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어르신 생활문화전승프로그램 柯 亭 里 義 兵 마을 백년터울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걷는다 주관 춘천문화원 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차 례-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1. 역사적 측면 2. 문화적 측면 3. 미래 삶의 터전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제3장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2. 고흥 류 씨 집안의 전통계승자 류연오 3. 김경달 집안의 며느리 천준기, 황춘화 4. 누님 생각에 목이 멘 류연한 5. 산을 배경으로 사는 사람 최문식 6. 밭갈이의 전승자 조남수 7. 산악대원으로 활동한 류혜상 8. 염소사육의 일인자 류동규와 류종원 부자 9. 가정리의 문화유산 지킴이 류연훈 10. 약주술을 담그는 사람 서영숙 11. 공무원과 시의원을 지낸 사람 류희만 12. 가정리 생활사의 최고 증인 류희자 13.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이상인 14. 게이트볼의 대가 류연규 15. 장사 할아버지의 후손 류희언 16. 송어와 향어양식의 대가 류희수 17. 짚풀공예의 대가 류병상 18. 회다지소리를 하는 사람 류연표 19. 귀농을 하게 된 박재용 20. 혈 지른 이야기를 전승하는 류연복 제4장 생활문화전승의 활용방안 1. 가정리 캐릭터 찾기 2
2. 생활문화전승자료 의병마을 접목 3. 생활문화전승자료 교육자료 활용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구술을 채록하는 장면. 류연오(남, 77), 류연훈(남, 58) 3 4
1. 역사적 측면 가정리는 마을 고유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가정리의 역사는 가정리만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가정리의 고유한 역사 적 사실이 춘천시의 역사이면서 대한민국의 중요한 역사이다. 역사는 그 지역 사람들이 살아온 내력을 기록으로 담아 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녹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기록자의 몫이다. 한 줄의 기록이 마을 전체의 삶을 대변할 수도 있다. 가령, 원주 사람들은 일하기만을 좋아했다는 다음의 기록은 원주인의 성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고착화되었다. 원주 사람들은 나는 날부터 그 부모가 먼저 곡식을 주어서 재물과 곡식의 근본을 삼도록 했고, 해마다 이식( 利 息 ;이자)을 늘려 받도록 했 다. 한편 대단치 않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아끼기를 만금과 같이 중하 게 보았다. 새벽 일찍이 일터에 나가 일을 하되 쉬는 법이 없고 해가 져서 어두워져서야 돌아온다. 그리고 이웃끼리 모여 마시는 법이 없는 데, 혼인을 치러도 역시 그랬다. 그들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거나 산에 서 꿩을 쫓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반드시 부지런하고 절약하며 인색한 사람만을 가려서 들였다. 한번이라도 일없이 떠도는 사람이 있으면 마 을에서는 그를 어른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집이 적고 부잣집이 많다. 강릉은 그렇지 않다. 1) 성현( 成 俔 :1439-1504)의 문집 허백당집( 虛 白 堂 集 ) <기강릉 원주풍속편( 記 江 陵 原 州 風 俗 篇 )>에서 언급한 원주에 관한 기록 1) 原 州 之 人. 自 始 生 之 日. 其 父 母 先 給 斗 粟. 爲 財 穀 之 本. 年 年 取 息. 視 一 稃 之 微 如 萬 金 之 重. 侵 曉 立 田 壟 之 間. 催 耕 督 耘. 無 休 息 之 時. 天 黑 乃 還. 隣 里 不 相 聚 飮. 其 於 媒 婿 之 際. 亦 曰. 其 人 結 網 驅 魚. 是 不 可 也. 其 人 登 山 逐 雉. 是 不 可 也. 必 擇 勤 儉 吝 嗇 之 人 而 納 之. 一 有 放 浪 之 跡. 則 不 得 齒 於 鄕 黨. 故 邑 中 多 高 墻 大 屋. 而 貧 寠 之 人 也. 江 陵 則 不 然. 虛 白 堂 集 卷 三 < 記 江 陵 原 州 風 俗 > 5 이다. 원주인들은 부지런히 일만하고 절약하는 습성을 지닌 것 으로 보았다. 허튼 행위는 전혀 할 수 없는 고을로 묘사되었으 며, 잔치에서 조차도 서로 먹고 마시며 흥겹게 노는 것을 불가 하다고 할 정도이다. 원주인들이 꼭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후세사람 들이 원주를 평가할 때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몇 줄 밖에 안 되는 성현의 기록이 원주인의 성품을 대변한 것이 다. 이처럼 그 지 역 사람들의 삶 을 나타내는 것 은 기록자의 몫 인 것이다. 삼 국사기 는 김부 식의 글이고, 삼국유사 는 일 연의 글이고, 사기 는 사마천 의 글이다. 사마 가정리 전경 천이 사기 를 쓰지 않았다면 사기 속에 있는 주옥같은 중국인의 삶은 사라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사마천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삶을 기록해 놓은 삼국사 기 나 삼국유사 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김부식과 일연이 삶의 가치가 다르고, 기록 방법이 다를지라도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조상들의 삶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두 기록 중 어느 하나라도 지금 없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조상을 모 르는 얼마나 비참한 후손이 되었겠는가를 말이다. 다시 한 번 석일연과 김부식이란 두 기록자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움을 6
전한다. 필자가 여기에 기록하는 가정리 사람들의 구술은 아주 중요 한 가정리 사람들의 역사적 기록물이 될 것이다. 이 기록은 그 야말로 전무후무한 가정리의 역사가 된다. 이것이 비록 필자가 의도한 생각에 의해서 묻고 들은 것이지만, 이를 능가할 어떤 기록물도 있을 수 없다. 여기 두 달 여에 걸쳐서 가정리 사람 들을 만나서 채록한 자료들은 가정리를 전국에 아니 세계에 알 리는 최고의 걸작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 필자 아닌 다른 사람 이 또 다른 시각에서 가정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할 것이다. 그 것이 객관적으로 봐서 필자의 이 기록물보다 나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이 기록을 능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필자가 오늘 만난 제보자는 그대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들은 얼마 있으면 모두 세상을 떠날 것이다. 다음 세대에 게 듣는 자료는 또 그대로 가치를 가질 뿐이다. 절대로 필자의 기록을 능가하지 못한다. 아울러 같은 제보자일지라도 제보 상 황(시간, 장소, 대담자, 기억 등등)에 따라서 내용이 다를 수밖 에 없다. 왜냐면 시간이 흐르듯이 역사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오늘 이들이 기억하는 사실은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전승되지 못한다. 그 중의 어느 일부만 전승이 될 것 은 당연한 것이다. 또 개인의 입장에 따라서 인식이 다르고 기 억의 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일지라도 다르게 전승이 된다. 따라서 지금의 이 기록이 가지는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가정리 마을이 형성된 기록으로는 고흥 류 씨 중에서 류숙 ( 柳 潚, 1564-1636)이라는 분이 이 마을에 낙향하면서부터이다. 그것이 벌써 4백년을 훨씬 넘는다고 하니 오래 된 마을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류숙 공 이 이 마을에 오기 전에는 이 마을에 사람이 살지 않는 인적 없는 땅이었던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여기서 가족을 7 거느리고,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삶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 공동체 내지는 개인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모 르고 있을 뿐이다. 사라져 버린 역사의 단면이다. 이번에 가정리 사람들로부터 듣고 기록한 사실은 아주 중요 한 것들이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가정리에 류 씨 들이 들 어오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 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볼 수 있다. 류연오 씨의 제보이 다. 여기는 원래 밀양 박 씨 홍천 용 씨 거제 반 씨가 살았다. 그 런데 류 씨네가 살면서 자손이 류숙 화본 번창하니까 그 세력이 자꾸 넓어 져서 그 성씨들은 세도에 밀려서 다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대곡에 는 밀양 박 씨네가 살았고, 제청말에는 용 씨네가 살았고, 가정자 쪽 에는 반씨네가 많이 살았다고 어른 들이 말했다. 2) 이 제보는 류연오 씨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제보 해 준 것이다. 이 사실은 가정리에 류 씨가 들어와서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나가게 된 배경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 왜 가정 리가 고흥 류 씨 집성촌이 되었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류연오 씨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 를 전승 자료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제보이지만, 다음의 기록을 보면 또 다르게 나 2) 제보자: 류연오(남, 77) 가정2리 미염이. 2011.8.10. 8
온다. 2. 문화적 측면 그런데 명당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여기 우리 류 서방네 보다 먼 저 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반( 潘 ) 씨, 위( 魏 ) 씨, 용( 龍 ) 씨 그 사람들 이 우리 류 서방네 보다 먼저 가정리에 들어 왔다. 인조반정 때 우리 류 씨가 들어왔으니까 400년이 넘었다. 그전에 여기(의병마을 앞)는 용 씨네 촌이었고, 자네네 물가마을(가정자 쪽)은 반 씨네 촌이었고, 위 씨네 촌은 저기(황골)이었다. 헌데 글쎄 그렇고 그런 것이다. 옛날 권력 다툼이야 그렇다. 그 사람들이 여기 가정리에 먼저 왔는데 우리 선조가 내려와서 세력이 팽창하니까 권력에 간 것이다. 그래서 그 사 람들이 우리보다 자손이 덜 퍼지고 잘 못 살았던 것이다. 3) 박 씨네가 위 씨네로 바뀌어 제보되고 있다. 무엇이 정설인 지는 모르지만, 제보자의 기억력에 따라서 이렇게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시대, 같은 나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 람들인데, 성씨가 다르게 전승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아 주 중요한 제보임에 틀림없다. 가정리 사람들은 모두 중요한 제보자이다. 왜냐면 모두 각자 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개인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개인의 삶을 하나로 합치면 마을 공동의 삶이 되고, 마을 공동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가정리라는 공동체의 중요한 역 사적 사실이 되어 남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 했다. 꿰 지 않으면 낱낱의 개별적 개체로 그냥 스러지고 만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비록 가정리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면 에서 보면 오늘 필자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구술 자료는 가정 리 역사에 있어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낱낱의 구술을 모은 한 권의 자료집은 그야말로 가정리 역사의 보배가 되는 것이다. 3) 제보자: 류연표(남, 77), 가정2리 약바우. 2011. 7. 18. 문화( 文 化 )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 현상을 일컫는다. 개인적인 성향의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삶에는 행위( 行 爲 )가 있고, 사고( 思 考 )가 있고, 그로부터 빚어지는 어떤 현상 ( 現 像 )까지 망라하고 있다. 다만, 개인의 경우도 문화라고 할 수 있으나, 대체로 집단이나 마을 공동의 삶을 문화라고 일컫 는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세월이 지나면서 변화를 하고 있다. 큰 틀의 문화는 빨리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잘 인식하지 못할 수 도 있지만,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작은 단위인 문화요소( 文 化 要 素 )는 끊임없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 가 세월을 거듭하면서 그 지역 문화의 정체성( 正 體 性 )을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지역의 문화특징 을 드러내는 지역의 정체 성도 또한 세월이 흐르면 서 변화를 하고 있다. 그 래서 지역의 문화는 고유 가정리의 생활상 하게 그 지역을 대표할 수도 있지만, 여러 지역의 보편적인 문 화현상으로 융화( 融 化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융화되면 그 지역 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문화는 사라지게 된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한번 사라지면 다시 돌릴 수 없다. 타 임머신을 타고 역사를 되돌리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는 흔히 발굴 작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건축을 하든가, 도 9 10
