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홍 득 표(인하대) I. 머리말 1. 문제의 제기 정치발전을 논하려면 정당, 의회, 선거, 정치문화 등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정치발전과 상호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개별적 논의보다는 종합적으로 접근해 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발전하려면 우선적으로 정당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정치발전의 핵심과제로 정당개혁을 꼽고 있는 것이다. 정당의 출현은 근대정부의 의심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정당은 사 실상 정부, 특히 민주정부의 형성자(makers)로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정당 이 민주주의를 창출했고, 정당 없는 근대민주주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정당은 단순 하게 근대정부의 부속기관(appendages)이 아니라 근대정부의 핵심이며, 근대정부를 만 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 정당과 정부의 관계나 정당과 민주주의의 상 관성에 대한 논의는 새삼스럽게 끄집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당정치는 민주주의의 기관차, 정당은 시민사회와 정부를 연결해 주는 가교, 민주정치는 정당정치, 정당을 알 면 정치가 보인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 당연하게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은 대의민주정치체제 존속을 위해서 필수적인 제도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근대정부의 출현이나 운영은 물론 대의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제도로서 그리 고 정치적 다원주의를 표현하고 현대 민주정치의 핵심 조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정당이 국민적 불신을 받고 있다.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당에 대한 불신이 커 정당정치 의 위기 라고 할 정도다. 정당의 쇠퇴현상은 정당 환경의 변화와 정당에 대한 시민의 기 1) Elmer E. Schattschneider, Party Governmen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42), p. 1.
4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정당이 고유한 기능을 효율적으 로 수행하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정당이 이익집약(interest articulation)과 정치동원 (political mobilization)의 수단(vehicle)으로서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당파 적 이해를 앞세워 오직 정치권력 추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근대적 의미의 정당이 처음 등장한지 60년이 되었지만 정당에 대한 불신과 정 당정치에 대한 회의론이 대단히 크다. 아직도 정당정치가 초보적 발전 수준에 머물고 있다. 반복되는 창당, 분당, 통합, 해산, 당명변경 등 때문에 정치학자 입장에서도 주요 정당명을 헷갈릴 정도다. 하루살이 정당이나 포말(거품)정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당 조직의 유동성이 매우 높다. 헌팅톤(S. P. Huntington)의 정치발전과 제도화 이론에 비추 어보면 한국 정당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수준은 매우 낮다. 정당의 제도화 수준 이 낮다는 것은 정당의 가치, 질서, 안정성 등이 매우 부실함을 의미한다. 정당이 변화하 는 환경의 도전에 잘 견디는 적응성(adaptability)이 낮다는 것이다. 이는 창당, 분당, 통 합과정을 반복하여 한국 정당의 변동이 잦아 연속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말해 주는 것이 다. 정치적 이해 때문에 이념도 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것이 한국정당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8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은 16개이며, 창당결성신고는 10건이 다. <표-1>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제헌국회부터 제18대 총선에 참가한 정당은 270개, 당선 자를 배출했던 정당은 102개에 이르고 있다. 미 군정기부터 1999년 12월까지 정당통합 사례가 62건이다. 2) 한국정당사에 역사가 가장 오래된 정당은 18년 동안 집권했던 민주 공화당이었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정당도 일본 자민당이나 대만 국민당을 제외하고 수 명(life span)이 20년 미만이다. 미국의 민주당 180년과 공화당 150년, 영국의 보수당 170 년과 노동당 100년, 독일의 사민당(SPD) 140년과 기민당(CDU) 150년 등의 역사와 비교 하면 한국정당의 유동성은 매우 높으며 단명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표-1 : 역대 총선 참가정당 현황> 국회의원 선거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계 참가정당 수 48 40 14 14 14 12 11 6 3 3 12 9 14 6 11 11 25 17 270 당선자 배출 정당 수 16 11 5 3 6 5 3 4 3 3 8 6 5 4 4 5 5 6 102 2) 김현우, 한국정당통합운동사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 63.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5 본 연구의 목적은 지난 60년 동안 한국 주요 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분석하는 데 있다. 정당의 연속이란 창당 이후 변화되는 정치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하면서 조직이 장기 간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의 변화란 새로운 정당의 창당, 분당, 통합, 해산 등으로 정당조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 주요 정당의 연속 과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연속과 변화 모형을 발견하며, 그 특징을 알아보고, 결론적으 로 정당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통하여 한국 정당정치 본질의 일단 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정당 연구방법을 역사적 접근법(historical approach), 구조적 접근법(structural approach), 행태적 접근법(behavioral approach), 기능주의적 체계적 접근법(functional -systematic approach), 이념적 접근법(ideological approach) 등으로 분류한다. 3) 본 연구 에서는 정당의 창당 성장 분당 해산 등 정당발전의 기원, 환경, 과정, 배경 등을 연구하 는 역사적 접근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정당의 연속과 변화 요인과 특징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연구범위는 지난 60년동안 집권당과 제1야당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끈임 없이 생성 소멸된 정당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정당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연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60년 동안 창당과 소멸과정을 거친 정당은 많지만 한국 정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여당과 주요 야당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연구범위를 집권당과 주요 야 당으로 제한하다 보니 유감스럽게도 진보정당과 군소정당이지만 정국운영의 캐스팅보 트를 행사했던 일부 정당에 대한 논의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Ⅱ. 정당의 연속과 변화론 1. 정당의 기원과 발전론 한국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살펴 보았다. 미국 3) Kay Lawson, The Comparative Study of Political Parties (New York: St. Martin's Press, 1976), pp. 4-19.
6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정당은 200년 가깝게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정당은 1시민사회의 하나 의 분파(faction)로서 불가피한 부산물(outgrowth of civil society)이며 2민주정치의 주 요 기능을 수행하고 3미국 대중이 과도한 기대나 가혹한(rigorous)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4) 미국 양당제가 오랫동안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을 정당기 원의 본질, 민주정치와 정당의 필요성, 정당에 대한 국민의 태도라는 시각에서 이해하 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당의 경우 연속성 보다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미 국과 정치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정당 발전단계나 연속성과 관련 있는 헌팅톤(S. P. Huntington)의 1파벌화 (factionalization) 2양극화(polarization) 3확장(expansion) 4제도화(institutionalization)론을 5) 적용하는 것도 무리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당은 제도화 평가 기준으 로 제시된 적응성(adaptability), 복잡성(complexity), 자율성(autonomy), 응집성 (coherence) 등의 조건을 6) 거의 갖추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정당의 기원론에서 접근하는 것도 적실성이 그리 높지 않 다. 정당의 기원에 대하여 듀베르제(Maurice Duverger)의 선거 및 의회주의론과 의회외 적 기원설, 7) 앱스테인(Leon D. Epstein)의 다수결 이론, 다원주의 이론, 개인주의 이론, 8) 앱스테인의 정당의 발전환경이란 시각에서 주장한 투표권의 확대, 정치적 대표, 사회구 조, 연방주의,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위, 선거제도 등과 관련설, 9) 라팔롬바라와 와이너 (J. La Palombara and M. Weiner)의 정당기원 제도론, 역사-상황론, 근대화론 또는 발전 론 10) 등을 적용하여 한국 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설명하는 것도 적절치 못한 것 같다. 대 부분의 이론은 정당이란 제도가 최초 출현한 기원과 관련하여 접근하고 있는데 한국정 4) Marc J. Hetherington and William J. Keefe, Parties, Politics, and Public Policy in America (Washington D. C : A Division of Congressional Quarterly, 2007), p. 1. 5) Samuel P. Huntington, 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8), pp. 412~420. 6) Huntington(1968), pp. 1~24. 7) Maurice Duverger, Political Parties: The Organization and Activity in Modern State, trans. by Barbara and Robert North (New York: John Wiley & Sons Inc., 1966), pp. xxiii~xxvii. 8) Leon D. Epstein, Political Parties in Western Democracies (New York: Frederic A, Praeger, Publishers, 1967), pp. 15~18. 9) Epstein(1967), 제2장. 10) Joseph La Palombara and Myron Weiner,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Political Parties," in La Palombara and Weiner(ed.), Political Parties and Political Developmen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6), pp. 7~21.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7 당의 연속과 변화는 그 차원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2. 정당의 연속과 변화요인론 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작용한 변인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당의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서 요인분석을 활용한 연구가 있다. 한 국정당이 창당, 분당, 통합을 거듭해 혼돈 이라는 정치상황에 도달한 것은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동족상쟁의 전쟁과 대립,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정세, 정당 내 계파정치, 정치문화, 지역정서 등 여러 가지 요인을 상정하여 정당통합사례를 경험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11) 정당 통합의 요인분석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통합과정이나 배경에 대한 심 층적인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정치특유의 예측 불가능하고 역동적인 정 치상황을 해방정국에서부터 나타난 정당의 존립양식과 행태를 분석 설명하려고 위기 와 통합 이라는 개념을 활용한 연구도 있다. 12) 한국정당의 변화과정을 위기와 통합 이 란 요인으로 분석한 것이다. 한국정당의 변동사에 대한 서술적 자료는 많지만 변화요인 을 분석하기 위해서 위기와 통합 이란 개념을 활용한 것은 새로운 접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한국 정당, 특히 야당의 특징을 파벌과 관련하여 분석한 연구 도 있다. 한국정당의 연속성과 변화를 파벌정치와 직접 연관시키지는 않았지만 한국정 치가 직업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친소관계에 따라서 형성된 파벌과 계파 조직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시각이다. 한국의 정치파벌은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활동과 정치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나의 사조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13) 정당의 연속과 변화는 단일 요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인들이 상 호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작용하는 (1)당내 요인과 (2)당외 요인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내 요인은 1정당의 기능 2대응능력 3정당의 정치역량 4의사결정 구조 5당내 민주화 6정당 리더십 7 조직구조 8당내 세력분포 및 파벌 9당내 갈등과 통합 10자금조달 11정당이념 12당성 및 충성심 13당원의 의지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당외 요인으로는 정당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구체적으로 1권력구조의 형태 2의회제도 3선거제도 4정치자금조달제도 5상대당의 경쟁력 6경쟁당과의 관계 7정보화와 전자정치시대의 등장 8사회균열구 11) 김현우(2000) 12) 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위기와 통합의 정치 (서울: 백산서당, 2004). 13)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서울: 에디터, 2000). pp. 17~18.
