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학 석사 학위논문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에 관한 연구 -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 A Study on Sadaebu's Expression and Appreciation of Plant Materials in the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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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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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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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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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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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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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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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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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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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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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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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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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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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이용자는 아래의 조건을 따르는 경우에 한하여 자유롭게 이 저작물을 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 및 방송할 수 있습니다. 이차적 저작물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따라야 합니다: 저작자표시. 귀하는 원저작자를 표시하여야 합니다. 비영리. 귀하는 이 저작물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동일조건변경허락. 귀하가 이 저작물을 개작, 변형 또는 가공했을 경우 에는, 이 저작물과 동일한 이용허락조건하에서만 배포할 수 있습니다. 귀하는, 이 저작물의 재이용이나 배포의 경우, 이 저작물에 적용된 이용허락조건 을 명확하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저작권자로부터 별도의 허가를 받으면 이러한 조건들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 이용자의 권리는 위의 내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용허락규약(Legal Code)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것입니다. Disclaimer

조경학 석사 학위논문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에 관한 연구 -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 A Study on Sadaebu's Expression and Appreciation of Plant Materials in the 18-19 Centuries of the Joseon Dynasty : focused on 'Dasan Jeong-Yakyong' 2012년 8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최 라 윤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에 관한 연구 -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 지도교수 성 종 상 이 논문을 조경학 석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2 년 4 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최 라 윤 최 라 윤의 석사 학위논문을 인준함 2012 년 6 월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에 관한 연구 -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최 라 윤 위 논문은 서울대학교 및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학위 논문 관련 규정에 의거하여 심사위원 및 초빙심사위원의 지도과정을 충실히 이수하였음을 확인합니다. 2012 년 8 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국문초록 이 글에서는 18-19세기 조선 사대부 정원의 식물소재를 중심으로 선정과정과 연출기법 그리고 완상방식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완상이나 연출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 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8-19세기의 지식인이자 식물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인물인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정약용이 남긴 문헌을 중심으로 분석하였으며, 동시대의 그림과 대표적인 저술서를 보조 자료로 하였다. 본 연구를 위해 우선 18-19세기 조선에서 유행처럼 번진 정원 조영의 이유와 경향을 살폈다. 18-19세기 조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가 발달하면서 이 익과 폐단 속에 이상적 주거를 갈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정원의 조영이 유행처럼 번졌다. 다음으로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대해 고찰하였다. 정약용은 젊어서부터 정원경영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정약용은 다양한 지역과 생 활여건을 경험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상에 따른 정원 조영의 경향을 다양한 관 점에서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정약용이 열망하던 이상주거의 특징은 매우 소박한 산림의 운치가 있는 청복( 淸 福 ) 의 삶이었다. 또한 정약용은 다양한 인간관 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들과 함께 정원을 향유하였고, 그 시대의 문화를 공유하였다. 이런 이론적 고찰을 바탕으로 분석의 틀을 만들어 식물소재와 관련된 정약용의 문헌을 분석하였다. 순차적으로 선정과정과 연출기법 그리고 완상방식에 대하여 고 찰하였다. 정약용의 식물소재 선정과정에 대해 고찰해본 결과 모든 여건에서 감각적 연출 을 위한 식물소재가 선정되었다. 도시지역과 관직시절에서는 상징성을 중시한 선정 이 나타났고, 향촌지역과 유배시절 노년기는 실용성을 중시한 경향이 나타났다. 이 런 여건과 의도 속에서 정약용이 선정한 수종으로 총 81종이 도출되었다. 정약용의 식물소재 연출의 특징을 연출한 의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식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상징적 구사, 심미적 즐거움을 위한 감각적 연출, 기능적 필요성과 가치 창출을 위한 실용적 기법 이 그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연출 의도는 서로 중복되어 연출되기도 하였다. 즉, 실용적 의도로 연 - ⅰ -

출하였으나 감각적 부분까지 고려하기도 하였고, 감각적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승 화하기도 하였다. 정약용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환경적 요인인 시대적 통념, 사회적 위 치, 개인적 관심 등을 통해 식물소재의 상징성을 추출해 내었다. 감각적 연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째, 빛을 활용하여 식물소재를 다양하게 연출하였 다. 둘째, 계절을 고려하여 식물소재를 연출하였다. 셋째, 식물소재가 자극하는 오 감을 모두 연출하고 완상하였다. 넷째, 식물소재를 여러 요소와 함께 복합적으로 연출하였다. 다섯째,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식물소재를 완상하였다. 위의 다섯 가지 특징을 바탕으로 식물소재를 사시사철 즐긴 연출방법을 도식화하였다. 정약용은 식물의 고유한 생태적 특성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였고, 수익이 높은 작물을 심어 가계를 경영하여 식물소재를 실용적으로 활용하였다. 정약용의 식물소재 완상방식은 사람과 음식과 행위에 따라 그 특징이 나타났다. 홀로 즐길 때는 식물소재의 미미한 감각을, 함께 즐길 때는 화려한 감각을 완상하 였다. 정약용은 식물소재를 완상할 때 음식을 곁들여 미각적 감각을 극대화하고, 지인에게 음식을 선물함으로써 감각을 공유하였다. 정약용은 식물소재가 주는 감각 적 자극을 예술 활동으로 승화시켰다. 시 짓기와 악기 연주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모임에서 함께 식물소재를 완상하고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다양한 교류가 일어 났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식물소재는 야외활동을 할 때, 감각적 자극을 줌으로써 상승효과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시문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식물소재와 연출방법, 완상방식에 대해 고찰하였다. 정약용이 경험한 다양한 삶의 여건에 따른 정원문화 를 살펴본 것은 18-19세기 조선의 사대부가 향유하였던 정원문화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글로 남아있는 자료를 다 양한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작게나마 본 연 구의 의의가 있겠다고 하겠다. 주 요 어 : 다산 정약용, 18-19세기, 조선, 사대부, 전통정원, 식물소재, 연출기법, 완상방식 학 : 2010-22370 번 - ⅱ -

목 차 국문초록 ⅰ 목 차 ⅲ 표 목 차 ⅵ 그림목차 ⅵ 제1장 서론 제1절 연구의 배경 및 목적 01 1. 연구의 배경 01 2. 연구의 목적 02 제2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03 1. 연구의 범위 03 2. 연구의 방법 08 제3절 관련연구고찰 12 1. 18-19세기 조선 정원문화에 관한 연구 12 2. 전통조경 식물과 배식에 관한 연구 14 3.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관한 연구 15 제2장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정원문화 제1절 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황 18 1. 도시문화의 발달 18 2. 완상문화의 유행 19 제2절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정원문화 20 1. 정원의 유형 20 2. 정원문화양상 23 3. 정원 내 식물에 대한 인식 26 - ⅲ -

제3장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 제1절 삶과 정원 30 1. 인물 개요 및 사상 30 2. 삶과 정원 공간 30 제2절 정약용의 이상주거와 정원 34 1. 정원의 조영(造營) 34 2. 정원의 구성 36 3. 정원의 향유(享有) 38 제3절 함께 즐긴 이들(交遊網) 39 1. 혈연과 혼인으로 형성된 교유망 39 2. 관직에서의 인연, 사교모임 40 3. 스승과 제자로의 인연 42 제4장 다산 정약용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 제1절 식물소재의 선정 44 1. 여건에 의한 선정 44 2. 의도에 의한 선정 47 제2절 식물소재 연출기법 55 1. 상징적 구사 55 2. 감각적 연출 60 3. 실용적 기법 80 제3절 식물소재 완상방식 86 1. 86 2. 맛을 통한 체험 88 3. 문화의 향유 93 제4절 소결 : 정약용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의 특징 98 1. 식물소재 선정의 특징 98 2. 식물소재 연출기법의 특징 101 3. 식물소재 완상방식의 특징 107 - ⅳ -

제5장 결론 [ 참고문헌 ] 부록 [부록 01] 다산 정약용의 삶과 정원 [부록 02] 연구대상 자료 분석 1. 연구결과 도출을 위한 자료 분석표 2. 연구대상 자료목록 - ⅴ -

[ 표 목차 ] <표 1-1> 연구 대상 자료 6 <표 1-2> 자료 분석의 틀 11 <표 1-3> 18-19세기 조선 정원문화에 관한 연구와 연구내용 13 <표 1-4> 전통조경수목과 배식에 관한 연구와 연구내용 15 <표 1-5>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관한 연구 16 <표 3-1> 정약용의 거처와 정원 35 <표 3-2> 황상유인첩에 제함 과 야사첩 에 의한 정원의 세부구성 37 <표 3-3> 죽란시사 구성원 41 <표 4-1> 여건에 의한 식물소재 선정 도출을 위한 비교 대상지 개요와 선정여부 45 <표 4-2> 여건에 의한 식물소재 선정 46 <표 4-3> 각 요소별로 완상한 식물소재 48 <표 4-4> 정약용이 감각적으로 연출한 식물소재와 완상 요소 49 <표 4-5> 기능별로 활용된 식물소재 50 <표 4-6>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물소재 52 <표 4-7> 상징성을 고려하여 선정된 식물소재 54 <표 4-8> 화분에 심은 식물소재 77 <표 4-9> 계절별 피는 꽃 80 <표 4-10> 채마밭에 식재한 수종 84 <표 4-11> 정약용이 선정한 식물소재 99 <표 4-12> 정약용이 활용한 식물소재의 오감 자극 요소 104 <표 4-13> 동반연출요소 104 <표 4-14> 기능별 식물소재 연출 특징 106 <표 4-15> 완상의 주체에 따른 완상방식 108 [ 그림 목차 ] <그림 1-1> 연구 전개과정 9 <그림 3-1> 정약용 생애지도 33 <그림 3-2> 허련,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 1853년, 지본담채, 23X32cm, 개인 소장. 37 <그림 3-3> 다산 정약용 계보도 40 <그림 4-1> 김홍도, 치사(致仕) 일부, 18세기, 견본담채, 76.7x3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5 <그림 4-2> [ 노을빛이 스며든 국화 ] 평면 모식도 62 <그림 4-3> [ 달과 담장머리 넝쿨 ] 단면 모식도 63 <그림 4-4> [ 빈 벽에 드리운 국화그림자 ] 입단면 모식도 64 <그림 4-5> [ 달밤의 뜰에 드리운 그림자 ] 모식도 66 <그림 4-6> [ 달밤의 뜰에 드리운 그림자 ] 단면 모식도 67 <그림 4-7> 초의선사,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 일부, 1812, 지본담채, 27x19.5cm, 개인소장. 68 <그림 4-8> [ 연못에 투영된 꽃과 가을빛 ] 모식도 - ⅵ - 69

<그림 4-9> 작자미상, 경기감영도(京幾監營圖) 일부, 18세기후반, 지본담채, 444.3 136, 호암미술관 소장. 71 <그림 4-10> [ 서지(西池)의 연꽃 ] 평면 모식도 72 <그림 4-11> 1892년 청수관(淸水館) 천연정(天然亭) 朝鮮国真景 タイトルよみ 72 <그림 4-12> [ 비단바위와 단풍 ] 모식도 73 <그림 4-13> [ 담장과 봄꽃나무 ] 모식도 74 <그림 4-14> [ 그림 속 식물과 정원 속 식물 ] 모식도 76 <그림 4-15> 이인문, 산수도, 112x42.1cm, 견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83 <그림 4-16> 김홍도, 춘화4 雲雨圖帖, 28.0x38.11cm, 지본담채, 간송미술관소장. 83 <그림 4-17> 김홍도, 설후야연(雪後野宴), 시기미상, 견본담채, 100x48cm, 기메미술관소장. 90 <그림 4-18> 성협, 야연(野宴), 19세기, 지본담채, 20.8x28.3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91 <그림 4-19> 식물소재 선정에 영향 준 요인간의 관계 및 특징 98 <그림 4-20> 연출의도가 가지는 관계의 특징 102 <그림 4-21> 정약용의 렌즈모델 *브룬스윅의 렌즈모델을 재구성하였다. 103 <그림 4-22> 정약용의 식물소재 감각적 연출 105 <그림 4-23> 실용적 기법 개념도 107 71 - ⅶ -

제1장 서론 제1절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 연구의 배경... 맑은 개울물 위로 성긴 그림자 비꼈고 疏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는 달빛 속에 번져 온다 暗香浮動月黃昏... [임포, 산원매화(山園梅花) ] 위의 시는 달밤의 매화를 읊은 중국 송나라의 임포(林逋, 967-1028)1)의 산 원매화(山園梅花) 란 시의 일부이다. 그의 시에서 매화를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매화는 향이 진하지 않아 밤이 깊어 사방이 적막할 때 은은하게 풍기는 암향 (暗香)을 감상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임포는 매화의 은은한 향과 차가운 늦겨울 의 달밤을 함께 즐긴 것이다. 암향뿐만 아니라, 소영(疏影)이라 하여 달빛에 비취 어 맑은 개울물에 아롱거리는 매화그림자를 감상하였다. 창문에 비치는 매화 그림 자를 의미하는 매창(梅窓)이라는 단어도 있다. 매화를 단지 그 식물 자체만을 감상 한 것이 아니라, 암향의 후각, 달빛과 그림자의 시각, 차가운 달밤의 촉각으로 상승 효과를 이룬 공감각적 이미지로 즐긴 것이다. 이러한 감상은 비단 매화에 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인 정약용의 국영시서(菊影詩序) 란 글에, 특별히 촛불에 비친 국화의 그림자를 사랑한다. 하여, 매일 밤 담장과 벽을 쓸고 등경과 등잔을 정돈하고는 조용히 국화 그림자 가운데 혼자 앉아 즐긴다. 2)라고 국 화 꽃 자체가 아닌 그 그림자 역시 감상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상은 선조 들의 글과 그림에서 자주 만나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감각적 태도로 나무와 풀을 감상한 다른 예가 또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있다면, 그 풀과 나무를 즐기기 위한 태도는 무엇이었는지? 이런 소재들의 감상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어떻게 공간에 연출하였는지? 본 연구는 1) 임포는 벼슬을 버리고 항주에 있는 서호의 고산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梅妻鶴子) 신선처럼 고고하게 은거한 삶으로 유명하다. 2) 정약용, 국영시서(菊影詩序),... 余於四者之外. 又特取其燭前之影. 每夜爲之掃墻壁治檠釭. 而蕭然坐其 中以自娛.... (박무영 2001, 63에서 재인용) - 1 -

