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f ;셜 콩 복원정 1:11 71 본겨l펙 (고증몇관련문현자료집)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찾f ;셜 콩 복원정 1:11 71 본겨l펙 (고증몇관련문현자료집)"

Transcription

1 :J NO 그다내\ 썩~l 보존기간 준영구 영구 샘산부서명 궁능문화재고} 찾f ;셜 꿈 복원정 1:11 71 본겨l펙 (고증빛관련문헌자료집) 무 삐 삐 삐 삐 삐 화 재 정 삐 삐 빼 삐 삐 빼 삐 삐 삐 삐 삐 삐f 매 4 자 료 실 삐 삐 삐 빼 삐 삐 삐 삐 삐 U 삐 삐 9 11 j <> 0( 2) 807 문화재청

2 찾f ;셜 콩 복원정 1:11 71 본겨l펙 (고증몇관련문현자료집)

3 목 차 1. 의궤 1) 조선시대 진연 진찬 진작의궤 목록 2) 창경궁영건도감의궤 3) 창경궁수리소의궤 4) 인현왕후 빈전도감의궤 5) 현종 빈전도감의궤 6) 명성왕후 빈전(혼전)도감의궤 2. 신증동국여지승람 3. 만기요람 4. 건물관련 사료 1) 내 전권역 (1) 자경전 (2) 환취정 (3) 통명전 (4) 정양문 (5) 여휘당 (6) 양화당 (7) 경춘전 (8) 순역헌 (9) 환경전 (10) 공묵합 (11) 함안각 (12) 연희 딩-

4 (13) 연경당 (14) 통화전 2) 궐내각사권역 (1) 주자소 (2) 동룡문 3) 기타 (1) 선인문 (2) 통화문 (3) 관덕정 (4) 숭문당 (5) 연희당 (6) 월근문 (7) 보정문 (8) 연희문 (9) 정일재 (1 이만수전 저승전 (11) 자경당 (12) 강서원 (13) 집춘영 4) 창덕궁 (1) 수강재 (2)서향각 5) 경모궁

5 ~ti갱풍 복원정비 기본계획연구 1. 의궈l 조선시대 진연 진찬 진작의궤 목록 창경궁영건도감의궤 창경궁수21 소의궤 인현왕후 빈전도감의궤 현종 빈전도감의궤 명성왕후 빈전(혼전)도감의궤

6

7 표 조선시 대 진연 진찬 진 작의 궤 목록 서 기 의 궤 명 발간시기 행사성격 18서 171 i훌훌 懷 종h 숙종 45 년 (1719) 蕭 宗 入 좁 老 所 i훌훌 f 義 軟 영조 20 년 ( 1744 ) 英 祖 50 歲 受 뽑 f 義 홍h 영조 41 년 ( 1765 ) 英 祖 71 歲 그림 i그t-c 그 C그 - [그 - C그 - 사용전각 景 賢 堂 景 賢 堂 景 賢 堂 19서 171 惠 훔 宮 進 戰 所 歲 휠l 순조 9 년 (1809) 惠 훌 宮 冠 禮 周 甲 -C 그 景 春 앓 *흉훌앓 進 를용 整 禮 옳휠L 순조 27 년 (1827) 純 祖 上 흘 號 進 體 옳휠l 순조 29 년 (1829) 純 祖 四 句 / 細 極 30 年 慧 11융 * C> lt 明 政 願 /**훌훌& 헌종 14 년 (1848) 純 元 王 듭 六 염 I ~ 仁 政 짧/ 通 明.!11 進 f했 歲 휠L 고종 5년 (1868) 趙 大 뼈 回 甲 = 훌h 政 짧/ 康 寧 앓 lt 進 뽑 f 義 軟 고종 1 0 년 (1873) 高 宗 尊 號 加 上 進 戰 웹흥휠l 고종 14 년 (1877) 趙 大 YC- 七 句 進 짧 f 義 軟 고종 24 년 (1887) 趙 大 紀 八 섭] 進 울쫓 f 義 軟 고종 29 년 (1892) 高 宗 4 1 句 / 細 極 30 年 C그 - * C그 lt 0 lt 康 寧 앓 通 明 짧 쫓h 政 앓 / 萬 慶 앓 쫓h 政 짧 / 康 寧 없 20세기 進 體 f 義 軟 광무 5 년 (190 1 ) 明 憲 太 尼 進 뽑( 望 八 ) it그 慶 運 堂 i훌훌 f 義 軟 광무 5 년 ( ) 高 宗 5 1 歲 ( 望 六 ) 進 훌 f 義 軟 광무 5 년 ( ) 高 宗 5 1 歲 ( 望 六 ) 0 lt C그 lt 成 寧 용$ 中 쭈n 默 / 觀 明 용&

8 건물열 자료 순조대 창경궁영건도감의궤 공사내용.hwp, 1 19) 창경궁영건도감의궤 (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1. 서지 - 간행년도 : 순조 34 년 (1834) 10월 - 공사기간 : 1831 년 7 월 년 4 월 20 일 - 소장정보 ; 규장각 奎 14324> 춘추관, 124 장, cm 奎 14325> 예조, 奎 14326> 미상, 奎 14327> 미상 장서각. <K2-3597> 적상산사고, l 책 024 장), 33 26cm, 현 소장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궁내부 < , 朝 > 태백산사고 - 판본과 특이사항 8건을 제작하여 규장각 호조, 예조, 춘추관, 강화부,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에 나누어 보관 하였다. 2. 의궤의 제작 경위 창경궁은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것을 인조 11 년 복구하였고, 현종 년간에 온돌과 바닥전돌 의 교체공사 이외에는 약 200 여년간 큰 수리공역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순조 30 년 (1830) 8월 1 일 오시( 午 時 )에 환경전( 歡 慶 嚴 )에 화재가 나서 함인정(패 仁 후) 공묵합(뽕 默 聞 ) 경춘전( 景 春 願 ) - 숭문당(몇 文 堂 ) - 영춘헌( 迎 春 野 ) 오행각 ('Ii 行 聞 ) 빈양문(좁 陽 門 )을 연달아 태웠다 1) 당시 환경전은 같은 해 5월에 갑자기 승하한 효명세자의 빈궁( 續 宮 )이었으며 장례식을 이틀 앞두고 있 었다. 불이 나자 연기와 화염 속에서 시신이 담긴 관을 꺼내어 환취정( 環 짧후) 에 임시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빈궁( 煩 宮 )을 옮겨서 설치할 처소( 處 所 )를 도총부( 都 擔 府 )로 정하였다 화재의 복구에 대한 논의는 다음해 7월이 되어야 있었으며 선선해지기를 기다려 하기로 했으나 예산이 충분치 않았다 그리 고 나서 1 년이 지나 1832 년 8월에 개기 길일을 잡지만 재정의 궁핍과 흉년 등을 이유로 다시 지체되었 다 순조 33 년 10 월 17 일에 창덕궁 내전 일곽이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창덕궁 복구공사와 더불어 미루 었던 창경궁의 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창경궁의 공사는 순조 34 년 4 월에 완료되었으나 창덕궁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같은 해 10월에 호 조 별례방(영 lj 例 房 )에 의궤도감을 설치하고 의궤를 제 작하였다. 3. 의궤의 체제와 공사내용 - 공사기간(각항시일) 1831 년 7 월 2 1 일 치목을 시작으로 1832 년 8 월 2 일 개기하였으나 8 일 공사를 중지하였다 년 10 월 27 일 치목을 다시 시작하고 11 월 15 일 정초, 21 일에 통명전과 함인정의 입주, 26 일에 상량하였다 년 3 월 7 일에 경춘전 입주하였고, 8 일에 상량하였다. 4월 20 일에 공사를 끝냈다 목록은 있으며 좌목( 座 El) 각항시일( 各 項 時 日 ) 도형( 圖 形 ) 승전( 承 傳, 上 짧 文 優 註 ) 물력구획( 物 力 區 劃 )-이 문( 移 文 ) 내관( 來 關 )-품목( 棄 텀, 附 式 例 ) 감결( # 結 )-실입( 實 入 ) 상전( 賞 典 ) 공장 (I 맏) 의 궤( 嚴 軟 ) 순이다 좌목( 座 目 ) 에 기록된 제조와 냥청, 별간역은 같은 시기에 공사를 시작한 창덕궁영건도감의궤 의 조직과 일치한다. 각각의 전각(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함인정, 양화당, 연희당, 영춘헌, 연경당)과 치목, 공답, 창호, 단청, 돌공사 등의 작업소 별로 패장을 두고 있다. 도형 에는 통명전( 通 明 嚴 ), 경춘전( 景 春 嚴 ), 양화당( 養 和 堂 ), 함인정(패 f 二 후)의 정면그림을 실었다. 승전( 承 傳 ) 은 1 830년 8월 1 일의 화재기사로 시작한다 년 7 월에 왕이 빈양문내 화재가 난 전각 1) r순조실록 31 권, 30년 (1830, 경인) 8월 1 일(병술) /

