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March 2014, pp.134~151. Copyright 2014,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정지연 a 明 珍 素 也 b a (재)불교문화재연구소 b 武 蔵 野 美 術 大 學 객원교수, 주식회사 明 古 堂 대표 국/문/초/록 본 논문은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심향사의 극락전 내에 안치되어 있는 협저아미타불상의 구조 및 제작 기법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X-ray 투과촬영 데이터와 2차례에 걸친 현장조사결과를 종합하여 검토하였으며, 파손된 부분에서 박락된 시료를 분석하여 바탕층의 구조와 재료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사 결과, 심향사상은 심목을 상 내부에 짜 넣지 않은 완전히 텅 빈 상태의 협저불상이며, 외부 옷주름의 요철( 凹 凸 )과 동일한 옷주름이 내부에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원형( 原 型 )이 되는 소조상( 塑 造 像 )을 조성하는 단계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협저층을 올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원형의 흙과 심목( 心 木 ) 을 제거하기 위해 정수리에서 뒷목까지 사선으로 절개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절개선이 확인되지 않는다. 머리를 절개한 부분에는 꿰맨 흔적이 없고 접착제( 漆 혹은 糊 漆 )를 사용하여 접착한 것이 관찰되었다. 눈의 검은자위 부분에 구슬을 감입하였고, 양쪽 귀와 손, 치마( 裙 )의 띠와 매듭은 나무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후기 제작으로 알려진 선국사 협저불좌상이나 동경 오쿠라집고관 협저보살좌상, 그리고 조선초기 작품인 죽림사 협저아미타불좌상, 불회사 협저비로자나불좌상, 실상사 협저아미타불좌상 및 협저보살입상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탕층 분석결과에 의해 회칠층( 灰 漆 層 )과 주칠층( 朱 漆 層 )은 제작 당시의 층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회칠층에 사용되어진 골분은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제작뿐만 아니라 불상의 회칠층에도 이용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으며, 불상에 금박을 붙이기 위한 바탕층에는 주칠을 올렸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근대에 들어서만도 두 차례 이상의 개금불사가 행해졌던 것이 관찰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개금불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의 층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본 논문은 鄭 至 娟, 2010, 韓 国 夾 紵 仏 の 技 法 的 硏 究 - 大 倉 集 古 館 藏 の 脫 活 乾 漆 菩 薩 坐 像 の 模 刻 を 中 心 に-, 博 士 學 位 論 文 ( 東 京 藝 術 大 學 大 學 院 美 術 研 究 科 文 化 財 保 存 學 專 攻 保 存 修 復 彫 刻 領 域 ) 내용 중 일부를 수정, 가필한 것이며 Sampling작업과 분석은 묘친 모토야( 明 珍 素 也 )선생으로부터 협력 받았다. 주제어 협저불상, 심향사, 제작기법, 주칠( 朱 漆 ), 골분( 骨 粉 ) 투고일자 : 2013. 12. 31 I 심사일자 : 2014. 01. 22 I 게재확정일자 : 2014. 02. 11
135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머리말 협저불상( 夾 紵 佛 像 )이라는 것은 불상을 제작하는 기법의 하나로써 삼베( 麻 ), 모시( 苧 ), 갈포( 葛 ) 등의 인피섬유( 靭 皮 纖 維 )와 칠( 漆 )을 주된 재료로 하여 만든 불상을 일컫는다. 이 기법이 탄생한 중국에서는 협저( 夾 紵 ) 라고 하며,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은 동진( 東 晋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01 명칭 과 기법에 대해서는 한( 漢 )나라의 유적인 낙랑( 樂 浪 ) 왕우묘 ( 王 旴 墓 )의 출토유물의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 었는데, 이들 칠기류를 조사한 결과, 얇은 목태( 木 胎 )에 천을 씌우거나 몇 겹의 천으로만 태( 胎 )를 만든 것에 俠 紵, 夾 紵, 糸 夾 紵 라는 명문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 다. 02 즉, 원형과 회칠의 사이에 인피섬유로 짜여 진 굵고 성 긴 베( 紵 )가 끼어( 夾 ) 있는 모습에서 협저( 夾 紵 ) 라고 하였 으며, 그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기법과 동시에 재료 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03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칠상( 乾 漆 像 ) 04 혹은 탈활 건칠상( 脫 活 乾 漆 像 ) 은 이와 같은 기법으로 제작되어진 불 상을 말하는 것으로, 근대에 들어 일본에서 만들어진 명칭 이다. 언제부터 일본에서 건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나라시대 ( 奈 良 時 代 )의 문헌에는 塞, 則, 即 등의 문자로 기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건칠 이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 다. 05 이후 에도말기( 江 戸 末 期 ) 열강에 의해 수출용으로 제 작되어진 칠공예품의 목록에 건칠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고 알려져 있어 이 시기부터 칠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되고 있으며, 이러한 명칭을 오카쿠라텐신( 岡 倉 天 心, 1863~1913)이 창립한 미술원에서부터 불상에 적용하여 사 용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오카쿠라가 1890년부터 1892년까지 3년간 도쿄미술학교( 東 京 美 術 學 校 )에서 개최한 일본 미술사 강의에서 호류사( 法 隆 寺 ) 몽전( 夢 殿 ) 관음 보살상의 설명에 대부분은 목조이지만, 손과 같은 부분은 건칠을 이용하였다. 건칠이라는 것은 곡소( 木 屑 ), 베( 布 ) 등 을 심( 心 )으로 하여, 칠( 漆 )을 사용하여 굳힌 것이다 고 말한 후부터 세간에 알려졌고, 06 이후 학계에서도 제작기법에 대 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건칠이라는 용어는 하나 의 명칭으로 굳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협저( 夾 紵 ) 와 건칠( 乾 漆 ), 2개의 명 칭이 병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명칭을 재검토한 결과, 근대 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건칠이라는 명칭보다는 기법과 재료 를 의미하고 있는 원래의 명칭인 협저를 사용하는 것이 타 당하다고 판단되므로, 본 논문에서는 협저 로 명칭을 통일 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협저불상은 현재까지 고려 전기에서 조선 초기에 조성되어진 25구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보 물이 9구, 시도유형문화재가 1구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 는 협저불상들은 몇 구의 불상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존상태 가 양호한 편에 속한다. 