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몽유록>과 임제 신해진(전남대) 1. 머리말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사육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남효온( 南 孝 溫 )의 <육신전( 六 臣 傳 )>(1492년 직전?), 임제( 林 悌 )의 <원생몽유록( 元 生 夢 遊 錄 )>(1576?), 김수민( 金 壽 民 )의 <내성지( 奈 城 誌 )>(1757) 등이 있다. 1) 첫 작품은 집전( 集 傳 ) 형태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몽유록( 夢 遊 錄 ) 양식이다. 2) 몽유록은 기탁적( 寄 托 的 ) 수사방식 과 작가가 은밀히 구현하고자 하는 우의( 寓 意 ) 를 담은 이야기 라는 필수적 두 요소를 지닌 양식이다. 곧 탁몽우의( 托 夢 寓 意 ) 라는 특성을 지닌 서사양식인 몽유록은 특정한 상황과 계기에 의해 파생된 문제의식을 꿈속에 기탁하여 허구적으로 창출한 양식이자,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개재해 있는 양식이다. 몽유록은 한갓 꿈에 기탁한다는 곧 탁몽이라는 수단을 통해 당대 현실과 일정한 거리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일견 보이게 했지만, 좌정대목의 자리 배열에 의한 허구 화를 통해 비유체를 형성함으로써 기실 그 거리화와는 오히려 반대로 당대 현실을 긴밀하게 직시할 수 있는 소통로를 창안한 양식이라 한 것 3)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은밀히 구현하고자 하는 우의를 담은 이야기로서의 몽유록을 살피 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질서와의 관련방식, 그리고 문학 외적인 충격에 대응하는 작가의 의식의 방향 등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임제의 <원생몽유 록>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임제 작자설에 따른 저작시기의 변증 <원생몽유록>의 작자설에 대한 여러 이설은 곧 임제설( 林 悌 說 ) 4), 김시습설( 金 * 본 발표문은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기존의 발표했던 글을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에 부합되게 발췌하고 요약하여 재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발표자의 기존 글 가운데 주요 참고서적은 조선중기 몽유록의 연구 (박이정, 1998) ; 한국고전소설의 이해 (신해진 외 5인, 박이정, 2012) 등이다. 1) 그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남효온의 <육신전>과 임제의 <원생몽유록>은 이재호에 의해 1980년 금호신화 (과학사)의 부록으로 번역된바 있으며, 그 가운데 임제의 <원생몽유록>은 신호열ㆍ임형택에 의해 1997년 역 주 백호전집 (창작과비평사)의 하권에 또다시 번역되어 수록된바 있다. 김수민의 <내성지>는 신해진에 의해 2007년 역주 내성지 (보고사)로 번역되었다. 2) <원생몽유록>의 <육신전>에 대한 주제적 수용은 신해진의 조선중기 몽유록의 연구 (박이정, 1998, 127-155면)에서 다루어졌고, 최근 들어 정출헌의 <육신전>과 <원생몽유록>: 충절의 인물과 기억서사의 정 치학 ( 고소설연구 33, 한국고소설학회, 2012)에서도 같은 취지로 다루어졌다. 반면, <육신전> <원생몽유 록> <내성지> 간 사육신 절의의 문학적 연변을 살핀 것은 신해진의 <내성지>의 창작동인 탐색 ( 한국고소 설의 이해, 박이정, 2008)이다. 3) 신해진, 몽유록에서의 좌정대목이 지니는 의미, 한국언어문학 43, 한국언어문학회, 1999.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자허의 벗인 해월거사가 꿈 이야기를 듣고 애통해 하며 말했다. 무릇 예로부터 임금이 혼미하고 신하가 어리석 어 마침내 나라가 망한 경우에 이른 것이 많았다네. 지금 그 임금을 보니 생각컨대 틀림없이 현명한 임금이며, 그 여섯 사람도 또한 모두 충의의 신하라네.어찌 그와 같은 신하들이 그와 같은 현명한 임금을 보필하였는데도 이와 같이 참혹함이 있을 수 있으랴!( 子 虛 之 友 海 月 居 士 聞 而 慟 之 曰 大 抵 自 古 主 昏 臣 暗 卒 至 傾 覆 者 多 矣. 今 觀 其 主 者 想 必 賢 明 之 主 也. 其 六 人 者 亦 皆 忠 義 之 臣 也. 安 有 以 如 此 等 臣 輔 如 此 等 主 而 若 是 其 慘 酷 者 乎?) 8) 원호설을 주장하는 이는 밑줄친 부분 중 금( 今 ) 을 원호( 元 昊 )가 생존해 있던 시 점으로 보아, 지금 나라의 형편을 보면 임금은 현명하시고 여섯 사람의 신하들은 모두 충의의 신하이다. 라고 작품 문면을 읽어냈다. 그는 이렇게 읽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 자고( 自 古 ) 라는 말이 나오고 기주( 其 主 ) 가 단종을 의미하기 때문에 금관 ( 今 觀 ) 의 금( 今 ) 은 같은 단종시대를 가리키는 시간부사로 보아야 할 것이고 관 ( 觀 ) 도 그 단종시대의 현재시제로 파악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9) 그러나 자고( 自 古 )~다의( 多 矣 ) 는 논지 전개상, 임금과 신하 모두 혼미하고 어 리석어 나라가 망한 경우가 많았다는 역사적 경험적 전제 내지 당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제 내지 당위의 관점으로서 임제가 병자사화( 丙 子 士 禍 : 단종 복위 운동 실패 사건)를 살펴보니, 단종은 현명하고 육신들은 충신이었음에도 참화를 겪 게 되었으므로 약시기참혹자호( 若 是 其 慘 酷 者 乎 ) 라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라는 문맥일 것이다. 이렇게 파악하는 것이 이 인용문의 자연스런 문맥의 흐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박은 해석상의 차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육인( 六 人 ) 이라는 용어인데, 이 용어는 틀림없이 사육신( 死 六 臣 )을 지칭한 말이다. 작품 속의 인물은 단종까지 합해서 9명 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6인을 정확히 지칭한 것은 사육신의 함의를 제대로 이해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표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육신( 六 臣 ) 이라는 용어의 최초의 출현을 4) 김태준, 증보 조선소설사, 학예사, 1939, 76쪽 ; 황패강, 원생몽유록과 임제문학, 한국서사문학연구, 단 대출판부, 1972. 5) 장덕순, < 夢 遊 錄 > 小 考, 동방학지 4, 연세대 동방학연구소, 1959, 131-132쪽. 6) 이가원, < 夢 遊 錄 >의 作 者 小 攷, 국어국문학 23, 1960, 134-136쪽. 7) <원생몽유록>의 작자설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모아 편찬한 것이 있는데, 우쾌제가 편한 원생몽유록 (박이정, 2002)이다, 작자설의 구체적 사항은 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8) <원생몽유록>의 이본연구로는 윤주필의 <원생몽유록>의 종합적 고찰 ( 한국한문학연구 16, 한국한문학회, 1993)이 돋보인다. 그는 <원생몽유록>의 善 本 으로 白 湖 集 (3간본, 목활자, 구한말 刊, 정신문화연구원 소장. 이하 인용문은 이 에 의거함.)에 있는 것을 삼았다. 그러나 윤주필이 원작의 일부로 본 自 解 부분만은 후대인들의 가필로 보아 정학성의 견해처럼 원작이 아닌 것으로 볼 것이다. 정학성, 몽유록의 역사의식과 유형적 특질, 관악어문연구 2, 서울대 국 문과, 1977. 9) 원용문, <원생몽유록>의 작자문제, 고소설연구 3, 한국고소설학회, 1997. 원호의 생몰년간은 그동안 알지 못했었으나 원용문이 1396-1463년으로 밝혀 놓았다. 그러나 그 근거가 밝혀 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은 것으 로 보인다.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개인 문집으로는 김일손( 金 馹 孫 ) 탁영집( 濯 纓 集 ) 의 1496년(연산군2) <청복소릉재소( 請 復 昭 陵 再 疏 )>에서 처음으로 보이며 10), 조선 왕조실록 에서는 인종( 仁 宗 ) 1년(1545)에 와서야 처음으로 보인다. 11) 이러한 기 록을 존중한다면, 단종복위 운동을 도모하다가 희생한 인물들을 상징하는 육신( 六 臣 ) 이라는 용어는 남효온의 <육신전>이 지어진 뒤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왜냐하면 남효온 1492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용어가 시중에 먼저 떠돌 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육신 이란 개념은 남효온에 의 해 보다 분명하게 특화ㆍ창출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후대인들에 의해 선명하게 각 인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육신 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 다 함은 이 작품이 남효온의 <육신전> 이후에 지어졌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이제, 임제가 <원생몽유록>을 지었고, 지었다면 과연 언제쯤 지었는지 살필 차례 이다. <원생몽유록>의 초두 부분이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원자허( 元 子 虛 )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강개한 선비였다.