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역사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을 위한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2015년 5월 29일(금) 13:30~18:00 강화도서관 >> 주최 : >> 주관 :
학술회의 진행순서 시간 제목(시간) 내용 비고 13:30 13:35 개회 (5분) 학술회의 일정 소개 김락기 (강화고려역사재단 사무국장) 13:40 13:45 개회사 (5분) 개회사 13:45 13:50 인사말씀 (5분) 인사말씀 박종기 (강화고려역사재단 대표이사, 국민대학교 교수) 김동빈 (인천광역시 문화관광체육국장) 13:50 13:55 축사 (5분) 축사1 류호룡 (강화군의회 의장) 13:55 14:00 축사 (5분) 축사2 유치현 (강화군 부군수) 주제발표 및 약정토론 <사회 :강옥엽(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4:00 14:05 (5분) 학술회의 취지 및 참가자 소개 사회 14:05 14:35 14:35 14:55 주제발표1 (30분) 약정토론 (20분)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조선후기 관방 시설의 정비를 중심으로- 약정토론 14:55 15:10 휴식 (15분) 중간휴식 15:10 15:40 15:40 16:00 16:00 16:30 16:30 16:50 주제발표2 (30분) 약정토론 (20분) 주제발표3 (30분) 약정토론 (20분)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국내외 유사 사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약정토론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보수 경과와 보존 관리 방안 -잠정목록 등재대상 유적을 중심으로- 약정토론 16:50 17:10 휴식 (15분) 중간휴식 이근호 (명지대학교 교수) 송기중 (충남대학교 교수)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최재헌 (건국대학교 교수)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백종오 (한국교통대학교 교수) 종합토론 <좌장 : 서영대(인하대학교 교수)> <지정발언> 강석화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17:10 18:00 종합토론 (50분) 류호룡 (강화군의회 의장) 원준호 (경기문화재단 유산기획팀장) *발표자 토론자 지정발언 및 청중 이창환 (상지영서대학교 교수) 전동광 (삼량고등학교 교감) * 일정 및 진행순서, 주제발표 제목은 변경될 수 있음
목 차 주제발표 1 :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 조선후기 관방 시설의 정비를 중심으로 - 11 이근호 (명지대학교 교수) [약정토론] 송기중 (충남대학교 교수) 35 주제발표 2 :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국내외 유사 사례의 비교를 중심으로 - 39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약정토론] 최재헌 (건국대학교 교수) 57 주제발표 3 :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보수 경과와 보존 관리 방안 - 잠정목록 등재대상 유적을 중심으로 - 65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약정토론] 백종오 (한국교통대학교 교수) 85
강화역사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을 위한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주 제 발 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조선후기 관방 시설의 정비를 중심으로- 이 근 호 명지대학교 교수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조선후기 관방 시설의 정비를 중심으로- 이 근 호 (명지대학교 교수) 1. 머리말 2. 임진왜란과 강화도의 보장처론( 保 障 處 論 ) 3. 보장처강화론( 保 障 處 强 化 論 )과 관방 시설의 구축 4.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 변화와 방어 체계 정비 5. 해방( 海 防 ) 강화 논의와 관방 시설의 보강 6. 맺음말 1. 머리말 이 글은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정비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추적하기 위해 작성된 글이다. 강화도는 고대 이래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관방 시설이 구축되었고, 고려조 몽골과의 전쟁 기간에는 임시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조선조 들어와 역시 다양한 관방 시설이 구축되었다.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 후금-청과의 대외적 긴장 관계 속에서 성곽과 진보( 鎭 堡 ), 돈대( 墩 臺 ) 등 다양한 관방 시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강화도의 관방 시설 정비, 특히 조선 후기 시점에서 이루어진 정비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 연구를 통해서 정리된 바 있다. 1) 이를 통해 강화도 진보의 설치와 돈대의 1) 조선 후기 강화도의 관방 시설 구축과 관련된 주요 성과는 아래와 같다. 강성문, 조선후기의 강화도 관방론 연구 육사논문집 56-2, 2000(강성문, 한민족의 군사적 전통, 봉명, 2000 재수록) 노영구, 북벌론과 군사력 강화 한국군사사7-조선후기Ⅰ, 경인문화사, 2012 박광성, 병자난 후의 강화도 방비구축 기전문화연구 3, 1973 ; 양요후의 강화도 방비책에 대하여 기전문화연구 7, 1976 반윤홍, 비변사의 강도보장책 연구 전통문화연구 5, 조선대, 1997 배성수, 조선후기 보장지 강화와 돈대, 인천역사 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4 ; 강화도 돈대의 축조와 역부 인하사학 9, 2002 ; 숙종 초 강화도 돈대의 축조와 그 의의 조선시대사학보 27, 2003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11
축조, 내성과 외성의 축성 등과 함께 군영인 진무영( 鎭 撫 營 )의 설치나 통어영( 統 禦 營 )의 이설 등이 해명되면서 방어체제의 전모가 상당부분 해명되었다. 아래에서는 기존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관방 시설의 정비 과정을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방위 전략의 변화와 관련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방위 전략은 필연적으로 역사상의 변화에 수반하여 전환될 수밖에 없으며, 방위 전략의 변화에 따라 방어 체계의 정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화도의 해양 관방 시설은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방위 전략 변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아래에서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 강화도가 보장처( 保 障 處 ) 2) 로서 주목받게 되었음을 언급한 뒤, 이어 17세기 보장처강화론에 따른 진보의 설치와 돈대 축조 등을 검토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조선 정부가 구축하고자 했던 강화도의 관방 시설 모습이 무엇인가 고민할 것이다. 다음으로 18세기 이후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 변모와 해방론( 海 防 論 )에 따라 방어 체계가 정비되는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강화도를 관장하던 군영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가 없었음을 양해 바란다. 2. 임진왜란과 강화도의 보장처론( 保 障 處 論 ) 조선 건국 직후부터 강화도는 교동과 함께 나라의 문호( 門 戶 )라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1409년(태종 9) 1월 경기수군절도사 최용화( 崔 龍 和 )는 상언( 上 言 )에서 강화, 교동은 나라의 문호가 되므로 爲 國 門 戶 해구( 海 寇 )가 기전( 畿 甸 )을 넘본다면 반드시 이곳을 경유할 것이다 3) 라고 하며, 강화도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지적하였다. 세종대 후반 양성지( 梁 誠 之 )는 잘 알려진 비변십책( 備 邊 十 策 ) 에서 경기 지역 중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경성과 개성부, 양주, 광주, 수원, 원평과 함께 강화도를 거론한 바 있다. 4) 양성지가 강화도를 포함시킨 이유는 수로가 험하다는 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 13, 고려사학회, 2002 연갑수, 병인양요 이후 수도권 방비의 강화 서울학연구 8, 1997 이강근, 조선후기 강화 지역 축성역에 대한 연구 -숙종대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51, 2013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 34, 서울대, 1995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도의 진보설치와 관방체계의 확립 인천학연구 9, 2008 정두영, 정조대 도성방어론과 강화유수부 서울학연구 51, 2013 등 2) 보 장 처란 보 루 ( 堡 壘 ).보새( 堡 塞 ) 등과 동일한 용어로( 中 華 學 術 院, 中 文 大 辭 典 2, 1246쪽 堡 障, 與 堡 塞 同 ), 본래의 의미는 군대가 주둔하여 전수( 戰 守 )하기 위한 소규모 성곽을 의미하였다. 3) 태종실록 권17, 9년 1월 29일 (임신 ) 4) 梁 誠 之, 訥 齋 集 권 1, 奏 議, 備 邊 十 策 12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것으로, 강화도가 갖는 지역적 입지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미 건국 초기부터 강화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이 점은 세조대 진관체제( 鎭 管 體 制 )의 정비 과정에서 강화도가 거진( 巨 鎭 ) 중 하나인 강화진( 江 華 鎭 )으로 명명되며, 김포, 양천, 통진, 교동을 주관하게 한데서도 알 수 있다. 5)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후에도 몇 차례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명종 연간인 1555년(명종 10) 5월 사헌부에서는 연해 방어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가운데 교동과 강화는 바다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문호라 하며 월곶과 함께 무관( 武 官 )의 파견을 건의한 바 있고, 6) 선조 초에도 강화를 인후지처( 咽 喉 之 處 ) 라 하며 방비를 강구하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7) 이 시기 강화도가 강조된 것은 왜구 문제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이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변이 발생하여 이를 진압한 뒤 임신약조를 통해 왜인들의 활동을 제한하였으나, 왜구와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에서 왜인의 약탈 사건을 시작으로 사량진왜변이 발생하였으며, 1555년(명종 10)에는 왜구가 전라도 일대에 침입, 절도사와 장흥 부사 등이 사망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이 사로잡히는 을묘왜변이 발생하였다. 국내 해안 일대에서 왜구의 준동은 결국 연해안 방어 강화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건국 초부터 강화도는 나라의 문호 또는 인후 등으로 인식되며 전략적 중요성이 주목되었다. 다만, 이렇다 할 관방 시설의 축조 등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주목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강화도의 군사적 측면보다는 주로 국마( 國 馬 )의 육성을 위한 최적지라는 측면에 더 관심이 두어졌기 때문이었다. 건국 직후부터 강화도에서는 말을 방목하거나, 8) 국농소를 설치하여 9)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며, 강화부사가 감목관( 監 牧 官 )을 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10) 그러나 임진왜란을 경험하면서 강화도는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강화도가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는 임진왜란 초기로, 1592년(선조 25) 9월 분조( 分 朝 )를 이끌고 있는 세자 광해군( 光 海 君 )으로 하여금 혹시 함경도가 일본군에게 함락당할 경우 그 대비책으로 5) 한편 성종대 간행된 經 國 大 典 에서는 세조대의 진관체제 내용에 일부 조정이 이루어졌는데, 강화도의 경우 종3품 병마첨절제사가 관장하는 장단진의 예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경국대전 권4 병전, 외관직 경기). 이런 변화는 예종 연간 강화, 삭녕, 마전 등을 통진에 예속시킨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예종실록 권6, 1년 7월 1일(임오)). 6) 명종실록 권18, 10년 5월 18일 (신해 ) 7) 선조실록 귄15, 14년 4월 4일(정유) 8) 태종실록 권28, 13년 8월 23일 (기사 ) 9) 태종실록 권31, 16년 3월 11일(계묘) 10) 세종실록 권58, 14년 10월 28일(신해), 세종실록 권59, 15년 2월 15일(기해)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13
