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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개항장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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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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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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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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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218-진행

제 2 편채권총론 제1장채권의목적 제2장채권의효력 제3장채권의양도와채무인수 제4장채권의소멸 제5장수인의채권자및채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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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회보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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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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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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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34 9 1900~1910년대 이혼법을 중심으로 吉川絢子* 11) 목차 Ⅰ. 머리말 Ⅱ. 갑오개혁기 일본유학과 법학과의 만남 1. 갑오개혁과 관비유학생 2. 東京法學院에서의 법학교육 Ⅲ. 유학생의 귀국과 법학교육 1. 법학교육기관의 설치와 일본 유학생 2. 일본 유학 경험자의 법학서적 집필 Ⅳ. 근대 재판제도의 도입과 전문적 판사의 등장 1. 1895년 재판소구성법 시행과 사법 행정의 미분리 2. 1907년 재판소구성법의 시행과 사법의 독립 3. 법관양성소 및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의 증가 4. 1910년대 한국인 판사의 출신 학교 분석 Ⅴ. 한국인 판사의 이혼법 지식과 인식 1. 번역판 법학통론 과 이혼법 서술 2. 東初生, 離婚法 制定의 必要 3. 매일신보 질의해답 란과 이혼법 Ⅵ. 맺음말 * Yoshikawa Ayako, 일본 京都大學 大學院 文學硏究科 박사과정 (yasegaerumakerunaittya@hotmail.com)

350 法史學硏究 第46號 [국문 요약] 1895년경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은 동경법학원 등에서 법학을 공부하였 다. 귀국 후 그들은 법관양성소,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강사로서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동시에 일본에서 나온 법학서적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들 법학서적은 교과서로써 사용되기도 하였 다. 1907년 12월의 재판소구성법 시행으로 말미암아 한국에서는 전담 판사가 필요하게 되었 다. 1910년대 판사가 된 한국인은 대부분 법관양성소, 보성전문학교, 일본 내지 대학 등에서 일본법을 배운 자 또는 그들의 제자였다. 다시 말하여 1910년대 한국 법원에서는 일본법을 익힌 한국인이 일본인 판사들과 함께 심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이나 일본 내지에서 번역, 출판된 법학교과서나 법조인의 각종 저작물에서는 한국의 법조인이 일본 이혼법을 한국에도 도입하려고 하거나 실제 한국에서 일어난 사례에 적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1910년대 여성을 원고로 한 이혼소송이 수 리된 배경에는 일본법을 익힌 한국인 판사에 존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관비유학생, 법관양성소, 보성전문학교, 근대법학, 이혼, 한국인 판사 Ⅰ. 머리말 2002년 몽골에서 신민법전이 시행된 것을 시작으로 2006년에는 베트남에서 신민법전이, 2007년에는 캄보디아에서 민법전이 그리고 2009년에는 중국에서 침권책임법(侵權責任法)이 각각 시행되었다. 또한 2004년에는 한국에서 민법개 정안이, 2009년에는 일본에서 채권법 개정안이 작성되는 등1) 현재 동아시아에 서 민법 개정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민법 계수에 관한 역 사적 경험을 돌이켜보는 작업은 한국사회에 더욱 적합한 민법전을 만들어가는 데 필수불가결이라 하겠다. 그 의미로 올해 2012년 2월 한국법사학회 주최로 개최된 동아시아에서의 민법의 수용과 전개 : 민법의 역사적 기반과 민법개정 의 과제 라는 국제학술회의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그리고 일본의 사례 를 들어 한국 민법전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는 좋은 기회였다. 1) 大村敦志, 民法改正を考える (岩波新書, 2011), p.107.

351 그 동안 발표된 근대 한국의 법학 수용에 관한 연구는 崔鍾庫, 韓國法學史, 金孝全, 近代韓國의 法制와 法學 등이 있다. 그리고 민법 수용에 초점을 맞 춰 연구한 것으로는 鄭鍾休, 韓國における西歐法繼受の初期的諸相 등이 있 다. 먼저 최종고와 김효전의 연구는 大韓帝國官員履歷書 와 신문 기사를 수 집 정리함으로써 한말 법조인이 된 한국인의 경력, 당시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법학교육의 내용 등을 밝혔다. 그리고 정종휴의 연구는 1890년대 말부 터 1910년의 한국병합에 이르는 시기 한국에서 이루어진 서구법 계수에 대하 여 입법과 사법, 교육 등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특히 교육을 통한 서구 법 수용에 대하여 고찰한 제4장 敎育による西歐法の受容 에서는 보성전문학 교 등에서 사용된 교과서, 당시 발행된 법학 잡지와 법학 논설 등을 분석함으 로써 당시 한국의 법학교육이 띠고 있던 성격을 밝혔다. 또한 최종고 연구에 대해서는 최달곤과 현승종이,2) 김효전 연구에 대해서는 정긍식이,3) 그리고 정종휴 연구에 대해서 이병수가4) 각각 서평하였다. 정긍식 의 서평에 잘 나타나 있듯, 이들 1차 자료를 많이 이용한 연구성과는 모래시 장에서 금 부스러기를 찾는 것에 비유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그야말로 엄청 난 시간과 그리고 따분함 가운데서도 옆길로 새지 않는 집중력 5)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초기 한국의 민법수용 과정을 좀 더 깊이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 음 세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1890년 말 일본에서 법학을 배우다가 2) 崔達坤, <서평> 崔鍾庫 著 韓國法學史, 法史學硏究 제11호(1990); 玄勝鍾, <서평> 崔鍾庫 著, 韓國法學史, 서울대학교 法學 제32권 1 2호(博英社, 1990 1991). 3) 鄭肯植, <서평> 金孝全 著, 近代韓國의 法制와 法學 (세종출판사, 2006), 1209면), 서울 대학교 法學 제48권 제2호(2007). 4) 李丙洙, 書評 鄭鍾休 韓国における西欧法継受の初期的諸相 日本法との関連 (1)~(3), 民商法雑誌 第88卷第4~6号; 同, 韓国における日本民法の変容(1)~(3), 同誌 第89卷 第2~4号; 同, 韓国民法典の制定過程についての一考察(1)~(2)( 同誌 第90卷第4~5号), 法制史研究 35(1986), p.362. 5) 鄭肯植, 앞의 책, 177면.

352 法史學硏究 第46號 한국에 돌아가 여러 법학교육기관에서 교편을 잡은 자들이 일본 어느 대학에 서 누구의 강의를 듣고 있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들 일본 유 학경험자가 법학서적을 집필하는 데 과연 누가 쓴 문헌을 참조하고 있었는지 를 밝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들 일본 유학경험자에게서 법학교육을 받아 법 조인이 된 자들이 어떠한 법학이론을 전개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 다. 다시 말하여, 근대 초기 민법 수용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1890년대 말 부터 한국인에게 수용되기 시작한 근대 법학이 1900년대 중반 이후 학교나 법 학서적을 통하여 교육되면서 1910년대 법조인이 된 법학도의 법학이론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이 글에서는 한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 너간 사람이 어디서 어떠한 법학교육을 받았으며 그 법학교육이 귀국 후의 교 육활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교육활동을 접한 이들이 이혼법 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보이고 있었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작 업을 통하여 1910년대 여성을 원고로 한 이혼소송이 한국 법원에서 수리된 배 경을 고찰하였다. Ⅱ. 갑오개혁기 일본유학과 법학과의 만남 1. 갑오개혁과 관비유학생 조선정부는 근대문물제도를 시찰시키기 위하여 1881년 조준영(趙準永), 박정 양(朴定陽), 어윤중(魚允中), 홍영주(洪英柱), 엄세영(嚴世永) 등 신사유람단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시찰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했으나 유길 준(兪吉濬), 유정수(柳定秀), 윤치호(尹致昊)는 慶應義塾과 同人社6)에 각각 입 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개화파 정권은 1883년경까지 100여 명의 관비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였다.7)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후 10년

353 간 유학생 파견이 중단되었으나 김홍집, 박영효 등의 이른바 갑오개혁이 계기 가 되어 1895년 봄부터 유학생의 일본 파견이 재개되었다.8) 그리고 같은 해 4 월 말 유학생 113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9) 같은 해 음력 5월 21일에는 26명이, 9월에는 7명이 관비유학생으로 각각 일본으로 파견되었다.10) 이 외에 조선정부 는 1895년 이전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가 있던 자들과 1896년 1월 새로 일본으 로 유학 간 자들 모두 관비유학생으로 대우하였다.11) 그러므로 1895년에서 1896년 초까지 조선정부가 파견한 일본 관비유학생은 연 164명에 이르렀다.12) 그들의 대부분은 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일본어를 배 웠다.13) 일본어 수업은 매일 2시간씩 이루어졌다.14) 그리고 일본어 외에 이화 학(理化學) 관련 수업도 진행되었다.15) 그 결과, 1895년 말까지 그들은 일상생 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일본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16) 6) 同人社; 1873년 나카무라 나오마사(中村正直)가 설립한 가숙. 메이지 초기에는 후쿠자와 유 키치(福澤諭吉)의 慶應義塾, 곤도 마코토(近藤眞琴)의 攻玉社와 아울러 三大義塾이라 불렸 으며, 학생수도 300명이 넘었다. 학과에는 英學正則, 英學變則, 漢學, 수학 등이 있었다. 1887년 폐교되었다. 7) 朴贊勝, 1890年代後半における官費留学生の渡日留学, 宮嶋博史 金容徳編, 近代交流 史と相互認識Ⅰ (慶応義塾大学出版会, 2001), p.71. 8) 근대 한국의 유학생 파견사(史)에 대하여 연구한 아베 히로시(阿部洋)에 의하면 한말의 일본 유학은 그 시기에 따라 네 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성준 등이 慶應義塾에 입학한 1883년 의 제1기, 파견이 재개되어 300명 가까운 학생이 일본 각종 학교에 입학한 1895년에서 1902 년의 제2기, 한국 황실특파 유학생 50명이 도쿄부립 제1중학 등에 입학한 1904년의 제3기 그 리고 사비유학생이 늘어나는 1905년에서 1906년의 제4기가 그것이다. 한말의 일본 유학생에 관한 연구는 허다하나 여기서는 상기 제2기를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만 소개한다. 金泳謨, 韓末支配層 硏究 (한국문화연구소, 1972); 阿部洋, 旧韓末の日本留学(Ⅰ), 韓 第3券第5 號(1974); 宋炳基, 開化期 日本留學生 派遣과 實態(1881~1903), 東洋學 18輯(1988); 朴贊 勝, 위의 논문. 9) 朴贊勝, 위의 논문, p.73. 10) 朴贊勝, 위의 논문, pp.76~78. 11) 朴贊勝, 위의 논문, p.79. 12) 朴贊勝, 위의 논문, p.79. 13) 慶応義塾, 慶応義塾75年史 (1932), p.157. 14) 朝鮮語学生彙聞, 読売新聞 1895. 5. 4. 15) 朝鮮語学生彙聞, 読売新聞 1895. 5. 4.