8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조의 변화 9대체조직의 출현 10국민의 당에 대한 지지도 11국민의 정당에 대한 태도 12선거시장의 변화 13정치문화 14경제상황 등이 있을 것이다. 14) 한국정당 60년의 연속 과 변화를 다양한 당내 외 요인들을 모두 고려하여 분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감당하 기 어렵다. 3. 알드리치의 정당결성 동기론 본 연구에서는 한국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서 알드리치(John H. Aldrich)가 제시한 정치인들의 정당 결성(party formation) 동기를 고려하고자 한다. 알드 리치는 정치인들의 정당결성 동기(incentives)로 1집단행동(collective action) 2사회선 택(social choice) 3정치야심(political ambition) 등 3가지를 제시하였다. 15) 정당은 정책선호를 공유한 사람들의 결사체로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을 집단행 동을 통하여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정당을 창당하고 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사회선택은 투표이론(voting theory)과 관련된 것으로 투표동원(electoral mobilization)을 위해서 정당이라는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선출직 공직에 당 선되려는 정치인들의 야심은 정당 결성의 핵심(heart)으로 야심찬 정치인(ambitious politicians)은 개인의 정치적 욕구나 기대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 또는 수단으로 정당 을 만들고 존속 변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국민의 지속적인 사랑과 선택을 받는다 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선출직 공직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은 정치적 야심 실현을 목적으로 창당하거나 기존의 어느 정당에 가입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정치인의 정당 결 성 동기를 정치사회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제나 결사체로서 이해하기보 다는 자신들의 정치야심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수단이란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다. 본 연구에서는 알드리치의 세 가지 요인 중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분석하는 데 정치야심 이란 개념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난 60년간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를 정치인의 야심 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정당의 존속과 14) 정당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변수로 크게 1유권자와 선거(voters and election) 2정치제도 (political institution) 3정당법(laws governing parties) 4정치문화(political culture) 5다양한 환경 (broader environment)-매스 미디어, 인터넷, 경제동향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Marjorie Randon Hershey, Party Politics in America, 12th ed., (New York: Pearson Longman, 2007), pp. 22~25. 15) John H. Aldrich, Why Parties? The Origin and Transformation of Political Parties in America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pp.26-61.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9 소멸은 특정 정치지도자의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들의 정치생명에 따라서 정당의 운명이 좌우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기 때문이 다. 정치인의 야심을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사적인 욕망 이라고 조작적 정의를 내 리고,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정당을 창당 분당 통합 해산하 는 등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가정 하에 접근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주요 정당 의 발전과 변화 과정에 특정 정치지도자 개인이 당권이나 대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창 당 분당 통합 해산 등을 주도했다 는 것이다. Ⅲ. 주요 정당의 연속과 변동과정 1. 이승만의 야심과 정당 1)이승만의 초창기 정치기반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 아부신( 阿 部 信 )은 일본 항복 후 치안유지 및 일본인의 생 명재산에 대한 보호책을 여운형에게 요청한 바 민족대표기관의 설치 필요성에 공감하 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6) 집단형성의 파도이론(wave theory)에서 주장 하는 바와 같이 건준위의 대항세력으로 1945년 9월 우익진영의 조선국민당, 한국국민 당, 고려민주당 등 3대 정파가 합당하여 단일 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한국민 주당은 초기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여 이승만, 김구, 이시영, 서재필 등이 영수가 되었 다. 한국민주당은 이승만, 김구 등 임정요인의 환국을 지지하였으며, 반탁운동을 전개 하였고, 이승만의 단독정부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1948년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200명의 의석 중 한국민주당은 29석을 차지하 여 85석을 차지한 무소속의 1/3수준이었다.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을 형식상 국가수반으 로 하고, 행정수반을 자당에서 차지할 것을 고려하여 내각책임제 도입을 원했으나, 이 승만은 미국과 같은 실권 있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여 헌법 초안을 수정하여 대통령제 를 채택하였다. 권력구조 갈등에 이어 국무총리 지명 및 초대 내각구성과 관련하여 이 승만을 지지하던 한국민주당은 크게 실망하고 이승만과 결별하였다. 한국민주당은 내 16) 일본 측에 요청한 내용과 건준위의 정강 정책 등은 다음을 참조할 것.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 한민국정당사 제1집(1945~1972) (서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3), pp. 132~133.
10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각책임제 도입을 목표로 대한국민회의와 대동청년단 세력과 합당하기 위하여 1949년 2 월 한국민주당을 해체하였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였는데 조병옥 등이 참 가하였으며 위원장 신익희, 부위원장 김도연을 각각 선출하고 이승만과 투쟁을 전개하 였다. 17) 원내 제1당인 민주국민당의 이승만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견제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 책임제의 권력구조에 대한 갈등은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을 불러왔다. 1948년 11월 창당 되었던 대한국민당은 한국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았던 잔류파가 명맥을 유지하다가 민 주국민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반이승만 운동에 대항하고자 신정회, 대한노농당, 일민구 락부 소속 의원들의 호응을 얻어 1949년 11월 대한국민당을 재창당 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서 총 210개 의석 중 무소속 126석, 대한국민당 24석, 민주국 민당 24석 등을 차지하였으며, 사실상 대통령당인 대한국민당은 원내세력이 매우 열세 하였다. 이승만은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제2대 국회 개원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국가가 존립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민주정치와 정당정치를 처음 경험하여 정치실험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집권세력에 비하여 무소속과 야권이 강할 경우 정착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 제를 유지 발전시키고, 국정을 안정적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다. 민주주의를 60년 이상 경험한 오늘날의 여소야대도 국회와 행정부간 갈등관계가 지 속되는 데, 하물며 야당 출신인 신익희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친야 세력이 국회 다수 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은 정치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집권자의 입 장에서는 당시 전쟁수행, 국정의 안정적 운영, 야당과의 대립 종식, 대통령의 통치기반 강화, 정권재창출 등을 가장 절박한 정치현안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원내에서 신임을 잃어가는 이승만으로서는 대통령 간선제로는 재선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직선제를 채택하여 자신의 재선을 보장받고자 했다. 이승만은 신 당을 조직하는 한편 헌법개정안 제출과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8) 자신을 지지하는 세 력화된 정치조직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17)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73), p. 195. 18) 김현우(2000), pp. 263~264.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11 2)이승만의 지배도구 자유당 이승만의 신당창당에 대한 구상은 전쟁 중인 1951년 12월 원내인사 중심으로 경남도 청 내 국회의사당에서 자유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원외인사 중심으로 부 산 동아극장에서 자유당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에서 제출한 대 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채택하는 헌법개정안이 1952년 1월 국회에서 부결되고, 1952 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된 이후 1953년 5월 원내외 자유당 이 합당하고 이승만은 당수직을 맡았다. 자유당의 창당이 권력 재창출을 위한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당을 만드 는 것은 많은 사람을 모아 세력을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 또한 창당의 명 분으로 내우외환의 국난 극복, 국토통일과 민족의 번영, 공존공영의 협동사회 건설 등 을 내세웠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국민당과의 지속적인 불화에 대처하고 정국의 안정을 위해 국회 내에 안정 세력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지속적인 집권 포 석을 위해서도 신당조직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 자유당 창당 은 불안한 정국을 극복하기 위한 충정도 있었겠지만 결국 취약한 이승만의 국회기반 강 화와 개인의 정치적 야심인 재선욕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창당 의 도는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확고한 지지기반을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 고, 지도노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행정의 하부조직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 핵심 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것이었다. 21) 원내외 자유당을 합당한 이후 치러진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203개 의석 중 과반수인 114석을 획득하였으며,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233 개 의석 중 126석을 차지하여 국회 제1당이 되었다. 이승만은 자유당 조직과 국회의 안 정적 의석을 정치기반으로 1952년 7월, 대통령 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등을 채택한 발췌개헌 을 단행했다. 이승만은 발췌개헌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정상적인 방법으 로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2차 개헌을 시도했다. 1954년 11월 대 통령 연임제 철폐, 국민투표제 도입, 국무총리제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사사오입 개 헌을 추진한 것이다. 195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등 야당 탄압과 정권유지를 위한 억압 장치를 강화하였다. 19) 심지연(2004), p. 77. 20) 연시중, 한국 정당정치실록 2권(서울: 지와 사랑, 2001), p. 37. 21) 최한수, 한국정치의 이해 (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0), pp. 201~202.
12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이승만이 자신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집단을 결합해 출범 시킨 자유당은, 통합된 에너지를 발휘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켰으며 중임제한을 삭 제하는 등 대통령 개인의 권력을 유지 확대하는 데 총력을 경주 했다. 22) 자유당은 이승 만의 통치권 행사를 뒷받침하는 지배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자유당은 국민을 위 해 존재하는 국민의 정당이 아니라 이승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의 사당( 私 黨 ), 즉 전위 정당이었다. 23) 이승만 대통령 개인의 권력 확대와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 자유당을 활용한 것이다. 자유당은 공당이었지만 실은 이승만 대통령 개인의 지배수단 으로서 동원되어 정치권력 유지와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지탱해주는 전위대 역할을 수 행한 셈이다. 개인적인 권력욕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근대적 성격의 집단들을 규 합해 만든 정당이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한국사회에서 특정 계급이나 특정 세력의 이익 을 대변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승만 개인의 의지를 관철하는 부속물로 전락하고 말았 다. 24) 자유당은 이승만의 시녀였다. 25) 비민주적이고 무모한 방법을 동원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정권을 유지하던 자유당은 마침내 1960년 3월,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 금권, 폭력 등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 민심이 떠난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통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했으나 결국 4.19혁명을 불러왔고,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으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자유당은 1960년 7월, 제5대 총선에서 참의원 4명, 민의원 2명을 당선시켰으나 이승만과 함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이 직접 창당한 자유당이나 그 를 지지했던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변화는 결국 이승만의 정치적 야심에 따라서 좌우되었다. 2. 장면의 야심과 정당 1)주도권 싸움의 민주당 사사오입 개헌 여파는 새로운 야당의 탄생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국민당 과 무소속 의원 60명이 11월 호헌동지회를 결성하는 등 반여세력이 규합되었다. 호헌동 22) 심지연(2004), p. 100. 23) 김호진, 한국정치체제론 전정 6판, (서울: 박영사, 1996), p. 279. 24) 심지연(2004), p. 101. 25) 연시중(2001), p. 62.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13 지회는 강력한 대여 투쟁과 더불어 자유당 소속 의원들의 개별적 탈당을 추진하였다. 호헌동지회가 모체가 되고, 장면 정일형 등 흥사단계와 자유당 탈당 인사, 무소속구락 부 등의 야권 세력을 결집하여 1955년 9월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민주당은 집단지도체 제를 채택하여 대표최고위원에 신익희, 최고위원에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 등 4 명을 선출하였다. 민주당은 독재주의 배격과 민주주의 발전, 공정한 선거에 의한 대의 정치와 내각제 구현, 자유경제 원칙하에 생산 증가와 사회주의에 입각한 공정한 분배 등을 주요 정강으로 내걸었다. 민주당은 창당과정에 조봉암의 가입문제 등을 놓고 이념대립 양상을 보이기도 했으 나 결국 반이승만 정치세력 결집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창당은 범야권 정치인들이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고, 이승만의 장기집권 음모와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 기 위한 이해의 일치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정당은 공동의 적 앞에서 는 일사불란한 응집력을 보이는 성향이 있으나 머지않아 당내 주도권을 놓고 계파 간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현상을 빚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이다. 민주당도 예외가 아니었 다. 창당 후 결국 당권을 놓고 소위 신파와 구파 간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여야 정 치인은 정당을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에 당권이든 대권이든 기회만 있으면 도전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민주당은 한 국민주당-민주국민당을 거쳐 온 인사들을 민주당 구파, 흥사단 측에서 새로 들어온 인 사들을 민주당 신파 라 불리게 된다. 민주당 창당 이후 내부 파벌투쟁이 계속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당 이념이나 정책 강령상의 견해 차이가 아닌 당권 쟁탈에 있었다. 26)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당권과 대권후보를 차지하기 위한 계파 간 세 력경쟁은 정당의 본질 측면에서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구나 사사오입 개헌과 장기집권 등으로 민심이 자유당으로부터 등을 돌려 정권교체 가능성이 매우 높 다고 판단한 상황에서는 너무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은 자유당의 이승 만 대통령과 경합할 수 있는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했다. 민 주당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하여 진보당 등과 합당 등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를 보수와 혁신 등 이념적 대립과 관련하여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나 선거연 합과정에 대통령 부통령 후보의 조정에 실패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27) 야 26) 김현우(2000), p. 302. 27) 김현우(2000), p. 306.