강화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11) 이 논의에서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가( 大 駕 )의 강화도 이주를 희망한다는 지적 12) 등과 관련해서 본다면 이 점이 충분히 고려된 지적이라 하겠다. 반면 국왕 선조는 강화도의 입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 때마다 조신( 朝 臣 )들은 그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이항복( 李 恒 福 )은 강화도를 제일의 요해처( 要 害 處 ) 라 하였고, 이희득( 李 希 得 )은, 수로가 사방으로 통하여 위급한 환란이 닥치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 고 하여 뛰어난 입지 조건을 내세우며 선조를 설득하였다.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인지 전쟁이 한창 중이던 1593년(선조 26) 1월 강화도에는 다수의 관군과 의병이 주둔하였다. 전라도 절도사 최원( 崔 遠 )이 이끄는 군사 4천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 權 徵 )이 이끄는 군사 4백명, 창의사( 倡 義 使 ) 김천일( 金 千 鎰 )이 이끄는 군사 3천명, 우성전( 禹 性 傳 )이 이끄는 군사 2천명 등이 주둔하였던 것이다. 13) 다만 이런 와중에 급제( 及 第 ) 이홍로( 李 弘 老 )는 1592년 10월에 상소하여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의구심을 공개적으로 제기하였다. 이홍로는 대가( 大 駕 )가 옮길 곳으로 거론되던 강화도에 대해서, 바다에 있는 섬으로 사면이 모두 물이어서 흉적( 凶 賊 )이 섬을 둘러싸고 주둔하여 버티면서 지구전으로 가면 원조가 통하기가 어렵게 되고 안에 있던 식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14) 그러나 이홍로와 같이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 의심을 갖는 인사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에 직면한 조선의 당국자들 사이에서 강화도는 요해처로 인식되며 방비 강화를 위한 대책이 제기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류성룡( 柳 成 龍 )과 김응남( 金 應 南 ) 등이며, 관서로는 비변사가 그 논의를 주도하였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이미 강화도를 주목하고 세자를 강화도로 옮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류성룡은 고려의 역사적 경험을 거론하며, 남방의 군사와 의병들이 이곳에 집결하였고, 또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기 지방의 소식이 이곳으로 통한다 15) 고 하였다. 류성룡은 또한 1597년(선조 30)에 제출한 차자( 箚 子 )에서는 남양( 南 陽 )에 위치한 수영( 水 營 )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수사( 水 使 )를 강화나 덕포 등에 주둔하게 하면 군사의 조발이 용이하며 이들을 틈틈이 조련하면 후일에 편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16) 11) 선조실록 권30, 25년 9월 10일(갑신) 12) 선조실록 권31, 25년 10월 4일(경인) 13) 선조실록 권34, 26년 1월 11일(병인) 14) 선조실록 권31, 25년 10월 30일(병진) 15) 柳 成 龍, 西 厓 集 권 6, 書 狀, 乞 東 宮 移 駐 江 華 以 通 南 方 形 勢 狀 16) 柳 成 龍, 西 厓 集 권5, 箚 子, 陳 措 置 防 守 事 宜 兼 辭 職 箚 子 14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좌의정 김응남 또한 강화는 하늘이 내려준 요새 天 府 之 地 要 害 之 處 라 하며 그 대책의 강구를 요구하였고, 17) 강화를 버리면 경성을 버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18)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화를 지켜야 한다는 표현으로, 일본군과의 전쟁 상황에서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의 결과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성 수비를 위해 강화도 방비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이 강구되었다. 1597년 8월 비변사에서, 강화는 해로의 문호로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서 진보( 鎭 堡 )의 장수를 독려하여 배를 정비하고 해로를 순찰하며, 수전( 水 戰 )을 연습케 하는 한편 선박 후미에 대포와 기계를 설비하도록 하자는 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 이런 과정을 거치며 강화도는 도성 수비를 위한 보장처( 保 障 處 )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1601년(선조 34) 윤승훈( 尹 承 勳 )은 강화는 보장처로서 전조( 前 朝 )에서 몽골병을 피한 곳도 이곳이며, 임진년 난리 때에도 이곳에 힘입어 경기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대가가 서쪽으로 파천했을 때 만약 강화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삼도를 통할 수 있었겠는가 라며 역사적 경험을 들어 보장처로서 강화도의 장점을 거론하였다. 20) 앞서 강화도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던 선조의 경우도 이 시기에 이르면 강화를 국도( 國 都 )의 인후( 咽 喉 )라 하며 방비를 목적으로 강화의 전세를 상납하지 말고 비축하여 비용에 충당하도록 지시하였다. 2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화도는 조선 건국 이래로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국마를 육성하기 위한 목장의 입지로 주로 강조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강화도에 대한 중요성이 지적되면서 도성 수비를 위한 보장처로서 위상이 정립되었다고 하겠다. 3. 보장처강화론( 保 障 處 强 化 論 )과 관방 시설의 구축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후금(후일의 청)으로부터 군사적 압력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였다. 화기의 제작이라든지 성곽의 정비 등이 그 일환으로 추진되는 한편 새로운 방위 전략이 모색되었다. 이른바 수도권 중심의 17) 선조실록 권67, 28년 9월 24일(계사) 18) 선조실록 권82, 29년 11월 13일(을사) 19) 선조실록 권91, 30년 8월 4일(임술) 20) 선조실록 권104, 34년 8월 25일(경인) 21) 선조실록 권167, 36년 10월 23일(을사)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15
방위 체제 구축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오위( 五 衛 )와 진관체제( 鎭 管 體 制 )의 정비를 통해 군사 동원 체제를 구축한 위에 전국에 걸쳐 관방 시설을 정비하였다. 국방정책의 이 같은 기조는 인력과 시설의 전국적인 배치를 통하여 변방과 후방, 중앙과 지방의 차별을 두지 않으려는 방어체계이며, 나아가 조선왕조가 추구하는 중앙집권체계에 대응하는 국방체계였던 것이다. 22) 그러나 이 같은 방위체계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제도 자체가 갖는 모순과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변화되어, 17세기 이후에는 수도권 중심 방위체제로 전환되었다. 23) 다만 이런 가운데 후금과의 접경 지역인 서북 방면의 거점 방어 전략이 함께 구사되었는데, 이 글에서 이 점은 논외로 하겠다. 17세기 전반기 수도권 중심 방위체제는 일단 수도 외곽 지역인 보장처의 강화로 나타났다. 24) 보장처란 동양의 고전적인 병법 가운데 하나인 퇴전( 退 戰 ) 을 위한 대비책이다. 퇴전 이란 아군의 병력이 열세하여 적과 대적할 수 없을 때 후퇴하여 병력을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25) 17세기 전반기 국왕이나 위정자들이 비록 당시의 대외정세와 정권 안정을 위해 전국을 고려한 방위체계를 구상하였을 것이지만, 전란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 등으로 이를 전국에 고루 분산시키기에 여력이 없자 차선책으로 취해진 것이 보장처의 정비였다. 즉 종사의 안녕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었던 것이다. 당시 보장처로 남한산성과 함께 주로 거론된 곳이 강화도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11월 사 복시에서 제출한 계사에서는 강화 도에 대해 급하고 어려울 때 병화를 피할만한 곳 爲 急 難 避 兵 之 所 으로, 이 점은 이미 고려조에서 징험되었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였다. 26) 이런 인식은 인조대로 이어져,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대사간 정엽( 鄭 曄 )이 피난을 권유하면서, 적합처로 강화도를 거론한 바 있다. 정엽은 종묘와 사직의 신주 및 왕대비와 왕비를 먼저 강화로 보내고 국왕은 서서히 사세를 보아 진퇴할 것을 권하였다. 27) 정묘호란 때 이귀( 李 貴 )는 안주( 安 州 )에서 조선군이 후금군에 패하면 국왕은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권유하였다. 28) 실제로 정묘호란 때에 인조가 강화에 상주하기도 하였다. 강화도가 종사 보전을 목적으로 한 보장처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강화도를 광해군 때에 부윤으로 개정하고, 인조대에 22) 김준석, 조선후기 국방의식의 전환과 도성방위책 전농사론 2, 서울시립대, 1996 23) 이근호, 숙종대 중앙군영의 변화와 수도방위체제의 성립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24) 이 시기 보장처 강화론에 대해서는 강성문, 수도 서울 방위에 대한 연구 육사논문집 45, 육군사관학교, 1993( 한민족의 군사적 전통, 봉명, 2000에 수도 서울 방위론 으로 재수록됨) ; 이근호, 앞의 논문, 서울학연구소, 1998 등이 참고 된다. 25) 百 戰 奇 法, 戰 法, 退 戰 26) 광해군일기(태백산본) 권10, 즉위년 11월 9일(임진) 27) 인조실록 권4, 2년 2월 7일 (신묘 ) 28) 인조실록 권15, 5년 1월 17일(을유) 16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유수로 개정한 것은 서울 방위와 종사 보전을 위한 보장처로서 강화도의 입지를 고려한 정책적 배려였던 것이다. 단, 강화도가 보장처로서 기능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1609년(광해군 1) 4월 사간원에서는 밀계( 密 啓 )를 제출하여, 강화도를 보장처로 삼으려는 논의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쳐져 있고 오랑캐가 뱃길을 잘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 이라고 전제한 뒤, 이를 비판하였다. 당시 귀화한 호인( 胡 人 )들이 호남이나 호서 등지에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소유한 배가 200여척에 이르고 해로에 익숙하다는 이유를 들어 강화도를 보장처로 하는 것은 실속이 없을 것이라며, 강화도에만 의지하지 말고 영남이나 호남 등지에서도 선택하여 방비를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29) 이런 반대론에도 불구하고 광해군대 이후로 방위 전략이 수도로 집중되며 강화도의 보장처 강화는 힘을 받아 추진되었다. 강화도의 관방 시설에 대한 대책은 광해군대부터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1614년(광해군 6) 7월 강화부사 이정표( 李 廷 彪 )는 국왕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강화도는 하삼도의 통행 선박과 상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정박한다고 전제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관리를 위해 선박이 정박하는 곳에 목책( 木 柵 )을 세울 것과 병선의 준비를 건의함과 동시에 덕진진( 德 津 鎭 )의 복설과 승천부( 升 天 府, 昇 天 府 )와 고암( 羔 巖 ), 갑곶진( 甲 串 津 ) 등에 진( 鎭 )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30) 이 중 덕진진은 강화도 남부에 위치한 진보로, 논의에 따르면 유근( 柳 根 )이 경기 감사에 재직할 때 설치하였다고 한다. 유근은 1593년(선조 26) 12월 경기 감사에 제수된 뒤 1595년(선조 28) 6월까지 재직하다가 잠시 다른 관직으로 옮긴 후에 1595년(선조 28) 10월에 다시 경기 감사에 제수되어 다음 해 5월 경 까지 재직한 바 있는 인물이다. 31) 논의대로라면 덕진진은 임진왜란 기간 중 설치되었다고 하겠으며, 이는 평소 서울 방위를 강조했던 유근이 마련한 대비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던 듯 이 시기 이정표가 다시 복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승천부는 강화도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고려조에 이미 군영이 설치되었던 곳이었다. 32)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군사적 기능보다는 원( 院 )이 설치되어 33) 오고 가는 선박의 정박처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은 갑곶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9) 광 해 군 일 기 ( 태백 산 본 ) 권 1 5, 1년 4 월 1 0 일 ( 신 유 ) 30) 광해군일기(태백산본) 권80, 6년 7월 11일(신유) 31) 선조실록 권46, 26년 12월 6일(을묘), 선조실록 권64, 28년 6월 14일(을묘), 선조실록 권68, 28년 10월 1일(경자), 선조실록 권75, 29년 5월 28일(갑오) 등 32) 李 穡, 牧 隱 集 목 은 시 고 권 2 9, 承 守 侍 中 招 而 作 蓋 公 設 送 酒 會 於 升 天 府 之 軍 營 也 33)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12, 경기, 강화도호부, 원우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17
고암의 경우는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대개 남쪽에서 염하( 鹽 河 )를 거쳐 조강( 祖 江 )으로 올라가는 코스에 위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정표가 지적한 곳은 이미 이전 시기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거론되던 곳으로, 이곳에 진의 설치를 건의했던 것이다. 이정표는 건의는 비변사에 내려져 논의되었으나 결국 감사가 형세를 보아 설치하자고 하면서 끝내 설치되지는 않았다. 강화도의 관방 시설 정비는 인조대 이후 다시 거론되었다. 1624년(인조 2) 남양의 수영( 水 營 )을 강화로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34) 강화도의 관방 시설 정비에 주력하였다. 특히 1631년(인조 9)에는 강화도의 관방 시설 정비에 대한 논의가 집중되었다. 당시 후금의 홍타이지는 1631년 7월 대릉하성 공략에 나섰는데, 원정 직전 가도에서 명에 투항한 만주인들이 대거 학살되는 일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명에 투항한 만주인 385명이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조선과 후금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35) 조선은 그 대비책 마련이 절실하였고, 이때 강화도에 대한 정비가 논의되었다. 1631년(인조 9) 7월 강화읍성과 갑곶성을 개축하여 만전에 대비토록 지시한 바 있다. 36) 또한 같은 해 8월 3일 강화유수 이시백( 李 時 白 )과 이서( 李 曙 ), 김자점( 金 自 點 ) 등이 국왕과 같이한 자리에서 강화도의 식량과 군기( 軍 器 ) 등을 점검하는 한편 갑곶에 축성하는 문제와 연미정( 燕 尾 亭 )에 보루를 쌓자는 논의가 제기되었으며, 인조의 경우는 강화도의 사방을 둘러 보루( 堡 壘 )를 쌓고 곡식을 비축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인조의 지적은 결국 후일 돈대의 설치로 완성되었다고 보인다. 인조의 의견에 대해 강화유수 이시백은 자신이 강화도를 순심한 결과 대진( 大 鎭 )을 설치할 만한 곳이 7곳, 소진( 小 鎭 )을 설치할 만한 곳이 10곳으로, 이곳은 모두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 相 望 之 地 이라며 진영을 설치하자고 하였다. 37) 이시백이 언급한 17개 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며, 대진과 소진의 구분 기준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후금의 위협에 직면하여 강화도 전체에 보루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이것이 후일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갔다고 하겠다. 보장처 강화 차원에서 이루어진 강화도 관방 시설 정비 중 주목되는 것은 진보( 鎭 堡 )이다. 아래의 <부록-1>에 따르면, 진보의 정비는 주로 효종과 현종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진보의 정비는 북벌 이념의 구현을 위한 현실적 대책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에 대한 청국의 감시가 느슨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34) 인조실록 권5, 2년 3월 16일(경오). 