354 法史學硏究 第46號 그리고 1895년 11월에는 8명, 이듬해인 1896년 7월에는 43명, 같은 해 12월에 는 20명 모두 71명의 관비유학생이 慶應義塾을 졸업하였다.17) 그들 중 61명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18) 1896년 9월 21일자 요미우리신문에 의하면, 졸업생 100여 명 중 7명이 법학 전공을 지원했으며 나머지 학생은 成城學校(17명), 東 京專門學校 정치과(7명), 商船學校(2명) 등에 진학하였다.19) 그리고 같은 해 9 월 유창희(劉昌熙), 정재순(鄭在淳), 장규환(張奎煥), 유치학(兪致學), 이면우(李 冕宇) 등 5명이 東京法學院에 입학하였다.20) 그 이후에도 東京法學院에는 관 비유학생이 계속 입학하였으며 1897년 8월까지 박만서(朴晩緖), 원응상(元應 常), 변하진(卞河璡), 유진방(兪鎭方) 등이 진학하였다.21) 2. 東京法學院에서의 법학교육 관비유학생이 慶應義塾 보통과를 졸업하여 상급학교로 진학한 당시, 東京에 서 법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는 帝國大學 법과대학, 東京 專門學校 법학부, 明治法律學校, 東京法學院, 專修學校 법률학과, 日本法律 學校, 和佛法律學校, 慶應義塾 법률과 및 일본법률과 등이 있었다.22) 특히 1897년 8월 당시 8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재학 중이던 東京法學院은 학 교 규모가 큰 편이었으며 전신인 英吉利法律學校가 설립된 1886년부터 1896년 까지 1,7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23) 그리고 같은 해 9월과 10월에 실 16) 17) 18) 19) 20) 21) 22) 23) 朝鮮学留生の好成績, 読売新聞 1895.12.29. 朴贊勝, 앞의 논문, p.97. 朴贊勝, 앞의 논문, p.87. 朝鮮人留学生の諸学校入学, 読売新聞 1896. 9.21 東京法学院, 法学新報 第66号, 1896. 독립신문 1897. 8.17. 大橋又四郞編, 東京遊學案內 (少年園, 1897). 川島仟司, 高野金重編, 中央大学20年史 (法学新報社, 1905), p.95.

355 시된 판사 검사등용시험24)에서는 합격자 총 33명 중 14명을 東京法學院 출신 자가 차지하였다.25) 東京法學院은 교수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학생 수가 워 낙 많은 것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26) 당시 東京法學院에는 법학통론, 민법총론, 친족법, 상속법, 물권법, 채권법, 민 사소송법, 파산법, 로마법 등의 강의가 있었다. 東京法學院 후진인 중앙대학에는 현재 장도(張燾) 등 한국인 유학생의 학적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27) 한국인 유학 생도 이들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東京法學院 발간 法學新報 에 게재된 광고를 바탕으로 1898년 당시의 시간표를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東京法學院 학년별 시간표(1898년 당시)28) 학년 1학년 교과목 담당자 法學通論 肥田平次郞 民法總論 伊藤悌治 親族法 穗積陳重 相續法 太田資時 物權法(第1部) 羽生顯親 債權法(第1部) 伊藤悌治 비고 24) 9월 23일에서 25일에 걸쳐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상법 등 5개 과목의 필기시 험이 이루어졌으며 10월 26일 필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구술시험이 실시되었다. 判検事 試験問題, 読売新聞 1896. 9.26; 判検事口述試験, 読売新聞 1896.10.27. 25) 이 때 합격한 14명 중에는 아지가자와(鯵ケ沢)구재판소 검사국 사법관시보검사대리, 도치기 (栃木)구재판소 판사, 도쿄지방재판소 판사를 거쳐 1908년 한국으로 건너가 평양지방재판소 판사, 평양구재판소 판사, 진남포구재판소 판사, 대구지방법원 판사,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판사, 함흥지방법원 부장판사,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판사, 공주지방법원 원장을 역임한 다케무라 마사카즈(竹村昌計)도 포함되어 있다. 東京法学院広告, 朝日新聞 1896.12. 6; 明治法律学校報告, 朝日新聞 1896.12. 9. 26) 文淵, 東京遊學案內 (少年園, 1891), p.121. 27) 한국인 유학생의 수강 상황과 관련하여 2012년 5월 필자는 中央大學 총무과에 학적부 공개 를 신청하였다. 그 결과 6월 같은 대학 학사부 학사과 담당자 시미즈 다이스케(淸水大輔)씨 에게서 이들의 학적부는 소실 등으로 말미암아 남아 있지 않다는 해답을 얻었다(학적부 공 개신청일 2012. 5.31, 해답일 2012. 6.15). 28) 東京法学院, 法学新報 第89号, 1898. 4.

356 法史學硏究 第46號 2학년 3학년 債權法(第2部 甲) 土方寧 債權法(第2部 乙) 馬場愿治 刑事汎論 古賀廉造 刑事訴訟法 石渡敏一 論理學 渡邊又次郞 法律原論 平山銓太郞 英語法律科 英語法律科 契約法 馬場愿治 物權法(第2部) 加納友之介 債權法(第3部) 土方寧 商法總論 原嘉道 會社法 原嘉道 手形法 植村俊平 海商法 朝倉外茂鐵 刑法各論 勝本勘三郞 民事訴訟法 今村信行 憲法 穗積八束 經濟學 金井延 證據法 肥田平次郞 法理学 平山銓太郞 英語法律科 私犯法 羽生顯親 英語法律科 擬律擬判 羽生顯親 訴訟演習 寺島直 破産法 小澤政許 保險法 馬場愿治 民事訴訟法 불명 國際公法 立作太郞 邦語法律科 國際公法 三崎亀之助 英語法律科 國際私法 立作太郞 行政法 一木喜德郞 美濃部達吉 財政學 松崎藏之助 高野岩三郞 羅馬法 戶水寬人 商法修正要領 岡野敬次郞 擬律擬判 馬場愿治 訴訟演習 寺島直

357 1899년 7월 12일 東京法學院 대강당에서는 미요시 타이조(三好退藏)29) 전 대심원 원장, 하루키 요시아키(春木義彰)30) 전 검사총장, 박용화(朴鏞和) 한국 대리공사 등 700여 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제1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총 184 명의 졸업생(邦語법학과 174명, 영어법학과 10명) 중에는 장도, 유창희(劉昌熙), 유치학(兪致學), 이면우(李冕宇) 등 4명의 한국인 유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31) Ⅲ. 유학생의 귀국과 법학교육 1. 법학교육기관의 설치와 일본 유학생 상급학교로 진학한 관비유학생들은 1899년경부터 한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하 였다.32) 1899년 10월 30일과 11월 2일 효고현(兵庫縣) 지사 오모리 쇼이치(大森 鍾一)가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에게 각각 보낸 보고서에서는 장도, 유창희, 이면우, 유치학 등 네 명이 한국을 향하여 10월 29일부터 31일 사이 각 각 고베(神戶)를 떠났음을 알 수 있다.33) 29) 미요시 타이조(三好退藏);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법관, 변호사. 1845년생. 휴가 다카나베번(日向 高鍋藩)출신. 1873년 사법성에 들어갔으며 188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들과 함께 유럽 의 재판재도를 시찰하였다. 귀국 후는 사법차관, 대심원 검사총장, 대심원장 등을 역임하였 다. 1896년 10월 대심원장을 의원 퇴직한 후는 변호사 등록을 하여 足尾銅山 광독사건 등의 변호를 맡는 동시에 도쿄변호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8냔 8월 64세로 사망하였다. 30) 하루키 요시아키(春木義彰);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법관. 1846년생. 야마토국 헤구리군 호류 지촌(大和國 平群郡 法隆寺村)출생. 1868년에서 1869년의 보신전쟁(戊辰戰爭) 때는 오우정 토군(奧羽征討軍)으로 종군하였다. 1872년 나라현 권대속(權大屬) 및 대속을 그만둔 후 사법 계에 들어가 사법권소검사(司法權少檢事), 도쿄상등재판소 판사, 나가사키공소재판소 검사 장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 검사장을 사직하여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 결당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1885년 다시 사법계로 돌아가 대심원 검사, 검사총장, 도쿄공소원 원장 등을 역임하 였다. 1904년 12월 59세로 사망하였다. 31) 東京法学院, 法学新報 第100号, 1899. 7. 32) 朴贊勝, 앞의 논문, p.122. 33) 兵發秘第519號, 兵發秘第526號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8 法史學硏究 第46號 이 시기 한국 각지에는 법학교육기관34)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한성에서는 1895년의 법관양성소 개교를 효시로 1898년에는 漢城義塾 (이듬해 樂英學校로 개칭)과 光興學校 등이, 1899년에는 時務學校 (이듬해 中橋義塾으로 개칭), 培 英義塾, 光成學校 등이 각각 설립되었다. 1895년에서 1910년까지 신문 등에 설 립 또는 학생모집 광고가 나온 학교만도 70여개 가까이 되었다.35) 이들 법학교육기관에서는 일본에서 귀국한 자가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한 성의숙에서는 변하진이,36) 광흥학교에서는 유창희와 장도가,37) 광성학교에서 는 이면우가38) 각각 강단에 섰다. 그리고 1905년 1월 24일 南署 銅峴 朴宮洞 第63統 2戶에 개교한 漢城法學校에서는 장도, 유치형(兪致衡), 유문환(劉文煥), 이면우, 홍재기(洪在騏), 석진형(石鎭衡) 등이 강사로 재직하며 법학통론, 명률, 민법, 상법, 형법, 재판소구성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등을 가르치고 있었 다.39) 같은 해 4월 西署 英語學校 後谷 第18統 1戶에 문을 연 養正義塾에서도 장도, 신우선(申佑善), 석진형, 유승겸(兪承兼) 등이 강사를 맡고 있었다.40) 그 리고 이달에는 礡洞 俄語學校 터에 법학교육기관이 또 설립되었다. 보성전문 학교가 그것이다. 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는 가운데 보국(報國) 구국(救 國)에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李容翊 등이 설립한 이 학교에는41) 법 률학 전문과, 경제학 전문과 그리고 법률학 전문야학과 등 세 개 학과가 설치 34) 이 글에서는 법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며 법률가 또는 법학자를 양성하는 기관뿐만 아니라 교과목 중에 법학과목이 들어 있는 학교도 법학교육기관으로 간주함. 35) 金孝全, 近代韓國의 法制와 法學 (世宗出版社, 2006), 165~208면. 36) 황성신문 1899. 3.20. 37) 法律敎師, 황성신문 1900. 2.14. 38) 推蔘事實, 황성신문 1901.11. 9. 39) 한성법학교에서는 총 31명이 강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10명이 일본에서 법학을 배운 자였다. 學員募集廣告, 황성신문 1905. 1.16; 法校開校詳報, 황성신문 1905. 1.27; 漢城法學校 創設 關係記錄, 1905. 40) 황성신문 1905. 4. 1; 황성신문 1906. 5. 8. 41) 姜萬吉, 普成專門學校 設立의 歷史的 背景, 近代西歐學問의 受容과 普專 (高麗大學校 出版部, 1986), 104면.

