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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교사용) 4-6부

Transcription:

연구논문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식민지기 하층 출신 일본인 이주자의 도시 경험과 자기규제 *1) 양 지 혜 목 차 Ⅰ. 동화( 同 化 ) 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Ⅱ. 식민자 사회 의 말단에서 1. 흥남의 식민자 사회 : 실재와 은유 2. 하층 출신 일본인의 위치 Ⅲ. 일본인 되기 라는 역설 Ⅳ. 외면과 교제 Ⅴ. 맺음말 Ⅰ. 동화( 同 化 ) 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이 사람은 때의 소리에 한마대 하고자 하옵내다. 우리 전주에는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7호(2012. 06): 7~39 양지혜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 이 글은 1990년 일본 소후칸 출판사에서 출간된 구술록: 미나마타민중사(( 聞 書 ) 水 俣 民 衆 史 ), 5권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흥남에서 일본 미나마타( 水 俣 )로 돌아간 일본인의 구술을 분석했다. 자료를 소개받은 이래 많은 분께 도움을 얻었다.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반원 일부는 해당 자료를 소개해 주고 부족한 초고를 읽어주었다. 구술집의 편집자인 오카모토 다츠아키( 岡 本 達 明 )씨는 이 글의 구상과 서술 과정에서 유익한 코멘트를 해준 것은 물론, 미나마타 현지 방문도 주선해 주었다. 미나마타 현지에서는 야마시타 요시히로( 山 下 善 寛 ), 이토 기미요( 伊 藤 紀 美 代 ), 타니 유우( 谷 由 布 )씨의 도움으로 몇몇 생존자와 인터뷰할 수 있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7

우편국인지 무어인지 엇지 그런지 몰나요. 저금이나 돈을 붓치거나 돈 을 찻거나 간에 안이꼬와 못보겟서요. 요번에도 저금을 차지러 갓더니 오마에가 못데기다 이구라 오마에가 혼진가 긋따위 말버르장이 를 하니 우편국 사무원들은 세상 형편을 열심으로 살피여 그따위 버르 장이를 곳치엇스면. 아이고 분해라. 이런 일노 보와도 일선인 무엇이라 는 그것은 꿈에도 틀녓지. (아니꼬아 生 ) 1) 동아일보 는 1921년 7월부터 1922년 3월까지 9개월 남짓 <때의 소리>라 는 코너를 만들어 독자의 투고를 연재했다. 그 중에는 위의 인용문처럼 일상 에서 일본인을 마주하며 경험한 사적인 차별과 이에 대한 토로가 적지 않았다. 제국의 지식인과 통치자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 정책으로 동화( 同 化 ) 를 선전 했지만 2) 조선인이 왕왕 경험한 일상은 네가 일본인이냐 혹은 네가 일본인 인 줄 아느냐 는 말이 흔연히 오가는 차별과 분리의 세계였다. 이 글은 식민지 기 조선의 도시 흥남( 興 南 )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사례를 통해 식민지의 일상 에서 일본인이 자신들만의 분리된 세계를 만들어간 과정을 살펴본다. 여기서 는 특히 하층 출신 일본인에 초점을 맞추어 왜 그리고 어떻게 평범한 개인이 식민자 로 변화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라는 체제를 지탱하는 보수층을 형성하 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흥남은 1927년 일본질소비료(주)라는 기업이 함경남도( 咸 鏡 南 道 ) 함흥군 ( 咸 興 郡 ) 운전면( 雲 田 面 ) 일대에 조선질소비료(주)라는 공장을 세우면서 형성 된 도시이다. 이 도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설립부터 1937년 구역 확장 이전 까지 도시 전체 인구의 35% 이상을 일본인이 점해왔다는 점이다. 3) 이들은 일 본질소비료(주) 주 공장이 있던 구마모토현( 熊 本 縣 ) 미나마타( 水 俣 )와 미야자 1) <때의 소리>, 동아일보, 1921.09.26. 2) 호소카와 유우지,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朝 鮮 과 滿 洲, 臺 灣 을 中 心 으로, J&C, 2002.; 권태억, 1910년대 일제의 조선 동화론과 동화정책, 한국문화 44, 2008.; 권태억, 1920, 30년대 일제의 동화정책, 한국사론 53, 2007. 3) 흥남의 인구는 1945년 8월 약 20만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에서 공개한 1930년부터 1942년까지 흥남의 인구통계는 본문의 <표 2> 흥남 연도별 인구통계에 제시했다. 8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키현( 宮 崎 縣 ) 노베오카( 延 岡 ) 지역 출신이 대다수로 조선총독부와 밀접하게 관계된 일본 본사 관계자부터 건설 공사 일용 인부 출신자까지 다양한 층을 이루었다. 1944년 현재 인구 18만, 여의도 면적(2012년 현재 2.95km2)의 44배 에 달하는 공업 도시 흥남 4) 의 일상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이들 일본인과의 연 관 속에서 구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흥남에 관한 연구 성과는 일본 질소비료(주)(조선질소비료(주))에 대한 기업사적 연구가 대부분을 차지한 다. 5) 사회상을 분석한 연구 역시 기업과 조선인의 갈등을 구조적으로 부감한 논문이 주를 이룬다. 6) 이 글은 이러한 기존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삼는 동시 에, 하층 출신 일본인의 경험과 감각에 초점을 맞추어 도시 하부에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던 보수층의 논리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1) 도시의 공간 편제라는 구조적 접근과 2) 하층 출신 일본인의 시선과 대면(encounter)이라는 경험적 접근의 두 가지 분석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먼저 구조적 접근은 도시의 공간 편제를 분석해 식민 도시 내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역 구성을 부감하는 방식으로 기존 연구의 주된 접 근법이었다. 7) 이러한 구조적 접근에서는 거주 지역의 민족별 분리와 학교ㆍ병 4) 조선총독부관보 1944.11.18. (제5338호). 5) 小 林 英 夫, 1930 年 代 日 本 窒 素 肥 料 株 式 會 社 の 朝 鮮 への 進 出 について, 山 田 秀 雄 編, 植 民 地 經 濟 史 の 諸 問 題, アワ 經 濟 硏 究 所, 1973; 小 林 英 夫, 1930년대 조선 공업화정책의 전개과정, 한국근 대경제사연구, 사계절, 1983; 姜 在 彦 編, 朝 鮮 における 日 窒 コンチエルン, 不 二 出 版, 1985.10; 堀 和 生, 朝 鮮 工 業 化 の 史 的 分 析 日 本 資 本 主 義 と 植 民 地 経 済, 有 斐 閣, 1995; 安 秉 直, 日 本 窒 素 に おける 朝 鮮 人 労 働 者 階 級 の 成 長 に 関 する 硏 究, 朝 鮮 史 硏 究 会 論 文 集 第 25 集, pp.157-201, 1998.3; 辻 原 万 規 彦, 朝 鮮 窒 素 肥 料 の 興 南 地 区 社 宅 街 について : 野 口 研 究 所 所 蔵 史 料 を 用 い て, 日 本 建 築 学 会 計 画 系 論 文 集 (779671), 2012.01, pp.135-142. 6) 곽건홍, 1930년대 초반 조선질소비료공장 노동자조직운동, 역사연구 4호, 1995.; 손정목, 위의 글.; 김경일,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 운동, 문학과지성사, 2004.; 이상의, 일제하 조선의 노동정책 연구, 혜안, 2006. 주 9)에 소개한 姜 在 彦 의 책(1985) <제6장. 조선민중과 마찰ㆍ저항>도 이러한 관점의 연구 성과라고 볼 수 있다. 7) 기술한 바대로 이러한 접근은 식민지 조선의 도시 연구를 대표하는 경향이다. 최근에는 농촌 의 사례에서도 구조적 접근을 따라 농촌 내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지역 분리를 확인한 연구 성과도 발표되었다. 도시에 대해서는 이혜은, 경성부의 민족별 거주지 분리에 관한 연구, 지리학 29, 1984.; 손정목, 일본인의 도심부 점거와 남촌ㆍ북촌 현상, 일제강점기 도시 화과정연구, 일지사, 1996.; 고석규, 나주의 근대도시 발달과 공간의 이중성, 광주학생독 립운동과 나주, 나주시ㆍ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1999.; 전우용, 鍾 路 와 本 町 식민도시 경 성의 두 얼굴, 역사와 현실 40, 2001.; 김일수, 일제강점 전후 대구의 도시화과정과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9

