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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 東 古 典 硏 究 第 24 輯 이상적인 정치 사회의 구현 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따라서 천인 합일론은 가장 적극적인 경세의 이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권근은 경서의 내용 중에서 현실 정치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천인합일의 원칙과 사례들을 발견하고, 이를 연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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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 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 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므로 한일청구권협정 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한 2011년 8월 헌 법재판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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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退溪學과 韓國文化 第43號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을 주목하여 서술하였다. 우선 정도전은 ꡔ주례ꡕ에서 정치의 공공성 측면을 주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국가, 정치, 권력과 같은 것이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표방하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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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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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石 堂 論 叢 49집 기꾼이 많이 확인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유형이 가족 담, 도깨비담, 동물담, 지명유래담 등으로 한정되어 있음도 확인하였 다. 전국적인 광포성을 보이는 이인담이나 저승담, 지혜담 등이 많이 조사되지 않은 점도 특징이다. 아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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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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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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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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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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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 57, 2015. 11, 3~32 http://dx.doi.org/10.15299/jk.2015.11.57.3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심노숭의 사가야화기, 정약용의 방친유사 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1)김 경 회 * 1. 들어가며 2. 장복선의 행적 비교 1) 입전 동기 2) 장복선의 처지 3) 장복선의 구휼 및 연대 3. 장복선의 형상화와 이옥의 문제의식 4. 나가며 <국문초록> 이옥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문학 작품을 통해 그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제시한 방안은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 가 있었다. 그리고 이옥이 공금을 유용하여 백성을 구휼한 장복선을 유협 으로 입전한 장복선전 은, 유협의 보편적 개념을 근간으로 이의 없이 수 용되었다. 그런데 일반 백성을 구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유협은 시 대적 산물로서 당대의 정세나 작가의 의식에 따라 이해되는 방식이 달라 서 그 유형이 일률적이지 않은 것처럼, 장복선전 도 당대의 사회 현실과 작가 이옥의 염원 및 상상력이 결합된 작품으로 여타의 유협전과는 구별 되는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본고는 이러한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장복 선전 에 나타난 장복선의 행적을, 심노숭의 사가야화기 와 정약용의 방 친유사 에 묘사된 장복상의 행적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장복선이 보여 준 *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책임연구원(kimkyunghoi76@hanmail.net) - 3 -

2 / 한국민족문화 57 유협적 면모의 특성을 재조명하여 그것의 의미를 밝히고, 장복선전 의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요인을 증명하였다. 우선 세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궁핍했지만 베풀기를 좋아했던 장복선 또 는 장복상이 공금 유용이라는 자기희생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 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장복선전 은 장복선을 백성을 구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한 유협으로 칭송한 반면, 사가야화기 는 장복상을 밤에 모여 나누는 가벼운 이야깃거리에 등장하는 인물 정도 로, 방친유사 는 장복상을 동지공의 유협적 면모를 전하는 이야기에 등 장하는 부수적 인물로 묘사하였다. 이처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세 가지 의 서사적 진실로 서술된 것은, 이옥ㆍ심노숭ㆍ정약용 세 작가의 문제의식 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장복선전 에 나타난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의 특성을 밝히기 위해서, 다음의 두 관점을 중심으로 세 작품에 서술된 장복선의 행적의 공 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였다. 첫째, 유협의 행위 준칙의 준수 여부를 중심 으로 장복선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장복선은 사회적 준칙보다 개 인의 준칙을 당당히 따르는 여타의 유협 내지 의인과는 달리, 구휼이라는 목적과 공금 유용이라는 수단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갈등했음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옥이 장복선을 유협으로 인정한 동시에 유협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인간적 갈등을 부각하여 보편적 인 인간의 삶의 단면을 보여 주고자 했으며, 백성의 삶의 질곡을 야기하는 당대 현실의 장벽이 높고 견고함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추론하였다. 둘째, 세 작품은 평안 감사 채제공이 장복선의 구휼을 인정하고 그를 석방한 사 실은 공통적이나, 장복선전 은 장복선과의 연대 범주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무관을 포함하여 상층을 상징하는 채제공까지 확장된 것이 특징적 이었다. 이를 통해 이옥이 하층부터 상층까지 전 계층이 소통과 합의를 기 반으로 연대하여 백성의 삶의 질곡과 사회적 모순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 결하자고 제언하였음을 밝혔다. * 주요어: 유협, 비교적 고찰, 인간적, 소통, 연대 - 4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3 1. 들어가며 인간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은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추구하는 인 간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 회복 나아가 문화적 발전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는 자신을 초월하여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파악하고 개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의 발전 등을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처지나 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인간의 본성, 시대상, 지향 가치 등의 요인들을 다각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제언( 提 言 )은 독단적인 사고방식을 배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질은 작가가 당 대의 현실을 자신의 염원과 결합하여 묘사하는 문학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은 작가가 인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를 관찰하고 삶의 질곡에 따른 고뇌를 총체적으로 서술한 결실이자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 품이다. 독자는 이러한 문학을 통해 있었던 세계와 있는 세계에 대해 통찰 하고 있어야 할 세계를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작가가 상정한 이상 적 세계와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파악한 후 그 원인 을 분석하고 제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심하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가 한미한 서족( 庶 族 ) 가문의 출신으로 당색이 선명하지 않지만 소북( 小 北 )에 속한 1) 이옥( 李 鈺, 1760~1815)의 장복선전( 張 福 先 傳 ) 이다. 작가 이옥에 관한 선행 연구들은 대부분 그의 작품과 문체에 주목하였 고, 장복선전 과 관련된 연구는 장복선의 유협( 遊 俠 )적 면모를 논의하였 다. 먼저 전자의 경우 현실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세속적 면을 묘파하 여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고, 한편으로 는 이상적 가치를 보여 줄 수 있는 긍정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가 의 윤리를 대변 2) 했다는 논의, 인간주의에 입각한 시정인( 市 井 人 )의 전 1) 김영진, 李 鈺 硏 究 ⑴ - 가계와 교유, 明 ㆍ 淸 小 品 閱 讀 을 중심으로, 한문교육연구 18, 한국한문교육학회, 2002, 349쪽. 2) 임유경, 李 鈺 의 < 傳 > 硏 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49쪽. - 5 -