359 되었는데 강사 20여 명은 曾前 日本의 遊學 야 卒業 人 이었으며42) 법률 과에서는 신우선, 유승겸, 유치형, 장도, 장헌식(張憲植), 홍재기, 유문환, 석진 형을 강사로 초빙하였다.43) <표 2> 보성전문학교 법률과 강사(1905년)44) 강사 성명 취직 연월 사직 연월 석진형(石鎭衡) 1905. 4 1913. 3 장도(張燾) 1905. 4 1908. 2 유문환(劉文煥) 1905. 4 1908. 3 신우선(申佑善) 1905. 4 1908. 2 이면우(李冕宇) 1905. 4 1908. 2 홍재기(洪在騏) 1905. 4 1907. 9 유치형(兪致衡) 1905. 4 1908. 2 장헌식(張憲植) 1905. 4 1908. 2 유승겸(兪承兼) 1905. 4 1908. 2 그리고 1903년 1월 복설된 법관양성소의 경우, 1904년 1월에는 교사 10명 중 한 명도 일본 유학 경험자가 없었으나 1905년 12월에는 유문환, 석진형, 유동작 등 일본 유학 경험자가 교사로 일하고 있다.45) <표 3> 법관양성소 교사 명단 1904년 1월 1905년 12월 정명섭(丁命燮), 홍재기(洪在騏), 조세환(曺世煥), 고익상(高 정명섭(丁命燮), 권필수(權必壽), 조세환(曺世煥), 안택중(安 翊相). 윤태영(尹泰榮), 김종호(金鍾濩), 윤광보(尹光普), 유 宅重), 송태환(宋台煥), 김정식(金廷植), 정기학(鄭基學), 김 문환(劉文煥), 석진형(石鎭衡), 유동작(柳東作), 윤헌구(尹憲 계형(金桂瀅), 이신우(李信宇), 허정(許定) 求), 나진(羅瑨) 42) 43) 44) 45) 創設 專門, 황성신문 1905.4.1. 本校 沿革, 法政學界 제1호(1907), 54면. 普成專門學校, 普成専門学校一覧 (1931), 52면. 法官養成所, 光武 8年度, 9年度, 10年度 法官養成所 經費金 請求書 冊 (발행년도 불명).

360 法史學硏究 第46號 다시 말하여, 1905년 이후 일본 유학 경험자들은 한성 내 여러 법학교육기관 에서 강사로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2. 일본 유학 경험자의 법학서적 집필 1906년 9월 15일자 황성신문 은 석진형이 양정의숙 교수들과 함께 교과서 를 번역하기 위하여 내부 참서관을 주면(奏免)하여 달라고 누차 청원하였다고 전하였다.46) 이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는 1906년경부터 법학서적의 집필, 번역, 판매가 활발해졌다. 우선 보성전문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各 專門敎科書 數千 卷을 新刊 할 예 정이었으며47) 법률학과에서는 각 강사가 강의록을 집필하기로 하였다48). 그리 고 1906년 3월 15일자 황성신문 에는 신간서적으로 법학통론 이 소개되어 있다. 이 광고에는 저자명이 없으나 강화부 보창학교(普昌學校)출판에서 간행 된 유성준의 법학통론 이 1905년 12월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이 책의 저자는 유성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1906년 6월 8일자 황성신문 에 게재된 평양 大同書館 광고에는 日本明治法制, 日本監獄法律詳解 49) 등의 법학서가 소개되어 있다.50) 1908년 5월에는 1907년 2월 보성전문학교 법 石氏 請願, 황성신문 1906. 9.15. 創設 專門, 황성신문 1905. 4. 1. 本校 沿革, 法政學界 제1호(1907), 54면. 일본 법무성 교정도서관(東京都 中野區소재)이 소장하는 자료 중에는 日本監獄法律詳解 라는 책은 없다. 다만, 1890년대 일본에서는 柳澤武運三, 日本刑法竝附則刑事訴訟法 改正 監獄則註解 附 公訴私訴告訴告發手續 等 書式 (大塚宇三郞, 1893); 川原梶三郞, 傍訓 刑 法 刑事訴訟法 監獄則 釋義 鼈頭精解 內訓伺 指令 (中村鍾美堂, 1893); 福井淳, 傍訓 刑 法 刑事訴訟法 監獄則 註釋 鼈頭內訓伺 指令 (岡本偉業館, 1897) 등 감옥칙의 해설 책이 몇 권 출판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日本監獄法律詳解 역시 감옥칙을 해설한 것으로 보인다. 50) 황성신문 1906. 6. 8. 46) 47) 48) 49)

361 률학 전문 야학과를 졸업한 주정균(朱定均)51)의 법학통론 이 경성일보사에서 발간되었다. 그리고 1910년 3월 15일자 황성신문 에는 경성 修文書館에서 장 도 형법총론, 유문환(劉文煥) 형사소송법, 신우선(申佑善) 민법총론, 석 진형 채권법(제1부, 제2부), 조성구(趙聲九) 채권법(제3부), 유치형(兪致衡) 물권법(제1부, 제2부), 홍재기(洪在祺) 민사소송법, 김상연(金祥演) 상법총 론, 김상연 회사법, 신우선 어험법, 유치형 해상법, 안국선(安國善) 상 행위법, 박만서(朴晩緖) 파산법, 이용무(李用戊) 국제공법, 유문환 국제 사법 등이 발간되었다고 소개되어 있다.52) 이들 법학서적 중에는 1890년대 일본에서 발간된 책을 번역한 것도 많았다. 우선 유성준의 法學通論 은 1881년 미야기 고조(宮城浩藏),53) 야시로 미사오 (矢代操)54)와 함께 메이지법률학교를 창립하며 1888년 초대 교장에 취임한 기 시모토 다쓰오(岸本辰雄)55)의 法學通論 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1898년의 초판 인쇄 이후 개정증보를 거듭하며 明治 말까지 20여 판이 인쇄되었다.56) 그 51) 第1回 卒業證書 授與式 延期, 法政學界 제1호(1907), 63면. 52) 황성신문 1910. 3.15. 53) 미야기 고조(宮城浩藏);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법관, 정치가. 1852년생. 사법성 명법료(明法 寮)에서 수학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귀국 후는 판사, 사법관 참사관으로 민법 등의 초 안 작성에 종사하였다. 1890년 중의원(衆議院)의원에 당선되었다. 명치법률학교 창립자 중의 하나. 1893년 2월 42세로 사망하였다. 54) 야시로 미사오(矢代操); 일본 메이지시대의 법학자. 1853년생. 에치젠 사바에번(越前 鯖江藩, 현 福井縣) 출신. 1870년 대학 남교(大學 南校, 도쿄대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1892년부터는 사법성 명법료에서 프랑스 법학을 공부하였다. 1878년 강법학사(講法學舍)를 설립하여 법학 을 강의하였다. 그 후 1881년 기시모토 다쓰오 등과 함께 명치법률학교를 창설하였다. 나중 에는 원로원 및 귀족원 서기관이 되었다. 1891년 4월 39세로 사망하였다. 55) 기시모토 다쓰오(岸本辰雄); 일본 메이지시대의 법학자, 교육자. 1852년생. 돗토리번(鳥取藩, 현 鳥取縣) 출신. 대학 남교를 거쳐 사법성 명법료에 입학하였다. 1876년 같은 학교를 졸업 한 후 사법성 최초의 유학생으로서 프랑스로 건너갔다. 1880년의 귀국 후는 판사, 참사원 의 관보(參事院 議官補), 법제국 및 사법성 참사관, 대심원 판사 등을 역임했으며 법전편찬에 도 공헌하였다. 1893년 변호사가 되었다. 1881년에는 미야기 고조, 야시로 미사오와 함께 명 치법률학교를 창립했으며 1888년에는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03년 명치법률학교가 명치 대학으로 개칭된 후에도 계속해서 교장을 맡았다. 1912년 4월 61세로 사망하였다. 56) 飯澤 文夫, 明治大学における学術出版の歩み.

