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7일 발행 통권 제112호 112 발행인:李圭衡/편집인:金尙勳/주간:金泰詢/발행처:社)退溪學釜山硏究院 (우614-743) 釜山市釜山鎭區田浦洞608-1 819-8587/F.817-4013 <卷頭辭> 出處가 분명한 공직사회 인간이 가지는 인성은 그 특성이 다양하여 일률적으로 판단 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과 측면에서 논하느냐에 따라서 출처의 관점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공직자의 윤리성을 우선시하여 사적 인 위치보다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인사청문회 를 통하여 고위공직자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한 상 규 (동주대 교수, 교육사상사) 있다. 공직자의 윤리를 강조한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은 교육적 인간상을 선비 론에서 밝히면서 실학적 관점에서 도덕적 인간으로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도덕적 인간이란 인간사회에서 상호보완적 인 관계로 인식하여 삶의 의미를 우주적 공동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의 임무를 올바로 파악하 고 실천하여, 타 존재를 인정하고 도움을 주고 봉사하는 것으로 보람을 찾는 공직자를 의미 한다. 연암은 이런 사람을 선비로 규정하고 그 임무를 사람, 사물에 관한 이법을 갖추고 향상 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법은 법성현(法聖賢)에 두고서 성현을 본받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성현이 남긴 법도를 통해서 내면 정신세계로 들어가 통찰할 수 있어야 한 다는 말이다. 연암은 성현의 법을 따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 형식을 배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정신과 내용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두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단순히 성현의 법이 지시하는 바대로 따르고 행하기만을 배우는 것을 형식을 배우는 것 이라고 한다면, 그 법이 왜 어떠한 근거에서 타당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의 전체 적인 국면 속에서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하며 어떠한 의의를 지닌 것인가를 밝혀내게 될 때 정신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은 이처럼 성현의 법 뒤에 숨어있는 성현의 정신을 통찰해내야만 성현과 같이 도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말은 성현 에 대한 정신적 통찰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선비라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연암의 선비관을 통해서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자기 초월적 도덕성으로 자기중심적 사고를 탈피하여 공동체적 존재를 인식하는 일이다.
112호 _2 그 길은 첫째, 정도에 의한 비판정신을 갖추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사림 선비는 王命 보다는 君子의 道를 실천하여 국정의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였다. 유교사회에서 왕명을 거절 할 수 있는 길은 학문적 바탕을 근거로 명분론이 있어야 했다. 이 명분론은 출처와 직 접 연결되어 상소문으로 자신의 國政 철학을 제안함과 동시에 출처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표 하였다. 당시 사림을 대표하는 남명 조식은 다섯 차례 관직을 받고서 거절하는 상소문을 올 렸고, 퇴계 이황은 44회 상소문에서 36회가 관직을 거절하는 내용을 올렸다. 퇴계 자신은 관 직에 나가게 된 것을 부모 봉양 혹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마음은 늘 향리에 있 었다. 퇴계가 처음 관직에 나갈 때 어머니 박씨가 너는 관직에 나가더라도 결코 높은 곳에 나가지 마라 세상 사람이 너의 뜻을 용납 못할까 걱정이다. 라고 훈도한 가르침을 받아들였 기 때문이기도 한다. 율곡 이이는 52회의 상소문에서 24회가 관직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 들의 이 같은 출처의 입장은 조정 대신을 비룻한 왕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사림의 언론을 존 중하게 되었다. 무릇 관직에 나아가는 공직자라면 출처에 분명해야 한다. 남명은 고금의 인물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 출처를 알아 본 이후에 그 행사의 득실을 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모든 정부 부처의 공직자가 출처가 불분명하고 권세와 허명과 이득을 좇아 국정을 문란케 하고 있어 옛 선비의 출처가 그리워진다. 얼마 전 총선에서 자격 미달자들이 저마다 국회의원이 되려고 기를 쓰고 매달리는 세태를 보고 국민은 실망하였다. 選良을 뽑는 선거는 이미 옛 말이 되어 버렸으니 한탄스럽다. 국가관의 정체성도 변질되고 국민을 기만하 고 우롱하는 입후보자들이 만연하니 어찌 제 정신 갖고 투표장으로 가겠는가. 고위 공직에 줄을 대어 장차관을 지낸 인사가 법을 어겨 법정 구속을 받는 세태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민주주의 국가는 선거로 말하고 언론으로 정당한 여론을 일깨워 준다. 공직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출처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올바른 정의사회가 이루어진다. 그 공부를 공직자가 되려 는 사람이나 공직자는 연암이 말하는 선비정신의 높은 도덕의식과 퇴계를 비롯한 고인의 출 처관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차례 <題字 : 鶴陰 李 燮> <卷頭辭> 出處가 분명한 공직사회 韓相奎 (01) 子孫들과 함께(13) 編輯室 (24) 退溪先生 言行錄 門人錄 編輯室 (03) <連載> 三國史記 所載 인물 엿보기(10) 兪英玉 (25) 胡亂과 三田渡의 恨 金隆燾 (05) 第27次 先蹟巡禮記 李道羲 (29) 金正基 (08) 咸陽 上林숲의 歷史的 意義 (上) <이런 詩> 登佛國寺吟 編輯室 (32) <國學講演> 退溪의 爲己之學과 先進化 방도 趙甲濟 (16) <詩苑> 균열, 초설(初雪), 휴전선 李鎬雨 外 (33) <問 辨> 拾級聚足의 의미는 趙昌奎 (19) <漢文文法(19)> 若 의 用法에 대하여 趙柄悟 (34) 古典의 숲을 거닐며 (2) 宥坐之器 許宗烈 (20) 硏究院 消息 (35) <連載> 退溪 山水詩 감상(9) 孫五圭 (22) 編輯長의 辯 (詢)(36)
112호 _3 退溪先生 言行錄 이와 기를 논함 (論理氣) 선생이 주자서(朱子書) 를 인용하여 덕홍 에게 가르치기를, 어야 하고 신하는 공경하여야 하며 아비는 사 랑하여야 하고 자식은 효도하여야 한다. 이것 이 이(理)이다. 임금이면서 어질지 않고 신하 마음(心)은 비록 몸을 주재하지만, 그 본체 이면서 공경하지 않으며 아비이면서 사랑하지 의 허령(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理)를 총괄 않고 자식이면서 효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 하며, <이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말이 다.> 이(理)는 비록 사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작용의 미묘함이란 실은 사람의 마음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물로부터 시작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내외(內外)와 정조(精粗)로 써 논할 수 없다 고 한 말의 주(註)에, 이(理) 는 비록 사물에 있지만 그 작용은 사실 마음 (理)가 아니다. 천하에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 이 이(理)이고 당연히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 비리(非理)이다. 이런 방식으로 추리해 나가면 이(理)의 실체를 알 수 있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사물에는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지만, 이 에 있는 것이다 했는데, 이(理)를 탐구하는 (理)에는 대소(大小)라는 개념이 없다. 아무리 자는 먼저 이것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밖으로 나가 보아도 그 바깥이 없는 것(無外)이 알아야 한다. 하였다. 이(理)이고 아무리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그 - 이덕홍(李德弘) - 안이 없는 것(無內)이 이(理)이다. 방향도 없고 先生引朱子書 敎德弘曰 心雖主乎一身 其體 장소도 없고 형체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충족 之식靈 足以管乎天下之理 [此自人而言] 理雖散 하여, 거기마다 하나씩 태극을 갖추고 있어서 在事物 其用之微妙 實不外一人之心 [此自物言] 남거나 모자라는 일을 볼 수 없다. 하였다. 初不可以內外精粗의註 理雖在物 而用實在心 - 김성일(金誠一) - 窮理者 須先知此義之如何 [李德弘] 問 理字之義 先生曰 若從先儒造舟行水造車行 이(理)자의 뜻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말 씀하기를, 陸之說 仔細思量 則餘皆可推也 夫舟當行水 車 當行陸 此 理也 舟而行陸 車而行水 則非其理 만약 선유(先儒)의 배를 만들어 물 위를 也 君當仁 臣當敬 父當慈 子當孝 此 理也 君 다니고 수레를 만들어 땅 위를 다닌다 는 말을 而不仁 臣而不敬 父而不慈 子而不孝 則非其理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나머지는 모두 추리할 也 凡天下所當行者 理也 所不當行者 非理也 수 있을 것이다. 배는 당연히 물 위를 가야하 以此而推之 則理之實處 可知也 又曰 事有大小 며 수레는 당연히 땅 위를 가야 한다. 이것이 而理無大小 放之 無外者 此 理也 斂之 無內者 이(理)이다. 亦此 理也 無方所無形體 隨處充足 各具一極 배이면서 땅 위를 가고 수레이면서 물 위를 간다면 그것은 이(理)가 아니다. 임금은 어질 未見有欠剩處 [金誠一]
112호 _4 退 溪 門 人 錄 南 嶽 金 復 一 中 宗 36 年 辛 丑 (1541년) 臨 河 縣 川 前 에서 靑 溪 公 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한 公 의 字 는 李 純 이고 號 는 南 嶽 이며 復 一 은 이름이다. 어릴적부터 공부에 열중하여 文 章 이 뛰어났 고 19세 때부터 退 溪 先 生 門 下 에 들어가 수학 하면서 朱 子 書 節 要 와 大 學 衍 義, 心 經, 近 思 錄 등을 탐독하여 학문의 경지를 넓혔다. 24세 때인 明 宗 19 年 (1564년)에 雲 巖 鶴 峯 등 두형과 함께 司 馬 兩 試 에 합격한 후 30세 때인 宣 祖 三 年 (1570년) 文 科 에 급제함으로써 退 溪 門 下 에서 수학한 다섯형제중 藥 峯 과 鶴 峯 에 이어 세번째로 文 科 에 급제하는 영광을 차 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채 고향에 머물 러 있다가 宣 祖 8 年 成 均 館 學 諭 에 등용되면 서 환로에 나가게 되었으며 學 正 을 거쳐 선조 12년 成 均 館 博 士 가 되었다가 곧 典 籍 에 올랐 고 그 다음해 庚 辰 (1580년)에 刑 曹 佐 郞 이 되 었으나 부친 靑 溪 公 이 서거하자 관직에서 물 러나 三 年 喪 5를 치루게 되었다. 그후 工 曹 와 戶 曹 의 佐 郞 벼슬이 주어졌으 나 부임하지 않았다가 成 均 館 典 籍 에 기용되 자 다시 관직을 맡게 되었으며 함경도 都 事 를 거쳐 선조 16년(1583년) 戶 曹 正 郞 에 임용되어 경기도 災 傷 敬 差 官 을 겸임 하였다가 전라도 御 使 로 발탁되어 호남지방이 탐관오리를 숙청 하는데 공헌했다. 선조 17년(1584년) 刑 曹 正 郞 을 잠시 거쳐 강원도 都 事 로 전임되었으며 이때 강원도 관 찰사 栢 谷 鄭 崑 壽 가 도산서당의 동문인지라 중요 政 事 에 관한 의논의 상대가 되었다. 그러나 宣 祖 20 年 (1587년) 蔚 山 郡 守 로 전임 됨에 따라 경상도 지방으로 이거하게 되었고 蔚 山 에서 쌓은 治 續 이 높이 평가되어 昌 原 府 使 로 승진하였다. 신임지인 昌 原 府 는 통제부와 監 營 이 가까운 곳이라 南 嶽 은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민폐를 근절시키는데 앞장섰으며 이에 자극을 받은 監 司 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부사직에서 파 직되었다가 그해 가을 慶 州 敎 授 란 지체가 낮 은 교직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불평없이 부임 하여 후진들에게 經 學 을 가르치고 道 義 를 권 장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다. 3년 뒤인 선조 23년 庚 寅 (1590년) 丹 陽 郡 守 에 임명되었으나 身 病 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가 다음해 成 均 館 司 藝 와 司 成 에 임용 되어 부임하였다. 이때 宣 祖 임금의 은전으로 文 獻 備 考 와 大 明 一 統 志, 宋 鑑, 性 理 大 全 등 서책을 하사 받 았다고 景 泗 流 芳 에 기록되어 있다. 뒤이어 豊 基 郡 守 에 임용되었다가 宣 祖 24 年 辛 卯 (1591년) 8월에 신병으로 귀향중 우거지 인 醴 泉 에서 서거하니 향년이 51세였다. 中 年 에 臨 河 本 鄕 에서 예천 金 谷 으로 이거 하여 德 進 洞 에 서당을 지어 講 學 하다가 뒤에 鼎 山 으로 옮겨 書 院 을 창건하여 교학을 진흥 시킨 그의 學 行 은 退 溪 先 生 의 神 位 를 봉안하 기 위해 盧 江 書 院 을 건립할 때 士 林 의 衆 論 으 로 賜 額 을 청하는 呈 文 을 南 嶽 이 쓰도록 추천 하리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遺 文 의 대부분은 壬 辰 兵 火 에 소실되고 일부 詩 文 만이 聯 芳 世 稿 에 실려 있으며 사후 안동 泗 濱 書 院 과 예천 鳳 山 書 院 에 제향되었다.
