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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평양 대부흥 운동 연구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이상규* 1. 문제와 과제 1907년에 있었던 대부흥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교회에는 부흥 에 대한 관심이 높다. 여러 곳에서 부흥 에 대한 학술 모임이 전개 되고, 1907년의 대부흥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여 1907년 부흥 전후의 사정과 부흥의 전개, 그리고 이 부흥이 가져 온 한국 교회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리되지 못한 점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 석명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1907년 전후 한국에서 전개된 부흥에 대한 논의와 관련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 우리가 부흥 이라고 말할 때 부흥을 단순히 수적인 성장이 나 외적인 발전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리고 한국 교회가 경험했던 부흥은 단순히 수적 성장이나 발전이 아 니라 영적인 변화와 각성이었다. 1) 성장 (growth)이 점진적이며 진화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1) 일반적으로 부흥 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 괄적인 개념이다.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 한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간섭 혹은 죄인들 과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혹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 운데 오시는 행위 로 정의되어 왔다. 아더 윌리스(Aurthur Willis)는 부흥 이란 하나님께서 장엄하신 능력으로 자신을 죄인들에게 계시하시는 일 이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191 론적이라면 부흥(revival)은 돌연함이 있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다. 성장은 인간의 계획과 프로그램에 의해 어느 정도 성취될 수 있지만,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혹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현상 이다. 따라서 부흥은 일차적으로 한 개인의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 변 화와 각성이며, 수적인 성장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부흥의 돌연함과 비 규칙성은 인간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1903-1907년의 부흥을 수적인 성장 정도로 생각하면 1907년 전 후 한국 교회 부흥의 의미와 성격을 곡해할 위 험이 있다. 둘째, 흔히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을 부흥 운동 혹은 대부흥 운동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이때의 성령 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심의 결과로 나타난 부 라고 정의했다. 부흥 운동사를 연구해온 에드윈 오르(Edwin Orr)의 정의는 보다 선명하다. 그는 부흥이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또 그와 관련된 신앙 공동체에서 신약 기독교에서 보는 성령의 역사 로 설명하기도 했다. 1859 년 웨일즈 부흥 운동 기간 중에는 부흥을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 으로 충만한 사람들 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마틴 로이드 존스의 정의는 보다 종합적이다. 그는 부흥이란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 이라고 설명했 다. 교회 부흥 운동 혹은 신앙 부흥 운동이란 말은 여자적으로 성경에 나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교회사에서 경험한 부흥의 역사를 종합해 볼 때 부흥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이 점 떠한 부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 이다. 첫째, 부흥, 혹은 신앙 부흥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관계된 것이 다. 영적 부흥은 불신자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영적 부흥은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와 그 공동체에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신앙 부흥은 내적 각성과 변화로 인한 새로운 활력이자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는 점이 다. 즉, 부흥은 일차적으로 한 개인의 내적 변화에서 시작되어 밖으로 나 타난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 없는 외적 부흥은 불가 능 하다는 사실이다. 이상규, 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설교와 부흥 (한 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강연집, 2006), 26ff. 참고할 것.

192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흥 (Revival)이었지 부흥 운동 (Revival movement)이 아니었다. 학생 신앙 운동,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등에서 보는 바처럼 우리는 운동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1907년의 성령역사는 사람이 중심이 된 운동 이 아니었다. 운동 이란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프로그램, 혹은 조직화된 활동을 의미하는데, 1907년의 부 흥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운동이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이때 의 사건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결과였다. 따라서 이런 1907년 대부흥의 역사를 운동 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에 대한 왜곡일 수 있다. 이것은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도 바르지 않다. 셋째, 어떤 이는 1907년의 부흥을 비정치화 ( 非 政 治 化 )로 해석 하지만 이런 해석도 옳지 않다. 비정치화 란 한국 교회가 정치 현실 의 문제, 곧 독립 운동, 민족 운동에 지나치게 관여하고 있으므로 이 런 신앙 외적( 外 的 )인 것에 대한 관심을 신앙 내적( 內 的 )인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는 주 장인데, 이 주장에는 적어도 2가지 오류를 포함한다. 첫째, 부흥은 인간의 의도와 기획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인 견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과 신앙의 내면적 성숙은 양립할 수 없다는 전재 위에서 나온 견해라는 점이다. 이런 경우 부 흥을 인간적인 프로그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이 와 관련하여 어떤 이는 내한한 선교사들이 경건주의자들 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독일형의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고 주장한다. 독일형의 경건주의자들이란 루터의 두 왕국론에 기초한 경건주의자들이라는 의미로서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 하려했다고 말 한다. 초기 선교사들이 독일형의 경건주의들이라고 말할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정치화의 의도가 게재되었다고 볼 근거가 없다. 한국 에서의 부흥은 예기치 않는 상황 가운데 발생한 사건이었다.