파계사 협저보살좌상은 불상 바닥 에 정통12( 正 統 12, 1447)년에 중수( 重 修 )하였다는 묵서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외의 불상들은 대부분 수리의 흔적만 남아 있고 관련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조나 재질 은 물론이고 수리를 실시한 시기나 방법과 재료 등에 관해 01 法 苑 珠 林 卷 16, 感 應 綠, 晋 世 有 譙 國 戴 逵 字 安 道 者 ( 中 略 ). 舊 在 正 覺 寺. 逵 又 造 行 像 五 軀 ; 辨 正 論 3, 晋 常 侍 戴 安 道, 學 藝 優 達, 造 招 隐 寺, 手 自 制 五 夾 紵 像 出 三 藏 記 集, 譙 國 二 戴 造 夾 紵 像 記. 02 建 武 廿 一 年 木 俠 紵 杯 ; 建 武 廿 八 年 蜀 郡 西 工 造, 乗 輿 俠 紵 量 二 升 二 合 羹 棓 ; 永 平 十 二 年 蜀 郡 西 工 夾 紵 行 三 丸 宣 子 孫 盧 氏 作 ; 英 平 十 二 年 糸 夾 紵 ; 永 始 元 年, 蜀 郡 西 工, 造 乘 輿 髹, 氵 月 畵 紵 黃 釦 飯 槃, 容 一 斗, 髹 工 廣, 上 工 廣. 洪 石, 2006, 戦 国 秦 漢 漆 器 研 究, 文 物 出 版 社, pp.113~117; 岡 田 文 男, 1995, 古 代 出 土 漆 器 の 研 究 - 顕 微 鏡 で 探 る 材 質 と 技 法, 京 都 書 院, pp.123~143; 岡 田 文 男, 2009, 奈 良 女 子 大 学 所 蔵 牽 牛 子 塚 古 墳 出 土 夾 紵 棺 の 塗 膜 観 察 夾 紵 乾 漆 シンポジウム- 牽 牛 子 塚 から 阿 修 羅 像 へ, 奈 良 女 子 大 学, pp.1~4. 03 洪 石, 2006, 앞의 책, p.116; 傳 舉 有, 1998, 中 國 漆 器 的 巓 峰 時 代 - 漢 代 漆 工 藝 美 術 綜 論 中 国 漆 器 全 集 第 三 巻 漢, 福 建 美 術 出 版 社, pp.3~11; 陶 世 智, 1990, 漆 芸 髤 飾 學, 福 建 美 術 出 版 社, pp.6~7; 小 爾 雅 廣 服 ; 大 宋 重 修 廣 韻 ; 説 文 解 字 糸 部. 04 일본의 칠공예 기법 중에서 안료와 칠을 혼합한 것을 건조시켜 가루로 만든 것을 건칠분( 乾 漆 粉 )이라 한다. 주로 마끼에( 蒔 絵 )의 안료로 사용되고 있다. 伊 藤 清 三 外, 2004, 新 裝 合 本 漆 藝 事 典, 光 芸 出 版, p.194. 05 法 隆 寺 伽 藍 縁 起 並 流 記 資 財 帳 (747년), 佛 分 鉢 参 口. 一 口 鉄 鉢, 口 徑 七 寸 四 分, 深 四 寸 六 分. 一 口 塞 鉢, 口 徑 六 寸 八 分, 深 四 寸 八 分. 一 口 薫 鉢, 口 徑 七 寸, 深 四 寸 七 分 大 安 寺 伽 藍 縁 起 并 流 記 資 財 帳 (747년), 即 宍 色 菩 薩 ニ 躯, 即 羅 漢 像 十 躯, 即 八 部 像 一 具, 西 大 寺 資 財 流 記 帳 (780년), 觀 世 音 菩 薩 土 塞 一 軀. 06 岡 倉 天 心, 2001, 日 本 美 術 史, 平 凡 社, p.58.
136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서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또한 협저불상을 포함한 사찰에 안 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불상들은 예로부터 개금 을 하여 상 을 장엄하는 신앙적 관습에 따라 원래의 표면이 그대로 전 하는 상은 없다. 이 중에는 잘못된 개금방법으로 인해 표면 이 두꺼워지거나 원래의 층을 손상시켜 상호가 변형되는 경 우도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협저불상 제작에 사용된 재료나 기법은 반드시 동 일한 것은 아니고, 불사( 佛 師 )나 칠장( 漆 匠 )들에 의해 주변 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지역의 재료가 이용되었으며, 그것에 적합한 기법이 궁리되어 적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 라서 현존하는 불상의 제작기법과 재료에 관한 연구는 협 저불상을 포함한 조각 영역 연구에 있어 작품 그 자체를 이 해하기 위한 기초연구이며, 동시에 전통적인 제작기법의 복원과 수리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데이터 축적의 일환이다. 본 논문은 전라남도 나주시 심향사 협저아미타불상의 제작기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으로는 X-ray 투과촬영 데이터 07 와 2차례에 걸친 현장조사결과를 종 합하여 고찰하고, 바탕층의 시료를 분석하여 구조에 대해 살 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연구목적 과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협저불상에 대한 선행연구를 먼 저 살펴보고자 한다. 협저불상의 선행연구 1. 일본의 협저불상에 대한 선행연구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걸쳐 제작되어진 일본의 협저불 상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열화되거나 화재 혹 은 지진 등의 원인으로 파손되었고, 이에 대한 수리가 가마 쿠라시대( 鎌 倉 時 代 )부터 근세에 걸쳐 여러 번 실시되어졌 다. 그러나 정확한 기법이 전해지지 않아 근세까지의 수리 는 조잡한 처치를 한 것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메이지시대( 明 治 時 代 ) 미술계의 지도자였던 오카쿠 라 텐신에 의해 고사사보존법( 古 社 寺 保 存 法 )이 제정되었 고, 이듬해인 1898년에는 일본미술원이 창립된다. 1906년 부터는 제2부(현재의 공익재단법인 미술원)를 나라( 奈 良 )에 두고 니이로 추노스케( 新 納 忠 之 介 )를 중심으로 중요문화재 의 수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08 토다이지( 東 大 寺 ) 법 화당의 불공견색관음상을 시작으로 코후쿠지( 興 福 寺 ) 아수 라상을 비롯한 팔부중상, 타이마데라( 當 麻 寺 )의 사천왕상, 토쇼다이지( 唐 招 提 寺 )의 노사나불상 등 많은 협저불상들이 수리되었다. 근년에는 불상의 수리에 수반하여 상세한 조사보고서가 나오고 있지만, 수리기술자의 입장에서 실증적이며 체계적 으로 정리된 연구가 발표된 것은 묘친 아키오( 明 珍 昭 男 )씨로 부터 시작되었다. 1936년에 묘친씨가 쓴 불상조각 은 그 후 연구의 기반이 된다. 09 이처럼 종래 협저불상의 제작기법이나 재료에 관한 연구 는 열화된 불상을 수리할 때 판명되었던 것과 파손된 상의 단편을 통한 것에 한정되었으며, 육안 관찰만으로 구조와 재 질을 해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대해 보다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1949년 미술연구소( 現 獨 立 行 政 法 人 國 立 文 化 財 機 構 東 京 文 化 財 研 究 所 )와 쿠노 타케시( 久 野 健 ) 등 관련 연구자들의 협력에 의 해 조직된 광학연구반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광학적 감식 법에 의한 고미술품의 연구 를 통해 X-ray투과촬영을 이용 07 본 논문의 X-ray 데이터는 (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08, 乾 漆 佛 한국의 불상 X-ray 조사보고서Ⅰ, 문화재청 (재)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전사하였다. 08 1914에는 일본미술원제1부(미술품제작부문)와 분리되어 미술원 이라 개칭하고 니이로( 新 納 )를 책임자로 하여 국보수리를 계속하였다. 1968년에는 재단법인 미술원 으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2013년 4월에 공익재단법인 미술원 으로 이행하였다. 이곳 미술원 국보수리소의 수리기술자들에 의해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목조불 상과 협저불상의 수리는 현재까지 100년 이상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西 村 公 朝, 1969, 美 術 院 七 十 年 の 沿 革, 美 術 院 紀 要 創 刊 号, 財 団 法 人 美 術 院, pp.1~5; 鈴 木 喜 博, 2011, 仏 像 修 理 100 年 - 美 術 院 の 歴 史 とともに 特 別 展 仏 像 修 理 100 年, 奈 良 博 物 館, pp.95~97. 09 明 珍 恒 男, 1936, 佛 像 彫 刻, スズカケ 出 版 部.