112호 _5 <國學講演會 要旨> 胡亂과 三田渡의 恨 - 부끄러운 과거도 外面 말아야 - 金 隆 燾 (회원, 전 동여자중 교장) 여진족 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女眞族)인 누루하치(奴兒哈赤) 蒙古)로 진출하여 제부족을 복속시켜 만주의 만주지방의 제부족(諸部族)을 통합하여 나라를 넘어 북경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세워서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태조(太 위세가 매우 강해져서 조선에 대해서도 압박 祖)가 되어 천명(天命)이라 건원(建元)하였다. 이 날로 더해졌다. 전역을 거의 차지하고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후금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서 종주국(宗主 인조 10년(壬申年, 1632년)에 후금이 조선 國)으로 섬기던 명(明)나라에 바치던 공물(貢 에 사신을 보내어 형제지맹의 대등한 관계에 物)을 폐지하고 매사에 항거하다가 정명(征明) 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고 칭신(稱臣)할 의 군사를 일으켜 승승장구(乘勝長驅)로 서진 것을 강요하고 세폐(歲幣)를 크게 늘려서 보낼 하여 심양(瀋陽)을 함락하고 요양(遼陽)을 공 것을 요구할 뿐더러 명나라를 칠 터이니 군사 격하여 명나라 본토진출의 첫걸음을 밟게 되 를 내어달라는 등 모욕적이고 무례한 요구가 었다. 도를 넘쳤다. 이에 조선에서는 강화론(講和論)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심양에 천도 도 있었으나 척화배금론(斥和排金論)이 거세게 (遷都)하고는 조선이 明과 가까이 하면서 후금 일어나서 국론이 선전불가피론(宣戰不可避論) 에 대해서는 사절(使節)의 왕래조차 하지 않고 에 이르렀다. 이에 맞서 후금은 2차로 조선침 소홀하니 조선을 정벌하여 명의 본토공략에 공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후환을 없애고 통교(通交)로서 이득을 얻고자 인조 14(1636) 병자년에 후금의 태종은 제 인조 5년(1627) 정묘년(丁卯年)에 병(兵) 3만 위에 올라 국호를 청(淸)이라 개칭하고 연호를 으로서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평산(平山) 부 숭덕(崇德)이라 개원하여 그 위세가 더욱 강자 근까지 진출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다급하여 (强恣)해져서 청태종은 조선 공략의 친정계획 강화도(江華島)로 난을 피하였다가 그해 3월 을 세워서 그해 12월 1일에 심양에 10만 대 에 화약(和約)이 이루어져 형제지국(兄弟之國) 군을 모아 친히 이끌고 나서서 압록강을 건너 으로 함과 국경에 시장을 여는 등의 조약을 쳐들어왔다. 맺고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서 물러갔다. 이 난 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조선 침공(侵攻)에 성공한 후금은 내몽고(內 이때 의주(義州)에는 임경업(林慶業)이 부윤 으로서 성을 굳게 지키고 있음을 알고서는 청 군은 의주를 피하여 주야로 급행하여 심양을
112호 _6 떠난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개성유수( 開 城 留 守 )가 청군이 이 미 개성을 통과하였다 는 치계( 馳 啓 )를 받고서 야 사세가 다급하여 강화유수( 江 華 留 守 ) 장신 ( 張 紳 )으로 주사( 舟 師 ) 대장을 겸하게 하여 강 화를 수비케 하는 한편 원임대신( 原 任 大 臣 ) 윤 방( 尹 昉 )과 김상용( 金 尙 容 )을 시켜서 묘사( 廟 社 )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비 강씨와 세손, 왕 자인 봉림대군( 鳳 林 大 君 )과 인평대군( 麟 坪 大 君 )을 배호하여 강화도로 피병( 避 兵 )케 하였 다. 또한 심기원( 沈 器 遠 )을 유도( 留 都 )대장으로 삼아 도성( 都 城 )을 수비케 하였으며 인조 임금 께서도 그날 밤에 강화도로 떠나려고 남대문 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통로를 끊어놓은 뒤라 부득이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 ( 南 漢 山 城 )으로 들어가서 훈련대장 신경신( 申 景 愼 )에게 성중의 군사 1만 3천으로서 성첩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때 성 안에는 양곡과 염 장이 겨우 50일을 견딜만한 분량이 있었다. 인조께서는 명나라에 급고하여 내원( 來 援 )을 요청하고 국내에는 도원수와 부원수,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근왕병( 勤 王 兵 )을 모으도록 하였다. 청군의 선봉은 12월 16일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서울에 입성하고서는 그 길로 한강을 건 너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청태종은 익년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 炭 川 )에 20만 대 군을 결진하고 성( 城 )동쪽의 망월봉( 望 月 峯 )에 올라 성중을 굽어보았다. 그때의 명나라 사정은 조선을 구원할 힘이 없었고 각처에서 올라오 던 감사와 병사의 근왕군도 도중에서 패하여 괴멸하거나 해산되어 버렸고 의병의 봉기도 있었으나 힘을 얻지 못하였다. 남한산성은 내 외가 격절되어 의지할 곳이 없는데다가 한 두 번 도전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 였고 40여일간 중위( 重 圍 )를 당하다 보니 양 식과 물자가 바닥나서 기아( 饑 餓 )와 혹한에 버 티는 그 참상은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신들 사이에서는 강 화론( 媾 和 論 )이 일어나서 이를 찬성하는 수가 늘어나게 되어 반대파와의 논쟁을 거듭하였던 바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니 예조판서 김상헌( 金 尙 憲 )과 이조참판 정온( 鄭 蘊 )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 화 쪽으로 기울어져 인조께서는 사신을 청영 에 보내어 화호( 和 好 )를 청했으나 청태종의 답 은 인조가 친히 성을 나와서 항복하라 는 것 이었다. 한편 강화도에서는 청군이 소선( 小 船 ) 80여 척을 마련하여 일시에 도성( 島 城 )을 급습하니 조선의 수비군은 지리적 호조건을 믿고 방비 에 허술했다가 일시에 쇄도하는 청병과 싸울 겨를도 없이 무너져서 정월 22일에 함락되니 유수 장신 등은 몰래 작은 배로 도망하고 김 상용( 金 尙 容 )과 이상길( 李 相 吉 )은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으며 피병한 빈궁과 세손 이하 200여명이 청군에게 잡히어 남한산성 아래로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도 청병의 학살과 음학 ( 淫 虐 )이 극심하여 부녀자의 순절도 많았다. 이러한 강화도의 참담한 소식이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성중은 더욱 혼란해지고 이제 더 견 딜힘이 없으니 국왕께서도 출성 항복을 결정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조 15년( 丁 丑 年, 1637년) 정월 30일 전쟁이 일어난지 두달만 에 인조께서는 세자와 함께 청의 강요대로 남 색 융복( 戎 服 )을 입고 성문을 나서 얼어붙은 돌계단을 말 한필 없이 엎어지고 미끌어지면 서 기다시피 내려가니 지켜보던 신하들과 백 성들의 통곡소리는 하늘과 땅에 사무쳤는데 한강( 漢 江 ) 동안( 東 岸 )의 삼전도( 三 田 渡 )에서
112호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행하였다. _7 竣이 해서(楷書)로 썼으며 몽골문, 만주문, 한 이곳에 청태종은 9층의 수항단(受降檀)을 문의 3종류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사적 제 세우고 단상에 앉아 남면(南面)하고 황막(黃 101호(1963.1.21지정)이다. 淸에서 비문을 요 幕)과 황산(黃傘)을 세웠으며 조선왕 인조는 청하자 仁祖는 張維와 趙希逸에게 명하여 지어 북면하여 땅바닥에 꿇어앉아 삼배구고두(三拜 올렸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호통과 독촉이 九叩頭. (세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번 조아림)의 심하므로 인조는 이경석을 면대하여 비문을 예를 행한 후에 한강 짓게 명하고 저들의 을 건너 서울로 돌아 비위를 왔다. 청은 조선의 굴 행여 격노하게 해서 욕적인 약조를 받고 는 안된다 고 당부했 세자와 빈궁과 봉림대 다. 척화파인 白軒은 군을 볼모로 데려가고 文字 배운 것을 후회 척화론의 주창자인pp 했으며 淸의 강요로 오달제(吳達濟), 윤집 백마산성에 위리안치 (尹集), 홍익한(洪翼漢) 되기까지 했다. 白軒 의 삼학사를 잡아가서 선생의 한(恨)도 산하 죽였다. 이 난을 인조 에 메아리쳤으리라. 맞추어야지 병자년에 일어난 난이 그래서 치욕의 비는 니 병자호란(丙子胡亂) 한때 매몰되기도 하 이라 하였고 우리 역 고 민족의 수치라고 사상 처음으로 외적에 넘어뜨린 적도 있으 게 항복한 크나큰 굴 욕으로 朝鮮의 恨, 수 나 다시 세워져 사적 <三田渡碑> 탈당한 백성의 恨, 환향녀의 恨이 되었다. 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는데 이는 잘못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삼전도는 민족사의 오점을 남긴 치욕의 장 부끄러운 과거도 역사의 진실일 바에야 그 소로 그곳에는 청나라의 강압에 의하여 청태 것을 외면한다고, 보기 싫어서 없애버린다고 종이 조선을 항복받은 치욕의 기록인 대청황 사실(史實) 그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 제공덕비 이른바 삼전도욕비 가 仁祖 17년 려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내어 교육의 장 (1639)에 세워졌다. 높이가 3.95미터 폭이 으로 삼아야 한다. 삼전도의 치욕을 외면하여 1.4미터로 거대한 돌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국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정벌하여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니 얼 오늘에 우리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 민족사 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는 것이다. 이 얼마 의 치욕 위에 있음을 일깨우고 호국정신을 길 나 욕된 형적(形迹)인가! 三田渡碑의 碑文은 러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력을 길러 행복한 당시 도승지와 예문관 제학을 겸임한 白軒 李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행할 景奭(1595~1671, 宣祖28~顯宗12)이 짓고 吳 바다.
112호 _8 <特別寄稿> 咸陽 上林숲의 歷史的 意義 (上) 金 正 基 (동아대학교 명예교수, 생명공학) 序 論 上林 숲은 崔致遠이 天嶺(지금의 咸陽)군 太守(894년)때 造成한 우리나라 最古 最大規模의 防風防災 護岸林이며 天然記念物 제154호(1962. 12. 3. 指定)이다. 時務十條 上疏(894년) 직후, 최치원 선생은 天嶺군 太守로 부임했다. 최치원 선생이 904년경 海印寺에 隱遁할 때까지 咸陽太守(894년~898년)로서 善政을 베풀 때 造成한 護岸林(防風林)이 上林 숲 이다. 溫帶南部 落葉闊葉樹林의 性狀을 지닌 學術上 매우 價値 있는 숲이며 落葉闊葉樹林으로서는 유일한 天然記念物이다. 上林과 下林(현재 없음)을 합해서 大館林이라 한다. 洛東江의 支流인 南江, 그 分流인 咸陽의 渭川은 1100년 전, 지금의 함양읍내 한가운데를 관통해 흘렀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농경지의 안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 최치원은 홍수피해를 막는 긴 제방을 쌓고 渭川水 물을 외 각으로 돌리는 한편, 제방을 따라 길게 방풍림을 조성하여 제방이 허물어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것이 지금의 상림 숲이다. 상림 숲 한가운데에는 길게 남북으로 폭 2-4m의 좁은 실개천이 흐 르고 있다. 이는 상림 숲에 水分을 대기 위한 것으로서 이 실개천 덕에 아무리 가뭄이 심한 해라 도 상림 숲의 樹木이 말라죽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지금 이 실개천은 구름다리(금 호미 다리)와 징검다리를 이용해 건너다닐 수 있다. 최치원의 治績 중에서 상림 숲은 함양을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곳이다. 풍치가 아름답고 지 방민의 휴식처로 알맞은 곳이며 최치원이 손수 智異山과 白雲山에서 많은 樹種의 闊葉樹를 캐어 다가 風水害를 막기 위한 방패와 방풍림으로 조성하였다고 하는 이 상림 숲은, 면적이 5만여 평 이나 되며, 서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당단풍나무, 생강나무, 나도밤나무, 쪽동백나무 등 114종 20,000여 그루의 樹木들 가운데는 200년 된 것도 있다. 상림 숲은 口傳說話도 많은 곳이다. 우리 속담에 咸陽山淸이다. 라는 말이 있다. 咸陽山淸은 高山峻嶺이 櫛比한 奧地에 있기 때문 이다. 이렇기 때문에 新羅時代에는 咸陽을 天嶺이라 했으며 後百濟와의 國境地帶였었다. 古代로 부터 萬百姓을 安住시켜주었던 民族의 山 智異山에 가장 隣接한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燕岩 朴址源의 學士樓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12호 _9 함양은 신라시대의 천령군으로 문창후 최치원(자는 孤雲)이 일찍이 천령 태수가 되어 이 누를 지은 지 벌써 천년이 흘렀는데 이곳 백성들이 후(侯)의 유혜(油鞋 진신)를 그리어 지금까지 學士樓 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후의 유적에 의해 일컬어진 것이다. 옛 고을 함양 백성들은 이같이 고운 최치원 선생하면 그의 인품을 신격화할 정도로 尊敬의 念을 갖고 있었다. 40여 년 전(1964) 筆者가 咸陽農業高等學校 校監으로 있을 때, 군민들의 欽慕를 받고 있던 崔 致遠太守 이야기가 새롭기만 했다. 또 文昌侯崔先生神道碑(상림 숲)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선생은 類說經學을 저술하여 道德 仁義 등 148條를 논하고, 일찍이 함양에 莅任(리임 부임)하여 벌을 주지 않아도 교화가 가능했으며 군에 학사루 를 세웠고, 손수 긴 언덕에 나무를 심었는데 선생이 가신 후 함양인사들이 召伯(周의 召公)의 甘棠 召公 이 일찍이 아가위(팥배)나무를 심어 文王을 그곳에서 쉬게 했다는 고사 처럼 사랑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후 함양군에서는 많은 賢人이 배출되 었으니 어찌 선생이 끼친 어진 풍속의 교화가 百世까지 남아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렇다. 여기 말하는 것은 上林 숲의 後光을 설명하고 있 다. 예부터 治山治水가 행정의 으뜸이라 하였다. 산을 가꾸고 물 을 다스리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이다. 국사책에는 최치원은 나라가 어지러워 해인사 계곡으로 은둔 했다. 는 요지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최치원은 사회에 불만을 품어서--- 라고 답하는 고교학생(高校學生)도 있었다. 筆者가 參考한 著名敎授들의 20篇 가까운 文獻들에도, 예컨대 咸陽 上林 숲 造成이 최치원의 思考轉換에 미친 영향에 관한 <上林숲의 崔孤雲 像> 硏究 와 같이 上林 숲 을 거론한 論文들은 없었다. 이러한 提言을 전제로 하여 咸陽 上林 숲의 歷史的 意義 를 서술하려한다. 問題의 提起 및 假說 設定 孤雲 崔致遠은 왜 隱遁했을까? 1) 人百己千의 각오로 12세 때 唐나라에 유학한 엘리트 학자 최치원에 대한 國內派 小人들의 嫉視였을까? 그리고 2) 최고운의 經學理念이 末期新羅社會의 佛敎理念에 맞지 않았을까? 3) 그래서 최치원은 隱遁했을까? 唐나라의 그 어려운 벼슬도 버리고 꺼져가는 祖國 新羅에 愛國하겠다고 早期歸國했는데도. 그리고 新羅의 國運은 아직도 40年이나 더 남아있었는데도 왜 서둘러 隱遁의 길을 決行했을까. 孤雲 崔致遠 硏究를 하면할수록 더욱더
112호 _10 그 까닭이 疑問으로 남았었다. 著名敎授들의 文獻들에도 上林 숲 을 거론한 論文들은 없었다. 하지만 筆者는 달랐다. 최치원의 行狀을 시기별로 분석해보면, 상림 숲 은 분명 孤雲에게는 思考 의 일대 轉換點이 된 契機가 되었다고 思料되었다. 孤雲 崔致遠은 왜 隱遁했을까? 라는 問題提起에서 崔孤雲은 隱遁한 것이 아닐 것이다. 라는 假說을 設定하여 上記論題 咸陽 上林 숲의 歷史的 意義 를 考察하였다. 文獻硏究 四山碑銘 王命에 의해 최치원이 撰했으며, 雙磎寺 碑文은 撰竝書도 했다. 智異山(경남 하동), 崇巖山(충남 보령), 曦陽山(경북 문경), 初月山(경북 경주) 등 四山에 있는 碑銘이니 四山碑銘이라 한다. 眞鑑禪師碑銘 : 智異山 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銘 (국보제47호. 887년), 無染和尙碑銘 : 崇巖山 聖住寺 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국보제8호. 890년), 智證和尙碑銘 : 曦陽山 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碑銘 (국보 제315호. 924년), 大崇福寺碑銘 : 初月山 大崇福寺碑銘 (886년)이라 한다. <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명 (국보 제47호) 비문서두사본 > <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명 (국보 제47호) 전액사본 > 四山碑銘은 한 자도 來歷 없는 것이 없고, 글이 막힘없이 확 트이고 뜻이 온전하여 참으로 海 東碑文의 祖宗이요, 禪宗의 歷史이다. 四山碑銘에서 최치원의 東方思想 즉 東方의 君子國, 빛나는 新羅 등의 용어를 여러 곳에서 강 조하여 仁者의 나라 新羅人의 自負心과 愛國心을 나타내었고, 또한 三敎를 통합하여 崔致遠 思想 ㆍ風流道에 포함시키는 論說도 전개하였다. 고 여러 論者들이 지적하고 있다. 鸞朗碑序 鸞郞碑序 斷片 76字의 意義와 文章은 金戊祚1) 교수의 論旨처럼 檀君思想을 정립한 劃期的인 文章이라 하겠고 최치원의 문장 중 으뜸이라 한다.
