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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末鮮初 留鄕所의 지방자치적 기능과 성격 변화 Ⅰ. 序 言 Ⅱ. 高麗朝 事審官의 기능 변천 Ⅲ. 麗末鮮初 留鄕所의 자치적 기능 Ⅳ. 朝鮮初期 留鄕所의 성격 변화 朴 翼 焕* 1. 世宗 10년 이후의 성격 변화 2. 成宗代의 再復立運動과 그 성격 Ⅴ. 結 言 Ⅰ. 序 言 고려시대 事審官1)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朝鮮初期 留鄕所2)의 그 기능과 성격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事審官의 기능 성격과 연계하여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다. 고려왕조의 事審官은 각 고을 副戶長 以下 鄕職에 대한 관리권과 人民들에 대한 宗主權을 갖는 대 신 그 임무로는 신분의 流品을 밝히어 구별하며, 賦役을 고르게 하고 風俗을 바룬다는 것이다.3) 그럼으로 朝鮮時代 留鄕所의 座首도 鄕案에 오른 鄕員들 중 京在所의 품의를 거쳐 鄕所를 조직하여 각 고을의 自治敎化業務를 지휘하고, 守令의 地方行政 자문기관 구실을 행하였다. 이는 마치 오늘날 各地方議會의 구실을 행하였던 셈이다. 우리가 오랜기간 중단되었다가 다시 실시하는 地方自治의 대의기관인 地方議會 기능 을 활성화 하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도 고려시대 事審官制度와 조선시대 留鄕所制度는 서로 그 연관성에 유의하여 기능과 성격을 역사적으로 잘 살펴 그 교훈을 오늘날의 各 地方自治制度를 활성화 하는데 활용해야 되리라 본다. * 晋州敎育大學校 敎授. 1) 事審官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 논저들이 참고된다. 旗田巍, 高麗の事審官 (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李純根, 高麗時代 事審官의 機能과 性格 (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5). 2) 留鄕所에 대한 논고로는 다음과 같은 논저들이 참고된다.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上 下( 震檀學報 34 35집, 1972 1973). 金龍德, 鄕廳硏究 (韓國硏究叢書 36, 韓國硏究院, 1978), 拙稿, 鮮初 留鄕所 置廢經緯 再考 ( 朴永錫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上, 探求堂, 1992). 李成茂, 京在所와 留鄕所 ( 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3). 3) 高麗史 권75, 選擧志3, 事審官條.

- 243 먼저 고려 事審官에 처음 임명된 분은 경순왕 金傅였다. 고려의 太祖가 경순왕을 慶州 地方 사심관으로 처음 임명한 의도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의도는 新羅古都 舊民 들의 새 고려왕조에 대한 반발심을 어루만져 民族의 大融合을 이루려는데 있었다고 하겠 다. 事審官을 增置하여 나간 高麗王朝 초기의 또 다른 의도는 新羅下代로부터 각 지방의 백성들이 그 지방의 유력한 豪族들에 의해 지배되어 내려오던 역사적 현실을 인정하여 그 지방출신 高官들을 그 지방 事審官에 임명하여 유력한 各地豪族들을 지방자치와 행정 자문에 응하게 포섭하여 활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하겠다. 이는 建國初期의 혼란기에 民心을 재빨리 수습하고 지방세력을 효과적으로 활용 통제하는데 기여한 바 크다고 본다. 그러나 中 後期로 내려오면서 事審官의 폐단과 그와 연결된 각 지방 權豪 후손들의 작폐가 더욱 심해지자 忠烈王 9년(1283) 事審官制度를 혁파하여 버렸다. 그렇지만 오래 내려오던 제도가 王命에 의해 혁파되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根絕되지 못하는 상태로 末期 공민왕 연간까지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4) 이와 같이 고려후기에서 末期까지 각 고을의 事審官을 冒稱하던 權豪 후손들에 의해 일부 고을에서나마 麗末에 벌써 留鄕所 가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柳洪烈에 의해 주장되었다.5) 다음으로 留鄕所의 成立時期를 공민왕 이후의 麗末이나 朝鮮王朝 초기로 내려보는 입 장이 있다. 이에는 李泰鎭과 金龍德 兩氏의 주장이 대표적인데 그 논거는 이런 점에 두 고 있다. 고려 恭愍王代 이후로 북쪽의 紅巾賊과 남쪽의 倭寇 등으로 사방에서 兵興하는 긴박한 정세 속에서 부족한 國家財政과 賞功과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恭愍王 3년 (1354) 添設職이 설치되었다.6) 이는 非實職이지만 官員으로서의 품계는 주는 것으로 처 음에는 3품까지로 제한되었으나, 거듭되는 전란으로 점차 高位職에 이르기까지 남설되었 다. 이 添設職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鄕吏出身이었으며 그들은 軍功賞職 등의 넓은 문을 통하여 品官으로서의 신분을 상승시켜 前御品官 閑良品官 留鄕品官 등으로 불리우는 새 로운 신분계층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7) 새 王朝로 넘어오면서 添設職出身에 대한 정리가 행하여져 李太祖 원년 9월에는 鄕吏 出身으로 登科者를 제외하고 고려의 奉翊(정2품) 이하 조선의 通政(정3품) 이하의 품계 를 갖고 있던 자들을 모두 本鄕에 돌려 보냈다.8) 그들은 자기 고을에서 麗末 이래로 신 4) 忠烈王 9년(1283) 이후에도 事審官을 冒稱하는 폐단이 그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는 사실은 충숙왕 5년(1318)에 州郡의 事審官을 罷하는 조치가 다시 내려지고 있으며, 恭愍王時의 개혁 책임을 일시 나마 부여받았던 權臣 辛旽마저 遷都運動을 추진한다는 명분 아래 五道都事審官이 되려고 획책하 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5) 柳洪烈, 朝鮮鄕約의 成立 ( 震檀學報 9, 1938) p.90. 6) 高麗史 권75, 選擧志3, 添設職條. 7) 金龍德, 鄕廳沿革考 ( 鄕廳硏究, 1978) p.17.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 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pp.137 138. 8) 太祖實錄 권2, 원년 9월 壬寅條.

- 244 國史館論叢 第55輯 분을 상승시킨 그들의 親族들, 土豪의 후예들인 이 品官들은 이미 本鄕에서 閑丁들을 모 아 토지를 廣占하여 견고한 사회경제적 터전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호간의 유대 를 굳히고 守令에 대해서는 그들의 權益을 지키려고 스스로 留鄕所를 마련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9) 이 견해는 앞의 柳洪烈氏 견해보다 유향소의 대두시기를 麗末이나 鮮 初 쪽으로 내려 보는 입장이다. 두 견해 모두 一家를 이룬 견해로 유향소의 대두 시기는 麗末鮮初의 격동기에 朝官을 역임하다 낙향한 事審官 출신의 후손들과 鄕吏에서 신분을 상승시킨 鄕邑品官 子弟들에 의해 留鄕所가 성립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역사의 격 동기에 그들이 世居하든 鄕邑에서 의 세력을 배경으로 留鄕所를 설치하여 내려오다 조 선왕조 太宗初에 벌써 수령을 詆毁하고 인물을 進退시키며 백성들을 侵漁함이 猾吏보다 심하다하여 革去하자는 주장이 대두하여10) 太宗 6년(1406)에 1차 革去되었다. 麗末鮮初 어느 시기에 각 고을 별로 자치적으로 조직되었을 留鄕所가 太宗 6년 경 당 시 사회에 미치는 기능과 영향을 볼 때 고려 事審官 기능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나 朝官들의 입장에서 보면 수령을 詆毁하고 인물을 進退시키는 것이 왕권 이나 朝廷의 행정권 비판 저항으로 보이겠지만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拙速的인 郡縣의 통 폐합과 당시 守令이나 鄕吏의 자질을 문제삼을 정도로 留鄕所가 나왔다는 것은 고려 事審官들이 宗主人民하며 甄別流品하던 그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성들을 侵漁함이 교활한 鄕吏보다 심하다는 것은 事審官의 폐단11)이 그대로 이어져 事審官이나 留鄕所가 고을의 풍속을 자치적으로 바루려던 그 順機能도 무색할 정도로 만들어 버렸기에 조선왕조의 太宗初年에 벌써 留鄕所는 革去의 대상이 되어 버렸던 것 으로 보인다. 이는 각 고을 鄕豪 品官들에 의해 고을 자치권이 지나치게 擅斷되다 보니 대두된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 온 고려왕조 事審官의 遺風에서 비 롯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본다. 그럼으로 먼저 고려조 事審官의 기능과 영향을 먼저 살펴 보고자 한다. Ⅱ. 高麗朝 事審官의 기능 변천 고려 事審官制의 시작에서 변천 혁파에 이르기까지 그 경위를 살피면서 기능의 변천 9) 金龍德, 앞의 책 p.17. 10) 太宗實錄 권11, 6년 6월 丁卯條. 11) 고려 사심관제가 再革罷된 충숙왕 5년 4월 관련 기사에서 혁파 이유로 지적한 폐단이 廣占公田 多匿民戶 若小有差役 例收祿轉 則吏之上京者 敢於私門 決杖徵銅 還取祿轉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 補於國 已盡革罷 라고 하였다( 高麗史 권75, 選舉志3 事審官條).

- 245 - 까지도 아울러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事審官制의 시작을 살필 수 있는 기사는 新羅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 金傅의, 來降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필 수 있는 데 그 기사를 보면, 新羅王 金傅來降 除新羅國爲慶州 使傅爲本州事審 知副戶長以下職等事 於是諸功 臣亦效之 各爲其本州事審 事審官始此12) 라고 하였다. 위에서 이하 기사는 마지막까지의 新羅國을 없애고 慶州로 하였으며, 金 傅를 本州(慶州) 事審으로 하였다는 것이고, 이하는 事審官의 직무에 관한 것으로 副 戶長 以下의 鄕吏의 職等事를 처리케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戶長의 職事는 제외되어 있는 것이 주의를 요한다. 이는 事審官의 職掌 범위가 결국 戶長層(堂大等 大等 포함) 職 掌 범위와 일치한다는 것이다.13) 이는 戶長層과 事審官의 이중적인 지배권력이 副戶畏 이하의 職等事에 관여하게 되어있음을 나타낸다. 기사는 여러 功臣들도 이를 본받아 각자 그 本州의 事審이 되니 事審制는 이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太祖 18년(935)에 비롯된 이 事審制는 羅末麗初 각 고을의 유력한 호족출 신들 중 고려왕조에 歸順 來降하여 新王朝의 기반 확립에 有功한 공신들로 하여금 그들 의 出身州에 대한 지배권을 敬順王의 來降을 계기로 太祖가 추인한 듯한 기사이다. 이는 後百濟의 통합을 앞에 둔 고려 太祖가 여러 功臣들과의 대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 련의 정치적 조치로 보이는 사료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중앙 귀족으로 편제된 豪族 들은 그들 출신 고을에 각각의 在地基盤을 유지하면서 또 연결되어 있었고 事審制의 경 우는 이런 시대적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성립된 것이라고 하겠다.14) 이렇기 때문에 고려의 地方制度가 정비되어 나가는 과정이나 外官이 파견되어 나가는 데도 그 고을 豪 族들의 세력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15) 다음으로 顯宗 10년(1019) 判下에 의하면, 凡差事審官 從其人百姓擧望 其擧望雖小 如朝廷顯達累代門閥者 竝奏差 曾坐諂曲 奸邪之罪者 勿差.16) 위의 기사는 事審官의 差定 원칙을 判下한 것인데 은 백성들의 擧望(薦望)에 쫓아 하고, 은 擧望者는 적더라도 累代에 顯達한 문벌자를 竝奏하여 差定하라는 것인데 다 12) 高麗史 권75, 選擧志3, 事審官條. 13) 李純根, 앞의 논문 p.199. 14) 李純根, 위의 논문 p.194. 15) 朴龍雲, 高麗時代史 上 (一志社, 1987) p.131. 16) 高應史 권75, 選舉志3, 事審官條.

