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예 지 제 19 집 임진왜란 7주갑 기념 학예지 2012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목 차 연구논문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7 정진술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3 박재광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55 나종남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75 이호준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05 김병륜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1 강신엽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1 김대중 부 록 2010육군박물관 연보 193 학예지 제1집~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05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16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7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정 진 술* 목 차 Ⅰ. 머리말 Ⅱ. 임진왜란 해전의 개괄 Ⅲ.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원인 1. 이순신의 지휘통솔력과 해전술 2. 수군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위 Ⅳ.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역사적 의의 1. 일본의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킴 2. 수군 명장의 역사적 계보가 이어짐 3. 왜구의 종식과 해상의 평화 도래 4.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이 해전술의 기본화 5. 장갑선이 해전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 올해는 임진왜란(이하 임란)이 발발한지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통시대의 연대법으로는 7주갑이 되는 의미깊은 해이기도 하다. 임란은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 국토가 폐허화되 고 나라가 멸망의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명의 지원과 각지에서 의병의 봉기 그리고 해전에서 연이은 승리로 말미암아 결국은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사흘만에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승승장구하여 불과 20여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계속 진격하여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동쪽으로는 함경 도를 석권하였다. 조선은 명의 지원으로 겨우 평양을 회복하고, 이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 으로 일본군은 동남 해안지역으로 물러나고 대부분의 병력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마침내 협 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전라도 지방을 공략한 후 서울로 진격하였다. *해군사관학교 해양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8 학예지 제19집 그러나 직산 전투에서 명군이 승리하고,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함으로 써 일본군의 예봉을 꺾어 그들을 동남 해안지역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1598년 8월에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여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 전쟁에서 육상의 전황은 이여송이 거느리는 명군의 평양수복전,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권률의 행주산성 전투, 그리고 정유년에 명군이 직산전투에서 각각 승 리하였다. 이러한 승리와 더불어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군의 보급로에 위협을 주어 그들의 전쟁수행에 차질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육전의 승리가 일본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의 자유로운 기동과 동남 해안지역의 주둔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함으로써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 을 저지하고, 그들 본국과의 해상병참선을 위협하였다. 해상에서의 승리는 해전사적으로도 중 요하여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1)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필 1) 海 軍 本 部, 韓 國 海 洋 史 (부산 : 啓 文 社, 1954). 崔 碩 男, 韓 國 水 軍 活 動 史 (서울 : 鳴 洋 社, 1965). 李 炯 錫, 壬 辰 戰 亂 史, 上 下 卷, 壬 辰 戰 亂 史 刊 行 委 員 會, 1967. 최영희, 임진왜란, 교양국사총서 7,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趙 仁 福, 壬 辰 倭 亂 時 朝 鮮 水 軍 의 勝 利 原 因 의 綜 合 的 分 析 評 價, 國 防 史 學 會 報, 국방사학회, 1976. 許 善 道, 壬 辰 倭 亂 에 있어서의 李 忠 武 公 의 勝 捷 -그 戰 略 的 戰 術 的 意 義 를 中 心 으로-, 軍 史 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 회, 1981. 崔 七 鎬, 李 舜 臣 將 軍 의 戰 略 構 想 과 作 戰 結 果, 軍 史 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李 載 浩, 壬 亂 水 軍 과 李 雲 龍 將 軍, 軍 史 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羅 鐘 宇,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 전북사학 5, 전북대학교 사학회, 1981. 趙 成 都, 忠 武 公 李 舜 臣 (서울 : 南 榮 文 化 社, 1982). 趙 成 都, 鳴 梁 海 戰 硏 究, 軍 史 제4호,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2. 張 學 根, 朝 鮮 時 代 海 洋 防 衛 史 硏 究, 해군사관학교, 1987. 趙 湲 來, 壬 亂 海 戰 의 勝 因 과 全 羅 沿 海 民 의 抗 戰 - 初 期 海 戰 과 鳴 梁 海 戰 을 중심으로-, 鳴 梁 大 捷 의 再 照 明, 해남문화 원 해남군, 1987. 오붕근, 조선수군사, 사회과학출판사, 1991. 金 一 相, 壬 辰 倭 亂 과 李 舜 臣 의 戰 略, 龜 海 趙 成 都 敎 授 華 甲 紀 念 忠 武 公 李 舜 臣 硏 究 論 叢, 해군사관학박물관, 1991. 崔 斗 煥, 鳴 梁 海 戰 과 강강수월래, 龜 海 趙 成 都 敎 授 華 甲 紀 念 忠 武 公 李 舜 臣 硏 究 論 叢, 해군사관학박물관, 1991. 愼 浩 史, 壬 辰 亂 과 李 舜 臣 의 戰 略 戰 術, 第 二 會 國 際 海 洋 力 심포지움 發 表 文 集, 대한민국해군 해군해양연구소, 1991. 姜 永 五, 李 舜 臣 提 督 의 戰 略 的 딜레마와 現 代 的 關 聯 性, 第 二 會 國 際 海 洋 力 심포지움 發 表 文 集, 대한민국해군 해군 해양연구소, 1991. 金 一 龍, 戰 跡 地 로 통해본 漆 川 梁 海 戰, 제8회 全 國 鄕 土 文 化 硏 究 發 表 會 ( 受 賞 資 料 集 ), 한국문화원연합회, 1992. 金 鍾 基, 釜 山 浦 海 戰,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鄭 鎭 述, 閑 山 島 海 戰 硏 究,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金 一 相, 鳴 梁 海 戰 의 戰 術 的 考 察,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姜 永 五, 壬 亂 期 朝 日 의 海 軍 戰 略,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정두희, 이순신연구-임진년 이후 그의 전략과 정유재란에 관한 재검토-, 이기백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하 (서울 : 일조각, 1994). 張 學 根,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해전),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趙 湲 來, 수군의 승첩,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9 자는 조선 수군의 연이은 승리 원인을 해전의 전략 전술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아울러 그 역 사적 의의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순신에 대한 무한한 찬사와 함께 그의 승리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넘쳐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순신이나 임란 해전을 주제로 다룬는 것이 숟가 락 하나를 또다시 얹는다는 식상함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가능한 한 실증적이며 객관 적인 시각에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Ⅱ. 임진왜란 해전의 개괄 16세기에 우리나라 남해안의 해상방위체제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2개의 수영이 설치되 어 연안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임란 때 경상도는 좌수사 박홍( 朴 泓 )이 동래의 좌수영에서, 그리고 우수사 원균이 거제도 오아포의 우수영에서 낙동강을 경계로 각각 동,서 해역을 관할하 金 一 龍, 壬 辰 亂 赤 珍 浦 海 戰, 제10회 全 國 鄕 土 文 化 硏 究 發 表 會 ( 受 賞 資 料 集 ), 전국문화원연합회, 1995. 任 元 彬, 충무공 이순신의 병법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20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1998. 任 元 彬, 충무공 이순신의 병법과 근대 해전, 海 洋 硏 究 論 叢 제22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1999. 任 元 彬,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24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0. 海 軍 大 學, 韓 國 海 戰 史, 2000. 鄭 鎭 述, 조선수군의 임난 초기대응에 관한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25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0. 최두환,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전략 사상 연구-현대 해군전략논을 중심으로-, 海 洋 硏 究 論 叢 제27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1. 朴 惠 一 외 3인, 李 舜 臣 의 鳴 梁 海 戰, 정신문화연구 제25권 제3호(통권 88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李 敏 雄, 朝 明 聯 合 艦 隊 의 형성과 露 粱 海 戰 경과, 歷 史 學 報 제178집, 역사학회, 2003. 趙 湲 來, 이충무공과 해상의병, 이순신연구 창간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3.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04). 김현기, 이순신의 군사적 리더십에 관한 현대적 조명, 이순신연구논총 2,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4. 임원빈, 병법의 관점에서 본 명량해전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33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4. 趙 湲 來, 새로운 觀 點 의 임진왜란사 硏 究 (서울 : 아세아문화사, 2005). 임원빈,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 (서울 : 도서출판 신서원, 2005). 조원래, 壬 亂 海 戰 에서 본 朝 日 양국의 水 軍 戰 力 - 初 期 海 戰 의 실상을 중심으로-,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서울 : 京 仁 文 化 社, 2005). 김현기, 이순신 제독의 전략 전술과 손자병법, 이순신연구논총 4,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5. 諸 章 明, 李 舜 臣 의 水 軍 戰 略 과 閑 山 大 捷, 軍 史 제60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이종학, 명량해전의 군사사학적 연구, 海 洋 戰 略 제132호, 해군대학, 2006. 이민웅, 임진왜란 초기 해전 연구 Ⅰ-전라좌수군의 제1차 출전을 중심으로-, 海 洋 硏 究 論 叢 제39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7. 제장명, 3대 해전을 통해 본 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이순신연구논총 8,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해전술과 귀선의 역할, 이순신연구논총 9,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장학근, 水 操 에 나타난 이순신 전술-기동항해( 尖 字 陣 )와 전투진형( 鶴 翼 陣 )을 중심으로-, 이순신연구논총 12,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9. 제장명, 露 粱 海 戰 과 이순신 戰 死 狀 況 에 관한 고찰, 軍 史 제78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10 학예지 제19집 였다. 전라도는 좌수사 이순신이 여수의 좌수영에서, 그리고 우수사 이억기( 李 億 祺 )가 해남의 우수영에서 장흥과 보성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각각 전라도의 동,서 해역을 관할하였다. 임진년(1592)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가 거느리는 일본군 제1번대가 700여척 의 함선으로 부산에 내침하였고, 9번대까지 모두 158,700명이 바다를 건너왔다. 이어서 일본 수군들은 침공지상군의 도해( 渡 海 )가 거의 마무리된 5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경상도 연안의 약탈을 시작하였다. 2) 일본군의 침략을 맞이하여 경상좌 우수사는 육지로 피신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적의 침공 초기에 접적지역의 우리 수군이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와해되어 버렸다. 결국 일본 수군에 대한 방어는 전라좌 우수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 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의 제1차 출전이 5월 4일에 이루어졌다. 5월 7일과 8일에 있었던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42척을 격파하며 압승하였고, 그 결과 경상우수 군에 대한 일본 수군의 급박한 위협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5월 하순에는 일본 수군들이 다시 거제도 서쪽으로 침입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순 신이 거느리는 전라좌수군의 제2차 출전이 5월 29일에 이루어졌으며, 이어서 전라우수군도 곧 합세하였다. 이번 출전에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의 4차례 해전을 치루면서 적선 72척을 분멸하며 크게 승리하였고, 그 결과 거제도 서쪽 해역에서 일본 함선들을 완전히 구축하였다. 이처럼 5월과 6월에 있었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했으나 육전상황은 이 와 반대로 조선군이 패퇴일로에 있었고, 일본군 선봉대인 고니시군은 6월 14일에 평양을 점령 하였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연이은 해전 승리는 당시 서울과 평양을 점령하고 해로를 통한 보급을 받아 계속 북진하려는 일본군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되었다 3). 그리하여 일본군 수뇌부는 조선 수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순신 함대를 격멸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육 전에 종사하고 있던 수군장들을 부산으로 남하시키게 되었다. 이에따라 경기도 용인을 수비하 고 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 脇 坂 安 治 ), 한성에 있던 구기 요시다카( 九 鬼 嘉 隆 )와 가토 요시아키 ( 加 藤 嘉 明 )가 급히 김해와 부산으로 내려와 출전준비를 하였다 4). 일본 수군들의 이와같은 공세준비에 따라 경상도 남해안에서 일본 함선들의 활동이 증가하 2) 參 謀 本 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本 編 ) ( 東 京 : 偕 行 社, 1924), pp. 75-78, 152-162. 3)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오만 장원철 옮김,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3, pp.233-234. 4) 有 馬 成 甫, 朝 鮮 役 水 軍 史 ( 東 京 : 海 と 空 社, 1942), pp. 90-92.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1 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러한 일본 수군의 움직임에 다시 한 번 쐐기를 박기 위하여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제3차 출전을 하였다. 그리하여 7월 8일에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73척으로 구성된 와키사카가 거느리는 일본 수군의 정예함대를 맞아 그 중 59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7월 9일에는 안골포 해전에서 구기와 가토가 거느리는 일본함대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지금까지 이순신의 1,2차 출전에 의한 여러 해전은 연안을 약탈하는 왜구들과 의 전투였었고 또한 소탕전의 성격을 띄고 있었으므로 적의 수군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지는 못했었다. 따라서 적의 함선활동도 계속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함대가 섬멸되므로서 그들은 수군전략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본 해전이 후 일본 수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5) 포구에 깊숙이 정박하여 조선 수군의 여하 한 공격에도 결코 포구밖으로 나오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함선을 보존하려는 수세작전으로 나 왔던 것이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전라좌수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제3차 출전이후 가덕도 서쪽 해 역에서 일본 수군의 활동은 완전히 멈추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본거지인 부산포에 대한 공격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드디어 8월 24일에는 전라우수군과 함께 제4차 출전을 하였다. 이때 출전한 전라좌 우수군의 함선 수는 전선(판옥선) 74척과 협선 92척으로 모두 166척이었 고, 원균이 거느리는 수척의 함선과 사량 앞바다에서 합세하였다. 6) 부산포로 진격하는 과정에 서 조선 수군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에서 적 함선과 조우하여 30척을 격 파하였고, 드디어 9월 1일에는 부산포에서 470여척의 일본 함선들을 공격하여 100여척을 격파 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부산포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일시적이나마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군의 본국으로의 퇴로를 위협하여 1593년 4월에 있었던 그들의 한성 철수 여 건을 조성하였다 7). 한편, 조선 수군으로부터 그들의 후방 병참기지를 공격받은 일본 수군들로서도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임진년 겨울이 지나기 전에 일본 수군들은 부산포로부터 웅포(진해)로 함선들을 전진 배치하여 해안의 포구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선 수군이 부산포로 진격하는 해로를 중간에서 차단하는 전략을 시행하였다. 결국 다음해인 1593년 2월말부터 3월초까지 조선 수군으 5) 參 謀 本 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文 書 ) ( 東 京 : 偕 行 社, 1924), pp. 55-56. 6) 제4차 출전시에 경상우수군의 척수는 알 수 없으나, 제3차 출전시에는 전선 7척이었다. 대체로 제4차 출전시의 조선수군 의 총척수는 170여척 안팍으로 추산된다. 7) 德 富 猪 一 郞, 近 世 日 本 國 民 史 豊 臣 氏 時 代 ( 戊 篇 ) ( 東 京 : 民 友 社, 1922), pp. 49-52, 300-308.
