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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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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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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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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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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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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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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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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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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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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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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한국 중 근세사회의 농법과 수리시설의 변화, 발달과정 등을 문헌 자료 검토와 발굴 보고서 분석을 통해 정리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지이용방식은 文宗代 田品 규정에서 볼 때 1년 또는 2년 休閑法이었다. 벼 경작법이 고려말에 이르러 休閑法에서 連作法으로 변화 발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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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세미나 진행 순서 서울중앙지검 검사장 축사(14:00) 제1주제(14:10~15:10):성폭력 피해 유형별 예방책 및 피해자 보호 방안 주제발표 :김진숙(여조부장),최순호(여조부 검사) 지정토론 :이화영(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백미순(한국성폭력 상담소장) 별첨


Transcription:

주제어 :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 범슬라브주의, 슬라브 서사시, 체코 Keywords : Alfons Mucha, Art Nouveau, Panslavism, Slav Epic, Czech 투 고 일:2011. 4. 20 심 사 일 : 2011. 5. 1 2011. 5. 25 게재확정일: 2011. 6. 5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의 경우를 중심으로* 최 정 현** 목차 >>> Ⅰ. 머리말 Ⅱ. 알폰스 무하의 생애와 예술적 경향으로서의 아르 누보 Ⅲ. 범슬라브주의 사상의 발단, 전개와 체코 지역에서 의 범슬라브주의 Ⅳ. 아르누보 예술가로서의 무하의 범슬라브주의 수용 과 해석 Ⅴ. 맺음말 1) 국문요약 이 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르누보 예술의 절정을 구가한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스 마리 아 무하의 작품 세계와 범슬라브주의라는 사상적 흐름을 함께 관찰하려는 시도이다. 장식적, 상 업적, 실용적 예술로 평가받는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라는 이념은 함께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범슬라브주의를 러시아 중심의 여타 슬라브 민족의 결집으로 통 상 읽어내는 협의의 보수적 범슬라브주의가 아니라 피지배 상태에 놓은 여타 슬라브 제 민족이 자유와 평등, 독립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는 광의의 급진적 범슬라브주의로 받아들인다면, 무하의 말년 대작 슬라브 서사시 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부터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오히려 조국과 민족의 가치를 느끼기 시작한 무하는 만년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체코 민족의 자유와 평등, 독립을 위해 자신의 남은 재능을 모두 바치게 * 이 논문은 2007년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KRF-2007-362-B00013)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116 제27권 2호 2011년 된다. 그것이 바로 슬라브 서사시 이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인 들에게 조금은 특징적인,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지식인, 예술가의 책무 의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르누보 라는 예술 양식이 서유럽 주변부 민족에게 낭만적 민족주의 운동 을 추동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기존의 전통적 재현 양식을 거부하고 새롭고 젊은 양식으로 자리 매김한 아르누보라는 사조가 천부적 인권인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었다 는 점에서 슬라브 세계가 근대 (modernity)로 진입하는 데서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Ⅰ. 머리말 이 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 예술계의 큰 흐름이었던 아르누보(art nouveau)를 대표하는 화가로 잘 알려진 체코 출신의 알폰스 마리아 무하 (Alfons Maria Mucha, 1860~1939)의 작품 세계를 범슬라브주의(Panslavism, Панславизм) 사상과 접목시켜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미술사조로서 아르누보는 19세기 후반기 무렵까지의 리얼리즘적 경향의 전통적 화풍과 결별하려는 여러 시도의 하나로 간주된다. 화려한 색감과 장식 적 요소로서 디테일에 대한 관심 등을 강조하며 오늘날 산업디자인의 영역이 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강세를 보인 흐름으로서 상업성 과 비교적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도구적, 실용적 미술의 정점에 서 있는 무하였지만, 1910년 만년에 이르러 오랜 외국 생활 끝에 고국 체코로 돌아온 뒤 연작 슬라브 서사시 (Slovanská epopej)를 남기며, 합스부르크 제국 의 이등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체코 민족의 슬라브적 DNA를 확인하는 정체성 탐구를 시도했다. 이 글에서는 상업 미술의 성향이 강한 아르누보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무하가 자신의 작품 슬라브 서사시 를 통해 보여준 슬라브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자각과 인식의 과정을 탐구하며, 무하 의 창작 세계를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남서 슬라브 여러 민족에게 서 확산되기 시작한 범슬라브주의의 일종의 예술적 실현 으로 이해하는 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알폰스 무하의 간략한 생애 소개부터 시작해 유럽의 가장 대표 적인 아르누보 화가로 인정받는 무하의 작품 세계를 슬라브 서사시 를 중심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17 으로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범슬라브주의에 대해서도 검토하며 주로 문화적 측면에서 그 접점을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주지하듯이, 범슬라브주의라는 사상적 스펙트럼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아래 본문에서도 언급되겠지만, 문화적 관점에서 글쓴 이에 의해 이 글에서 논의될 범슬라브주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정에서 발호된,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여타 슬라브 제 민족의 단합을 주장한 협의의 범슬라브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19세기 전반기부터 미하일 바쿠닌(М.Бакунин, 1814~1876) 등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와 급진적인 세력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특정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를 압제하는 폭력적 형태의 일체의 지배에 저항해 이를 전복시킬 것을 주장하는 사상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한 제국적 지배에 대한 저항의 중심에 러시아 민중을 위치시키며, 역사적 맥락에서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서/남슬라브 민족이 단결, 연대해 팽창적 제국주의 지배의 분쇄를 주장한 것이 이른바 광의의 범슬라브 주의이다. 무엇보다 무하는 아르누보 예술가로 이해되고 있으며, 가장 최근 체코의 역사와 문화사를 다룬 연구에서도 무하의 각별했던 민족적 정서와 애국적 감정이 거론되고는 있지만, 범슬라브주의, 특히 이 논문에서 글쓴이가 접점을 찾고 있는 광의의 범슬라브주의라는 구체적 사상과 접목되는 지점에서까지 조명되지는 않았다. 1)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시론적 성격을 지니며, 2) 앞으로 1) 체코 혈통으로서 캐나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세이어 교수의 최근 체코사 연구에서도 무하가 꾸준히 언급되고는 있지만, 범슬라브주의와의 연계 선상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Derek Sayer, The Coasts of Bohemia: A Czech History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한편,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을 별도로 연구한 논문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많은 경우, 무하의 작품과 생애, 예술세계 등을 함께 이야기하는 작품선집 종류의 도감에서 슬라브 서사시 에 대해 별도의 장이 할애되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슬라브 서사시 연작 시리즈의 구상과 착수, 완성과정에 대해 무하의 작품세계 전반을 언급하는 연장선상에서 거 론되고 있다. 물론 이때 범슬라브주의도 함께 언급되고는 있지만, 범슬라브주의와 그의 작품 슬라 브 서사시 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무하의 생애와 작품, 예술세계 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함께 볼 수 있는 도록 종류의 선집 중에서는 최근 3판째가 간행된 Sarah Mucha (ed.), Alfons Mucha (Prague: Frances Lincoln, 2009)를 참고하기 바람. 이 책은 프라하 무하 재단(Mucha Foundation)의 이사이자 무하의 손녀인 사라 무하가 책임편집을 맡아 출판한 것으로 작품 도판이나 작품 설명이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Agnes Husslein-Arco and et al (eds.) Alponse Mucha (Munich: Prestel, 2009), Victor Arwas (ed.), Alphonse

118 제27권 2호 2011년 무하를 위시해 지난 세기 초, 러시아 제국은 물론 폴란드, 체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민족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와 주제의 슬라브 연대 를 구상하고 받아들였던 여러 인물과 세력 등에 대한 문화 교류 라는 관점에서 더욱더 포괄적이며 체계적인 연구를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3) Ⅱ. 무하의 생애와 예술적 경향으로서의 아르누보 1. 무하의 생애 알폰스 마리아 무하는 1860년 7월 24일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하의 오스트리 Mucha: The Spirit of Art Nouveau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가 훌륭한 도판과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2)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알폰스 무하라는 예술가와 작품에 대해서 국내 애니메이션 전문가에 의한 도입서가 이미 존재한다. 일문학을 전공했고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이동민 이 쓴 무하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관한 책 알폰스 무하와 사라 베르나르. 아르누보의 별 그리고 전설이 된 배우 (서울: 재원, 2007)가 그것이다. 아르누보는 그 토대를 닦은 인물 중의 하나인 사무엘 빙(Samuel Bing, 1838~1905) 등이 유럽에 소개한 일본 미술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밀한 판화와 화려하면서도 원색적인 색감, 이국적인 장식 등의 일본 미술은 당대 유럽의 미술가 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이는 초기 아르누보의 방향설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카린 자그너, 아르누보, 어떻게 이해할까?, 심희섭 역 (서울: 미술문화, 2007), p. 18). 이런 연유로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아르누보 미술에 대한 연구와 작품 전시 등이 매우 활발했고, 역으로 현대 일본의 애니메 이션 산업 발전에 아르누보 미술의 풍부하고 화려한 색감과 환상적 여인의 장식, 디테일 묘사 등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정도의 추정할 수 있는 이유로 일문학을 전공하고 애니메이션 산업에 종사하던 원저자는 국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하에 관한 책을 낸 것으로 여겨진다. 책 자체는 무하에 대해 기존하는 영어판 저술들과 일본어판 서적을 참조해 쓰여 졌으며, 내용 역시 균형 잡힌 서술과 풍부한 도판, 충실하면서도 정확한 설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아르누보 자체와 관련 하여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예술가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일 것이다. 오스트 리아 출신인 그는 아르누보의 유럽 내 다양한 분파 중 하나인 비엔나 분리파 (Wiener Secession)의 기치를 내건 초기 대표주자로서, 화면의 모자이크식 구성과 금박을 이용한 장식성과 색감, 여인의 관능적 묘사 등으로 세기 말 아르누보 양식의 또 다른 한 전형을 구축한 인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아르누보 예술의 표징은 가우디(Antoni Gaudi i Cornet, 1852~1926)가 바르셀로나에 건축한 성가족 교회(Sagrada Família)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 최근 러시아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의 상업 포스터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포스터 중 상당수는 이른바 무하의 스타일을 직간접적으로 원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 주목해 지난 세기 초 슬라브 세계 전체의 문화적 유대와 교류에 대해서도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개최된 러시 아 포스터 전시회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할 수 있다. http://www.advertology.ru/article89600.htm (검색일: 2011.4.6) 위 링크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1897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포스터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바로 무하의 아르누보 스타일로 만들어져 있다. 한편, 최근 미술사가들의 지적에 서도 엿보이듯이, 포스터 미술의 역사는 미술사적인 관심을 떠나 정치와 경제, 문화에서 광고 미술 이 사회적으로 갖는 기능에 대한 논의를 포함한다. 크리스토프 베첼, 미술의 역사, 홍진경 역 (서울: 예경, 2006), p. 413.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위에 소개한 최근 러시아의 포스터 전시가 다름 아닌 광고론 쪽에서 기획, 제기했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19 아-헝가리 제국의 모라비아(Moravia) 지방의 이반치체(Ivančice)라는 도시에 서 태어났다. 지금의 체코 지역인 모라비아 출신의 무하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매우 깊어 어린 무하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비잔틴 문화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던 이반치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무하는 어머니와 고향의 지역적 영향을 받아 종교적 심성이 꽤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라비아 공국의 수도격 이었던 브르노(Brno)의 수도원에서 공부하던 소년 시절에는 훗날 낭만주의적 체코 국민음악의 선구자가 된 레오쉬 야나체크(Leoš Janáček, 1854 1928)와도 교유하게 되었다. 사정상 브르노의 수도원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어린 무하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체코 바로크 전통이 녹아 있는 사원의 프레스코화에 감동하기도 하고, 틈틈이 초상화를 그리며 그 돈으로 여비에 보태기도 했다. 이반치체로 돌아와 십대 후반을 보낸 무하는 21세가 되던 1881년에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빈으로 떠나게 된다. 짧은 빈 생활을 거쳐 벨라시의 큐엔 (Khuen von Belasi) 백작의 후원으로 뮌헨의 예술 아카데미로 유학을 간 무하는 그곳에서 체코인 클럽의 의장을 맡았고 이 클럽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인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Л. Пастернак, 1862 1945) 등 러시아인들 과 교유하기도 했다. 뮌헨에서의 2년간 수학한 뒤 백작의 권유로 무하는 다시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수학 중 후원자인 큐엔 백작의 재정 후원이 끊어지자 곤궁에 처한 무하는 생계를 위해 잡지사의 삽화 등을 그리며 어렵게 지냈다. 그러던 중 1894년 우연히 당시 파리 최고의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art, 1844~1923)의 연극 지스몽다 (Gismonda)의 포스터를 석판화로 완성 하게 되었는데, 4) 이 포스터 한 장이 예술가로서 그의 입지를 단숨에 끌어 올렸다. 연극 포스터로선 종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세로 길이가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규격(216 74cm), 황금빛과 담황, 초록 등의 부드러우면서도 대담한 색채, 겹쳐 찍는 석판화의 표현기법을 잘 활용한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이 무렵 무하는 당시의 석판화 기법에 정통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장르의 제약을 떠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로운 진로를 개척 4) 포스터와 설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람. Sarah Mucha, op. cit., pp. 42-45.

