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보고 분쟁의 땅 가자지구 한상용 연합뉴스 카이로특파원 연합뉴스 인천지사ㆍ스포츠레저부ㆍ 사회부 기자 한국기자협회 이달의기자상 수상 이집트의 라파 국경을 통과해 가자지구 땅을 밟은 2011년 11월 20일 오후 3시께(현지 시각). 너비가 6~8km, 길이가 40km에 달하는 작은 면 적에 1,700만 명이 빼곡히 살고 있는 가자지구에 들어갔다. 분쟁의 땅 가자지구는 2010년 고웅석 연합뉴스 카이로특파원이 취재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실제적 전시 상황에서 취재목적을 갖고 들어가기는 국내 언론 중 처음이었다. 2010년 1월 아이티 대지진, 2011년 3월 일본 쓰 나미 참사, 2011년 말 리비아 사태, 2012년 시리아 접경지대 등 대형 재난 내전 상황을 여러 차례 취재한 적이 있지만 가자지구는 교전이 한창 치열 하게 진행될 때라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자지구에 들어가 기 전 이집트 동북부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라파(Rafah) 국경 지대에서도 심심찮게 가자지구 내에서 발생한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치솟 은 검은 연기를 봐 왔던 터라 더욱 긴장됐다. 가자지구에서 본 현장은 지구상 최악의 분쟁지역이라는 곳을 곧바로 실 감나게 했다. 천장 없는 감옥 으로 불리는 가자지구 안에 설치된 공장과 초 분쟁의 땅 가자지구 219
소, 경찰서, 군 시설이 이스라엘 공습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 화됐다. 몇 층짜리인지도 모를 만큼 완전히 파괴된 민간인 거주 주택과 농 장의 비닐하우스도 몰골만 드러내 폭격 당시의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냈 다. 주변에는 바리케이드나 폴리스 라인도 없었고, 접근을 막는 군인이나 경찰관도 보이지 않았다. 동양계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서성이는 것을 본 주민은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진을 찍어라 하고 외쳤다. 청명한 가을 날씨였지만 가자지구 전체는 침울했다. 아직 휴전 합의가 성사되기 전인 터라 이스라엘 공습을 두려워한 가자지구 주민들이 외출을 극도로 꺼렸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건축 자재를 들여올 수 없는 탓 에 건물 대다수 외벽은 회색 벽돌을 그대로 드러내 회색 도시 를 방불케 했 다. 우리나라 70년대를 보는 듯한 주변 풍경에 차선 표시도 없는 도로 위에 는 낡은 차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택시에 안전벨트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속도계도 고장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 흔들리는 폭격에 한숨도 못 자 밤새 전투기와 정찰기의 굉음에, 숙소 건물이 크게 흔들릴 정도의 폭격 에 한숨도 못 잤지만 공포는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된 그 다음 날도 계속됐 다. 가자지구에 진입한 다음 날 택시를 타고 남부 중소도시 칸 유니스에서 북부 최대도시 가자시티로 30분간 이동하는 동안 생존의 본능 을 느끼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주변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내가 탄 택시밖에 없었 기 때문이다. 라파 국경 쪽에서 가자시티로 이어지는 도로는 하나밖에 없다. 가자시티 입구 중앙도로에 접어들자 깊이 5m, 폭 10m가량 되는 움푹 팬 커다란 웅덩 이가 나타났다. 택시기사는 어제 폭격을 맞아 생긴 구덩이 라면서 조심스 럽게 길가 쪽으로 차를 몰았다. 220 관훈저널 봄호
택시가 이동하는 동안 가자지구 상공에서는 정찰기 2~3대가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가자지구에서도 보이는 이스라엘 영토 상공에는 커다란 흰색 풍선이 둥둥 떠 있었다. 그 풍선에는 고성능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다고 가자 주민은 말했다. 내가 탄 택시도 이스라엘 전투기나 미사일의 타깃 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자지구에 머무는 외 신기자들에게 움직이면 위험하니 꼼짝 말고 있어라 라는 공지를 한 터였 다. 이스라엘이 오폭만은 하지 말길 바랐다. 시내 중심부엔 전쟁의 참상 고스란히 시내 중심부로 접어들자 폭격의 상흔은 더욱 깊었다. 큰 건물들은 상당 수가 무너져 내렸고, 특히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은 가자시티 경찰서는 형 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돼 있었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POLICE 라고 쓰인 경찰차량이 이전에 이곳이 경찰서였음을 짐작케 했 다. 거리에는 피폭 건물과 차량의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전쟁의 참 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시내 중심부에 약 200m 길이로 늘어선 쇼핑 거리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평소에는 쇼핑객과 주민들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지만 이날은 매 우 스산해 보였다. 1주일째 이스라엘의 집중폭격을 받은 가자시티 주민 거 의 모두가 집 안에만 머물고 있었다. 서방언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투로 이번 가자사태 를 그렸지 만 이스라엘에 비해 가자지구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이스라엘의 감시에서 하루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자지구의 평범한 주민에게서 이스라엘 과 전쟁을 치르려는 전의 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극도의 경 계심과 함께 삶의 고단함, 피로함이 묻어 있었다. 가자지구 주민의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는 실제 컸다. 하지만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가 과연 이스라엘군과 대항해 싸울 여력이 되는지 의심이 분쟁의 땅 가자지구 221
들 수밖에 없었다. 가자지구에서는 라파 국경에 배치된 군인을 제외하곤 집단으로 움직이 는 군인 또는 경찰 무리를 보지 못했다. 내가 찾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스 라엘이 그토록 위험하다고 강조한 가자지구의 미사일 발사대도 목격하지 못했다. 국경지대는 물론 가자 전역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한 대도 못 봤다. 실제 가자지구에는 이스라엘의 봉쇄정책과 방해로 탱크와 장갑차를 보유 할 수 없다고 한다. 나중에 집계된 수치도 하마스의 열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1월 14일부 터 21일까지 8일간 벌어진 양측의 포격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숨진 가자지 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164명이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 국민의 사망자 숫자는 6 에 불과하다. 사실 교전 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이 스라엘의 일방적인 공격인 셈이다. 숙소에 인터넷 안돼 전화로 기사 불러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자지구의 취재환경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숙소에는 인터넷이 깔려 있지 않아 모든 기사를 두바이특파원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일일이 불러줘야 했다. 통역도 없어 혼자 다니며 사진취 재를 했고, 서툰 아랍어를 써 가며 현지인에게 취재장소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가자지구에서는 어떤 화폐가 통용되는지 알지 못해 미국달러만 갖고 왔는데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었다. 현장에서 안 사실이지만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화폐단위인 세켈을 쓰고 있었다. 보람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목숨을 건 이동으로 사이가 가까워진 택시 기사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 방문으로 평범한 가자지구 주 민의 삶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가자지구 제2의 도시 칸 유니스 외곽에 자리 잡은 오므란의 낡은 2층짜 리 집은 전체 5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돼 있었다. 모두 4가족에 갓난아기까 222 관훈저널 봄호