원ㆍ상하수도와 같은 시설의 차별적 배치의 문제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최근 한 연구자는 경성과 인천의 인구 자료를 이용해 일본인과 조선인(중국인)이 분리가 아닌 잡거( 雜 居 )했으며, 거주지역 분리 란 실재한 공간 편제가 아닌 담 론적 구성물이었다고 주장했다. 8) 이 글에서는 흥남의 공간 편제 구조를 확인 하고, 이를 토대로 도시 내 일본인의 집단적 분리의 상징인 일본인만의 타운 (지역, 공간), 일본인만의 커뮤니티(집단)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본인만의 사회(공간, 집단) 이란 개념은 실재와 반드시 일 치한다고 보기 어렵지만, 거짓이나 환상이 아닌 하나의 가치 지향으로서 일본 인 개인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경험적 접근을 이용해 식민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의 생활을 분 석한 연구로는 9) 대표적으로 권숙인과 우치다 준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권숙인 은 경성, 평양, 대구, 경주, 마산, 익산 등지에 거주했던 일본인 교사와 교사 자녀, 중소 자영업자, 총독부 중하급 관리, 의사 자녀 등 주로 중층 이상의 일 본인들의 회고록과 소설을 분석했다. 10) 이를 통해 이들 일본인이 일본인 타 운 과 일본인 커뮤니티 속에서 현지와 분리된 세계를 형성하고, 조선인을 인 종화된 편견 속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왜 그러 그 성격, 역사문제연구 10, 2003.6.; 하시야 히로시( 橋 谷 弘 ) 저, 김제정 옮김, 일본 제국 주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다, 모티브, 2004 참고. 농촌에 대해서는 MATSUMOTO Takenori and CHUNG Seung-jin, On the Hosokawa Farm and the History of Daejangchon, a Japanese-Style Village in Colonial Korea; Dilemmas in Rural Development, Korea Journal Vol.49 No.3(Autumn 2009), pp.121-149 참고. 8) 김종근, 식민도시 京 城 의 이중도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울학연구 38, 2010; 김종근, 식민도시 인천의 거주지 분리 담론과 실제, 인천학연구 14, 2011. 9) 식민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의 생활에 대한 출판물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저작은 다카 사키 소지( 高 崎 宗 司 )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이규수 역, 역사비평사, 2006.: 植 民 地 朝 鮮 の 日 本 人, 岩 波 書 店, 2002.)이다. 이 책은 식민지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이 남긴 자료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분류한 것으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에 관한 경험에 대한 상징적인 저작이나 본격적인 연구서로 보기는 어렵다. 이외에 본문에서 분석한 두 편의 논문을 비롯해 최근 역사학, 인류학, 국문학, 일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식민지 조선의 일본 인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최근까지 발간된 연구 성과 중 가장 다양한 부문의 사례를 분석한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는 위의 두 연구만을 분석하는데 그쳤다. 10) 권숙인,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피식민 조선인과의 만남과 식민의식의 형성, 사회와 역사 제80집, 2008, 109-139쪽. 10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한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을 선택했는가라는 물음까지는 제기하지 않았다. 우치다 준은 개항 이래 1945년까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의 활동을 정치적 시기 구분을 따라 분류하고, 이들을 일컬어 제국의 브로커 라고 개념화했 다. 11) 이 연구는 시기별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를 다르게 파악한다는 점에 서 특징적이다. 저자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산업 개발비 요청이나 만주 개발과 같은 이권 일치 때문에 양자가 협력하는 양상을, 1940년대에는 총독부의 내선일체( 內 鮮 一 體 ) 정책으로 인한 조선인의 표면적 권리 신장과 만 주 개발, 전시 특수( 戰 時 特 需 )에 따른 경제적 성장을 이유로 일본인이 조선인 과 반목하는 양상을 띠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저자가 해당 시기에 대한 분석에 주로 활용한 자료의 성격 그 자체에서 연유한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0년대에 대한 분석에서 저자는 이전 시기에 대한 분 석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경찰의 비밀문서나 직접 수집한 서면 인터뷰 자료 등 현실의 구체적인 양상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를 다수 이용했다. 정치적 혹은 공식적 발언에서 하는 발언과 비밀문서, 인터뷰 자료에서 할 수 있는 발언이 다르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저자가 파악한 시기별 입장 변화에 관한 해석은 재 고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의 입장은 시기별로 급변했 다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온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 한 경험적 접근을 이용한 기존 연구를 참고하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으로 시선 이나 대면과 같은 경험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해 개인의 내밀한 감정, 욕망, 성향을 주목하고자 한다. 12) 11) Jun Uchida, Brokers of Empire: Japanese Settler Colonialism in Korea, 1896-1945,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11. 이 연구는 2005년 발표된 저자의 박사논문을 수정 출간한 것으로, 이미 국내에도 수록 논문 중 일부가 번역된 바 있다.( 총력전 시기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재조선 일본인의 협력, 근대성의 역설 (헨리 임, 곽준혁 편), 후마니타스, 2009.) 12) 이 연구는 개인이 논리를 이용해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 한다는 방식의 접근에 거리를 두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개인이 지적 구조를 형성하거나 이해하기 이전에 세계를 즉각적으로 경험 하고 느낀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어떻게 느끼고, 바라고, 행동했는지와 같은 감정, 욕망, 성 향의 파악을 중시하고자 한다.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대한 파악을 제안하는 역사 연구 방법 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Daniel Wickberg, What Is the History of Sensibilities?, American Historical Review 112, no.3, June 2007, pp.661-684.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11

이 글은 이를 위해 1990년 일본에서 출간된 구술록: 미나마타민중사(( 聞 書 ) 水 俣 民 衆 史 ) 5권(이하 <민중사> 5권 으로 약칭)이라는 한 권의 구술집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한다. 이 책은 오카모토 다츠아키( 岡 本 達 明 )와 마쓰자키 지오( 松 崎 次 夫 )라는 두 노동자가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미나마타 칫소(チッ ソ(주))(모기업: 일본질소비료(주))에 근무한 노동자와 그 가족 가운데 해방 후 흥남에서 귀환한 78명의 구술을 채록한 책이다. 13) 이 책은 해방 후 일본에서 출간된 귀환 일본인(조선 출신)에 관한 기록으로는 흔치 않게 1945년 이전 식 민지 당시의 경험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구술의 방법을 이용해 중산층 이하 소시민과 그 가족의 목소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구술 자 수만큼 다양한 구술 내용이 담겨 있지만, 본문에서는 특히 아래의 네 명의 회고를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가고자 한다. 네 명의 간략한 이력은 다음과 같다. <표 1> 주요 분석 대상자 이력 이름 성별 출생 출신지 흥남이주 미나마타에서의 생활 오가타 키쿠노 ( 緖 方 キクノ) 오니즈카 지사쿠 ( 鬼 塚 次 作 ) 후쿠야마 헤이이치 ( 福 山 兵 市 ) 미우라 마코토 ( 三 浦 誠 ) 女 1902년 이즈미( 出 水 ) 출생, 14) 미나마타( 水 俣 )로 이사 1935년 남편이 미나마타 일용인부, 자신은 농업 男 1908년 미나마타( 水 俣 ) 출생 1932년 반농반어( 半 農 半 漁 ) 男 1914년 미나마타( 水 俣 ) 출생 1930년 학생 男 1924년 미나마타( 水 俣 ) 출생 1939년 소작농 겸 건설공사 일용인 부의 손자(할머니와 이주) * 출전: 民 衆 史 5권, 146쪽.; 179쪽.; 193쪽.; 203쪽. 13) 부연하면 民 衆 史 5권의 출간은 1960년대 극심한 노사갈등과 1970년대 미나마타병 재판 으로 인해 칫소(주)의 기업성을 비롯한 미나마타 지역의 문화 전체를 재검토하려는 흐름이 형성된 것과 관계되어 있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구술 자체의 내용에 주목했고 1945년 이후 흥남 출신 간부와 노동자의 칫소(주) 재취업 문제와 民 衆 史 5권의 발간까지의 과정에 대 해서는 다음의 글을 통해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양지혜, < 戰 後 의 얼굴, 식민지의 몸: 미나 마타의 개발과 식민지 기억>,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WCU워크숍 발표문, 2012.) 14) 이즈미는 가고시마현( 鹿 児 島 縣 )에 속해 있지만, 지리적으로는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와 인접 해 있다. 12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위 네 명은 모두 출생 시기나 흥남 이주 시점이 다르지만 이주 이전까지 본토의 미나마타와 인근 지역에서 하층민으로 생활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구술 내용에서도 특히 조선으로 건너오기 이전의 경험과의 연관 속에서 식민 지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15) 여기에서는 이들 하층민 출신자가 속해 있던 흥남의 도시 구조와 이들이 식민자 사회 안팎에서 경험 한 시선, 대면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회고 내용을 재조합하고자 한다. 16) 위의 구술집 외에도 식민지 시기 흥남의 생활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남아 있다. 먼저 일본질소비료(주)(조선질소비료(주)) 지도부는 흥남의 정치, 행정, 사회 17) 각 방면에 개입하면서 방대하고 체계적인 자료를 생산했 지만 현재는 일부만을 공개한 상태이다. 18) 이외 1) 京 城 日 報 와 東 亞 日 報 15) 1945년 이전까지 미나마타는 지주제를 비롯한 반농반어촌의 생활방식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다. 미나마타에는 1907년에 이미 흥남의 조선질소비료공장(주)의 모기업인 일본질소비 료공장(주)의 주 공장이 건설되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흥남에 비해 규모가 작아 주민 다수 가 2차 산업보다는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水 俣 市 史 編 纂 委 員 会 編, 水 俣 市 史, 水 俣 市 役 所, 1966, p.549.; 水 俣 市 史 編 委 員 会 編, 新 水 俣 市 史 下 卷, 水 俣 市, 1991, pp.204-210.) 당시 흥남과 미나마타 두 지역의 형세를 비교하면, 1942년 흥남의 세대수는 30,081세대로 미나마타의 5,935세대에 비해 4배 이상 많았다. 같은 해 인구 역시 흥남은 163,403명이, 미 나마타는 29,825명이 집계되었다. 두 도시의 인구차는 133,578명으로 흥남의 인구는 같은 시기 미나마타 인구수의 4배가 넘었다.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43년판); 水 俣 市 史 編 纂 委 員 会 編, 水 俣 市 史, 水 俣 市 役 所, 1966, p.293.) 16) 民 衆 史 5권은 구술자의 회고가 생애사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주제별로 나누어 배치되 어 있다. 같은 날 같은 인물의 회고라 해도 주제별로 나누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에 서는 위 4명의 구술을 다시 조합하는 방식을 채용했다. 17) 흥남의 행정기구는 흥남읍회(1930년-1944년)로 1937년 현재 의원 선거 유권자는 지방측 일 본인 94명, 조선인 42명, 조선질소비료회사측 57명으로, 회사측이 압도적으로 다수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지방측 일본인 중에도 조선질소비료회사 하청 기업 관련자가 많았다. 읍회 의장이 조선질소비료회사 설립자인 노구치 준( 野 口 遵 )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 京 城 日 報, 1935.04.20.) 이외 회사와 경찰과의 관계, 조선총독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다. 橋 晄 正, 日 本 の 医 療 を 告 発 する, 亞 紀 書 房, 1972.; 藤 鳥 宇 內, 朝 鮮 における 企 業 犯 罪, 朝 日 ジャーナル, 1972.8.18.; 松 岡 信 夫, 朝 鮮 窒 素 肥 料 株 式 會 社 の 体 質 と 行 動 (<ノート> 水 俣 病 前 史 ) (1)~(4), 自 主 講 座 16, 17, 23, 25 号, 1972 年 7 月 ~1973 年 4 月.; 木 本 忠 昭, チッソの 技 術 と 植 民 主 義, 現 代 技 術 評 論, 1976. 06. 18) 최근 흥남 사택가의 구조에 대해 연구한 辻 原 万 規 彦 (2012)에 따르면, 野 口 研 究 所 所 蔵 史 料 가 공개되어 있어 회사와 설립자 노구치에 대한 자료가 공개되어 있지만, 1945년 이전 그룹 내 稟 議 書, 회의 의사록, 관계서류는 원본 열람을 허가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 辻 原 万 規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13

