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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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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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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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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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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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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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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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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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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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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2 佛敎學報 第 48 輯 서도 이 목적을 준수하였다. 즉 석문의범 에는 승가의 일상의례 보다는 각종의 재 의식에 역점을 두었다. 재의식은 승가와 재가가 함께 호흡하는 공동의 場이므로 포 교와 대중화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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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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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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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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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교육실습 소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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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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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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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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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고침을 받은 맹인 바디매오 말씀 : 마가복음 10장 46~52절 조용기 원로목사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 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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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구보학보 12집. 1),,.,,, TV,,.,,,,,,..,...,....,... (recall). 2) 1) 양웅, 김충현, 김태원, 광고표현 수사법에 따른 이해와 선호 효과: 브랜드 인지도와 의미고정의 영향을 중심으로, 광고학연구 18권 2호, 2007 여름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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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힉년미술

135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머리말 협저불상( 夾 紵 佛 像 )이라는 것은 불상을 제작하는 기법의 하나로써 삼베( 麻 ), 모시( 苧 ), 갈포( 葛 ) 등의 인피섬유( 靭 皮 纖 維 )와 칠( 漆 )을 주된 재료

Transcription: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1) 김 문 경(백양사박물관) Ⅰ. 머리말 Ⅱ. 麗 末 鮮 初 佛 敎 界 와 白 羊 寺 Ⅲ. 白 羊 寺 의 僧 役 負 擔 <차 례> Ⅳ. 僧 役 減 免 의 背 景 과 推 移 Ⅴ. 맺음말 <국문요약> 白 羊 寺 는 백제 무왕 33년(632) 신라의 異 僧 如 幻 禪 師 에 의해 창건되었다. 고려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양사는 高 僧 大 德 을 배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불교 선종의 맥을 유지 계승 발전시켜 왔기에, 백양사는 불교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位 相 을 차지하고 있다. 14세기 覺 眞 國 師 승려 淸 叟 의 중창 노력과 여말선초 4차에 걸친 전장법회를 통해 백양사의 寺 勢 는 보다 융성해졌다. 조선 초 백양사의 寺 格 은 白 嵓 寺 傳 帳 受 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첫째, 당시 백양사에는 寺 院 寶 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특 히 忌 日 寶 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려시대 사원보는 일종의 殖 利 機 構 로서, 사 * 본고에서 활용한 자료들은 백양사박물관 소장 유물들이며, 본 박물관에서 소 장하고 있는 田 籍 懸 板 記 文 의 양은 50여 점에 달한다. 백양사박물관은 전 남 장성군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본사 백양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聖 寶 博 物 館 이다. 본 박물관은 2005년 3월 개관한 이래 수장고 시설 확충을 위해 현재 리노베이션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 11월 중으로 재개관할 예정 에 있다. 현재 본 박물관에서는 자료 수집 및 조사 작업을 연차적으로 진행하 고 있으며, 추후 학계에 관련 연구 성과물을 제출해 나가고자 한다.

82 선문화연구 제2집 찰의 주요한 재정 기구로 활용되었다. 이는 여말선초 백양사의 경제활동 양상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당시 백양사의 가람규모를 알 수 있다. 백양 사의 가람규모는 11세기 中 延 禪 師 에 의해 중창되었을 때가 85칸 규모였으며, 태 조 2년(1393) 때는 76칸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백양사의 寺 勢 는 조선시대 불교정 책과 함께 浮 沈 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의 백양사는 110칸 규모의 湖 南 大 刹 로 자 리매김하였다. 조선왕조 정부에서는 승려를 遊 休 勞 動 力 으로 인식하여, 그들에게 다양한 종류 의 役 을 부과하였다. 조선 중 후기 백양사에는 철종 7년(1856)부터 고종 24년 (1887)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完 文 과 節 目 등이 발급되어 僧 役 의 減 役 및 免 役 조치가 내려졌다. 이들 자료를 보면, 백양사가 부담했던 僧 役 의 實 狀 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명분으로 僧 役 減 免 의 조치가 내려졌는가를 알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철종 11년(1860)에 발급된 完 文 을 중심으로 僧 役 의 부담과 僧 役 減 免 의 배경 및 추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당시 백양사가 부담했던 僧 役 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양사 는 封 山 願 堂 으로 지정되어 四 山 에 禁 標 가 세워져 僧 役 과 雜 貢 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인근 입암산성의 주둔군들이 백양사를 자주 침탈해오자, 完 文 에 四 山 의 경계를 명시함으로써, 침탈 금지 조처를 내렸다. 둘째, 3개의 寺 下 村 에서 백양 사를 지원해 주었다. 이들 三 洞 民 은 백양사를 수호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였으므 로, 이들에 대해 침탈 금지 조치를 내려주었다. 셋째, 백양사에서 부담하였던 雜 貢 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다. 백양사는 각 營 邑 의 校 卒 과 무뢰배 書 院 班 常 大 芚 寺 笠 巖 山 城 守 直 軍 등으로부터 침탈의 폐해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官 用 物 品 으로 비자나무 槐 花 松 花 그리고 覆 盆 子 를 정기적으로 例 納 하였다. 가혹한 수 탈이라 볼 수도 있는 백양사의 이러한 승역 부담은 여타 사찰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그다지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백양사는 어떠한 명분으로 僧 役 의 減 役 및 免 役 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조선후기 전국의 名 山 大 刹 에 王 室 願 堂 이 설립되었던 경향에 편승하여, 조선 중 후기 백양사는 왕실원당으로 지정받아 19세기 말까지도 僧 役 減 免 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즉 문정왕후(1501 1565)의 명으로 백양사에서 國 魂 祭 가 설행되고, 왕실과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왕실의 후원을 받음으로써 왕실원당에 버금가는 寺 勢 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인헌왕후(1578 1626)와의 관련성도 僧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83 役 減 免 의 명분으로 긴요하게 작용하였다. 인헌왕후는 양란으로 피폐해진 백양사 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여 雲 門 庵 에 後 佛 幀 과 佛 像 조성에 있어 대시주자로 동참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헌왕후의 影 幀 을 백양사에 봉안하였다.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러 백양사는 흥선대원군(1820 1898)의 封 山 願 堂 으로 지정됨에 따라, 四 山 에 禁 標 를 세워 경계를 명확히 하고 침탈 금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백양사 에서는 국가 주도의 國 祈 祭 가 설행됨에 따라 이를 통해 減 役 및 免 役 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주제어: 백양사( 白 羊 寺 ), 문정왕후( 文 定 王 后 ), 인헌왕후( 仁 憲 王 后 ), 승역( 僧 役 ), 완문( 完 文 ), 절목( 節 目 ), 왕실원당( 王 室 願 堂 ) Ⅰ. 머 리 말 13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이며, 호남지방의 要 刹 이다. 1) 지리적으로 볼 때 백양사는 전북과 전 남 지역의 접경에 위치함으로써, 타 지역의 문화가 전남권으로 유입되 는 주요 關 門 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백양사가 배출한 고승대덕으로는 고려말의 覺 眞 國 師 (1270 1355)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의 騎 虛 靈 圭 (? 1592) 逍 遙 太 能 (1562 1649) 白 谷 處 能 (1617 1680) 蓮 潭 有 一 (1720 1799) 白 坡 亘 璇 (1767 1852) 曼 庵 宗 憲 (1876 1956) 映 湖 鼎 鎬 (1870 1948) 등이 있다. 이들 고승들은 禪 敎 수행에 힘쓰는 한편 사대부들과의 交 遊 를 통해 조선의 사상계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백파선사는 추사 김정 1) 역사적으로 볼 때, 古 佛 叢 林 白 羊 寺 는 白 巖 寺 淨 土 寺 등의 寺 名 으로 불리 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寺 名 인 白 羊 寺 로 불리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 는 내용의 혼동을 피하고자 현재의 寺 名 인 白 羊 寺 로 일관되게 사용하고자 한다.

