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어 38호 차례 인사말 하느님 사용 설명서 의 길잡이 오 헬레나 수녀 _ 2 말씀과 삶 성경 필사를 마치고 _4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최종문 토마스 주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허전함을 채우려 합니다 말씀 안에서 항상 깨어 있고 기도하며 살아가렵니다 조윤정 수산나 함미경 로사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걸음을 걸으며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엄혜진 헬레나 박 란 릿다 주님은 정녕 살아 계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사랑 체험 _17 나의 관심은 오직 너뿐이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민선 마리마들렌 최효숙 소화데레사 정순자 제네로사 나를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 생활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매일 가족과 함께 바치는 5분 기도 자신을 열고 비우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서보원 스테파노 박현미 아녜스 박동진 바오로 최윤경 제네시아 김경희 소화데레사 성지순례기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성지순례 2 김 가브리엘라 수녀 _ 30 사진 갤러리 연수회 행사 모임_ 70 논단 그리스도의 Kenosis와 노자의 虛 를 통해 본 현대의 자기 비움의 이해 이 루아 수녀_ 76 삶을 향하여 _121 약간의 불편만 감수한다면 김은영 로사 하느님의 창조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한애경 데레사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김남철 베드로 내가 가진 사랑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삶 자비의 눈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회개로 초대받은 내 삶의 자리 나 아닌 다른 분이 내 안에 계시기에 독후감 본질을 사는 인간 을 읽고_136 문승희 수산나 이연숙 로사 이미애 데레사 최원우 요세피나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간을 잠시 도구로 쓰실 뿐입니다 김미진 소피아 나눔터 _141 카페글 하나 되어 나눔방 에서_147 책소개 _154 황윤구 스테파노
하느님 사용 설명서 의 길잡이 오 헬레나 수녀 안녕하십니까? 잦은 폭우와 폭염이 유난했던 지난여름에 교육원 책임자로 새로 소임을 맡게 된 오 헬레나 수녀입니다.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모든 학생들께 큰절 올리는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유수( 流 水 )와도 같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11년 만에 교육원 소임으로 다시 오니 잠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사이버 대학처럼 이러닝(e-learning) 으로 성경 공부를 하는 과정이 신설되고, 새로 나는 성경 공부 는 어르신을 위한 성경 공부에 한층 열기를 더하며, 최근에는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를 발간하고, 이를 위 한 봉사자 교육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변화들과 더불어 하느님 말씀 을 공부하고 배우려는 통신성서 학생들의 갈망과 열정이 여전히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감동과 고무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은, 교리문답 책에도 나와 있 듯이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는 사람이 창조된 본연의 목적과도 같은 것이라 고 봅니다. 바로 이 궁극적 목적인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을 알아야겠지요.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고, 또한 이를 통해 하느 님을 보다 더 진실되이 알고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이 이 땅에 온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참행복의 길이지요. 얼마 전에 2011년 오늘의 작가상 을 수상한 철수 사용 설명서 라는 책을 읽었 습니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대표 청년인 철수 의 취업과 연애 실패담을 그리고 있 는데,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을 비정상적으로 만들어가는 이 시대에 일침을 가하는 2
세태소설이자 성장소설이지요. 이 철수 사용 설명서 를 작성해 가는 주인공 철수 는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진실되이, 더 많이 알려주고 싶은 바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즉 더 많이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지요. 하느님도 마찬가지 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당신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 어, 복음사가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사용 설명서 를 만들어 두었 지만 사람들이 도대체 읽으려 하지 않음에 안타까워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 통신 성서교육원의 소명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더 쉬운 방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하느님 사용 설명서 의 길잡이 역할을 계속 충실히 해내 는 일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좀 더 올바로 알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 해서도 더 많은 이해와 사랑을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찾는 지름길을 발견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원의가 곧 지혜를 찾 는 것이며, 이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며, 가르침을 받으 려고 염원함은 지혜,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지혜 6,17 18ㄱ 참조)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육원 학생 모두가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이웃들에 게 하느님 사용 설명서의 길잡이 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삶의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느님 말씀으로 힘과 위로를 얻으며, 날이 갈수록 자신은 물 론 하느님과 이웃을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가슴에 품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삶의 한복판에 서 지혜를 찾는 곳, 곧 바로 성경-하느님 말씀 안에서 기쁘고 복된 나날이 되시 기를 빕니다. 이 글에 덧붙여, 하나 되어 회지 38호 원고를 모아서 교정 직전의 작업까지 해 놓으시고, 지금은 지혜이신 그분 곁에서 미소 짓고 계실 박 디모테아 수녀님께 추 모와 감사를 드리며 수녀님의 영전에 이 회지를 바칩니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혜 6,12) 3
말씀과 삶 성경 필사를 마치고 [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인 탈출기 12장에서 20장까지를 필사하시고, 나의 해방 체험(이집트 탈출 체험) 또는 광야 체험 을 적어보십시오. ] 식구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습 니다. 부활성야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집사람과 딸아이 그리고 조카 아이는 먼저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갔 광야 체험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고, 저는 조금 늦게 제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가 밤 11시 30분쯤이 라 기억됩니다. 최종문 (토마스) 4학년 현관을 들어서는데 이상하게도 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왜 문도 닫지 않고 들 2006년 그해는 저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해입니다. 기쁨과 고통이 그리고 부활의 은총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드리워졌던 하느님 체험의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봄에 저는 크나큰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해 7월에 중남부 남성 제 10차 꾸르실료 주말이 달라스에서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봉사자로 참가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3월부터 봉사 자 학교를 구성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있 었습니다. 준비하는 기간 내내 참으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을 위해 그것도 평생 동지로 함께할 꾸르실 료 형제를 얻는다는 기쁨에 하느님께 감 사하고 또 감사드리며 정성껏 준비해 나 갔습니다. 그러나 그해 부활절날 저희 어갔나 생각하며 막 거실로 들어서는데 웬 난데없는 흑인 서너 명이 저의 팔과 머리를 붙잡고 마룻바닥에 닿도록 누르 는 것이었습니다. 밤손님이 기다리고 있 었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집사람 과 아이들이 떠올랐고 걱정했지만, 생각 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나를 이층 아이 들 방으로 끌고 올라갔습니다. 그 방에 들어가니 집사람과 아이들이 앉아 있었 습니다. 저는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어떻 게 할 수가 없었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이 무사한 걸 보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방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그저 하느님께 기도만 드렸습니다. 하느 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 어 주세요. 저희를 돌보아 주시고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4
다섯 시간을 넘게 그렇게 기도만 드렸 습니다. 새벽 5시쯤 되니 아래층이 조용 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 게 제 손에 묶인 끈을 풀어 달라고 하고 는 아래층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가 보았 습니다. 아래층은 그야말로 폭풍이 휩 쓸고 지나간 그 상태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이 쓰러져 있고, 엎어져 있거나 깨져 있고, 뒤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약간의 돈과 가 전제품 등을 잃어버렸지만 저의 기도를 각하며 새삼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래, 살아 계신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고통들 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제 인생에 있어 서 앞으로도 수많은 광야의 여정이 있 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고통과 외로움에 허덕이기보다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밤낮없이 당신의 백성을 인 도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걸 맡기리라 다짐해 봅니다. 들어주시어 저희 가족에게는 손가락 하 나 다치지 않게 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만 드렸습니다. 정말로 우리 가족은 엄청난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 부활절 아 그해 7월에 있었던 중남부 남성 제10 차 꾸르실료 주말은 더할 수 없는 은총 의 시간이었습니다. 침에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습니다. 삽시 간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우 리는 서로를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하느 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부 [ 호세아 예언서와 아모스 예언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 여 필사하시고, 마음에 와 닿았던 성경구절에 대한 묵 상 또는 느낀 점을 자유롭게 써보십시오. ] 활절 아침해는 그렇게 솟아 오르고 있 었습니다. 성가대원인 저의 아내는 감사미사를 드려야 된다며 서둘러서 성당으로 갔고, 저와 아이들은 남아서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리를 하면서 저의 지 나온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순 간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가 있었을텐 데 지금까지 이렇게 잘 지내왔구나 생 아모스 예언서 주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허전함을 채우려 합니다 조윤정(수산나) 5학년 아모스서 1장과 2장에 걸쳐 아모스는 죄 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마스쿠 5
스 가자 티로 암몬 자손 모압 유다 이 스라엘들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하느님의 단죄를 선포한다. 나는 죄에 대해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 글을 통해 내 죄를 낱낱이 찾아 고백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았다. 주님께서 나에게 너의 세 가지 죄, 네 가지 죄 때문에 너를 단 죄하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바로 내 죄를 알아채고 죄를 고백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죄에 얼마나 민감한가? 작년 두 바이에서 살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수도 회 소속의 이탈리아 신부님께서 하신 말 씀이 생각난다. 요즘 신자들이 고해성사 를 보러 오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며, 그 럼 과연 신자들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거냐고 반문하셨다. 나 자신도 무척 찔 렸다. 속( 俗 ) 된 삶에 너무 깊이 빠져 죄 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주님과도 멀 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생각해야 겠다. 곡식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 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라는 구절 은 지금 내 복잡한 머릿속을 여실히 드 러내는 것 같았다. 나 라는 수레는 비 우면 비울수록 끌고 가기 쉬운 것을, 내 가 얼마나 많은 것을 싣고 있는가? 내 몸은 과식 과 게으름 으로 살쪄가고 있 으며, 나 자신을 위한 씀씀이가 커지면 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마음은 줄어 들고 있다. 자식에 대한 비뚤어진 욕심 과 삶의 허영 때문에 내가 얼마나 짓눌 리고 있는가를 반성해 본다. 마음이 무 거운 것은 곡식단이 가득 차 짓눌리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마음을 비우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평화 안에 머물고 싶 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아모스서 4장에서는 그런데도 너희 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라는 반복 된 구절이 마음에 깊게 와 닿았다. 사 람이 교활하고 영리한 것처럼 살고 있지 만 내가 어떤 고통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의지하고 기도할 데 는 주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머리 로 는 생각하면서, 큰 시련이 오면 내가 얼 마나 나약해지는지 반성하게 된다. 먹 을 것이 없어 굶주리더라도, 갈증에 목 이 타들어가도, 내 결실들을 누군가에 게 모두 빼앗겨 버리더라도, 내 모든 것 이 모조리 뒤엎어져 버릴지라도 오로지 주님을 향해 있는가?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돌아가지 못하는 나 를 질책하신다. 주님 앞에 다가선 것 같 6
지만 잠시 방심하면 저 멀리 가 있다. 산 을 빚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분께서는 당신의 뜻을 나에게 알려주신다. 주님의 뜻을 알고 살아야 진정 주님께 돌아갈 수 있으리라. 주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식과 형식적인 내 행동 을 즐겨받지 않으심을 알 수 있다. 너 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친 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 치는 너희의 그 친교제물도 거들떠 보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은 내 삶 전체에서 정성과 본질 이 없는 외적이고 가식적 인 것 에 대한 질책이시다. 내 삶이 공정 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고 싶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 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바쁘게 살고, 친 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하고 맥주 한잔 마시고 즐겁게 헤어졌을 때 갖는 허전 함 같은 기분이 무엇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남들 앞에서 과시하거나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며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할까 상상하면서 스스로에게 한심한 느 낌을 가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기 분들은 내면의 풍족함이 부족하기 때문 인 것 같다. 양식이 있고, 겉으로 치장 할 예쁜 옷들이 여러 벌 있더라도 목마 르고 굶주릴 수밖에 없는 그 이유인 것 같다. 내면에서 느끼는 충만함이 없으 면서, 그 허전함을 물질적인 것으로 채 우려 하니 항상 굶주리는 것 같다. 진정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 안의 허전함을 채워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주님께서 내 운명을 되돌리시는 것이 아닐까? 아모스서를 필사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과 함께 두서없이 묵상해 보았다. 오 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현재 깨달은 것은 삶 속에 항상 주님과 함께해야 한 다는 것이다. 깊이 빠졌다가 한없이 멀어 지는 내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주님 께 온전히 엎드렸다가 주님보다는 현실 에 깊이 빠져 있는 이중적인 삶이다. 이 번 학기의 성경 공부를 통해 물이 스며 드는 것처럼 주님의 공정과 정의 안에서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7
아모스 예언서 말씀 안에서 항상 깨어 있 고 기도하며 살아가렵니다 함미경(로사) 4학년 아모스는 유다 임금 우찌야 시대 그리 고 북이스라엘 예로보암 시대에 이스라 엘에 관한 환시를 받고 하느님의 신탁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아모스 예언서를 읽으면서 현재 바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같이 가슴에 와 닿음을 느꼈습니다. 당시 상황은 활발 한 교역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지만 빈부의 불균형과 계층간의 갈등, 약자 착취, 부유하고 강한 자의 편을 드는 법 정, 종교적으로 전례만 장엄하게 했지 그 또한 겉치레에 불과했고, 하느님께서 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들은 이방인 들보다 더 악한 죄를 범하고, 사치를 일 삼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누 르고 점점 더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 니라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는 모든 민족 에 대해 벌을 내리셨는데 아모스 예언 자는 주님의 징벌은 재앙이 아니라 그 분께 돌아오라는 은혜의 초대이며, 올바 른 회개는 겉치레 예배가 아니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정의를 실천하 는 것으로, 정의와 공정이 땅바닥에 떨 어졌으니(5,7) 공정이 물처럼 흐르게 하 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5,24) 고 외쳤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한쪽에서는 물질 이 넘쳐나서 쓰레기 처리가 문제이고 한 쪽에서는 굶주림, 질병, 전쟁, 테러, 여 러 재해, 강대국의 이익 때문에 고통 당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진 사람들 은 더 가지려고 하고, 권력을 행사하여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불의를 저지르 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시대로 사치가 만 연하여 돈이면 다 되는 듯 공정과 정의 가 땅에 떨어져 가고 있고, 우리 아이들 도 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대화가 되지 않고 무엇이 지혜로운 삶인가를 이 해시키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른들까지도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외모를 정상적인데도 자꾸 바꾸고,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거금을 주고 소품 들을 사면서 그런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도 점점 흥미 위주로 자극적 인 것을 부각시켜 유혹에 약한 사람들 8
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하고, 바르고, 가치 있는, 그 래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일깨우는 일 이 쉽지 않아 가슴 아픕니다. 더 늦기 전에 잘못된 점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 느님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며칠 전 딸아이가 상상도 못한 가격 의 명품 가방을 사겠다고 하는데, 화부 터 내는 바람에 대화가 쉽지 않았고, 서 로의 가치관이 다른 데서 오는 차이 때 문에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 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문제를 해 결하려고 교만을 내세워 저의 생각, 저 의 판단만을 강요하고 제 방식대로만 이 해시키려 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 금은 기도 중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 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이 렇듯 딸과 이야기해 보니 대부분의 젊은 친구들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는 것 을 알았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렇게 생각하고, 이것이 또한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됩니다. 아 모스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의 죄 를 보시고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예언 자들을 보내셔서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말씀 을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벌을 내리 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도 지금 하 느님께서 끊임없이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시는데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고 더구 나 점점 더 많은 우상숭배에 빠지고 있 음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만 그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 막을 일으키리라. 옛 모습을 되찾아 주 리라. (9,11)는 말씀에서 희망을 느꼈습니 다. 저의 걱정은 부질없는 일이고 교만 이었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선으로써 악을 이긴다 고 했습니다. 악을 행하지 말고 미워하 며, 선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라고 하셨으며, 선악을 항상 잘 구별해야 하 는데 이 선악의 구별은 오직 성경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정의롭게 살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매순간 회개하며 생활하 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경 고를 두려움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는 말씀 을 잘 새겨야 하겠습니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소공동체 봉사 자 교육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 9
다. 봉사자는 파견된 사도라는 말씀을 듣고, 부르심을 받은 봉사자들은 협조자 가 아니라 주체자로 적극적으로 이웃에 게 권하고, 실천하고, 모범이 되어야 한 다는 말씀을 듣고 부끄러웠습니다. 마지 막에 대리구장님께서 아모스 1장을 인 용하시면서 선을 찾는 삶이 봉사자의 임 무이고, 진정으로 사는 길이 악을 선으 로 이길 수 있는 삶이며, 올바른 길을 걸으면서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하느 님의 길을 걷는 삶을 실천하고 아름다 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 한 이웃형제들을 배려하여 겸손하고 검 소하게 살고, 어떤 이웃에게나, 어떤 경 우에서나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 마음 과 물질적인 부와 세상적인 권세를 부러 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영 광스러운 초대에 올바른 응답을 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고,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살도록 노력하며 기도드립니다. 참된 행복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언약을 미리 맛보게 합니다. 이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다릅니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좁습니다. 청빈 온유 고통은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길목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입니다. 과연 누가 그 길을 걷겠습니까?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 10
말씀과 삶 책 요약 후 묵상 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이리 [ 구약의 성조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여, 그들의 삶과 신앙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를 적어보십시오. ]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걸음을 걸으며 엄혜진(헬레나) 3학년 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탈출 2,11 12) 모세 는 궁궐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동포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잊지 않았고, 그 들의 어려움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나름대로 자신 안에 세워놓은 정의는 이집트인을 죽이게 한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특히 모세라는 인물에 대해서 묵상을 하게 되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히브리 아 기들처럼 죽을 운명에 처하지만 파라오 의 딸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죽음의 고 비를 넘기고, 공주의 양자로 궁궐에서 자라면서 부와 권력, 명예를 아쉬움 없 이 누리지만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아 픔이 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정체성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까? 모세에게는 동족에 대한 연민으로 표 현된 그리움이, 모든 인간 안에 하느님 이라는 원천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리 잡 고 있다.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 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나는 여기서 모세의 나름대로 세워놓 은 정의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된다. 힘 도 있었고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는 높 은 신분의 모세는 자신의 판단과 잣대 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열정에서 해 서는 안 될 일을 한다. 나도 한때 못할 것이 없고 무엇이든 내가 하면 다 될 것 같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면서 내가 곧 법이다. 라는 식의 기고만장한 때가 있었다. 사실 나의 열정에서 뿜어 나오는 열심한 봉사활동은 침체된 청년 회를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보여 좋은 이 미지를 만들어 냈고, 점점 나의 말과 행 동에 권위가 붙었다. 그러나 좋은 이미 지는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욕심이라 는 에너지가 더 필요했다. 그것이 결국 11
소용돌이 속으로 휘감기게 했고 낭떠러 지로 떨어지는 체험을 하게 했다. 더 이 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지 만 그렇다고 도망갈 용기도 없으니 내가 없어져야 할 굴욕적인 순간을 그저 견뎌 내야만 했다. 그러는 나를 주님께서는 가까스로 어둠 속에서 이끌어 내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다. 모세가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으로 가 서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며 살던 모 습은 파라오의 궁에서 살던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 다고 할까? 모세의 그런 모습 속에서 또 나의 모습을 본다. 모세는 얼마나 무력 함을 느꼈을까? 어떤 자책감이 그를 밝 음으로 걸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늘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 님께 소명을 받게 되는 그 순간에도 모 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 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탈출 3,11)라고 대답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나약 한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코린토 후서에서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 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 난다. (2코린 12,9)라고 하셨던 것처럼 모 세를 직접 일으키신다. 그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더욱 당신의 권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내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 기서 나의 모습도 바로 이렇게 걷고 있 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당신의 부 르심에 대한 응답도 내 뜻이 아니라 당 신의 뜻에 맡겼을 때에 비로소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또 그것이 신앙이 되어 주었고, 더욱 나를 내려놓으려는 노력과 훈련을 거듭하면서 주님의 힘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주님을 향한 걸음 이 앞으로 조금씩 더 나아갈수록 그분 의 따뜻한 사랑과 열기를 더욱 느끼게 된다. 주님,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 서 감사드립니다. 12
[ 내가 신앙을 갖기 전과 후, 또는 성경 공부를 하기 전 과 후를 비교해 보았을 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점 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달라진 점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적어보십시오. ] 이라 성경 속의 아버지도 잘못하면 무조 건 벌 주고 지옥 보내는 아버지로 각인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어머니만 원망하 며 살았습니다.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박 란(릿다) 3학년 저는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고 제 의지 와 상관없이 매주일 성당을 의무적으로 다녔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나 직 장생활을 할 때, 또 결혼 후에도 의무 적인 주일미사 참례와 되풀이되는 성경 말씀이 제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방학 중에 맞게 되 는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 주일도 아닌데 왜 성당을 가야 하는지 정말 싫 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일 아침이면 공복제를 지 켜야 한다며 아침밥을 성당을 갔다 와 야 주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성당 가는 것이 더 즐겁지 않았습니다. 늘 배가 고 팠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어릴 때 착하게 살면 천당, 계명을 어기 면 지옥, 이런 교리가 머릿속에 굳어 있 어서 사랑이라던가 용서라는 것이 별 의 미가 없었고, 특히 아버지가 무서운 분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 인데 우리는 천주교에 발목을 잡혀 주말 에 즐겁게 놀 수도 없다는 생각에 차라 리 엄마가 절에 다녔으면 등산이라도 마 음 놓고 갈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자 저 또한 어머니가 제게 했던 것과 똑같 은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받 게 하고 주일학교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제가 가정을 이끌어 가게 되자 저는 하 느님께 간절히 매달리기보다 책임져야 하는 현실 앞에서 하느님께 원망을 더 많이 하며 어떻게든 제 힘으로 모든 것 을 해보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힘든 시기야말로 하 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시며 저를 끌어 주셨는데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본당에서 주말 성령 세미나가 있었는데, 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반 강제로 참 석하여 별 기대도 없이 앉아 있었는데, 바로 그 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저를 바 꾸어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정 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들고 고달픈 13
나를 돌봐주고 위로를 주기보다 의무와 책임만 강조하던 형제들을 미워하고 있 던 마음을 바꿔주셨습니다. 물론 단번 에 모두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을 이해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주셨고, 그 지독한 미움이 엷어진 자리에 하느님 은 당신 사랑을 채워주셨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6년의 시간이 지나 면서 미워하고 사랑하고의 반복이긴 하 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 고 미워질 때, 지옥벌이 무서워서 하게 되는 억지 용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 랑으로 용서받은 죄인인 나이기에 그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하느님 체험기 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십 년간 들어온 성경 말씀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자 로는 읽어서, 또 여러 강좌를 통해 부분 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왜 사람을 이 토록 사랑하실까, 그 시대와 배경 뒤에 는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마 음이 생기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자 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또 성경에 대 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습니다. 그렇다 고 성경 공부반에 매주 나갈 형편이 아 니었기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매일미사 뒷면에 실린 통신성서교육원 광고가 눈에 들어와 이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지만 끝내자면 8년을 해야 되 는데 될까 하는 의문으로 1년을 그냥 보 냈습니다. 그러다 못 끝내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 니다. 나이가 있어 뒷장을 읽으면 앞장 의 내용이 아물아물해져서 답안 작성 도 어설프게 하곤 하지만 제가 생각하 고 있던 상황과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 로 공부한 것들이 연결이 되어 성경의 속뜻을 알게 되니 공부가 그저 즐겁기 만 했습니다. 통신성서 과정은 아직 걸어야 할 길이 창창하지만 세상 어떤 공부보다 참 좋 은 공부를 잘 시작했다고 저 자신을 가 끔 칭찬하곤 합니다. 주변의 시간이 없 다는 형제들에게도 통신성서를 권하곤 합니다. 그리고 지난 시절 그렇게도 원 망스럽던 어머니께 지금은 감사드립니 다. 강제로라도 저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셨기에 제가 그 사랑을 깨닫고 체험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앞으로도 저는 더디더라도 말씀 공부 를 꾸준히 하며 제가 받은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 찬 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또 통신 성서교육원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4
[ 내가 신앙을 갖기 전과 후, 또는 성경 공부를 하기 전 과 후를 비교해 보았을 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점 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달라진 점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적어보십시오. ]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기웃 거리기 시작했다. 성당도 가정도 꽃집도 모두 버려둔 채 이런 은둔생활이 계속 되니 첫째 아이들과 남편의 기운이 빠지 주님은 정녕 살아 계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정순자(제네로사) 3학년 신앙생활 30년, 그 중 20년은 열심히 성당 활동에 매달려 왔으나 성경 공부 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말씀은 먼 시 대의 역사일 뿐 현재 나의 생활과는 거 리가 멀었다. 성당 제대 꽃꽂이를 하면 서 우리 본당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당 에 봉사하게 되니 나름대로 자만심이 가득해지던 때, 수녀님은 전입해 온 젊 은 자매에게 제대 꽃꽂이 봉사를 넘기 라고 했다. 그러자 그 일이 너무 섭섭해 서 교회와 수도자에 대한 불신과 자신 의 신앙에 대한 회의로 몇 년을 냉담하 며 성당에 발을 끊었다. 그 동안 요가를 하며 상처 입은 마음 을 풀어보려 매달리기도 하고 금강경을 밤새 읽으면서 그 가르침이 참으로 우주 처럼 넓다고 감탄하였다. 인생이란 결국 허망한 것에 매달린 존재라는 것을 재 삼 확인하면서 성당에서 맛볼 수 없었던 고, 가게도 병든 화초처럼 시들어가더니 꽃집엔 거미줄만 가득해졌다. 경제적인 문제도 커져서 마이너스 통장에 숫자가 늘어가고 체납된 고지서 독촉장이 집안 에 쌓여갔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부처님 가르침은 읽었지만 성경을 밤새며 읽은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 경을 읽어보자는 결심과 3년 동안 냉담 했으니 3년 동안 새벽미사에 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새벽운동을 접었다. 매일 미사 후 성체조배를 하며 그날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쓰고 외웠다. 1년이 지나면서 성경은 내게 없어선 안 될 소중한 말씀으로 내 생활 안으로 들 어오기 시작했고, 마음 안에 들어온 말 씀은 나를 가슴 밑바닥부터 흔들어 대 기 시작했다. 매일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의 양식으로 삼으면서 말씀대로 생각 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말씀 은 그날의 모든 것을 예측하게 해주면서 나의 무너진 마음을 위로해 주고 어루만 져 주시는 것만 아니라 나의 약함과 교 만과 한계를 깨닫게 해주셨다. 모든 걸 그분께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15
순간마다 지혜와 도우심의 손길을 펴주 시니 감사만 아니라 내 삶을 완전히 감 싸주시는 하늘의 거룩한 향기를 맛보게 되었다. 성경 말씀에 온전히 매달리면서 모든 고난의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큰 환난을 미리 예비하도록 해주 셨다. 큰아들 미카엘이 원인 모르는 어 깨 근육 소실증으로 눈앞이 캄캄해져 울부짖을 때에도 나는 하느님을 찾았다. 또 작은아들 안토니오가 일본 유학 중 에 감당해야 했던 생활고와 정신적 갈등 으로 방황할 때에도 나는 모세의 지팡이 처럼 당신 말씀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얻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둠 속에서 나를 끌 어내신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에서 홍해바다를 건널 때 밤에는 불기둥 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셨던 바로 그분이셨다. 역사 속의 그분이 지 금 내 안에 내려오셔서 나의 역사에 함 께해 주심을 알았을 때 감사와 찬양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주님 당신은 정녕 살아 계신 나의 주 님이십니다! 이제 당신이 내게서 이루신 기적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낱낱이 전 하오리다. 세상 끝까지 나와 함께하시겠 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에 힘입어 당신 의 자녀로 당당하게 당신 말씀을 전하오 리다. 순간순간의 희노애락에 휩쓸리며 방황했던 나약한 인간이 말씀을 깊이 만나면서, 사마리아의 여인이 야곱의 우 물에서 길어올렸던 영원히 목마르지 않 을 생명수를 나도 맛본 것이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내 입 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 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여기 가 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네. (시편 34,2.5.7)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16
하느님 사랑 체험 [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사랑해 주신다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지, 그런 하느님의 사 랑을 언제 느꼈는지 등에 대해 묵상하신 내용을 적 어보십시오. ] 야 하기에 그것이 더 힘겹고 고통스러웠 습니다. 제 편에서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아직 신자가 아 니신 데다 평소 불교에 마음이 있음을 표현하신 아버지께 대세를 드리는 일이 나의 관심은 오직 너뿐이다! 이민선(마리마들렌) 4학년 마음이 많이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 이 사랑받는 것이 곧 내가 사랑받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엄마가 오직 나만 바라보고 사랑 해 주기를 바라던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었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 만 당장 아버지가 잘못 되실 수도 있다 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교회 의식을 행 동으로 옮기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 니다. 실제 상황이 어떻든 금방 괜찮아 지실 거라고만 믿고 싶은 바람이 더 컸 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장 위험한 상 황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다른 것 을 더 생각할 사이 없이 대세를 드릴 준 비를 하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만 하느님을 바라보았기에 제게 주어진 수많은 은총을 놓치며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의식이 없으셔서 세례 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여쭈어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짧지만 완전한 얼마 전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큰 병에 걸리셨다는 진단을 받아 온 식구들이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늘 건강하던 분이 하루아침에 중환자가 되어버린 것만 아 성사를 베푼 뒤 수도자인 저는 급박함 을 알리는 소리를 뱉어내는 온갖 기계들 에 둘러싸인 아버지를 뒤로 하고 공동체 로 돌아왔습니다. 니라, 수술 후 긴 회복과정을 거쳐야 하 는데 무엇 하나 낙관적일 수 없는 상황 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우 리 식구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성공 여 부를 모르는 채 이런저런 선택들을 해 저는 공동체로 돌아와 감실 앞에 조 용히 머물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 다. 그 하루가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위 급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 17
