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제2절 북구지역 1. 흥해읍(興海邑) 1) 매산리(梅山里) 1914년 기산(箕山), 용산(龍山), 매곡(梅谷), 백련(白蓮)을 합하여 매산(梅山)이라 하였다. 심곡골(深谷) 골이 깊어 불린 마을명으로 옛날부터 산송이가 유명하다. 돌림산 중턱에 삼동계(參 東契)를 조직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陳)의 의병 활동을 도왔던 조성목(趙性穆) 독립유공 자의 묘가 있다. 용산(龍山) 300여 년 전 월성 손씨가 개척한 마을로 용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명이 되었다. 매일(梅日) 매곡(梅谷) 마을이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의 명당 터에 형성되어 매일, 매곡이라 불렀다 한다. 최제우(崔濟愚)가 신광면 마북리 검등골에 살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 時亨)의 소개로 이곳의 동학교도인 손봉조의 집에 1862년에서 1863년 초까지 은거하 면서 접주제를 확립했다고 한다. 치미 치산(箕山) 용산, 치산, 큰동네를 통칭하여 매일이라 부르며 앞산의 모습이 치( 키 의 방언)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포항시 농업기술센터가 있다. 백련(白蓮) 신라 때 백련암이라는 큰절이 있었다 전한다. 2) 북송리(北松里) 조선 철종 때의 군수였던 이득강(李得江)은 흥해의 상습적인 홍수를 막기 위해 북송 리에 소나무를 심어 송림을 만들었다. 지홍관(池弘寬) 군수 때 폭 40m, 길이 10리에 이르는 북송숲이 되었다. 북송숲의 이름을 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두내리, 양
제1장 마을유래 605 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마을명을 북송리(北松里)라 하 였다. 2006년에 천연기념물 468호로 지정되었다. 큰마을 마을에 있던 이득강 군수와 지홍관 군수의 선정비는 1990년대 중반 영일민속박물 관으로 옮겼다. 건너각단 큰 마을 남쪽, 길 건너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양촌( ) 조선말 유양촌(柳良村)이란 관리가 귀양살이를 했다 하여 양촌(良村) 이라 불렀는 데, 뒤에 양촌(陽村)으로 바뀌었다 한다. 새각단 근세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매년 정월대보름 저녁에 건너각단 앞산 정상에 간수 를 묻는 풍습이 있다. 3) 마산리(馬山里) 앞산을 말머리산(馬頭山), 말뫼(馬山)라 부른데서 마을명이 연유한다고 하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병사들이 말을 매어 두던 곳이라 하여 마장동(馬場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산 1리 청룡사(靑龍寺), 포항전신전화국 흥해분국이 있다. 서남쪽에 대추나무가 많이 있었 다는 대추밭걸이 있고, 탕건처럼 생긴 탕건산 꼭대기에 고려장(高麗葬)을 했다는 큰 무덤이 있다. 마산 2리 마산사거리 동쪽 과수원 일대에 대성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1988) 각종 아 파트가 세워져 총 900여 호가 살고 있다. 대성아파트 입구에 영양이씨 열녀비(節婦曲 江崔氏妻英陽李氏碑)가 있다. 4) 옥성리(玉城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옥리의 獄 을 玉 으로 고치고, 성서의 城 자를 취하여 옥성리(玉城里)라 하였다. 향교산은 그 모습이 소가 누워서 풀을 먹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한다.
606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옥리(玉里) 흥해군 관아의 감옥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옥리(獄里) 혹은 옥거리라 불렀 는데, 후에 한자를 고쳐 옥리(玉里)라 하였다. 교리(校里) 향교가 있는 마을 이란 뜻으로 부른 이름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흥해 향교에는 서무, 동무, 명륜당, 서재, 동재, 수복실, 태화루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대성전(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87호)과 동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불타 버렸으며, 1953년에 명륜당과 수복실을 신축하고 뒤이어 동 서무를 복원하였으며, 1990년대에 명륜당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 태화루를 복원하였다. 성서(城西), 죽림동(竹林洞) 성 서쪽의 성서(城西)와, 향교 북쪽 대나무숲에 죽림동(竹林洞)이 있었으나 마을이 팽창하면서 위치나 경계가 희미해졌다. 신당곡(神堂谷) 1554년 남원 양씨(南原梁氏)가 개척한 마을이라 전하는데, 신당(神堂)이 있었으므로 신당곡(神堂谷)이라 불렀다. 흥해고등학교, 흥해중학교가 있다. 1996년 성내리에서 이 전한 흥해읍사무소가 있고, 흥해실내체육관이 근래에 신설되었다. 향교산에는 1975년 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이팝나무군락지가 있다. 1991년 흥해이팝청년회가 조직되어 이팝나무 꽃이 만발한 5월초 이곳에서 이팝축제가 열린다. 5) 약성리(藥城里) 1914년 약전(藥田), 북성(北城), 중흥(中興), 북문(北門)을 합하여 약성(藥城)이라 하 였다. 흥해초등학교, 향가심인당(진각종, 1954)이 있다. 약전(藥田) 약성리의 중심마을로 약초를 재배하는 밭(藥田)이란 뜻에서 마을명이 유래되었다. 북문밖 북성리(北城里) 흥해성(城)의 북문 밖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상중리(上中里) 중흥리(中興里) 약전리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 중리 중흥리라 불렀다. 30여년 전까지 상중리 중간에 있었던 연당의 수량이 많아 아래학성을 거쳐서 학성리의 미나리광까지 사시사 철 흘러내렸다. 지금은 하천이 모두 복개되고 연당터도 메워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1장 마을유래 607 6) 학성리(學城里) 읍성 북문 밖에서 동북쪽으로 형성된 마을로 학성(學城), 곡성(曲城), 북흥(北興), 북 원(北園)을 합하여 1914년 학성(學城)이라 하였다. 학성(學城) 마을에 글방이 많아 학성(學城)이라 불렀고, 읍성의 형태가 학(鶴)의 날개 같다고 해 서 학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옹성리 곡성리(曲城里) 성벽의 선이 굽어진 곳에 망대(望臺)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옹기 같다 하여 옹성(甕 城) 또는 굽진 곳에 있다 하여 곡성(曲城)이라 불렀다 한다. 북성리 북흥리(北興里) 북문리(北門里) 흥해초등학교 동편 마을로 옛 북문에서 연결된 도로를 경계로 약성리와 갈라져 있다. 새마치 새만리 뒷내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찬물이 작은 내를 이루어 여름이면 주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몸을 씻기 위해 모여들던 곳이다. 7) 남성리(南城里) 남문리, 뱃말꼭지, 성황리(城隍里), 양곡리(暘谷里) 등을 합쳐 남문의 남 과 성황의 성 을 따서 남성리(南城里)라 하였다. 남문리(南門里) 남성리의 으뜸 되는 마을로 흥해읍성의 남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문리(南門 里) 또는 남문밖 이라 하였다. 뱃말꼭대기 현 남성1리에 해당한다. 옛날 흥해 땅이 물에 잠겨 있을 때 이 곳에 배를 매어두는 나루가 있어 뱃마루마을 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성황리(城隍里) 조선말까지 흥해군수 참석 하에 성황제를 지냈던 곳이므로 성황리라 불렀다. 마을 남쪽에 나지막한 못산(池山)이란 산이 있어 마을 이름을 못산(池山)이라고도 한다. 남 미질부성(南彌秩夫城)이 있었으나 대부분 훼손되고 현재는 남서쪽에 3백여 미터가 남 아 있다. 1994년 경상북도 기념물 94호로 지정되었다.
608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양곡(暘谷) 권무정 서편 옥성리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마을이다. 8) 성내리(城內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북성, 서성, 동성을 합하여 성내리(城內里)라 하였다. 흥해읍성 터를 따라 그 안팎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읍성은 고려 현종 2년(1011년) 토 성(土城)을 쌓았으나,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공양왕 1년(1389년) 그 자리에 돌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읍성의 규모는 둘레 1,493척, 높이 13척, 우물 3곳, 남쪽과 북쪽에 각 각 1개의 문을 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영일민속박물관 담장 아래에 성돌 수십 개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1991년에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0호로 지정된 흥해군의 관아 건물인 제남헌은 조선 헌종1년(1835)에 증건되었다.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제남헌(濟南軒)을 수리하여 1983년 10월 29일 영일민속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영일 민속박물관 남쪽 도로 건너편에 있던 흥해읍사무소는 1996년 옥성리 흥해중학교 남 쪽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 2007년 흥해종합복지문화센터가 건립되었다. 9) 중성리(中城里) 읍성의 동쪽에 위치하며 1914년 중리(中里), 야성(野城, 廣城), 이화리(梨花里)를 합 하여 중리의 中 자와 야성의 城 자를 따서 중성(中城)이라 하였다. 2009년 5월 11일 중성리 167-1에서 국보급 포항중성리신라비(501년 이전)가 발견되었다. 중리(中里) 읍성 밖 동편 마을들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중리라 하였다. 옛 우시장(牛市場)은 망 창산으로 옮겨가고 어린이 놀이터가 되었다. 야성( ) 광성 광세이(廣城) 망창산(41m)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앞들에 넓은 성지(남미질부성)가 있다 하여 야 성 혹은 광성이라 불렀다. 옛날 백정들이 소와 돼지를 잡고 가죽을 씻어 말렸다는 가 죽둠벙이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공동창고와 노인정이 들어서 있다. 배꼬지(梨花里) 배가 드나들던 곶(串)이어서 불린 지명으로, 지금도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흥해안들 북편 들녘을 고래가 드나들었다는 뜻의 고래들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조선조 현종 때 민유중(閔維重)이 유배를 당해 이곳에 살면서 배나무를 재배하였다하여 이화평(梨 花坪)이라 부른 것이 이화리(梨花里)가 되었다고도 한다.
제1장 마을유래 609 10) 망천리(望泉里) 1914년 망창의 망 과 벌천의 천 을 따서 망천리라 하였다. 망창(望昌) 조선시대 망창역(望昌驛)이 있었던 곳으로 역촌(驛村) 또는 역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망천리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원망천(元望泉) 또는 원망창(元望昌)이라 부르기도 한다. 벌샘이(伐泉里) 마을에 펑펑 솟아나는 샘이 있어 벌샘(伐泉 羅泉)이라 하였다. 11) 남송리(南松里) 남천 상류에 마들, 새터(남휴리), 송리, 짓댕이, 서원마, 남대실 등의 자연부락이 1914년 남휴리의 남 과 송리의 송 을 따서 남송리(南松里)라 하였다. 마들 말을 사육하는 목장과 삼(麻)이 많이 생산되는 들이라 하여 마들 이라 하였다고 한다. 새터 김해 김씨가 일군 작은 마을이었으나 광복 후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다고 새터 라 불렀으며, 두무치를 오가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흥해들을 바라보며 쉬었다 하여 남 휴리(南休里)라고도 불렀다. 송리(松里) 새터 동편 천마산 북쪽 기슭에 송림이 울창한 곳에 형성된 마을이다. 월성 최씨와 월성 박씨가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짓댕이(池塘) 못이 있던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혹은 비가 오면 땅이 질어 질땅 이란 뜻 으로 짓댕이 라 불렀다 한다. 서원마 곡강서원(曲江書院)이 있어서 서원마 라 불렀다. 곡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에 가 담하여 공을 세우고 병조참판을 증직(贈職) 받은 정삼외(鄭三畏)가 창건하였으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고, 그 자리에 곡강 최씨(曲江崔氏) 시 조인 최호(崔湖)를 추모하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들어서 있다. 곡강 양수장 바로 옆 암벽에는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이라고 새긴 비(碑)가 있다.
610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남대실(南大里) 밀양 박씨로 병참 벼슬을 한 분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이 곳에 정착하여 남대 실이라 이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곡강 최씨는 흥해 배씨(興海裵氏)와 함께 흥해를 본관으로 하는 두 성씨 중의 하나 이다. 곡강 최씨는 고려 예종 때 신호위장군(神虎衛將軍)을 지낸 호(湖)가 곡강부원군 (曲江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곡강으로 하고 그를 시조로 모시게 되 었다. 1994년에 개교한 한동대학교가 있다. 12) 곡강리(曲江里) 1914년 봉림이, 동골, 너구(汝口), 흥곡(興谷), 곡강, 봉림이불(鳳林-) 등 자연부락을 합하여 곡강(曲江)이라 하였다. 봉림이(鳳林) 뒷산의 지세가 봉(鳳)의 형국으로 봉림(鳳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765년 발간 된 영일읍지에 마을 앞 큰들을 봉림호(鳳林湖)라 기록하고 있다. 동골(東谷) 너구(汝口)의 동쪽 골이란 뜻을 가졌다. 너구(汝口) 여씨(汝氏)가 집성 세거하던 마을이라 하여 여구(汝口)라 한 것이 변음 되어 너구라 고 부른다. 흥곡(興谷) 이 골에 들어와서 살면 흥(興)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답다리 골 어귀에는 두부와 불당이 파손된 미륵석불(고 1.8m, 연좌대 직경 2m)이 남아 있다. 말을 닮은 천마산(天馬山)은 6. 25사변 때 아군과 적군이 서로 밀고 밀리는 격전지이기도 했다. 곡강(曲江) 신라시대에 병마를 방목 사육했던 지역으로 나부산(放牧山)이라 부르는 야산이 곤륜 산(崑崙山, 177m, 일명 高靈山)과 마주하고 있다. 봉림이불마을 해안선을 따라 해풍과 모래를 막는 거대한 봉림수(鳳林藪)가 있었는데, 효종 때 최 군수가 모두 베어 샛바람이 극심하자, 방목하던 말을 구룡포의 북목(北牧)으로 옮겼다 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제1장 마을유래 611 13) 용한리(龍汗里) 1914년 용덕(龍德)과 소한(小汗)을 합하여 용한리(龍汗里)라 하였다. 용덕(龍德) 먼 바다에서 본 마을의 지형이 마치 큰 용이 엎드려 있는 것 같아, 용의 덕(德)을 입어 살아가는 곳이란 뜻으로 용덕(龍德)이라 하였다 한다. 영일만신항 축조공사가 2009년에 완공되었다. 소한(小汗)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작은 내에 땀을 씻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든다 하여 소한리라 한다. 14) 우목리(牛目里) 1914년 왜골과 우목(牛目)을 합하여 우목리(牛目里)라 하였다. 우목은 누워있는 소 의 눈 위치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우목구미(牛目龜尾)라고 부르 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정에 향토개발 선구자 유공비, 죽천 방면 우측 산에 해병 제일 상륙사단 자매결연비(1966), 제당 어귀의 향토개발 유공기념비, 마을 북동 해변 언덕 위에 조선일민무호박공도해비(朝鮮逸民無號朴公蹈海碑)가 있다. 15) 죽천리(竹川里) 봉화산(烽火山)의 동남 기슭 해안의 어촌 지을(知乙)과 대벌이를 합하여 죽천(竹川) 이라 하였다. 지을(知乙) 숲과 물이 좋아 새들이 많이 서식하였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대벌이(竹川里) 벌에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대벌이라 부른다. 1988년 포항전문대학(현 포항대학)이 송도동에서 이곳으로 이건 되었다. 대학의 서편 절골에는 세심선원(洗心禪院)이 있다. 16) 용곡리(龍谷里) 용연(龍淵)과 이곡(耳谷)을 합하여 용곡(龍谷)이라 하였다. 이곡(耳谷) 마을의 모습이 귀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12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새터(新基) 북천 가에 용연(龍淵)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수해로 폐허가 되고 서북쪽 100여 m 언덕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일궜다 한다. 고인돌 5기가 귀일과 새터 중간 지점에 남아 있고 호리못 둑 아래에 정교보유공비(鄭僑輔有功碑)가 있다. 17) 양백리(兩白里) 마을 뒷산 성지곡(聖旨谷) 일대에 학의 집단 서식처가 있어, 산이 희게 보인다 하여 백산(白山)이라 하였다. 내백과 외백 두 마을을 합쳐 양백리(兩白里)라 하였다. 내백(內白) 외백 안쪽에 위치하며 원래 오천 정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월성 이씨와 선산 류씨가 들어와 대를 잇고 있다. 외백(外白) 뒷산 가리점(葛点) 산등에 배천희(裵千熙) 국사(國師)의 묘와 배 국사의 말무덤이 있 다. 본관이 흥해로 고려 충렬왕 33년(1307)에 흥해에서 태어난 배천희 국사는 13세 때 반룡사(盤龍寺)의 일비(一非)에서 출가하고, 1325년에 승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들어가 강남(江南)의 몽산(蒙山)에게 의발(衣鉢)을 받고 귀국했으며, 공민왕 16년 (1367)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그가 당시 승려로는 최고 지위인 국사로 책봉됨으로, 국사의 고향인 흥해가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의 속읍(屬邑)에서 지군사(知郡事)로 승 격되었다 한다. 배 국사의 형인 배전(裵詮,?~1361)의 후손들이 매년 10월 7일에 묘 제를 지내오고 있다. 18) 덕성리(德城里) 1914년 덕곡(德谷)과 장성(長城)을 합하여 덕성(德城)이라 하였다. 덕실(德谷)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덕실(德室 德實)이라 불렀다 한다. 월성 이씨 입향조를 추모하는 재실 이상재(履霜齋)가 있다. 대한민국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의 고향이다. 장성(長城)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 불노동(不老洞), 장생(長生)골이라 하여 장생이라 불렀는데, 어떤 흥해군수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고명(高名)과 같다 하여 장성(長城) 으로 고쳐 쓰게 했다고 한다.
