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2012 03
문화+서울 contents 04 22 28 3월의 문화+서울 인문학, 예술에 홀리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에서는 미래 경영의 새로운 돌파 구가 바로 인문학이다 라는 연구자료를 발표했다. 이뿐만 이 아니다. 故 스티브 잡스 역시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 인 문학에 궤를 두고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상아탑에 갇혀 있던 인문학은 이제 인문학 열풍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번 호에서는 문화예술계에 부는 인문학 열풍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본다. 문화 人 모두가 희구하는 우리들의 무대를 위하여 국제 공연예술계를 대표하는 네트워크인 ISPA(국제공연 예술협회)의 제26회 국제총회가 서울문화재단 주관으로 서울에서 개최된다. 문.화.변.동 이라는 주제로 5일간 펼 쳐질 총회에 앞서 서울을 방문한 ISPA의 CEO 데이비드 베 일을 만나 이번 국제총회의 개최 배경과 디지털 시대의 순 소 공연예술의 역할, 미래 청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영아티스트 이 청년의 멋진 신세계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 의 앨범 재킷 디자인 으로 이름을 알린 붕가붕가레코드 의 수석 디자이너 김 기조를 만났다. 개성 강한 레터링 작업과 메시지로 차세대 젊은 디자이너로 주목받고 있는 그가 말하는 디자인, 그리 고 철학에 관한 이야기들.
c o n t e n t s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2012.03 vol.61 02 3월의 문화+서울 아트 갤러리 이달의 표지 작가 인문학, 예술에 홀리다 06 Column 인문학과 예술 10 Report 인문학, 담장을 넘어 대중과 만나다 14 Interview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수유너머 연구원 고미숙 고전평론가 지금 서울은 40 이슈1 한국 연극 새로움에 눈뜨다 44 이슈2 봄의 文 化 제전 48 이슈3 하우스 문학? 하우스문학! 52 이슈4 오감을 깨우면 무대가 맛있어진다 이미지 서울 56 북촌의 봄 18 Trend 발길 가는 대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사람과 사람 22 문화 人 모두가 희구하는 우리들의 무대를 위하여 ISPA CEO, 데이비드 베일 58 리뷰1 음악극 <전통에서 말을 하다> 60 리뷰2 연극 <1동 28번지, 차숙이네> 62 리뷰3 연극 <서울노트>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발행일 2012년 02월 25일 등록일 2005년 6월 8일 발행 인 한문철(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장) 발행처 (재)서울 문화재단 편집기획 서울문화재단 홍보교류팀 홍보교류팀 장 이현아 박영도, 정경미, 김수연, 신동석 오니트(주) 발 행 (재)서울문화재단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홈페이지 www.sfac. or.kr 편집 디자인 오니트(주) (재)서울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문화+서울 은 서울에 숨어 있는 문화 욕구와 정보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의 창조적 힘과 시민들의 일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자 합니다. 문화+서울 에 실린 글과 사진은 (재)서울문화재단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없으며, 문화+서울 에 실린 기사는 모두 필자 개인의 의견을 따른 것입니다. 28 영아티스트 이 청년의 멋진 신세계, 김기조 34 38 나의 서울생활기 샌드 아티스트 장 폴로 서울 단상 칼럼니스트 박사의 부암동 생태기 서울 너머로 64 68 문화@서울 72 76 78 82 84 해외 트렌드 런던의 공정 무역, 착한 소비 이야기 해외 뉴스 뉴욕 LA 밀라노 리스본 좌충우돌 문화 체험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 가족체험뮤지컬 <둥글게 둥글게> 문화 캘린더 SFAC 뉴스 현장 인터뷰 독자의 소리
문화+서울 아트갤러리 이달의 표지 작가 01 02 언제나 푸른 위로 박형진 2012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 시각예술분야 선정작가로 중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제6회 개인전을 여는 등 국내외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에는 커다란 풀잎과 작은 아이들, 졸고 있는 개가 주로 등장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시부모님이 계시는 경북 풍기로 이사해서 작업을 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작품 제작하는데 쓰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며, 가끔은 개와 산책을 하기도 한다. 짙은 대지와 푸른 하늘, 초록의 잎사귀가 주는 생명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시에서 시골로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작품 의 소재도 변하게 되었다. 건축물과 옥상정원, 인간의 외 로움을 표현했던 작품들은 서서히 커다란 식물들과 마당 정원, 아이들의 모습으로 표현된 서정적 자아를 등장시 킨 그림으로 변하는 것 같다. 경북 풍기에서 작업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오랫동 안 자연을 벗삼아 지내는 일이 화풍이나 작업 스타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콘크리트 건물 대신 커다란 새싹 들이, 변형되고 왜곡된 인간들의 모습들은 동화 속 인형 모습의 아이들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다. 도시에서의 작 업이 일상적인 모습을 재현했던 것들이라면, 현재의 작 업들은 그것에다 상상을 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 다면? 최근 작업에서는, 소중함을 알고는 있지만, 간과하기 쉬 운 작고 소소한 감정들의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건조한 일상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끌 어 안아보는 일,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릴 게 아니라, 작은 씨앗을 심어 설레는 맘으로 싹이 트기를 기다려보기 등을 그림에 표현하고 있다. 최근, 이 모든 감정을 보듬고 아우 르는 상태를 HUG라고 이름 붙였다. 요즘 가장 주력하는 작업이 있다면. 최근 작업의 주 관심사는 무엇인가를 끌어안고 보듬는 감 정의 표현인 HUG, 그냥 지나쳐 버리는 소소한 것에 대한 재발견인 새싹, 다정한 단짝의 모습을 담은 버디버디 시리즈 등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열 개인전에서는 아이 들과 함께 식물을 키워보는 프로젝트 잘 자라라 를 계획 하고 있다. 01. 표지 <잘 자라라> 117 91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09 02. <상당히 커다란 새싹> 91 116.8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1 03. <제법 커다란 열매> 117 91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1 02 문화+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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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문화+서울 04 문화+서울
플라톤이 광장에서 시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외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문학과 예술의 관계 맺기는 계속되어 왔다. 인문학자나 비평가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작품을 평가한다고 폄하받던 시절은 가고, 매혹적인 인문학의 시절이 오고 있다. 예술은 스스로 존재의 조건을 인문학을 통해 탐색하고, 사람들은 영혼을 살찌우고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대안 인문 공간을 찾는다. 인문학과 예술의 오래된 역사에서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인문학 공간까지. 풍파 많은 인문학과 예술, 그리고 대중의 조우를 살펴본다. 2012 03 vol.61 05
3월의 문화+서울 column 악연에서 인연으로의 변화 인문학과 예술의 관계는 밀접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실천의 행위였다면, 인문학은 이를 지 켜보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출하는 비평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술은 인문학보 다 먼저 존재했다. 예술을 인문학이나 과학 같은 학문과 구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술 은 감각과 감정에 호소하는 미학적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학문이 실증과 논리에 충실하다면, 예술 은 반대로 정서와 관련을 갖는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인간 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서 창조라는 것은 새로운 것 에 대한 문제다. 새로운 것은 감각적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느낀 다음에 이해하게 마련이다. 새 로운 것은 무에서 유를 만든다기보다 주어진 것에서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것이다. 예술은 원시시 대부터 인간과 함께해 왔지만, 예술에 대한 이론은 고대 그리스를 중심으로 터전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미학적 생산물에 대한 다양한 인문학적 고찰이 고대부터 있었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플 라톤의 시인추방론 일 것이다. 한마디로 예술을 미래의 이상향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이 논리는 인 문학과 예술 사이에 가로놓인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예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그만큼 예술의 매력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06 문화+서울
플라톤, 시인에 반대하다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으로 보았다. 모방이라는 것은 원본과 사본이라는 전제를 염두에 두는 것이 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술에 대한 최초의 문제 설정을 플라톤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모 방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고대 철학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예술학에도 중요한 영향 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은 당시에 유행했던 시학과 철학에서 벌어졌던 모방을 둘러싼 논쟁을 참고 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플라톤은 모방을 심리와 현실성의 문제라는 기본적 논의구조 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은 예술적 모방과 철학적 모방을 구분해서, 예술보다 철학이 훨씬 더 원본 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모방을 재현(re-presentation)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여 기에서 중요한 것은 재현이라는 말이다. 재현이라는 것은 다시 보여준다 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다시 보여주는 것일까? 원본을 다시 보여주는 것, 말하자면 사본 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술은 철학보다 더 원본에서 멀어진 모방이기 때문에 질이 떨어지는 사본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요지다. 플라톤은 예술과 철학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이중적 관계로 보았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좋 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분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니,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을 나쁜 모방으로 본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 호머를 비판하면서 필연적인 재현의 오류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서 플라톤은 만일 호머가 다른 인물의 목소리를 가장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와 서사는 재현 따 위에 붙들리지 않았을 것 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가장하지 않았다면 호머 의 시는 좋은 모방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가장하지 않고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모방은 무엇 일까? 그것은 바로 다른 인물인 척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서술을 드러내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드라마 같은 것은 나쁜 모방이고 과학 논문 같은 것은 좋은 모방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이 옳다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모방자 는 초월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셈이다. 진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남을 속이지도 않고, 언어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이 모방자는 특출한 능력을 발휘 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고리타분한 것처럼 보인다. 또 한 이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나 이론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재현 의 이중구조는 여전히 예술학에서 중요한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모방의 이중성이다. 쉽게 말하자면, 플라톤은 예술의 재현과 사물을 분리해서 언제 나 사물이 재현보다 먼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예술학의 핵심에 감 춰져 있다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 플라톤이 근본적인 의심을 예술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술 의 모방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의심 말이다. 따라서 아무리 진실하고, 신념에 찬 좋은 모방이라고 할지라도, 또 아무리 훌륭한 사유행위나 그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지라도, 진실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다. 진실성의 훼손이 뜻하는 것은 무엇 인가? 이 질문은 얼마나 모방이 사물과 닮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바꿔 물을 수 있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과 재현 사이의 유사성 또는 동등성이었다.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의견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문제가 있다. 비슷하거나 똑같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허위이고 가장이기 때문이다. 재현은 결코 사물과 똑같아질 수가 없다. 재현은 끊임없이 2012 03 vol.61 07