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평화롭게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버지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 다는 소식이 왔어도 저는 크게 들뜨지 않고 여전히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만일 아버지가 이런 응급상황에 처하지 않으셨다면 과연 하느님의 자녀 가 되실 수 있었을까? 하는 데에 생각 이 미쳤을 때, 아버지에게 펼쳐진 하느님 의 구원의 섭리를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저는 더 큰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게 큰 고통을 겪게 해주신다고 여겼던 그 순간 이 그분의 구원이 주어지는 은총의 때였 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주님의 사 랑의 손길을 제가 깨닫도록 하여 아버지 께 내린 그 구원의 은총이 더 이상 아버 지만의 것이 아니라 제 것도 되게 하셨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하여 이 지상에서 저와 함께 인연을 맺고 다양한 공동체 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타자( 他 者 )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있 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저 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 을 사랑하심으로써 오직 저만을 사랑 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최효숙(소화데레사) 4학년 나의 꿈은 수도자가 되는 것이었습니 다. 수도자가 되어 이태석 신부님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가난과 질병이 가득하여 모두가 꺼려하는 곳에서 주님 께 봉헌된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내 어릴 적 소망이었고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간 호사가 되었고 신앙생활에 나름대로 충 실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저에게 다른 삶을 원 하셨는지 저에게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질환을 주시어 저의 꿈을 포기할 수밖 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투석 치료를 해 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저는 근무 하던 병원의 작은 기도실에서 주님께 어 떻게 해야 하는지, 왜 나에게 이런 시련 을 주시냐며 따지기도 하고 울면서 나를 고쳐 달라고 애원도 했습니다. 그때 주 님께서는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는 속삭여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하지만 저는 결국 투석을 하게 되었고 18
응급실을 드나드는 신세가 되면서 직장 마저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몇 번의 수 술이 반복되면서 저의 고통과 외로움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그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 다.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 은 거짓말이 분명했습니다. 주님께서 나 를 버리셨으니 나도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냉담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냉담을 한다면 지금까지 해온 나의 신앙생활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냉담은 하되 주님께 일단 따지 기로 하고 밤마다 성당에 혼자 들어가 주님과 다투었습니다. 주님, 당신이 정 말 계시다면 왜 저를 미워하시는 것입니 까?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주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저를 어떻게 이렇게 내버릴 수가 있습니 까? 하면서 나는 어릴 적 상처받은 것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울면서 주님께 따 졌습니다. 미사는 하지 않으면서 며칠을 계속 성 당에서 저의 모든 상처가 마치 주님의 탓이기라도 하듯이 따지면서 주님께 이 제 다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믿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으신 비정한 분이시니 차라리 나를 죽 게 해 달라. 며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주님께 당신 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이라며 비난을 퍼붓고 있는데 성당 한쪽에 성 모님께서 나타나시더니 너무나 슬픈 얼 굴로 저에게 다가오시어 저를 포근히 안 아주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습니 다. 성모님의 품은 제가 안겨보았던 엄 마의 품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했고, 그 분에게서 느끼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지금까지 받아본 그 어떠한 사랑보다도 더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 씀도 없으셨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너 무나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 의 눈물은 건강과 다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제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무시해버리는 저의 영혼이 불쌍 해서 흘리시는 것이심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제가 지금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 은 제가 주님을 떠나려고 발버둥치는 이 영적인 고통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주님 을 사랑했다는 나의 고백이야말로 거짓 이었고 교만이었음도 깨달았습니다. 진 실로 주님을 사랑했다면 욥 성인처럼 어 떤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려 하거나 원망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깨달았 19
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아 픈 몸이지만 아직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 될 때까지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 온 곳이 지금 제가 있는 꽃동네입니다. 이곳에서는 간호사라는 경력이 많은 도 움이 되었습니다. 인곡자애병원에서 간 호사의 일을 시작한 지 올해가 12년째 됩니다. 그리고 제가 아픈 몸이기 때문 에 고통 받는 환자들의 마음을 누구보 다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고 그들의 아 픔을 함께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 은 저에게 수도자로서의 성소는 주시지 않았지만 더 겸손한 모습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 다. 주님께서는 외방으로는 저를 보내주 시지 않았지만 가까이 있는 내 이웃에 게 사랑을 베풀도록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너무 행복합니다. 그분 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너는 사 랑하는 내 딸이다! 하신 당신의 약속을 꼭 지키시는 참으로 진실한 분이십니다. 나를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 김경희(소화데레사) 4학년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무섭다 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젠 어언 10 년 전의 일이지만 갑자기 남편이 저 세 상으로 가고 나니 앞이 깜깜하고 정신 은 멍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남겨진 우리들 대학 1학년 큰딸, 고등학교 3학년 둘째딸, 중학교 2학년 아들 의 여건은 좋을 수 없었 다. 우리는 100석 규모의 식당을 운영 하고 있었지만 재산을 강탈하려는 마피 아들의 난동이 있었고, 퇴근하다 테러 를 당하여 죽을 뻔하기도 해 두려움이 커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침마다 미 사에 참례하고 온종일 묵주기도를 바치 면서 주님, 함께해 주세요. 를 간절히 외치며 주님께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그 래도 버틸 수 있는 힘을 받았던 것은 자 식들과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 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난 두려움을 잊 고 최선을 다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공소 20
를 이끌어 나갔다. 그 당시 공소를 이끌 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에 대한 맹목 적인 매달림에서 오는 힘이었다고 믿는 다. 싶다. 고 썼는데, 과연 나는 참된 신앙인 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확신하 는 바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 며 내가 주님께 해드린 것의 백 배, 천 배를 되돌려 주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5년 전에 무사히 귀국하여 지금은 안 양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이제는 큰딸 이 대기업 5년차 근무 중이고, 둘째 딸 은 결혼하여 내년 1월이면 아기를 낳고, 아들은 대기업에 1년차 근무를 하고 있 다. 우리 큰딸이 나에게 보낸 편지에 하 느님을 믿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자기 는 나의 마음을 먼저 아시고 나를 이끌 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께서 나를 필요하다고 여 기신다고 항상 느끼며 살아간다.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언젠가는 나누게 해주시리라 는 것을 믿고 있다. 도 엄마처럼 신앙심 가득한 사람이 되고 [ 우리는 여러 가지 전례 행위를 통해 하느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 행위가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나는 어떤 점에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적어보십시오. ] 생활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서보원(스테파노) 4학년 님의 현존을 가시적인 행위로 드러내는 전례는 우리 신앙인의 중심을 차지한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전 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 는 복잡한 전례 앞에서 어리둥절할 때 가톨릭 교회의 신앙생활은 늘 전례와 함께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 가 많았지만, 또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늘 반복되는 전례행위가 어느 21
순간 입만 움직이며 따라가는 것이 되 어버리는 때가 많다. 따라 외기도 힘들 었던 미사 경문이 어느 때부터인가 생각 없이 술술 나오고, 그러면서 사제가 외 는 경문의 의미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입 으로만 응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주일은 성당을 빠지면 안 되는 날 정도가 되어 버리고, 피치 못할 일이 생겨 미사를 빠지면 몹시 거북하고 그 때문에 성사 보기도 난감해서 어느 사 이에 쉬는 교우가 되고 마는 것이 예배 행위가 형식적인 것이 되면서 생기는 현 상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현상은 나에게 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 분명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왔 는데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집에 도착하 고 나서 그날 복음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느낌은 오늘 나는 성당에 친목모임 삼 아서 다녀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청년 시절 거의 10년 가까이 쉬는 교우로 전락했었던 경험이 있던 내게 그때 떠오른 생각은 이러다 간 주님의 은총으로 다시 타올랐던 내 신심이 식어버릴 수도 있겠다. 는 것이었 다. 그러면서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과 연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의 신앙생 활에서 주님의 자리가 차선으로 내려갔 다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 는 교회가 아닌 사람을 만나러 가는 교 회가 된 것이다. 성당에 도착해서 우선 주님께 인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 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곧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것이 첫 번째 이고 주일미사는 덤이 되어 버린 것이 다. 그래서 주님의 자리를 다시 최우선 으로 놓았다. 그리고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준비란 모든 전례행위에 있어서 그 전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먼 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는 공복제를 지 켜야 하는 법적인 것도 있지만 더 중요 한 것은 그날의 말씀을 미리 묵상해 보 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당에 미 리 도착해서 그날 말씀을 읽어보고 묵 상하고, 시간이 남으면 묵주기도를 하 면서 주님의 자리를 찾아드리는 것이 다. 그리고 전례에 참례하는 내내 전례 문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전 례문 안에 구구절절 녹아 있는 하느님 사랑이 느껴지고, 마땅히 하느님께 찬 미를 드려야 할 인간의 응답의 전형이 22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전례에 참 여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고, 우리를 사 랑으로 만들어 내신 주님께서 전례 안 에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외치고 계심 을 듣게 된다. 결론적으로 내 예배행위가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생활 안 에서 늘 주님을 가장 앞에 두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에게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삶을 살도 록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므로 가능하다. 곧 하느님 앞에 나아가 당신 사랑을 실 천했음을 겸손히 말씀드리면서 그렇게 살도록 나를 지어주신 하느님을 기쁜 마 음으로 찬미할 때 하느님께서는 몇 배의 사랑으로 나에게 힘을 주신다. 때론 인 간의 나약함으로 범하게 되는 죄도 있지 만 그런 것을 멀리하고,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에서도 조심하며, 하느님께서 나 를 사랑하시고 내 안에서 함께해 주심 을 기억할 때 전례는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순수한 어린이 같은 마음은 하 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거나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가족과 함께 바치는 5분 기도 박현미(아녜스) 4학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역겨워 하신 이유들을 공부해 나가면서 나 자 신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적인 것보 다는 형식적인 전례행위에 젖어들어 살 아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습관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하는 부분들이 있다 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느님께서도 나 의 이런 모습을 좋게 보실 수 없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좋 지 않은 모습들을 하나씩 고쳐 나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매일 새롭게 되고자 합니다. 한 번은 손님으로서 불쾌한 대접을 받 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언성 을 높이게 되어 매니저를 부르고 잘못한 직원을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제 목에 걸린 성 모님 목걸이를 보고는 자기도 가톨릭 신 자라고 할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지켜볼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렇게 화 를 내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과연 바람 직한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23
결국 말소리를 낮추어 불쾌했던 이유 를 이야기하면서 일처리를 원만하게 끝 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꼈던 것이 그 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그리 스도인임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할 수 있는 순간에 자신이 그 리스도인임을 깨닫게 되어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고마운 일입니다. 그 래서 외식을 할 때도 항상 크게 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꼭 바치곤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성호만 긋는다면 가식적인 것이 되겠지만, 남들 앞에서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밝히면서 성호를 긋는 것은 나 스스로 가톨릭 신 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약속이 기 때문입니다. 아침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기 도로 하루를 마무리하지만, 매일 입으로 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의 의미 를 매번 새롭게 새기고 하느님께서 원하 시는 뜻을 좀 더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 복해서 기억해 내고 그리고 그것이 몸 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 시 작한 매일 저녁 가족들 간의 5분기도 는 저희 가족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가족들 각자가 흩어져서 하게 되던 저녁기도를 함께 기도 테이블 앞에 서 바치면서 어느새 우리 가족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멀리 있는 다른 친척, 그 리고 병중에 있거나 고통 중에 있는 친 구들을 위하여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 하느님께 함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주일미사도 5분만 일찍 준비하면 되는 것을, 다른 일을 하다 혹은 게으름을 피 우다 늦어서 자주 서두르게 됩니다. 여 러 대의 미사가 있으나 아침에는 일어나 기 싫어서, 점심 때는 약속 때문에 미루 어 저녁이 되어서야 주일미사에 가는 경 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미사가 귀찮아 질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억지로 가서 바치는 예배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리 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주일의 하루 일과를 미사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하거나 급한 일이 아 니면 주일에는 미사와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 외에는 다른 약속들을 하지 않으 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 하 루가 여유 있고 편안한 날이 되면서 제 대로 된 안식일로 지낼 수 있게 되었습 니다. 게다가 미사에 가는 복장도 미사 후의 약속 때문에 편안한 복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만을 위한 화장과 옷 을 맞추어 입게 되었습니다. 새 옷이나 24
구두를 사게 되면 미사 갈 때 제일 먼저 입습니다. 가급적이면 정갈하게 최대한 정장으로 갖추어 입게 되었습니다. 옷을 그렇게 입으면 편안한 옷을 입었을 때 와는 달리, 미사 드리는 내내 제 마음의 자세도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허리도 꼿꼿이 세우게 되고 성호를 긋는 손끝 에도 정성이 들어갑니다. 제대로 준비하고 드렸는가 생각해 보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 리는 가장 큰 예물이니, 이제부터 정기 적인 고해성사를 통해 깨끗해진 심신 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삶 안에 서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들을 버려서 그 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나 자신을 항상 무엇보다 미사 전의 제 마음 자세와 거룩하고 정결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준비가 중요한 것인데 과연 몇 번이나 [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묵상한 내용과 함께 미사(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준비하고 봉헌하는 나의 자세에 대하여 적어보십시오. ] 자신을 열고 비우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박동진(바오로) 졸업생 인인데 주일미사, 평일미사 가릴 것 없 이 늘 미사에 참여합니다. 약간의 문제 는 미사 중 성가를 부를 때 음정 박자 무시하고 큰소리로 성가를 부르고, 성가 대 특송 때에도 자진해서 솔로하고, 모 든 미사에 참석하다 보니 신부님 강론 내용을 죄다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 게 조금 방해가 되는 면이 있습니다. 게 우리 본당에는 본명이 요한이라는 씩 씩한 청년(?)이 있습니다. 정신지체장애 다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는 조금 지 나친 점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미 25
사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오늘은 이 친구가 바쁜 일이 있었으면 하고 바 란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 이 지난 후에야 이 친구를 통해 미사에 참여하는 마음 자세와 진정한 목적에 대해 깨우치기 시작했습니다. 미사는 그리스도 신자, 아니 모든 사 람들이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 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바치 는 마음의 표현이고 그것이 드러나는 당 연한 행위라고 합니다. 또한 미사는 예 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제사의 재현 이며,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 는 파스카 신비의 온전한 재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순명을 몸소 보 여 주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통해 가 장 위대한 사랑인 구원을 우리에게 선 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미사는 잔치의 의 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말씀 전례 와 성찬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 고, 미사에 함께한 사람들이 서로 평화 와 축복을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그리고 사람들과의 친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친교를 통해 우리들 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고, 사람들은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사에 참여해 온 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 니다. 코 앞에 성당이 있는데도 불구하 고 미사 시간에 겨우 맞추거나 시작 성 가가 이미 흘러나오는 성당 문을 금방 전학 온 아이처럼 머쓱하게 밀고 들어가 기가 일쑤였고, 독서와 강론 말씀은 듣 는 둥 마는 둥 집중하지 못하고 머릿속 에는 온갖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한 시간 남짓 무슨 행사를 치루듯이 미사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 런 마음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다 보니 미사를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한 주 동안 지은 죄를 생각해 내고 속죄하 고, 하느님과 일치와 친교를 이루면서 하 느님께서 이 세상과 인류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은 아주 거 리가 먼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늘 보고 겪어 온 요한 형제를 통해 미사에 임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시간이 너무나 기다려져 가방 속에 성경과 성가집, 기도 서, 두꺼운 공책과 필기구를 가득 챙겨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누구보다 일찍 성 당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하고 26
큰소리로 주님을 찬미하고 기도를 드리 는 씩씩한 요한 형제를 통해 미사에 참여 하는 나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 성당 문 앞을 지키시는 신부 님 눈을 피해 주일학교를 땡땡이 치던 시절, 어느 날 신부님께서 강론 시간 중 에 휠체어를 타고 오신 한 장애우를 소 개하셨고 그분께서는 여러 가지 심한 장 애를 가진 자신을 남들이 보기에 불행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는 주 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면서, 사과 가 아주 맛있지만 그것을 남들에게 말 로 설명하기는 너무 어렵다는 비유를 들 어 그 행복의 느낌과 크기를 저희들에 게 들려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생각이 어려서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 해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까까머리 시절 그 장애우 와 성인이 된 후에는 요한 형제를 제게 보내시어 미사에 임하는 저의 마음 자 세와 신앙을 마치 세상살이의 작은 한 부분으로 치부하고 살아가고 있는 제게 따끔하고도 자상한 충고를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게 베푸시는 은총은 그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온전 하게 주어지듯이,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사랑의 은총을 만나기 위해서 평소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 을 열고 비우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 리고 모든 일에 실망하지 않고 아주 작 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 님께 찬미를 드리고 자신보다는 다른 사 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면 전과는 달 리 미사 중에 하느님께 가장 큰 흠숭과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도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놀 라우신 구원과 사랑의 은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최윤경(제네시아) 졸업생 요한복음 6장을 묵상하면서 가장 크 게 다가온 것은 예수님의 사랑, 하느님 의 사랑을 전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7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당신께서 손수 먹을 것 을 마련하시고 그들을 먹이시는 어버이 의 마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으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어 야 당신의 마음이 편하신 부모님의 사랑 을 뛰어넘어 당신의 생명까지 온전히 내 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깊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는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 시일반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 사람 이 한 숟가락씩 모으면 밥 한공기가 된 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이 떠오르면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나눔에서 시 작된 신비인 것을 보게 됩니다.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 적은 양이지만 어 린아이는 그것을 나눔을 위해 내어놓 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것이 너무 도 적은 양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은 어떤 기적이든지 그 기적이 일어나기 위 해서는 나눔의 신비, 아무리 작은 것이 라도 나부터 내어놓고 상대방을 먼저 받아들이며 나누게 될 때 그것이 기적 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에 게 주어진 조건과 상황 안에서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적은 것이면 내어놓기를 많이 주저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계 속 떠올리면서 느껴지는 것은 모든 것 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이고 그것에 감사하며 다른 이들과 나누게 될 때 그 것으로 인해 더욱 큰 신비를 보게 된다 는 것입니다. 22절부터 시작하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 안에서 저에게 다가온 말씀은 영 원히 라는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당신이 가지신 가장 소중한 것 인 생명을 내어놓으면서 우리들에게 당 신을 통해 영원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 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송두리째 내 어놓으시면서 어떠한 대가도 바라시지 도 않으시고, 죽어가는 당신을 생각하시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겨지는 우리들 을 생각하시며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모 든 것을 내어주시고도 더 마음 아파하 시고 더 주시려고 하시는 그런 분이 예 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시지 만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 느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한순간도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기도 28
를 통해 하느님과 늘 일치하시고 그분의 방향에 함께 동참하시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시고 우리도 함께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며 그 뜻에 따르셨 던 마음과 행실을 우리들도 똑같이 닮 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 셨고 또한 하느님과 하나의 삶, 일치의 삶을 어떻게 사셨는지를 구체적인 사건 과 상황을 통해서 보여주심을 느낍니다. 이 사건이 지금의 우리들이 봉헌하는 미 사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사를 통해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끈 을 자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들을 많 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팔리시던 그 밤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다. 이는 다시 오 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세세에 영속화하고, 또한 그때까지 사랑하는 신 부인 교회에 당신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 를 맡기시려는 것이었다. 이 제사는 자 비의 성사이고 일치의 표징이고 사랑의 끈이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 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 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이다. (전례 47항) 미사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새겨보 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며 우리를 당신과 일치의 삶으 로,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 시며 제정해 주신 미사이지만 삶이 바쁘 다는 핑계와 주님을 만나는 기쁨보다는 의무에 참석하게 되는 경우가 더욱 많았 습니다.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더욱 깊이 마음에 받아들이며 성체성사를 통 해 오늘도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을 온 전히 나에게 내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 리며, 그분을 더욱 기쁘게 맞이할 준비 를 하고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날들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29
성지순례기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성지순례 2 김 가브리엘라 수녀 졸업생 이스라엘 (1) 우리는 이집트 국경을 넘어 드디어 이스라엘 땅에 도착했다. 우리의 이스라엘 여정을 안내할 가이드 심 프란치스코는 느릿하고 조용한 음성을 가진 경상도 청년이었다. 예정한 시간보다 우리의 도착이 늦어지자 걱정을 하고 있 다가 처음으로 통관을 한 내 뒤를 이어 자매들이 하나씩 이스라엘 쪽으로 들어오자 마음을 놓았다고 했다. 마침내 예수님이 살아 숨 쉬며 사랑을 가르치시던 땅으로 온 것이다. 모두들 이집트에서의 좋은 기억들에 더해질 이스라엘 순례에 대한 기대로 눈을 반짝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주변 풍경과 도로는 깨끗하고 시원했다. 이집트의 척박한 자연과 여러 가지로 비교되었다. 두 나라 모두 시나이 반도와 홍 해로 이어지는 광야 지역이지만 이스라엘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체계적인 광산의 개발로 국토를 보전하고 성경의 역사를 보존하는 근면함이 보였 다. 도로 주변의 돌산에서는 광석을 채취하고 있었다. 지하자원을 채취해도 한 장소 에서 전부 파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량을 파내면 그곳을 잘 복원해 놓고 다른 곳에 서 자원을 채취한다고 한다. 그렇게 환경파괴를 최대한 줄이고 있는 것이다. 키부츠라 불리는 이스라엘 특유의 집단농장에 잘 자란 열대과일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사막지대인 이곳에 관개시설을 만들어 물을 끌어들여 인공으로 가 30
꾼 옥토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한참을 가다가 들른 휴게소에는 다양한 과일과 음 료수, 신선한 식품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이드는 우리에게 맛있는 대추야자를 선물로 사주었다. 우리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처음 도착한 도시 예리코는 사해 북동쪽의 유다 광 야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육지가 해수면보다 25m나 낮다고 한다. 원래 요르단 영토였던 이곳은 기후가 온화 하고 물과 과일이 풍부한 휴양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의 정치 중심지였지만 1967년 6 일 전쟁 때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고고학적으로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로 기원전 7000년경의 신석기 시대의 성과 성벽, 둥근 망대 유적이 남아 있다 고 한다. 그 당시에 이미 집안을 그림으로 장식할 정도로 생활수준도 높았다고 한다. 구약시대의 예리코는 종려나무의 성읍 이라고 불렸다(신명 34,3). 40여 년의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디딜 때 여호수아의 인 도로 정복한 첫 번째 도시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도 예리코가 자주 등장한다. 예 수님은 이곳에서 소경 바르티매오를 고쳐주셨고(마르 10,46 52) 세리 자캐오의 집에 머무시기도 했다(루카 19,1 10). 또한 이 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였는데 예리코와 예 루살렘 사이에 유다 광야가 있어서 위험이 많은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을 오가실 때 이 길을 이용하셨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배경이 되는 장소 이기도 하다(루카 10,29 30). 성경 세계의 예리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도착한 예리코에서 우리가 머물 장소 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으로 유명한 인터콘티넨탈 호텔이었다. 우리같은 서민이 모처 럼 별 다섯 개의 호텔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간의 팽팽한 정치적 긴장으로 부유한 휴양객들이 예리코를 찾지 않게 되어 어부지리로 얻은 행 운이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시나이 산을 다녀오고 계속해서 긴 시간 동안 광야를 지나와 피곤했던 우리는 시설이 좋은 호텔에서 잘 쉬면서 맛있는 식사로 체력과 탐 구심을 되찾았다. 31
유혹의 산, 예리코 성 점령 기념터 다음날 찾아간 첫 번째 장소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 수님께서 성령께 이끌려 가셨던 광야였다. 예리코의 서쪽에 위치하는 유다 광야에 있는 그 산은 유혹의 산 이라고도 불린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머무시며 사탄 의 유혹을 받으신 곳이라 해서 콰란타나 산(Mount of Qarantana) 이라고도 한다. 유혹의 산 정상 못 미쳐 건물이 서 있는 자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동굴터라고 전해진다. 그 자리에 6세기부터 있던 교회는 13세기쯤에 폐허가 되었고 지금 보이 는 건물은 1874년에 지은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다. 우리는 유혹의 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묵상하는 시간을 가 졌다. 지금은 예리코 시내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험하기 짝 이 없는 허허벌판이었을 것이다. 밤이면 들짐승이 울부짖어 두려움이 일기도 하 는.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사탄이 다가와 세상의 모든 영예와 부유함을 보이며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 대 한 신뢰로 물리쳤다(마태 4,1 4; 8 10). 사람이 자신의 안전과 소유를 추구하는 것 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대의 우리에게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평 생을 따라다니는 족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자유로워졌다 싶을 때마다 다 시 슬며시 다가오는. 삶의 모든 것에서 은근히 다가오는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예 수님처럼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유지하는 길뿐이다. 예리코 뒤편에 있는 유혹의 산을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고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예리코 성 점령 기념터였다.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오면 서 처음으로 점령한 곳은 지금은 언덕이 무너진 움푹한 흙더미일 뿐이었다. 고대 이 스라엘인들이 침공할 당시에는 외벽과 내벽이 견고한 성이었다는데 이스라엘인들 이 이 성을 공략한 방법도 특이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에게 엿새 동안 침묵하며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라고 하셨다. 이렛날이 되었을 때 사제들 이 부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모두들 큰 소리로 외치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여호 32
6,20 참조). 1900년대 독일과 영국에서 파견된 탐사팀의 예리코 성 탐사 결과는 이러했다. 예 리코 성은 이중벽으로 되어 있었고 두 성벽 사이는 5m의 간격이었다. 외벽은 두께 2m의 기반 성벽 위로 7미터 높이의 흙벽돌 벽을 쌓았고, 내벽 두께는 4m, 높이는 10 14m나 되는 견고한 성이었음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전쟁 때 성을 공략할 때 는 외부에서 사다리를 타고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들에 의해 안쪽이 무너지면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예리코 성은 특이하게도 외벽의 기초 위로 쌓아올려 진 성의 흙벽돌들이 모두 성벽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그 무너져 내린 흙벽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단처럼 밟고 올라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성이 무너진 원인은 강력한 지진이었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의 외벽에 붙어 있던 집들 중 북쪽의 집들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라 합의 집이 성벽 담에 붙어 있었다. (여호 2,15)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렇다면 하느님께서 직접 땅을 흔들어 벽을 무너뜨 리신 것이 아닐까. 이스라 엘 백성들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였 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순례자들을 말없이 맞고 있는 나지막한 그 흙언덕 은 고대 신앙의 선조들을 이끄신 하느님의 힘을 감 춘 채 순례자들의 마음을 33
믿음으로 초대하고 있는 듯했다. 자캐오 나무와 광야 체험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지역인 구약시대의 예리코를 떠나 신약시대의 예리코 지역으로 이동했다. 낮은 건물이 드문드문 서 있는 깨끗한 거리를 지나 가로수가 우 거진 조용한 주택가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로 키 작은 세관장 자 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올라갔던 돌무화과 나무라고 했다(루카 19,1 10). 하지만 이 나무의 실제 나이는 700살 정도라고 하니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 렘으로 올라가실 때 이 근처 어디선가 자캐오를 만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후대 사 람들이 정한 나무인 것 같았다. 굵다란 나무 밑둥에 모자이크로 예수님과 자캐오 의 만남을 그려놓 은 돌판이 붙어 있 었다. 또 예수님 은 이 근처에서 소 경 바르티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셨 다(마르 10,46 52). 주변의 나무들이 잎이 넓은 온대식 물 종류인 걸 보아 옛날부터 예리코 가 기온이 온화하 여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는 걸 짐 작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자신 안에 갇혀 살던 자캐오의 마음 34
의 키를 크게 하셨고,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서는 사물을 영적으로 볼 수 있도록 변화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음을 생각하니 예리코에 불어오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잎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주 오가셨던 신 약의 예리코는 AD 68~69년 사이에 예루살렘을 정벌하러 가는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우리가 탄 차는 다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광야지대로 들어섰다. 완 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유다 광야는 험한 바위로 이루어진 이집트의 시나이 광야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지역은 우기가 되면 땅 속에 스민 물기로 풀이 자라고 작은 꽃들로 뒤덮여 온통 붉고 누런 민둥산이었던 광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한다. 우리보다 먼저 순례를 다녀오신 선배 수녀님들은 3월초에 이곳에 도착하여 온 통 꽃으 로 덮 인 광야의 아름다 움을 보았다고 했 다. 우리도 두 주 일 정도 늦게 왔 다면 그 좋은 풍 경을 볼 수 있었겠 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 이 풍경도 좋았다. 우리는 맑은 하 늘 아래 끝없이 펼 쳐진 광야를 둘러 보다가 십자가가 서 있는 정상으로 올라가 산을 둘러보았다. 이월 중순 겨울이지만 우리나라의 봄 날씨 같아 들판 여기저기에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시편을 흥얼거리면서 여유롭 35
게 거닐던 우리는 바위틈에 핀 작은 꽃을 발견하고는 환성을 지르기도 하고, 가파 른 계곡으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물길이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이 작은 물줄기는 비 가 오면 폭포수가 되고, 빗물로 적셔진 골짜기는 푸른 풀밭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지역을 아랍어로 와디 켈트 라고 하는데 비가 오면 시내처럼 물이 흐르고 풀이 자 라는 골짜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득히 보이는 계곡 아래로 절벽을 따라 지은 건물이 보였다. 이 건물은 5세기 초 비잔틴 시대에 유다 광야에 세워진 독거수도원 중의 하나로 6세기 말 사이프러 스 출신 수도사 성 제오르지오의 이름을 딴 성 조지 수도원 이었다. 야고보 원복음 서에 의하면 수도원이 서 있는 지역은 성모 마리아의 아버지 성 요아킴이 천사에게 마리아의 탄생을 예고받은 곳으로 고대에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봉헌된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이제벨 왕후를 피해 시나이 산으로 달아나던 예언자 엘리야가 지 금의 성 조지 수도원 근처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광야로 도망치던 길도 바로 이 와디 켈트 계곡이라고 전해진다. 36
어디선가 조랑말을 탄 아랍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순례자들에게 물건을 팔기도 하고 계곡 아래의 성 조지 수도원으로 가는 사람을 태우기도 했다. 성 조지 수도원 은 힘들긴 하지만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데 우리에겐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산 위에서 수도원 건물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광야를 며칠이고 걸으면서 광야 체험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접으면서 산을 내려왔다. 사해, 쿰란 아주 짧게 광야를 체험한 우리의 다음 도착지는 사해( 死 海 )였다. 갈릴래아 호수의 물은 요르단 강으로 흘러가 유다 광야를 거쳐 사해에 도착한다. 사해는 지표 400 미터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북의 길이가 77km,동서 최대의 폭이 16km,전체 면 적이 9백65km2이며 갈릴래아 호수의 6배라고 한다. 수심 4백20m나 되는 사해로 매 일 평균 500만 톤의 물이 요르단 강으로부터 유입된다고 한다. 사해 지역의 기온 이 워낙 높아서 요르단 강에서 들어오는 양만큼의 물이 계속 증발할 뿐 다른 곳으 37
