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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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조선의 역서( 曆 書 )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박권수 (충북대학교) 1. 조선의 역서( 曆 書 )와 역법( 曆 法 ) 서운관지( 書 雲 觀 志 ) 와 내각일력( 內 閣 日 曆 ), 일성록( 日 省 錄 ) 등에 의거하건대, 조선시대 역서( 曆 書 )의 간행부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격 하게 늘어나기 시작해서 정조( 正 祖 ) 22년( 戊 午 年, 1798)에는 최대 1만9천 축( 軸 ), 1) 즉 38만 부에까지 도달하였다. 2) 이와 같은 역서 간행부수의 급격 한 증가는 이 시기에 역서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숫자들을 고려하여 조선시대 전체 를 통틀어서 발행되었던 역서들의 총부수를 따져본다면 아마도 수천만 부 투고 2013년 3월 23일. 심사 및 게재확정 2013년 4월 22일. * 이 논문은 Templeton Religion Trust 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논문에 표명된 견해는 저자의 것으로서 Templeton Religion Trust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1) 역서의 간행 과정에서 언급되는 1축( 軸 )이라는 단위는 20부를 지칭한다. 이 점에 대해 서는 허윤섭, 조선후기 觀 象 監 天 文 學 부문의 조직과 업무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36쪽. 각주 124를 참고할 것. 2) 서운관지( 書 雲 觀 志 ) 등에 따르면, 역서의 간행 부수는 정조대 후반기에 이르러 30만 부를 상회하기 시작한다. 또한 일성록( 日 省 錄 ) 에 따르면, 정조 22년( 戊 午 年, 1798) 11 월 30일에 관상감 제조 서호수( 徐 浩 修 )의 주청으로 다음해 역서의 전체 간행 부수를 예 전에 비해 2천 축을 늘려서 1만8천 축을 인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2월 20일에는 관 상감 제조 정민시( 鄭 民 始 )가 역서를 추가로 1천 축을 더 찍자고 주청하여 전체 간행 부 수 총 1만9천 축이 되었다. 조선후기 역서 간행 부수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허윤섭, 앞 논문, 30-32쪽과 정성희, 조선후기 曆 書 의 간행과 배포, 朝 鮮 時 代 史 學 報 23집 (2002), 132-133쪽에서 일부 규명을 해놓았지만, 이들 연구는 일성록 과 내각일력 의 자료 등을 참고하지 않아 정조 22년 말에 간행부수가 추가적으로 증가한 사실 등을 반영 하지 못하고 있다. 역서 간행부수의 정확한 변동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별도 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어서지 못할 것이다. 실제 간행되었던 숫자에 비해 남아 있는 역서의 숫자가 현저하게 적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역서에 대한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관심은 역서가 간 행되던 당시의 역사적 중요성을 생각하건대 지나치게 미미하다고 할 수 있 다. 심지어 우리는 아직까지도 여러 국학기관들과 도서관들, 그리고 개인들 이 보관하고 있는 역서들의 전체적인 소장 상황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 고 있지 못하다. 여기서 나아가 매년 수십만 부의 역서를 간행하고 전국적으 로 배포하기 위해 작동하였던 공식적, 비공식적 기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 는지, 역서 제작 자체에 동원되었던 물력( 物 力 )이 어느 정도였는지, 나아가 광범위하게 유포된 역서가 조선인들의 일상생활과 얼마나 긴밀하게 결합하 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가늠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 필자가 보기에 역서에 대한 미미한 관심과 연구의 미진함은 한편으로는 역서를 역법( 曆 法 )의 발전에 의거하여 간행되는 부차적인 결과물로만 바라 보는 암묵적인 시각과도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천문학 연구는 주로 역법 의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천문역산( 天 文 曆 算 ) 이론, 혹은 역법 지식의 전래와 수용, 소화의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조선시대 과학사(천문학사) 서술에서 역서는 역법 발전의 결과물 정도로서 만 취급되었을 뿐이고 역서 자체 로서 주목을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3) 역서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에는 조선 후기 서양천문학의 수용과정에서 시헌역법을 이 해하고 시헌서를 간행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인 전용훈, 조선후기 서양천문학과 전통천 문학의 갈등과 융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의 1장 曆 法 改 革 을 통한 天 文 曆 算 學 지식의 습득 과 조선 후기 시헌서의 내용을 민속학적이고 종교학적인 관심에서 역 주에 주목한 연구인 이창익,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창비, 2013) 등이 있 다. 또한, 조선 후기 역서의 간행과 배포 과정에 대한 연구로 허윤섭, 앞 논문, 23-32쪽; 정성희, 조선후기 曆 書 의 간행과 배포, 朝 鮮 時 代 史 學 報 23집 (2002), 117-146쪽; 김 혁, 曆 書 의 네트워크: 왕의 시간과 일상생활, 영남학 18호 (2010), 249-291쪽이 있으 며, 양반 가문에 소장되어 있는 역서들의 소장 상황 등에 관한 연구로 정성희,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 曆 書 類 의 현황과 가치, 史 學 硏 究 86호 (2007), 99-133쪽 등이 있다. 이 들 중에서 특히 김혁의 연구는 조선후기 역서의 반포와 유통과정을 일상생활에서의 활 용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다.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71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역서를 역법의 부산물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즉, 조선의 역서를 독자적인 역법 연구의 부산물 이 아니 라, 조선 정부가 자체적으로 간행할 수밖에 없었고 신민( 臣 民 )들 사이에 존 재하였던 광범위한 수요에 부응하여 인쇄부수를 늘릴 수밖에 없었던 주산 물 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역서 간행의 필요성 을 역법 연구의 필요성 에 보다 우선하는 조건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역서에 수록되어 있 는 날짜들과 24절기, 길흉일( 吉 凶 日 ) 등을 정하는 이론적 부분에 주목하기 보다는 먼저 역서의 외양적 측면, 혹은 양식적 측면에 주목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양적 측면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조선시대 역서간 행의 제반 조건들 중에서 보다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조선시대 역서의 외양적 변화를 신황제( 新 皇 帝 )의 등극에 따 른 연호( 年 號 )의 변화 과정과 역서의 양식적 변화의 과정으로 나누어서 구 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역서의 외양적 변화를 가져온 원 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논의하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역서 간행과 역법 연구의 근본적 조건들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역서 간행에서 작용한 근본적 조건, 혹은 역서의 외양적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역법이 아니었다. 조선의 독자적인 역서 간행과 조선 역서의 외양적 변화는 역서에 대한 실제적이고 광범위한 수요 와 제후국( 諸 侯 國 ) 조선과 황제국( 皇 帝 國 ) 중국의 관계 라고 하는 보다 근본적인 조건들 속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또한 이들 조건들과 더 불어 북경과 한양 사이의 시공간적인 거리 라는 물리적인 조건이 조선의 역 서간행과 역법연구의 기본 조건으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필자는 조선에서 로컬사이언스(Local Science) 의 일환으로서 존재하 였던 조선의 천문역법( 天 文 曆 法 ) 연구 의 전제들과 기본적 조건들을 조망 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4) 4)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천문학 활동과 관련해서 군주가 유교적 왕천하자( 王 天 下 者 )로서 관상수시( 觀 象 授 時 )의 정치이념을 표방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 왕조의 차원에서 지원하 고 수행하게 하였던 활동을 천문학 일반, 혹은 동아시아 보편과학(Universal Science) 으로서의 천문학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의 지

72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2. 연호( 年 號 )가 없는 역서( 曆 書 )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는 동치 원년( 同 治 元 年, 철종 13년, 1862)의 역서를 살펴보면, 월력장( 月 曆 張 ) 부분에 동치( 同 治 ) 라는 연호가 비어 있는 채로 인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현재 남아 있는 이 해의 역서들에 적혀있는 동치 연호는, 아래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서를 인출한 이후에 손으로 적어 넣은 것 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동치 원년 시헌서( 時 憲 書 )에 연호가 빠진 채로 간 행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동치제( 同 治 帝 )의 부친인 함풍제( 咸 豊 帝 )가 죽은 날짜는 철종( 哲 宗 ) 12년 ( 辛 酉 年, 1861) 7월 17일이었다. 6) 동치제는 즉위할 때에 나이가 겨우 6살에 불과했기에 함풍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숙순( 肅 順 ) 등에게 아들의 후견 을 맡기면서 뒷일을 부탁하였다. 새로운 어린 황제가 즉위한 이후 7월 29일 에는 기상( 祺 祥 ) 이라는 새로운 연호가 공포되었다. 그런데 그해 9월 30일 에 동치제의 생모인 귀비( 貴 妃 ), 즉 서태후( 西 太 后 )가 함풍제의 동생이었던 공친왕( 恭 親 王 )과 연합하여 쿠테타를 일으켜 숙순 등을 실각시키고 황후와 함께 섭정을 시행하였다. 이른바 신유정변( 辛 酉 政 變 )이라는 사건이 그것인 역적 변주 로서 특정 지역의 특성과 조건이 반영되면서 수행되었던 활동을 로컬사이언 스(Local Science)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로컬사이언스 라는 용어 를 사용하여 조선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역적 특성과 상황들이 반영되면서 수행되 었던 천문학 활동, 혹은 천문역법 연구 의 전제 조건들을 논의하고자 한다. 5) <그림 1>과 같이 역서의 맨 앞장에 월의 대소와 절기시각 등을 간략히 요약해서 적어 놓은 면을 단력( 單 曆 ), 단력장( 單 曆 張 ), 월력( 月 曆 ), 혹은 월력장( 月 曆 張 )이라고 지칭하였 다. 예를 들어, 삼력청헌( 三 曆 廳 憲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청구번호 古 大 5120-133)에 서는 월력( 月 曆 )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비해 삼력청완문( 三 曆 廳 完 文 ) (규장각한국 학연구원 청구번호 古 5120-134)에서는 단력 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 글에서는 월 력장 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6)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8월 22일이다. 이하 논문에 적힌 날짜 표기는 모두 당시 사용하 던 역서에 적힌 날짜 표기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조선시대에 해당 하는 연대들의 연도 표기는 중국 황제의 연호 연대와 조선 국왕의 치세 연대를 기준으로 표기하며, 괄호 안에다 서기( 西 紀 )를 부기하되 당시의 연대를 그레고리우스력의 연대로 환산하지 않고서 표기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앞의 각주 2에서 정조 22년( 戊 午 年, 1798) 11월 30일 이라고 했을 때, 이 날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1799년에 속한 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한 1799년으로 적지 않고서 그냥 1798년으로 적고자 한다.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73 데, 공친왕과 서태후 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새로운 정 부는 10월 5일에 신황제의 치세기 연호를 다시 동치( 同 治 ) 로 바꾸어서 공 포하였다. 그림 1. 철종 12년(1861)에 간행된 동치 원년( 同 治 元 年, 철종 13년, 1862) 조선 역서의 월력장( 月 曆 張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함풍제가 7월 17일 붕서했다는 소식은 의주부윤( 義 州 府 尹 )의 장계를 통 해 8월 19일에서야 한양에 전해졌다. 7) 이후 새 황제의 연호가 기상( 祺 祥 ) 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의주부윤의 보고로 전해졌고, 관상감에서는 이듬해 의 철종 13년( 壬 戌 年, 1862)의 역서의 연호 부분을 大 淸 祺 祥 元 年 으로 적 고서 역서의 연출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0월 하순경에 이르러 중국 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10월 하순경 이면 조선에서 역서의 인출을 거의 끝마치고 배포를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 이다. 그런데, 북경에서 일어난 정변의 결과 이미 결정된 기상( 祺 祥 ) 연호 가 사용될 것인지, 아니면 연호가 새롭게 정해질지 등에 대해서 조선 정부는 중국 측으로부터 아무런 공식적 공문을 받지 못하였다. 7) 哲 宗 實 錄 13권, 12년(1861, 辛 酉 ) 8월 19일조.