물론 약 5년 뒤에는 교동으로 옮겨졌다. 35) 한 명 기, 정 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127~131쪽 36) 승 정 원 일 기 3 3 책, 인 조 9 년 7 월 7 일 (기 묘 ) 37) 인조실록 권25, 9년 8월 3일(갑진) 18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일이었다. 효종 즉위 초까지 청국은 섭정왕 도르곤 多 爾 袞 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 대해서는 강경론자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군사적 움직임을 감시하고 친청( 親 淸 ) 세력의 부식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650년(효종 1) 도르곤이 돌연 사망하고 순치제( 順 治 帝 )가 친정( 親 政 )을 하게 되었다. 순치제는 조선의 세폐( 歲 幣 )를 감해주는 등 대조선 정책에서 온건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같은 청국 정세의 변화가 효종대 이후 진보 정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38) 효종대 이후 진보 정비의 방향은 다른 지역의 진을 강화도로 이설하거나 신설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월곶진 설치 등을 시작으로 1706년(숙종 32) 선두보( 船 頭 堡, 혹은 船 頭 浦 堡 )를 설치함으로써 모두 13진보( 鎭 堡 ) 체제( 體 制 ) 39) 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현종 연간에 이르면, 강화도에 설치된 몇몇의 진보들이 통진과 교동 등으로 이설되는 모습을 보인다. 철곶진을 비롯해 1665년(현종 6) 정포진( 井 浦 鎭 )이 교동으로 40) 이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모두 1669년(현종 10)에 다시 강화도 이설되기는 하였다. 철곶진, 정포진 등의 이설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강화 유수 서필원( 徐 必 遠 )이다. 그는 1665년(현종 6) 강화도의 군사 업무 중 변통해야 할 13개 조항을 진달한 바 있는데, 이때 이들 진보의 이설을 건의하였고 그것이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41) 서필원의 38) 노영구, 앞의 논문, 2012, 367~368쪽 39) 강화도의 진보 체제는 12진보 체제 로 명명되었다. 예를 들어 2000년에 간행된 강화군과 육사박물관 공동의 조사보고서인 강화도의 국방유적,에서는 12진보 54돈대 8포대라 하여 12진보체제로 규정하였고, 인천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동북아의 중심지 인천의 역사와 문화, 인천광역시, 2003에서도 역시 12진보 53돈대라 하여 12진보체제로 규정하였다. 12진보라 한 이유는 아래의 표에서 보이는 文 殊 鎭 을 생략하였기 때문인데, 물론 문수진이 오늘날의 지역 개념으로 김포에 위치하였기에 문수진을 김포의 관방 시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선후기 강화도의 진보를 정리한 여지도서 나 강화부지 등에서는 문수진을 포함, 13진보체제로 설명하고 있다. 단, 私 撰 대동지지 에서는 역시 문수진을 제외하고 있다. 관찬 사료인 영조실록 에서도 역시 13진보라 불리고 있다( 영조실록 권124, 51년 1월 23일(신미)). 13진보라 명명한 것은 이 시기 강화도 관방 체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13진보체제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지도서 (1757~1765) 강화부지 (1783년) 대동지지 (1861~1866) 月 串 鎭 濟 物 鎭 龍 津 鎭 廣 城 堡 德 津 鎭 草 芝 鎭 舡 頭 堡 長 串 堡 井 浦 堡 寅 火 堡 鐵 串 堡 昇 天 堡 文 殊 鎭 40) 현종실록 권11, 7년 2월 7일 ( 무오 ) 41) 서필원이 제시한 13개 조항에 대해서는 현종개수실록 권13, 6년 9월 28일(신해)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19
주장은 강화도의 군사력을 육군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42) 강화도를 육군 중심으로 편제하려는 노력은 이후 1678년(숙종 4) 진무영의 설치로 이어졌다. 43) 진보의 설치와 함께 주목되는 것이 숙종 초의 돈대( 墩 臺 ) 설치이다. 돈대는 적을 경계하고 방비하기 위해 행성( 行 城 )이나 해변 등에 설치한 소규모 방어시설이다. 돈대는 성곽에 부수적으로 설치된 포루와 치성 등에 비해서 체성( 體 城 )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체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축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돈대는 돈대 사이에 거리가 멀지 않아 유사시 인근 돈대와의 연락이 용이하며 인접 돈대와 교차 사격이 가능하도록 포좌를 배치하여 접근하는 적선을 제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44) 숙종 초 돈대의 설치는 당시의 불안한 대외 정세에 기인한 바 크다. 입관( 入 關 ) 후 청은 국내 저항 세력의 평정에 주력하였다. 그 하나의 예가 삼번( 三 藩 )의 난을 진압한 것으로, 삼번이란 평남왕 상가의(광동), 정남왕 경계무(복건), 평서왕 오삼계를 총칭하는 것으로, 1673년 삼번을 혁파하자 이에 오삼계 주도하에 청에 대항하였다. 오삼계의 난은 1679년 오삼계의 손자인 오세진이 자살하면서 종식되었다. 이밖에도 하문의 정성공( 鄭 成 功 ) 세력은 대만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어 저항했으나 결국 1683년에 역시 진압되었다. 45) 저항 세력의 진압에 골몰하던 청국은 조선에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대해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며 형세를 관망하자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면서 자강( 自 强 ) 대책으로 북한산의 축성과 강화도 관방 시설의 축조가 논의되었다. 46) 대외적인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돈대가 축조된 것이라 하겠다. 돈대가 우리나라 성제에 영향을 미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이다. 중국 명나라 장수 척계광( 戚 繼 光 )의 기효신서( 紀 效 新 書 ) 에 서 는 돈 후 ( 墩 堠 ) 라 기 록 되 었 는 데, 적에 대한 사전 경보를 목적으로 해변 10리마다 설치하도록 한 독립된 경보 시설의 하나이었다. 47) 조선에서 돈대는 1638년(인조 16) 남한산성의 옹성을 증축할 때 적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숙종 초 강화도 관방 시설을 강화하면서 그대로 적용되어 약 48개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당초 책임을 주관한 김석주( 金 錫 冑 )의 서계에 따르면 49개소의 돈대를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이 중 불은평( 佛 恩 坪 )이 누락되어 모두 48개소의 42) 송기중, 앞의 논문, 2010, 28~29쪽 43) 진무영 설치 과정에 대해서는, 송양섭, 앞의 논문, 2002 참조. 44) 이 시기 돈대의 설치에 대해서는 배성수, 앞의 논문, 2003을 참조함. 45) 이시바시 다카오 자음 홍성구 옮김, 대청제국 1616~1799, 휴머니스트, 2009 참조 46) 숙종실록 권1, 즉위년 11월 13일(임신) 47) 노영구, 조선후기 성제 변화와 화성의 성곽사적 의미 진단학보 88, 1999, 295쪽 20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돈대가 축조되었다. 당시 조성된 돈대의 반 이상이 넘은 27개소의 돈대가 설치된 방향은 강화도의 동북 지역인 염하( 鹽 河 )와 조강( 祖 江 ) 연안으로, 돈대 축조의 목적이 육지로부터 강을 건너오는 외적 방어에 주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8) 축조된 돈대에는 불랑기 등을 비롯한 대소 화포가 구비되었다. 49) 강화도에 돈대가 축조된 이후에는 도성과 남한산성 등에도 본격적으로 돈대를 축조하자는 제안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50) 17세기 이래 진보의 신설 혹은 이설과 돈대의 축조 등으로 강화도의 해양 관방 시설 정비가 일단락되면서 이를 보다 강화하기 위한 논의들이 제기되었다. 그 하나가 연락지세( 聯 絡 之 勢 )를 갖추자는 것으로, 내외의 상호 연결망을 확충하여 방비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1681년(숙종 7) 강화 유수 이선( 李 選 )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선은 먼저 강화도 연변에 돈대를 열치( 列 置 )하고, 부중( 府 中 )에는 내성을 견축( 堅 築 )하며, 내성 옆으로는 한 두 성을 방치( 旁 置 )하는 구조를 지적하고, 이를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과 어영청, 총융청이 각각 분수( 分 守 )하여 기각지세( 掎 角 之 勢 )를 이루자고 하였다. 또한 토성인 고려산성을 수리한 뒤 대가람( 大 伽 藍 )을 두어 상시로 승려를 모집하고 군사를 늘려 수어하자고 하였고, 섬의 외곽인 북쪽의 승천보와 남쪽의 덕진진, 그리고 서쪽의 인화석진을 연결하는 외성의 구축을 주장하였다. 이선은 또한 강외관방( 江 外 關 防 )이라 하여 백마산성을 풍덕부로 옮기고 덕포진은 김포와 부평에서 지키며, 문수산에 성을 쌓아 입보하면서 요망( 瞭 望 )하고, 갑곶의 수유현에도 돈대를 설치하자고 하였다. 51) 이선의 구상은 당시 강화도 관방 시설 정비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지적으로 판단되며, 중앙 군영의 분수까지 거론한 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4.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 변화와 방어 체계의 정비 18세기 이후 조선의 방위 전략은 도성 중심의 방위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 도성 중심의 방위 전략은 기본적으로 당시 서울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기인한 바 크며, 이 과정에서 이른바 여민공수론( 與 民 共 守 論 ) 론과 같은 의식의 대두 역시 중요한 역할을 48) 배성수, 앞의 논문, 2003, 159~160쪽 49) 승정원일기 305책, 숙종 10년 9월 3일(병인), 승정원일기 444책, 숙종 34년 10월 8일(경술), 승정원일기 960책, 영조 19년 7월 14일(갑오) 등 50) 예를 들어 승정원일기 416책, 숙종 30년 2월 15일(을유)가 참조 51) 숙종실록 권11, 7년 5월 21일(계유)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21
하였다. 여민공수론 이란 더 이상 보장처를 강화하여 퇴전( 退 戰 )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도성에서 지키겠다는 의식을 말한다. 52) 아울러 대외적으로도 청나라의 정세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숙종 초 오삼계의 난과 같은 청국 정세의 불안정성과 양국 접경 지역에서의 소요 등으로 조선에서는 청조( 淸 朝 )의 영고탑회귀설( 寧 古 塔 回 歸 說 )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청나라 황제가 북방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이를 우리 측에서는 청조의 고향인 영고탑으로 회귀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53) 영고탑회귀설은 호란 이후 대두한 뒤에 18세기 중반까지도 계속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비한 자강( 自 强 ) 대책의 모색이 필요하였다. 방위 전략이 변화하면서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 역시 변모하였다. 즉 이전 시기 도성을 버리고 들어가는 보장처의 개념이기보다는 도성 수비를 위한 전략적 방어진지 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전략적 방어진지 란 유사 이래 요새( 要 塞 )가 피난처 거점 전략적 방어진지로 변화한다는 것을 상정한 개념으로, 전략적 방어진지 는 서로 지원할 수 있고 넓은 전선에 걸쳐 적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개별적인 요충지로 구성되며, 피난처나 거점과 비교해서 건설과 유지 및 주둔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요새 형태를 말한다. 이 같은 전략적 방어진지 가 구축되었다는 것은 건설 주체가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발전되어 있음 을 뜻한다. 54) 1711년(숙종 37) 도성 수비를 위한 전략적 방어진지 로 북한산성이 축성된 것은 그 하나의 예이다. 55) 이 시기 강화도 역시 보장처의 위상에서 해양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방어진지 로 위상이 변화되었다. 영조대 조현명( 趙 顯 命 )이 제시한 이문론( 里 門 論 ) 은 이런 강화도의 위상 변화와 관련된 논의라 하겠다. 도성사수론( 都 城 死 守 論 )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 조현명은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고, 자녀와 재산이 소재하는 곳이므로 당연히 지켜야 한다면서 당위성을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고어( 古 語 )를 인용, 도적은 먼저 이문( 里 門 )에서 막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문에서 막지 못하면 결국 대문과 중문( 中 門 ), 내창( 內 窓 )도 또한 지킬 수 없다고 하면서 도성의 이문이 되는 강화도에 대한 방비를 먼저 하자고 하였다. 조현명의 주장에 대해 영조는 이문을 먼저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내창의 단속 또한 굳건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도성 중심의 방위에 대한 기존 입장을 강조하였다. 56) 단, 영조도 자신은 본래 도성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으나 강화도에 52) 도성 중심의 방위전략과 여민공수론에 대해서는 이근호,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 군사 37, 1998 참조 53) 영고탑회귀설에 대해서는 배우성,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64~83쪽 참조 54) 이 점은 존 키건 저,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 까치, 1996, 204~223쪽에 의거하였다. 55) 북한산성이 전략적 방어진지로 구축되었음에 대해서는 이근호, 아시아 성곽유산과 북한산성의 비교연구, 아시아 주요산성의 세계유산 등재과정과 고양 북한산성의 추진전략제안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14 참조 56) 승정원일기 965책, 영조 19년 11월 기축 (10일 ) 22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축성을 하게 한 것은 실로 두 곳에 마음이 있기 57)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도성 수비라는 대전제 하에 도성 수축과 강화도 외성 축성은 서로가 상승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내재된 것이었다. 58)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 변화와 함께 18세기 이후 읍성( 邑 城 ) 중심의 성곽 전략이 본격화되면서, 59) 강 화 도 의 내 성 과 외 성이 축 조 되었 다. 