기개가 매우 커서 세상에 용납되지 않아,자주 나은( 羅 隱 )의 한( 恨 )을 품고 원헌( 原 憲 )의 가난을 감당키가 어려웠다.아침이면 나아가 밭을 갈고,밤이면 돌아와 서 옛 사람의 책을 읽되,벽을 뚫어서 이웃집 등불 빛을 끌어들이기도 하고,주머니 속에 반딧불을 넣어 희미한 빛을 빌리기도 하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2) 이 초두 부분은 몽유자의 면모와 처지를 서술한 대목이다. 이를 보면, 몽유자 원 자허는 강개한 선비로서 기개가 커 세상에 용납되지 않는 개세적( 慨 世 的 ) 비분( 悲 憤 ) 을 가진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나은지원( 羅 隱 之 寃 )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원헌지빈 ( 原 憲 之 貧 )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나은지원 은 당( 唐 ) 말기의 시인이었던 나은( 羅 隱 )이 실력이 있는데도 열 번이나 과거에 실패하자 그의 이름을 횡( 橫 )에서 은( 隱 )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 13) 으로, 후세에 불우한 문인을 지칭하여 쓰는 말로 굳어진 용어이다. 또 원헌지빈 은 공자의 제자 원헌( 原 憲 )이 몹시 가 난한 생활을 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세에 선비의 빈궁을 일컫는 말로 쓰인 용 10) 金 馹 孫, < 請 復 昭 陵 再 疏 >, 濯 纓 集 續 集 上. 昭 陵 을 폐한 지 이미 40년이다. 폐할 적에 그것이 어떤 사단 에 연유하였는지는 알지 못하여 말하기 힘든 일이지만, 감히 나라를 위하여서는 윗사람에 대하여 諱 하지 아니 한다는 春 秋 의 의리를 본받고자 한다. 엎드려 생각건대 顯 德 王 妃 는 당초에 宗 社 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太 廟 에서 폐출함이 옳겠는가. 또한 문종에게 쫓겨난 것도 아닌데 庶 人 으로 장사지냄이 옳겠는가. 문종에게 쫓겨 나지 않고 지존의 왕비가 되었거늘 후에 세조에 의하여 폐출되어 화가 무덤에 미치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六 臣 의 모변으로 왕후의 동생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勳 臣 이 몰래 도와 魯 山 君 이 중도에 죽게 된 연고에서 말미 암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나라가 생긴 이래로 없었던 큰 변란이다. ( 昭 陵 之 廢 已 四 十 年 矣 其 廢 也 臣 未 知 其 緣 何 事 端 而 事 在 難 言 臣 敢 不 爲 國 諱 爲 尊 諱 以 法 春 秋 之 義 乎 然 臣 伏 念 顯 德 王 妃 初 不 得 罪 於 宗 社 則 黜 之 太 廟 可 乎 亦 非 見 黜 於 文 宗 則 葬 以 庶 人 可 乎 生 不 見 黜 於 文 宗 而 配 體 至 尊 後 乃 被 廢 於 光 廟 而 禍 及 重 隧 者 雖 由 於 六 臣 謀 變 而 后 之 母 弟 俱 誅 勳 臣 密 贊 卽 魯 山 中 道 隕 逝 之 故 而 此 誠 有 人 國 以 來 所 無 之 大 變 也.) 11) 仁 宗 實 錄 권2, 1년 4월 신축. 대개 忠 義 의 인사는 이러한 때에 많이 나오거니와, 저 六 臣 은 그때에 있 어서는 大 罪 를 입어 마땅하나, 그 본심을 논하면 옛 임금을 위한 것입니다. 이 기록 이전에는 ~ 等 으로 표 기되어 있었다. 12) 林 悌, < 元 生 夢 遊 錄 >. 世 有 元 子 虛 者 慷 慨 士 也 氣 宇 磊 落 不 容 於 世 屢 抱 羅 隱 之 恨 難 堪 原 憲 之 貧 朝 出 而 耕 夜 歸 讀 古 人 書 穿 壁 囊 螢 無 所 不 爲. 13) 박희병과 원용문은 羅 隱 을 중국 五 代 때 吳 越 사람으로 보고 있으나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박희병, 한국한문소설선, 한샘, 1995, 133쪽 ; 원용문, 앞논문, 1997, 59쪽. 이와는 달리 필자와 같이 唐 말기 시인 으로 본 것은 신호열ㆍ임형택이다. 신호열ㆍ임형택 공역, 譯 註 白 湖 全 集 하, 창작과비평사,1997, 861쪽.
어이다. 따라서 몽유자는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책을 열 심히 읽는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몽유자의 서술은 관습적 측면이 다분히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몽유자가 작가 임제 자신을 가탁한 허구적 인물임은 다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 다. 다음 글에 대해서도 원호설의 논자는 임제의 자유호방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만 몽유자 원자허의 비분강개함과 동일시하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14) 나 임제는 성질이 거칠고 뻣뻣한 사람이라 어린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고 자못 호협하게 놀기를 일삼아,기방 이며 술집으로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나이 이십이 가까워 비로소 배움에 뜻을 두게 되었다.그러나 힘써 배운 것이라고는 글귀를 교묘하게 다듬고 정문( 程 文 )을 지어 시관( 試 官 )의 눈을 현혹하며 당세에 이름을 얻 고자 하는데 지나지 못했다.그 후로 여러 번 과장( 科 場 )에서 낙방하고 시속에 맞는 취향이 적어 홀연 멀리 노닐 생각이 일어났다. 15) 이 기록을 보면, 임제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20세 (1568년) 때 비로소 학문을 시작했으나, 수차에 걸쳐 과거에 낙방한 이후 전국 각 지의 명승과 창루주사( 娼 樓 酒 肆 )를 떠돌며 많은 희학( 戱 謔 )과 풍류( 風 流 )의 행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인용문은 임제가 자유호방했음을 알려주는 자료라 하겠다. 그러나 임제가 자유호방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조차도 똑같이 자유호방만을 그려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몽유록 작품이 작가의 자전적 행적과 완전히 일치 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점을 야기한다고 하겠다. 자유스럽고 호방했던 임제가 비 분강개하는 몽유자를 창안해내야 했고 그에 따른 내면적 감정이 비분감보다는 비애 감으로 그려내어야만 했던 저간의 상황문맥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태도라 할 것이며, 이에서 문학이 존재하는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다음의 글을 보면, 임제는 22세(1570년) 때 대곡( 大 谷 ) 성운( 成 運 )을 찾아 가 수학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경오년(인용자 주:1570년)가을에 천리어( 千 里 魚 )가 되어 선생을 책상 앞에서 한 번 뵙고 함장( 函 丈 )의 가르침 을 받았다.그래서 떠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지만 형편이 오래 머물기도 어려워 서글픈 마음으로 하직을 하였다. 16) 대곡 문하에서의 수학 기간은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고 방랑을 거듭하던 백호에게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키고 나아가 현실 참여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적극 적으로 생각하게 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 17) 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임제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수차에 걸쳐 과거에 낙방한 사실이 있으나 대곡 성운을 찾아가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고 있어서, 몽유 자 원자허의 처지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임제는 몽유자처럼 원헌지빈( 原 憲 14) 원용문, 앞논문, 1997, 54-58쪽. 15) 林 悌, < 意 馬 賦 >, 白 湖 集 권4. 某 麤 豪 人 耳 早 歲 失 學 頗 事 俠 遊 娼 樓 酒 肆 浪 迹 將 遍 年 垂 二 十 始 志 于 學 而 其 所 學 亦 不 過 雕 章 繪 句 務 爲 程 文 眩 有 司 之 目 而 圖 當 世 之 名 矣 其 後 屢 屈 科 場 無 適 俗 之 調 忽 起 遠 遊 之 志. 16) 林 悌, < 意 馬 賦 >, 白 湖 集 권4. 在 庚 午 秋 爲 千 里 之 魚 而 得 一 拜 於 床 下 從 容 函 丈 便 有 不 忍 舍 去 之 意 而 勢 難 久 住 悵 然 而 辭. 17) 박종우, 백호 임제 시의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1995, 11쪽.