14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권의 후보단일화로 확실한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음에도 불구하 고 결국 대통령과 부통령후보를 놓고 정파 간 역할 분담에 실패하여 합당이 무산된 것 이나 다름없다. 한국 정당정치에서 대의를 위해서 개인이나 정파의 야심을 포기하지 못 하여 실패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신익희 후보의 사망으로 정권교체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누가 부통령에 당선되느냐 가 중요 관심사가 되었다. 무소속 조봉암의 러닝메이트였던 박기출 부통령후보가 재야 세력의 결집을 내세워 사퇴하고 장면 후보를 지지하였다. 장면의 부통령 당선으로 민주 당은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야권 후보의 단일화 효과를 어느 정도 보게 된 것이다. 민주당은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총 233개 의석 중 79석을 획득하여 126석의 자유당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원 내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양당제 구도의 정당체계를 형성하였다. 2)신 구파의 집권경쟁과 분당 민주당의 신 구파 간 갈등은 끊일 줄 몰랐다. 1958년 1월 상무회의에서는 구파인 조 병옥 대표최고위원의 사표가 자유당 동조의 배신행위 수습과 관련하여 수리되었으며, 1959년 9월 경남도당 분규사건으로 곽상훈 등 최고위원의 사퇴와 당 정풍운동을 위한 13인 위원회의 구성 등 민주당의 균열은 극에 달했고, 분당위기를 맞는 등 신구파의 갈 등은 자유당의 효율적인 견제나 민심의 수습 및 지지획득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민주당은 1960년 3월,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구파의 조병옥과 신파의 장면 간 후 보지명 문제를 놓고 더욱 더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조병옥이 대통령후보가 되고 장면은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며, 당권과 대권후보 분리론에 따라서 장면이 대표최고위 원에 당선되었다. 조병옥 후보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권교체는 또 다시 무산되었고, 장면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는 4월 혁명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제4대 대 통령 선거결과는 무효가 되었다. 1960년 4.19혁명에 의하여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하였고, 내각책임제 개헌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국회 총 233개 의석 중 175석을 차지하여 압도적으로 여당 이 되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민주당의 신 구파 간 갈등은 짧은 과도정부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민주당은 4.19이후 자신들이 자유당 정권의 대체세력이라고 믿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구조, 공천권, 당권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15 등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파 간 많은 공천지분을 확보하는 것이 총선 후 총리직을 차지하는데 유리한 입장이기 때문에 신 구파 세력경쟁은 점입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110개 선거구에서 신 구파 간 경합이 이루어졌으며, 자파 후보 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별도의 선거대책본부를 설치하는 등 28) 자중지란이 극에 달했다.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민의원 선거에서 복수 공천으로 같은 당 후보끼리 경쟁하는 전무 후무 한 일이 나타났다. 민주당 공천이 아닌 이른바 신파공천, 구파공천이었다. 이는 결 국 신 구파 간 집권경쟁이었다. 29) 자유당의 붕괴와 대안세력이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 에 민주당의 신 구파 간의 정국주도권 경쟁에도 불구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선거결과 구파 측은 민의원 84명, 참의원 17명, 신파 측 은 민의원 75명, 참의원 13명, 중도파는 10명이 당선되었다. 선거결과 어느 계파도 확실 한 우위를 점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파 간 세력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 질 수밖 에 없었다. 신 구파 간에는 당선자 대회도 별도로 개최하고 무소속의 영입에 박차를 가 하는 등 자파 세력의 확장과 단합 그리고 경쟁적으로 세를 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파의 관계는 정당발전의 초보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연합체와 흡사하 여 공동목표를 지향하면서 언제라도 각립( 各 立 )할 수 있는 요인을 지니고 있었다. 30) 신 구파 간 세력경쟁의 본질에는 계파 지도자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 의 전략이란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쉽게 해소되리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구파의 윤보선이 무난하게 대통령에 간선되었으나 윤 대통령이 지명한 구파의 국무 총리 후보자 김도연의 국회 인준 부결로 결국 신파의 장면을 재지명하여 국회 인준을 받았다. 민주당 신파가 내각책임제 하의 정부구성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민주당의 내분은 내각의 안배를 놓고 또 다시 첨예하게 발전했다. 거국내각이라고 하지만 결국 민주당 신파 중심의 파벌내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선에 불만을 품은 신파 내에서도 소장중심의 분파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조각 후 2주 만에 단행된 개각도 계파 간 갈등을 치유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계파 지도자가 대통령과 총리직을 차지하기 위한 민주당 신 구파 간 대립, 계파에서 더 많은 각료직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은 새로운 정당정치를 염원하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4월 혁명정신을 퇴색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분 당의 싹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 구파는 민구동지회( 民 舊 同 志 會 )라는 28) 김현우(2000), p. 338. 29) 이영석, 야당 40년사 (서울: 인간사, 1987), p. 99. 30) 연시중(2001), p. 102.
16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원내 교섭단체를 별도로 등록하고 신파정부를 공격하는 등 분당의 조짐이 구체화되었 다. 신 구파 간의 갈등이 정치이념이나 정책 등의 입장차가 아닌 계파의 정파적 이익에 서 비롯되었으며, 결국 신파와 결별한 구파 중심의 신민당이 1961년 2월 창당되었다. 신 민당은 위원장 김도연, 간사장에 유진산을 선출했다. 민주당은 끝내 분당되었다. 정당 내 파벌을 중심으로 정당이분열된 것이다. 31) 민주당의 내부 균열과 분당 및 해체 이면 에는 권력투쟁과 계파 지도자인 신파의 장면과 구파의 조병옥의 개인적 정치적 야심 실 현 등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윤보선의 야심과 정당 1)야권의 난립 내각책임제하의 상징적인 국가원수에서 1962년 3월 하야했던 윤보선은 12월 범야 대 동단결과 민간세력을 규합하여 순수한 제1야당을 만들 것을 제창하면서 야당 창당의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창당은 1963년 1월 구 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규제가 풀리면 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단일정당형성에는 무소속(김병로, 이인, 전진한), 구민주당(박 순천, 홍익표), 구신민당(유청), 구자유당(김법린, 이호) 4정파 연합에 의하여 구체화되 었으나 대통령후보 사전 합의와 관련하여 구민주당계가 이탈한 가운데 발기인 대회를 갖고,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표자를 김병로로, 당명은 민정당(가칭)으로 창당준 비위원회 결성을 신고하였다. 창당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던 중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군정 4년 연장안의 성명 발표로 시련을 겪었지만 윤보선은 재야의 정계 중진인 허정, 김도연, 김준연, 장택상, 이범석, 변영태 등과 군정 연장안에 대한 반대와 박정희 의장과 회담하는 등 정국타개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민정당은 1963년 5월 창당대회를 갖고 만장일치로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대표최고위 원에 김병로를 선출하였다. 민주창업의 국기가 붕괴된 상황에서 민주선정과 민의창달 을 위한 정치십자군이 되자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5.16 이후 창당한 첫 번째 야당이 된 것이다. 창당이후에는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관리내각의 구성을 촉구 하고, 민정이양 을 요구하는 등 강력한 대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중당과 별도로 몇 개의 야당이 창당되었다. 구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박순천을 중 심으로 민주당이 재건되었다. 반독재와 민주주의 수호 그리고 군정종식을 내세우면서 31) 신명순, 정당과 정당정치, 민준기 외, 한국의 정치: 제도 과정 발전 (서울: 나남, 2008), p. 235.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17 1963년 7월 창당대회에서 총재에 박순천을 선출하였으며, 김대중 정일형 등이 참여하 였다. 1963년 9월 민 군제휴로 정국의 안정 세력을 형성하고 자유민주주의 이념 하에 창조와 질서가 있는 민정 수립을 표방하면서 자유민주당이 창당대회를 가졌다. 대표최 고위원에 김준연을 선출하였으며, 소선규 김재춘 송요찬 등이 참여하였다. 1963년 9월 군정종식과 민주정치 재건을 목표로 국민의 당 이 창당대회를 가졌다. 대표최고위원 에 김도연, 최고위원에 김병로, 허정, 이범석 등을 선출하였다. 1963년 10월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윤보선은 45.1%를 득표하여, 46.6%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하였다. 11월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110 석, 민정당 41석, 민주당 13석, 자유민주당 9석, 국민의 당 2석 등을 각각 획득하였다. 2)윤보선의 기회주의 정치 한국의 정당은 선거 전후 통합과 분당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대 선거가 끝나고 야 권의 이합집산이 추진되었다. 그동안 야당의 결집을 통하여 군정종식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을 같이 했던 민주당 자유민주당 국민의 당 등 3당은 1964년 5월 통합 성명을 발 표하였다. 당명을 민주당으로 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기로 하였으나 대의원 비율 문제를 놓고 자유민주당이 통합에서 이탈하였다. 3당 통합은 무산되었고, 1964년 12월 민주당과 국민의 당 양당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퇴진 요구 등 강 력한 대여 투쟁을 다짐하면서 대표최고위원에 박순천, 최고위원에 허정을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3당 통합에서 이탈한 자유민주당은 제1야당인 민정당과 통합을 시도하였다. 민정당 은 민주공화당이 한 일회담 반대 학생시위의 계엄해제 후 안전장치로 제출한 학원안정 법안과 언론윤리위원회법안과 관련하여 온건론자인 유진산과 강경론자인 윤보선 간 참예한 갈등양상을 보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야당 퇴장 후 민주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에 대하여 온건파인 유진산의 묵계설로 민정당 당수 윤보선과 제2 인자인 유진산과 2개월여에 걸친 대립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유진산을 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32) 1964년 11월 자유민주당의 해체 선언과 민정당에 흡수 통합되었다. 윤 보선계가 통합신당을 완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통합이나 흡수는 특정 계파 의 지분을 확대하여 당내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추진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32) 김현우(2000), p. 431.