등 각 신문의 함흥, 흥남 지국의 보도 내용과 2)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흥남읍 회 회의록, 3) 조선인 작가가 서술한 노동문학 19), 4)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이 남긴 회고록, 20) 5) 해방 후 북한 정부가 발간한 기록, 21) 6) 1950년 대 남한으로 온 실향민이 남긴 기록 22) 이 있다. 이 연구에서는 위 구술집을 중 심으로 분석하되,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는 나머지 자료를 활용했다. Ⅱ. 식민자 사회 의 말단에서 1. 흥남의 식민자 사회 : 실재와 은유 흥남은 조선에서도 특수한 환경이었다. 일본인은 전부 사택에 들 彦, p.136.) 19) 식민지 시대 흥남을 대상으로 소설을 쓴 노동문학 작가는 이북명과 한설야가 있다. 대표적으 로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북명, <기초공사장>, 신계단, 1932.11.; 한설야, <사방공 사>, 신계급, 1932.11.; 이북명, <인테리>, 비판, 1932.12.; 이북명, <출근정지>, 문학 건설, 1932.12.; 이북명, <병든 사나이>, 조선문학, 1934.1.; 이북명, <공장가>, 중앙, 1935.4.; 이북명, 질소비료공장( 初 陣 ), 문학평론 (일본잡지), 1935.5.3.; 이북명, <구제사 업>, 문학, 1936.1.; 이북명, <현대의 서곡>, 신조선, 1936.1.; 이북명, <어둠에서 주은 스켓치 >, 신인문학, 1936.3. (이 글에서는 다음의 책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했다. 안승현 엮음, 일제강점기 한국 노동소설 전집 2, 3, 보고사, 1995.) 20) 흥남에 대한 회고는 현재 진행형으로 나오고 있다. 사우회, 동창회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이들의 기록이 < 旧 日 窒 北 朝 鮮 友 の 会 >( 夕 刊 デイリー, 2009.10.20.)와 같이 보도되고 있다. 이외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된 기록도 있다. 먼저 한국에 번역된 회고록으로는 흥남에서 제2차태로사건에 관계하며 노동운동가로 구속 되었던 이소가야 스에지( 磯 谷 季 次 )(김계일 옮김, 우리 청춘의 조선, 사계절, 1988.)의 책 이 있다. 다음으로 회사 간부 경력자들이 출간한 日 本 窒 素 史 への 証 言 ( 鎌 田 正 二 編, 全 45 集, 1977~1992.)도 있다. 필자 역시 개인적으로 미나마타 현지를 방문해 생존자 몇 분을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글에서는 하층 출신 일본인 에 집중해 이들의 목소리 에 초점을 두고 나머지 기록 생산자들은 별도로 다루고자 한다. 21) 리국순, 흥남비료공장 로동자들이 걸어 온 승리의 길, 력사논문집(사회주의건설편) 4, 과 학원출판사, 1960.; 리국순, 1930년대 조선로동계급의 구성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3.; 리국순, 일제 말기 조선인 강제징용에 관한 고찰, 력사과학, 1964. 22) 以 北 五 道 廳 興 南 市 誌 編 纂 委 員 會, 興 南 市 誌, 興 南 市 誌 編 纂 委 員 會, 1988(개정판, 2007). 14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어가 버리거나 상점가에 살아서 주위 조선인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조선인과의 접촉은 물건을 팔러 오는 어머니를 통하거나 조선 인 시장에 물건을 사러가는 정도였다. 일본인은 수도 많았고 일본인만 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흥남소학교 교사로 있었지만 아이들 교육에 조선인이라는 걸 의식한 적은 없었다. 일본 본토의 학교에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느낌이었다. 일본인 소학교는 흥남, 용성, 서호진 세 곳이 있었다. 조선인 보통학교는 아마 한 곳뿐인 것 같았는데 어디 있 는지도 알지 못했다. 23) 구술자 히라오 요시토( 平 尾 義 人 )는 1940년 일본에서 건너와 흥남소학교에 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흥남에서의 기억을 일본인만 사는 지역에서, 일본인 학교의 일본인 학생을 가르치며, 조선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지냈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분석된 여타의 도시에 거주했던 일본인들 의 회고에도 이미 유사하게 나타난 바 있다. 24) 장소(town)이든, 집단 (community)이든 식민자들만의 사회가 있었고, 피식민지민과의 대면 관계가 없었으며, 이로 인해 식민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방식 의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은 아프리카와 동남 아시아 식민지에서 거주했던 유 럽인 식민자들의 기록에서도 전형적으로 발견된다. 25) 질문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첫째, 식민자만의 사회 (이하, 식민자 사회 로 통칭)란 실재인가 은유인 가. 즉, 공간을 바탕으로 구현되어 있던 것인가, 아니면 믿음이나 희망인가. 둘째, 식민자 사회 라는 실재 혹은 관념을 유지시키는 힘은 무엇인가. 공간에 구현된 구조인가, 아니면 소속원의 의지인가. 셋째, 식민자 사회 의 소속원 모 23) 民 衆 史 5권, pp.181-182. 실제 이 구술이 발화될 당시 구술자 히라오 요시토( 平 尾 義 人 )는 흥남을 일본식 발음인 코난(こうなん)으로, 용성을 료우세이(りょうせい: 龍 城 )로, 서호진을 세이코신(せいこうしん: 西 湖 津 )으로 발음했을 것이다. 필자가 만난 편집자를 비롯해, 모든 구술자들은 흥남을 코난으로 발음했다. 식민지 이후에 남은 식민지에서의 습관이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24) 권숙인, 앞의 논문, 114-118쪽. 25) Lorenzo Veracini, Settler Colonialism, Palgrave Macmillan, 2010, p.79.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15

