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을 중심으로 손은실(서울대, 장신대) 주요어 중세 주석,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신학. 요약문 토마스 아퀴나스(1224 / 1225-1274)는 그 당시 파리대학 신학부 교수 의 교과목에 속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열두 작품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이 주석서들의 성격과 가치에 대해 토마스 연구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 들 사이에 의견이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의 주석이 아리스토 텔레스 텍스트에 충실하다고 보며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르네 앙뜨 완느 고띠에(René Antoine Gauthier)는 후자의 입장을 가진 대표적인 학자인데, 그는 토마스의 주석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는 프로크루 스테스의 침대에 강제로 맞추어 왜곡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토마스의 주석의 가치를 심각하게 의문시하게 하는 고띠에의 이런 주장이 토마스의 실제 주석 작품에 근거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 를 위해 그가 직접적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토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 학 주석 의 구체적인 예를 분석한다. 특별히 그리스도교 윤리와 일치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들을 선택하고 이 구절들의 주석에서 과연 토마스 가 그리스도교 신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왜곡하는지를 자세히 검토한 후, 토마스가 텍스트의 해석에 충실하고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주석에 개입시켜 텍 스트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음을 밝힌다. 또 이 사실을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를 인용하는 신학 대전 의 병행 구절에서 토마스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입장을 넘어서는 것과 비교하여 그의 주석서에서의 텍스트에 충실한 해석을 더 잘 부각되도록 한다. 그러나 이 연구는 토마스의 주석이 일차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자 체의 의미를 충실하게 파악하려고 했지만, 이것에 머물지 않고 또한 철학적 진 리를 파악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 후자가 고띠에가 말하는 아리 스토텔레스를 왜곡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본고는 비록 자기 시대의 역사적 지식의 한계 안에서 나마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를 충실하게 이해하려 했고 거기에 철학적 해석을
174 손은실 절묘하게 결합시키고자 했던 토마스의 주석이 오늘날도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 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함을 밝힌다. 1. 들어가는 말 중세시대의 파리대학 신학부 교수의 세 가지 주된 임무는 강독(legere), 토론(disputare), 설교(praedicare)였다. 1) 강독은 신학 강의의 첫 번째 구성 요소였던 성서 읽기와 주석을 가리킨다. 토론도 교육의 한 형태로서 혹 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해 논박될 입장의 논거들, 이에 대 한 반론 (주로 권위 있는 텍스트 인용으로 이뤄짐), 교수의 답변, 논박될 입장의 논거 각각에 대한 반박의 구조로 구성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많은 저작들도 이 두 교육과정의 산물로, 그의 많은 성서 주석 작품 2) 과 다양한 주제에 관한 토론 문제들 3) 이 이것에 해당한다. 설교도 신학 교 수의 주요한 한 임무로서, 성서의 말씀을 앞의 두 과정에 기초해 강론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토마스도 이 설교의 임무를 수행해 일년에 적어도 몇 번 은 대학에서 설교하였고 그의 설교 작품도 남아있다. 그런데 토마스는 위의 세 임무에 속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열두 작품에 대한 주석서를 남겼다. 그가 신학부 교육 과목에 속하지 않았고 인 문학부(Lès arts)의 교과에 해당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을 주석했던 사실 은 오늘날까지도 토마스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의 주석의 의도가 무엇이었 1) Pierre LE CHANTRE, Verbum abbreviatum, cap. 1, PL 205, 25; Chartularium Universitatis Parisiensis, ed. H. Denifle and E. Chatelain, t. 1, Paris, 1889, Ⅱ, no.1185, p.683, J.-P. Torrell, Initiation à saint Thomas d Aquin, Fribourg (Suisse) / Paris: Cerf, 1993, p.79, no.2에서 재인용. 2) 토마스는 많은 성서 주석을 썼는데, 그 가운데서 요한 복음 주석, 모든 바울 서신에 대한 주석 그리고 욥기 주석이 가장 완성된 작품으로 인정 받는다. E. Stump, Biblical Commentary and Philosophy, in: N. Kretzmann and E. Stump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Aquina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260. 3) Quaestiones disputatae de ueritate; 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Quaestiones disputatae de anima; Quaestiones disputatae de malo; Quaestiones disputatae de uirtutibus, etc.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75 는지에 대해 계속 논의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주석의 가치에 관해서도 그 의 사망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평가가 분분하다. 예컨대, 그의 사망 직후 인 문학부 교수들이 쓴 편지에 그의 주석이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는 것이 잘 드러나 있는가 하면, 4) 그의 적대자들은 그때부터 그의 주석이 아리스토텔 레스 텍스트에 대해 충실한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5) 마찬가지로, 현대 주석가들 가운데서도, 어떤 이들은 토마스의 주석을 매우 유익한 도 구로 보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토마스의 주석에 기본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학자들 가운데서도 의견이 다양하게 나 뉘어, 어떤 이들은 토마스가 거의 항상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에 충실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은 매우 드물게 표현한다고 보며, 다른 이들은 토마스가 필 요한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정하거나 확장시킴으로써 그의 개인적인 표현 들을 개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본다. 유력한 토마스 연구자들로 알려진 그라브만(M. Grabmann), 에쉬만(I. T. Eschmann), 셔뉘(M.