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예 지 제 19 집 임진왜란 7주갑 기념 학예지 2012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목 차 연구논문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7 정진술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3 박재광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55 나종남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75 이호준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05 김병륜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1 강신엽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1 김대중 부 록 2010육군박물관 연보 193 학예지 제1집~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05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16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7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정 진 술* 목 차 Ⅰ. 머리말 Ⅱ. 임진왜란 해전의 개괄 Ⅲ.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원인 1. 이순신의 지휘통솔력과 해전술 2. 수군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위 Ⅳ.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역사적 의의 1. 일본의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킴 2. 수군 명장의 역사적 계보가 이어짐 3. 왜구의 종식과 해상의 평화 도래 4.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이 해전술의 기본화 5. 장갑선이 해전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 올해는 임진왜란(이하 임란)이 발발한지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통시대의 연대법으로는 7주갑이 되는 의미깊은 해이기도 하다. 임란은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 국토가 폐허화되 고 나라가 멸망의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명의 지원과 각지에서 의병의 봉기 그리고 해전에서 연이은 승리로 말미암아 결국은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사흘만에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승승장구하여 불과 20여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계속 진격하여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동쪽으로는 함경 도를 석권하였다. 조선은 명의 지원으로 겨우 평양을 회복하고, 이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 으로 일본군은 동남 해안지역으로 물러나고 대부분의 병력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마침내 협 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전라도 지방을 공략한 후 서울로 진격하였다. *해군사관학교 해양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8 학예지 제19집 그러나 직산 전투에서 명군이 승리하고,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함으로 써 일본군의 예봉을 꺾어 그들을 동남 해안지역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1598년 8월에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여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 전쟁에서 육상의 전황은 이여송이 거느리는 명군의 평양수복전,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권률의 행주산성 전투, 그리고 정유년에 명군이 직산전투에서 각각 승 리하였다. 이러한 승리와 더불어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군의 보급로에 위협을 주어 그들의 전쟁수행에 차질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육전의 승리가 일본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의 자유로운 기동과 동남 해안지역의 주둔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함으로써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 을 저지하고, 그들 본국과의 해상병참선을 위협하였다. 해상에서의 승리는 해전사적으로도 중 요하여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1)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필 1) 海 軍 本 部, 韓 國 海 洋 史 (부산 : 啓 文 社, 1954). 崔 碩 男, 韓 國 水 軍 活 動 史 (서울 : 鳴 洋 社, 1965). 李 炯 錫, 壬 辰 戰 亂 史, 上 下 卷, 壬 辰 戰 亂 史 刊 行 委 員 會, 1967. 최영희, 임진왜란, 교양국사총서 7,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趙 仁 福, 壬 辰 倭 亂 時 朝 鮮 水 軍 의 勝 利 原 因 의 綜 合 的 分 析 評 價, 國 防 史 學 會 報, 국방사학회, 1976. 許 善 道, 壬 辰 倭 亂 에 있어서의 李 忠 武 公 의 勝 捷 -그 戰 略 的 戰 術 的 意 義 를 中 心 으로-, 軍 史 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 회, 1981. 崔 七 鎬, 李 舜 臣 將 軍 의 戰 略 構 想 과 作 戰 結 果, 軍 史 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李 載 浩, 壬 亂 水 軍 과 李 雲 龍 將 軍, 軍 史 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羅 鐘 宇,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 전북사학 5, 전북대학교 사학회, 1981. 趙 成 都, 忠 武 公 李 舜 臣 (서울 : 南 榮 文 化 社, 1982). 趙 成 都, 鳴 梁 海 戰 硏 究, 軍 史 제4호,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2. 張 學 根, 朝 鮮 時 代 海 洋 防 衛 史 硏 究, 해군사관학교, 1987. 趙 湲 來, 壬 亂 海 戰 의 勝 因 과 全 羅 沿 海 民 의 抗 戰 - 初 期 海 戰 과 鳴 梁 海 戰 을 중심으로-, 鳴 梁 大 捷 의 再 照 明, 해남문화 원 해남군, 1987. 오붕근, 조선수군사, 사회과학출판사, 1991. 金 一 相, 壬 辰 倭 亂 과 李 舜 臣 의 戰 略, 龜 海 趙 成 都 敎 授 華 甲 紀 念 忠 武 公 李 舜 臣 硏 究 論 叢, 해군사관학박물관, 1991. 崔 斗 煥, 鳴 梁 海 戰 과 강강수월래, 龜 海 趙 成 都 敎 授 華 甲 紀 念 忠 武 公 李 舜 臣 硏 究 論 叢, 해군사관학박물관, 1991. 愼 浩 史, 壬 辰 亂 과 李 舜 臣 의 戰 略 戰 術, 第 二 會 國 際 海 洋 力 심포지움 發 表 文 集, 대한민국해군 해군해양연구소, 1991. 姜 永 五, 李 舜 臣 提 督 의 戰 略 的 딜레마와 現 代 的 關 聯 性, 第 二 會 國 際 海 洋 力 심포지움 發 表 文 集, 대한민국해군 해군 해양연구소, 1991. 金 一 龍, 戰 跡 地 로 통해본 漆 川 梁 海 戰, 제8회 全 國 鄕 土 文 化 硏 究 發 表 會 ( 受 賞 資 料 集 ), 한국문화원연합회, 1992. 金 鍾 基, 釜 山 浦 海 戰,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鄭 鎭 述, 閑 山 島 海 戰 硏 究,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金 一 相, 鳴 梁 海 戰 의 戰 術 的 考 察,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姜 永 五, 壬 亂 期 朝 日 의 海 軍 戰 略,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정두희, 이순신연구-임진년 이후 그의 전략과 정유재란에 관한 재검토-, 이기백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하 (서울 : 일조각, 1994). 張 學 根,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해전),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趙 湲 來, 수군의 승첩,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9 자는 조선 수군의 연이은 승리 원인을 해전의 전략 전술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아울러 그 역 사적 의의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순신에 대한 무한한 찬사와 함께 그의 승리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넘쳐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순신이나 임란 해전을 주제로 다룬는 것이 숟가 락 하나를 또다시 얹는다는 식상함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가능한 한 실증적이며 객관 적인 시각에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Ⅱ. 임진왜란 해전의 개괄 16세기에 우리나라 남해안의 해상방위체제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2개의 수영이 설치되 어 연안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임란 때 경상도는 좌수사 박홍( 朴 泓 )이 동래의 좌수영에서, 그리고 우수사 원균이 거제도 오아포의 우수영에서 낙동강을 경계로 각각 동,서 해역을 관할하 金 一 龍, 壬 辰 亂 赤 珍 浦 海 戰, 제10회 全 國 鄕 土 文 化 硏 究 發 表 會 ( 受 賞 資 料 集 ), 전국문화원연합회, 1995. 任 元 彬, 충무공 이순신의 병법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20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1998. 任 元 彬, 충무공 이순신의 병법과 근대 해전, 海 洋 硏 究 論 叢 제22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1999. 任 元 彬,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24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0. 海 軍 大 學, 韓 國 海 戰 史, 2000. 鄭 鎭 述, 조선수군의 임난 초기대응에 관한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25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0. 최두환,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전략 사상 연구-현대 해군전략논을 중심으로-, 海 洋 硏 究 論 叢 제27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1. 朴 惠 一 외 3인, 李 舜 臣 의 鳴 梁 海 戰, 정신문화연구 제25권 제3호(통권 88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李 敏 雄, 朝 明 聯 合 艦 隊 의 형성과 露 粱 海 戰 경과, 歷 史 學 報 제178집, 역사학회, 2003. 趙 湲 來, 이충무공과 해상의병, 이순신연구 창간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3.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04). 김현기, 이순신의 군사적 리더십에 관한 현대적 조명, 이순신연구논총 2,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4. 임원빈, 병법의 관점에서 본 명량해전 연구, 海 洋 硏 究 論 叢 제33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4. 趙 湲 來, 새로운 觀 點 의 임진왜란사 硏 究 (서울 : 아세아문화사, 2005). 임원빈,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 (서울 : 도서출판 신서원, 2005). 조원래, 壬 亂 海 戰 에서 본 朝 日 양국의 水 軍 戰 力 - 初 期 海 戰 의 실상을 중심으로-,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서울 : 京 仁 文 化 社, 2005). 김현기, 이순신 제독의 전략 전술과 손자병법, 이순신연구논총 4,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5. 諸 章 明, 李 舜 臣 의 水 軍 戰 略 과 閑 山 大 捷, 軍 史 제60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이종학, 명량해전의 군사사학적 연구, 海 洋 戰 略 제132호, 해군대학, 2006. 이민웅, 임진왜란 초기 해전 연구 Ⅰ-전라좌수군의 제1차 출전을 중심으로-, 海 洋 硏 究 論 叢 제39집, 해군사관학교 해군해양연구소, 2007. 제장명, 3대 해전을 통해 본 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이순신연구논총 8,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해전술과 귀선의 역할, 이순신연구논총 9,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장학근, 水 操 에 나타난 이순신 전술-기동항해( 尖 字 陣 )와 전투진형( 鶴 翼 陣 )을 중심으로-, 이순신연구논총 12,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9. 제장명, 露 粱 海 戰 과 이순신 戰 死 狀 況 에 관한 고찰, 軍 史 제78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10 학예지 제19집 였다. 전라도는 좌수사 이순신이 여수의 좌수영에서, 그리고 우수사 이억기( 李 億 祺 )가 해남의 우수영에서 장흥과 보성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각각 전라도의 동,서 해역을 관할하였다. 임진년(1592)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가 거느리는 일본군 제1번대가 700여척 의 함선으로 부산에 내침하였고, 9번대까지 모두 158,700명이 바다를 건너왔다. 이어서 일본 수군들은 침공지상군의 도해( 渡 海 )가 거의 마무리된 5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경상도 연안의 약탈을 시작하였다. 2) 일본군의 침략을 맞이하여 경상좌 우수사는 육지로 피신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적의 침공 초기에 접적지역의 우리 수군이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와해되어 버렸다. 결국 일본 수군에 대한 방어는 전라좌 우수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 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의 제1차 출전이 5월 4일에 이루어졌다. 5월 7일과 8일에 있었던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42척을 격파하며 압승하였고, 그 결과 경상우수 군에 대한 일본 수군의 급박한 위협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5월 하순에는 일본 수군들이 다시 거제도 서쪽으로 침입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순 신이 거느리는 전라좌수군의 제2차 출전이 5월 29일에 이루어졌으며, 이어서 전라우수군도 곧 합세하였다. 이번 출전에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의 4차례 해전을 치루면서 적선 72척을 분멸하며 크게 승리하였고, 그 결과 거제도 서쪽 해역에서 일본 함선들을 완전히 구축하였다. 이처럼 5월과 6월에 있었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했으나 육전상황은 이 와 반대로 조선군이 패퇴일로에 있었고, 일본군 선봉대인 고니시군은 6월 14일에 평양을 점령 하였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연이은 해전 승리는 당시 서울과 평양을 점령하고 해로를 통한 보급을 받아 계속 북진하려는 일본군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되었다 3). 그리하여 일본군 수뇌부는 조선 수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순신 함대를 격멸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육 전에 종사하고 있던 수군장들을 부산으로 남하시키게 되었다. 이에따라 경기도 용인을 수비하 고 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 脇 坂 安 治 ), 한성에 있던 구기 요시다카( 九 鬼 嘉 隆 )와 가토 요시아키 ( 加 藤 嘉 明 )가 급히 김해와 부산으로 내려와 출전준비를 하였다 4). 일본 수군들의 이와같은 공세준비에 따라 경상도 남해안에서 일본 함선들의 활동이 증가하 2) 參 謀 本 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本 編 ) ( 東 京 : 偕 行 社, 1924), pp. 75-78, 152-162. 3)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오만 장원철 옮김,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3, pp.233-234. 4) 有 馬 成 甫, 朝 鮮 役 水 軍 史 ( 東 京 : 海 と 空 社, 1942), pp. 90-92.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1 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러한 일본 수군의 움직임에 다시 한 번 쐐기를 박기 위하여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제3차 출전을 하였다. 그리하여 7월 8일에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73척으로 구성된 와키사카가 거느리는 일본 수군의 정예함대를 맞아 그 중 59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7월 9일에는 안골포 해전에서 구기와 가토가 거느리는 일본함대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지금까지 이순신의 1,2차 출전에 의한 여러 해전은 연안을 약탈하는 왜구들과 의 전투였었고 또한 소탕전의 성격을 띄고 있었으므로 적의 수군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지는 못했었다. 따라서 적의 함선활동도 계속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함대가 섬멸되므로서 그들은 수군전략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본 해전이 후 일본 수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5) 포구에 깊숙이 정박하여 조선 수군의 여하 한 공격에도 결코 포구밖으로 나오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함선을 보존하려는 수세작전으로 나 왔던 것이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전라좌수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제3차 출전이후 가덕도 서쪽 해 역에서 일본 수군의 활동은 완전히 멈추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본거지인 부산포에 대한 공격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드디어 8월 24일에는 전라우수군과 함께 제4차 출전을 하였다. 이때 출전한 전라좌 우수군의 함선 수는 전선(판옥선) 74척과 협선 92척으로 모두 166척이었 고, 원균이 거느리는 수척의 함선과 사량 앞바다에서 합세하였다. 6) 부산포로 진격하는 과정에 서 조선 수군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에서 적 함선과 조우하여 30척을 격 파하였고, 드디어 9월 1일에는 부산포에서 470여척의 일본 함선들을 공격하여 100여척을 격파 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부산포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일시적이나마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군의 본국으로의 퇴로를 위협하여 1593년 4월에 있었던 그들의 한성 철수 여 건을 조성하였다 7). 한편, 조선 수군으로부터 그들의 후방 병참기지를 공격받은 일본 수군들로서도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임진년 겨울이 지나기 전에 일본 수군들은 부산포로부터 웅포(진해)로 함선들을 전진 배치하여 해안의 포구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선 수군이 부산포로 진격하는 해로를 중간에서 차단하는 전략을 시행하였다. 결국 다음해인 1593년 2월말부터 3월초까지 조선 수군으 5) 參 謀 本 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文 書 ) ( 東 京 : 偕 行 社, 1924), pp. 55-56. 6) 제4차 출전시에 경상우수군의 척수는 알 수 없으나, 제3차 출전시에는 전선 7척이었다. 대체로 제4차 출전시의 조선수군 의 총척수는 170여척 안팍으로 추산된다. 7) 德 富 猪 一 郞, 近 世 日 本 國 民 史 豊 臣 氏 時 代 ( 戊 篇 ) ( 東 京 : 民 友 社, 1922), pp. 49-52, 300-308.
12 학예지 제19집 로부터 웅포에서 치열한 공격을 받긴 했으나, 조선 수군이 가덕도와 부산포로 다시 진격하는 것 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8). 그리고 1593년 6월에는 그들 함선을 거제도 북방 의 영등포, 장문포 등지로 대거 이동 배치함으로써 본국과의 후방 병참선을 보호하였다. 1593년부터 명과 일본 간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었고, 상당수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함으 로써 육상의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그해 6월부터 충청도 수군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삼도연합함대로 일본 수군과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 이순신은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견내량을 경계로 일본 수군과의 오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 리고 대치기간 중에도 제2차 당항포 해전과 장문포 해전에서 적선 32척 9) 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1596년 말에 강화협상은 결렬되었고, 일본은 다음해인 정유년(1597)에 14만여 명의 병력으 로 재침하였으며, 모든 병력이 7월까지는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해 2월에 조선 정부는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해임하고, 대신 원균을 기용하였다. 원균은 정유년 1월에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 加 藤 淸 正 )를 요격하기 위한 부산 출전을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선조로 부터 한참 불신을 받을 때,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쳐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10) 라는 무 모한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모함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통제사로 부임하자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을 수륙합동으로 공격하여 이를 무찔러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뒤라야 부산으 로 진격할 수 있다는 지극히 건전한 작전계획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11). 결국 원균 역시 부산 진격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는 체찰사와 도원수의 독촉을 받고서야 출전하게 되었다. 정유년 6월 18일 통제사 원균은 10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19일에 안골포와 가덕 도의 포구에서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여 다수의 적선을 나포하였으나 아군측도 장수 1명이 전 사하고 1명이 부상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12) 7월 4일에 조선 수군은 다시 한산도를 출항하여 부산으로 진격하였고, 8일에는 다대포에서 적선 10여척을 분멸하였으며, 9일에는 적선 600여 척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접전하였는데 여기서 아군 전선 12척을 상실하였다. 13) 이윽고 회군하 8) 李 忠 武 公 全 書, 卷 3, 狀 啓 2, 令 水 陸 諸 將 直 擣 熊 川 狀. 9) 李 忠 武 公 全 書, 卷 4, 狀 啓 3, 唐 項 浦 破 倭 兵 狀. 亂 中 日 記, 갑오년 9월 29일. 10) 宣 祖 實 錄, 30년 1월 22일. 11) 宣 祖 實 錄, 30년 4월 19일, 6월 11일. 12) 宣 祖 實 錄, 30년 6월 28일, 6월 29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3 는 과정에서 가덕도와 영등포에서 적의 육상 매복병에게 공격을 받아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 다. 14) 15일은 바람이 크게 불어 칠천량에 정박중이었는데, 이날 밤 수많은 적선이 내습하였고, 조선 수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가운데 16일 새벽에 아 함대는 크게 궤멸되었으며, 경상우 수사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겨우 탈출하였다. 15)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은 호남지방을 석권함은 물론이거니와 해상을 통해 서해 연안 을 위협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기용하였고, 그는 8월 18일에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0여척을 수습하였다. 이순신은 우수영까지 후퇴하며 어란포와 벽파진 에서 적과 접전을 벌이면서 명량을 결전의 장소로 택하였다. 9월 16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은 일본 수군 133척과 명량에서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 수군의 서해진출은 좌절되었고, 결국 정유재란을 아군이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이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함대세력을 증강하고 있는 가운데 무 술년(1598) 7월에 진린이 거느리는 명의 수군이 내원하였다. 이어서 조 명연합함대는 절이도 해전에서 적선 50여척 16) 을 격멸하고, 여수 이서 해역에서 일본 수군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9월 15일에는 고금도를 출항하여 순천의 왜교성에 있는 고니시군을 수륙으로 합공하였다. 왜교 해 전은 10월 9일까지 계속되었으나 아군의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적은 육지와 포구에서 응전하 였으므로 아군 주로 명군의 피해가 컸다. 왜교의 적들이 철수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 명연합함대는 11월 9일에 재차 출전하여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러자 왜교에 고립된 고니시군을 구출하기 위해 사천, 남해, 고성 의 일본군이 해상으로부터 지원군을 파견하게 되었고, 이것을 간파한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하 여 노량에서 이를 요격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11월 18일 야간에 왜교로부터 노량으로 이동한 조 명연합함대는 19일 새벽부터 300여척의 일본 함선과 접전을 벌여 200여척을 격파하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통제사 이순신, 13) 亂 中 日 記, 정유년(Ⅰ) 7월 14일, 16일. 宣 祖 實 錄, 30년 7월 14일. 14) 柳 成 龍, 懲 毖 錄 정유년 8월. 15) 宣 祖 實 錄, 30년 7월 22일. 趙 慶 男, 亂 中 雜 錄, 정유년 7월. 金 浣, 壬 辰 日 錄, 선조 30년. 16) 趙 慶 男, 亂 中 雜 錄, 정유년 7월 16일.
14 학예지 제19집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흥양 현감 고득장 등 10여명과 명 수군의 부총병 등자 룡이 전사하였다. 17) 그리고 접전하는 사이에 왜교성의 고니시군은 해상으로 탈출하여 부산을 경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노량 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쟁도 종식되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기록으로 확인된 것만으로도 적 함선 570여척 이상을 격파하여 일본 수군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김으로 써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라는 이름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Ⅲ.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원인 1. 이순신의 지휘통솔력과 해전술 1) 출전에 앞서 예하 장수들과 협의 이순신은 함대의 출전에 앞서 예하 장수들과 작전을 협의하고 약속을 반복하였다. 그럼으로 써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모두 일사불란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가 해전마다 반드시 승리했던 이면에는 그의 훌륭한 지략과 더불어 이처럼 예하 장수들과 한마음으로 전투에 임했 다는 사실이 있었다. 임진년 첫 출전에 앞서 그는 예하 장수들을 좌수영 본영으로 불러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전에 대해 모두의 의견을 물었다. 출전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고 또 찬성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이러한 찬반토론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리고 결국에는 모두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았던 것이다. 18) 한산도 해전은 임란 중에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조선 수군의 빛나는 대첩이었다. 이순 신은 해전이 있기 하루 전날 당포에서 적 함대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 밤에 예하 장수들을 불러 작전을 협의하였다. 그는 부하들의 의견 가운데 좋은 점을 취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합하여 한산도 넓은 바다로 유인작전을 구상하여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19) 이처럼 출전에 앞 서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고, 미리 약속을 반복함으로써 17) 宣 祖 實 錄, 31년 11월 27일. 18) 李 芬, 行 錄, 李 忠 武 公 全 書 卷 9, 附 錄 1. 19) 이순신의 見 乃 梁 破 倭 兵 狀 에 更 飭 諸 將 이라 했고, 또 蛇 島 僉 使 金 浣 의 壬 辰 日 錄 에는 至 唐 浦 夜 戰 密 議 라 한 것으 로 미루어 보아, 이순신이 이날 밤에 부하 장수들과 유인작전을 협의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5 해전마다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법은 예하 장수들뿐만이 아니고 동료 수사들과의 합동작전에 서도 나타났다. 한산도 해전 때 조선 수군은 3개의 함대가 참여하였는데, 이순신이 거느리는 전라좌수군, 이억기가 거느리는 전라우수군 그리고 원균이 거느리는 경상우수군이었다. 이 당 시에는 조정도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통합지휘관 제도를 아직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3개의 함대가 통합지휘관도 없이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치루기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3개 함대는 통합지휘 관도 없이 대첩을 거두었으며, 그 중심에는 바로 이순신이 있었던 것이다. 2) 연합함대의 주둔지로서 최적의 수군 기지 선정 임진년 해전에서 여수와 해남에 각각 본영을 둔 전라좌 우수군은 멀리 경상도 해역으로 출 전하여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함대가 오고 가는 사이에 적이 다시 침범하면 이에 대응하 기가 쉽지 않을뿐만 아니라, 적이 퇴각할 때를 대비하여 부산 앞바다에서 결전을 치루기 위해 서는 그곳과 가까운 거리에 함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욱이 계사년(1593) 6월 에는 충청도 수군이 참전하여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이 한 곳에 모여서 작전을 수행하기 에 이르렀다. 따라서 연합함대를 위한 전진기지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으며, 이순신은 그해 7월에 드디어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였다. 한산도는 일본 수군이 부산에서 전라도로 향 하고자 할 때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20) 있는 섬으로 실로 해상의 요충지였다. 섬 내의 두을포는 이순신이 선정한 함대의 정박지로서 바깥바다로부터 잘 은폐되어 있고, 거친 풍랑으 로부터도 안전한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곳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여 견내량을 방어선으로 삼아 일본 수군과 대치하면서 결전을 준비하였다. 한산도에 설진한 후 조정에서는 뒤늦게야 수군에 통합지휘관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해 8월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실로 한산 도 수군진은 이순신이 언급한 것처럼 거제도 내 외양을 동시에 방어할 수 있는 곳으로서 21) 이곳을 선정한 그의 군사적 혜안이 잘 드러나고 있다. 정유년(1597) 10월에 설진한 목포 앞 보화도(고하도)나 완도군 고금도의 새로운 통제영도 그 위치를 보면 수로의 요충지이면서 함대 세력을 은폐시키기에 적합한 장소로서 연합함대 통 20) 李 忠 武 公 全 書, 卷 9, 附 錄 1, 行 錄, 倭 船 之 欲 犯 湖 南 者 必 有 是 路. 21) 趙 成 都 譯 註, 壬 辰 狀 草, 34번, 陳 倭 情 狀 (서울 : 同 元 社, 1972).
16 학예지 제19집 솔을 위한 이순신의 군사적 식견이 그 장소 선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 함대의 전투 진형 및 해상 결진법 도입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투 진형으로 구사했던 함대 진형은 두 종류다. 하나는 학익진(鶴翼陣)으 로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 그리고 제2차 당항포 해전 때 사용했다. 다른 하나는 장사진(長 蛇陣)인데 부산포 해전 때 사용했다. 학익진은 오늘날의 횡렬진을 의미하고, 장사진은 긴 뱀과 같은 형태의 진형인데 오늘날의 종렬진을 의미한다.22) 고대에 군대의 진형에는 5가지의 기본진 형이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오행진으로서 방진(方陣), 원진(圓陣), 곡진(曲陣), 직진(直陣), 예진 (銳陣)이었다.23) 그런데 조선 전기의 주요 병법서로서 문종대왕이 편찬한 오위진법 에는 오행 진 외에도 6가지의 변형 형태인 장사진, 학익진, 언월진(偃月陣), 어린진(魚鱗陣), 조운진(鳥雲 陣), 각월진(却月陣)이 등장한다. 그리고 6가지의 군사훈련 시나리오가 설정되어 있는데, 시나리 오에서 사용되었던 진형은 방진, 장사진, 학익진, 조운진, 각월진 뿐이며, 이것은 모두 육군을 조련하기 위한 진형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해전에 이들 진형을 도입했으며, 특히 여러 진형 가운데 간편하고 당시에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던 장사진과 학익진을 주로 이용하였다.24) <도 1> 우수영 전진도첩의 학익진도 <도 2> 연기신편 의 학익진도 22)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兵將說,陣法, 1983, p.207. 23)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武經七書, 1987, pp.389-391. 24) 김병륜은 학익진이 중종대에 이미 수전에 적용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학예지, 제15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8, p.146). 그러나 학익진이 중종대에 수전에 도입되었다면 이후 해전 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이지만 그와 관련된 근거는 볼 수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임란 초기 해전에서 병법에 능숙한 이순신이 학익진을 이용했어야 하는데, 그도 역시 첫 출전인 옥포 해전에서 학익진으로 분명히 해석되는 공격 진형을 대열을 지어 일제히 들어갔다(整列齊進) 라 표현하고, 또 2차 출전인 사천 해전에서도 여러 배들이 그 밑으로 일제히 돌진하였다(諸船齊進其下) 라며 학익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학익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3차 출전인 한산도 해전 때부터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전투를 치르면서 육전에서 주로 이용되었던 학익진 개념을 3차 출전 때야 비로소 해전에 도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7 여기서 학익진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자. 흔히들 이순신이 구사한 학익진으로 우수영 전진 도첩(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63호)에 나오는 <도 1>의 학익진도를 들고 있다. 우수영 전진도 첩은 1780년 이후에 작성된 문건으로, 그 안에는 전라우수사가 예하 수군을 조련하기 위해 사 용했던 10여개의 진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학익진이 조선 전기부터 군사훈련의 중요 진형 으로 활용되고 임란 해전에서 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형의 모습이 조선 후기에 수군 훈련의 교범으로 사용된 병학지남 이나 병학통 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학익진의 모습이 처음 으로 드러나는 것은 1660년경에 안명로( 安 命 老 )가 저술한 연기신편 이다. 25) 그 저서에 나타 나는 학익진의 모습은 <도 2>와 같은 횡열진이며, 이것은 문종의 오위진법 에 언급된 내용 곧 4통이 모두 횡대를 취하면 학익진의 형태를 이룬 것이다 26) 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횡열진인 학익진이 공격연습을 할 때에는 키를 벌린 형세로 전환되기도 한다. 27) 따라서 이순신이 해전에서 기본적으로 구사한 학익진은 <도 1>이 아니라 <도 2>와 같은 횡열 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8) 학익진은 모든 부대가 횡대를 취하는 진형이며 일자진( 一 字 陣 )으 로도 불렸다. 29) 이순신은 함대가 출전 중일 때 야간이 되면 해상에 정박하여 어김없이 결진( 結 陣 ) 하였는데, 이때 함대의 정박진형으로 <도 3>과 같은 방진을 이용하였다. 이순신의 기록에는 함대의 정박 진형으로 방진을 사용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위진법 에 오행진은 가르치기 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방진만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 보인다. 30) 실제로 오위진법 의 열병( 大 閱 儀 ) 항목에도 기본진형은 방진이다. 31) 이 말은 임란 이전에 조선에서는 오행진 중에서 방진이 주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함대의 정박 중에 결진했 던 진형이 다른 복잡한 진형보다도 간편했던 방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란 이후에 수군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사용되었던 병학지남 의 수조정식( 水 操 程 式 )에 기본진형이 방진으로 되 어있는 것은 32) 그러한 추정을 사실로 확인시켜 준다. 이순신이 해전을 수행할 때마다 예하 장 25) 柳 在 城, 安 命 老 의 생애와 演 機 新 編 에 대하여 演 機 新 編,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0. 26)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五 衛 連 陣, 四 統 皆 橫 列 則 一 部 之 成 鶴 翼 陣 也. 27) 상게서, 陣 法, 大 閱 儀 注, 勝 敗 之 形 二, 客 軍 還 聚 作 鶴 翼 陣 爲 箕 張 之 勢. 28) 김병륜은 임란 때 학익진을 횡렬진, 우수영 전진도첩 학익진(도 1), U자형 학익진의 3가지로 추정하였으나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학예지, 제15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8, pp.148-149). 29) 戚 繼 光, 紀 效 新 書 ( 四 庫 全 書 本 ), 卷 9, 出 征 起 程 在 途 行 營 篇, 爲 一 字 陣 別 部 應. 宣 祖 實 錄, 27년 6월 2일, 顯 宗 實 錄, 8년 윤4월 13일. 30)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五 衛 連 陣, 然 敎 習 實 難 故 今 權 從 簡 便 但 敎 以 方 陣 可 也. 31)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大 閱 儀 注, 五 衛 各 成 方 陣.
18 학예지 제19집 수들과 수없이 약속을 반복했던 것은 해전의 절차는 물론이거니와 해상에서 이러한 진형들을 형성하는 절차를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 3> 일위독진의 방진도 33) 4)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운용하여 적함대의 전열 와해 돌격선은 함대의 선두에서 본진의 공격에 앞서 적선에 돌진하여 근거리에서 함포공격을 퍼 부음으로써 적의 예봉과 사기를 꺾고 교란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승조원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야하며, 거북선은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추고 있 었다. 즉 격군과 사부들이 활동하는 공간의 방패가 두꺼운 판자로 되어 있어 적의 총탄이 관통 할 수 없고, 선체 상부가 판자로 덮여 있어 승조원을 완전히 보호하며, 개판 위에 철침을 꽂아 적의 등선이 불가하게 된 점 등이다. 거북선의 이러한 강력한 방어력은 해전에서 돌격선으로 활용되기에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14문의 함포를 보유하여 그 공격력도 역시 상당하였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이 신무기를 이용하여 임진년의 여러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던 것이다. 34) 거북선이 돌격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함대에서 그 배치 위치를 보면, 해상 기동전 때는 학익진의 양 익단에 배치된다. 35) 그리고 포구의 적선을 공격할 때는 장사진 즉 종열진의 선두 에 배치된다. 거북선의 전투 진행과정은 먼저 함대의 맨 선두에서 적 함대의 기함 혹은 대선에 32) 兵 學 指 南, 卷 5, 水 操 程 式, 下 方 營 條. 33)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p.205 진도에서 전재함. 34) 李 忠 武 公 全 書, 卷 9, 附 錄 1, 行 錄, 前 後 大 小 戰 以 此 常 勝 焉. 宣 祖 實 錄, 28년 10월 27일, 龜 船 之 制, 尤 爲 要 捷, 故 賊 之 所 憚 在 此. 이러한 기사로 보아 거북선이 해전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것은 확실하다. 35) 우수영 전진도첩 의 학익진도.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19 가까이 접근한다. 선수 용머리의 입으로 현자총통의 철환을 발사하여 갑판에 노출된 적의 인명 을 살상한다. 이어서 뱃머리를 돌려 현측에 배치된 천자 지자총통으로 대장군전과 장군전을 발사하여 적선의 장수가 위치한 층각을 공격하여 파괴한다. 무력화된 적선에 아군이 올라가 잔적을 섬멸한다. 적선을 나포하거나 불태운다. 대개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36) 5) 함대 출전 시 세 차례의 나발 운용 난중일기 1593년 2월 6일의 기사에 의하면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부터 출전하면서 4경 ( 四 更, 01:00-03:00시)에 첫 나발을 불고, 날이 밝을 무렵에 두 번째, 세 번째 나발을 불며 함대 를 출항시켰다고 한다. 37) 이순신이 함대를 이동하면서 이처럼 4경에 첫 나발을 불고, 이어서 세 번 나발을 불었던 절차는 전쟁기간 내내 지켜온 그의 전술원칙이었다. 38) 그러나 이순신의 기록과 조선 전기에 간행된 우리나라의 병서에는 세 차례 나발 소리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내용 이 보이지 않는다. 39) 부대를 움직일 때 나발을 세 번 부는 전술 신호는 척계광( 戚 繼 光 )이 1560년에 편찬한 기효 신서 에 처음 등장한다. 기효신서 에 의하면 첫 번째 나발을 불면 취사병은 밥을 짓고 나머지 병사들은 짐을 정리한다. 두 번째 나발을 불면 병사들은 밥을 먹는다. 세 번째 나발을 불면 병사들은 출발하여 진을 치고자하는 곳으로 가서 주장의 명령을 기다린다. 40) 척계광이 1567 년에 편찬한 연병실기( 練 兵 實 紀 ) 에도 이와 대동소이하게 나와 있다. 41) 이순신이 임란 때 사 용했던 세 차례의 나발신호 전술도 기효신서 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세 차례의 나발신호 전술을 통하여 함대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용함으로써 군사들 이 항상 다음 행동을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에 함대가 출전할 때 세 번 나발을 부는 신호 전술이 이순신으로부 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세 번 나발을 부는 신호 전술은 조선 후기의 병서 36) 李 忠 武 公 全 書, 卷 3, 狀 啓 2, 條 陳 水 陸 戰 事 狀. 37) 亂 中 日 記, 계사년 2월 6일, 四 更 初 吹 平 明 二 吹 三 吹 放 船 掛 帆. 38) 亂 中 日 記, 계사년 2월 9일, 병신년 1월 4일, 정유년 10월 29일. 李 忠 武 公 全 書, 卷 10, 附 錄 2, 諡 狀, 必 三 吹 打 耀 兵. 39) 世 宗 實 錄, 卷 133, 五 禮, 軍 禮 儀 式, 吹 角 令 과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兵 將 說, 陣 法, 1983, 陣 法, 形 名 條 의 나발의 운용에도 세 번 부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40) 戚 繼 光, 紀 效 新 書 ( 四 庫 全 書 本 ), 卷 2, 緊 要 操 敵 號 令 簡 明 條 款 篇. 41) 戚 繼 光, 練 兵 實 紀, 卷 3, 練 耳 目, 第 三 明 喇 叭 條.
20 학예지 제19집 인 병학지남 과 병학통 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42) 6) 철저한 탐적활동으로 적을 먼저 발견하고 행동 이순신 함대는 적에게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순신이 경계태세와 탐적활동을 철 저하게 유지했었던 때문이었다. 그가 함대의 경계태세 유지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는 그의 유물로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무술년(1598) 3월의 감결( 甘 結 )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 은 진을 치고 밤을 세울 적에 일체 큰 소리로 떠들지 말 것이며, 각 배에 숙직하는 사람은 뱃머리에 네 명, 배의 뒤쪽에 네 명으로 하되 두 사람씩 번갈아 자게 하고, 무시로 조사 적발하 여 위반하는 자에게는 무겁게 처벌한다 43) 라는 것이었다. 그는 출전 때는 물론이고 본영에 있을 때도 탐적활동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적의 동향을 미리 탐지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임진년 제3차 출전의 경우, 함대의 출전이 며칠만 지연되었 어도 그는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일본 함대를 여수 본영에서 맞이하는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 다. 그러나 본영에 있으면서도 그는 탐망군을 통해 적 함선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계속 탐지하 고 있었기 때문에, 가덕도, 거제도 부근에 적 함선의 활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곧바 로 출전하였다. 그가 이렇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출전하였기 때문에 와키사카 함대를 먼저 발 견하여 결국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 는 물론이거니와 명량 해전 전후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탐망군을 철저하게 운용하여 적 함대의 이동 상황을 미리 파악하며, 해안 인근의 육지에도 정찰병을 보내 적의 동태를 파악하 고 있음을 우리는 난중일기 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상주 전투에 앞서 순변사 이일이 적정을 살피기 위한 척후를 내보내지도 않아 적이 근접한 것도 모르고 있다가 패배했고, 칠천량 해전 때는 원균이 거느리는 조선 함대가 적선이 우리 함선에 불을 던질 때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함대가 괴멸되었다. 그들은 당시에 이름있는 장수들 이라 하겠으나 이순신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군사운용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국왕 선조까지도 원균이 척후병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44) 42) 兵 學 指 南, 卷 1, 旗 鼓 定 法, 明 喇 叭 號, 旗 鼓 總 訣 條. 御 定 兵 學 通, 卷 1, 水 操, 發 哨 船, 列 營, 升 船 廳 條. 43) 李 忠 武 公 全 書, 권15, 雜 著, 約 束 軍 中 辭. 44) 宣 祖 實 錄, 30년 7월 22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1 7) 야간에 협수로 통과하여 함대 행동 은폐 해전을 수행하면서 이순신은 적도 우리 함대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정탐활동 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하여 임진년에 제4차 출전할 때는 노량해협과 견내량을 일부러 야간에 통과함으로써 함대 행동을 적극적으로 은폐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45) 이순신은 말하길 적의 꾀는 참으로 측량할 길이 없다고 했다. 46) 이 말은 그가 자신의 함대 행동을 은폐하기 위하여 얼마나 신중하게 행동했는지를 역설적으로 알 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8) 신기전을 이용한 전술 신호와 암호 운용 이순신은 옥포 해전에 앞서 척후장( 斥 候 將 )으로부터 적선 발견 보고를 받았는데, 그 신호는 신기전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항포 해전에서도 그는 역시 신기전으로 적선 발견 보고를 접수한 바 있다. 47) 신기전은 종이통으로 화약을 포장하여 만든 것인데 불을 붙이면 화약이 분 출하는 힘으로 스스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주로 화차( 火 車 )에 장전하여 사용하였는데, 화차에 서는 100발을 거의 동시에 발사할 수도 있었다. 신기전은 조선 초기부터 북방지역에서 여진족 에 대한 방어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48) 세조 때부터는 신호용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 다. 49) 조선시대에 암호는 군호( 軍 號 )라 하였으며, 도성은 물론이거니와 군중( 軍 中 )에서도 운용되었 다. 군중의 군호 운영은 군사 기밀을 유지하고 적의 침투를 차단하는데 긴요하기 때문에 군호 위반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오위진법 의 진중 군법에 의하면, 진중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고 군호를 잊어버린 자는 목을 베게 되어 있었다. 대개 용병에 있어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공격작전을 진행할 때면 혼란한 사태를 대비하고 간첩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장( 主 將 )이 군호를 내려서 병사들이 서로 맞추어 보게 했는데, 그것은 작전의 성패가 기밀유 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위진법 의 군호에 대한 진중 군법은 육군은 물론이고 수군에게도 45) 李 忠 武 公 全 書, 卷 2, 狀 啓 1, 釜 山 破 倭 兵 狀. 46) 亂 中 日 記, 계사년 6월 16일. 47) 李 忠 武 公 全 書, 卷 2, 狀 啓 1, 玉 浦 破 倭 兵 狀, 唐 浦 破 倭 兵 狀. 48) 世 宗 實 錄, 30년 12월 6일. 49) 許 善 道, 朝 鮮 時 代 火 藥 兵 器 史 硏 究 (서울 : 一 潮 閣, 1994), p.115. 世 祖 實 錄, 1년 10월 20일.
22 학예지 제19집 그대로 적용되었다. 군호는 대개 암기하기 쉽도록 알기 쉬운 글자를 택하였다. 임란 때 전라좌 수사 이순신이 첫 출전하면서 발령한 군호는 용호( 龍 虎 ) 였으며, 복병에게는 그 중요성을 감안 하여 별도로 산수( 山 水 ) 로 정하였다. 50) 이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중요한 군사 운용의 시기마다 암호를 발령했음을 알 수 있다. 9) 유인작전과 위계책( 僞 計 策 )으로 원하는 장소에서 전투 수행 임진년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이어 승리하면서 일본 수군은 전투 중에 불리하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상륙하거나 혹은 포구에 깊숙이 정박하여 육지를 배경으로 우리 수군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일본 수군의 이러한 대항에 맞서 이순신은 유인작전으로 그들을 넓은 바다로 끌어 내어 섬멸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사천 해전에서는 해안 육지로부터 조총으로 대응해오는 일본 수군들을 바다로 유인하기 위하여 함대를 일시적으로 후퇴시키며, 결국은 포구의 적선들을 적 극적으로 공격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당항포 해전에서는 우리의 포위망 한 곳을 터서 적선이 넓은 바다로 나오도록 유인하여 이를 섬멸함과 동시에, 한 척의 적선을 살려두어 육지로 상륙 한 적들이 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는 것을 기다려 역시 이를 섬멸하였다. 한산도 해전에서는 치밀한 유인전술로 일본 함대를 견내량의 좁은 수로로부터 한산도 넓은 바다까지 끌어내어 이 를 섬멸하였다. 특히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의 유인전술은 마지막 단계에 적전에서 180도 회 전이라는 위험하고도 어려운 기동을 성공시켜 결국은 그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전술로 적 을 섬멸할 수 있었다. 10) 전과 확대를 위한 함대 병사의 상륙 금지 원칙 준수 이순신은 해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육지로 달아난 적을 추격하기 위하여 함대 병사들을 상륙 시키지 않았다. 별도의 해병을 탑재하지 않은 함대가 그 수군 병력을 육상 전투에 투입할 때, 그 함대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며, 함대의 가치도 상실하게 된다. 즉 각개 함정 의 전투력이 극히 약화되며 기동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임진년의 여러 해전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한산도 해전에서 공훈을 탐내어 패전하여 한산도에 상륙한 수백명 적군들의 수급을 획득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풀어 상륙시키지 않았던 것은 그 좋은 예라 하겠 50) 亂 中 日 記, 임진년 5월 2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3 다. 그는 함대 지휘관으로서 함대전투력 보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적의 함선을 격파하 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자 지상의 과제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침략 초기에 조선 함대를 색출 격멸시켜야 할 일본 수군들이 상륙하여 육전에 참여했던 것과 좋은 대조가 된다. 2. 수군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위 이순신의 난중일기 와 장계에 의하면, 임란 당시 조선의 군선은 판옥선, 거북선, 협선, 포작 선( 鮑 作 船 )이 있었다. 이들 군선 중 임란기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행사했던 선박은 판옥선과 거북선이었다. 판옥선은 3층으로 구조된 함선이다. 조선 초기의 맹선이 하나의 갑판을 갖는 평선( 平 船 )인데 반하여, 판옥선은 상장(판옥)을 설치하여 갑판을 이중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투원과 비전 투원을 분리하여놓고 비전투원인 격군(노군)을 상장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맹선 에서는 전투원인 수군 병사와 노젓는 격군이 같은 갑판 위에서 활동하였는데, 판옥선에서는 판옥 안에 격군이 자리잡고 이들은 적에게 노출됨이 없이 노역에만 전념하며, 병사들은 상갑판 위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선체가 커 전투원들이 높은 곳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었 고, 적이 접근해서 배 안에 뛰어들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판옥선의 이러한 구조 특징 때문에 일본군의 장기인 등선백병전( 登 船 白 兵 戰 ) 51) 을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은 실로 이 판옥선의 우수한 전투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거북선은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창제한 돌격선이 다. 거북선의 구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판옥선 위에 개판을 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개판 위에는 쇠못을 꽂아서 적의 등선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격군이나 방포장(화포장), 사부( 射 夫 ) 등 승조원들이 모두 선체 내부의 보호된 곳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당시 로서는 대단히 많은 14문의 천 지 현 황자총통을 탑재하여 화력이 막강하였다. 52) 이와같은 거북선의 장점은 함대의 선두에서 돌격작전으로 적 함대의 예봉을 꺾는데 적합하였다. 임진년 51) 해전에서 적선에 서로 올라타서 벌이는 전투를 boarding tactics라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접현전 (오붕근), 근접백병전 (장학근), 등선육박전 (이민웅), 등선백병전 (제장명) 등으로 부르고 있다. 육박전은 몸으로 부딪혀 싸운다는 의미이고, 백병전은 칼 창 등 백병으로 육박전을 치르는 것을 말하므로 필자는 등선백병전 을 취한다. 52) 趙 成 都, 거북선에 對 한 小 考, 海 軍 大 學 論 集 제6권, 제1호, 1964, p.87.
24 학예지 제19집 해전에서 거북선은 3척이 활약했으며, 을미년(1595)에는 5척으로 증강되었다. 한편, 임란 해전에서 활약했던 일본 군선은 아다케( 安 宅 ), 세키부네( 關 船 ), 고바야( 小 早 ) 세 종류가 있었다. 아다케는 그 크기를 노의 숫자로 말한다면 1-2명이 젓는 노가 적게는 40개에서 많게는 100개가 있었다. 세키부네는 빠른 속력을 얻기 위하여 뾰족한 선수와 날렵한 선형으로 되어 있는 군선이며, 40-80개의 노를 장비하였다. 고바야는 대체로 노가 14-30개인 작은 군선 으로 전투보다는 주로 척후나 연락을 위해 사용된 군선이었다. 53) 이순신은 일본 군선을 대선, 중선, 소선으로 분류하였는데, 소선은 고바야를 중선은 세키부 네를 가리킨 것이 확실하나, 대선은 모두 아다케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대선 가운데서도 특별히 층루선, 층각대선, 층각선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아다케로 추정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대선 가운데는 세키부네도 포함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세키부네 가운데 노수가 많은 것은 아다케와 규모가 비슷했다. 그러므로 임란 해전에서 조선 함선과 대적하는데 주력선으로 활약한 것은 아다케와 세키부네였다. 판옥선과 아다케의 전투 력을 비교해보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임진년 해전에서 조 일 주력 함선의 전투력 비교 54) 구분 판옥선 아다케 선체 두꺼운 판자로 된 평저형 선체로 선회가 자유로우며 아다케보다 크다. 얇은 판자로 된 첨저형 선체로 속력은 빠르나 판옥선에 비해 선회반경이 크다. 승조원 125-130여명 90여명 속력 3노트 3노트 이상 주 병기 천자,지자,현자,승자 총통 (장군전,피령전,철환 발사), 활(장 편전 발사) 조총, 활 보조 병기 창, 칼, 질려포, 대발화 창, 칼 돛 운용 순풍은 물론 역풍도 이용 순풍만 이용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판옥선의 전투력은 아다케에 비해 속력만 열세일 뿐 다른 요소들 은 우세하다. 판옥선은 선저가 평평하고 속력이 약간 느린 대신 제자리에서 선회할 수 있는 기동성능이 아다케에 앞선다. 또한 두꺼운 판자를 쓰기 때문에 방어력이 좋으며, 승조원 수도 53) 金 在 謹, 壬 辰 倭 亂 中 朝 日 明 軍 船 의 特 性,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海 軍 軍 史 硏 究 室, 1993. 54) 鄭 鎭 述, 閑 山 島 海 戰 硏 究, 壬 亂 水 軍 活 動 硏 究 論 叢, 海 軍 軍 史 硏 究 室, 1993, pp.191-192.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5 아다케보다 많아 전투력이 강했다. 다만 판옥선의 속력이 아다케에 뒤지고 있으나 임진년의 해전에서는 이 점이 큰 결함사항으로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피아 함대가 조우하여 접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속력보다는 오히려 선회기동성이 더 중요시되며, 또한 적을 추격하는 경우가 아니면 느린 속력이 치명적인 결함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옥선의 경우 비록 속력 은 빠르지 않았지만, 돛의 장점이 있어 역풍에도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역풍에는 전혀 돛을 이용할 수 없는 일본선의 단점과 서로 상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임진년 해전에서 속력의 결함이 결코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아다케는 첨저형 선체와 가벼운 판자 구 조로서 속력은 빠르지만 대신 선회반경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회전이 판옥선 보다 신속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돛이 비효율적이어서 순풍이 아니면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록 속력이 빠르다 하지만 원거리 항해 시에는 노만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반 드시 순풍을 기다려야 하는 취약점이 있었다. 특히 판옥선은 일본 함선에 없는 55) 화포를 장착하여 화력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하였 다. 일본 함선은 주병기가 조총인데, 그 사정거리는 100-200m였으나 실전에서는 50-60m 내외 에서 운용되었고, 56) 또 3발 이상 계속 발사할 수도 없었으므로 57) 해전에서는 화살과 거의 대 등한 위력밖에 보이지 못했다. 반면에 우리 함포의 발사거리는 200보(약 240미터, 1보=주척 6자=약 1.2미터)였고, 58) 궁노( 弓 弩 )의 발사거리도 역시 200보에 이르렀다. 59) 결국 일본 함선들 의 최선의 공격술은 근접 계류하여 검술로서 선체를 점령하는 방법인데, 이것마저도 판옥선의 선체가 높기 때문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Ⅳ.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역사적 의의 1. 일본의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킴 일본은 조선 침공을 준비하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그렇기 55) 宣 祖 實 錄, 29년 12월 21일. 56) 參 謀 本 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 附 記 ) ( 東 京 : 偕 行 社, 1924), p.7. 57) 宣 祖 實 錄, 26년 1월 7일. 58) 兵 學 指 南, 卷 5, 水 操 程 式, 看 賊 船 先 用 火 器 第 十 一. 59) 肅 宗 實 錄, 41년 3월 3일.
26 학예지 제19집 때문에 초기 침공작전에서 그들 수군이 육전에 참가하는 상식밖의 일이 진행되었고, 따라서 처음에는 수륙병진작전을 구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연패당 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임진년 6월에는 서울에 있는 전선사령부에서 육전에 참가하고 있던 와 키사카 야스하루( 脇 坂 安 治 ) 등의 수군들을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들을 격파 하고 해로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식량과 군사들을 서해로 북상시켜 당시 평양을 점령하고 있 던 고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의 북진을 지원하는 수륙병진작전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60) 평양 을 점령한 직후 고니시가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내 일본의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해로부터 올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대왕의 행차는 이로부터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61) 라 했던 데서 그들의 수륙병진작전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한산도, 안골포 해전 등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승리함으로써 그들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절되었다. 더욱이 임진년 9월에는 조선 수군에게 부산포까지 공격을 당하게 되어, 서울에 있는 전선사령부에서는 본국으로의 퇴로와 병참선으로서 부산 교두보에 대한 위기 의식이 팽배하였을 것이다. 해전의 패배로 초래된 이러 한 위기 상황은 일본군이 그들의 조선 점령 전략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평양전투의 패배 후 강화협상을 빌미로 서울 점령도 포기하고 동남 해안 지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2) 정유재란 때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우리 수군의 견내량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 수군이 승승장구하여 그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전라도 남해안을 석권하 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수륙병진작전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여 호남지방을 유린할 수 있 었다. 이때 만일 일본 수군이 남해를 지나 서해로 북상하여 계속 진격할 수 있었다면 순식간에 한강은 물론이거니와 대동강과 압록강 하구까지 도달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이 조성되었다면 조선이나 명에게는 큰 재앙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는 일본군이 출현했다는 소문만 있어도 인근의 민 관 기능이 마비되는 실정이었으므로 조선 서해안에 일본 수군이 횡행한다면 중국군의 내원도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 60) 국립진주박물관, 프로이스의 일본사 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3, pp.219-220. 朴 哲, 세스뻬데스-한국 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p.291. 李 重 煥 著, 李 翼 成 譯, 擇 里 志 (서울 : 을유문화사, 2000), pp.79-80. 61) 柳 成 龍 著, 金 鍾 權 譯 註, 新 完 譯 懲 毖 錄 (서울 : 明 文 堂, 1987), p.129. 62) 유성룡은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한 것은 심유경이 고니시에게 명군이 서해로부터 충청도에 들어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려한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이라 했다( 金 鍾 權 譯 註, 상게서, p.260). 그러나 연이은 해전의 패배가 더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朴 哲, 세스뻬데스-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pp.296-297).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7 이다. 다행히 명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승리함으로써 그러한 위기 상황은 도래하지 않 았고, 명군의 지원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되어 결국은 일본군을 다시 동남 해안지역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실로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일본의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켰다고 보 지 않을 수 없다. 임란은 일본군이 침략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승리한 전 쟁이었다. 63) 그렇더라도 우리의 전 국토가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무려 5만명 이상이 64) 적에게 잡혀간 실상으로 볼 때,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하겠 다. 특히 육전에서는 몇몇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전연패하였으며, 결국은 침략군 의 주요 장수와 다수의 군사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것은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차제에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빛나는 활약과 완승에 가까운 위업은 임란 전쟁을 우리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의미있는 쾌거라 하겠다. 2. 수군 명장의 역사적 계보가 이어짐 임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등장과 그의 위대한 활약은 우리 민족이 면면히 이어 온 수군 명장 의 계보가 이어졌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일찍이 삼국시대에도 수군장으로 활약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확연히 다가오는 첫 번째 수군 명장은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아닌가 한다.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은 활발하게 해양으로 진출하여 수군장으로서 장보고라는 큰 인물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장보고 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동북아시아의 국제 교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결국 해상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옴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찬란한 해양의 시대를 열 었던 인물이다. 그러기에 그를 일컬어 해상왕 혹은 해양상업제국(maritime commercial empire)'의 무역왕(merchant prince) 이라 하였다. 65) 장보고에 이은 수군 명장으로 우리는 주저없이 고려 태조 왕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왕건은 태봉의 해군 대장군 으로서 궁예의 명을 받아 여러 차례에 걸쳐 함대를 거느리고 송악을 출발 하여 멀리 나주까지 원정하였다. 태봉은 나주를 두고 오랫동안 후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 63) 許 善 道, 壬 辰 倭 亂 의 再 照 明, 第 二 回 國 際 海 洋 力 심포지움 發 表 文 集, 대한민국해군 해군해양연구소, 1991, pp.19-26. 64) 朴 哲, 세스뻬데스-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p.259. 65) Edwin O. Reischauer, ENNIN'S Travels in Tang China, New York : The Ronald Press Co., 1955, pp.287-294.
28 학예지 제19집 는데, 왕건이 거느리는 태봉 수군이 덕진포 해전에서 견훤의 후백제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결국 태봉이 나주를 장악하게 되었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태봉은 후백제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하 였고, 예성항에서 서남해를 거쳐 강주(진주)와 경주까지 이르는 해상무역로를 확보함으로써 태 봉의 경제적 기반은 더욱 충실해질 수 있었다. 나주 원정과 덕진포 해전은 왕건이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론하기 어렵다. 왕건은 궁예 정권의 나주 공략을 주도하여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성공은 그의 뛰어난 지휘통솔력, 함대 운용 술, 그리고 해전술의 능력 덕분이라 할 것이다. 특히 장거리 해상 원정이 가장 어렵고도 실패할 확률이 높은 공격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백제의 정예수군을 격멸하였던 것은 왕건이 비 범한 수군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장보고 이후 우리 민족의 해상활약의 전통을 계승한 위대한 수군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66) 고려는 11세기에 동여진 해적으로부터의 도전을 바다에서 슬기롭게 물리쳤으나 14세기에 도 전해 온 왜구에 크게 시달린 끝에 결국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다. 왜구가 침입해 온 초기에는 육지에서 이를 방어하기에 바빴으나 결국은 수군을 건설하여 바다에서 격퇴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수군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임란 해전에서 이순신이라는 수군 명장의 등장 은 한국 해양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이러한 수군의 전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러 한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해양으로부터의 도전 때도 반드시 새로운 명장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3. 왜구의 종식과 해상의 평화 도래 조선 왕조의 초기 임금들은 수군제도를 확립하고 군선을 비롯한 수군 군비를 강화하여 강경 책과 유화책을 동시에 써서 드디어 세종대에는 왜구를 근절하게 되었다. 그후 16세기 중종 명 종대에 이르러서 왜구가 다시 본격적으로 준동하였고, 허약해진 조선의 해방( 海 防 ) 체제는 이 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였다. 1592년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왜구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 임란 전 쟁은 명의 지원과 우리 의병들의 활약 그리고 조선 수군의 대응으로 결국 일본군을 격퇴시켰 다. 임란 이후 왜구는 완전히 종식되었고 해상의 평화가 도래하였다. 왜구가 종식된 것은 도요 66) 鄭 鎭 述, 한국해양사(고대편), 해군사관학교, 2009, pp.306-321.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29 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에 해적정지령( 海 賊 停 止 令 )을 내리고, 또 1589년에 바한( 八 幡 )을 금지 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67) 그렇지만 왜구의 종식에는 일본의 이러한 국내 사정뿐만 아니라 임 란 해전에서 그들의 철저한 패배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 수군이 비록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을 한번 격패시키긴 했어도, 7년 동안 이순신 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게는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무려 570여척 이상의 엄청난 함선이 격파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실로 임란 이후 왜구 가 멈춘 것은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의 한 전사가는 임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승리는 이후 300년 동안 일본의 전투함대 작전을 종식시켰다고 했던 것이다. 68) 4.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이 해전술의 기본화 군함에 포를 탑재한 가장 이른 시기는 1358년으로 영국 왕실 문헌에 나타난다. 그후 1488년 에 영국은 국왕 헨리 7세의 명령으로 2척의 대형 군함을 건조하여 각각 180문의 포를 탑재하였 는데, 69) 이 당시의 함포는 적에게 폭발에 의한 피해를 주는 대포라기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소 총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었다. 70) 유럽에서의 함포는 15세기까지도 갤리(galley)선의 선수와 선 미에만 탑재되었다. 71) 선체 측면에 포문을 만들어 대포를 발사하는 혁명적 방식은 영국이 1514년에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이 범선은 갈레온(galleon)선으로 발전되었다. 72) 현측포를 탑재한 갈레온선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함대 전투진형을 종열진(line-ahead formation)으로 형 성하여 현측 일제사격으로 공격하는 해전술을 탄생시켰고, 1545년에는 현측포에 의한 함포사 격이 영국과 프랑스 간의 쇼어햄(Shoreham) 해전에서 처음으로 발생하였다. 73) 이후 이 현측 일제사격 전술은 갤리선의 등선백병전( 登 船 白 兵 戰, boarding tactics)을 서서히 밀어내고 범선 67) 윤성익, 명대 왜구의 연구 (서울 : 경인문화사, 2007), pp.184-187. 68) G. A.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New York : E. P. Dutton & Co., 1921), p.65, 69) 有 馬 成 甫, 火 砲 の 起 原 とその 傳 流 ( 東 京 : 吉 川 弘 文 館, 1962), pp.459-460. 70) 金 州 植, 世 界 史 와 海 洋 活 動 의 關 係 ( 上 )- 古 代 에서 英 佛 戰 爭 까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1992, p.261. 71) Trevor N. Dupuy, The Evolution of Weapons and Warfare (Indianapolis/New York : The Bobbs-Merrill Company, Inc. 1980), p.117.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전쟁의 역사Ⅰ (서울 : 책세상 출판사, 1996), p.342. 72) 프랑코 지오게티, 에린 아브란슨 엮음, 안진이 옮김, 범선의 역사 (서울 : 위즈덤하우스, 2007), p.54. 73) S. W. Roskill 原 著, 李 允 熙 權 復 寅 共 譯, 海 洋 戰 略 (서울 : 淵 鏡 文 化 社, 1979), pp.23-38.
30 학예지 제19집 시대 내내 유럽에서 해전술의 기본이 되었다. 유럽에서 이와 같은 해전술의 발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해전술의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1380년에 진포 해전에서 화포를 탑재한 고려 함선이 정박 중인 왜구 함선을 공격하여 이를 격멸하였고, 1383년에 관음포 해전에서는 47척의 고려 함대가 함포를 이용한 해상기동전투로 120척으로 구성된 막강한 왜구 함대를 섬멸하였다. 74) 그러나 이무렵의 해전은 교범화된 전투 진형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해전술은 집단적으로 무턱대 고 싸우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10년의 삼포왜란이나 1555년 을묘왜변 등 여러 사 변에서도 조선 수군이 전투 진형을 해전에서 구사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 까지도 수군의 체계적인 전투 진형에 의한 해전술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75)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체계적인 해전술을 구사한 것은 임란 때 이순신에 의해서였다. 잘 알 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 학익진(횡열진)과 장사진(종열진) 그리고 방진(사각진)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범선시대에 유럽의 해군이 갈레온의 현측포를 이용한 일제사격을 위하여 종열진을 주로 사용했다면, 이순신은 전투에서 횡열진(학익진)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가 횡열 진을 자주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 주전투함인 판옥선은 일본 함선에 비해 선수가 매우 넓어 선수에 전투원과 화력을 적선보다 상대적으로 다수 배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므 로, 선수끼리 먼저 서로 마주치게 되는 당시의 해전에서 전투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는데 매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 조선 말기까지 판옥선의 넓은 선수가 좁혀지지 않고 계속 이 어진 것은 우리나라 선박의 전통성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해전에서 그와 같은 유리한 점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전술의 발전적 측면에서 볼 때, 횡열진보다는 종열진 에 의한 현측 일제사격술이 화력의 집중면에서 유리한 것은 분명하다. 어떻든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술은 조선 후기의 수군 훈련 교범인 병학지남 이나 병학통 에 계속 이어졌다. 5. 장갑선이 해전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장갑선( 裝 甲 船 ) 은 철갑선 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나 철갑선이 선체 를 쇠로 덧씌운 의미를 갖는 반면에 장갑선은 쇠 혹은 나무와 같은 딱딱한 껍데기로 덮어 씌웠 74) 강성문, 여말 선초 전술변화와 외교정책,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제2권 제1호,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 1995, pp.126-130. 75) 단순히 함선들을 좌우로 나누어 싸웠다는 기사가 보일뿐이다( 중종실록, 18년 6월 1일, 20년 9월 22일).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31 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므로 76) 두 용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임란기 거북선이 철갑선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 하겠으나, 드러난 사료 들을 살펴보건대 철갑선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거북선을 직접 고안하고 만든 이순신이 등에 쇠못을 꽂았다( 背 植 鐵 尖 ) 했고, 77) 거북선을 직접 보았던 그의 조카 이분( 李 芬 )도 위를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칼과 송곳을 꽂았다( 上 覆 以 板 揷 以 刀 錐 ) 했다. 78) 이러한 1차 사료들에 나타난 엄연한 사실들을 무시하고, 일본측 문헌인 고려선전기( 高 麗 船 戰 記 ) 에 철로 요해( 要 害 )되어 있었다는 내용이나 조선 후기의 몇몇 자료를 가지고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판단하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사실 진정한 철갑선은 19세기 중엽에 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하였다. 우리가 세계사적인 시각으로 군함의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16세기의 동양에서 목선에 약간의 쇠붙이를 가미한 것을 철갑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순신의 거북선이 당시의 일반 전선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장갑선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당시에 모든 승조원을 쇠못으로 덮인 판자로 방호된 내부에서 활동하게 하는 전선을 창안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해전사적 측면에서 16세기는 중요한 변화 의 시대였다. 서양에서는 갤리(galley : 노선)-갈레아스(galleass : 범노선)-갈레온(galleon : 범 선)으로 함선이 변화되고, 해전술도 등선백병전에서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로 변화되고 있었 다. 그리고 동양에서도 임란 해전에서 보는바와 같이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으로 변화되고 있었 다. 그런데 함포기동전에서 돌격선으로 적함대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은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승조원을 쇠못을 꽂은 판자로 방호된 선체 내부에 안전하게 보 호하여 함대의 선두에서 겁 없이 적함대로 돌격하여 함포를 발사하는 거북선의 출현은 획기적 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시기에 서양에서는 거북선과 같은 장갑선의 출현이 없었다는 것도 의미있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원균이 지휘했던 칠천량 해전에서 한번 패전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하였다. 승리한 해전은 모두 이순신이 그 지휘관이었다. 동일한 무기와 군대를 거느 76) 申 采 浩, 朝 鮮 史, 第 1 編, 總 論, 거북선은 목판으로 꾸미고, 철판으로 함이 아닌듯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鼻 祖 라 함은 가하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불가할 것이다. 77) 李 忠 武 公 全 書, 卷 2, 狀 啓 1, 唐 浦 破 倭 兵 狀. 78) 상게서, 권9, 부록1, 行 錄.