로를 놓든가 할 때 지표조사에 이어서 발굴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중요한 작업의 일환이다. 땅속 에 묻힌 유품을 찾아서 사라진 지역의 문화를 찾아내는 작업이 다. 그러면 땅속을 뒤져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민 속놀이, 상여계, 마을제사 등등의 무형문화요소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발굴은 그야말로 그 시대 문화를 찾는데 있어서 빙산 의 일각일 뿐이다.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역사를 알고자 하는 데 겨우 한조각의 돌칼, 돌도끼, 집구조 등의 유형문화요소에 불과하다. 얼마나 비효율적인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이번에 필자가 가정리 사람들의 구술을 통해 찾은 가정리 사 람들의 삶은 비 록 이 지역 사람 들이 누린 문화 의 일부에 지나 지 않을 지라도 100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보배 같은 자료 임에 틀림이 없 을 것이다. 왜냐 면 백년 터울 류희자 씨댁에 있는 화로 위 도구들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걸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생생한 삶이 담긴 자료이기 때 문이다. 이 기록은 나중에 가정리에 거주하는 후손들의 중요한 문화 적 자산이 된다. 옛 문헌에 있는 한 줄의 기록으로 인해서 마 을의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과 같다. 가령, 삼척에서는 요즘 이 사부 관련 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이사부 축제에서부터 각종 1995년 가정1,2리 공동집하장 상량식 때 절하는 모습 행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고 있으며, 조 각상, 공원 등 아주 많은 콘텐츠사업을 행하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삼척을 대표 하는 최고의 문화유 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 문화유산은 삼 국사기 와 삼국유 사 에 기록해 둔 몇 줄의 자료 때문에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삼척의 정체성이 되는 것 이다. 이번에 가정리 사람들의 구술을 통해 아주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은 모두 가정리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문 화유산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별 것이 아니겠지만, 마을공동체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이에 일정 기간을 두고 마을 사람들의 삶을 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 다. 그래야만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고, 훗 날 막대한 돈을 들여 땅을 파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 다. 11 12
3. 미래 삶의 터전 사람은 과거를 먹고 산다 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조상을 보라고 하며, 또한 그 사람의 미래를 보려면 그 사람의 과거를 보라고 한다. 이 말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 으니, 과거를 통 해서 미래를 짐 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행적보다 더 중 요한 것은 바로 현재이다. 곧, 현 재 살고 있는 사 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가정리의 옛 주역들 들 과거와 조상 의 삶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지는 것이 다. 영어로 현재( 現 在 )는 프리젠트(Present)이고, 선물( 膳 物 )도 프리젠트(Present)이다. 이 말은 현재에 충실히 하면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곧, 사람의 삶은 현재에 충실 히 하는 것 보다 더 이상의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 필자가 기록하고 있는 가정리 사람들의 구술은 다름 아 닌 가정리 사람들의 현재 모습이다. 그것은 구술자의 과거이며, 구술자 조상들의 삶이며, 구술자 자신의 현재인 것이다. 구술자 는 필자의 질문에 그들이 기억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 들을 현재 시점에서 충실하게 이야기했다. 여기서 참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 속에 조상들의 삶과 자신 의 과거가 함께 묻어난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당연하게 마을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 역사가 함께 한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 고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현재의 우리 삶을 지배하 고 있는 조상들의 유산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면면히 이어오는 조상들의 삶,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을 강 력하게 지배하 고 있으며, 미 래에 우리 후손 들의 삶도 그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 아가고 있는 행 위이며, 사고이 고, 현상인 것 이다. 우리는 절대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가정초등학교 교가비( 校 歌 碑 ) 다. 살아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 리 후손들이 또 다시 그들의 현재를 구술할 때, 오늘 살고 있 는 우리를 그들의 현재 속에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 구술을 한 가정리 사람들의 구술물( 口 述 物 )은 멀고 가까운 우리 조상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들 이야기이며, 나 아가 우리 후손들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이며, 가정리 마을 공동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다. 이들 이야기 곧 구술물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후손이 살아가 면서 가치관을 정립하는 단초가 된다. 그 가치관은 그 사람의 생사관, 세계관, 인생관, 종교관 등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이 된 13 14
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최고의 기준이 되어 사물 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가치관도 변화를 거듭하지만, 조상으 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인자는 잘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내 면에 자리하고 있는 원형질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이 구술물이 미래 삶의 터전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구술물은 또 다른 미래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가정리는 현재 한국 의병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우 리 역사에서 보면 의병은 아주 오랜 시기부터 국난이 있을 때 마다 있어왔다. 이른바 승병( 僧 兵 )도 의병( 義 兵 )의 한 형태이니, 그 역사는 이미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스님들 스스로 나라를 구하고자 총칼을 잡고 분연히 일어나서 외적( 外 敵 )과 싸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의병 의 수효가 훨씬 많았으며, 그 정신은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어 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완전히 나라가 적 의 수중에 들어가서 통치를 받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때 나 라를 구하고자 국내외에서 여러 사람들이 의롭게 일어나 군대 를 조직하고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심에 바로 춘천 가정리 출 신의 의병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와 춘천시에서는 이 를 기리기 위해서 가정리에 의암 기념관을 짓고 의병들의 숭고 한 뜻을 기리고, 어린 학생들에게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가정리 조상들의 삶이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정리 의병마을이라는 칭 호를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정리는 전국에 알려진 유명한 마을이 되었으며, 이것은 우리가 잘 활용만 하면 이곳 가정리 사람들의 경제에 엄청난 부가가치를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비근한 예로 안동에 있는 하회마을을 들 수 있다. 하회( 河 回 ) 마을은 물굽이가 마을을 돌아간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가 정리 의병마을은 역사적 실체를 통해서 지어졌지만, 안동 하회 마을은 마을의 지형을 따서 부르는 명칭인 것이다. 이 마을은 가정리가 고흥 류 씨의 집성촌인 것처럼 풍산 류 씨의 집성촌 이며,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며 국난 극복의 중심역할을 한 인물인 류성룡( 柳 成 龍, 1542-1607)이라는 유학자가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곳곳에 풍산 류 씨들의 유물이 남아있다. 그리 고 류 씨들의 유교적 유물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전되고 있는 무형문화재인 하회별신굿과 하회탈놀이 및 선유줄불놀이 등이 있다. 하회탈놀이는 하회별신굿을 할 때 행 하던 굿의 한 유형인데, 이 때문에 하회마을은 보다 잘 알려지 게 되었다. 영국의 여왕이 한국의 고유문화를 보기 위해서 찾 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시대 최고의 유학자와 기층문화의 병 립이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면서, 하회마을 조상들이 후손들에 게 물려 준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조상의 삶을 전승하고 가꿔서 자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가정리 의병마을도 얼마든지 하회마을처럼 가꿀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옆 동 네 하회마을의 장점 을 모방하고, 가정리 사람들의 삶을 부각 하면 되는 것이다. 구한말 최고의 유학 자들이 있던 곳이며, 의병의 구심점이며, 의암 기념관이 있으 윤희순 무덤에 있는 기념비의 하나 며, 약주술을 비롯한 조과( 造 菓 )의 기술이 뛰어나며, 쟁골의 산 신제와 거북놀이, 많은 설화 등등의 아주 훌륭한 자원이 있다. 게다가 집집마다 그동안 써오던 농기구 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 고 보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자원이 가정리 사람들의 현재 15 16
인 것이다. 이러한 현재는 곧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최고 의 선물인 것이다. 이 선물이 곧 가정리 사람들에게는 미래 삶 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가정리 사람들의 구술을 통 해서 얻은 구술물은 아주 중요하게 소용될 것이다.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가정리 표석 17 18
가정리의 지명이 처음 기록된 것은 사동리( 寺 洞 里 )이다. 절 사( 寺 )자를 쓰는 것 보니 절이 있던 골짜기, 곧 절골을 한자로 표기하여 사동이라 한 것이다. 사동이라는 표기는 1830년경에 편찬한 관동지( 關 東 誌 ) 에도 나오고, 가정리에 세거한 고흥 류 씨의 시조 류숙( 柳 潚 )의 신도비에도 사동이라 마을 이름을 표 기하였다. 그것이 1911년에 편찬한 조선지지자료( 朝 鮮 地 誌 資 料 ) 라는 책에도 사동이라는 표기만 있고, 가정리라는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조 때 춘천부사를 지낸 엄황 (1580-1653)이 편찬 한 춘천읍지( 春 川 邑 誌 ) 의 <춘주속지( 春 州 續 誌 )>에 보면 가정 자( 柯 亭 子 )라는 표기가 비로소 나온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는 가정자 라는 명칭이 이미 쓰 였는데, 기록에서 빠졌 가정리 의암기념관에서 딴묏산까지 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을 하면서 가정리( 柯 亭 里 )라고 굳어지게 되었다. 가정리에서 가정의 뜻은 가나무(떡갈나무의 일종)로 만든 정 자가 있어서였다. 그 때문에 가정리라는 지명이 생길 수 있었 다고 한다. 그 정자는 현재 보건소가 있는 부근에 있었다. 그래 서 아직도 이 지역을 가정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가나무로 만 든 정자는 누가 지었으며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이 없고 구전으 로도 전하지 않아서 현재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본래 가정리는 춘천군 남산외일작면( 南 山 外 一 作 面 )의 지역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춘천시 남면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여우내, 고란터, 텃골, 왕동, 약바우, 집실, 제청말, 절 골, 재궁골을 병합하여 가정리라 했다. 가정리에는 든바위와 같이 정기가 서린 지물이 있는데, 이 정기 때문에 왜적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의 병( 義 兵 )을 일으킨 류인석( 柳 麟 錫 ) 등 많은 의병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또, 대부분의 다른 지역은 골짜기가 동서로 뻗어있는데 가정리는 남북으로 나 있어 특별한 지세를 이루고 있다. 가정리는 3개리로 나누었다. 가정1리는 4개 반으로 나누고 제1반 개경자, 제2반 왕월, 제3반 대곡, 제4반 평촌으로 정했 다. 가정2리는 2개 반으로 나누고 제1반 약바우, 제2반 제청말 로 정했다. 가정3리는 2개 반으로 나누고 제1반은 집술, 제2반 은 쟁골로 정했다. 예전에는 가정리 마을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았다. 그러다 가 화전을 정리하면서부터 인구가 갑자기 많이 줄었다. 여기에 터전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 머물러 살았지만, 터전이 없는 사 람은 가정리를 떠나 시내로 나가 살게 되었다. 구술 중에는 화 전과 관련한 곳곳의 산 이름이 자주 거론되었다. 이곳에는 옛날 여우가 많이 살고 있었고, 호랑이도 많았다. 지금도 늑대, 담비, 고라니, 멧돼지 등의 짐승들이 다니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밤에 짐승을 보면 눈에서 빛이 난다. 그러면 이상하게 머리끝이 하늘로 올라간다. 2011년 9월 8일 저녁에 가정리에서 닭도리탕을 잘 하는 집에서 마을 제보자를 모시고 저녁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온 이야기 중에 인근 지역 밤에 불빛을 보고 무서워했던 것이었다. 그곳에 모인 모 든 사람들은 밤에 불빛을 보고 머리가 하늘로 향해 섰다는 경 험담을 한참이나 이야기 했다. 그 불빛은 짐승의 눈빛이거나 인( 燐 )이 발광해서 난 불빛이었다. 도깨비인줄 알았다거나, 호 랑이의 눈빛인줄 알았다느니 하는 어린 시절의 경험담이었다. 19 20