362 法史學硏究 第46號 리고 신우선의 民法總論 에는 니호 가메마쓰(仁保龜松)57)의 民法總論 을 다수 참조한 흔적이 보인다. 니호의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896년인데 3년 후인 1899년 8월에는 벌써 그 일부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민법론 이라는 제목으 로 독립신문 에 소개되었다.58) 그리고 1908년에서 1909년 사이 大韓協會會 報 제1호~제2호, 제9호~제12호에 각각 게재된 조완구(趙琬九), 이용재(李容 宰), 이종린(李鍾麟) 民法總論 역시 니호의 민법총론 을 번역한 것이었다. 참고로 민법 편찬의 목적을 언급한 부분을 각각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4> 仁保龜松 民法總論59) 民法ハ各人カ國家的共同生活ヲ 營ムニ當リテ相互ノ關係ヲ規定 スル必要ノ規則ナリ故ニ縱令民 法ナル名稱カ存セストルモ亦成 文ノ民法々規カ存セストスル モ苟モ國家的共同的生活生活ノ 成立スル以上ハ今日所謂民法ナ ルモノヽ本體ハ立法事業ノ未 タ發達セサル國家ニ於テモ旣 ニ不文ノ法律トシテ存在シタ ルコトハ敢テ弁明ヲ要セサル 所トス然ルニ社會ノ進步ト共 ニ法律モ次第ニ進化シ又法律學 ノ發達ニ伴ヒ法律ニ種々ノ適當 ナル名稱ヲ付スルニ至リ遂ニ國 家的共同生活ニ於ケル各人相互 ノ關係ヲ規定スル法律ヲ名ツ ケテ民法ト稱スルニ至リタル ノミナラス 독립신문 민법론 60) 신우선 민법총론 61) 조완구 외 민법총론 62) 이 법은 각국 셩들이 업 을 경영 며 셔로 교통 야 사 곳에 쓰 법률이니 샤 회 社會 샹에 진보가 되 로 민법이 졈졈 더 게 되엿고 문법 文法이 업 시 로 브터 문법이 잇 시 에 이르러 국가의 법률 학 이 크게 발달 엿스니 민법 도 학문이 업슬 브 터 일법이요 民法은各人이國家的 共 同生活 을當하여 互相 間關係를規定 必要準 則이라故로 民法의名稱 과成文에 條規가無 지 라도 國家가成立되야各 人이共同生活 以上에 不文法律로民法의 本 體가存在 은多辯을不 待 지라然이나 社會가 進步 을隨 야法律도 漸次進就 고 法律學 도發達되야適當 名稱 을命名 기에至 야國 家的共同生活 에對 야各人互相間關係 規 定 法律을名 야民法 이라稱 에遂至 더러 民法은各人이國家的으로共 同生活 을當 야互相間關 係規定 必要準則이됨은已 述인바此-必要準則이되 故 로民法의名稱과成文에條規 가無 지라도國家가成立되 야各人이共同生活 時에 不文法律(不文法은條章 의明示가無 고慣習의由來 로法律이된者-라)이라도自 然民法의本體가存在 은不 待多辯 지라도然이나社會 의進步를隨 야法律도漸次 進就 고 法律學도發達 야適當 名稱으로命名 기 에至 니國家的으로共同 生活 에對 야各人互相間 關係를民法이라稱 고 (http://www.meiji.ac.jp/press/outline/history/index.html) 57) 니호 가메마쓰(仁保龜松); 일본 메이지시대에서 쇼와시대 전기의 법학자. 1868년생. 미에현 (三重縣) 출신. 1893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법학연구를 계 속하는 한편 정부의 법전기초보조위원으로서 조사에 종사하였다. 1897년 법리학을 연구하 기 위하여 독일에 유학을 갔다가 1900년 귀국하여 교토제국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928년 같은 대학을 퇴직한 후는 關西大學으로 자리를 옮겨 이듬해인 1929년 關西大學 학장에 취 임하였다. 1943년 9월 75세로 사망하였다. 58) 독립신문 1899. 8.12, 1899. 8.14.

363 그리고 박만서는 오타 수케토키(太田資時)63)의 相續法, 오쿠다 요시토(奧 田義人)64)의 民法相續法論 등을 참조하면서 相續法 을 집필하였다. 주정 균의 법학통론 은 오다 요로즈(織田萬)65)의 法學通論 을 번역한 것이다. 이처럼 1906년경부터 일본의 법학교과서가 일본 유학 경험자들의 손으로 한 국어로 번역되면서 일본 민법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당시 보 성전문학교에서는 법학통론, 헌법, 민법총론, 민법각론(물권법 채권법 상속 법), 형법(총론 각론), 상법총론, 국제공법(평시 전시), 민사소송법, 형사소송 법 등이 교수되고 있었는데66) 이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던 주정균의 법 仁保龜松, 民法總論 (東京法學院, 1896), p. 6. 민법론, 독립신문 1899. 8.12. 申佑善, 民法總論 (발행년도 불명), 4면. 趙琬九, 民法總論(續), 大韓協會會報 제1권 제2호(1908), 32면. 오타 수케토키(太田資時); 일본 메이지에서 쇼와시대 전기의 변호사, 법학자. 도쿄시 출신. 1890년 7월 제국대학 법과 제2부(프랑스법 전공)를 졸업했다. 그 후 농상무성(農商務省) 참 사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92년 관직을 그만두고 대언업(代言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96 년 다시 농상무성 참사관 겸 중의원 서기관이 되었다. 1897년 6월 해직된 후는 도쿄 교바시 (京橋)에 사무실을 개설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하였으며 1900년 4월의 有松絞特許訴訟, 1903 년의 高野山下戻行政訴訟, 官吏収賄事件 등의 변호를 맡았다. 1916년 4월 나가노현(長野 縣) 보결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64) 오쿠다 요시토(奧田義人) : 일본 메이지 다이쇼시대의 관료, 정치가. 1860년생. 이나바번(因 幡藩)출신. 1884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그 후는 농상무성 특허국장, 행정재판소 평정관 및 내각 관보국장, 법전조사회 위원 및 내각 서기관 기록과장, 중의원 서시관장, 탁 식무 차관, 농상무 차관 겸 산림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12년에는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내각의 문부대신에 취임하였다. 1915년에는 도쿄시장이 되었으나 재임 중인 1917년 8월 58 세로 사망하였다. 민법에 조애가 깊어 1885년 英吉利法律學校 창립자의 하나가 된 이후 東 京法學院, 中央大學 이사를 거쳐 1912년 같은 대학 학장이 되었다. 저서로 民法親族法論, 民法相續法論 등이 있다. 65) 오다 요로즈(織田萬) : 일본 메이지에서 쇼와시대 전기의 법학자. 1868년생. 사가번(佐賀藩) 출신. 1892년 제국대학 법과대학 불법과(佛法科)를 졸업했으며 1895년에서 1900년까지 독일 및 프랑스 등지에 유학, 행정법 등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는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1931 년 정념 퇴직할 때까지 행정법 강의를 담당하였다. 교토제대 재직 중인 1921년에서 1930년 까지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판사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는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었으며 1900년의 창립 이래 교편을 잡아 온 立命館大學의 명예총장에 취임하기도 하 였다. 1945년 5월 78세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日本行政法論, 淸國行政法 등이 있다. 59) 60) 61) 62) 63)

364 法史學硏究 第46號 학통론 범례에는 이 책을 高等中學과 專門豫備科의 敎授 爲 야 編成 하였다는 말이 있다.67) 그리고 양정의숙 또한 법학통론, 형법(총론 각론), 민법 총론, 민법각론(물권 채권), 행정법(총론 각론), 상법(총론 각론), 국제공법, 국제사법 등의 수업이 있었는데68) 표지에 붓글씨로 양정의숙이라 적어진 유치 형의 물권법 제1부 서언에 보면 元來 物權에 關 規定이 甚히 廣闊 고 錯雜 야 一個年 學期로 到底 講了키 難 (밑줄은 인용자) 다는 말이 있 다.69) 이들 사실은 일본 유학경험자 또는 그들 밑에서 공부한 자들의 손으로 한국어로 번역된 법학서적이 보성전문학교 등 각종 법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 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Ⅳ. 근대 재판제도의 도입과 전문적 판사의 등장 1. 1895년 재판소구성법 시행과 사법 행정의 미분리 1895년 3월 25일, 한국에서는 법률 제1호로 근대적 사법제도의 효시인 재판 소구성법 이 공포되었다. 제1조는 지방재판소,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 소, 순회재판소, 고등재판소 그리고 특별법원 등 5개 재판소를 설치함을 규정 66) 67) 68) 69) 法政學界 제1호(1907), 57~63면. 朱定均, 法學通論 京城日報社, 1908, 범례. 황성신문 1905. 4. 1. 兪致衡, 物權法 第1部(발행년도 불명), 1(서강대학교 법학전문도서관 소장); 현재 서강대 학교 법학전문도서관에는 金祥演, 憲法 ; 張憲植, 行政法大義 ; 申佑善, 民法總論 ; 兪 致衡, 物權法 第1部; 兪致衡, 物權法 第2部 ; 柳東作, 物權法 ; 石鎭衡, 債權法 第1 部; 朴晩緖, 相續法 ; 金祥演, 商法要義 ; 金祥演, 會社法 ; 張燾, 刑法論 ; 李冕宇, 刑法各論 ; 李用戊, 平時國際公法 ; 劉文煥, 國際私法 등 14권의 개화기 법학교과서가 소장되고 있다. 그 밖에 개화기 법학교과서는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 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부산대학교 등 대학도서관, 부산 백산기념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365 하였으며 제14조 등에서는 각 재판소 판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 었다.70) 제14조 (한성, 인천, 부산, 원산의 각 개항재판소 인용자) 判事 及 檢事 別定한 司 法官試驗規則에 依 야 試驗을 經 者 中으로셔 內閣總理大臣을 經 고 法部大臣이 奏薦 야 大君主 陛下의 任命 시 者로 홈 제21조 巡廻裁判所 判事 法部大臣의 奏薦을 由 야 高等裁判所 判事 漢城裁判所 判事 法部 勅奏任官 及 別定 司法官 試驗規則에 依 야 判事에 任 者 中으로셔 大君主 陛下게셔 臨時로 命 심 제24조 (고등재판소 인용자) 判事 法部 勅奏任官 又 漢城裁判所 判事 中으로셔 大君主 陛下게셔 任命 시 니 제33조 判事 及 檢事 別定 規則에 依 야 試驗에 及第 을 要 니 但 本法 中에 別로 規程이 有 者 此限에 存치 아니홈 이처럼 재판소구성법은 그동안 분리되지 않았던 사법관과 행정관의 직역을 분리하여 재판을 판사에게 전담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법률이 시행된 지 얼마 안 되는 6월 1일,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은 한성부를 제외한 각부 관찰사에게 법부 훈령 제2호를 내렸다. 여기서는 觀察使 裁判所 判事 의 職務 執行 고 各 地方裁判所에 支所 設置 기 前에(는 인용자) 各 該 郡守로 兼任 裁判 事務 야 聽理 該 管內 訴訟 라 규정하여 관찰사 또 는 군수, 즉 행정관이 판사 노릇을 함을 허용하였다.71) 70) 宋炳基 朴容玉 朴漢卨 편저, 韓末近代法令資料集Ⅰ (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70), 193~194면, 196면.

