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 洋 學 第 57 輯 (2014 年 9 月 ) 檀 國 大 學 校 東 洋 學 硏 究 院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 52)박 선 미*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필자가 그동안 제기해온 완충교역모델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위만조선을 테스팅 모델로 하여 이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완충교역모델은 한국초기국가의 교역을 설명하기 위한 고유의 교역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시도에서 개발된 것이다. 본문에서는 세계체제론적 개념인 중심지-준주변(혹은 반주변)-주변이라는 용어를 지양하고 대신 중심지 와 주변지역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에서 소위 준주변으로 불리는 정치체를, 필자는 그 내부의 독자성과 자치성 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준중심지로 부르고, 한국초기국가 중 위만조선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준중심지로서 수행한 교역의 특징과 그 의미를 완충교역이라는 모델로 설명하였다. 기원전 2세기, 동북아시아에는 물자와 재화가 들어오고 나가는 문류 흐름의 중심지로서 漢 이 존재하였으며, 그 동북쪽에 이웃한 정치체들은 한과의 公 的 및 私 的 교역을 통해 한에서 제작한 문물이나 혹은 서역 문물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에 인접한 위만조선은 준중심지로서 물자의 흐름을 통제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기원전 3~1세기 한반도의 고고학 자료는 준중심지로서 위만조선이 완충교역을 수행하 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제어] 위만조선, 한, 진국, 완충교역, 세계체제론, 중심지, 준중심지, 주변 목 Ⅰ. 머리말 Ⅱ. 위만조선의 교역 관련 논의 Ⅲ. 완충교역모델의 이론적 배경 차 Ⅳ. 모델의 적용:위만조선 Ⅴ. 맺음말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 / smpark@nahf.or.kr - 73 -
2 東 洋 學 Ⅰ. 머리말 고대한국에서, 그리고 고대동아시아에서 국가와 국가 간 혹은 정치체와 정치체 간의 교역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은 무엇인가? 국내학계에도 잘 알려져있다시피 1970년대 초 월러스타인(Immanuel M. Wallerstein)의 세계체제모델(World-System Model)은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국가간 상호작용을 핵심과 주변이라는 비대칭적 관계의 확장으로 설명한 것이었고, 이것을 고대국가의 경제체제에까지 확대 적응해 보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와 비판이 있어왔다. 1) 여전히 그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지만 세계 체제모델에 대한 핵심적 비판 가운데 하나는 주변지역에 위치한 교역 당사자의 능동성과 내부의 역동성이 간과되었다는 점이었으며, 이를 위한 대안모델로 거리-균등모델(Distance-Parity Model)과 무역-디아 스포라모델(Trade-Diaspora Model), 동급 정치체 상호작용 모델(Peer Polity Interaction Model)이 제 기되었다. 국내학계에서는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모델을 원용하여 한반도의 문화변동을 설명하려고 한 시도가 있었 고, 2) 진 변한 정치체의 상호작용을 동급정치체 상호작용 모델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3) 서구학계의 교역모델을 원용하여 국내 사례연구에 적용한 것은 1980년대 초 위만조선의 교역을 중심지교역이론으로 설 명한 것이 4) 처음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한국고대사회가 수행한 교역을 서구이론에 대입하여 보편 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였으며, 나아가서는 한국고대사회에 적용할 교역이론의 모색과 탐색의 의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서구이론에 대한 치밀한 검토 없이 이론의 일부 내용을 전부인 것처 럼 해석하여 적용함으로써 교역의 외향적인 양식에 집중하게 된 결과를 낳았고 실제 한국고대사회가 수행했 던 교역의 성격이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 소홀했던 감이 없지 않았다. 또한 서구학계의 교역에 대한 이론적 동향과 논의를 살피고 이를 한국고대사회에 적용시켜보려는 것에 만족하고 한국고대사 고유의 모델 이나 이론을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은 미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필자는 한국고대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고유의 교역모델 정립을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완충교역모 델을 가설로 세워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된 위만조선의 교역 내용과 성격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 학계의 일부에서는 완충교역모델이 서구학계에서 제기된 것으로 오인한 경우도 왕왕 있었던 바, 본고에서는 기왕의 위만조선을 사례로 하여 완충교역모델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것이 향후 이 모델 이 다른 지역의 고대 교역사례에도 적용가능성이 있는가를 타진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본문에서는 위만조선을 둘러싼 교역 논의를 살펴본 후, 가설로 세운 완충교역의 결과가 고고학 자료에 어 떻게 나타나는가를 일별함으로써 필자가 제기한 기존의 견해를 보강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1) 박선미, 서구학계의 고대교류사 이론의 현황, 한국고대사연구 73, 2014, 191~230쪽. 2) 이성주, 청동기시대 동아시아 세계체계와 한반도의 문화변동, 한국상고사학보 23, 1996, 7~78쪽. 3) 우병철 김민철, 궐수형철기를 통해 본 진 변한 정치체의 상호작용-대등 정치체 상호작용 모델(peer polity interaction model)의 적용-, 한국상고사학보 65, 2009, 75~105쪽. 4) 최몽룡, 고대국가성장과 무역-위만조선의 예,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85, 57~76쪽. - 74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3 개별 고고학 자료에 대한 논의는 이미 별고 5) 를 통해 다루어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詳 論 하지 않기로 한다. 