84 선문화연구 제2집 희와 禪 論 爭 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편지를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교유하 였다. 백양사에 현전하는 추사 관계 유물들이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타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문화는 백양사를 거쳐 한층 정제된 문화로 발전하 여 전남권으로 전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백양사와 인접 해 있는 笠 巖 山 城 은 조선후기 양란 중 호남 승병 활동의 주요 거점이며, 전남권의 주요 關 防 이었다. 이에 백양사 승려들은 입암산성을 기반으로 적극적이고 활발한 義 僧 兵 활동을 전개하였고, 백양사에는 승려 靈 圭 希 黙 印 眞 과 같은 義 僧 將 들이 주석하기도 했다. 2)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양사는 조선후기 불교사 사상사 불 교미술사적으로 볼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이 분명하다. 이에 반해 지금까지 불교사 분야에서 백양사를 다룬 연구는 미비하다. 종래의 연 구는 일제시대에 간행된 朝 鮮 寺 刹 史 料 에 수록된 백양사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이들 자료 가운데 몇몇은 12 15세기의 吏 讀 를 사용한 문서라는 점에서 일찍이 국어학 분야에서 주목받기 시작했 다. 3) 또한 불교사적으로 볼 때, 이들 자료는 당시의 백양사가 처한 사정 을 파악하고, 僧 政 運 營 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그 후 불교사 분야에서는 1980년대 허흥식에 의해 처음으로 백양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4) 그는 조선사찰사료 에 수록된 백양사 관련 古 文 書 2) 白 羊 寺 四 名 日 薦 靈 戰 亡 錄 [No. 白 博 - 遺 物 -0054]. 3) 다음의 사료가 여기에 해당한다. 宣 德 五 年 四 月 日 僧 錄 司 貼 傳 書, 朝 鮮 寺 刹 史 料 上. 宣 德 六 年 辛 亥 八 月 十 一 日 監 務 官 貼 傳 書, 朝 鮮 寺 刹 史 料 上. 宣 德 七 年 壬 子 四 月 初 八 日 議 政 府 關 字 傳 書, 朝 鮮 寺 刹 史 料 上.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된다. 李 丞 宰, 高 麗 時 代 의 吏 讀 (태학사, 1992). 홍기문, 吏 讀 硏 究 (과학원출판사, 1957); 吏 讀 硏 究 (도서출판 태동, 1989 (영인본)). 4) 허흥식, 14 15 世 紀 淨 土 寺 의 古 文 書, 高 麗 佛 敎 史 硏 究 (일조각, 1986).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85 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수록된 사료를 분석하여 해제작업을 시도하 였으며, 이를 통해 이후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다 만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14 15세기 백양사의 면모를 구체화시키지 못 하고, 관련 자료를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와 같은 초기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병희는 여말선초 백양사의 중창과 경제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5) 그는 14세기 중반 백양사 의 重 修 重 創 내용을 살펴보고, 轉 藏 法 會 를 통해 당시 승려 및 사찰의 교류 관계를 규명하였으며, 백양사의 경제사정과 분규내용에 대해 검토 하였다. 그리하여 각진국사의 백양사 중창과 그의 俗 家 인 固 城 李 氏 家 門 과의 관련성에 대해 규명하였다. 지금까지도 백양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가 미공개 상태이므로, 종 래 연구 성과들은 조선사찰사료 에 수록된 백양사 관련 자료와 原 史 料 를 대조하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 고문서는 단순히 寺 中 에 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불교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 는 자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들 자료의 활용은 긴요하다. 특히 연구 의 공백 시기라 할 수 있는 조선 중 후기 백양사의 寺 勢 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 시기 백양사의 寺 勢 가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고려 말부터 근대까지 백양사의 위치가 명확해질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崇 儒 抑 佛 의 표방 아래 이전 시기에 비해 침체되었 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義 僧 兵 의 자발적인 전쟁 참여와 이후 승 려들의 國 役 담당은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혹독한 雜 役 으로 인한 불교계의 위기는 국왕과 관리들로 하 여금 그 처우를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케 했다. 그러나 처우 개선과 같은 호의는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왕실의 願 堂 寺 刹 로 지정되어 役 의 減 免 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청이나 書 院 등에서는 사찰을 중요한 5) 이병희, 高 麗 末 朝 鮮 初 白 羊 寺 의 重 創 과 經 濟 問 題, 韓 國 史 硏 究 99 100 (한국사연구회, 1997).

86 선문화연구 제2집 收 稅 原 으로 생각하여 온갖 경제적 부담을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백양사는 10여 차례 完 文 節 目 등을 成 給 받으며, 僧 役 減 免 의 혜택을 받아왔다. 이에 본고에서는 백양 사가 부담하였던 僧 役 의 實 狀 과 減 免 의 배경 및 추이에 대해 고찰함으 로써, 조선 중 후기 백양사의 寺 勢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麗 末 鮮 初 佛 敎 界 와 白 羊 寺 白 羊 寺 는 호남의 關 門 인 노령산맥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무 왕 33년(632) 신라의 異 僧 如 幻 禪 師 에 의해 창건되었다. 당시 사찰의 이 름은 白 巖 寺 였는데 6), 이는 산의 암석이 모두 白 色 이기 때문에 붙여진 寺 名 이다. 7) 이후 불교계의 상황과 백양사의 寺 格 이 변화함에 따라, 사찰 의 이름은 변모하였다. 백양사는 19세기 중반까지 白 巖 寺 淨 土 寺 라는 寺 名 을 혼용해 오다가, 19세기 후반 이후부터 白 羊 寺 라 하여 통일된 사 찰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양사는 고려말의 覺 眞 國 師 復 丘 (1270 1355)에 의해 대규모 중창 불 사를 하여 寺 勢 를 확장시키는 한편, 여말선초 4차에 걸쳐 轉 藏 法 會 를 개 최함으로써 寺 格 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었다. 각각의 법회 내용을 살펴 보면, 비용을 마련하는 방법 참여한 인물 행사를 위한 승려 조직 목 표하는 바 등 다소 차이를 보인다. 6) 白 巖 山 淨 土 寺 橋 樓 記,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極 樂 殿 佛 糧 禊 序 ; 이능화, 朝 鮮 佛 敎 通 史 上 (1911). 7) 白 巖 山 淨 土 寺 橋 樓 記,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87 <표 1> 전장법회에 참여한 승려의 규모 구분 시기 참여한 승려의 규모 知 識 道 者 합계 1차 층혜왕 2년(1341) 83명 70명 153명 2차 충목왕 4년(1348) 결락 결락 결락 3차 공민왕 2년(1353) 46명 52명 98명 4차 태조 9년(1409) 55명 45명 100명 2차 전장법회에 참여한 승려에 대한 기록은 결락되어 구체적인 사실 은 알 수 없으나, 1 3차 전장법회에 참석한 승려들은 모두 知 識 8)과 道 者 9)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소속 사찰은 절반 정도가 전 라도 소재 사찰들이다. 이를 통해 백양사와 인근 사찰들 간의 교류가 활 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서 이들 사이에서의 백양사의 位 相 을 가늠할 수 있다. 10) 1 3차의 전장법회는 모두 각진국사를 중심 으로 개최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려 말 그의 중창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4차 전장법회는 조선왕조 개창 후 抑 佛 崇 儒 策 의 실시로 불교계 가 위축된 상황 속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일이다. 이때에는 승려 晦 極 法 蓮 을 중심으로 하여 우바새 우바이 등 속인들도 대거 참 여하였다. 11) 개최 목적에 대해서는 上 祝 一 人 壽 下 福 萬 民 이라 하여, 이 8) 知 識 이란 善 知 識 과 惡 知 識 중 善 知 識 을 말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敎 授 의 善 知 識 즉 指 導 者 를 말한다. 따라서 知 識 은 곧 高 僧 이라 할 수 있다. 佛 敎 用 語 辭 典 下 (경인문화사, 1998), 1555면. 9) 道 者 란 佛 道 를 수행하는 자를 뜻하므로, 知 識 곧 고승에 아직 이르지 못한 수행자를 의미한다. 佛 敎 用 語 辭 典 上 (경인문화사, 1998), 281-282면. 10) 이병희, 앞의 글, 1997, 204-212면. 11) 4차 전장법회에 참여한 승려들은 이전과 달리 諸 位 色 掌 과 赴 會 衆 이라 구분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諸 位 色 掌 은 知 識 을 가리키고, 赴 會 衆 은 道 者 를 지칭한다. 는 선행연구를 따르고자 한다. 이병희, 앞의 글(1997), 213면.

