27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엄청난 파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가 없어 그 실체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鹿 島 鎭 (현재 고흥군 녹동) 萬 戶 李 大 源 (1566~1587)의 순국을 다룬 글, 1) 庚 寅 通 信 使 의 협상 조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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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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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일본 지리지, 수로지 5, 지도 6 등을 함께 검토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근대기 일본이 편찬한 조선 지리지와 부속지도만으로 연구대상을 한정하 기로 한다. Ⅱ. 1876~1905년 울릉도 독도 서술의 추이 1. 울릉도 독도 호칭의 혼란과 지도상의 불일치 일본이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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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이며 나름 의식이 깨어있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받은 간 호부들은 환자를 돌보는 그들의 직업적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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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영상기술연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뉴 뉴웨이브 세대란 60년대 일본의 영화사에서 과거세대와는 단 절된 뉴웨이브 의 흐름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뉴웨이브 세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 뉴 뉴웨이브 세대로 불린다. 뉴 뉴웨이브 세대 감독들의 경향은 개인적이고 자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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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기호

32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3號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을 주목하여 서술하였다. 우선 정도전은 ꡔ주례ꡕ에서 정치의 공공성 측면을 주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국가, 정치, 권력과 같은 것이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표방하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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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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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4년 4월 1일 말씀 1008호 1면에서 이어짐 두려움은 흠이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 지 않는다고 믿게 합니 두려움은 삶의 요청들을 채워주질 못합니 두려 움은 우리의 기대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 우리는 그분이 쓰러지도록 그냥 버려둔 것처럼 생 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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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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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출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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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1587년 損 竹 島 倭 變 과 壬 辰 倭 亂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Ⅰ. 머리말 1587년(선조 20)에 五 島 平 戶 島 왜인들이 전라도 興 陽 縣 損 竹 島 (현재 여수 시 삼산면)를 점령한 후, 출동한 전라 수군을 무찌르고 남해안을 습격하여 많 은 사람과 군선을 납치해 갔다. 이 사건을 丁 亥 倭 變, 損 竹 島 事 件, 損 竹 島 海 戰, 損 竹 島 倭 變 등으로 명명할 수 있으나, 이 사건의 발생지와 주체를 반 영한 손죽도 왜변 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손죽도 왜변은 을묘왜변(1555) 이후 최대 외침으로 호남 지역사회와 조선 국정운영은 물론이고 조일외교와 임진왜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기축옥사 (1589), 통신사 파견(1590),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1591), 임진왜란(1592) 등 한국사상의 굵직한 사건이 모두 이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왜변 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성격으로 단순한 침략 수준을 넘어 전면전 양상을 띠며 東 西 分 黨 과 北 虜 南 倭 로 혼미를 거듭하던 16세기 말기 조선 사회 전반에 투고일: 2010년 4월 6일, 심사일: 2010년 5월 14일, 게재확정일: 2010년 8월 27일.

27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엄청난 파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가 없어 그 실체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鹿 島 鎭 (현재 고흥군 녹동) 萬 戶 李 大 源 (1566~1587)의 순국을 다룬 글, 1) 庚 寅 通 信 使 의 협상 조건을 다룬 글 2) 에서 이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해 잠깐 언급되어 참고가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 연구는 이 사건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가 어느 정도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591년 통신사 귀국 보 고에 의해 확인된 것으로 파악한 한계를, 16세기 후반 한 중 일 3국민의 이 동이 납치와 매매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나해역을 하나의 생활권 으로 하는 3국민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긍정적 해석을 내린 한계를 노정했 다. 3) 또한 이 시기의 격렬한 정치적 갈등 이면에 이 사건이 도사리고 있었던 점, 전라 수군이 임란해전에서 승리하고 호남 의병장이 개전 초기에 대대적으 로 거병할 수 있었던 점도 주목하지 못했다. 따라서 임진왜란 직전 조선사 연 구 심화를 위해 이 사건은 중요한 주제라고 여기어 이 글을 작성하였다. 이에 필자는 먼저, 손죽도 왜변의 전개를 五 島 와 平 戶 島 인의 침략, 전라 좌수군과 우수군의 패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이어, 손죽도 왜변의 영향을 호남 지역사회의 반향(백성들의 순국자 추앙, 사족들의 무장단 조직)과 조선 국정운영의 반향(전라도 방비 강화, 1590년 통신사 협상)으로 나누어 알아보겠 다. 마지막으로, 손죽도 왜변의 성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의 탐색 전인가, 아니면 노예무역의 개시탄인가에 주목하여 살펴보겠다. 이상의 검토 를 통하여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한국사상의 몇 가지 의문점들을 풀어보고 자 한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의 목적은 임진왜란 직전 호남 지역사회의 분위 기, 임진왜란의 전개방향, 조선 조정의 안보관 등을 파악하는 데에 있다. 1) 李 殷 相, 1980, 高 興 雙 忠 祠 事 蹟, 민족문화협회; 金 德 珍, 2009, 李 大 源 과 鄭 運, 그리고 雙 忠 祠, 海 洋 文 化 硏 究 2. 2) 金 文 子, 1994, 島 井 宗 室 과 1590년 通 信 使 派 遣 問 題 에 대해서, 祥 明 史 學 2; 米 谷 均, 2002, 豊 臣 政 權 期 における 海 賊 の 引 き 渡 しと 日 朝 關 係, 日 本 歷 史 650. 3) 무라이 쇼스케 지음, 이영 옮김, 1998, 중세 왜인의 세계, 소화; 米 谷 均, 2003, 後 期 倭 寇 から 朝 鮮 侵 略 へ, 天 下 統 一 と 朝 鮮 侵 略, 吉 川 弘 文 館.

271 1_ 손죽도 사건의 전개 (1) 일본 五 道 人 과 平 戶 島 人 의 침략 1510년(중종 5) 三 浦 倭 亂 이후 잠잠하던 왜구들의 움직임이 1540년대에 접어 들면서 심상치 않더니 1544년(중종 39)에 蛇 梁 倭 變, 1555년(명종 10)에 乙 卯 倭 變 이 발생했다. 이후부터 왜선들이 한반도 서남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 질을 하고 사람을 잡아갔다. 그런데 조선 수군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임진 왜란 때의 史 草 소실로 부실한 선조실록 를 감안하면 속단할 수 없지만, 전라 감사를 역임한 柳 希 春 (1513~1577)이 적을 방어하는 데에 板 屋 船 防 排 船 夾 船 등이 매우 긴요한데도 병사가 없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견문을 감안 하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4) 이러한 상황에서 왜인들이 1571년(선조 4)에 순천 金 鰲 島 에 나타나 정박 중인 鮑 作 船 10척과 伏 兵 船 1척을 공격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상하게 하였다. 5) 1573년에 河 東 사람 9명을 잡아갔고, 6) 金 鰲 島 에 또 나타나 搜 討 將 과 싸웠 다. 7) 1574년에는 배를 타고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향하는 왜인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 전라감사에 의해 보고되었다. 8) 1575년에는 다수의 적도들이 배를 손질 하는데, 어느 나라를 침범할지 모른다는 정보가 對 馬 島 에서 들어왔다. 9) 1576년 에는 防 踏 僉 使 가 왜선을 포획하였고 康 津 사람 10여 명이 왜적에게 사로잡혀 갔다. 10) 이 시기에 왜적 출몰이 갑자기 빈번해졌고, 그 지역은 전라도에 집중 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兩 南 海 邑 의 수령을 문관에서 무관으로 교체하 4) 선조실록 5, 선조 4년 11월 29일. 5) 眉 巖 日 記, 1571년 3월 17일. 6) 선조실록 7, 선조 6년 3월 14일. 7) 선조실록 7, 선조 6년 6월 9일. 8) 선조실록 8, 선조 7년 5월 14일. 9) 선조실록 9, 선조 8년 3월 17일. 10) 선조실록 10, 선조 9년 4월 3일.

27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고 파직된 무신을 서용하는 정도에 그쳤다. 침입한 왜구가 곧장 달아나는 것을 보고 늘 있는 행위나 전쟁할 의사가 없는 행위로 간주한 채 특별한 대책을 세 우지 않았다. 가령 1586년(선조 19)에 倭 大 船 1척이 제주도를 침략하여 旌 義 縣 監 과 접전을 펼치다 도주하자, 全 羅 右 水 使 가 침략할 걱정이 없지 않으니 방비 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적선을 잡지 못했으므로 정의현감 金 大 頤 와 別 助 防 將 魚 得 洙 를 잡아 가두라고 지시했다. 11) 정부 대책은 적선을 막지 못한 장수를 문책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방비를 강화하는 데까지는 나가 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575년 동서분당 이후 조정은 정쟁에 몰두한 채 국 정 전반에 거의 손을 놓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당색에 따라 좌우되었 기 때문이다. 그러던 1587년(선조 20) 봄, 처음에 왜선 몇 척이 녹도 근처에 나타났다가 얼마 안 되어 수십 척이 손죽도를 침범했다. 12) 이러한 점 때문에 출몰 시기와 왜선 규모에 대해 기록이 각각이다. 당시 순천에 있던 鄭 起 溟 (1558~1589)은 왜선이 1월 16일에 처음 나타났고 손죽도에 30척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13) 반면에 실록 은 18척이 흥양을 침범했다는 전라감사의 2월 26일 치계를 수록 했고, 14) 趙 慶 男 (1570~1641)의 亂 中 雜 錄 과 李 廷 馣 (1541~1600)의 연보에도 2월에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보성에 있던 安 邦 俊 (1573~ 1654)은 3월에 16척이 손죽도에 이르렀고, 15) 나주 출신 梁 山 璹 (1561~1593)도 3월이라고 했다. 16) 이처럼 기록이 상반되기 때문에 사실 관계를 가리기가 어렵 지만, 실록 기록을 따라 2월에 모두 18척이 침범한 것으로 정리하고 논지를 전개하겠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휘몰아치던 2월에 九 州 의 五 島 와 平 戶 島 출신 왜인이 11) 선조실록 20, 선조 19년 6월 3일. 12) 선조수정실록 21, 선조 20년 2월. 13) 松 江 集 2, 伯 氏 遺 稿, 鹿 島 歌. 14)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2월 26일. 15) 隱 峯 全 書 6, 記 事, 壬 辰 記 事. 16) 松 川 集 7, 附 錄 下, 忠 臣 贈 通 政 大 夫 承 政 院 承 旨 兼 經 筵 參 贊 官 宣 敎 郞 守 工 曹 佐 郞 蟠 溪 公 行 狀.