3월의 문화+서울 column 사물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기획을 예술은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좋은 모방 혹은 나쁜 모방 예술학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재현과 모방이라는 최초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은 예술의 재 현을 가상이라고 생각하고 속임수라고 보았지만, 이런 생각은 플라톤 시절에나 진지하게 받아들 여졌던 것이다. 플라톤은 참으로 능수능란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은 만 들어놓고 재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재현과 철학적 재현을 구분하는 수법이 그렇다. 재현 자체를 예술적인 것과 동격에 놓았다고 한다면, 플라톤은 자신의 이야기도 하나의 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놓았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예술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 다. 결국 플라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의 문제는 가상의 가장성이라는 속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다. 철학은 가장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예술의 재현보다 훨씬 더 사물의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플라톤이 예술을 이렇게 파악한 까닭은 당시 예술이라는 말에 오늘날 우리가 느끼 는 것과 같은 뉘앙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말에 얽힌 의미들도 시대별로 변 화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영어로 예술을 뜻하는 art라는 말은 라틴어 ars 라는 단어에 서 왔다. 이 말은 배열(arrangement) 이라는 뜻이었다. 여러 개를 함께 묶거나 끼워 맞춘다 는 의미가 있었다. 이것이 기술 을 뜻하게 되면서 현재 의미로 바뀌었다. 단순하게 예술을 정의 하자면, 여러 가지 사물이나 재료에 기술을 가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예 술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다. 아름다움, 낯설게 보기 낭만주의는 산업사회의 출현과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지적 운동이었다. 특 히 자연을 과학적 합리주의에 맞춰 재단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의 영향은 광범위했는데, 시각예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에서 감정을 근거로 한 미학적 경험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낭만주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가 바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로 낭만주 의 예술의 관점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낭만 주의에 와서 예술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름다움 으로 공동체에서 받 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새로운 것은 익숙한 것과 결별함으 08 문화+서울
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익숙한 것, 다시 말해서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것 이라 고 합의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런 합의를 깨뜨려버린다. 감각의 반격이 시작되다 인상파처럼 대중의 예술 감각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 본격 등장한다. 아방가르드 예 술운동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을 통해 제시되는 이념이다. 현실이 합의한 윤리 적 가치를 넘어서기 위해 인문학은 초월적인 가치를 제시한다. 인상파가 자신의 예술을 펼치기 위 해 필요했던 것은 보들레르의 시학이었다.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감각에 대한 인문학적인 통찰이었다. 예술과 인문학의 관계가 불가분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현대 예술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고해졌다고 하겠다.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감각 체제에서 다른 감각 체제를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에서 앎과 감각이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예술은 낭만주의를 그대 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 예술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는 것은 어떻게 예술을 통해 새 로운 앎을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현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낭만주의에서 절대시했던 천재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는 절대적이고 독창적인 개인이었지만, 현대 예술은 이런 범 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완전한 예술, 존재의 근원을 묻다 현대 예술에 오면 그나마 예술가라는 범주에 남아 있던 낭만주의의 천재 개념도 더 이상 버티지 못 한다. 팝아트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술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팝아트는 현대 예술의 종착역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앤디워홀 같은 작가가 대표적이다. 워홀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코카콜라 한 병 은 같은 가격을 지불하고 사 먹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화폐가치의 평등한 교환성을 자신의 예술 원리로 삼았다. 워홀은 통조림통이나 세제 상자를 모방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더 이상 예술이 자연의 모방으로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사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좋은 예술이라는 플라톤주의적인 믿음은 여기에서 붕괴한다. 낭만주의 예술만 해도 자연은 언제나 예술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차원이었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이런 구도 자체를 부정한다. 현대예술 은 예술의 조건 을 보여주는 것을 주요 임무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이 드러내는 이 예술의 조건 이야말로 인문학이 꾸준하게 문제 삼아왔던 주제다. 인문학도 예술을 닮아 이제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글 이택광 문화평론가 경희대 영미어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를 모토로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다. 저서로는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무엇이 정의인가?(공저)>등이 있다. 2012 03 vol.61 09
3월의 문화+서울 report 탐구와 소비의 경계에 선 인문학 공간들 휘황찬란한 홍대 거리 안쪽의 작은 건물에 자리 잡은 강의실. 젊은 직장인들부터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성격을 가늠하기 힘든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다. 대학의 철학 시간이 이만큼 진지할까. 최근 몇 년 새 서울에는 인문학을 탐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인문학 공간이 부쩍 늘었다. 인문학 공간들은 무엇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가. 10 문화+서울
인문학에 대한 향수 혹은 동경 입학과 동시에 토익 점수와 학점 관리에 매달려야 하는 지금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 대기업 입사 시험과는 100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독서와 공부를 했고 온갖 이유를 다 들어 술자리를 만들 고 즐길 수 있었던 우리 때가 좋았노라고 말한다. 이건 지금의 삶을 긍정하는 한 방법이다. 그래도 그땐 재미있었다 고, 쓸모를 계산하기보다는 그저 재미를 위해 인문학을 공부했던 학창 시절을 추 억하는 것은 각박한 삶에 위로가 된다. 기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때가 있다. 01 재미로 배우는 인문학?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등 인문학 강좌들을 제공하는 공간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든다. 드물게 연구 목적으로 강의를 듣는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의 직 업과 상관 없이 그저 공부하고 싶다 는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 서도 기타를 배우고 서예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하필 인문학일까. 기타 연주나 서예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 운동에 영 취미가 붙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취향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어렵고 머리가 아프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같은 전문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입문 강좌조차 초 심자가 듣기에는 만만치 않다. 쾌감의 요소 중에는 분명 고통도 있다. 어렵고 머리 아픈, 딱 그만큼 인문학 공부의 매력과 재미 를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이 공간들을 찾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목적과 쓸모가 없기 때문에 놀 이가 재미있는 것처럼, 직무 능력이나 재테크 따위와 아무 상관없는 인문학 공부에 큰 매력을 느끼 는 사람들이 인문학 공간으로 모인다. 02 10여 년 역사의 대안 인문 공간들 수유너머, 문 의 회원 최진호 씨는 사람은 습관대로, 관성대로 살아가기 쉽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 하지 않았던 것을 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 공부도 그중 하나 라고 말한다. 1998년 출범한 수유+너 머 는 인문사회학 연구자들의 공동체로 10여 년 지속돼오다 2009년 수유너머 문, 수유너머 N, 수유 너머 R 등으로 분리되어 운영을 계속해오고 있다. 철학, 역사, 정치 등 인문사회학의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선정해 세미나, 강좌, 국제워크숍 등을 진행한다. 대학원생을 비롯해 인문사회학을 본격적 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단순히 재미를 느끼거나 교양을 쌓으러 오는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이 수유 너머 공간을 방문한다. 3월 말이면 12년이 되는 철학아카데미 는 이름 그대로 철학 에 특화돼 있다. 강좌는 크게 철학 이론과 철학을 기반으로 문화예술을 읽는 두 개의 축으로 운영된다. 철학 강의는 다시 초심자를 위 한 철학 입문 강의와 좀 더 깊이 있게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으로 나뉜다. 사진, 영화, 미술, 소설 등 문화예술에서 철학적 기반을 살피는 강좌는 각 분야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들 혹은 프로 작가들도 03 01. 세종예술아카데미 인문학 강의 모습. 02. 세종예술아카데미 오전 클래식 플러스에 모여든 수강생들. 03. 문지문화원 사이에서는 강좌 외에도 시 낭송회나 전시 행사를 제공한다. 2012 03 vol.61 11
3월의 문화+서울 report 많이 듣고 있다. 입문 단계와 고급 과정, 혹은 철학 이론과 문화예술에의 응용 등 강좌 성격을 구분 해 제공하는 것이 철학아카데미의 특징이다. 아트앤스터디 는 지난 2000년 개설된 인문학 포털이다. 철학, 문학, 역사, 미학, 미술, 영화, 건축 등 인문학과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온라인 강좌를 제공해왔다. 2010년에는 동교동에 인문숲 이 라는 공간을 마련해 오프라인 강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름난 인문학 공간들이 서울에 몰려 있 는 상황에서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은 오프라인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며 거주지역에 상관 없이 누구나 양질의 인문학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상아탑을 벗어나 거리로 나선 인문학 이러한 대안 인문 공간들은 위기에 처한 인문학이 대학 강의실을 벗어나 대중 곁으로 찾아가야 한 다는 목소리에서 출발했다. 인문학의 위기는 물질적 잣대로 모든 학문의 효용을 재단하려는 풍조 속에서 찾아왔다. 동시에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은 인문학이 학자와 연구자들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상황에 대한 지탄이기도 했다. 대안 인문 공간들의 등장은 쓸모없는 것으로 전 락해가던 인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되찾자는 움직임이다. 지난 2007년 문을 연 문지문화원 사이 는 인문, 예술 강좌를 통해 대학의 한계를 넘고 일반인과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워크숍을 통해 진정한 인문, 예술의 자리를 찾는다는 취지로 출발한 공간 이다. 아카데미 강좌를 운영하고 전시나 시 낭송회 같은 행사를 개최하면서 그 취지를 이어오고 있다. 독서대학 르네21 은 지난 2008년 독서운동을 통한 인문학 부흥을 표방하며 설립됐다. 동서양 고 전 읽기와 인문 강좌, 청소년 독서학교, 소외계층 청소년을 위한 독서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 영하고 있다. 다중지성의 정원 은 지난 2011년 입시와 취업에 매몰된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며 등 장했다. 인문학 강좌와 세미나, 워크숍 등을 통해 다중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중 지성의 활발 한 소통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안 인문 공간들이 인문학 저변 확대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철학아카데미의 경우 12년을 운영해오는 동안 8,000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했고 230명의 강의진이 활동했다. 물론 양적 측면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조광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대안 인 문 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인문학이 알게 모르게 삶 속에 스며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자신의 현재 삶과 일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다면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영혼을 살찌우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 다. 그는 인문예술적 삶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돈과 권력이 중심이 되는 삶이 아닌 인문예술적 삶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 철학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목표라고 강조했다. 04 인문학 저변은 어디까지 확대되었나 지금은 인문학의 위기를 떠들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 기업경영인을 대상으로 경영기법과 리더십을 강의하던 기관들은 인문학 과정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서울대는 2007년 개설한 인문대 최고지도자 과정 에 이어 2008년에는 중간관리자를 대상 으로 미래 지도자 인문학 과정 을 개설했다. 2007년 고려대박물관의 문화예술 최고위과정, 2008 05 12 문화+서울
