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원폭영화와 피해자 로서의 일본 강태웅 광운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Ⅰ. 머리말 해외에서 출판되면 무언가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가 해 자 라고 불려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만든 것도 우리들이니까, 이제부터 바뀌어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강조점은 인용자). 1) 이는 히로시마[ 廣 島 ] 출신 만화가 고노 후미요[こうの 史 代 ]의 말이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그 문제는 원폭의 직 간접적인 영향에 노출 된 피폭자( 被 爆 者 )의 이야기를 담은 그녀의 작품,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 라[ 夕 の 街, 櫻 の 國 ] (2004, 雙 葉 社 )라는 만화가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생겼 다. 번역을 맡은 한국 측 출판사(문학세계사)에서 원작에 없는 히로시마의 원 폭 투하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 책은 그 때 일본에서 희 생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자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 1) 隅 田 佳 孝, 2005. 10. 14, 被 爆 描 いた 漫 畵 韓 國 で륙 譯 出 版, 朝 日 新 聞 ( 夕 刊 ).
40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지이다 라는 문장을 책의 첫머리에 첨부하기를 요구했다. 고노 후미요는 이러 한 한국 측의 반응을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자를 전쟁의 가해자로 만들려고 하 는, 문제 가 되는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2) 여기서 원폭으로 인해 형용할 수 없 는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로부터 전쟁의 가해자를 연상하는 것에 대한 일본의 거부감 또는 금기를 읽어 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원폭의 버섯구름 사진과 길거 리에서 해방의 기쁨을 외치는 사람들의 사진이 병렬로 배치되는 것은 한국인 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미국에서도 원폭의 버섯구름 사진과 전쟁의 종식을 기 뻐하며 포옹하는 남녀의 사진이 같이 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 의 병치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위화감 을 갖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위화감 에는 원폭이 초래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앞에 두고 어찌 기쁨을 보이는 사진을 같이 배치할 수 있느냐는 인식이 깔려 있다. 3) 하지만 사진 속의 인물들 이 기뻐하는 것이 원폭투하가 아닌 종전임은 자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일본의 원폭에 대한 평가는 그것 하나만 분리해서 보려는 탈역사적 인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에서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공유 하지 못하는 한국의 내셔널리즘 이 비판받기도 한다. 4)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 은 점은 바로 이러한 원폭이 가져온 가해자/피해자 인식의 착종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은 원폭박물관과 같은 전시로, 추도회 와 같은 모임으로, 문학에 의한 글로, 회화와 만화와 같은 그림으로, 영화와 다 큐멘터리와 같은 영상으로 계속해서 표현되어 왔고, 일본에서는 전쟁 전체를 대표, 아니 대신할 만큼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이는 원폭에 의한 가공할 만한 피해 때문이겠지만, 일본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로서 이야기될 때 가장 큰 근거인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의 원폭에 대한 표현에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2) 결국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는 위의 문구가 들어가지 않고, 책의 띠지[ 帶 紙 ]에 실리 게 되었으며, 그 글의 주체는 한국의 출판사로 되었다. 3) 후지와라 기이치 저, 이숙종 역, 2003, 전쟁을 기억한다-히로시마 홀로코스트와 현재, 일조각. 4) 예를 들면, 山 中 千 惠, 2006, 讀 まれえない 體 驗 越 境 できない 記 憶, 吉 村 和 眞 編, はだしのゲン がいた 風 景, 梓 出 版 社.
41 단절되어 있고, 이러한 단절은 일본의 피해자 인식을 강화한다. 존 다워의 표 현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기억한다는 것은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가해적 사건을 잊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5) 따라서 이러한 문화장치에서 일본의 피해 를 강조하는 것을 통해 원폭은 반전 과 평화 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무 엇보다도 강력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6) 이러한 원폭에 대한 일본의 기억과 망각의 얼개가 대중문화를 통해서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거기 에 깔려 있는 일본인의 피해자 의식구조를 분석해 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 이다. 원폭이 일본인의 전쟁과 관련된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큼 그것이 가져오는 전쟁관의 왜곡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물론 원폭과 관련된 연 구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이루어져 왔고, 원폭이 일본의 가해 자로서의 기억을 잊게 하고, 피해자 로서 기억시키는 핵심적 아이콘 이 된 점을 지적하는 연구도 많다. 7) 하지만 원폭에 관한 일본의 대중적인 인식을 알 수 있는, 최근의 대중문화와 관련시켜 논한 연구는 국내에는 거의 없었다. 또 한 원폭을 다룬 영화를 분석한 기존 연구에서는 원폭영화의 범위를 히로시마 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이외에도, 1954년 미국 비키니섬에서 실험된 원폭 그리고 원폭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거나, 피폭자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등장하 는 미래를 다룬 영화에까지 확대하기도 한다. 8) 이런 연구에는 고지라[ゴジ ラ] 와 세계대전쟁( 世 界 大 戰 爭 ) 과 같은 SF영화도 포함된다. 9) 이처럼 원폭만 5) John W. Dower, 1996, The Bombed:Hiroshimas and Nagasakis in Japanese Memory, Hiroshima in History and Mem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23~124. 6) 원폭기념공원 이 아니고 평화기념공원 인 것처럼, 연결성이 애매한 원폭과 평화라 는 단어가 호환적으로 쓰이고 있는 상태에 대한 이의제기는 米 山 リサ, 2005, 廣 島 - 記 憶 のポリティクス, 岩 波 書 店, 序 章 참조. 7) 최근 한국에 번역된 원폭 관련 서적만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안 부루마 저, 정 용환 역, 2002,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후지와라 기이치 저, 이숙 종 역, 2003, 앞의 책;다카하시 데쓰야 저, 이목 역, 2008, 국가와 희생, 책과함께. 8) ミック ブロデリック 編, 1999, ヒバクシャ シネマ, 現 代 書 館 ;Jerome F. Sapiro, 2001, Atomic Bomb Cinema, Routledge 등이 그러하다.