273 탄 선박 두어 척이 전라도 興 陽 縣 鹿 島 鎭 앞바다에 침범했다. 경황이 없던 鹿 島 萬 戶 李 大 源 이 주장인 左 水 使 沈 巖 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혼자서 수하병을 이끌고 출동하여 왜선을 치고 왜인 목을 베었다. 남은 적들은 도망가고 녹도진 군사들은 사망하거나 실종된 이가 하나도 없는 승리였다. 이대원이 돌아와서 沈 水 使 에게 전과를 보고하면서 수급을 올렸다. 선발대를 앞세워 녹도진에 상륙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왜적은 전 선박을 이끌고 수일 지나서 녹도진에서 수로로 남쪽 80리 지점 대양에 있는 損 竹 島 를 침범하여 점령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은 五 島 에서 동남풍을 타고 三 島 (현재 거문도)에 이르러서 묵고 강진 仙 山 島 를 지나면 곧 장 古 今 島 나 加 里 浦 에 도달하고, 쓰시마로부터 동북풍을 타면 蓮 花 島 와 欲 智 島 두 섬 사이에 이르러서 묵고 곧장 남해의 彌 助 項 이나 순천의 防 踏 에 이르 는 두 개의 노선이 있다. 17) 그러니까 손죽도는 동남풍 바람길에 위치하여 돛을 올리면 쉽게 北 九 州 에서 전라도로 들어올 수 있어 이전에도 왜구가 침범한 일 이 있었다. 가령, 1525년(중종 20)에 왜선 4척이 손죽도, 平 斗 島 등지를 침범 하자 전라좌수사가 병선 20척을 거느리고 예하 진장과 함께 출동하여 격퇴시 켰다. 18) 五 島 와 平 戶 島 사람들은 30여 년 전에 선박 70여 척을 이끌고 을묘왜변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19) 이번 침략은 그 목적이나 무장력 및 침략방법에 있어 서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침략 목적은 뒤에서 언급하고 무장력과 침략방법에 대해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543년에 明 으로 항해하다 南 九 州 鹿 兒 島 남쪽 種 子 島 에 표착한 포르투 갈인에 의해 鐵 砲 ( 鳥 銃 )가 전래되어 일본 전역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더군다 나 왜구왕 으로 불리는 중국인 王 直 이 五 島 와 平 戶 島 를 근거지로 삼아 北 九 州 세력가인 오토모[ 大 友 ] 마쓰우라[ 松 浦 ] 씨와 손을 잡고 일본과 중국 남 17) 海 東 繹 史 40, 交 聘 志 8, 通 倭 海 路. 18) 중종실록 55, 중종 20년 9월 22일. 19) 윤성익, 2006, 後 期 倭 寇 로서의 乙 卯 倭 變, 韓 日 關 係 史 硏 究 24, 165쪽.

27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만을 연결하는 대외무역을 하고 있었고, 스페인인이 1584년에 平 戶 島 에 내항 하여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五 島 와 平 戶 島 에도 조총이 유입되 었다. 이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이전부터 조선을 간헐적으로 침략하였다. 미암 일기 1574년 4월 5일자에 따르면, 호남에 왜선 한 척이 침범해 와 樂 安 郡 守 朴 世 賢 이 힘써 싸워 승리를 거두고 배의 모든 적을 잡아 왜인의 머리 13급을 베었고, 順 天 의 代 將 軍 官 金 壽 億 이 힘을 합쳐 쏘아서 맞혀 머리 8급을 베고 왜의 銃 筒, 箭, 鐵 丸 을 서울에 올려 보낸 적이 있다. 이 鐵 丸 이 총통환, 조총 환, 조총 가운데 어느 것을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철환이 眞 木 防 牌 를 뚫었고, 20) 牛 皮 로 방패를 만들면 철환을 피할 수 있고, 21) 이순신이 왼쪽 어깨에 철환을 맞았다는 전후 기록으로 보아, 철환은 조총임에 분명하다. 이들 은 조총을 가지고 간간이 침입하더니 마침내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손죽도 왜 변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번에 가지고 온 조총은 이전 것과 비교하여 성능이 월등했던 것 같다. 이유는 중앙의 지원에 있었고, 결과는 조선군의 참패를 가 져왔다. 22) 이들은 조선인 沙 火 同 을 앞세워 서남해를 안방 드나들 듯 돌아다녔다. 사화동의 출신지와 도일계기에 대해서 자료가 엇갈린다. 南 蕃 에 팔려갔다가 도망쳐 중국을 거쳐 돌아온 金 介 同 과 李 彦 世 는 사화동이 珍 島 출신으로 왜노 에게 잡혀갔고, 23) 이정암은 寶 城 鮑 作 으로 왜국에 잡혀갔다고 했다. 24) 이에 반해 안방준은 康 津 출신으로 도망자이고, 趙 憲 (1544~1592)은 도망자라고 했 다. 25) 반면에 李 德 馨 (1561~1613)의 연보,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긍익의 연 려실기실 은 표류인이라고 했다. 출신지에 대해 진도, 보성, 강진 등이 거론된 20) 명종실록 25, 명종 14년 6월 6일. 21) 선조실록 26, 선조 25년 5월 5일. 22) 기록에 따라 沙 乙 火 同, 乷 火 同, 沙 乙 蒲 同, 沙 乙 背 同 등으로 불리지만, 여기서는 沙 火 同 으로 통일하겠다. 23)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11월 17일. 24) 四 留 齋 集 8, 年 譜, 行 年 日 記. 25) 선조수정실록 21, 선조 20년 12월.

275 것으로 보아 전라도 해변인이 분명하다. 그리고 도일계기에 대해 표류, 납치, 망명, 등이 거론되지만 모두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표류는 바람과 해류에 의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납치는 당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망은 동서 분당 이후 격렬한 정쟁 때문에 8도의 인심 이 크게 이반되고 민원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연해의 鮑 作 人 들이 고을 수령의 침탈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을 가도 조정은 근심거 리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간에 九 州 세력가들은 내투한 자들을 앞세워 손죽도 왜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2) 전라 좌수군과 우수군의 패전 1,000명 이상이 승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척의 왜선이 손죽도를 점령하 자 1영(좌수영), 5관(광양, 순천, 흥양, 낙안, 보성), 5포(녹도, 발포, 사도, 여 도, 방답)의 전라좌수군이 일제히 출동했다. 심암은 후방을 맡으면서 이대원을 최전방에 세웠다. 이때 이대원은 지금 날이 저물었고 또 군사들도 적어 덮어놓 고 출전하는 것은 무모할 따름이니, 군사를 더 많이 모으고 선단을 크게 지어 내일 아침 날이 밝은 다음에 효과 있게 치자고 심암에게 진언했다. 그러자 심 암은 도리어 협박까지 하면서 즉각 출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대원은 곧 이어 응원군을 거느리고 와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수일 전 전투로 피로에 지친 수하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출전했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은 상태에 서 손죽도 해상에서 3일간 전면전을 펼쳤다. 심암은 쳐다만 보고 구원병을 보 내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 영암군수를 맡으면서 주민들로부터 잘 다스린다는 호평을 받았고, 26) 이 점에 대하여 유희춘으로부터 인정까지 받은 심암이 휘하 장수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 은 다름 아닌 생전 보지 못한 조총의 위력 때문이었다. 나머지 장수들도 조총 이 무서워 모두 퇴주하고 말았는데, 이 점에 대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古 阜 26) 선조실록 8, 선조 7년 7월 21일.

27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에서 사건을 접한 金 齊 閔 (1527~1599)은 이대원이 노를 저어 먼저 나갔으나 나 머지 장수들은 철환, 즉 조총이 무서워 모두 퇴주했다고 했다. 27) 이대원은 중과부적과 무원고립 및 화력열세 상태에서 모든 군사를 잃어버 렸고 배조차 남김없이 깨지고 말았다. 水 卒 孫 大 男 만이 겨우 살아났다. 이대 원은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칼을 들어 자기 손가락을 잘랐다. 그리고 속저고리 를 벗어서 그곳에 손가락 피로 최후의 절명시 28) 한 장을 써서 하인에게 주며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라고 말했다. 그 후 붙잡혀 항복하라고 위협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자 왜인들은 그를 배의 돛대에 묶어 놓고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이대원이 죽을 때까지 그의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손죽 도 뭍으로 끌려나와 수하 병사들과 함께 살해당하여 22세의 청년 장군은 목숨 을 잃었다. 왜인들이 만행을 저지른 곳을 현재 현지인들은 무부장터 라고 하고, 당시 손죽도 사람들이 이대원 시신을 가묘를 써서 매장했다고 한다. 집안 사람 들은 유명을 받들어 혈서로 쓴 옷을 가져다가 양성현 대덕산 아래에 장례했다. 조총을 앞세워 전라좌수군을 가볍게 격퇴한 왜인들은 손죽도에 이어 강진 해역 仙 山 島 를 약탈한 후 馬 島 鎭 (현재 강진 마량)을 거쳐 加 里 浦 鎭 (현재 완 도)까지 넘어갔다. 이들의 공격으로 가리포 수군은 주둔지를 점령당하여 병선 4척을 빼앗겼고 첨사 이필은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퇴각하였고, 전라우수사 元 壕 까지 출동했으나 伏 兵 船 5척만 잃고 말았다. 29) 왜인들은 전라우수군까지 전멸시켰다. 왜인들은 흥양에서 강진에 이르는 도서와 수군진 및 연해지역을 내투자들 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사람을 납 치하며 군선을 나포한 후 이를 끌고 침략 5 6일 만에 돌아갔다. 예년 같으면 상륙하여 곡물과 같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곧바로 쳐들어 올라오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도서 연해 지역에 27) 鰲 峯 集 1, 詩, 悲 李 大 源. 28) 硏 經 齋 全 集 外 集 55, 識 小 類, 李 萬 戶 大 源 詩. 29)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2월 27일. 나사침은 이필이 눈에 철환을 맞은 것으로 들 었다고 했다.

277 대한 기습공격으로 사람을 납치하고 군선을 나포하는 선에서 자진 퇴각하였 다. 뒤에서 상술되겠지만, 바로 여기에 그들의 침략 목적이 있었다. 당시 아군의 피해는 막대했고 전투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적과 만나 대 전하면서 이대원을 포함하여 장졸을 천여 명이나 잃었고 수많은 양민이 죽거 나 납치되었고 군선이 납치되었건만 왜적의 머리 하나 참획하지 못할 정도였 다. 최고 사령관 심암이 관망한 가운데 예하 장수들이 앞다투어 도망갔기 때문 이다. 가령, 中 衛 將 으로 출전한 순천부사 邊 璣 는 처음부터 힘써 싸우지 않았 고 마지막에는 달아나 숨으려다 적의 화살을 어깨에 맞았다. 朴 仁 鳳 은 힘껏 싸 우지 않고 병선 지키기만 급급했고, 申 榮 은 병선이 느리다는 핑계로 즉시 나가 지 않았고 외양에 나가서는 화살 하나 쏘지 않고 가버렸다. 30) 成 天 祉 와 李 弘 明 도 달아나기에 급급한 장수였다. 31) 또한 선산도 복병장은 노래를 즐기고 술 에 취하여 방비하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다가 적에게 기습을 당해 화살을 맞고 먼저 달아나 수백 명의 백성들이 칼날 아래에서 목숨을 잃게 하였다. 32) 이전의 침략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은 이대원을 제외한 조선 장수들이 모두 도망쳤다 는 것인데, 좀체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는 난생 처음 접한 고성능 조총의 위 력에 겁을 먹은 결과였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왜군 소리만 들으면 조선 군 민 가운데 열에 아홉은 도망갔다고 하는데, 이 역시 손죽도 사건 때에 경험한 왜군들의 조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대원의 용전은 단연 돋보 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임금은 3공과 비변사당상 및 병조당상을 소집하여 변방의 일을 논의하면서 한성 右 尹 申 砬 을 右 防 禦 使 로 삼아 군관 30명을 거 느리고 그날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리고 邊 恊 을 左 防 禦 使 로 삼아 밤을 새워 30)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4월 4일. 31)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8월 9일. 박인봉, 신영, 성천지, 이홍명 등은 당시에 邑 이나 鎭 의 수군을 거느리고 출전했던 장수들이다. 그런데 실록은 그들이 어느 읍, 어느 진의 수장인지를 기록하지 않았다. 필자는 그것을 찾기 위해 여러 기록을 뒤 졌지만 역시 알아내지 못했다. 32)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11월 6일.