32 학예지 제19집 리고 치른 해전에서 지휘관의 차이가 승패를 결정지었다는 것은 지휘통솔의 중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원인을 분석한 결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통솔력과 해전술 그리고 수군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위를 들 수 있다. 먼저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통솔력과 해전술이다. 그는 출전에 앞서 부하 장수들과 협의하여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모두가 한마음으로 싸우도록 여건을 조성하였고, 연합함대의 주둔지로서 한산도나 고금도 등과 같은 최적의 수군 기지를 선정하였으며, 육전의 훈련교범에만 나와 있던 학익진과 장사진 그리고 방진을 처음으로 함대의 전투 진형에 도입하였다. 또한 거북선이라는 신무기를 개발하여 돌격선으로 운용함으로써 해전 초기에 적함대의 전열을 와해시켜 승리하였 고, 함대가 출전 때는 세 차례의 나발을 운용하여 군사들에게 행동의 여유를 주고 다가오는 사태에 미리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철저한 탐적활동으로 적을 먼저 발견함으로써 적에게 기습 을 허용하지 않고 필승의 대응책을 미리 강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작전에 임해서는 야간에 협수로를 통과하여 함대의 행동을 은폐하며, 척후선이 적선 발견을 신기전으로 보고하 게 하고, 암호를 운용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으며, 유인작전을 구사하여 아군이 유리한 장소와 시간에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승리한 후에는 전과확대를 위해 우리 수군을 상륙시켜 적의 수급을 획득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을 회피하는 원칙을 준수하였다. 다음으로는 우리의 수군 무기체계가 상대적으로 우세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천 지 현 황자 총통과 같은 대포를 탑재한 우리의 판옥선과 거북선이 대포가 없이 조총만으로 무장 한 일본 함선을 화력과 선체 크기에서 압도함으로써 일본 수군의 장기인 등선백병전을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임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 의의는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의한 조선 점령 전략을 와해시켰고, 명장 이순신의 등장으로 장보고 왕건에 이어지는 수군 명장의 역사적 계보가 이 어지게 되었으며, 왜구를 종식시키고 이후 3세기 동안 해상의 평화가 도래하게 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순신이 구사한 함포를 이용한 기동전술은 조선 후기에도 해전술의 기본이 되었고, 거북 선과 같은 장갑선이 해전사의 무대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끝.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3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서울 신청사 발굴 유물을 중심으로 - 박 재 광** 목 차 1. 머리말 2.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화기와 운용 3. 서울 신청사 발굴 유물의 성격 1) 佛 狼 機 子 砲 2) 勝 字 銃 筒 3) 箭 鏃 및 鐵 羽 4) 盈 字 銃 筒 5) 철환 4. 맺는말 1. 머리말 1)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의 보유와 끊임없는 군사훈련이 나라를 지키는 要 諦 임을 인식하고 무기 개발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에서는 병력의 규모라든가 전략과 전술, 충분한 물자의 조달, 그리고 훈련된 병사와 장 수의 통솔력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 개개인에 게 지급되어야 할 무기였다. 무기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얼마나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개발했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했다. 역대 전쟁에서 무기가 전쟁의 상황을 결정했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유 에서 우수한 무기의 보유와 뛰어난 성능은 한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구경하고자 원했던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 *이 글은 이전의 작성된 본인의 논문을 토대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보완하여 재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
34 학예지 제19집 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관람하는 觀 射 요, 둘째는 화약을 이용하여 형형색색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觀 火 이고, 셋째는 금수강산의 대명사인 금강산 관광이다. 이 세 가지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천하제일의 명기이자 자랑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들 관 람을 국가 안보와 관련해 엄격히 제한했고, 외국 사신들은 이들을 구경하고자 했으며, 한 가지 구경만으로도 외국 사신들은 최고급 대우로 여겼던 것이다. 이 중에서 관사와 관화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무기이자 호국병기로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에 대한 시범을 통해서 조선의 국방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특히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 명 일 삼국이 화약병기를 주요 전투무기로 삼아 벌였던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조총으로 무장된 15만여 명의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서울을 함락 당하고, 평안 함경도까지도 유린당하는 등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전쟁 이전까지 조 명 일 삼국 가운데 있어서 무기체계의 발달에 있어서는 명나라에 버금가는 상황이라고 자처해 오던 조선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로소 무기 후진국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전투 에서 연속적으로 패함으로써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勝 字 銃 筒 別 勝 字 銃 筒 大 勝 字 銃 筒 中 勝 字 銃 筒 小 勝 字 銃 筒 등의 소화기와 天 字 銃 筒 地 字 銃 筒 玄 字 銃 筒 黃 字 銃 筒 別 黃 字 銃 筒 등의 화포를 장비하고 있었 다. 그러나 소화기인 총통들은 일본의 화기인 鳥 銃 과 화약병기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 성능 면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조선의 화기가 화약선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식인 指 火 式 화약병기인데 반하여 조총은 발사장치에 의해 불을 붙이는 방식의 火 繩 式 화약병기이기 때문 에 성능과 운용에 있어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측의 관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승군의 활약, 수군의 해상권 장악, 명의 원병에 따른 합동 반격작전을 통해서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다. 아울러 조선 은 육전에서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조총의 제조 기술을 도입하고, 이에 상응하는 대응 전술로 맞서는 것이 최상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선 다급한 戰 局 타개에 진력하여야 했기 때문에 바로 대책이 마련되지는 못하였고 상당기간 동안 종래의 화기를 수급 활용하면서 저항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11월, 서울시 신청사 건물 부지(중구 태평로1가 31)에서 불랑기를 비롯한 보물급으 로 평가되는 임진왜란 이전 각종 무기류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각종 무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5 기류를 제작하던 관청인 軍 器 寺 관련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불랑기 자포 1점과 승자총통 다수, 장군전 촉 날개, 철환(둥근 쇳덩 이), 철촉 등 다량의 철제 화약무기이고, 특히 불랑기자포는 현재 보물 제861호로 지정돼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인데다 출토지가 확실해 최근에 보물 861-2호로 지정되었다. 본고에는 이들 발굴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이 사용했던 유물과 비교 분석하여 발굴 유물의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조선 중기의 무기체계의 실상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2.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화기와 운용 당시 조선군은 육지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밀려 연전연패를 거듭해 전국토의 70%가 일본군 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 었던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무기체계 상의 우위라 할 수 있다. 이는 화기의 보유량보다도 화 기의 성능과 전술의 차이가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군의 화기 보유에 대해서는 몇몇 문헌에 등장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신부의 기록인 선교사들의 이야기 (1601, 루이스 데 구스만 著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니시는 20,000명의 전투원과 함께 총 643척의 크고 작은 배에 편승하여 쓰시마섬을 출발 하였다. 특히 부산성이라고 불리는 요새는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첫 관문인 관계로 그곳에는 600여 명의 병사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마을에서 모은 평민들이 있었다. 연도에는 모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끝이 뾰족한 쇠들을 뿌려 놓았으며, 요새 내부에는 구리로 만든 작은 화포들이 2,000개나 배치되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작은 포환을 발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크기가 두 뼘 정도 되는 화살촉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1) 이 기록을 통해서 부산진성전투에서 참여한 조선군은 활과 화살, 그리고 개머리판이 없는 1) 박철, 1999, 서구인이 본 임진왜란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진주박물관, pp.81~82에서 재인용.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도 당시 부산진성에는 천 개 이상의 소형 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역, 1977, フロイス 日 本 史 2, 中 央 公 論 社, p.221)
36 학예지 제19집 소형 총통 2,000개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총통은 무쇠 탄환과 일부는 화살을 발사하였다. 2) 이어 벌어졌던 동래성에도 6문의 대포와 수많은 화전 화약통 그 밖의 많은 물 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는 기록이 있다. 3) 또 서애문집 에는 임란 발발 직전 중앙의 군기시에 天 字 地 字 玄 字 黃 字 銃 筒 과 각종 소형화 포, 勝 字 銃 筒 등이 비치되어 있음을 기술하고 있고, 4) 김성일의 鶴 峰 集 에 기술된 진주성 전투 에 대한 書 狀 에도, 김시민이 진주성전투 이전에 염초 510근을 비롯하여 조총, 각종 병기 등을 준비하였고, 실제 전투에서 玄 字 銃 筒, 飛 擊 震 天 雷, 蒺 藜 砲, 大 岐 箭, 火 鐵, 菱 鐵, 弓 弩, 大 弓 등 을 사용했다고 나와 있다. 5) 이렇듯 조선 중앙의 군기시를 비롯하여 지방의 병영에는 상당수의 화기가 비치되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중앙의 군기시에 비축되어 있던 여러 가지 화기와 27,000여 근의 화약은 백성들의 焚 燒 로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고, 지방의 경우에 도 지방관이 적을 만나 본영을 굳게 지키면서 항전한 경우가 적었던 관계로 화기가 제대로 쓰 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전라도 좌수영 등 수군과 왜군의 공격이 미치지 못했던 청천 강 이북의 안주, 영변, 의주 등지에서는 화차를 비롯하여 각종 화기가 비축되어 있어 6) 이를 적극 활용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화약병기는 勝 字 銃 筒 次 勝 字 銃 筒 大 勝 字 銃 筒 中 勝 字 銃 筒 小 勝 字 銃 筒 別 勝 字 銃 筒 小 銃 筒 雙 字 銃 筒 등의 소형 화기와 天 字 銃 筒 地 字 銃 筒 玄 字 銃 筒 黃 字 銃 筒 別 黃 字 銃 筒 등의 대형 화포가 있다. 이처럼 조선군이 장비한 화기는 그 종류가 다양하였고, 사거리도 비교적 길었음을 알 수 있 다. 다만 화기 발달의 초기단계인 지화식 화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조준 사격이 불 가능하였으며 명중률도 낮았다. 또한 총통의 규격이 통일되지 못함에 따라 제작 및 운용에 있 어서 많은 혼동을 초래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요인들은 총통을 운용하는데 커다란 제약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조선군은 소총에 있어서는 적인 일본이 비해서 성능의 열 2) 오만 장원철 역, 2003,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국립진주박물관, p.194. 3)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역, 앞의 책, pp.223~224. 4) 서애문집 권16, 잡저 記 鳥 銃 製 造 事 5) 학봉선생문집 권3, 馳 啓 晋 州 守 城 勝 捷 狀 ( 成 均 館 大 大 東 文 化 硏 究 院, 1972) 6) 징비록 권7, 계사록.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7 세를 보였고, 화포에 있어서는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7) 이는 전투에서의 승패로 나타났다. 특 히 화포류에 있어서는 조선군이 장비한 총통의 성능이 우수했는데, 이는 명종 때부터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대형화기의 개발에 주력한 덕분이다. 8)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운용하던 거 북선과 판옥선에는 위에서 언급한 각종 대형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조선군은 이러한 화포를 바탕으로 하여 해전에서 일본군에 전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이 중 소형선 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舷 을 붙이고 白 兵 戰 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선박의 전후좌우에 각종 화포를 장착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화포를 바탕으로 한 포전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군이 사용한 대형 화포는 일본군이 장비한 조총에 비해 그 사거리가 월등히 앞선 관계로 접근하지 않은 상 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무기체계상의 우열 못지않게 작용한 것이 전술적인 운용 문제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조선군은 다양한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비축량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에 연패를 거듭하게 되는데 그 요인은 화기 운용 전술의 부재가 아닌가 한다.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의 화기를 이용한 보병 전술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유성룡이 후에 조선군의 장수들이 일본군의 전술을 정확하게 인식치 못하 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할 만한 전술[ 陣 法 ]을 익히지 못하였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9) 당시 조선은 화기가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전술의 개발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단순히 화기를 접하지 못한 野 人 들에게 피상적으로 운용하던 것에 만족하였다. 따라서 소규모의 왜구 침입에서도 전국이 뒤흔들리는 양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임진왜 란 때에는 초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소형화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먼저 화약과 발사 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는 방식의 指 火 式 火 器 라는 점이다. 이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鳥 銃 [ 鐵 砲 ]에 비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성능이 한 단계 낮은 화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준 사격보다는 일단의 밀집 대형을 이룬 적에게 지향사격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번째는 형태상 구경은 작아지고 총신은 상대적으로 7) 박재광, 1996, 임진왜란기 조 일 양국의 무기체계에 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6, 한일관계사학회, p.43. 8) 허선도, 1994,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9) 서애문집 권, 잡저 戰 守 機 宜 十 條.
38 학예지 제19집 길어졌으며 죽절이 많고, 기존의 화기와는 달리 격목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토격형 형태의 화기라는 점이다. 특히 발사물이 화살보다는 철환(3~15개)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의 화기였기 때문에 기존의 화기에 비해 효율성이 증가하였다. 세 번째는 일부 총통의 경우 조총과 같은 신식 총과 유사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승자총통의 경우 기존의 화기를 개량하여 총신의 앞뒤에 가늠자와 가늠쇠를 부착하고, 銃 架 를 장착하였다. 따라서 소승자총통 은 총가를 잡고 가늠쇠와 가늠자를 이용하여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또 쌍자총통과 같은 화기는 총통 두 개를 병렬로 붙여 놓아 한번 장전을 통하여 여섯 번까지 사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화기이기 때문에 재장전 시간의 지연에 따른 사격의 비효율성을 다소나마 보완한 화기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소형화기는 여전히 지화식 화기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고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성능의 차이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육전에서 조선군은 무기체계와 전술적 열세로 일본군에 연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 해상 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게 된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대해 연전 연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 수군이 연승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군선에 장착된 대형화포의 성능이 우수성을 들 수 있다.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군비가 전선과 탑재 무기란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 다. 해전에 익숙한 수군 병사들과 견고한 전선에 위력 있는 화포를 갖추었다면 해상전에 대한 대비는 완벽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시에 있어서도 해전의 성패를 좌우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전선과 화기의 성능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은 대형 군선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포를 바탕으로 艦 砲 戰 術 을 구사하였고, 거북선 을 이용한 撞 破 戰 術, 火 攻 戰 術 을 구사했다. 이는 조선군이 지닌 무기체계의 장점을 최대한 활 용하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무겁고 튼튼한 군선이었다. 선체가 커 많은 전투원과 대형 화포,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적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기 어려운 반면 에 조선 수군은 높은 상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일본 수군은 판옥선의 舷 側 이 높아 선상에 쉽게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의 전통적인 전법 이었던 등선육박전술을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세키부네( 關 船 )는 선형이 가늘 고 길 뿐만 아니라 선체가 얇게 건조되어 매우 약한 선박이었고, 돛 역시 매우 단순하여 逆 走 성 능이 좋지 못한 四 角 帆 船 으로서 조선군의 러그세일형 雙 帆 의 기능에 미치지 못하였다. 10) 특히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39 일본의 세키부네는 선상에 대포를 장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력면에서 열세하였던 것이다. 11) 또 판옥선의 특징 중 하나인 강인하고 견고한 구조의 선체는 일본 군선을 상대로 당파전술을 구사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판옥선은 좌우 선회능력이 뛰어났고, 화포 발사에 따 른 반동 흡수에 유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판옥선의 구조적 특성은 대형 화포의 성능 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판옥선은 화포의 구사에 매우 편리한 선형을 하고 있다. 판옥선 의 상장갑판은 충분히 높고 넓어서 포격에 아주 유리하였다. 당시의 화포는 그 사정거리가 고 작 수백 보인 것들이어서 砲 座 가 높을수록 명중률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판옥선은 상갑판에 포를 안치시킴으로써 포좌가 충분히 높아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고 화포를 구사하기 때문에 포를 발사하기 좋아 화력이 강하며 명중률이 높았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12) 이런 점은 일본측 연구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선은 일본 군선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던 또 하나의 요소는 대형 화포이다. 판옥선과 거북선에 장착된 대형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적선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적선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였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대형화포 의 위력과 관련하여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의 선박은 강하고 크며, 위로 뚜껑이 있다. 화약솥과 화기들을 사용하며, 쇠로 만든 사석포 같 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구형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거의 남자의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모양 나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서 집어넣는데,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 렬하다 13) 선박에 대한 설명에서 위로 뚜껑이 있다는 것은 거북선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되며, 부딪치 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는 표현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 장군전과 같은 대형 화살을 의미한다. 또 다른 기록인 高 麗 船 戰 記 에도 유사한 내 용이 나오는데, 10) 김재근, 1994 앞의 책 p.144. 11) 왜선의 船 制 는 그 선체가 堅 厚 하고 장대하지 못하여 선상에 대포를 안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판옥선에 제압당하고 만다.( 선조실록 권61, 28년 3월 신묘) 12) 김재근, 1993 앞의 논문 p.274. 13)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역, 앞의 책, p.254.
40 학예지 제19집 9일 오전 8시 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이 공격해 왔다. 대선 가운데 3척은 장님배(거북 선)로 철로 要 害 하고 石 火 矢, 棒 火 矢, 大 狗 俣 등을 쏘아가며 오후 6시 경까지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 여 망루와 갑판, 要 害 까지 모두 부숴놓고 말았다. 鬼 宿 船 (거북선)은 左 馬 의 대선 앞을 가로막았고 소선들을 그 뒤에 쫓게 하였다. 그들 배에서 철포를 쏘아댔으며 귀숙선과 좌마의 대선은 서로 쏘아댔 으나 좌마의 배가 난사당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14) 라고 하여 거북선에서 石 火 矢, 棒 火 矢 등을 쏘았고, 해전에서 돌격선으로 상당히 효과적이고 위협적인 공격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대형화포에 발사되는 이들 대형 화살은 적선에 도달하여 선체를 파괴함으로써 적선의 전투력을 무력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 다. 이외에도 조선 수군은 소형화기와 질려포통, 비격진천뢰 등도 사용하였는데, 1593년 4월 웅천해전에서 조선군은 완구에 비격진천뢰를 장전하여 발사한 예가 있다. 15) 이들 화포는 거북 선과 판옥선에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군선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 화약병기는 매우 다양하고, 현존하고 있는 유물도 수십 점에 달한다. 특히 전쟁기념관 에서 소장중인 황자총통과 지자총통, 승자총통, 별승자총통, 소 중 대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라 하겠다. 황자총통은 포신에 萬 曆 丁 亥 四 月 黃 字 重 三 十 一 斤 八 兩 匠 富 貴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임진 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4월에 화포장 부귀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보물 886호) 형태는 포 입구에서부터 점차 두터워지고, 藥 室 은 筒 身 보다 더 두텁게 조성하고, 통신에는 죽절 5개가 조성되었고, 손잡이인 擧 金 은 약실쪽 첫째와 둘째마디 사이에 반달( 半 月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지자총통은 1992년 여천시 신덕동 백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유물로 당시 銅 綠 과 이물질 이 끼었고 더욱이 원형이 아닌 파열된 상태였다. 즉 약실 부위만이 온전하고 격목 부위에서 포구에 이르는 죽절이 조성된 포신은 크게 파열되어 포구 쪽은 완전 손실된 상태이다. 이러한 중화기는 약실 부위에 연호, 간지, 자호, 중량, 화약용량, 감독관, 장인 등의 명문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총통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함께 인양된 현자총통이 명종때 제작되었 고, 주조 형태상으로 현존하는 명종 10년과 12년에 제작된 지자총통과 비교해 볼 때 잔존된 약실 부위의 모양이나 죽절, 그리고 擧 金 의 배치 등이 매우 흡사한 것을 볼 때 명종 내지는 14) 高 麗 船 戰 記 15) 정진술, 1995 앞의 논문, p.368.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1 선조때 제작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된 지자 현자총통과 승자총통, 별승 자총통, 불랑기 자포 등 다량의 화약병기는 모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무기라 할 수 있다. 또한 국립진주박물관의 가정을묘명천자총통(보물 제647호) 중완구(보물 제858 호) 지자총통(보물 제862호) 현자총통(보물 제885호, 제1233호) 만력을묘명 승자총통(보물 제648호)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의 중완구(보물 제859호) 전쟁기념관의 황자총통(보물 제886 호) 지자총통, 동아대박물관의 지자총통(보물 제863호),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자총통, 경기도 박물관의 현자총통,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총통(보물 제856호) 등은 출토지역이나 시기가 모두 임진왜란과 유관하다고 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림 1. 황자총통(전쟁기념관 소장) 그림 2. 지자총통(전쟁기념관 소장) 3. 서울 신청사 발굴 유물의 성격 1) 佛狼機 子砲 불랑기 자포라 함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여 불랑기에 장착하던 자포를 말한다. 불랑기는 15세기 경 포르투갈 등 서구제국에서 제작되어 1517년경에 유럽의 상선을 통하여 중국 광동에 전해진 서양제 화기였다. 불랑기라는 명칭은 프랑크(Frank)의 한자식 표현이다. 최초 중국 남 부지역에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 회교도들을 앞세우고 왔는데, 중국 관원이 저 코 크고 머리가 누런 자들을 뭣으로 부르느냐고 묻자 회교도 자신들이 유럽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던 프랑크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유럽인을 불랑기라 통칭하고, 그들이 전해준 화포
42 학예지 제19집 도 같은 말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도자기를 차이나 라고 불 렀던 것처럼 중국인은 유럽인, 엄밀히 말하면 포르투갈의 식민지나 무역 상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를 불랑기 라고 불렀다. 불랑기의 전래에 대해서는 正 德 年 間 (1506~1521)에 포르투갈 에서 만든 불랑기 실물이 그 제조법과 함께 중국에 전달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16) 대항해시대인 1498년에 개발된 인도 항로로 동아시아와 서구사회의 접촉은 빈번해졌고, 상 호간의 교류는 동아시아 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때는 1516년, 포르투갈 은 명에 대해 통상 교역을 요구했지만, 151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malacca : 지금의 말레이시 아) 점령을 알고 있던 중국은 경계심을 나타내며 해안을 봉쇄하는 海 禁 政 策 을 썼다. 더욱이 포르투갈인들이 연해에서 약탈 행위마저 자행하자, 명은 강경책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런 와 중에 1522년, 광동성 신회현의 서초 만에서 명군이 4척의 포르투갈 함대와 전투를 벌여 함선 1척을 나포했고, 그들의 함재포를 노획했다. 이 노획포를 연구하여 명은 새로운 화포를 제조했 는데, 그중 하나가 불랑기였다. 이후 불랑기는 당시 명나라 군이 가지고 있던 어떤 대포보다도 성능이 뛰어났기에 이것을 본떠서 불랑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1522년에 동제 불랑기 32점을 자총과 함께 시험 제작하 는 데 성공했고, 이로부터 7년 후인 가정 7년에는 소형 불랑기 4000점, 가정 22년에는 중형 불랑기를, 다음해에는 마상용(horse-drawn)인 소형 불랑기 1000점을 주조해냈다 17). 이후 1626 년 袁 崇 換 이 영원 전투에서 홍이포의 막강한 위력을 보여줄 때까지 100여 년간 불랑기 형태의 대포는 매년 수천 문씩 생산되어 가장 중심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의 후장식 화포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전래됐다. 오토모 소린( 大 友 宗 麟 )이 臼 杵 城 공방전에서 사용했던 적이 있지만, 그러나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가 조선을 침략할 때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도, 활용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 불랑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의 평양성탈환전투 18) 를 계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평양성이 탈환된 이후 이와 관련해서 이덕형이 선조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명나라는 佛 狼 機 虎 蹲 砲 滅 虜 砲 등을 사용하였고, 성에서 5리 쯤 떨어진 곳에서 여러 포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는 것 같았는데 이윽고 불 빛이 하늘에 치솟으며 모든 왜적들이 붉고 흰 깃발을 들고 나오다가 모두 쓰러졌습니다. 라고 16) 박재광, 1997, 동아시아 삼국의 화기 제조와 교류 학예지 5, 육군박물관. 17) 大 明 會 典 ( 宇 田 川 武 久, 東 アシア 兵 器 交 流 史 の 硏 究 ( 吉 川 弘 文 館, 1993) p.337) 18) 선조실록 권49, 27년 3월 무술.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3 하여 명군이 사용한 불랑기의 성능이 뛰어났음을 언급하였다. 또 이항복도 성을 방어하거나 水 戰 을 치르는 데는 대포가 유용한데, 우리나라의[본국]의 천자 총 지자총 같은 대포는 제도가 지나치게 크고 장치하는 화약도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 화력은 대단히 맹렬하나 포탄이 곧게 나가지 않다 고 평가하고, 오직 현자총 및 1호로부터 5호까지로 대소의 구분이 있는 새로 제조한 불랑기포만이 가장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고 평하고 있다. 19) 이 처럼 불랑기는 기존 화포에 비해 규모가 작아 전투에서의 효용성이 높고, 성능도 우수하였기 때 문에 이후 적극 도입되어 거북선 등에 장착되어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신무기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조선은 불랑기국에 대한 정보는 익히 알고 있었다. 조선 중종 때에 명나라에 다녀 온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외모는 倭 人 과 비슷하고 의복의 제도와 음 식의 절차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도 예로부터 못 보던 사 람이다 하였습니다. 황제가 出 遊 할 적에는 韃 靼 佛 狼 機 占 城 剌 麻 등 나라의 사신을 각각 2 3명씩 뽑아 호종하게 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익히기도 하고 그들의 技 藝 를 살펴보기도 했습 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이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에서 얻은 견문을 토대 로 1614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芝 峰 類 說 에 불랑기국은 서양의 큰 나라이 다. 그 나라의 화기를 불랑기라 부르니 지금 兵 家 에서 쓰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랑기국에 대한 정보는 널리 알려진 듯하다. 한편 조선에서는 불랑기가 초기에 唐 制 子 母 砲 라고도 불렸으며, 이후 계속 제조되어 사용되 었는데, 이는 선조 28년 10월 비변사가 해상 통로를 차단할 좋은 계책으로서 대포와 불랑기 등의 화포를 거북선에 많이 장착할 것을 건의한 것 20) 을 볼 때 알 수 있으며, 선조 29년 정월 비변사가 화포 군기의 정비와 제조를 건의하면서 밝힌 전년도의 주조한 화포가 190여 자루 에 21) 불랑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또 선조 29년 6월 황해도 은율에서도 2점이 제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그 후 선조 30년(1597) 2월에 유성룡이 올린 請 軍 人 試 才 優 等 及 大 砲 能 中 者 論 賞 狀 에 의하 면 禿 城 에 불랑기를 설치하고 있고, 포수의 사격술이 뛰어남을 밝히고 있으며, 請 以 黃 海 道 出 19) 백사별집 권2, 계사 20) 선조실록 권68, 28년 10월 병인. 龜 船 不 足 則 晝 夜 加 造 多 載 大 砲 佛 狼 機 火 箭 器 具 以 爲 遮 截 海 道 之 計 此 乃 最 爲 救 急 之 良 策 也 21) 선조실록 권71, 29년 정월 을미. 22) 군문등록, 조선사편수회, 1933, p.85.
44 학예지 제19집 身二百名, 分守上疏及 京中軍軍器優數下送狀 에서 방어에 쓸 화약과 화기가 부족하니 군기시 의 불랑기 등을 방어사에게 내려 보낼 것을 건의하는 것으로 보아 정유재란에는 수성용으로도 많이 사용하게 된 것 같다. 한편 광해군 7년(1614)에 화기를 제조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火器都監의 활동 상황에 대해 기록한 火器都監儀軌 에는 불랑기에 대한 도설이 나와 있다.23) 또 한효순의 신기비결 에도 불랑기에 관한 훈련법이 기록되고, 순조대에 만들어진 융원필비 에도 주요 화기로 취급되었 다. 이로써 유럽에 있어서는 전선의 방어력이 증강되었던 17세기 이후에는 사용이 격감되었지 만 조선은 계속적으로 불랑기를 제조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24) 이와 관련하여 몇 년 전에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던 2점의 그림에서 불랑기가 조선 수군의 함선에 장착되어 운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점은 오오타 텐요오(太田天洋)라는 일본 역사화가가 그린 朝鮮戰役海戰圖 라는 그림인데,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싸우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판옥선의 고정식 포가에 장착된 화포가 바로 불랑기이 다. 또 하나는 2004년 8월 미국 뉴욕에서 처음으로 소 개된 거북선 그림인데, 이 그림의 하단에도 역시 불랑 기가 소형 전선에 장착되어 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 그림 3. 조선전역해전도의 불랑기 다. 이런 점에서 불랑기가 조선군의 함선 내지는 성곽 의 주력 화포로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불랑기의 제조 년대가 명종 18년부터 고종 11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신미양요때 미군이 찍어 간 사진을 보면 강화도의 포대에 많은 불랑기들 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의 부분이 불랑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만 그림 4. 거북선 그림에 그려진 불랑기 23) 화기도감의궤 불랑기조. 四號五十位 每位重九十斤 長三尺一寸七分 周營造尺他同 子砲五門式 二百五十門 每門重十 二斤 中藥線半條 火藥三兩 鐵丸一個 24) 이와 관련하여 나주목에서 1693년에 작성된 重記 자료에 의하면 전선에 4호 불랑기가 5위, 자포가 15개, 5호 불랑기 는 2위, 자포 6개가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5 기요람 의 군정편에 나타난 각 진영의 화기 보유 현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25) 현재까지 전해오는 불랑기는 1990년대에 전남 여천의 백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불랑기 자포 1점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불랑기 자포 3문는 1982 년 9월 11일 서울 강서구 목동 지하철 매립장에서 발견된 것으로 1563년(명종 18)에 제작된 불랑기 자포로서 불랑기가 임진왜란 이전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보물 861호 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 5. 불랑기 자포 그림 6. 불랑기 자포 명문 그런데 이와 유사한 불랑기 자포가 서울시 신청사 부지에서 승자총통, 대형화살촉 등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이 불랑기 자포는 길이 43.5cm, 폭 9.6cm, 두께 1.2cm이고, 지하에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음에도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명문도 선명했다. 이 불랑기 자포의 형태는 보물 861호 불랑기 자포와 똑같이 손잡이[擧金]가 달린 둥근 형태의 통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앞부분 은 모포의 포신 입구에 끼워 맞춰 끼워질 수 있도록 턱이 져 있으며, 뒷부분에는 자포실에 끼운 뒤 포 사격시 반동에 의해 자포가 튕겨져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빗장쇠에 걸리도 록 걸이쇠를 돌출시켰다. 자포의 중간에 반월형 형태의 손잡이가 형성되어 있고, 손잡이 뒷부분 에 약선 구멍이 藥室과 통해 뚫어져 있다. 자포 포신 표면 우측에 嘉靖癸亥地筒重七十五斤八兩 匠金石年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자포의 제작시기와 중량, 제작 장인까지 파악이 가능하다. 명문에 의하면 이 불랑기 자포는 1563년(명종 18년), 地筒, 무게 75근 8량, 군기시 장인 김석 년에 의해 제작된 불랑기 자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지통이라 함은 조선시대 화기의 명칭 부 25) 훈련도감에 불랑기 65자루, 4호 15자루, 5호 50자루, 자포 335자루가 비치되어 있다.
46 학예지 제19집 여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불랑기로서 두 번째 크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포의 제작시기는 물론이고, 형태와 제원 등 문화재로서 지녀할 할 제반 조건이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소장중인 보물 861호 불랑기자포와 매우 유사한 유물이다.26) 그림 7. 불랑기 자포(육군박물관 소장) 특히 불랑기 자포가 출토된 지역은 서울시청 신청사부지로서 조선시대 무기를 관장하던 軍 器寺 터이다. 따라서 1982년 9월 11일 서울 강서구 목동의 지하철 매립 작업장의 흙더미(서울 지역에서 옮겨온 것)에서 발견된 보물 861호 불랑기자포 보다 출토지가 확실한 최초의 유물이 26) 불랑기 자포는 포신에 제작시기(1563년), 제작 장인(김석년), 규모(地筒), 중량(75근 8냥) 등의 명문이 있어 육군박물관 에 소장된 불랑기 자포와 동일시기에 제작된 화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함께 발굴 유물군을 살펴보면 완형의 불랑기 자포 외에도 파손된 채 다른 유물과 함께 뭉쳐져 있는 불랑기 자포 1점이 더 있는 관계로 동일한 시기에 여러 점의 유물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 분 보물 861호 불랑기 자포 서울신청사 발굴 불랑기 자포 시기 명 문 제 원 1563 嘉靖癸亥 地筒重七十八斤 兩 匠朴命長 전장 43.7, 통장 40.3, 구경 9.5, 외경 12.5 1563 嘉靖癸亥 地筒重 斤 兩 匠李末叱同 전장 43.5, 통장 36, 구경 9.6, 외경 12.4 1563 嘉靖癸亥 地筒重七十九斤八兩 匠長石 전장 43.3, 통장 36, 구경 9.4, 외경 11.7 1563 嘉靖癸亥 地筒重七十五斤八兩 匠金石年 전장 43.5cm, 구경 9.6cm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7 기 때문에 조선시대 화기 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이곳에서는 불랑기 자포 외에도 여러 점의 勝 字 銃 筒 次 勝 字 銃 筒, 將 軍 箭 鏃 鐵 羽, 화살 촉, 화약 등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출토된 유물 모두 조선 중기에 제작된 무기로서 출토지 유 물 상호간의 연관성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불랑기 자포와 파열상태의 불랑기 자포 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불랑기 자포가 구리 81.08wt.%, 주석 9.94wt.%, 납 8.05wt.%, 비소 0.93wt.%의 성분으로 조성되었고, 미세조직 분석을 통해서 불랑기 자포에 사용된 제련용 구리광석이 황이 포함된 원광석이었음이 밝혀졌다. 27) 따라서 금번 조사된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 불랑기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545년과 1546년의 명종실록의 기사는 불랑기의 도입 가능성 을 높여준다고 하겠다. 1545년 11월 8일 군기시의 제조는 명종에게 중국인에게서 화포의 법을 전습하여 모화관( 慕 華 館 )에서 쏘아 보았으나 별로 맹렬한 힘이 없어 40보 밖에 표적을 세우고 쏘았는데도 모두 맞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 기계가 매우 둔하여 우리나라 포만 못합니다. 라 고 보고하고 있다. 28) 또 1546년 4월 23일 尹 仁 恕 가 제주 사람이 표류 끝에 琉 球 國 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중국의 화포와 철환을 배워왔다고 하고, 이를 水 戰 에 이용하면 매우 편리하기에 군기시로 하여금 이를 상세히 연구하도록 하자 는 보고 29) 를 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실록 기사는 명종때 군기시에서 새로운 중국의 화포를 도입하여 제조했음을 추정케 해주는 자료로 이 때 도입된 화기가 불랑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향 후 현존 유물과 국내외의 문헌 등의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서 불랑기의 도입 시기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금번 유물은 조선의 화기발달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 勝 字 銃 筒 서울시 신청사 부지에서는 불랑기 자포외에도 다량의 승자총통이 발견되었다. 제작연도는 그 원형이 보존된 유물을 통해서 16세기 중반으로 확인되었다. 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의 가장 대표적인 개인화기이다. 27) 이재성, 2012, 임진왜란기 화약무기의 제작기술에 대한 소고 420년을 넘어 다시 보는 임진왜란, 전쟁기념관, pp.72~74. 28) 명종실록 권2, 즉위년 11월 정묘. 29) 명종실록 권3, 1년 4월 기유.
48 학예지 제19집 그림 8. 승자총통 덩어리 그림 9. 승자총통 명문 이들 승자총통 계열의 화기들의 특징은 첫째, 화약과 발사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 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는 방식의 指 火 式 火 器 라는 점이다. 이는 일 본군이 사용했던 鳥 銃 [ 鐵 砲 ]에 비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성능이 한 단계 낮은 화기라 할 수 있 다. 따라서 조준 사격보다는 일단의 밀집 대형을 이룬 적에게 지향사격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 된다. 두 번째는 형태상 구경은 작아지고 총신은 상대적으로 길어졌으며 죽절이 많고, 기존의 화기와는 달리 격목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토격형 형태의 화기라는 점이다. 특히 발사물이 화살보다는 철환(3~15개)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의 화기였기 때문에 기존의 화기에 비해 효율 성이 증가하였다. 세 번째는 일부 총통의 경우 조총과 같은 신식 총과 유사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승자총통의 경우 기존의 화기를 개량하여 총신의 앞뒤에 가늠자와 가늠쇠를 부착하고, 銃 架 를 장착하였다. 따라서 소승자총통은 총가를 잡고 가늠쇠와 가늠자를 이용하여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또 쌍자총통과 같은 화기는 총통 두 개를 병렬로 붙여 놓아 한번 장전을 통하여 여섯 번까지 사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화기이기 때문에 재장전 시간 의 지연에 따른 사격의 비효율성을 다소나마 보완한 화기이다. 그림 10. 승자총통 별승자총통(전쟁기념관 소장)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49 이들 화기는 최초 승자총통의 원형으로부터 발전적으로 개량되고 있다. 즉, 사용되는 화약의 량이 줄어들고, 구경이 작아지며, 총신의 길이는 상대적으로 길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 다고 할 수 있다.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소형화기는 여전히 지화식 화기의 한계를 벗어 날 수는 없었고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성능의 차이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군기시터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 명문이 분명히 드러난 승자총통은 두 점인데, 하나는 萬 曆 十 三 年 五 月 日 次 勝 字 重 五 斤 九 兩 匠 金 石 이고 다른 하나는 萬 曆 癸 未 七 月 日 勝 字 重 五 斤 八 九 兩 匠 年 이다. 그런데 이 두 총통은 1585년과 1583년에 각각 제작된 총통인데, 총통을 만든 장인의 이름이 앞서 서술한 불랑기 자포의 장인 金 石 年 의 이름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불랑 기 자포를 비롯하여 승자총통이 같은 장인에 의해서 제작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승자총통은 10여 점 이상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모두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화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이들 총통의 시편을 채취하여 성분과 미세조직을 분석한 결과 구리-주석-납을 주성분으 로 하여 주조되었고, 특히 주석과 납 성분이 적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승자총통과 유사하다는 점이 밝혀지기도 했다. 31) 3) 箭 鏃 및 鐵 羽 또 신청사 부지에서는 여러 점의 箭 鏃 과 鐵 羽 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널리 활용되 었던 대형화포에서 발사되는 발사체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에 장착된 대형 화포를 활용하여 일본 수군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들 대형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적선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적선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였다. 또 당시 거북선과 판옥 선 등에서 장착되어 사용된 대형 화포의 성능은 다음과 같다. 30) 승자총통은 화약 1냥으로 철환 15개를 발사하고, 차승자총통은 화약 5돈으로 철환 5개 발사하며, 소승자총통은 화약 3돈으로 철환 3개를 발사하며( 火 砲 式 諺 解 ), 별승자총통은 철환 4개를 각각 발사한다. 31) 이재성, 앞의 논문, pp.70~72.
50 학예지 제19집 표 3. 임진왜란 당시의 대형화포 화포명 길이(cm) 구경(mm) 발사물( 화포식언해 ) 사거리(보) 천자총통 130 ~ 136 118 ~ 130 大將軍箭1발, 鳥卵彈100발 900 지자총통 89 ~ 89.5 105 將軍箭 1발, 鳥卵彈100발 800 현자총통 79 ~ 83.8 60 ~ 75 次大箭 1발, 鳥卵彈100발 800, 1500 황자총통 50.4 40 皮翎次中箭 1발, 鳥卵彈 40발 1100 별황자총통 88.8 ~ 89.2 58 ~ 59 皮翎木箭 1발, 鳥卵彈 40발 1000 이들 대형 화포의 특징은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피령목전 피령차중전 등 대형 화살 (箭)을 사용하였으며, 조란탄 다수를 발사하여 산탄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대형화포에 발사되는 이들 대형 화살은 적선에 도달하여 선체를 파괴함으로써 적선의 전투력 을 무력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서울 신청사 부지에서 발굴된 전촉과 철우는 함께 출토된 유물의 제작 시기를 고려해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이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이러한 대형 화살이 활용되었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이들 유물은 크기를 고려해 볼 때 지자총통을 비롯한 여러 화포에서 사용된 전촉과 철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1. 장군전촉 그림 12. 장군전 등 대형화살의 철우 4) 盈字銃筒 신청사 발굴 유물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유물로 하나가 있는데, 그 유물이 盈字銃筒이다.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51 이 영자총통은 서애문집 에 군기시에 원래 天 地 玄 黃字 대포가 있었고, 또 점점 작아져 盈字 昃字에 이르는 소포가 있었고, 다시 金墀가 창제한 대 중 소 세 가지 형태의 승자총 이 있었으며, 진천뢰 등의 화포가 있었다. 그런데도 亂後에 거의 다 散失되어 버렸다. 32)라고 기록되어 있는 화기이다. 그림 13. 영자총통 그림 14. 총통 명문 지금까지 현존 유물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부러진 상태로 발굴되기는 했으나 향후 크기와 형태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듯하다. 5) 철환 이밖에도 신청사 부지에서는 몇 점의 탄환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탄환은 직경 8cm 내외로 대형의 화포에 사용하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철제 탄환의 미세조직을 분석해보면 전형적인 주조 조직으로 탄소 함량이 4.3% 이하의 아공정 백주철로 제작되었다. 이들 철환들은 대체로 원형의 주물틀에 용해된 쇳물을 부어 여러 개를 동시에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33) 32) 서애문집 권16, 잡저 記鳥銃製造事. 軍器寺 元有天 地 玄 黃字大砲 又以次漸殺 至盈 축小砲 又有金土犀所製勝字大 中小三樣銃 又有震天雷等砲 而亂後散失殆盡 33) 이재성, 앞의 논문, pp.80~82.
52 학예지 제19집 4. 맺음말 임진왜란은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전술에 고전을 면치 못한 전쟁으로 화기가 전 체 전황의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조총을 이용하여 새로 운 전술을 구사하는 일본군에게 계속적으로 패배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 화기의 성능을 들 수 있다. 종래 조선군이 소지한 총통은 指 火 式 화기였음에 반하여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은 火 繩 式 화기였기 때문에 그 성능 면에서 월등히 떨어짐은 당연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한 더 큰 요인 은 다양한 종류의 화기가 어느 정도 비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화기 운용 전술의 부재가 아닌가 한다. 당시 조선군의 장수는 일본군의 조총의 성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또 이에 대응할 만한 전술을 전혀 인식치 못하였기 때문에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군은 초기 전투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육전에서 일본군에 대응하는 길은 조총의 기 술을 도입하고, 이에 상응하는 대응전술로 맞서는 것이 최상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 련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선 다급한 戰 局 打 開 에 진력하여야 했기 때문에 상당 기간 종래의 화기를 수급 활용하면서 저항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조선 수군의 해전에서의 연승은 수세적인 전황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 다. 이는 당시 수군이 운용하고 있던 거북선과 판옥선에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 총통 별황자총통 호준포 등의 대형화포가 장착되어 있어 일본 수군에 비해 월등한 화력과 전술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던 중에 조선은 선조 26년(1593) 1월 초순 조 명 련합군의 평양성 탈환을 계기로 명나라 와 일본의 선진 화기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중 앙의 훈련도감을 통해 조총 불랑기 호준포 백자총통 승자총통 등의 화기를 생산하였다. 금번 서울 신청사 부지에서 발굴된 불랑기 자포를 비롯하여 승자총통, 영자총통, 장군전촉 철우, 철기, 철촉 등은 임진왜란 직전에 제작된 화약병기로서 전쟁에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불랑기는 그 도입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문헌상에 불랑기가 우리나라에 등장하는 시기는 1593년 1월 임진왜란 때로 평양성탈환전투에서 명군이 사용하였 다. 이후 조선은 불랑기를 제작하여 운용하였고, 한효순의 신기비결 에 불랑기에 관한 훈련법
조선 중기의 화약병기에 대한 소고 53 이 기록되고, 순조대에 만들어진 융원필비 에도 주요 화기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불랑기는 조선후기 조선군의 주력화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불랑기는 계속적으로 사용되어 신미양 요 때에는 미국의 기함인 콜로라도를 선두로 한 전함 2척, 순양함 2척 등 5척의 군함이 강화의 초지진과 광성보진에 침입하였을 때 조선군의 주력 화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불랑기는 10여 점 정도가 전해오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불랑기 는 없었고, 1563년(명종 18)에 제작된 불랑기 자포가 3점이 현존하고 있었기에 불랑기가 임진 왜란 이전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금번 조사된 유 물을 통해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 불랑기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의 호국의지와 평화의 염원이 담겨있는 국방과학기술문화 재로서 국내외의 문헌 등의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서 조선 중기의 무기체계의 양상을 연구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끝)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55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나 종 남 ** 목 차 1. 머리말 2. 16세기 조선의 군사체제 변화 3. 전라도 관군의 초기 활동과 제1차 근왕군 1) 전라도 관군의 경상도 투입 2) 제1차 전라도 근왕군 활동 4. 삼도 근왕군의 활동 1)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 과정 2) 경상도 충청도 근왕군 활동 5. 용인( 龍 仁 ) 전투의 패전과 복귀 6.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1) 16세기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소위 격동의 시대 였다. 유럽 대륙에서는 국가 간의 전쟁과 통합, 왕조의 등장과 교체, 신흥세력의 발호, 도시의 발달, 사회 불안과 종교적 혁신, 시장의 발달과 상품의 유동, 기존 질서의 파괴 등 기존의 국제관계와 정치질서에 큰 변화가 나타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 에 시작된 유럽인의 세계를 향한 항해는 중국을 포함한 동양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기회였고, 서양에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일부 모험가 및 상인들의 돛을 타고 동양으로 전파되었다. 서양 세력의 출현은 명( 明 ) 중심의 동아시아 중화질 서( 中 華 秩 序 )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시발점이었다. 그동안 정치적, 철학적 대의명분을 통해서 유지되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서양 세력의 접근으로 인해서 야기된 국가 간의 교역 과 상업에 의한 관계 변화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함에 따라 16세기를 더욱 걷잡을 수 없는 격동 의 시대 로 만들었다. *이 글은 제1회 진주대첩 학술세미나(2011. 11. 12, 국립 진주박물관 강당)에서 발표한 발표문을 보완 정리한 것임.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56 학예지 제19집 16세기 이후 시작된 서양의 변화가 동양으로 전의되어 시작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급변을 포괄적으로 내포한 사건은 바로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1592~1598)이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에 대한 서양 세력의 영향과, 그로 인한 동아시아 내부의 변화에 의해서 촉발된 전쟁이었다. 1) 우선 이 전쟁은 일본의 치밀한 계획 하에 시작된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에는 당시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을 이루던 명도 참전하였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이 모 든 국력을 동원하여 벌였던 전쟁이라는 점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갖는다. 한편 임진왜란에 동원된 각 국의 병력 규모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일본 은 개전 초기에 약 15만여 명을 동원했고, 명이 전쟁 말기인 1598년경 약 10만여 명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조선은 초기의 혼란이 정리된 이후 관군을 최대 17만여 명까지 동원한 것으로 추 산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대규모 군대가 동원된 전쟁은 16세기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찾아 보기 힘들다. 그 뿐만 아니라 약 150년 후에 서유럽에서 발발한 7년 전쟁(1756~1763)에 동원된 프로이센 군대가 35,000여명이고, 이에 맞서 싸운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 70,000여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16세기 말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임진왜란은 당시 세계적 수준의 군대 가 결합한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조선, 일본, 명, 동남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유럽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친 이 전 쟁은 동아시아 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흐름을 전환시킨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막부( 德 川 幕 府 )가 집권하였으며, 명나라도 전쟁 후 유증으로 점차 쇠퇴하여 여진 세력에 대륙 패권 장악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조선은 7년 동안이 나 자국에서 전쟁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선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임진왜란이 16~17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를 포괄적으로 나타낸 사건이었음을 주장 하는 기존의 연구는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명, 조선, 일본의 내부 정치질 1)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정유년에 시작된 2차 침입은 정유재란( 丁 酉 再 亂 )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우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를 포함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 게이초의 에끼( 文 祿 慶 長 の 役 )>이라 부르고, 히데요시의 대륙 진입, 고려진( 高 麗 陣 ), 조선진( 朝 鮮 陳 ), 조선정벌( 朝 鮮 征 伐 ), 삼한정 벌( 三 韓 征 伐 ), 정한역( 征 韓 役 ), 조선역( 朝 鮮 役 ), 조선출병( 朝 鮮 出 兵 ) 등으로 부르며, 최근에는 조선침략이라고 하는 학자 도 있다.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 萬 曆 朝 鮮 役 ) 혹은 임진왜화( 壬 辰 倭 禍 )라고 부른다. 이처럼 전쟁에 대한 명칭만으로도 이 전쟁에 대한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역사 인식의 상이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Geoffrey Parker, Warfare: The Triumph of the West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p. 176~78;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전쟁의 역사 제2권 (서울: 책세상, 1995), pp. 520~23.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57 서의 변화가 국제관계의 변화를 추동한 것으로 추적하고 있다. 특히 전국시대의 종결과 국토 통일,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과 대외 진출의욕 발현 등 일련의 과정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설명하였던 일본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16~17세기 국제무역에서 은 무역의 종착 지였던 중국에 대한 관심이나, 이 과정에서 명 왕조의 무역정책, 조선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연구는 제한된 편이다. 3) 이러한 연구 경향을 정리하면 임진왜란 발발의 국제경제적 요인에 대한 관심은 제한되었고, 대부분 전쟁에 대한 정치적 추동력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임진왜란 직후에 명이 청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교역관계가 경색되는 국면에 이르면서 대 규모 전쟁을 야기했던 국제경제의 추동요인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지만, 결국 서양 세력에 의해서 제기된 변혁의 바람은 이후 2세기 이내에 동아시아 전체를 더 큰 격동으로 몰아세우고 말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임진왜란은 서양의 변화에 대한 면역 주사의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삼국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이 글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또 한 기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크게 변화시킨 임진왜란이 각 국가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으며, 새롭게 변화된 국제질서 하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먼저 이 글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의 교역 체계가 서양 중심의 세계적 시장체계에 편입되는 초기 단계에 발발한 상업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임진왜란 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상권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으며, 이 전쟁을 계기로 재편된 동아시아 국제교역과 은( 銀 ) 유통 체제는 동양 삼국의 국내 경제와 교역에 영향을 미쳤 음을 추적할 것이다. 5) 또한 이 글은 임진왜란이 명 중심의 중화질서의 근간인 책봉-조공 체제 3)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 역사비평사, 1999), pp. 18~20; 정구복, 임진왜란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 한일관계 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서울: 경인문화사, 2005), pp. 1~3; 한명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 아 질서, 역사학회 역음,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서울: 일조각, 2006), pp. 224~25; 박수철,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pp. 196~201. 4) 임진왜란에 대한 서양 학계의 이해는 국제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Michael Sharpe, Samurai Battles: Japan's Warrior Lords in 700 Years of Conflict (London: Chartwell Books, INC., 2009), pp. 176~81; Geoffrey Parker, The Military Revolution: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1500~1800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p. 108~11; Jeremy Black, War and the World: Military Power and the Fate of Continent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pp. 50~53; 찰스 킨들버거, 주경철 옮김,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서울: 도서출판 까치, 2004), pp. 117~22; 스카와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해역질서 및 화폐의 관점에서, 서애 류성룡 서거 4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논문집, 2007. 5) Parker, The Military Revolution, pp. 108~11; Black, War and the World, pp. 50~53; 찰스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58 학예지 제19집 를 결정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음을 밝힐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14세기 이후 유지되어 오던 명 중심의 중화질서가 동요하여, 이후 조선이 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 에 편입되는 과정을 설명할 것이다. 2. 서양 세력의 진출과 동아시아 국제경제의 변화 16세기 전반기에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등 신대륙과 새로운 시장을 향한 거대한 탐 험이 절정을 맞고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 인인들에게 모험과 더불어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이들 중에서 선구자들은 머지않아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게 이른다. 또한 이들의 세계로 향한 모험은 곧 아시아 대륙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1511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서남아시아 해역에서 활동 중이던 중국 상인의 도움으로 중국 남부의 주요 항구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유 럽인들은 오랫동안 내전을 치루고 있던 일본에까지 진출하여 규슈와 간사이 지방 봉건영주들 에게 무역에 대한 야망을 부추겼다. 이처럼 유럽인들의 등장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내정세와 국제관계, 그리고 국제무역의 판도를 바꾸었다. 6) 1368년 주원장이 명을 건국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일대 개편이 시작되었다. 특히 명은 한족이 중국 대륙에 건국한 국가였기 때문에, 명의 건국으로 인해서 당( 唐 ) 시대에 실현되었던 소위 중국적 세계질서 혹은 중화질서가 복원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이에 따라 명 왕조는 주변의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춘 나라들은 책봉-조공 체제를 활용하여 중화질서에 포섭하였으며,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나라들은 내속( 內 屬 )시켜 다스렸다. 그 결 과 조선, 일본, 베트남 등과는 책봉-조공관계가 유지되었으며, 요동, 운남, 티베트 등은 편입 혹은 토사를 설치하여 내속시켰다. 7) 명 왕실이 조선을 포함한 주변국과 사이에 맺은 조공-책봉 체제는 중심이 되는 중국과 주변 흥망사, 1500~1990, pp. 117~22; 그렉 클라이즈데일 지음, 김유신 옮김, 부의 이동: 화물의 흐름을 통해 추적한 세계 경제의 흥망사 (서울: 21세기 북스, 2008), pp. 149~51. 6)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pp. 117~22; 클라이즈데일 부의 이동, pp. 149~51;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 제 질서와 임진왜란, p. 3. 7) 조병한, 동북아 국제질서 속의 한국사, pp. 30~38; 이익주, 14세기 후반 원 명의 교체와 한반도, pp. 169~95; 김한 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중국적 세계질서의 붕괴, 정두희 이경순 엮음,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서울: 휴머니스트, 2007), pp. 287~315;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5~18.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59 국가의 군주가 서로 책봉과 조공을 교환함으로써 일정한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역할 시스템은 고대 중국의 제국들이 국가 체제를 형성하던 운영하던 원리에서 발원한 것이며, 중국 대륙이 통일된 이후에는 중화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운영체제로 활용되었다. 중국 대륙의 황제는 주변 국가의 왕을 책봉하고 조공을 받음으로써 세계를 일원적으로 지배하 는 중심( 中 心 )이라는 명분을 획득할 수 있었고, 또한 이를 계기로 중국 중심의 집단안보체제를 확보할 수도 있었다. 한편 주변 국가의 왕들도 중국 황실에게 조공을 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음 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 주도하는 집단안보체제에 참 여함으로써 기본적인 안보를 보증 받을 수 있었다. 8) 이처럼 중화질서를 발생하고 유지하는 책 봉-조공 체제는 근본적으로 자발적이며 쌍무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접어들어 명 중심의 중화질서와 책봉-조공 체제가 도처에서 무너지기 시작 했다. 9) 무엇보다도 책봉-조공 체제의 명분과 실제가 균형을 잃었기 때문인데, 특히 명이 14세기 후반에 요동에서 여진족과 몽고인들을 농락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고, 서남 외곽과 티베트에서 도 현지인들이 명 제국에 내속되는 과정에 많은 불만을 표출하였다. 한편 조선, 베트남, 유구, 일본 등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먼저 가장 대표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던 베트남이 조공을 하지 않음으로써 명의 침공을 초래하기도 하였고, 유구 역시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은 명과 가장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던 국가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는 3년 에 한 번씩 입조하라 는 명의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에 세 차례나 네 차례씩 다양한 명목을 붙여 수시로 입공할 정도로 명에게 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0) 그러나 명과 일본의 책봉-조공 관계는 원래부터 제도화되지 못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명과 바다로 이격되어 있어 두 국가 사이에 책봉과 조공이 지속적으로 교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으로는 책봉-조공 관계를 통해서 중화질서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치, 외교, 군사적 이익을 기 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관계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이 명 왕조에 조공 사절 을 보내기도 했으나, 이러한 조공은 조선이 보낸 조공과 달리 경제적, 문화적 기대와 대가를 고려한 조공이었다. 특히 책봉을 동반하지 않는 조공은 조공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일방적 책봉에 그친 명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제도적 책봉-조공 관계라 하기 어려웠다. 11) 그런 8) 조병한, 동북아 국제질서 속의 한국사, p. 32;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5~18;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4~6. 9)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5~18;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305~14. 10)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305~14;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4~6.
60 학예지 제19집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이 바친 조공은 명 중심의 중화질서에 참여하려는 욕망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16세기 초반 이후에는 이 질서에서 제외되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일본의 지도자들은 지속적으로 이 질서에 참여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한편 14세기 이후 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교역체계의 기본 질서는 명의 해금령( 海 禁 令 ) 이었다. 12세기 이래 중국 서남해안에서 잦은 소란을 일으켰던 주인공인 왜구에 대해서 늘 걱 정하던 명 왕조는 한때 일본 정부와 연합하여 군사적 공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자, 명 왕조는 해안 지방의 주민이 외세와 접촉할 수 없게 하기 위해 해금을 단행하고, 심지어 해외의 여러 나라와 교통하거나 교역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이후 연해 주민을 강제로 내륙으로 옮기는 대규모 사민( 徙 民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 한 명조의 해금과 사민정책은 연해지역을 왜구의 근거지로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왜구에 의한 근심을 더욱 조장시키고 말았다. 12) 한편 명 왕조의 일관된 해금정책은 중국과 일본의 물자교역을 크게 위축시켰다. 명이 건국된 초기에는 닝보, 추안저우, 광저우 등 세 곳에서 외국과의 조공무역이 이뤄졌는데, 이중에서 일본 상인들의 출입이 허락된 곳은 닝보였다. 그러나 1374년을 이후로 해금정책이 공식적으로 도입 된 이후에도 감합무역이 유지되기는 했으나, 일본의 경우 10년에 한 번씩 공선 2척과 상인 200 명에게만 허락되는 등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만 교역이 허락되었다. 이로 인해서 중국 상품과 중국 시장에 대한 일본인들의 욕구는 근본적으로 제한되었다. 그런데 1474년과 1523년에 감합 무역에 대한 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명에 대한 일본의 조공무역이 사실상 철폐되기에 이른다. 13) 이처럼 명 왕조는 왜구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해금 정책을 도입하고, 스스로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선박들을 파괴시키고 해상무역을 봉쇄함으로써 연해지역에 대한 지배를 스스 로 포기하였다. 또한 왜구에게 연해를 내주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제도적 제한을 가하여 사무 역과 더불어 기존의 조공무역까지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명 왕조의 정책적 결함 으로 인해서 명의 동아시아 해역에 대한 지배는 약해졌고, 이틈을 타서 일본 세력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4) 물론 해금령을 유지하는 가운데에서도 명이 주도하는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중심의 무역권 11)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5~18.;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305~14. 12)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5~18;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13)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8~9. 14)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8~9.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61 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중국, 조선, 일본, 유구, 북 베트남 등이 참가하는 소위 동아시아 국제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주요 교역 대상은 중국에서 생산된 생사, 견직물, 도자기, 조선에서 생산된 면포, 일본에서 생산된 금과 은 등이었다. 명은 이러한 무역 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해금령을 내리고, 자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나라의 선박에 한해서만 무역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 황실이 해금령을 통해서 추진하던 주변국과의 교역 질서는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 해역에서 점증하던 주변 국가들의 무역 욕구와 충돌하면서 점차 갈등이 증가하는 요인을 제공하였다. 15) 그러던 중 1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 교역에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였다. 즉 대항 해와 세계 정복을 통해서 세력을 팽창하던 유럽인들이 아시아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가장 먼저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말라카와 중국 남부 해안 도시들에 등장하여 동아시아 무역 확대를 위하여 노력한 결과, 1554년에는 광주( 廣 州 )에서의 통상을 인정받았으며, 3년 후에는 대중국 무역에 직접 참가하였다. 이처럼 포르투갈 상인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동중국해 교역 시스템, 즉 조공무역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포르투갈 상인에 비해서 늦은 156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 무역에 가담한 스페인 상인들은 그 등장부터 달랐다. 16) 이들은 필리핀을 점령한 이후, 1571년에는 마닐라를 동아시아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마닐라를 통해서 남미에 서 개발한 광산의 은을 아시아로 유입하여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아닌 직접 거래를 시작한 것이 다. 이처럼 1570년대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이 아시아에서 충돌한 사건은 중국과 아시 아 대륙에서의 은 수요 증대와 더불어 유럽과 아시아의 국제무역을 크게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7) 16세기 중반에 동아시아 세계에 유럽인들이 기존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교역에 변화 를 가져온 것 외에도, 동아시아 각 국의 국내정세와 국제 질서에 변화의 동인( 動 因 )을 제공하기 도 하였다. 예를 들면 1543년 태국을 출발하여 명으로 향하던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중국선 1척이 일본의 타네가시마에 표류했던 사건은 이후 일본의 국내 정세 변화에 큰 파장을 불러일 으킨 사건이었다. 타네가시마에 상륙했던 포르투갈 선원들은 일본인들에게 조총을 전해 주었 15)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8~9. 16)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pp. 117~22; 클라이즈데일 부의 이동, pp. 149~51. 17)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8~10. 16세기 후반에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양은 2,100~2,300톤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일본에서 유입된 양이 약 60%에 해당 한다. 이후 17세기 전반에는 그 양이 2배나 되는 5,000톤 정도이며, 일본에서 유입된 은이 약 2,400톤로 추계된다.