12 학예지 제19집 로부터 웅포에서 치열한 공격을 받긴 했으나, 조선 수군이 가덕도와 부산포로 다시 진격하는 것 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8). 그리고 1593년 6월에는 그들 함선을 거제도 북방 의 영등포, 장문포 등지로 대거 이동 배치함으로써 본국과의 후방 병참선을 보호하였다. 1593년부터 명과 일본 간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었고, 상당수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함으 로써 육상의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그해 6월부터 충청도 수군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삼도연합함대로 일본 수군과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 이순신은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견내량을 경계로 일본 수군과의 오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 리고 대치기간 중에도 제2차 당항포 해전과 장문포 해전에서 적선 32척 9) 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1596년 말에 강화협상은 결렬되었고, 일본은 다음해인 정유년(1597)에 14만여 명의 병력으 로 재침하였으며, 모든 병력이 7월까지는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해 2월에 조선 정부는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해임하고, 대신 원균을 기용하였다. 원균은 정유년 1월에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 加 藤 淸 正 )를 요격하기 위한 부산 출전을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선조로 부터 한참 불신을 받을 때,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쳐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10) 라는 무 모한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모함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통제사로 부임하자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을 수륙합동으로 공격하여 이를 무찔러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뒤라야 부산으 로 진격할 수 있다는 지극히 건전한 작전계획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11). 결국 원균 역시 부산 진격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는 체찰사와 도원수의 독촉을 받고서야 출전하게 되었다. 정유년 6월 18일 통제사 원균은 10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19일에 안골포와 가덕 도의 포구에서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여 다수의 적선을 나포하였으나 아군측도 장수 1명이 전 사하고 1명이 부상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12) 7월 4일에 조선 수군은 다시 한산도를 출항하여 부산으로 진격하였고, 8일에는 다대포에서 적선 10여척을 분멸하였으며, 9일에는 적선 600여 척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접전하였는데 여기서 아군 전선 12척을 상실하였다. 13) 이윽고 회군하 8) 李 忠 武 公 全 書, 卷 3, 狀 啓 2, 令 水 陸 諸 將 直 擣 熊 川 狀. 9) 李 忠 武 公 全 書, 卷 4, 狀 啓 3, 唐 項 浦 破 倭 兵 狀. 亂 中 日 記, 갑오년 9월 29일. 10) 宣 祖 實 錄, 30년 1월 22일. 11) 宣 祖 實 錄, 30년 4월 19일, 6월 11일. 12) 宣 祖 實 錄, 30년 6월 28일, 6월 29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3 는 과정에서 가덕도와 영등포에서 적의 육상 매복병에게 공격을 받아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 다. 14) 15일은 바람이 크게 불어 칠천량에 정박중이었는데, 이날 밤 수많은 적선이 내습하였고, 조선 수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가운데 16일 새벽에 아 함대는 크게 궤멸되었으며, 경상우 수사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겨우 탈출하였다. 15)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은 호남지방을 석권함은 물론이거니와 해상을 통해 서해 연안 을 위협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기용하였고, 그는 8월 18일에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0여척을 수습하였다. 이순신은 우수영까지 후퇴하며 어란포와 벽파진 에서 적과 접전을 벌이면서 명량을 결전의 장소로 택하였다. 9월 16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은 일본 수군 133척과 명량에서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 수군의 서해진출은 좌절되었고, 결국 정유재란을 아군이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이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함대세력을 증강하고 있는 가운데 무 술년(1598) 7월에 진린이 거느리는 명의 수군이 내원하였다. 이어서 조 명연합함대는 절이도 해전에서 적선 50여척 16) 을 격멸하고, 여수 이서 해역에서 일본 수군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9월 15일에는 고금도를 출항하여 순천의 왜교성에 있는 고니시군을 수륙으로 합공하였다. 왜교 해 전은 10월 9일까지 계속되었으나 아군의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적은 육지와 포구에서 응전하 였으므로 아군 주로 명군의 피해가 컸다. 왜교의 적들이 철수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 명연합함대는 11월 9일에 재차 출전하여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러자 왜교에 고립된 고니시군을 구출하기 위해 사천, 남해, 고성 의 일본군이 해상으로부터 지원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이것을 간파한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하 여 노량에서 이를 요격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11월 18일 야간에 왜교로부터 노량으로 이동한 조 명연합함대는 19일 새벽부터 300여척의 일본 함선과 접전을 벌여 200여척을 격파하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통제사 이순신, 13) 亂 中 日 記, 정유년(Ⅰ) 7월 14일, 16일. 宣 祖 實 錄, 30년 7월 14일. 14) 柳 成 龍, 懲 毖 錄 정유년 8월. 15) 宣 祖 實 錄, 30년 7월 22일. 趙 慶 男, 亂 中 雜 錄, 정유년 7월. 金 浣, 壬 辰 日 錄, 선조 30년. 16) 趙 慶 男, 亂 中 雜 錄, 정유년 7월 16일.
14 학예지 제19집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흥양 현감 고득장 등 10여명과 명 수군의 부총병 등자 룡이 전사하였다. 17) 그리고 접전하는 사이에 왜교성의 고니시군은 해상으로 탈출하여 부산을 경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노량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쟁도 종식되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기록으로 확인된 것만으로도 적 함선 570여척 이상을 격파하여 일본 수군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김으로 써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라는 이름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Ⅲ.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원인 1. 이순신의 지휘통솔력과 해전술 1) 출전에 앞서 예하 장수들과 협의 이순신은 함대의 출전에 앞서 예하 장수들과 작전을 협의하고 약속을 반복하였다. 그럼으로 써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모두 일사불란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가 해전마다 반드시 승리했던 이면에는 그의 훌륭한 지략과 더불어 이처럼 예하 장수들과 한마음으로 전투에 임했 다는 사실이 있었다. 임진년 첫 출전에 앞서 그는 예하 장수들을 좌수영 본영으로 불러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전에 대해 모두의 의견을 물었다. 출전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고 또 찬성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이러한 찬반토론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리고 결국에는 모두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았던 것이다. 18) 한산도 해전은 임란 중에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조선 수군의 빛나는 대첩이었다. 이순 신은 해전이 있기 하루 전날 당포에서 적 함대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 밤에 예하 장수들을 불러 작전을 협의하였다. 그는 부하들의 의견 가운데 좋은 점을 취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합하여 한산도 넓은 바다로 유인작전을 구상하여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19) 이처럼 출전에 앞 서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고, 미리 약속을 반복함으로써 17) 宣 祖 實 錄, 31년 11월 27일. 18) 李 芬, 行 錄, 李 忠 武 公 全 書 卷 9, 附 錄 1. 19) 이순신의 見 乃 梁 破 倭 兵 狀 에 更 飭 諸 將 이라 했고, 또 蛇 島 僉 使 金 浣 의 壬 辰 日 錄 에는 至 唐 浦 夜 戰 密 議 라 한 것으 로 미루어 보아, 이순신이 이날 밤에 부하 장수들과 유인작전을 협의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5 해전마다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법은 예하 장수들뿐만이 아니고 동료 수사들과의 합동작전에 서도 나타났다. 한산도 해전 때 조선 수군은 3개의 함대가 참여하였는데, 이순신이 거느리는 전라좌수군, 이억기가 거느리는 전라우수군 그리고 원균이 거느리는 경상우수군이었다. 이 당 시에는 조정도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통합지휘관 제도를 아직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3개의 함대가 통합지휘관도 없이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치루기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3개 함대는 통합지휘 관도 없이 대첩을 거두었으며, 그 중심에는 바로 이순신이 있었던 것이다. 2) 연합함대의 주둔지로서 최적의 수군 기지 선정 임진년 해전에서 여수와 해남에 각각 본영을 둔 전라좌 우수군은 멀리 경상도 해역으로 출 전하여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함대가 오고 가는 사이에 적이 다시 침범하면 이에 대응하 기가 쉽지 않을뿐만 아니라, 적이 퇴각할 때를 대비하여 부산 앞바다에서 결전을 치루기 위해 서는 그곳과 가까운 거리에 함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욱이 계사년(1593) 6월 에는 충청도 수군이 참전하여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이 한 곳에 모여서 작전을 수행하기 에 이르렀다. 따라서 연합함대를 위한 전진기지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으며, 이순신은 그해 7월에 드디어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였다. 한산도는 일본 수군이 부산에서 전라도로 향 하고자 할 때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20) 있는 섬으로 실로 해상의 요충지였다. 섬 내의 두을포는 이순신이 선정한 함대의 정박지로서 바깥바다로부터 잘 은폐되어 있고, 거친 풍랑으 로부터도 안전한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곳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여 견내량을 방어선으로 삼아 일본 수군과 대치하면서 결전을 준비하였다. 한산도에 설진한 후 조정에서는 뒤늦게야 수군에 통합지휘관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해 8월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실로 한산 도 수군진은 이순신이 언급한 것처럼 거제도 내 외양을 동시에 방어할 수 있는 곳으로서 21) 이곳을 선정한 그의 군사적 혜안이 잘 드러나고 있다. 정유년(1597) 10월에 설진한 목포 앞 보화도(고하도)나 완도군 고금도의 새로운 통제영도 그 위치를 보면 수로의 요충지이면서 함대 세력을 은폐시키기에 적합한 장소로서 연합함대 통 20) 李 忠 武 公 全 書, 卷 9, 附 錄 1, 行 錄, 倭 船 之 欲 犯 湖 南 者 必 有 是 路. 21) 趙 成 都 譯 註, 壬 辰 狀 草, 34번, 陳 倭 情 狀 (서울 : 同 元 社, 1972).