278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남쪽 지방으로 출정하게 하였고, 우참찬 金 命 元 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손죽 도를 침범한 적을 치게 했다. 33) 전라감사 韓 準 은 도내의 고을에 전령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막게 하였는데, 左 道 의 경우 南 源 등지의 관들은 順 天 에 나아가 진을 쳤고 全 州 등지의 관들은 樂 安 으로 나아가 진을 쳤고, 右 道 의 경 우 각 읍은 모두 바다 연변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그러나 5 6일이 지나도 해 변에 적의 기척이 없어 각각 陣 을 파하였다. 34) 모두 왜구가 이미 물러난 뒤 뒷 북치기였다. 심암은 병력, 무기, 전술, 기세 등 적의 전력을 소상히 보고하지 않았다. 스 스로 군율을 어긴 것을 알고 적세가 대단하다고 거짓으로 아뢰고 내지의 군사 를 징발하게 하여 정부의 대응전략 수립에 차질을 빚게 하기도 했다. 35) 임금은 패전과 군율 미준수 책임을 물어 심암을 조사할 것도 없이 의당 刑 具 에 채워 본도로 이송한 뒤, 轅 門 에서 참수하여 列 鎭 에 조리를 돌려야 된다 36) 고 하여 당고개에서 효수되었다. 이에 앞서 양산룡 등 전라도 유생들도 심암의 죄를 논 하고 처형을 주장하자 임금은 참으로 가상하다고 답변했다. 37) 우수사 元 壕 또 한 伏 兵 船 5척이 피침하였으나 따라가 잡지 않았다고 하여 국문을 받았다. 38) 이 외에 여러 장수들이 힘써 싸우지 않았거나 늦게 출동했고, 달아나 숨었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았다. 전라감사 韓 準 도 이대원이 패하여 죽을 당시 순천에 도 착하였으나 적의 형세가 왕성하다는 말을 듣고 내지로 급히 돌아가자 노약자 들이 길을 막고 붙들면서 호소했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벌벌 떨며 물러가 웅크 렸기에 남쪽 백성들에게 욕을 먹었다고 하여 파직당했다. 39) 한편 한준은 호조 참판과 우참찬을 거쳐 황해감사가 되어 정여립 사건을 최초로 고변하였으니, 전라도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33)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2월 28일. 34) 亂 中 雜 錄 1, 정해년 2월. 35)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3월 3일. 36)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3월 28일. 37)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4월 14일. 38)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3월 10일. 39)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6월 4일.

279 2_ 손죽도 사건의 영향 (1) 호남 지역사회의 반향 1 백성들의 이대원 추앙 손죽도 왜변은 재래식 무기로 재물이나 사람 몇 명을 약탈 납치하던 이전과 는 달리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대규모 인명을 납치했기 때문에 더더욱 큰 충격 을 남겼다. 그래서 이 사건의 끝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가 사건 직후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주에 머물던 羅 士 忱 (1526~ 1596)은 이를 실로 심대한 변이라고 하며 사태가 어디까지 갈지 우려된다고 하 였다. 평화의 날이 오래되어 문무가 편안히 놀고 잦은 흉년으로 국가 저축이 없는데, 北 亂 이 진정되지 않고 南 夷 가 또 일어나니 조정에는 良 將 이 없다고 개탄하였다. 40) 또한 김제민은 이로 인해 전라도 민간에서 騷 動 이 일어나고 있 다고 당시 민심을 전했다. 그해 12월에 큰 바람이 불어 뜰의 대나무가 쓰러지 고 한밤중에 새들이 놀라 운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접한 김제민이 감회를 시로 읊어 사람과 새가 같은 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41) 그리고 왜변 당시 동래부사 盧 埈 은 왜구가 대거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 여 언관의 탄핵을 받고 이정암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점에 대하여 실록 은 노 준이 술에 빠져 공무를 살피지 않고 모든 일을 下 輩 軍 官 에게 위임하고 왜인 에게 料 米 를 지급할 때에 문제를 일으킨 점 때문에 파직당했다고 상반된 사실 만 기록했다. 42) 한마디로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지만, 당시 조정은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그것을 실록 은 그대로 수용하는 수준이었다. 조총의 경우만 보더 라도 여러 개인 일기에 수록된 사실을 당시 당국자나 실록 편찬자는 흔적마 저 남기지 않았으니, 정권 안보가 국가 안보보다 앞선 일이었다는 의혹을 벗어 40) 錦 湖 遺 事 1, 著 述, 丁 亥 日 記 抄. 41) 鰲 峯 集 1, 詩, 丁 亥 臘 月 大 風 吹 動 衙 竹. 42)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3월 3일.

28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나기 어렵다. 손죽도 왜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직접 겪은 호남지방에서 가장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전 명종대에 강진에서 진도에 이르는 서남해 일대를 강타했던 을묘왜변을 연상시켜 더더욱 그러하였다. 호남인들이 겪은 충격은 자연스럽게 이대원에 대한 애도와 추모 열기로 이어졌다. 각 진과 여러 고을의 수군들은 적과 서로 마주보는 곳에 진을 치고 두려워 웅크리고만 있었고, 오직 이대원만 이 나아가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전세가 곤궁하게 되자 깃발을 들어 원군을 불렀 지만 여러 장수들이 아무도 가서 구해 주지 않아 왜적에게 사로잡혀 장렬하게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장수를 잃은 녹도진 수군들은 鎭 城 안에 鹿 島 祠 라는 사당을 지어 이대원을 배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흥양 사람들은 적의 위세에 뒷걸음질만 한 심암 의 태도에 분개하면서 이대원의 죽음을 애도하여 이대원가 라는 가련한 노래 를 지어 불렀다. 43) 鄭 澈 의 큰아들 정기명은 1585년 하반기에 동인의 공세에 못 이겨 낙향한 아버지를 따라 내려와 순천 백부 鄭 沼 댁에 머물고 있었다. 그 는 여기서 손죽도 사건을 듣고 鹿 島 歌 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시 15세이던 안방준은 이 소식을 듣고 이대원의 절의를 높이 사 이대원전 을 지 었다(현재 원문은 전하지 않음). 김제민은 力 戰 을 하다 敗 死 한 이대원의 충절 을 애통해하며 悲 李 大 源 이란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손죽도는 화살용 箭 竹 이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이 점은 현지 답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원이 죽자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며 손죽도를 損 大 島 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하여 李 晬 光 은 만력 정해년에 왜군이 전라도를 침범하였을 때에, 녹도만호 이대원이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손죽도에서 항거 하여 싸우다가 구원이 끊어지매 패전하여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損 竹 島 를 세상에서는 損 大 島 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에 竹 을 대라고 하기 때문 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대는 大 元 의 大 와 같은 음이다. 손대도는 곧 대원을 잃 43) 藥 泉 集 17, 神 道 碑 銘, 全 羅 左 水 使 李 公 神 道 碑 銘.

281 은 섬 이라는 말과 통한다 44) 는 기록을 남겼다. 竹 을 우리말로 대로 부르기 때 문에 이대원 순국 이후 조선 사람들은 손죽도를 손대도라고 불렀고, 결국 손대 도는 이대원을 잃게 한 섬이라는 말이 되었다. 이대원의 대 자와 음이 서로 같 아서, 이대원을 손상시킨다는 말이 은연중 포함되어 있다고 이수광은 민간의 떠도는 말을 채록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호남 지역민들의 이대원 애도 물결은 어떤 결과를 냈을까? 이대원 의 죽음은 호남인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이 점에 대해 南 九 萬 (1629~ 1711)은 이대원신도비 에서 임진왜란에 호남지방이 유독 완전하여 다시 나 라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먼저 왜적에게 몸을 맡겨서 사람들 의 마음을 장려하고 분발시킨 효험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 기술하 였다. 임진왜란의 극복은 호남의 보존에 있고, 그 원동력은 이대원의 장렬한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남구만의 생각이다. 특히 흥양 주민들은 장렬하 게 순국한 22세 청년 장군 녹도만호 이대원에 대한 제사와 사우 건립을 곧바로 단행했고, 그를 추모하는 노래 이대원가 를 지어 부르며 대일 항전의지를 불 태웠다. 그리하여 전라좌수군의 5관 5포 가운데 1관 4포를 차지한 그들은 전라 좌수군의 가장 용맹한 주력군으로 무장하여 임란해전 승리의 기둥이 되었는 데, 이순신의 일급참모들이 대부분 흥양 출신이었던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결국 손죽도 왜변은 임진왜란 때에 호남을 사수하게 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2 사족들의 무장단 조직 전라도 사람들이 겪은 충격은 이대원에 대한 애도와 추모 열기에 그치지 않고, 자위책 강구로 이어졌다. 전에 보지 못한 신무기 조총 앞에 수군이 참패하고 수령들이 앞장서 도망가 전라도 방어 전선이 무력하게 무너졌기 때문에 스스 로 자위책을 강구했다. 정부는 방어사를 전라도에 파견하고 전라감사는 거병 을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남 사족들도 자발적으로 거병하 였다. 44) 芝 峯 類 說 2, 地 理 部, 島.