62 학예지 제19집 으며, 이렇게 전해진 조총은 당시 전국시대를 경험하고 있던 일본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특히 전투와 전쟁으로 날로 가득 찼던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맞물려 조총은 일본에서 급속하게 개량되고 대량으로 생산되어, 결론적으로 일본의 군사력 강화로 연결되었다. 18) 한편 명은 1567년에 해금을 완화하여 민간 상인들이 해상무역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1570년대에는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여 전체적으로 국가의 교역제도를 정비하였다. 그 결과 1571년부터는 스페인이 필리핀을 점령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국으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기 시작하자, 1570년대 중반에 페루의 포 토시 은광 등지에서 은 생산량이 증가했고, 이후 더 많은 양이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명의 상품 화폐 경제는 더욱 번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틈을 타서 포루투갈 상인들을 통해서 국제무역에 참가했던 일본의 여러 다이묘( 大 名 )들도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며, 오다 노부나가 사후 정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외국 상선들이 일본에 와서 무역하는 것을 환영하고 해외무역을 장려하기도 했다. 19) 이처럼 1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와 그 해역에 등장한 서양 세력은 동아시아 국제교역과 경제 체제를 뒤흔들어 놓았고,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경제 질서에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국, 일본, 조선 등 삼국 내부의 국내 정치와 각 국가 간의 국제관계에는 뚜렷한 변화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특히 16세기 전반까지 중화질서의 주축인 명을 중심으로 한 책봉-조공 체제가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서양에서 전달된 변화의 바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일본 이 기존의 중화질서를 깨트리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으며, 일본에서 시작된 변화는 결국 동아시 아 전체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3. 동아시아 삼국의 국내정치 변화와 국제관계 조선 왕조는 1392년 개국 이후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개국 공신과 그 자손 18) 포르투갈과 다이묘들에 관계의 중심에는 은 무역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중국과의 무역에 은이 필요했고, 다이묘들은 새로운 신무기가 필요했다. 다이묘는 조총을 획득하여 새로운 종류의 군사력을 구성하였고, 이를 통해서 전국을 통일 하고자 했다. 이 시기 일본의 은광과 해상 무역권을 확보한 다이묘들이 전국통일의 과정에서 부각을 나타낸 것을 보면 포르투갈과 다이묘, 신무기와 은의 관계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다.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pp. 117~22. 19)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8~11,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63 들, 그리고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자손들이 주축이었던 소위 훈구 세력이 통치 집단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 왕조는 이들 훈구 세력의 협력을 통해서 국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사회 및 문화적 번영과 융성을 이룩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주축으로 구축된 조선 초기의 안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부의 갈등, 견제 세력의 등장 등으로 인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먼저 고려 말 이후 꾸준히 성장해 온 사림 세력이 성리학의 도학사상을 제반 사회질서의 가치기준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함에 따라 기존의 훈구 질서에 대한 도전하였다. 결국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들을 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마침내 훈구세력이 연산군 때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사림을 타격함으로써 정국을 혼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양대 사화로 인하여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 여 다시 사림파 인사들을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훈구세력들은 그들 의 권위와 이권을 위협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결국 1519년에 기묘사화를 통해 보복을 단행함으로써 또 다시 신진세력에 타격을 가하였다. 20) 이처럼 조선은 16세기에 접어들자 불과 20여 년 동안에 세 번의 사화로 말미암아 정치, 경 제, 사회 등 여리 측면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먼저 신분제도가 문란해졌고, 군역이 불균 형하게 부과되었다. 또한 세력자들이 직권을 이용하여 농장을 확대하는 폐단이 일어났으며, 이 와중에 공납제도( 貢 納 制 度 )가 문란해져서 농민의 부담이 과중해지는 등 사회의 기본질서가 뒤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1545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 척신들 사 이에 을사사화가 발행하였고, 사림들도 그들 내부에서 상호 대립하는 등 내부의 정쟁이 지속되 고 있었다. 21) 이러한 조선 내부의 정치 혼란은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 에 조선 왕조는 외교 및 국제문제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결국 국내 정치의 혼란과 내부적인 문제에 대한 치중은 조선의 국제적 시야를 제한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은 격 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22)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室 町 ) 막부의 제3대 쇼오군 아시카가 요시 미쓰( 足 利 義 滿 )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20)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5~18;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21) 정구복, 임진왜란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 pp. 4~5. 22)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 111.
64 학예지 제19집 는 봉건제도가 구축되면서, 각 지역의 슈고 다이묘( 守 護 大 名 ) 집단의 세력이 신장되어 점차 지 방분권이 촉진되었다. 15세기 중엽에는 봉건 영주세력에 대한 쇼오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더 욱 지방이 분열되기에 이르렀고, 1467년의 응인( 應 仁 )의 난( 亂 ) 을 고비로 무로마치 막부가 사 실상 몰락하였다. 이후 약 100여 년에 걸쳐 소위 전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하여 지방의 토착호족 출신의 신흥 무사집단이 등장하여 기존의 슈고 다이묘 집단를 제압하였고,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23) 무력으로 대호족의 지위를 확보한 다이묘들은 부국강병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 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강력한 무력을 육성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이들 중에는 오다 노 부나가( 織 田 信 長 )처럼 일본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의 영주들을 호령해 보고자 하는 야망까지 품는 이들도 나타났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각자의 세력을 구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개별 무역에 뛰어들었으며, 이 무역을 통한 부의 획득은 다이묘들의 군사력 확대와 그를 통한 영향 력을 증대시켰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나타난 포르투갈인의 내항과 총의 급격한 보급으 로 신설된 철포대 등 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이처럼 포르투갈과의 통상은 다이묘들의 권력을 재배치 시켰고, 이러한 요소들은 우수한 군사력을 보유한 세력이 주도하는 통일을 가져오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24)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동지역을 근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 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들의 협력을 기반 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 등을 장악하여 역시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중시했 다. 또한 그는 상공업을 육성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경작제도를 개선하는 등 개혁정책을 단행하는 등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삼포왜란이나 영파( 寧 波 )의 난( 亂 ) 등으로 명과 조선이 사실상 일본과의 무역을 폐쇄하자, 도요토미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당입( 唐 入 )을 통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25) 주원장( 朱 元 璋 )은 1368년 남경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이라고 칭한 이후, 원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주원장은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조사 23) 박수철,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pp. 202~3. 24) W. J. 보트, 조선정벌기 속의 임진왜란, pp. 237~39;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14~15. 25)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0~11; 박수철,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p. 208.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65 및 인구조사를 진행하여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황제 계승을 둘러싸고 반란과 찬탈 등이 발생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졌고, 영종 재임 기에 토목의 변 ( 土 木 之 變, 1449) 이 발생하여 명의 국가적 위신이 손상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서는 무종의 사치와 유흥, 라마교에 대한 광신 등으로 제반 정무가 환관들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정치적 혼 란이 극에 달했다. 무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은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전대의 정치적 폐단을 혁신하고 인사제도를 쇄신하여 한 때 그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신진 개혁 파와 보수파의 치열한 정쟁을 불러일으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들이 명나라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어 명나라를 위협하였다. 그 후 만력 제( 萬 曆 帝 )로 알려진 신종( 神 宗 )이 즉위하여 초기에 만력의 치 라는 개혁을 전개하였다. 그 결 과 한 동안 정치, 경제,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26) 국내의 해이해진 정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몽골과 화해 협력하여 북쪽 국경을 평온하게 하였고, 요동 섬서지역을 개척하고 남쪽의 반란세력들을 평정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신종도 점차 정사를 게을리 하고 사치, 방탕에 빠져들어 국고가 탕진되고 조정의 정치 질서가 무너져 환관들이 재차 국정을 어지럽혔다. 또 명나라 조정은 붕당을 만들어 대립 반목함으로써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27) 한편 건국 초기부터 명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북로남왜( 北 虜 南 倭 )였다. 28) 이 북로 남왜의 위협은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협은 명의 국방정책과 결부되었으며 북방으로의 끝없는 재정 지출을 요구하여 재정악화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16세 기 중반 이후 척계광의 왜구 제압으로 동남 해안이 안정되고, 1571년 명과 몽고의 알탄 사이에 서 화이가 맺어져 명은 몽고와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또한 앞서 지적한 대로 명 왕조의 재정 고갈과 은 부족현상은 해금정책의 완화, 그리고 은의 급속한 유입을 부채질하게 하였고, 그 결과 16세기 중반 이후 명은 활성화된 국제무역의 중심이 서게 되었다. 29)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과 명의 양국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의 전형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26) 케네스 M. 스워프, 순망치한: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pp. 319~20. 27) 스워프, 순망치한: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p. 321. 28) 몽고족을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명에게 있어서 북방의 몽고는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 여 명은 북방에 대한 군사력을 증대하였고, 그 결과 명의 국가 재정은 항상 악화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왜가 주도하는 남부 연해지역 약탈 역시 심각한 위기로 인식되었는데, 명 조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에 고민하고 있었다. 29)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66 학예지 제19집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체제에 기반을 둔 사대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을 섬기는 상황이었다. 형식적으로는 명과 조선 사이에 군신과 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 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의 지위를 감수했다. 구체적으로는 명 황제에 의한 책봉 의 수용, 명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도 부과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에 이성계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 조공 문제 등으로 알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도전등 이 고구려의 옛 영역을 회복하려는 차원에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과 심각한 갈등을 빚기 도 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명에 대한 사대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과 대결을 시 도할 정도로 주체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16세기에는 화이론( 華 夷 論 )을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 에 등장하여 명에 대한 사대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국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과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과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 를 통해 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30) 한편 16세기 이후 조명관계에서 점차 경제적 측면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15세기 내내 조선 은 명에 대한 조공에서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제외 받았다. 하지만 16세 기 전반기에 이르러 은 무역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하였다. 납에서 은을 추출하는 소위 회취법 ( 灰 吹 法 )이 조선에 도입된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 은 생산량이 급증하고, 이와 더불어 명의 상품 경제 발달과 북로남왜에 따른 은 사용량 증가로 중국과 일본, 조선 사이의 밀무역이 급증하였 다. 31)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사림세력은 국내 안정을 위해서 은의 국제교역을 엄격 하게 제한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조선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국제교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명에 대한 사대( 事 大 )와 더불어, 조선은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 교린( 交 隣 )을 대외 정책 으로 삼았다. 조선왕조가 성립된 뒤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와의 교린의 통교는 왕성하게 행해 졌고 무로마치 막부의 요청에 의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조선조정이 일본과 통교하는 주요 목적은 왜구의 억제에 의한 한반도 남부의 안정에 있었다. 일본은 명과의 책봉체제 속에서 조 선의 고려대장경, 쌀, 목면 등의 문물 수입이 목적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200년 간 조선으로부터의 사절단이 회례, 통신, 보빙 등의 목적 으로 빈번히 일본에 파견되었다. 32) 당시 조선의 지방관으로서도 인정되고 있던 대마도의 소 30)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4~15. 31)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32) 조선 전기에 왜구의 침략이 잦아지자 세종 초에 쓰시마섬을 정벌하여 교통을 끊었다. 그러자 식량 결핍을 걱정한 쓰시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67 ( 宗 )씨에게 파견된 지방 관직까지 포함하면 62회에 달하는 사절단의 파견이 있었다. 이 수치는 거꾸로 무로마치 막부, 오우치가, 쓰시마 소씨 등 일본으로부터의 사절단의 빈번한 왕래를 말 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절단의 교환은 대부분 15세기에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이 전국시대에 접어들자 조선과의 확실한 교섭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33) 1555년 삼포왜란 이후 소원했던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재개된 공무역은 소규모에 불과했으나, 밀무역은 점차 비중이 커져가고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중국은 은 부족을 외치고 있었고, 이 시기 일본과 조선에서 은이 생산이 시작됨에 따라 중국 상인들과 잦은 접촉이 재개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사림정권이 성립된 후, 은을 통한 밀무역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 자, 일본은 조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과 교역하는 무역 루트를 활용하였다. 34) 명은 건국 이래 일본의 조공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왜구에 의한 잦은 침략에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1404년에는 명 황실은 무로마치 막부의 요구를 받 아들여 10년에 한 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고,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 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 寧 波 ) 지역으로 지정했 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칼 등의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요긴한 것도 아닌 데다 일본 국왕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뒤 인원을 300명으로 늘렸으며, 명목상의 조공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35) 한편 16세기 초반부터는 일본 규슈지방 상인들이 명의 복건성 지역의 항구까지 진출하여 은 을 옷감으로 바꾸는 무역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 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 왕조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 결과 1547년 이후 일본의 조공선들은 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방향을 바꾸어 마카오로 접근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은 왜구가 더 극성스럽게 해적행위를 마의 도주 사다모리( 宗 貞 盛 )가 조선에 사죄하고 통상의 길을 열어줄 것을 간청하자, 조정에서는 평화 회유책으로 염포, 제포, 부산포를 열어 무역을 다시 허가하고 거기에 왜관을 두어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왜인의 내왕이 잦아지게 되자 상주 왜인 이외에는 모두 내쫓았으며, 1443년(세종 25) 일본에 갔던 통신사 변효문( 卞 孝 文 )은 세견선을 60척으로 제한하고, 좌선인수( 坐 船 人 數 )는 대선( 大 船 ) 40명, 중선( 中 船 ) 30명, 소선( 小 船 ) 20명으로 정하여 식량을 지급하고, 삼 포에 머무르는 자의 체류기간을 20일로 한하되 상경( 上 京 )한 배를 지키는 자는 50일로 한하여 식량을 배급한다는 것과,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2,3척의 특송선( 特 送 船 )을 허락하도록 한 계해조약( 癸 亥 條 約 )을 체결하게 하였다. 33)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08~11, 34)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pp. 11~15. 35)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8~22.
68 학예지 제19집 확대하였고, 이들은 명과 조선을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왜구의 발호는 명으로 서는 큰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명은 척계광( 戚 繼 光 ) 등의 활약으로 왜구를 거의 제압하였으며, 1567년 해금완화 이후에 왜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36) 4.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 히데요시의 사망 직후 일본군 철수를 계기로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동아시 아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 초기 이래 조선과 명은 책봉체제의 전형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명의 임진왜란 참전은 조선을 돕는다 는 표방아래 이루어졌지만, 실제 목적은 요동의 울타리인 조선을 방어함으로써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더 나아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공공연히 도전했던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군사, 재정적 큰 손실은 명 황실에 큰 타격을 입혔다. 다만 명의 조선 참전과 전비지출은 조선에 의 해 재조지은( 再 造 之 恩 )으로 숭배되었고, 왜란 이후 명이 조선에 대해 은혜를 베풀었다고 강조 하면서 군림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37) 그러나 명과 청 교체가 가시화되면서 조선은 명의 입장에서 단순한 울타리가 아니라 전략적 측면에서 보다 중요한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진의 급속한 성장과 도전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명의 입장에서 조선이야말로 여진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대상, 즉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를 유지함에 있어서 이이제이( 以 夷 制 夷 )를 실천할 수 있는 방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592년에 일본의 공격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서 명 군이 참전했던 것은 15세기 이래 책봉-조공 체제의 전형으로 유지되던 명과 조선 관계의 돈독 함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명이 이 전쟁에 참전함으로 인해서 명과 조선의 관계가 질적으로 변화하였고, 더 나아가 임진왜란 이후 가시화된 명과 청의 대결 이 점차 가시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38) 먼저 명이 군대를 조선에 파병한 것은 북경의 울타리인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인 36)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296~300. 37)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pp. 67~68. 38) 스워프, 순망치한: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pp. 334~49.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69 한다. 하지만 일본군이 예상 밖으로 강력했고, 또한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명은 조선을 단순 한 번국( 藩 國 )이 아니라 명 자체의 노지( 虜 地 )이자 구변( 九 邊 )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명은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안위가 명 제국의 안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직감하고, 패망 직전의 조선을 구할 것인지 혹은 포기하고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명이 이렇게 고민했던 이유는 조선 출병이 국내적으로 그리 여유로운 상황에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16세기 말에 지주-전호제가 보편화되었고, 상품생산이 확대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은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전체적으로 사회 유동화가 증대되었다. 39) 또한 전국적으로 대토지 소유 가 확대되는 가운데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둔전까지 사유화되면서, 그로 인해 변방 방위 체제가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40) 한편 1582년 장거정의 사망이후, 명 왕조 내부에서 내각과 反 내각을 축으로 하는 관료들 사 이의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 출병으로 인해서 군비 지출이 증가 하자, 명 왕실의 재정 적자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이 곧바로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했던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명 왕조는 날로 급증하는 전비 때문에 민간에 대한 징세를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서 각지에서 민원이 급증하였기 때문이 다. 따라서 명은 조선에서 하루라도 빨리 철수함으로써 재정 적자를 줄이고,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41) 하지만 일본과의 화의를 둘러싸고 명 조정이 다시 찬성과 반대로 갈라섰고, 이후 이를 계기로 당쟁이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왜란의 장기화는 정권의 무능함, 당쟁의 격화와 맞물려 더욱 명 내부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42) 명이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선 왕조와 지배 층은 재조지은으로 추앙하였다. 43) 비록 명군이 주둔하는 와중에 수많은 민폐와 부작용을 일으 켰지만, 중화질서를 강조하던 조선의 지배층은 명의 은혜를 잊어서는 의병이나 민중의 역할을 통해서 국난을 극복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높게 숭 39)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8~22. 40) 스워프, 순망치한: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pp. 334~49. 41)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18~22. 42) 스워프, 순망치한: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pp. 334~49. 43)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파견된 관군이 패전을 지속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파천 길에 목격한 민심의 이반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정황을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여 위축된 선조와 신료들에게 있어서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역전은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임에 분명했다. 따라서 절망적 상황 속에서 평양전투의 승리 소식을 접한 예조는 국가의 재조( 再 造 )가 오로지 평양 승첩에 달려있다. 고 운운하면서, 즉시 종묘에 고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례는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p. 72에서 재인용.
70 학예지 제19집 배하기에 앞장섰다. 조선 왕조 내부에서 시작된 이러한 분위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명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과 의리로 연결되었다. 44) 한편 임진왜란 직후 명 내부에서는 조선에서 시작된 재조지은에 부흥하여 자신들이 조선을 구원했다는 시혜자적 시각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각의 배경에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던 도중 에 명 왕조 내부에서 조선에 대한 직할 통치론, 왕위 교체론 등 조선을 길들이려던 논의가 제기 되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명은 자주 이러한 시각을 언급하면서,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에도 잦은 내정간섭이나 조선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여진족이 흥기하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명은 임진왜란 중에 명이 조선에 베풀었던 재조지은을 강조하 면서, 조선을 후금과의 대결구도 속으로 끌어들려고 설득하였다. 이와 같은 명의 상황은 1618 년의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더욱 절실했다. 45) 이와 같은 양상은 인조반정 이후 이를 비판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조를 승인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인조에 대한 승인 조건으로 조선의 병력을 징발하여 후금을 공격하는 것을 내세웠던 것이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선이 일본과 전쟁 이전과 같은 외교관계 를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륙에서 명과 청의 교체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 일본과 영원히 적대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었다. 우선 일본과 조선 사이의 무역 재개에 사활을 걸었던 대마도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17세 기 들어 중국에 대한 서양 상인들의 교역이 확대됨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대마도 중심의 일본 상인들은 조선과의 무역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동북아 국제교역의 활성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에도 막부와 조선 왕조의 중재에 나섰다. 46) 한편 임진왜란 종식 이후 새로 출범한 에도 막부 역시 조선과의 국교 회복이 참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막부는 조선과 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계 회복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 서는 조선이 왜란 당시 일본에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명군과 함께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 다는 위기의식 나타나기도 했었다. 이러한 막부 자체의 배경과 대마도의 염원이 맞물려 임진왜 란 시 납치한 조선인을 송환하는 등 조선과의 재수교에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47) 44)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pp. 67~68. 45)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pp. 74~88. 46)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22~24. 47) 박수철,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pp. 216~19.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71 또한 조선은 서북방에 점증하고 있던 여진세력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일 본과 지속적인 적대관계를 방치할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후금군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 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 째 되던 해인 1607년에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어 대마도 영주에 대한 하사미( 下 賜 米 )와 대마도 영주의 세견선이 왕래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막부의 쇼 군이 교체시마다 통신사를 보내는 등 1764년까지 왕래가 계속되었다. 그 뒤 일본은 흉년이 계속되어 사신 영접이 어렵다 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에 따라 조선 왕조는 통신사 를 대마도까지 보냈고, 일본은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영접하였다. 조선의 통신사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12차례 왕래하였으나, 일본 국내가 소란해지자 중지되었다. 결국 왜란 이후 긴박하게 돌아갔던 대륙에서의 명청 교체 분위기는 왜란 직후 일본을 적국 혹은 원수로 여기고 있던 조 선의 태도를 변화시켜, 일본과의 국교 회복으로 연결된 것이다. 48) 일본과 명의 외교관계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단절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도 명과는 정식 국교가 열리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과의 무역재개를 희망했으나, 명은 왜구 대책 때문에 쇄국정책을 취하여 정식 교섭은 없었다. 1603년에 에도 막부가 성립하자 도쿠가와 이 에야스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대외무역을 장려하였다. 그가 추구하였던 목표는 명과의 감합무역을 부활시키고, 조선, 유구 및 중국 무역상을 통하여 교섭을 꾀하는 것이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또 17세기 초에 일반인들의 남만인과의 접촉과 교역을 금지시키기 위해 막부는 일련의 금령을 내렸고, 네덜란드의 상인들과도 히라도에서 나 가사키로 옮겨 해안 경비를 더욱 강화하였다. 결국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의 대외무역은 나가사 키를 통한 서양과의 교류, 대마도를 경유한 조선 무역, 그리고 사쓰마를 경유한 유구 무역이라 는 세 개의 창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49) 하지만 명의 상인들이 비공식적으로 히라도, 나가사키 등지까지 진출하여 사무역을 행했다. 또한 대만, 루손, 캄보디아 등에서 일본과 명 상인 사이의 직접무역도 빈번하였다.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선 이후에도 정식국교는 열리지 않았으며, 청 의 사무역선이 점차 나가사키에 내항하여 무역을 행하였다. 나가사키에는 청국인의 거주지가 생겨날 정도였다. 50) 48)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22~24; 박수철,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pp. 216~19. 49) 한명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227~29. 50)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312~13.
72 학예지 제19집 5. 맺는 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 후반은 조선, 일본, 명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 를 경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동아시아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서양 세력이 조총과 선교사, 은을 앞세워 진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시아와 남미, 유럽 사이의 중개무역을 주도하 였으며, 특히 동아시아 각국의 국내 및 국제 정세 변화의 동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한 맥락 에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교역 체계가 서양 상인들이 구축한 전 세계적 시장체계에 편입되 는 초기 단계에 발발한 상업시대의 전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51) 이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동남아시아와 일본에서는 교역거점을 장악해서 경제 기반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조총 등 서양 의 무기들을 수입하여 군사력을 확보한 정권들이 등장하였다. 도요토미가 일으킨 전쟁은 동아 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상권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으며, 교역을 통해서 이익을 얻 으려고 노력하던 주변부가 중심부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한편 임진왜란을 계기로 재편된 동아시아 국제교역과 은 유통 체제는 세 국가의 국내경제와 교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요토미 정권 몰락 이후 에도 막부는 일찍부터 일본인의 도항 과 외국선의 기항을 제한하고, 나아가 국내에서 독자적인 통화체계를 구축함으로써 해외무역 과 국내경제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은 수출은 계속되어, 이를 제한하는 것에 성공한 것은 18세 였다. 청은 명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는 해금을 유지하다, 이후 해금을 완화하고 일본의 도항 도 인정하였다. 이후 18세기에 동전 중심의 통화체제를 성립하여 교역 활성화를 시도하였다. 은의 도래가 가장 늦었던 조선에서는 17세기 후반에 동전과 은을 별도로 사용하는 독자적인 통화체제를 구축되었다. 이처럼 늦어도 18세기 초반까지 동아시아 삼국은 각각 독자적인 통화 체계를 수립함과 동시에, 상호간에 제한적인 무역질서를 수립하여 국제교역이 곧바로 국내경 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교적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은 명 중심의 중화질서의 근간인 책봉-조공 체제를 결정적으로 뒤흔든 사건이 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을 외교적으로 섬기며 가장 전령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반대로 명은 조선에 대해 정치, 문화적으로 대국으로 군림했다. 책봉이나 반조와 같은 조선 국왕에 대한 외교적 승인이나 지지는 조선 국왕에 대한 정치적 정당성을 제공하였고, 권위의 51) Sharpe, Samurai Battles, pp. 176~81; Parker, The Military Revolution, pp. 108~11; Black, War and the World, pp. 50~53.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임진왜란 73 원천이기도 했다. 즉 조선은 명 중심의 중화질서에 긍정적인 태도로 임했으며, 명 은 조선을 충실한 국가로 평가했다. 결국 명의 참전은 이후 조선에서 재조지은으로 숭앙되었으며, 명은 위기에 처한 조선에 특별히 베푼 은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52)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명과 청의 교체 조짐이 가시화되면서, 14세기 이후 성립된 명 중심의 중화질서는 동요하였다. 즉 기존의 책봉-조공 체계에서 명과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주변국과의 국제질서의 근본이 변화된 것이다. 그 결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 중심의 새로 운 국제질서에 편입되고 만다. 한편 조선이 왜란 이후 불과 10년 만에 일본과 관계를 회복한 것은 북방에서 청의 위협이 날로 가중되어 감에 따라, 남방에 대한 안전을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전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통신사를 보내줬다는 은혜를 베푸는 입장이 아니라, 상호의 필요에 의해 성립된 상호공존체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에도 막부는 명과 공식적인 관계를 재개하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대명 관계 루트였던 조선과의 관계를 지속함에 따라 어느 정도 명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53) 16세기 후반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20세기 초의 세계대전과 같은 전환기였으며, 이를 통해서 동아시아 삼국은 격변을 맞게 되었다. 명은 왜란에 의한 국력이 쇠약해졌고, 명의 견제가 약해 진 틈을 타 청이 더욱 세력을 확장시켰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죽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국토 재통일이 이뤄진 후 막부 시대가 문을 열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 신분제가 동요되 고, 사회 시스템에 극명한 변화와 변동이 제기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조선에만 국 한되어서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동양 삼국과 그들 사이의 관계, 즉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이런 국제관계의 귀결은 결국 청 왕조의 성립과 명의 멸망으로 종결되었고, 이후 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성립되었다. 52)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pp. 311~14. 53)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22~23.
74 학예지 제19집 참고문헌 Geoffrey Parker, Warfare: The Triumph of the West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Geoffrey Parker, The Military Revolution: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1500~1800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Jeremy Black, War and the World: Military Power and the Fate of Continent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Michael Sharpe, Samurai Battles: Japan's Warrior Lords in 700 Years of Conflict (London: Chartwell Books, INC., 2009) 그렉 클라이즈데일 지음, 김유신 옮김, 부의 이동: 화물의 흐름을 통해 추적한 세계경제의 흥 망사 (서울: 21세기 북스, 2008)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전쟁의 역사 2권 (서울: 책세상, 1995) 찰스 킨들버거, 주경철 옮김,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서울: 도서출판 까치, 2004)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 역사비평사, 1999) 역사학회 역음,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서울: 일조각, 2006) - 이익주, 14세기 후반 원 명의 교체와 한반도, pp. 169~95. - 박수철,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pp. 196~223. - 한명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224~60. 정두희 이경순 엮음,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서울: 휴머니스트, 2007) - W. J. 보트, 조선정벌기 속의 임진왜란, pp. 233~84. - 김한규,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중국적 세계질서의 붕괴, pp. 285~316. - 케네스 M. 스워프, 순망치한: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pp. 317~54.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서울: 경인문화사, 2005) - 정구복, 임진왜란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 pp. 1~22. - 한명기,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pp. 103~28. 스카와 히데노리, 동아시아 해역 국제경제 질서와 임진왜란: 해역질서 및 화폐의 관점에서, 서애 류성룡 서거 4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논문집, 2007.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75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이 호 준 * 목 차 1. 머리말 2. 16세기 조선의 군사체제 변화 3. 전라도 관군의 초기 활동과 제1차 근왕군 1) 전라도 관군의 경상도 투입 2) 제1차 전라도 근왕군 활동 4. 삼도 근왕군의 활동 1)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 과정 2) 경상도 충청도 근왕군 활동 5. 용인( 龍 仁 ) 전투의 패전과 복귀 6. 맺음말 1. 머리말 1) 현재까지 한국의 군사사( 軍 事 史 ) 연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임진왜란 ( 壬 辰 倭 亂 )이다. 1) 기존 임진왜란 연구의 지배적인 시각에 의하면, 조선은 건국 이후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면서 점차 군비가 해이해졌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참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2) 또한 건국 이후 처음으로 수도가 함락되었던 충격과 대규모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을 겪었던 임진 왜란의 후유증에 과도하게 주목한 나머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 軍 事 體 制 )는 총체적 으로 부실했다고 평가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주체로서 수군 ( 水 軍 )과 의병( 義 兵 )의 활동은 높게 평가되는 반면 육상에서의 관군( 官 軍 )의 활동은 매우 부정 적으로 평가되곤 하였다. 3)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강사 1) 오종록, 2004. 조선시대 군사사 연구의 동향 -2001~2004- 軍 史 53, 332~335쪽. 2) 정구복, 2005. 임진왜란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9~10쪽. 3) 박재광, 2005.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39~40쪽.; 심승구, 2005. 임진왜 란의 발발과 동원체제의 재편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184~185쪽.
76 학예지 제19집 이러한 인식은 조선 관군이 임진왜란 초기에 붕괴되었고 재정비와 군사력 회복의 과정을 거 쳐 1593년이 되어서야 전체적인 전황 극복에 기여하였다고 보는 시각으로까지 나아갔다. 4) 그 러나 1990년대부터 관군의 활동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지고 전쟁사적 관점의 연구가 진행되었 다. 5) 이후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선 관군의 동원체제는 적절하게 가동되었으나 전술적 취약성 으로 인하여 초전에 패배하였음을 고찰한 선구적인 연구가 제출되었다. 6)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 관군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점차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재검토가 심화되면서 전쟁 초기 관군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을 고찰하는 연구가 후속하여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를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경상도 지 역의 관군 활동을 주목한 연구와 전라도 지역의 관군 활동을 주목한 연구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먼저 경상도 지역에 집중한 연구이다. 이에 관한 주요 연구로는 경주판관 박의장( 朴 毅 長 ) 을 중심으로 경상좌도 관군의 활동을 분석한 연구 7) 와 임진왜란 초기 조선 조정의 조치와 경상 도 지역에서 조선의 군사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들 수 있다. 8) 최근에는 경상 좌병사 박진( 朴 晉 )과 권응수( 權 應 銖 )를 중심으로 진행된 경상좌도의 초기 대응이 고찰되기도 하였다. 9) 다음으로 전라도 지역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호남군병의 난, 전라도 방어에 대한 연구 10) 를 주목할 수 있다. 아쉽게도 전라도 지역 의 경우는 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구가 의병 활동에 치중되고 있어 11) 추가적인 연구가 필 요한 실정이다. 본 논문에서는 임진왜란시 관군의 활동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경향과 논의를 바탕으로, 16세기 를 거치며 변화된 조선의 군사체제가 임진왜란 초기에 하삼도 지역에서 구현되고 있는 양상을 분석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전라도는 4차에 걸친 근왕군 활동과 지역방어의 성공에 4) 오종록, 2004. 앞의 글, 353쪽. 5) 노영구, 2010. 壬 辰 倭 亂 의 學 說 史 的 검토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6~27쪽. 6) 노영구, 2003.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 - 和 歌 山 縣 立 博 物 館 소장 壬 辰 倭 亂 圖 屛 風 에 대한 새 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문화 31. 7) 장준호, 2010. 임진왜란시 朴 毅 長 의 慶 尙 左 道 방위활동 軍 史 76. 8) 이호준, 2010.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 전투와 군사체제 軍 史 77. 9) 김진수, 2012.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조선군의 대응양상에 대한 검토 軍 史 84. 10) 하태규, 2007.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연구 26.; 하태규, 2010. 임진왜란 초기 호남군병의 난과 운암전투의 실상 역사와 담론 56. 11) 조원래, 2001.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조원래, 2011. 임란 초기 전라좌의병과 임계영의 의병활동 조선시대사학보 57.; 임진왜란사연구회, 2011. 임진왜란과 전라좌의병, 보고사.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77 힘입어 정유재란( 丁 酉 在 亂 ) 이전까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을 맞 아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관군은 매우 체계적인 절차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활동 가운데 방어군과 좌수군이 경상도로 투입되는 과정과 제1차 근왕군 활동 과정, 이후 삼도 근왕군이 조직되어 경기도로 북상하였던 과정을 통해 조선의 군사체제가 작동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근왕군은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설정된 진관의 구분과 진법체계를 기준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는 점에서 면밀한 고찰이 필요 하다. 이에 더불어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이 주력이었던 삼도 근왕군의 북상 과정과 용인 전투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 2. 16세기 조선의 군사체제 변화 조선은 대외 정세와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면서 군사제도를 개선시켰다. 15세기 초부 터 명( 明 )과 몽골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토목의 변( 土 木 之 變 ) 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자, 조선은 급변하는 북방 대외정세에 주목하여 중앙군과 지방군을 확대하고 조직을 정비하였 다. 이 과정에서 오위진법( 五 衛 陣 法 ) 이 간행되어 부대 편성과 전술 체계의 기준이 되었다. 12) 중앙군 조직의 개편으로 오위체제( 五 衛 體 制 )가 성립되었고, 세조( 世 祖 )대에는 북방 지역에서 적용되었던 군익도( 軍 翼 道 ) 체제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진관체제( 鎭 管 體 制 )가 시행되었다. 13) 병농일치( 兵 農 一 致 )의 원칙 아래 군적( 軍 籍 )에 포함된 군사의 수가 충분히 확보될 때는 각 도 의 지방군만으로도 소규모 적침에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92년부터 시작된 자연재난이 16세기에도 지속되어 폐농( 廢 農 )과 실농( 失 農 )의 반 복으로 상당한 사회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군역수행자의 양적 규모가 점차 축소된 것이 다. 14) 조선은 이에 대응하고자 새로운 정예 병종( 兵 種 )을 창설하거나 내금위( 內 禁 衛 )와 같은 기존 정예 병종의 수를 확대함으로써 군역수행자의 양적 감소를 정예군의 증강으로 보완하고 자 하였다. 15) 적침을 맞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조선은 지방군의 초기 대응에 이어 중앙에서는 12) 김동경, 2010. 조선 초기의 군사전통 변화와 진법훈련 軍 史 74, 130~134쪽. 13) 오종록, 1992. 朝 鮮 初 期 兩 界 의 軍 事 制 度 와 國 防 體 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76~178쪽. 14) 이태진, 2012. 새 韓 國 史, 까치, 347쪽. 15) 노영구, 2005. 율곡 이이의 軍 政 改 革 論 과 그 계승 역사문화논총 1, 43~45쪽.
78 학예지 제19집 경장( 京 將 )이 정예군을 이끌고 파견되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다. 대규모 전란을 맞아 중앙군이 지방으로 파견되는 것은 조선의 전쟁수행 과정에서 일반적인 사항이었으나, 그동안의 연구는 경장( 京 將 )의 파견 자체를 매우 특수한 변화로 보는 경향이 있 었다. 조선은 오위진관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도 대규모 전란시에는 조정( 朝 廷 )에서 별도로 장수 를 파견하였다. 16) 지방군의 수준에서 처리할 수 없는 대규모 전란에서 정예부대를 현장으로 증파하는 것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당연한 조치다. 사실 이는 조선 이전의 국가들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보아도 매우 일반적인 특성이다. 아래의 사료를 주목해보자. 우리 나라의 제도는 병( 兵 ) 농( 農 )이 서로 나뉘어지지 않아 목사( 牧 使 ) 이하로 군수( 郡 守 ) 현령 ( 縣 令 ) 현감( 縣 監 )에 이르기까지 으레 품질( 品 秩 )에 따라 병마절제사( 兵 馬 節 制 使 ) 병마동첨절제사 ( 兵 馬 同 僉 節 制 使 ) 병마도위( 兵 馬 都 尉 )를 겸직시켰는데, 수군( 水 軍 )도 그러하였다. 절제사가 진관을 맡아 다스리면 주변 고을의 병마 동첨절제사와 병마 도위는 여기에 소속되었다. 민정( 民 政 )에 있어서 는 서로 관련되지 않았으나 병정( 兵 政 )에 있어서는 진관이 주관하였으므로 평상시에는 읍을 진관에 소속시켜 놓고 주부( 州 府 )에 대해서는 장수( 將 帥 )로 예우하며 모두 병사와 수사의 통솔을 받게 했다. 그러다가 큰 병란이 일어나면 조정에서는 별도로 대장( 大 將 )이나 방어사( 防 禦 使 ) 등을 파견하여 다른 병력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는 한편 본도의 장졸( 將 卒 )들도 질서 정연하게 분속( 分 屬 )시켰다. 그리하 여 혹은 군사를 뽑아내기도 하고 보충시키기도 하였으나 진관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제승방략 은 한때의 분군( 分 軍 )했던 것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간혹 병사와 수사가 패전하여 직( 職 )에서 물러나기 도 하였으므로 방어사로 대신하게 했던 것이지 아주 정해진 제도는 아니었다. 17) 경장은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기도 했지만, 해당 지방군의 일부 거진( 巨 鎭 )을 분속받기도 하 였다. 그런데 16세기에 군역수행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지방군의 병력이 줄어들었고, 간 혹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가 수적 열세에 처해 초전에서 패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 경장이 후속하여 전장으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경장이 파견될 경우 중앙군( 京 軍 )의 충분한 병력유지를 위하여 해당 지방군의 일부를 경장 소속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18) 그리고 지방군의 전체 병력수가 줄었기 때문에 경장이 16) 갑작스러운 비상 상황시에는 군대 지휘체계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평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대장( 大 將 )이 임명되어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휘하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조선은 대규모 전란시에 중앙에서 대장을 임명하여 경군( 京 軍 )을 이끌고 적변이 일어난 지방으로 급파하였다. 육군군사연구소, 2012.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 사사(조선전기Ⅰ) 5, 경인문화사, 277~278쪽. 17) 선조수정실록 권25, 24년 10월 1일 계사 18) 육군군사연구소, 2012. 국방체제의 변화와 외침의 빈발 한국군사사(조선전기Ⅱ) 6, 경인문화사, 372~374쪽.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79 파견되면 내륙의 거진 이외에도 일부 제진이 경장 소속으로 추가 전환되었다. 이러한 부분을 고려했기 때문에 기존의 진관법( 鎭 管 法 )은 수정 보완될 수밖에 없었다. 진관체제가 시행된 초 기부터 진관의 운용과 기능은 계속하여 조정되었고 19), 16세기 중엽에는 경장의 파견과 지방군 분속과 관련되어 수정된 진관법을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의 분군법( 分 軍 法 ) 이라 불렀다. 16세기를 거치며 진관체제는 이렇듯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제승방략으로 구체화 변화되 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를 기반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20) 지방군의 초기 대응시 도 ( 道 ) 단위의 군사체제가 작동된 점, 좀 더 구체적으로 볼 때 도내의 지역별 각 고을이 집단으로 편성되는 거진( 巨 鎭 )을 중심으로 지방군의 초기 대응이 이루어진 점에서도 진관체제의 큰 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전라도 관군의 초기 활동과 제1차 근왕군 1) 전라도 관군의 경상도 투입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 도의 제승방략에 따라서 하삼도에는 방어사를 비롯한 경장들이 즉 각 파견되었다. 경장이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남부 지방의 감사는 순찰사를 겸하고 있었다. 21) 일본군이 상륙한 경상도에는 순변사, 좌 우방어사와 3명의 조방 장이 파견되었고, 인접한 전라도에는 1명의 방어사와 3명의 조방장이 그리고 충청도에는 방어 사가 파견되었다. 22) 경장들은 역로( 驛 路 )을 따라 남하하면서 제승방략에 약속된 자신들의 집 결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경상도로 파견된 경장들은 일본군의 북상으로 계획된 집결지에 도 착할 수 없었다. 반면 전라도로 파견된 경장들은 계획된 지점에 도착하여 부대 편성을 완료하 였다. 1592년 4월에 전라도 관군이 경상도에 투입되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의 철저한 도( 道 ) 단위 군사력 운용과 통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부산포에 접근할 때부터 경상도의 전황은 전라도의 주요 직위자에게 신속하게 전파되었다. 23) 4월 16일 이광( 李 洸 )은 19) 육군군사연구소, 2012. 진관체제의 확립과 지방군 한국군사사(조선전기Ⅰ) 5, 경인문화사, 365~370쪽. 20) 허선도, 1974. 制 勝 方 略 硏 究 (하) 진단학보 37, 14~15쪽. 21) 명종실록 권19, 10년 10월 18일 기묘; 선조수정실록 권25, 24년 3월 1일 정유 22)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15일
80 학예지 제19집 경상도 순찰사 김수( 金 睟 )로부터 전라도 관군을 경상도로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24) 김 수는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李 舜 臣 )에게 조정의 승인을 받자마자 즉각 전라 도 관군을 경상도로 투입할 수 있도록 미리 출동준비를 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25) 그러나 이광 은 김수의 요청에 즉각 응하지 않았다. 또한 전임 광주( 光 州 )목사를 비롯한 도내의 수령들로부 터 근왕군( 勤 王 軍 )을 조직하여 북상할 것을 건의받았으나 이 때에도 역시 즉각 근왕군을 동원 하지 않았다. 26)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이광이 전라도 관군을 타지방으로 파견하는 것에 대하여 조정으 로부터 승인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광은 전쟁 초기 원활하게 유지되고 있던 통신체계 를 활용하여 조정에 장계( 狀 啓 )를 올려, 전황 보고와 동시에 27) 전라도의 관군을 이끌고 도 외 부로 이동하여 작전을 수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 이광이 왜적이 깊이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이동하여 토벌할 것을 계청하니 상 이 서찰을 내려 칭찬하며 유시하였다. 이광이 즉시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공주( 公 州 )에 이르렀는데 28) 위의 사료를 볼 때 이광은 경상도 전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군 선봉대가 경상도 내륙으로 진출하자, 나름의 전략적 판단 하에 전라도 관군을 이끌고 도( 道 ) 외부로 이동하여 전투를 벌이겠다고 건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정에서는 이광의 건의를 승인함으로써 전라도 관군을 외부로 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 다. 조정에서는 선전관( 宣 傳 官 )을 통해 교지( 敎 旨 )를 내려 29) 조방장 이유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이동하도록 조치하였고, 전라도 순찰사에게는 전라도 관군을 징발( 徵 發 )하고 경 상도에 투입시킬지 여부를 직접 판단할 것을 지시했다. 30) 이를 통해서 볼 때 전라방어군( 防 禦 23) 이순신, 난중일기( 亂 中 日 記 ) 임진년 4월 15~20일;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1~3, 구 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1~3 24) 경상도 순찰사 김수는 경상도 초기 방어선이 돌파되고 밀양까지 함락되었음을 전라도 겸순찰사 이광에게 알리면서 전라도 군사 3~4천명과 군관 3~4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16일 25) 이순신,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1;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26)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재상에게 보낸 서한 27) 유팽로, 국역 월파집( 月 坡 集 ) 임진년 4월 17일 28) 선조수정실록 권25, 25년 5월 1일 경신 29) 전라도에 최초로 파견되었던 선전관 민종신( 閔 宗 信 )은 5월 10일 평양으로 복귀하여 선조( 宣 祖 )에게 수행한 업무를 보 고하였다. 선조실록 권26, 25년 5월 10일 기사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81 軍 )과 전라수군( 左 水 軍 )이 전쟁 초기에 경상도로 투입된 것은 순찰사 이광의 결심에 의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31) 전라방어군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우도 금산( 金 山 )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도내로 복귀하였 다. 전라방어사( 防 禦 使 ) 곽영( 郭 嶸 )은 4월 27일 전라우조방장( 右 助 防 將 ) 이지시( 李 之 詩 )를 비 롯한 5천여 명의 방어군을 이끌고 운봉( 雲 峯 )과 함양( 咸 陽 )을 거쳐 4월 29일에는 추풍령( 秋 風 嶺 ) 일대의 금산으로 이동했다. 32) 곽영은 경상우방어사 조경( 趙 儆 )의 부대와 합세하여 금산 일 대를 차단하면서 일본군 제3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후 이광이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을 조직하 여 북상하자 전라방어군은 전라도 지역방어를 위해 복귀하였다. 33) 전라도수군의 경우 당초 좌 우수군이 함께 경상우도로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우수군의 집결 이 지연되면서, 결국 전라좌수군이 먼저 경상우수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해전을 벌였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4월 27일 조정으로부터 경상우수사 원균( 元 均 )과 합세하여 작전을 실시하라 는 명령을 받자, 예하 관포( 官 浦 )에 분군령( 分 軍 令 )을 하달하여 좌수군 함대를 편성하고 5월 1일 출동준비를 완료하였다. 34) 그리고 당초 함께 경상도로 투입하기로 되어있던 전라우수군이 약속된 기일에 전라좌수영으로 도착하지 못하자, 전라좌수군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5월 4일 경상우도 해상으로 출동하였다. 35) 이후 이순신과 원균의 함대는 5월 6일 당포( 唐 浦 )에 서 합세한 이후 옥포( 玉 浦 )해전을 시작으로 연승을 거두었다. 36) 2) 제1차 전라도 근왕군 활동 30) 조정에서는 전라도 겸순찰사 이광에게 군사를 징발하고 전라도 관군을 경상도로 투입할지의 여부를 결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였다.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재상에게 보낸 서한; 이순신,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1~2,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1 31)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2 32) 선조실록 권26, 25년 5월 10일 기사;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27일 33) 전라방어군과 경상우방어군이 경상우도 금산( 金 山 )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부분은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이호준, 2010. 앞의 글, 170~173쪽. 34) 이순신은 좌수군을 좌수영 앞 바다로 집결하는 기한을 선정함에 있어 예하 관포( 官 浦 )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진 보성 ( 寶 城 ) 및 녹도( 鹿 島 )가 좌수영으로부터 뱃길로 3일 거리임을 고려하였다. 이순신은 4월 15일 20시에 전쟁발발 소식을 접수하였고 4월 27일 4시에 집결일을 4월 29일로 하는 분군령을 하달하였다. 실제 전라좌수군이 출동준비를 완료한 날짜는 5월 1일이었다. 이순신, 난중일기( 亂 中 日 記 ) 임진년 5월 1일 경오;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1 35) 이순신, 난중일기( 亂 中 日 記 ) 임진년 5월 3일 임신, 5월 4일 계유;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 뢰는 계본3 36) 임진왜란시 해전은 다음의 책을 참고할 것. 이민웅, 2008.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82 학예지 제19집 이광이 교지를 수령한 이후에 발령한 전라도 관군의 동원령은 처음부터 한성으로 근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동원령의 내용을 보면 전라도 각 고을의 수령들은 제진의 군사를 이끌 고 4월 29일까지 여산( 礪 山 )으로 집결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37) 이때 집결지로 선정한 여산 의 지리적인 위치만을 고려한다면 이광이 처음부터 한성으로 근왕하고자 동원령을 하달했다고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4월 23일 경상도의 전황을 볼 때 당시 전라도 관군이 한성으로 북상할 상황은 아니었다. 경상순변사( 巡 邊 使 ) 이일( 李 鎰 )은 4월 25일이 되어서야 상주( 尙 州 )에서 패전 하였으며, 이 소식이 조정에 보고된 것은 4월 27일이었기 때문이다. 38) 결국 앞서 살펴본 것처 럼 이광은 전라도 관군을 이끌고 도( 道 )를 벗어나 이동하여 전투를 벌일 계획으로 도내의 지방 군을 동원한 것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이광의 최초 계획은 경상도의 전황이 급속하게 악화됨에 따라 한성으로 이동하는 근 왕군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이광은 임진왜란 초기 근왕군 활동의 문제점과 용인 전투의 패전으 로 인하여 호남 사족( 士 族 )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 조선 후기의 주요 문집류에 서는 그를 무능하고 비겁한 인물로 그리며, 마치 처음부터 근왕을 미룬 것처럼 기록하였다. 39) 처음 이광은 전란이 나던 당초에 근왕할 뜻이 없었다. 전 광주목사 정윤우( 丁 允 祐 )가 이광에게 근왕 할 대의를 극력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징병령이 내려오자 이광이 비로소 창황하게 군사를 모으려 하였다. 군사 모을 시한은 급박하고 장마가 겹쳐서 고을 수령들이 늦게 도착하였다는 견책을 받을까 두려워 군사들을 급히 몰아쳐서 보통 노정의 배로 가도록 재촉하니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는 군사까지 있었으나 감히 원망하지 못하였다. 40) 그러나 이광에 대한 위 사료의 평가와 달리, 당시 전황은 1592년 4월 말 일본군의 신속한 북상과 함께 이일과 신립 부대가 충격적인 패전을 겪는 등 예상을 뒤엎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광은 단순히 전라도 외부에서 일본군을 요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한성으로 신속하게 북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그와 같은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 37) 선조실록 권26, 25년 5월 10일 기사;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29일 38) 박동량, 기재사초( 寄 齋 史 草 ) 하, 임진일록1, 임진년 4월 27일 39)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재상에게 보낸 서한; 김시양, 자해필담( 紫 海 筆 談 ) ; 김육, 잠곡유고( 潛 谷 遺 稿 ) 권11, 시장; 신흠, 상촌선생문집( 象 村 先 生 文 集 ) 권56, 志 諸 將 士 難 初 陷 敗 志 ;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권15, 선조조고사본말 권율의 행주승첩, 정담의 웅령전사, 권율 황진의 이치 승첩; 최립, 간이집( 簡 易 集 ) 권1, 碑 권원수 의 행주비; 허목, 미수기언( 眉 叟 記 言 ) 별집 권25, 구묘문 나주목사 박공의 묘표 40)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권15, 선조조고사본말 3도 근왕병이 용인서 패전하다 6월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83 라서 이광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추진된 제1차 전라도 근왕군 동원의 후유증은 이후의 근왕군 활동에 있어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했다. 위의 사료에서 언급된 것처럼 장마로 인하여 군사들이 이동하기 어려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장( 鎭 將 )들은 약속된 기일을 맞추 기 위해 무리한 이동을 강행하였기 때문이다.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은 다소 무리하게 추진되었으나 결국 여 산을 떠나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 과정은 임진왜란 초기 김성일( 金 誠 一 )의 이동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경상우병사로 발령받아 임지로 내려가던 김성일은 전쟁이 발발하자 신속하게 남하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김성일은 4월 22일 함안( 咸 安 )에서 한성으로 소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41) 직산( 稷 山 )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경상도초유사( 招 諭 使 )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복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전주( 全 州 )와 여산 사이에 위치한 삼례역( 參 禮 驛 ) 42) 인근에 이르러 근왕군을 이끌고 여산으로 가던 금산( 錦 山 )군수 권종( 權 悰 )과 화순( 和 順 ) 현감 정지( 丁 至 )를 만났다. 뿐만 아니라 이날 밤 여산의 한 객주( 客 主 ) 집에 전라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43) 이 부분이 전라도의 수령들이 각 제진의 군사를 이끌고 여산으로 집결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6일 동안 수많 은 지방군이 여산에 집결되었다. 44) 이후 순찰사 이광은 집결된 각 진( 鎭 )을 6군( 軍 )으로 분군 하여 북상하였다. 45) 41)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22일 42) 삼례역( 參 禮 驛 )은 전주부( 全 州 府 )에서 북쪽으로 35리 거리의 역( 驛 )으로 북쪽에서 전라도로 진입할 경우 대부분 이 곳 을 경유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 권33, 전라도 전주부 역원; 장유, 계곡집( 谿 谷 集 ) 권21, 계사 湖 南 暗 行 御 史 復 命 書 啓 43) 이노, 역주 용사일기( 龍 蛇 日 記 ) 한일문화연구소, 43쪽. 44) 순찰사 이광은 4월 29일에 제1차 근왕군 10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에는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이 역시 동일하게 10만여 명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4만여 명이었다.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상에는 대규모의 군대를 10만 대군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식의 택당집( 澤 堂 集 ) 에 기록된 이광의 행장에도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규모가 언급되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의 병력은 2차 근왕군보다 적은 병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29일; 이식, 택당집( 澤 堂 集 ) 별집 권8, 行 狀 전라 도도순찰사 이공의 행장 45)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은 6군( 軍 )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공주에서 근왕군이 철수하는 기록중 6군( 軍 )이 무너졌다는 대목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진법( 陣 法 )과 분군법( 分 軍 法 )에 대하여 가장 구체적인 사료는 이일( 李 鎰 )이 1588년 저술한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 이다. 현재의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 은 이선( 李 選 )이 1670년 중간한 것이다. 이광 은 문신이지만 그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병무( 兵 務 )에 정통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안도병마평사, 병조좌랑에 이어 1583년 함경도 지역에서 니탕개의 난 이 일어났을 때는 북청판관, 함경도도사, 함경도순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 였다. 이후 병조정랑에 이어 북방에서 강계부사, 영흥부사, 길주목사로 활동하다가 1586년에는 함경도 감사 겸 순찰사 로 부임하였다. 이광은 함경도 순찰사 재임간 1587년 시전부락 전투를 치루었으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과 당시 국방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이는 이일이 조정에 발송한 請 行 制 勝 方 略 狀 에서 확인된다. 이후에는 오위도총부 부
84 학예지 제19집 한편, 전라도 근왕군이 한성으로 북상하면서 도내의 전력공백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상도로 투입되었던 전라방어군이 복귀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전라도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하 면서 전쟁 초기 경상도에 투입한 전라방어군을 전주로 복귀시켰다. 경장 소속의 방어군이 이미 경상도에 투입된 상황에서 순찰사마저 잔여 지방군의 주력을 이끌고 북상할 경우 전라도를 방 어할 병력이 매우 부족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경상우도 금산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전라방어사 곽영은 조방장 이지시를 비롯한 방어군 전체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하여 전주에 주둔하였다. 46) 전라도 근왕군은 공주( 公 州 )에 도착하여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이광은 파군( 罷 軍 )을 결심한다. 대부분의 문집류 사료에서는 공주에 도착한 이광이 선조( 宣 祖 )의 서행 ( 西 行 )과 일본군의 한성 점령 소식을 듣자, 즉각 파진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47)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48) 과 택당집( 澤 堂 集 ) 에 수록된 이광의 행장( 行 狀 ) 49), 그리고 하태규 의 연구 50) 를 통해 볼 때, 전라도 근왕군이 공주에서 복귀하게 된 이유를 단순히 무능한 이광 의 결심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당시 제1차 근왕군은 동원하는 과정에서 워낙 무리하게 추진되어 징병에 대한 군사들의 반발과 더불어 군기 문란이 심각하여 전력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근왕하기에는 군량미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51) 즉, 무능한 이광의 판단이 근왕군의 공주 복귀를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이 이광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리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광은 한성의 소식을 듣고 여러 정황을 판단하여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을 복귀시켜 체계적 으로 재조직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료는 이광이 고경명( 高 敬 命 )에게 근왕 격 총관에 이어 1589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특히, 임진왜란을 대비한 비변사의 인사조치에 의해 1591년 전라도 순찰사로 부임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력을 고려할 때 임진왜란시에도 당대 군사업무의 계획된 절차에 따라서 행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 에서 각 고을의 수령 및 진장을 분군하여 부대를 편성하는 방 식과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전라도 근왕군이 조직된 것이다. 당시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의 편성에 있어 6군의 세부사항 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라도 제승방략에 의하여 경장과 수군소속의 제진을 제외하고 여산으로 집결한 대부분의 전 라도 각 고을의 군사들은 진법체계에 의해 편성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식, 택당집( 澤 堂 集 ) 별집 권8, 行 狀 전라도도순찰사 이공의 행장; 이선, 국역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 권2, 六 鎭 大 分 軍, 三 邑 分 軍, 請 行 制 勝 方 略 狀 ;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4월 29일 46)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4일 47)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재상에게 보낸 서한; 안방준, 국역 은봉전서( 隱 峯 全 書 ) 권6, 임진기사 48)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5월 1일 경신 49) 이식, 택당집( 澤 堂 集 ) 별집 권8, 行 狀 전라도도순찰사 이공의 행장 50) 하태규, 2007. 앞의 글, 153~154쪽. 51)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5월 3일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85 문을 요청한 서한이다. 전라감사 이광이 전 부사( 府 使 ) 고경명에게 보낸 서한에,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중략) 오늘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애통하고 절박한 취지로 격문을 띄워 서 사방의 충의있는 동지를 불러 유시하여 지체 없이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씻기나 바라야겠습니다만, 격문의 말이 만약 간절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길이 없으니 격문을 거칠고 엉성하게 지어서는 안됩니다. 격문을 지으셔서 속히 보여주기를 감히 바랍니다. (중략) 또 이 뜻을 사중( 士 重, 김천일의 字 ) 등의 제공( 諸 公 )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다. 52) 위의 사료는 이광이 고경명에게 근왕의 격문을 작성해줄 것을 급하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또한 김천일( 金 千 鎰 )을 비롯한 호남의 명망있는 사족( 士 族 )들에게 함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서한을 발송한 날짜가 이광이 공주에서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수한 5월 3일이었다. 이는 고경명이 이광에게 답신하는 아래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다만 저 경명이 월초부터 이 고을 동부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지금 귀하의 글월을 보니 3일에 낸 것인데 6일에야 군졸이 빈 집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늦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늦어서 일에 맞춰 쓰이지 못할까 무척 근심하고 있습니다. 53) 이광은 이미 한성이 함락된 상황에서 당시 전라도 근왕군의 군기, 사기, 병력규모 그리고 부족한 군량미를 고려하여 한성에 주둔중인 일본군에 비해 근왕군이 매우 열세한 것으로 판단 한 것이다. 따라서 도내로 복귀하여 근왕군을 재조직함으로써 충분한 준비를 하여 다시 북상하 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도내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자 도내 사족들의 대표자격인 고경명에게 근왕 격문을 요청한 것이다. 지휘부였던 순찰사 이광의 판단과는 달리 예하의 일부 장수들은 계속해서 북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광은 5월 4일 공주에서 군사를 되돌리고자 공주에서 파진( 罷 陣 )을 명령하였는데, 52)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3일 53)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도순찰사 이광에게 답한 서한;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3일