현학들의 叱 正 을 바란다. Ⅱ. 위만조선의 교역 관련 논의 위만조선에 초점을 맞춘 교역 논의는 많지 않다. 이 분야의 논의는 1980년대 이후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만큼 최몽룡의 중심지무역론 6) 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중심지무역론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램버그 칼롭스 키(C. C. Lamberg-Karlovsky) 교수 7) 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사회가 수행한 교역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세 가지 무역양식 가운데 하나인 중심지무역이론을 원용하여 위만조선에 적용시킨 연구이다. 중심지무역론은 위만이 한반도 북쪽이라는 지리적 요충지의 이점을 이용하여 막대한 흑자를 보고 이를 토 대로 국가를 세우고 성장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이다. 漢 과 辰 國 (또는 衆 國 ) 사이에 위 치한 위만조선이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였고 한편으로는 이들 사이의 무역을 통제하였던 것으로 해석 한다. 이 견해는 램버그 칼롭스키가 제안한 직접접촉교역(Direct Contact Trade), 교역(Exchange, 또는 Indirect Contact Trade), 중심지교역(Central Place Trade)이론 중에서 중심지교역 부분을 도입하여 위만 조선의 교역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眞 番 旁 辰 ( 衆 ) 國 欲 上 書 見 天 子 又 擁 閼 不 通 을 위 만조선이 중국 내륙의 한과 한반도의 濊 진국 사이에서 무역을 통제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위만조 선이 교역과정에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중심지무역은 상품이나 자원이 어느 한 쪽에서 생산되었거나 획득되었을 때 명백하게 나타 나게 되는데, 중심지로서의 C는 A와 B지역의 영향권 밖에 위치하여 A와 B장소에서 원하는 생산수단이나 자 원을 임의로 통제할 수 있다. C는 다른 중심지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옮겨주거나 자신들의 물품이나 자원들 을 수출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심지로서의 C가 A와 B의 영향권 밖에 위치한다는 점으로 A와 B 지역에서 원하는 생산수단과 자원을 통제한다는 부분이다. 즉 중심지인 C는 상품을 필연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담보로 하여 정치적으로 교역 대상국을 통제할 만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에 근거할 때 당시 동북아시아에 한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단위 교역망 안에서 위만조선이 한 과 대등한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는가는 의심스럽다. 중심지무역론은 고조선의 교역을 한반도와 그 주변이라는 틀에서 설명할 경우에 적용가능하지만 고조선의 주요 교역대상지역인 중국 내륙을 포괄할 경우 에는 한계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고조선이 중심지로 기능했느냐의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남만주와 한반 도에서 발견되는 명도전의 차별적 분포는 물론 교역의 당사국인 한, 위만조선, 진국(혹은 衆 國 )에서 나타나는 5) 박선미, 교역품의 양적 분석을 통한 위만조선의 완충교역 연구, 동양학 50, 2011, 93~117쪽. 6) 최몽룡, 앞의 글, 1985, 57~76쪽. 7) C. C. Lamberg-Karlovsky, Trade Mechanisms in Indus-Mesopotamian Interrelations,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92, No.2, 1972, pp.222~229. - 75 -
4 東 洋 學 고고학 자료를 중심지무역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위의 세 정치체가 대표적 으로 존재했던 중국 내륙, 한반도 서북부, 한반도 중부이남에는 화폐와 철기 등에서 차별적인 분포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지무역론이 학계에 미친 영향은 컸으며 학사적 의미도 남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외국의 교역이론을 도입하여 처음으로 고조선의 교역문제에 접근하였다는 점 외에도 명도전을 위만조선과 한의 교역관계를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로 제시함으로써 명도전의 출토를 연의 강역범위와 연결시키려는 기 존의 경향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역망 안에서 위만조선은 한 혹은 외부의 선진문물을 먼저 수용하고 이웃 정치 체들에게 전달했다. 이 점에서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이 수행한 교역의 주 요 대상이 한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틀도 한반도에서 벗어나 동북아시아라는 좀더 넓은 무대 에서 이루어진 교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심지무역론은 극복되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위만조선의 교역을 본격적으로 다룬 또 하나의 연구는 최근에 필자에 의해서 제기된 것으로 완충교역모 델 8) 을 가설로 세워 설명한 것이다. 이 견해는 기원전 3~2세기대 한반도 서북부와 중부이남에서 발견되는 고 고학 자료의 차별적 분포를 주목하고 이를 문헌기록과 함께 교류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다 음 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완충교역모델은 향후 보완해야할 과제가 많지만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하여 펼쳐 친 한, 위만조선, 진국 사이의 교역을 외면적인 형태와 내면적인 내용 및 성격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연구사적으로는 한국고대사 고유의 교역모델을 시범적으로 제안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 겠다. 완충교역모델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므로 중언부언을 피하기로 하고 대신 최근에 발표 된 논문 한 편을 더 살펴보자. 