이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2. 연구의 목적 정원이나 수목에 관련된 뿌리와 원형을 찾고자 한 노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각도로 진행되었다. 특히 전통정원에 관련된 연구에서는 정원에 쓰인 식물과 점경 물 등의 소재, 그리고 그 것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연구나 수목의 배식에 있어서 기능적, 생태적, 형태적, 상징적 기법에 관한 연구에 많은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정원 내 식물을 통한 정원과 행위의 연관성, 감각적 완상방식에 대한 연구는 부족 한 실정이다. 특히 전통정원의 재현에 풀과 나무는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재료이다. 하지만 단지 전통수목을 심고 그 형태를 모방한다하여 그 정원이 전통정원이 되는 것이 아 니다. 옛 사람들이 즐겼던 그 감성적 방법을 찾고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전통정원 재현의 일보전진이 되지 않을까. 또한 옛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것은 우리나라 풍토와 정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을 보는 것이다. 이는 우리 고유의 것이며, 우리만이 가진 차별화된 결과 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자연에 대한 동경을 우리 입맛으로 도시 내 공간에 표현하는 방법을 한국 전통에서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는 본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19세기 조선에서는 정원 조영이 유행처럼 번졌다. 삶의 질을 높이려는 한 흐름으로 조영된 정원과 시대적 배경의 관계를 찾고, 정원 내 식물소재를 바라 보았던 의식을 밝힌다. 둘째, 이를 위해 특정인물의 삶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그 대상 인물로서 조선후기의 지식인이자 식물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다산 정약용으로 한다. 정약용의 정원 조영관을 그의 삶, 사상과 함께 정리한다. 셋째, 다산 정약용 의 글과 원림에 주목하여 전통정원 내에서 식물소재를 공간적으로 어떻게 예술적으 로 조영하였는지, 감상자가 어떤 감각적인 태도와 행위로 식물소재를 즐겼는지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 2 -

제2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1. 연구의 범위 1.1 시대적 범위 본 연구에서는 18-19세기를 시대적 범위로 한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시기구분을 설정하는 기본시각은 대체로 서너 가지로 정리 해 볼 수 있다. 먼저 전통적 이해방식은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의 두 시 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과 같은 양란으로 조선 전기의 안정적 인 사회체제가 조선 후기에 와서 해이해졌다고 보는 시각이다. 한국사를 발전론적 으로 이해하려는 시각도 역시 양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양란 이후 사회가 해체 되어 17세기가 되면 전통체제가 흔들리고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첫 시기가 된다는 이해방식이다. 즉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한 시기로 보고 18 세기 이후에는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한다는 입장이다(한국역사연구회 2003, 26). 정치사적 입장에서는 조선 초기의 훈구세력이 정치를 이끌어 가던 시기에서, 사 림파가 정치의 정면에 등장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사림정치를 이끌어 가던 시기를 조선 중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사림정치의 폐해로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 즉 탕평 정치가 시작되어 세도정치로 넘어가던 시기를 후기로 파악하는 시각이라고 보고 있 다(이태진 1983; 홍순민 1995). 따라서 조선시대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제1기(15 세기)를 국역체제가 확립되는 시기, 제2기(16-17세기)를 양반지배체제의 안정기 (또는 전기적 국역체제의 해체기), 제3기(18세기 이후)를 양반지배체제의 동요기 (또는 국역의 총액제 운영기)로 규정하고 있다(한국역사연구회 2003, 26). 회화사적 입장에서는 안휘준의 한국회화사 에서 양식의 변천에 따라 초기 (1392-약1550), 중기(약1550-약1700), 후기(약1700-약1850), 말기(약 1850-1910)의 4기로 구분하였다. 3기로 나누어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 대표적 학자로는 이동주를 들 수 있다. 이동주는 중종연간(1506-1544)까지를 전기로, 중 종년간부터 숙종연간(1674-1720)의 전반까지를 중기로, 그리고 숙종연간 후반부 터 구한말까지를 후기로 나누어 보았다. 하지만 후기도 김정희 이후의 화단은 그 이전과 성격의 차이가 크고 또 근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한 번 더 나누어 후기와 말기로 구분하고 있다(안휘준 1980, 91-2, 154-5). - 3 -

정원은 경영주체의 취향에 따라 좌우되며, 경영주체는 정치, 경제 등 사회적 배 경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본 연구의 시대적 범위는 임진왜란(1592-1598)과 병 자호란(1636-1637)의 양난( 兩 亂 )이 일어난 후 황폐화 된 국토를 재건하여 새로운 사회적 제도와 문화가 나타나는 시기로부터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는 시기까지인 18-19세기로 한다. 18-19세기 조선으로 시기를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 영향으 로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1780) 등 새로운 문체와 생활방식이 유행하였 다. 이에 봉건사회가 붕괴될 것이 우려되었던 정조는 문체반정( 文 體 反 正 ) 3) 을 통해 이 유행을 제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사대부들은 이런 제약에 대한 반발으로 자신의 역량을 표현하기 위한 벽( 癖 ) 과 치( 痴 ) 4) 로 인한 다양한 한국적 문화가 발달한 시기이다. 그 한 갈래로서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는 일이 크게 유행하였다. 둘째, 취미로서의 정원 및 정원전문가가 나타난 시기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시대 에서는 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신림( 神 林 )이나 작물을 키우는 생산적 기능 중심 의 원림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꽃을 좋아하는 화벽( 花 癖 )이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 18세기 유박( 柳 璞, 1730-1787)의 경우, 황해도 배천군 금곡을 선택하여 이십년 동안 화원을 경영했고, 거기서 쌓은 전문지식과 감상의 안 목을 바탕으로 화암수록( 花 庵 隨 錄 ) 이란 전문서를 지었다(안대회 2007, 9). 셋째, 풍부한 문헌자료가 남아있는 시기이다. 다양한 글과 그림을 통해 다른 시 기보다 쉽게 그 당시 정원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2 연구의 대상 18-19세기 조선의 글과 그림은 다수 전해오고 있으나, 완상이나 연출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정 인물의 선정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19세기에 활동한 지식인을 선정 3) 1792년 10월 19일 정조가 내린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했던 정책이다. 중국판은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 누워서 보기에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즉, 고전을 엄숙한 자세로 읽어야 그런 스타일의 글이 써질 것이라는 이론에서였다. 정조는 서적 수입금지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한편,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하였다. 이로 인해 정조시대 이후 새로운 문체적 실험이 완 전 중단되었기 때문에 19세기는 지성사적 측면에서 암흑기 라 해도 좋을 정도로 황량하였다. (고미숙 2004, 109-16) 4) 벽( 癖 ) 과 치( 痴 ) 는 모두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 疒 )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들이다. 모두 무엇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정민 2004, 23) - 4 -

하였다. 둘째, 18-19세기 조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인물을 선정하였다. 셋째, 지식적재정적으로 정원경영능력이 있고 향유할 수 있었던 인물을 선정하였 다. 넷째, 정원과 관련한 다양한 기록과 자료를 남긴 인물을 선정조건으로 하였다. 이 선정조건을 만족시키는 인물로 다산( 茶 山 ) 정약용( 丁 若 鏞, 1762-1836)을 선 정하였다. 정약용은 정치 및 경제학자일 뿐 아니라 문학의 대가였으며, 수원성을 쌓을 때는 기중가설( 起 重 架 說 )에 의한 도르래[ 滑 車 轆 轤 ]를 만들게 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조선후기부터 궁궐이나 관아가 아닌 일반 사가( 私 家 )에서 친목도모와 유흥을 위 한 자유로운 모임이 열렸다(송희경 2004, 44). 정약용은 이런 문화사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죽란시사( 竹 欄 詩 社 )라는 사적인 친목과 문화교류를 위한 공동체를 결성하 여 문화 활동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문 속에는 조경수목이 58여 종(정동오 1983, 123)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의 삶터인 남양주 소내( 苕 川 )의 여유당과 명례방( 明 禮 坊 )의 죽란사는 물론 유배지인 강진( 康 津 )에서까지 정원을 조 영( 造 營 )했던 조경가이기도 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글과 정원을 중 심으로 18-19세기 조선 사대부 정원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에 대해 연 구하고자 한다. 현재 남아있는 다산 정약용의 정원은 경영주체의 변화와 지속적인 관리의 어려 움 등으로 인한 변형과 훼손으로 그 원형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정원의 주요 구성요소인 식물은 자연의 천이과정 등으로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그 원형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주된 자료는 문헌자료에 의존 하되, 원림유적은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참고로 한다. 다산 정약용과 관련이 있는 현존하는 정원유적지는 전라남도 강진의 다산초당( 茶 山 草 堂 )과 경기도 남양주 시의 여유당( 與 猶 堂 )이 있다.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어있는 다산초당( 茶 山 草 堂 )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 덕리 산 103-2에 위치해있다. 강진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갔을 때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년간 지냈던 공간이다. 원래 정약용의 외가 친척인 윤 박( 尹 博,?-?)의 산정( 山 亭 )이었던 것을 새로 꾸며 만든 보금자리였다. 당초 작은 초가집이었고 허물어진 것을 1958년 해남윤씨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새롭게 지었 다.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해배( 解 配 ) 후 여생을 보냈던 여유당( 與 猶 堂 )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다산유적지란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다. 본래 - 5 -

위치는 다산유적지 입구 주차장 부근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소실되었던 것을 유적지 내에 복원하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하나가 되어 호수같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는 두물머리 가 보이는 한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개혁자인 정약용은 경세유표, 목 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권의 저술이 있고, 다수의 시와 글을 남겼다. 그의 수많은 문헌 중 본 연구를 위해서 선정한 자료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정약용이 머물렀던 거주지와 유흥을 즐겼던 유람지에 대한 기록 중 식물소재 가 나타난 자료, 식물소재에 대한 정약용의 의식과 이용방법에 대해 기록된 자료와 그림을 대상으로 한다. 정약용이 저술한 글은 아니지만 식물소재와 관련된 조선을 대표할 만한 저술서와 18-19세기 조선에서 활동했던 화가의 그림을 보조 자료로 한다. 자료를 정리하면 <표 1-1>과 같다. <표 1-1> 연구 대상 자료 구분 정약용 작가 연구자료 자료해제 해석 가능한 정보 여 유 당 집 (與 猶堂集)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정리 한 문집 공간과 식물에 관한 시문과 기문의 다양한 기록 아 언 각 비 (雅 言覺非) 국민의 언어생활을 바로잡기 위해 지은 어원 연구서 식물의 한자명과 이름의 유 래 파악 가능 야 사 첩 (埜僿 帖) 강진군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산시문집 에서 누락된 일 문 (佚 文 )으 로 모 시 에 먹 글 씨로 쓴 글. 구체적인 이상주거의 세부사 항 파악 가능 석재죽란고성 애 국 (昔 在 竹 欄顧性愛菊) 다산이 활동한 시우회의 시 모음집 국화에 대한 정약용의 의식 파악 가능 초의선사(草衣禪 師, 1786-1866) 다산초당도 (茶 山 草 堂 圖 ) 1812년 정 약 용 의 부 탁 으 로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 정약용이 조성한 당시의 정원 구조와 식물소재 파악 가능 허련( 許鍊, 1808-1893) 일속산방도 (一 粟 山 房 圖 ) 1853년 정 약 용 의 제 자 황 상 의 산방을 그린 그림 정약용의 가르침대로 조성한 정원 공간의 모습 파악 가능 서유구(徐有榘, 1764-1845) 임원경제지 (林 園 經 濟 志 )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 론을 편 실학적 농촌경제 정 책서 각종 식물의 이름고증 및 재 배법과 조선후기의 각종 예 술과 문화에 대해 파악 가능 강희안(姜希顔, 1418-1465) 양 화 소 록 (養 花小錄) 1474년 에 저 술 된 원 예 에 관 한 책 조선전기의 기록이지만 조선 시대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원예에 대한 지식 파악 가능 홍석모(洪錫謨, 1781-1850)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 고 설명한 세시풍속집 18-19세 기 조 선 의 풍 속 파 악 가능 김득신(金得臣, 1754-1822) 풍 속 화 첩 (風 俗畵帖) 풍속을 그린 화첩 18-19세 기 조 선 의 공 간 및 풍속 파악 가능 김홍도(金弘道, 1745-1816) 단원풍속도첩 (檀園風俗圖帖) 풍속을 그린 화첩 18-19세 기 조 선 의 공 간 및 풍속 파악 가능 정약용(丁若鏞, 1762-1836) 관련 자료 조선 시대 저술서 그림 자료 - 6 -

