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파일럿 프로그램은 어디로 갔을까?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보는 예능 지형도 최근 예능 프로그램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시청자의 반응을 살핀 후 정규 편성을 결정하는 패턴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파일럿 프로그램 트렌드와 생존기는 최근의 예능 판도를 살피는 주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모험적 시도 과 안전한 선택, 지금의 파일럿 프로그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마이 리틀 텔레비전>(출처: MBC 홈페이지) 잘 만든 예능 하나, 열 교양 부럽지 않다? 텔레비전 탄생 이후의 세대에게 가장 친숙한 방송 장르 는 역시 예능 프로그램이다. 수준이 낮다, 프로그램 사이에 차별화가 없다 등등 비판을 받기 일 쑤지만, 예능 없는 일상을 상상해보면 꽤 헛헛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떤 예능은 단순히 일상을 수놓는 것을 넘어선다. 시대의 변화를 이끈다. 1990 년대 후반 <양심 냉장고>(MBC)가 그랬고, 2000년대에는 역시 MBC에서 방영되었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와 <신동엽의 러브하우스>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표적인 장수 예능 프로그 램인 MBC의 <무한도전>은 부모와 자식이 함께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예능의 운명을 가른다, 파일럿 프로그램 이런 프로그램들은 단순히 한 번의 방송으로 휘발되지 않고 대를 물려가며 세대 간의 기억을 섞 어주는 공공재 역할을 한다. 예능 프로듀서라면, 방송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프로그램으 로 시청자와 만나고 싶을 터다. 물론 누구보다 간절한 건 방송사 자체일 것이다. 고정적인 광고 수 익과 스테이션 이미지를 위해서다. 이런 바람이 현실로 드러나는 게 바로 파일럿 프로그램 이다. 방송 분야에서 말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은, 정규 방송으로 편성하기 전에 시청자의 반응을 알기 위해 시험적으로 제작해 방송하는 프로그램 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유는 간단 하다. 아무리 공을 들여 기획했다 해도 그 프로그램의 운명은 방송 직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막대 한 제작비를 들이기 전에 사전 탐색을 해보는 건 방송사로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설 연휴나 추석 연휴 등 명절이 되면 각 방송사는 경쟁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쏟아낸다. 주로 명절을 노리는 이유는 이렇다. 어차피 연휴 동안 방송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명절 특집 이 2016. 04+05 VOL. 05 38
<마이 리틀 텔레비전>(출처: MBC 홈페이지) 란 타이틀로 방송할 수 있다. 단발성으로 끝나도 무방하다. 시청률이 저조해도 실패했다는 느낌 을 주지 않는다. 명절 기간 특유의 확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기간이다 보니 프로 그램에 대한 감상과 평가가 다른 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퍼진다. 그러다 보니 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생일이 명절이다. 지난해 MBC 예능에 단비와도 같았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복면가왕>은 2015년 설 연휴에 첫선을 보였다. <능력자들>은 지난 해 추석 연휴에 처음 전파를 탔다가 정규 편성된 경우다. <판타스틱 듀오>(출처: SBS 홈페이지) 새로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찾아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개그 콘서트>(KBS)를 들 수 있다. 실질적으로 예능 파일럿 프로 그램의 원조 격이다. 1999년 7월 첫 방송을 했고, 반응이 좋아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외국인 토크의 신기원을 연 <미녀들의 수다>(KBS)는 2005년 추석 연휴에 첫 방송됐다. 지난 명절에도 어김없이 여러 편의 파일럿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연휴가 지난 후, 어느 방송 사의 파일럿 프로그램이 더 재밌었나 하는 분석 기사가 쏟아질 정도였다. 일단 현재까지 정규 편 성으로 간택된 건 <듀엣 가요제>(MBC)와 <판타스틱 듀오>(SBS) 정도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음 악 예능이다. KBS는 육아 예능을 선택했다. 1월 방송했던 <엄마는 고슴도치>를 자사 케이블 채 널에 정규 편성했다. 프로그램 이름마저도 다소 헷갈리는 <듀엣 가요제>와 <판타스틱 듀오>는 언뜻 봐도 음악 예능이라는 기존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안전한 선택 을 한 셈이다. 조금 다른 점이라 면 일반인이 가수와 한 무대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듀엣 가요제>는 일반인과 가수가 팀을 짠다. 가수가 일반인 파트너를 직접 고른다. 경연에 2016. 04+05 VOL. 05 39