로 흘러나가는 물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한다고 한다. 사해의 물 은 일반 바다보다 염도가 7 8배나 높아(염분 30 ~ 33%) 어떤 어류나 미생물도 살 수 없는 곳이다. 나눌 줄 모르면서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기심이 죽음의 바다( 死 海 )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염화칼슘 쏘디움 포타시움 미네랄 마그네슘 유 황 칼슘 우라늄 브로마인 같은 광물질이 무궁무진하게 함유된 사해의 진흙은 이스라엘의 주요 수출 품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아득히 펼쳐진 바다 건너편으로 요르단 땅이 보였다. 모래사장에서부터 진회색의 미끈한 흙이 밟혔다.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 라도 이 사해 진흙으로 아름다움을 유지했을 만큼 바다 주변과 물 속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검은 진흙은 미용효과가 좋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축축하면 서도 찬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도 신을 벗고 출렁거 리는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무리 추워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사해지만 겨 울철이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발을 물에 담근 채 손으로 진흙을 잡아 문지르 며 장난을 치는 우리 모습을 유다인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닷물에서 나와 맨발로 샤워 시설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발을 씻으면서도 자매 들은 계속 장난을 친다. 수도생활 연륜 이십오 년이 넘는 중년들인데 아직도 아이 들 같다. 출렁대는 푸른 물결은 여느 바다와 다를 바 없는데 바닷물에 닿은 옷이 금세 뻣뻣해지며 변색까지 될 기미를 보이는 것을 보니 사해의 염분이 얼마나 강한 지 실감난다. 우리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바닷가 휴게실을 벗어나 해 변을 끼고 남쪽으로 5km쯤에 위치한 쿰란 국립공원 지역으로 이동했다. 관광품 판매점 앞 주차장에서 차를 내렸다. 쿰란 유적지로 들어가기 위해서 입장 권을 사고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우리는 관광품 가게 뒤편에 있 는 천장이 낮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은 쿰란의 유래와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에세네파의 생활과 사용하던 가구 등을 기록한 비디오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놀라운 것은 영상 해설이 한국말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한국인이 많이 오면 한국 38
어 더빙까지 준비했을까. 사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이집트를 거쳐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이곳 쿰란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주로 개신교 순례단들이었다. 비디오에서는 예수님이 오실 길을 닦은 세례 자 요한을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에세네파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이곳에서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세상과 떨어져 철저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에네세파는 유다교의 분파에서 가장 경건하고 엄격한 집단 으로 전해진다. 성경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살며 벌꿀과 메뚜기만 먹고 살 았다(마르 1,6 참조)고 하는 걸 보면 믿을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비디오는 에세네파 공동체의 생활을 소개했다. 그들의 신앙 정신과 이곳에 자리하게 된 유래, 주거생 활, 기도, 성경 필사 작업, 그리고 목욕탕의 구조와 사용법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39
계단을 내려가 물 속에 잠겼다가 건너편 계단으로 올라오는 의식으로 목욕을 하며 죄에서 죽고 다시 사는 매일의 전례를 거행했다. 오늘 우리의 세례성사에 도입된 의 식을 매일 실행하며 살았을 그들의 경건한 신앙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갈등도 있었을 것이 다. 생각으로 이런저런 짓궂은 의문을 가져보며 나는 혼자 웃었다. 비디오를 본 다음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된 두루마리 성경과 그릇들이 전시된 작 은 전시장을 둘러보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가슴이 뻥 뚫리도록 시원하게 트인 널따란 황무지에 솟은 암벽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하얀 석회빛을 띤 바위산 중턱 여기저기에 자연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 유명한 쿰란사본 이 발견된 동굴들이 었다. 68년경 유다인 반란을 진압하던 로마 군대가 이 쿰란 공동체로 쳐들어오자 그들은 두루마리에 필사한 성경과 율법서들을 질그릇 항아리에 넣어 맞은편 산에 있는 여러 동굴에 숨겨놓았다. 그 이후 에세네파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숨겨놓은 사본들은 1900년 동안 동굴 속에 잠들어 있었다. 40
그러다 1947년 어느 날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던 베드윈족 양치기 소년이 언덕 위에 있는 동굴 속에 있던 항아리에서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 필사 두루마 리를 발견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어서 1949년 2월,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 가 살았던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리고 처음 사본이 발견된 동굴 주변에 있던 267개 의 동굴을 탐사했는데 그 동굴 중 11개에서 사해사본의 일부인 구약성경의 필사 두 루마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들은 쿰란 공동체의 주거지역에서 125m에서 1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쿰란이라는 말은 두 개의 달 이라는 뜻을 가지 고 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뜻은 아직 알 수 없다. 흔히 사해사본과 쿰란사본을 혼 동해서 사용하는데 사해사본은 사해 주변에서 발견된 모든 사본을 말하는 것이고, 쿰란사본은 쿰란 공동체 근처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만을 지칭한다. 그러니 까 쿰란사본은 사해사본의 일부인 것이다. 쿰란 공동체의 주거지 유적터 앞으로 잔잔한 푸른 사해가 보이고, 뒤편으로는 깊 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하얀 암벽 산에 뚫린 자연동굴이 바라다 보였다. 그 중에서 도 우리 눈에 잘 띄는 동굴이 두루마리 문서가 발견된 순서로 번호를 붙인 제4동굴 이라고 한다. 퇴적화된 암벽산은 만지거나 밟기만 해도 굵은 모래처럼 부서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풀 한 포기 없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양을 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하긴 베두인 목동은 잃은 양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했으니 돌산 너머 에 있을 풀밭에서 건너왔을 것이다. 공동체 유적터 사이로 나무로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면서 복잡한 구조의 방과 가구와 기도실, 목욕탕, 개인 침실, 공동 식당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물을 저장했 던 물탱크,도기 가마,하수도까지 있었다. 그 중에 두루마리 성경을 필사하고 보관 하던 서고 자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광야에 속하는 지역 특유의 한적함과 이국 정서를 듬뿍 담은 쿰란의 너른 풍경이 마음을 끌었다. 2천 년 전에는 더욱 고요했을 이곳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며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나도 이런 곳에서 기도만 하면서 살고 싶 은 마음이 들었지만 외적인 고요가 내면의 소음을 잠재울 수 없다는 생각이 함께 올 41
라왔다. 거룩한 삶이란 장소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이니까. 유적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데 가이드가 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열매를 가리켰다. 그 열매가 바로 루카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의 둘째 아들이 먹으려고 했던 쥐엄나무 열매라고 했다(루카 15,16). 거칠고 시꺼먼 것이 돼지도 먹기 힘들 것 같은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을 둘째 아들의 불쌍한 처지가 짐작되었다. 이곳 쿰 란의 면세점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상품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해 진흙을 원료로 한 화장품이 유명한데 매장은 온통 한국 아줌마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도 값싸고 좋 은 선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면세점인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 받은 영 수증을 보관해두면 출국할 때 공항에서 지불한 금액의 10%를 돌려받을 수 있단다. 나자렛 예수 탄생예고 성당, 성요셉 기념성당 우리의 다음 여정은 나자렛이었다. 황량한 광야의 쿰란을 뒤로하면서 점차 푸른 나무들을 만나는가 했더니 차는 복잡한 시가지로 들어섰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커 피숍, 스낵 식품, 관광품 가게, 옷가게 같은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상점이 늘어선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을 가면서 보는 거리는 어딘지 오래된 느낌과 장터같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달동네처럼 높은 언덕 위에까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지역이 제법 깊은 산골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모영보 성당의 크고 우아한 건물은 키가 큰 열대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처녀 마리아가 살던 집터 위에 예수 탄생예고 성당(성모영보 성당) 이 있다. 이곳에 처음 성당이 세워진 것은 326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 레나에 의해서였다. 그 후 네 번이나 성당은 파괴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68년에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십 세기에 들어와 지어서인지 성당은 현대와 고전이 어우러진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성당의 정면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모습과 네 42
복음사가가 조각되어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밖에서 보기보다 더 크고 넓었다. 성 당 안으로 들어서니 대리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어두운 색의 바닥이 은은한 윤기 를 뿜어낸다. 예수님의 생애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오 고 있다. 성당 가운데 위치한 돔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을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성당 지하에 있는 성모님이 영보를 받으신 동굴로 내려갔다. 밝으면서도 분위기 있는 조명이 동굴을 비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의 집터란 다. 여기서 처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동굴이 보 이는 제대에 둘러서서 미사를 봉헌했다. 성모영보는 나자렛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 43
니다. 육( 肉 ) 이 되셨다. 곧 하느님이신 분이 사멸할 인간이 되심은 성모 마리아의 피앗 에서 비롯된 큰 사건입니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놀랍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님 의 뜻이기에 마리아는 순종했습니다. 간결하고 힘 있는 신부님의 강론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준 마리아의 네 를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나 또한 성모님을 본받아 매순간 하느님의 부 르심에 네 라고 답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동안 옆에 부부로 보이는 외국인 남녀가 있었다. 말은 통하 지 않지만 그들이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를 나도 모르게 바치고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다시 대성당으로 올라와 성당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정면 제대 양쪽에 있는 작은 경당에서 짧은 경배 를 드렸다. 대성당 정원을 둘러싼 회랑 벽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성모자 성화가 전 시되어 있었다. 각 나라의 특성을 살린 성모자상들은 정말 다양했다. 우리나라의 성모님은 한복을 입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예수님을 안고 서 있는 모자이크 작 품이다. 이남규 화백의 작품으로 아래 편에 한글로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 라고 쓰여 있다. 성모님의 피앗을 기념하는 성당은 정말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그 어 떤 것도 네 라는 응답으로 온 인류 구원의 단초를 놓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 한 감사와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모영보 성당 마당을 지나 약 100여 미터쯤 거리를 두고 성요셉 기념성당이 있 다. 그곳은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돌아와 정착한 곳이면서 성 요셉의 목공소 자리이 기도 하다. 비잔틴 시대 이전부터 성가정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었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1914년에 다시 지었단다. 성요셉 성당으로 들어선 순례자들은 성당 양편에 있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 44
가면서 내부를 둘러보게 된다. 곳곳마다 성가정의 일화를 담은 성화와 작은 제대가 놓여 있었다. 지하경당의 성당 창문은 모두 성 요셉의 일생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 로 꾸며져 있었다. 아기 예수님을 돌보는 성 요셉, 소년 예수님이 성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옆에서 대패질을 하는 모습, 예수님이 성 요셉의 임종을 지켜보는 모습 등 좁은 실내에 다양한 성화들이 있어 조금은 복잡하게 느껴진다. 계단 마지막 지하 방에 들어서니 요셉과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셨다는 동굴터가 보존되어 있다. 성요셉 기념성당은 예수 탄생예고 성당의 부속건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고 아담 했는데 성당 밖에는 두 사람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성물판매소가 있었다. 우 리나라의 버스 정류장의 매점 규모와 형태가 닮아 있었다. 이 성물방은 건물 벽에 붙어 있다는 게 다를 뿐인데,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린 묵주 사이로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성요셉 기념성당도 여러 면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의 뒤로 한 발 짝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던 겸손한 성 요셉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소년 예수님이 어머니와 함께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마을 아이들과 뛰어놀았을 장소, 양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다듬으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은총의 땅, 지금은 많은 집들이 늘어선 시가지에 속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한적한 산골 마을 이었을 것이다. 이곳 지명이 붙은 나자렛 예수 라는 이름이 후일 십자가 위에서 세 상을 구원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깊이 머문다. 요셉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 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 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 2,23) 성모님과 성 요셉의 행복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나자렛의 성가정이 누 렸던 가난하지만 행복한 일상, 그러한 성가정의 소박한 삶이야말로 우리 가정의 근 본적인 삶의 태도일 것이다.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참된 행 복을 잃어버린 많은 가정을 성 요셉의 가호에 맡기고 나자렛을 떠났다. 45
카나 혼인잔치 기념성당,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다음으로 찾아간 장소는 갈릴래아 지방 카나의 혼인잔치 기념성당이었다. 예수님 께서 물을 술로 변화시킨 혼인잔치 기념성당은 아랍인 거주 지역의 좁은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의 성당은 1881년에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지은 건물이지만 이 성당 안에는 14세기로 추정되는 중세의 건물 유적과 5 6세기경의 그리스도인 무덤, 그리고 5세기의 유적인 안뜰 휘장이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성당 왼 편으로 들어가 회랑을 따라 제대 뒤편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대대적인 발굴로 찾아낸 옛 포도주 항아리와 돌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포도 주를 만들던 돌확이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성당 지하로 내려가는 회랑 의 선반에도 여섯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 고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이곳에 여섯 개의 돌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는 글이 적혀 있다. 지하 계단 오른편 문 쪽에는 유리로 덮인 아람어 비문과 함께 오래된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5세기 유다 교회의 흔적으로 이 모자이크를 만든 이들에게 축복을 비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라고 하고, 모자이크는 당시 교회 안뜰 바닥 장 식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지하를 돌아 나오는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오른편 발치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 여성의 전신상이 눈에 띄었다. 눈언저리에 짙은 얼룩 이 남아 있는 황토빛 석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우리는 미사가 거행 중인 성당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제대 뒤편 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 고, 그 아래편에는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주변에 항아리가 놓 여 있는 그림이 있다.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는 이곳에 성당을 짓기 전에 원래의 건 물터 바닥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카나의 혼인잔치가 있었던 장소라는 확실한 증거 를 발견했다고 한다. 카나에는 두 개의 혼인잔치 기념성당이 있다. 두 성당은 서로 46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어 프란치스코수도회 소속의 혼인잔치 성당에서 그리스 정교 회 소속의 기념성당 지붕이 보인다. 성당 앞 상점에서는 카나의 혼인잔치 때 사용했 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포도주를 팔고 있었다. 성당을 나와 차를 타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데 가이드가 문이 닫힌 허름 한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나타나엘 기념경당이라고 했다. 일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참석하셨던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바로 나타나엘이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나타나엘을 부르셨을 때 그는 결혼날을 기다 리고 있던 젊은이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본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은 확실한 축복과 기쁨의 이미지를 새겨주셨고 더 나아가 하 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신 구세주이셨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걷는 골목길 양 편으로 낡고 허름한 담이 이어졌다. 지저분한 낙서가 있고 칠과 벽돌이 떨어져 나간 시멘트 벽 사이로 잡풀이 자란 빈터도 보였다. 팔레스티나인들이 사는 지역 대부분 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호텔로 들어섰다. 짐을 들고 천장 이 낮은 로비로 들어서는데 적당히 낡은 붉은 카페트가 깔린 좁은 실내가 이상하게 도 익숙했다. 언젠가 전에 온 적이 있는 듯한 친근한 느낌이었다. 로비에서 지하층 으로 내려가는 식당에서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낯익은 느낌, 이런 것을 기시감( 旣 視 感 )이라고 하던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 창문을 여니 어둠에 잠 긴 갈릴래아 호수의 찰랑대는 물소리가 들린다. 정원으로 내려가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데 예루살렘에서 산다는 한국인 가족이 주말휴가를 지내러 와 있었다. 네다섯 살쯤 된 여자아이 둘이 놀이기구를 타면서 놀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다시 아침이 밝았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호텔 정원으로 나갔다. 열매 가 달린 큰 나무들이 서 있는 정원을 거닐며 흐릿한 하늘과 맞닿은 호수의 물결이 축대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의 여정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이다. 47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 강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 바람결 따라 들려오는 주의 말씀 들 었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 그물을 버리고 이제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 부가 되게 하리라. 예상했던 대로 오늘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스라엘 전체의 1/3의 물을 공급하는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다. 해 수면으로부터 약 209m 정도 아래에 있는 호수 수심의 평균 깊이는 약 26m, 가장 깊은 곳은 43m, 호수의 전체 둘레가 52km 된다고 한다. 굳이 숫자를 나열하지 않 아도 눈으로 보는 갈릴래아 호수는 한국의 저수지 규모가 아니라 바다라고 할 만큼 넓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이 호수를 갈릴래아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 호수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데, 유다인들은 호수의 모양에 따라 히브리말로 하 프를 뜻하는 킨네렛 호수(Yam Kinneret)라고도 불렀다(민수 34,11 ; 여호 13, 27). 그 리고 신약시대에는 겐네사렛 호수(루카 5,1), 티베리아스 호수(요한 21,1)라고도 했다. 아침부터 흐리던 날씨는 우리가 배에 올랐을 때도 여전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서 모두들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썼다. 어디선지 갈매기들이 낮게 날며 배 주위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풍랑을 가라앉히신 복음 말씀(마르 4,35 41)을 듣고 침묵 속에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복음의 내용을 그려보았다. 갈릴래아 호수는 높고 낮은 언덕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평소에는 고요하다가도 기 압의 변화를 일으키면 예기치 못한 폭풍이 몰아치기 일쑤라고 한다. 이 호수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있던 제자들이 거센 파도를 만나 고전하는데 예수 님은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복음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제자들은 겁이 나 안절부절못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믿고 잠이 드셨다. 그렇다. 예 수님은 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우리를 믿으시고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 하지만 나는 매번 예수님께서 약하고 결함투성이인 내게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는 걸 믿지 못하 48
여 두려워하고 뒷걸음치며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자연과 바람과 호수를 지배하는 분, 그분이 나를 만드신 분이시고 늘 내 곁에 계셔주시는데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 는 것이다. 두려울 때, 나를 믿을 수 없을 때 믿음으로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면 된 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우리가 갑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영화배우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멋 지게 수염을 기른 선장님이 태극기를 돛대에 올리고 애국가를 틀어주었다. 신기하 고 기뻐서 모두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상업적인 의도가 다분하겠지만 한국 인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에 기분은 좋았다. 배에서 바라보이는 호수 주변의 마을 들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 장소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의 구원활동이 이루어진 복된 곳들이다. 대표적인 갈릴래아 호수 순례지는 서북쪽의 타브가를 중심으로 호수를 끼고 예 수님의 고장이라 불리는 카파르나움 성베드로 기념성당이다. 그리고 베드로 수위 권 기념성당과 빵 의 기적 성당이 있 고, 호수 왼쪽에 있 는 쉐이크 알리 언덕 에는 참행복선언 기 념성당이 있다. 그분 은 이 호숫가에서 제 자들을 부르시고(마 태 4,15.18) 구원사업 을 시작하셨다(마태 4,12). 기도하시고 호 숫가 산 위에서 참행 복을 선언하셨다(마 태 5장). 그리고 호수 49
근처 마을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루카 4,31), 마귀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셨다(마르 1,39). 또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마태 4,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을 통하여 당신이 이룩하신 구원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도 갈릴래아였다(마태 28,10). 모두들 예수님 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호수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주님의 자취를 찾았다. 갈릴 래아 호수는 변덕스러움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뱃멀미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갑판 위에서 발걸 음을 떼어 놓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모두들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이곳을 마음과 눈에 남기려고 갑판 위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바빴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잠깐 동안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요 르단 강의 물길이 흐르는 곳이었다. 요르단 강의 물은 남쪽에서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온다고 했다.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 북쪽, 골란 고원 너머의 헤르몬 산(2,814m) 에서 발원하여 갈릴래아 호수를 거쳐서 사해까지 가는데 그 길이가 256km나 된 다고 한다. 우리가 본 요르단 강의 물길은 큰 개천 정도였지만 폭이 넓은 곳은 약 30m 정도 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식수원이기도 한 요르단 강물 상류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참행복선언 기념성당 (THE MOUNT OF THE BEATITUDES)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으로 올라가는 들판에 들어설 때쯤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 었다. 잘 가꾸어진 열대식물과 큰 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가니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이 있다. 진복팔단 성당 또는 산상설교(마태 5,1 12) 성 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성당의 돔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참 행복을 상징 하는 팔각형 모양이다. 아담하고 우아한 성당은 1937년에 이탈리아 사람 발루치(Barluzzi)가 설계했다고 50
한다. 성당을 둘러싼 아치형 주랑을 제외한 실제 성당의 규모는 전에 사진으로 보면 서 생각하던 것보다 작았다. 성당 안은 여덟 가지 행복을 히브리말로 써놓은 스테 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빛에 쌓여 온화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순례 자들은 성당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감실과 제대 주위를 돌면서 성당을 한 바퀴 둘 러보게 된다. 감실 앞 대리석 바닥에는 믿음 소망 사랑의 복음 삼덕과 지혜 정 의 용기 절제의 네 가지 덕이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성당에서 분주했던 발길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참된 행복을 음미하는 시간이 너무 감사했다. 며칠 전까지 종종 걸음을 쳐대던 나의 사도직 일상의 의 미를 더 깊여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 는 내 곁에 더 가까이 계신 예수님께 언제 어디서라도 세상을 넘어서는 진 정한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했다. 우리는 성당 밖으로 나와 주랑의 하 얀 기둥 사이로 반짝거리는 호수의 물 결을 바라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지금 은 성지를 맡아 관리하는 베네딕토수 도회 수녀들에 의해 성당과 주변이 잘 가꾸어져 있지만 그 옛날 예수님 시대 에는 평지와 언덕에 풀과 나무들이 무 성한 들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곳에 모인 군중들에게 참행복 외에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이곳이야말 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 용서와 화해, 올바른 자선 등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51
주님의 가르침들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모든 이들의 마음까지 도달하는 멋진 야외 강의실이었다. 예수님을 찾아 이곳에 모여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자연 속에서 예수님의 가 르침을 들으며 피곤하고 아픈 마음과 몸의 상처를 치유받았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 금이나 가난한 이들은 많지만 그들이 위로받고 자존감을 회복하여 행복하게 살려 면 예수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절감한다. 오늘의 세상에서 예수님 의 사랑을 보여줄 사명을 받은 나는 예수님의 참행복을 얼마나 알아듣고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도 이곳을 자주 오갔을 것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라고 말씀하신 갈릴래아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도 이곳이 구원 의 메시지가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출발점이 되기를 원하셨다. 참행복선언 기념성당에서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동굴 옆에 제대를 마련해 놓 은 곳이 있다고 한다. 내려가볼 수는 없었지만 그곳은 예수님이 찾아오는 군중들을 피해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장소( 마르 1, 35; 루카 4,42; 5,16 )라고 전해진다. 빵의 기적 기념성당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타브가(TABGHA)라고 불리는 빵의 기적 기념성당이었다. 타브가라는 이름은 일곱 개의 샘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헤프다페곤 을 아람어로 옮 긴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히브리어로는 엔 세바 라고 하는데 원래 물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시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이곳에 성당이 처음 세 워진 것은 350년경이다. 그 뒤 5세기경에 다시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지으면서 예 수님의 기적과 관련된 바위를 새 제단 아래로 옮기고 제단 주위를 모자이크로 장 52
식하여 성당을 지었다. 후대에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300여 년이 지난 1982년에 독일 베네딕토수도회에서 역사적 고증을 거쳐 복원했 다고 한다. 양편이 널찍한 녹지대로 가꾸어진 길을 따라가서 베네딕토수도원 소속의 넓은 정 원으로 들어서니 초세기 때 사용하던 연자방아와 우물터가 있었다. 5세기 비잔틴 양식 성당을 그대로 복원해 냈다는 성당의 내부 장식은 단순하고 분위기는 조용했 다. 우리는 제대 앞으로 다가갔다. 제대 바닥에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놓고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바위 일부가 드러나 있었고, 그 앞으로 5세기경에 만들어진 빵과 물고기의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그 문양이 눈에 익었다. 생각해 보니 전에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수녀님께서 이 문양을 한 작은 초받침을 선물로 주셨었다. 그때는 그 그림이 이렇게 유서 깊은 것인 줄 몰랐다. 그 옛날 넓은 평야였던 이곳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 침에 취하여 시간을 잊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고자 하셨 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은 모인 사람에 비해 턱없이 작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은 모 두를 배불리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체험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영 적으로만 아니라 육적 필요까지도 채워주시는 것을 깨달았다. 욕심 없이 가진 것을 나누는 소박한 나눔으로 천국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옛날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기적,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 불리신 기적(마르 6,30 44; 마태 14,13 21; 요한 6,1 14)을 나타낸 그림에 빵이 네 개 밖에 없었다. 그림이 잘못된 것은 아닐 텐데 싶은 생각에 눈길을 돌려 제대를 바라 보았다. 그렇구나, 예수님은 매일 미사에서 제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성변화를 통해 생명의 빵이 되어 오신다. 그래서 제대 아래 모자이크로 새겨진 네 개의 빵은 그리 스도의 몸인 제대와 더불어 다섯 개가 되는 거구나. 이처럼 깊은 성체 교리가 초세기 때부터 오늘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 53
는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아름답고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 속에 불리움 받았음이 새삼스럽게 감사로움으로 벅찼다. 날마다 봉헌되는 미사성제를 통 해서 지금도 빵의 기적 은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빵이 되신 예 수님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해 빵이 되도록, 그리하여 순수한 누룩처럼 부푸는 사랑 이 되어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불리움 받았음을 의식하게 해주 는 거룩한 장소에 내가 서 있다는 느낌이 전율처럼 나를 엄습했다. 빵의 기적은 사 람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채우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인 간의 영적 갈망이 채워지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가 난하지 않고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것이 진정한 채워짐이기에. 인간의 굶주 림을 채우는 진정한 빵, 살아 계신 주님. 팔레스티나 지역에 남아 있는 비잔틴 교회 유적 중 특별히 아름다운 작품으로 알 려진 이집트 풍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빵과 물고기의 모자이크 앞에서 한참을 묵상 에 잠겨 있던 자매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성당의 다른 편 바닥 에 호수 지역의 새 물고기 짐승 꽃들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제대 앞에 있는 빵과 물고기의 문양에 열중하다가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장식이 없는 초세기 풍의 조촐한 성당에 베네딕토 성인이 교회 건물을 봉헌하는 모습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자를 그린 이콘의 채색이 너무도 선명 해서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었던 것도 기억에 남았다. 베드로 수위권 기념성당 빵의 기적 성당에서 북쪽으로 5백 미터 거리에 베드로의 수위권 성당 또는 부 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기념성당 이 있다. 4세기 때에 이곳에 기념성당이 바위 위 에 세워져 있었는데, 13세기에 회교도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방치되었다 가 그 후 7백여 년이란 세월이 지난 다음 오늘의 기념성전이 다시 들어서게 된 것이 라고 한다. 54
제대 앞에 제법 큰 바위가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인 작은 성당이었다. 아마도 4세기경부터 있었던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그 크 기까지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대 앞의 울퉁불퉁한 바위는 어른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고기를 잡던 제자 들을 바라보시며 말을 건네시고, 빵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는, 그래 서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risti) 이라 불린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예수님 부활 이후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예수 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다시 고기잡 이가 되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리움 받았던 다른 형제들과 티 베리아스 호수로 갔다. 그들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그물을 쳤으나 한 마리 도 잡지 못해 허탈한 상태가 되었다. 예수님을 잃은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했 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목적을 잃은 채 무의미하게 시간을 소비하는. 붉은 새벽빛이 바다의 어둠을 밀어내는 이른 시각에 누군가가 호숫가에 서서 그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배 위에 탄 사람들에게 말한다. 다시 한 번 그물을 쳐 보라고,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그물을 쳤을 때 셀 수 없이 많은 고기가 걸려들 었다. 그때 베드로와 함께 있던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요한의 짧은 외침에 마음의 눈이 열린 베드로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분을 향해 헤엄쳐 나왔다. 예수님은 뭍으로 올라오는 제자들을 위해 널찍한 바위 위에 고기를 구워놓고 기 다리고 계셨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추위를 녹여주는 따스한 모닥불과 구운 생선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정,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쏟았던 사랑을 원점으로 돌려버 리고 만 제자들의 죄책감과 무안함을 덮어주고도 남았다. 예수님의 자상한 배려 속 에 제자들은 믿음을 회복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집어주시는 생선과 빵을 묵묵히 받 아 먹으면서 말이 필요 없는 용서와 사랑을 느꼈을 터이다(요한 21,1 14). 55
요한복음의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그리던 갈릴래아 호숫가가 바로 이곳 이다. 비잔틴 양식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경건함과 단순함을 잘 보여주 는 성당 벽은 옛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친 회색 벽돌로 되어 있어 옛날의 모습 을 상상하게 해준다. 성당 옆문으로 통하는 낡은 돌계단은 오래된 바위와 맞물려 있었는데 커다란 바위틈에 순례자들이 남긴 기도 쪽지가 여기저기 끼워져 있다. 호 숫가로 내려가던 자매 중 한 명도 작은 쪽지에 기도를 적어 바위틈에 끼워 넣는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했다.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 이어지는 기도 를 통해 바로 그분, 같은 주님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음이 고맙고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성당에서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바닥에 하트 문양의 돌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 었다. 아마도 예수님과 베드 로, 그리고 제자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잘 보고 마 음에 새기라는 의미인 듯했 다. 성당을 나서면 바로 갈 릴래아 호수와 만난다. 사람 들이 호숫가에서 조용히 물 을 만지거나 주변을 산책하 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쪼 개져 내리는 햇빛으로 주변 이 온통 금색으로 빛났다.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갈 대, 그 사이로 햇빛에 빛나 는 물결이 소리 없이 오가 는 그곳 분위기는 그 옛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 자들의 행복과 평화가 그대 56
로 전달되어 오는 듯했다. 성당 왼쪽 무성한 나무 사이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 는 모습의 검은 대리석상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미사 를 드리는 순례팀이 보인다. 아저씨 한 분이 지키고 있다가 방해가 될까봐 그러는지 엄한 얼굴로 다가오지 말라고 손을 흔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예전의 이름 시몬 으로 부르시어 베드로가 처음 부 르심 받던 때의 처지로 되돌아갔음을 깨우쳐 주신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 로는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한 배반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슬픈 가운데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사랑 을 고백했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시고 예수님은 더 큰 사명을 맡기셨다. 나를 따라라.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요한 21,15 19) 이러한 무조건적인 예수님 의 신뢰는 오늘 나에게도 되풀이된다.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니? 나도 베드로처 럼 대답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배반하는 저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 하지만 이 모습 그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 서 아십니다. 받은 상처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기회가 되면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 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조건 없는 예수님의 용서 속 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자 굳은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무안하지 않게 나의 잘 못을 깨우쳐 주시는 주님, 그러면서 더 큰 부르심으로 이끄시는 주님. 주님, 배반과 악을 사랑으로 갚으시는 당신의 마음을 온통 저에게 쏟아주십시오. 예수님의 마을 카파르나움 예수님의 공생활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카파르나움은 베드로 수위권 성당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예수님 시대의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 한 중요한 상업 지역이었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고장(마태 9,1), 예수님의 57
