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원논문집 제31집 111~144쪽 2015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6) 한국 초전불교와 서역 불교문화를 통하여 윤소희*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월명사가 부르지 못했던 성범(聲梵) 의 실체를 찾아서 실크로드와 중국 그리고 한국의 초전불교의 면면 을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중국 초기불교 시기에 서역에서 온 유랑승들이 많았고, 이들은 범어범패로 신통력을 부리거 거나, 다라니나 진언이 지닌 의성어 의태어의 유희성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사실을 포착하였다. 월명사가 활동한 시기에 중국에는 조식에 의한 당풍 범패가 창제된 후였으므로 서역풍 범어범패와 당풍의 한어(漢語)범패가 모두 들어왔 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찬탄의 게송을 노래하는 한어 범패를 이변(異變)을 물리치기 위해 불러달라고 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반면 3세기 전 부터 주술적 방편의 밀교신앙이 실크로드를 포함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였고, 한국의 불교수용과정에도 이러 한 면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한국에는 삼국시대부터 범어에 대한 다라니신앙이 있었고, 일본에서 발견되는 한국 승려들 의 범자관련 저술들에 미루어 볼 때, 범어범패의 주술적 신통력이 통일신라 당시 익히 행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경덕왕이 노래를 불러 재앙을 물리치려 했을 때 월명사가 성범을 부를 줄 모른다 는 말을 먼저 했던 것은 당시 신라에 범어범패가 널리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어범패는 인도풍의 성격을 유지한 체 실크로드와 중국에서 불리었다. 그러나 이들 범어범패가 실크로드와 중국 서방에 머문 시기가 수 백 년인데다 한반도에 들어 온지도 수 백 년이 지난 당시 상황에 미루어 볼 때, 성범 은 실크로드와 신라의 색갈이 다소 가미된 인도풍 범패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 이와 더불어 범본(梵本) 불경의 역경으로 인해 한어성조가 규정되었고, 찬불가가 중국의 궁중음악이었던 것을 비롯 하여 삼분손익 정악 아정(雅正)의 개념 또한 서역음악의 영향이었 듯이 중국 악가무 전반에 걸쳐 서역음악의 영향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는 한국 전통음악에도 마찬가지이나 본고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재장에서 불리는 범어범패이다. 느리고 장인된 선율로 부르는 한어범패와 달리 다라니나 진언을 노래하는 범어범패는 법기 반주로 흥겹 게 노래한다. 이는 초기 범어범패의 대중 친화적 성격과 닮은 점 이어서 앞으로 이 방면의 연구가 기대된다. [핵심어] 월명사, 성범, 서역범패, 신라의 범패, 범어범패, 실크로드 불교음악 <차 례> Ⅰ. Ⅱ. Ⅲ. Ⅳ. Ⅴ. Ⅵ. ** 부산대학교 출강. 머리말 중국 초전불교와 서역문화 한국 초전불교와 서역문화 범어의 한반도 전래와 유통 월명사의 성범 과 범어범패 맺음말
112 국악원논문집 제31집 Ⅰ. 머리말 경덕왕(재위 742~765) 19년(760년) 경자년 4월 초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자 월명사를 불러 이를 해소하려하였다. 이때 월명사는 향가만을 알 뿐 성범(聲梵) 은 못 한다 1) 고 하였다. 여기서 월명사가 하지 못한다고 했던 성범 은 어떤 노래였을까? 이에 대하여 이혜구는 고풍의 범패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고,2) 국악개론 에는 고풍의 범패는 당풍이나 향풍 이 아니기 때문에 서역에서 들어왔을 확률이 높다 고 하였다.3) 월명사가 말했던 성범 에서 범(梵) 은 브라마를 한역한 것으로 신성하다 청정하다 는 뜻이 담 겨있다.4) 브라마 는 인도 고대 신화에 나오는 만유의 근원이자 우주의 창조신이므로 범어 에는 창조주의 영(靈)에서 비롯된 언어 라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범 은 인도 라는 의미로 쓰여왔는데, 여기에는 인도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제반 사항을 볼 때 월명사 가 못 부른다고 했던 성범 은 중국풍과는 다른 인도풍 혹은 실크로드 지역 즉 서역풍의 범어를 가사로 하는 노래였을 가능성이 높다. 선행연구를 검토해 보면 김성혜의 신라의 불교음악 수용 양상에 관한 고찰 이 있다. 이 연구에 서는 주로 고구려와 중국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서역 불교음악에 관한 내용과는 거리가 있 다.5) 이상에서 보듯이 그간 국악학계에서는 월명사의 성범 이 고풍 이거나 서역풍 일 것이라는 추측은 했지만 성범 과 관련한 구체적인 연구는 없었다. 한편 실크로드와 한국 불교음악에 관한 논문이 발표된바 있지만 담론형식으로서6) 중국과 서역에 관한 내용을 담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 는 앞서 발표된 내용을 축약하고, 서역에 해당하는 내용을 보완하여 월명사 이전에 신라에 유입되 었을 범자와 이에 수반되는 불교문화를 조명하므로써 월명사가 모른다고 하였던 성범(聲梵) 의 실 체를 찾아서 사적(史的) 문화적 배경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연구 방법과 범위로는 문헌 뿐 아니라 유물과 같은 자료를 두루 활용하여 월명사 이전의 불교음 악 즉 성범을 둘러싼 당시 상황을 다각도로 추적해 보겠다. 왜냐면 문헌상으로 보면 기원전 139년 1) 三國遺事 第五卷, 月明師 兜率歌 條: 月明師兜率歌: 景德王十九年庚子四月朔. 二日並現. 挾旬不滅. 日官奏請緣僧, 作散花 功德則可禳. 於是潔壇於朝元殿. 駕幸靑陽樓. 望緣僧. 時有月明師, 行于阡陌時之南路. 王使召之. 命開壇作啓. 明奏云. 臣僧但屬 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王曰. 旣卜緣僧. 雖用鄕歌可也. 2) 이혜구, 신라의 범패, 한국음악연구, (서울: 국민음악연구회,1957), 252쪽. 3) 장사훈 한만영, 국악개론, (서울: 한국국악학회, 1975), 173쪽. 장사훈, 한국음악사, (서울: 세광출판사), 131쪽. 성범 을 범패 로 번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송방송은 진감국사의 귀국 이전에 범패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음악통사, (서울: 일조각, 1984), 129쪽. 한만영은 그의 또 다른 저서에서 한국의 범패는 당풍,향풍(신라풍)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고풍의 세 가지 종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불교음악연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14쪽. 4) 김용환 외, 불교 예술과 미의식, (부산: 부산대학교출판부, 2011), 193쪽. 5) 김성혜, 신라의 불교음악 수용에 관한 고찰, 한국음악연구 제40집, (한국국악학회,2006), 5-20쪽; 신라의 외래음악 수용 양상, 한국음악사학보 제35집, (한국음악사학회, 2005), 5-31쪽. 6) 윤소희, 실크로드와 한국 불교음악 담론: 월명사의 성범(聲梵)의 실체를 찾아서, 아시아음악과 문화, (제19회 아시아태평양 민족음악학 국제학술회의, 2014), 81-124쪽.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13 한무제(漢武帝)가 서역과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해 사신으로 보낸 장건(張騫)에 의해 개척된 것이 서역교류의 시초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으로 볼 때, 중국의 비단이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이집트에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 300년 후에는 유럽지역에서도 중국의 비단이 유통되고 있 어7) 문헌 보다 훨씬 앞선 서역 교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범 이라는 단어 외에는 그 어떤 실마리도 없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실체를 찾기 위해서는 문 화현상을 두루 조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에서 유형(類型, type)은 공통되는 문화형식을 말하는 데, 그것은 주로 전파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양식(樣式, style)은 드러난 문화의 가변적 인 표현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할 수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타 종교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기독교가 유입된 이래 약 100여년이 흘렀는데 요즈음 가톨릭 미 사곡이나 성모송과 같은 음원을 들어보면 목탁만 치면 염불이라고 할 만큼 한국적인 곡들이 많다. 한편 오늘날 소통되고 있는 용어 중에 성범 과 가장 가까운 것은 범패 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범패 의 개념은 대개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전문적인 불교의식음악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대만, 일본에서는 송경 염불 게송과 찬(讚)이 모두 범패이다. 한국의 범 패 개념이 이토록 축소된 데에는 조선의 억불과 일제의 사찰령, 근대 서구문화의 급류 속에 단절 되어온 대중 범패의 소멸이 있었기 때문이다.8) 이에 본고에서는 근대 이후 작곡가에 의해서 창작 된 것이 아닌 불교의식이나 신앙에 수반된 모든 율조를 범패 로 지칭할 것이며, 서역 은 실크로드 지역을 폭넓게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하겠다. Ⅱ. 중국 초전불교와 서역문화 채집경제시대의 고인(古人)들은 정주(定住)란 것을 아예 생각 할 수도 없었으므로 기동력이 왕 성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므로 동서 교류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나우 강변의 흑해와 볼가 강변 등에서 출토된 한(漢)나라의 거울, 방제경(倣製鏡)9), 옥 구검(玉具劍) 그리고 흉노식 동기와 서아시아에서 동아시아 일대에 걸쳐 출토되고 있는 채색토기 와 옥제품 등이 그 예이다.10)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비롯된 불교는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 하는 것 보다 훨씬 오래 전 부터 실크로드 지역에 머무르며 이곳 문화의 색깔이 입혀졌다. 불교를 신봉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상을 보면 모두가 그들의 생김새를 닮아있다. 이렇듯 어 7) Richard C, Foltz, op. cit, 3쪽. 허남결, 실크로드의 호상(胡商) 소그드상인들의 재조명: 종교문명의 동전에 미친 영향을 중심 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7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4), 105쪽. 8) 윤소희, 수륙재의례와 일반대중 범패: 대만 수륙법회와 산동적산원 불교의식을 통하여, 韓國禪學 제35호, (서울: 한국선학 회, 2013), 321-354쪽. 9) 모본(模本)이 되는 청동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청동제로 본 뜬 거울. 한국에도 이와 같은 거울이 다수 출토되어 있다. 10) 나가사와 가즈도시 저, 이재성 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서울: 민족사, 1994), 18쪽.