18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수 없을 것이다.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민주당의 야당 단일화 문제가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야권의 분열은 여권의 횡포와 독주를 불러왔으며, 적전분열은 정권획득 에 적신호가 되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1965년 4월 당명을 민중 당으로, 등록대표는 윤보선 민정당 총재와 박순천 민주당대표최고위원으로 하는 집단 지도체제 원칙에 합의하였다. 5월 통합선언 대회를 통하여 민중당을 출범시켰다. 민중 당은 민중을 위한 정당이며, 이 나라 자유민주세력의 총집결체가 되기를 기약하는 정당 으로서 군사적 권력집단이자 부패한 특권도당인 박 정권과 정면 투쟁할 결의를 굳게 한 정당임을 선언하였다. 6월 합당전당대회에서 유진산계와 불협화음으로 윤보선이 대표 최고위원에 낙선되고 박순천이 당선되었다. 지도위원 등은 계파별 안배를 하여 어느 계 파도 과반수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나 윤보선 총재가 당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당내 에는 그의 구심점이 상실되고 말았다. 33) 윤보선의 대표최고위원 낙선은 민주당과 민정 당 내 유진산계의 연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민중당이 윤보선계와 유진산계로 분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통합 민중당의 당권을 획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민중당의 당권을 획득한 신주류와 패배한 신비주류 사이에는 내분의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왜냐하면 합당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였던 윤보선이 제2야당 대표에게 당 권을 빼앗기고 비주류로 전락하여 조용하게 고문 역할만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구나 2년도 남지 않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되기 위한 당내 주도권 경쟁을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 주도권 경쟁은 당직안배나 대여투쟁 전략 또는 특정 정책에 대 한 입장차로부터 점화될 수 있는 것이다. 민중당은 결국 한 일협정 비준의 국회처리 방 법을 놓고 민주당계인 주류 측 온건파와 민정당계인 비주류 측 강경파 간에 대립이 격 화되기 시작하였다. 윤보선은 탈당계를 제출하였으며 의원직도 상실했다. 이 여파로 민 중당 소속의원 61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며, 민중당은 양분되었다. 김영삼은 당시 강경파가 탈당한 민중당의 원내 총무가 되었다. 윤보선계의 당내 강경파 의원들은 매국적 한일협정 반대투쟁과정에 진정한 민족관 과 헌정관을 찾을 길 없어 집단적으로 탈당한다고 선언하고 1966년 2월 창당발기인 대 회를 열어 신한당을 창당, 총재에 윤보선을 선출하였고, 장택상 김도연 정일형 등이 참여하였다. 33) 김현우(2000), p. 450.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19 민정당과 민주당의 합당은 야당 단일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민중당이 분당되어 신한당을 창당한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정당의 몸집을 크게 불리고 난 다음에 당권이나 당의 주도권을 획득한 후 야권의 단일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윤보선의 정치적 야심에 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통합 후 당연하게 차지할 것으로 기대 했던 민중당의 당권 도전에 실패하고 비주류로 전락하여 제6대 대통령선거 후보 가능 성이 낮은 상황에서 당의 대여 투쟁전략 등을 문제 삼아 탈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한당 역시 윤보선 1인 체제에 대하여 김도연 장택상 등이 불만을 제기하면서 당풍 쇄신과 당의 민주적 운영을 강력하게 촉구하기도 하였다. 34)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 두고 야권 단일화 문제 등으로 당내 반발은 큰 파장을 몰고 오지는 못했다. 1966년 5월 당직을 개편하고 장택상 등이 포함된 6인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중당과 야당대통령후 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신한당 총재인 윤보선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서는 단일야당의 단일후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9월 야당대통령후보 단일 화는 변함없는 소망이며 정권교체를 성취시킬 정직한 세력과는 기꺼이 제휴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민중당도 역시 야당세력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관심을 갖고 야당세력통합대책위원회(소집책 유진산)를 구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35) 10월 민 중당 임시운영위원회는 유진오를 대통령후보에, 박순천을 당수에, 유진산을 부당수에 각각 지명하였다. 신한당과 민중당의 후보단일화 문제는 양당의 대통령후보(윤보선, 유진오)와 재야의 백낙준 이범석 등으로 구성된 수차례의 4자회담 결과 합당하는 방향으로 급진전하였 다.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대회를 통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4자회담의 합의에 따라서 신민당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대표위원에 유진오를 지명하였다. 김영삼 은 운영위원. 김대중은 대변인이 되었다. 1967년 5월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 민당의 윤보선은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두 번의 대결에서 116만여 표차로 패배하였 다. 또한 6월 8일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등 45석 을 얻어 129석을 얻은 민주공화당에 참패하였다. 신한당과 민중당이 합당하고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킨 것은 대통령 선거를 불 과 3개월 정도 앞둔 시점에서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야권의 공통 목표가 설정되었으 며, 야당이 분열하면 또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과 위기감, 당권과 대권후보의 분리, 34)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73), p. 592. 35) 김현우(2000), p. 459.
20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계파 간 조직책 및 당직의 안배 등 다양한 정치적 이해가 일치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지도자의 야심 때문에 정당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신민당은 당론을 어기고 개헌 찬성입장을 밝히고 제명을 요구한 성낙현 등 3명의 의 원직을 상실시키기 위해서 1969년 9월 당 해산 결의와 창당대회를 통한 신민당복원, 3 선 개헌안 저지 실패, 12월 유진오 총재의 신병치료차 도일 등 때문에 1970년 1월 임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유진산을 신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는 등 지도체제의 변화 를 가져왔다. 2월 윤보선의 탈당과 제2신당 운동 전개, 그리고 1971년 1월 국민당 창당 과 윤보선 총재 선출 등의 정당의 변화를 가져왔다. 윤보선은 제7대 국민당 대통령후보 를 고사하고 사실상 정치생명을 마감하였다. 국민당은 윤보선의 후보 고사로 박기출을 후보로 내세웠다. 윤보선은 4.19이전 민주당과 신민당을 거쳐, 민정당을 창당하였으며, 재건된 민주당 과 합당하여 민중당을 창당하였고, 다시 민중당을 탈당하여 신한당을 창당하였다. 민중 당과 신한당을 통합하여 신민당을 창당했다가 다시 신민당을 탈당하여 국민당을 창당 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야심 실현을 위해서 정당을 만들고, 탈당하는 등 철저한 기회주 의 정치를 반복하였다. 윤보선의 정치적 야심과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서 정당의 연속 과 변화가 반복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박정희의 야심과 정당 1)박정희의 친위조직 민주공화당 박정희 장군이 주도하는 군부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하여 민주당 정권을 인수 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군정을 실시하였다. 포고 4호를 발령하여 장면 정권 인수, 국회해산, 일체의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최초의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였으며, 5월 포고 6호를 공포하여 비정치적 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치 사회단체를 해산시켰다.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여 4,374명의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였다. 1962년 12월 한국 최초로 정당법을 제정하였다. 정당법이 그동안 수차례 개정되기는 했지만 한국은 정당법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 정당법의 등장은 정당이 합법적인 정치제도로서 법적 지위를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 그리고 정당체계의 변동은 정당법과도 관련이 있다. 1963년 1월 정치활동이 허용되면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21 서 정당창당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 2월 제일 먼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총재에 정구영, 당의장에 김정렬을 선출하였다. 민주공화당 창당은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정보기관에서 은밀하게 재건당(가칭)으로 사전조직 작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도덕성 문제가 제기되었 다. 또한 창당을 주도했던 김종필과 다른 혁명주체세력 간에 주도권을 놓고 많은 갈등 이 야기되어 김종필의 외유와 민주공화당 해체 발표 직전상황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의장은 민주공화당의 존속을 용인한 동시에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에게는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세력이 계보나 파벌을 떠나 한데 뭉친 애국정당 의 조직 즉 범국민정당의 결성을 독려하였다. 두 여권 조직을 경쟁시켜 그 결과를 보고 선거에 나 설 정당을 선택하겠다는 계산이었다. 36) 민주공화당은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가 혁명공약에서 약속한 민정이양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 군정연장과 군복을 벗고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정치조직으로 만든 것이다. 민주공화당은 1963년 창당하여 1980년 해체될 때까지 단일정당으로서 최고의 연속성을 유지한 정당으로 기록되고 있다. 민주공화당은 박정희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여 제5대~9대에 걸쳐 당선시켜 집권당 이 되었으며, 현대 한국의 정당정치사에 많은 공과를 남겼다. 민주공화당은 박정희 대 통령의 친위조직인 집권여당으로서 조국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반면, 민주정치 발전을 퇴행시키는 악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민주공화당만큼 국정운영에 공과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역할을 수행한 정당은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당이 대통령의 통치이념이나 정치적 야심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 회의 안정적 의석 확보가 중요하다. 민주공화당은 제6대~제10대까지 박정희 대통령 임 기 내내 국회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박정희는 국회를 통하여 1969년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의 길을 텄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도입하여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하였으 며, 국회 전체의석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도록 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의 간선은 공직후보 추천, 정치 엘리트 충원, 선거과정 참여라는 정당의 기 본기능을 송두리째 말살시켰다. 모든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공천할 수 있지만 100% 패배가 확실한 유신체제에서는 출마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대권에 도전할 수 없는 상 황에서의 정당 활동은 그 효과나 기능이 대폭 축소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 의원을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유신정우회 제도는 관료적 권위주의 정권이 명실 공히 36) 김현우(2000), p. 385.
