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1. 서 론 헌법은 법률이 아니다. 그러므로 헌법개정에 관한 논의는 법률개정과는 다른 차 원에 있어야 한다. 대중의 여론이나 국정운영의 단기적 편의뿐 아니라 헌법의 근 본적 원리와 본질적 의미를 고려하며 장기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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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이상과현질* 이 셔 g a 0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본고는 헌법의 본질적 성격에 부합하는 이상적 개정 논의과정을 탐구하고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그러한 이상의 추구가 가능한지 살펴본다. 본고의 주 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헌법의 근본성(항구성), 정부 규제성, 총체성을 고 려할 때, 기존 정치권이 논의과정을 주도하지 말고 보다 중립적, 장기적, 원 리적 관점을 취하고 전문가적 지식과 시민적 교양을 갖춘 각계각층의 사람 들이 특별회의를 소집해 참여적으로 개정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 둘째, 설득 과정을 거쳐 다양한 입장의 화학적 통합 (integration) 을 추구하는 토의 (deliberation) 가 거래를 통해 이익들의 물리적 집성 (aggregation) 을 추 구하늠 토론 (debate) 보다 헌법의 근원성, 항구성, 전체성에 보다 더 부합 한다 셋째,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 1990 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 등 을 볼 때, 사회 분위기가 한 쪽으로 수렴하는 조건이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 과정에 필수적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지평을 볼 때, 참여적 토의민주주의 패러다임을 통해 헌법개정을 논의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는 이상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오히려 헌법개정 논의과정이 사회 균열과 갈등을 심 화시킬 위험성이 크므로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주제어: 헌법개정, 토의민주주의, 헌법의 본질적 성격,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 한국정치현실 이 논문은 2006년 국회의 지원에 의해 수행한 과제임. 이 논문의 초고는 관훈클럽/한국 정치학회 공동주최 세미나 (2006년 4월 27 일, 제주도)에서 발표되어 그 요약본이 관훈 저널 ~(2006년 여름)에 실렸음.

148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1. 서 론 헌법은 법률이 아니다. 그러므로 헌법개정에 관한 논의는 법률개정과는 다른 차 원에 있어야 한다. 대중의 여론이나 국정운영의 단기적 편의뿐 아니라 헌법의 근 본적 원리와 본질적 의미를 고려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개정논의가 이루어져야 한 다. 또한 단순한 수의 논리에만 의존하기보다 진정한 공동선을 향한 진지한 토의 를 통해 젤득하고 설득 당하는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처럼 헌법개정은 법률 개정에 비해 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그 논의는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은 상 황에서만 아주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당위적 바람과는 달리, 1987년 현행 헌법의 제정 이래 여러 차례 불거져 나 온 헌법개정 논의는 즉흥적 발상, 단기적 편의, 여론영합적 수사, 때론 정파적 이 해관계와 전략적 동기에 의해 이끌렸다는 인상을 준다. 잠시 나왔다가 곧 잠잠해 지며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음은 이런 논의과정의 문제점을 볼 때 당연하다 하 겠다 2006년에 접어들어 헌법개정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지 금까지와는 달리 바람직한 방향과 방식으로 헌법개정이 논의되고 무언가 성과를 낼 수 있윤지, 아니면 이번에도 헌법의 본질적 의미에 부합하는 논의보다는 2007 년 대선을 염두에 둔 정파적 대결에 그칠지 주목된다. 이 글은 헌법개정이 논의된다면 어떠한 과정 속에서 논의가 진행되어야 바람직 할지에 대한 학문적 고민을 담고 있다. 헌법개정이 구체적 내용과 관련해 수많은 실제적 이해관계와 주관적 가치판단을 수반하므로 그러한 내용에 초점을 맞출 수 도 있겠지만, 이 글은 보다 순수 원리상의 관점에서 논의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즉, 헌법의 의미와 당위적 존재이유를 순수 원리의 차원에서 규정하고 그렇 게 규정된 이상( 理 想 )에 부합하기 위해서 헌법개정 논의과정이 어떤 성격을 띠어 야 할지 탐색한다.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을 제시함으로써, 현 시점의 한국 정 치현실에서 헌법개정 논의가 과연 바람직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시사점 도나올수 있을것이다 본론의 주장을 미리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헌법은 급변하는 당대 시점 의 사회여론이 아닌 보다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인간권리, 사회가치, 문화규범을 천명하는 것이고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정부를 중요한 규제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149 관련 대상과 적용 범위가 워낙 총체적이기 때문에 법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 을 통해 개정이 논의돼야 한다. 단지 제도 틀만 달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논의 과정을 이끄는 원리와 대명제에서 차이가 나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헌법개정 논 의는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진지한 토의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한다 설득과정을 거쳐 다양한 입장의 화학적 통합 (integra디on) 을 추구하는 토의 ( deliberation) 가 거래를 통해 이익들의 물리적 집성 (aggregation) 을 추구하는 토론 (debate) 보다 헌법의 근원성, 항구성, 전체성에 보다 더 부합한다. 그 토의가 소수 엘리트로만 한정되지 않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수많은 시민으로도 확대되어 참 여적 성격을 띠어야 함은 물론이다. 셋째, 아주 이상적이라 할 수는 없어도 상대적 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 등을 볼 때, 사회 분위기 가 한 쪽으로 수렴하는 조건이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에 펼수적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지평을 볼 때, 참여적 토의민주주의 패러다임을 통해 법률개정과는 근 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헌법개정을 논의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는 이상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오히려 헌법개정 논의과정이 수많은 문제를 더 낳을 가능성 이 커 보인다. 