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시리즈 7



Similar documents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내지-교회에관한교리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178È£pdf

<3032BFF9C8A35FBABBB9AE5FC7A5C1F6C7D5C4A32E696E6464>

152*220

- 4 -

8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With_1.pdf


2015년9월도서관웹용

»êÇÐ-150È£

조사 심판: 미래를 위한 당신의 희망! Print

제 1 과 제자로 부르시니 1. 주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에 무엇인가를 버려두고 즉시 순종하였다. 그들이 버린 것은 배와 그물이었는 데, 그것은 곧 생업을 포기한 것이다. 2.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고. 전도나 선교를 의미한다. 1. 따르다 는 제자도의 핵심 동사이

ÁÖº¸

¿©¼ºÀαÇ24È£

º´¹«Ã»Ã¥-»ç³ªÀÌ·Î

통계내지-수정.indd

연구노트

쌍백합23호3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The mission minded church - Strategies in building a multicultural ministry – Die missions-bereite Kirche - Strategien zum Aufbau multikultureller Ge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왕께찬양합니다-R.Vader_&_J.Rouse._Arr.C._Kirkland)

Çѹ̿ìÈ£-197È£

본문2(91-182)

³»Áö_10-6

성경말씀, 즉 신구약만이 우리 신앙과 문서, 행위를 위한 유일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의 원칙과 통찰력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 그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기도를 다듬고 모양을 만들어 가게 한다. 또한 당신의 기도의 내용이 곧 당신의 신앙을 만든다 라고

2 Verse 2C E 전능 하신나의주하나님은?? j r j 2 0 r. fij fi j R = E2G 능치 Fm9 Cm M9 2C 못하실일전혀없네우리?? r. o R


(중등용1)1~27



Slide 1

ok.

- 89 -

* pb61۲õðÀÚÀ̳ʸ

10월추천dvd


cwma-hkc hwp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5:1-5:21 하나님의사랑으로구원받는다 구조상아래와같이연결을하여읽는것이도움이됩니다. *3:21-3:31 와 5:1-5:11 과 6-8 장들은각개인의구원에관한원리 *4:1-4:25 과 5:12-21 과 9-11 장들은인류전체에대한구원의원리 5:1-5:11. 우리각사람이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의 바라 이고 다른 것은 죄 를 용서하다 의 살라흐 다.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인데, 이것은 온 세상이 그의 말씀에 절대 따른다는 것이다.

- 2 -

Jkafm093.hwp

01¸é¼öÁ¤

기본소득문답2

레이아웃 1

hwp

(초등용1)1~29

Microsoft PowerPoint - PresentationK.pptx

....pdf..

HZKYXFOLETAR.hwp

ITFGc03ÖÁ¾š

5 291

ÁÖº¸

#7단원 1(252~269)교

소식지수정본-1

CR hwp

<5B DB1B3C0B0C0DAB8A65FC0A7C7D15FB5F0C0DAC0CEBBE7B0ED5FC5F8C5B62E706466>

<BFE4C7D1BCADBDC5BCAD2E687770>

¿ì¸®Áö02¿ùmj3

01 표지 1.qxd

What is the judgement like

병원이왜내지최종본1

We are thankful to the Lord for the opportunity to produce this material for the sake of the Kingdom. He makes all things possible. Thanks to those wh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SIGIL 완벽입문

나하나로 5호

USC HIPAA AUTHORIZATION FOR

041~084 ¹®È�Çö»óÀбâ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9-26 with art Korean DPA.hwp

전례강의7

우리 옆에 계신분과 인사하겠습니다

02 

0.筌≪럩??袁ⓓ?紐껋젾 筌

ÃѼŁ1-ÃÖÁ¾Ãâ·Â¿ë2

(......).hwp

성경이란무엇인가? 179 경우도있다 ( 마 13:14, 15:7, 22:43.45, 행 1:16, 28:25). 그렇다고해서그것이하나님이말씀하신것이아니라는것이아니라성령의감동하심에서나온말씀이라는것을생각하면인간적인요소들조차도하나님의말씀을전하는수단에불과한것임을알수있다. 물론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_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21 여 ö Ç J ö Ç Ç ö úç úç ú Ç 사랑으로채우 - - 여? J J J J J #ú Ç úç 사랑으로채우 - 여 L? ú ä F ä A ä # _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성찬경 a ff 4 4 l l k k k k k k k k k k k k a ff 4 l l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k k k k k k k k k k k k b f f 4 b f f 4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l l l l l l l l a f

01 표지.qxd

dating(수정).hwp

2002report hwp


(012~031)223교과(교)2-1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C0BAC7FDC0C720BAF1B9D02E687770>

<B0A5B6F3B5F0BEC6BCAD2D2E687770>

완벽한개념정립 _ 행렬의참, 거짓 수학전문가 NAMU 선생 1. 행렬의참, 거짓개념정리 1. 교환법칙과관련한내용, 는항상성립하지만 는항상성립하지는않는다. < 참인명제 > (1),, (2) ( ) 인경우에는 가성립한다.,,, (3) 다음과같은관계식을만족하는두행렬 A,B에

¾ç¼ºÄÀ-2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Transcription:

Contents

4

5

6

7

제97회기 개혁주의 신학대회 Ⅰ.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 김광열 교수 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Ⅰ.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 - 개혁주의 기독교 신앙의 요점 오늘날한국교회는현대주의사상과자유주의신학의도전뿐 만 아니라, 복음주의 안에서도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에서 떠난 왜곡된 신학 사상들의 도전 앞에 직면해있다. 명백한 이단 사상들도 교회의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으나,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면서도 성경적 가르침에서 떠난 왜곡된 복음들이 교회의 성도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다양한 도전 앞에 서있는 21세기 한국 교회의 성도 들에게 본 교단이 추구하는 개혁 신학의 원리가 무엇이고, 개혁 주의 신앙의 핵심 교리들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여줌으로서, 성경적 신앙의 정체성을 굳건히 정립하는 일이 요구되고 있다. 현대사상과, 주님이 전해주신 복음에서 떠난 다른 가르침들 로부터 교회의 성도들을 지키며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개혁주의 신앙의 요점들을 정리해보았다. 1부에서는 본 교단이 추구하는 개혁신앙의 원리들이 무엇인 지를 살피고,2부에서는 개혁주의 신앙이 추구하는 성경의 핵심 교리들을 정리하였으나, 지면관계상 요점적으로 서술하였다. 역사적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되, 최근에 주어지는 10

왜곡된 도전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 내용들을 정리하였다. 1 부. 개혁 신앙(Reformed Faith) 의 원리들 제 1 부에서 논의할 주제는 개혁 신학의 원리들은 무엇인 가? 에 관한 내용 즉 개혁 신학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전통 적으로 설명되어온 칼빈주의 5 대교리 가 개혁 신학의 원리 에대한충분한답이될수있는가? 아니면좀더근본적인 주제들로 설명되어야 하는가? 개혁 신학의 원리는 칼빈주의 5대교리를 포함하면서도 그 보다 더 포괄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신앙을 정의한다고 할 때, 어느 몇 개의 신학적 원리들만을 가지고서 개혁 신학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미흡한 설명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칼빈주의 개혁 신학을 말하고자 할 때, 혹자에게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예정 교리 혹은 선택교리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빈주의 창 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빈도 자신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에서 결코 예정 교리라는 하나의 교리를 먼저 세워 놓고 그 교리 위에서 나머지 내용들을 정리해 나가지 않는다. 1) 칼빈은 기독교 1) 다시 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교리 만이 그의 신학의 유일한 출발점 이거나 기본토대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강요의 제3 권 즉, 신자의삶을논하는주제들속에서한내용으로소개되고있을뿐이다. 사실 예정교리란 마르틴 루터나 어거스틴의 가르침 속에서도 찾아진다. 오히려 루터가 이 주제에 관해서 칼빈보다 더 많은 기록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R.C.Sproul 개혁주의 은혜론 (C.L.C.,1999)153. 11

강요를 통하여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원리들을 온전히 제시 하고자 했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어느 한 나라에서 야기된 신학적 논쟁에 대한 답변으로 형성되어진 칼빈주의 5대교 리 나 그 밖의 어느 한 교리만으로는 개혁 신학의 원리에 대한 충분한설명이될수는없으며, 그보다좀더포괄적인서술이 요청되는 것이다. 2) 물론, 칼빈주의 5대교리는 개혁 신학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아래의 항목들 속에서도 그 부분을 포함하여 설명 할 것이지만, 그것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A.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 개혁 신학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원리는, 성경을 신자의 구원과신앙생활, 그리고한걸음더나아가신학연구및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 최고의 권위로 삼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있다. 그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외침 속에서부터 들려졌다: 성경 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구속되어 있으므로, 그것에 거스 려 행동하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며, 안전한 선택도 아닌 것이 다. 이 말은 종교 개혁 당시 웜스(Worms) 국회에서 루터가 교권과 국가의 권력 앞에서 심각하게 이단의 죄목으로 주목받게 되었을 때, 외쳤던 신앙고백적 선언이었다. 3) 당시에 루터가 2) R. C. Sproul, 30. 12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적 구원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신칭의 의 복음을 주장하므로, 그를 탄압하려하자 루터는 자신의 주장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외쳤던 것이다. 4)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임을 강조한다. 물론, 교회의 권위 혹은 신조의 중요성 등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들은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을 뿐이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신적 권위의 계시 말씀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권위들은 그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중세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지 않다. 그들도 성경의 권위를 말한 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와 아울러 교회의 전통의 권위를 동등하 게 혹은 그 보다 더 높은 권위로 받았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자 들과 같이 오직 성경만 (Sola Scriptura) 의 권위를 최고의 권위 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지적되는 것이다. 개혁 신학은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계시말씀이므 로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의 핵심적인 성경적 근거들이 놓여 3) R. C. Sproul, 45. 4) Ibid., 이러한 점에서 Sola Fide 를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인이라고 부르는 반면에,SolaScriptura 는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인이라고 부른다. 이신칭 의 논쟁이 먼저 주요한 관심사이었지만, 웜스 국회 사건 이후로 Sola Scriptura 가 종교개혁의 또 다른 핵심 논제로 부각되었다. 13