- 246 國史館論叢 第55輯 만 에서 앞서 諂曲奸邪之罪에 연좌된 자는 差定치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고려 事審官 은 麗初에는 功臣들에 의해 兼差된 셈이지만 현종 10년 경에 오면 其人이나 百姓擧望을 많이 받는 자와 累代에 조정에 현달한 門閥者를 竝奏하여 정하는 원칙을 정했고, 다만 諂曲奸邪之罪에 연좌된 자는 差定에서 배제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이는 事審官의 기능에 비추어 보아도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즉 不正한 인물이 사심관에 差任되면 백성 薦望을 많이 받고, 또 여러 대에 걸쳐 조정에 현달한 門閥者라도 그 職任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이런 단서조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事審官의 기능을 단적으로 선언한 忠肅王 5년(1318) 5월에 下敎한 기사를 보 자. 事審官之設 本爲 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 17) 이라 하였다. 이는 事審官을 설치한 본래의 목적과 기능 4가지를 천명하였다. 그 네 기 능은 人民을 宗主하며, 신분의 品級을 甄別하며, 賦役을 고르게 하고, 風俗을 바 룬다는 것이라 하였다. 위의 네 사항이 모두 권리도 되고 또 의무사항도 되겠지만 그 비 중에서 본다면 과 은 권리사항에 가깝고, 과 은 의무사항에 가깝겠다. 특히 사항인 賦役을 均平하게 부과하지 못하면 모든 폐단이 이에서 비롯될 것은 당시의 적폐 실상을 지적한 잇단 기사를 보면 自明하다. 今則不然 廣占公田 多匿民戶(中略)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補於國 已盡革罷 其所匿民戶 推刷復舊.18) 지금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폐단으로 지적된 것이 널리 公田을 점유하고, 많은 民戶를 숨기어 威福을 멋대로 짓는 다는 것은 賦役을 고르게 부과하지 않은 폐단으로 나타난 사항이다. 에서 이 때문에 고을에 害가 있고, 나라에 補益됨이 없어 이미 다 혁파하였다. 그러므로 그 숨긴 民戶는 예대로 推刷하여 복구하라 는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 이미 다 혁파했다는 기사는 이보다 앞서 忠烈王 9년(1283) 4 월에 州府郡縣의 사심관을 權罷한 것을 지적한 말이다.19) 그러니 忠肅王 5년 4월 罷州 郡事審官 의 기사는 사심관 再革罷 기사이다. 이 再革罷時에도 백성들은 매우 기뻐하였 으나, 얼마되지 아니하여 權豪들은 다시 스스로 事審官이 되니 그 폐해는 전보다 성하였 다고 하였다.20) 이런 폐해는 恭愍王의 재위년간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17) 위와 같음. 18) 위와 같음. 19) 高麗史 권29, 忠烈王 9년 4월 辛亥條. 20) 위의 책 권34, 忠肅王 5년 4월 庚申條 및 朴祥, 東國史略 권5, 忠肅王 5년 罷州郡事審官條 細

- 247 실상의 일례로 보이는 것이 공민왕 14년(1365) 領都僉議使司가 되어 개혁을 주도하던 辛 旽마저 공민왕 18년 스스로 五道都事審官이 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21) 짐작할 수 있 는 일이다. 忠肅王 5년 이후 사심관이 다시 부활되지는 않았으나 그 기능은 公認된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京在所로 계승되어 갔다고 보여지고22) 留鄕所에도 큰 영향을 미쳤 던 것으로 보인다.23) Ⅲ. 麗末鮮初 留鄕所의 자치적 기능 앞의 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 事審官은 그 職能이 매우 큰 반면 후기로 오면 그 폐단도 커서 忠烈王代와 忠肅王代 두 차례나 혁파하였지만 그 영향과 폐해는 공민왕 연 간까지 그대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恭愍王의 23년 재위 연간을 그 前半과 後半으로 나누어 보면 그 전반은 왕이 친히 反元改革政策을 추진하여 정치 사회기강이 확립되었으 나, 正妃인 魯國公主의 사망 이후에는 政事에 뜻을 잃어 정치기강은 다시 흔들리었다. 外 部的으로도 전반에는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과 격퇴로 西北方面이 크게 유린되었고, 후반 에는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느라 국가의 경제와 사회 형편이 매우 불안하고 피폐하여졌다. 이런 난국을 대비하고 수습하기 위하여 공민왕 3년(1354)에 添設職이 설치되었다.24) 나라가 처한 긴박한 정세 속에서 부족한 財政과 賞功과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 로 마련되어 官員으로서의 品階를 주었다. 이는 非實職이지만 처음에는 3품까지로 한정 되었으나, 거듭되는 전란으로 高位職에까지 濫設되어 갔다.25) 이 添設職을 받은 사람들 은 대개 鄕吏出身이었으며 軍功을 통하여 신분을 상승시켜 留鄕品官 등으로 불리우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였다. 새 왕조가 건국되어서는 여러 고을의 鄕吏 가운데 과거에 오 르거나 공을 세운 사람 외에 本朝의 通政 以下 향리와 고려 왕조의 奉翊 以下 향리는 모두 本役에 돌아가게 하였다.26) 여려말선초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留鄕所가 언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조직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추측하여 볼 수 있는 자료로는 事審 註. 21) 高麗史 권132, 列傳45 叛逆6, 辛旽傳. 22) 李成茂, 京在所와 留鄕所 ( 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1992) p.357. 23) 旗田巍, 앞의 책(1972) p.135. 또 金龍德氏는 京在所를 在京事審官, 留鄕所를 在鄕事審官에 비정하 였다(金龍德, 앞의 책 p.152). 24) 高麗史 권75, 選擧志3, 添設職條. 25) 위와 같음. 26) 太祖實錄 권2, 원년 9월 壬寅條.

- 248 國史館論叢 第55輯 官을 역 임하다 낙향한 권세있는 호족 후손들에 의해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는 자료로는 忠肅王 5년 4월 州郡事審官이 權罷된 뒤 백성들이 이를 심히 기뻐하였으나, 얼마되지 아 니하여 權豪復自爲之 害甚於前 27) 이라고 한 기사가 주목된다. 여기에서 권세있는 호족 들이 스스로 이를 다시 복구하였다고 하지만, 비슷한 기관과 기능은 복구하였어도 명칭 은 그대로 事審官을 復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守令이 파견된 主郡(領 郡) 主縣(領縣)보다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屬郡 屬縣이 더 많았다고 하나,28) 예종 때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監務官은 明宗 6년(1176) 경에 오면 90여 곳을 넘어 100여 고을에 이르 렀던 것으로 보인다.29) 이렇다면 監務官이 정식 守令은 아니지만 明宗년간에 오면 감무 관과 수령을 합하여 外官이 파견된 고을이 전체 고을의 반 가까이에 육박한다. 이런 상 황 아래서 각 고을 權豪나 그 후손들이라도 나라에서 權罷한 사심관을 그대로 復稱하지 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기능을 행사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놓고서 그 명칭 은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留鄕所의 대두시기는 14세기 중 후반 각 고을의 형편에 따라 自生的으로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0) 이처럼 자생적으로 조 직된 留鄕所는 사심관에 못지 않는 자치적 기능이 컸기 때문에 中央集權을 강화하려는 太宗 초년부터 혁파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견해보다 留鄕所의 성립시기를 麗末이나 鮮初로 내려보는 입장이 李泰鎭 金龍德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 논거의 바탕은 留鄕所를 성립시킨 주동세력은 공민왕 3년에 설치된 添設職이 濫設되자 공민왕 이후부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兵興하는 긴 박한 정세 아래서 각 고을 鄕吏의 신분에서 起身하여 軍功을 통해 첨설직 품관으로 제 수된 閑良品官이나 留鄕品官들에 의해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31) 위의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까운 해석이 가능한 것인가를 검토하 여 본다. 太宗初에 벌써 수령을 詆毁하고 인물을 進退시키며 백성들을 侵漁함이 猾吏보 다 심하다는 비판론과 革去 주장32)이 중앙 조정에 대두되는 실태를 볼 때 당시의 국왕 과 조정은 각 고을 유향소를 政治改革의 대상으로 파악한 셈이다. 이렇게 守令을 비판 견제하고 인물을 진퇴시키는 세력가들을 太宗實錄 의 본 기사에서는 鄕原好事之徒 27) 高麗史 권34, 忠肅王 5년 4월 庚申條. 28) 高處史 地理志 에 보이는 491개 고을 중에서 수령이 파견된 고을이 117이고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고을로 屬府 1 屬郡 68 展縣 305 도합 374고을이 된다. 그렇지만 예종 때부터 파견되기 시작 한 監務官은 공양왕 때까지 174고을이나 된다(朴龍雲, 앞의 책 上, pp.127 132). 29) 朴龍雲, 위의 책 p.132 표 참조. 위의 표에서 감무관이 파견된 年代未詳의 고을이 42고을이나 된다. 30) 이런 견해는 柳洪列氏가 우리나라 鄕約의 成立過程을 검토함에 있어 유향소가 麗末에 성립되어 크게 영향을 미쳐 朝鮮的 鄕約이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 필자도 여러 지방 사례 조사로 유향소가 향촌의 풍속 교화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인 고을이 咸興과 安東이었다. 31) 金龍德, 鄕廳沿革考 (앞의 책) p.17.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앞의 책) pp.137 138. 32) 太宗實錄 권11, 6년 6월 丁卯條.

- 249 라고 지칭하였다. 이 鄕原세력가들을 太祖實錄 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살 펴보겠다. 太祖 원년 12월 壬戌條에서 당시의 左侍中 趙浚은 경기도통사 사면을 청하는 箋文 중에서 아래와 같은 지적을 하였으니, 訊逋逃冒職之吏 而還其鄕吏 擊鄕原土猾之姦 而役其蔭戶 縣各置宰 驛各置丞33) 라고 하였다. 위의 기사에서 기사는 피하여 다니면서 관직을 冒稱하는 관리들을 신문 하여 鄕吏로 돌려 보내자는 것이고, 기사는 鄕原 土猾의 간사함을 공격하여 門蔭으로 除役된 戶의 役을 복구하며, 은 각 고을에 수령을 두고 각 驛에는 丞을 두어 행정과 교통의 중요 단위인 縣과 驛에 모든 관리 책임자를 두자는 건의를 하고 있다. 여기 기 사에서 鄕原 土猾 세력들이 저지르는 폐단으로 門蔭으로 除役된 음호 란 사심관들이 저 지른 名匿民戶 폐단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이는 부역을 각 民戶에 고르게 부과하지 않 은 폐단이다. 다음으로 太祖 4년(1395) 11월 庚午條 기사에서 憲司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考察監司守令得失之目 ①興學 ②撫民 ③恤刑 ④治兵 ⑤備鹽鐵 ⑥繕城堡 ⑦畜資糧 ⑧省 征歛 ⑨禁田獵 ⑩懲鄕愿 ⑪納租自量 ⑫種桑麻 ⑬藝莞楮之令34) 이라 하였다. 여기서 조선 건국 초기에 감사와 수령들의 地方行政得失을 고찰하는 事目 13가지를 상소하는 가운데 그 10번째에 懲鄕愿이 들어 있다. 이를 보면 조선 개국 초에 外方의 감사와 수령들이 힘써 행해야 하는 行政事目 중에 鄕愿의 무리를 懲治할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은 향원 세력가들의 영향과 그 폐단이 심각하여 감사나 수령들 징계 대 상이 되었음을 반영한다 하겠다. 이렇게 선초에 外方의 각 고을에서 감사나 수령권의 행 사를 비판 견제할 수 있는 세력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이들의 세력집단이나 조직체가 麗 末에 벌써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太宗 6년(1406) 6월 丁卯日에 벌써 留鄕所를 두고 수령을 詆毁하며, 인물을 進退시키고 백성들을 侵漁함이 猾吏보다 심하다고 비판받는 鄕原好事之徒 35)의 신분이 어떤 사람들일지를 살펴보자. 앞의 주 33)의 원문 항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鄕原 土猾 을 공격하여 그들이 두둔하여 비호하는 民戶를 찾아 내어 役을 부과시키기를 上書하고 있는 趙浚의 지적에 나타난 것처럼 여말에 벌써 權罷한 사심관의 폐단이 그 후손 權豪 들에 의해 퍼져 있었기에 이런 개혁안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또 太祖 4년 11월 庚午條 기사에서 憲司가 상소한 考察監司守令得失之目 에서 나타난 懲鄕愿 은 鄕原勢力家들의 33) 太祖實錄 권2, 원년 12월 壬戌條. 34) 위의 책 권8, 4년 11월 庚午條. 35) 주 32)와 같음.