112호 _11 崔 致 遠 鸞 郞 碑 序 曰 國 有 玄 妙 之 道 曰 風 流 設 敎 之 源 備 詳 仙 史 實 乃 包 含 三 敎 接 化 群 生 且 如 入 則 孝 於 家 出 則 忠 於 國 魯 司 寇 之 旨 也 處 無 爲 之 事 行 不 言 之 敎 周 柱 史 之 宗 也 諸 惡 莫 作 諸 善 奉 行 竺 乾 太 子 之 化 也. 즉,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그것을 일러서 風 流 라고 한다. 이 풍류도 설정의 근본은 仙 史 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제로 이 속에는 三 敎 가 고루 습합되어 있으니, 여러 무리들과 잘 조화가 되어 젊은이를 교화하는데 으뜸이 된다. 말하자면 집안에서는 부모에 효하고, 나아가 나라에는 충 을 하는 이것은 공자{ 孔 子 ( 魯 司 寇. 노나라에서 벼슬을 한 공자)}의 旨 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해서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 老 子 ( 周 柱 史. 노자의 주나라 벼슬)}의 宗 이요, 모든 일에 악을 짓지 않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 釋 迦 牟 尼. 竺 乾 太 子 )의 화( 化 敎 化 )이다. 최경숙 2) 교수는 최치원은 鸞 郞 碑 序 에서, 우리나라는 儒 ㆍ 佛 ㆍ 道 三 敎 를 포함한 현묘한 道 風 流 가 있었으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우수성이 나타나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이 어질 고 유순하여 선을 좋아하며 필연적으로 불교에 감화 귀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성품 때 문만이 아니라 하늘이 마련해 준 것이며, 땅까지도 그렇게 시킨다는 것이다. 라고 논술하고 있다 고 그의 논고 최치원의 역사의식 에서 지적하고 있다. 다음은 崔 致 遠 의 哲 學 思 想 ( 崔 英 成.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2002.)을 참고했다. 최치원이 우리 고유의 사상인 風 流 道 를 花 郞 의 碑 文 ㆍ 鸞 郞 碑 序 에 논한 것은, 風 流 道 가 花 郞 의 實 踐 理 念 으로서 화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三 敎 思 想 에 대한 해박한 知 識 ( 故 事 引 用 등)과 이 해가 풍류도 해석에 토대가 되어 집약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의 이른바 玄 妙 한 風 流 道 를 지 닌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東 人 意 識 으로 표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우리 고유사상인 風 流 道 의 正 體 를 역사상 처음으로 탐구하려 했고, 天 符 經 을 解 文 한 인 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鸞 郞 碑 序 의 全 文 을 살필 수는 없지만 王 命 을 받아 지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桂 苑 筆 耕 集 桂 苑 筆 耕 集 은 현존 最 古 의 文 獻 學 的 가치를 지닌 自 撰 文 集 이며, 孤 雲 이란 字 를 붙이지 않고 다 른 이름을 붙인 現 傳 하는 최초의 文 集 이라고 桂 苑 筆 耕 集 의 文 獻 的 照 明 ( 孤 雲 의 思 想 과 文 學 )에서 } 鐸 一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桂 苑 筆 耕 集 은 崔 孤 雲 이 사용했던 文 體 가 총망라된 문장이다. 총 20권에는 卷 次 별로, 表 (임금에게 올리는 글), 狀 (임금 또는 고관에게 올리는 글), 奏 狀 (임금에게 올리는 글) 등 13 項 의 分 類 目 이 있다. 1) 고운의 사상과 문학(파전한국학당, 김무조 교수, 1997) 2) 최치원의 역사의식 (최경숙, 부산외국어대 교수, 1997)
112호 _12 沈慶昊 高麗大교수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先人들의 自敍傳)에서 桂苑筆耕序에서 饘於是 粥於是(전어시 죽어시), 즉 여기서 된죽도 먹고 여기서 묽은 죽도 먹었습니다. 라고, 임금에게 말한 최치원 在唐 時節의 苦生談을 서술하고 있다. 沈교수는 漢字文化圈 에서 自敍傳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漢나라때 司馬遷의 史記라며, 우리나라는 崔致遠이 처음이라 서술하고 있다. 硏究方法 우리나라 여러 聖賢들 가운데서 내가 가장 欽仰해마지않는 知識人인 孤雲 崔致遠선생, 新羅를 위해 좀더 愛國하지 않고 왜 隱遁했을까? 이 難題 考察을 위한 가장 近接한 論題 咸陽 上林 숲의 歷史的 意義 를 設定하여, 關聯 主要文獻調査와 아울러 現地踏査 및 口傳說話등을 調査하였다. 結 果 서라벌 10년간은 挫折의 시대였지만 咸 陽 上林 숲 (護岸林)造成은 孤雲이 地方行政 官으로서 心血을 기우려 對民奉仕한 崔致遠 의 唯一한 治績으로 남는다. 護岸林의 事後管理 對策(土壤硬度維持를 위한 다양한 樹種植栽, 移植樹木의 灌漑를 위한 실개천 設置 등)마저도 빈틈없이 計劃 한 크나큰 護岸林 공사를 成功裏에 완수한 <上林 숲의 한 모습> 것이다. 함양군민들의 최치원 太守에 대한 信仰에 가까운 絶大尊敬과 信望 그리고 최치원 太守 자신의 隱遁을 앞둔 마지막 對民奉仕意志, 이 兩 理 念이 맞물려 맞아떨어져, 그 어려웠던 咸陽郡民들의 오랜 宿願事業인 上林 숲 (護岸林)이 이룩해 졌던 것이다. 咸陽 上林 숲 은 분명 최치원 生涯의 일대 分水嶺이 된 記念碑的 業績이었다. 咸陽 上林 숲 의 歷史的意義 는 崔致遠太守에게는 실로 크다 할 수 있겠다. 考 察 序論에서 敍述한 提言을 前提로 하여 上林 숲의 歷史的 意義를 敍述해 보고자 한다. 筆者가 참고한 著名敎授들의 文獻들에도, 예컨대 咸陽 上林 숲 造成이 최치원의 思 考轉換에 미친 影響에 관한 硏究 와 같이 上林 숲 을 擧論한 論文들은 없었다. 하지만 筆者는 달랐다. 최치원의 行狀을 時期別로 分析해보면, 上林 숲 은 분명 孤雲에게는 思
112호 _13 考 의 일대 轉 換 點 이 된 契 機 가 되었다고 思 料 되었다. 최치원은 그 어려웠던 唐 나라의 벼슬도 버리고 早 期 歸 國 하여 꺼져가는 祖 國 新 羅 에 愛 國 하려 했 지만, 고비마다 新 羅 社 會 의 엄격한 世 襲 的 인 骨 品 制 度 의 障 壁 에 부닥쳐 아무 일도 못하고 말았다. 서라벌의 10년은 고작해야 단순한 外 交 文 書 의 取 扱 과 王 命 에 의한 碑 文 몇 개를 撰 한 것뿐이었다. 外 交 文 書 만 해도 그렇다. 당시에는 하찮았던 그 外 交 文 書 가 지금에는 比 重 있는 學 術 的 價 値 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많다. 저 유명한 謝 不 許 北 國 居 上 表 와 烏 昭 度 文 件 만해도 그러하다. 金 軾 도 三 國 史 記 에서 擧 論 하지 않았던 渤 海 建 國 史 를 이곳에서 상세하게 敍 述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치원이 撰 한 저 유명한 四 山 碑 銘 역시 모두가 國 寶 級 이다. 雙 磎 寺 의 眞 鑑 禪 師 大 空 塔 碑 는 국보 제47호이며, 聖 住 寺 의 朗 慧 和 尙 白 月 葆 光 塔 碑 은 국보 제8호이다. 鳳 巖 寺 의 智 證 大 師 寂 照 塔 碑 는 국보 제315호이며, 王 命 을 받은 8년 만에 完 成, 孤 雲 은 이를 影 伴 八 冬 이라고 최치원 特 有 의 綺 語 麗 句 로 표현했다. 初 月 山 의 大 崇 福 寺 碑 등, 모두가 國 寶 級 으로 名 文 章 들이며, 海 東 碑 文 의 祖 宗 이요, 禪 宗 의 歷 史 이 며, 또한 三 敎 ( 儒. 佛. 仙 )를 統 合 하여 崔 致 遠 思 想 ( 風 流 道 )에 包 含 시키는 論 說 도 전개하였다. 고 여러 論 者 들이 지적하고 있다. 嫉 視 와 疑 忌 속에서도 上 疏 와 建 議 로서 일관된 서라벌의 10년이었지만, 그 때 남긴 그 謝 不 許 北 國 巨 上 表 와 四 山 碑 銘 등은 1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 眞 價 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서라벌의 10년은 嫉 視 와 疑 忌 ( 疑 心 과 忌 避 )속에서 外 交 文 書 作 成 과 왕명에 의한 撰 碑 文 이 고작 이었다. 그의 政 治 理 念 을 펼쳐보려고 많은 上 疏 文 도 올렸지만 政 治 經 綸 은 펴보지도 못한 채, 마침 내 隱 遁 을 전제한 그리고 嘉 納 되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최후의 上 疏 文 을 올리게 되었다. 그것이 저 유명한 時 務 十 餘 條 이다. 지금은 그 1 條 도 알려져있지 않지만 최치원의 孫 子 崔 承 老 (927-989)가 高 麗 朝 成 宗 (981-997) 에게 올린 時 務 策 28 條 는 祖 父 의 時 務 10 餘 條 를 쏙 빼 옮겨 擴 大 深 化 시켰을 것으로 보이며, 널리 人 才 를 登 用 하는 科 擧 制 度 의 實 施, 有 能 한 平 民 의 登 用 등의 項 目 이 들어있었을 것이라 思 料 된다. 그러나 眞 聖 女 王 (887-897)은 政 丞 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時 務 10 餘 條 는 理 由 있다 하여 嘉 納 은 안 했어도 六 頭 品 에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職 分 인 阿 湌 을 수여하였다. 時 務 十 餘 條 上 疏 후 內 政 改 革 에 힘을 바치려 했으나, 阿 湌 에 임명(38세ㆍ894년)되었어도 骨 品 制 귀족정권의 權 力 核 心 에는 참여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猜 忌 와 疏 外 를 당한 후, 아찬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마침내 邊 方 인 天 嶺 郡 (지금의 咸 陽 ) 太 守 로 쫓겨나고 말았다. 咸 陽 은 또한 后 百 濟 와의 接 境 地 帶 였으니 防 虜 太 監 ( 防 禦 使 )도 겸임했다. 南 北 國 時 代 와 최치원 ( 李 佑 成 ) : 希 朗 ( 王 建 의 福 田 )에게 주는 詩 에서 최치원은 자기를 防 虜 大 監, 天 嶺 郡 太 守, 阿 湌 이라 했음.