(표 계속) 구분 그림 자료 작가 연구자료 신윤복(申潤福, 1758-1813?) 혜원전신첩 (蕙 園 傳 神 帖 ), 풍속을 그린 화첩 18-19세 기 조 선 의 공 간 및 풍속 파악 가능 이유신(李維新,?-?) 화 첩 (畵 帖 ) 주로 모임을 그린 그림이 많음 18-19세 기 조 선 의 공 간 및 풍속 파악 가능 문 인 지 우 (文 人 知 友 ), 고 사 도 (故 事 圖 )를 다 룬 그 림 18-19세 기 조 선 선 비 의 의 식 및 관심거리 파악 가능 정선( 鄭敾, 1676-1759) 자료해제 해석 가능한 정보 1.3 내용적 범위 이 논문에서는 우선 18-19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이 시기의 지식인들이 생각하 는 식물소재의 인식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이해 한 후, 다산 정약용의 글과 정원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분석하였다. 첫째, 정약용이 정원에서 식물소재를 선정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에 영향을 받았 는지, 어떤 의도에 의해 선정이 되었는지 파악하였다. 식물소재는 기후 및 입지에 따라 자생수종이 달라지므로 정원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식물소재의 선정에 대해 분석하였다. 또한 이런 자연적 조건 외에 정약용이 의도하는 목적에 따라 어떤 식 물소재의 선정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파악하였다. 둘째, 정약용이 정원에서 식물소재를 어떤 방법으로 연출했는지에 대해 고찰하였 다. 우선 옛 사람들이 선호했던 식물소재를 파악하여 그 선정경향을 파악하였다. 이 런 선정된 식물소재를 어떤 기법으로 표현해 냈는지를 고찰하였다. 예를 들어 식물 소재 자체의 색상 형태 질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정원 공간과 식물소재에 어떤 구 도적 관계가 있는지, 정원의 다른 연출재료인 점경물과는 어떻게 조합되어 나타났는 지를 고찰하여 정원에서 식물소재의 물리적 형상을 파악하였다. 셋째, 정약용이 연출한 정원공간에서 식물소재를 어떤 태도로 즐겼는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개인적 취향으로서 식물을 바라보는 어떤 감각적 태도가 있었는지, 어 떤 상징을 부여했는지, 혹은 누구와 함께 어떤 활동을 정원에서 했는지에 대한 연 구를 통해 전통정원을 이해하였다. 위의 과정을 통해 정약용이 정원에 식물소재를 통해 연출한 것과 완상했던 방식 이 무엇인지 해석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사회적 배경에 따라 생긴 미의식 과 그 미의식이 정약용에게 끼친 영향, 그리고 그 영향이 정원에 식물소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파악하여 18-19세기 정원의 단면을 찾아내었다. - 7 -

2. 연구의 방법 2.1 연구의 전개과정 옛 정원의 식물이나 조경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첫째는 남아 있는 유적, 유물을 통하여 밝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문( 詩 文 )을 통 하여 서술한 장면을 유추하여 고증을 받아 연구하는 방법이 있으며, 셋째는 원 모 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자료(문인화, 진경산수화 등)를 통한 방법이 있고, 넷째 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식물의 경우 화분분석( 花 粉 分 析, Pollen analysis)을 통하여 그 당시 어떤 식물이 식재되었는지 밝히는 방법이 있다(심우경 2006, 93). 본 연구는 정약용의 시문( 詩 文 )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연출기법과 완상방식을 찾 고, 조선시대에 저술된 식물소재 관련 글과 18-19세기에 그려진 식물소재 그림의 분석을 병행한다. 정약용의 식물소재 연출기법 및 완상방식을 연구함에 앞서 식물소재를 주재료로 하는 전통정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로부터 연구를 시작한다. 전통정원은 공간의 물 리적 기능적 특징이나 기교보다는 그 조성이면의 정신적 차원과 사물에 의미 부여가 더욱 중시된다. 따라서 그 전제조건으로서, 18-19세기 조선시대에 정원문화를 형성 하게 된 배경과 식물에 대한 의식에 대해 탐구한다. 이를 위해서 기존에 연구된 다 양한 분야의 연구결과를 참고로 한다. 연구대상은 인물중심으로 조사한다. 즉, 조선 후기의 지식인인 다산 정약용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다산의 행적과 흔적을 더듬어 그 속에 드러나거나 혹은 숨겨진 식물소재의 연출기법과 완상방식을 정리하 는 것이다. 정원 조영의 배경을 찾기 위해 다산 정약용의 생애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가 남긴 시문에서 정원과 관련된 자료를 추출한다. 정약용의 자료 분석 및 해석을 위해 분석의 틀을 정립한다. 분석의 틀은 관련 선 행연구를 고찰하여 연출기법과 완상방식 등을 주요 참고기준으로 목록화하여, 주로 어떤 감각의 세계로 식물소재를 읽어 냈는가에 대해 정리한다. 다산 정약용이 작성 한 정원과 관련된 자료를 바탕으로 1차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식물소재를 찾고, 이 를 통해 작정자의 식물소재 선정경향과 선호식물에 대해 파악한다. 2차적으로 자료 간의 공통적인 요소를 파악하여 공간, 계절, 물리적 요소 등 주변 환경에 따라 식 물소재를 어떻게 연출했는지 심미적, 물리적 특징을 정리하고 도식화한다. 3차적으 로 정원 안에서 이루어진 식물소재의 완상방식과 행위의 유형을 밝힌다. 본 연구의 전개과정을 도해로 정리하면 다음 <그림 1-1>과 같다. - 8 -

<그림 1-1> 연구 전개과정 2.2 자료 분석의 틀 다산 정약용이 정원에서 식물소재를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완상했는지에 대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도출하기 위해 분석의 틀을 기준으로 자료를 분석한다. 분석할 자료는 여유당집(與猶堂集) 및 기타의 자료에서 정약용의 감성과 의 - 9 -

도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시문( 詩 文 )이나 기문( 記 文 )을 중심으로 한다. 도출된 결과 를 보충하기 위해 정약용이 작성한 전문서나 글, 혹은 18-19세기 조선에서 활동한 문인들의 글과 화가들의 그림을 보조자료로 활용한다. 여유당집( 與 猶 堂 集 ) 원문과 번역문은 한국고전번역원 5) 의 한국고전종합DB에 서 제공하는 다산시문집( 茶 山 詩 文 集 ) 을 참고로 하였다. 다산시문집( 茶 山 詩 文 集 ) 외에 정약용이 작성한 시( 詩 )나 기( 記 )가 계속하여 발견되고 있는데, 이 자료 들은 관련 전시회의 도록 6) 이나 최근 간행된 번역본 7) 을 참고한다. 분석대상자료의 목록은 [부록 02] 2. 연구대상 자료 목록 과 같다. 자료 분석의 틀은 총 6가지로 분류하였고 원문 출처를 병기하였다. 본 연구의 중 심이 되는 완상의 식물재료 는 자료에서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주요 식물 과 이 주요 식물과 함께 등장하는 보조 식물 을 정리하고 각각의 식물소재의 연출기법 과 식물소재간의 연출관계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식물재료의 어떤 모습을 감각적 완상대상 으로 연출하고 완상했는지를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 의 오감 ( 五 感 )을 틀로 분석하였다. 완상한 식물소재가 위치한 장소 는 직접적인 지역이나 건물, 정원의 이름인 지명 과 그 안에서 어느 공간 에 위치하는 지를 파악하여 입 지에 따른 식물소재의 연출기법과 완상태도를 분석하였다. 시간 에 따라 다양한 모 습으로 변하는 식물소재의 특성과 그것을 어떻게 연출하고 완상했는지 파악하기 위 해 계절 과 하루 중 어느 시각 에 중점을 두었는지 파악하였다. 식물소재와 주로 동반하여 연출되는 요소 를 괴석이나 울타리 등의 시설요소 와 비나 바람 등의 날 씨인 자연요소 로 나누어 어느 요소가 주로 식물소재와 함께 연출되었는지를 파악 하였다. 마지막으로 식물소재의 완상방식 을 파악하기위해 행위의 주체가 개인인지 혹은 어떤 동반자와 함께였는지, 즉 어떤 모임형태 를 가졌는지와 그들이 완상하면 서 한 행위유형 을 파악하였다. 이 6가지 분석의 기준과 그 세부내용은 <표 1-2>와 같으며, 이 분석의 틀로 연구 자료를 분석한 내용은 [부록 02]에 첨부하 였다. 5) 2007년 11월에 출범하여 한문고전의 수집, 정리, 번역을 거쳐 출판 및 DB 매체를 통해 학계와 일반에 제공함으로써 한국학 연구의 토대를 조성하고 있다.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를 통해 고전번 역서 및 국고문헌(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한국문집총간, 국학원전 등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 다. 6) 다산종합도록, 다산 정약용, 마파람이 바다 위에 불어, (강진군, 2009) 제5회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특별전 도록, 다산학예, 방산에서 꽃피다, (강진군, 2009) 제6회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특별전 도록, 다산 정약용과 치원 황상의 만남, (강진군, 2010) 제7회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특별전 도록, 다산과 추사 2, (강진군, 2011) 2010년 상반기 실학박물관 특별전 전시도록, 다산과 가장본 여유당집, (실학박물관, 2010) 7) 정민, 다산의 재발견, (휴머니스트, 2011) - 10 -

<표 1-2> 자료 분석의 틀 구 분 완상식물 감 각 적 완상대상 주요식물 자료의 중심이 되는 식물과 연출기법 보조식물 주요식물의 배경이나, 함께 등장하는 식물과 연출기법 시 각 (視 覺 ) 색깔, 모양, 빛 등 촉각 감촉, 질감, 온도 등 청각 자연소리, 인공소리 등 후각 향기, 냄새 등 미각 맛 등 시설요소 동반연출 요소 자연요소 지명 완상장소 완상시간 완상방식 분석 내용 공간 식물소재의 연출기법 및 식물 소재간의 연출관계 감각에 의한 식물소재의 연출 기법 및 완상방식 식물과 함께 등장하는 시설요소 (예 : 괴 석, 울 타 리 등 ) 식물과 함께 등장하는 자연요소 식물소재와 동반하여 연출된 시설요소와 자연요소 (예 : 날 씨, 동 물 등 ) 지역이나 건물, 정원의 이름 현상이 일어나는 구체적 장소 장소에 따른 식물소재의 연출 기법 및 완상방식 (예 : 방 안, 지 당 등 )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과 암시요소 시 각 (時 刻 )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과 암시요 소 모임형태 개인 혹은 모임, 동반자 행위유형 해석 내용 완상하면서 함께 한 행동 (예 : 시 짓 기, 차 마 시 기 등 ) - 11 - 시간에 따른 식물소재의 연출 기법 및 완상방식 모임의 형태에 따라서 달라지 는 식물소재의 완상방식과 식 물을 완상하며 함께 한 행위 유형

제3절 관련연구고찰 본 연구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18-19세기 조선의 정원문화에 관한 선행연구 고 찰을 통해 정원조영의 문화사적 배경과 정원유형, 정원에서 나타난 문화양상을 이 해하였다. 그 다음 선호되었던 식물소재와 식물을 바라보았던 의식에 대한 자료로 서 전통정원의 조경식물과 배식에 관한 선행연구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연 구의 주요대상인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관한 선행연구를 고찰하였다. 1. 18-19세기 조선 정원문화에 관한 연구 정원은 정원을 조영(造營)하는 사람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또한 조영하는 사람은 그 시대의 문화와 사조(思潮)에 의해 그 의식이 형성된다. 따라서 작정자의 의식과 시대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18-19세기의 정 원문화에 대한 선행연구를 살펴보았다. 정민(2005)의 연구에서는 18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원예취미를 하나의 문화현 상으로 보았다. 이런 문화현상이 나타난 이유를 사물에 대한 관심의 증대, 중국 일 본과의 문화 교류 확대와 도시문화의 확산이 가져온 것으로 보았다. 김수아(2010), 정봉구(2009)의 연구에서도 조선후기에 나타난 정원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같은 관점을 갖고 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18-19세기의 원림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정 봉구(2009)는 원림 조영의 주체인 경화사족의 글과 그림을 통해 연구하였다. 조선 후기 한양 원림의 특징은 바깥채 영역에 실용적인 텃밭을 둔 것과, 사랑채 영역을 분할하여 모임의 장소를 마련한 것을 밝혀냈다. 유가현(2012)은 원림의 확장된 공 간으로서 산에서 나타난 동(洞)의 의미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홍형순 (2006)은 상상의 정원에 대한 기록을 통해 사대부의 정원생활과 그 문화에 대해 연구하였다. 정원에서 나타난 문화현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송희경(2004)은 정 원에서 이루어진 사대부들의 개인적 모임인 아회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김수아 (2010)는 전통정원을 사대부들의 이상향이었던 산수자연을 담은 공간으로서, 물리 적인 정원요소들을 감각적으로 향유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노닐 수 있 는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김은정(2012)은 에로티시즘의 관점에서 전통정원을 해석 하였다. 전통정원 안에서 나타난 에로티시즘 향유의 주체, 성립조건, 장소, 유형, 표 - 12 -