집이 있는 곳(마르 2,1)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공생활과 밀접한 곳이다. 이곳 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다(마르 1,16 20; 요한 1,35 42).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오)도 이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마르 2,13 14; 마태 9,9; 루카 5,27 28). 카파르나움은 어느 곳에서보다 예수님의 많은 기적이 행해진 곳이다. 열병으 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 치유(마르 1,29 31),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마 르 5,35 43), 마귀들린 이의 치유(마르 1,21 28), 중풍병자를 치유시키셨으며(마르 2,1 12), 고관의 아들을 낫게 하신 기적(요한 4,46 53)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이곳 카파르나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회당에 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기도하시는 일상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상은 오늘도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 라를 전하는 이들이 나날이 더욱 그 순도를 높여가야 할 일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회개하는데 더디어 예 수님께 크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 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마태 11,23) 예수님의 마을 카파르나움 이라는 팻말이 달린 문으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정 원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베드로 동상을 만나게 된다. 한 손에 하늘나라의 열쇠 를 쥐고 있는 그 동상에서 크고 힘찬 베드로 사도의 위용이 느껴진다. 그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베드로의 집터 위에 배 모양으로 지은 성 베드로 기념성당이 있 다. 5세기 초엽에 이미 베드로의 집터에 있던 경당이 갈릴래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경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 었다가 1894년에야 프란치스코수도회의 발굴작업으로 시나고가와 베드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집터에서 베드로 라는 그리스어의 푯말과 어선 그림이 58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당은 발굴된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해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배 모양으로 지어졌다. 외부의 모습이 보이도록 투명유리로 지어진 성당은 전체적으로 현대적 감 각이 물씬 풍긴다. 우리는 어선의 내부 같은 성당 중심에 있는 제대에서 미사를 봉 헌했다. 오늘 신부님의 강론은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 을 부르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신다. 사랑으로 주님을 따르라 하심은 나 혼 자만의 부르심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주님 곁에 머물고 배우며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프란치스코수도회 수사님이 그렸다는 벽 화들이 인상적이다. 가이드는 우리를 성당 아래로 데려가더니 투명한 유리바닥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베드로의 집터가 보였다. 내려다보이는 집터를 보면서 예수님 59
께서 아픈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드로의 장모는 유능한 고기잡이 사위가 어느 날 갑자기 어부 일을 그만두고 예 수님과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참에 예수님을 집에까지 데려오자 그만 홧병이 난 게 아닐까. 그런데 장모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그 동안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바뀌는 걸 느낀다. 예수님에게서 전해지는 평온함, 확신을 느끼면서 사위 베드로가 왜 모든 걸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못마땅함에서 오는 신경성적인 병이 금세 사라지고 예수님을 접대하는데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까.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인품에서 우러나는 자비와 사랑에 매료되었을 테니까.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진 성당에서 나와 열대나무들과 꽃이 만발한 작은 정원 을 지난다. 그곳은 작은 야외 전시장으로 발굴현장에서 나온 조각품들, 기둥의 일 부, 돌로 된 절구, 포도주를 짜는 확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예수님 당 시 주거지역의 풍경도 볼 수 있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된 집안은 대부분 좁았고 마 당이 없었다. 문이 마주보이는 사이로 난 좁은 길이 큰길로 이어졌다. 이렇게 가까 이 붙어 살다보면 이웃의 사정을 잘 알게 되는 이점도 있겠지만 부작용도 많았을 것이다. 우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이웃 몰래 먹을 수 없어 무엇이든 나눌 수밖 에 없었을 테니 욕심스러운 이웃은 불편이 컸을 것 같다. 밤늦게 친구를 위해 이웃을 찾아온 친구에 대한 비유가 떠올랐다. 아무리 밤이 깊었어도 저렇게 붙어 있는 집이니 쉽게 찾아가 졸라댈 수 있었을 것이다. 잠을 깬 친구는 귀찮아서도 빨리 빵을 주었을 것이다. 저렇게 작고 복잡한 집안이니 동전을 잃어버린 여자가 그걸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성경시대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던 선배 수녀님들의 말씀이 새삼 실감났다. 60
주거지역 옆으로는 흰 대리석의 유다인 회당 시나고가가 있었다. 우리가 보는 건 물은 4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빵 에 관하여 말씀하신 회당 자리 라고 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 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순례를 하면서 자주 시간을 넘어서서 그분이 서 계시던 바로 그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경이로움으로 마음이 두근거린다. 카파르나움 주택가의 검은 돌로 지은 촘촘한 집들과 시나고가의 희고 웅장한 건 물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우리는 다시 갈릴래아 호수 근 처로 갔다. 갈릴래아 호수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는 20여 종이나 된다는데 가장 많 이 잡히는 물고기는 청어, 그 다음으로 베드로 물고기 라고 하는 생선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물고기 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가 생길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간 호수 근처 식당은 한국인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가 자 리를 잡고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와 식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음식 이 나왔다. 접시에 놓인 생선 튀김이 사람 수대로 놓여졌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 에 덜 벗겨진 굵은 비늘과 억센 가시를 가진 생선으로 모양새가 험했는데, 바로 이 것이 말로만 듣던 베드로의 물고기였다. 생선을 좋아하는 나도 알뜰하게 발라먹기 가 어려웠다. 생선에 소금간이 전연 없는 걸 보니 역시 갈릴래아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가 분명하다. 생선 튀김은 레몬 조각이 곁들여 나오긴 했지만 싱거운데다 느끼 했기 때문에 고추장이 필요했다. 이런 생선은 간을 해서 조리거나 찜을 하면 더 맛 있을 텐데 그런 요리법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올리브유로 튀 겼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동안 호수 근처를 돌아보았다. 물 속에 잠긴 바위에 갈매 기 몇 마리가 한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늘어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빈 의자가 운치 있어 보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앉을 시간이 없다. 짧은 산책 시간을 보 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 되어 버스를 타러 가는데 큰 키가 눈에 띄는 외국 61
인이 보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회 서명원 신부님과 김광현 교수님 일행이었 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이고 그분들은 식사를 하러 이곳에 도착하신 것이다. 이국땅에서 아는 분을 만나니 더욱 신기하고 기뻤지만 만남의 반가움을 사 진 촬영으로 대신하고 헤어졌다. 타보르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성당 한낮이 되자 날씨가 더워졌다. 우리가 탄 버스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평야지대로 들어서서 산간지방을 향해 달렸다. 약 30여 분을 갔을까 주변 풍경이 눈 아래로 펼 쳐지는 제법 높은 지대로 올라와 버스가 멈췄다. 그곳은 타보르 산에 올라가는 사 람들이 차를 바꿔 타는 중간 정거장으 로 또 어김없이 기념품 상점이 있었다. 멀리 타보르 산 정상의 예수님 변모 기 념성당 탑머리가 보인다. 해발 588m의 타보르 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 이라고도 하는 그곳은 걸어 올라갈 수도 있지만 시간이 넉넉지 못한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택시를 타야 했다. 나는 첫 번째로 봉고택시에 올라 약 십여 분쯤 가다가 차에서 내리니 주변 공기가 아주 청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널찍한 평지에 오래된 큰 건물들과 잘 가꾼 정원들이 있어서 산정상에 올랐다 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성당으로 걸어 가는 길 양쪽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시 원하게 뻗어 있었다. 주님의 거룩한 변 모 기념성당을 가운데로 오른편에는 성 지를 관리하는 프란치스코수도원이 있었 62
다. 왼편으로는 무너진 석조건물과 정원이 운치 있는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폐허가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차를 타고 자매들이 모두 올라오자 가이드는 먼저 대성당 옆 오른쪽에 있는 전망대로 우리를 데려갔다. 산 아래로 벚꽃 같은 화사한 꽃을 가득 피운 나무 들이 눈길을 끈다. 무성한 숲 뒤로 이어지는 산자락도 보인다. 그곳에서 마르코복음 9장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부분을 읽고 잠시 동안 묵상에 잠겼다. 그런 다음 가 이드의 설명을 따라 산 아래로 펼쳐지는 동쪽으로 요르단 계곡과 골란 지방, 남쪽 으로 널따란 이즈르엘 평야와 산악지대, 서쪽의 나자렛과 카르멜 산, 북쪽으로 갈 릴래아 산악지대를 둘러보았다. 지명이나 지역을 모두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구약 시대 때부터 중요한 의미가 있는 타보르 산의 전경을 마음에 담고 싶어 쉽게 시선이 돌려지지 않았다. 타보르 산은 이사카르 납탈리 즈불룬을 구분하는 경계 지역으로 구약시대 때 가나안 족들이 섬기던 바알 신전이 있던 곳이다(호세 5,1 참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열두 지파가 땅을 나눌 당시 타보르 산은 즈불룬 이사카르 납탈 리 지파 사이의 중요한 경계가 되었다고 한다(여호 19,10 19). 또 여예언자 드보라는 타보르 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이즈르엘 평야에서 가나안 족과의 대전투에서 승리 를 거두었다(판관 4 5장). 신약시대 타보르 산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이루어진 곳이면서 부활하 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전파 사명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신 곳(마태 28,16 20)이기도 하다. 이렇듯 신구약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닌 타보르 산은 4세기경부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여 초막 셋 을 상징하는 커다란 성전이 세워졌다. 그 성전은 7세기 초에 페르시아 군에 의해 무너지고, 12세기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소 유가 되었지만 십자군의 패망과 더불어 살라딘 군에 의해 다시 폐허가 되었다. 우여 곡절 끝에 4백년 후 1931년에야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이슬람교 군주의 허락을 얻어 63
상주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순례 도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내려와 예수님 의 거룩한 변모 기념성전으로 들어갔 다. 지금의 성당은 1924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성당 안은 외부의 밝 음을 가라앉혀주는 차분한 느낌이었 지만 모자이크가 화려했다. 2층의 중 앙제대 벽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표현한 모자이크 그림이 있었 다. 중앙 제대 양편으로 모세 기념경 당, 엘리야 기념경당이 있다. 아래층 의 중앙 제대는 윗층의 예수님의 거 룩한 변모 기념경당 바로 아래에 위치 하고 있는데 둥근 아치형의 창은 불 멸을 상징하는 공작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다. 공작의 활짝 핀 날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아름답고 고고한 기품을 풍겼다. 순례자들은 아치 양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둥근 천장화를 볼 수 있다. 그곳엔 예 수의 탄생, 어린양이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 성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미 하며 경탄하는 천사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들을 통해 구원자 예수님의 여러 면을 묵 상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사실 때 타보르 산에 여러 차례 올라가셨 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타보르 산에서 예수님은 산 아래로 펼쳐지는 평야를 바라보면서 요셉과 마리아가 들려준 구약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스라엘 민족 안에 이루신 하느님 역사의 완성 을 위해 파견된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 나가지 않으셨을까. 또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 64
두고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발현 장소를 타보르 산으로 정한 것 은 신구약에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민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곳임을 전제로 하신 것일 게다. 성당에서 나와 차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혼자 여행하는 한국 청년을 만 났다. 경북 포항에서 혼자 성지순례를 온 청년이라는데 신부님과 가이드와 잠깐 인 사를 하는 듯 보이더니 다시 걸어서 산을 내려간다. 카르멜 산 (MOUNT CARMEL) 이스라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 동쪽은 이즈르엘 평야가, 서남쪽으로는 샤론 평야가 펼쳐진다. 제일 높은 곳이 해발 546m이라고 하는 카르 멜 산 끝자락, 엘리야의 기적이 일어난 전설적인 장소에 세워진 카르멜수도원을 찾 아갔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즈르엘 평야에 쌓인 돌무더기 를 가리키며 그곳이 고대 팔레스타인 중요 도시였던 므깃도라고 알려주었다. 현재는 메깃도(Tel Megiddo)라고 부르는 그곳은 옛날 무역 중심지로 페니키아 여러 도시들 과 예루살렘, 요르단 강 유역까지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솔로몬 때 건축한 성벽, 성문, 저택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 마구간이 어림잡아 450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하니 솔로몬의 전차대와 말 교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1열왕 9,15). 923년경 이집트의 시삭(Sisak)이 므깃 도를 침략하여 파괴하였고 그 후 아합 왕 때 다시 재건되었다. 요시야 왕이 북진하 는 이집트 군대를 이곳에서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카르멜 산악지대 로 이어지는 길 들판에 고대부터 이어지는 인류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돌무더기와 잡풀들에 싸여 잠자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포도밭 이라는 의미의 카르멜 산은 히브리어로 케렘 포도밭, 과수원 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대부분 민둥산인 이스라엘의 산들과 달리 숲이 무 성했다. 65
카르멜 산은 어느 산봉우리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드넓게 펼쳐져 있는 산 악지대 전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기원전 16세기의 이집트 문헌에도 거룩한 산 으로 기록될 만큼 카르멜 산은 옛날부터 신성한 산으로 전해졌다. 구약성경에서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엘리야가 바알 신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1열왕 18,20 40). 이렇게 유장( 悠 長 )한 역사가 담긴 카르멜 산 지역은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아름다운 숲이 이어지고 이름 모를 풀꽃들과 화려한 양귀비꽃이 어우러져 순례객들의 눈길을 끈다. 우리가 카르멜수도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었는데 수도사들이 기도하 는 시간이라서 문이 닫혀 있었다. 이 수도원이 있는 주변이 바로 기원전 860년경 북부 이스라엘 아합 왕 때 엘리야가 바알신 숭배자들과 대결한 곳(1열왕 18장)으로 무흐라카 곧 불의 장소, 불이 내려온 곳 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수도원 담밖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가 수도원 정원에 있는 칼을 휘두르는 엘리야 예 언자의 석상 뒷모습만을 보고 돌아서야 했다. 수도원에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못 내 섭섭했다. 12세기경 성지 탈환을 위해 참전한 십자군 중 프랑스 기사들이 엘리야가 450여 명의 바알 예언자들을 물리친 다음 아합 왕의 보복이 두려워 피신했던 동굴(1열왕 19,8 13) 근처에 모여 엘리야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수도 생 활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카르멜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카르멜수도회는 특별한 창설자가 없이 구약을 거쳐 신약에 이르는 성경을 토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예루살렘 시 중심가로 들어가 그랜드 코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드디어 오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게 된 것이다. 해발 700 800m 높이의 산악 지역에 위치하며 평화의 도시, 평화의 근원지 라는 의미를 지닌 예루 살렘은 이스라엘 수도이다.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 이슬 람교 유다교의 신앙의 중심지이다. 66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루살렘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구원을 완성하신 거룩한 장소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성지요, 유다인들에게는 영원한 다윗의 도성으로 정신적인 고향이다. 이처럼 여러 종교의 중요한 성지 예루 살렘은 첨예한 종교 간의 갈등으로 평화의 도시 라는 이름과 달리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는 평화가 필요한 도시 이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성지라고 하면 술레이만 2세(1520 1566 재위)에 의해 1532 년 1539년 사이에 재건과 보수가 계속되었던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말한다. 현재는 구시가지의 모체였던 다윗 도시 터와 그리스도교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시온 산은 성벽 밖에 위치하고,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아르메니아 정교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호텔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있었 다. 유다인이 경영하는 호텔이어서 전에는 유다인에게 금기시 되는 돼지고기가 나 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인지 뷔페 식 식당에는 신선한 과일과 다양한 종류의 고기, 생선들로 풍성했다.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날마다 새롭고 의미 있는 성지를 돌아보는 것이 흥미롭 고 즐겁지만 빡빡한 일정에 지칠까봐 가이드는 우리에게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으 라고 한다. 목자들의 들판 예루살렘에서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지도 신부님의 절친한 후배이며, 이스라엘 에서 안식년을 지내고 있는 신부님이 우리 순례에 동행하신다고 했다. 또 이스라엘 에 파견근무를 하고 계신 무관 한동욱 베드로님과 부인 세레나 자매, 딸 제르트루 다가 순례 출발 시간에 맞춰 호텔로 오셨다. 우리는 새로운 분들의 출현이 반가워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누며 차에 올랐다. 우리는 우선 시온 산 성지로 가면서 성지 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돌로 된 성채처럼 우람한 건물 사잇길 67
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성모영면 기념성당이었다. 하지만 성당 문이 열리지 않은 이 른 시간이어서 베들레헴으로 방향을 바꿨다. 목자들의 들판과 예수성탄 기념성당이 있는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랍인 지역이다. 우리가 탄 차는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게 이트 앞에 있는 베들레헴 체크포인트 앞에서 멈췄다. 그곳은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 과 유다인 지역을 구분하는 분리 장벽이 시작되는 곳으로 유다인들의 검문소가 있 었다. 이스라엘 안전 요원들이 방탄 유리 건너편에 앉아 순례자들에게 여권과 허가 증을 보이라며 엄격하게 검문을 했다. 검문소 주변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총을 멘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분위기도 험악했다. 우리는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여권을 꺼내들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무표정한 얼 굴로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아랍인 버스 기사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으로 검문을 마쳤다. 차는 다시 달려 아랍인 거주 지역으로 들어섰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 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 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천년 전 한밤중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서 양들을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천 사가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그곳엔 우리나 라의 벚꽃처럼 생긴 화사한 아 몬드 꽃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옛날의 자연동굴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목자들의 들판에 서서 루카복음 2장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아름 답고 성스런 그 밤의 정경을 묵상했다. 겨울이라지만 한국의 봄날 같은 온화한 날씨 68
여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눈앞으로는 들판과 구릉이 보였는데 그 옆으로는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풀을 뜯고 있는 진짜 양들을 보자 우리 모두는 탄성을 질렀다. 그 옛날 거룩한 밤에 목동들과 함께 있던 그 양 떼를 우리도 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들판 여기저기에 사람이 들어가 쉴 만한 석회석 동굴이 있어 우리가 몸을 구부리 고 들어가니 작은 제대가 있어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늘에 천사들의 군대가 나타나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이 들 판은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밤이었지만 그 당 시 양을 치던 젊은 목동들은 아마 30여분 만에 아기 예수님이 계시던 곳까지 달려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찬 기운이 내려앉는 유난히 환했던 그 밤, 몸을 녹일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졸거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양 떼를 지키고 있 었을 가난한 목동들. 선택받은 이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변두리 들판에서 양 떼를 돌보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맨 먼저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그 밤으로 구세주 아기를 찾아간다.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아기는 소외된 삶을 사는 목동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고 그들과 같은 가 난한 처지를 택하셨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천막 을 치신 구세주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지금 이 들판에 보이는, 우리가 허 리를 굽히며 들어갔던 그 동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동들이 피곤한 몸을 쉬던 동굴 위에 세운 목자들의 기념성당을 둘러보 았다. 이곳의 바위 천장에 뚫린 별 모양의 구멍에서 내리비치는 빛은 바닥의 모자이 크로 된 별에 가 닿는다. 이는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큰 별이 머문 위치를 나타낸다 고 한다. 지금은 목자들의 들판과 베들레헴의 예수님 성탄 성당 사이에 잘 닦여진 도로가 생겨 차를 타고 가게 되니 그 옛날 거룩한 밤 별빛을 쫓아 목자들이 달려갔 던 들판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목자들처럼 꾸밈없고 가난한 마음에 구세주가 오시는 그 순수함을 마음에 깊이 담는 것으로 그 느낌을 대신해 본다. (다음호에 계속) 69
구약중급 1차 연수회 구약중급 2차 연수회
그리스도의 Kenosis와 노자의 虛 를 통해 본 현대의 자기 비움의 이해 이 루아 수녀 (성바오로딸수도회) 목 차 국문 개요 Ⅰ. 서론 78 Ⅱ. 본론 80 1.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적 삶 80 1.1. 자발성과 겸손 82 1.2. 무한한 신뢰 84 1.3. 개방성과 타자지향성 86 1.4. 무저항과 포기 88 1.5. 능동성과 원천적인 자기 비움 89 1.6. 역설( 逆 說 )과 부즉불이( 不 卽 不 二 ) 91 2. 노자의 허( 虛 ) 92 2.1. 통함을 위한 유약( 柔 弱 ) 95 2.2. 대( 大 )를 위한 허정( 虛 靜 ) 98 2.3. 자유를 위한 무위( 無 爲 ) 103 2.4. 영원성을 위한 변화( 變 化 )의 논리 110 3. 케노시스(Kenosis)와 허( 虛 ) 안에 드러난 자기 비움의 종합 112 Ⅲ. 결론 116 참고문헌 118 76
국문 개요 본 글은, 서구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발전 아래 성장해 온 인류가 과도하게 욕망을 채우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발생 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직시하면서 기존 의 소유적인 삶에 대한 대안적 삶의 방 식으로 비움의 삶 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같은 비움의 모 델을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인 케노시스 (Kenosis)와 노자의 허( 虛 )를 통해 모색 해 보고자 했다. 즉, 비움의 삶이란 어떤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건네는지 살펴보면서 두 사상 안에서 보 다 비슷한 요소로 드러나는 비움의 성격 을 포착함으로써 포괄적인 비움의 삶을 제시해 보고자 했다. 각기 동서양의 사 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두 사상 안 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에게 건네는 진리를 탐색하고 자기 비움의 의 미를 조명해 보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인 케노시 스(Kenosis)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 으로 한 주요한 사건들 안에서 비움의 성격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 았는데, 그리스도의 비움의 성격이 자유 로운 의지에 의한 것으로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겸손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으 며 이 비움은 언제나 성부께 대한 무한 한 신뢰와 사랑으로 이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에게 고착되지 않고 계속해서 타인을 향해 다가서는 사랑으 로 이어지는 성격과, 그것이 십자가 죽 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통해 충만하고 온전한 자기 비움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으로 채워 지기를 갈망하고 채움의 과정으로써 드 러난다. 노자의 허( 虛 ) 역시 곽점초묘죽간본 과 도덕경 에 나타난 비움에 대한 사상 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비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살폈는데, 이는 무엇보다 현 대사회가 지향하는 경쟁과 성공, 권력과 소유와는 상이한 가치인 후향( 後 向 )의 모 습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서로를 통하게 하기 위해서 약해지고, 인간의 참된 생 명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욕심을 내려놓 고 자신을 비우도록 초대한다. 비폭력, 자기 절제, 조화와 화합이라는 비움의 논리를 통해 오히려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역설의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 스(Kenosis)와 노자의 허( 虛 )가 드러내는 비움의 성격을 종합하면서 보다 공통적 77
요소들을 수렴해 보고자 했는데, 그것 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 비움의 삶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을 도 피 없이 직면하면서 실천되지만, 삶에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고 지향하면 서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초월을 지향 한다는 것, 둘째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비움이 아니라 언제나 타인에 대한 배려 와 사랑으로 자신의 시간이나 생각을 내 어주도록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비움은 자유와 인간 완성을 지향하는 질적인 비움이라는 차원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 글에서 비중을 두 었던 점은, 비움의 삶은 타인 지향적인 삶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타인이란 직 접적으로는 우리의 이웃을 지칭하지만,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 을 떠나 외부로 시선을 던지는 이에게 타인이란 자신의 외부 즉 이웃, 새로운 사건, 상황, 생태, 새로운 사고로 확장되 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존 재 이유를 나 에게서 너 에게 두는 방식 은 배려와 사랑 안에서 점차적으로 상생 의 삶을 향해 폭넓게 자신을 개방하는 과정이며 이는 이기적인 자기 존재를 끊 임없이 비워가는 비움의 정수를 보여주 는 것이라 생각된다. 본 글은 낯선 주제의 이야기는 아니라 고 생각된다. 이미 오랫동안 많은 이들 이 지향했던 삶이기도 하고, 또 여전히 많은 이들이 확신하며 걷고 있는 길이기 도 한 때문이다. 오늘날 당면한 생태적 위기, 지독한 이기주의와 권력의 남용, 부와 지식의 극심한 양극화, 폭력적이고 과격한 삶의 양태, 고독과 인간 소외 현 상, 생명 경시와 같은 인간 존재의 뿌리 를 뒤흔드는 현실 앞에서 비움의 삶은 분명 희망이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생각된다. 비움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곧 채움이라는 진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 에게 희망이 되고, 혼란한 세상 안에서 자신을 추스르는 하나의 밝은 불빛을 발 견하게 되었으면 한다. Ⅰ. 서 론 1. 연구 목적 지구상에 생명체가 생기고 약 15만 년 전에 등장한 현생 인류의 역사는 끝없 는 욕망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지구 촌이 되고 세계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었으면서도 그 안에는 여전히 자국의 이익, 공동체의 이익, 개인의 이익이 뒤 얽혀 서로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이기적 패러다임이 자리하고 있다. 78
2011년 3월 11일 쓰나미와 대지진이 쓸고 간 일본 미야기현의 모습은 참혹 했다. 교체 시기를 미뤘던 노후된 원자 로 파손으로 방사능 누출까지 겹치면서 그 피해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이 다. 파손된 후쿠시마 원전 3호기는 우라 늄과 플루토늄을 원료로 하는 원전이다. 플루토늄은 순도 90%에서 농축하면 핵 폭탄이 되는 물질인데, 전문가들은 일 본이 적어도 47톤 정도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원전에 대한 피해 파 장 축소 보도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고, 기밀 유지를 위한 늦장 대책이 인재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근하게 일어나는 이기적인 자 국 이익 추구가 불러온 재앙이기도 하 고, 강자독식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낸 하 나의 예로 보인다. 한계를 모르고 욕망 을 채우는 일에 질주한 인류는 산업화,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통해 자본지상 주의 시대에 접어들게 했다. 물론 근대 를 주도해온 서구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은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과 교육을 통한 인간의 지적 성장, 억압적인 사회 구조 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지만 핵의 위협, 산업화와 난개발로 인한 생태계 파괴, 극심한 양극화 등은 인간의 무절제한 탐 욕이 불러온 현실로, 근저에는 자본주 의적인 논리와 소유에 대한 집착이 있었 다. 이제 인류는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이는 지금껏 우리를 지배했던 삶의 양식에 있어서 변 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하 나의 대안으로 근대를 특징지었던 소 유 라는 삶의 방식에서 존재적인 삶의 양식으로, 다시 말하면 욕망에의 집착 에서 비움 으로의 전환을 조명해 보고 자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인 케노 시스(Kenosis)와 노자의 허( 虛 )라는 차원 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물질과 인간의 주종 관계 를 전복시키고 소유와 탐욕으로 물든 사 회에 비움의 삶 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지 평과 가능성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연구 범위와 방법 본 글은 현대의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비움의 삶 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 스도의 케노시스(Kenosis)와 노자의 허 ( 虛 )를 통해 비움의 삶이란 어떤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건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두 사상 안에 79
서 보다 비슷한 요소로서의 비움을 포 착함으로써 포괄적인 비움의 삶을 제시 하고자 했다. 를 뒤흔드는 현실 앞에서 희망이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음을 살 펴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인 케노시 스(Kenosis)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 으로 한 주요한 사건들 안에서 비움의 성격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노자의 허( 虛 )는 곽점초묘 죽간본 과 도덕경 에 나타난 비움에 대 한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역시 그 비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주목해 볼 것이다. 곽점초묘죽간본 은 양방웅 의 초간 노자 를 참고했으며, 도덕경 은 특별한 판본 없이 박은희의 노자 나 최 진석의 도덕경, 이현주의 노자 이야기 등을 때에 따라 참조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 스(Kenosis)와 노자의 허( 虛 )가 드러내는 비움의 성격을 종합하면서 보다 공통적 요소들을 수렴해 보고자 했다. 현대사회 가 지향하는 경쟁과 성공, 권력과 소유 와는 상이한 가치로서 후향( 後 向 )의 삶 인 자기 비움의 삶은 분명 우리에게 도 전이 되지만 오늘날 당면한 생태적 위 기, 지독한 이기주의와 권력의 남용, 부 와 지식의 극심한 양극화, 폭력적이고 과격한 삶의 양태, 고독과 인간 소외 현 상, 생명 경시와 같은 인간 존재의 뿌리 Ⅱ. 본 론 1.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적 삶 일반적으로 비움을 뜻하는 케노시스 (kenosis)가 성경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 고 있는지 살펴보자. 희랍어의 케노스(κε νδζ)는 빈(empty), 내용이 없는(without content) 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케노 스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속이 빈 혹은 어리석고 경솔한 사람, 비슷 하게는 쓸모없고 부주의한 사람 1) 을 의 미했고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도 부정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 약에서는 소유물 없이 돌려보내다, 받 는 것에 실패하다, 빈손으로 떠나보내 다 와 같은 의미 외에 비유적 의미로 보 다 많이 사용되면서 2) 주목해 볼만한 표 현이 등장한다. 곧 마태오복음 3장의 산 상수훈에 등장하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 들 이란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 1) 최정자, 예수의 자기 비움 케노시스, 서강대 학교 수도자 대학원 석사논문, 1997, p.p.5 6. 2) 위의 논문, p.6. 80
은 가난의 영을 가진 사람들, 곧 겸손 한 영혼을 지닌 사람 3) 을 뜻하는데, 의지 적으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온 전한 의탁의 정신과 겸손을 지니고 소외 된 이들을 향해 자신을 내어놓은 이들 을 4) 가리킨다. 이들은 자신을 비운 사람 들임을 가리킨다. 에카르트는 가난한 사 람에 대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며 아것도 갖지 않은 사람 5) 이 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표현을 영으로 가난한 자 의 이해에 적용해 본다면, 인 간을 얽매는 다양한 애착의 끈을 풀어버 리고 그 비움의 자리를 그리스도께 내어 드림으로써 삶의 변화를 체험하고, 그리 스도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보 다 큰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험 한 이들 6)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필리피서를 제외한 바오로 서간에 드 러나는 케노시스(κενοσιζ)는 헛됨, 효 과 없음 7) 으로 쓰였으나 그리스도 찬가 가 삽입된 필리피서에는 케노시스에 대 한 중요한 사상이 8) 드러나고 있다. 즉, 케노시스가 예수의 신성이 육화라는 의 지적 겸손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음 9) 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 다. 또한 케노시스는 비움 혹은 스스 로 비우는 행동(self emptying) 을 나타 내기도 하는데 그리스도 찬가의 자기 비 움의 표현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바오로는 필리피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 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의미로 전례 모임에서 부르던 예수찬가인 그리스도 겸허가( 謙 虛 歌 )를 통해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를 강조했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비움의 삶을 살아가길 10) 권고했다. 이 같 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자기 비움은 곧 전적인 자기 개방과 겸손, 자기 포기 를 통해 구원 신비의 문을 여는 핵심 11) 3) 송창현, 예수의 행복선언에 나타난 영으 로 가난한 사람들, 현대가톨릭 사상No.27, 2002, p.17. 4) 김지황, 가난한 삶을 살기 위한 사제의 정체 성 확립, 부산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2002, p.13. 5) 토마스 머튼, 장은명 옮김, 선과 맹금, 성바 오로, 1998, p.134. 재인용. 6) 양만호, 자기 실현과 자기 비움 : 칼 융과 토 마스 머튼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신학전문 대학교 석사논문, 2004, p.p.41 42. 으로 표현되고 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바 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으로 드 7) 최정자, 같은 논문, p.7. 8) 곽승룡, 비움의 영성, 가톨릭출판사, 2004, p.p.95 96. 9) 위의 책, p.95. 10) 최정자, 같은 논문, p.p.10 11. 11) 위의 논문, p.2. 81
러났는데 구약성경에는 배신과 일탈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변 함없는 하느님의 충실(hesed)과 그 백성 에게 갖는 연민과 사랑(rahamim)을 통 해 드러난다. 사랑과 자비는 그것을 줄 수 있는 자가 내어줄 때만 가능하며, 이 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하 느님의 구원 방식인 자기 비움 12) 을 드러 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처지까 지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겸손, 자신 을 내려놓는 철저한 비움, 십자가 죽음 을 통한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 물로 내어놓는 자기 포기가 있었다. 이 런 예수의 자기 비움은 자발적 비움이면 서, 타인을 향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비움이었다. 낸다. 하느님의 자기 비하의 양식이 신약 에 와서 육화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보 다 명확히 드러났기에, 그리스도의 삶 전체는 자기 비움의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생활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행 위, 가르침, 인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은 철저히 성부를 향한 사랑의 응 답이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응답을 위 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비우 셨기 때문이다. 칼 라너는 예수가 인간 으로 있으며 행한 것은 우리에게 구세주 로서 로고스 자신을 계시하는 로고스 의 현존이다. 13) 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와 동일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머무시 면서 하느님을 드러내신 모습 안에는 인 12) 이철민, 그리스도교 은총 이해 안에서 본 케노시스, 부산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2005, p.15. 13) K.Rahner, Bemerkungen zum dogmatischen Traktat De Trinitate,in :Schr. z. Theol. Ⅳ, Einsiedeln 1960, 이철민, 같은 논문, p.39, 재인 용. 1.1. 자발성과 겸손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지극히 자신 을 낮추는 겸손의 모습으로 드러난 육화 사건은 하느님의 역동적 구원행위인 케 노시스가 14) 드러난 첫 번째 행위였다. 창 조주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강생하셨는데, 이는 스스로 죄인들과 같 이 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15) 하신 까닭이다.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을 칼 라너는 하느님의 지고한 인격적 자 유에 의한 행위 16) 로 이해했다.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이 이 같은 선 택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육화는 피조물인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14) 이철민, 같은 논문, p.25. 15) 위의 논문, p.40. 16) K. 라너, 이봉우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 입 문, 분도출판사, 1994, p.172. 82
조건 없이 무상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주 어지는 것이고, 인간이 죄에 의해 하느님 으로부터 떨어져나간다 해도 그분의 사 랑은 그것에 앞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명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 찬가 중 일부의 내용 을 살펴보도록 하자. 따라서 하느님의 비움은 폐쇄적 태도에 의한 인간의 죄를 극복하게 하며, 이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 17)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는 지를 기억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 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하느님이 인간의 경험 전체 곧 고 귀한 것과 범속한 것, 나약함 18), 죄와 죽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 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 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 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 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 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 하셨습니다.(필리 2,6 8) 음의 체험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음 을 의미한다. 강생은 결국 수난을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는 삶의 과정 안에서 자 신이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체 험할 정도로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황 19) 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필리피서의 그리 스도 찬가에서는 그 모습을 겸손 과 비 움 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본 질 과 종의 신분, 낮춤 과 현양되어짐 같은 다른 색을 지닌 상이한 전망 20) 을 통 17) 위의 책, p.172 18) W. 카스퍼, 박상래 옮김,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2000, p.330. 19) 최영철, 십자가 신학, 성바오로, 1996, p.121. 20) 마리오 세렌타, 곽승룡 옮김, 어제와 오늘 그리고 항상 계실 예수 그리스도, 대전가톨릭 필리피서 2장 6절의 하느님의 모습 이란 표현은 본질과 외형적 신분을 21) 가 리키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같 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음 으로써 동등한 하느님과의 동질성을 포기하셨 으며,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종의 형 상을 받아들이셨다 22) 고 말한다. 하느님 의 육화는 그 어떤 특권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자기 비움이 철 저하면 철저할수록 성부께 대한 신뢰는 대학교 출판부, 1998, p.208. 21) 김명수, 바울의 케노시스 그리스도론과 노 자사상, 기독교 언어문화 논집 Vol.7, 2003, p.5. 22) 이철민, 같은 논문, p.p.40 41. 83