之 貧 )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몽유자에 대한 서술은 관습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 다. 따라서 몽유자 원자허는 관습적 서술 속에서도 임제 자신을 가탁하였을 가능성 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18) 그러면 그 저작시기를 살필 차례가 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원생몽유록>의 말미 에 있는 무진중추( 戊 辰 仲 秋 ) 해월거사지( 海 月 居 士 志 ) 를 근거로 저작시기를 1568 년으로 본 황패강의 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도 몇 차례 개고되 면서 확고한 저작시기로 보는데 자신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 다. 19) 따라서 <원생몽유록>의 저작시기를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임제가 27세(1575년) 때 왜구가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에 서 이를 진압하고 있던 관원( 灌 園 ) 박계현( 朴 啓 賢 )의 막하에 포의( 布 衣 )로 종군했 음을 다음 글은 보여준다. 지난 을해년(인용자 주:1575)에 왜구의 소요가 있었는데,공(인용자 주:박계현)은 이때 호남을 지키기 위해 감 사( 監 司 )로 나왔다.그래서 나(인용자 주:임제)는 포의( 布 衣 )로 막부( 幕 府 )에 출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20) 이후, 두 사람은 망년지기( 忘 年 知 己 )로서 많은 시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강개한 마음을 이해해 주었던 남다른 관계였다. 21) 그런데 이 박계현은 다음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남효온의 <육신전>을 선조( 宣 祖 )에게 소개했던 인물이다. 특히, 박계현의 부친 박충원( 朴 忠 元 )은 영월군수로 역임했을 때 단종 능을 수축한 인물이기도 하 다. 22) 을해년(1575년)에 호남으로부터 왜놈들이 쳐들어온다는 경보가 왔다.나라에서는 공(인용자 주:박계현)을 전라 도 관찰사로 임명했다.박계현은 나라의 명을 받고 즉시 호남으로 떠나갔다.그는 그해 겨울 관찰사의 자리에서 해직되어 홍문관 제학으로서 왕(인용자 주:선조)앞에서 경서를 강론하게 되었다.23) 판서 박계현( 朴 啓 賢 )이 입시하였다.이어 아뢰기를, 성삼문( 成 三 問 )은 참으로 충신입니다.<육신전>은 곧 남 효온( 南 孝 溫 )이 지은 것이니 상께서 가져다가 보시면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즉시 <육신 전>을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 先 祖 )를 모욕하였으니, 나는 앞으로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그리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 하였다.24) 18) 원호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원자허를 원호가 자신의 字 를 밝힌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발표자는 작자 자신의 가 공적 인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장효현의 몽유록의 역사적 성격 (한국고소설론, 한국고소설편찬위원회, 새 문사, 1990)과 이병철의 임제의 <원생몽유록> 재고 (한민족문화연구 24, 한국민족문화학회, 2008) 등을 참 고하기 바란다. 19) 황패강은 원생몽유록과 임제문학 ( 한국서사문학연구, 단국대출판부, 1972)에서는 1568년을 창작연대로 보았다. 그것이 원생몽유록연구 ( 국어국문학총서 5, 정음사, 1979)와 원생몽유록 (김진세 편, 한국고전소 설작품론, 집문당, 1990)으로 개고되면서는 그 창작연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는 <해월선생연보 ( 海 月 先 生 年 譜 ) 부보첩( 附 譜 牒 )>(권1)의 기사를 검토하여 <원생몽유록>은 1568년에서 임제가 卒 한 1587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0) 林 悌, < 呈 灌 園 >의 自 註, 白 湖 集 권3. 往 在 乙 亥 有 倭 寇 之 警 公 時 出 鎭 湖 南 余 以 布 衣 出 入 幕 府 故 云. 21) 林 悌 문집인 白 湖 集 을 보면 灌 園 朴 啓 賢 과 주고받은 수많은 詩 들이 있다. 곧, < 醉 呈 朴 使 相 >, < 附 灌 園 詩 >, < 悼 灌 園 先 生 六 首 >, < 敬 占 絶 句 錄 呈 棠 幕 >, < 詠 甁 蓮 >, < 述 懷 呈 灌 園 >, < 種 當 歸 草 >, < 呈 朴 使 相 > 등의 詩 가 있다. 22) 윤주필, 백호임제, 한국인물유학사, 한길사, 1996, 931쪽. 23) 朴 啓 賢, 灌 園 集. 김춘택의 우리나라 고전소설사 (한길사, 1993) 64쪽 재인용. 24) 宣 祖 修 正 實 錄 권10, 9년(1576) 6월 임술. 이에 대해 栗 谷 李 珥 도 그의 < 經 筵 日 記 二 >( 栗 谷 全 書 권
윗글들은 제주도에서 왜구를 진압하던 박계현이 어떤 과정을 거쳐 1576년 6월 선조( 宣 祖 )에게 남효온의 <육신전>을 소개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 고 그 작품을 읽어본 선조가 몹시 진노했을 뿐 아니라 항간에 전해지는 그 책을 모 조리 찾아내어 불태워 버리겠다는 반응을 통해 당대의 정치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다. 즉, <원생몽유록>이 소재로 삼은 <육신전>은 세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 선조 때까지도 봉건왕조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임제가 박계현과 교유하면서 남효온의 <육신전>을 접했을 가능성이 상 당히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임제에게는 한명회( 韓 明 澮 )의 공업( 功 業 )을 부정 적으로 보는 의식을 나타낸 다음의 시 25) 가 있기 때문이다. 사나이 생사는 의리에 달렸나니 正 道 냐 權 道 냐는 성인이나 아실 일. 伐 罪 란 강태공의 말이 있거늘 그대의 功 業 은 어떻게 평가되리오. 男 兒 生 死 義 之 歸 事 或 權 經 聖 者 知 伐 罪 有 辭 周 尙 父 如 君 功 業 定 何 其 그리고 다음 글은 임제의 외손인 허목( 許 穆 )에 의해 쓰인 것으로서 임제가 벼슬길에 나아간 후 현달하지 못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임제가 1575년부터 시작된 동서분당 과정의 당대 정치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는 자료라 할 것이다. 문사로 이미 세상에 이름이 높아갔는데,이때 동서분당의 물의가 일어나 선비들은 명예를 다투어 서로 헐뜯고 끌어당기고 하였다.그러나 공은 분방하여 어울리지 않은데다가 또 자신을 낮추어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은 까닭으로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 26)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서분당은 1575년(선조8) 전조( 銓 曹 )의 낭관자리를 놓고 김효원( 金 孝 元 )과 심의겸( 沈 義 謙 )이 대립함으로써 그 발단이 시작되었던 것이 다. 주지하듯 김효원을 지지하는 일파를 동인( 東 人 ), 심의겸을 지지하는 일파를 서 인( 西 人 )이라 불렀다. 이러한 당대 정치현실 속에서 임제는 어느 당파에도 소속하 려 하지 않아 현달하지 못했음을 윗글은 나타내고 있다. 곧 사림들의 분열을 매우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벼슬길에 나아가기 이전부 터 동서분당의 발단이 시작된 만큼 임제는 이미 그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제가 비판적으로 바라본 당대의 실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가 있는데, 바로 다음의 것이다. 홍혼( 洪 渾 )이 벼슬을 버리고 양근( 楊 根 )으로 돌아갔다.이때에 청명( 淸 名 )이 있는 선비인 구봉령 김우옹 등이 다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갔다.대개 상의 뜻이 사류를 싫어함을 알기 때문이었다.홍혼도 벼슬을 버리자,누가 29)에서 언급하고 있다. 곧, 김종직도 성종에게 같은 사실을 아뢰었는데 성종의 낯빛이 변하자 변고가 있으 면 성삼문과 같은 충신이 되겠다. 고 한 사례를 들어, 박계현의 처사가 세조 곧 왕을 비판하는 것으로 비친 것 은 잘못이라 하고 있다. 25) 林 悌, < 過 韓 明 澮 墓 >, 白 湖 集 권2. 26) 許 穆, < 林 正 郞 墓 碣 文 >, 白 湖 集 附 錄. 文 詞 旣 日 有 名 於 世 而 於 是 東 西 朋 黨 之 議 起 士 爭 以 名 譽 相 吹 噓 引 援 而 公 跅 弛 不 群 又 不 喜 卑 事 人 以 故 官 不 顯.