두에게 소속의 권리는 안정적으로 주어졌는가, 아니면 소속원 내부에도 권리 의 차등이 있었고 소속원 중 불안정한 위치에 처해진 집단이 존재했는가. 여 기서는 다시 흥남의 사례로 돌아와 먼저 공간의 편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러한 질문의 답을 구하고자 한다. <그림 1> 1945년 당시 흥남지역 공장, 일본인 사택, 마을 배치도 龍興 西本宮 龍興工場 本宮社宅 鷹峰里 興德里 本宮工場 天機里 (상점가) 復興里 厚農里 荷德里 湖南里社宅 龍岩里 雲中里 興南工場 九龍里 火藥工場 製鐵所 雲城里社宅 柳亭里社宅 內湖 九龍里社宅 마그네슘工場 1932년 당시 흥남읍 * 범례: 공장 일본인 사택 마을(자연촌/조성촌) * 축척: 1:50,000 * 조선총독부, 흥남읍 시구개정공사계획 개요 및 설명서, 1932 (문서번호: CJA0013886).; 鎌田正二, 北鮮の日本人苦難記 : 日窒興南工場の最後, 時事通信社, 1970, pp.78-79. * 가마다 쇼지(鎌田正二)가 수록한 終戰後興南要圖 를 기본으로, 필자가 범례의 내용을 표기해 수정했다. <그림 1>은 1945년 현재 흥남의 공장과 일본인 사택, 마을의 배치도이다. 1945년 현재 흥남의 총 면적은 130 로 1937년 이후 진행된 구역 확장의 영 향으로 1927년 설립 당시 소속 구역(<그림1>의 1932년 당시 흥남읍 표시 구 역) 북쪽의 산간지역과 넓은 평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서 간 거리 약 20km, 남북 간 거리 약 16km로 지역 내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산이 많은 지형 으로 인해 지역민은 도보보다는 전차를 이용해 이동하기 쉬웠다.26) 지역 중심 16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부에는 흥남의 제1공장인 흥남질소비료공장( 興 南 工 場, 1928년 설립)과 제련소 (1932년 설립)가, 서쪽과 북쪽 평지에는 마그네슘공장(1934년 설립), 화약공 장, 본궁공장( 本 宮 工 場, 1936년 설립), 용흥공장( 龍 興 工 場, 1941년 설립)이 설 립되어 있었다. 일본인만 거주할 수 있는 일본인 사택단지는 각 공장의 주변 평지(일부 산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반면 마을의 경우는 운중리( 雲 中 里 ), 흥 덕리( 興 德 里 )와 같이 산간 지역에 점점이 흩어져 있고, 평지에 있더라도 내호 ( 內 湖 )와 서본궁( 西 本 宮 )처럼 사택과는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27) 사택과 마을이 잇닿아 있는 구룡리( 九 龍 里 )를 제외한다면 일본인만이 거주하는 일본 인 사택과 마을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예외적인 구룡리의 경우도 일 본인 사택과 마을은 구분되어 있었다. 아래의 <그림 2>를 보자. <그림 2> 1930년대 초반 구룡리 일본인 사택과 자연촌의 배치와 전경 九 龍 里 社 宅 九 龍 里 26) 시마다 마사루( 島 田 優, 2012. 7.24. 인터뷰); 흥남시지 (개정판 2007)과 조선어 신문인 동 아일보 에도 조선인이 통근, 통학을 위해 전차를 이용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자주 볼 수 있다. 27) 마을은 크게 자연촌과 조성촌으로 구분되었다. 자연촌은 1928년 흥남공장 건설 이전부터 있 었던 구룡리와 내호를 비롯해, 토목공사와 공장 취업을 위해 모여든 최하층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운중리, 흥덕리와 같은 산간 마을이었다. 조성촌은 전시체제로 인해 노동자 수요가 급 증하면서 공장측이 세우거나 기존의 자연촌을 새롭게 개편한 마을로, 서본궁, 용흥, 용암리 가 해당했다. 이들 지역에는 1944년 토막굴이나 광산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한 간이 수용시 설인 한바( 飯 場 ) 수준의 조선인사택이 설립되었고, 지도에서도 그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손정목, 앞의 글, 650-651쪽.)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17

九 龍 里 社 宅 九 龍 里 * 출전: (위) 조선총독부, 흥남읍 시구개정공사계획 개요 및 설명서, 1932 (문 서번호: CJA0013886).; (아래) 日 本 窒 素 肥 料 株 式 會 社 編, 日 本 窒 素 肥 料 事 業 大 觀, 1937, p. 225. <그림 2>는 1930년대 초반 구룡리의 일본인 사택단지와 마을의 배치와 전 경이다. 사택단지는 벽돌 건물로 정연하게 조성된 반면 마을(자연촌)은 모두 지붕이 지붕을 잇는 꼴로 난립해 있었다. 시야를 더 낮추어 보면 상, 하수도 시설과 같은 도시의 기반 시설 역시 구룡리 마을의 미로같은 골목을 비집고는 갖추어 질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8) 일본인만이 거주할 수 있는 일본인 사택과 마을은 공간 편제 상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점이 일본인만의 안정된 사회가 실재했다는 점을 보여주지 는 않는다. 일본인 사택은 누가 거주할 수 있는가, 사택에 거주할 수 없는 자 는 어디로 가는가, 이들 나머지의 일본인들은 어떤 경험 속에 있었는가. 아래 에서는 흥남의 일본인 구성을 통해 이러한 물음을 이어가고자 한다. 28) 일본인 사택의 우수한 시설과 구룡리 마을을 비롯한 흥남의 여러 마을의 미로같은 골목과 전염병, 악취를 대조하는 경향은 식민지기 노동문학과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어 신문에 서도 자주 나타났다. (이북명, <병든 사나이>, 조선문학, 1934.1.; 이북명, <공장가>, 중 앙, 1935.4.(안승현 엮음, 일제강점기 한국 노동소설 전집 3, 보고사, 1995, 79쪽; 144 쪽.); < 交 通 事 故 頻 發 >, 동아일보, 1931.12.27.; < 興 南 空 家 激 增 주민들이류리>, 동아일 보, 1933.02.24.) 18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2. 하층 출신 일본인의 위치 오가타 키쿠노( 緖 方 キクノ)는 규슈 남단 가고시마현( 鹿 児 島 縣 ) 이즈미( 出 水 ) 출생이다. 산 속에서 농사를 짓다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아이들 교육 문제로 27살 되던 1929년 인근의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미 나마타에서 남편은 일본질소비료(주) 카바이트 공장 일용직으로 일했고, 緖 方 는 감자 농사를 지었다. 이사한지 7년째 되던 1935년 남편의 상사가 미나마타 에 있으면 직공도 되기 어렵지만 조선에 가면 바로 직공이 되고 충분한 돈도 벌 수 있다 고 해서 흥남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6년 전에 건너온 남편 사촌 의 사택에 일곱 식구가 모여 살다 남편이 두 달 만에 직공으로 취직해 사택에 들어가게 되었다. 29) 오가타의 사례는 흥남의 일본인 인구가 가장 크게 증가한 1935년에서 1936 년 경 일본 본토의 하층민 가족이 흥남으로 이주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흥남 지역에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조선 질소비료(주)의 공장 건물을 건설하면서 부터였다. 30) 초기 이주자들은 모기업 인 일본질소비료(주)의 공장이 건설되어 있던 구마모토현의 미나마타와 미야 자키현의 노베오카 31) 에서 공장 간부와 직공으로 근무했던 자로, 자진하거나 발령을 받아 흥남으로 전근해 왔다. 이후의 이주자들은 이들 초기 전근자의 인맥을 빌어 온 자들로 미나마타와 노베오카 현지 혹은 인근 지역 출신자가 29) 民 衆 史 5권, 193쪽. 30) 1927년 이전에도 흥남 부근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호진( 西 湖 津 ) 지역에서 발동선을 이용한 명태어업과 창고업에 종사했다. 다만, 서호진은 1944년 구역확장 이전까지 는 흥남의 행정 구역이 아니었기에 흥남 구역 내에 존재했던 구세대 일본인에 대해서는 아직 까지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서호진에 대해서는 興 南 市 誌 (1988, 56-70쪽; 107-108 쪽.)에 자세하다. 31) 노베오카 지역은 1945년 이후 현재까지도 일본질소비료(주)라는 모기업의 영향력이 큰 도시 로, 회사 설립자인 노구치 현창회( 野 口 遵 顯 彰 会 )가 있고 도시 내에 노구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최근까지도 흥남사우회 모임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신문에도 보고되고 있지만, 주로 간부나 연구원 출신 중심이다. 하층민의 회고는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日 本 初 の 偉 業 たたえるー 野 口 翁 ㆍカザレー 博 士 顯 彰 祭 >, 夕 刊 デイリー, 2010.10.06.; < 靑 春 の 地, ふ るさと 興 南 を 思 う>, 夕 刊 デイリー, 2008.10.18.)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19