년 성공회대의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 2010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이 국립극장과 연계해 운영 하는 전통예술 최고경영자과정, 2011년 경상대의 CEO 인문학 과정 에 이르기까지 최근 5년간 CEO 대상 인문예술 강좌는 폭증했다. CEO들이 인문학을 배우고 인문 경영 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는 동안 기업들도 변화의 바람 을 맞고 있다. 임원진부터 중간관리자,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기업 구성원이라면 마땅히 인문예 술 지식과 소양을 갖출 것을 요구받게 됐다. 교육기관과 연계해 구성원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운영하는 기업이 늘었고, 외부 강사 초청 특강의 주제가 인문학인 경우도 많아졌다. 심지어 대기업 들의 신입사원 공채에서 인문계 출신 지원자의 합격 비중이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 공연예술기관의 인문예술 강좌를 넘어서 서울 각 자치구가 시민 대상 강좌, 백화점 문화센터가 고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강좌에까지 인문학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대학 혹은 학생들이 문사철( 文 史 哲 )을 외면한다고 개탄했던 것이 과연 우리 사회 맞나 싶은 착각이 들 지경이다.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부흥을 꿈꾸는 대안 인문 공간들의 등장, 경제와 문 화 전반에 걸쳐 부는 인문학 열풍에 이르기까지, 롤러코스터의 움직임 같은 인문학의 위상 변화에 서 역동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06 능력, 금전, 건강 그리고 영혼의 관리 철학아카데미의 조광제 교수는 인문학이 탐구보다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백화점 문 화센터 강의를 나가 보면 막상 수강생은 열 명이 채 안 됩니다. 그런데도 백화점들은 인문학 강좌를 계속 유지하죠. 문화센터 프로그램에서 인문학은 센터의 격조를 높이는 고급 액세서리 같은 역할 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본의 전폭적인 지원과 거리가 먼 인문학 공간들의 운영 여건은 위기를 말하던 10년 전이나 지 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철학아카데미의 경우 재정 문제로 인한 폐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며 위태 위태하게 유지해오고 있는 형편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인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 만 대안 인문 공간들, 관련 교육기관의 수 역시 늘었기 때문에 여전히 긴장하면서 운영해야 한다.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의 강은미 실장의 말이다. 무한 경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자기 관리를 강요받는다. 돈이나 건강, 어학 실력과 커 리어를 관리하는 대신 영혼의 관리를 선택한 사람들은 대안 인문 공간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스 티브 잡스의 아이폰을 이기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한, 인문학 의 진정한 열풍은 한참이나 먼 일일 것 같다. 04. 세종예술아카데미 클래식 수업에 모인 수강생들이 연주를 듣고 있다. 05.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인문학 강좌에서 수업중인 진중권 교수. 06. 문지문화원 사이. 07. 철학아카데미 대표인 조광제 교수의 수업 모습. 07 글 김문영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문화교양지 <나이고 싶은 나>, IT 및 모바일 분야의 매거진 <싸이버저널> <엠톡> 등의 기자로 일했다. 현재 편집대행사 대표 겸 자유기고가로 일하고 있다. 사람, 예술, 디지털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글을 쓴다. 2012 03 vol.61 13
3월의 문화+서울 interview 14 문화+서울
수유너머 연구원 고미숙 고전평론가 인터뷰 서울 중구 필동3가 79-66. 고미숙 선생의 새 공부방이자 서재인 감이당 의 주소. 나는 한참을 헤매었다. 길을 헤매면서 무엇보다 당황한 것은 그곳이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충무로역 1번 출구를 나와 대한극장을 끼고 돌면 나오는 골목길. 그곳에는 오랫동안 정갈하게 평양냉면을 해온, 그래서 내가 자주 찾는 집이 있고 그곳에서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언덕 중턱에 친구가 살았던 자취방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곳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딱 거기까지가 내 기억과 사유가 그어놓은 세상의 끝이었다. 놀랍게도 감이당 은 바로 건너편 건물이었다. 새로운 앎의 시작은 전혀 다른 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그어놓은 오래된 경계를 지우는 일에서 시작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주인공을 만났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최근 대학가나 경제, 경영, 출판계에서 다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데요. 저 개 인적으로는 이 인문학 열풍 이라는 것이 5~6년 전 회자됐던 인문학의 위기 라는 것과 동의어로 들립니다. 우리 사회는 왜 다시, 혹은 왜 여전히 인문학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일단 인문학이라는 게 존재와 삶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잖아요. 이 인문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사유를 시작한 이후로 계속되어왔습니다. 어떤 문명이 와도 존재와 세계에 대한 탐구를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존재와 세계, 존재와 자연, 존재와 문명 등도 그렇고요. 이것은 분과학으로서의 인문 학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인 앎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인문학이에요. 대학의 세부 학문인 분과학으 로서의 인문학을 염두에 두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학이 소외되었다 말하는 것은 실용 담론에 밀린 분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이 밀린 것이었지 근본적인 인문학이 소외된 것은 아니거든요. 1990년대 후반 들어서 대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돌았죠. 그 시기에는 신 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붐과 더불어 대학이 실용성과 자본에 포섭되는 시기였어요. 그 시기 대학들은 신자유주에서 살아남으려는 방법으로 인문학 포기 를 선택했어요. 그 다음 가장 먼저 한 것 이 건물 세우기였죠. 학내에 대형 자본 매장도 들여오고 운동장과 작은 무대와 광장을 없앴습니다. 그 것이 위기의 출구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금융위기와 더불어 2007년 이후로 버블 이 걷혔잖아요. 경영 원리, 경제 원리가 어떻든 간에 결국 우리는 빚 위에서 놀았던 것 아니에요? 서민 부터 재벌까지 모두 그랬지요. 그렇다 보니 지금 현대인은 존재 자체가 잉여입니다. 빚 위에서 살고 빚 위에서 사유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빛( 光 )이었다고 생각했던 게 결국 빚( 債 )이었습니다. 이 시 기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과 존재 몸과 사유 의 거리가 벌어졌음을 공통적으로 인식 2012 03 vol.61 15
3월의 문화+서울 interview 하게 됩니다. 실용성만을 추구해서는 실용적이지 않다 라는 자성이 다시 인문학을 부른 것이겠죠. 늘 그래왔다고도 말할 수도 있지만 개인의 불안과 억압이 적체된 시기가 요즘인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인문 학이 할 수 있는 것, 또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 어찌 보면 비슷한 말이네요.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존재 를 통찰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좌표를 보게 하고 존재와 세계에 대한 탐구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바꾸고 삶을 구원하는 일은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요. 그것은 인문학이 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존재 스스로가 하는 것이죠. 어떤 고전과 문명과 제 도도 존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토피아가 없는 것이에요. 인문학은 배경과 토대를 만 들어주고 존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스스로 통찰하는 법만 알려줘요. 자기 스스로 구원을 하든 나락 으로 떨어지든 그것은 온전히 그 존재의 몫이죠. 이번에는 선생님께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그간 수유너머 로 대표되는 비제도권 인문학 네크워크 를 구축해오셨는데요. 그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대학원 과정을 다닐 때만 해도 연구를 더 하기 위해서는 대학 강단에 속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일단은 제가 대학에 임용이 안 되었어요.(웃음) 물론 그 강단이라는 게 직 업과 생계의 문제도 관련된 것이지만 배움과 지식의 네크워크를 형성하려는 목적도 있잖아요. 강 단에 못 선다고 해서 제 실존을 투영할 배움과 지식의 네크워크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죠. 한편으로 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석사, 박사 과정을 밟아 분야의 전공자가 되는 것이 특정 분야를 심화시키고 세분화해서 집약적이고 세밀한 학문을 하는 것이잖아요. 후에나 그 연구 양상을 기반으로 공적 사 회적 영역으로 다시 걸어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기에 푸코나 들뢰즈의 이론과 저서들이 우 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이런 물음이 들었어요. 푸코는 역사학자일 까? 철학자일까? 고고학자일까? <임상의학의 탄생>이라는 책도 썼는데? 들뢰즈도 마찬가지로 철 학자인지 역사학자인지 지질학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금은 융화와 통섭이라 하는데 그때는 이런 것을 지식 간 횡단이라 했지요. 그런 생각들을 해나가다 작은 공간을 얻어서 서재 겸 세미나실 로 만들어놓고 각 분야의 전공자들과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요즘 많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공부의 달인 으로 통하는데요. 선생님의 저서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를 비 롯한 달인 시리즈 저서들이 큰 인기를 얻은 까닭이 아닌가 합니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소외받는 계 층이 청소년 계층입니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해주어야 할 것들, 그리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 은 말씀이 있다면요? 책 출간 이후, 강연을 통해 중 고등학생을 많이 만났어요.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에서 쿵푸 는 몸 이거든요. 저는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몸과 지식 사이의 간격을 줄이자!를 강조합니다. 학이시습지불 역열호( 學 而 時 習 之 不 亦 說 乎 ) 라는 고전의 말처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거워야 하는데, 요즘 아이 들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명령과 강제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잘해도 기쁨을 못 느끼고, 못 하면 경멸과 무시를 받지요. 알면 몸이 즐겁다 라는 사실을 알고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학벌 이 얼마나 높아요. 그런데 앓의 기쁨은 철저히 침묵되고 있지요. 사람이 좋다 하는 것은 쾌락 중추가 자극되는 것인데요. 이 자극은 마니아 를 양산합니다. 그런데 이 마니아라는 기분이 애 매하지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알코올중독자, 게임을 즐기는 사람과 게임중독자처럼요. 기쁨 과 쾌락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사람들, 특히 아 이들은 이 쾌락에만 집중합니다. 또 이것을 놓치 지 않고 자본이 개입하고요. 이 기쁨을 훈련하 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서부터 모니터를 보면 서 영어학습 게임을 할 것이 아니라 흙을 만지기 도 하고 먹어가기도 해가면서 몸 전체로 놀면서 훈련을 해야지요. 몸 전체로 느끼는 기쁨이지요. 예전에는 저도 요즘 아이들이 고생도 모르고 귀 하게만 자라서 버릇이 없다고만 생각했어요. 그 런데 최근 의역학( 醫 易 學 )을 공부하고 나니까 저부터 시각이 달라지더라고요. 환란이에요. 자 기 스스로의 몸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세대 입니다. 돈으로 산 서비스와 제도 안에서만 자랐 을 뿐이죠.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 이 들어요. 아이들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하 지만 아직도 아이들 몸 안에 있는 기쁨의 잠재력 을 일깨워줘야 할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고요. 더욱 문제는 제가 방금 말한 것이 꼭 아이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수유너머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셨습 니다. 최근 감이당 으로 공부방을 옮기셨는데요? 어떤 계기나 어떤 마음으로 거처를 옮기셨는지. 또 마음에 세워두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인가요? 그동안 좋은 공부는 사회비판적이고 양심적이 고 지식을 축적해서 나누어주는 것이라 생각했 어요. 그런데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까 더 좋은 공부는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 고 어디에도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게 되었어요. 사실 우리 몸도 우리가 사는 지구 16 문화+서울