74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하지만 10월 23일 경에는 조선 정부는 다음해 역서의 종종판( 終 終 板 ) 부 분의 판각과 인출( 印 出 ) 작업을 끝마치고서 배포를 시작해야 했다. 8) 따라서 새로운 동치( 同 治 ) 연호의 제정 소식을 공식적으로 전해 듣지는 못한 상태 에서 역서의 인출작업을 서둘러야 했던 조선 정부는 목판의 연호부분을 공 란으로 비워둔 채로 월력장 부분을 인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철종 13 년(1862)의 조선 역서는 연호에 해당되는 글자부분을 비워둔 채로 大 淸 元 年 歲 次 壬 戌 時 憲 書 라는 제목으로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동치 원년 시헌서의 간행과 관련된 위의 에피소드는 조선에서 이루어졌던 역서간행 작업에 작용하였던 기본적인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이 공식적으로는 황제국인 중국 의 정치적 변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제후국 이었다는 조건이다. 나아가 황제국 중국의 상황 변화 가 조 선 정부에 즉각적으로 알려지고 곧바로 반영되지 못하도록 하는 물리적인 조건, 즉 북경과 한양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시공간적 거리 9) 가 조선의 역 서 간행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3.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해의 역서들 중국에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고 역서에 새로운 연호가 사용된 것은 동 치 원년인 철종 13년(1862)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조선 8) 이듬해에 사용될 역서는 일반적으로 4월 1일부터 인쇄를 시작하는데, 전체 15장의 판목 을 초판( 初 板 ), 중판( 中 板 ), 종판( 終 板 ), 월력장판( 月 曆 張 板 ), 종종판( 終 終 板 )으로 나누어 서 순차적으로 인쇄하였다. 즉, 1월판~4월판을 초판, 5월판~8월판을 중판, 9월판~11월판 과 연신방위도판을 종판, 12월판과 기년판( 紀 年 板 )을 종종판으로 구분하여 지칭하였고, 종종판은 앞의 판들에 대한 인출을 마치고 맨 마지막에다 인출을 하였다. 특히 월력판과 연신방위도판은 한해에 정해진 분량 만큼의 부수만큼 인쇄가 끝나면, 그 판목을 부수어 서 비공식적인 추가적 인출을 막고자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三 曆 廳 憲 28-30쪽을 참고할 것. 9) 북경에서 황제가 붕서하였다는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기까지는 대략 1개월 남짓한 시간 이 소요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철종 12년(1861)에 함풍제가 붕서한 날짜는 7월 17 일이었는데, 그 소식이 의주부윤의 장계를 통해 한양에 알려진 시점은 8월 19일이었다. 또다른 예로, 순조 20년(1820)에 가경제가 7월 25일 붕서하였다는 청나라 예부( 禮 部 )의 자문( 咨 文 )이 의주부윤의 치계를 통해 한양에 전달된 날짜는 9월 10일이었다.( 純 祖 實 錄 23권, 20년(1820, 庚 辰 ) 9월 10일조.)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75 시대를 역서를 통해서 중국에서 새로운 황제들이 즉위한 시기에 조선에서 간행한 역서의 연호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연호 변화와 관련된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청나라가 입관( 入 關 )하고 조선에서 시 헌력( 時 憲 曆 )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이후부터 대한제국 설립 이전까지 중국 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일은 모두 여덟 번 있었다. 그 중에서 신황제( 新 皇 帝 )의 즉위 원년에 배포한 조선의 역서들이 남아 있는 해는, 필자가 현재 까지 파악한 바로는, 정조 20년(1796)과 순조( 純 祖 ) 21년(1821), 철종 2년 (1851), 철종 13년(1862), 고종( 高 宗 ) 12년(1875)이다. 이들 다섯 해의 역서 들 중에서 우선 순조 21년( 道 光 원년, 1821)과 철종 2년( 咸 豊 원년, 1851)의 경우에는 선황제( 先 皇 帝 )가 붕서( 崩 逝 )한 시기가 8월 이전이었으므로, 황제 붕서의 소식과 중국 측의 공문이 조선에 전해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그 결과 이 두 해에는 조선에서 새로운 황제의 연호들을 새겨서 역서를 간 행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종 12년( 光 緖 원년, 1874)의 경우에는 선황제가 12월에 붕서 하였고 조선 조정에는 1월 5일 경에야 그 소식이 전해졌다. 10) 하지만 그때 는 조선에서 역서들을 인출하여 이미 배포를 진행한 시점이기에 선황제 때 에 사용하던 연호가 그대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조선 정부는 추가적으로 신황제가 반포한 새로운 연호가 새겨진 역서를 별도로 간행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역서 간행 과정에서 연호의 표기와 관련해서 동치 원년(철종 13) 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한 경우가 한번 더 있었는데, 바로 건륭( 乾 隆 ) 황제의 선위( 禪 位 )가 이루어진 정조 20년( 嘉 慶 원년, 1796)의 경우이다. 정조 19년( 乾 隆 60년, 1795) 9월 4일 건륭제는 이듬해인 병진년( 丙 辰 年 ) 1월 초하루를 기점으로 황제의 자리를 자신의 열다섯째 황자( 皇 子 )인 가친왕( 嘉 親 王 )에게 선위한다는 유시( 諭 示 )를 내각( 內 閣 )에다 내려 주었다. 이어서 10 월 1일에는 조서( 詔 書 )를 내려서 선위를 공식화하였다. 10) 高 宗 實 錄 12권, 12년(1875, 乙 亥 ) 1월 4일조, 義 州 府 尹 黃 鍾 顯, 以 去 月 初 五 日 酉 時, 中 國 皇 帝 崩 逝, 啓.

