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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3號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을 주목하여 서술하였다. 우선 정도전은 ꡔ주례ꡕ에서 정치의 공공성 측면을 주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국가, 정치, 권력과 같은 것이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표방하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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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佛敎學報 第 48 輯 서도 이 목적을 준수하였다. 즉 석문의범 에는 승가의 일상의례 보다는 각종의 재 의식에 역점을 두었다. 재의식은 승가와 재가가 함께 호흡하는 공동의 場이므로 포 교와 대중화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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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김영석** 69)70) 목차 Ⅰ. 머리말 Ⅱ. 禁府單獨推鞫과 國王主宰推鞫 Ⅲ. 推鞫의 의미 변화 1. 推鞫의 原義 2.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국문 절차 로의 변화 3. 국왕주재추국으로의 변화 Ⅳ. 國王主宰推鞫의 종류 Ⅴ. 맺음말 [국문 요약] 의금부는 조선시대에 官員의 범죄와 반역죄, 綱常罪 등을 재판한 주요 형사사법기관이었 다. 의금부에서는 이러한 범죄들을 推鞫이라는 절차로써 다스렸다. 종래 추국의 종류에 관한 오해가 있어 왔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오해를 입증하며, 이를 바로잡고 나아가 의금부 사법 절차로서의 추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禁府單獨推鞫 國王主宰推鞫 三省交坐推鞫이 라는 용어로써 의금부의 사법절차를 분류할 것을 제안한다. 조선시대 추국의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公的인 신문 절차를 모두 추국이라 칭하였으나, 光海君代~仁祖代 이후로는 공적 국문 절차 중에서도 임금이 직접 통 제하는 절차만을 추국이라 하였으며, 肅宗代 내옥 혁파 후로는 의금부에서의 신문 절차만을 추국이라고 하였다. 특히 단순히 추국 또는 본부추국 이라고만 하면 국왕주재추국을 의미하 고, 금부단독추국은 獨爲 나 只 등을 덧붙이다가 拿鞫 이라는 용어로 대치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별개의 절차인 금부단독추국과 국왕주재추국을 혼동하였는데, 이는 위 * 이 글은 拙稿, 義禁府의 조직과 추국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위논문, 2013)의 일부분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daehangugin@naver.com

34 法史學硏究 第48號 와 같은 추국의 의미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절차는 담당한 사 건과 참여관원 등에서 크게 다른 절차이므로 반드시 구별하여야 하며, 이들의 구별은 의금부 의 사법절차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하겠다. 한편 국왕주재추국은 다시 親臨推鞫 闕庭推鞫 禁府推鞫으로 분류할 수 있다. [주제어] 의금부, 推鞫, 禁府單獨推鞫, 國王主宰推鞫, 三省交坐推鞫, 拿鞫 Ⅰ. 머리말 의금부는 조선시대에 官員의 범죄와 반역죄, 綱常罪 등을 재판한 주요 형사 사법기관이었다.1) 의금부에서는 이러한 범죄들을 推鞫이라는 절차로써 다스렸 다. 의금부에서 재판한 범죄는 사회의 유지와 직접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것들 이므로, 의금부의 사법절차인 추국에 관하여 아는 것은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수적이라 하겠으며, 사회상의 파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종래 의금부 추국의 종류에 관한 오해가 있어서 추국의 올바른 이해에 장애가 되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오해의 존재를 입증하고 나 아가 이를 바로잡는 것이다. 종래의 오해가 어떠한 것인지를 논하기 위하여, 연구자가 추국을 어떻게 분 류하는지를 여기서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다. 연구자는 의금부의 사법절차인 推鞫을 禁府單獨推鞫 國王主宰推鞫 三省交坐推鞫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본 다. 조선시대에 의금부에서 주관한 신문절차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사용한 것 에는 親鞫 庭鞫 推鞫 三省推鞫 拿鞫이 있을 뿐이며, 금부단독추국이나 국 왕주재추국이란 용어는 기존 연구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예가 없다. 다 만 三省交坐推鞫 은 절차의 정식 명칭은 아니나 연대기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표현이다.2) 연구자는 다른 관청의 관원이 참여하지 않고 의금부의 구성원들만 1) 李相寔, 義禁府考, 法史學硏究 제4호(韓國法史學會, 1977); 吳甲均, 朝鮮時代司法制度 硏究 (三英社, 1995); 拙稿, 義禁府의 조직과 추국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위 논문, 2013).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35 으로 진행하는 추국을 금부단독추국, 임금이 직접 국문하거나 委 官 을 포함한 전 현직 정승들이 승지 대간 및 의금부 당상관들과 합동으로 국문하는 추국 을 국왕주재추국 으로 부르고자 한다. 용어 사용에 통일성을 기하기 위하여, 三 省 이 의금부에서 의금부 당상관들과 자리를 함께 한[ 交 坐 ] 삼성추국을 삼성 교좌추국 으로 부르고자 한다. 국왕주재추국은 다시 親 鞫 庭 鞫 推 鞫 으로 나 뉘는데, 추국의 여러 종류 중 하나인 국왕주재추국에 추국이 속한다고 하면 용 어상의 혼란이 있게 되므로, 본 연구에서는 국왕주재추국의 하위분류를 親 臨 推 鞫 闕 庭 推 鞫 禁 府 推 鞫 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이들 세 용어는 연대기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3) 금부단독추국은 관원의 범죄를 다스리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절차이고, 국왕 주재추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큰 범죄로 인식된 반역 사건을 재판한 가장 중한 절차이며, 삼성교좌추국은 반역 사건에 준하는 관심을 받은 강상범죄를 주로 담당한, 국왕주재추국에 버금가는 중한 절차이다. 4) 금부단독추국과 국왕 주재추국은 이와 같이 다루는 범죄의 종류가 본질적으로 다르고, 범죄의 輕 重 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절차의 진행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특 히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참여인원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국왕주재추국 은 의금부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전반적인 절차를 주관하거나, 최소한 절차의 진행을 승정원과 함께 담당하고 照 律 만은 단독으로 하는 등 의금부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임금이 직접 국문의 주체가 되거나 의금부 외에 전 현직 정승들과 승지 대간이 절차에 참여하였으므로, 의금부의 구성원들만으로 진 행하는 금부단독추국과는 격이 달랐다. 종래의 오해란 바로 확연히 다른 이들 두 절차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2) 成 宗 實 錄 성종 20년(1489) 5월 8일1; 中 宗 實 錄 중종 21년(1526) 7월 24일1; 明 宗 實 錄 명종 12년(1557) 5월 22일3; 宣 祖 實 錄 선조 22년(1589) 9월 12일1; 光 海 君 日 記 광해군 7년(1615) 8월 6일1; 承 政 院 日 記 인조 3년(1625) 7월 24일3; 효종 6년(1655) 1월 18일5 등. 3) Ⅳ. 國 王 主 宰 推 鞫 의 종류 참조. 4) 금부단독추국 국왕주재추국 삼성교좌추국의 담당 사건과 참여인원 등에 관하여는 拙 稿, 위 논문, 제2부 참조.