위만조선에 대한 專 論 연구는 아니지만 고조선의 교역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견해가 발표되었다. 모피 무역과 명도전을 연결하여 고찰한 강인욱의 글인데, 9) 이 글은 위만조선을 명기하지 않고, 연대도 기원전 7~3세기대의 교역을 검토한 것이지만, 管 子 揆 度 篇 10)에 기록된 發 朝 鮮 의 문피와 명도전을 연결시킨 것을 보면 위만조선 전후 시기의 교역과도 상관성을 갖는다. 어쨋든 이 글에서 주목되는 점은 압록강유역에서 한 반도 서북부에 분포하는 명도전유적을 고조선 내부에서 이루어진 산악지역과 고조선 사이의 모피무역에 의 한 산물로 파악하고, 고조선은 모피를 산지에서 구해서 취합하는 소매상(Tradesman)과 모피를 가공하거나 취합해서 공급하는 중개인(Middleman)이 존재하는 이중교역체제(Dual Trade System)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 부분이다. 고고학적으로는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유적, 遼 寧 省 寬 甸 雙 山 子 유적 등과 같이 주변에 별다 른 주거의 흔적이 없이 교통로 근처에서 철기 및 위신재 등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는 소매상의 존재를, 吉 林 8) Sunmi Park, Buffer Zone Trade in Northeast Asia in the Second Century BC, The Journal of Asian Perspectives Vol.51-2, University of Hawaii Press, USA, 2012, pp.221~250. 박선미, 앞의 글, 2011, 93-117쪽. 9) 강인욱, 古 朝 鮮 의 毛 皮 貿 易 과 明 刀 錢, 한국고대사연구 64, 2011, 243~284쪽. 10) 管 子 23, 揆 道 篇 第 78. 桓 公 問 管 子 曰 吾 聞 海 內 玉 幣 七 筴 發 朝 鮮 之 文 皮 一 筴 也. - 76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5 省 桓 仁 抽 水 洞 유적과 같이 수계에 위치하며 산간지역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소형의 주거유적의 경우는 중개 인의 존재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 연구는 모피를 중심으로 하는 교역에서 소매상과 중개인을 상정하고 이들이 각각 다른 지리적 위치를 점유하면서 누층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줌으로써 고조선의 모피무역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모피가 일종의 위세품이자 부의 상징품으로서 지배층에 의해 장기간 교역되었을 가능성 이 있으므로 명도전을 매개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모피의 산지와 명도전의 분포관계를 통해 소매상과 중개인을 상정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기한 이중교역체제 의 개념도 모호하다. 본문에서 제기한 고조선의 무역시스템이 가졌던 복잡한 이중적인 구조 를 이중교역체제라고만 명명하였을 뿐 이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의와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향후 보다 진전된 연구를 기대해 본다. 이상의 연구 가운데 중심지교역론은 사실상 교역의 외면적 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으로는 교역의 내용과 성격을 설명할 수 없다. 당시 교역망을 구성했던 한, 위만조선, 진국 사이에서 진행된 교역은 특정 유물의 지역적 분포에서 차별성을 낳게 하였고 지역 정치체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교류사적 관점에서 이를 설명할 교역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완충교역모델은 이러한 학문 적 요구에서 제안된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를 위한 작업틀과 이론적 배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Ⅲ. 완충교역모델의 이론적 배경 동북아시아의 경우 핵심지역에 근접해 있던 반주변부의 정치체는 핵심지역의 정치체보다는 덜 복잡하지만 주변부의 정치체보다 좀더 중앙화된 복합사회로 특징된다. 이러한 지위에 있는 경제를 Dendritic Political Economy라고도 부르는데, 11) 이들은 핵심지역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피동적 수용자로 묘사되는 월러스타인 의 반주변지역에 대한 개념과는 달리 자치성을 가지면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핵심지역과 주변지역 사이에 오가는 물자의 흐름을 조절, 혹은 통제함으로써 정치, 경제적인 완충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이들 정치체가 특정 정치체에 의한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적이며, 능동적 수용자로서 중심지와 접 촉하는 한편 주변의 이웃 정치체와의 교역을 일부 통제하였다는 점에서 준중심지로 부른다. 중심지역, 준중 심지역, 주변지역에 위치한 이웃한 정치체들 사이에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는 곧 사회, 정치적 변동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완충교역모델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11) Robert S. Santley and Rani T. Alexander, The Political Economy of Core-Periphery System, Resources, Power, and Interregional Interaction, edited by Edward M. Schortman and Patricia A. Urban, New Your Plenum Press, 1992, pp.25~31. - 77 -