더욱 온전해진다. 7절의 자신을 비우시 다(heauton ekenosen) 는 예수께서 비 움의 주체이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비웠 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분은 스스로 신 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 10,18)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 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적 모습을 버리셨으며 이런 자발성에 따 른 자기 비움은 외적 변화를 넘어선다. heauton은 자신 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는 신적 존재의 본래 자아 를 말한다고 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본성을 포기하 고 사랑하는 인간의 한계와 변화를 받 예수의 자기 희생은 인간이 행할 수 있 는 자기 헌신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 결과도 질적으로도 다르다. 그것은 하 느님의 사랑을 받는 외아들의 자발적인 자기 헌신 26) 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들이심은 역설적 진리를 내포 23) 한다고 하겠다. 이제 자기 비움 은 종의 모습 을 취하셨다. 는 표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 에서 종 으로의 자기 비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모 습을 지니신 육화의 사건을 지칭 24) 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자발적인 자기 비움 과 자기 양도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 지 계속 이어지며 이는 예수의 자기 내 어줌이 사랑의 동기에 의해 결정된 것으 로 25) 보고 있는 요한복음에서 다시 확인 된다. 1.2. 무한한 신뢰 그리스도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 받고 멸시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통 해 분열된 인간 사회를 포착했다. 사실 그분은 고통 받는 이들과 멀리 떨어진 채 제3자로서 바라보고, 보살피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로, 가난한 이로 사셨다. 우리에게 알 려진 바가 거의 없는 예수의 성장기에부 터도 그분의 특별한 출생의 사연 때문 에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성장했을 것 27)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 23) 김명수, 같은 논문, p.6. 24) J. Gnilka 外, 김경희 역, 국제성서주석 : 필리피서, 필레몬서, 한국신학연구소, 1988, p.p.200 201. 25) W. 카스퍼, 같은 책, p.341. 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예수는 육 화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 26) 위의 책, p.342. 27) 송봉모, 공생활 이전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삶, 신학과 철학 No.7, 2005, p.p.71 72. 84
로 취하셨다. 그러나 공생활을 통해 드 러나는 예수의 자기 비움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와 고통, 가 난함 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 뢰로 드러나고 있다. 무시하고 싶은 인간 현실이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지 름길이 될 수 있음을 예수는 당신 삶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태도는 제자들과 군중들에게도 요청되 어지며,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느님 께 의탁하면서 물질적, 정신적 애착들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시작 하도록 초대하신다.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풀 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 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루카 12,24 28) 루카복음 12장의 말씀은 반복되는 일 상의 걱정에 매여 삶의 의미를 잃어버 릴 수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아버지 께 신뢰를 둔 예수의 자기 비움은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요구된 자 세였고 그것은 오늘날 부르심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요청되는 자세이다. 까마귀들을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씨 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골방도 곳간도 없다. 그러나 하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 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느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 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너희 가 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가 이 처럼 지극히 작은 일도 할 수 없는데, 어 찌 다른 것들을 걱정하느냐? 그리고 나 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 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 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 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들에 서 예수께서 첫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 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의 숨은 뜻은 어 렵지 않다. 그것은 하느님 뜻과 다른, 사 욕과 사심이 복음을 선포하는 상황에 끼어들어 본말이 전도되거나 희석되지 않도록 철저히 자신을 비운 신뢰의 정신 안에서 선교하도록 제자들에게도 강조 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는 이 같이 단순 하고 정제된 삶을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85
가르쳤을 뿐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 으로 살아내셨다. 의 율법이나 관습에 매여 있지 않으셨기 에 종종 그분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큰 스캔들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 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 9,58) 당시 유다인들은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철저히 터부시했다. 그러나 예 수께서는 유다인에게는 원수와 다름없 예수의 비움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 지가 될 수 있는 가정과 고향, 소유물이 라는 인간의 필요조건들을 떠나는 데까 지 확장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에게 기 본적으로 필요한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 인 배척이나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 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의 자기 비움은 단지 버리고 비우는 그 자체가 있는 것 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아버지를 따르기 위한 보다 충 만한 채움을 위한 비움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예수의 케노시스적 삶 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일치를 통해서 보 다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며 당시 문화와 관습 을 뛰어넘으셨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 해서라면 자신에게 다가올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의 자세였다. 같은 맥락 안에서 예수께서 는 당시 사회에서 볼 때 무척 이례적으 로 여성들과 아이들을 존중하셨다(루카 9,47 48). 이는 고정된 사고에 안주하는 이,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나 목숨에 애착하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도 전이 되는 일이다. 그분은 대립과 갈등, 사회적 분위기에 매여 있지 않으시며 자 신이 만나는 비유다인들을 받아들이면 서 하느님 나라의 포용성 28) 을 이해했다. 1.3. 개방성과 타자지향성 지상에서 사셨던 예수는 우리에게, 외 예수께서는 당시 신분이 수상한 천민들, 피지배층이었던 죄인과 종교 의식적으 로 부정한 이들과 우정을 나누셨고(마르 부 상황에 자신을 열고 굳어진 사회적 관습과 상황을 뛰어넘는 개방성을 지향 하도록 도와준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 28) 유정원, 다종교사회와 생태위기 시대의 그 리스도 이해, 가톨릭대학교 박사논문, 2010, p.218. 86
2,16), 당신 제자들에게는 종처럼 행동 29) 하셨다(요한 13,1 17). 최후만찬 식탁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죽음에 앞서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기 위해 그들 의 발을 씻어주셨다(요한 13,3 17). 노예 들이나 하는 가장 비천한 시중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자유로움을 드러내셨으며, 그 사랑의 힘은 예수를 어떤 틀에도 가둘 수 없게 했다. 예수께 서 당신 자신이 병든 이들의 의사로, 세 상에서 고통 받는 죄인들을 부르러 왔 다고 하신 말씀처럼 당시 사회와 종교가 배제하고 멸시했던 이들과 어울렸다. 사 회 중심부에서 밀려났을 뿐 아니라 하느 님께 버림받아 구원받을 희망을 상실했 다고 낙인찍혔던 이들에게 30) 하느님이신 분께서 이제 그들을 경계 없는 온전히 열린 자세로 끌어안는 것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의 또 다른 특징은 그 비움이 언제나 타인에 대한 사랑으 로 이어지며, 타인을 향한다는 점이다. 복음서에는 거의 언제나 사회에서 버 림받은 이들이 등장하는데, 예수께 가 장 가난한 이들은 유다사회와 종교로 부터 보호받지 못해 잠잘 곳 없고(루카 14,21 23), 거리를 헤매는(마태 11,15) 이 29) W. 카스퍼, 같은 책, p.97. 30) 유정원, 같은 논문, p.204. 들, 슬퍼하는 사람들(루카 6,21), 하느님 으로부터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고 멸 시받던 병자들, 악령 들린 이들 31) 이었 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회에서 천대받 는 이들과 하나가 되셨다. 복음에서 예 수께서는 먹보요 술꾼 으로 불리며 세리 와 같은 죄인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고 전하면서 그분이 가난한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사신 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 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시선에서 가난한 이들을 보셨다면 결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체면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들 자 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셨다. 타자의 철학을 통해 환대하는 주체 를 말했던 E. 레비나스의 말은 이런 의 미에서 예수를 떠오르게 한다. 그가 말 하는 환대는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하는 것은 고아와 과 부, 나그네, 이방인과 같은 가난한 이들 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레비나스가 말한 주체 란 사리사 욕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무게와 어두 움을 모른 척 하지 않고, 끊임없이 타인 의 짐을 먼저 나서서 함께 떠받치며 짊 31) 위의 논문, p.202. 87
어지고 나누는 존재라고 말했던 점이다. 이런 전망 안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인 류를 향한 사랑과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몸소 지길 원하는 마음이 온유 하고 겸손한 분 이며, 무거운 짐에 눌린 이들을 기다리시는, 환대를 실천하는 주 체이시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의 삶을 통해 가 난한 사람으로 개인적 사욕과 애착들을 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 14,22 24) 언제나 이웃을 향해 자신을 떠나 온 전히 자기를 내어주는 예수의 자기 비움 은, 소외된 사회의 빈곤한 자들과의 동 일시 안에서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 하게 한다. 비워내셨고 사람들에게도 이를 강조하 시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소외된 이들 에게 베푼 것이 곧 주님께 한 것과 같다 고 하셨는데, 가난한 이들을 당신 자신 과 동일시하심으로써 사회가 그들에 대 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도록 초대하신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에 게 타자일 수 있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 받는 이들을 섬기고 그들의 존엄성을 인 정하고 동등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을 따르는 참 제자의 길 32) 임을 말씀 하셨다. 바로 이런 삶의 배경 아래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실 때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 히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비움을 실천 1.4. 무저항과 포기 자기 비움의 극치인 예수의 십자가 죽 음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을 엿보게 한다. 비폭력과 무저항의 정신이 명확히 드러났던 십자가 사건 이 전에, 예수께서는 공생활 중에 원수 사 랑의 가르침을 통해 폭력을 포기하고 불 의와 강요 앞에서 저항하지 말 것을 강 조했다. 예수께서 폭력을 버리라고 요구 한 결정적인 대목은 마태오복음의 산상 수훈과 루카복음의 평지설교에서 드러 나는데 모두 원수 사랑이라는 테두리에 담긴 가르침 33) 이었다. 하신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 32) 유정원, 같은 논문, p.p.88 89. 33) 잉오브뢰르, 장익 옮김, 예수는 비폭력을 호소했는가, 울림: 깊고 넓고 맑은 삶을 위하 여 Vol.14, 신앙아카데미, 2006, p.14. 8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 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 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루카 6,28 29) 력적으로 똑같이 반격을 하게 할 정도로 그 전염성이 매우 크다고 말한다. 비록 이런 수단이 여러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폭력이란 결국 악의 수 단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폭력과 정 면 투쟁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이미 폭 력에 패배한 것이 된다. 예수의 요구는 예수께서는 악에 대해 결코 악으로 대 응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인류가 생 긴 이래 존재해 왔던 양육강식적인 폭 력이 고착화된 구조를 묵인하는 것이거 나 두려움 때문에 지배층의 폭력을 외면 하는 무책임한 태도처럼도 보인다. 그러 나 예수의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은 단 지 악에 대한 소극적 침묵을 말하는 것 은 아니라고 보인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악의 한계 없는 복수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용서와 사랑을 통해 악에 대응해야 바로 이런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한 하나 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오직 폭력을 폭 력으로 갚지 않으려는 곳에서만 악의 지 배력은 사실상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 다. 35) 바로 이런 정신은 자신 안의 앙갚 음에 대한 감정을 비울 때 가능하다. 이 와 같은 예수의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히 실현되었다. 세상의 지배욕과 억압에 대한 욕구를 끊 기 위해 하느님이 대처하시는 방식이 비 폭력과 무저항인 십자가로 드러났다. 한다고 했다. 예수의 비폭력은 본질적으 로 인간 안에 있는 폭력과 악에 대한 비 움을 드러낸다. 이는 아주 작은 타격에 도 똑같이 보복하고 싶은 유혹과, 폭력 에 대해 또 다시 폭력을 행사하게 하는 대항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기 위해 상대를 원수로 보는 마음을 내려놓으라 1.5. 능동성과 원천적인 자기 비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셨던 계 약은 자기 낮춤과 자기 소외, 자기 제한, 그로 인한 고통의 자발적 수락을 전제 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심으 는 의도 34) 가 내재되어 있다. 폭력은, 폭력에 맞서는 이에게 불가항 34) 위의 글, p.23. 35) 라이문트 슈바거, 손희송 옮김, 희생양은 필 요한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9, p.p.285 286. 89
로 유한한 창조 세계인 죄의 역사 안으 로 들어오셨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 분은 세상에 당신 자신을 던지셨기에 인 간이 겪는 아픔과 고통에 무관할 수 없 었으며, 스스로 고통 받는 분이 되신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열정적으로 인간 의 운명에 동참하시는 분 36) 으로 계시되 었다. 으신 모멸과 버림받음은 성부에게서도 그러했다 39) (마태 27,46; 마르 15,34; 시편 22,2). 예수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인 죽음에까지 내려간 자기 비 움의 극치를 40) 보여준다. 물론 인간 지성 으로 이 사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 같은 예수의 버림받음은 하느님 자신 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자 없이 성부께서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히브 4,15) 하느님이 되길 원하지 않으셨기에 십자 가의 버림받음은 예수의 죽음이며 동시 에 성부의 죽음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 생명을 내어놓는 순명과 사 랑을 통해 성자는 십자가에서 하느님 아님( 非 神 ) 을 체험했다. 곧 하느님 아 기득권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예 수의 십자가 죽음을 바오로는 케노시스 의 극치로 선언했다. 37) 로마서 8장 32절, 갈라티아서 1장 4절에서는 예수의 죽음 을 내어주다 의 의미인 두나이(δοναι)라 는 동사 38) 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는 예 수 자신이 죽음을 통해 세상에 대한 사 랑을 아낌없이 보여주셨으며 그 사랑은 님 은 신성을 포기하는 원천적인 자기 비움이면서 삼위일체의 본성인 원천적인 자기 비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41) 고 말 한다. 예수께서는 온전한 자유로 죄스런 인 간을 끌어안으셨기에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와 직면하셔야 했다. 죄란 하느 님으로부터 분리로, 십자가의 버림받음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 는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인간들에게 받 36) 최영철, 같은 책, p.146. 37) 김명수, 같은 논문, p.p.9 11. 38) 김희성, 신약성서의 십자가 이해, 교수논 총 Vol.16, 서울신학대학교, 2004, p.3. 39) 최영철, 같은 책, p.p.137 138. 40) 윤정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랑 : 칼 라너의 사랑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발타살의 물 음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2004, p.82. 41) 윤정현, 같은 논문, p.79. 90
을 통해 예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 부터 완전한 버림받고 분리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셨다. 예수는 죽음 을 통해, 죽을 운명에 있는 그리고 지옥 에 있는 인간들과도 철저히 함께하신다. 시대와 종교, 인종과 사상, 시간을 뛰어 넘어 예수의 구원 행위에 제외되는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무엇 보다 사랑의 살아 있는 역동성을 드러내 는 것으로 정체되지 않고 움직이는 행동 으로 드러났으며, 사랑하는 이와 일치하 여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었다. 십 자가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은 일로 보 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이유가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 죽음과 지옥에로 까지 내려가는 끝없는 하강과 추락, 비 움의 사랑 42) 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 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 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 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 을 당하였다. (이사 53,8) 이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자신을 죽음 에 이르기까지 낮춘 예수께 대한 부연 설명처럼 보인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예수의 자기 비움의 가장 깊은 의미는 십자가상에서 확연히 드러나며 하느님 에 의해 현양되어지는 그리스도 찬미가 의 상승운동이 시작되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에 의해 다시 높여지는 상승의 운동 43) 으로 드러 난다. 1.6. 역설( 逆 說 )과 부즉불이( 不 卽 不 二 )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은 결과적 으로 현양되어짐으로 드러난다. 필리피 서의 그리스도 찬미가는 하느님께서 인 간이 되는 자발적인 자기 비움에 초점 이 맞춰진 하강운동과, 인간을 위해 죽 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높 여지는 상승운동의 두 부분으로 나눠진 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상승운동은 자신을 비우는 하강운동이 전제가 되고 있으며 그것은 철저히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 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 서 부활할 사실을 미리 알았기에 십자가 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 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지만 자신을 모두 내어놓고 걸으셨던 그 길은 영광과는 거리가 먼 자기 비움 42) 위의 논문, p.p.81 82. 43) 마리오 세렌타, 같은 책, p.202. 91
과 내어줌으로 점철된 길이었다. 여기에 는 종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예수께 서는 고통을 받아 안으려는 의지, 하느 님의 구원 계획에 순명하려는 의지 안에 서 자신을 비웠으며 자신의 영광이 아니 라 끝없이 낮아지는 겸손과 감춤, 고통 의 길을 선택 44)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의 죽음은 단지 죽음으 로 끝나지 않고 인간을 그들의 가장 큰 심연인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 습이 실현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본 글 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비움의 몇 가지 큰 측면만을 보았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그 특성은 언제나 각각 구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많은 경우 복합 적인 의미를 동반한다고 보인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은 본질적으로 성 부에 뜻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모든 인 간을 위한 온전한 자기 내어줌을 전제하 고 있다. 까지 이른다. 부활은 이와 같은 아들 의 순명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 45)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 로 인해 모든 것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 는 그곳에 주도적으로 하느님께서 개입 하심으로써 46) 예수를 드높이 올리시어 (hyperupson) 그분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선물로 주어진다. 여기에 서 우리는 케노시스와 후페룹소, 즉 낮 아짐과 높여짐, 죽음과 부활은 서로가 서로를 해석하며 둘은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와 다름없는 부즉불이( 不 卽 不 二 )의 관계 47) 로 존재함을 본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자기 비움의 모 44) 위의 책, p.p.201 202. 45) 이철민, 같은 논문, p.45. 46) 김명수, 같은 논문, p.6. 47) 위의 논문, p.7. 2. 노자( 老 子 )의 허( 虛 )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드러 난 예수의 자기 비움에 비견되는 사상을 동아시아 사상, 특히 노자의 사상 안에 서 찾아보려 한다. 노자 철학의 핵심적 범주인 허( 虛 )를 보기 전에 상위 개념이 라고 할 수 있는 도( 道 )를 살펴보려고 한 다. 그것은 허( 虛 )가 도( 道 )의 속성이며, 상태, 때론 그것이기도 하기에 도( 道 )의 개념 없이 허( 虛 )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 는 까닭이다. 노자는 도( 道 )를 천지( 天 地 ) 이전, 어 미 같은 존재로 보면서 질서에 앞서는 개념으로 보았다. 도( 道 )란 그 형체가 없 기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며 인간이 붙이는 개념과 명칭을 초월하고 있다고 92
했다. 이 같은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도 ( 道 )는 텅 비어 있다고 했지만 분명한 것 은 그 텅 빔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 니라는 것이다. 순수한 무( 無 )이지만, nothingness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그 는 무( 無 )라는 글자를 즐겨 사용하면서 도( 道 )가 보통 사물과는 다른 속성을 지 님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 하면, 노자는 도( 道 )를 인간의 언어개념 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본질로, 카오스와 같은 미분화된 원초적 실재로서 우주만 물의 근원이자, 존재방식, 인간이 따라 야 할 근본 이법으로 보았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사상에서 도( 道 ) 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방식으로, 정 지되어 있거나 정착하는 성질의 것이 아 니다. 그것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지만, 그 변화는 일관되고 영원( 常 )하다. 즉, 자연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자연 그 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변하지 않는 성품은 상( 常 )이며, 그 변화를 주도하 는 근본 질서인 도( 道 )는 변함이 없다 48) 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변화 라는 표 현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모든 만물은 변화 속에 존재하므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 라서 노자에게 도( 道 )란 변화를 포용하 48) 양방웅, 초간 노자, 예경, 2003, p.53. 는 개념이다. 노자는 이런 도( 道 )를 물이나 아기, 여 성, 소박함, 허정( 虛 靜 ), 무위( 無 爲 ) 등을 통해 말했다. 이는 인위적인 힘을 가하 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도( 道 )의 상태, 속성이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목해 볼 것은 노자가 도( 道 )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것들은 모두 변화에 가장 잘 순 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일정한 모습을 고집하지 않기에 일 방통행을 지양한다. 이는 노자가 허심 ( 虛 心 )으로 변화에 응할 때 영원히 존속 할 수 있지만 변화됨을 거부하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한다 49) 고 보았던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자의 도( 道 )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과 비교해 볼 때 그 성격은 분명 다르다. 인격신 개념이나 초월성이 아니라 철저 히 무규정적이며 내재적 성격을 지니는 도는 그것을 통해 만물이 생성되었지만 우주 없이는 도( 道 ) 역시도 존재할 수 없 는 무한성과 제한성을 동시에 포함하며 하나의 자발성의 원리로 외부와 자연스 럽게 상호교류하면서 변화, 확장해 나가 는 자연의 모습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49) 김경수, 노자의 부정의 사상 연구, 성균관 대학교 박사논문, 1999, p.136. 93
이제 도( 道 )의 속성으로서의 허( 虛 )를 살 펴보자. 노자 철학의 핵심 범주 가운데 하나 인 허( 虛 )는 비어 있다는 의미인 충( 冲 ) 과 같은 의미로 도( 道 )가 존재하는 모습 이면서 도( 道 )를 하나의 모델로 삼는 행 위자에게는 모범적인 행위 형태이기도 하다. 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 모델 이나 원칙은 인간적인 전통이 아니라 도 ( 道 )에 기원하기에 허( 虛 )는 인간이 따라 야 할 이상적인 행위와 인식 상태로 이 해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아무런 강 제적인 의지나 목적에 좌우되지 않고 특 정한 이론이나 가치 체계에 의해서도 인 도되지 않는 행위로 도( 道 )가 어떤 특정 한 내용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는 50) 이 해에서부터 시작된다. 노자가 살았다고 추측되는 춘추전국 시대는 기원전 11세기로 서주사회의 혈 연 중심의 귀족봉건제와 신정국가 체제 가 붕괴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종교 적 의미를 지니던 천( 天 )에 대해 보다 객 관적으로 사유하려는 경향들이 등장하 기 시작했는데 노자의 천( 天 ) 개념은 대 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왕권 약화에 따 른 지배층의 권위 상실과 종교적 권위의 몰락으로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한다. 고 고한 가치를 추구하던 현인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이제 지식이란 이익을 얻기 위 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할 만큼 문( 文 ) 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철기문 명의 부흥과 함께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제후국 간에 경쟁과 전쟁으 로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노자는 이런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그 는 이와 같은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실 도( 失 道 ), 곧 도( 道 )를 잃은 까닭으로 보 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이 자연을 모델로 하는 문명을 실천하고 재건 51) 하 는 것이었다. 노자가 사회적 혼란의 원인 으로 지적한 실도( 失 道 )는, 노자의 철학 에서 중요한 개념인 유위( 有 爲 ) 즉, 무언 가 억지로 취하려는 욕심과 집착으로 인 해 발생한다고 보았고, 그것을 내려놓고 비움으로써 사회적 치유와 복구가 가능 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곧 인간을 끊임 없이 애착과 사욕에 빠지게 하는 소지 ( 小 知 )를 덜어내고 비우는 손( 損 )의 과 정 을 통해 깨끗한 빈 마음인 허정( 虛 靜 ) 의 상태에 이르면 인간이 지닌 본래 참 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질적인 변 화가 일어난다 52) 고 본 것이다. 따라서 노 50)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 나무, 2001, p.p.146 147. 51) 최진석, 같은 책, p.11. 52) 한병학, 노자 철학의 기본 이해, 광주가톨 94
자가 말했던 다양한 차원에서의 덜어냄, 비움이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빔 그 자 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가치나 존재의 수용을 위한 비움 53) 임을 알 수 있겠다. 도( 道 )란 기( 氣 )와 리( 理 )의 운동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기( 氣 )는 생 명을 유지시키는 호흡이나 우주에 생기 를 불어넣는 힘인데, 기( 氣 )가 모이면 형 상을 지닌 물( 物 )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분산되어 허( 虛 )가 되면 그 형상은 사라 이라고들 한다. 그는 행위의 부정을 뜻 하는 무위( 無 爲 ), 욕망의 부정인 무욕( 無 慾 ), 지식의 부정인 무지( 無 知 ), 개체성의 부정인 무사( 無 私 ) 등을 말했다. 노자의 노선은 분명 특이하다. 많은 이들이 발 전( 發 展 )을 지향하면서 움직임( 動 ), 강함 ( 强 ), 상달( 上 達 ), 채움( 實 )을 말했지만 노 자는 고요함( 靜 ), 약함( 弱 ), 하달( 下 達 ), 비움( 虛 )과 같은 전혀 다른 후향( 後 向 )의 노선을 지향 54) 했기 때문이다. 진다. 그러나 형상이 소멸되어도 에너지 로서의 기( 氣 )는 여전히 존재하기에 끊 임없이 생성 소멸되는 변화의 세상 안에 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다 고 본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런 인생 의 무상함에만 집중한 허무주의자는 아 니었다. 그는, 한계 없는 자기 충족적 욕 망을 절제하고 경계하면서 계속되는 변 화를 받아들여 영원함을 누리는 것을 지향했다고 보인다. 이제 다양한 차원에 서 노자가 말한 덜어냄, 비움을 구체적 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弱 也 者, 道 之 用 也. (약야자, 도지용야) (곽점초묘죽간 6장) 55) 초간 6장에서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유약함을 도( 道 )의 작용이며 속성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 고 정( 靜 )으로 동( 動 )을 이긴다는 논리는 예수의 경우와 같이 강한 역설처럼 들 린다. 노자가 봤던 도( 道 )의 유약함이란 한곳에 정착하거나 고착되지 않고 굳어 있지 않은 속성을 말했다. 물줄기가 아 무리 약해 보여도 흐르지 않는 곳이 없 는데 그 모습이 마치 행함이 없어 보이 2.1. 통함을 위한 유약( 柔 弱 ) 노자를 흔히 역설적 논리를 즐긴 사람 릭대학교 석사논문, 2008, p.19. 53) 김경수, 같은 논문, p.157. 나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유연성과 54) 김경수, 같은 논문, p.2. 55) 2300년 전의 초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 된 노자의 글로 곽점초묘죽간의 해설서를 바탕 으로 했다. 이하 초간 이라고 대신하겠다. 양방 웅, 같은 책, p.p.64 65. 95
통함( 通 )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다. 자신에게 매여 있지 않음을 그 특징 으로 하는 모습은 자연이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를 따라야 하는 인간에게는 사욕이나 집착으로 차있는 자신을 덜어내고, 비 우는 과정을 그 삶의 기초로 두어야 한 다고 말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힘 있는 자들의 무자비한 통치가 빚었던 사 회적 악과 백성들이 겪는 고통 앞에서 노자는 도( 道 )란 무엇보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통행과는 상반되고 그것을 지 양하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이런 맥 락 안에서 볼 때 그가 왜 후향( 後 向 )의 노선을 계속해서 추적하며 지향했는지 이해해볼 수 있다. 도덕경 55장에서는 덕( 德 )이 깊이 내 재되어 있는 사람을 갓난아기에 비교하 고 있다. 독충이나 독사, 사나운 짐승도 공격성이 없는 아기에게 해를 가하지 않 는다. 아기가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 는 것은 조화가 지극한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인데, 조화란 변함없는 원리이고, 이런 불변하는 원리를 아는 것을 밝음 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애쓰는 것은 재앙이라 하며 마음이 기 를 부리는 것을 강( 强 ) 57) 이라 말하고 있 다. 적자( 赤 子 )란 도가( 道 家 )에서는 높은 수양의 경지에 들어간 인격을 비유할 때 사용했다. 인간의 정신과 몸은 어릴수 록 부드럽고 유연하여 무엇이든 잘 수용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몸과 마음의 유연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우리 역시 含 德 之 厚, 比 於 赤 子. (함덕지후, 비어적자) 毒 蟲 不 螫, 猛 獸 不 據, 攫 鳥 不 博. (독충불석, 맹수불거, 확조불박) 終 日 號 而 不 和 之 至 也. (종일호 이불애 화지지야) 知 和 曰 常 知 常 曰 明 益 生 曰 祥 心 使 氣 曰 强. (지화왈상 지상왈명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도덕경 55장 中 ) 56) 56) 도덕경은 특별한 판본 없이 박은희의 노자 나 최진석의 도덕경, 이현주의 노자 이야기 잘 알고 있다. 노자는 갓난아기의 모습 에서 드러나는 화( 和 ), 즉 유연한 조화의 성격 58) 에 주목하고 있다. 약함이 이루 는 화( 和 )는, 막힘없는 통함( 通 )의 특징 을 드러낸다. 아기란 인위적이고 이분법 적인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이며 주관과 객관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주객미분의 상태로 그 안에는 선입 등을 참조했으나 각 장에 해당하는 해석의 참고 는 주석을 달았다. 57) 최진석, 같은 책, p.407. 58) 위의 책, p.p.410 411. 96
견이 자리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아 기는 약하지만 아주 강한 생명력을 지 니고 있다. 그 모습을 통해 자연과 완전 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만물의 생명력 이 온전히 작용할 수 있다 59) 고 본 것이 다. 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이는 지극한 약함에도 불구하고도 절대 스 스로를 크게 만들려고 하지 않기에 오 히려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 다. 모두가 부러지기 쉬운 강함을 바라 볼 때 오히려 노자는 가장 약한 것이 이 루는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설은 모든 물질 중에서 가 장 부드럽고 약하다고 보는 물의 비유 60) 를 통해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도덕경 8장의 내용을 보면,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고 말한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며 싸우지 않고 모든 사람들 이 싫어하는 곳에 자발적으로 자리하는 데 항상 자신을 낮은 곳에 두는 겸손 때 문에 오히려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 다. 더러운 모든 것이 아래로 가고, 그것 이 모이는 곳에 물은 스스로 처하는 모 습이 도( 道 )에 가까우며 서로 다투지 않 는 까닭에 탓할 바가 없다고 한다. 노자 는 물의 특성을 두 가지로 말하는데, 만 물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지니면서도 자 신을 드러내기 위해 남들과 다투지 않 는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 첫 번째 특성 이고, 자신을 낮추어 모두가 꺼리는 장 소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겸손의 도( 道 ) 上 善 若 水. (상선약수) 水 善 利 萬 物 而 不 爭, 處 衆 人 之 所 惡,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故 機 於 道. (고 기어도.) 夫 惟 不 爭, 故 無 尤. (부유부쟁, 고 무우) (도덕경 8장) 59) 박헌용, 노자 도덕경에 나타난 생태신학 모델연구, 협성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논문, 2003, p.p.82 83. 60) 양방웅, 같은 책, p.66. 를 지니고 있음이 두 번째 특성이다. 물 이 지니는 이 같은 속성으로 인해, 물은 최상의 선으로 비유되고 있으며, 자연의 도를 따라 자기를 비우면, 상선( 上 善 )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61) 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노자는 욕망에 근거한 사사로움을 버리고 철저히 이타적인 삶 을 사는 허( 虛 )의 모델로써 물을 예로 들었던 것이다. 유약함과 비슷한 맥 안 에서 노자는 있음( 有 )보다 없음( 無 )을, 가득 참(영( 盈 );만( 滿 ))보다 비어 있음(충 61) 김명수, 같은 논문, p.p.8 9. 97
( 沖 );허( 虛 ))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이 해했으며, 곧은 것( 直 )보다 굽은 것( 曲 ) 에서 온전함을 62) 찾는 역설의 방식을 종 종 선택했다. 이런 사고 안에는 노자가 강한 것을 대부분 인위적 문화의 체계 로, 부드러운 것은 자연의 운행 방식으 로 보고 있었던 것에 기인하기도 하는 데, 그는 약함이나 부드러움을 통해 막 힘없이 흐르는 자연의 원칙을 인간이 ( 虛 靜 )을 만물의 고향처럼 생각했기에, 허( 虛 )를 만물이 태어나는 자궁과 같고, 정( 靜 )은 만물이 갖고 태어나는 품성과 같다고 보았다. 생명은 무엇이나 허( 虛 ) 하고 정( 靜 )한 곳에서 비롯되므로 그 생 명의 시작은 유약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이 마음을 비워 청정한 빈 마음에 이르 면,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참된 생명 력이 회복될 수 있다 64) 고 보았다. 따라 살아야 할 도( 道 )로 바라보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致 虛 極, 守 靜 篤. (치허극, 수정독) 2.2. 대( 大 )를 위한 허정( 虛 靜 ) 노자는 도( 道 )가 운동을 하기 위해서 허( 虛 )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노자에게 있어 허( 虛 )나 정( 靜 ), 공( 空 )은 무한한 창조성이 기인하는 곳 63) 으로 이 해되기도 한다. 허( 虛 )는 인간 주체가 편 협하고 계산적인 지식인 소지( 小 知 )와 과 도하고 지나친 욕망을 의미하는 다욕( 多 欲 )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비운 상태 를 의미하고, 정( 靜 )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산란하던 마음이 고요해져 어떤 내 외적 자극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萬 物 並 作, 吾 以 觀 基 復. (만물병작, 오이관기복) 夫 物 云 云, 各 復 歸 基 根.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歸 根 曰 靜, 是 謂 復 命, 復 命 曰 常, 知 常 曰 明.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不 知 常, 妄 作 凶. (부지상, 망작흉) 知 常 容, 容 乃 公, 公 乃 王, 王 乃 天, 天 乃 道, 道 乃 久, 沒 身 不 殆. (지상 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도덕경 16장) 흔들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는 허정 62) 위의 논문, p.p.8 9. 63) 박헌용, 같은 논문, 2003, p.84. 도덕경 16장을 보면, 도( 道 )의 참 모습 64) 한병학, 같은 논문, p.23. 98
인 허정은 아무런 함 없이 스스로를 드 러낸다고 말한다. 허정한 마음을 닦으면 모든 만물이 지닌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며 모든 만물은 다양성과 차별성을 넘 어 자신이 나온 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고 말한다.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만물은 도( 道 )의 근원적 고요로 되돌아 간다는 말이다. 모든 생명의 참다운 본 음 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 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 物 )을 받아들 일 수 있고, 유한한 존재 역시도 수용 할 수 있다. 가득 찬 상태에서는 내용 물을 담을 공간이 없기에 넘치게 된다 67) 고 하였듯이 비어 있음이 없다면 아무리 새로운 것이 오더라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래 모습인 명( 命 )으로 되돌아감이라고도 말하며, 이는 회귀의 끊임없는 운동이기 에 영원함( 常 )이라 부르며 이런 영원함을 大 盈 若 盅, 基 用 不 窮. (대영약충, 기용불궁) (초간 27장) 아는 것, 다시 말해 만물이 끊임없이 운 동하고 변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근원으 로 복귀하여 생명의 원래 상태로 돌아가 게 됨을 아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지혜이 며 밝음( 明 ) 65) 이라 하고 있다. 텅 빈 맑은 마음인 허정( 虛 靜 )은 글 자 그대로 마음을 비운 평온한 상태 로써 이는 마음 속의 욕망을 다스리 는데 유리하다고 보았다. 안정된 마 꽉 찬 것은 마치 텅 빈 것 같으나 그의 효용은 영원하다 68) 고 한다. 노자는 허성 ( 虛 性 )을 무, 욕, 충( 無, 谷, 沖 )이란 용어 를 사용하면서 설명했는데, 허( 虛 )란 무 규정적이며 경계가 없고 스스로를 제약 하지 않기에 무한한 작용 69) 을 할 수 있다 고 보았다. 이는 바퀴살의 비유를 통해 서도 확인된다. 음을 통해 사물의 본 모습을 인식 66)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의 허( 虛 )란 외적으로는 텅 비어 보이지 만 단순히 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 제나 창조적 활동이 가능한 경계 없 三 十 輻 共 一 轂, 當 其 無, 有 車 之 用.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埏 埴 以 爲 器, 當 其 無, 有 器 之 用.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65) 박은희 역해, 노자, 고려원, 1997, p.p.76 77. 66) 김영규, 노자 제 1장을 통해 본 노자사상 (2), 신앙과 삶 17호 2008, p.172. 67) 김경수, 같은 논문, p.73. 68) 양방웅, 같은 책, p.p.224 225. 69) 김경수, 같은 논문, p.p.79 80. 99