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193 한국 교회 부흥 대한 네 번째 오해는, 한국에서의 부흥의 기원을 역사,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부흥의 역사는 일제하의 민족의 현실, 정치적 좌절과 불안, 주권상실에서 오 는 반일감정의 표출 등이 부흥의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역 사, 환경적 요인이 종교적 영역에도 일정의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 지만 그것이 1907년 전후 한국 교회의 부흥의 주도적인 요인은 아니 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3가지 관점에 대한 곡해 에 유념하면서 1907년 전후의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와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00년대에는 교회의 수적 성장만이 아니라 신앙 운동과 영적 부흥에도 큰 발전이 있었다. 특히 1900년 초에는 일정기간 동안 회 집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査 經 會 )가 도처에서 개최되었다. 당 시로는 성경 교육 기관이나 훈련된 지도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사경 회는 단기 성경 교육과 훈련의 의미가 있었다. 이 당시 사경회가 열 리면 먼 지방에서까지 양식과 의복을 준비하여 참가하는 일이 많았 고, 당시 교회에 큰 활력을 주었다. 1903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교회에는 여러 가 지 형태의 신앙 운동이 일어났는데, 1907년의 대부흥, 1909년의 100 만인구령운동( 百 萬 人 救 靈 運 動 )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1907 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은 전국적으로 파급된 사건으로서 그 이후의 한국 교회의 성격을 주형( 鑄 型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지니고 있다.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소개되던 1880년대에서 1890년대 초까지는 전래와 접촉, 모색과 적응의 시기였다면, 1894-1895년 청일전쟁이 지난 후부터는 점차 교회 성장이 뚜렷해졌 다. 그러다가 1903년, 1904년, 1906년 간헐적인 부흥이 있었고 1907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대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 특히 1907 년에 있었던 대부흥은 한국 교회의 신앙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194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2) 2. 부흥의 시대적 배경 교회 부흥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나 기독교회는 그 시대의 상황과 무관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과 그 시대적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 시 대적 정신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가치와 이념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 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과 라틴신학이 다른 형식의 신학을 모색하고 형성학 된 것은 그 시대적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비록 교회가 처 한 정치 사회적 환경이 교회와 신학 형성의 주도적 요인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종속적 요인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903-1907년 에 이르는 한국의 사회 환경은 기독교회와 부흥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1900년대는 점증하는 일본의 세력과 조선침략의 야욕이 구체화 되어 갔고 민족적 절망감이 심화된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198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190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 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소위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 의 아픔이었고, 조선인들의 가슴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감리 교 선교사 무즈(J. R. Moose, 무아각)선교사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 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 (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고 말하면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때야 말로 이 땅에서 복 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 라고 말한 바 있다. 3) 윌리엄 베 2) 1907년 평양 대부흥에 관한 개괄적인 기록으로는 박용규, 평양 대부흥 운동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을 참고할 것. 3) J. R. Moose, A Great Awakening, KMF 2:3 (Jan. 1906), 51. There is indeed a golden opportunity for the Christian worker in this land. The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195 어드는 이런 현실에서 조선인들은 수치감, 분노, 그리고 증오에 내 몰려 그들은 무언가 영웅적인 일을 해 내고야 만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고 해석했다. 4)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신자의 책임 의식이 고 조되었고,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암 울한 현실로부터 탈출 욕구가 심화된 시기였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문제에 책임을 느끼고 이것이 마치 믿는 자 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의식과 함께 부흥을 위해 기 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항상 정치 사회적 상황을 중시하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궁극적으로 종교적 상황을 형성해 준다.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기 때 문에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은 종 교적 관심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종교적 상황이 어떠한가가 더 중요 한 요인인 것이다. 부흥 사학자들에 의하면 신앙 부흥 운동은 영적, 도덕적 퇴보가 있을 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5) 히스기야왕 때 일어난 부흥 운동의 경우, 그 이전 시대의 아하스왕 시대(735-716 BC)에 이스라엘 백성 의 반역과 영적 침체가 있었다. 즉, 저들은 16년간 우상 숭배와 악 행, 음란과 방탕이 있었다. 역대하 28:19에서는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 하였다 고 했는데, NIV에서 이 본문을 아하스가 유다에서 악한 일을 증가시켰고, 여호와께 가장 불 충했다 고 번역했다. 18세기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general unrest and lack of something to which they may cling is causing the people to turn to the Missionary and the message he has; and they are trying to find out if we have something which they can trust. 4) W. Baird, Pyung Yang Academy, Korea Mission Field(이하 KMF) 2:9 (Oct. 1906), 221. 5)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이 그러했다. I. D. E. 토마스, 신앙 부흥 운동 (여수룬, 1986), 47ff.