이야기 중에는 반드시 특정 지명이 거론 되었다. 그 중 류희자 씨는 아버지가 농바우 위에 큰 불이 있어서 안고 집에 와보니 나무토막이었다고 했다. 류희국 씨는 딴묏산에서 밤에 불빛이 나서 친구들과 같이 가 봤더니 양철깡통이었다고 했다. 이처럼 각각의 지명은 가정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 는다. 2011년 7월 남면사무소에서 파악한 가정리의 가구수( 家 口 數 ) 와 인구수( 人 口 數 )는 다음과 같다. 수효 인구수 가구수 마을 남 여 계 가정 1리 74 78 70 148 가정 2리 35 36 30 66 가정 3리 33 44 39 83 합계 142 158 139 297 - 가래울 버덩: 쟁골 미나리 폭포 쪽으로 가다 보면 현재 한 화제약 별장이 있는 곳이다. - 가정교( 柯 亭 橋 ): 쟁골 입구에 서 술워니고개 방면으로 가는 곳 에 있는 다리이다. 가정교 바로 위에 농바우가 있어서 쟁골사람 들이 거리제를 지냈다. 그곳으로 걸어서 사람들이 다녔으나 다리 가 놓이고 길이 넓게 뚫리고 포 장이 되어서 현재는 그곳으로 다 가정교 니지 않는다. 이 다리를 건너서 방하리로 갈 수 있다. - 가정나루: 가정자 자리 앞에 있는 홍천강의 나루이다. 이 가정나루에서 배를 정박하는 모습 나루는 1944년 청평댐 건설로 청평호가 생기면서 교통수단으 로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고란터나루, 황골나루와 함께 세 곳의 나루가 있었다. 그리고 술워니고개를 넘어 방하리나루에서 배 를 타고 가평까지 가는 방하리 나루도 있었다. 소주고개로 통 하는 도로와 방하리로 통하는 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유일 한 교통수단이 이곳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 지 않으면 쟁골로 난 산길을 걸어서 강촌까지 가서 춘천시내로 가는 교통편을 이용했다. 이곳에는 주막도 있었는데, 그 주막에는 홍천에서 떼꾼이 내 려오다 쉬기도 하였다. 주막에서는 술도 팔고, 음식도 팔고 잠 을 자고 가기도 하였다. 주막이 꽤 컸다. 홍천에서 내려오는 떼 꾼은 이곳 주막에서 쉬고 다시 강을 타고 한강으로 내려갔다. 청평댐 막히기 전부터 이미 이곳에는 나루가 있었다. 청평댐이 생기기 전에는 호수가 아니라, 여기가 여울이었다. 예전에는 이 21 22
곳에 사람들이 사는 집이 아주 많았다. 아주 큰 마을을 형성하 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곳과 이어진 황골에 경찰지서 까지 있을 정도로 번창한 곳이었다. 강 건너는 떼내(뗏목이 내려와서 붙들어 매고 쉬었다고 해 서), 말골이 있었고, 강을 건너면 홍천 모곡으로 바로 닿을 수 있었다. 보리매상이나 밀 매상을 할 때 지게에다 모두 지고 가정나루 까지 왔다. 여기 가정3리의 쟁골 사람들까지 매상을 할 때는 가정나루까지 보리와 밀을 지게에 지고 왔다. 그때 점심 내기 한다고 무거운 매상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쉬지도 않고 가정나 루까지 걸어오기도 하였다. 청평호가 생기고 나서 처음 타고 다녔던 배는 작업선이었다. 청평댐 막을 때 쓰던 배를 건져서 나룻배로 사용한 것이다. 그 런데 그 배는 휘발유를 하루에 5드럼씩 먹을 정도로 기름이 많 이 들었다. 나중에 타고 다니던 배는 똑떼기 라 불리던 똑딱선 이 다녔고, 이 배를 타고 사람들은 가정리에서 가평까지 오갔 다. 아침에 두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운행 했다고 한 다. 현재는 가정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나루는 없어졌고, 그 명칭만 남아 있 다. - 가정리 도로: 가정3리에 살던 류 증상이라는 사람이 6.25사변 전에 군 인을 갔는데, 류증 상 씨는 공병대 특 무상사로 있으면서 자신의 소속부대 도로 공사 때 폭파하는 장면, 류희만 제공 공병대원과 같이 여기 도로를 넓혔다. 원래는 마찻길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 전에는 도로가 아주 좁아서 차는 도저히 다 닐 수 없었다. 류희만 씨는 류증상 씨의 공로비( 功 勞 碑 )라도 세워줘야 할 것 이라고 한다. 그만큼 가정리 도로를 넓힌 것은 가정리 사람들 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음을 의미한다. 지금 소주고개로 통하는 길은 나중에 뚫렸다. - 가정리 유원지: 가정나루 부근 미루나무 밭 옆에 있던 유 원지이다. 현재 보건소 뒤쪽에서부터 황골까지 백사장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모래(백사장)가 길게 늘어져 있고, 한쪽에는 미 루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앞에 있는 청평호가 잔잔하여 놀기 좋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유원지를 운영한 기 간은 9년간이었다. 그때 놀러 온 사람들에게 텐트 한 대당 500원의 자릿세를 받았는데, 하루에 평균 100만 원 정도 걷힐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왔 다. 이 자릿세는 청소비 명목 이었다. 자릿세를 받을 수 있 었던 것은 마을에서 유원지 관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외 유원지에서 노는 장면 부에서 건달들이 와서 행패 를 부린다거나 하면 관리 요원이 모두 막았다. 가정리유원지를 운영하는 동안에 한 명의 익사자도 없을 정도로 철저히 관리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관광버스가 유원지에서부터 현 의암기념관 앞까지 줄을 이어 있었다. 옛날에는 자가용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관광회사에서 관광버스로 행락객을 실어 날랐 다. 그래서 여름이면 아예 가정리에 관광회사 직원이 와서 상 23 24
주를 하였다. 마을에서는 가게 를 각 반별로 하나 씩 열어 장사를 하 게 했으며, 밤이면 모닥불을 피우는데 나무를 단으로 묶 어서 팔았으며, 튜 브에 바람을 넣어 주고 돈을 받기도 했으며, 모래에 빠 가정리 나루 및 유원지터, 지금은 낚시꾼만 진 차를 트랙터나 찾고 있다. 경운기로 끌어내 주고 얼마간의 수고비를 받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여름에는 마을의 수입이 괜찮았다. 그런데 이곳 대곡천에는 모래가 많아 강바닥이 옆의 논밭보 다 지대가 높았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마을의 집과 논밭 이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춘천시에서는 이 마을의 상 습적인 침수피해를 막고자 모래 준설작업을 했다. 그때가 1980 년대 중반이었는데, 모래가 없어지면서 유원지는 자연히 사라 졌다. - 가정자( 柯 亭 子 ): 부질과 주일당( 主 一 堂 ) 사이를 가정자라 한다. 이곳에 가나무(또는 갈나무)로 만든 정자가 있어서 붙여 진 이름이다. 이 때문에 가정리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가 정자는 누가 지었는지, 언제까지 있었는지 등 어떤 형태의 정 보도 전해지지 않아서 현재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지명과 관련해서 가정자가 있었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가나무는 떡 갈나무의 일종이다. 또 가정리 입구 뱃터(가정나루)에 갈나무 정자가 큰 게 있었 는데 배와 뗏목을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쉬어 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갈나무(참나무) 있는 동네라고 부르면서 마을 이름이 가정자로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 또 강 옆에 있는 나무라 해서 강가 나무에서 유래됐다는 이 야기도 있다. - 가정초등학교: 이 초등학교는 1937년 9월 1일에 가정보통 학교 설치인가가 나 서 건립되었다. 1937년 10월 20일 약암 공회당에서 개 교를 해서, 2009년 지금 있는 건물에서 폐교를 했다. 현재 있는 초등학교 건물 로 옮기기 전에는 현 건물 약 100여m 앞에 위치해 있었다. 가정초교 16회 졸업사진 잦은 침수로 인해 1971년 8월 17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가정리 주민들은 지 게와 리어커 등을 이용해 학교 신축을 도왔다. 그 리고 1987년 9월 23일 에는 새로 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2009년 폐교될 때까지 가정리와 그 인근 의 초등교육을 담당해 왔 다. 현재 국제창의 미션 스쿨이 교육청에서 초등 학교 건물을 임대받아 운 가정초교(2011) 25 26
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교사가 학생 들을 가르쳤으며, 6.25한국전쟁 중 인 공 때는 북한에서 파 견한 교장 밑에서 인 공교육을 받았던 적 도 있다. 역사의 수 난기를 모두 거친 학 가정초교 졸업장 교이다. 아울러 가정 리, 박암리, 관천리 일대 의 사람들을 동문으로 묶 어 단결하게 만든 역할도 하였다. 가정초등학교 교사는 류 씨가 아니면 할 수 없 을 정도로 류 씨들의 텃 세가 세었으며, 류 씨가 아니면 류 씨의 사위로 삼아서 근무하게 하였다 는 이야기가 전한다. 처음 초등학교가 생겼 을 때 한문학과 신학 간 의 갈등이 아주 심했다. 옛 가정초교 현관 입구 특히, 종손들은 학교를 보 내지 않고 서당에만 다니게 하기도 했다. 또 초등학교마저도 집안이 가난해서 다니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TV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정초등학교에 모 여 TV 시청을 했다. 당시 여로 라는 드라마가 유행했 다고 한다. - 강원도학생교육원: 가정 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정문 오른쪽 산에는 고 흥류씨분산동구라는 한자로 써진 작은 표석이 있다. 강원도 학생교육원은 의암 류인석 등 구국항쟁으로 자주 강원도학생교육원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 들을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교 육청에서 건립한 학생교육원이다. 가정리에 세워진 이유가 의 병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중고생들을 뽑아 나라사랑 교육을 실 시한다. 설립목적은 선현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심신단련을 통한 인 격의 도야로 호국의 얼을 다지어 선진조국의 주역이 될 자주 적, 창조적, 도덕적인 한국인을 육성하는데 있다고 한다. 1988년 9월 3일 교육부 승인을 받아, 1990년 2월 6일에 개 원을 해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남학생 위주로 교육을 하고, 강릉에 있는 사임당교육원에서는 여학생을 중심 으로 교육을 한다. 강원학생교육원을 수료한 학생은 2009년 12월 31일까지 69,465명이었다. - 개경자: 가정리. 가정자. 갱자. 가정나루 부근을 개경자 라 한다. - 갱자: 개경자, 가정자. 개경자의 준말표현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세 가지를 다 쓰고 있다. 가정자 앞에는 홍천강의 가 정나루가 있었다. - 거리제터: 가정리에는 두 곳에서 거리제가 있었다. 한 곳은 27 28
1리의 지방서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현재 유인 석 기념관 있는 곳이었다. 1970년대까지 지내다가 없어졌다. 또 한 곳은 3리의 거리제터인데 농바우 있는 곳이었다. 현재는 재궁교 밑에서 지낸다. 농바우에서 재궁교로 장소를 옮긴 것은 농바우가 도로공사 때문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3리의 거리제는 격년으로 지내는데 재궁동산 제를 지내고 나서 재궁교 밑 에서 개를 잡아 지낸다. 농 바우가 없어지면서 한 동안 지내지 않다가 2008년부터 다시 지내게 되었다. 다시 지낸 이유는 어디 가서 점을 보거나 하면 거리제 이야기 가 자주 나타나서였다. 어차 쟁골 현 거리제 터인 재궁교 피 동네 사람들에게 좋다는 데 어려운 것도 아니니 다시 지내자고 해서 재개되었다. 2리는 1리와 3리에서 막아주기 때문에 따로 거리제를 지내 지 않았다. 거리제는 정월달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이를 막고자 지냈으며, 제물로 개를 잡고 소지를 올렸다. - 경로당: 가정리 경로당 은 류인석 기념관 주차장 옆 남면 게이트볼장 뒤에 있다. 경로당 현관에는 경로당을 지을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을 나무판에 새겨 두었 다. 그리고 짚공예작품 등이 벽에 걸려 있다. 경로당은 이 지역 노인들 1,2리경로당 벽에 걸려있는 명단 의 만남의 장소로 충분한 역 할을 하고 있다. 경로당은 기금이 조성돼 있어서 그것으로 운 영을 하는데, 모자라면 얼마씩 거두어서 보태기도 한다. 현재 이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기거하면서 관리를 하고 있다. 그 할 머니는 경로당 운영비로는 관리가 어려워서 남의 토지를 도지 로 부쳐 생활비를 보충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가정리에서 유 일하게 게이트볼을 치는 여성이다. 할아버지들이 게이트볼을 칠 때 인원이 모자라면 불러서 같이 친다. 노인들이 모임을 갖 게 되면 술안주나 음식을 마련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한다. 경로당 인근은 가정리 시장이 섰으며, 주막거리를 형성했던 가정리에서 가장 번화했던 지역이었다. 우시장, 잡화시장, 생필 품시장 등이 열려서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다. 가정리의 중심가로 지금도 경로 당, 게이트볼 장, 의암기념관, 버 스정류장 등이 있어서 가정리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 고란터: 고란( 皐 蘭 ) 또는 난 곡( 蘭 谷 )이라고도 했다. 가정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정리에 고란초 서 박암리 방면으로 가는 곳이다. 지금은 청평호에 묻혀서 원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고란터 나루가 있었다. 조선조 광해군 때 류몽표( 柳 夢 彪, 1543-1616)의 아들 태우 ( 泰 宇 ) 류활( 柳 活, 조선 선조 때 문신, 자는 源 叔 )이 이곳에 은 거하면서 고란을 심고 살았다. 후에 충청도 목천( 木 川 )으로 이 사했다. 고란초( 皐 蘭 草 )는 바위에 붙어 자생하는 난초의 일종이 다. 고란터 지역은 문화재 굴터 지역으로 묶여 있다고 한다. 주 춧돌, 기와, 숟가락 등이 땅을 파면 나온다. 주춧돌, 맷돌 등은 사람들이 가져갔다. 29 30