36 法 史 學 硏 究 第 48 號 의금부의 사법절차인 추국을 다룬 기존의 연구로는 李 相 寔 吳 甲 均 田 中 俊 光 金 鎭 玉 金 友 哲 의 연구를 들 수 있다. 李 相 寔 5)과 吳 甲 均 6)의 연구는 사법 절차뿐 아니라 의금부의 전반적인 모습을 대상으로 한 데 비하여, 田 中 俊 光 은 詔 獄 을 다스리는 절차 本 稿 에서 국왕주재추국 으로 칭하는 것 에 관하여 그 전체적인 진행 과정을 살펴보았고, 7) 金 鎭 玉 은 금부단독추국의 약한 형태로 보 이는 禁 推 에 관하여 의미 연혁 대상범죄 목적 등을 구체적으로 고찰하였 으며, 8) 金 友 哲 의 연구는 추국의 세부절차인 結 案 에 초점을 맞추었다. 9) 기존의 연구 중에서 의금부 사법절차 전반에 관하여 언급한 것은 李 相 寔 의 연구와 吳 甲 均 의 연구로, 추국의 종류에 관한 오해도 이 두 연구에서 발견된다. 李 相 寔 은 추국 이라는 하나의 용어로써 의금부의 모든 사법절차들을 뭉뚱그렸 기 때문에, 각 절차 사이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10) 한편 吳 甲 均 은 宮 廷 재판인 親 鞫 과 庭 鞫 그리고 義 禁 府 裁 判 인 推 鞫 및 三 省 推 鞫 11) 이라고 하 거나, 추국의 형식과 절차는 의금부가 성립되면서 개시되었고 친국과 정국이 의금부에서 발전한 格 上 된 재판형식이라면, 推 鞫 은 의금부의 본래적 재판형식 인 것 12) 이라고 하여, 의금부의 사법절차를 친국 정국 추국 삼성추국의 넷 으로 나누고 이 중 추국과 삼성추국을 의금부의 고유한 절차인 것으로 파악하 였다. 친림추국 궐정추국과 더불어 국왕주재추국의 한 형태인 금부추국을 義 禁 府 裁 判 13) 인 금부단독추국과 혼동한 것인데, 나아가 국왕주재추국을 위하여 설치한 鞫 廳 이 의금부 내의 기관으로서 의금부 운영의 한 형태였던 것으로 파 악하였다. 14) 5) 李 相 寔, 앞의 글. 6) 吳 甲 均, 앞의 책. 7) 田 中 俊 光, 新 昌 令 推 斷 日 記 를 통하여 본 中 宗 代 謀 逆 事 件 의 發 生 背 景 과 詔 獄 節 次 의 實 態, 法 史 學 硏 究 제41호( 韓 國 法 史 學 會, 2010). 8) 金 鎭 玉, 禁 推 의 성격과 특징, 民 族 文 化 第 36 輯 (한국고전번역원, 2010). 9) 金 友 哲, 조선후기 推 鞫 운영 및 結 案 의 변화, 民 族 文 化 第 35 輯 (한국고전번역원, 2010). 10) 李 相 寔, 위 논문, 33~37면. 11) 吳 甲 均, 앞의 책, 48면. 12) 吳 甲 均, 앞의 책, 52면. 13) 각주 11 참조.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37 추국의 종류에 관한 종래의 오해는 史料에서 推鞫 이라는 단일한 용어가 여 러 가지 의미를 가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구자는 추국의 의미가 시간이 흐름 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간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추국의 의미가 여럿임을 입증하고, 의금부 사법절차로서의 추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추국의 새로운 분류를 제안한다. Ⅱ에서는 추국이 둘 이상의 의미 를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를 들어서 이를 증명한다. Ⅲ에서는 추국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추국 의 의미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Ⅳ에서는 추가적으로 국 왕주재추국의 하위분류를 제시한다. Ⅴ에서는 논의를 정리하고 본 연구의 목적 을 재확인한다. Ⅱ. 禁府單獨推鞫과 國王主宰推鞫 조선시대 사료에서 추국의 의미는 여러 가지이다. 따라서 똑같이 推鞫 이라 되어 있어도 각각 다른 절차를 의미할 수 있다. 아래의 법전규정 및 실록기사 는 추국의 의미가 여러 가지였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추국용 신장은 너비 9푼[약 2.3 ]에 두께 4푼[약 1.0 ]이고, 삼성교좌추국용 신 장은 너비 8푼[약 2.0 ]에 두께 3푼[약 7.6 ]이며, 의금부의 신장은 너비 7푼[약 1.8 ]에 두께 2푼[약 5 ]이다.15) 육전조례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綱常에 관한 중대한 사건을 의금부에서만 추국할 수는 없으니, 삼성교좌추국을 함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라고 하 14) 吳甲均, 위의 책, 43~44면 53~54면. 15) 六典條例 <刑典> [義禁府/鞫] : 推鞫訊杖 廣九分 厚四分 三省訊杖 廣八分 厚三分 本府訊杖 廣七分 厚二分.

38 法史學硏究 第48號 였다.16) 1601년(선조)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위 역적들은 선왕의 대에 죄목이 극히 무거웠으니, 의금 부에서 추국함은 사안의 체면상 중하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삼성교좌추국으로 철저히 신문함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라고 하였다.17) 1616년(광해군)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정해를 의금부에서 단독으로 추국하긴 곤란할 것 같으 니, 삼성교좌추국으로 철저히 신문하여 처치함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라고 하였다.18) 1643년(인조) 의 추국용 신장과 삼성교좌추국용 신장에 관해서는 속대전 에 같은 내 용의 규정이 있는데,19) 육전조례 에는 의금부 신장의 규격이 추가되었으므 로 이를 인용한다. 에 따르면 추국은 삼성교좌추국보다 더 중하게 다스리는 절차이다. 한편 ~ 에 따르면 의금부에서 단독으로 추국하는 것보다는 삼성 교좌추국이 더 중하게 다스리는 절차이다.20) 의 추국과 ~ 의 추국을 동 16) 宣祖實錄 선조 34년(1601) 3월 4일② : 義禁府啓曰 : 綱常重獄, 不可只本府推鞫, 三 省交坐, 何如? 傳曰 : 允. 17) 光海君日記 광해군 8년(1616) 3월 10일① : 義禁府啓曰 : 右賊人等, 在先朝罪名極重, 自本府推鞫, 事體不重. 請三省交坐, 窮推何如? 傳曰 : 允. 18) 承政院日記 인조 21년(1643) 4월 7일④ : 義禁府啓曰, 李挺海, 本府似難獨爲推鞫, 三省交坐, 窮問處置, 何如? 傳曰, 允. 19) 續大典 <刑典> [推斷] : 凡推鞫訊杖 廣九分 厚四分 三省則廣八分 厚三分<用營造 尺>. 이 규격은 欽恤典則 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20) 이를 보여 주는 기사로는 이외에도 宣祖實錄 선조 26년(1593) 8월 1일⑥, 같은 해 10월 29일⑤, 선조 29년(1596) 6월 1일⑤, 선조 32년(1599) 5월 2일⑤, 선조 35년(1602) 11월 12일③, 선조 39년(1606) 10월 16일③, 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1608) 8월 7일①, 承政院日記 인조 9년(1631) 2월 25일⑤, 인조 10년(1632) 1월 21일⑧, 顯宗實錄 현종 원년(1660) 5 월 27일②, 承政院日記 현종 원년(1660) 5월 28일⑥( 顯宗實錄 기사와 같은 사건에 관한 것임) 등이 있다. 推鞫 이란 용어를 쓰지는 않았으나 의금부에서 단독으로 신문하는 절차가 삼성교좌추국보다 덜 엄한 절차임을 보여 주는 기사로는 中宗實錄 중종 20년 (1525) 3월 20일⑨, 明宗實錄 명종 2년(1547) 11월 30일②, 宣祖實錄 선조 35년(1602)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39 일한 것으로 보면, 추국은 삼성교좌추국보다 중하고 삼성교좌추국은 추국보다 중하다는 기이한 결론이 도출된다. 가만으로도 문제는 있다. 즉 추국용 신장과 의금부의 신장이 별개로 존재하므로, 의금부에서 추국할 때에는 과연 어느 신 장을 사용하는 것인가 또는 의금부의 신장은 추국 아닌 다른 용도에 사용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가와 나~라를 서로 모순되지 않게 해석하고 가 자체에서 발생되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추국 이라는 단일한 용어가 둘 이상의 의미로 쓰였음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연구자가 의금부 사법절차의 분류를 위하여 금부단독추국과 국왕주재추국 이란 명칭을 새로 만드는 것은 추국이 의미하는 각각 다른 절차를 구별하기 위 한 수단이다. 별개의 절차가 여러 사료에 推 鞫 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기록되 어 있는 것이 기존의 연구에서 추국의 종류를 오해하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하 기 때문에, 각각의 절차에 각각의 명칭을 붙이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에 없던 명칭을 만들면서까지 의금부 사법절차를 새롭게 분류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위 가~라의 사료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의금부 사법절차의 새로운 분류를 통하여 별개의 절차들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이 의금부의 사 법절차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가~라는 사료에서 추국이 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에 불과하므로, 이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사료, 특히 연대기 자료에서 추국이 가지는 의미는 금부단독추국과 국왕주 재추국 외에 더 많다. 그러나 의금부의 사법절차와 관련해서는 금부단독추국과 국왕주재추국 및 국왕주재추국의 하위분류에 속하는 금부추국뿐이다. 따라서 이들 명칭에 의한 분류만으로도 충분하다. 위의 예에서 가의 추국은 국왕주재 추국이고 나~라의 추국은 금부단독추국이다. 12월 27일2, 光 海 君 日 記 광해군 6년(1614) 3월 12일2, 光 海 君 日 記 광해군 7년 (1615) 7월 7일2, 仁 祖 實 錄 인조 원년(1623) 9월 14일1 등이 있다.