114 국악원논문집 제31집 떤 문화가 특정 지역에 머무르다 보면 자연히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시키게 된다. 석가모니 입멸 후 고구려 소수림왕대(AD4세기)에 불교가 공인되기까지는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 에 머물렀던 지역은 서역 즉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방의 실크로드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머물렀던 이 지역 문화는 의례 진행에 수반되는 송경율조를 비롯하여 불교무용 등 중 국불교에서 다 밝히지 못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1. 서역의 시원과 지역적 배경 서역 이란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한서( 漢 書 ) 의 서역전 권96이다. 본 사료를 보면, 한 무제(BC140-87)가 흉노에 대항해서 대월씨( 大 月 氏 )에 장건을 파견하여 서역경영 이 시작되었 다 고 적고 있다. 이는 기원전 60년에 전한( 前 漢 )이 숙적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타림분지의 중앙부 에 위치한 우레이청( 五 壘 城 )에 서역도호부( 西 域 都 護 府 )를 설치하면서부터 형성된 지역으로 좁은 의미의 서역 이다. 한대 이후 중국의 대외 교섭과 교류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서역 의 범위가 서 쪽으로 더 확대되어, 당대( 唐 代 )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천축(인도) 파사(페르시아,이란) 안식 (이란 북부) 따쉬( 大 食 : 아랍), 사자국(스리랑카), 불름(대진: 동로마)까지 포함된다. 이는 넓은 의 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기까지 통용되었다. 서역과 문화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당대( 唐 代 : 618~907)이다. 당시 서방의 문물이 활발 히 중국으로 도래하였는데, 이때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및 로마에서 이단시( 異 端 視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7세기 중엽 당나라의 타림 분지에 안서도호부( 安 西 都 護 府 )를 설치한 시기는 실크로드11)의 최성기( 最 盛 期 )였다. 당시 실크로드 육로 는 남로와 북로의 두 길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벽화와 유적을 통해 불교음악에 대한 해설을 내 놓기도 하였다. 실크로드의 인적 구성은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투르키스탄과 서투르키스탄으로 나누인다. 동쪽은 현재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 서쪽은 소련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카자흐 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다지키스탄의 다섯 공화국으로 이루어졌 다. 이중 이란 계인 타지키스탄을 빼고는 모두 투르크계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은 민족적으 로나 종교 문화 전반에 걸쳐 명료한 단층이 형성되어 있다. 전기는 아리아인의 일파가 타림분지 의 주변 오아시스에 분산 거주하며 대상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로 다방면으로 섭취한 독특 한 문화가 있다. 이후 천산 이북과 몽골리아 초원지대의 유목세력인 투르크계의 종족은 타림분지 로 이주하여 사막의 새로운 거주자로 화하면서 이슬람문화에 젖어들었다. 이 시기의 전기를 아리 11)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의 저서 China, (총5권) 중 1권 후반부에 실크로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박주식, 실크로드의 생성과 발전 및 쇠퇴, 민족연구 제27권, (한국민족문화연구원, 2006), 150-164쪽; 김규현, 대당서역기, (서울: 글로벌콘텐츠, 2013), 755-767쪽.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15 안의 시대, 후기를 이슬람의 시대로 칭하고 있으며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시점은 대개 9세기 경이다. 이 중에 월명사가 말한 성범과 관련되는 시기는 전기에 해당하는데, 이 당시 실크로드를 왕래한 소그드인은 신라에 서역문화를 전달하는 주역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신라 항목에서 논하겠다. 2. 불교유입과 역경 석가모니는 승려들이 집을 짓고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계율로 금했다. 그리하여 초기에 중국으 로 넘어온 승려들도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고 돌아다니며 포교하는 유화승들이 많았다. 그 한 예로 거지를 화즈(花子)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유화승을 일컫던 교화자(敎化子) 에서 나온 말이다.12) 중 국에 공식적으로 불법을 전한 승려로 알려진 축법란(竺法蘭)은 유랑하며 포교를 하다가 낙양에 오 게 되었고, 안식국(安息國)의 태자였던 안세고(安世高), 대상(隊商)의 아들 담가가라(曇柯伽羅), 간 법개(干法開) 등 걸식 유화승의 기록이 많다.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문자를 쓸 줄 몰랐으 므로 유랑승들이 외는 범어 주문을 따라하며 신심을 키웠고, 그 가운데 유랑승들이 일으켰던 신통 력이 화제의 중심에 서며 포교의 효과가 컸다.13)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불교전파를 위해서는 범어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했다. 역경에 관련된 승려들은 인도 서북쪽 다위에씨(大月氏) 안스(安息), 캉주(康居) 등지로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에 걸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 인물인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3-413)은 구마라염의 아들로 쿠자국 왕의 누이동생 기바를 어머니로 하여 쿠자국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름을 합하여 구마라습이라하였는데, 줄여서 라습(羅什)으로 번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그는 7세 때 출가하여 북인도 각지에서 수학한 후 불학(佛學)에 대한 경지가 높았다. 383년 (건원19) 진왕이 승전하자 401년(융안5) 구마라습으로 하여금 범어 경전을 번역토록 하여 성실 론 심송률 대품반야경 묘법연화경 아미타경 십주비바사론 등 경률론 74부 380여권이 번역 되었다.14) 인도나 실크로드 지역의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활동한 것과 반대로 중국에서 서역으로 건너간 승려들도 많았는데 이들을 입측승이라고 한다. 그 중에 최초로 인도로 간 승려는 법현(法 顯)이다.15) 법현은 399년(동진 융안3)무렵 혜경 도정 혜탈 혜외 등과 함께 장안을 떠나 실크 로드의 여러 나라를 거쳐 북인도에 갔다가 불루사에서 동행들과 작별하고, 홀로 여러 성지(聖地)를 순례한 후 마갈타국에 3년간 머물면서 마하승기율 을 비롯한 경과 율을 번역하였다. 이 외에도 12) 澤田瑞穗, 佛敎と中國文學, (東京: 國書刊行會, 1975), 3쪽. 조명화, 불교와 돈황의 강창문학, (서울: 이회출판사, 2003), 173쪽. 13) 조명화, 앞의 책, 173-174쪽. 14) 길상(吉祥) 편, 불교대사전 상권, (서울: 홍법원, 2003), 213쪽. 15) 길상(吉祥) 편, 앞의 책, 839쪽. 동명이인으로 중인도 나란타사 승려가 있기도 하다.
116 국악원논문집 제31집 수 많은 입축승(入竺僧)들로 인하여 중국과 인도의 교류는 매우 활발하였다. 이러한 왕성한 서역교 류가 신라의 월명사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겠다. 3. 한어에 미친 범어의 영향 1) 한어성조와 범패 중국에서 문자를 익힌다는 것은 그 생김새와 발음을 동시에 배우는 것이었으므로 발음만을 따로 표기해야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인도로부터 불교가 유입되면서 한어와 이방 언어의 접촉 이 이루어졌고, 이때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발음을 표기해야만 했다. 따라서 한어 성조의 형성과 변화는 인도에서 온 범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16) 중국 문학은 문자의 고립성과 단음성(monosyllabic-isolating language)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 구 형식과 성률(聲律) 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엄격한 수식 규율이 만들어내는 중국문학의 언어 적 제한은 다른 언어 문화권에서는 보기 힘든 구어와 문자의 분리, 이른바 형문(形文)과 성문(聲文) 현상을 만들어 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문자가 각 지역의 방언 독음과는 격리돼 사용되는 언어형 문학이라 할 수 있다.17)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歌)하거나 영(詠)하거나 간에 모두 패라고 하였는데, 중국에 들어와서는 경전의 문구를 영하는 것은 전독이라 하고, 창송문을 가하는 것은 범패 라고 하였는데,18) 이 또한 한어(漢語)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고승전 에 나오는 승려들의 포교행을 보면 주어(呪語)나 주문(呪文)처럼 구전(口傳)을 통한 것이 더 많았다. 심지어 옛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글자로 적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진언과 다라니(dhāraņi)는 무의미한 어휘나 의성어, 의태어를 반복함으로써 쉽게 기억하고, 이를 통해 삼매에 들게 하는 구조가 있다. 신주(神呪) 다라니의 주어(呪語) 들은 본래 밀교에서 중 시된 것이었으나 이 당시 실크로드와 중국의 민중들은 밀교 교리의 의미 보다 그저 들어서 재미있 고 신통한 다라니의 능력에 매료되었다. 따라서 유화승들은 교리 보다는 민중의 관심을 사기 위하 여 율조를 바탕으로 하는 또 다른 언어 예술을 주어(呪語)와 섞어 사용하면서 대중들 속으로 들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 주문이 지니는 본래의 신비성이나 주술성은 약화되고, 흥미와 오락성으로 대 중의 인기를 얻는 것을 비난하는 여론이 생기기도 하였다.19) 16) 심소희, 한자 정음관의 통시적 연구,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 37-71쪽. 윤소희, 중국 한어 성조와 한국 범패, 국악원논문집 제28집, (국립국악원, 2013), 121쪽. 윤소희, 중국 한어 성조의 입성과 범패의 맺음형: 영남범패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8집, (동아사불교문화학회, 2014), 145-176쪽. 최영애, 中國語音韻學, (서울: 통나무출판사, 2000), 15-22쪽. 17) 郭紹虞, 中國文字型與言語型的文學之蓮變, (北京: 丹靑圖書, 1985), 327-335쪽. 金經一, 중국 구어체 언어의 문학적 수용: 燉煌 俗文學 作品을 中心으로, 동서문화교류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7), 4쪽. 18) 然天竺方俗 凡是歌詠法言 皆稱爲唄 至於此土 詠經則稱爲轉讀 訶讚則號爲梵唄, 高僧傳 권 13.(대 50 P415b), 조명화, 앞의 책, 135쪽.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17 이러한 영향으로 불교문화와 범어는 돈황의 속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를 요약해 보면. 첫째 유교가 시대적 구어와 거리가 있는 문자로 그 사상을 전파하고 유지해 왔던데 비해 불교는 고승들의 구어가 그대로 남겨 회자되었고, 이들은 후대 당송 백화문의 뼈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둘 째 불교가 가져온 대중성과 통속성으로 종교와 서민문학의 묘한 배합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강 경문 변문 등의 구어체 문학이 대두되었다. 셋째 불경의 번역으로 새로운 언어 형태를 수용하므 로써 당시 사회에서 일찍이 없었던 자유스럽고 평이한 심리적 정신적 차원의 어조를 제공했다. 귀 족적이고 엄숙한 유교나 현실도피적인 도교와 달리 현세와 또 다른 세계를 밀접하게 연결 짓는 종 교적 공간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었던 것이다. 2) 돈황의 강창문학과 한국의 화청 민중의 속어로 설법하였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중국에 들어오므로써 대중친화적인 구어체 사 설이 돈황에서 다량 발견되었다. 석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에는 불법을 노래하던 민간 유흥적 가 사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바로 강창문학이다. 강창문학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면, 팔관재를 지내는 긴 밤, 자정 무렵이 지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졸음에 겨워한다. 이때 지종이 법좌에 올라가 한번 큰 소리로 범패를 부르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20) 는 대목이다. 그런데 한국에도 근대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 밤재를 지낼 때 한 승려가 징을 치며 회심곡을 하면 보살 들 주머니를 다 털었다던 풍속이 있다. 이때 대중의 심금을 울렸던 사설들은 실크로드지역의 강창문학과 연결되어 후대로 가면서 대중 친화적인 불곡 사설로 발전하였고, 이들은 대중 불교가 성했던 송대에 이르러 만개하였다. 송대에 는 마을의 중심에 사찰이 있고, 사찰 마당에는 오락장이 있었는데 여기서 담경(膽經) 설창(設 唱) 탄창과 같은 노래들이 불리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저간에는 돈황문에 보이는 목련구 모변문 부모은중경 과 같은 것이 있어 오늘날 한국의 회심곡도 이러한 흐름과 같이한다. 4. 중국음악에 미친 인도불교의 영향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음악의 최초 중국 전래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진나라 최표(崔豹) 의 고금악론(古今樂論), 당나라 오경(吳競)의 악부고제요해(樂府古題要解) 에 의하면 장건에 의해 서역길이 개통된 후 서역 악기인 호각(胡角)이 전래되고, 이연년(李延年)이 이 호각으로 연주 하는 신성이십팔해(新聲二十八解)를 지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중국 학자들은 이 기록을 들어 중 국에 전해진 최초 서역음악으로 보고있다.21) 중국에서 호악(胡樂)이라 불리는 서역 음악의 전래는 19) 조명화, 앞의 책, 175쪽. 20) 高僧傳 권 13.(대 50 P414a), 釋智宗조, 조명화, 앞의 책, 139-140쪽. 若乃八關長夕 中宵之後 四衆低昻 睡蛇交至 宗則昇座一轉 梵響干雲 莫不開神畅體 豁然醒悟 21) 徐寶餘, 論絲路音樂對中古文學內質的影響, 박진태 엮음, 실크로드의 예술, (서울: 도서출판 박이정, 2008), 67쪽.