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것이잖아요. 삶과 자연이 그렇듯 앎도 머무르면 않되는 것이지요. 10여 년간 수유너머 를 운영해왔는데 인생의 한 마디를 지났다는 생각을 했어요. 계절의 원 리와 같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오고 또 봄이라고 해서 매년 같은 봄이 아닌 다른 봄 이 오지요. 어떤 리듬을 따르면서 변주가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수유너머 라는 것도 그동안 이름과 권위를 갖게 되었어요. 그러면 매번 그 이름과 권위 위에서 시작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있는 감이당 은 새로 이름을 지어 새 토대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곳은 봄이 죠. 수유너머 가 분과학을 넘는 것이었다면 현 재는 세대를 넘나드는 문화를 융합하는 강좌와 공부가 진행되는 공간입니다. 수평적 네크워크 를 넘어 세대 간의 네크워크를 구성하는 것이지 요. 계획이 하나 있다면 미국 뉴욕에서 이런 활 동을 계속해나가고 싶어요. 뉴욕은 가장 미국 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비국가적, 탈국가 적인 공간이잖아요. 의역학이라는 동양적 지혜 가 세계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민족주의 세대가 아닌 글로벌 세대의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그동안 우리 아 이들의 세계화라는 것은 여행과 연수를 통한 즉 소비의 방식으로 만나는 세계화였잖아요. 이것 은 조금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뉴욕에 이 런 거점을 만들면 글로벌한 영역에서 우리 아이 들이 자본적 틀이 아닌 방식으로 진정한 세계를 만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 박준 2008년 <실천문학>에 시가 당선되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간 여러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썼다. 요즘에는 떨리는 마음으로 첫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박정훈 사람과 공간에 관심이 많아 그런 작업을 좋아한다. 박정훈사진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다. 2012 03 vol.61 17
3월의 문화+서울 trend 쉽게 만나는 온오프라인 인문학 라이브러리 애플의 故 스티브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내놓겠다. 고 말했고, 구글은 신입사원의 상당수를 인문학 전공자로 뽑겠다고 밝혔다. 그 이후, 좀 앞서간다는 CEO들은 너도나도 인문학과 독서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자기계발과 토익 공부에 목매던 직장인과 학생들은 유행처럼 인문학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인문학에 접근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유명하다는 강의라도 등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무턱대고 고전을 읽으면 되는 걸까? 알고 보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인문학 공간이 가까운 곳에 숨어 있다. 일상적인 삶의 가치를 녹여내고 여러 사람과 소통하며 참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인문학 공간을 소개한다. 18 문화+서울
01 02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토론의 장, 인디고서원 부산의 예쁜 벽돌집. 볕이 좋은 한낮이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은 작은 정원이 딸린 곳. 서점 이라기보다는 아틀리에 같은 이곳이 바로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 이다. 인디고서원은 20여 년 이상 청소년 인문학 독서운동을 펼쳐온 허아람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베스트셀러나 학습 참고서를 주로 파 는 다른 서점과 달리 이곳에서는 청소년에게 권해주고픈 인문학 도서를 판매한다. 그리고 청소년 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사고의 폭과 인문학적 깊이를 더해주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정세청세 다. 정세 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상과 소통하다 의 줄임말로 직접 기획한 주제에 맞춰 토 론하는 행사다. 100여 명의 학생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3~4개월 동안 머리를 맞대고 프로그 램을 기획한다. 청소년들은 더 이상 교육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주체가 된다. 고등학생 때 여기에 참가한 뒤 대학생이 된 선배들은 중간교사 라는 이름으로 도우미를 자처한다. 부산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서울 인천 대구 울산 전주 등 전국 12곳으로 확대되었을 정도다. 인디고서원의 중간교사들은 10대 시절을 이곳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며 보낸 이들이 대부분이 다. 인디고서원이 단지 10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이유는 이런 중간교사들이 20대, 30대가 되어도 이곳에서 10대들과 함께 진지한 토론에 임하기 때문이다. 인디고서원에서는 세계 각국의 작가들과 문화예술교육가 등 창조적 실천가와 인문학 석학 등을 초청해 심포지엄과 강연 등을 여는 인디고 유스 북페어 가 한 해 걸러 한 번씩 열린다. 주제와 변주 라는 프로그램은 매월 한 차례 만나고 싶은 책의 저자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문답하는 형식으로 구 성된 세미나다. 대형 서점의 저자 사인회나 홍보 행사와 달리 저자와 청소년 간에 진지한 대화와 토 론이 이뤄진다는 장점이 있다. 또 청소년 기자들이 직접 기획, 제작하는 인문교양지 <인디고잉>을 발행하고 있다. 인디고서원은 청소년을 위한 이란 타이틀이 걸려 있지만 방점은 인문학에 찍혀 있 다. 이곳에 가면 언제든지 인문학이 주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인문학 공간, 길담서원 서울 통인동, 허름한 한옥집 앞에 서점이 문을 열었다. 울퉁불퉁한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 기한 입구에는 화초들이 놓였다. 인문학 서점인 길담서원 이다. 책을 파는 곳이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방 이지만 굳이 서원 이라는 말을 붙여놓았다. 서점도, 북카페도 아닌 서원이라는 명칭을 쓰는 이유는 이곳이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누는 장소가 되기를 소망하는 주인의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길담서원의 주인인 박성준 교수는 성공회대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교수지만 한명숙 전 국무총 리의 남편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길담서원의 문을 열면서 비치할 1,500권의 책을 손수 골랐다. 신간 위주로 꾸며진 여느 서점들과 다르게 출판된 지 오래되었지만 현재에도 유효한 책들을 눈에 잘 띄게 배치해놓았다. 03 01. 02.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 03. 인디고서원 인문학 행사 정세청세 현장. 2012 03 vol.61 19
3월의 문화+서울 trend 길담서원은 주로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인문, 사회과학, 문학, 예술 등의 인문학 도서를 주로 파 는 곳이지만 독서 모임이나 미술 전시, 음악회 등 다채로운 인문 예술 행사도 많다. 청소년과 어른 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도 자주 열린다. 서점이라기보다는 문화 공간에 더 가깝다. 책을 보며 차 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있고, 소모임을 위한 공부방도 있다. 작지만 알차고, 책과 사람, 문화가 어우 러진 따뜻한 곳이다. 길담서원에는 현재 청소년 인문학 교실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 교실 등 다양한 공부 모임이 진 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의 기획을 전담하는 사람은 따로 없다. 길담서원을 찾아온 사람 들이 스스로 하나 둘씩 프로그램을 만들면 다른 누군가가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이어진 다. 길담서원만의 독특한 문화다. 길담서원은 좋은 책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빨간 책과 녹색 책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레드북스(Red Books)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가에 자리한 사회과학 서점은 그 대학의 진보성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 징이었다. 한때는 전국에 140여 곳의 인문사회 서점이 있었지만, 학생운동과 진보 담론이 쇠퇴하 면서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금은 서울대 그날이 오면 과 성균관대 풀무질 정도가 근근이 명성을 이어간다. 전국을 통틀어 7개밖에 남지 않은 사회과학 서점. 그런데 서울 도심 한복판에 8번째 사회 과학 서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이름은 레드북스(Red Books) 다. 빨간 책 이라니, 이름부터 심상 치 않다. 게다가 대학가가 아닌 도심인 서대문에 문을 열었다는 것이 특색이다. 레드북스에서는 수험서 실용서를 팔지 않는다. 대신 3,500여 권의 인문사회 서적을 판매한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교과서처럼 읽었던 책들은 물론 최근 나온 신자유주의나 세계 금융자본주의 비판서, 한국 사회의 진보적 담론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담은 책들도 눈에 띈다. 웬만한 인문사회 서적은 다 있다고 보면 된다. 레드북스의 공식 명칭은 작은 책 카페, 인문사회서적 커피 모임 레드북스 다. 진보적인 활동가 인 최백순 김현우 씨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레드북스는 그저 서점이 아니라 사람들의 만남을 이 어주는 사랑방을 지향한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저자 초청 간담회나 다양한 형태의 영화제 음 악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반핵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상영하기도 한다. 레드북스에서는 2층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다. 기증받은 헌책도 취급한다. 그래 서인지 벌써부터 장기 절판된 책을 찾는 독자들이 홈페이지를 통해 헌책을 예약하고 있다. 차 한 잔 의 여유와 함께 인문사회학을 논하고 싶은 곳이다. 04 05 서울역 무료급식소 따스한 채움터 에서 열리는 노숙인을 위한 채움 인문학 강좌 자연과학은 20대에도 이해하기 쉽지만, 인문학은 인생의 깊이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인문학이 삶의 학문이라는 방증이다. 그래서인지 삶의 굴곡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교도소나 노 숙인센터 등 사회의 변방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역에 위치한 따스한 채움 터 는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다. 하루 평균 1,000여 명이 이용한다. 이 건물의 3층에는 노숙인을 06 20 문화+서울
위한 채움도서실과 샤워실이 있다. 따스한 채움터는 단순히 노숙인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공간에서 인문학을 위한 공간으로 변신했 다. 2월부터 4월까지, 매주 목요일이면 3층 채움 도서실은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의실이 된다. 저 녁 7시부터 90분간 진행되는 이 강의는 동서양 철학, 문학 및 글쓰기, 영화 인문학 등으로 채워진다. 서울역 주변의 노숙인과 노숙인상담보호센터를 이용하는 노숙인이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 다. 참여를 원하는 노숙인은 강의시간에 맞춰 따스한 채움터를 방문하면 된다. 세상과 단절된 노숙인들이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 려면 자존감의 회복이 절실하다. 인간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도 근본적으로 자존감이 회복되 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것과 대조적이 다.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의는 노숙인을 단지 재워주고 먹여주는 대상에서 삶의 주체로 서게 하 는 유의미한 시도다. 07 09 08 10 스마트폰 하나로 인문학을 마스터한다! 인문학 앱 시간을 내어 인문학 공부를 하기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스마트 기기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해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권한다. 스마트폰만 잘 이용해도 이동 중에 틈틈이 여러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마인드브릿지 애플리케이션 은 직장인들에게 필수교양으로 떠오르고 있는 인문학 콘텐츠를 다 양한 형태로 제공한다. 철학자 강신주, 법학자 박홍규 교수, 과학저술가 이정모 교수 등 국내 인문 학 분야의 권위자들이 강의를 진행한다. 게다가 전자책, 서평 등 풍부한 인문학 콘텐츠가 매주 업데 이트되어 애플리케이션만 잘 활용해도 인문학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할 수 있다. 책 1권을 A4용지 10 장 분량으로 압축한 전자책은 매주 1권씩, 서평은 매주 2편씩 제공된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에서 개발한 대학공개강의서비스(KOCW) 애플리케이션은 국내 대학 및 해외 교육자료 공개(Open Education Resources) 운동 협의체와 연계해 강의자료 정보를 공유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교육학, 의약학, 예술, 체육 등 다양한 종류의 강의가 준비되어 있는데, 관심 있는 강의를 검색해 볼 수 있으며 마음에 드는 강의는 즐겨찾기에 추가해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미국의 엘 고어, 빌 게이츠와 같은 명사와 석학들의 강의도 즐길 수 있다.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새플링 재단이 운영하는 TED컨퍼런스(www.ted.com) 는 지난 2006년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석학들의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인문학을 접할 수 있는 스마트한 세상이다. 04. 서울 통인동에 위치한 길담서원. 05. 06. 서대문에 위치한 레드북스는 인문사회학서적만을 보유한 서점이다. 07. 08. 인문학 전문 어플 <마인드 브릿지>. 09. 10. 한국교육학술정보에서 제공하는 대학 강좌 서비스 어플. 글 배나영 인터넷 방송 DJ에서 유명 포털사이트의 기획자, 대학로의 뮤지컬 배우를 거쳐 자유기고가로 변신했다. 음주가무가 특기다. 2012 03 vol.61 21