있다. 1) 첫번째로 성경의 권위의 근거는 성경 영감의 사실에서 찾아진다. 성경이 최고의 권위있는 말씀인 것은, 그 책이 하나님의 영감 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딤후 3:16-1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같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글이다. 원어의 의미를 살린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내쉼(breath) 에 의해서 작성된 책이라는 말이다. 결국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에 게서 찾아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 저자들이 하나의 인격적인 도구로서 사용되었으나, 그 들은 자의적으로 성경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 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 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 ( 벧후 1:21) 개혁 신학이 가르치는 유기적 영감 의 관점은 인간이 로버트와 같이 기계 적으로 성경 기록의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인간만의 독립적인 역할 수행을 통하 여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의 스타일이나 지식 정도 와 인생의 배경 등을 그대로 사용하셨지만, 그들을 모든 죄의 영향에서 보호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계시될 수 있도록 성경기록의 과정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셨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경 영감론을 따라서 성경말씀을 이해하게 될 때, 14

우리는 성경이 신적 권위를 지닌 책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2)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영감된 책이라면 우리 는 성경이 불오한(infallible) 책이며 또한 그 결과 무오한 (Inerrant)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오란 성경이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고, 무오란 불오한 성경의 성질로 말미암 아 기록된 성경에는 오류가 없음을 의미한다. 성경 영감의 사실이 성경의 불오와 무오를 보장하는 것은 성경 영감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신적 권위를 말해주기 때문이 다.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성령의 감동하심으 로기록하였다면, 성경에는오류의가능성이있을수없는것이 다. 더욱이 하나님의 속성을 고려해볼 때 그 사실은 더욱 명백해 진다. 하나님의 속성 중 전지하심과 거룩하심( 혹은 의로우심) 의 속성은 성경의 불오를 함의하고 있다. 우리는 전지하지는 못하 지만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마음은 선하지만 지식이 부족하여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직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거짓말하려는 의도는 없으나, 실수 로잘못된진술을하게되는것이다. 반면에 전지하지만 악한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전지 하므로 실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완벽한(?) 거짓 말을 시도할 수도 있다. 소위 말해서 지능범 의 경우가 여기 에 해당한다 하겠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전지하시면서 15

동시에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는 실수하지 않는 전지하심과 나쁜 방향으로 실행하려는 악한 의도를 가질 수 없는 의로우심의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에 오류를 남기도록 역사하실 수 없다고 봐야한다 물론, 하나님은 불오하시지만 인간 저자들은 불오한 존재들 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저자들은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성경을 기록했었어야 했다. 결국 성경 영감을 믿으면서 성경의 불오를 거부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에 떨어지게 한다. 성경 영감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성경의 불오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 영감을 말하면서도 성경에 오류가 있다 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전지하지 못하시거나 아니면 악한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또 선하시면서 도 성경의 오류를 방지하지 못하셨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 의 전능하심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은 전지하시며 또 선하시지만 인간 저자들의 지적 한계나 의지적 한계를 보호하실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여서 성경에 오류가 포함되도록할수밖에없었다고말하게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신 분이시 다. 인간 저자들을 모든 죄와 부족의 한계에서 벗어나도록 성령 님의 역사로 인도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영감을 말하면서 성경의 불오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16

하기때문이라고할수있다. 롬1:1에서사도바울이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 이란 단지 하나님에 관한 복음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복음은 하나님 에 관해서 인간들이 말하는 그러한 일반적인 종교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서 주어진,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영감의 역사의 산물로서의 복음 진리를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한다. 결국 성경 영감이나 불오성의 주제는 초자연 계시 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 우리는 초자연적 영감의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개혁 신학이될수없음을여기에서확인할수있다. 성경영감을 바르게 인정하지 못하면 성경의 불오도 받아들일 수 없고, 성경 을 하나님의 계시말씀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책으로 볼 수없으며, 단지인간의종교적통찰력에의해기록된종교적 문서로 밖에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개혁 신학은 신자의 신앙이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으로 주어진 책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라고 보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3) 성경의 무오성(Inerrancy) 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말하 게하는 또 다른 근거이다. 사실 성경의 무오성은 성경의 불오성 의당연한귀결이라고볼수있다. 불오성이란성경에오류가 발생할수없는성질이기때문에, 그러한성질을가지고있는 17

성경 안에 오류가 없다는 성경 무오성의 가르침은 불가피한 결론이 된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선하심, 그리고 전능하심의 속성들에 근거하여 성경이 불오한 성질을 지닌 책임을 인정한다 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인간 저자들로 하여금 성경에 오류가 없도록 기록케 하셨다는 성경 무오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성경의 무오성을 비학문적 인 개념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성경무 오설은 근본주의자들이 창안해낸 개념으로 초대교회 교부들이 나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 다. 5) 그들은 성경무오의 개념은 거부하고, 성경불오의 개념을 다르게 정의하여, 성경의 영적, 종교적 메시지에 관한 한 오류가 없을 뿐이고, 다른 지리적, 과학적,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기록 에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자신들의 가설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역사적 자료들을 취사선택하여 왜곡시킨 연구 결과임이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기도 했다. 6) 이러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신학적 시도들에 대항해서 5)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들로서는 Jack B. Rogers와 Donald K. Mckim's 을들수있다. 그들의저서, 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An Historical Approach (New York: Harper & Row, 1979) 를보라. 6) John D. Woodbridge 가그의저서, Biblical Authority: A Critique of the Rogers/ Mckim Proposal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훌륭하게 설명해준다. 그들의 왜곡된 이분적 성경이해에 대한 개혁 신학의 평가는 제2부에서 개혁주의 성경관을 논의하는 항목에 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18

개혁 신학은 성경 영감에 기초한 성경 불오와 무오를 바르게 가르치며, 그에 근거하여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7) B. 하나님 중심의 신학 1) 신본주의 신학 개혁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학(theocentric theology) 의 관점이다. 그것은 앞의 항목에 서 언급한 바, 성경 계시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와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오직 성경만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고, 그 계시에 근거한 신학을 세워가므로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된다. 인본주의 신학(anthropocentric theology) 이란 인간에 의 해서 고안되고 인간의 지혜로 세워지는 신학을 의미한다. 그러 한 신학은 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못하므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이나 이성적 논의를 통해 정립해가는 7) Wayne Grudem, 성경핵심교리 (C.L.C., 2004) 74-75. 물론, 여기에서 성경무오의 개념은 성경의 원문에 해당된다. 현재 성경원본은 우리에게 없으나, 성경학자들에 의해서 거의 99% 이상 원본을 찾아냈다. 그루뎀은 미국 헌법책의 원본을 유추적으로 예로 들어 설명해준다. 만일 워싱톤에 있는 정부 고문서 보관실에 있는 미국헌법 원본고서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더라도, 미국 정부는 수많은 사본들을 비교, 연구하여 원본을 복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개혁 신학자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의 몇 군데에 흠집이 있다고 해서 그 집이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19

신학으로 전락되므로,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은 바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취했던 관점이었 다. 기독교를 단지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의 종교로 간주하고, 인간의 종교생활을 현상 세계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 는 여러 가지 활동들 중의 하나로만 인식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신학이란 단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일 뿐이다. 그러나 신본 주의 신학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해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가는 연구인 것이다. 전자가 인본주의 신학인 것은 하나님 의 계시를 따라서 신학을 세워가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에서의 주제는 인간이지만, 신본주의 신학에서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이처럼 개혁 신학은 인간의 통찰력이나 종교적 체험을 연구함 으로 세워가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계시말 씀으로 연구하는 신학이므로 신본주의 신학이며, 그것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을 인정할 때 가능해지 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항목에서 제시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 말씀으로 이해하여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가 전제될 때,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세워질 수 있다. 개혁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신학을 추구하게 되므로, 하나님 중심 의신학이된다. 2) 하나님 절대 주권(Sovereign Lordship) 의 신학 개혁 신학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Sovereignty) 이나 무궁하신 은총(Grace) 과 같은 하 20

나님의 주요한 성품들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먼저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는데, 하나님 이우주만물의창조자이시며, 주관자가되심은크게두가지 영역들 속에서 설명된다. 먼저는 우리 눈으로 확인되는 모든 만물들, 피조 세계가 다 그 분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오늘도 그 분의 뜻과 섭리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가시적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된다. 히브리서 1:3은 주님이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다고 설 명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한 오늘도 주님의 붙드심 의 능 력과 섭리 안에서 존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의 어느 한 구석도, 인류 역사의 어느 한 시점도 주님의 숨결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가시적피조세계에대한하나님의주권은인간의 지적 영역들, 학문과 사상 등을 포함한 모든 불가시적 세계에도 적용된다. 자연 만물과 인간 사회에 대한 모든 지식들은 인간 스스로 창조해내는 지식이 아니라,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원초적인 지식(God's knowledge of the universe) 으로부터 주어지는 파생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개혁주의자 들은 인류문명과 지식의 영역들 속에서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 고후 10:5) 해야 하는 사명을 강조한 다. 개혁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시 8) C. Van Til, 변증학 신국원 역 (C.L.C., 1997) 57 이하를 참고하라. 21