제1장 마을유래 613 안동네 이씨 가문의 재실 덕봉재(德峯齋)가 있으며, 화왕산(火旺山) 전투 때 창의종군 하였 던 이봉수(李鋒壽), 이열(李悅) 의사의 출신지이다. 19) 덕장리(德壯里) 1914년 못밑(德山), 원두들, 장자(壯者)를 합하여 덕장(德壯)이라 하였다. 웃장자 옛날 백만장자가 살았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아랫장자마을에 장사가 나는 샘이 있어 장사(壯士)마을이라 하여 장자동(壯者洞)이라 했다고도 전해진다. 아랫장자 마을 서남쪽에 둔각지(頓角池)가 있는데, 신라시대에 웃장자마을에서 전라도 모처에 서 구하여온 긴 뿔나팔을 못가의 누각에서 불어 시간을 알렸다고 전해져온다. 못밑(德山) 못이 있는 장성(長城) 마을 아래에 위치한다 하여 못밑이라 한다. 일명 덕산(德山)이 라고도 부른다. 20) 용전리(龍田里) 1914년 신성동(新成洞)과 용전(龍田), 임천(林泉)의 일부를 합하여 용전리(龍田里)라 하고 각각 1, 2리로 나누었다. 신성동(新成洞) 이 마을 북서쪽에 있던 안삼바리(三海)라는 어촌이 없어지고 이 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자 신성동(新成洞) 혹은 삼바리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용전(龍田) 큰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곡강의 하구를 치니, 호수였던 이 지역의 물이 빠져 육 지가 되었다는 전설에 의해 용전이라 하였다 한다. 임천(林川) 곡강지서가 있었으나 1998년 7월 11일에 흥해파출소와 통폐합되었다. 한때 곡강면 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61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21) 용천리(龍泉里) 1914년 용소(龍沼), 임천(林泉), 굴산(屈山), 신땀(新潭), 별재(伐堤) 등을 통틀어 용천 (龍泉)이라 하였다. 굴산(屈山) 강물(北川)이 마을 앞에 굽이쳐 흘렀기에 굴산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임천과의 사이 에 4기의 고인돌이 있다. 임천(林泉) 마을 동편 숲속에 샘이 있어 임천이라 하였다 한다. 성혈식 고인돌 3기가 있다. 용슬(龍膝 龍沼) 마을 앞 하천에 소(沼)가 형성됐는데 그 모습이 용을 닮은 데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 설이 있어서 용소라 했으며, 마을의 위치나 형태가 용의 무릎에 해당된다 하여 용슬 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신땀(新潭) 맑은 물웅덩이를 개발한 데 연유한 지명이라 한다. 뒷산 오천 정씨 묘역에 3기의 고인돌이 있다. 별재(伐堤) 일제시대에 도로가 나기 이전까지 청하와 흥해를 잇는 주도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고갯마루에 고인돌 2기와 큰 서낭당이 있다. 22) 금장리(金壯里) 1914년 금사(金沙), 선돌배이, 장동(壯洞), 바래미, 방근(芳近), 시란 등을 합하여 금 장(金壯)이라 했다. 금사(金沙) 마을 뒷산에서 사금이 나온다 하여 금사동 혹은 금사방이라 불렀으며, 서당마을이 라 부르기도 했다. 선돌배기 새탑(立石) 일곱개의 고인돌이 있던 곳에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2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장동(壯洞) 수곡(壽谷)산 골짜기에 위치하며 마을 남동쪽 산머리에 사자형국의 덤방산이 있다.
제1장 마을유래 615 바래미 지형이 바릿대 같다하여 발산(鉢山), 혹은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바래미라 불렀다 한다. 주변에 왕대나무가 많다. 방근(芳近) 멀리 개천이 보인다고 망계(望溪)라 했다가 글자의 음(音)이 좋지 않다 하여 방근(芳 近)으로 개칭했다 한다. 실안 곤륜산 서편으로 못이 메워진 자리에 형성된 마을이다. 23) 흥안리(興安里) 낚시봉과 곤륜산 기슭에 위치한다. 한 때 흥해군 북하면(北下面) 소재지였으며, 큰 뜸, 연당뜸, 곤륜산밑 등의 마을을 합하여 흥안리라 하였다. 큰뜸 큰 마을 이란 뜻이다. 도로 남쪽에 북하면사무소가 있었으며, 1914년 이후 곡강면 사무소로 이용되다가 면사무소가 용천리로 옮기면서 폐지되었다. 연당뜸 마을 동남쪽 산등성이에 신라 때 쌓은 토석성(土石城)인 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 터 가 있다. 북미질부성은 남미질부성과 같은 시기인 신라 지증왕 5년(504) 9월에 역부 (役夫)들을 징집하여 흙으로 쌓았다. 북미질부성은 축조된지 425년 후인 고려 태조 13년(930)에 이 성의 성주 훤달(萱 達)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함께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여 고려에 복속되었다. 그 후 고 려 현종 2년(1011)에 흥해읍성이 축조됨에 따라 성의 기능이 약화되어 흥해군의 주변 성으로 조선 중엽까지 동북쪽의 해적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성의 흔적만 남 아 있고, 성내에는 수십 기의 묘지가 들어서 있다. 마을 동쪽 곡강천 옆에는 2004년 6월에 완공된 흥해 하수종말처리장이 있다. 24) 칠포리(七浦里)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있던 지역으로서 조선 고종 8년(1871) 동래로 옮길 때까 지 군사기지로 번창하던 곳이다. 중종 5년(1510)에 쌓은 칠포성의 흔적이 있고, 성벽 기층에 正德十年乙亥造築城 이란 글이 남아 있다.
616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강북(江北) 마을 앞을 흐르는 고현천의 북쪽에 위치한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칠포성터와 옛 칠포초등학교에 이르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 강서(江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9호로 지정된 칠포리암각화(七浦里岩刻畵)가 있다. 청동기시 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이 암각화는 가로 2.5m, 세로 1.5m, 높이 1.4m 의 자연석을 중심으로 주변 네다섯 개의 바위에 가면(假面)모양 같기도 하고, 검파형 (劍把形) 같기도 하며, 방패 모양이나 소머리 모양 같기도 한 문양이 여러 개 새겨져 있는데, 선사시대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2001년 8월에 대원군 척화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비는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5) 오도리(烏島里) 오도(烏島)는 검은 섬 이란 뜻이다. 섬목마을 앞 바다에 있는 바위섬이 까마귀처럼 검다고 오도(烏島)라 했다고 한다. 검댕이(檢丹) 청하면 신흥리로 넘어가는 길가에 비구니들만 있는 절이 있어 금단(禁斷)이라 한 것 이 변하여 금댕이(檢丹)이라 부른다. 섬목(島項) 조봉산(鳥烽山) 기슭 해안에 위치하는 어촌으로 오도로 건너가는 길목이므로 섬목이 라 했다. 청하면 청진리와의 경계 지점에는 박정희대통령각하순시기념비(朴正熙大統領 閣下巡視記念碑)와 1978년 김수학 경상북도지사가 세운 영일사방준공비가 있다. 2007 년 구봉산 일대에 영일사방기념공원을 준공했다. 26) 초곡리(草谷里) 사일(士逸)마을 어귀에 숲이 있어서 선비들이 숨어 살기에 적당하므로 사일(士逸)이라 고 불렀다 하며, 고려 말에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지낸 장표(張彪)가 입향하여 초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 하여 초곡(草谷)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월남참전 해병 상이용사들이 야산을 개간하여 농업단지를 형성하였던 해병새마을은 1980년대 이후 없어졌다. 한센병환자 정착촌인 베다니아 마을은 1994년 마을 전체가 주택단지 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성곡리로 이주하였다. 마을 어귀에는 연(蓮)이 자생하 는 서림지(西林池)가 있다.
제1장 마을유래 617 27) 학천리(鶴川里) 1914년 학림의 학 과 천상 의 천 을 따서 학천리(鶴林里)라 하였다. 학천리 골짜 기에 천곡사(泉谷寺)란 절이 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이 절은 우물이 유명하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중 이 곳에 머물면서 목욕을 한 후 완치되었다 한다. 왕은 자장율사(慈藏律師)로 하여금 절을 짓게 하고 천곡사(泉谷寺)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선덕여왕이 목욕을 했다는 전설상의 우물인 석정(石井)과 조선 숙종 15년(1689)에 세운 천곡사사적비(泉谷寺事蹟碑)가 있다. 1922년에 건설된 상수도 수 원지가 있었으나, 1998년 여름 태풍 예니호의 피해로 붕괴된 후 수원지를 폐지하고 2004년 도음산 산림문화수련장을 개장했다. 내맏이(川上) 학천의 남쪽 등들 위에 있으므로, 또는 학천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내맏이라 했다고 한다. 강당(講堂) 조선 영조 때의 선비 최천익(崔天翼) 진사가 제자들을 가르친 강당(講堂)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1990년대 말 1천 세대가 넘는 아파 트가 들어섰으며, 2001년 포항시농산물공판장이 들어섰다. 천곡사 입구에는 고려말 불교의 큰 별 배천희(裵千熙) 국사(國師)를 모신 사당과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 遺墟碑) 가 남아 있다. 2006년 11월에 문을 연 포항교도소가 있다. 28) 성곡리(城谷里) 성하(城下), 충곡(忠谷), 냉천(冷泉), 마장(馬場), 소푸리, 점촌(店村), 구억(九億)을 1914년 통폐합하여 성하와 충곡의 각 1자를 따서 성곡(城谷)이라 하였다. 말맛(馬場 馬坪) 조선조 효종 6년 (1655) 대동배(大冬背)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토성을 쌓고 말을 사 육하던 곳이며, 흥해 권무정의 궁사들이 말타는 연습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소포리(沼蒲里) 소포(沼蒲)가 있었다 하여 소포리라는 설과 소풀이 많이 난다 하여 소푸리라 했다고 한다. 나환자촌(애도원) 딴낫골이라고도 부르며, 6.25이후 개신교 재단에서 음성 나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개척한 양돈, 양계로 유명한 마을이다.
618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찬샘이(냉천) 200여 년 전 懷德黃氏가 터를 잡은 마을로, 물이 차고 맛좋은 샘이 있다하여 찬샘 이라 불렀다 한다. 점촌 상점과 주막이 있어서 마을명을 점촌 혹은 주촌이라 했다. 동네어귀에 한때 달전 지서가 있었다. 성하(城下) 마장성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하리라 불렀다 한다. 구억(九億) 사일마을과 경계지점에 아홉 명의 억대 부자가 살았다 하여 구억이라 불렀다. 금강 정사(佛敎講學)가 있다. 충곡(忠谷) 충신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충곡(忠谷)이라 했다는 설과 남서방위의 산이 학의 형국이고 이 마을이 학의 먹이가 되는 위치라 하여 충곡(蟲谷)이라 불렀다 한다. 29) 이인리(里仁里) 1914년 초리(初里)와 인제동(仁堤洞)을 합하여 이인동(里仁洞)이라 하였다. 초곳(初里) 인근 부락 중 처음 생긴 곳이란 뜻으로 초곳이라 불렀다 한다. 달전초등학교와 이 인교회가 있다. 의현동(義峴洞) 새마을 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소티재(小峴, 牛峴)에 위치한다 하여 의현(義峴) 이라고 하며, 소티골, 소티재라고도 부른다. 어리못골(御米洞 仁堤洞) 이곳에서 생산되는 유도벼의 품질이 우수하여 대궐에 납품되었으므로 어미(御米)골 이라 하고, 못을 어리못이라 했는데, 조선 초기 홍수로 못 둑이 터지자 못 터에 마을 이 형성되어 인제동, 어리못골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태(內基) 초곳의 안쪽이라 하여 안태라 불렀다 한다.