28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그 대표적 인물이 鄭 汝 立 (1546~1589)이다. 정여립은 서인의 이이, 성혼과 수학한 후 이이의 천거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이이가 銓 郞 제수를 반대하자 이이 사후 동인으로 돌아섰다. 스승을 배반했다는 서인의 공격에 시달린 정여 립은 1585년(선조 18)부터 향리 전주에 내려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45) 그는 전주, 금구, 태인 등 인근 고을의 무사에서 천인에 이르는 상하인을 규합하여 계를 만들고 大 同 契 라 이름을 붙였다. 매월 15일에 일제히 한곳에 모여 과녁에 활쏘기 승부를 겨루며 회합 때에 소요되는 술과 고기를 여러 고을에 편지를 띄 워 요청하였다. 계원들이 정여립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先 儒 들 이 많았지만 단지 禮 學 을 할 뿐이었고, 활 쏘는 技 藝 에 대해서는 이제야 처음 으로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 南 彦 經 이 정여립에게 군사와 말을 징발하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정여립이 한번 호령하자 군사가 모 두 모여들었는데, 감히 낙오하는 자가 없었다. 정여립은 여러 군사를 나누어 부대를 편성하고 각각 장수를 계원 중에서 선발하여 정하였다. 왜적이 물러나 자 정여립은 군사들을 해산하고 장수들에게 훗날에 만일 오늘처럼 변고가 생 기면 너희들은 각자 부대를 이끌고 일시에 오라 고 호령하고, 명부 한 통을 가 지고 돌아갔다. 남언경이 鄭 公 은 학문을 하는 선비일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또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다 고 탄식하였다. 이어 정여립이 황해도사와 김제 군수가 되고자 했을 때, 사람들이 여립은 幕 佐 와 수령이 되는 것을 구할 사람 이 아닌데 라고 말하며 그를 의심했다고 한다. 46) 정여립의 거병은 2년 8개월 뒤 그가 모반을 도모하려고 한 단서로 西 人 에 의해 규정되어 己 丑 獄 事 (1589. 10)의 결정적 빌미가 되었다. 정철은 기축옥사 때 정여립이 호남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영남에서 일어나는 자도 있고 서울에서 일어나는 자도 있습니다 47) 고 계달하며 영남과 서울의 동인 인사를 정여립과 연결시켰다. 이에 따라 거병 45) 우인수, 1988, 정여립 역모사건의 진상과 기축옥의 성격, 역사교육론집 12, 75쪽. 46) 隱 峯 全 書 5, 己 丑 記 事. 47) 선조실록 195, 선조 39년 1월 22일.

283 을 요청한 남언경도 기축옥사 때에 拿 鞫 을 받았다. 48) 큰 전란을 겪지 않았던 당시에 자의적인 거병은 쉽게 용납되지 않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특히 東 人 의 공세에 밀려 극심한 수세에 처한 서인은 동인 인사의 거병에 매서운 의혹 의 눈초리를 보내며 옥사를 확대하고 마침내 정권을 차지하였다. 이렇듯 손죽도 왜변 때 정여립의 무장 활동은 나중에 기축옥사의 빌미가 되어 호남지방을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직접 거병 하지는 않았지만 대일 자위책을 강구한 사람도 있었으니 金 千 鎰 (1537~1593) 이 대표적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나주 향리의 克 念 堂 이라는 서재에 머물고 있 던 그는 녹도만호 이대원의 죽음을 접한 후 상소를 올려 대응책의 잘못과 상벌 의 혼란을 논하였고, 낮에는 학문을 강론하고 석양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하 였고, 제자들로 하여금 兵 馬 의 일을 익히게 하였다. 49) 향리에서 들은 倭 情 이 예사롭지 않아 김천일은 자위책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왜변이 일어난 해 9월에 내왕한 다치바나 야스히로[ 橘 康 廣 ]의 활동이 전국 에 알려지면서 민심이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588년 1월에 서울의 선 비들이 무려 백명, 천명으로 떼를 이루어 미친 짓, 괴이한 짓들을 하는데, 그것 이 천태만상으로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때로는 무당 흉내를 내면서 덩실거리 고 둥둥곡[ 登 登 曲 ] 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하고, 혹은 초상과 장사 지내는 일을 꾸며 껑충거리고 흙을 다지기도 하며, 동으로 갔다 서로 달렸다 웃었다 울었다 하였다. 그리고는 저희들끼리 묻기를, 무슨 일로 웃느냐? 무슨 일로 우느냐? 하고는 큰 소리로 스스로 답하기를, 將 相 들이 제대로 된 사람 이 아니어서 웃는다. 국가가 위태롭고 망해 가고 있어서 우는 거다 하면서, 다 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하였다. 당시 이것을 주창한 사람은 鄭 孝 誠, 白 震 民, 柳 克 新, 金 斗 南, 李 慶 全, 鄭 協, 金 誠 立 등 30여 인이었고, 이들을 추 종하여 법석을 떤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50) 백진민(백유양의 아들), 유극신(유 48) 선조수정실록 23, 선조 22년 12월 1일. 49) 健 齋 集 부록 3, 年 譜. 50) 亂 中 雜 錄 1, 무자년 1월.

28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몽학의 아들), 이경전(이산해의 아들), 정협(정언신의 아들), 김성립(허엽의 사 위)은 명문가 출신의 젊은 엘리트였다. 이들이 동요하는 상황에서 백성들 또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행동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당시 歌 曲 에는 樂 時 調 가 있었는데 그 소리가 처량하며, 머리를 내젓고 뒷덜미를 놀리고는 하 여 부끄러움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또 啓 眠 調 가 있는데 그 소리가 슬프며 가 련하고 서글펐다. 또 於 平 調, 偶 調, 邈 邈 調 는 다 비참한 것을 숭상하고, 옷은 흰 것을 숭상하여, 식자들은 소리가 애처롭고 옷이 희다 해서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여기었다. 자학적 행위와 슬픈 곡조의 갑작스런 유행은 전쟁 발생 예 상에 따른 심리적 동요를 반영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조선에 퍼진 시기는 통신사 일행이 돌아온 1591년 1월이나 3월이라는 것이 기존 이해이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손죽도 왜 변 때에 전례 없는 예감이 나돌았고, 다치바나 야스히로에 의해 일본 정세 변화 와 통신사 요청이 전국에 알려진 1588년 초기에 전쟁설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실제 임금도 1588년 3월 26일에 왜변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비변사로 하여금 무사를 서용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이때부터 더욱 심각해져서 각자가 자기의 이해를 도모하고 나랏일은 버려두고 잊어버렸다. 급기야 1589년에 기축옥사가 일어나 수많은 선비가 살육되는 참 화를 겪고 말았다. 사상초유의 정쟁 앞에 대외 방비책을 강구할 틈도 없이 1590년 에 통신사가 출발하여 이듬해 1591년에 돌아왔다. 통신사에 의해 일본의 침략 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정국은 본격적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라도 민심이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재지사족들도 자구책 마 련에 긴박하게 움직였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하는 사람들이 속 출하였다. 남원 출신 安 瑛 (1565~1592)은 통신사 귀국 이후 왜침을 예상하고 보검을 매입하여 집에 보관하는 등 무장을 서둘렀고, 52) 옥과 출신 柳 彭 老 51)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3월 26일. 52) 旌 忠 錄 3, 淸 溪 安 公 事 實.

285 (1564~1592)는 자신의 마을 뒤 玉 出 山 의 山 城 峙 깊은 골짜기에 수년 전에 집 3칸을 지었는데, 그중 한 칸에 冶 匠 奴 5 6명을 두어 날마다 무기를 만들게 하 고, 또 한 칸에 針 線 婢 5 6명을 두어 날마다 군복을 만들게 하고, 또 한 칸에 捧 稅 米 수백 석을 비축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53) 충청도 출신이지만 1591년 7월에 전라도 錦 山 大 芚 山 에 들어온 趙 憲 은 독서를 하지 않고 산곡을 해매며 높은 산에 올라 먼 데를 보며 나라 일을 탄식하다가, 하루는 승려 4인과 식사 를 같이하며 명년에는 반드시 왜란이 있을 것이며 나는 의병을 일으켜 임금을 모실 것이니 이 밥을 먹는 사람은 함께 와서 나라를 돕자 고 하였다. 이들은 모 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5월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였다. 그들이 개전한 지 1개월도 안 되어 발 빠르게 의병진을 구성할 수 있 었던 것은 이미 전란 전부터 준비한 결과였다. (2) 조선 국정운영의 반향 1 전라도 방비 강화 을묘왜변이 일어난 1555년 5월에 왜구가 전라도의 달량포에 침략하여 진도, 나로도, 어란포, 영암 등지를 보름 가까이 휩쓸고 갔다. 이 아픈 기억이 채 아 물기도 전에 전라도 연해지역은 손죽도 왜변을 겪으며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조정은 전라도 방비책 마련에 부심하기 시작했다. 왜변 발생 20일 이상 지난 2월 27일에 3정승, 비변사 당상, 병조 당상이 집 결한 어전회의에서 전라도와 인접 충청도가 불안하다는 의견에 따라 대응력이 부족한 감사를 교체하는 일이 벌어졌다. 54) 경상도에도 申 恪 을 방어사로 내려 보냈다. 55) 바로 이어 임금은 적이 비록 물러났으나 이는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라고 판단한 후 戰 具 를 닦고, 烽 燧 나 瞭 望 등의 일을 단속하여 경계 태세를 태 53) 月 坡 集 3, 日 記, 1592년 5월 16일. 54)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2월 27일. 55)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2월 30일.

28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만히 하지 말도록 전국에 지시했다. 56) 물러난 적들이 언제 다시 나타나 전면전 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판단한 임금은 병조에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강구하도 록 지시했다. 병조는 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전라도의 加 里 浦 와 珍 島 및 濟 州 등 3읍과 法 聖 倉 과 群 山 倉 등 2창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 武 臣 과 雜 類 및 公 私 賤 으로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고 대오를 편성해서 유사시를 기다리 게 하고, 弓 矢 와 銃 筒 및 鐵 甲 과 鐵 丸 등 무기를 갖추어 놓겠다고 답변했다. 57) 전국이 준전시 상황에 접어들 정도로 긴박하게 움직였지만, 초점은 전라도에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1588년 3월에 임금은 남방에 왜변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비변사 로 하여금 罪 廢 중에 있는 쓸 만한 무사를 抄 啓 敍 用 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軍 律 贓 濫 을 범하였거나 欺 罔 한 죄를 범하였던 자가 서용되었고 성적이 하등 인 자도 여기에 참여되었다. 58) 또한 1589년 1월에는 비변사에서 무신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이순신을 포함하여 40명 가까운 명단을 올렸 다. 59) 남방 연해 적로의 요충이 되는 곳에 城 을 쌓고 濠 를 파도록 하기도 하였 다. 하지만 이러한 방비책도 기축옥사 여파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전 해에 떠났던 통신사가 1591년 3월에 귀국하여 일본 정국이 알려지면서 또다시 전라도 중심의 대일 방비책이 강구되었다. 이러한 전라도 방비책은 용력 있는 무신을 신분의 귀천과 전과를 불문하고 호남 연해지역으로 불러들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李 舜 臣 (1545~1598)이다. 그는 1586년 1월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가 되었고, 1987년 8월에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였다. 둔전관 때에 섬이 외롭고 멀리 있기 때문에 군사를 더 파견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절도사 李 鎰 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적이 군사들을 몰고 와서 섬을 에워싸자 이순신이 적의 괴수를 쏘아 죽여 물리 쳤다. 이일이 자기 죄를 면하려고 이순신을 패군한 것으로 무고하여 이순신은 56)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3월 3일. 57)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3월 2일. 58)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3월 26일. 59)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1월 21일.