적인 영역들에서 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영역들 속에서도 인정하 게 하고, 그 모든 영역들 속에서 그 분의 주되심(Lordship) 을 세워가야할 사명이 있음을 강조한다. 3)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의 신학 다음으로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을 강조한다. 특히 하나님의 은총의 원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들 안에서 공통 적으로드러나고있는주제이다. i) 칼빈주의 5 대교리의 첫째 항목은 인간의 전적 부패 를 말한다.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 아래 놓여있 는 부패한 존재들인데, 이러한 인간의 전적 부패의 가르침은 전적 무능력을 함의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무능력이란 자연인 의 삶에서의 무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의로운 삶을 전혀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는 바로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바울의 복음서라고 불리우는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논지의 흐름도 사실은 1장에서 3장까지 인간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논증 한 후에,4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불가능성을 철저하게 깨달 은 자만이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게 22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주의가 강조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불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은 동시에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의 필요성을 역으로 강조해주는 가르침이 된다. 오직 하나 님의 무궁하신 은총 안에서만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들을 살릴 수있음을깨닫게되기때문이다. ii) 5 대 교리의 둘째 항목은 무조건적 선택 을 가르친다. 오늘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것은 인간 편에서의 어떠한 공로나 조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선택이라는 가르침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 서 그 기쁘신 뜻대로 주어진 무조건적인 은총의 선택으로 말미암 아 예정함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 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조건없는 선택의 은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iii) 셋째 항목은 제한 속죄 혹은 그리스도의 의도있는 속죄 사역(Christ's purposeful atonement) 이다. 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한 속죄사역을 감당하셨을 때, 아무나 그의 속죄 사역의 은총을 주시려고 의도하셨던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 전에 성부께서 택하셔서 그에게 맡겨주셨던 이들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보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그리스 도의 속죄 사역의 의도는 창세 전에 성부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사랑하신 그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신실한 9) R. C. Sproul, 179 이하. 23

표현인 것이다. iv) 넷째 항목은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성령님의 효과적인 부르심(Spirit's effective call) 인데, 10) 여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다메섹 도상 에서의 사울과 같이, 아무리 인간의 상태가 완악하고 강팍한 심령의 소유자일지라도, 또 그러한 상태에서 아무리 완강하게 거부하려한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는 그 죄인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시고 주께로 돌아오도록 역사하신다는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부르실 때, 그들에게 선한 모습이 있어 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죄인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그리고 연약한 모습으로 서있을 때에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 롬 5:6-10) 은혜를 주셔서 자녀 삼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죄인이며 또 원수된 자일지라도 강권적으로 부르셔서 자녀삼으시는 하나님 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의 사랑을 확인해 볼 수 있다. v) 다섯째 항목은 성도의 견인 을 말하는데,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되고 있음 을 말해준다. 창세 전에 예정하실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 의 은총은 구원의 전과정 속에서 계속되다가, 그 구원이 완성되 는 시점에 이르기까지도 변함없이 계속적으로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0) R. C. Sproul, 197 이하. 24

로마서 8장 31절 이하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한 마디로 나는 너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 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도, 그리고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 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 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 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이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변치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의 자녀들을 붙드시고 인도하신 다는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이 마지막 항목도 역시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을 말해주고 있다. C. 오직 믿음 으로의 원리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역사적 복음주의가 공통적으로 받아들 이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11) 루터도 그것으로 교회가 서고 넘어질 수 있는 핵심적인 조항이라 고 말했듯이, 이 가르 침은 개혁 신학에서만 가르치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개혁신학도그원리없이는존재할수없을것이다. 앞의항목들 속에서지적했던바, 개혁신학이강조하는 하나님의절대주 11) 물론, 최근에 제기되는 새관점(New Perspective) 의 주장들은 주의깊 게 평가되어야할 이론이다. 새관점의 대표적인 신학자 N. Tom Wright는 신자의 초기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최종 칭의는 신자의 삶을 평가하여 주어진다고 보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Monism) 를 주장 한다. N. Tom Wright, What Did Saint Paul Really Say?, (Grand Rapids: Eerdmans, 1997) 25

권 사상이나 무궁하신 은총 의 가르침들은 바로 이 이신칭 의의 가르침 속에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의 원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가르침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나 무궁하신 은총의 원리들이 구원의 영역에 적용될 때, 그것은 이신칭의의 원리를 불러오게 한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주어지며, 따라 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주어지므로, 오직 믿음으 로만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되는 것이다. 믿음 이외에 어떠한 다른 인간적인 조건이나 공로가 추가적으로 요구 된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나 은총으로 주어지는 구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란 인간이 어떻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 님 앞에 서기 위해서 죄인된 인간은 먼저 자신이 의롭다함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칭의란 바로 신자를 의롭다하시는 하나 님의 법적 선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근거로 의롭다 고 선언하시는가? 이다. 여기에서 개혁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선언받게 됨을 가르 친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의 교리를 단지 법적으로 꾸며진 얘기 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2)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26

라는 성경적 원리를 통해서 법적 근거가 마련된 하나님의 공의로 운선언임을가르친다.( 롬5:12-21) 칭의의근거는두가지로 요약된다 :1) 예수님의 대리적( 대표적) 위치와 2) 그러한 대리적 위치에서 감당하신 순종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은총의 계획안에서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 은혜 언약의 대표자 로서 속죄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은혜 언약 안에서 그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자녀들에게 그가 획득하신 의의 공로를 나누어주실 수있게된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인 것이다. 화목 제물로 드려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의롭다함의 영적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 롬 3:25-26) 따라서, 여기에서 믿음이란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 된다. 가톨릭이 세례를 도구적 수단( 원인) 으로 여기는 반면에, 개혁자들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했다. 믿음으로 우리 는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고, 의의 전가를 얻게 되므로, 믿음이란 칭의를 위한 충분한 도구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믿음이란 비공로적(non-contributory) 원인이다. 예수님의 사역만이 공로적 원인이고, 신자의 믿음은 하나의 도구 (instrumental cause) 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신 자의 믿음 자체에는 어떠한 공로도 없다는 말이다. 2) 오직 믿음, 그러나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참 믿음이요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 을 말한다 12) R. C. Sproul, 68. 27

이신칭의의 가르침 안에 함의되어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무궁 하신 은총이란 신자의 행함의 열매를 배제하는 주권과 은총이 아니라, 그것들을 불러오는 하나님의 주권이고 은총인 것이다. 칼빈주의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는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참여와 책임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인 은혜로 말미암아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온전한 순종의 삶의 열매를 살아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므로 우리는 쉰다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므 로 우리도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방식의 이해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이란 믿음으로 의롭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한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믿음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참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행함의 열매들도 결코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 행함의 공로를 가지고서도 신자의 칭의 가 확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칭의를 위한 충분한 공로적 원인은오직예수님의십자가의공로안에서만찾아진다. 그러나,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접붙임 받게 한 믿음이 참된 믿음일 때, 그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이루게 되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이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28

변화를 경험하여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 신학은 믿음에 행함을 덧붙혀서 칭의의 근거 를 삼으려는 로마 가톨릭의 공로주의도 거부하지만, 동시에 믿음에 행함이 그 열매로서 따라오는 것을 거부하는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 도 거부한다. 즉, 신자의 칭의를 위한 공로는 오직그리스도의십자가의속죄사역뿐이며, 그것은오직믿음 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신자의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주어진 참 믿음이라면, 그것은 행함 의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요 15:1 이하) D. 신자의 삶에 대한 강조 그와같은 참 믿음,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개혁 신학의 이해는 신자의 삶에 대한 강조로 연결된다. 개혁신앙은 하나님의 주권 을 강조하므로 인간의 삶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 님의 주권이 전포괄적인 성격을 가지므로 오히려 신자의 삶의 어느 한 영역도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야하는 사명에서 제외될 수있는영역은없다고가르친다. 1) 하나님의 주권의 전포괄성의 원리를 따라, 이원론적 관점들 을거부함 앞의 항목들 중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개혁 신학이 강조하는 29

하나님의 주권은 전포괄적 성격을 지닌다. 가시적 세계와 더불어 불가시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서 벗어난 곳은 한 구석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개혁 신학은 과거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모든 종류의 이원 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헬라의영육이원론은기독교회안에영향을끼쳐때로는 금욕주의적 신앙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중세 시대의 고행주의 도 일종의 영육이원론의 영향이 가져온 결과일 수 있다. 영적이 고 정신적인 영역들을 고귀하고 선한 것으로 간주하고, 육체적 이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먼 것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태도는 인간의 육체 자체를 악한 것, 괴롭혀야할 것, 그리고 죽여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개혁 신학은 육신을 포함한 전인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고, 구원의 대상임을 가르친다. 에덴에서 하나님이 인간 을창조하실때, 육신을포함하여그가창조하신전인을보시고 선하다(it was good)!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 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잘됨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사에 잘되고 또 육신적으로도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요삼 1:2). 마찬가지로 중세의 성속이원론도 성경이 허용하지 않는 왜곡 된 견해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전포괄성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 속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세상을 떠나 산 속이나 수도원 속으로 들어가 숨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 30