40 法史學硏究 第48號 Ⅲ. 推鞫의 의미 변화 추국 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본래 推鞫은 보통명사로, 초기 에는 임금이 직접 피고인 등을 신문하거나 여러 관청에서 단독으로 또는 합동 으로 피고인 등을 신문하는 절차도 구별 없이 추국이라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로는 단순히 추국 이라고 하면 국왕주재추국만을 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 인다. 이에 반하여 금부단독추국임을 나타낼 때에는, 17세기에는 本府獨爲推 鞫 이나 只令禁府推鞫 과 같이 本府 의금부를 의미함 또는 禁府 를 반드 시 표시하는 외에 獨爲 나 只 또는 令 등을 덧붙이다가, 이후 拿鞫 이라는 용어로 대치하였으며, 의금부를 제외한 관청에서의 절차는 推考 나 推治 등 의 용어로써 나타내었다. 아래에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1. 推鞫의 原義 본래 推鞫은 보통명사로, 죄상을 다스림 21) 또는 (중죄인을) 잡아다가 국문 함 22)이 그 사전적 의미이다. 大明律에서는 단 1건의 용례를 찾을 수 있는데, 역시 보통명사로 보인다.23) 조선시대에도, 光海君代까지 推鞫은 보통명사로서 모든 公的 국문 절차를 구별 없이 가리키는 용어였다. 산원 최안종의 아내 중보가 남편의 사촌아우24) 김중명과 간통하고는 최안종을 목 졸라 죽였다. 사건이 발각되자 형조에서 추국하였는데, 김중명은 도망치고 중보는 교형에 21) 22) 23) 24) 李崇寧 監修, 뉴에이스國語辭典, 改訂版(金星敎科書株式會社, 1989), 1875면. 李家源 權五惇 任昌淳 監修, 東亞漢韓大辭典, 중판, (東亞出版社, 1989), 725면, 推 항목. 大明律 435(<刑律> 斷獄 [有司決囚等第]) : 若犯人反異 家屬稱寃 卽便推鞫. 원문에 表弟 인데, 고종사촌 외사촌 이종사촌을 통틀어 表兄弟 또는 表姉妹라고 하며, 중국식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현재도 이들을 각각 姑表兄弟姉妹 舅表兄弟姉妹 姨表兄 弟姉妹라고 한다.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처하였다.25) 41 1395년(태조) 안숭선이 아뢰기를, 의원을 구하였는데 얻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병조에서 (의원들 을) 추국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26) 1432년(세종) 임금이 내가 호조의 보고 및 대신의 의논으로 인하여, 충청도의 재해 조사에서 재 해를 입지 않은 논밭의 면적이 너무 좁게 조사되었다 하여 김득례를 의금부에 내려 추국 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27) 1435년(세종) 임금이 무릇 의금부 형조 사헌부에서 추국할 때에는 처자식이나 노비로서 가장을 위하여 上言하는 자가 많다. 라고 하였다.28) 1444년(세종) 왕세자가 미령하였는데, 호조참판 임원준이 명을 받들어 약에 관하여 논의하고서는 아뢰지도 않고 귀가해 버렸다. 즉시 임원준을 불러 승정원에서 추국하게 하였는데, 잠시 후 용서하라고 명하였다.29) 1463년(세조) 신창군 맹석흠이 와서 아뢰기를, 신의 집 북쪽 담 밖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사 람이 있습니다. 라고 하니, 한성부에서 추국하게 하였다.30) 1478년(성종) 25) 太祖實錄 태조 4년(1395) 12월 3일① : 散員崔安宗妻重寶奸其夫表弟金仲明, 縊殺安宗. 事覺, 刑曹推鞫, 仲明逃, 絞重寶. 26) 世宗實錄 세종 14년(1432) 2월 23일② : 崇善啓 : 求其醫而未得, 請令兵曹推鞫. 從之. 27) 世宗實錄 세종 17년(1435) 12월 17일① : 上曰 : 予因戶曹啓及大臣之議, 以忠淸道損實 過輕, 下金得禮于義禁府推鞫. 28) 世宗實錄 세종 26년(1444) 3월 14일② : 上曰 : 大抵義禁府 刑曹 司憲府推鞫之際, 或妻子或僕隷爲家長而上言者多矣. 29) 世祖實錄 세조 9년(1463) 9월 11일② : 王世子未寧, 戶曹參判任元濬承命議藥後, 不啓還 第. 卽召元濬, 令承政院推鞫, 尋命赦之. 30) 成宗實錄 성종 9년(1478) 4월 13일② : 新昌君孟碩欽來啓曰 : 臣家北墻外, 人有自縊死 者. 令漢城府推鞫.