112호 _14 그러나 天 嶺 郡 太 守 는 前 任 한 大 山 郡 (전북 泰 仁 ) 太 守, 城 (충남 瑞 山 ) 太 守 와는 格 이 달랐다. 막강한 權 限 과 名 聲 을 지녀 부임하는 최고운 태수에게 기대하는 함양군민들의 尊 敬 과 절대 信 賴 그리고 太 守 자신의 隱 遁 을 앞둔 마지막 對 民 奉 仕 決 意, 이 兩 理 念 이 맞아떨어져 大 護 岸 林 이 완공된 것이다. 서라벌 10년간은 挫 折 의 時 代 였지만 咸 陽 上 林 숲( 護 岸 林 ) 造 成 은 孤 雲 이 地 方 行 政 官 으로서 심 혈을 기우려 對 民 奉 仕 한 최치원의 유일한 治 績 이다. 護 岸 林 의 事 後 管 理 對 策 ( 土 壤 硬 度 維 持 를 위 한 다양한 樹 種 植 栽, 移 植 樹 木 의 灌 漑 를 위한 실개천 설치 등)마저도 빈틈없이 계획한 크나큰 호 안림 공사를 성공리에 완수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漢 江 의 물줄기를 京 畿 道 로 바꾸는 방대한 土 木 工 事 였었다. 전임 太 守 들이 이룩하지 못한 咸 陽 郡 의 宿 願 事 業 인 上 林 숲( 護 岸 林 ) 造 成 을 최치원 太 守 는 어떤 意 志 로, 그리고 咸 陽 郡 民 들은 왜 이때를 護 岸 林 造 成 의 適 期 로 삼았을까? 함양군민들의 民 心 을 鼓 吹 시킨 原 動 力 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時 代 相 을 최치원 태수의 시대별 行 狀 에 맞추어 考 察 해보면 그 解 答 이 導 出 될 것 같다. 최치원 태수는 다른 태수와는 格 이 다른 막강한 권한을 지닌 태수였었다. 지방관으로 나갈 때 는 中 央 官 職 은 박탈하는데도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中 央 官 職 인 阿 湌 을 그대로 유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防 虜 太 監 ( 咸 陽 은 後 百 濟 와의 國 境 地 帶 이니 防 衛 司 令 官 職 )도 겸하게 했다. 그리고 또한 서 라벌 滯 留 10년간의 名 聲 을 익히 듣고 있던 崔 孤 雲 의 名 望, 그것은 마치 君 主 에 버금가는 絶 對 權 威 에 대한 咸 陽 郡 民 들의 尊 敬 과 欽 仰 의 對 象 이었으며, 이것이 곧바로 護 岸 林 造 成 을 위한 郡 民 들 의 大 熱 情 과 總 動 員 으로 直 結 되었다고 본다. 한편 崔 孤 雲 太 守 자신의 決 意 는 어떠했는가. 서라벌의 10년은 嫉 視 와 疑 忌 의 세월이었지만 咸 陽 에서는 知 識 人 太 守 崔 孤 雲 에 대한 尊 敬 과 欽 仰 은 絶 對 的 이었으며 거의 信 仰 에 가까웠다. 咸 陽 太 守 는 隱 遁 을 앞둔 마지막 奉 仕 라는 대목도 곳곳에서 感 知 된다. 첫째는 咸 陽 太 守 부임 직전, 서라벌에서의 時 務 10 餘 條 의 上 疏 였다. 儒 敎 思 想 의 政 治 理 念 가운데 第 一 德 目 이라고 하는 科 擧 制 度 의 實 施 등이 담겨있었을 時 務 10 餘 條 가 新 羅 佛 敎 社 會 에 嘉 納 될 理 가 없었음을 太 守 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리 心 定 해두었던 海 印 寺 溪 谷 으로의 隱 遁 (이 무렵의 隱 遁 은 필히 俗 世 를 떠나 草 野 山 間 에 묻힌다는 決 然 한 意 志 가 담긴 隱 遁 )을 前 提 한 것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母 親 을 모시고 赴 任 한 太 守 였었다. 당시 新 羅 의 外 官 職 은 家 族 을 同 伴 하지 않는 通 3였 는데도 隱 遁 하기전의 마지막 孝 行 길로 삼았다고 思 料 된다. 그러나 咸 陽 에서는 상기와 같이 郡 民 들의 意 思 는 달랐던 것이다. 서라벌에서 隱 遁 한 최치원은 咸 陽 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다시 말해 서라벌에서의 隱 遁 은 政 治 로부터의 隱 遁 이었지 民 間 啓 蒙 과 國 土 사랑마저도 隱 遁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함양군민들의 최치원 太 守 에 대한 信 仰 에 가까운 絶 大 尊 敬 과 信 望 그리고 최치원 太 守 자신의
112호 _15 隱 遁 을 앞둔 마지막 對 民 奉 仕 意 志, 이 兩 理 念 이 맞물려 맞아떨어져, 그 어려웠던 咸 陽 郡 民 들의 오랜 宿 願 事 業 인 護 岸 林 이 이룩해졌던 것이다. 咸 陽 上 林 숲 은 분명 최치원 生 涯 의 일대 分 水 嶺 이 된 記 念 碑 的 業 績 이었다.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는 崔 致 遠 太 守 에게는 실로 크다 할 수 있겠다. 방대한 護 岸 林 을 自 信 있게 완공한 孤 雲 은 이 무렵 思 考 의 一 大 轉 換 期 를 맞이하 였다. 서라벌에서 隱 遁 한 한 知 識 人 이 이곳 상림 숲 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咸 陽 에서 되살아난 최치원은 곧 바로 報 民 을 위한 民 衆 啓 蒙 과 疆 土 사랑을 위한 國 土 巡 5로 이어 져, 저 많은 大 文 巨 作 과 燦 爛 한 著 述 을 남기게 된 것이다. 結 論 서라벌에서 은둔한 한 知 識 人 이 이곳 上 林 숲 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최치원은 隱 遁 한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設 定 한 假 說 解 決 을 위해 考 察 한 結 果 는 과연 設 定 한 假 說 그대로, 최치원은 隱 遁 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結 論 이다. 최치원의 隱 遁 은 서라벌에서 政 治 로부터의 隱 遁 이었지 民 衆 啓 蒙 과 國 土 사랑마저도 隱 遁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咸 陽 에서 되살아난 최치원은 곧 바로 報 民 을 위한 民 衆 啓 蒙 과 疆 土 사랑을 위한 國 土 巡 5로 이 어져, 저 많은 大 文 巨 作 과 燦 爛 한 著 述 을 남기게 된 것이다.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는 崔 致 遠 太 守 에게는 실로 크다 할 수 있겠다. 최치원은 단순한 過 去 完 了 型 의 人 物 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 周 邊 에서 時 代 와 더불어 苦 悶 하는 知 識 人 으로서 살아 있어, 그의 文 章 과 思 想 또한 連 綿 하게 生 動 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데 論 考 가 끝난 지금에도, 筆 者 에게는 최치원 선생에 관한 疑 問 과 迷 路 는 곳곳에서 새로이 돋아나고 있다. 아마도 다른 최치원 硏 究 者 모두에게도 孤 雲 선생은 때로는 莊 嚴 한 선비의 모습 으로, 때로는 山 川 을 巡 5하는 老 仙 의 모습으로 비쳐졌으며 오랫동안 欽 仰 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孤 雲 최치원은 알면 알수록 더더욱 알고 싶어진다. 智 異 山 의 入 山 詩 보다도 더 神 妙 하고, 伽 倻 山 의 遁 世 詩 보다도 더 玄 妙 한, 어느 靈 山 에 있을 仙 人 의 발자취를 찾아서 筆 者 의 최치원 硏 究 는 더 욱 계속될 것이다. 成 三 問 은 聖 君 을 만나 訓 民 正 音 이란 大 文 化 를 創 製 하는 主 役 을 했는데, 최치원도 聖 君 을 만났더라면 하고 아쉬워해 본다. 라고 孤 雲 崔 致 遠 의 人 間 과 思 想 (2006)에서 筆 者 는 서술하고 있다. 金 正 基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생명공학)께서 咸 陽 上 林 숲의 歷 史 的 意 義 外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셨습니 다. 序 論 에서부터 結 論 까지를 이번 호에 게재하고 附 錄 ( 上 林 숲의 古 蹟, 口 傳 說 話, 神 道 碑 )은 다음호에 싣습니 다. 많은 자료와 함께 玉 稿 를 주신 金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실)
112호 _16 <國學講演 要旨> 一流국가란 敎養국가이다 - 退溪의 爲己之學과 先進化의 방도 - 趙 甲 濟 동아대학교 명예교수 (생명공학) 本院에서 主催하고 부산광역시가 後援한 國學講演會가 조갑제닷컴 대표의 退溪의 爲己之學과 국민교양 함양과 先進化의 방도 라는 演題로 지난 6월 27일 오후 3時부터 2時間동안 부산일보사 대강당에서 열렸다. 修己治人의 방도, 敎養人의 육성과 교양인의 모습, 지식인과 교양인의 차이 등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곁들인 현 실감 있는 강연 내용을 요약해 싣습니다. (편집실) 修己治人의 방도 卽政治, 政治卽道學을 이루는 것은 모든 유학 유학을 흔히 修己治人의 학문이라 한다. 즉 자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그래서 퇴계도 정 내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것이니 大學 치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론은 자연 속의 의 三綱領 八條目이 그 중심 哲學을 이루고 우거진 숲속에서 종일 그윽하게 혼자 향내음 있다.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이 유학의 理想 을 피우는 난초가 풍진 세상을 향해 띄우는 이고 指向하는 길이며 八條目은 三綱領 실천 결코 야하거나 튀지 않고 은근히 말을 건네는 의 전제이다. 修身을 근본으로 하고 제 몸을 그런 향기의 메시지와 유사하다.>(金炯孝, 바르게 하지 못하고서는 아무 일도 바르게 하 원효에서 다산까지, 청계) 지 못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格物, 퇴계의 학문적 근본입장은 진리는 평범한 致知, 誠意, 正心은 修身의 과정이고 齊家, 治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신념으로 知와 行 國, 平天下는 修身의 效用이다. 이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誠이요 <修己의 학문적 심화를 위해 정치 사회를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敬을 강조하였다. 王을 가급적 멀리하기를 바랐던 退溪 李滉은 자연 교육시키고자 성학십도 를 지어서 선조에 의 순수와 고요 속에서 내면의 정신적 왕국을 게 올렸고 벼슬길에서 물러나서는 많은 제자 올연히 세우고 굳건히 보존하기 위해서 그 왕 를 가르쳤다. 그중 西厓 }成龍은 임진왜란때 국의 헌법인 理와 주권자인 上帝와 그 왕국의 영의정으로서 도성이 15일 만에 함락 당하게 영토인 마음(心)의 삼각관계를 탐구하는 데 全 되자 어전회의에서 도승지인 백사 이항복은 생애를 바쳤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 몽진처를 의주로 정하여 불리할때 명나라 보 나 그에게는 바깥의 현실세계가 있었다. 이 세 호를 받아야 된다고 진언하자 선조는 나의 생 계를 그는 외면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유학 각도 같다고 하였고 일부는 함경도를 주장하 의 본질인 修己와 治人의 두 세계를 合一시키 였으나 서애는 임금의 행차가 조선을 한 발 는 최종의 목적이 구현되어야만 비로소 온전 이라도 떠나면 이미 조선이 아니게 된다 하여 한 휴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선조가 의주에 계속 머물렀고 왜병으로부터 도덕과 외면적인 정치가 상호 회통되는 道學 나라를 지키게 되었다. 만약 임금이 압록강을
112호 _17 넘어서 明 나라 땅으로 갔다면 의병은 일어나 지 않았을 것이며 조선은 패전국이 되었을 것 이다. 서애의 공적은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 다. 또한 성웅 이순신을 천거하여 국난을 극복 했다. 퇴계의 성리학은 나라 안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정치와 발전은 지금 修 己 의 부족, 즉 교양의 부족 이란 장애물을 만났다. 교양이 약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투표를 한다. 그렇 게 하여 뽑힌 국회의원의 20%가 前 科 者 이다. 국회가 난장판, 사기판이 된다. 治 人 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교양 없는 유권자와 교양 없는 정치인들이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추행한다. 氣 의 힘으로 한국은 선진국 문턱까지 왔지만 이젠 理 의 힘을 강화해야 자유통일을 넘어 一 流 국가 건설로 나아갈 수 있다. 氣 로 상징되는 경제 등 물질적 힘은 理 로 상징되는 정신과 사상의 통제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 퇴계의 용 어대로 理 發 氣 隨 之 해야 한다. 理 가 약하고 氣 가 세다. 지금은 바뀌어야 한다. 敎 養 人 육성 王 朝 국가의 주권자는 上 帝 이지만 민주국가 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退 溪 선생은 王 을 교육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국민을 교 양인으로 육성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본이 다. 敎 養 (교양)이란 知 識 을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이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끝나지 않고 그 지식을 길러서 인간의 品 格 으로 昇 華 시킨다는 뜻이다. 지식이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 라 가슴속에서 자라나 행동으로, 습관으로, 인 격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敎 養 은 실천을 전 제로 하는 지식 체계이다. 敎 育 은 가르치고 육성한다는 의미이다. 교육 의 3대 목표는 智 德 體 이다. 智 慧 (지혜)를 키우 고, 德 性 을 키우고, 體 力 을 키운다. 人 文, 예 술, 스포츠이다. 인문적 교육을 통하여 인간과 역사, 그리고 사물의 원리를 알게 한다. 예술 을 통하여 인간의 감성이 풍부하게 되고 審 美 眼 을 갖춘다. 體 育 을 통하여 당당한 승부정신 과 鬪 志 를 몸에 익힌다. 교양과 교육은 결국 全 人 的 인 것을 추구한다. 圓 空 神 體, 즉 원만한 인간, 外 柔 內 剛 한 사람, 일종의 紳 士 道 이다. 1. 讀 書 는 교양의 기본이다. 문학, 역사, 예술, 종교, 철학, 지질, 天 文 書 를 읽으면 인간, 역사, 우주를 이해하게 된다. 語 彙 力 이 풍 부해지고, 大 局 觀 을 갖게 되며 겸허해진다. 2. 뿌리의식은 인간 심리의 支 柱 이다. 조국, 고향, 家 門, 母 校 는 정서와 인격을 안정시 킨다. 3. 스포츠와 예술(미술, 공연, 영화 등)은 쉼과 즐거움을 통한 再 充 塡 (재충전)이다. 4. 野 外 활동은 인간본성 속의 野 性 을 일깨운다. 교양인의 모습 * 교양은 균형 감각이다. 知 性 과 野 性 의 균형과 종합이다. 엄격과 관용의 균형, 자유와 민주 의 균형, 文 武 의 균형과 종합은 一 流 의 조 건이다. 고구려는 野 性 이 너무 강해 망했고, 조선은 知 性 이 너무 강해 망했으며, 신라는 知 性 과 野 性 을 두루 갖추어 長 壽 했다. 李 承 晩, 朴 正 熙, 金 庾 信, 文 武 王, 트루먼, 레이건, 처칠 같은 인물이 지성과 야성을 겸한 교양 인이었다. 一 流 국가, 조직, 인간은 상반된 요소를 융합시켜 더 큰 에너지를 내도록 하 는 포용력과 종합력의 소유자이다. 로마, 몽 골,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 균형감각은 公 的 으로 표현될 때는 公 正 性 과 객관성이다. * 교양은 절도이고 정확성이다. 말을 정확하게 행동을 절도 있게 한다. 실수와 사고가 적다. * 敎 養 은 正 義 感 이고 용기이다. 교양인은 공정 성과 공평성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서 분 노한다.