6 東 洋 學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B(Buffer Zone)가 고도로 발달된 국가 C(Center)와 복합사회 단계에 있는 주변지 역 P(Periphery) 사이에서 교역을 수행한다. C는 재화와 용역의 집산지로서 주변지역에 이를 공급하는 센 터, 즉 중심지로 정의된다. B는 지리적으로 C의 배후에 있거나 혹은 C와 P 사이에 위치한다. P는 지리적으 로 C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각 지역에는 하나 혹은 다수의 정치체가 존재할 것이지만 중심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정치체가 핵심부로 등장한다. 이 모델에서 B는 C로부터 재화와 물자를 공급받고 그 일부를 이웃 정치체들에게 공급한다. B와 C사이에 는 직접교역이 이루어지며, B는 조약과 같은 것을 통해 C의 상품에 대한 독점권을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 다. C가 B와 교류관계를 맺는 이유는 경제 외에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 복합적일 수 있다. 주변에 위치한 P는 B의 중개를 통해 C의 상품을 조달한다. 이 경우 B와 C사이 및 B와 P사이에는 직접교역이, C와 P 사이 에는 간접교역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교역형태에서 B는 P로 제공되는 재화의 양을 조절하고, 주변지역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를 통해 B는 세력을 확장시킨다. P는 B와 제한적인 교류를 하지만, 결과적으로 新 文 物 에 의해 받게 될 문 화충격이 B를 거치면서 완화되므로 자신의 세력과 토착문화를 운영하기 위해 B를 이용하게 된다. 이 교역체 계 안에서 C와 B와 P는 모두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완충교역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B가 멸망하면 C와 P사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P는 C와 직접교역을 하게 된다. 이것은 P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변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완충교역체계 안에서 B와 P로 수입된 C의 상품을 비교해보면 B에 더 많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B와 C사이에는 완충지대가 없기 때문에 B는 C의 물질문화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이것은 B의 물질문화가 어느 정도 C와 유사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교역의 규모나 직접 혹은 간접교역을 막론하 고 모든 교역에는 교환되는 물질뿐만 아니라 상징이나 가치체계, 정치와 종교적 개념들, 예술 등 정신적 문 화 요소들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P에서는 적은 양의 외래물품이 발견되는데, 이는 B가 거래에 개입하기 때 문이다. 물론 중심지에서의 거리에 따라 수입량도 반비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당시의 교역관계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우려를 범할 수 있다. 실재로 위세품이나 희귀한 소재의 경우 원산지와의 거 리에 상관 없는 분포를 보이기 때문이다. B가 소멸된 이후 P에는 재화 도달범위와 상관없이 C에 대한 수입 량이 증가한다. 이는 C와 P의 거래에서 B가 관여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B가 단순한 중개 무역이나 중계무역을 하였다면 C의 물품은 최종 목적지인 P에서 더 많이 발견되게 될 것이다. C의 물품이 P보다는 B에서 더 많이 출토되는 것도 B가 완충교역을 하였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은 중계무역과 중개무역은 서로 다른 용어이자 개념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무역의 주체가 되는 의미가 있는 반면 후자는 양자의 거래를 성사시킨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동안 이를 구분 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혼란을 보여온 바도 없지 않은데, 이를 엄격히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한편 교류에서 완충지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례는 두 가지가 발견된다. 첫째는 로마와 자유독일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에 대한 롯데 헤데아거(L. Hedeager)의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마야 저지대 와 고지대에 위치한 초기사회의 교역을 다룬 윌리엄 라쩨(William L. Rathje)의 연구이다. - 78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7 헤데아거 12) 는 유럽에서의 교역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로마와 자유독일 사이에 분포하는 교역품을 검토하 였다. 그는 로마산 수입품이 자유독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로마로부터 거리가 멀어질수록 적은 분포를 보이고 자유독일에 와서야 다수가 발견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로마산 수입품이 희소 혹은 부재한다는 측면 에서 로마와 자유독일 사이의 지역을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일종의 정치적 공백지대로서의 완충 지대로 산정하였다. 라쩨 13) 는 하나의 정치체가 어떻게 복합사회로 발전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저지 대와 고지대 사이의 교역을 검토하였다. 그는 자원이 빈약한 저지대에 위치한 정치체가 자원이 풍부한 고지 대의 정치체와 교역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사회-정치 조직을 가진 마야문명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저지대를 완충지역(Buffer Zone)과 완충지대에 의해 둘러싸인 중심부(Inner Core 또는 Central Area)로 구 분하고, 중심부의 정치체가 고지대와의 교역을 위해 완충지대의 정치체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지리적 불리함 을 극복하고 완충지대와 고지대의 구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조직들을 형성하였는데, 이것 이 저지대의 정치체로 하여금 복합사회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작용했다고 본 것이다. 사실 라쩨의 중심부는 보 통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가치평가 된 핵심 혹은 중심적 역할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고, 다만 발달된 외 부세계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내부 라는 지리 및 공간적 개념이다. 그리고 완충지대는 내부 사회와 바 깥 사회의 사이에 존재하는 지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헤데아거와 라쩨는 비록 교역에서 완충지대를 주목하기는 하였으나 완충지대에 존재했던 정치체가 교역에서 담당한 역할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의 완충지대는 1) 통합된 국가가 不 在 한 일종의 정치적 공백 지대이며, 2) 자원집산지와 접경된 바깥쪽에 있으면서 외부로부터 한 지역을 격리시키는 지대를 의미한다. 