76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曆 書 年 度 年 號 變 化 先 皇 帝 崩 逝 年 月 朝 鮮 曆 書 年 號 表 記 康 熙 元 年 ( 顯 宗 3, 1662) 順 治 康 熙 順 治 18 年 ( 顯 宗 2, 1661) 1 月 現 存 曆 書 表 紙 落 張 擁 正 元 年 ( 景 宗 3, 1723) 康 熙 擁 正 康 熙 61 年 ( 景 宗 2, 1722) 11 月 現 存 曆 書 無 乾 隆 元 年 ( 英 祖 12, 1736) 擁 正 乾 隆 擁 正 13 年 ( 英 祖 11, 1735) 8 月 現 存 曆 書 無 嘉 慶 元 年 ( 正 祖 20, 1796) 乾 隆 嘉 慶 乾 隆 60 年 ( 正 祖 19, 1795) 10 月 禪 位 詔 書 乾 隆 六 十 一 年, 嘉 慶 元 年 道 光 元 年 ( 純 祖 21, 1821) 嘉 慶 道 光 嘉 慶 25 年 ( 純 祖 20, 1820) 7 月 道 光 元 年 咸 豊 元 年 ( 哲 宗 2, 1851) 道 光 咸 豊 道 光 30 年 ( 哲 宗 1, 1850) 1 月 咸 豊 元 年 同 治 元 年 ( 哲 宗 13, 1862) 咸 豊 同 治 咸 豊 11 年 ( 哲 宗 12, 1861) 7 月 年 號 部 分 空 白 光 緖 元 年 ( 高 宗 12, 1875) 同 治 光 緖 同 治 13 年 ( 高 宗 11, 1874) 12 月 同 治 十 四 年 표 1. 청나라 황제의 붕서와 신황제의 즉위 연월에 따른 조선 역서의 연호 표기 변화 건륭제의 선위 소식은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9월 29일 이전에 이미 조 선 정부에 알려진 듯하다. 이 날짜의 승정원일기( 承 政 院 日 記 ) 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건륭 황제가 전위( 傳 位 )하는 게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있음을 확 인하고서 별도로 경하사절( 慶 賀 使 節 )을 보낼지 말지 등을 논의하였다. 11) 9 월 29일 승정원에서 논의되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안건은 바로 이듬해인 정 조 20년(1796) 병진년의 역서에 연호를 어떻게 표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 제였다. 왜냐하면 이듬해의 역서에 새로운 황제의 연호를 새겨 넣어야 할 텐 11) 承 政 院 日 記, 정조 19년(1795, 乙 卯 ) 9월 29일조.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77 데, 9월 29일 시점은 선위조서( 禪 位 詔 書 )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도 아니었 고, 중국 측으로부터 새로운 연호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공문이 도착하지도 않 았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연호를 넣은 중국의 역서가 동지 이전에는 북경 에서도 나돌지가 않을 테니, 조선에서 역서를 간행할 때 당해 연도와 같은 건륭( 乾 隆 ) 연호를 계속 사용하여 역서를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2) 이렇게 해서 간행된 역서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은 乾 隆 六 十 一 年 歲 次 丙 辰 時 憲 書 이다. 그림 2. 연호가 乾 隆 六 十 一 年 으로 표기된 정조 20년(1796)의 조선 역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그러다가 이듬해의 연호가 가경( 嘉 慶 ) 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동지정사 ( 冬 至 正 使 ) 민종현( 閔 鍾 顯 )의 치계( 馳 啓 )로 11월 6일에 조선 정부에 알려졌 다. 13) 민종현은 3일 후인 11월 9일 건륭 황제가 10월 1일에 반포한 선위 조 12) 承 政 院 日 記 정조 19년(1795, 乙 卯 ) 9월 29일조, 上 曰, 勿 論 某 字, 年 號 則 必 當 改 易 矣. 向 者 前 禮 判, 以 曆 書 事, 有 所 陳 達, 皇 曆 旣 未 出 來 於 冬 至 之 前, 則 我 國 曆 書 之 仍 用 乾 隆 年 號, 亦 似 無 妨, 況 我 國 曆 書, 初 非 相 關 於 大 國 者 乎. 且 新 皇 帝 年 號, 未 知 將 用 幾 年 之 久, 而 今 皇 帝 年 號 之 遽 改, 甚 覺 悵 惜 矣. 13) 正 祖 實 錄 43권, 19년(1795, 乙 卯 ) 11월 6일조, 이 해 동지사 사절 민종현 일행은 10

78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서를 베껴서 보내면서 가경 연호가 표기된 병진년(1796)의 중국 시헌서를 한 부 구해서 보내왔다. 11월 28일에는 특별 재자관( 齎 咨 官 )으로 파견된 변 복규( 卞 復 圭 )가 북경의 사정을 탐지하여 비국에 보고하면서, 자금성 내에서 는 태상황제( 太 上 皇 帝 )에 대한 미안함 을 이유로 건륭 연호를 붙인 시헌서 를 사용하고, 자금성 이외의 기관과 지역에는 가경원년( 嘉 慶 元 年 ) 연호가 적힌 시헌서를 배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4) 중국에서는 이와 같이 두 가지 의 연호를 동시에 사용하는 상황은 건륭 황제가 죽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중국 측에서 가경 연호를 사용한 시헌서를 배포하고 있음을 확인한 조선 정부는 嘉 慶 元 年 으로 연호가 표기된 역서를 별도로 다시 인출하여 배포하였다. 그러한 결과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정조 20년(1796)의 역서로서 嘉 慶 元 年 의 연호를 가진 역서와 乾 隆 六 十 一 年 의 연호를 가진 역서가 함께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각 기관에 소장된 역서들의 상 황을 토대로 추정하건대, 조선 정부는 정조 19년(1795) 연말에는 이미 乾 隆 六 十 一 年 으로 연호가 표기된 역서를 이미 전국적으로 배포하였으므로 嘉 慶 元 年 으로 연호가 표기된 역서를 다시 대량으로 인출하여 배포하지는 않 았으며 단지 소수의 부수만을 제작하여 궐내에 보관한 듯하다. 이런 이유로 아래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가경원년 의 역서는 그 월력장의 면에 일반적으로 역서의 인출과 배포 시점에 찍히게 되는 관상감의 관인( 官 印 )인 관상감인( 觀 象 監 印 ) 이 찍히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고 새로운 연호가 중국에서 공포되더라도 그 것이 조선의 역서에 반영되는가의 여부는, 새로운 연호에 대한 정보가 한양 에 전달되어 조선의 역서에 반영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는 가의 여부에 달려있었던 셈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충분한 시간 이란 중국과 조선 사이에서 신황제의 등극과 연호의 변화와 같은 중요한 정보가 북경과 한양 사이의 거리를 감당하고 전달되기에 필요한 시간과 이 정보를 반영하여 조선에서 30만부 이상의 역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을 합한 것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조선에서 역서를 간행하는 데에 필 요한 시간은 최소 1년 이었으며, 역계산과 정서 등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월 10일 정조를 알현하고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14) 正 祖 實 錄 43권, 19년(1795, 乙 卯 ) 11월 28일조.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79 인출( 印 出 )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만 고려하더라도 최소 6개월 이상의 시 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5) 그림 3. 연호가 嘉 慶 元 年 으로 표기된 정조 20년(1796)의 조선 역 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4. 조선시대 역서( 曆 書 )의 양식적 변천 황제국 중국과 제후국 조선의 관계 라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인 조건 이 조선의 역서간행에서 결정적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례는 바로 조선시대 역서의 외양적인 차원의 변화, 다시 말해 역서의 양식적인 변화이다. 15) 역서는 그것이 사용되기 2년 전부터 제작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N년에 사용할 역서 는 N-2년 10월 1일부터 계산을 시작하여 N-1년의 1월까지 종종판의 계산을 끝내서 결 과를 제출해야 했다. 역서에 대한 인출은 N-1년의 4월부터 시작해서 동지 20일 전까지 마치도록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三 曆 廳 憲 28-30쪽과 書 雲 觀 志 권2, 治 曆 항목 을 참고할 것.

