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의사학 제 23권 제2호(통권 제 47호) 2014년 8월 Korean J Med Hist 23 ː269-318 Aug 2014 c대한의사학회 http://dx.doi.org/10.13081/kjmh.2014.23.269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 (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황의룡** 김태영*** 1. 머리말 2. 스포츠와 도핑의 역사적 흐름 3.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와 양상 4. 한국의 반도핑 활동의 전개와 실태 5. 맺음말 1. 머리말 역사에 기록된 그리스의 고대올림픽에서도 향정신성 약물이 사용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훌리한(Houlihan)은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선수나 전사들 은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남을 속인다거나 자신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여러 약물을 복용하였다 (Houlihan, 2002: 33-34)고 하였고, 레빈달(Levinthal)은 고대사회 스포츠선수들은 경기 력 향상을 위해 곰팡이가 생겨 구멍이 뻥 뚫린 환각성 무화과를 먹기도 하였 다. 그 후 로마의 검투사나 전차를 모는 전사들이 시합에서 더 오래 버티기 위 해 흥분제를 복용하였다 (Houlihan, 2002: 33-34)고 언급할 정도로 스포츠와 약물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 논문은 한국외국어대학교 2014년도 학술연구비조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 한국외국어대학교 사범대학 *** 교신저자: 김태영 / 한국외국어대학교 사범대학 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로 107, 130-791 이메일: ktyoung66@hanmail.net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69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근대사회와 더불어 재탄생한 스포츠는 사교적 행위의 하나로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신체활동이란 개념으로 출발하여 전 세계인이 즐기는 신체문 화로 자리 잡았으나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언제부턴가 선수와 국가를 포함 한 국제적 경쟁 수단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즉 메달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서 는 국가가 지원하는 스포츠정책이 필요했다. 그 결과 각국 선수들은 메달을 획득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도핑 1) 에 의존하는 부정적 경쟁 형태가 현대 스포 츠계를 지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의학사 2) 와 도핑의 연관 성에 대해 워딩턴(Waddington)은 현대스포츠에서 스포츠의학이 각광을 받 게 된 것은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이하 IOC) 와 국제경기연맹들이 선수들의 약물사용을 척결하려는 노력과 때를 같이 하 였지만, 공교롭게도 그 약품들을 스포츠계에 가져온 것도 바로 의학이었다. 원래 의학은 신체적 실행능력의 향상에 도움을 주고자 스포츠에 도입되었 다 (Waddington, 1996: 194)고 언급할 정도로 스포츠경기시 지구성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근육 내에 글리코겐(glycogen)을 저장하는 방법이라든가, 단백질 보충제를 통한 근육의 비대(hypertrophy)로 최대근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약리학(약물)이라는 의학적 연구를 이용한 스포츠 트레이닝의 향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하였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약이란 알맞게 사용하면 선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약이 된 다. 따라서 인간이 약물을 과다 복용하면 많은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 스포 1) 19세기에 들어와 구미를 중심으로 스포츠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인간이 다양한 약물을 사용하 였는데, 이때 도핑(doping)이란 단어가 유럽에서 등장하게 된다. 도핑의 원어인 도프(dope) 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며 반투어족에 속하는 카피르(Kaffir) 부족이 전투나 수렵 등, 전통의식을 행할 때 원기를 북돋우려는 목적에서 마시는 술이나 음료를 가리켰다. 이것이 보어(Boer)족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져 dope 가 되었고, 1889년에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다 (Hanley, 1979: 396). 2) 본고에서 지칭하는 의학사 및 의학적 발전 이란 인체의 구조나 기능, 질병, 치료, 예방, 건 강유지의 방법이나 기술 등의 역사적 연구라는 개념을 토대로 의학의 한 분야인 약물의 작 용과 부작용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약리학이나 병리학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도핑방법 및 약물의 변화와 국제경기연맹의 반도핑 정책도 의학사적 발전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어 왔다고 판단된다. 270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츠세계에서 도핑을 금지하는 다양한 근거들을 살펴보면, 1930년대부터 유행 한 암페타민(amphetamine) 3) 의 과다 복용은 행동양식의 변화(불안, 초조, 어 지러움, 피해망상증, 공격성)를 초래하고, 코카인(cocaine)은 심근경색증, 부 정맥, 뇌출혈, 경련, 행동양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마약성 진통제는 호흡부전 과 저혈압, 근육경직, 금단증상이 나타나며, 스테로이드(steroid)인 근육강화 제는 여드름, 탈모증, 정신장애, 여성의 남성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여성에게 는 월경불순뿐만아니라 음성이 남성처럼 굵어지고 탈모가 진행되며, 음핵이 비대해지는 등의 현상이 일어난다(체육과학연구원, 2003: 10-11). 이러한 현 상은 스포츠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도 파탄을 가져올 염려가 높 아지기 때문에 스포츠세계에서는 도핑행위를 금지하는 이유로 반도핑(antidoping)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60년대 스포츠세계에서 선수들의 약물복용이 만연하고, 도핑 이 사회 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건강한 사람이 경기할 때 인위적으로, 또는 불공정하게 경기력 향상을 목적으로 체외성 물질을 사용하거나 생리적으로 체내에 있는 물질의 양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심리적 방법의 다양한 이용도 도핑이라 판단 (Dirix, 1988: 669; Hanley, 1979: 404; Todd & Todd, 2001: 67)하였다. 그 후 국제경기연맹들은 도핑 이란 선수가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금지약물을 복용하거나 금지방법을 사용하는 일. 즉 선수의 건강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는 반사 회적이고 불법적인 행위 (한국도핑방지위원회, 2013: 8)를 가리키게 되었다. 우선 스포츠선수들의 약물남용 문제를 척결하기 위해 IOC를 비롯한 많은 국제경기연맹들이 반도핑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특히 1967년 IOC는 반도 핑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의무위원회(이하 IOC-MC) 4) 를 재구성하였다. 1968 3) 1927년에 미국의 화학자인 알레스(Gordon Alles)가 에페드린을 실험실에서 합성하였는데, 이를 암페타민이라 명명하였다. 1932년에 천식환자를 위한 흡입제로서 벤제드린이라는 이 름의 일반의약품으로 출시되었다. 4) 1961년 신설된 IOC-MC는 당시 스포츠의학과 관련하여 약리학과 생화학 분야 등에서 활발 히 활동하던 유럽의 의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Scaint, 1994: 86). 그 후 1964년 동경올림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71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년의 동 하계올림픽 대회부터 참가 선수들을 대상으로 도핑컨트롤(doping control)을 시작하였고, 여자선수에게는 여성성별확인검사(sex testing)를 병 행하면서 선수들의 약물복용 및 성별검사로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해 경기에 출전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반도핑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러한 정책은 선수들 사이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던 도핑행위를 조금씩 억제 하는 역할을 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1999년 선수들의 도핑검사에 대한 전문 조직으로 설립되는 세계반도핑기구 가 재탄생할 때까지 IOC-MC는 스포츠 선수들의 도핑행위를 규제하는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동안 선수들 도핑과 관련한 연구는 많이 보고되고 있다. 특히, 세계 각국 에서 일어난 스포츠선수들의 도핑관련 사례나 도핑방법, 약제의 효능, 약물의 과다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 및 경기와 관련하여 일어난 사고 등에 대한 연구서 등이 많이 간행된 바 있다( 太 田 美 穗 외, 1996; Boje, 1939; Cashmore, 2000; Dyment, 1984; Dimeo, 2007; Goldman, 1984; Hanley, 1979; Hoberman & Yesalis, 1995; Miller, 1979; Prokop, 1970; Todd, 1987; Todd & Todd, 2001). 그리고 의사로써 IOC-MC에서 활약한 경험을 연구서로 발행하거나 자서전적 형태로 출판한 저서도 있다( 黑 田 善 雄, 1990; 2002; 융크비스트 라거, 2012). 여성선수를 대상으로 시행한 성별확인검사에 대한 연구도 조금 진행되어 왔 다( 来 田 享 子, 2010; Ferguson-Smith & Ferris, 1991). 한편 국내에서는 스포츠 계의 도핑과 관련하여 197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국내선수의 약물복용실태 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김기호, 1982; 金 炫 權, 1989; 박현, 1985; 주왕기 외, 1976; 황수관, 1996; 최영미, 2012). 스포츠도핑과 관련하여 선수들의 윤 리적, 도덕적 측면을 고찰한 철학적 연구도 보고되고 있다(박영수, 2013; 이호 근, 2010; 최덕묵, 2002; 황옥철 황정현, 2011). 나아가 동독의 사례를 통해 여성선수들의 도핑 실태에 대한 연구도 보고되었다(심승구 김미숙, 2008). 픽 전에 개최한 국제스포츠과학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Sport Sciences) 에 참여한 의사, 스포츠의학자, 약리학자 등은 선수들의 도핑문제를 IOC가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는 조 직을 새롭게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黑 田 善 雄, 1990: 12; Todd & Todd, 2001: 67). 여기에 참여한 의사들은 이후 IOC의 반도핑 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272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특히 김건열 5) 은 20여년간 IOC-MC에 위촉되어 활동하며 주로 자신의 경험과 자료 등을 이용해 IOC의 도핑컨트롤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와 국가 대표급 선수들의 도핑검사에 대한 에피소드를 정리한 저서도 간행한 바 있다 (김건열, 1988; 1992b; 2008). 이러한 연구 성과들은 각기 해당 분야나 자신 들의 경험을 통한 도핑 사례, 그리고 스포츠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차원에 서 도덕적, 윤리적 내용 등을 분석함으로써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 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국내외적인 도핑실태와 반도핑 정책의 추진 과정이 나 양상 등을 기술할 때 그것을 추진한 배경과 정확한 연도의 표기, 선행연구 에 대한 자료 충실도 등에서 많은 오류가 발견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국제스포츠계를 대표하는 조직인 IOC가 올림픽경기를 중심으로 실 시하는 반도핑 정책에 대한 고찰과 국내 체육단체들이 이를 연계하여 실시한 반도핑과 관련된 현대의학사적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스포츠세계의 도핑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선수들의 인권적 문제를 포함한 불명예와 사회적 고통 등 매우 민감한 사안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도핑컨트롤 6) 은 비공개를 철칙으로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사료나 언론보도를 접하기가 어려운 부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제스포츠를 좌지우지하고 있 는 IOC의 1차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국내의 사료 역시 관계기관의 담당자가 여러 번 교체되거나 부실한 관리 등으로 인해 체계적으 로 정리, 보관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반도핑 활동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였다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IOC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반도핑 활동에 나선 1968 년부터 1999년까지로 기간을 한정하여 다음의 세 가지 과제를 현대사적으로 5)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1986년부터 2004년까지 IOC와 OCA(Olympic Council of Asia)의 의무위원을 지냈고, 2006년 국내의 도핑관리 전담기구로 설립된 한국도 핑방지위윈회(Korea Anti-Doping Agency, 이하 KADA)의 초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한 국의 도핑방지 활동의 산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6) 도핑컨트롤이란 도핑검사와 관련된 일련의 프로세스를 말한다. 