16 학예지 제19집 솔을 위한 이순신의 군사적 식견이 그 장소 선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 함대의 전투 진형 및 해상 결진법 도입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투 진형으로 구사했던 함대 진형은 두 종류다. 하나는 학익진(鶴翼陣)으 로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 그리고 제2차 당항포 해전 때 사용했다. 다른 하나는 장사진(長 蛇陣)인데 부산포 해전 때 사용했다. 학익진은 오늘날의 횡렬진을 의미하고, 장사진은 긴 뱀과 같은 형태의 진형인데 오늘날의 종렬진을 의미한다.22) 고대에 군대의 진형에는 5가지의 기본진 형이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오행진으로서 방진(方陣), 원진(圓陣), 곡진(曲陣), 직진(直陣), 예진 (銳陣)이었다.23) 그런데 조선 전기의 주요 병법서로서 문종대왕이 편찬한 오위진법 에는 오행 진 외에도 6가지의 변형 형태인 장사진, 학익진, 언월진(偃月陣), 어린진(魚鱗陣), 조운진(鳥雲 陣), 각월진(却月陣)이 등장한다. 그리고 6가지의 군사훈련 시나리오가 설정되어 있는데, 시나리 오에서 사용되었던 진형은 방진, 장사진, 학익진, 조운진, 각월진 뿐이며, 이것은 모두 육군을 조련하기 위한 진형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해전에 이들 진형을 도입했으며, 특히 여러 진형 가운데 간편하고 당시에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던 장사진과 학익진을 주로 이용하였다.24) <도 1> 우수영 전진도첩의 학익진도 <도 2> 연기신편 의 학익진도 22)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兵將說,陣法, 1983, p.207. 23)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武經七書, 1987, pp.389-391. 24) 김병륜은 학익진이 중종대에 이미 수전에 적용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학예지, 제15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8, p.146). 그러나 학익진이 중종대에 수전에 도입되었다면 이후 해전 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이지만 그와 관련된 근거는 볼 수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임란 초기 해전에서 병법에 능숙한 이순신이 학익진을 이용했어야 하는데, 그도 역시 첫 출전인 옥포 해전에서 학익진으로 분명히 해석되는 공격 진형을 대열을 지어 일제히 들어갔다(整列齊進) 라 표현하고, 또 2차 출전인 사천 해전에서도 여러 배들이 그 밑으로 일제히 돌진하였다(諸船齊進其下) 라며 학익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학익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3차 출전인 한산도 해전 때부터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전투를 치르면서 육전에서 주로 이용되었던 학익진 개념을 3차 출전 때야 비로소 해전에 도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7 여기서 학익진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자. 흔히들 이순신이 구사한 학익진으로 우수영 전진 도첩(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63호)에 나오는 <도 1>의 학익진도를 들고 있다. 우수영 전진도 첩은 1780년 이후에 작성된 문건으로, 그 안에는 전라우수사가 예하 수군을 조련하기 위해 사 용했던 10여개의 진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학익진이 조선 전기부터 군사훈련의 중요 진형 으로 활용되고 임란 해전에서 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형의 모습이 조선 후기에 수군 훈련의 교범으로 사용된 병학지남 이나 병학통 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학익진의 모습이 처음 으로 드러나는 것은 1660년경에 안명로( 安 命 老 )가 저술한 연기신편 이다. 25) 그 저서에 나타 나는 학익진의 모습은 <도 2>와 같은 횡열진이며, 이것은 문종의 오위진법 에 언급된 내용 곧 4통이 모두 횡대를 취하면 학익진의 형태를 이룬 것이다 26) 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횡열진인 학익진이 공격연습을 할 때에는 키를 벌린 형세로 전환되기도 한다. 27) 따라서 이순신이 해전에서 기본적으로 구사한 학익진은 <도 1>이 아니라 <도 2>와 같은 횡열 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8) 학익진은 모든 부대가 횡대를 취하는 진형이며 일자진( 一 字 陣 )으 로도 불렸다. 29) 이순신은 함대가 출전 중일 때 야간이 되면 해상에 정박하여 어김없이 결진( 結 陣 ) 하였는데, 이때 함대의 정박진형으로 <도 3>과 같은 방진을 이용하였다. 이순신의 기록에는 함대의 정박 진형으로 방진을 사용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위진법 에 오행진은 가르치기 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방진만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 보인다. 30) 실제로 오위진법 의 열병( 大 閱 儀 ) 항목에도 기본진형은 방진이다. 31) 이 말은 임란 이전에 조선에서는 오행진 중에서 방진이 주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함대의 정박 중에 결진했 던 진형이 다른 복잡한 진형보다도 간편했던 방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란 이후에 수군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사용되었던 병학지남 의 수조정식( 水 操 程 式 )에 기본진형이 방진으로 되 어있는 것은 32) 그러한 추정을 사실로 확인시켜 준다. 이순신이 해전을 수행할 때마다 예하 장 25) 柳 在 城, 安 命 老 의 생애와 演 機 新 編 에 대하여 演 機 新 編,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0. 26)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五 衛 連 陣, 四 統 皆 橫 列 則 一 部 之 成 鶴 翼 陣 也. 27) 상게서, 陣 法, 大 閱 儀 注, 勝 敗 之 形 二, 客 軍 還 聚 作 鶴 翼 陣 爲 箕 張 之 勢. 28) 김병륜은 임란 때 학익진을 횡렬진, 우수영 전진도첩 학익진(도 1), U자형 학익진의 3가지로 추정하였으나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학예지, 제15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8, pp.148-149). 29) 戚 繼 光, 紀 效 新 書 ( 四 庫 全 書 本 ), 卷 9, 出 征 起 程 在 途 行 營 篇, 爲 一 字 陣 別 部 應. 宣 祖 實 錄, 27년 6월 2일, 顯 宗 實 錄, 8년 윤4월 13일. 30)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五 衛 連 陣, 然 敎 習 實 難 故 今 權 從 簡 便 但 敎 以 方 陣 可 也. 31)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大 閱 儀 注, 五 衛 各 成 方 陣.
18 학예지 제19집 수들과 수없이 약속을 반복했던 것은 해전의 절차는 물론이거니와 해상에서 이러한 진형들을 형성하는 절차를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 3> 일위독진의 방진도 33) 4)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운용하여 적함대의 전열 와해 돌격선은 함대의 선두에서 본진의 공격에 앞서 적선에 돌진하여 근거리에서 함포공격을 퍼 부음으로써 적의 예봉과 사기를 꺾고 교란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승조원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야하며, 거북선은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추고 있 었다. 즉 격군과 사부들이 활동하는 공간의 방패가 두꺼운 판자로 되어 있어 적의 총탄이 관통 할 수 없고, 선체 상부가 판자로 덮여 있어 승조원을 완전히 보호하며, 개판 위에 철침을 꽂아 적의 등선이 불가하게 된 점 등이다. 거북선의 이러한 강력한 방어력은 해전에서 돌격선으로 활용되기에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14문의 함포를 보유하여 그 공격력도 역시 상당하였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이 신무기를 이용하여 임진년의 여러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던 것이다. 34) 거북선이 돌격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함대에서 그 배치 위치를 보면, 해상 기동전 때는 학익진의 양 익단에 배치된다. 35) 그리고 포구의 적선을 공격할 때는 장사진 즉 종열진의 선두 에 배치된다. 거북선의 전투 진행과정은 먼저 함대의 맨 선두에서 적 함대의 기함 혹은 대선에 32) 兵 學 指 南, 卷 5, 水 操 程 式, 下 方 營 條. 33)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p.205 진도에서 전재함. 34) 李 忠 武 公 全 書, 卷 9, 附 錄 1, 行 錄, 前 後 大 小 戰 以 此 常 勝 焉. 宣 祖 實 錄, 28년 10월 27일, 龜 船 之 制, 尤 爲 要 捷, 故 賊 之 所 憚 在 此. 이러한 기사로 보아 거북선이 해전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것은 확실하다. 35) 우수영 전진도첩 의 학익진도.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9 가까이 접근한다. 선수 용머리의 입으로 현자총통의 철환을 발사하여 갑판에 노출된 적의 인명 을 살상한다. 이어서 뱃머리를 돌려 현측에 배치된 천자 지자총통으로 대장군전과 장군전을 발사하여 적선의 장수가 위치한 층각을 공격하여 파괴한다. 무력화된 적선에 아군이 올라가 잔적을 섬멸한다. 적선을 나포하거나 불태운다. 대개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36) 5) 함대 출전 시 세 차례의 나발 운용 난중일기 1593년 2월 6일의 기사에 의하면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부터 출전하면서 4경 ( 四 更, 01:00-03:00시)에 첫 나발을 불고, 날이 밝을 무렵에 두 번째, 세 번째 나발을 불며 함대 를 출항시켰다고 한다. 37) 이순신이 함대를 이동하면서 이처럼 4경에 첫 나발을 불고, 이어서 세 번 나발을 불었던 절차는 전쟁기간 내내 지켜온 그의 전술원칙이었다. 38) 그러나 이순신의 기록과 조선 전기에 간행된 우리나라의 병서에는 세 차례 나발 소리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내용 이 보이지 않는다. 39) 부대를 움직일 때 나발을 세 번 부는 전술 신호는 척계광( 戚 繼 光 )이 1560년에 편찬한 기효 신서 에 처음 등장한다. 기효신서 에 의하면 첫 번째 나발을 불면 취사병은 밥을 짓고 나머지 병사들은 짐을 정리한다. 두 번째 나발을 불면 병사들은 밥을 먹는다. 세 번째 나발을 불면 병사들은 출발하여 진을 치고자하는 곳으로 가서 주장의 명령을 기다린다. 40) 척계광이 1567 년에 편찬한 연병실기( 練 兵 實 紀 ) 에도 이와 대동소이하게 나와 있다. 41) 이순신이 임란 때 사 용했던 세 차례의 나발신호 전술도 기효신서 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세 차례의 나발신호 전술을 통하여 함대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용함으로써 군사들 이 항상 다음 행동을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에 함대가 출전할 때 세 번 나발을 부는 신호 전술이 이순신으로부 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세 번 나발을 부는 신호 전술은 조선 후기의 병서 36) 李 忠 武 公 全 書, 卷 3, 狀 啓 2, 條 陳 水 陸 戰 事 狀. 37) 亂 中 日 記, 계사년 2월 6일, 四 更 初 吹 平 明 二 吹 三 吹 放 船 掛 帆. 38) 亂 中 日 記, 계사년 2월 9일, 병신년 1월 4일, 정유년 10월 29일. 李 忠 武 公 全 書, 卷 10, 附 錄 2, 諡 狀, 必 三 吹 打 耀 兵. 39) 世 宗 實 錄, 卷 133, 五 禮, 軍 禮 儀 式, 吹 角 令 과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形 名 條 의 나발의 운용에도 세 번 부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40) 戚 繼 光, 紀 效 新 書 ( 四 庫 全 書 本 ), 卷 2, 緊 要 操 敵 號 令 簡 明 條 款 篇. 41) 戚 繼 光, 練 兵 實 紀, 卷 3, 練 耳 目, 第 三 明 喇 叭 條.