120 제27권 2호 2011년 한 셈이었다. 그러나 포스터 제작자로서 무하의 이름이 높아졌다기보다 당대 파리 최고의 여배우였던 베르나르와 6년 동안 전속계약을 맺었다는 사실 때문에 무하의 작품이 초기에 더욱 조명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이후 무하를 신뢰하기 시작한 베르나르는 그에게 단순히 그녀 자신이 출연한 <르네상스 극장>의 연극 포스터 디자인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빈과 뮌헨에서 공부하고 습작하던 시기의 경험까지 높이 사, 극장 무대 디자인 을 비롯해 자신의 무대의상과 보석, 악세사리 등 소품 디자인까지 그에게 의뢰했다. 5) 베르나르를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무하는 곧 여러 종류의 상업미술 의뢰를 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과 여유, 대중적 인기와 명성을 쌓아 나갔다. 샴페인 라벨, 과자 상자, 비누 곽 등의 디자인부터 보험회사의 포스터, 유명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 보석 공예와 가구 디자인, 무대 의상과 무대 디자인 등에까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무하의 작품은 열띤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무하의 작품에 묘사되던 여인의 주된 모티프는 금발의 밝고 풍성한 머리에 각종 장식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화려하면서도 환상적인 의상에 고대 그리스, 로마 여신풍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다. 이렇듯 1900년을 전후로 한 약 10년 동안 무하는 당시 유럽 대륙에 불던 화려한 장식과 풍부한 디테일로 꾸며진 이른바 아르누보 양식 미술의 절정을 구가했다. 또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설립 작업에도 참여할 정도였다. 이렇게 파리에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인 1906년 무하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까지 진출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역시 자신의 아름답고 여성적 인 미술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그는 1910년 프라하로 돌아오게 된다. 1881년 20세가 갓 넘은 나이에 체코를 떠난 이후 30년 만에 50세 나이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 무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체코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을 5) 구체적인 도판과 사진 등은 다음을 참고하기 바람. David M. H. Kern & G. Mourey, The Art Nouveau Style Book of Alphonse Mucha: all 72 Plates from Documents decoratifs in Original Color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80), pp. 23-28.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21 경험하게 된다. 먼저, 무하는 22살 연하의 제자인 마리야 히틸로바(Maria Chitilova, 1882~1959)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주 체코 미국 대사를 역임하게 되는 찰스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1858~1939)이라는 실업가와 교유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알게 된, 체코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각별했던 크레인의 재정적 후원 아래 무하는 고국에 정착해 조국에 바치는 이른바 슬라브 서사시 의 완성에 더 편안하게 몰두할 수 있었다. 체코 민족을 비롯한 슬라브 제 민족의 지난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모티프로 삼아 완성된 20편의 초대형 연작 시리즈는 무하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모든 역량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바친 결정체로 평가된다. 서유럽 평단의 일반적인 평가에 의하면, 무하는 자신의 상업적,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상업주의적 주문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서사시적 작품에 몰두했다고도 한다. 6) 조금은 아이러니하게도,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는 당대 체코 문화계와 민중 들에게 복고적 성향의 고루한 민족주의적 이념을 때늦게 구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냉담한 평가와 시선에 맞부딪혔다. 7) 그럼에도 무하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여 아르누보라는 실용적 장식 미술가로서뿐 아니라 민족적 주제를 바탕으로 이념적 대작 을 통해 조국과 민족에게 헌신 하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무하는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해나가면서 동시에 여전히 아르누보 예술의 본령에서 또 다른 방법으 로 조국에 봉사했으니, 1918년 체코가 합스부르크 황실로부터 독립하자 독립 체코 최초의 화폐와 우표 디자인을 도맡아 수행했다. 이후 20년대에도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 의 작업에 꾸준히 매진하여 1926년 드디어 애초 구상대로 20편의 대작을 완성했다. 이후 70세를 넘긴 나이인 1930년대에도 무하는 끊임 없이 작업에 전념하며 슬라브 서사시 에서 그려낸 슬라브 민족의 독립과 자유, 평화를 더욱 승화시킨 이성의 시대, 지혜의 시대, 사랑의 시대 의 3부작을 남겼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체코와 접경 지방인 수데텐란 6) 장 폴 뷔용, 아르누보, 윤철규 역 (서울: 열화당, 1994), p. 45; 레나테 울머,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 의 거장, 이원제 역 (서울: 마로니에 북스, 2005), p. 7. 7) 아래에 언급되겠지만, 1912년 슬라브 서사시 의 첫 3작품이 공개되었을 때부터 나중에까지 무하 의 사이클에 대해 체코 민중의 반응은 조금은 냉담했다. 아르누보 예술의 정점을 스스로 완성한 무하였지만, 당대 체코 화단을 비롯하여 사회에서는 전통에서 소재를 찾는다는 발상이 그 자체로 경원시되고 있던 때라 거장의 대작 역시 처음부터 긍정적 반응만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이동민, op. cit., pp. 154-155.

122 제27권 2호 2011년 드(Sudetenland) 지방을 강제 병합하며 체코를 점령하던 1939년 무하는 불온 한 예술로 대중을 선동했다 는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고, 얼마 후 80세를 목전에 둔 고령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체코 역사를 증언하는 고성인 브이쉐흐라드(Vyšehrad)의 기념묘역에 프라하 시민과 체코 인들의 애도 속에 안장되었다. 2. 예술적 경향으로서의 아르누보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시각미술에서는 주목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 다.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파리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브뤼셀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화가, 디자이너, 공예가, 건축가 등은 처음에 혹독한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 시대의 정신을 표현해낸 작품을 제작했다. 당대 사람들이 새로운 미술, 즉 아르누보(Art Nouveau)라 부른 이 예술은 1900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그 정점을 찍은 이래로 약 10여 년 동안 여성적 곡선과 식물의 덩굴무늬, 갖가지 기묘하고도 부드러운 선, 화려하고 부드러운 색감을 살린 이미지가 회화, 조각, 공예, 서적, 가구/보석/의상/무대/실내/인쇄/광고/포 장 디자인, 건축 등의 부분에까지 포괄적으로 원용되어 표현된 것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비록 미술사조에서 아르누보는 단명한 편이지만, 한편으로 는 20세기라는 시대로의 이동을 과감하게 추동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섬세한 영향을 남긴 흐름으로 간주된다. 기존의 리얼리즘적 재현 전통에서 벗어나 예술을 새롭게 개혁하여,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을 젊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르누보의 가장 굵고 선명한 지향점이었다. 즉, 산업화, 근대화가 한창 추진되기 시작하던 19세기 말엽 야기되기 시작한 사회적, 문화 적, 정신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아르누보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의 혁신, 일상의 진부함에 반기를 든 새로운 미에 대한 갈구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8) 이러한 아르누보의 또 다른 특징은 무엇보다 범 유럽적 성격이다. 지역별 명칭 8) 자그너, op. cit., p. 12.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23 차이가 있었을 뿐, 아르누보 운동은 스페인에서 러시아, 스웨덴에서 이탈리아 에까지 이르는 거의 전 유럽을 휩쓴 예술 양식이었다. 독일에서는 유겐트슈 틸 (Jugendstil),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는 제체시온슈틸레 (Sezessionstüle) 이라 불렸으며, 바르셀로나에서는 더욱 광범위한 모데르니스타 (Modernista) 운동의 일부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미학의 진원지로 여겨진 런던 상점 리버티의 이름을 따 스틸레 리베르티 (La Stile Liberti)라 불렸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아르누보라 불리는 양식을 받아들인 미술가들이 대체로 미술공예 운동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동부와 북부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아르누보 계열의 장인과 디자이너들이 국제적인 양식을 수용하면서도 민족적 낭만주 의 운동 을 지속시킨 미술가로도 생각되었다. 19세기 중엽까지의 관례적인 리얼리즘적 재현 양식을 거부하고, 글자 그대로 새롭고 젊은 표현 방식을 찾고자 한 아르누보 양식은 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민족적일 수 있는, 9)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편재한 또 다른 양식이었다. 그러나 아르누보 예술은 초기 상업적이며, 장식성이 강조된 응용미술적인 부분을 벗어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또 다른 사회적 색채가 덧씌워지기 시작 했다. 즉, 프랑스 문학을 중심으로 한 상징주의의 모호한 음울함과 화려한 장식적 요소 등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에서처럼 종전의 리얼리즘적 재현 전통에 과감하게 반기를 들고 새로운 표현 방식 모색에 나섰던, 다소 자체 모순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아르누보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의 몇몇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짙게 띠어 갔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스웨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왔던 핀란드,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을 비롯하여 러시아 제국에서도 역시 민족주의적 성향을 노정했다. 타민 족의 억압적 지배를 받아왔던 앞의 두 지역이 자신들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 려는 보다 공세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냈다면, 러시아의 경우는 러시아 역사상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유럽과도 다르며, 아시아와도 다른 러시아만의 고유한 특성, 즉 러시아적 민족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 스티븐 에스크릿, 아르누보, 정주정 역 (서울: 한길아트, 2002), p. 5.