만류하기를, 지금 명사들이 다 물러가니,군은 어찌 억지로라도 머물지 아니하오. 하니,홍혼이 말하기를, 사 ( 邪 )와 정( 正 )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거취( 去 就 )가 무슨 관계가 있겠소. 27) 이 글은 1576년 8월의 기사다. 김효원을 군자로 여겼는데 그가 제재되자 벼슬을 버린 홍혼( 洪 渾 )의 사건을 이이( 李 珥 )가 기록한 것이다. 28) 그런데 김효원을 따르는 자들 중에는 명절( 名 節 )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의겸을 따르는 자들 중에 는 노성( 老 成 )한 사람들과 불초자( 不 肖 者 )가 많았다고 한다. 29) 이 사건과 <육신 전>의 조처 등을 결부시켜 볼 때, 이 시기의 선조( 宣 祖 )는 시정( 時 政 )에 대해 잘잘 못을 간하는 선비보다는 말을 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들을 정계에 등용시 켰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에 와서 변혁지향적인 인물은 기피되고 정치현실에 안주하려는 인물은 등용되었기에, 청명( 淸 名 )있는 선비들이 벼슬을 그만둔 사례가 많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제는 사림들의 분열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박계현으로부터 <육신전>의 내용을 들었을 처지에서 시정( 時 政 )에 대해 잘잘못을 간할 수 있는 청 명있는 선비들이 많이 벼슬을 그만두는 당대 현실을 목도하고는 <원생몽유록>을 지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추론을 보다 확고하게 하는 방증 자료가 있다. 곧 임제가 몽유자의 나은지원 ( 羅 隱 之 寃 )을 품고 있던 포의( 布 衣 )시절에 <원생몽유록>을 지었던 것으로 된 다 음과 같은 기록이다. 포의( 布 衣 )때 조중봉( 趙 重 峰,인용자:조헌)과 함께 육신사( 六 臣 祠 )를 배알하고 돌아왔다.그로 인해 <수성지 ( 愁 城 誌 )>와 <원생몽유록( 元 生 夢 遊 錄 )>을 지어서 충분격렬( 忠 憤 激 烈 )한 심회를 우의( 寓 意 )했다. 30) 이로 볼 때, 임제가 28세(1576년) 때 진사( 進 士 )로 등제하고 29세(1577년) 때 9월 알성시( 謁 聖 試 ) 문과( 文 科 )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承 文 院 正 字 )에 제수된 것 을 감안하면, 포의시절에 <원생몽유록>을 지을 수 있는 시기는 1576년 가을쯤으 로 추론할 수 있겠다. 31) 27) 李 珥, < 經 筵 日 記 > 2, 栗 谷 全 書 권29, 선조 9년(1576) 8월. 洪 渾 棄 官 退 歸 于 楊 根 于 時 淸 名 之 士 如 具 鳳 齡 金 宇 顒 輩 皆 解 官 歸 鄕 蓋 知 上 意 厭 士 類 故 也 渾 亦 棄 官 人 或 止 之 曰 今 者 名 士 多 퇴 君 何 不 强 留 乎 渾 曰 邪 正 未 定 去 就 何 關. 28) 李 珥 는 말이 쓰이지 아니하고 道 가 행해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부득이 물러가는 것이지 물러가는 것이 본래 의 뜻은 아니다. 하면서 洪 渾 의 출처에 대해 비판하는데, 李 珥 가 西 人 의 입장에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9) 이정섭, 黨 議 通 略 小 考, 계간 서지학보 13, 한국서지학회, 1994, 96쪽. 30) < 林 氏 宗 家 家 傳 通 文 >. 布 衣 時 與 趙 重 峰 謁 六 臣 祠 而 還 因 著 愁 城 誌 及 元 生 夢 遊 錄 以 寓 其 忠 憤 激 烈 之 懷. 소재 영, 林 悌 와 그 문학, 고소설통론, 이우출판사, 1983, 136쪽 재인용. 31) 정학성이 몽유록의 역사의식과 유형적 특질 ( 관악어문연구 2, 서울대 국문과, 1977)과 임백호문학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1985)에서 저작시기를 1577년 이후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 구체적 증거는 없고 다만 <원생몽유록>에 있어서 남효온이 부각된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임제가 이미 동서분당으로부터 빚어진 당대 정치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私 家 에서 전해진 通 文 이라 하더라도 임제가 포의시절에 <원생몽유록>을 지었음을 밝히고 있는 한, <원생몽유록>은 임제가 28세(1576년) 때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춘택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사 (한길사, 1993)에서 임제가 <원생몽유록>을 1568년에 지었는데, 박 계현이 임제를 1575년에 제주도에서 만나고 나서 <육신전>의 존재를 알고 1576년 선조에게 남효온의 <육신 전>을 소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고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황패강 논의로 미루기는 했으나, 박계현의 부친 박충원이 영월군수 재직시 단종 능을 수축한 사실이 있다는 점과 임제 나이 20세 때는 현실에 구애받지
이와 같이 <원생몽유록>의 저작시기를 추론하는데 있어, 무진중추( 戊 辰 仲 秋 ) 해 월거사지( 海 月 居 士 志 ) 라는 부기( 附 記 )가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 면, 이 기록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황여일( 黃 汝 一 )의 호가 해월( 海 月 )이고, <원생몽유록>에 나오는 해월거사의 시와 논평이 해월문집( 海 月 文 集 ) 에 <제임백호원생몽유록후( 題 林 白 湖 元 生 夢 遊 錄 後 )>(권3, 詩 )와 <서임백호원생몽유록후( 書 林 白 湖 元 生 夢 遊 錄 後 )>(권7, 跋 )로 수 록되어 있음 32) 을 들어 황패강은 해월거사가 바로 실존인물인 황여일이라고 한 다. 33) 그러면서 그는 다음의 인용문들을 가지고 황여일이 임제가 지은 <원생몽유 록>에다 책임을 나누어 가진다는 생각에서 시와 논평을 쓴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증거력은 미흡한 것 같다. 公 起 東 南 海 上 進 而 與 文 苑 鉅 公 相 頡 頏 聲 聞 中 華 其 文 章 汗 瀾 無 涯 涘 而 詩 律 精 麗 與 林 白 湖 悌 爲 伯 仲 其 義 氣 並 埒 云 公 風 骨 秀 偉 氣 貌 軒 昻. 34) 丁 丑 始 遊 泮 宮 與 車 五 山 林 白 湖 並 驅 而 進. 35) 앞 인용문은 이광정( 李 光 庭, 1552~1627)이 쓴 해월선생의 묘갈명 병서( 墓 碣 名 幷 序 )이고, 뒷 인용문은 이유원( 李 裕 元, 1814~1888)이 쓴 해월선생 신도비명 병 서( 海 月 先 生 神 道 碑 銘 幷 序 )이다. 전자는 임제ㆍ황여일과 동시대를 산 이광정이 황 여일의 문장과 시율( 詩 律 ) 그리고 의기( 義 氣 )에 있어서 당대 문명이 있던 임제와 백중되는 바가 있다는 서술이지 서로 간에 교류가 있었다는 것으로 말한 것은 아닌 듯하며, 후자도 정축년(1577년)에 황여일이 차천로ㆍ임제와 같이 알성시 문과에 급 제한 사실을 적시한 것이지 서로 간에 교류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볼 수 없는 듯하다. 특히, 이 점은 임제 문집인 백호집 에 황여일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글 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필자가 해월문집 을 일별해 본 바에 의하면 황패강이 인용한 글을 제외하고는 양자 간에 서로 교류한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 방증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 자허( 子 虛 )가 허구적 인물이었듯 자허의 벗 해월 거사( 海 月 居 士 )도 마찬가지로 허구적 인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적실한 이해라 하 겠다. 왜냐하면 해월( 海 月 ) 곧 바다 속의 달이란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이듯, 역시 실 재의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36) 따라서 가공의 인물인 자 허의 벗으로 허구적 인물 해월거사를 설정한 것으로 보아야겠다. 않고 창루주사( 娼 樓 酒 肆 )를 떠돌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추론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임제가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곡( 大 谷 ) 성운( 成 運 )으로부터 수학하고 난 이후부터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2) 子 虛 之 友 梅 月 居 士 로 된 <원생몽유록>의 이본이 있는데, 매월거사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원생몽 유록>이 해월문집 에 수록된 것을 감안하면 梅 月 이 海 月 로 읽혀졌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따라서 梅 자는 海 자와 字 樣 이 비슷한데서 오는 착오인 듯하다. 33) 황패강, 앞논문들. 박희병도 한국한문소설선 (한샘, 1995, 139쪽)에서 황패강의 견해에 동의했다. 34) 기존 논문에서 재인용할 때는 원문을 그대로 싣는다.(이 원칙은 이하 같다.) 35) 주 34) 참조. 36) 林 悌, 譯 註 白 湖 全 集 (신호열 임형택 공역), 창작과비평사, 871쪽.