- 고란터 나루: 고란터 앞에 있던 홍천강의 나루이 다. 가정자 나루, 황골 나루 와 함께 가정리에는 세 개 의 나루가 있었다. 청평호로 인해 만들어진 나루이다. 가 정리 사람들이 외부로 갈 수 있는 당시 훌륭한 교통 수단이었다. 고란터 전경 - 고메골: 절골 옆 골짜 기이다. - 고흥류씨분산동구비: 가정리 어귀에 있는 표석이다. 현재 강원 학생교육원 정문 오른쪽 숲에 위 치해 있다. 비 앞면에 고흥류씨분 산동구비( 高 興 柳 氏 墳 山 洞 口 碑 )라는 8자의 글씨를 음각( 陰 刻 )으로 새 겼다. 성재( 省 齋 ) 류중교( 柳 重 敎, 1821-1893) 선생의 친필이라 전 한다. 그러니 이 동구비( 洞 口 碑 )가 세워진 것은 성재가 살았을 때니 까, 1800년대 중후반이라 할 수 있다. 고흥 류 씨의 조상 산소가 고흥류씨분산동구비 있는 곳임을 표지( 標 識 )한 것이다. 총탄에 맞은 자국이 깊게 파여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인지, 6.25한국전쟁 때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6.25한국전 쟁 때 맞았을 것이라고 이 지역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높이는 약 1.2m정도 된다. 이 표석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 지는 알 수 없다. 비슷한 글귀가 고란터에 있는 글씨바위에도 새겨져 있는데, 글씨바위에는 기봉강역홍무의관( 箕 封 畺 域 洪 武 衣 冠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고흥류씨분산동문( 高 興 柳 氏 墳 山 洞 門 )이라 새겼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르나, 성재 가 동구비를 세웠다고 하니, 아마도 성재나 그 앞의 조상이 세 웠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어찌 됐든 고흥 류 씨의 조상 묘를 쓴 곳으로, 고흥 류 씨의 집성촌임을 나타낸 것이다. - 광복판들: 들 중에 가장 복판이라 한다. 강원도에서는 가 장 의 의미로 광 이라는 말을 쓴다. 복판은 중앙, 곧 가운데라 는 뜻이니, 광복판은 가장 가운데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 니 광복판은 가정리에서 가장 가운데 들(평지)이라는 것이리라. 의암기념관 앞 신작로로 내려가는 곳이며, 샘보의 물로 논을 지었다. - 광산골: 쟁골에 있는 골짜기이다. 한화별장에서 미나리 폭 포 가기 전 오른쪽에 있다. - 구드렛(랫)골: 쇠파니 옆 골짜기이다. - 굴아우: 굴이 뚫린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다. 쟁골에 위치해 있다. 굴바우 안산이라고 부른다. - 글씨바위: 홍무벽( 洪 武 壁 ), 또는 동구석( 洞 口 石 )이라고도 한 다. 고란터 옆 홍천강 가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을 이곳 사람들은 글씨바위 라고 한다. 바위에 글씨를 새 긴 일종의 암각문( 岩 刻 文 )이다. 양각( 陽 刻 )이 아닌 음각( 陰 刻 )이 다. 글씨는 기봉강역홍무의관( 箕 封 畺 域 洪 武 衣 冠 ) 고흥류씨분산 동문( 高 興 柳 氏 墳 山 洞 門 ) 이라고 전자( 篆 字 )로 새겼다. 여기서 기봉강역홍무의관 은 이 땅은 기자에게 봉해졌던 강역이다. (그런데 이 땅을 일본이 넘보고 있으니) 마땅히 무력을 받들어 서 우리의 문물과 예의범절을 지켜야할 것이다. 라고 가정리 사람은 해석하였다. 그리고 의암 류인석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31 32
당시 의병들의 집결 지인 이곳 암벽에 의병봉기의 당위성 을 천명하기 위해서 새겼을 것이라고 한 다. 그렇다면 이 글 귀는 의암 류인석이 새긴 것이 된다. 정 확하게 증거를 댈 수는 없다. 글씨바위 그러나 이는 이 땅은 기자가 봉한 강역(나라, 땅, 지역)으로 우리는 홍무시대의 의관을 갖추어야할 것이다. 로 풀이된다. 여기서 홍무는 명( 明 ) 나라 태조의 연호로, 당시 숭명배청( 崇 明 排 淸 )의 사상을 상징하 는 것이다. 이를 신재( 信 齋 ) 류휘석( 柳 輝 錫 )이 다시 새겼다라고 전한다. 4) 그렇다면 글귀의 해석은 이렇다. 이 땅은 중국인 기자가 중 국 땅으로 명명한 것으로 마땅히 중국의 의관을 갖춘 중국의 풍습이 전하는 곳이니, 일본인은 침범하지 말라. 라는 해석으로 밖에 들을 수 없다. 슬픈 사연이다. 어찌 의병장 류인석이 명나 라 연호를 쓰며, 또 자주적이 아닌 명의 의관을 갖춰야 된다고 했단 말인가? 시대의 당위성 때문이기는 하나 석연치 않다. 분 명히 그 당시는 대한제국시대로 우리의 연호인 광무( 光 武 )와 융희( 隆 熙 )를 쓰고 있던 시절이다. 해석의 근거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흥류씨분산동문 은 고흥 류 씨가 묘를 쓴 산이 있 는 마을의 입구 라는 뜻이다. 곧, 고흥 류 씨 집성촌이며, 조상 4) 춘천시 가정리 조사보고서, 문화 역사마을 만들기 춘천시 추진협의회, 2004. 113-4쪽. 33 의 묘가 있는 구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끝 글자 가 입 구( 口 )자로 된 같은 내용의 비석이 강원학생교육원 앞에 도 있다. 이곳 사람들은 성재 유중교가 쓴 글씨라고 한다. 고증 이 필요한 대목이다, - 기봉( 旗 峰 ): 깃대봉. - 깃대봉: 물갈봉 우측 웃터골 뒤에 있는 봉우리이다. 깃대봉 앞에는 한화제약이라는 제약회사가 들어와 있다. 기봉이라고도 한다. - 난곡( 蘭 谷 ): 고란터의 다른 명칭이다. 고란터 - 남면게이트볼장: 춘천시 남면 게이트볼장이 가정리에 설치 돼 있다. 실내에 설치돼 있어 전천후 경기장이다. 사계절 언제 나 공을 치며 경기를 할 수 있다. 위치는 경로당 앞이며, 의암기념관 주차 장 옆,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 가에 있다. 마을 사 람들은 자주 이곳에 모여 서 편을 나눠 경기를 한 다. 남면게이트볼 장이지만 남면게이트볼장에서 게이트볼을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치는 장면 가정리 사람들이 전부이 다. 그것도 노인인구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젊은이들도 같 이 치면 좋을 건데, 치지 않으려 한다고 하였다. 대부분 할아버 지를 중심으로 경기를 하는데, 여성으로는 경로당을 관리하는 할머니 한 분이 현재 유일하다고 한다. - 논골: 삿골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농바우: 농처럼 생긴 바위이다. 류희자 씨의 아버지가 밤에 이쪽을 지나는데 불빛이 번쩍번쩍 하였다. 누가 호랑이 불이라 34
고 해서 가만히 올라가보니 나무뿌리에서 나는 불이었 다. 집에 가져와서 보니 벚 나무 뿌리였다고 한다. 농바우는 술워니고개 올 라가기 직전 길 밑의 개울 가에 있었다. 아주 크고 시 커멓게 생긴 바위였다. 가 정3리 쟁골에서 개를 잡아 쟁골 옛 거리제 터인 농바우 서 거리제(길제사)를 지내 던 곳이다. 지금은 보( 洑 )와 길을 정비하면서 깨뜨려서 없어졌 다. 그 때문에 거리제사도 재궁교 밑으로 옮겨 갔다. - 늠연실( 凜 然 室 ): 늠연당이라고도 한다. 미염이(미래미)에 있 는 사당이다. 인조 때 참판을 지낸 류숙( 柳 潚, 1564-1636)의 화본( 畵 本 )을 모신 사당이다. 류숙은 고흥 류 씨 부학공파 춘천 입향조( 入 鄕 祖 )이 다. 춘추로 고흥 류 씨 문중에서 제 사를 지낸다. 현재 는 음력 9월 25일 에 전작을 지내고 있다. 제사비용은 위토가 있기 때문 늠연실 안에 있는 상량문 에 그곳에서 충당 하고 있다. 화본의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사본이다. 집에 보관하면 분실우려도 있고, 또 관리도 잘 안 될 것 같아서 기증을 했다. 6.25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방공호를 파면서 총탄막이로 놓고 있는 것을 당시 17세였던 류연오 씨가 들고 와서 보관하였다. 그래서 화본이 비를 맞아 얼룩얼룩 해졌으나 일부에 불과하다. 이 화본 은 류숙이 훈작을 받을 때 도화서 에서 그린 것이다. 화본의 규격이 아주 잘 맞는다고 한다. 이 사당은 원래 제청말에 있었으 나, 1984년 현재 위치인 미염이로 옮겼다. 늠연실 안에는 1984년 11 세손 류제한이 짓고 류제생이 쓴 한글로 된 <늠연실중건상량문>이 있다. 늠연실 입구 문에는 류숙의 늠연실 중건비 13세손 류열욱( 柳 烈 郁 )이 1987년 ( 丁 卯 年 ) 여름에 영모문( 永 慕 門 ) 이 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마당에는 늠연실중건사적비( 凜 然 室 重 建 事 蹟 碑 )가 세워져 있는데, 1986년에 후손 류제한( 柳 濟 漢 )이 짓고, 류제생( 柳 濟 生 )이 썼다. 2011년 현재 류연오 씨가 관리를 하고 있다. 늠연실 앞에는 1951년에 세운 류몽표신도비가 있는 데, 비문은 어우야담( 於 于 野 談 ) 의 저자인 그의 동생 류몽인 ( 柳 夢 寅 )이 쓴 것이다. 1912년에 세운 류숙의 신도비도 있다. 류숙의 신도비는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휘가 찬했다. 이곳 에는 6.25한국전쟁 때 누군가 쏜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 능곡( 陵 谷 ): 능골. - 능골: 능꼴이라고도 부른다. 한자로는 능곡( 陵 谷 )이라 한 다. 제청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흥성부원군( 興 城 府 院 君 )으 로 추증된 류몽표( 柳 夢 彪, 1543-1616)의 묘가 있어 불러진 것 이다. 또는 무덤을 팠다고 해서 능골로 불러졌다고도 한다. 절 골 들어가서 첫 번째 골짜기이다. 올라가면 바위가 넓적하고 평편한 게 많다. 능골에 묻힌 류몽표는 우리나라 3대 야담집( 어우야담, 청 35 36
구야담, 동야휘집 )의 하나인 어우야담( 於 于 野 談 ) 을 쓴 류 몽인( 柳 夢 寅 )의 형이다. 류몽표는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양주로 피난 가던 중 왜적이 칼 로 어머니를 찌르러하자 동생 류몽웅( 夢 熊 )과 같이 몸으로 어 머니를 감싸서 살렸다. 당시 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고, 류몽표 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 대곡: 대골 - 대곡천( 垈 谷 川 ): 가정리 사이로 흐르는 시내를 대곡천이라 대곡천의 여름 쟁골 대곡천에서 여름 휴가를 한다. 쟁골 위의 산에서 발원하 즐기는 가족 여 미나리폭포를 지나고 쟁골과 제청골을 지나 고란터까지 이 어진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가정리 사람들이 쓰기에는 부족 하지 않다. 가재를 비롯해서 각종 물고기가 서식하며,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서 피서지로 각광 을 받고 있다. - 대골: 대곡( 垈 谷 ), 텃골. 고란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 다. 옛날에 이곳에 즘터가 있 었다고 한다. 즘터는 옹기를 굽던 곳을 말하는데, 지금은 뚜렷한 것이 없다. - 대장간 터: 여우내골에 대장간터 있다. 외당( 畏 堂 ) 류홍석( 柳 弘 錫, 1841-1913) 장군과 그의 며 느리 윤희순( 尹 熙 順, 1860-1935) 여성의병 등이 의병을 훈련 시킬 때 병장기를 만들던 곳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대 장간 터 위에는 그 옛날 의병훈련장( 義 兵 訓 鍊 場 )이었다는 표석 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 도곡( 陶 谷 ): 질골. - 독산( 獨 山 ): 딴묏산이라 한다. 약바우마을 뒤와 제청말 앞에 외따로 있는 산이다. 다 른 산과 연계되지 않고 홀로 있으므로 독산( 獨 山 )이라고 불 러진다. 독산에는 약바위와 할 미바위가 있다. - 동구석( 洞 口 石 ): 글씨바 딴묏산 위, 홍무벽. - 두리봉: 고란터 뒤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둥그스름하다. 조선지지자료 에도 두리봉이라 하였는데, 한자로는 두미봉( 斗 尾 峰 )으로 표기하였다. - 뒤닐고개: 복희안 들어가서 미나리폭포 있는 곳이다. 그곳 으로 계속 가면 창촌이 나온다. 예전에 그곳으로 쌀과 비료 등 을 짊어지고 강촌까지 넘어 다녔다. 길이 멀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 뒷골: 가정리 뒤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현재 다송목장이라 는 염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는 곳이다. - 든바우: 들어앉은 바위. 부처바위. 선바위. 흔들바위. 여 우내골 산꼭대기에 들어 올려놓은 모양으로 있다 하여 든바우 라고 한다. 이 든바우의 정기를 받고 의암 류인석이 태어나서 전국 총 의병장이 되었다고 한다. 류인석의 생가에서 올려다보 면 바로 보인다. 또 이 바위는 여우내골 입구에서 보면 돌부처 37 38
모양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 처바위라고도 한다. 부처바 위이기 때문에 기원을 하면 이뤄진다는 얘기도 있다. 또 바위가 서 있다고 해서 선바 위라 부르기도 한다. 또 흔 들면 흔들린다고 해서 흔들 바위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든바우 밑에까지 든바우, 산꼭대기 9부 능선 화전( 火 田 )을 일궈서 곡식을 심어 먹었다. 저녁 먹고 울력으로 그곳에 가서 짐을 지고 왔다. 마을에서 상당히 먼 곳이지만 화전을 했다. 이쪽으로 넘어가면 발산리의 황골이 나온다. 호랑이가 아이를 물어가서 든바우 밑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집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없어져서 동네 사람 들이 모두 나서 어린아이를 찾아다녔다. 마을에서는 도저히 찾 을 수 없었는데, 든바우 아래에 가니 그곳에서 아이가 울고 있 었다. 어린아이 혼자 그곳으로 걸어갔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랑이가 아이를 물어서 바위 밑에 갖다놓았다고 하 였다. - 들어앉은 바위: 든바우. 부처바위. 흔들바위. 선바위. 보 건소 쪽에서 바위를 보면 들어앉은 바위가 한 눈에 보인다. - 딴묏산: 독산. - 떡돌배기: 청각골 옆 골짜기이다. 가정3리인 쟁골 동남쪽 에 위치해 있다. - 류인석 생가 터: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류인석( 柳 麟 錫, 1842-1915) 장군의 생가 터이다. 이곳에서 중국에 가기 전까 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81번지이 다. 여의내골 입구에 있다. 불에 타고 나서 새로 지은 지가 90 여년 된다고 한다. 류혜상 (1917년생) 씨의 할아버지가 다시 지은 것이다. 집의 모양 은 옛날과 다르다. 지금은 (ㄱ)기역자인데, 그전엔 네모 반듯(ㅁ자)했다. 집의 크기는 9칸이다. 집 앞에는 우물터가 있다. - 문안골: 절골 옆에 있는 류인석 생가터 골짜기이다. - 물갈봉: 옛날에 술워니 고개 쪽 가평으로 넘어가는 곳에 물갈이라는 참나무가 큰 게 있어서 물갈봉이라고 불렀다. 거기 어디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물갈나무있는 데를 가리키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갈봉이 된 것이다. 이 산은 등산객이 많 이 오는데, 물갈봉에 올라가면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이다. 산 에 오르면 가평시내, 용문산, 유명산, 화악산이 빙 둘러 보인다. 등산하는데 2시간여가 소요된다. - 미나리골: 산미나리가 나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작은 폭포 또는 미나리폭포라고 하는 폭포가 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 이 천렵( 川 獵 )도 하고 화전( 花 煎 )놀이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서 천렵을 한 것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 미나리폭포: 미나리골에 있는 폭포이다. 원래는 작은 폭포 인데 폭포 밑에 산미나리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미나리폭포 로 명명되었다. 폭포의 높이는 약 10여 m 정도이나 아주 아름 다운 경치를 갖고 있다. 폭포도 크고 아름다워서 소풍과 화전 놀이와 천렵 장소로 유명했는데, 오세만이라는 사람이 산판길 닦느라고 위쪽에 있는 바위를 다 부셔서 망가졌다고 한다. 그 미나리 폭포는 쟁골에 사는 박화순 씨가 폭포 밑에 산미나리가 많으니까 미나리 폭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큰 폭포는 구곡 39 40