124 제27권 2호 2011년 유럽과 미국의 세기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 아르누보 예술에 대해 가장 총체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는 에스크릿(Stephen Escrit)은 아르누보가 러시 아에서는 범슬라브주의와 서구적 근대화라는 두 가지 모순된 욕구를 채워주 었고, 카탈루냐에서는 지방이 아닌 대도시가 되고자 했던 바르셀로나에 에스 파냐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국제적인 유럽 정체성을 상기시켰으며, 핀란 드에서는 낭만주의 전통과 유럽의 근대성을 동시에 환기시키며 민족주의적 욕구를 드러내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0)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에서 도시적 전통이 강했던 카탈루냐를 제외하면, 민족적 단위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 나 자유와 독립, 평등을 찾으려는 주장은 핀란드에서 강했다. 당시 핀란드의 이런 경향은 핀란드의 영웅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 11) 를 기본으로 한 삼 포의 저항 (Defence of Sampo) 등에 잘 나타나 있다. 12) 화려하면서도 원색적인 색감과 민족의 원형적이면서 역사적인 기억을 제재로 한 이런 경향은 사실 이전 세기에 나타난 일종의 민족적 낭만주의의 지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 10) Ibid., p. 191. 11) 나탸샤 댄스 의 저자인 영국인 올랜도 파이지스는 칼레발라 를 영국인들에겐 베오울프 (Beowulf), 러시아인들에겐 사드코 (Садко)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올랜도 파이지스, 나타샤 댄스, 채계병 역 (서울: 이카루스 미디어, 2003), p. 576. 12) Ibid., p. 195. 13) 문화사적인 의미에서 러시아에서 아르누보 양식은 이른바 근대 양식 (стиль модерна)을 주도한 예술 세계 (Мир Искусства)의 초기 상징주의적 경향과 19세기 말 러시아 미술과 공예를 보존, 장려하기 위해 조성된 공방과 아틀리에에서 작업한 일련의 예술가들의 작품, 그리고 이 두 경향 바깥에 있는 몇몇 개별 예술가로 크게 세 부분으로 대별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세계 를 주도한 흐름은 세르게이 댜길레프(С.Дягилев, 1872~1929)와 레온 박스트(Л.Бакст, 1866~1924), 알렉 산드르 베누아(А.Бенуа, 1870~1960), 드미트리 필로소포프(Д.Философов, 1820~1894)가 있으며, 아 브람체보(Абрамцево) 공방의 민속주의적 흐름에는 엘레나 폴레노바(Е.Поленова, 1850~1898)가 있 으며, 스몰렌스크의 탈라쉬키노(Талашкино) 공방에는 러시아 전통 민예품인 마트료쉬카를 발명한 (!) 세르게이 말류틴(С.Малютин, 1859~1937) 등이 있다. 그리고 개별적 예술가로는 빅토르 바스네 초프(В.Васнецов, 1848~1926)와 이반 빌리빈(И.Билибин, 1876~1942)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초 기 상징주의와 유미주의적 성향을 짙게 내보인 잡지 예술 세계 가 아르누보 양식을 차용, 또는 이에 강하게 영향 받고 있음은 이견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러시아 민속 공예와 농민층 의 기호와 세계관을 반영한 공방의 수공예품들은 일견 아르누보 양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 다. 하지만 공방의 민속적 수공예품 역시 초기 민속적 디자인과 모티프의 차용에서 곧 새로운 예술 양식에 대한 환영과 수용 등으로 이행해갔다. 그러한 과정에는 바스네초프의 그림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민중이 이해하는 아름다움의 핵심은 색 이라는 그의 주장과 이러한 주장을 예술화 한 바스네초프의 그림은 그가 제재로 삼은 고대 러시아 역사의 많은 장면들과 함께 20세기 초 새로운 예술 양식의 한 흐름을 제시해주었다. 이후 이반 빌리빈 등은 바스네초프의 양식을 계승해 발전시킨 경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색의 재발견이라는 측면만 두고 본다면 바스네초프는 이후 나탈리야 곤차로바(Н.Гончарова, 1848~1916) 등에게까지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25 한편으론 이러한 민족적 낭만주의는 핀란드나 체코와 같은 주변적 인 민족 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으며, 회화와 조각, 공예, 건축 등의 시각예술 분야에 서 민족적 낭만주의의 발현은 언어예술인 문학과 함께 가장 활발했다. 이에 비해 체코의 경우 건축을 제외한 조형예술에서 민족적 낭만주의의 정서가 두드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가장 추상적인 예술형태라 할 수 있는 음악에서 이른바 국민악파 음악을 통해 체코 민족주의가 주장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베드리쥐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řak, 1841~1904), 레오쉬 야나체크(Leoš Janaček, 1854~1928) 등의 대표적 작품과 프라하 국립오페라 극장을 통해 주로 상연된 오페라 리부쉐 (Libuše)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14) 이러한 체코의 민족적 낭만주의 경향의 예술이 란 점에서 무하의 아르누보 예술 역시 유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5) 미술사를 벗어나 문화사라는 맥락에서 지난 세기 초 러시아의 예술양식과 흐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길 바람. 파이지스, op. cit., pp. 396-419. 14) 지적해야 할 것은 국민악파 음악이 그 제재와 파토스, 수신자 등은 분명 본연의 체코 민족을 대상으 로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음악 자체는 유럽적 이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국민악파적 경향을 보인 곳은 체코 이외에도 헝가리, 핀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등이 있지만, 체코 음악은 사실 상 빈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독일 음악, 좀 더 문화적으로 정의하자면 다뉴브 강 유역의 음악 과 분리되기 어려운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스메타나는 헝가리인 리스트의 지원과 격려 속에 음악을 배웠으며, 드보르작은 독일인 브람스의 후원 덕분에 어려웠던 젊은 시절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야나체크 역시 독일인 바그너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 위의 사실은 체코 민족의 자유와 독자성을 강하게 주장하던 시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음악이 당시 유럽 주류의 음악 과 완전히 절연한 채 오로지 체코적인 독립한 음악만으론 존재할 수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일 것이다. 협소한 오늘날의 민족과 국가 개념으로 과거를 소급해 바라보는 것이 빚을 수 있는 오류가 국민음악의 이해에서도 그대로 되풀이 될 수 있는 경우이다. 요컨대, 체코를 비롯한 유럽 주변부 민족과 국가에서 자신들의 독자적 성향과 제재를 편취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음악을 위시 한 문화가 대두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큰 틀에서 자신들 역시 속했던 유럽 음악과 유럽 문화라는 테두리 내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체코 국민악파들이 유럽 음악 전통과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체코 국민악파 음악을 주장했다기보다 는 오히려 자신들의 음악적 자양분으로 삼은 유럽 음악의 전통에 못지않은 체코 음악이 있음을 역설하고 싶어 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신성로마제국 시대에 보헤미아 출신의 오타카르 2세(Otakar II, 1230~1278)가 있었으며, 카렐 4세(Karel IV, 1316~1378)에 의해 독일 의 선제후뿐 아닌 보헤미아의 왕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처럼, 체코에도 유럽에 전혀 뒤지지 않는 체코인들의 음악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 한 것이라는 생각이 보다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15) 10대 청소년 시절 브르노의 수도원에서 수학할 때, 무하는 야나체크를 이미 이곳에서 알게 되었다.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때 무하와 야나체크 두 사람이 얼마나 민족주의적 정서에 공감했는지 그리고 서로 의기투합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나중에 논의되겠지만, 슬라브 서사시 등에 체코 민족, 슬라브 민족의 인종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하가 체코 국민악파 음악가들처럼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든다. 오히려 무하에게서는 체코 민족, 슬라브 민족의 자유와 독립, 평등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광의에서 천부인