검사(대상자 선정, 입안, 시 료채취, 검체의 취급, 운반과정 등)와 분석, 결과관리, 청문회 등 도핑의 전체 과정을 가리키 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73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규명하고자 한다. 첫째 세계적으로 스포츠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1900 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일어난 역사적 도핑 사례의 형성을 살펴보고 이를 규 제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그 원인을 개괄할 것이다. 이를 통해 스포츠 세계와 도핑이 근현대시기를 지나오면서 어떻게 생산되었고, 그 배경은 무엇 이고, 이를 규제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선수들의 약물 실태의 주요 원 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둘째, 국제스포츠계를 리드하는 IOC가 선수들의 도핑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 1968년부터 전개하기 시작한 도핑컨 트롤 과 여성성별확인검사 정책에 대한 현대사적 전개양상을 분석할 것이 다. 즉 이 정책이 어떠한 경위로 제도화되었으며, 이를 채택한 동인은 무엇인 가?를 국제적 반도핑 전문조직인 세계반도핑기구 가 새롭게 발족하는 1999 년까지를 중심으로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의사의 의학적 증명서를 제시해 야 하는 여성성별확인검사 제도는 국내에서는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 았다. 셋째, 이러한 반도핑 정책의 추진과 전개과정과 연계하여 국내체육계가 취한 대응조치, 국내선수의 적발사례, 국내선수 도핑에 대한 문제를 일반화하 는데 공헌한 도핑컨트롤센터의 설립과 활동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이것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중요한 내용이라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IOC를 중심으 로 국제적 반도핑 정책이 전개되고 국내체육계가 이를 받아들여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과정과 양상을 스포츠의학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국내체육계의 도핑정책에 관한 현대사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사료된다. 2. 스포츠와 도핑의 역사적 흐름 1) 20세기 스포츠와 도핑(doping)의 역사적 사례들 20세기에 들어와 스포츠가 전 세계로 전파되고 올림픽 등의 국제경기가 빈번하게 열리면서 스포츠계의 도핑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04년에 열린 제3회 세인트루이스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토마스 힉스(Thomas Hicks)는 결승선을 통과한 후 졸도하였다. 선수를 뒤따르던 코치가 스트리 274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크닌(Strychinine)과 브랜디를 섞은 음료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담당의 사인 루카스(Lucas)는 의학적 관점에서 마라톤 선수들에게 약물이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Dyreson, 1998: 89; Todd, 1987: 91)고 하였다. 1908년에는 영국과 벨기에 축구선수들이 시합 중에 경기력을 증강시키려 산소를 흡입하 였고, 복싱선수들이 스트리크닌이라는 흥분제를 복용하여 경기력을 향상시 켰다. 1910년에는 파라도핑(para-doping), 또는 항도핑(anti-doping) 7) 이라는 경기력을 떨어트리려는 방법이 적발되기도 하였다(Dyreson, 1998: 90). 하지만 이러한 도핑에 대한 부작용과 불공정한 경쟁을 막기 위한 사회적 규 제는 동물들이 경쟁하는 동물스포츠(animal sports) 에서 먼저 실시되었다. 도노헤와 존슨은 1910년 후반이 되면 산업화와 함께 갬블(gamble) 스포츠에 서 경기력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이 무모할 정도로 약물을 투여하는 바람에 많 은 경주마나 경주견들이 약물에 시달리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경마협회가 경 주마 보호를 위해 경주가 끝난 말의 수액을 검사하여 알칼로이드(alkaloid)를 검출해 냄으로써 경마에서 도핑검사가 최초로 실시 (Donohoe & Johnson, 1986: 5-6; Ljungqvist & Lager, 2012: 57)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동 물스포츠에 약물을 투여하는 행위가 불거져 도핑검사가 실시되고, 스포츠세 계에서 경쟁이 격심해지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약물복용이 만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의과학자를 중심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도핑검사가 실시되어야 한 다는 비판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8)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벤제드린(benzedrine)을 비롯한 베르베린 (berberine)이라는 중추신경을 흥분시키는 각성제를 개발하여 사용하게 되 고, 1932년 암페타민을 합성하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졸음을 쫓아야 할 경우에 복용하였다. 암페타민은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7) 상대방 선수나 팀에 의해 약물을 복용당하는 것을 말한다. 8) 1939년 보예는 Doping 이라는 연구에서 동물들이 참가한 스포츠에서 흥분제가 만연하고 있어 몇 몇 나라들은 동물에 대한 잔인함을 이유로 이를 금지하였다. 인간이 참여하는 스포 츠에서도 약물이 만연하고 있어 역시 동일한 금지가 시행되어야 한다 고 지적하였다(Boje, 1939: 440).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75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Benzedrine Alert, 1944: 19-20; 黑 田 善 雄, 1972: 518; 船 山 信 次, 1974: 188). 이것이 혹독한 역경과 싸워야 하는 사이클 선수들에게 전이되어 약물이 지 배하는 경기로 둔갑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보예(Beje)는 오늘날 스포츠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들에게 자극제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부정 하기 어렵다. 기록을 경신하고 대중의 만족에 부응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 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선수들 자신의 건강보다 더 우선순위에 놓이게 되었 다 (Boje, 1939: 439-440)고 할 정도로 이 당시에도 약물이 만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들어와 암페타민은 사이클, 축구, 복싱과 같은 프로선수가 활약 하는 종목에서 육상, 역도, 빙상선수와 같은 아마추어(Amateur)선수로도 확 산되기에 이른다( 黑 田 善 雄, 2002: 545). 그 단적인 사례로 1952년 노르웨이 의 오슬로(Oslo)에서 벌어진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에 참가한 덴마 크 선수들 탈의실에서 암페타민 약제가 든 봉지와 주사 앰플이 다량으로 발 견되면서 많은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고 있음이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 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체육회, 1986:162; Dirix, 1988: 99; Hoberman & Yesalis, 1995: 77; Miller, 1979: 98; Payne, 1975: 83-84; Rosen, 2008: 68). 특히 지금도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투르 드 프랑스대회 9) 는 약물로 오 염된 경기로 유명하다. 1955년에 열린 경기에서 25명의 선수 중 5명의 선 수에게서 약물이 검출되었고, 그 중 2~3명은 암페타민 의존증으로 진단받 았다(Rosen, 2008: 70). 1967년에는 13일째 경기에서 영국의 토미 심프슨 (Tommy Simpson)이 암페타민과 브랜디의 혼합물을 복용하고 사망하는 사 건 10) (Goldman, 1984: 27-28; Cameron, 1994: 3)이 일어나는 등, 이 대회에서 9) 이 대회는 1903년 시작되었다. 가장 더운 여름에 3주간 벌어지며, 하루에 200km 정도를 달 리는 레이스를 펼친다. 첫 대회부터 항상 선수들의 도핑이 문제시되었다. 선수들은 고통 을 줄이기 위해 에테르를 사용하다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록향상을 위해 도핑을 하였다 (Miller, 1979: 98). 1967년에는 사망사고가 일어나 더욱 유명해졌고, 1988년에는 Festína의 관리 팀과 의료팀이 조직적으로 EPO(erythropoietin), 성장 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암페타민 등을 복용하였음이 밝혀졌다(Cameron, 1994: 4). 10) 이 사건은 IOC-MC가 반도핑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기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IOC의 제 276 醫 史 學
일어난 도핑 사례는 수 없이 많이 보고되고 있다.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마침내 올림픽경기에서도 도핑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1960년 로 마올림픽 올림픽이 개막하던 날 벌어진 사이클 경기에서 크누드 에네마르크 옌센(Knud Enemark Jensen) 11) 이 100km 단체경기에 출전하였으나 경기 도 중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하였다. 부검 결과는 열사병으로 인한 급 성심부전으로 밝혀졌다. 암페타민이 피부로 가는 혈액의 양을 줄여 체열이 상승하였고, 혈액에서는 다량의 암페타민과 니코틴산이 검출되었다. 담당의 사는 흥분제(stimulants)를 과도하게 사용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세계 언론은 도핑으로 간주하였다(Dirix, 1998: 99). 따라서 대다수 도핑 연 구자들은 이 사건을 스포츠계에서 도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 중 요한 사례로 보고 있다(김건열, 2008: 22; 심승구 김미숙, 2008; 102-103; 이 호근, 2010: 88; 정종훈, 1996: 16; 최덕묵, 2002: 2; 최영미, 2012: 7; Gleaves & Llewellyn, 2013: 1; Houlihan, 2002: 62; Moller, 2005: 453; Todd & Todd, 2001: 67). 스포츠사학자인 디메오는 세계적으로 스포츠에서 선수들의 기 량이나 체력향상을 개선하기 위한 약물복용, 또는 방법의 사용이 도핑으로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된 시기가 1950년 중반부터 1960년대라 지적(Dimeo, 2007: 103) 할 정도로 당시 선수들의 약물복용은 매우 심각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던 듯하다. 2) 1960년대까지 약물의 변천과 도핑의 사회적 배경 19세기 중반부터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자주 이용한 약물로는 주로 카페 인(caffeine)과 에테르(ether)가 포함된 설탕, 알콜(alcohol)성 음료, 니트로 글리세린(nitroglycerine) 헤로인(heroine), 코카인(cocaine) 등이었다. 1940 년대부터 안드로겐이 사용되었다. 1950년대에는 에페드린(ephedrine)과 도 정착에 추진력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11) 로마올림픽은 사상 처음으로 TV중계권을 계약하고 경기장면이 구미 선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옌센의 사망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목격하면서 스포츠계의 도핑은 국제 적 이슈가 되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77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암페타민(amphetamine), 카페인, 중추신경자극제, 근육강화제인 테스토 스테론(testosterone) 등 남성호르몬성 단백동화제, 펩티드호르몬(peptide hormone)과 유사약물 등(성장호르몬, 태반성선자극호르몬, 부신피질자극 호르몬, 에리스트로이에틴, 인슐린, 인슐린 성장인자)이 선수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사용되었다( 黒 田 善 雄, 2002: 545). 또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anabolic steroid)가 미국에서 등장한 후 약의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는 소문 에 많은 미국선수들이 복용(현재환, 2012: 29; Yesalis & Bahrke, 2001: 53) 12) 하게 되었고, 타국 선수들에게도 전해져 국제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미 국에서 흔히 안드로 라 불리는 이 약은 테스토스테론의 생산을 늘리도록 자 극하여 주기 때문에 힘에 의존하는 선수들이 스테로이드를 사용하기 시작하 였다. 