20 학예지 제19집 인 병학지남 과 병학통 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42) 6) 철저한 탐적활동으로 적을 먼저 발견하고 행동 이순신 함대는 적에게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순신이 경계태세와 탐적활동을 철 저하게 유지했었던 때문이었다. 그가 함대의 경계태세 유지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는 그의 유물로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무술년(1598) 3월의 감결( 甘 結 )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 은 진을 치고 밤을 세울 적에 일체 큰 소리로 떠들지 말 것이며, 각 배에 숙직하는 사람은 뱃머리에 네 명, 배의 뒤쪽에 네 명으로 하되 두 사람씩 번갈아 자게 하고, 무시로 조사 적발하 여 위반하는 자에게는 무겁게 처벌한다 43) 라는 것이었다. 그는 출전 때는 물론이고 본영에 있을 때도 탐적활동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적의 동향을 미리 탐지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임진년 제3차 출전의 경우, 함대의 출전이 며칠만 지연되었 어도 그는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일본 함대를 여수 본영에서 맞이하는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 다. 그러나 본영에 있으면서도 그는 탐망군을 통해 적 함선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계속 탐지하 고 있었기 때문에, 가덕도, 거제도 부근에 적 함선의 활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곧바 로 출전하였다. 그가 이렇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출전하였기 때문에 와키사카 함대를 먼저 발 견하여 결국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 는 물론이거니와 명량 해전 전후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탐망군을 철저하게 운용하여 적 함대의 이동 상황을 미리 파악하며, 해안 인근의 육지에도 정찰병을 보내 적의 동태를 파악하 고 있음을 우리는 난중일기 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상주 전투에 앞서 순변사 이일이 적정을 살피기 위한 척후를 내보내지도 않아 적이 근접한 것도 모르고 있다가 패배했고, 칠천량 해전 때는 원균이 거느리는 조선 함대가 적선이 우리 함선에 불을 던질 때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함대가 괴멸되었다. 그들은 당시에 이름있는 장수들 이라 하겠으나 이순신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군사운용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국왕 선조까지도 원균이 척후병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44) 42) 兵 學 指 南, 卷 1, 旗 鼓 定 法, 明 喇 叭 號, 旗 鼓 總 訣 條. 御 定 兵 學 通, 卷 1, 水 操, 發 哨 船, 列 營, 升 船 廳 條. 43) 李 忠 武 公 全 書, 권15, 雜 著, 約 束 軍 中 辭. 44) 宣 祖 實 錄, 30년 7월 22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1 7) 야간에 협수로 통과하여 함대 행동 은폐 해전을 수행하면서 이순신은 적도 우리 함대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정탐활동 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하여 임진년에 제4차 출전할 때는 노량해협과 견내량을 일부러 야간에 통과함으로써 함대 행동을 적극적으로 은폐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45) 이순신은 말하길 적의 꾀는 참으로 측량할 길이 없다고 했다. 46) 이 말은 그가 자신의 함대 행동을 은폐하기 위하여 얼마나 신중하게 행동했는지를 역설적으로 알 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8) 신기전을 이용한 전술 신호와 암호 운용 이순신은 옥포 해전에 앞서 척후장( 斥 候 將 )으로부터 적선 발견 보고를 받았는데, 그 신호는 신기전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항포 해전에서도 그는 역시 신기전으로 적선 발견 보고를 접수한 바 있다. 47) 신기전은 종이통으로 화약을 포장하여 만든 것인데 불을 붙이면 화약이 분 출하는 힘으로 스스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주로 화차( 火 車 )에 장전하여 사용하였는데, 화차에 서는 100발을 거의 동시에 발사할 수도 있었다. 신기전은 조선 초기부터 북방지역에서 여진족 에 대한 방어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48) 세조 때부터는 신호용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 다. 49) 조선시대에 암호는 군호( 軍 號 )라 하였으며, 도성은 물론이거니와 군중( 軍 中 )에서도 운용되었 다. 군중의 군호 운영은 군사 기밀을 유지하고 적의 침투를 차단하는데 긴요하기 때문에 군호 위반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오위진법 의 진중 군법에 의하면, 진중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고 군호를 잊어버린 자는 목을 베게 되어 있었다. 대개 용병에 있어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공격작전을 진행할 때면 혼란한 사태를 대비하고 간첩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장( 主 將 )이 군호를 내려서 병사들이 서로 맞추어 보게 했는데, 그것은 작전의 성패가 기밀유 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위진법 의 군호에 대한 진중 군법은 육군은 물론이고 수군에게도 45) 李 忠 武 公 全 書, 卷 2, 狀 啓 1, 釜 山 破 倭 兵 狀. 46) 亂 中 日 記, 계사년 6월 16일. 47) 李 忠 武 公 全 書, 卷 2, 狀 啓 1, 玉 浦 破 倭 兵 狀, 唐 浦 破 倭 兵 狀. 48) 世 宗 實 錄, 30년 12월 6일. 49) 許 善 道, 朝 鮮 時 代 火 藥 兵 器 史 硏 究 (서울 : 一 潮 閣, 1994), p.115. 世 祖 實 錄, 1년 10월 20일.
22 학예지 제19집 그대로 적용되었다. 군호는 대개 암기하기 쉽도록 알기 쉬운 글자를 택하였다. 임란 때 전라좌 수사 이순신이 첫 출전하면서 발령한 군호는 용호( 龍 虎 ) 였으며, 복병에게는 그 중요성을 감안 하여 별도로 산수( 山 水 ) 로 정하였다. 50) 이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중요한 군사 운용의 시기마다 암호를 발령했음을 알 수 있다. 9) 유인작전과 위계책( 僞 計 策 )으로 원하는 장소에서 전투 수행 임진년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이어 승리하면서 일본 수군은 전투 중에 불리하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상륙하거나 혹은 포구에 깊숙이 정박하여 육지를 배경으로 우리 수군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일본 수군의 이러한 대항에 맞서 이순신은 유인작전으로 그들을 넓은 바다로 끌어 내어 섬멸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사천 해전에서는 해안 육지로부터 조총으로 대응해오는 일본 수군들을 바다로 유인하기 위하여 함대를 일시적으로 후퇴시키며, 결국은 포구의 적선들을 적 극적으로 공격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당항포 해전에서는 우리의 포위망 한 곳을 터서 적선이 넓은 바다로 나오도록 유인하여 이를 섬멸함과 동시에, 한 척의 적선을 살려두어 육지로 상륙 한 적들이 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는 것을 기다려 역시 이를 섬멸하였다. 한산도 해전에서는 치밀한 유인전술로 일본 함대를 견내량의 좁은 수로로부터 한산도 넓은 바다까지 끌어내어 이 를 섬멸하였다. 특히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의 유인전술은 마지막 단계에 적전에서 180도 회 전이라는 위험하고도 어려운 기동을 성공시켜 결국은 그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전술로 적 을 섬멸할 수 있었다. 10) 전과 확대를 위한 함대 병사의 상륙 금지 원칙 준수 이순신은 해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육지로 달아난 적을 추격하기 위하여 함대 병사들을 상륙 시키지 않았다. 별도의 해병을 탑재하지 않은 함대가 그 수군 병력을 육상 전투에 투입할 때, 그 함대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며, 함대의 가치도 상실하게 된다. 즉 각개 함정 의 전투력이 극히 약화되며 기동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임진년의 여러 해전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한산도 해전에서 공훈을 탐내어 패전하여 한산도에 상륙한 수백명 적군들의 수급을 획득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풀어 상륙시키지 않았던 것은 그 좋은 예라 하겠 50) 亂 中 日 記, 임진년 5월 2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3 다. 그는 함대 지휘관으로서 함대전투력 보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적의 함선을 격파하 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자 지상의 과제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침략 초기에 조선 함대를 색출 격멸시켜야 할 일본 수군들이 상륙하여 육전에 참여했던 것과 좋은 대조가 된다. 2. 수군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위 이순신의 난중일기 와 장계에 의하면, 임란 당시 조선의 군선은 판옥선, 거북선, 협선, 포작 선( 鮑 作 船 )이 있었다. 이들 군선 중 임란기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행사했던 선박은 판옥선과 거북선이었다. 판옥선은 3층으로 구조된 함선이다. 조선 초기의 맹선이 하나의 갑판을 갖는 평선( 平 船 )인데 반하여, 판옥선은 상장(판옥)을 설치하여 갑판을 이중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투원과 비전 투원을 분리하여놓고 비전투원인 격군(노군)을 상장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맹선 에서는 전투원인 수군 병사와 노젓는 격군이 같은 갑판 위에서 활동하였는데, 판옥선에서는 판옥 안에 격군이 자리잡고 이들은 적에게 노출됨이 없이 노역에만 전념하며, 병사들은 상갑판 위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선체가 커 전투원들이 높은 곳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었 고, 적이 접근해서 배 안에 뛰어들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판옥선의 이러한 구조 특징 때문에 일본군의 장기인 등선백병전( 登 船 白 兵 戰 ) 51) 을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은 실로 이 판옥선의 우수한 전투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거북선은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창제한 돌격선이 다. 거북선의 구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판옥선 위에 개판을 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개판 위에는 쇠못을 꽂아서 적의 등선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격군이나 방포장(화포장), 사부( 射 夫 ) 등 승조원들이 모두 선체 내부의 보호된 곳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당시 로서는 대단히 많은 14문의 천 지 현 황자총통을 탑재하여 화력이 막강하였다. 52) 이와같은 거북선의 장점은 함대의 선두에서 돌격작전으로 적 함대의 예봉을 꺾는데 적합하였다. 임진년 51) 해전에서 적선에 서로 올라타서 벌이는 전투를 boarding tactics라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접현전 (오붕근), 근접백병전 (장학근), 등선육박전 (이민웅), 등선백병전 (제장명) 등으로 부르고 있다. 육박전은 몸으로 부딪혀 싸운다는 의미이고, 백병전은 칼 창 등 백병으로 육박전을 치르는 것을 말하므로 필자는 등선백병전 을 취한다. 52) 趙 成 都, 거북선에 對 한 小 考, 海 軍 大 學 論 集 제6권, 제1호, 1964, p.87.