22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입법부까지 장악하는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유신정우회는 소속정당과 지역구가 없어 당론이나 지역구의 민심보다는 자신을 추천해 준 대통령의 의지를 입법과정에 충실하 게 반영하는 충성스런 친위세력이었다. 대통령은 당정에 대하여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지만 민주공화당 내부갈등은 끈임 없이 나타났다. 창당초기인 1963년 많은 갈등이 있었다. 1월 최고회의와 민주공화당 사 이의 당 기구에 대한 이견, 2월 김종필의 일체 공직사퇴, 10월 김종필의 당 복귀, 12월 국회 요직 인선과 내각 구성에 대한 불만 표출, 인사정책에 불만을 품은 정구영의 6대 총선 후보등록 보류 표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1964년에는 한 일 회담과 관련하여 반김종필 세력의 결집과 장경순 국회부의장과 김 종필 당의장의 갈등, 5월 공화당의 요구에 의한 최두선 국무총리 등 내각 총사퇴와 정일 권 총리의 임명, 6월 김종필 당의장 퇴진과 서울특별시 전역에 비상계엄 선포, 7월 비상 계엄 해제, 8월 학원보호법안의 국회통과 좌절과 민주공화당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분 규, 9월 당 운영개혁에 대한 찬성과 저지 등이 있었다. 1965년에는 8월 한 협정비준안과 월남파병동의안의 단독 처리와 정국 수습을 위한 국무총리와 내각 및 주요 당직자의 알괄 사표 제출과 정부와 공화당의 내부갈등, 12월 박정희가 지명한 이효상 국회의장의 1차 투표에서 재적과반 미달과 50~ 60명의 의원들 의 지명 불복과 항명파동, 그리고 주동의원들의 제명 등 징계조치가 이루어졌다. 1966년 9월 삼성재벌의 밀수사건의 보도, 9월 김두한의원의 오물투척 사건과 내각 총 사퇴, 1967년 6월 제7대 총선의 부정 타락선거 시비와 학생시위, 1968년 5월 한국국민 복지연구회 사건과 관련 의원 제명이 있었다. 1969년에는 야당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농성하는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71년 오치성내무장관 의 해임결의안 통과와 관련한 항명파동과 12월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비상사태를 선포 하였다. 1972년 10월 제8대 국회해산과 정당 및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특별성명 을 발표하여 유신체제 도입을 추진하였다. 유신체제 도입 이후 1973년 3월 당의장을 비롯한 당 요직 전면 개편과 8월 발생한 김 대중 납치사건과 개헌서명 운동 등의 반체제 활동이 격화되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 2호의 선포와 창당에 참여하여 당의장 등을 역임한 정구영의 탈당, 연이어 긴급조치 4호부터 9호까지 선포 및 해제 등 억압과 유화정책을 구사하였다.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의 피격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 2월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 국민투표 실시와 73%의 찬 성, 2월 동아일보 광고해약 사태 발생, 1977년 행정수도구상 발표, 1979년 10월 김영삼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23 의원 제명과 부마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그리고 10.26 박정희 대통령 유고, 11월 김종필 의 공화당 총재 취임, 1980년 10월 제10대 국회와 민주공화당의 해산 등으로 이어졌 다. 37) 2)박정희 리더십과 정당의 연속성 민주공화당 18년사는 파란만장하였다. 창당 이후의 원내외 활동은 드라마틱하게 전 개되었다. 많은 우여곡절과 내분 그리고 갈등이 있었지만 분당이나 해산 등의 위기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당론에 불복하는 항명 사태, 조각 및 당직 인선에 불만을 품고 사표 제출, 당내 제2인자격인 김종필의 견제 등은 있었지만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없었다. 민주공화당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박정 희의 강력한 리더십이 작용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수시로 갈등 당사 자나 고위 당직자 등을 청와대로 불러 수습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리더십을 보였다. 당무회의를 직접 주재하기도 하였다. 사안에 따라서는 대국민 특별담화 등을 통하여 국 민들에게 분명한 정치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모습도 보였다. 박정희는 포용과 배제, 분할과 견제의 병행, 상황에 따른 용의주도한 용인술의 리더 십과 지배전략 38) 등도 작용하였다. 대권과 당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제왕적 지위 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종용이나 설득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공천 권을 전적으로 행사하여 의원들의 정치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당 장악과 통치는 강력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민주공화당은 철저하게 박정희의 통치도구에 불과하였다.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을 수행하는 합법적인 정치조직으로 기 능했던 것이다. 정당은 민주주의의 요건을 최소한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제도로서 형 식적인 역할만 부여 받았고, 대통령의 통치철학이나 정책의지를 앞장서서 추진하는 전 위대가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당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 때문에 응집력을 발휘하면서 집권여당으로서 한 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고, 또한 비민주적인 억압정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입법 활동 등에 동원될 수 있었다. 예컨대 1965년을 일하는 해 전진의 해 로 정하고 일하는 정당 37) 민주공화당의 원내외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역정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할 것. 중앙선거관리위 원회(1973)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정당사 제2집(1972~1980) (서울: 중앙선거관리위원 회, 1981). 38) 김호진(1996), p. 424.
24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으로서의 활동을 다짐한 것이나,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잘 살기 10가 지 약속, 1969년 개헌논리로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 1971년 대통령후보지명을 위 한 전당대회에서 70년대는 더욱 싸우며 건설해야 하는 사명의 시대, 근대정당의 긍 지, 번영과 통일 선언, 1974년 총화의 기반을 다지는 해 로 정한 것 등은 박정희의 조 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통치철학을 구체화하는 데 민주공화당은 전문 관료들 못 지않게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39) 5.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전두환의 야심과 정당 1)3김의 대권 전초전과 정당변화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1969년 11월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하고 40대 기수 론을 제창하였다. 1970년 9월 전당대회에서 40대 기수에 해당되는 김영삼 김대중 이 철승 등 3인 간에 각축전이 벌어져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앞섰으나 다음날 실시된 제2 차 투표에서 김대중과 이철승의 연합으로 김대중이 역전승하는 결과를 가져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은 민주공화당 박정희 에게 패배하였으며, 5월 제8대 선거에서 신민당은 지역구 89석을 얻어 113석의 민주공 화당에 패하였다. 국민당은 1석밖에 얻지 못하였다. 대선과 총선에서 연거푸 패배한 신민당은 1971년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한 김대중 대신 김홍일을 총재로 선출하였으나 그 과정에 당의 주도권을 놓고 유진산계와 반유진산계로 분열되어 대립과 분열양상을 보였다. 1971년 10월 유신체제가 도입되는 등 정치의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1972년 12월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재선되 었으며, 신민당은 1973년 2월 제9대 총선에서 총 지역구 146석 중 52석을 얻어 73석을 얻은 민주공화당에 패했으나 상당한 의석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무소속은 19명이 당선 되었다. 1974년 4월 유진산이 사망하였으며, 1974년 8월 총재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의 김영삼 이 야당사상 최연소 총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분열하고 대립하는 야당의 행태는 조금 도 변하지 않았다. 주류인 김영삼계와 비주류인 이철승계 간의 당권경쟁은 점입가경이 었다. 1976년 5월 전당대회는 각목과 쇠파이프가 동원되는 폭력과 난동 속에 주류와 비 39) 민주공화당의 의정활동이나 선거공약 등에 대하여 다음을 참조할 것.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73),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81).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25 주류가 각기 다른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주류는 단일지도체제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 하고, 비주류는 당헌을 개정하여 김원만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이철승 등을 최고위원으 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당 대표가 이중으로 등록 신청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에 따라 김영삼의 총재지위가 소멸되어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충환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하였다. 결국 당 수습10인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개최된 1976년 9월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이 대표최고위 원으로 선출되어 2년여 만에 당권이 바뀌었다. 이철승의 참여속의 개혁이라는 중도통 합론과 김영삼의 선명야당론은 다시 분열과 대립을 가져왔고, 1979년 5월 총재경선에 서 2차투표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에 역전승하였다.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서 신민당 은 지역구 61석을 얻어 68석을 얻은 민주공화당을 바싹 추격하였다. 유신체제 속에서 1978년 제9대 대통령에는 박정희가 다시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유신체제에 강력하게 도전하였다. YH사건, 신민당 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등 여당의 강경대응은 부마사태를 불러왔고, 여당 은 거의 통치능력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최규하 과도정부가 등장하면서 서울의 봄은 왔다. 김종필을 주자로 내세우는 민주공 화당과 달리 신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 간에 치열한 대권 전초전이 시작되었다. 연금 상태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복권이후 대권후보 경쟁에 나섰다. 양자 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권후보 경쟁이 전개된 것이다. 서로가 대권후보를 양보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암투와 반목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장본인인 자신이 후보가 되어 야 한다는 김영삼과 신민당 입당을 미루면서 자신이 후보가 되지 않으면 재야 중심의 신당을 만들어 출마하겠다는 배수진을 친 김대중 간의 대립과 갈등은 도를 넘는 지경으 로 발전하였다. 박정희 이후 대권을 차지하겠다는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김영삼, 재야 의 김대중의 치열한 각축전은 신군부의 정치전면 등장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980년 5 월 전국비상계엄 확대와 더불어 김대중과 김종필은 연행되었으며, 8월 신민당 총재 김 영삼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9월 김대중은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9월 전두 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0월 국민투표에 의하여 5공화국 헌법이 채택되 었고, 부칙에 따라서 제10대 국회와 신민당을 포함하여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다. 11월 에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서 811명에게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26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2)전두환의 권력욕과 위성정당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고 1980년 11월 계엄포고 제15호에 의하여 정당창당을 위한 집 회가 허용되면서 전두환 정당이 창당되기 시작하였다. 민주정의당은 1981년 1월 창당 대회를 개최하여 전두환을 총재로 선출하고, 제12대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였다. 민주복 지국가를 건설할 개혁주도 범국민정당임을 선언했다. 신군부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정 치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민주정의당은 철저하게 전두환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 만든 패권정당이었다.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놓고 자신들만이 비밀리에 창당 작업을 한 것은 선거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형적인 불공정행위를 감행한 것 이다. 신군부란 비공식적인 권력집단이 공식화된 정치조직을 만든 것이다. 40) 민주정의당 창당 후 1981년 1월 민주한국당(총재 유치송)과 한국국민당(총재 김종 철), 민권당(김의택) 등이 차례로 창당되었다. 2월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이 당 선되었다. 민주한국당 유치송은 출마하여 선거인단의 7.7%를 득표했으나, 자유경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한 선거였다. 3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에서는 총 276개 의석 중 민주정의당 151석, 민주한국당 81석, 한국국민당 25석 등을 각 각 획득하였다. 신군부는 민주주의 외형상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 민주한국당의 창당을 지원하였는 데 이는 자신들이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데 정치파트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진정한 정치적 반대세력을 대표하는 참신한 야당은 아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 에서 타율적으로 창당된 민주한국당을 선택하고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41) 권력에 의해 인가된 전형적인 위성정당이 출현한 것이다. 42) 국가가 5.16 이후 두 번째 한국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영향을 직접 행사한 것이다. 헌법 개정의 부칙에 따랐지만 기존 정당을 해산시키고,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관제 야당 창당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정당질서를 인위적으로 재편하는 등 국가가 직접 개입한 것이다. 민주한국당 창당과정 에 국가정보기관이 직접 개입하고 총재를 지명하였으며 창당발기인의 선정에 영향을 행사하였다. 심지어 당명 작명에도 간여하였다. 43)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야당은 40) 심지연(2004), pp. 326~327. 41) 홍득표, 한국정치분석론: 제5공화국의 위기와 변동 (인천: 인하대출판부, 1993), p. 158. 42) 심지연(2004), p. 329. 43) 신상우, 고독한 증언 (서울: 창민사, 1988), pp. 18~21; 이상철, 수신제가에서 맴돈 치국의 꿈, 월간조선 (1986년 2월호),p. 215.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27 자율성을 행사할 수 없으며, 활동 범위나 방법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관제 야당은 여당을 견제하거나 도전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야당 본연의 기능 수행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민주한국당은 정부 여당에 협조적이었고, 충 성스런 야당이 되었다. 전통적인 야당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집권세력과 공생하려는 수용적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44) 3)김영삼 김대중의 대권획득 단계적 전략 1982년 12월 김대중의 미국 신병치료를 허용하였으며, 1983년 6월 정치적 자유를 요 구하면서 시작한 김영삼은 23일 만에 단식을 중단하였다. 1984년 6월 민주화추진협의 회(민추협)가 결성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계가 통합하여 신군부와 기성 야당에 대한 도전장을 낸 것이다. 민추협의 결성과 신당 추진, 그리고 1984년 11월 15명을 제외한 모 든 정치인들이 해금되면서 새로운 선명야당이 창당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나지 않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원아래 1985년 1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었으며, 이민우를 총재로 선출하였다. 2월 김대중은 미국에 서 귀국하였다. 신한민주당은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추협이 모태가 된 것이다. 신한민주당은 창당과정에 국가 공권력에 의한 방해공작과 수난을 겪었다. 신한민주당이 창당된 계기는 무엇보다 신군부에 의한 권위주의적인 지배를 효율적 으로 견제하지 못하는 충성스러운 야당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선명한 자생야당의 출현 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은 체제내의 여당의 한 부분 인 45) 야당 을 거부했던 것이다. 민주정의당의 제1중대로 취급받은 민주한국당에 대한 국민의 불 신과 불만은 1985년 2월 제12대 총선에서 표출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창당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일약 제1야당이 된 것이다. 민주정의당 148석, 신한민주당 67석, 민주한국당 35 석, 한국국민당 20석을 각각 획득하였다. 1985년 3월 3김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인이 해금되었으며, 4월 민주한국당 의원 23명 이 신한민주당에 합류하였다. 1986년 2월 김영삼은 신한민주당의 상임고문에 취임하였 다. 김영삼의 신한민주당 입당으로 직선제 개헌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야 간 개헌공방이 가열되었다. 전국 9대 도시에 개헌추진지부를 결성하면서 군중집회를 44) 홍득표(1993), p. 169. 45) 이종각, 야당 분열과 사꾸라 시비, 신동아 (1987년 5월호), p. 215.