-D. Chenu), 질 송 (E. Gilson) 등은 위의 두 입장의 중도를 취하여, 토마스 주석에는 텍 스트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객관적 충실성을 유지하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는 것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6) 이런 입장들과는 달리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불어 번역자이면서 토마 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의 비평판의 편집자인 르네 앙뜨완느 고띠 에(René Antoine Gauthier)는 토마스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는 프로쿠르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에 강제로 맞추어 왜곡시킨 사람들의 선두주자로 본다. 7) 얼핏 보기에 이런 고띠에의 해석은 일리가 4) Chartularium Universitatis Parisiensis, loc.cit., vol.1, no.447, J. A. Aertsen, Aquinas s philosophy in its historical setting,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quinas, ed. by N. Kretzmann and E. Stump,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21에서 재인용. 5) J.-P. Torrell, op. cit., p.345. 6) 불어권에서 토마스 연구의 높은 권위자로 인정받는 토마스와 같은 수도회, 즉, 성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장 삐에르 또렐신부(Jean Pierre Torrell)는 그라브만 (Martin Grabmann)의 종합에 기초해서 위의 세 입장을 소개한다. J.-P. Torrell, op. cit., p.346. 7) R.-A. Gauthier, Introduction, in: Aristote, L éthique à Nicomaque, t. 1, introd., tr., comment., R.-A. Gauthier et J.-Y. Jolif, Louvain / Paris, 1970 (재판),
176 손은실 있어 보인다. 기실 토마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자이고, 이로 인해 신학적 요 구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의 주석에서도 신학적 입장의 개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띠에의 말이 옳은 것으 로 밝혀진다면, 그 누구도 토마스의 주석이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띠에의 비판은 토 마스 주석의 가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비판이 과연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검토하 는 것은 토마스 주석이 오늘날 가질 수 있는 의의를 찾아보려고 할 때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토마스의 주석에 대한 고띠에의 비판이 타당하지 않 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미 고띠에의 입장을 반박한 학자들이 있다. 8) 그 러나, 그들의 반박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토마스 주석의 구체적인 예들을 증거로 제시해 그들의 논의를 보충하는 것이 필 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 대해 개관할 것이다. 이어서 고띠에의 비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 보고, 그 전제를 분석한 후, 그의 비판이 가장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토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의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그 비판이 정 당하지 않음을 밝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토마스 주석의 현대적 의의를 찾아볼 것이다. 2.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 대한 개관 2.1. 토마스 주석의 시대적 배경 13세기에 이르러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거의 대부분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알려졌을 때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만남은 갈등을 야기했다. 1210년 상스 (Sens) 공의회에서는 파리대학에서의 아리 p.274-275. 8) 예를 들면, V. J. Bourke, R. McInerny등이 있다. 이들의 글은 뒤에서 인용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77 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작품 강독을 금지 했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금지 령이 여러 차례 반복되다가 1255년에 와서야 마침내 파리대학 인문학부에 서 그때까지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수업에 사용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9) 그러나 그 이후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활발해짐과 동시 에, 당시 주석가(Commentator) 로 지칭되며 주석의 탁월성을 인정받았던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따르는 인문 학부 교수들, 즉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해석을 둘러싸고 위기의 시대가 도 래 한다. 이 시대는 1256년의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의 지성의 단일성에 관하여 라는 저작의 출현으로부터 1270년, 1277년의 라틴 아베 로에스주의자들의 단죄 사태까지 이른다. 바로 이 아베로에스주의를 둘러 싼 논쟁의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쓴다. 이 시대에 가장 첨예한 논쟁의 대상은 이미 암시되었다시피 지성의 단 일성 문제였다. 이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의 모호한 구절들에 기인한다. 그는 지성을 분리된 것 으로 묘사하며, 단지 지성만이 불멸하 고 영원하다 (De anima, 430 a17-24)라고 말한다. 아베로에스는 이 구절 을 해석하면서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지성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고 해 석했다. 왜냐하면 만약 지성이 분리된 것이라면 그것은 개별자들에게로 복수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신학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 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불멸성과 개인의 도덕적 책임성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양립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토마스는 이 문제 에 대답하기위해 지성의 단일성에 관하여 (De unitate intellectus) (1270) 를 썼다. 얼핏 보기에 신앙과 철학적 논의가 대립된 문제로 보이는 이 주 제를 논의하는 서론에서 그는 아베로에스의 입장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 리와 모순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입장이 철학의 원리들 과 모순되기 때 문에 부정확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밝힌다. 이것은 그의 의도가 순수하게 철학적인 논증을 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결론은 아베로에스가 소요학파라기보다는 소요학파철학을 타락시킨 사람이라는 것 9) Cf. B. G. Dod, Aristoteles Latinu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Medieval Philosophy, ed. N. Kretzmann, A. Kenny, J. Pinborg, Cambridge, 1982, p.45-79.