즉 지리적으로 두 지역 사이에 끼어 있는 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본고에서 제기하는 가치평가 된 의미로 서의 완충 과는 다르다. 필자가 제기한 완충교역모델의 핵심은 하나의 교역망에 존재했던 정치체를 모두 고려하면서 완충지대의 B라는 정치체가 준중심지로서 중심지 C로부터 공급받은 재화와 물자를 주변 P에게 전달해주되, 그 흐름을 일부 조절하고 통제하며, 이 과정에서 B는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P는 자신의 세력과 토착문화를 保 持 하고 운영한다는 점이다. 말그대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수준의 발전단계(혹은 같은 수준의 발전단계)에 있는 정치 체 사이에 또 다른 정치체가 존재(혹은 개입) 함으로써 교역의 흐름과 토착문화 사이의 균형을 조성한다. C 가 B와 교역하는 동인은 경제적인 측면 외에도 다양하다. 현대사회와는 달리 고대사회에서 경제는 정치, 사 회,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요구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충이라는 용어 혹은 완충지대라 는 용어는 지리적 개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인 개념으로서의 완충을 의미한다. 지리적 의미에서 B는 완충지역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B의 일부가 완충지대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12) L. Hedeager, A Quantitative Analysis of Roman Imports in Europe North of the Limes(0~400 A.D), and the Question of Roman-Germanic Exchange, New Directions in Scandinavian Archaeology(K. Kristiansen & C. Paluden-Müller eds.), National Museum of Denmark, Copenhagen, 1978, pp.191~216. 13) William L. Rathje,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Lowland Classic Maya Civilization, American Antiquity 36, No.3, 1971, pp.275~285. - 79 -
8 東 洋 學 완충교역모델에서 각 지역의 위치와 교역품의 흐름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완충교역모델에서 중심지 물자의 흐름 Ⅳ. 모델의 적용:위만조선 1. 기원전 3~1세기대의 고고학적 배경 위만조선 이전과 위만조선 시기 남만주와 한반도의 고고학적 환경은 다음과 같이 특징지울 수 있겠다. 첫 째, 남만주의 경우 주거지, 무덤, 철기, 청동기, 토기 등에서 전국시대 이래의 특징과 토착적인 요소가 복합 적으로 나타난다. 일종의 복합문화지대가 형성된다. 둘째, 한반도 서북부의 경우 무기류와 농공구류를 중심 으로 하는 戰 國 系 철기가 다량으로 분포하는 한편 주거지, 무덤, 토기, 청동기는 여전히 토착의 전통을 따르 고 있다. 셋째, 한반도 중부 이남의 경우 간단한 형식의 농공구류를 위주로 하는 철기가 소량 발견된다. 넷 째, 중국 내륙에서 제작, 유통된 화폐가 남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로 확산되고, 한반도 중부 이남으로는 확산되 지 않는다. 14) 비록 위만조선과 한의 경계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의 고고학 자료는 위만조선이 요하 이동 지역에 대하여 일정정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요하 이동의 고고학 자료는 토착 문화에 전국계통과 북방 유목민 계통의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필자가 위만조선이 이 지역의 일부 를 관할하였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며, 이 지역을 華 夷 雜 居 의 지역으로 보거나 15) 혹은 연, 제, 조의 유이민 14) Sunmi Park, op. cit, 2012, pp.226~236. - 80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9 들에 의해 점유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16) 근거가 되기도 하다. 위만조선의 수도로 지목되는 평양일대와 주변의 서북한 지역은 세형동검문화라는 기존의 토착 청동기문화 를 기본으로 하되, 다량의 철제 무기와 농공구류가 추가된다. 이들 철기는 전국시대의 전통을 이은 漢 式 철 기들이다. 이와 함께 포전,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과 같은 중국계 화폐도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무덤에서도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나무곽무덤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첨가되며 기원전 2세기부터는 다수를 차지하게 된 다. 17) 주거지의 경우도 一 자형의 외구들을 가진 주거지에서 ㄱ 자형, 혹은 두개 이상의 구들을 가진 주거지 로 발전한다. 18) 성곽도 평양지역에 다수 분포하는데, 이중에서 평양시 대성구역에 자리잡은 청암동토성을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19) 기원전 2세기 경의 한반도 중부 이남의 고고학 자료는 이 지역에 아직 국가로 발전된 정치체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세형동검과 세문경, 이형동기 등을 위주로 하는 청동기문화가 전성기를 보이고, 여기 에 수입된 간단한 철기가 산발적으로 첨가된다. 무덤의 경우도 기존의 토광묘와 적석토광묘 등이 주를 이루 며 목관묘가 소수 혼재한다. 주거지의 경우도 방형과 장방형의 평면을 가진 수혈식 위주이며, 취락의 규모도 앞 시기에 비하여 커지기는 하였으나 왕성을 상징할 만한 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20) 다음의 <지도 1>은 위만조선과 그 이웃 지역에서 나타나는 차별적인 철기제품의 분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철기 이외에 위만조선에서 발견된 외래물품으로는 동전, 청동제품, 전국계통의 회색 도기, 유리제품 등이 다. 이것들은 대부분 토착의 청동기와 철기를 공반하는 무덤, 주거지, 성곽 등에서 출토된다. 한반도 중부이 남에서는 철기 외의 외래물품 역시 극히 제한적으로 발견된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철기의 사례와 상통한 다. 즉, 한반도 중부 이남으로 수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역품은 漢 鏡, 鼎 등의 청동제품이 있으며, 최근에 발굴된 울산 장현동 및 완주 신풍 등의 예와 같은 유리제품이 있다. 전국계 및 한계의 회색도기는 발견되지 않고 그 영향이 미약하게 나타날 뿐이다. 