24 학예지 제19집 해전에서 거북선은 3척이 활약했으며, 을미년(1595)에는 5척으로 증강되었다. 한편, 임란 해전에서 활약했던 일본 군선은 아다케( 安 宅 ), 세키부네( 關 船 ), 고바야( 小 早 ) 세 종류가 있었다. 아다케는 그 크기를 노의 숫자로 말한다면 1-2명이 젓는 노가 적게는 40개에서 많게는 100개가 있었다. 세키부네는 빠른 속력을 얻기 위하여 뾰족한 선수와 날렵한 선형으로 되어 있는 군선이며, 40-80개의 노를 장비하였다. 고바야는 대체로 노가 14-30개인 작은 군선 으로 전투보다는 주로 척후나 연락을 위해 사용된 군선이었다. 53) 이순신은 일본 군선을 대선, 중선, 소선으로 분류하였는데, 소선은 고바야를 중선은 세키부 네를 가리킨 것이 확실하나, 대선은 모두 아다케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대선 가운데서도 특별히 층루선, 층각대선, 층각선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아다케로 추정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대선 가운데는 세키부네도 포함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세키부네 가운데 노수가 많은 것은 아다케와 규모가 비슷했다. 그러므로 임란 해전에서 조선 함선과 대적하는데 주력선으로 활약한 것은 아다케와 세키부네였다. 판옥선과 아다케의 전투 력을 비교해보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임진년 해전에서 조 일 주력 함선의 전투력 비교 54) 구분 판옥선 아다케 선체 두꺼운 판자로 된 평저형 선체로 선회가 자유로우며 아다케보다 크다. 얇은 판자로 된 첨저형 선체로 속력은 빠르나 판옥선에 비해 선회반경이 크다. 승조원 125-130여명 90여명 속력 3노트 3노트 이상 주 병기 천자,지자,현자,승자 총통 (장군전,피령전,철환 발사), 활(장 편전 발사) 조총, 활 보조 병기 창, 칼, 질려포, 대발화 창, 칼 돛 운용 순풍은 물론 역풍도 이용 순풍만 이용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판옥선의 전투력은 아다케에 비해 속력만 열세일 뿐 다른 요소들 은 우세하다. 판옥선은 선저가 평평하고 속력이 약간 느린 대신 제자리에서 선회할 수 있는 기동성능이 아다케에 앞선다. 또한 두꺼운 판자를 쓰기 때문에 방어력이 좋으며, 승조원 수도 53) 金 在 謹, 壬 辰 倭 亂 中 朝 日 明 軍 船 의 特 性,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海 軍 軍 史 硏 究 室, 1993. 54) 鄭 鎭 述, 閑 山 島 海 戰 硏 究,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海 軍 軍 史 硏 究 室, 1993, pp.191-192.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5 아다케보다 많아 전투력이 강했다. 다만 판옥선의 속력이 아다케에 뒤지고 있으나 임진년의 해전에서는 이 점이 큰 결함사항으로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피아 함대가 조우하여 접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속력보다는 오히려 선회기동성이 더 중요시되며, 또한 적을 추격하는 경우가 아니면 느린 속력이 치명적인 결함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옥선의 경우 비록 속력 은 빠르지 않았지만, 돛의 장점이 있어 역풍에도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역풍에는 전혀 돛을 이용할 수 없는 일본선의 단점과 서로 상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임진년 해전에서 속력의 결함이 결코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아다케는 첨저형 선체와 가벼운 판자 구 조로서 속력은 빠르지만 대신 선회반경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회전이 판옥선 보다 신속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돛이 비효율적이어서 순풍이 아니면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록 속력이 빠르다 하지만 원거리 항해 시에는 노만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반 드시 순풍을 기다려야 하는 취약점이 있었다. 특히 판옥선은 일본 함선에 없는 55) 화포를 장착하여 화력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하였 다. 일본 함선은 주병기가 조총인데, 그 사정거리는 100-200m였으나 실전에서는 50-60m 내외 에서 운용되었고, 56) 또 3발 이상 계속 발사할 수도 없었으므로 57) 해전에서는 화살과 거의 대 등한 위력밖에 보이지 못했다. 반면에 우리 함포의 발사거리는 200보(약 240미터, 1보=주척 6자=약 1.2미터)였고, 58) 궁노( 弓 弩 )의 발사거리도 역시 200보에 이르렀다. 59) 결국 일본 함선들 의 최선의 공격술은 근접 계류하여 검술로서 선체를 점령하는 방법인데, 이것마저도 판옥선의 선체가 높기 때문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Ⅳ.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역사적 의의 1. 일본의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킴 일본은 조선 침공을 준비하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그렇기 55) 宣 祖 實 錄, 29년 12월 21일. 56) 參 謀 本 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附 記 ) ( 東 京 : 偕 行 社, 1924), p.7. 57) 宣 祖 實 錄, 26년 1월 7일. 58) 兵 學 指 南, 卷 5, 水 操 程 式, 看 賊 船 先 用 火 器 第 十 一. 59) 肅 宗 實 錄, 41년 3월 3일.
26 학예지 제19집 때문에 초기 침공작전에서 그들 수군이 육전에 참가하는 상식밖의 일이 진행되었고, 따라서 처음에는 수륙병진작전을 구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연패당 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임진년 6월에는 서울에 있는 전선사령부에서 육전에 참가하고 있던 와 키사카 야스하루( 脇 坂 安 治 ) 등의 수군들을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들을 격파 하고 해로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식량과 군사들을 서해로 북상시켜 당시 평양을 점령하고 있 던 고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의 북진을 지원하는 수륙병진작전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60) 평양 을 점령한 직후 고니시가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내 일본의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해로부터 올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대왕의 행차는 이로부터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61) 라 했던 데서 그들의 수륙병진작전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한산도, 안골포 해전 등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승리함으로써 그들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절되었다. 더욱이 임진년 9월에는 조선 수군에게 부산포까지 공격을 당하게 되어, 서울에 있는 전선사령부에서는 본국으로의 퇴로와 병참선으로서 부산 교두보에 대한 위기 의식이 팽배하였을 것이다. 해전의 패배로 초래된 이러 한 위기 상황은 일본군이 그들의 조선 점령 전략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평양전투의 패배 후 강화협상을 빌미로 서울 점령도 포기하고 동남 해안 지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2) 정유재란 때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우리 수군의 견내량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 수군이 승승장구하여 그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전라도 남해안을 석권하 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수륙병진작전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여 호남지방을 유린할 수 있 었다. 이때 만일 일본 수군이 남해를 지나 서해로 북상하여 계속 진격할 수 있었다면 순식간에 한강은 물론이거니와 대동강과 압록강 하구까지 도달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이 조성되었다면 조선이나 명에게는 큰 재앙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는 일본군이 출현했다는 소문만 있어도 인근의 민 관 기능이 마비되는 실정이었으므로 조선 서해안에 일본 수군이 횡행한다면 중국군의 내원도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 60) 국립진주박물관, 프로이스의 일본사 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3, pp.219-220. 朴 哲, 세스뻬데스-한국 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p.291. 李 重 煥 著, 李 翼 成 譯, 擇 里 志 (서울 : 을유문화사, 2000), pp.79-80. 61) 柳 成 龍 著, 金 鍾 權 譯 註, 新 完 譯 懲 毖 錄 (서울 : 明 文 堂, 1987), p.129. 62) 유성룡은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한 것은 심유경이 고니시에게 명군이 서해로부터 충청도에 들어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려한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이라 했다( 金 鍾 權 譯 註, 상게서, p.260). 그러나 연이은 해전의 패배가 더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朴 哲, 세스뻬데스-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pp.296-297).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7 이다. 다행히 명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승리함으로써 그러한 위기 상황은 도래하지 않 았고, 명군의 지원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되어 결국은 일본군을 다시 동남 해안지역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실로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일본의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켰다고 보 지 않을 수 없다. 임란은 일본군이 침략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승리한 전 쟁이었다. 63) 그렇더라도 우리의 전 국토가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무려 5만명 이상이 64) 적에게 잡혀간 실상으로 볼 때,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하겠 다. 특히 육전에서는 몇몇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전연패하였으며, 결국은 침략군 의 주요 장수와 다수의 군사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것은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차제에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빛나는 활약과 완승에 가까운 위업은 임란 전쟁을 우리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의미있는 쾌거라 하겠다. 2. 수군 명장의 역사적 계보가 이어짐 임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등장과 그의 위대한 활약은 우리 민족이 면면히 이어 온 수군 명장 의 계보가 이어졌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일찍이 삼국시대에도 수군장으로 활약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확연히 다가오는 첫 번째 수군 명장은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아닌가 한다.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은 활발하게 해양으로 진출하여 수군장으로서 장보고라는 큰 인물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장보고 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동북아시아의 국제 교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결국 해상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옴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찬란한 해양의 시대를 열 었던 인물이다. 그러기에 그를 일컬어 해상왕 혹은 해양상업제국(maritime commercial empire)'의 무역왕(merchant prince) 이라 하였다. 65) 장보고에 이은 수군 명장으로 우리는 주저없이 고려 태조 왕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왕건은 태봉의 해군 대장군 으로서 궁예의 명을 받아 여러 차례에 걸쳐 함대를 거느리고 송악을 출발 하여 멀리 나주까지 원정하였다. 태봉은 나주를 두고 오랫동안 후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 63) 許 善 道, 壬 辰 倭 亂 의 再 照 明, 第 二 回 國 際 海 洋 力 심포지움 發 表 文 集, 대한민국해군 해군해양연구소, 1991, pp.19-26. 64) 朴 哲, 세스뻬데스-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p.259. 65) Edwin O. Reischauer, ENNIN'S Travels in Tang China, New York : The Ronald Press Co., 1955, pp.287-294.
28 학예지 제19집 는데, 왕건이 거느리는 태봉 수군이 덕진포 해전에서 견훤의 후백제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결국 태봉이 나주를 장악하게 되었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태봉은 후백제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하 였고, 예성항에서 서남해를 거쳐 강주(진주)와 경주까지 이르는 해상무역로를 확보함으로써 태 봉의 경제적 기반은 더욱 충실해질 수 있었다. 나주 원정과 덕진포 해전은 왕건이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론하기 어렵다. 왕건은 궁예 정권의 나주 공략을 주도하여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성공은 그의 뛰어난 지휘통솔력, 함대 운용 술, 그리고 해전술의 능력 덕분이라 할 것이다. 특히 장거리 해상 원정이 가장 어렵고도 실패할 확률이 높은 공격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백제의 정예수군을 격멸하였던 것은 왕건이 비 범한 수군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장보고 이후 우리 민족의 해상활약의 전통을 계승한 위대한 수군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66) 고려는 11세기에 동여진 해적으로부터의 도전을 바다에서 슬기롭게 물리쳤으나 14세기에 도 전해 온 왜구에 크게 시달린 끝에 결국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다. 왜구가 침입해 온 초기에는 육지에서 이를 방어하기에 바빴으나 결국은 수군을 건설하여 바다에서 격퇴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수군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임란 해전에서 이순신이라는 수군 명장의 등장 은 한국 해양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이러한 수군의 전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러 한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해양으로부터의 도전 때도 반드시 새로운 명장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3. 왜구의 종식과 해상의 평화 도래 조선 왕조의 초기 임금들은 수군제도를 확립하고 군선을 비롯한 수군 군비를 강화하여 강경 책과 유화책을 동시에 써서 드디어 세종대에는 왜구를 근절하게 되었다. 그후 16세기 중종 명 종대에 이르러서 왜구가 다시 본격적으로 준동하였고, 허약해진 조선의 해방( 海 防 ) 체제는 이 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였다. 1592년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왜구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 임란 전 쟁은 명의 지원과 우리 의병들의 활약 그리고 조선 수군의 대응으로 결국 일본군을 격퇴시켰 다. 임란 이후 왜구는 완전히 종식되었고 해상의 평화가 도래하였다. 왜구가 종식된 것은 도요 66) 鄭 鎭 述, 한국해양사(고대편), 해군사관학교, 2009, pp.306-321.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9 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에 해적정지령( 海 賊 停 止 令 )을 내리고, 또 1589년에 바한( 八 幡 )을 금지 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67) 그렇지만 왜구의 종식에는 일본의 이러한 국내 사정뿐만 아니라 임 란 해전에서 그들의 철저한 패배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 수군이 비록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을 한번 격패시키긴 했어도, 7년 동안 이순신 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게는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무려 570여척 이상의 엄청난 함선이 격파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실로 임란 이후 왜구 가 멈춘 것은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의 한 전사가는 임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승리는 이후 300년 동안 일본의 전투함대 작전을 종식시켰다고 했던 것이다. 68) 4.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이 해전술의 기본화 군함에 포를 탑재한 가장 이른 시기는 1358년으로 영국 왕실 문헌에 나타난다. 그후 1488년 에 영국은 국왕 헨리 7세의 명령으로 2척의 대형 군함을 건조하여 각각 180문의 포를 탑재하였 는데, 69) 이 당시의 함포는 적에게 폭발에 의한 피해를 주는 대포라기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소 총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었다. 70) 유럽에서의 함포는 15세기까지도 갤리(galley)선의 선수와 선 미에만 탑재되었다. 71) 선체 측면에 포문을 만들어 대포를 발사하는 혁명적 방식은 영국이 1514년에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이 범선은 갈레온(galleon)선으로 발전되었다. 72) 현측포를 탑재한 갈레온선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함대 전투진형을 종열진(line-ahead formation)으로 형 성하여 현측 일제사격으로 공격하는 해전술을 탄생시켰고, 1545년에는 현측포에 의한 함포사 격이 영국과 프랑스 간의 쇼어햄(Shoreham) 해전에서 처음으로 발생하였다. 73) 이후 이 현측 일제사격 전술은 갤리선의 등선백병전( 登 船 白 兵 戰, boarding tactics)을 서서히 밀어내고 범선 67) 윤성익, 명대 왜구의 연구 (서울 : 경인문화사, 2007), pp.184-187. 68) G. A.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New York : E. P. Dutton & Co., 1921), p.65, 69) 有 馬 成 甫, 火 砲 の 起 原 とその 傳 流 ( 東 京 : 吉 川 弘 文 館, 1962), pp.459-460. 70) 金 州 植, 世 界 史 와 海 洋 活 動 의 關 係 ( 上 )- 古 代 에서 英 佛 戰 爭 까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1992, p.261. 71) Trevor N. Dupuy, The Evolution of Weapons and Warfare (Indianapolis/New York : The Bobbs-Merrill Company, Inc. 1980), p.117.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전쟁의 역사Ⅰ (서울 : 책세상 출판사, 1996), p.342. 72) 프랑코 지오게티, 에린 아브란슨 엮음, 안진이 옮김, 범선의 역사 (서울 : 위즈덤하우스, 2007), p.54. 73) S. W. Roskill 原 著, 李 允 熙 權 復 寅 共 譯, 海 洋 戰 略 (서울 : 淵 鏡 文 化 社, 1979), pp.23-38.