제1장 마을유래 619 30) 대련리(大蓮里) 1914년 대곡(1里), 연화(2里), 덕성(3里)을 통폐합하여 대곡(大谷)과 연화(蓮花)의 이 름을 따서 대련(大蓮)이라 하였다. 하일(大谷) 대련천 상류에 위치하며 골짜기가 크다고 대곡이라 했다. 연(蓮)이 많아 꽃이 필 때 경관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하일(荷日)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연화동(蓮花洞) 연(蓮)을 재배하던 연당이 많았던 마을이라 전한다. 덕성(德城 得聖) 서당골 사당골 왜병이 쳐들어 왔을 때 덕이 있는 분이 설득하여 물러가게 했다고 덕성(德城)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배천희 국사와 같은 큰 인물이 살던 곳이라 하여 득성(得聖) 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배천희 국사가 상봉재 중턱에 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교육하였 기에 서당골, 국사의 사당이 있었다 하여 사당골이라고도 불렀다 전한다. 국사는 수백 수의 닭을 놓아 길렀는데 한 번도 산짐승의 피해가 없었다 하며, 집터에는 유허비가 남아 있고, 비각은 6.25때 포격 당해 파손되었다. 포항예술고등학교(1998년 개교)가 위치해 있다. 2. 신광면(神光面) 1) 냉수리(冷水里) 신광면의 최남단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8개의 자연부락을 합하여 냉수리(冷水里)라 하였다. 1리에는 용천(龍泉), 밭가운데 마을, 아랫마을, 주막(酒幕)각 단, 모골, 새각단이 있고, 2리에는 신리(新里)와 원골이 있다. 용천(龍泉) 이 마을 북동방위에 용박골(龍岩谷)이 있고 그 안골에 신리지가 있다. 못 안쪽에 용 마가 나타나 마주(馬走) 쪽으로 갔다는 전설을 가진 용암(龍岩)이 있는데, 여기서 솟아 난 샘물을 용천이라 하고,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용천이라 했다. 밭가운데 마을 용천마을 아래쪽 밭 가운데에 마을이 형성되자 지어진 지명이라 전한다.
620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아랫마을 용천마을 아래쪽에 위치하며 평해황씨와 청주양씨가 개척하여 세거하고 있다. 이 마을 남서 오밋당의 두 아름드리 당산목에서 당제를 지내왔는데, 이 나무를 없앤 후 마을에 우환이 잦은지라 다시 당산목을 심고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내다가 30년 전부 터 지내지 않는다. 여강이씨(驪江李氏) 재실인 이로당(履露堂)이 있다. 주막각단 주막거리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경주와 청하로 통하는 주도로가 이곳을 지나가 주막이 많이 있 었던 마을이란 뜻에서 주막각단 또는 주막거리라 불렀다. 조선 말엽 경상감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교회 건너편 위치에 있던 세 아름드리 회화나무 정자 그늘에 쉬면서 마신 샘 물이 워낙 차고 맛이 좋아 그 정자나무를 냉수정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그 뒤부터 이 주막거리는 물론 아랫마을과 신리 일원을 돌말골(石斗洞)이라 부르던 것을 냉수동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914년에는 용천, 새각단까지 통틀어서 냉수리라 칭하였다 한다. 새각단 경주시 강동면과 경계지역에 위치하며 40여 년 전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룩 한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이라 한다. 16호 중 밀양박씨가 8호로 가장 많다. 뒷산에 아 기를 안은 여인 형상의 바위가 있어 주민들이 보호하고 있는데, 이 바위가 무너질 때 마다 바람난 여인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다. 모골(慕谷) 1959년 축조된 용천지(소매기못)를 돌아 산모퉁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월성이 씨 송와공(松窩公)을 모신 모현사(慕賢祠)가 있어 모곡이라 불리었다 한다. 마을의 위 치가 한쪽 모퉁이에 있어 방곡(方谷), 모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근년에 이르도록 3호 가 살았고 모현사는 경주시 강동면 다산으로 이건하였다. 새마을 신리(新里) 돌말골(石斗谷) 골짜기 북쪽 언덕에 50여 호가 사는 마을이다. 여강이씨 4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면서 신리라 하였다. 원래는 이 마을 남쪽 언덕 등들 건너각단에 십수 호의 진주강씨 집성촌이 있었으며, 그 일부가 신리 쪽에도 마을을 개척하여 살고 있 었다고 한다. 원곡(院谷) 우각리(牛角里)로 넘어가는 언덕을 원(院)고개라 부르며 부근에 죽동원(竹洞院)이 있 었다고도 한다. 이 고개 동편에 기계유씨(杞溪兪氏)가 개척하여 10여 호 살았는데, 6.25동란 때 함포사격이 격심하였던 격전지다.
제1장 마을유래 621 2) 흥곡리(興谷里) 1914년 당내, 원흥곡, 마주와 벽동, 송곡, 기계면 종단의 일부를 합하여 흥곡(興谷) 이라 하고 당내(堂內)와 원흥곡(元興谷)을 2리로 하였다. 서편 동풍지산을 넘으면 기계 면 미현리에 닿는다. 당내(堂內) 마을 어귀에 당산목이 있는 큰 송림이 있었기에 불리워진 지명인데 지금은 십수 그 루만 남아 있다. 오리 모양의 나무를 세우고 제단을 쌓은 곳에서 정월보름날 골안골 마을과 합동으로 당제를 지내왔다. 10여 년 전에 제당을 지었다. 골목신(神)으로 진씨 (陣氏)를 모시고 있다. 월성최씨와 은진송씨가 세거하고 있으며 파평윤씨도 7호나 된 다. 임란이후에 형성된 마을이라 전해진다. 원흥곡(元興谷) 골안골이라 부르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근세에 이르러 흥하는 마을 이란 뜻에 서 흥곡이라 개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1, 2리 모두를 흥곡이라 호 칭함에 따라 원래의 흥곡이란 뜻으로 원흥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벽동 마주(馬走 麻助) 주막거리 서편 청룡봉(靑龍峯)으로 뚫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냉수2리 신리에 사는 이씨 집안에 태어난 아기가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등 기이한 일이 있었다는 전설에 의해 용마(龍馬)가 달아난 방향의 마을이라고 마주(馬走)라 하였다 한다. 마을 진입 도로변에 고인돌 1기가 있다. 옛날 삼밭이 많았을 때 마전(麻田)이라 부른 것이 와전되어 마조(麻助)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점골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했으며, 옹기를 굽던 점(가마)이 있었다 하여 점골이라 불렀 다. 지금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3) 우각리(牛角里) 도음산(禱陰山)의 북서 산기슭에 형성된 세 개의 자연부락인 우각(愚覺), 장당(長堂), 송동(松洞)을 합하여 1914年 우각리라 하였고, 1, 2리로 나누었다. 우각(愚覺 牛角) 멀리 비학산 쪽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와우(臥牛) 형상을 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 어 있다 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원래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손
622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자 오형제 중 막내인 이의온(李宜溫)이 입향하면서 어리석음을 깨닫는 현자(賢者)의 마을이 되라는 뜻으로 우각(愚覺)이라 불렀다 한다. 장대이(長堂) 1리인 우각에서 이사 온 여강 이씨들이 이룩한 마을이라 전하며, 옛날 마을 동편 산기슭 우각 가는 길(안들)에 기(奇) 정승이 살 때 그 집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 으므로 장당(長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장당 북쪽 300여 보(步) 거리의 송동(松 洞)이라는 송림 속 마을에는 20년 전까지 청송심씨(靑松沈氏)가 15여호 집성촌을 이 루어 살았다 한다. 4) 죽성리(竹城里) 1914년 죽동(竹洞)과 중성(中城), 시룻골을 합하여 죽성(竹城)이라 불렀다. 원래의 중성은 없어지고 시룻골을 중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댓골(竹洞) 대나무가 울창한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나, 대나무는 화재로 많이 없어졌 다 한다. 마을 동남편의 숲은 백로와 왜가리의 서식처로 매년 좀에 수백 마리의 백로 왜가리가 날아와 새끼를 낳아 기른다. 마을에서는 백로와 왜가리를 위해 벌칙을 정 하여 보호하고 있다. 중성(中城) 토성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우물이 근래까지 있었는데, 이 부근에 형성되 어 있던 마을이다. 그 샘에 범이 빠져 죽은 이후 변괴가 잦고 차츰 쇠몰하여 버렸다 전한다. 이 마을은 우각동에 살던 김해김씨가 옮겨와서 일군 마을이라 하며 지금은 그 후손들이 시루골에 옮겨서 살고 있는데, 이에 연유하여 시룻골 마을을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시루골 윗각단과 굼각단, 아랫각단이 있으며, 떡 시루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음에 연유한 마을 이름이다. 20여 년 전까지는 83호까지 살던 것이 지금은 60호 정도뿐이며, 김해 김씨 20여 호, 월성이씨 12호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5) 상읍리(上邑里) 비학산(762.3m) 동편 기슭에 위치하며, 1914년 상읍(1리), 새각단, 드문달이, 절안 마을(이상 2리)과 같은 자연부락을 통폐합하여 상읍(上邑)이라 하였다.
제1장 마을유래 623 상읍 신광현기(神光縣基)가 있는 토성리의 윗쪽 마을이 되므로 읍의 윗마을, 즉 상읍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풍곽씨(玄風郭氏)가 개척한 마을이라 하며 나주임씨(羅州林氏) 가 세거하고 있다. 70여 호가 살며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새각단 새로 생긴 마을로서 30호가 살고 있다. 드문달이 법광사지 동쪽에 여기저기 산재하는 27호 정도되는 마을이다. 언덕 위의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절안(寺內) 법광(法廣) 법광사지내의 마을로서 5호가 살고 있다. 마을 남쪽에 1930년에 새로 건립한 법광 사(法廣寺)가 있다. 신라 진평왕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숭안전(崇安殿)이 있다. 6) 토성리(土城里) 신라와 고구려가 엿재를 분계선으로 하여 서로 대치하던 시절에 흙벽돌로 쌓은 옛 성터를 중심으로 성내, 장터, 윗각단, 샛각단, 비선거리, 너매각단이 있고, 그리고 앞걸 (南川) 건너에 갱빈마을이 있으며 이들을 합하여 1914년 토성리라 하였다. 동잉음현(東仍音縣, 신라 초기), 신을현(神乙縣, 신라 경덕왕 정유년), 신광현(神光縣, 고려 태조 13년~조선 고종 광무 13)의 기지(基地)가 있던 곳으로서, 예부터 이 마을 을 토성리라 통칭하거나 신광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지금은 면소재지가 되어 있다. 장터 신광 100여 호가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웃각단과 도로 서편에 형성된 장터마을 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웃각단과 그 동편 옛 창고 터에 형성된 마을인 창마을, 신광중 학교 서편에 형성된 비선거리와 같은 마을을 합하여 성안(城內)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샛각단 장터와 너매각단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샛각단 일 부른다. 너매각단과 연결되어 있 으며 토성 2리에 속한다. 토성2리에는 160여 호가 사는데 월성김씨가 10여 호, 파평윤씨가 30여 호 세거하 고 있다. 이 마을 앞 논들에 있는 200여 년생 참나무 당산목에서 1 2리 합동으로 김 씨 골막이 신위를 모시고 동제사를 지낸다.
62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갱빈마을 흔히 앞걸이라 부르는 남천 건너 탑골 아래쪽에 10여 호 살던 마을인데, 사라호 태 풍(1959) 때 침수되어 이주하고 마을이 없어졌다. 토성리의 동편에는 일명 향교산(鄕校山), 일봉(一峯), 관봉(冠峯), 월봉(月峯)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 독매산(獨山, 104m)이 있고 그 북동쪽에 또한 딴봉산(獨山)이 있어 일봉(日峯)이라 하는데, 옛날에 이 두 봉우리 사이에 신묘한 빛이 발산하였다 하 여 신광(神光)이란 이름이 생겼다 전해지기도 한다. 7) 사정리(士亭里) 1914년 사미(士美), 모정( 茅亭), 가척(加尺)을 합하여 사정이라 했다. 1리에는 가척, 안모정, 바깥모정, 2리에는 사미의 웃돔, 아랫돔이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가 근 년에 개설되었다. 가척 마을이 처음 생성되었을 때 멀리서 보면 자의 눈금처럼 보였기에 붙여진 지명이라 전한다. 20여 호로서 처음 마을을 일군 주(朱)씨는 없고 평해황씨, 월성최씨가 그 후 세거하 였는데 지금은 각각 4호 정도씩 살고 있다. 주성욱(朱成郁)의 가척보시설공적비가 사 미로 가는 곳에 있다. 모정 옛날 넓은 잔디 벌에 울창한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 한다. 월성 김씨 집성촌으로서 안모정, 바깥모정이 있으며, 월성김씨 문중 소유의 재실 일모정(一 茅亭), 쌍송정(雙松亭), 추모정(追慕亭)이 있다. 동제는 정월보름에 안모정에 있는 연당 곁 상수리나무 당산목에서 지낸다. 사정(士亭) 원래는 이 마을 남쪽 당산목 부근에 아주 맛좋은 샘이 있어서 새미(泉味)라 불러오 다가 200여 년 전 고을 현감이 순시차 들렀을 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에 감탄하여 사미(士美)라 칭하였다 한다. 큰각단, 모시각단(평지마을), 대밭각단으로 불리는 세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제당은 모시각단에 웃당, 큰각단에 아랫당이 있어 따로 지냈으나 최근에는 합동으로 두 곳에 번갈아 지낸다.