4 / 한국민족문화 57 ( 傳 )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시속의 부도덕성을 고 발하여 현실 자각과 비극적 갈등을 반영 3) 했다는 논의, 이옥은 실학자들 처럼 일관된 사상을 전개하거나 당대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고자 하는 논 의를 전개하지 않았고, 문인으로서 자신의 사유를 객관화하기보다는 주관적 의론을 통해 전개하였으며, 사( 士 )의 계층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4) 는 논의, 인생의 황혼에서 머뭇거리는 자신과 입전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회의 5) 했다는 논의, 평생 글만 쓰 면서 자신의 문체를 고수하고 일상에 침잠하여 자신을 위로하였고, 사소 한 것의 의미를 발견하고 일상적 담론을 제시하는 수필적 글을 통해 삶의 철학을 모색하여 한문학의 생활 문학화를 열어 놓았다. 6) 는 논의 등이 있 다. 이처럼 이옥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문학 작품을 통해 그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제시한 방안은 그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 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으로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를 고찰한 연구들은 이옥이 장복선을 유 협으로 인정한 사실들을 분석한 후 이옥의 인식에 동감하였다. 예를 들면 남을 돕기 위하여 공금을 쓴 것은 국법을 범한 행동인데도 장복선의 행동 을 의로운 풍모라며 찬사를 보낸 이옥이 바란 것은 재물을 가벼이 알고 의 를 중하게 여기는 풍토였다. 장복선 같은 인물을 대망( 待 望 )한 것은 민간 에서 임꺽정을 의적( 義 賊 )으로 이야기하거나 전우치가 고전 소설에서 도 술을 이용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의인( 義 人 )으로 서술된 사실과 맥락을 같 이하는 것 7) 이라는 논의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심각한 시대에 이옥은 의를 위하여 자신의 재물이나 이익 심지어는 목숨까지 버릴 수 있 는 자를 바람직한 대안으로 여겼고, 발랄한 시정의 인간 군상 속에서 의를 3) 김균태, 이옥의 문학이론과 작품세계의 연구, 서울: 창학사, 1986, 213쪽. 4) 윤기홍, 李 鈺 의 문학론과 문체연구 - < 俚 諺 引 >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13, 한 국한문학회, 1990, 252쪽. 5) 정환국, 李 鈺 의 인간학 - 傳 을 대상으로, 한국한문학연구 52, 한국한문학회, 2013, 258쪽. 6) 권순긍, 李 鈺 傳 의 시정세태 묘사와 諷 刺, 한문교육연구 23, 한국한문교육학회, 2014, 275쪽. 7) 임유경, 앞의 논문, 42~43쪽. - 6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5 실현하여 유협의 면모를 보여 준 장복선을 그에 적합한 인물로 인정하였 다. 8) 는 논의가 있다. 또한 협( 俠 )에 대한 비판과 답변을 마련하고 그에 합당한 인물로 장복선을 제시 9) 하였다는 논의가 있다. 이처럼 장복선전 은 이옥이 일반 백성을 구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한 유협 장복선의 행적 을 서술한 작품이다. 이러한 이옥의 장복선전 은 다음의 측면에서 심도 있게 논의한다면 작 품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그것의 가치를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동시대인인 안정복( 安 鼎 福, 1712~1791)은 유협을 수용할 때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경계하였다. 10) 원인이나 경과는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을 중시할 경우 유협의 가치가 주객이 전도되거나 몰이해되는 사태가 발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로운 존재로 알려진 유협은 시대적 산물 로서 당대의 정세나 작가의 의식에 따라 이해되는 방식이 달라서 그 유형 이 일률적이지 않기에 주체적 수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고는 아래의 물음을 중심으로 장복선의 행적을 분석하여 장복선전 11) 에 나타 난 유협의 특성과 이옥의 문제의식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첫째, 장복선과 관련된 기록들을 비교적 관점에서 고찰했는가. 이옥이 1795년 이전에 서울에 거주하면서 장복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창작 12) 한 장복선전 의 장복선과, 심노숭( 沈 魯 崇, 1762~1837)의 사가야화기( 四 街 夜 話 記 ) 와 정약용( 丁 若 鏞, 1762~1836)의 방친유사( 旁 親 遺 事 ) 에 등장 하는 장복상( 張 福 相 )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세 작품은 특정 인물이 평양 8) 권순긍, 앞의 논문, 291쪽. 9) 김향남, <장복선전> 연구, 한국언어문학 93, 한국언어문학회, 2015, 198쪽. 10) 옛사람들이 유협전( 遊 俠 傳 ) 을 읽으면 금방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화식전( 貨 殖 傳 ) 을 읽으면 금방 살림 경영을 하려 한다고 말한 것처럼, 참으로 신중을 기하지 않아서 는 안 될 것이 익히는 것이다( 古 人 言 讀 遊 俠 傳 便 欲 輕 生 讀 貨 殖 傳 便 欲 營 産 所 習 信 不 可 不 愼 矣.). 안정복, 순암집( 順 菴 集 ) 권5, 이사빈에게 답합( 答 李 士 賓 書 辛 巳 ). 11) 장복선전 (이하 본문 인용 시 작품명 생략)과 이옥의 이홍전( 李 泓 傳 ) 은 실시학사 고전 문학연구회가 옮긴 역주 이옥 전집 (소명출판, 2001.)의 2권(번역)과 3권(원문)을 참고 하였다. 12) 손민서, 이옥 <전> 연구 - 작가의식의 변모 양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 위논문, 2010, 21~22쪽. - 7 -

6 / 한국민족문화 57 의 공금을 유용하여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그 지역의 백성들이 구명 운동 을 벌여 극적으로 살아났고, 그의 공금 유용은 사욕을 위한 착복이 아니라 백성의 구제를 지향했다는 내용상의 공통점이 있으며, 이러한 일련의 행 적을 남긴 자의 성명이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이옥, 심노숭, 정약용이 동일인의 이야기를 견문하여 글을 지었음 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세 작품에 서술된 장복선 또는 장복상의 처지나 이 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 등은 차이를 보이는데 그에 대한 구체 적인 논의는 드문 상황이다. 13) 서술자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에 따라 인물에 대한 묘사 및 평가는 달라지기 마련이기에, 각 서술자의 시각 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때 장복선 또는 장복상과 그가 처한 상황 등을 객관 적으로 이해하고 이옥의 장복선전 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는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를 넘어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양상을 밝히는 의미도 있다. 이때 전( 傳 )은 인물의 생애를 서술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고, 기( 記 )는 특정 인물 또는 사건에 대해 보다 자유롭게 서술하는 글이며, 유사( 遺 事 )는 사건을 주목하여 기록한 글로서 세 작품은 창작 의도와 문체가 다른 만큼, 이옥의 문제의식을 파악하기 위해 심노숭과 정약용의 글은 보조 자료로 사용하고 자 한다. 둘째, 이옥이 서술한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의 특성을 파악했는가. 선행 연구들은 이옥이 사회 개혁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당대 사회의 모순에 비 판적 입장을 취했고, 고문이 지닌 전통적 격식을 거부하며 소품( 小 品 )이라 는 새로운 문체로 자신의 생각 및 느낌을 표현하여 시대에 민감하게 대응 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반면 다수의 전( 傳 )을 통해 이옥이 제시한 대안들은 다소 부적절하거나 주관적이었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장복선전 의 경우 이옥의 창작 동기를 수용하고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를 긍정적으로 평가했 을 뿐, 그것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의 특이성을 총체적으로 고찰하 13) 김향남은 <장복선전> 연구 (앞의 논문)에서 이옥의 서술 전략을 중심으로 장복선전 을 심노숭, 정약용의 글과 비교하여 논의하였는데, 이옥의 문제의식을 유협의 행위 준칙과 그의 문학적 서술의 특성의 측면에서는 분석하지 않았다. - 8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7 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면 봉건 사회의 와해로 일반 백성이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던 시기에 장복선은 구휼이라는 친사회적 행위를 하였다. 이러한 장복선을 이옥은 유협으로 추앙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였고 논자들도 그에 의 견을 같이하였다. 그렇지만 이옥의 장복선전 은 장복선의 구휼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었음을 장복선의 내적 갈등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장복선이 공금 유용이라는 자신 의 불법적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상황이나 그것을 용납하려는 작가의 시선 은, 다른 의인의 모습이나 유협전의 서술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이옥은 평양의 일반 백성, 무관 계급, 평안 감사 채제공( 蔡 濟 恭, 1720~1799) 등 이 공금 유용을 통해 구휼을 실천한 장복선을 백성을 구제하고 사회 정의 를 실현한 유협으로 인정하고 공감했다고 묘사하였다. 이는 공동체의 유 지와 발전의 측면에서 하층에서 상층까지의 연대를 의미하는데, 하층 문 인과 일반 백성의 갈망을 형상화한 여타의 유협전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연대 범주의 확장이기에 치밀한 고찰을 요구한다. 2. 장복선의 행적 비교 조선 후기는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은 기간이었다. 정치적으 로는 양반 관료 간의 당쟁이 격화되었고,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등의 경제적 변화는 신분 제도를 포함한 사회 구조의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유교는 조선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기 어 려웠다. 또한 성리학의 경직화와 실학의 위축, 서학( 西 學 )의 유행 등의 현 상이 나타났고 신분제의 동요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출현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협이다. 조선 후기의 유협은 도시 서민의 새로운 요구와 인식, 즉 신의( 信 義 ), 정의의 옹호, 자유로운 생활, 억강부약( 抑 强 扶 弱 ) 등 그 계층이 지닌 반권위적이며 수평적이고 자연법적인 윤리 의식과 이상을 구현하려 한 일종의 문제적 인간형이었다. 특히 유협이 중시한 신의를 바 - 9 -