137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한 불상 조사를 실시하였다. X-ray투과촬영 데이터는 내부 의 심목구조와 협저층의 두께, 그리고 원형의 흙을 꺼내기 위해 상을 절개한 부분뿐만 아니라 열화된 부분이나 후대의 보수부분 등을 판단해 내는데 유효하게 적용되었고, 제작기 법에 관한 연구는 한층 진보될 수 있었다. 10 1970년대 이후부터는 니시무라 코쵸( 西 村 公 朝 ), 11 츠지모 토 칸야( 辻 本 干 也 ), 12 혼마 토시오( 本 間 紀 男 ), 13 나카자토 토 시카츠( 中 里 寿 克 ), 14 야마자키 타카유키( 山 崎 隆 之 ) 15 등의 연 구자들에 의해 협저불상의 재료와 제작기법이 보다 상세하 게 밝혀졌다. 최근 큐슈박물관에서는 CT스캐너를 이용하여 아수라의 제작기법과 보존 상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 의해 카마쿠라시대와 메이지시대의 수리 흔적들 이 명료하게 파악되었고, 또한 원형인 소조상의 형태를 복원 하여 옷주름과 장신구는 원형제작 단계에서는 만들지 않았 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현재 협저불상의 연구는 보 다 첨단의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1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미술 원 국보수리소를 중심으로 불교조각의 보존기술, 수복기술 이 재정립되었고, 니이로 추노스케, 묘친 아키오, 니시무라 코쵸 등에 의해 수리보존기술과 함께 불상제작기술이 전승 되어 왔다. 연구하여 수리한다 라는 이들의 이념은 초기 수 리의 출발점에서부터 수리의 방향성을 제시하였고, 철저한 조사와 연구 그 자체가 바로 훌륭한 수리에 이어진다는 자세 는 문화재 수리의 기본이념으로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 다. 17 이렇게 밝혀진 연구 성과는 실제 수리 현장에서 적용되 고 있으며, 미술원 국보수리소 이외에도 문화재연구소 등의 공공기관, 니시무라 쿄쵸가 지도한 도쿄예술대학 등 대학의 문화재보존수복학과, 묘친 아키오의 아들 묘친 쇼지( 明 珍 昭 二 )가 이끄는 메코도( 明 古 堂 )와 같은 개인 공방도 보존기술 이나 수복기술을 재평가하면서 문화재의 수리와 복원에 진 력하고 있다. 18 2. 우리나라의 협저불상에 대한 선행연구 우리나라의 협저불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00년에 발표된 최은령씨의 조선시대 협저보살입상에 관한 석사논 문이 최초이다. 그 후에도 미술사 영역에서의 연구 성과는 계속 발표되고 있으며, 논문의 내용 중에는 제작기법에 관한 부분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재료와 제작기법에 대 한 실증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고 단순히 일본 협저불상의 연 구결과와 대응시키려고 하는 일면이 있어 우리나라 협저불 상의 제작기법과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19 2003년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현 (재)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협저불상에 대해 비파괴조사 방법을 이용한 광학적 구조조사가 실시되었고, 20 2007년과 2008년에 X-ray투과촬영 조사결과를 정리한 보고서가 발표 10 本 間 紀 男, 1985, X 線 による 木 心 乾 漆 像 の 研 究, 美 術 出 版 社. 11 西 村 公 朝, 1973, 脱 乾 漆 彫 刻 の 技 法 とその 表 現 効 果 について 美 術 院 紀 要 3, 財 団 法 人 美 術 院. 12 辻 本 干 也, 1970, 奈 良 時 代 の 乾 漆 技 法 - 造 像 技 法 考 (3) 佛 敎 藝 術 78, 毎 日 新 聞 社. 13 本 間 紀 男, 1998, 天 平 彫 刻 の 技 法 - 古 典 塑 像 と 乾 漆 について-, 雄 山 閣 出 版 社. 14 中 里 寿 克, 1968, 法 隆 寺 献 納 宝 物 乾 漆 伎 楽 面 の 製 作 技 法 について 試 考 -X 線 透 視 による 漆 芸 品 の 研 究 東 京 国 立 博 物 館 研 究 誌 206, 東 京 国 立 博 物 館 ; 同, 1976, 乾 漆 製 伎 楽 面 の 製 作 技 法 - - 主 に 東 大 寺 伎 楽 面 について 佛 敎 藝 術 106, 毎 日 新 聞 社 ; 同, 1988, 飛 鳥 平 安 時 代 仏 像 彫 刻 に 関 する 調 査 研 究, 東 京 国 立 文 化 財 研 究 所. 15 山 崎 隆 之, 1990, 奈 良 時 代 の 乾 漆 技 法 - 心 木 と 布 貼 りについて 佛 敎 藝 術 193, 毎 日 新 聞 社 ; 同, 1990, 乾 漆 伎 楽 面 の 製 作 技 法 について-- 実 験 的 考 察 愛 知 県 立 芸 術 大 学 紀 要 20, 愛 知 県 立 芸 術 大 学. 16 今 津 節 生, 2012, X 線 CTを 用 いた 国 宝 阿 修 羅 像 の 健 康 状 態 調 査 と 製 作 技 術 の 解 明 科 研 費 NEWS 2012 vol.3, 日 本 学 術 振 興 会. 17 鈴 木 喜 博, 앞의 논문, pp.97~105; 井 上 正, 1978, 四 天 王 立 像 当 麻 寺 ( 大 和 古 寺 大 観 第 2 巻 ), 岩 波 書 店, pp.51~55. 18 박형국 外, 앞의 책, pp.196~197. 19 기존의 연구 성과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崔 恩 領, 2000, 조선초기 건칠불상에 관한 연구 :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건칠보살입상을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同, 2001,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所 藏 乾 漆 大 勢 地 菩 薩 立 像 東 岳 美 術 史 學 2, 東 岳 美 術 史 學 會 ; 同, 2003 竹 林 寺 における 乾 漆 仏 像 デアルテ 19; 同, 2006, 大 邱 把 渓 寺 불교미술사학, 通 度 寺 ; 同, 2013, 韓 國 乾 漆 佛 像 의 硏 究,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광희, 2003, 낙산사 원통보전 건칠관음보살좌상 연구 문물, 재단법인 한국문물연구원. 20 우리나라의 보존과학 분야에 있어 불상에 대한 광학적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63년 국보 제78호에 대해 코발트(60Co) 선원을 이용하여 내부구조 및 결함을 조사한 것이 최초이다. 이듬해인 1964년에는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대해서도 세슘(137Cs)선원을 이용하여 불상의 제작기술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금속유물에 대 한 조사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목조불상이나 협저불상과 같은 유기물로 제작되어진 유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2013, 박물관보존과학이야기, p.16, p.29.