42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을 역사적 인과관계에서 절단시켜 본다면 원자폭탄에 관한 전인류적인 우려가 혼재됨으로써,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그것이 가져온 타자 의 피해는 더욱 흐 릿해질 뿐이다. 이 글에서는 기존연구를 토대로 하여 원폭이 여타 다양한 전쟁의 기억, 주 로 가해적이고 침략적인 기억을 생략하고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단일화시켜, 내 셔널적인 기억으로 수렴시키는 과정, 다르게 말하면 유일한 피폭국 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피폭 내셔널리즘( 被 爆 nationalism) 이 어떻게 표현되 는가를 중심으로 고찰해 나갈 것이다. 이를 위하여 앞서 언급했던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 이 작품은 원 작만화의 출판에 이어, 2007년 영화화되어 일본에서 개봉되었다(감독 사사베 기요시[ 佐 部 淸 ]). 또한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판될 정도로 대중적인 영향력이 크다. 뿐만 아니라 원작만화는 제8회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만화부문 대상[ 文 化 廳 メディア 芸 術 祭 マンガ 部 門 大 賞 ], 제9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신생상[ 手 塚 治 蟲 文 化 賞 新 生 賞 ]을 수상했고, 영화도 문부과학성, 문화 청, 히로시마현지사, 도쿄도지사, 히로시마시, 히로시마시 교육위원회, 일본 PTA 전국평의회, 청소년 영화심의회, 일본영화 펜클럽 등의 지원과 추천을 받았을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기에, 최근의 인식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기존의 원폭 관련 작품과는 다른, 새로운 시점으로 원폭 문제에 접근한 작품으로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일본 측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을 원폭영화의 계보 속에 넣음으로써 그 변화상과 변하지 않는 내러티브를 발굴해 내고자 한다. 이 를 통해 일본에서 대중적, 교육적으로 영향력 있는 영상미디어가 갖는 문제점 을 도출해 내고자 한다. 9) 고지라 는 1954년도 영화로 미국의 수소폭탄실험으로 돌연변이한 공룡 고지라가 일본을 습격한다는 내용이고, 세계대전쟁 은 1961년도 영화로 핵전쟁이 실제 일어 나 도쿄, 뉴욕, 런던, 파리, 모스크바 등의 도시에 핵폭탄이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43 Ⅱ. 새로운 시점의 반핵 피폭자 영화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는 2부로 나뉘어져, 제1부의 제목이 저녁뜸의 거리 이고, 제2부의 제목이 벚꽃의 나라 이다. 저녁뜸[ 夕 ]은 해안지방에서 저녁 무렵에 해풍( 海 風 )이 육풍( 風 )으로 바뀌면서 무풍상태가 될 때를 말한 다. 저녁뜸의 거리 란 바로 그러한 지역인 히로시마시를 가리키고, 벚꽃의 나라 는 일본을 의미한다. 10) 최초의 원폭영화는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였지 만 전후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원폭 관련 영화는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한다. 제1부인 저녁뜸의 거리 는 원폭 투하 후 13년이 지난 1958년 (원작에서는 1955년) 11) 의 히로시마시에 있었던 원폭 슬럼( 原 爆 slum) 을 배경으로 한다. 제1부의 주인공 히라노 미나미[ 平 野 皆 實 ]는 12) 원폭 슬럼 의비가새는허름한 집에서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원래는 5인 가족이었으나 원폭으로 인해 아버지와 여동생은 죽고 어머니와 미나미는 피폭당했다. 남동생 히라노 아사 히[ 平 野 旭 ]는 친척 집에 피난 가 있어 피폭을 모면하고, 패전 후에는 그 친척 집의 양자(이름이 이시카와 아사히[ 石 川 旭 ]로 바뀜)로 들어가게 되어 미나미와 10) 이 제목은 작가 오타 요코[ 太 田 洋 子 ]의 작품에서 빌려온 것이라 한다. 오타의 夕 の 街 と 人 と (1955)는 만화의 배경이 되는 원폭 슬럼 을 취재한 글이고, 櫻 の 國 (1940)는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의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이다. 고노 후미요 의 만화와 오타 요코의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水 島 裕 雅, 2005. 3, 戰 爭 と 女 性 作 家 - 太 田 洋 子 を 中 心 として, 科 硏 報 告 書, 戰 爭 他 者 美 意 識 - 美 意 識 におけ る 異 文 化 理 解 の 可 能 性, 72~81쪽에 자세하다. 11) 원작과 영화 사이의 3년 차이는 원작(2004)과 영화(2007)의 발표된 간격과 일치한 다. 히라노 미나미의 50주기를 맞아 동생 아사히가 히로시마로 찾아가는 행위에 현 재성을 부여하기 위한 조정으로 보인다. 12) 히라노 미나미역을 맡은 배우 아소 구미코[ 麻 生 久 美 子 ]는 이마무라 쇼헤이[ 今 村 昌 平 ] 감독의 간장선생[カンゾ 先 生 ] (1998)으로 유명해졌다. 이 영화는 아소 구미 코가 바다에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생긴 버섯구름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아소 구미코라는 배우의 영화 속 역할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의 피폭자 배역도 정 해졌다. 澤 誠, 2007, 佐 部 淸 監 督 インタビュ, キネマ 旬 報, 8월 상순호, 59~61쪽.