9 건물별 자료 순조대 창경궁영건도감의궈 공사내용.hwp, 2 을 호조에 명하여 더위가 가시면 복구하도록 명한다. 부족한 예산을 정번전으로 충당할 논의를 하지만 실제로 공사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년 8월 2 일을 開 基 길일로 택한다 그러나 8월 8 일에 흉년으로 인한 財 力 이 부족하니 營 建 을 중지 하자는 영 의 정 南 公 輸 (남공철)의 양에 따라 공사를 중지 했다가 1833 년 10 월 26 일 영 건도감제조를 조만 영으로 하여 11 월 1 일 영건도감사목( 營 建 島 藍 꿇 目 )을 마련하고 창경궁 주자소(뚫 字 所 )에 도감을 설치하 여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고 있다 승전 의 끝부분에는 통명전, 경춘전, 함인정의 상량문과 상량의( 上 標 優 )를 수록하였다. 품목질( 棄 텀 秋 ) 에 각종 E 人, I llc 들의 품삼, 목재가격 규정이 보이며 實 入 에서는 각 嚴 聞 등별로 필 요한 재목물품 등이 분류되어 기록되어 있다 실입( 實 入 ) 에는 공사 건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 건물별 소요자재가 적혀 있다. 서술방 식은 이보다 2년 전에 경희궁의 공사를 한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 와 같이 석재, 재목, 철물로 나 누어 해당 건물에 들어간 수량을 적고 있다 - 화재로 피해를 입은 부분은 주로 빈양문 안쪽의 전각이었지만 이에 대한 복구 외에도 정조대에 소실된 (1790 년) 통명전과 그 외에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 졌다 주요전각 공사내용 공사내용 통명전 (28 칸) 신조,포진 경준전 (28 칸) 신조 동행각과 純 亦 휩 (25 칸) 환경전 (28 칸) 신조 복도각 (4 칸) 양화당 (20 칸) 신조,포진 양화당 북행각 (10 칸) 延 禮 堂 (20 칸) 신조 i않 仁 후 (9 칸) 신조 延 春 野 (12 칸) 연춘헌 동행각 (7 칸반) 신조 延 慶 堂 (6 칸) 신조 수라간 (12 칸) 신조 소주방 (9 칸) 서행각 철물보수 컨R및견 聞 (14 칸) 신조 } 或 安 聞 (7 칸반) 수라간 (24 칸반) 신조 迎 春 휩 (14 칸) 신조 영춘헌 후행각 (13 칸) 集 m뭄 野 (26 칸) 신조 구소주방 (23 칸) 罷 8 軍 堂 ( 19 칸) 신조 體 元 聞 (10 칸반) 신조 정양문행각 (16 칸반) 신조 ;밟 庫 (2 칸) 신조 北 찮 庫 (2 칸) 重 맺 q 堂 수보(철물포함), 포진 養 性 齊 ( 野 ) 수보(철물포함) 며 처 묘"- 수보(철물포함) 홍화문 연지 수보 q 니

10 건물열 자료 순조대 칭경궁영건도감의궤 공사내용 hwp, 3 교태문 은구 주요전각 공사내용 공사내용 양화당서변 이모끼중문 (2 칸) 南 t옮 門 (1 칸) 寅 錢 門 (1 칸) 쯤 慶 門 後 t옮 門 (1 칸) 경춘전동행각북협문 (1 칸) 弘 仁 門 과 협문(이모끼문 2 칸) 함인정 좌우 협문 (2 칸) 동북문과 협문 (3 칸) 환경전뒤 中 門 (1 칸) 동문 (1 칸) 공묵합 판장(반칸) 延 홈 堂 동행각문 (1 칸) 여휘당동북문 (2 칸) 體 元 聞 남문 (1 칸) 延 春 幹 이모끼문 (1 칸) 협중문 (1 칸) 정양문판장 (8 칸) 集 瑞 門, 演 水 堂 앞문, 通 天 門, 옮 花 門, 納 淸 門, 建 仁 門 철물수보 喜 雨 樓, 觀 物 野 維 德 堂 공사내용 신조 신조 철물수보 포진 4. 의의 및 가치 의궤의 짜임이 2 년 앞서 발간된 西 關 營 建 都 藍 嚴 f행t»cl832) 와 공사내용의 서술방식이 거의 유사하 며 일부 형식적인 부분은 내용이 같다 2년이라는 시간차이를 감안하여 두 의궤의 다각적인 비교 연구 도 용이하다. 또한 1830 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 에 보이는 모습과 1833 년 이후 순조대의 공 사, 그리고 동궐도형 을 통하여 19 세기의 창경궁의 모습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5. 관련문헌 西 關 營 建 都 藍 慶 軟»0832) << 昌 德 宮 營 建 都 藍 嚴 勳»(1834) - 4 -

11 환경전 (28 칸) / 양화당 (20 칸) Z'- 기 ""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목재 (1) 가구채 추녀사 주요전각 원도리 -ι,?- -δ-;ζ 대량 합량 퇴량 종량 창방 래(산 익공 행공 t ~ 3:: 二 i l 화반 보아지 대?-.!:== 그 ι 끼 ~.!:== 동자주 대 공 /장 여 통명전 (28 칸) (8) 경춘전 (28 칸) (8) 동행각과 純 亦 페 (25 칸) 방) 목재 복도각 (4 칸) - 전면 복도 프, 二 & ι} 조 ~ = -c 二 5 양화당 북행각 (10 칸) 延 세홉 ' 1::(20 칸) (.J1 패 仁 꽉 (9 칸) (8) 延 春 tlff Cl 2 칸) 연춘헌 동행각 (7 칸반) i믿딸댄 (6 칸) 수라간 (12 칸) 추 녀 6 1 소주방 (9 칸) 서행각 키~~;땀] (14 킨-) J행 安 뽑1 (7 칸반) 수라긴 (24 칸반) 피l 春 페 (14 칸)/ 영준헌 후행각 (13 칸) 集 福 번1(26 칸) 구소주방 (23 칸) 영춘헌 집복헌 합해서 麗 庫 힘t(l9 칸)

12 -c 동자주 대공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목채 (1) 가구채 주요전각 원도리 목재 추녀사 - -"" ",Pr 대량 합량 퇴량 종량 창방 /장 여 래(산 익 공 행공 안초공 화반 보아지 대?- - 亡 그 방) 뭔 7디템 (10 칸반) 정양문행각 (16 칸반) Jf,:; 庫 (2 칸) 北 lfi:;j퍼 (2 칸) 현HI 랜i A -;;z.. 錢 生 낌뷰 (~f) J- n j 7' -1 드 홍화문 연지 교태문 은구 ()) 양화당서 변 이 모끼 중문 (2 칸) F휘 ;t띔 F J (l 칸) t던 錢!- J(l 킨-) 칩; 慶 F ' 냐 後 t품 l"'j (l 킨-) 경춘전동행각북협문 (1 킨) 파 t r'1 과 협문(이모끼문 2 칸) 힘-인정좌우 협문 (2 칸) 동북문과 협문 (3 칸) 환경전뒤 11 1까 (1 킨) 동문 (1 칸) 공묵합 판장(반칸) 延 禮 i효동행 각문( 1 칸) 여 휘 딩 동북문 (2 킨-) 9밍 元 때남문 (1 칸) 延 春! 끼 이모끼문 (1 칸) 협중문 (1 칸)

13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목재 (1) 가구재 정 양문핀장 (8 칸) 集 l해 門, 뺑 水 : 앞문, j떠 天 I" 만, 등MH 늬, *며댐H"l 첼 仁 119 喜 ~ I J 樓,?i!J, 物 llh *암 t'i±l2~ 주요전각 원 도 리 주녀사 ~ 上 -;ι 평주 대 량 합량 퇴량 三 1'.2- l 창방 래(산 /장 여 방 ) 목 재 -l 그 1 행 공 안초공 화반 보아지 대?-.!_= ::i ι;-;ζ -[ 二 동자주 대 공 J

14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載 )>>(1834) ---- 목재 (2) 수장재 순각반 주요전각 쌍창벽 사창인 방반자 장동귀 중 방 인방 머름대 대동자 소동자 청판 벼-,서 벽선 단동귀 二 그 1;1_ 동다란 자장다 동다란 선 방 장다란 ~드E E 三 란 귀틀 청판 통명전 (28 칸) 경춘전 (28 칸) 동행각과 純 끼q규 (25 킨-) 목재 CD 환경전 (28 칸) 복도각 (4 칸) 양화당 (20 칸) 양화당 북행각( 10 킨) 延 세침 ~(20 칸) j펴 仁 루 (9 칸) 延 핵!'(12 칸) 연준헌 延 慶 댄 (6 킨-) 수라간 (12 칸) 소주방 (9 칸) 서행각 찌~~r챔 (14 칸) ] 成 安 댐 (7 칸반) 통행각 (7 칸반) 수라간 (24 칸반) 迎 春 lfi.+(14 칸) 영춘헌 集 l움 i~l(26 칸) 후행각 (13 칸) 구소주방 (23 칸) 핸 ll 單 함 (19 칸) 9굉 5CI행 (10 칸반) 정양문행각 (16 칸반) J:fn ; 庫 (2 칸) ~ltj:~;; 庫 (2 칸) 첼흐센뭔켠t 養 性 폈(페) n ~~ 4 투,} 홍화문 연지