8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천문연구원, 국립과천과학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역서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선적으로 조선의 역서가 수백 년에 걸쳐서 간행되어오면서도 그 기본적인 체제나 형식 등과 같은 외양적 형태에서는 그다지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18세기 이후부터 고종 31년(1894)까지의 조선 역서들을 살펴보면, 16) 그 형식과 체제는 놀라울 정도로 고정되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 간행된 역서의 형식과 체제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서의 세부적인 형태나 체 제를 따져보면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두 번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변화의 계기는 임진왜란이었고, 두 번째 변화의 계기 는 병자호란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전쟁 기간을 기준으로 삼아 조선시대 전 체(조선 초기부터 고종 31년까지)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여 역서의 외형 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편의상 각각의 시기를 제1기 부터 제3기로 호칭하고자 한다. 각 시기 동안에 간행된 역서들의 장수( 張 數 ) 와 외형적인 측면에서의 주요 특징들을 정리하면 아래 <표 2>와 같다. 구분 제1기 제2기 제3기 기간 조선초 ~ 선조 31년(1598) 선조 32년(1599) ~ 인조 15년(1637) 인조 16년(1638) ~ 고종 31년(1894) 平 年 張 數 閏 年 張 數 14 15 16 17 15 16 특징 明 의 국호와 연호 표기 없음. 월력 장, 연신방위도 부분이 각 1면으로 구성 明 의 국호와 연호가 사용됨. 월력장 과 연신방위도가 각각 1장으로 늘어 남. 마지막에 紀 年 부분이 포함됨. 淸 의 국호와 연호가 사용됨. 마지막 의 紀 年 부분이 사라짐 표 2. 시기에 따른 조선시대 역서의 양식적 변화 양상 16) 이 글에서는 갑오개혁 이전의 시기인 1894년까지 역서만을 다루기로 한다. 이는 1895 년 이후 역서의 양식적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다음 해인 1895년(고종 32) 역서의 권두서명은 大 朝 鮮 開 國 五 百 四 年 歲 次 乙 未 時 憲 書 이다. 중 국 청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대조선( 大 朝 鮮 ) 이라는 국호와 개국( 開 國 )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이후 역서의 양식적 변화에 대해서는 최고 은, 1864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 역서( 曆 書 ) 연구 (충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를 참고할 것.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81 1) 제1기: 조선 초 ~ 선조 31년(1598) 조선 초부터 선조( 宣 祖 ) 31년(1598)까지 간행된 조선의 역서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본적으로 황제국인 명( 明 ) 나라의 국호와 연호가 적혀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의 역서인 선조 13년(1580) 경진년( 庚 辰 年 ) 역서를 살펴보자. 17)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역서 의 월력장 맨 첫줄에는 권두서명으로 太 歲 在 庚 辰 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역서들 중에서 제1기에 간행된 또다른 역서인 선조 27년(1594) 갑오년( 甲 午 年 ) 역서의 경우에도 太 歲 在 甲 午 이라는 권두서명 이 붙어 있다. 이처럼 제1기의 역서에는 그 해의 간지( 干 支 ) 만을 큰 글자로 적어서, 이 역서가 각각 경진년과 갑오년에 사용하기 위해 간행한 역서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두 줄로 幹 金 枝 土, 納 音 屬 金 이라 는 구절로 이어지고 이후 歲 德 在 庚 合 在 乙 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이 두 구절은 제2기 이후에는 맨 앞의 월력장이 아닌 연신방위도( 年 神 方 位 圖 )에 붙어서 나오게 된다. 이런 사실은 현존하는 역서들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선 조 13년(1580) 경진년( 庚 辰 年 ) 역서뿐만 아니라 안동의 풍산( 豊 山 ) 유씨( 柳 氏 )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역서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 17)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역서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선조 13년 (1580) 경진년( 庚 辰 年 ) 역서이다.( 庚 辰 年 大 統 曆 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319호에 지정되 어 있다.) 이 역서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종태, 庚 辰 年 大 統 曆 小 考, 생활문물연 구 7호 (2002)를 참고할 것. 18) 선조 13년(1580) 역서 다음으로 오래된 역서는 안동의 풍산( 豊 山 ) 유씨( 柳 氏 ) 유성룡 ( 柳 成 龍 )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선조 27년(1594)에서 선조 40년(1607)에 해당하는 8권 의 역서이다.(선조 27년(1594), 선조 29년(1596), 선조 30년(1597), 선조 31년(1598), 선 조 37년(1604), 선조 38년(1605), 선조 39년(1606), 선조 40년(1607) 역서들이다. 이들 역서들은 古 文 書 集 成 18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에 영인되어 있다.) 이외에도 진주( 晉 州 ) 정씨( 鄭 氏 ) 우복( 愚 伏, 鄭 經 世 ) 종택( 宗 宅 )에 선조 40년(1607), 광해( 光 海 ) 3 년(1611), 광해 7년(1615), 광해 인조( 仁 祖 ) 7년(1629) 역서를 소장하고 있다.(이 역서들 에 대해서는 정성희,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 曆 書 類 의 현황과 가치, 106-110쪽을 참 고할 것.) 그러므로 선조 13년(1580) 이전에 간행된 조선의 역서가 정확히 어떠한 모습 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편사자료 등을 보건대, 선조 13년(1580) 경진년 역서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82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그림 4. 선조 13년(1580) 경진년( 庚 辰 年 ) 역서의 제1면 월력장( 月 曆 張 )과 제2면 연신방위도( 年 神 方 位 圖 ), 제3면인 정월장( 正 月 張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 이처럼 제1기의 시기 동안 조선 정부는 역서에다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표기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명나라의 국호를 대신해서 조선( 朝 鮮 )이라는 국 호를 앞세우거나 별도의 연호를 정해서 표기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의 역서는 당시 중국 명나라에서 간행되던 역서와는 분명 다른 형태와 체제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역서에서는 월력장과 연신방위도 부분이 각 각 1면만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윤달( 閏 月 )이 들어오지 않는 평년( 平 年 )을 기준으로 이야기할 때, 선조 31년(1598)까지의 역서는 모두 14장, 면수로는 28면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윤년에는 1장이 늘어나서 15장, 30면으로 구성 되었다. 제1기에 간행된 역서들이 외형상 위와 같은 특징들을 가지게 된 것은 조 선 정부가 독자적으로 역서를 간행하면서 지녔던 은밀하면서도 실용적인 태 도가 역서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은밀함 이란 조선 정부가 황제국인 중국에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고서 역서를 독자적으로 제작하여 간행하고 있음을 숨기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내면적 으로는 중국 정부가 조선에서의 독자적인 역서 발행을 인지하고 있었거나 묵인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공식적으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일개 제후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83 국인 조선이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용적인 태도 란 비록 제후국인 조선이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는 일이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조선 자체의 역서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충분한 양의 역서를 자체적으 로 간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2) 제2기: 선조 32년(1599) ~ 인조 15년(1637)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2년(1599) 이후 조선의 역서는 형태상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진행된 형태상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월력장의 맨 앞부분에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가 붙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이 시 기에 간행된 역서로는 풍산 유씨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선조 37년(1604) 갑 진년( 甲 辰 年 ) 역서, 선조 40년(160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 등이 있다. 이 중 에서 선조 40년에 사용된 정미년 역서의 경우를 보면,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서의 권두서명은 大 明 萬 曆 三 十 五 年 歲 次 丁 未 大 統 曆 이다. 이 전까지 간행된 역서가 대통력법( 大 統 曆 法 )에 의거해서 만들어졌기에 실제 내용상으로는 대통력( 大 統 曆 )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서명이 아예 붙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역서는 대통력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던 것 이다. 또한 황제국인 중국의 국호인 대명( 大 明 )과 만력( 萬 曆 )이라는 연호가 권두서명의 일부분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5. 선조 40년(160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의 월력장 부분. 월력장이 2면에 걸쳐 있다. 우복( 愚 伏 ) 종택( 宗 宅 ) 소장본.

84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역서 첫 장인 월력장의 첫줄에 大 明 萬 曆 으로 시작하는 권두서명이 붙게 되자 그 이전 시기까지 월력장의 첫줄에 적혀있던 太 歲 在 庚 辰 歲 德 在 庚 合 在 乙 (<그림 4>의 선조 13년 역서 참고) 부분은 다음 장인 연신방위도의 맨 앞줄로 옮겨지게 된다. 풍산 유씨 집안에 남아서 전해지는 이 시기의 역서들 을 보면, 太 歲 在 庚 辰 歲 德 在 庚 合 在 乙 부분은 연신방위도의 맨 첫줄에 적 혀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간행된 또다른 역서인 선조 40년(160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의 경우를 보면 아래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太 歲 在 丁 未 歲 德 在 壬 合 在 丁 부분이 연신방위도의 첫줄에 등장한다. 그림 6. 선조 40년(160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의 연신방위도 부분. 太 歲 在 丁 未 歲 德 在 壬 合 在 丁 부분이 연신방위도의 첫줄에 적혀있다. 우복( 愚 伏 ) 종택( 宗 宅 ) 소장본. 또한 선조 32년(1599) 이후 사용된 역서에서부터 월력장과 연신방위도가 각각 두 면, 즉 한 장씩을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중국에서 간행한 역서와 같 이 조선 역서의 맨 마지막 부분에도 기년( 紀 年 ), 즉 연대표의 부분이 추가 로 붙기 시작하였다. 역서의 기년부분에는 간행 연도로부터 역으로 60년 기 간에 해당하는 연대표를 적게 된다. 예를 들어, 선조 40년(1607) 정미년 역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85 서의 경우, 그해부터 역으로 60년, 즉 만력( 萬 曆 ) 35년 정미년(1607)부터 가 정( 嘉 靖 ) 27년 무신년( 戊 申 年, 1548)까지의 연대표가 적혀있다.(아래 <그림 7>과 <그림 8>을 참고) 이 기년 부분은 역서의 마지막 두 면에 걸쳐서 상단 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 부분에는 여타 길흉일에 대한 정보와 역서 간행 에 참여한 관상감 관료들의 명단이 실리게 된다. 그 결과 역서의 마지막 부 록 부분은 새롭게 포함된 기년 부분 때문에 그 분량이 기존의 1장에서 2장 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즉 부록 부분이 총 4면에 걸쳐 실리게 된 것이다. 나 아가 이전시기에는 각각 1면을 차지하던 월력장과 연신방위도 부분이 각각 2면(1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역서의 전체 장수는 제1기의 역서들 에 비해 2장이 더 늘어나게 되어, 평년에는 16장 32면, 윤년에는 17장, 34면 으로 구성되었다. 그림 7. 선조 40년(160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의 기년 부분의 1면과 2면. 우복( 愚 伏 ) 종택( 宗 宅 ) 소장본.

86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그림 8. 선조 40년(160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의 기년 부분의 3면과 4면. 우복( 愚 伏 ) 종택( 宗 宅 ) 소장본. 조선 정부에서 역서를 제1기의 형태에서 제2기의 형태로 바꾸어서 간행 하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역서를 외양적으로 명나라의 역서와 똑 같은 모양을 갖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은 임진왜란이 끝나 갈 즈음에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역서를 간행하는 일이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일과 관련이 있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마무리 되는 시기 로서 조선에는 명나라 사신으로 정응태( 丁 應 泰 )라는 인물이 와 있었는데, 그와 조선 정부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나중에 정응태는 명나라로 돌아 가서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무고 하는 바람에 조중( 朝 中 ) 간에 외교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 이런 상황에서 선조 31년(1598) 12월 조선 정부는 정응태가 조선의 독자 적 역서발행 관행을 문제 삼으면서 명나라의 황제에게 고변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특히 국왕인 선조는 비망기( 備 忘 記 )를 내려서 우리 나라에서 개별적으로 역서를 만드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 이라고 하 19) 정응태( 丁 應 泰 ) 무고사건 에 대해서는 허지은, 丁 應 泰 의 朝 鮮 誣 告 事 件 을 통해 본 조 명 관계, 史 學 硏 究 제76집 (2004), 169-205쪽을 참고할 것.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87 면서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편찬한 역서를 정응태의 표하인이 가져다가 보 게 된다면 필시 난처한 일이 있을 것 이라는 걱정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이미 인출해 놓은 선조 32년(1599)의 역서를 아예 반포하고자 하는 관상감 을 질책하며 역서를 반포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하기도 하였다. 20) 그는 중국 의 흠천감의 관인이 찍히지 않은 조선의 역서는 사조( 私 造 )한 역서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말한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정응태의 고변이 두려워서 이미 만들어 놓은 선조 32년(1599)의 역서 중에서 미리 반포하지 않은 4~5천 권 을 폐기하기도 하였다. 21) 결국 조정에서의 논의가 진행된 후에 역서가 일 상생활에 관계된 것이니 형편상 난처하다고 반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 하 면서 역서 판목의 일부를 개간하여 간행을 다시 진행하고 배포를 계속하기 로 결정하였다. 22) 하지만, 이로 인해 역서의 간행 부수는 수요에 턱없이 모 자라는 숫자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인출 시간도 천연되어 배포가 아주 늦 어지게 되었다. 결국 다음해인 선조 32년 2월 초 무렵까지도 역서의 인출이 완료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관상감 제조( 提 調 ) 이헌국( 李 憲 國 )은 과거에는 팔도의 수령에게 다 내려주던 역서를 지금은 겨우 대신에 게만 주고 있으며, 이미 봄철이 지나가고 있는데 역서를 아직 반사하지 못하 고 있다 는 말로 국왕에게 설명하였다. 23) 조선 정부는 정응태 일행의 눈을 속이기 위한 조치로 이미 만들어 놓은 이듬해 선조 32년의 역서 목판을 개간하여 역서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고 쳐서 제2기의 역서와 같은 형태로 변경하였다. 즉 현존하는 선조 40년(1604) 의 역서처럼 역서의 맨 앞장에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표기하고, 마지막 부 분에 기년 부분을 싣는 형태로 역서의 외양을 바꾼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역서는 선조 32년(1599) 역서 이후 비로소 명나라에서 반포한 대통력의 체 제를 그대로 따른 형태로 만들어지고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4) 물론 이러한 조치는 조선의 역서를 중국의 대통력을 그대로 가져다가 복각하여 인출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일종의 임시적 조치였을 뿐이다. 20) 宣 祖 實 錄 107권, 31년(1598, 戊 戌 ) 12월 22일조. 21) 宣 祖 實 錄 109권, 32년(1599, 己 亥 ) 2월 2일조. 22) 宣 祖 實 錄 107권, 31년(1598, 戊 戌 ) 12월 25일조. 23) 宣 祖 實 錄 109권, 32년(1599, 己 亥 ) 2월 2일조. 24)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 壬 辰 年, 1592)부터 선조 13년( 戊 戌 年, 1598)까지 사용한 역서는 제1기와 같은 형태로 발간되었다.