28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개최하였다. 여야 간의 개헌을 둘러싼 대치는 지속되었다. 통합으로 거대 야당이 된 신 한민주당은 개헌을 통한 정권교체를 추진한다는 전략이었지만, 민주정의당은 호헌을 통해 정권교체를 막고 계속 정권을 장악한다는 전략이었다. 46) 때문에 여야 간 사활을 건 대치공방은 충분하게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민주정의당이 1987년도 예산안을 변칙처리하자 신한민주당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 를 제출하였다. 여야 간의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극한 대립 속에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 재는 12월 정부 여당에 7개항의 민주화조치를 요구하는 이민우 구상 을 발표하였다. 자신의 요구가 수용되면 내각제 개헌협상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여당과 화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민우 총재체제에 불만을 품은 김영삼, 김대중이 1987년 4월 지지자를 이끌고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였으며,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신한 민주당 소속의원 90명 중 78명이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합류한 것이다. 신한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신한민주당의 창당과 분당 그리고 통일민주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정당질서의 변화 는 무엇보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치적 야심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지 않으면 정권교체가 전연 불가능한 상황에서 직선제 개헌요구 등 강력 한 투쟁은 민주화를 위한 충정도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한민주당 탈당이나 통일민주당 창당, 그 후 직선제 개헌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투쟁은 자신들의 정권 획득을 위한 단계적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순수한 충정도 작용했지만 대권획득이라는 정치적 야심이 내면적 동기가 되었다고 분 석할 수 있다. 이런 분석은 다음에 전개되는 통일민주당의 분당과정을 살펴보면 확연하 게 나타난다. 4)김영삼 김대중의 협력과 분열 민주정의당은 1987년 6월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제13대 대통령후보로 선 출하였다.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개헌, 김대중 사면 복권 등 시국수습 8개항이 포함된 6.29선언을 발표되었다. 7월 김대중의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고, 8월 노태우는 민주정의 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정치적 계산 때문에 통일민주당 입당을 늦추던 김대중이 8월 입 당하면서 김영삼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약속하였으며, 9월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기에 46) 심지연(2004), p. 350.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29 이른다. 하지만 통일민주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 김대중 간의 후보 경쟁이 가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역할분담론 등이 논의되고, 후보 단일화 압력이 가중 되었지만 양 세력 간의 대결은 날로 심해졌다. 1987년 체제 라고 불리는 개헌안이 10월 국민투표에 의하여 채택되었으며, 김종필 이 주도하는 신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기 대선 출마를 선언하여 분당위기를 맞았다. 통일민주당은 11월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였다. 김대중은 자신의 지지자들과 동반 탈당하고, 11월 창 당대회를 개최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후보와 총재로 선출되었다. 민주화를 위한 명분으로 직선제 개헌을 위한 강력한 투쟁을 했지만 그 이후 신군부의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여야 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하여 대통령후보단일화 를 성사시키기보다는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한 것이 다. 야권의 분열은 신군부의 재집권을 보장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었다.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당선되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은 2 등,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은 3등, 신민공화당의 김종필은 4등을 차지하였다. 두 김은 자 신들의 당권이나 대권과 직접적인 이해가 없는 사안이나 공동의 적 앞에는 단합된 모습 을 보였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 실현과 관련된 문제에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세가 불리하면 미련 없이 떠나고, 자신들이 만든 정당을 부수고, 또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야권의 분열로 대선에서 패배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통합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정치적 이해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야권 분열과 정권 교체 실패에 따른 국민의 실망, 언론의 야권 통합 필요성 역설, 정치적 위기감의 공동 인 식, 두 김의 총재직 각각 사퇴, 양당통합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통합일정 합의, 양당 각각 의 전당대회를 통한 합당 확인, 문제가 되었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의 합의 등 야권통 합은 시간문제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끝내 통합은 무산되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당권과 관련된 지도체제 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에 통합노력은 백지상태로 돌아갔다. 양 당 통합이 무산된 것도 두 김의 정치적 이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통합야당을 만들어 주도권을 자신들이 차지하겠다는 양 김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성사 직전의 통합이 무위 로 끝난 것이다. 야당의 변화를 추진하다 결국 양 당을 각각 존속시켜 다음 총선에 승부 를 걸겠다는 방향으로 발전된 것이다. 16년 만에 소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실시된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30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신민주공화당 35석 등을 획득하였다. 호남당, 영남당, 충청당 구도로 정당질서가 재편 되었다. 결국 지역감정이 총선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여당은 총 299개 의석 중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여 여소야대인 분점정부가 출현한 것이다. 총선 후 양 김은 각 각 자당의 총재로 재추대되었다. 4당 구도에 대하여 대화와 타협 정치의 가능성을 연 황금분할론 이라는 평가가 나왔 다. 최초의 분점정부 출현은 여당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고,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정치, 여야 간의 동반자 관계 설정 등 새로운 정치실험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국 회 상임위원장이 4당에 배분되는 등 여당주도적인 정치는 야당과 함께하는 화합의 정 치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의 부결,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 등에 관한 법률개정 법률안 의 통과와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의 출국금지 요청안 통과, 5공정치비리조사특별위원회 등 의 구성과 활동, 노태우의 중 간평가 공약에 대한 압박 등등 여당의 무기력과 국정운영의 한계가 현실화되기 시작하 였다.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리더십,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석 열세, 3김의 강력한 정치리 더십 등 때문에 민주정의당은 정국 주도권을 완전 상실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부여 당은 야당의 협력 없이 국정을 안정적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통치력의 한계에 직 면하게 된 것이다. 5)김영삼의 대권 승부수 김영삼은 제13대 대선에서 2등을 차지하여 정치적 위상이 매우 높아졌지만, 제13대 총선에서는 제3당으로 전락하여 정치세력이 위축되었고, 정국 주도권 행사에 김대중 제1야당 총재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대화와 타협정치에 대한 기대보다는 분점 정부의 부정적 측면이 나타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떤 형태든 정계가 개편되어야 한 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결국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 당이 합당을 선언하였다.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고 김영삼이 대표가 되었다. 민주정의당은 전두환의 전위조직으로 창당되어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등 연속성을 유지하다가, 총선 패배와 4당 체제의 등장으로 정국주도권을 상실하고 급기 야 야당과 야합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민주정의당의 해체는 국회 안정의석 확보의 실 패에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전두환과 같은 강력한 정치적 구심 점을 형성하지 못한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리더십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31 전두환 없는 민주정의당은 노태우가 강력하게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집권당이 었던 민주정의당이 3당 통합으로 해체되는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3당 합당은 한국정당사에 여야가 통합하는 초유의 일이 되었다. 정책연합이나 정당 간 제휴 차원을 뛰어 넘는 3당 해체와 3당 통합을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정치적 간통 이라는 극단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김영삼은 기존정당 구도로는 당면한 문제 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정국 안정을 위해서 합당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47) 납득하 기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민주정의당과 신민주 공화당은 이념적으로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통일민주당과는 다르고, 정강 정책에서는 어떤 유사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영삼은 신군부세력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하여 누 구보다 앞장서서 비판했던 장본인이다. 소위 민주화 주도세력의 핵심이라고 자임하던 김영삼이 신군부세력과 야합한 것이다. 이는 결국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 마디로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정 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대권 획득을 위한 보수대연합과 여야 간 이념적 융합을 통 하여 중도적 성향의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하여 대권을 차지하려는 정치적 실리를 도모 한 것이다. 명분은 없었으나 대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역연합을 꾀하고, 정파 간 세력통합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김종필도 애매모호한 정치적 입지를 타개하고 싶었 을 것이다. 노태우도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개편하여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기반을 다 지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 해체와 민주자유당 창당은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이해타산에 의하여 성사된 것이다. 대권이 나 당권 등 정치적 야심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명분보다는 정치적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국민이 총선에서 선택한 4당 체제를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실리계산에 의하 여 인위적으로 개편한 것이다. 여야 합당이라는 정당 사상 초유의 기록을 정당사에 남 겼다. 6)거대여당과 야권의 변화 3당 합당과 거대여당 출현은 야권 재편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거대여당에 대항하 는 경쟁세력의 출현은 집단형성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자유당에 합류 하지 않았던 이기택 등 일부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과 무소속 의원들이 1990년 6월 민주 47) 심지연(2004), p. 390.