138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되었다. 이 두 개의 보고서에 의해 우리나라 협저불상의 가 장 큰 구조적 특징으로서, 상내에 심목이 넣지 않아 완전히 텅 빈 상태인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21 그러나 각 상의 구체 적인 제작기법에 대한 설명은 없다. 보존과학 분야에서는 2009년에 해인사 소장 희랑대사 상에 대한 수리가 실시되어 그에 대한 보고서가 출판되었 고, 2012년 중요동산문화재 목불 철불 건칠불 기록화 사업 결과보고서(강원 경기) 의 대상 문화재 중에 낙산사 협저보살좌상이 포함되어 있다. 22 그 외, 협저기법과 재료 에 대한 본격적인 논문으로는 도쿄 오쿠라슈코칸 협저 보살좌상( 東 京 大 倉 集 古 館 夾 紵 菩 薩 坐 像 )을 통하여 본 한 국 협저불상의 제작기법 을 들 수 있다. 23 그러나 우리나라 의 협저불상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는 10여년이 조금 넘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 앞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들이 많 이 남겨져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협저불상의 제작기법에 관 한 연구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미술사와 보존수복 및 보존과학 분야에서 조사와 수리가 진행되었고, 그와 관 련된 많은 연구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육 안 관찰에 의존하였으며, 제작기법과 심목의 형태, 사용된 재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수리에 의해 밝혀진 성과이다. 모든 국보급의 협저불상 및 목조불상의 수리는 일본미술원 을 중심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현상유지 라는 보존철학에 입각하여 개채( 改 彩 )나 개금( 改 金 )은 물론이거니와 불확정 적인 수리와 복원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24 예외적으로 에도시대( 江 戶 時 代 )부터 성행한 니지( 泥 地 ) 25 는 내구성이 약해 근년에 들어 불상을 수리할 때 제거하며, 그 외의 바탕 층은 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무엇보다 비가역성재 료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칠을 이용한 수리를 허용하고 있 다는 것이 특징이다. 26 반면, 우리나라의 목조불상이나 협저불상의 제작기법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해 인사 희랑대사상의 경우 뒷면이 목재로 잇대어져 있어 목심 건칠로 오인되었고, 27 봉화 청량사 약사여래좌상과 같이 틀 을 이용하여 만든 근세의 불상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으 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1962년에 재정된 문화재 보 호법 제3조(문화재보호의 기본원칙)에 문화재의 보존 관 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 지만 원형에 대한 관념 또한 아직 모호한 것이 현실이다. 근 년에 이루어지고 있는 불상의 수리는 그에 선행하여 과학적 인 조사와 여러 관계자 선생님들의 자문을 거쳐 진행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작업 현장에서는 아직 수리나 복원의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제작기법과 재료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수리를 할 경우,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제 거해 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여 원형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는 불상의 보존에 21 林 碩 奎, 2007, 한국 乾 漆 佛 像 의 광학적 조사현황 한국의 사찰문화재,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재)불교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22 엔가드 국립공주대학교, 2012, 2012년 중요동산문화재 목불 철불 건칠불 기록화사업 결과보고서(강원 경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23 정지연, 2010, 韓 国 夾 紵 仏 の 技 法 的 硏 究 - 大 倉 集 古 館 藏 の 脫 活 乾 漆 菩 薩 坐 像 の 模 刻 を 中 心 に-, 東 京 藝 術 大 學 大 學 院 美 術 研 究 科 文 化 財 保 存 學 專 攻 保 存 修 復 彫 刻 領 域 博 士 學 位 論 文 ; 同, 2013, 도쿄 오쿠라슈코칸 협저보살좌상( 東 京 大 倉 集 古 館 夾 紵 菩 薩 坐 像 )을 통하여 본 한국 협저불상의 제작기법 문화재 46-3; 同, 2014, 나주 및 남원지역 협저불상의 제작기법에 관한 고찰 대구사학 114. 24 박형국 外, 2007, 동양미술사, 미진사, pp.195~197. 25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江 戶 時 代 )부터 토분( 地 粉 )이나 지분( 砥 粉 ) 혹은 호분( 胡 粉 )을 아교와 혼합하여 회칠층 대신에 사용하였는데 이를 니지( 泥 地 )혹은 반다지( 半 田 地 )라 고 한다. 재료비를 삭감할 수 있고 공정이 간단하기 때문에 성행하였으나, 내구성이 약해 근년에 들어 불상을 수리할 때 니지로 만들어진 바탕층은 제거하는 것을 원칙으 로 하고 있다. 26 일본에서는 맥칠에 목분( 木 粉 ), 혹은 목분과 섬유부스러기를 배합하여 만든 것을 곡소우루시( 木 屑 漆 ), 우루시곡소( 漆 木 屑 ), 곡소( 刻 苧, 木 屑, 木 屎 )라고 하며, 협저불상이 나 기악면( 技 樂 面 )의 세부형태를 만드는 모델링제로 사용되어지거나 목조불상을 제작할 때 지나치게 깎아버린 부분의 수정과 이음매를 메우는데 사용된 예가 있다. 근대 에는 목불상의 수리에 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곡수( 穀 樹 )라고 하며, 백골의 옹이를 제거한 부분과 접합 부분의 충진제로 사용되지만 실제 불상 의 수리에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27 이 상은 원래 완전한 협저불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엔가 뒷면이 파손되었고, 파손된 뒷면에는 목재를 잇대어 수리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목심협저 불상과는 다르다.
139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직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구데이터의 축적은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 살펴 볼 심향사상에 관한 연구는 이 러한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과학적인 접근방법 을 이용하여 제작기법을 밝히고자 하였다. 다. 1011년 몽고군의 침입에 의해 나주로 몽진을 온 것도 고 려왕실의 번병( 藩 屛 )으로서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에 속한다. 특히 나주에 몽진한 현종은 이곳 심향사에서 나 라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고 구전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심향사의 중요성과 위상을 가늠케 하며 이곳에 협저불 상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30 심향사( 尋 香 寺 ) 협저불상의 제작기법 분석 1. 문헌조사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심향사의 극락전 내에는 협저기 법으로 만들어진 아미타불상 1구가 안치되어 있다(이하 심 향사상으로 약칭) 28 <사진 1, 3>. 이 상이 전해지고 있는 나주지역은 역사적으로 영산강 유역의 해상세력의 중심지로서, 후고구려의 왕건( 王 建 )을 도와 고려를 건국시킨 정치적 지지 세력의 하나였다. 건국 후에도 나주는 태조 왕건의 정치적인 거점이었으며, 제2대 혜종( 惠 宗 ) 29 즉위 후에는 어향( 御 鄕 )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원래 심향사는 신라시대의 원효가 미륵원( 彌 勒 院 ) 이 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공민왕 7년 (1358)에 중수되었고, 지금도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과 석 탑이 경내에 남아 있다 31 <사진 2>. 조선시대 지리서 신증 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 (1530)과 대동지지( 大 東 地 志 ) (1864)에는 신왕사( 神 王 寺 ) 로 기록되어 있고, 1872년 나주읍성지도에서는 신왕사( 神 旺 寺 ) 라는 이름으 로 나타난다<그림 1>. 또, 1976년에 현재의 미륵전을 해체 복원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는 錦 城 山 神 皇 寺 竜 華 堂 重 建 ( 中 略 ) 乾 陸 五 十 四 己 酉 元 月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조 13년(1888)에 중건될 당시까지는 신황사( 神 皇 寺 ) 로 불리 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지금의 심향사라는 이름은 광 무 3년(1899)에 간행된 나주군읍지( 羅 州 郡 邑 誌 ) 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33 사진 1 심향사 전경 사진 2 심향사 경내 고려시대 석탑 사진 3 극락전 내부 28 세키노타다시( 関 野 貞 )의 朝 鮮 美 術 史 제7장 조각편에서 나주 심향사는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된 목조석가좌상으로 조사기록 되어 있다. 関 野 貞, 1932, 朝 鮮 美 術 史, 朝 鮮 史 学 会, p.241. 29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莊 和 王 后 )는 나주지역 토착호족 세력인 오씨( 吳 氏 )의 딸이다. 30 최성락 외, 1999, 나주시의 연혁 나주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김선( 金 琁 ) 저, 김종섭 번역, 2003, 국역 시서유고( 市 西 遺 稿 ), 나주시, p.492. 31 成 春 慶 李 柱 承, 1999, 나주시의 불상 유적 나주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32 大 東 地 志 에는 신왕사가 신라 때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山 水 ) 錦 城 山 北 五 里 端 重 奇 偉 有 月 井 峯 維 摩 窟 泑 災 洞 普 老 寺 北 二 十 里 新 羅 時 創 神 王 寺. 33 羅 州 郡 邑 誌 尋 香 寺 在 州 北 門 外 錦 城 山 下.