15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목재 (2) 수장채 주요전각 쌍창벽 사창인 순각반 방반자 장동귀 τz; ;{ 인방 머 름 대 대 통자 소동자 청판 벽선 벽선 단동귀 중그모 DI 동다란 자장다 동다란 귀틀 청판 선 방 장다란 ~ ~르a 란 교 태 문 은구 목재 ι 양화당서 변 이 모끼 중문 (2 칸) 1휘 t원 門 (1 칸) 寅 錢 門 (1 칸) 經 慶 門 後 t품 門 (1 칸) 경춘천동행각북협문 (1 칸) 弘 仁 門 과 협문(이모끼문 2 칸) 함인정좌우 협문 (2 칸) 동북문과 협문 (3 칸) 환경 전뒤 i:: j=1 門 (1 칸) 동문 (1 칸) 공묵합 판장(반칸) 延 피홉깥운동행각문 (1 칸) 여휘당동북문 (2 칸) 9필 7CI첨남문 (1 칸) 延 春 팎이모끼문 (1 킨) 협중문 (1 칸) 정양문판장 (8 칸) 集 돼d 門, 딱! 水 堂 앞문, i따 天 門, ~j 花 1펴, 대 淸 門 建 仁 門 喜!:Ti 樓, k짧 4끼 fl 샘;~~l11t

16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목재 (3) 수장재 주요전각 디L 화구판 木 목재 가퇴선 벼--,서 L ~ 비 단중방 머 름 대 단머름 동자 칭핀 인방 단인방 반자다 장청판 장산이 단 대 란 통 명 전 (28 칸) 경준전 (28 칸) 동행각과 純 亦 i J\l (2 5 칸) 0 환경전 (28 칸) 복도각 (4 칸) 양화당 (20 칸) 양화당 북 행 각( 10 칸 ) 延 괴힘 R:C2 0 칸) 패 仁 뚜 (9 칸) 延 春 Il!H 1 2 킨-) 연춘헌 동행각 (7 칸반) 延 優 fj:(6 킨-) 수라간 (12 칸) 소주 방 ( 9 칸) 서행각 치 ~~땀](14 칸)!하 安 챔 (7 칸반) 수라간 (24 킨반) i꾀l'@: 파-f(14 칸) 영춘헌 후행각 (13 칸) t등 福 ~FF(26 칸) 구소주방 (23 킨) 認 I덴침t(19 칸) 9윌 7C I챔 (10 킨반) 정양문행각 (16 칸반) ii;; 텔 (2 칸) 北 셔,1 떠i(2 칸) E될 P핏할 죠쫓 性 쐐 om 며 처 므~ 홍화문 연지 교태문 은구

17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목재 (3) 수장재 주요전각 a - 화구판 { r'? 木 목 재 가퇴선 벽 선 %- tl l 단중 방 머 름 대 단머 름 동자 청 판 인방 단인 방 반자다 장청판 장산 이 단 란 양화 당서 변 이 모 끼 중문 (2 칸) j휘 t품!꺼 (1 킨) i한싫 ' 9(1 칸 ) 忽 慶 펴 後 l띔 門 ( 1 칸) 경춘전동 행각북 협 문 (1 칸 ) i]l 仁 門 과 협문( 이모끼 문 2 칸) 함 인 정 좌우 협 문 (2 칸 ) 동북문 과 협문 (3 칸) 환경 전 뒤 대1 1꽉 (1 칸) 동문 (1 칸) 공묵합 판장(반칸) 延 과~11t 동행각문 (1 칸) 여휘 당동북문 (2 칸 ) 9뭔 표; 關 남문 (1 칸) 延 春 I따 이 모 끼 문 (1 칸) 협 중문 (1 칸) 정양문판장 (8 킨) 集 I돼 까, 때l7.K 힐i 앞문, 通 天 /] ']' 김j 花 r'j. *며김융 r'1. 建 仁 ~'] 喜 1;디핸, 않~ 物 n11 ;J:ft t ~'. 쿄

18 14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軟 )>>(1834) ---- 창호채 세만살 주요전각 세살청 세만살 연창장 반간연 완자 연창문 분합영 간반연 下 횡장 청판분 雙 ;&, 침%문 얼굴장 연독창 반자 대 ( 竹 ) 영창 흐 ;- L 갑창 장지 벼--,서 L 판분합 단분합 지 창장지 합 추장지 창 창장지 지 지 통명전 (28 칸) 경춘전 (28 칸) 세 만 26/ 소 동행각과 純 끼;써 (25 人 i즈 ;;. 4 廣 판 우 리 44 쌍 창- 2 廣 忽 칸) 판 戶 20 문 4 판문 8 門 6 환경전 (28 칸) 창호 우 리 판문 2 Fο 복도각 (4 칸) 양화당 (20 칸) 양화당 북행각 (10 칸) 延 피흙댄 (20 칸) 만살 좌우 1 칸거 때 仁 펀 (9 킨-) 延 w 퍼re i2 칸) 연춘헌 통행각 (7 칸반) 延 慶 堂 (6 킨-) 수라간 (1 2 칸) 소주방 (9 칸) 서 행각 悲 ;l껏!캠 (14 칸) 成 安 챔 (7 칸반) 수라간 (24 칸반) 펴j 春 파FC 1 4 칸) 영춘헌 후행각 (13 칸) 싸 i~뭄때 (26 칸) 구소주방 (23 킨) 隨 I 庫 할 (19 킨) g앨 cl챔 (10 칸반) 청 판 분합 리 판 4 협 우 리 오 12 문 4 지 1 봉 징_4

19 장지 벽선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敵 )>>(1834) ---- 창호재 창호 주요잔각 세 살청 세만살 세만살 연창장 반간연 완자 연창문 분합영 긴반연 下 횡장 판분합 단분합 청판분 雙 장 지 창장지 추장지 $f 낌S 얼굴장 연독창 반자 대( 竹 ) 영칭- 흐창 갑창 창 창장지 지 합 지 정양문행각 (16 칸반) t~~ 屆 (2 칸) 北 괴1 L 庫 (2 칸) 뢰즘?JT',q~ 養 캘짧(떼 ) 며 처 무'-'- 홍화문 연지 교태문 은구 μ 양화당서변 이모끼 중문 (2 칸) i휘 t원 門 (1 킨) 웅흰 錢 門 (1 칸) 忽 g잦 f'j 後 t띔 門 (1 칸) 경춘전동행각북협문 (1 칸) 따 仁 門 과 협문(이모끼문 2 칸) 함인정좌우 협문 (2 칸) 동북문과 협문 (3 칸) 환경전뒤 中 門 (1 칸) 동문 (1 칸) 공묵합 판장(반칸) ~ill홈숨운동 행 각문( 1 칸) 여휘딩동북문 (2 칸) 體 d휩남문 (1 칸) 延 春 i~f 이모끼문 (1 칸) 협중문 (1 칸) 정양문판장 (8 칸)

20 장지 벽선 창경궁영건도감의궤( 昌 慶 宮 營 建 都 藍 嚴 動 )>>(1834) ---- 창호재 集 l해 門, 창호 세만살 주요전각 세살청 세만살 연창장 반간연 완자 연창문 분합영 간반띤 T 횡장 판분합 단분합 청판분 雙 %응 지 창장지 추장지 --{갚 얼굴장 연독창 반자 대( 竹 ) 영창 흐.~.:>. [ J- 갑칭- 창 창장지 지 합 지 t(;(\7}: 텐 앞문, i낸 XFLJ. 값j 花 "l ~ r셔 情 IJ'J, 않 仁 꺼 챔 1퍼 樓, 7,파~까1tH t1h엄한t ~

21 창경궁영건도감의궈 1(1834)-목채 경준전동행 延 慶 堂 6 칸 공묵각 14 칸 延 禮 堂 延 春 횡구 각+ 수라간 20 칸 함안각 7 칸반 20 칸 12 순역헌 25 소주방 9 칸!_?- 9 평주 대량 3 3 간반대량 2 보 9 34 평량 17 드 죠 E J: 퇴량 창방 21 장혀 원도리 도리 동자주 추녀 4 2 산방 그 l 18 대공 ?- -c 18 보아지 23 소로 77 9 장연 선자연 단연 마족연 평고대 선자개판 허가도리 바탕 所 場 2 개 1 1 柱 2 1 緣 2s1H 집우사 엠 木 4 풍판 ~l- 고 工 松 竹 26 7 목기 산자판 념 3 연함 마루종심 妹 樓 宗 心 르 느 λ t그l ~ 20 6 추녀종심 ~ 까 t J 묘,' 허가연 10 수라란 24 칸 칸 C ]