196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에는 반 신앙클럽의 범람 등 불신적 세속주의가 팽배하였다. 에드윈 오르(Edwin Orr)에 의하면 미국에서 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예일 대학에는 크리스천 학생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윌리암스대학 (Williams College)에서는 성찬식을 조롱하는 축제를 거행하기도 했 고, 심지어는 성경을 불태우는 일까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제 2차 각성 운동 이전의 상황도 이와 같았다. 6) 라토렛은 1750년과 1815년 사이를 거절과 부흥의 시대 라고 부 르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대가 계몽 사상에 의해 일어났다고 분 석하고 합리주의 및 이와 관련된 이신론이 젊은 계층사이에 열렬한 동조자를 얻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7) 이 당시 영국에서의 영적 상태 도 이와 비슷하였다. 합리주의 사상이 만연하던 시기의 영적, 도덕적 타락, 안일주의 등 신앙적 퇴보상태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 이다. 사실 1903-7년에 이르는 이 기간은 정치적으로 일제에 의한 국 권상실의 기간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황폐함이 있었다. 기독교회는 여전히 서양의 종교였고, 어디에도 소망을 줄 수 없는 영적인 공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흥은 일어나 수 없는 환경이었다. 1906년 당시 장로교인은 약 4만 4천 587명에 지나지 않았고, 전국적으로 550여 개 처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으나 조직 교회는 32개 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갈망했 6) 에드윈 오르는 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감리교도들은 교회로 들어 오는 수 보다는 나가는 수가 더 많았다. 침례교도들은 말하기를 가장 썰렁 한 계절을 맞이했다고 했다. 장로교도들은 총회에서 국가적인 불 경건을 규탄했다. 전형적인 회중교회인 메서추세츠주의 레녹스의 사무엘 세퍼드 목사는 16년 동안 한 사람도 더 얻지 못했다 고 했다. E. Orr, The Role of Prayer in Spiritual Awakening (LA: Oxford Association for Research in Revival, 1968). 7) 라토렛, 기독교사(하), 64, 108.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197 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하나님은 부흥의 불길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대부흥의 지역적 중심이었던 평양의 경우 1905년 당시 기독교 신자 는 9,390명에 달했다. 8) 당시 평양 전체인구는 6만명으로 추산할 때 이미 상당한 기독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이 부흥의 시 원지가 된 것이다. 3. 부흥의 역사적 전개 3.1. 1903년 1907년 대부흥의 연원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 元 山 )에서는 선교사들의 집회 가 개최되었다. 이 집회에서는 중국에서 사역하던 중 1900년의 의화 단( 義 和 團 ) 사건 9) 으로 휴양 차 원산에 오게 된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iss Mary Cutler White)와 캐나다장로교 파송으로 역시 중 국에서 일하던 중 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오게 된 매컬리(Louise 8) Figures That Speak, KMF II:2 (Feb. 1906), 69. 9) 의화단(( 義 和 團 )사건이란 1900년 중국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반제애국( 反 帝 愛 國 ) 운동으로서 산동( 山 東 )에서 시작하여 하북( 河 北 ) 북경( 北 京 ) 천진 ( 天 津 ) 산서( 山 西 ) 하남( 河 南 ) 내몽고( 內 蒙 古 ) 동북( 東 北 ) 등지로 확산되었 다. 이들은 부청멸양 ( 扶 淸 滅 洋, 곧 청나라를 도와 서양세력을 물리친다) 이란 구호 아래 반외세를 주창하며 교회를 공격하고 서양 선교사들을 처 단하였다. 이때 189명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이 피살되었고, 수천 명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이 피살되었다. 한국에 잘 알려진 요나단 고포드 도 이 난을 피해 중국을 떠나 있었다. 이 일로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8개국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연합군은 북경과 천진을 함락시키고 의화단은 진압되었다. 자희태후는 광서황제와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북경에서 서 안( 西 安 )으로 탈출하였다. 1901년 9월 청 정부는 연합군에 투항하고 신축 조약 ( 辛 丑 條 約 )을 체결했다.

198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H.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 가운데 부흥이 있게 해 달라 고 기도해 왔다. 기도하던 중 이들은 8월 24일부터 1주일 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는 화이트와 매컬리, 그리고 케롤(A. Carrol), 노을즈(Knowles), 하운셀(J. Hounshell) 등이 참석하였고, 그 리고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 인 기도에 대해 3차례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요한복음 14장, 15 장, 그리고 16장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기도의 3가지 본질, 곧 그리스 도 안에 있어야 함,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뢰, 그리고 성령의 체험 에 대해 준비하면서 자신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었던 점과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당시 하디는 원산에서 사역하면서 사역의 열매가 없어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었다. 하디는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에서 힘서 일했으 나 거기서 선교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렀 다. 10) 이런 상태에 있던 하디는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자신의 죄를 고 백했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 백인이라는 우월주의,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통회했다. 이런 교만과 죄악으 로 자신의 선교 사역에서 열매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디가 자신의 사역을 자책하고 회개했을 때 함께 참석했던 이들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하디는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로서 한국 선교를 자원하여 부산지방에서 선교를 시작한 의료선교사 10) Methodist Church, South, Report for 1905, 39-40.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199 였다. 1898년 남감리교로 이적한 그는 전도를 위한 그의 많은 노력 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낙심한 가운데 있었으나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와 불 충을 깊이 회개하였다. 후일 하디는 이렇게 고백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어 첫 번째 명하신 것은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 을 함께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과 실패한 원인을 밝히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괴롭고도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셨으니 이는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하심이라. 지난 수년 간 나는 한국인들에게 죄를 자백하게 하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보여 주도록 강조해 왔습니다. 그려면서 지금까지 는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 지속적이고도 빈틈없는 회개, 고통 을 수반한 회개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회개는 그에게 큰 변화를 주어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청중들은 감동을 받았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하디 의 죄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 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 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기도회가 끝난 후 첫 주일 하디는 창천감리교 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하디는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었음과 성령충만하지 못함을 회개했다 이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하디의 고백은 선교사들 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회개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캐나다 출신 롭(A. F. Robb, 鄴 亞 力 )선교사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하디는 이때로부터 사경회의 강사가 되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회개와 영적 각성, 그리고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이때의 기도와 회개의 모임 은 그 이후의 부흥 운동의 연원으로 알려져 있다. 부흥의 역사는