- 250 國史館論叢 第55輯 비판 견제가 중앙집권을 확립하려고 파견되는 감사나 수령들에게 그들 지방행정의 득실 을 고찰하는 요목에 들어가 있음은 鄕原勢力이 太祖년간에 얼마나 심각하게 대두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개국초에 왕권과 중앙집권을 확립해 나가려고 파견되 는 守令을 詆毁할 정도의 鄕村勢力家라면 강한 身分制社會에서 非實職인 첨설직을 통해 品官이 되었다 하여도 各鄕村에 있던 閑良品官이나 留鄕品官 신분으로 개국초부터 守令 權을 비판 견제하는 조직체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이끌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 말선초에 벌써 유향소를 조직하여 鄕權을 주도하던 부류의 사람들 신분은 事審官을 역 임하다 낙향한 權豪후손들이거나 朝官을 역임하다 낙향한 前御官이나 그 후손들에 의해 조직되고 주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유향소가 고려왕조 사심관의 遺制로 주장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留鄕所의 再復立이 주장되는 成宗 15년(1484) 5월 癸巳日에 右 副承旨 金宗直이 啓하기를, 我朝 自李施愛煽亂之後 革罷留鄕所 奸黠之吏 恣行不義 建國未百年 而風俗衰薄 (中略) 請復建留鄕所 糾察鄕風36) 하소서 라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世祖말년 경에 유향소가 再革罷된 것은 인 정하면서도 1차 復立된 시기37)와 世祖가 유향소를 재혁파한 이유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 으나 위의 기사에서 기사를 보면 李施愛亂 때문에 혁파된 것이 더 크게 영향미쳤음은 드러났다고 본다. 또 기사에서 留鄕所復建 이유는 奸吏들에 의해 쇠박해진 鄕風을 규 찰하기 위함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 우의정 洪應은 留鄕所 即前朝事審官也 復立爲便 이 라 復立을 지지하고 그 논거로써 유향소는 前朝事審官也 라 하여 조선시대 유향소가 고 려시대 事審官의 遺制임을적절하게 지적하였다. 또 留鄕所가 麗末에 벌써 조직되었을 것 으로 보이는 자료는 유향소의 京城出張所 내지 監視所라 할 수 있는 京在所38)에 관한 기록이 고려 恭讓王 2년(洪武 23 : 1390)의 李成桂 戶籍에 나타나고 있다.39) 이런 관계 때문에 유향소를 分京在所라 부르기도 하였다.40) 그러니 京在所이거나 留鄕所이거나 모두 고려 事審官의 遺制임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실제로 成宗 13년(1482) 1월 유향소 復立便否 논의에서 廣陵府院君 李克培는, 36) 成宗實錄 권116, 15년 5월 癸巳條. 37) 拙稿, 鮮初 留鄕所의 置廢經緯 再考 (앞의 책 上) pp.769 785. 위 논고에서 世宗 10년의 留鄕 所復設을 자세히 재검토하였다. 38) 柳洪烈, 朝鮮에 있어서의 鄕約의 成立 ( 韓國社會思想史論攷, 一潮閣, 1980) p.117. 39) 李基白 編著, 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一志社, 1987) pp.257 261, 洪武 23年 戶口規式. 40) 成宗實錄 권173, 15년 12월 甲戌條, (前略) 分京在所 自祖宗朝設立 其來已久 近歲革罷而不復 何也 라고 하고 또 同甲戌日 기사에서 (前略) 則分京在所之設 亦是正風俗之一端也 라고 하였다.

- 251 州府郡縣 各有土姓 其在京從仕者 謂之京在所 擇其居鄕土姓刚明品官 爲留鄕所 有司奸吏所犯 互相糾察 維持風俗 41) 라고 하였다. 이는 과 항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시대는 各州縣의 土姓出身者 중에 在京從仕者를 경재소라 하고, 고을에 사는 剛明한 품관을 택하여 유향소를 둔다고 하여 그 기능 면에서의 上下關係를 잘 지적하고 있다. 또 항에서는 兩機關의 설치 목적을 간교한 鄕吏들의 所犯을 서로 규찰하여 고을의 좋은 풍속을 유지하기 위함이란 것을 천명한 기사이다. 그러므로 金龍德은 유향소를 在鄕事審官, 경재소를 在京事審官에 비정 하기도 하였다.42) 이러므로 여말선초 유향소는 고려 사심관의 기능 중 宗主人民하고 甄 別流品하던 기능은 경재소에 많이 넘겨주었고, 均平賦役하고 表正風俗하던 기능은 그대 로 계승되어 鄕村民을 자치적으로 지배하는 실질적 權能은 太宗 초년 경까지 대단히 컸 기 때문에 그 폐단도 커서 中央朝廷重臣들이 정치문제화하여 太宗 6년 6월에 국왕에게 건의하여 전국의 留鄕所를 1차로 혁거하였다.43) 그러나 수령을 비난 견제하기도 하지만 그 지방 실정을 모르는 수령에게 地方行政의 자문 역할도 하던 유향소를 혁파하니 그 필요성도 다시 대두하여 앞의 유향소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品官을 河崙의 건의에 따다 太宗 17년(1417) 2월에 申明色을 두었다. 이 申明色은 중국의 中正처럼 科擧鄕試應試者 의 신분을 판정하는 등44) 守令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으나 역시 폐해가 많다하 여 곧 혁파하고 말았다.45) 申明色이 혁파된 3년 뒤인 世宗 2년(1420) 9월에 당시 禮曹判書 許稠의 上言에 따라 凌上之風을 막으려고 조정은 향촌에서 수령의 권위를 최대한 보장하는 소위 守令告訴禁 止法 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府史 胥徒가 그 관리를 고소하거나 品官 吏民이 수령이 나 감사를 고소하면 비록 사실이라도 그것이 宗社安危에 관계되거나 非法殺人에 관한 것 이 아니면 在上者의 죄는 논하지 않으며, 만약 사실이 아닐 경우 在下者는 엄벌할 것을 상소하여 채납된 것이었다.46) 이런 관권 옹호를 위한 일방적인 法의 뒷받침으로 국가와 수령의 권위는 크게 강화되었겠지만 이를 배경으로 한 수령들의 부정과 탐혹은 옛날의 배에 이르고 橫歛苛政으로 백성들은 눈살을 펼 날이 없다고 司憲府는 상소하고 있다.47) 이러한 사태의 시정은 사회적 요청이었으므로 수령의 갖가지 枉法侵奪로 피해를 입은 41) 위의 책 권137, 13년 1월 辛卯條. 42) 金龍德, 앞의 책(1978) p.152. 43) 太宗實錄 권11, 6년 6월 丁卯條, 州府郡縣 各有守令 鄕原好事之徒 置留鄕所 無時群聚 詆毁守 令 進退人物 侵漁百姓 甚於猾吏 乞皆革去 以除積弊. 44) 李成茂, 앞의 논문 p.364. 45) 太宗實錄 권34, 17년 11월 戊寅條. 46) 世宗實錄 권9, 2년 9월 戊寅條. 47) 위의 책 권77, 19년 6월 己未條.

- 252 國史館論叢 第55輯 당사자의 원억을 분간하여 주기로 되어 禁民告訴之法은 다소 완화되었다.48) 그러나 部民 과 수령간의 갈등이나 마찰을 자치적으로 조정하거나 자문할 수 있는 留鄕所나 申明色 을 없애버리었고 또 수령의 죄는 불문에 붙인다는 조건이 따랐으므로 실질적인 개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外官에 대한 무한정한 보호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풀 수 없는 여건 아래서 常民이 수령을 打傷하는 등49)의 폭력적 반항이 연속되 었으므로 새로운 대책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Ⅳ. 朝鮮初期 留鄕所의 성격 변화 1. 世宗 10년 이후의 성격 변화 세종 10년(1428)의 留鄕所復設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鄕 憲 50)에 실려 있는 世宗十年留鄕所復設磨鍊節目 의 자료가 유향소의 복설 허용 사료이 니 즉 태종 6년에 1차 혁거된 유향소와 그 기능이 비슷한 申明色을 두었지만 그것도 태 종 17년(1617)에 폐단으로 인해 혁파되었다. 그 뒤인 세종 10년에 鄕射 鄕飮禮의 보급을 통한 자치적 鄕風敎化를 위해 유향소가 다시 설립이 허용될 때의 節目이 留鄕所復設磨 鍊節目 과 留鄕所作弊禁防節目 이 동시에 頒下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51) 다른 하나는 留鄕所復設에 관한 기사가 世宗實錄 의 年紀 기사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鄕憲 에 실린 鄕所復設 허용을 전제한 兩節目을 사료로서의 신빙성을 잘 인정치 않으려는 입장 이다.52) 또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역사적 사실 설명과 논리 전개에 어려움이 있다. 그 48) 위의 책 권51, 13년 3월 丙子條. 49) 위의 책 권40, 10년 6월 丁亥條. 50) 지금 奎章閣圖書로 전해오는 鄕憲 은 처음 3권으로 간행된 것이나 마지막 책이 缺卷된 상태로 2책(奎 909, 910)이 전해 온다. 缺卷된 3책의 내용을 알 수 없어 궁금하였는데 다행히 國史編纂委 員會 史料館에 鄕憲 간행의 저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咸興新舊鄕憲目 合部 자료가 필사본으로 전해 온다. 이 合部 는 朝鮮史編修會 시절 原所藏者인 함흥부 韓永夏氏로부터 빌려와 등사한(昭和 9년 : 1932) 자료로 교정과 검열을 마쳐놓은 것이다. 이 자료는 咸興과 永興地方에 오랜 세월 傳寫되어 내려 오다 大韓帝國의 성립을 계기로 光武皇帝가 式昭舊憲 이라 親書하고 칙 명에 의해 자료가 정리되어 鄕憲 으로 간행되었음을 咸興新舊鄕憲目 合部 跋文을 통해 알 수 있다(拙稿, 朝鮮前期 鄕規와 鄕規約考 史學硏究 38, pp.327 339). 51) 柳洪烈 李泰鎭 金龍德氏 등이 대표적이고 필자도 이 설을 지지한다. 52) 李樹健 李成茂氏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李樹健 교수가 대표적인데 그 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年紀 기사 중에 留鄕所復設에 관한 기사는 없다는 것과 留鄕所作弊禁防節目 끝에 부기된 崔應賢의 승지로서의 在任期間을 들어 사료 本文 중의 上之十年 을 上之十九年 으로 고쳐봐야 하 고 이 節目들은 世宗 10년(戊申)의 자료가 아니라 그 60년 뒤인 成宗 19년의 자료로 봐야한다는