126 제27권 2호 2011년 그러나 에스크릿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19세기 전반 독일을 중심으 로 유럽을 휩쓴 문학에서 낭만주의와 19세기 말엽 음악과 회화, 공예, 건축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후자는 민족주의를 정치적 열망으로 표현했으며, 이러한 진보적 의식의 배면 에는 주류 유럽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또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즉, 핀란드가 되었건, 카탈루냐가 되었건, 또는 스코틀랜드가 되었건 민족을 기본 단위로 한 더 큰 정치적 독립을 원함과 동시에 더 넓은 유럽 문화 의 일부가 되기를 그들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16) 이런 점에서는 러시 아의 경우도 예외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17) 이런 맥락에서 에스크릿은 역사적 으로 게르만인의 영역 깊숙이 진입해 있는 프라하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라 는 대립적 요소를 표현했으며, 그것 자체로 프라하의 문화적 절충주의적 역학 관계를 알려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8) 요컨대, 체코인으로서 무하가 파리에 서 쌓아올린 아르누보 예술가로서 그의 성가가 30년에 걸친 외국생활 끝에 고국에 정착해 슬라브 서사시 라는 민족주의적 작품으로 귀결된 것은 충분 히 예측할 수 있는 경로이며,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권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자존, 독자성 등이 중요시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또한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하고 난 뒤인 1936년 이성의 시대, 지혜의 시대, 사랑의 시대 라는 보편적 주제를 전면으로 강하게 드러낸 또 다른 3부작을 완성했다는 점에서도 타당성을 지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무하의 민족의식에 대한 경도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구자도 있다. 예를 들어 울머의 경우, 무하의 민족주의적 의식을 조금은 보수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장식의 천재이자 형태의 대가인 무하가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한 채 장식미술가로 명성을 얻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역사, 특히 민족의 역사를 그려내고 자 했다고 설명하며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의 작업에 몰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울머, op. cit., p. 7. 16) 에스크릿, op. cit., p. 246. 17) 러시아의 경우, 에스크릿은 건축가 표도르 쉐흐텔(Ф.О.Шехтель, 1859~1926)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 고 있다. 쉐흐텔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러시아관 건축을 담당했는데, 당시 러시아관은 키쥐섬 (о. Кижи)의 현성용 성당(Преображенский собор)의 양식을 차용해 목재로 지어졌다. 지극히 러시 아적 민속에 기대고 있는 이 양식은 그러나 쉐흐텔 본인이 지속적으로 유럽 여행을 하며 유럽에 대한 견문을 넓혀가고 있던 도중, 아르누보 건축 양식과 민족적 제재를 접합시켜 탄생된 것으로 에스크릿은 설명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처럼 러시아의 근대 양식 은 핀란드의 아르누 보와 마찬가지로 민족적 전통과 국제적 근대성 사이의 긴장감을 노정하고 있으며, 이는 마치 쇠락 해가는 제국과 막 태어나려는 민족국가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었다는 증거였다고 판단한다. Ibid., p. 228. 첨언하자면, 러시아의 아르누보 건축을 이야기할 때, 종종 빠뜨려지는 사람은 미하일 에이젠 슈테인(М.О.Эйзенштейн, 1867~1921)이다. 그는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С.М.Эйзенштейн, 1898~1948)의 아버지로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그가 남긴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은 그 독특함 으로 아주 특징적이다. 18) Ibid., pp. 389-390.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27 창작 세계를 마무리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라기보다 민족적, 슬라브적 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 이렇게 평가될 수 있는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를 고찰하기 위해 범슬라브주의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요청된다. Ⅲ. 범슬라브주의 사상의 발단, 전개와 체코에서의 범슬라브주의 이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예술적 경향으로서의 아르누보와 슬라브 서사시 를 중심으로 한 무하의 작품세계가 범슬라브주의라는 사상적, 문화적 맥락에 서 이야기될 수 있도록 하는 범슬라브주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겠다. 주지하듯이,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에서만 일어난 정치적, 역사적, 사상적 흐름이 아니며, 19세기 후반에만 집중해 논구된 개념도 아니다. 모스크바-제3 로마 이론이 나오던 15세기부터 유고연방이 붕괴되고 난 뒤, 코소보(Косово)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세르비아에서 주장했던 범세르비아주의까지 이 모두를 범슬라브주의라는 사상적 스펙트럼으로 수렴해 생각할 수 있다. 범슬라브주 의라는 이념으로 포괄되는 이 모든 사상적 분기점을 이 글에서 모두 담아낸다 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러시아뿐 아니라 슬라브인 전체에서 유기적인 공유개념으로 본격적으로 발전 해나가기 시작한 범슬라브주의의 초기 국면과 무하에게 더 직접적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추정되는 체코에서의 범슬라브주의에 대해 논의해 보는 수준에 서 일단은 머물고자 한다. 매우 역설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정합적이게도, 범슬라브주의는 서구의 자극, 특히 독일(게르만)을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시대의 작가와 철학자들의 19) 아르누보 미술을 정점에 서게 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라는 행사 자체가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라 는 에스크릿의 지적 역시 귀담아 들을만 하다. 앞서 언급한 쉐흐텔의 러시아관이나, 핀란드 아르누 보 양식으로 완성된 핀란드관 등은 이 해 만국박람회에서 최고의 인기 전시관 가운데 하나였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무하가 당시 오스만 투르크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 나의 전시관 장식 작업에 참여한 것 역시 억압받고 지배당하던 슬라브 민족의 아픔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128 제27권 2호 2011년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서슬라브인들 사이에서 19세기 초에 처음 시작되었 다. 20) 당시 서남부 슬라브 민족들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및 오토만 제국의 지배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문화적 주체성이 과거 역사의 희미한 그림자로만 인식되던 시기에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 로부터 민족적 자각과 슬라브 세계의 공동 연대를 강조하는 강한 자극이 주어졌다. 헤르더가 전한 슬라브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자각과 연대의 중심은 다름 아닌 언어였다. 헤르더는 슬라브 제 민족에게 있어 그들의 일체성의 가장 확실한 근원은 언어적 유사성에 있음을 지적했다. 21) 한편, 이런 외부적 자극과 병렬해, 슬라브인들 공통의 뿌리를 찾고 공동의 연대를 형성코자 하는 범슬라브적 관념의 발전은 심리적이고 정치적인 내적 요구의 한 산물이기도 했다. 22) 비록 지금의 강한 민족적 개념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신성로마제국 으로 편입된 체코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배층을 독식했던 게르만 민족에 대해 계층적, 혈통적 불평등함을 자각하고 있었다. 남슬라브인들 역시 14세기부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복속되기 시작해 이슬람교의 투르크 민족에게 주도권을 상실하고 나서 제국의 이등민족으로 전락했다. 23) 러시아 역시 1240년 몽고의 침입 속에 키예프 루시가 완전히 궤멸당하고 말았다. 즉, 슬라브 세계 전반은 13세기경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기까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한 채 핵심 주류세력에 대해 마치 부속성분과 같은 존재로서 자신들의 역사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중세 말기에 이르러 서남부 슬라브 민족들은 그들이 이웃하고 있는 또 다른 서구세력, 혹은 아시아의 이교도 세력에 비해 정치적, 문화적으로 우월한 위치에는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더 넓은 범위의 강력한 공동체에 스스로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느꼈으며, 이를 20) Taras Hunczak, Pan-Slavism or Pan-Russianism, Taras Hunczak (ed.), Russian Imperialism from Ivan the Great to the Revolution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1974), p. 82. 21) H. Kohn, Pan-Slavism: Its History and Ideology (New York: Random House, 1972), p. 8. 22) 李 瑛 雨, 李 東 鎭, 19 世 紀 汎 슬라브 主 義 理 念, 慶 大 論 文 集 ( 人 文 社 會 科 學 ), 제50권 (1990), p. 25. 23) 이정희, 동유럽사 (서울: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pp. 148-152. 한편,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오스만 투르크 제국 지배하의 발칸 반도와 그리스 민족은 상당 부분 더 흐릿한 민족의식 속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람. 마크 마조워, 발칸의 역사, 이 순호 역 (서울: 을유문화사, 2006), pp. 91-141.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29 통해서만 자신들의 독자적 생존이 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24) 초기 범슬라브적 관념은 상기한 바와 같은 외적 자극과 내적 필요라는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도, 먼저 상대적으로 안전한 문화적 측면에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슬라브 세계의 언어, 역사, 종교, 철학, 민속, 예술, 인종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를 통해 슬라브 세계에 겐 서구, 특히 게르만 세계와 다른 독특한 문화적 전통과 언어적 유사성, 슬라브적 민족정신 등과 같은 이른바 범민족적 연대의 기반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25) 그러나, 범민족적 연대의 기반을 발견하자마자 상이한 민족적 현실 에 처한 슬라브 제 민족은 자신들의 현실과의 투쟁이란 실제에선 또 다시 서로 다른 노선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범슬라브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데서 체코인, 슬로바크 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생각한 범슬라브주의의 궁극 적 목표는 개별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초기 단계로서 슬라브 세계의 제 민족이 자유롭고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범슬라브 연방 의 결성이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들의 국가적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성이나 주도적 지위에 대한 어떤 요구도 사실상 갖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슬라브 민족들과 동등한 지위만 가질 수 있어도 만족할 만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26) 한편, 이에 반해 러시아와 폴란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정교 문화권의 중심이자 중세 그리스 지중해 세력의 정치적 정점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24) 이런 상황에서 더 근대적 의미의 범슬라브주의의 시초라 여겨지는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사제 유라 이 크리자니츠(Juraj Križanić, 1618~1683)의 슬라브 통합론이 태동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천명한 슬라브 통합론은 언어, 경제, 문화, 정치의 동질성에 근거한 슬라브 통합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러한 그의 이념은 19세기 러시아 사상가들에 의해 상당 부분 계승되었다. 크리자니츠의 슬라브 통합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람. Л.Н.Пушкарев, Юрий Крижанич. Очерк жизни и творчества (Москва: Наука, 1984). 25) Kohn, op. cit., pp. 17~27. 이런 경향의 범슬라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루터파 슬라브인인 체코 의 얀 콜러(Jan Kollăr, 1793~1852)와 파벨 샤파르직(Pavel Šafařik, 1795~186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이 발견한 범슬라브적 연대의 기반은 콘이 설명하고 있듯이 어떤 정치적, 역사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슬라브인들의 영광스러웠던 옛 과거를 찬미하고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문화적 범슬라브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말할 수 있다. 26) Ibid., pp. 27-37.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기능하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는 키예프 루시 이래 다소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국가적 단위에선 처음으로 독립을 획득한 경우이다. 물론, 역설적인 의미겠지만, 우크라이나를 예상치 못한 나라 (Unexpected Nation)라고 칭하는 연구자도 있을 정도이다. A. Wilson, Ukrainians: Unexpected Nation (Ithaca: Yale University Press, 2000).

130 제27권 2호 2011년 함락을 지켜보면서, 신을 믿지 않는(безбожие) 타타르 이민족의 200년이 넘는 지배를 종식시키며 등장한 모스크바 공국의 러시아는 절대황정 시기의 팽창과 시베리아 개척과 복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19세기까지 기백 년 동안 스스로의 힘을 계속 키워갔다. 폴란드 역시 몽고 침입을 러시아가 방패막 이를 해 주는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연합으로 중부 유럽의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혀갔다. 이 두 세력에게는, 서남부의 슬라브 제 민족이 피지배 와 탈자유, 억압과 박해의 상황에 놓인 자신들을 정상적 인 삶의 조건으로 돌려놓는 것이 시급했던 것과는 달리, 슬라브인들의 연대와 단결을 통해 사실 상 자신들이 슬라브 세계 전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야심 아닌 야심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27)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 슬라브 세계의 중심과 정점에 러시아를 서게 하고, 여타 다른 슬라브 민족을 이에 복속시키는 전형적 의미에서의 팽창적 범슬라브주의는 사실상 19세기 후반기, 러시아 제국의 공식적 외교, 정책 노선으로 채택된 적이 없다. 28)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국, 프러시아, 프랑스, 영국과의 유럽 대륙에서 세력 균형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러시아 제국의 대외 정책은 이들 세력 내의 슬라브 민족을 준동해 러시아와의 연합을 꾀하는 정치 노선이 라이벌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자중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19세기 전반기 아직 범슬라브주의가 사상적, 정치적 흐름으로 정착되기 이전에는 더욱 명백하다. 오히려 이때 체코 측에서 러시아의 잠재적 불안을 간파하고 경보의 메시지 를 울리게 된다. 역사학자 한스 콘(Hans Kohn)이 소개하고 있듯이, 체코의 언론인 카렐 하브리체크(Karel Havlíček Borovský, 1821~1856)은 1846년 러시 아를 여행하고 난 다음, 당시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들의 논쟁 속에 다듬 27) 1795년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에 의해 자신의 영토가 3등분되어 각기 흡수되면서, 낭만주의 시기의 도래와 함께 역사상 최초로 독립을 잃게 되는 아주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합병된 폴란드는 러시아 혁명 때까지 사실상 속주의 형태로 존속 하게 된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위시한 19세기 여러 사상가와 오늘날까지 현대의 연구가들에 의해 많은 점에서 비교된다. 각각 정교 세력과 로마 가톨릭 세력의 보루였던 이 두 나라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스스로를 슬라브 세계의 중심에 세우려는 노력을 거의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측면에서 러시아와 폴란드의 슬라브 세계 내에서의 역학관계는 또 다른 흥미로운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28) 정희석, 19세기 러시아 친슬라브주의자들의 슬라브 통합사상: 크림전쟁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 정치논총, 제39권, 제1호 (서울: 한국정치학회, 1999), pp. 279-299.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31 어지고 있던 범슬라브주의의 초기 조야한 형태를 목도하고서는 강렬한 반감 과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러시아인들은 오직 그들만이 슬라브인들의 역사를 지배했다고 믿고 있다 며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유럽에서 러시아인 들은 미움을 사거나 무시당하는데, 바로 그 이유가 러시아인들의 이런 독단 때문이다 라고 냉정하게 진단하며, 러시아인들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헝 가리인들 밑에서 사는 것이 낫다 고까지 밝히고 있다. 29) 하브리체크는 러시아 와 폴란드의 경쟁 관계를 꿰뚫어보며 이 과정에서 체코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 지, 다음과 같은 우회적(!)인 해결책이 더 현명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군주제는 우리와 일리리아(20세기의 유고슬라비아)인들의 민족성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보장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이 강해 질수록 우리의 민족성은 더욱 더 안전해질 것이다. 30) 이런 상황에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2월 혁명의 시민, 민족혁명 정신에 크게 고무된 오스트리아 제국 내 헝가리인들의 독립 요구를 계기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해온 오스트리아 제국의 향후 진로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자유로운 제 민족 연방으 로의 변형, 러시아와 폴란드 간의 관계개선, 터키 세력 아래 있는 슬라브 민족의 해방 의제 등을 두고 이른바 프라하 회의 가 열리게 되었다. 프라하 회의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체코 민족의 국부로 추앙받는 프란티셰 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1876)였다. 현실적인 정치가였던 그는 초기부터 체코 민족을 비롯한 유럽의 약소민족이 맹목적으로 민족주의를 추구해 분리독립 노선을 좇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체코 민족이 연방의 형태로 남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체코 민족 29) K. Havríček, Czech and Slav, H. Kohn, The Mind of Modern Russia: Historical and Political Thought of Russia`s Great Age (New York: Harper & Harper, 1962), p. 86-88. 당시 24살의 하브리체크는 얀 콜러 등이 불어넣은 친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에 영향 받아 1843년부터 2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시기 동안 젊은 정치가요 보헤미아 지방의 명망 높은 귀족으로 서 하브리체크가 접한 러시아의 체코 인식과 현실은 그로 하여금 러시아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완전히 접어버리게 하기도 했다. 30) Ibid., p. 90.