폭포를 일컫는다. 지금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데, 찻길이 폭포 위로 뚫려서 폭포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기가 곤란하다. - 미래미: 미염이 - 미염( 米 鹽 )이: 미래미. 쇠파니 옆에 있는 곳이다. 늠연실 이라는 류숙 공의 사당이 위치한 부근이다. 미래미라고도 부른 다. 한자로는 미염( 米 鹽 )이라고 쓴다. 옛날 이곳에 흉년이 들어 서 마을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고흥 류 씨 의 선조인 류숙이 갖고 있는 쌀과 관가의 구휼미를 이곳에서 풀고, 소금을 풀어서 아사( 餓 死 )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구휼했 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쌀과 소금을 나누어 준 곳이라 는 뜻으로 쌀 미( 米 )자 소금 염( 鹽 )자를 써서 미염이라고 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염이를 미래미라고 발음해서 현재는 미염이 와 미래미가 같이 쓰이고 있다. 큰 미래미 작은 미래미가 있다. 류숙 공이 쌀을 나눠주다가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춘천 시내 방면으로 옮겨 살게 했다고 한 다. - 바른골: 삿골 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골짜기로 들어가 면 바른 손 쪽에 속한다. 이 일대에는 옛날에 화전을 많이 해 먹었다. - 박석고개: 고란터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박수고개라고 도 한다. - 방죽: 옛날 가정리 유원지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 장마가 지면 물이 계속차서 유원지의 모래를 준설하고 방죽을 세웠다. 방죽 때문에 지금은 비가 많이 와도 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는 다. 유원지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운영하였다. - 버덩: 평촌. - 벌개경자: 가정자가 있던 곳의 벌판을 일컫던 명칭이다. - 병문안: 바위가 양쪽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 복희안: 보코안이라고도 발음한다. 큰 성골 옆 골짜기이다. - 부러진 바우: 바위 중간이 갈라져 있는 곳이라고 춘천시 가정리 조사보고서 에 나온다. 그러나 가정리 사람들은 잘 알 지 못하였다. - 부질: 여우내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가정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충의대교( 忠 義 大 橋 ) 못가서 있는 곳이다. 옛날에 집을 지을 때나 벽을 바를 때 그곳에서 흙을 파왔다. 마차로 흙을 파서 날랐다. 그래서 붙이는 토질이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 같다. 여기 다른 흙은 많은데 찰흙은 거기 가서 파왔다. 새 벽을 바를 때 꼭 그곳 흙을 사용했다. 새벽은 집을 지을 때 맨 끝에 바르는 흙을 말한다. 처음 바르는 것은 초벽이라 한다. - 부처바위: 든바우. - 부처안골: 쇠파니 너머에 있는 골이다. 그 골짜기를 넘어서 면 가정3리가 다 보인다. 절골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부처안골이 라 했다. - 비랭이소: 벼랑 밑에 있는 소이다. 고란터 있는 곳인 왕터 쪽이다. - 비렁여울: 홍천강에 있는 여울로 벼랑 밑에 있다. 박암리 가기 전에 있다. 보통 비랭이라고 한다. 옛날 박암리 사람들이 비랭이를 지나 학교를 이곳으로 왔다. 이곳 가정초등학교가 남 산초등학교 다음에 세워진 것이다. - 비렁이바우: 벼랑바우라고도 한다. 벼랑 밑에 있는 바위이 다. - 빗들 배깃들: 왕동 위쪽에 있는 들이다. 흥성부원군 류몽표 와 그 아들 취흘( 醉 吃 ) 류숙( 柳 潚 ) 부자( 父 子 )의 신도비( 神 道 碑 ) 가 있어서 불러진 지명이다. 빗들은 비석이 있는 들이라는 뜻 이다. 늠연실 옆이다. 지금은 늠연실을 옮겼다. 옮기기 전에 있 던 곳이다. - 사동( 寺 洞 ): 절골이라고 부른다. 집실 동쪽에 있는 마을이 41 42
다. 예전에 절이 있었다. 지금의 저수지 자리이다. 원래 절이 있었으나 빈대가 많아 망했다고 한다. 스님이 시주를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 웬 기둥이 서 있었다. 그래서 기둥을 밀었더니 모 두 빈대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절이 폐사하면 모두 빈대 때문 이라고 했다. 스님이 동이를 갖다 놓은 자리가 아직도 동그랗게 있으며 우 물, 탑자리, 기와조각, 주춧돌 등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문화재 굴터지역으로 묶였다. 고란터 지역도 그렇다. 그래서 그곳의 땅 을 파면 별의 별 것이 다 나온다. 가정리의 원래 지명이 사동리 곧, 절골 이었다. - 사동리( 寺 洞 里 ): 가정리의 옛 지명으로 조선지지자료 에 나온다. - 삭골: 삿골. - 삼성봉( 三 聖 峰 ): 텃골에 있는 산이다. 삼성묘( 三 聖 廟 )가 있 었다. 옛날 항와( 恒 窩 ) 류중악( 柳 重 岳, 1843-1909)이 모셨을 수 있다. - 삿골: 유인석 기념관 뒤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삿골에는 바 른골과 논골이 있다. 삭골이라고도 한다. - 상아골: 생아골이라고도 한다. 골짜기 세 개가 합쳐진 곳이 다. - 상암( 上 岩, 象 岩 ): 상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코끼리 상( 象 ) 또는 윗 상( 上 )이라고도 하는데 류종원 씨 생각에는 코끼리 상 ( 象 )자가 맞다고 한다. 저수지 쪽에서 상암을 보면 코끼리처럼 보인다. 웃바우라고도 한다. - 상암산( 上 岩 山 ): 텃골 뒤에 있는 산이다. - 색싯골: 새악시골. 미나리골 옆에 있는 골이다. - 새악시골: 미나리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연애골이라고도 한다. - 샘보: 샘을 이용한 보( 洑 )이다. 약바우 가는 길목에 있는 43 것이다. 지금도 그 물을 받아 낸다. 거기서 남는 물로 평촌에서 논을 해 먹었다. 약바우 다리 밑에 샘 나오는 것을 말한다. - 샛골: 삭골과 웃텃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생강골: 현 이상인 씨 집 뒤편으로 가정2리 마을회관 뒤 골짜기를 일컫는다. 상강골 삼강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곳에 장승이 서 있었다. - 서낭당터: 가정 2리 삿골 입구, 의암 기념관 쪽에 있다. 쟁 골에 사는 류희자 씨는 이 서낭부근에 살았는데, 3리로 시집오 기 전 마을에서 서낭고사를 지내는 것을 봤다. 서낭에 창호지 한 장 갖다 놓고 동전 서푼, 쌀 세 스푼을 넣어 싸서 서낭에 매달고 서낭고사를 했다. 이 서낭당은 마을길을 닦으면서 없어 졌고, 그 이후로는 제사도 지내지 않게 되었다. 길가에 위치하 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프면 서낭당에 놓인 떡 을 먹기도 했으며, 기름을 짜거나 물건을 사올 때는 서낭당에 잠시 두었다가 왔다. 그렇지 않으면 크고 작은 화근이 생겼다 고 한다. - 선바위: 든바위. 부처바위. - 설통거리: 쟁골 입구 옻물 앞에 있는 길거리이다. 예전에 여기에 벌통을 많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여기서는 벌통을 설통이라고도 불렀다. 5) 길을 닦으면서 설통거리의 벌통 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다. 설통거리에는 바위가 많았는데, 이곳에 길을 닦으려고 굴삭 기로 파헤칠 때 아주 큰 구렁이가 나왔다. 그래서 굴삭기 기사 는 뱀이 그냥 살아갈 수 있도록 놔주었다. 그 구렁이를 설통거 리 터주라고 하였다. 옛날에 이곳에 집이 세 채 있었는데, 밤에 술워니 고개에서 오다가 보면 호랑이가 설통바우쪽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5) 설통은 설통발과 함께 위로부터 내려오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거꾸로 놓은 통 발을 일컫는 말이다. 44
주 무서워서 머리가 하늘로 치솟을 정도로 혼이 났다고 한다. - 설통바우: 삿골에 있다. 설통(벌통)처럼 생긴 바위이다. 설 통바위 밑에 설통바웃보( 洑 )가 있다. 설통은 벌을 놓는 통인 벌 통을 일컫는 이칭이다. 여기는 설통바우가 여러 개 있다. 약바 위에도 있고, 쟁골에도 있고, 삿골에도 있고 여러 곳에 있다. 그러니 설통바우라 하면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른다. 그러니 설 통이 있으면 다 그렇게 얘기했다. - 설통바웃보( 洑 ): 설통바우 밑에 있는 보이다. 삿골에 있었 다. - 소막골: 안꼴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막을 짓고 장사 준 비를 하던 곳이다 고 하는데, 여기서 소막( 素 幕 )은 흰 장막을 뜻하는 것이고 장사( 葬 事 )는 묘혈을 파고 죽은 사람을 묻는 작 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 쇠파니: 절골 쪽에 있다. 뒤두렛골에 있는 장등이다. 여기 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전에 쇠를 파냈던 골짜 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쇳물을 끓여 부었다는 것이다. 쇠를 파냈다는 것은 철광이 있었다는 것이고, 쇳물을 끓여 부었다는 것은 혈을 지른 것을 뜻한다. 그러니 솨파니가 쇠를 파낸 곳이 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고, 일본인들이 혈을 끊은 골짜기를 말 한다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설을 모두 이야기 하고 있으나, 다 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는 것을 봐서 혈을 끊으려고 했다는 말 이 옳은 것 같다. 옛날 고흥 류 씨가 벼슬을 많이 하니까, 일본인들이 산에 쇠 [ 鐵 ]을 질러서 쇠파니라는 지명이 생겼다. 일본인들이 현재 쇠 파니라 부르는 산에 혈을 끊는다고 해서 쇠를 박고 묘를 파 뒤 집었다. 그래서 산의 혈맥을 없앴다. 미염이의 현 류연오 씨 집 앞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 연못이 있었다. 일본인이 그 산에 혈 을 지르고 무덤을 파 뒤집으니까 쌀뜨물 같은 게 연못에 비쳤 다고 한다. 그러니 그 혈이 내려와 연못까지 물이 흘렀다는 것 이다. 혈을 지를 때는 대개 쇠말뚝을 박든가, 산의 땅을 파내어서 산의 혈맥을 끊었다. 여기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 수나려: 홍천강의 물이 멈췄다가 돌아 흘러가는 곳이다. 요 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고 하였다. - 수락산( 壽 樂 山 ): 능골 뒤에 있는 산이다. 앞에는 수락재라 는 사당이 있다. 흥성부 원군 류몽표( 柳 夢 彪, 1343-1616)의 묘가 있 다. 은행나무 뒤쪽에 있 는 산이다. 6.25한국전쟁 때 유몽 표의 후손 류봉상( 柳 鳳 相 )이 지방 청년 백여 명 을 모아 산악대( 山 岳 隊 ) 를 조직하여 스스로 대 수락산 장이 되어, 수락산에 웅 거하면서 각처에서 들어오는 괴뢰군(인민군과 중공군)을 모두 섬멸하니, 괴뢰군(인민군과 중공군) 이 감히 침입하지 못하여, 완전히 자유 독립지대를 이루었다. 강원도가 수복된 후에도 이 지방의 치안을 류봉상에게 맡기고 상을 주어 크게 표창하였다. 당시 산악대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서 방하리 입구, 남이섬, 춘 천에서 가평으로 가는 구길 입구에 기념비를 세워 두었다. 전 부 83명이라고 하는데, 가평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수효가 더 많다. 춘성의 맥( 春 城 의 脈 ) 에는 <6.25동란과 남면 산악대의 활 약>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전문을 옮기 면 다음과 같다. 45 46
산천초목도 울부짖었던 민족의 비극 6.25, 그때의 처참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리만치 우리에겐 기 혹한 동족상쟁의 비극이었 다. 남침을 계획하고 미리 전쟁 준비에 광분했던 붉 가평에 있는 산악대전장비 은 무리에 비해 허술 하기만 했던 우리의 방위태세는 총도 칼도 없기에 오직 불타는 애국과 멸공정신, 그 리고 맨주먹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처참한 전쟁이었다. 그러기에 그 어느 싸움보다도 곳곳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분 연히 일어나 싸운 무 명의 애국 반공 청년 들의 값진 싸움이 많 았다. 1953년 6월 7일 춘 남이섬에 있는 산악대원 전장비 성군 남면 지역의 청 장년 83명이 산악대 를 조직, 유봉상( 柳 鳳 相 )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춘성, 홍천, 가평 등지에서 북괴 내무서를 습격, 적치하의 행정을 교란시키고 지 47 방 불순분자를 색출 처단하였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잠복하 였다가 북괴군 이동로를 기습, 그들의 작전을 지연 및 마비케 하였으며 퇴진하는 패잔병을 섬멸하였다. 맨몸으로 탄알을 막으며 맨주먹으로 싸웠던 그때 그 사람들! 4반세기가 흘러간 지난 75년 8월 사라져 가는 그들의 넋을 다시 찾아 길이 빛내고, 후세에 전하여 반공의 교본으로 삼고 져 기념비를 세웠다. 춘성군 남면 방하리(남이섬)에 세워진 <6.25 반공투쟁 산악 대원 전적비>가 바로 그것이다. 비에 새겨진 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내 고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를 홀홀히 버린 자랑스러운 젊은이들의 얼을 기리며 여기 유서깊은 남이섬에 전적비를 세우다. 붉은 무리의 말발굽이 은혜받을 우리의 강토를 짓밟았을 때 이 고장 여든 셋 젊은이들은 바위에 등을 대고 풀로 몸을 가리며 맨주먹으로 붉은 무리들을 무찔렀다. 이제 그들의 슬기와 용기를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움에 그 이름 길이 빛날 것이다. 조국의 알찬 번영과 함께 영원히 6) 6) 춘성의 맥, 춘성군, 1982. 67-8쪽. 48