22 누리개 고색판 l 남 2 산자 44 부 83부 102 τ5'- 바 인방 인중방 159 단인중방 벼---, 서 L 104 자 벼 ---,서 L 단벽선 머름대 단머 름 대 2 대동자 동 자 51 소동자 청 판 45 남 3 0 님 사창인방 14 1R 4 /벽 선 8 벼 자 무 1 방 벼 자 무, 1 2/벽선 2 %- 바 /청 판 2 살창인방 1 /벽 선 2 /살목3 0 벼---,서 L 판 2 團 門 板 8 4 중그모 Do 가지방 2 방반자다 20 란 동다란 30 소란 순 각반자 24 장다란 동 다란 42 소란 124 청 판 56 둔 테목 /대 목 2 縣 木 30 마루 장청 판 145 長 散 伊 60 長 童 귀 틀 1 4 젠동 귀 틀 귀틀 청판 남 디L 11 남 4 6 화 구문 인 2 - [ h ]

23 i'- 바 화구판 대목 12 4 벽선 2 路 掌 四 坐 版 (발판?) 문판 4 덮 8 "Ii 4 ') l 용지판 4 2 지반자우 리목 반자우리 조~ ;) 장지 반칸장지 14 호문장지 2 닝_ij:A L 조 l- 2 4 세살청판 분합 반칸세살 청판분합 만살청판 분합 반칸만살 청판분합 만살단분 합 28 짝 짝 8 짝 ~ 因 짤 장지 8짝 4 반칸연창 장지 완자주장 지 2짝 4 짝 쌍창 4 짝 도 차 1 광창 2 1 사창 14 짝 4 반자 合 聞 영창 36 짝 14 짝 영창 4 짝 갑창 2짝 竹 14 개 벽선 10 우리판문

24 창경궁영건도감의궈 1(1834)-석물 이문 陣 EC 박석) 매 남 길이 3 자, 폭 2 자, 두께 l 치 실입 주 3:. 서' 걷 토 며 처'-'- 영춘헌, 경준전/동행각 화 것 처, 양화당, 집복헌, 함안각, 순역헌 연희당/동행각, 수라간, 西 醫 庫, 함인정 연경당/서 행각, 려휘당, 연춘헌/ 공묵각 정양문행각 동행각 ~?- 바 체원합 대주초석 z -;ζ -흐 서 까4 _?- -i 서 17 8자 2 7자 장대석 6 자 자 자 자 5 치 7 6자 6 8 f-λ--=l 5자 자 지 5치 4 고막이 5자 2 2 λ--=l 4 자 10 8 ~1l λ --=l 5자 2 3 7자 보석 6자 자 8 9 4자 연통석 아궁이 화구 頂 石 화구석 n

25 창경궁수리소의궤 ( 昌 慶 宮 修 理 所 嚴 軟, 昌 慶 宮 修 理 都 藍 嚴 軟 ) (1633) 작업소 주 건물 -a =-누-~그l 능 I그~ 공사내용 릅좋 1L 家 (5 칸 4 면퇴) 廣 運 堂 (3 칸 4 변퇴) 남행 랑 (4 칸), 북행 랑 (8 칸) 無 進 堂 (3 칸 4 면퇴) 壽 樓 堂 (5 칸 4 면퇴) 前 行 郵 (15 칸) 蘇 基 別 堂 (9 칸 전퇴) 觀 喜 堂 (2 칸 전후퇴) j힘 仁 堂 (14 칸) 뚫t 歲 堂 (5 칸 전후퇴) 좌우북행랑 01 칸) 仁 慶 뿜 月 堂 남행랑 (11 칸) 宮 顧 鳳 燒 門 內 南 行 郞 (5 칸 전퇴) 聞 f 散 體 元 門 內 行 郞 (15 칸) 移 秋 內 差 뼈 外 水 刺 間 (8 칸) 철거 춤흉좋 堂 後 團 房 (3 칸 전퇴 ) 慶 壽 堂 東 月 郞 外 行 郞 (3 칸) 延 神 門 內 月 鳳 (6 칸) 외월랑 昌 慶 宮 文 明 嚴 (5 칸 4 면퇴) 내행랑 (5 칸), 외행랑 (15 칸) 鳳 瑞 樓 (5 칸 전후퇴) 龍 興 樓 (5 칸 전후퇴) 경 덕 궁 홍문관장서각 (5 칸) 議 政 府 內 倫 邊 司 ( 1 2 칸 전퇴) 通 明 嚴 (5 칸 4 면퇴 28 칸) 청와전 36 칸 移 造 1 소 면 誠 聞 (4 칸 전후퇴) 월랑 (5 칸전후퇴) 觀 {훌 堂 전후퇴 12 칸 移 造 (잡물.i -도;그르 서책방 (6 칸 후퇴) 뼈 仁 堂 대청 전퇴 3 칸, 온돌 4 칸 移 造 敵 屬 堂 겸함) 서행각(합각포함 6 칸) 를를 樓 堂 월랑 5 칸 이조 서행각 남변 월랑 (3 칸) 통행각(합각포함 4 칸) 동행각 남변 (5 칸) 동월랑 (7 칸) 남월랑 (5 칸 전퇴) 정양문 (1 칸 전퇴) 뼈 仁 堂 동서행랑 4 칸 이조 延 뺨 門 외월랑 4 칸이조 패 仁 堂 서온돌 4 칸, 書 옳 廳 북 월랑 l 칸 이조 춤 藍 堂 團 房 전퇴 3 칸, 慶 壽 堂 東 月 댐E 外 3 칸 이 조 新 造 麗 輝 堂 (3 칸 4 면 퇴 ), 수라간 (4 칸 전퇴), f좋 PS 家 (6 칸 전퇴, 동서퇴) 修 補 修 補 Q ]

26 작업소 ~~ 1그]경 I그를 2소 3소 養 和 堂 (3 칸 4 면퇴, 20 칸) 延 과룡 堂 (3 칸 4 면퇴, 20 칸) 演 慶 堂 (3 칸 전퇴, 9 칸) 歡 慶 願 (5 칸 4 면 퇴 ' 28 칸) -닝 =/.걱 { 1그 능 I를j 살문(동 남쪽 기단위) 동월랑 (6 칸), 흠웹 明 門 (1 칸) 남월랑 (9 칸) 동월랑 (5 칸) 남월랑 (10 칸) 서월랑 (5 칸) 西 鷹 階 上 柳 林 樓 (2 칸), 階 上 柳 林 樓 (2 칸) 동월랑(전퇴 11 칸) 남월랑(전퇴 13 칸) ( 察 材 서월랑( 1 2 칸) 木 를 함) 4 소 所 겸 景 春 嚴 (5 칸 4 면퇴, 28 칸) 困 仁 훔 (1 칸 4 켠퇴, 9 칸) 歡 慶 願 橫 家 (5 칸) 경춘전 남월랑 (10 칸), 集 瑞 門 (1 칸) 공사내용 無 速 堂 20 칸 移 造 신조 通 天 門 (1 칸), 수보 쫓름 月 堂 행랑 9 칸 이조 廣 運 堂 이조 敵 歲 호동월랑 3 칸, 서월랑 2 칸 이조 4 칸 전퇴 敵 歲 堂 북월랑 5 칸 이조, 2칸 무퇴 신조 뿔 月 堂 1 칸, 壽 樓 堂 1 칸, 문명 전외윌랑 2 칸 이조 南 쩔 경덕궁에서 판자 가져옴 휩t 歲 堂 이조 창경궁 文 明 嚴 28 칸 이조 文 明 嚴 외행랑 9 칸, 月 郵 2 칸 이조 龍 興 樓 鳳 瑞 樓 각 5 칸, 외행랑 6 칸 이조 廣 雲 堂 북행랑 8 칸, 행랑 8칸 이조 문명전 내행랑 5 칸 이조 延 # 門 內 문명 전 廣 運 堂 남 등흉 績 堂, 비변사의 재목과 기 와 이조 등룹 績 堂 재목과 기와 이조 慶 등즐 願 후행각 5칸 이조, 신조 인경궁 鳳 嚴 門 내행랑 5 칸전 제 1 월랑 (13 칸 전퇴) 되, 내차비수라간 5 칸전퇴, 3 제 2월랑 (16 칸 전퇴) 東 t품 밖 북행랑 (9 칸) 칸무퇴 이조 4 칸 5 칸 修 補, 인경궁 體 元 門 내행 랑 15 칸 移 造 2 칸 修 補, 5 칸 경덕궁 홍문관 장서각 移 造, 內 差 倫 行 路 聞 (7 칸), 井 邊 曲 家 (5 칸) {1쫓 補, 일부 新 造 제 3월랑 (12 칸), 패 家 (2 칸), 洗 路 家 (2 칸), 측간 (6 칸) 體 室 (7 칸) 長 慶 門 內 月 鳳 (34 칸) {1쫓 補 長 慶 門 협 l 칸, l 칸문 新 造 2 칸 신조 永 蕭 門 내월랑 7 칸 移 造 33 칸 수보, 1 칸 新 造 l 칸문 (2 곳) 문명전 l 칸문 移 造, 1 처 新 造