132 제27권 2호 2011년 을 비롯한 슬라브 제 민족은 현재의 오스트리아 제국이 연방으로 변화한다는 조건 아래 법적, 사회적으로 동등권을 보장받으면 연방 체제 유지를 옹호한다 는 생각을 핵심으로 한다. 31) 그러나 제국의 수뇌부는 슬라브 민족의 요구를 외면한 채, 제국 내 독일과 헝가리 민족만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소위 오스트리 아-헝가리 왕국의 이중체제 로 전환했고(1866년), 결국 이에 팔라츠키를 비롯 한 체코 정치가들은 친오스트리아주의를 포기하고 범슬라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32) 또한 이들이 범슬라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계기가 된 사건은 러시아의 농노해방령(1860)이었다. 노예의 신분으로 예속되어 있던 빈곤한 농민을 신분상 제약에서 풀어준 것에 대해 체코의 지식인들은 주목했 다. 억압과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해방된 민중으로 다름 아닌 체코 민족 자신을 투사시키면서, 알렉산드르 2세를 바로 그러한 지배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해방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33) 이러한 상황에서 1867년 팔라츠키는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기대 와는 반대로 슬라브 제 민족의 통합이 반드시 러시아의 주도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과 보수적 범슬라브주의자들의 주장과 슬라브 제 민족의 각기 고유한 언어, 풍습, 종교,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접하면서 범슬라브주의가 별다른 성과를 가져오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인식 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방문에서 팔라츠키는 러시아 지식인들을 상대로 연설 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밝혔다: 러시아인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슬라브 세계의 통합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것은 범슬라브주의가 슬라브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1) 당시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회의에 부정적이었는데, 그것은 슬라브 민족회의에서 지향된 친오스트 리아슬라브주의의 기본개념이 자신들의 범슬라브주의와 정면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자국의 정치가들이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던 슬라브 인들의 참여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장수,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정치활동, 연방체제 도입을 지향 한 3월 혁명(1848) 이후의 시기를 중심으로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pp. 74. 한편, 미하일 바쿠닌은 1795년 삼등분된 폴란드의 독립이 러시아와 폴란드 민족 모두의 목표라 생각하고선, 러 시아가 아닌 폴란드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김우현, 배규성, 바쿠닌의 연방사상, 환태평양연구, 제5권 (대구: 경북대학교 환태평양연구소, 1992), pp. 37-38. 32) Ibid., pp. 167-169. 33) Hunczak, op. cit., p. 91.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33 여러분들은 슬라브 민족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슬라브 민족을 대등한 동반자로 간주할 경우 슬라 브 세계의 통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4) 한편, 프라하 회의와 체코 민족주의자들의 논의가 점증하던 이 시기 미하일 바쿠닌(М.Бакунин, 1814~1876)은 슬라브 연방(Славянская федерация) 과 유럽 연방공화국(Европейская федеральная республика) 이란 구상을 통해 러시아의 급진적 범슬라브주의라는 흐름의 맹아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무정 부주의자로서 무엇보다 혁명의 중요성과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했다는 면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레닌의 선구라 할 수 있는 바쿠닌은 1848년 프라하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 대영제국 등 제국들이 이끌던 당대 유럽에서 슬라브 인민의 해방을 통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타도와 중동부 유럽에서의 자유 슬라브 공화국 연방 수립을 주창했다. 35) 여기에서 우리는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 중심의 범슬라브주의가 이미 이 글에서의 논의 궤적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간략하지만 체코를 비롯한 슬라브 제 민족에서 주장된 범슬라브주의가 아닌, 러시아에서 형성되어 주장된 범슬라브주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이, 슬라브계 언어로 말하는 산재된 슬라브 민족들을 공통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기반을 토대로 러시아를 중심으로 연합하고 통합하려는 정치 적, 문화적 사상 이라고 할 수 있는 범슬라브주의는 그간 서방학계나 국내학계 에서는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를 러시아 제정의 제국주의 정책 이데올로기, 즉 팽창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로 형성, 전개되어 온 국제관계 사상으 로 대체적으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 사상을 분석하면,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내용상 보수적 범 슬라브주의와 급진적 범슬라브주의로 구분되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할 수 있다. 러시아의 보수적 범슬라브주의가 비정교 세계의 슬라브 세계에 대한 34) 강성호 외, 중유럽 민족문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중심으로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p. 38. 35) http://az.lib.ru/b/bakunin_m_a/text_0140.shtml (검색일: 2010.11.20)

134 제27권 2호 2011년 위협에 대처하고 나아가 몰락할 운명에 있는 서구문명 대신에 슬라브 통합을 통한 슬라브 문명의 세계 주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된 논리로서 평가된다 면, 급진적 범슬라브주의는 슬라브 민족들의 독자적 발전을 방해하는 전제정 의 타파와 평화가 구가될 유럽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슬라 브 통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된 논리로서 평가할 수 있다. 36) 그러나 러시아 범슬라브주의는 자체가 안고 있는 논리적 한계성과 객관적 토대의 부재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즉 유토피아적 성격을 갖는 정치사상으로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19세기 전반에 걸쳐 제정 러시아가 한편으로는 제국의 영토적 전일성과 전제 군주정 유지,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및 발칸 정책에서의 현실적이고 실용주의 적 노선 추구를 대내외적 중점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기에 러시아적 범슬라브 주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보수적 범슬라 브주의와 급진적 범슬라브주의의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도표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 1] 보수적 범슬라브주의와 급진적 범슬라브주의의 비교 37) 슬라브 문명과 서구문명과의 관계 보수적 범슬라브주의 상호배타성, 슬라브문명 우월성 급진적 범슬라브주의 상호보완성 슬라브 민족의 공동의 적 설정 서구세력 전제정 및 식민체제 러시아 민족과 제국 내 기타 슬라브 민족과의 관계 동등한 권리 불인정 동등한 권리 인정 제정의 슬라브 민족에 대한 러시아화 정책 수용 반대 슬라브 통합과 유럽 통합과의 관련성 무관 슬라브 통합은 유럽통합의 하나의 과정 36) 정희석, op. cit., pp. 279-299; 정희석,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의 유형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제34권, 제2호 (서울: 한국정치학회, 2000), pp. 255-276. 37) Ibid., p. 259. 보수적/급진적 범슬라브주의라는 말은 이념적 지향성을 분명히 노정하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직접 인용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문맥에 따라 보다 중립적인 협의의/광의의 범슬라 브주의라는 용어로 대체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는 글쓴이의 주장으로 아직은 임의적인 용어 치환일 뿐이다.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35 아르누보 예술이라는 장식적이고 지극히 실용적이며, 상업적인 미술 경향 을 주도한 무하라는 화가가 급진적 범슬라브주의와 연관을 가진다는 점은 당연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과 사회사상을 통한 사회 변화를 접목시켜 설명하고자 하는 이 글에서 필자는 무하의 구체적이고 개별 적인 사상이 직접적으로 급진적 범슬라브주의를 충실하게 구현, 답습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결과론적으로 무하가 창조해낸 예술이 급진적 범슬라 브주의에서 주장하는 논점들과 많은 부분 겹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즉,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태어나 정교를 신봉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유년 시절부터 강하게 받은 체코인인 무하는 청년기부터 예술적 완숙미에 이르는 30여년의 시간을 비엔나를 비롯한 뮌헨, 파리, 미국 등에서 활동하는 등 외면적으로는 이른바 슬라브 문명과 서구 문명이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어 낸 경우라 말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중후반의 카렐 하브리체크,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또 독립 체코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토마슈 마사리크(Tomáš G. Masaryk, 1850~1937) 등 체코 민족운동, 정치 지도자, 지식인 등이 간파한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 이른바 보수적 범슬라브주의의 음과 양을 읽어내며,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체코 민족을 위한 자유와 독립, 평등을 주장한 점은 결과론적으로 급진적 범슬라브주의와 그 맥을 분명 히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이 논문의 내용상 핵심을 이룰 다음 장에서 아르누보 예술가로서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가 내포하는 범슬라브주의의 수용과 해석에 대해 살펴보겠다. Ⅳ. 아르누보 예술가로서의 무하의 범슬라브주의 수용 과 해석 1.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1910년 50세에 무하는 부인 마르슈카, 갓 태어난 딸 야로슬라브나와 함께 미국에서 체코로 돌아왔다. 프라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즈비로흐(Zbiroh) 성의