사람과 사람 문화 人 ISPA(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Performing Arts) CEO, 데이비드 베일 모두가 희구하는 우리들의 무대를 위하여 국제 공연예술계를 대표하는 네트워크인 ISPA(국제공연예술협회)의 제26회 국제총회가 서울문화재단 주관으로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다. 올해로 창설 64주년을 맞이하는 ISPA는 2012년 제26회 ISPA 국제총회를 도시 특유의 사회문화적 역동성을 바탕으로 국제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는 서울에서 Cultural Shifts: 문.화.변.동. 이라는 주제로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의 한류 현상 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기술적 동인이 공연예술 창작과 향유, 유통과 교류의 내용적 형식적 무게 중심에 어떠한 변화들을 일으키는지를 놓고 동서양 전문가들이 비전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장이 될 것이다. 행사를 4개월 앞둔 지난 2월 6일부터 14일까지 서울을 방문한 ISPA의 CEO, 데이비드 베일(David Baile)을 만나, 한국에서 ISPA 총회가 개최되는 배경,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순수 공연예술의 역할, 미래 청중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었다. 22 문화+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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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문화 人 6월에 개최되는 ISPA 서울총회를 앞두고 진행사항 점검 및 업무 협의차 서울을 방문한 것으로 안다. 먼저 ISPA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서울총회를 4개월 정도 앞두고 있기에 프로그램 및 현장 운영에 관한 협 의 등 주관 기관인 서울문화재단과의 업무 회의를 비롯해 다양한 협력과 도움을 주고 있는 여러 기관을 직접 방문해 ISPA의 활동을 소개하고, 서 울총회의 성공을 위해 지속적인 도움을 요청하고자 왔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명동극장을 비롯해 영국문화원, 일본국제교류기금 등을 방 문했는데, 여러 기관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총회 준비가 원활하게 진행되 고 있기에 무척 기쁘다. ISPA(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Performing Arts)는 50여 개국 400명의 공연예술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성과 리더십을 기반으로 한 국 제 네트워크다. 국제 공연예술계에는 ISPA를 비롯해 다양한 연합체가 존 재하는데, ISPA는 64년이라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국제 연합체로서 ISPA만의 강점을 몇 가지 갖고 있다. 첫째, 소속된 회원들의 지역적 직업 적 배경이 가장 다채롭다는 것이다. 현재는 미국과 캐나다, 영국의 회원 이 가장 많지만, 북미와 유럽으로 대변되는 국가 외에도 브라질, 남아공, 아랍, 싱가포르 등 전 세계 50개국의 전문가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지 역적 다양성을 대변하고 있다. 회원들의 직업적 배경도 다양한데,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 장르, 가령 뉴욕 필하모닉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 클 래식 음악과 오페라 분야를 비롯해 현대무용, 연극, 다원 등 다양한 공연 예술 종사자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ISPA는 시장 기능을 지향하는 연 합체가 아니다. ISPA의 핵심은 아이디어 그 자체에 있다. 우리는 아이디 어 교환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해 전 세계 전문가들의 생각과 비 전을 공유하며 서로 간의 연관성, 영향성에 등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함으 로써 세계 전체 공연예술계가 발전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또한, 일시적인 모임이 아닌 중장기적 관계 구축에 관심을 두고, 각국 회원들이 개인적 직 업적 관계를 국제적으로 넓힐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아마도 공연예술 연합체에 가입하는 이들은 연합체의 시장 기능에 관심이 많 을 것인데, ISPA가 추구하는 아이디어 교환을 통한 중장기적 관계 구축이, 나 와 같은 민간의 공연예술 프로모터가 사업을 활성화하는 것에 도움이 될지 궁금 하다. 나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 구조에서 순수 공연예술 분야의 비영리 조직, 그리고 영리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예술 기업이 당면하고 있는 주요 이슈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공과 민간의 공연예술 기관, 비 영리 예술 조직과 상업 예술 조직 모두 변화하는 시대에 예술의 역할, 조 직의 생존 문제, 미래 관객에 대한 고민 등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고 본다. 이러한 당면한 현실의 변화, 위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해석과 해 결책을 찾는 통로가 ISPA 총회의 역할이다. 이 같은 기능은 궁극적으로 비영리, 영리 기관 모두의 영속성에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이 경영하고 있 는 마스트미디어 와 같이 순수 공연예술은 물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 를 갖고 있는 여러 기관, 개인 역시 ISPA 회원이다. 가령, 브로드웨이 크 로스 아메리카 를 비롯해 상업 예술 분야의 기관, 개인도 ISPA의 회원으 로 참여하고 있다. 일반인은 물론 공연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 또한 공연예술 분야의 다채로운 직업군에 대해 혼돈하는 경우가 많다. 아트 프리젠터, 아트 프로모터, 예술경영 인 등 다양한데, 이들의 차이점이라든지 ISPA 회원의 구성 비율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달라. ISPA의 회원은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다양한 직업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공연장 및 프리젠팅 기관(Presenting organization)의 비율 이 가장 높다. 공연장 및 프리젠팅 기관은 시설을 기반으로 한 조직으로 서 한국의 세종문화회관이라든지 영국의 바비칸 센터, 미국의 케네디 센 터, 싱가포르의 에스플러네이드,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이 그 예다. 다음으로 공연예술단체(Performing arts organization)이다. 이 들은 창작과 제작에 중심을 둔 예술 조직으로 가령, 뉴욕 필하모닉과 같 24 문화+서울
은 음악 무용 연극 단체, 그리고 여러 예술 축제를 조직하는 기관들이 그 예다. 다음으로 서울문화재단, 호주예술위원회 등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 하는 지원 기관이 있다. 그리고 개인 예술가 및 CAMI, IMG와 같은 예술 프로모터나 에이전트도 많으며, 예술경영인으로 분류되는 무대감독 등 다양한 직업군이 ISPA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 직업군의 역할과 개발이 중 요한 것은 일반 관객이나 청중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는 않지만, 예술과 사람이 만나는 중간 지점, 즉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문화예술 발전 에 있어 허리와도 같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ISPA는 결국 공연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다양한 이들이 의견 교환과 비전 제시를 통해 스스로 역량을 키움으로써 공연예술의 발전을 꾀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매 해 두 번의 총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안다. 올해 국제총회 개최지로 서울을 선정 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렇다. ISPA는 공연예술의 사회적 힘을 키우는 것에 뜻을 같이하는 공 연예술 종사자, 전문가들의 연합체다.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키우며 공연 예술이 사회 발전과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함께 고민한 다. 이를 위해 매해 1월에 뉴욕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6월에는 세계 주요 문화도시를 돌며 국제총회를 개최한다. 1949년 설립 당시부터 개최 된 뉴욕총회는 올해 64회를 맞았고, 지난 1987년부터 매해 6월에 개최하 는 국제총회는 올해 서울에서 26회를 맞는다. 나를 비롯한 ISPA의 핵심 회원들은 서울을 찾는 것에 대한 기대가 크 다. ISPA의 국제총회는 이제까지 주로 전통적인 문화예술 도시, 즉 런던, 파리, 빈 등에서 개최돼왔다. 그런데 2007년 내가 부임한 이후 ISPA와 이 사진은 새로이 부상하는 문화예술 도시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세계 공 연예술계의 새로운 세대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2008년 국제 총회는 남아공의 더반, 2009년은 브라질의 상파울로, 2010년은 크로아 티아의 자그레브에서 국제총회가 개최되었다. 2011년에는 캐나다 토론 토에서 개최되어 토론토의 새로운 문화 르네상스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 고, 2012년에는 아시아 에너지의 중심인 서울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대다수의 ISPA 회원은 한국에는 전통적인 공연예술 장르만 존 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전통 공연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시도되는 다 양하고 혁신적인 공연예술 창작물, 현대 작품 등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 다. 세계 공연예술 전문가 중에 한국을 한 번도 다녀가지 않은, 직접 체험 하지 못한 이가 매우 많다는 것이 서울총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이다. ISPA 는 공연예술 전문가들의 모임이지만, 이들의 구성 비율, 인식은 세계 전 체의 대체적인 관심, 인식을 반영하는 소우주(microcosm)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의 오해, 혹은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 다. 또한, 전통적인 문화예술 중심지인 유럽이 문화예술 분야 지원을 대 폭 축소하는 것과 달리, 한국 등 아시아가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정책적 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2012 03 vol.61 25
사람과 사람 문화 人 26 문화+서울
서울총회의 주제가 문화변동 인데, 어떤 의미인가. 무엇보다 서울에서 세계가 함께 문화변동을 논의하는 것은 아주 시의적 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는 Cultural Shift 는 문화예술의 에너 지가 서구에서 동양으로 이동하는 상황에 관한 것이다. 서울총회는 이 같 은 변화를 국제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와 함 께 테크놀로지 등 새로운 동인이 공연예술의 창작과 유통, 그리고 예술을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대해 논의하게 된 다. 여러 측면에서 실제로 오늘날 진행 중인 다양한 사회문화적 기술적 인 변화, 변동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15년 넘게 한국의 공연예술 프로모터로 일해왔다. 현재 여러 도시, 국가가 경제적인 부분을 비롯한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데, 한국 공연예술의 가능성, 미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가장 중요하고 공식적인 답변을 하자면, 남미와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함께 이들 정부가 예술과 문화 부분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고 있다 는 점에서 새로운 미래를 보게 된다. 특히, 한국의 중앙 및 지방 정부, 공공 기관이 문화예술 인프라 확충 등 재정적으로 문화예술 지원을 확대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문화예술을 통한 개개인의 예술가, 시민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이해 수준을 높이고 있는 질적인 측면 역시 한국 문화 예술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는 근거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이 미래 아시아의 관문이 될 것이 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한국과 한국의 공연예술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 에 대해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 실제로 국제사회가 한 국을 주시하도록 하는 다양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고 본다. 한국 공연 예술 창작품의 국제교류가 점차 확대되는 점 등이 그 이유다. 그리고, 테 크놀로지 등 기술의 활용, 개발 측면에서 한국은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한국 사회의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지난해 라이브 싱가포르 에 참석했을 때, 한 일본 공연예술 전문가가 새로운 정 치가가 부임할 때마다 새로운 공연장이 지어지는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즉, 관객 개발보다 하드웨어, 인프라의 성장에만 급급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문 제 제기다.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적으로 한국 공연예술 시장의 개방성,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청중이 있기에 한국에서도 진행 중인 공연예술 인프라 확대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인프라보다 관객 개발이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간혹 인프 라 확충만 강조되느라 그 안에 담기는 핵심인 프로그램을 간과할 수 있는 데, 인프라 확충과 아울러 프로그래밍에 대한 고민, 개발은 필수적이다. 앞서 테크놀로지의 역할, 그리고 관객 개발에 대해 언급했다. 생활 방식이나 사 고 체계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젊은 세대가 극장, 무대라는 매체로부터 감동 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예술 교육이 답이다. 학교에서의 예술 교육, 예술의 가치에 대해 알리고 계 몽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예술과의 관계는 라 디오, TV가 등장할 때부터 계속 제기돼온 이슈다. 오늘날 파일 공유 프로그 램이나 SNS가 예술 창작, 향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공연 예술의 전달 혹은 유통 측면에 도움이 된다고 보며 보다 근본적 궁극적으 로는 직접적이고 상호적인 만남이 인간이 희구하는 본연의 것이라 생각하 며, 따라서 현장의 무대가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ISPA 2012 서울 총회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 리더들이 제시하는 문화예술의 미래! 문화예술계 지적 담론 을 통한 글로벌 소통과 공감, 네트워크의 場. 주제 Cultural Shifts: 문.화.변.동. 기간 2012년 6월 11일(월) ~ 6월 16일(토) 총6일간 장소 문래예술공장, 세종문화회관, 남산예술센터, 예술의전당,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명동예술극장 프로그램 구성 아카데미, 포럼, 공연, 피치 세션, 홍보부스 전시, ISPA 수상자 만찬, 네트워킹 행사 등 참가자 35개국 공연예술 전문가, 문화예술경영인 행정가, 전공자 등 400명 등록 www.ispa.org/seoul2012korean 주최 서울문화재단, ISPA 본사 후원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미디어 후원 MBC 협력 세종문화회관, 남산예술센터, 예술의전당,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명동예 술극장, 문래예술공장, 영국문화원, 크레디아, 영국 IAM 매거진, 클럽 발코니,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 문의 서울문화재단 ISPA 서울총회 사무국(02-3290-7052~4) 글 김용관 한국 대표 공연기획사의 하나인 마스트미디어와 마스트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경영해 온 김용관 대표는 세계적 음악가 및 예술단체들의 공연을 유치하여 국내 공연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해 왔다. 순수 클래식음악 공연, 해외 팝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을 비롯하여 태양의 서커스, 블루맨 그룹 내한 공연 및 인체의 신비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코리아 투어 등 전방위적인 공연문화에 대한 접근을 통해 문화예술사업의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 사진 박정훈 2012 03 vol.61 27