제1장 마을유래 625 8) 안덕리(安德里) 1914년 안지(安地)와 지덕(地德)을 합하여 안덕(安德)이라 하였는데 자연부락으로는 2리에 못산, 개척당, 큰마을, 딱밭골이 있고, 1리에 못안, 안마을, 황토골, 안지(安地) 등이 있으며, 특히 야지마을(안마을)은 목축업 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안지 마을 뒤 안지산(安地山)에 토굴이 하나 있어 빈번한 외침 때 피난하기 좋은 곳이라 하여 안지라 부른다. 월성김씨 터주마을인데 지금은 2호가 살며, 마을 총 호수는 20 여 호다. 황토골 황토(黃土) 지역이며 월성이씨 10여 호가 집성 세거 했는데 4호로 감소되었다. 못안 12호 정도가 살며 야(也) 자 모양의 산이 다섯이나 있다 하여 오야(五也)라 하고, 못이 있어 오야지라 한 데서 연유하여 마을 이름도 오야지라고도 부르며, 임란 때 주 씨(朱氏)가 살면서 못을 막았다 하여 주가동(朱家洞)이라고도 불렀다. 옛날 젊은 과부 가 살면서 엿을 만들어 팔았는데, 사방에서 찾아와 엿치기를 하였기에 엿치기 마을 이라 한 것이 음이 변화하여 야치마을로 불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큰마을 20여 호 살던 월성이씨 집성촌으로서 8대째 이어 살고 있는데, 지금은 12호가 농업 에 종사하고 있다. 마을 북동 언덕받이에 160여 년생 팽나무 당산목(수고 15m 가슴 둘레 2.0m)에서 동제사를 정월보름에 2리에 속하는 자연부락 합동으로 지낸다. 딱밭골 한지(韓紙) 원료인 닥이 많이 생산되던 마을이며 15여호 월성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 었는데 지금은 6호만 남아 있다. 마을 어귀에 300여년생 느티나무 정자목 2그루가 있다. 개척당 큰 마을과 못산마을 중간 지점에 45년 전 형성된 마을로서 20호가 살고 있다. 못산 홍수로 인하여 제방이 유실되고 마치 산처럼 변모된 못터에 마을이 생겨 못산이라 부른다. 50여 호 살던 마을인데 지금은 20호 남아 있으며 청주한씨가 7호, 전주이씨 가 5호 세거하고 있다. 못둑은 80여m 그 흔적이 잔존하며 못둑 북쪽 부위 산록에 한
626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림정자(翰林亭子)란 큰 바위와 두 그루의 팽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어느 한림학사를 지낸 분이 쉬어간 곳이라 전한다. 9) 만석리(萬石里) 구만(九萬)과 입석(立石)을 합하여 1914년 만석리(萬石里)라 통칭하고 1, 2리로 나누었다. 구만리 마을 남쪽에 오묵강 숲이라는 반달형 언덕에 노거수들이 수십 그루 남아 있다. 옛 날 물이 굽이쳐 흐르던 곳에 흙이 쌓이고 농토를 일구어 마을을 형성하니 굽안마을이 라 불렀는데 훗날 구만으로 변음된 것이라 한다. 선돌(立石)마을 현재 마을 남서쪽에 높이 2.4m, 너비 1.2m 정도의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주민들 은 정월 보름 이 신석(神石)에 동제사를 지낸다. 이 돌은 신라 때 경주로 옮겨가던 것 이란 전설이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이 선돌 서편 산기슭에 자리하였다 하며 월성손씨 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100여 호가 사는 이 마을에 월성손씨는 7호, 월성최씨는 8호 세거하고 있다. 10) 반곡리(盤谷里) 1914년 반곡, 쇳골, 엿재, 무덤실, 물고래와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반곡이라 하였 다. 넓직한 큰 바위들이 여러 개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불리어진 지명이다. 1945년 반곡지(만수면적 약 20ha) 축조로 바위들도 대부분 물속에 잠기고 140여호 중 반이 수몰되자 현 위치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른다. 큰마을 절강편씨(浙江片氏)가 많이 살고 있으며 총 호수는 40여 호다. 마을 서북쪽에 도체 이 숲이 있어 마을의 풍치를 돋운다. 음력 2월 28일 마을 어귀에 있는 제당에서 인동 장씨(仁同張氏) 할아버지와 월성이씨 할머니 신위에 제사를 지낸다. 오세흥(吳世興), 김찬묵(金燦黙) 두 선비가 창건하였던 반곡서당(盤谷書堂)은 현재 휘문정(輝門亭)이란 편액을 달고 절강 편씨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쇳골(金谷) 반곡지 남서편 골짜기의 마을로서 계곡에 금빛 모래가 많이 있어 불리운 지명이다. 반 곡지 축조 후 젊은이들이 잇달아 죽는 괴변이 일어나 주민들이 이주를 많이 했다고 한다.
제1장 마을유래 627 고래 물고래 반곡지 아래 저습지에 물이 차기 쉬운 마을을 뜻한다. 엿재 청하면과 경계를 이루는 육현(六峴) 중턱에 위치하며 2가구 정도 남아 있다. 이 고 갯마루에는 200여 년생 노송(수고 20m 흉위3.3m)이 있어 당제를 근년까지 지내 왔 었고 서낭당이 있었다. 무덤실 엿재마을 남쪽 산허리에 위치하고 주위에 무덤이 많다 하여 불리게 된 명칭이다. 11) 기일리(基日里) 반곡지(盤谷池)에서 서쪽으로 터인 좁은 골짜기에 학전(鶴田)과 새터, 평장골(平章 谷), 올금당과 같은 작은 마을들이 있는데, 1914년 이들 마을을 통폐합하여 기일리(基 日里)라 하였다. 학전골 기일 입구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흔히들 아랫마을이라 부른다. 비학산 뒷 골짜기 마 을이란 뜻으로, 혹은 학의 서식처가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지명이며, 진주강씨가 500여 년 전에 일구었다고 한다. 30여 호가 산다. 새터 학전 남서쪽 마을로서 부락 뒤 옻나무골 어귀에 약수터가 있어 약수동이라 부르기 도 한다. 평장골 17호가 사는 기일의 중심마을로서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가 출생하였다 하여 불리 어진 이름이다. 수령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 숲의 제당에서 정월 보름 날 사구당 할매 신위에 당제를 지낸다. 올금당 평장골 남서 골짜기에 위치하며 옛날 용 다섯 마리가 승천했다는 전설을 갖는 오룡 탕(五龍湯)이란 곳이 있어 마을 이름을 오룡탕골이라 부른 것이 변음되어 오금당, 올 금당이라 했다 한다.
628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12) 마북리(馬北里) 1955년 축조한 마북지(만수면적 12ha)에서 괘령(掛嶺)으로 트인 깊은 골짜기에 형 성된 마을이다. 검등골, 인편, 수박골은 없어지고, 큰마을은 마북지 확장공사로 대부분 수몰되고 10여 호가 남쪽 산기슭으로, 다수는 흥해읍 북송리로 이주하였고, 당수동에 는 20호 정도 살고 있다. 마북이란 지명은 반곡이 역촌일 때, 방사(放飼)한 말들이 말 발지재를 넘나들며 돌아다녔으므로 생긴 것이다. 큰마을 보통 마북이라 부르기도 하며, 창령조씨가 터를 잡고 후에 안동권씨, 인동장씨, 진 주강씨가 입향하였다 전한다. 마을 어귀에는 안동권씨가 소반에 묘목을 얹어와 심은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어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낸다. 마북지 확장공사로 이 마을 대부 분과 이 나무가 침수될 상황에 처하자 노거수회와 지역 언론의 구명운동으로 1998년 남쪽 언덕으로 이식되었다. 당수동(堂樹洞 堂伐嶝) 400여 년전 인동장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들어와 정착하면서 뒷산에 우거진 느티나 무 숲에 있는 거목에 제사를 지내게 되어 당수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근대에 이르 러 그 숲을 베어 팔아버리니 당벌등(堂伐嶝)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방아괘 모 습의 괘령(掛嶺)을 오르는 산중턱에 검등골이라는 5호 남짓 살던 마을이 있었는데, 한 때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은거하였다 전한다. 이 재를 넘으면 죽장(竹長)의 상옥(上 玉)으로 통한다. 13) 호리(虎里) 흔히 호리못이라고 부르는 용연지(龍淵池, 1953년 축조, 만수면적 87ha) 주위에 위 치하며 자연부락으로는 호리, 윗두들, 개척단이 있다. 원래 범촌, 중리, 윗두들과 같은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 이들을 합하여 호리(虎里)라 하였다. 1953년 용연지가 준공 되면서 김해김씨가 개척하였다는 40여 호의 각 성씨가 살던 중리(아랫마을)는 수몰되 고, 상징바위인 범바위(虎頭山)도 만수 땐 머리부분만 노출될 뿐이다. 용연지란 이름 은 이 못 상류 지역에 마치 용이 앉았던 모양의 흔적이 있는 큰 바위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부르게 되었다. 새각단 중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못 남쪽 신작로변에 형성한 마을로 개척단, 신흥리, 새마을 등으로도 불린다. 근래에 식당과 숙박업소가 많이 들어서 있다.
제1장 마을유래 629 왯두들 웃두들 북서쪽 언덕 위에 위치하며 8호 정도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밀양박씨가 모여 살며 과수원이 많다. 마을어귀 동산에 참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중파 시조 재실인 호계정사(虎溪精舍)가 있다. 3. 청하면(淸河面) 1) 덕성리(德城里) 고려 8대 현종 2년(1011) 지금의 성터에 토성을 쌓아 하방(河芳 또는 花芳)에 있던 현기(縣基)를 옮겨 덕성현(德城縣)이라 하였다. 이에 연유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 합 시에 향교골, 핑이골, 비달골, 동문걸, 서문밖, 덕송(德松)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덕성리라 통칭하였다. 동문걸 동밖 성의 동문(東門)밖에 형성된 마을로서 주로 상가를 이룬다. 우체국과 농업기술센터가 위치해 있고, 1914년 서문밖에 설립되었다가 1959년 이건(移建)된 제일교회가 있다. 일 제 때 건립된 금융조합은 농협으로 개조되어 사용되다가 90년대 초에 장터 곁으로 이건 하였다. 성터에서부터 이 거리에 걸쳐 청하장이 섰는데 5.16이후 새 장터로 옮겨졌다. 서문밖 성밖 덕성서문(德城西門) 밖에 형성된 마을로서 지금은 비달골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치 도길인 7번국도가 포항, 영덕간에 뚫리기 이전까지 경주, 대구로 가는 주도로가 연결 되었던 곳으로서 금은방과 각종 점포가 있었던 지역이다. 비달골 원래는 현재의 위치보다 서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인데,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부락 이었기에 비달먹다(비루먹다) 라는 어원에서 생긴 지명이라 전한다. 핑이골 성의 동편 골짜기에 위치하며 그늘진 곳에 얼음 저장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 며, 또는 빙판이 생겨 잘 녹지 않으므로 빙골이라 하였던 것이 핑이골로 음이 변하였 다 한다. 옛날 바다에서 큰 거북 한 마리가 새끼 여섯을 이끌고 이 마을에 올라와 살 았는데 그 후부터 마을이 번창하였다하며, 정월대보름이면 제당(祭堂)에서 이 일곱 거 북신위(神位)에 제사를 지낸다.
630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덕송(德松) 동문걸의 큰 길 건너 동편에 노송림이 울창하여 덕송이라 하였는데 차츰 마을이 형 성되었다. 저자걸이 있고 청하침례교회가 있다. 교동(校洞) 향교가 있어 향교골, 교동이라 불렀으며 2리에 속한다. 월성이씨(月城李氏)의 집성 촌으로서 골 원의 사저(私邸)와 아전이속(衙前吏屬)들의 사택 등 고급주택이 즐비하던 마을이다. 2) 덕천리(德泉里) 청하군 역면지역(驛面地城)이었던 것을 고종 32년(1894) 내북면(內北面)에 편입시켰 다가 1914년 관동(館洞)과 송천(松泉), 외일동(外一洞)과 외삼동(外三洞)의 일부를 병 합, 큰 샘(버덩우물) 이 있다하여 덕천리라 하고 송라면(松羅面)에 편입시켰다. 1973년 7월 1일 주민의 편의를 위해 다시 청하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동(館洞) 조선조 때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이 있던 마을이며 내일동이라 부르던 것을 고종 32년 찰방(察訪)이 폐쇄되자 관아소재지(官衙所在地)라 하여 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둘레 521척, 높이 5척의 석축담장이 있었다하며, 연당(蓮塘)이 있던 부근에 300~400 여 년생 은행나무 당산목(堂山木)이 있어 유씨(兪氏)터주, 진씨(陳氏)골목 신위에 동제 사를 지낸다. 조선조 후반기에 이르도록 관전장(館前場 8일, 18일, 28일)이 섰다. 송천(松泉) 내이동이라 부르던 것을 찰방이 없어지자 송천수 속에 펑펑 솟아 흐르는 샘 이름을 따서 송천이라 하였다. 이 샘에 일인(日人)들이 혈(穴)을 질렀다 한다. 20여 그루의 노 거수가 남아있는 송천숲 서편에 제당이 있어 정월보름마다 안씨(安氏)터주 신위에 제 사를 지낸다. 3) 미남리(美南里) 1914년 위 필미(筆尾), 남천(南川), 새장터, 관덕(觀德), 호암(虎岩)의 일부를 합하여 미남리라 하였다. 위필미 필미 뒷산이 붓끝 같은데 연유하여, 한편으로는 이 산이 일제강점기 철도역사터를 닦을 때 없어지자 붓을 가까이 하는 선비가 많다는 뜻으로 필미(筆尾)라 부르게 되었다 한
제1장 마을유래 631 다. 지형이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마을 가운데 찜대를 세워 두고 있으며, 배가 떠 내려감을 막는다는 뜻과 홍수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마을 남서쪽에 필미수(筆美藪)라 는 송림을 70년 전에 조성하였다. 그 이후부터 가난하던 이 마을이 부촌(富村)으로 변 모하였다 한다. 일제 때부터 과수원이 많던 곳이다. 남치이 남천(南川) 용산(龍山) 서북 편 자락에 형성된 마을인데, 미남천의 남쪽에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려 졌다한다. 마을 북동쪽 하천변에 있는 탕갓봉 중턱 서당골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자리 를 잡고 마을을 일구었는데, 새 국도가 30여 년 전에 뚫리면서 마을이 양분되었다. 땅골 당동(唐洞) 용산 한 골짜기 속에 두세 집이 남아 있다. 초계정씨(草溪鄭氏) 재실(齋室)과 김해김 씨(金海金氏) 재실이 있으며 천제단기도원이 있다. 옛날 신당(神堂)이 있었다 하여 당 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용산 정상 남서 허리목에 용산사지(龍山寺址)가 있다. 새장터 사장터(射場) 조선조 때 궁술(弓述)을 연마하던 곳으로서 1910년대까지 망시루(望矢樓)가 있었으 며 그 당시엔 오막사리 한 두어 채 있던 곳이라 전한다. 덕성리 북동편 도로변에 있 던 청하지서가 1958년 이건(移建)되어 오고, 5.16직후 덕성리 성터에서 서던 장이 이 마을 가까이 옮겨옴에 따라 새장터라 부르게 되면서, 마을이 급속히 커지게 되었다. 관덕동(觀德洞) 관덕관송전(觀德官松田)의 북동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이라 전할 뿐이다. 관덕(觀德) 은 덕성(德城)을 바라다보는 위치에 마을이 있다 뜻으로 풀이된다. 관덕관송전은 세종 때 조성된 숲으로서 그 일부가 남아 기청산식물원(箕靑山植物園)이 보전하고 있다. 4) 필화리(筆花里) 새 7번국도가 이 마을 1, 2리 사이를 갈라 지나고 있으며 엣 봉송전(鳳松田) 서쪽머 리 자리에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에 의하여 10여 호가 새마을을 이루어 있다. 1914년 하필봉(下筆峰)과 화지동(花枝洞)을 합하여 필화리라 불렀다. 해필미 하필봉(下筆峰) 하필미(下筆尾) 구석필미 마을 뒷산이 붓끝 같다 하여 필봉 필미라 했으며 바다 쪽 마을을 하필미(下筆尾), 혹은 해필미(海筆尾)라 불렀다 한다. 정월보름날 마을어귀 노송림(老松林) 당산목에서 동제사를 지냈는데, 최근 격년제로 지낸다.