과 다른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신자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 으로 살아야할 것을 가르친다. 복음의 정신으로 자신이 속한 이웃과 사회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그 공동체에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 변화와 회복을 가져오는 열매를 맺어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영혼 뿐 아니라, 육신과 함께 전인의 회복을 가져오며, 또한 교회의 회복 뿐 아니라 그리스도 인이 속한 이웃과 사회 속에서의 회복까지도 가져올 수 있는 전포괄적인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복음 은 총체적 복음 이라고 말할 수 있다. 13) 영적 영역에서의 변화와 회복 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들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하고 있으며 또 인정되어야함을 강조하는 것이 개혁 신학인 것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영적 회복을 가져다주는 복된 소식이지 만, 동시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웃과 사회 속에서도 기쁜 소식으로 들려져야 한다. 복음의 정신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켜주어야 할 사명이 하나님의 자녀들 에게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2)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사역 위에서 지적한 바, 하나님의 주권의 전포괄성에 대한 개혁 13) 총체적 복음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김광열, 총체적 복음: 한국교회 이웃과함께거듭나라 ( 부흥과 개혁사, 2010) 를 참고하라. 31

신학적 이해와 그 실천적 적용의 사례는 바로 종교개혁자 칼빈이 제네바 시에서 펼쳤던 사역 속에서 확인된다. 칼빈은 자신이 속해있던 제네바 시민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할 수 있도록 성경적, 신학적 도덕적 기준들을 세우고 적용함 으로 제네바 시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냈다. 제네바 시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국가와 교회 두 기관들은 각자의 임무와 역할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두 기관이 상호 협력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해가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세상의 영역과 영적인영역을모두다스리시는왕이시며, 따라서그두영역들 사이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함께 이루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14) 당시에 제네바 도시는 가난과 혼돈의 도시였다.1536년 칼빈 이 그 도시로 부임한 이후,154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 난민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1538년에는 도시의 인구가 12,000명 에 불과했으나, 10,000 여 명의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병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었다. 15) 제네바 시는 이러한 피난민들을 위하여 기관들을 세우고, 환자와 가난 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수행했는데, 그 때 칼빈은 교회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을 균형있게 적용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 14)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II. 8:46, 409-411. 15) 손병덕, 칼빈의 개혁주의 사회복지 실천과 현대 기독교 사회복지의 과제 신학지남 2003 년 겨울호 ( 통권 277 호) 166. 32

도의 복음으로 사회를 회복시키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당시에 제네바 시가 겪어야했던 그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그것을 정부의 책임이라고만 보지도 않았고 또한 교회의 역할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제네바시의 사회적 문제 를접근함에있어서, 정부차원에서는종합구호원과난민보호 소를 설립하여 운영케함으로, 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직에 대 한 업무와 규정들을 재정립하여 섬김과 봉사의 역할을 감당하도 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두 기관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제네바 시의 사회적 문제가 극복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지도록 방안 들을 제시하였다. 특히 교회의 집사 직분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신자의 삶에 대한 개혁 신학의 강조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종합 구호원이나 난민 보호소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실제로 봉사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집사들이었는데, 그러한 교회의 대사회 적 책임 수행의 배경에서 칼빈의 신학적 작업이 그 기초가 되었 다. 칼빈은 그러한 공공기관에서의 봉사 업무를 위해서는 교회 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의 차원에서 교회 집사들을 파송해서 인적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보았다. 16) 이처럼, 교회의 집사의 역할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교회의 내적인 업무들로만 제한되지 않았다. 교회의 내적 업무들로만 제한된 집사 직분은 중세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로마가톨릭에 서 이해해 온 교회 집사직이란 성직자를 보조하거나 교회 예식을 16) Andre Bieler, The Social Humanism of Calvin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38. 33

돕고 행정적인 업무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중세 가톨릭의 전통적인 이해와는 달리 교회 집사의 주요 업무는 바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칼빈은 이러 한 견해를 제네바 교회 법령(Geneva Church Ordinances) 17) 속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제네바 교회의 직분자들이 교회 뿐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신학자 칼빈은 그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도 임하므로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의 회복을 이루어내도록 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E.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개혁 신학의 특징을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중세 시대에 가톨릭의 구원관이 공로주의적, 율법주의적 성격의 오류를 범했다면,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은 신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신자의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복음적 진리를 회복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7) The Register of the Company of Pastors of Geneva in the Times of Calvin ed. & trans., Philip E. Huges (Grand Rapids: Eerdmans, 1966), 35-49. 34

율법에 대한 개혁자들의 이해가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 으로 율법이 인간의 사회 생활 속에서 죄를 억제해주는 기능과 죄를 정죄하는 기능을 인정하되,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방도 는 될 수 없음을 밝혀줌으로서 율법주의적 접근을 복음적 관점으 로 회복시켜주었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금욕, 고행 등과 같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 려 했던 오류를 바로 잡고, 어떠한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을 하나님 앞에 세워줄 수 있는 것임을 밝혀주었다고 하겠다. 중세 가톨릭의 율법주의적 접근을 거부함에 있어서는 일치하 면서도 복음주의 안에서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들이 있으므로 그러한 입장들을 개혁 신학의 관점과 비교하면서 개혁 신학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루터교(Sola Fide!) 의 한계 종교개혁자 루터의 공헌도 가톨릭의 율법주의적 오류를 극복 하고, 복음적 관점을 회복해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율법을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함으로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는 것으로, 그리고 복음은 인간을 살리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 둘을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물론,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자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35

죄인을 정죄하는 기능을 가진다. 율법의 기능의 긍정적인 측면 을 최대한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죄인된 자신의 무능함과 불가 능성을 깨달아 가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에 게로 나아갈 수 있게하는 몽학 선생( 초등교사) 의 역할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갈 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자체만을 가지고서는 죄인이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세 가톨릭의 공로주의적인 방향에서 바라본 율 법 이해를 거부하고, 복음을 강조하며 그 복음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도구적 수단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했던 것은 루터가 당시의 다른 개혁자들과 함께 공통적으로 노력했던 시대적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교의 오류는 복음이나 믿음을 강조하는 데에 있었다기 보다는, 복음을 강조하다보니 율법을 정죄하는 기능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율법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지 못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죄인을 의롭다 칭하게 해주는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 으로서 믿음의 중요성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믿 음이 율법의 삶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칭의받거나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담고 있으며,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들이 이 땅 위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안내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접근 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한다. 율법은 그것을 통해서 36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도로서 주어진 것이 ( 율법주의 )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께로 나아오도록 함에 그 율법의 기능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께 나아온 이후의 삶 속에서 하나님 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안내책자(guidebook) 가 바로 율법인 것이다. 그렇다 면, 율법주의적인 접근에서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지, 율법의 내용들을 신자의 성화의 삶을 위해서 바르게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측면에서우리는율법의유익을말해야한다. 율법에 대한 루터교의 부정적인 태도는 루터 교회의 성화관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율법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루터교의 관점은 정적주의(Quietism) 의모습속에서도그극단적인모습이발견된다. 오직은혜와 믿음으로만 누리게 되는 구원이므로 어떠한 율법의 행위나 인간 의 행동도 은총의 삶에 역행하는 것이며, 심지어 성례나 기도도,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은혜의 수단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태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다. 18) 18) 물론, 루터교의 이해가 항상 은혜의 원리만을 강조하고, 율법의 삶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교의 성화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루터교 안에서는 오직 믿음 을 강조하는 입장 뿐만 아니라, 믿음과 함께 믿음의 행위, 성화와 선행의 삶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다. Minnesota에 있는 Luther-Northwestern Theological Seminary 교수인 Gerhard O. Forde의 입장은 전자의 관점을 제시하는 루터교의 성화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화관에 대해서는 Christian Spirituality ed. by Donald L. Alexander (Downers Grove, Ill. : inter Varsity Press, 1988) 13 이하 을 참고하라. 37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올 때까지 신자는 고요히 기다려야 한다 는 정적주의의 주장들은 다소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 만, 루터교의 오직 믿음 의 원리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드러내준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들도 은혜의 원리 혹은 오직 믿음 의 원리와 상충하는 것으로만 간주함으로서, 심지어 성 경읽기, 기도, 어떠한 선행이나 봉사 등도 모두 독약과 같은 것 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일들은 언제 나 인간의 의를 세우려는 율법주의적 접근이라고 간주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만 평가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물론, 기도나 봉사 혹은 성례의 행위들도 율법주의적 관점에 서 자기 의( 義 ) 를 이루려는 수단으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복음의 빛 아래에서 바르게 이해하고 시행될 때 그것들은 오직 믿음 의 원리와 상충되지 않는 복음적 행위들 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2) 칼빈의 이해 : 율법의 제3 의 용도(3rd use of Law) 칼빈도 루터와 같이 구원에 대한 율법주의적 접근은 인정할 수 없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가르쳐주는 거울 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19)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들, 하나님 앞에서 바르 지 못한 자세들이 율법의 거울을 통해서 밝혀지고 그래서 자신이 19)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II. 7:7, 355. 38

죄인됨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전적 무능력과 불가능성을 깨닫고, 스스로하나님앞에서설수없는존재임을인정하고, 주께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기능을 설명 함에 있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로 나아온 이후에도 그것 은 신자의 삶에 중요한 안내 책자가 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있는 율법을 통해서 신자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가며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있는지 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 율법의 긍정적인 측면을 바르게 세워주 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균형을 견지하고있다고볼수있다. 율법에대해율법주의적인방식으 로 접근하는 것은 거부하지만, 복음 안에서 이해된 율법은 하나 님의 마음이 담긴 유익한 안내도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은총 안으로 들어온 신자는 그의 삶 속에서 율법을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율법은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으며, 복음의 자유함 속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더욱 온전한 순종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결국 칼빈의 관점을 통해서 우리는 신자가 복음 안에서 반율법 적이거나 혹은 초율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 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주님 안에서 율법의 온전한 성취의 삶을 살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복음으로 율법을 내어버린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율법의 온전한 성취를 말하고 있다고 39