출 정서에 대해 연구하고 회화를 바탕으로 공간적으로 도식화를 시도하였다는데 의 의가 있다. <표 1-3> 18-19세기 조선 정원문화에 관한 연구와 연구내용 18-19세기 조선 정원문화에 관한 연구 김수아, 2010,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 석사학위논문 조선시대 와유문화(臥遊文化)로 해석한 전통조경 조선시대 문인들의 정원과 관련한 기록을 대상으로 조선시대에 다양한 전개양상을 보인 와유문화와 전통정원과의 문화사적 관계를 연구. 정원의 물리적 구성요소들을 분석하고, 나아가 정원이란 개인의 이상향이 축적되어 조영된 공간으로 심신의 휴식과 안정 뿐 만 아니라 정신의 수양과 유희를 위한 공간으로서 그 의미를 가짐. 김은정, 2012,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학위논문 조선후기 정원에서 전개된 에로티시즘 양상과 표출 방식 연구 : 풍속화와 시문 해석을 중심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풍속화와 시문 해석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정원에서 전개된 에로티시 즘 양상과 표출 방식을 밝힘. 주로 회화자료를 통해 에로티시즘이 구현되는 공간들의 구 조 및 요소들 간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여 에로티시즘 향유의 주체, 성립조건, 장소, 유형, 표출 정서에 대해 정리. 공간의 도식화를 시도. 송희경, 2004,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조선후기 아회도 연구 조선시대의 관료와 문인들이 여러 목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모임을 개최하고 이를 시각물 로 남긴 아회도에 대한 연구. 사대부의 정원에서 이루어진 아회에 대한 정보를 포함. 유가현, 2012,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 사대부 원림으로서 동(洞)에 관한 연구 전통시대 한국정원의 속성을 산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한 연구. 원림의 개념을 경관을 만 드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노닐고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설명. 원림으로서 동의 의 미 를 고 찰 하 기 위 해 서 사 대 부 의 동 (洞 ) 답 사 기 록 에 나 타 난 내 용 을 파 악 하 여, 원 림 의 형 태와 의미, 행위 유형을 연구. 정민, 2005, 한국한문학연구 35. 18, 19세기 문인지식인층의 원예 취미 18세 기 중 반 이 후 서 울 지 역 을 중 심 으 로 성 행 한 원 예 문 화 에 대 한 연 구. 화 훼 재 배 와 정 원 경영을 이 시대의 문인지식인층의 문화현상으로 보고, 이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현상에 대한 연구. 정봉구, 2009,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조선 후기 한양의 원림에 관한 연구 :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원림기(園林記)와 원림도(園林圖)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경화사족들의 도시문화가 한양 원림의 구성요소와 특성에 반영되었음을 규명. 조선 후기 한양 원림의 형성배경을 찾고, 경화사족의 원림기와 의원기, 원림도 및 유서 등을 분석하여 조선 후기 원림의 특성을 도출. - 13 -

홍형순, 이원호, 2006,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ol.24, No.4 허균의 저작을 통해 본 상상적 공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경관에 관한 연구. 조선 선조 때의 명망 있는 문인인 허균 의 작품을 통해 그가 표현한 상상적 공간의 실체를 들여다 봄. 2. 전통조경 식물과 배식에 관한 연구 정원에서 식물소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되어온 전통정원의 조경 식물과 배식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았다. 이선(2006)의 책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식재의 역사와 각각 공간 성격에 따른 배식유형 등 한국전통조경식재에 대해 총망라한 책이다. 이 책은 전통 조경식물에 대한 역사적 상징적 기능적인 기능과 그 배식기법에 대한 기초자료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외희(1986)는 조선시대 조경 식물을 고문헌과 사례지 답사를 통해 그 문화적 배경에 따른 상징성을 고찰하고 한글명 한문명 학명 등으로 정리하였다. 김미옥 (2010)은 그동안 교목에 비해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지피식물과 그 배식기법 을 연구하였다. 이외희(1986)와 김미옥(2010)의 논문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선호 했던 식물에 대해 파악하는 기초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박상진(2011)과 이상희(2004)의 책은 식물과 관련된 문화와 역사를 정리한 연 구로서, 과거에 선조들이 생각했던 식물에 대한 생각이나 쓰임 등을 살펴볼 수 있 다. 박상진(2011)의 책은 식물의 쓰임새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였다. 각 식물이름의 유래 관련된 문화 및 중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의 관련 자료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상희(2004)의 책에서는 주로 꽃과 관련된 우리문화, 즉 꽃에 대한 미의식, 민속, 문학, 예술, 전설 등을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다. 심우경(2006)은 최근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상당수 발표되고 있는 문헌들을 바탕 으로 조선후기 시문에서 정원조성의 의도와 방법을 파악하였다. 주된 작정자는 문 인이었지만 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과학적인 기술을 동원하였으며, 주거 환경에서 화려한 경관 조성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을 중요시했다고 밝히고 있어 조선 문인들이 식물소재를 기능적, 과학적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연구는 식물소재의 선정경향과 상징성, 기능성, 배식기법 등에 대해 많이 진행되어 왔으나,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하는 식물소재의 심미적인 연출기법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 14 -

<표 1-4> 전통조경수목과 배식에 관한 연구와 연구내용 전통조경수목과 배식에 관한 연구 김미옥, 2010, 상명대학교 대학원 환경자원학과 환경조경전공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 지피식물에 관한 연구 : 옛 그림 및 문헌 분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옛 그림 및 문헌을 중심으로 지피식물과 그 배식기법을 도출하여 문화재 유 역 및 현대 조경에 활용하기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함. 연구 자료는 입수가 가 능 하 고 사 료 적 가 치 가 있 는 조 선 시 대 의 옛 그 림 766점 (정 원 도 6점, 민 화 760점 )과 고 문 헌 8점 의 사 료 를 대 상 으 로 분 석. 박상진, 2011, 김영사 문화와 역사로 만나는 우리나무의 세계 꽃과 열매가 아름다운 나무에서 생활에 쓰인 나무까지 생태학적 접근을 넘어 인문학적 접근으로 나무에 담긴 역사와 철학을 다루고 있음. 역사서와 고전소설, 옛 선비들의 문집, 시가집 등 고전문헌의 명확한 해석을 통해 나무의 삶을 재조명하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탐구함. 심우경, 2006, 韓國實學硏究, 제12호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문헌을 통하여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주거환경을 꾸리는데 있어서 이들이 선호한 조경식 물과 조경문화, 정원조성의 의도와 방법를 이해. 품종을 구분하여 명시하거나 난대식물을 방한 시설이나 온실을 지어 월동하게 하는 등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 실용적인 측면을 중 요시했다는 점을 강조함. 이상희, 2004, 넥서스Books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생 물 학 적 문 화 사 적 전 분 야 에 걸 쳐 꽃 과 우 리 문 화 와 의 관 계 를 깊 이 있 게 고 찰 한 책. 꽃 의 상징, 한국인의 꽃에 대한 미의식, 꽃과 민속, 꽃과 문학, 꽃과 예술, 꽃에 얽힌 전설 등 한국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꽃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음. 이선, 2006, 서울 : 樹流山房.仲心 우리와 함께 살아온 나무와 꽃 (한국 전통 조경 식재) 전통 조경의 특질과 배경 사상, 선사시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식재의 역사, 궁궐과 지배층, 민가 등 공간에 따른 배식 유형 등 전통 조경 식물의 면면 들을 연구. 이외희, 1986, 서울대학교 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학위논문 조선시대의 주요조경식물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 조선시대 조경식물의 상징성과 그것이 정원의 조경식물 선택에 미친 영향을 고문헌과 민 가정원 중 별서를 사례로 고찰. 또한 상징성이 나타나게 된 요인을 식물의 형태 및 생리 적 특성, 식물과 관련된 고사 및 인물의 연상, 유교의 영향 등으로 정리. 3.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관한 연구 본 연구의 대상인 다산 정약용에 대한 선행연구를 통해,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영 향을 미친 삶의 배경과 사상, 정원에서의 행위양상 등을 살펴보았다. - 15 -

정동오(1983)는 정약용이 조성한 정원과 방문한 유람지를 일생에 따라 정리하였 다. 이 연구를 통해 정약용의 개인적 상황에 따른 정원 조영 경향을 파악할 수 있 었다. 정민(2010)은 정약용의 시문을 통해 정약용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주거의 형태 와 구성요소를 공간별로 정리하였다. 박희성(2006)은 정약용의 자연관이 강진 다 산초당에 어떻게 구현되었고, 정원에서 어떻게 향유하였는지 그 의미를 연구하였 다. 정민(2010)과 박희성(2006)의 연구를 통해 정약용의 글에 담긴 이상적 공간과 실제적 공간인 다산초당이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정원에서의 향유방식을 구체적으로 연구한 다음과 같은 선행연구가 있다. 신익철 (2008)은 정약용의 국영시서(菊影詩序) 를 통해 그 당시 유행했던 국화그림자 감상법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정약용과 주변 인물들이 국화그림자를 감상한 글을 분석하여, 정약용이 다른 사람과 달리 과학적 관찰시선 을 통해 감상하였음을 해석 하였다. 정정미(2011)는 정약용이 즐겨 마신 차(茶)와 관련된 시(詩)를 통해 정약 용의 차생활, 즉 정약용이 심은 차나무의 종류와 차를 통한 주변인과의 교류 등을 고찰하였다. 정민(2011)의 책인 다산의 재발견 에서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1801-1818까지 강진 유배시기에 정약용이 작성한 시와 편지글을 찾아 국역(國譯) 하였다. 이 책에 포함된 정원과 관련된 시(詩)는 본 연구를 진행하는 기초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표 1-5>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관한 연구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에 관한 연구 박희성, 2006,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정약용의 자연관과 다산초당원의 의미에 관한 연구 다산 정약용의 자연관을 중심으로 다산초당원의 의미를 찾음. 정원을 구성하고 있는 외형 적인 요소들에 대한 통시적 고찰을 통해 본래의 모습을 추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작정 자의 행태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정원의 의미를 살펴봄. 신익철, 2008, 한국실학연구 Vol.16. 다산(茶山)과 다산학단의 국영시(菊影詩) 창작과 그 의미-원굉도 문학의 수용 양상과 관련하여 정 약 용 과 주 변 사 람 들 의 국 영 (菊 影 )에 대 한 시 의 분 석 을 통 해, 감 상 의 입 장 차 이 를 규 명. 정약용은 원굉도의 국영시를 통해 국화그림자 놀이를 알게 되고 즐겼지만, 원굉도처럼 국 화 그 림 자 의 모 습 그 자 체 를 시 화 (詩 化 )하 는 것 이 아 니 라, 과 학 적 관 찰 의 시 선 으 로 국 영 을 대했음을 밝혀냄. - 16 -

정동오, 1983, 한국정원학회 Vol.1 No.2. 정약용의 원림생활연구-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를 중심으로 정다산전서를 중심으로 조경가로서 정약용이 있게 한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정약용의 일 생 을 유 소 년 시 절, 관 리 기 간, 유 배 기 간, 해 배 이 후 의 4기 로 나 누 어 정 원 생 활 을 살 펴 봄. 또 한 정 약 용 의 시 문 속 에 나 타 난 58여 종 의 조 경 식 물 을 밝 혀 냄. 정민, 2011, 휴머니스트 다산의 재발견 이 책 은 1801-1818년 까 지 강 진 유 배 시 기 다 산 의 생 생 한 육 성 을 담 은 친 필 편 지 를 찾 아 내어 연구하고 정리하였음. 다산의 강진 유배 시기, 수많은 제자, 승려, 자녀에게 쓴 시, 산문 등을 역사적 맥락, 문화적 맥락, 개인적 맥락 속에서 맞춰내 다산의 면모를 재구성 하고 있음. 정민, 2010,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47. 다산 정약용의 이상주거론 정약용의 여러 글을 통해 이상적인 주거에 관한 그의 생각을 살펴봄. 정약용이 추구한 이 상주거의 핵심을 복잡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자연 친화적 생활 등으로 요약함. 이상적 주거 공간의 위치 설정과 구성, 운영 방식에 대해 연구. 정정미, 2011, 계명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정약용의 다시(茶時)와 차 생활 정약용의 시문 중 다시에 관련된 자료를 중심으로 정약용의 차 생활에 대해 연구. 정약용 이 심은 차나무의 종류와 차를 통한 주변인과의 교류, 정약용의 차에 대한 생각 등에 대 한 자료를 포함. - 17 -

제2장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정원문화 제1절 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황 1. 도시문화의 발달 18세기 조선은 대동법(大同法)의 전국적인 시행으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서울에 자본이 집중하였다. 그 결과 한양의 인구가 급증하였고 그 구성도 상업 인 구 중심으로 변하였다. 시장은 확대되었고 도심 곳곳에 약국이나 푸줏간, 서점, 그 림 가게 등 점포 상업도 활성화되었다. 도성 안팎에는 채소, 약초, 과일 등을 재배 하는 근교농업도 성행했다(고동환 2007, 190-214). 18-19세기에는 도시 중심의 발달과 중국의 명(明) 청(靑)에서 들어온 새로운 문물의 영향으로 서울은 정치 뿐 아니라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지방과 격차를 벌여갔다. 이에 문인들은 더욱더 서울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이런 경향은 당시 서울의 위상은 공주로 귀양 가는 친구를 송별하며 쓴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글에 잘 반영되어 있다. 아름답구나! 이 얼마나 화려한가! 일찍이 나라 안을 두루 노닐어 신라와 고려, 그 리고 기자(箕子)의 옛 도읍지를 차례로 여행했으며, 태백산, 금강산의 무인처(無人處) 도 다녀보았네. 하지만 산수의 장려함과 문명(文明)이 한양을 능가하는 곳이 없었네. 비록 숲이나 계곡이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고 해도 어찌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을 찾 아가겠는가? 더구나 한양은 정교(政敎)가 시행되는 곳이요, 인물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이 아닌가? 사환가(仕宦家)와 벌열(閥閱), 인물과 누대(樓臺), 수레나 선박, 재화(財 貨)의 번성함, 그리고 친척과 벗들, 공부에 필요한 문헌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네.1) 어느 지역보다 서울의 경관과 문화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정치가 시행되는 중심부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이라 하 였다.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인 사환가(仕宦家)나 국가에 공로가 많거나 관직 경력 이 많은 가문인 벌열(閥閱)등 고위 관직자가 모여 있는 곳이며, 함께 할 수 있는 친척과 벗들, 그리고 그 들과 함께 즐길 누대(樓臺)가 있는 곳이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는 두 아들에게 한양에 있어야하는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박제가, 송이정재왕공주서(送李定 載 往 公州序), (안대회 2000, 114-7에서 재인용) - 18 -