27 작업소 -그X L 낀...,_,돌 u 부속건물 공사내용 명정전 倒 楊, 문정전 뼈 楊 大 嚴 長 옮 內 官 廳 (13 칸) 좁 陽 門 밖 承 傳 色 入 接 處 (14 칸) 인경궁에서 移 造 中 嚴 長 젊 內 官 廳 (8 칸), 東 宮 長 뿜 內 官 廳 (8 칸), 續 嚴 長 짧 부분 新 造 內 官 廳 (4 칸), 내시교관청 (3 칸) 몇 化 門 內 香 室 (14 칸) 世 子 待 留 廳 (3 칸), 司 餐 院 供 上 棒 上 廳 (2 칸) 改 造 5소 時 敏 堂 04 칸), 進 修 堂 (18 칸), 東 冊 房 (3 칸), 뿔 文 堂 (12 칸), 夜 對 廳 (3 칸), 觀 光 廳 (7 칸), 大 君 待 學 廳 (6 칸), 司 調 廳 (3 칸), 大 君 問 安 廳 (6 칸), 王 子 問 安 廳 (3 칸), 內 班 院 (3 1 칸), 內 딩 房 (23 칸), 大 嚴 司 짧 房 (5 칸), 무예별감방 (6 칸), 내궁방 고간 뼈 庫 間 內 짧 庫 (14 칸), 내사옹원 (28 칸), 외사옹원 (18 칸), 內 禁 衛 廳 (3 칸), % 林 衛 廳 (2 칸), 修 補 暴 司 { 業 廳 (2 칸), 內 入 소뺑 官 廳 (2 칸), 內 三 廳 裝 入 接 處 (6 칸), 忠 順 衛 定 處 衛 廳 (3 칸), 좁 廳 (9 칸), 藝 文 館 (8 칸), 尙 瑞 院 (2 칸), 內 族 問 安 廳 (2 칸), 宣 傳 官 廳 (4 칸), 武 暴 宣 傳 官 廳 (3 칸), 承 政 院, f휴 講 院, 兩 司 臺 행 廳 (4 칸반), 딛 失 A 廳 04 칸), 內 醫 院, 東 所, 弘 文 館, 都 擔 府 짤 差 備 (6 칸), 內 人 入 接 處 內 1T 郞 (27 칸), 長 慶 門 外 內 官 移 排 廳 (5 칸) / -

28 표 1 조선 후기 빈 흔전 설 행 장소 승하시기 승하장소 빈전 혼전 혼전영 비고 인조 년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선정전 창경궁 문정전 永 思 廠 효종 년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선정전 창경궁 문정전 敬 폈 願 인선왕후 1674 년 경덕궁 회상전 경덕궁 융복전 창경궁 문정전 敬 思 散 현종 1675 년 창덕궁 여차 장덕궁 선정전 창경궁 환경전 孝 敬 흉~ 인경왕후 1680 년 경덕궁 회상전 경덕궁 융복전 경덕궁 계상당 永 Dt3 般 명성왕후 1683 년 창경궁 저승전 창덕궁 선정전 창경궁 문정전 永 폈 般 장렬왕후 1688년 창경궁 내반원 장경궁 환경전 창경궁 문정전 孝 멍 歐 인현왕후 1701 년 창경 낭 경춘전 창경궁 환경전 문정전 계상당 敬 寧 歐 단의빈 1718년 경덕궁 장춘헌 창경궁 경극당 창경궁 내반원 永 徵 歐 4;- τ=ζr 1720 년 경덕궁 융복전 경덕궁 자정전 창경궁 문정전 孝 寧 願 경종 1724 년 창경궁 環 짧후 창덕궁 선정전 창경궁 문정전 敬 ng 廠 효장세자 1728년 延 福 歐 선의왕후 1730 년 경덕궁 魚 漢 할 경덕궁 광명전 창경궁 문정전 敬 徵 散 효순현빈 1751 년 8월에 문정전 수리 후 11 월에 계상당 수리 창경궁 건극당 창경궁 혼전 설행장소를 창경궁 내반원 延 福 散 宜 春 뽀f 건극당( 建 極 堂 ) 古 永 徵 歐 으로 기록 의소세손 1752 년 창경궁 통명전 숭문당 창경궁 강서원 정성왕후 1757 년 창덕궁 觀 理 開 경덕궁 景 薰!짧 창경궁 강서원 徵 寧 散 인원왕후 1757년 경덕궁 永 暴 호 창경궁 통명전 창경궁 문정전 孝 BB 嚴 사도세자 1762 년 창경궁 시강원 창경궁 강서원 景 뽕 般 영조 1776년 경희궁 집경당 경희궁 자정전 경희궁 태녕전 孝 njj 散 문효세자 1786 년 창경궁 별당 창경궁 搖 華 호 경희궁 태녕전 ;져 -~ 1800 년 창경궁 迎 春 함 창경궁 환경전 창덕궁 선정전 孝 元 散 정순왕후 1805 년 상 녁 강 깅 c~- 선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문정전 孝 安 歐 현경혜 빈 년 창경궁 경춘전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통화전 景 鎬 歐 효의왕후 년 창경궁 자경전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통화전 孝 홈 歐 현목수빈 년 창경궁 보경당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도총부 5월 8 일 환경전에 효명세자 년 창덕궁 희정당 환경전 -도총부 창경궁 통화전 孝 tu#앓 성빈 -8월 1 일 긴.ι -:: ::: 二 년 경희궁 회상전 경희궁 장락전 창덕궁 선정전 孝 成 散 효현왕후 1843 년 창덕궁 대 조전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문정전 微 定 般 헌종 1849 년 창덕궁 중희당 창경궁 환경전 창덕궁 선정전 孝 定 散 순원왕후 1 860년 창덕궁 양심합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문정전 孝 正 廠 ;크:~;;; E 1863 년 창덕궁 대 조전 창경궁 환경전 창덕궁 선정전 孝 文 散 철인왕후 1 878년 창경궁 양화당 창경궁 환경전 창경궁 문정전 孝 微 願 λj 처 와 -송 1890 년 경복궁 흥복 천 경복궁 태원전 경복궁 문경전 孝 렀 散 며 서 와 -송 1895 년 경복궁 건청궁 경복궁 태원전 경복궁 문경전 景 孝 般 효정왕후 순명비 1903 년 1904 년 화재 도총부로 이안 시υ -l ;;1 ] 성빈시 인정전에 재궁 경운궁 흥덕전 경운궁 인소전 孝 惠 般 수인닝( :, 1 권안 싱-?강 깅 rll; l 성빈시 문경전에 재궁 경운궁 흥덕전 경운궁 문경전 짧 孝 없~ 1.,l 1 ~ { I 권안 고종 년 ;J. 1 ~.) V-t I' ( ν? ι, ι L 1 tj ;l j s~ ι,l 6 } L.. ι1 시 ' 孝 德 般 상 ν ν -이1 1 헥 ; 순종 년 -싱,_ 1 / 니 1 낀 ;-I J 1., ;). ii ι1 호l 인 * 각 빈혼전도감의궤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ιm