8 / 한국민족문화 57 탕으로 한 인간적 상결( 相 結 )은 권력에 의한 수직적 명령 관계가 아닌 수 평적 관계 위에서, 주종 관계가 아닌 대등한 우( 友 )의 관계 위에서 성립되 었으며, 공적 질서인 예적( 禮 的 ) 신분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14) 이러한 유협은 상공업과 상품 화폐 경제 의 발달로 생기가 넘쳤던 시정( 市 井 )이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 때 문에 속임수가 횡행하는 각박한 곳으로 변하고 사회 질서는 와해되어 15) 혼란스러워진 사회의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1 자고로 우리나라에는 참된 유협이 없다. 2 근래에 한양에서 유협으로 이름난 구달문( 具 達 文 )이라는 사람이 있는 데, 그는 친구가 은( 銀 ) 한 봉( 封 )을 잃고 자신을 의심하자 자신이 가 져갔다며 은 한 봉을 구해 친구에게 주었다. 3 얼마 후 그 친구는 잃었다고 생각한 은을 자신의 집에서 찾고 구달문 에게 받은 은을 돌려주며 사과하였다. 그런데 구달문은 별일 아니라 며 웃어넘겨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4 경금자( 絅 錦 子 )는 구달문이 여항의 점잖은 사람이지 유협은 아니라고 평하였다. 5 채제공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평양 감영의 은고( 銀 庫 )에서 은 이천 냥이 사라지자 고지기인 장복선에게 그것을 추징하려 하였다. 그렇지 만 장복선이 가난하여 추징할 수 없자 법대로 그를 옥에 가둔 후 사형 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6 평양 사람들이 장복선이 죽게 됨을 애석히 여기고 옥바라지한다는 소 문이 들렸다. 7 채제공이 밤중에 사람을 시켜 옥중을 엿보게 하니, 마침 장복선은 관 ( 官 )의 재물을 훔쳐 사복( 私 腹 )을 채웠다는 치욕을 면하기 위해 기록 을 남겼다. 14) 박희병, 조선후기 민간의 유협숭상과 유협전의 성립, 한국고전인물전연구, 서울: 한 길사, 1992, 299~300쪽. 15) 예전 사람들은 소박하였는데 요새 사람들은 기지( 機 智 )를 숭상한다. 기지는 기교를 낳고, 기교는 간사를 낳으며, 간사는 속임수를 낳는다. 속임수가 횡행하면 또한 세도가 날로 어지러워진다( 古 之 人 朴 後 人 尙 機 機 生 巧 巧 生 詐 詐 生 騙 騙 生 而 世 道 亦 難 矣 哉.). 이홍 전, 267쪽(2권), 217쪽(3권). - 10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9 8 은고에서 사라진 이천 냥은 장복선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데 사 용한 것이었다. 9 사형을 집행하는 날 평양 사람들이 몰려와 장복선을 살려 달라며 노 래를 불렀다. 10 사람들 대열 중에 있던 장교가 장복선을 살리기 위해 은을 추렴하자 고 제안하자, 본래 은장식을 많이 하던 평안도 지방이라 금세 은 천여 냥이 모였다. 11 채제공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려 했고 장복선의 성품을 기특하 게 여겨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은 오백 냥을 내어 장복선을 도와 주어 관의 장부가 채워졌다. 12 경금자는 지방의 아전 장복선이 관의 재물을 축내어 사사로이 은혜를 베푼 것은 법적으로 사형을 당할 일이나, 재물에 인색하여 남의 어려 움을 도운 면모를 보면 그는 진정한 유협이라고 평하였다. 위와 같이 장복선전 의 경개를 정리할 수 있는데, 실재한 인물의 행적 을 사실 그대로 서술하여 교훈을 전달하려고 고심한 전( 傳 )과 달리 장복 선전 은 이옥이 장복선의 신원( 身 元 )은 간략히 서술한 반면 그가 겪은 사 건을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유협의 면모를 부각했다는 점에서 이옥의 문제 의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는 장복선의 처지, 그의 선행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이 다르게 서술된 기록들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입전 동기 우리나라는 자고로 유협이 없다. 가끔 유협이라 일컬어지던 사람은 모 두 기생방에서 떼를 지어 노닐며 몸을 검술에 맡긴 옛날 청릉계와 같은 자들이었다. 혹은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고 술을 마시며 마작이나 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어찌 참된 유협이겠는가? 16) 16) 三 韓 古 無 俠 人 其 往 往 稱 俠 者 皆 朋 遊 花 房 以 身 許 劒 若 古 靑 陵 契 者 或 不 顧 家 貲 飮 酒 業 馬 弔 者 也 是 豈 眞 俠 人 也 哉. 263쪽(2권), 216쪽(3권). - 11 -

10 / 한국민족문화 57 구달문은 여항의 점잖은 사람이지 유협은 아니다. 17) 유협에게 소중한 바는 능히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에게 잘 베풀고, 의 기를 숭상하여 남의 곤란하고 다급한 처지를 주선해 주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유협이 아니겠는가. 18) 이옥은 장복선의 행적을 바탕으로 유협의 면모를 서술하기 전에 서두에 서 일반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유협의 개념을 규명하였다. 그것은 사마천 ( 司 馬 遷, BC145~BC86)이 유협열전( 遊 俠 列 傳 ) 에서 유협을 신뢰, 과감한 행동, 성실, 자기희생, 겸손 등의 속성을 갖춘 자로 규정 19) 한 것과 유사하 다. 또한 이옥은 유협이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갖더라도, 당대에 유협으로 통용되었지만 향락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 방탕한 왈짜 20) 와는 거리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러한 이옥은 유협의 참된 의미 에 부합하는 자들이 조선에 드물기 때문에 유협이 없다고 단언하고, 구달 문처럼 여항의 장자( 長 者 )일 뿐 유협이 아닌 자가 유협으로 미화되는 세태 를 비판하면서, 유협에 적합한 인물로 장복선을 소개하였다. 실제로 조선 초기부터 유협 내지 협에 대한 인식이 존재해 왔고 21) 16세 17) 具 達 文 閭 巷 之 長 者 也 非 俠 也. 264쪽(2권), 216쪽(3권). 18) 所 貴 乎 俠 者 能 輕 財 重 施 尙 義 氣 周 困 急 而 不 望 報 斯 其 爲 俠 人 乎. 264쪽(2권), 216쪽(3권). 19) 유협의 경우 비록 그 행위가 정의에 의거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며 이미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또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 의 고난에 뛰어들어야 할 때에는 생사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 하지 않고 그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삼는다. 이 밖에도 찬미할 점이 많다 ( 今 遊 俠 其 行 雖 不 軌 於 正 義 然 其 言 必 信 其 行 必 果 已 ( 其 ) 諾 必 誠 不 愛 其 軀 赴 士 之 阨 困 既 已 存 亡 死 生 矣 而 不 矜 其 能 羞 伐 其 徳 蓋 亦 有 足 多 者 焉.). 유협들은 패를 짓고 세력을 결성 하여 축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리며 폭력으로 약한 자를 억누르거나 마음대로 쾌락을 즐기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도 세속에서는 그 진의를 모르고 주 가, 곽해 등을 포악한 무리들과 함께 취급하고 비웃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 가( 至 如 朋 黨 宗 彊 比 周 設 財 役 貧 豪 暴 侵 淩 孤 弱 恣 欲 自 快 游 俠 亦 醜 之 余 悲 世 俗 不 察 其 意 而 猥 以 朱 家 郭 解 等 令 與 暴 豪 之 徒 同 類 而 共 笑 之 也.). 사기( 史 記 ) 권124, 유협열전( 游 俠 列 傳 ). 20) 이태화, 조선후기 왈자 집단의 구성과 성격, 한국학연구 22,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 소, 2005, 188쪽. 21) 황상은 젊어서부터 아첨하느라고 듣기 좋게 꾸미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낯빛으로 사 - 12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11 기 이후 문학적으로 형상화 22) 되어 왔지만, 유협에 관한 의미 및 인식은 모호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천차만별이어서, 나름의 신념과 가치를 지향 하여 일반 백성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유협의 구체적 면모를 정립하는 것 이 필요했다. 즉 이옥은 항간에서 유행하는 유협은 백성을 구제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참된 유협과 거리가 있었기에, 진정한 유협의 행적을 통 해 유협의 진상( 眞 相 )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당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하려 한 것이다. 장복선 같은 자야말로 정말 유협이 아니겠는가? 그가 관의 재물을 축 내면서 사사로이 은혜를 판 것은 법에 있어서 마땅히 사형을 당할 일이 다. 그러나 만약에 장복선이 집에 쌓인 재산이 있었던들 어찌 관의 재물 을 훔쳐 나라의 법을 범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격이 무디고 옹 졸할 뿐만 아니라 재물에 인색하여 남의 어려움을 잘 돕는 것으로 이름 난 자가 드물다. 장복선은 지방의 일개 말단 아전이었지만 넉넉히 옛 대 협( 大 俠 )의 유풍( 遺 風 )을 지녔다. 23) 또한 이옥은 논찬 부분에서 궁핍하였지만 백성을 구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한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를 거듭 강조하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장복 선의 행위는 구휼이라는 목적과 공금 유용이라는 방법 양 측면을 고려하 여 판단해야 할 문제인데, 후자보다는 전자를 주목하고 장복선을 입전한 동기를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이옥을 포함하여 장복선을 유협으 로 칭송한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의로운 마음을 갈망했는지를 짐작 람들에게 좋게 보여 왔고, 교만하고 음탕한 행동을 방자히 행하여 유협( 遊 俠 )의 명칭을 얻었다( 黃 象 爰 自 小 時 巧 言 令 色 服 美 于 人 恣 驕 淫 之 行 得 遊 俠 之 名.). 世 宗 實 錄 卷 42, 世 宗 10 年 10 月 戊 戌 (20 日 ) 4번째 기사.; 이영( 李 榮 )은 본디 호협( 豪 俠 )하다고 일컬으나 별로 쓸 만한 것이 없는 재목입니다( 李 榮 素 以 豪 俠 稱 別 無 可 用 之 材.). 成 宗 實 錄 卷 81, 成 宗 8 年 6 月 丁 酉 (2 日 ) 2번째 기사. 22) 박혜순, 협전( 俠 傳 )의 초기적 형태로서의 <장생전( 蔣 生 傳 )> 연구, 어문논집 60, 민 족어문학회, 2009, 13~15쪽. 23) 若 福 先 者 眞 俠 人 乎 其 爲 鼠 於 官 市 恩 於 私 者 在 法 固 當 刑 而 若 使 福 先 家 而 有 積 金 則 亦 豈 盜 官 藏 干 國 律 乎 東 人 性 愿 拙 且 儉 於 財 鮮 有 以 周 急 名 者 而 福 先 以 外 邑 一 小 吏 綽 然 有 古 大 俠 餘 風. 267쪽(2권), 217쪽(3권). - 13 -