200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1903년 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으로 하디보다 앞서 내한하였던 게일 (James S. Gale)은 하디는 은혜 받은 후 180도 달라졌다고 증언했다. 은혜를 받은 후 하디는 마치 40일 간 금식 기도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얼굴에 광체가 났던 모세의 얼굴과 같았고, 베 드로가 갈릴리에서 처음 부름 받았을 때와 후일 베드로서를 기록할 때의 모습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라고 증언했다. 스웨덴에서 온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프란스 목사(Rev F. Franson)가 1903년 10월 원산을 방문하고 그가 인도한 장감침( 長 監 浸 ) 연합사경회 기간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는 당대의 유명 한 부흥 운동가였으며 스칸디나비아 선교회의 창시자였다. 무디의 영 향을 받고 중국내지선교회(CIM)의 허드슨 테일러, 기독교연합선교회 의 심슨(Simpson) 등과 교분을 나누었던 프란손은 일주일간 원산에 머물면서 사경회를 인도했을 때 다시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11) 하디 는 원산지방 만이 아니라 개성, 서울 등지에서도 집회를 인도했고 이 곳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 3.2. 1904년 1904년 봄에도 원산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초교파적 인 사경회가 열렸다.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 전계은 ( 全 啓 恩 ) 목사, 감리교의 정춘수( 鄭 春 洙 ) 목사도 성령을 충만히 받고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 하였다. 한국인과 선교사들은 이 땅에도 11) 하디는 프란손을 통해 어떻게 부흥회를 인도해야 하는 지를 배웠다고 한 다. 프란손의 방법은 인간적인 어떤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 모든 것을 의 탁하는 것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 순종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하디에게 인상 깊었던 프란손의 집회는 집회 마지막에 아버지, 당신은 할 수 있습 니다. 당신은 할 것입니다. 당신은 해야 합니다. (Father! Thou canst do it, Thou wilt do it, Thou shalt do it)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01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원산에 이어 개성 송도도 부 흥의 중심지가 되었다. 감리교 선교 구역이었던 이곳에서 1904년 2 월 26일부터 10일간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도 참석자들은 각 자의 죄를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곳에서도 이전 에 볼 수 없었던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개성 집회에서는 전도 운 동으로 발전하여 감방, 삽다리, 술은리 등에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기 도 했다. 하디가 떠난 후 이 지역 선교사인 크램(W. G. Cram)에 의 해 집회가 계속되면서 계속적인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해 3월에는 서울에서도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배화학당 학생들 사이에서도 통회하는 역사 가 나타났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선교사의 보고서가 남 아 있다. 죄에 대한 참회가 너무 분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 신들의 죄를 자백했으며 훔친 물건들을 배상하였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처음으로 죄가 무엇이며,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집회는 성령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진정한 죄의 자각과 구원의 확신을 가 져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머리로는 기 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마음은 성령의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옛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역사와 함께 1904년 6월에 와서 처음으로 부 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1904년 하디는 안식년으로 한국 을 떠나기 전인 10월에 서울, 제물포,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이 곳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렇게 한국 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년 9월 한국에서 활동

202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와 2개의 감리교 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 음주의 선교 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의 주요 목적은 한국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모임은 매해 기도달력 (Prayer Calender)을 만들고 한국의 오순절을 위해 기도했다. 특히 한 국의 복음화를 위해 전력하기로 하고 1906년 신년에 전국적인 부흥 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새로운 신자의 영입보다 기존 신 자들의 영적 각성이 우선이고, 그것이 긴요하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연합운동은 부흥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3. 1906년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 松 都 )에서는 큰 부흥을 경험했는데, 선교사 크 램은 이때에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또 그는 돈 을 훔친 자는 돌려주고 형제를 미워한 자는 용서를 빌었고, 다른 이 유로 예수를 믿었던 이들은 참으로 주님을 섬기겠노라고 고백하였 고, 양반이라고 하여 천민을 멸시하던 사람이 이재부터는 그 사람 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요, 형제로 대하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고 했다. 평양 주제 선교사들은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 를 개최하였다. 이 집회에서 하디는 요 한 1서를 본문으로 설교하였고, 은혜를 받기 전 자신이 얼마나 교만 하였으며, 서구인으로서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인을 폄하하였던 죄 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진솔하게 증거 하였 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고 평양 장대현교회 담 임목사였던 이길함을 비롯하여 참석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 특히,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03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의 손을 잡고 이 집회에 참석했던 셔우드 홀 (Sherwood Hall)은 불과 12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이 집회가 자신의 생을 변화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고자 꿈꾸고 있던 어린 셔우드 홀은 이 집회를 통해 부모처럼 의료선교사 가 되기로 작정했고, 후일 부모를 이어 우리나라에 제 2대 선교사로 내한하여 해주에 결핵요양원을 설립하는 등 한국을 위해 일했다. 평양 선교사 사경회(8. 26-9. 2) 이후 서울에서는 선교사들의 연 례대회가 9월 2일부터 9일까지 개최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내한하여 인도 카시아 지방 (Kassia hills)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하여 한국 인들과 선교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다른 곳에서의 부흥에 대 한 소식은 한국인들에게도 부흥을 열망하게 되었고, 부흥을 위해 기 도하게 되었다. 특히 존스톤은 웨일즈에서의 부흥은 연합기도(통성기 도, prayer in union)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였고, 후일 통성기도 는 한국 교회의 특징적인 기도의 관행이 되었다. 아리조나 주립대학 교의 사회학 교수인 조지 토마스(George Thomas)가 지적한 바와 같 이 19세기 부흥 운동은 여러 나라와 통신망(network)을 지니고 있었 고 상호영향을 주었는데 12) 우리나라의 부흥 운동도 외국의 부흥 운 동에 관한 정보가 상당한 자극을 준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서울 사경회 후 존스톤은 평양으로 가 장대현교회에서 다시 사경 회를 인도하였다. 이곳에서도 존스톤은 그가 목도했던 인도와 웨일즈 에서의 부흥에 대해 보고했다. 13) 12) George M. Thomas, Revivalism and Cultural Chang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13) 이 집회에서 존스톤은 웨일즈에서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처럼 부흥의 인물로 쓰임받기 원하는 이는 손을 들라 했을 때 길 선주장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길선주에게는 거룩한 열정이 있었 고, 1906년 12월 12일부터 22일까지 선천에서 열린 황해도 도사경회 주