- 253 역사적 사실은 중요 고을 邑誌나 名賢들의 문집 기록을 통해 世宗에서 端宗년간에 향사 당 건물이 마련되어 鄕會가 열리거나,53) 鄕飮禮를 곁드린 鄕規나 鄕規約講信禮가 베풀어 졌던 고을이 나타나고 있다.54) 世宗 10년에 留鄕所復設이 國令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다 면 上記 고을의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이를 궁색하게 설명하기 위해 留鄕所는 지방 호족들이나 在地品官士族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성립된 기구였기 때문에 太宗代 國令에 의해 혁거되었다 해도 그 당시만은 해체되었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조금 경과한 뒤에는 음성적으로 조직되어 활동을 계속했다는 것이다.55) 이는 太宗이 유향소 뿐만 아니라 申明色까지도 혁파하여 버린 뒤 世宗 10년에 벌써 國令에 의해 留鄕所復立 이 허용되었겠는가를 회의적으로 보는 견해다. 그러나 世宗은 태종 못지않게 즉위 초년 에는 왕권의 확립과 지방에로의 확대에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왕권의 확립을 위한 일련 의 조치로 臺諫들의 署經權 확대(同王 8년)로 宰臣들을 견제하고, 父王의 정책을 이어 承旨의 知吏 兵曹事를 겸임케하여 銓注機能을 계속 행사하게 하였고, 守令告訴를 금지하 는 조치를 취하여56) 왕권의 지방확대 효과를 거두려고 애쓴 점 등을 통해 즉위 8년을 전후하여서는 왕권이 안정적으로 확립되었다. 위와 같은 조치들로 王權이 확립된 것은 긍정적이나 守令權이 일방적으로 옹호되어 그들의 불법적인 吏民侵奪行爲로 집단 민원과 물리적 저항 사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57) 이러한 갈등을 해소시키고 凌上之風도 교화하려는 의도에서 留鄕所復設 조치가 취해지 는 한편, 鄕所에 참여하는 鄕任者들의 불법패리도 예방하려는 留鄕所作弊禁防節目 도 함 께 頒下되었던 것이다.58) 이로써 1차 革去되었던 留鄕所制度는 다시 생겨나지만 이때는 留鄕所 자체가 守令告 訴禁止法의 규제아래 놓여 있었고, 인연을 따라 작폐되는 品官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한 留鄕所作弊禁防節目 이 따로 마련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유향소나 申明色처럼 자치 적일 수 없었다.59) 이 뒤에도 유향소의 토호적 성향을 억제하고 非理를 규제하여 守令權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史料再檢은 필자가 鮮初留鄕所置廢經緯再考 에서 했으니 생략하 고, 더 첨언할 사항은 그 節目을 上啓한 同副承旨 崔應賢이 자기가 啓文을 올리는 그 해가 主上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지 19년이 되는지를 분간 못했다는 논리는(본문의 10년을 19년으로 고친다 는 논리의 근거가 되므로) 더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되고, 또 成宗 10년이 戊申年이라면 再考할 만 하겠지만 그 해는 己亥年이라 그렇게도 볼 수 없겠으니 같은 節目을 여러 세대에 걸쳐 전사하는 과정에서 함흥지방 선비들이 世宗代의 留郷所作弊禁防節目 도 崔應賢이 啓한 것으로 알고 誤記했 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末尾에 부기된 최응현은 삭제하여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생 각된다. 53) 安東과 榮川(지금의 榮州) 고을이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54) 咸興 光州 泰仁 등이 나타나고 있다. 55) 李成茂, 앞의 논문 p.365. 56) 世宗實錄 권15, 4년 2월 庚寅條. 57) 위의 책 권40, 10년 6월 丁亥條. 58) 鄕憲 권1, pp.10 11, 咸興新舊鄕憲目 合部 pp.13 15.

- 254 國史館論叢 第55輯 에 복종시키려는 조치는 同王 11년 5월에 守令告訴의 일이 생기면, 今後陰嗾者 則被訴守令 勿論品官吏民 並杖一百徒三年 如有陰嗾告訴 身自告訴者 連 繼不絕則知官以上 降號 縣官 降爲屬縣 60) 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고을 수령이 고소되면 몰래 사주한 品官과 吏民은 杖 100대에 徒 3년 형을 병과하고, 그 고을 중 知官 이상(郡이상)은 降號하며, 縣官은 속현으로 내려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守令을 고소하면 고소하게 한 사람과 고을 전체를 연좌적으로 책 임을 묻겠다는 것으로 여간 엄격한 규정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또 同王 17년에는 京在所 제도를 정비 강화하여 현직의 관리들로 하여금 각자 8향(父의 內外鄕, 祖의 外鄕, 曾祖의 外鄕, 母의 內 外鄕, 妻의 內 外鄕) 이내의 유향소를 官品에 따라 겸장할 수 있게 하였다.61) 또 京在所의 정원도 아주 큰 고을 유향소 정원수와 같게 강화시켜 座首一員, 參上別監二員, 參外別監二員 도합 五員으로 규정하였다.62) 이와 같은 유향소에 대한 법적 제도적인 규제는 자연히 유향소의 品官들로 하여금 자 신들의 안전과 권익 보존을 위해서도 王權과 官權의 대행자인 守令權에 타협 순종하면서 지방행정의 諮問機關化되어 나갔다. 이렇게 되도록 한 조치는 在京官人들로 하여금 官品 에 따라 京在所를 兼掌하게 규정하였을 때도 京在所는 鄕中公務만 장악하게 하고, 本鄕 의 수령정치에는 간여할 수 없게 규정하여 위반자는 糾理토록 하였다.63) 유향소의 품관 들이 守令權에 굴복하고 마는 실례를 보면 留鄕所復設 조치가 있은 2년 뒤인 世宗 12년 (1430)에 茂珍州의 降號事件이 있었다. 이 사건은 처음 光州人 盧興俊이 部民인 金專과 함께 州牧使 辛保安을 구타한 사건에서 비롯하였다. 처음 鞫問에서 茂珍品官 人吏들은 모두 두 사람의 죄를 숨기고 감추려 했지만 일단 定罪하고 降號의 조치까지 내려지자 그들의 家舍와 家人들을 출향시키는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64) 이 사건이 있은 뒤부터 光州地方 鄕士族들 가운데 名望이 높았던 金文發에 의해 鄕規 約的 성격의 향약이 立定 實施되었던 기록이 光州邑誌 65)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또 이 鄕約은 그 뒤 李先齊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적으로 보급되었음이 秀巖誌 66)의 기 59)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앞의 책, 1986) p.147. 60) 世宗實錄 권44, 11년 5월 丙辰條. 61) 위의 책 권69, 17년 9월 乙巳條. 이때 官品에 따른 京在所를 겸장할 수 있는 규정에 2品 以上은 8 鄕, 6品 이상은 6鄕, 6品 이하 叅外官은 4鄕이었고, 無職衣冠子弟는 2鄕을 겸할 수 있었다. 62) 위와 같음. 63) 위와 같음. 64) 世宗實錄 권48, 12년 5월 己未條. 65) 光州邑訪 (奎 10787) 人物篇 金文發條. 66) 秀巖誌 는 秀巖書防에 모셔지고 있는 事門 李先齊와 그 후손 淸心堂 履素齋 東巖 南溪 다섯 선생의 문집이다.

- 255 사와 光州鄕約條目 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즉 文宗 1년(14511)에는 光山縣監 安哲石과 함께 州號를 복구시키려는 소를 올려 採納되자67) 喜慶堂을 修建하고 경내에 志望이 있 는 선비 90명으로 儒案(鄕案)을 비로소 두어 鄕綱을 바루고 향악을 행하였다. 公은 世宗 文宗 成宗朝에 歷事하여 후세에도 卓然함이 공에 미칠 만한 분이 없어 光州의 輿地之 誌 에도 首題로 나타난다68)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世宗 연간에 金文發의 주도 아 래 鄕約이 실시됐음을 알 수 있고 州號가 복구된 文宗 1년에는 李先齊의 주도 아래 鄕 案까지 작성 비치되어 鄕綱이 많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論及된 光州鄕約條目 은 李先齊의 유고로 전해오다 秀巖誌 에 수록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중엽 世宗 文宗 연간부터 보급 실시되기 시작한 鄕約條目으로 현 대까지 그 원형이 전해지는 자료로는 가장 오랜 귀중한 것이다.69) 필자가 지금까지 검토 한 바로는 15세기 중 후반 世宗과 成宗 연간에 鄕規나 鄕規約 鄕約이 실시된 곳으로 밝 혀진 지역은 이곳 光州 이외에도 威興 安東 泰仁 등이 있다.70) 지금 秀巖誌 에 전해 오는 光州鄕約條目 의 其二綱 綱目을 어긴 자를 벌하는 벌칙에 보면 執綱 發文境內齊會 鄕社堂 施以中等之罰 이라 되어 있다. 이 기사로 미루어 본다면 文宗 연간에 光州에서 벌써 鄕社堂 건물이 마련되어 있어 二綱에 속하는 條目을 어긴 자를 벌하는 일을 郷員 들이 일제히 모여 논의한다는 것이다. 이를 본다면 世宗 연간에 留鄕所復設이 國令에 의 해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집회 집무소인 鄕社堂 건물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71) 위의 光州地方 鄕約 실시와 儒案의 비치는 州牧使 辛保安의 구타사건을 계 기로 州號가 降等되는 강한 조치가 내려지자 金文發 李先齊와 같은 명망있는 前職官僚들 에 의해 鄕風을 자치적으로 敎化시키는 한편, 州號를 복구시키려는 노력도 병행하여 文 宗 원년에 가서야 京在所를 통한 여러 차례의 진정으로 州號가 복구되게 된다.72) 다음으로 世宗 10년에 留鄕所復設이 허용되어 전국의 주요 고을 중 여건이 성숙된 고 을들에 留鄕所가 復立되고 鄕射 鄕飮禮와 鄕規約講信會를 베풀기 위한 鄕射堂 건물이 마 련되어 나갔다.73) 그러나 守令告訴禁止法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유향소의 품관들은 왕권 의 대행자인 수령들에 순종 타협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세종 28령 (1446) 경까지 계속 심해져 가고 있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으니, 67) 文宗實錄 권8, 원년 6월 甲戌條. 68) 秀巖誌 권1, p.22, 蓽門先生行狀. 69) 拙稿, 15세기 光州鄕約의 鄕規約的 性格 ( 龍巖車文燮博士華甲紀念論叢 中 朝鮮時代史硏究, 1989) pp.461 462. 70) 위와 같음. 71) 위의 책 p.364. 72) 文宗實錄 권8, 원년 6월 甲戌條. 73) 安東 榮州 光州 등이 대표적인 고을로 나타나고 있다.

- 256 國史館論叢 第55輯 朴孝誠 知豊德郡事 郡人黄得富不禮 亦令品官火其家黜之 收其田 自部民告訴之法立 民有以守令過惡相告者 74) 라 하였다. 위의 기사는 知豊德郡事 朴孝誠에게 郡人 黃得富가 禮를 표하지 아니하 여 品官들에게 그 집을 불태우고 黜鄕을 명령하였다는 것이니 部民告訴之法 이 세워진 뒤에도 部民이 守令의 過惡을 相告하여도 이제는 鄕所의 品官들이 수령권에 타협하여 部民들을 전보다 더 학대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는 留鄕所復設은 세종 10년 6 월에 허용되었지만 엄격한 留鄕所作弊禁防節目 75)이 동시에 頒下되어 있었고, 또 同王 11년 5월에 守令告訴의 일이 생기면 知官以上은 降號하고 縣官은 속현으로 降等시킨 다 76)는 엄격한 법적 제재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世祖는 즉위 초부터 守令의 貪汚 亂政도 고소를 허용한다는 世宗 29년의 결정을 再闡 明하고, 일반 백성들의 告訴 의욕을 높이기 위해 어느 때 보다도 朝官의 파견을 자주 하 였다.77) 守令들의 非行을 규제하기 위한 世祖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정책은 分臺(御史) 가 이르름에 令守은 畏縮되어 무릇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한다 78)는 말이 나올 정도 로 강경한 것이었다. 제2차의 留鄕所 革罷 조처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이 었다. 世祖 말년 무렵 忠州의 한 백성이 수령의 비행을 고소한 일이 있었는데 忠州 留鄕 所는 守令告訴는 옳지 못하다 고 하여 그 백성을 심히 侵虐하였던 것이다. 忠州 留鄕所 의 행위는 분명히 즉위이래 일관해 온 世祖의 告訴許容政策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 사실 을 안 世祖는 비단 忠州 留鄕所 뿐만 아니라 모든 유향소가 이처럼 수령과 결탁하고 있 다는 판단에서 전국적인 留鄕所 革罷 조처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79) 또 하나의 견해 는 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咸吉道 各地의 留鄕所들이 참여하여 반란이 급속히 확대 되자 나중 이 반란을 진압한 뒤, 왕권의 확대 강화 입장에서 전국의 留鄕所도 혁파되었 다는 것이다.80) 74) 世宗實錄 권112, 28년 4월 壬子條. 75) 이 節目의 내용이 世宗代의 것과 너무나 갖기 때문에 咸興地方 鄕士들이 누대에 걸쳐 자료를 등 사하여 전해오는 과정에 착오된 기록이 붙여져 그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앞의 주52 참조). 76) 주 60)과 같음. 77) 世祖實錄 권2, 원년 11月 己卯條. 78) 위의 책 권7, 3년 3월 乙亥條. 79) 成宗實錄 권137, 13년 정월 辛卯日 기사에서 廣陵府院君 李克培가 주장한 바로써 李泰鎭氏는 이 說을 더 지지하는 것은 좋으나, 留鄕所復立이 결정되려 할 때 이를 막기 위해 反對論者인 成 俊이 급작스럽게 내놓은 李施愛亂 응징설은 造作의 혐의가 보인다고 하였다( 震檀學報 34, p.27, 각주 87 참조). 그러나 成俊의 李施愛亂膺懲說 이 급작스럽게 조작되지 않았다는 점은 뒤에 領事 洪應과 金宗直 등에 있어서도 계속 주장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으로 본다. 80) 이 설을 주장하는 자는 成俊 이외에도 成宗 13년 당시 우의정 洪應과 성종 15년 5월 당시 右副承 旨 金宗直 등도 계속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成宗 14년 이후 留鄕所復立運動을 주도했던 金宗直 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우려야 한다고 생각된다.