178 손은실 이다. 10)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 학이 아니라, 그것의 왜곡된 해석이라는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 리스도교 신학 사이에는 양립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토마스 아 퀴나스 사상의 매우 중요한 한 원리와 부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진 리와 이성적 진리가 모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원리이다. 만약 그러한 경우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하나는 오류이다. 따라서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류의 장본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기꾼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11). 이러한 논변에 기초해서 토마스는 만약 철학자들의 저술에서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 발견 된다면 그것은 철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철학의 타락 혹은 오용(corruptio vel abusus) 12) 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만 약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반대되는 것을 주장한다면, 토마스는 그가 철 학을 오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방금 살펴본 토마스의 아베로에스의 주석에 대한 비판은 그가 아베로에스 주의에 의해 야기된 논쟁의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하면서 품었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를 짐작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는 지 성 단일성론과 같은 아베로에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해석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인지를 검증해 볼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가정이 옳다면, 조금 뒤에 살펴보게 될 고띠 에의 주장, 즉, 토마스의 주석의 목적은 단지 신학적 사용에 있었고, 객관적 인 주석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본 것은 무리한 주장으로 보인다. 10) Thomas de Aquino, De unitate intellectus, c. 2, in fine: [Averroes] non tam fuit Peripateticus, quam philosophiae Peripateticae depravator. 토마스의 지성 의 단일성에 관하여 에 대한 연구서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A. de Libera, L unité de l intellect: commentaire du De unitate intellectus contra averroistas de Thomas d Aquin, Paris: J. Vrin, 2004; F. Van Steenberghen, Thomas Aquinas and Radical Aristotelism,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80 (국 역: 토마스 아퀴나스와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이 재룡 역, 성 바오로, 2000, p.41-88). 11) Thomas de Aquino, Expositio super Librum Boethii de Trinitate, q. 2, a. 3, c. 12) Ibid.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79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토마스는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 스 해석을 둘러싸고 인문학부 교수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던 대략 1268년에서 1273년 사이에, 즉 그의 활동 경력의 마지막 시기에 다음과 같은 열두 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대해 주석을 썼 다: De anima, De interpretatione, Analytica posteriora, Physica, De caelo,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Meteorologica, De sensu et sensato, De memoria et reminiscentia, Metaphysica, Ethica Nicomachea, Politica. 이 주석들은 강의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다. 2.2. 토마스의 주석 방법의 특징 토마스의 시대에 전승되었던 해석의 두 가지 모델은 텍스트를 다른 말 로 바꿔 해제하는 설명적 환원 주석(paraphrase)과 문자적 주석이다. 첫 번 째 모델은 아비켄나(Avicenna 980-1037)의 주석에서 사용된 것으로 12세 기 후반기부터 1230년경까지 많이 모방되었다. 이것은 텍스트와 설명이 융합되는 형태이다. 토마스의 스승 대 알베르투스의 많은 주석도 이 모델 을 따른다. 두 번째 모델은 아베로에스의 주석양식이다. 이 아랍 철학자의 문자적 주석의 특징은 텍스트를 쪼개고 또 쪼개서 그 안에서 완벽하게 질 서 지워진 논리적 구조를 발견하는데 있다. 13) 아베로에스 주석이 소개된 이후 다양한 형태의 문자적 주석이 설명적 환원 주석을 대체한다. 1245년에서 1250년경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에 의해 행해졌던 주석(lectura)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보여준다. 우선 텍스트의 큰 부분과 작은 부분을 계속해서 나누어가는 문단 구분이 있다. 여기에 두 부분으 로 구성된 텍스트 설명이 이어진다. 텍스트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부분(sententia)과 텍스트에 대한 더 심화된 설명을 하는 부분(expositio litterae)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텍스트의 어려운 부분에 대한 논의가 토 론문제 형식으로 덧붙여져 있다. 14) 그런데 경우에 따라 이 세 가지 요소 각각이 어떤 주석의 주된 형식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대 알베르투스는 두 13) M.-D. Chenu, Introduction à l étude de saint Thomas d Aquin, Montréal: Institut d études médiévales / Paris: J. Vrin, 1950, 1993(5쇄), p.188. 14) A. de Libera, La philosophie médiévale, Paris: PUF, 1994 (3th ed.), p.27.
180 손은실 번에 걸쳐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을 썼는데, 첫 번째 주석에서는 토론 문제 형식의 주석을 썼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주석이라기보다는 텍스트로부터 자유롭게 발전된 문제들에 대한 논의이다. 반면 두 번째 주석 에서는 설명적 환원 주석 형식을 취한다. 토마스의 경우, 짧은 기간에 열두 주석 (모두가 완성된 주석이 아님)을 쓰면서 열 편의 주석에서는 텍스트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형식(sententia) 을 선택하고, 나머지 두 주석 15) 은 텍스트에 대한 더 심화된 설명을 하는 형식(expositio)을 취한다. 이제, 여기서 계속 논의하게 될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의 예를 통해 sententia의 구조를 살펴 보자. 이 주석에서는 정치학 주석 이나 형이상학 주 석 과는 달리 제 일 권 주석을 시작하기 전에 전체 주석에 대한 서문(prooemium)이 따로 나오지 않고, 바로 각권 주석으로 넘어간다. 각권 주석은 여 러 편의 강독(lectio)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lectio에는 먼저 텍스트의 번역 이 나오고, 일종의 서문이 잇따른다. 이 서문에서 주석자는 각 lectio 단위에 포함된 텍스트 전체의 대의를 제시하고 텍스트의 문단 구분을 한다. 이어서, 텍스트의 전개 순서를 따라 각 구절의 대의와 의미를 해설한다. 이러한 주 석 구조는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방법의 특징이 텍스트의 문자적 의 미를 설명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베로에스의 주석이 소개된 이 래 16) 이미 파리 대학 인문 학부에서 널리 채택된 주석 방법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다른 중세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문자적 의 미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저자의 의도(intentio auctoris)를 찾으 려고 했다. 이것은 텍스트안에 포함되어 있는 원리와 실마리로부터 논의를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주석이 단지 텍스트의 역사적 인 의미의 재구성에만 있지 않고, 철학적인 주석이기도 했음을 보여 준다. 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서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의 탐구 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실재에 관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17) 15) 분석론 후편 주석 과 해석론 주석. 16) 1225년 이래로 Michael Scotus (± 1235)가 아베로에스를 번역, 소개하였다. 