다른 종목에서도 곧 테스토스테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결과 1960 년대를 통해 많은 종목의 선수들이 이 물질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스포츠선수의 약물복용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우려 의 목소리가 세계 언론을 통해 국제적 문제로 제기되기에 이른다(Yesalis & Bahrke, 2001: 50). 그러나 1960년대까지 스포츠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 어떤 단체도 선수들의 약물복용을 금지 하거나 규제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자율적 선택에 맡겼던 공공연한 행위였 다. 그런데 선수들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심에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 함으로써 경기 중에 사망하는 등의 해악이 알려지면서 선수 도핑에 대한 규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제적으로 강력히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여론 형성에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가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고 보여진다. 첫째, 1950년대부터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대결이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융크비스트 라거, 2012: 122-123; 伊 藤 偵 之, 2013: 111-112).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동서냉전시대가 초래되면서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경기는 정치체제 12)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현재환(현재환, 2012: 30) 참조. 278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의 우월성을 앞세운 대결로 치닫게 된다(Dimeo, 2007: 104). 13) 이들 국가들 이 국제경기에서 벌인 메달 경쟁은 개인이 아닌 국가단위의 대결이었다. 그 결과 경기연맹이나 선수들은 암묵적으로 용인되던 약물을 이용해서라도 무 조건 승리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다시 말해서 자국의 정치체제의 우월성을 선 전하려는 정치적 대결이 약물의 힘을 빌어 선수의 몸을 개조하는 사이보그화 14) 를 부추기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 에 불어 닥친 젊은이들의 약물남용 현상과 약리학 발전이 스포츠선수들 사이 의 도핑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15)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인간은 효과 가 뛰어나고 간편하고 독성 없는 약물을 찾게 되었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경제활동으로 신체의 생화학적, 생리학적, 심리학적 기능을 변화시키는 강력 한 약물들이 제약사를 통해 대량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는 스포츠선수에게도 영향을 미쳐 오랫동안 혹독한 트레이닝을 통해 달성되는 경기력 향상보다는 항생제와 여러 호르몬제, 흥분제 등이 신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더 뛰어난 기량향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개개인의 신체적 기능향 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적의 약물을 간단하게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면서 약의 남용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 다양한 약물을 복용하게 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3)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스포츠 무대에서 막강한 실력을 행 사하였지만,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참가하면서 국제스포츠계는 구소련과 미국을 중심 으로 냉전체제의 대결 양상으로 변하여 선수의 개인적 선택은 물론 국가정책의 하나로 도 핑과 같은 의학적 조작이 경기력 향상에 크게 작용하였다(심승구 김미숙, 2008: 99-100; Rosellini, 1992: 50; Todd, 1987: 90). 14)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동유럽 출신의 여자운동선수들의 남성 같은 체격을 보면 수많 은 세계신기록들과 더불어 이들이 여장남자 인지 유전적 잘못 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지 의 아해하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그 후 공산체제가 붕괴되고 이런 현상이 다량의 스테로이드 복용 때문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한편, 미국의 실체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점은 구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은 국가주도로 도핑이 실행되었지만, 미국 등의 서방국 가에서는 선수들의 자발적인 행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Levinthal, 1999: 160~161). 15) 모트람은 스포츠계의 약물복용은 두 가지 사회적 요소와 병행하여 촉진되었다. 첫째, 1960 년대에 들어와 팝 뮤직을 들으며 황홀감을 맛보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약물을 복용하는 것 이 음성적으로 유행했다는 점, 둘째, 과학적 진전에 따라 약리학 이 1960년대부터 급격하게 발전하였다는 점 (Mottram, 1988: 1)을 들고 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79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3) IOC 및 국제기구의 반도핑 정책의 추진 경위 20세기에 들어와 두 번의 전쟁이 세계를 혼란으로 빠트린 가운데 의료학 자들을 중심으로 전쟁수행을 위한 새롭고 간편한 약물 연구가 발전하게 되었 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에게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을 투여하면 빠르게 체중이 증가하고 강한 체력을 만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약물연구는 운동선수들의 경기력 향 상에 응용되었고, 많은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면서 스포츠계의 도핑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다. 즉 1950년대부터 의과학 및 약리학의 발전과 함께 스포츠선수들의 약물복용이 늘어나고, 약물남용에 의한 사건 등이 빈발하자 의학자를 비롯한 세계여론은 올림픽경기를 주관하는 IOC가 약물복용 금지에 앞장서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시 IOC위원장인 에이 버리 브런디지(Avery Brundage) 16) 는 1960년 제56회 샌프란시스코총회에서 경기에서 암묵적으로 벌어지는 원기를 북돋아주는 약 의 사용에 주의하도 록 처음으로 당부한다. 다음 총회에서는 각국 선수들의 도핑실태를 IOC에 보 고하고, 운동선수들이 암페타민을 다량으로 복용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도핑 문제를 중대한 일로 인식하고 약물의 부정한 사용에 관한 방지책을 강구해야 한다 (체육과학연구원, 2003: 7; Scaint, 1994: 85)고 언급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선수들 도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는 정도였다. IOC는 1961년 6월에 로잔(Lousanne)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뉴질랜드 의 아더 포리트(Arthur Porritt)를 위원장으로 히가시 류타로( 東 龍 太 郞 ), 산 토스(Joaquim Perreira Santos), 그루스(Josef Gruss)로 구성된 의무위원회 16) 에이버리 브런디지(1887~1975년)는 미국인으로 올림픽 근대5종과 10종 경기에 출전하였 고, 1936년에 IOC위원이 되었다. 1952년~1972년까지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순수한 아마추 어정신의 신봉자로 올림픽 상업화에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도핑을 비판하였으나 반도핑 정책을 채택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특히 그의 도핑규제 정책은 의 학자들과 세계여론에 떠밀린 실험적인 시행에 지나지 않았다. 선수에 대한 의학적 검사는 IOC가 아니라 국제경기연맹(IF)과 각국의 NOC가 할 일이라는 견해를 보였다(Scaint, 1994: 86, 88-89)고 알려져 있다. 280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medical commission)를 신설하고, 선수들의 도핑과 결연한 싸움을 해야 한 다는 점을 강조하였다(Mottram, 1988: 1-2; Todd & Todd, 2001: 67). 1962 년 모스크바 총회에서 도핑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를 거쳐 반도핑에 관한 결 의문을 채택하고, 올림픽경기에서 도핑검사를 실행할 방법과 약물종류 등을 조사하는 작업에 착수(Scaint, 1994: 86; Todd & Todd, 2001: 68) 17) 하는 움직 임을 보인다. 한편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18) 는 1963년 1월에 프랑스의 스트라 스부르(Strasbourg)에서 대중들의 약물남용과 스포츠계의 도핑실태를 우려 하여 개최한 회의에서 약물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는 의사와 약제사, 생물학자, 법리학자, 스포츠선수, 저널리스트 등이 참석하여 사회적으로 인 기 있는 스포츠선수들의 도핑을 근절해야만 대중들에게 퍼져 가는 약물남용 을 조금이라도 방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의학상 치료와 도 핑과의 구별이 곤란하기 때문에 의료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약물도 결과적으 로 경기력을 향상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은 도핑이라 판단, 이를 복용한 선수 는 실격 처리한다. 도핑 약물로는 마약, 중추신경자극제, 스트리크닌, 에페드 린 등의 알칼로이드(alkaloid), 전 세계의 모든 강장제, 호흡자극제, 호르몬을 지정하였다 (Dirix, 1988: 671; Todd & Todd, 2001: 68). 이 회의에서 제시한 도핑의 정의는 이후 IOC를 비롯한 국제경기연맹이 내세우는 도핑의 기본적 정의로 자리 잡게 되었다. 17) 국가별 도핑정책은 1962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도하여 도핑위원회를 설립하고 경기력 향 상을 위해 인위적으로 도핑을 하는 선수나 이것을 묵인하는 협회에 대해 엄한 처벌을 내 린다는 법령을 제정한 국가가 되었다. 1959년부터 도핑 조사에 착수하였던 프랑스가 1963 년에 관련법을 제정하였고, 1965년에는 벨기에가 도핑방지 규정 을 제정하였다(김건열, 2008: 22; Beckett & Cowan, 1979: 185). 이러한 결정이 IOC를 비롯한 국제경기연맹의 반 도핑 활동에 크게 작용하여 스포츠세계의 본격적인 약물규제 정책이 태동하는 밑바탕이 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18) 유럽평의회는 유럽연합(EU)과는 관계없이 1949년 5월에 네덜란드를 비롯한 영국, 프랑스 등 10개국이 참가하여 설립하였다. 현재는 47국이 가입하고 있으며, 유럽인의 인권보호, 민 주주의, 법치주의의 수호, 유럽지역 국가의 사회적 법적 사례의 표준화, 유럽 정체성 확립 등을 설립목적으로 하고 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81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IOC는 1964년 동경올림픽의 오프닝 세리머니로 스포츠의학자, 약리학자, 법학자, 스포츠연맹 관계자 등 1,000여명을 초대하여 국제스포츠과학회의 (International Congress of Sport Sciences) 를 열고, 스포츠의과학의 연구 성 과는 물론 선수들의 도핑문제를 토론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다(김진원, 1976: 35; 黒 田 善 雄, 1990: 12; Todd & Todd, 2001: 67). 이 회의에 참가한 의사들은 도핑을 아무리 제재해도 약물을 복용하는 선수는 계속 복용할 것이기 때문 에 검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도핑이 성적 향상에 좋은 효과를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는 등의 논의 끝에 생체 속에 생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인 경우에는 양이 많거나 수상한 방법으로 투여하는 경우, 몸 안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투여한 경우도 문제이다.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경기력 향상을 목적으로 사용하면 도핑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Scaint, 1994: 86). 때마침 동 경올림픽에 출전할 사이클 선수들이 입국하면서 공항검색대의 가방에서 다 량의 약물이 발견되었다. 이를 기회로 IOC는 즉각 도핑검사를 실시하려 했으 나 선수들의 거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당시 구로다( 黒 田 ) 19) 는 의사들이 지 금까지 사이클경기에서 약물복용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었고, 이번에도 약 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도핑검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IOC가 이 를 승인하였지만 선수들의 반발로 검사계획은 취소되었다. 