- 257 지방통치체제를 守令보다 朝官派遣에 더 의존한 世祖의 정치는 새로운 차원의 中央集 權政治 다시 말하면 전제적인 중앙집권정치로 풀이되지만, 이에서 나타나는 守令不信의 경향은 그 동안의 官權一邊倒的인 鄕村政策이 실패하였음을 뜻한다.81) 이는 앞서 太宗代 申明色制度나 世宗 10년 이후 비록 守令告訴禁止法 아래에서나마 留鄕所가 復立되어 王權의 대행자인 守令權에 동등하게 맞서 비판 견제는 못하였지만 수령의 지방행정 자문 기관과 협력기관화 되어 있던 世宗 연간에서 端宗 연간까지의 鄕村政策보다 더 나쁜 상 태에 빠져 들었다. 世宗은 監司와 守令權 옹호를 통해 왕권과 중앙집권력도 꾸준히 키워 나갔지만 혁거 된 留鄕所를 復立시켜 지방자치기관으로 키우기보다는 수령들 지방행정의 자문기관으로 변화시켜 왕권의 대행자인 守令權과 鄕權의 대표기관인 留鄕所의 타협과 협력을 통해 國風을 교화하여 나가겠다는 정책의지가 돋보인다.82) 鄕村의 자치적 성향을 강하게 가지는 在地의 中小土豪들은 처음부터 官權一邊倒的인 향촌정책을 환영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조정에 의해 강력히 추진됨에 따라 그에 굴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鄕村을 더욱 불 안하게 만들어 감에 따라 일부의 中小土豪들은 그들대로의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83) 그 들이 世宗말년 경부터 유향소가 再復立되는 成宗 19년(1488) 경까지 鄕村의 안정을 위해 모색한 방법으로는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 社會制의 도입을 시도하였고,84) 풍속의 교화를 위해서는 鄕憲을 비롯한 鄕規85)와 鄕規約의 보급86)을 위해 鄕士族 中心의 鄕案을 작성 81) 李泰鎭, 앞의 책 p.149. 82) 世宗은 平安道 咸吉道부터 監司久任制를 실시하여 同王 30년에는 8道 모두 30朔으로 久任시켜 監 司의 道內 각 고을 수령들 감찰 지배권을 뒷받침하여 주었고, 守令들에 대해서는 同王 4년부터 守令告訴禁止規式을 만들어 수령권을 옹호하여 주었다. 守令權은 즉위 초부터 옹호하여 王權을 확립하여 나가고 凌上의 폐풍을 방지하면서 풍속을 교화하는데 유향소를 復立시켜 在地品官들의 협조들 받게 한 셈이다(拙稿, 鮮初 留鄕所의 置廢經緯 再考 앞의 책 上, p.774). 83) 李泰镇, 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 上 ( 震檀學報 34) p.28. 84) 社倉制는 朱子가 鄕村의 경제적 안정을 자치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考案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 는 世宗 22년 3월 左賛成 河演의 救荒策 상소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同王 30년에 일단 채택되어 이의 실시를 적극 주장해 오던 李甫欽을 知大丘郡事로 임명하여 大丘郡에서 시험적 실시에 들어 갔다. 그리하여 文宗 원년에는 慶尙道內 10여 郡縣으로 확대 실시되었지만 나중 李甫欽은 세조 즉위 후에 知順興郡事로 轉補되더니 同王 3년에는 錦城大君(瑜)과 함께 端宗 復位의 음모를 꾀했 다는 혐의를 받고 被禍되어 杖流되었다. 그 뒤 同王 7년에 전국적으로 확대 조치를 내리지만 社 倉制는 여건의 不備와 책임자의 무능으로 비판받다가 成宗 원년에 혁파되고 말았다. 85) 鄕憲은 李太祖가 親製한 鄕憲이 咸興地方에서 즉위 7년부터 頒下되어(東北面 州郡縣의 名號와 경 계 分定을 위해 함흥에 간 鄭道傳에 명하여 頒下된 것으로 추정됨. 田川孝三, 鄕憲과 憲目 鈴木俊古稀記念東洋史論叢 참조) 실시되기 시작했고, 永興地方에도 영향을 미쳤다. 鄕憲과 비 슷할 정도의 엄격한 鄕規가 世宗 연간부터 실시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을은 慶尚道 安東이었다 ( 永嘉誌 에 실려 전해 오는 權偲의 鄕射堂記 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權孟慶의 立寶記 에 의해 서도 확인된다). 安東의 古邑誌인 永嘉誌 에는 지금도 鄕規舊條 가 실려 전해오고 있다(拙稿, 朝鮮前期 安東地方의 鄕規와 鄕規約考 東國史學 19 20 합집, 東國史學會, 1986, pp.115

- 258 國史館論叢 第55輯 하여 실시를 권장했다. 世祖 말년 경 유향소 再革罷 이후부터 예종과 성종 초년까지는 계속하여 勳舊派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재지사림 출신의 신진 관료들을 억제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정책을 통해 性理學的 이상 실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世祖의 집권 초기부터 落鄕하거 나 은둔하여 性理學硏究와 그 이상 실현을 위해 애쓰던 節義派 선비들이 好學好禮의 군 주 成宗이 즉위하자 서서히 登科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였으니 그 대표적 인 물이 金宗直이었다. 金宗直은 吉再의 학통을 이은 金淑滋의 아들로 그의 문하에서 金宏 弼 鄭汝昌 金孟性 曹偉 南孝溫 金馹孫 權五福 兪好仁 朴漢柱 李黿 등87)이 배출되어 嶺南 學派의 始源을 이루었고, 金宏弼의 문하에서 趙光祖 金安國 金正國 李長吉 李長坤 등88)이 배출되었다. 앞의 金宗直 문인들이 成宗代의 개혁정치와 留鄕所再復立運動에 많은 영향 을 미쳤다.89) 2. 成宗代의 再復立運動과 그 성격 成宗의 즉위 초부터 士林出身 선비들이 登科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은 하지만 아직 그 세력이 약하여 그들의 性理學的 理想을 정책에 반영하기는 어려웠다. 김종직을 비롯한 士林派 선비들이 留鄕所再復立運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은 成宗 14년이지만 그 논의가 처음 일어난 것은 成宗 13년(1483) 1월 헌납 金臺의 上啓에 의해 일어나는 데 그 내용은, 侵漁百姓 莫如鄕吏 守令未必皆賢 以此民不得奠居 雖有京在所 耳目不逮 亦未得糾檢 (中略) 留鄕所之法甚美 中因革除 致此巨弊 復立何如 90) 132 참조). 86) 世宗과 文宗 연간부터 鄕員 자조치직인 鄕座目(鄕案)이 조직되고 그 조직 내부의 규약인 鄕規約 的 성격의 향약이 실시된 대표적 고을은 光州地方이었음이 光州邑誌 와 秀巖訪 의 기록에 의 해 확인되었다(拙稿, 15세기 光州鄕約의 鄕規約的 性格 韓國史의 理解 朝鮮時代 1, 신서 원, pp.455 476). 또 成宗 연간부터 洞約契座目이 조직되어 내려오고 洞 단위의 향약인 洞約의 契組織과 결합되어 500여 년이 넘게 오늘날까지도 전해오는 洞約契는 泰仁地方의 古縣洞約契 이 다. 이 洞約契는 成宗 6년(1475)부터 不憂軒 丁克仁에 의해 시작된 洞約契이다(拙稿, 泰仁地方 의 古縣洞約考 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pp.269 299). 87) 儒賢淵源 (國史編真委員會史料館所蔵本) p.5. 88) 위와 같음. 89) 金宗直의 문인 중 그와 함께 개혁정치에 나섰던 인물이 曺偉와 金馹孫 등이요, 留鄕所復立에 노 력했던 인물이 權五福(五紀의 아우로 戊午史禍時 극형을 받았으나, 醴泉 鄕射堂記 를 남겼음)과 金馹孫( 吊義帝文 을 史草에 실어서 戊午史禍의 발단이 되어 극형을 받았으나, 金海의 會老堂記 를 남김) 외에 卞季良의 문인 鄭誠謹 등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90) 成宗實錄 권137, 13년 정월 庚寅條.

- 259 - 라고 하였다. 요점을 찾아보면, 백성들을 侵漁함이 鄕吏같은 것이 없는 데 비록 京在所 가 있다 하나 鄕吏들을 糾檢할 수 없다. 留鄕所는 심히 좋은 것인데, 중도에 革除되어 이런 큰 폐단에 이르렀으니 復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鄕吏들의 巨弊를 京在所만 갖고는 안되니 유향소를 復立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李克培가 찬성했고, 主 上은 領敦寧以上의 諸重臣들에 의논토록 하였다. 그 다음날의 회의 결과는 領議政 鄭昌 孫, 右議政 洪應, 宣城府院君 盧思愼 등이 반대했고, 靑松府院君 沈澮, 坡川府院君 尹士 昕, 左議政 尹弼商, 領敦寧 尹壕, 廣陵府院君 李克培 등이 찬성을 표하였다.91) 그러나 찬 성론자들도 留鄕所員들의 挟私作弊를 징계하기 위한 禁抑節目 을 해당 관서로 하여금 상의 시행토록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92) 여기에서 復立을 찬성하지만 유향소의 작폐를 금하려는 禁抑節目 이 세종대의 留鄕所作弊禁防節目 과 유사한 절목을 지칭한 것으로 보 인다.93) 金臺의 留鄕所復立建議에 가장 먼저 찬성했던 李克培의 견해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州府郡縣 各有土姓 其在京從仕者 謂之京在所 京在所 擇其居鄕土姓剛明品官 爲留鄕所 有司奸吏所犯 互相糾察 維持風浴 其來已久 94) 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京在所와 留鄕所의 상관관계를 아주 적절히 표현하였고, 두 기관 설치 목적은 奸吏의 범죄를 규찰하여 풍속을 유지함이라 했다. 그런데 그 유래는 이미 오래다 하였다. 여기서 경재소와 유향소를 두어 풍속을 유지케하는 그 제도 유래가 이미 오래라 한 점이 주목된다. 바로 이어 세조 때 留鄕所革罷의 이유를 들고 있으니 세 조 때 이전으로 거슬러 봐야 한다. 그렇다면 文宗 端宗 연간이나 世宗 연간을 생각해야 하겠는데 其來已久 라 했으니 世宗代 아니면 그 이전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리라 본다.95) 다음 구절에 世祖代 혁파 이유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中間廢之者 在世祖朝 忠州民告其州守令 其時留鄕所 以守令告訴 爲不可 侵其人太甚 乃 至上聞以此罷之 非他故也96) 라고 하였다. 이는 世祖朝 전국의 留鄕所革罷 이유는 충주의 部民이 그 수령을 고소하 91) 위의 책, 辛卯條. 92) 위와 같음. 93) 世宗 10년의 留鄕所作弊禁防節目 과 같은 내용이 經國大典 刑典 元惡鄕吏禁制條目 으로 법규화 되어버렸다. 94) 成宗實錄 권137, 13년 정월 辛卯條. 95) 주 37) 拙稿, p.778 참조. 96) 주 90)과 같음.