조 선 전 기 신 증 동 국 여 지 승 람 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고려 고종 때 토축( 土 築 )된 내 외성이 있으며, 외성은 둘레가 37,780척이고, 내성이 3,874척이었다. 60) 그러나 이들 성곽은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이를 다시 축조하려는 노력이 숙종대부터 진행되어 숙종 초 강화유수 허질( 許 秩 )에 의해서 일부 축조가 이루어진 뒤 숙종대 중반에 이르러 본격화 되었다. 1681년(숙종 7) 강화유수 이선의 상소에서 부중( 府 中 )에 내성을 견고하게 쌓을 것을 주장한 이후 관련 논의가 몇 차례 더 제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1684년(숙종 10) 9월 강화유수 윤계( 尹 堦 )가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읍성보다는 창성( 倉 城 )을 먼저 축조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685년(숙종 11) 갑곶창성이 축조되기도 하였다. 61) 내성 축조에 대한 주장은 이후 숙종에 의해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즉 1690년(숙종 16) 강화 외성의 축성을 권유하는 조신들의 의견에 대하여 숙종은 고려조의 역사적 경험을 거론하며, 내성이 있어 고려 때 강화에 들어가 적병을 방어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병자호란 때에도 내성이 있었다면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성 축조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시사한 바 있다. 62) 그러나 내성 축조는 효용성이나 물력의 소비가 크다는 이유 등 여론에 밀려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후 강화유수를 지낸 이인엽( 李 寅 燁 )과 박권( 朴 權 ) 등에 의해서 줄기차게 제기되었고, 1708년(숙종 34) 12월에는 내성 축조 문제를 두고 국왕과 조신들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기도 하였다. 즉 최석정( 崔 錫 鼎 )을 비롯해 박권, 이건명( 李 健 命 ), 이인엽 등이 입시한 자리에서 박권은 자신이 직접 그린 강화도의 도형( 圖 形 )을 제시하며 내성 축조를 주장하였다. 최석정이나 이인엽 등은 박권의 주장에 동의하였으나, 이건명의 경우, 내성의 대대적인 축조를 반대하면서 대신 성기( 城 基 )를 수선하는 정도로 그칠 것을 주장하였다. 이건명은 대가가 만약 주필한다면 그곳은 57) 승정원일기 962책, 영조 19년 8월 기미 (9일 ) 58) 이근호, 영조대 도성수비논란의 검토, 향토서울 83, 2013 참조 59) 노영구, 앞의 논문, 1999 참조 6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2, 강화도호부 61) 승정원일기 305책, 숙종 10년 9월 3일 (병인 ) ; 승정원일기 307책, 숙종 11년 2월 3일 (계사 ) 62) 숙종실록 권22, 16년 9월 12일(기해)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23
강화유수가 맡아 수비하고, 장신( 將 臣 )들은 밖에서 방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숙종은 도성은 지나치게 넓어서 지키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시작이 반이라며 강화의 남산을 포함해 축조하되 강화도 군병으로는 담당하기 어려우니 승군을 동원해서 삼군문이 함께 축조도록 지시하였다. 63) 이로써 내성 축조가 진행되기 시작하여 이후 강화유수를 지낸 박권과 민진원 등이 이어받아 1710년(숙종 37) 5월 이전에 축성이 일단락된 듯하다. 64) 다음, 강화 외성에 대한 관심은 이미 병자호란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즉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인조 15) 12월 호조판서 심열( 沈 說 )은 이미 외성의 터가 존재하므로 이를 따라 수선하면 다른 날에 근본지지( 根 本 之 地 ) 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65) 이후 외성에 대한 관심은 숙종대에 다시 제기되었는데, 1690년(숙종 16)에는 호조참판 이의징( 李 義 徵 )과 좌의정 목내선( 睦 來 善 )의 주장에 따라 삼군문이 주도하여 외성을 축조하였다. 66) 이때 석축으로 총 길이 43리 200보에 해당되는 거리에 외성이 축조되었다. 67) 그러나 이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았던 듯 내성 축조가 진행되던 시기인 1710년(숙종 36) 6월 영의정 이여( 李 畬 )는 외성을 천연의 요새 天 塹 에 비견하며 천참에 먼저 힘을 다해야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여 외성을 확대해서 축성하자고 하였으나 당시는 내성 축조 중심으로 논의되는 상황이었기에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68) 이후 강화 외성은 영조대에 전축( 磚 築 ) 과정을 거치게 된다. 1743년(영조 19) 자강( 自 强 ) 대책을 강구하라는 영조의 지시에 대해 강화유수 김시혁이 외성의 전축을 건의하였다. 69) 김시혁은 외성을 지키지 못하면 내성 또한 지킬 수 없다며 외성 축조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 같은 김시혁의 주장에 대해 약 10여 일 지난 뒤 집의 채응복이나 70) 구성임 등의 반대 의견이 개진되기도 하였다. 71) 반면 영의정 김재로를 위시하여 좌의정 송인명이나 공조판서 신사철, 병조판서 서종옥 등이 김시혁의 의견을 지지하면서 힘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도성 수비 대신 강화 외성을 축성하자고 주장한 이유는 도성이 63) 승정원일기 445책, 숙종 34년 12월 3일 ( 을사 ) 64) 이는 숙종 37년 5월 내성 축조에 대한 공로를 시상하는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숙종실록 권50, 37년 5월 15일(계묘) 참조). 65) 승정원일기 62책, 인조 15년 12월 22일 (병진 ) 66) 숙종실록 권22, 16년 9월 27일 (갑인 ) 67) 강화군,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34~35쪽 68) 승 정 원 일 기 4 5 5 책, 숙 종 3 6 년 6 월 2 9 일 ( 계 해 ) 69) 영조실록 권58, 영조 19년 7월 9일(기축) 70) 영조실록 권58, 영조 19년 8월 3일(계축) 71) 영조실록 권58, 영조 19년 8월 7일(정사). 다만, 구성임이 주장한 16개 조항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아 알 수는 없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도성 밖의 백성을 도성 안으로 옮기자는 내용을 비롯해 간헐적으로 한 두 조항이 거론될 뿐이다. 24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수비하기에 지나치게 넓으며, 소홀한 곳이 많다는 데 있었다. 송인명의 경우 도성은 형편상 수비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 김재로는 도성의 동서변이 낮고 허약하여 지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강화도는 천험( 天 險 )의 땅이면서 차경차수( 且 耕 且 守 )가 가능하다는 점, 강화도는 남한산성과 함께 좁아서 지키기가 쉽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제시되었다. 72) 이렇게 도성사수론과 강화 외성 축성론이 논란이 지속되다가 결국 강화 외성의 축성과 도성 수축을 병행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1743년(영조 19) 도성은 삼군문에서 분수하여 천천히 수축하고, 강화도는 유수의 책임 아래 1년에 10리를 가축( 加 築 )하며, 북한산성도 총융청에서 담당해서 가축하도록 결정되었고, 73) 1745년(영조 21) 강화도 외성이 완성되었다. 강화도 내 외성 축조의 효용성은 18세기 중반 체계적인 군사 전략과 전술을 제시한 송규빈( 宋 奎 斌 )의 아래와 같은 지적을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강화도의 본성이 긴요한 이유는 비단 갑곶나루의 관문이 될 뿐 아니라 한 번 장대에 올라가면 수백 리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종적이 모두 눈앞에 들어오기 때문에 미리 적침에 대비할 수 있으며 또 팔도의 근왕병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어 도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74) 송규빈은 강화 내성으로 볼 수 있는 본성의 유용성에 대해 갑곶나루의 관문으로서 기능과 함께 적의 동태 파악이 용이하다는 점과 팔도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내외성의 축조를 통해서 군민을 수용하여 입보할 수 있다는 장점 75) 과 함께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을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5. 해방( 海 防 ) 강화 논의와 관방 시설의 보강 18세기 이후 강화도 관방 시설의 정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해방론( 海 防 論 )이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급증하는 중국인들의 황당선( 荒 唐 船 )의 출현과 19세기에 이어진 서양의 이양선( 異 樣 船 ) 출현 등은 해방 강화의 요구로 이어졌다. 조선 연해안, 특히 서해안 72) 이근호, 앞의 논문, 2013 참조 73) 승정원일기 962책, 영조 19년 8월 26일 (병자 ) 74) 宋 奎 斌, 風 泉 遺 響, 江 都 75) 숙종실록 권48, 36년 6월 29일(계해) ; 숙종실록 권49, 36년 8월 29일(병술)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25
일대에 황당선의 출몰이 급증한 것은 청국의 해금정책( 海 禁 政 策 )이 이완된 것과 관련이 있다. 76) 1700년(숙종 26) 7월 27일 황해도에서 올라온 장계에서는 황당선의 출현이 전에 비하여 배나 많다는 지적이 77) 제기될 정도로 이 시기 이후 황당선의 출현은 조선 조정의 주요한 현안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세기 전반기에는 이양선이 수시로 조선 연해안을 왕래하였다. 순조와 헌종 연간에 충청도의 마량진( 馬 梁 鎭 )과 고대도( 古 代 島 )을 비롯해 전라도의 흥양과 제주, 고군산 등지에 이양선이 정박하는 예가 확인되며, 78) 1847년 이후에는 경상과 전라, 황해, 강원, 함경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였다. 79) 심지어 도성의 목전인 경기 덕적진 굴업도나 교동, 강화의 월곶진 등에 정박하기도 하였다. 80) 주로 영국과 프랑스 상선들이었으며, 1846년과 1847년에는 프랑스 군함이 연해안에 출몰하였다. 1860년 제2차 중 영 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여 북경이 함락된 사실은 조선 지식인 사이에서 충격으로 받아졌으며, 급기야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丙 寅 洋 擾 )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辛 未 洋 擾 ) 등의 사건은 해양 방어에 대한 필요성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에서 해방에 대한 필요성은 일찍부터 제기되었으나, 특히 숙종조 이후 급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이미 숙종 초부터 해방을 위한 대책 도모가 필요함이 지적되었고, 1683년(숙조 9) 병조판서 남구만( 南 九 萬 )은 염려스러운 해방의 실태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81) 해방론이 확산되면서 강화도의 방어 시설 및 체계에 대한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수군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송규빈의 풍천유향 에서는 돈대와 연미정 이남의 축성 등으로는 적을 막아낼 수 없다고 하며, 천연의 요새지가 점점 변하여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해상에 방비가 하나도 없어서 싸우고자 하여도 대비할 것이 없는 것 이 서글프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강화도에서 전투할 수 있는 것은 수군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수군을 다시 설치하고, 진보에서는 수군 군관들이 각기 전선( 戰 船 )을 마련해서 이에 대비하자고 하였다. 82) 수군 강화 논의는 현실화되어, 정조대 통어영( 統 禦 營 )이 강화부로 이설되었다. 통어영은 1631년(인조 11) 교동의 경기 수영이 승격된 것으로, 경기와 충청, 황해의 76) 청국의 해금 정책과 조선에 황당선 출현 문제에 대해서는 민덕기, 동아시아 해금정책의 변화와 해양 경계에서의 분쟁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 참조 77) 비변 사 등 록 숙 종 2 6 년 7 월 2 7 일 78) 순조실록 권19, 16년 7월 19일(병인) ; 순조실록 권32, 32년 7월 21일(을축) ; 헌종실록 권12, 11년 6월 29일(기미) ; 헌종실록 권14, 13년 8월 11일(정사) 79) 헌종실록 권15, 14년 12월 29일(기사), 是 歲 夏 秋 以 來 異 樣 船 出 沒 隱 現 於 慶 尙 全 羅 黃 海 江 原 咸 鏡 五 道 大 洋 中 或 漫 瀾 無 以 蹤 跡 之 或 下 陸 汲 水 或 叉 鯨 爲 糧 殆 無 以 計 其 數 也 80) 고종실록 권1, 1년 8월 9일(정축) ; 고종실록 권3, 3년 7월 12일(무진) : 고종실록 권3, 3년 7월 12일(무진) 81) 숙종실록 권2, 1년 1월 18일(정축), 숙종실록 권14, 9년 9월 26일(갑오) 82) 송 규 빈, 풍 천 유 향 강 도 26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수군을 관장하였다. 효종과 현종대에 이루어진 진보의 이설 등은 통어영과 함께 강화도의 수군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 등으로 인해 반발에 부딪쳐 결국 진무영이 설치되면서 점차 육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가 해방론의 영향으로 정조대에 교동의 통어영을 강화부로 이설하였던 것이다. 83) 통어영의 강화부 이설 후 강화 유수가 경기 수사와 삼도 통어사를 겸하면서 수군과 육군을 통령하게 하고 교동 현감을 부사로 승격시켜 방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또한 안흥진를 수사의 행영( 行 營 )으로 삼도록 하였다. 84) 그러나 통어영은 10여년 뒤에 다시 교동으로 이설되었고, 이후 강화도는 고종대까지 진무영 중심의 육군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육군 중심의 운영은 중국이 해군에 막대한 투자를 했음에도 서양 함대에 패배한 것을 목격함과 동시에 지형상 서양의 대형 군함이 상륙할 만한 곳이 마땅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병인양요 직후 육군의 진무영을 확대하고 그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진무영을 종래 종2품에서 정2품으로 승격시키고 병력 수를 증강시켰다. 또한 진무영을 지원할 수 있는 주변 지역의 군비도 확충하여 영종도와 교동을 각기 진무영의 좌우 해방장으로 삼아 통제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 대부도와 인천의 방비가 강화된 것 역시 이 일환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강화도 방위 체계의 정비는 이후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고종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기연해방영( 畿 沿 海 防 營 )을 창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85) 이런 가운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친 뒤에는 강화도 연안에 포대( 砲 臺 )가 설치되었다. 1874년(고종 11) 진무사에 제수된 신헌( 申 櫶 )의 건의에 따라 용진진 이하 3곳의 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때 포대가 설치된 곳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 용진진까지 포대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6) 같은 해 11월에는 영의정 이유원( 李 裕 元 )의 요청에 따라 통진의 덕포진 인근 안행동( 雁 行 洞 )에 포대 축조가 결정되었다. 87) 1878년(고종 15) 10월에는 제물진에 포대를 축조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88) 포대는 성에 부수되는 포루와는 달리 연해안 방위를 위해 설치된 장치였다. 이 시기 포대 설치 지역은 대개 염하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특히 손돌목 일대에 집중된 것으로 추정된다. 83) 이상 통어영과 관련된 논의는 이민웅, 앞의 논문, 1995 ; 송기중, 앞의 논문, 2010 ; 정두영, 앞의 논문, 2013을 참고함. 84) 정조실록 권7, 3년 3월 8일(임진) 85) 고종 초기 강화도의 방위 체계 정비에 대해서는 연갑수, 앞의 논문, 1997 참조 86) 박광성, 앞의 논문, 1976, 14쪽 87) 일성록 고종 11년 11월 20일 88) 승정원일기 2855책, 고종 15년 10월 5일(신사). 강화군과 육군박물관 공동 조사 보고서인 강화도의 국방유적 에서는 모두 8개의 포대를 제시하였으나, 현재 기록으로써 확인되는 것은 위에서 제시한 몇 곳의 포대뿐이다.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27