즉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외래물품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무기류와 농공구류를 위주로 하는 철기, 한 스타일의 도기, 한경, 청동합, 유리제품 등이 한으로부터 위만조선을 통해 수입되었고, 소량의 철제 농공구류와 청동기, 유리구슬 등이 제한적으로 위만조선을 통해 진국으로 2차 교역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세기대의 고고학 자료에는 극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한반도 서북부에서 는 전국시대와 한대에 주조된 화폐의 분포가 평양일대에 집중되는데, 이는 위만조선 시기 압록강에서 대동강 에 이르는 일대에 넓게 산재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한 스타일의 무덤과 유물도 증가한다. 중부 이 15) 田 村 晃 一, 樂 浪 郡 設 置 前 夜 の 考 古 學 (1)- 淸 川 江 以 北 の 明 刀 錢 出 土 遺 跡 の 再 檢 討, 東 アジア 世 界 史 の 展 開 ( 靑 山 學 院 大 學 東 洋 史 論 集 ), 汲 古 書 院, 1994. 16) 박선미, 기원전 3~2세기 요동지역의 고조선문화와 명도전유적, 선사와고대 14, 2000. 17) 리순진,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나무곽 무덤에 대한 연구, 고고민속논문집 8, 1983, 99~158쪽. 18) 최성락, 철기시대의 유적,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97, 396~403쪽. 19) 백종오, 북한학계의 고조선 성곽 연구 동향 단군학연구 14, 2006, 333~360쪽. 20) 최몽룡, 철기시대의 시기 구분,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97, 325~342쪽. - 81 -
10 東 洋 學 1. 평양 낙랑리 2. 평양 정백동 3. 평양 토성동 4. 평남 대동군 5. 평남 강서군 6. 평남 증산군 7. 황남 봉산군 8. 황남 은파군 9. 황남 재령군 10. 황남 신천군 11. 황남 은율군 12. 황남 운성리 13. 황남 배천군 14. 함남 영흥군 15. 함남 함주군 16. 함남 함흥시 17. 함북 무산시 18. 함북 회령군 19. 자강도 토성리 20. 자강도 시중군 21. 충남 당진군 22. 충남 부여시 23. 충남 논산 24. 전북 익산시 25. 전북 완주군 26. 전북 장수군 27. 대구 28. 경산 29. 경주 30. 부산 <지도 1> 기원전 2세기 한반도의 철기 분포도 남에서는 처음으로 한의 화폐가 유입되고 소위 낙랑토기 한경 등과 같은 한 스타일의 유물이 급증하기 시 작한다. 철기의 경우도 수량면에서 현저히 증가한다. 반면 세형동검문화는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흥미 롭게도 문헌에는 진국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삼한이 이를 대신한다. - 82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11 이상과 같이 위만조선 시기와 위만조선 멸망 이후의 시기에 고고학 자료에서 발견되는 차별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위만조선의 멸망을 기점으로 하여 나타나는 고고학 자료에서의 변화는 위만조선이 한과 주변정치체들 사이에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개입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위만조선이 갖는 준중심지로서의 교역 기원전 3세기에 고조선은 燕 과 서쪽 경계를 접하고 있으면서 강역을 다투고 있었다. 중국 내륙에서 秦 과 한이 대립하고 있었을 때는 燕 齊 趙 의 유이민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해갔고,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위 만은 이들 이주민들 가운데 하나의 집단을 이끈 우두머리였다. 고조선의 왕 準 은 위만을 신임하고 그를 박사 에 임명하여 서부경계를 지키며 한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위만은 서변에 체류하면서 이주세 력을 규합하고 세력을 키웠으며, 마침내 준에게 한이 침략한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수도를 침략해 스스로 왕 이 되었다. 이 때 준은 바다 가운데로 도주하였다. 이상이 위만조선의 성립배경이다. 당시 한은 화폐를 기본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고도로 발달된 화폐경제시스템을 발전시켰다. 한의 철기제 작은 오랫동안 분권화된 상태로 운영되었지만, 漢 製 철기는 이웃한 정치체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 었다. 21) 또한 한은 이웃 종족들을 오랑캐로 규정짓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 국제질서를 세웠으며, 이 것은 한이 맺은 국제관계에서 오랫 동안 기본원리로 작동하였다. 22) 바로 이 점이 한으로 하여금 위만조선을 완충세력으로 이용하여 兵 威 財 物 을 증여하면서까지 주변 蠻 夷 들의 入 朝 를 필요하게 하였을 것이고 동시에 이를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게 하였을 것이다. 위만조선은 한이라는 중심지와 진국으로 대표되는 주변지역 사이에 위치하면서 한의 선진문물을 수입한 뒤, 이를 이웃 정치체들에게 제한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세력을 확장시켰다고 생각된다.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의 眞 番 旁 辰 ( 衆 ) 國 欲 上 書 見 天 子 又 擁 閼 不 通 이나 滿 得 兵 威 財 物 이라는 기록을 통해 위만조선이 주변의 여 러 나라가 중원지역과 통교하고자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은 또한 侵 降 其 旁 小 邑 眞 番 臨 屯 階 來 服 屬 方 數 千 里 라 하여 위만이 주변의 소읍을 병합하고 진번과 임둔이 스스로 내속해 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은 위만조선이 준중심지로서의 면모를 갖 추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농공구류를 주요 품목으로 하는 철기와 화폐 등의 존재는 위만조선이 전쟁 등 의 무력적인 환경보다는 한의 화폐를 교환매개로 사용하면서 평화적인 수준에서 무역하였을 가능성을 시사 하고 있다. 진국은 국가 이전의 복합사회 단계에 있었다. 진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주민들을 통치하고 세력을 유지하 기 위하여 자신의 권력을 과시할 상징적 도구로서 위세품이 필요하였고, 위만조선을 통해 부분적으로 조달할 21) Donald B. Wagner, The State and the Iron Industry in Han China, Nordic Institute of Asian Studies, 2001, pp. 33~52. 22) Marshall Sahlins, Cosmologies of Capitalism: The trans-pacific sector of the world system, Culture/Power/History: A Rea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edited by Nicholas B. Dirks, Geoff Eley, and Sherry B. Ortn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pp.412~455. - 83 -