할 수 있다. 3) 웨슬리(John Wesley) 의 오류 율법주의(Neonomeanism) 사실 웨슬리의 신학은 웨슬리가 사역했던 18세기 영국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시대에 영국 사회는 부정 부패가 만연한 사회였다. 20) 정치계 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타락한 모습 들이 발견되었던 시대였다. 부정 부패와 뇌물 수수, 인신 매매나 노예 제도 등 기독교 국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던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였음을 깨달은 웨슬리는 신자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신학을 제시하려 했었던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가 제시한 완전성화교리 (doctrine of entire sanctification) 도 개혁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는 있다. 복음과 율법에 대한 웨슬리 의 관점에 있어서도, 그러한 차원에서 율법에 대한 추가적인 강조가 있었던 이유를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그의 반응을 고려하여 평가해볼 수 있다. 그는 루터나 칼빈이 오직 믿음 을 강조하는 신학을 제시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 한 오직 믿음 의 신학이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을 무시하고 거룩한 삶에서 멀어지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웨슬리는 신자의 최종적인 구원이란 그리스 20) John Wesley Bready 의 저서, England : Before and After Wesley: The Evangelical Revival and Social Reform (Hodder & Stoughton, 1939) 를 참고하라. 저자는 제1부에서 18세기 웨슬리가 영국의 부흥운동 을 일으키기 직전의 영국사회의 모습을 그려준다. 40

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주어진 주님의 거룩과 믿은 이후에 신자가 이루어낸 신자의 복음적 거룩이 함께 고려되어서 주어진다고 보는 신율법주의적(neonomeanism) 태도를 드러냈다. 물론 칭의받은 이후의 삶 속에서 성화의 열매들이 맺혀져야 한다. 그러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 칭의나 구원의 근거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은총이 가져오는 열매이며,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이뤄가는 삶의 증거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최종적인 구원의 근거로 이해될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성이 무너지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공로로 만 주어지는 구원의 의미가 타협받게 될 것이다. 개혁 신학도 웨슬리와 함께 율법의 삶을 무시하는 명목적 그리스도인을 거부하며, 율법을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 하지만, 그 강조는 복음의 정신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리스 도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허물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미 완성된 것이며, 주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서 신자의 편에서 더 이상 해야할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 남겨진 성화의 삶과 성숙을 위한 노력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누리는 삶이지, 무거운 짐으로 감당해야하는 율법주 의적 의무는 아닌 것이다. 결국, 웨슬리는 영국 사회 속에서 타락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신자들을 위해, 신율법주의적 방식으로 율법을 강조하였으나, 그로 인해 복음의 은혜성을 부분적으로 타협하는 결과를 가져왔 다고 할 수 있다. 41

2부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교리들21) A. 성경론( 계시론) 1)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계시란하나님께서자신에관해숨기셨던것을알려주시는 것으로서, 성경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누어지는데, 전자 는 창조사역에 기초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계시로서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지만, 후자는 재창조( 구속사 역) 에 기초하며 택자들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위해 주어진 계시 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은 후자에 속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1 권에서 일반 계시를 논하면서, 특별 계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롬 1:19이하에서 바울은 일반계시의 확실성을 말해주는데, 자연과 우주만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 나님의 능력과 신성과 영광이 확실하게 전달되어 하나님을 알만한 것 이 인간들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죄인된 인간은 불의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연계시들을 거부하거나 왜곡 시키는 가운데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21) 제2부의 논의들은 총회교육부에서 현대인을 위한 신학총서로출판했던 시리즈 중 제5 권인 필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정리하되, 일부 보완한 내용들 이다. 김광열, 장로교 기본교리 ( 총회출판부, 1998) 42

것이다( 롬1:18). 바로 그와같은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해결책으로 제시해주신 것인 특별계시인 것이 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치료적인 성격을 지닌다. 칼빈은 안경 에 비유해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설명한다. 시력이 나쁜 사람도 안경을 쓰고 자연만물의 모습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되듯이, 죄인된 사람들도 성경계시를 통해서 자연만물들 속에서 제시되 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신성들을 바르게 읽을 수 있게 된다 고 보았다. 2) 성경계시의 성격들 성경계시를 신구약의 전 역사 속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해주는 구절은 히브리서 1:1-2상이다 :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 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 니. 이 구절에서 중심주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는 사 실이다. 즉, 계시사건을 말하고 있는데, 1절은 구약에서의 계시 를, 그리고 2절 상반절에서는 신약에서의 계시를 비교하고 있 다. 그 구절들은 성경계시의 성격들에 대해서 3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ㄱ) 계시의 통일성-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언제나 동일하신 한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3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 신 내용들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계시 말씀들은 모두 같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이므로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계시가 되는 것이다. ㄴ) 계시의 역사성- 구약에서의 계시도 이스라엘의 역사의 현장들 속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주어졌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초역사적인 계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계시인 것이다. ㄷ) 계시의 중심이며 완성자 되신 예수님 - 구약에서부터 주어 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되신 예수님의 계시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그 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종결된 것으로 봐야한다. 예수님 이후에는 더 이상 어떠한 형태의 새로운 계시 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시 안에서 완성된 성경계 시는 그것으로서 인간의 구원과 신앙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이 충족히 담겨있는 계시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충족성)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교회에 새로운 신학적 이탈자인 신사 도 신학 의 오류를 지적해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활동했던 사도들의 시대는 1 세기에 마감되었고, 그 이후 1900년간 침묵하 다가, 하나님께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사도시대를 열 었다는 주장이다. 그 신 사도 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 새롭게 계시의 말씀들을 주신다는 주장은 히 1:1-2 에서 말하는 계시에 대한 가르침과 다른 비성경적인 사상인 것이다. 44

3)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 ㄱ)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역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을 만들고, 만물을 조성하는 능력의 말씀이다( 시 33:6).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언제나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다. 히브리서 4:12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신자들이 성경공부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며, 복음전도자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 하고 있는 것이다( 롬 1:16). ㄴ) 그것은또한의미있는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는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무의미한 초능력 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 를 전달해주는 의미있는 능력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은 위대한 역사를 이뤄내지만, 동시에 그 말씀은 의미있는 내용 을 전달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말씀을통해위대한역사를이뤄내는것도중요하지 만, 그 위대한 역사의 의미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도행 전 8 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능력만을 바라보고, 그 능력의 45

참 의미는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은 질문을 했었던 것이다. 22)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바른 의미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ㄷ)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말씀이다 인간도 자신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 생각, 사상들을 드러내주게 되듯이, 하나님도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 내시며, 그의 계시는 그 분의 성품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통해서 그 분을 만나게 되고, 그의 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살전 1:5; 딤후 3:16; 벧후 1:21).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곧 그 분을 가까 이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성경을 인간의 글이라고만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바울도 만나지만, 동시에 하나 님의 면전 앞에 서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ㄹ) 우리는 성경책 숭배(bibliolatary) 의 어리석음은 주의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을 나타내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경책 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성경책 자체는 하나님의 존재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성경책의 공간 22) 행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8:18-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46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책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우상시하는 태도는 바른 태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성경책을 소중히 취급하고 잘 간수해야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즉,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지, 책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 다. ㅁ) 우리는 신정통주의자들이 정통신학의 성경관을 비판하면 서 지적하는 성경책 숭배 의 비난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정통신학의 성경관에 대해서,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인간의 글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바로 성경책 숭배 (bibliolatry) 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저술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려하기 때문에, 성경책 숭배의 어리석음을 범한다고 보 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들, 즉 성경의 일차적인 의미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우상숭배의 죄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인간을 통해서 주신 하나 님의 계시말씀이기 때문이다. 4) 성경무오에 대한 현대신학들과 복음주의의 이탈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면, 그것은 무오한 책이어야 한다. 위의 제1부 A 항목에서도 지적한 바와같이, 그 책을 기록케하신 하나님의 속성들을 고려해볼 때, 성경에는 오류가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47

분이시며, 전지하신 분이시고,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에는 의도적인 거짓도, 무지한 실수도 있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실수 없이, 죄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기록되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성경무오에 대한 신앙은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고 백이었으나, 최근 현대신학 그리고 복음주의 안에서도 왜곡된 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ㄱ) 19세기 현대성경비평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성경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권위는 거부되고, 단순히 인간 저자들의 글로만 간주되어,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기준 아래 분석하고 비평하였다. 결국, 어떠한 초자연적인 계시의 가능성도 인정될 수 없었고, 초자연적인 역사나 이적적 사건들 도 거부되는 가운데 신적 영감의 사실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나 종교적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 들에 의해서 기록된 종교문서라는 동력적 영감설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졌다. 결국, 인간의 글이므로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서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ㄴ) 신정통주의 신학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관은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 는 것으로 보아 비판하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경으로 돌아 48

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온 곳은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신앙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정통신학도 비판하였다. 특히, 바르트(Karl Barth) 는 자유주의 신학은 초월적인 하나 님의 계시를 간과하고 단지 인간의 사상을 말하는 내재주의 신학으로 전락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 사들을 배제하고서 단지 인간의 도덕적 교훈을 말하는 인간의 내재적 도덕종교에 머물고 말았다고 보았다. 그들의 신학 속에 서는 하나님의 초월적 음성은 사라지고 인간의 음성만이 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바르트는 정통신학의 성경관에 대해서도 인간저자들 의 글을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졌 다고 지적했다. 인간 저자들의 글은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 할 뿐인데,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글과 동일시함으 로서 성경책 숭배(Bibliolatry) 의 죄에 빠졌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대안은 성경을 인간 저자의 오류있는 글로 간주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 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려했던 것이다. 즉, 실존철 학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와의 실존적 만남의 사건 속에서 인간의 글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become) 때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될 수있다. 1) 인간 저자가 유한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죄와 오류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성령님의 감동으로 역 49