스포츠의학자들 은 더 이상 도핑을 방치하면 스포츠계가 큰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IOC가 도 핑을 규제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하여 환기시켰다 ( 黒 田 善 雄, 1990: 12). 1965년에는 의무위원회의 활동을 뒷받침할 의무규정(medical Code)이 IOC헌장에 채택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다. IOC는 1967년 총회에서 그동안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의무위원회를 재편 성하고 도핑컨트롤과 관련된 내용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의무위원회는 1950년대 중반부터 선수들이 경기력을 높이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광범위하 19) 구로다 요시오( 黒 田 善 雄 )는 의사로 1964년 동경올림픽 선수촌 진료소장으로 근무하였고, 도핑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서 제출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 후 일본을 대표한 IOC- MC위원으로 위촉되어 반도핑활동에 참여한 도핑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282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게 사용해 왔다는 점과 여성경기에 남자가 참가하는 일이 발생하여 여성의 성별확인검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도핑컨트롤을 담당할 의학적이고 전문적인 조직이 필요하고 효과적인 검사과정을 도입할 것을 제 안하였다(Beckett & Cowan, 1978: 185; Scaint, 1994: 87). 이 보고를 토대 로 IOC는 1967년에 새로운 의무위원장으로 벨기에의 알렉산드르 드 메로드 (Alexandre de Mérode) 20) 를 임명하고 각국의 도핑검사 전문가인 의학자와 약리학자들로 구성된 조직을 재출범시켰다. 구체적인 도핑목록을 정리하여 도핑컨트롤과 여성성별확인검사를 시행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였다(Dirix, 1988: 15; Park, 1988: 12). 이러한 경위를 거쳐 IOC의 반도핑정책은 1968년 그루노블(Grenoble)동계올림픽부터 역사적인 첫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21) 3. IOC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와 양상 1) 조직설립과 30여년의 전개 과정 1966년 IOC-MC가 선수들의 도핑에 관해 조사하여 IOC의 대응책에 관해 제시한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올림픽위원회(National Olympic Committee, 이하 NOC)는 스포츠의학 조직을 통해 선수들에게 도핑에 관해 전반적인 교육을 장려한다. 둘째, 각국 NOC는 올림픽에 출전 선수명단을 제출할 때 나는 도 핑을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절대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는 선수들이 직접 서명한 서류를 제출하도로 한다(자동적으 20) 벨기에 왕자출신인 메로드는 매우 정력적인 활동가이고 스포츠세계에서 도핑방지를 주도 한 사람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1) 역사적으로 처음 경기연맹에 의해 선수들의 약물에 대한 규제는 192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이 흥분제를 금지한 일이지만, 규제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Dimeo, 2007: 68, 114; Rosen, 2008: 10; WADA, 2013). IOC는 1937년 바르샤바(Warszawa)총회에서 처음으로 선수들의 도핑에 관련해 언급하였다. 이듬해의 총회에서는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선수는 아마추어정신에 입각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결의 문을 채택(IOC, 2014; Rosen, 2008: 11)하였으나 이것은 선언적 수준에 불과한 조치였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83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로 도핑검사, 또는 필요하다면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 어 놓아야 한다). 셋째, 각 국제경기연맹은 경기를 관장하는 규칙이나 규정 속에 도 핑행위를 확실하게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해야 한다. 넷째, IOC 조직은: 가) 도핑에 관해 강력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나) 올림픽경기가 벌어질 때 도핑이라는 위반사항이 발견된 NOC나 선수에 대해 벌칙을 부과하는 권한을 부여받아 야 한다. 다)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대회 중에 선수를 검사할 적정 한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준비는 대회조직위원회의 의 학담당 조직의 감독 하에 IOC의 승인을 받은 FIMS(국제 스포츠의학연맹) 임원들의 지원을 받아 실시) (Porritt, 1966: 1; Scaint, 1994: 87-88). 그리고 흥분제와 자극제를 도핑목록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하였지만, 실제 로 이 보고서에는 도핑컨트롤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실시할 방법이나 목록 결정 등에 관한 과학적인 조사, 위반에 따른 인권침해에 대한 방지책 등이 부 족한 실정이었다. 22) 1967년 제65회 총회에서 초대 IOC-MC위원장인 포리트(Porritt)가 사임하 고 새로 취임한 메로드(Merode)는 미진한 보고서 내용을 추가로 조사하는 작 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도핑컨트롤과 여성성별확인검사에 알맞은 객관적이 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선수들의 소변을 시료로 채취하여 도 핑 여부를 조사하는 의학전문가 조직을 구성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도핑컨 트롤 및 여성성별확인검사와 관련하여 첫째, 1968년 그루노블과 멕시코시 티(Mexico City)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은 도핑컨트롤에 임해야 하고,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서약해야 한다. 둘째, 여자선수들은 모두 성 22) 1960년대 중반까지 IOC가 도핑 금지를 일관되게 주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세계에 퍼져 있는 약물과 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검출하는 방법이 과학적으로 개발되지 못하였 다는데 있었다(김건열, 1992b: 22; 박종세, 1987: 31; 黒 田 善 雄, 1990: 11; Catlin, Fitch & Ljungqvist, 2008: 99). 284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별확인검사를 실시한다. 선수들은 검사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올림픽경기 를 개최하는 멕시코시티는 도핑컨트롤을 관장할 메디컬센터 23) 를 설치해야 한 다 (Todd & Todd, 2001: 68)는 세 가지 항목을 제안하였다. 또한 금지약물 목록(The List of Prohibited Substances)을 IOC 헌장에 삽입하고 약물이 검 출된 선수의 징계내용, 만약 도핑컨트롤을 거부한 선수와 단체종목에서 약물 이 적발되면 그 선수의 동료까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는 벌칙을 규정 (김건열, 2008: 22; 박종세, 1987b: 32; IOC, 1972: 31)하도록 권고하였다. 도 핑목록에는 교감신경흥분제(sympathomimetic amines)와 중추신경흥분제 (stimulants amines), 정신흥분제(psychomotor stimulants), 마약성 진통제 (narcotic analgesics), 정신안정제(tranquilizer)를 지정하였다. 올림픽경기에 서 1위~3위를 차지한 선수를 무작위로 선별하여 도핑컨트롤을 실시하고, 금 지약물과 방법 등을 올림픽 개막 전에 발표하는 검사 제도를 제시하였다. 금 지약물목록은 The List of Doping Class and Method 라는 소책자로 발간하 고 해당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배포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도핑검사 및 여성성 별확인검사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23) 이때부터 어느 국가나 올림픽경기와 같은 규모의 대회를 유치하면 국제공인 도핑 컨트롤센 터를 보유해야 한다. 참가선수들의 시료를 가져와 분석한 후 빠른 시간 내에 보고하고 이를 통해 유무를 판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후 이 제도는 정례화되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85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표 1. 동 하계올림픽 도핑테스트와 양성반응 수 Table 1. A number of doping test and positive reaction in summer and winter Olymic games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연도 개최지 검사 수 양성 수 연도 개최지 검사 수 양성 수 1968 Mexico City 667 1 1968 Grenoble 86 0 1972 Munich 2,079 7 1972 Sapporo 211 1 1976 Montreal 786 11 1976 Innsbruck 39 2 1980 Moscow 645 0 1980 Lake Placid 440 0 1984 Los Angeles 1,507 12 1984 Sarajevo 424 1 1988 Seoul 1,598 10 1988 Calgary 492 1 1992 Barcelona 1,848 5 1992 Alberlville 522 0 1996 Atlanta 1,923 2 1994 Lillehammer 529 0 1998 Nagano 621 0 (IOC Fact sheet/2014에서 재인용) IOC는 선수들에게 도핑컨트롤을 실시하는 목적으로 첫째, 도핑에 의해 야 기되는 스포츠선수의 건강상의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 둘째, 올림픽정신과 동 일한 정정당당하고 깨끗한 스포츠맨십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참가 자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는 기본목표를 제시하고, 1968년 2월에 열린 그루노블 동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공식적 도핑컨트롤을 거행하 였다(김건열, 2008: 27). 위의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IOC-MC는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를 대상으 로 86회의 검사(마약과 각성제, 흥분제 등 약 30종의 습관성 약물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했지만, 한 건의 양성반응도 적발하지 못하였다. 멕시코시티올 림픽에서는 667명의 검사자 중에 1명에서만 알콜성분을 검출하였다. 스웨덴 의 근대5종 선수가 상당히 높은 에틸 알콜(ethyl alcohol) 24) 수치를 보였기 때 문에 올림픽경기에서 최초로 메달을 박탈당하였다. 그런데 찰리와 미첼에 의 24) 알콜은 적은 복용만으로도 사격 점수를 향상시킬 수 있고 근대5종 경기에 사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금지시키고 있다(Reilly, 1988: 145). 286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하면,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기간에 운동선수와 코치들은 도핑의 도덕 성이나 적합성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어떤 약물이 더 효과적이냐를 따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Charles & Michael, 2002: 53 재인용)고 언급할 정도로 IOC-MC의 첫 도핑검사는 선수들에게 큰 위협이 되 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 IOC-MC는 1971년에 들어와 금지약물을 흥분제와 교감신경흥분제, 중추신 경흥분제, 마약성 진통제로 나누고, 도핑목록과 방법, 목적이 기재된 도핑 북 (Doping Book)에 총 24종의 약물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1972년 삿포로( 札 幌 ) 동계올림픽과 뮌헨(Munich) 올림픽부터 도핑컨트롤은 모든 선수들이 지 켜야 할 의무사항으로 IOC헌장에 규정하였다. 삿포로대회에서는 211명을 검 사하여 1명의 아이스하키 선수가 에페드린 양성반응을 보였다. 뮌헨대회에 서는 총 2,079명을 검사하여 역도와 유도, 사이클, 농구, 수영에서 7명이 암페 타민과 에페드린 양성반응을 보여 징계를 받았다. IOC-MC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스포츠경기는 선수를 몰몬트로 이용하는 약리학자나 의학자의 경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는 문구가 인쇄된 팸플릿을 배포하여 각 NOC 관계자와 선수, 팀닥터, 코치 등에게 도핑의 폐 해를 홍보하는데 노력하였다. 밀러(Miller)에 의하면, 이 문구는 당시 선수들 의 약물복용실태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었다(Miller, 1979: 100)고 말할 정도 로 선수들의 도핑과 의학자들의 깊은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IOC-MC는 1950년대부터 많은 선수들이 복용하고 있다고 알려진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의 검출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해 왔다. 1974년 이 성분의 검출방법을 발견하 면서 1976년부터 금지약물로 지정하였다. 