서 1등을 한 팀은 다음 주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 경연을 함께 준비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 다. 일반인 출연자에게서 감동 요소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다. <판타스틱 듀오>도 크게 다르 지 않다. 가수가 팬을 스튜디오로 초대해 함께 노래를 연습하고 무대를 보여준다. 첫 회에는 이선 희, 임창정, 태양, 김범수 등이 출연했다. 서너 개의 정규 프로그램을 낳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지난 설 연휴 각 방송사의 파일럿 프 로그램 출격이 성공적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시도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해에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있었다. 아프리카 방송 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방송을 텔레비전 속으로 끌어들인 경우다. 젊은 세대 사이에 이미 부유하고 있던 문화 트렌드를 지상파 방송사가 적기에 포착해 세련된 방송 언어로 정화해 방송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집밥 백선생>(출처: tvn 홈페이지) 오디션에서 관찰 예능을 지나 쿡방 과 먹방 으로 돌아보면 최근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은 쏠림 현상 이 유독 심하다. 한동안은 각종 오디션이 범람 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꽤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건 사실이다. 인구 5천만 명의 나라에서 한 프 로그램의 예선에 2백만 명이 참가하는 대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이 기록은 2012년에 방영된 <슈퍼스타K 시즌4>(Mnet)가 세웠다. 200만 명이면, 와병 중인 사람이나 각종 고시 준비하는 이 를 빼고 1030 사이에서 노래 좀 부른다는 사람들은 다 한 번씩 줄 서봤다는 얘기다. 슈스케 가 뜨자 각 방송사들은 일제히 똑같이 혹은 조금 다르게 오디션 트렌드에 영합했다. <위대한 탄생>(MBC), <밴드 서바이벌 TOP 밴드>(KBS), <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 >(SBS), <보이스 코리아>(Mnet)가 그 예다. 해가 차면 기울 듯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대는 갔다. 그 뒤를 잠시 메운 건 각종 관찰 예능 이 었다. <인간의 조건>(KBS), <나 혼자 산다>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이상 MBC), <백년 손님 - 자기야>(SBS), <꽃보다 할배>(tvN) 등의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연예인 집 냉장 고가 비었는지, 아침에 뭘 먹는지, 뭘 입고 자는지 전 국민이 알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의 대세 트렌드 는 바로 음식 이다. 현재 예능은 소위 쿡방 과 먹방 의 영향권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요리사이자 외식 사업가인 백종원은 1980년대 땡전뉴스 는 저리 가라 할 정 2016. 04+05 VOL. 05 40
도로 정기적으로 자주 텔레비전에 등장한다. 백종원을 위시한 일단의 셰프들은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해 요리를 하고, 요리를 가르치고, 음식을 평가하고, 심지어 냉장고까지 뒤지고, 음식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다. 기존에 잘하고 있던 프로그램도 먹방으로 변했을 정도다. <정글의 법칙>(SBS)은 야생에서 채취한 먹을거리를 요리해 맛보는 순간이 그날 방송의 하이라이트가 된 지 오래다. 일종의 야생 먹방인 셈이다. 방송한 지 오래돼 자연사 수순으로 가던 <해피투게더>(KBS)는 야간매점 코너와 함께 기사회생했다. <헌집줄게 새집다오>(출처: JTBC 홈페이지) 먹방 이후엔 집방? 문제는 먹방 이후 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각 방송사들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 는 듯하다.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그 고민이 엿보인다. 먹방 트렌드의 강고함은 무엇 때문일까. 일 본 방송 트렌드를 살펴보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보통 일본이 한국보다 20년가량 앞서 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먹방이 인기를 끈 게 바로 2000년대 초부터다. 일본 사회 전체가 장기간의 불황에 지칠 대로 지쳤을 때였다. 프리타 족 (정 규 직장이 아닌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과 파견직(비정규직)이 일본 젊은 이들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시절이기도 하다. 큰돈과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주택 구입, 그리고 결혼과 출산보다는, 음식점 탐방과 요리 처럼 상대적으로 소소하지만 필수적인 아이템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된 셈이다. 밥 먹는 장면 이 담긴 DVD가 출시되고, 맛있는 음식점에 관해 잘 정리된 정보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먹방 문화도 일본과 탄생 배경이 다르지 않은 듯하다. 젊은 층은 젊은 층대로 중 장년 과 노년층은 그들대로, 각기 다른 이유로 세대적 우울증을 앓고 있다. 먹방 트렌드의 뿌리가 생각 보다 깊다는 말이다. 2016. 04+05 VOL. 05 41
여기에 먹방과 쿡방의 중흥을 이끈 백종원이라는 인물의 특색도 한몫한다. 그는 자신의 분야 에서 일가를 이뤘지만(심지어 탤런트와 결혼했다), 드물게도 보는 이에게 열등감이나 강박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주로 들고 나오는 요리가 집에서도 쉽게 도전해볼 만한 요리라 는 점, 그리고 경상도도 전라도도 아닌,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한다는 점이 요인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계는 음식 방송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예능 프로그램의 살아 있는 역사 라고 할 수 있는 방송인 이경규는 어느 인터뷰에서 쿡방은 끝나야 한다 고 일침을 놓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케이블 채널을 중심으로 셀프 인테리어 프로그램들이 등장하면서 쿡방을 잇는 집방 의 트렌드가 읽히기도 한다. 