42 法史學硏究 第48號 심회 등이 함께 아뢰기를, 여진족이 官敎를 위조한 사유를 예조에서 추국하게 하 십시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옳다. 라고 하였다.31) 1485년(성종) 사헌부의 죄인 김수석에게 刑具를 법대로 채우지 않았다 하여, 사간원에 사헌부 관 리들을 추국하라고 명하였다.32) 1489년(성종) 사헌부 대사헌 이세좌 등이 와서 아뢰기를, 이전에, 사헌부[本府]에서 총관 등을 추국하면서 私情을 개입시킨 바가 있다 하여 사유를 물으려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 다.33) 1493년(성종) 당시에 무녀 돌비가 國巫라 칭하고 宮掖에 출입하면서, 푸닥거리나 祈恩 등 안 하 는 짓이 없었다. 궁궐의 뭇 재물이 御衣까지도, 그의 집에 많이 들어갔다.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에서 추국하여 벌하니, 당시 사람들이 통쾌하다고 하였다.34) 1515년(중종) 형조와 좌 우포도청에서 죄인 복동은 승정원에서 아뢴 내용으로 인하여 형조와 좌 우포도청에서 함께 추국하였습니다. 라고 아뢰었다.35) 1618년(광해군) 조선 초기부터 의금부와 三法司인 형조 사헌부 한성부 및 포도청은 물론 이고 승정원과 병조에서도 추국을 할 수 있었으며, 특히 直囚衙門36)이 아닌 사 31) 成宗實錄 성종 16년(1485) 11월 15일⑤ : 沈澮等僉啓曰 : 野人官敎詐僞之由, 令禮曹推 鞫. 傳曰 : 可. 32) 成宗實錄 성종 20년(1489) 11월 1일② : 以司憲府罪人金水碩鎖械不如法, 命司諫院推鞫 司憲府官吏. 33) 成宗實錄 성종 24년(1493) 윤5월 1일② : 司憲府大司憲李世佐等來啓曰 : 前日, 以本府 推鞫摠管等有所用情, 欲問情由, 34) 中宗實錄 중종 10년(1515) 윤4월 18일② : 時, 巫女乭非, 稱國巫, 出入宮掖, 或禳災, 或祈 恩, 無所不爲. 凡宮禁財貨, 以至御衣, 多歸其家. 至是, 憲府推鞫罪之, 時人稱快. 35) 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1618) 12월 16일② : 刑曹 左右捕盜廳啓 : 罪人福同, 因政院 啓辭, 刑曹 左右捕盜廳, 眼同推鞫矣. 36) 범죄의 혐의를 받는 자를 형조로 이송하지 않고 직접 가둘 수 있는 直囚衙門으로는 經國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43 간원과 예조에서도 추국을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의금부37) 형 조38) 사헌부39)에서 추국을 행하였는데, 승정원40)에서 추국한 사례도 적지 않 다. 그러나 의금부 외의 관청에서 피고인 등을 신문하는 절차를 추국이라고 한 것은 光海君代까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에 관하여는 (1515년)가, 형조 에 관하여는 (1618년)가 각각 마지막 기록으로 보인다. 2.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국문 절차 로의 변화 위 1의 (1618년) 이후로 형조나 사헌부 등의 관청에서 신문하는 절차는 대 체로 推問 이나 推治 등의 용어로써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의금부 외에 추 국 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관청은 내수사가 유일하다.41) 그런데 내수사는 直囚 37) 38) 39) 40) 41) 大典 <刑典> [囚禁]에 규정된 병조 형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장예원 종부 시 관찰사 수령과 續大典 <刑典> [囚禁]에 규정된 備邊司 捕盜廳이 있었다. 世宗實錄 세종 31년(1449) 1월 6일①; 端宗實錄 단종 원년(1453) 4월 12일④; 世祖 實錄 세조 4년(1458) 8월 21일②; 成宗實錄 성종 8년(1477) 1월 24일⑤; 성종 24년(1493) 12월 7일④; 燕山君日記 연산군 10년(1504) 4월 1일③; 中宗實錄 중종 25년(1530) 6 월 12일①; 明宗實錄 명종 11년(1556) 1월 4일①; 宣祖實錄 선조 18년(1585) 4월 28일 ④; 선조 39년(1606) 7월 2일①; 光海君日記 광해군 6년(1614) 12월 20일① 등. 世宗實錄 세종 24년(1442) 5월 30일①; 端宗實錄 단종 원년(1453) 3월 29일②; 世 祖實錄 세조 5년(1459) 4월 27일④; 成宗實錄 성종 4년(1473) 1월 28일⑤; 성종 20년 (1489) 6월 16일⑤; 燕山君日記 연산군 3년(1497) 6월 15일⑥; 中宗實錄 중종 14년 (1519) 6월 13일④; 明宗實錄 명종 5년(1550) 3월 15일①; 宣祖實錄 선조 22년(1589) 9월 3일② 등. 太祖實錄 태조 5년(1396) 5월 18일①; 定宗實錄 정종 2년(1400) 4월 1일②; 世宗實 錄 세종 8년(1426) 5월 20일①; 端宗實錄 단종 원년(1453) 9월 22일①; 世祖實錄 세조 7년(1461) 8월 19일①; 成宗實錄 성종 즉위년(1469) 12월 11일⑤; 성종 7년(1476) 10 월 26일③; 성종 16년(1485) 3월 6일②; 성종 24년(1493) 4월 21일②; 燕山君日記 연산군 2년(1496) 2월 26일①; 中宗實錄 중종 8년(1513) 5월 26일② 등. 世祖實錄 세조 14년(1468) 1월 19일⑥; 成宗實錄 성종 4년(1473) 9월 12일④; 성종 13 년(1482) 6월 14일④ 등. 仁祖實錄 인조 3년(1625) 7월 14일③(첫 기사); 承政院日記 인조 25년(1647) 4월 4일 ⑨; 仁祖實錄 인조 25년(1647) 4월 25일①; 孝宗實錄 효종 3년(1652) 3월 5일①(마지 막 기사).

44 法 史 學 硏 究 第 48 號 衙 門 이 아니면서도 內 獄 이라는 것이 설치된 곳으로, 42) 임금이 개인적으로 부리 는 사람[ 私 人 ]을 시켜 신문하는 私 獄 으로 지목된 내옥은 43) 仁 祖 代 이후 臺 諫 등이 줄기차게 혁파를 요구하여 44) 결국 숙종 37년(1711)에 혁파되었다. 45) 그러 므로 내수사에서 추국한 것이 변칙이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王 府 혹은 詔 獄 이라 불린 의금부의 추국과 유사 하다. 즉 이때에는 추국 이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국문 절차 라는 의미의 용어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本 府 推 鞫 令 本 府 推 鞫 命 本 府 推 鞫 使 本 府 推 鞫 移 本 府 推 鞫 自 本 府 推 鞫 등을 포함함 의 의미 도 1의 카를 전후하여, 즉 17세기 전반에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의금부 사헌 부 의정부 중추부 등 명칭이 府 로 끝나는 관청에서 자기 관청을 가리킬 때 에는 모두 本 府 라고 하였으므로, 本 府 推 鞫 이라고 하면 의금부에서 추국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헌부에서 추국하는 것일 수도 있다. 成 宗 代 까지는 사헌부에 서 본부추국 이라고 칭한 기록만이 보일 뿐이므로 모두 사헌부에서의 추국에 해당한다. 46)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본부추국 의 의미가 바뀌게 된다. 좀 더 정 확하게 말하면, 본부추국 에서의 본부 의 의미가 바뀌게 된다. 