632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곶이골 화지동(花枝洞) 1리 구역으로서 옛날 이 마을 앞으로 청하천이 휘감아 흐를 때 현내사창(縣內社倉) 이 있었고, 지형의 모습에 의해 곶이(串)골 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성균진사(成均進士) 에 이필성(李必盛)이 과거에 합격하여 화짓대를 꽂고 석달 열흘 잔치를 벌였던 것에 연유하여 화지골이라 부른다 전한다. 한편 김해김씨 문중에서도 대과(大科)에 급제하 여 화짓대를 꽂았다 하며, 도산서원장(陶山書院長)을 지냈다 전해진다. 샛돔에 있는 정치인 이기택 씨 생가 앞에 있는 회화나무 당산목에서 연안이씨(延安李氏) 신위를 모 셔 놓고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5) 용두리(龍頭里) 청하천의 하구인 용산 머리 북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새마을(1리), 새터, 오두, 허후 리(이상 2리)와 같은 자연부락과 화지동 일부를 합하여 1914년 용두리라 하였다. 2010년 이후 이 일원에 철도역이 들어설 계획이라 한다. 용산리 용산기슭에 자리했던 마을인데 새마을을 일구어 모두 이주해 버리고 지금은 전답 (田沓)으로 변해있다. 고인돌 4기가 있다. 새마을 새마리 용산리가 이동하여 일군 새마을이다. 해변엔 풍광 좋은 조경대(釣鯨臺)가 있는데 옛 날 조선조 때는 정자(亭子)가 있어 이곳에서 백일장(白日場)이 열리기도 했었다. 4년마 다 삼짇날 양씨(襄氏)터주와 유씨골목 신위에 제사를 드린 후 별신(別神)굿을 했다. 새터 신기동(新基洞) 월포초등학교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두리의 이좌도(李座道)가 명당터를 찾아 이사를 와서 개척한 마을이다. 후에 서씨(徐氏)가 이주하여 무과에 급제하니 이씨는 오두리로 되돌아갔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허후리 외휘리(外揮里) 외휘라리(外揮羅里) 중휘리(월포 3리) 남동 해변 마을로서 개포(介浦)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을 때 외곽수비대의 지휘소가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지명이라 전한다. 오디 오두리(鰲頭里) 강성산(江城山, 150m) 동편 산기슭에 10여 호 남아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에 이 르기까지 12우물을 먹는 현내(縣內) 연안 최대의 부촌(富村)이었고, 서당이 있었다 한다.
제1장 마을유래 633 영천이씨(永川李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세거하면서 효우(孝友) 이원량(李元良)과 오 암대사(鰲岩大師)를 배출시켰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어린 시절 한때 여기서 자자 라면서 서당을 다녔다하여 이 세 인물을 오두삼성(鼇頭三星)이라 불렀다는 구전이 있다. 6) 월포리(月浦里) 월포만(月浦灣)을 끼고 있는 본면(本面) 연안 최대의 마을이다. 근년에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여름 한철 크게 붐빈다. 1리는 적은포, 2리는 개포(介浦), 3리는 월아구(月牙 丘)와 중휘리(中揮里)를 합친 마을인데, 1914년 월아구의 월 자와 개포의 포 자를 취 하여 월포라 이름하였다. 적은포 소구포(所丘浦) 월포천변(月浦川邊) 월현산(月峴山, 月來山 다래산 달애산 달래산, 해발 106m, 대보름달이 덕성(德城)에서 보면 이 산마루에 돋아 뜬다)남쪽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 다. 서쪽 논들에는 고인돌 1기가 남아있다. 낫개 개포 청하천과 월포천(月浦川)이 날라 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육지와는 샛강으로 인 하여 따로 떨어진 새터에 신라 때 수군만호진영기(水軍萬戶鎭營基)가 설치되었던 마을 이다.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들막 달래두들 월아구 고인돌군으로 추정되는 큰 어금니모습의 바위들이 있는, 달이 뜨는 언덕이란 뜻으 로 불려지는 마을이다. 근년에 이르러 이 바위들은 없어졌으며, 마을 역시 동쪽언덕 아래로 이동하여 버리고 언덕은 논으로 변모하여 왔다. 300여 년생 팽나무당산목이 있고 구월 중기에 동제를 지낸다. 중휘라리 중휘리(中揮里) 수군만호(水軍萬戶)가 개포에 있을 때 이곳에 중군(中軍) 지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 정된다. 월포초등학교 동편 늪지는 옛날 청하천이 흐른 지역이며, 이곳에서 화살촉과 칼 등의 병기류(兵器類)가 출토되었으며, 고인돌로 추정되는 입석(立石) 1기도 남아있다. 7) 방어리(方魚里) 다래산 동편 산기슭에 자리한 어촌으로서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서편 언덕배기 제당이 있는 주변이라 한다. 마을 어귀 해변의 큰 바위가 말같다 하여 말바윗골이라
63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불렀는데 방어가 잘 잡히는 현 위치로 마을이 이동하게 된 후 방어진(方魚津)이라 부 른 데서 방어리라 불리게 되었다. 영일정씨(迎日鄭氏) 터주에 월성이씨(月城李氏) 골메 기 신위를 모시고 동제사를 올리는데 정월과 구월에 두 번 지낸다. 국립수산진흥원 영일수산종묘배양장이 있고, 방어리침례교회가 있다. 8) 이가리(二加里) 1914년 백암동(白岩洞)과 이기로포(二岐路浦), 그리고 소동(蘇洞)과 청진(靑津)의 일 부를 합하여 이가리라 하였다. 백암동(白岩洞)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마을인데 바다가 멀어지면서 대부분이 바닷가로 이주하고 소 수의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원래 마을보다 서쪽 산록으로 옮겨서 정착해 있다. 도씨(都氏)와 김씨(金氏), 서씨(徐氏)가 세거하였던 마을로서, 백암이란 이름은 주변 암 반층이 이암층의 흰색에 연유하거나 혹은 형제바위 앞 물새 똥으로 희게 된 백암이 보이는 언덕에 마을이 처음 현성되었기에 연유한다고도 한다. 서편 언덕 위엔 황새마 을이란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이는 송림 속에 황새가 깃들은 데서 연유한다. 이기로포(二岐路浦) 이기로진(二妓老津) 이가리(二哥里) 옛날 두 기생(妓生)이 청진과 백암의 갈림길에 터를 잡고 늙도록 마을을 개척하면서 살았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 전하기도 하며, 도씨와 김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로 하 여 각각 집성촌(集姓村)을 일구었는데 차츰 번성하면서 서로 합하여 한 마을이 되었다 하여 이가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9) 청진리(靑津里) 월포만 남단 해안 돌출부위에 형성된 어촌마을로서 3리인 보리진은 흥해읍의 오도 리(烏島里)와 경계를 이루며, 마을 남서쪽에는 옛 봉화산(烽火山)인 묵은봉(舊烽山, 해 발 104m)이 있다. 1914년 대곶이(1리)와 흥해군의 푸나리(2리), 보리진(3리)을 합하여 청진이라 하였다. 대곶이 죽곶(竹串) 바다쪽으로 뾰죽이 나온,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50년 전까지는 마을 앞 해변에 있는 장군바위에서 동제사를 지냈는데 요즘은 마을 제당에서 달성서씨(達城徐氏)터주 와 김해김씨 골목신위에 구월 중기에 지낸다.
제1장 마을유래 635 푸나리(靑津) 원래는 서편 골짜기 송림 울창한 곳에 있었으므로 송정리(松亭里)라 했었는데 바닷 가로 이주하여 푸른나리, 푸나리(靑津)라 이름을 바꾸었다. 동제사는 영신당(靈神堂)에 서 김해김씨 터주와 월성최씨 골목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두 번씩(정월보름과 구월중 구) 지내고, 5년마다 별신굿을 해 오다 2007년에 폐지되었다 한다. 보리진 포이포(包伊浦) 포위진(包圍津) 모진(牟津) 임란 때 왜적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는 구전(口傳)도 있으며, 보리가 잘되는 어촌이 었다는 설도 있다. 안동권씨(安東權氏)와 김해김씨가 세거하였다. 10) 신흥리(新興里) 본 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옛날 호수지역이라 한다. 청하군의 동면(東面) 지역으로 서 1914년 소동(蘇洞)의 일부와 흥해군 검단동 일부를 번현(蕃峴)에 병합하여 신흥리 라 하였다. 원래 마을의 중심인 번현(蕃峴)은 뒷산 산기슭에 있었는데, 칠포가 수군만 호의 진기(鎭基)가 되어 번창하게 되자 인근 마을인 이곳도 마을 앞 평지로 이동하여 신주택지(新住宅地)가 형성되니 신흥(新興)이라 불렀다 한다. 번현은 그 산 꼬리의 모 습이 되돌아 굽어 있는 고로 반현(反峴)이라 불렀는데, 훗날 번현이라 고쳐 불렀다 한 다. 이 마을 남서쪽 산록, 서낭재로 가는 길목에 문둥골이 있는데 나환자의 발생으로 폐촌(廢村)되었다 한다. 솔등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청하입향조(淸河入鄕組) 제단각 (祭檀閣)이 있다. 마을 남쪽 북골(北谷)에는 오줌바위가 있어 눈병에 좋다는 약수(藥 水)가 오줌 누듯 흘러나온다. 이 주변 바위에 윷판 성혈이 있다. 남서쪽 서낭재 꼭대 기에는 고인돌 4기(基)가 있다. 구월 중기에 160여 년생 소나무 당산목(堂山木)이 있 는 제당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11) 소동리(蘇洞里) 청하의 조산(朝山)인 용산(龍山, 203.3m) 남쪽 산기슭에 자리하며 범바우, 손등, 지 릿골과 까치곡 일부를 합하여 1914년 소동이라 하였다. 범바우마을 서편 소동천변에 는 100여m에 걸쳐 옛 숲의 일부가 남아 있다. 손등 소동(蘇洞) 마을 지형이 손등 같은데서, 혹은 소의 등과 같다하여 손등 소등이라 하던 것을 한자표기로 소동(蘇洞)이라 했다 한다. 마을 남쪽엔 둔전(屯田)이 펼쳐져 있는데 조선 조 때 둔전이 있었다. 창의대장 김진규(金鎭奎) 의사의 출생지이며 공(公)의 묘는 가라 현(加羅峴)에 있다.
636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범바우 이 마을 동편 산록에 범 모습의 큰 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가 묻히면 이 마을이 쇠 퇴하고 노출되면 소동이 쇠한다 하여 두 마을 간에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작현천(鵲 峴川)이 이 마을과 청하초등학교 남부분교 사이를 흐른다. 동제는 유둣날 500년생 노 송에서 지냈는데 사라호 태풍 때 도복 고사하여 400여 년생 모과나무에서 다시 이어 지내다가 근년에 폐지되었다. 까치골 고현교(古縣橋) 주위에 위치하며 까치고개의 전설에 유래하여 까치골이라 부른다. 옛날의 주막촌이 있던 지역이나 지금은 1호가 남아 있고, 이 일원에는 돌방무덤(石室 古墳)이 있다. 옛길은 여기에서 땅골로 이어졌다 한다. 철교가설을 위해 뚫은 까치곡 굴이 있다. 지리골 지례곡(知禮谷) 손등 북쪽마을이며 이암층의 풍화지대인지라 비가 오면 몹시 질척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지례곡은 한자식 표기이다. 최근 이가리로 연결되는 2차선도로가 개설되어 공장과 식당이 상당수 들어섰다. 이 마을 뒤 용산(龍山) 자락에 수십 기의 돌방무덤 (石室古墳)이 있다. 12) 고현리(古縣里) 까치고개(鵲峴)와 별래재(別乃峴 星峴, 壯者峯 181m)를 잇는 7번국도의 서편 일원 에 고현1리와 2리(下坊, 梨長谷, 梨谷)가 있다. 1914년 네 개의 자연부락을 합하여 중 심부락 이름인 고현(古縣)으로 통칭하였다. 고현 고청하리(古淸河里)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해아(海阿)라 개칭하고 화방(花芳)의 앞들에 토성을 쌓 아 현기(縣基)를 옮겨와 수백 년을 지내다가, 고려 현종조에 덕성리로 옮겨가니 그 자 리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화방(花芳)과 구분하여 고현(古縣) 혹은 고청하리(古淸河里) 라 부르게 되었다. 하방(下坊) 화방(花芳) 하방(河芳) 하방(河坊) 배골에서 흘러내리는 하방천이 이 마을 중심을 흐르며, 옛날에는 이 안골짝으로 배나무 또한 많았던 고을이라 배꽃 만발한 풍경을 보고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추정 된다.
제1장 마을유래 637 배골 이곡(梨谷) 이화동(梨花洞) 매봉(172m)과 달봉산 사이의 배나무밭이 많았던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고려 때 남계부곡(南界部曲)이 있었다. 인조(1628)때 부제학(副提學) 류숙(柳潚)이 송라 학산(鶴 山)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7년을 살다가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재등용되어 떠났 으며, 달봉산 북쪽에는 당시 밤낚시를 즐기며 노닐다가 밝은 횃불의 정취에 감탄하여 류숙이 못 이름을 지었다는 어화지(漁火池)가 일부 남아 있어 못안못이라 부른다. 이장곡(梨長谷) 고주산(高柱山, 해발 348m, 고주봉산(高柱烽山)이라 했으며 내륙으로 연결되는 봉화 산(烽火山)이었다. 동편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하며, 1958년 만수면적(滿水面績) 8.46ha의 고현지(古懸池)가 축조되어 있으며, 배나무 밭이 많고 골짜기가 깊은 산촌마을이다. 13) 하대리(下大里) 청하천 남쪽에 넓은 들이 있어 한들이라 부르며, 그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 여 아래한들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대리(下大里)로 통칭하였다. 앞 들에 조선조 영조대(英祖代) 현감 한우창(韓羽昌) 재임시 축조한 한들못이 있고 앞 산 등너머에 왓골, 그 너머에 살알, 암자가 있었다 하여 불의동(佛義洞)이라고도 불리 는 불묏골이 있다. 명안리에 안심지(安心池)가 축조되기 이전까지는 봇물과 한들못에 만 의존하여 소량의 벼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어 주로 밭농사에 의존하여 살아온 마을 이라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 먹기 어렵다는 얘기가 전해지며, 가뭄을 많이 타는 들 이란 뜻으로 한(旱)들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정월보름에 마을남쪽 들녘에 있는 제당 (당산목은 200년생 적송)에서 어진 골목님네 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앞산 까치고개 서편 일원에 1990년 농공단지(50,000여평, 20개 업체 수용)가 조성되었다. 14) 상대리(上大里) 봇갓산 동편 기슭 청하천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70여호가 사는데 김해김씨와 월성 김씨(月城金氏), 영일정씨(迎日鄭氏)가 많이 산다. 마을 북쪽에는 상대숲이 일부 남아 있고, 한때 하천변 제방을 따라 30ha 두산포도원이 1974년에 설치되어 마주앙 포도 주의 주원료를 생산했었다. 웃한들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식 표기에 따라 상대평(上大 坪)이라 했는데 1914년 상대리로 하였다. 욋골(기와굽던 곳, 와곡), 따복골, 소등골과 같은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한다. 동제는 연일정씨 터주 김해김씨 골목 신위에 200년 생 소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에 지낸다.