88 선문화연구 제2집 를 통해 태종의 억불정책 아래에서 백양사가 표출했던 自 存 意 識 을 엿볼 수 있다. 전장법회에서는 모두 국왕에 대한 은혜를 갚거나 국왕의 장수를 기원 하고 있으나, 국가의 비호 내지는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양사는 이러한 전장법회를 통해, 승려들의 信 心 을 고취시키고 아울러 내외에 寺 勢 를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전기 백양사의 寺 格 에 대해서는 白 嵓 寺 傳 帳 受 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2) 첫째, 여말선초 백양사에서는 寺 院 寶 13) 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백양사에서는 灯 油 寶 靜 庵 和 尙 忌 日 寶 大 藏 寶 長 年 寶 長 灯 寶 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14) 또한 명칭만 寶 라 표현하지 않았을 뿐 당시 백양사에서는 시납 받은 租 布 등의 현물 을 돌아간 부모나 승려의 忌 日 을 위해 사용하고자 시납 받는 경우도 있 었다. 15) 뿐만 아니라 각진국사 복구의 조카인 李 嵓 (1297 1364)의 자녀 들이 장년보 대장보 기일보 명목으로 각 100석씩 300석을 내어 사찰 의 운영기금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양사에는 조선전기까 지 사원보가 운영되었으며, 이는 사찰 운영의 주요한 재정 기반으로 작 용하였다. 둘째, 사료의 내용 중 間 閣 庫 라는 항목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12) 白 嵓 寺 傳 帳 受 (태조 2년, 1393)[No. 白 博 - 遺 物 -0042]는 당시 백양사 소유의 재산을 布 貸 庫 灯 油 寶 庫 文 書 庫 間 閣 庫 佛 寶 庫 法 寶 庫 등 13개 항목 으로 나누어 소상히 기록한 문서이다. 그 내용을 통해, 백양사의 경제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寶 가 등장함으로써 고려시대 寺 院 寶 연구에도 중요하다. 13) 고려시대 寺 院 寶 는 일종의 殖 利 機 構 로서, 僧 俗 을 신앙관계뿐만 아니라 경 제관계로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였다. 한기문, 寺 院 의 寶 運 營, 高 麗 寺 院 의 構 造 와 機 能 (민족사, 1998), 397-398면. 14) 白 嵓 寺 傳 帳 受 [No. 白 博 - 遺 物 -0042]. 15) 白 嵓 寺 傳 帳 受 [No. 白 博 - 遺 物 -0042]. 長 城 戶 長 李 芬 父 忌 租 二 十 石 社 主 心 白 忌 布 七 疋.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89 다음의 표와 같다. <표 2> 태조 2년(1393) 백양사의 가람 규모 건물 명칭 크기 건물 명칭 크기 건물 명칭 크기 彌 陀 殿 3칸 大 藏 殿 3칸 僧 堂 5칸 食 堂 3칸 上 室 6칸 侍 者 寮 3칸 中 行 廊 3칸 監 院 房 多 寮 連 12칸 客 寮 3칸 鐘 樓 殿 3칸 三 寶 稤 2칸 大 稤 3칸 㕑 舍 3칸 南 行 廊 10칸 洗 閣 3칸 東 司 2칸 馬 厩 3칸 砧 家 2칸 沙 門 1칸 樓 橋 3칸 백양사는 지금의 쌍계루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고종 1년(1864) 홍수로 사찰 전체가 휩쓸려 내려가면서 道 巖 大 師 (1805 1883)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재건하였다고 한다. 16) 따라서 이 자료를 통해 고종 1년 (1864) 이전 백양사의 가람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백양사는 11세기에 中 延 禪 師 에 의해 중창되면서 淨 土 禪 院 이라 개칭 한 바 있는데, 당시 중창한 가람의 규모는 法 堂 東 俠 藏 堂 食 堂 上 房 등 85칸이었다. <표 2>에 의하면 태조 2년(1393)에는 76칸 이상으로 11 세기에 비해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 이후 백양사는 불교계의 변화 속에 서 浮 沈 을 거듭한 결과, 1930년대에는 110칸 규모의 寺 勢 를 유지하게 되 었다. 17) 宋 나라 景 平 年 間 18)에 이르러 淨 土 禪 院 으로 寺 名 을 改 稱 했는데, 그 門 徒 16) 白 巖 山 道 巖 堂 大 師 行 略 (1927)[No. 白 博 - 遺 物 -0028]. 17) 白 羊 寺 殿 閣 列 錄 [No. 白 博 - 遺 物 -0045]. 18) 宋 나라 景 平 年 間 은 423 424년에 해당하므로, 이는 景 祐 年 間 (1034 1037)의

90 선문화연구 제2집 인 中 延 禪 師 가 이를 이어 殿 堂 과 門 廡 丈 室 賓 寮 등 80여 칸을 다시 지었다. 19) 당시 寺 名 에서 알 수 있듯이, 백양사는 淨 土 信 仰 을 강조하고 禪 宗 을 표방하려는 의도에서 淨 土 禪 院 이라 개칭한 듯하다. 이는 태조 2년 (1393) 백양사에 彌 陀 殿 이 존재했던 사실과도 부합된다. 불교 건축에서 정토신앙 즉 아미타신앙을 강조할 경우 중심 전각은 극락전 곧 미타전 이 된다. 20) 따라서 백양사의 대웅전이 일제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후기까지 백양사는 정토신앙을 강조하였고, 전각 배치 또한 미타전에 중심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백양사의 寺 名 은 19세기 전반까지 백암사와 정토사를 혼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大 藏 殿 의 존재이다. 고려말 각진국사는 건 물과 부대시설을 완성한 후 결여된 法 寶 를 구하고자, 송나라에 제자를 파견하여 大 藏 經 을 마련토록 했다. 21) 이때 대장경을 보관한 堂 宇 에 대 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표 2>로 보아 당시 백양사에서는 별도로 3칸 규모의 大 藏 殿 을 조성하여 봉안토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22) 현재 백 양사에는 대장경과 대장전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이 자료의 내용을 誤 記 로 여겨진다. 朝 鮮 佛 敎 通 史 上 의 全 裸 南 道 長 城 郡 白 巖 山 白 羊 寺 조에 따르면, 고려 덕종 3년(1034)에 中 延 禪 師 가 淨 土 法 門 을 선양하기 위해 淨 土 寺 로 개칭하였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19) 白 巖 山 淨 土 寺 橋 樓 記. 20) 김봉렬, 불교건축 (솔, 2004), 25-26면. 21)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22) 1930년에 작성된 白 羊 寺 殿 閣 列 錄 에 보면 당시 백양사에 존재하던 堂 宇 의 명칭과 규모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堂 宇 들은 한국전쟁과 1960년 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 백양사 가람배치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 이고 있다. 2006년 백양사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大 藏 殿 터로 추 정되는 곳에서 건물의 초석과 불에 탄 기와편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대장전의 규모는 3칸이었음이 분명하다.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91 통해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白 嵓 寺 傳 帳 受 외에는 조선전기 백양사의 상황을 전하는 자료가 없 어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전반적인 抑 佛 의 분위기 속에서 寺 格 을 유지해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 29년(1447)에는 세종이 여주 신 륵사를 수호하는 승려들의 자질 문제가 거론되자 장성 白 巖 寺 의 승려 學 蒙 을 보내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23) 이로 미루어 보아, 15세기까지 도 백양사의 寺 名 은 白 巖 寺 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종래 신륵사를 수호하던 승려들에 대해 의지없는 雜 僧 이라 표현한데 비해, 백암사 승 려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강한 승려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백양사는 淸 淨 道 場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백양사는 조선전기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도 轉 藏 法 會 를 개 최하는 등 강한 自 存 意 識 을 표출하였으며, 그 속에서 현재의 寺 勢 를 지 켜낼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Ⅲ. 白 羊 寺 의 僧 役 負 擔 백양사에는 <표 3>과 같은 사찰경제 자료가 현존하고 있다. 이들 자 료는 백양사의 경제적 근간을 보여주는 자료로 完 文 完 約 節 目 등이 그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 자료는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작성되었는데,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대가로 왕실에서 희사한 토지라든 가 佛 事 당시 시주자 명단 등 백양사의 재산 상황과 그 변화를 일목요연 하게 알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3) 世 宗 實 錄 卷 117, 29 年 7 月 9 日 條.