118 국악원논문집 제31집 한대에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시대에 지속적인 확대과정을 거쳐 수 당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이 당시 중국에 있어 실크로드 교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불교를 둘러싼 서역 문물의 유입이었 다. 불교는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경전의 전파가 주된 것이었으므로 서역음악은 자연히 문학과 막역한 관계를 지니고 진행되었다. 장춘석은 그의 논문 論絲路音樂對中古文學內質的影響 를 통 해 서역음악의 아화(雅化) 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동진남북조 시대에 쿠자 천 축 강국(康國) 소륵(疏勒) 안국(安國) 고려(高麗) 등의 외국음악이 중국에 활발히 유입되었는 데, 그 중에 절대 다수가 서역음악이었고, 이들의 전래 초기에는 수준이 낮은 속악으로 인식되다가 점차 아화 과정을 겪으면서 서역음악의 지위가 강화되어갔다 는 것이다. 서역음악이 궁중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시기는 위진남북조시기이다. 잦은 전쟁으로 주나라 때 부터 행해 오던 아악이 결여되자 그 빈자리를 서역음악이 채우면서 종묘제례에도 서역음악이 사용 되었다. 그런가하면 양나라의 무제는 궁중에서 불교의 게송을 부르게 했다. 그리하여 수서 악지 에는 양무제가 정악(正樂)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불법을 서술한 것이다. 22) 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양무제는 직접 불곡을 창작하기까지 하였는데 이 당시 한유(韓愈)의 시 화산녀(華山女)에는 거리 마다 불경을 말하고 종소리와 나(螺) 소리가 궁정을 시끄럽게 한다 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이는 당대의 연악에 불교음악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무제 당시에 논 악자칠십팔가(論樂者七十八家) 라는 학설이 생겼는데, 이는 훗날 삼분손익법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 다. 이후 서역음악은 부단히 상류층 음악에 편입되면서 주(周) 진(秦) 한대(漢代)에 형성된 아 정(雅正) 의 개념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23) 더불어 서역음악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중국의 12율 형 성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위 북주 북제가 서역의 영토와 인접하여 서역의 악무가 중 원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이어지는 수대에는 국제음악 활동이 활발하여 고구려기와 백제기 등이 연주되었으니 이때 함께 연주되던 서역음악이 당연히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나라의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칠부 기와 구부기에 속한 음악들을 보면, 천축기를 비롯하여 대부분 서역으로 통칭되는 실크로드지역 음악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수대는 음악문화가 번성하면서. 율려와 악조이론의 정립을 보게 되었 다. 수나라 개황(開皇 589~600) 때 설립된 칠부기는 고려기(高麗伎: 고구려음악)를 비롯해 국기(國 伎) 청상기(淸商伎: 중국음악) 천축기(天竺伎: 인도음악) 안국기(安國伎, Bokhara음악) 쿠자 기(龜玆伎: 庫車伎) 문강기(文康伎: 晉의 假面伎)로 구성됐다. 이 칠부기는 수나라 대업(大業 605~616) 때 구부기(九部伎)로, 당나라 태종(626~649) 때 십부기(十部伎)로 확대되었다.24) 이 당시에는 서역 각처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연주자들과 가인(歌人)들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2) 隋書 第305頁 名爲正樂,槪述佛法, 徐寶餘, 앞의 논문, 69쪽. 23) 박진태 엮음, 앞의 책, 80-822쪽. 24)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서울: 도서출판 보고사, 2012).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19 대표적인 인물로 소지파를 들 수 있다. 그는 쿠자 출신의 비파명인이었으나 중국으로 건너와 활동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조묘달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범어 Sujva 를 번역한 묘달(妙達)에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는 물론이요 미얀마와 신장 일대에 서 유입된 음악이 민간 곡조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이 곡자사(曲子詞) 이다. 이로써 외래음악인 서역음악과 중국의 민간음악이 융합된 다양한 불곡이 생겨났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의식이 양무제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때25), 중국 불교문화 혹은 음악이라는 것이 실은 서역문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역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 지역 색깔의 차이도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번성한 음악문화를 향유 한 쿠자의 벽화들 중에 음악 연주를 하고 있는 그림들을 보면, 5현 비파 소 횡적 수공후 류 트 등이 있다. 서역문물 교류에서 쿠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투루판(高昌)은 한대(漢代)부 터 있던 도시국가이지만 당대에는 중국문화가 유입되어 음악문화의 독특한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코탄은 간다라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간다라는 오늘날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한 때 인도의 문화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곳에 4현 류트, 수형 하프와 팬파이프와 같은 악기들이 있었다.26) 한국의 불상과 불교미술이 대부분 간다라양식인 점에 미루어 볼 때27) 앞으로 코탄과 한국음악을 비교해 보면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불교의 게송과 찬팅이 양나라의 궁중음악으로 연주되었던 상황을 볼 때, 이어지는 수대의 궁중음악에는 다분히 불교적인 내용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수대의 7부기와 9부기로 확대되었다가 당의 태종(626~649) 때는 또 하나의 부기가 늘어나 십부기(十部伎)가 되었다. 십부 기에는 서량기(西凉伎) 청상기(淸商伎) 또는 청악(淸樂) 고려기(高麗伎: 高句麗伎) 천축기(天 竺伎: 印度伎) 안국기(安國伎, Bokhara伎) 쿠자기(龜玆伎: 庫車伎) 강국기(康國伎, Samarkand 伎) 소륵기(疏勒伎, Kashgar伎) 연악(宴樂) 고창기(高昌伎)로 구성되었다. 이들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실크로드 즉 서역, 혹은 호악이라 지칭되는 음악과 상통하고 있고, 그 가운데 월명사가 못 부른다고 했던 성범 스타일의 노래가 있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다음 항에서는 이러한 서역 의 불교문화가 한반도에 어떻게 유입되었는지 월명사 이전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5) 양무제는 수륙재를 최초로 행한 황제로써 우란분법회, 양황보참 등 여러 의례를 고승들과 함께 창제하였다. 윤소희, 한 중 불교음악 연구, (서울: 백산자료원, 2007), 36-51, 205쪽; 道端良秀, 중국불교사, (서울: 우리출판사, 2003). 이외 중국 불교 사를 비롯한 일체의 문헌. 26) 조석연, 고대의 공후, (서울: 민속원, 2008), 73-80쪽을 통해 고대 인도의 공후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하였으며, 불탑 에 새겨진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27) 이주형, 간다라미술, (서울: 사계절출판사, 2003)에 의하면 간다라양식은 고대 그리스문화와 융합되기도 하였다. 당시 샤카 파르티아와 탁실라, 스와트, 쿠산왕조의 미술이 시원이었던 간다라양식이 한국 불교문화에 스며든 간다라양식을 구체적이고도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20 국악원논문집 제31집 Ⅲ. 한국 초전불교와 서역문화 종교의 전파는 초보적인 전달 과정과 문화적인 변이를 거치는 공전(公傳)의 두 단계가 있다. 초 전은 민간에서 잠행적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짙고, 공전은 초전 과정을 거친 후 국가의 공식적인 허용에 의해 광범위하게 전파된다. 초전불교의 기록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실크로드 지 역을 통해 직접 들어온 점에서 한국 불교문화의 색깔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교 행위 는 그에 해당하는 경전이나 기도문을 낭송하면서 이루어지므로 종교가 유입되었다는 것은 곧 그에 수반되는 율조가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1. 고구려와 서역불교 문화 한국의 불교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즉위 2년 임신년(372)28) 에 전진 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사 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것이 최초 전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전불교일 뿐 그 이전에 유입된 불교문화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하나의 예로 삼국유사 는 3세 기 중반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 여인 고도령과의 사이에서 아 도를 낳았다29) 는 기록이 있다. 아도는 5살 때 어머니의 뜻으로 출가하였다가 14살에 고구려로 돌 아와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이때는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100년 전의 일이다. 1) 무용총에서 발견되는 서역불교 문화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벽화고분은 약 95기에 달한다. 이들은 중국에 있는 것이 24기이고, 나 머지 71기는 모두 평양 이북에 분포해있다. 월명사 이전에 해당하는 3세기 초부터 7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고분 벽화는 대개 인물 풍속도, 장식무늬도, 사신도(四神圖)들이다. 수용 소화 재창조 의 과정을 거치는 문화의 속성을 볼 때, 벽화는 그 사회가 속한 문화의 실마리를 제공 할 뿐 아니 라 외래문화의 수용방식을 읽게 해 준다. 그러한 점에서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가 문화 요소의 수 용단계를 보여준다면, 50여년 뒤 출현하는 덕흥리 고분벽화의 행렬도는 소화과정을 보여주는 예이 다.30) 393년(광개토왕 3년)에는 국가의 주도로 평양에 9개의 사찰이 창건되면서 평양은 수도 집안에 버금가는 불교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 무용총 널방의 북벽 접객도(接客圖)에는 14 명의 남녀가 대열을 지어 춤을 추고 있다. 이 그림 속 사람들의 복식이 서역식인데다 무용총에 보 이는 여러 정황들이 서역 문화의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다. 28) 소수림왕 즉위 2년은 중국 동진(東晋)의 함안(咸安) 2년으로, 효무제(孝舞帝)가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29) 三國遺事 卷3, 法興, 第3, 阿道基羅條: 接我道(阿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問 曹魏人我(姓我也)堀摩奉使句麗 私 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觀堀摩 投玄影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30) 전호태,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 (서울: 사계절출판사, 2004), 23쪽.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21 고구려복식과 서역복식을 양식적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다 같이 바지와 저고리를 착용하고, 깃 이나 섶 도련 소매 끝에 다른 색의 단을 두르는 가연법을 취하며, 고깔형 모자인 변형모와 조우 관 같은 둥근 모자를 쓰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고분 연대는 이웃한 각저총과 함께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무용총의 공양행렬도는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앞서가는 사람과 그 뒤를 따르는 승려와 귀족의 복식을 통해 5세기 후반 새로운 수도 평양을 중심으로 번성 하였던 서역 불교문화를 읽게 한다.31) <그림 1> 쌍영총 공양 핼렬도32) 2) 안악고분의 서역 불교문화 황해도 안악군 일원에 있는 안악고분은 모두 돌방봉토무덤으로서 발굴 순서에 따라 1 2 3호 분으로 명명한다. 그 중에 안악3호분에는 영화30년(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甘六日)이라는 기록이 보 인다. 이는 동진(東晉)의 연호로써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 교통을 통해 동진과 교류하 며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때는 서기 357년이므로 고국원왕 27년에 안악3호분 이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벽화에 나타나는 각종 동물 관련 소재의 기원은 서역이나 북방 유목 기마민족문화에 근간을 두고 있다. 5세기 초 고구려에 정착된 이 천마상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에 신라로 전파되어 경주의 천마총으로 이어진다. 이 그림 중 고구려인과 겨루는 상대는 큰 눈과 높은 매부리코를 지니고 있어 서역인으로 판명되 었다. 이는 사찰에서 흔히 보는 사천왕이나 금강역사와 같은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생활 속에서 겨루기를 즐기는 인물인 점에서 주목된다. 이를 유추해 보면, 어떤 서역인이 고구려에 와서 살면서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았다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북중국 벽화에서는 좀처 31) 정수일, 앞의 책, 127-130쪽. 전호태, 앞의 책, 50쪽. 고고학사전,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32) http://hopergy.tistory.com/710