미국이나 영국 등 소위 선진국에서는 집에 관한 프로그램 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인당 소득이 오르면 음식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경제 수준이 더 올라 가면 인테리어와 가드닝 등 집에 관한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는 분석도 나왔다. 과연 이 통찰이 우리나라에도 통할까? 아직까지는 기대만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는 못 한 것 같다. 결국, 답을 알려면 끊임없이 사회 변화를 읽는 수밖에 없다. 중국판 <나는 가수다>(출처: 중국판 <나는 가수다> 공식 홈페이지) 창의적인 프로그램, 포맷 개발에서 시작된다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포맷 개발은 바로 사회 트렌드를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연 한국 방송사는, 특히 지상파 방송사는 이 역할에 충실할까. 어떤 포맷이 뜬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 가서 소진될 때까지 길어 올리는 화전민식 영업 을 해온 건 아닐까. 지난 2014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방송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포맷 제작 환경에 대한 조 사를 진행한 바에 따르면, 1 조사에 응한 다수의 전문가들은 포맷에 대한 방송사 내부의 인식 이 1 한국콘텐츠진흥원(2014). <방송 포맷 수출 활성화 및 현지화 연구> 2016. 04+05 VOL. 05 42
시급히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송사 내부 인사들이 방송 포맷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결과는 참신한 포맷의 부재다. 외국에는 포맷을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회사가 있다. 네덜 란드의 엔데몰(Endemol)이나 영국의 프리맨틀 미디어(Fremantle Media) 같은 회사다. 국내의 경우 이러한 포맷 전문 회사는 고사하고, 중소 독립 프로덕션의 색다른 아이디어가 실제 방송까지 이어지는 데만도 걸림돌이 많다고 업계 인사들은 지적한다. 방송으로 제작되더라 도, 저작권 보장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우리나라는 방송 환경의 하드웨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각종 뉴미디어의 견본시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누가 봐도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 포맷 몇 가지 판 매한 걸로 만족할 형편이 아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부연하자면, 중국은 한국 방송의 장점과 미덕 을 금방 흡수해 다른 수준으로 치고 올라갈 것이다. 벌써부터 그 조짐이 보인다. 중국판 <나는 가 수다>는 모체인 한국판 <나는 가수다>(MBC)보다 훨씬 화려하고 다양한 볼거리를 보여준다. 편성에 있어 여전히 절대적 권리를 가진 방송사가 제작사의 창의성을 저해하면 한국의 엔데 몰은 나오기 힘들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 경제 와도 역행한다. 어제의 성공이 여기선 보장되지 않는다. 트렌드에서 벗어나선 안 되고, 20~30대에게 소구 해야 하며, 누가 봐도 엣지 있고, 이슈 또한 계속 양산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해야 한다. 트렌드와 코드를 읽어라 그렇다면 방송사는 자체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를 공들여 하고 있을까? 최근 몇 년 간 급부상한 방송사가 있다. 바로 tvn이다. tvn을 들여다보면 기존의 지상파 방송사와 대비되는 부분이 보인다. 2011년, 당시 이덕재 tvn 방송기획국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제의 성공이 여기선 보장되지 않는다. 트렌드에서 벗어나선 안 되고, 20~30대에게 소구 해야 하며, 누가 봐도 엣지 있고, 이슈 또한 계속 양산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해야 한다. 내 년엔 자체 제작 100%를 실현할 계획인데, 일단 파일럿 프로그램을 많이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는 R&D(연구 개발)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머릿속에서 상상하기보단 일단 비용을 투하해 시청자들에게 어떤지 묻고 반응을 볼 계획이다. 휘발성이지만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일단 반응 이 나오면 그에 따라 정규 편성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tvn의 약진은 5~6년 전부터 해온 방송 포맷 R&D의 결과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주 종영한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시청률 38.8%를 기록했다. 2016년의 38.8% 는 20년 전 <모래시계> 수준의 시청률(64.5%)이라고 보면 된다. HUT(총 시청 가구 수)가 하강 곡선을 그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보통 통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총 시청자 수는 훨씬 많을 수 있다. 그만큼 태후 가 오랜만의 메가톤급 히트작이라는 얘기 다. 이 정도로 성공할 줄은 KBS 관계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허무맹랑한 연애담이라 치부할 게 아니다. 여기에 어떤 코드가 숨어 있는지 방송계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한다. 서점에서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청소년들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끊 임없이 읽어내야 한다. 그것이 지난 명절을 끝으로 사라져간 그 많았던 파일럿 프로그램에 들어 간 수고와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2016. 04+05 VOL. 05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