29 건물명 건 립 연대 현존건물 건립 홍화문 성종 15 년 하늘과 땅사이의 조하를 넓히고 천지를 공경하여 밝힌다 (1484) 광해군 8 년 (1616) 영조와 정조가 백성을 만나던 곳 선인문 고증 14 년 ( 1 877) 옛이름은 서 린문(해짧 門 ) 조정신하들의 줄입문 I 왕의 문묘 잠배시 줄궁통로 ~ 二 l드 l 정조 3 년 (1779) 정조가 경모궁에 줄입하기 위하여 건립, 힘준원의 유근문 (펴짧 F ]) ~frif 성종 5 년 광지 문 (I없 智 門 ) (1475) 이전부 S cj 셔; jjl 터1,J 으며 년 왕이 성균관에 거동할때 이 문을 나와 다리를 건너다녔음 장경궁 외북장문(후원), 며0 저 0 므 "- 굉해군때 재건 왕의 입궁과 줄궁의 실질적인 경계지점 명정전 여 4 므ι 드 프 j υ이드 E 성종 1 5 년 (1484) 광해군 8 년 (1616) 드l 프 j 인 ~ ; 성종 대 건립 광해군 대 중장 明 은 눈이 밝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근원적 진리를 밝히는 지혜 라 할 λ 있다 [시경]에 요임금의 덕성으로 }J:, IJfl, 文 j /핀의 네가지를 들고 있다 성종 정월 동지에 세 왕비께 하례를 드리고 명정전에서 조하를 받음 중증 명정전에서 처용회를 관람 조 이 조 즈 의,, 정조 때 는 장례후 우주(신주)를 보관, 정조 어머니 회갑연, 고종 때 (1878) 정나라 사신과 직사 접견 j 명정전 뜰에서 망곡저, 정조의 친위부 대 인 장용영이 영정전 행각에 주둔 명정전 북월랑의 문 대 내의 경계가되는문 영조 원비 정성왕후 혼전 휘렁전 고종 1 5 년 절인황후 혼전 킹0느도 L으 '6f 경종때 건 립 순조 3 4 년 중건 숭문 이 란 뿔힘 之 意 1 으 뜻임 ~ 1 ~, 口 r 환경전 경준전 힘인정 쥐운정 성종 1 5 년 (1484) 인조 11 년 (1633) 숙종 1 2 년 (1686) 순조 3 4 년 중건 숭문당 현판과 1 日 깜 在 효 (매 일감시하고 계신 다 )' 게 판은 영조의 어 필 관련건물 숭문당북쪽의 i펼 獨 [힘(혼자있을때 삼간다)-동궐 도 함인정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 치조공간과 연조공간의 구분역할? 년 복구 임 금의 행자가 나가는 문 j 항죽을 전달하고 과거 급제자를 만나는 곳 굉해군8 년 중건 홉은 1공경히 맞이 한다 1는 뜻 중종승하 소현세자승하 숙종 즉위년 -경종의 혼전? 순조 34 년 중건 숙종 10 년 (1684) - 정나라 사신 지제 순조 34 년 중건 순조 3 4 년 중건 영조-편전으로 이용 순조 30 년 ( 1 830) 효명세자의 빈전 --> 화재발생처 숙종 25 년 -경준전으로 이어 인현왕후 서거(숙종 ) 영조 28 년 ( 1 752) 사도세자의 거처 순조 15 년 (1815) 헌종탄생 정조탄생 혜경궁 홍씨 승하 순조어필(경준전 현판, 경준전기) 궁궐지 의 인경궁 힘인당 이건 기사는 오류임 장경궁수리소의궤 에는 인경궁의 후행각을 옮겨왔음 1 일부는 신건 명정전의 후전, 편전으로 사용, 과거 합격유썽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한 기록이 많음 영조는 33 년 35 년 사이에 함인정을 집중적으로 사용함 함인정 서남쪽 언덕 1 수강재 후원의 정자 숙종의 어필펀액 쥐병과앙부 일구등설지 정조 승하 (180이 왕의수신 과 관련 된 건 물 현 재는 장 덕 궁영역 동궐 도의장 영준헌 순조 34 년 중건 순조대 화재후 장남궁(효영세자의 거치)를 헐어 그 재 목으로 재건합 동 남궁의형태 집복헌 통명전 성종 1 5 년 (1484) 순조 34 년 중건 임진왜란에 소실 광해군 8 년 재건 궐도, 동궐도형과 자이가 있음 영조 11 년 영빈이씨가 사도세자를 줄산 정조후궁 수빈(유빈) 박씨의 저소 펀 액은순조어필 선조 8 년 영종비 인순왕후 승하 선조임진년 공회빈(순회세자의 빈) 승하 이필의 난에 소실, 광해군 3 년 (1611) 연호 인조 대 에 재건 j 현종 5 년 (166 4 )도개비 소동 후 헌증 13 년 통명전과 양화당을 수리 순조 34 년 중건 숙증 3 년 (1677) 명성왕후 김씨를 위해 잔치 1 만수전이 불타자 자의대비 (장럴왕후 1 인조의 계비)가 통명전으로 이어 와비교할것

30 인현왕후 빈전도감의궤 樓 宮 圖 그 림.제목없 음 內 十 二 R 廣 七 R 죠# 五 # 圓 繼 五 τf 地 方 木 j 享 五 -t 廣 六 τf 平 防 高 五 廣 띤 τf 四 面 障 子 十 = 隻 內 南 北 各 二 隻 分 聞 東 西 各 四 R 劍 圍 雲 角 廣 各 六 τf 멀 六 分 靈 寢 滿 頂 骨 圖 그 림;제목 없음 高 爛 平 狀 安 於 內 看 居 朱 紅 以 多 紅 大 段 作 띠 自 上 單 下 平 林 長 六 R 廣 三 R 爛 - 具 柱 高 六 R 圓 經 一 τf 八 分 料 防 長 八 R fik 長 六 R

31 현종 빈전도감의궤 F 鬼 顧 造 成 所 / 수본질 同 日 ( 甲 寅 八 月 二 十 八 日 ) 右 手 本 寫 行 下 事 正 嚴 南 邊 新 造 補 慶 프 間 行 聞 九 間 所 蓋 中 互 及 pfr 輔 方 평R 等 從 實 入 算 的 進 排 事 各 該 司 良 中 棒 # 馬 只 寫 提 調 手 決 內 依 戶 훨 EL 暑 甲 寅 九 月 十 八 日 右 手 本 馬 行 下 事 正 顧 南 邊 1[ilj1l " j Ji 까 l"j /1,(,써 l"l ff 四 處 太 銷 鎬 四 部 當 馬 封 趙 是 乎 훗 겨ζ 所 段 素 無 銷 鋼 E 是 乎 等 以 別 工 作 良 中 打 造 進 排 之 意 預 寫 棒 납 馬 只 薦 提 調 手 決 內 依 甲 寅 十 月 二 十 日 - 寫 行 下 事 正 嚴 四 邊 月 願 三 處 깜 戶 內 外 所 排 銷 鋼 及 東 邊 - 間 神 門 俠 門 等 所 排 趙 鎬 進 排 事 棒 납 寫 乎 Jjif 曾 前 棒 it 中 龍 銷 鋼 代 以 大 銷 짧 打 造 進 排 之 意 棒 # 寫 只 寫 提 調 手 決 內 依 :5UI 作 右 手 本 寫 行 下 事 1L- 따 띠 j'_ JI!01; : I 1' \H1 f펴 溫 埈 所 入 E 專 石 Z 良 從 實 入 進 排 馬 乎 야 ~ 11 'ij I 次 細 沙 六 石 所 入 休 紙 隊 末 ζ 良 依 橫 間 進 排 事 棒 # 寫 只 馬 提 調 手 決 內 依 戶 뽕 司 廳 극뚜 禮 寶 극 塊 願 修 理 所 甲 寅 九 月 初 二 日 半 間 等 溫 埈 所 入 轉 石 段 置 亦 未 能 詳 知 是 去 乎 從 實 入 進 排 事 該 司 良 中 棒 람 寫 只 寫 手 決 內 依 戶 폼g E깅 甲 寅 九 月 二 十 七 日 - 寫 行 下 事 本 所 新 造 溫 l갖 等 處 忠 義 房 參 奉 房 亞 厭 官 房 終 敵 官 房 長 훔 內 官 房 酒 房 內 官 房 典 更 房 泡 E 房 守 樓 房 典 1~E 官 房 合 十 溫 ;텃 假 曲 ;l 突 所 入 廣 뚫 高 長 者 每 溫 j 突 各 立 式 合 十 立 等 物 進 排 事 該 藍 良 中 棒 # 寫 只 寫 手 決 內 依 戶 費 續 I 몽E 甲 寅 十 月 二 十 日 - 寫 行 下 事 中 使 言 內 倒 井 近 處 떼 間 排 設 事 未 종 當 t옮 를 二 間 :5U 寫 新 集 以 寫 障 蘇 亦 寫 乎 等 以 t옮 를 段 自 本 所 以 新 集 薦 在 果 封 趙 次 르 處 趙 짧 段 ;5Jj 工 作 良 中 進 非 事 棒 # 寫 只 寫 手 決 內 依 甲 寅 十 一 月 初 -- 日 - 寫 行 下 事 中 使 言 內 徒 ll 齊 室 溫 埈 甲 障 子 三 節 響 金 - 部 朴 排 亦 寫 置 所 入 正 鐵 =n- 벚 /\ 斗 等 物 斯 速 進 排 事 各 該 司 良 中 棒 it 馬 只 寫 手 決 內 依 戶 豊 I 費 續 工 몽효 同 日 - 薦 行 下 事 本 所 所 掌 行 聞 嘉 應 門 內 二 十 間 뚫 貼 改 畵 事 많 E 定 쫓 是 如 乎 善 手 畵 員 二 人 斯 速 定 送 之 意 圖 畵 뿔 良 中 棒 남 薦 只 寫 手 決 內 依 戶 醫 同 日 - 薦 行 下 事 倒 顆 室 八 間 半 三 層 慶 階 及 五 層 石 橋 等 處 所 쏠 Ell윷 法 油 休 紙 等 物 依 橫 間 算 補 進 排 事 各 該 꾀 良 中 棒 it 薦 只 寫 手 決 內 依 戶 費 續 工 藍 司 體 몫 義 짧 庫 甲 寅 九 月 十 八 日 - 寫 行 下 事 本 所 所 掌 徒 oi쯤 室 東 西 底 所 輔 轉 石 外 亦 多 有 庫 庫 修 補 之 處 是 乎 等 以 所 入 轉 石 多 小 未 能 的 知 是 야 亞 歡 官 房 - 間 終 敵 官 房 - 間 宗 室 房 느 間 參 奉 房 - 間 忠 義 房 - 間 長 짧 內 官 房 - 間 酒 房 內 官 房 - 間 典 更 房 - 間 泡 [fr 房 건