122 국악원논문집 제31집 럼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고구려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과 직접 교류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2>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하는 사람들33)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에는 64명으로 구성된 고취악대가 등장한다. 악대의 구성을 보면 크고 작 은 뿔나팔을 비롯하여 젓대 등 관악기를 부는 사람만 28명, 동원된 타악기도 9종에 이른다. 이러한 고취악은 한대에 서역에서 장건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것이다.34)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장건이 귀 국하면서(BC122) 많은 서역 문물을 소개하였는데, 그 중 고취악과 횡취악이라는 2종의 군악이 수 입되었다. 한편 장건이 귀국할 때에 마하토륵(摩訶兎勒) 이라는 곡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35) 여기서 마하토륵 이라는 이름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서 공히 쓰는 크다 는 의 미의 마하 와 미륵 과 유사한 토륵 으로써 인도불교와 관련된 어휘이다. 2. 백제와 서역 불교문화 백제 본기(本記)에는 제15대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어오자 그를 궁중으로 맞이하며 공경했다 는 기록이 있다. 동진에서 건너온 생김새가 낮선 외국 승려를 왕이 친히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했다는 것은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불교가 급속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그 전 부터 알고 있던 불교가 양성화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듬해 을유년(385)에 한산주(寒山州)에 절을 짓고 스님 열 분을 모 33) 정수일, 앞의 책, 126쪽에서 인용. 34) 越成, 鼓吹樂 小考, 이화여대 창립 70주년 기념 논문집,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56), 96쪽. 35) 晉書 樂誌, 橫吹有雙角, 卽胡樂也, 張傳望入西域 傳其法於西京 惟得摩訶兎勒一曲, 전인평, 비단길 음악과 한국음악, (서울: 중앙대학교출판부, 1996), 195쪽.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23 셨으니 이것이 백제 공전불교의 기록이다. 이어 아신왕(阿幸王)이 즉위한 태원 17년(392) 2월에는 백성들에게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 는 왕명을 내릴 정도로 불교가 확산되었다. 1) 천축기행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인 겸익(謙益)은 529년(성왕 4)에 인도에 다녀와서 율종을 개창하였다. 그는 인도 중부의 상가나 대율사(尙伽那大律寺)에서 범어(梵語)를 배웠다. 특히 율부(律部)를 전공 하여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하였다. 두 승려는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면서 범어 율문을 국내의 고승 28인과 함께 번역하여 율부 72권을 펴냈다. 당시 백제의 고승들은 겸익 을 도와 윤문(潤文)과 증의(證義)를 하였으며, 그 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 율에 대한 소 (疏) 36권을 지었다.36) 이때 번역한 율은 범본아담장오부율문(梵本阿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 이라 고 하는데, 여기서 아담 이나 비담 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준말이다. 성왕은 이 신역 율본을 태 요전(台耀殿)에 보관하여 널리 보급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중 국에 이미 오부율(五部律) 등 몇 종의 율부가 번역되어 있었는데도 백제가 인도로부터 직접 원 전을 가져와 번역한 사실은 한국불교가 중국 아닌 서역과 교류해온 점에서 주목된다. 겸익의 율학 으로 인하여 백제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되었는데,37) 겸익의 범자에 대한 내용은 제Ⅳ항에서 다시 논하겠다. 또한 당시 인도 불교의 최고 전당 날란다(Nalanda)사38) 에는 늘 백제 승려가 몇 명씩 상주할 정 도로 백제의 천축기행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헤초 스님처럼 견문록을 남기거나 대식 같이 미지의 세계를 탐방한 사람이 없어39) 백제불교의 실크로드 문화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가 없어 안타깝다. 2) 금동대향로 향로는 예로부터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不淨)을 없애기 위하여 향을 피웠던 도구로 인도에서는 4,000년 전부터 만들어졌고, 중국에서는 전국시대(B.C.5세기~B.C.3세기) 말 부터 만들어졌다. 중국 의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나라(B.C.206~A.D.219)에 이르는 시기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承盤) 위에 ㅗ 모양 다리와 잔(盞)모양의 몸체, 중첩된 산봉우리 모양의 뚜껑을 갖춘 박산향로(博山香爐) 가 많이 만들어졌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신선사상이 유행했던 북중국 지역과 낙랑무덤에서 발견된 바 있는 박산향로 36) 길상(吉祥) 편저, 불교대사전, (서울: 홍법원 2003), 88쪽 외 불교학 문헌 참조. 37)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서울: 신문관, 1918). 38) 인도 북부, 비하르 시 남쪽에 있는 유명한 불교 수도원으로 흔히 날란다대학이라고 부른다. 날란다의 역사는 석가모니(BC 6~5 세기)와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9)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 하, (서울: 창비출판사, 2006), 37쪽.
124 국악원논문집 제31집 는 아랍을 비롯한 서역의 향 문화를 받아들여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백제의 금동대향로는 한대 이후 박산향로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성은 무 령왕릉 출토 동탁은잔(銅托銀盞)과 왕비의 베개, 능산리 동하충의 벽화, 부여 외리 출토 무늬벽돌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금동향로 뚜껑에 장식된 조각에는 완함 피리 배소 북 거문고(?) 등 다섯 가지 악기가 새겨 져 있다. 이 중에 완함은 말 위에서 타던 서역악기로써 중국 한대까지는 비파로 불리다가 진(晉)나 라 때 완함 이라는 사람이 잘 연주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피리는 쿠자에서 기원된 관악기 이며, 배소는 북방유목민들의 관악기로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난다.40) 이 외에 타원형으로 누인 거문고 계통의 현악기와 무릎에 올려둔 북을 찾기 위하여 수년간 아시 아 지역 도상과 문헌을 찾았으나 타원형의 현악기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르 도대탑에서 금동향로의 무릎북과 비슷한 항아리 북을 발견하였다. 향로에 새겨진 북과 똑 같다고 는 할 수 없으나 이들이 불교 탑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그림 3~4> 보로부르도 대탑의 조각들41) 3) 유리 구슬 한국에서 발굴된 최초의 유리제품은 1989년 부여 합송리 돌무덤에서 출토된 남색 대롱옥이다.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구슬은 6세기 전반에 축조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 되었다. 이 유리구슬은 동남아 계통의 유리구슬로 판명되고 있어 실크로드를 통한 유통경로가 있 었을 겻이다. 이 외에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금박구슬이나 점박이구슬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 40) 정수일, 앞의 책 상권, 183쪽. 41) https://www.google.co.kr/search?q=borobudur&newwindow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25 서 실크로드를 지나 한반도로 유입된 것이다. 일본서기 권24 에는 6세기 무렵, 백제의 사신과 쿤륜 사신에 얽힌 기록이 보 이기도 한다.42) 이와 더불어 다수의 연구에 백제와 동남아와 의 교역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 불교 교류의 결과였다. 3. 신라와 서역 불교문화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가 수용한 것을 재수용하거나 중국으 로부터 전래된 서역계 문화를 수용한 것이 많다. 신라 본기(本 記 제4권)에는 제19대 눌지왕 때에 사신 묵호자(墨胡子)가 고 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경북 선산)에 이르자, 그 고을 사람 <그림 5> 백제 무령왕릉의 유리구슬43) 모례(毛禮 毛祿)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 를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시켜 의복과 향물(香物)을 보내왔는데, 묵호자가 향 의 용도와 의미를 알려주자 왕이 사찰을 하사하니 그것이 흥륜사(興輪寺)였다. 모례 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史訖)인데, 아도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삼천(三川)에 절을 지 어서 살았는데, 그 곳이 바로 영흥사(永興寺)이다. 해동고승전 에 의하면 아도가 일선군에 왔을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정방(正方)과 감구빈(減垢 玭)이 포교활동을 하다가 피살된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이전부터 불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삼국유사 에는 아도가 오기 전에 흥륜 사를 비롯하여 7곳의 가람터가 있었다는 기록44) 도 있다. 눌지왕(417-458) 때 아도화상의 전도활 동으로 신도가 늘어나기 시작하여 6세기에 이르러 법흥왕이 불교를 흥기시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혀 이차돈(異次頓,506~527)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었다. 이차돈의 순교이후 월명사 이전의 시기인 진흥왕 12년 (551)에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에 의해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 가 열린 기록45) 이 보인다. 불교의례가 대규모로 행해졌다는 것은 율조가 수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월명사 이전의 사례로써 월명사의 성범 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42) 日本書紀 卷24, 皇極元年 2月 條: 백제에서 조문차 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작년 11월에 대좌평(大佐平)인 지적(智積)이 죽었 습니다. 