6.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강화도 관방 시설의 정비 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선 건국 이래로 강화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단, 보장처로 그 위상이 확립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파악된다. 17세기 이후 후금-청과의 대외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조선의 방위 전략이 수도권 중심으로 변화하였고, 그 일환에서 제기된 보장처강화론이 힘을 얻게 되면서 진보의 이설과 신설, 돈대의 설치 등 강화도 관방 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강화도 관방 시설에 대한 정비가 일단락되던 17세기 후반 경에는 외곽의 진보나 돈대 뿐 아니고, 내성과 외성, 그리고 통진의 문수산성까지 아우르는 방위 체제에 대한 구상이 제기되었으며, 이 구상은 18세기 강화도의 전략적 방어진지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군민을 수용하여 입보( 入 保 )하는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18세기 이후 황당선, 이양선의 출현, 특히 서양세력의 진출에 따라 해방 강화 논의가 대두하는 가운데, 통어영의 이설이 있었는가 하면, 염하 일대에 포대의 설치를 통해 관방 시설을 보강하려는 노력이 추진되었다. 강화의 해방 관방 유적은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과 청, 그리고 서양 세력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역사 문화적 가치가 탁월한 문화유산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내성과 외성, 그리고 진보와 돈대, 포대 등으로 이어지는 관방 체계의 구성은 전통적인 성곽의 운영을 집대성한 것이며 장기간에 걸친 성곽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특히 섬 이라는 지리적 입지 조건은 여타의 성곽 유산과 차별적인 조건임에 분명하다. 28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참고문헌> 태 종 실 록, 세 종 실 록, 명 종 실 록, 선 조 실 록, 광 해 군 일 기 ( 태 백 산 본 ), 인 조 실 록, 현 종 실 록, 현 종 개 수 실 록, 숙종실록, 영조실록, 순조실록, 헌종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경국대전, 신보수교집록,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여지도서, 강화부지, 牧 隱 集 ( 李 穡 ), 訥 齋 集 ( 梁 誠 之 ), 西 厓 集 ( 柳 成 龍 ), 風 泉 遺 響 ( 宋 奎 斌 ), 대동지지 (김정호), 百 戰 奇 法 강성문, 수도 서울 방위에 대한 연구 육사논문집 45, 육군사관학교, 1993( 韓 民 族 의 軍 事 的 傳 統, 봉명, 2000 재수록) 강화군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김준석, 조선후기 국방의식의 전환과 도성방위책 전농사론 2, 서울시립대, 1996 노영구, 북벌론과 군사력 강화 한국군사사7-조선후기Ⅰ, 경인문화사, 2012 노영구, 조선후기 성제 변화와 화성의 성곽사적 의미 진단학보 88, 1999 민덕기, 동 아 시 아 해 금 정 책 의 변 화 와 해 양 경 계 에 서 의 분 쟁 한 일 관 계 사 연 구 4 2, 2 0 1 2 박광성, 양요 후의 강화도 방비책에 대하여 기전문화연구 7, 1976 배성수, 숙종 초 강화도 돈대의 축조와 그 의의 조선시대사학보 27, 2003 배우성,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재편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 13, 고려사학회, 2002 연갑수, 병인양요 이후 수도권 방비의 강화 서울학연구 8, 1997 이근호,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 군사 37, 1998 이근호, 숙종대 중앙군영의 변화와 수도방위체제의 성립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이근호, 아시아 성곽유산과 북한산성의 비교연구 아시아 주요산성의 세계유산 등재과정과 고양 북한산성의 추진전략제안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14 이 근 호, 영 조 대 도 성 수 비 논 란 의 검 토 향 토 서 울 8 3, 2 0 1 3 이시바시 다카오 자음 홍성구 옮김, 대청제국 1616~1799, 휴머니스트, 2009 인천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동북아의 중심지 인천의 역사와 문화, 인천광역시, 2003 존 키건 저,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 까치, 1996 한명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中 華 學 術 院, 中 文 大 辭 典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29
<부록-1> 강화도 진보 개설 현황 진보명 이설 및 설치 내용 비고 월곶진( 月 串 鎭 ) 제물진( 濟 物 鎭 ) 교동 강화 인천 강화 1629년(인조 7) 혁파 89) 1655년(효종 6) 복설 90) 1653년(효종 4) 혁파 91) 1655년(효종 6) 강화 복설 92) 1661년(현종 2) 갑곶나루 이전 93) 철곶진( 鐵 串 鎭 ) 양천 강화 풍덕 강화 1649년(효종 즉위년) 이전 강화 이설 94) 1666년(현종 7) 풍덕 이설 95) 1669년(현종 10) 강화 복설 96) 1712년(숙종 38) 주문도( 注 文 島 ) 이설 97) 1728년(영조 4) 이전 강화 복설 98) 덕진진( 德 津 鎭 ) 강화 통진 강화 임진왜란 당시 강화 설치 이후 폐지와 설치 반복 99) 1666년(현종 7) 통진 이설 100) 1669년(현종 10) 강화 복설 101) 정포진( 井 浦 鎭 ) 강화 교동 강화 1666년(현종 7) 교동 이설 102) 1669년(현종 10) 강화 복설 103) 1717년(숙종 43) 장봉도 이설 104) 1728년(영조 4) 4월 이전 강화 복설 105) 용진진( 龍 津 鎭 ) 신설 1667년(현종 8) 7월 이전 설치 106) 초지진( 草 芝 鎭 ) 안산 강화 1653년(효종 4) 혁파 107) 1655년(효종 6) 강화 복설 108) 장곶진( 長 串 鎭 ) 신설 1676년(숙종 2) 109) 인화석진( 寅 火 石 鎭 ) 신설 1656년(효종 7) 110) 승천포진( 昇 天 浦 鎭 ) 신설 1656년(효종 7) 111) 광성보( 廣 城 堡 ) 신설 1658년(효종 9) 112) 선두보( 舡 頭 堡 ) 문수진( 文 殊 鎭 ) 신설 신설 1706년(숙종 32) 설치 113) 1708년(숙종 34) 화도보( 花 島 堡 ) 합설 114) 1694년(숙종 20) 문수산성 축성 115) 1745년(영조 21) 경 진( 鎭 ) 설치 116) 30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1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89) 승정원일기 24책, 인조 7년 2월 24일(경술), 인조실록 권20, 7년 2월 24일(경술). 진보의 설치 등과 관련해서 현재 그 시기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점이 있어 번거롭지만 아래에 전거 자료를 제시하였다. 이 부분은 차후 보다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90) 승정원일기 137책, 효종 6년 10월 27일(정축), 洪 處 大 啓 曰 月 串 濟 物 草 芝 三 鎭 前 日 革 罷 之 時 兵 符 已 爲 燒 火 矣 今 則 三 鎭 旣 己 復 設 兵 符 更 爲 造 作 之 意 敢 啓 傳 曰 知 道 91) 승정원일기 126책, 효종 4년 3월 3일(기사), 備 邊 司 啓 曰 草 芝 萬 戶 移 設 事 頃 日 榻 前 定 奪 而 臣 等 退 考 文 書 則 京 畿 濟 物 草 芝 兩 處 萬 戶 曾 已 革 罷 以 其 所 屬 水 軍 移 給 於 新 設 鐵 串 矣 永 宗 萬 戶 僻 在 於 南 陽 小 浦 之 邊 距 海 頗 遠 最 爲 不 緊 以 此 移 設 勿 改 前 號 仍 兼 監 牧 更 爲 觀 勢 陞 其 職 品 而 萬 戶 之 可 堪 新 設 與 否 令 該 曹 審 察 其 爲 人 或 遞 或 仍 宜 當 以 此 分 付 何 如 傳 曰 允 92) 승정원일기 135책, 효종 6년 6월 25일(무인), 洪 命 夏 曰 三 南 新 造 津 船 今 將 上 來 而 聞 仁 川 府 使 尹 言 則 濟 物 近 處 上 下 十 里 之 地 本 無 人 家 決 難 募 入 以 居 濟 物 雖 廢 舊 城 尙 在 或 復 設 萬 戶 或 置 別 將 使 之 句 管 舟 楫 而 本 堡 水 軍 移 屬 鐵 串 者 數 雖 不 多 若 難 還 屬 本 堡 除 守 本 州 束 伍 典 守 設 倉 堡 內 以 爲 緩 急 之 備 云 (중략) 上 曰 言 于 該 曹 依 爲 之 93) 현종개수실록 권5, 2년 4월 1일(경진) 94) 승정원일기 108책, 효종 즉위년 10월 6일(신묘), 禁 府 姜 瑜 淸 風 水 山 驛 任 義 伯 長 湍 東 坡 驛 韓 震 琦 江 華 鐵 串 鎭 徒 一 年 定 配 啓 95 ) 현종개수실록 권14, 7년 2월 7일 ( 무오 ) 96 ) 현종실록 권16, 10년 3월 3일 (병신 ) 97) 숙종실록 권51, 38년 3월 27일(경술) 98) 비변사등록 영조 4년 4월 27일자 기사에서 철곶별장이라는 직함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해서 다시 강화로 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99) 광해군일기 권80, 6년 7월 11일(신유) 100 ) 현종개수실록 권14, 7년 2월 7일 ( 무오 ) 101 ) 현종실록 권16, 10년 3월 3일 (병신 ) 102 ) 현종실록 권11, 7년 2월 7일 ( 무오 ) 103 ) 현종실록 권16, 10년 3월 3일 (병신 ) 104 ) 신보수교집록 병전 외관직 105) 비변사등록 영조 4년 4월 27일자 기사에서 정표별장이라는 직함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해서 다시 강화로 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106) 비변사등록 현종 8년 7월 7일자 기사에는 용진진( 龍 津 鎭 )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미 이에 앞서 설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단, 강화부지 진보조에서 용진진은 강화유수 홍중보가 1716년(숙종 42)에 신설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07) 주 90) 참조 108) 주 91) 참조 1 0 9 ) 강 화 부 지 진 보 조 1 1 0 ) 대 동 지 지 강 화 부 1 1 1 ) 강 화 부 지 진 보 조 112) 위와 같음 113) 위와 같음 114) 숙종실록 권46, 34년 11월 25일(정유) 115) 숙종실록 권27, 20년 9월 13일(무인) 116) 영조실록 권61, 21년 4월 25일(정묘)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31
강화역사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을 위한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약 정 토 론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토론문 송 기 중 충남대학교 교수
약정토론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역사적 맥락> 토론문 송기중 (충남대학교 교수) 우선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저를 초빙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강화도는 보장처로서 군사문제에서는 다른 지역과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근호 선생님의 본 논문은 이러한 강화도의 위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외람되지만 토론자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제가 모르는 것 몇 가지를 질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깊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 3장 보장처 강화론과 관방시설 구축 이라는 장에서 선생님께서는 退 戰 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퇴전이라는 개념은 본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아군의 병력이 열세하여 적과 대적할 수 없을 때 후퇴하여 병력을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한 전략 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는 강화도 관방시설 구축에 대한 설명과 함께 위급시 강화도로의 진입을 원활하게 하는 방안이 함께 서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술이 같이 이루어져야 3장 부분이 다른 장에 비해 부각되리라 생각됩니다. 2. 4장 강화도의 전략 위상변화와 방어체계 정비 이라는 장에서 보면 강화도의 내성과 외성 축조 등 강화도 자체 방어체제 정비를 강화도의 전략적 위상 변화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만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강화도가 수도 서울을 방비하는 문호라고 설명한다면 내 외성의 축성보다 강화도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을 방비하는 측면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내외성의 축조가 里 門 論 과의 상관성에 대해 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35