특히 사회 균열과 갈등을 섬화시킬 위험성이 크다. 11. 헌법의 본질적 특성애 부합하는 개정 논의과정 헌법이 최고법이라 함은 다른 어떤 형태의 법보다도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근본 성은 곧 항구성을 의미한다. 어느 특정 시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시대적 상 황과 상관없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효력을 지닌다는 성격이다. 물론 시간적 범위 를 완전히 초월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절대적 보편 규범과 규칙은 상상하기 힘들 므로 헌법의 항구성도 상대적 개념이긴 하다. 그래도 가능한 한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사회 규범과 규칙을 담지( 擔 持 )한다는 의미에서 헌 법은 시대상황적 적실성에 민감해야 하는 법률, 행정명령, 조례 등 기타 법체계에 비해 항구성을 본절로 삼는다. 항구성을 띤 헌법은 당대 사람들의 의사와 상황논리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그래 서 그들의 다수결로 만틀거나 쉽게 고칠 수 없는 항구적 인간 권리와 사회 규범의 명시를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헌법에서 천명되는 원칙들은 인간법이 아니라 자연

150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법으로서 당대 사람들이 편의대로 만들기보다는 발견하고 선언해야 하는 것이라 는 생각이 공명을 자아왔다 (Corwin 1928/1929). 특히 경성헌법을 취하는 거의 대 부분의 나라들의 경우, 헌법은 당대 사람들 중 다수가 소수를 수( 數 )로 누르고 원 하는 대로 고치지 못하도록 불가양한 근본적 원칙을 명시하고 단순다수결보다 어 려운 개정규정을 담고 있다. 물론 과거에 만틀어진 헌법에 오늘의 사람들이 구속 되는 것이 정당한지 이의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Alexander 1998) 그러나 거의 모든 나라가 헌법을 채택해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법적 틀의 존재는 기정사실로 받 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헌법의 근본성, 항구성은 헌법개정(헌법제정에도 해당되지만) 논의과정 과 관련해 몇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항구적 보편원리(상대적 개념이지만) 에 관한 추상적 논의가 헌법개정 논의과정을 이끌어야 한다. 구체적 논의는 펼연 적으로 당대의 고유한 상황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므로 법률이나 그 밖의 하위법과 관련해선 적실하지만 근본적 헌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헌법개정 논의과정 은 그때그때 변하기 쉬운 여론을 초월해야 한다. 물론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의견 이 개진되어야 하고 가능하면 반영되면 좋겠지만, 수의 대소에 따른 여론이 헌법 적 판단의 기준이 되어선 곤란하다. 셋째, 오늘날 선거로 뽑히는 의원들은 헌법개 정 논의의 주체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의 양섬과 원칙에 충실한 수 탁자 (trustee) 의 역할보다는 유권자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는 대리인 (delegate) 씌 역할을 주로 따르는 겸향이 크다 이러한 의원들의 행태는 법률의 제 - 개정에는 알맞을지 몰라도(물론 이 경우에도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구 적 헌법의 개정을 위해선 바람직하지 않다 선거 승리를 위해 여론에 연연할 수밖 에 없는 의원들보다는, 후술하듯이 전문적 소양과 시민적 교양을 갖춘 여러 계층 의 사람들이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항구적 근본성에 덧붙여 권력 및 정부에 대한 규제성도 헌법의 본질적 성격에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입헌주의 ( constitutionalism) 는 전제 군주의 자의적 권력을 제 한해 시민의 권리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절대군주제로부터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오랜 역사에서 입헌주의의 도입, 즉 헌법의 채택이 초기 추진력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정부권력에 대한 규제성에 초점을 맞춘 정의, 즉 헌법이란 정부행위를 공정한 쪽으로 효과적으로 규제해 정부의 책임성을 높이는 규칙들 이라는 정의가 나올 수 있다 (Friedrich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 이상과 현실 151 1968, 26). 물론 헌법이 정부 외에 시민사회에 대한 규제도 포함할 수 있다. 헌법 이외의 법들도 정부에 대한 규제를 담을 수 있다. 그렇지만 헌법이 기본적으로 시 민사회보다는 정부권력을 규제 대상으로 삼으며 다른 법들보다 더 근원적이고 전 반적인 차원에서 정부를 규제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정부의 직접적 이해당사자들이 헌법개정 논의과 정상 너무 큰 역할을 맡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 의 원, 고위 관료가 헌법개정 논의를 주도한다면 규제 대상이 스스로에 대한 규제를 정하는 것으로서 이해충돌의 문제가 발생한다. 정부조직법, 국회법, 선거법 등의 경우, 정부에 대한 규제를 담지만 헌법이 정한 틀 내에서의 세부규칙에 관한 것이 므로 정부 내 행위자들이 결정해도 원칙에 큰 훼손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 나 헌법은 정부권력에 대한 규제의 기본 틀이므로 권력당사자들이 그 개정논의에 서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해선 곤란하다 기존 정부가 아닌 다른 조직이나 기구, 예 를 들어 특별히 구성된 헌법제(개)정회의, 전문가 조직, 각종 시민단체 빛 이익단 체 등이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반영해 엘스터는 주장하길, 헌법은 그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소 집된 회의에서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Elster 1998b, 117). 의회는 헌법의 규제를 받는 기관으로서 헌법 제정/개정 과정에서 큰 역할을 맡아선 곤란 하고, 의회뿐 아니라 대통령이나 법원 등 헌법의 규제 하에 놓이는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부권력 행사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특별회의를 소집 하되, 그 소집 시기와 관련해 정파적 자의성이 개입되고 갈등이 증폭펼 위험성이 있으므로 전문가로 구성된 특별헌법위원회가 10년 내지 20년 주기로 정기적으로 자동 구성되어 개정 필요성을 타진하도록 하자는 주장도 들린다 (Schwartz 2004). 헌법의 또 다른 본질적 특성으로 총체성을 들 수 있다. 헌법은 정부권력의 작동 방식뿐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역할, 행태, 관계, 신념, 가치관 등 사회의 핵심 요 소들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규정한다. 헌법학자 Finn은 헌법의 이원성을 강조하는 데, 사법적이 uridic) 측면이 여러 제도적 형태를 규정하는 반면 시민적 (civic) 측면 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이 지니고 지녀야할 정체성, 태도, 생활양식을 규 정 한다고 한다 (Finn 2001; 또한 Mac어02001; Muφhy 2001 도 참조할 것 ). 대 한민 국 헌법의 경우, 각 정부조직에 대한 규정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국가정체성에 관한 총강,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국민의 권리와 의무, 경제에 대한 조항도 있