- 수락재( 壽 樂 齋 ): 수락산 밑에 있는 고흥 류 씨의 사당이다. 그 앞과 옆에는 고흥 류 씨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 다. 이 수락재는 고흥 류 씨 11대조와 조비, 12대조와 조비, 13대조와 조비를 모시고 있다. 13대가 병조참판을 지내 고, 늠연실에 따로 화본( 畵 本 )을 모신 류 숙 ( 柳 潚 ) 수락재 위패 이다. 벽면에는 <수락재상량문>을 한글로 써서 표구를 해서 걸 어두었다. 1997년 5월 19일 에 상량문을 지었다. 고흥 류 씨 11대 의정공이 돌아가신지 수락재 현판 382년 째 되는 해라고 하였 다. 수락재 앞에는 수락재기 비( 壽 樂 齋 記 碑 )가 세워져 있다. - 술워니고개: 한자로 주원현( 酒 原 峴 )이라 하는데, 가정리에 서 방하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조선지지자료 에도 술원이 고 ( 酒 原 峴 )로 표기되었다. 이곳에는 유래가 두 개 전한다. 하나는 묏자리 잡을 때 술을 마시고 잡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원님이 고개를 넘다가 힘들어 서 술 먹기를 원했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다. 조선조 선조( 宣 祖 ) 때 취흘( 醉 吃 ) 류숙( 柳 潚 ), 문상옹( 汶 上 翁 ) 류혁( 柳 奕 ), 태우( 泰 宇 ) 류활( 柳 活 ) 3형제가 박상의( 朴 尙 義 )라는 명사를 데리고 대지( 大 地 )를 구하러 다니다가 이 고개에서 술 을 마시고 능골로 와서 대지( 大 地 )를 잡았던 곳이다. 원님이 고개를 넘다가 하도 힘이 드니까 술을 한 잔 먹고 넘어갔으면 했는데, 산에 술이 있을 리는 없고 해서, 술을 원 한다고 해서 술원이고개라고 했 다고 한다. 지금은 좀 깎아 놓았고 차도 가 뚫려 있는데 그 전에는 높아 술워니고개 서 겨우 걸어가게 되어있었다. 가평으로 갈 때는 술워니고개를 넘어 방하리로 해서 갔다. - 숯가마터: 재궁동에도 있고, 제청말 쪽에도 있었다. 옛날 숯가마가 3개 정도 있었다. 없어진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쟁골에 사는 최문식 씨의 아버지가 숯을 구워 팔았다고 한다. 쟁골에는 나무가 많아서 숯을 굽기가 아주 좋았다. - 시장거리: 광복판들에서 시장이 열렸다. 지금 의암 기념관 앞이었다. 시장이 열릴 때는 별의 별 물건이 다 들어왔다. 도로가 좋 아지면서 시장이 열리 지 않았다. 홍천의 모곡 장( 牟 谷 場 )을 가기 전에 소장수들이 들렀기 때 문에 시장이 형성됐다 고도 한다. 우시장( 牛 市 가정리 옛 거리 場 )도 한동안 열렸다. 곡식은 장사꾼이 사놓 았다가 한 번에 싣고 가기도 하였다. 시장거리에는 주막( 酒 幕 ) 도 여러 개 있었다. 춘천으로 가는 도로가 좋아지면서 자연히 시장이 없어졌다. 49 50
- 신금솔: 의암기념관 앞 현재 남면 게이트볼 장 있는 부근 에 있던 솔밭이름이다. 솔밭이 아주 무성하게 있었는데, 솔밭을 신금솔이라 명명했다. 소나무 숲이 없어진지는 약 30여 년 된 다. 1980년대에 없어졌다. - 아랫고개: 고란터에 딸린 고개, 고란터 다음 고개로 박암리 방면으로 가는 쪽에 있다. - 아랫들: 가정리 아래쪽에 있는 들로 대곡에 있는 버덩이다. - 안꼴: 안골이라고도 한다. 가정리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골과 대곡 사이에 있다. - 약물: 쟁골에 있는 약물터이다. 쟁골에서 시간 반 정도 걸 어서 산으로 올라가면 산의 9부 능선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밑 으로 약 3m 가량 길 이의 굴이 뚫어져 있 다. 재궁동산제당 방면 이 아닌, 좌측골짜기 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는 길목에는 예전에 사람들이 살 던 집터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절구가 작 쟁골 약물 은 계곡 옆에 뒹굴고 있다. 옛날 화전을 일구고 살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올라가는 길목에는 갖가지 산약초가 있었다. 특히 당뇨에 좋 다는 봉삼이며, 피를 맑게 한다는 둥글레 등이 사방에 흩어나 있었으며, 곰취, 취나물 등의 산나물도 아주 많았다. 특히, 이곳 에는 멧돼지가 많기 때문에 산에 오를 때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멧돼지를 봤을 때 소리를 지르면 바로 덤벼들기 때문에 조용히 있다가 지나가면 가던 길을 가야한다. 약물이 나오는 굴은 높이가 낮아서 서서 들어갈 수는 없고, 앉은걸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은 비교적 많이 고여 있다. 바 위에 대한 명칭은 따로 없고 그 밑에 솟아나는 샘을 약물이라 고 한다. 물을 상중하탕으로 구분해 두었다고 했는데, 2011년 여름에 갔을 때는 상탕에만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약물터는 쟁골 사람들이 특별히 위하는 곳으로 유명한 기도 처이다. 이곳에 기도를 하러 갈 때는 며칠 전부터 금기를 해야 한다. 만약 부정한 사람이 그곳에 가게 되면 실뱀이 나타나기 도 하여 부정한 사람이 왔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곳에 기도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무교인( 巫 敎 人 )들도 이곳에서 텐트를 쳐놓고 며칠씩 기도를 하고 간다. 약물 주변에 기도한 흔적을 남기지 말고 깨끗이 청소를 하고 갈 것을 동네사람들은 원하고 있었다. 이 약물은 상당히 영험해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고 한다. 특히 위장병이 있는 사람은 오랜 시간을 두고 복 용을 하면 그 효험을 볼 수 있다. 예전에 강원도지사 부 인이 몸이 몹시 안 좋아서 가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약 물을 복용하였는데, 얼마 지 나지 않아서 가마를 보내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약물 입구 한다. 물맛은 탄산약수처럼 쏘지는 않고, 그렇다고 일반 물 같지는 않다. 상당히 차면서 약간 미끈한 느낌을 주며 뭔가 신비감까 지 곁 드려 있다. 이곳에 오르는 길이 순탄치 않아서 몸이 불편한 사람은 오를 수 없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앉은뱅이가 이 물을 먹고 일 51 52
어서 갔다는 등의 일화를 사실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아울러 약물까지 길을 뚫어서 몸이 불편한 사람을 비롯해서 노약자들이 많이 찾아서 그 효험을 봤으면 하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의 바람이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이 약물 옆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을을 오르내릴 정도로 기 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약물의 효험으로 알고 있었다. - 약바우: 약암리( 藥 岩 里 ), 약바우가 있는 마을. 텃골 북쪽 딴묏산 기슭에 있는 큰 바위가 매우 영험하여 병든 사람을 위 하여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바위 밑 에 옛날에는 샘이 솟아서 그것으로 효험을 봤는데, 류 씨네가 약바우 위에 묘를 쓰고 그 부정으로 인해서 약물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산을 쓴 것은 한 200년 정도 된다. 이곳에 묘 를 쓴 사람은 충청도 목천에 사는데 이제는 이장을 해 갔 다. 이 약바우가 효험이 있다고 해서 많은 환자들이 찾아와서 죽어나가고 하니, 동네가 부정 하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부정을 막기 위해서 개를 잡 아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옛날에 약바우 밑에 있는 샘 을 앉은뱅이가 먹고 다리가 펴져 걸어서 나갔다고 한다. 약바우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이 바 위를 약바위로 일컬었다고 한 다. 옛날 어른들이 이곳에 약바우가 있어서 제약회사가 들어올 것이라 했는데, 정말 한화제약회사가 들어왔다고 한다. 약바우 10여 미터 옆에는 할미바우가 있다. 바위의 모양은 특별하지 않지만 사방 6여 미터 정도의 크기로 바위 앞에 서면 특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잣나무 등이 우거차서 밑 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 약바우가 있는 마을: 약바우. 그냥 약바우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약암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 약암교( 藥 岩 橋 ): 약바우가 있는 마을의 다리를 일컫는다. 약바우교라고도 부른다. 대곡천을 가로질러 미염이와 이어지는 다리이다. 여기서 약바우까지 거리가 약 70여 미터 정도 된다. 약암교 밑에는 샘보가 있어서 예전 에 광복판들에 있는 논에 물을 대었 다. - 약암리: 약바우가 있는 마 을. 약바우. - 양조장터: 의암기념관 앞에 있 었다. 막걸리를 만들어서 팔았는데, 약암교 규모가 상당히 컸다. 나중에 막걸리 가 잘 팔리지 않자, 6.25한국전쟁 후에는 소주를 내리다가 그 것도 여의치 않아서 문을 닫았다. 양조장터에 살던 류희찬 씨 댁의 택호가 양조장댁이다. - 엄연당( 儼 然 堂 ): 늠연실. 미염이에 있는 사당으로 늠연실 의 이칭이다. 인조( 仁 祖 ) 때 참판을 지낸 취흘 류숙의 화본( 畵 本 )을 모신 사당으로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 여우내: 조선지지자료 에는 여우 ( 如 遇 溪 )라 하였다. 우 계( 右 溪 )라고도 한다. 가정리 옆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의 암 류인석이 탄생했다. 여우내 뒤에 있는 골짜기를 여우냇골이 53 54
라 한다. 정미의병 때 류홍석( 柳 弘 錫 )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 탄 약을 만들었으며 의병을 훈련시켰다. 지금도 쇳조각이 나오고 쇳물이 녹았던 자리가 붉은 빛을 띠 고 있다. 여성의병 윤희순( 尹 熙 順 )도 여우냇골 의병진에 참가했 다. 가정자 옆에 있는 골짜기인데, 여울에서 유래했다. 따로 냇골 이라고도 한다. - 여우냇골: 여우내 - 여우내천: 여우내골에서 흐르는 냇물을 말한다. 든바우에서 시작해 여우냇골을 따라 흘러 대곡천과 합수하여 홍천강으로 흘러든다. - 여의내: 여우내. 여성의 자궁을 닮아 기운이 좋은 곳이 몇 곳 있다고 한다. - 연못: 미염이에 있던 연못이다. 이 연못은 쇠파니에 일본인 이 혈을 지르자 쌀뜨물 같은 것이 비쳤다고 한 다. 현재 여의내골 입구 에도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연( 蓮 )이 자생하고 있으며, 그 옆 에는 1984년 춘성군수 가 세운 의병훈련터 표 석이 있다. 가정초등학 가정초교 앞 훈련장 표석 옆의 연못 교 바로 앞 다리를 건 너 오른쪽에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 연애골: 새악시골 - 열녀정문: 쟁골 입구에 있었다. 조선 영조 때 류재한( 柳 宰 漢 )의 아내 양천 허 씨( 陽 川 許 氏 )의 열녀정문이다. 류재한은 한 말 학자인 류중악( 柳 重 岳, 1843-1909)의 고조부로, 벼슬은 통 덕랑( 通 德 郞 )을 지냈다. 그의 아내 양천 허 씨는 1806년(순조6 년)에 정려되었다. - 오리나무골: 여우냇골 줄기에 있는 골짜기이다. - 옻물: 가정리 쟁골 약수라고도 한다. 쟁골 입구인 설통거리 밑 계곡물 옆에 있는 샘물 이다. 쟁골에서 흐르는 내 를 건너야 한다. 내를 건널 수 있도록 돌다리를 놓았 다. 그리고 수질 검사표까 지 설치해 두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옻에 오 른 사람이 이 물로 씻으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지 금은 새농어촌건설사업을 옻물 안내판 하면서 정비를 해놓았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나던 산골이 나지 않는다고 한 다. 산골은 아주 작은 갑각 류 생물인데, 다친 뼈가 붙 는데 특효약이라 해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한다. 현재 산골이 나지 않는 것 은 시멘트를 사용해서 물만 옻물 나오게 만들어서 산골이 자 랄 수 없기 때문이다. - 왕동: 왕월. - 왕월: 왕동( 旺 洞 ), 왱월이라고도 한다. 여우내 북쪽 들에 있는 마을이다. 왱월 뒤에 있는 골짜기는 왱월골이다. 가정초등 55 56
학교 쪽을 일컫는다. - 왱월꼴: 왱월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우계( 右 溪 ): 여우내. 우계( 遇 溪 )라고도 한다. 여우내골에 있는 계곡 또는 여우내골의 이칭이다. 가정리 고흥 류 씨 중에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을 우계파( 右 溪 派 )라 한다. - 웃바우: 상암( 上 岩 ). 가정자 위쪽에 있는 바위이다. 약바 우 위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상암( 象 岩 )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 우시장( 牛 市 場 ): 광복판들에서 시장이 열리 때 우시장도 열 렸다. 우시장은 오랫동안 열린 것이 아니라, 얼마간 열리다가 말았다. 모곡시장이나 남면시장 또는 춘천우시장으로 가기 전 에 소를 팔고 사던 곳이다. 시장이 크지 않기 때문에 많은 소 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웃텃골: 텃골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 원골: 절터 있는 골짜기에 있다. - 윤희순표석: 의병훈련터. - 은행나무: 제청말에 있는 보호수 두 그루이다. 이 은행나무 는 고흥 류 씨 입향 조상이 이곳에 심은 것이다. 사당 왼쪽에 있는 나무는 누가 가운데에 불을 놓아 두 그루로 갈라졌다. 전 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에 떠돌던 거지가 그곳에서 한동안 생활 했는데, 거지가 그곳에서 담배를 피다가 담배 불이 나무에 붙 어 은행나무를 태웠다고 한다. 위에 있는 것은 산 밑에 은행나무라 하고, 밑에 있는 것은 논 가운데 은행나무라고 한다. 두 그루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위의 은행나무는 강원- 춘천-7호로 1982년 11월 13일에 지정되었고, 수령은 450년, 수고는 20m, 둘레는 530cm이고, 관리자는 이상철이라 하였다. 밑에 있는 양쪽으로 갈라진 은행나무는 고유번호와 일자와 관 리자 모두 위의 것과 같은데, 수령은 470년이고, 수고는 21m 이고, 둘레는 900cm라 하였 다. 다음은 제청말 은행나무 옆 에 살고 있는 류황상 씨의 제 보이다. 선조께서 어떻게 여기 정착 을 해서 은행나무를 심었다. 그 할아버지께서 여기로 가져 와서 심었는데, 중요한 나무니 까 그랬을 것이다. 그게 자라 서 이렇게 커져버렸다. 한 500년 됐으니까, 1대를 30년을 치니까 나한테 13대면 은행나무1 500년 된다. 여기 얽힌 이야기 는 모르고, 그냥 선조께서 심었다는 것만 안다. 낙향 해서 오셔가지고 저 밑에 나무도 같이 심었다고 한 다. 저 나무 안에 구멍이 뚫 어졌으니까 옛날에 얻어먹 는 사람 거지라고, 그 사 람이 갈 데가 없어서 거기 은행나무2 들어가서 담배를 피다가 거기서 나무 부스러기 같은 것에 불이 나서 한 나무가 두 개로 갈라졌다. 그런데 춘천시에서 누가 와서 시멘트를 부어서 이게 하나로 돼 가고 있다. 원래 한 나무였다가 중간에 타서 떨어졌 다가 다시 붙고 있는 것이다. 언제 그런지는 모르고, 옛날부터 우리도 들었던 이야기이다. 내가 조그마했을 때만해도 큰 나뭇 57 58