조선 후기의 자 료에서는 사헌부에서 사헌부의 추국을 본부추국 이라고 칭한 사례를 찾을 수 없으며, 해당 기사에 드러난 관청의 이름만으로는 본부 가 어느 관청을 가리키 는지 알 수 없는 사례가 많은데, 이들 기사의 본부 는 정황상 모두 의금부로 보 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는 의금부와 내수사에서의 신문 절차만을 추국이 라 칭하게 된 것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즉 두 관청 중 의금부만 府 로 끝나 42) 내수사에 獄 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으나, 내수사에 설치된 獄 을 의미하는 內 獄 이란 용어가 承 政 院 日 記 인조 21년(1643) 4월 18일10에 처음으로 보이 므로, 仁 祖 代 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43) 承 政 院 日 記 인조 21년(1643) 4월 20일9; 仁 祖 實 錄 인조 24년(1646) 1월 3일4 등. 44) 承 政 院 日 記 인조 21년(1643) 4월 23일7; 仁 祖 實 錄 인조 22년(1644) 4월 24일4; 인 조 23년(1645) 11월 27일1; 孝 宗 實 錄 효종 3년(1652) 5월 27일1; 顯 宗 改 修 實 錄 3년 (1662) 4월 12일2; 肅 宗 實 錄 숙종 15년(1689) 1월 3일1 등. 45) 肅 宗 實 錄 숙종 37년(1711) 7월 4일2. 46) 定 宗 實 錄 정종 2년(1400) 4월 1일2; 世 祖 實 錄 세조 11년(1465) 1월 17일2; 成 宗 實 錄 성종 10년(1479) 12월 8일1; 성종 21년(1490) 5월 16일3; 성종 22년(1491) 4월 6일5.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45 므로, 본부추국 의 본부 는 의금부를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인 二男을 의금부에 잡아가두고 추국하였다.47) 1628년(인조)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전패를 깨뜨린 죄인 송두인을, 조정 업무와 시장 장사를 정 지하는 기간이 지난 뒤에 의금부에서 추국하라는 것으로 명이 내려졌습니다. 라 고 하였다.48) 1678년(숙종) 임금이 親鞫을 일단 그치고, 내일 의금부에서 추국할 것을 분부한다. 라고 하였 다.49) 1730년(영조) 임금이 경희궁에 가서 금상문에서 이유백과 이택징을 직접 국문하였다[親鞫]. (나 흘 전인) 24일 의금부에 이유백, 이유원, 이유백의 사위 최종악, 여관 주인 이몽린을 추국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유원이 (진술에서) 김양순 이최중 이명훈 이의익 정 성휴에 언급하여, 이에 親鞫을 한다고 명하였다.50) 1782년(정조) ~ 에서 의금부 로 번역한 것은 모두 원문에 本府 라고만 되어 있다. 나 와 같이 막연히 본부 라고 기록한 경우도 보이고, 나 와 같이 승정원 에서 또는 임금이 본부 라고만 칭한 경우도 보인다. 는 이런 類의 기사 중 첫 사례인데, 해당 기사는 물론이고 같은 날의 다른 기사들에서도, 본부 에 해 당하는 것으로 볼 만한 관청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다만 5개월 전인 인조 6년 (1628) 1월에 二男이란 자가 庭鞫 후에 풀려난 일이 있고51) 같은 해 8월에 역적 47) 承政院日記 인조 6년(1628) 6월 13일④ : 罪人二男拿囚, 本府推鞫. 48) 承政院日記 숙종 4년(1678) 6월 22일⑥ : 政院啓曰, 殿牌破傷罪人宋斗寅, 過停朝市後, 本府推鞫事, 命下矣. 49) 承政院日記 영조 6년(1730) 3월 12일⑲ : 上曰, 親鞫姑罷, 明日本府推鞫爲之事, 分付. 50) 正祖實錄 정조 6년(1782) 6월 28일② : 上詣慶熙宮, 御金商門, 親鞫李有白 李澤徵. 辛 卯, 命本府推鞫有白 有源 有白之壻崔鍾岳 逆旅主人李夢麟, 有源引金養淳 李最中 李命勳 李義翊 鄭聖休, 乃命親鞫.

46 法史學硏究 第48號 의 노비로서 국가에 몰수된 자들 중에 二男이란 자가 있는데,52) 이들을 모두 동일인으로 본다면 의 二男을 가두는 곳과 그에 대한 추국이 행하여지는 곳 은 당연히 의금부가 되므로,53) 의 본부 는 의금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에서도 본부 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만한 관청의 이름은 찾을 수 없으나, 전 패를 깨뜨린 사건 또는 親鞫의 대상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추국하는 것이므로, 이들 기사에서의 본부 도 의금부로 해석하여야 한다.54) 의금부에서 아뢰면서 본부추국 이라 칭한 것 또는 의금부의 보고를 인용한 것이 아닌데도 본부추국 의 본부 를 정황상 의금부로 해석하여야 하는 사례는 위 기사 외에도 많다.55) 이들 중 첫 사례가 仁祖代의 것( )이므로, 늦어도 仁祖 代에는 이러한 의미 변화 본부추국 의 본부 가 경우에 따라 사헌부 또는 의 금부를 의미하던 것이 의금부만을 의미하게 됨 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 런데 늦어도 仁祖代에 의미 변화가 나타난 것일 뿐이며, 의미 변화의 시기를 仁祖代로 확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왕조실록 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주로 승정원일기 에서 발견되는데 이 자료는 현재 仁祖代 이후의 것 만 남아 있어서 光海君代 이전의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실록기사 중 본부추국 이 의금부에서의 추국을 의미하는 사례는 선조실록 에 처음 보이나, 이를 포함하여 宣祖代~顯宗代의 실록기사에서 본부추국 이란 51) 承政院日記 인조 6년(1628) 1월 24일⑤. 52) 承政院日記 인조 6년(1628) 8월 3일⑧. 53) 庭鞫은 주로 반역 사건에 대하여 행하는 것이며, 역적이나 역적에 연루된 자를 가두는 곳은 의금부이고 이들을 추국하는 장소는 闕庭 또는 의금부이다. 庭鞫에 관하여 자세히는 拙稿, 위 논문, 제2부 제3장 참조. 54) 전패를 깨뜨린 사건은 이 시기에 국왕주재추국으로 다루었고, 親鞫의 대상이 된 사건도 국 왕주재추국으로 다루었다. 국왕주재추국을 행하는 本府 라 불리는 기관은 의금부이다. 이 에 관하여 자세히는 拙稿, 위 논문, 제2부 제3장 및 제4장 제1절 제1항 (3) 참조. 55) 실록기사 중에는 肅宗實錄 숙종 27년(1701) 9월 25일⑥, 英祖實錄 영조 6년(1730) 3 월 12일⑤, 영조 6년(1730) 3월 18일①, 영조 16년(1740) 2월 5일①, 영조 34년(1758) 5월 19일③ 이 더 있을 뿐이다. 그러나 承政院日記 에는 숙종 6년(1680) 5월 7일⑬; 숙종 13년(1687) 10월 19일⑫; 숙종 15년(1689) 윤3월 13일⑳; 경종 2년(1722) 3월 29일⑩; 영조 5년(1729) 3월 11 일㉟; 영조 13년(1737) 2월 8일⑮; 영조 24년(1748) 5월 25일㉜; 영조 37년(1761) 9월 11일⑩; 영 조 51년(1775) 7월 3일⑲; 정조 3년(1779) 4월 20일⑫; 정조 16년(1792) 3월 15일㉑ 등 매우 많 이 보인다.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47 용어는 의금부에서 아뢰거나 의금부에 전교한 내용 또는 이를 인용한 것에만 나타나므로, 56) 宣 祖 代 또는 光 海 君 代 에 이미 본부추국 이 사헌부에서의 추국 을 제외한 의미로 쓰였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단순히 본부추국 이나 금부추국 이라고만 하면, 의금부에서의 추국 중에서도 금부단독추국은 제외하고, 임금이 직접 국문하거나 委 官 으로 선정된 전 현직 정승이 승지 대간 및 의금부 당상관들과 합동으로 국문하는 절차인 국왕주재추국만을 의미하게 된 것 같다. 