152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다. 그러프로 정부제도에 대한 합리적 기대와 아울러 사회환경적 조건과 역사적 전통에 대한 인식, 규범적 가치관, 정치문화도 헌법에 총체적으로 녹아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헌법의 여러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같이 움직이며 전 체적 (holistic) 으로 기능을 수행한다. 만약 이 요소들 간에 부합성, 조응성, 일관성, 조율성이 약하다면 헌법은 역기능을 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헌법의 총체성은 국 가권력이 지배적 위치에 서서 사회체제 작동과정을 주도하던 과거에 비해 국가권 력, 시장, 시민사회, 국제사회가 상대적 힘의 균형을 이루고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 며 상호간 경계가 많이 희미해진 오늘날 보다 커졌다고 말할 수 있다. 총체성이라는 본질적 특성도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관련해 시사점을 던진다. 사 회체제의 일부분에 관련된 특정 정책을 규정하는 법률이나 기타 하위법과 보다 전 반을 아우르는 총체적 헌법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헌법의 총체성을 감안해 사회 의 모든 구성원들이 고루 그 개정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시사점이 자연스레 나온 다. 정부만의 일일 수 없다. 부분적, 지엽적, 편향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몇 몇 정당이나 일부 이익단체, 이념적 시민단체가 헌법개정 논의과정을 주도해서도 안 된다. 학자나 법 전문가에게만 맏길 수도 없다. 다양한 사회이익과 의견을 대변 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제도에 대한 합리적 판단뿐 아니라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 규범, 정치문화, 이념적 가치 관 등이 가능한 한 폭넓게 헌법 논의과정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상기한 헌법의 근본성(항구성). 권력 규제성, 총체성이란 본질적 성격을 고려할 때 그 개정 논의과정상 대통령이나 국회 등 기존 권력주체의 역할은 최소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규정에 의하면, 국회 재적의원 과반 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되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 된 후 국민투표(유권자 과반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로 헌법개정이 최종 확정되며 대통령이 이를 공포한다. 형식 절차에서 국회의 역할이 결정적이고 대통 령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이 개정 절차를 파기 할 수는 없다. 만약 꼭 헌법개정을 해야만 한다면 기존의 규정된 절차를 거쳐야 한 다. 여기서 상기한 이상적 헌법개정과정과 우리 현실 사이의 괴리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헌법이 근본적이고 총체적으로 권력구조와 사회체제 전반에 방향을 제 시하는 가장 중요한 권위적 기틀이란 점을 존중한다면 개정 논의과정이 형식 요건 에 너무 구애되기보다는 본질적인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기존 헌법에 규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 이상과 현실 153 정된 형식 절차를 무시할 수도 없으므로 고육지책으로 운용의 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즉, 헌법개정안이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제안, 의결되기에 앞서 상당한 기 간에 결친 실질적인 논의과정이 진행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질 적인 논의과정은 앞서 말한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의 특정을 띠도록, 전문적 소양과 시민적 교양을 갖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주도해야 한다. 각계각층의 이 해관계를 대변하는 이익단체 및 시민단체 대표들, 전문가, 학자,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 및 관료가 균등한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토의를 이끌도록 한다. 일반시민도 인터넷 등을 통해 논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 고, 서베이에 나타난 여론도 비록 일반시민의 피통적 의견이지만 참고 차원에서 널리 그리고 자주 공표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실질적 논의과정을 거쳐 입장이 적 절한 수준에서 종합 정리될 수 있다면 그 시점부터 헌법이 규정한대로의 형식 절 차를 밟아 정치권의 결정과 최종적인 국민투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11. 토의민주주의 이상에 따른 헌법재정 논의과정 앞 절에서 말한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이 지닌 여러 운영상의 난제(예를 들 어, 각계각층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정할지, 어느 정도의 기간을 잡을지 등)는 차치하더라도, 그 논의과정이 어떠한 원리에 입각해 진행되어야 할지 그리고 그 논의는 원칙상 어떤 성격을 띠어야 할지가 또 다른 고민거리를 던진다 그 동안은 주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만 논의의 의미를 이해해왔다. 자유주의 관 점은 각 행위자의 이익은 상황이 변치 않는 한 고정되어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 발한다. 개인은 자기의 고정된 이익/입장을 보다 확실히 강조하고 고집함으로써 전체적 의사 결정 시 좀더 유리한 위치에 있고자 한다. 자발적 거래와 타협을 통해 최대다수 세력인 승리연합 (winning coalition) 을 형성함으로써 각 개인은 자기 이 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사회 전체 입장에서는 다양한 이익들을 거래와 타협을 통 해 집 성 (aggregate) 하여 가장 중간에 위 치 한 균형 점 (optim떠 point, equilibrium) 을 찾 을 수 있다면 이상적이다 이 균형점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줄 수 있는 공 리주의적 효용을 확보해준다. 