638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15) 서정리(西井里) 청하의 진산인 호학산(呼鶴山)의 주맥(主脈)이 남동쪽으로 달리다가 우족산(牛足山) (가로질산이라고도 부른다)에 이르러 큰 혈을 이루었는데 그 남쪽 산기슭에 금호(金 湖), 감정(甘井), 밤나무지이, 모과정과 같은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를 합하여 1914년 서정리라 하고 1, 2, 3리로 나누었다. 금호(金湖) 금정(金井) 아혜현기(阿兮縣基)가 있던 마을로서 신라가 점유하여 화방으로 현기를 옮겨갈 때까 지 이 지역의 중심 마을이었다. 옛날 달골에는 금광(金鑛)이 있었고, 마을.북동 산골 짜기에 금씨골이란 지명이 있고, 마을어귀 샘에서 장님 오빠와 물을 먹다가 금덩이를 샘 속에서 발견하고 놀라 소리치는 통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전설 등으로 미루 어 이 지역에 금이 토출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금정리(金井里)란 지명은 이에 유래한 것이며, 금호동(金湖洞)이란, 성지비결(性智秘訣)에 물 위에 뜬 금바가지 형국 의 혈 (穴)이었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감정리(甘井里) 30여호의 작은 마을로서 물맛이 좋은 샘이 있어 감정리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 서 편 도로변에는 임란 때 곽재우 장군을 따라 출전하였던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김득 경(金得鏡) 의사(義士)와 그의 아들 문룡(文龍) 의사의 묘단비(墓壇碑)가 있다. 모과지이 목과정(木瓜井) 감정리, 밤나무지이와 더불어 서정2리에 속하는 마을로서 400여 년생 모과나무 당 산목 곁에 샘이 있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며, 정월보름날 동제를 감정리와 더불어 달 성 서씨 터주 신위와 동신위에 지낸다. 밤나무지이 율전(栗田) 시지골 안골짝에 접어들면 언덕위에 30호 정도 사는 마을이 있는데 밤나무가 많았 을 때 불려진 지명이다. 이 마을 북쪽 골짜기 건너 사실못 남쪽 옛 용지(龍池)마을터 에 제당이 있어 덕성2리와 합동으로 정월보름날 산신령과 담양전씨(潭陽田氏), 황주변 씨(黃州邊氏) 터주에 월성최씨(月城崔氏) 골목신위에 제사를 지내오다 폐지되었다. 16) 명안리(鳴安里) 엿재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에 형성된 안심(安心), 명암(鳴岩), 점말과 같은 마을을 합하여 1914년 명안리라 하였고 1. 2리로 나누었다. 마을 어귀에 있던 월성이씨 문중
제1장 마을유래 639 (門中)묘역인 안심숲을 베어내고 1971년 유역면적 850ha의 안심지(安心池)를 축조하 였다. 이에 배바우 마을도 이주하고 2호만 남아 있다. 배바우는 도로 확장으로 상당부 위가 묻혀 버렸다. 옛날 이곳에 바닷물이 차 있을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었다 한다. 고려때 간천부곡(干川部曲)이 있었다. 명암리(鳴岩里) 마을 서편 1km 거리에 초가삼간 크기의 움푹 패인 구멍바위가 있는데 어느 날 한 밤중에 얼음장이 깨지듯이 울었다 하여 불리운 지명이다. 정월 보름날 300여년생 떡갈나무 당산목에서 달성서시 터주와 남평문씨 골목신위 에 동제사를 지내 오다가 근년에 폐지되었다. 아주신씨(鵝州申氏)와 월성김씨(月城金 氏) 세거(世居)마을이다. 안심리(安心里) 40년 전까지 안심 숲이 마을 앞을 가로막아 있어서 외부에 마을이 노출되질 않아 잦은 왜구의 침입이나 전란에도 안심하고 숨어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안심리라 불 렀다 한다. 이 숲은 청하 세거 월성이씨 입향조를 비롯한 조상들의 묘역이었는데, 이 문중산소를 가로질산으로 이기하고 축조한 안심지 만수 때엔 마을 앞에까지 못물이 출렁인다. 점마을 엿재로 넘어가는 길가에 형성된 마을로서 예부터 옹기굴(옹기가마)이 있어 그렇게 부 른다. 정월 보름날 300여 년생 적송 당산목에서 김해김씨 터주 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1990년대에 이르러 도로가 확 포장되면서 옹기굴은 사라지고 식당들이 들어서고 있다. 17) 유계리(柳溪里) 청하천의 발원처인 궁곡(弓谷)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따라 덕성산(德城山)과 호학 산(呼鶴山)의 줄기가 형성한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유치이, 황배이, 서계와 같 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 유계리라 개칭하였다. 상옥으로 가는 샘재 굽잇길이 2 리인 서계 마을을 돌아간다. 유치이(柳川) 마을 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柳川, 마을 윗돔에 흘러넘치는 샘이 있어 流 川 이라 하니 이에 연유하여 유천리 라 불렀다 한다. 이 마을 북쪽으로 활 모양의 계 곡이 펼쳐지는데 활골(弓谷)이라 부른다.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할 때 신라군의 궁노수 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640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1999년 유계지 착공되면서 2004년 이 일원이 수몰지역이 되어 덕성리와 미남리로 이주하였다. 용두현으로 오르는 동북 언덕에 전 조계종 총무원장 이지관(李智冠) 스님 의 탄생지가 있다. 황배이 황암리(黃岩里) 황배이골 어귀의 바위가 누른색인데 연유한 지명이다. 월성최씨(月城崔氏) 집성촌 으로서 근년에 축조 중이던 황암지(黃岩池) 터에는 조선조에 이동신공(李東信公)의 별 장이 있던 곳으로서 한 때 비스무스 광산이 있었다. 여기서 골짝 깊이 들어가면 상사 (相思)바위 입구 기암절벽 사이에 성문(城門)과 같이 트인 곳이 있어 왜명동(倭鳴洞)이 라 부른다. 임란 때 이 안골에 피난하고 있던 주민들이 이곳에서 왜병을 돌과 바위로 무찔러 쫓으니 울며 도주했다하여 왜명동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서계리(西溪里) 이 고을의 서쪽 계곡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명종(明宗) 원년(1545) 을사사화(乙巳士 禍) 때,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있던 윤상문(尹尙文)이 이 고을에 유배(流配)되었을 때 지은 지명이라 전한다. 마을 앞 하천에 돌이 누적되어서 물이 바닥으로 스며들어 버 리니 일명 건천동(乾川洞)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북쪽에 7호 정도 살고 있는 중리 (中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그 안골짜기 월곡(月谷)에 금광이 있었다 한다. 마을 동 편 하천변에는 오리(五里)에 뻗친 풍치림(風致林)이 있었는데 일제말기에 자력갱생사 업의 명목으로 대부분이 벌채 개간되고, 1천여 평에 50여 그루의 노거수(老巨樹)가 남 아있다. 이 마을 남쪽 들에 1917년 건립된 유계교회가 있고 서편 대밭 아래에 윤백주 (尹百冑)와 그의 자 윤빈(尹殯) 을 기리는 상덕사(尙德祠)와 죽림사(竹林祠)가 있다. 18) 청계리(淸溪里) 천령산(天嶺山)에서 발원한 물이 안청계리 쪽으로 한 가닥, 바깥청계 쪽으로 한 가 닥 흘러내려 삼송리를 지나 월포 바다로 빠진다. 천령산은 원래 신구산(神龜山)이라 불렀으며 이 산의 중턱에는 상태사지(常泰寺址)가 있고 원각조사의 부도도 있었다 전 한다. 호학산(呼鶴山)은 청계도사(淸溪道士)가 학을 불러서 놀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청하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진 산의 위치와 형태의 특성상 백리두들과 서정리 금정마을에 걸쳐 자리하는 야산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신라가 세력다툼을 할 때 격전지로 도끼재, 거진령(去 陣嶺), 호학제(呼鶴堤), 백리두들(百里田原), 용잠이등골(龍臥嶝), 거진등곡(陣嶝谷) 같은 지명이 전한다.
제1장 마을유래 641 안청계 내청리(內淸里) 도끼재 동편 10여 호 사는 산촌이다. 영천이씨 재실(永川李氏 齌室)이 있고 마을 어 귀 팽나무 당산목 아래 제당(祭堂)에서 정월보름에 청송심씨(靑松沈氏) 터주신위에 제 사를 지낸다. 호룡골 못이 있고, 1999년 확장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그 아래 작은 저수 지를 1988년 하나 더 축조하였다. 바깥청계 외청리(外淸里) 원래는 개천 건너 언덕에 있었는데 뱀(또는 지네)의 극성으로 이주하여 현 위치에 마을을 일구었다 한다. 맑은 냇물이 사시장천 흐르는 지역이라 하여 청계(淸溪)라 불 렀다 한다. 현재 70호 정도 살고 있으며 쌀농사를 주로 하는 마을이다. 청안이씨(淸安 李氏) 가문에서 이순창(李淳昌) 의사(義士)가 배출되었으며 마을 북서쪽에는 서포선생 (西圃先生) 숭봉지처(崇奉之處)인 서포정(西圃亭)이 있었고, 마을 속에 청안이씨(淸安李 氏) 재실 청학정(淸鶴亭)이 있다. 이 마을 동편에 청계숲이 있으며, 2007년에 노거수 회의 주선으로 숲을 정비 무육하여 쉼터를 조성하였다. 400년생 느티나무 노거수 다 섯 그루가 남아 있다. 4. 송라면(松羅面) 1) 상송리(上松里) 천령산이 시원인 월포천이 청하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이 마을 앞을 흐른다. 송림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세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위에서부터 차례로 상 송리, 중송리, 하송리라 부르며, 세 마을을 통틀어 삼송리(三松里)라 하기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송, 중송을 합쳐 상송리라 하고, 행정동명으로 상송은 상 송1리, 중송은 상송2리라 한다. 조선 초기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이 덕천리에 설치되니 이 마을이 역촌으로 번성하 게 되었으며 상송리는 외이동(外二洞), 중송리는 외일동(外一洞), 하송리는 외삼동(外三 洞)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찰방의 바깥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라 한다. 당초에는 중 송리가 남쪽 냇가에 있었고, 그 북서쪽에 상송리가 있었는데, 내청계(內淸溪) 호룡골 못 이 터지는 큰 홍수를 당한 연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나오게 되었다 한다. 마을 뒤 성 둣들에는 봉화를 올리는 작은 인조 토산이 세 개 있었는데 해방 이후 제거되었고, 이 들을 건너 1.5km 골짜기로 찾아들면 성도지(成道池)가 있고, 그 안골 둔덕에 나대의 절 터인 성도암지(成道庵址)가 있는데, 일제 때 원각조사(圓覺祖師) 비가 출토되었다. 조선
642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시대 부제학(副堤學)을 지낸 유숙(柳潚)이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 최근 이 일원 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마을 주위의 숲은 일제말기 자력갱생 사업이란 명목으로 거의 다 벌채, 개간되었다. 1리는 남평문씨(南平文氏) 터주와 김해김씨 골목신위에, 2리는 월 성김씨 터주와 파평윤씨 골목신위에 정월 보름마다 동제사를 지낸다. 2) 하송리(下松里) 삼송리의 동편에 위치하며 7번국도변에 찬샘이, 별장촌이 있고, 중송리에 연결된 원 래의 하송리에는 90호 정도 살고 있다. 삼송리 중 맨 아래 있다고 하송리라 한다. 세조 4년(1458) 화산(花山) 일원에 있던 송라역이 이 지역으로 옮겨오고, 관동(館洞) 에 찰방이 주재하면서 인근 7읍의 역을 관장케 했을 때 크게 번창했던 마을로서 오역 (午驛), 외역(外驛), 혹은 외삼동(外三洞)이라고 불러오던 마을이고, 일명 만성(蔓城)이라 부르던 곳이다. 현재의 위치보다 북쪽에 위치했는데 홍수로 인하여 하상(河床)이 이동되 고 수질이 나쁜지라 남쪽으로 서서히 옮겨 앉게 되었다. 찬샘이 마을은 달애산 서편 두 사리가 시원지이며 역촌이 형성되면서 서쪽으로 300~400m 이주해온 것이라 전한다. 고종 32년(1895) 내북면에 속했을 당시에는 북면 사무소가 있었으며 숲을 제거한 공터에는 5일장이 3일, 8일에 서곤했다. 하송에서는 남평문씨 터주와 월성김씨 골목 신위에, 찬샘이는 파평윤씨 터주와 월성최씨 골목신위에 두사리라는 옛 마을 터 숲속 제당에서 각각 정월보름마다 동제사를 지낸다. 삼송리의 지형이 배 같다 하여 돛대의 상징인 찜대를 마을 가운데 세워두고 있으며, 배는 바다를 향해 떠내려간다는 이론에 의하여 바다 쪽을 숲으로 가려뒀는데 200수년 전 안청계리 호룡곡(虎龍谷)의 저수지 가 홍수로 붕괴하였을 때 이 숲으로 인하여 숱한 생명과 곡식더미를 건졌으므로 일명 식생(食生)이 숲 이라 부르고 있다. 이 숲을 보존, 육성하기 위해 부사과 윤기석(副司 果尹琦碩)의 처 청풍김씨 설보여인이 천냥의 거금을 희사하였으므로 주민들이 이 숲 의 북쪽 언덕 비탈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두었다. 한때 도역(道驛)으로서 크게 번성 하였던 곳인데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마을 동편 숲 속에 이 숲을 조성한 청풍김씨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여인의 숲 기념비를 2003년 노거수회가 주관하여 세워두었다. 1914년까지 여제단(厲祭壇)이 있었고, 찬샘이 마을에는 밀알기도원, 포병부대가, 7번 국도 동편으로 포항스틸러스 체력단련운동장이 들어섰다. 3) 중산리(中山里) 신구산(神龜山, 776m, 현재 天嶺山)과 종남산(終南山)이라고도 불렀던 내연산이 마 주하여 만든 깊고 아름다운 계곡 어귀에 중리(中里), 학산(鶴山), 덕곡(德谷)과 같은 자
제1장 마을유래 643 연부락이 있다. 계곡 깊숙이 12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시명리(時明里), 삼거리, 심양리, 산두곡, 뿔밭과 같은 작은 화전민촌들이 있었는데 20여 년 전 모두 철거되었다. 산남 의진 정환직대장이 뿔받(角田)에서 피신하고 있던 중 일헌에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있 다. 뿔밭은 불밭, 즉 화전(火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인데, 훗날 뿔밭으로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각전(角田)으로 잘못 기록하게 되었다 중리(中里) 300여 년 전 형성된 마을이며 북쪽에는 북리(北里), 동쪽에는 동하동(東下洞)이란 마을이 있었고, 그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리라 했다 한다. 마을 남서쪽에 기우제를 지내던 건지봉(乾止峰, 346m)이 있는데, 사혈(巳穴)이라 뱀 기운 을 누르기 위하여 마 을 어귀에 돈상(豚像)을 세워 두었다. 산신과 월성이씨 골목신위에 정월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학산(鶴山) 숙종 18년(1692) 해남현감을 지낸 김석경(金錫慶)이 주선하여 은사(恩師) 회재선생 숭봉지처(晦齋先生 崇奉之處)로 학산서원을 건립함에 따라 점점 크게 형성된 마을이 다. 하천 주변의 지형이 학을 닮은 데서 연유한 지명이라 전한다. 덕곡(德谷) 보경사 경내에 형성된 마을로서 절의 덕을 입고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불리어진 지 명이라 한다. 흔히 보경마을 이라 부르며 10년 전에 건립된 대련암(大蓮菴)이 있고 그 앞 도로변에 기미 3.1독립의거기념비가 있다. 보경사 창건 때 사찰을 보안하기 위해 쌓은 성벽이 있던 일원에 1988년도 신 상가 와 대형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절문 앞에는 700여 년생 회화나무(15 6.2 13m) 한 그루가 있었는데 2004년 도복 고사하였으며, 담 안 소재 도지정기념물 11호인 200여 년생 탱자나무 두 그루가 있다. 4) 광천리(光川里) 내연산과 천령산이 이루는 깊은 계곡 물이 마을 앞을 흐르며, 광흥리(光興里, 3리) 뒤에는 산머리에 샘솟는 웅덩이가 있어 고기가 뛰놀았다는 어유산(魚遊山, 126m)이 있다. 서쪽으로부터 1리인 하광(下廣), 2리인 안동네, 3리인 광흥이 자리하고 있다. 하 광 서편에는 상광이 있었는데 수질이 나빠 피부병 발생이 많아져 폐촌되었다. 본면이 청하군의 북면에 속할 때에는 안동네에 내북면 사무소가 있었는데, 1914년 광흥동으 로 이전하면서 세 마을을 통틀어 광천리라 하였다.