3. 이 논문에서는 주로 국가의 전략 안에서 강화도의 군사적 위상 변화라는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화도의 위상 변화에 있어 주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조운로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17세기 후반부터 대동법의 시행 등을 기점으로 서울로 가는 물류량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운로를 단속하고 관리하는 부분이 강화도의 중요한 업무로 등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자 입장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이 조금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강화도에 관련된 연구성과와 선생님의 주장을 워낙 잘 정리해주셔서 질문꺼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두서없는 토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글을 오독하여 잘못된 질문을 했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아울러 저를 이렇게 영광스런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6 강화고려역사재단
강화역사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을 위한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주 제 발 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국내외 유사 사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심 승 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국내외 유사 사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구성과 특성 3. 국내외 군사유산의 사례 분석 4.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5.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유산 보존의 대상이 과거 단일 건축물에서부터 역사도시는 물론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 문화루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확대되는 동시에 세분화되는 양상이다. 1) 2015년 5월 현재, 세계유산의 목록에는 161개국에 위치한 1,007건의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그리고 복합유산이 포함되어 있다. 2) 그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은 총 779건이다. 이를 국가별로 살펴보면, 이탈리아가 50건으로 가장 많고 중국 47건, 스페인 44건 그리고 한국은 모두 11건이다.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단순히 일국사적 가치에 머무는 것을 넘어 인류가 함께 보전해야할 보편사적 가치를 전제한다. 이를 증명해 내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유산의 운용지침(Operational Guidelines)에서 제시하는 10가지 등재기준 가운데 *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한국사 교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회 감사 1) 박소현, <문화유산 보존과 관련된 국제헌장의 흐름><<이코모스헌장선언문집>>, 2010. 11쪽. 2) http://whc.unesco.org/en/list.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39
최소한 한 가지 이상 기준에 부합해야 하고, 그 기준에 해당하는 근거를 밝혀야 한다. 둘째, 세계유산 가이드라인에 명시된 매뉴얼에 따라 후보 유산에 대한 진정성과 완전성을 입증해 내야 한다. 셋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비교 연구가 필수적인 동시에 보전과 관리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3) 강화도는 일찍이 천험( 天 險 )의 요새로써,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해도( 海 島 )에 만 들 어 진 임 시 수 도 이 자 한 민 족 의 마 지 막 보 루 였 다 4). 삼국 이래 혈구( 穴 口 ) 또는 해구( 海 口 ) 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강화도는 고려 이래 수도의 관문 이자 마지막 보장처( 保 障 處 ) 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13세기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요새화되기 시작한 강화도는 17세기 청나라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돈대와 외성, 그리고 산성 등 이중삼중의 방어체제와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5) 19세기말 강화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사건 등을 연이어 겪으면서 구미 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차단하기 위해 해안 포대를 비롯한 관방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6) 강화도의 관방유적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해양관방유적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해양유산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 글은 재단 측의 요청에 따라 인천시의 강화도 해양관방유적, 즉 해양군사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가늠해 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하지만, 현재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강화도 해양관방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 조사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국내외 유사 사례의 현황을 비교ㆍ검토해 봄으로써,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이 갖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늠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3) 여기에 잠정목록을 신청해도 우선등재추진대상 에 선정되어야 한다. 본 신청의 경우 또한 1국 1건, 1년에 총 45건으로 제한되며 국제 심사에만 2년이 걸리는 끈기와 인내심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여정이 기다린다. 4) 심승구,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세계유산 가치와 등재전략><<강화역사유산의 세계유산적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전략>>, 강화고려역사재단. 2015. 3. 5) 박광성, <병자난후의 강화도 방비구축><<기전문화연구>>3, 1973.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한국사론>>34, 1995. 강화군ㆍ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한국사학보>>13, 2002. 배성수, <숙종초 강화도 돈대의 축조와 그 의미><<조선시대사학보>>27, 2003. 강석화, <강화 관방유적의 현황 및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활용 방안><<강화역사적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2013. 6) 박광성, <양요후의 강화도 방비책에 대하여><<기전문화연구>>7, 1976. 장학근, <구한말 해양방위정책-해군창설과 군함구입을 중심으로-><<사학지>>19, 1985. 연갑수, <병인양요 이후 수도권 방비의 강화><<서울학연구>>, 1997. 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 출판부, 2001, 40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구성과 특성 1)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구성요소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남긴 성곽 및 군사유산 가운데 그 기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성곽 및 군사유산들은 늘 각 나라에서 문화유산의 중요한 일부로 존재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성곽 및 군사유적의 보존관리는 전 세계적으로 풀어야 할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유산 가운데 전쟁과 관련된 군사유적들이 일찍부터 보존 내지 관리대상으로 주목되어 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난 2005년에 ICOMOS 산하 학술분과위원회의 하나로 국제 성곽 및 군사유산위원회(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ttee on Fortifications and Military Heritage, ICOFORT)가 설립되어 이 분야의 유산적 가치를 발굴하고 각종 개발과 훼손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ICOFORT 위원회 정관 제2조에 성곽 및 군사유산 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7) (1) 성곽, 진지(요새화된 마을)와 같은 구조물 : 군사공학시설, 병기창고, 항구, 막사, 군 기지, 훈련 등 기타 공격 및 방어 목적으로 조성된 시설. (2) 야전 격전지, 반수생( 半 水 生 ) 또는 방어시설을 포함한 경관. (3) 고대 또는 최근의 전쟁기념물, 묘지, 전사자 추념탑 등 그 종류와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이와 같은 정의는 세계유산 가운데 성곽 및 군사유산의 범위와 구성요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에 근거하여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범위와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본적으로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범위는 강화도와 김포 연안, 그리고 부속의 섬에 구축된 군사시설들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 교동을 비롯한 주변 섬들의 군사시설도 일단 조사의 대상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대상은 크게 성곽(강화외성, 강화산성, 정족산성, 문수산성, 갑창성, 정창성 등), 진보, 돈대, 포대, 봉수대, 요망대 등의 군사시설과 그 부속건물들로 구성된다. 셋째, 실제로 강화도 주변의 각종 훈련 장소와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 내지 방어시설을 포함한 군사경관이 중요한 대상이 된다. 여기에 전쟁기념물( 總 制 營 學 堂 址, 7) http://www.icofort.org/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41
비석 등), 묘지, 전사자 추념탑( 雙 忠 碑 ) 등도 포함되어야 한다. 넷째, 강화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육해( 陸 海 )라고 불리는 갯벌, 군량미 조달을 위한 둔전( 屯 田 ), 염하의 좁은 해로와 손돌목도 해양관방유적과 연관된 빼놓을 수 없는 구성요소들이다. 그 밖에 해양관방유적과 그 주변 유적지의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물질, 용도와 기능, 입지와 주변환경, 비물질적 전통, 정신과 감성, 경관 등도 무형적 유산으로 포함될 수 있다.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특징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섬 주변의 자연 지형과 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성곽과 군사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유산이 갖는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8) 첫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자연지형인 바다를 해자로 이용하는 만든 요새도시 유산이다. 강화가 일찍부터 보장처로 주목받은 까닭도 수도 인근에서 가까운 섬이기 때문이었다. 9) 13세기 몽골군이 침입하자, 임시수도를 옮겨 최후의 보루로 삼은 것도 몽골군이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강화도와 김포 내륙 사이의 긴 해협은 육로로 침입할 때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10) 강화도 주변에 군사기지인 진( 鎭 )과 보( 堡 )를 설치하고 해안에 긴 장성과 돈대, 그리고 포대를 설치하며, 내성과 산성을 쌓아 2차ㆍ3차 방어선을 삼은 것도 해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바다 건너 김포시 내륙 산 위에 강화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문수산성을 쌓은 것 또한 섬과 바다, 그리고 내륙을 연결해 해양 방어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강화도와 그 인근의 교동ㆍ장봉도ㆍ볼음도ㆍ말도의 봉수대와 주문도ㆍ어류정의 요망대 등도 강화도의 해양 외각경비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둘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강화해협을 해자로 이용할 뿐 아니라 바다 물길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어유산이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를 가로지르며 길게 흐르는 염하( 鹽 河 )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빨라 일찍이 급수문( 急 水 門 ) 또는 8) 강화도 해양관방유산의 특징은 필자의 지난 번 글의 내용을 수정ㆍ보완하여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 9) 예성강과 한강 하류에 위치한 강화도는 개경까지 60리, 서울까지 120리이다. 한편, 삼남지방에서 각종 물산이 조운을 통해 올라올 수 있었던 점도 고려되었다. 10) 이 강화해협은 24km의 좁고 긴 바다로서, 섬과 육지의 폭이 길게는 1km에서 짧게는 2~300m에 불과할 정도로 가깝다. 강화수역에는 하루에 두 차례씩 왕복성 조류가 흐른다. 밀물 때에는 경기만으로부터 조강안쪽으로 그리고 썰물 때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조류가 이동한다. 42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험탄( 險 灘 ) 이라 불릴 정도로 배가 쉽게 지날 수 없었다. 특히 손돌목 지점에서는 강화도의 산세가 바다 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물속에 만들어 놓은 뾰족한 바위들이 소용돌이를 치는 물살, 즉 손돌기( 孫 石 磯 ) 를 만들어냈다. 이곳을 지나는 배의 전복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고려와 조선 때에는 손돌목 항로를 피하기 위해 아예 부평의 내륙으로 뱃길을 여러 번 팠다가 중단했을 정도였다. 손돌목은 서해안 남쪽에서 개성이나 한강으로 출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였다. 그러자 손돌목은 해상 방어에서 일당백의 요해지로 평가되었다. 