92 선문화연구 제2집 <표 3> 白 羊 寺 所 藏 寺 院 經 濟 資 料 目 錄 書 名 時 期 白 羊 寺 浮 結 及 火 栗 矯 弊 節 目 철종 7년 (1856) 完 文 철종 11년 (1860) 完 約 고종 5년 (1868) 完 文 ( 戊 辰 六 月 ) 고종 5년 (1868) 長 城 白 羊 寺 完 文 ( 戊 辰 二 月 日 寺 上 ) 고종 5년 (1868) 長 城 白 羊 寺 完 文 ( 戊 辰 二 月 日 邑 上 ) 고종 5년 (1868) 完 文 고종 10년 (1873) 長 城 白 巖 山 淨 土 寺 完 文 고종 20년 (1883) 白 巖 寺 完 文 고종 23년 (1886) 兵 營 白 巖 寺 完 文 고종 24년 (1887) 본고에서는 철종 11년(1860)에 성급된 完 文 을 중심으로 당시 백양사가 담당했던 僧 役 의 실상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표 3>의 자료를 살펴보 면, 당시 백양사에 부과되었던 僧 役 의 종류와 감면 내용 그리고 감면의 명분 등이 거의 유사하다. 철종 11년(1860)에 내린 完 文 과 거의 같은 내 용의 完 文 이 고종 24년(1887)에 또다시 내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찰에 대한 討 索 과 誅 求 가 조선시대 말까지 호전되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국가로부터 철종 11년(1860) 完 文 을 발급받을 당시 백양사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승려들의 말에 의하면, 백양사의 사세는 敗 殘 하고 남 아 있는 승려 또한 많지 않았다고 한다. 24) 이는 조선후기 거의 모든 사찰 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던 고통이었다. 당시 法 住 寺 通 度 寺 같은 大 刹 들도 義 僧 役 이나 기타 雜 役 및 雜 貢 을 부담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방 양 24)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93 반들의 誅 求 가 빈번하여 승려들은 그 침탈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고, 그 러는 동안에 梵 宇 가 퇴폐한지 오래되고 승려들은 점차 凋 殘 해졌다. 25) 백양사의 이와 같은 사정을 고려하여, 官 府 에서는 철종 11년(1860) 11 월에 完 文 을 발급해 주고, 승역의 내용을 조정해 주었다. 그 조정 내용 은 1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 류할 수 있다. 26) 첫째, 백양사 승역 감면 항목을 설정하기에 앞서, 백양사의 경계를 분 명히 해 주었다. 四 山 禁 標 라 하여, 동쪽으로는 採 師 洞 까지, 남쪽으로는 孫 馬 까지, 서쪽으로는 東 庵 과 石 見 峙 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曲 頭 峙 까 지로 경계를 명기하였다. 27) 이것은 뒤에 笠 巖 山 城 守 直 軍 들이 경계를 넘어오는 침탈의 폐단을 금한다. 는 항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28) 이와 같은 무리들로부터 백양사를 보호해 주고자 경계를 설정한 것으로 사료 된다. 백양사는 白 巖 山 에 자리하고 있으며, 29) 백암산과 笠 巖 山 은 모두 장성 부의 북쪽 40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30) 거리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 다. 입암산성에 주둔하는 束 伍 軍 은 3,000여 명이었고, 31) 산성 내에는 長 慶 寺 興 慶 寺 仁 慶 寺 玉 井 寺 高 慶 寺 의 5개 僧 營 寺 刹 이 있었다. 32) 25) 이재창, 朝 鮮 朝 社 會 에 있어서의 佛 敎 敎 團, 韓 國 史 學 7(한국정신문화연 구원, 1986), 161면. 26)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完 文 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편의상 1 15항목이라 칭하기로 한다. 27)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1항목. 28)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9항목. 29)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寺 刹 條. 30)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山 川 條. 白 巖 山 在 府 北 四 十 里 笠 巖 山 在 府 北 四 十 里. 31)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關 阨 條. 32) 輿 地 圖 書 下, 長 城 府 羅 州 鎭 管, 寺 刹 條. 長 慶 寺 興 慶 寺 仁 慶 寺 玉 井 寺 高 慶 寺 俱 在 府 北 四 十 里 笠 巖 山 城 內.

94 선문화연구 제2집 이와 같이 입암산성은 전라도 지역의 주요 關 防 이었는데, 적지 않은 守 直 軍 으로 인해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백양사가 수차례 침탈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철종 11년(1860) 완문을 成 給 하면서, 침탈금지 조항을 포 함시켰던 것이다. 이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四 山 境 界 안에 있는 토지에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베어서는 안 된다. 33) 이와 같이 백양사는 封 山 願 堂 으로서 四 山 에 禁 標 가 세워져 보호받음 으로써, 벌목 금지 조치까지 내려졌다. 둘째, 백양사와 인근 三 洞 民 과의 관련성이다. 34) 백양사에서 殿 牌 를 埋 安 한 적이 있으므로, 三 洞 民 으로 하여금 매년 백양사를 수호하도록 했 다. 35) 이와 관련하여 백양사와 三 洞 民 의 田 畓 및 布 稅 를 침탈하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하였다. 36) 이는 백양사가 왕실 원당이었음을 의미한다. 백양사는 조선중기 문정왕후와 인헌왕후의 願 刹 이었을 뿐 아니라,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殿 牌 를 봉안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백양사의 寺 下 村 인 三 洞 의 백성들은 왕실 원당인 백양사를 수호하고,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關 阨 條. 笠 巖 山 城 有 五 寺 長 慶 寺 屬 長 城 興 慶 寺 屬 興 德 仁 慶 寺 屬 泰 仁 玉 井 寺 屬 井 邑 高 慶 寺 屬 高 敞. 33)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6항목. 34) 完 文 에 기재되어 있는 三 洞 의 정확한 地 名 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제 2 3항목으로 보아 백양사의 寺 下 村 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長 城 白 羊 寺 完 文 戊 辰 二 月 日 寺 上 [No. 白 博 - 遺 物 -0050](고종 5년, 1868), 長 城 白 羊 寺 完 文 戊 辰 二 月 日 邑 上 [No. 白 博 - 遺 物 -0051](고종 5년, 1868)과 함께 검토함으로써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35)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2항목. 36)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3항목.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95 경제적 지원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제3항목과 같은 침탈 금지 조처가 내 려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왕실 원당이었던 백양사의 寺 格 을 가늠할 수 있고, 사하촌의 존재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백양사에서 부담하였던 雜 貢 내용에 대해 알 수 있다. 完 文 에서 는 侵 漁 之 弊 를 끼쳤던 주체에 대해 항목별로 언급하며, 그들로부터 백 양사를 보호해주는 조치를 내리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의 금지 조항이 있는 것은 제12 항목뿐인데, 조선후기 양반들이 말을 타고 사찰을 출입 하는 사례가 빈번하자 이에 대해 내려진 조치라고 볼 수 있다. <표 4> 백양사 침탈의 주체 및 내용 백양사 침탈의 주체 典 據 내 용 各 營 邑 의 校 卒 과 무뢰배 4항목 侵 漁 之 弊 를 금함 각 書 院 과 班 常 5항목 侵 漁 之 弊 및 관리들이 말 타고 출입하는 것을 금함 大 芚 寺 7항목 侵 漁 之 弊 를 금함 笠 巖 山 城 守 直 軍 9항목 수직군들이 경계를 넘어오는 侵 漁 之 弊 를 금함 兩 班 12항목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을 금함 官 用 榧 子 二 十 五 斗 槐 花 春 秋 二 斗 式 松 花 春 秋 14항목 二 斗 式 依 例 納 事 完 文 에 구체적인 폐단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實 狀 을 파악하기 는 어려우나, 철종 2년(1851) 法 住 寺 에 成 給 된 完 文 節 目 을 살펴보면 짐 작이 가능하다. <표 5>는 철종 2년(1851) 예조판서 윤정현이 법주사에 내린 完 文 節 目 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법주사는 元 宗 과 宣 禧 宮 의 願 堂 이자 純 宗 의 胎 室 을 봉안하던 사찰로 다른 사찰에 비해 잡역과 잡공의 부담이 비 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37) 그러나 完 文 내용의 구체성에서부터 차이가