중요한 점은, 공정한 이익집성은 각자의 다양한 이 익과 의견을 분명히 밝히고 상대방의 것을 명확히 파악하는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154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는 것이다 즉, 모든 이익이 충분히 표출되고 상대방에게 그 입장이 정확히 전달되 는 의사소통 과정이 있어야 균형적 이익집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의사소통을 위해 자유주의자는 자유로운 토론 을 중시한다 그러나 복잡한 사안일수록 과연 중간점 균형점을 찾은 것인지, 다시 말해 이익 집성이 잔 이루어진 것인지 합의가 잘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사회이익의 분 화가 제한적이었던 과거 산업시대나 사회성원 사이에 매우 균질적인 가치관이 공 유되는 사회조건에서라면 이익집성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러 나 근래 탈산업화가 심화되며 사회이익이 워낙 갈래갈래 파편화되다보니 각기 자 기 이익을r 고수하는 행위자들 사이에서 거래를 통해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이익 집성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아무리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명확히 각자의 이 익을 밝히고 균형점을 찾으려 해도 의견 합치가 안 이루어지고 불만을 낳는다. 모 든 사회성원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해도 광범하게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 익집성이 요구되는데, 요즘처럼 복잡하고 유동적인 탈산업시대에는 토론과 거래 를 통한 합의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입장이나 이익이 존재하는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워졌마. 이러한 새로운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물리적 이익집성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토론 개념은 적실성을 많이 잃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헌법개정 논의와 관련해 자유주의적 토론 개념은 한계가 크다. 전술한 근 본성(항구성)이라는 헌법의 본질적 특성은 당대 사람들의 여러 이익을 집성해 중 간점을 찾는 토론 작업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적 이익집성 은 당대 상황을 정확히 반영해야 하는 법률이나 기타 하위법 결정에는 상대적으로 잘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항구적인 인권, 사회규범, 정체에 관한 규정은 당 대 사람들의 이익/입장 사이의 최적의 균형점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 률 결정은 주로 수의 논리에 따라 과반수 규칙에 따르지만 헌법개정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고 절대다수제를 취한다는 점을 볼 때, 물리적 이익집성을 위한 토론이 헌법개정 논의과정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자유주꾀 시각에 대한 반성으로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토의의 의미를 새롭게 이 해하자는 지적( 知 的 ) 움직임이 사회 일각에서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 대안적 시각에서 토의는 숙의나 심의 ( deliberation) 라고도 표현되는 개념으로서 단순한 토 론 (debate) 이나 논쟁 (argumentation) 과는 구분된다 진정한 의미의 토의는 이익이나 생각의 물리적 집성이 아니라, 충분한 설득과정을 거쳐 이익과 생각의 화학적 통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155 합이 수반되거나 적어도 그것을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을 말한다 (Habennas 1984/ 1987; Elster 1998a). 여기서 중요한 가정은 개인의 이익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가정이다. 사람들이 토의를 진행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논리에 공감을 한다면 각자 의 원래 이익선호체계를 바꾸어 사회전체의 공동선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호 설득하고 설득 당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이 가정은 자유주의적 가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개인 의 이익관이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규정된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적 ( communitarian) 이다 토의를 강조하는 일단의 학자는 토의를 진행하는 과정상 비 록 공동선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합의에조차 이르지 못해도 행위자 상호간에 그리 고 체제, 대해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Olsen 1996; Connor 외 1993, Tyler 2(01). 1986; Gutmann 외 토의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토의가 자유주의 관점에서의 토론보다 이상적 헌법 개정 논의과정에 적합하다 헌법의 근원성을 감안한다변 그 개정논의가 여론, 수 의 논리, 집단간 거래, 집단간 힘의 균형 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개념에만 입각해선 곤란하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불가양의 인권, 범할 수 없는 사회규범, 상황논 리로써 바꿀 수 없는 권력구조와 정부운영 원리 등을 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화 학적 이익통합을 목표로 하는 토의가 헌법의 본질에 부합한다 하겠다 다시 말해, 헌법논의는 단순한 표 대결을 넘어 의사소통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이 의사소통은 잠재적 때론 명시적 위협에 기반한 이익들 간의 거래가 아니라 설 득이 수반되는 논의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Elster 1998b, 105). 헌법의 정부 규제성과 총처l 성이라는 본질을 볼 때도 공동체주의적 토의 개념이 자유주의적 토론 개념보다 헌법개정 논의에 적합하다 헌법은 정부권력을 기본적 으로 규제하는 것이고 정부, 시민사회, 시장 등 사회체제의 모든 측면의 근본 틀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정부나 정치권에만 그 개정을 맡길 수 없고 가능한 한 많은 사회성원이 그 개정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이익집성의 문제점 은 다양한 이익틀을 표출하고 그 한가운데의 균형적 중간점을 거래와 타협으로써 찾는 작업이므로 주요 사회이익을 대표하거나 권위적 정책결정권을 가진 핵심 행 위자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즉, 이익집성을 목표로 하는 토론은 엘 리트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 엘리트에게만 맡기지 말고 가능한 한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과 일반시민도 참여해야 하는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

