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제도 의 도입이라는 제도적 측면, 귀속재산의 불하라는 자본축적의 측면, 노동자의 양성이라는 인적자원의 측면, 성장지향형 국가의 연속이라는 정책적 측면 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중 소기업 또는 중소공업을 소재로 하여 기업가의 성장 또는 특정 지역에의 특정 산업의 집적 등을 탐구한 것은 별로 없었다. 본고는 직물업을 대상으로 하여 식민지기에 특정지역에서 중소공장들이 발흥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직물업은 대표적인 중소공업이며 1950 년대의 수입대체, 1960년대의 수출 지향공업화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제국 경제의 틀 속에서 조선의 직물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았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성장의 씨앗이 자라났고 해방 후 변화한 경제환 경 속에서 크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직물업 역시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와 마 찬가지로 특정 지역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오늘날에도 섬유도 시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대구이다. 대구에 직물업이 집중한 배경 그리고 그 과정은 纖 維 技 術 振 興 院 (1990) 에도 어느 정도 묘 사되어 있다.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며 설명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조선 경제 전체( 나아가 일본 제국 경제 전체) 의 변화 속에서 대구 직물업의 성장을 위치지으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 전체의 1930 년대 직물업에 대한 연구로는 木 村 光 彦 (1983), 權 赫 泰 (1997) 를 들 수 있다. 木 村 는 1930 년대에 영변, 안주, 대구 등지에서 소규모 직물공장 들이등장한사실은발견하였지만같은시기일본에비해서그수가매우적다는데의미를 두었다. 權 赫 泰 는 전시통제기에 상대적으로 원료를 구하기 쉬운 견직물업에서 중소 공장들 이 등장한 사실에 주목하였지만 본격적인 전시통제기 이전에 있었던 변화는 다루지 않았다. 2. 식민지기 조선의 직물 공장수의 추이 직물 생산은 면방직공장의 겸영직포를 제외하면 대개 중소 규모의 공장들에 의해 이루어 진다. 제품의 종류가 많고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어 생산품을 바꾸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민지기 조선에서는 1930 년대 중반까지 중소 직물 공장이 별로 많지 않았다. 대신 농가의 부업 생산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견직물과 마직물에서는 그 비중이 압 도적이었다. 농가에서 생산가능한 직물은 자급자족적으로 생산하여 소비하고 그렇지 못한 직물은 주로 일본으로부터의 이입에 의존하는 체계에서 중소 공장이 끼어들 자리는 그다지 많지않았다고할수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30 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림1은 식민지기 직물 공장수의 추이를 보인 것이다. 공장의 기준이 때때로 바뀌었지만 모두 5인 이상의 직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1-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추이를 보는 데 문제는 없다. 1930년대 이후의 직물공장 수를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굳이 조선공장명부의 것을 이용한 까닭은 산업조합 등의 공동작업장을 제외하기 위해서이다. 공동작업장은 1934년도부터 대거 공장 명부에 편입되는데 다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공동작업장도 기준만 맞는다면 공장으로 파악 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1. 조선의 직물공장수, 1918-1940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조선공장명부 주1) 1922-28 년간의 수치는 관영공장을 제외한 것이다. 2) 1930 년 이후의 수치는 공동작업장을 제외한 것이다.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1918-22 년간의 증감, 그리고 1934 년 이후의 증가이다. 