사람과 사람 영아티스트 붕가붕가레코드 수석 디자이너 김기조 이 청년의 멋진 신세계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그는 시종일관 진중하다. 맥이 빠질 법한 식상한 질문에도 조곤조곤 길고 진지한 답변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여기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고 선언하는 청년은 없는 듯 보인다. 붕가붕가레코드 수석 디자이너이자 1인 스튜디오 기조측면 을 운영하며,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 앨범 디자인으로 이름을 알린 김기조. 주목 받는 차세대 디자이너로 거듭난 그가 말하는 김기조, 디자인, 그리고 소통 이야기. 한글, 솔직하고 낯설게 말하기 현재 붕가붕가레코드 수석 디자이너로 있는데 간략한 소 개를 부탁한다. 2004년 설립과 동시에 첫 음반 <관악청년포크협의 회> 디자인을 맡아 진행한 이래로 붕가붕가 레코 드의 선임 디자이너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2010 년 군 복무를 마치고, 붕가붕가레코드 이외의 작 업을 진행하기 위한 개인 스튜디오의 필요성 을 느껴 기조측면 이라는 이름의 일인(1 人 ) 스 튜디오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디자이너와 스 타일리스트 두 가지 역할을 시도해보려 합니 다. 앞으로 진행할 작업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2012년을 맞아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 용할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28 문화+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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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영아티스트 01 02 03 김기조 디자이너의 작업 하면 대부분 클래식한 느낌의 타이포그래피를 떠올리 는 사람이 많다. 붕가붕가레코드 앨범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은 건가? 붕가붕가레코드에는 처음부터 참여했고, 초기 작업 대부분을 제가 했으 니, 레이블 구성원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일 테고요. 저도 처음엔 과 거의 한글 디자인이 보여주는 기묘한 조형적 감성의 생경함에 관심을 가 지고 접근했었어요. 네모난 틀 안에 우겨 넣어서 만들어지는 왜곡된 형 태, 방편적인 조형들에 관심이 갔죠. 그런데 작업을 할수록, 그것이 단순 히 옛것처럼 보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이 취할 수 있는 스타일 의 또 다른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글에 대한 장식적 실험 등 이 충분한 결말을 보지 못한 채로 애매하게 모던 한 경향으로 옮겨간 것 에 대한 아쉬움도 있고요. 저는 과거의 디자인을 재현하고 있다기보다는 현재에도 의미를 지닌 채 활용될 수 있는 한글 디자인의 또 다른 갈래를 파고 있는 거죠. 제가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글 디자인의 경향이 중 성적인 톤의 본문용 글꼴과 캘리그래피, 또는 매우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글꼴 정도였어요. 그래서 저는 대중적 활용도가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색다른 글꼴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현재의 경향과 반대되는 것으 로 네모꼴 글자의 극단적인 실험, 글자 획의 장식적 활용을 자연스레 연 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현재의 스타일이 만들어진 것이죠. 타이포그래피는 영문 으로 작업했을 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 서인지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꾸준히 해온 김기조씨의 작업이 더욱 눈에 띄 는 것 같은데. 04 01. 작업 스케치들. 02. 쑥고개청년회의 탄생 공연 포스터. 03.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와 얼굴들 2집> 앨범 커버. 04. 아침<Hyperacitivity>앨범 커버. 05. 아침의 앨범 발매 티저 포스터. 05 영문으로 디자인했을 때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근현대사를 겪어오면서 한국인에게 자리 잡은 타자의 시선으로 평가되는 것에 익숙 한 문화적 사고 방식,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영문이 의미 요소가 아 닌 조형 요소로서 받아들여지는 효과, 영문 글꼴의 개발이 풍부하게 이 루어진 점 을 들 수 있어요. 저 역시 기존의 한글 글꼴을 그대로 사용했을 때, 범용적으로 활용 가능한 중성적 글꼴만으로는 흡입력 있는 이미지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죠. 그래서 해당 디자인을 위한 전용 글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매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온전 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있어요.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모국어이기 때문에 이해도가 충분한 상황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미묘한 어조를 조절 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죠. 사실, 역으로 묻고 싶은 것이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활동하면 서, 자신이 속한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업에 어째서 외국어를 30 문화+서울
빌려와야 하는 걸까요. 그것이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면 모르겠지만, 제 게는 작업의 시작과 동시에 영어 단어, 문장부터 찾아보는 행위가, 실제 우리 일상과는 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한 창작물이든 모국 어를 기반으로 했을 때 그 의미가 온전히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사회 구 성원 스스로 자신의 것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일반화되다 보니, 반대 로 한글을 절대가치의 진리처럼 숭상하는 흐름이 만들어져 버렸어요. 저 는 이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한글은 그저 글자 이고, 아무 리 큰 의미를 부여해도 우리, 즉 한국인이 쓰는 글자 예요. 도구가 권위, 진리로서 개입하는 순간 경직된 사고, 움직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요. 그러다 보면 결국에 한글은 역시 촌스럽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 나오는 거죠. 지속가능한 소통을 말하다 메시지도 참 재미있는 것이 많다. 이 시대 청춘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화두일 텐데, 특히 결과는 참담했다 싫은데요 같은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젊은 세대 의 심리적 화두를 잘 이끌어내는 것 같은데, 본인 생각은 어떤가. 많은 작업자가 자신의 생각, 주장들을 작업을 통해 풀어내려 하지만, 태 도적인 면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적당한 선에서 감추지 못하는 경 우가 많은 듯해요. 나는 괴롭다 던가, 나는 슬프다 던가 개체화된 감각으 로 풀어내고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는 그것이 공감을 강요하는 것으로 읽 힐 수 있거든요. 그 순간 관찰자는 불편한 벽을 느끼고 외면하게 되죠. 철 저한 계산까지는 아니지만, 제 작업 스타일이 확고한 이상 메시지마저 자 의식이 과도하게 투영되는 것을 배제하려 노력했습니다. 관찰자가 작업 을 보는 순간 그 사람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일부 아트워크에서 70년대 선전물 스타일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게 발화성 이 강력한 메시지들과 어우러져 반항적이고, 무심한 청춘들의 단면을 드러내곤 한다. 처음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권위적인(또는 그렇게 보이려 애쓰는) 글꼴의 형태를 빌어, 다소 힘이 빠져 보이거나 모자라 보이는 메시지를 담았을 때, 어딘가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면서 권위를 가지고 노는 2012 03 vol.61 31
사람과 사람 영아티스트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전복적인 상황묘사가 즐거운 작업이었는데 그렇 게 해서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와 같은 메시지가 나왔던 것이죠. 하지만 작업에서 정치적 방향성을 지우고, 좀 더 일상적인 메시지를 담게 되었을 때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작업의 스타일적인 부분은 과거의 것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거 에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옛날 티를 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아요. 예를 들 어 푸로덕-숀 처럼 예전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으로 문구를 쓰는 것이 시대에 대한 진지한 묘사라기보다는 그 시대를 빌려 와 대상을 희화화하 는 것에 목적이 있잖아요? 그 시대 사람들의 나름 진지했던 일상을 현재 의 눈에 어색해보인단 이유만으로 우습게 여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가벼운 태도로서 옛날식 표기법을 사용하는 투의 작업은 첫 작업 관악청년포크협의회 1집 이후로 완전히 버렸어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지향점을 현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과 소통 하려는 의도가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눈뜨고코베인 3집 <Murder s High>나, 장기하와 얼굴들의 2집 커버는 일련의 작업스타일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앨범은 생동감이 넘치지 만 불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음악이 표현하는 이미지를 1차적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음반디자인을 해 오면서 현재까지 지키고 있는 제1원칙입니다. 음악을 포장하는 이미 지가 아니라 음악에 시각적 장치를 제시하는 것인데, 즉, 외로움이 담긴 노래에 외로운 이미지를 담거나, 어긋나 있는, 심지어는 완전히 반대되 는 이미지를 담기도 해요. 음악과 디자인 두 가지가 힘을 지닌 채로 영향 을 주고받으며 효과를 만든다고 할까요. 눈뜨고코베인 3집 <Murder s High>의 경우, 음반에 실린 음악들이 살인, 살해, 죽음에 대한 공포심과 원죄의식이 담겨 있어요. 음반디자인을 위한 첫 회의에서 사건 현장을 표현하는 것으로 표지 아이디어가 모일 때, 제가 이 음반에는 예쁜 그림 이 필요해. 라고 주장하면서, 표지 이미지를 어린아이가 자동차 밑을 들 여다보는 것으로 결정했어요. 청자의 상상 속에서 전개될 수 있는 이미 지를 만든 것인데, 표지에서 굳이 피나 폴리스라인 등을 표현하지 않아 도 상상에 따라서는 잔혹하게 보일 수 있었죠. 물론 그 장면이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고요. 음반 디자인 외에 요즘 관심을 갖는 디자인 분야가 있나. 저 자신 또는 누군가의 취향, 일상을 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 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역할에도 관심이 있고요. 특히 요즘은 옷이나 장난감 등에 계속 관심이 가네요. 최근 창작 분야의 화두는 협업, 콜래보레이션 이에요. 서로의 개성을 잃지 않은 채, 교집합 으로 새로운 결과물이 탄생한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연이 닿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를 해독하는 몇가지 암호들 붕가붕가레코드나 김기조 씨 작품은 인디레이블이긴 하지만 이제 비주류 문화 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 측면에서 일종의 문화디자 인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화디자인이란 어떤 것인가. 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 그리고 그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판을 합 쳐 문화적 테두리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축적되 고 그것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전체의 것으로 확대해나가면서 문화가 성장하는 거죠. 작은 동네 빵집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경험과 일상이 축 적되면서 나이를 먹다 보면 하나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생겨나 겠죠. 굳이 문화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사회 구성원이고 싶어요. 공공성이 부재한 곳에서 공공디자인이라는 말 이 튀어나오고 문화적 토양이 빈약한 곳에서 문화디자인이라는 말이 나 오는 것 같아요. 기획을 통해 완성된 가치를 대중에게 던져준다는 개념의 문화디자인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숨 쉴 수 없는 생명체에게 공급하는 인 조 배합토인 거죠. 가령 홍익대 인근의 갈수록 높아지는 임차료, 구성원 의 생계 문제로 그곳을 기반으로 한 독립문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문화 지원을 위한 예산과 정책은 매우 인공적인 것이죠. 자생적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는 힘이 자꾸만 좌절되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평소 프로젝트에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이 있나. 평균적으로는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그 이상의 시간을 써본 작업은 거 의 없는 편이에요. 어떤 작업물은 찰나에 튀어나온 것들도 있고, 반면에 보기와는 다르게 장고의 끝에 나온 결과물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마무리에 쓰는 편인데, 주어지는 시간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져요. 완성도 없이 얼개를 짜는 것은 나흘 정도 안에 이루어집니다. 적응력이 좋은 편 이라, 작업 장소는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가끔은 카페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작업 흐름이 막힐 때는 일부러 시끄러 운 패스트푸드점을 찾기도 해요. 예전부터 혼자서 작업하는 것이 몸에 배었는데, 결벽적인 작업 스타일 때문이라기보다는 작업이나 작업 공간 32 문화+서울
자체를 공유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 듯해요. 여럿이서 하는 작업도 좋더라고요. 서로 긴장감이 있으니 쉽게 피로해지지도 않고. 작업할 때 디자이너로서 의식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디자이너가 자기에게 특별한 능력과 책임이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사회 구성원과 몸을 섞지 않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디자이너이기 전에 스스로가 사회 구성원이고, 본인의 행동이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 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으로 충분해요. 디자인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과신 아닐까요. 디자이너가 문제 해결 방식을 보편 성에서 찾지 않고, 디자인적 특수성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만든 디자 인 제일주의 의 초라한 결과물들은 이미 주변에 널려 있으니까요. 당 연한 얘기지만,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접근하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접근하는 것에 우선해야겠죠. 개인적으로는 독해 능력,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혹 시 떨어지는 건 아닌지 항상 확인해요. 게을러지는 것보 다 사고가 단순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어요. 적어도, 이 디자인은 녹색을 주 색상으로 나뭇잎 문양을 넣어 친환경 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따위의 말을 읊조리는 디자이 너는 되지 않도록요. 또한 항상 내가 왜 이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 작업 내에서 이러한 방향성을 가지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늘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여유를 잃지 않고 무난하게 사는 것이 개인적 인 바람이죠. 이미 그것 자체가 큰 도전인 사회 이지만. 글 박현일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래픽디자인 작업을 주로하는 더 그라프 를 7년째 꾸리고 있다. 새롭지만 쉽고 편안한 디자인이 뭘까 어렵고 불편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사진 박정훈 2012 03 vol.61 33