12 東 洋 學 수 있었다. 한과 직접교역을 하지 않은 진국으로서는 대외교역에서 한의 화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군현이 설치되면서 이 둘 사이에 직접교역이 이루어지고 부분적으로 한의 화폐를 수 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폐는 소량이 유입되어 부를 상징하거나 장신구로 사용되었고 상업 거래를 위한 매 개물로 통용되지는 않았다. 하천과 내륙 교통로에 형성된 유적에 산발적으로 분포해 있거나 한 두 닢의 동전 이 출토되는 맥락으로 보아 한에서 유입된 동전은 경제적 의미에서의 화폐라는 기능을 탈각하고 사회적, 이 데올로기적 기재로서 유용되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한동안 위만조선은 한과 우호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한편으로는 이웃 정치체들을 통합하면서 비교적 평화로운 변경을 유지시켰다. 이러한 평화는 위만조선의 손자 우거왕이 蠻 夷 의 입조를 방해하는 등 조약에 위반되는 활동을 벌이자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화친과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한은 결국 침략을 단행하고 위 만조선은 멸망을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만조선과 한의 관계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이 우세적인 지위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무역을 지 배했다거나 위만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위만조선은 외신의 약 을 맺을 정도로 한과는 정치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며 주요 무역 파트너로 서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도 한의 영향력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에 의해 행사된 어떠한 정치 경제적 혹은 군사적 지배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위만조선 멸망 후 한반도 중부 이남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통합 및 분할이 목격되는데, 이 경우도 교역이 중요한 인과관계의 한 요소로 간주될 수 있겠으나, 한이 중심지역으로서 적극 개입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 한반도 내에서 발견 되는 한대 화폐의 산발적 분포를 통해 볼 때 오히려 삼한이 한군현과 교역하면서 선택적으로 漢 物 을 수용하 였다고 생각된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완충교역이 와해된 이후 한반도의 교역체계는 낙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때는 낙랑과 삼한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작용시스템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V. 맺음말 본고에서는 필자가 그동안 제기해 온 완충교역모델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위만조선을 테스팅 모델로 하 여 이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완충교역모델에서는 세계체제론적 개념인 중심지-준주변(혹은 반주변)-주변이라는 용어를 지양한다. 대신 중심지와 주변지역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에서 소위 준주변으로 불리는 정치체를, 필자는 그 내부의 독자성과 자치성 및 능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준중심지로 부른다. 본 문에서는 한국초기국가 중 위만조선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준중심지로서 수행한 교역의 특징과 그 의미를 완충교역이라는 모델로 설명하였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완충교역모델은 한국초기국가의 교역을 설명하기 위한 고유의 모델을 만들어 - 84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13 보자는 학문적 요구에서 제안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이론적 모델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례연 구를 통해 검증되어야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은 하나의 교역망 안에 포괄된 교 역 당사자들을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라는 비대칭적 관점에서의 이분법적인 접근을 극복할 수 있고, 교 역 당사자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교역에 가담하면서 특정 교역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유지시켰음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사회의 내적 역동성과 내재적 발전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사회와 국가가 똑 같은 발전단계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대를 통틀어 사회, 지역, 정치체 사이에는 문화적인 면에서건 혹은 물질적인 면에서건 차별성을 갖는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이들 사이에 때로는 완충지역이 형성되어 중심지역과 주변지역 사이의 관계에 관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들 세 권역의 정치체들은 지배와 예속이라는 비대칭적 관계보다는 오히려 독자성을 가지면서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중심지역, 완충지역, 주변지역 사이의 물자의 흐름을 조절, 혹은 통제함으 로써, 정치 경제 문화적인 균형을 맞추었다. 한, 위만조선, 진국이 형성한 교역망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 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강인욱, 古 朝 鮮 의 毛 皮 貿 易 과 明 刀 錢, 한국고대사연구 64, 2011. 