44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어머니와는 떨어져 살게 된다. 당시 살 곳을 잃은 피폭자와 인양자( 引 揚 者 ) 그리고 재일조선인에 의해 형 성된, 13) 불법주택이 즐비한 원폭 슬럼 에는 불법점거 퇴거를 요구하는 종이들 이 붙어 있다. 어느날 그 거리의 한 대중목욕탕에 미나미가 어머니와 함께 들 어갔을 때, 여탕 안의 모든 여성은 피폭의 상처=켈로이드(keloid)를 14) 한명도 빠짐없이 팔이나, 다리, 등, 어깨 등에 지니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는 비춘다. 거기서 미나미는 아무도 그것[あの 事 ] 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지만, 이 또한 어머니와의 대화가 아닌 독백일 뿐이다. 그것 이 이야기되기 위해서 원폭 슬럼 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난 외부인이 등장한다. 그 역할은 미나미를 좋아하는 회사동료 우치코시[ 打 越 ]가 맡는다. 우치코시의 접근에 답하려 할 때마다 원폭에 의해 희생된 여동생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와, 그녀는 우치코시의 접근을 뿌리친다. 몇 번의 뿌리침을 겪고 나서 둘이 키스하려고 할 때도 역시 죽은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미나미는 결심한 듯 피폭의 경험을 우치코시에게 털어놓는다. 미나미의 피폭 체험은 내레이션으로 처리되고, 화면은 실제 원폭투하 장면과 파괴된 히로시 마 시내의 영상을 보여 준다. 자신이 피폭자임을 외부인에게 알리고 나면, 급 격히 몸이 안 좋아지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은 피폭자 영화의 장르적 관습으 로, 15) 이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피폭자임을 알려 주고 나서 몸져 눕게 된 미나 미는, 결국 병문안을 온 우치코시 그리고 남동생 아사히와 함께 강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조용히 죽는다. 죽으면서 13년이 지났지만 원폭을 떨어뜨린 사람은 나를 보고, 해 냈다, 또 한 명 죽였다! 라고 생각해 주려나 라는 독백 을 남긴다. 13) 영화에서 인양자와 재일조선인에 대한 언급과 묘사는 없다. 14) 피폭자의 피부에서 볼 수 있는 피부병으로, 피부가 융기하여 게껍질을 닮은 형상을 띤다. 15) 영화의 장르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공식(formula), 관습(convention), 도상(iconography) 등이 있다. 장르 영화에서 공식이 서사구조의 전체적인 틀에서 반복을 가 리킨다면, 관습은 비교적 작은 행위의 반복을 말한다. 토마스 소벅 저, 주창규 외 옮김, 2004, 영화란 무엇인가, 거름, 213~215쪽.
45 제2부인 벚꽃의 나라 에서는 그로부터 50년 뒤인 현재의 일본을 배경으 로 하여, 저녁뜸의 거리 의 주인공인 미나미의 동생 아사히와 그의 딸 나나미 [ 七 波 ]가 주인공이 된다. 나나미는 갑자기 어딘가 전화를 하고 아무 말 없이 집 을 나서는 아버지 아사히를 미행한다. 이 미행에는 나나미의 친구 도네 도코 [ 利 根 東 子 ]도 동행하게 된다. 도코는 나나미의 동생과 사귀었지만, 도코의 집 안에서 피폭 2세 16) 집안과는 사귈 수 없다고 반대하여 헤어진 상태이다. 히로 시마까지 미행하게 된 둘은, 미나미라는, 나나미가 만난 적 없는 고모의 50주 기 때문에 아버지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미행하여 히로시마까지 오는 여행을 통해 나나미는 어릴 적 죽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17) 나나미의 어머니도 피폭자였지만 아버지는 결혼하기를 원한다. 할머니(미나미의 어머니) 역시 피폭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피폭자가 아닌 아들 아사히가 피폭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혼하지만 나나미의 어머니는 피폭의 영향으로 일찍 죽고 만 다. 이러한 과거회상 장면에 그 당시 존재치 않았던 현재의 나나미가 화면에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데이트 장면, 할머니와의 갈등, 결혼 프로포즈 그리고 나나미를 임신하게 되어 행복했던 순간의 회상 장면에, 적극적 으로 과거의 신(scene)에 침범하여 나나미가 그들을 바라본다. 과거의 장면에 출몰 하는 나나미의 존재는 마치 유령과 같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게다가 나 나미는 이 과거의 풍경이 처음 보는 것이 아닌 이미 보았던 것이고, 이를 알았 기 때문에 이 부모에게서 태어나기로 자신이 결정했다는 독백을 한다. 즉, 피 16) 일본의 전국 피폭 2세 단체연락협의회 가 가리키는 피폭 2세의 정의를 알기 위해 서는 먼저 피폭자원호법에서 정의하는 피폭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피폭자 원호법에 따르면 피폭자는 1 직접 원폭피폭을 당한 자, 2 원폭투하 후, 2주일 이 내에 폭심지에 들어간 자, 3 피폭자를 간호하거나 구원활동에 참여하여 피폭당한 자, 4 원폭 투하 후, 피폭자의 태내에 있던 자이다. 따라서 피폭 2세라 함은 피폭 자가 양친 또는 어느 한쪽이고, 양친 또는 어느 한쪽이 피폭 후에 낳은 자 로정의 된다. 全 國 被 爆 二 世 團 體 連 絡 協 議 會 原 水 爆 禁 止 日 本 國 民 會 議 編, 2001, 被 爆 二 世 の 問 いかけ, 新 泉 社, 16~19쪽. 17) 원작만화에서는 이 부분이 벚꽃의 나라 1부로 독립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미나 미의 회상으로 처리된다.