앞의 것은 제1 차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일본 경제의 이른바 大 戰 景 氣 와 反 動 恐 慌 이 경성의 직물업에 미친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1) 본고가 주목하는 것은 뒤의 것, 즉 1930년대 중반 이후 직물 공장수가 뚜렷한 증가 경향을 보인 것이다. 비록 증가한 결과도 같은 시기 일본 의직물공장수에는크게못미치지만이러한변화는해방후의직물업성장의가능성을보 여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림2 는 조선공장명부의 직공수별 분류에 따른 공장수를 나타낸 것이다. 1940년 명부에 는 직공수 등급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분포를 알 수 없다. 그림에서 조선의 직물공장중에는 5~49명의 직공을 고용하는 A 급의 공장이 언제나 가장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공장수의 증가는 1934-36년간에는 뚜렷하지 않지만 그 후에는 이 A 급 공장이 주도하고 있다. 현대 1) 이에 대해서는 류상윤(2008) 을 참고바란다. -2-
의 중소기업의 기준은 주로 종업원수 100명이나 200명 이하이기 때문에 B, C급 공장 역시 같은 범주에 포함시켜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중소 규모의 공장 중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작 은 A 급의 공장이 많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직물 공장들은 대 개 소공장들이었던 것이다. 그림2. 규모별 직물공장수, 1930-1939 자료: 조선공장명부 주: 직공수에 따라 A는 5~49 인, B는 50~99 인, C는 100~199 인, D는 200인이상을 가리킨 다. 그렇다면 어떤 직물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어떤 지역에 생겨났던 것일까? 그림3 은 면직물, 견직물, 인견직물로 나누어 각각을 주로 생산하는 공장들이 얼마나 있었던가를 보인 것이 고, 그림4 는 도별로 몇 개소씩의 직물 공장들이 존재했는지를 도시한 것이다. 먼저 그림3을 보면 면직물의 공장수는 정체하고 견직물의 공장수는 193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늘어났 다. 인조견직물의 공장수는 1937-1939년간에 큰 폭의 증가를 보였지만 1940년에는 오히 려 감소하였다. 한편 그림4를 보면 1938년까지는 경기도에 가장 많은 공장이 있었지만 1939 년부터 평안북도와 경상북도가 그것을 추월하였다. 이들 외에도 경상남도와 평안남도 에서 1930년대 중반 또는 말에 직물 공장들이 늘어나지만 역시 눈에 띄는 것은 평북과 경 북이다. 이들 두 곳은 특히 영변과 대구라는 특정 府 郡 에 직물 공장이 밀집해있었다는 특징 을가진다. 그림3. 생산직물별 공장수, 1930-1940 -3-
자료: 그림2와 같음 주: 견직물은 견면교직물, 인조견직물은 인조견교직물은 포함한다. 이밖에도 모직물, 마직물, 기타직물을 생산한 공장이 있지만 소수이므로 제외하였다. 그림4. 도별 직물공장수, 1930-1940 자료: 그림2와 같음 3. 원료와 직물 수급의 변화 앞장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1930 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소공장은 대개 견직공장이었다. 견직물은 마직물과 함께 조선 내 생산의 대부분이 가내생산이었던 직물이었다. 그런데 마직 -4-
물의 경우는 전체생산액에서 공장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율이 1930년대에 단 한 해를 제외하 고 10% 를 넘기지 못했지만2) 견직물의 경우는 1938년에 12.9%, 1939년에 37.8%, 1940년 에는 무려 63.9% 나 되었다. 3) 물론 이렇게 늘어난 공장생산을 모두 소공장에서 담당한 것은 아니지만 공장수의 증가와 생산비율의 증가가 비슷한 방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1930년대 중후반 특히 후반에 다수의 견직공장이 등장하고 견직물의 공장생산의 비중도 늘어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먼저 견직물의 원료인 견사의 수급의 변화 에서 찾을 수 있다. 식민지기 조선의 제사업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것은 조선을 병합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속시킨 일본의 제사업의 영향 때문이었다. 일본은 생사수요가 급증하던 미국시장을 개척 하여 20 세기 들어 세계 최대의 생사수출국이 되었는데( 그림5), 식민지 당국은 일본 제사가 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선에서도 잠업을 장려하였다. 