287 조정으로부터 평복으로 종군하라는 명을 내려 받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1588 년 윤6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조정에서 무신 중에 서열을 따지지 않고 뽑 아 쓸 만한 인물을 천거하였는데, 이순신이 그 둘째에 들어 있었다. 1589년에 도 채용설이 제기되었다. 60) 이로 인해 이순신은 1589년과 1590년에 정읍현감 과 고사리진 만포진 첨사에 천거되었으나 대간들의 비판으로 임명되지 못하 다가, 드디어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왜적의 태도가 날 로 극성스러워지자 임금께서 비변사에 명령을 내려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라고 하자, 유성룡이 천거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즉시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을 알고 방 비책 강화에 들어갔다. 그는 왜구들이 반드시 올 것을 알고 본영과 부속 진의 무기를 수리 정비하였고,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에 가로 늘어놓았으며, 거 북선을 건조하였다. 그리고 손죽도 왜변 때에 참전하였던 병사들을 자신의 주 위에 포진시켰다. 그들은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휘하에서 왜정을 제공하며 분 전하였다. 高 風 孫 의 경우를 살펴보자. 왜변 후 정부가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참전하였던 병사들을 조사할 때에 그도 당국자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그는 좌 수영의 鮑 作 출신이었던 것 같은데, 심문을 받을 때에 일본의 침략이 沙 火 同 의 소행이란 사실을 언급하여 당국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진왜 란 때에도 참전하여 한산도 대첩 때에 이순신이 타고 있는 배의 格 軍 으로 분전 하다 鐵 丸 을 맞고 부상을 당하였다. 61) 손죽도 왜변 이후 대일 방어태세를 전라도를 중심으로 강구하고 있을 때 선조는 변협과 만나 상황 점검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금이 우리나라의 사 정을 저들이 죄다 알고 있으니 만약 우리나라가 전라도에 주력하는 줄을 알고 딴 道 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라고 묻자, 변협이 小 賊 이라면 天 城 加 德 鎭 이 염려되지만, 大 賊 이야 어느 곳엔들 들어오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답변하 60)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7월 28일. 61) 李 忠 武 公 全 書 2, 狀 啓 1, 見 乃 梁 破 倭 兵 狀.

288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였다. 62) 1591년에 소 요시토모[ 宗 義 智 ]가 부산에 들어왔다가 공갈협박을 하고 돌아간 후 일본인은 부산에 들어오지 않았고, 부산포에 머물고 있던 자들조차 하나 둘 자취를 감추더니 이윽고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그곳 사람들 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지적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일 방어태세 는 전라도 중심으로 강구되었고, 마침내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방비가 튼튼한 전라도로 들어오지 않고 근래 외침을 거의 겪지 않은 부산포로 들어왔다. 조선 의 실패한 대책, 일본의 허를 찌른 공략이었던 것이다. 2 1590년 통신사 협상 쓰시마[ 對 馬 島 ]는 1587년 6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편입되었다. 동시에 조선 국왕의 입조 교섭권이 쓰시마에 주어졌다. 그리하여 1587년 이후 3회에 걸쳐 쓰시마 사신이 들어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도주 소 요시시게[ 宗 義 調 ]는 1587년 9월에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특송사로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에서 이미 신국왕이 즉위하였고, 63) 그 사신이 이미 쓰시 마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64) 이를 보고받은 조선 조정은 동평관에 머물고 있는 덴케이[ 天 荊 ]에게 새 국왕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이 자 리에서 선조는 일본은 국왕을 폐한 나라이므로 그 사신을 접대할 필요가 없다 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하지만 사신이 들어오면 접대하는 것이 전례라는 중신 들의 청에 의해 吏 曹 正 郞 柳 根 을 宣 慰 使 로 부산에 파견하였다. 65) 다치바나는 유근을 따라 12월에 상경하여 서계를 전달하며 通 信 使 파견을 요청하였다. 66) 일본의 통신사 요청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논의를 편 결과 1588년 3월에 응하 지 않기고 결정하였다. 67) 이에 다치바나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쓰시마로 돌아 62)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8월 1일. 63)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9월 7일. 64)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10월 20일. 65)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10월 22일. 66) 선조실록 21, 선조 20년 12월 22일. 67)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3월 4일.

289 갔다. 68) 이렇게 하여 제1차 통신사 파견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치 바나가 상경시 인동과 상주에서, 그리고 서울 체류시 연회석상에서 조선이 망 할 날이 멀지 않다고 발언하였는데, 이는 침략전쟁이 추진되고 있는 일본 내부 사정을 표한 것이었다. 다치바나가 귀도하자, 소 요시시게는 1588년 12월에 정사에 博 多 승려 겐 소[ 玄 蘇 ], 부사에 소 요시토모[ 宗 義 智 ], 수행원에 야나가와 시게노부[ 柳 川 調 信 ]로 구성된 제2차 통신사 협상단을 파견하였다. 69) 이들은 부산 왜관에 머물 며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의견만 분분한 채 결정을 내지 못하자 그들은 귀국하고 말았다. 교섭 중에 도주 소 요시시게가 사망하고 소 요시토모가 뒤를 이었다. 그 사이에 쓰시마는 고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의 입조에 대한 독촉을 거듭 받았다. 이에 1589년 6월에 정사 겐소, 부사 소 요시토모, 하카다 상인 시마이 소시 쓰[ 島 井 宗 室 ] 등 25명으로 구성된 제3차 협상단이 들어와 李 德 馨 이 선위사로 임명되어 맞이하였다. 70) 조정의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선조는 강경하게 반대 하였다. 그러던 선조는 8월 4일에 파도의 험난함을 이유로 계속 거절한다면 우 리를 의심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방책을 제의하였다. 즉, 저들에게 답하기를 왜변을 일으킨 五 道 平 戶 島 의 도주와 괴수, 왜적을 인도한 사화동, 그리고 납치된 사람을 보내도록 하면 어떠할지에 대해 대신, 비변사, 예조는 충분히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71) 이는 이미 1587년 12월에 公 州 提 督 조헌이 봄에 흥양 경내에 침구한 적의 괴수와 嚮 導 者 를 잡아 보내어 국법을 밝게 보 이라 고 상소로 밝힌 바 있어 새로운 제안은 아니다. 72) 이에 8월 11일에 대신들 이 모여 논의한 결과 쓰시마 사신을 접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73) 그리하여 선조 68)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4월 10 22일. 69) 선조수정실록 22, 선조 21년 12월. 70)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6월 30일. 71)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8월 4일. 72) 선조수정실록 21, 선조 20년 12월. 73)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8월 11일.

29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는 8월 28일에 소 요시토모 일행을 접견하여 압송과 송환을 요구하였고 그것 을 일본 측이 수락하였다. 마침내 9월 21일 임금이 종2품 이상을 불러 인견한 자리에서 조정의 논의에 따라 통신사를 보내도록 하였다. 74) 11월 18일에는 통 신사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을 임명하였다. 75) 조선의 통신사 파견 결정 소식은 宗 義 智 小 西 行 長 淺 野 長 政 을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겐소와 소 요시토모는 야나가와 시 게노부로 하여금 적괴 반민 압송과 포로 송환에 대한 명령을 내리도록 하였 다. 시마이 소시쓰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일본은 1590 년 2월에 반민 사화동과 적왜 3인, 그리고 孔 大 元 등 피로인을 조선에 보냈 고, 76) 사화동은 힐문을 받고 성 밖에서 참형되었다. 五 道 와 平 戶 島 도주를 보내 주라는 조선 측 요구를 묵살하고 단지 해변인만을 보낸 것이다. 이에 따라 3월 6일에 통신사 일행이 서울을 출발하여 77)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이렇듯 손 죽도 사건 때 발생한 피로인 송환은 통신사 파견 결정의 최대 전제조건이었다. 3_ 손죽도 사건의 성격 (1) 豊 臣 秀 吉 의 탐색전인가? 손죽도 침략을 기획한 자와 그 배후는 누구이고, 침략군을 단순 노략질을 일삼 는 왜구(해적)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막강 정치세력의 휘하에 있는 훈련된 정규 군으로 볼 것인가? 이를 기획한 자는 九 州 五 島 平 戶 島 세력가임에 분명하 다. 그렇다면 그 행위가 이들의 단독 결정인가 아니면 배후세력에 의한 의도된 계산이었는가가 궁금해진다. 통신사 협상시 쓰시마 측은 사화동이 五 道 인을 74)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9월 21일. 75) 선조실록 23, 선조 22년 11월 18일. 76) 선조실록 24, 선조 23년 2월 28일. 77) 선조실록 24, 선조 23년 3월 6일.

291 끌어들여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했지만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필자는 일 본 정국의 진행 방향을 감지한 유력 세력가가 조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군대를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침략 행위를 감행한 것으로 손죽도 왜변을 해석하고, 이 정보는 곧바로 도요토미에게 제공되어 조선 침략으로 직결되었을 것으로 판단 하고 있다. 이를 반증할 수 있는 사실은 五 道 와 平 戶 島 세력가들이 小 西 行 長 宗 義 智 와 함께 임진왜란 때 제1진으로 도해했던 점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군대의 침략 행동은 조선 전체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그 결과는 조선 을 침려하려는 도요토미의 계산을 굳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도요토미는 1585년(선조 18) 7월에 일본 최고 실권자인 關 白 이라는 지위를 받았다. 바로 이어 9월에 家 臣 들에게 入 唐 의지를 표명하며 해외 침략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조선 침략 의사가 손죽도 왜변 1년 6개월 전에 처음 표 현되었던 것이다. 중국 정벌 계획은 1586년 3월에 大 坂 城 에서 耶 蘇 會 선교사단에게도 공개 되었는데, 이때 도요토미는 선교사단에게 조선과 중국 정벌에 필요한 2,000척 의 군선을 만들기 위한 목재를 이미 벌채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이 어 4월에 모리 데루모토[ 毛 利 輝 元 ]에게 九 州 를 평정한 후 조선에 도해하겠다 는 계획을 알렸고, 6월에 對 馬 島 主 소 요시시게[ 宗 義 調 ]가 서간과 헌물을 보 냈을 때 도요토미는 조선을 공격하는 병력이 준비되면 파견하여 평정할 예정 이니 그때는 충절을 바치도록 하라 고 명령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78) 8월 에 安 國 寺 에케이[ 惠 瓊 ]와 구로다 요시타카[ 黑 田 孝 高 ]에게 薩 摩 藩 主 시마즈 [ 島 津 ] 씨 항복 후 명 정복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12월에 豊 臣 이 라는 성을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으며 그의 집권과 명 정벌 계획은 기정 사실화 되었다. 바로 이때 五 島 領 主 우쿠 스미하루[ 宇 久 純 玄 ]는 동생을 大 坂 에 보내 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豊 臣 姓 부여와 關 白 전임을 축하하였다. 우쿠 스미하 78) 田 中 敏 昭, 1999, 豊 臣 政 權 의 日 本 統 合 과 對 馬 島 主 宗 氏 의 朝 鮮 交 涉, 東 西 史 學 5, 89쪽.