86 학예지 제19집 본영의 외곽에 주둔했던 예하 장수들은 이광을 찾아와 도내로 복귀하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건 의했다. 54) 당시 판치( 板 峙 ) 55) 에 주둔하였던 광주목사 권율( 權 慄 )은 파진하라는 명령을 듣자 광 주진의 군사들을 엄히 단속하고, 이광을 찾아가 명령을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며 전 첨사( 僉 使 ) 백광언( 白 光 彦 )도 이광을 찾아와 비난하였다. 56) 일부 장수들은 현 시점에서 그 대로 북상하여 한성을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광은 파군을 철회하였지만 군사들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미 부대 전체가 술렁이며 그동안 내재되었던 문제가 증폭된 것이었다. 일부 제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사들은 이탈하여 도 내로 복귀하고자 했다. 이에 이광은 예하 지휘관들로 하여금 이산( 尼 山 )현의 석교천( 石 橋 川 ) 일대 57) 에서 도망병을 즉결 처분하며 부대를 수습하고자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군기와 사기로 인하여 결국 부대 전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58) 이광은 결국 권율과 백광언을 비롯한 여러 수령 들과 함께 전주( 全 州 )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고 59), 이후 조정으로부터 근왕의 독촉을 받고 삼도 근왕군을 조직하여 다시 북상하게 된다. 4. 하삼도 근왕군의 조직과 북상 1)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 과정 전주로 복귀한 이광은 재차 근왕군을 동원하에 앞서 도내의 민심을 안정화하고자 하였다. 백광언을 조방장으로 임명하고 60) 고을별로 도내의 요해지를 할당하여 방어하도록 조치하였다. 공주에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면서 본보기로 난동의 주모자들을 처벌하여 군율을 세웠다. 도내에 유시( 諭 示 )를 내려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61) 54)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재상에게 보낸 서한;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3일;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55) 계룡산( 鷄 龍 山 )의 서쪽 자락이 이어지다가 끊어지는 고개로써 공주( 公 州 )와 이산( 尼 山 ) 사이의 통로이다. 만기요람( 萬 機 要 覽 ) 군정편4, 관방 충청도 공주;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별집 권16, 지리전고 총지리 56)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안방준, 국역 은봉전서( 隱 峯 全 書 ) 권8, 호남의록 57) 이산( 尼 山 )의 석교천( 石 橋 川 )은 석성( 石 城 )현의 수탕천( 水 湯 川 )까지 이어지는 지류였다. 이광이 군사들을 수습하고자 했던 지점이 이산의 석교( 石 橋 )였던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와해된 전라도 근왕군의 대부분이 석교를 건너 은진과 여산을 경유하여 도내로 복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 권18, 충청도 이산현 산천 58)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5월 1일 경신 59) 안방준, 국역 은봉전서( 隱 峯 全 書 ) 권6, 임진기사; 권8, 白 沙 論 壬 辰 諸 將 士 辨 60)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87 한편, 조정에서는 경기도의 일본군을 남북으로 압박하여 섬멸하고자 했기 때문에 근왕군의 북상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근왕 소식이 없자 선조는 5월 3일 개성( 開 城 )에서 하삼도 근왕군으 로 하여금 북상할 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하달하였다. 62) 이광은 5월 11일 전주에서 이 교지를 접수하고 동원령을 하달했다. 63) 그리고 경상도 순찰사 김수에게도 교지를 전달했다. 64)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과정에서는 매우 심각하게 군기가 이완되면서 심지어 호남군병 의 난 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65) 우주창( 紆 州 倉 )에 주둔하고 있던 전주판관 이성임의 군사들과 금구( 金 溝 )에서 주둔중이던 조방장 백광언의 군사들도 흩어져 버렸다. 66) 이에 더해 순창( 淳 昌 ) 옥과( 玉 果 )의 군사들이 징병에 불복하며 반란을 일으켜 순창 일대를 장악하였고, 전주로 이동하던 담양( 潭 陽 )의 군사들도 연달아 와해되었다. 67) 이외에 고산( 高 山 )현감 신경희( 申 景 禧 ) 는 이광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68) 이광은 근왕을 지체할 수 없어 전라병사 최원( 崔 遠 )에게 전라도 방어와 반란 진압을 맡기고 북상하였지만 근왕군의 군기 이완은 지속되었다. 5월 19일에 근왕군이 북상한 지 하루 만에 군사들의 도망과 반란이 속출하여, 5월 20일에는 남원( 南 原 )과 구례( 求 禮 ), 순천( 順 天 )의 군사 8천여 명이 흩어지며 전주로 도망하였다. 이를 수습하던 이광의 군관( 軍 官 )이 반란군에게 붙들 렸다가 전주에서 겨우 빠져나올 정도였다. 남원부사는 남원판관을 남원으로 복귀시켜 군사를 수습하고, 구례현감은 직접 구례로 돌아가 수습한 뒤 은진( 恩 津 )에서 합류했다. 이외에도 전주, 나주, 광주의 군사들도 용안( 龍 安 )에서 도망하여 수령들이 수습하고자 하였다. 69) 순창과 옥과 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 최원이 남원에서 진군하였으나, 순창군수가 겨우 난을 진압하기 도 하였다. 70)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은 군기와 사기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가진 채 북상했다. 전라도 근왕군이 북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많은 수의 도망병은 상당수가 치중( 輜 重 ) 인 61) 이식, 택당집( 澤 堂 集 ) 권8, 행장, 전라도 도순찰사 이공의 행장 62) 선조실록 권26, 25년 5월 10일 임술 63)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선조교서 64)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14일 65)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과 이후 북상 과정에서 일어난 호남군병의 난의 연구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것. 하태규, 2010. 앞의 글, 413~414쪽. 66)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5월 3일 67)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18일 68) 이식, 택당집( 澤 堂 集 ) 별집 권8, 行 狀 전라도도순찰사 이공의 행장 69)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권15, 선조조고사본말 3도 근왕병이 용인서 패전하다 6월;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19일, 20일 70) 전라병사 최원은 5월 16일 남원에 주둔 중이었다.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4월 22일;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20일
88 학예지 제19집 원이었다. 전라도 근왕군의 병력 규모는 4만여 명이었지만 71) 여기에는 군량을 수송하는 인원 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아래의 관련 기록을 보자. 본도 군량 소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은 8명에 한 바리, 교생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72) 전라도 근왕군은 전투병 이외에도 치중 인원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진위에 도착한 삼도 근왕군의 총병력 5만여 명을 기록한 대목에서 병마( 兵 馬 )와 치중( 輜 重 )을 합하여 언급하였 다. 73) 전라도 근왕군의 치중 인원은 대부분 각 고을의 공노비, 개인 소유의 사노비, 공을 세우 기 위한 자원자들이었다. 이들은 군율과 사기 면에서 볼 때 전투 병력보다 응집도가 매우 떨어 지기 때문에, 근왕군을 이탈하는 병력 중에는 치중 인원이 상당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은 순찰군과 방어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대편성의 기준은 전라좌도 와 우도의 지리적인 구분, 나아가 진관의 구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74) 이 점은 전라 도 근왕군이 전주에서 북상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근왕군의 출발 기록에 있어 선조 수정실록 보다 구체적인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의 대목을 보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겸순찰사 이광은 전주부윤과 나주목사 등을 거느리고 전주, 익산, 용안, 임천, 온양을 거쳐 이동하였 다. 반면 방어사 곽영은 조방장 이지시, 김종례, 남원부사 등을 거느리고 여산, 공주를 경유하는 충청 도 대로( 大 路 )를 따라 이동하여 경기도 진위( 振 威 )에서 다시 합진( 合 陣 )하기로 하고 5월 19일에 북상 하였다. 75) 근왕을 위한 군사 활동이기 때문에 순찰사와 방어사가 거느린 전주부윤, 나주목사, 남원부사 는 평시의 수령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군사직위로 보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71)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6월 1일 기축;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권15, 선조조고사본말 3도 근왕병이 용인서 패전하다 6월 72)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19일 73)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6월 1일 74) 각 지방의 거진( 巨 鎭 )은 지리적인 구분을 고려하여 편성되었다. 진관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 기능이 달랐다. 국경지역 진관을 중심으로 국방이 이루어지고, 내지의 거진은 유사시 거점이 되었다. 육군군사연구소, 2012. 앞의 책, 382쪽. 75)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5월 1일 경신;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19일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89 각각 전라도의 거진장( 巨 鎭 將 )들이다. 순찰사 소속의 전주부윤은 정3품 병마절제사( 兵 馬 節 制 使 ), 나주목사는 종3품 병마첨절세사( 兵 馬 僉 節 制 使 )이다. 또한 방어사가 거느린 남원부사는 종 3품 병마첨절제사이고 76), 조방장은 대부분 정3품으로 지방으로 파견시 병마첨절제사 이하의 지방군 지휘관들을 통제하는 고위 장수였다. 77) 그렇기 때문에 당시 순찰군은 전라우도의 거진 을 중심으로 편성되고, 방어군은 전라좌도의 거진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그동안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편성에 있어 의심할 바 없이, 선조수정실록 과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에 따라서 광주의 군사들은 전주 에서 출발할 때부터 방어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여겼다. 광주목사 권율이 방어군의 중위장( 中 衛 將 )으로서 충청도 대로를 따라 북상했다는 것이다. 78) 그런데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와 정 기록( 正 氣 錄 ) 의 내용을 보면 권율은 수원에서 방어군 소속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 의 아들들이 용안에서 도망쳤던 광주의 군사들을 수습하여 수원에서 광주목사에게 인계하였는 데, 이후 광주목사 권율이 방어군의 중위장으로 임명되었다고 서술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권율 은 이광을 따라 서쪽으로 북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79)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이동로를 보면 권율을 비롯한 광주의 군사들은 방어군이 아닌 순찰 군 소속이었음이 확실하다. 앞서 살펴보았던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북상 과정에서 군사들이 도망치는 대목을 다시 한 번 보자. 5월 20일 전라우도에 속하는 전주, 광주, 나주의 군사들이 용안에서 도망하였는데, 80) 용안은 순찰군의 이동로상의 고을이며 금강( 錦 江 )을 도하하는 곳이 다. 광주의 군사들이 방어군 소속이라면 용안에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찰군과 방어군이 전주를 떠나 삼례역을 지나면서부터는 이미 별도의 이동로를 따라 북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주에서 근왕군이 편성될 때 권율의 광주 군사들은 순찰군 소속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시 전라도 제승방략의 분군법은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에 수록된 진관법과는 달랐지 만 전시에 부대를 편성함에 있어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시대를 통 틀어 볼 때 전라좌도와 우도의 구분은 시기별로 미세한 조정이 있었다. 광주는 조선후기에 전 라좌도에 속하였지만, 81) 조선전기에 이어 임진왜란시에도 전라우도에 속한 고을이었다. 82) 따 76) 역주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권4, 兵 典 外 官 職 77) 서태원, 2001. 朝 鮮 前 期 有 事 時 地 方 軍 의 指 揮 體 系 사학연구 63, 51~52쪽. 78)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5월 1일 경신;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권15, 선조조고사본말 3도 근왕병이 용인 서 패전하다 6월 79) 고유후, 정기록( 正 氣 錄 ) 제2편, 본문 재상에게 보낸 서한;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5월 5일 80)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20일
90 학예지 제19집 라서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이 조직될 때 광주는 나주진관 소속의 제진으로 순찰군에 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순찰군과 방어군은 부대를 편성함에 있어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 거진( 巨 鎭 )을 고려하였 다. 전주에서 분군된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최초 편성은 다음과 같다. 이광의 순찰군은 전라 우도 소속인 전주 나주진관을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곽영의 방어군은 전라좌도 소속인 남원 진관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광주는 나주진관 소속의 제진이었다. 전라도 근왕군의 최초 출발 시의 부대편성이 진위에 도착한 이후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 에 기록된 근왕군의 편성 83) 은 삼도 근왕군이 진위에서 재집결한 이후의 것 으로 보인다.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 초기에 순창과 옥과의 군사들이 일으킨 호남군병의 난에 이어 북상과정에서 담양, 구례, 순천의 군사들이 도망하였다. 이 때의 난병( 亂 兵 )들은 전 라좌도 소속으로 특히, 주로 남원진관 소속이었기 때문에 전라좌도의 제진으로 편성된 방어군 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졌다. 따라서 순찰군과 방어군이 별도의 이동로를 따라 경기도 진위에 집결한 이후 전력의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근왕군을 재편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권율의 광주 군사들은 방어군으로 전환된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2) 경상도 충청도 근왕군의 조직 삼도 근왕군 활동 이전에도 김수가 경상도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도 내로 복귀하여 각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일본군 선봉대가 조령( 鳥 嶺 )과 추풍령을 넘어 한성으로 북상하자, 김수는 경상도 근왕군 2천여 명을 이끌고 전라도를 경유하 여 이동하였는데 다시 경상도로 진입하고 있던 초유사 김성일과 운봉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김성일은 김수에게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이 이미 공주에서 파진하였음을 알리면서, 근왕하기에 앞서 경상도내의 일본군을 처리하라고 권고했다. 그리하여 김수는 도내로 복귀하여 근왕군을 경상우도의 각 지역에 분산시키고 지역방어에 진력하였다. 84) 이런 와중에 이광을 통해 경상도 81) 조선전기 전라좌우도의 구분은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러 전라우도 소속의 광 주와 장흥 2개 고을이 전라좌도 소속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1787년( 正 祖 11)에 간행된 탁지지( 度 支 志 ) 에서 확인된다. 시대의 흐름으로 인하여 인문 자연지리 역시 변화하기 때문이다. 전라우도 소속의 진원은 임진왜란 이후 장성에 편입 되었다. 역주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권4, 兵 典 外 官 職 ; 선조실록 권82, 29년 11월 10일 임인; 숙종실록 권59, 43년 6월 27일 경술; 탁지지( 度 支 志 ) 권2 外 篇, 版 籍 司 版 圖 部, 附 疆 域, 湖 南 82) 세종실록 권29, 7년 9월 4일 경자; 이긍익,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권17, 선조조고사본말 호남의병 83) 선조수정실록 권25, 25년 5월 1일 경신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91 역시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하라는 교지가 전달되었다. 김수가 이광으로부터 전달받은 선조( 宣 祖 )의 교지는 아래와 같다. 왜적이 경기 지역에 가득하므로 부득이 송도( 松 都, 개성을 말함)에 주차하여 사방을 호령하여 기어 이 왜적들을 무찔러 섬멸하려고 하니 경은 경상우도에 비밀히 통보하여 급급히 경내의 군사를 총동원 하여 와서 응원하도록 하라 85) 경상도에서는 전라도와는 달리 각지에서 일본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근왕군을 조 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한 차례 근왕군이 북상하였다가 도내로 복귀하였고, 일본군의 주둔과 약탈로 경상우도와 좌도는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근왕의 교지를 받은 김수는 이에 따 라 가용한 소수정예군만으로 근왕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제2차 경상도 근왕군은 순찰사의 아병 ( 牙 兵 )과 경상우도의 일부 수령, 86) 그리고 우방어군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경상우방어군은 우 방어사 조경과 조방장 양사준( 梁 士 俊 ), 종사관 이수광( 李 睟 光 ) 등 군관 70여 명을 주축으로 합 류하였다. 김수는 이후 근왕군 1백여 명을 이끌고 이동하여 5월 18일에 이광과 합류하였다. 87) 한편, 일본군 선봉대의 북상 경로였던 충청도에서도 평소와 같은 계획된 군사동원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전쟁 초기에 충주( 忠 州 )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좌도의 지방군은 도순변사( 都 巡 邊 使 ) 신립의 부대로 동원되었으나 충주 전투에서 패전하였다. 당시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尹 先 覺 )은 청주( 淸 州 )에서 있었는데, 88) 일본군 제3군이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면서 공주로 이동하였 다. 89) 충주에 이어 청주가 함락되면서 충청좌도와 우도의 연결이 차단되었고 90) 충청좌도에서 는 정상적인 군사동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84) 김성일은 김수에게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근왕군을 조직하여 공주까지 북상했다가 다시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근왕하기에 앞서 도내의 일본군을 처리할 것을 권유했다.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5월 7일 85)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86) 제2차 경상도 근왕군에 포함된 경상도의 수령은 밀양부사 박진, 함안군수 유숭인이다. 이외에도 거제현령 김준민 역시 김수의 호령을 받고 거제도에서 경상우도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87)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5월 14일, 16일, 18일; 경상도 근왕군에는 밀양부사 박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진은 김수를 따라 근왕하다가 온양에서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복귀하여 경상좌병사로서 활약하였 다.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6월 6일 88) 윤선각, 문소만록( 聞 韶 漫 錄 ) 판서 윤국형 저 89) 선조실록 권26, 25년 5월 3일 임술; 구로다 나가마사( 黑 田 長 政 )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3군은 전쟁 초기에 추풍령( 秋 風 嶺 )을 넘어 북상하면서 충청도 황간( 黃 澗 )과 청주( 淸 州 )를 함락시켰다. 이형석, 1967. 임진전란사 상, 서울대학교출 판부, 277~278쪽. 90) 윤선각, 문소만록( 聞 韶 漫 錄 ) 판서 윤국형 저
92 학예지 제19집 충청도 근왕군의 동원 과정에서도 도내의 지역을 구분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초 기에 충청도에도 경장( 京 將 )의 파견과 더불어 지방군이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충주 청주 전투 의 패전으로 인하여 근왕군은 충청우도의 군사들을 중심으로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동원한 충청도 지방군은 2만 5천명이었으나 도내의 주요 고을이 함락된 이후에는 1만 5천명의 군사들을 수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사료에서 당시 충청도에서의 군사동 원과 주요 조치를 살펴볼 수 있다. 충청도 관찰사 겸 순찰사 윤선각( 尹 先 覺 )이 치계하였다. (중략) 본도의 군사가 2만 5천명이었으나 세 차례의 패전으로 흩어진 뒤에 거두어 조발하니 겨우 1만 5천명을 얻었습니다. 청주( 淸 州 ) 이동의 고을들은 적로가 막히어 나올 수가 없기에 그 본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방비하도록 하고, 신은 이광 김수와 함께 직산( 稷 山 )에 도착하여 13고을의 군사는 조방장 이세호( 李 世 灝 ), 수사 변양준( 邊 良 俊 ) 등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서 매복하였다가 합동 공격하여 마구 쳐들어 오는 적을 방어하도록 하고, 다만 우도의 군사만으로 근왕병을 삼았는데 그 수가 8천여 명입니다. (중 략) 경성을 구원하겠습니다. 91)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충청도 지역방어를 비롯하여 삼도 근왕군의 이동간 측방의 위협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삼도의 근왕군이 합류하여 5월 27일에 직산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윤선각은 조방장 이세호와 수사 변양준으로 하여금 충청도 13개 고을의 군사들을 이끌고 삼도 근왕군의 우측방을 방어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92) 1만 5천명의 충청도 군사들 가운데 거의 절 반이 도내에 잔류하였고, 충청도 근왕군은 우도 소속의 군사들로만 이루어진 8천명의 규모였 다. 93) 충청도 근왕군의 활동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소만록( 聞 韶 漫 錄 )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91)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92)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육상에서 활동하는 대목을 보아 이 시기에는 충청도의 수군의 상당수가 육전에 투입되었을 것으 로 보인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포 전투에서 부산포 첨사 정발을 비롯한 수군이 부산진성에서 육전을 치루었 던 점, 그리고 경상좌수사 박홍 역시 예하의 좌수영 군사들을 이끌고 육상에서 활동했던 점과 동일한 부분이다. 93) 처음 삼도 근왕군이 합세했을 때는 총병력이 6만여 명이었으나, 6월 1일 경기도 진위에 이르렀을 때에는 총병력이 5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윤선각이 결국 1만 5천명의 충청도 지방군 가운데 8천명을 이끌고 근왕하였고, 나머지 는 조방장 이세호 등에게 소속시켰음을 보여주는 추가적인 대목이다.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 록, 임진년 6월 1일; 坤, 서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93 내 관하는 충청병사 신익( 申 翌 )과 방어사 유옥( 兪 沃, 宣 祖 實 錄 에는 李 沃 이라 기록되어 있음)에게 8천명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진위( 振 威 )에 이르러 우리 3인(삼도 순찰사를 말함)이 모든 장수들과 의 논한 다음 먼저 수원( 水 原 )에 있는 적을 쳐서 길을 개통하고 이어서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마침 수원에 있던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저절로 달아났다. 나는 생각하기를, 대군이 한 번 진위를 떠나면 경기와 충청 사이에는 군사를 주둔할 곳이 하나도 없으니, 용인( 龍 仁 )과 죽산( 竹 山 )에 있는 적이 와서 보급로를 끊는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마땅히 한 진( 陣 )을 진위에 머물러 두어 괴산( 槐 山 )에 주둔해 있 는 조방장( 助 防 將 ) 이세호( 李 世 灝 )의 군사와 서로 기각( 掎 角 )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 뒤를 엄습당할 근심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으나, 이 계교는 마침내 쓰이지 못했다. 94) 윤선각이 직산에서 조방장의 부대를 괴산으로 보내 충청우도를 방어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도 근왕군이 진위를 떠나 경기도 내에서 북상할수록 용인과 죽산에 주둔한 일본 군으로부터 보급로가 차단되는 것을 크게 염두하고 있었다. 5. 용인( 龍 仁 ) 전투의 패전과 복귀 삼도 근왕군의 북상은 불리한 기상 여건 하에서 진행되었다. 장마의 영향으로 전라도 경상 도 근왕군이 전주에서 출발하여 수원에 주둔하는 14일 간의 이동 과정에서 10일 동안 비가 내렸다. 95) 이러한 기상 조건하에서의 행군으로 군사들의 피로는 극심한 상태였다. 전라도 근 왕군은 순찰군과 방어군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이동로를 따라 북상하였고, 경상도 근왕군은 전라순찰군을 따라 이동했다. 96) 전라도와 경상도 근왕군은 5월 24일 온양에서 충청도 근왕군 과 합세하고 진위에 집결한 이후 부대를 재편하고 작전회의를 했다. 97)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삼도 근왕군은 진위에서 머무르는 동안 부대를 재편하였다. 당시 부대 편성에 대한 세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선봉장( 先 鋒 將 ), 중위장( 中 衛 將 ) 등의 직함을 보 아 진법( 陣 法 )에 의해 분군( 分 軍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근왕군의 경우 전라순찰군의 선 봉장은 조방장 이지시, 중위장은 나주목사 이경복이었다. 전라방어군의 선봉장은 조방장 백광 94) 윤선각, 문소만록( 聞 韶 漫 錄 ) 판서 윤국형 저 95) 정만록( 征 蠻 錄 ) 의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경상도 근왕군은 5월 19일 전주에서 출발하여 6월 3일에 수원 독성산성 에 도착하였다. 14일 간의 북상과정에서 10일 동안 비가 내렸는데, 폭우가 내린 날이 6일이었다. 96)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5월 20일 97)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94 학예지 제19집 언, 중위장은 광주목사 권율이었다. 98) 충청도 근왕군의 경우 충청순찰군에는 충청병사 신익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충청방어군이 별도로 편성되었으나 예하 위장( 衛 將 )에 대한 기록은 없 다. 99) 경상도 근왕군은 1백여 명이었지만 상당수가 조방장, 전 현직 첨사, 만호, 첨사, 수령 등 정예로운 무관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순찰사 예하의 군관들과 경상우방어군 소속의 군관 들이 주축이었다. 100) 그러나 병력이 소규모였기 때문에 전라순찰군과 함께 이동했다. 한편,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삼도 근왕군을 유인하여 한강 가에서 결전을 치루고자 하였다. 일본의 수군장 가운데 한 명이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 脥 坂 安 治 )의 예하 부대가 용인 과 수원 등지에서 주둔하며 한성으로 접근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삼도 근왕군이 6월 3일 진위에서 북상하자 수원에 있던 일본군은 용인으로 철수하였다. 101) 당시 한성의 일본군 지휘부에서는 삼도 근왕군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비책 마련에 고심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결과, 광주( 廣 州 ) 일대에 군사를 집결시켰다가 이후에 근왕군이 양천( 陽 川 )의 북포( 北 浦 )에 도달하면 포위하고자 했다. 102) 이광은 전라방어군을 용인에 투입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권율은 불필요한 소규모 전투를 벌 이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전력을 아껴 북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용인을 거쳐 한성으로 북상하는 이동로상의 험지( 險 地 )에 일본군의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 서, 군량 확보와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조강( 祖 江 ) 103) 을 건너 임진( 臨 津 )을 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다른 의견으로는 북상하지 말고 먼저 독성산성( 禿 城 山 城 )에서 견고하게 방어하 면서 일본군을 유인하여 전투를 치루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104) 그러자 삼도 순찰사는 권율 의 의견을 들어 6월 4일 아침에 장계를 올려 양천에서 한강을 건널 것임을 보고하였다. 105) 이날 오후 수원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 결과 이광은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해서 더욱더 주목하였다. 삼도 근왕군이 오후에 수원 북산( 北 山 ) 106) 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수원 우문리( 牛 98)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99) 윤선각, 문소만록( 聞 韶 漫 錄 ) 판서 윤국형 저;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00)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101)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6월 3일 102)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6월 6일 103)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 권12, 경기도 강화도호부 누정 104)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6월 1일 기축 105) 삼도순찰사는 근왕군 작전회의 결과 권율의 의견을 반영하여 먼저 양천으로 진격하기로 하고 6월 4일 아침에 공동으 로 장계를 올렸다.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1일 기유;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6월 1일 기축;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06) 삼도 근왕군이 독성산성에서 진을 옮긴 수원 북산( 北 山 )의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이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95 文 里 ) 일대에서 약탈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파되었다. 이에 김수는 즉각 예하의 근왕군을 출동시켰다. 이 소규모 전투에서 경상도 근왕군은 전과를 올리며 용인까지 추격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며 일본군이 반격할 기미를 보이자 철수하였다. 107) 이날 전라도 근왕군내에서는 다시 용인 방면의 일본군에 대한 조치를 놓고 논의가 일어났다. 이 사항은 앞서 있었던 삼도 근왕군의 이동계획과는 달리 전라도 근왕군내에서만 논의된 것으 로 보인다. 당시 경상도 순찰사 김수의 장계를 보자. 初 5일에는 경성( 京 城 )으로 가려 하는데 충청도 순찰사와 방어사는 안산( 安 山 )을 거쳐 가기로 하고 전라도 순찰사와 방어사는 신과 같이 금천( 衿 川 )을 거쳐서 양천 ( 陽 川 )의 북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충청도 장사들은 이미 출발하였고 전라도 장사가 막 출 발하려는데 선봉장인 전첨사 백광언의 진에서 적과 대전중이라는 치보가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도 달하였다 하기에 이광과 같이 상의하여 충청도 순찰사는 적병이 가까운 곳에서 진을 옮겨 대기하라고 하였으므로 양호장사는 곧 접전하였는데 (하략) 108) 충청도 근왕군은 6월 4일 작전회의에서 확정된 계획에 따라 이동 중이었다. 경상도 근왕군 역시 출발하려던 시점에 전라도 근왕군의 선봉군이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광과 함께 동반했던 김수마저 용인 전투가 벌어질 것은 몰랐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광은 양천으로 향하되, 먼저 용인의 일본군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광의 계속되는 주장에 전라방어사 곽영은 선봉장을 보내 용인의 일본군 진지를 정찰하였다. 정찰을 다녀온 백광언이 길이 좁고 수목이 빽빽하여 공격하기 어렵다 고 보고하자, 이광은 오히려 군기 문제 를 거론하며 장형( 杖 刑 )을 가했다. 109) 그리고는 순찰군의 선봉군을 전라방어군에 증원하고 용 인에 주둔한 일본군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110) 이에 전라방어군은 용인으로부터 10리 떨어 6월 4일 수원부 앞에서 진을 쳤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원 북산은 구 수원부의 북산인 화산으로 추정된다. 선조실 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6월 3일 107)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08)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09)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4일 110) 이광이 공주에서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을 해산시키자 백광언은 이광의 진에 찾아가 칼을 빼어 들고 이광의 조치를 비난했다. 재조번방지 의 기록에 의하면 백광언이 문소산 일대를 정찰한 이후 공격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하자 이광 은 분노하며 공주에서의 감정을 들어 곤장을 쳤다. 장형으로 중상을 입은 백광언은 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적에게 죽임을 당하겠다. 고 말했다.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4일
96 학예지 제19집 진 지점까지 접근하여 결진하였다. 111) 문소산( 文 小 山 )에 주둔한 일본군은 구축된 진지에서 방 어전을 준비하였다. 112) 문소산 전투에서는 순찰군의 선봉군과 일부 위군( 衛 軍 )까지 방어군에 증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 뿐만 아니라 선봉의 수령들을 방어군 소속으로 전환시키는데 113) 이들은 고부군수, 함열현감, 정읍현감이었다. 114) 오위진법에 의한 분군을 잘 보여주는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 의 6진대분군( 六 鎭 大 分 軍 )과 3읍분군( 三 邑 分 軍 )을 미루어 볼 때, 거진장( 巨 鎭 將 )이 각 위( 衛 )의 위장( 衛 將 )으로 임명되었고 거진 소속의 제진장( 諸 鎭 將 )이 예하의 부장( 部 將 )으로 편 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5) 당시 순찰군이 5위분군( 五 衛 分 軍 )인지 또는 3위분군( 三 衛 分 軍 )인지 는 분명하지 않다. 선봉장과 중위장이 언급되는 점을 보아 적어도 3위분군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16) 다만 기존의 전라도 진관을 고려할 때 고부 함열 정읍은 전주진관에 소속된 제 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위( 衛 )가 5부( 部 )로 편성될 때 진관의 구분이 고려된다는 점을 보아 고부군수를 비롯한 3명의 수령은 위( 衛 )에 소속된 부장( 部 將 )이었다. 따라서 이광의 조치 에 의해 전주부윤이 위장으로 임명된 순찰군 소속의 1개 위( 衛 )가 방어군에 증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증강되었던 백광언의 군사들은 오히려 조직적인 편성을 하지 못한 채 문소산으로 향했다. 결국 방어사 곽영의 명령에 의해 117) 2천여 명의 증강된 선봉군은 6월 5일 문소산의 일본 군 진지로 진격했다. 118) 이는 당시 백광언과 이지시가 이광에게 언급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111) 이항복, 백사집( 白 沙 集 ) 권2, 제도도원수 권공의 유사; 박동량, 기재사초( 寄 齋 史 草 ) 하, 임진일록2, 임진년 8월 112) 당시 문소산( 文 小 山 )에 구축된 일본군의 진지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豊 德 川 洞 )의 임진산성( 壬 辰 山 城 )으로 비정되어 있다. 이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발간한 자료를 비롯한 문헌자료와 유물 발견에 따른 경기도박물 관에서 실시한 현장 유물조사보고서를 통해 실증되었다. 경기도박물관, 2000. 龍 仁 壬 辰 山 城, 경기도박물관 삼성 물산 주택부문, 45~47쪽.;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91. 한국의 성곽과 봉수 상, 고려서적, 299~300쪽. 113)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6월 5일 114)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逆 賊 緣 坐 疏 放 疏 115) 당시 조선군의 부대편성 과정에서는 계획된 분군법에 의해 부대가 5위 또는 3위로 편성될 수 있었다. 이 때 1개 위는 5부로 편성되었다. 위-부가 편성될 때는 진관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선봉장은 별도의 장수가 임명되었다. 116) 당시 전라도 근왕군의 편성에서 선봉장과 중위장만 언급되는 점을 보아 순찰군과 방어군은 각각 1개의 위( 衛 )로 편성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중위군( 中 衛 軍 ) 예하의 5부( 部 ), 그리고 선봉군( 先 鋒 軍 )으로만 편성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전기 조선군의 부대편성은 오위진법( 五 衛 陣 法 )을 표준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반드시 5위( 衛 )로 편성되는 것은 아니었고, 3위( 衛 ) 또는 1위( 衛 )로 편성되기도 하였다. 이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순신의 장계( 狀 啓 )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위급한 상황에서 병력이 부족하지만, 신속하게 부대를 편성하여 출동할 때 는 1개의 위( 衛 )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도 위( 衛 )는 오진법 체계에 따라서 5부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근왕군의 병력 규모와 참여한 수령들의 수를 고려할 때 최소 3위분군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임진장초( 壬 辰 狀 草 )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2; 육군군사연구소, 2012.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사사(조 선전기Ⅰ) 5, 경인문화사, 279~284쪽. 117)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逆 賊 緣 坐 疏 放 疏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97 이보다 앞서 백광언과 이지시가 이광에게 말하기를, 우리 병사가 비록 많으나 모두 여러 고을에거 질서없이 모여든 오합지졸( 烏 合 之 卒 )입니다. 그러니 다소를 따지지 말고 모두 본읍의 수령에게 거느리 게 하여 아무 읍이 선봉이 되고, 아무 읍이 중군이 되며, 전후좌우도 모두 분담하는 일이 있어 한 곳으 로만 모이지 말게 하여 각자가 진을 만들고 십여 곳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략) 119) 한성에 있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삼도 근왕군이 용인 방면으로 접근하자 전 병력을 이끌 고 문소산으로 남하했다. 이미 신속한 증원을 위해 예하 무장이었던 야마오카 우곤( 山 岡 右 近 ) 에게 선봉군을 맡겨 먼저 출발시켰다. 이 부대는 문소산에 도착하여 와키사카 사요에( 脥 坂 左 兵 衛 )가 이끄는 수비군과 합류하였으며, 이날 정오에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였다. 120) 방어군의 중위군( 中 衛 軍 )이 투입되기 전에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21) 워낙 울창한 산지에서 일본 군이 단병전술을 구사하며 근접전을 벌이자 장병전술의 장점을 누릴 수 없었던 백광언 부대는 점차 열세를 면치 못하고 피해가 가중되었다. 문소산 전투는 험한 지형을 이용하고, 산악에서 근접전을 벌였던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문소산의 일본군 진지는 높고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되었고, 녹각( 鹿 角 )을 비롯한 장애물 이 설치되어 근왕군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122) 백광언 부대는 수목이 울창했던 문소산에 오르 면서 소로를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전진했다. 123) 일본군은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다가 정오에 이르러 반격을 개시했다. 124) 삼도 근왕군은 증원군을 투입했으나 결국 문소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광교산 일대로 퇴각하 였다. 전황이 악화되자 경상도 근왕군이 먼저 증원되었으며, 안산으로 출발했던 충청도 근왕군 도 문소산으로 되돌아왔다. 125) 백광언 부대는 증원된 근왕군과 함께 포와 활을 사용하면서 근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했다. 126) 전투 결과 전라도 근왕군의 선봉장이자 용명이 높았던 백 광언과 이지시를 비롯하여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고 127), 함께 전투했던 경상도 군사들은 부 118)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119) 박동량, 기재사초( 寄 齋 史 草 ) 하, 임진일록2, 임진년 8월 120)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본대 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형석, 1967. 앞의 책, 328~330쪽. 121) 신경, 재조번방지( 再 造 藩 邦 志 ) 1, 임진년 6월 5일; 이항복, 백사집( 白 沙 集 ) 권2, 제도도원수 권공의 유사 122)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6월 5일 123)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逆 賊 緣 坐 疏 放 疏 124)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6월 5일 125) 윤선각, 문소만록( 聞 韶 漫 錄 ) 판서 윤국형 저;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26) 문소산 전투가 발발한 이후에 투입된 경상도 근왕군은 최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김수의 군관 김경납은 궁시로 싸웠고, 별파진( 別 破 陣 ) 서팽옥은 전투간 포( 炮 )를 사용했다.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27)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6월 1일 기축; 조경남,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권1, 임진년 上 6월 5일
98 학예지 제19집 상을 입고 겨우 퇴각하였다. 128) 삼도 근왕군이 사기가 크게 꺾였으며, 군사를 수습하고 광교산 일대로 옮겨 주둔하였다. 129) 광교산 전투에서 삼도 근왕군의 선봉군이 패배하고, 본영이 기습당하면서 혼란이 가중된 결 과 대군이 와해되었다. 문소산 전투의 패배로 사기가 크게 꺾이었으나 이광을 비롯한 순찰사들 은 이튿날 총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근왕군을 추격하여 광교산 일대로 침투하 였는데, 삼도 근왕군은 밤새 일본군의 횃불 이동에 주목하느라 이러한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총반격의 선봉이었던 전라방어군이 광교산 진지에서 출발하자 곧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먼저 전라방어군을 포위하고 일부가 돌격하는 전법으로 승리하였다. 거의 이와 동시에 광교산 일대로 침투했던 일본군은 아침을 먹고 전라방어군을 후속하려던 충청도 근왕군을 기습했다. 130) 윤선각이 아병 2백명을 증원했으나 131), 충청도 근왕군이 먼저 무너지 면서 광교산 일대의 근왕군은 토붕와해( 土 崩 瓦 解 )처럼 무너졌다. 이미 전라도와 경상도 근왕군 의 주력이 총공격을 위해 앞서 출발한 상황에서 삼도 순찰사의 본영을 지키던 아병( 牙 兵 )들의 대응은 역부족이었다. 132) 결국 근왕군은 부대 전체가 붕괴되면서 수많은 군기( 軍 器 )와 물자를 방기한 채 퇴각하였다. 133) 이후 삼도 근왕군은 진위의 갈원( 葛 院 ) 일대에서 군사들을 수습하고 각 지방으로 돌아갔다. 윤선각은 충청도 근왕군을 경기도와 가까운 요충지에 배치하였고, 괴산에 잔류시켰던 조방장 이세호의 부대까지 동원하였다. 134) 이광과 김수는 각기 군사들을 수습하여 각 도로 복귀하여 이후로는 지역방어에 진력하였지만, 삼도 근왕군 활동의 실패로 이들은 도내의 사족들과 조정 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128) 경상도 순찰사 김수의 군관이었던 김경납은 이지시와 함께 전투했으나 얼굴에 칼을 맞아 상처를 입었다. 또한 별파진 서팽옥은 백광언과 함께 전투하면서 화포를 운용하였으나 발에 칼을 맞아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이탁영, 역주 정만 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29) 현재 당시 근왕군이 집결했던 광교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30)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逆 賊 緣 坐 疏 放 疏,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31)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132)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坤, 장계, 임진년 7월 4일 133) 광교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삼도 근왕군이 방기한 물자는 군량( 軍 糧 ) 9천석과 군기( 軍 器 ) 300바리였다. 군기 가운데 는 화약, 철환, 쇠사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희문, 쇄미록( 瑣 尾 錄 ) 제1, 임진남행일록 逆 賊 緣 坐 疏 放 疏 ; 이탁영, 역주 정만록( 征 蠻 錄 ) 乾, 임진변생후일록, 임진년 6월 6일 134)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 병진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99 6. 맺음말 임진왜란은 조선이 기존에 치루었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6세기를 거 치며 조선이 대외 전쟁을 맞아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하였는지 살펴보면, 적변을 맞은 해당 도 ( 道 )의 지방군이 초기 대응을 하였고, 중앙군이 증파되어 상황을 종결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시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은 경상도 지방군의 초기 방어력을 압도하는 규모와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경상도 연해안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내륙으로 진출하였다. 그로 인하여 제승방략에 의해 경상도 남부의 계획된 지점까지 이동하던 경상도 순변사와 방어사 등이 지휘 하던 경군( 京 軍 )은 남하 도중에 급편하여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경상도 내륙까지 돌파되면서 전라 충청 강원도의 군사들을 동원하고자 했던 삼도 도순변사 신립의 부대마저 불비한 여건 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결국 패전하였다. 예상을 벗어난 전황이 이어지면서 조선이 계획한 전쟁 수행은 연쇄적으로 틀어졌던 것이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조선 조정은 담당 지역에서만 군사력을 운용할 수 있었던 자전자수( 自 戰 自 守 )의 원칙을 깨고, 각 도의 지방군이 다른 지방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전쟁 초기 전라도는 일본군이 북상하는 주요 경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조선 관군이 체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경상도 연해안 지역에서의 초기 전황이 악화되면서 경상도 순찰사의 요청과 조정의 승인, 그리고 전라도 순찰사의 결심에 의해 전라도 방어군( 防 禦 軍 )과 수군( 水 軍 )이 경상도로 투입될 수 있었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도내의 잔여 지방군을 집결시켰는데, 충주 전투의 패전으로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근왕을 추진하였다. 이광의 입장에서는 일본군 선봉대를 추격하여 신속 하게 한성으로 북상해야 했기 때문에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의 동원과정은 무리한 강행군의 연 속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지방민의 동요와 무리한 군사동원은 커다란 후유증을 낳았고, 이후 제1차 전라도 근왕군이 공주에서 회군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군기 문란의 사태가 벌어졌다. 심 지어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이 조직될 때는 호남군병의 난 으로 표출되었다. 삼도 근왕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대규모 조선군이 동원된 사례였으며 하삼도의 군사 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제2차 전라도 근왕군의 순찰군과 방어군은 각각 전라우 도와 전라좌도 소속 고을의 군사들로 조직되었다. 특히, 전라도 근왕군의 이동로 분석을 통해 권율이 이끌었던 광주의 군사들이 최초에는 순찰군 소속이었음을 새롭게 고찰하였고, 이로써
100 학예지 제19집 지방군 동원과 편성에 있어 진관체제의 거진별로 구분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충청도 근왕 군의 동원 과정에서도 도내의 지역을 구분하는 특징을 볼 수 있었다. 전장( 戰 場 )이 내륙까지 확대되고 수도 한성이 함락되는 등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전황을 맞아 조선 조정은 도( 道 ) 단 위 군사력으로 대응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각 도의 지방군을 근왕시켰다. 한강을 도하하려고 했던 삼도 근왕군은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는 과정에서 문소산 전투를 벌 였다. 삼도 근왕군이 경기도 진위에 도착하여 전라도 근왕군의 부대가 재편되었다. 또한 수원 에서의 작전회의 결과, 삼도 근왕군은 용인과 광주를 경유하지 않고, 양천에서 한강을 도하하 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삼도 근왕군의 배후를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순찰군의 선봉군과 일부 부대까지 추가적으로 방어군에 증원하여 용인 일대로 투입하였다. 그 러나 문소산 전투의 전황은 근왕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양천을 향해 출발하였던 충청도 근왕군을 비롯하여 경상도 근왕군까지 문소산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일본군은 험한 지 형을 이용한 근접전에서 위력을 발휘하면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작은 혹을 떼려던 의도에서 시작된 문소산 전투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삼도 근왕군은 이튿날 광교산( 光 敎 山 )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결국 각 지방으로 복귀하였다. 문소산 전투에서 상당수의 정예병을 잃고 광교산 일대에서 주둔한 근왕군은 다음날 전라방어군을 선봉으로 삼 아 반격을 위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삼도 근왕군의 선봉과 전투를 벌이면서 동시에 광교산에 남아 있던 근왕군의 본진을 기습하였다. 근왕군의 전열은 붕괴되었고, 대부분은 전장을 이탈하여 각 지방으로 패주하였다. 본 논문은 군사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초기 삼도 근왕군의 활동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에 조선 관군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는 달리 하삼도에서는 상당히 체계 적인 대응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워낙 조야의 기대를 받았던 삼도 근왕군이었기에 용인 전투의 패전은 충격적이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 순찰사들은 당대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 에 저술된 대부분의 사료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렇지만 삼도 근왕군 활동은 이후의 전황 극복에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용인 전투에서 패주하였지만 상당수의 근왕군 은 지방으로 복귀하여 지역방어에 투입된 것이다. 조선 관군은 전투경험을 축적하면서 점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적응하고, 나아가 전황 극복 에 기여하였다. 삼도에서 추진된 근왕군 활동을 통해 하삼도 관군은 실로 유례없는 대규모 군 사동원과 부대이동에 이어 전투 경험까지 쌓으면서, 당시 오합지졸( 烏 合 之 卒 ) 이라고 비판받았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101 던 수준에서 벗어나 점차 각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전라도의 경우 제1차 전라도 근왕군 활동 때부터 광주목사로서 종군했던 권율은 이광에 이어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지역방어전에 성공하였다. 이후에는 제4차 전라도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이듬 해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도원수로서 활약한다. 앞으로 임진왜란 초기 전쟁사를 연구함에 있어 기존 사료의 충 분한 비판과 더불어 전체적인 전황의 추이를 조정의 전쟁지도, 군사체제와 연계하여 보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102 학예지 제19집 Abstract A Study on Kŭnwang Activity in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Imjin War Lee, Ho-Joon In this paper, I look at how the changes in the Chosŏn military system over the sixteenth century were realized in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Chŏlla, Kyŏngsang, Ch ungch ŏng)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Imjin War based on recent studies. The Imjin War was drastically different from any war that the Chosŏn statehad encountered before. In the sixteenth century, according to the chesŭngbangnyak system, local troops of the invaded province would first take action against the invaders. Reinforcement troops from the capital would then deal with the situation. In the Imjin War, however, Japanese troops deployed to the Kyŏngsang province overwhelmed the local troops and advanced inland after breaking the coastal line of defense. The central troops coming to the rescue were consequently forced to engage the Japanese troops under the new circumstance. As the situation deteriorated, the Chosŏn court moved away from the principle of local engagement and allowed the provincial forces toconduct operations outside their own provinces. In the early years of the war, Chŏlla province was not directly affected by the Japanese invasion, and the regular forces there could maneuver in a more systematic manner despite the agitated populace and a few local rebellions. The commander (sunch alsa) of the of the Chŏlla province decided to dispatch his provincial troops to the the Kyŏngsangprovince after the request of assistance from there was approved by the court.
임진왜란 초기 下 三 道 勤 王 軍 활동 연구 103 Kŭnwang (literally meaning "save the king") forces of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is a good example that shows the massive mobilization of the Chosŏn armed forces after the start of the Imjin War. The kŭnwang forces from the Chŏlla and Ch ungch ŏng provinces organized their units based on the demarcation of the bases (chin gwan), which itself was formed according to geographical features. The combined kŭnwang forces, however, were heavily defeated in the Battle of Yongin and shocked the whole state that had high expectations for them. The provincial commanders that led the battle were criticized by most historical sources from the late Chosŏn period for their ineptitude. The Chosŏn regular forces, however, eventually became accustomed to engaging the Japanese forces as they saw more action, and they seem to have made a contribution toward turning things around. Even though they were defeated in the Battle of Yonging, many from the kŭnwang forces returned to their provinces and participated in local defense missions. Through their kŭnwang activity, the regular forces of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emerged victorious in the end and redeemed themselves from the dishonor of being called a ragtag band (ohapchijol). * Key words : Imjin War (Imjinwaeran), "save the king" forces (kŭnwanggun), military system (kunsa ch eje), chin gwan system (chin gwan ch eje), chesŭngbangnyak, allotted deployment system (pun gunbŏp), base establishment (chinbŏp), regular forces (kwan gun), central commander (kyŏngjang), local troops (chibanggun), central troops (chunganggun)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05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김 병 륜* 목 차 1. 머리말 2. 절제방략과 그 내용 1) 절제방략과 그 사료적 가치 2) 절제방략과 4운체제 3) 절제방략 수록 내용에 대한 검토 3.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 절제방략과 제승방략의 상호관계 2) 각 지역별 제승방략의 수록 내용 3) 소위 제승방략 체제 의 본질과 진관체제 4. 16세기 조선군 방위체제의 특징 1) 16세기 방위체제의 지향점 2) 오위진법형 분군법의 특징과 그 도입 시기 3) 16세기 조선군 무기 운용의 특징 5. 맺음말 1. 머리말 1) 임진왜란은 연구가 많이 된 듯 보이지만 전체적인 전쟁 국면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여 전히 공백지대가 많다. 개전 초기 조선군의 방위체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와 관련해 이미 임진왜란 당대부터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의 단점을 거론하면서 이것이 조선군 방위체제의 중요한 약점이자 패전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제기됐다. 1) 흔히 병력이 없는 장수( 無 軍 之 將 ) 와 장수가 없는 병력( 無 將 之 卒 ) 이라고 표현하듯이 제승방략이라는 방위체제에 문제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2) 이처럼 임진왜란 패배의 원인을 제승방략의 단점에서 찾는 견해가 조선시대 사료에도 나타 나기 때문에 현대 이후에도 제승방략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3)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국방일보 취재기자 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애선생문집 권7 계사 청수거진관지제계( 請 修 擧 鎭 管 之 制 啓 ) 2) 선조실록 49권 선조27년 3월 29일(정미) 3) 이 분야의 주요 연구성과는 아래와 같다. 허선도, 1973, 제승방략 연구-상 진단학보 제36호, 진단학회
106 학예지 제19집 제승방략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수정 보완해 가면서 당시 조선군 방위체제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도 가능해졌다. 현대 이후의 연구들은 제승방략에 대한 비판 일변도적인 시각을 벗어나서 일부 단점이 있기 는 하지만 지역 단위 방위체제인 진관체제를 단점을 극복한 방위체제라는 긍정적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병력을 전투지역에 집중하는 분군법의 형태 라고 제승방략을 평가하는 관 점 4) 은 이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보다 입체적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승방략에 대한 연구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제승방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는지, 그 본질은 무엇인지 여전히 모호한 점이 적지 않다. 특히 현대 이후 처음으로 제승방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 5) 에서 절제방략( 節 制 方 略 )은 바로 을묘왜변 전후에 김수문이 시행하였던 이른바 남방제승방략의 절목의 편린 이라고 지적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제방략에 대해서 그 이후 추가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글에 서는 절제방략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른바 제승방략 체제의 본질 과 진관제와의 상호 관계, 나아가 16세기 조선의 방위태세의 특징까지 살펴보려 한다. 2. 절제방략과 그 내용 1) 절제방략과 그 사료적 가치 절제방략( 節 制 方 略 )은 현재 두 경로로 전승되고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선산부사와 이 순신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던 정경달(1542~1602) 후손 집에서 전해 오는 진법( 陣 法 ) 6) 끝부분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하 진단학보 제37호, 진단학회 김세명, 1992, 조선시대 전기 진법과 제승방략의 현대적 의의, 국방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구진, 2005, 조선시대 6진방어체제-제승방략에 대한 연구 백산학보 제71호, 백산학회 장학근, 2007, 제승방략이 지닌 병력운용상의 가치 군사 제64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창국, 2009, 15-16세기 함길도 지역 군사체제-제승방략연구, 국방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육군본부, 2012, 한국군사사 6권 조선 전기 II 제9장 제5절 병력동원체제의 개선-제승방략, 육군군사연구소 4) 김세명, 1992, 조선시대 전기 진법과 제승방략의 현대적 의의, 국방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7쪽 5)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하 진단학보 제37호. 37쪽 6) 반산세고 영인본 소수 진법, 1987, 아세아문화사. 정경달의 후손 정학열씨가 소장한 진법 필사본은 1988년 전라 남도 유형문화재 제 164호(반계사 소장 유물일괄, 1988. 12. 21)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일부에서는 이 진법을 정경달의 반곡진법 이라고 부르면서, 정경달의 저서로 오해하기도 하나, 그 내용은 크게 봐서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07 에 마치 부록처럼 수록되어 있다. 또 하나는 정약용(1762~1836)의 제자로 추정되는 정사욱이 편집한 미산총서( 嵋 山 叢 書 ) 7) 에 절제방략이란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8) 이 두 종류의 절제 방략은 몇몇 자구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용이 동일하다. 미산총서 는 정사욱이 단독으로 편집한 저작물이라기보다는 정약용이 편찬을 서둘렀던 보 다 큰 차원의 책자인 비어고( 備 禦 考 )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9) 또한 정약용은 정경달의 반 곡난중일기를 열람했고 1815년 정경달 문집 수록본의 반곡난중일기를 산정한 인물도 다름 아 닌 정약용이었다. 10)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2종의 절제방략은 모두 그 기원이 정경달이 남긴 유문( 遺 文 )으로 소급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종의 절제방략 중 원본은 정경달 후손 집안에 소장된 진 법 에 수록된 것이며, 미산총서 에 수록된 것은 정약용이 반곡난중일기를 산정할 무렵 필사 해 둔 것을 정약용의 제자인 정사욱이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정경달 후손들이 소장해 오던 진법 은 그 내용으로 보면 문종과 수양대군이 편찬한 진 법 내지 오위진법 을 단순 필사한 것인데, 그나마 후손이 보관해온 진법 은 정경달이 직접 필사한 판본도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에 정경달의 후손들이 다시 모사했다는 것이다. 11) 이 때문에 현존하는 절제방략 이 정경달이 남긴 유문( 遺 文 )의 상태에 얼마나 근 접한 것인지는 단정적으로 장담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존하는 절제방략을 보면 주로 16세기 이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군사관련 사목, 절제 6~7개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용이 군사 문제 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두까지 섞여있는 문체로 된 것을 볼 때 그 내용을 정경달 후손들이 임의로 수정, 첨가한 것으로는 판단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애당초 이 내용은 정경달 본인이 모종의 사료를 보고 옮겨 적은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절제방략( 節 制 方 略 )은 바로 을묘왜변 전후에 김수문이 시행하였던 이른바 남방제승방략의 절목의 편린 이라는 선행 연구자의 평가는 일정 문종 재위시절 수양대군이 편찬한 진법 내지 오위진법 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 정경달의 반곡진법 은 수양대군 편찬 진법 의 필사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7) 정사욱, 미산총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 古 朝 76-60 제5책. 허선도의 논문(1974)에서 정주응 편 무비지 라는 제목으로 인용한 문헌이 바로 이 책이며, 이 논문에서 거론한 두계 이병도 소장본 미산총서 와 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미산총서 는 내용이 다른 판본이다. 8)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 하, 진단학보 제37호, 진단학회, 29쪽 9)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하, 진단학보 제37호. 진단학회, 34쪽 10) 장흥문화원 편, 1997 장흥문집해제, 도서출판 무돌 137쪽 11) 장흥문화원 편, 1997 장흥문집해제, 도서출판 무돌 134쪽
108 학예지 제19집 부분 수긍할 수 있다고 보인다. 이처럼 절제방략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전해오는 절제방략이 독립된 책으로 편찬된 내용의 일부인지, 아니면 사목 혹은 절제 등의 형식으로 애당초 독립적 으로 존재하는 문서 몇 개를 단순히 수집 기록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정경달 후손이 보존해온 진법 을 보면 융경 신미년(1571년) 간행했다는 간기가 붙어 있다. 이로 보아 정경달이 후손이 보관해 온 진법 은 문종과 수양대군이 지은 진법 간행본 을 필사한 것이 분명하며, 본문이 아니라 간기 뒤에 절제방략을 덧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절제방략 자체는 정경달이 필사의 대본으로 삼은 간행본 진법 의 일부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정경달이 무언가 다른 사료를 보고 절제방략을 덧붙였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정경달 이 필사의 대본으로 삼은 수양대군 편 간행본 진법 뒷부분에 누군가 필사로 절제방략을 추 가로 적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어떻든 간에 현존하는 절제방략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하나의 완성된 책자라기보다는 16세기 이후 제정된 여러 군사관련의 규정들을 모아놓은 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들 절제 방략이라는 제목 밑에 수록된 일련의 문서에는 연호나 국왕 재위 년에 대한 표시 없이 간지만 적혀 있다. 때문에 각각의 사목이나 절제가 작성된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순변사 김수문의 절제가 만들어진 무오년은 그가 명종 13년에 경상도의 순변사로 임명 12) 되었음을 고려할 때 1558년이 분명하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감사 이감의 절제가 작성된 기미년은 1559년이 분명해 보인다. 이감은 1559년 1월19일부터 1560년 2월17일 사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3) 결국 기미년에 작성 된 감사 이감의 절제라는 제목의 문서는 이감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한 1559년에 작성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수록된 계해년의 비변사 사목도 1503년과 1563년 중 한 해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야하는데, 이들 군사관련 규정들이 삼포왜란(1510년)과 을묘왜란(1555년)에 대한 대응 조치로 제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1503년보다는 1563년 계해년에 제정되었을 가능 성이 높다. 그 뒤에 수록된 을묘년 비변사 사목은 을묘왜란이 일어난 1555년 을묘년에 작성된 것이라고 12) 명종실록 명종 13년 2월16일(갑오)자 실록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 경상도 도순변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날 경상도 순변 사로 호칭을 바꿨다. 13) 한국국학진흥원, 2005, 증보경상도선생안, 국학진흥원, 514쪽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09 봐야할 것이다. 무인년 병조 사목의 경우 1518년과 1578년 무인년 중 한 해에 작성된 것으로 봐야할 터인데 본문 내용 자체로는 작성 연도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상 절제방략 에 수록된 문서에 대한 검토 결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4) 무오년(1558년) 순변사( 巡 邊 使 ) 김수문( 金 秀 文 )의 절제 기미년(1559년) (경상) 감사( 監 司 ) 이감( 李 戡 )의 절제 계해년(1563년) 5월 접수한 비변사( 備 邊 司 )의 사목( 事 目 ) 을묘년(1555년) 4월 접수한 비변사의 관문( 關 文 )으로 방어사가 가지고 온 사목( 事 目 ) 무인년(1518년?, 1578년?) 2월 접수한 병조( 兵 曹 )의 사목( 事 目 ) 무오년(1558년) 7월에 감사( 監 司 )와 좌 우 병 수사의 동의 조건( 條 件 ) 2) 절제방략과 4운체제 현존하는 절제방략의 첫 대목에는 구체적인 날짜와 문서 제목에 대한 설명 없이 3개 항목의 규정이 적혀 있다. 즉 육군을 운( 運 )으로 표현한 4개 단위부대로 나눈다는 것과 그와 별개로 포망장, 군량 운반을 담당한 차사원, 무기와 군사장비 운반을 담당한 차사원을 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을 좌우도로 나눠 반복해서 기록한 다음, 각 관의 군사를 방어사와 병사에 나눠 소속시킨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좌도의 육군 제장( 諸 將 )과 제색군( 諸 色 軍 )을 4운으로 나눈다. 포망장( 捕 亡 將 ), 군량전운차사원( 軍 粮 轉 運 差 使 員 ), 군기전수차사원( 軍 器 轉 輸 差 使 員 ) (을 둔다) 우도의 육군 제장과 제색군을 4운으로 나눈다. 포망장, 군량전운차사원, 군기전수차사원 (을 둔다) 방어사( 防 禦 使 )와 병사( 兵 使 )에게 각 관( 官 )의 군사를 나누어 소속시킨다. <절제방략> 이상 편성이 좌, 우도 병력의 전체 전투편성일수는 없다. 오위진법에 따른 위장과 부장이 복수( 復 數 )로 위 규정과 별도로 정해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이점은 뒤이어 나오는 순변사 김 수문 절제에 위장, 부장이 모두 나오는 것으로 봐도 분명하다. 다만 16세기 중엽부터 임진왜란 초기 전투 당시 분군법에 나타나는 돌격장, 계원장, 참퇴장 14) 본 논문에 수록된 절제방략의 번역은 정상길씨의 번역안을 참조한 것이다.
110 학예지 제19집 등의 직책도 편성되어 있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여하간 위 규정은 좌, 우도 병력의 전체 전투편성이 아니라 기존의 분군법에서 명시하지 않은 병력의 4분할 체제와 함께 포망장, 군량전 운차사원, 군기전수차사원 같은 직제를 추가로 설치하도록 규정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위장( 衛 將 )에 나누어 소속하되, 각기 소속 관( 官 )과 약속( 約 束 )을 정하여 변란( 變 亂 )의 소식을 듣는 즉시 먼저 본읍( 本 邑 )의 한 운( 運 )의 군사를 거느리게 한다. 소속 관에 달려가 전통( 傳 通 )하여 그들 로 하여금 정해진 장소에 도착해 모이게 해서 위( 衛 )를 합쳐 변란에 대응한다. 소속된 관은 제색군사( 諸 色 軍 士 )를 나누어 4운으로 만들고, 각 부대는 각기 거느릴 영장( 領 將 ) 1인 을 정하고, 한 부대는 수령( 守 令 )이 친히 거느려 적진으로 나아가고, 그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부대도 또한 본읍에서 거느릴 영장을 정하여 정제( 整 齊, 정비)하고 명령을 기다린다. 내지( 內 地 )의 각 관은 제색군을 나누어 4운으로 만들고, 각 부대는 무략( 武 略 )이 있는 자로 전직 조사( 朝 士 ), 내금위( 內 禁 衛 ), 겸사복( 兼 司 僕 ) 중에서 별장( 別 將 ) 1인을 정하여 정제하도록 하고, 만 약 사변( 事 變 )이 있을 시에 적세( 賊 勢 )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공문을 돌려 징발( 徵 發 )하고, 한 부대 는 수령이 친히 사변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가 소속된 주장( 主 將 )의 절제를 받고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운은 정제하고 명령을 기다린다. 변란을 듣고 달려갈 때에 각 관에 있는 갑옷, 투구, 방패는 공문을 돌린 후에 실어가고, 장 편전, 활, 장창은 상태가 좋은 것을 가지고 가되, 만약 활, 화살, 창, 검이 없는 자는 이름을 장부에 기록해 두고 제급( 題 給 )하였다가 진을 파한 후에 돌아와 바치게 하고, 접전할 때에 쏜 것은 거두지 않고 회계에서 감하여 기록한다. 전직 만호( 萬 戶 ), 권관( 權 管 ), 내금위, 겸사복은 우선 분방( 分 防 )하게 하지 말고 매 부대를 거느릴 영장( 領 將 )으로 차정( 差 定 )하고, 남은 사람은 분군( 分 軍 )할 때에 부장( 部 將 )으로 임명한다. 만일 탈 루된 자가 있으면 색리( 色 吏 )만이 아니라 수령도 법에 따라 곤장으로 처벌한다. 활을 잘 쏘는 자로 뽑힌 교생( 校 生 )과 충의위( 忠 義 衛 )는 잠시 분방( 分 防 )하게 하지 말고, 사변이 있을 때에 어떤 부대( 某 運 )에 들어가 적진으로 달려갈 것인지 미리 통지하여 정제하고 명령을 기다린다. 부대로 나눈 군인을 각기 부근에 사는 사람으로 매 15명마다 그 중에 근검한 사람을 뽑아 통장( 統 將 ) 으로 정하고, 30명마다 영장( 領 將 )으로 정하여 변란을 듣는 즉시 그들에게 거느리게 한다. 아전( 衙 前 ), 향리( 鄕 吏 )로서 무재( 武 才 )가 있는 날랜 자들을 미리 뽑아 사변이 있어 군사를 영솔( 領 率 )할 때에 수령이 거느리게 한다. <무오년 순변사( 巡 邊 使 ) 김수문( 金 秀 文 )의 절제> 위 절제에서 핵심내용은 각 고을에 소속된 모든 병력들을 기본적으로 4개 단위부대(4운)로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11 편성해 그 중 수령은 제1운을 직접 지휘하고, 나머지 제2,3,4운은 전직 만호나 권관, 내금위나 겸사복 출신의 영장이 지휘하도록 한다 는 내용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편성은 조선 전기 군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교대제 근무에 기반한 번차와는 다른 개념으로 특정 지역의 부대를 단일부대로 편성하지 않고, 4개 단위부대로 나눠 편성하는 개념 이다. 이 같은 편제를 도입한 이유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추론은 가능 하다. 즉 각 고을의 예하 부대 병력 중 일부가 경장이나 해당 도의 병마절도사 등의 지휘를 받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경우에 대비해 사전에 병력을 분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유사시에 특정 고을의 병력 전체가 방어사나 순변사, 혹은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아 다른 고을로 이동한다고 가정할 경우 해당 지역은 군사적 측면에서는 공백지대가 된다. 하지만 지역별로 미리 병력을 분할해 놓을 경우 원 주둔지에 잔류하는 부대와 경장 혹은 병마 절도사의 직접 지휘를 받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 집결하는 부대 등 임무에 따라 융통성 있는 부대 운영이 가능해진다. 이 같은 지역별 병력 4분할 운용체제는 경장의 파견과 그에 따른 병 력 집중 운용에 대한 보완책의 일종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병력운용체제, 다시 말해 지역별로 병력을 4분할하는 체제를 김수문 절제에 있는 표현을 살려서 표현한다면 4운체제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런 4운체제는 임진왜란 때에도 실제 적용된 규정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검간 조정이 남긴 일기를 보면 1592년 4월20일자를 보면 함창수 이국필이 1,2운의 수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주 땅에 도착해, 방백(경상 감사) 의 지휘를 받았다 는 대목이 나온다. 15) 또 4월24일자에도 저녁에 듣기를 반라성주 권길이 3운 의 군대를 이끌고 고령 현에 도착했다 는 대목이 적혀 있다. 16) 각 고을의 병력을 운( 運 ) 단위로 분할해서 운용하는 4운체제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절제방략에 규정된 4운 체제는 기존의 제승방략 관련 사료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던 내용으로, 당시 병력운용체제의 구체적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3) 절제방략 수록 내용에 대한 검토 절제방략에는 김수문의 절제 외에도 병조, 비변사나 경상도 관찰사 급에서 정한 군사 관련 15) 조정, 진사일록, 임진년 4월20일자. 與 咸 昌 倅 李 國 弼 率 領 一 二 運 軍 數 千 餘 人 到 星 州 地 承 方 伯 指 揮 16) 조정, 진사일록, 임진년 4월24일자. 夕 聞 半 刺 城 主 權 吉 率 三 運 軍 到 高 靈 縣 다만 반라성주가 조선군 직책이 맞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112 학예지 제19집 규정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각 관( 官 )의 군기( 軍 器 )는 고을에서 무사( 武 事 )를 잘 아는 사람 한 명을 가려 정하여 그로 하여금 전담하게 하고, 군기색리( 軍 器 色 吏 )는 아전( 衙 前 ) 중에서 무업( 武 業 )하는 사람으로 십분 가려 정하 고, 화포장( 火 砲 匠 ) 2인도 장건한 사람으로 정제한다. 군량( 軍 糧 )은 먹을 수 있는 쌀을 미리 정제[ 吹 正 ]하여 한 바리[ 駄 ]에 몇 말씩 담아서 가볍고 편리한 바리로 만들어 쌓아두었다가 사변을 듣는 즉시로 운송한다. 증미( 蒸 米 ), 미숫가루[ 米 食 ], 마른 말똥 [ 乾 馬 糞 ]과 모든 더운 달에 질병과 기근을 구할 물자들도 많이 비축하여 사변이 났을 때에 군핍( 窘 乏 )할 걱정이 없게 한다. 군기도 셋으로 나누어 긴급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여러 묶음으로 실어다가 함께 정제하 여 명령을 기다린다. 수전( 水 戰 )을 할 때는 만들어 둔 판옥선( 板 屋 船 )과 경내의 포작선( 鮑 作 船 )을 쓸 수 있는지 여부를 미리 친히 살피고, 화포와 기계도 완전하고 튼튼하게 만들고, 약속을 더 엄히 하여 군사를 나누어 장수를 정하되 어느 전선에는 능로군( 能 櫓 軍 ) 누구 누구, 사관( 射 官 ) 누구 누구가 탈 것인지 일일이 정제한다. 적변( 賊 變 )이 있는 곳에 순변사의 절제( 節 制 )에 의하여 달려가 구원할 일이거니와 만약 적선이 도박 ( 到 泊 )한 곳이 5, 6식( 息 ) 이내이거든 육군이 달려가 헛되이 무력시위를 하는 것은 제승( 制 勝 )의 계 책이 될 리 만무하니 부득이 병선( 兵 船 )을 정제하여 바다로 나가 합격( 合 擊 )하여 초멸( 勦 滅 )할 것을 기약하고, 감사( 監 司 )의 행차가 멀리 있어 호령이 미치지 못하거든 사변이 있는 곳의 주장( 主 將 )의 호령을 듣고 따른다. <기미년 감사 이감 절제> 1559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경상도 관찰사 이감의 절제는 지휘체계에 대한 규정은 거의 없고 전시에 대비한 여러 가지 규정들이 수록된 것이 특징이다. 찐쌀을 의미하는 증미와 미숫 가루를 의미하는 미식을 미리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등 비상식량에 대한 규정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마른 말똥은 일종의 비상연료로 보인다. 1559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감사 이감 절제에 판옥선이란 용어가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판옥선은 명종대 전후에 개발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인데, 이 사료도 그 같은 학계의 추정을 뒷받침하는 사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적선이 해안에 정박 했을 때 5~6식 이내의 거리일 경우 육군보다는 수군이 출동해 격멸하도록 정한 규정도 당시 육군과 수군의 임무 분담과 수군 전술의 변화 과정 중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료다.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13 하삼도( 下 三 道 )에 적변( 賊 變 )이 있는 경우에는 마땅히 좌 우방어사( 左 右 防 禦 使 )를 파견하여 본도의 병사( 兵 使 )와 더불어 기각( 掎 角 )을 이루어 적을 막게 한다. 군사의 절반은 병사에게 소속시키고, 나 머지 절반은 방어사에게 소속시키되 관찰사( 觀 察 使 )와 함께 의논하여 미리 분군( 分 軍 )한다. 활을 잘 쏘고 장건( 壯 健 )한 사람은 남김없이 뽑아내어 죽거나 늙고 병든 자로 빠진 인원을 보충하되, 한 명이라도 보충한 것이 맞지 않거나, 한 명이라도 은닉하고 뽑지 않았거나, 혹 늙고 병든 것으로 속여 칭탁하고 탈루( 脫 漏 )된 자가 있으면 색리( 色 吏 )는 제주( 濟 州 )로 전가사변( 全 家 徙 邊 )하고, 수령 은 엄히 다스린다. 활을 잘 쏘고 장건한 사람들 중 선발된 사람들은 평상시에 약속( 約 束 )을 정했다가 사변을 들으면 적진으로 달려간다. 좌 우도의 군사를 바꾸어 배정하는 경우에는 군정( 軍 情 )이 기뻐하지 않으니 각기 거주하는 고을이 속한 도에 나누어 배정한다. 한 고을의 군사를 각 장수에게 나누어 배속시킬 경우에는 부자 형제가 혹 서로 멀리 떨어질 수 있으니 고을 수로 다소( 多 少 )를 참작하여 분정( 分 定 )한다. 각 진포( 鎭 浦 )의 전함은 우선 수사( 水 使 )가 이끌고서 바다로 나가고, 각 고을의 전함들은 병사( 兵 使 ) 가 연변 수령을 미리 장수로 정하여 적변을 들으면 제 때에 바다로 나간다. 방어사( 防 禦 使 ) 병사도 수사가 병세( 兵 勢 )가 조금 약하여 제승( 制 勝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또한 각 읍의 선척( 船 隻 )을 모두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합격( 合 擊 )한다. 방어사가 탑승할 전선은 병사가 관할하는 고을의 전함 중에 서 뽑아 정한다. 방어사가 사변을 듣고서 내려갈 경우에는 병사 수사는 그의 절제를 받는다. 방어사가 그 지역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감사( 監 司 )와 병사가 같이 의논하여 마련한다. 육량전( 六 兩 箭 )은 적(선)을 쏘아 부수는 것이니 병영( 兵 營 ) 수영( 水 營 )에서 수백 개씩 만든다. 좌도( 左 道 ) 각 고을에 거주하는 군사로 우도( 右 道 )에 입방( 入 防 )하는 자는 하번( 下 番 ) 시에는 좌도에 분군( 分 軍 )한다. 수군( 水 軍 )은 사변을 듣는 즉시 본포( 本 浦 )로 달려가 번( 番 )을 합쳐 수어( 守 禦 )한다. <계해년 5월 접수한 비변사 사목> 계해년 5월 비변사 좌목은 지휘관계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대목을 많이 담고 있다. 우선 하 삼도에 좌우 방어사를 파견해 좌우 병마절도사(병사)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기각을 이루게 한다는 대원칙을 천명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 병마절도사 외에 좌우 방어사를 추가로 파견해 병력을 분할 운용하는 것은 제승방략체제의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져 있는데 계해년 사목에 그 같은 규정이 완전하고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방어사가 파견될 경우 병사, 수사가 방어사의 절제를 받도록 대원칙을 정한 점도 중요하다.