사하신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가 바르트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이원론적으로 접근하게 하였고, 결국 성경말씀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3) 바르트는 성경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성령님의 사역들 즉, 조명의역사와영감의역사를바르게구분하지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조명의 역사가 있을 때에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 때에도 성경은 이미 성령님 의영감으로기록된하나님의신적계시의말씀임을간과 하고 있는 것이다. ㄷ) 복음주의 안에서의 왜곡된 주장들 - 성경관에대한왜곡 된 견해들은 복음주의 안에서도 들려지고 있다. 복음주의 안에 서의 왜곡들은 주로 성경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1) 화란의 신학자 벌카우워(G.C.Berkouwer) 는 성경을 하늘 에서 떨어진 문서로만 보려는 방식의 가현설적(Docetic) 성경관 을 비판했다. 그것은 성경에서 신적 저자의 중요성만을 강조하 는 근본주의적 성경관이라는 것이다. 사실, 정통신학의 성경관이 말하는 완전축자 영감교리에 대 한 일반적인 오해들 중의 하나는 그것을 기계적 영감설로 간주하 50

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축자영감교리가 반드시 기계적 영감일 필요는 없다. 인간 저자의 중요성을 충분히 말하면서도 하나님 의 영감의 역사를 조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카우워는 전통적인 성경관이 인간 저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설명하려 한다. 인간 저자들은 신적 차원의 존재가 아니며, 단지 유한한 인간에 불과 하므로, 그들이 기록한 문서들은 그들의 유한한 지식, 기술정보, 혹은 당시의 문화적 제약 속에서 기록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글들을 영원한 신적 진리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중요시 해야 할 내용은 성경의 핵심적인 목적과 의도인 데, 그것은 성경이 종교적,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므로구원에관해설명하는진리들에관해서만무오하다고 해야한다고 보았다. 그 밖의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인간의 유한한 한계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2)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로저스와 맥킴(Rogers & Mckim) 도 벌카우워의 이분법의 방향에서 성경을 바라본다. 특히, 성경 불오(Infallibility) 의 개념을 그와같은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정의했다. 즉, 불오란 성경이 기록된 의도와 목적에 해당하는 영적 진리에 관한 내용들에 관해서 오류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다 무오하다고 보는 견해는 거부하였다. 벌카우워와 같이, 성경의 영적 구원의 메시지와 직접적인 51

연관이 없는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사실들에 있어서는 유오한 내용들이 성경에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부분들까지도 무오하다고 간주하는 견해는 17-8 세기 정통주의의 신학적 창안 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과학시대 이후로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보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교리이며, 초대교부 들로부터 종교개혁자 등 역사적 기독교회에서 가르쳐온 내용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ㄹ) 개혁 신학의 관점 개혁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위에서 제시 되는 이분법적인 접근을 거부한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성경은 영적 구원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사실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 이분법적인 접근방식은 성경의 내용들 중, 핵심적인 복음 의메시지와그메시지를담고있는주변의역사적형식을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그 핵심적인 복음 의 메시지와 그 복음이 형성된 역사적 상황을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다. 복음의 내용은 갈보리 언덕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제시되고 구원의 역사가 52

전개되었듯이, 신약의 계시도 인간 역사의 현장 속에서 주어져 복음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히 1:1-2). 2) 정확이말하면, 복음의핵심내용과그것을담고있는역사 적 상황 모두가 온전히 신적 기원과 인적 요소를 지니고있 다고 해야한다. 영적, 구속적 메시지는 영감되었고, 그 밖의 역사적, 지리적 내용들은 오류있는 인간의 글이라고 나눌수없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는 원저자로서 성경의 내용과 형식들 모두에 관여하셨다고 해야한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그 분의 영감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오직 인간 저자의 손에만 맡겨져서 기록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3) 개혁 신학의 원리들을 고려해볼 때도, 이분법적 접근방식 은 옳지 않다.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의 전포괄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 영적인 영역에만 관여하시고, 그 밖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는 간과하셨다고할수없는것은하나님의주권은그모든 영역들을 다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인영역이외의다른영역들속에서무오를보장하실수 없으시다면, 어떻게 그가 영적인 영역에서도 무오를 보장 하실 수 있다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개혁 신학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포괄적 권위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구원의 영역에서만 의미있는 말씀이 되는 것 이 아니라, 그 밖의 과학적, 역사적, 지리적 영역들 속에서 도 의미있는 신적 계시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53

4) 백보를 양보하여 우리가 이분법적인 접근방식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이것이다: 이분법을 따르게 될 때, 신자들은 스스로 성경에서 어느 부분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고, 어느 부분이 인간의 오류 있는 말씀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러한 결정은 인간의 주관적인 결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분법적인 접근방식은 결국 인간의자율이성을최고의권위로삼는결과를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은 성경을 모든 교리적, 신학적, 신앙적 판단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신적권위의말씀으로받는입장위에서있다. B. 신론 이제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여, 이제부터는 성경이 제시하는 핵심적인 교리들을 하나씩 정리해보려 한다. 성경의 가르침들을 살펴보는 가장 일반적인 전개방식은 우주 만물과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설명하는 신론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분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인간들이 저지른 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논의( 인간론), 그러한 죄의 문제 가운데 놓인 인류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존재와 그 분이 성취하신 구속사역 에 관한 설명( 기독론),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성취된 54

구원 역사를 개개인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구원 적용의 역사( 구원론),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에 관한 논의 ( 교회론), 마지막으로 인간이 최종적으로 이르게되는 종말에 대한 논의( 종말론) 의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그러면 먼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 시고, 어떤 속성들을 지니시는지?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 이란 무슨 의미인지? 등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들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격들 우리가일반학문에서습득하게되는지식과하나님을아는 지식과는 차이점들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일반 학문의 지식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다. ㄱ) 인격적인 관계를 포함하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그 분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고 이해되는 지식이다.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아는지식(Knowledge about God) 이란그 분과의인격 적인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서도 가능한 지식이다. 그러 나 성경에서 제시되는 참된 신지식이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분과의 언약적 관계 속으로 들어옴으로서 그 분을 알게되는 지식이다(Knowledge of God). 그 분을 나의 주, 나의 55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을 경배하며 사랑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지식이 참된 신지식인 것이다. 마태복음 7:23에서 예수님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는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 서 이해될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는 알았고, 외형적인 종교 사역들에도 열심히 있었지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으므로 주님이 모른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ㄴ) 우리의 신지식은 유한한 지식이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신지식과 인간이 갖게되는 신지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게된다. 전자는 온전한 지식이나, 후자는 유한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신지식은 한계가 있는 지식인 것이다. 그렇다고 불가지론의 오류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 지고있는 신지식이 유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참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지식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근거해서 설명되는 지식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참된 지식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갖고계신 신지식 만큼, 온전한 지식은 아닌 것이 다(Incomprehensibility). 바로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성경의 교리들에 대한 설명들 중에서 온전한 설명이 주어지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3) 23) 아래의 내용들 중에서 언급되어질 교리들 중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56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알고계신 것 만큼 완전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므로, 우리의 신지식은 유한한 성격을 갖는 것이다. ㄷ) 구속계시사적으로 특징지워진 지식이다 신지식이란 구속사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 바르게 세워질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체계를 세워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길로만 따라갈 때, 참된 신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아담의 타락 이후의 죄 가운데 빠져있는 인간의 부패한 이성으로는 왜곡된 지식만을 만들어가게 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계시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창조-타락-구원으 로 설명되는 구속계시의 역사를 따라서 제시되는 길로 따라갈 때만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ㄹ) 유추적(Analogical) 방식으로 소유하게되는 지식이다 하나님의 신지식은 완전하고 초월적인 지식인 반면에, 인간 의 지식은 유한하고 제한된 피조물의 차원의 지식이다. 하나님 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고려할 때, 그 두 지식들이 서로 완전히 별개의 성격의 지식들이 교리나 예수님의 위격에 관한 교리들을 신비의 교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 교리들에 대한 설명이 온전히 납득되도록 설명되기 보다는, 단지 성경의 가르침들을 정리하여 표현하는 정도의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57

라고 간주하고 그 둘 사이의 어떠한 접촉점도 인정하지 않는다 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게된다( 불가지론의 오류). 그렇다고 그 두 개의 지식들을 서로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동질의 지식이라고 간주하려 한다면, 범신론적인 오류 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갖게되는 신지식이란 그 두 지식들이 유추적으로(analogically) 연관되는 유비적 관 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신지식이란 하나님 과 동일한 방식으로 갖게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과 동일 한 정도로 소유하게되는 지식도 아닌 것이다. 24) 우리는 하나님 께서 그의 계시를 통해서 드러내주신 만큼만 그 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소유하신 신지식만큼 완전한 지식은 아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지식이므로 참되고 확실한 지식이 된다( 불가지론의 극복). 즉, 우리는 하나 님을 참되게 알 수 있으나, 그 분에 대해서 완전히 모든 것을 이해할수있는것은아니며, 단지그분의계시를통해서유추적 으로만 알게 된다. ㅁ) 불가해적 성격(Incomprehensibility) 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신지식의 유한성, 유추적 성격 등에 대 24) 하나님의 신지식은 원초적이고, 한 순간에 완성된 지식이라면, 인간의 신지식은 점진적으로 축척되어가는 지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지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되거나 증가되는 지식이 아니다. 58