박 승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수용과 스콜라 철학의 발전, 가톨릭 철학, 제 3호 (2001), p.125. 17) Sententia super librum De caelo et mundo, lib. 1, lect. 22.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81 요컨대, 토마스의 주석은 두 개의 관심,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있는 그 대로 읽는 것과 또한 그를 넘어서서 철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미묘하 게 결합시키고 있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의 구체적인 주석을 살펴보기 전에 마지막으 로 토마스가 사용한 라틴어 번역에 대해 살펴보자. 2.3. 토마스가 사용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번역 중세에 이 책은 여러 차례 번역되었었다. Ethica vetus 라는 이름으로 알 려진 번역은 12세기 말경 나온 것으로 2권과 3권만 포함하고 있다. 반면 1217-1220사이에 나온 번역인 Ethica nova 는 전권에 대한 번역이었으나 1권만 전체가 남아있고, 나머지 9권의 경우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다. 1246-1247년 사이에 다시 한번 전권에 대한 번역이 나왔는데, 옥스포드 대학 초대 총장이었고, Lincoln의 주교였던 로베르투스 그로스테스트 (Robertus Grosseteste)의 것이다. Translatio lincolniensis로 불리는 이 번역은 텍스트 번역과 아울러 여러 그리스 주석가들 (Eustrate, 고대의 익명의 주석가, 에 베소의 미카엘 등)과 로베르투스 그로스테스트 자신의 노트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번역이 나오자마자 대 알베르투스가 1248-1252년 사이에 쾰른에 서 이 번역서를 가지고 강의를 했고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강의 를 매우 충실하게 기록했다. 그 이후, 1271-1272년 18) 사이에 토마스 자신 이 직접 주석할 때 사용한 번역은 로베르투스 그로스테스트의 번역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이 수정본이 모베크의 길렐무스(Guilelmus de Moerbecka: c. 1215-c. 1286)의 번역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 의견은 많은 증거에 기초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19) 18) 고띠에의 이 연대 규정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는 다음 글이 있다. V. J. Bourke, The Nicomachean Ethics and Thomas Aquinas, in: St. Thomas Aquinas 1274-1974 Commemorative Studies, 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1974, p.239-259. 19) R.-A. Gauthier, op.cit., p.111-131.
182 손은실 3. 토마스 주석에 대한 고띠에의 비판 고띠에가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비판하는 글 가운데 가장 전 형적인 것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성 토마스는 도덕철학을 쓰지도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을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석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것이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특징 지웠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정신에는 낯선 정신으로 작동하 는 신학 안에 아리스토텔레스 도덕철학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 ] 이로 인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의미와 균형을 전복시킬 수밖에 없었다. 20)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고띠에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 음을 볼 수 있다. 첫째, 고띠에는 토마스의 주석의 목적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자체를 이해하는데 있지 않고, 단지 자신의 신학적 사상 전개의 수단 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 본다. 21) 둘째, 첫째 전제의 논리적 귀결로, 그는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작품과 신학적 저작에서의 상이한 아리스 토텔레스 사용을 전혀 가정하지 않는다. 셋째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윤리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윤리의 차이가 양립불가능성을 내포 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전제가 과연 토마스의 실제 주석 작업과 그의 사상의 기본 원리에 부합하는지를 보기 위해 고띠에가 가장 많이 연구한 작품 니코마 코스 윤리학 의 몇 가지 구절, 특히,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일치하지 않는 구절을 선택하여 분석할 것이다. 20) R.-A. Gauthier, op.cit., p.275. 21) 이와 관련하여 고띠에는 구체적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을 예로 들어 다 음과 같이 설명한다: 토마스는 신학자이었을 뿐이고 그것만을 원했다. 그가 신 학대전 2부에서 자신의 도덕신학을 개진했을 때, 니코마코스 윤리학 을 주석한 것은 오로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철학 안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 이성적 도구를 보았 기 때문이었다. Ibid. V. J. Bourke는 고띠에의 이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토마스의 주석의 목적이 그런 것이었다면, 토마스가 한 것처럼 구절 구절 주석하 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권할 만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V. J. Bourke, 위에서 인용된 논문, p.254.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83 4.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의 몇 가지 예들을 통한 고띠에의 비판에 대한 반박 4.1.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주석에서 토마스는 그리스도교 의 관점을 투사하여 왜곡된 해석을 하는가? 고띠에는 토마스가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 른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본질에 너무나 깊은 변동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22) 고띠에의 말에서 종속절은 맞는 말이다. 인 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두 사상가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고선, 혹은 궁극적 목적이 행복(eudaimonia)에 있다고 말하며,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활동, 인간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부분인 지성(nous)의 탁월성을 따른 활동, 즉 관조적 활동에 있는 것으로 본다. 23)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의 궁극적 목적 인 완전한 행복 24) 은 신의 본질의 관조에 있다. 25) 그러면 토마스는 이 두 행복의 정의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과연 그는 고띠에가 말하는 것 처럼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변화시키는 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와 신학적 저작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정의하는 구절(1177a17-19)에 대한 주 석에서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다음에 그가 왜냐하면 그것은 사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22) R.-A. Gauthier, op. cit., p.275-276. 23) Ethica, 1177a 12-17. 24)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행복을 논의하면서 eudaimonia 의 동치어 로 felicitas 를 사용한다. 반면, 자기 자신의 행복론을 전개할 때는 일반적으 로 beatitudo 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두 단어를 동의어로 취급한 다. cf. A. Kenny, Aquinas on Aristotelian Happiness, in: S. MacDonald, E. Stump (ed.), Aquinas s Moral Theory. Essays in Honor of Norman Kretzmann, Ithaca,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92, p.20. 25) Summa theologiae (이하에서는 ST) I-Ⅱ, 3, 8, c.; Summa contra Gentiles Ⅲ, 48, 16; Expositio super Boethii de Trinitate, q. 6, a. 4, ad 4.