12 / 한국민족문화 57 할 수 있다. 비가 조금 내려 장경문( 長 慶 門 ) 사가참( 四 街 站 )에서 머물렀는데 이 성 사람으로 나와 친한 이들이 술병을 들고 왔다. (중략) 장복상은 대동문 ( 大 同 門 )에 거하였는데 기녀 둘이 번갈아 음식을 차려 주고 계절마다 옷 을 지어 주니 굶주림과 추위를 근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그만 배를 사 서 강호 간을 왕래하며 낚시로 자오( 自 娛 )하였다. 24) 동지공( 同 知 公 )은 참의공( 參 議 公 )의 서자( 庶 子 )인데 뜻이 크고 남다른 기개가 있어 젊었을 때에는 호협( 豪 俠 )을 일삼았다. (중략) 한마을에 사 는 여러 친척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공은 온 마음을 다하여 급 한 이를 도와주었는데, 비록 이러한 일이 자주 있어도 싫어하지 않았다. 공이 돌아간 뒤에도 공의 아들이 그 부인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행 하였으니, 모두가 공의 덕이 길러 놓은 것이다. 25) 반면 심노숭은 장복상을 비가 오는 날에 자신이 지인과 함께 술을 마시 며 나누는 한담 속에 등장하는 풍류적 인물 정도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정 약용도 동지공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방친유사 를 지었기에, 장복상을 동 지공의 독특한 행적과 호협한 기질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부수적인 인물 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사가야화기 와 방친유사 에 서술된 장복상의 행 적을 통해 이옥이 주목한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 내지 유협의 참모습을 온 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24) 小 雨 留 長 慶 門 四 街 站 城 中 人 與 余 親 者 具 壺 觴 來. (중략) 福 相 居 大 同 門 妓 二 人 輪 日 備 食 遞 節 授 衣 不 以 憂 飢 寒 買 小 舟 往 來 江 湖 間 釣 魚 自 娛. 심노숭, 사가야화기( 四 街 夜 話 記 ), 김영진 옮김, 눈물이란 무엇인가, 서울: 태학사, 2002, 65쪽(원문 247쪽), 68쪽(원문 248쪽) (이하 서명 생략). 25) 同 知 公 參 議 公 之 庶 子 也 倜 儻 多 奇 氣 少 任 俠. (중략) 里 中 諸 宗 族 多 貧 窶 公 盡 心 周 急 雖 數 不 厭 公 旣 沒 公 之 胤 子 與 冢 婦 人 紹 而 行 之 皆 公 之 德 有 以 孚 也. 정약용, 다산시문집( 茶 山 詩 文 集 ) 권17, 방친유사( 旁 親 遺 事 ) (이하 서명 생략). - 14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13 2) 장복선의 처지 장복선이라는 사람은 평양 감영의 은고를 맡아보는 고지기였다. 지금 판서로 있는 채제공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은고를 조사했더니 없어진 은 이 무릇 이천 냥이나 되었다. 복선의 집이 본래 가난하여 그것을 추징할 수 없어서 법대로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26) 장복상은 평양부 사람으로 어려서 가난하여 남의 품팔이를 하다가 장 성하여 부( 府 )의 노비로 편입되었다. 부에서는 으레 노비로 창고를 관리 하게 했는데, 그를 그곳 방언으로 고자( 庫 子 )라고 하였다. 여러 노비가 복상만 못하여 그에게 대고( 大 庫 )의 직책이 주어졌다. 복상은 사람이 아 주 강개하였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복상은 부의 기녀 여러 명을 거느 리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각각 한 달에 하나씩 큰 독에 술을 빚으면 그는 무리들과 모여 마셔 하루에 끝장을 내었다. 그리하여 돈이 없어 술을 못 마시는 자는 복상에게 달려가 취하곤 하였다. 복상은 천류고( 泉 流 庫 )를 관리하면서 수십 년 동안 남용해 왔는데 관찰사가 그것을 적발하여 장차 그 감수한 바를 대조해 보고 도율( 盜 律 )로 사형시키고자 하였다. (중략) 관찰사가 복상의 죄를 용서하여 주고는 그를 불러 이렇게 된 까닭을 물 으니 복상이 대답하기를 쇤네에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 만 재물을 아끼지 않았고 남의 어려움을 보면 꼭 구하였을 뿐입니다. 라 고 하였다. 관찰사가 혀를 차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27) [동지공이] 그[채제공]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을 때 장복상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공은( 公 銀 ) 1만 냥을 축내었다. 장복상은 마땅히 사형감이 었으나 성격이 호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기에 서도( 西 道 ) 백성들이 다 투어 저마다 그의 죄를 대신 받으려고 하였다. 28) 26) 張 福 先 者 平 壤 觀 察 營 之 主 銀 庫 庫 子 也 今 尙 書 蔡 公 濟 恭 之 按 營 也 覆 其 庫 所 乾 沒 銀 凡 二 千 兩 家 素 貧 無 以 爲 徵 法 當 斬. 264~265쪽(2권), 216쪽(3권). 27) 福 相 平 壤 府 人 少 貧 爲 人 賃 旣 壯 屬 府 中 奴 籍 府 例 以 奴 管 庫 方 言 稱 庫 子 諸 奴 視 福 相 不 及 以 大 庫 授 之 福 相 爲 人 慷 慨 好 施 與 畜 府 妓 數 人 人 各 釀 一 月 一 大 甕 聚 其 徒 飮 一 日 盡 之 人 有 不 得 飮 者 赴 福 相 醉 福 相 管 泉 流 數 十 年 爛 用 觀 察 使 發 其 奸 將 照 監 守 自 盜 律 斬 之. (중 략) 觀 察 使 贖 福 相 死 召 福 相 問 所 以 得 此 對 曰 小 人 無 他 術 但 臨 財 不 愛 見 難 必 救 觀 察 使 嘖 嘖 以 爲 難. 사가야화기, 66쪽(원문 247쪽), 68쪽(원문 248쪽). - 15 -