사람과 사람 나의 서울 생활기 샌드 아티스트 장 폴로 풍류를 알면 서울이 보인다 한 줌의 모래를 든 손. 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가 화면 위에 사람과 세계와 우주를 그려낸다. 샌드 애니메이션 분야에선 가히 세계 최고의 거장으로 굴지의 에미 상과 아카데미 상을 동시 수상한 아티스트, 장 폴로를 만났다. 건국대학교 문화예술대의 교수이자 광주 비엔날레 명예 홍보대사를 지낸 바 있고, 최근엔 지상파 TV의 인기 프로그램에서 샌드 애니메이션 퍼포먼스를 펼쳐 더욱 인지도를 높인 그는 차분한 인상과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예인이었다. 올해로 한국에 계신 지 얼마나 되신 건가요? 11년째 되네요. 처음에 워크숍 때문에 서울에 올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아보라는 제의를 받은 게 시 작이네요. 숙명여대에서 4년을 가르치다가 국민대에 갔다가 이제 건국 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인상은 어땠나요?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 엄청난 도시라는 것이 첫인상이었어요. 좋았어요. 처음 왔을 때에는 압구정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출근했었죠. 점차 한국 예술인들과도 교류하고, 서울의 전통이 살아 있는 명소들을 돌아다니면서 서울생활에 서서히 적응해나갔습니다. 샌드 애니메이션을 평생의 이력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맨 처음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시작했다가, 빅 스튜디오로 옮겨 애니메 34 문화+서울
이션을 하게 되고 거기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하다가 샌드 애니메이션 에 눈 뜨게 되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건국대에서도 샌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고 있어요. 스톱 모션을 주로 가르치지만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함 께 샌드 애니메이션도 수강과목에 포함되지요. 선생님과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열광적인 블로거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한국말을 잘하면 가서 볼 수 있을 텐데. 예술가 지망생으로서 한국 대학생들은 어떤가요? 중국의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쳐봤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세계 어느 나라의 대학이나 다 비슷해서 열심인 학생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한국 학생들이 보 여주는 예술적인 성과는 믿기 어려울 만큼 프로페셔널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이 최고의 교수 로 선정한 것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기쁜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제가 가진 다른 문화적인 토양과 다른 사고방식이 그들에게 좋은 의미에 서 자극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교수를 정말 존중 해 줍니다. 어떨 땐 많이 어려워한다는 생각도 드는데, 전 그걸 깨려고 합 니다. 질문이 없으면 질문을 하라고 다그칩니다. 전 조용한 학생들을 좋 아하지 않아요(미소).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호기심이 많아야죠. 호기심, 특히 예술학도나 과학도라면 마땅히 호기심을 가져야죠. 그것이 다른 스 타일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입니다. 다행히 한국의 학생들은 제 가 창조적으로 다그치는 것을 좋아하고 이에 고무되는 것 같습니다. 전 그들에게 질문에 답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해보라고 말합니다. 답을 하는 건 너무도 쉽죠. 생각하는 것이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이런 제 뜻을 성실 하게 받아들여주는 학생들이 대견해요. 2012 03 vol.61 35
사람과 사람 나의 서울 생활기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발견하셨나요? 여기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면, 검은 사인펜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들 이 제가 여행한 나라와 도시들입니다. 상당히 많죠? 그런데 그중에서 서 울이 가장 큰 도시였어요. 정말 크죠. 그리고 가끔은 정말 정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멋진 곳들이 있죠. 홍대 거리가 있 고, 인사동이 있고, 그리고 특히 삼청동을 정말 좋아해요. 삼청동에 산 지 햇수로 5, 6년이 됐어요. 그 아름다운 골목들을 좋아해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너무 유명해져서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복작대는 것입니 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서울의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오래 보존했으면 하 는 마음입니다. 전통과 현대가 맞물려 있는 도시, 서울을 위한 도시계획 (urban planning)이 필요합니다. 삼청동과 인사동은 세계 어딜 가도 찾 아볼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곳입니다. 고층빌딩을 짓기 위해 오래된 건물을 허무는 건 말도 안돼요! 그리고 최근 인사동이 주말 외에도 평일에도 차량 제한을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아는데 정말 박수쳐 주고 싶습니다. 개인적 욕심으론, 삼청동도 그랬으면 좋겠어요(미소). 한 국엔 정말로 아름다운 동네가 많거든요. 서울에서 제가 산책하길 좋아하 는 최고의 곳은 북촌입니다. 정말로 북촌을 사랑해요. 북촌은 아직 인사 동이나 삼청동만큼 현대성으로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북촌은 거리 구조 상 차 들어갈 데가 없거든요(미소). 북촌이 서울의 도시계획 모델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샌드 애니메이션 공연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가 시간엔 주로 뭘 하세요? 친구들과 술을 마십니다. 한국인들도 술을 좋아하죠? 주로 와인을 마셔 요. 사실 칵테일을 매우 좋아하는데 한국에선 칵테일 바가 그리 많이 없 는 것 같더라고요? 아, 물론 한국의 술도 좋아해요. 한국의 술이라면 종류 를 가리지 않고 다 시도해봤습니다. 동동주나 막걸리는 물론이고요. 그리 고 여행을 좋아하는데, 한국에선 많이 못 해봐서 아쉬워요. 서울 말고도 비엔날레 명예대사를 했었기 때문에 광주에 가봤고, 제주도도 가봤고, 평 양에도 가봤네요. 가끔 제자들과 술을 한잔하실 때도 있나요? 저는 음주와 일은 구분하는 편입니다. 학기 초 교직원들과 일종의 개강 파티를 할 때 한잔할 일은 있어도 학기 중에 제자들과 마시는 일은 없어 요. 제 교육상의 원칙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네, 한국 전통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가운데 샌드 애니메이션 퍼포먼 스를 펼치는 독특한 공연을 했습니다. 세 번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국 음악과 함께하는 경험이 매우 색달랐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관객들은 어 떻게 봤을지는 전혀 모르겠네요. 무대에 서면 퍼포먼스에 집중하느라 다 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그 무대에 선 내가 행복하면 관 객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희망할 뿐입니다. 앞으로 한국엔 얼마나 더 계실 건가요? 모르겠어요. 처음에 왔을 때에도 11년째 체류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으 니까요. 글 최세희 번역가이자 대중음악 칼럼니스트로 문화를 독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진 박정훈 36 문화+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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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서울단상 칼럼니스트 박사의 부암동 생태기 부암동, 서울 속 시골에 자리 잡다 대학로에 살던 시절, 언니네 집에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고 꼬불꼬불한 숲 길을 한참 가야 했다. 오른쪽으로는 담장이 쳐진 숲이, 왼쪽으로는 서울 의 야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올라가서 처음 만나는 마을. 그곳에 언니네 집이 있었다. 놀러 갈 때마다 하룻밤 자고 내려왔다. 내게 언니네 집은 시 골 이었다. 그런 내가 그곳으로 이사했다. 빈집이 잘 나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한 번 이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도통 다른 곳으로 이사 가려 들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살기 불편하다고 털어놓았다. 지하철역에 서 다섯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어 버스를 갈아타야 하고, 습기가 많아 여름 에는 곰팡이꽃이 피기 일쑤고, 겨울에는 겨우 몇 정거장 떨어져 있는 서울 시내보다 훨씬 춥다 했다. 눈이 좀 왔다 싶으면 북악스카이웨이 올라가는 길은 통제되기 십상이다. 가게도 없고 식당도 없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곤 했다. 좀 불편해서, 없는 게 많아서, 그래서 오히려 살기 좋은 동네라고. 평일 낮에는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동네에 주말이 오면 사람들이 물처 럼 흘러 다녔다. 부암동 살아요, 하면 반응은 두 가지였다. 와, 서울에서 제일 핫한 동네에 사시네요. 비싸죠? 아니면 거기가 어디예요?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재미있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동네 이야기를 하면 아, 내가 아는 누구도 거기 살고 있는 데 라는 말이 두 번에 한 번꼴로 돌아왔다. 이 넓지도 않은 동네에 어쩌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까? 사실 객관적으로 많은 사람이 살고 있 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 직장을 다니지 않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이었다. 부암동이 일종의 예술인 마을처럼 소문나게 된 건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서는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렀다. 대학로에 살던 시절과 생활리 듬이 크게 바뀌었다. 더 늦게 일어나고, 밤에 형형하게 깨어 있는 시간이 늘었다. 달라진 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만이 아니었다. 삶의 가치에 대 한 시선도 달라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에서 한 걸음 비켜선 느 38 문화+서울
낌이었다. 한 계절 카페에서 커피 내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다른 동네에 살았다면 대학생들이 하는 일 아니냐며 엄두도 내지 않았으 리라. 날씨가 좋으면 집 앞에 좌판을 펴고 벼룩시장을 열기도 했다. 물건 을 파는 것보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과 수다 떠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관광객 을 대상으로 제법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부암동 주 민이 되었다. 동네의 모든 사람과 깨알같이 인사를 나누고, 동네 소식에 훤하게 된 건 내가 그만큼 마음이 한가로워졌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부암동에 서는 안면만 트면 금세 이웃사촌이 되었다. 내 이웃들은 국을 끓이거나 김치를 담그면 대문 앞에 놓고 갔다. 가게 앞을 지나다가 붙잡혀 들어가 차 한잔을 얻어먹거나 가게 주인이 손수 담근 생강차를 얻어오는 일은 흔 연하다. 새벽이 되면 옆집 닭이 꼬끼오 울고, 여름이 되면 근처 밭에서 수 확한 오이와 상추를 뒷골오이 라는 이름으로 동네 슈퍼에서 팔았다. 피 클 담아 먹기 딱 좋은 작고 고소한 오이다. 서울의 맨 얼굴을 만나다 좋은 길이 많은 동네라는 걸 알게 된 후, 걸어 다니는 일도 늘었다. 밤에도 낮에도 산책하러 신발 꿰차고 나올 일이 잦아지다 보니 길에서 만나는 사 람도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근 10년은 된 듯한 사람을 동네 슈퍼 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이 외진 동네에서 신기하 네, 하며 서로 손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만큼 동네를 돌아 다니는 시간이 많다는 증거겠다. 그러다 보니 얼굴 익힌 사람들뿐 아니라 얼굴 익힌 개와 고양이들도 늘었다. 손가락만한 소시지라도 주머니에 슬 며시 챙기게 되는 건, 날 보면 반가워하는 개와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눈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웬만한 불편한 것들에는 익숙해졌고, 그래서인지 부암 동을 시골이라고 여겼던 예전의 기억도 사라졌다. 지하철까지는 멀었지만 서울시내 웬만한 곳은 버스 한 번 타면 갈 수 있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당 은 여전히 많지 않지만 먼 곳에서도 먹으러 오는 맛있는 집은 보석처럼 박 혀 있다. 홍대 앞에서 주로 활동하는 밴드가 동네 카페에 와서 공연을 하기 도 하고, 걸어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재미있는 전시가 열리기도 한다. 부암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자 아버지는 말했다. 너 어릴 때 자주 데 리고 소풍 갔는데, 자두나무가 많았지. 조금만 걸어가면 있는 백사실 계 곡에 갈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린 내 손을 잡고 이곳을 산 책했을 젊은 아버지가 눈에 잡힐 듯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 옛날의 부 암동과 비교해 지금의 부암동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동 네 사람들의 고집 센 기질이 이곳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다른 동네의 물이 이곳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기껏 4 년 남짓 살았을 뿐이지만, 내 변화를 생각하면 후자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 살면서 경복궁역까지 꼬불꼬불한 산길을 걸어 내려갈 일이 많 아졌다. 왼쪽에는 가끔 꽃사슴이 출몰하는 청와대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남산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야경이 펼쳐진다. 언니네 집으로 올 때 는 시골로 들어가는 낯선 길이었던 곳이 이제는 착착착착, 내 발걸음에 호응하는 친숙한 길이 되었다. 나는 서울의 중심지에 살고 있지만, 사람 들에게 이곳은 여전히 시골이다. 글 박사 글 쓰는 사람.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여행자의 로망 백서> <나의 빈칸 책>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비포컵라이즈, 뉴욕> <빈칸책 소년+소녀> <나의 책 빈칸책> 그림 이정현 대학에서 의류학을 공부했고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아날로그와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 중이다. 2012 03 vol.61 39