결국, <원생몽유록>의 이본( 異 本 )이 오늘날처럼 다양하게 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임제가 그것을 지을 때 기휘( 忌 諱 )의 대상이어서 이름을 밝히지 못하게 된 역 사가 빚어낸 양상이라 하겠다. 그리고 앞서 살핀 것처럼 <원생몽유록>의 말미에 붙은 부기가 신빙성이 없는 것이라면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 저작 시기는 1576년 가을 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37) 3. <원생몽유록>의 주제적 구현 양상 <원생몽유록>은 허구적 인물이자 불우한 강개지사( 慷 慨 之 士 ) 원자허( 元 子 虛 )가 몽중세계에서 남효온의 인도로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 端 宗, 1453)과, 그 단종 복위운동(1456)의 주인공들인 사육신을 만나 그들의 비애와 의리 등을 곡진 하게 읊은 시를 듣다 깨는데, 말미는 자허의 벗 해월거사( 海 月 居 士 )가 거기에 대해 총평하는 것으로 결구되어 있다. 형식적으로 볼 때 입몽과 각몽이 뚜렷이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좌정-토론-시연 이 몽중사건으로 순차적 단락을 이루고 있어, 몽유록의 유형적 전형을 성취하고 있다. 몽유자는 복건자의 안내로 왕과 다섯 신하를 만난다. 복건자 남효온은 단종과 관 련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바, 이는 남효온이 사육신의 행적을 쓴 <육신전>의 저자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남효온은 허구적 차 원에서 보자면 몽중세계의 인도자이고, 사실적 측면에서 보자면 사육신 사건의 실 상을 알려주는 안내자이며, 임제가 <육신전>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식을 표명하는 매개인물이다. 몽유자가 복건자의 안내대로 따라가자, 그곳에는 왕과 다섯 신하가 앉아 있었다. 그 순서는 왕이 앉고 그 다음에 다섯 사람이 앉고, 그리고 복건자가 앉고, 끝으로 자허가 앉는 순이었다. 곧, 왕-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남효온-원자 허 순이다. 이 좌정대목에서, 몽유자 원자허가 복건자보다 뒷자리에 자리 잡은 것은 사육신의 사적을 복건자를 통해 전달받았음을 암유( 暗 喩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사육신의 족적 내지 사적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재구성했음을 나타낸다. 좌정대목을 통해 몽유자는 말석에 자리 잡음으로써 왕과 다섯 신하의 공간에 일 원이 되어 토론과 시연 대목을 목격할 수 있었다. 토론대목은 흥망을 좌우하는 요 인 가운데 왕자( 王 者 )와 관련된 부분이다. 1 복건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요임금,순임금,탕왕,무왕은 만고의 죄인입니다.훗날에 간계( 奸 計 )로써 왕위를 취한 사람들[ 狐 媚 取 禪 者 ]은 그들에게 빙자( 憑 藉 )해 왔고,신하로서 임금을 쳐서 임금이 된 사람들[ 以 臣 伐 君 者 ]은 그들로부터 이름을 빌려 왔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은 호미취선( 狐 媚 取 禪 )과 이신벌군( 以 臣 伐 君 )의 폐습이 오래도 록 이어졌어도 끝내 고쳐지지 않으니,아아!네 임금이야말로 영원히 반적( 叛 賊 )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2 말이 37) 이러한 추정은 정학성과 그의 견해에 동조한 윤주필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지만, 정학성이 그 저작시 기를 출사 직후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겠다.
다 끝나지 아니하여,왕께서 정색하시며 말씀하셨다. 어허,이 무슨 말인가?네 임금님의 성덕( 聖 德 )을 지니고서 네 임금님의 입장에 처했다면 옳은 일이겠지만,네 임금님의 성덕이 없고 네 임금님의 처지가 아니라면 옳지 않 으니,저 네 임금님이 어찌 죄가 있으리오.다만 그에 빙자하고 그에 이름을 빌려오는 사람들이 그릇된 것이로 다. 3 복건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마음속에 불평이 쌓여서 말이 지나치게 격분했음을 알지 못하였습 니다. 38) 봉건왕조의 전시대를 통하여 성군( 聖 君 )으로서 그 권위와 지위를 한 번도 의심받 아 본 일 없는 요순탕무( 堯 舜 湯 武 )에까지 만고의 죄인 으로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 지만, 네 임금과 같은 성덕( 聖 德 )을 갖추고서 네 임금 때처럼 천명( 天 命 )과 인심 ( 人 心 )이 모아져 임금이 된다면 옳은 것이고, 네 임금과 같은 성덕이 없는데다 천 명과 인심까지 모아지지 않았는데 임금이 된다면 옳지 못하다고 한 것과, 천명과 인심이 모아지지 않았는데도 임금이 되어 요순탕무를 빙자하여 이름을 빌려오는 자 들은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 이라는 단종의 대답으로 일단락 짓는다. 시연대목은 흥망을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신하( 臣 下 )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절의 를 지킨 사육신들이 자신들의 심회를 표명케 하고 있다. 특히 단종사( 端 宗 事 )에 대 한 후대인으로서의 감회를 읊은 자허의 시에는 단종사를 이미 지나간 하나의 역사 로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곳은 말없는 무덤뿐 이라는 회한이 자 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임제는 사육신에 대한 실상이 관문헌( 官 文 獻 )에는 난신 ( 亂 臣 )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온전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고 오로지 그들의 무덤 만이 있을 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없는 무덤뿐 이라는 회한은 사육신이 실천한 절의를 온전히 평가하지 못하는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한 회한이자, 동서분 당이라는 사림의 분열에 직면하여 그 말없는 무덤뿐 인 설원( 雪 冤 )되지 않은 사육 신의 절의를 수용해야만 하는 후대인으로서의 회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 여 사육신에 관련된 <육신전>의 저술이야말로 과거 절의의 행적을 밝혀주어 선악 의 스승이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등장한 유 응부가 자신보다 이전에 등장했던 인물들(원자허 포함)을 싸잡아 썩은 선비( 腐 儒 ) 로 매도함으로써, 작가가 문사들의 나약한 절의가 아니라 무사( 武 士 )의 기개 있 는 절의를 희구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몽 후에는 해월거사가 토론과 시연 대목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총평하도록 하 고 있다. 해월거사가 주현신충( 主 賢 臣 忠 ) 함에도 패망한 단종사를 대세와 하늘의 뜻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고 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분울함이 극대화된 다. 복선화음( 福 善 禍 淫 )하는 천도( 天 道 )가 아니라면 임제가 살았던 당대 상황을 해 결할 수가 없고, 해결할 수 없다면 다만 지사( 志 士 )의 회한( 悔 恨 )을 돋울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문사의 나약한 절의가 아닌 무사의 기개 있는 절의가 당대 현실 속 38) < 元 生 夢 遊 錄 >. 幅 巾 者 噓 噫 而 嘆 曰 堯 舜 湯 武 萬 古 之 罪 人 也 後 世 之 狐 媚 取 禪 者 藉 焉 以 臣 伐 君 者 名 焉 千 載 滔 滔 卒 莫 之 救 咄 咄 四 君 爲 人 嘺 矢 言 未 已 王 正 色 曰 惡 是 何 言 也 有 四 君 之 聖 而 處 四 君 之 時 則 可 無 四 君 之 聖 而 非 四 君 之 時 則 不 可 彼 四 君 者 豈 有 罪 哉 顧 藉 之 者 名 之 者 非 也 幅 巾 者 拜 稽 首 謝 曰 中 心 不 平 不 自 知 其 言 之 過 於 憤 也.