366 法史學硏究 第46號 이 재판소구성법은 1899년 5월 30일 법률 제3호로 개정되었으며 개정법 제 37조에서는 判事 及 檢事 別定한 規則에 依 야 試驗에 及第 者로 任命 을 要 니 但 本法 中에 別로 規定 잇 者 此限에 存치 아니 이라 고 규정하였다.72) 그러나 부칙 제59조 및 제60조에서는 당분간 재판은 관찰사 또 는 감리가 겸임한다고 규정하였다.73) 그리고 1900년 9월 15일 공포된 법부령 2호에서는 國內 私立學校 中 法律 學 專門科에 卒業 者 法部 認許를 經 後에 奏判任官試驗 及 任命規則 第6條 依 야 司法官試驗에 來赴 을 得 事 라 규정하였으나 사법관 시 험은 사실상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74) 이처럼 1895년 3월의 재판소구성법 시행 이후에도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일본 아사히신문은 1906년 6월 28일의 사설에서 한국에는 문명국의 소위 재판제도가 없다 라고 말하였다.75) 2. 1907년 재판소구성법의 시행과 사법의 독립 1907년 12월 23일 재판소구성법(법률 제8호)이 새로이 시행되었다. 제1조에 서는 구재판소, 지방재판소, 공소원 그리고 대심원 등 4개 재판소를 설치함을, 제2조에서는 區裁判所 判事가 單獨으로 裁判을 行 고 地方裁判所, 控訴 院 及 大審院은 定數의 判事로 組織 部에서 合議 야 裁判을 行함 을 각각 71) 宋炳基 朴容玉 朴漢卨 편저, 위의 책, 474면. 72) 宋炳基 朴容玉 朴漢卨 편저, 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 (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71), 492면. 73) 제59조와 제60조에서는 각각 現今間은 本 法律 第8條 地方裁判所 另設치 아니 고 各 觀察府에 權設 고 判事 觀察使로 兼任 고 主事 一人을 姑先 敍任 이라, 現今間은 各 開港市場裁判所 開港市署에 兼設 고 判事 監理로 兼任 이라 고 규정하였다. 宋 炳基 朴容玉 朴漢卨 편저, 위의 책, 494면. 74) 宋炳基 朴容玉 朴漢卨 편저, 韓末近代法令資料集Ⅲ (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71), 194면. 75) 韓国の司法制度, 朝日新聞 1906. 6.28.

367 규정하였다.76) 이리하여 법률은 사법과 행정을 명백히 분리하였다. 1909년 10월 16일 통감부재판소령(칙령 230호)이 시행되면서 재판소구성법은 폐지되었으나 재판소령 역시 區裁判所 判事 單獨으로 裁判을 고 地方裁 判所 及 控訴院은 3人의 判事, 高等法院은 5人의 判事로쎠 組織 部에셔 合 議 야 裁判 (제7조) 이라는 규정을 두었다.77) 이처럼 사법과 행정이 분리되면서 한국에서는 전임 판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1907년 9월 초 일본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기사에 의하면 일본은 앞으로 5년 내 지 7년 사이에 판사 560명, 검사 52명, 서기 912명, 통역 19명, 통역관보 285명 총 1,830명을 채용, 한국 각지 법원에 배치할 예정이었다.78) 그러나 일본 사법 성(司法省)은 600명이 넘는 판 검사를 한꺼번에 한국에 부임시킬 수 없으므로 법원 관계자의 다수를 한국인으로 충당하려고 하였다.79)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한국인 법관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기관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예컨 대 1907년 9월 1일자 아사히신문은 8월 30일 열린 원로회의에서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통감이 법관양성소를 설치하여 속성으로 한국인 판사를 양성해야 겠다고 말하였다고 보도하였다.80) 물론 한국에 사법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5년 3월 25일 칙령 49호 법관양성소규칙으로 말미암아 설치된 법관양성소에서는 같은 해 11월 10일 함태영(咸台永)을 비롯 하여 4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81) 그러나 1896년 4월 제2회 졸업생 39명을 낸 후 법관양성소는 폐소되고 말았다. 법관양성소는 1903년 1월, 7년 만 에 재개되었으나 1905년 말까지 졸업생은 모두 46명에 불과하였다.82) 76) 宋炳基 朴容玉 朴漢卨 편저, 韓末近代法令資料集Ⅵ (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71), 160~161면. 77) 韓國度支部大臣官房, 現行 韓國法典 (日韓書房, 1910), 2741면. 78) 韓国司法制度案, 朝日新聞 1907. 9. 1. 79) 韓国司法制度, 朝日新聞 1907. 9. 8. 80) 韓国司法制度案, 朝日新聞 1907. 9. 1. 81)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舊 京城帝大 法文學部(法科), 舊 京城法學專 門學校 同窓會員 綜合名簿 (1957).

368 法史學硏究 第46號 3. 법관양성소 및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의 증가 법관양성소의 졸업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07년부터였다. 1907년 22명 의 졸업생을 낸 것을 위시하여 1908년에는 54명, 1911년에는 29명, 1912년에는 24명, 1913년에는 17명, 1914년에는 14명, 1915년에는 32명, 1916년에는 36명, 1917년에는 41명, 1918년에는 34명 그리고 1919년에는 41명의 졸업생을 냈다.83) 또한,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서도 1907년에는 34명, 1908년에는 48명, 1910 년에는 15명, 1911년에는 45명, 1912년에는 36명, 1913년에는 28명, 1914년에는 15명, 1915년에는 20명, 1916년에는 23명, 1917년에는 19명, 1918년에는 27명 그 리고 1919년에는 17명의 졸업생을 냈다.84) 이들 학교에서는 매년 평균 25명 내 지 2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림 1> 법관양성소 및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수의 추이(1905년~1919년) 8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위의 책. 참고로 1904년 7월과 1905년 12월의 졸업생은 각각 26명과 20 명이다. 8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위의 책. 84) 普成專門學校, 普成專門學校一覽 (1931), 102~103면.

369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05년 말부터 이들 학교에서는 일본 유학 경험자들이 교편을 잡고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는 1908년 장도, 유문환, 신우선 등 일본 유학 강사들이 그만두었으나 그 후에도 일본 유학경험자 또는 장도 등 일본 유 학경험자 밑에서 법학을 공부한 보성 졸업생들이 강단에 섰다. 1908년 이후 1919년까지 보성전문학교에 취임한 교사 및 강사는 각각 11명, 34명인데85) 이 들 중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은 22명, 일본 유학 경험자는 10명이었다. 교수진의 70% 이상이 보성전문학교 또는 일본에서 법학을 접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표 5> 보성전문학교 교사 및 강사의 출신 학교 (1908~1919)86) 교사 강사 윤익선(尹益善), 민중식(閔重植), 김서경(金 瑞經), 남형우(南亨祐), 이항종(李恒鍾), 차 상찬(車相瓚), 민대호(閔大鎬) 한광호(韓光鎬), 이성묵(李聖默), 이원생 (李源生), 변덕연(卞悳淵), 신규선(申圭善), 김기수(金箕壽), 정구창(鄭求昌), 변영만 (卞榮晩), 이용헌(李容憲), 이각종(李覺鍾), 유옥겸(兪鈺兼), 조성구(趙聲九), 주정균 (朱定均), 서상즙(徐相楫), 정우범(鄭雨笵) 일본 유학 경험자 고원훈(高元勳, 明治大學), 정광조(鄭廣朝, 早稻田大學) 유동작(柳東作, 明治大學), 박병철(朴炳哲, 日本大學), 이은우(李恩雨, 中央大學), 최 린(崔麟, 明治大學), 최창조(崔昌朝, 中央 大學), 양대경(梁大卿,明治大學), 신익희 (申翼熙, 早稻田大學), 채기두(蔡基斗, 明 治大學), 이창환(李昌煥, 明治大學), 유승 흠(柳承欽, 明治大學), 이용무(李用戊, 유 학처 불명), 이한경(李漢卿, 유학처 불명), 김대희(金大熙, 유학처 불명), 전성오(全省 吾, 明治大學) 기타, 불명 김익집(金益集, 불명), 최한기(崔漢基, 불명) 이기찬(李基燦, 법관양성소), 김영기(金永 基, 불명), 강매(姜邁, 불명), 김태영(金泰 榮, 불명), 김명수(金命洙, 불명)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85) 普成專門學校, 위의 책, 49~50면, 52~57면. 86) 普成專門學校, 위의 책; 明治大學朝鮮同窓會, 會員名簿 (1931);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앞 의 책;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009); 한국역사정보통학 시스템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370 法史學硏究 第46號 한편 법관양성소는 1909년에서 1911년의 법학교 시절을 거쳐 1911년 경성전 수학교로 개편되면서87) 일본인 강사가 증가하였다. 1908년까지만 해도 강사 중 에는 장도, 신우선, 홍재기, 유문환, 나진, 석진형, 유동작, 양대경, 박만서 등 한 국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나88) 明治 44年 朝鮮總督府 及 所屬官署 職員錄 에 게재된 경성전수학교 강사촉탁 중에 한국인은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 았다.89) 이 때 강사촉탁으로 임명된 사람은 조선총독부 서기관, 조선총독부재 판소 판 검사 또는 서기장 등 실무자가 많았다. 특히 <표 6>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야마구치, 요코타, 하라 등 3명은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에도 일본에서 3 년에서 6년의 판사 경험이 있었다.90) 물론 1911년에서 1919년 사이 경성전수학 교에는 석진형, 박용희(朴容喜), 김병로(金炳魯), 양대경 등 한국인 교사도 몇 명 있었지만, 일본인 강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환경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지 고 있었다.91) <표 6> 경성전수학교 강사 촉탁(1911년) 이름 직책(1911년) 아주미 도키타로(安住 時太郞) 총독부 서시관 후지와라 마사후미(藤原 正文) 총독부 서시관 야마구치 사다마사(山口 貞昌) 총독부 판사 요코타 도시오(橫田 俊夫) 총독부 판사 오카 게사오(岡 今朝雄) 총독부 사무관 87) 법학교와 경성전수학교의 강사나 수업 내용 등은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同窓會, 서울대학 교 法科大學 百年史 (2004), 98~108면에 제사한 설명이 있다. 88)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同窓會, 앞의 책, 79면. 89)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 及 所屬官署 職員錄 (1912), 211면. 90) 자세한 내용은 吉川絢子, 日帝時期 離婚訴訟과 日本人 判事, 법사학연구 제44호(2011), 171~209면을 참조. 91) 1911년에서 1919년까지 경성전수학교 강사촉탁으로 임용된 자는 모두 18명 정도가 된다 (1913년 및 1915년은 朝鮮總督府 及 所屬官署 職員錄 이 발간되지 않아 정확한 인원은 알 수 없다). 이들 18명은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이 시기 경성전수학교 강사촉탁 중에 한국인은 없었다.