96 선문화연구 제2집 있기는 하나, 법주사에 비한다면 백양사의 雜 貢 부담은 비교적 가벼웠 던 것으로 짐작된다. 납부처 및 대상 <표 5> 법주사의 잡역과 잡공 雜 貢 官 用 메주[ 燻 造 ] 山 果 山 菜 鄕 校 書 院 鄕 廳 山 果 山 菜 郡 司 作 廳 通 引 廳 官 奴 廳 使 令 廳 山 果 山 菜 士 大 夫 家 遊 人 過 客 松 栮 木 笻 繩 鞋 素 膳 山 果 山 菜 빨래돌[ 洗 踏 砧 ] 다듬잇돌[ 搗 衣 砧 ] 京 官 地 方 官 의 巡 審 行 次 供 饌 京 官 地 方 官 遊 人 過 客 藍 輿 負 擔 경주 정혜사의 예에 비추어 볼 때, 38) 백양사에 대한 서원의 침탈 내용 또한 짐작이 가능하다. 백양사는 書 院 에 紙 物 및 祭 享 에 소용되는 현물 상납 등을 부담하였을 것이다. 백양사에서는 官 用 물품으로 비자나무 열매와 복분자를 상납하였다. 옛부터 백암산과 내장산에는 비자나무가 분포하였고, 장성부의 토산물 가운데에는 榧 子 가 포함되어 있었다. 39) 조선시대에는 비자나무의 목재 와 열매를 귀하게 여겨, 조선왕조실록 에서는 비자나무 進 上 에 관한 37) 報 恩 郡 俗 離 山 法 住 寺 判 下 完 文 節 目, 朝 鮮 寺 刹 史 料 上, 129-135면; 오경후, 朝 鮮 後 期 僧 役 의 類 型 과 弊 端, 국사관논총 107(국사편찬위원회, 2005), 91면, <표 5> 재인용. 38) 경주 정혜사는 선조 5년(1572) 옥산서원의 창건과 함께 소속되어 순조 34년 (1834)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까지 약 260여 년간 서원의 경제적 기초를 이루 었다. 이에 서원 유생의 供 饋 및 서원 소용의 紙 物 신발 沈 醬 및 포도 등 현물 상납을 담당하였다. 玉 山 書 院 誌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46-49면. 39)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36, 長 城 縣, 土 産 條.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97 여러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전기부터 榧 子 는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 도 지역의 주요 진상 품목 가운데 하나였으며, 40) 목재는 최고급 바둑판 의 材 木 으로 사용하였고 열매는 약재나 祭 享 에 사용하였다. 41) 그런데 完 文 을 보면, 백양사의 僧 役 을 감면해주면서도 비자나무 열매는 계속 해서 진상토록 하라 고 하고 있다. 다만 完 文 을 成 給 하기 이전의 상납 물량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의 경감 조치였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白 皮 紙 2 束 씩 매달 초하루에 鷲 捿 寺 와 望 月 寺 에서 當 納 하였다. 42) 그러나 장성의 鷲 棲 寺 와 望 月 寺 가 담당하였던 부분과 비교해 본다면, 많은 양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백양사에서 단독으로 비자나무 열매를 진상하는 사정을 고려하여, 복분자 진상은 백양사 승려들과 山 城 鎭 吏 가 분담토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큰 부담으로 작용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43) 完 文 에서 진상 물품과 양을 규정해 놓은 것을 보면, 완문 발급 이전에 는 다소 많은 양의 물품을 납부해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이와 같이 감소 조치가 내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복분자 납부의 경우, 백양사 인근의 내장산이 주산지이기에, 이는 토산물의 현물 납부로 보 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원산지 공급이라는 점에서 물품을 진상함에 있 어 다소 용이하였다고 생각된다. 40) 世 宗 實 錄 卷 11, 3 年 1 月 13 日 條. 41) 英 祖 實 錄 卷 113, 45 年 7 月 10 日 條. 42)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邑 事 例 ; 김문경, 邑 誌 로 본 朝 鮮 後 期 寺 刹 製 紙 의 實 狀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49-50면. 43)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邑 事 例, 租 報 秩. 覆 盆 子 白 羊 僧 山 城 鎭 吏 分 當 無 下 記.