156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제 2호 (2006) 정을 자유주의적 토론 개념이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크다. 반면에 토의는 토론보다 덜 엘리트적이고 많은 참여를 전제로 한다. 토의민주주 의자 중 띈부는 대의과정상 대표자들(의원 등과 같은)이 진지한 토의를 진행함으 로써 국민이 정치 신뢰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거버넌스가 기해진다는 주장을 하고 그 쪽으로 연구를 집중시킨다 (March and Olsen 1986: Elster 1998a: Mansbridge 1980). 그러나 보다 많은 토의민주주의자는 사회 모든 구성원을 토의의 주체로 간 주해 전체 차원의 토의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며 각 개인과 사회체제에 어떤 순 기능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Cohen 1989: Cohen 외 1995: Haberrnas 1984 1987: Gutmann 외 1996). 토의는 토론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보다 많은 사람의 참 여를 전제로 하며 그 전제가 실현돼야 이상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익통합석 토의와 헌법개정 논의의 부합성을 엿볼 수 있다.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 가 필요하다면 그 과정상 토의 개념이 핵심 추진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띤 참여적 토의민주주의 이상에 맞는 헌법개정 논의과정은 어떠해야 할 까? 첫째, 헌법개정을 논의하는 주체들이 의식적으로 이익집성보다는 이익통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자기의 원래 이익선호체계를 고수한다는 전제를 버리고 상대 방과의 상호 설득과정을 거쳐 필요 시 자기 이익관을 바꿀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의 이익은 고정되어 있다는 자유주의적 가정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 각은 우리의 인식이 오랜 타성에 젖은 탓일지 모른다. 인간의 이익선호체계가 대 화를 통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Tyler 1998: Ty1er 200 1; Mansbridge 1999: Blackbum 1998; Braithwaite 1998) 헌법개정 논의에 임하는 행위자들이 보다 의식적으로 이익통합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이상적 토의 가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둘째, 이익통합을 목표로 삼기 위해서는 논의 참여자 각자가 유권자의 뜻을 충 실히 반영 하는 지 시 받은 대 리 인 (instructed delegate) 의 역 할뿐 아니 라 소선에 따라 국민 전체를 위한 행동을 하는 독립적 수탁자 (independent trustee) 의 역할도 균형 있게 수행해야 한다. 대리인 간에는 거래를 통합 물리적 이익집성은 가능해도 공 동선을 향한 이익통합은 용이하지 않다. 당대 사회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는 법률이 나 기타 하위법이 아니라 항구성을 띤 근본적 사회규칙인 헌법을 논의하는 과정이 니 만큼 참여자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도 완전히 도외시하면 안 되겠지만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독립적 수탁자의 역할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157 셋째, 재선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현직 의원들, 정당의 당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정치인 등은 독립적 수탁자 역할을 하기에 한계가 큰 탓에 이익통합을 향한 토의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사회이익을 직능적으로 혹은 이념적으로 대 변해야 하는 이익단체 대표들도 공동선을 향한 이익통합 노력에 동참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그러므로 편향적 시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전문 가, 학자, 시민단체 대표, 언론 등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고 일반 국민도 논의 과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 고위 관료, 이익단체 대표 등 특정 관점에 경도되기 쉬운 행위자들의 경우도 물론 배제할 수는 없다. 사회적 토의를 이끌어 나가고 국민의 참여를 촉구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들의 역할도 기대해야 하되, 가능한 한 많이 골고루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한 쪽 관점만 불균형 하게 강조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넷째, 이익통합을 위해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과정을 거치는 토의는 장기에 걸 쳐 진행되어야 한다. 가장 균형적인 중간점을 정답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이익집성 적 토론이 좀더 결과중심적이라면, 토의는 보다 과정중심적이다 사전에 정답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같이 모색해야 하는 것인 공동선을 향해 각자의 선호체계를 통합해 나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정 그 자체에 우선순위가 있으므로 시간에 제약을 받아선 안 된다. 헌법은 부분이 아닌 사회체제 전체를 다루고 항구 적 원리를천명하는것이므로더욱더 그개정 논의가충분한시간여유를두고토 의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헌법개정 논의가 자기주장의 일방적 외침이 아니라 상호간 설득을 목표 로 한 진정한 토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개성이 원칙이겠으나 때로는 단계에 따 라 비공개성도 적절히 가미해야 할 필요가 있다. 회의 공개 여부는 장단점을 지닌 다. 한편으로 회의 공개는 논의가 명분과 공동선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게 해준다. 즉, 정파적 집단적 이익의 언어를 이성과 논리의 언어로 바꿔준다 회의 공개가 참 여자의 사익추구 동기를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숨기게 하는 효과를 낸다. 노골적으로 편향된 이익관을 주장하지 못하고 설혹 위선일지라도 명분, 공동선, 이성을 강조하게 된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이를 엘스터는 civilizing force of hypocrisy"라고 표현했다 (Elster 1 998b. 11 1). 보다 많은 사람의 적극적 참여를 유발 하기 위해서도 회의가 공개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그려나 다른 한편, 회의 공개는 남을 의식한 영합적 발언과 수사적 발언을 촉발