한 내용들은 또한 신지식의 불가해성을 의미하게 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말씀을 통해서만 참된 신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따라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롬 11:33-36; 시 145:3; 147:5; 139:6). a. 여기에서 말하는 불가해성이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신지 식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 대해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에 대해서 불가해한 부분이 남아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불가해 성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표현이다. b. 또한 하나님의 지식에 있어서의 불가해성과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의 불가해성은 구별된다. 왜냐하면, 전자의 불가해성 은 원초적이과 항속적인 것이나, 후자의 경우는 파생적이고 상대적인 불가해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에 있어서 인간의 지식이 양적으로 증가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 의신지식과는질적차이가있으므로그불가해성은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질적 차이가 아니라, 양적 차이에 서 발생된 문제이므로, 계속적으로 노력한다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같은 피조물의 차원에 속하므로, 그 불가해성은 항속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자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므로 항속적인 불가해성 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지식에서 언급되는 불가해 성이란 단순히 양적으로만 지적되는 불가해성이 아니다. 그것 59

은 본질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이 다르다는 사실에 기초한 질적 차이에서 주어지는 불가해성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속성들 고유적 속성 / 보편적 속성 전지성 열린신학의 문제 하나님의 속성들은 크게 고유적 속성과 보편적 속성으로 구분 해볼 수 있다. 먼저 고유적 속성들을 살펴보려 한다. 이범주에속하는속성들은또한절대적속성이라고도불리운 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 밖에서는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적 속성들도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피조물들 속에서 그 속성들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보편적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완전하나마 어느 정도 는 그러한 속성들을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되는 고유적 속성들이란 조금이라도 피조물들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 기 때문에, 고유적 속성 혹은 절대적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범주 안에는 자존성, 단순성, 불변성, 그리고 무한성의 속성 들이 포함된다. ㄱ) 하나님의 자존성 - 이 속성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근원 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 60

이외의 것들을 의존하여 존재한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 하며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외부의 도움없이 자신의 생명을 자신 스스로 유지하며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자존성을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의 소명 과정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만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너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라고 가르쳐 주셨다( 출 3:14).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호렙산에 있는 떨기 나무 불꽃의 모습에서 벌써 모세에게 그의 자존성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계셨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떨기나무 불꽃은 불이 계속 붙어있 었지만, 그 나무는 타들어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나무의 불꽃 은 그 불꽃의 생명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나무가 연소될 때 나오 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떨기나무 불꽃의 생명 은 나무가 연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 다. 즉, 불꽃의 생명이 나무에 의존하지 않았고, 불꽃 자체로부 터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의 자존성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외부의 어떤 것에 의존함 없이 존재하시는 자존자이신 것이다. ㄴ) 단순성 - 이 속성은 하나님이 복합적인 존재가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단순 61

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자존성과도 연관되어 이해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만일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존재이라면, 하나님은 그러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분들에 의존하여 존재하시게 된 것이라고 말하게 되므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못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순성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존재는 그 본질에 어떤 속성들이 첨가됨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해준다. 만일 그러한 방식 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영원한 원리( 속성) 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속성들이 혼합되어서 구성된 존재라 고 간주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다른 속성들에 종속케되는 존재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ㄷ) 무한성 - 하나님의 무한성의 속성은 세 가지 영역들 속에 서 제시될 수 있다. a) 완전성- 먼저, 하나님의 존재의 질적인 면에서 무한하심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할 수 있다. 그 분은 그의 지식이나 거룩, 사랑, 능력 등에 있어서 어떠한 부족함이나 제한도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b) 영원성- 또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시간의 영역 속에서 적용시켜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만나게된다. 그런데, 그 분의 영원하심이나 무한하심 등의 개념들은 우리 인간들의 사고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개념들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유한한 인간으로 62

서 초월자의 무한성이나 영원성을 바르게 이해하거나 설 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의 영원하심이 이러하다는식의 적극적인 서술보다는 그 영원하심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지적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 분의 영원성의 의미들을 접근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단순히 끝없이 연장된 시간 의 개념과는 다르다고 해야한다. 현재의 피조계의 시간을 단순히 양쪽 방향으로 끝없이 연장시킨 것으로는 하나 님의 영원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과 피조계의 시간의 차이는 단순히 양적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피조계의 어떠한 존재 를 확대시킨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성질의 영원 성이라고 해야한다. 왜냐하면, 시간도 사실은 하나님 의 피조대상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피조대상의 존재 차원에 속한 시간과 창조주의 존재차원에 속한 영원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원성은 피조물들의 영생하는 것과도 구별 된다고해야한다. 사실하나님의택한백성들이영생하 게되는것은사실이다. 그러나, 택자들이영생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 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 분의 고유한 속성이지만, 사람에 63

게 있어서 그것은 그의 존재에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택자들에게 주어진 영생은 시작이 있는 영생이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며 원래적인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원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분은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모든 시간들을 그의 충만으로 채우시는 분이시라는 점도 균형있게 이해해야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그가 시간 적인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심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영원하심은 또한 시간의 영역과 무관하신 분이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 속의 모든 시간들은 그 분의 손길에 의해 서만 진정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종속 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 중의 하나로서 시간은 그 분의 통치 아래 놓여있는 하나님의 통치대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c) 편재성-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공간의 영역에 적용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만나게된다. 하나 님은우주공간으로도다포용될수없는분이시다. 그는 모든피조물들과공간위에계신분이시기때문이다왕상 ( 8:27; 행 7:24). 여기에서도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64

첫째, 하나님의 편재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분이 우주 공간 안에 무한대로 퍼져있는 존재인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가 유한한 피조물의 공간적인 제약을 초월하고 계시다는 의미 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 속성은 하나님께서 피조계를 지배하 고 있는 공간의 법칙을 초월해 계심을 말해준다. 공간의 법칙이 란하나님께는적용될수없기때문이다. 둘째, 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설명할 때 지적한 바와같이, 하나님의 광대하심 혹은 무소부재하심은 어떤 피조된 공간이 확대되어서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피조된 공간은 아무리 확대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광대하심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대상 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후자는 창조자의 원래적인 속성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셋째, 여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공간적 초월성만 강조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가 우주만 물에 충만히 내재하심만을 강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와 같이, 하나님을 역사의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게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 에는 하나님을 우주만물과 동일시함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간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적으로 말해 준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하신 신이시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 그의 백성들과 성전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분이시다. 65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은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다 포용할 수 없는 광대하신 신이 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넷째, 끝으로 편재교리의 실제적인 유익들을 생각해보려 한 다. 편재하신 하나님은 시편 139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 끝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로 내려가 있을지라도 거기계시고, 새벽날개를치고바다끝에가서거할지라도거기 에도 계신 분이심을 말해준다 (8-9 절). 우주 안에서 그의 시야를 벗어나 숨을 곳은 한 군데도 없음을 고백하면서, 시편기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뜻을아옵소서. 내게무슨악한행위가있나보시고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절) 즉, 하나님의 편재성을 참으로 알게되면, 그는 언제나 하나 님 앞에서 의 삶을 살게되며, 진실한 회개와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게 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교리는 모든 공포로부터 해방된 삶을 뒷받침해준다. 시편 23:4 말씀과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거기에서도 함께하실 것이 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교리는 복음전도자들로 하여금 주의 함께하심의 확신 속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들 로나아가도록도와준다마 ( 28:19-20). 66

ㄹ) 불변성 하나님의 속성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 분의 자존성이나 무한성과 연결되어 이해 할 수 있다. a) 무한성과의 관계- 무한성이란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나 편재성을 가리키는데, 그러한 속성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시간이나 공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이심 을 말해준다. 시간이나 공간의 변화가 하나님의 존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함을 의미하므로, 그것은 즉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지배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 과 공간의 원리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해 놓으 신 원리들이며, 오늘도 그 분에 의해서 통치받고 있는 피조 세계일 뿐이다. b) 자존성과의 관계- 자존성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 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 이외 의 것들에 의해서 존재하지도, 영향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그의 존재, 속성, 지식, 사역 등에 있어서, 어떠한 외부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이뤄가실 수 있는 자충족하신(selfsufficient) 신이심을말해주고있다. c) 끝으로, 불변성의 의미는 단순히 비인격적인 부동체 로 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 하심 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불변하 67

심은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설명된다: 말 3:6; 시 102:25-27; 히 1:11-12; 약 1:17. 그런데, 야고보서의 구절 (...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 니라.) 은 마치 하나님께서 생명력도 없는 어떤 석고상과 같은 비인격적인 부동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 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이란 인격적인 하나님의 신실 성, 특히 언약적 신실성의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 분의 선하심 을 신실하게 보여주시며, 반대로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진노로 반응하시는데, 바로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성경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하나님의 후회하심 이나 진 노를 변경하심 과 같은 구절들은( 창 6:6; 삼상 15:11; 출 32:10-14; 요 3:10)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그러한 표현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기록된 것으로 봐야한다. 성경은 인간을 대상으로 주어진 계시이므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인간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 예를들면, 출 24:11 이나 수 4:24 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손 은, 실제로 하나님에게 사람의 손과 같은 부분이 있다는 말( 신인동형동성 론: Anthropomorphism) 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이해의 차 원으로 표현된 말(Anthropic expression) 이라고 해야 한다. 예를들면, 신약에서 성령을 근심케한다. 와 같은 표현도, 68

실제로 성령님이 근심 가운데 빠져든다는 말이 아니고 단지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봐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둘째, 하나님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본문들 은, 그 변화의 내용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에서의 변화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이나 속성들, 지식, 작정, 혹은 언약적 신실성에 있어서 변하시는 분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언약은 언제나 신실하게 서있으므로, 불순종 하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시나, 돌이켜 순종의 삶으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다시 그 진노를 거두시는 모습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보편적 속성들을 살펴보려 한다. 앞에서 살펴본 고유적 속성들과는 달리, 보편적 속성들은 피조물들에게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는 속성들을 가리킨다. 여 기에는 도덕적 속성들과 같은 여러 가지의 속성들이 언급될 수 있으나, 지면 관계상 주로 지적 성격의 속성들 중에서 전지성 과 지혜로우심의 속성을 중심으로 논의하려 한다. i) 전지하심(Omniscience)- 이 세상과 인간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알고계신 속성을 가리킨다.( 삼상 2:3; 욥 21:22; 사 40:14,28; 시 139:3-6) 성경의 하나님은 깊이 숨겨진 일들도, 자그마한 일들도, 죄와 악함도, 마음의 생각과 장래일들도 모두 알고계신 하나님이다. 69