32 [ 明 聖 王 탐] 續 願 [ 塊 願 ] 都 藍 嚴 動 L F뽕 願 二 房 修 理 所 所 掌 票 目 뤘 徒 O 濟 室 # 末 樓 六 間 設 白 木 滿 頂 前 後 l!.9 門 感 生 布 甲 帳 帳 貼 及 鐵 ~J 等 物 修 理 Ffr- 造 成 所 M 家 터 間 上 設 油 휩 滿 頂 典 세E 廳 南 邊 표 間 設 油 끊 滿 頂 水 陽 間 妹 樓 設 油 휩 滿 頂 풍 物 熟 設 廳 一 間 半 設 白 木 浦 頂 都 醒 里 房 前 面 東 警 下 應 大 週 陽 蓋 覆 次 草 휩 二 짧 l 包 E 間 - 間 半 設 白 木 滿 頂 西 邊 朴 工 下 戀 大 i옆 陽 油 휩 朴 排 / 易 子 間 三 間 設 油 휩 滿 頂 쩔 物 陳 設 行 閒 七 間 設 魔 좁 輔 方 觀 正 嚴 四 面 흘 階 上 設 盧 흥좁 輔 方 觀 j떠 l,~l"ji 시끼 샤j ~; '. c ;;;:.u; 녔 V 니 ll:j 設 白 木 滿 頂 ;,';;!J-;[ 서 - 씨 設 盧 醫 輔 方 짧 設 油 휩 滿 頂 -11 } 白 放 席 六 張 付 地 衣 一 浮 以 上 白 木 l 隨 白 救 席 二 十 張 付 地 衣 一 浮 白 木 績, j± 草 席 十 張 付 地 衣 一 浮 1J 니 t싣 草 席 十 二 張 付 衣 - 浮 南 退 草 席 六 張 付 地 衣 一 浮 以 上 生 布 鎬 歡 慶 願 南 月 휩~ 內 人 入 接 處 第 一 溫 찢 二 間 白 放 席 十 四 張 付 地 衣 - 浮 홉IT 退 二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 浮 妹 樓 三 間 草 席 二 十 五 張 付 地 衣 -i뚱 白 木 結 前 退 二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一 浮 妹 樓 二 間 草 席 十 六 張 付 地 衣 一 浮 M 退 二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 浮 以 上 生 布 錯 第 二 間 溫 埈 二 間 白 救 席 四 張 付 地 衣 - 浮 白 木 뚫 前 退 二 間 草 席 A 張 付 地 衣 - 浮 生 布 結 第 三 間 溫 埈 白 救 席 十 l'.'.9 張 付 地 衣 - 浮 白 木 結 흡IT 退 二 間 草 席 A 張 付 地 衣 - 浮 生 布 鎬 第 四 間 溫 텃 白 救 席 十 四 張 付 地 衣 - 浮 白 木 뚫 前 退 二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 浮 生 布 結 以 上 自 歡 慶 嚴 內 二 十 二 處 段 今 짧 段 不 寫 入 排 藍 宮 內 官 入 接 處 溫 j갖- 間 白 救 席 l!.9 張 半 付 地 衣 - 浮 白 木 錯 妹 樓 二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 浮 生 布 網 白 級 席 登 每 二 坐 白 救 席 方 席 二 坐 以 上 白 木 I 短 뼈 仁 후릅IT &줄 新 造 家 溫 앉 二 間 所 排 휩 白 級 廣 席 及 妹 樓 二 間 前 後 退 四 間 所 排 白 放 廣 席 地 衣 等 白 木 精 隨 所 入 排 設 次 정찢 物 熟 設 廳 草 席 二 十 張 付 地 衣 - 浮 舊 承 政 院 察 物 熟 設 廳 草 席 四 十 二 張 付 地 衣 - 浮 七 張 付 地 衣 - 浮 以 上 生 布 鎬 東 溫 찢 二 間 白 放 席 十 七 張 付 地 衣 - 浮 白 木 *홀 聚 物 籃 鷹 內 官 房 - 間 半 草 席 十 二 張 付 地 衣 一 浮 薰 色 淳 房 - 間 草 席 七 張 付 地 衣 - 浮 場 色 패 房 - 間 草 席 七 張 付 地 衣 - 浮 껏 色 源 房 - 間 草 席 七 張 付 地 衣 - 浮 館 工 色 쨌 色 拉 溫 텃 二 間 草 席 十 六 張 付 地 付 t-ili 衣 -1뚱 酒 房 溫 j갖 - 間 草 席 七 꿇 付 地 衣 - 浮 以 上 生 布.효 退 三 間 草 席 十 프 張 付 地 衣 一 浮 第 二 間 溫 않 二 間 白 放 席 十 四 張 付 地 衣 -- 浮 以 上 白 木 結 前 退 二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 浮 生 布 篇 第 三 間 溫 埈 - 間 白 級 席 七 張 付 地 衣 - 浮 白 木 結 前 退 - 間 草 席 四 張 付 t 也 衣 - 浮 妹 樓 一 間 草 席 八 張 付 地 衣 一 浮 退 - 間 草 席 四 張 付 地 衣 - 浮 以 上 生 布 錯 第 ~ 間 溫 埈 - 間 白 放 席 t 張 付 t 也 衣 - 浮 되 木 績 前 退 -- 間 草 席 四 張 付 地 衣 - 浮 生 布 鎬 東 月 멈E 第 一 間 溫 렛 二 間 白 政 席 十 張 付 地 衣 - 浮

33 ~t혈풍 보원정비 가본계획연구 2. 신증동국여지승람

34

35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與 地 勝 寶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 권 > 비고편 - 동국 여지비고 제 l 권 - 창경궁 성종이 대제학 서거정( 徐 居 正 )에게 명하여 이름을 지어 달게 하였다. 궁 밖의 동쪽 담 문을 선인문( 宣 仁 門 )이라 하고, 가운데 동쪽 담 문을 경양문( 景 陽 門 ), 새 대문을 장춘문( 長 春 門 ), 가운데 대문을 선명문( 宣 明 門 ) 남쪽 협문(쨌 門 )을 춘흥문( 春 興 門 ) 안의 동쪽 담장 문을 건 양문( 建 陽 門 ), 동북쪽 담장 문을 기화문( 絡 華 門 ), 광연정( 廣 延 후) 서쪽 고개 문을 평창문( 平 昌 門 ), 남쪽 행랑 문을 영화문( 永 和 門 ), 북쪽 행랑 문을 영평문( 永 平 門 ), 내사복( 內 司 樓 ) 남쪽 문을 운금문( 雲 鎬 門 ), 외동산( 外 東 山 ) 문을 연양문( 延 陽 門 ), 왼쪽 협문을 광범문( 光 範 門 ), 오 른쪽 협문을 숭범문(몇 範 門 ), 남쪽 담장 문을 단봉문( 月 鳳 門 ), 안의 서쪽 담장 문을 의추문 ( 宜 秋 門 ), 왼쪽 궁 문[ 關 門 ]을 숙장문( 蕭 章 門 ), 겸사복청( 暴 司 樓 廳 )의 새 대문을 영복문( 迎 福 門 ), 내사옹( 內 司 寶 )의 위쪽 동문을 소춘문( 小 春 門 ), 북문을 소동문( 小 東 門 ), 중궁 차비문( 中 宮 差 備 門 )을 연도문( 延 禮 門 ), 승정원 남문을 연영문( 延 英 門 ), 서쪽 행랑 문을 금호문( 金 虎 門 ), 밖의 서쪽 담장 문을 진금문( 鎭 金 門 ), 서쪽 담장 문을 요금문( 魔 金 門 ), 후원의 북쪽 담장 문 을 공신문(# 辰 門 ), 새로 난 북쪽 담장 문을 창합문( 聞 關 門 ), 동쪽 담장 문을 청양문(춤 陽 門 ), 밖의 북쪽 담장 문을 광지문( 廣 智 門 )이라 하였다. 창경궁( 昌 慶 宮 ) 창덕궁 동쪽에 있으 며, 예전 수강궁( 壽 康 宮 ) 터이다 성종 14 년 0483) 에 정희왕후( 貞 熹 王 텀) 인수왕대비( 仁 縣 王 大 姐 ) 안순왕후( 安 順 王 텀) 세 궁( 宮 )을 위 하여 지 었다. 선조 25 년 (1592) 왜 란 때 불타 광 해군 8년 (1616) 에 중건하였다. 명정전( 明 政 嚴 ) 성종이 매양 정월 동지 때가 되면 여러 신 하들을 거느리고 세 궁에 하례드리고, 이 전에 나와서 조회를 받았다. 넓이가 5 칸, 세로가 4 칸이며, 동향이다. 동쪽을 명정문( 明 政 門 )이라 하며, 문 밖의 어구( 倒 構 다리)를 옥천교( 玉 川 橋 )라 한다. 전 뜰의 남쪽 문을 광정( 光 政 )이라 편액하고 북쪽 문을 원범( 元 範 )이라 편액 하였다. 문정전( 文 政 嚴 ) 명정전 남쪽에 있으며 숭화문(몇 化 門 )을 口 口 라 한다 인양전( 仁 陽 歐 ) 명정전 서쪽에 있다. 경춘전( 景 春 散 ) 수강전( 壽 康 顧 ) 북쪽 환경전( 歡 慶 散 ) 서쪽에 있다 소혜왕후( 昭 惠 王 텀) 인현왕후( 仁 顯 王 텀)가 승하하였으며, 혜빈( 惠 續 )이 이 전에서 승하하셨 다, 정종 헌종의 태어난 곳인데, 어펄로 탄생전(짧 生 嚴 )이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동쪽 벽 에는 장헌세자( 莊 歡 世 子 )가 그린 묵룡도(뿔 龍 圖 )가 있는데, 정조가 기문을 지었다. 0 셔쪽 에 가효당( 嘉 孝 堂 )이 있고, 남쪽에 희강당( 喜 康 堂 )이 있다. 통명전( 通 明 嚴 ) 경춘전 북쪽에 있 는데, 인순왕후( 仁 順 王 尼 )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푸른 기와를 이었는데, 정종조에 불탔다. 고려 때 세운 것이다 환경전( 歡 慶 嚴 ) 경춘전 동쪽에 있는데, 중종이 승하하였다 순조 30 년 에 불타 중건하였다 수령전( 壽 寧 顧 ) 인양전( 仁 陽 嚴 ) 북쪽에 있다. 자경전( 慧 慶 嚴 ) 명정전 북 쪽에 있는데, 효의왕후( 孝 露 王 텀)가 승하하였다. 정종이 자전( 經 觀 )을 이 전에 모셨다. 통화 전( 通 和 願 ) 요화당( 搖 華 堂 ) 동남에 있다 양화당( 養 和 堂 ) 환경 전 북쪽에 있다 여 휘 당( 麗 8 軍 堂 ) 통명전 서쪽에 있는데, 인열왕후( 仁 烈 王 尼 )가 승하하였다. 숭문당(뽕 文 堂 ) 명정전 서쪽에 있다. 함인정(패 仁 흑) 명정전 서북쪽 빈양문(홈 陽 門 ) 안에 있다. 환취정( 環 짧 享 ) 통명전 북쪽 에 있는데, 경종이 승하하였다. 김종직( 金 宗 直 )의 기문이 있다. 영춘헌( 迎 春 野 ) 집복헌( 集 福 몇f) 동쪽에 있는데, 정종이 자궁( 孫 宮 )을 모시던 곳이다. 정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공묵각 ( 悲 默 聞 ) 환경전 남쪽에 있다. 동궁( 東 宮 ) 건양문( 建 陽 門 ) 밖에 있는데, 예전 구현전( 求 賢 嚴 )