조선 후기의 연대기자료에서는 금부단 독추국을 단순히 本 府 推 鞫 이라고 한 사례도 있으나, 57) 대체로 本 府 獨 爲 推 鞫 58) 이나 自 本 府 推 鞫 59), 只 本 府 推 鞫 60), 只 令 禁 府 推 鞫 61) 등으로 표현함으 로써 의금부의 구성원들만 참여하여 단독으로 추국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나타 내었다. 이외에 의금부의 단독적 절차임이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으나, 단순히 本 府 推 鞫 이라 하지 않고 於 本 府 推 鞫 62) 또는 ( 勿 ) 令 本 府 推 鞫 63) 이라 한 사례 도 있다. 56) 宣 祖 實 錄 선조 24년(1591) 2월 11일2( 禁 府 郞 廳 啓 曰 : 自 本 府 推 鞫 矣. ); 선조 28년 (1595) 2월 23일2; 같은 해 12월 1일6( 司 憲 府 前 啓 承 旨 請 遞 事. 臣 等 伏 見 下 禁 府 傳 敎, 李 成 男 則 令 本 府 推 鞫, ); 선조 29년(1596) 6월 1일5; 선조 32년(1599) 5월 2일5; 선조 34년(1601) 3월 4일2; 선조 36년(1603) 6월 10일3; 선조 39년(1606) 7월 6일2; 같은 해 8월 9일2; 같은 해 10월 16일3; 같은 달 17일2; 光 海 君 日 記 광해군 즉위년(1608) 4월 20일1; 광해군 8 년(1616) 3월 10일1; 仁 祖 實 錄 인조 16년(1638) 5월 16일3; 顯 宗 實 錄 현종 원년 (1660) 5월 27일2. 57) 宣 祖 實 錄 선조 32년(1599) 5월 2일5; 宣 祖 實 錄 선조 39년(1606) 7월 6일2. 58) 宣 祖 實 錄 선조 26년(1593) 8월 1일6; 같은 해 10월 29일5( 本 府 不 可 獨 爲 推 鞫 ); 光 海 君 日 記 광해군 즉위년(1608) 8월 7일1; 承 政 院 日 記 인조 21년(1643) 4월 7일4( 本 府 似 難 獨 爲 推 鞫 ). 59) 宣 祖 實 錄 선조 24년(1591) 2월 11일2; 선조 29년(1596) 6월 1일5; 光 海 君 日 記 광해 군 즉위년(1608) 4월 20일1; 광해군 8년(1616) 3월 10일1; 承 政 院 日 記 인조 9년(1631) 2 월 25일5; 효종 3년(1652) 3월 10일5; 현종 원년(1660) 5월 28일6. 60) 宣 祖 實 錄 선조 34년(1601) 3월 4일2; 承 政 院 日 記 인조 10년(1632) 1월 21일8. 61) 宣 祖 實 錄 선조 29년(1596) 6월 5일2; 宣 祖 實 錄 선조 35년(1602) 11월 12일3 ( 只 令 禁 府 尋 常 推 鞫 ). 62) 宣 祖 實 錄 선조 28년(1595) 2월 23일2. 63) 宣 祖 實 錄 선조 28년(1595) 12월 1일6; 仁 祖 實 錄 인조 16년(1638) 5월 16일3.

48 法史學硏究 第48號 3. 국왕주재추국으로의 변화 本府獨爲推鞫 이나 只本府推鞫 등으로 국왕주재추국과 구별되던 금부단독 추국은 19세기에는 拿鞫 이라 불림으로써 국왕주재추국과 용어상으로 명백히 구별되고 있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신지도에 충군한 죄인 박우현을 拿鞫하여 사실을 알아내어 속 히 법과 형벌을 바루라고 傳旨를 내리셨습니다만, 拿鞫과 設鞫은 그 거행하는 바의 格例 가 같지 않아서, 나국은 의금부 당상관들만이 개정하여 문초하는 것이고, 설국은 추국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죄인은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무거우니, 어느 例로써 거행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승정원에다 이에 관하여 논의하라 고 유시하여 비답을 내린 것이다. 라고 하였다.64) 1873년(고종) 拿鞫은 大明律에서는 전혀 용례를 찾을 수 없으나, 조선에서는 초기부터 사 용한 용어로, 죄인을 잡아다(가) 국문함 65)이란 의미의 보통명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에는 사헌부가 拿鞫의 주체로 등장하는 기사도 있다.66) 그런데 이 拿鞫이 19세기에는 금부단독추국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高宗代 이전 에 이미 금부단독추국은 拿鞫이라 하였으며, 국왕주재추국 즉 推鞫 을 행 하는 것은 設鞫이라고 하였음을 위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拿鞫이 라 칭해지게 된 금부단독추국은 언제부터 추국 으로 불리는 절차에서 제외되 었을까? 光海君代 또는 仁祖代 이후로 추국 은 의금부나 내수사에서의 국문 절차만 64) 承政院日記 고종 10년(1873) 12월 14일㉛ : 義禁府啓曰, 薪智島充軍罪人朴遇賢, 拿鞫得 情, 快正典刑事, 傳旨啓下, 而拿鞫與設鞫, 其所擧行, 格例不同, 拿鞫則只本府堂上開坐問 招, 而設鞫則推鞫擧行也. 今此罪人, 罪犯至重, 以何例擧行乎? 敢稟. 傳曰, 已諭於院議之, 批矣. 65) 뉴에이스國語辭典, 306면; 東亞漢韓大辭典, 710면, 拿 항목. 66) 世宗實錄 세종 3년(1421) 11월 6일⑦ : 副司直崔濡齎脯四十脡, 奔競于兵曹判書趙末生 家, 憲府拿鞫之.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49 을 가리키게 되고 특히 ( 獨爲 나 只 없이) 단순히 본부추국 이라고만 하면 국 왕주재추국을 의미하게 되었음을 이상에서 살펴보았다. 숙종 37년(1711)에 內獄 이 혁파된 후로는 추국 은 의금부에서의 국문 절차만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이 다. 그런데 이미 단순한 본부추국 은 국왕주재추국을 의미하고 있었으므로, 내 옥 혁파 후 얼마 되지 않아 단지 추국 이라고만 하면 곧 국왕주재추국을 의미 하게 되고, 금부단독추국은 더 이상 本府獨爲推鞫 등으로도 칭하지 않게 되었 을 것이다. 英祖代에 간행된 속대전 및 正祖代에 간행된 대전통편 의 관 련규정은 추국이 국왕주재추국만 의미함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들어 추국하는 일을 담당한다.67) 경국대전 뭇 추국용 신장은 너비 9푼에 두께 4푼이고, 삼성교좌추국에서는 너비 8푼에 두께 3푼이다<영조척을 씀>.68) 속대전 뭇 형신은 하루에 1차만 하고, 추국이 비록 엄중하기는 하나 (그 형신은) 2차를 넘길 수 없다<영조 21년(1745)에 내린 수교>.69) 속대전 추국의 대상인 죄인에 대한 刑訊 拿來 査問을 청할 때에는 鞫廳에서 完議하여 아 뢰며, 국문에 참여한 사헌부 관원이 단독으로 아뢰어서는 안 된다.70) 속대전 추국의 대상인 죄인을 刑訊할 때에, 규정된 신장 대수를 채우기[準次] 전에 사실대 로 진술하는 자 및 갑자기 죽을 염려가 있는 자 및 사건의 실정에 관하여 다시 물 어보아야 할 듯한 자에 대하여는 委官의 의견을 論啓하여 형신을 정지한다<정조 4년(1780)>.71) 67) 68) 69) 70) 대전통편 經國大典 <吏典> [京官職/從一品衙門/義禁府] : 掌奉敎推鞫之事. 續大典 <刑典> [推斷] : 凡推鞫訊杖 廣九分 厚四分 三省則廣八分 厚三分<用營造尺>. 續大典 <刑典> [推斷] : 凡刑訊, 一日一次, 推鞫雖嚴重, 毋過二次<當宁乙丑下敎>. 續大典 <刑典> [推斷] : 推鞫罪人 請刑 請拿 請査 鞫廳完議以啓 參鞫臺官 毋得獨啓.