204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서울과 평양에서만이 아니라 그해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프레스톤(J. F. Preston)이 관할하고 있는 이곳에서 남감리회 선교사인 저다인(J. L. Jerdine)이 집회를 인도했을 때 이곳 에서도 성령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저다인은 하디와 함께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원산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로서 하디와 상벽 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906년 1월 함흥에서 부흥 사경회 를 인도한 바 있는데, 그는 조용하게 설교하였으며 성경을 많이 인용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집회를 통해 목포지역에서 회개와 자복 이 일어났고, 이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 로인 박치록과 함께 평양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영적 뜨거움이 없음 을 보고 새벽마다 기도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 두 달 동안 새벽 4시경에 교회로 가서 기도하기 시 작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알려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게 됨 으로 1907년부터는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1907년의 대 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3.4. 1907년 대부흥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평양을 중심한 서울 등 이북지역과 목 포 등 전라도 지역, 그리고 전국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07 년 1월에는 평양에서 대 부흥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의 대부흥 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 은 셋 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 大 河 )를 이루 듯이 1907년의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 동안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 강사로 집회를 인도했다. 이곳에서 김익두는 길선주의 말씀을 통해 큰 은 혜를 체험하게 된다.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05 별한 역사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 14) 에서 평안남도 도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때의 집회에는 약 1000여명이 회집한 가 운데 그래함 리(Graham Lee), 스왈른(William L. Swallen), 번하이젤 (Charles F. Bernheisel),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블레어(William N. Blair)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5) 낮에는 주로 성경을 공부 14) 장대현교회는 사무엘 마펫에 의해 1893년 7명의 교인으로 널다리 교회 로 출발하였다. 1896년에는 300여명의 교인으로 증가되었고, 1900년 6월 에는 새 예배당을 신축하고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 65). 이때 세례교인은 386명, 학습교인은 392명, 총 교인은 1200명에 달했다. 교인수가 크게 증가되자 1903년 가을에는 일부의 교인 을 분리하여 남문밖교회로 독립하였고, 1905년 겨울에는 사창동(후일 창 동)교회를, 1906년 1월에는 산정현교회를, 1909년에는 서문밖교회를, 1911년에는 외성교회를 각각 설립하였다. 1906년 당시 세례교인은 914 명, 학습교인은 334명, 총 교인수는 2984명에 달했다. 1907년 당시는 세 례교인 1076명, 학습교인 385명, 총 교인수는 약 3천명에 달했다. 백종 구, 선교사 마펫의 지도력과 평양 장대현교회의 개척고가 성장, 교회, 민족,역사 (솔내 민경배박사고희기념논문집, 2004), 401참고, 15) 영계( 靈 溪 ) 길선주( 吉 善 宙, 1869-1935)는 선도( 仙 道 )에 몰두했던 인물이 나 친구인 김종섭의 권면으로 천로역정 등을 읽고 회심한 후 26세가 되던 1897년 8월 15일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영수로 임명되었다. 33세가 되던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 가 되었고, 1902년에는 장대현교회와, 황해도 및 평안도의 도조사( 道 助 事 )가 되었다.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 입학하였고, 1907년 6월 평양신학 교 제1회 졸업생으로 그해 9월 17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장대현교 회에서 20년간 목회하였고,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로회 제4회 부회장 (1910),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1회 총회 부회장(1912)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당시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 다. 1935년 11월 26일 오전 9시 30분 평남 강서군 이차면 고창동에서 평서노회 부흥회 마지막 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향년 67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났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제자였던 한평룡( 韓 平 龍 )은 다 음과 같은 추모시를 남겼다. 한마음 한 듯으로 희 羊 데 먹이신지 사십년

206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하고 저녁에는 대중 집회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저녁 집회는 1월 6 일부터 시작되었다. 약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예배당 공간이 협소 하여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은 창밖에 멍석을 깔고 자리를 잡 았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 나 이에 개의치 않고 집회는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강 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 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영적인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냉랭한 가운데서 집회가 끝날 수는 없었다. 방위량 선교사의 설교는 통회와 회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 히 1월 12일 블레어목사(Rev. W. N. Blair)가 고린도전서 12:27을 읽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 라고 설교했을 때 성 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부흥이란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 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 날은 더욱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영적 분 위기가 회중을 압도하였고 신비한 역사가 일어났다.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 라고 외치며 합당한 신자의 삶을 살 지 못했음을 책망하고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 하로같이 피땀을 부우시고 이제 곧 떠나셨다니 가슴털렁하외다. 님게서 거러오신 70년 옛길엔 눈보라 비바람 끊칠날 없었건만 끝끝내 씩씩한 자 취 그 더욱 뚜렷해 막막한 넓은 들에 羊 떼는 길을 잃코 목자 찾어 우는 소리 끊임없이 들릴 때 살어도 예수 죽어도 예수 만 칠천번 웨치시니 더 욱 놀랍고나 아마도 강단에 쓰러짐 님의 뜻이오리. 길선주는 그는 한국 보수주의 신앙의 대부였고, 박형룡 박사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길선 주는 한국 교회의 고유한 관행이라 할 수 있는 새벽기도를 시작한 인물로 서 기도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구약을 30회 (창세기에서 에스더서 까지는 540회 통독), 신약을 100회 이상(요한 일서 는 500독, 요한 계시록은 1만독)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교회부흥을 위해 힘썼던 부흥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기도, 독 경, 부흥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는 하루 2-3시간씩 기도하기를 쉬지 않 았던 기도의 용사였다. 그러했기에 그는 한 시대의 영적 새벽을 여는 영 적 지도자였다.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07 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길선주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이렇게 사경회를 마감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4일 정오기도회를 열 고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했다. 이날 헌트(Hunt, 한위렴) 선교사의 설교 후 그래함 리 선교사가 통성기도를 요청했다. 여기서 회중가운데서 뜨거운 기도가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가 평양 대부흥이 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 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 다. 자신을 아간과 같은 자라고 운을 뗀 길선주는 1년 전 세상을 떠 난 자기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을 받았으나 그 일부를 자신이 사취했던 죄를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이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위대한 부흥의 시작이었다. 죄의 회개를 외쳤던 길선주의 설교는 세례 요한 의 선포와 같은 것이었다. 16) 이때부터 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 고, 이날의 회개 운동은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다. 길선주의 회 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었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 를 고백했다. 이 죄의 고백은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켰고 이때부터 수많은 이들은 자신의 가슴을 열어 제치고 은폐된 비밀의 창고 속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개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 같았고, 그 회개가 이 강산을 부흥의 불결로 파도치게 하는 동 력이었다. 이 당시의 회개에 대해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16) 이날의 회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요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 1907년 한국을 휩쓴 성령의 불길 (When the Spirit s Fire Swept Korea) 를 참고할 것.