다수를 이루었다. 32) 다수의 이주자들은 일본 본토의 불경기를 피해 흥남으로 이주했다. 1930년 이래 흥남의 인구 통계는 이러한 이주의 추세를 보여준다. <표 2> 흥남 연도별 인구통계 (단위: 명)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日 7,364 9,417 9,608 9,760 11,216 13,336 17,043 18,139 20,054 23,308 25,684 28,456 29,214 朝 15,360 13,585 15,450 14,409 18,263 24,653 26,477 39,297 46,701 68,013 85,458 122,064 133,101 外 2,277 497 402 410 496 1,103 776 641 711 732 841 964 1,088 合 25,001 23,499 25,460 24,579 29,975 39,092 44,296 58,077 67,466 92,053 125,417 151,484 163,403 * 출전: 조선총독부통계연보 (각년판); 음영은 필자가표기. 조선총독부에서 흥남의 연도별 인구를 수록한 것은 1930년부터 1942년까 지로, 일본인과 조선인, 외국인의 인구 증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 외국인은 주로 건설업 종사를 위해 계절 노동자로 이주한 중국인 일용 인부들( 苦 力 )이 었다. 33) 일본인 이주의 특징은 이들 중국인 인구의 증감과 비교하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34) 일본인의 경우 자연 증감폭을 감안한다고 해도 특히 1931년과 1936년 시점에서 큰 폭의 사회ㆍ경제적 인구 증가가 있었다. 반면, 중국인의 경우 1930년과 1935년 크게 유입되었던 인구가 다음해에 들어 대폭 축소하는 32) 이들 외에는 함경도 소재의 군대를 제대한 군인 출신이 많았다. 특히 흥남 인근의 함흥연대 에는 도호쿠( 東 北 ) 지방 출신자가 주로 배치를 받았기 때문에 흥남 공장에도 이들 도호쿠 지방 출신자가 다수를 이루었다. 나남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일자리를 구할 생각에 흥남공장 에 일용직 인부로 취업한 이소가야 스에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 民 衆 史 5권, 202쪽.; 이소가야 스에지, 위의 책, p.65.) 33) 함경도라는 지역적 특성상 소수의 러시아인의 인구도 고려할 수 있지만, 통계연보 외의 인구 자료인 국세조사보고서 및 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해 보면 흥남의 외국인은 중국인 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보고서 제2권 26쪽; 254-255쪽; 1935년도 동 보고서 제1권 조사의 개요, 14쪽 및 60쪽.; 손정목, 645쪽 참고.; 1933년 현재 함경남도 도내 전체에 중국인을 제외한 외국인은 모두 8명에 불과했다. (< 咸 南 道 內 人 口 百 五 十 萬 人 >, 동 아일보, 1933.11.03.) 34) 조선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인구 증가율이 커서 자연 증감과 사회ㆍ경제적 증감 사이의 차이 를 살피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흥남의 잦은 구역확장(1937년 이후)으로 인해 유입 인구 파 악이 더욱 어렵다. (조선총독부, 흥남읍회 회의록, 1937(문서번호: CJA0003234).) 20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조선인의 경우도 1930년과 1935년의 경우는 일본인보다 는 중국인과 유사한 인구 증감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인ㆍ조 선인이 공장 증설이나 도시 내 토목 사업을 목표로 유입되었다가 공사가 끝나 면 유출되거나 체류하는 반면, 일본인의 경우는 공장 증설이 완성된 시점을 노려 공장 취업을 위해 이주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누 릴 수 있었다. 일본 본토에 있을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채용되기 쉬웠고, 승진 역시 이전에 비해 빨랐다. 흥남에서는 일본 본토 공장에서의 경력을 인정해 일용인부였던 자는 직공으로, 직공이었던 자는 조장(소단위 직공 대표)으로, 조장이었던 자는 계원(대단위 직공 대표)로 채용될 수 있었다. 35) 일단 채용된 이후에는 본급 이외에도 재선수당( 在 鮮 手 當 ), 흥남수당, 가족수당, 식사수당, 장시간수당과 같은 여러 항목의 수당을 지급받기도 했다. 36) 다만, 이러한 혜 택이 일본인 내부에서도 계층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은 유의할 필 요가 있다. 계층별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은 주거 환경이었다. 일본인 사택 은 흥남의 모든 일본인에게 주어지 않았다. 사택은 직공 이상 인 기혼자에게만 제공되었다. 구성은 직급별로 차등적이어서 공장장의 경우 28평의 모든 부대시설이 갖추어진 사택에 살았지만, 일반 평직공은 4평 남짓 한 공간에 부대시설도 제한되어 있는 사택에서 지냈다. 같은 단지 내에 있어 도 공장장의 사택과 직공의 사택은 각종 건축물과 가로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37) 35) 民 衆 史 5권(76-80쪽.)의 싼 물가, 많은 수입 항목 참고. 36) 공장은 일본인에 대한 여러 수당 지급 조치를 해방 이전은 물론, 이후까지도 유지하고자 했 다. 民 衆 史 5권에 수록된 石 牟 禮 休 左 衛 門 라는 사원의 일기(p.240.)에는 1945년 8월 16일 조선인 급료를 인상한다는 회보가 발표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에 따르면 일본인의 경 우는 변화가 없고, 대신 조선인의 경우만 최소 25%에서 최대 50%까지 급여 인상을 실시하 기로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37) 같은 호남리 사택 단지 내에도 직급별로 구( 區 )가 나뉘어 있어 각 직급별 거주지는 도로와 건물 (체육관, 사원클럽)로 구분되었다. ( 辻 原 万 規 彦, 朝 鮮 窒 素 肥 料 の 興 南 地 区 社 宅 街 について: 野 口 研 究 所 所 蔵 史 料 を 用 いて, 日 本 建 築 学 会 計 画 系 論 文 集 779671), 2012.01., p.138.)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21

<표 3> 호남리, 구룡리 사택단지 내 구별( 區 別 ) 시설 비교 1구 2구 3구 4구 5구 위치 호남리 호남리 호남리 구룡리 구룡리 직급 사원(공장장~평사원) 준사원 조장 일반직공 일반직공 방 개수 7개~3개(급별) 3개 2개 2개 2개 크기 28평~9평 9평~6평 6평~4.5평 6평~4평 6평~4평 구조 주택식 주택식 주택식 아파트식 아파트식 부대시설 넓은 취사장 넓은 취사장 좁은 취사장 좁은 취사장 좁은 취사장 실내화장실 남녀별도 남녀별도 남녀공용 남녀공용 남녀공용 목욕탕 실내ㆍ개별 실내ㆍ개별 옥외ㆍ공동 옥외ㆍ공동 옥외ㆍ공동 정원 있음ㆍ나무O 있음ㆍ나무O 있음ㆍ나무X 없음 없음 * 출전: 民 衆 史 5권, 津 下 ヒデ 子 (흥남공장 사택과 전표 업무) 구술, 171-172쪽.; 辻 原 万 規 彦, 朝 鮮 窒 素 肥 料 の 興 南 地 区 社 宅 街 について: 野 口 研 究 所 所 蔵 史 料 を 用 いて, 日 本 建 築 学 会 計 画 系 論 文 集, 2012.01, pp.135-142. 사택 단지 내의 이러한 구분은 일본인 이라는 민족(식민자/피식민자) 혹은 인종(일본인/조선인/중국인)을 기준으로 하층민과 한데 묶인 사원층이 하층 출신의 노동자와 자신을 구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호남리 1구와 같은 흥남 의 사원 사택 거주민들은 도쿄제국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학연으로 맺어져 있 었다. 38) 5구 사택에 거주하는 일본인 직공이 흥남 사택 단지에서 공장장을 마 주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39) 일용인부처럼 직급이 낮거나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사택이 아닌 별도의 주 거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들 노동자나 가족은 동향 사람의 사택이나 마을에 있는 조선인이나 일본인의 집에서 하숙하거나 단신료( 單 身 寮 ) 라는 노동자 합 숙소에서 생활했다. 40) 38) 1945년 이후 회사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질소비료(주) 그룹은 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부 출신 이 정점에 있는 학맥으로 연결될 집단이었다고 한다.(NHK 取 材 班, NHKスペシャル 戦 後 50 年 そ の 時 日 本 は< 第 3 巻 >チッソ 水 俣 工 場 技 術 者 たちの 告 白, 日 本 放 送 出 版 協 会, 1995, pp.35-39.) 39) 5구 사택에 거주했던 한 부인의 기억은 상징적이다. 부인은 1구부터 3구까지의 사택을 양반 샤타쿠(양반사택, ヤンバン 舍 宅 ) 라 불렀지만 그 내부의 시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니시 미 스( 西 ミス), 현 94세, 2012.7.22. 인터뷰) 40) 하숙업은 흥남의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 사택에서는 적게는 2명, 많게는 5~6명까지 하숙생을 두는 가정이 있었다. 사택이 아닌 마을 에서는 하숙업이 직업적으로 성행했다. 하숙생들은 경제적인 상황을 비롯한 이유로 마을의 조선인ㆍ일본인 주택에 살았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하숙업에 대해서는 民 衆 史 5권의 22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일본 본토에서 하층의 생활을 하던 농민과 일용직 인부들은 흥남에 건너와 식민자 집단의 말단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전에 비 해 훨씬 많은 임금을 받았다. 승진할 경우 일본인 사택에도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장장ㆍ일본인 간부 일본인 직공 일본인 일용직 조 선인 직공 조선인 일용직 중국인 일용직으로 41) 구성된 직급별ㆍ인종별 차등 구조 안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본인의 말단,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 에 낀 경계인이라는 위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종종 마을의 조선인 집에 하숙 하던 일본인이 노동운동에 참여해 불온시되거나, 42) 일본인 사택 내에서 하숙 하던 경우에도 불륜이나 이혼과 같은 가정불화사건의 주범으로 이야기되곤 했 다. 43) 조선인과 한 마을에 살거나 일본인 사택에서 더부살이하던 이들 하층 출신 일본인들에게 일본인만의 안정된 사회 란 실재하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 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들의 감정과 욕망, 성향 속에서 일본인 사회 가 지녔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식민자만의 사회 가 하나의 지향점으로 기능한 측면을 알아보고자 한다. 小 形 キク의 구술(179쪽) 외에도 이소가야 스에지( 磯 谷 季 次 )의 회고(김계일 옮김, 우리 청춘 의 조선, 사계절, 1988, 66쪽.)를 참고할 수 있다. 41) 이 글에서는 중국인 일용인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자 한다. 1945년 이전 흥남의 인구 자료를 토대도 봐도 중국인 인구는 계절에 따른 이동성이 강했기에 도시 내 장기적으로 미친 영향력을 추적하기 어렵다. 일본어신문인 京 城 日 報 의 경우, 흥남의 중국 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조선어신문인 동아일보 의 경우 자선모금 참여 와 같은 선행이나 범죄 연루와 같은 악행을 단편적으로 보도하고 있을 뿐이다.(< 野 會 軍 逮 捕 일망에 四 명>, 동아일보, 1932.02.06.; < 血 汗 흘린 勞 賃 에서 醵 出 中 國 僑 民 同 情 >, 동아일 보, 1934.08.26.; < 前 後 九 回 나 轉 賣 된 少 女 >, 동아일보, 1935.03.30.) 여기에서는 중국인 일용인부의 생활상을 참고할 수 있는 다음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것에 그친다. 松 田 利 彦, 近 代 朝 鮮 における 山 東 出 身 華 僑 植 民 地 期 における 朝 鮮 總 督 府 の 對 華 僑 政 策 と 朝 鮮 人 の 華 僑 への 反 應 を 中 心 に, 東 アジアと 半 島 空 間 : 山 東 半 島 と 遼 東 半 島, 思 文 閣 出 版, 2003.; 王 恩 美, 第 四 節 一 九 四 五 年 以 前 における 華 僑 社 會 の 特 徵 と 中 國 人 意 識, 東 アジア 現 代 史 のなかの 韓 國 華 僑 : 冷 戰 體 制 と 祖 國 意 識, 三 元 社, 2008; 孫 承 會, 1931년 植 民 地 朝 鮮 의 排 華 暴 動 과 華 僑, 中 國 近 現 代 史 硏 究 제41집, 2009.; 노태정, 1920년대 在 조선 중 국인노동자의 실상,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2010. 42) 이소가야 스에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이소가야 스에지, 위의 책.) 이외에도 노동운동 관련 신문기사에서도 종종 일본인이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朝 窒 日 職 工 廿 餘 名 檢 擧 >, 동아 일보, 1931.06.02.; < 興 南 窒 素 職 工 百 餘 名 을 檢 擧 警 察 은 血 眼 活 動 繼 續 某 重 大 事 件 綻 露?>, 동아일보, 1932.05.02.) 43) 民 衆 史 5권, 177-181쪽.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23