112호 _18 * 敎 養 은 주체성이고, 조용한 너그러움이다. * 교양은 이해력이다. 자신과 他 人, 그리고 인 간, 역사, 국가, 조직에 대한 이해력이 크면 다른 것, 틀린 것에 대한 포용이 가능하다. 자신을 알면 남을 이해한다. 자신이 있으면 남을 용서, 관용한다. 이해력과 관용, 포용 력은 비례한다. * 교양인은 천재를 알아본다. 凡 人 에게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天 才 에겐 감사를! * 敎 養 은 사회성이다. 즉 남에 대한 배려이다. 낮은 사람에게 뻐기지 않고, 높은 사람에게 굽히지 않는다. 특히 弱 者 에 대한 관심이 깊다. * 敎 養 은 인생관이다. 敎 養 人 은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된 인생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생 각을 정리해준다. 인물관 역사관 세계관은 인생관의 다른 표현이다. * 敎 養 은 인간의 기본 土 壤 이다. 이 토양 이 기름지고 풍요로우면 여기에 심는 전문 성이란 나무도 잘 자란다. 밑변이 길어야 꼭지 점이 높다. * 교양은 敎 養 語 이다. 한국인의 敎 養 함양을 막 고 있는 것은 첫째, 漢 字 말살-한글 專 用 에 의한 민족문화, 미풍양속, 민족혼의 파괴이 다. 둘째로는 민주주의를 틈탄 선동이 無 5 와 억지를 합리화해준다. 셋째로는 방송과 신문 등 대중매체가 흥미위주의 저질프로를 집중적으로 양산, 배포한다. 넷째 기능중시 교육이다. * 한국 지도층의 無 교양은 한국어 파괴에 앞 장서고, 대한민국 建 國 과 신라의 삼국통일 을 부정, 또는 폄하하고, 애국심이 없으며, 교양 없는 언어와 행동을 공개적으로 되풀 이하여 국민교육을 망치고 있다. 인생관, 역 사관,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은 미성숙 人 格 을 보이고 있다. * 교양의 再 建 은 국어교육, 특히 漢 字 교육 강 화로 敎 養 語 를 정립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 다. 退 溪 學 釜 山 硏 究 院 報 가 漢 字 를 사용 한 國 漢 혼용으로 되어 있어 반가움이 앞서 고 교양함양에 기여하고 있다. 그 다음 공중 도덕을 확립하고, 군대를 국민교육장으로 활 용하며, 회사의 예절교육, 고급독서 생활, 특히 기성세대의 책 읽기 분위기를 조성한 다.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선진화를 위한 지 표가 될 만한 선언문과 구체적인 교양지침 서도 만들면 좋을 것이다. 一 流 국가란 교양 인이 모여 사는 교양사회를 근거로 한 교양 국가이다. 지식인과 교양인의 차이 1. 지식인은 많이 아는 사람이고 교양인은 많 이 가르치는 사람이다. 2. 지식인은 지식을 자랑하지만 교양인은 사 람과 사람됨을 중시한다. 3. 지식인은 말이 많지만 교양인은 행동이 많다. 4. 지식인은 패배를 싫어하고 잘못을 인정하 지 않지만 교양인은 패배와 실수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5. 지식인은 대체로 편협하고 교양인은 대체 로 균형감각이 있고 너그럽다. 6. 지식인은 僞 善 으로 흐를 위험이 있고, 교양 인은 勇 者 의 소양이 있다. 7. 지식인은 대체로 예술과 스포츠를 멀리하 지만 교양인은 知 德 體 의 종합을 志 向 한다. 8. 한국에 지식인은 많지만 교양인이 드물다. 정치인은 반드시 교양인에서 나와야 한다. 한국인의 교양을 파괴하고 있는 이들은 주로 가짜 지식인, 즉 배운 무식자들이다. 이 나라엔 지식인으로 위장한 깽판세력이 너무 많고 세다. 9. 論 語 에 나오는 君 子 는 교양인이고 小 人 은 못된 지식인이다. 君 子 和 而 不 同 小 人 同 而
112호 _19 不 和 - 君 子 는 같지 않아도 서로 화합하고, 小 人 은 같아도 서로 불화한다. 君 子 和 而 不 同 의 민주사회를 만드는 힘이 교양이다. 오늘날 한국의 인성교육은 성공하지 못했다. 사기, 무고, 위증 등이 일본과 비교가 안될 정 도로 많고 대낮이 암흑이라 하겠다. 이런 현실 에 퇴계를 다시 돌이켜보게 되며 한자 폐지와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아 분별력, 기억력, 판단력을 망각한 것으로 理 의 쇠퇴현상이다. 국민을 깨우치는 것이 퇴계선생의 정신을 이 어가는 것이다. 국민을 교양인으로 거듭나게 하여 나라를 정상화 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당면과제이다. 그렇게 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問 辨 (21) 섭급취족( 拾 級 聚 足 )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해운대구 반여동 김 ) 주인과 객이 서로 존중하며 계단을 오르는 방법입니다. 섭급취족( 拾 級 聚 足 ) 이란 예를 행할 때, 계 단을 오르는 방법으로 섭등취족( 涉 等 聚 足 ) 이 라고도 합니다. 이 때 섭급 과 섭등 은 계단을 오른다는 말이고, 취족 은 발을 모은다는 뜻으 로 한 계단을 오를 때 마다 두 발을 모으며 올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향교나 서원 에서 예를 행할 때 실제로 지켜지고 있는 예 절이므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규정은 예기, 곡례 에 나오는 것으로 그 조문은 다 음과 같습니다. 주인은 동계( 東 階 )로 나아가고, 객은 서계( 西 階 )로 나아간다. 한 층계를 오를 때마다 발 을 모으면서 걸음을 이어서 오른다. 동계를 오 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올리고, 서계를 오를 때는 왼발을 먼저 올린다. 주객( 主 客 )의 존비에 따라 계단을 오르는 방 법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쪽 계단은 주인의 계단이고 서쪽 계단은 손님의 계단입 니다. 이 때 주인은 동쪽 계단을 오르면서 오 른쪽 발을 먼저 올리고 왼발을 오른발에 모읍 니다. 객은 반대로 서쪽 계단을 오르면서 왼발 을 먼저 올리고 오른발을 왼발에 모으게 됩니 다. 이렇게 한 계단씩 발을 모으며 오르게 되 면 주객이 서로를 등지는 일이 없게 됩니다. 즉 섭급취족을 하게 되면, 주객의 몸이 서로를 향하게 되어 마주보며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漢 )나라의 학자 정현( 鄭 玄 )이 이 에 대해 서로 향하여 공경함이다. 고 해설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일 서쪽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오른발을 먼저 올리고, 동쪽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왼발 을 먼저 올리거나, 한 칸을 한 걸음씩에 오르 게 되면 반드시 서로 등지게 되는 경우가 발 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계단을 오르는 속 도에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 하지 않는다는 혐의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 한 최소한의 덕목이 존재합니다. 장유( 長 幼 )의 관계는 차례[ 序 ]가 없으면 손상되고, 붕우( 朋 友 )의 관계는 신뢰[ 信 ]가 없으면 손상되듯이 주객의 관계는 공경과 배려가 아니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계단 하나를 오르면서도 서로를 공경하도록 가르친 것은 번잡한 예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를 공경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치려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요. 조 창 규 (경성대학교 교육대학원 조교수)
112호 _20 古 典 의 숲을 거닐며(2) 宥 坐 之 器 (유좌지기 : 곁에 두고 스스로 훈계로 삼는 물건) 기기 許 宗 烈 (회원, 敬 化 書 院 講 伯 ) ( 敧 器 )라는 그릇이 있다. 물이 없으면 기울어지고, 물이 반쯤 들어 있으면 똑 바로 서 며, 물이 가득차면 뒤집어지는 그릇이다. 옛날 중국의 제( 齊 )나라 환공( 桓 公 )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며 늘 곁에 놓아 마음을 다 스렸다고 한다. 공자도 이것을 보고 아아! 가득차고도 엎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吁 惡 有 滿 而 不 覆 者 哉 )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족( 知 足 )해야 함을 언제나 강조해, 분수와 정도에 맞지 않는 탐욕을 경계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계영배( 戒 盈 盃 )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과학자 인 하백원( 河 百 源, 1781~1845)에 의해 재현되었다고 전하며, 비슷한 시기 강원도 홍천지방의 도 공( 陶 工 ) 우명옥이 계영배를 만들어 자신의 방탕한 삶을 경계했다고 한다. 이 잔은 후에 거상( 巨 商 ) 임상옥( 林 尙 沃, 1779~1855)에게 전해져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큰 장사꾼으로 거듭났다는 것이 최인호의 상도( 商 道 ) 에서 보인다. 또 박만( 撲 滿 )이란 그릇은 흙으로 도자기처럼 만든 벙어리저금통이다. 한 번 넣은 돈은 다시 꺼 낼 수 없으므로 돈이 가득차면 저금통을 깨뜨려 돈을 꺼내야 한다. 그러므로 박만은 비어 있어야 만 그 모습을 온전히 지닐 수가 있다. 그래서 군자는 다소 모자라는 데에 있을지라도 가득 찬 데에 있지 않으려 했다. 주역의 지산겸괘 단전( 周 易 地 山 謙 卦 彖 傳 )에는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비게 하고, 겸허한 곳을 더해 준다.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여 겸허한 데로 흐르고,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허함에는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고 겸허한 것을 좋아하나니, 겸은 상대를 높임으로써 내가 빛나고, 내 몸을 낮추되 중용지도를 넘지 아니하니 이것이 군자의 마침 이다. 라고 했다. 몇 년 전 대만 사법부에서는 전 총통 천수이볜( 陳 水 扁 )과 그 부인 우수전( 吳 淑 珍 )에게 거액의 국가 기밀비를 횡령한 죄를 물어 무기징역형을 내린 일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 딸 과 사위 등에게도 징역형이 선고 되었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총통에 오른 천수이볜은 한사람이 부패하면 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一 人 貪 戾 一 國 作 亂 ),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 윗사람의 행실은 아랫사람이 따라한다( 風 行 草 偃 上 行 下 效 ) 는 세상의 이치를 당연히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개혁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뒤로는 몰래 부패한 짓을 일삼았다. 라고 하고, 또 이어서 만족할 줄 알아 항상 만족하면 죽을 때까지 욕되지
112호 _21 않고, 그칠 줄 알아 늘 그치면 죽을 때까지 부끄러움이 없다.(知足常足 終身不辱 知止常止 終身無 恥) 라고 한 명심보감 안분편(明心寶鑑 安分篇)을 인용하여 판결문을 맺었다는 기사를 보았다.(조 선일보 이항수의 특파원 칼럼, 2009.9.14) 우리의 현대사도 몇몇 통치자와 그 추종세력들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본인의 불명 예는 물론이고 온 국민에게 실망과 자괴감(自愧感)을 남기게 하였다. 허공에 바로 삼층 누각을 지을 수가 없다. 기초를 튼튼히 닦고 일층과 이층을 차례로 세운 후 에라야 3층을 올릴 수 있듯이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정도를 지켜야하고, 정성을 다해 겸허함을 가 져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숭고한 삶을 값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기기(敧器)와 박만(撲滿)의 교훈을 잊지 말고, 宥坐之器(유좌지기)의 가르침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出典> 周易 地山謙 彖曰 天道는 虧盈而益謙하고 地道는 變盈而流謙하고 鬼神은 害盈而福謙하고 人 道는 惡(오)盈而好謙하나니 謙은 尊而光하고 卑而不可踰니 君子之終也라 荀子 宥坐篇 孔子觀於齊桓公之廟 有敧器焉 孔子問於守廟者曰 此爲何器 守廟者曰 此蓋爲宥坐 之器 孔子曰 吾聞 宥坐之器者 虛則敧 中則正 滿則覆 孔子顧謂弟子曰 注水焉 弟子把水而注之 中則正 滿則覆 虛則敧 孔子喟然而歎曰 吁惡有滿而不覆者哉 子路曰 敢問 持滿有道乎 孔子曰 聰 明聖知 守之以愚 功被天下 守之以讓 勇力幠世 守之以怯 有四海 守之以謙 此所謂挹而損之之 道也 <挹而損之;제멋대로 방자함을 억누름> (공자가 노나라 환공의 묘를 참관할 때 기울어진 그릇이 있었다. 공자가 묘 지키는 자에게 물 어 말하기를 이것이 무엇 하는 그릇이냐? 라고 하였다. 묘 지키는 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아 마도 오른쪽 곁에 두는 그릇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오른쪽 곁에 두는 그릇이라 하는 것이 속을 비우면 기울고 중간 정도면 바로 서며 가득차면 뒤집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제자가 물을 퍼서 붓자 중간 정도에서 바로서고 가득차자 뒤집히며 속을 비우자 기울어졌다. 공자가 놀라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가득차서 뒤집히지 않는 것이 이겠 는 가 라고 하였다. 子路가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가득 찬 상태를 지속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총명과 성인의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공이 천하를 덮을 때는 이를 겸양 으로 지키며, 용맹이 세상을 어루만질 때는 두려움으로 이를 지키고, 가 四海를 다 가질 때는 겸손으로 이를 지킨다. 이것이 이른바 억제하며 이를 덜어내는 방법이라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112호 _22 <연재> 退溪 山水詩 이해와 감상 (9) 孫 五 圭 (제주대 교수)) 19. 백운동서원의 선비들에게 보이다 있다. 첫째, 숙수사 절을 허물고, 성리학을 교 육하는 서원을 창건한 것은, 불교를 배척하는 소백산 남쪽 자락 옛 순흥 데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조선초 배불론(排佛 죽계에는 찬 시냇물, 흰 구름 층층 論)의 맥을 잇는 것으로, 사상적 전환과 유교 인재 길러 도를 지켜 공이 얼마나 컸으며 적 의례의 확산을 목적으로 한다. 사당 세워 현인 받든 일 일찍이 없었도다 둘째 백운동 서원창건은 성리학적 세계관의 우러러 사모하여 스스로 찾느니 인재들이요 확산과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것은 성리 학문 열중함은 높은 벼슬 사모함이 아닌데 학적 세계관이 생활 속에 뿌리내려, 가치관과 고인을 보지 못했으나 마음은 보았나니 생활 습속으로 정착되는데, 큰 효과를 가져오 달 비치는 맑은 연못, 차가움이 얼음 같고저 게 하였다. 성리학은 불교에 비하여, 현실주의 적 세계관과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실학의 성 白雲洞書院示諸生(己酉赴豊邑後) 백 운 동 서 원 시 제 생 기 유 부 풍 읍 후 격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 서 주세붕은 무당의 허황한 요설을 물리치고, 小白南墟古順興 竹溪寒瀉白雲層 죽 계 한 사 백 운 층 불교의 비현실적 내세관도 비판하였다. 나아가 生材衛道功何遠 立廟尊賢事匪曾 인삼재배법을 널리 알려, 백성들의 경제생활향 景仰自多來俊碩 藏修非爲慕騫騰 古人不見心猶見 月照方塘冷欲氷 소 백 남 허 고 순 흥 생 재 위 도 공 하 원 경 앙 자 다 래 준 석 고 인 불 견 심 유 견 입 묘 존 현 사 비 증 장 수 비 위 모 건 등 월 조 방 당 냉 욕 빙 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런 주세붕의 노력 으로, 백운동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고 교육하 는 학교로서의 역할을 굳건히 하게 되었다. 이후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감사에게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년) 상소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 경상북도 순흥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서원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 하사하는 이다. 이 서원의 터는 원래 숙수사(宿水寺)라 것으로, 그것을 직접 쓰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는 절이 있었다. 숙수사를 허물고 서원을 지어 시켜 쓰되, 임금의 이름으로 하사하는 것이다. 안향을 모시고 성리학을 교육하는 학교를 세 그러니 임금이 인정하는 국가급의 공인된 교 웠다. 안향은 고려말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들 육기관인 것이다. 서원의 경비를 위해, 토지나 여온 학자이다. 그래서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 노비 그리고 서적 등을 하사하여, 명실공히 교 창건에는 두 가지의 큰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게 된다.