158 한국정치연구 제 15 집 저 12호 (2006) 시킬 위험성이 있다. 공평한 중립적 동기로써 설득하고 설득 당하기보다는 사전에 정해진 자기주장을 경직되게 고집하는 경향이 굳어질 수 있다 논리적 반박을 받 고 스스로도 자기 입장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경우에도 이미 공표한 자기 입장 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즉, 공개된 논의과정에서는 필요 시 자기 선호체계를 바꾸 며 공동선을 향해 이익을 통합해 나가기가 용이하지 않다 자기 입장을 강하게 외 쳐대고 고수해 유리한 거래로써 유리한 이익집성을 이루고자 경쟁하는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의 비공개는 이러한 공개에 따르는 한계를 피할 수 있게 해주지만, 정 파적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는 입장 간에 야합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고 논의과정상 의 폭넓은 참여라는 기준도 훼손한다는 문제가 있다. 178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헌법회의는 회의 비공개의 양면성을 잘 예시해준다. 공개되지 않은 펼라텔피 아 헌법회의에 대해, 만약 각 대의원이 자기의 입장을 사전에 밝혔다면 일관성을 위해서라또 자기 입장을 고수하려 했을 것이다. 반면 회의를 비공개로 함으로써 각 대의원은 자기 의견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상대방 논리에 개방적으로 설득될 수 있었다.. (Elster 1998b, 109-110) 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그 헌법회의는 참여성과 대표성도 기하지 못했지만(각 주 대의원들을 선출하는 과정에 여성과 흑 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재산이 없는 백인은 참가하지 못했다 l, 지적으로 높은 수준 의 논의를 하며 토의민주주의 이상에 상당히 다가간 모범적 예로 간주하는 학자가 많다 (Elster 1998b, 98) 그러나 필라델피아 헌법회의가 이상적이었다고만 말하긴 힘들다. 여러 이익을 표방하는 집단 또는 세력 간에 노골적 거래와 타협이 있었다 큰 주와 작은 주 간 에, 남부 주와 북부 주 간에, 강력한 연방정부를 원하는 세력과 주 정부에 더 큰 힘을 실어주고자 한 세력 간에, 대통령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고자 한 세력과 의 회 간선으로 뽑고자 했던 세력 간에 복잡한 거래가 있었고 타협의 산물로 헌법이 나올 수 있었다. 그 거래와 타협 이띤에는 생존, 체제유지 내지는 계급이익을 지켜 야 한다는 공동이익이 존재했고, 내가 그 공동이익을 갤 수도 있으니 그러한 최악 의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도 내 이익을 많이 들어달라는 암묵적, 때론 명시적 위협 도 작용했다 (Roche 1990; Beard 1990) 결코 토의민주주의자가 꿈꾸는 이상이 그 대로 구현되었던 회의라고 볼 수는 없다. 회의 (비)공개성이 지니는 이러한 양면성을 고려할 때, 헌법개정 논의과정은 전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 이상과 현실 159 반적으로 공개하되 부분적으로 비공개 단계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특 별헌법회의에서 각 위원회별 토의는 비공개로 하고 전체 토의는 공개로 하는 방안 을 고려해볼 수 있다 (EIster 1998b, 117). 의제를 설정하고 여러 대안을 취합하는 초기 단계에서만 보다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비공개로 논의를 진행하고 그 후로는 공개로 하여 일반국민도 적극 참여하는 방안이다. 물론 보다 다양하게 공 개와 비공개를 혼용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IV. 정치현실에 비춰본 헌법개정 논의과정의 가능성과 한계 헌법은 가장 근본적인 최상위의 법체계이므로 가능한 한 가장 이상적 과정을 거 쳐 제 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술한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은 현실 에서도 지향할 목표로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사회 분위기 가 한 쪽으로 수렴되어 헌법개정의 필요성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광범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유리한 현실 조건이 있어야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런 현실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헌법개정 논의과정이 이상적 토의를 통해 이익통합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사회 균열과 갈등을 심화시컬 수 있다. 근래 헌법제정의 성공사례로 거론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는 유리한 사회 조건의 존재가 바람직한 토의과정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예시해준다. 남아프리 차공화국의 새 헌법 채택과정은 오랜 기간에 걸쳐 특별 헌법의회에서 진지한 논의 가 이루어졌고 각계각층 사람들이 적극 참여해 활발히 의견 개진을 했다는 특정을 보였 다 (Hart 2004). 1989년 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의 지 도자 만델 라 (Mandela) 와 남아프리가공화국 정부 수상 보타 (Botha) 간의 회담을 계기로 새 헌 볍 제정을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1990년 2월 ANC 불법화 철회 이후 헌법제 정 과정과 절차에 대한 협상이 본격화되어 1994년 최종적으로 헌법제정 과정에 대 한 원칙과 절차를 규정한 임시헌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92년 중반에 폭 력 사태 확산과 사회적 소요로 인해 한동안 협상이 중지되기도 했지만 꾸준히 노 력한 덕택으로 임시헌법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임시헌법 규정에 따라 1994년 4월 최초의 비인종차별적 총선이 설시되었고(투표율 86%), 총선 결과로 구성된 새 의 회 가 5월 헌볍 의 회 (Constitutional Assembly) 로 출범 하였 다

160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제 2호 (2006) 1994~96년에 걸쳐 이 헌법의회는 국민에 대한 홍보 교육 노력과 국민으로부 터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를 위해 신문, 라디오, TV 거리게시판, 버스 옆면 16만 부 배포되는 의회신문, 포스터, 웹 사이트, 대중 연설 등의 수단을 활용했다. 그 결과,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체 국민의 73% 가 이러 한 헌법관랜 교육과 참여 노력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Hart 2004, 31). 또한 이 2년 정또의 기간 동안 총 200만 건이 넘는 제안이 개인, 이익단체, 전문가 집단 등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Hart 2004, 31). 상당 기간에 걸쳐 헌법의회와 시민사 회의 여러 행위자 간에 긴말한 상호삭용과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5년 11 윌, 이처럼 많은 사회적 요구들을 세밀히 살피며 헌법의회는 1994년의 임시헌법이 정한 틀 속에서 새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이 때 68개 사안은 더 많은 연구 후 재검토하기로 결정하였다 1996년에 접어들어 초안에 대한 수정작업이 가 해져 동년 5월에 헌법의회는 최종 헌법안을 작성하였다 7월 ~9월에는 헌법재판소 (1 995년 2펠 출범)가 이 헌법안을 검토하고 수정 제안을 헌법의회로 보냈고, 이 수정 제안은 10월 헌법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1 월, 이 수정된 최종 헌법안을 헌법 재판소가 최종 승인했고 12윌에 만델라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듬해 1997년 2월, 드디어 이 새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의 특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헌법제정이 수년에 걸쳐 많은 시간을 요했다 충분한 논의를 위해서일 뿐 아니라 사회구성원들 간의 선뢰 조성 을 위해서도 이러한 장기간의 헌법제정 논의과정이 도움이 되었다. 둘 째, 장기에 걸쳤을 뿐 아니라 시기별로 단계를 나눠 구체적 계획 하에 추진되었다. 