손돌목 부근에 광성보 덕진포, 덕포진 등의 진보와 돈대, 그리고 포대가 집중된 것도 이 같은 지형과 물길을 최대한 이용한 방어 전략에 입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19세기말 프랑스가 조선 연안의 수로를 측량하면서 굳이 염하( 鹽 河 )의 해도( 海 圖 )를 만든 까닭도 바로 손돌목이 갖는 해상 교통 및 방어망으로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한 탓이었다. 11) 셋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염하의 물길 이외에도 섬 주변의 자연지형과 지물을 최대한 활용한 군사유산이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저택( 沮 澤 ) 이라 불리는 갯벌이다. 강화도 주변의 해안은 사면이 사초( 沙 草 )와 점토성이 강한 갯벌로 둘러져 있어 육해( 陸 海 ) 라 불리며 또 하나의 방어벽 구실을 하였다. 12) 갯벌에 배를 정박해 놓아도 사람 신체의 절반이 빠지므로 좀처럼 섬으로 상륙하는 일이 어려웠다. 강화도의 동쪽 해안(월곶~초지진)에만 긴 외성을 쌓고, 다른 해안에 외성을 쌓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동쪽 해안을 제외하고는 다른 해안 대부분이 갯벌로 둘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넷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과거 뿐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군사요충지로서 기능하는 살아있는 유산( Living Heritage) 의 성격을 갖는다. 강화도 북쪽이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있고, 강화해협의 양안은 아직도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부대와 각종 군사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다. 특히 좁은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강화도 북쪽 해안은 여전히 해상 통행이 금지되고 있고, 이 주위에 구축된 돈대는 현재 군 시설로 이용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강화해협의 경우,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으나,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최근에 와서야 민간어선이 다니게 되었다. 강화도가 아직도 냉전의 현실을 반영하는 관방지역임을 말해준다. 세계유산 가운데 과거의 성곽 및 군사유산이 오늘날까지 그 기능이 유지되는 사례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점을 감안할 때, 강화도 11) 조선이 병인양요 뒤에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海 門 防 守 他 國 船 愼 勿 過 ) 라는 비석을 강화해협 입구에 세우고, 일체 외국배의 통항을 금지한 것도 염하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12) 육해의 대표적인 곳은 초지진 아래 장자평( 丈 者 坪 )에서 황청포( 黃 靑 浦 )에 이르기까지의 30~40리 사이이다.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43
해양관방유적이 매우 특별한 사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강화도의 해양관방유적은 13세기 이후 19세기말까지 동아시아 군사시설의 단계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해양의 성곽 및 군사유산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바다와 섬, 그리고 인근 내륙의 산악지형을 배경으로 7백여 년간 지속적으로 구축된 성곽과 각종 방어시설은 국내의 사례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예외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강화도는 지정학적으로 하늘이 내린 요새 라고 불릴 만큼 바다를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해상의 관문이자 요충지로서, 섬 주변에 둘러싸인 성곽 및 각종 군사시설은 한국의 해양군사유적을 대표하는 특징을 갖는다. 바다를 둘러싼 섬으로서, 염하의 빠른 물살과 소용돌이, 사방으로 펼쳐진 갯벌 등 자연 지형지물 그 자체만으로도 외부인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천혜의 보장처였다. 여기에 섬 주위로 내성(궁성, 부성), 중성, 외성, 산성(고려, 정족), 돈대, 포대, 봉수, 요대 등 다양한 성곽과 방어물을 설치함으로써, 강화도는 이중 삼중의 철옹성을 갖추게 되었다. 섬을 마주보는 김포의 문수산 위에는 강화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성을 쌓아 강화의 길목을 보장하는 등 섬과 바다, 그리고 육지를 연결하는 고유하고도 톡특한 해양관방( 海 防 )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3. 국내외 성곽 및 군사유산의 사례 분석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 서류에는 신청대상의 유산에 대한 비교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유산의 비교 연구는 특정한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도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내외 유사한 사례와 비교함으로써, 후보 유산이 역사적ㆍ문화적ㆍ경관적 가치가 높고 인류사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사례이며, 우수하게 보존된 유산인지 등을 증명해 내야 한다. 여기서는 국내외 세계유산 가운데 유사사례에 한정해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국외의 유사 사례 1980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 779건 중 성곽 및 군사시설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유산 50건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44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표-1. 세계유산 중 성곽 및 군사시설 (1980~2015년 현재) 13) 국가 유산명 등재 기능 성곽유형 지형 등재기준 파나마 포르토벨로와 산 로렌소 요새 1980 군사 해안 ⅠⅣ 이스라엘 옛 시가지와 도시성벽 1981 종교/군사 평지 ⅡⅢ Ⅳ 쿠바 아바나 구시가와 요새들 1982 군사 해안 Ⅳ Ⅵ 미국 라포탈레사 산 후안 국립역사지구 1983 군사 섬/해안 Ⅵ 인도 아그라요새 1983 군사 평지 Ⅲ 콜롬비아 카타제나 항구 요새 역사기념물군 1984 군사 해안 ⅣⅥ 이라크 하트라 1985 종교/군사 평지 ⅡⅢⅣⅥ 영국 궤네드 에드워드 1세시대 성곽군 1986 군사 산지 ⅠⅢⅣ 중국 만리장성 1987 군사 산지/평야 ⅠⅡⅢⅣⅥ 스리랑카 갈 옛 마을과 요새 1988 군사 해안 Ⅳ 영국 런던 탑 1988 군사 평지 ⅡⅣ 핀란드 수오멘린나 요새 1991 군사 혜안 Ⅳ 일본 히메지 성 1993 군사 평지 ⅠⅣ 베트남 후에 기념물 복합지구 1993 행정/수도 /문화 룩셈부르크 중세요새도시 1994 군사 평지 Ⅳ 이탈리아 몬테 성 1996 군사 평지 ⅠⅡⅢ 평지 ⅢⅣ 스페인 쿠엔카 성곽도시 1996 군사/도시종 교/행정/경제 산지 ⅡⅤ 쿠바 산 페드로 드 라 로카요새 1997 군사 해안 ⅣⅤ 한국 수원 화성 1997 군사/정치 행정/산업 평지 ⅡⅢ 중국 핑야오 고성 1997 군사 평지 ⅡⅢⅣ 파키스탄 로타스 요새 1997 군사 평지 ⅡⅣ 프랑스 카르카손 역사도시 1997 군사 평지 ⅡⅣ 폴란드 말보르크 독일기사단 성 1997 군사 구릉지 ⅡⅢⅣ 독일 바르트부르크 성 1998 문화/군사 산지 ⅢⅥ 세인트키츠 네비스 브림스톤 힐 요새 국립공원 1999 군사 해안 ⅢⅣ 루마니아 오러슈티에 산맥 다키안 요새 1999 종교/군사 산지 ⅡⅢⅣ 이탈리아 베르나 시 2000 군사 강변 ⅡⅣ 13) http://whc.unesco.org/en/list. <<남한산성 세계유산등재신청을 위한 기초작업 연구>>,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2010.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신청서 작성 1단계 비교연구 보존관리계획>>, 경기문화재단, 2011. <<서울 한양도성 서울성곽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위한 학술연구>>, 서울특별시, 2012.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45
국가 유산명 등재 성곽유형 기능 지형 등재기준 영국 세인트조지역사마을 버뮤다군사물 2000 군사 해안 ⅣⅥ 덴마크 크론보르 성 2000 군사 해안 Ⅳ 벨라루스 미르 성 2000 군사 평지 ⅡⅣ 스페인 루고의 로마시대 성벽 2000 군사 평지 Ⅳ 스위스 벨린초나 성과 성벽 2000 군사 산지 Ⅳ 아제르바이잔 시르반샤 궁전과 바쿠성곽 도시 2000 문화/군사 산지 Ⅳ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 2001 군사 사막 ⅡⅣⅥ 이스라엘 아크레 고대항구 도시 2001 행정/군사 해안 ⅡⅢⅤ 러시아 데르벤트 성채와 도시, 요새건물 2003 군사 해안/산지 ⅢⅣ 중국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2003 행정/군사 분지 ⅠⅡⅢⅣ 알바니아 베라트와 지로카스트라역사중심지 2005/8 상업/종교 강변/산지 ⅢⅣ 시리아 기사의 성채와 살라딘 요새 2006 군사 해안/산지 ⅡⅣ 이집트 하라트 주골, 역사요새 도시 2006 상업/군사 분지 ⅡⅢⅣⅤ 투르크메니스탄 나사의 파르티아 성채 2007 행정/군사 구릉지 ⅡⅢ 인도 붉은 요새 2007 군사 강변 ⅡⅢⅥ 프랑스 바우반 요새 2008 군사 산지/해안 ⅠⅡⅣ 베트남 하노이 탕롱황성 2010 행정/군사 강변 ⅡⅢⅣ 베트남 호왕조 성 2010 행정/군사 강변/산지 ⅡⅢⅣ 케냐 몸바사 예수요새 2011 군사 해안 ⅡⅤ 포르투갈 엘바스 요새도시와 방어시설 2012 군사 해안 Ⅳ 카타르 알 주바라 고고학 유적 2013 군사/상업 해안 ⅢⅣ 인도 라자스탄 구릉요새 2013 군사 산지 ⅡⅢ 한국 남한산성 2014 군사 산지 ⅡⅣ 전 세계유산 가운데 위에서 제시한 각 나라의 성곽 및 군사 관련 유산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 나라의 성곽 및 군사유산은 당대 최고의 축성술과 공학기술을 반영한다. 둘째, 각 나라의 성곽 및 군사유산은 국제정치의 구조 및 세력판도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특색을 보인다. 셋째, 각 나라의 성곽 및 군사 유산 은 특히 중세 및 근대적 의미에서의 문화경관(자연경관)을 갖는다. 넷째, 각 나라의 성곽 및 군사유산은 유형적 가치 이외에도 신앙, 신념, 의식 등이 가미된 무형적 가치를 갖는다. 46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다섯째, 오지에 소재한 까닭에 보존관리 및 접근성, 이용의 한계(유산의 방기 및 파괴, 만리장성 등)가 드러난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성곽 및 군사유산이 갖는 위와 같은 공통점은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경우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갖추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보편성을 찾아내면서도, 강화도 해양관방유적 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밝히는 작업은 다른 세계유산과의 차별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강화도 해양관방유산과 유산한 해외유산으로는 성채(citadel), 성(Castle), 성벽(Wall), 요새(Fort), 요새도시(Fortress), 읍성(Fortified) 등이 있다. 이들 유산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그 기능과 성격이 서로 다르다. 예컨대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중세 봉건 영주가 살았던 성채나 성이나 식민지 제국이 식민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쌓은 요새도시와 달리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동아시아 주변국가와 구미 제국의 침탈에 저항하기 위해 해도에 쌓았던 마지막 보루이자 전시수도였다는 점이다. 특히 지금까지 세계유산에 등재된 성곽 및 군사유산 가운데 그 기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거의 없는 점에서 볼 때,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는 유산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특별히 예외적인 사례로 판단된다. 또한 기존의 성곽 군사유산의 사례는 주로 평지, 산지, 해안에 집중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에 비하여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과 내륙 사이에 구축된 군사시설들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섬과 해협을 끼고 산지 주변에 구축된 성곽과 돈대, 그리고 포대를 비롯한 다양한 방어시설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만든 독특한 해양 문화경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4) 나아가 중세로부터 근대까지 7백년간 동아시아의 군사건축물이 섬을 둘러싸고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산적 가치가 매우 크다. 2) 국내 사례 지금까지 국내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 11건 중 성곽 및 군사시설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유산은 2건이다. 또한 국내 유산 가운데 세계유산 14) 심승구, 앞의 글, 참조.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47