그 밖에 백제의 사신이 쿤륜의 사신을 바다에 밀쳐 빠뜨렸습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인숙, 유리와 고대 한국, 실크로드와 한국 문화, (서울: 소나무출판사, 2000), 217-249쪽. 43) 정수일, 한국속의 세계 상권, 101쪽. 44) 三國遺事 卷3 興法 阿道基羅: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계(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 墟: 一曰金橋東天鏡林, [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45) 三國遺事 卷3 4塔像 皇龍寺九層塔: 神曰, 皇(黃)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 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126 국악원논문집 제31집 1) 유리구슬 한국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들은 대부분 중국계의 납(鈉) 유리와는 그 성분이 달라 서방에서 온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신라 유리그릇의 기벽에 점박이를 넣은 수법은 고대 로마의 식민지였던 퀼른 지역에서 개발된 것이라는 주장이47) 있을 정도로 신라의 서역 교류 역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상상을 초 월한다. 금박이 구슬은 경주의 금령총(金鈴塚)48) 이외에 합천옥전 고분군(陜川玉田古墳群)에서도 출토되었다. 유리와 관련한 유 물은 주로 5세기 전후한 것이어서 월명사나 혜초의 서역 기행 <그림 6> 미추왕릉지구 고분 출토 구슬46) 보다 훨씬 이전의 서역문화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는 내 물왕(奈勿王, 356-402) 때 국내외적으로 도약의 발판을 구축 하였는데 이때 중국 북조로부터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실크로드 문물이 많다. 위 사진은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상감구슬이다. 원래 상감구슬은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꽃 새 같은 형상을 구슬 속에 새겨 넣은 일종의 모자이크무늬의 구슬이다. 이러한 장식무늬구슬은 대체 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앙시아아 등 서역 일원에서 일찍이 유행했던 것이다. 그 외에 여러 유적에서 나오는 금박구슬이나 점박이 구슬은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 그 기원을 두 고 있어 이들의 전달 경로를 봤을 때 신라에 번성한 서역교류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2) 실크로드의 신라인 돈황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족적을 남긴 고대 한국인의 자취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 대 당서역구법고승전 에 열거된 신라인을 보면, 승려 정관(貞關, 627-649), 돈황 벽화의 한국인 사절 (642-686), 사마르칸트의 한국인 사절(7세기 후반), 혜초(8세기 전반)가 있고, 고구려가 신라에 멸 망하자 고구려의 고선지가 중앙아시아 석권(8세기)에 기여한 것도 실크로드 지역에 활동한 한국인 으로 주목된다. 3) 경주의 서역인 경주 외동면에 있는 사적 26호 괘릉 앞에는 무인석상(武人石像)이 세워져있다.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에 세워진 무인상이 서역인이라는 점은 대부분 의견이 일 치하고 있다. 이러한 무인석상은 괘릉 뿐만 아니라 경주시 도지동에 있는 경덕왕(재위 702-736)능 46) 정수일, 앞의, 102쪽에서 인용. 47) 권영필, 렌투스 양식의 미술, (서울: 사계절출판사, 2002), 129쪽에는 이와 관련한 루트를 지도를 통해 표시하고 있다. 48)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봉토분[積石木槨封土墳].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27 과 안강읍에 있는 흥덕왕(재위826-835)능에서도 발견된다. 신라인들이 서역인 무인석을 왕릉의 외 호물로 택한 것은 장대한 위용과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적 기능을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들 돌상에 새겨진 서역인의 체격과 복식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적 묘 사는 서역인을 직접 모델로 삼았기에 가능하다는 것이 이 방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흥미로운 것 은 괘릉 무인석의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있는 복주머니이다. 서역인이 신라에 와서 신라풍의 주머 니를 차고 있는 것을 통해 신라와 서역인이 가졌던 문화적 포용성을 느낄 수 있다. 그 외에 신라의 왕릉에는 홀을 잡고 있는 서역인 토우까지 있어 신라 속의 서역인과 서역문화가 얼마나 왕성했던 가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림 7> 실크로드의 소그드인 낙타 몰이꾼49) <그림 10-11>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과 복주머니51) 49) 국립중앙박물관, 앞의 책, 19쪽. 50) 국립중앙박물관, 앞의 책, 61-63쪽. 51) 그림 8-11은 정수일, 앞의 책, 229-236쪽에서 인용. <그림 8-9> 소그드 상인들50) <그림 12-13> 용강동 돌방무덤의 토우
128 국악원논문집 제31집 위 사진의 오른쪽 두 개의 토우는 용강동 돌방무덤의 토우 중 서역인으로 판명된 것이다. 이들 의 모양새를 보면 두 손으로 홀을 잡은 서역남자(17CM)와 고깔을 쓴 남자는 모두 월명사가 활동 했던 전후의 시기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서역인이 신라에 살면서 무장이나 문관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석상과 토우에는 상당한 사실성이 투영되고 있다. 이는 월명사 가 말한 성범 이 서역풍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특수층에 의해 불리는 특이한 외래 음악이 아니라 신라에 널리 불리고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신라에는 서역 즉 실크로드 문화와 관련이 있는 호악기로 피리 횡적 소 박판 요고 동발 당비파 공후 등 여러 악기 가 보인다. 4) 신라의 유학 승려 신라의 각덕(覺德)이 중국의 남조 양나라로 건너갔다가 진흥왕 10년(559)에 양의 사신과 함께 불사리를 가지고 돌아온 것이 신라승으로서는 입당구법의 효시로 꼽히는데 이는 8세기 월명사의 기록(760년) 보다 200년 이상 앞선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승려와 일반 유학생들의 입당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후 신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약 400년 동안에 구법을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들어간 승려의 수는 수 백 명에 달하였다.52) 당시 당나라는 서역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적 번성기 를 이룬 만큼 이들은 당나라에서 불경과 더불어 다양한 서역문물을 접하였을 것이다. 고승전(高僧傳) 53) 을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승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중 신라승려가 130명에 이르러 삼국 중 압도적으로 많다. 중국인으로부터 지장왕보살로 추앙된 지장스님(金地藏)과 천태종의 제16조인 의통(義通)을 비롯해 중국인을 교화한 신라승려들의 활약 이 괄목할만 하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중국인들로부터 추앙을 받은 다수의 신라승려가 있다는 것은 중국이 아닌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서 중국 보다 앞선 불교가 있 었다 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5) 혜초의 서역 기행 혜초(慧超, 704~787)가 천축 기행을 한 것은 당시에 이 지역으로 유학승과 문물학습을 배우러 가는 일이 왕성하였던 사회 풍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혜초는 경주를 출발하여 당나라에 들 어가 인도 출신의 승려들로부터 밀교와 대승 등 여러 불학을 익히다가 723년 광저우(廣州)를 떠나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약 4년 동안 서역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727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 다. 그는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왕성(王城)의 위치와 규모 언어, 습속 종 52) 高柄翊, 慧超의 往五天竺國傳, 한국의 명저,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69), 48-49쪽. 이 글의 말미에 신라승구법입당 표 에 90여명에 달하는 입당승들의 이름과 입당 및 귀국 연도, 문헌 출처 등이 있다. 53) 중국을 비롯해, 우리나라, 일본의 불교 고승들의 전기집으로. 최초로 편찬된 것은 중국남조 양나라의 혜교가 편찬하여 14권으 로 이루어져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당초부터 6세기 초 양무제까지의 고승들의 열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론 1권과 본문 13권의 구성이다. 한국에도 통일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고승전 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29 교 특히 불교의 성행 정도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나 신라로 귀국하지는 못하였다. 혜초 또한 중국 땅에서 입적함으로써 한국의 불교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지만 월명사 당시 신라의 서역교류의 일면을 대변해 주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혜초의 서역 기행이 경덕왕(재위 742~765) 19년(760년) 경자년 4월 초하루에 있었던 월명사의 성범 에 관한 기사 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당시에 신라 는 실크로드 교역이 활발했고, 서역인이 경주에 상주하였고, 신라의 사신과 승려들이 실크로드를 오가며 그 지역 불교문화를 왕성하게 배워왔으므로 서역풍 범패 또한 신라에 널러 퍼졌을 것이라 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왕이 월명사에게 범패를 불러 달라고 했을 때 성범 을 모른다는 대답을 먼 저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에 신라에 서역 혹은 범어범패가 널리 불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월명 사는 향가를 불렀다 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6) 최치원의 향악 잡영오수 최치원(崔致遠, 857~?)은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헌강왕 11년(885년) 3월54) 에 중국 회남 (淮南)에서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886년(정강왕 1)향악잡영오수라는 시를 써서 왕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삼국사기 의 악지 55) 와 계원필경(桂苑筆耕) 에 전한다. 이때 신라 오기(五伎)의 모습 을 읊은 칠언시 5수를 일컬어 향악잡영오수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담긴 기예들 대부분이 서역에 서 들어온 것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최치원은 월명사 보다 후대의 사람이므로 월명사의 성범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본고에서 주목 하는 것은 서역에서 유래한 기예를 향악 이라는 이 름을 붙인 점이다. 학계에서는 향악잡영오수 중 월전(月顚) 은 서역 의 코탄(于闐), 산예(狻猊)는 쿠자(龜玆)에서 전래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예(사자무)의 기원은 인도와 페르시아의 두 가지로 갈린다. 그 중에 인도 기원설을 보면,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왕이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건립한 사자석주(獅子石柱)에서 사 자가 석가모니를 수호하는 신수(神獸)로 사용된 유 적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자무가 천축국(인도)과 사자국(스리랑카)에서 행해지다가 불교 전파의 길 을 따라 쿠자를 거쳐 장안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다.56) 금을 칠한 공을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금환 54) 三國史記 권11. 14a 55) 三國史記 권32 11ab 樂志, 新羅樂. <그림 14> 혜초 향악잡영오수가 기록된 원본