鑿 戶 牖 以 爲 室, 黨 其 無, 有 室 之 龍.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故 有 之 以 爲 利, 無 之 以 爲 用. (고 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도덕경 11장) 으면 쓸모가 없고,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어도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들어 가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서 무엇 이 쓸모 있는 것은 그것 자체가 空 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표현이다. 이는 인 간이 참되게 인간됨을 살아가기 위해서 도덕경 11장은, 바퀴살 서른 개가 바 퀴통 하나에 모이지만 바퀴통이 비어 있 어서 수레로 쓰일 수 있으며,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되, 그릇이 비어 있기에 용 기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을 내 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들되 그곳이 비어 있기에 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의 바탕이 되고 비어 있음은 쓸모의 바탕이 된다 70) 는 내용이다. 시선을 좀 더 넓혀서 보면, 위의 글은 빈 것의 쓰임새를 통해서 무위( 無 爲 )의 작용 71) 을 설명하고 있다. 첫 구절의 無 는 비어 있음( 虛 )을 뜻한다. 빈 공간, 그것 이 수레를 쓸모 있게 한다는 것으로 비 어 있음으로 무엇인가로 사용될 수 있는 가치 72) 가 있음을 말한다. 둘째, 셋째 구절은 그릇이 가득 차 있 70) 이현주 대담,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上, 다산글방, 1993, p.139. 71) 윤재근, 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가, 둥지, 1993, p.140. 72) 이현주 대담, 같은 책. p.140. 는 언제든 외부에서 오는 생각이든, 사 물이든, 사람이든 그것을 수용하고 식별 할 빈 공간, 넉넉함이 있어야 한다는 표 현으로 바꿔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이 는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자 신을 버리고 그 안을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라는 초대와 유사할 수 있다. 마지 막 구절은 비어 있는 것은 모든 쓸모의 바탕이 된다 73) 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있음( 有 )에 집착하면서 살아가지만 불멸 의 삶이란 오히려 비움( 空 )에 있다고 하 는 것이다. 사람도 자기 생각이나 고집 으로 꽉 차 있으면 타인과 다른 생각들 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으며 74) 더 나은 합의점이나 변화를 도출하는 것이 불가 능하게 된다. 정리해 본다면, 노자에게 있어 마음이 텅 빈 상태를 지극하게 하는 허( 虛 )와 마 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는 정( 靜 )은 하 나의 수양방법이었다. 또한 모든 현상의 73) 위의 책. p.p.140 141. 74) 위의 책. p.144. 100
발생근거인 허( 虛 )를 이해하기 위해 노자 는 있음( 有 )의 이로움은 바로 없음( 無 ) 때 문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다만 공허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낳는 창조적인 생명의 공간이며 작용을 하기 때문 75) 이다. 이제 허( 虛 )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무( 無 ), 곡( 谷 ), 충( 冲 )을 통해서 도 비움의 의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것은 빈 것을 떠날 수 없다. 노자는 무 ( 無 )의 허( 虛 )를 모르고 실( 實 )만을 욕심 내는 이들을 향해 인간의 욕망이란 그 끝을 모른 채 항상 가득히 차기를 기대 하고 텅 빈 것을 알지 못한다 77) 고 말하 고 있는 것이다. 노자 34장에 나오는 대 도( 大 道 )는, 무( 無 )의 통성( 通 性 )을 보여주 고 있는데,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 에 따라 움직이는 물결 같은 모습을 표 가. 무( 無 ) 허( 虛 )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무 ( 無 )는, 유( 有 )와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는 데, 노자는 우주의 본질은 유( 有 )나 비유 ( 非 有 )로 말할 수 없으며 구분할 수도 없 다고 말했다. 둘을 갈라 구별지을 수 없 현함으로써, 무위( 無 爲 ) 역시도 무엇인가 를 고집스럽게 이루려는 집착의 행동을 부정하는 표현으로 자신을 고집함이 없 음을 의미하며 이로써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계속적으로 적응함으로써 통함( 通 ) 을 이룬다고 보았다. 는 이유를, 비유( 非 有 )와 유( 有 )는 서로 를 포함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노자는 유 ( 有 )와 무( 無 )는 도( 道 )의 이중성인 까닭 에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 은 것 76) 으로 보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 다. 무( 無 )는 없는 것이므로 허( 虛 )이다. 그러나 허( 虛 )가 없다면 존재도 없다. 터 나. 곡( 谷 ) 谷 神 不 死, 是 謂 玄 牝. 玄 牝 之 門, 是 謂 天 之 根.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綿 綿 若 存, 用 之 不 勤.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덕경 6장) 없이 집을 지을 수 없고 허공 없이 땅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무엇이든 이로운 75) 이문경, 노자의 무욕 사상 연구, 충주대학 교 경영 행정 외국어 대학원 석사논문, 2010, p.p.16 17. 76) 김경수, 같은 논문, p.59. 내용을 보면,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 니,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말한다. 현 묘한 암컷의 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 77) 윤재근, 같은 책, p.124. 101
리이며, 이는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듯 하니,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 78) 고 한 다. 텅 비어 있는 골짜기인 곡( 谷 )의 모 습을 도( 道 )에 비유하고 있다. 고매한 인 격은 속으로 가득 차 있으나, 항상 자신 을 겸손하게 낮추며 비우고자 하기 때 문에 외형적으로는 골짜기처럼 낮고 비 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 서 진정 위대함이나 깨끗함은 그것에 집 착하지 않고 모든 굴욕을 기꺼이 받아 치는 80) 생명의 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계곡( 谷 ) 역시 단순한 빔이 아 니라 무한한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을 뜻하고 있다. 계곡( 谷 )은 수용 성으로 인해 만물을 낳는 근원이 될 수 있기에 이를 일컬어서 노자는 현묘한 암 컷이라고 표현했다. 만물은 소멸할 수 있 고 유한하지만, 도( 道 )는 오히려 자신을 텅 비어 자유롭게 만들면서도 항상 존재 하고 영원히 작용하는 것이다. 들이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런 넓고 큰 덕, 포용력이 있는 인격을 제 대로 볼 눈이 없을 때, 그는 오해받기 십 상인데 마치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 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역 시 외적인 것만으로 사람과 사건을 판단 할 때가 적지 않다. 우리는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79) 쉽게 잘못된 판 단을 내리곤 하는 것이다. 다시 계곡으 다. 충( 沖 ) 道 沖 而 用 之, 或 不 盈, 淵 兮, 似 萬 物 之 宗. (도충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挫 其 銳, 解 其 紛, 和 其 光, 同 其 塵, 湛 兮, 似 或 存. (좌기진,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담혜, 사 혹존) (도덕경 4장 中 ) 로 돌아와 그 모습을 상상해 보자. 계곡 은 움푹 파여진 지형으로 산의 모든 물 들이 이곳에 모인다. 그 물은 계곡을 따 라 아래로 흘러 큰 강과 바다를 이룬다. 물이 모인 곳에는 생명이 살 수 있는 기 반이 마련되기에 계곡은 수용성의 표상 이 된다. 그곳은 풍요로움과 조화가 넘 78)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34. 79) 위의 책, p.174. 도( 道 )는 비어 있기에 가득 차는 법이 없고 그 깊음이 만물의 근원처럼 보인다 고 말한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엉킨 것을 풀고 그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가 되는데 그 맑음이 마치 영원한 존재 같다고 말한다. 충( 沖 )은 비어 있다는 뜻으로 무( 無 )와 80) 박헌용, 같은 논문, p.34. 102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상계 의 단지 없음을 말하는 상대적인 의미의 무( 無 )가 아니라 현상과 절대의 세계 모 두를 포함하는 무( 無 )를 의미한다. 여기 에는 한계가 없다. 현상계의 눈으로 보 면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 오고 감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도( 道 )의 시선에 서 그 모든 것이 하나 81) 라는 말이다. 도 ( 道 )란 비어 있음을 가지고 행위를 하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가득 찰 수 없으며, 끊임없이 행동하기에 도( 道 )의 작용에 있 어서 울타리가 없고 막힘도 없다. 도( 道 ) 의 그 행위에 형태가 없으니 가득 찰 수 도 없다 82) 는 것이다. 충( 沖 )은 충( 盅 )과 같이 그릇이 비어 있음을 말하는데, 텅 빈 그릇이 인간의 눈에는 단지 아무것도 없다고 파악될 뿐 이다. 그러나 비어 있는 도( 道 )는 소멸되 지 않으며 영원한 작용을 지닌 형이상학 적 실재로 무한한 창조력을 소유하고 있 다 83) 고 본 것이다. 이는 무한한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성을 지니고 있 음을 말한다. 노자는 도( 道 )가 이처럼 비 어 있는 충( 沖 )의 성질로 인해 그 효용 역시 지속될 수 있다 84) 고 본 것이다. 81) 이현주 대담, 같은 책, p.p.73 74. 82) 위의 책. p.71. 83)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p.27 28. 84) 김경수, 같은 논문, p.p.81 82. 2.3. 자유를 위한 무위( 無 爲 ) 무위( 無 爲 )는 노자의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무위( 無 爲 )는 아무 인위( 人 爲 ) 도 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는 데, 행위의 부정이 아니라 하지 않는 일 이 없는 무불위( 無 不 爲 )를 뜻하는 것으 로 하지 않음의 상태가 된 무욕( 無 慾 ) 85) 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되기 어렵다. 따 라서 무위( 無 爲 )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 로 유위( 有 爲 )에 대한 부정의 견해를 통 해 다시 접근해볼 수 있다. 우선 유위 ( 有 爲 )의 뜻을 보자. 설문 ( 說 文 )의 해석 에 따르면 유( 有 )를 모종의 장애물에 의 해서 은폐된 상태로 보았다. 도덕경 38 장에서는 86) 위( 爲 )에 대한 해석을 살펴볼 수 있다. 노자 시대의 문화와 윤리적인 가치들이 변질되어 인간 삶을 억압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위( 爲 )의 의미를 보면 자연을 따르지 않 는 행위, 즉 참된 생명의 고유한 활동을 85) 이문경, 같은 논문, p.21. 86)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159 도덕경 38장을 요약하면 문명과 제도가 발달할수록, 인간관계 는 더욱 외면적이 되어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정 신은 소실되어 간다. 이 결과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고정된 형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목적이나 의도가 없는 것이 최상의 덕이라고 말 한다. 103
방해하거나 훼손, 변형시키는 행위 87) 등 을 말하고 있다. 이런 해석으로 미루어 보아 노자는 유위( 有 爲 )를 인위적 행위 로 보았다. 그는, 인위를 통치자들의 정 치와 관련해서 보는 입장이 컸는데, 거 짓된 행위나 얕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작위는 어떤 행위에 얽매이거나 집착하 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 는 억지로 하면 실패하게 되고, 집착하 게 되면 놓치게 되기에, 성인은 극심함 을 버리고, 지나침을 버리고, 과분함을 버린다. (노자 29장) 88) 고 말함으로써 순수 한 지향을 넘어서 무리수를 두는 인간의 억지 행동을 부정하며 경고하고 있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문명( 文 明 ), 성 지( 聖 智 ), 공자가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 던 인의( 仁 義 ) 등을 인위적인 것으로 봤 지만 전적으로 그것을 부정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단지 아는 것에 얽매이지 목적은 무엇인가에 적응하는 것에 있기 에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안에서 고정된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 보다 큰 위( 爲 )를 획득하자 89) 는 것이 노자의 논리였다. 따 라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 無 爲 )는 소지 ( 小 知 )와 다욕( 多 慾 )에 의해 타자에 대한 이해나 관심 없이 자기 욕망과 편협한 지식에 사로 잡혀서 행하게 되는 자기중 심적이고 폐쇄적인 자아활동을 포기하 는 것 90) 을 뜻했다. 이 같은 맥락 안에서, 노자가 당시 사회를 실도( 失 道 )라고 말했 던 것은 과도한 유위( 有 爲 )로 인해 인간 서로 간에 경쟁을 추구하자 갈등이 생 기고 본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자 존재 의 위기가 발생하던 당시 상황을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실도( 失 道 )의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나날이 자신을 덜 어내고 비우는 손( 損 )의 수양이 필요 91) 했 던 것이다. 않는 앎을 추구하고, 욕구를 지니되 그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애롭되 자애로 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 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부정도 그 의미 와 가치가 있지만 다만 그것만으로는 완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주된 87) 김권일, 노자 철학에서 유위의 의미, 신학 전망 144호, 광주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4. p.p.59 61. 88)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127. 爲 道 者 日 損, 損 之 或 損, 以 至 無 爲 也, 無 爲 而 無 不 爲. (위도자일손, 손지혹손, 이지무위야, 무위 이무불위) (초간 48장) 92) 89) 김경수, 같은 논문, p.p.95 98. 90) 김권일, 같은 글, p.p.63. 91) 한병학, 같은 논문, p.1. 9 2 ) 노 자 선, 이 율 곡 의 노 자 이 해 순 언 4장 곽본 48장,http://blog.daum.net/ 104
위 문장은, 명상을 통해 도를 실행하 는 자는 점차 자신 안에 있는 욕심을 덜 어내게 되는데, 이런 덜어냄( 損 )의 과정 을 통해 무위( 無 爲 )에 이르면 억지나 집 착함 없이 마주하는 일들을 대할 수 있 게 된다고 한다. 이는 곧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무위 ( 無 爲 )의 활동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는 덜어냄( 損 )이라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지극히 당연한 이 야기 같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기에, 자연의 법 칙에 따른 적절한 체중감량을 시도하는 일 대신 인간들은 자연의 법과는 다른 인간의 법칙을 만들어 내세웠고 그 결과 사회 극소수에 해당하는 이들은 불어나 는 체중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이른바 불 의한 부의 편중이 심화되는 것이다. 이 같은 부의 불균형한 분배로 사회 빈곤층 이 삶에 허덕이는 것은 과거나 오늘이나 워냄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 93) 을 말한다. 노자가 말한 무욕( 無 欲 )의 범주는 자 연의 도가 지니는 무욕( 無 欲 )을 본받는 지족( 知 足 )과 더불어 자기 비움을 통해 타자를 배려하려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노자는 도덕경( 道 德 經 ) 7장에서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욕 심을 비워 자신을 부정하는 길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을 완성하고 긍정할 수 있음 94) 을 역설했다. 이와 같이 무위( 無 爲 ) 로 드러나는 도( 道 )의 자기 비움은 채우 지 않고 자신을 끝없이 비움으로써 영 원할 수 있는 도( 道 )의 장구( 長 久 )함으로 귀결된다. 도( 道 )의 자기 비움이란 자연 스러운 행함으로써 도( 道 )와 무위( 無 爲 ) 의 인과적 선후관계를 따지지 않고 상호 보완적 관계성 95) 에 더 주목한 것이다. 그 럼, 노자의 무위로 드러나는 자기 비움 을 비폭력, 절제, 조화와 화합이라는 측 면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노자는 이와 같은 자연의 법칙이 사회 전반으로 자연 스럽게 정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 서 무위란 자신에게 갇혀 끊임없이 움켜 가. 비폭력 노자가 폭력에 대해 완전한 무저항이 나 비폭력을 주장했는지의 여부는 도덕 쥐려는 사욕과 충동의 활동을 제거하고 진실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덜어냄과 비 nojasun/10165156, 2011.1.11접속. 93) 위의 사이트. 94) 박헌용, 같은 논문, p.p.76 77. 95) 위의 논문, p.86. 105
경( 道 德 經 )을 통해서 볼 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도덕 경( 道 德 經 )을 통해 노자가 지향하던 노 선은 자연을 추구하고 인위적 행함을 지 양함에 있었다. 이런 노자에게 있어 전 쟁이나 폭력은 인간의 탐욕이 표면으로 돌출한 인위적 행위로 규정되어질 확률 이 다분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비폭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텍스트는 도덕 경 31장인데, 노자는 이 텍스트에서 폭 력의 전형인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를 직 접적으로 불길한 도구 로 규정하고 있 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가 지향했 던 평화적 노선과 어떤 경우라도 전쟁의 정당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그것은 결국 인간을 해치는 살인과 전혀 다를 바 없 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故 曰 兵 者, 不 祥 之 器 也, 不 得 已 而 用 之, 淡 爲 上, 弗 美 也. (고왈병자, 불상기지야, 부득이이용지, 염 담위상, 불미야) 美 之, 是 樂 殺 人. 夫 樂 ( 殺, 不 可 ) 以 得 志 於 天 下. (미지, 시락살인. 부락(살, 불가) 이득지어천 하) (초간 33장 中 ) 내용을 보면, 노자는 무기를 상서롭 지 못한 기물 이라고 일단 단정하면서도 부득이한 경우에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냉담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환기시킨다. 무기를 좋아하 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되며 무기 사 용을 좋아한다는 것은 곧 살인을 즐긴 다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와 같은 사람은 천하에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 96) 을 분 명히 하고 있다. 노자는 전쟁 자체를 그 결과에 상관 없이 흉한 일이라고 여겨 단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기뻐한다면 그는 영웅이 아니라 살인자이며, 그에게 세상의 권력 을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보았다. 노자는 분명 비폭력적인 자세를 견지했 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폭력적 마음을 자극하는 근본적 요소를 없애고자 했음 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도덕경 43장에서 드러난다. 물은 천하에 서 가장 부드럽지만 단단한 바위까지 뚫 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폭력에 대해 오 히려 부드러움과 같은 다투지 않음의 전 혀 다른 자세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만이 악의 가장 큰 원인 이라고 지적하면서 세상의 혼란은 만족 함을 모르고 탐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96) 양방웅, 같은 책, p.p.274 275. 106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따 라서 그 욕심을 비워, 전쟁에 이르는 다 툼으로 번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보다 근 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보고자 97) 했던 것이다. 노자의 노선을 따랐던 장자의 글을 통 해서도 평화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사욕 이나 탐욕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 있 다. 빈 배라는 글을 통해 자신을 비운 새로운 삶의 양식이 갖는 가능성을 되새 아무 이름도, 아무 거처도 없이 삶 자체로 노닐 것이다. 단순해서 차별이 없고, 어느 모로 보나 바보와 같다. 그의 걸음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어떠한 힘도 없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이름이 드러나지 도 않는다. 그러한 이가 곧 완전한 사람이니, 그의 배는 비어 있다. (장자 제 20편, 산목( 山 木 ), 2절 中 ) 98) 김해 보자. 폭력이나 상대의 무력에 대해 같은 방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다,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식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것이 쉬운 일이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 만 폭력과 무력의 질긴 고리를 끊는 것 은 그것에 대한 비폭력과 무저항, 노자 의 표현대로라면 자신 안의 분노와 폭력 의 마음을 비워 그에 맞서지 않는 비움 의 자세를 통해 그 가능성을 보았다고 하겠다. 것이다. 일을 이루고 또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서 누가 스스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내려 와 잊혀져서 살 수 있을까? 그는 도처럼 보이지 않게 흐를 것이고, 97) 정유진, 같은 논문, p.48. 나. 자기 절제 노자는 심리적 절제를 뜻하는 지족( 知 足 )과 행위의 절제인 지지( 知 止 )를 이룰 98) 토머스 머튼, 황남주 옮김, 장자의 길, 고려 원미디어, 1991, p.131. 107
때 존재는 영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 치 인간의 욕구를 철저히 억누르는 금욕 주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과는 분명 다르다. 단지 욕망을 금지하 는 차원이 아니라 자율적인 선택을 통한 욕망의 절제 99) 를 뜻하기 때문이다. 노자 는 도덕경 44장에서 탐욕이 낳는 폐해 들을 나열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지나친 사욕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 병폐인가? 이런 까닭에 지나치게 아끼면 반드시 크게 허비하고, 지나치게 많이 쌓 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족함을 알 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여 장구( 長 久 )해질 수 있다 100) 고 말 한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현실만을 바라 보는 인간은 명예나 재물을 탐함으로 공 동체의 생명을 해치는, 본말이 전도된 상 황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한다. 이 태어나면서 본래 지닌 마음이나 감 각은 그 자체로 이미 자연스럽고 충만한 것이었으나 인간 욕심에 의해 본질을 상 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탐욕이 인간 본연 의 감각이나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타락시켰다는 말이겠다. 我 無 事 而 民 自 富, 我 亡 爲 而 民 自 化. (아무사이민자부, 아무위이민자화) 我 好 靜 異 民 自 正, 我 欲 不 欲 而 民 自 樸. (아호정이민자정, 아욕불욕이민자박) (초간 21장 中 ) 名 與 身 孰 親, 身 與 貨, 孰 多, 得 與 亡 孰 病. (명여신, 숙친, 신여화, 숙다, 득여망, 숙병) 是 故 甚 愛 必 大 費, 多 藏 必 厚 亡. (시고 심애 필대비, 다장 필후망) 知 足 不 辱, 知 止 不 殆, 可 以 長 久. (지족 불욕, 지지 불태, 가이장구) (도덕경 44장) 도덕경 44장을 보자. 이름과 몸은 어 느 것이 친숙하고, 몸과 재화는 어느 것 이 소중하고, 얻음과 잃음은 어느 것이 99) 김경수, 같은 논문, p.112. 자기 절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내용인 초간 21장에서는, 내가 일을 만들어 내지 않으니 백성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순리를 어긋나지 아니 하니 백성이 저절로 순화되며 내가 묵묵 히 있으니 백성이 저절로 단정해지고, 내 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니 백성이 저절로 순박해진다 101) 고 말하고 있다. 노자는 개 인적인 것을 비울 때 오히려 그것을 이 룰 수 있고, 탐욕을 비우고 자발적인 자 100)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p.184 185. 101) 양방웅, 같은 책, p.189. 108
기 절제를 통해 삶의 만족함을 누릴 수 있으며, 좁은 이기적 자아인 소아( 小 我 ) 를 버림으로써 대아( 大 我 )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건강한 자기 절제 를 통한 비움의 자세로 이룰 수 있는 참 된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다. 조화와 화합 무위( 無 爲 )의 또 다른 특성은 현상계의 모든 차별과 규정, 틀을 초월해 조화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만물은 서로 어우 러지는 가운데 숨은 날카로움은 부드럽 게 만들고, 엉킨 매듭은 풀며, 지나치게 빛나는 것은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서 로 조화를 이룬다. 인간 역시도 태어날 때부터 높고 낮음이 따로 없는 존재이기 에 티끌 같이 가장 낮은 것과도 조화를 이루며 함께할 줄 알아야 한다고 노자 는 생각했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하느 님의 힘을 입어 어떤 상황에서나 만족할 수 있다고 했던 것처럼 노자 역시도 변 화 앞에서 조화를 이루고 적응하는 것 을 자유로움으로 보았고 인간이 완성해 야 할 하나의 지향점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지속적인 수양을 통해 닦여 진 인격의 성숙함을 견지하고 있다. 물 론 현실적인 인간 사회는 차별과 대립의 전형적인 세계로 자기 주장과 반목, 투 쟁과 자기 과시가 들끓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 인간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보는데, 이 모든 것은 도( 道 )의 입장에서 보면 다만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이기 102)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노자의 시선 은 유한한 세상 안에서 장구( 長 久 )하게 존속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을 비워 상생 과 조화 안에 머물 때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불의한 세상 안에서 한 줄기 희 망의 빛을 향해 걷도록 초대하고 있다. 天 之 道, 基 猶 張 弓 與. (천지도, 기유장궁여) 高 者 抑 之, 下 者 擧 之, 有 餘 者 損 之, 不 足 者 補 之. (고자억지, 하자거지, 유여자손지, 부족자보지) 天 之 道, 損 有 餘 而 補 不 足, 人 之 道 則 不 然, 損 不 足 以 奉 有 餘. (천지도, 손유여, 이보부족, 인지도즉불 연, 손부족, 이봉유여) 孰 能 有 餘 以 奉 天 下, 唯 有 道 者. (숙능유여이봉천하, 유유도자) 是 以 聖 人 爲 而 不 恃, 功 成 而 不 處, 基 不 欲 見 賢. (시이 성인 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 견현) (도덕경 77장) 102)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p.27 28. 109
노자는 자연의 도( 道 )를, 마치 활시위 를 당기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높은 활 시위는 아래로 당겨주고, 낮은 활시위는 위로 올려주는 것처럼 남는 것은 덜어내 고 부족한 것은 보태 줘서 균형을 이룬 다고 말한다. 자연의 도( 道 )는 많이 이 룬 것을 자랑하지 않고 부족한 것을 방 치하지 않지만 인간의 도( 道 )는 자연의 도( 道 )를 역행하여 부족한 것을 덜어 남 는 것을 받든다고 꼬집고 있다. 사회적 부조리가 이 한마디 안에 그대로 드러나 는 듯하다. 도를 지닌 자, 곧 성인만이 남는 것으로 천하를 받드는데 그는 무엇 을 하고도 그것에 기대지 않고, 공이 이 루어져도 차지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기 에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 는다 103) 고 말한다. 이처럼 도덕경 77장 은 재물의 소유에 대한 자세를 직접적 으로 연상하게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과할 때는 덜 어내고, 소수의 목소리와 의견을 경청하 는 자세 또한 생각하게 한다. 어느 한 쪽 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객관적으로 조 율하며 하나에 집착하거나 소유함 없이 적응하며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상황이 변화할 때 외골수처럼 애착하지 않는 자세를 통해 언제든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인간 관계의 모델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4. 영원성을 위한 변화( 變 化 )의 논리 변화란 언제나 하나의 죽음을 전제 한다. 새로운 상황들을 수용하기 위 해서는 기존 상황들을 새로운 시각으 로 재독해야 하기 때문인데, 형성된 하 나의 세계나 단계에서 죽고 다른 단 계로 나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기도 하다. 그것은 고립된 자신의 세 계를 깨고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앞 서 노자의 부정은 긍정을 위한 부정이 며, 긍정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서의 부정이라고 말한바 있다. 끊임없 이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한 다는 것은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고 사 람을 억누르는 제약에서 벗어나 무한 한 존재의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함 104) 이었다. 天 長 地 久. (천장지구) 天 地 所 以 能 長 且 久 者, 以 基 不 自 生, 故 能 長 生. (천지소이능장차구, 이기부자생, 고 능 103) 박은희 역해, 같은 책, p.p.300 301. 104) 김경수, 같은 논문, p.4. 110
장생) 是 以 聖 人 後 其 身 而 身 先, 外 其 身 而 身 存 (시이 성인 후기신 이신선, 외기신 이신존) 非 以 基 無 私, 故 能 成 基 私. (비이기무사야, 고 능성기사) (도덕경 7장) 도덕경 7장에서 노자는 천지( 天 地 )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不 自 生 ) 영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비우 는 삶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삶이면서 전적으로 이타적인 삶 105) 으로 연결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고 비운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과 사건에 유 연하게 적응하면서 요청해 오는 필요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 는 지금 당장은 장애물처럼 보이고, 자 신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것이 긴 안목에서는 살리는 것이며 영원 을 향하는 것이고, 영원을 위한 논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노자는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남 보다 앞서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영원히 있게 된다. 고 말한다. 노자는 인간의 지극히 본능 적인 욕망을 거슬러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後 其 身 ) 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며, 자신을 비우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겸손과 비움 은 의도하지 않고도 남보다 앞서는 결과 를 가져온다. 자기 몸을 밖에 내어 맡긴 다( 外 其 身 ) 는 표현은 자기부정을 뜻하는 데,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고 과감 히 타인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오히려 자 신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자신을 진정으로 낮추는 자는 언젠가 분명 다시 높여지고, 높여진 것은 다시 낮아지는 길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은 자 신을 낮추고 비우는 것이 자기 모멸이나 비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오게 될 자연스러운 결과를 희망하는 현자들의 행위였음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존재에게 주어 지는 특별한 자세가 아니라 존재 일반의 근원적인 기반으로 보았고, 타인을 향해 나아가고 고무되는 과정으로서 필수적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 자에게는 변화 앞에서 낡은 자아나 자 신에게 묶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떠나 타인에게로, 또 유연하게 내적, 외적 변 화를 수용하고 자연의 도( 道 )를 따라 변 화를 모색하기 위한 허( 虛 )였음을 상기 하는 것이 좋겠다. 105) 김명수, 같은 논문, p.8. 111
3. 케노시스(Kenosis)와 허( 虛 ) 안에 서 드러난 자기 비움의 종합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노 자의 허( 虛 )를 통해 각각 동서양에 큰 영 향을 미친 사상 안에서 다르지만 비슷 한 색을 지닌 두 생각을 마주하는 자리 였다고 본다. 물론 그 세세한 성격에는 차이가 있지만 시대와 국경을 뛰어 넘 어 이처럼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거론되 고 있었던 점은 분명 흥미롭다. 그것은 자기 비움을 통해 인간 완성을 향해 나 아가려는 이상과 더불어 비움이 지니는 유효성과 그 가치를 꿰뚫고 있는 놀라 운 통찰을 엿보게 한다. 물론 자기 비움 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면면히 이어졌 지만, 인간 욕구의 실현이 점점 더 극대 화되고 파괴력을 지니는 오늘날, 생명을 회복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하나의 자 세로서 자기 비움이 지니는 의미를 재독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 진다. 이제, 예수의 케노시스(Kenosis)와 노자의 허( 虛 ) 안에서 드러난 요소 중 공 통적으로 묶어볼 수 있는 내용들을 정 리해 보도록 하자. 가. 세상 안에서, 세상을 거슬러 예수나 노자가 말한 비움이란 철저하 게 세상을 떠나서 이뤄지는 초세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물론 비움을 통해 이 르는 곳은 초세상적이기도 하고 초월적 인 것이지만 그 실현은 언제나 구체적 인 현실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사상 이 태동했을 때의 혼란한 사회적 상황의 영향도 있겠으나 현실에 염증을 느껴 오 히려 현실 도피적인 것에 끌릴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예수와 노자의 자기 비움의 양상은 인간이 발 딛고 있는 현실 세상 안에서 지극히 실천적인 형태를 띠고 있 다. 복음적 자기 비움은 사회의 소외 계 층인 가장 빈곤한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 서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랑과 연민 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과의 동일시로 드러났다. 노자에게 허( 虛 )는 지배자나 통치자들에게 더욱 요구된 자세였지만 사회적 계급이나 경계 안에서 상생을 위 한 것이었고 변화되어 가는 세상 안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적응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허( 虛 )였으며 이런 노자의 이론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 다. 따라서 조화와 균형, 변화와 상생을 위해, 인간이 수없이 자연을 거슬러 자 행했던 인위적인 행위와 가치와는 반대 되는 자연의 도( 道 )로서의 덜어냄, 비움 이 강조되고 있다. 비움은 인간을 제외한 하느님과 하느님 112
을 배제한 인간을 양자택일하지 않는다. 비움은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와 협동을 살게 한다. 조화의 길로서 비움은 하느 님과 인간이 만나는 체험적이고 신비적 인 것이다. 106) 만으로 인간으로써의 삶을 박탈당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 던 병자들은 희망의 근거를 인간 세상에 둘 수 없는 사회적으로 가장 빈곤한 이 들이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찾아간 다. 또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위의 표현처럼 비움은 세상에 대한 혐 오나 배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비 움의 목적은 다만 비움에 있는 것은 아 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비움이란 수단 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107) 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에게 자기 비움은 자신 안에 그 사랑과 연민의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을 지향 하는 것이다. 도가( 道 家 )에서 허( 虛 )라는 자세도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허( 虛 ) 를 통해 도( 道 )를 얻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자기 비 움은 철저히 현실 세상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끊임없이 세상의 흐름, 가치, 사고방식을 거스르는 초월적인 자세 또 한 요구한다. 예수는 병자들 가운데에서 도 힘의 논리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경쟁 에서 패배하고, 최극단으로 밀리는 이들 곁을 직접 찾아다니셨음을 복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 하나 106) 곽승룡, 같은 책, p.75, 재인용. 107) 위의 책, p.75. 합리적인 사고와 경제논리를 뛰어 넘으 신다. 곧 인간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논 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논리인 생명논리 가 경제논리에 우선 108) 한다. 즉 통상적으 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틀 을 깨신다. 예수께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고 그것은 세상의 논리와는 결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 수와 같이 자기 부정을 통해 긍정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참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노자에게도 당시 시대를 지배했던 사회 악의 발생 이유들은 개인적 이익을 챙기 는 일이나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이 자행한 폭력적인 행위에 그 뿌 리들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 쟁이나 분쟁, 권력으로 인한 착취, 폭정 을 멈추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 자신만 을 위해서 살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통 해 새롭게 변화된 세상을 희망했던 것이 다. 이 같이 예수의 자기 비움과 노자의 108) 김명수, 같은 논문, p.p.9 11. 113
허는 현실의 문제를 대면하는 가운데에 서 실천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4 25) 하셨던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 나. 타인을 향해서 둘째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노자 의 허( 虛 )는 자신을 끊임없이 개방하여 타인을 향해 나간다는 점이다. 이와 같 은 자기 개방적인 비움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 없이는 불가능한 자세이다. 역설적 이게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을 유 지하기 위해서 자신으로부터 나와, 타인 에게 자신을 비워 남김없이 건네줄 때만 나와 너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카스퍼 는 모든 존재하는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맺음 없이 홀로 고고하고 초연한 척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찾아 얻을 수 없으며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을 향한 자 기 초월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 서 예수의 가장 깊은 곳에 중심을 이루 고 있는 타인을 위한 사랑으로서의 자기 비움이야말로 모든 것을 함께 지탱하면 서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유 대의 끈 109) 이라고 할 수 있다. 밀알 하나 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 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 해 인류를 구원하는 자기 비움의 결과 를 가져오셨다. 하느님은 케노시스를 통해 불변성과 변화성을 동시에 지닌다. 불변의 하느님 은 타자와의 차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 아들이시는 변화성을 취하지만 당신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도, 타자의 변화 속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닌 그분 안에 있는 현실로서 드러난다. 110) 노자의 사 상 안에서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 다. 그는 비움을 통해 천지의 영원함을 꿰뚫어 보았는데, 천지가 영원할 수 있 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부자생 ( 不 自 生 ) 때문에 가능하며 인간 역시 그 와 같은 자연의 도( 道 )를 닮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미 같은 자연의 도( 道 )는 만 물을 낳아주지만 만물을 자기 것으로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곡은 깊이 움푹 파여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고 남들이 더럽다 여기는 것까지도 아무 말 없이 품어 안는다. 그러나 작은 계곡 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게 되어도 자신 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 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 109) W. 카스퍼, 같은 책, p.p. 315 316. 110) 이상윤, 불교의 공과 그리스도교의 무 의 의미의 비교, 부산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2004, p.68. 114
의 공을 자랑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 다고 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 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내어주는 삶, 넘 치는 것은 나누고, 부족한 것은 겸손하 게 수용하는, 자신을 가득 채우지 않는 자연처럼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 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 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자신에게 다 가오는 모든 경우의 수 앞에서 도피함 없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은 타인에게 온전히 개방된 삶의 형태와 같아 보인다. 을 모두 내어주는 태도, 무저항 등을 통 해 드러났으며 무엇보다 그 비움으로 써 인간에게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라는 엄청난 선물이 주어졌으며 지상의 삶 동안 몸소 보여주셨던 그리스도의 자 기 비움은 아버지께 사로잡혀 그 뜻을 행하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행복과 기 쁨을 살아갈 수 있음을 제시했다. 따라 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하느님을 벗 어난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온 전한 종속에서 오는 자유라고 할 수 있 다. 즉 자기 비움은 단지 그럴듯한 말 이 아니라 분명 자신을 비워내는 고통 다. 해방과 자유를 향한 질적 비움 케노시스는 양( 量 )적인 것이 아니라 질 ( 質 )적인 성격을 갖는다 111) 고 말한다. 육 화의 사건뿐 아니라 지상에서 보내신 그 리스도의 삶은 존재로서 그 비움의 완 성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 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 기 비움과 충만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곧 예수의 겸 손과 바보스러움, 무저항과 고통이 우 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 112) 이 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자신을 낮 추는 겸손과 바보스러울 정도로 자신 111) 김명수, 같은 논문, p.6. 112) 곽승룡, 같은 책, p.112. 스러운 과정이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 어나는 과정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 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멈추는 것이며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머무르 시는 하느님에 의해 살고 움직이는 것 이기 때문이다. 자기 비움은 그분 자 신 안에서, 또 우리 자신 안에서 실현 113) 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노자의 비움도 자유로움을 지향한다 는 점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 자유는 인간 주체의 자유를 지향하는데 무엇보 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과 사욕 없이 변 화에 적절히 적응할 줄 아는 자유로움과 같다. 유한자인 인간은 변화되는 시공간 113) 양만호, 같은 논문, p.37. 115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적 응은 노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 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고정된 질서나 생 각, 체제를 뛰어넘어 생각할 수 있는 자 유로움이 요구되었다. 노자는 경계가 없 는 도의 허성( 虛 性 )에 대해 말하면서 허 ( 虛 )를 통해 만물을 제약 없이 끌어안을 수 있다고 보았다. 허( 虛 )에 대한 순자의 생각은 노자의 허( 虛 )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기억할 수 있으니, 기억이란 마 음에 지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 虛 ) 가 있다고 함은 이미 그 속에 지니고 있 는 것들이 장차 받아들이려는 것을 거 부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허( 虛 )라고 한다. 114) 고 말했는데, 단지 비움이 목적 이 아니라 새로운 채움을 가능하게 하 는 수용적인 비움이어야 함을 가르쳐 준 다. 비울 때 담을 수 있고, 담을 때 닮을 수 있다. 딱딱한 것은 바람이 불면 부러 지지만 유연한 것은 바람이 불 때 함께 휘어질 뿐 언제나 다시 일어선다. 그러나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야 비울 수 있 는 것의 관계는 무엇이 선후인지보다 상 호관계성이 중요하다고 보인다. 노자에 게 자기 비움은 자신을 고집하는 마음 을 비우는 것이며 변화를 거부하는 마 음을 비움으로써 115) 인간이 존재적으로 누리는 자유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비움이 애착과 안주, 집착과 도전 없음에 대한 생생한 도전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노자의 비움 역시도 질적 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Ⅲ.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의 케노시스와 노자의 허( 虛 )가 지니는 유사점을 통해 역사, 종교, 시대의 경계를 넘어 자기 비 움의 양식이 어떤 공통적 요소들을 내 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본 글의 논점에 따라서 인간의 욕망과 무분 별한 소유로 인해 비대해지고 불균형해 진 현대에 비움의 삶 이 줄 수 있는 새 로운 가능성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 다. 케노시스(Kenosis)와 허( 虛 ) 안에서 드러난 자기 비움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 상을 도피 없이 직면하면서 실천되지만 삶에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고 지향하면서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초 월을 지향한다는 것, 둘째는 자신의 만 족을 위한 비움이 아니라 언제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자신의 시간이나 114) 김경수, 같은 논문, p.157. 115) 위의 논문, p.133. 116