잠정목록에 올라가 있는 14건 15) 중에 유사사례 3건을 아울러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국내 유사사례 현황 16) 등재 유산 잠정 목록 유산명 등재 등재기 준 기능 성곽유형 지형 수원화성 1980 ⅡⅢ 군사 평지 남한산성 2014 ⅡⅣ 군사/수도 산지 중부내륙산 성군 낙압읍성 2011 서울 한양 도성 2010 ⅠⅡⅣ 군사 산지 2012 ⅢⅣⅤ Ⅵ ⅡⅢⅣ Ⅵ 군사/행정 수도/행정/ 군사 평지 산지/평 지 등재사유 - 전통적 축성기법에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계획에 의해 조성한 성 곽건축의 대표적 사례 - 동아시아의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 류한 군사유산, - 유사시 임시수도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 시, - 자연지형을 활용한 성곽과 방어시설로 7C~19C 축성술의 단계별 양상 - 한반도 중부내륙 산성군은 순수 군사적 목적에 의해 축조되어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내려왔던 산성문화의 실체를 보여 주는 물질유산 - 낙안읍성은 마을을 둘러싼 성곽과 관아, 민가들이 오롯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고을 의 모습을 보여주는 탁월한 유산 - 주변 지형을 이용해 축조한 석축 성곽으 로 궁궐과 종묘, 사직 등의 역사적인 건축 물을 에워싸고 있는 도성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역사도시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는 유산 성곽 및 군사시설과 관련한 국내에 이미 등재된 세계유산은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의 두 사례가 확인된다. 또한 현재 잠정목록에 등재된 사례는 중부내륙 산성군(덕주산 성ㆍ삼 년 산 성ㆍ상 당 산 성ㆍ온 달 산 성ㆍ장 미산 성ㆍ충 주 산 성), 낙 안 읍 성, 서울 한 양 도 성의 세 가지로 확인된다. 국내의 다섯 가지 사례들은 모두 내륙의 평지와 산지 또는 평지와 산지에 연결된 군사유산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15) 현재 잠정목록은 강진 도요지, 서남해안 갯벌염전, 대곡천 암각화군,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남해안일대 공룡화석지, 중부내륙 산성군,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 익산역사유적지구, 외암마을, 낙안읍성, 우포늪, 한국의 서원, 한양도성, 김해ㆍ함안 가야고분군,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한국의 전통산사 등 17건이다(문화재청, 유네스코 등재유산). http://heritage.unesco.or.kr/wh/ wh_intro/ 16) http://www.cha.go.kr/worldheritage/selectworldheritagesub.do?mn=ns_04_04_02&hcode=record1 48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섬과 인근 산 사이에 바다를 끼고 구축된 강화도 해양관방유산은 국내의 유사한 사례들 사이에서도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국내의 성곽 및 군사시설이 주로 산성, 읍성, 도성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되는 것과 관련해 볼 때, 바다의 외성과 주변 산지에서 해안 방어를 위해 쌓아진 산성과 각종 군사시설은 강화도가 유일하다. 국내의 유사 사례에서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이 갖는 독특한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강화도에 임시 수도를 두고 이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체제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한 방어체제라는 시대변화에 따라 기능과 성격이 변화된 점도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이 갖는 특색이다. 예를 들면, 강화도는 중세로부터 근대까지 육지와 바다를 통해 접근하는 외세와의 접촉 속에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저항의 보루로 기능한 사실이 내륙의 다른 유산들과도 구별된다. 결국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이미 세계유산에 등재되거나 잠정목록에 올라와 있는 국내의 다른 사례들이 모두 내륙의 산성 관방유적이라는 사실과도 분명히 대비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육지를 지키는 관방유산이 아니라 바다를 지키는 해양관방유산이라는 점이다. 특히 바다를 끼고 섬과 인근 산지 및 해안을 무대로 성곽과 군사시설을 구축한 사례는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이 갖는 유산의 가치를 뚜렷이 말해준다. 이는 현재까지 세계유산 가운데 성곽 및 군사유적의 사례에 비쳐 봐도 거의 유일한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 4.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1) 등재신청에 적용될 세계유산 등재기준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입지는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요충지라는 인식으로부터 구축된 것이다. 양서와 삼남지역의 수로를 관장하는 요충이자 황해 바다에서 예성강이나 한강을 거슬러 수도(개성과 서울)로 출입하는 해로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 인근에 위치한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바닷길과 섬, 그리고 주변 산악지형을 잘 이용하면서 그것과 일체화된 형태로서 축조된 성곽과 돈대, 포대 등의 군사시설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13세기 고려 때 피난 수도의 성곽으로서 쌓기 시작하여 17세기 서울의 보장처로 다시 구축되면서 약 7백여년 동안 수축에 참여한 군사와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49
백성들의 공역과 장인들의 기술이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로 보존되어 있다.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강화의 행궁과 유수부 등의 역사적 기념물을 에워싸고 있는 피난수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염하를 끼고 강화도와 김포 사이가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군사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Ⅱ, Ⅳ의 두 가지 관련 기준에 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7) 첫째, 등재기준 Ⅱ이다. 이 기준은 특정 기간이나 문화 지역 내에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 계획 또는 경관 디자인에서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 증거에 해당하는 유산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기준은 오랜 시간동안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인간 가치의 교환을 뚜렷이 반영하는 유산에 적용된다.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한반도 안에서 세계와의 교류와 접촉 과정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 강화도 관방유적은 황해를 통해서 수도로 접근하는 바다의 관문일 뿐 아니라 보장처로서 해상과 대륙 세력의 접촉과 충돌을 경험한 외세침입의 방파제로 기능하였다. 강화도의 성곽과 군사시설은 한국의 해양관방유적을 대표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군사건축물이 17세기 이후 한국의 바다와 섬, 항구와 인근 산악 지역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바다와 섬 주변, 그리고 해협을 끼고 양안( 兩 岸 )에 구축된 돈대와 성곽을 비롯한 다양한 방어시설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만든 독특한 해양 문화경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등재기준 Ⅳ이다. 이 기준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기술의 총체, 경관유형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하는 유산이다. 강화도의 관방유적은 13세기의 원나라(몽골족), 17세기의 청나라(만주족), 19세기말의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항전했던 군사시설이 남아있으며, 각 역사 단계의 층위가 강화 외성 유적에서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다. 또한 단일한 유적군 안에서 각 시기의 축성술을 단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증거가 잘 남아있는 점도 장점으로 보인다. 특히 19세기말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한국을 식민지화 하기 위해 진출했다가 충돌했던 저항의 역사성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서의 보편적 가치가 크다. 여기에 현재까지 북한과의 삼엄하게 긴장된 국면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거의 유산이라는 점도 유산의 탁월한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준들이 바로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이 지니고 있는 세계유산으로서의 탁월하면서도 보편적인 가치라고 판단된다. 17) 심승구, 앞의 글 참조. 18) 심승구,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세계유산 가치와 등재전략><<강화역사유산의 세계유산적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전략>>, 강화고려역사재단. 2015. 67~76쪽. 50 강화고려역사재단
주제발표 2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2) 진정성과 완전성 세계유산의 등재를 위해서는 세계유산 가이드라인(제78~95항)에 명시된 매뉴얼에 따라 후보 유산에 대한 진정성과 완전성을 입증해 내야 한다. 먼저 진정성(authenticity)은 내적으로는 그 유산의 물리적 구조에 있고, 외적으로는 이해관계가 있는 공동체에 의해 부여된 가치에 있다. 진정성은 물질적 요소와 그 배경, 다시 말해 구조물과 대상 사이의 자체적 관계 및 물리적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진정성은 참된 가치의 반영, 즉 해당 유적이 본래 형성된 조건 속에 남아있고, 모든 중요한 역사를 반영하는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경우 무엇보다 등재후보 신청 대상지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해당 유적 내지 유적지에 대한 자연 지세, 건축 구조,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모두 진정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어 성곽과 군사시설은 진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충분한 역사적인 사료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에 진정성을 충족하기 위한 속성인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 물질, 용도와 기능, 전통 기술과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 환경, 언어와 그 밖의 형태의 비물질적 전통, 정신과 감성 그리고 그 밖의 내부 요인들 등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기록유산과 연구물로 뒷받침해야 한다. 또한 유적의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 물질, 전통기술(축성술)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 환경(수운과 교통, 봉화 및 통신), 비물질적 전통(민속), 정신과 감성요인 등에 대해서는 현장조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완전성(integrity)은 신청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표현하는 특성의 전체와 원래 모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완전성은 다음 항목을 통하여 입증해야 한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데 필요한 요소를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는가? 신청유산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특징과 과정을 대표할 수 있는 적절한 규모인가? 신청유산의 보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무관심과 개발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완전성은 유적의 형성 배경이나 환경이 본래 시기나 다른 중요한 시기와 일치하는가, 혹은 중요성을 강화하거나 감소시키는가의 여부로 판단한다. 완전성의 측면에서 보면,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경관요소를 군사 통치 민속 요소로 구분하였을 때 각각의 경관요소들은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의 종합적인 가치를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2015년 제2차 학술회의 <강화 해양관방유적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방안> 51
5. 나가는 말 이상에서 세계유산의 국내외 사례 분석을 통해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이 갖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간략하게 가늠해 보았다.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의 요새도시 로서, 험난한 역사의 고비를 공간에 새긴 기억의 최전선이다. 강화도의 성곽 및 군사시설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을 수호하는 동시에 서울로 가는 해로( 海 路 )를 지키는 방어 구조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해양관방유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동아시아의 군사건축물이 한국의 바다와 섬, 항구와 인근 산악 지역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또한 19세기말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의 침략과 저항이라는 근대의 역사 단계와 사건을 생생히 증명하는 군사유산이라는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갖는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섬과 바다 주변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성곽과 군사시설이 7백년간에 걸쳐 조성된 보기 드문 해양 군사유산이라는 점에서 세계유산의 가치가 크다. 17세기이후 200년간에 걸쳐 강화해협 주변 자연 지세를 활용해 만든 성곽과 돈대, 산성과 포대 등의 방어시설은 독특한 축성술과 함께 강화도만이 가진 해양관방의 역사성과 문화경관을 잘 보여준다. 특히 강화도의 성곽과 군사시설은 한국의 해양관방유적을 대표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군사건축물이 한국의 바다와 섬, 항구와 인근 산악 지역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둘째, 강화도의 관방유적은 13세기 이후 19세기말까지 각 시기별 군사시설의 배치와 변화, 그리고 방어와 항전의 흔적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는 점에서 유산적 가치가 크다. 강화도의 관방유적은 13세기 대몽항전을 위해 내성(궁성), 중성, 외성, 산성(삼랑, 고려) 등 피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섬 내부에 방어시설이 갖춰졌다. 그러다가 정묘ㆍ병자호란 뒤 2백년간에는 피난수도 뿐 아니라 수도의 관문으로서, 해상방어에 초점이 기울여졌다. 이를 위해 강화도 내부에 진보, 내성(읍성), 외성(정족), 창성( 倉 城 ), 돈대, 포대 등을 설치하여 섬 내부의 방비를 더욱 견고히 하는 한편, 염하를 사이에 둔 문수산성과 덕포진 등 섬 밖의 군사시설을 설치하여 육지와 연계 방어하는 유기적인 해양 관방체계를 구축하였다. 강화도 관방유적은 13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역사의 각 층위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외성의 경우에 단일한 유적군 안에서 토성( 土 城 )에서 전성( 磚 城 ), 그리고 석성( 石 城 )의 시대별 층위를 살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보인다. 셋째, 강화도 해양관방유적은 한반도 안에서 세계 열강을 만난 군사유산이라는 52 강화고려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