88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하지만 이와 같은 임시적 조치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항구적인 형식으로 고 정되었으며 제3기의 역서가 간행되기 시작한 인조 16년(1638) 이전까지 지 속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역서가 제2기와 같은 형태로 변화한 과정을 자 세히 살펴보면, 명나라가 조선 정부에 앞서와 같은 형태로 역서를 변화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적은 없었으며 또한 독자적인 역서의 간행을 공식 적으로 문제를 삼은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조선 측에서 먼저 일종 의 자기검열 을 수행하여 스스로 역서의 형태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즉 조 선 측은 명나라에서 독자적인 역서 간행의 관행 을 문제삼을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여 조선 역서의 외양적 형태를 명나라의 대통력과 같은 형태로 바 꾸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는 작업은 애초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시작된 일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정치 질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의 시기 에 조선은 명의 원군의 도움으로 승리 아닌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에, 중국 과 조선의 관계에서 명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영향력은 역서 간행에 있어서는 중국 측의 공식적 요구가 아닌 조선 자체의 자기검열 의 형식으로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3) 제3기: 인조 16년(1638) ~ 고종 31년(1894) 제3기에 만들어진 역서가 이전 시기의 역서와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월 력장의 맨 앞줄에 청( 淸 )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3기에 간행된 역서 중 하나인 고종 8년( 同 治 10년, 1871)의 역 서의 맨 앞부분의 월력장을 살펴보면, 청나라의 국호인 대청( 大 淸 )과 당시의 연호인 동치( 同 治 )라는 연호가 맨 앞줄에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그 림 9>를 참고) 이런 식의 역서는 인조 16년(1638) 역서부터 간행되기 시작 하여 그 외양적 형태에서 큰 변화가 없이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간행되 었다. 25) 그런데 이와 같은 역서의 변화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정부가 명나 25) 인조 16년(1638)의 조선 역서는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장서각, 한국천문연구원 등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타의 기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지 여부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89 라의 국호와 연호를 버리고 청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역서의 또 다른 변화 는 선조 32년(1599) 이후 뒷부분에 추가되었던 기년( 紀 年 ) 부분이 다시 사라 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역서에서 기년 부분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청나라가 건국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한 지 가 얼마 되지 않아 60년의 기간에 해당하는 기년 부분을 채우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기년 부분이 사라지면서 제3기에 간행된 역서의 전체 장수는 1장이 줄어들어 평년에는 15장, 윤년에는 16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림 9. 고종 8년( 同 治 10년, 1871) 조선 역서의 월력장. 필자 소장본. 제3기에 해당하는 역서의 형태가 만들어진 과정은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를 천자국( 天 子 國 )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도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9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인조 15년( 丁 丑 年, 1637) 1월 말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삼전도에서 거행하였는데, 이로써 청과 조선의 관계는 기존의 형제국( 兄 弟 國 )의 관계에서 군신( 君 臣 )의 관계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조선 정부와 청나라 정부는 항복의식을 행하기 전에 미리 강화의 조건을 논의하고 협약을 맺게 되는데, 청나라와의 강화조건 중 첫 번째가 바 로 조선은 명나라가 준 고명( 誥 命 )과 책인( 冊 印 )을 청나라에 헌납하고, 명 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며, 명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대신 모든 공문서에 청 나라의 연호와 정삭( 正 朔 )을 사용할 것 이라는 조건이었다. 26) 이런 조건들이 강화 협약에 명시되었기에 조선은 청나라의 연호를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사용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청나라에 의해 군사적으로 제 압이 된 상황에서 당시 정부와 사대부 관료들은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실제로 항복 행사를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조 15년 (1637) 2월 28일에는 명나라의 숭정( 崇 禎 ) 연호를 사용한 조선 국왕의 교서 를 청나라 군사에게 빼앗겨서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 교서에는 명나라의 연호를 여전히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조( 仁 祖 )가 청에 대한 굴욕을 애통 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로 조선정부는 철군이 완료되지 않 은 청나라 정부와 군대를 자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고, 이후 비변사에 서는 정부의 각종 문서에 모두 청나라의 연호인 숭덕( 崇 德 )을 사용하자는 내용의 계문을 올리고 시행하게 된다. 특히 이 명령은 청나라와의 접경지역 인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강하게 전달되었던 듯하 다. 27) 이런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조선은 정부의 모든 공식적인 문서, 특히 청나라와의 외교문서 등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야 했다. 특히 청나라에 직접 보내는 외교문서에서는 청의 연호를 반드시 사 용해야 했다. 외교문서와 더불어 조선 정부가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역서를 간행하는 문제였다. 역서는 백성 들의 일상생활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기에 향촌의 벽지까지 퍼져 26)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과 청나라가 체결한 강화 협약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허태 구, 丙 子 胡 亂 의 정치 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29-135쪽을 참 고할 것. 27) 仁 祖 實 錄 34권, 15년(1637, 丁 丑 ) 2월 28일조.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91 나가는 것이었고, 또한 대량으로 인쇄하여 배포하는 것이었기에 이런저런 경로로 청나라로 충분히 흘러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나라의 국호와 연호가 들어간 역서를 배포한다는 것은 곧 조선이 청나라 에 굴복하고 있다는 치욕적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백성들에게 알리 는 일을 의미하였다. 반대로 조선 정부가 왕실의 위엄과 조정의 위신을 생각 하여 계속해서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가 적힌 역서를 만들어서 배포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청나라에 흘러들어가서 외교문제로 비화될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이와 같은 고민을 1637년부터 이미 시작하였다.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한 때는 인조 15년(1637) 1월로서 이때는 그 해 정축년의 역 서를 그 전 해인 인조 14년(1636)에 제작 완료하여 배포를 끝내고 이미 전국 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 정축년의 역서에는 大 明 崇 禎 이라는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가 권두서명으로 박혀있었다. 따라서 조선 정 부는 만약 청나라 측에서 정축년(1637)의 역서를 제공할 것을 요구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고민 끝에 인조 15년 5월 25일 예조( 禮 曹 )에서는 관상감에서 이미 간행한 정축년의 역서에는 大 明 崇 禎 十 年 歲 次 丁 丑 大 統 曆 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타당하지 못하다 고 하면서 대신들과 상의하여 역서를 임진년 이전의 예에 따라 중국 연호를 쓰지 말고 某 年 曆 書 라고 써서 인출하는 것이 합당 하다는 의견을 국왕에게 올린다. 28) 그러다가 인조 15년(1637) 7월 21일에는 조강( 朝 講 )이 끝나고서 청나라와 일본에 대한 방어 문제를 논의하다가 최명길( 崔 鳴 吉 )이 역서에 관한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다. 청나라 측이 정축년의 역서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할 때에 이미 인출하여 사용하고 있는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가 박혀있는 역서 를 그 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조에게 만약 역서에다 청나라의 연호를 표기하지 않고 정축( 丁 丑 ) 이라는 간지( 干 支 )만을 표기하여 보낸다면 저들이 성낼 것이니, 그들의 연호를 적은 역서 몇 건을 만들어 28) 仁 祖 實 錄 34권, 15년(1637, 丁 丑 ) 5월 25일조. 禮 曹 啓 曰, 觀 象 監 曆 書, 曾 以 大 明 崇 禎 大 統 曆, 印 出 矣, 今 更 思 之, 似 未 妥 當. 請 依 壬 辰 以 前 例, 不 書 天 朝 年 號, 以 某 年 曆 書 印 出 似 當. 大 臣 之 意 如 此. 敢 稟. 上 從 之.