114 학예지 제19집 해당 도의 병사, 수사가 아닌 임시로 파견된 방어사가 우위에 서도록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해전이 벌어질 때 병력이 부족할 경우 수사뿐만 아니라 방어사와 병사(병마절도사)도 선척 을 이끌고 해저네 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것도 특이한 대목이다. 전시상황이 될 경우 수군들이 번을 합쳐 근무하도록 한 것은 전시에는 교대 근무 규정을 적용하지 않음을 명시한 대목이다. 조선시대 군대는 기본적으로 번차근무 다시 말해 교대근무 제에 기반을 둔 병력운용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제도의 기본 발상은 평시 운용부대 를 줄이더라도 전시에는 가급적 많은 병력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전시에는 번차에 상관 없이 근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같은 원칙을 명시적으로 규정한 내용을 계해 년 비변사 사목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무기체계 운용의 측면에서 활을 잘 쏘고 장건한 사람들 중 선발된 사람들은 평상시에 약속 ( 約 束 )을 정했다가 사변을 들으면 적진으로 달려간다 는 점을 비변사 사목으로 명시한 점은 매 우 중요하다. 사실상 활 위주의 병력 운용 방침을 중앙 조정 차원에서 확인한 것이다. 비실용 적 무기로 알려져 있는 육량전에 대해 육량전( 六 兩 箭 )은 적(선)을 쏘아 부수는 것이니 병영( 兵 營 ) 수영( 水 營 )에서 수백 개씩 만든다 고 명시한 점도 조선시대 전투용 화살촉의 운용 실태를 보여주는 사료로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무재( 武 才 )가 있는 자로 숨거나 빠져 있다가 나중에 나타난 자는 수령은 물론이고 당상관( 堂 上 官 ) 공신( 功 臣 ) 의친( 議 親 )이라도 무겁게 논죄하여 곤장을 친다. 유향소( 留 鄕 所 ) 색리( 色 吏 )도 함께 곤장을 치고 전투가 있는 곳으로 보내 충군( 充 軍 )한다. 봉수( 烽 燧 )에 전혀 봉화를 올리지 않고, 적을 맞는 곳은 더욱 심하니 명령을 어기는 자는 즉시 군법 ( 軍 法 )을 시행하여 일군( 一 軍 )에 효시( 梟 示 )한다. 요망( 瞭 望 )을 하지 않고 전례에 따라 봉화를 올리 거나, 혹은 중로( 中 路 )에서 봉화를 끊어 전달하지 않는 자는 율( 律 )에 의하여 논단( 論 斷 )한다. 도내의 장사( 將 士 )들로 명령을 어긴 자는 군법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며, 당상관( 堂 上 官 )인 수령은 계문( 啓 聞 )한다. 조방장( 助 防 將 )은 본도의 관찰사의 지휘를 듣도록 조처한다. 연해( 沿 海 )에 사는 백성들은 피해가 우려되니 적변이 있는 경우에는 제 때에 알려 그들이 성( 城 )으로 들어와 피해를 피하도록 한다. 만약 사변( 事 變 )이 있게 되면 도내의 무반당상( 武 班 堂 上 )으로 죄를 입은 자들을 한편으로 조정에 계문( 啓 聞 )하고 장수로 차정( 差 定 )한다. <을묘년 4월 비변사 사목>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15 1555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을묘년 비변사 사목에서는 당상관, 공신, 의친 등 출신에 상관없이 군사 분야에 재능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종군해야한다는 원칙을 명시한 점이 인상적이다. 조방장을 두고, 관찰사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규정을 비변사 차원의 사목에 명시 한 점도 경장 파견 관행이 관습법으로 제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적 이 침입했을 때 봉수 신호가 끊길 경우 목을 잘라 효시하도록 한 사목은 바로 다음해인 1556년 국왕의 전교 17) 라는 보다 강제성이 강한 형식으로 법제화된다. 승려( 僧 人 )와 향화( 向 化 )는 큰 적이 있을 경우에 임시로 선발해 부적하게 한다. 각 진포( 鎭 浦 )의 성자( 城 子 )를 증축하고, 궁노( 弓 努 )와 능철( 菱 鐵 )을 많이 준비하여 적변이 있을 때 에 각 처의 요로( 要 路 )에 몰래 많이 설치한다. 입방( 入 防 )하는 군졸은 관찰사 진장( 鎭 將 ) 수령이 일체 법조를 준수하여 입번( 立 番 )을 빼먹는 폐 단이 없게 할 것이며, 번을 빼먹는 자와 대신 대립 代 立 )하는 자는 일일이 적발하여 감사에게 이문( 移 文 )하여 보고한다. 수령으로 병 수사를 가볍게 여기고 얕봐서 즉시 붙잡아 보내지 않는 자는 계문 ( 啓 聞 )하여 파출한다. 각 관( 官 )의 군기( 軍 器 )는 정치하지 않으면 적진에 임해서 사용하기 힘드니 활, 장 편전, 통아( 筒 兒 ) 등의 물건을 민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급속히 수리 보수하여 많은 수를 만든다. 경오년 18) 에 제승( 制 勝 )했을 때에 석전( 石 戰 )의 공이 많았는데 안동( 安 東 ) 등 고을의 사람들을 많이 뽑아내어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한다. <무인년 2월 병조의 사목> 1518년 혹은 1578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무인년 병조의 사목에서 눈에 띄는 조항은 두 가지다. 우선 적이 대규모로 침공할 경우 승려를 의미하는 승인과 귀화인을 의미하는 향화를 초발해 전투에 투입하도록 규정한 대목이 흥미롭다. 이 같은 병조 사목의 규정들은 이 시기에 비군사층을 동원해 병력 부족 문제에 대처했다는 기존 연구 19) 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려의 경우에는 1555년에 전시에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뤄졌고, 결국 같은 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승려에 대한 징발이 실제로도 행해졌다. 20) 병조 사목이 어느 해 17) 수교집록 병전 봉수조 18) 1510년 경오년의 삼포왜란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1968, 한국군제사-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294~295쪽 20)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위와 같음.
116 학예지 제19집 에 작성된 것이냐에 따라 구체적인 의미 부여는 다소 달라질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사료와 기 존의 연구에 확인되던 승려의 전시 동원을 절제방략 수록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21) 귀화인의 경우에도 최소 귀화한 본인의 경우 조선 전기 병역의무의 기본이 되는 정병이나 보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귀화인 후손의 경우 귀화인 사람의 고손, 증손 때부터 군역을 부과해 야한다는 논의는 이미 1532년의 기록 22)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1576년이 되면 함경도에 서 귀화인을 의미하는 향화의 후손들에게 실제로 군역을 부과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 다. 23) 그와 관련한 구체적인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귀화인의 증손 때부터 일반 조선인과 같이 군역에 충정하도록 한 국왕의 전교가 1591년 내려지면서부터다. 24) 무인년 병조 사목은 1591년 귀화인 후손에 대한 군역 의무 부여 규정을 법제화하기 이전인 1518년 혹은 1578년에 최소한 전시에는 귀화인들도 강제 동원하도록 하는 규정을 먼저 마련했음을 보여준다. 병조에서 무기를 사전에 확보해야한다고 지시하면서 활, 장전, 편전, 통아 등 활과 관련된 장 비만 거론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군의 실제 전력 운용에서 활이 차지하는 비중 이 압도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사목에서 유사시 안동의 석전군을 동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실제로 임진왜란 초기 안동의 석전군이 출전한 기록 25) 이 발견되는 점도 흥미 롭다. 이 같은 사목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로 준수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이기 때문이다. 성( 城 ) 안에 우물을 뚫고 연못을 파는데 수근( 水 根 )이 없으면 혹 마른 연못을 파서 빗물을 저장한다. 적선( 賊 船 )에 화공( 火 攻 )을 하기 위해 관솔[ 松 明 ]을 대선( 大 船 )에는 2백 자루, 소선에는 백 자루(를 준비한다). 임전( 臨 戰 )할 때에 쓸 녹각( 鹿 角 )을 미리 준비하여 쌓아두고, 돌덩이는 크고 작은 것을 반반씩 많은 수를 거두어 쌓아두고, 능장( 稜 杖 )을 많이 저축해 둔다. 장건( 壯 健 )한 자는 혹은 장창 ( 長 槍 )으로, 혹은 장겸( 長 鎌 )으로, 혹은 도끼[ 斧 子 ]로 함께 정제한다. 위장( 衛 將 )은 소속된 곳에 큰 변란이 있을 시에 본관( 本 官 )에 비록 작은 변란이 있을지라도 진( 鎭 )을 떠날 수 없고, 사유를 갖추어 주장( 主 將 )에게 치보( 馳 報 )하고 본관의 적을 방어한다. 변란이 일어난 곳에 주장이 도착하기 전에는 중위장( 中 衛 將 )이 절제하고, 제장( 諸 將 )은 중위장의 호 21)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이 승병의 동원을 규정한 위 사목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도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22) 중종실록 중종 27년 9월 25일(신해)자 23) 선조실록 선조 9년 7월16일(정미)자 24) 조선시대 법규(수교집록 병전 만력 신묘년 승전)에 따르면 귀화인의 경우 귀화한 사람의 증손부터 군역에 충정하도록 되어 있다. 25) 난중잡록 권1 임진년 상 4월21일자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17 령을 듣는다. 무인년 26) 에 순무어사( 巡 撫 御 史 )가 가지고 온 사목( 事 目 )에, 수령 중에서 문신( 文 臣 )과 문음( 門 蔭 )으 로 무략( 武 略 )이 없는 자는 병사( 兵 使 )에게 명령하여 각기 그 고을에 산거( 散 居 )하는 전직 조관무신 ( 朝 官 武 臣 )을 대장( 代 將 )으로 정하여 적진으로 달려가도록 하고, 배의 격군( 格 軍 )과 군인은 수령이 친히 거느리고 전쟁터로 달려간다. 방어사와 조방장은 명호( 名 號 )가 비록 다르지만 특별히 경중( 輕 重 )의 차이가 없으니 분군( 分 軍 )하는 일을 전례대로 시행하여 병사( 兵 使 ) 방어사에게 소속된 군을 뽑아내어 분정( 分 定 )한다. <무오년 감사 좌우병수사 동의조건> 1558년 7월 감사와 좌우 병사와 수사가 동의했다는 조건에는 지휘체계와 관련된 규정과 무 기체계와 관련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무기체계와 관련된 조항에는 해전에서 화공용으로 관 솔을 준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6세기 중반이라면 이미 조선 수군에서 각종 화약무기가 일반화된 시점임에도 화약무기가 아닌 관솔을 대량으로 준비해 화공을 준비한다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준다. 전쟁에 임할 때 필요한 녹각, 능장 등 장애물과 장창, 장겸, 도끼 등을 준비하도록 한 것도 해전에 해당하는 것인지, 육상전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 나 그 어느 경우라도 조선군의 일반적인 무기체계 구성에서는 좀 벗어난 것이다. 사료가 부족 한 상태에서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으나 당시 조선 지방군의 일반적인 무기체계 보유 지침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기존 무기체계 구성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조건으 로 보인다. 위장과 관련된 지휘체계 규정도 그 의미가 불명확한 점이 있다. 본관을 위장이 원래 맡은 직책을 의미한다고 가정한다면, 위장이 원래 담당한 고을의 관할구역 내에서 아주 작은 전투라 도 벌어질 경우에는 상급자의 관할구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도 자신의 관할구역을 버려 두고 상급자의 관할구역으로 출동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원래 관할구역 방어가 가장 기본적인 책임임을 명시한 규정으로 보인다. 주장이 오기 전에 중위장이 지휘하도록 한 구정은 주장이 지휘하는 병력이 모두 평시 집결한 상태가 아니라 는 점에서 당연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동의조건에는 무인년 순무어사의 사목이 재인용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눈에 띄는 대목은 26) 정경달 후손 집안에 보존되어 온 진법 에 수록된 절제방략에는 무인년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본 미산총서 에 수록된 절제방략에는 연도에 대해 명시하지 않고, 생변처( 生 變 處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118 학예지 제19집 두 가지다. 우선 다른 법전에서 보이지 않는 대장( 代 將 )의 임용 규정이 확인된다. 조선의 지방 관과 지방군 지휘관은 법적, 행정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1인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 문관 출신 지방관이 부대를 지휘할 역량이 부족할 경우 누군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근거 조항이 바로 무인년 순무어사 사목, 그리고 그것을 인용한 감사와 좌우병사의 동의조건이었던 셈이다. 3.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 절제방략과 제승방략의 상호관계 지금까지 제승방략과 관련된 연구에서는 제승방략이라고 지칭되는 새로운 방위체제를 도입 하는데 김수문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김수문이 사실상 제승 방략을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은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언급 27) 한 이래 현대 이후의 연구에서 도 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재 전해오는 절제방략의 내용으로 본다면 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 법을 고쳐 도내의 여러 고을을 순변사, 방어사, 조방장, 도원수 및 본도의 병사와 수사에 나누 어 소속시키고 이를 제승방략이라고 했다 는 전통적 견해는 다소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해당 지역의 상시 배치 지휘관 외에 조전절제사 같은 경장 혹은 임시지휘관을 파견하는 관행 자체는 이미 성종 재위시절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28) 따라서 경장 의 파견 그 자체를 제승방략 체제의 본질적 요소로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경장의 파견이 얼 마나 제도화되었는지 여부가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1558년 작성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김수문의 무오년 절제에는 방어사와 조방장 등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다는 눈길을 끈다. 물론 무오년 절제에 나오는 4운체제라는 병력 운용 체제 자체가 방어사 나 조방장 등 경장 내지 비상설 지휘관의 추가 파견을 전제로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으나 김수 문 명의로 작성된 무오년 절제에 비상설 지휘관의 파견과 관련한 직접적 내용이 없다는 점은 27)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10월 1일(계사)자 28)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1968, 한국군제사-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318~321쪽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19 의미심장하다. 특히 하삼도( 下 三 道 )에 적변이 있을 때 좌 우방어사를 파견하고 이들에게 병력의 절반을 할당한다 는 취지의 규정은 156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해년 비변사 사목에서 보다 분명하고 명시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유사시 방어사 등 비상설 지휘관의 파견을 제도화하고, 이들에게 병력의 절반을 할당하도록 명문화시킨 규정 자 체는 김수문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비변사 명의로 하달된 사목에 등장하고 있다. 결국 이 같은 새로운 방어체제가 정착한 것은 김수문 개인의 의견을 떠나 중앙 조정 차원의 판단이 추가로 뒷받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는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정식으로 설치근거가 명 시되어 있는 직제다. 29) 특히 병마절도사는 도내 군사업무의 총책임자로서 직접 지휘하는 진장 은 물론이고 각 읍의 수령에 대해서도 군사업무 관한 한 포폄, 규찰, 용형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전에도 없는 방어사와 조방장을 추가로 파견하는 것을 상례화하고 특 히 방어사에게 병력 절반을 할당하도록 하는 것은 법전으로 뒷받침되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 도사의 권한을 제약하는 조치이다. 이 같은 조치를 결코 개인이 결정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 고, 개인이 결정할만한 내용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유사시 경장 내지 비상설 지휘관을 추가로 파견해 해당 지역의 병력 일부를 직접 지휘하도록 하는 시스템은 애당초 조정의 위기대 응 과정 중에 처음 나왔고, 이것이 하나의 관습법처럼 제도화하는 과정에는 계해년 비변사 사 목 등 중앙 조정 유관 부서의 공식적 결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정착 과정에서 김수문이 일정한 기여를 했을 개연성은 있다. 유성룡이 제승방략을 거론 하면서 유독 김수문만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정경달의 진법 과 정사욱의 미산총서 에는 절제방략 이란 문구만 나올 뿐 제승방 략 이란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절제방략 에는 제승방략 체 제의 특징으로 알려진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절제방략 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제승방 략 체제의 성립과 제도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문서에 제승방략 이라는 직접적 표현은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29) 경국대전 권1 이전 30) 오종록, 1985,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의 성립과 운용 진단학보 제60호, 진단학회, 120쪽
120 학예지 제19집 임진왜란 이전 조선시대 군사관련 고문서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상태에서 단정적인 결론 을 내리기는 쉽지 않으나, 제승방략 이란 용어 자체가 애당초 특정한 방위체제를 한정적으로 지칭한다기보다는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선행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제승방략은 특정한 방위체제를 지칭하는 용어이기 이전에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방책 이라는 의미도 가진 용어였다. 31) 방략 은 방책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전략이나 전술, 혹은 작전계획을 포괄하는 의미의 용어로 조선시대에 광범 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승 도 승리 혹은 승전 정도의 의미로 흔히 사용되었던 용어였다. 결국 제승방략 도 특정한 방어체제를 지칭하기 이전에 승리전략, 승리전술, 승리를 위한 작전계획 등의 의미로 사용하던 용어일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고 싶다. 한 단계 더 나간다면 당시 일정 규모 이상의 관할구역을 가진 지휘관이 전시 부대 편성이나 지휘관계 규정, 다시 말해 분군법( 分 軍 法 )에 해당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전략 혹은 전술 방침 혹은 원칙 내지 작전계획까지 포괄한 문서를 작성했고, 이런 문서를 흔히 제승방략 이라고 불 렀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종서(1383~1453) 혹은 이일(1538~1601)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승 방략 책자, 다시 말해 이른바 북도 제승방략 에는 지역별 방어계획과 유사시 증원 및 역습계 획, 전시 부대 편성과 지휘관계 규정, 식량 보급 관련 규정, 유사시 장병들이 준수해야할 규정 까지 모두 망라하고 있다. 삼남지역에 적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승방략과 내용상 차이가 많은 이일의 저서, 이른바 북도 제승방략 에도 제승방략 이란 책 제목이 붙은 이유도 애당초 제승 방략이란 용어가 16세기 중엽에 새로 도입한 특정한 방위체제를 지칭할 때만 한정적으로 사용 했던 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승방략이 작전계획 내지 그와 유사한 성격의 지침을 포괄한 문서이고, 하나의 단일한 책자 라기보다는 여러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작성하는 성격의 문서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료도 남 아있다. 1604년 함경도 관찰사 서성은 우리나라 변경에는 모두 제승방략이 있어 성을 지키고, 계원하고, 추격 요역하는 길을 규칙으로 정해 지켜야하며, 이를 어길 경우 죄를 준 것이 오래 되었다 고 말하고 있다. 32) 서성이 지칭한 제승방략이 함경도에서 시행한 북도 제승방략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개유( 皆 有 ) 라는 표현만 봐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 함경도 이외 31)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하 진단학보 제37호, 진단학회, 8쪽 32) 선조실록 선조 37년 8월 26일(갑진)자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21 의 변경지역에도 제승방략이 모두 있었다 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모두 있었다 는 표현은 제승방략이라는 하나의 문서가 있어 각 도에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다기보다는 각 도마 다 별도의 제승방략이 존재했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표현이다. 또한 (제승방략을) 어길 경우 죄를 주었다 는 표현을 볼 때 각 도 단위로 제승방략을 작성하더라도 중앙 조정 차원에서 그 내용을 검토 승인함으로써 반드시 지켜야하는 강제규정으로 삼았음도 짐작하게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또한 임진왜란 개전 초기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제승방략에 의거해 분군하고, 여러 고을에 문서를 보내 소속 병사를 각자 이끌고 정해진 장소로 나아가 주둔하게 했다 는 실록 33) 의 내용은 당시 경상도에 적용하던 제승방략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항복은 우의정 겸 제도도체찰사( 諸 道 都 體 察 使 ) 겸 도원수( 都 元 帥 ) 신분으로 1600년에 올 린 차자 34) 에서 평시제승방략에서 본도에서 수군에 소속된 곳이 모두 19관이다 이라고 언급했 다. 이 차자에서 이항복이 평시제승방략( 平 時 制 勝 方 略 ) 이라고 지칭한 문서도 전라도 육 수군 의 관할에 대해 언급했음을 볼 때 전라도에서 적용하고 있던 제승방략일 가능성이 높다. 같은 맥락에서 유성룡이 언급 35) 한 양남제승방략( 兩 南 制 勝 方 略 ) 도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각 각 작성, 적용하고 있던 별개의 제승방략을 지칭한 것이라고 해석해야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절제방략과 제승방략의 상호관계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결론 적으로 흔히 과거에 제승방략 체제라고 부르던 지휘관계 규정 내지 방위체제 자체는 16세기 이후 절제방략에 수록된 비변사, 병조의 사목 등 기타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여러 조치에 의해 어느 정도 시일을 두고 점진적으로 완성된 방위체제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제승방략은 일시에 김수문의 창안으로 갑자기 마련된 것이 아니고 전부터 내려 오는 여러 가지 응급방안을 하나로 일원화하여 정제한 것이라고 이해해야한다 는 지적 36) 은 일 정 부분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16세기 중엽 이후 새로운 지휘관계 규정과 병력 운용 규정이 비변사나 병조의 사목 형태로 만들어지 고, 그것이 절제방략이란 이름 아래 정리되기도 했으며, 그에 따라 과거와 구별되는 새로운 33)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4월14일(계묘)자 初, 慶 尙 監 司 金 睟 聞 賊 變, 卽 依 制 勝 方 略 分 軍, 移 文 列 邑, 各 率 所 屬 兵, 進 屯 信 地 34) 백사선생문집 권5. 35) 서애선생문집 권16, 서임진사시말시아배( 書 壬 辰 事 始 末 示 兒 輩 ) 36)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하 진단학보 제37호, 진단학회, 19쪽
122 학예지 제19집 방위체제가 출현했지만, 이 같은 방위체제는 특정 개인이 제안한 제도가 아니었고, 특정 시점 에 단기간에 완성된 제도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지칭하는 특정한 용어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 이 높다. 다시 말해 애당초 제승방략은 특정한 방위체제를 지칭하는 용어라기보다는 부대 편성은 물 론이고 지휘관계 규정, 전략 전술상의 원칙, 작전계획까지 포괄하는 성격의 문서로 도( 道 ) 등 일정한 지역단위로 작성한 후 중앙조정 차원에서 승인하는 성격의 문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6세기 중엽무렵부터 각 지역별로 작성하기 시작해 임진왜란 때 적용한 각 지역의 제승 방략에는 절제방략에 수록된 비변사, 병조의 사목과 관련된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유성룡은 16세기 중엽 점진적으로 완성된 새로운 성격의 방위체제를 지칭할 때도 제승방략이란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각 지역별 제승방략의 수록 내용 이른바 북도 제승방략 에서 핵심내용을 분군법이라고 보고, 분량상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열진방어는 부차적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37) 하지만 이른바 북도제승방략 에서 이일은 부임 하자마자 제승방략을 상고했다고 되어 있고, 38) 문맥상 그가 상고했다는 제승방략은 분군법뿐 만 아니라 방책내지 작전계획이라고 할 만한 내용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39) 이처럼 당시 시행한 제승방략이 분군법 외에 전시 작전계획 성격의 내용을 포괄하는 문서였 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료는 위에서 언급한 서성의 발언 이외에도 몇 개 더 찾을 수 있다. 신경 은 임진왜란 초기 상황을 묘사하면서 당시 묘당에서 제승방략을 지어, (적을) 상륙하게 한 후, 공격하도록 했다. 변방의 장수들이 바다 가운데서 막을 생각을 못해 여러 고을이 와해되었 다 40)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제승방략은 적을 해상에서 요격하지 않고, 육상에서 방어하라 는 취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37) 허선도, 1974, 제승방략 연구-하 진단학보 제37호, 진단학회, 52~57쪽 38) 제승방략 권2 청행제승방략장 39) 이 문제는 북도 제승방략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도 제승방략의 저자에 대해서는 김종서가 처음 짓고, 이일이 증보했다는 견해(김구진)와 저자가 이일이라는 견해(허선도)로 나눠진다. 제승방략을 애당 초 분군법뿐만 아니라 일종의 방어시 작전계획을 포괄하는 성격의 문서라고 이해한다면, 이일은 이미 존재하는 북도 제승방략을 수정 보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증보문헌고비고 예문고 병가류의 설명대로 북도 제승 방략 내지 그 책에 수록된 작전방침의 최초 저자는 김종서일 가능성도 있다. 40) 신경, 재조번방지 권1. 當 時 廟 堂 撰 制 勝 方 略 使 之 下 陸 然 後 勦 擊 故 邊 將 無 意 遮 遏 于 洋 中 及 列 郡 瓦 解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23 신경이 말한 제승방략의 규정 중 (적을) 상륙하게 한 후, 공격하도록 했다 는 내용은 경상도 내지 경상좌수영에 해당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는데, 경상도 내지 경상좌수영에 적용한 제승방 략에 작전계획내지 전략 혹은 전술상의 원칙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각 지역별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승방략에 수록된 조선군의 방어계획은 지휘 관의 재량권을 다소 제약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매우 구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604년 함경도 관찰사 서성이 우리나라 변경에는 모두 제승방략이 있어 성을 지키고, 계원하고, 추격 요역하는 길을 규칙으로 정해 지켜야하며, 이를 어길 경우 죄를 준 것이 오래되었다 고 표현한 것도 당시 제승방략이란 이름으로 사전 작성한 문서가 매우 강 한 구속력이 있는 작전계획내지 지침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휘관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작전계획 내지 작전상의 원칙을 사 전에 규정한 또 다른 실제 사례로 관찰사, 병마절도사의 입성 금지 조치 를 들 수 있다. 묵재일기를 보면 우리나라의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에는 감 병사는 모두 성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책응( 責 應 )한다 고 되어 있다 는 구절이 나온다. 41) 즉 당시 방어계획상 관찰사와 병마절 도사가 성 안에 들어가서 수성전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육군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42) 를 보면 충청도 일대의 주요지형과 그에 따른 주둔 병력을 언급하면서 특정 지형지물에 대해 추/요격처에 해당된다는 언급을 곳곳에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제승방략이란 명문의 제목은 없지만 북도 제승방략 식의 구체적인 지형 별 작전계획을 함경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에서 작성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개전 직후인 1592년 4월14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 게 보낸 공문을 보면 방략에 의거해 부산과 다대포의 우요격장으로 하여금 군사와 전선을 정 비해 바다로 나가 사변을 대비하게 했다 고 되어 있고, 4월15일자 공문에서도 방략에 따라 방 비를 튼튼히 하여 굳게 지켜 적을 막아내는 일들을 각별히 조치하고 있다 는 표현이 보인다. 43) 41) 안방준. 비어논변, 묵재일기 1623년 4월자. 해당 내용은 안방준이 묵재 이귀의 행적을 기록한 대목 중 일부다. 현존하는 절제방략이나 북도 제승방략에는 직접적으로 이와 똑같은 내용은 발견되지 않으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전해오지 않은 특정 지역 제승방략의 한 구절이 분명하다. 42) 육군박물관 유물번호 087111 / 000. 유물 명칭은 군사작전계획서 로 되어 있을 뿐 원래 이 문서의 정확한 제목은 알 수 없다. 분군법과 전시의 요격처, 추격처가 명시된 점 등을 고려해서 잠정적으로 호서제승방략 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 고 싶다. 이 문서의 작성연대와 수록된 분군법의 특징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43) 임진장초, 인왜경대변장( 因 倭 警 待 變 狀 ) 일( 一 ) 및 삼( 三 ). 다만 인왜경대변장 일( 一 )의 방략에 의거해 부산과 다대포의 우요격장으로 하여금 군사와 전선을 정비해 바다로 나가 사변을 대비하게 했다 는 내용과 신경이 말한 (제승 방략에서 적을) 상륙하게 한 후, 공격하도록 했다 는 내용은 다소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두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면 두 형태의 작전이 발동되는 전제 조건에 차이가 있었고, 그 전제조건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124 학예지 제19집 여기서 말하는 방략도 분명 제승방략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고 그 내용은 특정한 상황에 서의 전술적 조치에 관한 규정으로 짐작된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제승방략은 내용상 전시 부대 편성과 지휘관계 규정 등 이른바 분군법 에 해당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전시 전략 혹은 전술 원칙 내지 작전계획에 해당하는 내용까지 포괄하는 문서로 각 지역별로 작성한 문서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소위 제승방략 체제 의 본질과 진관체제 이처럼 제승방략을 일정한 지역 단위로 부대 편성, 지휘관계 규정, 전략 전술상의 원칙, 작전계획 등을 포괄적으로 담은 문서 로 정의한다면 이른바 제승방략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경장의 파견을 제승방략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 만, 경장 내지 비상설 지휘관의 파견 규정이 보이지 않는 북도 제승방략에서도 제승방략이란 용어를 쓴 것을 보면 이 같은 방위체제를 제승방략이란 용어로 포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제승방략을 하나의 특정한 방위체제로 전제하고 이를 진관체 제와 대비되는 용어로 이해하는 전통적 관점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진관제( 鎭 管 制 ), 혹은 진관체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관제라는 것도 실상 주진( 主 鎭 )-거 진( 巨 鎭 )-제진( 諸 鎭 ) 상호 간의 지휘관계와 각 지방관이나 전임무관들의 관할구역 문제를 규정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을 반드시 관할구역 내에서의 자전자수( 自 戰 自 守 ) 형태 의 작전만 하도록 강제한 하나의 특수한 방위체제로 이해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한 검토를 필요 로 한다고 보인다. 진관제는 특정한 도 내에서 주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 좌, 우익으로 나누는 종래의 체제와 달리 주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나머지 주변 지역을 병렬적 제진이 그에 소속되는 체제로 이해되 고 있다. 이때 일정한 영역을 담당하는 특정 군사지휘관이 평시 고유의 관할구역내지 방어책임 구역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관할구역을 정한 이상 자신의 관할구역을 벗어나 다른 지 역으로 지원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것도 당연하다. 성종대에 각 진관의 책임방어가 강요되고 야전지휘관이 임의로 타 진관을 지원할수 없다고 규정한 불필적타진지조법( 不 必 籍 他 陣 之 助 法 ) 이 시행됐다 44) 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사료에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25 나오는 불필적타진지조법 은 진관제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특정한 군사지휘관이 자신의 관할구 역 내에서 작전해야한다는 자명하고 보편적인 원칙을 재확인한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 도 있다. 이런 제한 규정은 전면전에 준하는 전시 상황 하에서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자명하다. 평시에는 관할구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금지하더라도 조정의 판단에 의해 전시상황에 서는 얼마든지 이 같은 규정은 변동될 수 있으며, 설사 다른 지역으로의 출동을 허용할지라도 이것이 진관제의 본질을 침해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좀 더 냉정한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무엇보다 이른바 진관제가 적용된 시기에도 조선 지방군은 기본적으로 서울에 근무하는 상 번( 上 番 )과 지방 원 거주지에 잔류하는 유방( 留 防 )으로 나눠 근무했다는 점도 상기해 볼 필요 가 있다. 특정 진관의 고유 병력이라고 할지라도 그 중 일부는 교대로 상번해서 중앙군의 일원 으로 절제 받았다는 뜻이다. 상번 병력은 기본적으로 관할구역 자체의 방어와 무관한 임무를 맡은 부대이며, 그 기본 임무는 시위지만 유사시 중앙군의 일원으로 경장의 지휘 하에 대규모 교전이 발생한 지역으로 파견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45)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제승방략(체제)은 진관체제를 부정하기보다는 진관체제 안에서의 개 량적 방법이었다 고 보는 견해는 다각도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6) 이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임진왜란 직전 조선군의 방위체제를 논할 때 진관이나 제승방략 같은 특정한 용어아래 검토를 하기 보다는, 16세기대의 방위체제 등 보다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4. 16세기 조선군 방위체제의 특징 이렇게 용어를 정의하고 16세기 중반 이후 임진왜란 초반기까지의 부대 편성과 작전계획 등 에 나타난 조선 작전체제의 특징에 대해 논하자면 대략 아래와 같이 사항을 제시할 수 있다. 44) 장학근, 2007, 제승방략이 지닌 병력운용상의 가치 군사 제64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쪽 45) 조선시대 때 상번 병력이 전면전에 투입할만한 대규모 전쟁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인 사료를 제시할 수 없다. 다만 조정의 진사일록 1592년 5월6일자에서 조정이 서울에서 내려온 오주상번기사( 吾 州 上 番 騎 士 ) 김언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장면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김언희는 신립 패배 사실을 전하고, 경기방 어사 병력은 죽산(경기도 안성일대)에 주둔하다 철수했다고만 전할 뿐 자신이 신립 휘하인지 경기방어사 휘하인지, 아니면 그냥 서울에 있다 개별적으로 탈주한 것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만약 김언희가 신립 휘하로 출전한 것이 라면 상번 군사가 다시 자신이 소속된 진관으로 출전한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46) 육군본부, 2012, 한국군사사 6권 조선 전기 II 제9장 제5절 병력동원체제의 개선-제승방략, 육군군사연구소
126 학예지 제19집 1) 16세기 방위체제의 지향점 이른바 방어사 같은 경장의 파견 혹은 비상설 지휘관을 추가로 파견하도록 한 조치는 1510 년 경오왜변 때부터 실록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47) 이 같은 조치는 전시에 준하는 상황에서 일 종의 임기응변으로 취해진 것은 분명하다. 유사시 필요할 경우 외부에서 병력을 지원하거나 병력을 자질이 우수한 지휘관을 추가로 선발해서 파견하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 의 타당성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1563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해년 비변사( 備 邊 司 )의 사목( 事 目 ) 처럼 해당 지역 병력 절반을 방어사가 지휘하도록 제도화한 것은 분명히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고 할 수 있 다. 평소 해당 지역에서 병력을 훈련시키고, 해당 병력을 지휘해 보지 않은 인물을 새롭게 지휘 관으로 파견한 후 지휘하도록 한다는 발상은 군사적 측면에서 타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성룡이 경장 등 비상설 지휘관 파견을 비판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관체제를 자신의 책임구역만을 방어하게 하는 자전자수 체제로 이해하거나, 이른 바 제승방략 체제를 병력을 일제히 징발하여 모두 국경 부근에 결집시키는 것 48) 이라고 이해 하는 전통적 입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전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진관이라는 것은 각 지역별 지휘관의 평시 관할구역 내지 방어책임 구역을 정하고, 각 주진-거진-제진 간의 지휘관계를 정한 원칙에 불과한 것이다. 이 같은 관할 구역내지 방어책임구역은 평시상태에서는 지켜질 수 있으나 전면전 상태에서 이 같은 관할구 역만 고집할 경우 각개 격파당할 우려가 있다. 당연히 그 같은 방어체제가 하나의 대원칙으로 일관되게 정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시 말해 삼포왜란이나 을묘왜변 이전에 방어 작전 측면 에서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책임구역을 벗어난 지역에서의 병력 투 입이라는 상황이 부각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이른바 제승방략 체제, 보다 정확하게는 16세기대 조선군의 방위체제에서 유사시 병력을 모 두 국경 부근에 집결한다는 인식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병력동원 상황만 봐도 분명해 진다.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는 개전과 거의 동시 혹은 왜군의 47) 중종실록 중종 5년 4월 8일(계사). 이 때 이후 중종 재위 기간 동안 방어사와 관련된 기록이 20여 차례 이상 실록에 등장한다. 48) 선조실록 선조 27년 3월 29일자(정미)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27 출현 이후 불과 하루, 이틀이 경과한 시점에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래성 내부에는 동래부사 송상현뿐만 아니라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의 부대도 같이 주둔하고 있었 다. 49) 상식적으로 타 지역 부대가 동래성 안에 주둔할 이유는 없으므로 이들 병력은 개전 이후 긴급 증원된 부대로 짐작된다. 개전 시점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어떤 경우로 계산 해봐도 2일 안팎의 매우 짧은 시일에 증원부대가 동래성으로 진입했다는 기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도주하긴 했지만 울산에 주둔하던 경상좌병사가 동래성 전투 개시 이전에 이미 동래성에 출동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50) 이 같은 증원부대의 신속한 출동은 사전에 정해진 방어전략 내지 병력 출동 지침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같은 방어전략 내지 병력 출동 지침의 실체는 사전에 작성된 경상도 내지 경상좌도의 제승방략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부 병력이 신속하게 국경지역으로 집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순변사 이일의 지휘를 받는 또 다른 경상도 병력은 대구로 집결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1) 순변사 이일이 대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상주, 문경 병력을 포함한 경상도 병력 일부가 대구 금호평에 도착해 대략 4월19일 분산될 때까지 해당 지역에 주둔 중이었다. 52) 이일이 한양에서 출발한 시점과 그의 이동 경로를 감안하면 순변사의 지휘를 받는 병력을 대구로 집결하도록 한 조치도 이일에 의해 임기응변으로 정해진 조치라기보다는 사전에 정해진 방어계획내지 지침에 따라 이루어졌 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4월21일 안동판관 윤안성이 지휘하는 병력 등 경상좌병영 소속 13개 읍군 소속 병력은 울산좌병영성으로 집결 53) 한 것도 조선군의 초전 대응과 관련해서 살펴 봐야할 대목이다. 울산 좌병영성 전투에서 경상좌병사 이각과 좌병영 우후 원응두는 좌병영성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54) 이처럼 이각이 좌병영성에서 방어전을 치를 의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전 후 약 1주일 만에 경상도 13개 읍군 병력이 좌병영 성으로 집결한 것은 이 같은 병력 집결이 이각의 판단이나 지시와 무관하게 사전에 정해진 방침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대비해 사전에 정해진 지침에 따라 계획된 병력 이동이 이루어진 49) 난중잡록 권1 임진년 상 4월14일자 50) 난중잡록 위와 같음 51) 징비록 52) 이호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 전투와 군사체제 군사 77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53쪽 53) 난중잡록 권1 임진년상 4월21일자 및 22일자 54) 난중잡록 위와 같음
128 학예지 제19집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로 보건데 당시의 방위체제는 국경지역에 집결해야하는 병력 과 그 보다 후방 내지에 해당하는 교통 요지인 대구 울산으로 집결할 병력을 사전에 구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변기, 성응길, 조경, 양사준, 박종남, 변응성, 유극량 등 개전 이후 하삼도로 파견된 경 장 중 상당수가 경상도-충청도로 연결되는 주요 고갯길 주변에서 작전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경상우방어사 조경의 경우 4월15일 임명 이후 늦어도 23일 경상도 경계 내로 진입하며 이후 추풍령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다. 방어사 조경이 28일 추풍령에서 방어를 시도하다 병력 이 분산되어 실패했다는 기록 55) 도 보이지만 4월30일 전라방어사와 합류한 이후 김천에서 소규 모 교전을 시도 56) 하는 것으로 보아 조경은 시종일관 추풍령 부근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조경은 추풍령과 연결되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것이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상 조방장 내지 경상좌도방어사, 혹은 충청방어사 등 기록에 따라 직책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변기에게는 조령 방어 임무가 부여됐다는 기록 57) 이 확인된다. 경상도로 출전한 직후 변기의 동선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변기의 부하인 종사관 이경류가 상주전투에서 이 일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기록 58) 이 발견되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이후 신립의 조령 정 찰 당시 이일과 함께 변기가 다시 등장하고 죄를 씻기 위해 신립군의 선봉 임무가 부여됐다는 기록도 보인다. 59) 혹은 신립이 변기로 하여금 조령 방어를 포기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 다. 60) 결국 방어사 변기는 상주전투 참전-조령-신립군 선봉대 순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지역 은 모두 조령에서 연결되는 축선이다. 변기도 조령을 방어하는 작전 내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전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조방장 유극량에게도 죽령 방어임무가 주어졌다는 기사가 일부 사료에서 확인된다. 61) 경상 조방장 혹은 경상좌방어사의 직책을 가진 성응길의 경우는 고갯길 방어임무에는 투입되지 않 55) 난중잡록 권1 임진년상 4월28일자 56) 난중잡록 권1 임진년상 4월30일자 57) 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 4월14일(계묘)자. 미수기언 권38 서애유사 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58) 난중잡록 권1 임진년상 4월25일자 59) 재조번방지 권1 임진년 4월26일자 60) 서애선생 별집 권4 조령축성 61) 미수기언 권38 서애유사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29 았지만 4월23일 의흥, 4월24일 의성, 4월28일 안동 풍산 등에서 지속적으로 일본군의 북상을 견제했다. 62) 이 같은 움직임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일대의 육군 방어는 다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국경지역(동래성)-내지의 교통요지(울산, 대 구)-주요 고갯길(조령 등) 등으로 이어지는 3단계의 종심 방어태세를 구축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63) 특히 이중에서 국경지역으로 병력 증원과 교통요지로의 병력 집결은 사전에 정해진 방어계획에 따른 조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16세기 조선의 방위체제를 놓고 국 경지역에 병력을 집결해 한번 패전할 경우 연쇄적으로 패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체제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초전 대응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16세기 방위체제는 그 이전보다 거시적이고 통합적 관점의 전력운용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 초기 관군 대응의 긍정적 요소를 재평가해야한다고 주장한 연구 64) 는 매우 시사적이다. 2) 오위진법형 분군법의 특징과 그 도입 시기 일종의 전시 대비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제승방략은 분군법은 물론이고 작전계획까지 포괄 하는 성격의 문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승방 략을 분군법의 일종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흔히 발견된다. 후대 의 사료이긴 하지만 심지어 제승분군지법( 制 勝 分 軍 之 法 )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65) 이 는 그만큼 16세기 중후반에 지역별로 작성된 제승방략에 실린 분군법이 그 이전 시기의 분군법 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표현일 것이다. 16세기 분군법의 특징 중에 경장의 파견이나 경상도에서 해당 지역 병력 중 절반을 방어사 에 할당하는 조치 등은 이미 앞서 분석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16세기 분군법 에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적지 않다. 특히 특정 지역의 지방관이나 전임무관들을 5위-25부장이 나 1위-5부장 식으로 일종의 전투편성 개념에 따라 직제를 부여한 것은 16세기 분군법의 중요 62) 이호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 전투와 군사체제 군사 77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67~168쪽 63) 소산역, 작원, 황산잔도 등에서 벌어진 전투도 하나의 방어선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경상도와 그 외곽지역에서만 4단계 에 걸친 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64) 노영구, 2003,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 한국문화, 규장학한국학연구소 65) 증보문헌비고 권109 병고1 제치1
130 학예지 제19집 한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이 문제는 오위진법류의 조선 전기형 병법에서 구상하고 있는 가상적 편제와 실제 지방군의 부대 편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의 차원에서 분석할 사안이기 때문에 그 군사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오위진법에 따른 편제는 대장 밑에 5위( 衛 )를 두고, 위에는 각각 5부( 部 )가 있으며, 부마다 각각 4통( 統 을) 보유하도록 했다. 66) 따라서 기본적으로 5위-25부-100통 내지 1위-5부-20통을 기본으로 하는 전투편성을 기초로 한 공격과 방어작전을 수행한다. 물론 위, 부, 통에는 정수가 없다 67) 고 했으므로 5위 대신 3위제 등 삼각편제에 입각한 전투편성을 하는 경우도 고려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관체제에 따른 주진-거진-제진이 병법상의 개념 그대로 1-5-25개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제진을 제외하고 주진-거진만 본다고 하더라도 모든 지역이 주진1-거진 5개 혹은 주진1개-거진3개로 구성된 것도 아니었다. 경국대전 육군만을 기준으로 볼 때 경기도 진관은 4개, 충청도 4개, 황해도 2개, 강원도 3개 등이다. 경상좌병사 휘하 3개, 경상우병사 휘하는 3개지만 영안도 북병사 휘하는 진관이 12개에 달한다. 68) 다시 말해 경국대전에 규정된 주진-거진-제진에 오위진법에 기반을 둔 병법을 제대로 적용하 려면 전투상황에 맞게 부대의 지휘계통을 재편성할 수밖에 없다. 이일이 지은 북도 제승방략에 나오는 분군법은 결국 함경도 북병사 예하의 잡다한 거진과 제진을 오위 진법에 따라 편제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각 고을의 수령이나 전임무관들을 5위-25부장 체제에 맞춰 전투 편성상의 직책에 임명하고 있다. 여기에 추가해 임무에 따른 지휘관인 선봉장, 유군장, 한후장, 계원장, 참퇴장, 돌격장, 치중장 등을 별도로 지정한 것이 16세기 분군법의 특징이다. 1588년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 때의 전투편성 기록도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壯 襄 公 征 討 時 錢 部 胡 圖 ) 69) 라는 제목의 그림에 남아있다. 이를 보면 그 기본 뼈대는 대장, 좌위, 우위 등 3위 체제에 좌우위에 각 5부장을 두어 3위-10부장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대장 밑에는 조전장 8명을 편성하고, 좌우위에 밑에 각각 각종 도장 5명, 좌우 화열장과 골격장, 선봉장, 유군장, 한후장, 참퇴장, 계원장 2명을 두고 있다. 이 같은 전투편성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출전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순신은 66) 진법 분수 67) 진법 위와 같음 68)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1968, 한국군제사-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63~167쪽 69)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유물번호 081005 / 000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31 임진왜란 개전 초반 1위-5부 체제에 맞춘 전투편성을 했고, 여기에 유군장, 좌/우 척후장, 한후 장, 참퇴장, 돌격장 등 임무별 지휘관을 추가로 편성했다. 70) 이 같은 전투편성에 나타나는 직책 중 선봉장은 말 그대로 선봉에서 과감하게 공격하는 임무 를 맡은 지휘관이고, 돌격장도 필요시 과감한 공격임무를 부여받은 지휘관으로 보인다. 유군장 은 진형에 상대적으로 덜 구애받으면서 변칙적인 작전을 구사하는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을 의미할 것이다. 척후장은 말 그대로 정찰부대를 지휘하는 것이고, 한후장은 후방에 잔류하는 예비대의 지휘 관으로 전장에서 이탈하는 병사들을 통제하는 것도 한후장의 임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퇴장 은 일종의 독전 역할을 맡은 지휘관이며, 계원장은 최초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으나 주력부대의 뒤를 따르면서 긴급지원이 필요할 경우 즉시 투입이 가능한 일종의 기동예비대를 지휘하는 장 수였다. 결국 16세기 조선군 분군법의 본질 중 하나는 오위진법에 따른 전투편성 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분군법은 임진왜란 중 중국 척계광류의 병법을 도입하면서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618년 광해군은 명나라를 지원할 부대를 파견하는 논의하면서 "굳세고 생각 이 깊은 당상 무신을 엄선해 선봉으로 정하고, 한후장( 捍 後 將 )과 척후장( 斥 候 將 ) 역시 당상 당하 무신을 엄선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지시하고 있다. 71) 여기서 나오는 한후장 등의 직제는 16세기 조선군 분군법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1619년 3월 심하전 투의 실전에서 한후장이나 척후장 같은 직책은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명나라 척계광류의 편제 를 이미 적용한 마당에 그 이전 조선 고유의 전투편성을 섞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 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전투편성을 적용하지 않았다고해도 임진왜란 당시 풍부 한 실무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왕 광해군이 한후장과 척후장을 직접 언급할 정도로 이 같은 전 투편성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같은 16세기 후반대의 전투편성이 언제 최초로 도입되었는지, 이 같은 전투편성이 김수문 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성종대인 1491년의 전투편성을 보면 9도장 -15대장을 핵심으로 하는 기본 편제에다 좌우 아장과 중군, 오위의 중위장, 전/중/후원장이 추 가로 편성되는 아주 독특한 전투편성이 확인된다. 72) 성종 재위시절이면 이미 수양대군이 진 70) 임진장초 부원경상도장( 赴 援 慶 尙 道 狀 ) 이( 二 ) 71) 광해군일기 1618년 6월28일자 72) 성종실록 성종 22년 10월17일(경신)
132 학예지 제19집 법 을 편찬한 이후임에도 진법, 다시 말해 오위진법과는 기본 뼈대가 다른 전투편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오위진법에 기반을 둔 3각 편제내지 5각 편제에 기반을 둔 정연 한 전투편성은 15세기말까지도 일반화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오위진법에 적합한 새로운 전투편성이 도입된 시기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사료가 바 로 육군박물관에 군사작전계획서 라는 유물 명칭으로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다. 73) 이 고문서를 보면 상도방어사 소속이라는 문구를 시작으로 좌위장 청양현감, 전위장 예산현감, 중위장 온양 군수, 우위장 천안군수, 후위장 목천현감과 그 병력 규모가 적혀 있다. 하지만 위장 아래로는 부장대신 1도장 태안군수, 2도장 당진현감, 3도장 진천현감, 4도장 문의현령, 5도장 연기현감, 6~10도장 군관으로 적혀 있다. 이는 성종대의 전투편성과 북도 제승방략식 전투편성의 중간단 계에 해당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고문서의 다른 대목을 보면 좌부장 임천군 수, 전부장 한산군수, 우부장 부여현감 등 부장이라는 직제와 후위장 유신현감 등 위장이라는 직제가 식별된다. 또한 한후장, 유군장, 좌우 참퇴장 등의 직제도 나와서 북도 제승방략이나 이 순신 휘하 수군의 전투편성과 유사한 편제를 보여준다. 이 고문서의 정확한 작성연대는 분명하 지 않으나 판옥선이란 용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중엽에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74) 이 고문서에 도장( 都 將 )이 다수 등장하는 성종대 분군법의 영향이 남아있는 과도기적 전투편성 과 오위진법에 부합하는 위장-부장식의 새로운 분군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분군법으로 변화가 발생한 시점도 절제방략에 수록된 사목들이 제정되는 와중인 16세기 중엽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3) 16세기 조선군 무기 운용의 특징 실물 유물이나 각종 전투기록을 볼 때 임진왜란 때를 포함해 16세기의 조선군은 창, 칼, 활 을 비롯한 재래식 냉병기와 화약무기를 모두 보유했다. 또한 문종 때 작성한 신진법 이래 오위 진법 계열의 병법서를 보면 보병 병종으로 팽배수(방패+칼), 총통수(화약무기), 창수(창), 검수 73) 육군박물관 유물번호 087111 / 000. 앞에서 이 문서를 호서제승방략이라고 부를 것으로 제안했었다. 74) 이 문서는 모두 1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충청도 지역에서 작성한 군사 관련 고문서로 보이나 특정연도에 동시에 제작한 단일 문서가 아니라 작성연도를 달리하는 최소한 4개 이상으로 나눌 수 있는 복수의 고문서가 섞여 있는 상태 로 보인다. 문서 내용 중 무오년은 1558년, 기미년은 1559년, 갑술년은 12월 윤달이 있는 157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연도 표시가 된 부분이 그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인지, 뒷부분과 연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별개의 문서가 연접되어 있는 상태여서 개별 문서 내용이 정확하게 언제 작성되었는지 명확하게 확언하기는 어렵다.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33 (장검), 궁수(활) 등 5개의 병종을 제시하고, 기병 병종은 기사(활), 기창(창) 등 총 7개의 병종 을 제시하고 있다. 75) 하지만 임진왜란 직후에 작성된 무예제보를 보면 말 위에서 창을 쓰는 것은 비록 무과시험 장에선 쓰이지만 그 방도가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아 창과 칼이 버려진 무기가 된지 이미 오래 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76) 임진왜란 무렵에 이미 기창, 다시 말해 창을 주력무기로 하는 기병이 몰락하고 활을 주력무기로 한 궁기병 위주로 재편된 상황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77) 이처럼 재래식 병기 중에 활이 주력무기처럼 운용되는 경향은 기병에 한정되지 않고 보 병 병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식년시와 도시, 내금위 별시위 갑사 등 특수병종과 여수 대정 등 초 급 지휘관의 채용 시험에 비록 기창 과목이 있기는 했으나 정기적인 훈련 평가는 기본적으로 활쏘기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양적으로 병력의 핵심인 정병의 경우에도 훈련 성적 평가 는 오직 활쏘기를 기준으로 실시됐다. 78) 물론 수군은 화약무기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았으나, 화약무기의 비중이 더욱 강해 지는 조선 후기에도 판옥선에 승선하는 전투요원 중 30% 이상이 활을 쏘는 사부, 혹은 사관이 었을 정도로 활을 중시했다. 79)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육군의 경우에도 대형화약무기는 수성전 위주로 운용되었으며, 야전에서 적극적으로 운용한 기록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80) 결국 임진왜 란 당시 야전과 수성전, 해전을 포괄하는 여러 전투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대표적으로 사용한 재래식 무기는 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실전에서 재래식 병기 중에 활을 중시하는 경향이 절제방략 에 수록된 16세기 조선 의 군사 관련 규정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1518년 혹은 156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인년 병조사목 에는 각 관( 官 )의 군기( 軍 器 )는 정치하지 않으면 적진에 임해서 사용하기 힘드니 활, 장 편전, 통아( 筒 兒 ) 등의 물건을 민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급속히 수리 보수하여 많은 수를 만든다 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155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오년 김수문 절제에는 활을 잘 쏘는 자로 뽑힌 교 75) 문종실록 문종1년 6월19일자 76) 한교, 무예제보. 77) 김병륜, 201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학예지 17호.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75쪽 78) 김병륜, 201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학예지 17호.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76쪽 79) 김병륜, 2010, 조선시대 수군 진형과 함재 무기 운용, 군사 74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73쪽 80) 김병륜, 2006, 조선시대 화약무기 운용술, 학예지 13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93쪽
134 학예지 제19집 생( 校 生 )과 충의위( 忠 義 衛 )는 잠시 분방( 分 防 )하게 하지 말고, 사변이 있을 때에 어떤 부대( 某 運 ) 에 들어가 적진으로 달려갈 것인지 미리 통지하여 정제하고 명령을 기다린다 고 규정한다. 비변사에서 1563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목에는 활을 잘 쏘고 장건( 壯 健 )한 사람은 남김없이 뽑아내어 죽거나 늙고 병든 자로 빠진 인원을 보충하되, 한 명이라도 보충한 것이 맞지 않거나, 한 명이라도 은닉하고 뽑지 않았거나, 혹 늙고 병든 것으로 속여 칭탁하고 탈루 ( 脫 漏 )된 자가 있으면 색리( 色 吏 )는 제주( 濟 州 )로 전가사변( 全 家 徙 邊 )하고, 수령은 엄히 다스린 다 는 규정도 두고 있다. 또한 활을 잘 쏘고 장건한 사람들 중 선발된 사람들은 평상시에 약속 ( 約 束 )을 정했다가 사변을 들으면 적진으로 달려간다 고 명시해 재래식 무기 중에서는 활 위주 의 전력 운용을 전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5. 맺음말 16세기 접어들어 경오왜변과 을묘왜변 등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나 병조 명의 의 사목을 작성해 전시에 대한 대비태세를 강화하려 했다. 특히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위기상황 을 극복하기 위해 평시 해당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병사와 수사 이외에 방어사와 조방장 등 비상설 지휘관을 추가로 파견했다. 이처럼 비상설 지휘관이 빈번히 파견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순찰사 김수문은 1558년 유사시 각 고을의 병력을 4분할하는 4운체제를 고안해 일정지역(아마도 하삼도)에 적용하도록 했다. 비변사는 1563년 유사시 하삼도에서 전시내지 이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평시 해 당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병사와 수사 이외에 방어사와 조방장 등 비상설 지휘관을 파견하도록 제도화하고, 병력의 절반을 방어사 휘하에 두도록 사목에 명문화했다. 16세기 중엽부터 각 지역별로 전시에 대비한 작전계획 내지 전략 전술 원칙, 전투편성 규정 을 담은 제승방략을 작성했다. 이처럼 제승방략이란 용어는 원래 16세기 중엽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방위체제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분군법과 작전계획을 포괄하는 지역별 전시대비 문서를 지칭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각 지역별 제승방략에는 매복처, 요격처 구체적인 지형에 따른 구체적인 방어계획을 담고 있어서 일견 전쟁대비태세의 수준을 높였지만 한편으론 해당 지휘관의 재량권을 제약했다.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35 16세기 중엽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제승방략에는 경장의 파견 외에도 오위진법형 분군법이 적용된 것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조선 전기에 확립된 신진법-오위진법 계열의 병법은 경 국대전에 규정된 진관의 주진-거진-제진 체제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문에 16세기 조선군은 관할 구역 내의 지방관과 전임무관들을 평시 직책에 상관없이 전시에는 위장-부장 등 오위진법에 부합하는 직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전투편성을 했고 이 같은 전투편성의 내용은 지역별로 작성하는 제승방략에 명문화했다. 이 같은 전투편성 때는 위장-부 장 외에도 참퇴장, 계원장, 돌격장 등 임무별 지휘관도 별도로 지정했다. 조선 전기 오위진법에서는 기병을 기창과 기사 2개 병종으로 구분하고 보병도 팽배수,장검 수, 창수, 총통수, 궁수 등 5개의 병종으로 구분했지만, 16세기 중엽 이후 실제 전력 운용에서 는 재래식무기 중 활을 대표무기로 가장 중시했다. 이 같은 재래식 무기 중에서는 활을 가장 중시하는 전력 운용방침은 1518년 혹은 1578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인년 병조사목, 155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오년 김수문 절제, 1563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 변사 사목을 통해 명문화된다.