14 / 한국민족문화 57 장복선을 다룬 세 편의 글은 장복선이 유용한 공금의 금액과 사형이 선 고된 이유의 측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금액의 경우 그와 관련된 이 야기가 구전되면서 변모된 결과로서 그의 행적을 논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 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반면 사형이 선고된 이유의 측면에서 장복 선전 과 사가야화기 에서 서술된 장복선이 어린 시절에 빈곤했다는 사 실은 중요하다. 또한 장복선이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는 사실을 사 가야화기 와 방친유사 에서 확인할 수 있고, 장복선전 의 후반부에서 은고에서 사라진 이천 냥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데 사용되었다는 묘 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즉 곤궁을 면치 못한 삶 을 살았던 장복선은 장성하여 생활적으로 자립하여 살면서 빈곤에 시달리 는 사람들을 정신적ㆍ물질적으로 도와주며 산 인물이다. 이러한 장복선의 구휼이 사형이라는 판결이 내려질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장복선 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때 국고에 보관되어 있던 공금을 유용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장복선전 에서는 사가야화기 와 방친유사 와 달리 장복선에 게 사형이 선고된 이유가 당시에 그가 추징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였기 때 문이라고 추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기녀 및 동류와 술을 마신 장복 상의 모습을 통해 풍류적 요소 29) 를 보여 준 사가야화기 나 방친과 관련 된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장복상의 일화를 간략히 서술한 방친유사 와는 다른 내용이다. 즉 이옥의 서술은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장복선이 궁핍한 상황에서도 구휼을 실천했다는 사실과, 곤궁했 기 때문에 구휼하기 위해 공금을 유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통해 그의 자기희생과 과감한 행동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이처럼 극적 요소를 바 탕으로 장복선의 베풀기 좋아하는 성격을 부각한 것은, 개연성을 높이고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를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 고 기대감을 상승시키는 데 일조한다. 28) 又 隨 至 平 壤 有 張 福 尙 者 欠 公 銀 萬 兩 當 死 而 福 尙 任 俠 樂 施 西 民 爭 欲 百 身 以 贖 之. 방친유사. 29) 김향남, 앞의 논문, 196쪽. - 16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15 3) 장복선의 구휼 및 연대 내가 죽는 것은 진실로 애석하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죽은 뒤에 혹 관의 재물을 훔쳐 내 배를 채웠다는 말이 있게 되면 또한 대장부의 치욕 이 될 것이다. 내 이제 기록 하나를 남겨 증거를 삼겠다. 30) 아무가 초상에 가난해서 염도 못하고 있을 때 내가 은 몇 냥을 주었으 며, 아무의 장사에 내가 은 몇 냥을 주었다. 내가 주관하여 아무 처녀를 시집보내고, 아무 총각을 장가들일 때 몇 냥의 은을 썼고, 모씨의 환자 ( 還 子 )와 아무 아전의 포흠( 逋 欠 )을 갚아 주는 데 모두 내가 마련한 은 몇 냥이 들었다. 다 적고 나서 셈해 보니 모두 이천 냥이 넘었다. 31) 장복선이 공금을 유용하여 실천한 구휼은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첫째, 장복선 스스로가 자신이 실천한 구휼에 대해 사회적 준칙과 개인적 준칙 사이에서 갈등했다. 장복선전 에서 사형이 선고된 직후까지 장복선은 자 신의 의도와 행위를 백성의 구제와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이 해하되 다른 요인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는 평안 감사 채제공이 장복선 을 옥에 가두고 다음 날 형을 집행하려고 한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평 양 사람들이 장복선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앞다투어 그를 옥바라지한 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채제공은 사람을 시켜 옥중을 엿보게 하였는데, 죽 음을 앞둔 장복선은 옥중에서 평소처럼 사람들과 태연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장복선이 그동안 자신의 신념을 실천해 온 만큼 사 형이 집행되더라도 후회가 없음을 암시한다. 유협전이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장복선은 유협이 라 칭할 만하다. 그렇지만 옥중에서 장복선은 자신이 사망한 이후 공금을 유용한 사실을 30) 我 固 死 不 惜 恐 我 死 後 或 疑 我 盜 官 藏 以 自 肥 不 亦 耻 丈 夫 我 且 留 下 一 錄 以 作 契. 265쪽(2 권), 216쪽(3권). 31) 某 之 喪 貧 不 能 斂 我 贈 銀 幾 兩 某 之 葬 我 贈 銀 幾 兩 我 之 嫁 某 娘 冠 某 甲 費 幾 兩 銀 某 之 糴 某 吏 之 徵 逋 皆 我 銀 幾 兩 題 畢 而 會 之 二 千 有 贏. 265쪽(2권), 216쪽(3권). - 17 -

16 / 한국민족문화 57 사람들이 오해하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잘못 인식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자신이 한 일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 이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하되 그것을 자랑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유협의 면모와는 거리가 먼 인간적인 내면적 갈등이다. 이러한 사념( 思 念 )은 장복선 스스로가 공금을 유용한 구휼은 목적의 측면에서는 친사회적일 수 있으나 방법의 측면에서 는 반사회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타의 유협이나 의인의 모습 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예를 들면 유협의 행적을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받는 정래교( 鄭 來 橋, 1681~1759)의 임준 원전( 林 俊 元 傳 ) 에서, 임준원(?~1697)이 곤경에 빠진 여인의 빚을 갚아 주고 그녀에게 모욕을 준 젊은이와 관리를 꾸짖은 장면의 경우, 임준원은 자신의 준칙을 따른 것에 대해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당당했다. 임준원이 일찍이 육조 거리를 걸어서 지나가는데, 어떤 여인이 관리에 게 끌려가고 있었다. 또한 성질이 고약하고 못된 짓을 하는 젊은이 하나 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그녀를 욕보여, 그녀는 소리 내어 울며 매우 슬 퍼했다. 임준원이 그 까닭을 묻고는, 적은 빚 때문에 여인을 이처럼 욕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라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여인의 빚을 갚아 주고는 차용증을 찢은 후 갈 길을 갔다. 여인은 임준원 을 따라가 공은 어떤 분이시며, 어디에 사시는지요? 라고 물었다. 임준 원은 예법에 남녀는 길이 다르다고 했소. 그런데 어찌 내 이름을 묻는 것이오? 라고 답하였다. 여인이 계속 물었지만 임준원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준원의 이름이 여염 간에 알려졌다. 그의 성격을 사 모하고 얼굴 보기를 원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그 집에 모여들었다. 32) 게다가 사가야화기 에서는 장복상이 공금을 유용하여 구휼이라는 목적 을 달성한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대목이 있는데, 장복선전 에는 석방된 32) 俊 元 嘗 步 過 六 曹 街 上, 有 一 女 子 被 官 人 驅 去. 一 惡 少 背 隨 詬 之, 女 號 哭 甚 哀. 俊 元 問 其 故, 叱 曰 可 以 微 債 辱 女 人 至 此 耶. 立 償 之 裂 其 券 遂 去. 女 隨 而 問 曰 公 何 如 人 家 安 在. 子 昭 曰 禮 男 女 異 路 何 必 問 我 姓 名. 強 之 終 不 告. 自 是 子 昭 名 震 閭 閻. 慕 風 願 識 者 跡 交 其 門. 정래 교, 완암집( 浣 巖 集 ) 권4, 임준원전( 林 俊 元 傳 ); 정래교, 임준원, 허경진 옮김, 조선 평민 열전, 서울: 알마, 2014, 53쪽. - 18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17 장복선의 행방에 대한 서술이 없기에 주목을 요한다. 또한 장복상이 반성 하기 전과 후의 모습을 일괄적으로 고려하면 사가야화기 의 장복상은 야 화( 夜 話 )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밤에 모여 나누는 가볍고 풍류적인 이 야기의 주인공일 뿐 유협이라고 평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사람이 나서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나랏돈을 쓴 죄는 죽어 마땅하나 수십 년 동안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하였으니 지금 죽어도 유 감이 없다. 33) 내 죄는 죽어 마땅하나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죽지 않았으니, 이제 다시 예전 일을 하여 죄를 더해 거듭 여러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 다. 34) 그동안 함께 지낸 기녀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장복상은 석방되 어 죽음을 면하게 된 후 고지기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 신의 구휼이 잘못된 실천이었음을 뉘우친다. 이는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그가 함께 어울려 놀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보여 준 정정당당한 모습 과 상충된다. 유협은 국가 질서인 사회적 준칙을 따르기보다는 유협 개인 의 준칙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인다. 35) 그런데 장복선전 에서 장복선은 죽음을 앞두고 사회적 준칙인 법률을 지키는 것과 개인적 준칙인 의리의 실천 사이에서 인간적인 심리적 갈등을 겪었고, 사가야화기 에서 장복상 은 죽음을 면한 후 개인적 준칙과 사회적 준칙의 혼란 속에서 결국 후자를 따랐다. 이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따른 장복선을 유협으로 인정하되 그 의 인간적 면모를 극적으로 서사화 한 이옥과, 장복상의 행적을 사실적으 로 서술하면서 그를 유협으로 인정하기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등 33) 人 生 一 死 等 耳 吾 用 公 貨 罪 當 死 數 十 年 行 吾 所 欲 至 今 死 無 憾. 사가야화기, 66~67쪽 (원문 247쪽). 34) 吾 罪 當 死 賴 諸 公 援 不 死 從 此 不 復 爲 舊 役 以 益 罪 重 煩 諸 公. 사가야화기, 68쪽(원문 248쪽). 35) 정현선, 친사회적 행위로서의 俠 과 義, 중국인문과학 54, 중국인문학회, 2013, 257쪽. - 19 -