46 동북아역사논총 24호 폭자의 피를 잇는 피폭 2세로서의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피폭 2세가 운명 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능동적 자세로 과거를 껴안는 것이다. 그녀와 동 행했던 도코 또한 헤어졌던 나나미의 동생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가진 이 작품은 기존의 원폭 관련 작품과의 연결성보 다는 차별성 이 주로 지적되었다. 이 작품과 원폭만화의 정전( 正 典 ) 이라 할 수 있는 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 18) 과 비교한 가와구치 다카유키[ 川 口 隆 行 ] 와같은경우, 맨발의 겐 이 원폭이 가져온 참상을 잔혹하게 묘사하여 공포의 환기를 통한 공갈의 평화 를 제창하였던 것과 달리,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에는 그러한 잔혹한 묘사가 억제되어 있고, 정치적 주장 또한 전면에 나 오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다. 19) 또한 사토 다다오[ 佐 藤 忠 男 ]도 이 영화를 기존의 피폭자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시점을 던져주는 작품으로 평가하였 다. 사토에 의하면 피폭자는 반핵운동의 심벌이었지만, 차별과 자기비하에 시 달리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영화 속의 피폭 2세들은 받아들이기 힘 든 원폭의 아이[ 原 爆 の 子 ] 라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더 나아가 주인공 자신이 일부러 그러한 운명을 선택하였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사토는 그러한 아름다운 환상 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20) 기존의 히로시마시의 시설이었던 히로시마 원폭자료관 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2002년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몰자 추도평화기념관 이 건립되었고, 이 18) 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 은 1973년 6월부터 주간소년 점프[ 週 刊 少 年 ジャンプ] 에 연재되어 후에 단행본 10권으로 발매된 만화이다. 피폭자를 다룬 대표적인 만화 로 영화와 드라마로도 수차례 만들어졌고,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맨발의 겐 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福 間 良 明, 2006, 原 爆 マンガ のメディア 史, 吉 村 和 眞 編, はだしのゲン がいた 風 景, 梓 出 版 社 에 자세하다. 19) 川 口 隆 行, 2005, メディアとしての 漫 畵, 甦 る 原 爆 の 記 憶, 原 爆 文 學 硏 究 제4 호, 84~85쪽. 가와구치가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의 새로운 측면만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표현의 부재와, 히로시마 라는 도시의 역사적 사회적 문맥이 불가시화 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 지만 가와구치 글의 초점이 텍스트의 분석보다는 인터넷상의 수용자의 평가분석에 놓여져 있어, 이 글의 시점과는 거리가 있다. 20) 佐 藤 忠 男, 2007, 作 品 評 : 原 爆 の 子 であることに 積 極 的 な 意 義 を 感 じとる 視 点, キネマ 旬 報, 2007년 8월 상순호, 62~63쪽.