136 학예지 제19집 국문초록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김 병 륜 임진왜란은 연구가 많이 된 듯 보이지만 전체적인 전쟁 국면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여 전히 공백지대가 많다. 개전 초기 조선군의 방위체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과거 연구에서 남도제승방략의 편린 이라고 지적된 절제방략 의 내용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절제방략에 따르면 순변사 김수문은 1558년 경장 혹은 비상설 지휘관이 빈번히 파견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각 고을의 병력을 4분할하는 4운체제를 고안해 일정지역(아마도 하삼도) 에 적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절제방략에 수록된 문서에 따르면 경장 혹은 비상설 지휘관의 파 견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김수문이 아니라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1563년 유사시 하삼도 에서 전시내지 이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평시 해당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병사와 수사 이외에 방어사와 조방장 등 비상설 지휘관을 파견하도록 제도화하고, 병력의 절반을 방어사 휘하에 두도록 사목에 명문화했다. 16세기 중엽부터 각 지역별로 전시에 대비한 작전계획 내지 전략 전술 원칙, 전투편성 규정 을 담은 제승방략을 작성했다. 이처럼 제승방략이란 용어는 원래 16세기 중엽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방위체제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분군법과 작전계획을 포괄하는 지역별 전시대비 문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각 지역별 제승방략에는 매복처, 요격처 구체적인 지형에 따른 구체적인 방어계획을 담고 있어서 일견 전쟁대비태세의 수준을 높였지만 한편으 론 해당 지휘관의 재량권을 제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각 지역별로 보편적으로 작성되기 시작 한 제승방략은 경장의 파견 외에도 오위진법형 분군법이 적용된 점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조선 전기에 확립된 신진법-오위진법 계열의 병법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진관의 주진-거진-제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37 진 체제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16세기 조선군은 관할 구역 내의 지방관과 전임무관들을 평시 직책에 상관없이 전시에는 위장-부장 등 오위진법에 부합하는 직 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전투편성을 했고 이 같은 전투편성의 내용은 지역별로 작성하 는 제승방략에 명문화했다. 이 같은 전투편성 때는 위장-부장 외에도 참퇴장, 계원장, 돌격장 등 임무별 지휘관도 별도로 지정했다. 절제방략을 보면 16세기 중반을 거치는 시기 조선군이 실제 전력 운용에서는 재래식 무기 중에서는 활을 대표무기로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활 위주의 전력 운용방침은 1518년 혹은 1568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인년 병조사목, 155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 되는 무오년 김수문 절제, 1563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변사 사목을 통해 명문화된다. * 주제어: 제승방략, 진관, 절제방략, 방위체제, 오위진법, 분군법, 활
138 학예지 제19집 Abstract Kim, Byong-lyuen During the early 16th century when there were increasing incidents of provocation by the Japanese such as the Japanese Invasion of Sampo( 三 浦 倭 亂 ) and the Eulmyo Japanese Invasion( 乙 卯 倭 變 ), Joseon Court dispatched non-standing(temporary) commanders, including Bangeosa( 防 禦 使 :Defense Commander), to the troubled area additionally as a measure to reinforce the regular defense forces in each region under the command of Byeongsa( 兵 使 :Provincial Army Commander) and Susa ( 水 使 :Provincial Navy Commander) in its effort to handle the crisis situation. In 1558, in his attempt to prepare for the situation that frequently required dispatching of a non-standing commander, Kim Sumun( 金 秀 文 ), the newly appointed Sunbyunsa ( 巡 邊 使 :Border Patrol Commander) has devised a system that allows deployment of 4 Units( 四 運 ) in each county separately as required and employed the new system to certain areas such as Gyongsang Province. In 1563, Bibyonsa( 備 邊 司 :Border Defense Council) introduced a new commander called Bangeosa, institutionalizing the practice of dispatching a non-standing Defense Commander to Gyongsang, Jeolla or Chungcheong Province when an emergency occurs which corresponds to a war or its equivalent, in addition to Byeongsa and Susa, and revised the Administrative Rule( 事 目 ) requiring half of the troops to be placed under the authority of Defense Commander. To be sure, the new defense system of the 16th century that relied heavily on non-standing Defense Commander was fraught with many problems in reality. However, to state that The defense system of Joseon Armed Forces during the period of Imjin War ( 壬 辰 倭 亂 ) placed a heavy emphasis only on border areas as is alleged in the past studies does not agree with the historical fact. Judging from the example of the Imjin War on the basis of the defense operation actually implemented in Gyongsang Province, the defense system at the time was based on at least 3 stages of Depth Defense, consisting in the order
절제방략과 제승방략 139 of border defense (the 1st stage), in-land transportation center defense (the 2nd stage) and uphill defense (the 3rd stage). The military organization that was based on Owijinbeop( 五 衛 陣 法 ) of the early Joseon period was not fully consistent with what was stipulated in Chingwan ( 鎭 管 :Garrison Command) system of Gyeonggukdaejeon( 經 國 大 典 ). For this reason, Joseon Armed forces maintained a kind of combat organization by awarding war-time duties to responsible Provincial Officialsand Military Officers of the country in accordance with Owijinbeop. The specifics of this type of combat organization was described explicitly in Jeseungbangnyak ( 制 勝 方 略 ) that was prepared by each region. During Joseon period, Jeseungbangnyak that contained operation plans and combat organization in preparation for warfare was compiled by region. However, as it also contained specific defense plans and tactical principles which took local topography into consideration, this Jeseungbangnyak tended to restrain discretionary power of local commanders, especially as time passed. From the early and the mid-16th century, the representative weapon of Joseon in terms of actual deployment in warfare was bow. This kind of bow-centered military strategy is well documented in Samok or Administrative Rule that is presumed to have been prepared in 1518 or 1578, 1558 and 1563. * keyword: Jeseungbangnyak, Chingwan, Owijinbeop, bow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1 육군박물관 소장유물 소개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강 신 엽* 충렬사지 는 임진왜란 초기전투에서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 등 동래 부산 다대포에서 활약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충렬사 관련 기록을 모은 책이다. 제1권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관련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제2권에는 부산진첨사 정발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제3권에는 다대포첨사 윤흥신, 제4권에는 양산군수 조영규, 제5권에는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과 관련 기록을 편집하였다. 제6권에는 임진동래유사 등이, 제7권에는 화기 등이, 제8권에는 순절도 서문 등이 있다. 제9권에는 송공단, 제10권에는 정공단, 제11권에는 윤공단 관련 기록이 있다. 육군박물관에는 현재 부산진순절도(보물 제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제392호)를 소장하고 있다. 이 순절도 2점의 이해를 위해서는 상기한 충렬사지 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책에서 순 절도와 관련된 글 몇 편 선별해서 소개하고자 하는 바이다. 물론 충렬사, 순절도 등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1) 기존의 연구 성과를 보더라도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역주를 통하여 원문의 내용을 감상하는 것 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 육군박물관 부관장 1) 충렬사, 순절도 관련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육군박물관, 2011, 육군박물관 도록 부산박물관, 2012, 임진왜란 (임진왜란 7주갑 특별기획전 도록) 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62. 동래부지 충렬사지 항도부산 1 허선도, 1963, 순절도와 민족정기 (상 하), 국방 133 134 이강칠, 1979, 송상현 부사와 동래부순절도, 월간문화재 허선도, 1998, 임란벽두 동래(부산)에서의 여러 순절과 그 숭양사업에 대하여(상), 한국학논총 10, 국민대학교 한국 학연구소 서영식 외, 1999, 임진왜란 초기 전투 연구 현장답사보고서, 학예지 6, 육군박물관 정길자, 2000, 송상현 공 종가소장 동래부순절도 연구, 대학발전연구 논문집 제20집 권소영, 2003, 육군박물관 소장 동래부순절도 연구, 학예지 10(사서화류 특집) 이현주, 2010, 기억이미지로서 동래 지역 임진전란도 연구, 한국민족문화 37
142 학예지 제19집 충렬사지 권 1 송동래전( 宋 東 萊 傳 ) 송동래는 이름이 상현( 象 賢 ), 자가 덕구( 德 求 ), 본관이 여산( 礪 山 )이다. 어릴 적부터 뛰어나 남다른 기상을 지녀서 유생 시절에 이미 이름이 났으며, 20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은 처음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부터 장수로서의 재질이 있다는 말을 들어 오랜 기간을 변방 진영에서 재직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역임한 뒤 마침내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 당 시 왜적 평수길( 平 秀 吉 )이 현소( 玄 蘇 ) 평의지( 平 義 智 ) 등을 보내 토산품을 바치고 우리나라의 허실을 염탐하면서 아울러 중국에 조공하게 해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공이 부임한 이듬해에 적은 국력을 다하여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때 동래는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맨 먼저 그 공격을 받았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공은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을 미리 알고 급히 조복( 朝 服 )을 가져다가 갑옷 위에 껴입고 호상( 胡 床 )에 앉아 있었다. 공은 적이 가까이 접근해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평조익( 平 調 益 )이라고 하는 자는 일찍이 조신( 調 信 )을 따라 조선을 왕래하면서 공을 만났다. 이때 공이 그를 지성껏 대우해 주었기 때문에, 조익은 공에게 감동하였다. 평소에 그는 공에게 그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공에게 성 옆의 후미진 곳으로 피신할 것을 눈짓하 였으나 그에 응하지 않았다. 조익은 내심 공이 알아채지 못한 줄 알고는 옷자락을 부여잡고 그 위치를 가리켜 주려고까지 하였다. 공은 벌써 호상에서 내려가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 다. 절을 마치고는 그의 아버지 복흥( 復 興 )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외로운 성은 포위되었는데도 여러 진( 鎭 )에서는 그 위태로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군신의 의리는 중 대하지만 부자의 은혜는 이에 비하면 가볍습니다. 그는 마침내 살해되었다. 공은 죽기 전에 그 부하에게 명령하였다. 내 허리 아래에 팥알만한 사마귀가 있다. 내가 죽으면 이것을 증거로 삼아 내 시신을 거두어 달라.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3 조금 있다가 평의지와 현소 등이 도착하여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한탄한 나머지 공을 해친 자를 색출하여 베어 죽였으며 공의 시신과 살해된 공의 첩을 찾아 동문 밖에 장사지 내고 푯말을 세워 그 자리를 표시하였다. 갑오년 겨울에 경상 절도사 김응서( 金 應 瑞 ) 2) 가 적장 청정( 淸 正 )을 그의 진중에서 만나 그 내막을 알고 글을 갖추어 조정에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함과 동시에 제문을 내리고 그의 집에 월급을 지급하며 공의 아들 한 사람에게 벼슬을 내렸다. 을미년에는 그 가족이 상소하여 고향의 선영으로 이장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을 계기로 상이 김응서에게 분부를 내려 가족으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관을 싣고 나와서는 청주( 淸 州 ) 가포곡( 加 布 谷 )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공의 시신이 적진에 있을 때 매동( 邁 仝 )이라고 하는 동래부 사람이 공의 제사날과 명절 때가 되면 반드시 제물을 잘 장만하여 제사하되 해마다 상례로 하였다. 그는 나중에 공의 아우 상인 ( 象 仁 )의 집에 가서는 공이 전사한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말하다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 다. 상인이 그에게 고기를 대접하자 먹지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공의 아우를 만나 보니 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찌 차마 고기를 먹겠습니까? 공을 반장할 때 공의 충의에 감복하여 통곡하면서 백리 밖까지 따라와 전송한 유민( 遺 民 )이 거의 70여 인이나 되었으며, 평의지는 길에서 공의 관을 만나자 말에서 내려 길을 피해 전송하 였다. 이 당시 상국( 相 國 ) 이항복( 李 恒 福 ) 3) 이 접반사로 의령( 宜 寧 )에 머물러 있다가 찾아가 염습과 2) 김응서( 金 應 瑞 ): 1564(명종 19)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金 海 ). 자는 성보( 聖 甫 ). 시호는 양의( 襄 毅 ).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 21) 감찰( 監 察 )이 되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 다. 그해 8월 조방장( 助 防 將 )으로 평양 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 방어사에 승진되었다. 그는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 李 如 松 )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 權 慄 )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다. 임란이 끝난 후에는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 建 州 衛 )의 후금 정벌을 위해 명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그는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서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 ( 姜 弘 立 )과 함께 출전하여 심하( 深 河 )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살이호 ( 薩 爾 滸 )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 金 應 河 ) 운산군수 이계종( 李 繼 宗 ) 등이 전사하자, 그는 강홍립과 함께 후금에게 부득이하게 출병했음을 알리고 잔여병과 함께 투항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나 처형되었다. 그 후 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 졌다. 3) 이항복( 李 恒 福 ): 1556(명종 11)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慶 州 ). 자는 자상( 子 常 ), 호는 필운( 弼 雲 ) 백사( 白 沙 ) 동강( 東 岡 ). 시호는 문충( 文 忠 ). 오성부원군( 鰲 城 府 院 君 )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 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 李 德 馨 )과의 기지와 작희( 作 戱 )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
144 학예지 제19집 관을 새로이 바꾸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송군의 시신이 적진 속에서 장차 고향땅으로 반장하기 위해 임시로 의령의 한 마을에 안치하였습니 다. 나는 공의 벗으로서 남쪽 지방에 사신을 접대하러 왔다가 이 고을을 지나게 되어 삼가 제수를 마련해서 천지 사방에 두루 소리쳐서 그 혼을 불러 제사를 드립니다. 아! 포위된 외로운 성에서 담소하며 지휘한 것은 어찌 공의 정의로움이 아니겠으며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번득여도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어찌 공의 절개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대체로 평소 가슴속에 배양해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남들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동래산은 푸르고 남해는 아스라하여 길이 남아 변치 않으리니, 영원히 그 이 름을 드리울 것입니다. 남문에서 밤마다 붉은 기운이 빛나서 북두성을 향해 치솟는 것은 공의 정기가 아니겠습니까? 어찌 아니겠습니까?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 계신 대궐문을 두드려 구천에 호소하고서 우레를 채찍질하고 귀신을 몰아 세 변방의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큰바람을 일으키고 폭우를 내려 사방의 피비린내를 말끔히 씻어버린 다음에 사뿐히 내려와 팔방을 두루 돌면서 녹아서는 냇물이 되고 솟아서는 산악이 되어 남쪽 변방을 지키던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모두 공의 정령이 뭉쳐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니, 죽어서도 베푸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의리상 제사드리지만 문장으로는 전사한 뜻을 높이지 못하고 단지 나그네로 만나고 보니 부끄 러워 하염없이 웁니다. 인간세상에서는 오늘 밤뿐이지만, 지하에서는 영원할 것입니다. 한 잔 술로 이별하니 편히 쉬소서. 을사년(선조38, 1605)에 윤훤( 尹 暄 ) 4) 이 동래부사가 되어 사당을 세워 공을 제사지냈다. 공의 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 權 慄 )의 사위였다. 1575년(선조 8)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 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 관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 舟 師 大 將 )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되었다. 그는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 西 宮 : 경운궁. 덕수궁을 말함)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저술로는 백사집( 白 沙 集 ), 사례훈몽 四 禮 訓 蒙 등이 있다. 4) 윤훤( 尹 暄 ): 1573(선조 6)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海 平 ). 자는 차야( 次 野 ). 호는 백사( 白 沙 ). 그는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97년(선조 30) 정시 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관이 되었다. 그는 1599 년(선조 32) 호조좌랑을 거쳐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그는 경상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는 주청부사( 奏 請 副 使 )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 副 體 察 使 )를 겸직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5 첩 두 사람은 다 절개를 지켜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공을 수행하는 신여로( 申 汝 櫓 )라고 하는 사람은 공과 함께 죽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다 전기를 짓는다. 금섬전( 金 蟾 傳 ) 금섬은 함흥( 咸 興 ) 기생이다. 그녀는 남다른 재주와 용모를 지녔으며 13세부터 공을 따랐다. 일찍이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매우 애통해하였기 때문에 공이 항상 그 절조를 중히 여겼다. 그 녀는 공을 따라 동래로 왔다. 사태가 다급해져 공이 조복( 朝 服 )을 가져가자, 그녀는 공이 장차 순절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여종 금춘( 今 春 )과 관아의 담장을 넘어 공이 있는 곳에 가 보 니, 적이 이미 몰려들어 공을 해친 뒤였다. 그녀도 적들에게 3일 동안 포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쉴새없이 꾸짖다가 끝내 살해되었다. 적들은 그 절개를 기특하게 여겨 관을 마련해 공과 함께 묻어 줬다.(통천 한언( 韓 彦 )의 서녀였다고 한다. 공을 따라 묘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양녀전( 李 良 女 傳 ) 이양녀 역시 공의 첩으로, 공을 따라서 동래로 왔다. 공은 적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하 여 그녀를 내보냈다.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다가 길을 떠난 지 하루 만에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는 소식을 듣고는 애통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차라리 지아비 곁에서 죽겠다. 그녀는 급히 동래로 돌아오다가 여종 만개( 萬 介 )ㆍ금춘( 今 春 )과 함께 사로잡혀 바다를 건너 갔다. 수길( 秀 吉 )이 그녀를 범하려 하였지만 이씨는 죽기로 결심하고 거부하였다. 수길은 그녀 를 의롭게여겨 풀어주고는 수절하고 있던 전 관백의 딸 원씨( 源 氏 )와 별원( 別 院 )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녀는 끝까지 절개를 보전하다가 귀국하였다. 이씨는 사로잡힐 때 공의 비단 갓끈을 차고 갔는데 항상 몸에 지녀 버리지 않았다. 몸종 금춘이 먼저 돌아가게 되자, 이씨는 갓끈의 구슬 두 개를 빼어 보내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공의 부인이 만약 살아 계신다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이것으로 증거를 삼도록 하라.
146 학예지 제19집 나중에 이씨가 돌아와 부인과 그것을 서로 맞춰 보고 함께 통곡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슬퍼하였다. 공을 위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신여로전( 申 汝 櫓 傳 ) 신여로는 서얼이다. 그는 공을 따라 동래에 왔다. 공은 여로에게는 모친이 살아 계시므로 적에게 혹시 피해를 당할까 염려하여 돌려보냈다. 여로는 돌아가는 도중에 적이 부산을 함락하 였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공에게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이 난리통에 어떻게 죽음을 아까워하겠는가? 마침내 그는 공에게 돌아와 함께 죽었다. 다음과 같이 찬( 贊 )한다. 나는 경인년(1590, 선조 23) 신묘년(1591, 선조 24) 간에 사관으로서 직접 임금을 모시고 있으면서 조정이 왜적과 우호 관계를 논한 일의 전말을 매우 자세히 들었다. 그것은 대체로 현소( 玄 蘇 )가 왔을 때 조정에서는 그 속셈을 깊이 알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사신이 귀국해서는 부사( 副 使 ) 김성일( 金 誠 一 ) 5) 이 말하였다. 적은 반드시 군대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5) 김성일( 金 誠 一 ): 1538(중종 33)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의성( 義 城 ). 자는 사순( 士 純 ), 호는 학 봉( 鶴 峰 ). 시호는 문충( 文 忠 ). 이황( 李 滉 )의 문인. 1568년(선조 1) 그는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으며, 이어서 검열 대교 등을 거쳤다. 이후 그는 형조와 예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명나라에 사은사 서장관 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0년(선조 23) 그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 이라는 정사 황윤길( 黃 允 吉 )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 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그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 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 柳 成 龍 ) 등의 변호로 직산( 稷 山 )에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그는 의병장 곽재우( 郭 再 祐 )를 도와 의병 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 산음 단성 삼가 거창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 召 募 官 : 조선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학봉집, 해사록( 海 傞 錄 ), 상례고증( 喪 禮 考 證 ) 등이 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7 묘당에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으로 믿었다. 혹시라도 적이 교활하여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외국 오랑캐를 대하는 것은 마땅히 정성과 믿음으로 해야 하는데 어찌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리하여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선조대왕만은 슬기가 뛰어나 그 속사정을 환히 알고 의리를 들어 적의 요구를 물리치고 중국에 보고하였는데, 임진년에 이르러 왜구의 세력을 막아 낼 도리가 없었다. 만일 선조대왕의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중국의 대군 을 출정시키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무엇을 힘입어 보존되었겠는가? 국사를 그르친 자의 살점 을 씹어먹는다고 분이 풀리겠는가? 아! 세상이 태평할 당시에 나라의 대권을 한 손에 쥐고서 겉으로만 공손하게 행동하고 사사 로운 은혜와 원한을 갚는 것으로 유쾌하게 생각한 자들은, 난리를 당하여 산 속으로 숨어 제 몸과 처자를 보전하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장수란 자들은 적을 무서워해서 우물쭈물하다가 도망갔는데도, 조정에서는 그들을 벌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발탁하여 그 명망을 온 나라에 선양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런데 공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기에 일개 수령으로 서 전사하기를 그렇게 편하게 여겼다는 말인가? 비록 옛날의 충신인 장순( 張 巡 ) 허원( 許 遠 ) 6) 과 같은 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공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나 공을 따라 죽은 자는 공을 위해 죽었으니, 이는 곧 공의 풍모에 격동된 바가 있어서였던 것이다. 저 개돼 지 같은 왜적도 존경할 줄 알았으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현헌( 玄 軒 ) 신흠( 申 欽 ) 7) 이 기록하다. 6) 장순( 張 巡 ) 허원( 許 遠 ): 안녹산( 安 祿 山 )과 사사명( 史 思 明 )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수양성( 睢 陽 城 )이 반란군에 포위되었 다. 성 안에 양식이 고갈되자 사람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고 하였으나 장순( 張 巡 )과 허원( 許 遠 )은 수양은 강회 ( 江 淮 )의 보장( 保 障 )이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깊이 쳐들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될 것이다. 하고 끝까지 수양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新 唐 書 卷 192 張 巡 列 傳 ) 7) 신흠( 申 欽 ):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平 山 ). 자는 경숙( 敬 叔 ), 호는 현헌( 玄 軒 ) 상 촌( 象 村 ) 현옹( 玄 翁 ) 방옹( 放 翁 ). 시호는 문정( 文 貞 ).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 承 仕 郎 )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선조 22)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 봉교 사헌부 감찰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그는 세자시강원 필선, 홍문관 교리 응교 전한, 육조의 참지 참의,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도승지, 병조와 예조의 판서 등 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그는 삼도순변사( 三 道 巡 邊 使 ) 신립( 申 砬 )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고, 도체찰사( 都 體 察 使 ) 정철( 鄭 澈 )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 持 平 )에 승진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그는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 폭 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 知 製 敎 ) 승문원 교감을 겸대하였다. 이후 그는 이조정랑, 사복시 첨 정, 집의, 군기시 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 尹 根 壽 )의 서장관( 書 狀
148 학예지 제19집 충렬사지 권 1 동래부사증이조판서천곡송공행장 ( 東 萊 府 使 贈 吏 曹 判 書 泉 谷 宋 公 行 狀 ) 본관은 전라도 여산군( 礪 山 郡 )이다. 증조부 승은( 承 殷 )은 선략장군( 宣 略 將 軍 ) 충좌위( 忠 佐 衛 ) 부사맹( 副 司 猛 )으로 통훈대부( 通 訓 大 夫 ) 통례원( 通 禮 院 ) 좌통례( 左 通 禮 )에 추증되었다. 조부 전( 琠 )은 진용교위( 進 勇 校 尉 )로 통정 대부( 通 政 大 夫 ) 승정원 좌승지( 左 承 旨 )에 추증되었다. 부친 복흥( 復 興 )은 통훈대부( 通 訓 大 夫 ) 로 송화 현감( 松 禾 縣 監 )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嘉 善 大 夫 )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 김씨는 정부인( 貞 夫 人 )에 추증되었다. 공( 公 )은 이름이 상현( 象 賢 )이고 자가 덕구( 德 求 )이며, 천곡( 泉 谷 )이라 자호하였다. 우리나라의 여러 송씨( 宋 氏 )들 중에 오직 여산 송씨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문에 세력도 컸 다. 12대조인 송례( 松 禮 )는 벼슬이 시중( 侍 中 )에까지 이르러 고려 시대의 명신( 名 臣 )이었으나, 선략( 宣 略, 증조부) 이후로는 점점 못하다가 송화공( 松 禾 公 )에 이르러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 이 현령에 이르렀다. 여러 대의 묘소가 모두 고부군( 古 阜 郡 ) 천곡산( 泉 谷 山 )에 있다. 공은 가정( 嘉 靖, 명 세종의 연호) 신해년(1551, 명종6) 1월 8일에 태어났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준수하여 10여 세에 경사( 經 史 )를 모두 통달하였으며, 두세 번만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15세에 승보시( 陞 補 試 )에 장원하였는데, 시험관이 그의 글을 보고는 감탄하면서 다음 과 같이 말하였다. 이 수재( 秀 才 )는 훗날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때부터 함께 사귀는 사람이 모두 당시의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그가 지은 시문은 반드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20세에 진사( 進 士 )에 합격하고, 또 6년 뒤 만력( 萬 曆, 명 신종의 연호) 병자년(1576, 선조9)에 문과( 文 科 )에 합격하여 승문원( 承 文 院 ) 정자( 正 字 )에 보직되었으 며, 이후 그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官 )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이정구( 李 廷 龜 ) 장유( 張 維 ) 이식( 李 植 )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 正 宗 :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 月 象 谿 澤 : 月 沙 이정구, 象 村 신흠, 谿 谷 장유, 澤 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저술로는 상촌집, 야언 野 言 등이 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49 무인년: 저작 기묘년: 박사,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 경성판관 계미년: 사헌부 지평,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 갑신년, 을유년: 질정관( 質 正 官 )으로 중국에 두 번 다녀옴. 병술년: 지평, 은계도( 銀 溪 道 ) 찰방 북평사 정해년: 지평 무자년: 배천 군수( 白 川 郡 守 ), 충훈부 경력,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사재감 군자감 정( 正 )을 역 임하고, 신묘년: 집의( 執 義 )로 통정대부( 通 政 大 夫 )의 품계에 올라 동래부사( 東 萊 府 使 )가 됨. 대개 이때부터 조정의 논의가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나, 공은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 고, 또 이발( 李 潑 ) 8) 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내직( 內 職 )에 안정할 수 없어서 내직과 외직을 자주 옮겨 드나들었다. 이발이 패하여 죽은 뒤에도 그 무리들의 질투가 더욱 심하였으므로 공 역시 당세에 용납되지 못할 줄 스스로 알고 외직에 근무하면서 헐뜯음을 피하였다. 그때 마침 병술 년 이래로 나라에는 왜인들과 틈이 생겨서, 언제 전쟁이 터질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래는 왜적들이 오는 길목인 까닭에 조정에서는 공을 문무가 겸비한 인재라 하여 동래부사로 임명했지만, 이것은 선의에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공은 부임한 이후 백성을 다스리고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한결같이 진심과 신의로써 하였다. 따라서 아전과 백성들은 공을 부모처럼 받들었다. 그때 사계 선생( 沙 溪 先 生 ) 김장생( 金 長 生 ) 9) 이 8) 이발( 李 潑 ): 1544(중종 39) 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光 山 ). 자는 경함( 景 涵 ), 호는 동암( 東 巖 )ㆍ 북산( 北 山 ). 그는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하였다. 그는 이조정랑, 응교, 전한,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 鄭 澈 )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로 인하 여 이이( 李 珥 )ㆍ성혼( 成 渾 )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선조 22) 동인 정여립( 鄭 汝 立 )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 待 罪 )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 杖 殺 )되었다. 9) 사계 선생( 沙 溪 先 生 ) 김장생( 金 長 生 ): 1548(명종 3) 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은 광산( 光 山 ). 자는 희원( 希 元 ), 호는 사계( 沙 溪 ). 시호는 문원( 文 元 ). 그는 1578년(선조 11) 학행( 學 行 )으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 宗 系 辨 誣 )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이후 그는 동몽교관, 인의, 정산현감, 안성군수,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그의 문인으로는 송시열( 宋 時 烈 ) 송준길( 宋 浚 吉 ) 이유태( 李 惟 泰 ) 등 당대의 명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 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아들을 선생 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학문적으로 송익필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 禮 學 )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 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
150 학예지 제19집 정산 군수( 定 山 郡 守 )로 있었다. 공은 선생에게 왜구가 이르면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선생은 공의 충분( 忠 憤 )을 사모하여 그 시를 새겨 현( 縣 )의 벽에다 걸어 두었다. 다음해 임진년 4월 13일에 왜적이 침범해 와서 14일에는 부산을 함락시켜 첨사( 僉 使 ) 정발( 鄭 撥 )을 죽이고,15일에는 동래부를 공격하였다.이보다 앞서 경상 병사( 慶 尙 兵 使 ) 이각( 李 珏 )이 무리를 거느리고 성( 城 )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킬 계책을 세우더니,왜적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도망쳐 나가려 하였다.공이 의( 義 )롭지 못함을 들어 꾸짖고 함께 죽을 것을 말하였다.그러자 각( 珏 )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곳이 따로 있소.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공의 책임이오. 그는 노약자 30명만 데리고 마침내 달아나 버렸다. 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흔들렸 다. 공이 개연히 백성에게 맹세하고 성에 올라 방어 준비하고 있자니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졌 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공은 시종인 신여로( 申 汝 櫓 )에게 말하였다. 나는 나라를 지키는 신하의 의( 義 )로써 당연히 죽기를 맹세하였다. 그러나 너는 늙은 어미가 있으 니, 부질없이 죽을 것이 없다. 빨리 도망가거라. 이날 적군이 성을 넘어 마구 진입하자, 공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급히 갑옷 위에 조복( 朝 服 )을 입고 남문( 南 門 )에 올라가 손을 맞잡고 의자에 단정히 앉으니, 그 모습이 태산과 같았다. 이윽고 적이 가까이 육박해 왔는데, 적 가운데 평조익( 平 調 益 )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는 일찍이 평조신( 平 調 信 )이 통신사( 通 信 使 )로 왕래할 때 따라와서 공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공이 자못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이에 조익은 공에게 감동해서 평소 공을 위해 은혜를 갚으려 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그는 성 한쪽 후미진 곳을 가리키며 공에게 피하라고 하였다. 공이 응하지 않으므로 그는 공이 알아차리지 못한 줄 알고 다시 옷자락을 손으로 끌었다. 공은 하는 수 없이 의자 아래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재배( 再 拜 )하고 나서, 아버지 송화공( 松 禾 公 )에 던 송익필이 아버지 사련( 祀 連 )의 일로 환천( 還 賤 :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 ( 徐 渻 ) 정엽( 鄭 曄 ) 등과 신변사원소( 伸 辨 師 寃 疏 )를 올렸다. 그는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 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 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 禮 備 要 ) 4권, 가례집람( 家 禮 輯 覽 ), 전례문답( 典 禮 問 答 ), 의례문해( 疑 禮 問 解 ), 근사록석의 ( 近 思 錄 釋 疑 ), 경서변의( 經 書 辨 疑 ) 등이 있다. 그의 문집으로는 사계선생 전서 가 전한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51 게 편지를 보냈다. 외로운 성( 城 )에는 달무리지듯 적병에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영에서는 모두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 히 잠자고 있습니다. 군신간의 의리는 중대하지만, 부자간의 은혜는 이에 비하면 가볍습니다. 다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니, 당시 나이 42세였다. 공은 죽음에 임해서도 평소처럼 의연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허리 아래에 콩알만한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으면 그것을 증표로 하여 시체를 거두라. 얼마 뒤에 적장 평의지( 平 義 智 ) 현소( 玄 蘇 ) 등이 이르러 서로 공의 충성심에 감탄하고, 공 을 해친 적병을 잡아 처형하여 군중에 돌려 경계시켰다. 신여로( 申 汝 櫓 )는 공의 말을 듣고 떠 났다가 하루 만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공은 임금을 위해 죽으려 하는데, 내가 어떻게 공을 위해 죽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되돌아와 공의 뒤를 따라 죽었다. 공의 첩( 妾 ) 금섬( 金 蟾 )은 함흥( 咸 興 ) 사람인데 적을 꾸짖고 몸을 깨끗이 보존하여 죽었다. 적이 공의 시신과 금섬의 시신을 거두어 동문 밖에 묻어 주고 나무를 세워 표하고 시( 詩 )를 지어 제사 지내 주었다. 이때부터 남문 위에는 밤마다 빛나는 자기( 紫 氣 )가 곧바로 하늘에 뻗쳐 있어 몇 해 동안 흩어지지 않으니, 적이 더욱 두려워 하였다. 갑오년 겨울에 경상 병사( 慶 尙 兵 使 ) 김응서( 金 應 瑞 )가 적장( 賊 將 ) 청정( 淸 正 )을 진중에서 만 나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듣고 장계를 올렸다. 상은 매우 감탄하면서 특명을 내려 관작을 추증 하고 정려( 旌 閭 )를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한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제 사 지내게 했다. 그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바른 기상 외로운 기품, 훌륭한 모습 우뚝하네. 재주는 문무를 겸하였고, 덕은 충효를 보전하였네. 수양( 睢 陽 )이 포위당했을 때 하란( 賀 蘭 )이 구원하지 않았고, 북군( 北 軍 )이 패할 때 안고경( 顔 杲 卿 )의 충분( 忠 憤 )이 격발되었네. 10) 구차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죽음에 나아가는 것은 영화롭구
152 학예지 제19집 나. 의리는 태산처럼 중하게 하고, 목숨은 홍모( 鴻 毛 )처럼 가볍게 여겼네. 정성과 충성이 있는 곳에, 장한 기운 꺾이지 않았네. 적들이 아직 남았는데, 경이 어찌 눈 감겠는가? 을미년에 집안사람들이 조정에 청하여 고향에 옮겨 장사하려 했으나 적병들이 아직 변경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이 도신( 道 臣 )에게 하교하여, 그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신을 찾아오게 하여 청주( 淸 州 ) 가포곡( 加 布 谷 )에 장사 지냈다. 공의 관이 돌아오자, 백성들이 모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1백 리 밖까지 추송( 追 送 )하는 이가 수백 명이었다. 적장 청정( 淸 正 ) 이하가 모두 말에서 내려 엄숙히 전송하였다. 동래부에 매동( 邁 仝 )이란 사람은 공의 제삿날이 되거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음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 다. 그는 훗날 공의 아우 상인( 象 仁 )의 집에 와서 공의 순절한 상황을 말하면서 슬픔을 주체하 지 못하였다. 그는 공의 아우가 고기를 주어도 먹지 못하였다. 오늘 우리 공의 아우를 보니 우리 공을 다시 본 듯한데, 어찌 고기를 먹겠습니까? 공의 첩 이씨( 李 氏 )는 적병에게 잡혀갔으나 역시 굴복하지 않았다. 적도 그가 공의 가속( 家 屬 )임을 알고 더욱 공손하게 대우하였다. 적은 그녀를 수절하면서 살고 있는 관백( 關 白 ) 가강 ( 家 康 )의 누이 집에 거처를 정하여 함께 살도록 배려하였다. 홀연 폭풍우가 몰아쳐 벽과 지붕 이 모두 무너졌지만 이씨가 있는 곳은 멀쩡하였다. 적은 이것을 보고 매우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적은 그녀를 돌려보내서 공의 삼년상을 추복( 追 服 )하게 하였다. 을사년에 동래부사 윤훤( 尹 暄 )이 공의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인조대왕이 반정( 反 正 ) 초기 에 충렬( 忠 烈 ) 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묘에 제사 지냈다. 오랑캐가 침략하니, 모든 성이 무너지네. 영남의 칠십이주, 의사 1명 없구나. 순절한 공의 뜻은 열렬 하기 그지없네. 모든 병사 전사하고, 지키던 성 텅비었네. 숙연한 집무처는, 하늘과 땅뿐일세. 관복입 고 예 갖출제, 숙연하기 그지 없네. 난무하는 칼날을, 모기보듯 하였네. 이 한 몸 부서진들, 정신이야 가이 없네. 10) 수양( 睢 陽 )이 격발되었다.: 당 현종( 唐 玄 宗 ) 때 안녹산( 安 祿 山 )의 난리에 장순( 張 巡 )이 수양( 睢 陽 )에서 적병에게 포 위되자, 하란진명( 賀 蘭 進 明 )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하란진명이 시기한 나머지 원병을 보내지 않아 장순이 포로 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켜 죽었다. 안고경( 顔 杲 卿 ) 또한 안녹산의 난에 사사명( 史 思 明 )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왕승업( 王 承 業 )에게 원병을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아 포로가 되어 피살되었다. 송상현( 宋 象 賢 )이 임진왜란 때 동래성( 東 萊 城 )에 서 항전하다가 적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이들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舊 唐 書 卷 192 顔 杲 卿 張 巡 列 傳 )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53 아! 열성( 列 聖 )의 충신을 숭상하고 보답함이 이에 이르러 다하였다 하겠다. 숭정( 崇 禎, 명 의종의 연호) 신묘년(1651, 효종 2)에 윤문거( 尹 文 擧 ) 11) 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공의 사당이 남문( 南 門 )의 곁에 붙어 있어 너무 시끄럽고, 또 옛날 대략 지은 것이라서 소략하여 혼령을 편안하게 모시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여겼다. 그는 마침내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힘을 모아 내 산( 萊 山 )의 남쪽 안락리( 安 樂 里 )로 옮겨 세웠다. 이것의 규모가 커서 서원( 書 院 )으로 삼았다. 청주( 淸 州 ) 고부( 古 阜 )에서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제사를 모시니, 사림은 정성을 다해 높이 받 들었다. 공의 부인 이씨( 李 氏 )는 충의위 온( 熅 )의 딸이고, 승지 문건( 文 楗 )의 손녀이다. 이문건( 李 文 鍵 ) 12) 은 기묘 명인( 己 卯 名 人 )이었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 인급( 仁 及 ),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이 됨. 차남 : 효급( 孝 及 ), 진사 딸 : 현감 이창원에게 시집갔으나 자손이 없음. 정랑의 아들 : 근( 根 )으로, 상서원 직장을 지냄. 진사의 딸 : 정복규( 鄭 復 圭 )에게 시집감. 직장의 자녀(4남 2녀) : 아들은 문병( 文 炳 ) 문전( 文 烇 ) 문정( 文 烶 ) 문수( 文 燧 )임. 딸은 김전( 金 澱 ), 김규( 金 鍷 )에게 시집감. 공은 후덕하고 도량이 넓어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섰으며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공은 경전을 깊이 공부하였고 제자( 諸 子 )와 경사( 經 史 )에 밝았으며, 병가( 兵 家 )의 서적도 두루 섭렵하였다. 공은 내행( 內 行 )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어버이가 있으면 비록 추운 겨울이거나 더 운 여름일지라도 예를 갖추어 건( 巾 )이나 띠[ 帶 ]를 벗지 아니하고 오직 명령을 받들어 모셨으 11) 윤문거( 尹 文 擧 ): 1606(선조 39) 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파평( 坡 平 ). 자는 여망( 汝 望 ), 호는 석호( 石 湖 ). 시호는 충경( 忠 敬 ). 그는 1633년(인조 11)에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제천 현감 춘추관 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 때 사간원 정언으로 척화 의( 斥 和 議 )를 진계( 陳 啓 )하였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 扈 駕 )하였다. 그는 근사록( 近 思 錄 ) 과 주자서절요( 朱 子 書 節 要 ) 등을 가까이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석호유고 3권이 있다. 12) 이문건( 李 文 鍵 ): 1494(성종 25)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 星 州 ). 자는 자발( 子 發 ), 호는 묵재( 默 齋 ) 휴수( 休 叟 ). 그는 1528년(중종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주서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 박사를 거쳐 정언 이조좌랑에 이르렀다. 1546년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윤원형( 尹 元 衡 )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 李 輝 )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154 학예지 제19집 며, 아우 상인( 象 仁 )과도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큰누이가 정자( 正 字 ) 장언오( 張 彦 吾 )의 아내가 되었다가 일찍 과부가 되므로 여러 아들을 데 리고 와서 공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공은 누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섬겨 오래도록 소홀함이 없 었으며, 조카들을 자신의 친자식과 다름없이 돌보아 양육하였다. 이웃 마을에서조차도 그 누구 도 공을 따를 수 없다고 칭찬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공은 집을 다스리는데도 법도가 있어, 평소에 성낸 말이나 얼굴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자애로 써 두루 거느렸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공의 위엄을 경외하고 그 은혜에 감복하였다. 공은 덕으 로써 집안을 다스려 화목할 수 있었다. 공은 관직 생활에서는 항상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키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 면 강직하게 대처하고 아첨하지 않았다. 공은 절개를 지켰으며 죽음에 임해서도 그 태도가 자 연스럽고 뜻이 여유가 있어서 평소와 같았다. 이러한 공의 행동은 올바른 학문과 심오한 수양 의 발현이고, 사물의 경중을 분별함이 본래 속마음에 정해져 있어서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루 아침에 강개한 마음에 목숨을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까닭에 미천한 첩조차도 한 사람은 적을 꾸짖고 나서 뒤따라 죽고, 또 한 사람은 죽기 를 맹세하고 절개를 지켰다. 미천한 종으로서도 의를 지켜 목숨을 버려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모두 공의 덕에 감화되고 의로움에 감동되어 그 이해의 유혹과 생사의 두려움마저도 잊게 된 것이다. 또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이 울며 사모하고, 사림들이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셔 오래도록 잊지 못하며, 포악한 오랑캐들까지도 경복( 敬 服 )할 줄 알아 공의 깨끗함에 감히 무례한 행동을 가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보아도 공이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고 멀리까지 감복시킴이 어떠했 는가를 알 수 있다. 아! 사람이 사는 도리는 인( 仁 )과 의( 義 )일 뿐이다. 인( 仁 )은 부자( 父 子 )간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 義 )는 군신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이것은 진실로 천명( 天 命 )이고 인성( 人 性 )이기 때문에 고금이 같고 미개한 오랑캐와 문명한 중국이 다름이 없다. 자기의 직분을 다해 목숨을 바치는 의로운 이치가 누구에게나 없겠는가? 그러나 다만 평소에 그것을 밝힐 줄 아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없고 또 수양하는 공이 없다면 줏대없이 흔들리다 비굴하게 세상에 아첨할 뿐이 다. 그러므로 이해의 갈림길에 서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낭패하고 당황하며 두렵고 나약해지 고 만다. 끝내는 그 인과 의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인륜의 아름다움을 깨뜨리기 때문에 중국이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55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금수처럼 되는 것이다. 세상사가 이러한데 참으로 한스러울 뿐이다. 공의 학문을 후배의 짧은 학식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미루어 보자면, 공의 학문은 세속에서 글짓기만을 일삼고 벼슬을 구하고 그저 세상을 따라가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공의 그것은 나아가는 바가 이와 같이 훌륭했던 것이다. 신독재( 愼 獨 齋 ) 김공( 金 公 ) 13) 이 어릴 때 일찍이 공에게서 수학하여 우뚝 일세( 一 世 )의 유종 ( 儒 宗 )이 되었는데, 그 학문이 비록 모두 공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공의 연원( 淵 源 ) 을 대략 알 수 있다. 이로써 말한다면 공의 집에 있을 때의 훌륭한 행적이 위에 기록한 것뿐만이 아닐 것이며,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길 때의 남다른 언론과 풍채도 반드시 사관의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 다. 생각건대, 비부( 秘 府 )에 소장되어 있는 사적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가승( 家 乘 )의 기록마저 자세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공의 벗 문정공( 文 貞 公 ) 신흠( 申 欽 )이 공을 위해 열전( 列 傳 )을 지었다. 그 말이 비록 간략하 지만 말을 아는 군자는 오히려 징험하여 믿을 것이다. 오성( 鰲 城 ) 상공( 相 公 ) 이항복( 李 恒 福 )은 공을 애모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외로운 성에 왜적이 달무리 지듯 포위했을 때 담소하면서 지휘한 것은 공의 열렬함이 아니겠는가? 번쩍이는 칼날 아래에서도 단정히 앉아서 예를 갖춘 것은 공의 절개가 아니겠는가? 남문 위의 자기( 紫 氣 )가 북두성에 뻗친 것은 공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이 말이 세간에 많이 전해 내려오지만 그것만으로 공을 다 형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군자들은 오히려 공에 대한 제사와 증직( 贈 職 )이 늦은 것을 탄식하면서 충성을 권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으니, 당시에 공을 소홀하게 대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끝내 공으로 하여금 당시의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하였고, 또 변방으로 쫓겨나 게 했지만, 공은 오히려 큰 절개를 세워 우리나라 수백 년 전통의 강상( 綱 常 )을 붙들었다. 이것 13) 신독재( 愼 獨 齋 ) 김공( 金 公 ): 1574(선조 7) 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광산. 이름은 집( 集 ). 자는 사강( 士 剛 ), 호는 신독재( 愼 獨 齋 ). 시호는 문경( 文 敬 ). 그는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 宋 時 烈 )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과 임피현령( 臨 陂 縣 令 ), 전라도사, 선공감 첨정,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이( 李 珥 )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 禮 學 ),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 金 長 生 ) 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저술로 는 신독재문집, 의례문해속( 疑 禮 問 解 續 ) 등이 있다.
156 학예지 제19집 은 하늘이 공으로 하여금 이러한 업적을 성취하게 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당 시에 공을 미워한 자들의 현명 여부도 어떠했는가를 알게 해준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공에 게야 유감될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겠는가? 지난 임진년 가을에 공의 증손 문병( 文 炳 )이 많은 선비의 뜻에 따라 나에게 와서 행장( 行 狀 ) 을 청하였다.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굳이 사양한 지 4년째가 되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 수록 더욱 굳게 요청하므로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또 생각해 보건대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나서 묘 앞의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창( 顯 彰 )하는 비문조차 아직 없으니, 세상의 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을 알 만하다. 따라서 사실을 기록해야 할 글을 머뭇거리고 지어놓지 않으면, 비록 공의 큰 절개야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평생의 업적은 갈수록 어두워져 징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가장 ( 家 狀 )과 여러 사람들의 글을 대략 거론하면서 한 두가지 들었던 것을 덧붙여 이상과 같이 기 록하여 사관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아울러 당세의 군자에게 알리는 바이다. 숭정( 崇 禎 ) 을미년(1655, 효종 6) 2월 일( 日 )에 은진( 恩 津 ) 송시열( 宋 時 烈 ) 14) 은 삼가 행장( 行 14) 송시열( 宋 時 烈 ): 1607(선조 40) 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 恩 津 ). 아명은 성뢰( 聖 賚 ). 자는 영보( 英 甫 ), 호는 우암( 尤 菴 ) 또는 우재( 尤 齋 ). 시호는 문정( 文 正 ). 그는 27세 때 생원시( 生 員 試 )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 陰 一 陽 之 謂 道 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선조 13)에는 봉림대군( 鳳 林 大 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 師 傅 )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 世 子 侍 講 院 進 善 ) 사헌부장령( 司 憲 府 掌 令 )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 丑 封 事 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 尊 周 大 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 華 를 명나라로 夷 賊 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 復 讐 雪 恥 : 청나라에 당한 수 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658년(효종 9)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승하한 후에는 대부분 재야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 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그러나 1674년(숙종 즉위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 친 죄로 덕원( 德 源 )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 長 鬐 )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領 中 樞 府 事 兼 領 經 筵 事 )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 ( 奉 朝 賀 )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 金 錫 胄 ) 김익훈( 金 益 勳 )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 변( 壬 申 三 告 變 )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그는 제자 윤증( 尹 拯 )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1689년(숙종 15)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 元 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그는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57 狀 )을 쓴다. 충렬사지 권 2 증좌찬성정공시장( 贈 左 贊 成 鄭 公 諡 狀 ) 공은 휘가 발( 撥 )이고 자가 자고( 子 固 ), 본관이 경주( 慶 州 )이다. 고려 때에 휘 진후( 珍 厚 )가 군기 윤( 軍 器 尹 )에 봉해졌는데 그 후 대대로 경상( 卿 相 )이 되었 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희계( 熙 啓 )는 개국 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 르렀으며, 계림군( 雞 林 君 )에 봉해지고 시호가 양경( 良 景 )이다. 양경의 후손은 고관대작을 지낸 이가 5세( 世 )나 되었다. 휘 명선( 明 善 )은 간성 군수( 杆 城 郡 守 )를 지냈는데, 관찰사 남궁숙( 南 宮 淑 ) 15) 의 따님에게 장 가들어 가정( 嘉 靖 ) 계축년(1553, 명종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말수와 웃음이 적었다. 공은 소학( 小 學 ) 의 내용 중에 거처할 때에는 부모에게 공경을 지극히 한다. 는 말에 깨달음이 있어 종신토록 외우고자 하였다. 공은 약관 시절에 사서( 四 書 )와 오경( 五 經 )을 통달하였다. 이때 모부인이 연세가 드셨기 때문에 공은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봉양하 려 하였다. 공은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선임되고 해남 현감( 海 南 縣 監 )에 부임하였는데, 그로부터 3년 만에 명성이 온 경내에 자자하였다. 공이 면직하고 돌아 동년 6월에 그는 서울로 압송되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그는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 丙 申 處 分 )과 1744년(영 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그의 학문은 전적으로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그가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 朱 子 大 全 ) 과 주자어류( 朱 子 語 類 ) 의 연구로서, 그 결과 주자대전차의( 朱 子 大 全 箚 疑 ) 주자어류 소분( 朱 子 語 類 小 分 )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 尤 菴 集 ) 이 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 宋 子 大 全 이라 명명하였다. 15) 남궁숙( 南 宮 淑 ):1491(성종 22) 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 咸 悅 ). 자는 숙부( 淑 夫 ). 그는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 박사, 홍문관 부정자, 지평, 승정원 좌부승지, 상호군, 한성 부우윤,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근면하면서 능력있는 관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158 학예지 제19집 왔는데, 마침 오랑캐가 종성( 鍾 城 )으로 쳐들어왔다. 공은 원수( 元 帥 )의 막부( 幕 府 )로 달려갔다. 오랑캐의 난리를 평정하고 돌아와서 거제 현령( 巨 濟 縣 令 )에 제수되었다가, 들어와 비변사의 낭 관이 되었다. 어느날 대신들이 모여 앉아 공을 불러 붓을 잡게 하고 입으로 글을 불러 주었다. 이때 공이 경서의 깊은 내용과 벽자( 僻 字 )라도 대신들이 말하는 것을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갔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공을 크게 칭찬하였다. 이후 공에 대한 칭찬과 명망이 자자하였으 므로 공은 팔사( 八 司 ) 16) 의 낭관을 두루 겸직하였다. 공은 승진을 거듭하여 위원 군수( 渭 原 郡 守 ), 훈련원 부정( 副 正 ), 사복시 정( 正 ), 내승( 內 乘 )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왜적과 대외적으로 마찰이 거듭되다보니 조정은 남쪽 변방에 대한 수비를 걱정하게 되 었다. 이때 공은 부산진 첨사( 釜 山 鎭 僉 使 )에 제수되었고, 관례에 의거해서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 의 품계를 더하였다. 공은 부임하러 떠날 적에 울면서 모부인에게 하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제가 벼슬하려는 것은 본래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해서입니다마는, 이미 군주의 신하가 되었으니 나 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충성과 효도를 둘 다 온전히 할 수 없을 듯합니다. 부디 어머니 께서는 저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부인은 눈물을 훔치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경계하였다. 가거라. 네가 충신이 되면 내가 무슨 서운함이 있겠느냐? 공은 무릎을 꿇고서 가르침을 받고 아내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집에 있을 때처럼 어머니를 봉양해 주시오 곁에 있던 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공은 부산진에 이르러 새벽부터 밤늦도록 전쟁에 대비하면서 결사적으로 국가를 수호할 계책을 세웠다. 16) 팔사( 八 司 ): 비변사( 備 邊 司 ) 내수사( 內 需 司 ) 등과 같이 사( 司 ) 자가 붙은 여러 개의 부서 또는 부( 府 ) 감( 監 ) 시 ( 寺 ) 원( 院 ) 서( 署 ) 등의 부서에 소속된 낭관 계급의 관리를 말한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59 아들 흔( 昕 )은 공을 따라 임소로 갔다.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3일에 공이 망해루( 望 海 樓 )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반쯤 무르익자 공은 아들 흔을 불러 명하였다. 오늘 잔치를 베푼 뜻을 네가 아느냐? 이는 바로 내가 너와 결별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만약 지체한 다면 필시 화를 당할 것이다. 오늘 즉시 떠나거라. 흔이 울먹였다. 과연 이와 같다면 이 자식이 어찌 차마 홀로 돌아가겠습니까? 공은 말하였다. 부자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하다. 너는 돌아가서 할머님과 어머니를 봉양하라. 그는 종을 재촉하여 아들을 부축하여 말에 태워 보냈다. 13일에 척후병이 적침의 경보를 알려 왔다. 공이 신속히 배를 타고 바다에 내려가니 왜적의 배가 이미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공은 단지 세 척의 전함이 있을 뿐 뒤에 오는 지원군도 없었 다. 공은 싸우다가 퇴각하여 성으로 돌아왔다. 공은 성 밖의 민가들을 모두 불태우게 해서 육 박전에 대비하였으며, 은밀히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넓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달빛도 대낮처럼 밝았다. 왜적은 사방으로 성을 포 위하였다. 공은 성루에서 장검을 들고는 소경으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여 평소처럼 편안하고 한가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에 군사와 백성들이 안정하여 놀라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왜적들이 포위망을 좁히면서 성으로 올라왔다. 칼날의 기운이 하늘에 번득이고 대포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공은 장병들을 인솔하고 힘을 다해 성을 순행해서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는데, 세 곳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낮이 되자 성안에 화살이 떨어지니, 한 비장( 裨 將 )이 나와서 아뢰었다.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소서.
160 학예지 제19집 공은 말하였다. 내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감히 성을 버리라고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그는 또 다시 군중에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고 명하였다. 그가 강력히 싸우지 않는 자들을 격동시키니, 장병들이 모두 울면서 감히 떠나지 못하였다. 얼마 후 공이 탄환을 맞고 전사하자, 성도 끝내 함락되었다. 공에게는 18세의 애향( 愛 香 )이 라는 첩이 있었다. 그녀는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곡하고 시신의 곁에서 자결하였으 며, 종 용월( 龍 月 )도 적에게 달려들어 싸우다가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그 후 추포( 秋 浦 ) 황신( 黃 愼 ) 17) 이 통신사로 일본에 들어가니, 왜장 평조신( 平 調 信 )이 공의 충성과 용맹함을 극구 칭찬하였다. 우리 군대가 처음 바다를 건너 부산진의 성안에서 크게 기세가 꺾였다. 만일 공의 병력이 많았더라 면 어찌 함락시킬 수 있었겠는가? 부산진 이후로는 감히 우리의 칼날을 막은 자가 없었다. 또 평조신은 애향이 함께 죽은 일도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왕래하는 왜인 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귀국의 장수로는 오직 부산의 흑의장군( 黑 衣 將 軍 )이 가장 두려웠다. 천계( 天 啓 )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진( 鎭 )의 병졸이 왕명을 받들고 온 사신을 맞이하여 공의 의로움과 열렬함을 추후에 드러내어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이 일의 전말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인조조에 동래부사( 東 萊 府 使 )가 처음으로 사당을 세우고 송상현( 宋 象 賢 )과 함께 모셔 17) 황신( 黃 愼 ): 1560(명종 15) 1617(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 昌 原 ). 자는 사숙( 思 叔 ), 호는 추포( 秋 浦 ). 시호는 문민( 文 敏 ). 그는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그는 감찰. 음죽현감, 호조 병조의 좌랑, 정언, 고산현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605년(선조 38)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 扈 聖 宣 武 原 從 功 臣 )에 책록되었다. 또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 衛 聖 功 臣 )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 檜 原 府 院 君 )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다음 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 李 爾 瞻 )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 鄭 浹 )의 무고로 쫓겨나 중도부처( 中 途 付 處 )되었다. 그 후 그는 옹진 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별세하였다. 저술로는 추포집, 대학강어, 일본왕환일기 日 本 往 還 日 記 등이 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61 제사를 올렸는데, 충렬( 忠 烈 ) 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금상( 今 上 ) 신유년(1681, 숙종 7)에 동래부사의 상소로 인하여 대신에게 의논해서 공에게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 9)에 또다시 경연관의 진계( 陳 啓 )로 인하여 상은 대신에게 하문하여 정려문을 세워 주게 하였다. 아들 흔은 의리상 원수인 왜적과 함께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왜적과 싸우다 가 죽은 사람의 자식들과 결의하여 맹세하는 글을 짓고 청( 廳 )을 만들고는 복수( 復 讐 ) 라 불렀 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사( 水 使 )에 이르렀다. 흔의 아들은 현감 백기( 伯 基 )가 있다. 백기는 여덟 아들을 두었다. 그 이름은 이열( 爾 說 ), 이상( 爾 尙 ), 이량( 爾 亮 ), 이필( 爾 弼 ), 이광 ( 爾 光 ), 이원( 爾 遠 ), 이재( 爾 載 ), 이식( 爾 栻 )이다. 조정에서는 충신의 아들을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어 연달아 관작을 내렸다. 공은 비록 무예에 종사하였으나 항상 일찍 일어나 책을 읽어서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독서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공은 집에 있을 때에는 몸을 삼가고 신칙해서 행실이 학자보다 더 뛰어났다. 공이 왜란을 만나 국가를 위해 죽은 충절은 진실로 근원한 바가 있으니, 하루아침 에 비분강개한 자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공의 이러한 충절이 어떻 게 이처럼 열렬하게 종과 첩에게 미칠 수 있었겠으며, 저처럼 왜국의 무리들을 깊이 감동시킬 수 있었겠는가? 아! 슬프다. 공은 법전에 있어 마땅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있어야 하므로 감히 공이 남긴 사적을 선별하고 이에 의거하여 시호를 정하고자 하는 바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남구만( 南 九 萬 ) 18) 은 찬한다. 18) 남구만( 南 九 萬 ): 1629(인조 7) 1711(숙종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宜 寧 ). 자는 운로( 雲 路 ), 호는 약천( 藥 泉 ) 또는 미재( 美 齋 ). 시호는 문충( 文 忠 ). 그는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가주서 전적 사서 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그는 1659년 (효종 10) 홍문록에 오르고 곧 교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이조정랑 집의 응교 사인 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대사성 안변부사 전라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숙종 초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좌윤이 되었다. 동년 그는 윤휴( 尹 鑴 ) 허견( 許 堅 ) 등의 방자함 을 탄핵하다가 남해( 南 海 )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 庚 申 大 黜 陟 )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사 간, 대제학에 올랐다. 그는 병조판서가 되어 폐한 사군( 四 郡 )의 재설치를 주장해 무창( 茂 昌 ) 자성( 慈 城 ) 2군을 설치했 으며, 군정( 軍 政 )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그는 1684년(숙종 10)에 우의정, 이듬해에 좌의정, 1687년(숙종 13)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즈음 그는 송시열( 宋 時 烈 )의 훈척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해 소론( 少 論 )의 영수로 지목되었 다. 그는 1689년(숙종 15)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 그는 1694년(숙종 20)에 갑술옥사( 甲 戌 獄 事 )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숙종 22)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1701년(숙조 27)에 희빈 장씨( 禧 嬪 張 氏 )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 金 春 澤 ) 한중혁( 韓 重 爀 ) 등 노론 의 주장에 맞서 경형( 輕 刑 )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그는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는 그 후에도 우여곡절을 겪다가 1707년(숙종 33)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 奉 朝 賀 )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162 학예지 제19집 충렬사지 권 6 임진동래유사( 壬 辰 東 萊 遺 事 ) 만력 임진년 여름 4월 13일에 왜병이 대거 침범하였다. 이때 정발은 부산진 첨사로서 진 휘 하의 3척의 전함을 이끌고 급히 포구로 출정하였는데, 이미 적선이 절영도 앞바다를 가득 메우 고 있었다. 정발은 전투하다가 퇴각해서 진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공은 동문 위를 지키면 서 급히 성을 수비할 수 있는 무구를 수리하였다. 공은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허둥지둥하지 말 것을 경계하면서 소경으로 하여금 누각 앞에서 퉁소를 불게 하니 군사와 백성이 평소처럼 편안해하였다. 왜적은 상륙한 후 주둔하면서 관망하고 있다가 14일 닭이 울 즈음에 처음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공은 고함을 지르며 성을 순시하였으며 병사들은 분투해서 왜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다. 왜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이 세 곳이나 되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어 떤 비장이 그를 만류하면서 도망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꾸짖으면서 명하였다. 남아는 죽을 뿐이다. 감히 다시 말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하겠다. 정오 때 그는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으며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정발에게는 18세의 애향 이라는 첩이 있었는데, 정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결하였다. 적은 승세를 타서 곧바로 동래부로 향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남문루에 올라서 군민을 이끌고 성을 지키면서 적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좌병사 이각은 전쟁 소식을 듣고는 성안으로 달려들어와 보졸 수백 명을 뽑아 조방장으로 하여금 맞이하여 공격하고자 하 였다. 그는 부의 남쪽 10리쯤에 도착해서는 중과부적이라고 하면서 퇴각하려고 하였다. 그는 각자의 위수지역에서 활동하자고 하면서 조방장과 함께 문을 열고 도망가 버렸다. 적군은 취병 장에서 먼저 백여 명을 시켜 목패 하나를 가지고 남문 밖에 서 있다가 갔다. 송상현은 군관 송봉수 등으로 하여금 나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전투하고자 한다면 전투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 그는 당대 정치 운영의 중심 인물로서, 정치 경제 형정 군정 인재 등용 의례( 儀 禮 )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장에 뛰어나 책문( 冊 文 ) 반교문( 頒 敎 文 ) 묘지명 등을 많이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 가 청구영언 에 전한다. 저서로는 약천집 주역참동계주 周 易 參 同 契 註 등이 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63 공도 역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목패로써 적중에 던졌다. 전투하다가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적병은 마침내 세 길로 나누어 침범하였다. 하나는 황령산 아래에서 침범하였고, 또 하나는 서대로에서 침범하였으며, 또 하나는 취병장에서 침범하였다. 왜적은 곧바로 남문을 향하여 해 가 지기 전에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15일 아침에 적은 성의 뒷산에 올라 높은 데에서 낮은 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부민은 다급하게 적을 만나자 모두 성으로 들어와 견고하게 지키 고 있었다. 그러나 성은 작고 사람은 많았다. 적병 수십만이 한꺼번에 다투어 침범하니 성안에 는 가득 메워져 움직일 틈도 없었다. 이 때문에 적들도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공도 부하에게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껴입고 호상에 걸터앉아서는 안색을 변하지 않았다. 왜인 평조익은 일찍이 통신사를 수행하여 조선에 온 적이 있었고, 공은 그를 매우 후대 해주었다. 그는 공에게 감복하여 은혜 갚을 것을 생각하고는 급히 그 앞으로 와서 피하라고 눈 짓하였다. 그러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조익은 또 옷을 잡아끌고 성 옆의 후미진 곳을 가리켰다. 공은 이미 호상에서 내려와 북향하고 절하였다. 절하는 것이 끝나자 부친께 서신을 올렸다. 외로운 성은 포위되어 있는데도 여러 진에서는 위태로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군신의 의리는 중하지 만 부자의 은혜는 가볍습니다. 또 시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 중에 살아남는 자가 있다면 나의 시신을 거두어주어야 할 것이다. 내 배꼽 아래에는 검은 사마귀가 콩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증험할 것이다. 군관 송봉수 김희수 등 4~5인, 향리 대송백 소송백, 관노 철수 매동 등이 공의 곁에 서 있었다. 적병이 진격하자 송봉수 김희수 대송백 등은 싸우다가 죽었으며, 공도 마침내 전사 하고 말았다. 소송백 철수 매동 등은 포로가 되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들이 공의 시신을 거 둘 때에 흑사마귀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북산의 율림( 栗 林 )에 장사지냈다. 적장도 공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탄식하면서 장례 물품을 마련해주었고 시를 지어 제사지냈다. 또 적장은 공을
164 학예지 제19집 해친 자를 참수하였다. 이때부터 초루( 譙 樓 ) 위에는 항상 붉은 기운이 하늘까지 뻗쳐서 몇 년 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갑오년 간에 조정은 경상절도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에게 말하고 공의 가족으로 하여금 관 을 가져다가 장례치르게 하였다. 적장이 길에서 그의 관과 마주치자 말에서 내려 피하였다. 공에게는 함흥의 기생 금섬( 金 蟾 )이라는 첩이 있었다. 그녀는 공이 조복을 찾는 것을 듣고는 전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공에게 가려고 담장을 넘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지만 3일 동안 그들을 욕하다가 살해되었다. 적은 그녀를 의롭게 여겨서 관을 갖추고 함께 장례를 치러주었다. 신여로라는 사람은 공을 따라 남쪽으로 왔으나, 공은 그에게 모친이 살아 계시다 는 것을 알고서 적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어 돌아가게 하였다. 그는 부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공에게 후대를 받았는데 난리에 임해서 어찌 죽음을 아끼겠는가? 그는 돌아와서 함께 전사하였다. 부의 백성 김상( 金 祥 ), 그리고 마을의 여인 2명은 지붕 위에 올라갔다. 두 여인은 기와조각을 부수고 김상은 그것을 적에게 던졌다. 적이 떠난 후에 김상의 어머니가 와서 보니 상과 두 여인이 같이 죽어 있었다. 왜적 3명도 그 옆에 죽어 있었는데, 그들이 상에게 살해된 것을 알았다. 그 후에 왕래하던 왜인들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진년 전쟁 때에는 부산성의 흑의 장군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웠다. 반나절을 대치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자들이 매우 많았다. 만일 성이 견고하고 군대가 많았다면 끝낸 함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것은 정발이 흑색 도포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래부의 교수 노개방( 盧 蓋 邦 )은 밀양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을 뵈려고 집에 가다가 적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왔다. 그는 곧장 향교로 갔으나 이미 선성의 위판은 성안의 정 원루에 옮겨진 뒤였다. 그는 성문을 두드리며 대성통곡하였다. 송공이 문을 열어주자, 개방은 위판( 位 版 )에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그는 교생 문덕겸( 文 德 謙 ) 양통한( 梁 通 漢 ) 등과 함께 같이 지키면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성이 함락되자 그들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개방의 아 내는 밀양에 있으면서 산 속으로 왜병을 피하다가 왜적과 마주치자 남편의 홍패를 품에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65 이로부터 6~70년 후에 내가 동래부사가 되었다. 동래는 왜인을 접대하는 것이 일이었는데도 전혀 대비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조차도 다시 축조하지 않고 있었다. 고을의 노인을 만나서 옛일을 물어보니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아! 송공과 정공의 충의의 절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들은 바이고 조정에서도 진실로 이미 추모하였고 사당을 세워서 표창의 예전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같이 전사한 의사 열녀와 노교 수의 죽음과 김상 등의 적을 친 일 등도 역시 그 충의와 분격함이 옛사람에게 부끄러운 것이 없지만, 백년도 채 안 되어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진실로 노인들이 탄식 하는 바이고 성세에도 결여된 예전이다. 이에 다시 널리 자료를 수집하고 그 믿을 만한 사실을 선별하여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정리해서 돌에 새기고 그 일을 기록하고자 한다. 관도( 官 道 )의 옆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화공으로 하여금 그 일을 그려서 보기만 하면 감동하는 자료로 삼고 자 하였다. 또 부성을 개축하고 병기를 수리하고자 하였다. 이미 채석은 하였지만 병 때문에 부사직을 그만두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10년이 지나 함경도 관찰사에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동래의 노인들이 서신을 보내 왔다. 지금의 태수 안진( 安 縝 ) 19) 이 당세의 문장가에게 글을 청하여 공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당시에 기록했던 것을 얻어서 신뢰할 수 있는 증거로 삼기를 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진실로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즉시 이전에 작성해 두었던 원고를 대략이나마 정리해서 삼가 그 부로에게 전달하였다. 숭정 무신년(1668, 현종 9) 정월 27일 여흥( 驪 興 ) 민정중( 閔 鼎 重 ) 20) 이 쓰다. (민공은 호가 노봉( 老 峰 )이다. 효종 무술년 19) 안진( 安 縝 ): 1617(광해군 9) 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竹 山 ). 자는 율보( 栗 甫 ), 호는 학촌( 鶴 村 ). 그는 1639년(인조 17) 사마시에 합격, 1652년(효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현종 초에 정언( 正 言 ) 영광군수 장령( 掌 令 ) 헌납(헌납) 등을 지냈다. 1664년(현종 5) 동래부사를 거쳐, 전주부윤을 지내고 1670년 동부승 지 형조참의 승지 병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674년과 1677년에는 동지부사( 冬 至 副 使 )로서 두 차 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숙종 6)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그 뒤 대사간 예조참판 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담백하고 검약하는 성품을 지녔으며 효행으로도 유명하고 문장에도 능하였다. 20) 민정중( 閔 鼎 重 ): 1628(인조 6)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 驪 興 ). 자는 대수( 大 受 ), 호는 노봉( 老 峯 ). 시호는 문충( 文 忠 ). 그는 1649년(인조 27)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 좌랑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사간원 정언 사간,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 사헌부 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 충 청도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병조참의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이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 호조 공조의 판
166 학예지 제19집 (1658, 효종 9) 가을에 본부에 취임했다가 기해년 봄에 채직되어 돌아갔다.) 충렬사지 권 7 화기( 畵 記 ) 상기한 그림 1건에서 성의 한가운데에 높이 서 있는 것은 객관( 客 館 )이다. 붉은 도포를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서 뜰 한가운데에서 북향하여 몸을 굽히고 있는 사람은 동래부사 송공으로 조용히 의에 나아가는 모습이다. 부사의 뒤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한 사람은 시종 신여로 이다. 관아의 담장을 타넘으면서 부사를 따르려고 하다가 적에게 잡힌 젊은 여인은 그의 첩 금섬이다. 그녀는 비록 기생이었지만 정렬( 貞 烈 )함이 있었다. 정원루( 靖 遠 樓 )는 객관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난간에 비스듬히 죽어 있는 이는 교수 노공과 제자 문생이다. 노교수는 이 고을에서 위판을 받들어 모시다가 전사하였으며, 제자 문생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또 양조한( 梁 潮 漢 )이라 하는 사람이 같이 전사했다고도 하지만 전하는 것이 상세하지 못해서 함께 서술하기가 곤란하다. 아! 조공( 趙 公, 조영규)은 양산군수로서 충분하고 강개한 인물로서 이곳에 와서 같이 전사하 였다. 그는 적에게 활을 쏘았는데, 적이 그의 팔을 잘라 버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살아 있는 듯하다. 몸소 의로움을 행하여 거리에서 전투하기도 하고 방어하기도 하다가 힘을 다해 적을 죽이기 도 하였으며 힘이 다해 전사하기도 하였다. 세 사람은 두 명의 비장과 한 명의 아전인데. 그들 의 이름은 김희수( 金 喜 壽 ) 송봉수( 宋 鳳 壽 ) 송백( 宋 伯 ) 등이다. 어떤 이는 지붕에 올라가 기 와를 던져 적을 죽였다. 두 여인은 그를 도와서 지붕에서 기와를 부수기도 하고, 기와를 전해주 기도 하였다. 장부도 장하지만, 그 여인들은 얼마나 기특한가! 장부는 김상이다. 여인은 어떤 서, 한성부윤 의정부 참찬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 許 積 ) 윤휴( 尹 鑴 )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숙종 5) 장흥( 長 興 )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그는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 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그는 호포( 戶 布 ) 등 여러 가지 일을 실행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수항( 金 壽 恒 )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그는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 碧 潼 )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그의 관작 이 회복되었다. 그 후 그의 묘소는 여주로 이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 노봉연중설화( 老 峯 筵 中 說 話 ) 임진유문 ( 壬 辰 遺 聞 ) 등이 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67 이의 아내이거나 딸이겠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슬프구나. 북문 밖에서 다급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 이가 있다. 그는 평시에 높은 벼슬을 하면 서 국가로부터 은혜와 영화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던가? 하루아침에 국가가 변을 당했는데 조 그마한 힘조차도 쓸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도망가서 구차히 살 궁리만 하는가? 가령 국가에 법이 있어 집행한다면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도 고을 사람들은 좌병사 이각을 수치스 럽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역사책을 읽을 때에 충신과 열사의 업적에 이르러서는 그 사람의 뼈가 썩고 그 사람의 제사가 없어져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와 관련이 된다면,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흐르는 눈물을 그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치가 본래부터 내 마 음에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 임금을 위하여 죽고 이 성을 지키다가 죽었다면 비분강개하 면서 더욱더 사모하는 것이다. 예전에 윤훤이 사당을 지어 송공을 제사하였고 민정중과 이지익( 李 之 翼 ) 21) 이 노인들에게 물 어서 그 사실을 채록하였고, 또 외할아버지 우재 송문정공에게 문장을 청하였으며, 선생은 그 일을 전하였다. 그리고 정석이 비석을 세워 그 글을 영원히 전달해주고 있다. 또 장차 이 일을 그림으로 그렸다. 지금 나는 고성의 남문 안에 조그마한 땅을 사서 사당을 짓고 조공 노공 문생을 사당에서 제사지내주었다. 왼쪽에는 익무( 翼 廡 )를 지어 김희수 이하 송백 등의 아전과 김상과 같은 백성들도 모두 참예시켰다. 그 비석을 옮겨서 뜰에다 두고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하였다. 그 집의 좌우에는 벽을 세워 서 화공으로 하여금 여러 사람들이 의를 지키다 전사한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아울러 이각이 도망하는 모습도 그 사이에 두었다. 또 성이 함락된 뒤에 남은 백성들이 적에게 아부하지 아니 하고 의로 일어나 적을 친 24명의 성명을 그 옆에 적어두었으며, 여러 사람들의 권선징악의 뜻으로 마무리하였다. 사당을 짓고서도 부족해서 부족하여 비석을 세웠고, 비석을 세운 것이 부족해서 또 그림을 21) 이지익( 李 之 翼 ): 1625(인조 3) 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평( 咸 平 ). 자는 여휘( 汝 輝 ), 호는 계촌( 桂 村 ). 그는 1652년(효종 3)에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675년(숙종 1) 사은 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그는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어 대사헌 참찬 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판서로 10여 건의 큰 사건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하였다. 1678년 판서 형조판서가 되고, 개성유수 한성판윤 함경감사 전 라감사 비변사당상 평안감사 등을 역임하고, 원접사( 遠 接 使 )로 네 차례나 의주를 왕래하였으며, 지돈녕부사가 되었 다가 기로소( 耆 老 所 )에 들어갔다. 조정에 있는 40년 동안 정국이 몇 번 바뀌었으나 시세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기 신념대로 시종일관하였다.