140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錦 城 山 神 旺 寺 北 望 門 당하였고, 밝혀지지 않은 이런저런 연고로 불회사에 보관되 어 있던 것을 심향사로 다시 되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 당할 것이다. 그 외에는 1988년에 불모 만봉 이치호( 萬 峰 李 致 虎, 1909 ~2006)가 개금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사찰 내에 구전되고 있다. 현재의 표면금박은 그 때 개금된 것이다. 그림 1 1872년 나주읍성지도(규장각소장) 2. 육안관찰을 통해 살펴본 제작기법 심향사상은 높이 136.0cm, 무릎 폭 97.0cm로 고려후기 이 상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기록으로서는 상의 밑판에 쓰 여진 묵서가 유일하다. 근년에 밑판의 가장자리와 세로축으 로 덧대어진 목재에 의해 발원문의 일부가 보이지 않고 있으 나 내용은 다음과 같다<사진 6>. (14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34 양쪽 팔을 구부려, 왼손은 왼 쪽 무릎 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사진 4, 5>. 願 文 四 年 庚 戌 十 月 二 十 一 日 修 西 方 敎 主 阿 彌 陀 佛 一 位 奉 安 于 本 國 錦 城 山 彌 勒 殿 等 錦 華 堂 維 星 觀 河 堂 宗 仁 錦 潭 堂 炳 淵 泰 益 義 洪 信 女 壬 子 生 金 氏 廣 修 行 寅 生 金 有 成 王 京 内 居 咸 氏 時 任 生 税 務 主 事 耳 里 檀 越 等 確 佛 坐 极 本 郡 東 部 面 竹 林 居 盧 在 昇 造 庚 戌 十 月 二 十 一 日 願 以 此 功 德 普 及 如 一 切 我 等 如 衆 生 當 生 極 樂 國 同 見 無 量 壽 開 供 成 佛 道 발원문에 의하면 순종4년( 純 宗 4 年, 庚 戌, 1910)에 불상을 보수하여 봉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사에 참여한 사 람 중에 나주 동부면 죽림에 사는 노재승이 불상의 밑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상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불회 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그러나 밑판의 발원문 에 의하면 1910년 보수하여 심향사 미륵전에 봉안된 불상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 상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도난을 사진 4 정면 사진 사진 5 측면 사진 정상계주, 중간계주, 백호가 감입되어 있고, 눈의 검은자 위부분에 타원형의 구슬 35 을 감입하였다. 양쪽 귀와 손, 치마 [ 裙 ]의 띠 장식과 매듭은 나무를 조각하였다<사진 9~11>. 밑판의 중앙에는 복장공( 服 裝 孔 )이 뚫려 있다. 상의 내부 는 근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복장물이 납입되어 있고 빈공간 은 흰색의 광목천으로 채워져 있다<사진 6>. 34 문명대, 1983, 高 麗 後 期 端 雅 様 式 ( 新 古 典 的 様 式 ) 佛 像 의 成 立 과 展 開 古 文 化 22, 韓 國 大 學 博 物 館 協 會, pp.48~49; 임석규, 2007, 앞의 논문, p.106. 35 재질에 관해서는 분석데이터가 없지만, 흑요석이나 수정을 감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소조불상 제작기법의 하나이며, 이후 목조불상이나 협저불상에도 적용되었다고 추측된다. 정지연, 2013, 앞의 논문, p.189.
141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그 외 육안으로 관찰되는 보존 상태를 살펴보면, 나발이 부분적으로 보수되었으며, 정상계주, 중간계주, 백호도 보수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 7, 8>. 이 부분의 수리에 관련 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기는 알 수 없다. 또, 등 부분에는 직경 0.8cm 정도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후 사진 6 심향사 밑판의 복장공과 묵서 복장공를 통해 살펴본 불상의 내부는 심목을 짜 넣지 않 아 텅 빈 상태이며, 금박을 올려 장엄하고 있다. 내부의 금 박은 상을 제작할 당시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1910년 밑 판을 새로 만들어 보수할 때에 내부의 금박도 같이 올렸거 나, 그 이전에 개금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만으로 그 시기를 추정할 수는 없다. 상의 내부를 관찰해 보면 얼굴의 눈, 코, 입의 형태가 명확 히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된다. 또, 옷주름선은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주름의 凹 凸 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진 13, 14>. 따라서 원형( 原 型 )이 되는 소조상( 塑 造 像 )을 조성하는 단계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협저층을 올 린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의 안쪽에서는 절개한 선이 확인되며, 절개부분은 실 로 꿰매어 봉합하지 않고 칠( 漆 )이나 호칠( 糊 漆 )을 이용하여 접합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사진 21>. 상의 다른 부분에서는 절개선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형의 흙과 심기는 머리 대에 인위적으로 파손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서는 바 탕층과 협저층이 관찰되고 있으며, 미량의 시료를 채취하여 분석하였다<사진 25>. 사진 7 정상계주와 육계주 사진 8 나발(뒷머리 부분) 뒷부분과 상의 아랫부분을 통해 제거한 것으로 판단된다. 36 양쪽 손은 손목 부분에서 심목을 잇대어 소매 안쪽으로 끼워 넣었다. 심목의 연결방법은 손과 심목의 양쪽에 구멍을 뚫고 장부촉을 끼워 연결시켰으며, 심목의 길이는 팔꿈치까 지이다. 현재 왼손은 심목과 분리되는 상태이며, 수인의 형 태로 보아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측된다. 손목과 팔꿈치 부근에서 못으로 고정시킨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사진 11, 12, 22~24>. 사진 9 양쪽 귀 36 이와 같은 특징은 오쿠라집고관 협저보살좌상과 남원, 나주 지역의 협저불상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기법이다. 정지연, 2013; 同, 2014, 앞의 논문 참조.
142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사진 10 치마[ 裙 ]의 띠 장식 사진 11 오른손과 왼손 사진 12 왼손의 분리 상태와 심목 연결구조 사진 13 내부의 옷주름(배 부분) 사진 14 내부의 옷주름(무릎부분) 3. X-ray 데이터를 통해 살펴본 제작기법 X-ray 데이터에서는 상의 전면( 全 面 )에 균열이 관찰된다 <사진 15, 16>. 이러한 균열은 상의 내부에 원형의 흙이 깨끗 하게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에서 생긴 균열이 촬영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상의 균열과는 무관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쿠라집고관 협저불상의 X-ray 데이터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상의 협저층은 명확한 선이 아니라 농담이 다른 층으 로 나타는데, 상반신 부분은 3층, 하반신 부분은 4~5층 정도 로 구분된다.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 외, 육계의 맨 윗부분, 머리의 좌우측과 뒷머리의 돌출 된 부분, 코, 입술, 턱, 목의 삼도는 다른 부분의 마감층 보다 조금 두껍게 올린 이중( 二 重 )의 층이 형성되어 있지만, 전체 적으로 마감층의 두께는 매우 얇다. 이중의 층에 대해서는 상의 내부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얼굴이나 옷주름의 형태가 명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형태를 만든 층으로 보기는 어렵 고, 마무리 작업과정에서 표면의 형태를 가다듬거나 보강하 기 위해 올린 제작 당시의 층으로 생각된다 37 <사진 18, 20>. 눈의 검은자위부분에는 구슬을 감입한 것이 확인되며 <사진 17, 18>, 머리의 정상계주 뒷부분에서 뒷목의 경계부 분까지 사선으로 절개한 선이 나타난다.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절개선을 찾을 수 없다<사진 19~21>. 37 이 상과 형식적으로 유사한 동시대의 불상, 즉 14~15세기의 협저불상에서도 얼굴과 목 부분에 이중의 층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보수되어진 층이 아니라, 제 작 당초에 올려 진 마감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원형이 되는 소조상의 단계에서부터 거의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한국 협저불상의 제작기법적 특징으로 볼 때, 마 무리 작업과정에서 표면의 형태를 다듬기 위해 올린 층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의 불상이 협저층 위로 칠에 밀가루 혹은 풀, 그리고 톱밥을 섞어 만든 곡수( 穀 樹, 木 屎 )를 두껍게 올려 형태를 만드는 모델링 작업과는 다르다.