18 / 한국민족문화 57 장하는 일상적이고 풍류적인 인물 정도로 인식한 심노숭의 의식의 차이에 서 비롯된 것이다. 36) 둘째, 각 기록의 서술자는 장복선 또는 장복상을 위한 구명 운동에는 공 감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주체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하였다. 장복선이 도와준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장복선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위를 공금 유용보다는 구휼의 측면으로 이해하고 장복선의 선처( 善 處 )를 바라는 노래 를 불렀다. 옥바라지와 노래에 이어 장복선을 살려 달라고 호소한 일반 백 성의 일련의 구명 운동은 장복선과 평양 사람들의 정서적 연대( 連 帶 )를 의 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준법이라는 원칙을 중시하는 공적 질서와 구휼 및 그 수혜를 중시하는 민간 질서의 대립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대립으로 극 적 긴장감이 감돌던 형장의 분위기는 각기 다른 주체에 의해 고조되었다.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대열 중에 있던 장교가 커다란 버들상자를 땅에 던지며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은 장복선이 죽는 날입니다. 그를 살리고 싶은 분들은 여기에 은을 추렴하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평안도 지방 은 본래 은이 많고 풍속 또한 사치스런 곳이라 은장식을 하지 않은 사람 이 거의 없었다. 이에 은장도나 은비녀 혹은 부녀자의 은가락지, 은노리 개 등을 던지니 마치 눈이 내리듯 분분하였다. 잠깐 사이에 은이 너덧 상 자를 채웠는데, 아전이 그것을 달아 보니 벌써 천여 냥이 되었다. 37) 성 안의 남녀가 물결처럼 물려들어 사또님, 사또님, 우리 장복상을 살려주오. 라고 노래하면서 여자들은 귀걸이와 가락지를, 남자들은 관잠 ( 冠 簪 )과 허리띠 장식을 내놓으니 아침부터 정오까지 이미 장복상이 횡 36) 심노숭은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정직하게 기록하였고 개인의 내밀한 욕망, 주관적 기호, 취향 등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토로하는 글쓰기를 지향했다는 정우봉(2013)의 논의를 수 용하여, 유협이라는 관념을 실체화하기 위해 장복선의 행적을 서사화 내지 극화( 劇 化 )한 이옥의 서술보다는 심노숭의 서술이 사실적임을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정우봉, 沈 魯 崇 의 < 南 遷 日 錄 >에 나타난 내면고백과 소통의 글쓰기, 한국한문학연구 52, 한국한 문학회, 2013, 293쪽 참고. 37) 歌 未 竟 將 校 之 在 列 者 擲 大 柳 簏 於 地 揚 于 衆 曰 今 日 卽 張 福 先 且 死 日 也 如 有 願 贖 者 醵 白 金 於 此 關 西 素 饒 銀 俗 且 夸 尠 無 以 銀 飾 者 於 是 或 刀 或 簪 婦 女 之 或 指 環 或 釵 或 雜 佩 之 屬 紛 紛 然 下 如 雪 頃 刻 而 以 簏 量 者 四 五 吏 秤 之 爲 銀 已 千 餘 兩. 266쪽(2권), 217쪽(3권). - 20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19 령한 액수만큼 되었고, 감영에 나가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38) 동지공이 장복상을 위해 주장[채제공]에게 고하여 자기의 봉급을 모두 털어 그것을 보상케 했으나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자 서인( 西 人 )들이 다 투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칼자루를 장식한 테두리를 떼어 내놓았고, 아 녀자들도 가락지를 벗어서 던져 주었다. 잠깐 사이에 은( 銀 )이 모자라는 양만큼 채워져서 장복상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공의] 성명이 벼슬아치들 사이에 알려져서, 무릇 안절사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다투어 공을 보조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39) 먼저 사가야화기 에서는 평양의 백성들이 노래하며 자발적으로 추렴하 는 과정에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다다랐다면, 방친유사 에서는 호협( 豪 俠 ) 을 일삼은 동지공이 봉급을 헌납하여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리고 장복 선전 에서는 조선 시대에 각 군영이나 지방 관아의 군무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아치인 장교( 將 校 )가 추렴을 제안하여 분위기가 한껏 고양되었다. 방 친유사 의 경우 정약용이 동지공의 호협한 기질을 강조하기 위해 서술한 글로서 부수적 인물인 장복상의 행적은 소략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에 장복 상과 관련된 정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비장( 裨 將 ) 40) 이었던 동지공이 장복상을 구하기 위해 솔선수범한 사실은 장복상과 백성 과의 연대에 무관( 武 官 ) 계층이 포함되었음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장 복선전 도 방친유사 의 비장처럼 장교의 제안으로 백성들이 추렴했다는 서술은 장복선과 백성과의 연대에 무관 계층이 포함되었음을 뜻한다. 세 작품은 장복선 또는 장복상과 백성들이 연대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나, 주체와 연대의 범주의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장복선전 과 방친유사 는 백성이 아닌 무관이 추렴을 제안하였기에 백성의 자발적 참여의 측면 38) 城 中 士 女 奔 走 如 波 爲 之 謠 曰 使 爺 使 爺 願 活 張 福 相 婦 人 出 珥 環 男 子 出 簪 佩 自 平 旦 至 日 午 已 準 福 相 所 欠 數 詣 營 請 納. 사가야화기, 67쪽(원문 248쪽). 39) 公 爲 之 告 主 將 竭 俸 錢 以 償 之 尙 未 滿 西 人 爭 解 佩 刀 摘 其 櫑 釦 其 婦 女 脫 戒 指 擲 之 頃 刻 而 銀 相 當 福 尙 遂 得 活 以 故 聲 重 搢 紳 間 凡 按 節 出 外 者 爭 得 公 以 爲 助 也. 방친유사. 40) [동지공은] 일찍이 번옹( 樊 翁 )을 따라 비장( 裨 將 )이 되어 함흥( 咸 興 )의 막하에 이르러 여 러 관부를 순행( 巡 行 )하게 되었다( 嘗 隨 樊 翁 爲 裨 將 赴 咸 興 幕 下 巡 行 諸 府.). 방친유사. - 21 -