168 학예지 제19집 그렸으니 장차 이 이치를 가지고 마음을 삼는 자를 감동시키고자 하였다. 사람마다 어느 누가 이 마음이 없겠는가? 이 마음을 가진 자는 어찌 이 이치를 갖추지 않았겠는가? 어찌 이 그림을 보고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위해 죽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고을 사람들은 성이 처음 무너질 때에 적들이 성의 동쪽 산을 넘어서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만력 임진 후 180년에 기축년(1769, 영조 45) 겨울 11월 하순에 부사 권이진( 權 以 鎭 ) 22) 은 기록한다. 충렬사지 권 8 본부순절도서( 本 府 殉 節 圖 序 ) 예전에 임진년에 동래부 성이 함락되는 날에 부사 충렬공 송공, 양산군수 조공, 교수 노공, 비장 송봉수 김희수, 유생 문덕겸 등, 향리 송백, 노비 신여로, 송공의 첩 금섬, 고을 사람 김상 두 여인 등이 모두 순절한 곳이다. 큰 절개는 역사책에 적혀 있고 그 자세한 내용은 비석에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동래부의 백성들만이 지금까지 칭찬하는 것이겠는가? 우리 해동 사람들 은 그 누가 듣고서 모르겠는가? 그러나 상상을 해 보고 흥기하여도 오히려 눈으로 보고 감동한 것만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래부에는 예전부터 순절도가 있었는데 그 뜻이 여기에 있다. 펼쳐서 보면 조용히 조복을 입고 북향하고 단정하게 절을 하는 이는 송공이다. 잠시도 떨어지 지 아니하고 강개한 모습으로 같이 간 이는 양산군수 조공이다. 옆에서 모시면서 떠나지 않는 이는 노비 신여로이다. 옆에서 육박전을 하면서 혈전을 벌이는 이는 송 김 양 비장과 향리 송백 이다. 예를 갖추어 누 아래에서 위판을 받들고 절을 하는 이는 노교수와 두 유생이다. 담을 넘다가 목숨을 버린 이는 송공의 첩 금섬이다. 기와를 거두어서 적에게 던지는 이는 고을 사람 김상과 두 여인이다.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고 말에 뛰어올라 북으로 도망가는 자는 좌병사 이각이다. 지금은 임진년으로부터 약 200년이 흘렀는데도 사람의 이목을 비추어 어제 일처럼 생생한 22) 권이진( 權 以 鎭 ): 1668(현종 9) 1734(영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安 東 ). 자는 자정( 子 定 ), 호는 유회당( 有 懷 堂 ) 수만헌( 收 漫 軒 ). 시호는 공민( 恭 敏 ). 그는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다. 그는 율봉역( 栗 峰 驛 ) 김천역( 金 泉 驛 ) 찰방 승문원 부정자 정언 함평현령 전라도 도사 정언 홍문관 수 찬 설서 지평 사서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710년(숙종 36)에 동래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당론으로 인해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했으나, 1721년(경종 1) 좌의정 이광좌( 李 光 佐 )의 천거로 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8년(영조 4)에는 이인좌( 李 麟 佐 )의 난을 수습한 공으로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유회당집( 有 懷 堂 集 ) 이 있다.
충렬사지( 忠 烈 祠 志 ) 169 것은 이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보면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라 할지라도 충량한 마음 을 본받고 정렬한 행동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고, 모두 적 때문에 임금을 버린 일을 부끄러워하면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각각 성을 지키는 마음 이 있을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의리를 알 것이니, 이 한 폭의 그림이 견고한 성과 날카로운 무기보다 낫다. 아! 동래부가 어찌 하루라도 이 그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세월이 오래되어 더욱더 빛바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므로 내가 흐려지는 것을 우려 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읍의 화공 변박( 卞 璞 )으로 하여금 모사해서 새로 그리게 하였다. 만일 후세의 사람들이 현재 보기를 지금의 사람들이 옛날 보는 것과 같게 한다면 이 그림이 전해지는 것이 장차 무궁할 것이고 임진년간의 순절한 일도 천백 년이 지나도록 하루 같을 것이리다. 이 어찌 형상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없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충렬사에 보 관해서 후세 사람들을 기다린다. 숭정 기원후 133년 경진년(1760, 영조 36) 가을 상순에 지부 홍명한( 洪 名 漢 ) 23) 은 삼가 쓴다. 충렬사지 권 8 부산진순절도서( 釜 山 鎭 殉 節 圖 序 ) 아! 임진년 변란에 부산첨사 충장공 정공이 부산진에서 바다를 덮은 적들과의 전투에서 흑의 를 입고 있었다. 공은 성을 지키면서 충성스럽고 용맹하게 무수하게 적을 사살하였다. 그 결과 하루도 안 돼 적의 시신이 산처럼 쌓인 곳이 세 곳이나 되었다. 만일 공에게 열흘을 빌려주었 다면 적의 기세를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팔도를 유린하게 하였다. 공이 그 이튿날 탄환에 맞아서 전사한 것은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이 그림을 보면 천년 뒤에도 지사들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첩들조차도 같은 날에 목숨을 버렸으니 한 가정 안에서 용맹스럽고 감복한 일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임진년과는 거리가 23) 홍명한( 洪 名 漢 ): 1724(경종 4) 1774(영조 5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豊 山 ). 자는 군평( 君 平 ). 그는 문음( 門 蔭 )으로 입사( 入 仕 )하여 금부도사를 지냈다. 그는 재직 중에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특제( 特 除 )되었으며, 그 뒤 정언 수찬 교리 등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그는 1761년(영조 37)에 동래부사의 직책을 마친 후 대사간 승지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 형조참판 도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영조의 문예진흥책의 하나인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1770년(영조 46)에 동국문헌비고 간행 의 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170 학예지 제19집 오래되었다. 태평스러운 세상이지만 저들을 잊어서도 안 되며 이 땅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공을 계승하여 성을 지키는 자들은 모두 충성스럽고 용맹한 공을 스승으로 삼아서 준비하고 때를 기다린다면 순환하여 반복되는 하늘도 임진년의 일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서 하늘의 때를 얻는다면 공이 이루지 못한 업적도 이룰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순 절도가 영원히 전해진다면 어찌 훗날에 증험함이 되지 않겠는가? 다시 그려 보관함으로써 훗날 에 충성스럽고 용맹한 선비를 기다린다. 숭정 기원후 133년 경진년(1760, 영조 36) 가을 상순에 지부 홍명한이 삼가 쓴다.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1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 崔 氏 家 奴 들의 정변 주도와 崔 氏 武 人 政 權 의 몰락과 관련하여 - 金 大 中 * 목 차 1. 머리말 2. 家 奴 勢 力 의 政 變 主 導 3. 神 義 軍 의 불만과 軍 事 行 動 4. 鷹 揚 軍 의 政 變 가담 5. 맺는말 1. 머리말 1) 崔 忠 獻 이 세운 政 權 은 그가 죽은 후에도 崔 氏 家 로 4대에 걸쳐 이어졌다. 崔 忠 獻 은 崔 怡 에게, 崔 怡 는 崔 沆 에게, 崔 沆 은 崔 竩 에게 정권을 물려주면서 62년 동안 유지되었다. 최충헌은 정권을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었던 기반을 최이에게 물려주었다. 이러한 최씨집정의 승계는 대를 거듭 하면서 계속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최충헌은 집권이후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家 奴 와 같은 사적 무력기반을 유지하였으며, 이들 가노들은 최이, 최항을 거쳐 최의에 이르기까지 계속 승계 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노들은 결국 최씨무인정권을 무너뜨렸다. 최충헌 정권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무력기반 을 최씨가내에 물려주어 정치권력을 지속하려 했지만, 그 같은 노력은 4대 최의 대에 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258년 최씨 무인정권을 유지하는데 선봉적 역할을 하였던 家 奴 勢 力 이 神 義 軍 과 鷹 揚 軍 을 규합하여 최씨정권에 칼끝을 돌림으로서 최충헌이 열었던 최씨 무인정권은 그 막 을 내리게 되었다.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172 학예지 제19집 이 글은 최씨 무인정권의 몰락이 최충헌이 사적으로 물려주었던 가노들의 정변을 주도하였 다는 점에 주목하여 최충헌 정권의 성격을 생각해 볼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최씨 무 인정권의 몰락에 대해서는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결과 최씨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정 변의 명분으로 걸었던 왕정복고는 형식상에 그쳤으며, 집정무인만이 바뀐 채로 무인정권이 계 속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1) 아울러 최씨 정권의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崔 氏 家 의 家 奴 였 던 金 俊 과 그 一 派 였다는 점도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2) 이로 인해 무인정권사의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崔 竩 정권의 몰락을 무력기반의 해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본다면 그 正 體 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 권력의 변동에는 흔히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사력 내지는 무력을 소유한 집단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무인 집권시대의 정권 교체에는 그러한 실례가 더욱 많았다. 최의 정권이 몰락하게 된 정변도 예외는 아니었다. 崔 氏 家 의 家 奴 집단과 神 義 軍 그리고 鷹 揚 軍 이 정변 주도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최씨 정권의 명맥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던 집단 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최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필자가 궁금하게 여기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검토할 문제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金 俊 으로 대표되는 가노세력의 성장과 분열에 대해서 검토해 보고, 그들이 어떻게 정변을 주도하게 되는 지를 살펴보겠다. 다음은, 삼별초 가운데 신의군이 정변에 가담하여 군사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특히 신의군이 최의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는 다른 집단과의 연합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도 궁금하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국왕의 侍 衛 를 담당했던 응양군이 정변에 가 담한 과정과 그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이러한 검토는 정변에 가담한 무력을 소유한 집단들이 최씨정권의 명맥유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최충헌 정권의 유산과도 같 은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최충헌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한다. 1) 邊 太 燮, 武 臣 亂 과 崔 氏 政 權 의 成 立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2) 許 興 植, 1262 年 尙 書 都 官 貼 의 분석 韓 國 學 報 27 29, 1982. 洪 承 基, 崔 氏 武 人 政 權 과 崔 氏 家 의 家 奴 震 檀 學 報 53 54, 1982. 野 澤 佳 美, 金 俊 の 政 變 について 史 正 12, 1982. 金 塘 澤, 武 臣 政 權 時 代 의 軍 制 高 麗 軍 制 史, 陸 軍 本 部, 1984; 高 麗 武 人 政 權 硏 究, 1987. 鄭 修 芽, 金 俊 勢 力 의 形 成 과 그 向 背 - 崔 氏 武 人 政 權 의 崩 壞 과 관련하여 東 亞 硏 究 6, 西 江 大 東 亞 硏 究 所, 1985. 姜 在 光, 崔 氏 武 人 政 權 期 金 俊 崔 良 伯 勢 力 의 成 長 과 對 立, 西 江 大 석사학위논문, 2001.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3 2. 家 奴 勢 力 의 政 變 主 導 崔 氏 家 의 家 奴 3)였던 金 俊 4)은 최의 정권에서 일탈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4대 60여 년에 걸쳐 존속되었던 최씨 무인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김준이 왜 최의 정권에서 일탈 하였을까 궁금하다. 또한 어떻게 최씨정권을 몰락시키는 정변을 성공적으로 주도할 수 있었을 까 의문스럽다. 특히 그가 최씨가의 일개 가노였다는 점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 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기록을 검토하여 보자. A-1 俊 通 怡 嬖 妾 安 心 配 固 城 數 年 乃 還 怡 之 召 沆 爲 俊 後 有 力 焉 及 沆 襲 權 補 別 將 益 親 信 沆 死 竩 獨 任 崔 良 伯 柳 能 而 踈 俊 俊 心 不 平 及 吉 儒 之 敗 益 相 疑 貳 ( 高 麗 史 권130, 金 俊 傳 ). A-2 宋 吉 儒 ( 中 略 ) 起 於 卒 伍 高 宗 時 謟 事 崔 沆 爲 夜 別 抄 指 諭 ( 中 略 ) 累 遷 將 軍 尋 拜 御 史 中 丞 有 司 以 系 賤 不 署 告 身 沆 强 逼 乃 署 加 大 將 軍 爲 慶 尙 道 水 路 防 護 別 監 率 夜 別 抄 巡 州 縣 督 民 入 保 海 島 有 不 從 令 者 必 撲 殺 之 或 以 長 繩 連 編 人 頸 令 別 抄 等 曳 投 水 中 幾 死 乃 出 稍 蘇 復 如 之 又 慮 民 愛 財 重 遷 火 其 廬 舍 錢 穀 死 者 十 八 九 又 奪 人 土 田 財 物 脧 削 無 厭 按 察 使 宋 彦 庠 劾 報 都 兵 馬 使 其 黨 金 俊 等 私 謂 大 司 成 柳 璥 待 制 柳 能 曰 吉 儒 吾 所 善 聞 按 察 劾 書 已 至 都 堂 若 遽 發 勢 難 營 救 吾 將 乘 閒 白 令 公 庶 可 免 願 圖 之 令 公 指 崔 竩 也 璥 等 以 俊 兄 弟 昵 於 竩 不 得 已 陰 戒 堂 吏 停 禀 竩 舅 巨 成 元 拔 聞 之 以 告 竩 怒 流 吉 儒 于 楸 子 島 罵 璥 能 俊 等 曰 吾 以 爾 輩 爲 腹 心 何 專 擅 若 是 耶 皆 俯 伏 待 罪 及 俊 誅 竩 吉 儒 訴 彦 庠 於 俊 謀 害 之 王 以 彦 庠 嘗 有 功 命 赦 之 ( 高 麗 史 권122 宋 吉 儒 傳 ). A-1에서 알 수 있듯이, 가노 김준이 변질된 것은 최의가 정권을 잡고나서였다. 집권자인 최 의가 崔 良 白 과 柳 能 만을 가까이 하고 김준을 멀리하였던 것이다. 5)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은 宋 吉 儒 를 구제하려는 사건을 일으켜 최의와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A-2는 송길유 구제 사건의 전모를 담고 있다. 송길유는 원래 졸병 출신이었는데 최항에게 3) 최씨가는 많은 家 奴 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가노들은 최씨가에 최대의 충성과 봉사를 하였다. 이는 최씨가의 최대의 신임과 후원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들 가노들은 최씨가에서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정권의 유지를 위하 여 기여하였다. 특히 家 兵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기여는 최씨가의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洪 承 基, 위 논문 참조. 씨는 최씨가의 가노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검토하여 그 역할을 밝혔다. 4) 金 俊 의 初 名 은 金 仁 俊 이었다( 高 麗 史 130, 反 逆 4 金 俊 傳 ). 5) 洪 承 基 는 앞 논문에서 최씨가의 가노로서 崔 竩 와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유일한 사람으로 崔 良 白 을 들고 있다(씨 의 논문 85쪽). 그러나 여기에 柳 能 을 더 포함하여 생각할 수 있겠다. 유능은 최의가 최항으로 정권을 계승받을 때 도와 준 인물이었다. 또한 최의를 제거하려는 정변이 일어나려는 것을 알고선 이를 사전에 봉쇄할 목적으로 최의와 구체적인 대책을 세웠다. 더구나 마지막까지 최의와 生 死 를 함께 하였다.
174 학예지 제19집 아첨하여 야별초지유가 되었고, 마침내는 大 將 軍 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경상도 수로방 호별감에 재직할 때에 民 들을 가혹하게 침탈하였다. 그래서 안찰사 宋 彦 庠 의 탄핵을 받아 도병 마사까지 보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은 송길유를 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김준 과 송길유는 오래 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김준이 崔 怡 정권에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준 자가 바로 송길유였다. 6) 송길유가 김준을 추천한 것은, 김준이 원만한 성품과 무인적 기질을 소유한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김준은 이미 여러 사 람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김준의 힘만으로 송길유를 구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大 司 成 柳 璥 과 待 制 柳 能 에게 협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준은 집권자인 최의와 멀어지고 있던 점을 은폐 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유경과 유능은 김준과 최의가 여전히 親 信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 로 믿은 것 같다. 당시에 김준은 이미 최의의 자문자 역할을 한 최양백과 사돈을 맺고 있었다. 7) 김준이 송길유의 비행 사실을 유경과 유능을 통하여 수습하려던 사실이 巨 成 과 元 拔 8)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거성과 원발은 이같은 사실을 즉각 최의에게 보고하였다. 최의는 사건 전체 를 보고 받고 송길유를 추자도에 유배보내고, 유경과 유능 그리고 김준에게는 훈계로써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송길유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킨 김준으로선 어느 누구보다도 自 求 策 을 강구하게 되 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준의 자구책 모색은 최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장을 달리하여 후술하겠지만, 그것은 최의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다른 무력집단과 연결함으 로써 가능했다. 그러면 함께 정변에 뛰어 들었던 사람들은 김준과 어떤 관계에 있는 자들이었을까? 의문의 실마리를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B 俊 狀 貌 魁 岸 性 寬 厚 謙 恭 下 人 又 善 射 好 施 與 以 得 衆 心 日 與 遊 俠 子 弟 群 飮 家 無 所 儲 者 ( 高 麗 史 130, 叛 逆 金 俊 傳 ). 사료 B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준이 遊 俠 子 弟 와 더불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마셨다 라는 대 6) 高 麗 史 金 俊 傳 에는 朴 松 庇 宋 吉 儒 等 譽 於 崔 怡 怡 遂 倚 信 每 出 入 必 使 ( 金 ) 俊 扶 持 授 殿 前 承 旨 라고 기록되어 있다. 7) 高 麗 史 129 反 逆 3 崔 忠 獻 附 崔 竩 傳 8) 최의가 집권했을 때의 銓 注 權 은 待 制 柳 能, 門 客 崔 良 白 그리고 최의의 외삼촌인 巨 成 元 拔 등이 행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張 東 翼, 高 麗 後 期 銓 注 權 의 行 方 - 銓 注 參 與 官 僚 들을 中 心 으로- 大 丘 史 學 15 16, 1978.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5 목이다. 유협자제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9) 김준과 평소 이해관 계가 있는 인물들이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변에 끼어 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김준은 정변을 추진시키는 병력으로 최씨가의 家 兵 들을 동원하였다. 김준은 최씨가의 가노였지만, 무력을 행사하는 가병들의 家 兵 長 10)이었다. 가노집단들은 수명의 가병장들의 통 솔을 받고 있었다. 최씨가에서 가병장이었던 김준은 병력을 규합하는 데, 또 다른 가병장과 연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변을 추진하는 군사력을 보다 공고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家 兵 長 은 다름 아닌 李 公 柱 였다. 그러면 이공주가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 다. 특히 김준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 기록을 통해서 김준과 이공주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C-1 奴 等 白 竩 曰 公 柱 身 事 三 世 年 老 有 功 請 加 叅 職 乃 授 郞 將 奴 隷 拜 參 自 此 始 ( 高 麗 史 129, 叛 逆 3 崔 忠 獻 附 崔 竩 傳 ). C-2 ( 谷 州 新 恩 縣 ) 高 宗 四 十 六 年 以 衛 社 功 臣 李 公 柱 內 鄕 陞 知 覃 州 事 後 復 舊 名 還 屬 別 號 新 城 ( 高 麗 史 58, 地 理 志 3 西 海 道 黃 州 牧 ). C-1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공주가 최의 정권에서 參 職 을 받을대 이미 年 老 하였다는 점이다. 최씨가의 3대째를 섬겨온 이공주였다. 가노들이 그를 참직 제수에 강력히 추천한 것도 그 때문 이었다고 풀이된다. 최씨가와 苦 樂 을 함께 해온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공주는 최씨가에서 잔뼈가 굵어진 인물이었기에 어느 누구보다 최씨가의 실정에 밝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가노 들에게 代 父 격인 존재였다고 보인다. 김준이 이러한 이공주에게 접근하여 자문을 구한다거나, 이공주가 거느린 가병으로 병력을 증대시켰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더구나 이공 주는 최씨가를 3대에 걸쳐 섬겼던 인물이었고, 김준의 아버지 金 允 成 은 崔 忠 獻 에게 투탁한 노 비였다. 11) 같은 최씨가의 가노라는 점에서 서로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관계 9) 洪 承 基 는 앞 논문에서 遊 俠 子 弟 를 귀족 관료층을 포함한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는 자제들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씨의 이러한 추측은 최씨 무인정권시대의 노비들의 경제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金 俊 과 함께 정변에 가담한 인물 가운데 文 臣 인 柳 璥 과 崔 昷 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귀족 관료층에 포함될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10) 鄭 修 芽 는 앞 논문에서 崔 沆 이 家 兵 長 을 뽑을 때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는 가노를 선택하여 家 兵 長 을 삼았다고 하였다. 11) 高 麗 史 130, 反 逆 4 金 俊 傳
176 학예지 제19집 가 김준에게까지 지속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항이 정권을 계승받을 무렵 불안한 정국의 분위기를 이용해 上 將 軍 이었던 周 肅 이 왕정을 회복시키려 했을 때에도 이들은 행동을 같이 하 여 최항을 지지하였었다. 이들은 가노의 대표로 행동을 같이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공 주가 參 職 을 받을 때 가노들이 추천한 것도 김준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계로 김준에게 정변의 토대가 된 병력을 제공해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C-2는 이공주의 고향인 西 海 道 新 恩 縣 이 고종 46년(1259)에 知 覃 州 事 로 승격되었음을 알리 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정변이 성공한 후 이공주가 衛 社 功 臣 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준은 최의가 집권하면서 주변으로 소외되어 갔다. 특히 김준은 송길유 구제 사건을 일으켜 최의와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준은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는 쿠데 타를 모색하게 되었다. 정변은 먼저 가병장 이공주와의 제휴를 통해서 가능하였다. 다음은 최씨가의 일개 가노에 지나지 않았던 김준이 어떻게 정변을 성공적으로 주도하였을 까 궁금하다. 김준이 정변의 추진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은 문신을 포섭함으로써 가능하였 다. 大 司 成 柳 璥 과 樞 密 使 崔 昷 을 포섭하여 정변의 선두에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면 유경과 최온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보겠다. 아울러 이들이 김준의 포섭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검토할 것이다. 정변의 선봉에 섰던 유경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유경 12) 은 文 化 柳 氏 로서 그의 가문은 柳 州 縣 의 吏 族 에서 무반으로, 그리고 무인정권이 들어 12) 文 化 柳 氏 世 譜 는 修 譜 에 따라 아래의 것들이 있다( 文 化 柳 氏 世 系 譜 卷 5 目 次 ) 분류 분류 내용 編 纂 人 卷 數 始 役 完 役 西 紀 내용 編 纂 人 卷 數 始 役 完 役 西 紀 修 譜 名 修 譜 名 永 樂 譜 嘉 靖 譜 己 巳 譜 庚 申 譜 乙 酉 譜 柳 穎 1 世 宗 5 年 1423 柳 希 潛 10 中 宗 37 年 明 宗 17 年 1562 柳 處 厚 5 肅 宗 9 年 肅 宗 15 年 1689 柳 煥 文 13 英 祖 16 年 英 祖 18 年 1765 柳 道 行 13 英 祖 18 年 英 祖 41 年 1765 丁 巳 譜 甲 子 譜 丙 寅 譜 甲 寅 譜 丙 辰 譜 柳 秉 均 27 正 祖 21 年 純 祖 3 年 1803 柳 昇 基 37 哲 宗 13 年 高 宗 1 年 1864 柳 寅 哲 60 癸 亥 5 月 丙 寅 3 月 1926 柳 根 榮 15 庚 戌 4 月 甲 寅 2 月 1974 柳 根 榮 17 甲 寅 7 月 丙 辰 8 月 1976 이 가운데 嘉 靖 譜 는 國 文 學 ㆍ 國 史 學 등에 이용될 수 있는 자료가 있어 주목된다. 또한 文 化 柳 氏 世 系 譜 (대전: 文 化 柳 氏 世 系 譜 編 修 委 員 會, 1984)가 5 卷 으로 편찬되어다. 한편 文 化 柳 氏 의 族 譜 를 연구한 川 島 藤 也 (가와시마 후지야)가 있다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7 설 무렵부터 文 班 化 한 가문이었다. 유경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보자. D-1 柳 璥 字 天 年 一 字 藏 之 政 堂 文 學 公 權 之 孫 高 宗 朝 登 第 累 遷 至 國 子 大 司 成 璥 久 在 政 房 與 兪 千 遇 俱 爲 崔 沆 所 厚 ( 高 麗 史 권105 柳 璥 傳 ). D-2 沆 子 竩 累 世 用 事 擅 威 福 時 又 連 凶 荒 餓 莩 相 枕 竩 不 發 倉 賑 貸 由 是 大 失 人 心 璥 遂 與 金 俊 等 謀 誅 一 日 俊 等 詣 璥 議 璥 不 敢 顯 言 令 家 人 進 杏 子 一 椀 俊 等 拜 曰 已 諭 蓋 杏 與 幸 聲 相 近 也 高 麗 史 권105 柳 璥 傳 ). D-3 誅 竩 歸 政 王 室 王 謂 璥 曰 卿 等 爲 寡 人 立 非 常 之 功 ( 中 略 ) 唯 以 上 將 軍 仍 右 副 承 宣 賜 推 誠 衛 社 功 臣 號 又 賜 米 二 百 石 彩 段 百 匹 甲 第 土 田 後 因 宰 樞 奏 爵 其 子 六 品 給 田 一 百 結 奴 婢 各 十 五 口 陞 其 鄕 儒 州 監 務 爲 文 化 縣 令 高 麗 史 권105 柳 璥 傳 ). D-4 右 別 將 金 仁 俊 同 心 衛 社 爲 白 在 郎 將 朴 希 實 李 延 紹 隊 正 金 承 俊 將 軍 朴 宋 庇 大 司 成 柳 卿 承 旨 同 正 金 大 材 金 用 材 金 植 材 郎 將 同 正 車 松 祐 郎 將 林 衍 李 公 柱 中 郎 將 金 洪 就 等 乙 良 直 子 一 名 乙 東 西 班 勿 論 七 品 直 子 無 在 如 亦 中 內 外 孫 甥 姪 女 壻 中 一 名 乙 東 班 是 去 等 九 品 西 班 是 去 等 校 尉 爲 等 如 差 備 爲 良 於 爲 敎 矣 田 丁 乙 良 各 田 畓 幷 五 十 結 奴 婢 幷 十 口 式 以 賜 給 爲 良 於 爲 敎 是 齊 丘 史 三 人 乙 良 眞 拜 把 領 五 人 乙 良 許 初 入 仕 爲 良 於 敎 矣 ( 文 化 柳 氏 世 譜 - 嘉 靖 版 -). D-5 璥 旣 誅 ( 崔 ) 竩 奏 置 政 房 于 便 殿 側 掌 銓 注 凡 國 家 機 務 皆 決 焉 ( 高 麗 史 권105 柳 璥 傳 ) D-6 俊 弟 承 俊 自 以 爲 功 高 秩 卑 心 常 怏 怏 璥 聞 之 謂 承 俊 曰 以 公 之 功 雖 一 日 九 遷 可 也 然 循 資 除 授 國 家 常 典 公 以 隊 正 越 四 等 授 中 郞 將 不 可 謂 不 超 遷 也 承 俊 益 銜 之 俊 每 入 闕 必 謁 璥 直 廬 承 俊 獨 不 爾 ( 中 略 ) 璥 多 置 甲 第 權 勢 日 熾 門 庭 如 市 承 俊 林 衍 等 諸 功 臣 忌 之 譖 于 俊 諷 王 王 欲 奪 其 權 罷 璥 承 宣 除 簽 書 樞 密 院 事 囚 璥 所 善 將 軍 禹 得 圭 梁 和 指 諭 金 得 龍 郞 將 慶 元 祿 璥 謂 俊 曰 公 始 與 璥 同 心 擧 義 復 政 王 室 親 如 骨 肉 善 譖 者 不 能 閒 豈 圖 今 日 反 如 是 耶 俊 愧 謝 承 俊 林 衍 等 不 言 而 退 遂 殺 得 圭 和 得 龍 流 元 祿 于 遠 島 ( 高 麗 史 권105 柳 璥 傳 ). D-7 流 璥 于 黑 山 島 籍 其 家 璥 子 行 首 陞 及 珽 悅 並 流 海 島 高 麗 史 권105 柳 璥 傳 ). ( 權 延 雄, 美 國 內 의 韓 國 史 硏 究 慶 北 史 學 2, 1980). 韓 永 愚, 미국내 한국 신분자료 및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동향에 대한연구 韓 國 史 論 13, 서울 大, 1985에 있어 참고된다. 三 川 藤 也 의 하버드 대학 박사학위 논문인 Clan Structure and Political Power in Yi Dynasty Korea: A Case Study of Munhwa Yu Clan, 1972이 文 化 柳 氏 에 보이는 氏 族 의 移 動 과 그 性 格 - 儒 敎 的 官 僚 體 制 와 血 統 集 團 - 이라는 제목으로 朝 鮮 學 報 70에 일부 실려 있다.
178 학예지 제19집 유경은 正 堂 文 學 을 지낸 유공권의 손자였다. 고종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13) 국자대사성까지 지냈다. 그는 正 房 에서 오랜 동안 인사를 담당하였다. 또한 최항의 각별한 대우를 받은 인물이 었다( D-1). 이로 미루어 보다 최항의 門 客 14)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최의 집권기에 송길유 구제 사건에 연루된 유경은 김준과 함께 최의 제거에 뛰어들었 다. 김준 등이 유경의 집에 가서 제의했던 정변 거사에 동의한 것이다(D-5). 김준이 유경을 정변에 끌어들인 까닭은 자신이 賤 出 이라는 한계성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천출로서 정변의 선봉장이 되어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기란 걸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의를 제거한 직후에 유경은 인사권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기무를 결정한 정방을 장악하고 있었다(D-5). 그리고 衛 社 功 臣 號 와 여러 혜택을 받았다. 유경의 아들에게 6품을 爵 하고, 토지 100 蒛 노비 각 15 口 를 分 給 하여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위사공신 가운데 유경의 서열은 1위였다. 그런데 유경이 실제로 지급받은 D-4)의 기록에는 아들에게 6품이 아닌 7품이 주어지 고, 전답도 100결이 아닌 50결만이, 노와 비도 각각 15구가 아니라 총 10구만이 분급되었다. 이는 당시 유경의 공신 서열이 6위로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공신 서열의 변화가 포상의 삭 감을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D-6)의 기록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유 경은 김준의 동생인 金 承 俊 과 官 秩 문제로 사이가 멀어져 갔다. 김승준은 자신의 관직이 낮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정변에 뛰어든 것에 대한 보상이 너무 작은 것으로 생각한 데 서 오는 불만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당시 김승준은 위사공신에도 들지 못하였다. 그는 인사 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경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였다. 그러나 유경은 김승준이 隊 正 에서 4단 계나 위인 中 郞 將 을 준 것도 크게 승진시켜 준 것이라 하여 그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유경의 이 같은 조처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김준 세력의 부상을 억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 다. 이러한 유경의 조처에 대해 김승준은 자신의 불만을 김준에게 토로하였을 것이다. 김준 또한 이를 계기로 유경의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유경의 심복인 禹 得 圭 梁 和 金 得 龍 을 죽이 고 慶 元 祿 을 보낸 것이다. 그 이후 유경은 林 衍 집권기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5) 추밀사였던 최온이 정변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 이것은 김준이 최온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아래 E사료에 주목하기로 하자. 13) 고려 高 宗 代 과거 급제자에 대해서는 姜 芝 嫣, 高 麗 高 宗 朝 科 擧 及 第 者 의 政 治 的 性 格 白 山 學 報 33, 1986 참조. 14) 門 客 에 대해서는 朴 菖 熙, 崔 氏 政 權 下 門 客 의 性 格 에 대하여 第 19 回 全 國 歷 史 學 大 會 紀 要, 1976 참조. 15) ( 元 宗 ) 十 五 年 卒 年 七 十 九 謚 文 正 ( 高 麗 史 105, 柳 璥 傳 )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79 E 仁 俊 曰 如 此 大 事 不 可 無 主 者 可 推 大 臣 有 威 望 者 以 領 衆 卽 召 樞 密 使 崔 昷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竩 傳 ). 김준이 군중을 통솔할만한 威 望 있는 자를 물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변을 주도해 나갈 적격의 인물로 유경을 내세웠었다. 그런데 또 다시 추대 형식으로 최온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러한 김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다음 사료 F의 검토를 통하여 그 저의를 알 수 있다. F 崔 沆 嘗 娶 大 卿 崔 昷 女 以 有 疾 棄 之 改 娶 承 宣 趙 季 珣 女 ( 高 麗 史 節 要 高 宗 37 年 5 月 ). 위 F사료에서, 최온은 최항의 장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항이 최온의 딸이 병이 있다는 이유로 버리고 承 宣 趙 季 珣 의 딸과 재혼하였다. 이 같은 최항의 재혼은 장인이었던 최 온이 최씨가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최온은 최항을 이은 최의 정권에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최씨가의 가노였던 이공주나 김준은 최온의 이러한 입장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 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김준은 최온에게 접근하여 정변의 세력을 규합하는데 이용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정변이 성공한 이후에 대사성 유경에게 주어질 평가를 약화시키 기 위해서도 또 다른 인물의 추대가 필요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유경과 최온의 문신으로 서의 사회적 지위를 견주어 봄으로써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유경의 가문은 앞서 살펴 보았듯이, 무인 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줄곧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 한 가문이었다. 무반 가문에서 문반화한 가문인 것이다. 반면에 최온의 鐵 原 崔 氏 가문 16) 은 先 祖 때부터 전통적인 고려의 문벌 귀족이었다. 그의 선조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G-1 崔 惟 淸 字 直 哉 昌 原 郡 人 六 世 祖 俊 邕 佐 太 祖 爲 功 臣 父 奭 初 名 錫 擢 魁 科 事 文 順 宣 三 朝 位 至 守 太 保 門 下 侍 郞 同 中 書 門 下 平 章 事 判 吏 禮 部 事 謚 譽 肅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傳 ). G-2 惟 淸 少 孤 嗜 學 睿 宗 時 登 第 乃 曰 儒 者 當 學 古 入 官 遂 杜 門 讀 書 不 求 仕 宦 有 薦 者 辭 以 學 未 就 後 被 薦 直 翰 林 院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傳 ). 16) 이에 대한 논고는 朴 龍 雲, 高 麗 時 代 의 定 安 任 氏 鐵 原 崔 氏 孔 巖 許 氏 家 門 分 析 - 高 麗 貴 族 家 門 硏 究 (2)- 韓 國 史 論 叢 3, 1978참조.
180 학예지 제19집 G-3 鄭 仲 夫 之 亂 文 臣 皆 被 害 諸 將 素 服 惟 淸 德 望 戒 軍 士 勿 入 其 第 以 至 期 功 之 親 俱 免 禍 ( 中 略 ) 自 幼 至 老 手 不 釋 卷 經 史 子 集 靡 不 該 通 又 酷 好 浮 圖 日 誦 佛 經 所 至 學 生 沙 門 質 問 者 坌 集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傳 ). G-4 讜 少 聰 悟 善 屬 文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附 崔 讜 傳 ). G-5 璘 器 局 宏 深 少 不 護 細 行 與 豪 俠 子 薄 遊 蒱 酒 閒 年 幾 三 十 始 發 憤 讀 書 康 宗 朝 登 第 歷 臺 諫 ( 中 略 ) 嘗 再 知 貢 擧 號 稱 得 士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附 崔 璘 傳 ). G-6 詵 明 宗 時 爲 右 司 諫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附 崔 詵 傳 ). G-7 宗 峻 神 宗 四 年 擢 魁 科 高 宗 朝 累 官 至 左 承 宣 ( 中 略 ) 宗 峻 欲 令 其 子 試 之 國 子 正 錄 以 非 試 日 不 聽 宗 峻 屬 崔 瑀 請 之 乃 得 試 時 人 譏 之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附 崔 宗 峻 傳 ). 철원 최씨의 시조인 崔 俊 邕 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공신이 된 인물이다. 그 후 5대 孫 인 崔 奭 이 出 仕 하기 시작하면서 정계에 발을 내딛었다(G-1). 그리고 6대 손인 崔 惟 淸 은 학문에 전념 하여 直 翰 林 院 이 되었다. 특히 그의 학문은 經 史 子 集 에 걸쳐 통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G-2). 7대 손인 崔 讜 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崔 詵 은 명종때 右 司 諫 을 지냈다(G-6). 8대 손인 崔 璘 도 뒤늦게나마 글을 읽었지만, 출사하여 臺 諫 을 지냈고 두 번이나 知 貢 擧 가 되어 선비를 얻었다(G-5)는 것으로 보아 최온의 가문이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임을 알 수 있다. 무신난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최유청은 다른 문신과는 달리 오히려 무신들의 보호를 받았다 (G-3). 崔 瑀 가 집권하던 시대에도 崔 宗 峻 은 정기 시험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우와 통하여 아들을 시험에 응시케 할 수 있었다(G-7). 최씨가와 매우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 듯이, 최온이 최항의 장인이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다음은 최온 개인에 대한 아래의 기록을 보자. H-1 ( 崔 ) 昷 氣 度 雄 偉 倜 儻 敢 言 善 斷 事 高 宗 朝 登 第 官 累 樞 密 使 ( 高 麗 史 권99 崔 惟 淸 附 崔 昷 傳 ). H-2 金 俊 謀 誅 崔 竩 邀 與 計 議 昷 子 牽 龍 行 首 文 本 與 中 郞 將 李 柱 散 員 分 泰 校 尉 朴 瑄 隊 正 兪 甫 等 密 爲 書 通 于 竩 及 誅 竩 籍 其 家 得 書 一 通 乃 文 本 洩 俊 謀 也 ( 同 上 ).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81 H-3 ( 金 ) 俊 與 柳 璥 請 殺 文 本 等 王 曰 此 輩 狂 惑 唯 啚 目 前 何 知 大 義 赦 之 可 也 然 卿 等 有 請 可 流 之 璥 等 固 請 王 曰 必 欲 殺 之 何 更 聞 卿 等 可 自 爲 之 乃 起 入 內 璥 等 伏 地 謝 罪 遂 流 文 本 于 島 ( 中 略 ) 俊 等 力 請 王 不 得 已 流 黑 山 島 ( 同 上 ). H-4 ( 崔 ) 昷 嘗 與 河 千 旦 李 淳 牧 同 在 誥 院 河 李 俱 有 文 名 ( 同 上 ). H-1에 의하면, 최온은 氣 度 가 雄 衛 하고 뛰어난 자질로 말을 과감히 하고 일을 잘 결단한 인 물이었다. 때문에 文 翰 官 으로서 주로 元 과의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 었던(H-4) 것이 아닐까 싶다. 17) 김준은 이러한 능력을 갖춘 최온을 포섭의 대상자로 주목했던 것이다. 김준의 최온 포섭은, 최온이 최씨정권과 등을 돌린 상태를 포착하여 가능하였던 것으 로 보인다. 포섭의 의도는 정변에 가담한 사람들의 세력을 규합하려는 데 있었다. 더구나 정변 의 공로가 유경에게 편중될 것을 막을 수 있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기에 최온을 추대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최온이 고려 전기부터 문벌 귀족 가문이었고, 정변 당시에 추밀사로 宰 樞 였던 점으로 보아 문신으로서 사회적 지위도 유경에게 뒤질 바 없는 인물이었던 점으로 알 수 있다. 사실 최의와 그 측근세력을 제거한 직후, 최온은 유경 김준과 함께 왕실을 회복시킨 장본인으 로 대두하였다. 그러나 정변이 있은 지 3개월 후인 6월에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H-3). 아들인 崔 文 本 이 정변 거사 계획을 최의에게 밀고하였던 것이 뒤늦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H-2). 최온에 대한 이러한 조처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준의 아들인 金 大 材 가 정변의 거사 계획을 장인인 최양백에게 알린 것이 그대로 최의에게 보고하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러하다. 고의적으로 밀고한 최문본과는 동기부터가 달랐기 때문이겠지만, 18) 김대재에 대해서 는 그 책임을 전혀 묻지 않았다. 이로 보아 김준의 최온 포섭과 정변 직후의 행동은 일시적인 계책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상에서 김준의 문신 포섭 활동을 살펴보았다. 포섭된 인물은 대사성 유경과 추밀사 최온이 었다. 유경은 김준이 일으킨 송길유 구제 사건에 말려들어 자구책을 구하고 있었던 때, 김준의 거사 계획을 스스럼없이 받아 들였음을 알았다. 17) 史 料 J-4)에 보이는 誥 院 은 知 制 誥 들이 모여 왕명에 따라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곳이었다. 邊 太 燮, 高 麗 의 文 翰 官 金 哲 埈 博 士 華 甲 記 念 史 學 論 叢, 지식산업사, 1981. 18) 필자의 소견으로는 아마도 金 大 材 가 장인되는 崔 良 白 을 정변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정변의 계획을 풀어 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崔 良 白 은 金 俊 과는 사돈이었지만, 최항이 죽고 최의가 정권을 이어 받을 때 최항의 유언대로 최의의 襲 權 을 輔 導 한 인물이다.
182 학예지 제19집 최온의 가문은 원래부터 최씨가와는 밀접하였다. 최온도 최항의 장인이었다. 그런데 딸이 병이 있다하여 최항이 내쫓고 재혼하면서부터 최씨가에 반감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고 생 각되었다. 때문에 김준의 추대를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김준이 문신을 포섭하여 정변에 앞세운 것은 김준이 賤 出 이라는 신분의 한계성을 느껴서였다. 그러나 문신 가운데 유경에 비길 만한 인물로 최온을 내세운 것은 정변에 가담한 세력을 보다 용이하게 결집시키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정변이 성공한 이후에 유경 1인에게 功 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려도 의도도 있지 않았을 까 여겨진다. 3. 神 義 軍 의 불만과 軍 事 行 動 김준이 최의 정권에서 일탈하여 대사성 유경과 추밀사 최온을 포섭하여 정변을 일으켰음을 알았다. 그런데 김준을 위시한 가노집단 이외에도 최의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다른 군사집단 이 있었다. 최의 정권의 무력 기반이 되었던 三 別 抄 가운데 神 義 軍 이라는 군사조직이었다. 다음 사료가 이를 알려 준다. I-1 神 義 軍 都 領 郞 將 朴 希 實 指 諭 郞 將 李 延 紹 密 謂 璥 仁 俊 承 俊 公 柱 將 軍 朴 松 庇 都 領 郞 將 林 衍 隊 正 朴 天 湜 別 將 同 正 車 松 祐 郞 將 金 洪 就 仁 俊 子 大 材 用 材 式 材 等 曰 竩 親 近 憸 小 信 讒 多 忌 不 早 爲 之 所 吾 曹 恐 亦 不 免 遂 定 計 約 以 四 月 八 日 因 觀 燈 擧 事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竩 傳 ). I-2 ( 前 略 ) 又 以 國 人 自 蒙 古 逃 還 者 爲 一 部 號 神 義 是 爲 三 別 抄 ( 高 麗 史 81, 兵 志 1 兵 制 元 宗 11 年 5 月 ) 신의군의 都 領 郎 將 인 朴 希 實 과 指 諭 郎 將 인 李 延 紹 가 먼저 柳 璥 金 俊 金 承 俊 李 公 柱 朴 松 庇 林 衍 朴 天 湜 車 松 祐 金 洪 就 金 大 材 金 用 材 金 式 材 에게 비밀리에 정변을 제의하고 있다. 신의군 이 어떤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던 듯하다. I-1의 기록에서 이들 신의군이 생명의 위협 까지 느끼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집권자인 최의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음을 면하 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료만으로도 신의군은 최의 정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고 있던 존재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신의군은 몽고에서 포로로 갔다가 도망쳐온 일부로써 조직한 부대였다(I-2). 따라서 신의군의 구성원은 이전부터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83 반면에 夜 別 抄 는 어떠하였을까? 최의는 김준 일파와 신의군의 거사 계획을 이미 보고 받고 서 야별초를 동원하여 대책을 강구하려 했다. 아래 J사료를 통하여 집권자 최의와 야별초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J 大 材 以 希 實 等 謀 告 良 伯 良 伯 佯 應 以 告 ( 崔 ) 竩 崔 竩 急 召 柳 能 計 議 時 日 已 暮 能 曰 暮 夜 無 能 爲 請 以 書 諭 夜 別 抄 指 諭 韓 宗 軌 遲 明 召 李 日 休 等 勒 兵 討 仁 俊 未 晩 也 竩 然 之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竩 傳 ). 최의는 정변을 주동한 신의군을 역습하려는 데 주로 야별초의 병력을 동원하려했다. 야별초 는 여전히 최씨 정권을 지탱해 주는 무력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신의군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의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19) 이러한 신의군이 최의 정권에 대립하여 정변을 主 動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와 관련하여 삼별초가 최씨가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나를 먼저 검토하기로 하자. 이를 알 수 있는 구체적 인 기록은 없다. 다만 아래의 기록을 통해서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K. 崔 瑀 憂 國 中 多 盜 聚 勇 士 每 夜 巡 行 禁 暴 因 名 夜 別 抄 及 盜 起 諸 道 分 遣 別 抄 以 捕 之 其 軍 甚 衆 遂 分 爲 左 右 ( 中 略 ) 權 臣 執 柄 以 爲 爪 牙 厚 其 俸 祿 或 施 私 惠 又 籍 罪 人 之 財 而 給 之 故 權 臣 頤 指 氣 使 爭 先 効 力 金 浚 之 誅 崔 竩 林 衍 之 誅 金 浚 松 禮 之 誅 惟 茂 皆 籍 其 力 ( 高 麗 史 81 兵 志, 兵 制 元 宗 11년 5 月 ). 삼별초는 녹봉을 후하게 받고, 사사로운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죄인들의 몰수한 재산까지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융숭한 대우를 받은 삼별초는 힘을 다하여 최씨가에 충성을 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 혜택을 받았다는 삼별초는 구체적으로 야별초가 아닐까 한다. 야별초였던 송길유가 入 保 海 島 를 督 勵 할 때 백성들에게 잔학하게 했던 사실이나 20) 야별초가 죄인들을 고 문하는데 동원되었던 것은 죄인들의 몰수한 재산을 삼별초가 받았다는 K의 기록과 전혀 무관 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한 창설 시기로 보아도 신의군은 최씨가에게 그런 융숭한 대우를 받 기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특히 신의군이 창설된 최항 집권기에는 녹봉을 후하게 받을 수 없었 다. 21) 더구나 야별초와 신의군의 창설 동기나 목적, 그리고 그들의 최씨가에서의 임무를 보아 19) 許 興 植 씨는 앞 논문에서 신의군과 야별초를 대립관계에서 파악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신의군과 최의 정권 과의 대립이었다고 할 것이다. 야별초는 최씨 정권의 手 足 처럼 무력을 행사하는데 이용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20) 이에 대해서는 尹 龍 爀, 고려의 海 島 入 保 策 과 몽고의 戰 略 變 化 - 麗 蒙 戰 爭 전개의 一 樣 相 - 歷 史 敎 育 32 참조.
184 학예지 제19집 도 신의군이 야별초에 크게 뒤진다는 인상이 짙다. 주지하다시피 야별초는 盜 가 많았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이용하여 崔 怡 가 그의 정적들을 제 어할 목적으로 조직했다. 따라서 야별초는 철저하게 최이의 사병으로 이용되었다. 그런 야별초 는 대신 군인전도 지급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신의군은 당시 팽배하고 있던 몽고와의 강화에 대한 여론을 묵살하기 위하여 최항이 일시적으로 조직하였다. 22) 신의군의 창설은 최씨가의 대 민지배를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일시적으로 조직된 신의군은 최씨가에서 임무나 역할에 있어서 열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처우도 자연히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 신의군 과 야별초의 활동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L-1 ( 高 宗 四 十 一 年 八 月 癸 酉 ) 慶 尙 全 羅 二 道 各 遣 夜 別 抄 八 十 人 守 衛 京 城 ( 高 麗 史 권24, 世 家 高 宗 41 年 8 月 ). L-2 ( 高 宗 四 十 年 十 一 月 辛 卯 ) 王 渡 江 迎 于 昇 天 新 闕 夜 別 抄 八 十 人 衷 甲 以 從 ( 高 麗 史 24, 世 家 高 宗 40 年 11 月 ). L-3 沆 死 殿 前 崔 良 白 秘 不 發 喪 ( 中 略 ) 會 夜 別 抄 神 義 軍 書 房 三 番 都 房 三 十 六 番 擁 衛 乃 發 喪 ( 高 麗 史 129, 叛 逆 3 崔 忠 獻 附 崔 沆 傳 ). L 群 의 사료는 정변 이전의 야별초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야별 초는 수도방어를 담당하였다(L-1). 이 때 경상 전라에서 야별초를 보냈다는 점으로 보아 그 조 직이 전국에 걸쳤던 것 같다. 또한 국왕의 친위를 맡기도 하였다(L-2). 23) 그런데 신의군은 최항 이 죽고 최의가 정권을 이을 무렵 불안한 정국의 상황을 은폐하여 發 喪 하는 데 옹위하는 임무 21) 고려의 財 政 難 은 몽고의 침탈로 더욱 어려워졌다. 고종 40년(1253) 이후의 상황은, 고려의 왕실 재정이 그 한계를 드러 내게 되었다. 이러한 재정 궁핍 추세는 정변이 일어나기 전인 고종 44년(1257)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던 것을 다음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高 宗 47 年 6 月 ) 宰 樞 會 議 分 田 代 祿 遂 置 給 田 都 監 ( 高 麗 史 78 食 貨 志 1 田 制 祿 科 田 ) 宰 樞 가 회의하여 田 土 를 分 給 하여 祿 俸 에 대신하도록 하고 給 田 都 監 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 史 料 가 시사하는 것은 국 가에서 관리에게 주던 녹봉을 계속 지급할 수 없는 위기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러한 고려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한 代 案 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 祿 科 田 이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고로는 深 谷 敏 鐵, 高 麗 祿 科 田 考 朝 鮮 學 報 48, 1968과 閔 賢 九, 高 麗 의 祿 科 田 歷 史 學 報 53 54, 1972; 朝 鮮 史 論 文 選 集 ( 高 麗 篇 ).. 22) 金 塘 澤, 앞 논문 23) 본래 국왕의 親 衛 侍 衛 는 鷹 揚 軍 의 임무였다. 이 점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다.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85 를 수행하고 있는 것만이 보인다(L-3). 이 때에는 신의군만이 아니라 야별초를 비롯한 書 房 6 番 과 都 房 36 番 도 가담하였던 것이다. L군의 사료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신의군의 활동 영역이 나 규묘가 야별초에 비해 작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변이 성공을 거둔 후에도 야별초가 주로 활동하고 있음이 다음 기록에서 드러난다. M-1 幸 王 輪 寺 各 番 都 房 夜 別 抄 神 義 軍 書 房 殿 前 擁 駕 而 行 觀 者 感 泣 ( 高 麗 史 권24, 世 家 高 宗 45 年 夏 4 月 辛 卯 ). M-2 別 賜 夜 別 抄 神 義 軍 人 米 三 斛 銀 一 斤 布 三 匹 ( 高 麗 史 권24, 世 家 高 宗 45 年 夏 4 月 丁 酉 ). M-3 蒙 兵 候 騎 一 千 入 遂 安 界 遣 夜 別 抄 禦 之 ( 高 麗 史 권24, 世 家 高 宗 45 年 夏 4 月 辛 丑 ). M-4 暉 黨 自 稱 官 人 引 蒙 古 兵 來 攻 寒 溪 城 防 護 別 監 安 洪 敏 率 夜 別 抄 出 擊 盡 殲 之 ( 高 麗 史 권130 趙 暉 傳 ). M-5 衍 分 遣 夜 別 抄 捕 俊 諸 子 及 其 黨 皆 斬 之 ( 中 略 ) 衍 欲 拒 命 遣 夜 別 抄 于 諸 道 督 民 入 居 島 ( 中 略 ) 衍 所 遣 夜 別 抄 至 慶 尙 道 督 民 入 保 海 島 高 麗 史 130 林 衍 傳 ). M 群 의 사료에서도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것은 신의군에 관한 기록이 야별초에 비해 소략하 다는 점이다. 정변 직후 신의군은 야별초와 各 番 都 房 및 書 房 과 함께 국왕의 王 輪 寺 행차를 옹위하고 있다(M-1). 또한 야별초와 더불어 米 3곡 銀 1근 布 3필을 포상으로 받았다. 최씨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가담한 보상으로 취해진 조처였던 것이다. 한편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몽고에 대항하여 전투를 전개한 것은 야별초였음을 M-3ㆍ4 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임연이 김준을 제거할 때 동원된 군사 집단도 삼별초 가운데 구체적으론 야별초였다. 야별초는 海 島 에 民 들을 강제로 入 保 시켰다(M-5). 이미 야별초였던 송길유가 최씨가의 지시를 받고 民 들을 강제로 입보시키려 하다가 많은 무리를 빚은 적도 있었 다. 야별초가 강력한 무력을 소유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무인 집정자들이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야별초의 활동 영역이나 규모가 신의군에 비해 월등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제는 신의군에 대한 궁금증 가운데 정변의 진행 과정에서 군사행동은 어떠하였는지 살펴 보자. 신의군은 김준 일파와 연합함으로써 최의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하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186 학예지 제19집 N 仁 俊 率 子 弟 趨 神 義 軍 見 希 實 延 紹 云 事 洩 不 可 猶 豫 乃 召 集 向 所 與 謀 者 及 別 將 白 永 貞 隊 正 徐 挺 李 梯 林 衍 使 衍 及 指 諭 趙 文 柱 吳 壽 山 捕 宗 軌 殺 之 又 召 指 諭 徐 均 漢 等 會 三 別 抄 于 射 廳 使 人 呼 於 道 曰 令 公 死 矣 聞 者 皆 集 璥 與 松 庇 等 亦 至 仁 俊 曰 如 此 大 事 不 可 無 主 者 可 推 大 臣 有 威 望 者 以 領 衆 卽 召 樞 密 使 崔 昷 昷 至 又 邀 朴 成 梓 議 之 仁 俊 召 良 伯 未 及 升 堂 別 抄 兵 以 炬 燒 口 遂 斬 之 衍 又 斬 日 休 于 其 家 仁 俊 令 竩 門 卒 不 報 更 籌 分 隊 伍 於 廣 場 燃 松 明 如 晝 衆 人 呼 噪 適 大 霧 竩 家 兵 無 一 人 知 者 黎 明 夜 別 抄 等 壞 竩 家 壁 而 入 ( 中 略 ) 別 抄 ( 中 略 ) 又 索 竩 及 能 皆 殺 之 ( 高 麗 史 129 崔 忠 獻 附 崔 竩 傳 ) N의 기록에서는 정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의군의 장교들과 김준이 공모자들에게 구체적 인 행동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최의가 정변을 진압하려는 데 동원하려던 야별초를 오히려 신의군과 김준 일파가 역이용하고 있는 점이다. 정변의 진압군으 로 나서려던 야별초를 오히려 정변에 가세시켰다. 신의군을 위시한 정변군들은 먼저 진압군의 지휘관인 韓 宗 軌 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사전에 정변으로 끌어들인 같은 야별초 소속의 徐 均 漢 을 시켜 최의가 이미 살해되었다고 거짓으로 전 파케 하였다. 일종의 기만 전술을 쓴 것이다. 집권자인 최의는 야별초의 최고 통수권자나 다름 없다고 하겠다. 병력의 최고 통수권자만 제거하면 그 이하의 병력을 손아귀에 넣기란 시간문제 인 것이다. 많은 무리들이 갈팡질팡할 때 김준과 신의군 장교들은 추밀사 최온과 최항집권기의 문객으로서 상장군을 지낸 朴 成 梓 를 등장시켰다. 이로써 진압에 나선 야별초를 무릎꿇게 하였 다. 커다란 부딪힘 없이 병력을 장악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이용하여 최의와 그 추종자들을 제거하였다. 작전 계획에 따라 정변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의 측근이면서 자문 역할을 하였던 최양백과 진압군으로 나서서 야별초를 정돈한 지휘관인 李 日 休 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이어 최의와 그 측근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일관된 통수 체제를 갖추지 않은 야별초였지만, 그 규모나 군사력이 신의군에 비해 월등하였 으리란 점은 정변의 진행과정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의군이 김준 휘하의 가병집단과 연합하고 있었음에도 야별초를 대항하기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측했던 점으로 보아 그러 하다. 따라서 정변의 주도자들은 야별초의 무력을 오히려 최의 세력 제거에 역이용하는 것이 정변에서 성공하는 열쇠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신의군이 김준 세력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신의군이 자체의 무력만으로는 최의의 군사적 기반에 겨룰 수 없었던 듯하다. 때문에 최의 정권에 적대감을 갖 고 있던 인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많은 가병을 거느리고 있던 김준 일파와의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87 연합은 절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을 수행한 것은 누구일까? 다음 사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O. 林 衍 初 名 承 柱 其 父 不 知 何 許 人 僑 寓 鎭 州 娶 州 吏 女 生 衍 遂 以 鎭 州 爲 貫 衍 蜂 目 豺 聲 捷 而 有 力 能 倒 身 臂 行 或 投 蓋 于 屋 梁 爲 大 將 軍 宋 彦 祥 廝 養 卒 後 歸 其 鄕 蒙 古 兵 適 至 衍 與 鄕 人 逐 之 遂 補 隊 正 有 林 孝 侯 者 通 衍 妻 衍 知 之 誘 孝 侯 妻 通 焉 孝 侯 告 有 司 有 司 欲 治 衍 罪 金 俊 壯 其 爲 人 力 救 得 免 又 薦 爲 郞 將 故 衍 常 呼 俊 爲 父 冲 爲 叔 父 ( 高 麗 史 권130 林 衍 傳 ). 사료 O는 임연이 林 孝 侯 의 妻 를 간통한 문제로 곤궁에 빠져 있을 때 김준의 힘을 입어 구제 되었다는 내용이다. 더구나 김준은 임연을 郎 將 으로 삼는 은혜까지 베풀었다. 鎭 州 의 향리였을 때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隊 正 에 보임된 이래로 관직이 승진된 셈이다. 이를 계기로 임연은 김준을 아버지로 金 冲 ( 金 承 俊 )을 숙부로 불렀다. 김준의 은혜를 입었던 임연은, 김준이 최의 제거에 나섰을 때 누구보다 먼저 그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김준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정변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준의 심복이었던 임연이 신의군에 소속하고 있었음이 앞서 소 개한 사료 I-2)에서 확인된다. 그것은 사료에 보이는 신의군 도령낭장 박희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24) 김준에게 발탁되었을 때는 낭장이었는데 정변 당시에는 도령낭장이었다. 임 연은 김준의 심복이면서 신의군에 소속한 장교였던 것이다. 따라서 임연이 신의군의 입장을 김준에게 알렸고 신의군 장교들 또한 같은 도령 낭장인 임연을 통하여 김준의 動 態 를 알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같은 임연의 활동으로 김준의 가노집단과 신의군은 최의 정권에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면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결합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신의군이 최의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군사집단임을 알았다. 최씨가에서 야별초 에 비해 규모나 역할이 적었고 그에 따른 처우도 좋지 못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의 불만은 최씨가의 가병장으로서 가병을 거느리고 있던 김준세력과 연합함으로써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 연결은 김준의 심복이면서 신의군에 소속하고 있던 임연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24) 金 塘 澤 은 앞 논문에서 林 衍 을 야별초나 신의군 소속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관직앞에 부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都 房 소속의 장교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崔 瑀 집권때 李 裕 貞 이 都 房 員 이면서 夜 別 抄 에 속한 都 領 이었던( 高 麗 史 23 世 家 高 宗 22 年 8 月 ) 것을 보면 都 房 員 이라 해서 부대에 소속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鄭 修 芽 씨는 앞 논문 414쪽에서 전거도 밝히지 않고 임연을 야별초의 일원으로 보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앞 구절에서 神 義 軍 都 領 郎 將 朴 希 實 이라고 했기 때문에 다음 구절의 都 領 郎 將 林 衍 앞에는 부대명을 생략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그가 야별초였다면 박희실과 구분하기 위해 夜 別 抄 라고 소속 부대를 밝혔을 것이다.