130 국악원논문집 제31집 (金丸), 가면무로 술잔을 들고 춤 추는 월전, 역신을 쫓던 대면(大面), 무인들이 봉황춤을 추는 속독 (束毒) 또한 신라 때 쿠자나 허텐, 소그디아 등지의 잡기들이다.57) 서역에서 들어온 기예들을 향 악잡영 이라고 한 점에 미루어 보면, 당시 서역문물이 신라에 들어와 향악화되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최치원이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이와 같은 시를 바친 점에서 향악 이 서역의 향악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튼 이 당시 서역에서 들어온 성범 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상 월명사 이전에 들어와 성범 의 전파에 영향을 미친 한반도의 서역교류 내용을 연도별로 정돈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월명사 전후 실크로드 교류의 역사 기 원 전 기 원 후 200 흉노의 한 침입 139 한나라 장건의 비단길 개척 122 장건이 귀국하면서 서역의 고취악(마하토륵) 유입 무캄으로 연결 284 신라의 제13대 미추왕릉 (재위 262~284)의 서역 유리 구슬 356 내물왕(奈勿王, 356-402)대 신라 번성과 문화의 도약 발판 372 고구려 소수림왕대 불교 공전(公傳)/ 100년 전 초전(初傳) 375 안악 3호분은 고국원왕 27년 다양한 서역 문화가 묘사됨 384 4C말-5C초 침류왕이 즉위한 해에 인도의 마라난타스님, 백제 불교 공전(公傳) 고구려 무용총과 기타 고분의 서역 문물 서기 357년 안악 3호분 조성. 393년(광개토왕 3년) 쌍영총의 공양행렬도 5C말-6C초 신라로 전파(경주 천마총) 417- 눌지왕대(417-458)에 고구려 승려 묵호자에 의해 신라 불교 초전 6C초 백제 무령왕릉의 유리구슬 신라 금령총 금관, 유리 용기, 기마 인물 토기 521 법흥왕 8년 이차돈 순교 후 불교 공인 627 신라 승려 (정관貞關, 627-649), 돈황 벽화의 한국인 사절(642-686), 사마르칸트의 한국인 사절(7세기 후반) 628 신라승 원측과 그 제자들의 당나라 유학과 범어관련 저술58) 642 돈황 벽화의 한국인 사절(642-686) 56) 李進新, 新疆宗敎演变史, (中國: 新疆人民出版社, 2003), 103-107쪽. 박진태 엮음, 실크로드의 예술, (서울: 도서출판 박이정, 2008), 91쪽 등 참고. 57) 정수일, 앞의 책 상권, 227쪽. 58) 원측(圓測, 613-696)은 일찍이 당으로 유학하여 般若心經疏 를 비롯하여 다수의 저술을 하였고, 그 가운데는 64종 범음(梵音) 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원측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 승장(勝莊: 651-714)에 의해 이 당시 신라의 실담범자(悉曇梵字) 유입 배경과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기 원 후 702 고구려 후예 고선지의 중앙아시아 석권(8세기 전반) 33대 경덕왕(재위 702-736) 19년(760년) 월명사의 성범 괘릉의 서역 무인석상, 용강동 돌방 무덤의 토우 (서역인) 720 혜초(慧超, 704~787) 723년 중국 광주 출발 천축으로 이동 760 경덕왕 19년 월명사가 성범을 모른다고 함. 830 진감국사 귀국, 당풍범패 유입 834 신라 흥덕왕, 서역 문물에 의한 사치 금지령 내림 840 장보고, 당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의 중심 역할 885 최치원의 귀국, 이듬해(885) 향악잡영오수 바침 1100 이슬람교도의 인도 침입 시작, 인도에 불교가 사라지게 됨. 131 Ⅳ. 범어의 한반도 전래와 유통 월명사의 성범 이 범어범패라면 그와 관련되는 가장 직접적인 매개는 범어 이다. 범어는 석가 모니의 모국어인 마가다어와 인도의 고전어였던 산스크리트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사용한 언어는 그의 출신지인 마가다를 포함한 북인도 지역의 속어로써, 오늘날 이를 팔리어 로 칭하고 있다. 팔리어는 석가모니 입멸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구전되었으므로 당시 방 언의 흔적이 경전에 남아있고, 이들은 미얀마와 태국 등지의 남방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59) 팔리어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일찍이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불전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진보적 성향의 대승불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중국과 한국 등 동북아 지역에는 산스 크리트어인 실담(悉曇)이 전해졌다. 실담(Siddham) 은 굽타 문자 이후의 인도 문자로, 어원을 보 면, 완성된 의 시다(siddha) 와 문자 라는 뜻의 마트리카(mātŗkā) 가 합성된 싯담마트리카 (Siddhamātŗkā)이다. 이를 좀 더 쉽게 풀이하면 깨달은 자 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시다 로 인하여 시다르타의 언어 로 풀이 할 수도 있다.60) 1. 범어의 한반도 전래 범어는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로 여러 불경 속에 진언을 적은 문자와 함께 유입되었으므로 삼국시대부터 범어가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61) 진언(眞言) 혹은 다라니로 번역되는 만트라 (mantra)는 신성한 사상을 담는 그릇 이라는 범어에서 유래하여 주(呪) 밀주(密呪) 신주(神呪) 59)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저, 동아시아 불교의식과 음악, (서울: 민속원, 2013), 혹은 한국음악연구 제51집, (한국국악학회, 2012)에 실린 졸고, 팔리어 송경 율조와 범패 참고 바람. 60) 본 범자의 원리와 사상에 관해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준 강대현선생과의 대담. 61) 이태승, 망월사본<眞言集凡例>에 대한 연구, 한국어학 제19집, (한국어학회, 2003), 208쪽.
132 국악원논문집 제31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한자로 된 범패 가사들은 불보살을 칭탄하는 뜻에 집중된 것에 비해 범어로 된 진언은 소리 나는 음에 집중하여 지송하므로써 신통력을 발휘하는 기능이 있다. 앞서 백제의 서역문화에서 예시하였듯이 백제의 침류왕 원년(384)에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들 어 왔으므로 범어와 관련한 불교는 백제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526년 무렵 겸익(謙益)은 인도 20여부파의 계율을 기록한 사분율(四分律) 범본(梵本)을 직접 번역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현장 (玄奘)62) 이나 의정(義淨)63) 보다도 100년이 앞선 시기이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 백제는 6세기부터 실담범자를 접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수행과 신앙도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범자와 관련한 역사적 전개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중국이나 일본의 문헌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문헌에서 구체적인 내용들이 보이는데64), 범자와 관련하여 거론되는 승려들로는 백제의 관륵(觀勒, ca7c) 고구려의 혜관(慧灌, ca7c) 혜편(惠便, 6-7c), 신라의 원초 (圓超, 560-656: 원측의 제자) 불가사의(不可思議, ca700-770) 승장(勝莊, ca651-714)등이 있 으나 지면 관계상 이들의 내용은 생략하고,65) 일본에서 발견되는 실담 저술에 관한 승려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2. 통일신라의 범어 유통과 신행 한반도에 범어가 전래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승려들이 일본에 범어를 전해준 기록들이 다방면에서 발견된다. 입당구법순례행기 를 쓴 원인자각대사(圓仁, 794~864)는 당나라 순례 기 간 동안 신라인의 도움으로 많은 성과를 이루었고, 귀국 이후 일본 천태종의 시조가 되었다. 산동 적산원에서 신라인의 불교의식을 자세히 기록하므로써 한국에도 친숙한 그에게는 안연(晏然) 이라 는 제자가 있었다. 안연은 어려서 원인의 제자로 출가하여 19세에 보살대계(菩薩大戒)를 받았고, 884년 무렵 44세 였다는 기록에 미루어 841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엔닌과 문하의 여러 승려들로부터 불학 의궤 및 실담을 전수 받은 후 여러 저술을 펴냄으로써 일본 태밀(台密)의 집대성자로 꼽힌 다. 이들 저술 중 悉曇梵字 8卷에는 한국 승려들의 범어 관련 활동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신라인이었던 김예신(金禮信)이 일본에 전한 오음(吳音), 신라승 월충(月忠)이 62) 현장(602-664)은 629년부터 645년 사이 서역의 那揭羅曷國(Nagarahara) 등 약 138개국을 직 간접 견문한 후 그 나라의 풍 토와 관습 등을 정리하여 大唐西域記 ( 大正藏 51,876c09-14)를 펴냈다. 63) 의정(635-713)은 현장의 大唐西域記 에 자극을 받아 인도로 건너가 20여년간 수학하였다. 그의 南海寄歸內法傳 ( 大正藏 51,01a25-27)에는 당시 인도 등지에서 유행했던 범어의 체계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여 현장 에서 일보 전진한 성과를 거두었다. 64) 한국 뿐 아니라 중국 대만 베트남 등, 동아시아 지역 불교학 분야의 많은 연구들이 일본의 사료와 연구자료에 근거해서 이루 어지고 있다. 범자와 관련한 한국 학자의 연구는 이태승, 중국에서의 悉曇學 形成에 대하여, 密敎學報 제2집, (2000). 智廣 의 悉曇字記 硏究, 密敎學報 제3집, (위덕대학교 밀교문화연구원, 2001), 211-238쪽. 이태승 안주호 공저, 悉曇字記와 望月寺本 眞言集 硏究, (서울: 글읽는들, 2004); 강대현, 安然의 悉曇藏 에 나타난 東아시아 佛敎家의 悉曇에 관한 硏究, (경주: 위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외 다수. 65) 보다 자세한 내용은 강대현, 앞의 논문, 149-160쪽 참고 바람.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33 지은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 에 나타나는 위작자(僞作字)로서의 육근진언, 그리고 백제승려 혜 균(慧均)이 지은 사론현의기(四論玄義記) 중 십사음의(十四音義) 에 나타나는 오십자문(五十字 門) 등이다. 혜균은 삼론종의 승려로 일본에서 승정(僧正)을 지낸 인물이다. 6세기 중엽부터 7세기초엽까지 왕성한 활동을 한 혜균은 법랑에게서 十二門論 66) 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때의 12문은 범자의 종 자(種字)를 이르는 말이다. 기본 종자인 12자는 여러 체언을 만나 또 다른 자로 파생되는데 이들은 42자에서 51자에 걸쳐 있다. 한글대장경 화엄경 입법계품 에는 42화엄자모 로 보살도를 이룬 선지중예동가 범어 하나하나가 해탈로 들어가는 문(門)이 됨을 설하고 있고,67) 혜균이 사론현의 기 전 12권을 백제의 보희사(寶憙寺)에서 찬술하였다는 주장68) 에 비추어 볼 때, 6~7세기 한국의 범자 유통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안연은 중국어 성조에 관하여 기술하면서 범자의 음과 한자음과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이를 전한 인물 다수를 들고 있는데, 그 중에 신라인 김예신이 등장한다. 당시 안연은 김예신의 성(性)만 거명하였는데 후에 정엄(淨嚴)이 그의 저술 삼밀초( 三密鈔) 에서 김예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 일본에는 원래 오(吳)와 한(漢)의 이음(二音) 을 전하였다. 처음에는 김예신이 대마국(對馬國: 현재 대마도)을 거쳐 본국으로 와서 오음을 전하 여 배웠고 후략 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여기서 김예신이 전한 오음 은 범어를 이르는 것으로, 그 내용에 관한 연구가 한국 학자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69) 본고에서 중요시 하는 것은 김 예신이라는 인물과 신라의 범어 유통 상황, 나아가 월명사의 성범과 관련한 시기이다. 일본 역사에 서 대마도 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한 때는 문무천황 5년(701)부터다. 이 사실에 미루어 볼 때, 김예 신은 적어도 그 이전에 일본에 오음을 전하였을 것이고, 이는 월명사 보다 훨씬 이전에 범어에 관 한 체계적인 이해와 사상적 유통이 신라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월충이 저술한 석마하연론 은 대승기신론 의 주석서로, 진언 및 다라니 신앙의 생생한 일면이 느껴지는 대목이 담겨 있다. <표 2> 월충의 석마하연론 중 범자와 신행 (於呼反) (那閬反) 66) 범자의 종자는 아 자로 시작하여 5모음과 12모음으로 분파되며 이들은 각 모음(摩多)의 장단과 관련이 있다. 상세한 내용은 강대현, 悉曇字記에 나타난 12摩多와 그 音의 長短에 대하여, 불교학연구 제37호, (불교학연구회, 2013), 참고. 67) 윤소희, 화엄자모와 범어 범패, 한국음악연구 제55집, (한국국악학회, 2014); 화엄자모와 21세기 불교음악, 동아시아불 교문화 제22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5). 68) 최연식 校註, 校勘 大乘四論玄義記, (서울: 불광출판사, 2009). 69) 강대현, 安然의 悉曇藏 에 나타난 東아시아 佛敎家의 悉曇에 관한 硏究 외 다수. 70) 釋摩訶衍論, ( 大正藏 32, 660a20-28).