초기에는 繭 이 일본으로 이출 되었지만 곧 일본의 제사자본이 조선으로 진출하여 생사를 이출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림6 은 조선의 생사 생산량과 수이출량을 보인 것이다. 수이출량은 일본의 수출량에 비 하면 5% 도 되지 않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수출 추세와 매우 유사하게 추이하고 있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제사업 역시 수이출 특히 일본으로의 이출에 크게 의 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이출된 생사의 대부분은 일본 내에서 검사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조선의 제사업은 일본을 거쳐 미국 시장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림5. 주요국의 생사수출, 1910-1938 ( 단위: 톤) 자료: Federico (1997). 그림6. 조선의 생사생산과 수출, 1917-1940 ( 단위: 톤) 2) 10% 를넘긴해는1935년이고그때의비율은10.6% 였다. 3) 이상 공장생산액의 비율에 대해서는 柳 尙 潤 (2007) 의 그림1 을 참고바란다. 4) 반면 견직물 시장은 관세장벽에 가로막혀있었다. 미국은 자국의 견직물업을 보호하기 위해 絹 완제품에 4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Ma(1996: 334 ft. 11) 참조. -5-
자료: 朝 鮮 の蠶 絲 業 (1942) 그런데 그림5와 그림6에서 눈에 띄는 것은 1930 년대의 수( 이) 출의 둔화이다. 처음 현상 이 나타난 것은 1929년에 미국을 덮친 대공황 때문이었으며 대공황이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인 후에도 수( 이) 출이 늘지 않은 것은 인견(rayon) 의 소비 확대 탓이다. 5)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의 생사 수출 둔화는 곧바로 조선 생사의 일본으로의 이출 둔화로 이어졌다. 그리 하여 1932년부터는 생산과 수이출의 격차가 커졌고 그만큼 조선내 견직물생산에 이용할 수 있는 생사가 많아지게 되었다. 1920년대까지 조선에서 증산된 견은 거의가 그대로 또는 생사로 가공되어 일본으로 이출 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당국에서 정책적으로 압박한 탓도 있지만 견6) 또는 생사 가격이 높 다는 경제적 유인도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7) 그런데 미국으로의 수출이 둔화되 면서 1930 년초 일본과 조선의 생사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그림7을 보면 1920년대 후반과 비교하여 1930 년대초에 생사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Lockwood (1936: 31) 는 미국 소비자의 구매력 감소, 그리고 인견사와의 경쟁이 일본에서 생사의 생산 감소보다는 가격 저하를 불러온 이유로 일본 잠사업의 구조를 들고 있다. 양잠이 2백만 농 가의 부업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제사 역시 수많은 小 제사가들의 손에 맡겨지고 있기 때문에 수요의 축소에 반응하여 재빨리 생산을 줄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림7. 생사 가격의 추이, 1921-1940 ( 단위: 원/ 백근) 5) 일본에서 수입된 생사는 미국에서 광폭 견직물 생산에 주로 쓰였으나 1930년대 들어서는 인견사로 거의 대체 되었다. 대신 1930 년대에 일본산 생사는 주로 여성용 스타킹 생산의 원료로 활용되었다. Lockwood(1936: 34) 참조. 6) 繭 의 공판가격은 요코하마 수출생사가격에 연동하여 정해졌다. 7) 때때로 繭 의 공판가격이 하락할 때는 농민들이 가내 직물 생산을 위해 공판을 회피하여 식민지 당국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6-
자료: 조선경제잡지, 경성상공회의소통계연보 주: 서울의 도매가격이다. 미국발 대공황은 일본을 거쳐 생사 가격의 하락이라는 모습으로 조선에 이르렀다. 이제 생사를 가공하여 견직물로 파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는 조선인들이 늘게 되고 8) 식민지 당 국도 견직을 장려하는 쪽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견직물의 가내 생 산과 부업 생산이 함께 늘어났다. 하지만 원료 가격의 하락으로 견직물의 가격 또한 내렸다 고 하더라도 여전히 견직물은 면직물이나 인견직물에 비해 고가품이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와 마찬가지로 저렴하면서 견직물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인견직물이 조선 시장에서 크게 인 기를 끌면서 견직물의 수요를 빼앗아가기도 하였다. 