지금 서울은 이슈 한국 연극 새로움에 눈뜨다 일본 현대 연극 열풍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와 가요가 큰 인기를 끌며 한 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일본 소설 과 희곡을 앞세운 일류( 日 流 ) 가 만만치 않다. 특 히 연극계에서는 히라타 오리자의 과학연극 시리 즈와 미타니 고키의 코미디를 앞세운 일본 작품들 이 평단의 호평과 함께 장기 공연에 따른 상업적 성 공까지 거두고 있다. 지난 한 해만 보더라도 일본 희곡 또는 소설을 무대화한 작품만 30여 편을 헤아 린다. 새로운 작품에 목말라하는 관객들에게 일본 연극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가면서 우리 연극판 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인기가 계속될 전망이다. 일본 연극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연극이 한국과의 교류를 본격화한 것 은 1980년대부터다. 당시 신극에 반기를 들며 1960~70년대 일본 연극계를 강타한 <앙그라(언 더그라운드)> 연극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일본 전통극에서 가져온 신체 움직임을 창조적으로 보여준 스즈키 다다시의 <트로이의 여 인>과 대사 없이 몸짓으로만 드라마를 전하는 오타 쇼고의 침묵극 <물의 정거장>은 한국 연극계에 큰 충격을 줬다. 재일교포 극작가 겸 연출가 쓰카 고헤이(한국명 김봉웅)의 <아타미 살인사건>도 독특한 미학을 선 보였다. 쓰카 고헤이의 과장된 연기스타일과 무대 표현은 당시 한국 연출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 다. 또한 앙그라 연극의 후계자인 재일교포 연출가 김수진이 이끄는 신주쿠양산박의 <천 년의 고독>과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C LG아트센터 제공 <인어 전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두 작품 모두 거칠 지만 생명력 있는 무대로 오랫동안 회자됐다. 한일 연극 교류, 물꼬를 트다 본격적인 일본 연극 열풍의 촉매제가 된 것은 2002년 일본 신국립극장과 한국 예술의전당이 공 동제작한 <강 건너 저편에>부터다. 공동 대본(김 명화, 히라타 오리자)과 공동 연출(이병훈, 히라타 오리자)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기획과 내용 면에서 본격적인 한일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한일연극교 류협의회가 만들어진 것도 이즈음이다. 한편 <강 건너 저편에>선 90년대 거품경제가 꺼 지면서 반작용으로 나온 <조용한 연극>의 기수 히 라타 오리자의 스타일이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국 내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 다. 사실 히라타 오리자는 1990년대에 그의 <서울 시민>과 <도쿄노트>를 서울에서 공연한 적이 있지 만 당시 한국 관객은 일상과 구분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나 구어체 대사로 대표되는 그의 연극관에 시 큰둥했다. 하지만 <강 건너 저편에> 이후 <도쿄노 트>를 번안한 박광정의 <서울노트>, 이윤택의 <서 울시민 1919>, 신용한의 <S고원으로부터> 등이 잇따라 공연되며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후 히라타 오리자가 한국 연극계의 단골로 부상하게 된 것은 성기웅의 공이 크다. 성기웅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과학하는 마음> 시리즈 를 매년 공연하며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인기를 동 시에 얻었다. 대학 부설 실험실 연구원들의 일상을 40 문화+서울
연극 <됴화만발> 2012 03 vol.61 41
지금 서울은 이슈 그린 <과학하는 마음> 시리즈는 작가의 주제를 관 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 회를 사는 개인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 공감을 자아냈다. 또 박근형도 일본을 떠나 해외에서 사는 현대 일본인의 자화상을 그린 히라타 오리자의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출해 주목받았다. 2004년 <조용한 연극> 계열에 속하는 마쓰다 마사타카의 <바다와 양산>(연출 송선호)이 찬사를 받으면서 일본 희곡을 찾는 한국 연출가가 부쩍 많 아졌다. 이후 김동현이 기타무라 소우의 <고래가 사는 어항> <눈 속을 걸어서>를 선보였고, 김광보 가 사카테 요지의 <다락방>과 <블라인드 터치>, 베 스야쿠 미노루의 <조반니> 등을 무대에 올리는 등 여러 연출가가 한동안 일본 희곡에 천착했다. 스페 인 내전을 소재로 한 후쿠다 요시유키의 원작을 뛰 어나게 각색한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연출 손 진책)은 여배우 김성녀의 연기가 어우러진 수작으 로 지금도 해마다 무대에 오르고 있다. 담담한 서정이 불러일으키는 따뜻한 공감 한국 연출가들은 21세기 들어 민주화나 인권 문제 등 거대 담론이 쇠퇴하고 일상으로 관심이 쏠리는 경향과 맞물려 현대인의 삶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일본 희곡의 서정성과 문학성에 공감했다. 박혜선이 연출한 쓰지다 히데오의 <억울한 여자 >나 노다 히데키가 연출은 물론 출연까지 한 <빨간 도깨비>, 마쓰모토 유코가 연출한 정의신의 <20세 기 소년 소녀 창가집> 등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정의신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는 신주쿠양산박을 탈퇴한 이후 앙그라 연극 스타 일에서 벗어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을 내놓기 시 작했다. <겨울 해바라기> <행인두부의 마음> <적도 아래의 맥베스> 등을 올린 그는 2008년 일본 신국 립극장과 한국 예술의전당이 공동제작한 <야끼니 꾸 드래곤>으로 한일 양국의 연극상을 휩쓸었다. 01 02 03 01. 연극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 C 백성희장민호 극장 제공 02.03. 연극 <백년 바람의 동료들> C 두산아트센터 제공 04.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C LG아트센터 제공 04 지난해에도 <야끼니꾸 드래곤> 앙코르 공연 외에 <쥐의 눈물> <겨울 선인장> <아시안 스위트> 등이 잇따라 공연됐다. 재일교포를 포함해 동성애자, 장 애인,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정의신은 동시대 가장 친숙한 일본(어) 극작가의 위상을 확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정치가의 독도 영유권 발언이나 역사 교과 서 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면 일본 문화 거부 운동이 일어나던 과거와 달리 요즘 관객들은 민족적 강박 증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완성도 높은 일본 연극 의 공연은 계속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타니 고키는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 기를 얻은 일본 극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웃음 의 대학>과 <너와 함께라면>은 2008년 연극열전 시리즈 2와 2010년 시리즈 3이 배출한 최고의 히 트작으로 매년 배우를 바꿔가며 롱런하고 있다. 미타니 고키의 작품들의 특징은 따뜻한 소동극 이라는 것이다. 황당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서로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을 배경으로 검열관과 작가가 일주일간 웃음을 놓 고 벌이는 소동을 그린 <웃음의 대학>은 4년도 안 돼 30만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 미타니 고키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이와 유사한 스타일의 소동극도 속속 등장했다. 걸작 멜로드라마를 쓰기 위한 계약연애 소동을 다룬 고카미 쇼지의 <연애희 곡>이나 섹시 아이돌에 열광하는 오타쿠 삼촌팬이 라는 신선한 소재를 그린 고사와 료타의 <기사라기 미키짱>, 여성의 월경과 폐경을 그린 호라이 류타 의 <마호로바> 등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들 코미디는 단순히 대중 영합이라고 비판하 기엔 작품성도 뛰어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극 에 비해 희극을 저평가하는 한국 연극계에선 나오 기 힘든 작품들이다. 한국 연극의 주제의식이 예전 의 거대 담론에서 많이 해방됐다고 하더라도 여전 히 무겁고 관념적인데다 평단의 호평을 받는 연출 가들은 탈드라마와 형식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한 42 문화+서울
국 관객들에겐 재미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연극 계에 부재한 틈, 즉 주제의식이 있으면서도 재미있 는 작품에 대한 관객의 욕구를 채워준 것이 바로 일 본 희곡 아닐까. 웃음, 감동이 있는 일본 소설과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이 한국의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면서 이를 가공해 무대화하는 흐 름도 보인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일본의 전후 <무 뢰파( 無 賴 派 )> 작가인 사카구치 안고의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서>를 토대로 한 조광화의 <됴화만 발>과 국내에 드라마로 잘 알려진 노자와 히사시의 동명소설을 무대로 옮긴 <연애시대>가 화제를 모 았다. 또 재일교포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의 저명한 나오키문학상을 수상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한 <꽃>, 일본 문학계의 거장인 엔도 슈사쿠의 종교소설 <침묵> 등도 연극으로 만들어 졌다. 이어 올해 들어 드라마로도 유명한 아베 야로 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독회를 가진 뒤 제작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작품들은 한국 관객 의 정서에 파고들며 일본 연극의 수요를 지속적으 로 끌어올리고 있다. 한국 연극계에 부재한 틈, 즉 주제의식이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작품에 대한 관객의 욕구를 채워준 것이 바로 일본 희곡 아닐까. 한편 한일 교류 차원의 일본 연극 공연이나 합작 공연도 최근 스펙트럼이 더욱 넓어졌다. 지난해 앙 그라 연극의 일원이었다가 70년대 중반부터 스펙 터클한 상업 연극의 일인자가 된 니나가와 유키오 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2000년대 경제불 황으로 꿈과 희망을 잃은 일본 젊은 세대를 대변하 는 <제로세대>, 오카다 도시키의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가 대표적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연출가로 해외에서도 잘 알려 진 니나가와 유키오는 그동안 국내에서도 익히 명 성이 알려져 있었으나 제작비 등 경제적 여건 때문 에 오랫동안 내한 공연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에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특유의 화려한 비주얼이 돋보이는 작품을 보여주며 일본 연극에 히라타 오리자로 대표되는 소극장 연극 외에 상업 적이고 스펙터클한 작품이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 워줬다. 또한 오카다 도시키는 요즘 젊은 세대의 일 상 언어를 희곡에 도입하는 한편 독특한 신체성을 보여주며 최근 일본 연극의 최전선을 보여줬다. 한일 합작 연극도 눈에 띈다. 2009년부터 오타 쇼고의 <정거장 시리즈>를 무대에 올리고 있는 여 성 연출가 김아라는 지난해 <바람의 정거장>에 백 성희, 시나가와 도루 등 한국과 일본 배우의 중견 배우들 출연시켜 한일 양국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 을 선보였다. 또 제로 세대에 속하는 다다 준노스케 가 성기웅의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함께 만든 <재/생>은 사실주의적 표현과 신체언어 공연의 경 계에서 내러티브를 실험하며 한일 연극 교류의 새 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연극 <벽 속의 요정> C PMC 프러덕션 제공 글 장지영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동대학원(미술사)을 졸업했고,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9월부터 1년간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하고 심기일전해서 돌아왔다. 천성이 게을러서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은 싫어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한다. 약간의 공연 중독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2012 03 vol.61 43
지금 서울은 이슈 축제나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마냥 설렘과 환희로 다가오던 것도 다 옛말이다. 민선자치제 실시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여전히 그 수를 늘려가는 데에만 여념 없어 뵈는 수많은 지역축제 로 인해 축제의 본래 의미마저 퇴색한 만큼 페스티 벌은 우리에게 일상화 된 지 오래다. 일상 밖에 있 어야 할 축제가 오히려 일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 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계절 고유의 매력도 한풀 꺾인 것 같다는 비관이 유효한 오늘날에도 긴 겨울 을 보내고 맞는 봄만큼은 여전히 봄 특유의 생명력 으로 넘실대기 마련. 마찬가지로 온갖 난립하는 축 제 가운데서도 새롭고 특별한 문화를 얹어냄으로 봄의 文 化 제전 각양각색 봄 페스티벌 써, 보고 듣고 즐기고 느끼는 페스티벌 고유의 의미 로 가득 채운 봄 페스티벌 은 겨우내 언 땅을 비집 고 나온 새싹만큼이나 축제 본연의 설렘과 낭만에 밀착해 있다. 실제로 봄을 시점 삼아, 서울을 기점으로 열리는 갖가지 봄 페스티벌은 수확의 계절이자 축제의 계 절인 가을 못지않은 특별함을 과시한다. 영화와 음 악, 미술에 이르는 다채로운 영역도 영역이지만 독 특한 콘셉트를 표방하며 보다 미시적인 영지에 움 튼 각양각색 페스티벌은 일상화된 축제의 의미에 반기를 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밖으로 나간 클래식, 한데 뭉친 인디음악 서울 곳곳에서 열릴 클래식 음악의 향연인 서 울스프링실내악축제(Seoul Spring Festival of chamber music, 이하 SSF)는 완연한 봄의 정취 를 느낄 수 있는 도심 속 클래식 음악제를 표방하는 페스티벌이다.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2006년 처 음 시작된 이래 매해 분명한 주제를 두고 공연을 이 어온 SSF가 올해에는 4월 30일부터 5월 13일까 지 2주간에 걸쳐 열린다. 2012년 SSF가 선택한 주 제는 바이올린. 2011년에는 건반 소리 향기에 취하 위 2011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폐막 프로그램 <열정>. 아래 2011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음악, 무용 그리고 피아니스트들>. 다 Pianissimo! 라는 테마 아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 공연을 펼친 데에 이어 올해는 Mystical 44 문화+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