134 국악원논문집 제31집 ( 伊 因 反 ) ( 毘 入 反 ) 위와 같이 신주를 만 팔천 사백 오십 번 외우고 나면 심량( 心 量 )이 완전하게 구족되어 요달하지 못할 바가 없다. 70) 월충의 석마하연론 은 계명( 戒 明 ca8~9c)이라는 승려에 의해 전파되어 진언종의 근본 논장이 되었다. 계명이 8~9세기 인물인 점에 미루어 볼 때, 월충은 적어도 779년 이전에 이 저술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월명사의 성범 에 관한 기록 보다 다소 뒤의 일이지만 이러한 범자 신행 을 일본에 전했다는 것은 훨씬 이전부터 이와 같은 진언신앙이 신라 본토에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신라 범자의 현존 실체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부구정광다라니경 은 그 제작 시기가 706~751년 간의 것71) 으로 월명사의 성범 에 관한 기록 보다 50여년이 앞선다. 경상북도 금릉군 남면 오봉리 금오산 서쪽 기 슭에 있었던 갈항사( 葛 項 寺 )에서도 범자 진언이 발견되었다. 동서삼층석탑과 함께 75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범자의 내용은 불모( 佛 母 )인 준제( 準 提 )께 바치는 진언으로 한국 실담의 원형 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 15> 갈항사 범자 진언 72) 71) 남권희, 한국 기록문화에 나타난 진언의 유통, 밀교학보 제7집, (위덕대학교 밀교문화연구원, 2005). 72) 이에 관한 내용은 http://blog.daum.net/kelim/10826062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35 닥종이에 가는 붓으로 나선형 동그라미 사이에 쓴 범자는 원래 26자이나 지금은 24자 정도를 읽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 신행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천수경 을 보면, 5언8구의 준제주 게송을 왼 후 나무칠구지대준제보살 이라는 진언으로 넘어간다. 준제주는 공덕 크니 일념으로 염송하면 세상 어떤 어려움도 침해하지 못하리라. 천신들과 사람들이 여래처럼 복받으며 여의주를 만났으니 크나큰 복 얻으리라 73) 는 준제진언 게송의 내용을 보면, 신라 사람들과 오늘날의 신행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외에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망월사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진 언집범례(眞言集凡例)> 등 범자 신앙에 대한 여러 자료가 있으나 이는 연대상으로 본고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생략하겠다. Ⅴ. 월명사의 성범 과 범어범패 1. 월명사와 시대적 배경 월명사는 신라 경덕왕 대의 승려이자 화랑으로 능준대사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에 스 승 사(師)자가 붙은 것은 왕가와 친밀한 엘리트로써 국선(國仙)까지 지냈던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륵이 화랑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미륵하생신앙을 믿었으며, 제망매가(祭亡妹歌) 도솔 가(兜率歌) 를 지을 정도로 향가에 능했고, 이들 노래와 관련한 이적(異蹟)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 아 수행력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명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화랑의 세력이 다소 약화된 시기였으니 이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사회적 안정과 왕권 세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경덕왕 재위 시절은 당나라의 불교문화가 절정 을 이룬 때였고, 당과 연합하여 통일을 이룬 만큼 적극적인 사대(事大)를 하였다. 이 무렵 중국에는 조식(曹植 192~232)에 의해 창제된 한어범패가 만들어져 당풍 범패가 불리고 있었고, 당나라와 활 발한 교역을 하였던 당시 상황을 볼 때, 당풍 범패가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2. 월명사의 성범 과 신라의 불곡(佛曲) 한편 월명사가 부르지 못했던 성범 에 대하여 두 가지의 가능성을 열어 볼 수 있다. 먼저 향가 만 알뿐 성범은 모른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성범 은 일반적인 향가풍 노래가 아닌 전문 불 곡이었을 가능성이다. 월명사가 불렀던 향가는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불렀던 점에 미루어 볼 때, 73) 準提功德聚 寂靜心常誦 一切諸大難 無能侵是人 天上及人間 受福如佛等 遇此如意珠 定獲無等等 한정섭, 천수경 강의, (서울: 이화문화사, 1996). 우천 법안 편저, 천수경 정근법, (서울: 정우서적, 2008).
136 국악원논문집 제31집 서정 가곡의 향가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신라풍의 불곡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명사는 제망매가 와 도솔가 를 지어 부를 정도로 향가에 능했는데 향가풍의 범어범패라고 못 부른다고 했을 가능성 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월명사가 부르지 못한 성범 은 신라의 향가풍이 아닌 외래풍의 불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외래풍의 불곡이라면 한어범패와 범어범패의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월명사 당시 중국에는 이미 조식에 의한 한어 범패가 있었고,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신라에 조식의 어산 범패가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음성 본연의 뜻을 중시하던 인도범패에서 찬사(讚詞) 의 뜻을 중시하게 된 한어범패의 성격74) 을 생각해 볼 때, 재앙을 물리치고자 했던 목적과 잘 맞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듯 오늘날 한국에서 불리는 한어범패 가사는 대개 법을 설하거나 불보살을 찬 탄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월명사가 부르지 못한 성범 은 당풍의 한어범패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범어범패이다. 두 해가 나타난 재앙을 물리치려고 한 상황에 미루어 볼 때, 월명사가 부르지 못한 성범 은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어범패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여 기서 따져봐야 할 점은 그 범어 범패가 중국풍이었는지 실크로드 혹은 인도풍이었는지에 대한 것 이다. 중국의 한어 범패가 생겨난 이유는 한어가사와 본래의 범어 선율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에 전해진 후에도 범어를 그대로 노래한 범어범패는 인도에서의 원형대로 부르거나 읊는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크로드와 중국 초전불교의 전개 과정을 살펴 볼 때, 이 지역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수백 년이었고, 한국 초전불교 시기부터 통일신라 당시까지 수백년이 흐른 뒤였다. 그러므로 인도풍의 선율이 신라시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월명사가 부르지 못한 성범 은 실크로드지역의 색깔과 신라의 향토적 색깔이 다소 가미된 인도풍의 범패였을 가능성이 높다. 3. 월명사의 성범 과 범어범패 중국 초기불교의 승려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 유랑승이 많았다. 당시 유랑승들은 다라니와 진 언을 노래하며 신통력을 부리고 반복되는 묘사적 어휘로 민중을 사로잡았다. 다라니와 진언으로 주술을 부리는 승려들의 신통한 능력에 매료되었던 일화들을 보면, 경덕왕이 왜 월명사에게 노래 를 부르게 하여 재앙을 물리치려 했는지 이해가 간다. 그때 월명사에게 부탁한 것은 초기 중국 유랑승들이 그랬듯이 주술(呪術)적 범패로 신통력을 발휘해달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즈음도 한국 사찰에서는 범어로 된 다라니를 외면서 액(厄)과 마(魔)를 물리치는 신행이 행해지고 있다. 주력신앙과 관련한 밀교의 전개 과정을 보면, 초기밀교는 다라니의 염통공덕(念通功德)으로 제 화초복(除禍招福)을 목적으로 하고, 중기 밀교는 대승사상을 상징적인 의례로 조직화하고 실천하 74) 高雅俐, 佛敎音樂 傳統與 佛敎音樂, 佛敎音樂, (臺灣: 佛光山文敎基金會, 1998), 34쪽. 音聲. 力量的中視則不再像原始佛敎時期那樣地强調
월명사의 성범(聲梵)에 관한 연구 137 였으며, 후기 밀교는 탄트라와 관계한 각 시대별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중 제화초복을 주력하는 초기밀교는 3세기 전 부터 한역되기 시작하여 병의 치료나 주술, 불노불사의 도술(道術) 음양오 행 참위술(讖緯術) 신선술(神仙術) 귀신신앙(鬼神信仰) 방술(方術) 등이 실크로드를 포함한 중국에서 널리 유행되었으므로 한국의 불교수용과정에도 이러한 면이 강하게 부각되었다.75) 밀교적 신행을 수행하는 다라니나 진언은 의성어 의태어를 비롯하여 반복되는 패턴의 단어가 많다. 현재 한국에서 암송되는 천수다라니나 능엄주를 비롯하여 한자 게송 끝에 외는 진언도 이러 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유화승들은 교리 보다는 민중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음악을 바탕 으로 하는 또 다른 언어 예술을 주문(呪文)과 섞어 노래하니 진언이 지니는 본래의 신비성이나 주 술성은 약화되고, 흥미와 오락성으로 전락하고 있다 고 지적하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오 늘날 한국의 재장에서 범어 가사를 노래하는 순서에 이르면 한어 범패와 달리 템포가 빨라지고 법 구를 신명나게 치며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범어 범패의 이러한 율조들은 월명사 당시부터 있었던 대중 친화적 유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4. 서역문화와 신라의 가무 일반적으로 호악 이라 불리는 서역음악의 전래는 한 대(漢代)에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시대에 지 속적인 확대과정을 거쳐 수 당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들 중 고취곡(鼓吹曲)은 대부분 서역 악곡이었는데 이들은 송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사(舊曲新詞)와 함께 전승되어 왔고, 여기에 불 교적 음조나 호어(胡語 서역언어)가 혼합되어 있었다.76) 한편 북주의 무제(武帝, 543-578)는 돌궐 녀를 왕후로 맞은 후 서역 제국과의 친교가 이루어지자 쿠자 소륵 안국 강국 등 악사들이 대 거 활동하였고, 남북조 시대에는 서역에서 유입된 악무를 통칭 산악(散樂) 혹은 백희(百戲)라고 하 였는데 산악의 종류는 수백 종에 달했고,77) 이들과 연결되는 것이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였다. 오늘날 서역, 즉 실크로드 지역을 대표하는 신장위구르의 무캄(무카무)은 기악과 무용음악의 종 합이자 여러 곡을 이어서 연주하는 투곡(套曲)78) 형식이다. 중국과 대만의 범패 중 화엄경에 실려 있는 범어 가사의 종자(種字)를 노래하는 화엄자모 범패 또한 투곡식이다.79) 한편 장건이 귀국할 때 가져왔다는 무캄 에 대해 북경민족대학의 구안예웨이(關也維)교수는 무카무(木卡姆)는 마하토 륵(摩訶兜勒) 이라는 음악에서 확대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80) 무캄의 영역은 워낙 방대하여 본고에 75) 76) 77) 78) 79) 장익, 인도 밀교의 형성과정, (경주: 한국불교학회 동계워크숍 발표 논문집, 2015), 15쪽. 馬端臨, 文獻通考 卷129 樂 2. 정수일, 앞의 책, 438-444쪽. 홍주희, 중국 신강 위구르 무캄, 한국음악사학보 제36집, (한국음악사학회 2006), 195-201쪽. 袁静芳, 中国汉传佛敎音乐文化, (北京: 中央民族音乐出版社, 2003), 79쪽. 기원후 1세기 무렵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화엄경 중에 화엄자모는 마가다어 즉 팔리어로 된 것으로 석가모니의 모국어이다. 윤소희, 화엄자모와 범어 범패, 한국음악연구 제55집, (한국국악학회, 2014), 179쪽. 80) 권오성, 실크로드 지역 무카무의 음악적 특징, 실크로드의 예술, (서울: 도서출판 박이정, 2008), 206쪽.