112호 _23 소수서원의 현판은 명종임금이 직접 쓰신 것이다. 소수란, 기폐지학 소이수지( 旣 廢 之 學 紹 而 修 之 ) 에서 따온 것이다. 이미 무너진 학 문을 이어서 닦는다 라는 의미에서, 이어서 닦는다( 紹 修 ) 를 서원이름으로 하사하였다. 따 라서 백운동 서원을 세워 성리학을 교육하고 자 기치를 높이든 것은 주세붕이요, 사액서원 (소수서원)으로 승격시킨 것은 퇴계의 공이다. 이런 성리학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위의 시를 살펴보면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제1,2구는 백운동 서원의 위치와 지리 적 특색을 알 수가 있다. 백운동 서원의 자리 는 소백산 남쪽 기슭이며, 옛 순흥부에 속한다 는 것을 말하였다. 원래 순흥은 順 興 府 이며, 이 지역의 중심지로 상당히 규모가 컸었다. 그 러나 단종이 영월로 귀양가고, 수양대군이 세 조로 등극하자, 이에 반대하던 금성대군이 순 흥으로 귀양을 왔다. 순흥부사와 금성대군은 상왕인 단종을 위하여 복위를 꾀하였다. 이 사 실이 알려져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으며, 순흥부는 폐지되고 말 았다. 이 때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이 후 순흥에는 전설 하나가 전해져 내려왔 다. 순흥에 은행나무가 자라면 순흥이 복귀될 것이요, 순흥이 복귀되면 노산군(단종)이 복위 될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숙종조에 이르러 순 흥의 뒷산에 은행나무가 자라났다. 徐 氏 성의 선비가 상소를 하였다. 그리고 순흥이 복귀되 고 노산군이 복위되었다. 단순한 전설이나 순 흥부의 폐지와 복귀, 세조찬위와 단종의 죽음 과 복위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전설은, 민중의 바람과 고 통이 반영된, 진실성 있는 이야기로 이해 된다. 중국에서 죽계는 원래 은거하는 선비들의 한 가한 거처를 상징한다. 이 죽계가 백운동 서원 안으로 흐른다. 안축도 죽계를 노래한 경기체 가 죽계별곡 을 지었다. 퇴계는 풍기군수 재 임시, 죽계를 통하여 소백산을 유람하고 기행 문인 유소백산록 을 지었다. 맑은 시냇물이 서원을 통과하며 이루어내는 산수의 아름다움 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지금도 가을날 이 곳을 방문하면, 아침 햇살이 경렴정( 景 濂 亭 )을 비추고 죽계에 반영되니, 아름드리 노송이 숲 을 이루어 드리우는 그늘마저 신비로움을 연 출한다. 제2구가 이런 풍광의 아름다운 산수경관을 형상하고 있다. 경렴정은 북송 성리학자로, 태극도설 을 지어 성리학을 일으킨, 염계 주 돈이를 경모 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런 학자를 경모하는 정신이 깃들인 정자가, 죽계변에 서 서 아침 햇살을 받는 모습은, 산수경관을 문화 경관으로 전환시키는 시적 효과와 상징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소수서원으로 하여금, 저 절로 학문의 전당이란 기능성을 환기시킨다. 제3구는 이곳이 성리학을 교육하는 서원이 라는 기능을 강조한다. 제4구 또한 서원의 기 능 중, 성현을 제사지내는 공간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제3,4구는 서원이 교육과 제사를 담당 하는 학문연구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현을 받들어 모시는 의례는, 도를 깨닫고 실 천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니, 다름 아닌 道 를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현 에 대한 제사는, 도를 받들어 실천할 것을 다 짐하는 행위이며, 예의의 실천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그 시초가 백운동서원이다.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실천해야만 하는 규범적 이상이다. 따라서 제 4,5구는 백운동서 원의 기능과 설립의 역사적 의의를 노래한다.
112호 _24 그래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은, 벼슬을 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고인을 보지 못했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순수학문연구 으나, 고인의 글을 통하여 고인의 참뜻을 의 열의와 교육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해하게 된 것을, 마음은 보았나니 라고 고 벼슬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물리치는 것은 감탄하게 된다. 아니다. 다만 학문의 궁극 목적이 벼슬에 있지 이런 참뜻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욕망을 버 않다는 것이니, 조선초 관학파들과 확연히 다 리고, 순수 학문의 관점에서 성현의 글을 대할 른 사림의 학문정신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새 때만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 순수한 마음 로운 학문의 목적을 제시한 선언적 의미가 크 의 경지를, 맑은 연못 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 다. 왜냐하면 조선초에는 관학이 중심이었기 서 제8구에서는, 맑은 연못 같은 순수한 마음 때문이다. 학문을 배워 세상을 위해 이롭게 쓰 의 경지를, 차가움이 얼음 같고저 라고 하여 고, 벼슬에 나아가 백성을 위한 정치에 진력하 그 밝고 맑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성리학적 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곧 경세학(經世學) 으로, 상성성(常惺惺) 의 경계를 노래한 것이 중심이었다. 다. 상성성 은 언제나 깨어있는, 현명하고 순 그러다 차츰 경세보다는 도에 더욱 중심을 수한 본질적 깨달음의 경계이다. 나아가 모든 두고, 수양적 성격을 강조하게 되었으니, 道學 욕망이 소거되어, 지혜의 깨달음으로 가득 찬, 으로서의 성리학이 대두하였다. 이후 사림의 초탈의 정신적 경계를 말한다. 등장으로 도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여, 도학파 따라서 이런 경계에는 현상의 본질과, 삼라만 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제6구는 도학의 학문 상의 物理와, 인생의 참된 이치가, 연못에 비 목적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성 치는 달처럼 투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곧 哲理 현의 학문은 다시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의 깨달음이요 道의 정신적 경계인 것이니, 제 된다. 글귀마다 성현이 말하고자 하는 참뜻 7,8구에서 노래하는 詩境이 그러하다. (13) 燈火可親 燈火可親은 등불을 가까이할 만하다. 라는 뜻으로, 서늘한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좋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국 당(唐)나라 때, 한유라는 유명한 문장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 유학자들과의 토론을 즐겼으며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책을 사랑하였던 그의 마음은 아들의 독서를 위해 지은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 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월은 빠릅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 輕이란 권학시(勸學詩)를 배운 일이 있으시죠. 時秋積雨霽(시추적우제) 때는 가을이 되어, 마침내 장마도 물러나고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서늘한 바람이 마을에 불어오는구나. 燈火稍可親(등화초가친) 이제 등불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簡編可舒卷(간편가서권) 책을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112호 _25 三 國 史 記 所 載 인물 엿보기 (10) 好 童 왕자의 자살과 劍 君 의 知 而 强 食 바야흐로 兪 英 玉 (부산대 강사)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계절이다. 봄과 여름은 만물이 生 長 하는 찬란한 시간이 요, 가을과 겨울은 절정의 결실, 그리고 종말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소멸없는 탄 생이 어디 있으랴! 다만 언제 어떻게 사라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陽 의 기운이 넘치는 이때 애달 픈 두 죽음을 돌아보며 인생을 어떻게 마감해야 할지 조용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고구려 3대 大 武 神 王 의 아들 호동왕자는 우리 모두가 아는 국민 동화 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가 낙랑을 이긴 7개월 뒤 참소와 의심을 받아 곧 자결했음을 아는 이는 정말 드물다. 삼국사 기 권14 고구려본기 에는 대무신왕 15년(A.D32) 4월에 호동과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고, 그 바로 아래 同 年 11월에 호동이 자살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삼국사기 의 해당 全 文 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冬 11월, 왕자 호동이 자살했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 次 妃 ]인 갈사왕( 曷 思 王 ) 손녀의 소생 이다. 얼굴 모습이 美 麗 하여 왕이 몹시 사랑해 好 童 이라고 이름했다. 첫째 왕비[ 元 妃 ]는 호동이 적통을 빼앗아[ 奪 嫡 ] 太 子 가 될까 두려워, 왕에게 참소하기를 호동이 저를 禮 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제게 亂 한 짓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왕이 다른 사람의 아이 라고 미워하는 것이오? 하자,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禍 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 려워 눈물을 흘리면서 고하기를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 봐주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제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장차 호동을 죄주 려 하였다. 2 어떤 이가 호동에게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습니까? 하니, 호동이 답하기를 내가 해명하면 이는 어머니의 惡 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칼에 엎어져 죽었다. 3 史 論 : 지금 왕이 참언( 讒 言 )을 믿어 사랑하는 자식을 죄없이 죽였으니, 그의 不 仁 은 족히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호동도 죄가 없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책망을 받을 때는 의당 순( 舜 )이 고수( 瞽 瞍 ))에게 하듯이 하여, 회초리는 맞되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不 義 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호동은 이렇게 할 줄 모르고 죽을 자리가 아닌 데서 죽었으니, 작은 일을 삼가는[ 小 謹 ] 데 집착하여 大 義 에 어두웠다 고 할 만하다. 公 子 申 生 에게나 비유할까?
112호 _26 好 童 이란 용모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붙여진 이름이 다. 그런 그가 낙랑을 이기는 데 큰 功 을 세우기까지 했 으니, 元 妃 의 불안이 가중되었을 법하다. 그래서 허목( 許 穆,1595~1682)은 호동의 계책을 써서 낙랑을 멸하니 호동은 왕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태자의 어머니가 이 를 시기하여 왕에게 호동이 무례하다고 참소했다 (주1) 하였고, 이종휘( 李 種 徽, 1731~1797)는 호동이 왕의 사 랑을 받는 데다 기특한 功 까지 세우니, 왕후 甲 氏 는 왕이 탈적( 奪 嫡 )할 뜻을 둘까 두려워 호동을 참소했다 (주2)고 하였다. 미수 허목이 말하는 태자 는 바로 解 憂 를 가리킨다. 호동이 자살한 지 한 달 뒤에 대무신왕은 아들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3대 대무신왕(재위 18~44) 사후에는 그의 동생인 4대 閔 中 王 (재위 44~48)이 즉위하고, 민중왕 사후에는 5대 慕 本 王 (재위 48~53)이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대무신 왕의 맏아들인 해우이다. 삼국사기 는 그의 사람됨이 사납고 不 仁 하며 國 事 를 돌보지 않아 백성 들이 원망했다고 적었는데, 안정복의 동사강목 은 그 해우를 낳은 이가 바로 元 妃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元 妃 의 아들 해우가 모질고 사나운데 반해 次 妃 의 아들 호동은 美 麗 하고 또 공이 있 으니, 원비는 王 과 朝 野 의 마음이 호동에게 기울어서 장차 호동이 太 子 가 될까 두려워 그를 참소 한 것이다. 궁중의 이와 같은 시기와 암투는 어느 때나 흔히 있는 일이니 무엇이 새롭겠냐마는, 아버지 대무신왕과 아들 호동의 처신은 우리에게 父 子 有 親 과 참된 孝 의 의미를 되짚게 하고 있어 분변이 필요하다. 호동의 자살사건에 대한 김부식의 史 評 은 거의 정답에 가깝다. 조선전기 官 撰 사서 동국통감 도 김부식의 이 史 論 을 수록할 뿐 다른 史 評 을 두지 않았고, 조선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역시 김부식의 이 사론을 그대로 전재( 轉 載 )했으니, 고려부터 조선후기까지 이에 대한 儒 者 의 시각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호동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그 아비 대무신왕에게 책임이 있다. 그래서 김부식은 부인의 참소를 믿어 愛 子 를 무고하게 죽인 그의 不 仁 을 먼저 성토하였다. 대무신왕은 총명하고 굳세어 영토를 확장하고 國 勢 를 높인 훌륭한 군주에 속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호동처럼 어진 아들을 해명도 없이 스스로 죽게 만들어 史 家 들로부터 晉 나라 獻 公 과 같은 부류로 취급받았다. 김부식은 호동의 자살을 公 子 申 生 의 그것에 비유했고, 윤기( 尹 愭,1741~1826)는 西 周 시대 伯 奇 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申 生 은 춘추시대 晉 나라 獻 公 의 太 子 이다. 헌공은 여희( 驪 姬 )를 얻어 해 제( 奚 齊 )를 낳자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세우려 하였다. 그때 마침 신생이 生 母 의 제사를 지낸 뒤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바치니, 그 속에 미리 독약을 넣어 둔 여희가 헌공을 만류하면서 시험해보 고 드셔야 한다고 속닥거렸다. 이에 헌공이 그 고기를 개에게 던져주니 개가 먹고서 바로 죽었다. 신생이 이를 듣고 두려워서 新 城 으로 달아났는데, 헌공이 신생의 師 傅 를 죽이니, 마침내 신생이 자결하고 말았다. 周 宣 王 (재위 B.C827~782)의 大 臣 尹 吉 甫 의 後 妻 는 前 室 자식 伯 奇 가 자신에