가지가 중간에 얹혀있었다. 우리 애들 적이니까 내가 시방 83 세인데 애들 적이니까 그때는 15,6살 그때였다. 그때는 불에 탄 자국이 있었다. 예전에 강릉아주머니라는 사람이 여기 와서 자리를 깔고 포 를 놓고 술 한 잔 놓고 절을 하였다. 아주머니는 어디서 왔냐 고 하니, 강릉에서 왔는데 이런 큰 나무를 보면 기도하고 간다 고 하였다. 부를 때는 그냥 은행나무라 한다. 하나는 산 밑에 은행나무, 하나는 논 가운데 은행나무라 한다. 7) - 을여울: 홍천강에 있는 여울, 물살이 세어서 늘 소리가 난 다고 한다. - 음지패: 음지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박암리로 가는 구( 舊 ) 길로 산골길이라고도 한다. - 의병훈련장(터): 여의내골에 있다. 의병장 류홍석( 柳 弘 錫, 1841-1913)과 그의 며느리 윤희순( 尹 熙 順, 1860-1935) 등이 이곳에서 의병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훈련장이었다는 표석이 2개가 있다. 하나는 1984년 8월 1일 춘성군수가 세웠고, 또 하나는 2005년 12월 20 일에 의암유인석선생기념 사업회에서 세웠다. 의병 훈련터 아래에는 대장간터 가 있다. 1984년 8월에 춘성군수가 세운 표석은 가정초등학교 앞 연못가에 세워져 있고, 2005년 12 월에 세운 표석은 훈련장 항일의병 무기제조 훈련장유적기념비 터라는 곳 길가에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7) 류황상(남, 83) 가정2리 제청말. 2011.7.21. 59 <항일의병 무기제조 훈련장유적기념비> 1907년 대한제국의 광무(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강제해산시킨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하자 이에 통 분한 춘천 의병장 외당( 畏 堂 ) 유홍석( 柳 弘 錫 )과 여성의병장 윤 희순( 尹 熙 順 )을 비롯한 남녀노소 700여 의병이 같은 해 8월 춘 천시 남면 여의내골을 중심으로 크게 봉기 하였다. 이때 춘천 의 진은 의병투쟁에 긴요한 화약과 탄환 등을 조달할 수 있는 무기제조소를 설치하고 의병훈련을 실시하는 동시에 의병의 사 기를 진작시킴으로써 보다 피맺힌 대일항쟁을 펼쳤다. 이에 구 국항쟁의 역사적 현장이요 민족정기가 서린 성스러운 유적지의 소중한 흔적과 뜻깊은 의의를 새기고 기리고자 정성을 모아 이 곳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2005년 12월 20일 (사)의암 유인석 선생기념사업회 강원도 춘천시 <여의내골 의병훈련장( 義 兵 訓 鍊 場 )> 이곳은 구한국( 舊 韓 國 ) 말기 조정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일본 ( 日 本 )과 그 세력을 따르는 도당( 徒 黨 )을 몰아내고자 스스로 일 어선 젊은이들이 모여 힘을 기르던 의병훈련장( 義 兵 訓 鍊 場 )이 다. 의병장 류인석( 柳 麟 錫 ) 선생을 중심으로 류홍석( 柳 弘 錫 ) 박 화지( 朴 華 芝 ) 류중악( 柳 重 岳 ) 등을 비롯 춘천 춘성지구 유림( 儒 林 ) 및 청장년( 靑 壯 年 ) 일천여명이 모여 한편에서는 화약( 火 藥 ) 과 탄환( 彈 丸 )을 만들고 한편에서는 훈련에 힘쓰던 의병들의 구국( 救 國 )의 함성이 메아리치던 곳이다. 이 나라 의병사( 義 兵 史 )에 길이 빛날 구한말 제1기 의병의 연고지( 緣 故 地 )로 호국 ( 護 國 )의 얼이 담긴 옛터에 표석을 세워 후세에 남긴다. 1984 년 8월 1일 춘성군수 춘성의 맥 에는 여의내골 의병훈련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60
기록해 두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황제의 양위 등 일본의 노 골적인 침략행위에 대한 울분과 멸망해 가는 국운( 國 運 )을 좌시( 座 視 )할 수 없 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하고자 외 의병훈련장터표석(1984) 치는 소리가 높았 다. 이때 화서 이항로( 華 西 李 恒 老 ) 선생의 문하생( 門 下 生 )인 춘성군 남면 유림( 儒 林 )이 주동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 이 전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유중낙( 柳 重 樂 ), 유중악( 柳 重 岳 ), 유홍석( 柳 弘 錫 ) 등이 주동이 되어 춘성군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 의기청년 1,000 여명이 모이게 됐는데, 이들은 유홍석( 柳 弘 錫 )이 지은 <고병정가사( 告 兵 丁 歌 辭 )>를 부르며 훈련을 하였다. 유중악( 柳 重 岳 )이 농우를 팔아 군자금( 軍 資 金 )을 조달하여 화 약을 제조하고 놋쇠와 구리를 모아 실탄을 만들어 사용하였으 니 이름하여 화승포( 火 繩 砲 )라 하였다. 유홍석( 柳 弘 錫 )의 자부( 子 婦 ) 윤희순( 尹 熙 順 )은 <안사람의병 가>를 비롯 수많은 의병군가( 義 兵 軍 歌 )를 지어 보급하여 부르 게 하고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하여 그들의 활동을 도왔다. 젊 은 혈기의 청장년들이 이에 호응, 의협심과 애국충정으로 의병 봉기를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의병사( 義 兵 史 )에 기록된 남자들만의 의병가사 를 부인하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의한 61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절대적으로 통제되던 시대에도 국난극 복을 위해서는 아녀자들도 남편과 그의 동료들을 도와 직접적 으로 나라 찾기 운동에 가담하였으니 이는 우리 고장만이 간직 한 자랑이요 보배라 하겠다. 여의내골은 우리나라 문헌상에 기록도 없는 최초로 발견된 의병훈련장이며, 직접 무기와 실탄을 제조하여 지급한 고장이 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이는 전국의 의병활동의 본거지가 춘성군이었다는 사실을 다 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춘성군민은 이 같이 역사에 빛나는 조상들의 얼을 되찾아 우리 생활에 승화시켜 내일을 위한 오늘 의 터전을 더 한층 굳건히 해야 될 것이다. 8) - 의암교( 毅 菴 橋 ): 의병교라고도 한 다. 의암기념관으로 들어가는 대곡천을 가로지른 다리이다. 다리 밑에는 대곡천 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여름에는 아 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의암교 - 의암기념관: 의암( 毅 菴 ) 류인석( 柳 麟 錫, 1842-1915)의 의병활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가정리에 세 운 기념관이다. 유인석의 묘소 를 중국에서 이곳으로 반장( 返 葬 )해 모셨고, 의암 유인석 관 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는 의암의 사상과 저술활동, 의 병활동, 생활사 등에 관한 것을 하였다. 그리고 숙박시설 및 체 험 등의 교육을 할 수 있는 체 의암기념관 입구 계를 갖추어 놓았다. 전국에 있 8) 춘성의 맥, 춘성군, 1982. 63-4쪽. 62
는 초 중 고교 등의 예약을 받아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곳 에 가면 우리나라 의병활동의 전모를 알 수 있다. 직원들이 상 주하고 있으며, 문화해설사가 항시 대기하고 있어 언제든지 현 장에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의암선생묘( 毅 菴 先 生 墓 ): 성역화된 의암 류인석의 묘가 있 다. 중국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만주 홍경헌 평정산에 서 고향인 가정리로 옮긴 것은 1935년 4월 12일(음 3월 10일)이었다. 반장( 返 葬 )을 할 때 그의 제자와 유 림들이 가정리 뜰을 메울 정도로 많이 왔다. 그래서 갓을 쓴 사람들로 가정리가 가득 찼다. 그리고 당시 반 장의 비용은 류참봉 댁에서 의암 묘역 모두 지불했는데, 다음은 의 암의 후손 류연창 씨의 구술 내용이다. 중국에 있는 의암 유적지 산소를 가봤다. 거기서 산소를 이 리로 모시면서 가평서부터 상여를 모시고 왔다. 나는 직접 보 지를 못했다. 그래 지금도 날 보고 하는 얘기가 그때 우리 류 가에 큰 부자가 있었다고 한다. 천 석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래 서 내가 지금까지 비를 조그맣게 라도 해드리고 싶다. 그때 반 장( 返 葬 )을 할 때, 장례비를 류참봉 댁에서 다 치렀다. 그때 의 암의 제자들 수백 명이 하여간 갓 쓴 사람이 가정리에 가득했 다고 한다. 그 사람들 먹는 것까지 류참봉 댁에서 다 댔다. 그 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는 지금도 물질적으 로 신세를 못 갚지만 마음 적으로라도 그 신세를 잊으면 안 된 다. 라고 그런 말씀을 하셔서 그렇게 전해 들었다. 뭐 그게 참 63 보통 저거는 아니다. 더군 다나 지금 같이 먹을 거 막 흔할 때가 아니라, 아주 어 려울 때였다. 9) 의암은 가정리 출신으로 화서학파( 華 西 學 派 ) 3대 종 주가 되었고 척사위정( 斥 邪 의암제 후 기념촬영 衛 正 )의 기치를 내걸고 제 천( 提 川 )의병을 지휘 했다. 팔도창의대장( 八 道 倡 義 大 將 )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의병을 총 지휘했다. 일본의 침략을 막고 왜적을 쫓아내는데 일생을 보냈 다. 의암제( 毅 菴 祭 ) 때는 의암묘소에서 제사를 지낸다. 원래 의 암제는 의암 선생 동상 앞에서 지내다가 묘소로 옮겨 행하고 있다. 이때가 2005년 4월 12일 제21회 의암제부터이다. - 의정공묘: 능골에 있는 흥성부원군 류몽표( 柳 夢 彪 )의 묘이 다. - 작은 폭포: 미나리폭포. - 장터: 시장거리. 의암 유적지 앞에 있는 곳이다. 예전에 이곳에 가정장이 열렸다. 갖가지 생필품을 갖고 와서 팔았다. 우시장도 한동안 열렸다. - 재궁동: 쟁골 - 재궁동 산신제터: 재궁동산제당이라고도 한다. 쟁골에 있는 산신제를 지내는 터이다. 제사를 세 곳에서 지낸다. 세 곳 모두 당집이 있고, 돌로 된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제사는 2년에 한번 씩 정월에 날을 받아서 지낸다. 축문 등을 모두 갖춰서 금기까 지 하고 엄격하게 지낸다. 산제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뒤의 구술을 보기 바란다. 9) 제보자: 류연창(남, 72) 가정2리 미염이. 2011.7.18. 64
다음은 2011년 7월 21일 에 본 산제당의 모습이다. 산제당 건물은 슬레이트로 지어졌고 10) 양쪽은 1.40m정 도의 높이이다. 제일 앞 당에 는 대리석에 재궁동 산제당 ( 齋 宮 洞 山 祭 堂 )이라 적고, 그 뒤에는 큰 신목이 있다. 재궁동산제당 당에는 한지와 실이 걸려있 다. 뒤의 당도 똑같이 당집 이 지어졌고 한지와 실이 걸려 있다. 토지신위( 土 地 神 位 )이라고 대리석에 적었다. 그 다음에 거기서 맨 꼭대 기에 있는 당은 거기로부터 약 40~50m 좌측으로 있는 데, 역시 여기에도 제당을 지어놓았다. 제당은 슬레이 재궁동 토지신당 트가 아니라 함석이다. 양쪽 에는 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역시 안에는 산신지위( 山 神 之 位 ) 라고 대리석에 적어 놓았다. 역시 한지와 실이 걸려있다. 여기는 다 참나무 군락지로 되어 있는데 나무들이 아주 크 다. 뒤에는 단풍나무, 느티나무 군락지를 이뤘다. 11) 이 재궁동산제사는 1986년 강원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 을 한 적이 있다. 고증과 지도는 류연오 씨가 하였다. 류연오 씨는 축문을 쓰고, 택일과 제관까지 선정하는 아주 중요한 역 10) 2004년 당시만 해도 나뭇가지로 고정을 하고, 짚으로 3면을 이어서 가려 놓 았다. 그때도 대리석으로 된 위패가 있었다. 춘천시 가정리 조사보고서, 문 화 역사 마을 만들기 춘천시 추진 협의회, 2004. 150-1쪽 사진 참조. 11) 2011.7.21. 필자와 조사일행이 이곳을 답사 후에 기록한 것이다. 65 할을 맡고 있다. 항와집 에 그 축문이 전하고 있다. 1986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 대회에 출품했던 자료 중에 다음과 같은 목적이 기술되 어 있다. 재궁동 산제 거북놀이는 재궁동 산신신당 마을의 우환과 질병 퇴치, 맹수들의 화난을 물리치고 가축의 번식과 풍년을 기원 하는 제례이다. 매년 정월 초 마을총회에서 당주와 제 관을 선출하여 제례를 올린 다. 제례가 끝나면 산제당 앞 개울의 다리를 보수하고 분 재궁동거북놀이 장면 장한 거북이와 농악대가 함 께 어우러져 마을 어귀에서 우물 굿을 한 뒤, 제주의 집부터 시작하여 가가호호를 돌며 당굿과 고사반을 올린다. 한해 운이 대통하고 거북이처럼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놀이이 다. 12) - 재마당고개: 깃대봉 쪽으로 넘어 방하리로 가는 고개를 말 한다. 옛날 6.25한국전쟁 때 의암 류인석 장군의 아들인 류해 동 씨가 이곳에 방공호를 파놓아서 동네 사람들이 피란을 하기 도 했다. 류해동 씨는 중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중국어를 할 줄 알았 12) 강원의 전통 민속예술, 강원도, 1994. 74쪽. 66
다. 그런데 6.25 한국 전쟁 때 중공군이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이 다. 그때 비행기가 마 을 상공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이 마 을에 사는 양조장댁 할아버지가 비행기가 지나가면 전쟁이 끝난 줄 알고 태극기를 들 재마당고개 고 흔들면서 밖에 나 가서 환영한다고 막 뛰어 다녔다. 그 광경을 중공군이 보고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류해동 씨가 쫓아가서 중국어로 뭐라 말을 하니까, 중공군이 죽이지 않았다. 이렇게 재마당에 살던 류해동 씨가 사람을 많이 살렸다. 어떻게 했는지, 중공군이 오히려 류해동 씨에게 쌀을 갖다 주었다. 중공군은 민간인에게 해코지는 안 했다고 한다. 중공군 의 음식은 돼지기름으로 볶아놓아서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 다. 그 음식을 잿불에 올려서 볶으면 기름이 빠지는데, 그러면 고소한 게 맛이 괜찮았다. 중공군은 밤이면 피리불면 서 행군을 하고 간다. 낮 에는 폭격 때문에 갈 수 없으니까 숨어 있다가 밤 이면 행군을 했다. 중공군 이 이곳 재마당에 잠시 머 물러 갔었다. - 쟁골: 재궁동( 齋 宮 洞 ) 이라고도 일컫는다. 가정 쟁골 전경 3리를 일컫는다. 흥성부원군( 興 城 府 院 君 ) 유몽표( 柳 夢 彪 )의 재 궁( 齋 宮 )이 있었다. 재궁동을 줄여서 우리말로 쟁골이라 한다. - 절골: 사동. - 절골저수지: 절골에 있는 저수지 축조는 1979년에 했다. 마을의 저수지를 축조하고 수리시설을 만들면서 논농사를 짓는 데 매우 편해졌다. 그 전에는 강물을 높은 곳까지 퍼 올려 논 농사를 짓든가, 천수답으로 비가 와야 모내기를 하였다. 샘보의 물로 광복판들에서 논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아주 적은 면적이 었다. 절골저수지 축조이후 논농사를 많이 하게 되었다. 저수지 를 축조하고 1983년 봄에 가정리 평야 일대의 경지 정리를 했 다. 절골저수지는 마을에서 관리를 하는데, 관리하는 사람은 2011년 현재 1년 에 약 2백만 원 정도의 관 리비를 받는다. 저수지 용 량이 상당히 크고, 물이 많으면 저절로 넘치게 만 들어서 저수지가 무너질 우려는 없다. 저수지 방둑 절골저수지 은 넓이가 약 20여m정도 되어 차량이 들어가서 돌려나올 수 있다. 평시에는 저수지로 통하는 길을 막아 두다가 농사를 짓고자 농기계가 들어갈 때는 입구를 연다. 저수지로 난 물결은 산색을 드리워서 그 경치가 일품이다. 계절별로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여름이면 녹색으로 청초한 풍 경을 드러내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붉은 산이 호수 위에 드리 워서 물빛과 함께 더욱 절경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67 68