50 法 史 學 硏 究 第 48 號 경국대전 의 규정인 가는 각 중앙 관청의 조직과 기능을 규정하는 < 吏 典 > [ 京 官 職 ] 중에서도 의금부에 관한 항목의 내용이므로, 단순히 의금부의 핵심 업무가 奉 敎 推 鞫 이라는 의미일 뿐이고, 다른 관청에서는 推 鞫 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리하여 실제로 다른 관청에서도 추국이 행하여 졌음을 위에서 이미 확인하였다. 경국대전 에서 추국 이란 용어가 보이는 것은 가가 유일하다. 그러나 속대전 (나~라)과 대전통편 (마)에서는 추 국 이란 용어가 < 刑 典 >에만 보이며, 모두 국왕주재추국에 해당한다. 이것이 규정 자체만으로 명백한 라와 마를 먼저 보면, 국청이 설치되거나 위관이 임명 되는 推 鞫 은 국왕주재추국과 삼성교좌추국뿐인데, 72) 당시의 법제자료에서 삼 성교좌추국은 반드시 三 省 推 鞫 또는 省 鞫 이라 칭하였으므로, 73) 라 마의 추 국은 국왕주재추국이다. 다는 영조가 親 鞫 을 하다가 의금부에 국문을 명하면서 내린 전교인데, 74) 아래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親 鞫 은 국왕주재추국의 하나 이다. 나는 여기에 의금부 신장의 규격만 더하면 위에서 본 육전조례 규 정 75) 이 된다. 나의 추국은 訊 杖 의 규격으로 미루어 금부단독추국은 물론이고 삼성교좌추국보다도 중한 절차임을 알 수 있으므로, 국왕주재추국 외의 절차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이상을 요약하면, 경국대전 에서는 추국이 특 정한 기관의 특정한 절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으나, 속대전 과 대전통 편 에서는 추국 이란 용어가 모두 국왕주재추국을 의미한다는 것이 된다. 71) 大 典 通 編 < 刑 典 > [ 推 斷 ] : 推 鞫 罪 人 用 刑 時 準 次 前 直 招 者 及 有 徑 斃 之 慮 者 及 或 有 情 節 更 問 者 則 委 官 意 見 論 啓 停 刑 < 當 宁 庚 子 >. 72) 拙 稿, 위 논문, 제2부 제2장 이하 참조. 73) 특히 續 大 典 보다 3년 앞서 간행된 新 補 受 敎 輯 錄 의 < 刑 典 > [ 省 鞫 ]에는 陵 上 放 火 는 推 鞫 의 대상이고( 996) 여러 종류의 강상범죄는 三 省 推 鞫 ( 990 992 995)의 대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단순히 추국 이라고 하면 삼성추국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74) 英 祖 實 錄 영조 21년(1745) 2월 30일1. 75) 각주 15 참조.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51 Ⅳ. 國王主宰推鞫의 종류 국왕주재추국은 다시 親鞫 庭鞫 推鞫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사이의 차이 는 국왕주재추국과 금부단독추국의 차이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으며, 사건의 중 요도나 난이도에 따라 참여인원의 수와 장소 등을 달리한 것에 불과하다.76) 특 히 친국과 정국은 절차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다만 추국은 의금부를 그 장소로 한다는 점에서 친국 및 정국과 절차상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삼성교좌추국에 가까우나, 다루는 사건의 종류가 친국 정국과 동일하고, 전 현직 정승이 대거 참여한다는 점에서 참여인원도 친국 정국과 더 가까우므로, 친국 정국과 함 께 국왕주재추국으로 묶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특히 삼성교좌추국은 초기 부터 반드시 삼성추국 이나 省鞫 등으로 칭하였으나, 친국은 비록 친국 정 국 추국이 뚜렷이 분화되기 전이긴 하여도 親 이란 글자 없이 推鞫 이라고만 한 사례도 있는데,77) 이러한 사례가 친국 정국 추국을 하나로 묶는 것이 타당 함에 대한 방증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궁궐에서 열린 친국 정국과 달리 추국은 장소가 의금부였기 때문에, 연대기자료에서는 주로 본부추국 이라 고 칭하였다. 위에서 本府獨爲推鞫 이나 於本府推鞫 등은 금부단독추국이고 단순히 本府推鞫 이라고만 하면 국왕주재추국이라 하였는데, 단순한 본부추국 이 바로 국왕주재추국의 세 절차 중 가장 약한 형태인 추국이다. 그런데 의금부에서의 사법절차를 금부단독추국 국왕주재추국 삼성교좌추 국으로 분류하고 국왕주재추국을 다시 친국 정국 추국으로 분류하는 것은 용 어상의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추국이 본래 모든 公的 국문 절차를 의미한 점이 나 이후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국문 절차를 의미하게 된 점은 접어두고라도, 18세기 중 후반의 법제자료인 신보수교집록 속대전 대전통편 에서 추국이 국왕주재추국 전체를 가리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왕주재추국의 76) 친국 정국 추국의 구체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하여는 拙稿, 위 논문, 제2부 제3장 참 조(각각 親臨推鞫 闕庭推鞫 禁府推鞫임). 77) 光海君代까지의 실록기사에서 종종 발견되며, 이 경우 임금이 에 가서 을 추국하였 다. [上御, 推鞫 ]라는 식으로 썼기 때문에 親鞫임을 알 수 있다.