후카사와 신이치로(深澤 新一郞) 371 총독부 검사 하라 조테이(原 正鼎) 총독부 판사 이마무라 다케시(今村 武志) 총독부 사무관 시미즈 기요시(淸水 潔) 고등법원 서기장 모로즈미 아키라(兩角 斌) 총독부 검사 오타 데루쓰구(太田 輝次) 총독부 참서관 엔도 류사쿠(遠藤 柳作) 총독부 시보 에하라 요시쓰치(江原 善槌) 총독부 속(屬) 미즈마 요시쓰구(水間 美繼) 이처럼 1907년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일본 유학경험자 또는 그들의 제자 가, 법관양성소에서는 일본 유학경험자 또는 일본인이 각각 강사가 되어 법학 을 가르치고 있었다. 4. 1910년대 한국인 판사의 출신 학교 분석 법관양성소와 보성전문학교 학생들 가운데는 졸업 후 법조인이 된 사람도 많았다. 1908년에서 1919년 사이 판사로 임명된 한국인은 모두 130명이었다. 이들 중 법관양성소 및 경성전수학교 졸업자는 56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明 治, 中央, 京都法政 등 일본 소재 대학교 졸업자가 26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 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 졸업자도 7명 있었다. 다시 말해, 1910년대 한국인 판사 중 약 70%에 해당하는 90명이 한국 또는 일본 내지에서 법학교육을 받 은 자였다.

372 法史學硏究 第46號 <그림 2> 한국인 판사의 출신 학교(1908년~1919년)92) 이와 관련하여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는 제령 6호로 朝鮮總督府 判事 와 及 檢事의 任用에 關 件 을 공포 시행하였는데 거기서는 판사의 임용 자격에 대하여 朝鮮總督府 判事와 及 檢事 裁判所構成法에 依 야 判事 나 檢事나 又 司法官試補 爲 資格을 有 者 中에셔 任用 이라 고 규정하였다.93) 그러나 이날 제령 7호로 공포 시행된 朝鮮人의 朝鮮總督府裁 判所 職員의 任用에 關 件 제1조에서는 帝國大學이나 官立 專門學校 나 或 朝鮮總督이 指定 學校에셔 3學年 以上 法律學科 修 야 卒業 朝鮮人은 文官高等試驗委員의 銓衡을 經 야 特히 朝鮮總督府 判事나 或 檢 事에 任用 을 得 이라 고 규정하였다.94) 다시 말해, 한국인으로서 제국대학, 관립전문학교, 조선총독이 지정한 학교에서 3년 이상 법학을 전공하며 문관고 등시험위원의 전형을 통과한 자라면 재판소구성법이 규정한 자격이 없어도 판 92) 立命館大學, 立命館學誌 제1호(1916); 普成専門學校, 앞의 책; 明治大學事務局, 明治大 學一覽 (1937); 明治大學朝鮮同窓會, 앞의 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 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www.history.go.kr/)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93) 朝鮮總督府 官報 제29호(1910.10. 1). 94) 위의 책.

373 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95)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1911년 1월 中央大學, 明治 大學, 法政大學, 京都法政大學, 關西大學, 慶應義塾大學, 日本大學, 早稻田大 學 등 일본 소재 8개 사립대학을 지정학교로 하였다.96) 한국 또는 일본의 관 립 사립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자가 1910년대 한국인 판사의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법적 기반이 있었다. 이렇게 판사가 된 한국인은 民事에 在 야 原告 被告가 共히 朝鮮人된 境遇, 刑事에 在 야 被告人 이 朝鮮人된 境遇 심리를 담당하였다.97) Ⅴ. 한국인 판사의 이혼법 지식과 인식 1. 번역판 법학통론 과 이혼법 서술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1906년경부터 한국에서는 법학서적의 번역, 집필, 판매가 활발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1905년 말 또는 1906년 초에는 유성준의 법학통론 이, 그리고 1908년 5월에는 주정균의 법학통론 이 각각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들 책은 각종 법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1910년 대 판사가 된 한국인 역시 이들 교과서로 법학을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이 이들 교과서가 집필된 당시 한국에는 이혼법을 포함한 친족법이 95)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시보(試補)로 1년 6월 이상 재판소 또는 검사국에서 실무수습을 한 후 시험에 합격하거나 3년 이상 제국대학 법과 교수 또는 변호사로 일한 적이 있어야 하였 다(재판소구성법 제57조, 제65조). 96) 朝鮮總督府 官報 제115호(1911. 1.19). 97) 1909년 10월 18일 칙령 제236호로 공포된 통감부재판소령 제25호에서는 韓國人으로셔 判 事 又 檢事된 者 民事에 在 야 原告 被告가 共히 朝鮮人된 境遇, 刑事에 在 야 被告人이 朝鮮人된 境遇에 限 야 其 職務 行 이라 규정하였다. 1910년 10월 1일 공 포 시행된 통감부재판소령 개정의 건 (제령5호)으로 말미암아 법문 중 한국 이 조선 으 로 변경되었으나 규정 자체는 남겼다. 이 규정은 1920년 3월 24일 제령 3호로 말미암아 삭제 되었다.

374 法史學硏究 第46號 없었다. 그리고 저자 자신도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친족법에는 我國 慣習과 風俗에 逕庭 바 或 有 함을 인식하고 있었다.98) 그러므로 교과서 중에는 我邦 習慣과 風俗에 適合치 아니 이 多 으로 此에 記述치 아니 노라 면 서 번역을 일부 생략하기도 하였다.99) 그러나 이혼법에 관한 한 유성준은 번역을 생략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표 7> 기시모토 다쓰오의 법학통론 과 유성준의 법학통론 비교 기시모토 다쓰오 법학통론 유성준 법학통론 第四 離婚 婚姻ノ解消ハ二個ノ原因ニ由ル 死去及ヒ離婚是ナリ 夫婦ノ一方死去スレハ他ノ一方ハ鰥寡ト爲リ婚姻關係ノ 解消スルヤ當然ナリ 然ルニ離婚ニ至リテハ法律上之 ヲ認許ス可キヤ否ヤニ付キ頗ル議論アリ 婚姻ハ性質上 永久ノ契約ニシテ夫婦ノ共同生活ハ世ヲ終フルニ至リ始 メテ止ム 豈中道ニシテ別離ス可ケンヤトハ正確ナル 理論ナリト雖モ法律ハ寧ロ實狀ニ依ラサルヲ得ス 若 シ其人ト爲リヲ誤信シ 又ハ法律上認ム可カラザル錯誤 ノ爲メニ結婚シ 若クハ結婚後夫婦間又ハ親族間ニ於テ 別離セサルヲ得サル必要ニ遭遇シタルニ尙ホ理論ヲ墨 守シテ離婚ヲ許サヽラン歟 當事者ノ利益ヲ害シ延ヒ テ社会ノ利益ヲ害シ其弊害言フ可カラサルモノアラ ン 是レ法律カ婚姻ハ永久ノ契約ナリトノ原則ニ例外ヲ 設ケ離婚ヲ許ス所以ニシテ亦已ムヲ得サルニ出ツ 故 ニ此例外ハ妄リニ許ス可キニ非ス 唯左ノ場合ニ限リ テ之ヲ許ス 一 協議上ノ離婚則チ夫婦相和セス相嫌惡シ又ハ次ニ述 フル裁判上ノ離婚ノ原因アルモ之ヲ曝露スルヲ欲セサ ル等ノ爲メ其他場合ノ如何ニ拘ハラス雙方ノ承諾アレ ハ以テ婚離スルコトヲ得ルナリ 二 裁判上ノ離婚即チ法律上一定ノ離婚ノ原因アリ一方 ノ權利トシテ離婚スルモノニシテ姦通罪 破廉恥罪 重 罪等ノ刑ヲ受ケ 又ハ暴行虐待ノ行爲アリシトキ等ハ裁 判所ニ出訴シテ離婚スルヿヲ得ルナリ 第四 離婚 婚姻의 解消 二個의 原因을 有 니 卽 死去 及 離婚이 是라 夫婦 中 一邊이 死去 즉 他 一邊은 鰥寡가 되야 婚姻 의 關係가 解消 이 當然 지라 然而 法律上 離婚의 許否에 當 야 議論이 頗多 니 婚 姻은 性質上 永久 契約이라 夫婦의 共同生活은 世를 終 에 至 야 始止 니 엇지 中途에서 離別 이 可 리오 은 正確 理論이라 然 나 法律은 不可不 社會의 實狀과 相伴 니 社會의 實狀으로서 此 理論을 膠守 기 難 에 其 實狀을 寧依 지나 若 其人을 誤信 거나 法律上 可 히 認치 못 錯誤를 因 야 結婚 거나 結婚 後에 夫婦間 이나 親族間에 不可不 別離 必要가 有 境遇에도 尙且 理論을 膠守 야 離婚을 不許 진 當事者의 利益을 害 고 一家의 禍胎를 釀 며 社會의 紊亂을 招 야 其 弊害가 可히 言치 못 바 有 지니 是以로 法律이 婚姻은 永久의 契約되 原則에 例外 設 야 議婚을 許 이 得已치 못 境遇에 出 이라 然 나 此 例外 妄許 이 不可 고 左開 境遇에만 限 야 許 이라 一. 協議上의 離婚 卽 夫婦가 相和치 아니 야 互相 嫌惡 거나 且次에 述 바 裁判上 離婚의 原因이 有 지라도 此 曝露코져 지 아니 等을 因 야 兩雙의 承諾으로 離婚 境遇 二. 裁判上의 離婚 卽 法律上 一定 離婚의 原因이 有 야 一邊의 權利로써 離婚 者니 姦通罪, 破廉恥罪, 重罪 等 의 刑을 受 거나 暴行 虐待의 行爲 等이 有 時 裁判所 에 呈訴 야 離婚 을 得 이라 98) 兪星濬, 法學通論 (1905), 267면. 99) 兪星濬, 위의 책, 281면.