중국은 일상생활이 문명화되어 있어서, 비록 궁벽하고 외딴 시골에 살더라도 성 인도 될 수 있고 현자도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못하여 도성 문에서 수십 리만 벗어나도 벌써 태고 적의 미개사회다. 하물며 먼 시골이랴?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이 순조로울 때는 멀찍이 산비탈에다 집을 세 내어 살아서 선비의 본모습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벼슬길이 끊기면 서울에 의 탁해 살아서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2)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서울에서만이 문화의 안목을 유지할 수 있음을 당부하고 있다. 이전 시대에 처사의 삶은 향촌의 농토를 기반으로 성리학에 힘쓰는 것이었는 데 이 시기에 들어서면 서울에서 문화의 안목을 유지하는 것으로 가치의 척도가 변 화한 것이다(정봉구 2009, 32). 이렇듯 그 당시의 서울은 상업 인구의 증가와 그로 인한 경제 변동으로 인해 물 질과 돈에 대한 욕망이 발견되고 성공의 기회가 포착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서울의 문화적 풍요로움은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선 망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서울은 성공을 뒷받침해 주는 유력한 삶의 공간으로서 기 대되었다. 서울은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중심성이 강조되기 보다는, 권력과 출세 부 와 이를 기반으로 한 풍부한 문화적 경험의 공간이자, 취향과 기호의 표현을 통해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풍요로운 도시로서 이해되었다(최기숙 2003, 423). 2. 완상문화의 유행 중국의 명(明) 청(靑) 문인들의 완상문화(玩賞文化)는 사신단을 따라 연행길에 올랐던 문인들과 그 시기에 출판된 서적들의 유입을 통해 18세기 조선의 문인사회 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주로 경화사족3)을 중심으로 조선 문인사회에 명 청 서적의 열독과 수집, 고동서화(古董書畵)의 수집과 감상 등의 완상문화가 유행 하기 시작하였고,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사유와 지식, 문체 등은 조선 문인들의 문 장과 사상 및 생활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문인사회의 변화를 감지한 당 시 조선의 왕 정조(正祖)는 이것이 장차 봉건사회질서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 여 2) 정약용, 1810, 시이자가계(示二子家誡), "... 中國文明成俗. 雖窮鄕遐陬. 不害其成聖成賢. 我邦不然. 離 都門數十里. 已是鴻荒世界. 矧遐遠哉. 凡士大夫家法. 方翺翔雲路. 則亟宜僦屋山阿. 不失處士之本色. 若仕宦 墜絶. 則亟宜託栖京輦. 不落文華之眼目...." (박무영 2001, 201-2에서 재인용) 3) 정봉구(2009)는 경화사족 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①조선 후기 ②한양에 세거하며 ③관직(특히 청 요직의 획득 가능성에서 우위를 갖고 있던) 가문출신으로 ④학문과 예술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한양의 문 화를 주도하였던 문인계층 으로 정의하였다. - 19 -

겨, 문체반정(文體反正) 의 기치 아래 문인들에게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문체 반정은 주로 상층의 사대부들을 제약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이후 상층 문인들의 완상문화는 확연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완상문화는 일반 문인들이 나 중인 서얼 계층으로 널리 확산되어 소품문(小品文) 이라는 문체를 빌어 표출되 었다. 그들에게 있어 완상문화의 추구, 즉 벽(癖) 과 치(疵) 에 대한 추구는 자신 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김희 경 2008, 12-3). 제2절 18-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정원문화 1. 정원의 유형 18세기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문화가 발달하면서 복잡한 도시생활에 지쳐 전원의 삶을 동경하고 서울 근교에 전장(田莊)과 별서(別墅)를 운영하며 삶의 여유 를 회복코자 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사대부들은 빼어난 승경(勝景)을 모방하여 정원을 가꾸고 원예에 탐닉하며 도시 생활에 지친 심신을 위로 받았다. 경제적 여 건 등으로 별서나 정원을 조성할 여력이 없을 경우, 상상을 통해 정원을 그리며 글 로 남기는 일도 나타났다(정민 2010, 127). 1.1 도심 내 산림(山林)의 구현 서울은 문화의 중심지이자 뛰어난 경관이 있는 곳이지만, 과도한 도시문화발달로 인한 부작용과 여유롭지 않은 서울생활에 대한 한탄4)은 이상적 주거에 대한 열망 을 일으켰다. 복잡한 도시 생활은 전원의 삶을 동경하고 도시를 벗어나 별서 등을 운영하면서 삶의 여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경향들이 나타난다. 이에 정원은 번잡한 현실 공간 내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고 완상하며 자연을 향유하는 이상을 이루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욕구 해결 공간이었다. 4) 정약용은 송이성화장귀서(送李聖華將歸序)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울은 땔나무가 귀해서 겨울에는 말똥을 태우고 개가죽을 입어 난방을 한다. 그래서 늙으면 가래기침이 나서 고질병이 된다. 부 인네가 물정을 몰라 서울에 있다 보면 반드시 고리채를 얻어 쓴다. 남자가 몇 년간 벼슬살이를 나가도 그 1년의 비용을 능히 갚을 수 없다. 벼슬하는 것이 이익이 안 된지가 오래다.... (정민 2010, 127에서 재 인용) - 20 -

동원은 나의 벗 이심원(李深遠: 이유수)의 거처이다. 그 곳에는 누정(樓亭), 숲(樹 林), 맑은 못(淸池), 괴석(怪石) 등 빼어난 볼거리가 있었으므로 평소에 성시의 산 림(城市山林) 이라 일컬어졌다. 또 심원은 글을 잘하고 옛 것을 좋아하여 유명한 서 화, 악기, 옛 술잔 등의 골동고기(骨董古器)와 같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일체를 구하여 그 집에 모두 모아두었으니, 찬란하여 좋아할 만했다.5) 유언호(兪彦鎬, 1730-1796)가 친구 이유수(李惟秀, 1721-1771)의 정원인 동 원(東園)을 방문하고 남긴 동원아집기(東園雅集記) 이다. 유언호는 누와 정자, 숲, 연못, 괴석 등 빼어난 볼거리가 있는 동원(東園)을 성시의 산림 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옥(李鈺, 1760-1815)의 백운필(白雲筆) 에서도 사시사철 피는 꽃에 몰입 하여 복잡한 서울 살이를 잊은 삶을 구현하고자6) 하였다. 정약용 역시 서울 명례 방7)에서 지낼 때, 아침 저녁으로 들려오는 도시소음과 집에 정원하나 없음을 탓하 면서 뜰의 절반을 잘라 정원을 조성8)하였다. 그 정원에서 달빛을 벗 삼아 술을 마 시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면서 산림의 정취를 취하였다. 최신의 유행을 누리기 위해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 한양에 살기를 희망했던 문인 들 사이에서 일어난 정원 가꾸기의 유행은 자신의 거처 안에 자연을 끌어들여 척박 한 도시생활에 찌든 일상에 삶의 여유를 회복하고픈 열망이었다. 또한 고동서화를 모아 감상하듯, 정원을 가꾸고 화훼를 수집하는 붐이 경쟁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5) 유언호, 동원아집기(東園雅集記), 燕石 권2 : 東園. 予友李深遠居也. 有樓亭樹林淸池怪石之勝. 素 號城市山林. 深遠又文而好古. 求名書畫琴磬鍾鼎彜罍古器凡可以資耳目之娛者. 盡聚其室. 粲然可喜. (출처 : 한국고전종합 DB) 6) 이옥, 백운필(白雲筆),... 기이한 풀꽃들이 황양목이나 단풍나무의 초록빛과 붉은빛과 어우러져, 매 년 늦봄이면 꽃향기가 끼쳐오고, 진 꽃이 땅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성시(成市) 안에 살 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게 했었다.... (정민 2007, 196에서 재인용) 7)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남부 11방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남대문로1 2가 을지로 2가 명동1 2가 충무로1 2가 회현동2 3가 장교동 저동1가 각 일부와 남산동1 2 3가 각 일원에 해당한다. 8) 정약용, 죽란화목기(竹欄花木記), 내 집은 명례방에 있다. 명례방에는 고관들의 저택이 많아, 번화한 네거리에는 날마다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서로 엇갈리며 달린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완상할 만한 연못이 나 동산이 없다. 해서 내 집 뜰의 절반들 잘라 구획을 하고 좋은 꽃이나 과실나무를 구하여 화분에 심어 채워 놓았다....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건을 빗겨 쓰고 울타리를 따라 거닌다. 혹은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하니, 고요하여 산림이나 원포(園圃)의 정취가 있었다. 그래 시끄러운 수레소리도 거 의 잊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余家明禮之坊. 坊多公卿巨室. 故車轂馬蹄. 日交馳乎衚衕之間. 而無陂池園林. 足以供晨夕之玩者. 於是. 割庭之半而界之. 求諸花果之佳者. 揷諸盆以實之.... 每朝退. 岸巾循欄而步. 或月 下酌酒賦詩. 蕭然有山林園圃之趣. 而輪鞅之鬧. 亦庶幾忘之.) (박무영 2001, 60에서 재인용) - 21 -

1.2 상상의 정원, 의원(意園) 사대부의 저작들 중에는 실제로 조성하지 않은 상상적 공간이나 정원에 관한 기 록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 중국의 명말청초와 18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부조리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상상속의 정원을 꾸미는 글을 썼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부터 비롯된다. 명(明)말 황주성(黃周星, 1611-1680)의 장취원기(將就園記) 와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의원 지(意園誌) 가 이의 대표적인 글이다(홍형순, 이원호 2006, 112). 의원(意園)은 마음으로 정원을 만든 것이다. 정원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그것을 지었으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마음에 그려보니 정원 이 곧 내 눈앞에 나타나 뚜렷하게 보인다. 무릇 정원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마음에 두었다고 또한 반드시 정원을 소유하게 될 일도 아니다. 이 모두는 서로 병통 이 있는 것이지만, 마음에 두지도 않았는데 정원을 소유한 자가 정원은 없으나 마음 속에 담아둔 자보다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조잡한 자취일 뿐이로다. 사람 이 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들 깃들어 살지 않은 이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 구구하게 진짜냐 가짜냐 가릴 것인가? 정원의 너비가 몇 무이건 길이가 몇 무이건 간에, 처소 와 향배, 원근과 넓고 좁음을 가리지 않고, 내 몸이 가는 곳을 따라 있을 뿐이다.9) 의원지(意園誌) 는 유경종이 30세부터 경영해온 해암동천(海巖洞天)에서 그 가 어떤 정원을 꿈꾸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 글에서 현실 적 규모를 따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정원을 꾸리고 싶다고 하였다. 마 음속에 생겨난 대로의 자취를 좇으면 그 뿐이라는 것이 유경종이 그리는 정원의 시 작이다. 실재하는 정원을 소유하고도 그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자보다는 실제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속에 이를 담아두는 자가 낫다고 하고 있다(김동 준 2003, 169). 그리하여 유경종이 마음에 그린 정원의 풍경은 일단 그 규모부터가 장대하다. 별 채가 딸린 큰 건물과 정자와 누대까지 갖춘 정원이다. 유경종이 늘어놓은 식물은 그 개수가 총 58여종에 가깝다. 식물의 성격도 다양하다. 교목부터 초목까지, 일용 작물에서 수익작물까지 열거했는가 하면, 기화요초(琪花瑤草)나 미목화훼(美木花 卉) 등 관상용 식물도 있는 것10)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식물 9) 유경종, 의원지(意園誌), 해암고(海巖稿) 권10, (김동준 2003, 169에서 재인용) 10) 유경종, 의원지(意園誌), 해암고(海巖稿) 권10,... 봉우리가 있고 고개가 잇고, 시내와 폭포가 있다. 밭이 있고 채마가 있으며, 울타리, 담장, 사립문도 세우리라. 누대가 있고, 집이 있고, 대청과 부엌, - 22 -