29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루는 도요토미로부터 薩 摩 를 안내하는 데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의 동 생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면하면서 도요토미가 薩 摩 정벌 의향이 있다는 것 을 전해 들었다. 이 과정에서 宇 久 와 豊 臣 小 西 의 밀접한 접촉이 이루어졌 다. 79) 그런데 우쿠 스미사다[ 宇 久 純 定 ]는 平 戶 島 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마쓰우 라[ 松 浦 ] 씨와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1577년에 화친을 맺었고 그의 손자 우쿠 스미하루는 마쓰우라 시게노부[ 松 浦 鎭 信 ]의 딸을 처로 삼을 정도로 양 세력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그리고 이듬해 1587년 2월에 도요토미는 전라도 연해에 해적선을 침입시 켜 무력 도발을 감행하도록 했다. 이 점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지 만, 그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왜냐하면 일본 전국에 중국을 정복한다는 계 획이 선언되고 나서 어떤 사람은 선박을 새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 진 지역에서 선박을 만들게 하고, 그 밖의 사람은 무기나 탄약을 조달하거나, 유산이나 전답을 처분하여 준비를 갖추는 등 그 열의 궁리 배려는 지금까지 일찍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80) 이 점에 대하여 안방준은 壬 辰 記 事 에서 사화동을 길잡이로 삼아 약간의 배를 보내어 우리나라 병력의 강약을 시험했 고, 나사침은 丁 亥 日 記 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의 허실을 자세히 관찰했을 것 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북한에서도 1586년에 도요토미는 사쓰마 정벌에 앞서 조선 출병 계획을 쓰시마 영주에게 알리면서 조선 국왕의 일본 방 문을 요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전라도 흥양과 가리포에 해 적선을 침입시켜 무장 도발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81) 고 파악하였다. 손죽도 왜 변을 도요토미가 정권을 잡은 후 조선 침략을 감행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전력을 탐지하기 위한 예비전으로 성격 규정을 내린 것이다. 의도대로 손죽도 왜변이 진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도요토미는 3월 1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大 坂 을 출발하여 5월 8일 薩 摩 의 大 平 寺 에서 시마즈 요시 79) 金 文 子, 1994, 앞의 글, 118쪽. 80) 국립진주박물관, 2003,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176쪽. 81) 사회과학원, 1980, 조선전사 9,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54쪽.

293 히사[ 島 津 義 久 ]의 항복을 받고 九 州 정벌을 종결지었다. 여기에 五 道 의 우쿠 [ 宇 久 ] 씨, 平 戶 島 의 마쓰우라[ 松 浦 ] 씨 등이 동참하였다. 당연히 공상이 내려 졌는데, 우쿠 스미하루[ 宇 久 純 玄 ]는 도요토미로부터 1만 5,000석 정도의 소유 권을 인정받아 大 名 으로 발전하였다. 도요토미는 薩 摩 정벌시 진중에서 처에 게 보낸 편지에서, 고려 왕에게 일본의 궁궐에 들어와라, 그렇지 않으면 내년 에 처벌하겠다고 빠른 배를 보내어 전하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唐 國 까지 손에 넣을 생각이다 고 적고 있다. 그리고 전국적인 세력가 本 願 寺 光 佐 에게 보낸 朱 印 狀 에서도 조선 왕으로 하여금 입조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쓰 시마도 도요토미 세력에 편입되고 말았다. 도주의 사자인 야나가와 시게노부 [ 柳 川 調 信 ]가 熊 本 에 가서 도요토미와 회견하였는데, 도요토미는 조선 출병 및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에 입조하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리하여 9월 에 도주 소 요시시게[ 宗 義 調 ]는 조선으로 하여금 조공과 함께 가도입명을 하도 록 하였다. 1588년에 도주 자리를 이어받은 소 요시토모[ 宗 義 智 ]는 조선을 드나들며 조공과 가도입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과 결혼한 후 장 인에게 일본군이 쉽게 조선에 침입할 수 있는 방법과 그에 알맞은 지식과 기술 에 대해서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사실을 고니시가 도요토미에게 전하자 대단히 기뻐하며 그들에게 선봉장으로 출진하도록 명령하였다. 조선이 입공을 거절하자, 도요토미는 1591년에 전국의 大 名 을 京 都 에 불러 조선 출병을 선포한 후, 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平 戶 島 에서 12리 정도 떨어 진 名 護 屋 을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런데 名 護 屋 지역은 벽지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고 식량뿐만 아니라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손 이 닿지 않은 황무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한반도 출구였던 博 多 를 선택하지 않고 名 護 屋 을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전라도 공략에 있었다. 명호옥~전라도 노선은 바람과 해류를 이용한 최단거리 일본~조선 노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도 조헌이 조정의 의논은 왜적이 湖 海 諸 島 를 침공하리라 하여 영남지방을 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은 크나큰 실책인 줄로 압니다 라고 우려할 정도로 전라도 방어에 주력하였다.

29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2) 노예무역의 개시탄인가? 왜란 7년 동안 10만 명 가량의 조선인이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고, 그중 상 당수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려 나갔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노예무역전쟁 이라 고 평가하기도 한다. 82) 그런데 일본군은 5년 전 손죽도 왜변 때에 수백 명의 조 선인을 납치하여 데리고 갔다. 사상 유례없는 대량 납치는 침략 과정에서 발생 한 우발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노예무역을 위한 계산된 행위인가가 궁금하다. 사실 일본인의 조선인 납치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멀리는 신라 와 고려 때부터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429년(세종 11)에 통신 사로 일본에 다녀온 朴 瑞 生 은 왜적들이 일찍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우리 인 민을 붙잡아 노비로 삼고 혹은 먼 나라에 轉 賣 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 행 길에 정박하는 곳마다 잡혀 간 사람들이 다투어 도망해 오려고 해도 그 주 인이 枷 鎖 를 하고 굳게 가두어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보고하였다. 83) 손죽도 왜변 직전에도 납치행위가 있었는데, 1573년에 河 東 사람 9명이, 1576년에 康 津 사람 10명이 왜적에게 잡혀갔다. 이들 가운데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려 나간 자도 있었다. 그런데 손죽도 왜변 때에는 10여 명 납치하던 이전과 달리 수백 명을 납치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 상당수가 동남아시아에 팔려 나갔다. 이러한 행위 에 적극 가담한 지역은 九 州 의 平 戶 島 와 그 인근 五 島 였다. 이들이 적극적으 로 납치에 나선 데에는 조선과 거리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인 요인과 서양과 통교를 하고 있는 長 崎 를 가까이 두고 있다는 현실적인 요인이 작용하였다. 따 라서 九 州 의 長 崎 주변 세력가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인을 납치하여 노예 무역을 진행했고 그 사실은 조선 인사들에게도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임 진왜란 때에도 대규모 납치행위가 자행되었던 것으로 보아, 손죽도 왜변과 임 82) 이원순, 1985, 임진 정유재란시의 조선부로노예문제 왜란 성격 일모, 변태섭 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삼영사. 83) 세종실록 46, 세종 11년 12월 3일.

295 진왜란의 전개양상 상당부분이 九 州 세력가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손죽도 왜변 당시 일본 침략군은 수백 명에 이르는 조선 수군과 양민을 납 치하여 일본으로 끌고 갔다. 그 가운데 일부는 쇄환되었고, 일부는 동남아에 팔려 나갔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일본에 잔류한 사람도 있었다. 이 네 가지 경우를 하나씩 살펴보겠다. 1 쇄환자 쇄환인의 숫자와 쇄환 시기에 대해 자료마다 약간 차이가 나고 있으니, 하나씩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申 欽 은 1589년(선조 22) 5월에 秀 吉 이 또 平 義 智 玄 蘇 世 俊 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와서 孔 雀 한 쌍과 말 한 필을 바 치게 하고, 포로가 된 우리나라의 변방 백성 金 大 璣 孔 大 元 등 1백 16인을 쇄 환하는 동시에 본국의 叛 民 沙 火 同 과 정해년의 賊 倭 緊 時 要 羅 三 甫 羅 望 古 時 羅 등 3인을 묶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入 寇 했던 일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 다. 그것은 바로 귀국의 반민 사화동이 五 島 의 왜인을 유혹하여 변방의 요새를 약탈한 것인데 지금 묶어 보낸다 하며 간절하게 使 者 를 보내 주기를 청하였 다 84) 고 하여, 1589년 5월에 116명이 쇄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 7월조에서는 일본국 平 秀 吉, 平 義 智, 玄 蘇 등이 본국의 포로 金 大 璣 孔 大 元 등 1백 16인을 쇄환하고 또 叛 民 沙 火 同 및 정해년의 賊 倭 緊 時 要 羅 三 甫 羅 望 古 時 羅 등 3인을 포박하여 보내며 말하기를, 入 寇 한 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이고, 곧 귀국의 반민 사화동이 五 島 의 왜인을 유인하여 邊 堡 를 약탈한 것이므로 지금 잡아 보내어 귀국의 처치를 기다립니다 하고, 이어 우리 使 者 가 나라에 와서 修 好 해 주기를 간청하였 다 85) 고 하여, 1589년 7월에 116명이 쇄환되었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李 恒 福 은 신이 庚 寅 연간에 비변사의 낭관으로 있었는데, 84) 象 村 集 56, 志, 壬 辰 倭 寇 構 釁 始 末 志. 85) 선조수정실록 22, 선조 22년 7월.