그만큼 1930년대 중반까지는 견직물의 수요가 늘기는 하였으나 그 폭은 제한되어 있었다. 견직물의 수요를 크게 늘린 것은 1930 년대 말의 전시통제였다. 그림8 은 면직물, 견직물, 인견직물의 소비량의 추이를 나타낸 것인데, 1930년대말에 면과 인견의 소비량이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일부 국가들과의 무역에 장애가 생기면 서, 일본에서는 면사의 수입이 제한되어 면직물이 부족해졌으며 인견직물은 되도록 외화획 득을 위해 엔블럭이 아닌 곳으로 수출할 것이 장려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일본으로부터의 이입량의 감소에서 비롯된 조선내 직물 소비량의 감소였다. 그림8. 주요 직물별 소비량, 1924-1940 ( 단위: 백만평방야드) 8) 船 越 順 治 (1936: 12) 는 근래의 繭 의 저렴함으로 양잠농가가 賣 繭 을 늦추고 명주의 제직을 하는 것이 현저히 증가했다 고 하였다. -7-
자료: 堀 和 生 (1995) 주: 면은 스테이플파이버와의 교직물을, 견은 면과의 교직물을, 인견은 견, 스테이플파이버 등과의 교직물을 포함한다. 면과 인견과 같은 대중소비직물의 소비 감소분이 바로 견과 같은 고급직물의 소비로 대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통제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원료가 풍부했던 견직물이 주목을 받았 던 것은 분명하다. 생산이나 가격에 대한 통제가 다른 직물에 비해 늦었던 것도 견직물의 戰 時 好 況 을 가능케 하였다. 이미 다른 직물에 대한 통제가 실현된 상황에서 곧 있을지 모를 통제를 대비하여 견직물을 사재기하려는 투기적 수요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영변와대구의직물공장 1930년대 들어 달라진 경제 환경 속에서 소규모의 견직공장이 여러 지역에서 등장하였는 데 특히 공장이 집중되었던 곳이 평북 영변군과 경북 대구부였다. 이 두 곳은 여러 가지 공 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원료입수가 쉬었다는 점이다. 견직물 의 원료는 생사인데, 생사의 원료인 繭 의 생산량은 도별로 봤을 때 경북이 가장 많았고 전 남, 강원, 평남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경북의 산견량은 1920년대에는 전조선의 약15%, 1930년대에는 약20% 에 달했다. 9) 이러한 경북의 繭 이 모이는 곳이 바로 대구였다. 이 때문 에 일본 제사자본의 진출도 대구가 가장 빨랐다. 원료견이 풍부한 대구에는 대제사공장뿐만 아니라 소규모 공장도 많았고 조선공장명부에 따르면 1930년 현재 33개소의 제사공장이 위치해 있었다. 10) 이는 전조선내 제사공장의 30% 가 넘는 것이었다. 소규모 제사공장이 존 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적으로 繭 공판제가 실시된 이후에도 대구에는 경성과 함께 繭 자 9) 류상윤(2007), 그림4 참조. 10) 그 다음은 경성부의 10 개소였다. -8-
유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1) 평북의 산견량은 경북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영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영 변만의 산견량은 조선내 각부군중 대개 5 위안에 들었다. 영변은 또한 대제사공장이 없는 평 북에 위치하고 있어서 인근 평남의 군들과는 달리 대제사공장으로의 一 手 販 賣 로부터 자유로 웠다. 一 手 販 賣 계약이 도 단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말의 신문기사는 비슷한 시기에 견직공장이 들어선 영변과 안주를 비교하면서 영변에서는 직조업이 번창하고 안주에 서는 실패를 당하는 것은 평남의 고치일수구입이 대량생산하는 대자본가의 이익을 위할 뿐 이고 소직조업자의 파멸을 조장함을 증명 한 것이라고 보았다. 12) 영변에서는 가내 또는 산 업조합의 제사장에서 제사가 이루어졌다. 영변에 직물공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22년 13), 대구는 1917 년이었다. 14) 하지만 대구의 최초 직물공장인 秋 仁 鎬 의 東 洋 染 織 所 는 처음에는 東 洋 苧 즉 擬 麻 布 를 주로 제직하였다. 대 구부내 공장에서 견직물( 정확히는 견면교직물) 이 생산된 것은 秋 仁 鎬 의 동생 秋 信 鎬 가 錦 春 紗 를 발명하여 1926 년 東 洋 製 絲 染 織 所 를 창업한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15) 영변의 최초 직물공장인 寧 邊 織 造 組 合 은 영변 天 道 敎 宗 理 院 에서 경영하였는데 지역에서 자본금을 모집 하여 설립한 것이다. 아마 지역 유지들이 투자하였을 것이다. 