47 듬해인 2003년에는 나가사키에 국립 나가사키 원폭사몰자 추도평화기념관 이 건립되었다. 이는 기억의 전승을 국가 차원에서 관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차원의 이벤트는 갈수록 대규모화되어 가지만, 피폭자 개인에 대한 차별 적인 시선 문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영화는 가치가 있을 것 이다. 즉, 피폭자에 대한 차별과 선입견이 그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고 피폭 2세 로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고, 또한 같은 피폭자끼리도(미나미 어 머니=나나미 할머니의 경우) 그러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에 서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고발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입장 에 서 있다는 점에서는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가 이제까지의 영화와는 다른 차별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글의 처음에서 제기했던, 전쟁과 피해자 의 표상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도 과연 가와구치와 사토의 표현처럼 이 영 화는 새로운 것일까? Ⅲ. 평화의 파괴자, 그 이름은 원폭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는 이상과 같이 새로운 시점으로 원폭을 다룬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를 검토하기 위해서 이 영화 이전에 일본 에서 만들어진 원폭영화는 어떠한 것이었나를 개괄해 볼 필요가 있다. 1950년 에 최초로 만들어진 원폭영화의 배경은 히로시마가 아닌 나가사키였지만, 1952년 이후 제작된 원폭영화는 그 배경을 주로 히로시마로 하고 있어 표현의 빈도에 있어서 히로시마 우위, 나가사키 열위 라는 도식이 성립하게 된다. 21) 21) 히로시마 우위, 나가사키 열위 는 영화 표현의 빈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반 적인 원폭과 관련된 관심도에도 적용될 것이다. 다카하시 신지[ 高 橋 眞 司 ]는 이를 열등피폭도시 나가사키 로 표현하였다. 그는 히로시마보다 나가사키가 원폭의 위 력이 적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하는 히로시마, 기도하는 나가사키 라는 기본적
48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는 피폭자의 처참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그려내는 영화 가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영화들이 미국의 원폭 투하를 잔혹행위 로 고발하지는 않는다. 대신 원폭은 단지 자연재해와 같이 그리고 피폭은 백혈병 과 같은 불치병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나중에 상술하게 되는 피폭으로 인해 죽 게 되는 젊은 여성의 사랑을 그린 원폭 처녀[ 原 爆 乙 女 ] 물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서구가 오히려 일찍부터 원폭 투하를 잔혹행위 로 규정하고 비판했음 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영상물에서는 불가항력 적인 비극 으로만 받아들였 다. 도널드 리치는 그 이유를 일본문화적 바탕에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 れ] 로 설명하고 있다. 22) 물론 리치의 말대로 일본문화적인 영향이 없지는 않 겠지만 이 글의 논지에서 보자면 잔혹행위 로 고발하기 위해서는 투하주체인 미국이 이야기의 전면에 나와야 하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따라서 원폭이 어쩔 수 없는 비극 으로 묘사된다면, 전쟁이라는 역 사적 맥락을 떠나 일본의 피해만을 강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는 피폭자의 처참함을 고발하기보다는 원폭 이라는 사실 자체의 전달에 중점을 두는 영화가 나온다. 즉, 원폭을 직 간접 적으로 체험한 세대가 적어짐에 따라 기억의 전승단계로 이행했다고 볼 수 있 다. 한 평론가의 표현을 빌면, 반전, 히로시마, 나가사키 를 교과서라는 무덤에서 소생시키는 방법 으로써 영화화가 선택되는 것이다. 23) 이상과 같은 원폭영화의 변화 흐름을 염두에 두고 21세기에 제작된 저녁뜸의 거리, 벚꽃 의 나라 를 분석해 보자. 인 태도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나가사키가 이렇게 된 것에는 원폭 피해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전후 최초로 원폭을 그린 소설 나가사키의 종[ 長 崎 の 鐘 ] 이 제시한, 원폭은 신의 섭리 라는 주장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高 橋 眞 司, 2001, 祈 りの 長 崎 批 判 - 劣 等 被 爆 都 市 から 平 和 の 祈 り へ, 世 界 9월호, 75~83쪽.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영화의 배경 문제에 대해서는 福 間 良 明, 2006, 反 戰 のメディア 史, 世 界 思 想 社 에 자세하다. 22) ドナルド リチ, 1999, もののあわれ- 映 畵 の 中 のヒロシマ, ミック ブロデリ ック 編, ヒバクシャ シネマ, 現 代 書 館. 23) 馬 場 廣 信, 2004, 父 と 暮 せば 作 品 評, キネマ 旬 報 8월 상순호, 118쪽.
49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역시 피폭자의 처참함과 고발에는 관심이 없는 면에서 1990년대 이후의 경향을 따르고 있고, 전쟁이라는 맥락이 결여되 고, 평화의 파괴자 로 원폭을 그리는 면에서는 전후 일본의 원폭영화 특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원폭은 미나미의 5인 가족의 일상적인 삶을 복구가 불 가능하게 파괴해 버렸고, 현재까지 피폭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 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어판 에서 책의 띠지에만 있을 뿐,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저지당한 것이다. 전쟁이란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영화 속의 원폭은 단지 평화의 파괴자 에불 과하여, 주인공 미나미가 언제나와 같이 학교에 갔을 때, 히로시마 상공에 출현 24)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최근에 만들어진 다른 영상물에서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다. 2005년에 방영된 히로시마 쇼와 20년 8월 6일[ 廣 島 昭 和 20 年 8 月 6 日 ] (TBS 텔레비전)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임신한 아내의 배를 쓰다 듬으며 행복해하는 남편의 모습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학교에서 발레를 연습 하고 있는 소녀들을 비추어 주고, 그 다음에 원폭이 투하된다. 전쟁을 종식시 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누리고 있던 평화를 파괴하고 전후 계속해서 이 어지는 고통의 시작 으로 원폭은 그려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저녁뜸의 거 리 에서의 미나미의 마지막 대사처럼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질문을 국가나 전 쟁에 묻지 않고 원폭을 투하한 개인에게 묻는 것과 같이, 영화 속의 원폭은 개 인 차원의 문제가 되고 국가 차원의 언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전 쟁이라는 맥락과 미국이라는 투하 주체를 상실하면서 일본이라는 국가 차원의 문제가 희석되고 개인의 피해자적 상징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또 다른 최근 의 영상물의 경우에는 원폭의 이야기가 일본적 내러티브에 흡수되어 버린다. 2004년에 제작된 아버지와 산다면[ 父 と 暮 せば] (구로키 가즈오[ 黑 木 和 雄 ] 감 24) 출현 이라는 표현은 전후 최초로 만들어진 원폭영화인 나가사키의 종[ 長 崎 の 鐘 ] (1950)에서 가져왔다. 이 영화에서 원폭이 투하되는 장면과 더불어 원폭의 출현은 전쟁에 미친 군벌에 대한 최후의 경고가 되었다 라는 자막이 나온다.