52 法史學硏究 第48號 한 형태를 단지 추국 이라고만 함은 곤란하며, 기존 연구의 오해도 바로 이것이 그 원인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본 연구에서는 친국 정국 추국 대신 다 른 용어로써 국왕주재추국의 세 형태를 분류하고자 한다. 임금이 직접 피고인 등 을 추국한 친국은 親臨推鞫78)을 줄인 말로 보이므로, 친국을 친림추국으로 대치 한다. 임금이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나 궁궐에서 진행한 정국은 闕庭推鞫79)을 줄 인 말로 보이므로, 정국을 궐정추국으로 대치한다. 친국 정국과 달리 궁궐 대신 의금부를 신문 장소로 하였던 추국은 연대기자료에서 주로 本府推鞫으로 칭하였 는데 本府는 의금부를 가리키므로, 추국을 禁府推鞫으로 대치한다. Ⅴ. 맺음말 조선시대에는 추국의 의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公的 인 신문 절차를 모두 추국이라 칭하였으나, 光海君代~仁祖代 이후로는 공적 국문 절차 중에서도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 절차만을 추국이라 하였으며, 肅 宗代 내옥 혁파 후로는 의금부에서의 신문 절차만을 추국이라고 하였다. 특히 단순히 추국 또는 본부추국 이라고만 하면 국왕주재추국을 의미하고, 금부단 독추국은 獨爲 나 只 등을 덧붙이다가 拿鞫 이라는 용어로 대치하였다. 추국의 이와 같은 의미 변화를 기존의 연구에서 파악하지 못하여, 별개의 절 차인 금부단독추국과 국왕주재추국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절차는 담당한 사건과 참여관원 등에서 크게 다른 절차로, 이에 관하여는 拿鞫과 設鞫 의 차이를 논한 위 승정원일기 기사80)에서도 명백하므로, 반드시 구별하여 78) 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1618) 8월 27일①; 承政院日記 영조 12년(1736) 7월 17일⑥; 정조 원년(1777) 1월 17일㊶; 순조 7년(1807) 7월 12일㉙; 헌종 14년(1848) 11월 10일㉕ 등. 79) 中宗實錄 중종 16년(1521) 10월 30일③; 明宗實錄 명종 11년(1556) 4월 10일①; 宣 祖實錄 선조 27년(1594) 2월 23일②; 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1618) 10월 26일⑧; 承 政院日記 인조 원년(1623) 5월 12일⑨; 仁祖實錄 인조 6년(1628) 2월 17일② 등. 80) 각주 65 참조.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53 야 한다. 이들 절차를 구별하는 것은 의금부의 사법절차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하겠다. 연구자는 이를 위하여 금부단독추국 국왕주재추국 삼성교좌추국이라는 용 어로써 의금부의 사법절차를 분류할 것을 제안한다. 다른 관청의 관원이 참여하 지 않고 의금부의 구성원들만으로 진행하는 추국을 금부단독추국, 임금이 직 접 국문하거나 委官을 포함한 전 현직 정승들이 승지 대간 및 의금부 당상관 들과 합동으로 국문하는 추국을 국왕주재추국 으로 부르고자 한다. 용어 사용 에 통일성을 기하기 위하여, 三省이 의금부에서 의금부 당상관들과 자리를 함께 한[交坐] 삼성추국을 삼성교좌추국 으로 부르고자 한다. 한편 親鞫 庭鞫 推 鞫으로 다시 나눌 수 있는 국왕주재추국은 용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그 하위분류를 親臨推鞫 闕庭推鞫 禁府推鞫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조선시대에 推鞫 이란 단어가 의미한 여러 절차 사이의 관계는 아래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내수사의 국문은 변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임금 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국문 절차와 의금부의 국문 절차는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고 모두 광의의 추국으로 분류하였다. <그림 1> 추국의 여러 의미와 형태 모든 公的 국문 절차(최광의) 임금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국문 절차(광의) 기타 의금부의 국문 절차(광의) 내수사의 국문 절차 국왕주재추국(협의) 삼성교좌추국 금부단독추국 친림추국 궐정추국 금부추국(최협의)

54 法史學硏究 第48號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國史編纂委員會, 1955~1958). 承政院日記 (國史編纂委員會, 1961~1977). 經國大典, 奎章閣資料叢書 法典篇, 서울大學校 奎章閣, 1997. 續大典, 奎章閣資料叢書 法典篇, 서울大學校 奎章閣, 1998. 大典通編 (上 下), 奎章閣資料叢書 法典篇, 서울大學校 奎章閣, 1998. 六典條例 (上 下), 奎章閣資料叢書 法典篇, 서울大學校 奎章閣, 1999. 各司受敎 受敎輯錄 新補受敎輯錄, 奎章閣資料叢書 法典篇, 서울大學校 奎章閣, 1997. 大明律講解, 奎章閣資料叢書 法典篇, 서울大學校 奎章閣, 2001. 한국역사연구회 중세 2분과 법전연구반, 新補受敎輯錄, 청년사, 2003. 李崇寧 監修, 뉴에이스國語辭典, 改訂版, 金星敎科書株式會社, 1989. 李家源 權五惇 任昌淳 監修, 東亞漢韓大辭典, 중판, 東亞出版社, 1989. 吳甲均, 朝鮮時代司法制度硏究, 三英社, 1995. 金友哲, 조선후기 推鞫 운영 및 結案의 변화, 民族文化 第35輯, 한국고전번역원, 2010. 金鎭玉, 禁推 의 성격과 특징, 民族文化 第36輯, 한국고전번역원, 2010. 李相寔, 義禁府考, 法史學硏究 제4호, 韓國法史學會, 1977. 田中俊光, 新昌令推斷日記 를 통하여 본 中宗代 謀逆事件의 發生背景과 詔獄節次 의 實態, 法史學硏究 제41호, 韓國法史學會, 2010. 拙稿, 義禁府의 조직과 추국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위논문, 2013. 朝鮮王朝實錄[http://sillok.history.go.kr], 2013년 9월 20일 최종접속. 承政院日記[http://sjw.history.go.kr], 2013년 9월 20일 최종접속.

추국의 의미 변화와 분류 55 <Abstract> Chuguk, Its Meaning s Change and Grouping 81) Kim, Youngsuck* Uigeumbu( 義 禁 府 ; the King s Court) was one of main criminal courts of the Chosun Dynasty, in charge of the crimes of government officials, treason and ethical crimes. Uigeumbu took charge of these crimes by the process of Chuguk( 推 鞫 ; interrogation). Up to now, there has been misunderstanding about the forms of Chuguk. In this essay, I proof this and correct the misunderstanding. And I go on to suggest that the legal process in Uigeumbu be assorted with three terms of Geumbu-dandok-chuguk( 禁 府 單 獨 推 鞫 ; interrogation by Uigeumbu alone), Gugwang-jujae-chuguk( 國 王 主 宰 推 鞫 ; interrogation leaded by the king) and Samseong-gyojwa-chuguk( 三 省 交 坐 推 鞫 ; interrogation by Uigeumbu with 3 agencies) in order to understand Chuguk properly. In Chosun era, the meaning of Chuguk changed from time to time. Its initial meaning was official process of interrogation. From King Gwanghae s reign or from King In-jo s reign, it meant official process of interrogation directly controlled by the king. After the abolition of Nae-ok( 內 獄 ; the king s private and unofficial court) in King Suk-jong s reign, only process of interrogation in Uigeumbu was called Chuguk. Thereafter, just Chuguk meant Gugwang-jujae-chuguk, while Dok-wi( 獨 爲 ; to do something by oneself) or Ji( 只 ; only) were affixed for Geumbu-dandok-chuguk. Finally, the term of Naguk( 拿 鞫 ) was used in order to mean Geumbu-dandok-chuguk. * Researcher at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56 法 史 學 硏 究 第 48 號 In previous researches Geumbu-dandok-chuguk and Gugwang-jujae-chuguk which were different legal processes have been considered as the same, which seems to be due to not grasping the change of Chuguk s meaning above. We have to distinguish the two processes because they were very different in many points. I think that the distinguishment of these is prerequisite for understanding of Uigeumbu s legal processes. In addition, Gugwang-jujae-chuguk had three forms of Chillim-chuguk( 親 臨 推 鞫 ; Gugwangjujae-chuguk by the king directly), Gwoljeong-chuguk( 闕 庭 推 鞫 ; Gugwang-jujae-chuguk held in the palace without the king present) or Geumbu-chuguk( 禁 府 推 鞫 ; Gugwang-jujae-chuguk held in the Uigeumbu). [Key Words] Uigeumbu( 義 禁 府 ), Chuguk( 推 鞫 ), Geumbu-dandok-chuguk( 禁 府 單 獨 推 鞫 ), Gugwang-jujae-chuguk( 國 王 主 宰 推 鞫 ), Samseong- gyojwachuguk( 三 省 交 坐 推 鞫 ), Naguk( 拿 鞫 ) 접수일 : 2013. 9.20., 심사일 : 2013. 9.24.-10. 4., 게재확정일 : 201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