26)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아 25) 당시 선수들 사이에서 그 어떤 약물보다 스테로이드 복용이 많았는데, 이 약물은 금지약물 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26) 1968년 멕시코올림픽 10종경기 우승자인 미국의 빌 토미(Bill Toomey)도 은퇴 후 이 약을 복 용하였다고 고백하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스웨덴의 릭키 브러치(Ricky Bruch)도 은퇴 후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공공연하게 복용하였다고 시인하였다(Charles & Michael, 2002: 53). 이 외에도 은퇴선수들에 의해 스테로이드 복용에 대한 고백이 줄을 이 었는데, 1975년까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금지약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테로이드는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87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나볼릭 스테로이드에 대한 검사는 275명이 받았고, 8명의 선수가 양성반응을 보여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단 1명도 양성반 응을 보이지 않았다. 1981년에는 IOC-MC 내에 금지된 도핑목록과 언제 약물검사를 할 것인 지에 대해 결정하는 스포츠도핑과 생화학(Doping and Biochemistry of Sport) 이라는 하부 위원회를 신설하였다(박동호, 2002: 57). 이때부터 도핑 검사 방법이 크게 향상되어 LA올림픽이 열리기 전인 1983년 카라카스에서 열 린 팬아메리칸대회 27) 에서는 도핑 선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조사가 가능해졌 다(김건열, 2008: 22). 28) 그러나 이 대회에 참가한 미국의 육상선수들은 검사 에 적발되느니 경기 전에 돌연 귀국해 버렸다. 이는 새로운 금지약물 검출방 법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리 기권함으로써 이듬해에 자국에서 열리는 LA올림 픽에 출전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어떤 선수는 일부 러 자신의 기량을 전부 발휘하지 않고 하위로 처지는 방법을 택해 약물검사를 피해갔다(Todd & Todd, 2001: 79).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다섯 종류로 분류한 도핑목록에 새로운 약물을 추 가하였다. 특히 중추신경흥분제로 카페인이 추가되었는데 기준농도 이상 검 출되면 양성으로 판정하고, 원래 체내에 존재하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 론(testosterone) 29) 도 체내 대사물과 비교하는 검출방법이 발견되어 스테로이 드 종류에 포함시키는 등, 총 70여종을 금지약물로 지정하였다. 30) 이 대회에 1974년에 런던대학의 브룩스(Brooks)박사가 방사면역측정법(Radioimmunoassay)을 응용 한 검출법이 개발되면서 도핑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이 검사법은 결과가 나오는데 4일이 나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27) 이 대회는 북미를 비롯한 전 아메리카대륙이 모여서 치루는 경기로 4년마다 개최되며 IOC 가 공인하는 대회로 1942년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올림픽 다음으로 인기가 있는 대 회이다. 28) 검사방법의 발전에 따라 1980년대부터 역도, 수영, 레슬링연맹 등 종목별 국제대회에서 도 핑검사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29) 이것은 체내에서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체모와 굵은 목소리, 강한 근력과 같은 다양한 남성적 특질을 만들어내는 물질이다. 이것의 자연 공급량을 늘리면 근육을 키우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운동선수들에게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30) Todd에 의하면 1984년 LA올림픽에서 인간의 성장호르몬은 유행성 아나볼릭 약물이라고 288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서는 총 1,507명을 검사하였고 10명의 선수가 양성반응을 보였다. 2명이 메 달을 박탈당하였다. IOC-MC는 1985년 베를린 총회에서 도핑의 발달과 함께 검사를 피해가는 방법이 더 앞서 간다는 점을 고려하여 매번 금지약물과 검출방법을 늘리는 등, 반도핑정책을 견고하게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모든 문제 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선수들이 대회가 열리기 전 훈련기간 중에 약물을 복용하다가 대회가 임박하면 약물을 중단해 버리기 때문에 경기 가 끝나고 실시하는 검사에는 약물이 검출되지 않는 경우가 가장 큰 두통꺼리 였다. 31) 이것은 IOC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thletics Federations, 이하 IAAF)은 IOC보다 한 발 앞서서 경기기간 외의 검사(Out of Competition Testing, 이하 OCT) 제도를 실시하 도록 규정을 개정하고, 이를 따르도록 각국 육상경기연맹에 지시하지만, 각국 의 법률과 검사비용이 큰 문제로 제기되어 각국의 경기연맹의 주도로 OCT를 실시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그러나 각국 NOC가 이것을 실행할 의지를 전 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1989년에 재차 OCT의 실행을 결의하고 대표급 선수 를 대상으로 기습적으로 OCT를 실시하도록 권고하였다(권오찬, 1989: 33). 그리고 만약 검사에서 약물이 검출되면 선수에게 공정한 소명의 기회를 부여 하기 위해 청문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 는 규정으로 개정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개정에 따라 각국의 국가대표급 선 수에 대한 OCT검사는 1989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대한체육회, 1987: 45-46; Jennings & Simson, 1992: 199; IOC, 1985: 83-85). IAAF의 뒤를 따라 IOC-MC도 1991년부터 OCT를 실행할 실무진을 구성하고 선수들에게 사전 통보 없이 OCT 도핑검사를 실시한다고 통고하고, 각국의 도핑검사기관에 국 가대표급 선수들의 OCT를 자주 실시하도록 촉구하였다(박동호, 2002: 57). 묘사되기도 하였다(Todd & Todd, 2001: 81). 31) IOC-MC에서 활동하는 구서독의 맨프레드 도니케(Manfred Donike)교수는 현재의 도핑검 사는 약 50%밖에 신빙성이 없고, 24시간 전에 약물을 복용한 경우는 아예 검출되지 않아 새 로운 검사방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조선일보, 1987년 3월 13일).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89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IOC는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도핑규제를 엄격히 취하려 면 국제경기연맹 간에 의견일치가 꼭 필요하다(대한체육회, 1988: 126-127; IOC, 1988: 9-10) 고 전제하고, 새롭게 β-차단제(9종 및 관련 화합물)와 이뇨 제(15종 및 관련 화합물)를 금지약물로 지정하였다. 도핑 형태나 방법도 부정 한 수혈로 알려진 혈액도핑 32) 과 더불어 약리학적, 화학적, 물리학적으로 부정 한 행위를 추가로 금지하였다. 제한물질로 알콜, 국소마취제, 부신피질스테 로이드도 추가하였다. 특히 혈액도핑은 매우 부정한 방법일 뿐 아니라 혈액 이나 혈액 관련제의 투입으로 신체에 많은 위험성과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에 금지방법에 추가하였다(김기호, 1988: 34). 같은 해 열린 캘거리동계올림픽에 서는 아이스하키에 출전한 1명의 선수가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한 사실이 적발 되었다. 총 1,598명이 도핑검사를 받았고 34명이 카페인과 이뇨제, 베타 차단 제, 흥분제, 단백동화 스테로이드에 대한 양성반응을 보였다. 10명이 징계를 받았고 24명이 경고처분을 받았다(김건열, 1992: 32). 33) 특히 육상 100m 결승 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한 캐나다의 벤 존슨(Ben Jonson) 이 양성반응을 보여 메달을 박탈당하였다. 그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일종 인 스타노졸롤(Stanozolol) 34) 을 복용한 것으로 밝혀져 세계인들에게 인간의 승리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도핑의 만연에 대해 다시 한 번 경각심을 불러일 32) 1960년대부터 경기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혈액도핑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운동선 수가 자신의 혈액이나 이에 적합한 혈액 기증자의 혈액에 고밀도의 고산소 적혈구를 투입 하여 몸에 정맥 주사하는 방법으로 육상 장거리와 사이클, 크로스컨트리스키에서 성행한 다( 青 木 純 一 郎, 1975: 494-497; 김진원, 1976: 35-36; Ekblom, Goldbarg &Gullbring, 1972: 175-180). LA올림픽에서 미국의 사이클 선수가 타인의 혈액을 주입한 결과 사고가 발생하 였다. 당시 이에 대한 검출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IOC-MC는 규제를 망설였지만, 결국 이 사 건으로 1985년부터 도핑목록에 혈액도핑을 포함시켰다(김건열, 1992b: 65-66; 1995: 26; 황 옥철 황정현, 2011: 31-32; 今 川 重 彦, 2003: 195). LA올림픽 후 미국의 사이클 선수 24명 은 경기가 열리기 직전에 혈액도핑 했다고 시인하였다(대한체육회, 1987: 47; 박종세, 1988: 78; Legwold, 1985; 37). 33) 외언내언, 서울신문, 1991년 8월 24일. 34) 1984년 LA올림픽 당시에 이 약을 검출해 낼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애용하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올림픽 역도경기에 출전한 선수 중에서 2명이 이 약의 양성 반응을 보였다(김건열, 1992: 32-36). 새로운 약물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스포츠계를 장악 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90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으켰다. 35)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IOC-MC에서 위원으로 활동한 김건열은 1988년 이후 올림픽에서 도핑 문제는 전문화, 지능화, 지하화가 빠르게 진행 되어 올림픽이 존속하고 메달리스트의 영광이 계속되는 한 약물에 의존하려 는 선수들 욕망은 상존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김건열, 1992a: 25). 즉 도 핑분야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지하조직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여서 도핑 검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김건열, 1995: 24)고 언급하였다. 1989년 IOC-MC는 펩티드호르몬유사체(hCG, ACTH, HGH, Somatotropin) 와 마리화나를 금지약물에 추가하였다. 1992년에는 선수들이 테스토스테론 을 남용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되어 단백동화스테로이드를 남성화 단백동화 스테로이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첫 검사결과로 T/E 비율이 6~10일 때에 는 더욱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추가하여 재검사를 실시하도록 개 정하였다. 에피테스토스테론(Epitestosterone)이 테스토스테론의 사용을 은 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150mg/ml 이상은 재검사하도 록 결정하였다(Todd & Todd, 2001: 99). 1992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부 터 혈액채취방법을 실시했는데, 4cc의 소량을 채취하여 혈액도핑과 에리스 로포이에틴(EPO)의 사용을 검출하기 위해 적혈구의 형태변화와 적혈구의 TRC(Transferrin Receptor Concentration)를 조사해 도핑을 가려내는 방법 을 택하였다(김건열, 2008: 184-185).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총 1,848명 을 검사하여 배구선수 1명은 스트리크닌, 육상선수 1명은 흥분제, 2명은 클 렌부테롤(Clenbuterol), 1명은 놀에페드린(Norephedrine)을 복용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IOC는 1994년 국제경기연맹(IF)과 국내정부기관(NGB), NOC와 도핑관련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모든 대회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으 로 도핑목록을 개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도핑 정의로 첫 35) 벤 존슨은 출전정지기간이 끝난 1991년 다시 트랙으로 돌아와 1993년 2월 몬트리올에서 열 린 대회에 출전했다가 도핑검사에서 두 번째 적발됐다. 이번엔 테스토스테론이 검출됐다. IAAF는 1993년 3월 5일 존슨에게 선수자격 영구 정지처분을 내렸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91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째, 도핑은 스포츠 및 의 과학의 윤리에 반하는 것이다. 둘째, 도핑이란 1 금지약물에 속하는 물질을 투여하는 것이다. 2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금지약 물을 투여하는 행위 로 새롭게 발표하였다. 그리고 β-2 자극제인 살메테롤 (Salmeterol)의 흡입을 도핑목록에서 제외하였다 (IOC, 1994: 3). 1968년부 터 1996년까지 IOC-MC가 제시한 도핑목록은 점점 늘어나 약물종류와 복용 방법, 형태 등이 매우 다양해졌다. 