소재에 대해서 파악해 볼 수 있다. 다음 문단에서는 정원에 채울 동물들과 집안에 둘 가구 및 도구 그리고 책에 대해 열거하고 사계절의 운치 및 날씨에 따른 승경을 묘사하고 정원 안에서 어떻게 즐길 지를 글로 남겼다. 정원에서 아침이면 꽃에 물 을 주고, 저녁엔 오이밭에서 오이를 따는 소일거리를 하기도 하고 산과 달을 벗 삼 아 시간을 보낸다. 시와 글을 읽고 쓰기도 하고 음악과 차를 곁들여 즐기기도 한 다. 이경종은 이 글에서 정원의 입지를 잡는 것부터 정원에 식재한 수종 및 각종 물건을 비롯한 정원에서의 완상방식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경종은 이조판서까지 지낸 당시 사대부 문화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대부들이 남긴 실제정원이 아닌 의원( 意 園 )에 대한 기록은 그들 이 자유롭게 조성하고 향유했던 정원문화와 정원에서의 행위를 읽어 볼 수 있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 2. 정원문화양상 당시 활발한 도시 문화를 배경으로 한 청나라 문물의 수입 등으로 인해 조선후 기 지식인들의 생활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흥적 소비적 형태를 띤 문화 활 동이 활성화되었고, 이전에 완물상지( 玩 物 喪 志 )라 하여 금기시되던 골동 서화 수집 이나 원예 취미 같은 것이 적극 애호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책과 골동서화에 대 한 취미를 부추기는 한편, 원림과 정원을 꾸며 갖가지 진기한 화훼와 수목을 심는 원예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정민 2007, 181). 또한 이러한 완상의 문화를 공 유하기 위한 사적인 모임이 생겨났다. 사랑채에 마련한 정원과 도시 근교에 마련한 별서( 別 墅 )와 누정( 樓 亭 )은 이런 모임의 중심지로서 문화의 꽃을 피웠다. 2.1 사대부들의 원예취미 18-19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도시 근교에 마련한 세거지( 世 居 地 )와 별서( 別 墅 )에 각종 누각들을 짓고, 정원에서 갖가지 나무와 꽃을 심어 소요하고 감상하였 다. 친구가 찾아오면 함께 명필의 서첩, 좋은 그림, 골동품을 함께 완상하는 일을 안방, 바깥채, 회랑, 별채가 있고, 정자, 누대, 단과 뜰이 있으리라. 소나무, 녹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두충나무, 적목나무, 박달나무, 회나무, 비자나무, 대나무, 파초, 매화, 오동나무, 무궁화, 석류, 느티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오얏나무, 앵두나무,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구기자나무, 포도, 난초, 국 화, 뽕나무, 마, 닥나무, 옷나무, 오이, 박에다 파, 생각, 마늘, 토란, 무, 겨자, 아욱, 가지, 부추, 배추 등의 여러 채소와 기화요초( 琪 花 瑤 草 ), 미목화훼( 美 木 花 卉 ), 콩, 약 모종, 창포, 원추리, 등나무, 머루, 당귀, 이 끼, 연꽃, 지초, 순채, 마름 따위의 모든 식물을 심으리라.... (김동준 2003, 169-70에서 재인용) - 23 -

취미로 삼았다. 또한 한 분야에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표현한 벽(癖) 으로 불리는 다양 한 현상이 나타난다. 벽(癖) 이란 그 일을 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고 기뻐서 온전히 자신을 잊고 몰입하는 순수한 행위였다. 특별한 동기 없이 이익과 남들의 시선을 떠나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마니아적인 성향을 보이는 화벽(花癖) 의 경향도 나타난다. 이전 시기에도 물 론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 을 비롯하여 이황의 매화시 같은 화훼 관련 저 술과 시문이 적지 않았지만, 18-19세기의 그것은 사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중 되었다(정민 2007, 182). 조경식물에 관심을 많이 쏟은 인물은 유박(柳璞, 1730-1787)으로, 그는 유득공 의 7촌 당숙이 되는 인물로 황해도 배천에 백화암(百花菴)을 짓고 온갖 꽃을 길렀 으며 꽃 재배의 체험을 바탕으로 화암수록(花庵隨錄) 을 남겼는데 그의 백화암 을 위해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유득공(柳得 恭, 1749-1807), 이헌경(李獻慶, 1719-1791),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목 만중(睦萬中, 1727-?) 등 쟁쟁한 문인들이 기문과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식물 을 재배하고 감상하는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심우경 2006, 99). 네 계절의 화훼를 모두 백가지 구했다. 큰 것은 재배하고, 작은 것은 화분에 담아 둑을 쌓아 백화암 가운데 두었다. 몸을 그 사이에 두고 소견하면서 세상을 잊고 기쁘 게 자득하였다, 분매(紛梅)와 금취(禁醉, 국화품종)은 찬찬히 정신을 살피고, 왜철쭉 과 영산홍은 멀리서 형세를 보며 웅위함을 취한다. 단약(丹藥)과 계도(桂桃)는 마치 새 여인을 얻은 것과 같다. 치자와 동백은 큰손님을 마주한 듯 아리따운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석류는 생각이 시원스럽다. 파초와 괴석은 마당가에 두어 명산으로 삼 는다. 유송(瘐松)에서 태고의 모습을 얻고, 풍죽(風竹)은 전국의 기상을 띠고 있다. 섞어 심어 시자로 삼는다. 연꽃은 마치 주무숙(周茂叔)을 마주한 듯 공경스럽다. 기 이한 것, 예스런 것을 취해 스승으로 삼고, 맑고 깨끗한 것은 벗으로 삼는다. 번화한 것은 손님으로 삼는다.11) 유박은 사시사철 정원을 빛낼 꽃과 나무들을 구하고, 큰 것은 땅에 심고 작은 것 은 화분에 담아 둑에 배치하였다. 매화와 국화는 가까이에서 음미하고, 철쭉과 연 산홍은 멀리서 그 빛깔과 형세를 감상하였다. 그 밖의 식물들은 여인이나 손님 등 11) 유박, 화암수록(花庵隨錄), (심우경 2006, 99에서 재인용) - 24 -

마치 사람인 듯 의미를 부여하여 마당에 배치하였다. 이 밖에도 원예를 전문적으로 다룬 유서( 類 書 ) 12) 도 등장한다. 홍만선( 洪 萬 選, 1643-1715)의 산림경제( 山 林 經 濟 ) 와 서유구( 徐 有 榘, 1764-1845)의 임원 경제지( 林 園 經 濟 志 ) 가 그것이다. 산림경제( 山 林 經 濟 ) 는 각종 원예작물의 재 배법을 논한 제4지 치포( 治 圃 ) 와 화목, 화초, 정원수의 배양법을 논한 제6지 양 화( 養 花 ) 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임원경제지( 林 園 經 濟 志 ) 에서는 예원 지( 藝 畹 志 ), 섬용지( 贍 用 志 ), 이운지( 怡 雲 志 ) 에서 원예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렇듯 18-19세기에는 원예에 관련된 다양한 글과 전문서들이 등장하여 그 시 대의 문인들이 원예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2.2 사대부공동체, 아회( 雅 會 ) 조선후기 정쟁으로 분화된 지식인 집단은 내적 결속을 다지며 문화 교류를 강화 하였고, 공적인 모임보다는 사적인 모임인 아회( 雅 會 )가 성행하였다. 아회의 배경 으로서 정원은 문화를 교류하고 공유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회와 고동서화 및 화훼의 완상, 유락( 遊 樂 )의 공간으로서 정원은 활용되었고, 정 원을 완상하며 지은 글과 그림은 조선후기의 예술을 한층 발달시키는 매개체가 되 었다. 성시산림( 成 市 山 林 )의 문화가 유행하면서 문인들의 모임도 멀리 명승명소를 찾아가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열렸다. 또한 아회에는 일정한 동료와 정기적으로 혹은 반복하여 모임을 갖는 경우가 적 지 않다. 일반적으로 정기적인 아회 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별이나, 한 달 을 주기로 개최되었고 모임 참석자가 거의 일정하며, 모임에서는 내부 규칙이나 범 례가 정해져 있었다. 범례, 규칙이 있거나 참석자가 고정된 아회는 대부분 내규를 지키기 위하여 책을 만들었고 이를 참석자에게 배포하였다. 정기적인 아회 는 특정 인물에 의하여 열리기도 하였지만, 아회 참석자 전원이 순번을 정하여 차례대로 모 이거나, 모임 구성원의 경사가 있을 때 특별한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이 모임을 마련하고 주위 동료를 초청하여 유흥을 즐긴 초청에 의한 아회 는 대부분 초청자의 자택이나 별장에서 이루어졌다(송희경 2005, 143). 12) 내용을 사항별로 분류하여 편찬한 책으로, 다양한 분야의 관련된 문장을 뽑아 유별( 類 別 ), 운별( 韻 別 ), 자별( 字 別 ) 등으로 분류하여 편찬함으로써 검색에 편리하도록 한 일종의 공구서이다. (최환 2003, 1에서 재인용) - 25 -

3. 정원 내 식물에 대한 인식 18-19세기에 이르러 정원에 심긴 식물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감각적 경험을 기 록한 글이 많이 전한다. 문인들은 정원의 식물을 완상하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 고, 자신의 심정을 대입하여 표현하거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 감상하 기도 하였다. 3.1 깨달음의 매개체로서의 식물 조선의 문인들이 완물상지 에 대한 자기 논리의 옹호를 위하여 흔히 거론하는 예는 정호(程顥)와 사량좌(謝良佐)의 일화였다. 근사록(近思錄) 에 정호에게 제 자인 사량좌는 정호가 편집한 사서를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우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자 정호는 기송(記誦)과 박식(博識)이 완물상지라고 나무란다. 이 일화를 두고 주자는 정호가 역사서를 본 것과 사량좌가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의 차이는 위기지 학(爲己之學) 과 위인지학(爲人之學) 에 있다고 밝혔다. 이에 착안한 조선의 문인 들 중 장유(張維), 송시열(宋時烈) 등은 완물(玩物)이 상지(喪志) 즉 성정(性情) 이나 본지(本志)와 내심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함양하게 할 수 있다면 사물에 대한 완상 이 수양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문인들이 애호하는 자연물의 감상이나 산수의 유람을 기록한 글에서도 나타난다(김영주 2009, 2-3). 조선후기 문신인 유만주(兪萬柱,?-?)는 흠영(欽英) 에서 분재를 통해 이치 를 얻는 것(盆花驗理) 13)이라 하여 식물을 통해 이치를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남옥(南玉, 1722-1770)의 눈 내리는 밤 매화의 정취를 읊은 시이다. 펄펄 흩날리는 눈발 소복소복 쌓이는데 斜斜整整復疎疎 정원 뜨락과 합실의 거처 구분되지 않네 不分庭堆與閤居 가냘픈 흰빛 신명을 더해 옥창을 밝히고 弱素添神明屋牖 외로운 맑음 힘을 얻어 금서를 차갑게 비추네 孤淸有力冷琴書 그림 그리기 전 뉘라서 꽃의 수만큼 줄였는고? 畵前誰減裁花數 온 세계 함께 나누어 태초의 형상을 지녔다오 天一同分有象初 숲에서 깨어날 때면 모두 너를 배우리니 睡起林柯皆學汝 도인이 만물을 齊一함은 전부 헛된 것은 아니리 道人齊物未全虛14) 13) 유만주, 흠영(欽英), (유가현 2012, 76에서 재인용) 14) 남옥, 차지경설중부매운(次持卿雪中賦梅韻), (참고 : http://blog.daum.net/jidam55/7732894) - 26 -

이 시는 눈 내리는 모습과 매화의 하얀 꽃송이를 대비하여 철리적 깨달음을 노 래하고 있다. 이 시를 보고 한 평(評)이 있다. 아름다운 생각이 넘치듯 일어나고, 藻思溢發 창신한 어구가 산처럼 솟아난다. 刱語山出 눈이 외로운 매화 꽃 송이의 밝음에 빛을 더해 창을 환히 밝히는 깨끗함이 정신 을 더욱 맑게 비추어주어, 아름답고 새로운 생각들이 솟아난다고 평하고 있다(신익 철 2004, 112). 이와 같이 사대부들은 식물소재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새 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매개체로서 여겼다. 3.2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서의 식물 시문에서 문인들의 감정을 식물소재에 이입시켜 마치 대상이 화자와 동일시되어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식물소재는 신하의 충절과 우국지사(憂國之士)로부터 남녀간의 사랑의 맹세, 혹은 사람간의 믿음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절개와 의리에 대한 신념을 세한삼 우(歲寒三友) 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로 상징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식물의 형태와 생태적 특징에 따라 객관적 상징물이 된다. 잎과 관련해서는 오동나무는 잎 이 커서 떨어지는 소리로 가을이 온 것을 알고, 파초는 초본식물 가운데 가장 잎이 크다고 해서 초왕(草王) 이라고 불렀다. 열매와 관련해서 복숭아나무는 그 열매의 모습이 여음(女陰)과 흡사하기 때문에 벽사력(辟邪力)을 지녔다고 믿었다. 열매의 씨앗이 많은 것은 일반적으로 다산(多産)을 상징하였는데, 석류, 포도, 동백, 산숙 (山椒), 민들레 등이 그것이다. 대나무는 그 마디로 해서 절도(節度) 를 상징하고 또 그 뿌리가 서로 엉켜 뻗어 있기 때문에 단결력 을 상징하였다. 매괴(玫瑰)는 그 가시 때문에 위험 을 상징하였고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은 가지가 가늘게 실과 같 이 늘어지는 까닭에 아름답고 날씬한 여인 에 비유되었다(이상희 2004, 1: 57). 시문이나 기문이 아닌 개인의 호(號)에 식물소재을 대입하여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정희맹(丁希孟)의 사은도서(四隱圖序) 란 글에서 자신의 호 를 죽은(竹隱), 송은(松隱), 매은(梅隱), 국은(菊隱)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연유 에 대해 추운 비바람을 견뎌내고 뜨거운 여름 기운에도 꿋꿋한 절의와 기개를 상징 - 27 -