Ⅲ. 일본인 되기 라는 역설 미우라 마코토( 三 浦 誠 )는 14살이 되던 1939년 할머니와 함께 흥남에 있는 숙모네 사택으로 건너왔다. 흥남에서 미우라는 할머니 때문에 여러 번 부끄러 움을 느꼈다. 어느 날 구룡리에 있는 영화관에 가던 길이었다. 앞서 가던 부부 가 어이, 봐봐. 조선까지 와서 농민처럼 똥통이나 짊어지고 밭이나 갈고. / 요보(ヨボ: 조선인을 비하하는 호칭 인용자)라고 생각했는데 내지인( 內 地 人 ) 이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부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미우라의 할머 니가 밭을 갈고 있었다. 구룡리 사택의 수세식 화장실에서 나온 오물을 길어 거름으로 쓰려고 할머니가 밭을 일군 것이었다. 44) 또 어떤 날은 할머니를 병 원에 모시고 갔다가 부끄러움을 겪었다. 의사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통역 필요 한 할머니 왔다 하며 간호사를 불렀다. 할머니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겠다 는 얘기였다. 미우라는 이런 상황들을 거치면서 흥남은 미나마타에 비하면 큰 물이어서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다. 시골 출신이나 갓 도시에 나온 티를 내는 시골뜨기들은 바보 취급을 당했다. 미나마타 사투리는 말씨가 사납지 않나. 나는 가능한 표준어를 사용하려고 했다. 나이든 사람들이란 거 기까지 와서 사투리를 쓰고... 라고 기억했다. 45) 미우라의 이야기는 일본 본토의 시골, 하층에서 생활하던 일본인이 흥남에 오면서 흥남의 일본인 에게 걸맞는 일본인다움 의 기준을 배우고 스스로를 규 제한 상황을 보여준다. 미우라에게는 사투리와 농사일로 상징되는 시골스러운 것, 농촌적인 것은 도태되고 낡은 것일 뿐만 아니라 조선인다운 것 이고 일본 인답지 못한 것 이었다. 이러한 농촌적인 것에 대한 거부는 특히 하층 출신 여 성들 사이에 중요한 변화를 낳았다. 흥남으로 이주 후 일본인 가족은 남성들 (남편, 아들)이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면서 상대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서 살펴본 부부의 대화에 나타난 것처럼 일본인 여성들(어 머니, 부인, 딸)에게 농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유포된 것이다. 이러한 44) 民 衆 史 5권, 200쪽. 45) 民 衆 史 5권, 202쪽. 24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이유로 어떤 여성들은 일본인이면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사모님이 되는 조선은 사바( 娑 婆 ) 극락이다. 여자의 극락. 이라고 여겼지만, 46) 한편에는 농 사라는 습관을 내려놓지 못하면서 새로운 일본인 여성상 에 갈등하는 사람들 도 생겨나게 되었다. 앞서 살펴본 오가타의 사례를 다시 들어보자. 나는 가자마자 일찍부터 세평 반 정도 되는 밭을 빌렸다. 도착한 게 5월 초였으니까 그 때부터 호박이랑 야채를 심었다. 2, 3년 정도 지나서는 밭을 더 늘릴 수 있었다. (중략 인용자) 남들은 오가타씨 는 조선에 와서 까지 뭐하러 그런 농민이나 하는 일을 하는거냐 고 자 주 말했다. 나는 조선에 놀러온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택 사모님들 입네 하는 여자들은 긴 기모노를 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멋을 부리고 돌아다녔다. (내가 인용자) 얼굴은 새까만 주제에 화장 같은 것도 전혀 하지 않으니 나를 보고 물건이나 파는 여자라고 생각했겠 지. 47) 인용문에서 오가타는 흥남에 건너온 후에도 일본 본토에서와 다름없이 농 사일을 했고, 그 일로 인해 흥남의 다른 일본인들에게 여러 번 빈축을 산 경험 을 이야기했다. 남들에게는 나는 조선에 놀러온 게 아니다 라고 이야기했지만 인용문 말미에서 물건이나 파는 여자로 보았겠지 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오 가타 스스로도 다른 일본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하층 출신 여성의 경우 흥남 이주 후 농민의 생활과는 거리를 멀리 했다. 흥남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 48) 라며 농사일과 거리를 두었지만 문 제는 남았다.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이나 굵어진 손마디는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그림 3> 참조.) 하층 출신 여성들은 화장을 하고 손수 건을 둘러 그을린 피부나 손마디를 가리며 흥남의 다른 일본인들의 시선을 의 46) 民 衆 史 5권, 74쪽. 47) 民 衆 史 5권, 195쪽. 48) 이시무레 사토시( 石 牟 禮 智, 현 79세, 2012. 7.24. 인터뷰)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25