32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당을 창당하였다. 민주당은 창당 후 평화민주당과 통합을 추진하였다. 민주당과의 통합 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자 평화민주당은 호남당의 이미지를 불식하고자 재야와의 통합 을 모색하여 1991년 4월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당명을 신민주연합으로 변경하였다. 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낮은 경우 당을 쇄신하는 개혁이나 리더십의 변화 그리고 정책의 획기적인 전환 등 환골탈퇴 보다는 당명을 바꾸어 기존 정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색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통일민주당과 신민주연합의 통합이 지지부진 한 가운데 1991년 6월 광역의원 선거에 서 야당이 참패하였는데 이것이 야당통합의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9월 김대중과 이기 택을 공동대표로 하는 민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신민주연합과 민주당의 통합은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견제, 거대 여당 대표인 김영삼에 대한 김대중의 경쟁의식, 지방 선거 참패에 따른 위기의식, 제14대 총선 전략과 김대중과 이기택의 정치적 위상 약화 에 따른 불안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치인의 야심 실현 이라는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정당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제14대 총선을 앞둔 1992년 2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통일국민당을 창당 하 였다.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의 일소, 정당의 사당화 및 지역정당화 배제, 깨끗하고 정직 한 정치의 실현 등을 다짐했으나 정주영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전위조직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 재벌총수가 정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한 최초의 시도였다. 민 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등이 참가한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 은 다시 여소야대의 분점정부를 출현시켰다.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 참패, 민주당 승리, 통일국민당 약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13대 총선에서 국민이 선택한 분점정부를 무 시하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통하여 제조된 통합정부를 다시 3당 통합이전 상황으로 복귀시킨 것이다. 3당 야합에 대한 국민의 냉엄한 심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 당 정주영 등이 경합한 가운데 유효표의 42%를 득표한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대선에서 세 번째 낙선한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정주영도 1993년 2월 정계를 떠났다. 김 대중이 떠난 민주당은 이기택 체제가 출범하여 통일국민당 등과 통합을 시도했으나 여 의치 않았다. 하지만 민주당은 1995년 11월 창당한 개혁신당과 12월 통합을 선언하고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김대중과 정주영 없는 당은 리더십의 한계를 보였다. 강력한 정당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야당이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 여주었다.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33 7)민주자유당 계파 간 권력투쟁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3당 합당을 밀실에서 추진하 면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합당 후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였으며, 자필로 서명한 문 서가 1990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노태우의 내각제개헌 포기의사 전달로 파동은 일단락되었으나 한 지붕 세 가족 의 계파 간 갈등과 불신은 치유불능의 사태로 증폭되 는 결과를 가져왔고, 당권과 대권을 둘러싼 계파 간 암투는 더욱 치열해지는 원인을 제 공한 셈이 됐다. 48) 1994년 말부터 민주자유당 내에서는 김종필 대표체제는 개혁과 세 계화의 추세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 민주계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다. 김종필이 김영삼 후계 나 내각제를 통한 입신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차기 논의의 한 복판에 그가 서게 될 것을 우려한 측에서 지도체제 개편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는데, 이는 민주자유당 내의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49) 김종필의 2선 후퇴문제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었다. 김영삼은 1995년 1월 김종필 민주 자유당 최고위원을 당직에서 배제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이는 통일민주당계가 당의 주도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겠다는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필은 탈당하여 3월 자유 민주연합을 창당 하였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김종필과의 지역연합 붕괴로 충청표 이탈과 호남의 민주당 지지 때문에 참패하였다. 또한 1995년 정기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의 비자 금 문제가 폭로되면서 노태우가 구속되었다. 민주자유당은 신군부세력과 야합한 떳떳 하지 못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역사 바로 세우기 를 내걸고 신 군부와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한 일환으로 당명 변경을 추진한 것이다. 민주자유당은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1996년 2월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 다. 국민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외형적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민주자유당의 분열, 자유민주연합의 창당, 신한국당 창당 등 정당의 연속과 변화는 이질적인 정파가 야합하여 출범한 민주자유당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계가 완전하게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명분 없는 3당 통 합의 결과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되는 정치적 야심을 달성했다. 대권 목표를 성취하고 난 후 이질적 요소를 배제하고 완전한 의미의 개인당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1차로 차기 48) 심지연(2004), p. 401 재인용. 49) 심지연(2004), p. 425.
34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대권까지 넘볼 가능성이 있는 제2인자인 김종필을 제거하는 것이 시급했을 것이다. 김 종필을 제거하고 난 뒤에 신군부세력을 처단하는 과거 청산을 통하여 정권의 기반을 더 욱 공고히 다져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조성하며 역사를 바로 세우는 등 치적을 올리려 는 목표에 따라 5.18특별법 제정,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 등을 감행하였다. 또한 총선을 앞두고 당의 이미지를 쇄신, 다수의석을 차지하여 국정운영의 안정기반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분열과 당명 변경, 그리고 김종필에 의한 신당 창당 등 정당의 연속과 변화는 당내 권력투쟁과 깊은 관련 이 있다고 볼 수 있다. 8)김대중 김종필의 집요한 정치야심 야당인 통합민주당도 변화를 가져왔다. 정계 은퇴 후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이 귀국 하여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다. 정계복귀의 유인요인과 추진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 다고 볼 수 있으나 명분으로 내세운 정부와 통합민주당이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유인 요인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야심인 추진요인이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를 창당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당으로 통합민주당의 위상은 급 격하게 추락했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은 결국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대권에 도전 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추구하기 위해서 국민과의 약 속을 위반하고 정계에 복귀하였으며,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기존 야당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개인의 정치적 선택에 의하여 야당이 분당되고 새로운 정당이 태어나는 등 야 당의 질서가 재편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신한국 당 139석, 새정치국민회의 79석, 자유민주연합 50석, 통합민주당 15석 등을 차지하였다. 제15대 총선 직후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신한국당의 당선자 영입에 반 발하고 양당 간 공동투쟁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양당 간 국회에서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정부 여당에 공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양당 간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단 일화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런 와중에 두 당은 각각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김대중과 김 종필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양당 간 후보 단일화추진 등 선거제휴 협상은 권력분 점을 위한 양당통합론으로 발전하였다. 1997년 7월 양당은 대통령후보단일화를 위한 협상소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결국 양당 간 공동정부를 만들어 대통령은 김대중, 국무 총리는 김종필이 맡기로 합의하였다. 대통령중심제에서 공동정부를 형성하여 정치권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35 력을 분점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김종필은 자유민주연합의 대통령후보를 사퇴하고 박 태준을 총재로 선출하였다.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한 지역연합 또는 선거연합이 성 사된 것이다. 대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당 간 유례없는 선거연합이라는 정치실험이 시작 되었다. 더구나 내각책임제 하의 연립정부 형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과 국 무총리를 각기 다른 당에서 맡는 초유의 공동정부 형성과 권력분점에 대한 실험을 약속 한 것이다. 50) 양당 통합 등 정당의 변화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김대 중과 김종필은 정치적 야심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역 당 끼리 선거연합을 통한 공동정부 형성에 합의한 것이다. 야당의 지역 당 끼리의 선거연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꾼 여당 입장에서는 대선에 승리하기 위한 다른 당과의 연합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 다. 다른 정파와 제휴하지 않고는 정치권력 획득이 어렵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회창과 통합민주당의 조순 총재는 합당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977년 11월 양당 통합과 후보단일화를 공식적으로 선언하 였다. 당명은 한나라당으로 하고, 대통령후보에 이회창과 당 총재에 조순을 선출하였 다. 한편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11월 국민신당을 창당하였다.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한 것은 소위 김대중-김종필의 선거연합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다른 정파와 제휴하지 않으면 정권 획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성사된 것이다. 이회창의 대권에 대한 야심과 조순의 당 총재 및 집권 후의 기대 등 정치적 이해가 일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인제의 탈당과 국민신당 창당도 신한국당에서 대통령후보가 되지 못한 것이 주원인이 되었으며, 자신 의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의 야심을 달성하 기 위한 탈당, 분당, 합당, 창당 등의 변화가 또 반복된 것이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4번째 대권에 도전하여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킨 것이다. 한국헌정사에 최초의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의 승리는 지역 당 끼리의 선거연합이 위력을 발 휘한 것이며, 이회창 자녀의 신상문제, 이인제의 출마로 인한 여권성향 표의 분산 등이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 공동정부는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갈등이 증폭되 50) 대통령중심제에서 권력분할은 불가하다는 등 공동정부의 성공과 실패 요인 등에 대한 분석은 다 음을 참조할 것. 홍득표, 공동정부 모형의 실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부의 경험적 분석, 국 제정치논총 제40집 2호, 한국국제정치학회(2000. 7), pp. 295-317.