92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서 보내는 것도 마땅한 방법인듯 합니다만, 이것은 성실한 것이 아니므로 자못 염 려스럽습니다. 29) 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다만 심양( 瀋 陽 )에 있는 소현세자( 昭 顯 世 子 )에 게 보내는 역서와 평안도와 함경도 등 청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 서는 청나라의 연호를 표기한 역서를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의견을 피 력하였다. 30) 그리고 7월 27일에는 역서에다 숭덕( 崇 德 )이라는 청나라의 연 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조선 정부가 실제로 청나라로부터 인조 15년 정축년의 역서를 보내줄 것을 요청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위 의 기사를 토대로 짐작하건대, 조선 정부는 이미 간행한 인조 15년 정축년 (1637)의 역서가 아닌 청나라의 연호를 붙인 역서를 별도로 찍어서 소현세 자 일행과 북쪽의 변경 지역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 15년(1637) 8월 9일에는 비변사에서 역서의 새로운 규례를 마련하여 임금에게 허락을 요청한다. 이때는 다음해의 역서를 본격적으로 인쇄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당시 비변사에서 올린 새로운 역서의 규례에 따 르면, 역서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첫 번째 종류의 역서는 맨 앞장인 월력장 부분에 들어가는 권두서명 부분에 청나라의 연호를 표기하여 간행하고, 맨 마지막 장에 있는 기년 부분을 삭제 한 역서이다. 역서에서 연호가 표기되는 부분은 역서의 맨 앞장인 월력장 부 분에 적힌 권두서명 부분과 맨 마지막의 기년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형 식의 역서는 특히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안도, 함경도와 더불어 황 해도 지역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종류의 역서는 권두서명 부분에 들 어가는 연호를 없애고 단지 간지( 干 支 )만을 넣으며 맨 마지막에 들어가는 기년 부분을 역시 삭제한 역서이다. 조정에서는 이 두 번째 양식의 역서를 하사도( 下 四 道, 충청, 전라, 강원, 경상)와 경기도에다 배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인조 16년(1638)의 역서가 실제로 두 가 지 종류로 나누어서 제작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승정원일기 에 따르면, 만 약 청나라에서 만에 하나 역서에 기년 부분이 왜 제거되었는지를 물으면, 29) 仁 祖 實 錄 35권, 15년(1637, 丁 丑 ) 7월 21일조, 鳴 吉 曰, 彼 若 索 觀 象 監 曆 書, 則 何 以 處 之? 臣 則 以 爲, 以 丁 丑 書 之, 而 不 書 其 年 號, 則 彼 必 生 怒. 以 若 干 件, 書 其 年 號, 而 送 之 似 當. 但 此 非 誠 實, 殊 可 慮 也. 30) 仁 祖 實 錄 35권, 15년(1637, 丁 丑 ) 7월 21일조.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93 기년 부분은 반드시 60갑자 동안의 기간을 기록하는데, 숭덕( 崇 德 ) 2년과 3 년 이전의 해에 대한 연호를 바꾸기가 어렵고 (청나라의 연호가 그다지 오 래 사용된 것이 아니므로) 또 명나라의 연호를 계속 사용할 수도 없는 일이 기에, 지금 임시적으로 제거하였다 고 답하라고 되어 있다. 반대로 왜관( 倭 館 )에서 기년 부분의 제거에 대한 질문이 있으면, 난리통에 물력이 충분하 지 못하여 (왕실과 종친부, 관서에서 사용하는 진헌, 반사 외에) 관상감 사건 ( 私 件 )의 경우, 그 아래위의 덧붙여진 장을 제거하고 간단함만을 취했기 때 문이다 라고 변명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역서의 기년 부분은 인조 16년(1638) 역서에서부터 이미 종류에 상관없이 삭제되었을 가 능성이 높은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일들이 일어난 인조 15년(1637)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고 조 청( 朝 淸 ) 관계가 안정화되고 난 뒤에도 역서의 맨 마지막에 실리던 기년 부 분은 다시 덧붙여지지 않고 완전히 제거되고 만다. 인조 16년(1638) 이후 효 종( 孝 宗 ) 1년(1650)까지 조선에서 간행한 역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지만, 현존하는 효종 2년(1651) 신묘년( 辛 卯 年 )의 역서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 다. 31) 아직 시헌력으로 개정하기 전의 대통력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 역서는 권두서명이 大 淸 順 治 八 年 歲 次 辛 卯 大 統 曆 으로 적혀있으며 뒤쪽의 기년 부분도 제거되어 있다. 32) 흥미로운 점은 제2기와 마찬가지로 제3기의 시기에도 청나라가 명시적으 로 조선에 역서의 독자적인 간행을 문제 삼거나 한 적은 없다는 점이다. 물 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숭정 연호를 사용한 일이 문제가 되었지만, 조선 에서 간행하는 역서 에 대청( 大 淸 )의 연호를 반드시 표기하라고 요구한 적 도 없다. 항복 문서에는 단지 명나라의 연호를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으므 로, 조선에서 사용하는 역서에는 그냥 제1기에 간행한 역서의 경우와 같이 간지( 干 支 )로 그 해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안도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실제 31) 효종 1년(1650)에 간행되고 효종 2년(1651)에 사용된 大 淸 順 治 八 年 歲 次 辛 卯 大 統 曆 은 현재 국립천문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32) 현재 인조 16년(1638)에서 효종 1년(1650)까지의 역서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양계( 兩 界 ) 지방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배표하는 모든 역서의 권두서명에다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여 간행하기 시작한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효종 2년(1651) 이후부터는 전국적으로 배포한 역서에 청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표기하였음은 분명하다.

94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로 이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험하고 불성실한 안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역서에다 청나라의 연호를 표기하는 식 으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에도 청나라가 먼저 조선 역서의 국호와 연호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았고 조선 정부가 스스로 자기검열 을 수 행하여 역서에 표기되는 국호와 연호를 변경하였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우선 제3기의 기 간 동안에는 중국과 조선에서 역법이 대통력에서 시헌력으로 바뀌어서 간행 되는 시기가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이후 시헌력을 도입한 이후에도 조선은 중국을 따라서 역법 계산의 방식에서 서양신법역서( 西 洋 新 法 曆 書 ) 체재 에서 역상고성( 曆 象 考 成 ) 체제를 도입하였고, 이후 다시 역상고성후편 ( 曆 象 考 成 後 編 ) 의 체제를 도입하는 등 보다 소규모의 변화를 수용하고 진 행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법 체계의 변화가 역서의 외양적 형식이나 체제에 어떤 식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단지 효종 5년(1654) 전후로 역서의 제목이 대통력에서 시헌력으로, 33) 영조( 英 祖 ) 12년(1736) 이후로는 시헌서( 時 憲 書 )로 바뀌었을 뿐이다. 34) 결국 역서 양식의 시대적 변화 과정에 대한 위의 논의는 조선시대 역서의 간행에서 조선정부가 고려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자 제약요건은 다름 아닌 중국과의 외교적 문제 였음을 말해준다. 조선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역서의 변화를 자발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발적 변화에는 일종의 자기검열 의 기제가 작용하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스스로 자기검열을 수행해야 할 만큼 황제국 중국 대( 對 ) 제후 국 조선이라는 구도가 강력한 규정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33) 대통력은 효종 4년(1653)까지 사용되었고, 효종 5년(1654) 역서부터 시헌력이 사용되 었다. 그러다가 다시 현종( 顯 宗 ) 8년(1667) 정미년( 丁 未 年 ) 역서에서부터 3년간 대통력 을 다시 사용하다가 현종 11년(1670) 경술년( 庚 戌 年 ) 역서에서부터는 다시 시헌력을 사 용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용훈, 조선후기 서양천문학과 전통천문학의 갈등과 융 화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4), 18-22쪽; 이기원, 안영숙, 임영란, 민병희, 한국에서 대통력 사용 시기에 관한 연구, 한국우주과학회보 제18권 2호 (2009)를 참고할 것. 34) 건륭제의 즉위 이후 황제의 이름이 홍력( 弘 曆 )이기에 피휘( 避 諱 )하여 다음해인 영조 12년(1736) 역서의 이름을 시헌력( 時 憲 曆 )에서 시헌서( 時 憲 書 )로 바꾸도록 하였다. 英 祖 實 錄 40권, 11년(1735, 乙 卯 ) 10월 19일조.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95 5. 조선 정부의 역법( 曆 法 ) 연구 목적 조선의 독자적인 역서 간행에 내재되어 있는 북경과 한양사이의 시공간 적 간격 이라는 기본적인 조건은 보다 근본적으로 조선이 국초부터 독자적 인 역서를 간행하고 역법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구체적으 로 말해서, 조선에서 역일( 曆 日 )을 계산하여 책력( 冊 曆 )을 별도로 인출하여 사용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조선으로 보내준 역서의 부수가 조선쪽 의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부수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미 태조 때부터 명나라로부터 대통력을 받아왔다. 35) 이후 태종 은 즉위하자마자 명나라에다 사신을 보내서 고명( 誥 命 )과 인신( 印 信 ), 책력 ( 冊 曆 )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명나라에서는 이후 매년 조선의 사 신 편으로 대통력을 보내왔다. 36) 명나라에서는 역서를 나누어주는 의식( 頒 曆 日 儀 )을 공식적으로 매년 10월 초1일 거행하였다. 중국의 조정에서 역서 를 나누어주는 의식에 대한 규정은 홍무( 洪 武 ) 26년(1393)에 마련되어 대 명회전( 大 明 會 典 ) 에도 수록되었다. 37) 여기에 따르면, 황제는 이날 자금성 의 봉천전( 奉 天 殿 ) 38) 에 마련된 어좌에 앉아서 흠천감에서 편찬하여 올린 다 음해 역서를 문무백관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보내는 역서의 부수는 원칙적으로 101부였 다. 39) 중국에서 내려준 101부의 역서 중에서 한 부는 대황력( 大 皇 曆 )이라고 35) 太 祖 實 錄 15권, 7년(1398, 戊 寅 ), 12월 22일조. 명나라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어서 명 태조 주원장의 부음을 알리고 다음해의 연호를 건문( 建 文 )으로 정하고 건문 1년의 역서 한 부를 조선에 보내주었다. 36) 太 宗 實 錄 1권, 1년(1401, 辛 巳 ) 2월 6일조. 명나라에서는 건문 3년의 대통력 1권을 보내주었다. 37) 大 明 會 典, 103권, 曆 日. 애초 역서를 나누어주는 의식은 9월 삭일에 거행하였으나, 가정( 嘉 靖 ) 9년부터 10월 삭일로 바꾸어 거행하였다.( 曆 日, 國 家 治 曆 明 時 以 賜 百 官 頒 行 天 下 屬 欽 天 監 官 推 算 而 事 隸 於 祠 部 每 歲 二 月 朔 欽 天 監 奏 進 明 年 曆 式 預 行 各 布 政 司 刊 布 例 以 九 月 朔 進 呈 頒 賜 嘉 靖 十 九 年 改 用 十 月 朔, 洪 武 二 十 六 年 定 進 頒 曆 日 儀. ) 38) 현재 자금성의 황극전( 皇 極 殿 )에 해당한다. 39) 太 宗 實 錄 에 따르면, 초기에는 명나라에서 대통력을 1부 보낸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 4년에는 100부를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태종 4년 3월 27일조.) 그리고 太 宗 實 錄 9권, 5년(1405, 乙 酉 ) 3월 27일자에 따르면, 명나라는 영락( 永 樂 ) 3년 대통력 을 100부 보내면서 그 중 1부를 황색 비단으로 표지를 입혀서 조선 국왕에게 반사하였 다. ( 今 頒 永 樂 三 年 大 統 曆 日 一 百 本 內, 黃 綾 面 一 本. ) 그러다가 태종 8년(1408) 이후부터 명나라에서 반사해주는 역서의 숫자가 101부로 바