208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드라도 문제가 아니 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심 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어린 애기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 워서 빨리 갈 수 없어 아기를 나무에 부딪쳐 죽게 하고 혼자서 달아났 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다. 17) 이날 그래함 리 선교사의 짧은 설교 후 두 세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했는데, 그 기도는 계속적인 통회로 이어졌다. 그래함 리는 죄 의 자복은 계속되었고 죄의식에 고민하면서 땅을 쳤다. 회중은 울음 바다가 되었고 이 기도회는 새벽 두시까지 자백과 눈물로 계속 되었다. 고 기록했다. 그래함 리가 1월 15일자로 기록한 글에서 어 제 있었던 집회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 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 고 보고했다. 1월 15일자로 조지 맥쿤 이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에게 다음과 같은 편 지를 보냈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 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 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 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 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18) 17)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87;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서울: 컨 콜디아사, 1978), 111. 18) George M. McCune, Letter to Dr. Brown dated Jan. 15, 1907.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09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이날 저녁 말씀을 전한 길선주의 얼굴은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날의 설교는 우 뢰와 같은 선포였다. 당시 광경에 대해 장대현교회의 동료 장로였던 정익노( 鄭 益 魯 )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겨두고 있다. 그날 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찬 얼굴이었고 순 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했 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 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 버릴 수 있고 도피 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조심에 쌓인 얼굴 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 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울부짖었다. 19)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 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 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겨울의 세찬 바람도 아랑곳 없이 기도의 물결은 마치 폭포와 대양의 물결 소리같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 었다. 온 교인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 서 기도하기를 새벽 2시까지 계속하였다. 20) 이때의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 제친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불결과 음색, 도적, 19)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110. 20)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ongyang, KMF 3:3 (Mar. 1907), 33-37.

210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거짓, 질투,,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의 힘이 무엇이든 이런 고백을 강 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 교인들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지고 그 리고 마루에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21) 방위량(W. N. Blair)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당시 회개 운동은 진정 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기도 했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 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 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 을 갚아 주었는데 그것은 비단 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이 보 여주는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나타난 부흥의 역사는 순식간에 평양 전역으로 알려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에로 확산되었다. 또 평양시내 의 미션스쿨에로 번져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의 역 사가 나타났다. 김찬성( 金 燦 星 )의 인도로 숭덕학교에서는 약 300여 명의 학생이 통회 자복하였고, 숭실전문학교 학생들도 부흥을 체험하 였다. 22) 평양신학교 개학 사경회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다. 부 흥의 불길에는 교파의 벽이 없었다. 감리교 학교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이 불길은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 구로 전파되었고,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길선주가 서울의 승 21) W. Baird, The Spirit Among Pyung Yang Students, KMF 3:4 (May, 1907), 66. 22)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111.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11 동, 연동, 상동교회, 그리고 수구문( 水 口 門 )교회에 와서 성령의 도를 가르쳤을 때 이곳에서도 부흥이 일어났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 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 다. 이러 부흥은 1907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 국으로 확산되었다. 흔히 이때의 부흥의 역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기술이 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원산을 비롯 하여 평양, 개성 송도, 서울, 목포 등지에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으 나 부산 경남 지방에는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23) 부 산 경남 지방에서는 원산이나 평양, 혹은 서울이나 목포에서와 같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점을 보도해 주는 기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당시 부흥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 있지만 부 산, 경남 지방에서의 부흥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부산, 경남 지방에서 부흥이 있었다면 기록될 수 있는 여러 매체가 있었으나 타 지역에서의 부흥에 대해서는 여러 정보를 주고 있으면서도 이 지방 부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타 지역과 달리 부산, 경남 지방에서 부흥이 없었던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1905-1907년 당시 부산의 교세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부산 경남 지방에도 여러 교회가 산재해 있었으나 신자 수는 대구 지방의 3분지 1에도 미치지 못했 다. 부흥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관계된 것이며, 영적 각성이나 부흥은 신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데, 이 당시 부산 경남 지방의 신자 23)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상규, 1907년 전후 부산경남에도 부흥이 있었을까? 부경교회사연구 6 (2007. 1), 29-44를 참고할 것.