식하고, 한편으로 조선인 여성과는 차이를 두고자 했다. <그림 3> 하층민 출신 여성의 기념 사진 * 사진 맨 왼쪽의 여성은 손 위에 하얀색 손수건을 둘렀다. 농사일을 했어서 손가락 마디가 굵은 게 보이기 흉하다 는 게 이유였다. (출전: 民 衆 史 5권, 201쪽.) 한편, 하층 출신 남성은 직장 내에서 자신과 유사한 직급의 조선인과 중국 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주로 남성의 공간이었던 공장 내 부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중국인이 일상적으로 대면했다. 공장 내부의 남성 들도 공장 바깥의 여성들처럼 조선인의 일 과 일본인의 일 을 구분하는 방식 으로 경계를 세웠다. 이들 사이에는 뭐야, 넌 일용직이야? 음, 조선인같은 일 이네. 49) 라는 말투가 퍼져 있었고 이런 분위기는 일본인의 말단으로 편입한 하층 출신자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후쿠야마 헤이이치( 福 山 兵 市 )의 사례는 하층 출신 일본 남성 노동자가 흥남 공장에 취업하며 경험한 감정 변화를 보 여준다. 조선에 건너올 때에도 거기에 가면 좀 뻔뻔해 져야지 생각했다. 49) 民 衆 史 5권, 83쪽. 26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연공계( 鉛 工 係 )에는 조선인 직공이 20명 정도 있었다. 경력이 짧은 일용직에게 직공은 신과 같았다. 절대였다. 그런데도 일본인 일용직에 게 조선인 직공은 굽실굽실 댔다. 일본인의 경력은 일본인 직공에게만 해당했다. 도리어 일본인 일용직은 조선인 직공을 너희들은 요보다, 요보 라며 바보취급을 했다. 조선인 인부를 써서 일을 시켜라. 업무 내용은 이러이러하다 라는 명령이 오면 일을 시키는 것이 내 직분이었 으니까. 그게 내 일의 책임이었던 거다. (중략 인용자) 나보다 아래 가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조선인을 쓸 수 없다. 그리고 조선인을 쓰지 않으면 조선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50) 열입곱 살이 되던 1930년에 흥남으로 건너온 후쿠야마는 공장 최하층의 일 용직으로 채용되었다. 후쿠야마는 취업 후 조선인 직공을 비하해 직급을 역전 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세웠다고 기억했다. 타인이 말하는 조선인같은 일 을 맡게 된 현실 속에서 조선인에 대한 바보취급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 라기보다는 이처럼 의식적인 필요에 따라 선택한 일이었다. 다른 하층 출신 일본 남성의 구술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무지와 부도덕함에 대한 비난이 반복 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점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책임감이란 게 없는 자들인 거다 조선인은 의리도 인정도 몰랐다. 은혜도 몰랐다 조선인은 향상심이란 것도 없다 사건은 특히 조선인이 많았다. 조선인은 교활하기 때문이다. 51) 하층의 일본 남성 노동자들이 품었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비난과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은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로 이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다시 미 50) 民 衆 史 5권, 163쪽. 51) 民 衆 史 5권, 119-120쪽, 140쪽.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27

우라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러한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정형화와 일본인다 움 이라는 자의식의 관계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미나마타 생활은 참담하고, 그냥 참담했다. 걸식하는 것 외에는 살 방법이 없었다. 그런 괴로움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기분이 앞섰다. 소나 말이나 먹을 것 같은 음식물, 소나 말이 맛있어 하며 먹을 것 같은 음식 에서 해방되었으니까. 게다가 거지같은 옷에서 해방되기도 했고. 6할 ( 割 ), 4할까지 빼앗기던 소작인의 둘째, 셋째 아들의 슬픔은 이제 질렸 고 두 번 다시는 농민같은 건 안될꺼라는 마음이 있기도 했다. 조선까 지 와서 더럽게! 농민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지 않다 는 것은 모두 그런 마음의 반향( 反 響 )이었다. 조선이란 곳은 한 껍질 벗기면 일본 전국에서 생계를 잃은 자가 모여든 곳이었다. (중략 인용자) 모두 내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질릴 만큼 하고 조선으로 건너와서 사치스러 운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막 도망쳐 온 빈핍( 貧 乏 )한 생활을 비웃고 싶 었던 것이다. 52) 미우라의 이야기는 궁핍했던 일본 본토의 생활에 대한 반발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구걸과 걸식, 소작농의 자식으로 겪었던 가난의 기억은 강하게 남아 식민지에서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흥남에 건너와 새로운 사회에서 마주한 계급 사다리에 갓 첫발을 내딛은 이들 하층 출신 일본인은 과거 자신의 모습 을 조선인에 붙박으면서 사다리의 아래로 더욱 밀어냈다. 흥남으로 이주한 하층 출신 여성과 남성은 조선인이나 중국인과 유사한 자 신의 과거, 혹은 조선인이나 중국인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며 일본인다운 것 을 구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고 자 노력했다. 이 장에서 살펴본 회고에 나타난 표준어( 사투리), 화장( 그을 린 얼굴), 손수건( 굵어진 손마디), 폭언은 조선인ㆍ중국인과 다른 일본인다 52) 民 衆 史 5권, 203쪽. 28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움 이라는 경계 안에 머물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모호한 위치에서 자기규제를 통해 스스로 보수화해간 모습을 보여준다. Ⅳ. 외면과 교제 대개의 경우 흥남 내에서 일본인은 조선인을 보고도 외면했다. 마주침은 일 상적이었다. 사택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엇갈려 있는 조선인 학교와 일본 인 학교의 학생들은 등굣길마다 조선인 아이들을 마주쳤다. 53) 통학이나 통근 을 위해 오른 전차에서도, 54) 근무가 끝난 후 몰려간 천기리( 天 機 里 ) 술집에서 도 55) 어디에나 조선인은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보고도 못 본척하기를 선택했 다. 한 구술자는 해방 이후에도 소련 아이들과는 놀았지만 조선 아이들과는 절대 놀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구술자에게는 그것이 당시의 분위기 였다. 그 러나 몇몇의 경우는 조선인과 친분 관계를 갖기도 했다. 아래에서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가타는 밭에서 일하면서 조선인 여성들(원문은 어머니[オモニ])과도 낯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오가타는 기억나는 대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술하고 있다. 53) 이시무레 사토시, 위의 인터뷰. 54) 시마다 마사루, 위의 인터뷰. 55) 民 衆 史 5권, 153쪽.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29

<표 4> 오가타의 조선 여성과의 대화 회고 구술 원문 소리 예상 해석 オクサン オデミ 오쿠상, 오데미 사모님, 어디? オデミ オッチエ(オデミてなあいに) オクサン ドトスンデル 五 区 ヨ タンシン オリマッソ(あんたはどこ) 오데미, 옷째? 오쿠상, 도코 순데 루 오쿠요. 당신, 오 리맛소 タンシン チョッコンチョッコン(すぐそこ) 당신, 초콤, 초콤 오데미라니 무슨 뜻? 사모님, 어디 살 아? 5구요. 당신, 어디 서 왔소. 당신 조금 조금(바 로 거기) * 출전: 民 衆 史 5권, 198쪽. 대화를 회고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어와 함경도 방언이 원칙 없이 뒤섞여 있 어 명확한 의미를 번역하거나 통역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양 쪽 모두가 불완전하나마 단어와 어휘, 행동을 통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가타는 밭에서 자주 만난 조선인 여성의 집이 있 는 마을에 가 밥을 먹기도 했고, 역으로 조선인 여성이 도움을 구할 때는 자신 의 사택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양쪽의 교류가 원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자. 저기[チョウゲ(あそこ)] 사모님은 쌀을 두면 몰래 훔쳐가고, 계 란도 훔치고 해. 여기 사모님은 마음씨가 좋아서[ 胸 チョンゴシだか ら]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어. 라고 신용을 받았다. 어머니에게 예쁨을 받은 거다. 그래도 말을 하는 것과 신용하는 것은 또 별개이다. 조선인 마음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터놓지 않았 다. 모든 것을 터놓고 보여주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하면 안됐다. 마음 을 터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내 얘기를 전부 터놓는다는 얘기고 내 지혜 도 전부 터놓는다는 게 아닌가. 56) 56) 民 衆 史 5권, 199쪽. 30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오가타는 조선인 여성이 자신을 신뢰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바로 조선인은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고 단정한다. 말과 신용을 분리하는 것 을 볼 때 오가타가 둘 사이의 문제를 불완전한 의사소통 때문이라고 보는 것 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감정의 변화의 원인은 조선인은 신용 할 수 없다, 내 얘기를 전부 터놓을 수 없다 는 오가타 자신의 머뭇거림에서 비롯했다. 오가타의 회고는 하층의 조선인과 하층의 일본인 사이의 교류가 양 자가 지닌 신뢰나 편견, 혹은 앞 장에서 살펴본 일본인다움 에 대비되는 조선 인ㆍ중국인에 대한 시선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미나마타의 산골 출신으로 1932년 흥남에 건너온 오니즈카 지사쿠( 鬼 塚 次 作 )는 조선인 동료와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오니즈카는 하역 계( 荷 役 係 ) 직공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인 동료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도 처음 2년간은 조선인 동료와 외면하며 어색하게 지냈다. 2년쯤 지난 후 조선인 쪽 이 먼저 다가와 친분을 맺기 시작한 이후에는 작업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밥 을 먹고, 고민을 나누었다. 부부 동반으로 마을과 사택을 오가며 모임을 하는 한편, 오니즈카가 조선어를 익혀 서툴게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니즈카가 조 선인과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니즈카는 조 선인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간신히 심상소학교를 나와서 글자도 별 로 모르고 셈도 할 줄 몰랐다. 그런 자가 선생으로, 경찰로 근무했던 자들과 함께 일한다니! 내게 조선인은 대단해 보였다. 57) 두 사례는 하층 출신 일본인이 조선인과 가졌던 관계 맺기의 단편을 보여준 다. 그러나 오가타의 경우는 조선인은 얼굴도 마음도 일본인과는 비슷하지가 않다. 닮은 구석이 없다는 이야기다 58) 고 결론을 지으면서 다수의 일본인들이 세웠던 경계 안쪽으로 돌아갔다. 반면, 오니즈카의 경우 얼마나 가까운 친구 가 될 수 있었는지 그건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이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전(해방-인용자) 후에 부르고 하지는 않았을꺼다 라고 기억할 만큼 감정적인 유대를 오래 간직했다. 결국 경계 밖의 만남은 통역과 소통의 57) 民 衆 史 5권, 146-150쪽. 58) 民 衆 史 5권, 317쪽.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31