184 손은실 말할 때, 그는 특별히 행복이 어떤 탁월성 26) 에 따른 활동인지를 보여준 다. 이에 대해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그는 완전한 행복은 관 조적 탁월성의 활동에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행복한 자도 외적으로 유복한]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에서 그는 완전한 행복을 외적인 것들 과 비교한다. 그는 전자를 두 가지 측면으로부터 논의한다. 첫째 그는 완전한 행복이 관조의 활동에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둘째 그러나 다른 탁월성에 따른 것 에서 그는 이 행복을 행위에서 성립하는 행복보 다 선호한다. 27) 이 주석에서 우리는 토마스가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학적 관점을 투사하 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의 내용을 풀이하는 데 만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행복에 대해 논의하는 또 다른 구절(1097b6-15) 주석에서 토마스는 다 음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범위를 규정한다 : 이 작품에서 철학자는 이 지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해 말한 다. 왜냐하면, 저 생에 있어서의 행복은 전적으로 이성의 탐구를 넘어서 는 것이기 때문이다. 28) 26) 토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에서 사용하는 virtus는 탁월성으로 번역한다. 왜냐하면 그는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의미로 그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Cf. Sententia libri ethicorum, lib. 2, lect. 6. 그러나, 토마스가 신 학대전 에서 사용하는 virtus는 덕으로 번역한다. 물론 여기서도 그는 아리스 토텔레스 윤리학의 개념을 상당 부분 차용하지만 그의 윤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특히 성서의 복음 정신에 뿌리를 두는 보다 폭 넓 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virtus를 정의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 누스를 인용한다. ST I-Ⅱ, 55. 27) Sententia libri ethicorum, lib. 10, lect. 10: Deinde cum dicit: quoniam autem est speculativa etc., ostendit in speciali cuius virtutis operatio sit perfecta felicitas. Et circa hoc duo facit. Primo ostendit, quod in operatione speculativae virtutis consistit perfecta felicitas. Secundo comparat felicitatem perfectam ad res exteriores, ibi, opus erit autem etc. Circa primum duo facit. Primo ostendit, quod perfecta felicitas consistit in operatione speculationis. Secundo praefert hanc felicitatem felicitati quae consistit in actione, ibi, secundo autem qui secundum aliam virtutem etc. 28) Sententia libri ethicorum, lib.1, lect. 9, 1097 b 6-15 구절에 대한 주석: Loquitur enim in hoc libro philosophus de felicitate, qualis in hac vita potest haberi. Nam felicitas alterius vitae omnem investigationem rationis ex-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85 여기서도 우리는 토마스가 철학적 윤리와 신학적 윤리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전자의 범위가 이성의 탐구 안에 있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명료한 구분은 그의 신학적 저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행복은 신의 본질의 관상 29) 에 있다고 말하며, 아리스토 텔레스가 이해한 행복 - 행복이 일차적으로는 관조에 있고 부차적으로는 행 위와 정념을 지시하는 실천적 지성의 활동에 있다 30) - 은 불완전한 행복이 라고 본다.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이러한 구분법을 자신의 신학에서 사용하여 이 그리스 철학자가 말하는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 을 지칭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행복 개념 자체에 대한 충실한 해석과 배치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이해를 먼저 그 자체 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그 자신의 행복 개념과 비교하는 것이다. 이 비교 과 정에서 그는 철학자의 행복 개념의 내용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자기 나름의 평가를 덧붙인다. 즉, 그것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고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지금까지 살펴본 토마스 텍스트들의 증거는 고띠에가 말하는 것과는 반 대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행복 이해에 대한 차 이를 분명히 인식하여 후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전자에 대한 이해에 변화 를 일으키지 않음을 보여준다. 4.2. 주석서에 나타나는 자율성 고띠에는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은 신학적 입장의 영향으로 인 해 자율성을 갖지 못하다고 말한다. 주석의 자율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cedit. 이 구절 외에 다른 구절 주석에서도 토마스는 여러 차례 철학자는 현 세의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명시한다. 1100 a 11-14, 1101 b 5-9. 29) ST Ⅰ-Ⅱ, 3, 8, c.: ultima et perfecta beatitudo non potest esse nisi in visione divinae essentia. 30) ST Ⅰ-Ⅱ, 3, 5, c.: Beatitudo autem imperfecta, qualis hic haberi potest, primo quidem et principaliter consistit in contemplatione, secundario vero in operatione practici intellectus ordinantis actiones et passiones humanas, ut dicitur in X ethic. 여기서 토마스가 의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177 a 12 와 1178 a 9이다.