생각을 내어주도록 한다는 것, 마지막으 로 비움은 자유와 인간 완성을 지향하 는 질적인 비움이라는 차원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와 같은 자기 비움이 가져오는 존재 의 완성에 대한 진리 인식은 철학적 흐 름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E.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서양 철학사에 서는 처음으로 자신을 떠난 타자 중심 의 철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 신의 철학에서 자기 비움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적은 없지만 타인을 위해 현실 적으로 자신의 소유와 힘, 시간과 능력 을 나눔으로써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타 인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끌어안아야 한 다고 하면서 우리가 타인을 위한 존재 임 116) 을 증언하는 일을 철학적 소명으로 삼았다. 분리와 소외가 만연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 고 했던 그의 주장 안에서 우리는 또 다 른 비움 의 자세를 어렵지 않게 대면할 수 있다. 본 글에서 무엇보다 좀 더 비중을 두 었던 점은 비움이 타인 지향적인 삶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타인이란 직접적으 로는 우리의 이웃을 지칭하지만, 자신에 116) 강영안,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 지성사, 2009, p.19. 게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떠 나 외부로 시선을 던지는 이에게 타인이 란 자신의 외부 즉, 이웃, 새로운 사건, 상황, 생태, 새로운 사고로 확장되는 개 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 이 유를 나 에게서 너 에게 두는 방식은 배 려와 사랑 안에서 점차적으로 상생의 삶 을 향해 폭넓게 자신을 개방하는 과정이 며 이는 이기적인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비워가는 비움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하 다.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도리어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현실을 망각하고 상실하 는 현대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회복을 위한 비움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 한 생태적 위기, 지독한 이기주의와 권 력의 남용, 부와 지식의 극심한 양극화, 폭력적이고 과격한 삶의 양태, 고독과 인간 소외 현상, 생명경시와 같은 인간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현실 앞에서 아 주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딛도록 우리를 초대한다고 생각된다. 본 글이 낯선 주제의 이야기였다고 생 각되진 않는다. 이미 오랫동안 많은 이 들이 지향했던 삶이기도 하고 또 여전히 많은 이들이 확신하며 걷고 있는 길이기 도 한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타인( 他 人 ) 은 지옥 이라고 규정했지만 이 시대를 빈 117
몸으로 밝혔던 많은 이들은 타인 없이 나만을 위해 살고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지옥 이라는 것을 수없이 증명했다고 생 각한다. 비움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곧 채움이라는 진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 에게 희망이 되고, 혼란한 세상 안에서 자신을 추스르는 하나의 밝은 불빛을 발 견하게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성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05. 김우성 외, 비움의 기도, 가톨릭 출판사, 1997.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 지성사, 2009. 곽승룡, 비움의 영성, 가톨릭출판사, 2004. 박은희 역해, 노자, 고려원, 1997. 양방웅, 초간 노자, 예경, 2003. 윤재근, 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가, 둥지, 1993. 이현주 대담,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上, 다산글방, 1993.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1. J. Gnilka 외, 김경희 역, 국제성서주석 : 필리피서, 필레몬서, 한국신학연구소, 1988. K. 라너, 이봉우 옮김,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분도출판사, 1994.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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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향하여 [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원래 모습대로 보존하 고 완성해 나가기 위해 지구를 살리자. 는 환경보호 운동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입니까? ] 약간의 불편만 감수한다면 때 미리 계획을 세워 필요한 것만 사되 먹을 만큼 사기, 음식점에서 남은 음식 싸오기 등이다. 사무실에서는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개인 컵을 쓰며, 물 절약을 위해 양치하거나 세수할 때 물 받아서 쓰기, 아이들 목욕 후 남은 물로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 는 등의 방법이 있다. 김은영 (로사) 1학년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일들도 있다. 첫째, 사무실에서나 집에서 커피를 많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 기에 참 좋다는 감탄이 나오도록 아름 답게 만드셨지만, 그 세상을 더럽히는 장본인이 바로 내가 아닌지 반성하게 된 다. 나는 이 세상을 잘 보존하여 아이들 에게 물려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 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 내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 들을 살펴본다. 우선 쓰레기 분리수거하기, 다 쓴 물 건도 재활용할 방법 찾기, 전기 플러그 뽑아두기, 빈 방 형광등 끄기, 보일러와 에어컨은 꼭 필요할 때만 틀기, 추운 겨 울 내복 입기,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 지 않고 계획적으로 열기 등이 있다. 그 리고 음식물 낭비를 줄이기 위해 장 볼 이 마시는데 공정무역 커피를 사려고 한다. 둘째, 청소나 세탁, 설거지할 때 화학세제를 쓰면서 내내 찜찜한 마음인 데 식초나 베이킹소다, 천연비누가 화학 세제 못지않은 효과를 본다고 하니 그 런 것을 사용하려고 한다. 셋째, 단순한 운동을 하려고 한다. 스포츠 센터는 전 기를 사용하는 온갖 운동기구, 샤워실, 에어컨 등으로 에너지를 잡아먹는 하마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스포츠 센 터보다는 일상 속에서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면 가까 운 거리는 걸어 다니며 자가용 사용을 줄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아이들과 의 산책, 조깅 등을 하려고 한다. 넷째, 사무실에서도 컴퓨터, 프린터, 화장실 불 끄기를 습관들이려고 한다. 다섯째, 121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고 장바구니를 늘 가방에 넣어 다니려고 한다. 여섯째, 천 연섬유로 만든 옷을 입고 일곱째, 화장 품 끝까지 쓰기이다. 물론 이렇게 지구를 위해서 기본적으 로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을 한결같이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덜 사고, 더 오랫동안 사용하자. 는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한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환경보호와 에너지 절약에 내 작은 힘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즐거운 불편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더 나은 미래, 세상을 떠올리면 행복해 지기까지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친환경 성찰 10계명> 한애경(데레사) 1학년 1.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며 친환경적으로 선택해요. 2. 거룩한 마음으로 노동과 일상에 임해요. 3. 물건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해요. 4. 생태영성에 관심 갖고 공부하며 전파 해요. 5. 유기농 재배로 인한 볼품없는 야채 과 일 선택하여 먹어요. 6. 음식 국물 버리지 않아요. 7. 개인 컵 가지고 다녀요. 8. 절전의 시간을 갖고 전기 플러그 뽑아요. 9. 물은 생명이에요. 아껴 써요. 10. 음식물 쓰레기 줄이는 지렁이 키워요. 우리 수도회에서는 매일의 생활 속에 서 환경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위해 위 와 같이 친환경 성찰 10계명 을 정하여 모든 회원들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실 천하고 공동체 모임 때에 실천한 것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처음 이 친환경 성찰 10계명 을 받았 을 때는 병들어 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 해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 보자고, 열심 히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기도상 위에 잘 보이도록 세워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 고 보시니 좋았다. 라고 하셨던 것처럼 모든 창조물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신 앙의 눈 을 가지는 것이므로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곤충 한 마리도, 내 옆에 있는 가장 위대한 하느님의 작품인 형 제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의식하 는 것에 마음을 썼다. 122
청빈서원을 한 수도자로서 내가 가지 고 있는 물건들을 바라본다. 꼭 필요하 지 않는 것들이 참 많다. 짐스럽게 느 껴지는 물건들, 쓸 만한 것인데도 오래 가지고 있어 싫증이 나 버리고 싶은 충 동을 느낄 때가 있다. 깨끗하게 다 정 리하고 싶어질 때 기도상 위에 놓인 친 환경 성찰 10계명을 보면서 쓰레기통에 버렸던 신축성이 떨어진 양말을 다시 주워서 더 신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곤 한다. 매일 세 끼 식사시간은 많은 실천을 하게 되지만 유혹도 많이 받는 때이다. 조금 남은 반찬과 김치 국물, 다 먹기 엔 힘들어 버리면 편하지만 망설이다 가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찌개를 끓일 때 넣는다. 그러면 신김치 국물이 찌개를 더 맛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외출했을 때는 종이컵 절약을 위해 가 방 안에서 개인 컵을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한다. 가방이 무거운데 꼭 이렇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가벼운 페트병에 물을 담아 가는 것으로 방법을 바꾼다. 그럼 몇 번은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아 도 되니까. 꼭 종이컵을 사용해야 할 때에는 이름을 써놓고, 다른 이들에게 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한다. 주일 저녁 총원에서 살고 있는 동생 수녀님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뭐하고 있어요? 북한에서 굶 주리고 있는 동포들을 기억하며 저녁 은 단체로 단식을 하고, 총원 전체가 1 시간 동안 전등을 끄고 모든 전기제품 의 플러그를 뽑고 절전의 시간을 갖고 있어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말에 놀라웠다. 정말 실천하고 있구나. 일부 러 전등을 끄고 어둡게 지내고 있구나. 일요일 저녁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 램과 뉴스를 통해 듣는 세상 소식도 잠 깐 멀리하고 지구 살리기 에 힘을 싣고 있는 것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우리 수도회 큰 공동체에서는 과일 껍질과 채소 등을 고기 다지듯이 잘게 썬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고 효소 를 이용하여 퇴비를 만들고, 지렁이를 키우는 곳에서는 지렁이 양식으로 주기 위해서이다. 작은 분원에서는 과일 껍 질과 채소 찌꺼기 등을 말려서 버리는 것으로 쓰레기를 줄이고, 휴지 대신에 손수건을 쓰는 것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 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더위에 지쳤을 때 마시는 시원한 냉수 한 컵의 맛을 누구나 잘 알 것이다. 또한 시원한 물로 땀에 젖었 123
던 몸을 씻는 상쾌함도. 이 귀한 물 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빨래를 모 아서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물은 받아 서 사용하고, 빨래 헹군 물은 화장실 물로 재사용하고 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 첫영성체 교리를 성무라는 믿음을 갖고 내가 매순간 만 나는 하느님의 창조물들 공기 물 빛 바람 나무 꽃 곤충 먹거리 생필품 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으로 하느님 의 창조 사업에 협력자가 되어야 할 것 을 다시 한 번 결심한다. 하면서 안타까움을 많이 느낀다. 요즘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고 공중도덕을 지 키고 물건을 아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서 거의 개념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 다. 그냥 나만 편하면 되고, 내가 안 했 으면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도 상 [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잘 관리하도록 맡겨주신 이 세 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나와 이웃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이나 재능은 무엇인지 세 가지 이상을 적어 보십시 오. ] 관없고 왜 성당에서는 편한 종이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되 는 아이들.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동안 짜증내지 않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의 의미를 알리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름답다고 감탄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김남철(베드로) 1학년 하시며 행복해 하셨던 하느님 마음을 다시 찾아드려야 한다. 비록 작고 미약 한 것마저 잘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지 만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에 비추어 고해성사를 준비하듯이 친환경 성찰 10계명 으로 날마다 지구 살리기 에 얼 마나 노력했는지 성찰하려고 한다. 자 연과 이웃을 하느님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늘 반복되는 일상이 거룩한 나는 평야 지대의 곡창에 소재한 읍 내에서 농기구 제조업을 하시는 아버지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유도 모르면 서 형제들 중에서 제일 많이 맞고 구박 을 당하면서 자랐다. 그 당시는 이런 아 버지가 싫고 밉기만 했는데, 어린 마음 에 밖으로는 드러내지 못하면서 원망도 많이 했고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요즘 124
아이들 같았으면 아마 가출을 해도 몇 번을 했을 것이다. 군대에 입대해서도 엄격한 훈련을 받 아야 했다.(28주 동안 하사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음.) 명령을 받으면 김 일성의 눈알이라도 빼 올 정도로 강하 고 혹독한 군사교육을 받고 배치된 곳 은 군기가 한국 군대 중에서도 제일 세 다는 맹호부대여서 정기휴가 이외에는 일체 외박이나 외출이 없는 군대생활 을 했다. 마침 8 18 판문점 도끼만행사 건이 발생해 군 생활이 2개월 더 연장 되어 만 34개월 일주일 만에 자유의 몸 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은 사회 에 나와서 대인 관계도 수월하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렇 지 못했다. 우선 사람을 만나면 경직되 고 이상하게 움츠러들어 할 말도 잘 못 하고 남의 말을 듣기만 하는 소극적이 고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 돼버려 직장과 사회생활이 어렵기만 했다. 그렇지만 다 행히도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그토록 싫 고 두려웠던 아버지가 불쌍하게 생각되 고 보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노력이 전혀 없었는데도 마음 속 에서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는 것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제대를 하고 직장을 찾기 어려워 아버 지 공장에서 2년을 보내다가 우연한 기 회에 국가공무원 시험을 보았는데 운좋 게 합격했다. 별 볼일 없던 실업자가 갑 자기 국가공무원이 된 것이다. 1년을 근 무하다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 혼하게 되었고 첫딸을 낳고 둘째 아이 가 생겼는데 또 딸이었다. 우리 형제가 6남매(4남 2녀)인데 그 가운데 손녀만 8명이고 손자는 한 명도 없으니 병석에 계셨던 아버지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결국 아버지는 손자를 보지 못 하고 1986년 당신 생일날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11월에 비로소 처음으로 내게서 아들이 태어나니 기쁨 보다는 슬픔이 더 컸다. 하느님이 원망 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1988년에 형님 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딸 만 셋을 남기고 새벽에 잠자다가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그때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아 버지도 거의 3년 동안 누워 계시다 돌 아가셨는데 그 슬픔이 잊힐 만하니 이 번에는 형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뜬 형님에 대한 슬픔으로 나는 거의 3년간을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정 말 슬펐고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술과 한탄으로 3년여의 세월 125
을 보내다가 조금 잦아들 무렵인 1992 년, 큰아들을 낳은 지 6년 만에 막내아 들이 태어났다. 너무나 기쁘고 좋았지 만 만나는 사람마다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그 박봉을 가지고 어 떻게 애들을 키울까? 지금이 어떤 시대 인데 애를 넷이나 낳아? 원시인이냐? 등 별별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그래 도 나는 좋았고 기뻤다. 아내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줘서 지금 큰딸은 초등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고, 둘째딸은 약 사로 재직하고 있다. 큰아들은 군 제대 후 복학해서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4학 년에로 재학 중이고 늦둥이 막내아들 은 교대 1학년에 재학 중이니 이것이 하 느님의 은총, 귀중한 선물이 아니고 무 엇이겠는가? 또 궁핍한 생활 중에도 불 평 한마디 없이 시댁과 시동생, 시누이 들을 먼저 챙기며 네 명의 아이를 낳아 주고 아이들과 나의 뒷바라지를 다해준 아내가 가장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진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낳아주시고 가르치신 부모님이 곧 하느님의 선물이고, 나의 뜻을 받들어 많은 어려움과 힐난의 눈초리에도 불구 하고 자식을 잘 길러준 내 소중하고 고 마운 아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깊이 믿고 있다. 또 착하게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공부도 잘해준 네 명의 자식이 이 세상 무엇과 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믿 고 있다. 또 나와 내 가정과 형제자매 들, 부모님을 봉양하는 터전이 되어준 직장 또한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에 틀 림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은총은 오 랜 세월 동안의 냉담과 악행에도 불구 하고 이 죄인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불 러주시고, 다른 이들도 그런 체험을 했 는지 모르겠지만 넘치도록 풍성한 성령 의 은총을 쏟아주신 하느님의 변함없으 신 사랑이다. 지난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내가 세 례를 받은 것은 1972년 4월 1일이지만 몇 달도 다니지 못하고 냉담하고 말았 다. 냉담한 것만 아니라 절에 다니기 시 작하면서 미신에 빠져 무당 아주머니에 게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의논할 정도 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무시하고 딴 짓 만 하고 있었는데, 2007년 4월 어머니 가 돌아가셨다. 동생 내외는 착실히 성 당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 동안 연미사를 드리게 되어 우리 부부도 주 말에는 고향에 내려가 미사에 참례했 126
다. 그런데 미사 때 성가 소리가 들려오 고 어머니 성함이 불리고, 성경말씀을 듣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니 그들은 아무렇지 도 않은데 나만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매 미사 때마 다 그러니 창피하기도 하고 뭐가 잘못 된 것인가? 하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 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그대로 있을 수 [ 이 과의 삶의 자리 를 읽으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 는 여정의 동행자로서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 각되는 사람들을 차례로 10명까지 적어보시오. 어떤 면 에서 그들이 나의 이웃이고 나는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 내가 가진 사랑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삶 이연숙(로사) 1학년 가 없어 본당을 찾아갔는데, 아무 어려 움 없이 고해성사를 보게 되어 무려 36 년간의 냉담이 그 자리에서 풀렸다. 이 질문을 선택한 이유는 친정 아버 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나도 죽음 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얼마나 많은 냉담을 풀고 한 달에 한두 번의 고해 성사를 통해서 지난날의 대죄와 소죄를 모두 토해 내며 내 영혼을 청소했고, 신 구약 성경 필사와 봉독도 했다. 또 이 렇게 성경 공부도 하고 교리 공부도 열 심히 하고 있으며, 신앙생활도 내가 아 는 범위에서는 철저하게 하고 있으며 배 운 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완고했던 내 마음을 일순간 에 활짝 열게 하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 랑일 것이다. 매일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 이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인사가 됐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 니다. 아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 는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하느 님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지, 어떻게 하 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인지 등등의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번 기회가 아니면 나는 또 이런 것에 무 뎌지고 별 생각 없이 살아갈 것이 자명 하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동행 자로서의 이웃이 10명, 아니 5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견진 대모님 박 마리아 형님이시다. 신앙생활을 대충 하던 나를 레지오에 입단시키시고 돌보 127
아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묵 주기도문도 외우게 되었고 다른 기도문 도 알게 되었으며 성모님에 대해서도 많 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견진 때 흔쾌히 대모님이 되어주셨다. 지금은 멀리 떨어 져 계신다. 그래도 가끔 전화 통화를 하 면 늘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부 터 하신다. 그 덕에 이렇게 하느님 옆에 내가 존재하는 것임을 잘 안다. 대모님,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최 라우렌시오 신부님이시 다.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지만 신 부님 덕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일본에 계신 것으로 아는데, 여 러 자매님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재미있 게 치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신부님이시다. 그때는 세상 것을 중심으 로 살았지만 지금은 하느님 중심의 삶 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조금 이나마 변화된 나를 그분께 보여주고 그분이 하고 계신 하느님 사업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싶다. 신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배드민턴을 잊지 않고 고 마워하고 있기에, 하느님께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이 일생을 봉헌하신 하느 님을 나도 더 알고 싶어 하느님께 나아 가니 그만큼 하느님도 나에게 다가와 주셨다. 세 번째는 우리 성당 사무장님 최 유 스티나 형님이시다. 그분이 사무장이 되 기 전에 교육부에서 알게 된 것이 인연 이 되어 그분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주로 성당의 큰 행사와 축일에 성전 꾸 미는 일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많 이 부족했던 나에게 그 시기마다 의미 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상징하는 그 림과 말씀을 묵상하게 했으며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 분이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꾸민 성전을 보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느 님께 감사함을 느낀다는 신자분들의 말 을 듣기도 했다. 유스티나 형님은 내가 힘들고 고민이 생기면 하느님의 사랑으 로 나를 잘 이끌어 주시는 신앙의 멘토 이시다. 요즘엔 가끔 사무실 일을 도와 드리면서 만남을 갖는다. 네 번째는 함께 창세기, 탈출기를 공 부한 올해 72세이신 최 유스티나 형님 이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많으시고 매사에 지고는 못 배기는 샘 이 많으신 어른이시다. 그분은 나뿐만 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 128
이 기도를 하시며 성경 공부도 나이와 상관없이 열심히 하시는데, 요즘 요한복 음을 공부하시는 멋있는 분이시다. 항 상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놓고 계신 분이 시다. 그분의 그 열정이 나에게도 성경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분은 나 때문에 성경 공부를 할 수 있 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나야말 로 그분 덕에 이렇게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이 엔나타 형님이시다. 나와 동갑내기인데 주민등록으로는 나 이가 많게 나와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 이 형님은 처음에는 그리 친하지는 않 았다. 레지오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봄과 가을에 특히 증상이 심해지는 조 울증 환자다. 자주 만나서 내가 그 형님 의 말을 많이 들어주는 편이다. 안 보이 면 걱정이 되어 연락하고, 우울하다고 하면 만나서 맛난 것 사주고 하면서 더 친해졌다. 힘든 삶이지만 노력하는 그 형님을 보면서 많은 힘과 위로를 받는 다. 형님의 병이 빨리 나으시기를 늘 기 도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여섯 번째는 박 엘리사벳 형님으로 내가 아팠을 때 나를 챙겨주신 고마우 신 분이시다. 또한 같이 일하면서 내게 인내와 겸손을 배우도록 하느님이 보내 주신 십자가이기도 한 이웃이다. 그분 과 함께 일하면서 갈등도 많았고 고민 도 많이 하면서 그분과 닮은 나를 보기 도 했다. 지금도 많이 어렵고 조심스러 운 분이지만 그분이 좋다. 나를 되돌아 보게 하고 교만하지 않게 나를 지켜주 시는 아주 매력적인 분이시다. 아직은 그분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지만 언젠 가는 내가 보는 하느님을 그분도 보게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내가 도 움이 되려고 노력한다. 십자가인 형님과 함께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일곱 번째는 나의 거들짝 노 모리시 오이다. 하느님께 가는 여정에 파라오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많 았던 아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어, 미사에 열심이며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다. 남편 때문에 나는 하느님 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앞으로 도 늘 나의 기도 내용이 되어줄 남편이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꼭 이루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여덟 번째는 시어머니이시다. 나에게 129
성당에 다니라고 성경책을 예물함에 넣 어 보내주신 분이시다. 나와 친정 식구 들은 비웃었지만 시어머니 덕분에 지금 까지 지켜주고 보살펴 주신 분이 하느님 이심을 알게 되었다. 나를 살리시고 사 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분, 삶이 왜 소중한지 가르쳐 주신 분, 새로운 세상 을 보게 해주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그 분 덕분에 알게 되었다고 나는 다시 고 백한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아홉 번째는 친정 부모님이시다. 미신 을 믿는 부모님의 세상에 대한 잣대는 오직 물질적인 부, 돈뿐이다. 비록 하느 님을 믿지 않지만 신앙인이 된 나를 배 척하거나 구박하시는 일은 없었다. 그분 들의 물질적인 도움이 나의 가족과 시 댁 식구들에게 선이 되어주었음을 감사 드리는 마음이다. 다행히 아버지가 돌 아가실 때 조건부 대세를 받으셨다. 이 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도 기 도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신 하느님께 감 사드린다. 내가 더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그들이 힘들고 지쳤을 때 그들의 버팀목과 그늘 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하느 님께서 나의 이런 기도를 꼭 들어주시리 라 믿는다. 이웃은 좋던 나쁘던 간에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로에 함께해 주시는 이들이다. 이분들과 끝까지 이 소중한 여정을 함께 가고 싶다. 나를 스쳐가는 모든 분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함 께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느님을 향한 여러 행로가 있겠지만 내가 추구 하는 것은 조그마한 것을 나누는 나눔 의 여로 에 모두 함께했으면 하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고 느꼈으면 한다. 아직 나부터 나눔 에 익숙하지 않지만 아주 작은 나눔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단순하게 나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쉽게 내어주는 삶을 살고 싶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 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열 번째는 나의 자식들이다. 지금은 마지못해 성당에 가는 형편이지만 그들 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130
[ 창조와 인류기원을 다룬 이 과를 마치면서 하느님과 나, 나와 이웃, 나와 사물 의 관계를 조용히 되돌아봅니 다. 혼돈과 두려움과 좌절을 안겨주는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이 우리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세 1,1 2,25 참조) ] 자비의 눈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이미애(데레사) 1학년 어느 정도면 하느님 보시기에 적당할 까? 난 많이는 못하는데. 전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자 애썼고 그에 대한 확 신이 없어 늘 불안했습니다. 그렇게 외 줄타기 신앙생활을 하다가 큰아이를 통 해 큰 시련이 왔습니다. 늘 저금하는 심 정으로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막상 큰일을 당하고 보니 왜 하느님은 저를 희생양으로 삼으셨는지 원망스러웠고, 혹시 하느님께서 저를 깜빡 잊으신 것이 저는 세례를 받고 한동안 심한 정체성 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 다. 특히 열과 성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 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마치 자신의 만 능열쇠로 여길 때 과연 저는 하느님 앞 에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하느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는 지를 알 수 없어 정말 혼란스러웠습니 다. 저도 하느님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 한, 하느님께 기도할 것이, 은혜를 구해 야 할 것이, 자비를 청해야 할 것이 너 아닌가 하는 생각에 너무 고통스럽고 서운하기만 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에 등급이 있다면 저는 마치 맨 끝자리에 놓인 불가촉천민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저는 그 로부터 만 4년을 울면서 기도하고 울면 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도 제가 울 때 성모님도 함께 울어주 시고 성체를 모실 때 주님이 저를 위로 해 주시고 다독여 주시는 체험도 했습 니다. 그렇다 해도 저와 저의 아이에게 닥친 시련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 았습니다. 무 많은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이기 때 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우연히 가정환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도생활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정도면 될까? 경이 극도로 열악한 아이들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매일 보면서 131
마음이 무척 아팠는데, 실질적으로 그 애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 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아이들이 제게 오는 그 때만이라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자 는 마음이 들었고, 저의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아이들도 제게 마음을 열고 저를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게 지도받는 아이들 중에는 부유하고 똑똑 하고 예쁜 아이들도 있었고, 그 아이들 고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독여 줍니다. 제가 시련 속에 있을 때 주님은 더 고통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울어주셨던 모습도 소중하게 마음에 새겨 둡니다. 제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늘 알려주시는 하느님, 세상에 걸려 넘 어지지 않도록 늘 저를 자비의 눈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저는 알고 사랑하고 또 감사합니다. 도 모두 소중하고 예뻤지만 곤란한 환 경의 아이들이 제게 다가올 때 저는 더 힘껏 안아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그 환경을 용감하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세상 어딘가에 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해 주 었습니다. 아이들은 성장하여 저를 떠났고 그 [ 바오로의 생애를 보여주는 그림에서 마음에 드는 그 림 하나를 선택하여 인상깊게 다가온 바오로의 모습 을 묵상한 내용을 적으십시오. (바오로의 회심 2과 9쪽 4번) ] 회개로 초대받은 내 삶의 자리 문승희(수산나) 성바오로 신학영성 이후 저도 그곳을 떠나 어려운 아이들 을 돕는 봉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 는 이제 하느님이 제게 어떤 분인지 잘 압니다. 제가 또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 지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제게 안길 때 저는 가슴이 너 무 아파 목이 메이지만 어금니를 꽉 물 회개는 하느님을 향하여 다시 돌아서 는 마음이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 겠다. (마태 28,20) 하신 당신의 약속에 대한 부응이 바로 하느님을 늘 내 가까 이에서 함께 모시고 싶은 마음이다. 따 132
라서 죄라는 것은 그 마음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행태를 말할 것 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죽을 죄 를 지었다 하더라도 늘 자비와 용서로 우리를 받아주신다. 나는 하느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 는 신자이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는 기회를 얻었듯이 나도 내 삶 의 자리에서 늘 회개의 자리로 초대받 는다. 재작년일이던가? 임종을 앞둔 어떤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장애인 자매님을 통해서 그 할 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았다. 할 머니는 심장병을 앓고 계셨다. 물론 아 무런 연고가 없는 가난한 할머니였다. 아무리 할머니에게 가족관계를 물어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의사가 수술을 하면 산다고 해도, 의사가 자기 몸을 실 험대 위에 얹어 놓으려 한다면서 자기는 죽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수술을 거부 하였다. 결국 다음날 새벽 할머니는 하 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본당에 와서 교적을 찾아도 할머니 성함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웃 본당에서 수년 전에 이사를 왔지만 교 무금 문제 때문에 교적도 옮기지 못하 고 무임승차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장례 절차가 남았는데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 니 막막했다. 더군다나 교적관리가 되 지 않아 우리 본당에서는 아무런 조치 를 취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할머 니는 며칠을 병원 영안실에 방치되다시 피 했다. 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영구 임 대아파트 문을 관리실의 도움을 받아 열고 들어가서 전화번호 수첩을 찾아 겨우 할머니 여동생에게 연락을 취했 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생전에 그 여동 생의 돈을 빌려서 쓰고 갚지를 않아 친 자매간이지만 남보다도 못한 관계를 유 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차마 미안해서 여동생에게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조 차 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것 을 정리하고 보니 빌린 돈만큼 되었다. 그러자 그 돈을 할머니 여동생이 가져 갔다. 할머니의 친척들은 장례비 부담 을 꺼려했으므로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 고 빈 테이블 위에 성수를 뿌리고 사도 예절을 하는 것으로 할머니의 한많은 모든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입소문을 통해 듣고 달려온 20여 명 133
의 신자들이 사도예절에 함께하였다. 사도예절의 주례는 할머니의 교적이 있 는 이웃 본당 신부님이 해주셨다. 신부 님도 사제생활 30여 년 동안 이런 막 막한 죽음은 처음이라며 안타까워하셨 다. 할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나에게 그 러셨다. 평상시에 장기기증 같은 것을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무 런 서약도 못하고 이렇게 병원에 눕게 되었다고. 할머니의 알 수 없는 욕심이 당신 여 동생과의 사이도 나쁘게 하고 교적관리 도 못한 어리석음이 분명 있지만 세상 이 너무나 냉소적인 것이 아쉬웠다. 할 머니는 신자였지만 죽음 후에 사도예절 말고는 어떠한 기도도 받지 못하고 가 셨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안타깝고 눈물이 났다. 마음이 너무나 아픈 나 머지 할머니를 위해 십자가의 길 기도 를 바치는데 4처쯤 하는 중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얘야, 너는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신 자들이 연도를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 이 그렇게 중요하냐? 그 할머니는 이미 나에게 와 있다. 할머니의 죄가 진홍빛 처럼 진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할머니 를 이미 용서하였다. 그것은 네가 걱정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 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하느님은 자 비하시고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뼛속 깊 이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바오로 사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셨듯이 할머니도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 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 다고 아무렇게나 살면서 하느님의 자비 를 청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 해서 사는 삶이지만 인간인지라 나약하 고 자주 넘어지는 습성이 있기에 넘어 질 때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다 시 하느님께 돌아서는 용기를 얻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다. 나 아닌 다른 분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불교 신자였다. 최원우(요세피나) 성바오로 신학영성 둘째 딸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매달 만남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개신교 신자도 있었다. 그 당시 다미선교회에서 134