50 동북아역사논총 24호 독)을 보면, 원폭에 대한 이야기를 일촌법사( 一 寸 法 師 ) 라는 일본의 전래동화 로 바꾸어 히로시마의 일촌법사가 원폭을 떨어뜨린 아카오니[붉은 귀신, 赤 鬼 ] 와 싸우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따라서 일본적 내러티브에 함몰된 영화들은 일본인 이외의 피폭자에 대해 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유일한 피폭국 이라는 담론에 대해 반박하는 근거 중의 하나인 7만에 달하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서도 전혀 그려지지 않 는 것이다. 25) 이는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도 그렇고, 앞서 언급한 다른 최근의 영상물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와구치에 의하면 저녁뜸의 거리 배경인 원폭 슬럼 은 그곳에 모인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성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임 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 대한 표현은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결여=배제를 통 한 일본인의 배제공간의 배타적 점유 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26) 이러한 배 타성이 하나의 피폭 내셔널리즘 양태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Ⅳ. 원폭 처녀 와 새로운 위령 앞서 언급했듯이 원폭영화에는 피폭으로 고통을 당하는 젊은 여성을 그린 원 폭처녀 물이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는 바로이 장르를 차용하고 있다. 이 장르에서 일본의 피해자 적 표상을 강화하는 것은 주인공 젠더 역할의 명확한 구분이다. 원폭의 희생자인 젊은 여성은 한편으로 는 순결과 순진무구가 제시되면서, 또 한편으로 피폭에 의한 불치의 병이라는 25) 한국에는 피폭 2세가 8만 명 정도 있다고 한다. 全 國 被 爆 二 世 團 體 連 絡 協 議 會 原 水 爆 禁 止 日 本 國 民 會 議 編, 2001, 앞의 책, 62~65쪽. 한국의 피폭 2세에 대한 평전 으로는 전진성, 2008, 원폭2세 환우 김형률 평전-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휴머니 스트 참조. 26) 川 口 隆 行, 2005, 앞의 글, 89~90쪽.
51 더럽힘[ 汚 れ] 이 대조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우치코시의 접근을 뿌리치는 미나미처럼, 금욕적으로 고통을 인내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체현한 다. 전투행위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여성이 원폭의 희생자로서 더 적합 한 것이고, 가정에서 남녀가 안심하고 소비할 수 있는 문화적 제품으로 교환가능 하다. 또한 이러한 원폭 처녀 이야기는 불치의 병을 앓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도 교환가능하다. 원폭의 희생이 된 이유와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부여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27) 불치의 병 과 함께 원폭 처녀 에게는 침묵이 강요된다. 저녁뜸의 거리 의 주인공도 피폭과 그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 침묵을 유지한다. 침묵을 외부인 에 밝힌 경우는 앞서 보았듯이 죽음이 기다린다. 침묵을 지키고 외부인의 침범 을 막으려는 할머니(미나미의 어머니)는 다른 피폭자와는 달리 80세까지 살게 된다. 이러한 인내를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주목과 정부의 지원을 갈망하는 실 제의 피폭생존자에게 그리 달갑지 않지만, 국가보상문제 차원에서 피폭생존자 를 위한 법개정에 난색을 표해 왔던 일본정부에게는 형편이 좋은 것이다. 28) 물 론 영화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 그러한 내러티브를 취하는 것은 아 니다. 그보다는 안전한 내러티브가 선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쟁의 주체가 되는 남성을 중심에서 소외시키고, 모든 피해를 여성에게 집중시킨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구도는 기존 사회가 갖는 전통적 이고 안 27) マヤ モリオカ トデスキ ニ, 1999, 死 と 乙 女 - 文 化 的 ヒロインとしての 女 性 被 爆 者, そして 原 爆 の 記 憶 の 政 治 學, ミック ブロデリック 編, ヒバクシャ シ ネマ, 現 代 書 館, 199~222쪽. 28) 상징적인 것은 1989년에 결성된 전국 피폭 2세 단체 연락협의회 이다. 이들은 피 폭 2세들에게도 피폭자와 같이 피폭자 원호법을 적용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정부의 지원은 없고 차별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피폭 2세, 3세에 대한 건강실태조사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그 대상을 정의하는 행위가 되므로, 불안을 증대시키고 차별을 조장하게 된다는 이유로 실시 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피폭 2세 단체는 차별은 조사의 결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사의 비과학성 그리고 문제를 어둠 속 에 방치하는 것이 불안을 증대시 키고 차별을 조장한다고 극력 주장하고 있다. 全 國 被 爆 二 世 團 體 連 絡 協 議 會 原 水 爆 禁 止 日 本 國 民 會 議 編, 2001, 앞의 책, 18~19쪽.