에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해월거사의 전망에서 당대 정치현실이 그 만큼 문제적임을 나타낸 것이다. 요컨대 <원생몽유록>은 임제가 후대인으로서 좌 절된 역사에 대해 윤리적 부당성을 느끼지만 어찌할 수 없는 비애로 작품을 끝맺은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것을 간략하게나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개한 선비로서 기개 가 매우 커 세상에 용납되지 않던 몽유자가 입몽하여 장사( 長 沙 )의 강기슭에 도달 하는데, 그곳에서 복건자의 안내로 왕과 다섯 신하를 만난다. 좌정대목을 통해 몽유 자가 왕과 다섯 신하의 공간에 일원이 되게끔 하여 토론과 시연 대목을 목격 내지 참여하도록 한다. 토론대목은 흥망을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왕자( 王 者 )와 관련된 부분을 문제제기하고 일단락을 짓는다. 시연대목은 흥망을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신하( 臣 下 )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절의를 지킨 사육신들이 자신들의 심회를 표명케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절의가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왕자( 王 者 )에 관 련된 부분처럼 일단락을 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각몽 후에 해월거사가 토 론과 시연 대목이 갖고 있는 의미를 총평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4. <육신전> 수용을 통한 <윈생몽유록>의 창작의식 <원생몽유록>에서 몽유자 원자허에 의해 그려진 다섯 신하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서사적 박진감 및 그에서 비롯될 수 있는 비분감은 거세되고 다만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한 애상과 비감 을 지닌 자들로서, 그들을 불사이군( 不 事 二 君 )의 절의를 행한 인물로서만 부각되어 있다. 남효온의 <육신전>이 선악의 스승이 되었다고 임제가 생각했듯, 그 절의( 節 義 ) 야말로 당대 정치현실의 사림들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눌 수 있는 규준( 規 準 )이기도 했다. 임제가 자신의 시대를 바라보는데 있어 그것이 필 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징적인 한두 사람의 시( 詩 )만 살피기로 한다. 재주가 어린 임금이 의탁할 바가 못됨이 깊이 한스럽거늘 나라가 앗기어 임금 욕 당하고 제 목숨마저도 버렸구나. 지금 올려다보고 내려볼 적 천지에 부끄러울 뿐 그 해에 일찍 스스로 도모하지 못했음이 후회스러워라. 深 恨 才 非 可 托 孤 國 移 君 辱 更 捐 軀 至 今 俯 仰 慙 天 地 悔 不 當 年 早 自 圖 이 시는 박팽년을 염두에 두고 읊어 낸 것이다. 1, 2구는 실패한 자의 탄식과 회 한 을 읊조리고 있다. 오히려 금석( 金 石 )에다 충성심을 기탁( 寄 託 )하고 강호에서 늙 어갔더라면 상왕( 上 王 )의 수명이 연장되고 광묘( 光 廟 )의 정치가 더욱 융성할 수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마저 감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자허는 마지 막 구에서 박팽년이 일찍이 죽고자 했던 것 39) 처럼 차라리 그렇게 했으면 나았을 39) 남효온, <육신전>. 彭 年 知 王 事 終 不 濟 臨 慶 會 樓 池 欲 自 隕.
지도 모른다는 심정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육신전>에서의 박팽년은 다음 인용문을 보면 단아지사( 端 雅 之 士 ) 40) 로 서의 모습이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다. 사형을 받게 될 때 사람들에게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를 난신( 亂 臣 )으로 여기지 말라. 김명중( 金 命 重 )이 이때 금부낭관( 禁 府 郎 官 )이 되어 있었는데,박팽년에게 사사로이 일렀다. 공( 公 )은 어찌해서 이런 화난( 禍 難 )을 불러 들였습니까? 팽년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마음속이 편안하지 못하니,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팽년은 성 품이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소학( 小 學 )으로 몸을 단속하여,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의관( 衣 冠 )을 벗지 않으니,다른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였다. 41) 임제는 이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앞서도 언급했듯 복건 자와 왕과의 토론에서 흥망을 좌우하는 왕자( 王 者 )에 대한 것이 일단락되었기 때문 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왕( 先 王 )의 고명( 顧 命 )을 받아 총애 입음이 융성했으니 受 命 三 朝 荷 寵 隆 위태로움에 당해 하찮은 몸을 아낄손가. 臨 危 肯 惜 隕 微 躬 아하 일은 글렀지만 이름만은 꿋꿋하니 可 憐 事 去 名 猶 烈 의( 義 )를 취하고 인( 仁 )을 이룸은 부자( 父 子 )가 같도다. 取 義 成 仁 父 子 同 또 이 시는 성삼문을 염두에 두고 읊어낸 것이다. 1, 2구는 세종이 유신들에게 왕 손을 부탁했던 일을 들추어 성삼문이 신숙주를 꾸짖은 일 42) 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다. 마지막 구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成 勝 )이 1456년 유응부와 함께 명나라 사신 의 송별을 위한 연회 때 운검( 雲 劍 )을 쥐게 되어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베고 단종 을 복위하고자 한 것과 사육신으로서의 성삼문의 행적을 두고, 원자허가 취의성인 ( 取 義 成 仁 )에 부자( 父 子 )가 같았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임제가 성삼문의 호걸 지사( 豪 傑 之 士 ) 43) 로서의 모습을 거의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 다. 44) 이렇게 볼 때, 박팽년의 고뇌하는 지식인의 면모보다는 성삼문의 행동하는 지식 인의 면모에 대해 임제가 더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람은 으스스 나뭇잎 지고 물결 찬데 장검 어루만지며 길게 휘파람 불 제 북두성 기울었다. 風 蕭 蕭 兮 木 落 波 寒 撫 劒 長 嘯 兮 星 斗 闌 干 40) 박희병, 조선전기 인물전의 양상과 문제,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130쪽. 41) <육신전>. 臨 刑 顧 謂 人 曰 毋 以 我 爲 亂 臣 金 命 重 時 爲 禁 府 郞 私 謂 彭 年 曰 公 何 以 致 有 此 禍 嘆 曰 中 心 不 不 得 不 爾 彭 年 性 沈 潛 寡 黙 以 小 學 律 身 終 日 端 坐 衣 冠 不 解 令 人 起 敬. 42) <육신전>. 時 申 叔 舟 在 上 前 三 問 叱 之 曰 吾 與 汝 在 集 賢 時 世 宗 日 抱 王 孫 逍 遙 散 步 謂 諸 儒 臣 曰 寡 人 千 秋 萬 歲 後 卿 等 須 護 此 兒 言 猶 在 耳 汝 獨 忘 之 耶 不 意 汝 之 惡 至 於 此 也. 43) 박희병, 앞논문, 1992, 130쪽. 44) 물론 3구에서 일은 글렀지만 이름만은 꿋꿋하다고 했으나, 성삼문의 거침없고 당당한 기백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분을 참지 못해 발을 구르는 세조의 모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光 廟 頓 足 曰 受 禪 之 初 曷 不 沮 之 而 乃 依 我 今 背 我 乎 三 問 曰 勢 不 能 也 吾 固 知 進 不 能 禁 退 有 一 死 然 徒 死 無 益 忍 而 至 此, 欲 圖 後 效 耳. <육신전>.
살아서는 충효를 온전히 하고 죽어서는 의로운 넋 되었구려. 품은 생각 어떠하뇨? 둥근 저 밝은 달과 같았어라. 아아!첫 계획부터 글렀으니 썩은 선비를 뉘 책하리오. 生 全 忠 孝 死 作 義 魄 襟 懷 何 似 一 輪 明 月 嗟 不 可 兮 慮 始 腐 儒 誰 責 유응부의 시는 무인( 武 人 )의 행동하는 기개를 나타내어 문사들의 나약함을 대비 시켰다는 점에서 앞의 시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기본적으로는 <육신전>에서의 다 음과 같은 유응부 사적에서 취재( 取 材 )한 것으로 짐작된다. 세조가 국문하면서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느냐? 유응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국 사신을 청해 연회를 베풀던 날,칼로써 그대를 없애버리고 구주( 舊 主 )를 복위시키려 했었소.하지만 불행히도 간사한 사람이 발설해 버렸으니,내가 다시 무얼 하겠소?그대는 속히 나를 죽이시오. 세조는 발끈하여 꾸짖었다. 너는 구주를 위한다는 명분을 칭탁해 나라를 도모하려 한 게지. 이에 무사에게 명하여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는 사실대로 아 뢰게 했다.유응부는 굴복하지 않았으며,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서생들과 더불어는 일을 꾀할 만하지 못하다고 하더니,과연 그렇구나.접때 중국사신을 청해 연회를 베풀던 날,내가 칼을 한번 쓰고자 했거 늘,너희들이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 못된다. 고 굳이 그걸 말리더니,오늘의 이 화난( 禍 難 )을 초래하고 말았구나. 너희들은 사람으로서 꾀가 없으니,어찌 축생과 다르리. 그리고는 세조에게 말했다. 만일 그 밖의 일을 듣고 싶 으면,저 좀스런 선비들에게나 물어보시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45) 작가 임제가 자신의 시세계에서 강렬한 남성적 취향 46) 내지 서생( 書 生 )의 속성을 거부하고 영웅의 기개를 노래했던 것 47) 을 감안해 보면 유응부에 대해서 상당한 애 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용한 시( 詩 )가 출현하는 <원생몽유록> 의 문면적 상황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유응부의 시가 원자허를 비롯한 앞 사 람들의 시 다음에 출현하여, 그들의 나약함을 들어 썩은 선비( 腐 儒 ) 로 매도하는데 원자허도 함께 싸잡아 매도한다는 점에서 임제 나름의 갈등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생몽유록>은 유응부의 노래가 다 마치기도 전에 천둥소리 때문에 각몽( 覺 夢 )하는 것으로 결구되어 있다. 때문에 원자허는 각몽 후에 출현하 지 못하고 또 다른 허구적 인물인 해월거사가 몽중세계의 의미를 총평하는 것으로 서 임제는 결구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만큼 임제는 문사들의 나약함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임제는 몽유자를 기개가 매우 커 세상에 용납되지 않던 강개한 선비로 그려내고 있다. 그가 몽중세계로 들어간 곳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곧, 장사( 長 沙 ) 이다. 그곳의 강기슭에 도달하여 원한 깃든 강물이 오열하며 흐르지 못할 제 / 물 억새 꽃 단풍잎에도 서늘하니 바람 이는구나. / 분명 이곳이 장사의 강기슭임을 알 45) <육신전>. 上 問 曰 汝 欲 何 爲 對 曰 當 請 宴 日 欲 以 一 尺 劒 廢 足 下 復 故 主 不 幸 爲 奸 人 所 發 應 孚 復 何 爲 哉 足 下 速 殺 我 光 廟 怒 罵 曰 汝 托 名 上 王 欲 圖 社 稷 令 武 士 剝 膚 而 問 情 不 服 顧 謂 三 問 等 曰 人 謂 書 生 不 足 與 謀 果 然 曩 者 請 宴 之 日 吾 欲 試 劒 汝 輩 固 止 之 曰 非 萬 全 計 以 致 今 日 之 禍 汝 等 人 而 無 謀 何 異 畜 生 白 上 曰 如 欲 聞 情 外 事 問 彼 豎 儒 卽 閉 口 不 答. 46) 안병학, 임제의 시세계와 부정의식, 민족문화연구 16,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2, 171-173쪽. 47) 윤주필, 앞논문, 99쪽.