112호 _27 게 수작을 걸어온다고 남편에게 무함했다. 윤길보가 믿지 않자, 그녀는 일부러 치마 안으로 벌을 잡아넣은 뒤 백기에게 털어달라고 엄살을 부리면서, 그 모습을 남편이 몰래 지켜보게 하였다. 백 기는 의심치 않고 계모의 치마 속 벌을 애써 털어주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윤길보는 아들이 희롱한다고 확신하여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서 매질한 뒤 쫓아내자, 백기는 결국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호동이나 백기와 신생의 서러운 죽음은 모두 부친의 어리석은 곡해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불신과 의심은 아마도 자식을 친애함이 부족해서 싹튼 것이리라. 윤기( 尹 愭,1741~1826)는 前 何 愛 也 後 何 疑 (주3)라 하여 어진 호동을 끝까지 믿고 사랑하지 못한 아비를 탓했고, 유한준( 兪 漢 雋,1732~1811)은 彼 父 子 之 無 親 이라 지적한 뒤 그 註 에 왕이 의심하여 호동을 죽였다[ 王 乃 疑 而 殺 之 ] (주4)고 단언하였다. 綱 目 體 사서 동사강목 도 綱 에 호동이 자살했다 고 적지 않고 유 한준처럼 고구려 왕이 아들 호동을 죽였다[ 高 句 麗 王 殺 其 子 好 童 ] 고 적어 놓았다. 즉 호동의 자 살은 실은 그 부친이 아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아들 호동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小 謹 에 집착하여 죽을 자리가 아닌 데도 피하지 않고 죽어, 아버지를 자식 죽인 천고의 不 義 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김 부식은 자식이 부모에게 책망 받는 경우, 의당 순( 舜 )의 孝 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순임 금의 부모는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 했지만, 순은 그때마다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며 事 親 之 道 를 다해 결국 완악한 부모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천하에 못 모실 부모가 없다 는 가르침을 주어 세상의 모든 父 子 들을 안정시켰기에 大 孝 라 일컬어진다. 이처럼 호동도 우선 위기를 피하 고 후일의 事 親 을 기약해야 했건만 그러지 못했으니 죄가 없지 않다 는 일침을 피할 수 없는 것 이다. 죽을 자리가 아닌데도 죽은 또 다른 사람으로는 劍 君 을 들 수 있다. 검군(? 628)은 신라 진평 왕 때 花 郞 인 近 郞 밑에서 수행한 郞 徒 출신의 하급 관료였다.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검 군>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1 검군은 大 舍 仇 文 의 아들로 沙 梁 宮 舍 人 이 되었다. 진평왕 49년(627) 秋 8월에 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말라 죽자, 이듬해(6280)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때웠다. 이때 궁중의 여러 舍 人 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고의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 이 홀로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검군이 나는 近 郞 의 門 徒 에 이름을 붙 여두고 화랑의 뜰에서 수행했으니, 진실로 그 義 가 아니면 千 金 의 이익에도 마음을 움직이 지 않는다[ 僕 編 名 於 近 郞 之 徒 修 行 於 風 月 之 庭 苟 非 其 義 雖 千 金 之 利 不 動 心 焉 ] 고 답했다. 사 인들이 몰래 이 자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의논하고, 드디어 검 군을 불렀다. 2 검군은 자기를 모살할 계획을 알았으므로 근랑에게 오늘 이후로는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작 별을 고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거듭 캐묻자, 그제야 검군은 대략 그 이유를 말했다. 근랑이 어찌 有 司 에 말하지 않는가? 하니, 검군이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 뭇 사람들을 죄주게
112호 _28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굽고 저는 곧으니 되려 제가 도망가는 것은 대장부의 일이 아닙니다[彼曲我直 而反 自逃 非丈 也] 하고는, 드디어 사인들이 부르는 장소로 나아갔다. 사인들은 술을 차려 놓 고 사죄하면서 한편으로 몰래 약을 음식에 섞었는데, 검군은 이를 알면서도 굳이 먹고 그만 죽었다[知而强食 乃死]. 君子는 말하기를 검군은 죽어야 할 곳이 아닌데 죽었으니[死非其 所] 泰山을 鴻毛보다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일제 때 발행된 신문이나 잡지는 간간히 검군의 지조와 仁心을 긍정적으로 소개했지만, 조선에 서 그는 그다지 인구에 회자되지 못했다. 칭찬하자니 소중한 목숨을 허무하게 버린 잘못이 걸리 고, 비난하자니 차마 남을 죄에 빠뜨릴 수 없다는 마음이 아까운 데다 또 자신은 곧으니 도망칠 수 없다는 장부의 기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동국통감 이나 동사강목 은 아무런 好惡를 드러내지 않았고, 다른 몇몇 사람들은 그를 대개 소량(小諒) 으로 평가하였다. 小 諒은 잗다란 신념[小信]을 뜻한다. 작은 신념에 얽매여 굳이 죽음을 택한 검군은 왕자 호동처럼 결코 유교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남극관(,南克寬,1689~1714)은 그를 千金에도 不動心 하며 평생 耿介한 뜻을 간직하여 高名이 百代에 傳한다 (주5)고 칭송했고, 삼국사기 열전 제 8에 立傳된 것을 보면 김부식도 역사에서 그가 그저 잊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 같다. <新羅의 武士魂> 自山 안확(安廓, 1886~1946), 中外日報 1928.6.11~14. 아! 劍君의 死여. 如此한 死는 新羅人이 아니면 不能이라. 그 泰山같은 尊義. 그 鴻毛같은 輕死. 이런 武士的 정신은 新羅人에 있어 一이 아니오 二가 아니다. 當時 毫髮만치라도 情이 있는 人士는 擧皆 그런 氣質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옛사람보다 좀 더 너그럽게 호동과 검군을 바라봤으면 싶다. 부모를 내버리는 패륜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에 부친이 가정 불화로 근심할 것을 염려한 호동의 효심이 경종을 울리 지 않는가! 타인을 짓누르고 이겨야 사는 경쟁시대에 제 살자고 남을 고발할 수야 없다는 검군의 배려가 아름답지 않는가! 주1 : 許穆, 眉叟記言 권34 東事 <高句麗世家 上> 주2 : 李種徽, 修山集 권11 東史列傳 < 高勾麗宗室列傳> 주3 : 尹愭, 無名子集 詩 <詠東史> 제60수 주4 : 兪漢雋, 自著 권1 <廣韓賦> 주5 : 南克寬, 夢囈集 乾 續東都樂府 <劒君引>
112호 _29 <國學講演會 要旨> 山不高 地不廣이나 麗沃한 山野 - 淸道, 昌寧의 先蹟을 찾아서 李 道 羲 (本院 會員, 東萊鄕校 掌議) 이 더해가는 계절, 가정의 달인 푸르름 지난 5월 23일 退溪學釜山硏究 람하고 나와 공원을 돌아보니 故 朴正熙 대통 院과 淡水會, 博約會 3개 단체 합동으로 제27 自助, 協同으로 잘살아 보세 를 외치며, 愛國 차 先蹟巡5 행사가 개최되었다. 금년 선적순 愛族 정신으로 작사 작곡하신 새벽종이 울렸 례지는 淸道 일원과 昌寧방면이 선정되어 아 네 새 아침이 밝았네 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 침 8시 부산적십자회관 앞에서 우리 일행을 래는 근 半世紀가 지났건만 우리의 마음속에 태운 버스는 시내를 서서히 벗어나 目的地를 생생이 남아있는 것 같아 感懷가 깊었다. 령 銅像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당시 勤勉, 향해 달려갔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우리 嶺南 40여분에 걸쳐 새마을 운동 발상지를 관람 의 젓줄인 洛東江이 悠悠히 흐르고 먼 산에는 을 마치고 다음 방문지인 固城李氏 世居地인 綠陰이 짙어갔다. 綠陰芳草勝花時 라는 詩 구 君子亭(柳湖蓮池)으로 향했다. 君子亭에 이르 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계절이었다. 니 자연석에 새겨진 固城李氏世居地 라는 표 지석이 한눈에 들어 왔다. 君子亭 앞 과수원 길을 따라 들어가 追遠齋 앞에 세워진 追慕碑 를 보면서 내아문을 들어서니 固城李氏 慕軒 宗中 李鍾大 會長 외 몇 분이 반갑게 우리 일 행을 맞이하였다. 추원재의 두 방과 마루에 모 두 올라, 차려진 茶菓를 들면서 會長의 환영인 사말에 이어 迎接하는 宗員들을 일일이 소개 각 단체장의 인사말에 이어 안내자의 일정 하고, 退溪學釜山硏究院 李圭衡 理事長의 답사 소개가 체 끝나기도 전에 密陽 요금소를 지나 로 인사를 마치고 君子亭으로 향했다. 淸道로 접어들었다. 국도변 휴게소에서 잠간 휴식하고 첫 방문지인 새마을 운동 發祥地 신 君子亭 명승지 百選중의 하나이기도 하 도리로 향했다. 9시 30분경 첫 방문지에 도착 다. 이곳은 固城李氏 淸道 入鄕祖이신 慕軒公 하여 문화재 해설사의 안내로 새마을 운동 기 諱 育의 世居地로 李泙의 5형제 중 넷째 아들 념관으로 들어갔다. 기록 영상물을 관람할 때 로 태어났으며, 맏형 雙梅堂 胤과 둘째형 忘軒 는 모두 다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새 冑와 함께 佔畢齋 金宗直先生으로부터 學問을 마을운동기념 신도역의 대통령 전용열차를 관 배웠으나 벼슬길에 나아간 두 형과 달리 국가 은 淸道 八景의 하나요, 전국
112호 _30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거르지 않고 개강하여 두 선생을 追慕하고 있다. 門蔭으로 成宗 24년 安奇道察訪이 되었다. 燕 11시 30분경 우리 일행은 龍岡書院에 도착 山君 4년에 일어 난 戊午士禍 때 佔畢齋 金宗 했다.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에 위치한 이 書 直 門人으로 몰려 大司諫이던 맏형 李胤이 거 院은 慶北文化財 제129호로, 이곳은 密陽朴氏 제도로, 正言이던 둘째 형 李冑가 진도로 流配 의 顯祖인 忠肅公 朴翊과 壬亂 14義士를 祭享 되고, 뒤이어 燕山君 10년에 일어난 甲子士禍 하고 後進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에서는 둘째형 李冑가 慘殺을, 아버지 泙이 剖 재유사의 안내로 麗忠祠와 壬亂功臣 14위를 棺斬屍를 당하는 悲運을 겪는다. 두 형을 문안 모신 忠烈祠에 退溪學釜山硏究院 權五崇 副院 다닐 때 보아둔 柳谷 竹林村이 山不高而秀麗 長을 焚香官으로 모시고, 朴淳燁선생의 執禮로 즉 산이 높지 않지만 수려하고, 地不廣而肥沃 謁廟하고 경내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들은 넓지 않지만 비옥하니 가히 살만한 곳인 것을 알고 定着하여 生利가 넉넉한 柳谷里에 서 中興의 世業을 이룩하고 體魄이 永眠한 곳 이 固城李氏 淸道 世居地이다. 書院은 高宗 5년에 大院君의 서원 龍岡 철폐령에 의하여 毁撤되고 龍岡書 堂으로 개칭하였고, 그 후 여러 번의 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麗忠祠에는 麗末 충 公께서는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 처참한 신이며 두문동 72賢이신 松隱 朴翊선생과 그 수난사를 목격하고 벼슬을 버리고, 中國의 유 의 장자 박융을 모신 사당이며, 壬辰倭亂 때 학자 周敦頤의 愛蓮說에서 연꽃이 花之君子 忘憂堂 郭在祐 등과 연합하여 義兵을 일으켜 라는 글을 읽고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어 淸道, 密陽, 慶山 등지에서 왜적들에게 큰 타 新羅池라 불리던 이곳에 못을 파고 蓮을 심고 격을 준 朴慶新, 慶因, 慶傳, 慶胤, 慶宣, 智男, 정자를 지어, 연못 이름을 柳湖蓮池라 이름 짓 哲男, 瑄, 璨, 璘, 瑀, 瑾, 琡, 球 등 14의사를 고 못가에 아름다운 君子亭을 지어 선비들을 모신 곳이 忠烈祠이다. 이들 14의사는 父子, 만나고 後學을 가르치는 장소로 활용한 것이 兄弟, 叔姪, 從兄弟 사이로 나라가 위기에 처 오늘 날 인근 주민은 물론 도시 사람들의 휴 했을 때 몸을 던져 이 지역을 守護한 密陽朴 식처로 각광받고 있는 柳湖蓮池이다. 氏 一族으로, 爲國忠節의 龜鑑이 되고 있다. 1919년 이 정자에서 400여명의 鄕內儒林의 경내에는 崇節門, 龍岡書院, 尙義堂, 自靖堂, 주축으로 忘軒 慕軒 형제를 기리는 君子亭講 東齋 輔仁堂, 西齋 龍岡齋, 麗忠祠, 忠烈祠, 龍 學契 를 創契하여, 매년 음 8월18일을 정일로 岡池, 龍淵亭 등 文化財 건물들이 우뚝우뚝 서 모여 經典을 講誦하고 詩를 지어 읊기를 한해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112호 일정에 따라 풍각면 소재지 우리식당 에 도 착하여 편안하게 점심을 먹고난 후 昌寧 芙蓉 _31 하고 서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경내를 둘 러보았다. 亭으로 향했다. 국도를 따라 풍각초교를 지나 勿溪書院은 처음에는 창녕군 대지면 왕산에 멀리 비티재 낙타봉 수복산을 바라보며 대자 影孝祠로 건립되어 千里負屍 효행으로 들어난 연을 벗 삼아 꼬불꼬불 산 고개를 넘어 창녕 侍中公 成松國 선생을 향사하여 온 것이 그 芙蓉亭에 도착했다. 嚆矢이다. 英祖 5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 을 서원으로 만든 다음 勿溪書院으로 호칭하 경남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에 위치한 芙蓉 였다. 고종 8년 훼철되었으나 1995년 5월에 亭은 경상남도문화재 자료 제248호로 지정되 복원되어, 侍中公을 주향으로 成三問, 成聃壽, 어 있다. 宣祖 15년 창녕현감이던 寒岡 鄭逑 成守琛, 成運, 成悌元, 成渾, 成允諧 등의 學問 先生이 講學道場으로 이 정자를 創建하였다, 과 德行을 추모하기 위해 7위의 위패를 모셨 山紫水明한 위치에 있는 이 정자를 先生께서 다. 그 후 成汝完, 成熺, 成守慶, 成文濬, 成灠, 는 자신의 門徒인 成安義에게 이양되어 사용 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순종 14년에 하다가 1727년 불에 탄 뒤 正祖 4년에 重建 成安義, 철종 8년에 成準得을 추가 배향되어 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55년 復 모두 21位를 배향하고, 해마다 2월 中丁日에 元하였다. 경내의 은행나무아래서 本院 尙德文 春享祭를 올리고 있다. 化大學 學長이신 李源鈞선생이 芙蓉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널찍한 대지에는 사당인 崇德祠와 顯道門, 神三門, 講堂, 中浮堂, 東齋, 西齋, 典穀廳, 永 의병장 芙蓉堂 成安義는 本貫은 昌寧이고 寶閣, 無邊樓, 院庭碑閣, 庫直舍등 14개의 건 字는 精甫이며 號는 부용당이다. 31세가 되던 물이 들어서 있으며, 창녕성씨종중에서 관리하 宣祖 24년 대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고 있다. 40여분 동안 경내와 주변을 돌아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녕에서 의병 5.000명 을 모집, 각지에서 왜적과 싸워 큰 功을 세웠 고 다음 일정인 우포늪으로 향했다. 다. 持平 등을 거쳐 南原府使를 지내고 光海君 4년 光州牧使를 거쳐, 仁祖反正 후 司成 등을 지내고 李适의 變亂 때 王을 公州로 扈從한 功8로 通政大 에 올랐다. 현재 影幀閣에 있 는 影幀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로 지 정되어 있으며, 芙蓉堂逸稿가 있다. 우리 일행 은 아쉬움을 남긴 체 다음 일정인 勿溪書院으 로 발길을 돌렸다. 경남 창녕군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 이방면 오후 2시30분경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소재 안리, 대합면 주매리 일원에 걸처있는 牛浦늪 勿溪書院에 도착했다. 안내자의 인도로 退溪學 은 원시 자연이 숨 쉬는 곳이다. 우포늪은 낙 釜山硏究院 이사장을 焚香官으로 모시고 우리 동강 지류인 도평천 유역에 1억4.000만년전 일행은 崇德祠 앞에서 정중하게 焚香再拜를 한반도가 생성될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112호 _32 담수면적 2.3 가로2.5, 세로 1,6 로 국내 관람하고 각자 관람 및 휴식을 취한 후 다음 최대의 자연 늪지다. 1997년 7월 26일 생태 일정인 光山書堂으로 향했다. 계 보존지역 가운데 生態系特別保護區域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된 光山 지정 되었고, 이듬해 3월 2일에는 國際濕地條 書堂은 창녕군 유어면 광산리에 위치하고 있 約 보존습지로 지정되어 세계적인 습지가 되 다. 이 서당은 仁祖 14년에 丙子胡亂이 일어 었다. 우포늪 1.3, 목포늪 53만, 사지포36 났을 때 창녕 일대의 義兵을 모아 南漢山城을 만 쪽지벌14만, 4개 늪으로 이루어져 있 포위한 淸軍을 물리치기 위하여 從軍한 義兵 으며, 1997년 342종의 동, 식물이 서식하고 長 楊暄의 忠義를 기리기 위해 8세손 전환과 있는 것으로 조사 보고되었다. 우포늪은 우포, 9세손 정규 등이 세운 서당이다. 목포, 사지포, 쪽지벌을 총칭 牛浦늪이라 한다. 오후 5시 30분경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 1998년 람사르협약에 등록된 후 환경부 습지 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영산면의 양평해장국 보호구역(1999년), 천연보호구역(2011년)으로 에서 잘 끓인 황태탕으로 夕饌을 즐기고 옛 先 지정되기도 했는데. 우포늪 생태탐방로에서는 賢들의 삶과 行蹟을 찾아 본 感懷를 되새기며 1억4천만년전의 원시 자연 늪의 자연생명체를 알차고 바르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귀로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우포늪 생태학습관 에 올랐다. 에서 우포늪의 사계절에 대한 영상기록물을 登佛國寺吟 李承晩 小少曾聞佛國名 젊을 때 일찍이 불국사 이름을 들었는데, 登臨此日不勝情 막상 오늘 이곳에 오르니 감개무량 하구나. 靑山無語前朝事 청산은 전조의 일을 말하지 않는데, 流水唯傳舊國보 흐르는 물은 오직 옛 신라의 소리를 전하네. 半月城邊春草綠 반월성 가에는 봄풀이 푸르고, 瞻星臺下野花明 첨성대 아래에는 들꽃이 밝게 피었네. 三姓王孫今安在 朴 昔 金 왕손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古壘松陰臥戍兵 옛 싸움터 솔 그늘에 戍兵들만 묻혀있네. 李承晩(1875~1965 황해도 평산) :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初名은 承龍 號는 雩南(우남). 철 저한 친미 반공주의자로 共産主義 粉碎에 앞장서 自由民主主義를 표방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 를 다졌다. 대통령을 4번이나 연임하였으나 4대 대통령 선거의 부정으로 인한 국민적 저항이 원 인이 되어 4 19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에 亡命하여 생을 마감하고 뒤에 국 립묘지에 安葬되었다.