212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들의 수가 미미했다. 여전히 초신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둘째 이유는 부산 경남 지방에는 영적 각성에 대한 기대나 영적 지도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목포의 경우 그 지역 선교사였던 프레스톤의 강력 한 지도력이 주효했으나 부산, 경남의 경우는 그런 지도력이 행사되 지 못했다.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주선교부의 경우 1907년 당시 5명의 여선교사와 3사람의 남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중 한 사람인 커를은 의사로서 진주에, 아담스는 마산에서 활동했고, 다른 한 사람 엥겔은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분이다. 북 장로교 선교부에는 의사였던 어빈, 사이더보탐, 그리고 월터 스미 스 등 오직 3사람이 부산지부에 배속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인적 구성은 부산, 경남 지방에서의 부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이 유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었다. 부산, 경남의 유교적 색체가 강항 보 수적 환경, 강력한 불교적 영향, 그리고 해안성 민속 신앙과 미신은 기독교의 입신과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와 같은 지리적 환경은 서울이나 평양과는 판이했고, 이런 점들이 영적 각성이나 갱신, 부흥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4. 1907년 부흥의 역사적 의의 1907년 전후의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갖 는가? 이때의 부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격이 있다. 첫째, 한국 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의 성숙을 가져왔 다. 1907년 부흥으로 장로교회에서만 이 해에 16,000명의 새 신자를 얻었고, 감리교에서는 10,000명의 새 신자를 얻었다. 어떤 기록에 의 하면 이 부흥 운동의 결과로 평양을 중심으로 약 3만 명의 개종자가 생겨났다고 했다. 또, 어떤 통계의 의하면 1907년에는 학습, 세례교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13 인이 9만 명이었으나, 1908년에는 이 부흥 운동의 결과로 15만 명으 로 늘어났다고 한다. 1907년의 대부흥의 역사는 신자의 증가라는 외형적 성장만이 아 니라,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변화를 주는 내성적( 內 省 的 ), 내면적 성 숙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당시 중국의 선교사로 한국을 방 문하여 부흥을 목격하였던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는 성령 의 불길이 한국을 휩쓸 때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에서 지금 한국에서는 엄청남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휘몰아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사도행전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엄청난 힘이 교회를 뒤엎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 힘은 신 앙의 성숙을 가져온 것이다. 둘째, 선교사들과 한국인 간의 상호 이해와 공동체적 일체감 형 성에 기여하였다.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때는 선교사들이 입국한지 20년이 지난 때였으나 한국인과 선교사들 간에는 상호 불이해와 장 벽이 없지 않았다. 민족성의 차이, 습관과 풍습, 사고 방식이나 문화 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없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또한 부 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흥을 통해 상호 몰이해를 회개하였고, 서로를 진정한 형제애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런 점들은 무어(J. Z. Moore, 文 約 翰 ), 클라크(A. D. Clark), 블레어 (W. N. Blair) 등의 고백 속에 드러나 있다. 특히 한국의 정치현실과 관련하여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이에는 여전히 장벽이 있었다. 그러나 부흥을 통해 상호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연합을 이루어 주었다. 무어는 이렇게 고백했다. 금년(1907)까지 나는 다소간 한인을 멸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동 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이 양자 사이에는 유사성이나 공동한 광장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214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한인들은 서양인들과 동일한 신앙 체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왔다. 이번 부흥은 나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첫째, 피상적 으로 볼 때는 서양과 정 반대되는 일이 수천가지가 있겠지만 한인은 그 내면과 또 기타 근본적 인생문제에는 서양인 형제들과 꼭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둘째, 이번 부흥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즉, 전 생활을 신앙화함에 있어서 기도와 단순하게 어린아이와 같이 의 지하는 점은 동양이 서양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점이 보다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더 심오하기도 하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배우기 전에는 완전무결 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24) 셋째,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구형했다. 1907년 부흥은 한국 교회 의 신앙 형태를 구형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신학적으로 개인적인 신 앙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적이고도 경건주의적인 성격을 구체화했다. 1907년 부흥은 그 시대적 상황 대문에 신령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 데, 신령주의는 개혁주의와는 달리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 어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교회를 중시하지 않고 눈에 보 이지 않는 불가견적 교회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사회적 책임이 나 문화적 소명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런 점들이 한국 교회에 탈 역사적인 내세 지향적 교회관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신학적 성격 외에도 한국 교회의 부흥은 평양에서 남자들의 성경공부반에서 시작되었으므로 한국 교회는 성경 공부를 강조하였 고 사경회를 중시하여 후일 부흥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이래로 한 국 교회는 연초나 농촌지역의 경우 농한기( 農 閑 期 )에 정기적인 사경 회를 개최했다. 도( 都 )사경회, 혹은 군( 郡 )사경회 등 연합사경회가 개 최되었고, 후에는 개별 교회 단위의 사경회가 일반화되었다. 또 (비 록 1906년 이전에 새벽기도회가 이미 있었다는 흔적이 있지만) 1906 24) J. Z. Moore, The Great Revival Year, KMF 3:8 (Aug. 1907), 118; 백 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393 재인용.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15 년 9월 말경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에 의해 시작된 새벽기도회가 한 국 교회의 중요한 기도 관행이 되었으며, 1907년 대부흥의 시작과 함께 통성기도가 일반화되었다. 