1996년도에 규정한 내용은 위의 표2와 같 다. 표 2. 1996년 하계올림픽 도핑 리스트 Table 2. A doping list of summer Olympic games in 1996 Doping Classes Doping method Classes Drug Subjects to Certain Restriction 도핑 리스트 내용 A. Stimulants 사기 고양, 피로감 감퇴 등 B. Narcotics 고통 경감, 행복감 고양 C. Anabolic Steroids 근육강화작용 D. β-blocker 감량, 검사회피 E. Diuretics 체급경기에서 체중감량 목적 및 도핑약제 사용후 은폐 목적으로 사용. A. Blood Doping 지구성 경기능력을 향상시킴 B.Pharmacological,Chemical &PhysiologicalManipulation 뇨 검체의 질적 양적 변화, 바꿔치기 A. Alcohol 안정감 B. Marihuana 안정감 C. Local Anesthetics 통증 경감 및 제거 D. Corticosteroid 피로경감, 진통 작용 목적 E. Beta Blocker 심장 박동수 경감 및 심리적 안정. IOC-MC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총 1,928명의 선수를 조사하여 10 명의 선수를 적발하였다. 이 중 6명이 러시아선수였는데 5명에게서 브로만탄 (Bromantan)이라는 매우 새로운 약물이 검출되어 징계처분을 내렸다. 당시 이 약은 당시 구소련의 우주개발에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도핑 리스트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운동선수들에게 널리 사용되던 신약으로 밝혀졌기 때문이 292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었다(김건열, 1996: 28-29; 太 田 美 穂 외, 1996: 508). 러시아는 이 재제에 불복 하여 즉각 스포츠중재재판소(Court of Arbitration for Sport, 이하 CAS) 36) 에 제소하였고, 브로만탄이 흥분제에 속한다는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최종 판결을 이끌어내 5명의 러시아선수들은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김건열, 1996: 27-29). 이 외에도 남성화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110m 허들선수와 3단뛰기 선 수 2명만이 징계처분을 받았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총 621명의 선수가 검사를 받았고 양성반응은 검출되지 않았다. 2) 전문적 반도핑(World Anti-Doping Agency)조직의 설립과 경위 1968년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IOC와 국제경기연맹의 반도핑 정책은 해가 거듭할수록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까지 일어난 도핑 사건들을 통해 그 동안의 반도핑 정책이 스포츠선수들에게나 연맹관계자들에게 약물 의 폐해를 알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도핑의 완전한 규제에는 많 은 문제점과 한계를 노출해 왔다고 판단하였다. 예를 들면 전 세계에서 발매 되는 많은 약물을 금지시키거나 소변검사에 검출되지 않는 복용방법 등을 완 벽히 규제하는 것은 IOC나 국제경기연맹들이 가지는 권한으로는 전부 방지 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 국 정부와 NOC 등의 전폭적 지원 없이는 매우 제한된 도핑검사나 규제에 그친다는 점을 파악하고, 국제 적으로 중립적 입장에서 실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설립의 필요성을 국제회 의를 통해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IOC를 비롯한 국제경기연맹들은 먼저 1988년 6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101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세계반도핑상임회의(Permanent World Conference on Anti-Doping in Sport) 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첫째 국 36) 스위스 로잔에 본부를 두고 있다. 1984년 IOC가 중심이 되어 발족되었으나 1994년에 IOC로 부터 독립하였다. 올림픽대회 기간에 도핑규정 위반이나 경기 결과 판정, 출전자격 등에 대 해 선수단 측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일반 정식 재판에 제소하기 전에 경 기기간 내에 CAS에 제소하게 하여 선수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CAS에 제소 된 안건은 24시간 내에 처리해야 하며, 가능한 선수의 인권을 보호하는데 설립취지가 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93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제적인 협력체계를 강화한다. 둘째, 철두철미한 도핑컨트롤을 확립한다. 셋 째, 각국 정부의 도핑컨트롤에 대해 원조한다. 넷째, 반도핑 캠페인을 전개한 다. 다섯째, 경기기간 외의 도핑검사를 실시한다는 국제반도핑헌장 을 채택 하고, 2년마다 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대한체육회, 1989: 131; 黒 田 善 雄, 1999: 11-12; Todd & Todd, 2001: 89). 이어서 이러한 행동에 유네스코도 동참한다. 유네스코는 1988년 11월 21일 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제2차 스포츠담당장관회의 를 열고 IOC가 채 택한 세계반도핑헌장 에 입각하여 스포츠계의 도핑이 단순히 엘리트 선수만 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금지해 야 한다는 국가적 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첫째, 오타 와의 국제 안티 도핑헌장을 지지함과 동시에 국제적이고 일관된 도핑컨트롤 시스템의 확립에 노력한다. 둘째, 도핑의 징계에 대한 폐해 등에 관한 교육, 계몽프로그램을 국제적으로 합의한다. 셋째, Olympic Solidarity 프로그램 안에서 반도핑에 관한 정기 세미나 설치를 IOC에 제안한다. 넷째, 각국 정부 에 도핑관련 약물의 엄격한 감시체제를 요구한다. 다섯째, IOC가 국제도핑기 구를 설치하는 것을 환영한다. 여섯째, 각국 정부에 대해 국제도핑기구가 충 분한 기능을 발휘하도록 원조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결의문을 채택(대한체육 회, 1989: 130; IOC, 1988: 628-631)하고 유네스코도 국제적 반도핑 활동에 함 께 노력할 것을 국제행사를 통해 스포츠계의 반도핑 정책을 재차 부각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회의를 통해 세계여론을 한 데 묶는데 성공한 IOC는 1999년 2월 로잔에서 스포츠도핑에 관한 국제회의(World Conference on Doping Sport) 를 또 다시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현재 도핑문제와 관련된 새로 운 조직의 설립 작업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0년에는 더욱 전문화되 고 독립적인 반도핑 기구를 설치하고 운영하겠다는 각오를 각국의 관계자에 게 전달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 동년 11월 15~17일에는 호주 시드니에 서 각국의 스포츠장관 및 차관들이 참석한 스포츠계의 약물에 관한 국제정 상회의(International Summit, Drug in Sport, Pure Performance) 를 열고 국 294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제적 도핑을 담당할 독립된 조직의 설립과 자금조달과 관련한 시드니 공동 성명(Sidney Communique) 을 인준하였다. 37) 여기서는 종전과 같이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기간(event testing)의 도핑컨트롤은 IOC-MC에서 주관하지 만, 상시 OCT는 세계반도핑기구 에서 담당한다고 결정하였다. 결국 IOC 본 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조직설립에 관한 사무절차를 마무리하고 WADA 를 새로운 세계 반도핑 기구로 인준하기에 이른다. 특히 각 국가별 반도핑에 관한 정책 수립을 요청하고, 도핑컨트롤과 국제협력, 도핑관련 연 구와 조사, 교육 및 홍보, 불법약물 유통에 대해 철저한 규제를 담당 장관들에 게 요구하였다(김건열, 1999: 50-52; 체육과학연구원, 2003: 7; Catlin, Fitch & Ljungqvist, 2008: 100, 103). 이러한 10여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그 동안 각 경 기단체별로 추진하였던 반도핑 활동을 전문조직인 WADA 에 의해 통일성 을 가지고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마련하게 되었다. 3) 여성성별확인검사 제도의 도입과 전개로 나타난 문제 IOC-MC에 의한 여성성별 확인검사 제도는 1968년 도핑컨트롤과 함께 도 입되었다. 이 검사는 스포츠경기에서 여자선수들만 출전하게 되어 있는 경기 에 여자가 아닌 선수가 참가하였기 때문에 공평한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참가 자의 성별을 미리 확인하는 제도를 말한다. 1930년대부터 국제스포츠계에서는 남성이 여자로 분장하거나 여자 흉내 를 내면서 여성경기에 참여하기 때문에 불공정한 경쟁이 펼쳐진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리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세계여론이 형성되면서 도핑검사와 함께 도이되었다. 특히 육상경기에서 이러한 속임수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스 미스와 페리스에 의하면 최초로 스포츠경기에서 선수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증명이 필요했던 때는 1948년 영국여자 육상연맹(British Women's Amateur 37) 한국에서는 최훈창 문화관광부 체육교류 사무관이 정부 측 대표로 참석하였고, 비정부 (NGO)대표로 김건열 KOC의무위부위원장이 참석하였다(김건열, 1999: 50). 참고로 WADA의 국내조직인 한국도핑방지위원회(Korean Anti-Doping Agency, 이하 KADA)는 2006년 국민체육진흥법을 개정법률에 의거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95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Athletic Association)이 의사가 발행한 여성확인증명서를 요구한 것이 발단 이 되었다 (Ferguson-Smith & Ferris, 1991: 18)고 알려져 있다. 즉 남성이 여 성경기에 출전한 사례가 많아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성성별확인검사를 처음 실시한 국제경기연맹은 IAAF였다. IAAF는 1964 년 국제경기에 참가하는 여자선수는 산부인과 의사가 실시한 성별검사를 받 아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참가규정에 국제적인 육상경기에 출전하는 여자선 수는 자국 협회로부터 여성이라는 성별확인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1966 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육상선수권대회 부터 이 검사를 실행하였다 (Doig et al., 1997: 3; IAAF, 2006; Lamed, 1976: 3; Scaint, 1994: 92). 초창 기 검사방법으로는 알몸의 선수들을 2~3명의 여의사 앞에 세워 놓고 걷게 하 여 눈으로 검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총 243명의 선수가 여 성으로 판명 38) 되었으나 5명의 세계기록 보유자들은 검사를 거부하고 자국으 로 돌아갔다. 나중에 소련과 동유럽의 몇 몇 선수들은 실제로 남성으로 확인 되었다(Lamed, 1976: 3; Yesalis & Bahrke, 2001: Todd, 1987: 87)고 한다. 이 때부터 IAAF의 규정에 따라 각국의 육상연맹들은 여자선수에 대해 성별검사 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의학적 증명서로 작성하여 국제대회에 참가할 때 제 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각국의 육상연맹은 여자선수들에 대한 성별검사를 실 시하게 되었다. IOC 이사회에서 여성성별확인검사의 도입을 논의한 것은 1966년 10월로 알려져 있다( 来 田 享 子, 2010, 28). IAAF가 이미 이 제도를 정관에 규정하고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IOC-MC 위원장인 아더 포리트(Porritt) 39) 는 총회에 서 이 검사를 실시하려면 좀 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 결국 38) 243명 선수들 대부분은 검사방법이 매우 모욕적이었다고 비판하였다(Ferguson-Smith & Ferris, 1991: 17). 39) 아더 포리트는 여성성별 확인검사의 도입에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IOC가 이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IOC는 이 제도를 도입하였고, 그 작업을 새로운 위원장인 메로드(Marode)에게 위임하였다( 来 田 享 子, 2010: 29). 메로드 는 반도핑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Scaint, 1994: 91). 296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1967년에 열린 IOC총회에서 도핑검사와 더불어 여성성별확인검사의 도입에 관한 심의가 이루어졌고, 그루노블 동계올림픽에서 실시한다는 안건이 통과 되었다. 따라서 경기에 참가하는 여성 참가자는 자국에서 검사한 여성이라는 의학적 증명서(Medical Certificates for Female Participants Athletics) 를 의 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였다. 1968년 1월에 열린 IOC이사회에서 이 검사제 도에 대한 규정안을 승인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검사내용으로는 첫째, 가장 근대적인 검사방법을 사용한다(타액 체취). 둘째, 검사는 비밀을 지켜야 하 며 선수들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검사방법에 의해 대회가 열리기 전에 실 시한다. 셋째, 원칙으로 모든 여성선수에게 검사를 실시한다(IOC, 1966). 