29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그때에 賊 酋 秀 吉 이 우리에게 통신사를 요청하면서 우리나라의 叛 民 인 沙 火 同 및 五 島 의 賊 倭 로서 누차 우리의 변경에 入 寇 했던 信 三 甫 羅, 緊 時 要 羅, 望 古 時 羅 등 세 倭 人 을 결박하여 보내고, 인하여 다시 우리 백성들로서 포로 로 잡혀간 남녀 1백 30여 명을 쇄환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쇄환된 백성들 가운 데 金 大 璣, 孔 太 元 등 2인은 제법 영리하여 문자를 알았고, 스스로 五 道 에 포 로로 잡혀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그 島 酋 의 행위와 토지의 肥 瘠 과 人 民 의 多 少 와 風 俗, 形 勝 등에 관하여 매우 자상하게 말해 주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86) 고 하여, 1590년(선조 23)에 130명이 쇄환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1590년은 진도의 거민 沙 乙 火 同 이 왜국에 투항하여 그들이 노략질하는 데 嚮 導 노릇을 해 왔는데 일본에서 그를 쇄환시켜 왔으므로,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獻 俘 禮 를 거행했다 87) 는 실록 기사로 보아, 2월 28일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시기에 대해 1589년 5월, 1589년 7월, 1590년 2월 28일 등이 보인다. 이 중에서 통신3사를 임명해 놓고 있던 1590년 2월 28일이 쇄환 날짜 로 추정된다. 조선은 이들의 쇄환을 확인한 후 통신사를 출발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인원에 대해 116명, 130명이 보인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정확한 숫자인 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다. 많게는 130명, 적게는 116명이 쇄환된 셈인데 (80명, 160명이라는 설도 있음), 그 가운데 金 大 璣 와 孔 太 元 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조선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김대기는 쇄환 즉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1591년(선조 24) 3월에 김대기 를 조사한 최립은 하교를 받고 10월 24일에 선조에게 倭 情 을 보고하였다. 그 는 奏 本 에서 김대기가 畠 山 殿 州 라는 이름의 그쪽 지역에서 들은 바에 의하 면, 국왕이 전함을 대대적으로 갖추고 금년에 大 明 을 쳐들어 갈 것이라고 하였 다, 그리고 일본의 關 白 平 秀 吉 이 군대를 일으켜 諸 島 60여 州 를 병탄하였 고, 琉 球 와 南 蠻 의 諸 國 도 모두 복종하며 귀의해 왔다. 그런데 嘉 靖 연간에 사 86) 白 沙 集 別 集 1, 啓 辭, 舟 師 事 宜 啓. 87) 선조실록 24, 선조 23년 2월 28일.

297 신을 보내 조공하려고 했을 때 대명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 대로 원망하며 한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 왔다. 그래서 명년 3월 사이에 대 명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병선이 지나가다 보면 혹 귀국의 경내 를 소란스럽게 할 염려도 있을 듯싶다 고 진술하였다고 보고하였다. 88) 김대기 가 진술한 점에 대해서 柳 成 龍 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성룡은 신이 또 한 먼저 항목에서 말한 쇄환인 김대기 등이 진술한 말을 참조해 보면, 지난해 6월경 그곳에서 들은 것이니, 이른바 중국에 쳐들어가고자 한다는 내년 봄은 바로 금년을 가리키는데 이미 맞지 않았습니다. 이어 倭 僧 과 쓰시마의 平 義 智 가 와서 공갈하고 으름장을 놓은 것에 의하면 실은 금년 5, 6월경인데, 쳐들어 오는 시기는 또 내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앞뒤 말이 번거롭게 자꾸 변하여 터무니없는 듯하니, 공갈하여 오직 간악한 꾀를 이루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은 더욱 확실한 듯합니다 89) 고 하면서,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名 護 屋 에 전함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김대기의 증언을 도요토미의 사기극으로 치부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여러 관료들에게 나타났었다. 공태원(혹은 孔 大 元 )은 손죽도 왜변 때 왜인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 돌아 와 임진왜란 때에 좌수영 鎭 撫 로 참전하였고, 이순신 곁에 있으며 통역을 맡았 고 왜정을 전해 주었다. 1593년 3월에 이순신 함대는 당포 해전에서 일본군 2 명을 나포했다. 이를 심문한 사람이 일본말을 잘 아는 공태원이었다. 공태원은 하루 종일 심문했다. 한 명은 宋 古 老 ( 宗 五 郞 )로 나이 27이고 약간 글자를 알 고, 또 한 명은 要 沙 汝 文 ( 與 左 衛 門 )으로 나이 43이었다. 이들이 말하기를 자 신들은 出 雲 출신으로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잡혔기 때문에 일본군의 동정을 자세히 모른다고 발뺌을 하자 처 형해 버렸다. 90) 그의 통역 일은 1594년 5월 4일에도 있었다. 경상우수사의 권 관이 이순신에게 와서 왜적 3명이 中 船 을 타고 楸 島 에 온 것을 만나 붙잡아 88) 簡 易 集 1, 奏, 辛 卯 奏 十 月 二 十 四 日 奉 敎 製. 89) 西 厓 集 3, 奏 文, 陳 倭 情 奏 文 辛 卯. 90) 李 忠 武 公 全 書 3, 狀 啓, 討 賊 狀.

298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왔다 고 하자, 이순신이 압송해 와서 심문하도록 하였는데, 공태원이 통역을 맡아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 을 만나 배를 조종할 수가 없어 떠다니다가 이 섬에 댄 것이라고 하였다 고 전 하였다. 91) 그리고 난중일기 에 따르면, 그는 1595년 7월 14일에 이순신이 한 산도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좌수영에서 들어와 이순신 가족 소식을 전해 주었 고, 10월 21일에는 몹시 싸늘한 바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순신의 부 름에 불려가 왜적의 정세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596년 1월 7일에는 항복 왜인 5명에 대한 통역자로 뽑힌 적도 있었다. 2 매매자 손죽도 사건 때에 납치된 사람 가운데 南 蠻 에 팔려간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서 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南 蠻 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말레이반도와 필리핀을 점령하였다. 일본인은 납치 조선인을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에게 팔아 가까 이는 중국(절동과 절서)이나 동남아, 멀리는 유럽으로 팔려갔고 일본으로 되팔 려온 사람도 있었다. 92) 팔려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당수 되었던 것 같다. 통신사 파견의 전제 조건으로 납치인 송환을 조선에서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 쓰시마는 팔려간 사람들에 대한 송환도 수행하였다. 그런 데 그 실적이 미미하였던지 金 誠 一 은 쓰시마 측에 여러 섬에 공문을 내려 보 내 아직까지 잔류한 포로들을 찾아 돌려보내라고 하였소. 그리고 곧이어 남만 에서 쇄환한 우리 백성 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보내 주었소. 그뿐 아니라 그 아 드님을 쓰시마까지 보낸다고 하니 우리는 족하의 은혜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 게 생각하고 있었소.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바가 어찌 각 섬에 잔류한 자뿐이 겠소? 남만으로 팔려간 사람들까지 차례로 모두 돌려보내 주시도록 한다면 더 더욱 고맙겠소 93) 라고 하문을 분발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91) 李 忠 武 公 全 書 6, 亂 中 日 記 2, 1594년 5월 4일. 92) 重 峯 集 8, 疏, 請 斬 倭 使 疏 辛 卯 三 月 十 五 日. 93) 鶴 峰 集 5, 書, 擬 與 副 官 平 調 信.

299 전매된 사람 중에 쇄환된 사람 외에 도망쳐 나온 사람도 있었다. 전라도 좌 수영 鎭 撫 였던 金 介 同 과 李 彦 世 가 그들인데, 두 사람 가운데 이언세는 長 興 출신이었다. 그는 손죽도 싸움에서 왜구에게 잡혀가 五 島 에 머물다가 南 蠻 에 팔려갔다. 배를 타고 주야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廣 西 香 山 縣 땅에 닿았다.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 자인 김개동과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知 縣 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 는 蠻 人 이 올린 告 狀 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朝 鮮 國 의 長 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 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南 雄 府 에 압송하니 三 司 官 이 그 문초 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5월 20일에 서울을 출발한 謝 恩 使 右 議 政 柳 㙉 이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11월 12일에 서울에 돌아 오게 되었다. 94) 이들은 돌아와 사화동의 부역, 납치자와 납치선의 정황 등 중요한 사실을 조선에 알렸다. 또한 이들은 임진왜란 때 좌수영 수군으로 참전했다. 부산포 해전에서 좌수영 우후 이몽구가 일본군 두 명의 목을 베었다. 그중 한 명은 본 래 왼쪽 귀가 없었다. 이를 본 김개동과 이언세는 소인을 (정해년에) 잡아간 왜인은 본시 왼쪽 귀가 없었는데, 이제 왜인의 머리를 보니 얼굴이 그와 같으 며 이 왜인은 나이가 늙어서 스스로 두목이 되어 도적질을 일삼고 사람 죽이기 를 즐겨 하였다 고 말했다. 95) 3 참전자 손죽도 왜변 당시 납치된 사람 가운데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과 함께 들어와 통 역관과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도 있었다. 낯선 이국 조선 땅에서 전쟁을 원활 94) 惺 所 覆 瓿 藁 26, 附 錄, 鶴 山 樵 談.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5월 20일. 선조실록 22, 선조 21년 11월 12일. 95) 李 忠 武 公 全 書 2, 狀 啓, 釜 山 破 倭 兵 狀.

30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하게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현지 사정에 정통하고 언어를 소통할 수 있는 안 내원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납치인을 현지 안내원 으로 양성하였다. 현지 부역자만으로는 원활한 전쟁 수행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준비작업이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무장들의 일기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조 선을 침략하기 전부터 조선어 통역사를 양성하였고 그들을 데리고 조선에 들 어왔다고 한다. 96) 그러면 어떤 사람을 통역관으로 양성하였겠는가가 궁금하 다. 일본인으로 하였을 가능성도 있고, 조선인으로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중에서 손죽도 왜변 때에 납치한 조선인에게 일본어 교육을 시켜 통역관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은 조선 곳곳을 안내할 길잡이로 손죽도 왜변 때에 납치한 조선 인을 앞세웠다. 이 일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조헌이 비왜지책 에서 연해 여러 진의 정박할 곳을 외국 사람은 실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향도하는 사람 을 얻어야만 온전하게 돌아갔으며, 그 밖에 널리 정박한 배는 도서와 해변에 많이 걸쳐서 부서지고 없어진 것이 매우 많으니 왜적의 큰 근심이었다. 그러므 로 늘 흑산도, 추자도 등의 섬에서 전복잡이를 하는 어부를 포로로 얻으면 큰 보배로 여기어 전복을 많이 주고 향도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고 말한 바와 같 이, 굴곡이 심하고, 섬이 많고, 갯벌이 넓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조선 해안 을 일본인은 정보원 없이는 들어올 수 없었다. 이처럼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현지 정보 수집과 정보원 확보를 위해 손죽도 왜변 때에 사상 유례없는 납치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4 잔류자 통신사 협상시 쓰시마는 100명 이상의 포로를 송환해 주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서 포로를 송환할 때에 바삐 모았던 관계로 낙오 되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다고 하였다. 또한 통신사들이 일본에 와서 96) 김문자, 2008, 16세기 동북아 국제질서 변동과 전쟁, 일본역사연구 27, 226쪽.