375 그리고 주정균의 경우, 원본보다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오다는 이혼의 의의, 이혼의 종류를 살펴본 다음 메이지 민법의 이혼 규정에 대하여 우리 민법은 이혼원인에 따라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협의상 이혼이라 하며 또 하나 는 재판상 이혼이라 한다. 협의상 이혼을 하는 데는 사유에 제한이 없으나 재 판상 이혼을 하는 데는 특정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라고 설명하여 이혼에 관 한 설명을 마쳤다. 한편 주정균은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재판상 이혼인 가능한 경우를 설명하였다. 이처럼 번역판의 설명이 원본보다 자세한 까닭은 일본에서 는 쉽게 법전을 참조할 수 있는 데 대하여 한국에서는 그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1899년 당시 東京帝國大學 부속도서관에는 日本六法全 書 를 비롯하여 법전이 약 280권 비치되어 있었다.100) <표 8> 오다 요로즈의 법학통론 과 주정균의 법학통론 비교 오다 요로즈 법학통론 주정균 법학통론 婚姻ニ因ル結合ハ配偶者ノ生涯繼續スベキモノナレトモ 生前ニ於テ其結合關係ヲ解除スルコトアリ之ヲ離婚 Divorce, Ehescheidungト謂フ從來ノ法制ハ或ハ夫ノ自由ニ任 セテ其妻ヲ離婚スルコトヲ許スモノアリ或ハ夫婦ノ一方 ノ意思ニ本ツキテ離婚ヲ許スモノアリ或ハ相互ノ合意ニ 因リテ之ヲ許スモノアリ此種類ノ法制ヲ自由離婚又ハ制 限離婚ノ制ト謂フ又或ハ全ク離婚ヲ禁スルモノアリ離婚 禁止ノ制即チ是レナリ自由離婚ノ制ハ未開ノ社會ニ行ハ ルルコト多ク制限離婚ノ制ハ現今開明諸國ニ之ヲ見ル離 婚禁止ノ制ハ宗敎上政治上ノ理由ニ依リテ近年ニ至ルマ テ歐洲諸國ニ行ハレタルモ今ハ槪ネ之ヲ廢セリ我民法ハ 離婚ノ原因ニ因リ別チテ二トセリ一ヲ協議ノ離婚ト云ヒ 一ヲ裁判上ノ離婚ト云フ協議上ノ離婚ニハ事由ノ制限ナ ク裁判上ノ離婚ハ特定ノ事由アル場合ニ限ル 婚姻의 性質은 配偶者의 生涯가 繼續 者-나 然이나 其 生前에 在 야 夫婦의 關係 解除 이 有 니 此 離婚이 라 稱 며 法律이 夫의 意思와 或 夫婦의 一方意思와 又或 夫婦의 互相 合意 因 야 離婚을 許 이 有 니 此 自 由離婚 又 制限離婚의 法律이라 稱 며 又或 法律로 全 然 禁止 이 有 니 自由離婚의 法律은 未開社會에 行 든바-오 制限離婚은 現今 開明諸國에 行 바-며 禁止離 婚의 法律은 宗敎上, 政治上의 理由 依 야 今年 지 歐 洲諸國에 行 얏스나 今日에 大槪 廢止 얏스며 日本國 民法上에 離婚은 其 原因을 從 야 二種 區別이 有 니 (一) 은 協議上離婚이오 (一)은 裁判上離婚이라 協議上離婚은 事 由에 制限이 無 나 裁判上離婚은 特別 事由가 有 境 遇에 限 니 譬컨 配偶者가 重婚과 妻가 姦通을 行 時와 夫가 姦淫罪 因 며 配偶者가 破廉恥 罪 犯 야 刑에 處 時와 配偶者가 同居치 못 虐待와 重大 侮辱 을 受 時와 配偶者의 生死가 三年 以上 不分明 時와 配 偶者의 一方이 他 一方의 直系尊屬에게 對 야 虐待 及 重 大 侮辱을 加 時와 直系尊屬으로브터 虐待 及 侮辱을 受 時 等과 如 이 是라(밑줄은 인용자) 100) 東京帝國大學附屬圖書館, 東京帝國大學附屬圖書館和漢書目錄 (1899), 235~237면.

法史學硏究 第46號 376 이처럼 유성준 또는 주정균은 일본 친족법 가운데는 한국의 관습이나 풍속 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음을 인식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번역을 생략하기도 하 였으나 이혼에 관하여는 원문에 충실하게 한국어로 옮겨 독자인 법학도에게 소개하였는데 그 까닭은 其 制度 中에 若干 加取할 者가 有 이라 故로 參照 기 爲 야 서였다.101) 2. 東初生 離婚法 制定의 必要 1908년 5월 서북학회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 에는 동초생(東初生)이라는 자의 이혼법 제정의 필요 라는 글이 게재되었다.102) 여기서 저자는 이혼을 부 부가 생전에 혼인을 해제하는 것이라 정의한 다음 이혼에 관한 법제를 자유이 혼, 이혼금지 그리고 제한이혼 등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자유이혼을 남 편이 강제적으로 아내를 이별하는 것이라 정의하며 한국의 칠거지악이 그것이 라 설명하였다. 저자는 혼인의 본질을 단란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남녀의 결 합으로 보고 있으므로 저자에게 自由離婚은 婚姻 本體에 違背하며 夫婦의 關係를 輕케 야 子孫의 幸福을 傷害 며 社會의 風儀 紊亂 에 至 하는 것이었다.103) 그러나 離婚禁止 人性에 反 야 情誼上 仇敵과 如 者라도 尙且 夫婦의 關係 繼續케 는 제도라 이것 역시 수긍할 수 없었다.104) 그 러므로 저자는 법률에서 인정한 원인이 있을 때에 한하여 혼인을 해제할 수 있 는 제한이혼을 오늘날 여러 국가가 채택하며 兩極端의 害惡을 矯正 할 수 있는 제도라 소개하였다.105) 다시 말해, 저자는 자유이혼과 이혼금지를 부정하 101) 102) 103) 104) 105) 兪星濬, 앞의 책, 267면. 西北學會, 西北學會月報 제17호(1908), 18~22면. 西北學會, 위의 책, 21면. 西北學會, 위의 책, 같은 면. 西北學會, 위의 책, 같은 면.

377 며 그 절충적인 제도인 제한이혼의 도입을 완곡히 주장한 것이다. 필명 등으로 보아 이 글의 저자인 동초생은 1908년 7월 일본 明治大學 법률 과를 졸업한 후 경성공소원 서기, 함흥지방재판소 판사, 평양구재판소 판사 등 을 역임한 이동초일 가능성이 크다.106) 1902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부립 교토제이중학교(京都第二中學校, 현 京都府立 鳥羽高等學校) 보통과를 거쳐 1905년 9월 明治大學 법률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시마다 데쓰요시 (島田鐵吉)107) 밑에서 친족법을 공부하였다.108) 1905년 출판된 시마다의 친족법 강의록인 民法親族法講義 와 동초생의 글 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이혼의 분류 방법을 들 수 있다. 동초생은 이혼을 자유이혼, 이혼금지 그리고 제한이혼 등 세 종류로 나누었는데 시마다 역시 이혼에 관한 입법례는 이를 다음과 같은 세 종류로 나눠 볼 수 있다 면서 이혼을 금지이혼법, 제한이혼법 그리고 자유이혼법으로 구분하였다.109) 다음으로 이혼금지에 대한 인식이다. 이혼금지에 대하여 동초 생은 人性에 反 야 情誼上 仇敵과 如 者라도 尙且 夫婦의 關係 繼續케 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시마다 또한 금지이혼법은 도저히 화숙(和熟)할 수 없는 자에게 강제로 부부관계를 계속시키는 인성에 어긋나는 제도라 말하였 다.110) 그리고 시마다는 1912년 明治大學 강의록으로 親族法 을 발간하였다. 106) 황성신문 1909. 2. 3; 황성신문 1909. 4. 2; 朝鮮總督府 官報 제155호, 1911. 3. 9; 內閣 記錄課 職員錄 1908~1909. 107) 시마다 데쓰요시(島田鐵吉); 일본 메이지시대에서 쇼와시대의 판사 법학자. 1870년생. 이 시카와현(石川縣)출신. 1896년 7월 東京帝國大學 법률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법관시보로 고지마치구재판소(麹町區裁判所)에 부임하였다. 1898년 3월 도쿄구재판소 판사로 임명되 었다. 1901년 10월부터는 도쿄지방재판소 부장으로서 1902년의 國分寺小學校放火事件, 1909년의 日糖事件 등에서 심리를 담당하였다. 1911년 5월에는 행정재판소 평정관에, 1923 년 5월에는 대심원 판사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듬해 인 1923년 1월 대심원 부장이 되었다. 1951년 10월 81세로 사망하였다. 108) 大韓學會, 大韓學會月報 제6호, 1908. 7, 1; 明治大學法學科講義錄 雜錄集 38年度第1 學年 (1905), 136면. 109) 島田鐵吉, 民法親族法講義 (明治大學出版部, 1905), 239면. 110) 島田鐵吉, 위의 책, 240면.