96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하여 큰 판본의 역서였는데, 이것은 조선의 왕에게 특별히 내리는 어람본( 御 覽 本 )이었다. 나머지 소황력( 小 皇 曆 ) 100부는 조선의 여러 관서에서 사용하 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황력( 皇 曆 )을 받아와서 나누어주는 일에 대해서는 고 종 7년(1870)에 간행된 승정원의 규정집인 은대조례( 銀 臺 條 例 ) 에도 자세 히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재자관( 賫 咨 官 )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역서 101권을 받아 12월 안으로 돌아와 조정에 납입한다. 그 중 어 람건( 御 覽 件 )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붙인 국왕표지 를 없앤 이후에 입계하 고 나머지는 시임대신( 時 任 大 臣 ), 원임대신( 原 任 大 臣 ), 국구( 國 舅 ), 종친( 宗 親 ), 의빈( 儀 賓 )과 정부의 육조판서( 六 曹 判 書 ), 장군( 將 軍 ), 양사( 兩 司 )의 장 관( 長 官 ), 승지( 承 旨 )와 사관( 史 官 ), 각신( 閣 臣 ) 등 경향 각지의 관사( 官 司 ) 와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40) 문제는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내려 보내준 101부는 조선의 역서수요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부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에서는 국내 에서 발생하는 역서의 수요를 충당하려면 자체적으로 역계산을 하여서 별도 로 역서를 인출해서 배포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 별도로 역계 산을 수행하지 않고 중국에서 받아온 명나라의 역서를 그대로 베끼거나 번 각( 飜 刻 )하여 인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사신이 명나라로부터 돌아오고 난 뒤, 즉 새해가 시작되고 한참 후에나 역서의 인출과 배포가 이 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는 자신들의 수요에 맞추어서 역서 를 사용하려면, 역일계산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위해 그것의 바탕이 되는 역법을 공부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은 역법 연구를 토대 로 다음해의 역일 등을 미리 계산하여 역서를 자체적으로 대량 인출하여 배 포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조선 초기부터 역서를 계산하여 그 뀌었다. 즉, 이 해부터 소황력 100부와 황색 비단으로 표지를 입힌 대황력 1부를 합친 101부를 보낸 것이다.( 太 宗 實 錄 15권, 8년(1408, 永 樂 6년) 2월 7일, 永 樂 六 年 大 統 曆 日 一 百 本 黃 綾 面 一 本. ) 중국에서 조선에 반사하는 역서의 숫자가 정확히 어떻게 변화 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40) 銀 臺 條 例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청구기호 奎 5046), 皇 曆, 䝴 咨 官 進 北 京, 受 百 一 卷, 十 二 月 內 領 納 御 覽 件, 去 國 王 標 紙 入 啓, 餘 頒 給 于 時 原 任 大 臣, 國 舅, 宗 親, 儀 賓, 政 府 東 西 壁, 六 曹 判 書, 時 原 任 將 臣, 兩 司 長 官, 承 史 時 任 閣 臣, 儒 臣, 京 各 司 八 道 四 都, 及 幼 使 所 經 邑 外 道, 成 送 有 旨.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97 결과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처벌하는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흥미로 운 사실은 조선에서 행한 역계산의 정확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기본 적으로 명나라에서 받아온 중국 역서에 기재된 역일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에 역서에 필요한 역일 계산을 잘못한 서운관 관료에게 처벌을 가하는 내용은 태종( 太 宗 ) 10년(1410)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해에 서운관승( 書 雲 觀 丞 ) 유당생( 柳 塘 生 )이 역일계산을 하면서 12월의 삭일( 朔 日 )을 갑자( 甲 子 )일로 잡았는데, 중국에서 받아온 대통력에는 계해( 癸 亥 )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41) 이 일로 유당생은 영주로 귀양이 보내진다. 태종 17년(1417) 12월 27일에도 명나라에서 받아온 (중국의) 대통력으로 본조( 本 朝 )의 책력을 비 교하니 틀린 곳이 있었기 때문에 서운관 부정( 副 正 )을 의금부에 가두는 일 이 있었다. 42) 이처럼 명나라에서 받아온 역서와 조선의 역서가 역일 계산에 서부터 계속 차이가 나자 마침내 세종( 世 宗 ) 2년( 庚 子 年, 1420)에 성산군( 星 山 君 ) 이직( 李 稷 )이 역법의 교정을 건의하면서 본격적인 역법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43) 이후 십 여 년에 걸친 역법 연구의 결과 세종 14년(1432) 경에 이르러서 야 역법 계산에서 오차가 적어지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44) 특히 이 해에는 정인지( 鄭 麟 趾 ), 정흠지( 鄭 欽 之 ), 정초( 鄭 招 ) 등에 의해 대통력법통궤( 大 統 曆 法 通 軌 ), 태양통궤( 太 陽 通 軌 ), 태음통궤( 太 陰 通 軌 ) 등의 서적들이 수집되고 연구되었다. 그리고 세종 26년(1444)에 이르러 이순지( 李 純 之 )와 김담( 金 淡 )에 의해 칠정산내편( 七 政 算 內 篇 ) 과 칠정산외편( 七 政 算 外 篇 ) 이 편찬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세종 14년에 역법 계산의 오차가 없어지자 세 종이 이후로는 일식( 日 食 )과 월식( 月 食 ), 절기( 節 氣 )의 일정함이 중국에서 반포한 역서와 비교할 때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으니, 내 매우 기뻐하였다 고 말하였다는 사실이다. 45) 즉 세종에게 역법연구의 기본적인 목표는 중국에 41) 太 祖 實 錄 19권, 10년(1410, 庚 寅 ) 4월 6일조. 42) 太 宗 實 錄 34권, 17년(1417, 丁 酉 ) 12월 27일조. 43) 世 宗 實 錄 51권, 13년(1431, 辛 亥 ) 3월 2일조. 44) 세종 즉위 초기에 성산군 이직의 역법교정 건의가 이루어지고 이후 수시력의 계산법 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한영호 이은희, 麗 末 鮮 初 本 國 曆 완성의 道 程, 동방학지 155권 (2011), 47-55쪽을 참고할 것. 45) 世 宗 實 錄 58권, 14년(1432, 壬 子 ) 10월 30일조, 上 曰, 曆 算 之 法, 自 古 帝 王 莫 不 重 之. 前 此 我 國 未 精 推 步 之 法, 自 立 曆 法 校 正 以 後, 日 月 之 食, 節 氣 之 定, 較 之 中 朝 頒 曆, 毫 釐 不 差, 予 甚 喜 之.