64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너분걸 광천(廣川) 넓은 개울이란 뜻인데, 내연산 계곡에서 급류하던 하천이 이 마을 앞에서 넓게 퍼 져 흘렀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하광리(下廣里) 광천 1리를 말하며 감나무골이라고도 한다. 마을어귀 송림 속 제당에서 정월보름에 지씨(池氏)와 용씨(龍氏) 신위에 동제를 지낸다. 안동네 광천3리에 새마을이 형성되면서 안동네로 호칭되었다 한다. 1909년 건립된 송라침 례교회가 있다. 밀양박씨, 김해김씨, 수원백씨가 대부분이다. 정월보름이면 면사무소 뒤 400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서 파평윤씨 터주와 영해남씨(寧海南氏) 골목신위에 동 제를 지내고 있다. 광흥동(光興洞) 현 본면 중심마을로서 각종 관공서와 초중등학교가 있다. 1918년 하송리에 서던 시 장을 주막집 한 채 뿐이던 이곳 장터걸로 옮겨오고 1956년 5월 20일 면사무소를 건 축하고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보경사 동로전(東爐殿)에서 개강을 했던 사립학원 광흥학교(廣興學校)가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광흥동(廣興洞)이라 했는데 훗날 光 興洞 이라 표기했다 한다. 5) 조사리(祖師里) 다래산 북동 해안에 형성된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방화동(芳花洞) 일 부를 병합하였으며, 고려말 원각조사(圓覺祖師)가 태어나 살던 마을이라 하여 조사리 라 불리어졌다. 조사의 생가 터에는 1913년 12월 2일 평양신학교 출신 허담(許膽) 목사가 조사리침 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16년에는 교회 내에 진명사립학원(進明私立學院)을 설립, 4 년제로 4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광흥국민학교가 설립되자 흡수 폐교되고 교회 는 장로교파가 인수하였다 한다. 그 후 허목사가 귀향하여 다시 교회를 인수하고 교 회이름을 구우정교회(九友亭敎會)라 했는데, 1972년에 다시 장로교파에서 인수하여 동천장로교회(東天長老敎會)라 하였다. 이 마을 북서쪽 언덕배기에는 김해허씨의 9형제가 세웠다는 구우정(九友亭)의 흔적 으로 작은 명비(名碑)가 남아 있고, 그 부근에는 일제시에 성도암지에서 발굴된 원각 조사 비가 옮겨 세워져 있다. 마을 포구에는 원각조사 탄생설화가 담긴 부부 용바위
제1장 마을유래 645 가 있었는데 10여 년 전 주변을 콘크리트로 뒤덮으면서 암용 바위는 파손되었다. 남 아 있는 숫용 바위에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정월보름에 북서쪽 송림 속에 있는 제당에서 평해황씨 터주, 김해허씨 골목신위와 원각조사신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6) 방석리(芳石里) 어유산과 천마산(天馬山) 사이에 만수면적 19.48ha 용곡지(龍谷池, 조선조 중엽에 축조, 해방 후 증축)가 있으며 이 물로 이 마을 앞들을 수리안전답으로 일구어 두었 다. 1914년 방화동과 독석(獨石)마을을 합하여 방석이라 하였다. 방화(芳花) 마을 북동쪽 봉화산인 도리산(桃李山)이 바위산인데다 옛날엔 복숭아나무와 자두나 무가 많아서 꽃이 필 때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마을 이름을 방화라 했으며, 조선조 때 이 고을 현감은 보경사와 조경대(釣鯨臺), 그리고 이곳 도리산의 춘경을 필히 찾아 노닐었다 전한다. 원 마을은 뒷산록에만 형성되어 있었는데 남쪽으로 확산되었으며, 정월보름에 도리산에서 산신제를 지낸 후 제당에서 순흥안씨 터주와 파평윤씨 골목신 위에 제사를 지낸다. 독석(獨石) 마을 앞 바닷가에 검고 널찍한 큰 바위가 하나 외로이 있어 마을 이름을 검은돌, 딴돌, 독석이라 부른다. 한때 나포리라 부르기도 했으며, 백사장에 시장이 섰으므로 한불장터란 지명이 남아 있다. 마을 서편 어귀에 치성바위인 성혈식(性穴式) 고인돌 애기방우 가 있으며 부근에 여러 개 산재하던 고인돌은 축항공사 때 깨어 썼는데 석공이 횡사하는 변괴가 있었다 고 한다. 이 윗 등 당산숲 속에 제당에서 정월보름에 산신과 동신, 그리고 창조류씨 (創祖柳氏) 터주신위를 모시고 동제사를 지낸다. 북동 해변에는 1966년 건립된 5인 해병 순직비가 있으며, 주변 해안은 상륙작전 훈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7) 화진리(華津里) 천마산(天馬山)과 도리산(桃李山, 봉화산(烽火山), 104m)북동 기슭에서부터 해안에 걸쳐 형성된 마을로서 이진(耳津), 대진(大津), 화산(花山)과 같은 자연부락이 1, 2, 3 리로 각각 형성되어 있으며, 1914년에 화산(華山)의 華 자와 구진 대진의 津 자를 택 해 화진(華津)이라 이름 하였다.
646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이진(耳津) 마을 앞 포구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진(龜津)이라 부른다 하며 한편으로는 포 구의 꼴이 귀(耳) 같다 하여, 혹자는 구진이 귀진으로 발음되면서 한자표기를 귀 이 (耳) 자로 표기했다고도 한다. 바닷가 거북 바위에서 40여 년 전까지 동제를 지내왔 다. 정월보름에 제당에서 월성최씨, 달성서씨, 파평윤씨 세 골목신위를 모시고 동제를 지내며, 이 날 낮에는 여인들이 앉은줄당기기를 한다. 옛날 도리산에 봉수군이 주둔하 고 있을 때에는 도리포라 부르던 곳이며, 88서울올림픽 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유남규 선수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대진(大津) 송라역이 도리산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을 때 원산과 동래 등지를 오가는 선 박들이 정박하면서부터 마을이 동쪽 바닷가로 이동하게 되고, 따라서 원래는 서피진 (西皮津)이라 부르던 것을 대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1910년에 건립된 화진침 례교회가 있고 바닷가 제당에서 정월보름에 원씨 터주와 심씨(沈氏) 골목신위에 제사 를 지낸다. 화산(花山) 화산(華山), 고송라(古松羅), 학교마을 등으로 불리어지는데, 이는 이 마을 동편 모래 언덕과 백사장에 해당화와 순비기, 갯매꽃 등 꽃이 많은 데서 연유한다. 해발 75m의 천마산(天馬山) 북동 산자락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둣들이 있으며, 그 주위에 형성되었던 마을이 바닷물이 차츰 물러감에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 초기까지 마을 앞 언덕에 송라역이 있었으므로 일명 고송라(古松羅)라 부른 다. 1958년 송라국민학교 화산분교가 설립되자 학교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마을 앞 제당 주위의 전답과 뒷동산 음장고(陰藏庫)라 불리는, 난시에 음식물이나 문서를 저장하였다는 괴석이 있다. 주위 논들은 1900년 초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주로 염전을 일구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병수송부대가 화산 불 백사장에 상륙 주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지라 도리산 봉군과 송라도찰방군, 그리고 의병, 주민 등이 봉기하여 대동숲에 운집 대기하 고 있다가 야밤에 기습하여 백병전을 치르다 피아가 전멸하다시피 수많은 사상자를 내 었다는 얘기가 구전되고 있다. 그 때 죽은 자들을 무더기무더기 묻어둔 작을 골짜기를 썩은숭이네고랑 이라 한다. 거센 해풍에 백사(白沙)가 이동하면 유골들이 곳곳에 노출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 때 송라소학교에 부임한 일본인 교장이 야밤에 이곳에서 원혼제를 지냈다 전한다. 이 인근은 육군해양휴양지로 쓰이고 있다.
제1장 마을유래 647 8) 대전리(大田里) 내연산의 지맥 둘이 동주하면서 한 가닥은 지경(地境)의 해변에 이르고 남쪽 것은 방석(芳石)의 도리산(桃李山)에 멎는데 이 두 산능선 사이에 형성된 큰 골짜기에 산령 전(山嶺田), 심방(尋芳, 2리)과 두곡(斗谷, 1리)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 남쪽 야산에 최근 골프장이 들어섰다. 1914년에 북동대산(北東大山)의 대(大) 자와 산령전(山嶺田)의 전(田) 자를 따서 큰 들이란 뜻으로 대전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른다. 듬실 두곡(斗谷) 고려말기에 제주강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일구기 시작했고 그 후 순흥안씨(順興安氏) 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한다. 이 고을의 들 모습이 두(斗) 자 같다 하 여 두곡(斗谷)이라 했고 마을 앞 천변에 듬바위라고도 하고 천보암(天寶岩))이라고도 하는 볏짚으로 엮어 만든 뜸을 둘러친 듯한 바위의 모습에서 뜸실이라 하였는데, 변 음되어 듬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3.1만세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숲 속에 3.1 의거기념비가 있고 마을 속에는 청하장터 기미만세운동 모체가 되었던 대전교회(1913 년 설립)가 있다. 유적으로는 동편 아룡곡(亞龍谷)에 아룡사지가, 방화지(芳花池) 서편 에는 지정(至精)사지가 있고 어사터로 가는 뒷 산길 주위에 석곽고분군이 있다. 심방(尋芳) 승방동(升芳洞) 큰 마을인 두곡에 비해 작은 마을이란 뜻으로 승방(升芳)이라 표현했다고도 하며, 봄에 산천에 꽃이 가득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하여 심방(尋芳)이라 불렀다 한 다. 고려 때엔 북아부곡(北阿部曲)이 있었다. 마을 어귀 참나무 숲 당산목 아래에 있 는 제당에서 정월보름에 산신과 함씨(咸氏) 터주, 김씨 골목신위에 제사를 지오다 근 년에 폐지되었다. 산령전(山嶺田) 대전리의 서편 산골에 위치하며, 10여 호가 살고 있는 산촌이다. 동남 골짜기에 옛 날 삼전(蔘田)이 있어 쌩밭골(삼밭골의 변음)이라 부르기도 했다. 서편 산 중턱에는 내 연산 산신 할무당을 모신 신당인 백계당(白啓堂)이 있어 3월 보름에 백계당 숭봉계원 들과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낸다. 9) 지경리(地境里) 이 마을 북쪽은 영덕군과 경계를 이루는 버드내(지경천)가 흐르며 1리에는 지경, 2 리에는 어사터와 염전(鹽田)이란 자연부락이 있는데, 1914년 지경리로 통폐합하였다.