하 지만 초창기에 실시된 검사방법은 의사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기 때 문에 예행연습에 불과하였다는 평가도 있었다(Scaint, 1994: 92). 1968년 멕 시코 올림픽에서는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염색체 검사, 즉 구강점막도말검 사(Buccal Smear Test) 40) 로 시행하였으며, 산부인과 의사가 검사를 담당하 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구강점막 뿐만 아니라 모공에서 샘플을 채 취하여 검사하는 방법을 병행하였다(Schwinger, 1981: 72). 그 결과 1,280명 의 선수 중에서 3명이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1,800명 중 모두가 정상이라는 검사결과가 나왔다(Ferguson-Smith & Ferris, 1991: 19). 그 후 유전자 진단기법인 중합효소연쇄반응법(Polymerase Chain Reaction, 이하 PCR)은 1991년 삿포로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부터 적용하였 다. 1992년 알버빌 동계올림픽에서도 이 검사방법으로 실시하였다(Doig et al., 2000: 8).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구강점막 세포를 채취하여 XY염색 체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총 2,050명의 시료를 채취하여 검사하였다(서울올림 40) 이 검출방법은 턱 안 상피조직인 구강점막을 일부분 긁어내어 검사한다. 이 세포는 암컷에 만 존재하는 성염색체(Barr Body)의 존재유무를 밝혀주며, 남성은 단 하나의 X염색체를 가 지고 있으므로 성염색체는 남성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검사는 X염색체의 개수 를 판별하는 실험으로 XX염색체와 XY염색체를 판별하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검사결과가 검사자의 숙련도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검사 자체의 신뢰도가 낮아 위양성 및 위음성 결과가 많이 나왔다(김정욱 외, 2000: 216; Ferguson-Smith & Ferris, 1991: 18).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97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픽조직위원회, 1989: 788). 그런데 이 검사로 피해를 본 여성선수가 나타나면서 이 정책은 국제적인 문 제가 되었다. 1985년 일본 고베( 神 戸 )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한 선수 중에 3명이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그 중 2명은 XY염색체를 보유했으나 안드로겐(androgen)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스페인의 허들선수인 마리아 호세 마르티네스 파티노(María José Martinez Patíño)의 경우는 X와 Y염색체를 각기 따로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1983년 헬싱키 세 계육상선수권대회에 참가했을 때 여성이라는 증명서를 제출하였지만 고베대 회에는 이 증명서를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아 재차 성별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Y염색체를 보유한 남성이란 판정이 나왔고, 당연히 출전이 금지되었 다. 그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받던 장학금이 정지되는 등 사회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41) 그녀는 3년이 지난 후에 전문의사의 도움을 받아 Y염색체가 존재해도 남성호르몬에 반응하지 않으며, 월경이 없어 아이 를 낳을 수 없지만 다른 신체기능이나 심리는 여성으로 특이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란 점을 스스로 밝혀냈다(김건열, 1992: 129-130; 융크비스트 라거, 2012: 199-200; 来 田 享 子, 2005: 29-44). 파티노는 법적으로 경기연맹을 고소 할 수 있었으나 이후에 다시 육상계로 복귀하였다가 은퇴하는 길을 택했다.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국제경기연맹들의 여성성 별확인검사 정책에 대한 의학적 신뢰성을 떨어뜨렸고,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 라는 국제여론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즉 국제사회에서 남녀라는 성별을 구 분하는 경계선은 어디일까? 의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상식적 구분에서 벗 어난 신체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이들은 스포츠경기에서 정 당한 경쟁이 불가능할까? 등의 성별검사의 의학적 문제와 한계성에 대한 재 평가 및 여성인권보호 차원에서도 여성을 비하하는 요소가 있으며, 사회적으 41) 김건열에 의하면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18세의 여자선수가 성별검사에서 남 성으로 판정되어 핵형(Karyotype) 검사를 해 본 결과 46XY로 자격발탁을 당한 사례가 있었 다. 이 선수도 산부인과 진료에서 여자성기발육부전이 있는 Gonadal Dysgenesis로 검사상 남자로 분류되었다(김건열, 1992: 130). 298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로도 모순된다는 여성운동계 및 의학계, 국제여론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 다. 결국 1991년 IAAF는 참가자의 성별을 평가하는 항목은 유지하는 수준에 서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듬해부터 폐지되었다. 뒤이어 IOC도 1999년 서울 총회에서 이 제도의 폐지를 결정하고 2000년 시드니올림 픽부터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성별 확인검사 정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경기대회를 관장하는 아시아올림픽 평의회(Olympic Council of Asia, 이하 OCA)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의심이 가는 선수에게는 아직도 검사를 실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99년 강원도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에 서 총 126명의 선수가 이 검사를 받았다(김정욱 외, 2000: 216). 이러한 세계 적 동향과 국제여론의 문제제기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이 제도에 관한 여성에 대한 인권적 문제나 의학적 한계성에 대해 국내에서 화제가 된 일이 거의 없 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선수 누구도 이 검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어 스포츠계에서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4. 한국의 반도핑 활동의 전개와 그 실태 1) 국내의 반도핑 활동의 전개 과정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60년대부터 IOC를 비롯한 국제경기연맹들 의 반도핑 정책 에 맞추어 국내의 경기연맹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전개해 왔 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계의 도핑, 또는 약물복용이란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 한 것은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다. 1972년 삿포로동계올 림픽 개막을 앞두고 1971년 말부터 IOC는 선수들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의 약품의 종류를 지정했다 는 소식과 동계올림픽 참가 선수에 약물검사 및 성 별검사를 실시할 예정 42) 이라는 기사들이 신문을 통해 짧게 소개되어 있다. 42) 흥분제 등 복용엄금, 올림픽위 약품 지정, 조선일보, 1971년 12월 30일; 약물-성별검사 (동계오륜참가선수), 조선일보, 1971년 12월 31일; 약물-성검사하기로, 내년 아시아경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299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그 후, 1976년 대한체육회가 발행하는 체육(Sports Korea) 43) 에 게재된 논단 에서 김진원(1976: 35-36)은 많은 부작용이 경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나볼릭 스테로이드와 혈액도우핑(일본어식 표현) 문제가 큰 두통꺼리가 될 것이며, 이러한 스포츠의 과학화가 인간의 비인간화로 치닫고 있음을 개탄 하는 글을 실어 당시의 스포츠선수들의 혈액도핑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리고 주왕기 등은 한국운동선수들의 약물복용 실태조사 란 연구에서 1974년 대 구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참가한 112명의 선수들을 대상으로 흥분제 복용을 알아보기 위해 TLC(Thin Layer Chromatography)로 뇨를 채취하여 분석한 결과 흥분제를 복용한 사례가 5명 검출되었지만, 선수들이 경기기록을 인위 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복용하였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주왕기 외, 1976: 41-45) 44) 고 발표하여 당시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약물복용 실태를 제시하였 다. 1979년에는 徹 底 期 하는 모스크바 올림픽에서의 도우핑 테스트 (대한체 육회, 1979: 14)와 여성의 남성화를 위한 동독에서의 약제 사용 실태 (대한체 육회, 1979: 22), 인간개조, 어디까지 許 容 해야 할까? (대한체육회, 1979: 46) 등에서 국제경기를 중심으로 스포츠선수들의 도핑과 그 부작용, 윤리적 측면 등에 대해 간략히 세계적 추세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1981년 9월 바덴바덴 총회에서 제24회 서울올림픽 유치와 11월의 아시 아경기대회를 서울이 개최권을 가져오면서 선수들과 도핑과의 관련성이 우 리 사회에 조금씩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두 대회의 유치활동이 활 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8월 2~5일자 신문에는 스포츠상식 정설 역설: 약 물이 메달리스트를 만든다 는 등의 기사들이 보도 45) 되었고, 학술적 연구물 46) 기대회, 조선일보, 1973년 12월 22일. 43) 이 잡지는 대한체육회에서 체육계 소식이나 체육관련 연구물, 사회적 이슈 등을 소개하기 위해 1965년부터 발행하는 월간지이다. 44) 주왕기는 2008년의 언론 보도에서 당시 이 조사 내용을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도록 모 체 육단체가 기자들에게 로비작업을 벌였다고 알고 있다 고 술회하기도 하였다(주왕기, 1989: 355; 올림픽 정신과 도핑, 강원일보, 2008년 8월 19일). 45) 조선일보, 1981년 8월 2일, 5일. 46) 김기호(1982)의 스포츠의 疾 病 管 理 와 도우핑, 김순겸(1984)의 Antidoping Control, 박 현(1984)의 도핑과 도핑컨트롤의 諸 般 問 題 에 對 한 考 察 등이 발표되면서 도핑관련 연구가 300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도 몇 편 소개되었다. 또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Korea Olympic Committee, 이하 KOC)을 중심으로 선수들 도핑의 국제사례나 약물의 부작 용, 동구권 국가의 도핑 실태 등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 후 IOC와 OCA의 대 회개최 규정에 따라 도핑검사를 직접 실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면서 1984 년 9월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orean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이하 KIST) 부설 도핑컨트롤센터(Doping Control Center) 가 설립되었다. 이 것이 계기가 되어 선수와 도핑과의 관련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조금씩 관심 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1990년 이전까지 대한체육회 및 국내경기단체의 정관이나 규정에 선수들의 약물복용에 따른 신체적 부작용이나 도핑검사와 관련된 조항을 제 정한 연맹은 볼 수 없었다. 1990년도 3월에서야 국내 모든 경기연맹을 총괄 하는 대한체육회 및 KOC에 의무위원회 설치조항을 새롭게 삽입하는데 그 쳤다. 1990년에 개정한 KOC 이사회 내용을 보면 IOC 헌장 정신에 부응하기 위해 의무, 보도, 올림픽아카데미위원회 등 3개의 위원회를 신설한다. 도핑금 지 활동을 담당할 의무위원회는 KOC 규정 제20조 제2항으로 신설한다. 의무 위원회는 KOC가 승인하는 도핑연구소와 국내 유관연구소와의 정보교환과 업무협조, 국제대회 파견선수의 예방교육과 도핑검사, 국내대회에서의 도핑 금지 규정과 벌칙규정 제정, 스포츠의학 강습회 및 학술세미나 개최 또는 지 원, 그리고 스포츠의학 연구논문의 출판 등의 사항을 심의하고 자문하게 된 다 (대한체육회, 1990: 34-41)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즉 1990년에 들어와서 야 IOC 헌장에 부합하도록 KOC의 규정을 개정하고 선수들 도핑관련 사항을 조율하는 의무위원회 를 발족시키는 행정적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1980년대 후반까지 국내경기연맹들은 선수들 도핑에 대한 대응 및 관리에 손 을 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301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2) 도핑컨트롤센터 설립과 도핑 실태 IOC 헌장 에는 의무규정과 부속규칙으로 도핑검사에 대한 기관별 업무분 장이 정해져 있다. IOC-MC는 금지약물 지정, 약물분석센터 공인, 대상선수 수 결정, 금지약물 복용선수 및 관련자에 대한 조치 권고안을 작성하도록 하 고, IOC 집행위원회는 금지약물 복용선수 및 관련자에 대한 제재 조치를 취 해야 한다. IF는 대상선수 수의 결정과 무작위추출 대상선수를 선정하고, 약 물복용선수에 대한 추가적 제재 조치 조항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의 조직위원회는 약물검사 시료 채취, 시료 호송, 약물분석센 터 지정 및 지원이 있고, 도핑컨트롤센터는 금지약물 복용 여부를 분석하고, 조직위원회 및 위무위원회에 분석 결과를 보고하는 업무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서울 올림픽조직위원회, 1989: 784). 