20 / 한국민족문화 57 에서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장복선 또는 장복상과 백성의 연대에 무관 계 층이 포함되었다는 점은, 장복상을 한담( 閑 談 )에 등장하는 풍류적 인물로 바라본 사가야화기 에 비해 연대 범주의 확장을 지향한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채제공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고 또 장복선의 인간됨을 기특하 게 여겨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은 오백 냥을 내어서 도와주었다. 그 이튿날로 관의 장부가 채워졌음을 알려 왔다. 41) 관찰사가 장복상의 죄를 용서하고는 그를 불러 이렇게 된 까닭을 물으 니 장복상이 쇤네에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만 재물을 아 끼지 않았고 남의 어려움을 보면 꼭 구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 다. 관찰사가 혀를 차며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42) 게다가 장복선전 은 장복선과의 연대 범주가 무관을 포함하여 상층이 자 공적 질서의 수호자인 평안 감사 채제공까지 확장된 것이 특징적이다. 채제공은 장복선을 기특하게 여겨 석방한 동시에 그를 돕기 위해 몸소 많 은 돈을 냈다. 장복선전 은 장복선이 사형을 선고받은 후 석방되어 죽음 을 면하기까지의 과정이 두 글에 비해 비교적 극적이고 상세하게 묘사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대의 범주가 하층에서 상층까지 확장되어 있으며 장복선의 구휼에 대한 상층의 긍정적 시선이 현저히 드러난다. 장복선의 구휼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유사한 반응은 그들이 민중적 질서의 승리라 는 이념을 공유하는 이념 공동체를 형성했음을 암시한다. 이는 작가 이옥 이 주변 인물의 반응을 통해 장복선의 구휼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장복 선이 하늘을 대신하여 시비를 가리고 정의를 실현해 주기를 갈망한 일반 백성의 염원을 실현한 유협임을 역설하고자 했음을 뜻한다. 나아가 장복 선이 공금을 유용하여 구휼한 것을 하층부터 상층까지 지지하고 의로운 41) 尙 書 從 民 欲 且 奇 其 人 命 原 之 出 五 百 銀 助 之 翌 日 而 官 薄 告 充. 266쪽(2권), 217쪽(3권). 42) 觀 察 使 贖 福 相 死 召 福 相 問 所 以 得 此 對 曰 小 人 無 他 術 但 臨 財 不 愛 見 難 必 救 觀 察 使 嘖 嘖 以 爲 難. 사가야화기, 68쪽(원문 248쪽). - 22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21 행위로 공감하기를 기대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 글은 평안 감사 채제 공이라는 상층 인물이 여론을 수용하여 장복선 또는 장복상을 석방한 사 실은 공통적이나, 장복선을 기특하게 여기고 직접 원조한 사실은 장복선 전 에서만 나타난다. 사가야화기 에서 관찰사가 언급한 것처럼 장복상의 행위는 개인이 실행하기도 어렵지만 공정하게 판결하기도 어려운 문제이 기에 다양한 입장에서 숙고하고 협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옥은 연 대 범주의 확장을 기조로 삼고 역사적 진실에 작가 나름대로 채제공의 원 조라는 서사적 진실을 추가한 것이다. 3. 장복선의 형상화와 이옥의 문제의식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작가 이옥은 장복선전 을 통해 인간적인 내적 갈등을 겪은 장복선이 일반 백성을 구휼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했다고 판 단하고 그를 진정한 유협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정해진 운명에서 자유로 울 수 없었던 소외된 백성들과,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타고난 기질에 순 응하여 그들을 도와준 장복선, 그리고 장복선을 원조한 채제공 등의 연대 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이옥의 문제의식은 백성 개개인이 처한 고된 상황 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혼란스러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 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이옥의 장복선전 은 장복선 이 보여 준 유협의 면모의 특성을 유협의 행위 준칙 그리고 상층과의 합의 및 연대의 측면에서 재해석한다면 작품의 가치를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이옥은 유협 본연의 의미에 부합하는 자들이 조선에 드물기 때문 에 유협이 없다고 단언하였는데, 장복선은 유협의 행위 준칙을 따랐는가. 장복선은 후대가 공금을 사용한 구휼 활동을 사리사욕을 위한 행위로 그 릇 해석할 것을 염려하여 구휼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여 근거를 남겼다. 그 기록은 유협과 관련된 여타의 기록과 달리 구휼의 수혜자들을 자세히 언 급하여 백성 개개인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일반 - 23 -

22 / 한국민족문화 57 백성이 어느 시기에 또는 어떤 이유로 곤궁하여 원조가 필요했는지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을 작성한 장복선의 마음가짐 은, 국가 질서인 사회적 준칙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준칙을 중시하는 성 향을 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실천하되 공덕을 자랑하 거나 내세우지 않으며 근심하지 않는 유협의 행위 준칙이나 의인의 언행 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장복선을 유협으로 입전한 작가 이옥도 장복선이 관의 재물을 축내어 사사로이 은혜를 베푼 것은 법적으로 마땅히 사형당 할 일이라고 서술하여, 장복선의 공금을 유용한 구휼이 문제적임을 자인 하였는데, 이러한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과 작가의 논찬은 유협전의 일반 적 서술과는 거리가 있다. 이옥은 민간 질서를 근간으로 장복선의 구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도 준법이라는 공적 질서를 준거로 장복선의 구휼을 판단하고 그것의 한 계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진 것인데, 이러한 심리 상태는 장복선 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현 상을 세심히 관찰하고 철저히 묘사한 이옥은 사건의 현실적 구체성을 확 보하고 인간적인 내적 갈등이라는 진솔한 정서를 기록하여 삶에 대한 인 간적 이해가 필수적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의 유한성에 대 해 고민하고 회의한 장복선을 통해, 유협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는 인간적으로 부단히 고뇌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여타 유협전에 등장 하는 인물들 내지 그들의 유협적 면모에 대한 성찰을 제안한 것이다. 여기 에서 고문( 古 文 )처럼 효용과 교화를 앞세우며 지나치게 형평의 올바른 것 을 추구하여 실상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인간적 이해 속에서 삶의 참다운 모습을 찾는 글의 가치를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본래 모습 즉 세태 의 흐름 속에서 기로에 선 인간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가야화기 에 서술된 장복상의 수감 전의 모습과 석방 후의 그것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겠다는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의 측면에서 규율을 어겼다고 자각하고 내적으로 - 24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23 갈등한 것은, 민중적 질서에서 추구하는 목적과 공적 질서가 중시하는 법 적 수단 간의 괴리에 대한 심각한 인식 내지 가치관의 혼란을 뜻한다. 이 와 동일한 맥락에서 유협의 신념을 실천한 장복선과 그를 서술한 이옥이 목적과 수단의 불일치를 염려하고 심리적으로 갈등했다는 것은, 백성의 구휼과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유협의 목적 달성을 가로막는 현실의 장 벽이 높고 견고했고, 그만큼 장복선이 공금을 유용하여 베푼 선행은 파격 적이고 문제적이었음을 시사한다. 둘째, 이옥이 장복선의 구휼 및 구명과 관련하여 평안 감사를 포함한 상 층과의 합의를 통한 연대를 모색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옥은 장복선전 을 통해 관가의 재물을 유용해야만 구휼할 수 있는 안타까운 사회적 현실 을 드러내었다. 장복선의 공금을 유용한 구휼은 그의 사회적 위치에서 벗 어난 선행으로 상층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보다는 상층이 비난할 만한 허 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장복선의 선행은 상층에 백성의 질곡을 알리기 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백성의 고충을 헤아린 장복선의 마음가짐과 실천 을 통해 상층에 교훈을 줄 수 있다. 지배층인 양반들이 그들의 신분적 위 치와 역할을 망각한 결과 백성의 비극이 일어났다면, 장복선이 공금을 유 용하여 구휼할 수밖에 없는 구실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상층이며, 지방 의 아전인 장복선이 공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것은 지배층의 무책 임성과 부도덕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피지배층의 도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옥은 상층이자 공적 질서의 수호자인 평안 감사 채제공이 장 복선을 기특하게 여기고 원조했다는 서술을 통해 민중적 질서를 추구한 동시에 그에 대한 상층과의 합의를 전제하였다. 이는 백성의 구휼과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민중적 목적의 달성은 상층을 포함한 전( 全 ) 계층의 소 통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또한 생동감과 탄력성을 상실하여 원활한 소통 과는 거리가 먼 당대 사회의 번거롭고 허위적인 예교와 윤리, 인성의 불합 리 등 낡은 가치 체계와 제도, 사회의식의 교정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적 문제 내지 갈등은 사회 구성원들이 원활히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하여 합 의할 때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한다. - 25 -