378 法史學硏究 第46號 거기서 시마다는 왕정유신(王政維新) 후에는 明治 6년 제162호 포고로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처는 이혼의 소(訴)를 제기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고 설명 하였는데111) 동초생 글 중에는 明治維新 以來로 妻가 離婚請求의 訴 提起 事 法律上 明認 에 至 였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러한 동초생과 시마다의 유사점은 이혼법 제정의 필요 의 저자가 시마다 밑에서 친족법을 공부한 이동초일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것이다. 만약 이 논문 의 저자가 이동초였다면 일본 이혼법은 소개와 강의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 법 조인이 될 사람이 도입을 주장할 정도로 중요성을 띤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겠다. 3. 매일신보 질의해답 란과 이혼법 1912년 6월 매일신보 는 독자의 질문에 대하여 변호사가 대답하는 법률고 문 란을 신설하였다.112) 처음에는 일본인 변호사 나카무라 도키아키(中村時 章)113)가 이 코너를 담당하였으나 1913년 8월부터는 한국인 변호사 정구창(鄭 求昌)으로 담당자가 바뀌었다.114) 1908년 1월 보성전문학교 야학을 졸업한 그 는115) 1909년 12월부터 1913년 1월까지 경성지방재판소 판사로 있다가 판사를 111) 島田鐵吉, 親族法 (明治大學出版部, 1912), 263면. 112) 豫告, 매일신보 1912. 6. 9. 1912년 6월 14일부터 연재가 시작되었다. 113) 나가무라 도키아키(中村時章); 일본 메이지시대에서 다이쇼시대의 변호사. 1875년생. 야마 구치현(山口縣) 출신. 1901년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사법관시보로 야마구치지방재판소에 부임하였다가 약 1년 후 그만두고 야마구치에서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08년 경성 공소원 판사로 한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10월 판사를 그만두고 경성지방재판소 검사국 에 변호사등록을 하였다. 이래 권업은행 및 제일은행의 법률고문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리 고 1911년의 이른바 105인 사건에서는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미야케 죠사쿠(三宅長 策), 오구보 마사히코(大久保雅彦), 윤방현(尹邦鉉)들과 함께 피고인 변호를 맡았다. 1919년 1월 사망으로 변호사 등록을 취소하였다. 114) 매일신보 1913. 8.22.

379 그만두고 같은 해 2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등록을 하였다.116) 1915년 4월 10일의 질의응답 란에는 의주군 정서면 안계동의 김낙홍(金洛 洪)이라는 자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 게재되었다. (質疑) 本夫가 有 女子가 其 本夫가 不顧 을 因 야 生父의게 依托 고 2個年間 生活 다가 生父母가 困乏 을 不堪 야 不獲已 本人의 意思를 依 야 他人의게 改嫁 의 事 行 얏스나 本夫의 離婚契約을 成立치 못 고 但 生父母의게 對 야 契約을 成立 第三者(後嫁 夫) 本夫에게 法律上 如何 關係가 有 자 이와 관련하여 1912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조선민사령(제령 7호)은 제1조에 서 民事에 關 事項은 本令 其他의 法令이 特別 規定 잇 場合을 除 外 左의 法律에 依 이라면서 민법, 상법, 민사소송법 등 23개 법령에 따르도록 하였다.117) 그러나 제11조에서는 第一條의 法律 中 能力, 親族 及 相續에 關 規定은 朝鮮人에게 此를 適用하지 아니 朝鮮人에게 關 前項에 對 야 慣習에 依 이라 규정하였다.118) 그리고 1910년의 한국병합 을 전후하는 시기 일제 당국이 조사한 바로는 조선의 관습에서는 처가 남편에 게 이혼을 청구함은 도의(道義)에 반하는 일이므로 비록 남편에게 비행이 있다 하여도 처는 남편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없었다.119) 따라서 만약 조선민사령 제11조가 말하는 관습 이 일제 당국이 밝힌 그것을 지칭한다면 상기 질문에 나오는 여성 역시 이혼청구권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정구창은 夫가 惡意로써 數年間 不顧(卽 遺棄) 115) 普成専門學校, 앞의 책, 66면. 116) 황성신문 1909. 1. 7; 황성신문 1909. 1. 9; 朝鮮總督府 官報 제135호, 1913. 1.15; 朝 鮮總督府 官報 제163호, 1913. 2.18. 117) 總督府 公文, 매일신보 1912. 3.27. 118) 總督府 公文, 매일신보 1912. 3.27. 119) 慣習調査報告書 (1912), 314면.

380 法史學硏究 第46號 얏슬진데 離婚請求를 야 離婚 後 他에 改嫁 지오 若 離婚치 안이 고 改嫁 얏슬진데 設令 其 原因이 夫가 不顧 又 生活 困難에 因 얏슬지라도 重婚罪의 罰을 難免 지며 其 有夫女로 아즉 離婚치 안이 女子인 줄 知 고 娶 者도 亦 重婚罪에 依 야 處罰될지니라 但 無夫의 女로 信 고 娶 者의 無罪됨은 勿論이니라 고 대답하였다. 요컨대 이번 사례는 남편이 악의로 처를 유기한 경우이니 처는 남편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만약 이혼하지 않는 채 다른 남자에게 개가하면 이유야 어찌되었든 중혼죄가 성립된다고 대 답한 것이다. 이처럼 전 경성지방재판소 판사가 여성에게도 이혼청구권을 인정하고 있었 다는 사실은 그들이 한국 또는 일본의 법학교육기관에서 접한 일본 이혼법이 한국의 사례에도 적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10년대 한국에서는 여 성을 원고로 하는 이혼소송이 수리되기 시작하였는데120) 그 배경에는 이처럼 1900년대 초 한국 또는 일본에서 일본 이혼법을 접한 판사들의 존재가 있었다. Ⅵ. 맺음말 이 글에서는 한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어디서 어떠한 법학교육을 받았으며 그 법학교육이 귀국 후의 교육활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 지 그리고 그들의 교육활동을 접한 이들이 이혼법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보 이고 있었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1895년경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은 경응의숙 등에서 1년 정도 일본어를 공부한 후 동경법학원 등 상급학교로 진학하였다. 그 당시 동경법학원에서는 헌법,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이 교수되 120) 자세한 내용은 吉川絢子, 植民地朝鮮における離婚訴訟と朝鮮民事令 1910年代を中心 に, 史林 第94卷 第5號(2010)을 참조.

381 고 있었으며 한국인 유학생 역시 이들 수업을 듣고 있었다. 둘째, 한국으로 귀국한 일본 유학경험자는 1890년대 말부터 한국 각지에 설 립되기 시작한 각종 법학교육기관에서 강사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들은 학교에 서 교편을 잡은 동시에 일본에서 나온 법학서적을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법학서적은 교과서로써 사용되기도 하였다. 셋째, 1907년 12월의 재판소구성법 시행으로 말미암아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 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전담 판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1900년대 말부터 1910년대 말까지 판사가 된 한국인은 대부분이 법관양성소, 보성전문학교, 일 본 내지 대학 졸업자였다. 다시 말하여, 1910년대 한국 법원에서는 일본 유학경 험자나 그들의 제자 또는 일본인 강사에게 법학을 배운 사람들이 일본인 판사 들과 함께 심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19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이나 일본 내지에서 번역, 출판된 법학교과서 나 법조인의 각종 저작물에서는 한국의 법조인이 일본 이혼법을 한국에도 도 입하려고 하거나 실제 한국에서 일어난 사례에 적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1910년대 한국에서 여성을 원고로 한 이혼소송 이 수리된 배경에는 일본 유학경험자나 그들의 제자 또는 일본인 강사에게서 일본 이혼법을 배운 한국인 판사의 존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사료 및 자료] 한국어문헌 每日申報, 皇城新聞, 독립신문. 大韓學會, 大韓學會月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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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日文要約> 近代初期韓国における民法学の受容と判事に対 する影響 : 離婚法を中心に 吉川絢子* 121) 1895年頃 官費留学生として日本に渡って行った韓国人は東京法学院など で法学を学んだ 帰国後 彼らは法官養成所や普成専門学校などで講師とし て教育活動に従事するとともに 日本で出版された法学書を翻訳した これ らの法学書は教科書として使用されることもあった 1907年12月の裁判所構 成法施行にともない韓国では専門判事が必要となった 1910年代判事となっ た韓国人はその大部分が法官養成所や普成専門学校 日本内地の大学などで日 本法を学んだ者あるいはその弟子であった つまり1910年代 韓国の裁判所で は日本法を熟知した韓国人が日本人判事とともに審理を担当していたのであ る また 1900年代半ば以降韓国や日本内地で翻訳 出版された法学書や法曹 人の各種著作からは 韓国の法曹人が日本の離婚法を韓国にも導入しようとし ていたり 実際に韓国で起きた事例に適用したり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これ らのことから 1910年代 女性を原告とする離婚訴訟が韓国の裁判所で受理さ れた背景には 日本法を熟知した韓国人判事の存在があったと言える [キーワード] 官費留学生 法官養成所 普成専門学校 近代法学 離婚 韓国人判事 접수일 : 2012.9.2., 심사일 : 2012.9.19.-9.28., 게재확정일 : 2012.10.7. * 京都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博士課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