이에 따라 88서울올림픽 유치 이후 올림픽 개최국의 의무조항의 하나인 도 핑검사소 설치가 필요해지자 한국정부는 KIST를 도핑컨트롤센터를 지정하 고 연구비와 분석기 구입비, 훈련비 등을 지원하는 체제로 출범시켰다(박종 세, 1988: 77;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1989: 785-786). 이때부터 국내에서 본 격적으로 선수들에 대한 도핑검사가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우 리 선수들이 도핑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 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메달권에 진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 직접 도핑검 사를 몸소 체험(황호곤, 1988: 40)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47) 도핑컨트롤센터는 이 대회에서 총 584명의 선수를 검사하였고, 그 중 12명(역도, 육상, 체조, 승마 등)이 양성반응을 보여 IOC의 벌칙규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한편 우리나라의 육상과 사격에서 메달권에 진입한 선 수가 에페드린(Ephedrine) 양성반응을 보였고, 이들은 감기약이나 체중조절, 피임제 등을 복용하였다고 시인하는 일도 있었다. 이것에 대해 OCA-MC는 이 47)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도핑검사를 받아본 선수들이 약물복용에 따른 징계에 경각심 을 품게 되면서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2년 동안 태릉선수촌의 대표선수들과 지도 자를 대상으로 한 도핑관련 교육이 7번 실시(황호곤, 1988: 40-41)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302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번 아시아경기대회는 도핑검사를 처음 실시하여 홍보 및 사전교육이 부족했 기 때문에 호르몬제 양성반응 선수만을 도핑으로 간주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에페드린 양성반응 선수는 판정을 보류하고 경고조치에 그치는 사건도 일어 났다(김건열, 1992b, 48-49; 박종세, 1987a: 21). 이 후 도핑컨트롤센터는 86아시아경기대회의 검사 실적이 양호했다는 평 가와 IOC의 약물기능검사 테스트에 합격해 1987년 8월부터 IOC로부터 국제 적인 도핑검사기관으로 인정받게 되어 88서울올림픽에서도 도핑검사를 수행 (대한체육회, 1987: 126)하게 되었고, 서울올림픽에서 벤 존슨의 도핑 양성반 응을 검출한 성과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도핑검사와 도핑컨트롤센터가 사회적 화제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도핑컨트롤센터는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대회 및 국내대회의 도핑검사를 담당하는 전문기관으로 활동해 왔지만, IOC-MC는 검사결과가 언론에 먼저 노출되는 몇 번의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 에 관리 및 보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1999년에 자격을 상실하는 조치 를 취하였다. 48) 국내선수의 도핑관련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것은 1989년 8월이었다. 이날 KOC는 긴급 의무위원회를 열고 북경 아시아경기대회 파견선수에 대한 도핑검사 결과 양성반응으로 판정된 여자 역도선수 2명을 선수단에서 제명하 고 선수자격을 박탈하였다(당화성, 2004: 18; 대한체육회, 1990: 46). 49) 신문 기사에 따르면, 양성반응을 보인 역도선수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약국에서 약 을 사 복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고 한다. 당시 대한체육회장은 기자들에게 건전한 신체를 가꾸어 가야 할 젊은이들, 특히 운동선수가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국내대회에 출전하는 선수에게도 도핑테스트 48) KIST, 국제공인 도핑검사 자격 상실 에서 보듯, 1999년부터 국내 유일의 도핑검사 기관인 KIST가 IOC의 정기검사에서 불합격돼 공인 도핑검사 자격을 상실했다( 서울신문, 1999 년 1월 6일). 49) 외언내언, 서울신문, 1990년 8월 24일. 이 외에도 지난해 국가대표 수중발레선수 S모양 이 체중조절을 위한 이뇨제 등의 약물복용으로 숨졌다고 보도하였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303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를 해서 깨끗한 선수가 경기에 참가하도록 할 방침 50) 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보도에서 보듯 당시 국내선수들의 도핑컨트롤 이나 약물에 대한 지식 및 인 식이 매우 부족하였고, 도핑검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국내선 수들도 도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51)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선수 6명의 도핑검사 결과(후에 IOC 도핑규정범위 이내의 수치로 확인됨)가 도핑컨트롤센터의 관리 미숙으로 국 내 언론에 특종으로 보도되었고, 외신으로 전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 망 신을 당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52) 1995년에는 IAAF가 실시한 OCT 에서 육상 800m의 국가대표 선수가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 도핑 양성반응 을 나타내 국제경기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는 며칠 전 감기가 걸려 감기약을 먹었는데 거기에 클렌부테롤 성분이 들어 있었다 고 밝혔지만, 4년간 자격정 지 처분을 받았다. 53) 1996년에도 전국체전에 출전한 육상선수가 도핑검사에 서 양성반응을 보였고, 재검사에서도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6.7로 나와 허용 치(T/E = 6.0미만)를 넘겨 IOC 규정에 따라 3개월 동안 재검사를 실시 54) 하기 로 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1998년에는 대한체조연맹이 일부 선수들의 도핑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였 50) 이 당시의 기사에는 종종 약물복용 국내서도 심각, 동아일보, 1987년 2월 5일; 충격, 병든 스포츠정신 도핑사태, 매일경제, 1988년 9월 27일; 선수약물복용 우리도?, 조선일보, 1989년 11월 23일, 등이 기사가 많이 실렸다. 51) 金 炫 權 이 1989년에 보고한 연구를 보면, 20개 종목 387명의 국가대표급 대학생 운동선수 를 대상으로 도핑의 경험 유무에 대해 26명(6.7%)이 도핑을 경험하였고, 또 주위에 도핑 한 선수가 있었다 고 응답한 비율이 31.5%로 나타나 당시 상당수의 선수가 약물을 복용하 고 있음을 시사한다( 金 炫 權, 1989: 54, 74). 52) 이 대회의 마라톤 우승자인 황영조와 역도 우승자인 전병관이 국내에서 실시한 1차 검사에 서 테스토스테론의 T/E Ratio(Testosterone/Epitestosterone Ratio)이 6.3과 7.0의 수치가 나왔다. 결국 이들은 2차 검사에서 기준치 이하로 나와 아슬아슬하게 도핑 혐의를 벗고 올 림픽에 출전하였다.(김건열, 1994: 85; 동아일보, 2000년 8월 29일). 1994년 히로시마아시 아경기대회에 출전한 황영조선수는 우숭 후 경기 3일 전에 감기가 걸려 우황청심환을 먹었 다고 진술한 일도 있다(김건열, 1995: 32-33). 53) 불운의 중거리스타 이진일 한맺힌 트랙 돌아온다, 조선일보, 1997년 3월 23일. 54) 육상 손상영, 재검에서도 양성반응, 연합뉴스, 1996년 11월 9일; 동아일보, 1996 년 11월 9일. 304 醫 史 學
황의룡 김태영 : 스포츠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1968~1999): IOC활동과 국내의 대응과 전개를 중심으로 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KOC-MC가 1998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할 선수 212명의 도핑검사에서 체조선수 4명과 수영선수 1명이 이뇨제를 복용하는 등의 양성반응을 보여 자격정지 2 년의 처분을 받았다. 특히 체조연맹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선 수들이 약물을 복용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뇨제로 살 빼기를 하는 선수들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코칭스태프 몰래 복용할 경우 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또 이뇨제는 선수들에 따라 다 르긴 하지만 1개월 정도가 지나면 검출되지 않는다 55) 고 언론에 보도되어 경 기연맹 관계자들이 책임을 회피한다는 강력한 여론의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1980년대부터 국제대회의 개최에 발맞추어 도핑컨트롤센터 가 설립되고 국내선수들의 반도핑 규제가 시작되었지만, 1990년대 들어와 간 신히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경기연맹들은 정관을 개정하며 의무위원회를 설 치하는데 그친다. 도핑검사도 예산부족이란 이유를 내세워 국제대회에 파견 할 때만 해당 선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고, 이 중에서 몇 몇 선수들은 양성 반응을 보여 자격을 상실하는 등의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도핑검사에서 양 성반응을 보인 선수들은 거의가 아무 생각 없이 감기약을 복용하여 발생한 일 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56) 5. 맺음말 본 연구에서는 IOC가 추진한 반도핑정책에 대해 1968년부터 1999년을 중 심으로 역사사회학적 관점으로 고찰하였다. 20세기 들어와 국제적 문제로 부 각된 스포츠선수들의 도핑 사례를 개괄하고 이를 토대로 반도핑정책을 추진 한 경위와 전개 과정, 그리고 여성성별 확인검사 제도의 실시에 따른 한계, 이 55) 체조협회, 선수 약물복용사실 알고도 묵인, 동아일보, 1998년 11월 13일; 체조 協, 약물 복용선수 4명에 자격정지 2년, 동아일보, 1998년 11월 17일. 56) 스포츠선수들이 한약, 보약, 감기약 등을 의무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마구 복용하는 그만 큼 도핑검사에 대해 무지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된다. 제23권 제2호(통권 제47호) 2014년 8월 305
HWANG Eui-Ryong KIM Tae-Young : Anti-doping Policy Development Process in the Sports World (1968~1999): Focusing on IOC Activities and Passive Response from Korea 에 대한 국내체육계의 대응 및 전개 과정, 도핑컨트롤센터의 설립과 활동, 국 내선수들의 도핑검사 사례를 통한 대한체육회의 대응책에 대한 현대사적 과 정과 한계를 밝혔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 도핑이란 단어가 등장한 후, 20세기에 들어와 의 약학적 발 전과 함께 스포츠선수들의 기량향상에 다양한 약물이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수들 사이의 도핑 현상은 확산되었다. 1930년대 암페타민이 발 매되고 전쟁이나 스포츠경기에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약물복용이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위나 경쟁 등을 이겨내기 위해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이나 한계에 부딪쳤을 때 약물의 힘 을 빌어 극복하려는 방법으로 도핑은 스포츠세계에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1952년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다량의 약물을 소지한 것이 발각 되고, 경기 도중에 선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약물이 만연하였음을 대중들이 알게 되었고, 이러한 도핑을 규제하자는 비판여론이 대두되었다. 그 배경에는 1950년대부터 구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 선수들(철저한 국가적 스포츠정책에 의한 약물복용 선수)이 올림픽에 참가하고 메달경쟁이 극심해 지는 정치적 문제가 작용하였다. 더불어 일반대중들과 청소년들의 약물남용, 또는 오용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고, 청소년들의 우상인 스포츠선수들의 도핑을 가장 먼저 근절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또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고 판단된다. 이 당시 IOC를 비롯한 국제경기연맹들도 스포츠계의 약물남용 을 막기 위한 정책추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예전부터 인간의 자율에 맡겨져 있던 약물복용 행위는 위반이 아니라는 국제 적 인식과 금지약물 성분에 대한 과학적 검출의 한계성 때문에 선수들의 도핑 을 규제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였다. 따라서 스포츠에 서 도핑은 불공평하고 비도적적인 것이고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 하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1960년부터 스포츠경기에서 일어난 많은 도핑사건들이 알려지면서 여러 국제기구는 이에 대한 방지책을 강구하기 위해 자주 세계회의를 개최하고 약 306 醫 史 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