301 들은 바에 따르면, 포로 송환 상황이 본국에서 들은 내용과 대체로 같다고 하 였다.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송환되지 못하고 일본에 잔류한 조선 포로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九 州 지역 그리스도교 신자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1593년에 長 崎 에서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100명 중에 과반수는 조선인 노예였다고 한다. 97) 이 50명 이상의 조선인 세례자 가운데 1년 전 임진왜란 때에 납치된 사람도 있었 겠지만, 그 이전 손죽도 왜변 때에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잔류하여 17세기 전반에 가서야 존재가 확인된 사람도 있었다. 임 진왜란이 끝나고 1634과 1642년에 平 戶 島 에서 작성된 포로인과 그 가족 관계 를 기록한 平 戶 町 構 瀕 浦 町 人 數 改 帳, 平 戶 町 人 別 生 所 糺 이라는 문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손죽도 왜변 때에 납치되어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조 선인이 있었다. 이는 甚 五 左 衛 門 의 부인으로 7살 때인 1587년에 平 戶 島 에 들 어왔다. 문서에 부모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혼자 건너왔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 아, 당시 유년들도 대거 납치되었음에 분명하다. 이 여자는 3세 연상의 甚 五 左 衛 門 과 결혼하여 平 戶 島 영의 相 ノ 浦 에서 어민으로 생활하다 1636년에 長 崎 로 이주하였다. 98) Ⅱ. 맺음말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소규모 내침을 자행하던 일본인들은 1587년에 손죽도 왜변을 일으켜 또다시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손죽도 왜변은 지방 세력가에 의해 노략질을 일삼던 이전의 왜변과는 달리 새로이 일본 집권자로 등장한 도 97) 中 村 質, 1992, 秀 吉 政 權 과 壬 辰 倭 亂 의 特 質, 아시아문화 8, 23쪽. 98) 中 村 質, 1992, 壬 辰 丁 酉 倭 亂 の 被 虜 人 の 軌 跡, 한국사론 22, 174쪽.

30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요토미와 연결된 규슈 세력가에 의해 자행된 임진왜란의 전초전 성격을 띠었 다. 총통과 조총으로 중무장한 침략군 앞에 전라 좌우수군은 무기력하게 무너 졌지만, 녹도만호 이대원은 중과부적에도 불구하고 손죽도 해전에서 전력응전 하다 장렬하게 순국했을 뿐만 아니라 사족들은 직접 거병을 하기도 하였다. 이 후 호남 사족들은 무장단을 조직하여 자위체제를 다졌고, 연해민들은 이대원 을 애모하는 마음을 널리 가졌을 뿐더러 정부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보내 는 등 전라도 해안지역 방어에 주력했다. 이는 호남 연해민들의 대일의식을 고 조시키고 호남 연해지역의 방어력을 증대시켜 임진왜란 당시 전라수군이 조선 수군의 주력군으로 전란극복의 원동력이 되고 호남의병이 개전 초기에 거병하 였던 배경이 되었다. 전라도 사족들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거병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 이 정여립인데, 정여립의 거병은 2년 8개월 뒤 그가 모반을 도모하려고 한 단 서로 서인에 의해 규정되어 기축옥사의 결정적 빌미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병 을 요청한 전주부윤 남언경도 기축옥사 때에 처벌을 받았다. 큰 전란을 겪지 않았던 당시까지 자의적인 거병은 쉽게 용납되지 않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 다. 특히 동인의 공세에 밀려 극심한 수세에 처한 서인은 동인 인사의 거병에 매서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옥사를 확대하고 마침내 정권을 차지하였다. 이 외의 재지사족들도 자구책 마련에 긴박하게 움직였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 는 전란에 대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는데, 나주 출신 김천일, 남원 출신 안 영, 옥과 출신 유팽로, 충청도 출신 조헌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4~5월경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였다. 그들이 개전한 지 1개월도 안 되어 발 빠르게 의병진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전란 전부터 준비한 결과였다. 왜군들은 퇴각하면서 사상 유례없는 수백 명의 조선 인질을 연행해 갔다. 이들을 동남아시아에 매각하는 노예무역을 단행했고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향도로 활용했다. 매매자 가운데 일부는 탈출하여 귀국한 후 중요한 왜정을 제 공하였다. 또한 피로인 쇄환은 경인통신사 협상의 카드로 활용되어 100여 명 이 넘는 숫자가 쇄환되었는데, 일부는 왜란 당시 이순신 옆에서 통역과 정보

303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일부는 현지에 잔류하여 17세기에 가서야 존재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손죽도 왜변은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하여 방어태 세를 파악하고 정보 요원을 확보하기 위한 예비전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30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참고문헌 <사료> 簡 易 集, 健 齋 集, 錦 湖 遺 事, 亂 中 雜 錄, 眉 巖 日 記, 白 沙 集, 四 留 齋 集, 象 村 集, 西 厓 集, 惺 所 覆 瓿 藁, 松 江 集, 松 川 集, 藥 泉 集, 硏 經 齋 全 集, 鰲 峯 集, 月 坡 集, 隱 峯 全 書, 李 忠 武 公 全 書, 旌 忠 錄, 朝 鮮 王 朝 實 錄, 重 峯 集, 芝 峯 類 說, 鶴 峰 集, 海 東 繹 史. <단행본> 국립진주박물관, 2003,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무라이 쇼스케 지음, 이영 옮김, 1998, 중세 왜인의 세계, 소화. 사회과학원, 1980, 조선전사 9, 과학백과사전출판사. 李 殷 相, 1980, 高 興 雙 忠 祠 事 蹟, 민족문화협회. <논문> 金 德 珍, 2009, 李 大 源 과 鄭 運, 그리고 雙 忠 祠, 海 洋 文 化 硏 究 2. 金 文 子, 1994, 島 井 宗 室 과 1590년 通 信 使 派 遣 問 題 에 대해서, 祥 明 史 學 2. 김문자, 2008, 16세기 동북아 국제질서 변동과 전쟁, 일본역사연구 27. 米 谷 均, 2002, 豊 臣 政 權 期 における 海 賊 の 引 き 渡 しと 日 朝 關 係, 日 本 歷 史 650. 米 谷 均, 2003, 後 期 倭 寇 から 朝 鮮 侵 略 へ, 天 下 統 一 と 朝 鮮 侵 略, 吉 川 弘 文 館. 우인수, 1988, 정여립 역모사건의 진상과 기축옥의 성격, 역사교육론집 12. 윤성익, 2006, 後 期 倭 寇 로서의 乙 卯 倭 變, 韓 日 關 係 史 硏 究 24. 이원순, 1985, 임진 정유재란시의 조선부로노예문제 왜란 성격 일모, 변태섭박사 화갑기념사학논총, 삼영사. 田 中 敏 昭, 1999, 豊 臣 政 權 의 日 本 統 合 과 對 馬 島 主 宗 氏 의 朝 鮮 交 涉, 東 西 史 學 5. 中 村 質, 1992, 秀 吉 政 權 과 壬 辰 倭 亂 의 特 質, 아시아문화 8. 中 村 質, 1992, 壬 辰 丁 酉 倭 亂 の 被 虜 人 の 軌 跡, 한국사론 22.

305 [ABSTRACT] A Study on Japan s Invasion of Sonjukdo in 1587 Kim, Deokjin In 1587 Japan which had executed small scale invasions of Korean territory carried out a wide scale invasion of Sonjukdo of Heungyang, Jeolla do. The invasion of Sonjukdo was different from the previous invasions by Japanese local power holders in that it was a precursor to Imjin Waeran, invasions executed systematically by Toyotomi Hideyoshi, the newly appeared leader, and his allies who exerted influential power in Kyushu. Accordingly, it had a great impact on the governing of Joseon as well as the governing of the community of Jeolla do. The Jeolla navy was hopelessly defeated by the invaders armed with firearms and hundreds of Joseon people were kidnapped to Japan. Lee Dae won, Manho of Nokdojin, died gloriously while frighting bravely against the invaders at the sea of Sonjukdo. In the wake of this, those living at the coast of Jeolla do lamented the death of Lee Dae won and enhanced their anti Japanese sentiments. In addition, they reinforced defense power and strengthened the Jeolla navy, leading it to grow as the main force of the Joseon navy which played the leading role in fighting against Japan. Besides, Yangbans in Jeolla do organized the righteous army called Uibyeong to defend their native places. Jeong Yeo rip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Yangbans who organized Uibyeong. Jeong Yeo rip s organization of the righteous army became the decisive

30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cause of the accusations of high treason of 1589 when it was defined by Westerners as the clue of his attempt to raise insurrection two years and eight months after the organization. As Joseon had no experience of a large scale war until then, the voluntary organization of an army was considered to be a very dangerous action and was not easily accepted. Westerners who had been suppressed by Easterners aggressiveness made suspicious glances at the righteous army organized by one of Easterners, expanding the accusations and finally gaining the power. In addition, Yangbans in Jeolla do organized armed groups and made self defense system, moving under high tension. Lots of people prepared for the potential invasion from Japan. Kim Cheon il from Naju, Ahn Yeong from Namwon, Yu Paeng ro from Okgwa, Jo Heon from Chungcheong do also made preparation for the invasion. After Imjin Waeran broke out, they organized righteous armies between April and May and gave a great blow to the Japanese army. As they made preparations for the war, they could rapidly organize righteous armies in less than one month after the break out of the war. Japan s invasion of Sonjukdo stirred unrest not only in Jeolla do but also all over the nation. The news that the war was impending was spread throughout the nation, causing the public to become agitated. In response, the government punished the commanders of the Jeolla navy for failing to defeat the Japanese soldiers who invaded Sonjukdo. Besides, it reinforced defenses in Jeolla do. It ordered the province to enhance military power by constructing a fortress and repairing military equipments. It also sent brave commanders to the province, including Lee Sun sin as naval commander of left Jeolla do and Jeong Un as Manho of Nokdo. Although the Joseon government had focused on strengthening defenses along the coast of Jeolla do, Japanese military

307 chose Busan, which they had not invaded recently, as the first place they attacked during Imjin Waeran instead of Jeolla do, overpowering Joseon military at the beginning of the war. However, Lee Sun sin and Jeong Un successfully led Joseon navy, playing leading roles in reversing the tide of the war. Through the invasion of Sonjukdo, Japan wanted to collect information for its future wide scale attack on Joseon and assess Joseon s military power. Therefore, Japanese military invaded Joseon territory through Sonjukdo of Heungyang and moved into Garipo of Gangjin, taking hundreds of Joseon hostages to Japan. Some of them were sold as slaves to Southeast Asian nations, some used as guides during Imjin Waeran, some came back to Joseon and some had to live in Japan though they wanted to come back. Disporting the hostages was discussed during the negotiation over Joseon s dispatch of its emissary called Tongsinsa to Japan. After refusing persistently Japan s strong request for Tongsinsa, Joseon finally allowed the dispatch of Tongsinsa on the premise that Japan had to repatriate Joseon hostages. As a result, about 100 hostages returned home. In addition, out of the people sold to Southeast Asia, a few escaped and came back. These people worked as Lee Sun sin s interpreters or intelligent agents during the war. Thanks to the important information on Japanese military provided by them, Lee Sun shin could defeat Japanese soldiers on the southern coast. keywords Jeolla do, Sonjukdo, Lee Dae won, Imjin Waeran, Tongsin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