98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서 반포한 역서와 비교해서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는 역서를 간행하는 일 이 었던 셈이다. 하지만 칠정산이 완성되고 난 뒤에도 조선에서 이루어진 역일계산의 결과 는 중국에서 간행한 역서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세종 30년 (1448) 1월 12일 명나라에서 가져온 역서가 도착한 이후 서운관( 書 雲 觀 )에 서는 아래와 같은 주청을 올린다. 지금 무진년( 戊 辰 年 )의 정월( 正 月 )과 10월의 상현( 上 弦 )이 명나라 역서에서는 초8 일이고, 본국의 역서에서는 초7일로 되었는데, 명나라 역서는 통궤( 通 軌 )의 해뜨 는 시각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본국의 역서는 내편( 內 篇 )의 해뜨는 시각을 기준 으로 한 것이오니, 명하시어 다시 미루어 계산하도록 하옵소서 라고 하였다. 46) 서운관의 관리들은 조선의 역계산 결과와 명나라의 역계산 결과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계산에서 사용되는 수치테이블의 상수( 常 數 )들이 다르기 때문 에 발생한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계산과정의 잘못이 아니라 어떤 상수값들을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기사에 서 나타나듯이 명나라 역서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지적되고, 다 시 계산하라 라는 명령을 내릴 것을 주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중국과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똑같은 계산방법을 사용하여 역일을 계산하였다면, 중국의 수도인 북경과 한양의 경위도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삭망일( 朔 望 日 ), 절일( 節 日 ) 등의 결과에서 조선 측의 계산결과와 중 국 측의 계산결과가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동 일한 역계산법을 사용할 경우 중국과 조선 측의 계산과정이 모두 정확하게 이루어졌다면 그 차이는 원칙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차이 인 셈이다. 하지만 계산 결과의 차이가 중국 측이나 조선 측에서 수행한 계산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북경, 혹은 남경( 南 京 )과 한양의 경위도 차이로 인해 정확한 계산을 수행하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차이 인지 를 당시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47) 46) 世 宗 實 錄 119권, 30년(1448, 戊 辰 ) 1월 12일조, 書 雲 觀 啓, 今 戊 辰 年 正 月 十 月 上 弦, 大 明 曆 在 初 八 日, 本 國 曆 初 七 日. 大 明 用 通 軌 日 出 分, 本 國 用 內 篇 日 出 分. 命 更 令 推 算. 47) 명나라는 건국( 洪 武 1년, 1368) 이후부터 영락제( 永 樂 帝 )가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 永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99 필자가 짐작하기에는 아마도 당시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계산결과에서 차 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중국의 역서와 외면상 똑같은 계산의 수치가 적혀야 한다는 강력한 원칙이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에게 있어서 역법 계산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역서에 기재되는 역일과 절기 등이 중국의 역서와 외 면적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원칙이 앞서 설명한 계산결과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에 도달 하도록 하는 데에 방해의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면적 일치에 대한 집착은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조선 의 천문학자들이 북경과 한양에서 이루어진 역계산의 과정이 모두 정확할 경우에도 그 결과에서는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음 을 인식한 이후에도 계 속되었다. 물론 18세기 정조대에 들어서면 영조대 이전과 달리 월( 月 )의 대소( 大 小 ), 절기의 입기시각( 入 氣 時 刻 ), 입기일( 入 氣 日 )을 비롯하여 일월식의 계산 결 과가 중국 측과 하루, 혹은 그 이내의 수치 정도 차이가 날 경우에 조선 측 의 계산을 신뢰하면서 그대로 역서에다 반영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 한다. 48) 하지만 그와 같은 계산 결과의 차이가 절일( 節 日 )의 기준점이 특정 樂 元 年, 1403)하기 이전까지 수도를 남경에 두었다. 이 시기를 제외하면 중국의 수도는 원대( 元 代 ) 이후 줄곧 북경이었다. 명나라는 수도가 남경이었을 때에는 대통력법통궤( 大 統 曆 法 通 軌 ) 에 의거하여 남경 을 기준으로 역일( 曆 日 )과 일출입, 일월식을 계산하고 그에 의거하여 역서를 간행하였다. 이후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역일과 일출입에 대한 계산은 여전히 남경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수행한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藪 內 淸 저, 兪 景 老 편역, 中 國 의 天 文 學 ( 電 波 科 學 社, 1985), 167쪽 ; 이은희, 한영호, 조선 초 간행의 교식가령 ( 交 食 假 令 )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3권 1호 (2012), 38쪽의 각주 13을 참고할 것. 이에 비해 수시력( 授 時 曆 )과 대통력( 대통력법통궤 의 방법에 의거)에서 일월식 등을 계산할 때에는 기준 지점의 경도( 經 度 )가 주요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에 북경과 남경을 기 준점으로 계산 결과들이 서로 크게 차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대의 대통력법에서는 원칙적으로 원대 수시력에서 북경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천문 상수들을 사용하고 있었기 에 계산 결과에서 미세한 오차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당시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으 로부터 도입한 역법에서는 모두 정삭( 定 朔 )과 정망( 定 望 ) 등의 계산에서 오차를 포함하 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오차는 원칙적으로 명나라의 학자들과 조선의 학자들이 북경과 남경의 경도 차이를 보정하지 않은 채 계산을 수행하 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학자들은 이런 점들을 정확히 인식하지 는 못하였던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은희, 한영호, 같은 논문, 58-62쪽을 참고할 것.

10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한 달의 시작과 끝부분에 걸쳐있어서 달의 대소와 윤달의 위치가 중국 역서 의 그것과 확실히 달라지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면,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자신들의 계산 결과를 끝까지 고집할 수는 없었다. 49) 이는 역일의 차이로 인해 중국 측과의 외교적 공문이 오고갈 때에 혼동되거나 혹은 마찰이 일어 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18세기 후반 이후 조 선 천문학자들의 역법 계산의 능력이 수준급에 달하였음에도, 그와 같은 계 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의 크기는 조선의 역서가 중국 역서와 심한 외면적 차이를 갖게 하는 것을 용인할 정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6. 결론 조선의 역서 간행과 관련된 질문들을 던져보자. 만약 조선에서 로컬사이 언스(Local Science) 가 가능하였고 또 존재하였다면, 그 대표적인 분야였던 역법연구, 혹은 역( 曆 )계산은 어떠한 조건과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일 까? 애초 조선에서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종과 과학자들은 왜 칠정산( 七 政 算 )을 편찬하고 역법을 연구하였는가? 조 선지역의 경위도( 經 緯 度 )에 맞추어진 정확한 역서를 만드는 것이 애초의 목 적이었는가? 필자가 생각하기로, 뒷부분의 두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는 최소한 북경과 한양의 경위도가 다르기 때문에, 혹은 중국에서 반포한 역서는 북 경을 기준으로 한 역법을 토대로 하였기에 경위도가 다른 조선에서는 그대 48) 일례로 정조 21년(1797)의 조선 역서가 그것이다. 당시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중국 측 의 계산결과와 조선 측의 계산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조 21년(1797)의 역서에는 조선 측의 계산 결과를 반영하여 간행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용훈, 앞 논문, 46-47쪽을 참고할 것. 49)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자신들의 계산 결과를 신뢰하여 조선의 역서에 반영하기 시작하 는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 본격화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항상 자신들의 계산 결과를 역 서에다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중국 측의 계산결과와 다를 경우 자신들의 계산 결 과를 신뢰하여 반영하는 한계는 달의 대소, 입기시각, 입기일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그 차이가 한 달의 차이, 혹은 윤달의 위치의 차이 등의 수준으로까지 커질 경우 에는 중국 측의 계산 결과를 그대로 준용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용훈, 같은 논문, 41-48쪽, 본 국력의 시행과 한계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어 참고가 된다.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101 로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 이라고만 말할 수 없을 듯하다. 그보다는, 한양 이 비록 북경과 경위도가 다른 지역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중국과 동일한 역 서를 대체적으로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이 상황을 보다 정확히 설명하는 말일 듯하다. 이 점은 역법 계산 능력이 부족하였던 조선 초기에는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며, 역법 계산 능력이 충분히 갖춰 지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다시 말해, 조선 이 독자적으로 역서를 만든 주된 동기와 이유는 자주성에 대한 강한 의식 이라든지, 혹은 독자적 역법에 대한 욕구 나 지적인 호기심, 나아가 유교 적 왕도정치( 王 道 政 治 )의 이념에 의거하여 왕천하자( 王 天 下 者 )로서의 위엄 을 갖추고자 하는 욕구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조선이 역서를 독자적으 로 간행할 수밖에 없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서 에 대한 광범위한 자 체적 수요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중국에서 내려주는 역서의 숫자가 턱없이 적었기에 조선은 역서를 자체적으로 인출하 여 배포해야만 했던 것이며, 이를 위해 역계산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와서 번각하여 그대로 사 용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역서를 인출해서 배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 경과 한양사이의 시공간적 거리 가 크나큰 물리적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선의 학자들은 역계산을 수행하여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면 서 중국 역서의 내용과 차이가 없는 역서를 만들려고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도 역법계산의 능력을 온전하게 갖추게 되면서부터는 이런 차이가 본질 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자적 계산능력의 발달에 따른 이러한 인식은 조선의 역서가 중국의 역서와 합치되어야 한다 는 관념과 황제국인 중국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자기검 열 의 장벽을 쉽게 뛰어 넘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독자적 계산능력을 확보 하고자 한 당초의 목적이 중국 역서와 합치하는 역서를 만들기 위함이었지, 중국보다 뛰어난 역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선에서 독자적인 역서가 필요하게 된 일차 적인 이유는 역법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조선에서 로컬사이언스 가 존재했 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역서에 대한 실제적인 수

102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요, 다시 말해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을 투여함으로써 비로소 충족시킬 수 있는 역서에 대한 커다란 수요 자체였다. 그리고 그러한 수요를 충족하는 작 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국 측의 역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에는 한양과 북경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때문에 조선은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할 수밖에 없었고, 역서의 독자적인 간행을 위하여 역법 연구를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북경과 한양 사이의 시공간적인 거리가 조선시대의 역서 간행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건들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에, 조선 정부의 역서 간행 과정에는 제후국으로서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해서는 안된다 는 원칙론에 따른 자기검열 의식과 실제로 역서를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나눠주어야만 한다 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함께 충돌하면서 상존하였던 것이다.

Calendar Publication and Local Science in Joseon Korea PARK Kwon Soo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calendars published in the Joseon period, focusing mainly on the changes in their outward form. The significant changes in the outward forms of Joseon calendars were made twice during about five hundred years of the dynasty. The first change was made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second after the Manchurian invasion in 1637. While examining the causes of the changes, I investigate the material aspects and the basic conditions of the autonomous calendar-publishing by Joseon government. With this examination, I argue that the changes in the outward forms of Joseon calendars were not caused by the developments of calendar calculation method, but caused by the changes in the tributary system that regulated the relation between 'China as a Empire' and 'Joseon as a Feudal State'. I also argue that if the local science of calendar calculation system had existed in Joseon, the most essential condition that enabled it was the practical demand for calendars that could be met by investing vast resources. In addition, in the process of satisfying such demand, the distance between Seoul and Beijing was too far just to wait for the arrival of Chinese calendars. Joseon government had no choice but to study the calendar calculation method independently for autonomous calendar publication. Key words. Joseon calendar, Calendar publication, Calculation system, Local Science, Joseon dynasty, Chinese calendar, Tributary 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