셋째, 논의가 중구난방 혼란에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초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은 헌법제정 과정에 대한 원칙과 절차를 규정한 임시헌법의 덕택이었다. 임시헌법 은 수년에 걸친 헌법제정 논의가 너무 방만해지지 않고 체계적 틀 속에 머물며 이 어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넷째, 헌법논의 전 과정에 걸쳐 국민 참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틀이 잡힌 시점부터 이루어졌다. 다섯째, 국민 사이에 진지 한 대화를 촉진시키고 적극적 의견 새진을 독려하기 위해 많은 재원과 아이디어가 동원되었고 세섬한 배려가 이루어졌다(예: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 홍보 노력). 여 섯째, 다양한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집단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고 과정상 많이 반영되었다. 고착화된 인종갈등과 정파분열에 대한 견제로 시민사회가 중요한 역 할을 했던 것이다 일곱째, 헌법 내용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판단과 의회의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161 정치적 결정 사이에 부단한 상호작용이 있었고 수정 작업이 수차례 되풀이되었다. 앞 절들에서 논한 이상적 토의과정이 완전히 구현되었다고 단언한다면 과장이 겠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는 참여와 토의가 비교적 잘 이루어진 예라 하겠 다. 헌법논의과정이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으로 광범한 공감대 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의 인종차별적 체제를 계속 끌고 갈 수 없다는 데에 흑인과 백인 진영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이 동의했 고, 만약 새 헌법제정을 위한 논의가 결실을 내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충돌이 일어날 것이란 위기감도 널리 공유되었다 반드시 합의를 이루어 새 헌법 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에 사회적 의견 수렴이 있었기에, 중간 중간 우여독절에 도 불구하고 수년에 걸친 헌법논의과정이 최종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 헌법제정 당시의 경험을 되돌아볼 때도 광범한 사회적 의견 수렴이 헌법 제 개정 논의과정상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Roche 1990: Lauter 1987). 그 때도 기존의 연맹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 이 너무 큰 문제를 안고 있어 반드시 새로운 헌법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있 었다. 기존 연맹규약의 대내외적 문제점이 너무 심각해 체제 유지 자체가 위협 받 고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언덕 위의 도시 (city upon a hill). 즉 미국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예외주의적 공감대가 퍼져 있었다. 이처럼 강한 사회 컨센서스가 있었기에 여러 이익들 간의 갈등을 극복해 새 헌법에 도달 할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는 이러한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가? 헌법개정과 관련해서 강한 사회적 요구가 있고, 어느 한 방향으로 그 요구가 수렴될 가능성이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라면 헌법개정에 관한 논의가 원만하 게 의견 수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실을 볼 때 오늘날 한국사회에 서 꼭 기존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데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 않 는다 어느 방향으로의 개정은 차치하고 개정 여부 자체에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 되어 있지 않다면 헌법개정 논의가 낙관적 전망을 가져올 수는 없다 헌법의 근본성(항구성). 정부 규제성, 총체성을 반영하고 토의민주주의 이상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개정논의과정은 그 중요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실현하기 어려 울 수밖에 없다. 다양한 배경과 이익 입장을 지닌 수많은 사람이 장기적 안목으 로써 공동선을 향해 의견을 통합해 나가는 작업이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기 위해선

162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사회적 공감대란 중요한 조건이 필요하다. 이 현실 조건이 부재한 상태에서 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시킬 경우 정파간, 사회계층간, 이념집단간 갈등이 증폭되며 이 익통합은커녕 더 심한 분열이 야기될 공산이 크다. 헌법은 법률과는 달리 당대 상 황에 대한 인식과 당대 사람들의 의견만 고려해서 만들 수 없는 것으로서 전술한 바대로 엄 격한 이상적 요건을 가급적 충족시킬 펼요가 있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18세기 후반 미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회적으로 강한 추진력이 이 미 있을 정우 그러한 바람직한 헌법논의는 비교적 용이해질 수 있으나, 그런 조건 이 없다면 헌법개정 논의는 자칫 정파적 동기에 집착하는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하 향식 (top-down) 동원과 그에 따른 정파적 - 이념적 집단적 대결로 이어지기 쉽다. 헌법 변화는 꼭 개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원의 새로운 사법 적 판단, 엽법부와 행정부의 새로운 정책적 결정과 해석, 비공식적 제도 관행의 수 정, 나아가 시민들의 의식 변화 등을 통해서도 헌법의 중심적 정신과 원리가 바뀔 수 있다 (Moore 2(01). 이런 방법들은 공식적인 헌법개정만큼 급격한 변화를 가져 올 수는 없겠지만 점진적으로 헌법이라는 추상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정파적 대 결과사회 갈등을너무심화시킬 위험성이 큰헌법개정보다논란의 정도가상대적 으로 낮다. 한국 헌법이 지닌 여러 문제점을 이러한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경로를 통해 고쳐나가는 노력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v. 결 론 헌법 개정을 논하려면 특별한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법률 개정과는 달리 좀더 이상적인 관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앞의 11절에서는 헌법의 본질적 성격 에 부합하는 이상적 개정 논의과정은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헌법의 근본성 (항구성). 정부 규제성, 총체성을 고려할 때, 기존 정치권이 논의과정을 주도하지 말고 보다 중립적, 장기적, 원리적 차원에서 사회규칙의 기본 틀을 논할 수 있는 전문가적 지식과 시민적 교양을 갖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특별회의를 소집해 개 정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 III절에서는 헌법의 본질에 맞는 논의는 자유주의적 토 론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적 토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상형로서의 토의는 고정된 이익들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는 물리적 이익집성이 아니라 충분한 설득작