98 선문화연구 제2집 1 전라도내의 모든 役 이 (백양사를) 영원히 침탈치 못하게 하라. 44) 2 戊 戌 年 부터 백양사의 雜 役 을 면제해 주었으므로 例 納 토록 한 것 외에 는 일체 침탈하지 못하게 하라. 45) 그 외에도 위와 같은 항목들을 명시해 놓아, 전반적인 백양사의 僧 役 부담을 완화시켜 주었다. Ⅳ. 僧 役 減 免 의 背 景 과 推 移 조선왕조 정부에서는 승려를 遊 休 勞 動 力 으로 인식하여, 그들에게 다 양한 종류의 役 을 부과하였다. 조선후기 불교계는 양란 당시 僧 軍 의 활 동으로 조선전기까지의 부정적 인식을 우호적인 것으로 변모시켰고, 탄 압의 정도 역시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는 조정과 사회의 긍정적 인식일 뿐 실질적으로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즉 승려 들은 남북한산성을 비롯한 산성축조와 방비, 紙 役 을 비롯한 각종 雜 役 과 雜 貢 을 담당하여 부족한 국가재정을 보충하는 데 동원되었다. 僧 役 의 가혹한 부담은 승려가 흩어지고 사찰이 황폐화되어가는 불교계의 위 기를 초래하였다. 조선후기 불교계는 혹독한 승역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王 室 願 堂 이 되어 役 의 減 免 혜 택을 받는 것이었다. 국가 최고 권력인 왕실의 庇 護 를 받음으로써 여타 세력의 침탈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願 堂 의 기원은 신라 고려시 44)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8항목. 45)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13항목. 完 文 이 작성된 시기는 철종 11년(1860)이므로, 그 이전 시기 중 戊 戌 年 은 헌종 4년(1838)에 해당한다.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99 기까지 소급해 올라 갈 수 있으나, 조선후기에는 陵 주변에서 탈피하여 전국의 名 山 大 刹 에 원당이 설치되었다. 46) 왕실원당으로 지정되면 왕실 및 국가로부터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찰의 입장에서 볼 때 원당 설립은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해 주었던 셈이다. 조선 중 후기 백양사는 철종 7년(1856)부터 고종 24년(1887)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完 文 과 節 目 등이 成 給 되어 僧 役 의 감면 혜택을 받았다. <표 3>의 자료를 보면, 승역의 감면에 있어서 원당 설립이나 국가 주도 의 제사인 國 祈 祭 설행 등이 명분으로 제시되어 있다. 우선, 백양사가 왕실 원당으로 지정받아, 승역 감면의 혜택을 받게 된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종대에는 內 願 堂 이 완전히 철폐되고, 47) 명종 대에는 궁궐 밖에 願 堂 성격의 사찰들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명종대에 는 崇 佛 性 向 을 지닌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함으로써 한때 불교가 중흥하 기도 했다. 당시 王 旨 나 문정왕후의 命 으로 願 刹 을 內 願 堂 으로 지정하 였고, 명종 5년에는 이러한 사찰이 급증한다. 명종대 불교계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주도적으로 崇 佛 策 을 실시하여 兩 宗 이 復 設 되고 각 처에 內 願 堂 이 지정되는 등 중흥기를 맞 이했다. 이에 편승하여 백양사에서도 문정왕후의 命 으로 명종 12년 (1557) 3월 제향을 올린 뒤 계절마다 국혼제를 실시했다. 이때 백양사에 서 제향을 올린 國 婚 들은 穆 祖 와 孝 恭 王 后 를 비롯하여 列 聖 과 宗 室 尙 宮 王 室 관련 일반 인사 등 모두 114명이었다. 48) 언제까지 국혼제가 설 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정왕후 사후 여타의 불교시책들이 종결 46) 박병선, 朝 鮮 後 期 願 堂 考, 白 蓮 佛 敎 論 集 5 6합집(1996), 361-363면. 47) 中 宗 實 錄 卷 1, 1 年 10 月 25 日 條. 48) 이는 白 羊 寺 四 明 日 奉 祝 國 魂 記 [No. 白 博 - 遺 物 -0038](명종 12년, 1557)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백양사가 문정왕후의 命 을 받아 列 聖 과 宗 室 尙 宮 및 王 室 과 관련된 여러 魂 靈 을 위해 國 魂 祭 를 올렸음을 보여주는 記 文 이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과 사찰의 관계 내지 문정왕후 당시 백양사의 寺 格 을 연 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100 선문화연구 제2집 되는 것과 시기를 같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정왕후의 이와 같은 후 원은 추후 백양사에 내려진 完 文 에 減 役 의 명분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따라서 문정왕후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백양사는 王 室 願 堂 으 로서의 寺 格 을 유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極 樂 殿 佛 糧 禊 序 의 文 定 王 后 賓 香 祝 列 書 라는 기록으로 보아, 문정왕후는 극락보전 조성 불사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49) 이후 왜란으로 전국이 초토화됨에 따라 백양사 또한 모든 전각과 문 화재들이 소실되었다. 이에 전후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인조 3년(1625) 대 규모 중창 불사를 진행했다. 50) 특히 운문암의 중창 불사에는 仁 憲 王 后 具 氏 가 大 施 主 로 참여하였고, 이를 계기로 백양사는 인헌왕후의 願 刹 이 되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이 19세기 말에 작성된 完 文 에서는 僧 役 감면의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헌왕후(1578 1626)는 인조반정(1623년)으로 즉위한 인조의 어머니 이다. 그리하여 인헌왕후는 反 政 으로 실추된 왕권의 회복과 列 聖 祖 에 대한 孝 를 다하기 위해 원당을 마련하였다. 佛 力 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 로하고 極 樂 往 生 을 빌어 주기 위함이었다. 1 後 佛 幀 化 主 靜 觀 堂 一 禪 畵 員 騎 虛 堂 靈 圭 大 施 主 王 大 妃 具 氏 殿 下. 51) 2 仁 獻 王 大 妃 具 氏 現 增 福 壽 當 生 極 樂 之 願 畵 成 西 往 九 品 會 幀 畢 備 點 眼 安 于 中 獅 子 庵 以 此 畵 像 功 德 奉 爲. 52) 49) 白 巖 事 蹟, 極 樂 殿 佛 糧 禊 序 ; 朝 鮮 寺 刹 史 料 上. 50) 白 羊 山 雲 門 庵 創 修 事 蹟 에 따르면, 第 1 重 創 記 는 大 明 天 啓 五 年 丁 卯 則 我 仁 祖 大 王 五 年 에 작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天 啓 5 年 은 丁 卯 年 이 아니고 乙 丑 年 이므로 이는 誤 記 이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을 보면, 이 시기가 天 啓 五 年 乙 丑 十 二 月 日 이라 기록되어 있 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을 비교해 본 결과, 인헌왕후(1578 1626)가 불사를 후 원했던 시기는 천계 5년(1625, 인조 3)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51) 白 羊 山 雲 門 庵 流 傳 錄 [No. 白 博 - 遺 物 -0046].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101 인헌왕후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즉위하고 왕위를 유지해 나가 는 인조를 바라보며 개인적 信 佛 의 경향이 두터워졌을 것이다. 이에 三 南 제일의 助 道 處 53) 라 불리는 백양사 운문암의 중창 불사에 적극적으 로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인헌왕후는 운문암에 後 佛 幀 와 佛 像 을 조성하 는데 대시주자로 참여하였다. 이는 인조와 왕비 그리고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려는 의도였다. 54) 爲 永 久 遵 行 事 白 羊 山 卽 仁 憲 王 后 具 氏 影 幀 奉 安 之 所. 55) 뿐만 아니라 인헌왕후는 자신의 影 幀 을 제작하여 운문암에 봉안하였 다. 또한 사료 6 8을 통해, 조선후기 백양사 운문암에 阿 彌 陀 九 品 會 圖 와 불상 그리고 인헌왕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러한 聖 寶 들은 현존하지 않으므로, 위자료는 亡 失 된 백양사 성보문화재 의 현황 파악에도 중요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백양사는 興 宣 大 院 君 (1820 1898)의 封 山 願 堂 이 되었다. 56) 爲 永 久 遵 行 事 白 羊 山 卽 大 院 君 宮 封 山 之 地 也. 57) 封 山 이란 胎 室 이 있는 산을 지정한 것으로, 주위에 禁 標 를 세우는 등 외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봉산은 왕 이나 왕비의 陵 墓 를 보호하고 胎 를 묻기 위한 胎 封 封 山 과 栗 木 封 山, 香 52)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53) 白 羊 山 雲 門 庵 流 傳 錄 [No. 白 博 - 遺 物 -0046]. 54)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55)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56)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57)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102 선문화연구 제2집 炭 封 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원찰이 있는 산은 거의가 봉산으로 획정되 고, 이들 봉산 가운데 일부가 胎 封 封 山 으로 왕실의 胎 를 봉안하였다. 순천 松 廣 寺 의 경우, 태실을 봉안하지는 않았지만 원당사찰 혹은 封 山 守 護 寺 刹 로서 기능하였다. 송광사는 봉산수호사찰로 지정받았는데, 이에 명례궁 예조 관찰사 등으로부터 10여 개에 달하는 完 文 과 節 目 을 成 給 받았다. 때문에 僧 役 을 감면받고 寺 弊 의 시정 조치가 내려졌다. 이는 봉산수호사찰 역시 원당의 지위와 다를 바가 없음을 의미한다. 58) 따라서 백양사가 흥선대원군의 봉산원당이 된 것과 주위에 四 山 禁 標 가 획정된 것은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백양사에는 殿 牌 가 埋 安 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王 牌 를 봉안하는 왕실 원당의 성격 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9) 이상과 같이 백양사는 여러 대에 걸쳐 왕실 원당으로서의 寺 格 을 유 지해 왔고, 그로 인해 1856 1887년까지 승역의 감면 혜택을 받아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백양사에서는 국가 주도의 국기제가 설행됨에 따라 이를 통 해 승역의 감면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왜란과 호란 이후 승려들이 담 당했던 僧 役 가운데에는 산성축조와 방어, 紙 役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 에 산재해 있었다. 특히 승려들이 시신을 매장하는 役 에 동원된 것은 전 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현종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京 城 안팎에 시체가 많이 쌓여 있었지만 인력이 모자라 묻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60) 이는 전쟁과 혹심한 기근 추위가 엄습한 선조 26 27년(1593 1594) 58) 박병선, 앞의 글(1996), 374-375면. 59) 完 文 [No. 白 博 - 遺 物 -0044]. 60) 宣 祖 實 錄 卷 43, 26 年 10 月 2 日 條.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103 의 일이다. 이에 선조는 승려들을 모집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려 있는 시 체와 해골을 묻어 주게 하고, 그 대가로 禪 科 牒 과 度 牒 을 지급하였다. 61) 전란 이후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속출하고 있었던 것은 전쟁과 자연재해 로 인한 기근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62) 조선은 임진왜 란(1592)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 그리고 병자호란(1636) 등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1601년부터 1750년 무렵까지 자연재해의 피해가 장기적으로 계속되었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은 많은 희생자를 초래하여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 63) 전란과 기근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상 기후 등으로 인해 전염병은 계 속되었고, 인구와 田 地 의 結 數 는 감소했다. 이로 인해 사망자는 속출하 였고, 시체 매장에서부터 국가적으로 冤 魂 들을 위해 지내주었던 癘 祭 는 주로 승려들의 몫이었다. 조선전기 백양사는 장성군내에 위치한 資 福 寺 였다. 64) 그런 연유에서인지 국가에 환란이나 재앙이 있을 때, 특히 호남 지방의 경우 장성 백양사에서 國 祈 祭 를 지냈다. 國 祈 祭 는 국가에 환란이나 재앙이 있을 때 조정에서 近 臣 을 보내어 國 泰 民 安 을 기원했던 국가적 제의행사이다. 백암산에는 고려 충정왕 때 에도 국기제를 올렸다는 口 傳 이 있다. 65) 조선 선조 35년(1602)과 36년 (1603)에도 국기제를 올린 적이 있으며, 현종 2년(1661)에도 제사를 지냈 다는 기록이 있다. 61) 오경후, 앞의 글(2005), 81면. 62) 나종일, 17세기 위기론과 한국사, 역사학보 94 95합집(1982). 이태진, 小 氷 期 (1500 1750년)의 天 體 現 象 的 原 因 - 朝 鮮 王 朝 實 錄 의 관련 기록 분석-, 國 史 館 論 叢 72(국사편찬위원회, 1996). 63) 오경후, 앞의 글(2005), 82면. 64)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65) 강현구, 白 羊 寺 의 民 俗 資 料, 佛 敎 文 化 硏 究 6(남도불교문화연구회, 1996), 188면.