24 / 한국민족문화 57 예를 들어 이옥은 신병사전( 申 兵 使 傳 ) 을 통해 인간인 이생과 귀신인 신병사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상호 신뢰하고 원활하게 소통하 여, 명( 明 )과 유( 幽 )가 운동하며 변화하는 통일체인 천지의 구성원으로 서 로 유별( 有 別 )하지만 공경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명과 유는 서로 달라서 서로를 부정( 否 定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상호성( 相 互 性 )의 관계에 있기에 서로 자신의 본성을 명확히 하면서 상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43) 이처럼 이옥은 장복선과 평양 사람들이 처한 정황을 묘사하여 일상성과 개별성을 확보하고, 그들이 처 한 상황의 개선에 대해 하층부터 상층까지의 인간적 이해와 합의를 제안 하여, 개개인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연대하여 조화를 추구하 기를 바란 것이다. 이와 같이 이옥은 공금을 유용한 구휼이라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 준 아 전 장복선이 사회적 준칙과 개인적 준칙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유협의 인간적 면모와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단면을 그리고 일반 백성의 삶의 질곡을 야기하는 현실적 장벽이 높고 견고함을 드러내었다. 또한 평안 감사 채제공이 장복선을 기특하게 여기고 원조한 서사적 진실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각계각층이 합의하고 연 대해야 함을 제안하였다. 사회에서 개인으로 시선을 옮겨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개별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이옥은, 사회적 관계와 보편성을 고려하여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개개인의 존재와 역할을 치밀하게 고민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민중적 시각에서 개개인이 서로를 동등한 개체로 존중하고 연대해야 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 는 존재인 각자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성원들 과 조화를 이룰 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인간 성과 사회성의 발견은 곧 관계의 발견으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된 갈등과 고립 속에 있게 된다. 갈등과 고립 상태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43) 정인혁, < 申 兵 使 傳 >의 敍 事 的 葛 藤 構 造 硏 究, 어문연구 40-4, 한국어문교육연구 회, 2012, 184쪽ㆍ190쪽ㆍ193쪽 참고. - 26 -

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25 인간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는 이질성 및 다 양성의 증대 속에서의 원활한 소통과 진정한 연대의 추구의 토대는 인간 적 이해임을 말한다. 4. 나가며 이옥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문학 작품을 통해 그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제시한 방안은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 가 있었다. 그리고 이옥이 공금을 유용하여 백성을 구휼한 장복선을 유협 으로 입전한 장복선전 은, 유협의 보편적 개념을 근간으로 이의 없이 수 용되었다. 그런데 일반 백성을 구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유협은 시 대적 산물로서 당대의 정세나 작가의 의식에 따라 이해되는 방식이 달라 서 그 유형이 일률적이지 않은 것처럼, 장복선전 도 당대의 사회 현실과 작가 이옥의 염원 및 상상력이 결합된 작품으로 여타의 유협전과는 구별 되는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본고는 이러한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장복 선전 에 나타난 장복선의 행적을, 심노숭의 사가야화기 와 정약용의 방 친유사 에 묘사된 장복상의 행적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장복선이 보여 준 유협적 면모의 특성을 재조명하여 그것의 의미를 밝히고, 장복선전 의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요인을 증명하였다. 우선 세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궁핍했지만 베풀기를 좋아했던 장복선 또 는 장복상이 공금 유용이라는 자기희생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 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장복선전 은 장복선을 백성을 구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한 유협으로 칭송한 반면, 사가야화기 는 장복상을 밤에 모여 나누는 가벼운 이야깃거리에 등장하는 인물 정도 로, 방친유사 는 장복상을 동지공의 유협적 면모를 전하는 이야기에 등 장하는 부수적 인물로 묘사하였다. 이처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세 가지 의 서사적 진실로 서술된 것은, 이옥ㆍ심노숭ㆍ정약용 세 작가의 문제의식 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27 -

26 / 한국민족문화 57 다음으로 장복선전 에 나타난 장복선의 유협적 면모의 특성을 밝히기 위해서, 다음의 두 관점을 중심으로 세 작품에 서술된 장복선의 행적의 공 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였다. 첫째, 유협의 행위 준칙의 준수 여부를 중심 으로 장복선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장복선은 사회적 준칙보다 개 인의 준칙을 당당히 따르는 여타의 유협 내지 의인과는 달리, 구휼이라는 목적과 공금 유용이라는 수단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갈등했음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옥이 장복선을 유협으로 인정한 동시에 유협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인간적 갈등을 부각하여 보편적 인 인간의 삶의 단면을 보여 주고자 했으며, 백성의 삶의 질곡을 야기하는 당대 현실의 장벽이 높고 견고함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추론하였다. 둘째, 세 작품은 평안 감사 채제공이 장복선의 구휼을 인정하고 그를 석방한 사 실은 공통적이나, 장복선전 은 장복선과의 연대 범주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무관을 포함하여 상층을 상징하는 채제공까지 확장된 것이 특징적 이었다. 이를 통해 이옥이 하층부터 상층까지 전 계층이 소통과 합의를 기 반으로 연대하여 백성의 삶의 질곡과 사회적 모순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 결하자고 제언하였음을 밝혔다. 이와 같이 사회적 문제의 발생과 해결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자아와 타 자 양자의 인간적 관계와 밀접한 만큼,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좌우하는 원 활한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자아와 타자 양자는 지속적으로 소통 하며 자신과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성찰해 나갈 때 자아, 타자, 사회를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자 및 사회와 연 관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면서 자신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의 다양한 생각들을 파악하고 합 의하여 총체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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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선전 에 나타난 이옥의 문제의식 고찰 / 29 <Abstract> A Study on a Critical Mind of Lee, Ok in Jang Bok-Seon Jeon - Focusing on a Comparison with Sagayawhagi by Sim, No-Sung and Bangchinyusa by Jeong, Yag-Yong Kim, Kyung-Hoi Lee, Ok faced up to the social contradiction of the day and made greater efforts to overcome it through literary works, but plans which he presented had limits because he did not get out of his status. Jang Bok-Seon Jeon that he created showed Jang, Bok-Seon misused public money and helped the poor by self-sacrifice, so Lee, Ok acknowledged Jang, Bok-Seon as a chivalrous person. His critical mind has been accepted on the basis of the universal concept of the chivalrous persons without argument. However the types of the chivalrous persons were not uniform, because the chivalrous person who relieved people and realized social justice was a creature of the times and was understood differently by the state of affairs of the day or writer consciousness. Jang Bok-Seon Jeon also included distinguishing features, because the work was combined with social reality of the day and wish or imagination of Lee, Ok. To grasp the features, I made a comparison between Jang, Bok-Seon s trace of the past of Jang Bok-Seon Jeon and Jang, Bok-Sang s trace of the past of Sagayawhagi by Sim No-Sung and Bangchinyusa by Jeong, Yag-Yong. And then I reinterpreted the feature of the aspects as the chivalrous person that Jang, Bok-Seon showed, determined its meaning, and attested to main factor to raise the value of Jang Bok-Seon Jeon. Fist of all, three works said in common that Jang, Bok-Seon who was poor but liked doing an act of charity, helped the poor by self-sacrifice misusing public money. By the way Jang Bok-Seon Jeon praised Jang, Bok-Seon as the chivalrous person for relieving people and realizing social justice, while Jang, Bok-Sang was described as a character of small conversation at night in - 31 -

30 / 한국민족문화 57 Sagayawhagi, and Jang, Bok-Sang was described as a supporting character of the story to tell the aspects of the chivalrous person of DongJiGong in Bangchinyusa. I explained that one historical fact about the trace of the past of Jang, Bok-Seon was changed three descriptive facts on account of critical minds of three writers. In sequence, to understand the aspects of the chivalrous person of Jang, Bok-Seon of Jang Bok-Seon Jeon, I analyzed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of the trace of the past of Jang, Bok-Seon in three works on the basis of two points of view. First, I examined the trace of the past of Jang, Bok-Seon by obey of rule of action of the chivalrous person. Unlikely the general chivalrous person or righteous person that bravely followed individual rule not social rule, Jang, Bok-Seon psychologically conflicted between the purpose of relief and the method of misusing public money. Through those descriptive facts, Lee, Ok acknowledged Jang, Bok-Seon as the chivalrous person, and tried to demonstrated humane conflicts of the chivalrous person experiencing in the process of realizing social justice and show a slice of life of universal human. I also inferred that the barrier of reality of the day brought on the fetters of life of people was high and strong through it. Second, three works commonly said that Pyeongan envoy Chae, Je-Gong acknowledged relief of Jang, Bok-Seon and released him, however the category of solidarity with Jang, Bok-Seon was distinctively extended from people and officer class to Chae, Je-Gong symbolizing the upper class in Jang Bok-Seon Jeon. I found that Lee, Ok suggested that all class from the lower class to the upper class should band together on the basis of communication and agreement, apprehend the fetters of life of people and social contradictions, and solve them. *Key Words: Chivalrous Person, Comparative Study, Humane, Communication, Solidarity ㆍ논문투고일: 2015년 10월 2일 ㆍ심사완료일: 2015년 11월 20일 ㆍ게재결정일: 2015년 11월 23일 - 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