188 학예지 제19집 4. 鷹 揚 軍 의 政 變 가담 이제까지는 김준의 가노집단과 신의군이 연합하여 최의를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음을 살펴 보았다. 김준은 정치적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신의군은 야별초에 비해 뒤떨어진 처우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여기에 가세한 또 하나의 군사 집단이 있었다. 다름아닌 鷹 揚 軍 이었다. 고려의 중앙군 즉, 京 軍 가운데 소속된 부대였다. 이는 龍 虎 軍 과 함께 2 軍 을 이루며 국왕의 친위 시위를 맡고 있었다. 응양군의 병력은 1,000명(1 領 )이었고, 최고 지휘관은 상장군이었다. 응양군의 상장군 은 班 主 라고도 불리어져 武 班 을 대표하고 있어 경군 소속의 모든 부대를 대표할 수 있는 위치 였다. 25) 그런데 경군 가운데 응양군만이 최의와 그 추종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에 가담한 새로운 사실 이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P 璥 與 ( 朴 ) 松 庇 等 亦 至 仁 俊 曰 如 此 大 事 不 可 無 主 者 可 推 大 臣 有 威 望 者 以 領 衆 卽 召 樞 密 使 崔 昷 昷 至 又 邀 朴 成 梓 議 之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竩 傳 ). 이 기록은 정변을 주도한 김준이 최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고 있다. 여 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응양군의 상장군이었던 朴 成 梓 를 맞아서 의논했 다는 사실이다. 정변의 구체적인 군사행동의 감행을 위해서 응양군의 최고 지휘관을 끌여들였 던 것은 아닐까고 생각한다. 그러면 응양군이 정변에 가담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무인 집권 시대의 응양군의 실 태에 주목하는 것이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순서일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의 기사를 검토함으로 써 그 일면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Q-1 ( 高 宗 3) 時 遣 將 禦 契 丹 兵 驍 勇 者 皆 忠 獻 父 子 門 客 官 軍 羸 弱 不 可 用 ( 中 略 ) 門 客 有 請 從 官 軍 者 卽 流 遠 島 ( 高 麗 史 129 崔 忠 獻 傳 ). Q-2 毅 明 以 後 權 臣 執 命 兵 柄 下 移 悍 將 勁 卒 皆 屬 私 家 ( 高 麗 史 81, 兵 志 1 序 ) 25) 李 基 白, 高 麗 京 軍 考 高 麗 兵 制 史 硏 究 所 收. 洪 承 基, 高 麗 초기 中 央 軍 의 組 織 과 役 割 高 麗 軍 制 史, 陸 軍 本 部, 1983, 특히 39-41쪽.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89 R-1 崔 元 世 金 就 礪 追 丹 兵 于 忠 原 二 州 閒 戰 于 麥 谷 追 至 朴 達 峴 大 敗 之 ( 高 麗 史 世 家 4 年 7 月 庚 辰 ). R-2 ( 中 略 ) 以 中 軍 兵 馬 使 崔 元 世 爲 兵 部 尙 書 鷹 揚 軍 上 將 軍 ( 高 麗 史 世 家 高 宗 4 年 7 月 乙 未 ). S-1 又 令 門 客 朴 成 梓 爲 督 役 使 凡 百 之 費 皆 出 私 儲 不 日 功 畢 制 度 得 宜 誠 竿 世 大 功 朕 甚 嘉 嘆 其 令 有 司 開 府 益 封 食 邑 加 贈 考 妣 進 秩 二 子 成 梓 以 下 至 工 匠 亦 皆 賞 賜 有 差 沆 辭 不 受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沆 傳 ). S-2 又 激 至 鷹 揚 軍 上 將 軍 朴 成 梓 議 之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沆 傳 ). S-3 許 沆 親 侍 二 十 人 初 入 仕 丘 史 二 十 人 眞 拜 把 領 二 十 人 初 入 仕 監 督 官 上 將 軍 朴 成 梓 子 一 人 眞 拜 把 領 工 匠 賞 功 有 差 ( 高 麗 史 권129 崔 忠 獻 附 崔 沆 傳 ). Q-1에 의하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출정군을 편성했는데, 驍 勇 者 는 모두 崔 忠 獻 父 子 의 문객이었고 官 軍 은 파리하여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다. 관군은 응양군을 포함한 경군을 가리킨다. 다만 최충헌이 국왕을 친위하는 응양군을 강화시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26) 의종 명종 이후의 무인 집권 시대에는 병력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보위보다는 집정 무인의 私 家 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도 이를 말해준다(Q-2). 왕실 호위군인 응양군이 거란의 침입을 추격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다. 崔 元 世 와 金 就 礪 가 거란병을 추격하여 대패시켰는데, 이 때 최원세는 응양군의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이었다(R-1, 2). 최충헌은 왕실호위군을 빼내어 거란군 방어에 이용하였다. 최충헌은 필요하다면, 국왕의 시위군인 응양군도 동원하였다. 이는 최충헌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필요한대로 경군을 운용하 였을 개연성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 경군 가운데서도 都 房 員 응으로의 차출이 이루어지기도 했 음은 앞서 살펴보았다. 그런 응양군이 최의 대에 와서는 정변에 가담하였다. 응양군의 상장군인 박성재가 바로 그이 다. 그는 崔 沆 집권기에는 최씨가의 문객으로서 督 役 使 를 지낸 인물이다(S-1 2). 최항대에 九 曜 堂 을 짓는 공사를 맡았던 박성재였다. 27) 그는 국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아 그의 아들 1명이 26) 최충헌 집권 이전의 국왕을 시위하는 부대는 勇 力 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牽 龍 控 鶴 內 巡 檢 軍 그리고 禁 軍 이 그러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당택의 최씨정권과 국왕 의 논문( 高 麗 의 武 人 政 權 所 收 )을 참조하라.
190 학예지 제19집 眞 拜 되기도 하였다.(S-3). 28) 최항의 측근이었던 박성재가 최의대에 와서정변에 가담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T ( 高 宗 四 十 年 十 一 月 ) 王 渡 江 迎 于 昇 天 新 闕 夜 別 抄 八 十 人 衷 甲 以 從 ( 高 麗 史 권24, 世 家 高 宗 40 年 11 月 辛 卯 ). 이 기록은 최의 정권을 쓰러뜨리는 정변이 일어나기 4년 4개월 전의 일이다. 야별초가 국왕 의 호위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의 국왕인 고종이 몽고대를 만나러 갈 때 야별 초 80명이 갑옷을 속에 입고 따라갔다는 것이다. 야별초가 새로이 국왕의 친위를 담당하였다는 것은 응양군의 고유 임무가 약화된 것을 의미한다. 최항 집권기에 국왕의 호위를 야별초가 담 당하였다는 사실은, 응양군의 상장군으로서의 박성재의 지위는 약화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국왕의 친위를 맡음으로써 국왕은 물론, 최씨 집정자에게도 보일 수 있는 자신의 입지가 좁아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 어린 최의가 집권하면서 그는 김준이 꾀하는 정변에 가담하였다. 이제 는 정변이 성공한 후에 박성재는 어떻게 되었을까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U-1 ( 高 宗 四 十 五 年 十 二 月 壬 寅 ) 朴 成 梓 爲 左 僕 射 ( 高 麗 史 권24, 世 家 高 宗 45 年 ). U-2 ( 元 宗 元 年 春 正 月 戊 寅 ) 朴 成 梓 爲 樞 密 院 副 使 ( 高 麗 史 권25, 世 家 元 宗 元 年 ). U-3 ( 元 宗 二 年 十 二 月 ) 朴 成 梓 參 知 政 事 判 禮 部 事 仍 令 致 仕 高 麗 史 권 25, 世 家 元 宗 元 年 ). U-4 ( 元 宗 五 年 十 一 月 庚 寅 ) 參 知 政 事 致 仕 朴 成 梓 卒 ( 高 麗 史 권26, 世 家 元 宗 45 年 ). 최씨 정권을 몰락시키고 왕정이 회복된 직후에 左 僕 射 가 되었고(U-1), 그 이듬해에는 樞 密 院 副 使 에 올랐다(U-2). 또 다음해에는 參 知 政 事 判 禮 部 事 로 致 仕 하였다(U-3). 박성재는 치사한 후 3년만에 卒 하였다(U-4).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씨 무인 정권 시대에는 관군이 거의 집권자 최씨의 사병화되었다. 27) 高 麗 史 129, 反 逆 3 崔 忠 獻 附 崔 沆 傳. 28) 사료 U-3)에 대한 해석은 譯 註 高 麗 史 를 비판한 許 興 植 의 앞 논문을 따랐다.
崔 忠 獻 政 權 의 性 格 191 이러한 면은 국왕의 친위를 맡은 응양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왕실 호위마저 최항의 문객이 담당하고 있었던 사례를 보았다. 이는 최씨가의 왕실 동태 파악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었다. 정 변에 가담한 박성재도 응양군의 상장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지는 국왕에게서나 최씨가에서 나 좁아지고 있었다. 그가 최씨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에 가담한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5. 맺는말 본고는 최충헌이 최이에게 물려주었던 家 奴 와 別 抄 軍, 그리고 京 軍 이 최의 집권기인 1258년 (고종45)에 일으켰던 정변을 통하여 최충헌 정권의 성격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1258년의 정변 을 통하여 최씨정권을 개창했던 최충헌 정권의 성격을 규정해보고자 한 것이다. 최충헌이 아들 최이에게 물려준 무력기반이 최이가 최항에게, 또 최항이 최의에게 승계되었다는 점에 주목하 였다. 최씨 무인정권은 무력의 토대가 되어온 家 兵 집단과 神 義 軍 그리고 鷹 揚 軍 이 해체되면서 결 정적인 破 局 에 직면하였다. 이들 무력 집단들은 최의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정변을 일으켜 최의와 그 추종세력을 제거하였다. 崔 沆 정권에서 신임을 받던 家 兵 長 金 俊 은 최의가 집권하면서 소외되어 갔다. 더구나 宋 吉 儒 구제사건을 일으켜 정변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다른 가병장인 李 公 柱 의 병력을 제공받아 자체 세력을 공고히 하였 다. 이공주는 최씨가에서 잔뼈가 굵어온 인물로 최씨가노들의 代 父 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같 은 최씨가의 가노라는 점에서 김준의 집안과는 막역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공주와 제휴하여 병력을 장악한 김준은 文 臣 포섭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포섭한 문신은 大 司 成 柳 璥 과 樞 密 使 崔 昷 이었다. 두 문신들 또한 김준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경은 김준과 함께 송길유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고, 최온은 최항과 혼인한 딸이 쫓겨나게 되면 서 최씨가와는 등을 돌리게 되었던 때문이었다. 김준이 정변에 가담한 인물을 규합할 유경이 있었음에도 추밀사 최온을 끌어들인 의도는 정변세력을 결집시키고, 정변 이후 유경에 대한 평가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김준을 위시한 가병집단 밖에도 최의정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신의군이라는 군사집단 이 있었다. 신의군은 몽고에 포로로 갔다온 사람들로 구성된 삼별초 가운데 하나였지만, 병력
192 학예지 제19집 의 규모라든가 활동영역, 나아가서는 최씨가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夜 別 抄 보다 劣 惡 하였다. 경 제적 처우도 야별초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의군 장교인 朴 希 實 과 李 延 紹 가 정변을 主 動 했던 것이다. 반면에 최의가 정변의 진압군으로 동원한 것은 주로 야 별초였다. 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김준과 신의군 장교들의 기만전술에 있었다. 진압군으로 나선 야별초의 머리를 돌려 오히려 최의세력을 타도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신의군과 최의정 권에 불만을 갖고 있던 다른 무력집단과의 통합은 林 衍 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임연은 김준에게 은혜를 입어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지만 동시에 신의군에 속한 인물이었다. 정변에는 또 다른 군사집단이 가담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응양군이었다. 응양군은 2 軍 가운 데 하나로 왕실의 親 衛 ㆍ 侍 衛 를 담당한 부대였다. 그런데 응양군의 상장군인 朴 成 梓 가 정변에 가담하였다. 박성재는 최항 집권기에 그의 門 客 으로서 督 役 使 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 국왕 호위의 최고 지휘관을 최씨 문객이 장악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최씨가에서 국왕의 動 靜 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또한 국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권의 존속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 다. 이 무렵 응양군의 고유 임무인 국왕의 친위를 야별초가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응양군의 지위가 약화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있던 박성재는 나이 어린 최 의가 집권하면서 김준과 신의군의 동태를 직시하면서 정변에 가담했던 것이다. 최씨정권은 최충헌의 사적 무력집단이었던 家 奴 들은 金 俊 으로 대표되는 政 治 勢 力 을 이루면 서 神 義 軍 과 京 軍 의 하나인 鷹 揚 軍 을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켰다. 신의군은 최충헌이 물려준 별초군이 公 兵 인 三 別 抄 로 정착되었는데, 결국 최씨정권에 반기를 들기에 이른 것이다. 최충헌 이 집권한 이후 경군 장악에 주력하였고, 그것을 최씨 가내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최의 대에 가서는 응양군의 상장군마저 최씨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에 가담하였다. 최충헌은 집권이후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家 奴 와 같은 사적 무력기반을 유지하고, 이를 최씨 집정무인에게 물려주었으나 결국 이들이 반최씨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전복시켰다. 최 충헌 정권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무력기반을 최씨집정에게 물려주어 정치권력을 지속하려 했지 만, 그 같은 노력은 4대를 지난 최의 대에 깨지게 되었다. 1258년 최씨 무인정권을 유지하는데 선봉적 역할을 하였던 家 奴 勢 力 이 신의군과 응양군을 규합하여 최씨정권에 칼끝을 돌림으로 서 최충헌이 개창하였던 최씨무인정권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최충헌 정권은 그가 사 적으로 조직한 무력기반에 의해 유지되었으나 또 그들의 손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2012육군 박물관 연보 193 붙임#1 2012 육군 박물관 연보 (2012. 1. 1. ~ 2012. 12. 31) Ⅰ. 학 술 활 동 1. 강원도 양양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1) 조사 기간 : 1차 2012. 4. 16 17, 2차 2012. 4. 25 26 (2) 대 상 지 : 오봉산고성, 양양읍성, 석성산성, 대포영성, 인구민보, 후포매리산성, 광정진성 (3) 조 사 자 : 부관장 김성혜, 학예사 오경래, 자문위원 서울문화유산 연구원장 박준범 2. 대 외 활 동 (1) 한국박물관협회 신년 교례회 참석 - 일자 / 장소 : 2012. 1. 10일 / 한국민속박물관 - 대 상 : 박물관장 대령 최 정 민 (2) 2012년 우리가족 박물관 탐방 참여관으로 신청 - 일자 : 2012. 2.21일 (4) 한국 박물관협회 22차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장소 : 2012. 2.27 / 국립중앙박물관 - 내 용 : 정기총회 참석 - 대 상 : 박물관장 대령 최 정 민
194 학예지 제19집 (5) 서울 동부지역 대학박물관 정기총회 참석 - 일시 : 2012. 4. 5일 - 대상 : 부관장 4급 김성혜, 6급 오경래 (6) 대학박물관 협회 춘계학술대회 참석 - 일시 / 장소 : 2012. 4. 19일 / 건국대 박물관 - 대상 : 6급 김자현 등 3명 (7) 여수 좌수영 박물관 자문회의 참석 - 일시 / 장소 : 2012. 8.23일 - 대상 : 부관장 4급 김성혜 3. 교 육 (1) 12년 전반기 학교관광 자원봉사자 교육 - 일자 / 장소 : 2012. 4.23 / 박물관 - 대 상 : 노원문화원 문화해설사 12명 (2) 12년 전반기 군 문화재관리 교육 참석 - 일자 / 장소 : 2012. 5.17 18 / 경주 보문단지 - 대 상 : 부관장 4급 김성혜 (3) 12년 학교관광 자원봉사자 심화교육 - 일자 / 장소 : 2012. 6.18 / 박물관 - 대 상 : 노원문화원 문화해설사 11명 (4) 3군 사관학교 박물관 합동세미나 참석 - 일시 / 대상 : 2012. 8. 8/ 박물관장 등 3명 (5) 아시아 유럽 박물관네트워크 서울총회 참석 - 일시 / 대상 : 2012. 9.13 / 박물관장
2012육군 박물관 연보 195 (6) 12년 후반기 군 문화재관리 교육 참석 - 일자 / 장소 : 2012.11.8 9 / 서울 성각 - 대 상 : 6급 오 경 래 4. 간행물 발간 (1) 육군박물관, 강원도 양양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2) 육군박물관 복식유물 도록 발간 Ⅱ. 전시 보존 및 시설관리 1. 육군박물관 (1) 화랑정 대보름 삭회 특별 전시 - 기 간 : 2012. 2. 3 4 / 육사 화랑정 - 내 용 : 궐장노 등 3점 (2) 2012년 서울동부지역 대학박물관 연합전시 - 기 간 : 2012. 9. 5 11.30 - 내 용 : 조선을 지커낸 힘, 그 내면을 톺아 보다 (4) 박물관 탐방표시판 부착 - 기간 : 2012. 4. 1 10. 31 - 내 용 : 국립중앙박물관 주관의 '2012년 우리가족 박물관 탐방'행사 참여 기관으로서 인증 사진촬영용 표지판 부착(박물관 로비) (5) 군사사학과 국사 과목 박물관 현장수업 지원 - 일시 / 대상 : 2012.5.11 08:00 15:00 / 1학년 문과생도 3개반
196 학예지 제19집 2. 육사 기념관 (1) 기념관 전시환경 개선 : 11.26 - 전시실 안내 입간판 설치 - 복식변천사실 패널 교체 - 생도생활관실 : 입간판교체 - 전망대 : 망원경 관람용 발판 제작 Ⅲ. 유물 및 자료 수집 1. 유물 구입 : 훈련도감 관안 등 48종 73점 1) 전반기 : 훈련도감 관안 등 20종 44점. 조천도1점 복제 2) 후반기 : 대나무 갓끈 등 28종 29점 번호 유 물 명 수량 내 용 1 훈련도감 관안 1 훈련도감의 관안( 官 案 )으로 관직명이 명시된 문서 2 신연차 비기 1 3 청풍 자집 3 4 충렬사지상,하 2 5 우후배행하기 1 전라도 임실에 부임하는 현감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자료로 지방관아 조직구성 현황 연수사 임란때 우의정을 역임했던 약포 정탁의 아들 정윤목이 강원 도 피난 생활사를 기록한 문집 임란때 부산에서 순절한 송상현 부사를 비롯한 충의 열사들 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렬사의 사적 무진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행차할 때 그를 수행하는 관 리들의 직무와 인원수를 기록한 문서 6 조선경비대 졸업증서 1 1948년에 발행된 조선경비대사관학교 6기 이재인 졸업증서 7 충 훈 부 문서 4 8 중호선생문집 2 9 죽 천 집 5 완문은 평안도 의주에 거주하는 도사 이의석이 조선 태조 때 공신의 후손으로 역을 면제해 달라고 충훈부에 올린 문서 1592년 임란이 발발할 때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 의병활동 을 한 윤탁연 문집 죽천은 임진왜란 대 활약했던 의병장으로 1592년에 전라도 보성에서 의병 활동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
2012육군 박물관 연보 197 10 대 관 도 1 1책으로 되어 있는 목판본 지도첩으로 지도 하단부에 속오군 의 수, 산성, 수군 현황 등이 부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 11 징 비 록 1 서애 유성룡의 저서로 임란 관련 제1권 사료집 12 만오선생 문집 5 1626년 예조 정량에 제수된 만오 신달도 의문집 13 검간선생진사일록 1 14 어초와양세삼강록 2 검간 조정(1555 ~ 1636)선생문집으로 임란의 실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 의병활동을 한 어초와공 김유부와 그 의 두아들 충효를 기리기 위해 찬술된 문집 15 16혈 무 쇠 총 1 앞부분 총구가 16혈로 되는 연발 지화식총 16 무 쇠 총 1 신호용 무기의 지화식총 유사시에는 타격무기로 사용 17 말 방 울 6 청동 재질의 주술적인 문양 등이 있는 마구장식품 18 나 각 1 19 휴 대 용 검 4 대소라껍질에 취구를 붙여 만든 나각이다. 지공(손구멍)이나 음높이의 조절하는 장치가 없이 한음으로 소리내는 악기 대모, 나전.어피,조각목 장식의 칼집 철제칼과 상아로 만든 젓가락이 쌍으로 들어가 있다. 20 축 음 기 1 미국 제조의 축음기로 월남전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 21 대나무 갓끈 2 22 병담 유찬 1 23 저 울 1 갓끈은 갓을 고정시키는 역할과 장식성을 겸비한 것으로, 대 개는 헝겊으로 만들었으나 옥, 마노, 산호, 호박, 대나무 등으 로 만든 장식적인 갓끈도 있었다. 대나무갓끈은 대나무 마디 마디로 장식한 것임. 남경 국자감 학정 서창희 주집(편집주). 군사의 각종 전술내 용, 용병술 등을 기술한 병서로 소장가치 있음 손저울로 한중일 나라에서 주로 사용했다. 목, 상아, 청동, 소뼈 등으로 만들어진 도량형기이며, 형태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전시가치가 있다. 24 카 메 라 1 근대 자료로 야전 정훈자료로서 소장가치 있음 25 부대인지인 1 26 목판본 사마방목 1 27 필사본 사마방목 1 28 조선여지도 1 전주지역의 국민방위군제15단지인( 國 民 防 衛 軍 第 十 五 團 之 印 )으 로 근대자료로서 가치가 있음 숭정기원 후 4번째 갑자식 사마방목으로 목판본 인쇄이다. 전시가치 있음. 만력41년 임진왜란직 후(광해군5년) 계축년 증광시 사마방목 필사본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임시 과거시험인데 계 축옥사(영창대군 제거)를 해결한 후 인재등용 1894년 제작된 조선여지도로서 활판인쇄본이다. 전시가치 있음 운요오호 사건시 일본이 만든 지도를 김옥균이 재 제작 박영효 친필이 있음
198 학예지 제19집 29 가영교정동서 지구만국방도 31 제국복장요람 1 32 당빌의 아시아 지도 1 33 세계교통전도 1 34 한국 교통 전도 1 35 일청한 삼국여지도 1 36 동아형세도해 1 1 일본에서 제작, 서반구와 동반구로 나뉘어 그렸으며 활판 인쇄 본이다. 일본 스스로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된 특징이 있다. 전시가치 있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525만원에 구입, 독도박물관에서도 소장 육군박물관의 근대군복 특히 영친왕 군복을 연구할 수 있는 1차적 자료로 전시가치있음. 당빌은 프랑스인으로 유명한 지리학자이며 300여년 전에 한 국부분을 크게 그려놓은 특징이 있는 아시아 지도로 특히 울 릉도와 독도를 표기하고 한국영토로 그렸으며 sea of korea 로 한국해로 표기. 전시가치 있음. 한일합방 전 대판매일신보사에서 편찬한 지도로 초기 형태의 태극기 도식이 있는 일본 국기를 가운데 1895년 일본 국민신문사에서 발행한 한국교통도와 동북아시 아 철도, 항로를 표기한 지도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철저한 연구로서 보여진다. 1894년 일본에서 발행된 일청한 삼국여지도. 울릉도와 독도 가 역시우리쪽으로 붙어져 그려져 있다. 울릉도는 죽도, 독도 는 송도로 표기되었지만 그려진 거리상 우리영역에 들어와 있고 이때만 해도 조선의 것임을 일본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지역의 이동로와 지역별 주요 특산물을 표기 하고있는 지도로, 특히 조선지도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과 백 두산 근처에 호랑이를 그려 놓은 것이 아주 흥미로운 지도로 서 소장가치가 있음. 37 일로교전조견신지도 1 러 일전쟁사의 귀중한 군사지도임 38 건 재 집 1 39 국장기념사진첩 1 40 홍석방교지(만력21년) 1 41 홍석방교지(만력24년) 1 건재집은 임란의병 중 뚜렷한 행적을 남긴 김천일의 글을 모 은 문집이다. 건재집에 실린 글 중 의병의 활동상을 보고한 임진소( 壬 辰 疏 )의병과 관군의 지배체계에 대해 건의한 계사소 ( 癸 巳 疏 ) 등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의 활약상과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임. 순종 국장 사진첩으로 경성사진 통신사에서 1925년에 발행한 책자로 보존 상태는 좋지 못하나 참고품으로 소장가치가 있음 민비의 국장사진첩은 이미 소장하고 있음 임진왜란(1592년)발발 1년후 가선대부(종2품)을 용양위 부호 군자로 임명하는 교지로서 소장가치 있음. 임란중 죽은 홍석방의 추증교지 가선대부 용양위 부호군자 홍석방을 예조참판겸 동지의 금부사 성군관일을 더하는 교지 행재 시 재물을 헌납한 공로로 추증받음. 소 장가치 있음
2012육군 박물관 연보 199 42 홍석방교지(만력24년) 1 임란중 홍석방 가문내 홍효종을 증직으로 통정대부 호조참의 에 봉하는 교지. 홍아무개의 조부로써 쌀을 바치고 당상관직을 매관한 교지소 장가치 있음 43 김경혁 무관자료(교지) 1 절충장군(정3품)으로서 구성진관 안의 병마첨절제사 교지다. 44 김경혁 무관자료 (전령) 1 병조당상군 관직을 전령하는 문서, 병조판서 수결이 있으므로 소장가치 있음. 45 김경혁 무관자료 (추증 교지) 1 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 김윤필을 증직 가위대부 한성부 좌윤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하는 교지 김경혁의 부 김윤필에게 한성부 좌윤 등을 추증하는 교지. 소장가치 있음 46 47 48 49 김경혁 무관자료 (가선대부품계승급교지) 김경혁 무관자료 (홍패교지) 김경혁 무관자료 (호적단자) 김경혁 무관자료 (무과 각패) 1 1 1 금군에서 실시한 궁술대회시 유엽전 몰기로 가선대부품계 승 급에 관한 교지로 소장가치 있음. 상호군 무과 홍패 병과 제113등으로 급제하여 받은 교지로서 소장가치 있음 김경혁의 한성부 호적단자이며, 김경혁과 그의 부( 父 ) 조부 ( 祖 父 ) 증조부( 曾 祖 父 )등의 벼슬이 수록되어 있음. 1 뿔로 제작된 서각(물소뿔)패로서 소장가치 있음. 2. 유물 기증 : 미군포탄 등 37종 40점 번호 기 증 품 수량(점) 기 증 자 계 미군포탄 등 37종 40점 1 신미양요시 사용한 포탄 1 Daniel N.Morris 2 UN군 방한모 1 3 장교 코트 1 4 바지 2 5 미군 여군화 1 6 철 모 1 박 상 억 7 여군전투복 1 8 미군완장(MP) 1 9 미공군 신발 1 10 목도리 1
200 학예지 제19집 11 마 크 4 12 벨 트 1 13 비상약품셋 1 14 카빈탄창 1 15 작업모 1 16 안경집 1 17 걸프전(신발) 1 18 각반 1 19 카키비지(신발) 1 20 식판 1 21 도시락 1 22 카키모자 1 23 월남전 모자 1 24 영국수통 1 25 공병깃발 1 26 화생방 제독셋 1 27 수 통 1 28 베낭띠 1 29 미공군병사용 군화 1 30 농구화 1 31 60년대 장교신발 1 32 화생방복 1 최 동 식 33 후레쉬 1 34 우 의 1 35 웨스트포인트 모자 1 36 화랑의 수기공 연마석 1 37 M1 카빈소총 1 국방부장관
2012육군 박물관 연보 201 Ⅳ. 홍보활동 1. 소장품 대여 (1) 단기 대여 구분 대 여 기 관 수량(점) 기 간 계 1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 42종 89점 부산진순절도 등 2점 6. 2 7. 29 2 천안박물관 망원경 8.29 12.15 3 전주역사박물관 징비록 등 2점 9. 3 11.21 4 5 12년지상군페스티벌 군사연구소 12년지상군페스티벌 육본 탄약과 광복군사령장 등 13종14점 9.25 10.15 소형총통류 19종 65점 9.27 10.15 6 전쟁기념관 부산진순절도 등 5점 12.11.1 13.1.31 (2) 장기 대여 수탁 기관 수량 (점) 수탁기관 수량 (점) 독립기념관 소총 등 4점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미군우의등 22점 강화역사관 조총 등 2점 국군기무부대 방첩부대기 1점 전쟁기념관 광복군모자 등 4점 양평농업박물관 용문사 지도 등 2점 해사박물관 총통 등 3점 육본 기록정보관리단 학군호국단 수첩 등 31점 육본 군사연구소 석검 등 19점 화천군베트남파병용사 권총 등 61점 5사단(부대정기) 1점
202 학예지 제19집 (3) 유물 자료 사용 승인 번호 내 용 일자 1 대구은행 사외보 향토와문화 출판 관련 납석제 해시계 사진사용 허가 1. 4 2 3 4 웅진씽크빅 <과학쟁이> 나현미 요청자료: 환두대도 사진자료 제공 김정희 (사회평론 출판사 학술팀) 요청자료: 조천도 사진자료 제공 주)웅진씽크빅 웅진주니어 아동교양 출판 관련 천자총통, 황자총통, 동래부순절도 사용허가 1.10 1. 5 2. 9 5 주)성안당 국왕의 선물 출판관련 오재순 고풍 이미지 사용 허가 1.12 6 7 파랑새 출판사 결정! 한국사 출판 관련 호남 병자 창의록, 등 6점 사진자료 제공 진주동명중학교 논문게재 관련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사진자료 제공 8 주) 좋은책 신사고 중학교역사교과서 출판 관련 소장유물 대전회통 자료사용 승인 3. 8 9 10 11 12 13 TV조선 유용원의 밀리터리 시크릿 프로그램 제작 관련 대한제국시대부터 현제까 지 육군전투복 촬영 주)웅진씽크빅 주니어 월간지 생각쟁이 사진촬영 요청자료: 기창,당파,삼지창 강지숙 임진란 7주갑 기념 문화 학술대제전 포스터 제작 부산진순전도 사진자료 제공 주)예림당 세종대왕 출판용 지자총통, 신기전 사진자료 제공 주)키네마 준포샤 조선왕조역사를 돌아보는 여행 출판 관련 동래부순절도 등 2 점 사용허가 14 주) 마고북스 소설 7년전쟁 출판용 부산진순절도, 동래부순절도, 사진자료 제공 5.23 15 주) 기탄교육 기탄교과사전 출판용 홍의포 사진자료 제공 5. 29 16 17 한국 국학진흥원장 요청자료: 부산진순절도, 동래부순절도, 사진자료 제공 문화재청 영상콘텐츠 제작 관련 유물 촬영 촬영유물: 쇠뇌 및 병서 18 도서출판 민속원 한국복식사전 출판 관련 박물관 도록 59쪽 사용 승인 6.19 19 김민아 요청자료: 평양 기성도(병풍) 사진자료 제공 2.23 2.28 3. 9 5.23 5. 9 5.21 5.18 5.31 6.18 6. 26
2012육군 박물관 연보 203 20 해군사관학교 교관 한성일 연구논문 작성 요청자료: 군사 작전 계획서 장양공 정토 시전 부호도 등 12점 사진자료 제공 21 한국교육방송공사 생방송 톡톡보니하니 제작 관련 박물관소장유물 스케치 촬영 7. 6 22 23 24 주) 웅진씽크빅 주니어 월간지생각쟁이 출판용 갑옷 등 6점 자료 제공 주) 웅진씽크빅 주니어 월간지생각쟁이 출판용 갑옷 등 6점 자료 제공 대진대학교 디지털 포천문화대전 제작 자료제공 - 경기도 포천군/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지표조사 보고서 25 경인일보 인천전쟁사 출판용 : 부산진순절도, 동래부순절도 사진제공 8. 8 26 27 28 29 30 31 일본 학연그룹 출판사업부 요청사진자료 : 부산진순절도, 동래부순절도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전시팀 (담당자: 이기은) 요청자료: 장양공정토시전 부호도,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사진자료 제공 한국관광공사 여행정보사이트 내 박물관 정보제공 육군박물관 전경사진 제공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 관련 소장유물 이미지 사용 허가 : 홍 의포 등 6점 성균관대학교 산학협력단 학국복식사진 DB구축 -무관초상 등 2점 자료사용 승인 OBS 특집 다큐멘터리 (신 열하일기)촬영 지원 촬영내용 : 궁시류, 총포탄환류, 지도유묵류 전시실 32 KBS 부산방송국 부산재발견 프로그램 제작 관련 동래부순절도 사진 사용허가 9. 8 33 서울여자대학교 근대문화유산 의생활분야 목록화조사 관련 소장 복식유물 촬영 9.10 34 35 시몽 포토에이전시 역사시리즈물 사진사용허가 미즈시나 테츠아 출판사 역사잡지 2점 사용승인 처음한국사 출판 목적 소장유물 동래부순절도 조선왕조의 역사 출판 관련 부산진순절도 등 36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 관련 소장유물 촬영: 연의환 등 5점 9.18 37 주) 리베르 출판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출판 관련 소장유물 병적부 이미지 사용 허가 38 주)파랑새출판사 어린이 역사책 출판 관련 민영환휘호 등 5점 이미지 사용허가 9.20 39 주)미디어프론트 수원화성 축조과정 교육영상제작관련 화성부 성조도 디지털이미지 사용허가 6. 29 40 달성군 임진왜란 전쟁도작성 관련 부산진순절도 등 2점 이미지 사용 허가 10.2 7. 6 7. 6 7.11 8. 9 8.15 8.23 8.23 8.29 8.31 9.11 9.11 9.18 9.20
204 학예지 제19집 41 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 EBS 역사채널 출판관련 부산진순절도등 2점 사용허가 10.10 42 도서출판 성안당 이순신 평전 출판관련 동래부순절도 등 4점 이미지 사용승인 10.16 43 44 45 46 국방홍보원 국군FM 이익선의 행복바이러스 - 촬영 및 인터뷰: 육군박물관 역사 및 소장품 소개 KBS 역사스페셜 유물 촬영 - 촬영내용: 부산진순절도 등 6점 청주MBC 창사특집 다쿠멘터리(420년 임진왜란 해자의 비밀) 촬영 - 촬영내용 : 동 래부순절도 등 2점 국방부 홈페이지 게재 홍보용 유물촬영 - 촬영내용 : 군복식 및 장구류의 현물사진 10.17 10.18 10.29 10.22 47 KBS역사스페셜 유물촬영-촬영내용 : 한국의 武, 궁시류 11. 2 2. 관람인원 (2012. 1.1 ~ 11. 31) : 명 1. 박물관장 이 취임 Ⅴ. 인사이동 (1) 이임 대령 최정민, 취임 대령 신내호 : 2012.11.15 2. 전 입 (1) 부관장 4급 김성혜 (육군본부 박물관) : 2012. 3 (2) 7급 박인향 (화랑대연구소 박물관) : 2012. 3. 19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05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제 1 집 ( 1989 ) 창간사 육군박물관 보물 10점 승자총통계 실태소고 - 현존유물을 중심으로 - / 이강칠 다관식 고대화기 / 김순규 육군박물관소장 주요 고화기 / 모동주 조선시대 궁시의 발달 / 박윤서 자료소개 / 권영란 육군군사박물관소장 현대총기류 목록 제 2 집 ( 1991 ) 조선전기의 화약병기 대외급비책 / 허선도 호준포의 실태소고 / 이강칠 노 / 김순규 조선전기의 병역제도 / 이현수 고려 무인정권기의 병제운용 / 김대중 소개 철제유물 과학적 보존처리 / 박윤서
206 학예지 제19집 제 3 집 (1993, 정하명 교수 정년기념 특집) 정하면 교수 근영 발간사/약력 저작목록 1406년 조흡의 사령장에 대하여 / 정구복 조선시대 환도의 기능과 제조에 관한 연구 / 강성문 임오군란후 친군제도와 군복에 대한 소고 / 이강칠 조선말기의 군적 / 이현수 육군박물관 소장 군적문서의 분석 삼군부 설치와 변천에 대한 연구 / 이대숙 고려전기 중앙군의 군역제도 소론 / 정경현 고려말기의 백정대전 / 이경식 조선시대의 양반 / 이태진 개념과 연구동향 충무공 이순신의 하옥죄명 전몰상황 자살론 순국론에 관한 검토 / 장학근 만주국 시대 일제의 대만 조선인 농업이민정책사 연구 / 김기훈 군사작전에 있어서 지형의 영향 -주요 전례를 중심으로- / 이충진 한의 고조선 침공시 패수 왕검성의 위치에 관한 소고 / 김광수 한국전쟁시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고찰 / 양영조 한국전쟁시 육군의 교육 및 훈련체계, 1950. 6 ~ 1951. 8 / 박일송 20세기초 영국 육군 개혁 -남아프리카전쟁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 원태재 루소의 평화사상 -초기저작을 중심으로- / 박영준 통합이론과 통합전략의 연구동향 / 박기수 Preliminary Report on the Archaelogical Survey in the Eastern Mongolia / 최복규 임진강 유역의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 / 이재 강성문 김기훈 <부록> : 육군박물관 소장 군적 문서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07 제 4 집 (1995, 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운촌 이강칠 선생 고희기념 특집) 이강칠 선생 근영 발간사 이강칠 선생 연보 특별기고 육사박물관이 군사문화재의 보고가 되기까지 / 이강칠 박물관학류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의 발전방향 / 이재 공 사립 박물관의 과제와 발전방안 / 신도근 철제 판갑의 과학적 보존처리 / 이오희 복식류 고려복식양식 / 유희경 군복, 관모에 관한 연구 / 강순제 원의 군복, 융복에 관한 연구 / 김미자 답호와 전복재고 / 박성실 조선시대 군복에 관한 연구 / 이현숙 비천복식에 관한 연구 / 임영자 대한제국시대 육군장병 복장제식과 대원수 예 상복에 대하여 / 이미나 무기류 조선시대 편전에 관한 연구 / 강성문 동서양 전장의 도와 검 / 김순규 노해번역 / 김기훈 임란기 조선수군의 무기체계 / 정진술 임진왜란기 화약병기의 도입과 전술의 변화 / 박재광 한국의 쇠뇌 / 유세현
208 학예지 제19집 기타류 한국의 예사상과 예학의 역사적 고찰 / 남상민 광개토대왕의 내치와 외치 / 이형구 빙고제의 고찰 / 손영식 18세기 말 경상도 현풍현의 군비실태 / 이현수 민화는 가시화된 우리 문화의 원형 / 김만희 평산신씨 무변고 / 김재갑 무구에 상감된 문양에 대한 소고 / 이경자 육군군기에 관한 소고/ 이대숙 부록 육군박물관 연보 제 5 집 (1997, 육군박물관 창립 40주년 기념) 양대박의 운암전 고찰 / 강성문 동아시아 삼국의 화기제조와 교류 / 박재광 삼국시대의 성곽전투와 운제의 운용 / 김대중 육군박물관 소장 양계지도 해설 / 강석화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공포에 대한 고찰 / 이덕부 불랑기 실태 고찰 / 이강칠 조선시대 도검의 실측과 분석 / 김성혜 박선식 고대 군사유물의 과학적 보존처리 / 임선기 조선중기 이일의 관방정책 / 강신엽 궁인위궁에 대한 고찰 / 유세현 부록 1. 자료소개 훈국신조군기도설 훈국신조기계도설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09 부록 2. 연보 육군박물관 40주년 연보 제 6 집 (1999) 제 1 부 무구편 정익공 이완 장군 유물에 대하여 / 이강칠 도검의 기능성 연구 / 김성혜 김영섭 Weapons of the 1871 US Korean Campaign (Shinmiyangyo) / THOMAS DUVERNAY 제 2 부 군사편 조선초기 화기 방사군의 실상 / 강성문 임진왜란 해전시의 함포운용술 연구 / 최두환 임진왜란 초기 전투 연구 / 서영식 외 클라우제비츠 중심 이론의 현대적 적용 / 나종남 제 3 부 박물관 운영편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의 박물관의 역할 / 박재광 육군 부대역사관의 실태 분석 / 모동주 제 4 부 부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행통정대부 남원도호부사임공행장초 / 강신엽 군사(무구류 성곽 봉수)관련 논저 목록 제 5 부 육군박물관 연보
210 학예지 제19집 제 7 집 (2000, 국궁 문화 특집) 발간사 삼국시대 궁의 연구 / 김성태 조선시대 활의 군사적 운용 / 강성문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 심승구 조선시대 활의 제작과 궁재의 확보 / 우다가와 다케히사 저 서영식 역 국궁에 반영된 철학사상 / 강신엽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국궁 / 정재민 우리나라의 궁장 시장에 대한 보고 / 유세현 국궁의 과학적 분석 / 최진희 부록 나의 국궁 체험기 / 담도성 글 학예지편집실 역 사료 조선왕조실록의 대사례 향사례 관련 기사 녹취 한국 역사 속의 국궁 문화 세미나 육군박물관 연보 제 8 집 (2001, 관방유적 특집) 경기 서울 인천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 / 백종오 김병희 김주홍 강원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과 과제 / 유재춘 대전 충남지역 관방 연구의 현단계 / 서정석 충청북도의 관방유적 / 현남주 경남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과 과제 / 나동욱 경상북도의 관방유적 / 이희돈 전남의 관방유적 연구현황 / 박준범 전북지역의 관방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 / 강원종 제주도 관방시설에 관한 연구와 실태 / 김명철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11 육군박물관 연보 제 9 집 (2002, 화약 병기 특집) 한국의 화약병기 / 이강칠 고려말 조선초 화약병기 연구의 현황과 과제 / 김대중 15~16세기 조선의 화기 발달 / 박재광 조선후기 화기 발달사 연구 현황과 이해의 방향 / 노영구 조선의 역대 화차에 관한 연구 / 강성문 대원군 집권기 무기개발과 외국기술 도입 - 훈국신조군기도설 과 훈국신조기계도설 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 / 연갑수 임진왜란기 무기류 발굴의 고고학적 성과 - 용인 임진산성 출토품을 중심으로 - / 백종오 훈국신조군기도설(번역) / 강신엽 육군박물관 연보 제 10 집 (2003, 사서화류 특집) 육군박물관 소장 동래부순절도 연구 / 권소영 육군박물관 소장 조천도 연구 / 정은주 당포전양승첩지도 에 대한 일고찰 - 노씨본과 신씨본을 중심으로 - / 이상훈 임진왜란기 조총의 전래와 제조 - 철포기 를 중심으로 - / 이왕무 해동지도 의 봉수표기형태 고찰 / 김주홍 말갈문제 를 통해 본 6세기말 요서 정세의 변화 / 이성제 The Archery Tradition of Korea / 김기훈 훈국신조기계도설(번역) / 강신엽 육군박물관 연보
212 학예지 제19집 제 11 집 (2004, 조선의 도검 특집) 조선시대 도검 연구의 현황과 과제 / 박재광 조선시대 도검의 유형 분석 - 칼몸의 슴베와 자루의 종합구조 / 이석재 애자문 연구 - 조선검의 고동, 그 명칭의 오류 / 이석재 칠성검 연구 / 김미경 조선시대 도검에 나타난 문양과 매듭장식에 관한 연구 / 이승해 조선시대 운검 별운검 보검 연구 / 강신엽 조선왕조실록 을 통해 본 환도의 의미와 기능 / 강순애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도검의 모습 / 안재한 육군박물관 연보 제 12 집 (2005, 무구류 제작법 특집) 고대 철 제련에 대한 일고 / 박현욱 여말선초의 화약 화기 제조에 대한 일고찰 / 박재광 조선초기 군기감 무기제조의 변화 추이 / 김일환 조선시대 도검 모극의 결합구조 연구 / 이석재 조선시대 각궁과 교자궁의 제작실태 / 유세현 승자총통에 대한 과학적 연구 / 이재성 조선시대 갑주의 제조 / 박가영 조선시대의 군사 교육 기관에 관한 연구 / 김기훈 숙종대 국방개혁안에 관한 일고창 / 노영구 육군박물관 연보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13 제 13 집 (2006, 육군박물관 개관 50주년 특집) 고구려 중장기병에 관한 제문제 / 서영교 최충헌 정권과 중방 도방 교정도감 / 김대중 연산군대 서정논의과 대여진정책의 변화 / 김낙진 조선시대 화약무기 운용술 / 김병륜 미이라를 통해 본 조선시대 한 무관의 삶과 행적 / 심승구 문경새재 어류산성에 대하여 / 이재성 조선시대 갑주의 제조 / 박가영 왜성연구를 위한 예비적 검토 / 김기훈 김태산 김인욱 이정빈 한국전쟁 중 한국군의 재편성에 관한 연구, 1951 ~ 1953 / 나종남 육군박물관 개관 50주년 연보 제 14 집 (2007, 관방유적 축조법 특집) 한성 백제시대 산성 축조방식에대하여 / 김호준 신라 성과성문의특징과 변천과정 검토 / 김병희 고려시대 성곽의 축성법/ 김낙진 조선시대 도성축조와 성랑/ 신영문 화성건설의물자 조달 / 이달호 한국성각유적의 문화자원 활용 방안 연구 / 백종오 한국 내지봉수의 구조.형태 고찰 / 김주홍 경남지역 지방봉수대 고찰 / 홍성우 사법비전공하 연구시론/ 김기훈 육군박물관 연보
214 학예지 제19집 제 15 집 (2008, 군사 신호체계 특집) 조선후기 군사 깃발 / 노명구 조선후기 군사 신호체계 연구 / 최형국 조선수군의 전술신호 체계 / 정진술 육군군기 개관 / 안재환 성문출토 확쇠 현황 / 김병희, 백영종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 백영종 정사론 / 김세현 육군박물관 연보 제 16 집 (2009, 전통 군사복식 특집) 삼국시대 판갑의 특징과 성격 / 송정식 조선시대의 군복에 관한연구 - 군군복을 중심으로 / 최영로 조선시대 두정갑에 대한군사사적 검토 / 김병륜 경기도박물관 소장 헌종가례진하계병의 군복류에 관한 연구/ 정미숙, 남경미 육군박물관 소장 망수에 관한 소고 / 최은수 말갑옷 연구 시론 / 장경숙 특별기고 (세계의 군사박물관 탐방) 일본박물관 - 도쿄국립박물관, 에도도코박물관, 국립역사 민속박물관을 중심으로 / 강신엽 영국 제국전쟁박물관 / 이내주 프랑스 박물관 소계 / 김진찬
학예지 제1집 ~ 제17집 게재논문 목차 215 제 17 집 (2010, 우리나라의 전통기병 특집)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 김병륜 신라기병 과 목장 / 서영교 19세기 전반기 조선기병 역화의 배경연구 / 최형국 조선 정조대 장용영창설과 마상무예의 전술적 특성 / 최형국 17세기 조선의 마구 收 給 에 관한 연구 / 장원주 육군박물관 연보 제 18 집 (2011, 전통시대 무예 국궁 특집) 삼국~고려시기 활쏘기 문화 / 윤성재 조선전기 활쏘기 문화의 특징 / 윤훈표 부북일기 에 나타난 무인의 활쏘기 훈련 / 우인수 일제 강점기의 전통 궁술 / 김기훈 전국 활터[ 射 亭 ]의 현황과 과제 / 이재학 활쏘기의 체육학적 논의 / 정재성 육군박물관 연보 부록 2012 육군박물관 연보 수증도서 학예지 제1집~제18집 게재논문 목차
216 학예지 제19집 투고 규정 1. 일반원칙 1) 학예지 에 논문게재를 희망하는 자는 다음의 투고요령에 글 파일을 편집위원회에게 이메일 을 통해 제출한다. 2) 논문 투고자는 논문과 함께 1 필자명과 논문명의 영문 표기 2 외국어 초록(300단어 내외) 3 논문의 주제어(3~7개, 국문 및 외국어)를 편집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단, 외국어로 작성 된 원고인 경우 국문초록을 작성하며, 사용이 가능한 외국어는 영어 일어 중국어로 한다. 3) 공동집필의 경우 2인까지는 병기하며, 3인 이상일 경우 대표 저자와와 공동 저자로 구분하며, 후자는 각주로 내려서 표기한다. 4) 원고분량은 원칙적으로 논문의 경우 200자 원고지 150매 이내를 원칙으로 하며, 비평 논문과 자료소개, 학술기획의 경우 100매 내외, 그리고 서평의 경우에는 30매를 기준으로 한다. 이를 초과할 시, 논문 게재자는 추가 조판 비용을 부담하여야 한다. 2. 본 문 1) 논문의 목차는 머리말(혹은 서언, 서설 등)과 맺음말(혹은 결론, 결언, 결어)을 포함하여 아라 비아숫자(1, 2, 3 )로 표기하며, 목차 안의 항목은 1)-가-가) 순으로 표시한다. 2) 도표는 반드시 표 기능을 사용하여 작성한다. 3) 괄호 표기는 [ ], ( ), 순으로 하고, 원문에 있는 주석은 ( )로 처리한다. 4) 연대의 표시는 서기를 원칙으로 하며 불가피한 경우 ( )안에 서기를 병기한다. 5)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6) 인용문은 한글로 번역함을 원칙으로 한다. 3. 각 주 모든 주는 각주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참고문헌을 포함한다. 1)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 동양어권의 논문은 (반각)안에, 단행본은 (반각)안에 제 목을 넣는다.필자, 연도, 논문명, 서명, 출판사(혹은 발행기관) 순서로 하며, 논문과 서명 및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17 출판사 사이에 쉼표는 생략한다. 잘 알려진 학회지의 경우 발행기관을 생략할 수 있다. 논문과 각주의 끝은 마침표로 표시한다. 김민경, 2005, 조선전기의 군사제도와 궁술문화 학예지 3, 165쪽. 강석환, 1996, 조선후기 화포연구 일조각. 2)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 서양어권의 된 논문은 안에 제목을 쓰고, 단행본의 書 名 은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논문과 서명 사이에는 반드시 쉼표로 구분한다. 서명과 권수 사이도 쉼 표로 구분해 준다. Lee, Hai-soon, 1990, Sijo Revival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l-3 Seoul: Institute of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23쪽. 3) 역서일 경우는 저자 역자, 연도, 번역서명, 출판사를 쓰고, 괄호 안에 원서를 밝힌다. 2인의 공저일 경우 병기하되, 3인 이상일 경우 대표저자 혹은 제1 저자만 쓰고 외 ~인 으로 표기한 다. 三 品 彰 英 심호섭 역, 2009, 南 鮮 과 北 鮮 경희출판사(1957, 南 鮮 と 北 鮮 ハ バ ド 燕 京 同 志 社 東 北 文 化 講 座 委 員 會 ). 김인욱 강원묵, 2009, 무기발달사 연구의 동향 경희출판사. 김헤영 외 3인, 2009, 대한제국 연구의 동향 경희출판사. 5) 동일한 자료를 여러 번 인용할 경우 연도, 앞의 논문 혹은 연도, 앞의 책 으로 표기한다. 강석한, 2005, 앞의 논문, 20쪽. 김민결, 1996, 앞의 책. 6) 기타 이 요강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기존의 학예지 편집 관례에 따른다.
218 학예지 제19집 심사 / 간행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욱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게재 논문의 심사와 간행을 위한 것이다. 제2조( 학예지 의 내용과 투고) 1. 학예지에 대한 논문, 자료, 서평 및 기타 본 학회의 취지에 부합하는 사항을 수록한다. 2. 논문 투고는 원칙적으로 회원만이 할 수 있지만, 편집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예외를 둘 수 있 다. 3. 논문 원고는 학예지 투고지침 에 맞게 작성한 것이어야 하며, 소정의 심사를 통과해야 학예 지 에 게재될 수 있다. 4. 논문은 수시로 제출할 수 있으나, 최소한 간행 2개월(9월 30일) 이전에 편집위원회에 제출하여 야 한다. 5. 자료와 서평 등은 위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으며, 편집위원회에서 논의 결정한다. 제3조 (간행일자 및 면수) 1. 학예지는 매년 12월 30일(연 1회) 간행한다. 2. 학예지는 매호 300쪽 안팎의 분량으로 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4조 (편집위원회) 1. 연구지의 편집과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편집위원회를 둔다. 2. 편집위원회는 육군박물관장이 위촉한 편집위원으로 구성하며, 편집위원 중 위원장을 선출한 다. 3. 편집위원회는 학예지 의 간행을 기획하고, 모든 원고의 1차 심사를 담당한다. 4. 편집위원회는 2차 심사의 결과를 종합하고 최종 처리한다. 5. 편집위원회는 연 4회 정기적으로 개최함을 원칙으로 한다.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19 제5조 (심사위원) 1. 2차 심사위원은 편집위원회를 거쳐, 해당 분야 전문연구자 중에서 위촉한다. 단, 논문 추천자와 투고자의 지도교수는 2차 심사위원이 될 수 없다. 2. 심사위원에게는 소정의 심사료를 지급할 수 있다. 제6조 (논문심사) 학예지 에 투고된 논문은 1 2차 심사를 모두 통과하여야 한다. 단 박물관장이 주관한 학술회의 에서 발표한 논문의 경우 1차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1. (1차 심사) 분야, 제목 및 목차 설정, 형식, 분량 등의 적합성 여부를 검토하고, 참석 편집위원 3분의 2 이상 의 통과 판정을 얻어 2차 심사에 회부한다. 2. (2차 심사) 1) 2차 심사위원은 각 논문당 3명을 위촉한다. 2) 심사위원은 논문의 학문성을 객관적으로 심사하여, 정해진 양식에 따라, 게재 가능(A), 수정 후 게재(B), 수정 후 재심사(C), 게재 불가(D)의 4 등급으로 판정하며, 그 결과를 편집위원회 에 제출한다. 단 B, C 등급의 경우 수정이 필요한 사항을 제시하고, D 등급의 경우에는 그 이유를 명시한다. 3) 편집위원회는 제출된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A,A,A) (A,A,B) : 게재 (A,B,B) (B,B,B) : 수정 후 게재 (A,A,C) (A,A,D) (A,B,C) (A,B,D) : 편집위원 또는 제3자 1인에게 수정 후 게재 또는 수정 후 재심사 판정을 의뢰 (A,C,C) (B,B,C) (A,C,D) (B,C,C) (B,B,D) (C,C,C) : 수정 후 재심사 (A,D,D) (B,C,D) (B,D,D) (C,C,D) (C,D,D) (D,D,D) : 게재불가 4) 재심사는 1회에 한하며, 심사위원 전원 수정 후 게재(B) 이상의 판정을 받아야 게재하며, 그 이후의 판정이 나올 경우 게재불가 조치한다. 5) 심사를 통과한 논문 편수가 편집중인 연구지 수록 분량을 초과할 경우에는 우선 주제가 해당 호의 편집 기획에 부합하는 것을 선정하고, 다음으로는 심사성적을 기초로 순위를 정하여 선
220 학예지 제19집 정한다. 6) 심사성적을 기초로 투고의 순서를 정한다. 제7조 (심사결과 통보) 1. 논문의 심사위원이나 심사과정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비공개로 한다. 2. 논문 제출자에게는 심사결과와 수정 요구 사항, 게재 불가의 이유를 공개한다. 3. 논문 제출자는 심사위원의 수정 요구 사항을 존중하며, 최대한 반영하도록 한다. 제8조 (논문 심사료 및 게재료) 학회는 게재가 확정된 논문의 심사료와 게재료를 논문 투고자에게 청구할 수 있다. 부 칙 제1조. 이 규정은 2010년 1월 1일부로 소급 적용한다. 제2조. 이 규정에서 나오지 않는 사항은 관례에 따른다. 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육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제반 학술 연구 활동의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준수하여야 할 연구윤리의 기준을 확립하고, 이를 관리 감독할 연구윤리위원회의 조직 임무 운 영에 관한 사항을 정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제2조 (적용대상 및 범위) 이 규정은 육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학회지 투고자에 적용된다 제3조 (윤리규정) 육군사관학교 학예지 의 회원 및 투고자는 아래 행위를 부정행위 로 간주한다. 1. 타인의 연구 성과를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연구 성과로 발표하는 행위 2. 수행되지 않은 연구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허위로 제시하는 행위 3. 이전의 연구를 새로운 연구처럼 출판하거나 발표하는 행위. 단 여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예외 사항을 둔다.
투고규정,심사간행규정,연구 윤리위원회 규정 221 1) 석 박사 학위논문 혹은 그 일부의 경우, 그 성과를 다른 학회지나 출판물 등에 게재한 적이 없다면, 이를 부정행위 로 간주하지 않는다. 2) 연구윤리위원희의 심의를 거쳐 승인을 받고, 그 사유를 출판이나 발표에서 서면으로 밝힌다 면, 이를 부정행위 로 간주하지 않는다. 4. 이외 일반적으로 연구윤리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행위 제4조 (연구윤리위원회의 구성) 1. 위원회는 편집위원장이 임명한 8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며, 편집위원장이 위원회의 위원장 을 맡는다. 2. 위원은 다년간 학예지 연구에 종사한 중진학자를 선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3. 위원이 심의 대상인 경우, 해당 심의 건에 대하여 위원 자격을 일시 정지한다. 제5조 (연구윤리위원회의 기능 및 임무) 위원회는 본 규정 제3조에 위반되는 행위에 대하여 심의하고, 필요한 조치 및 징계를 결정한다. 제6조 (연구윤리위원회의 소집, 심의, 및 제재) 1. 위원회는 위원회의 위원 및 내 외부의 심의 요청이 있을 시에 위원장이 소집하고, 재적 위원 과반수 출석, 출석 위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2. 위원회는 신청인이 제시한 최대한 관련 자료를 서면을 통해 심사하며, 신청인의 신원을 철저히 보호하는 한편, 피신청인에게는 소명의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여야 한다. 3. 부정행위 로 판정될 경우 그 수위에 따라 다음의 징계 조치를 취한다. 1) 경고: 부정행위 의 고의성이 없고, 그 수위가 경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구두로 경고 조치한 다. 2) 출판물 삭제: 부정행위 의 고의성이 인정되며, 그 수위가 상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만주학회 명의로 출간된 저서 학술지 등 제반 출판물의 성과를 삭제하며, 향후 3년간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 3) 출판물 삭제와 영구 제명: 부정행위 의 고의성이 인정되며, 그 수위가 심각하다고 판단될 경우, 만주학회 명의로 출간된 저서 학술지 등 제반 출판물의 성과를 삭제하며, 본 학회에 서 영구 제명한다. 4) 이상 2)와 3)의 판정이 나오면 최초 발간되는 본 학회의 홈페이지와 학회지에 판정의 내용을
222 학예지 제19집 공시한다. 4. 모든 회원은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수용해야 하며, 신청인 또는 피신청인의 불복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1회에 한해 재심 요청을 할 수 있다. 부칙 이 규정은 2011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정: 2011년 12월 1일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학예지 연구윤리위원회 위원장 : 최 정 민(육군사관학교) 위 원 : 이재(육군사관학교 ), 강성문(육군사관하교), 김기훈(육군사관하교), 이내주(육군사관하교), 이현수(육군사관하교)
육군박물관 학예지 제19집 편집위원장 : 신내호(육군박물관장) 편 집 위 원 : 정진술(해군사관학교 해양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박재광(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 나종남(육사 군사사학과 교수) 이호준(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강사) 김병륜(국방일보 취재기자 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 강신엽(전 육군박물관 부관장) 김대중(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학 예 지 제 19 집 임진왜란 7주갑 기념 2012년 12월 22일 인쇄 2012년 12월 31일 발행 발 행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사서함 77-1호 우 : 139-799 02) 2197-6451~4 편집 제작 : 황금알 E-mail : tibet21@hanmail.net Tel 02) 2275-9171 Fax 02) 2275-9172 (비매품)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출처를 명시하면 자유로이 인용할 수 있습니다. 무단 전재하거나 복사하면 법에 저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