648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지경(地境) 청하현과 영해현의 경계에 놓인 땅이라 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다. 1949년 11월 6일 이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해안에 침투한 무장공비 30명을 사살하였는데, 북괴는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1950년 2월 4일 50여 명이 밤 8시 40분 이 마을을 급습하여 주민 99명의 사상자(34명 희생)를 낸 사건이 있었다. 이에 1985년 6월 25일 검문소 건너 편 산기슭에 반공피학살현장비를 세웠다. 이 산중허리에 애기방우가 있어 치성을 드 리면 자식을 얻는다고 하며, 많은 성혈식고인돌이 산록에 산재하고 있다. 동제당에서 정월보름에 엄씨(嚴氏)와 조씨(趙氏) 터주, 골목신위에 제사를 지낸다. 염전(鹽田) 6.25 전까지 300여 년 동안 소금을 구워오던 마을로서 어사터와 함께 2리에 속한 다. 해변에는 휴게소와 해수욕장이 있다. 달성서씨 5호 외 15여 호가 살고 있었으며, 동제는 개울 건너 화산 마을에서 함께 지낸다. 어사터 어촌인 지경에서 2km 정도 서편에 위치하며, 버드나무가 울창하였다던 버드내 가 에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는 웃돔과 아랫돔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옛 마을은 그 사이 에 크게 형성되어 있으며, 현재의 7번국도가 개설되기 이전(원래 송라도로를 수정했다 함) 고려 때의 주도로가 이 마을을 지났다 한다. 5. 기계면(杞溪面) 1) 현내리(縣內里) 두봉산(頭峯山, 237m) 남쪽, 죽장으로 통하는 국도 북편에 형성된 마을로 면청사와 학교, 각종 관공서가 자리하며,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본 면의 중심지로 1 2리로 구분되어 6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재 현내1리에 속하 는 안마을(內里), 갱빈마을과 현내2리에 속하는 뒤밑마을, 숲각단을 합하여 옛 현기지 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현내리라 하였다. 안마을 내리 현내 신라말기에 아찬(阿湌)을 지낸 유삼재(兪三宰, 기계유씨의 시조)공이 낙향하여 살게 된 후 문성동(文星洞)에서 현기(縣基)를 옮겨 왔다 한다. 시장 입구에 있는 팽나무 당산목을 지나 북서쪽으로 200여m 들어가면 옛 현청사
제1장 마을유래 649 터와 경로당이 있다. 2001년 10월에 신축 이전한 면사무소에는 1828년 탐관오리의 학정에 항거한 박만용(朴萬龍) 유공비와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던 영일군수 김옥현, 박 준무의 공덕비와 조선조에 세워진 경주부윤 민영직(閔泳稷), 조명정(趙明鼎)의 선정비 가 나란히 서 있다. 갱빈마을 갱빈각단 강변마을 강변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문성교가 건설되었고, 둔 전(屯田)들에는 벼와 과수농사가 발달되어 있다. 1988년도부터 기계천변 4,000여평의 시유지에 기계면민 운동장을 조성하였다. 숲각단 임리(林里) 조선 성종 때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던 도원 이말동(桃源 李末仝)공이 기계에 은거하면서 풍수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서숲(西藪) 동편에 자리한 마을이다. 서숲은 지금 그 일부가 남아 있으며, 도로변에 1992년에 세운 을미의병장두산이종 흡창의비(乙未義兵將斗山李鍾翕彰義碑)가 있다. 뒤밑 서숲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인데 기계중 종합고등학교가 있다. 2) 지가리(芝柯里) 죽장면(竹長面), 기북면(杞北面)으로 통하는 국도변에 위치하며 소금실(素琴室), 월리 (越里), 지가실(芝柯室)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1914년 이를 통폐합하여 지가리라 하 였다. 구내 소금실 구천(九川) 뒷산이 거문고 같은 모습이라 소금실(素琴室)이라고 부르며 구곡(九谷) 골짜기의 내 를 구천, 구내라 하여 마을 이름도 때로는 그렇게 부른다. 구곡 어귀의 느릅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구천곡에 월성이씨 구봉공(九峰公)을 추모하가 위해 세운 구봉정(九峰亭)이 있다. 너매마을 월리 언덕을 넘어서야 이 마을에 들어올 수 있다 하여 월리, 너매마을이라 한다. 지가 지가실(芝柯室) 조선조 중엽 김화석이란 선비가 정착하면서 자손들이 지초(芝草)처럼 번성하며 화목 하란 뜻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라 한다. 1979년 건립된 지가교회가 있다.
650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중리(中里) 지가실 동편마을로서 지가실과 소금실 중간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팽나무와 회화나 무 당산목에서 너매 마을과 함께 동제사를 지낸다. 3) 봉계리(鳳溪里) 봉좌산(鳳座山, 589m) 북쪽에 위치하며 이리재를 넘으면 영천시 수성(守城)으로 통 한다. 1914년 인비(仁庇)의 일부와 치동(致洞), 동자방(童子房), 선래, 관평(灌坪), 상이 (上伊), 하이(下伊)를 합하여 봉계리라 칭하였다. 봉좌암(鳳座岩) 봉좌산 꼭대기에 있는 봉황 모양의 바위로 치동의 월성김씨와 관평의 파평윤씨 사 이의 성쇠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치성드리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봉좌암 (일명 탕건바우) 서편에는 50여 명 수용 가능한 굴이 있다. 치동(致洞 治洞) 봉계 봉좌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중간에 위치하여 예부터 봉계라고도 불렀다 하며, 1637 년 경주김씨 기계 입향조인 일암(逸菴) 김언헌(金彦憲)이 칡숲을 치고 마을을 일구었기 에 벌치동(伐致洞)이라 하다가 치동이라 불렀다 한다. 서당이었던 남덕재(覽德齋)와 조 선 숙종 때 성균관 생원 김계영의 덕업을 추모하여 지은 흔히 분옥정(噴玉亭)이 있다. 설내 서천(㐥川) 치동 어귀에 위치하며, 고려 공민왕 때 홍수로 황폐해진 전답을 호미(鋤)로 복구하 였다 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동지뱅이 동자방(童子房) 봉좌산 정상의 큰바위(봉좌암)를 산중턱에 있는 이 마을에서 쳐다보면 동자의 모습 같아 마을 이름이 생겼다 한다. 관평(管坪) 남북으로 길게 뻗친 봉계숲의 서편에 위치하며,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태사의 묘와 재실인 봉강재(鳳岡齋)이 있다. 고려말 경주부윤(府尹)으로 있던 태사의 후손이 이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분실된 태사의 묘를 찾았다 하여 관평(官坪)이라 불렀으며, 한편 물 대기 좋은 들이라 하여 관평(灌坪)이라고도 한다. 봇걸 이동(伊洞) 봇걸은 고속도로 건설로 모습이 크게 변했으며, 윤씨(尹氏)들 집성촌이어서 부른 윤동
제1장 마을유래 651 (尹洞)은 차츰 타성이 이주해 와 인(人) 자를 더하여 이동(伊洞)이라 고쳤다. 상이(上伊), 하이(下伊)가 있는데, 상이 서쪽 이리재에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임고 4터널이 있다. 4) 고지리(高旨里) 봉좌산(589m) 북쪽 기슭에 자리하며 1리에 고지뱅이, 화창리(禾蒼里)가, 2리에 와지 (瓦旨), 암정(岩井)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에 고지리라 통칭하였다. 서편 마봉산이 말이 달리는 형상으로, 머리부분이 와지 뒤편으로 용마등이라 하고, 허리 부 분이 고지뱅이 뒤편이며, 꼬리 해당 부분을 말미(馬尾)들이라고 한다. 고지뱅이 고두뱅이 고척(高尺) 300여 년 전 박춘우(朴春禹)라는 선비가 정착하여 봉좌산 정상부의 바위를 봉좌암 이라 이름하였으며, 마을에서 바위를 쳐다보면 앞산인 마봉산(馬峯山) 허리 위로 한 자 정도 솟아 보인다 하여 고척 고지뱅이 고두(高頭)뱅이라 불렀다 전한다. 2천년 전 고주보(高周寶)라는 장사가 아홉 개의 바위를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옮겨 가다가 성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여 버려둔 바위가 흩어져 있는 들이란 전설에 따라 고 주뱅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암정(岩井) 옛날 구암(九岩)과 칠정(七井)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구총암(九塚岩) 이라고도 부르는 구암은 고인돌로 1988년 경지정리 때 9개 중 8개가 묻혀버렸다 한다. 새각단 화창리(禾倉里) 뒤늦게 신설된 마을로서 벼농사가 잘 되는 곡창지대란 뜻이다. 1961년 최병현(崔炳 玄)이 앞장서서 개척한 마을이다. 와지(瓦旨) 암정리 남서쪽에 위치하며 대문닫이 논이란 곳에 옛날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연유 하여, 또는 지형이 기왓장 같아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정월보름에 자연부락 단위로 동제(洞祭)를 지낸다. 5) 문성리(文星里) 신라 후기에 쌓았다는 산성이 있는 백마산(白馬山, 383m, 일명 무학산, 장방산, 성 산) 북쪽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로서 신라 때 기성현기(杞城縣基)가 있었다. 원씨(元氏) 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한때 원문동(元門洞)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남양홍씨(南陽洪 氏) 집성촌이 되었다.
652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문성(文星) 번창하던 마을이 기계천의 범람으로 농토가 유실되고 쇠퇴하여져 갈 때 하늘에 문 창성(文窓星)이 나타나 마을이 다시 번창하게 되어 붙인 마을 이름이라 한다. 1970년대초 새마을사업 성공사례지로 박정희대통령이 전국 시장 군수 비교행정회 의를 개최했던 곳으로 박정희대통령순시기념비(1993년 개축)와 새마을운동발상기념 비, 문성양수장설치기념비가 동네 어귀에 있다. 이 마을이 새마을운동발상지임을 알리기 위해 2009년 포항시에서 새마을운동발상 지기념관을 건립하였다. 6) 학야리(鶴野里) 어래산(魚來山, 444m)과 성산(城山)이 이루는 계곡에 형성된 마을로서 담안, 걸띠배 기, 학골, 안동네, 중법(中法), 탑곡(塔谷)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1914년 학골의 학 (鶴) 자와, 들이 있어야 학이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으로 야(野) 자를 취합하여 학 야리라 하였다. 담안마을 어래산쪽 산기슭에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는데, 담을 높이 쌓고 산다고 불린 이름으 로, 터가 너무 세어서 기질이 거칠어진다 하여 대부분 학골로 이주하였다 한다. 학골 횟골 햇골 학곡(鶴谷) 학의 서식처가 있던 곳이란 설과, 내단(奈丹)에서 관망하면 지형이 학을 닮았다는 설과, 큰 회화나무 당산목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회나무골, 횟골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 마을 안쪽을 안동네라 한다. 걸띠배기 학골 어귀 개울가에 형성된 마을인데 학골과 연결되어 있으며 회화나무 당산목이 있다. 시월보름에 여기 제단에서 동제를 지낸다. 중법(中法) 학야동 첫 들머리에 위치한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일군 마을이다. 들머리 지릿들에 는 고인돌 4기가 있다. 탑골(塔谷) 중법 서편 언덕 위의 마을인데, 옛날 절이 있었고 오랫동안 탑의 흔적이 남아 있던 마을이라 한다.
제1장 마을유래 653 7) 성계리(星溪里) 동은 경주시 강동면에, 남은 어래산이 휘감는 곳에 위치하며, 북에는 기계천이 흐른 다. 1914년 칠성(七星)과 화계(花溪)의 각 한 자를 취합하여 성계리라 하였다. 자연부 락으로는 1리에 아인골, 2리에 화계, 화당(花堂), 방구뱅이, 싯집매가 있다. 아인(安仁)골 칠성동(七星洞) 300여 년 전 신유효(辛裕孝)란 선비가 노당재(일명 칠성현)로 넘어가는 길목 골짜기 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 현재의 위치로 이주해 오게 되니 고인돌인 칠성암이 마 을 속에 들게 되어 칠성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형성된 마을은 안인(安仁)골이라 했는데, 발음이 변천되어 아인골이라 하며 편안히 어질게 살아가는 마을이란 뜻이라 전한다. 화댕이 화당(花堂) 처음 10여 호 살 때 살구꽃이 피면 꽃 속에 집들이 묻힌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한다. 지금은 싯집매 마을과 연결된 큰 마을로 변천하였다. 화계(花溪) 월성김씨가 300여 년 전 개척한 마을로, 산에서 흐르는 개울가에 아름다운 꽃나무 가 많던 마을이라 화계라 했는데, 변음되어 회계라고도 부른다. 30여 호 살고 있다. 방구뱅이 방구백이 큰 바위(고인돌 3기)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 바위는 1956년 성계교회가 설립되 면서 파손되고 그 파편 바위쪽 두 개가 남아 있다. 2리에서는 3~4년 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싯집매 세(三) 집이 모여 산다고 붙인 마을명으로 현재는 10호가 산다. 마을 앞 들의 경지 정리가 1985년에 이루어졌다. 8) 내단리(奈丹里) 비학산의 일지맥이 남주하여 해발 307m의 용산(龍山, 일명 사산, 태봉, 봉화봉)을 융 기하였는데, 이 산 서쪽 산기슭에 내만(멀망), 남쪽에 안사산(內蛇山), 동남쪽에 바깥사 산과 윗달성, 점말, 동쪽에 종단(宗丹)이 있어 각각 1, 2, 3리로 구분하고 있다. 1914년 이들을 합하여 내만(奈萬)과 종단(宗丹)의 이름을 취합한 내단(奈丹)이라 명하였다.
654 제10편 마을유래와 설화 안사산(蛇山) 1리에 안사산, 바깥사산, 점말과 같은 마을이 있다. 윗달성은 도로개설로 폐촌이 되 었다. 뒷산인 용산은 신라 때 태자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胎峯)이라 부르기도 하고, 봉화를 놓던 산이라 하여 봉화봉이라고도 한다. 바깥사산 용산의 남동쪽 산기슭에 위치하는 마을로 월성이씨가 세거하면서 풍수설에 의거하 여 기계천의 물이 흘러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달성(達城)마을에다 숲을 조성하였 다 하며, 지금은 개간되어 과수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1911년 건립된 내단교회가 있 고, 비왕산업이란 비료공장이 있다. 달성(達城) 옛날 달성서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생긴 지명이라 전한다. 경주시의 달성과 포항시의 달성이 내단천을 경계로 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점마을 아랫사산 북쪽에 위치하는 옹기 굽던 마을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 중단되었다. 신 라토기를 재현하는 신라토기 제조업체가 있다. 멀망 내만(奈萬) 원계(遠溪) 300여 년 전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 라 한다. 현기(縣基)를 멀리 바라보는 곳에 있다는 뜻으로 멀망이라 하고, 기계천에서 멀다는 뜻으로 원계(遠溪)라 했다 하나, 내만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종단(宗丹) 내단 3리로서 용산 북동쪽에 위치하여 멀망과 대칭하고 있는 마을로 300여년 전 최국일(崔國一), 박충국(朴忠國) 두 선비가 개척했다. 불무혈(穴)이라는 용산 머리 북쪽 의 굽은 능선이 소의 짐바리 모습과 유사하므로 상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멀망의 돌무덤에 상응하는 돌더미(돈대)를 마을어귀에 쌓기도 하였다. 당산목은 고사하였으 며, 6.25이후부터 동제는 폐지되었다. 9) 화대리(禾垈里) 용산과 두봉산이 이루는 골짜기에 형성된 자연부락 숲뒤마을과 방축(防築)마을을 합 하여 1914년 화대리(禾垈里)라 하였다. 원래 용산 산록과 두봉산 산록의 팔리곡(八吏 谷) 어귀에 산재하고 있던 마을이 400여 년 전부터 서서히 이주해 옴으로써 형성된 마을이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