저수지 안에는 물 고기가 많이 살고 있 어서 간혹 그물로 잡 아먹는 사람들이 있 다. - 절터: 사동. 옛날 절이 있었던 터 를 말한다. - 정문안: 저수지 안에 바위 많은 곳이 저수지와 경지정리 준공기 다. - 제사공장터: 옛날에 제사공장( 製 絲 工 場 )이 있던 곳이다. 지 금 강원학생교육원 앞 사이이다. 일제강점기( 日 帝 强 占 期 ) 때 있 었다. 제사공장은 누에고치와 목화 등을 이용하여 실을 뽑아내 던 공장이다. 이곳에 다니는 사람을 제사공( 製 絲 工 )이라 했는 데, 주로 여직원이 많았다. - 제청말: 제청촌. 왕월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광해 군 때 취흘( 醉 吃 ) 류숙( 柳 潚 ), 문상옹( 汶 上 翁 ) 류혁( 柳 奕 ), 태우 ( 泰 宇 ) 류활( 柳 活 ) 3형제가 그 부모의 제청( 祭 廳 )을 모시고 6년 간 시묘( 侍 墓 )를 살았다고 해서 제청말이라 한다. 현재 수락재 ( 壽 樂 齋 )가 있는 곳이다. 이곳 제청에 류숙의 화본( 畵 本 )이 있 었는데, 현재는 늠연실을 짓고 옮겼으며, 화본의 원본은 국립고 궁박물관에 있고, 늠연실에 있는 것은 복사본이다. - 제청보( 祭 廳 洑 ): 제청말 앞에 있는 보( 洑 )이다. - 제청촌( 祭 廳 村 ): 제청말. - 주막거리: 주막( 酒 幕 )거리는 의암 기념관 앞에 있었다. 옛 날에는 여기 광복판들이 가장 번화가여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골목이었다. 주막이 몇 개 있다고 해서 주막거리로 불렀다. 주 막에는 가끔 색시도 있었다. 색시가 오면 손님들이 서로 차지 하려고 하였다. 이곳에 양조장( 釀 造 場 )도 있고 장거리도 있었 다. 6.25한국전쟁이 나고 나서 차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막걸리 공장이 소주( 燒 酒 )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소주공장이 있던 때만 해도 배고픈 시절이라 많이 힘들었는 데,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뭘 모르고 소주를 먹고 취해서 죽을 뻔 했던 적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칡뿌리 캐서 지게 에 짊어지고 오다가 막걸리 한잔 얻어먹으려고 들리던 시절이 다. 주막은 없어진지 약 40년 이상 되었다. 마을에 전기 들어 오기 전까지 있었다. 우시장( 牛 市 場 )도 난리(한국전쟁) 이후까 지 있었다. 그 전에는 가게가 아주 여러 개 있었다. 상회에서는 별별 물건을 다 팔았다. 가정리에는 주막거리 뿐 아니라 가정나루에도 주막이 있었 다. 주막은 술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음식도 팔았고, 잠을 잘 수 있는 여관의 역할까지 하던 곳이다. 홍천에서 서울까지 가던 떼꾼들이 가정 주막에 머물다가 강을 따라 내려갔다. - 주일당( 主 一 堂 ): 가정 리에 있는 사당이다. 이항 로( 李 恒 老 )와 김평묵( 金 平 黙 )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한 성재 ( 省 齋 ) 류중교( 柳 重 敎, 1821-1893)를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1979년 성재의 문생( 門 生 ) 주일당 인 의암( 毅 菴 ) 류인석( 柳 麟 錫, 1842-1915), 항와( 恒 萵 ) 류중악( 柳 重 岳, 1843-1909)을 같 이 배향하였다. 2001년부터 백범 김구( 金 九, 1876-1949)까지 봉안을 하였다. 성재 류중교는 1882년 가정리에 가정서사( 柯 亭 書 社 )를 세우고 유생들을 가르쳤다. 류중교가 돌아가시고 1902 69 70
년에 가정서사가 주일당( 主 一 堂 )으로 개칭되고,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류중교의 진상( 眞 像 )을 봉안하였다. 진상은 조기환( 趙 基 煥 ) 화백이 그렸다. 주일당은 여러 차례 중건 되었는데, 현재 건물은 1989년 10월에 신축한 것이다. 경내에는 1989년에 세 운 주일당중건기적비( 主 一 堂 重 建 紀 蹟 碑 )가 있다. - 줄바우: 들어앉은 바위 줄기를 일컬어서 줄바우라 했다. 그 산줄기가 한덕리의 잣방산 줄기로 이어진다. - 중의 물: 절골 절터에 있던 우물을 말한다. 중이 먹던 우물 이다. 바른골, 문안골 가는 그곳이다. - 쥐산: 여우내골에 있는 높은 봉을 일컫는다. 발산리와 경계 를 이루고 있다. - 지방서: 홍천강 가에 있다. 박암리교 아래를 지방서라 일컫 는다. - 질골: 한자로는 도곡( 陶 谷 )이라 한다. 질그릇 도( 陶 ) 자를 쓴 것을 봐서 이곳에서 예전에 질그릇을 만들어 명명된 지명인 것 같다. 상암이 질골의 끝자락에 있다. - 집술: 약바우 북쪽 쟁골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한자로 집 실( 執 室 )이라고도 쓴다. 김경달( 金 敬 達, 1849-1896) 의병의 묘 소가 있다. 묘소가 원래는 가정리 송이재에 있었으나, 1984년 에 가정3리 집실 마을로 이장하고 후손들이 묘비를 세웠다. 김 경달은 효행이 뛰어나고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부인이 명 주를 짠 것을 장에 가서 팔아올 때였다. 우연히 형님의 빚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돈으로 형의 빚을 갚았는데, 그 부인도 아 주 기뻐했다고 한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의 군중에 들 어가 용감히 싸우다가 1896년 3월 2일 가평에서 전사하였다. - 집실: 집술. - 즘터: 정터라고도 부른다. 노인정 건너편이다. - 차돌배기: 차돌이 많이 박혀 있는 들이다. - 청각골(걸): 쟁골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청밧고개: 가정리에 있는 고개이다. - 청앗고개: 가정리에 있는 고개이다. - 취흘공묘( 醉 吃 公 墓 ): 능골에 있는 취흘( 醉 吃 ) 류숙( 柳 潚, 1564-1636)의 묘이다. 수락산 중턱에 있다. 늠연실 참고. - 큰성골: 굴아우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텃골: 대곡. - 투냥꼴: 미래미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평촌: 버덩에 있는 마을이다. 평촌 부근에 있는 들을 평촌 들이라 한다. - 평촌들: 평촌에 있는 들[ 野 ]을 말한다. - 학교터: 예전에 가정초등학교가 있던 터를 말한다. 가정 초등학교 참고. - 한화제약별장: 한화제약 사장 이 이용하는 별장이 쟁골 안쪽에 위치해 있다. 그곳 개울에서 밤에 어항을 놓으면 메기가 몇 마리 들 어가 있을 정도로 고기도 많다. - 할미바위: 약바우 옆에 있는 바위이다. 높이가 6~7m정도 하는 바위로 허리가 꼬부라진 할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바위라 부른다. 원래는 더 높게 바위 꼭대기가 나 와 있었는데 6.25한국전쟁 때 폭격 할미바위 에 맞아 위에 있던 것이 깨졌다. 그래도 그 원래의 형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위 중간에 약 간 홈이 파진 부위에 누가 와서 초를 켜놓고 기도를 했는지, 검게 그을려 있다. 약바위에서 옆으로 약 10여m부근에 위치해 있는데, 마을에 서 산을 쳐다보면 금방 눈에 들어온다. 71 72
- 홀짝골: 웃바우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홍무벽( 洪 武 壁 ): 글씨바위. 고란터 남서쪽 홍천강가에 있 는 큰 바위이다. 앞면에 기봉강역홍무의관( 箕 封 疆 域 洪 武 衣 冠 )이 라는 8자가 새겨져 있다. - 황골나루: 충의대교 옆에 있던 홍천강의 나루이다. 황골나 루 부근에는 큰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에는 여관도 있었 고, 약방도 있었다. - 효정( 孝 井 ): 약바위 서쪽에 있는 우물을 말한다. 조선 철종 ( 哲 宗 ) 때 류중이( 柳 重 履 )와 그의 아내 이씨( 李 氏 )가 효성이 지 극하여 산새와 물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며 먼 산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부모님께 드렸다. 이 씨 부인의 꿈에 신령이 지 시하기를 살강 밑을 파라고 하였다. 파보니 맛 좋은 물이 솟아 나왔다. 그의 종조( 從 祖 ) 되는 참판 류영하( 柳 榮 河, 1787-1868)가 <효정기( 孝 井 記 )>를 지어 칭찬했다. 지금은 숲 속에 덮여있고, 집이 있었다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춘천향토자료집 에는 이렇게 전한다. <며느리의 정성으로 솟은 우물> 조선조 철종 때 효성이 지극한 유중수( 柳 重 修 ) 13) 의 아내 이 씨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닭소리와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심산유곡에 가서 정화수를 길러다 시부모님께 드렸다. 엄동설 한에도 물고기를 잡아다 봉양하는 효부였다. 하루는 심산유곡에서 길어온 정화수를 시부모님께 드리고 아 침밥을 짓다가 너무 피곤하여 그만 풋잠이 들어버렸다. 비몽사 몽간에 홀연히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 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같이 심산유곡에 가서 물을 길어 13) 다른 문헌에는 모두 유중이( 柳 重 履 )로 나오는데, 춘천향토자료집 에는 중수 ( 重 修 )로 나온다. 다 부모님께 드리는 지극한 효성의 상으로 너에게 물을 준다. 부엌 살강 밑을 파 보아라. 꿈에서 깨어난 이 씨는 신령님이 계시해 준대로 살강 밑을 팠다. 한참을 파내려 가는데 샘물이 솟아오르더니 금세 물이 흥건히 고였다. 신령님, 부덕불효한 저에게 이런 샘물을 주시다니 그저 감 사드릴 따름이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시부모님을 정성껏 모 시고 지아비를 받들고 자녀들을 잘 키워 보은 하겠나이다. 신령님을 향하여 감사의 절을 수없이 하였다. 그 후부터 매일 새벽 심산유곡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어려움 을 면하게 되었고, 살강 밑에서 나오는 물로 부모님을 더욱 열 심히 봉양하게 되었다. 이에 그의 종조( 從 祖 )인 참판 유영하( 柳 榮 河 )가 <효정기( 孝 井 記 )>를 지어 크게 친양하고 기렸다 한다. 효정은 춘천시 남면 가정리 약바위 서쪽에 있는 우물로 지금 은 겨우 흔적만 남아 있다. 14) - 흔들바위: 든바우. 들어앉은 바우. 바위를 흔들면 큰 바 위가 흔들거린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15) 14) 춘천향토자료집,춘천문화원, 1992. 149-150쪽. 15) 지명정리에 도움을 준 분은 류희국, 류희자, 류동규, 류연훈, 류연오, 류연표 씨 등이다. 73 74
제3장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중국 항일유적지를 찾아 류연창(우), 류연훈(좌) 씨(2011) 구술채록 장면. 류희만(남, 72) 류연창(1940년생, 72세)_가정2리 조사일시 2011년 7월 18일 가족관계 부인 -택호가 의암댁 -부인이 제주를 잘 담금 특징 -류인석의 증손자 -광복회 회원 - 개인 신상 의암 류인석 선생의 증손자인 류연창 씨는 가정초등학교를 75 76
졸업 후 춘천 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할아버지 류해동의 서당에서도 공부를 했으나 배우기 싫어서 도망을 많이 다녔다 고 한다. 같은 마을의 이상인 씨도 할아버지 류해동의 서당에 서 함께 공부했다. 중학교 중퇴 후 계속 농사를 지었다. 반면 동생들은 대학을 모두 졸업했다. 군 제대를 하고 1년 뒤인 27세 때 홍천 개야리 출신의 부인 박순재 씨와 혼인했으며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아들 둘은 현재 춘천시청에 근무하고 있다. -증조부 이야기(의암 류인석) 의암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니까 일본 군인들이 의암 선생을 잡으려고 왔을 때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류연창 씨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것으로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서 구술을 그대로 싣는다. 그 전에 왜놈의 앞잡 이가 왜놈들을 데리고 의암을 살해 하려고 의 암이 집에 계신 줄 알고 의암제 때 쓸 제주를 담그는 박순재 온 거야. 근데 저녁때 씨(2011)1 이제 관천이라는 데로 가셨는데. 거기 누가 있었냐하면 의암의 동생 삼형제인데 막내분이 하 자 석 자라고 의암의 친동생분이 거기 계셨고, 우리 할아버지 (류해동)가 계셨고, 심봉길 씨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리고 하나 는 우리 삼형제의 손자 분 그 분이 거기 계셨는데, 남자들 너 이 있었고 여자들은 우리 증조할머니, 할머니 또 증조할머니 수행하는 몸종이 하나 있었 고, 나한테 작은댁 저 그러 니까 작은 증조부의 손녀딸 이 있었고. 그리고 와서 우리 증조부 가 계신 줄 알고 그냥. 예 전엔 초가집 아니에요? 불 을 싸놓고 이제 그러니까 튀어나갈 수밖에. 남자는 제주를 담그는 장면 작은 증조부가 칼에 찔려 즉사를 하시고, 또 심봉길 씨라는 분이 즉사하고 또 나한테 큰 댁 아저씨뻘 되는 사람도 거기서 칼에 찔려서 결국은 금방은 안 돌아갔는데 돌아가셨고, 또 우리 할아버지는 80년대에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 할아 버지를 평소에 모시고 있다가 들었는데, 할아 버지는 옛날에 그전에 상투 풀어헤치고 화장 실에 가서 살았대요. 여자는 안 죽였다니까. 그래 거기서 살았어 요. 제주를 담그는 박순재 씨2 그 집에서 살다가 여기(미래미) 온 지가 한 40년 가까이 돼 간다. 하여간 우리 가정이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의암의 동생분이 거기서 돌아가 셨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배길 수 없어서 의암 할 아버지가 중국으로 건너가신 것이다. 결국은 중국에서 74세로 돌아가셨는데, 그곳이 방취구라는 곳이다. 방취구에서 돌아가셔 77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