하는 매화나무와 대나무, 소나무와 국화라고 설명15)하였다. 식물소재는 강한 바람이나 햇살 등의 기후조건과 함께 개인의 감성을 자극하고, 그 감정이 이입된 상징물이었다. 3.3 완상 대상으로서의 식물 식물의 꽃과 잎은 그 아름다운 색과 자태, 그리고 그윽한 향기로 인하여 사람들 의 마음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의 정취를 더욱 깊게 해준다(이상희 2004, 1: 21).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정원에 심어 놓은 열다섯 종류의 초목 에 대해 읊다(園植十五咏) 란 시가 있다. 집이 시루봉(甑峯) 자락에 있는데, 주위를 갖가지 나무들이 두르고 있으며 그중 에는 내가 손수 심은 것들도 있다. 짙푸른 잎과 그윽한 향기가 모두 성대하여, 봄여 름 즈음에 틈틈이 생각나는 대로 시를 짓기에 아주 좋았다. 그리하여 모두 오언시 15 편을 지었다.16) 그는 정원의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을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황현 은 원식십오영(園植十五咏) 이란 시를 지었다. 15가지 식물 중 황현은 배롱나무 꽃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아침이고 저녁이고 천 번을 보고 보아도 싫 증이 안난다. 17)고 하여 꽃을 완상하는 즐거움을 드러내었다. 15) 정희맹, 사은도서(四隱圖序), 선죽재집(善竹齋集),... 용암(龍巖)에는... 매화나무와 대나무, 소나무와 국화가 있다.... 나는호(號)를 스스로 죽은(竹隱), 송은(松隱), 매은(梅隱), 국은(菊隱)이라 부르 기도 하고 장소에 따라 호를 고쳐 불렀다.... 그러면 이 네 가지 식물은 어떤 것인고... 바야흐로 모든 것 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에 서리와 눈이 하늘에서 내릴지라도, 또 무더운 한여름에 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공중을 녹일 듯 하여도 송죽은 다른 나무와는 달리 꼿꼿하게 홀로 빼어났으니 이는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 는 것이다. 또 돌이 갈라지고 얼음이 언 언덕에 모든 꽃이 시들어 지고 서리가 천지에 가득 내려 모든 생 물이 초췌하게 되어도 매화와 국화는 추위를 무릅쓰고 홀로 아름답게 피어난다. 이 또한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 절개를 굳게 지키고 가난하고 천한 곳에서도 바꾸지 아니하고 무력으로 위협 을 당하는 경우에도 결코 굴하지 않으니 즉 정정(亭亭)하여 늦게 시들고 울울(鬱鬱)하여 변치 않는 자와 같은 유(類)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아, 확연히 스스로 난세에도 변하지 아니함을 견지하나니 고로 강한 바람에도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충신을 알 수 있나니... (이상희 2004, 1 : 122에 서 재인용) 16) 황현, 원식십오영(園植十五咏), 매천집(梅泉集) 권 3, mm_a660_av003_071* : 屋處甑峯之趾. 雜樹圍繞. 間有手植者. 蒼翠幽馥俱蓊然. 最宜春夏之際. 暇日隨意就賦. 總之得五言十五篇. *"mm_"으로 시작되는 일련번호는 한국고전종합DB에서 제공하는 원문의 일련번호이다. 17) 황현, 원식십오영(園植十五咏)-백일홍(百日紅), 매천집(梅泉集) 권 3, mm_a660_av003_071 :... 어여쁜 고야의 자태요(娉婷姑射姿) 동글동글 옥을 쓸어 놓은 듯하다(團團啓玉粲) 창문을 열고 아침이 고 저녁이고(拓窓朝復暮) 천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안 난다(不厭千回看)... - 28 -

이 외에도 이퇴계는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매화의 화분을 안고 하늘을 우러러 매화를 살려달라고 읍소( 泣 訴 )했고, 서거정( 徐 居 正 )은 매화와 같이 있는 시간이 짧 은 것을 아쉬워하며 피는 것을 빨리 하고 지는 것을 더디게 해달라 고 조물주에게 애원했을 정도였다(이상희 2004, 1: 22). 또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떤 이가 집을 사려는데, 뜰에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자 제값보다 많은 돈을 치르고 그 집을 샀다. 남들은 그를 두고 물정 모르는 바보라거나 돈이 남아돌아 주체 못하는 호사가라고 냉소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에 게 오래된 소나무는 집의 가치를 더해 주는 중요한 재산이자 값을 매기기 힘든 귀 한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영조 때 사람인 상고당( 尙 古 堂 ) 김광수( 金 光 遂, 1699-1770)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안대회 2010, 72). 이렇듯 18-19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원 안의 나무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높게 사고 즐겨 완상하였으며 정원의 풀과 나무에 대한 예찬을 시문으로 남겼다. - 29 -

제3장 다산 정약용의 정원생활 제1절 삶과 정원 1. 인물 개요 및 사상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영조 38년 6월 16일 아버지 나주정 씨(羅州丁氏)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이며, 호는 죽란산인(竹欄山人), 자하도인(紫霞道 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문암일인(門巖逸人), 여유당(與猶堂), 탁옹(籜翁), 다산 (茶山), 송풍암(松風菴), 열수(洌水), 초계(苕溪), 채산(菜山), 사암(俟菴)이다(실학 박물관 2010, 133-4). 정약용은 19세기 초에 18세기 전반기의 경세치용학과 18세기 후반기의 이용후생 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이다. 그가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종래의 한국 실학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자기시대의 과제를 파악하고, 둘째 육경사서(六經四書) 를 궁구하여 유학의 진수(眞髓)를 체득하고, 셋째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는 서양문 물을 흡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총체적 개혁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개혁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그가 이러한 개혁방안을 제시 할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그의 천품이 남달랐던 점도 있었지만, 귀양살이라는 정 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받아들이고, 40대 중반에 맞 은 중풍의 병고(病苦)를 굳센 의지로 이겨낸 바와 같은 그의 참 용기에 기인하는바 가 크다. 그는 자연철학의 신봉자로서, 지구가 하루에 9만리를 돌듯,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야 무엇인가 이루어진다고 믿었 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통하여 간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던 것이다(실학박물 관 2010, 13). 그는 일생동안 정치ㆍ경제ㆍ역사ㆍ지리ㆍ문학ㆍ철학ㆍ의학ㆍ자연과학ㆍ교육학ㆍ 군사학 등의 분야에 걸쳐 500권 180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2. 삶과 정원 공간 정약용의 일생은 대체로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이익(李瀷, 1681-1763)의 학풍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던 1762-1788년까지, 제2기는 28세 때 - 30 -

부터 관리가 되어 정조( 正 祖 )의 인격이나 재능 등을 인정받으며 중요 관직을 거치 던 1789-1800년까지, 제3기는 신유박해( 辛 酉 迫 害 )에 연루되어 18년간 강진에 유 배되어 저술에 힘쓰던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제4기는 유배에서 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던 1818년부터 1836년까지의 시기이다(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제1기(1762-1788년)는 출생부터 등과( 登 科 )할 때까지의 28년간이다. 이 시기 에 정약용은 화순현감과 예천군수 등을 역임했던 아버지를 따라 각 지방의 수려한 산수를 유람하였다. 지방 관아에서 지낼 때에는, 관아 내에서 자신이 지내던 공간 주변에 있던 기존의 식물소재를 완상하였다. 이 때, 정약용은 기존에 있던 나무 아 래 단( 壇 )을 만드는 등 소극적인 조영활동을 하였다. 정약용은 유년시절에 집 근처에 위치한 수종사( 水 鐘 寺 )에서 독서를 하였다. 1776년 15세의 나이에 풍산홍씨( 豐 産 洪 氏 )와 혼인하였다. 1779년 형 정약전( 丁 若 銓, 1758-1816)과 함께 과거를 위해 상경하여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 陞 補 詩 )에 합격하였다. 1783년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정조의 지우를 입 었다. 이 시기에는 함께 과거 공부를 했던 또래의 형제들 및 성균관의 동료들과 서 울 인근의 이름난 누정( 樓 亭 )에서 시회( 詩 會 ) 및 뱃놀이 등의 연회를 즐겼다. 1784년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 丁 載 遠, 1730-1792)의 처남인 이벽( 李 檗, 1754-1785)으로부터 서학을 처음 접하였다. 제2기(1789-1800년)는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생활을 했던 시기이다. 서울 명례 방( 明 禮 坊 ) 소룡동( 小 龍 衕 )에 거주하면서 뜰에 대나무로 난간( 竹 欄 )을 두른 정원을 조성하였다. 실용적 목적보다는 관상 위주의 식물소재를 활용하였다. 이 정원에서 같은 정계의 비슷한 시기에 관리가 된 15인을 모은 죽란시사( 竹 欄 詩 社 )가 결성되 었다. 정조의 신의를 한 몸에 받는 것을 시기한 관리들의 모함으로 해미와 금정으 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790년 해미에 10일간 정배되었을 때 서산 개심사를 유람 하였고, 1795년 금정찰방으로 외보( 外 補 )되었을 때는 보령 영보정( 永 保 亭 ), 홍주 용봉사( 龍 鳳 寺 ) 및 공주와 부여 일대를 유람하였다. 1797년 윤6월에 곡산부사에 제수되었다. 이 때, 관아의 보수가 있었는데, 남은 자재를 활용하여 서향묵미각( 書 香 墨 味 閣 )을 조성하였다. 1799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1800년 정조의 승하와 함께, 39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소내( 苕 川 )에서 강학하였고, 그곳에 여유당 ( 與 猶 堂 )의 편액을 달았다. 제3기(1801-1818년)는 천주교에 연류 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818년 해 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정약용은 마땅한 거처가 없 - 31 -

어 여기저기 옮겨 살았고, 수입도 없어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작은 채마밭을 꾸리는 것으로부터 정원생활이 시작된다. 이 정원은 장다리꽃이 있는 소박한 곳이었다. 이 후 다산초당으로 옮겨 갔을 때에도 실용적 목적의 원포( 園 圃 )를 꾸리는데 힘을 썼 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정약용 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이배( 移 排 )되었다. 강진 유배 초에는, 강진의 동 문 밖 주막[ 東 泉 旅 舍 ]에서 거처하였다. 1803년 주막 내 자신이 거처하던 곳을 사 의재( 四 宜 齋 )라 이름하고 사대부나 중인들의 자제를 대상으로 강학하였다. 1805년 백련사에서 혜장( 惠 藏, 1772-1811)과 교유하고, 고성사 보은산방( 寶 恩 山 房 )으로 거처를 옮겼다. 1806년 제자 이학래의 집 사랑채로 이사하였다. 사랑채 앞의 뜰에 대나무를 심고, 작은 채마밭을 조성하였다. 1808년 현재 다산초당( 茶 山 草 堂 )으로 불리는 윤단( 尹 慱 )의 산정으로 이사하였다. 이사 후 2년 뒤, 연못을 넓히고 채마밭 을 조성하는 등 대대적으로 정원을 다시 조성하였다. 1809년 초의( 草 衣, 1786-1866)와 교유하였다. 1818년 9월 57세의 나이에 해배에 임하였다. 정약용 은 양반제자 18명과 중인제자 6명에게 각각 별도로 자기 아들과 더불어 스스로 경 영하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다신계( 茶 信 契 )를 조직하게 하고 초의선사를 비롯한 만덕사의 스님들에게 전등계( 傳 燈 契 )를 조직하게 하여, 길이 우의를 다지도록 하였 다. 제4기(1818-1836년)는 해배되어 고향인 소내에 돌아와 살다가 75세의 나이로 별세한 때이다. 이시기에 정약용은 유배에 있으면서 기운 가세를 회복하기 위해 경 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식물소재를 중심으로 원포( 園 圃 )를 경영하였다. 여기 에 정자를 짓고 채화정( 菜 花 亭 )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한강을 중심으로 배를 타고 유람하였다. 1820년 청평일대를 유람하였다. 1823년에는 배 위에 지붕을 얹어 산 수록재( 山 水 綠 齋 )라 편액하고 이 배를 타고 한강일대를 유람하였다. 1836년 홍씨 부인과의 회혼일에 별세하였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다양한 지역과 생활여건을 경험하였다. 이런 다양한 삶의 조 건에서 남긴 문헌들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어떤 식물소재를 연출하고 완 상하였는지를 읽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 32 -