- 260 國史館論叢 第55輯 자, 그 때 그곳 유향소가 그 고소인을 심하게 침학하였다. 이를 들은 主上이 이 때문에 유향소를 혁파하였고 다른 까닭이 아니란 것이다. 여기서 李克培의 주장에 일리는 있으 나, 末尾에 다른 까닭이 아니란 주장을 부언한 데에 회의가 가는 점이 있음도 유의할 필 요가 있다. 그 전날 金臺의 復立建議를 놓고 主上이 의견을 물었을 때 가장 먼저 찬성하 면서 臣亦念此久矣 而未得上建耳 97)라 하였다. 그러니 유향소의 復立意思는 李克培도 가진 지 오래인데 건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누구보다도 유 향소가 復立되기를 바란 지가 오래란 것이다. 또 未尾에는, 復立留鄕所 似無害於國政 其留鄕之 作弊者 自有國法 制之不難 又何恤也 98) 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留鄕所를 復立해도 國政에 해가 없을 것 같은데 그 까닭은 유향소의 작폐자를 禁制하는 國法 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 留鄕所復立便否를 논의하기 시작하는 成宗 13년 1월 이전에 鄕所의 작폐자를 禁制하는 國法이 있다 하였는데 이는 언제부터 있은 국법인지를 推論하여 본다. 앞의 註 94) 인용 문 말미에 있는 其來已久 란 것을 갖고 留鄕所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奸吏所犯을 규찰 하여 풍속이 잘 유지되도록 한 것이 어느 왕 때부터 인지를 推及하여 봤을 때 적어도 世宗代나 그 이전으로 볼 수 있었다.99) 그렇다면 留鄕所作弊者를 禁制하려는 國法도 世 宗代 아니면 그 이전 왕대로 보겠는데 推及이 가능한 法制 마련으로는 世宗 10년 6월 留鄕所復設時 함께 내려지는 留鄕所作弊禁防節目 일 가능성이 가장 많고, 또 하나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太宗實錄 에 자주 나타나는 鄕愿推劾法 이 이 국법일 가능성이 있 다.100) 이 두 禁法의 전후 관계를 놓고 볼 때 太宗代의 鄕愿推劾法 이 世宗 10년의 留鄕 所作弊禁防節目 의 母法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世宗實錄 의 편년 기사에 유향소 관계의 직접적 기록이 안보인다 하여 鄕憲 에 전해오는 世宗十年戊申留鄕所 復設磨鍊節目 과 留鄕所作弊禁防節目 이 世宗 10년의 사실이 아니고 成宗 19년의 사실이 라 한101) 주장은 온당치 않음이 유향소의 적극적 再復立論者인 廣陵府院君 李克培의 成 宗 13년 1월 辛卯日 기사에 의해서 世宗 10년에 留鄕所가 復設되고 그때 留鄕所作弊禁 防節目 도 國法에 준하는 규정으로 頒下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李克培는 누구보다도 留鄕所의 再復立을 지지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10여 일 뒤부터 중견인인 副承旨 成俊과 반대 입장에 섰던 右議政 洪應, 적극적 復立論者인 97) 위와 같음(주 90 庚寅條 말미). 98) 위와 같음. 99) 주 95) 참조. 100) 주 37) 拙稿, pp.774 775. 101) 李樹健, 朝鮮時代地方行政史 (民音社, 1989) pp.329 330.

- 261 金宗直도 그렇게 주장하는 李施愛亂膺懲說 을 그가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찬성 발언 뒤에 굳이 非他故也 라고 하는 것은 반대론을 봉쇄하고 일을 서둘러 추진하기 위 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듯한 인상이 짙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누구보다도 再復立을 원하지만 李施愛亂膺懲說 을 솔직하게 발언하는 당시 右副承旨 金宗直의 주장을 살펴 보아야 한다. 前朝太祖 令諸邑 擇公廉之士 審察鄕吏不法 故奸吏自戢 五百年間 維持風化者以此 102) 라 하였다. 이는 고려 太祖가 여러 邑의 公廉之士를 택하여 사심관을 삼아 鄕吏不法을 자세히 살피게 하니 500년 간이나 風化가 유지된 것은 이런 제도(事審官) 때문이란 것이 다. 이어서 我朝에서 유향소의 혁파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我朝 自李施愛煽亂之後 革罷留鄕所 奸黠之吏 恣行不義 建國未百年 而風俗衰薄 十室之 邑 必有忠信 (中略) 請復建留鄕所 糾察鄕風103) 여기서 本朝 유향소 혁파 이유를 李施愛가 煽亂한 뒤에 혁파되었음을 지적하고, 유향 소 혁파 (2차) 이후 풍속이 쇠박해졌으니, 청컨대 유향소를 復建하여 鄕風을 규찰케 하 자는 것이다. 여기서 감지되는 것은 누구보다도 유향소의 再復立을 바라면서도 논리를 당당하게 펴는 金宗直의 주장에 더 유의해야 할 것으로 본다. 또 留鄕所復立을 추진하던 士林派 측이 李施愛亂膺懲說로 저항에 부딪히자 그 前例를 留鄕所 아닌 事審官制로 바 꾸어104) 주장한 것으로 보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 위의 金宗直이나 同王 15년 4월 己 卯日에 事審官制를 진언한 吳孝淵이나 李文孫 등의 주장 만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위에 인용한 金宗直의 주장을 곧 이어 받아 元老大臣인 洪應은 留鄕所 即前 朝事審官也 105)라 하고 있다. 그러니 적어도 朝鮮前期의 유향소는 고려 事審官의 遺制임 을 확인하는 사료이다. 金宗直을 비롯한 土林派들이 成宗 15년 5월부터 추진하는 留鄕所再復立運動의 성격은 1차 復立된 世宗 世祖代나 이보다 앞서 成宗 13년 1월부터 李克培 등의 원로 대신들이 추진하는 留鄕所復立運動과는 내용과 성격이 좀 더 달라진다. 앞서 1차 復設되었을 때나 同王 13 14년 復立推進時는 留鄕所 品官들의 자문과 협력을 얻어 奸吏所犯을 규찰하여 鄕風을 교화시키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金宗直을 비롯한 新進士林派들이 추진 102) 成宗實錄 권133, 15년 5월 癸巳條. 103) 위와 같음. 104) 李泰鎮, 앞의 논문(下), p.12. 105) 주 102)와 같음.

- 262 國史館論叢 第55輯 하는 留鄕所再復立運動은 鄕射 鄕飮禮나 養老儀 같은 古禮를 회복 실천하여 風俗을 순화 시키려는 의도와 성격이 두드러진다.106) 이는 性理學의 이상에 입각한 古禮回復實踐運動 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추진된다. 成宗 15년 5월부터 金宗直 등을 비롯한 士林派에 의해서 추진되는 留鄕所의 임무는 鄉村內의 不孝 不悌 不睦 不姻 不任恤한 자 다시 말하면 頑嚚自恣 하여 鄕村秩序를 파 괴하는 자107) 모두를 규제하려는 것이요, 이는 鄕三物 鄕八刑으로 萬民을 敎化 糾正하려 는 鄕大夫의 古禮制108)를 실천하기 위해 持平 曹偉가 留鄕所 復立을 청하고 있다.109) 또 이런 취지의 鄕射 鄕飮禮를 미리 실행하여 본 金宗直의 주장을 살펴 보면, 臣 曾爲守令 設鄉射 鄕飲之禮 使孝悌者先之 才藝者次之 不肖者不與爲 由是一鄕之人 企而化之 恥而改之 小補於風化 110) 라 하였다. 위의 기사는 金宗直이 成宗 8년부터 10년(1479 : 己亥) 까지 善山府使로 재직 하고 있을 때 두 儀禮를 실행하여 본 경험을 얘기하면서 두 의례는 孝悌者를 앞세우고 才藝者는 버금하며, 不肖者는 더불어 하지 않았더니 이로 말미암아 鄕人들의 風化에 좀 보템이 됐으니 폐할 수 없다고 進言하고 있다. 이는 同王 14년 8월 丙子日 기사이다. 또 金宗直은 同王 15년 11월에도 古禮制를 실행할 유향소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進言한 것 을 보면, 古有不睦之刑 不婣之刑 聖人之制 至爲詳密 且自留想所革罷後 奸吏放恣 雖有傷風敗俗 之事 無有檢察者 故恣行無忌111) 106) 李泰鎭, 앞의 논문(下), p.7. 앞서 世宗 10년에 유향소가 1차 復設될 때도 鄕射禮나 鄕飮酒禮 같 은 古禮를 보급시키는 기구로 유향소를 復設한 의도는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 징표로는 世宗代 유향소가 복설된 것으로 확인되는 安東府에서 鄕所 건물을 鄕射堂이라 했고 그 편액은 安平大 君이 썼다고 했다( 永嘉誌 권5, 鄕射堂條). 여기에서 鄕射 鄕飮酒禮가 베풀어졌음도 확인된다 (權偲의 鄕射堂記 참조). 다음으로 文宗 연간에 光州府에도 鄕社堂 건물이 마련되었음이 秀巖 誌 에 실려 있는 鄕約條目 의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또 이를 독려하는 국왕의 敎旨文도 世 宗實錄 권62, 15년 10월 丁丑日 기사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런 古禮가 제대로 행해진 곳은 州 나 府 이상의 大邑 가운데서도 일부 지방 실시에 그쳤던 것은 이런 古禮에 대한 이해와 보급이 미흡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世宗實錄 권133에 鄕飮酒儀 와 鄕射儀 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도 반증된다 하겠다. 10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4, 慶尙道 醴泉郡 樓亭條 權五福 鄕射堂記 참조. 108) 周禮 권第十, 地官 大司徒條. 鄕三物 은 6德(知 仁 聖 義 忠 和)과 6行(孝 友 睦 婣 任 恤)과 6 藝(禮 樂 射 御 數)를 말하고 鄉八刑 은 ① 不孝之刑 ② 不睦之刑 ③ 不婣之刑 ④ 不悌之刑 ⑤ 不任之刑 ⑥ 不恤之刑 ⑦ 造言之刑 ⑧ 亂民之刑을 말한다. 109) 成宗實錄 권149, 13년 12월 庚辰條. 110) 위의 책 권167, 14년 8월 丙子條. 111) 위의 책 권172, 15년 11월 乙未條.