136 제27권 2호 2011년 한 켠을 아틀리에 겸 거처로 임대한 무하는 이곳에서 체코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다. 체코로 돌아온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앞서 한 일은 프라하 시민회관 중앙 홀의 장식이었다. 20세의 나이로 체코를 떠나 오스트리 아, 독일, 프랑스, 미국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온 유명한 화가라고는 하지만 체코에서 그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하지만 무하는 오랜 외국생활을 겪으며 오히려 조국 체코에 대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슬라브 서사 시 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까지 꿈꾸고 있었기에 자비로 홀을 장식하겠다고 제안했다. 수도 프라하의 시민 회관 중앙 홀을 장식하면서 무하는 체코 땅에서 본격적으로 슬라브 서사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 역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랜 역사의 체코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고자 한 그의 의도는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종교개혁의 움직임을 보여준 얀 후스(Jan Huss, 1372~1415)나 사상가이자 17세기 유럽 최대의 지성이자 애국자로 꼽히 기도 했던 얀 아모스 코멘스키(Jan Amos Komensky, 1592~1670) 등 수세기 전의 전통적인 종교, 사상 지도자를 주제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당시 파리를 비롯한 서유럽의 전위적인 새로운 미술 경향에 경도된 젊은 화가를 비롯한 평단의 일부에선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무하는 비난받았다. 이러한 비난은 나중 그가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하고 난 다음에도 역시 같은 이유로 이어지기도 했다. 중앙 홀 작업이 끝나고 난 뒤 1912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시기(1914~1918)를 거쳐 1926년까지 약 15년에 걸쳐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시켰다. 슬 라브 서사시 는 총 20편의 연작이다. 가장 작은 작품이라도 가로 세로 한 쪽의 길이가 4m터가 넘으며, 제일 먼저 그린 세 작품은 크기가 가장 커 가로 8m, 세로 6m를 넘어선다. 작품의 크기도 그렇지만 내용을 담기위해 무하는 오랜 시간 준비 작업을 거쳤다. 1848년 혁명이 번져나가던 19세기 중반 무렵,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체코의 지위 향상과 독립을 꾀하던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와 20세기 초 체코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토마슈 마사리크의 저술을 탐독하고, 프랑스의 슬라브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드니 등에게서 자문 을 구하면서 무하는 자신의 슬라브 서사시 에 오늘의 동, 서, 남슬라브인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37 [그림 1] 1919년 프라하의 클레멘티움에서 전시회를 가질 때의 모습. 앞 에 앉은 이가 무하이다. 모두의 가장 영광스럽고 중요하며, 자랑스러운 역사의 20 장면을 선정했다. 그 주제는 아래와 같다. 1. 태고적 슬라브인들 (Slované v pravlasti) 슬라브 공통 신화적 시간 2. 뤼겐 섬의 스반토비트 축제 (Slavnost Svantovítova) 슬라브 공통 신화적 시간 3. 슬라브어 전례의식의 도입 (Zavedení slovanské liturgie) 슬라브 공통 9세기 4.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Car Simeon) 남슬라브 9세기 5. 보헤미아 왕 프르제미슬 오타카르 2세 (Otakar II) 서슬라브 13세기 6. 동로마 황제를 방불케 하는 세르비아인 황제 스테판 두샨의 대관식 (Štěpán Dušan) 남슬라브 14세기 7. 그룬발트 전쟁이 끝난 후 (Bitva grunwaldská) 서슬라브 15세기 8. 크로므네지쥐의 얀 밀리취 (Milíč z Kroměříže) 서슬라브 14세기 9.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는 얀 후스 (Kázání Mistra Jana Husa v kapli 서슬라브 Betlémské) 15세기 10. 크리지쥐카히의 집회 (Schůzka na Křížkách) 서슬라브 15세기 11. 비트코프 전쟁이 끝난 후 (Po bitvě na Vítkově) 서슬라브 15세기 12. 후스파의 왕 포데브라드의 이르지 (Jiří z Poděbrad a z Kunštátu), 서슬라브 15세기 13. 보드나니에서의 페트르 헬치츠키 (Petr Chelčický) 서슬라브 15세기 14. 이반치체 형제교단의 크랄리체 성경 인쇄 (Bratrská škola v Ivančicích) 서슬라브 16세기 15. 터키에 맞서 시게트에서 항전을 펼친 미쿨라쉬 즈린스키 (Hájení Szigetu proti Turkům Mikulášem Zrinským) 서슬라브 17세기

138 제27권 2호 2011년 16. 얀 아모스 코멘스키 (Jan Ámos Komenský) 서슬라브 17세기 17.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 (Zrušení nevolnictví na Rusi) 러시아 1860 18. 성 아토스 산 (Mont Athos) 슬라브 공통 탈시간 19. 슬라브 린덴나무 아래에서의 옴라디나의 맹세 (Přísaha Omladiny pod 슬라브 공통 탈시간 slovanskou lípou) 20. 슬라브 찬가 (Apoteóza z dějin Slovanstva) 슬라브 공통 탈시간 2. 슬라브 서사시 에서 범슬라브주의와의 조우 및 수용 슬라브 서사시 20편 작품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슬라브인 공통의 주제로 태고적 슬라브인들, 성 아토스 산, 슬라브 찬가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남슬라브에 대해선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과 동로마 황제를 방불케 하는 세르비아인 황제 스테판 두샨의 대관식 등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사건이 두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다. 서슬라브에 대해 선 보헤미아 왕 프르제미슬 오타카르 2세, 그룬발트 전쟁이 끝난 후, 후스파의 왕 포데브라드의 이르지, 터키에 맞서 시게트에서 항전을 펼친 미쿨라쉬 즈린스키 등이 있다. 신성로마제국 시대 제국 내 최대 판도를 구축 한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오타카르 2세와 얀 후스 운동 이후 체코가 로마 가톨릭의 세력권을 벗어난 무렵, 체코의 왕이었던 이르지 등의 모습, 그리고 튜튼 기사단과 투르크에 맞서 영광스런 승리를 기록한 두 작품은 주변 세력과 서슬라브 세계와의 갈등으로 좁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팽창하는 제국주의적 야욕에 맞선 방어적 평화주의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38) 또 슬라브 서사시 작업에 들어가면서 처음 그린 태고적 슬라브인들, 뤼 겐 섬의 스반토비트 축제, 슬라브어 전례의식의 도입 등은 비단 체코인들 에게뿐 아니라 슬라브인 모두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슬라브 역사 초기 의 주제들이다. 가로 8m, 세로 6m의 초대형 캔버스에 그려진 이 장면들은 38) 전기 연구가들의 탐구에 의하면, 무하가 20개의 주제를 선정할 때 주변이나 당시 정치적, 사상적 인물들과 특별히 다르게 논의를 거친 것이라기보다 무하 본인의 선택에 의해 확정되었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 시대 최고의 패자인 카렐 IV세나 루돌프 II세가 언급되지 않은 것 또는 체코 역사에 서 최대의 전환점인 소위 백산전투 라 하는 빌라 호라 전투 등이 빠진 것은 더 객관적인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다기보다 무하 본인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Lenka Bydzovsk, The Slavic Epic, Agnes Husslein-Arco and et al (eds.), Alponse Mucha (Munich: Prestel, 2009, pp. 58.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39 [그림 2]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는 얀 후스 (1925, 404 480) 그 자체로 압도적일 뿐 아니라, 슬라브인들 역사의 장을 연다는 의미에서 물리적 캔버스의 크기에 맞먹는 주제라 할 수 있다. 한편 슬라브 서사시 에서 특징적인 것은 무하가 얀 후스의 운동을 중심으 로 한 이른바 <후스 사이클>라는 작은 연작을 슬라브 서사시 내부에 또 하나 더 구성한다는 것이다. 크로므네지쥐의 얀 밀리취, 베들레헴 교회에 서 설교하는 얀 후스, 크리지쥐카히의 집회, 비트코프 전쟁이 끝난 뒤, 보드나니에서의 페트르 헬치츠키, 얀 아모스 코멘스키 등 6편의 작품이 그것인데, 이들 모두는 14세기 말엽,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프라하를 중심으로 벌어진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격인 후스주의 운동 (Hussite movement)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39)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민중 착취와 면죄부 판매 등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얀 후스이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하층 민중 절대 다수가 체코인들이었기 에 얀 후스의 저항 운동은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체코인들의 민족운동 39) 위의 각주 38)과 연계해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체코 문화사에 대해 가장 최근의 저서를 남기고 있는 세이어 교수 같은 경우, 이교도, 정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등 종교적 구별도 그리 엄하지 않은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전편은 후스 사이클 을 중심으로 무하가 재해석한 체코와 슬라브인 들의 역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Sayer, op. cit., p. 153.