186 손은실 좋은 하나의 방법은 주석 작품과 신학 저작에서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텍 스트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 과 일치하지 않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두 구절에 대한 주석과 신학적 저작에서의 그 구절들에 대한 사용을 살펴보자. 4.2.1. 1137 a 26-32 구절 ( [ ] 정의는 인간적인 어떤 것이다. )의 주석 먼저 이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정의로운 것은 단적으로 좋은 것들을 나누어 가지고 있되 그것들에 대 한 지나침과 모자람을 가지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 존재한다. 가령 신들 과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는 그것들에 대한 지나침이 아예 없을 것이며 도저히 고쳐질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유용한 몫이 없을 것이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해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까지 유용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의는 인간 적인 어떤 것이다. 31) 이 구절은 신이 정의롭다고 진술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충된다. 이로 인해 토마스의 스승 대 알베르투스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신에게 정의를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토의문제 형식으로 다룬다. 32) 반면 토마스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의 틀 안에 머물 뿐 정의라는 탁월성이 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선 침묵 한다: 정의로운 것은 존재한다 에서 그는 정의로운 것이 어떤 사람들 사 이에서 추구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정의로운 것이 부( 富 )나 이런 류 의 다른 것들처럼 단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욕구될만한 것들이 발견되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것들을 때때로 지나치게 혹 은 모자라게 가지는 사람들에게 부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 떤 이들에게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지나침도 없기 때문에 항상 최 상의 방식으로 이런 선( 善 )들을 누리기 때문이다. 덕에 있어서 완벽한 사 31) 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1137 a 26-32, 이창우, 김재홍, 강상진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6, p.195-196. 32) Albertus Magnus, Super Ethica. Commentum et quaestiones, lib. 5, lect. 14, éd. par W. Kubel, Monasterii Westfalorum in aedibus aschendorff, 1968, 1972, p.376 ff.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87 람들과 신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것처럼. [ ] 그러므로 정의는 사람들 의 일반적인 상태와 관련되기 때문에 인간적인 선임이 분명하다. 33) 다른 한편 신학대전 에서는 토마스도 신에게 정의라는 속성을 귀속 시 킨다. 34) 이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에게 정의라는 탁월성을 부여하는 것 은 우스꽝스러운 것 (1178 b 10)이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정의를 신에게 부여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에게 부여하기를 부정했던 도시 국가에서의 행위와 관련된 정의가 아니라 신에게 어울리는 행위와 관련된 정의임을 명시 한다 35). 4.2.2. 1129 b 28-29 구절 ( 정의는 종종 탁월성 중에서 최고의 것으 로 여겨진다. )의 주석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 전체에 해당하는 정의 36) 를 탁월성 중에서 최 고의 것임을 주장하면서 저녁별이나 샛별도 그렇게 경탄할 만하지는 않 다 는 속담을 인용한다. 이 텍스트를 주석하면서 토마스는 이 철학자의 의 도를 해명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자신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타인과 관련해서도 완전한 것이 더 좋은 33) Thomas de Aquino, Sententia libri ethicorum, lib. 5, lect. 15, Rome, éd. Léonine, tom 47 / 2, 1969, p.320: Deinde cum dicit: Sunt autem iusta etc., ostendit in quibus competant iusta. Et dicit quod iusta competunt in illis personis quibus possunt adesse ea quae sunt bona simpliciter et absolute, sicut divitiae et alia huiusmodi, et tamen habent quandoque circa hoc superabundantiam et defectum, sicut sunt communiter homines. Quibusdam enim circa talia non est aliqua superabundantia, sed semper optime utuntur talibus bonis, sicut contingit hominibus perfectis in virtute et forte diis, [ ] unde patet quod iustitia est humanum bonum, quia respicit communem hominum statum. 34) ST I, 21, 1, c. 35) ST I, 21, 1, ad 1. 36)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법을 지키는 것 과 공정한 것 (1130 b 9)이 그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 로 이해되며, 전자는 탁월성 전체에 해당하는 정의이고 후자는 탁월성의 한 부분으로서의 정의이다.
188 손은실 것이기 때문에 자주 사람들이 정의가 모든 탁월성 가운데 가장 뛰어나 다고 말한다. 이것이 헤스페루스, 즉, 저녁에 가장 빛나는 별도, 루시퍼, 즉, 아침에 가장 빛나는 별도 정의만큼 눈부시게 빛나지 않는다고 말하 는 속담의 기원이다. 37) 이 주석에서도 토마스는 그리스도교의 도덕과 일치하지 않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이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신학자로서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리스도교 도덕의 틀에서 보자면 신에게 관련된 덕들인 믿음, 소 망, 사랑이 도덕적인 덕 그러므로 정의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이러한 그 리스도교적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토마스가 윤리학 주석 에서 자신의 입장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윤 리학의 틀 내에서는 신에게 관련된 초자연적인 덕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아퀴나스는 아리스토 텔레스 윤리학이 이성의 범위 안에서의 탐구에 한정됨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반대로 신학대전 에서는 신학적 도덕의 틀 안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삽입하면서 토마스는 정의가 모든 덕이 아니라 도덕적 덕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말 한다. 38) 지금 살펴본 두 가지 예는 토마스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일치하지 않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을 주석할 때,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 그 자체의 이해에 머물러 있고, 반면 동일한 구절을 자신의 신학적 저작에 사용할 때 는 주석에서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 하지 않고 수정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띠에의 토마스 주석 비판은 37) Sententia libri ethicorum, lib. 5, lect. 2: quia esse perfectum non solum secundum se, sed etiam in comparatione ad alterum, potius est, propter hoc (cum) multoties dicitur, quod haec iustitia sit praeclarissima inter omnes virtutes; et proverbium inde sumitur, quod neque Hesperus, idest stella praeclarissima vespertina, neque Lucifer, idest stella praeclarissima matutina, ita fulgeat sicut iustitia. 38) ST Ⅱ-Ⅱ, 58, 12, c.: [ ] si loquamur de iustitia legali, manifestum est quod ipsa est praeclarior inter omnes virtutes morales: inquantum bonum commune praeeminet bono singulari unius personae. 여기서 토마스는 탁월 성 전체에 해당하는 정의를 법적 정의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법을 지키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89 그가 신학적 저작에서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정해서 사용한 것을 마치 왜곡된 해석을 한 것으로 본 데 기인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수정 은 왜곡과는 엄연히 다른 것임을 다시 한 번 지적하자.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위에서 살펴본 두 구절에 대한 주석과는 달리,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더 확장 시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필연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인지를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자. 4.3. 텍스트의 의미를 확장하는 주석의 예 : 1094 a 26 구절 ( 정치학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기획적인(μαλιστα αρχιτ εκτονικη ) 학문이다. )의 주석 토마스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의 의미를 풀 이한다. 정치학은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하고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장 총기획적인 학문이라고 한 다. 그러나 이 해석 마지막에 그는 정치학이 단적으로 가장 중요한 학문이 아니라 실천학 가운데서 그러하다고 말한다. 전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 학(scientia divina)에서 탐구되고 그러므로 신학이야말로 말할 것도 없이 가 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본다. 39) 여기서 토마스는 자신이 주석하고 있는 아리 스토텔레스 텍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구분을 도입한다. 이 경우 토마스 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저자의 의도와 불일치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 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에서 제기한 학문 분류를 상기해 볼 수 있다. 거기서 철학자는 가장 높은 학문은 가장 높은 유 (το τιμιωτατ ον γενο )를 대상으로 가지는 것이라고 하며, 따라서 이론적 학문이 가장 높은 학문이고, 세 가지 이론적 학문인 수학, 자연학, 신학 가운데서도 신학 이 가장 높은 학문이라고 한다. 40) 이 형이상학 텍스트에 비추어 볼 때, 39) Sententia libri ethicorum, lib. 1, lect. 2: [ ] politicam dicit esse principalissimam, non simpliciter, sed in genere activarum scientiarum, quae sunt circa res humanas, quarum ultimum finem politica considerat. Nam ultimum finem totius universi considerat scientia divina, quae est respectu omnium principalissima.