넷째, 1907년 부흥은 전도 운동과 선교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전 도 운동의 대표적인 경우가 1909년에 시작된 백만인 구령운동이었 다. 1907년 대부흥이 그해 6월까지 절정에 달했으나 곧 그 열기가 식어지고 1908년에는 영적 각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1909년에는 이전의 부흥의 열정을 전도 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백만인 구령 운 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복음주의 연합 공의회는 백만인 구령 운동 을 전개하기로 하고 1909년 외국에서 온 부흥사들은 전국 주요 도시 에서 전도 집회를 열어 전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 문서를 보급 하며, 가가호호 방문하는 등 전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 배후 에는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 100만 명만 확보하면 민족의 독립을 이 룰 수 있다는 확신도 짙게 깔려 있었다. 1909년 한 해 동안 70만권의 마가복음서가 배부되었다. 이 운동 에 대해 백낙준 박사는 대부흥 운동과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불 순물이 많이 섞여있던 한국 교회가 보다 순수해지고 순화되었으며 부흥 운동과 전도 운동이 더욱 연결되어 한국 교회 발전에 크게 기 여하였다 고 하였다. 비록 목표한 100만명 구령에는 성공하지 못했 으나 민족 복음화를 위한 시도였다. 1907년 부흥은 선교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07년 장로교회 는 전도국을 설치했고, 노회의 조직과 함께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1908년에는 평양 여전도회가 이광선( 李 光 善 )을 제주도에 파송했다. 1909년에는 한석진 목사를 동경에, 최관흘 목사 를 해삼위( 海 蔘 威,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했다. 감리교회도 1907년 내 지 전도국을 설치하고 1910년에는 해외 전도국을 설치했다. 남감리 회는 1908년 간도선교회를 조직하고 이화춘( 李 和 春 )을 북간도에 파

216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송했다. 북감리회는 1910년 손정도 목사를 북중국에 파송했다. 이런 일련의 선교활동은 부흥 운동의 결실이었다. 다섯째, 1907년 부흥은 단순한 영적인 각성 운동이거나 교회의 성장만이 아니라 사회 변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와의 변화된 새로운 관계는 수평적인 질서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권의 인식을 통 해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고 신분 타파, 의식 개혁, 구습( 舊 習 )의 개 혁,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와 사회 개혁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점 들은 18,9세기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부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결 실들이었다. 기생의 도시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부흥이 가져온 결과였다. 1907년 평양을 방문했던 러트(Rut)는 평양에서의 기독교의 성함은 실로 놀랄 만 하다. 매 일요일에 교회 에 참여하는 한인은 약 14,000명에 달한다. 평양의 인구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4만 혹은 5만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3분지 1에 해당한다. 25) 고 기록했다. 평양에서의 부흥 은 평양의 사회적 변화를 수반했다. 여섯째, 1903년 이후 1907년 대부흥은 연합 운동을 가능케 했다. 한국에서의 부흥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교파에 메이지 않았다. 이 부 흥을 통해 교파 간 지역 간, 기관과 조직 간의 연합을 이루어 주었 다. 특히, 당시 주도적인 개신교파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지속적 인 연합을 가능케 했다. 1905년 9월 15일 4개의 장로교선교부와 2 개의 감리교 선교부 소속 150여명의 선교사들은 장감연합공의 회 (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결성 했는데 이것은 부흥이 가져온 연합체였다. 이 기구를 통해 피선교지 인 한국에서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장감교파가 연합하여 코리아 미션 필드(Korea Mission Field)를 발행하고 교육 의료, 찬송 25)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116.

신학과 세계 1907년 대부흥, 그 역사와 의의 217 가 편찬, 문서 사역에서도 교파간의 협력과 연합을 추구했다. 한국에 서 만이 아니라 외국의 경우에서도 부흥은 교파의 한계에 매이지 않 았다. 1907년 부흥의 결과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간의 연합을 이루어주었고, 교육, 의료, 문서 선교, 출판 등에서와 성경 번 역에서 교파의 벽을 넘는 진정한 연합을 이루어 주었다. 5. 맺는말 1907년의 대 부흥을 외국 선교사들은 진정한 오순절 이라고 불 렀는데, 어떤 이는 이때의 회개 운동,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영적 각 성과 교회 부흥을 한국 교회의 영적 중생 (Spiritual rebirth)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07년을 전후한 부흥은 한국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이상심리의 발작이나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아니 라, 분명한 성령의 역사였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은 이 점에 대해 염 려하고 예의 주시했던 점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공통된 확신은 한 국에서의 부흥은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였고, 따라서 2천년이란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는 동일한 성령의 사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부흥은 곧 나타나게 되는 일제하에서의 탄 압과 박해를 이겨나갈 수 있는 영적 힘이었다. 이런 부흥과 갱신이 없었다면 일제하에서의 고난의 여정을 헤쳐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흥은 현실의 불신앙과 도전을 극복하는 힘이었다. 한국 교회 부흥에서 중요한 사실은 선교사와 한국인 전도자들이 부흥을 위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의 노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 이다. 단지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사랑이 식어진 것을 책망하고 그리스도 안에 한 지체라는 사실을 설교했을 따름이다. 오 직 말씀을 증거 했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지 인간적인 어떤 수

218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007 봄 제 38호 단의 동원이나 인간적인 노력이 부흥을 가져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조나단 에드워드가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있는 죄인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과 같 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을 말했을 때 듣 는 이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과 같다(눅 24:32)고 했던 누가의 기록과도 같다. 한국 교회 부흥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방언이 있었다 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방언이 없었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방언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라는 신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반드시 옳 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역사는 반드 시 방언을 동반하다고 말하지만, 이언 머레이(Ian Murrey)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의 역사가 항상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불변의 보습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역사하신다. 방언은 북 가피한 요소가 아니다. 이 당시 부흥은 감정에 도취된 편향된 감정주 의나 자기발산적인 종교적인 광신적인 요소가 없는 순수한 부흥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