<그림 3-1> 정약용 생애지도 - 33 -

제2절 정약용의 이상주거와 정원 정약용이 열망하던 이상주거의 특징은 매우 소박한 산림의 운치가 있는 청복(淸 福) 의 삶이었다. 또한 그의 실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경제관념까지 포함한 실질적 인 모습이었다. 정약용은 이런 이상주거에서 선비의 품격을 갖추고 지인들과 함께 향유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의 이상주거에 대한 꿈은 그가 강진의 유배생활과 해 배 후 고향에서 노년을 보낼 때 현실적으로 구현하였다. 1. 정원의 조영(造營) 정약용은 한적한 산골에 거주하는 은자(隱者)의 삶을 동경하였다. 경제적 사회적 현실에 따라 이를 구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약용은 그가 거처한 곳에 정 원을 조영하여 은자의 삶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18-19세기 조선에는 서로 다른 학통과 정치적 견해를 지닌 붕당(朋黨)들이 대 립하고 공존하는 정치적 혼란상을 보인다. 사대부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도 하 고 물러나 지방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역시 정계에 진출하였지만, 정치적 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은일(隱逸)의 삶을 갈구하였다. 정약용이 그리는 이상향은 깊은 두메산골의 한가로운 초가집이었다. 새하얀 배꽃 아래 조그만 뜨락 小院梨花底 깊은 봄 두메산골 초가집이라 深春峽裏家 처마 밑은 누워서 쉴 만하고요 茆檐容偃息 벼논은 한평생을 족히 꾸릴 만 稻隴足生涯1) 정약용은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에게 회전원(懷田園)2)에 대한 시를 보냈는 데, 여기서 정약용이 생각하는 이상주거의 위치는 봄날이면 배꽃이 피는 산골의 초 가집이라고 하고 있다. 정약용은 제자 황상에게 유인(幽人)의 삶을 설명할 때에도 1) 정약용, 회전원 다섯 수를 지어 남고의 운을 화답하다(懷田園五首酬南皐韻), av002_086* * "av000_000"로 매겨진 정약용의 글은 한국고전종합DB에서 제공하는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원문의 일련 번호인 kc_mm_a597_av000_000 에서 뒤의 9글자를 축약해서 기재한 번호이다. 축약번호 앞의 세 자리 숫자는 다산시문집의 권 번호이고 뒤의 세 자리는 숫자는 권 내의 해당 글의 번호이다. 즉, av002_086은 다산시문집 2권의 86번째 글을 뜻한다. 이하 같다. 2) 회전원(懷田園)은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생각이 닿은 곳은 정신도 함께 가기 때문에 자나 깨나 무엇을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정신이 함께 와 있다. 붓을 잡아 그 정신을 기록하여 나의 형체를 달래본다(懷田園. 紀想也. 想之所至. 神亦至焉. 寤寐想之. 倐忽神至. 援筆書之. 以慰吾形.), (정약용, 회전원 다섯 수를 지 어 남고의 운을 화답하다(懷田園五首酬南皐韻), av002_086) - 34 -

아름다운 산수 속 초가의 삶3)이라고 묘사하였다. 정약용은 춘천의 남쪽에 위치한 그의 별장인 문암장(門巖莊)을 통해 전원(田園) 의 삶을 추구하려 했지만, 현실적 생활을 무시한 채 자연적 삶만을 추구할 수 없었 다. 이제 정약용은 그가 거처했던 곳에 정원을 조성4)하거나 기존에 조성된 정원을 통해 산림의 운치를 연출하였다. 그 곳이 오래 머물 곳이든, 금방 떠날 곳이든 여 념하지 않았다.5) 정약용은 정원을 조성할 때, 정원 전체를 적극적으로 조영하기도 하였고, 정원의 일부에 나무를 심거나 단(壇)을 만들어 소극적으로 조영하기도 하 였다. 이런 실질적 정원 조성을 통해 정약용은 동경하던 은자(隱者)의 삶을 현실에 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표 3-1> 정약용의 거처와 정원 거 처6) 거주기간 정원 조성여부 화순 금소당 예천 반학정 서울 재산루 서울 담연재 서울 죽란사 황해도 곡산관아 강진 사의재 약2년 약1년 약1년 약3년 약9년 약2년 약4년 일부 일부 기존 기존 전체 일부 - 강진 다산초당 약10년 전체 친척인 윤단의 초당으로 연못을 넓히고 채마밭을 조성하는 등 대 대 적 으 로 정 원 을 재 조 성 13) 소내 여유당 약17년 전체 집 앞 에 정 자 를 짓 고 원 포 를 경 영 14) 내용 관 아 앞 소 나 무 아 래 단 (壇 ) 조 성 7) 관 아 의 쓰 지 않 는 정 자 를 활 용 8) 김 육 (金 堉, 1580-1658)이 조 성 한 정 원 9) 기 존 정 원 10) 뜰 의 일 부 에 대 나 무 난 간 을 둘 러 뜰 을 조 성 11) 관 아 보 수 후 남 은 자 재 로 서 향 묵 미 각 (書 香 墨 味 閣 )을 지 음 12) 강진 유배의 첫 거처. 동문 밖 주막의 방 한 칸에서 지냈음 3) 정약용, 황상유인첩에 제함(題黃裳幽人帖), av014_110 :... 지역을 선택할 때는 모름지기 아름다운 산수를 골라야 한다.(余曰擇地須得佳山麗水.)... 중앙에 국세(局勢)가 맺힌 곳에 초가집 3~4칸을 짓되, (就中央結局處. 構茆屋三四間.)... 4) 정약용, 죽란화목기(竹欄花木記), av014_018 : 나의 집이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는데, 명례방에는 높은 벼슬아치와 세력있는 집안들이 많아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날마다 한길(衚衕)을 서로 달린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완상할 만한 연못이나 정원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집의 뜨락을 반 정도 할애하여 경계를 정 하고, 여러 꽃과 과일나무 중에서 좋은 것을 구하여 화분에 심어 그곳을 채웠다.(余家明禮之坊. 坊多公卿 巨室. 故車轂馬蹄. 日交馳乎衚衕之間. 而無陂池園林. 足以供晨夕之玩者. 於是. 割庭之半而界之. 求諸花果之 佳者. 揷諸盆以實之.)... 고요한 산림(山林)과 원포(園圃)의 정취가 있어서 수레바퀴의 시끄러운 소음을 거의 잊어버렸다.(蕭然有山林園圃之趣. 而輪鞅之鬧. 亦庶幾忘之.)... 5) 정약용은 다산초당에 있을 때, 이웃의 스님이 유배지라 언제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정 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정약용을 보고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 꽃이며 약초, 샘물과 괴 석 등은 모두 나와 함께 떠다니는 것입니다. 떠다니다가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떠다니다가 서로 헤어지 면 씻은 듯이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떠다니는 것이 뭐 불가한 일입니까.(彼花藥泉石. 皆與我浮者也. 浮而 相値則欣然. 浮而相捨則浩然忘之已矣. 又何爲不可. 且浮未嘗悲也.)..., (정약용, 부암기(浮菴記), av013_047) 6) 정약용이 1년 이상 거주했던 곳을 대상으로 하였다. 7) 정약용, 차군정 아래에 노송 한 그루가 있는데(此君亭下有古松一株)..., av001_034 :... 섬돌로써 단 만들고 잔디를 깔아주며(砌石爲壇莎作茵), 스물 넷의 기둥으로 용비늘을 받쳐주네(二十四柱擎龍鱗)... 8) 정약용, 반학정기(伴鶴亭記), av013_057 :... 나는 예천에 도착하는 날로 관ㆍ해ㆍ정ㆍ누의 제도를 살펴보고, 정각의 동쪽에 폐허가 되어 버린 정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余至醴泉之日. 則巡視館廨亭樓之 - 35 -

2. 정원의 구성 정약용이 생각하는 정원의 구성은 유거( 幽 居 )에 대해서 설명한 황상유인첩에 제함( 題 黃 裳 幽 人 帖 ) 과 야사첩( 埜 僿 帖 ) 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크게 뜰과 채마밭의 주거 주변, 집과 가까운 산중턱에 세운 초각( 草 閣 ) 일대, 주거와 떨어 져 전답과 호수가 있는 주거 외곽, 소나무 몇 그루와 약초원 잠실로 이루어진 주 거 뒤 로 나누어진다. 각 구역별 세부내용은 다음과 같다. 집 앞 뜰(주거 주변)에는 낮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엔 갖가지 꽃과 고급수종을 화 분에 심어 선비의 품격을 갖춘다. 뜰 옆에 연못을 조성하여 완상하고 남새밭에 물 을 공급하기 위한 저수지로도 활용한다. 두 개의 남새밭을 두는데, 집과 가까운 곳 에는 채소류를 심고, 더 먼 곳에는 오이나 고구마 등을 심고 해당화로 울타리를 만 든다. 집 옆쪽의 사립문 밖으로 산언덕을 50여보(약 90m) 15) 정도 올라가 계곡 옆 에 대나무 숲을 등지고 초각( 草 閣 ) 을 짓는다. 집 앞의 개울을 따라 100여보(약 180m) 정도의 거리(주거 외곽)에 전답을 두어 경영한다. 그 옆에는 연꽃과 가시연 이 군락을 이룬 큰 연못이 있다. 집 뒤(주거 뒤)에는 소나무 몇 그루 심고 그 옆에 약초원을 만든다. 소나무 북쪽으로 잠실을 두어 누에를 기른다. 制. 於 政 閣 之 東. 得 一 廢 亭.)... 내가 이 정자에 살게 되면서 글을 짓다가 여가가 많으면 책을 보는 데에만 뜻을 두었더니,( 余 旣 處 是 亭. 筆 墨 多 暇. 佔 畢 唯 意.)... 9) 김육, 재산루기( 在 山 樓 記 ), 잠곡유고( 潛 谷 遺 稿 ) 9권, a322_av009_019 :... 재산루는 종남산 위의 태극정 아래에 있는데, 층진 바위가 솟아 있고 계곡의 물이 그 가운데로 흐르며, 서울을 굽어보고 삼각산 을 바라보며 읍하고 있다. ( 樓 在 終 南 山 上 太 極 亭 下. 層 巖 突 起. 澗 水 中 流. 俯 瞰 長 安. 平 挹 華 山.)... 10) 정약용, 봄날 담재에서 지은 잡시( 春 日 澹 齋 雜 詩 ), av001_141 : 이때 누산( 樓 山 )에서 회현방( 會 賢 坊 )으로 이사하였는데 홍공께서 그 집을 담연재라 이름하였다. ( 時 自 樓 山 移 住 會 賢 坊. 洪 公 名 其 齋 曰 澹 然.)... 11) 정약용, 죽란화목기( 竹 欄 花 木 記 ), av014_018 : 각주 7 참고 12) 정약용, 서향묵미각기( 書 香 墨 味 閣 記 ), av014_020 :... 너희들은 웅덩이를 이용해서 연못을 만들고 돌로는 섬돌을 쌓고 남은 재료로는 연못 옆에 누각을 지으라. 자제들을 이곳에 살게 하겠다.( 汝 其 因 坑 爲 池. 石 以 砌 之. 以 其 餘 材. 臨 池 爲 閣. 將 以 處 子 弟 也.)... 13) 정약용, 어느 날 매화나무 아래를 산책하다가( 一 日 散 步 梅 下 )..., av005_115 :... 다산 속의 집을 빌 려 사는데( 賃 屋 茶 山 裏 ) 어느새 많은 세월이 흘렀다네( 欻 然 歲 華 走 ) 떠돌이라 원대한 계획도 없고( 萍 梗 無 遠 圖 ) 게을러서 하는 짓도 늘 구차했지( 呰 窳 計 常 苟 ) 지금 두 번째 봄을 맞고 보니( 及 玆 再 見 春 ) 살기도 꽤 오래 살은 게지( 棲 息 亦 云 久 )... 가슴속에는 자그마한 은둔처 생각이( 胸 中 小 丘 壑 ) 반평 을 두고 서려 있었 기에( 半 生 鬱 蟠 糾 ) 다짜고짜 그 뜻 한 번 펴보려고( 勃 然 思 一 展 ) 분수를 따질 겨를도 없이( 拙 分 末 遑 守 )... 14) 정약용, 두 번째 차운하다( 二 疊 ), av007_095 : 정자 몹시 낮고 작으나 먼 바람 받아들여( 亭 絶 低 小 受 長 風 ) 시원하기는 바로 높은 누각과 마찬가진데( 爽 涼 乃 與 飛 樓 同 ) 금년에 꽃나무 일백 그루를 심어 놨으 니( 今 年 種 樹 一 百 本 ) 요행히 여생 동안 고운 꽃구경을 누리리라( 僥 幸 殘 齡 享 嫣 紅 )... 15) 1보는 6척이고, 1척은 약 30cm이므로 50여 보는 약 90m정도이다. - 36 -

<표 3-2> 황상유인첩에 제함 과 야사첩 에 의한 정원의 세부구성 구분 주거주변 위치 시설 뜰 향 장 (響 墻 )과 화 분, 목 가 산 뜰 오른편 연못, 대나무 홈통 연꽃 남새밭1 아욱, 배추, 마늘 등 채소류 남새밭2 오 이, 고 구 마 등. 해 당 화 (울 타 리 ) 대나무 난간 자연림, 대나무 숲 전답 곡식류 큰 연못 연꽃, 가시연 담장 밖 초각 일대 50여 보 쯤 떨 어 진 산언덕 주거 외곽 1백 여 보 쯤 떨 어 진 곳 건물 뒤 주거 뒤 식물소재 석류나무, 치자나무, 백목련, 국화, 기화괴초, 과실수 등 소나무 소나무 동쪽 약초원 인삼, 도라지, 천궁, 당귀 등 소나무 북쪽 잠실 뽕나무 정약용의 제자 황상(黃裳, 1788-1870)은 황상유인첩에 제함(題黃裳幽人帖) 의 내용대로 일속산방(一粟山房) 이라는 유거(幽居)를 지어 살았다. 허련(許鍊, 1808-1893)이 황상의 산방을 그린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가 있다. 이 그림에 서 산 속에 자리 잡은 초가와 왼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정약용이 말한 초각(草閣)일대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3-2> 허련,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 1853년, 지본담채, 23X32cm, 개인 소장. - 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