주장하는 예수재림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지만 난 별 관심 이 없었다. 그냥 존중해 주는 차원으로 듣고 있었는데 며칠 후에 꿈을 꾸었다. 내 방에 예수님이 오셨다. 왕의 모습으 로 오셔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계 셨다. 그러나 그땐 내가 교회 이야기를 너무 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이후 이민 오면서 한국 사람들을 만 나고 싶어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렇게 지내던 중 크라이스트처치에 서 목회를 하고 있는 남편 친구가 부흥 회를 하기 위하여 오클랜드에 오셨다. 다른 교회 일로 왔지만 우리집에 묵기 로 했다. 3박 4일 동안 먼 거리 부흥회 장소까지 봉사했다. 부흥회를 마치고 12월 25일 아침 목사님은 우리 가족 모 두에게 안수를 주고 본당예배를 위하 여 떠나시는데 공항까지 모셔다 드렸 다. 우리 교회에서는 11시에 예배를 드 리는데 조금 늦게 예배당에 들어갔다. 마침 성가대에서 사도신경을 노래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 가사를 듣다 보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보였다. 성가대 윗 쪽 천정 가까이에 깜깜한 마굿간이 있 었었고 그 속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님 이 계셨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뭉 클한 감정이 솟구쳐 한없이 울었다. 내 가 간절히 원하지도, 부르지도 않았는 데 주님께서 나를 품으셨나 보다. 다시 호주로의 재이민, 그리고 가톨릭 으로의 개종, 나 스스로 찾아왔다. 교리공부 첫날부터 세례받을 때까지 성경통독을 했다. 그리고 5개월 뒤 본 당에서 성령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 기간 중 안수예절 때 다시 성 가대 윗쪽에서 푸른 기운을 느꼈고, 신 부님의 영가가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 나도 청했다. 그리고 수년 동안 베풀어 주신 신비, 내 영혼의 자유, 풍요.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분이 계시다. 하느님은 아름다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사랑이시다. 내가 꽃을 아름답다 할 때도 그것은 내 안에 하느님이, 의로운 일을 할 때에도 의로우신 하느 님이 내 안에서, 사랑을 할 때에도 내 안에서 하느님 이 하시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하느님의 통로일 뿐이다. 하느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 나를 보 내신 그분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 그렇게 사는 삶이 나의 삶이어야 한다 고 다짐한다. 135
독후감 본질을 사는 인간 을 읽고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황윤구(스테파노) 2학년 수녀님께. 먼저 수녀님께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저는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에 제출할 과제물을 작성하기 위하여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중의 하나인 본질을 사는 인간 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과제물을 받았을 때 혹시 집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 주 오래 전이라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지만 책장에서 이 책을 찾 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니 전에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아 처 음 읽는 것 같았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먼저 요약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월이 흘러 신앙의 지성화와 신학의 조직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이성을 바탕으로 한 교리 중심의 종교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원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체험의 종교로서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직분)은 첫째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둘째가 주님 으로부터 파견받아 활동하는 것인데 첫째 직분이 언제나 둘째 직분보다 우선시 되 어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주님으로부터 봉사활동에 필요한 힘과 권위를 받아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파견받아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즉응성( 非 卽 應 性, unavailability) 이 필요하다. 비즉응성이란 사도직 요구(복음 전파와 봉사활동)가 들어왔을 때 즉각적 136
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 다. 비즉응성의 원칙을 가장 모범적으로 살아가신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하느님 께 파견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면 서 그때 그때 응답해야 할 요구도 많았지만, 아주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시어 하느님 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셨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비즉응성 을 살아야 하며 비즉응성을 살아가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첫 째, 만약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견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칭 파견 된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둘째,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적 상태는 무질서함과 피곤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곧 영적 힘의 재충전을 위하여 비즉응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전에 읽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났습니 다. 그때에는 아마 제가 첫째 직분과 둘째 직분을 마리아와 마르타 에 관련지어 이 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이 아주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가 재속회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은 이 책의 내용이 지난번과는 달리 저의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 이유 는 아마도 이런저런 활동으로 제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간간이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아서가 아닌가 합니다. 과연 지금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 게 사는 것인가?, 바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 이 아닌가? 이런 회의가 들도록 분주하게 살다 보니 하루 30분 묵상은 저에게 희망 사항에 불과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져만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읽은 이 책은 요즈음의 저에 대하여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었으며 제가 정말 해야 할 일을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책에 인용된 자칭 파견된 사람이 보이는 내적 무질서의 증상들을 읽으면서 저 자신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었는데 그 중 멍청하게 있는 시간을 용납하 지 않으며 항시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한다. 라는 구절이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고 그것에 대 137
해 감사드리면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 활동 후 영적 재충전을 위해서는 다 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과 함께 성찰, 분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확대 일로에 있었던 활동 범위를 검토하여 축소할 부분은 축소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며, 매일 단 몇 분이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주 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일주일에 하루라도 한 시간을 조용히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제가 하느 님에 대한 사랑, 영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 습니까? 이 책을 다 읽으니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자됨의 본질이 무엇 인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는 가슴 뜨겁게 주님 을 만나는 인격적 사랑의 종교요, 신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으로 불러주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자가 된다는 것 이 라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할 것도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을 깊이 알고, 열렬히 사랑 하고, 충실히 따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녀님 보시기에도 저의 생활이 여러 모로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의 기도로 제가 주님을 좀 더 자주, 좀 더 가까이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도 수녀님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비즉응성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138
인간을 잠시 도구로 쓰실 뿐입니다 김미진(소피아) 2학년 매번 송봉모 신부님의 책을 읽으며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 과제로 읽은 본질을 사는 인간 도 나의 상황과 어쩜 이리도 잘 맞을 수 있을까. 마치 나를 위해 읽으라고 권해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둘째 아이 첫영성체 부모교사가 주신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을 읽고 감명을 받았고 셋째가 두 살임에도 첫영성체 어린이 교사로 일하라는 권유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올해부터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녀 때 청년 레지오도 하고 어린 이 레지오 단장도 조금 해보았지만, 결혼하고 10년이 넘게 집에서 애만 키우다가 성 당에서 어린이 교사로 일하게 되니, 마치 사회 초년병처럼 마음은 들떴지만 아무것 도 모르는 무식한 상태라 겁도 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사 일을 시작하면서는 나는 애가 셋인데(막내도 어리고) 봉사까지 하니 하느님이 날 특별히 봐주실 거야. 하는 생각과 다들 선생님이라 불러주니까 내가 그들보다 뭔가는 더 낫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교만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런데 봉사를 하다 보니 성당도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갈등, 뒷담화가 무성한 곳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주일학교 교감과 첫영성체 대표 교사와의 갈등 사 이에 끼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애매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까지 아무 역할 없이 성당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갑자기 교사가 되니까 저에 대한 말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 속에서 다행히도 저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을 깨달아 열 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나의 역할과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용기를 갖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열정을 갖고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또 나도 모르 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견진성사를 받고 난 후 내가 없어도 성당은 잘 돌 139
아가는데 내가 착각 속에 나 자신을 너무 힘들게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갈 수 있는 모임은 나가고 빠져도 되는 모임은 빠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본질을 사는 인간 에서도 영적 힘의 재충전을 위해서 비즉 응성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저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성실하게 어떤 모임에도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는데, 저에게 숨통을 열어주시는 말 씀이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은,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며 그 하느님은 내가 없이도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고, 그분이 나를 제쳐두기로 결 정하시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 다른 방법을 써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성당에 봉사하니까 나에게 벌을 안 주시겠지, 우리 집에 복을 주시겠지, 나의 기도는 다 들어주시겠지, 나는 남보다 하느님의 은총을 더 받겠지, 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이런 몹쓸 교만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성인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자신의 소명과 자기의 그릇을 정확히 알고 물러날 줄 알고, 모든 칭찬과 대접받음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의 죽음마 저도 사람은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려준 그래서 더더욱 위 대한 성인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인간을 도구로 잠시 쓰실 뿐, 교만할 필요도 없 고, 으스댈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것을 이 책을 통 해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140
나눔터 학생이 평가자에게 인간의 손에 내맡기지 말고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자. 정녕 그분의 위엄이 크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도 크시다. (집회 2,17 18) 평가자님, 홍수나 더위 피해 없이 잘 지내셨는지요? 다들 덥다고 불평을 하는데, 저는 생활과 자연이 충만한 여름이 너무 좋아요. 빈약한 도시의 나무숲 속에서 울 어주는 매미의 소리가 한없이 정겹습니다. 거기에 반주를 맞추는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도요. 그동안 하느님의 평화가 얼마나 큰 은총이었는지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 어요. 어서 유혹과 시련이 끝나고 다시 씩씩한 저 자신으로 돌아오길 빌고 있습니 다. 기도 부탁드릴게요. 건강하시구요. 항상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1학기 나눔터 를 다시 읽어보며 큰 힘을 얻었어요. 행복하세요. 평가자가 학생에게 자매님! 자매님의 모습을 보면서 삶의 기쁨이 거창함에서 오기보다는 소소한 것들에서도 찾을 수 있음을 느낍니다. 올 여름은 비가 많이 왔던 만큼 빗소리를 감상할 기회도 많았어요. 여름의 비가 더욱 씩씩하게 자매님을 자라게 해주었으리라 믿습니다. 5과에서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았지요. 구약에서 한 인물이 과연 참 예언자인지 아니면 거짓 예언자인지에 대해 판단을 한 흔적을 엿보게 됩니 141
다. 구약시대와 지금 이 시대는 까마득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언자 시대가 과거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엔 예언자 시대처럼 거짓된 진리를 마치 참 진리인 양 말하는 사람 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거짓 예언자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거짓 예 언자의 모습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하면서 이를 고급스럽게 포 장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에서,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에서도,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에게서도 찾 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에 구약시대 참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 고 있지요. 그들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불의의 상황에서 용기 있게 쓴 소리를 할 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시대 참 예언자들의 중요한 공통점은 하나같이 하느님 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구분은 개 인의 인간적인 능력과 성장 배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단지 자 신은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함을 뼛속 깊이 체험하고(예레 23,9), 단지 주님이 자신의 입에 담아준 말들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거짓 예언과 참 예언을 식별하며 살아가야 하는 신앙인일 뿐 아니라 각 자는 주님의 소명에 따라 예언직을 수행해 나가야 할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참 예언 자의 삶을 살아감이 필연적으로 세상에서 받을 보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것입니 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길을 마련하시는 하 느님을 믿으며 이 세상을 힘차게 함께 살아가도록 해요. 142
학생이 평가자에게 + 찬미 예수님!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휴가도 잘 다녀오셨고요? 보람과 기쁨이 함께하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1학기를 마치고 연수회에 참가하여 오랜만에 새로운 교우들과 사귀 고 좋은 말씀의 교육을 꼭 받으리라 계획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간암이라는 진 단을 받고 막막한 심정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말기 까지는 아니었고 수술하기 위해 아산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검사하는 데만 열흘이 걸렸는데, 수술하기 곤란한 위치라 색전술 시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주님과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5과 문제집을 풀었습니다. 좁은 병실에서 보호자 침대에 앉아 안경을 쓰고 하나씩 풀었습니다. 덕분에 성경 읽기도 재미있게 했고요. 힘든 상황이었지만 주님께 의지하며 한 공부가 저를 일으켜 주었 습니다. 제 남편이 어떤 순간에서든 끝까지 주님을 믿고 바라게 되길 기도 부탁드립 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평가자가 학생에게 + 찬미 예수님! 자매님, 안녕하세요? 항상 열심히 답안을 작성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남편께서 간암 진단을 받 으셔서 상심이 매우 크셨겠네요. 그래도 다행히 치료를 받을 수 있으셔서 마음이 놓이니 저도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더욱이 수술이 곤란한 위치라 걱정이 많으셨음 에도 좁은 병실에서 이렇게 성경 공부를 하시며 주님께 의지하시는 모습이 그분께 서 보시기에도 참 흐뭇하셨을 겁니다. 주님께서 다시 건강을 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쾌유하시길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럼, 주님 은총 안에서 건강하시고, 다음 기회에 기쁜 소식을 기대하며 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143
학생이 평가자에게 올해는 장마가 끝난 것 같다가 다시 폭우가 쏟아지고, 백년 만에 온 물폭탄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엄청난 피해가 났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답 답합니다. 그것들이 재해가 아닌 인재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반성합니다. 그래서 저와 요세피나는 작은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기 전 몇 번 더 생각해 보고 꼭 필요한 것만 사기, 마트 덜 가기, 스프레이 안 쓰 기, 트리오 덜 쓰기 등등.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감사함을 느끼며 우리의 작 은 실천으로 자연을 보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의 보물인 요세피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전부 하느님 께 바쳤어요. 요세피나의 예쁜 마음을 평가자님께 살짝 자랑합니다. 폭우가 그치면 더운 날씨가 계속되겠지요. 건강 조심하시고 기도 중에 만나길 청합니다. 평가자가 학생에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의 작은 체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일미사에 갔는데 지갑 에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두 장밖에 없었습니다. 만 원을 헌금으로 내고 나 면 제가 쓸 돈이 없었기에 저는 이천 원을 봉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복음 말씀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나누어 먹었다는 말씀이었 습니다. 또한 나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시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들으며 저는 마음 이 바뀌었고 기쁜 마음으로 이천 원 대신 만 원을 봉헌했습니다. 며칠 후 거짓말처 럼 그 돈은 10배가 되어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요세피나 자매님도 하느님께 봉헌한 첫 월급을 10배로 돌려받아 기뻐할 수 있기를.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 총이 가득한 나날이 되시도록 기도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44
학생이 평가자에게 + 찬미 예수님 1학기 말에 큰아이가 반에서 친구관계로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한 아이가 반 친구들에게 우리 아이랑 놀지 말라고 하면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큰아이가 듣 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요. 학교 다니기 싫다며 우는 아이 때문에 저도 몇 번씩 학 교에 가곤 했어요. 저도 손발이 벌벌 떨리고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곁에서 주님께 울면서 매달렸지요.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이도 친구들이 또 외면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저는 이 번 기회를 통해 아이에게 고칠 점이 있으면 고치고 저도 그동안 엄하게 했던 양육방 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닌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시련을 허락하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텐데, 주님께 어서 이 고통의 시간이 끝나게 해주시라고 모자란 기도를 보태고 있습니다. 이번 과를 공부하면서 특히 야고보서를 읽으며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저에게 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저희 아이 마리아를 위해 함께 기 도해 주세요. 늘 감사드려요. 평가자가 학생에게 +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요한 9장). 사람들은 소 경의 볼 수 없음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에 그리된 것이라 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말 145
씀하십니다. 저 역시도 저에게 힘든 일이 닥치면 예수님께 하소연합니다. 제가 무 엇을 잘못했기에 힘들게 하십니까? 저 역시 부족한 사람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당신을 더욱 더 갈망하게 하시고 성 장시켜 주십니다. 저 역시 부족한 사람이기에 자매님께 어떤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힘든 과정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길, 또 그분의 뜻 이 이루어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마리아를 더 많이 이해하고, 아이 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를 위해 기도드리 겠습니다. 삶의 한 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의 한 올 한 올이 천으로 짜입니다. 성경도 우리 삶을 천에 비유합니다. 순간순간 덕의 실천과 의무 이행에 마음을 쏟는다면 죽을 때 그동안 고운 실로 짠 옷감이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146
까페글 [ 마음열고 ] 하나 되어 나눔방 에서 퍼온 글 외인 가족 입교 권면 자운영 (동기) 2009년 11월에 레지오에 입단하여 봉사하랴, 기도하랴, 선교하랴, 정신없이 바 쁘게 지내야 했다. 그런 중에서도 2011년 3월 신부님과 단장님께서 예비신자 한 명씩을 꼭 입교시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하셨다. 나는 순명하는 마음으로 두 가족을 찜해놓고 열심히 공을 들였다. 두 가족 중에 한 가족은 개신교회에 다니는데 엄마는 입교 의사가 있었으나 개 신교회에서 활동 중인 자녀들 때문에 개종이 어렵다고 했으므로 다른 가족에게 접근하였다. 그 가족은 동네에서 잘 싸우는 집안으로 소문이 날만큼 하루가 멀다고 살림살 이를 때려 부수는 소동을 피우고, 동네 아줌마들과도 사이가 좋지않아 싸움닭이 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활동) 그 싸우기 좋아하는 집안에는 무속인까지 있다고 해서 접근하기도 어려워 보 였다. 그러나 집안에 하나뿐인 딸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딸 에 대한 혼사를 핑계로 그 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집의 부인의 이야기를 들 어 보니 천주교 집안 출신이었지만 무속인이 있는 가정으로 시집을 오게 되어 천 주교와 멀어지고, 지금은 친정과의 왕래마저 끊어진 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 는 우선 그들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매일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남편 을 만나보니 불같은 성격에 쉽게 접근을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부 인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 승낙까지 얻었으므 로 더 용기를 내어 부인에게 에비자교리를 받을 것을 권유하자 부인은 천주교에 147
무척 호의적이었지만 무속인이 있는 관계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 다. 그래서 무속인이 있는 집안이지만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면 따님 결혼에 오히 려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주교와 하느님에 대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가족을 위해 계속 기도했다. (결과) 그 기도의 응답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매님이 성당에 나와 교리를 받으면서 성 격도 유순해졌고 눈에 띄게 변화하며 모습이 달라졌다. 예전에 독한 모습이 사라 지면서 주위 사람들과의 잦은 다툼도 없어졌다. 세례를 받은 후 자매님의 놀라운 변화를 보고 엄마가 천주교 신자가 되니 집안뿐만 아니라 동네도 조용해져서 살 것만 같다. 며 딸도 성당에 다니고 싶다 하여 현재 예비자 교리반에서 열심히 교 리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남편 역시 지금은 집안 사정 때문에 천주교에 나가지 못하지만 자기도 꼭 성당 에 다니겠다고 약속했다. 자매님이 세례를 받으니 친정 어머니와 형제들도 기뻐하 며 서로 만나며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한 가족의 평화를 허락해 주셨으니 감사드립 니다. 레지오 입단 동기 SELEM 세례를 받고 난 후 저의 생활 여건이 여의치 않아 짧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18년 동안이나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받은 지 19년 만에 성령 세미나를 하면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교리 지식은 부족했으나 견진을 받고 다시 신앙생활을 하 고 싶은 열망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고부간의 갈등 때문에 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나는 내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주위에서 방해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 라고 핑계 대고 또 내 주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 148
고 비난하면서 신앙생활을 접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병환이 깊어지자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날 부터 저에게는 다른 병도 아닌 수족을 쓰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면서 그야말로 생지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죄 없는 남편만 괴롭히고 자연히 부부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었습 니다. 그 생지옥 같은 날들이 흘러 15개월 되던 날 이번엔 남편이 간암 판정을 받 게 되었습니다. 난 이 모든 것이 시어머니 때문이라고 원망하기에만 바빴습니다. 남편의 간암 판정 3개월 후 시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남편은 4년을 투병하다가 하 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허탈하고 쓸쓸한 마음을 둘 곳조차 없어 방황하는 가운데 나의 유일한 위안은 본당 레지오 단원들의 끊임없는 연도였습니다. 나는 내가 위안을 받은 것을 돌려 드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누구의 권유도 없이 자진하여 레지오에 입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의무적인 봉사 활동도 해내기가 쉽지 않았고 매일미사도 짐으로 느껴졌습니다. 묵주기도 시간은 왜 그리 길고 지루하던지요. 그동안 늘 자기 멋대로 살아온 습관 때문에 한 단체에 소속되어 단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매일 갈등 속에 지내다 보니 3개월이 되어 입 단선서를 하라는데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4개월째에는 강압에 못 이겨 겨우 선서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댁 식구들과 갈등의 원인 제공자도 저였다는 것을 알고 깊 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부담스럽던 레지오 단원 활동이 일상생활 처럼 된 것도 얼마나 기쁜지요. 이보다 더 큰 하느님의 은총이 어디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레지오 단원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니 쁘레시디움 부단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더 열심히 활동하려 하니 저의 신앙지식이 부족하게 느껴져 우선 성 경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고 통신성서교육원에 입학했습니다. 결국 레지오 단원들의 열심한 연도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결실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동안 무지하여 남만 탓하며 죄인으로 살아온 것을 다시 주님께 용서 청합니다. 149
아직도 저는 신앙생활에 있어 미숙아일뿐이지만 레지오 마리애에서 많이 배워 참된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15기도와 매월 첫째 주 금요일마다 연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위한 묵주기도를 특별히 바치고 있으며, 남편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습니다. 나의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이 모든 깨달음을 주신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오직 주님과 성모님만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 다. 아~멘! (요한 14,8) 카페 8주년 성지순례 이모저모 롱다리 말씀으로 하나 되어 카페 8주년 정기모임 성지순례를 충남에 있는 해미 성지 로 다녀왔습니다. 온라인에서만 알고 지내던 많은 분들을 직접 뵈며 인사 나누게 되어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박해 때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담대 하게 죽음을 택하신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접하며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잔 혹하기 이를 데 없는 마구잡이 처형으로 인간의 잔악함을 만방에 드러낸 생매장 터를 돌아보면서 그 무명 순교자들이 가신 길을 묵상해 보고, 초라하게 흐트러진 우리의 신앙심을 다잡아 보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던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 순교란 무엇인가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 습니다. 그 옛날 우리 신앙 선조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적색 순교 를 하셨지 만 오늘의 우리에게 순교란 다름 아닌 내 뜻을 바치는 백색 순교 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다시 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내 뜻을 죽이는 것이야말 150
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순교일 겁니다. 참으로 거룩한 땅! 해미 순교성지에서 좋은 분들과 함께 뜻 깊은 만남의 시간 을 가짐에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함께하는 내내 한가족이라는 강한 느낌 속에 우리 모두 말씀 안에서 하나 되는 일치감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카페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현안도 진지하게 논의되 었고, 카페 8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모두 하나 되는 행복한 나눔의 시간이었 습니다. 이번 정기 모임을 위해 여러 모로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을 올리며 앞으로도 우리 말씀 카페가 더더욱 활성화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빛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완전 무장된 가운데 어느 때라도 우리의 마음은 올곧게 하느 님을 향해 안테나가 고정될 수 있도록 늘 말씀 가운데 생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모든 가족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성모님께 꼴통 해마다 찾아오는 성모성월 5월이면 예수님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과거에 모든 감각들이 되살아나듯이 살면서 힘들고 마음이 아파 지쳐 있을 때에도 언제나 당신을 바라봅니다. 엄마의 품에 안겨 투정부려 봅니다. 나는 남보다 뛰어난 논리를 갖추지도 못하고, 몇 마디의 말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도 없어 이런저런 넋두리하다가 엄마의 따뜻한 품 안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엄마의 미소를 보면 모든 피로와 고통들이 사라지면서 151
마음에 평화를 느끼며 엄마, 사랑합니다. 울 하늘엄마, 사랑합니다. 조용히 외쳐 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엄마.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오늘도 당신 앞에 앉아 투정부린 이 아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해맑은 웃음으로 대해주시는 하늘엄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도 성모님의 자비하심으로 치유의 은총을 받아 감사드립니다. 항상 같이하시는 엄마,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엄마를 따르다가 엄마 품에 잠들고 싶어요. 묵주 한 알 한 알에 작은 소망을 담아 성모님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돌보아 주소서! 아멘!!! 엄청난 지진에도 피해 입지 않음에 감사의 기도를 천상의 장미 일본에 사는 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지진이 일어나 통신이 전부 두절되었는데 간신히 엄마랑 통화가 되었다면서 어 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다급한 목소리였습니다. 딸아이가 있는 곳은 거의가 단층인데 그 애들 집만 4층 건물의 4층이어서 늘 걱정이었지요.. 152
간혹 지진 때문에 침대가 흔들려 잠을 못 잔다거나 그릇 부딪히는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는 소식이 오긴 했었는데 오늘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냥 4층에 있 어야 할지 공터로 아기랑 나가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전화는 처음이었습니다. 5개 월된 아기를 데리고 피신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어떤 쪽이 더 안전한지 모르겠다면서, 집안의 모든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아수라장이라는 것 입니다. 신랑과도 연락할 길이 없다면서. 그때까지 뉴스를 보지 못한 상태라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고, 지진에 대한 지식 이 없는 저로서는 우선 집에 있으면서 숨을 공간을 찾아 놓으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화를 끊자마자 전국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응답하는 데만도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그러다 문득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 전화주신 분들의 자녀들이 걱정되어 그분들에게 전화를 해본 적이 있었 나를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딸은 아기를 데리고 공터로 피신하며 쪽지를 써놓았는데 이것을 보지 못한 사 위가 처자식을 찾아 헤매다 극적으로 상봉했답니다. 딸아이 부부는 지진 덕분에 서로가 더욱 소중한 존재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답니다. 여진이 아직 있고, 해일 얘기도 나오는 가운데 걱정은 많이 되지만 멀리서 도 와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우리 님들께서도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53
책 소개 성경 여행 스케치 김혜윤 바오로딸 성경 여행 스케치 1, 2권을 합친 개정 증보판이다. 성경을 각 권으로 다루기보다 제작된 역사와 순서를 따라 성경을 관통 해 보기를 제안하면서, 성경은(특별히 구약성경) 본문이 말하 는 시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이 제작된 시기의 정 치 사회 신학적 측면을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 정태현 바오로딸 요한복음의 전반적 특징과 배경을 설명하여 본문 전체의 이 해를 돕고, 본문 주해 부분에서는 요한복음 전문을 제시하고 각 장과 절마다 각주를 붙여 거룩한 독서를 하는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설명해 놓았다. 참고 문헌과 성경 색인을 실어 거룩한 독서를 하는 독자들이 참고하도록 배려했다. 시편 (성경 펼쳐 읽기) 안소근 생활성서사 시편에 대한 입문으로 안내하여 시편집을 이해하는 데 필수 적인 아홉 개의 시편을 펼쳐 보인다. 시편 전체를 아우르는 가난한 이들의 찬양 위에 좌정하시는 하느님 에 대한 묵상으 로 이끌어 준다. 154
성경, 사랑의 편지 조르지오 제비니 성서와 함께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분, 성경에 대한 기초 지식을 단단히 다지고 싶은 분들을 위한 성경 입문서이다. 1 2장에서는 성 경의 의미와 성경의 형성에 대해, 3 4장에서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조망하면서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5장에서는 우리가 읽은 성경이 삶을 통해 완성되 도록 도와주는 렉시오 디비나 방법을 안내한다. 성경에서 배우는 生 生 잉글리시 이창봉 가톨릭대학출판부 매주일 미사의 복음 말씀을 The New Jerusalem Bible로 읽고 중요한 영문법과 유용한 단어 숙어 표현을 해설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경 중에서 일부를 고르고 새로운 원고를 보 태어 11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성경의 백성( 수정판 ) 클라이레 무사띠 김정훈 이정석 성서와 함께 성경 시대의 생활 지리 역사 풍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화와 상세한 그림으로 구성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생 활과 그들의 신앙과 종교생활, 성경에 나오는 장소와 사건, 그 리고 사상 등에 관해 50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155
참 재밌는 성경(마르코 복음) 수원가대성경연구회 수원가톨릭대학출판부 십대들이 흥미롭게 성경에 접근할 수 있도록 그림과 게임, 놀 이형식을 사용하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상황 을 제시하여 스스로 답을 찾고 경험을 나누도록 했다. 또한 미사와 교리를 연결시키기 위해 전례주일 복음을 알려주고 되 새김으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준다. 소공동체를 위한 성경공부(마태오 복음) 수원가대성경연구회 수원가톨릭대학출판부 주일 복음 말씀을 순차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은 물론 그 말씀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삶의 체험을 나눌 수 있도록 꾸 며진 교재다. 가족, 이웃, 여러 공동체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 으며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도록 초대하고 있다. 교부들의 성경 주해 앤드루 라우스 외 하성수 외 분도출판사 신구약성경 전권에 대한 교부들의 사상과 신앙의 정수( 精 髓 ) 만 뽑아 현대어로 옮겨 엮은 30권의 방대한 총서다. 이 총서 는 현대 독자들이 고대 그리스도교 시대에 활동한 교부들의 핵심 사상에 다가가고 깊이 들어가 볼 기회를 제공한다. 156
성서사십주간(구약 1. 2) 성경읽기 안내 영원한 도움 성서연구소 성서와 함께 성경을 읽는데 꼭 알아야 할 사실들을 압축하여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으므로 독자들이 성경 을 펼쳐 읽도록 친절한 길 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다. 다양한 사진과 그림, 도표로 성경 의 내용과 메시지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그대 마음이 말하는 길을 가라 프란츠 요제프 오르트켐퍼 김선태 생활성서사 주일과 축일의 전례 독서에서 제외된 41편의 구약성경 본문 에 대한 강론 모음이다. 미사 독서에서 배제된 구약성경의 내 용과 그 안에 담겨진 구약성경의 잊힌 지혜들을 잘 보게 해준 다. 이 책을 통해 구약성경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잊힌 지혜들 의 소중함을 재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여인들 피에르 모를롱 베르내르 김정옥 누멘 4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과 여성들과의 만남을 제시, 분 석하고 예수님이 일생 동안 만나셨던 여성들에 대해 어떤 시 각을 가지고 대하셨는지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에 따라 감지 하도록 하고 있다. 가장 중점으로 다루는 주제는 여성과 예수 님에 대한 질문들이다. 157
시서와 지혜서(쉽게 풀어 쓴 구약성경, 그 세 번째) 김혜윤 생활성서사 오경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느님의 가르침 (율법) 을, 예언서가 인간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을 중 심으로 하고 있다면 시서와 지혜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가 르침과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성경에 비추어 본 채근담에 담긴 삶의 지혜 홍자성 임덕일 가톨릭출판사 채근담 의 동양적 정서를 살리면서, 짤막한 성경 말씀을 통해 삶의 지혜를 깊이고자 했다. 채근담 의 내용을 성경 의 말씀인 사랑 ( 1코린 13장 )의 특성에 따라 3부( 섬김 나 눔 사귐 )로 나누어 엮었다. 각 주제는 채근담 의 풀이, 원 문, 예화로 엮어진 해설과 이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제시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학생용/ 교사용 ) 김정훈 윤영란 바오로딸 마르코복음서의 전체를 일주일에 한 장씩 공부하고 깊이며 나눌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작업을 함으로써 학습효과를 높여준다. 어르신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욱 기쁘고 활력에 찬 노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끌어 준다. 봉사자용은 마르코복음 각 장을 해석하고 학생 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매뉴얼을 수록했다. 158
새로운 성경신학사전 1 2 3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P. 로싸노 G. 라바시 A. 지를란다 외 43명 지음 임승필 외 20명 옮김 170 245 각 권 60,000원 바오로딸 성경을 폭넓게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는 안내서 세계의 저명한 성경신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연구한 성경 속 의미들을 국내에 소개해 드립니다.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배경 안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잘 조명하고 있어 성경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사전입니다. 성경의 인물들과 본문을 구성하는 중심용어들을 상세하게 풀이해 놓았 습니다. 주제에 따라 영성적 측면과 묵상을 돕는 영적독서의 역할 및 성경통독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쉽게 접하고 읽기에 편하도록 3권으로 나누어 엮었습니다. 1권: 가난~빛 어둠까지 57항목(884쪽) 2권: 사도 제자~예루살렘 시온까지 49항목(832쪽) 3권: 예수 그리스도 ~ 히브리서까지 60항목(934쪽) 전화 주문 : 02) 944 0945 가톨릭 인터넷서점 바오로딸 www.pauline.or.kr 전국 바오로딸 서원
발행 : 2011년 11월 30일 펴낸데 :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142 704 서울 강북구 오패산로 184 등록 제7 123호 1994. 3. 30 전화 944 0819~0824 FAX 987 5275 이메일 : uus@pauline.or.kr 홈페이지 : http://uus.pauline.or.kr 카페 http://cafe.daum.net/junim510 이 책은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 통신성서교육원 회지이며 비매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