생산품은 주로 熟 素 였다. 16) 영변직조조합은 1927 년에 개인경영으로 바뀌어 東 亞 染 織 所 가 된다. 1930년 공장명부에는 대구와 영변 소재 직물공장이 각각 3 곳 있었다. 대구의 3공장은 추 씨 형제의 것이었고 모두 기타면직물 을 생산한 것으로 되어 있다. 錦 春 紗 를 아직 본격적 으로 생산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영변의 3공장은 모두 견직물을 생산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朝 鮮 の機 業 에서는 좀더 분명하게 熟 素 와 花 頭 라고 하였다. 17) 朝 鮮 の機 業 에서는 대구의 1공장과 영변의 3 공장의 직기종류를 확인할 수 있다. 대구의 동양염직소는 족답기 50대와 역직기 40 대를 갖추었다. 반면 영변의 3공장에는 역직기와 족 답기는 없고, 대신 飛 杼 (flying shuttle) 또는 쟈카드를 장착한 수직기가 각각 10대 가량 갖 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대조는 흥미로운데 같은 공장표를 더 관찰하면 도시에 위치한 공장 들은 대개 역직기와 족답기를 이용하고 농촌에 위치한 공장들( 소수에 불과하지만) 은 飛 杼 또는 쟈카드가 붙은 수직기를 이용하고 있다. 전기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농촌에서 역직기를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족답기 또한 원동력은 불필요하지만 농촌에서 이를 구매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개량수직기는 그 틀을 나무로 쉽게 만들 수 있고 중요 부품만 외 부에서 구매하여 끼워넣으면 된다. 대구에서는 1930년대에 새로 등장한 공장들도 주로 족 답기와 역직기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편 영변에서는 1936 년경에 처음으로 産 業 組 合 에서 역직기를 도입하였는데, 18) 기존 手 織 工 場 들의 반발도 거세었다. 19) 11) 경성의 자유시장은 1936 년에, 대구 시장은 1937 년에 폐쇄되었다. 12) 대규모의 직조업은 번창, 그러나 그 반면 에 있어 소규모 생산은 파멸 ( 조선일보 1929.11.24, 3 면) 13) 영변직조조합설립 ( 동아일보 1922.11.17, 4 면). 14) 大 邱 市 內 工 場 巡 り(9): 東 洋 染 織 所, 3 쪽. 慶 尙 北 道 (1930) 의 공장표에서도 창업년월을 확인할 수 있다. 15) 大 邱 小 機 業 者 資 金 逼 迫 顯 著 ( 동아일보 1935.5.17 4 면). 창업년은 공장명부에서 확인하였다. 16) 영변에 직조업 발전 ( 조선일보 1923.8.16, 4 면). 17) 朝 鮮 の機 業 의 공장표도 1930년 12월 현재의 것이지만 1930 년 공장명부와는 다르다. 대구의 3공장중에는 추인호의 동양염직소만 실려있는데 생산품은 의마포 였다. 18) 寧 邊 의 현재직기수 9 천대를 돌파, 점차 기계화경향 현저 ( 매일신보 1936.7.22, 4 면). 이 기사는 産 業 組 合 에 서 역직기 12 대를 구입설치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19) 1936년 6 월의 寧 邊 産 業 組 合 協 議 會 에서 力 織 機 구입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織 物 業 者 인 李 羲 夢, 蔡 希 天, 張 學 秉 등이 力 織 機 가 도입되면 手 工 業 에서 一 步 前 進 한 今 日 의 자카드 및 改 良 機 業 者 등은 전부 廢 業 하게 된다 며 열렬히 반대하여 보류된 바 있다. 寧 邊 産 組 2 回 協 議 會 決 議 事 項 과 討 議 內 容 ( 조선일보 1936.6.11, 4 면). -9-
직물업의 발흥에는 기술의 전파가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영변에서는 林 鎔 濟 라 는 인물에 의해 제직기술 특히 熟 素 의 제직기술이 보급되었다. 20) 하지만 그가 어디서 기술 을 습득했는지, 그리고 개량직기는 어디서 들여왔는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대구에서는 추씨 형제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섬유기술진흥원(1990: 137) 에 따르면 추인호는 일찍이 일본으 로 건너가서 중학교를 마치고 부인과 함께 제직기술을 습득하여 귀국하였다고 한다. 21) 영변 에서는 대개 중국식 견직물을 자체생산하는데 노력한 반면 대구의 추씨 형제들은 새로운 상 품 개발에 노력하였다. 대구에서는 영변과 같은 농촌 저임금의 혜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에 가내생산직물과는 다른 특색있는 상품을 계속해서 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錦 春 紗 에 쓰이는 硬 化 綿 絲 와 같이 가공된 원료사를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도시의 이점 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22) 이상과 같은 초기조건과 앞장에서 다룬 1930년대의 변화된 환경이 접속하여 만들어낸 것 이 바로 1930 년대 중후반의 영변과 대구에서의 소직물공장의 발흥이다. 