겠으니 / 달 밝은 밤 영령( 英 靈 )은 어디에서 노니는가? 며 시 한 수를 읊조린다. 강 물은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원한이 깃들어 오열하며 흐르지 못하는 강물과, 또 쓸쓸히 바람이 부는 달 밝은 밤의 수풀이 그 전경( 前 景 ) 을 이루고 있는 시이다. 이에서 자연스럽게 장사와 관련된 비극적 사적을 떠올리도 록 하고 있다. 장사는 항우( 項 羽 )가 의제( 義 帝 )를 쫓아낸 뒤 살해했던 곳으로, 상수 ( 湘 水 ) 연변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상수는 중국 호남성( 湖 南 省 )에 있는 강 이름으 로서, 순( 舜 )임금이 죽자 그 두 비( 妃 )인 아황( 娥 皇 )과 여영( 女 英 )이 투신했던 곳 이다. 또 굴원( 屈 原 )이 멸망하는 조국을 차마 볼 수 없어 빠져 죽은 멱라수도 이 강의 한 줄기이며, 한( 漢 )나라 때 가의( 賈 誼 )가 굴원의 불행한 일생을 자신의 처지 에 빗대어 지은 <조굴원부( 吊 屈 原 賦 )>를 던진 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장사는 비감( 悲 感 )을 자아내는 곳이기 때문에 몽유자가 지닌 정서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몽중세계의 공간으로서 설정된 곳이리라. 몽유자는 이곳에서 토론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미 앞에서 인용된바 대 강의 줄기만 소개하면 1 복건자( 幅 巾 者 )의 과격한 문제제기, 2 왕의 이의( 異 議 ) 제기, 3 복건자( 幅 巾 者 )의 사과 로 구성되어 있다. 남효온이 <육신전>에서 세조 ( 世 祖 )를 폄하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임제는 복건자로 하여금 1과 같이 과격한 문 제를 제기하도록 허구화한 것이다. 과격한 문제제기를 하도록 한 것은 그 만큼 <육 신전>이 임제에게 주었던 충격이 컸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봉건왕조의 전시대 를 통하여 성군( 聖 君 )으로서 그 권위와 지위를 한 번도 의심받아 본 일 없는 요순 탕무( 堯 舜 湯 武 )에까지 만고( 萬 古 )의 죄인( 罪 人 ) 으로 비판의 초점을 맞추도록 했던 것이다. 요( 堯 )와 순( 舜 )은 그들의 아들이 무능하므로 왕위를 자기 아들에게 전하 지 않고 요( 堯 )는 순( 舜 )에게 물려주고 순( 舜 )은 우( 禹 )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며, 탕( 湯 )은 하( 夏 )나라 걸( 桀 )의 신하로서 걸( 桀 )이 폭군이기에 쫓아내고 자기가 왕 이 되었으며 무( 武 )는 은( 殷 )나라 주( 紂 )의 신하로서 주( 紂 )가 포악하기에 역시 쫓 아내고 자기가 임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만 한정한다면, 중세시대의 통치 권력이 항용 들고 나오는 명분론의 허위성과 통치권력 자체의 정당성이 여지없이 의심을 받게 되었던 것 48) 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임제가 남효온의 <육신전>이 지니는 의미를 온전히 그대로 수용할 수 없 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2이다. <육신전>이 주는 의미 때문에 복건자로 하여 금 과격한 문제제기를 하도록 해놓기는 했어도 액면 그대로 요순탕무 를 비판한 것 은 아니다. 이에 대한 단종의 대답이라는 형식을 빌려 임제 자신의 시대적 정치상 황을 표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곧 네 임금과 같은 성덕( 聖 德 )을 갖추고서 네 임금 때처럼 천명( 天 命 )과 인심( 人 心 )이 모아져 임금이 된다면 옳은 것이고, 네 임 금과 같은 성덕이 없고 천명과 인심이 모아지지 않았는데도 임금이 된다면 옳지 못 하다고 한 것과, 천명과 인심이 모아지지 않았는데도 임금이 되어 요순탕무에게 빙 자하고 이름을 빌려오는 자들이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임을 아울러 덧붙이고 있는 48) 임형택, 이조전기의 사대부문학, 한국문학사의 시각, 창작과비평사, 1984, 408-414쪽.
것에서 그 점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될 수 있는 자는 그 자신의 덕 ( 德 )과 시세( 時 勢 )라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49) 그러나 임제는 3처럼 복건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격한 문제제기에 대한 왕의 이 의( 異 意 )에 대해 사죄하게 함으로써 과격한 문제제기를 일단락 짓고 있다. 단종의 왕위 찬탈로 즉위한 세조를 염두에 둔 복건자의 과격한 문제제기를 그것도 사죄케 하여 일단락 짓는 것은 세조( 世 祖 )를 뒤이은 현왕권 또는 현왕조의 정통성 을 인정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임제 가 살았던 당대에 있어서 세조의 왕위 정통성은 심각한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 고 또한 당대의 왕권은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하겠 다. 이 토론대목에서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허가 참여하지 않고 철 저히 목격자로서만 역할을 행하고 있다는 데서도, 출사하고자 했던 임제가 적극적 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당대 왕권에 대해서는 이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당대의 현실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임을 확인케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임제가 자신이 처했던 당대 현실을 근거로 하여 <육신전>의 주제를 제한적으로 수 용하는 태도 50) 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벼슬을 하면 반초( 班 超 )처럼 되 어야 한다고 생각한 출사지향기( 出 仕 志 向 期 ) 의 작가 임제는 그것을 제한적으로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에 분울함 이 더해져 사육신들의 행적을 시화( 詩 化 ) 하여 그들의 절의 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이어진 시연( 詩 宴 )대목은 <육신전>에서 절의를 지킨 사육신( 死 六 臣 ) 에 주목한 남효온과는 다른, 사육신이 실천한 절의( 節 義 ) 를 바라보는 임제의 재해 석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대 상황에서 임제 자신도 출사하고자 하는 입장이었기에 사육신을 이미 과거 역사적 인물로서 비감 ( 悲 感 )과 애상( 哀 傷 ) 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바, 이 점은 앞서 이미 살핀 바이 다. 그러나 그들이 실천한 절의( 節 義 ) 가 갖는 의미는 임제 당대의 문제였다. 왜냐 하면, 청론( 淸 論 )에 위배되는 훈구 및 외척 관료들이 명종대( 明 宗 代 )에 여전히 세 력을 떨쳤었고, 선조대( 宣 祖 代 )에 이르러서는 외척 출신인 심의겸의 중용문제를 두 고 사림파가 동서로 갈라져 분열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시정( 時 政 )에 대해 잘잘못 을 간할 수 있는 청명( 淸 名 )있는 선비들이 환로( 宦 路 )에서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곧 적극적으로 사림의 정치이념을 실현해야 할 계제에 이미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연대목은 임제가 왕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하( 臣 下 )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표명하기 위한 대목이 라 하겠다. 특히, 이 대목에서 세조에 대한 <육신전>과 같은 직접적인 비판은 전 49) 정학성, 앞논문, 1985, 70쪽. 이의 주35)에 의하면, 임제가 타협하기를 거부한 것은 왕권을 정점으로 한 전 제적 통치질서와 가치질서 전반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관찰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점은 본 논의에 의하면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50) 신재홍, 앞책, 1994, 105쪽. 이에 의하면, <원생몽유록>이 단종과 사육신 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하 나, 그것보다는 <육신전>이 지닌 의미망을 임제 나름대로 당대 현실에 근거하여 제한적인 수용의식을 보여주 는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혀 보이지 않고 다만 사육신이 행한 절의 에만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서도 그렇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당대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의 중요성은 많이 희석되었고, 그것보다는 관료사회의 부패 특히 사림의 분열이 당대적 현안으로 부 각되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면 임제는 청명( 淸 名 )있는 선비가 벼슬을 그만두는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인 식했는지, 다음 시 51) 를 통해 살펴보자. 어짊과 사악함이 한가지로 뒤엉키니 천지 다시 요순시대 될 수 있을런지. 취하면 근심 사라지지만 술 깨면 세상걱정 길어지누나. 