52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전한 젠더 역할의 재확인이다. 즉, 역사와 정치, 욕망과 단절되어 묵묵히 자신 의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일을 하는 여성, 이에 반해 피폭을 면하고 역사적 기억을 외부로 전달하는 역할은 남성이 맡아, 수동적인 여성과 능동적인 남성 이라는 전통적 인 젠더역할이 원폭 처녀 라는 장르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젠더의 역할구분은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에서 인내하고 침 묵하는 미나미와 기억을 전달하는 아사히 그리고 우치코시, 히로시마 쇼와 20년 8월 6일 의 세 자매와 남동생과 남자친구, 아버지와 산다면 에서 원폭 기록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도서관 사서인 여주인공과 자료를 찾으러 온 남자 등으로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분석해 보았을 때,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는기존일본 의 원폭영화의 내러티브 특성을 거의 대부분 답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원폭영화의 공식과 관습을 잘 따르고 있다는 점은 다른 영화와 비교 될 때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그 밤은 잊을 수 없다[その 夜 は 忘 れない] (1962년, 吉 村 公 三 郞 감독)에서는 원폭 17주년을 맞아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취재를 온 한 잡지사의 기자(기억의 전달자이므로 남성)가 피폭자를 만나 취재 를 한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한 명의 피폭 여성은 이미 여러 번 언론에 노출이 되어 자신의 피폭체험과 기형 으로 된 신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러 한 여성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하던 기자는 친구의 소개로 가게 된 바 오 텀 의 마담 아키코[ 秋 子 ]에게 반하고 만다. 아키코가 기둥서방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구해 줌으로써 둘 사이는 가까워져 가지만, 아키코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도쿄로 돌아가기 전날 아키코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 자 아키코는 기모노를 벗고 가슴을 내보인다. 가슴 가운데에 바로 피폭의 상흔 이 남아 있고, 화면은 그녀 가슴의 피폭 상처와 원폭의 버섯구름으로 연결된 다. 이제까지 침묵하며 피폭의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녀가 기자에게 피 폭의 체험을 전달한다. 저녁뜸의 거리 의 미나미와 같이 외부인에게 피폭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녀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시 데리러 오겠다며 도쿄 로 떠나는 기자와 기차역에서 이별한 후 그녀는 급격히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만 다. 여기서 피폭의 체험을 인내하지 않고 언론에 노출되는 여성은 바람직하지
53 않게 그려지고, 반면 여주인공과 같이 끝까지 말 그대로 가슴 속에 피폭의 체 험을 간직하고 인내하는 여성, 그것도 기모노에 싸인 단아한 여성이 이상적으 로 그려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영화에서 피폭 2세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일본의 과거 를 끌어안으려는 모습은 새로운 것이 아닐까? 일본의 피해만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상에 대한 경각심과 그 영향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오 늘의 일본관객에게 보여 주려는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그렇다고 그 기저에 깔 려 있는 일본적 위령의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동생과 도코를 다시 만나게 주선해 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나나미는 아버지와 우연히 만나게 된 다. 나나미가 뒤를 쫓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그간의 사정을 딸에게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저녁뜸의 거리 주인공인 누나 미나미의 사진을 꺼내 딸 나나미에게 보여 주며 나나미와 미나미가 닮았다. 그러므로 나나미가 행 복해져야 한다 는 대사를 함으로써 나나미와 미나미의 동일성에 대해 직접 언 급한다. 그러면서 화면에는 미나미의 사진 속의 얼굴과 나나미의 얼굴이 이중 인화되어 둘 간의 동일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 동일성을 확대해석하면 나나미 가 꿈이나 상상이라는 설명도 없이, 유령처럼 과거회상 장면에 출몰한 것에 대 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즉, 나나미는 살아 있지만 죽은 미나미와의 동일성을 통 하여 유령과 같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토 다다오는 이를 아름다운 환상 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와의 동일성 그 리고 그 교감은 바로 위령의 문화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미나미로 대표되는 피폭자에 대한 위령의 문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령이라는 테마는 미나미의 50주기를 기억하기 위한 아사히의 여행을 그린 벚꽃의 나라 편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지만, 중요한 것 은 죽은 이가 단지 위령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 있는 자와 소통하고 있고 재현=표상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토 준[ 江 藤 淳 ]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일본인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볼 때에도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또 하나