헌법개정 논의과정과 토의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163 업을 통해 각자의 선호체계를 공동선을 향해 화학적으로 통합시켜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헌법개정 논의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이상적 토의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정치가나 전문가 같은 엘리트뿐 아니라 일반국민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하고, 토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의도적으로 수탁자로서의 역할을 맡아 이익통 합을 시도해야 한다. 공개와 비공개도 적절히 섞을 필요가 있다. 이상적 헌법개정 논의과정을 현실에서 실현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현행 헌법 조 항이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리 심각한 제약이 되지 않는다. 운용의 묘를 잘 부린다면 현행 헌법개정 규정 하에서도 전술한 이상적 토의과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현실상의 문제는 헌법개정 방향은 물 론 여부에 대해서도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아프리카공화 국 사례가 보여주듯이, 적어도 기존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대명제에 사회적 의견 수렴이 있어야만 헌법개정 논의과정이 아주 이상적이진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원 활히 진행돼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헌법개정이 꼭 펼요하다 는 생각이 광범한 사회적 지지를 받고 있는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런 상황에 서 정치권 일각에서의 주도로 헌법개정이 논의된다면 이상적 논의과정을 이룰 수 없음은 말할 여지도 없고 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사회통합을 오히려 저해할 위 험성이 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헌법개정 논의는 매우 선중하게 제기되어야 하 고, 사회적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었는지 살펴보는 작업과 개정이 아닌 다른 방식 을 통한 점진적 헌법변화에 대한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Alexander, Larry. 1998. Constitutionalism: Philosophical Foundation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Beard, Charles A. 1990 Framing the Constitution." Peter Woll, ed. American Government Readings and Cases. 10th edition. Glenview, IIIinois: Scott, Foresman. Blackbum, Simon. 1998 Trust, Cooperation, and Human Psychology." Valerie Braithwaite and Margaret Levi, eds. Trust and Governance. New York: Russell Sage. Braithwaite, John. 1998. Institutionalizing Distrust, Enculturating Trust." V떠e디e Braithwaite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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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한국정치연구 제 15집 저 12호 (2006) IfBn,Mt1 1. The Deliberative Process of Constitutional Revision: Idealism and Reality Seang-Ha lim Kyung Hee University This article embodies an ideal process of deliberation on constitutional revision that is compatible with the foundation of the constitution and assesses whether or not this process has any chance to be realized in Korea today. The main arguments are threefold. First, a constitution is by de비li디on timeless, regulative, and holistic; this fundamental characteristic of a constitution suggests that a discussion of constitutional revision must not be led by politicians or govemment officials, but must be driven in a participatory fashion by those experts and citizens with neutral long-term perspectives and who rlεpresent various segments of society with the ability to deliberate at a special constitutional convention. Second, in a liberal concept of a debate, seeking physical aggregations of interests through negotiations and de떠 s does not meet the timeless, regulative, and holistic nature of a constitution; only a communitarian concept of deliberation pursuing chemical integrations of views through persuasion can do this. Third, in light of the South African experience in the 1990s, strong social consensus on the necessity of constitutional revision is a critical social prerequisite for an ideal process of deliberation. Lacking this prerequisite, Korean p이 itical reality today is highly unfavorable to an ideal deliberative democratic paradigm in terms of constitutional revision. Instead, thε dangers of sharp social division and excessive partisan conflicts are most likely to accompany talks of constitutional revision. Keywords: constitutional revision, deliberativε democracy, fundamental character of constitution, case of the Republic of South Africa, Korean political re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