賢 邪 一 混 沌 天 地 再 虞 唐 醉 去 閑 愁 破 醒 來 世 慮 長 이 시를 보면, 임제가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타나 있다. 즉 당대를 현사( 賢 邪 )조차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현실로 파악하고 있다. 권세를 장악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관료층의 기회주의적 타락을 이렇게 본 것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임제는 자신의 시대를 의리가 지켜지지 않는 명리( 名 利 )를 추구하는 현실로 인식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한 작가의 비분( 悲 憤 )으로서 요순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고 있다. 취( 醉 )하면 사대부적 이상을 좌절시 키고 있는 지배 권력의 불의와 횡포를 눈감을 수 있지만, 다시 깨면 고뇌에 찬 현 실로 되돌아와 걱정이 많아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임제는 자 신의 시대를 어리석음과 치졸함으로 가득한 것으로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 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인식을 지녔던 임제는 사육신( 死 六 臣 ) 에 대한 추모가 아니라 그 들이 실천한 절의( 節 義 ) 를 간절히 바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앞서도 살펴 본 바 있듯 <원생몽유록>을 지을 때 시정( 時 政 )의 잘잘못을 간할 수 있는 청명( 淸 名 )있는 선비들이 많이 벼슬을 그만 두고 있는 정치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임제 는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문사( 文 士 )들의 나약한 절의가 아니라 무사( 武 士 )의 기개있는 절의 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까지 살핀 것을 요약하자면, <육신전>은 세조를 암매( 暗 昧 )한 군주 내지 전 제( 專 制 )군주로서 폄하하고 충절과 의리를 지킨 사육신( 死 六 臣 ) 들을 보다 직접적 으로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는 반면, <원생몽유록>은 당대의 문제적 현실을 담아 내기 위해 당대의 왕권( 王 權 )에 저촉하지 않고 사육신들이 실천한 절의 그것도 무사의 기개 있는 절의 를 수용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 점이 바로 해월거사의 총평 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가가 자신의 분울한 심정을 표백하도록 한 요 인이 아닌가 한다. 이제, 이러한 <원생몽유록>의 의미에 대한 해월거사의 총평을 살펴보자. 가 무릇 예로부터 임금이 어둡고 신하도 혼미하여,마침내 나라가 망한 경우에 이른 것이 많았다네.이제 그 임 51) < 悼 灌 園 先 生 六 首 > 제 2수, 白 湖 集 권1.
금을 보니,생각컨대 반드시 현명한 임금이라네.그 여섯 사람도 또한 모두 충의( 忠 義 )의 신하라네.어찌 그와 같 은 충의의 신하들이 그와 같은 현명한 임금을 보필하는데도,참혹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오호라!대세( 大 勢 )가 그렇게 만들었던가!시운( 時 運 )이 그렇게 만들었던가!아무래도 시운( 時 運 )과 대세( 大 勢 )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으며,그리고 또한 하늘의 뜻에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나 하늘의 뜻에로 돌리고 나면 선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천도( 天 道 )가 아니겠는가.하늘의 뜻에로 돌릴 수 없다고 한다면 아득하고 막막하여 이 이치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아득한 누리 속에 다만 지사( 志 士 )의 회억( 懷 憶 )을 돋굴 따름이다. 52) 이 글은 원자허( 元 子 虛 )의 몽사( 夢 事 )를 전해들은 해월거사가 그것에 대해 총평 한 전문( 全 文 )이다. 가는 단종사( 端 宗 事 )의 과거에 대한 논평이다. 주암혼신( 主 暗 臣 昏 ) 한 결과로 패망하는 것은 응당하지만 주현신충( 主 賢 臣 忠 ) 함에도 패망한 단 종사에 대해 해월거사 나름의 분울한 평가이다. 성패( 成 敗 )의 계기는 대세( 大 勢 )에 돌리지 않을 수 없고 그 대세( 大 勢 )는 천명지거취( 天 命 之 去 就 )와 인심지이합( 人 心 之 離 合 )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거사는 주현신충( 主 賢 臣 忠 ) 함에도 패망한 단종사를 대세와 하늘의 뜻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고 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분울함이 극대화된다. 그러면서도 나속에는 시연대목에 있어서 사육신들이 실천한 절의( 節 義 ) 문제와 관련이 있다. 논평의 시각이 과거문제 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제까지 중첩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소인과 군자로 지칭되는 훈신과 사림의 대립 그리고 사림의 분열 이라는 당대 상황에 대한 평가가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한다. 복선화음( 福 善 禍 淫 )하 는 천도( 天 道 )가 아니라면 임제가 살았던 당대 상황을 해결할 수가 없고, 해결할 수 없다면 다만 지사( 志 士 )의 회한( 悔 恨 )을 돋울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문사의 나약한 절의가 아닌 무사의 기개 있는 절의가 당대 현실 속에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해월거사의 전망에서 당대 정치현실이 그 만큼 문제적임을 나타 낸 것이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적 상황에서 출사입공( 出 仕 立 功 ) 하고자 했고, 벼슬을 하면 응당 정원후( 定 遠 侯 )에 봉해진 반초( 班 超 )와 같이 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던 임제에게는 그 해결책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벼슬 길에 나아간 지 두 달 만에 벌써 강호한정( 江 湖 閑 情 )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임제가 산 당대는 계유정난이 하나의 과거의 역사로서 전해진 것 이 아니라 그것은 당대 정치현실의 문제였다. 계유정난( 癸 酉 靖 難 )에 있어서 신하로 서의 절의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사림파의 형성과 정치적 투쟁에 의해 도덕적 명분을 서서히 구축해 온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주목되 는 바는 중종조( 中 宗 朝 ) 이후의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화를 위해 세조 정통론을 교묘히 이용한다는 점이다. 즉, 세조도 사육신의 절개를 알고 있었기에 그 들을 처형함으로써 오히려 절의를 높이 샀고 또 시세( 時 勢 )와 천명( 天 命 )에 의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이다. 이런 와중에 계유정난에 대한 역사적 평 52) <원생몽유록>. 大 抵 自 古 昔 以 來 主 暗 臣 昏 卒 至 傾 覆 者 多 矣 今 觀 其 主 想 必 賢 明 之 主 也 其 六 人 者 皆 亦 忠 義 之 臣 也 安 有 以 如 此 等 臣 輔 如 此 等 主 而 若 是 其 慘 酷 者 乎 嗚 呼 勢 使 然 也 時 使 然 耶 然 則 不 可 不 歸 之 於 時 與 勢 而 亦 不 可 不 歸 之 於 天 也 歸 之 於 天 則 福 善 禍 淫 非 天 道 也 耶 夫 不 可 歸 之 於 天 則 冥 然 寞 然 此 理 難 詳 宇 宙 悠 悠 徒 增 志 士 之 恨 耳.
가는 하나의 고정체로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새로이 형성되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출사입공( 出 仕 立 功 )하려 했던 임제가 당대 관료층의 모순과 분열에 대해 갈등했던 것이다. 결국, 작가 임제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봉건 사회 관료들의 모순과 분열이고, 그 모순과 분열이라는 당대적 상황에 대한 대안으 로서 <원생몽유록>을 통해 무사의 기개 있는 절의 를 내세우나, 그것이 근본적 해 결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그 자신도 자각한 듯하다. 5. 맺음말 왕위를 계승할 적통으로서 전혀 하자가 없던 단종, 왕실의 안위를 내세워 왕위를 강압적으로 물려받은 세조, 그러한 양극에서 단종복위 운동을 꾀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을 제재로 한 작품 가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이 임제에 의해 어떻게 수용 되어 <원생몽유록>으로 창작되었는지 살폈다. 임제의 시선이 단종의 비극적인 죽 음에는 비켜나 있었던 반면 사육신의 의연한 충절에 맞춰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기개 있는 절의에 주목되었던 것이다. 사림정치의 질서가 재편되던 시기였다는 점 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각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