140 제27권 2호 2011년 으로 발전했다. 단순한(!) 민족운동이란 성격 이외에, 많은 연구가가 지적하고 있듯이, 후스주의 운동은 하급계층의 사회 구조적 불평등 자각에서 비롯한 계급투쟁의 성격이 짙으며, 또한 독일인 위주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바깥에서 체코인들을 위한, 즉 억압과 박해를 받는 체코인들을 위한 진정한 교회를 찾으려 했던 또 다른 종교적 신념을 옹호하며 구원을 모색한 운동이기 도 하다. 40) 이러한 얀 후스 운동에 6편의 작품이 바쳐진 것은 14세기 말엽 신성로마제국 치하에서 독일인의 지배를 받던 슬라브(체코) 민족의 운명을 무하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던 체코 민족의 운명으로 투사시킨 결과임은 명백해 보인다. 얀 후스에게 많은 종교적 감화를 준 종교 지도자인 크로므네지쥐의 얀 밀리치 (1305?~1374), 얀 후스의 베들레헴 교회에서의 설교, 후스 운동이 한창 격화 되던 무장투쟁 시기를 소재로 한 크리지쥐카히의 집회, 지기스문트와의 일대 격전 후인 비트코프 전쟁이 끝난 뒤, 후스파 사상가인 페트르 헬치츠 키 41) 등을 그린 6편의 작은 사이클은 이처럼 제국에서 2등 시민 으로 피지배 계층으로 전락해 압박과 수탈, 착취로 고통 받던 슬라브인들에 대한 무하의 특별한 민족의식이 담겨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2) 40) 대표적으로 다음을 참고하기 바람. Howard Kaminsky, A History of the Hussite Revolution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4), pp. 189-191. 41) 페트르 헬치츠키(Peter Chelčicky, 1390경~1460경)는 얀 후스보다 조금 뒤늦은 시대를 산 인물로, 후스주의 운동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다. 후스가 공개 처형된 1415년 이후 공개적 인 투쟁 활동을 접고 30살이 되던 해인 1420년부터 수도원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1457년 믿음의 그물 (Siet` viery)이란 저술을 바탕으로 이른바 <체코 형제교 단>(Unitas fratrum)을 조직해 활동을 재개했다. 헬치츠키는 국가를 조직적인 폭력체로 규정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그리스도의 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 <체코 형제교단> 은 이후 15세기 후반부터 후스파 투쟁을 계승해 신성로마제국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거부하고 체코인들의 민족적 자치를 그리스도에 의해 허락받은 것으로 여기며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나가는 데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 권재일, 체코슬로바키아 史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서울, 1995), pp. 75-76. 한편, 톨스토이도 헬치츠키의 <믿음의 그물>과 체코 형제교단의 국가적 정체성 부정과 종교 적 운동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심취하기도 했었다. 톨스토이와 헬치츠키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람. И.М.Порочкина, Л. Н. Толстой и славянские народы (Л.: Издательство ленинградск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1983), стр. 13-23. 42) 이런 무하의 민족의식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가 당시까지도 오스만 투르크의 실질적 지배 속에 고통 받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1년 전 이 프로젝트를 의뢰받은 무하는 일부러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당시 남슬라브 민족들의 민속의상과 장식 등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Ronald F. Lipp, Alfonse Mucha: The Massage and the Man, Sarah Mucha (ed.), Alfons Mucha (Prague: Frances Lincoln, 2009), pp. 16-17.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41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슬라브어 전례의식의 도입, 이반치 체에서의 형제교단의 크랄리체 성경의 인쇄 와 같은 작품에서 모티프로 제시 된 언어의 독자성 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9세기 모라비아 지방으로 비잔틴 제국에서 정교가 전래되던 초기, 슬라브어로 미사를 집전하던 테마를 나타낸 것이며, 후자는 후스주의 운동 이후 무하의 고향이었던 이반치체에서 최초로 체코어로 된 성서가 인쇄되어 체코 민족어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잔틴 제국이 정교를 모라비아와 불가리아, 러시아를 통해 포교할 때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슬라브인들의 토착어를 허용 했다. 말이 허용이지, 슬라브 방언에 능통했던 마케도니아 혈통의 키릴과 메포디 형제를 비잔틴의 정교 전도사로 파견할 때 슬라브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라고까지 지시한 것은 로마 가톨릭과의 포교전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도가 있었지만, 슬라브인들이 정교를 받아들 일 때 자신들의 언어로 성서를 쓰고 예배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언어적 독자성과 민족주의를 크게 고무했다라고 볼 수 있다. 43) 또한 얀 후스보다 100년 뒤에 등장한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여러 조처에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또 그가 실제로 행한 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성서의 독일어 번역이다. 즉, 성서의 진리가 고위 성직자들에게 독점되어 그들에 의해서만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아는 일반 민중 모두가 성서를 통해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확보 받고, 또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가 아닌 자신들 의 언어로 예배를 집전함으로써 이 땅의 모든 언어로 신을 찬미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43) 물론 여기에는 양날의 칼처럼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한 점도 있었으니, 정교 문화권은 시간이 지나 며 어려운 그리스어를 경시하고 토착어에 집중함에 따라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어 문헌을 받아들이 고 소화하는 데 지체 현상을 겪게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라틴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한 로마 가톨릭 문화권과는 달리 정교 문화권은 많은 경우에 고전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유산과 절연될 수밖에 없었다. 오종우 교수는 국내 러시아어문학 연구자 중 이 부분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다. 오종우, 대지의 숨, 러시아의 숨표들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3), pp. 78-79.

142 제27권 2호 2011년 [그림 3] 슬라브어 전례의식의 도입 (1912, 610 810) 위에 보이는 슬라브어 전례의식의 도입 의 경우, 공중에 사람이 떠 있는 몽환적인 구성과 함께 이들은 옅은 푸른빛이 도는 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암시한다. 오른쪽 위의 네 명은 머리 뒤로 금빛 후광이 비추고 있으며 거기에 이름이 적혀 있는데, 불가리아에 서 정교를 받아들인 보리스 왕과 키예프 루시의 이고리 대공 부부, 이들에게 정교를 전한 비잔틴 제국의 미하일 황제이다. 그 옆으로 키릴과 메포디 형제가 보이며 왼쪽 상단에 검게 뒤덮인 이들은 모라비아 공국을 비롯한 슬라브 지역에 정교 전파를 방해한 프랑크 왕국의 공후와 수도사 등으로 추정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왼쪽 앞에 있는 소년이 전면을 똑바로 마주보며 오른손에 움켜쥐고 번쩍 치켜들고 있는 원이다. 슬라브인들의 단결을 상징한다고 흔히 해석되는 이 원을 들고 있는 소년은 그림 속에서 이 원의 의미대로 단결을 주장한다기보다는 그림의 프레임 바깥에서 현재 시점에서 그 그림을 바라보 는 관객에게 슬라브인들의 단결을 주장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44) 앞에서 논의 한 급진적, 또는 광의의 범슬라브주의 이념을 떠올린다면, 관람객의 눈앞에 원을 한껏 치켜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먹마저 불끈 쥔 소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44) Victor Arwas (ed.), Alphonse Mucha: The Spirit of Art Nouveau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p. 329.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43 제국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르비아를 비롯한 남슬라브인들,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러시아, 러시아 제국에 나뉘어 지배받고 있는 폴란드인들, 그리고 러시아인들마저 진정한 슬라브 통합을 위해 단결해 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처럼 슬라브 서사시 전편에는 체코 민족을 위시한 슬라브 제 민족의 자유와 독립, 그들의 독자성이라는 테마가 저류에 흐르고 있다. 한편,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제국의 세력에 의해 지배 받는 슬라브 민족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점에서 조금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은 무하가 러시아에 관해 유일하게 슬라브 서사시 에서 구현하고 있는 장면으 로, 이것은 러시아의 농노해방에 관한 것이다. [그림 4] 러시아의 농노 해방 (1914, 610 810) 이 그림은 사실 무하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미국인 사업가 찰스 크레인의 권유로 슬라브 서사시 의 한 장면이 되었다고도 하지만, 45) 무하 역시 이 한 장면의 그림을 위해 1913년 직접 러시아를 방문해 수십 장의 사진과 러시아 45) Bydzovsk, op. cit., p. 59. 당시 크레인은 러시아에 대규모 사업을 계획하던 중이었고, 슬라브 서사 시 에 러시아에 관한 장면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언급하며 농노해방을 모티프로 하는 작품을 그려 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144 제27권 2호 2011년 인들의 모습을 스케치해왔을 정도로 많은 준비를 했다.46) 아래의 사진은 그중 몇 장면이다. 성 바실리 성당의 풍경을 직접 찍은 아래 오른쪽 사진은 그대로 그림에 반영되었으며, 붉은 광장에 있는 시민과 부녀자의 모습을 담은 왼쪽 사진도 그림에 녹아 들어가 있다. [그림 5] 191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무하가 직접 찍은 사진들 스무 폭의 그림 중 하나이지만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이 그림을 위해 무하는 모스크바에까지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과거 파리 만국박람회에 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의 장식을 맡았을 때 그는 발칸 반도를 여행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단순한 사전 답사 성격 이상의 의미 역시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과 그 뒤를 잇는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지배계층이자 핵심세력,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 민족의 지배를 항상 받아왔던 슬라브 민족으로서 체코인의 자유와 독립, 무엇보다 체코인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 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누구보다 무하 스스로 강하게 느꼈다고 생각할 수 있다.47) 그런 의미에서, 앞서 논의했듯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슬라브 세계 의 단결과 팽창을 주장하는 협의의 범슬라브주의라기보다 러시아인이건 체코 46) 무하의 후손 중 한 명인 조세프 무하(Josef Mucha)가 2000년 프라하에서 발행한 사진첩에 무하가 농노해방에 관한 그림의 완성을 위해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Josef Moucha and Jiři Řapek, Alfons Mucha (Prague: TORST, 2000), pp. 39-52. 47)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무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1878년부터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보스니아-헤르체고 비나 전시관 디자인을 맡았다. 대다수 연구가들이 지적하듯, 당시 강력한 제국 세력의 지배를 수백 년이나 받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을 디자인하며 무하 역시 같은 슬라브인으로서, 같은 피지배민족으로서 공통의 정서를 충분히 느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45 인이건 다름 아닌 슬라브인이 중심이 되어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억압하 는 모든 체제의 지배 구조의 혁파를 주장한 광의의 범슬라브주의를, 의식하지 는 않았다 할 수 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무하가 따랐다고는 충분히 추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48) 즉, 러시아의 전제정을 민중의 자유와 평등, 행복을 억압 하는 족쇄로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쿠닌 등의 초기 무정부주의자, 19세기 후반부 들어서면서부터 합스부르크 제국과 투르크 제국 등에서 피지 배 슬라브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런 폭압적 지배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 한 광의의 범슬라브주의와 내용상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는 범슬라브주의의 예술적 실현, 또는 아주 보수적으 로 말한다고 해도 문화적 조우 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며, 이를 인정한다 면 역으로 무하의 예술은 범슬라브주의를 배면에서 지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49) 동시에 연작 슬라브 서사시 에서 놓치기 쉬운 점은 서슬라브, 특히 얀 후스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른바 후스 사이클 6편만큼이나 20편의 작품 중 앞뒤 3편씩 총 6편이 공통 슬라브적인 주제로 수렴된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작품인 뤼겐 섬의 스반토비트 축제 와 19번째 작품인 슬라브 린덴나무 48)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것( 슬라브 서사시 에서 잠깐씩 보이기는 했으나(특히, 전쟁의 파괴적 힘이 일으키는 공포와 반전주의적 평화론이 강조되는 보드나니에서의 페트르 헬치츠키 라는 작 품 등에서)으로, 슬라브 서사시 이후 무하는 더욱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에 침잠하게 된다. 1936년 76살의 나이에 그는 이성의 시대, 지혜의 시대, 사랑의 시대 3부작을 통해 개별 민족 의 문제를 넘어 인류 보편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은 체코 민족의 독자성과 우수성이라는 측면도 되겠지만, 또 한편에선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행복, 존엄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 추구라고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무하의 또 다른 작품 한 점에도 동일한 해설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922년에 그린 Russia Restituenda 는 사회주의 혁명과 가뭄이 맞물려 초유의 대기근 사태가 벌어진 러시아 를 애도하고 러시아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라는 뜻의 라틴어 제목처럼 러시아에게 희망과 격려, 세계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있다. 아마 굶주림으로 힘없이 축 늘어진 아이를 안은, 초췌하고 야윈 어머니의 젖은 눈과 얼굴을 그린 이 작품은 대다수 평론가들에게 무하의 작품 중 가장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Arwas, op. cit., p. 181.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무하는 민족, 이념, 지배 등의 가치를 떠나 궁극적으론 인간의 존엄성과 인도적 가치를 더욱 중요시하게 여기는 성격을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49) 1939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뒤를 잇는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인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하고 난 다음 그를 체포한 이유 중 유력한 하나로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제기할 수 있다. Алексей Мокроусов, В стране бульваров, Новое время, No. 33 (20 августа 2006). http://dlib.eastview.com/ browse/doc/9920541 (검색일: 2010.11.20). 나치에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때부터 자주, 평등, 독립을 원했던 체코 민족의 불손한(!) 기질이 바로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에서 형상화되어 극대화 되었고, 그래서 무하를 가장 불온한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146 제27권 2호 2011년 아래에서의 옴라디나의 맹세 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체코 민족에게만 국한해 생각하는 것만큼 전체 슬라브 민족의 범위로까지 확장시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50) 체코 민족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중요성을 지니는 후스 사이클 에 대해 무하가 설정하는 비중만큼, 그는 또한 슬라브 전체 민족의 공통된 시원과 또 그들이 개척해 나가야 할 보편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 정합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 슬라브 서사시 의 마지막 작품이 슬라브 찬가 라는 일종의, 중세 초기부터 당대까지 슬라브 민족들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면서 희망찬 미래를 예지하는 이른바 슬라브 역사의 완결 판과 같은 성격의 그림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림 6] 슬라브 찬가 (1926, 480 405) 높이 4.8m에 달하는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되면 관람객은 왼쪽 하단의 린덴나 무 가지를 손에 들고 그림의 중앙을 향해 환호하는 것으로 그려진 인물들과 거의 같은 높이에서 위로 비스듬히 바라보게 된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50) Arthur Elliridge, Mucha: The Triumph of Art Nouveau (Paris: Terrail, 1992), p. 126.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47 무지개를 배경으로 그리스도가 슬라브인들을 축복하고 있으며, 한가운데 팔 을 내뻗은 젊은이는 양손에 영광과 명예, 단결과 영원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화관을 쥐고 있다. 아래 여러 인종들과 함께 슬라브 여인들 역시 화관을 들고 있으며 구미 각국의 국기는 슬라브인의 통합과 미래를 축하하는 듯하다. 그림의 한가운데 흰 옷을 입은 여인들은 흰 천을 길게 펼치며 마치 아래 어두운 푸른색으로 그려진 암울하고 힘들었던 자신들의 역사를 지금 펼쳐내는 흰 천에는 영광스럽고 순결한 슬라브 인들의 역사로 기록할 것이라 는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왼쪽 아래 나뭇가지를 든 인물들의 눈높이에서 출발하는 이 흰 천은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전체 작품에 대한 은유적 제시로 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0편의 작품 전체 캔버스 길이만 120m가 넘는 슬라브 서사시 라는 이 대작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캔버스(즉, 위 그림에 묘사된 흰 천)가 마치 강물의 흐름과도 같이 슬라브인들의 거의 모든 역사를 실어 왔음과 동시에 앞으로 슬라브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역사 또한 자신과 같은 후대의 어느 예술가에 의해 언젠가는 캔버스 위에 그려질 것임을 확신하 기 때문일 것이다. 51) 역사와 예술이 흐름과 시간 속에 존재한다면, 20세기 초 대단히 장식적이고 실용적인 산업 미술로 평가받는 아르누보가 19세기에 타오르기 시작한 민족주의의 물결을 타고 형성된 정치사상인 범슬라브주의와 조우했듯이, 후대에도 또 다른 조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하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체코인들이 문학과 음악 등에선 이미 예술적, 민족적 성과가 뛰어나나 미술에선 그렇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며 자신이 미술에서 체코 민족의 어떤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는 무엇을 남겨보겠다는 생각으로 처음 슬라브 서사시 라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51)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러시아 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А.Сокуров)의 영화 러시아 방주 (Русский ковчег, 2002)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네바 강으로 향한 겨울 궁전의 창문을 활짝 열고, 겨울 안개가 넘실거리며 피어오르는 네바 강 물결을 보여준다. 노아의 방주처럼 세계문화를 살릴 보물 같은 작품을 담고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은유로서 러시아의 방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네바 강은 과거의 기억을 담고 있는 방주를, 아라라트 산에 걸쳐 놓지 않고, 미래로 영원히 실어갈 전달자로, 그리고 우리의 현재도 함께 실어 나를 전달자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148 제27권 2호 2011년 Účelem mého díla nikdy nebylo bořit, ale vždy stavět, klást mosty, neboť nás musí všechny živit naděje, že celé lidstvo se sblíží, a to tím snáže, dobře-li se pozná navzájem. Šťasten budu, bude-li mně dopřáno přispěti skrovnými silami k tomuto poznání aspoň a zatím u nás, v naší rodině slovanské. 내 작업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다리를 건설하고, 묻 고, 인류는 언젠가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우리가 서로를 좀 더 잘 안다면 더욱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우리 모두가 슬라브 인으로 한 가족과 같다는 이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다 면 나는 아주 기쁠 것이다. 52) Ⅴ.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아르누보라는 실용적이며 상업적 미술에서 출발한 한 예술가가 민족의식으로 귀결하는 궤적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지점에서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의외의 겹침과 교차도 살펴볼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범슬 라브주의는 당연히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 통치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체코인들에게 기껍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체코인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친오스트리아적 슬라브주의가 지지를 얻고 있었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슬라브 형제국 의 결집 이데올로기에 찬동 하는 양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하 역시 이런 개념의 범슬라브주의를 구현하 겠다는 의미에서 필생의 역작이자 거작인 슬라브 서사시 를 완성하려 매달 리진 않았다. 표면상으론, 그의 지향은 범슬라브주의만큼 체코 민족주의에게 로 쏠리지만, 조금 더 확대 해석한다면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억압과 피지배에 처한 민족과 인간의 자유와 평등,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전반기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의 52) http://fredfred.net/skriker/index.php/alfons-mucha-slovanska-epopej/lang/cs/ (검색일: 2011.04.19)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49 자각이 체코에선 한걸음 늦은 것이 분명하나(당시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와 대비해), 정치인이나 역사학자, 사상가와는 조금 다른 시민이었던 무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예술적 각성과 그의 노력은 분명 평가받을 만하 다. 53) 그가 1900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당시 독립을 얻지 못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전시관을 위해 디자인과 그림을 맡았다는 것 역시 평범하게 듣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무하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작업을 맡았을 때 범슬라브주의 정신에서 연원해 체코를 중심으로 한 남서 슬라브의 단합 등을 염두에 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민족으로서 슬라브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범슬라브주의의 광의의 개념에 서 찾을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핍박받는 민중 의 저항과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일 것이다. 또한, 범슬라브주의라는 구체적인 사상 흐름을 관찰 함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선 여하한의 사상보다 우선하는 천부의 자유와 독립, 평등, 인권 등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배면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실용예술의 영역으로 치부할 수 있는 아르누보이지 만 예술의 새로운 재현 방식을 찾으려는 그 시도, 또 보편 속의 개별 을 실현해냈다는 것으로 보아 중세와 전근대를 지나 진정한 근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그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역사적 근대로의 진입을 추동한 아르누보 예술이 오랜 피지배의 역사를 가진 슬라브 민족에게 진정한 근대로의 질적 도약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찰에 나름대로 인식론적 의미 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정된 주제로 쓴 짧은 논문에서 모두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결론을 마무리 지으며 앞으로 보다 진전된 새로운 연구 테마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무하의 작품과 예술에는 많은 부분 종교적인 분위기가 전경처럼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슬라브어 전례의 53) 사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지극히 상업적 화가로 출발한 무하와 같은 당시 환쟁이 이자 그림꾼으 로 시작했던 사람들마저 궁극에는 민족과 공동체 앞에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윤리적 책무를 자각 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 슬라브 세계의 어떤 독특한 측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 고 싶었다.