ㄱ)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앞으로 발생될 모든 일들까지도 포함하는 전지성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건들이 발생되기 전에 이미 확실하고 완전하게 그 사건들을 알고계신 것이다. 그런한 점에서 인간의 지식과는 다른 지식이다. 인간의 지식은 사건들이 발생된 후에야 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즉, 인간의 지식은 사건들의 발생과 변동에 따라서 형성되는 지식이지만, 하나님의 지식은 오히려 그 분의 지식에 의해서 미래의 모든 일들의 발생들이 결정되는 지식이다. ㄴ)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분석적(Analytic) 이지 만, 인간의 지식은 종합적 (Synthetic) 지식이 된다. 즉, 인간의 지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점 더 축척되어서 형성되는 지식이라는 점에서 종합적 성격을 지니지만,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며 완벽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신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 면, 인간에게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일들을 알 길이 없었겠지만, 하나님에게는 이 세상의 만물들이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었다면, 그것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라고 해야한다.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밖에서 즉, 하나님에게 알려지지않은채로존재할수있는것은아무것도없기때문이 다. ㄷ)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란 단순히 앞으로 발생될 여러 가지 가능성들에 대한 지식이라고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의 전 지성은 실제로 그 시점에서 발생될 사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계 신 지식이기 때문이다. 70

즉, 하나님의 전지성은 하나님의 선지하심 (fore-knowlege) 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 이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의 교리들은 하나님의 선지성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선지성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고 다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떠난 해석이 되곤 한다. 예들들면 중세의 한 신학자는 중간지식 (middle- know ledge) 라는 개념으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인간의 자유의지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다 알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성이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에 대한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실제로 발생될 사건 즉 인간이 행동하게 될 것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지하심을 이해할 때, 인류의 역사가 온전 히 그 분에 의해서 결정되며 섭리되며 또 진행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예언과 예정에 대한 가르침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열린신학자들이 (open theology) 또 다시 성경적인 작정이나 예정교리들을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선지성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도 알지 못하시며, 인간들과 같이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하나님의 선지하심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지성이란 선지하심(fore 71

knowledge) 를 포함하는 전지라고 해야한다. 실제로 성경의 문맥 안에서는 하나님의 작정과 선지성의 개념 들은 인간의 인격적인 활동에 장애물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 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요셉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창세기 45:1 절 이하에 보면,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았던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형들이 시기심 속에 서 행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행된 일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손길이 진행되고 있으나,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은 로버트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적 활동을 -의지 의 자유로운 결정과 행동을 -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중세의 중간지식의 신학자들이나 현대의 열린 신학자들의 염려와 같 이, 하나님의 주권이나 선지성을 말하게되면, 반드시 인간이 로보트와 같이 행동하게 된다라는 등식은 잘못된 명제임을 알아 야한다. ㄹ) 전지하심이신자들이삶에주는실제적인교훈들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비밀한 죄나 가식적인 신앙생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다 지켜보시며 알고계신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신전의식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가식적 인 신앙 태도도 불가능함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욥 72

31:1-4; 34:2; 마 6:4, 6, 18) ii) 지혜로우심 - 보편적 속성 중 지적인 성격의 속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우심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는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ㄱ) 지혜로우심은 전지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지적인 속성에 속하지만, 그럼에도그두가지속성들은서로구분된다. 지식은 이론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지혜는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해주는 실천적인 차원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유될 수 있는 성격의 속성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의지와 관련되어서 이해되는 속성이다. 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지혜로 창조 하셨다고 말하며 ( 잠 8:22 이하, 요 1:1-3; 고전 1:24; 골 1:15), 그 분의 통치와 섭리 그리고 구원의 계획들도 모두 하나님의 지혜로 역사하셨음을 말해준다( 히 1:3; 고전 1:24, 30). 사실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현장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현장이다.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들 중에서 가장 큰 범죄의 사건( 최대 의 인간 범죄는 하나님을 죽인 사건일 것이다.) 을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의 사건( 영생의 73

축복을 가져오는 구원사건) 으로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ㄷ)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의 속성을 통해서 신자 가얻을수있는실천적인교훈은, 신자에게크나큰위로가 되어 확신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사랑으로 주어진다면,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지혜로우심 속에서 주어지므로, 우리 를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들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롬 8:28). 3) 삼위일체론 i) 서론적 논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은 아마 성경의 교리들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어려운 부분에 해당하는 작업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존재의 여러 가지 형태들이 있으며, 그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간다. 예를들면, 식물들의 차원은 이동하지는 않으나 그럼 에도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런데, 곤충들은 이동하는 생명체이므로 식물들의 차원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또한 74

단지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요구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그리고 동물들은 곤충보다는 고차원적인 삶을 살아가므로 애정적인 차원( 예를들면, 어미와 새끼와의 사랑) 까지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의 차원은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 예를들면 이성적 능력, 도덕적 차원,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 차원의 삶까지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차원의 삶은 식물 이나 동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생활양식인 것이다. 그러 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항목에서 논의하려는 내용은 인간의 차원을 훨씬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들이 므로, 사실상 그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그 신비를 완전히 정리해낼 수 없는 부분이 남게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계시말씀이 제시하는 것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 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알고계신 것만큼 우리가 완벽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것 만큼은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이와같은 설명은 다른 교리들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적용되어 야할 원칙이지만, 여기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진 술은 더욱 그러하다 하겠다. 삼위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는 인간의 이성에 흡족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성경의 진술들을 가능 75

한 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한 신학작업의 결과일 뿐이다. ii) 교리의 진술 신구약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제시된다( 민 6:24-26; 시 147:18; 요 17:3; 고전 8:4; 고후 13:13 등). 그러한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하여, 역사적 기독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성경적 진리로 수납하고 신앙고백 을 하여왔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6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하 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으로 본체는 하나이며... 위에서 제시한 신, 구약의 성경 말씀들을 요약하여 신앙고백적 문구로 정리한 내용인데, 그 고백의 함축적 의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있다. ㄱ) 삼위일체 교리는 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성경이 계시해 준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지만, 결코 삼신론이나 다신론의 신관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와같이 본체는 하나이나 라는 표현 속에서 고백되는 하나 님의 통일성(unity) 은 신, 구약을 통해서 일관성있게 제시되는 가르침이다( 신 6:4; 사 44:6; 요 10:30; 고전 8:4; 엡 4:5-6; 약2:19). ㄴ) 그런데 그 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신다고 고백한다. 76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성을 말함에 있어서, 그들 삼위들은 각각 서로에게 객관적 인 대상으로서 구별되는 위격이심을 말해야하는 것이다. 즉, 삼위의 하나님은 서로에게 나, 너, 그, 그를 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서로를 호칭할 수 있는 구별된 위격들이시라 는 것이다( 마 17:5; 요 17:1; 16:28; 16:13).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하시며, 아들 예수님은 성부 하나 님을 기도를 드리는 대상으로 삼으시고 있는 것이다( 요 3:35; 15:10; 16:14; 17:5; 14:16). 즉,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주체와 객체로 간주하고 행동하며 대화할 수 있는 구별된 위격적 존재로 활동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삼위의 하나님을 그냥 단지 한 하나님의 다양한 양태들로서만 간주하는 단일신론 은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ㄷ) 결론적으로 성경의 하나님은 그의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 서 한 분되심 과 삼위성 을 똑같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존 재의 성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분되심의 요소를 더 궁극적 인 성격으로 받아들이면 단일신론의 오류에 떨어지게 되고, 반대로 삼위성을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더 궁극적인 성격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삼신론의 오류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궁극적으로, 영원히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77

바른 신앙이 된다. C. 인죄론 성경이가르치는인간이해는 3단계로나누어생각해볼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인류를 창조 하셨을 때의 모습이며, 둘째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죄한 이후의 인류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인류의 모습인 것이다. 1) 에덴 동산에서의 삶- 하나님의 은총과 복 안에서의 인간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 인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축복의 삶이 소개된다. 창 1:28 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 에 충만하라 는 말씀은 인간들에게도 하나님과 같이 창조의 특권을 맛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하나님 과동일한차원의창조는아니지만, 인간도자신과같은모습의 존재를 잉태하고 낳아 기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창 1:29 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채소와 과실 을 식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된 사실을( 창 3:17) 고려해 볼 때, 창세기 1장에서의 상황은 심판의 노동이 아닌 즐거운 근로를 통한 식물의 획득이고,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 78

신 축복의 선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창 2:3 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일의 축복을 주셨다. 6일 간의 성실한 근로의 시간들을 마친 후, 한 주에 하루씩은 육체적 으로도 안식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께 경배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영적 안식의 날을 허락하심도 하나님의 축복 된 배려일 것이다. 창 2:8-15 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주 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터로 허락하셨다. 좋은 환경에 서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창 2:16-17 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말해준 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그 자유는 예외가 있는 자유였다 (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예외규정으로 주어졌다). 여기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자유는 세속적인 자유와는 다른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자유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자유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의 자유이다.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자유란 사실상 방종이며,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한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의 자유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참 자유, 인간이 참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자유인 것이다. 창 2:18 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하나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