문제였다기 보다는 시선과 심리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외면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간혹 만남은 이루어졌지만 교제 이후에도 일본인다움 이라는 시선 밖을 택하기 보다는 시선 안으로의 회귀가 자연스러웠다. 대다수의 하층 출신 일본인들은 스스로 세운 흥남의 일본인다움 이라는 기준에 속하기 위해 평범 한 개인에서 식민지 라는 체제를 지탱하는 견고한 보수층으로 변화했다. Ⅴ. 맺음말 이 글은 식민지기 조선의 흥남( 興 南 )에 거주한 하층 출신 일본인들의 구술 분석을 통해 식민지의 일상에서 일본인이 왜 그리고 어떻게 평범한 개인에서 식민자 로 변화하는지의 과정을 분석했다. 주요 자료는 1990년 출간된 구술 록: 미나마타민중사(Minamata Minsyusya) 5권의 수록 구술을 다루었다. 이 글은 이를 통해 평범한 개인들이 식민지라는 체제를 지탱한 보수층을 형성한 과정을 알아보고자 했다. 흥남은 1927년 일본질소비료(주)라는 기업이 조선 북단 함경남도에 조선질 소비료(주)라는 공장을 세우며 형성된 공장도시였다. 식민지 시기 이 도시에 는 전체 인구 중 약 4분의 1을 넘는 일본인 인구가 거주했다. 이들 중 상당수 는 일본 본토에서 건설 일용직이나 소작농으로 종사하던 하층민 출신으로, 이 주 후에는 지역 내 일본인 집단의 말단에 속했다. 상류층에게 안정적으로 주 어진 일본인용 주거 공간이나 부대 시설 이용 권한은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제 한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하층 출신 일본인이 이주 후에도 일정 기간을 조선인과 공유하며 생활했다. 일본인용 주거나 부대 시설 이용 권한을 얻은 후에도 직장이나 전차, 마을 길목에서 조선인은 언제나 있었다. 이들 하 층 출신 일본인들에게 일본인만의 공간 이란 실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이주 후의 경험을 살펴보면 일본인 사회 란 실재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생활을 팽팽하게 얽어맨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일본인다움 이라는 기준의 존재이다. 하층 출신 일본인들은 이주 후 32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농촌에 익숙한 생활 습관이나 외모, 업무 방식을 의식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 다. 표준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화장으로 그을린 피부를 가리는 노력은 일 본인은 도시민다워야 하고, 이를 통해 조선인과 자신의 영역을 구분하고자 한 것에 해당했다. 한편으로 이들은 직장에서 함께 일한 조선인들을 부도덕하고 나태하다는 이미지로 정형화하며 자신들과 구분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식적 행위들은 노력하면 할수록 이미 일본인인 자신을 더욱 일본인답게 행동하도 록 규제하는 역설을 낳았다. 둘째, 조선인과의 대면 관계에서 나타난 의식적 행위들이다. 대부분의 일본 인들은 일상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조선인을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다. 극히 일부가 조선인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조선인과의 관계 맺기의 과 정에서도 일본인다움 이라는 경계 안으로 돌아가기 쉬웠다. 결국 하층 출신 일본인들은 스스로 세운 흥남의 일본인다움 이라는 기준에 속하기 위해 평범한 개인에서 식민지 라는 체제를 지탱하는 견고한 보수층으 로 변화했다. 참고문헌 <연속간행물> 조선총독부 관보,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京 城 日 報, 東 亞 日 報, 朝 鮮 中 央 日 報 <단행본> 高 橋 晄 正, 日 本 の 医 療 を 告 発 する, 亞 紀 書 房, 1972. 以 北 五 道 廳 興 南 市 誌 編 纂 委 員 會, 興 南 市 誌, 興 南 市 誌 編 纂 委 員 會, 1988. 이소가야 스에지( 磯 谷 季 次 ), 김계일 옮김, 우리 청춘의 조선, 사계절, 1988. 岡 本 達 明 編, ( 聞 書 ) 水 俣 民 衆 史 5 卷, 草 風 館, 1990. 堀 和 生, 朝 鮮 工 業 化 の 史 的 分 析 日 本 資 本 主 義 と 植 民 地 経 済, 有 斐 閣, 1995. 姜 在 彦 編, 朝 鮮 における 日 窒 コンチエルン, 不 二 出 版, 1985.10.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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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이 글은 식민지기 조선의 흥남( 興 南 )에 거주한 하층 출신 일본인들의 구술 분석을 통해 식민지의 일상에서 일본인이 왜 그리고 어떻게 평범한 개인에서 식민자 로 변화하는지의 과정을 분석했다. 주요 자료는 1990년 출간된 구술 록: 미나마타민중사(Minamata Minsyusya) 5권의 수록 구술을 다루었다. 이 글은 이를 통해 평범한 개인들이 식민지라는 체제를 지탱한 보수층 형성의 과 정을 알아보고자 했다. 흥남은 1927년 일본질소비료(주)라는 기업이 조선 북단 함경남도에 조선질 소비료(주)라는 공장을 세우며 형성된 공장도시였다. 식민지 시기 이 도시로 이주한 일본인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 본토에서 건설 일용직이나 소작농으로 종사하던 하층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주 후 지역 내 일본인 집단의 말단에 속해, 상류층 일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조선인과 공유해 야 했다. 이로 인해 이들 하층 출신 일본인은 일본인다움 과 조선인다움 에 대한 구분, 그에 따른 자기 규제, 조선인에 대한 정형화, 조선인과의 대면 관계 의 회피의 방식으로 일본인 사회 라는 지향을 만들어 갔다. 결국 하층 출신 일본인들은 스스로 세운 흥남의 일본인다움 이라는 기준에 속하기 위해 평범 한 개인에서 식민지 라는 체제를 지탱하는 견고한 보수층으로 변화했다. 주제어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재조일본인( 在 朝 日 本 人 ); 식민자( 植 民 者 ); 식민자 사 회; 흥남( 興 南 ); 미나마타( 水 俣 ); 이중도시; 하층민; 노동자; 노동자 가족 36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Abstracts> Making Colonizer-only society : The urban experience and self-regulation of lower-class Japanese Settlers in the colonial period Yang, Ji Hye (Hanyang University) This report is the analysis of the process why and how the lower class Japanese change from ordinary individuals to Colonizer in their daily life in the colony through oral interview of them residing in Heungnam in the colonial Chosun period. Oral dictations were extracted for the analysis from Minamata Minsyusya(Vol.5) published in 1990.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process of formation of the Conservatives who sustained the colonial system of ordinary individuals solidly. Hungnam was a city formed on the northern tip of Hamgyeongnam-do, Chosun with the foundation of Chosun Nitrogen Fertilizer Company by Japan Nitrogen Fertilizer Company in 1927. Over one quarter of the entire population were Japanese who resided in the city in the colonial period. Many of them were from lower class that engaged in daily construction works or peasantry in mainland Japan, and belonged to lowest class in the Japanese society after settlement(immigrant). Permission to use the facilities or residential space, which was given to the upper class stably, relatively limited to them. As a result, not a few lower class Japanese had to share with Koreans for a certain period after settlement(immigrant). They had to meet Koreans everywhere including works, street cars and back streets even after they obtained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37

permission to use the residential and ancillary facilities for Japanese. Space of Japanese only was not available to these lower-class Japanese. Investigation to their experience after settlement(immigrant) indicates that the non-availability of Japanese-only society rather played as a strong centripetal force to tightly intertwine their life. First of all, it was the existence of the criteria of Japanese-ness. The lower-class Japanese consciously try to change their habits, appearance, or way of doing business familiar to rural life. For example, they tried to speak standard Japanese and hided their tanned faces by makeup to look like urbanites, to differentiate themselves from Koreans. On the other hand, they distinguished Koreans from them formalizing the Koreans in the workplace as immoral and lazy. These efforts, the more consciously they tried, led to the paradox to regulate them to behave even more Japanese-like. Secondly, it s their conscious act appeared in face-to-face relationship with the Koreans. Most of the Japanese people took the attitude that turns away Koreans encountered in their daily lives. Only a fraction of them built a long-term relationships with Koreans but, but they still had the experience of hesitation to build a relationship with the Koreans. In summary, the lower-class Japanese who had immigrated to the colonial city Heungnam set the basis for the Japanese-ness and made efforts to belong within the criteria, As a result, all the experience they did in Heungnam, including the hesitation, were the cause to solidly support the colonial system. 38 도시연구: 역사 사회 문화 제7호

Keywords Japanese in colonial Korea(Chosun); colonizer; Colonizer society; Heungnam; Minamata; Lower class; Laborer; Laborer family 논문투고일 심사완료일 게재확정일 2012. 04. 30. 2012. 06. 03 2012. 06. 12. 식민자 사회 의 형성 양지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