영변에서는 1926 년에 설립되었지만 조합원에게 별반 이익을 주지 못하는 동시에 조합 자체도 손실이 많 던 23) 산업조합과 지역 유지들이 1930년대초 생사 가격 하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 여 제사법의 개량과 제직기술 전습에 힘썼다. 그리하여 가내생산의 주산품 명주, 공장생산 의 주산품 숙소 이외에도 다양한 견직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1936년 현재 영변에는 재래직 기 외에 紋 織 機 ( 즉 쟈카드직기) 107 대, 족답기 19 대, 飛 杼 가 달린 직기 5,070대가 있었 다. 24) 쟈카드가 많이 보급된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비싼 만큼 가내생산에 사용되지는 않 았을 것이고 공장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영변의 견직공장에서는 이 쟈카드직기를 이용하여 무늬를 넣은 다양한 직물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시에서와 같이 그때그때 제사 소에서 실을 사서 쓰는 것이 아니고 영변산업조합에서 생사의 유통까지 관할하였던 것이 안 정적인 원료공급을 가능케 하였을 것이다. 영변의 견직공장도 1930년대말에 크게 늘어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평안북도의 견 직물 공장생산의 대부분을 광폭 絹 紬 와 소폭 生 織 絽 及 紗 가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뒤의 것은 쟈카드직기 등을 이용하여 짠 복잡한 조직의 직물을 가리켰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앞의 것인데 조선에서는 그때까지 견주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주의 생산은 1939 년부터 갑자기 늘어나는데 평남북과 경기에서 그러하였다. 25) 만주국이나 중국에서 작 잠사류가 수입되어 이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좀더 검토를 요한다. 1939년의 한 신문기사는 영변의 직물공장에서 원료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모회사로부터 작잠사를 구입하려한다는내용이있는데그후경과는알수없다. 26) 대구에서 소직물공장이 발흥한 배경으로 1934년의 신문기사는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 이후 다시 설치하기로 결정이 바뀌는 과정은 不 明 하다. 20) 영변 견직업 有 望 ( 동아일보 1922.4.6, 4 면). 21) 그런데 출처로 표시된 金 峻 憲 (1983: 317) 에는 막상 그런 내용이 없다. 그와 관련된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없는내용이라좀더확인이필요하다. 22) 船 越 順 治 (1936: 12) 에 따르면 錦 春 紗 란 생사와 경화면사를 교직한 것이다. 생사와 마사를 교직한 춘포는 평남의 성천, 덕천등이 주산지인데, 근래 대구부내의 소공장에서 錦 春 紗 라 칭하여 마사의 대용으로서 경화면 사를사용한것을생산하고있다고하였다. 23) 영변산업조합 업무를 확장, 판매, 구매, 이용방면 ( 동아일보 1931.8.14, 5 면). 24) 辛 宗 源 (1937). 25) 1938-40 년간의 도별 공장생산액은 昭 和 十 三 年 民 營 工 場 生 産 額 集 計 ( 第 1 條, 第 2 條 ), 昭 和 十 四 年 官, 民 營 工 場 生 産 額 ( 集 計 原 稿 ), 昭 和 十 五 年 民 營 工 場 生 産 額 集 計 에서알수있다. 26)조선의무역통계에서는 1930 년대말에만주국에서수입한작잠사보다더많은양이일본으로이출되고있다. 반면 만주국의 무역통계에서는 조선으로도 소량의 작잠사가 수출되고 있다. -10-
다. 첫째, 생사시세가 낮게 유지되어왔고 제사가의 지역내 放 賣 와 인견공업의 발달에 따라 당분간 앙등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어 경영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둘째, 대구부는 조선제 일의 생사생산지이므로 원료사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 셋째, 대구부는 물자의 집산지 로서 企 業 에 유리하다. 넷째, 날씨, 수질 등이 직물업에 비교적 적합하다. 