36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었다. 마침내 내각제 개헌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공조관계는 균열되기 시작하였으며, 합당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내각제 개헌 유보와 함께 새정치국민회 의는 개혁정당을 만들어 제16대 총선에 대비하고자 신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신당 창당 전략은 김대중의 구상에서 나온 것으로 51)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김 대중이 주도하여 만든 여섯 번째 정당이 되는 셈이다. 새천년민주당은 강령에 내각제를 제외시켰다. 그 결과 자유민주연합과의 공조는 파기되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133석, 새천년민주당 115석, 자유민주연합 17석 등의 결과가 나왔다.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자유민주연합과 공조체제 복원을 위해서 김종필이 추천한 이한동의 총리 임명, 교섭단체 등록 요건 완 화 추진, 소속의원의 자유민주연합 입당이라는 상식 밖의 의원 임대까지 감행하였다. 공조가 복원되었지만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자유민주연합의 찬성으로 국 회에서 통과되지 공조체제가 완전 붕괴되었다. 김대중은 대권과 당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창당, 탈당, 분당, 해체, 통합 등 수 많은 정 당변화를 직접 주도하면서 끝내 정치적 야심을 달성한 것이다. 한국 정당의 연속과 변 화를 주도한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당적을 수시로 바꾸고, 계보원을 이끌고 탈당하고, 당을 만들고 부수는 일을 여섯 번이 나 반복하여 한국의 최고 창당전문가 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당의 운명이 특정 정치지도자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었던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9)한나라당의 연속성과 박근혜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연거푸 패하고, 2000년 제16대 총선, 2004년 제17대 총선, 1998 년과 2006년 지방선거 등을 치르면서 내분과 당내 갈등 등으로 분당의 위기를 여러 번 맞이하였다. 분당과 해산, 당명변경 등 위험요인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당권도 수차례 바뀌었다. 2002년 12월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이 재도전했으나 실패하 였으며, 불법대선 자금문제로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얻고 해체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박근혜대표의 대중적 인기와 원칙을 중시하는 리더십 발휘로 천막당사에서 위 기를 맞은 한나라당을 회생시킬 수 있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선과정에 박근혜 계와 이명박 계로 나뉘어 돌아 설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지만 51) 심지연(2004), p. 466.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37 경선결과 박근혜의 아름다운 승복으로 위기를 또 한 차례 넘겼다. 한나라당은 연속성을 유지한 가운데 2007년 12월 제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이 당선되어 10년 만에 잃었던 정권을 되찾아 집권당이 되었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친이 세력과 친박 세력 간에 공천 지분 때문에 심각한 파동이 일어났으며, 친박연대의 출현 등 또 한 차례 분당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제18대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하여 여대야소인 통합정 부를 출범시켰으며, 친박 연대 소속의원들의 영입으로 거대 여당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10년 넘게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씩 패하고 연속성을 유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킨 것과 진보정권에 의한 국민의 실망으로 분열되지 않으면 정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등이 작용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0)정당리더십 부재와 집권당 분열 한나라당이 10여 년 동안 연속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야당은 많은 변화를 거듭하였다. 새천년민주당은 제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을 당선시켰다. 새천년민주당은 집권 후 분화 가 시작되었다. 집권 후 여당의 분열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정당이 정치권력을 획득 하면 그동안 준비한 정강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대통령을 정점으로 정부와 집권 당이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재창출 후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3년 4월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등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또한 노무현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새 천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당으 로서는 향후 5년간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하지만 보다 중요 한 것은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당권을 쥐고 있었으며, 영남출신의 당내 비주류인 노무현이 자신의 당을 창당하려고 한 것이다. 탈당파 들은 2003년 11월 전국 정당을 표방하면서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한마디로 노무현 당을 만든 것이다. 새천 년민주당을 김대중당으로 인식한 것이며, 친노세력 중심의 새로운 정치조직을 결성하 여 자신이 구상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우리당은 창당된 지 얼마 안 되어 실시된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탄핵 후폭풍 덕분에 과반수가 넘는 152석을 확보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나라당은 121석, 새천년민주당은 9석,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었다. 친노 세력이 탈당하고 또한 총선에
38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서 패배한 새천년민주당은 2005년 5월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열린우리당은 또 한 차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당내 계파 간 지분싸움, 참여 정부에 대한 비판과 실패론, 2006년 10.25 재보선 참패 등으로 위기의식이 팽배하였다. 열린우리당 간판으로는 제17대 대선과 제18대 총선을 치르기 어렵다는 불안과 위기감 때문에 비노그룹에서는 당 해체론을, 친노 그룹은 당 사수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양 진 영 간 첨예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탈당에 이어 2007년 2월 말 열 린우리당도 탈당하였다. 대통령의 무당적 현상이 발생한 것이며, 정당정치는 책임정치 라는 등식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한길 등도 2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 여 5월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하였다. 중도개혁통합신당은 2007년 6월 민주당 탈당 파를 규합하여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하였으며, 7월에는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다. 8 월 열린우리당 탈당파, 중도통합민주당 탈당파, 손학규의 선진평화연대 등과 합세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였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인 정동영은 당선되지 못 했다. 2008년 2월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였으며,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과 심대평의 자유선진당도 창당되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153석, 통합민주당 81석, 자유선진당 18석, 친박연대 8석을 각각 획 득하였다. 통합민주당은 7월 당명을 다시 민주당으로 변경하였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후 5년 동안 집권여당은 당명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잦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당 이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수차례 변화를 반복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새천년민주당에 뿌리가 약하고 지지기반이 별로 없었던 노무현은 국민경선을 통하여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역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책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자신의 정당을 갖고자 했던 데서 집권당의 분화가 시작되 었다고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등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필요조건은 갖추었지만 국정 지지도의 지속적인 추락, 정치현실과 자신이 구상 했던 이상과의 괴리, 당내의 불협화음 등 때문에 무당적 대통령의 길을 선택했던 것으 로 볼 수 있다. 집권당의 변화는 결국 노무현의 자기 당 창당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 다. 대통령 탈당 후 열린우리당은 집권당 기능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대 선과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뛰어난 정치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에 서 정당은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는 뛰어난 지도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39 자의 정치적 야심과 의지에 의하여 좌우되기도 하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오합지졸과 같이 그만그만한 지도자들이 경합하는 경우 당은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한 채 변화를 반 복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Ⅳ.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모형 1. 정당 연속과 변화의 세 모형 지난 60년 동안 진행되었던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과정을 <그림-2>와 <그림 -3>과 같이 나타냈다. 주요 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크게 3가지 모형으로 분류하고자 한 다. 1)정치변동의 종속모형 정당의 연속과 변화가 정치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형이다. 한국은 제3세계 정 치학의 실험실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정치적 격변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골고루 경 험하였다. 헌정질서가 중단되는 등 정치변동이 발생할 때마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영 향을 미쳤다. 5.16이후 자유당, 민주당, 신민당이 해산되었다. 또한 10.26사태가 발생하 고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민주공화당, 신민당, 국민당 등이 강제로 소멸되었다. 정치적 격변을 맞이할 때 모든 정당이 강제로 해산되는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새 정치 질서가 자리잡는 과정에 신당이 창당되는 변화가 있었다. 제3공화국 시작과 더불어 민 주공화당, 민정당, 국민의 당, 자유민주당, 민주당 등이 창당되었다. 제5공화국 출범과 정에 민주정의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이 창당되었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는 정 치변동의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았다. 정당이 정치변동을 주동하지 못했고, 정당외적 요 인에 의하여 발생한 정치변동 때문에 기존의 모든 정당이 해체되거나 또한 새로운 정당 이 창당되는 등 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40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그림-2 : 한국 주요 정당의 변천사(1945~1980)> 범례 : 통합, 당명변경 분당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41 <그림-3 : 한국 주요 정당의 변천사(1981~현재)> 범례 : 통합, 당명변경 분당
42 / 제1회의: 한국정치 60년 연속과 변화 2)정당지도자의 야심모형 특정 정치지도자의 야심이 정당의 연속과 변화의 최대 변인이 되는 모형이다. <그림 -2>와 <그림-3>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요 정당의 연속과 변화를 소수의 정치지도자가 주도하였다. 한국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정치인은 이승만, 윤 보선, 김도연, 박정희, 유진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그 다음 신 익희, 김준연, 김병로, 허정, 이범석, 박순천 등이 한국 정당의 연속과 변화에 일정한 역 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정치적 야심인 당권이나 대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목적과 선거 전략에 따라서 한국 정당의 연속과 변화가 이루어졌다. 특정 정치지도자의 야심에 의하 여 위로부터 정당의 연속과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을 빼고 한국정당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이들 몇몇 정치지도자의 정치역정이나 행로가 곧 한국 정당의 연속과 변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정치지도자의 정치운명에 정당의 존속 여부가 좌우되어 온 것이다. 자유당 10년은 이승만의 전위정당으로서 개인의 정치적 야심 실현의 부산물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주공화당 18년은 박정희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는 친위조직으로서 근대화를 지원하고, 억압정치를 제도화하는 도구역할에 충실하였다. 민주정 의당 9년 은 전두환의 신군부권위주의 정권의 시녀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 정당이 한국 정당사 에서 비교적 연속성을 유지했던 이유는 장기집권 때문이지만 이는 결국 특정 정치인의 야심인 정치권력의 획득 및 유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당 변동도 이들이 주도하였다. 이승만과 관련된 한국민주당 대한국민당 자유당 등 3회, 윤보선이 정당변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민주당 신민당 민정당 민 중당 신한당 등 5회,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를 거쳐 직접 창당을 주도한 신한민주당 통 일민주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등 5회,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후보를 거쳐 통일민주 당 입당과 탈당 그리고 평화민주당 신민주연합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 당 등 6회,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등 4회, 기타 신익희, 조병옥, 유진산, 김도연 등도 수차례 당적 변경 과 정당변화를 주도하기도 하였 다. 특히 김대중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서 정당변화를 6회씩이나 주도하여 창당 전문가 다운 면모를 과시하였다. 특정 정치인의 당권 장악과 대권도전을 위한 개인적인 정치야심 때문에 이루어진 정 당변화는 수없이 많다. 한국민주당의 이승만과 신익희의 권력구조 갈등과 1949년 민주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 43 국민당 창당, 1951년 이승만에 의한 자신의 사당인 자유당 창당, 신파인 장면과 구파인 조병옥의 권력투쟁으로 민주당 분당과 1961년 신민당 창당, 민정당의 윤보선과 유진산 의 대립과 갈등으로 윤보선의 당내 입지 강화를 위한 1964년 자유민주당 흡수, 야권 단 일화와 당권 획득 후 윤보선의 대권 도전을 위한 민정당과 민주당의 합당과 1965년 민 중당 창당, 민중당 당권을 박순천에게 빼앗기자 제6대 대통령후보가 되기 위한 윤보선 의 1966년 신한당 창당, 윤보선의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과 1967년 신민당 창당, 신민당을 탈당하여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가 된 1971년 국민당 창 당, 신한민주당을 탈당한 김영삼의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대통령후보가 되기 위한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탈당과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김대중의 대권도전 기반 확충을 위한 민주당과 신민주연합의 합당과 1991년 민주당 창당, 김대중의 정계복귀 후 대권 도전을 위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김영삼의 대권 도전 승부수 차원의 1990년 3 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창당, 1992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창당과 대권 도전, 민주자유 당의 김영삼 당 만들기와 권력투쟁 그리고 김종필 탈당과 1995년 자유민주연합 창당,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을 합당하여 1997년 한나라당을 창당한 이회창의 대권 도전, 1997년 이인제의 신한국당 탈당과 대권 도전을 위한 국민신당 창당 등등을 예롤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창당, 탈당, 분당, 통합 등 정당 변화를 수차례 주도한 이유는 민주주의 발전과 국리민복 차원에서 이루진 것이 아니다. 정치적 야심인 당권이나 대권 도전을 위한 정 치기반 구축차원에서 추진된 것이다. 세가 불리하면 계보원을 이끌고 탈당 분당 등을 통한 신당 창당과 외연확대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른 당과 통합하는 등 정당을 사조직 과 같이 변화시켰다. 탈당과 분당의 변( 辯 )이나 창당과 통합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자 유민주주의 발전과 독재타도 등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이 당권을 장악하거나 대통령후보가 되기 위한 술수의 은폐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추구하는 데 유리한 정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수시로 정당변화를 주도한 것이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가 정치적 야심과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변화가 주로 대선이나 총 선 전후에 이루어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결국 선거 때 후보가 되거나 출마 후 당선 되기 위한 전략에서 정당지도자가 정당 변화를 주도한 것이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가 선거 때 임박하여 이루어졌다. 정당의 연속과 변화는 선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민 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는 정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 하면 선거 승리를 의식해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거나 조직 확대를 위해서 정당 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