- 263 라 하였다. 여기서는 詳密한 古制를 행할 장소의 필요와 유향소 혁파 뒤 奸吏들이 방자 하나 檢察者가 없으니 방자한 행동을 꺼릴 것 없이 한다는 것이다. 이를 멈추게 하기 위 해 復設을 청하는 데, 前朝事審官 維持五百年風俗 今若復設留鄉所 擇鄕中織理者一人 使之檢察 則澆薄之風 庶可息矣112) 라 하였다. 앞의 주 102) 인용 원문에서도 나타났지만 여기서도 前朝事審官을 본받아 留 鄕所를 復設하여 鄕中識理者 한 사람으로 풍속을 檢察케 한다면 박한 풍속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면서 留鄕所復設을 청하고 있다. 그는 고려왕조의 事審官制가 좋은 풍 속의 유지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고 있음이 다시 확인된 셈이다. 이에 대해 국왕은 유향 소가 復立되면 그 폐단도 반드시 심할 것이므로 정지시켰다는 것이다. 成健도 이를 이어 留鄕檢察者에 사람을 얻으면, 可하나, 사람을 얻지 못하면 작폐만 더욱 심할 것이라고 하자, 主上도 州郡留鄕所에 어떻게 다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113) 이에 대해 金宗直은, 十室之邑 必有忠信 雖小邑 豈無一二識理者乎 若擇人檢察 則敗常之辈 庶可省矣 若有檢 察者作弊 則亦有觀察使守令矣114) 라 反論을 폈다. 이는 비록 조그만 고을이라도 1 2명의 識理者 가 없겠습니까?(반드시 忠信한 識理者 1 2명은 구할 수 있다는 논리) 만약 사람을 택하여 敗常의 무리를 검찰하 면 가히 줄일 것입니다. 만약 檢察者의 작폐가 있다면 그들을 감독하는 관찰사와 수 령이 또 있으므로, 檢察者의 작폐 금단은 가능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에 있어서 전조 사 심관제를 본받은 유향소의 재복설을 확신에 찬 논리로 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成宗 17년 10월 당시 大司諫이었던 金首孫의 留鄕所에 대한 견해를 보면, 國家之設留鄕所 所以糾正鄕里風俗也 鄉里不孝不悌者 留鄕所可以糾之 鄕里之不睦 不姻者留 鄕所可以繩之 騁奸謀而愚弄守令者 則可以制之 假官威而侵漁百姓者 則可以 懲之 其有關風敎大矣 115) 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가가 유향소를 둔 목적은 鄕里風俗을 규정하려는 것 이란 것이다. 또 과 에서 不孝 不悌 不睦 不姻은 유향소가 糾正하고 痛繩해야 할 1차 112) 위와 같음. 113) 위와 같음. 114) 위와 같음. 115) 위의 책 권196, 17년 10월 丙申條.

- 264 國史館論叢 第55輯 적인 古禮116) 鄕規로 고을 백성 모두가 지키도록 독려해야 할 것이고, 과 은 일반 土豪品官들이나 鄕吏(衙前)들이 저지르기 쉬운 불법으로 이도 유향소가 제지하고 징계해 야 할 일을 지적하면서, 그것들은 風敎에 크게 관계있는 일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니 鄕 所는 좋은 禮俗의 보급과 함께 향리들의 불법을 징계할 것을 지적한 것이다. 또 이어서 주장하기를, 近者 因一二人作弊而革之 臣恐鄕里之風 俗由是大毁 或曰 風俗汚隆 係於守令之賢否 留 想所 不必設也 是大不然 117) 라 하였다. 그는 근래 1, 2인의 작폐로 유향소가 혁파되어 鄕里風俗이 크게 허물어진 것 이 두렵다 했다. 풍속의 汚隆이 수령의 賢否에 달렸다고 혹 말하며 유향소의 復設이 필 요치 않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크게 그렇지 않다 고 반론을 펴고 있다. 그는 또 守令이 현명해도 풍속을 크게 일으키는 것은 기대키 어려운데 그 이유는 서로 자주 교대 되 기 때문이며, 守令이 현명치 못하면 폐단만 끼치니 移風易俗은 守令만 갖고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118) 그러므로 京在所에 명령하여 鄕中의 謹厚公正한 자로 유향소 책임을 맡기자는 것이다. 만약 유향소 책임을 맡은 자가 풍속을 敗壞시키거나 백성들을 侵漁하 는 자가 있으면, 여러 京在所에 이첩하여 憲府에 轉報케 하고 科罪를 推劾케 하자는 것 이다. 또 留鄕員으로 앞서와 같이 작폐하는 자가 있으면 탈락시키고, 또 京在所가 糾劾 토록 명령하면, 鄕風은 可히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이를 風敎를 유지하는데 一 助가 아니되겠습니까?119) 하는 강한 반론을 폈다. 이는 당시 국왕을 비롯하여 유향소 복 설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비판이요, 金宗直을 비롯한 찬정론자들에 대하여 강한 지지 발언이었다. 또 同年 12월 辛巳日에 鄭誠謹과 金宗直이 국왕에게 上言한 것을 더 보면, 鄭誠謹은 아래와 같이 上言하였다. 古有鄕大夫 以糾正風俗 我朝留鄉所 卽其遺法也 請復之120) 그는 옛날에 鄕大夫121)가 있어 風俗을 규정하였는 데 我朝의 유향소는 그 남아 온 法 116) 주 108) 참조. 117) 成宗實錄 권196, 17년 10월 丙申條. 118) 위와 같음. 119) 위와 같음. 120) 위의 책 권198, 17년 12월 辛巳條. 121) 周禮 司徒敎官職 에는 지방단위를 鄕 州 黨 族 閭 比로 나누고 그 長을 鄕大夫 州長 黨正 族 帥 閭胥 比長으로 하였다. 그러니 鄕大夫는 가장 큰 지방단위인 鄕의 長 칭호이다. 또 鄕射禮는 州에서 鄉飮酒禮는 黨에서 행하는 의례인데, 鄕大夫는 국가의 法을 正月에 司徒로부터 받아 그

- 265 制이니 復設을 청한다는 것이다. 이는 古禮의 회복을 위해 鄕所復設을 주청한 것인데 이 런 주장은 金宗直을 비롯한 新進士林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국왕은 유향소는 폐지된 지가 이미 오래니 復設은 不可하다고 일관하였다. 이에 대해 金宗直은 이르기를, 守令固難盡得人 觀察使賢則可以變風俗也 但以速遞不能行其道也 若擇遣觀察使 而期以 三十朔則可矣122) 라 하였다. 이는 수령은 모두 賢人을 얻기 어려우니 觀察使가 현명하면 풍속 변화가 可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빠른 교체로 그 道를 행할 수 없으니, 觀察使의 임기를 30朔으로 하는 것이 可하다는 것이다. 이는 世宗代에 실시한 적이 있는 監司久任制 를 다시 주장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 국왕은 관찰사가 賢明하면 可하나, 현명하지 않다 면 해가 있지 않겠는가? 反問하고 있다.123) 다음으로 經筵에서 掌令 金楣가 監司의 久任制에 대해 上啓한 바를 보면, 當擇剛明正大者 爲監司 使之久於其任 三年乃遞 則頑悍之俗 漸可革也124) 라 하였다. 이는 監司를 剛明正大한 자로 삼아 그 임기를 3년으로 하면 완고한 풍속을 점점 바꾸는 것이 可할 것이라 하여 監司久任制를 주장하고 있다. 또 유향소 혁파 이후 의 풍속 동향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 古者一鄕之中 擇品官正直一二員 爲鄕有司 以正風俗 名曰留鄕所 革罷以來 鄕風日以濡 薄 臣意亦以爲 復立留鄕所 擇剛直品官 爲鄕有司 則雖未能卒變薄俗 亦或有維持鄕風 而頑 兇之徒 庶少矣125) 라고 하였다. 이는 정직한 품관 1, 2인으로 鄕有司를 삼아 풍속을 바루니 이를 유향소라 했다. 이를 혁파한 이래로 鄕風이 날로 박해지니 臣도 또한 유향소를 復立하여 剛直品官 으로 鄕有司를 삼으면, 갑자기 薄俗을 바꿀 수는 없으나 또한 鄕風을 유지할 수는 있어 頑兇의 무리가 무릇 적어지기는 할 것이라 하였다. 士林派의 巨頭 金宗直은 留鄕所 復立運動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同王 18년 6월에 全羅道觀察使로 出辭하게 되었으며, 이 出辭는 이외로 復立運動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 것을 州長에게 傳受하면 州長은 正月中의 吉日을 택해 鄕射禮를 행하고, 黨正도 마찬가지로 四 孟月의 吉日을 택해 鄕飲酒禮를 행한다 하였다. 122) 成宗實錄 권198, 17년 12월 辛巳條. 123) 위와 같음. 124) 위의 책 권214, 19년 3월 丙寅條. 125) 위와 같음.

- 266 國史館論叢 第55輯 게 된다.126) 위에서 掌令 金楣가 다시 들고 나온 監司久任制와 留鄕所復立論議는 평소 金宗直이 주장하던 바로써 이 논의는 同年 5월의 復立決定으로 몰아가게 되는데, 金楣의 論議再開는 감종직의 還朝를 염두에 두고 벌린 것으로 보는 견해127)도 있다. 金楣의 건의가 있은 뒤 몇일 안되는 4월 丙辰日에 勳舊系列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柳子光으로부터 유향소를 복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을 보면, 留鄕所官 武於鄕曲 鄕吏畏之 過於邑宰 其弊不貲 然有補風化者亦多 (中略) 以此善者勸 惡者懲矣 臣意謂不可不立也128) 라고 하였다. 이는 유향소가 여러가지 폐단도 적지 않지만, 風化에 補益되는 점도 또한 많으므로 子光 자신은 復立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왕은 혹자는 可 라 하고 혹자는 不可 라 하니 마땅히 다시 의논하라고 하였다.129) 이 명령에 의해 同王 19 년 5월 乙亥日에 議政府 領敦寧以上과 六曹 漢城府 2品 이상이 모여 復立便否를 논의토 록 하였더니 勳舊系列의 일부는 아직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많아 졌었다.130) 국왕은 이체 이미 찬성으로 태도를 바꾼 領議政 尹弼商 등의 의견을 쫓아 留 鄕所의 復立을 可決시켰고,131) 이에 따라 다음 6월에 司憲府가 啓한 留鄕所復立節目 과 같아 시행할 것을 傳旨하였다.132)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金宗直을 비롯한 士林系列 선비들은 鄕射 鄕飮禮 같은 古 禮의 보급을 통해 풍속을 순화시키고, 고려 事審官制를 본받아 惡吏를 규찰하려는 의도 에서 留鄕所再復立運動을 꾸준히 추진하여 1차적 목적은 달성되었다. 再復立留鄕所의 이 러한 권한은 유향소가 이제 향촌자치의 중심이 됨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집권체제 확립 의 시녀적 역할에 그쳤던 이전 留鄕所와는 그 성격이 판이한 것이다.133) 鄕吏에 대 한 통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이전의 유향소는 주로 猾吏의 수령에 대한 凌蔑行爲를 규제할 따름이지만, 復立留鄕所에서는 奸謀를 품고 守令을 愚弄하는 경우와 官威를 빌 려 백성을 侵漁하는 경우 두 가지로 나누어 놓고 있다.134) 전자는 이런 유향소의 임무 126) 李泰鎭, 앞의 논문 (下), p.12. 127) 위와 같음. 128) 成宗實錄 권215, 19년 4월 丙辰條. 129) 위와 같음. 130) 이 논의에서 반대 의견을 표한 사람은 洪應, 尹壕, 許琮, 愼承善, 魚有沼, 李克增, 成俊 등이었고, 찬성 의견을 표한 사람은 尹弼商 李瓊仝 金克忸 權侹 尹垓 辛鑄 尹甫 洪貴達 李陸 韓懽.李拱 辛以 中 崔景禮 李約東 具壽永 鄭蘭宗 魚世謙 李世佐 李欽石 등이었다. 131) 成宗實錄 권216, 19년 5월 乙亥修. 132) 위의 책 권217, 19년 6월 庚申條. 133) 李泰鎭, 앞의 논문(下), p.9. 134) 주 115) 인용문 참조.