리순진,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나무곽 무덤에 대한 연구, 고고민속논문집 8, 1983. 박선미, 서구학계의 고대교류사 이론의 현황, 한국고대사연구 73, 2014. 박선미, 교역품의 양적 분석을 통한 위만조선의 완충교역 연구, 동양학 50, 2011. 박선미, 기원전 3~2세기 요동지역의 고조선 문화와 명도전유적, 선사와고대 14, 2000. 백종오, 북한학계의 고조선 성곽 연구 동향 단군학연구 14, 2006. 우병철 김민철, 궐수형철기를 통해 본 진 변한 정치체의 상호작용-대등 정치체 상호작용 모델(peer polity interaction model)의 적용, 한국상고사학보 65, 2009. 이성주, 청동기시대 동아시아 세계체계와 한반도의 문화변동, 한국상고사학보 23, 1996. 최몽룡, 철기시대의 시기 구분,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97. 최몽룡, 고대국가성장과 무역-위만조선의 예,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85. 최성락, 철기시대의 유적,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97. 田 村 晃 一, 樂 浪 郡 設 置 前 夜 の 考 古 學 (1)- 淸 川 江 以 北 の 明 刀 錢 出 土 遺 跡 の 再 檢 討, 東 アジア 世 界 史 の 展 開 ( 靑 山 學 院 大 學 東 洋 史 論 集 ), 汲 古 書 院, 1994. Donald B. Wagner, The State and the Iron Industry in Han China, Nordic Institute of Asian Studies, 2001. Hyung Il Pai.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 85 -
14 東 洋 學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Formation Theories,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2000. L. Hedeager, The Evolution of Germanic Society 1-400 A.D., First Millennium Papers: Western Europe in the First Millennium A.D., edited by R. F. J. Jones, Oxford, England, 1988. Lamberg-Karlovsky C.C., Trade Mechanisms in Indus-Mesopotamian Interrelations,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92, No.2, 1972. Marshall Sahlins, Cosmologies of Capitalism: The trans-pacific sector of the world system, Culture/Power/History: A Rea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edited by Nicholas B. Dirks, Geoff Eley, and Sherry B. Ortn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Robert S. Santley and Rani T. Alexander, The Political Economy of Core-Periphery System, Resources, Power, and Interregional Interaction, edited by Edward M. Schortman and Patricia A. Urban, New Your Plenum Press, 1992. Sunmi Park, Buffer Zone Trade in Northeast Asia in the Second Century BC, The Journal of Asian Perspectives Vol.51-2, University of Hawaii Press, USA, 2012. William L. Rathje,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Lowland Classic Maya Civilization, American Antiquity 36, No.3, 1971. * 이 논문은 2014년 7월 25일에 투고되어, 2014년 8월 13일까지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14년 8월 29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4년 9월 3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 86 -
緩 衝 交 易 모델에 대한 理 論 的 檢 討 위만조선의 교역양식 복원을 위한 試 論 15 Abstract The Theoretical Study of Buffer Zone Trade Model for Restoring Wiman Choson s Trade Mode 23)Park, Sunmi* This paper examines the model of Buffer Zone Trade in the semi-core named Wiman Choson from the perspective of local polities in the Korean peninsula. I termed the semiperiphery in the world system theory semi-core, focusing on the internal dynamic of polities, which does not include the trade network of a core. In the second century BC, Han was a center for flowing of goods, commodities, and services, in northeast Asia, and its neighboring polities, directly or indirectly, obtained Han s products and exotic materials of western societies by trading with Han. Wiman Choson was one of those kinds of neighbors. Wiman Choson bordering with Han concluded a formal agreement with Han, and partially monopolized Han s products and luxary goods. It emported advanced material and passed small amount of them to its neighbores like Chin, controlling the quantity and manipulating local leaders. Thereby, it expanded its power and territory. The archaeological data in the third century to the first century BC shows the Buffer Zone Trade of Wiman Choson as a semi-core in the Korean peninsula. [Key Words] Wiman Choson, Han, Chin, Buffer Zone Trade, World Sytem Theory, Core, Semi-core, Peripery * Researcher, Northeast Asian History Foudation - 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