104 선문화연구 제2집 1-1) 宣 廟 朝 三 十 六 年 壬 寅 正 月 二 十 三 日 此 道 癘 氣 熾 行 民 多 暴 死 故 方 伯 轉 聞 于 朝 別 遣 近 臣 祭 之. 1-2) 宣 廟 朝 三 十 七 年 癸 卯 三 月 二 十 四 日 此 道 癘 氣 又 熾 民 多 暴 死 僵 尸 丘 山 故 方 伯 又 聞 于 朝 上 又 別 遣 近 臣 祭 之. 66) 호남지방에 역병[ 癘 ]이 크게 치성하여 임금이 친히 祭 文 을 짓고 弘 文 館 校 理 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위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祭 物 物 目 과 行 禮 式 이 구체적으로 적기되어 있다. 67) 제사에 사용한 祭 物 은 4 邊 4 豆 이라 하여, 수수 피 기장 쌀 밤 곶감 대추 미나리 무 돼지머리 양머리 노루포 소금 祭 酒 등이다. 그리고 행례 절차를 보 면, 降 神 禮 가 없고 헌관 1인이 연전 3작하고 4배를 올리며 祝 은 땅 속에 묻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68) 국기제는 종파를 초월하고 官 民 이 합동하여 국난을 극복하려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行 禮 式 의 경우, 우선 조정에서 파견한 獻 官 과 인근 7 8 개 고을원들이 집사가 되어 유교적 제의 방식에 따라 진행한다. 그런 연 후에 승려들이 불교적 제의 방식에 의거하여 제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이는 白 巖 山 文 化 圈 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호남지방의 문화권은 크 게 보아 3개 권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를 중심 으로 한 조계산 불교문화권, 강진 해남 완도를 중심으로 한 島 嶼 地 域 유배문화권 그리고 백양사가 위치한 백암산을 중심으로 한 백암산문화 66)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그런데 여타의 자료에서는 이와 같은 여제 설행 기사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두 기록만으로 설행 시기를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먼저 1-2)를 보면, 선조 36년이 癸 卯 年 인데 뒤에서 昭 敬 大 王 癸 卯 年 이라 적기하고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면 선조 36년(1603)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1-1)은 선 조 35년인 壬 寅 年 즉 1602년의 일로 보아야 한다. 67)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No. 白 博 - 遺 物 -0038]. 68) 강현구, 앞의 글(1996), 188면.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105 권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백암산문화권은 유교와 불교가 공존 융합하 는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조선후기 백파선사와 추사의 편지를 통한 禪 論 爭 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백양사에서 종파를 초월한 通 宗 敎 적 성격의 국기제가 설행되었음은 당 연한 결과일 것이다. 결국 조선정부에서는 국기제를 통해 국난에 처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자 장성 백양사에서 국가 주도로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와 같은 국기제 설행 사실은 19세기말 完 文 에서 僧 役 감면의 명분으로 작용한다. Ⅴ. 맺 음 말 지금까지 백양사 관련 연구의 공백 시기라 할 수 있는 조선 중 후기 의 寺 勢 변화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백양사 소장 고문서를 중심으로 백 양사가 부담하였던 僧 役 의 실상과 추이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 실상 에 보다 접근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그간의 미공개 자료를 발굴하여, 연 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밝혀진 사실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白 羊 寺 는 백제 무왕 33년(632)에 창건된 이래 淨 土 信 仰 을 표방 한 禪 宗 寺 刹 로서의 위용을 과시해 왔다. 창건 시 사찰의 이름은 白 巖 寺 였으나, 19세기 전반까지 淨 土 寺 라는 寺 名 을 혼용하였다는 점이 이를 방 증한다. 또한 태조 2년(1393)의 백양사 가람 규모를 보면, 대웅전 대신 정 토신앙의 중심 전각이라 할 수 있는 彌 陀 殿 [지금의 極 樂 寶 殿 ]이 존재하 고 있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존하는 극락보전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조선조 숙종 연간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그러나 태조 2년(1393)의 기록을 통해, 그 이전에 조성된 堂 宇 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본고를 통해 그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大 藏 殿 의 존재를 확 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백양사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