54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의 보이지 않는 시선, 즉 죽은 자들의 시선을 동시에 감득( 感 得 )하는 것 에 의하여, 그로부터 기쁨과 안정을 얻어, 죽은 자들에게 호소하는 마 음이 통하게 한다. 일본이라는 국토, 일본인이 보는 풍경, 일본인 의 생활 영위는 항상 죽은 자와의 공생감 속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 다. 죽은 자와 공생 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 같아 보여도, 실은 죽은 자 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살고 있다는 감각을 갖지 못 하는 것이다. 그 감각이 일본문화의 근원에 있다. 29) 이러한 에토 준이 말하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와의 공생 을 토대로 한 일본문화론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일본문화적 특징으로 한정시켜 정당화하 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30) 하지만 이러한 시선적 특성이 일본문화와 일본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이러한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의 공존은 아버지와 산다면 에서 원폭으로 죽은 아버지의 유령 과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피폭자 여성을 다룬 영화에서도 되풀이된다.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의 여주인공인 미나미=나나미는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이가 교환가능한 일본문화론적 토대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일본의 풍 경 을 인식하는 것이고, 결국 이 영화는 죽은 이의 위령으로 수렴되는 내셔널 내러티브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9) 江 藤 淳, 2004, 生 者 の 視 線 と 死 者 の 視 線, 新 版 靖 國 論 集, 近 代 出 版 社, 15~17쪽. 30) 이러한 에토 준의 일본문화론적인 위령론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카하시 데 쓰야 저, 현대송 옮김, 2005,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에 자 세히 나온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에토가 말하는 죽은 자와의 공생감이 일본문화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이 왜 야스쿠니신사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에 대한 필연성이 전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55 Ⅴ. 맺음말 이상과 같이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를 중심으로 하여, 최근 만들어진 원폭영화를 살펴보았다.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는 피폭이 세대를 넘어 선 문제이고 피폭자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가는 피폭 2세를 그림으로 써, 일본에서 새로운 시점의 원폭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전쟁 이 가져오는 참상과 그 지속성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전후 일본의 관객에게 다시금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 원 폭영화가 갖고 있는 내러티브를 반성없이 답습함으로써 피폭 내셔널리즘 으 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상 실하고 일본적 내러티브 안으로 원폭을 끌어들임으로써 일본의 피해만을 강조 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원폭과 전쟁에는 주체와 타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일 본은 타자와 역사가 부재한 내러티브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56 동북아역사논총 24호 참고문헌 <저서> 다카하시 데쓰야 저, 이목 역, 2008, 국가와 희생, 책과함께. 다카하시 데쓰야 저, 현대송 옮김, 2005, 결코피할수없는야스쿠니문제, 역사비 평사. 이안 부루마 저, 정용환 역, 2002,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 전진성, 2008, 원폭2세 환우 김형률 평전-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휴머니스트. 토마스 소벅 저, 주창규 외 옮김, 2004, 영화란 무엇인가, 거름. 후지와라 기이치 저, 이숙종 역, 2003, 전쟁을 기억한다-히로시마 홀로코스트와 현 재, 일조각. 大 江 健 三 郞, 1965, ヒロシマ ノ ト, 岩 波 新 書. ミック ブロデリック 編, 1999, ヒバクシャ シネマ, 現 代 書 館. 全 國 被 爆 二 世 團 體 連 絡 協 議 會 原 水 爆 禁 止 日 本 國 民 會 議 編, 2001, 被 爆 二 世 の 問 いか け, 新 泉 社. テッサ モリ ス=スズキ, 2004, 過 去 は 死 なない:メディア 記 憶 歷 史, 岩 波 書 店. 濱 野 成 生 編, 2004, 日 米 映 像 文 學 は 戰 爭 をどう 見 たか, 日 本 優 良 圖 書 出 版 會. 新 藤 秉 人, 2005, 新 藤 秉 人 原 爆 を 撮 る, 新 日 本 出 版 社. 米 山 リサ, 2005, 廣 島 - 記 憶 のポリティクス, 岩 波 書 店. 福 間 良 明, 2006, 反 戰 のメディア 史, 世 界 思 想 社. 吉 村 和 眞 編, 2006, はだしのゲン がいた 風 景, 梓 出 版 社. Hein, Laura ed., 1997, Living with the Bomb:American and Japanese Cultural Conflicts in the Nuclear Age, New York:M. E. Sharpe. Sapiro, Jerome F., 2001, Atomic Bomb Cinema, Routledge. Orr, James J., 2001, The Victim as Hero, University of Hawaii Press. <논문> 佐 藤 忠 男, 1970, 原 水 爆 映 畵 の 步 み, 日 本 映 畵 思 想 史, 三 一 書 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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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동북아역사논총 24호 黑 い 雨, 今 村 昌 平 監 督, 1989년. 八 月 の 狂 詩 曲, 黑 澤 明 監 督, 1991년. TOMORROW/ 明 日, 黑 木 和 雄 監 督, 1998년. 鏡 の 女 たち, 吉 田 喜 重 監 督, 2003년. 父 と 暮 せば, 黑 木 和 雄 監 督, 2004년. 廣 島 昭 和 20 年 8 月 6 日, (TBS텔레비전), 2005년. 夕 の 街 櫻 の 國, 佐 部 淸 監 督, 2007년.
59 ABSTRACT Atomic-bomb films and the Japanese as victim Kang, Taewoong Japan s unique experience of Hiroshima and Nagasaki made the Japanese war victimhood. This research analyzes recent popular atomic bomb films to demonstrate how basic themes of war victimhood are reflected and reinforced. In those films the atomic bombings are depicted having little historical connection with the World War Ⅱ. That could conceal the Japanese aspect of victimizer in that war and stress the aspect of victim. Yunagi no Machi, Sakura no Kuni provides the ideal example of atomic-bomb film genre in which Japanese civilians are innocent victims of the anonymous forces of war. This work will show Yunagi and recent atomic-bomb films use the narratives lacking the notion of historical liaison and the Japanese want to consume that sort of narratives backing hibaku nationalism or atomic bombed nationalism. keywords atomic-bomb film, atomic bombed nationalism, war victim, Hiroshima, Nagasa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