190 손은실 신학 41) 이 최고의 학문이라는 토마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와 배 치되는 것도, 하물며 그에 대한 왜곡도 아님을 알 수 있다. 4.4. 고띠에의 비판에 대한 반박 지금까지 살펴 본 토마스의 주석들은 고띠에처럼 적어도 모든 토마스 주석을 단칼에 싸잡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왜곡이라고 볼 수 없음을 잘 보 여준다. 위에서 살펴본 모든 텍스트들의 증거는 고띠에의 비판의 세 가지 전제와는 반대로, 첫째, 토마스의 주석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체를 이해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이것은 그가 신학자로서 그 의 주석을 자신의 신학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접근하는 방법은 주석 작품과 신학 저작에서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셋째, 토마스는 아 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윤리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윤리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그 차이가 필연적으로 양립불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보지 않음 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신학적 공리 - 은총은 자연을 파괴 하지 않고 완성 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 에 따라 그리스도교 윤리는 철학적 윤리와 대립하지 않으며 완성한다고 보기 때문 이다. 그런데 왜 토마스와 같은 수도회 소속 신부였던 고띠에는 이 유명한 토마스의 신학적 공리를 통해 토마스의 신학과 철학의 관계이해를 보지 못했을까? 42) 그것은 아마도 그가 평생 니코마코스 윤리학 불어 번역, Aristoteles Latinus 편집, 토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 편집 등의 학문 활동을 하면서 자구 해석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토마스의 신학사상 40) Aristoteles, Metaphysica, 1026 a 20-23. 41) 토마스는 이성적 탐구로서 철학에 속하는 신학과 계시에 기초하는 신학을 분명 하게 구분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물론 전자에 해당한다. 42) cf. R. McInerny, Aquinas on Human Action. A Theory of Practice, Washington: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2, p.176-177. 맥키너 니도 이 책에서 고띠에의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 대한 해석에 한 장 ( 章 )을 할애하고 그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우리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마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바친 학자가 그렇게 철저히 그들 사이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91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신학적 공리를 소홀히 다룬 데 기인하는 것은 아닐 까? 아니, 그것 보다는 그가 토마스와는 다른 자신의 관점, 즉, 아리스토텔 레스의 이교도 윤리와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양립불가능하다고 보는 관 점 43) 을 토마스의 주석 해석에 적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만약 그가 토마스의 관점을 전형적으로 표현해 주는 위의 공리의 파악에서부터 출발 하여 그 공리가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았다면, 그는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서 자연적 인식의 자 율성 44) 에 부여한 중요성을 그토록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고 띠에의 토마스 주석에 대한 해석은 정약용 45) 이 청대 고증학을 비판하면서 강조했던 자구훈고는 텍스트의 올바른 이해에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음과 의리를 관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43) 이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강하게 주장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인의 덕 (virtutes) 과 이교도의 덕을 구분하고, 후자를 덕이라기보다는 악덕 (vitia)으로 본다. De Civitate Dei, 19, 25, BA 37, Paris: Desclée de Brouwer, 1960, p.165. 이 점에서 토마스는 이 히포의 감독과 다른 관점을 가졌는데, 그는 이교도의 덕 을 악덕이라 보지 않고 불완전한 덕이라 본다. 그러니까 고띠에는 여기서 프 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 및 근세의 많은 철학자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입 장을 더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cf. H. V. Jaffa, Thomism and Aristotelianism. A Study of the Commentary by Thomas Aquinas on the Nicomachean Ethics, Conneticut, 1972 (재판; 초판: Chicago, 1952), p.23. 44) 셔뉘 신부는 중세 신학자들 가운데, 안셀무스, 보나벤투라를 예로 들면서, 토 마스만이 자연과 이성에 그들 고유의 능력과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고 말 한다. M.-D. Chenu, Bulletin Thomiste, 1928, p.244. 토마스와 반대로 보나 벤투라는 이성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J. Ratzinger, La théologie de l histoire de saint Bonaventure, tr. fr. par R. Givord et révisé par L. Burger et F. Vinel, Paris: PUF, 1988, p.150. 45) 청나라 학자들의 학문은 고거( 考 據 )에 뛰어나다. 그들이 고증하는 방법은 훈 고( 訓 )에 정밀하지만 의리에는 소략하여 또한 이기성정의 설에 많은 손상을 주었다. [ ] 공자의 도를 과연 자구 훈고의 학으로 계승할 수 있겠는가?, 여유당전서( 與 猶 堂 全 書 ), Ⅱ-32-22-23, 김영우, 청대 고증학의 경전해석 방법, 출간 예정 논문, p.1에서 재인용.