30 학예지 제19집 시대 내내 유럽에서 해전술의 기본이 되었다. 유럽에서 이와 같은 해전술의 발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해전술의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1380년에 진포 해전에서 화포를 탑재한 고려 함선이 정박 중인 왜구 함선을 공격하여 이를 격멸하였고, 1383년에 관음포 해전에서는 47척의 고려 함대가 함포를 이용한 해상기동전투로 120척으로 구성된 막강한 왜구 함대를 섬멸하였다. 74) 그러나 이무렵의 해전은 교범화된 전투 진형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해전술은 집단적으로 무턱대 고 싸우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10년의 삼포왜란이나 1555년 을묘왜변 등 여러 사 변에서도 조선 수군이 전투 진형을 해전에서 구사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 까지도 수군의 체계적인 전투 진형에 의한 해전술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75)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체계적인 해전술을 구사한 것은 임란 때 이순신에 의해서였다. 잘 알 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 학익진(횡열진)과 장사진(종열진) 그리고 방진(사각진)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범선시대에 유럽의 해군이 갈레온의 현측포를 이용한 일제사격을 위하여 종열진을 주로 사용했다면, 이순신은 전투에서 횡열진(학익진)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가 횡열 진을 자주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 주전투함인 판옥선은 일본 함선에 비해 선수가 매우 넓어 선수에 전투원과 화력을 적선보다 상대적으로 다수 배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므 로, 선수끼리 먼저 서로 마주치게 되는 당시의 해전에서 전투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는데 매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 조선 말기까지 판옥선의 넓은 선수가 좁혀지지 않고 계속 이 어진 것은 우리나라 선박의 전통성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해전에서 그와 같은 유리한 점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전술의 발전적 측면에서 볼 때, 횡열진보다는 종열진 에 의한 현측 일제사격술이 화력의 집중면에서 유리한 것은 분명하다. 어떻든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술은 조선 후기의 수군 훈련 교범인 병학지남 이나 병학통 에 계속 이어졌다. 5. 장갑선이 해전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장갑선( 裝 甲 船 ) 은 철갑선 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나 철갑선이 선체 를 쇠로 덧씌운 의미를 갖는 반면에 장갑선은 쇠 혹은 나무와 같은 딱딱한 껍데기로 덮어 씌웠 74) 강성문, 여말 선초 전술변화와 외교정책,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제2권 제1호,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 1995, pp.126-130. 75) 단순히 함선들을 좌우로 나누어 싸웠다는 기사가 보일뿐이다( 중종실록, 18년 6월 1일, 20년 9월 22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31 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므로 76) 두 용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임란기 거북선이 철갑선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 하겠으나, 드러난 사료 들을 살펴보건대 철갑선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거북선을 직접 고안하고 만든 이순신이 등에 쇠못을 꽂았다( 背 植 鐵 尖 ) 했고, 77) 거북선을 직접 보았던 그의 조카 이분( 李 芬 )도 위를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칼과 송곳을 꽂았다( 上 覆 以 板 揷 以 刀 錐 ) 했다. 78) 이러한 1차 사료들에 나타난 엄연한 사실들을 무시하고, 일본측 문헌인 고려선전기( 高 麗 船 戰 記 ) 에 철로 요해( 要 害 )되어 있었다는 내용이나 조선 후기의 몇몇 자료를 가지고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판단하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사실 진정한 철갑선은 19세기 중엽에 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하였다. 우리가 세계사적인 시각으로 군함의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16세기의 동양에서 목선에 약간의 쇠붙이를 가미한 것을 철갑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순신의 거북선이 당시의 일반 전선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장갑선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당시에 모든 승조원을 쇠못으로 덮인 판자로 방호된 내부에서 활동하게 하는 전선을 창안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해전사적 측면에서 16세기는 중요한 변화 의 시대였다. 서양에서는 갤리(galley : 노선)-갈레아스(galleass : 범노선)-갈레온(galleon : 범 선)으로 함선이 변화되고, 해전술도 등선백병전에서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로 변화되고 있었 다. 그리고 동양에서도 임란 해전에서 보는바와 같이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으로 변화되고 있었 다. 그런데 함포기동전에서 돌격선으로 적함대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은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승조원을 쇠못을 꽂은 판자로 방호된 선체 내부에 안전하게 보 호하여 함대의 선두에서 겁 없이 적함대로 돌격하여 함포를 발사하는 거북선의 출현은 획기적 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시기에 서양에서는 거북선과 같은 장갑선의 출현이 없었다는 것도 의미있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원균이 지휘했던 칠천량 해전에서 한번 패전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하였다. 승리한 해전은 모두 이순신이 그 지휘관이었다. 동일한 무기와 군대를 거느 76) 申 采 浩, 朝 鮮 史, 第 1 編, 總 論, 거북선은 목판으로 꾸미고, 철판으로 함이 아닌듯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鼻 祖 라 함은 가하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불가할 것이다. 77) 李 忠 武 公 全 書, 卷 2, 狀 啓 1, 唐 浦 破 倭 兵 狀. 78) 상게서, 권9, 부록1, 行 錄.
32 학예지 제19집 리고 치른 해전에서 지휘관의 차이가 승패를 결정지었다는 것은 지휘통솔의 중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원인을 분석한 결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통솔력과 해전술 그리고 수군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위를 들 수 있다. 먼저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통솔력과 해전술이다. 그는 출전에 앞서 부하 장수들과 협의하여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모두가 한마음으로 싸우도록 여건을 조성하였고, 연합함대의 주둔지로서 한산도나 고금도 등과 같은 최적의 수군 기지를 선정하였으며, 육전의 훈련교범에만 나와 있던 학익진과 장사진 그리고 방진을 처음으로 함대의 전투 진형에 도입하였다. 또한 거북선이라는 신무기를 개발하여 돌격선으로 운용함으로써 해전 초기에 적함대의 전열을 와해시켜 승리하였 고, 함대가 출전 때는 세 차례의 나발을 운용하여 군사들에게 행동의 여유를 주고 다가오는 사태에 미리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철저한 탐적활동으로 적을 먼저 발견함으로써 적에게 기습 을 허용하지 않고 필승의 대응책을 미리 강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작전에 임해서는 야간에 협수로를 통과하여 함대의 행동을 은폐하며, 척후선이 적선 발견을 신기전으로 보고하 게 하고, 암호를 운용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으며, 유인작전을 구사하여 아군이 유리한 장소와 시간에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승리한 후에는 전과확대를 위해 우리 수군을 상륙시켜 적의 수급을 획득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을 회피하는 원칙을 준수하였다. 다음으로는 우리의 수군 무기체계가 상대적으로 우세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천 지 현 황자 총통과 같은 대포를 탑재한 우리의 판옥선과 거북선이 대포가 없이 조총만으로 무장 한 일본 함선을 화력과 선체 크기에서 압도함으로써 일본 수군의 장기인 등선백병전을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의의는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의한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켰고, 명장 이순신의 등장으로 장보고 왕건에 이어지는 수군 명장의 역사적 계보가 이 어지게 되었으며, 왜구를 종식시키고 이후 3세기 동안 해상의 평화가 도래하게 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순신이 구사한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은 조선 후기에도 해전술의 기본이 되었고, 거북 선과 같은 장갑선이 해전사의 무대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끝.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3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서울 신청사 발굴 유물을 중심으로 - 박 재 광** 목 차 1. 머리말 2.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화기와 운용 3. 서울 신청사 발굴 유물의 성격 1) 佛 狼 機 子 砲 2) 勝 字 銃 筒 3) 箭 鏃 및 鐵 羽 4) 盈 字 銃 筒 5) 철환 4. 맺는말 1. 머리말 1)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의 보유와 끊임없는 군사훈련이 나라를 지키는 要 諦 임을 인식하고 무기 개발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에서는 병력의 규모라든가 전략과 전술, 충분한 물자의 조달, 그리고 훈련된 병사와 장 수의 통솔력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 개개인에 게 지급되어야 할 무기였다. 무기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얼마나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개발했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했다. 역대 전쟁에서 무기가 전쟁의 상황을 결정했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유 에서 우수한 무기의 보유와 뛰어난 성능은 한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구경하고자 원했던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 *이 글은 이전의 작성된 본인의 논문을 토대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보완하여 재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
34 학예지 제19집 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관람하는 觀 射 요, 둘째는 화약을 이용하여 형형색색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觀 火 이고, 셋째는 금수강산의 대명사인 금강산 관광이다. 이 세 가지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천하제일의 명기이자 자랑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들 관 람을 국가 안보와 관련해 엄격히 제한했고, 외국 사신들은 이들을 구경하고자 했으며, 한 가지 구경만으로도 외국 사신들은 최고급 대우로 여겼던 것이다. 이 중에서 관사와 관화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무기이자 호국병기로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에 대한 시범을 통해서 조선의 국방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특히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 명 일 삼국이 화약병기를 주요 전투무기로 삼아 벌였던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조총으로 무장된 15만여 명의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서울을 함락 당하고, 평안 함경도까지도 유린당하는 등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전쟁 이전까지 조 명 일 삼국 가운데 있어서 무기체계의 발달에 있어서는 명나라에 버금가는 상황이라고 자처해 오던 조선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로소 무기 후진국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전투 에서 연속적으로 패함으로써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勝 字 銃 筒 別 勝 字 銃 筒 大 勝 字 銃 筒 中 勝 字 銃 筒 小 勝 字 銃 筒 등의 소화기와 天 字 銃 筒 地 字 銃 筒 玄 字 銃 筒 黃 字 銃 筒 別 黃 字 銃 筒 등의 화포를 장비하고 있었 다. 그러나 소화기인 총통들은 일본의 화기인 鳥 銃 과 화약병기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 성능 면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조선의 화기가 화약선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식인 指 火 式 화약병기인데 반하여 조총은 발사장치에 의해 불을 붙이는 방식의 火 繩 式 화약병기이기 때문 에 성능과 운용에 있어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측의 관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승군의 활약, 수군의 해상권 장악, 명의 원병에 따른 합동 반격작전을 통해서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다. 아울러 조선 은 육전에서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조총의 제조 기술을 도입하고, 이에 상응하는 대응 전술로 맞서는 것이 최상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선 다급한 戰 局 타개에 진력하여야 했기 때문에 바로 대책이 마련되지는 못하였고 상당기간 동안 종래의 화기를 수급 활용하면서 저항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11월, 서울시 신청사 건물 부지(중구 태평로1가 31)에서 불랑기를 비롯한 보물급으 로 평가되는 임진왜란 이전 각종 무기류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각종 무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5 기류를 제작하던 관청인 軍 器 寺 관련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불랑기 자포 1점과 승자총통 다수, 장군전 촉 날개, 철환(둥근 쇳덩 이), 철촉 등 다량의 철제 화약무기이고, 특히 불랑기자포는 현재 보물 제861호로 지정돼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인데다 출토지가 확실해 최근에 보물 861-2호로 지정되었다. 본고에는 이들 발굴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이 사용했던 유물과 비교 분석하여 발굴 유물의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조선 중기의 무기체계의 실상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2.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화기와 운용 당시 조선군은 육지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밀려 연전연패를 거듭해 전국토의 70%가 일본군 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 었던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무기체계 상의 우위라 할 수 있다. 이는 화기의 보유량보다도 화 기의 성능과 전술의 차이가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군의 화기 보유에 대해서는 몇몇 문헌에 등장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신부의 기록인 선교사들의 이야기 (1601, 루이스 데 구스만 著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니시는 20,000명의 전투원과 함께 총 643척의 크고 작은 배에 편승하여 쓰시마섬을 출발 하였다. 특히 부산성이라고 불리는 요새는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첫 관문인 관계로 그곳에는 600여 명의 병사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마을에서 모은 평민들이 있었다. 연도에는 모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끝이 뾰족한 쇠들을 뿌려 놓았으며, 요새 내부에는 구리로 만든 작은 화포들이 2,000개나 배치되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작은 포환을 발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크기가 두 뼘 정도 되는 화살촉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1) 이 기록을 통해서 부산진성전투에서 참여한 조선군은 활과 화살, 그리고 개머리판이 없는 1) 박철, 1999, 서구인이 본 임진왜란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진주박물관, pp.81~82에서 재인용.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도 당시 부산진성에는 천 개 이상의 소형 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역, 1977, フロイス 日 本 史 2, 中 央 公 論 社, p.221)