106 선문화연구 제2집 과, 遺 構 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白 嵓 寺 傳 帳 受 의 間 閣 庫 항목을 통해, 대장전의 존재 여부와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셋째, 백양사 주변에 설정했던 四 山 禁 標 를 통해 조선후기 백양사의 영역에 대해 알 수 있다. 우선 조선정부에서는 여타의 침탈로부터 백양 사를 보호하고자, 그 주변에 禁 標 를 설정함으로써 경계를 분명히 하였 다. 인근 입암산성의 주둔군들이 백양사를 자주 침탈해오자, 完 文 에 이 들로부터의 침탈 금지 조항을 명시하였다. 또한 그 경계 안의 토지에서 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도 베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예부터 白 巖 山 에는 비자나무 갈참나무 매화나무 등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러 한 나무들에 대해 벌목 금지 조치를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 대 해서는 추후 고려시대 사찰 주변에 설치했던 長 栍 標 와의 관련성 및 조 선후기 寺 院 田 에 대해 보다 면밀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넷째, 백양사에 경제적 지원을 했던 三 洞 民 의 존재를 통해 寺 下 村 의 존재 가능성을 제기해 볼 수 있었다. 三 洞 民 은 경제적 지원 외에도 백양 사를 수호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는 백양사가 殿 牌 를 埋 安 한 王 室 願 堂 이었기 때문이다. 三 洞 民 들은 백양사 수호의 대가로 침탈 금지 조 치를 받음으로써, 조선정부로부터 일정 부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원당 설립 주체와 사찰이 상호보험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듯이, 사찰과 사하 촌 또한 그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사하촌에 대해서는 추후 除 役 村 과 관련하여 면밀한 검토를 진행하고자 한다. 다섯째, 백양사가 승역의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명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조선후기 전국의 名 山 大 刹 에 왕실원당이 설립되었던 경향에 편승하여, 조선 중 후기 백양사는 왕실원당으로 지정받아 19세기 말까 지도 승역 감면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문정왕후(1501 1565)의 命 으 로 백양사에서 國 婚 祭 가 실시됨에 따라 왕실원당에 버금가는 寺 格 을 유 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1578 1626)가 백양 사의 중창 불사에 대시주자로 참여하였고, 後 佛 幀 과 佛 像 그리고 자신

朝 鮮 後 期 白 羊 寺 의 僧 役 에 대한 고찰 / 김문경 107 의 影 幀 을 백양사에 봉안하여 명실공히 왕실원당으로의 位 相 을 갖추었 다. 이후 19세기 말 백양사는 흥선대원군(1820 1898)의 봉산원당으로 지정됨에 따라, 四 山 에 禁 標 가 획정되고 침탈 금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백양사에서는 선조 35 36년(1602 1603) 국가 주도의 國 祈 祭 가 설행됨에 따라 이를 통해 승역 감면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 중 후기 백양사는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寺 勢 를 유지해 왔 다. 즉 왕실을 중창 불사의 대시주자로 참여시켜, 경제적 지원을 받음과 동시에 왕실원당으로 지정받아 여타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이 같은 경 제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영조 51년(1775)에는 장성부사 김항주 가문의 후원을 받아 극락보전 내에 2m 가까이 되는 阿 彌 陀 會 上 圖 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에 백양사는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유지 계승 발전시킬 수 있 었고, 현재까지도 불교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位 相 을 차지하고 있다. 추후 본고에서 미진했던 점인 四 山 禁 標 에 대해 연구를 진행함으로 써, 조선후기 사원전의 규모를 밝혀낼 것이다. 아울러서 寺 下 村 에 대해 밝혀내어, 조선후기 僧 俗 의 관계를 검토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자료] 極 樂 殿 佛 糧 禊 序 白 巖 山 淨 土 寺 橋 樓 記 白 嵓 寺 傳 帳 受 白 巖 山 淨 土 寺 事 蹟 白 羊 寺 四 明 日 奉 祝 國 魂 記 白 羊 寺 四 名 日 薦 靈 戰 亡 錄 白 羊 寺 殿 閣 列 錄 - 107 -

108 선문화연구 제2집 白 羊 山 雲 門 庵 流 傳 錄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輿 地 圖 書 玉 山 書 院 誌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完 文 (철종 11년, 1860) 朝 鮮 寺 刹 史 料 上 朝 鮮 王 朝 實 錄 湖 南 邑 誌, 長 城 府 邑 誌 이능화, 朝 鮮 佛 敎 通 史 上 (1911) 洪 良 浩, < 長 城 南 門 倡 義 碑 >, 耳 溪 集 卷 25; 韓 國 文 集 叢 刊 241(민족문 화추진회) [논저] 김갑주, 朝 鮮 時 代 寺 院 經 濟 硏 究, 동화출판공사, 1983, 1-279면. 김문경, 邑 誌 로 본 朝 鮮 後 期 寺 刹 製 紙 의 實 狀 - 三 南 地 方 을 中 心 으로-, 동국대 석사학위논문, 2002, 1-69면. 김상현, 朝 鮮 時 代 佛 敎 史 硏 究 의 方 向, 朝 鮮 時 代 佛 敎 史 硏 究 의 課 題 와 展 望, 대둔사, 2001; 朝 鮮 佛 敎 史 硏 究 의 課 題 와 展 望, 佛 敎 學 報 39, 2002, 265-271면. 김순석, 朝 鮮 後 期 佛 敎 界 의 動 向, 國 史 館 論 叢 99, 2002, 79-100면. 김순석, 朝 鮮 後 期 佛 敎 史 硏 究 의 現 況 과 課 題, 朝 鮮 後 期 史 硏 究 의 現 況 과 課 題, 창작과 비평사, 2004, 561-600면. 나종일, 17세기 위기론과 한국사, 역사학보 94 95합집, 1982, 421-473면. 박래경, 白 巖 山 國 祈 祭 의 民 俗 信 仰 硏 究, 鄕 土 文 化 8, 향토문화개발 협의회, 1983, 79-91면. 박병선, 朝 鮮 後 期 願 堂 硏 究, 영남대 박사학위논문, 2001, 1-220면. 박용숙, 朝 鮮 朝 後 期 의 僧 役 에 관한 考 察, 論 文 集 人 文 社 會 科 學 篇 -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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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선문화연구 제2집 <Abstract> A Study on Monk's Labor of Baekyangsa in Late Chosun Dynasty Kim, Moon-Kyung Baekyangsa( 白 羊 寺 ) was established by Saint Yeohwn( 如 幻 禪 師 ) in 632. This temple produced many priestes of virtue from late Koryo dynasty to the present age. Because the Most Reverend Priest Kgkjin( 覺 眞 國 師 ) and monk Chungsu( 淸 叟 ) remodeled Baekyangsa in 14th century, this temple was in full flourish. Baekyangsa Museum has Baekamsa-Jeon-Jang-Su( 白 嵓 寺 傳 帳 受 ) and we can grasp a phases of Baekyangsa in early Chosun dynasty through this book. It is as follows. First, Baekyangsa operated a Temple-treasure( 寺 院 寶 ). Second, a scale of this temple was over 76 kans. Monk's labor of Baekyangsa was fallen off or discharged in late Chosun Dynasty. The reason is as follows. This temple was appointed a prayer house for a Royal family( 王 室 願 堂 ) in late Chosun Dynasty. So this temple was benefited in the reduction and exemption about monk's labor. For example, the queen of Moon-Jung( 文 定 王 后 ) performed a religious service in this temple. A religious service was called as Kuk-Hon-Jea( 國 魂 祭 ). The queen of In-Heon( 仁 憲 王 后 ) supported this temple, so Won-Moon-Am( 雲 門 庵 ) established, a Buddhist painting and an image of Buddha ware made. Moreover, this temple had the portrait of the queen. Therefore Baekyangsa was protected by Chosun government. Key Words: Baekyangsa( 白 羊 寺 ), the queen of Moon-Jung( 文 定 王 后 ), the queen of In-Heon( 仁 憲 王 后 ), monk's labor, a prayer house for a Royal family( 王 室 願 堂 ) - 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