- 267 를 계승한 것이지만, 후자는 復立留鄕所가 이전 유향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임을 말 해 주고 있다. 즉 復立留鄕所는 향리를 어디까지나 향촌 구성원의 하나로 보고 그들의 侵虐行爲를 향촌에 대한 不睦 不姻의 행위로 간주하여 제재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135) 士林派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재복립된 유향소이지만 재복립이 결정된 뒤 2년밖에 되 지 않은 同王 21년(1490) 7월부터 유향소를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士林系列에 서 나오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혁파를 청하는 工曹判書 成健의 주장을 보면, 設留鄕所 欲正風俗也 而其爲留鄕所者 非其人 互相毁謗 至於告狀 甚者與守令相抗 作弊 於民 反致風俗不美 請罷之136) 라 하였다. 그는 유향소의 설치는 風俗을 바루려 함인데 再復設 이후 유향소는 非人 들이 相毁 相抗하고, 백성들에 작폐하여 풍속에 反하여 아름답지 못하니 혁파를 청한다 는 것이다. 이는 명분론적 주장이었고, 其實은 유향소가 鄕村 鄕飮禮 같은 古禮를 힘써 행하여 풍속을 순화시키려는 것은 소홀히 하고 鄕所나 觀察使나 수령 누구도 非違를 규 찰하는 일을 힘쓰지 않고 있음을 개탄한다.137) 또 士林派들이 재삼 혁파를 청하는 것은 各地의 留鄕所를 1차적으로 감독할 책임을 갖고 있는 京在所를 勳舊大臣들이 兼掌制度 에 의해 사림 세력이 두드러지는 일부 고을을 제외하고는 勳舊派들이 재복립 유향소의 대부분을 장악하였기 때문이었다.138) 그러나 士林系列 인사들의 혁파 주장이 받아들여지 지 않자 士林系列 선비들은 司馬所라는 기구를 만들어 대항하려 하다 계속적인 탄압을 받아139) 큰 타격을 받자 다시 무대를 중앙으로 돌려 權貴化한 勳舊大臣들의 정치자세에 대한 공격을 펼쳤던 것이다. 이는 성리학 특유의 淸白信條에 근거한 거침없는 공격으로 공격받는 勳舊大臣 측으로 하여금 하나로 뭉치게 하였고, 드디어는 감점적인 보복행 위를 불러 일으켰으니 그것은 燕山 4년(1498)에 이르러 戊午士禍로 나타났다. 이와같이 그간의 士林 勳舊 대립의 근본 문제가 유향소에 얽힌 利害得失이었기 때문에 士禍 벽두 에서 勳舊勢力의 巨頭 尹弼商 柳子光 등은 士林派의 새로운 보루인 司馬所에 대한 탄압부터 가했던 것이다.140) 조선의 文物制度가 成宗 이후 弛緩하여 갔음과 같이 유향소도 이때부터 더욱 부패하 135) 李泰鎭, 앞의 논문(下), p.10. 136) 成宗實錄 권242, 21년 7월, 丁卯條. 137) 위의 책 권245, 21년 9월, 甲申條. 138) 처음에는 유향소의 再復立을 반대하던 尹弼商 柳子光 등의 勳舊派들이 찬성으로 태도를 바꾼 것 은 京在所 兼掌制에 의해 각 고을 鄕權을 장악하여(2品 이상 大臣들은 연고권이 있는 고을 8鄕 까지의 유향소 감독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역이용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李泰 鎭, 앞의 논문 (下), pp.16 26 참조. 139) 燕山君日記 권31, 4년 8월 癸酉條. 140) 李泰鎭, 앞의 논문 (下), pp.28 29.

- 268 國史館論叢 第55輯 여 가기 시작하여, 유향소는 점차 鄕風糾正의 本意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야심을 품은 惡 輩의 集合所로 변하여져 가고 있었다.141) 그러므로 燕山君 즉위년(1495) 5월 庚戌日에 忠淸道都使 金馹孫이 謹條利病 26事를 상소하는데 그 1條에서 유향소에 관한 상소하는 것을 보면, 責留鄕以礪風浴 國家於留鄕 建革不一 議者紛紛 而先王卒置之者 以其窮村僻鄕 監司守 令所不及知之 善惡皆得以糾舉也 有古閭師之遺意焉 142) 라고 하였다. 이는 유향소를 督貴하여 풍속을 순화시킴을 강조한 것인데, 이 중에서 주 목을 요하는 것은 유향소에 대해 국가가 취한 建革(置廢) 조치가 한 번이 아니라는 것이 다. 그러니 燕山君 즉위년에 金馹孫의 주장은 유향소의 建置도 한 번이 아니요, 革去 廢 止도 한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앞서 成宗 19년(1488) 5월의 留鄕所 復立은 世宗 10년에 復設되었다가 世祖 말년 경에 혁파된 유향소의 재복립 (2차復設)임이 기록 상으로 확인된 셈이다. 또 先王(成宗)이 끝내 유향소를 復置한 것은 궁벽한 鄕村의 일(善 惡)을 監司와 守令이 알지 못하는 바라 이 선악을 모두 糾擧하기 위함이요, 이는 옛날 閭胥나 族師143)의 남긴 뜻이란 것이다. 또 이어 지적한 것을 보면, 今但與邑吏爲敵 發摘其弘徵贖以拚一遊耳 其於鄕風 邈然無正 且鄕射鄕飮養老等禮 所以 別淑慝而成禮俗也 著在令甲 而俗吏慢不擧行 臣願三年之後 以此等事 責留鄕 以時告守令 而行之 144) 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지금의 유향소는 邑吏와 함께 적이 되었고, 鄕風에 대해 그들 은 막연하여 바룰 뜻도 없다 했다. 또 鄕射 鄕飮 養老禮 등은 法典에 있는데도 俗吏들이 게을러 거행치 않는다 했다. 자신(臣)은 3년 뒤를 바라면서 이같은 古禮法] 등의 일로 유향소를 督責하고, 이때 守令이 고하게 하여 이를 실행케 하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만 보아도 金馹孫이 스승 김종직 못지 않게 재복립된 유향소를 督責하여 鄕射 鄕飮 禮 같은 古禮를 보급시켜 풍습을 교화 진작시키려고 얼마나 애썼던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이 얼마나 정책에 반영되었는지를 알기도 어렵거니와 留鄕所의 再復立運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립하였던 士林과 勳舊派들은 再復設에는 어렵게 타결로 이끌어 졌지만, 각지에 再復設된 유향소의 감독권과 鄕權은 京在所兼掌制 141) 柳洪烈, 앞의 논문 p.127. 142) 燕山君日記 권5, 원년 5월 庚戌條. 143) 인용 본문에서 閭師 라 한 것을 周禮 에 보이는 閭의 長인 閭胥와 族의 長인 族師를 통합하 여 略稱한 것으로 보인다. 144) 주 142)와 같음.

- 269 度를 역이용한 勳舊派들에 그 주도권이 넘어가 버렸다. 사림파들은 그들이 목적했던 유 향소를 통해 鄕射 鄕飮 養老禮 등을 보급하여 풍속을 교화하여 나가려던 의도가 좌절되 자, 司馬所를 설립하여 훈구파와 대항하면서 풍속을 바루려 하였으나 이것도 戊午史 禍145)와 甲子士禍로 큰 타격을 받았다. 광폭한 君主를 만난 것도 士林들의 화근이었지만 이런 광폭한 君主를 책략으로 선동하여 사림파 선비들을 대 탄압하던 그들도 甲子士禍 에서는 더 큰 탄압을 받았으니 일종의 報應을 악연으로 받은 셈이었다. 정치의 혼란함이 그 극도에 이르렀으니 뒤의 中宗反正도 피할 수 없는 정치의 흐름이었다. 이 뒤 16세기 이후의 유향소의 기능과 그 성격 변화는 中宗 宣祖代의 鄕約普及運動의 성격과 관련지어 검토해야 할 문제임으로 본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146) 다만 그래도 京在所의 지휘 감 독 아래 있던 留鄕所는 그 고을 지방자치와 행정의 자문기관 역할은 하였으나, 京在所가 혁파되어 버린 宣祖 36년(1603) 뒤로는 守令의 地方行政 보조기관으로 되어 버려 그 명 칭도 鄕廳 이라 많이 불리게 되었다.147) Ⅴ. 結 言 麗末鮮初에 각 고을 나름대로 설치된 留鄕所, 각 유향소를 주도적으로 조직했던 세력 가들과 그 설치시기는 고을마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각 고을 유향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움직였을 세력가도 事審官을 모칭하던 權豪後孫들일 가능성이 留鄕品官 후 손 보다 더 컸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鮮初 留鄕所의 자치적 기능과 성격 이해를 위해 고려 事審官制의 기능 변천을 검토하였다. 고려 사심관의 기능은 人民을 宗主하고, 인민의 신분 流品을 甄別하며, 賦役을 均 平하게 하고, 風俗을 表正케 한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권리 성격이 강하고 뒤의 두 가지는 의무 성격이 강하지만 어느 것이나 바르게 행사하지 못하면 폐단을 가중시키 는 것이다. 그래서 顯宗 10년에 諂曲奸邪之罪에 연좌된 자는 差定치 말라는 규제가 내렸 으나 폐단은 그치 지 않아 忠烈王 9년(1283)에 1차 權罷되고, 충숙왕 5년에 2차 혁파되 었다. 그러나 그 유풍은 공민왕 연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여말선초 각 고을 留鄕所와 京 在所 성립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음을 成宗代 留鄕所 再復立 추진과정의 논의에서 많 145) 연산군 4년(1498) 7월의 士禍는 金馹孫이 스승 金宗直이 쓴 吊義帝文 을 史草에 실었다가 柳子 光의 무고로 士林들이 화를 입었다. 史草에 의한 禍이기 때문에 다른 士禍와 그 성격 구별을 위 해 戊午史禍라 하기도 한다. 146) 拙稿, 朝鮮前期 呂氏鄕約 普及運動과 그 性格 ( 又仁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8) pp.201 230 참조. 147) 金龍德, 앞의 책(1978) pp.16 66 참조.

- 270 國史館論叢 第55輯 이 나타났다. 고려 事審官制의 영향을 많이 받은 鮮初의 유향소는 申明色制度와 함께 鄕村自治的 기능이 너무커서 中央集權體制를 확립하려는 太宗의 왕권강화책과 조정의 집권정책에 저촉되어 太宗 6년(1406)에 1차 혁거되고, 申明色制度도 太宗 17년에 혁파되었다. 世宗 즉위 초년에도 왕권강화를 위한 守令告訴禁止法 시행은 계속되어 집권체제는 확립되었 겠지만 吏民들의 수령에 대한 물리적 저항사태가 빈발하자 유향소를 世宗 10년(1428)에 1차 復設하였다. 그러나 鄕所品官들의 비리도 금지하려는 留鄕所作弊禁防節目 도 동시에 내렸다. 이를 통해 이제 유향소는 수령의 지방행경 자문기구화 하였다. 이 제도의 시행 이 계속되자 수령과 유향소가 협력하는 것은 좋으나 吏民들에 대한 侵虐이 계속되고 世 祖의 王權再確立 정책에 반항하는 이시애난이 터지자 이 난을 진압한 직후에 전국의 유 향소는 2차로 혁파되었다. 成宗의 즉위 초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金宗直을 비롯한 士林系 인사들은 成宗 14년부터 留鄕所再復立運動을 끈질기게 추진하지만 국왕과 훈구파들의 저지에 부 딪혀 5년 간이나 再復立이 지연된다. 그러나 사림파 인사들은 국왕과 훈구파들을 설득시 키기 위해 지구적이지만 당당한 논리를 주장한다. 그 논리는 鄕射 鄕飮禮 같은 古禮의 보급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고, 奸吏들의 폐단을 檢察하기 위해 고려 事審官制의 유풍인 留鄕所를 再復立하자는 주장을 펴, 일부 훈구대신과 국왕의 허락을 받아 成宗 19년 (1488) 5월에 재복립의 결정을 얻어 내었다. 그러나 어렵게 재복립된 유향소가 古禮의 보급기관으로 鄕風을 교화하고, 奸吏들의 폐 단을 자치적으로 檢察하는 중심기관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士林勢力이 우수한 일부 고을 을 제외하고는 京在所의 兼掌制에 의해 전국의 여러 고을 鄕權은 훈구파들에 의해 장악 되어 버렸다. 士林派들은 각 고을에 司馬所를 설립하여 대항하지만 힘의 한계를 느낀 士 林系 인사들이 權貴化한 훈구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勳舊系列 인사들이 국왕(燕山主) 을 책략으로 선동하여 사림파 선비들에 대 탄압을 가하여 유향소를 통한 古禮普及을 통 해 鄕風을 교화하려던 이상 실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뒤의 유향소는 대부분 猾吏들의 폐단이나 檢察하고 수령들의 지방행정 자문역할을 담당하는 기구로 유지되다가, 倭亂을 치른 뒤 士林들에 의해 京在所가 혁파된 선조 36년 이후로 오면 이제 鄕廳 은 수령들 지방행정의 보조기관화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