넷째, 일본으로부 터의 이입품에 비해 생산품은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 27) 한편 추신호의 금춘사 발명을 발 흥의 배경으로 본 기사도 있다. 28) 공장명부에서 1939년과 1940년에 새로 등장하는 공장이 대부분 1938년에 새로 대구부로 편입된 비산동과 침산동에 위치한 것을 보면29) 1930년대 중반에는 금춘사를 주로 생산하던 달성군의 소직물공장들이 1930년대말에 면사공급난과 견 직물 수요증가를 맞아 순견직물로 전환하면서 규모를 키웠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비슷한 상품을 생산하는 소공장들이 난립하는 경우에는 경쟁 때문에 함께 위기에 빠지기 쉬운데 이러한 현상이 1930 년대 중반 대구에서도 나타났다. 30) 이를 대구부 당국과 직물업 자들은 産 業 組 合 을 조직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산업조합은 1934년부터 준비되어 1935년말 에 창립되었는데 대구부와 그에 인접한 달성군의 3 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고, 사업으로는 조합원이 생산한 직물의 가공, 매각, 조합원의 직물업 경영에 필요한 물품의 구입, 가공, 매 각, 그리고 조합원에게 직물업 경영에 필요한 설비를 이용하게 하는 일 등을 하기로 하였 다. 31) 영변에서는 일찍부터 繭 유통 통제를 목적으로 산업조합이 조직되었고 여기서 나중에 는 생사와 직물의 유통까지 통제하게 되었다. 5. 맺음말 20세기초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직물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 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직물업은 훨씬 강했던 일본의 직물업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조선인은 직물 소비의 큰 부분을 일본으로부터의 이입품에 의존해야 하였다. 1920년대까지 는 부업적인 가내생산과 일본의 직물업 사이에서 조선의 직물공장이 설 자리는 넓지 않았 다. 하지만 1929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견직물의 원료인 생사의 현지이용을 쉽게 함으로써 조선의 직물업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경제에 예속됨으로써 성장하였던 조선의 잠 사업이 그 배경이었다. 새로 등장한 직물 공장은 상대적으로 원료생사를 구하기 쉬웠던 영변과 대구에 집중되었 다. 이들 지역에는 1910년대 후반 또는 1920년대 초반에 이미 직물 공장이 설립되었고 그 기술 또는 경험이 주위로 전파되고 있었다. 그것이 1930년대 들어 원료의 풍부함을 만나고 나아가 1930 년대말에 수요의 증대를 맞닥뜨리면서 폭발적으로 반응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1943 년의企 業 合 倂 이전까지는이두곳의직물업의성장은계속되었던것으로보인다. 해방 후 영변은 북쪽으로 분리되고 대구만 남았다. 일본으로부터의 직물과 의료 수입은 제한되었고 중소 직물업의 생산품은 좀더 대중적인 인견직물로 전환하였다. 대구에 축적된 인프라는 다시 힘을 발휘하였다. 인견사의 공급창구인 부산과 가까워서 원료 입수의 이점도 27) 近 く統 制 する大 邱 の機 業 ( 一 ) ( 조선민보 1934.10.10). 28) 大 邱 小 機 業 者 資 金 逼 迫 顯 著 ( 동아일보 1935.5.17 4 면). 대구와 달성군내에만 99개의 공장이 생기었다고 하는데 공식통계의 공장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공장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29) 조선공장명부에 따르면 편입되기 전에는 달성군에 공장이 거의 없었다. 30) 大 邱 小 機 業 者 資 金 逼 迫 顯 著 ( 동아일보 1935.5.17 4 면). 31) 대구직물산조창립 ( 조선일보 1935.3.2 4 면). -11-
유지되었다. 해방이전에는 일본의 직물업자들이 공급해주던 부분,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 는 미국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대구 직물업은 크게 성장하였다. 영변의 직물업도 해방 후 남한의 직물업에 영향을 미쳤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많 은 피난민이 발생하였는데 영변과 그 인근의 사람들이 남한의 몇몇 농촌지역에 정착하여 그 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32) 영변의 직물업은 대구의 직물업과는 달리 농촌 직물업으로서 성장 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농촌에 정착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대구의 직물업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해방후 직물공급의 공백을 메꾸는 데 이들은 크게 공헌하였다. 32) 朴 容 奇 (1985), 吳 世 昌 (1979) 참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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