150 제27권 2호 2011년 식의 도입 에서 성자로 추앙된 슬라브 통치자들은 성상화와 성당 내부 프레스 코화를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처럼, 분명 심히 의도적으로, 지극히 평면적이면 서도 도식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머리 부분에는 황금빛 원형의 후광이 그려져 있고 사람의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기도 하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비잔틴과 정교의 종교예술 기법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환기하자면, 무하의 어머니는 신심이 아주 깊은 사람으로서 어린 맏아들 알폰 스를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브르노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비록 수도원에 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무하 역시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결과가 왼편 그 림이다. 8살의 꼬마 알 폰스가 그린 이 수채화 는 현존하는 무하의 그 림 중 가장 어린 나이에 그려진 것이다. 오른편 그림은 뮌헨에 서 공부하던 시절, 무하 가 먼 친척의 부탁으로 미국의 노스다코타 주 에 세워질 체코인 개척 교회를 위해 그린 것 이다. [그림 7] 책형 (1868, 37 23.5)54) [그림 8] 성자 키릴과 메포디 (1886, 85 45.5)55) 아래 왼편에 보이는 것은 파리에서 이미 아르누보 예술가로 성가를 얻고 54) Sarah Mucha, op. cit., p. 126. 55) Sayer, op. cit., p. 148. 정교에 대한 특별한 선호도라고 말하긴 어려우나, 로마 가톨릭이나 프로테스 탄트적 요소보다는 비잔틴을 통한 동방정교에 무하가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키릴과 메포 디의 테마는 1931년 무하가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성당인 비타 성당(Katedrála svatého Víta, St. Vitus Cathedral)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다시 활용하려고 했지만 막바지 단계에서 체코 최초의 성인 류드밀라와 뱌츨라프로 변경되었을 정도였다. Ibid. 150.

아르누보와 범슬라브주의의 문화적 조우 최 정 현 151 난 다음의 책장식이다. 1895년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 머나먼 공주 (La Princesse lointaine)의 대본을 다시 각색해 쓴 소설 트리폴리의 공주, 일세 (Ilsée, Princesse de Tripoli, 1897)의 도서 장식을 맡은 무하는 이 책을 흡사 중세시대 필사본 분위기로 꾸며냈다. 석판화 12궁도 (Zodiac)는 황금빛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 뒤에 둥근 황금빛 후광을 둘러씌우고 거기에 12궁도를 나열하고 있다. 성인의 머리 뒤에 황금빛 후광을 씌우는 것은 비잔틴 예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데, 무하는 특히 이 기법을 선호해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활용했다. [그림 9] 도서장식 (1897, 30.1 24.2) [그림 10] 12궁도 (1896, 65.7 48.2)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한자면, 무하의 아르누보 미술은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각주 3)에서도 언급했듯이, 20세기 초 무하를 위시한 아르누보 미술은 러시아의 상업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래에 있는 일련의 포스터에서 보듯, 러시아에서 제작된 이러한 상업적 포스터는 무하의 파리 전성기 시절 아르누보 경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러시아에서도 상업적 영역의 광고 예술에서 20세기 초의 실용예술을

152 제27권 2호 2011년 다시 되짚어 보는 움직임이 아주 활발하며, 56) 유럽적 차원과 슬라브 세계 차원에서의 이러한 사회문화적 겹침과 조우는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으로 앞으로도 계속 연구 주제로 남을 것으로 예상해 본다. [그림 11~13]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제작된 무하 풍의 상업 포스터들 56) http://www.advertology.ru/article89600.htm (검색일: 2011.05.06) 이 웹페이지에선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상업 포스터가 무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을 바로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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