192 손은실 5. 토마스 주석의 현대적 의의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러면 도대체 토마스 주석이 오늘날도 아리스토 텔레스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유용한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 보자. 당장 토마스는 문헌학자도 아니고, 게다가 그는 라틴어 번역에 의존했다 는 사실이 약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근대의 역사비평주석이 발전해 오면서 토마스와 당대의 주석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불충분했었고 46) 때로는 왜곡된 텍스트를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 밝혀짐 으로써 부분적으로 역사적인 주석으로서는 결함이 있음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주석가들의 주석과정에 대한 질송(E. Gilson)의 해석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중세 주석가들이 그리스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역사가로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옳다. 역사 속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만큼이나 실패를 포함한다. [ ] 그들의 방법에는 인위적인 것이라고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리들을 그것들을 파괴시킬 위험이 있을 만큼 폭력적 으로 밀고나가지 않았고, 그 원리들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도 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원리들의 진리의 총체성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확장하고 연장시킨다. 흔히 말하는 주석가들의 시대 는 특히 주석철학자들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이 하지 않았던 말을 계속 하도록 했다고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역사가의 역할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이기를 원했다. 철학 안에 철학사가들만 존재해야한다고 주 장하지 않는 한 역사 자체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비난할 것이 없다. 47) 46)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에 관한 중세적 접근은 근대적 접근, 특히 베르너 예거 (Werner Jaeger) 시기 이후의 접근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 스의 책이 출판을 위해 준비된 책이라기보다 강의 노트와 같은 미완성의 상태 라는 사실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다. [ ] 그러나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의 각각의 책들이 완결된 전체이며 하나의 계획에 의해 저술된 책이라고 생각 한다. N.J. Green-Pedersen, The Tradition of Topics in the Middle Ages. The Commentaries on Aristotle s and Boethius Topics, Muenchen / Wien, 1983, p.13; 강상진, 12세기 초반 중세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아벨라르 두스(1079-1142)를 중심으로, 가톨릭철학 제3호 (2001), p.113, note 19에 서 재인용. 47) E. Gilson, L esprit de la philosophie médiévale, Paris, 1932, t. 2, p.225.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93 중세 주석이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것이었다는 이러한 질송의 평가는 부분적으로 근대 역사비평주석이 제기하는 비판에 맞서서 중세의 주석을 변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호는 적어도 토마스 주석의 경우 그의 주석의 전모를 잘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토마스는 텍스트의 의미를 넘어서서 철학적인 진리를 추구 하는데 까지 나아가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충실 히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비록 자기 시 대의 역사적 지식의 한계 안에서나마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에 대한 충실 한 이해와 철학적 해석을 절묘하게 결합한 토마스의 주석은 오늘날 아리 스토텔레스 이해에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의 현대적 공헌은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 구절의 주석 자체를 읽을 때 비로소 찾 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토마스 주석을 자세히 읽고 그 의 주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몇 학자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 주석의 유용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중세철학연구로 유명한 Notre Dame 대학의 철학교수이며, 유력한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자인 랄프 멕키너니(Ralph McInerny) 는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은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이해에 중요한 도움을 준다고 보며 48) 마르타 크레이븐 누스바움(Martha Craven Nussbaum)은 토마스의 주석은 영혼론 에 대한 가장 위대한 주석들 중의 하나이다 49) 라고 말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불어 번역자인 트리코(Tricot)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번역 서문에서 라틴주 석들 가운데 토마스의 주석은 필수불가결의 도구 라고 묘사하고, 번역 주에 서 자주 그의 주석을 인용한다. 이들의 긍정적인 평가는 토마스 주석의 유용 성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이고 최종적인 증거는 각 구절의 주석 자 체를 읽을 때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이 글이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을 읽는데 작은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48) R. McInerny, Aquinas on Human Action. A Theory of Practice, Washington: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2, p.163. 49) Essays on Aristotle s De Anima, ed. by M. C. Nussbaum and A. O. Rorty, Oxford: Clarendon Press, 1992,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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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197 <Abstract> Commentaire de l Ethique à Nicomaque par Thomas d Aquin Eun-Sil Son Quant à la qualité des commentaires des oeuvres d Aristote par Thomas, les avis sont partagés. Certains considèrent qu il interprète les textes du Stagirite avec objectivité et fidelité, alors que d autres le mettent en doute. R.-A. Gauthier, éditeur de l Aristoteles Latinus, par exemple, considère que son commentaire de l Ethique à Nicomaque n est pas une interprétation d Aristote pour Aristote, mais elle vise à utiliser sa philosophie morale dans une théologie animée par un esprit étranger au Stagirite. Notre article se propose de montrer que cette interprétation du commentaire thomasien par Gauthier n est pas fondée. Pour cela, nous étudions les commentaries de quelques passages de l Ethique à Nicomaque qui n ont pas la même idée morale que la morale chrétienne, et nous montrons que Thomas s y contente de préciser les sens littéraux des textes sans les modifier pour les rendre conformes à la foi chrétienne. A travers cet examen se révèlent les qualités des commentaires d Aristote par Thomas. Ces qualités consistent dans une combinaison subtile d une exégèse historique et littérale et d une exégèse philosophique. Cette dernière peut se traduire, pour prendre l expression de l Aquinate luimême, dans l idée suivante: stadium philosophiae non est ad hoc quod sciatur quid homines senserint, sed qualiter se habeat veritas rerum. Sententia super librum de caelo et mundo, lib.1, lect.22)
198 손은실 MOTS CLES: commentaire médiéval, Thomas d Aquin, Aristote, philosophie et théolog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