138 국악원논문집 제31집 서 이를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항에서는 마하토륵 은 인도의 범어와 관련 이 있고, 초전불교가 성했던 지역적 특성을 지닌 사실만을 언급하겠다. 5. 서역 불교문화와 한국음악 2소박을 주된 근간으로 하는 일본과 중국에 비해 3소박이 주된 패턴을 이루는 한국 전통음악은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그리고 신장지역의 음악과 더 가깝다. 필자는 우즈베키스탄 보이순에서 열리는 민속축제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부분의 음악이 3소박 이었다. 또한 노래하고 춤추 는 여인들이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린 모습을 비롯해서 그들의 생김새 등 한국과 많은 친연성이 보였다. 한국의 전통음악이나 민속음악 중 긴 악곡은 대개 느리게 시작하여 점차 빨라지는 틀을 지니고 있다. 영산회상과 산조와 같이 느리게 시작하여 점차 빨라지는 것은 인도와 실크로드 지역에서 공 통적으로 발견된다. 인도불교의 면모를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스리랑카에는 밤새도록 찬팅을 노 래하는 철야법회가 성행하는데 여기서 불리는 마하빠리따도 이런 흐름이었다. 특히 인도 라가가 무박의 알랍으로 시작해서 본 곡으로 접어드는 것은 한국의 산조가 다스름으로 시작해서 점차 빨 라지는 것과 흡사하다. 중국과 대만을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염불류 범패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염불은 대부분 느리게 시작해서 점차 빨라진다. 실제로 염불의식에 참여해 보니 느리게 시작해서 점차 잦아 든 후에 좌선으로 접어드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의식과 수행법은 불교문화권에 널리 쓰이는 방식 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의 영산회상이나 산조가 갖는 음악적 틀은 불교 수행법에서 생겨난 염불 과 관련성이 있다. 81) Ⅵ. 맺음말 본고는 월명사가 못 부른다던 성범( 聲 梵 ) 의 실체를 찾아서 범자의 한반도 유입과 유통 상황을 파악하였고, 그와 관련한 문화유입의 경로를 따라 서역 불교문화와 음악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 과 정에서 중국의 초전불교 당시 서역 유랑승들이 부르는 주어( 呪 語 )와 주문( 呪 文 ) 범패의 신통력이 대단하였으며 범어가 지닌 묘사적 율조의 유희성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 히 범어범패가 지닌 신통력은 경덕왕이 이변( 異 變 )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던 상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81) 느리게 시작해서 점차 빨라지며 빙글빙글 도는 이슬람의 수피댄스를 보면 느린 음악에서 점차 빨라지는 틀은 세계 보편적 종교음악 현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월명사의 성범( 聲 梵 )에 관한 연구 139 월명사가 활동한 시기는 조식에 의해 창제된 한어범패가 생겨난 이후였고, 당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했던 당시 상황에 미루어 볼 때 월명사가 부르지 못한다던 성범 이 당풍범패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찬탄의 뜻이 중요한 한어범패를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불러달라고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에 비해 당시 통일신라에 유통되던 주력( 呪 力 )신앙과 서역교류의 면면을 볼 때, 월명사가 부르지 못했던 성범 은 진언이나 다라니 같은 범어범패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3세기 전 부터 한역되기 시작하여 병의 치료나 주술, 불로불사의 도술( 道 術 ) 음양오 행 참위술( 讖 緯 術 ) 신선술( 神 仙 術 ) 귀신신앙( 鬼 神 信 仰 ) 방술( 方 術 ) 등이 실크로드를 포함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한 뒤 한국 불교로 수용된 사실이 뒷받침되고 있다. 또한 백제의 겸익은 중국의 현장 보다도 100년이나 이른 시기에 범본( 梵 本 ) 경전을 번역하였고, 삼국의 승려들이 일본에 전한 범어 수행과 범자 관련 저술을 보더라도 이러한 정황 추정이 자연스럽다. 비슷한 시기에 최치원은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놀이와 기악을 향악 이라는 이름을 붙여 잡영오 수 라고 했다. 이는 서역의 가무와 오락이 신라에 뿌리내린 일면을 짐작케 하는 대목으로써 서역의 범어범패가 신라에 왕성하게 소통되고 있었음을 추정하는 간접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왕이 범 패를 불러달라고 했을 때 성범 을 부르지 못한다는 말을 먼저 했던 것이다. 한어와 범어의 선율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범패가 창제되었던 것에 비해 범어범패는 본래의 선율을 그대로 노래할 수 있었음을 감안해 볼 때, 범어범패는 인도풍 율조와 리듬을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본래의 범어율조라 할지라도 실크로드와 중국 서방에 머물러 있었던 기간이 수백 년이었고, 통일신라 까지 한반도에서 보낸 기간도 수백년이었다. 이러한 시간적 경과를 볼 때, 인 도풍의 선율이 유지되면서도 지역적 변화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월명사 당시의 범 어범패는 실크로드지역의 색깔과 신라의 향토적 색깔이 다소 가미된 인도풍의 범패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초전불교 당시 중국 서부를 포함하는 실크로드 지역에 오락적인 흥미로 범어범패의 인 기가 많았는데, 이는 오늘날 법기반주와 함께 흥겹게 노래하는 한국 범어범패와도 닮아서 앞으로 이 방면의 연구가 기대된다. 더불어 범어 경전을 한역하는 과정에 한어 성조가 규정되었고, 중국의 제례음악과 궁중 악가무 에 이르기까지 인도 불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중국 음악이론의 근저가 된 삼분손 익, 정악과 아정함의 개념 변화, 불경의 게송을 노래하는 궁중음악, 수대의 7부기와 9부기에서 당 대의 10부기까지 서역음악을 제외하고는 중국 궁중음악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편, 신라의 불상과 사찰유물을 보면 대부분 간다라양식인데, 실크로드 지역 중 간다라문화를 많이 받아들인 곳은 코탄이므로 인도와 고탄, 경주로 이어지는 문화추적에서 또 다른 연구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음악 뿐 아니라 서역과 한국의 일반 음악도 막역한 관계가 있음에도 그간 이 방면의 연구가 매우 빈약하다. 앞으로는 불교학과 고고학 등 다방면의 분야와 교류하여 연구 성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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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사의 성범( 聲 梵 )에 관한 연구 143 82) A Study on the Mantra chants of the Unified Silla era -Through researching the Buddhist culture of Silk Road- Yoon, Sohee* One day during the reign of King Gyeongdeok (742-765), two suns risen up. The King thought of it as an evil omen. So he ordered Ven Woulmyung to redress it with Buddhist chants. Then monk Woulmyung said I can't sing Sungbeom ( 聲 梵 ). I can only sing Hyangga (Silla native style songs). And so I wonder what kind of Sungbeom chants Monk Woulmyung could not sing. In fact, the word Beom means India, Mantra or Brahmā, I think the songs may have been Mantra chants. That period was in the early days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when trade was brisk through the Silk Road. At that time the main goal of the Silk Road trade was to disseminate Buddhism and Buddhist culture. Previously there had been some wandering monks who came from India or middle Asia in the early Buddhist days of China and the Silk Road. There are some records relating how wandering monks enjoyed a certain popularity, due to the magic power or the amusements of Mantra chanting. King Gyeongdeok, demonstrating his awareness of this power, consequently asked Ven Woulmyung to sing. Even though he declined to sing, it shows how mantra chants of Silk road area s or Indian style were popular at that time in Silla. Until now many Korean Buddhists have recited the mantra as incantation of belief and the mantra chant is sung with jolly rhythmical percussion accompanying the traditional Buddhist ritual, in contrast with the slow melisma melody of the Chinese lettered Beompae. This, I believe, is related to the custom of Silla mantra chanting. [key words] Woulmyungsa; Sungbeom; Mantra chants; Silla Beompae; Buddhist chants on Silk Road. 투고일 심사일 게재 확정일 2015년 4월 9일 2015년 5월 22~6월 20일 2015년 6월 22일 ** A Lecturer in Pusan National U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