143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사진 15 X-ray 데이터 정면 사진 16 X-ray 데이터 측면 사진 17 얼굴정면 검은자 위에 감입된 구슬 사진 18 X-ray 데이터 검은자 위에 감입된 구슬 양쪽 귀와 치마[ 裙 ]의 띠와 매듭장식 부분은 나무로 제작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금속제의 못이 X-ray 필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칠과 같은 접착제를 이용하여 상의 표면에 접착하였다고 생각된다<사진 9, 10, 15>. 또 왼손은 심목부분에 3개의 못으로 고정하였고, 오른손 은 손목 주위에 6개, 팔꿈치 부근에 2개, 총 8개의 못으로 고 정하였다. 이 중에는 근대에 제작되어진 못도 확인된다<사 진 22~24>. 그 외 나발의 일부가 X-ray 데이터에 다른 색을 띠고 있어 원래 제작된 나발과는 다른 재료로 제작된 알 수 있으며, 이 부분은 후대에 보수되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144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사진 19 얼굴측면 사진 20 X-ray 데이터 얼굴측면(절개선) 사진 21 내부의 머리 절개선 사진 22 X-ray데이터 측면(손과 심목) 사진 23 오른쪽 손목 부분의 못 사진 24 왼쪽 팔꿈치 부분의 못 4. 시료 분석을 통해 살펴 본 제작기법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심향사상의 등 부분에는 최대직경 1cm 정도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부분에서는 마감층과 협저층의 단면이 육안으로 관찰된다. 관찰된 부분은 크게 금 박층과 바탕층, 그 아래에 있는 인피섬유직물로 이루어진 두 꺼운 협저층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사찰의 허가를 얻어 파손된 부분에 부스러져 있는 파편들 중, 극소량을 시료로 채취하여 분석하였다. 분석방법으로는 광학현미경(Optical Microscope)을 이용하여 금박층과 바탕 사진 25 등의 파손 부분과 확대 사진
145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ᄀ금박 ᄂ흑색칠층 ᄃ금박 ᄅ얇은칠층 ᄆ미색안료층 ᄇ금박 ᄉ얇은칠층 ᄋ적색칠층 ᄌ갈책칠층 ᄎ암갈색칠층 ᄏ회칠층 사진 26 광학현미경( 200)과 부분확대 층의 구조를 관찰하였고,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과 여기에 부착된 전자현미분석기(Electron Probe MicroAnalyzer)를 사용하여 성분 분석을 실시하였다. 먼저,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한 시료에서는 3층의 금박층 이 확인된다. 구조를 살펴보면 위에서부터 ᄀ 금박 ᄂ 흑 색 칠층 ᄃ 금박 ᄅ 얇은 칠층 ᄆ 미색( 米 色 ) 안료층 ᄇ 금박 ᄉ 얇은 칠층 ᄋ 적색 칠층 ᄌ 갈색 칠층 ᄎ 암갈색 칠층 ᄏ 회칠층 이 있다<사진 26>. 시료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회칠층 아래에는 협저층이 있다. 광학현미경에서 관찰되는 단면사진( 400)과 EPMA로 Mapping한 사진을 금박층과 바탕층, 회칠층, 협저층으로 나 누어 층별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b c d a. 400 b. SEM c. Au d. C e f g h e. Ca f. Cl g. Cu i j k h. Hg l i. O j. P k. Pb l. Zn 사진 27 EPMA Mapping
146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제일 위쪽에 관찰되는 ᄀ 금박층 은 1988년 만봉스님에 의해 개금된 현재의 표면금박이다. 수 은(hg)이 검출되는 것으로 보아 아말감기법으로 금박을 올 렸다. 금박 아래에 관찰되는 흑색 칠층은 금박의 발색을 돕 기 위한 바탕층으로 판단된다. 2번째 ᄃ 금박층은 구리(Cu)와 아연(Zn)이 주성분으로 검 출되므로 금을 대신하여 황동( 黃 銅 )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 다. 38 이 가금( 假 金 )층은 얇은 박( 箔 )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는 상태로 관찰되는데, 이것은 황동박( 黃 銅 箔 )을 아교에 개어 만든 황동니( 黃 銅 泥 ) 39 라고 판단된다. 즉, 가금니( 假 金 泥 )로 표면을 장엄한 것이다. 현재까지 불상에 금 대신 가금을 사용한 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는 데, 2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첫 번 째는 금니( 金 泥 )의 대용으로 가금니( 假 金 泥 )을 표면에 그대 로 올려 사용하였다기보다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법 중 금 박의 발색을 좋게 하기 위하여 황색의 안료나 동박( 銅 箔 )을 바탕층으로 올리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까지 우리나라 불상에서 확인되어 알려진 바는 없다. 다음은 2번째 금박층이 묵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1910년에 밑판을 중수할 때 개금도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식민강점기라 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금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 으로 에도( 江 戶 )시대 이후 사용되던 황동박을 40 이용했을 가 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탕층은 납(Pb)을 주성 분으로 하는 안료인 연분( 鉛 粉, 2PbCO 3 Pb(OH) 2 ) 혹은 밀 타승( 密 陀 僧, PbO)을 사용하였다. 3번째 ᄇ 금박층은 거의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상태이 며, 수은이 함께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아말감기법으로 금 박을 올렸다. 그 아래에는 ᄉ 얇은 칠층, ᄋ 적색 칠층, ᄌ 갈 색 칠층, ᄎ 암갈색 칠층의 순으로 관찰된다. ᄋ 적색 칠층에 서는 수은과 납이 주성분이므로 진사( 辰 砂, HgS) 및 연단( 鉛 丹,Pb₃O₄)을 칠과 혼합하여 만든 주칠층( 朱 漆 層 )으로 판단된 다. 주칠층은 고대 칠기제작 기법에 있어 금박의 바탕층으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려후기 불상의 바탕층 으로도 사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아래층에 있는 정 제되어 투명한 ᄌ 갈색 칠층과 그 보다 조금 짙은 ᄎ 암갈색 칠층은 주칠층을 올리기 위해 도포한 칠층으로 판단된다. 칠층의 아래에는 ᄏ 회칠층이 관찰된다. 이 층에서는 칼 슘(Ca)과 인(P)이 주성분으로 검출되었다. 따라서 심향사상 의 회칠층에는 골분( 骨 粉 )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골 분층은 불상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통일신라시 대 유구로 밝혀진 경주탑동 849-16번지 출토 칠기( 漆 器 )의 완( 碗 )과 개( 蓋 )의 회칠층 성분 분석에서 칼슘과 인이 검출되 어 골분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41 또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의 고급 나전칠기의 회칠층에서도 골분층이 확인된 바 있다. 42 이번의 분석을 통하여 골분은 칠공예품에서 뿐만 아 니라 불상의 회칠층에도 이용되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회칠층에 사용된 재료에 관해서는 휴식록( 髹 飾 錄 )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곤집( 坤 集 ) 질법( 質 法 ) 제17에 완 38 가금( 假 金 )은 동( 銅 ) 85~87%, 아연( 亜 鉛 ) 13~15%의 비율로 합금하여 만든 황동을 얇은 박( 箔 )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황동은 연전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는 철사나 얇 은 판으로 가공이 쉽다. 39 금분은 금속망에 금박을 놓고 붓이나 뾰족한 침으로 문질러 가루로 만들어 쓰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금분은 대부분 쇄금( 灑 金 )이나 마끼에( 蒔 絵 )와 같이 뿌려서 문양을 나 타낼 때 사용된다. 반면, 불상의 육신부, 불화의 금선을 그을 때, 묘금( 描 金, 泥 金 畵 漆 )에는 금니( 金 泥 )를 사용한다. 금니의 제작방법으로는 잘게 조각난 금박을 접시 위에 놓고 아교를 섞어 손가락으로 문질러 갠 다음 열을 가해 수분을 증발시킨다. 여기에 따뜻한 물을 조금씩 넣어 섞어준 다음 금분이 가라앉으면 윗물을 버려 불순물을 제거 한다. 이렇게 만든 금분에 다시 아교액을 섞어 사용한다. 이상현, 2010, 전통회화의 색, 결, pp.78~88; 東 京 藝 術 大 大 学 院 文 化 財 保 存 学 日 本 画 研 究 室, 2007, 図 解 日 本 画 用 語 事 典, 東 京 美 術, pp.62~65. 실제 금니층이 관찰된 예로는 고려시대 제작의 나전포류수금문향상의 칠편을 분석한 것이 있다. 박정혜, 이용희, 2013, 고려시대 칠기에 나타난 묘금기법 연구 박물관 보존과학 vol.14, 국립중앙박물관, pp.61~67. 40 일본에서는 에도시대( 江 戶 時 代 ) 이후에 금박을 대신하여 공예품 등에 사용되었으며 신츄하쿠( 真 鍮 箔 )라고 한다. 41 (주)씨엔티 경담연구소, 2010, 경주탑동 849-16번지 출토 칠기 보존처리 보고서 경주탑동 849-16번지 유적, 재단법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 pp.130~135. 42 최석찬, 김선덕, 이용희 외, 2011, 조선시대 칠도막 분석연구 보존과학회지 Vol.27, No.4,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pp.371~380; 이용희, 1996, 조선시대 나전칠기 수 리 보존과학회지 Vol.5, No.2,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pp.25~34; 주12 참조. 그 외, 골분이 사용된 칠기로는 낙랑칠기의 분석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박정혜, 이용희, 2013, 앞의 논문, pp.61~67; 김경수, 유혜선, 이용희, 2003, 낙랑칠기의 칠기법 조사(Ⅰ) 박물관보존과학 Vol.4, 국립중앙박물관, pp79~88; 岡 田 文 男, 1995, 古 代 出 土 漆 器 の 研 究 顕 微 鏡 で 調 る 材 質 と 技 法, 京 都 書 院, pp.109~143, 156~159.