36 학예지 제19집 소형 총통 2,000개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총통은 무쇠 탄환과 일부는 화살을 발사하였다. 2) 이어 벌어졌던 동래성에도 6문의 대포와 수많은 화전 화약통 그 밖의 많은 물 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는 기록이 있다. 3) 또 서애문집 에는 임란 발발 직전 중앙의 군기시에 天 字 地 字 玄 字 黃 字 銃 筒 과 각종 소형화 포, 勝 字 銃 筒 등이 비치되어 있음을 기술하고 있고, 4) 김성일의 鶴 峰 集 에 기술된 진주성 전투 에 대한 書 狀 에도, 김시민이 진주성전투 이전에 염초 510근을 비롯하여 조총, 각종 병기 등을 준비하였고, 실제 전투에서 玄 字 銃 筒, 飛 擊 震 天 雷, 蒺 藜 砲, 大 岐 箭, 火 鐵, 菱 鐵, 弓 弩, 大 弓 등 을 사용했다고 나와 있다. 5) 이렇듯 조선 중앙의 군기시를 비롯하여 지방의 병영에는 상당수의 화기가 비치되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중앙의 군기시에 비축되어 있던 여러 가지 화기와 27,000여 근의 화약은 백성들의 焚 燒 로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고, 지방의 경우에 도 지방관이 적을 만나 본영을 굳게 지키면서 항전한 경우가 적었던 관계로 화기가 제대로 쓰 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전라도 좌수영 등 수군과 왜군의 공격이 미치지 못했던 청천 강 이북의 안주, 영변, 의주 등지에서는 화차를 비롯하여 각종 화기가 비축되어 있어 6) 이를 적극 활용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화약병기는 勝 字 銃 筒 次 勝 字 銃 筒 大 勝 字 銃 筒 中 勝 字 銃 筒 小 勝 字 銃 筒 別 勝 字 銃 筒 小 銃 筒 雙 字 銃 筒 등의 소형 화기와 天 字 銃 筒 地 字 銃 筒 玄 字 銃 筒 黃 字 銃 筒 別 黃 字 銃 筒 등의 대형 화포가 있다. 이처럼 조선군이 장비한 화기는 그 종류가 다양하였고, 사거리도 비교적 길었음을 알 수 있 다. 다만 화기 발달의 초기단계인 지화식 화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조준 사격이 불 가능하였으며 명중률도 낮았다. 또한 총통의 규격이 통일되지 못함에 따라 제작 및 운용에 있 어서 많은 혼동을 초래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요인들은 총통을 운용하는데 커다란 제약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조선군은 소총에 있어서는 적인 일본이 비해서 성능의 열 2) 오만 장원철 역, 2003,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국립진주박물관, p.194. 3)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역, 앞의 책, pp.223~224. 4) 서애문집 권16, 잡저 記 鳥 銃 製 造 事 5) 학봉선생문집 권3, 馳 啓 晋 州 守 城 勝 捷 狀 ( 成 均 館 大 大 東 文 化 硏 究 院, 1972) 6) 징비록 권7, 계사록.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7 세를 보였고, 화포에 있어서는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7) 이는 전투에서의 승패로 나타났다. 특 히 화포류에 있어서는 조선군이 장비한 총통의 성능이 우수했는데, 이는 명종 때부터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대형화기의 개발에 주력한 덕분이다. 8)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운용하던 거 북선과 판옥선에는 위에서 언급한 각종 대형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조선군은 이러한 화포를 바탕으로 하여 해전에서 일본군에 전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이 중 소형선 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舷 을 붙이고 白 兵 戰 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선박의 전후좌우에 각종 화포를 장착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화포를 바탕으로 한 포전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군이 사용한 대형 화포는 일본군이 장비한 조총에 비해 그 사거리가 월등히 앞선 관계로 접근하지 않은 상 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무기체계상의 우열 못지않게 작용한 것이 전술적인 운용 문제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조선군은 다양한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비축량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에 연패를 거듭하게 되는데 그 요인은 화기 운용 전술의 부재가 아닌가 한다.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의 화기를 이용한 보병 전술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유성룡이 후에 조선군의 장수들이 일본군의 전술을 정확하게 인식치 못하 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할 만한 전술[ 陣 法 ]을 익히지 못하였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9) 당시 조선은 화기가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전술의 개발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단순히 화기를 접하지 못한 野 人 들에게 피상적으로 운용하던 것에 만족하였다. 따라서 소규모의 왜구 침입에서도 전국이 뒤흔들리는 양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임진왜 란 때에는 초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소형화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먼저 화약과 발사 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는 방식의 指 火 式 火 器 라는 점이다. 이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鳥 銃 [ 鐵 砲 ]에 비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성능이 한 단계 낮은 화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준 사격보다는 일단의 밀집 대형을 이룬 적에게 지향사격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번째는 형태상 구경은 작아지고 총신은 상대적으로 7) 박재광, 1996, 임진왜란기 조 일 양국의 무기체계에 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6, 한일관계사학회, p.43. 8) 허선도, 1994,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9) 서애문집 권, 잡저 戰 守 機 宜 十 條.
38 학예지 제19집 길어졌으며 죽절이 많고, 기존의 화기와는 달리 격목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토격형 형태의 화기라는 점이다. 특히 발사물이 화살보다는 철환(3~15개)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의 화기였기 때문에 기존의 화기에 비해 효율성이 증가하였다. 세 번째는 일부 총통의 경우 조총과 같은 신식 총과 유사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승자총통의 경우 기존의 화기를 개량하여 총신의 앞뒤에 가늠자와 가늠쇠를 부착하고, 銃 架 를 장착하였다. 따라서 소승자총통 은 총가를 잡고 가늠쇠와 가늠자를 이용하여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또 쌍자총통과 같은 화기는 총통 두 개를 병렬로 붙여 놓아 한번 장전을 통하여 여섯 번까지 사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화기이기 때문에 재장전 시간의 지연에 따른 사격의 비효율성을 다소나마 보완한 화기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소형화기는 여전히 지화식 화기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고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성능의 차이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육전에서 조선군은 무기체계와 전술적 열세로 일본군에 연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 해상 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게 된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대해 연전 연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 수군이 연승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군선에 장착된 대형화포의 성능이 우수성을 들 수 있다.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군비가 전선과 탑재 무기란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 다. 해전에 익숙한 수군 병사들과 견고한 전선에 위력 있는 화포를 갖추었다면 해상전에 대한 대비는 완벽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시에 있어서도 해전의 성패를 좌우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전선과 화기의 성능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은 대형 군선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포를 바탕으로 艦 砲 戰 術 을 구사하였고, 거북선 을 이용한 撞 破 戰 術, 火 攻 戰 術 을 구사했다. 이는 조선군이 지닌 무기체계의 장점을 최대한 활 용하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무겁고 튼튼한 군선이었다. 선체가 커 많은 전투원과 대형 화포,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적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기 어려운 반면 에 조선 수군은 높은 상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일본 수군은 판옥선의 舷 側 이 높아 선상에 쉽게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의 전통적인 전법 이었던 등선육박전술을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세키부네( 關 船 )는 선형이 가늘 고 길 뿐만 아니라 선체가 얇게 건조되어 매우 약한 선박이었고, 돛 역시 매우 단순하여 逆 走 성 능이 좋지 못한 四 角 帆 船 으로서 조선군의 러그세일형 雙 帆 의 기능에 미치지 못하였다. 10) 특히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9 일본의 세키부네는 선상에 대포를 장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력면에서 열세하였던 것이다. 11) 또 판옥선의 특징 중 하나인 강인하고 견고한 구조의 선체는 일본 군선을 상대로 당파전술을 구사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판옥선은 좌우 선회능력이 뛰어났고, 화포 발사에 따 른 반동 흡수에 유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판옥선의 구조적 특성은 대형 화포의 성능 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판옥선은 화포의 구사에 매우 편리한 선형을 하고 있다. 판옥선 의 상장갑판은 충분히 높고 넓어서 포격에 아주 유리하였다. 당시의 화포는 그 사정거리가 고 작 수백 보인 것들이어서 砲 座 가 높을수록 명중률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판옥선은 상갑판에 포를 안치시킴으로써 포좌가 충분히 높아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고 화포를 구사하기 때문에 포를 발사하기 좋아 화력이 강하며 명중률이 높았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12) 이런 점은 일본측 연구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선은 일본 군선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던 또 하나의 요소는 대형 화포이다. 판옥선과 거북선에 장착된 대형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적선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적선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였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대형화포 의 위력과 관련하여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의 선박은 강하고 크며, 위로 뚜껑이 있다. 화약솥과 화기들을 사용하며, 쇠로 만든 사석포 같 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구형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거의 남자의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모양 나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서 집어넣는데,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 렬하다 13) 선박에 대한 설명에서 위로 뚜껑이 있다는 것은 거북선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되며, 부딪치 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는 표현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 장군전과 같은 대형 화살을 의미한다. 또 다른 기록인 高 麗 船 戰 記 에도 유사한 내 용이 나오는데, 10) 김재근, 1994 앞의 책 p.144. 11) 왜선의 船 制 는 그 선체가 堅 厚 하고 장대하지 못하여 선상에 대포를 안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판옥선에 제압당하고 만다.( 선조실록 권61, 28년 3월 신묘) 12) 김재근, 1993 앞의 논문 p.274. 13)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역, 앞의 책, p.254.