112호 _33 균 열( 龜 아) 이 호 우( 李 鎬 雨 ) 차라리 절망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雅 號 : 爾 豪 愚. 경북 청도 生 (1912~1970). 1995년 경북문화상 수상 초 설( 初 雪 ) 박 권 숙( 朴 權 淑 ) 인제를 넘어 북쪽 한계령 고개턱에서 보았다. 국경으로 몰리어가는 눈, 눈, 눈 순백의 고요한 화해 그 눈부심을 보았다. 바위는 바위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서로의 가슴으로 서로를 묻으며 우리의 동토를 향해 소리 없이 전진했다. 용서하라, 끝없이 이어지는 흰 깃발의 행렬 살과 살이 서로 부딪고 뼈와 뼈가 서로 부딪쳐 힘없이 허물어지는 저 국경을 넘어서 달려왔다. 나부꼈다. 그리고 조용히 얼어붙은 우리의 냉기를 어루만졌다. 숨겨진 불씨가 일 듯 환한 세상이 열리고 이 땅에 빛나는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싱싱한 화해의 꽃송이로 춤출 때 우리도 하나가 되어 희디 희게 쌓여갔다. 경남 양산 生 (1962~) 중앙일보 시조공모 장원작, 2009년 최계락문학상 수상. 휴 전 선( 休 戰 線 ) 박 봉 우( 朴 鳳 宇 )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 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 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 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 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 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 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 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 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 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號 : 秋 風 嶺. 전남 광주 生 (1934~1990).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962년 전라남도문화상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112호 _34 <연재22> 漢 文 文 法 (19) 趙 柄 悟 ( 釜 山 大 外 來 敎 授, 編 輯 委 員 ) - 若 의 用 法 에 대하여 - ~ ~ ~ ~ ~ ~ ~ ~ ~ ~ ~ ~ ~ ~ ~ ~ ~ ~ ~ ~ ~ ~ ~ 若 의 用 法 은 크게 가정부사, 관형사, 2인 칭대명사, 형용사, 접속사, 접미사, 何 와 連 用 하되어 의문부사로 쓰임의 7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이들 用 法 들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예문과 함께 구체적 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 ~ ~ ~ ~ ~ ~ ~ ~ ~ ~ ~ ~ ~ ~ ~ ~ ~ ~ ~ ~ ~ 1. 가정부사 : 만약, 만일. 使 趙 不 將 括 卽 已 若 必 將 之 破 趙 軍 者 必 括 也 [ 史 記, 廉 頗 藺 相 如 列 傳 ] (만약 조나라에서 괄 을 장수로 삼지 않는다면 (곧) 그만이지만, 만 약 (반드시) 그를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 대를 부수는 자는 반드시 괄일 것입니다.) * 括 : 묶을 괄. 若 臧 武 仲 之 知 公 綽 之 不 欲 卞 莊 子 之 勇 冉 求 之 藝 文 之 以 5 樂 亦 可 以 爲 聖 人 矣 [ 論 語, 憲 問 ] (만일 장무중의 지혜와 공작의 탐욕치 않는 것과 변장자의 용맹과 염구의 才 藝 에다가 禮 樂 으로 文 采 를 내면 또한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綽 : 너그러울 작. * 文 之 : 문채를 내다 여기서의 之 는 대명사가 아니라, 앞 의 말을 타동사로 만드는 접미사로 보거나 아 니면 명사를 동사화한 것으로 본다. 2. 관형사 : 이같은, 그런, 그의. 君 子 哉 若 人 尙 德 哉 若 人 [ 論 語, 憲 問 ] (군자 로구나! 이러한 사람이, 덕을 숭상하는구나! 이런 사람이) * 若 而 도 若 과 뜻이 같은데, 若 而 人 는 그 뜻이 이와 같은 사람 이나 아 무개 이다. 孔 子 生 不 知 其 父 若 母 匿 之 [ 論 衡, 實 知 ] (공 자는 태어나서 그의 부친이 누구인지를 몰랐 고 그의 모친도 그 사실을 숨겼다.) * 匿 : 숨길 닉. 3. 2인칭대명사 : 너= 爾, 女. 若 勝 我 我 不 若 勝 若 果 是 也 我 果 非 也 邪 [ 莊 子, 齊 物 論 ]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을 이 기지 못한다면 당신은 과연 옳고 나는 과연 그르다고 하겠는가?) * 邪 (= 耶 ) : 어조사 야. 4. 형용사 : 같다.= 如 與 其 病 後 能 服 藥 不 若 病 前 能 自 防 [ 明 心 寶 鑑, 省 心 篇 上 ] (병이 난 후에 약을 먹기보다는 병 이 나기 전에 스스로 예방하는 것만 못하다.) 5. 접속사 : 및(=그 밖에, 또), 이에(= 乃 ) 子 若 孫 [ 漢 書 ] (아들 및 손자) 若 能 有 濟 也 [ 國 語 ] (이에 능히 구제함이 있다.) 6. 접미사 : 앞 말을 의성어나 의태어로 만들어주는 역 할을 하는 접미사. 이런 역할을 하는 접미사로 는 然, 焉, 如, 爾 등이 있다. 空 空 如 也 : 어리석은 모양, 무식한 모양, 私 意 가 없는 모양. 自 若 : 氣 色 이 태연한 모양. 7. 何 와 連 用 되어 의문부사 로 쓰임 : 若 何 (= 如 何, 奈 何 ) : 어찌, 왜, 어떻게. 不 能 正 其 身 如 正 人 何 [ 論 語, 子 路 ] (그의 몸 [자신]을 바르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겠는가?)
112호 _35 - 硏究院 消息 敎養人의 育成이 先進化의 기본 - 國學講演會 盛了 - 5 일정과 장소 등에 관한 사항을 主議題로 한 이날 회의에서 금년도 선적순례는 예년과 달리 당일 행사로 5월 23일 시행키로 의결했 으며 순례지는 경북 청도와 경남 창녕 지역의 선적지를 둘러보기로 결정하였다. 第119次 理事會 - 신임감사에 裵政一 운영위원 선출 - 우리것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本院이 主催하고 釜山廣域市가 後援한 가운데 마련된 2012년도 國學講演會가 지난 6월 27일 부산일보사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제119차 이사회가 지난 5월 18일 본원 회 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임기 만료 된 鄭沃錫 감사 후임으로 裵政一 運營委員을 신임감사로 선출 했으며, 國學講演會는 6월 하순경 개최하되 演士 초빙에 관한 사항은 李圭衡 이사장에게 위임하기로 의결하였다. 退溪의 爲己之學과 국민교양 함양과 선진 화의 방도 라는 題下의 講演에서 趙甲濟 연 사는 王朝국가의 주권자는 上帝이지만 민주 국가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退溪선생은 王을 교육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국민 第27次 先蹟巡禮 제27차 선적순례가 본원과 부산담수회, 박 약회부산지회 합동으로 거행되었다. 을 교양인으로 육성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 지난 5월 23일 하루 일정으로 진행된 선적 본이다. 敎養(교양)이란 知識을 가르치고 기른 지 순례행사는 오전 8시 회관 앞을 출발하여 다는 뜻이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끝나지 않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 새마을운동발상지 고 그 지식을 길러서 인간의 品格으로 昇華시 기념관을 시작으로 追遠齋와 君子亭(유호연지) 킨다는 뜻이다. 지식이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 - 龍岡書院 - 창녕 芙蓉亭 - 勿溪書院 - 우 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자라나 행동으로, 습관 포늪 - 光山書堂 순으로 진행되었다. 으로, 인격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敎養은 실 천을 전제로 하는 지식 체계이다. 라고 역설하 였다. 運營委員 會議 금년도 첫 운영위원 회의가 지난 4월 18일 (水) 풍미초밥에서 개최되었다. 금년도 先蹟巡
新入會員 紹介 李 文 浩 (炫林) 金 一 均 (法山) 貫鄕 : 載寧, 1941年生(辛巳) 原籍 : 경남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住所 : 부산시 북구 화명3동 롯데낙천대@ 104-1503 貫鄕 : 商山, 1948年生(戊子) 原籍 : 경남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住所 : 부산시 기장군 정관신도시 해모로@ 1611-901 051-361-8078, 010-8980-8063 052-277-7725(社), 010-8522-1112 尹 五 木 (隱谷) 貫鄕 : 坡平, 1964年生(甲辰) 原籍 : 전북 김제시 상동동 住所 : 부산시 서구 토성동1가 11-36 벽곡서예 - 趙昌奎 교수 博士學位 취득 - 051-253-6516, 010-2571-6102 우리원의 禮學講義 담당 조창규 교수가 지난해 8월 경성대학교 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朝鮮前期의 濂洛 詩風의 漢詩 硏究 이다. 後半期 舍廊房 運營日程 月日 9/27 10/29 主 題 日新其德의 삶에 대하여 世宗 聖君의 慧眼과 우리말글의 현실 發表者 許宗烈 金泰詢 月日 11/27 12/27 (오후 2시30분 ~ 4시) 主 題 位次에 대하여 世와 代에 대한 또 다른 見解 發表者 薛宗潤 朴淳燁 編輯長의 辯 이번 112호는 우리 院報에 처음으로 두 분 元老의 글을 맞이하게 되어 반갑고 고맙습니다. 洛川 先生의 三田渡의 恨 은 부끄러운 과거도 歷史의 眞實로서 外面할 수 없음을 깨우쳐, 後人들에게 준엄 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金正基박사의 上林 숲의 歷史的 意義 는 新羅末의 국제적 碩學 崔孤雲先生의 빛나는 詩文과 愛民의 治績을 소상히 일러 주셔서, 자랑스런 先哲을 눈앞에 뵙는 듯합니다. 九旬을 앞 둔 두분께서 더욱 老益壯하시어 왕성한 筆力을 보여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 나라엔 知識人은 많지만 敎養人은 드물다. 修己가 안된 채 治人治國에 나서는 厚顔이 아닌 지? 政治에 뜻 둔 분들은 出處 에 대한 냉철한 自己反省을 해보시지요. 言의界의 巨擘 趙甲濟大記者 의 國學講演 要旨를 味讀해 봅니다. 신라의 三國統一과 대한민국의 建國을 폄하하는 지도층의 無敎養 은 국민교육에 어떤 이바지를 할는지요? 敎養人의 말은 信義가 있습니다. 교양인이 가득한 나라가 先 進國입니다. 仔詳하게 先蹟踏査記를 써 주신 李道羲先生 수고하셨습니다. 그 土요일 맑은 대낮, 東萊鄕校 明 倫堂 앞뜰에서 거행된 婚禮式에서 衣冠을 정제하고 차분히 집례하시던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그날 新 婦가 西洋 白人이었기에 우리의 傳統婚禮式이 더욱 빛나더이다. 心遠先生의 古典의 숲 두번째가 나갑니다. 兪英玉교수의 三國史記 소재 人物 와 함께 갈수록 읽을 맛이 납니다. 戒盈盃! 修身齊家의 基本이겠지요. 또한 王子好童과 劍君의 孝와 義理가 [詢] 아름답고 애틋합니다그려. 생명은 지구처럼 무겁고, 舜임금의 大孝도 있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