147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칠( 垸 漆 )은 일명 회칠( 灰 漆 )이다. 각회( 角 灰 )나 자설( 磁 屑 )은 상등( 上 等 )이며, 골회( 骨 灰 )와 합회( 蛤 灰 )는 중등( 中 等 )이고, 전회( 甎 灰 )나 배설( 坏 屑 ), 지회( 砥 灰 )는 하등( 下 等 )이다 43 라 고 쓰여 있으며, 휴식록전증( 髤 飾 録 箋 證 ) 에는 사슴 뼈를 태운 재는 상등( 上 等 )이고, 소뿔을 태운 재는 그 다음이며, 혹 은 동( 銅 )과 놋쇠 등의 가루를 넣으면 더욱 좋다 44 고 기록되 어 있다. 45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예로부터 회칠의 혼 합재료로써 뼈를 태워 가루로 만들어 칠에 혼합하는 기법이 사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골분을 좋은 재료로 생각한 이 유는 회칠층에 사용되는 다른 재료들과 비교하였을 때 가볍 고 견고하며, 많은 기공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두 껍게 회칠층을 올려도 주름이 생기지 않고 빨리 경화( 硬 化 ) 되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관찰하였다. 관찰결과, 오른꼬임을 한 섬유 부스러기이며, 섬유주변은 투명한 칠이 감싸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사진 29>. 그 외 의 첨가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협저층에 사용된 베의 표면에 섬유부스러기와 칠을 혼합하여 눈메움을 하였 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6 협저불상의 경우, 베의 표 면에 눈메움을 하게 되면 협저층 사이가 밀착되는 효과를 가 져 오게 되므로 전체적인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 는 인위적인 힘에 의해 협저층의 섬유조직이 끊어지면서 공 기 중에 장시간 드러난 결과, 열화현상이 진행되어 잘게 부 서진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사용된 인피섬유의 종류에 대 해서는 시료의 한계로 인해 파악할 수 없었다. a b c 맺음말 심향사상은 심목을 상 내부에 짜 넣지 않은 완전히 텅 빈 사진 28 협저층을 메운 입자분석(a. 100, b. 100, c. 200) 육안으로 관찰되는 협저층은 인피섬유를 겹겹이 올려 만 든 것이 관찰되지만, 고운 분말상( 粉 末 狀 )의 물질이 협저층 의 섬유조직 사이를 메우고 있어 정확한 층수는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두께는 1cm 내외이며 밝은 갈색을 띠고 있 다. 협저층에 사용된 인피섬유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인위적 으로 섬유를 잘라내어 채취해야하므로 시료를 얻지 못하였 다. 다만, 섬유조직 사이를 메우고 있는 분말상의 물질을 파 악하기 위해 이 부분에 있는 분말을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상태의 협저불상으로 불상의 내부를 관찰한 결과 외부의 옷 주름과 내부의 옷주름의 요철이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아 원형이 되는 소조상을 조성하는 단계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제작한 다음 그 위에 베 바르 기를 하여 협저층을 올렸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곡소우루 시( 木 屑 漆 )와 같은 모델링 재료(Modelling 材 料 )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드는 작업 단계는 거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이 러한 점은 우리나라 협저불상의 제작기법에 있어 가장 중요 한 특징이며, 일본 협저불상의 제작기법과 큰 차이점의 하 나라고 할 수 있다. 43 坤 集 質 法 第 十 七, 垸 漆, 一 名 灰 漆, 用 角 灰 磁 屑 為 上, 骨 灰 蛤 灰 次, 之 甎 灰 坏 屑 砥 灰 為 下. 44 琴 経, 鹿 角 灰 為 上, 牛 角 灰 為 次, 或 雑 銅 鍮 等 屑, 尤 妙. 45 蒹 葭 堂 写 本, 1938, 髤 飾 録, 東 京 美 術 學 校 校 友 會 發 行 ; 世 襄 著, 1983, 髤 飾 録 解 説, 文 物 ; 索 予 明 著, 1974, 蒹 葭 堂 本 髤 飾 録 解 説, 台 湾 商 務 印 書 館. 46 협저층을 올릴 때 층과 층 사이 즉, 호칠로 붙인 베의 표면에 올을 메우는 재료에 관해 일본의 협저불상 제작기법에서 거론된 바 있다. 일본의 재단법인 미술원 소장이었 던 오노데라 히사유키( 小 野 寺 久 幸 )씨는 흥복사 아수라상을 수리한 후 모조제작에 관한 공정을 보고하였는데, 협저층을 올릴 때 사용한 베의 표면에 사비( 錆 漆, 砥 粉 을 물에 개어 생칠과 혼합한 것)를 도포하여 눈을 메운다 라고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야마자키 타카유키( 山 崎 隆 之 )씨는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쓰고 있다. 山 崎 隆 之, 1990, 앞의 논문, pp.36~38.