40 학예지 제19집 9일 오전 8시 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이 공격해 왔다. 대선 가운데 3척은 장님배(거북 선)로 철로 要 害 하고 石 火 矢, 棒 火 矢, 大 狗 俣 등을 쏘아가며 오후 6시 경까지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 여 망루와 갑판, 要 害 까지 모두 부숴놓고 말았다. 鬼 宿 船 (거북선)은 左 馬 의 대선 앞을 가로막았고 소선들을 그 뒤에 쫓게 하였다. 그들 배에서 철포를 쏘아댔으며 귀숙선과 좌마의 대선은 서로 쏘아댔 으나 좌마의 배가 난사당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14) 라고 하여 거북선에서 石 火 矢, 棒 火 矢 등을 쏘았고, 해전에서 돌격선으로 상당히 효과적이고 위협적인 공격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대형화포에 발사되는 이들 대형 화살은 적선에 도달하여 선체를 파괴함으로써 적선의 전투력을 무력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 다. 이외에도 조선 수군은 소형화기와 질려포통, 비격진천뢰 등도 사용하였는데, 1593년 4월 웅천해전에서 조선군은 완구에 비격진천뢰를 장전하여 발사한 예가 있다. 15) 이들 화포는 거북 선과 판옥선에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군선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 화약병기는 매우 다양하고, 현존하고 있는 유물도 수십 점에 달한다. 특히 전쟁기념관 에서 소장중인 황자총통과 지자총통, 승자총통, 별승자총통, 소 중 대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라 하겠다. 황자총통은 포신에 萬 曆 丁 亥 四 月 黃 字 重 三 十 一 斤 八 兩 匠 富 貴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임진 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4월에 화포장 부귀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보물 886호) 형태는 포 입구에서부터 점차 두터워지고, 藥 室 은 筒 身 보다 더 두텁게 조성하고, 통신에는 죽절 5개가 조성되었고, 손잡이인 擧 金 은 약실쪽 첫째와 둘째마디 사이에 반달( 半 月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지자총통은 1992년 여천시 신덕동 백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유물로 당시 銅 綠 과 이물질 이 끼었고 더욱이 원형이 아닌 파열된 상태였다. 즉 약실 부위만이 온전하고 격목 부위에서 포구에 이르는 죽절이 조성된 포신은 크게 파열되어 포구 쪽은 완전 손실된 상태이다. 이러한 중화기는 약실 부위에 연호, 간지, 자호, 중량, 화약용량, 감독관, 장인 등의 명문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총통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함께 인양된 현자총통이 명종때 제작되었 고, 주조 형태상으로 현존하는 명종 10년과 12년에 제작된 지자총통과 비교해 볼 때 잔존된 약실 부위의 모양이나 죽절, 그리고 擧 金 의 배치 등이 매우 흡사한 것을 볼 때 명종 내지는 14) 高 麗 船 戰 記 15) 정진술, 1995 앞의 논문, p.368.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1 선조때 제작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된 지자 현자총통과 승자총통, 별승 자총통, 불랑기 자포 등 다량의 화약병기는 모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무기라 할 수 있다. 또한 국립진주박물관의 가정을묘명천자총통(보물 제647호) 중완구(보물 제858 호) 지자총통(보물 제862호) 현자총통(보물 제885호, 제1233호) 만력을묘명 승자총통(보물 제648호)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의 중완구(보물 제859호) 전쟁기념관의 황자총통(보물 제886 호) 지자총통, 동아대박물관의 지자총통(보물 제863호),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자총통, 경기도 박물관의 현자총통,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총통(보물 제856호) 등은 출토지역이나 시기가 모두 임진왜란과 유관하다고 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림 1. 황자총통(전쟁기념관 소장) 그림 2. 지자총통(전쟁기념관 소장) 3. 서울 신청사 발굴 유물의 성격 1) 佛狼機 子砲 불랑기 자포라 함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여 불랑기에 장착하던 자포를 말한다. 불랑기는 15세기 경 포르투갈 등 서구제국에서 제작되어 1517년경에 유럽의 상선을 통하여 중국 광동에 전해진 서양제 화기였다. 불랑기라는 명칭은 프랑크(Frank)의 한자식 표현이다. 최초 중국 남 부지역에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 회교도들을 앞세우고 왔는데, 중국 관원이 저 코 크고 머리가 누런 자들을 뭣으로 부르느냐고 묻자 회교도 자신들이 유럽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던 프랑크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유럽인을 불랑기라 통칭하고, 그들이 전해준 화포
42 학예지 제19집 도 같은 말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도자기를 차이나 라고 불 렀던 것처럼 중국인은 유럽인, 엄밀히 말하면 포르투갈의 식민지나 무역 상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를 불랑기 라고 불렀다. 불랑기의 전래에 대해서는 正 德 年 間 (1506~1521)에 포르투갈 에서 만든 불랑기 실물이 그 제조법과 함께 중국에 전달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16) 대항해시대인 1498년에 개발된 인도 항로로 동아시아와 서구사회의 접촉은 빈번해졌고, 상 호간의 교류는 동아시아 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때는 1516년, 포르투갈 은 명에 대해 통상 교역을 요구했지만, 151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malacca : 지금의 말레이시 아) 점령을 알고 있던 중국은 경계심을 나타내며 해안을 봉쇄하는 海 禁 政 策 을 썼다. 더욱이 포르투갈인들이 연해에서 약탈 행위마저 자행하자, 명은 강경책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런 와 중에 1522년, 광동성 신회현의 서초 만에서 명군이 4척의 포르투갈 함대와 전투를 벌여 함선 1척을 나포했고, 그들의 함재포를 노획했다. 이 노획포를 연구하여 명은 새로운 화포를 제조했 는데, 그중 하나가 불랑기였다. 이후 불랑기는 당시 명나라 군이 가지고 있던 어떤 대포보다도 성능이 뛰어났기에 이것을 본떠서 불랑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1522년에 동제 불랑기 32점을 자총과 함께 시험 제작하 는 데 성공했고, 이로부터 7년 후인 가정 7년에는 소형 불랑기 4000점, 가정 22년에는 중형 불랑기를, 다음해에는 마상용(horse-drawn)인 소형 불랑기 1000점을 주조해냈다 17). 이후 1626 년 袁 崇 換 이 영원 전투에서 홍이포의 막강한 위력을 보여줄 때까지 100여 년간 불랑기 형태의 대포는 매년 수천 문씩 생산되어 가장 중심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의 후장식 화포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전래됐다. 오토모 소린( 大 友 宗 麟 )이 臼 杵 城 공방전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지만, 그러나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가 조선을 침략할 때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도, 활용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 불랑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의 평양성탈환전투 18) 를 계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평양성이 탈환된 이후 이와 관련해서 이덕형이 선조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명나라는 佛 狼 機 虎 蹲 砲 滅 虜 砲 등을 사용하였고, 성에서 5리 쯤 떨어진 곳에서 여러 포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는 것 같았는데 이윽고 불 빛이 하늘에 치솟으며 모든 왜적들이 붉고 흰 깃발을 들고 나오다가 모두 쓰러졌습니다. 라고 16) 박재광, 1997, 동아시아 삼국의 화기 제조와 교류 학예지 5, 육군박물관. 17) 大 明 會 典 ( 宇 田 川 武 久, 東 アシア 兵 器 交 流 史 の 硏 究 ( 吉 川 弘 文 館, 1993) p.337) 18) 선조실록 권49, 27년 3월 무술.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3 하여 명군이 사용한 불랑기의 성능이 뛰어났음을 언급하였다. 또 이항복도 성을 방어하거나 水 戰 을 치르는 데는 대포가 유용한데, 우리나라의[본국]의 천자 총 지자총 같은 대포는 제도가 지나치게 크고 장치하는 화약도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 화력은 대단히 맹렬하나 포탄이 곧게 나가지 않다 고 평가하고, 오직 현자총 및 1호로부터 5호까지로 대소의 구분이 있는 새로 제조한 불랑기포만이 가장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고 평하고 있다. 19) 이 처럼 불랑기는 기존 화포에 비해 규모가 작아 전투에서의 효용성이 높고, 성능도 우수하였기 때 문에 이후 적극 도입되어 거북선 등에 장착되어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신무기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조선은 불랑기국에 대한 정보는 익히 알고 있었다. 조선 중종 때에 명나라에 다녀 온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외모는 倭 人 과 비슷하고 의복의 제도와 음 식의 절차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도 예로부터 못 보던 사 람이다 하였습니다. 황제가 出 遊 할 적에는 韃 靼 佛 狼 機 占 城 剌 麻 등 나라의 사신을 각각 2 3명씩 뽑아 호종하게 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익히기도 하고 그들의 技 藝 를 살펴보기도 했습 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이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에서 얻은 견문을 토대 로 1614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芝 峰 類 說 에 불랑기국은 서양의 큰 나라이 다. 그 나라의 화기를 불랑기라 부르니 지금 兵 家 에서 쓰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랑기국에 대한 정보는 널리 알려진 듯하다. 한편 조선에서는 불랑기가 초기에 唐 制 子 母 砲 라고도 불렸으며, 이후 계속 제조되어 사용되 었는데, 이는 선조 28년 10월 비변사가 해상 통로를 차단할 좋은 계책으로서 대포와 불랑기 등의 화포를 거북선에 많이 장착할 것을 건의한 것 20) 을 볼 때 알 수 있으며, 선조 29년 정월 비변사가 화포 군기의 정비와 제조를 건의하면서 밝힌 전년도의 주조한 화포가 190여 자루 에 21) 불랑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또 선조 29년 6월 황해도 은율에서도 2점이 제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그 후 선조 30년(1597) 2월에 유성룡이 올린 請 軍 人 試 才 優 等 及 大 砲 能 中 者 論 賞 狀 에 의하 면 禿 城 에 불랑기를 설치하고 있고, 포수의 사격술이 뛰어남을 밝히고 있으며, 請 以 黃 海 道 出 19) 백사별집 권2, 계사 20) 선조실록 권68, 28년 10월 병인. 龜 船 不 足 則 晝 夜 加 造 多 載 大 砲 佛 狼 機 火 箭 器 具 以 爲 遮 截 海 道 之 計 此 乃 最 爲 救 急 之 良 策 也 21) 선조실록 권71, 29년 정월 을미. 22) 군문등록, 조선사편수회, 1933, p.85.
44 학예지 제19집 身二百名, 分守上疏及 京中軍軍器優數下送狀 에서 방어에 쓸 화약과 화기가 부족하니 군기시 의 불랑기 등을 방어사에게 내려 보낼 것을 건의하는 것으로 보아 정유재란에는 수성용으로도 많이 사용하게 된 것 같다. 한편 광해군 7년(1614)에 화기를 제조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火器都監의 활동 상황에 대해 기록한 火器都監儀軌 에는 불랑기에 대한 도설이 나와 있다.23) 또 한효순의 신기비결 에도 불랑기에 관한 훈련법이 기록되고, 순조대에 만들어진 융원필비 에도 주요 화기로 취급되었 다. 이로써 유럽에 있어서는 전선의 방어력이 증강되었던 17세기 이후에는 사용이 격감되었지 만 조선은 계속적으로 불랑기를 제조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24) 이와 관련하여 몇 년 전에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던 2점의 그림에서 불랑기가 조선 수군의 함선에 장착되어 운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점은 오오타 텐요오(太田天洋)라는 일본 역사화가가 그린 朝鮮戰役海戰圖 라는 그림인데,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싸우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판옥선의 고정식 포가에 장착된 화포가 바로 불랑기이 다. 또 하나는 2004년 8월 미국 뉴욕에서 처음으로 소 개된 거북선 그림인데, 이 그림의 하단에도 역시 불랑 기가 소형 전선에 장착되어 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 그림 3. 조선전역해전도의 불랑기 다. 이런 점에서 불랑기가 조선군의 함선 내지는 성곽 의 주력 화포로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불랑기의 제조 년대가 명종 18년부터 고종 11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신미양요때 미군이 찍어 간 사진을 보면 강화도의 포대에 많은 불랑기들 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의 부분이 불랑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만 그림 4. 거북선 그림에 그려진 불랑기 23) 화기도감의궤 불랑기조. 四號五十位 每位重九十斤 長三尺一寸七分 周營造尺他同 子砲五門式 二百五十門 每門重十 二斤 中藥線半條 火藥三兩 鐵丸一個 24) 이와 관련하여 나주목에서 1693년에 작성된 重記 자료에 의하면 전선에 4호 불랑기가 5위, 자포가 15개, 5호 불랑기 는 2위, 자포 6개가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