지 포함해 20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기사는 아내와 남동생, 다섯 살과 세 살 난 3명의 아들, 태어난 지 6개월 된 여아와 함께 살고 있었다. 거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 어른 4명에 어린이와 아기 5명이 한데 모 여 점심을 하고 있었다. 작은 상 위에는 누런색의 전통 빵과 토마토, 오이가 섞인 샐러드만 놓여 있을 뿐 다른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기사의 동생은 이 가족 중 유일하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수월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공무원 신분인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1년 넘게 파견근무 를 하는 동안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기사의 집 한쪽 편에 있는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세수용 물에서 역한 냄 새와 묘한 짠맛이 느껴졌다. 가자지구의 정수처리시설을 정상적으로 가동 하는 데 필요한 부품의 반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기사의 가족을 포함해 가 자 주민은 물을 그대로 마시지 않고 대신 뜨거운 차에 설탕을 듬뿍 넣어 자 주 마셨다. 기사의 가족 4~5명과 인터뷰를 하며 가자지구 다수의 주민이 무엇을 바 라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에 대한 분노의 목 소리도 들었다. 하마스가 가자지구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나서 점차 주민을 강압적으로 다루려 하고 있고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와 단일화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하마스와 파타 양대 정파는 지난 수년간 치열한 권력다 툼을 벌여왔다. 가자지구의 한 주민은 하마스를 지지하지 않는 주민도 여 기에 꽤 많지만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보복당할 우려로 아무도 대놓 고 하마스가 싫다 고 말 못 한다 고 말했다. 양측의 충돌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매우 어리둥절케 하는 이스라엘 언론 보도도 나왔다. 이스라엘이 한국 측에 미사일요격시스템 아이언돔 구매 를 요구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은 가자사태 동안 백발 백중의 적중률을 자랑하며 전 세계 언론을 통해 홍보 효과 를 가장 크게 본 주인공이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자지구 민간인이 희생되는 동안 이스 분쟁의 땅 가자지구 223
라엘은 자국산 무기류 판매에 나선 셈이다. 마음속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 일은 또 있었다. 11월 21일 저녁 이스라 엘과 하마스 양측이 휴전에 합의했다고 미 국무장관과 이집트 외교장관이 카이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밝힌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언론은 일제히 휴전 합의를 이끌어낸 주역으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칭찬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도 주목을 받았다. 주민들 피해는 언론에서 사라져 그런데 이상했다. 가자 주민의 고통과 피해현황, 전쟁의 잔혹함, 이-팔 분 쟁의 궁극적인 원인, 충돌배경에 관한 보도는 온데간데없고 제3의 인물들 이 호평을 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가자지구 주민들은 서 방의 언론보도에서 조연도 맡지 못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보도인 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분쟁기간 가장 큰 피해를 보고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항상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주민이었 다. 그러나 서구의 시각에서 본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자 이스라엘의 잠재적인 테러그룹 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이스라엘은 자 국안보를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위협하고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은 생존권 을 내걸고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다. 1948년 약속의 땅 으로 불리던 지중해 동부연안의 가나안 지역에 이스 라엘이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은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팔레 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정착촌을 앞세워 영토 확장에 열중해 왔 다. 특히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극심했다.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지하터널과 제한적 구호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생활의 연속에 서 벗어나기 어려운 여건 탓이다. 224 관훈저널 봄호
이스라엘은 2007년 6월 강경 무장 정파 하마스가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 타인 수반이 이끄는 온건 정파인 파타 소속 보안군을 몰아내고 가자지구 를 장악하자 육로뿐 아니라 바닷길까지 틀어막아 하마스 체제를 고사시키 는 봉쇄정책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로켓발사 진지나 지하벙커 등 군사시설을 짓는 데 전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건축자재 반입도 철저히 막았다. 지난해 초 몰락한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정부도 하마스의 영 향력이 자국 내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스라엘에 동조해 가 자지구와 접한 국경을 사실상 폐쇄해 버렸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찢긴 채 기구 한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으로 건너가 난민 신세를 져야 한다. 만약 팔레스타인 국가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무국적자이거나 아니면 이 스라엘 국민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도 요원한 상태다. 팔레스타인은 이 스라엘을 자신의 땅을 빼앗은 적으로 간주하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의 공존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비극이 빨리 끝나길 바라 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가 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분쟁의 땅 가자지구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