148 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원형의 흙과 심목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의 정수리부분에 서 뒷목까지 사선으로 절개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절개 선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형의 흙과 심목은 상의 아 래 부분과 머리를 절개한 곳을 통하여 제거하였다고 생각된 다. 또한 머리를 절개한 부분에는 꿰맨 흔적이 없고 칠과 같 은 접착제를 사용하여 접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상이 많 은 일본의 협저불상의 경우에는 형태상의 특징 때문에 머 리 이외에도 등이나 팔 등 필요한 곳에 창을 뚫어 원형제작 에 사용된 흙과 심목울 제거할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 협저 불상은 좌상이 많기 때문에 목과 머리의 흙과 심기는 머리를 절개하여 제거하고, 몸의 흙은 바닥을 통해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점은 한국 협저불상 제작기법의 특징 중 하나이며, 본 상의 경우도 동일하다. 눈의 검은자위 부분에는 구슬을 감입하였다. 또, 양쪽 귀 와 손, 치마의 띠와 매듭은 나무로 제작하여 접합하였다. 바탕층 분석결과에 의해 주칠층과 칠층, 회칠층은 제작 당시의 층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회칠층에 사용한 골분은 고 려시대 나전칠기뿐만 아니라 불상에도 이용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으며, 불상에 금박을 붙이기 위한 바탕층은 주칠을 이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근대에 들어서만도 두 차 례 이상의 개금불사가 행해졌던 것이 관찰되었고, 여러 차례 의 개금불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의 층은 훼손 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불상의 바탕층은 제작자가 상의 면을 고르고 형태를 바로 잡는 마무리 단계이며, 금박이나 채색을 올리기 위한 기저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상의 재질을 보호하는 역할 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 았다. 따라서 불상을 수리할 때 원래의 바탕층을 제거하고 새로운 바탕층을 올리는 경우 미묘하게 상호( 相 好 )가 변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불상의 수리란, 단순히 해체하여 클리닝하고 재질을 강화 시켜 접합하면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불확실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겉모습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 지금 현존하는 형태, 즉 고색, 충해, 마멸, 결손 등 시 간을 경과하여 생긴 경년변화도 역사의 일부분이므로 반드 시 남겨져야 하며, 현상유지를 기본으로 하는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문화재야 말로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49 Jeong Ji-yeon 심향사 극락전 협저 아미타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참고문헌 羅 州 郡 邑 誌 大 唐 西 域 記 大 東 地 志 大 宋 重 修 廣 韻 法 苑 珠 林 本 草 綱 目 小 爾 雅 説 文 解 字 岡 田 文 男, 1995, 古 代 出 土 漆 器 の 研 究 顕 微 鏡 で 調 る 材 質 と 技 法, 京 都 書 院 関 野 貞, 1932, 朝 鮮 美 術 史, 朝 鮮 史 学 会 蒹 葭 堂 写 本, 1938, 髤 飾 録, 東 京 美 術 學 校 校 友 會 發 行 久 野 健, 1987, 乾 漆 佛 日 本 の 美 術 254, 至 文 堂 今 津 節 生, 2012, X 線 CTを 用 いた 国 宝 阿 修 羅 像 の 健 康 状 態 調 査 と 製 作 技 術 の 解 明 科 研 費 NEWS 2012 vol.3, 日 本 学 術 振 興 会 김경수, 유혜선, 이용희, 2003, 낙랑칠기의 칠기법 조사(Ⅰ) 박물관보존과학 Vol.4, 국립중앙박물관 김광희, 2003, 낙산사 원통보전 건칠관음보살좌상 연구 문물, 재단법인 한국문물연구원 金 琁 저, 김종섭 번역, 2003, 국역 시서유고( 市 西 遺 稿 ), 나주시 東 京 文 化 財 硏 究 所 編, 2011, 硏 究 資 料 脫 活 乾 漆 像 の 技 法, 学 藝 書 院 東 京 藝 術 大 学 大 学 院 文 化 財 保 存 学 日 本 画 研 究 室, 2007, 図 解 日 本 画 用 語 事 典, 東 京 美 術 鈴 木 喜 博, 2011, 仏 像 修 理 100 年 - 美 術 院 の 歴 史 とともに 特 別 展 仏 像 修 理 100 年, 奈 良 博 物 館 明 珍 恒 男, 1936, 佛 像 彫 刻, スズカケ 出 版 部 문명대, 1983, 高 麗 後 期 端 雅 様 式 ( 新 古 典 的 様 式 ) 佛 像 의 成 立 과 展 開 古 文 化 22, 韓 國 大 學 博 物 館 協 會 박정혜, 이용희, 2013, 고려시대 칠기에 나타난 묘금기법 연구 박물관 보존과학, vol.14, 국립중앙박물관 박형국 外, 2007, 동양미술사, 미진사 本 間 紀 男, 1998, 天 平 彫 刻 の 技 法 - 古 典 塑 像 と 乾 漆 について-, 雄 山 閣 出 版 社 本 間 紀 男, 1985, X 線 による 木 心 乾 漆 像 の 研 究, 美 術 出 版 社 山 崎 隆 之, 1990, 乾 漆 伎 楽 面 の 製 作 技 法 について-- 実 験 的 考 察 愛 知 県 立 芸 術 大 学 紀 要 20, 愛 知 県 立 芸 術 大 学 山 崎 隆 之, 1990, 奈 良 時 代 の 乾 漆 技 法 - 心 木 と 布 貼 りについて 佛 敎 藝 術 193, 毎 日 新 聞 社 索 予 明 著, 1974, 蒹 葭 堂 本 髤 飾 録 解 説, 台 湾 商 務 印 書 館 西 村 公 朝, 1973, 脱 乾 漆 彫 刻 の 技 法 とその 表 現 効 果 について 美 術 院 紀 要 3, 財 団 法 人 美 術 院 西 村 公 朝, 1969, 美 術 院 七 十 年 の 沿 革 美 術 院 紀 要 創 刊 号, 財 団 法 人 美 術 院 성춘경 리주승, 1999, 나주시의 불상 유적 나주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沈 福 文 編 著, 1992, 中 國 漆 芸 美 術 史, 人 民 美 術 出 版 社 辻 本 干 也, 1970, 奈 良 時 代 の 乾 漆 技 法 - 造 像 技 法 考 (3) 佛 敎 藝 術 78, 毎 日 新 聞 社 엔가드 국립공주대학교, 2012, 2012년 중요동산문화재 목불 철불 건칠불 기록화사업 결과보고서(강원 경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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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HWAJAE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Vol. 47. No. 1, March 2014, pp.134~151. Copyright 2014,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A Study of the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Statue from Simhyangsa Temple Jeong Ji-Yeon a Motoya Myochin b a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b Aesthetics and Art history laboratory Musashino Art University, Meikodo INC Abstract This paper deals with a review of the structure and production techniques of the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statue enshrined in Geungnakjeon Hall of Simhyangsa Temple, located in Daehodong, Naju-si, Jeollanam-do, Korea. To achieve this goal, X-ray date and two rounds of field research were performed. The data collected were reviewed, and a sample peeled off from the damaged part was analyzed to investigate the structure and material of the background layer. The results revealed that the Simhyangsa Temple Buddha statue was an almost empty Driedlacquer(Hyeopjeo) Buddha statue where wood core had not been framed and inserted in the statue. It was thus observed that considering that the clothes wrinkles clearly remained, the same one as the irregularity of the outer clothes wrinkles, the Dried-lacquer layer was lifted made in an almost complete shape in the process of forming the clay figure as the origin form. The statue was found to be diagonally incised from the top of the head to the back of the neck to remove the clay and wood core. But in other sites, no incision was confirmed. It was observed that on the site of the head where the incision was made, an adhesives(lacquer or paste) was used. In addition, the black eyes were impacted with beads and the ears, hands, bands, and knots were made of wood. These features are identically shown in the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statue from Seonguksa Temple, known as a work of the late Goryeo dynasty; the Seated Dried-lacquer Buddha statue in Okura Museum of Art in Tokyo, Japan; the Seated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statue from Jungnimsa Temple, know as a work of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the Seated Vairocana Buddha statue in Bulhoesa Temple, the Seated Driedlacquer Amitabha Buddha and the Seated Dried-lacquer Buddha statue from Silsangsa Temple. The analysis of the back layer demonstrated that the ground layer and the red lacquer were the production of the time. In particular, the bone ash used for the ground layer was also coated for the ground layer of Buddha statues as well as for the production of the lacquerware during the Goryeo dynasty. It was also found that gold mending was conducted more than twice even in modern times and that the layer of the production time was well preserved despite gold mending several times. Key Words Dried-Lacquer Buddha Statues, Simhyangsa Temple, Production Techniques, Red Lacquer, Bone Ash Received : 2013. 12. 31 I Revised : 2014. 01. 22 I Accepted : 2014. 0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