36 의 광연정( 廣 延 후) 터이며, 앞에 연못이 있다. 성종 22 년 0491) 에 짓고 춘궁( 春 宮 )이라 고쳐 불렀다. 동남쪽에 동룡문( 鋼 龍 門 )이 있다. 중희당( 重 熙 堂 ) 동궁( 東 宮 )의 서연( 書 흉)이며, 신료 (닮 燈 )들을 불러서 보는 곳이다. 헌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곁에 소주합루( 小 庫 合 樓 )가 있 는데, 정종조 때 팔분( 八 分 )으로 정구팔황 호월일가( 底 總 八 쁨 胡 越 - 家 ) 여닮 자를 써서 당의 문 위에 걸었다 남문을 중화문( 重 華 門 )이라 하며 또 그 남쪽을 이극문(흉 極 門 )이라 하는데 곧 동궁의 정문이다. 성정각( 誠 正 聞 ) 중희당 오른쪽에 있는데,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만나 보는 곳이다. 숙종의 어필 현판이 있다. 정종 5년 Cl 781) 에 조윤형( 曺 允 亨 )을 명하여 경계 십장도( 微 成 十 歲 圖 )를 그려서 걸었다 - 수강재( 壽 康 顆 ) 중희당 동쪽에 있다 시민당( 時 敏 堂 ) 수강재( 壽 康 顆 ) 동쪽에 있는데 동궁의 외당( 外 堂 )이다 청정( 聽 政 )과 조참( 朝 쌍) 등의 일을 이곳에서 행한다. 건극당( 建 極 堂 ) 신독재( 慣 獨 濟 ) 북쪽에 있다. 의춘헌( 宜 春 휩) 바로 건극당 동쪽 방이다. 0 효순왕후( 孝 純 王 尼 )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저승전( 蘭 承 顧 ) 건양문( 建 陽 門 ) 밖에 있다. 명성왕후( 明 聖 王 尼 )가 승하하였다. 취선당( 就 善 堂 ) 저승전 서쪽에 있는데, 경종이 태어났다. 진수당( 進 修 堂 ) 시민당 북쪽에 있는데 진종(혈 宗 )이 승하하였다. 집복헌( 集 福 野 ) 영춘헌 서쪽에 있으며, 장헌세자( 莊 敵 世 子 )와 순조가 태어났다. 양심각( 養 心 聞 ) 口 口 口 口 디에 있는데, 순원왕후( 純 元 王 텀)가 승하하였다. 보루각( 報 源 聞 ) 동룡문 옆, 시강원 동쪽에 있다. 광해군 갑인년 (1614) 에 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일영대( 日 影 臺 )가 있다. 0 대궐 안에 는 전루소( 傳 隔 所 )가 모두 12 곳이니, 동룡문 동수구( 東 水 口 ) 어정( 倒 井 ) 경화문( 景 化 門 ) 광정문( 光 政 門 ) 진선문 마군영( 馬 軍 營 ) 돈화문 경추문( 景 秋 門 ) 북수각( 北 水 聞 ) 영숙문 ( 永 蕭 門 )이다. 대궐 밖에는 6 곳이니, 소( 所 )마다 군사 2 명이 있다 사정( 射 후) 내사복시에 있 다. 효종조에 세웠는데 바로 옛날 철장 목마( 鐵 校 木 馬 )의 뜻이다. 후에 정자가 폐지되었는 데 영종 18 년 (17 42) 에 고쳐 지었다. 춘당대( 春 塊 臺 ) 바로 궁궐 안 후원( 後 행)인데, 선비를 시험보이고 무사( 武 士 )를 사열하는 곳이다. 성종조에 파가 창경궁 후원에서 났는데, 한 줄기 에 9 개의 가지가 자라니 당시에 서총( 瑞 짤)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연산군 을축년 (1505) 에 이 곳에 대를 짓고 서총대( 瑞 첼 臺 )라 이름하여 방탕하게 놀이하는 장소로 삼았다. 대를 쌓을 때에 하삼도( 下 三 道 )의 군민( 軍 民 )을 정발하여 고역(률 投 )시키며 포목을 많이 받아들이니 백 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옷 속의 솜을 뜯어서 다시 포목을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 색깔이 연기에 그을린 듯 검고 치수가 짧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거친 변포 옷을 서총대포( 瑞. 臺 布 )라 한다. 0 성종이 하루는 춘당대에 나가서 집춘문( 集 春 門 )으로 성균관 유생( 潤 生 )들을 불러 경서를 강( 講 )받고 과거 급제를 주었는데, 지금도 미담( 美 談 )으로 여긴다. 0 선조 5 년 (1572) 에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고 다음날 방방( 放 模 )하니,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이 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0 임금이 거둥할 때마다 배설방( 排 設 房 )에서 큰 베 장막을 펼쳐 차일( 週 日 )을 영화당( 奭 花 堂 ) 처마 앞 동쪽에 치는데, 큰 대나무 가지로 기둥을 삼아서 대( 臺 ) 곁에 열 길이나 되게 세우니, 높은 나무들이 모두 그 아래로 들어간다. 또 당( 堂 ) 섬 돌에 잇따라 붉은 덜마루[ 朱 板 野 ], 곧 보계판( 步 階 板 )을 설치하고 용수석( 龍 覆 席 )으로 덮으 니, 그 위에 수삼백 명이 앉을 만하며 마루 밑으로는 사람이 서 서 다닐 만한데, 9층 나무 층계를 만들어서 밖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못이 있는데, 가물 때 못가에 도마뱀과 동자( 童 子 )를 만들어서 비를 11 차례나 빌되, 무신 종 2품관이 제관이 되며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시장을 옮겼다, 도마뱀을 사용하는 일은 지금은 폐지되었다. 12 차의 오방 토룡제( 五 方 土 龍 쩔)에는, 당하(호 下 ) 3품관이 제관이 된다. 어수당( 魚 水 堂 ) 불로문( 不 老 門 ) 안에 있는데, 돌 을 깎아 문을 만들었다 효종조에 창건하였다. 영화당( 興 花 堂 ) 춘당대 위쪽에 있는데, 앞에 연못이 있다 당 뒤에도 못이 있는데, 바로 주합루(옮 合 樓 ) 앞 못이다. 0 무릇 과거를 설행 /

37 하여 선비를 시험할 때에 임금이 여기에 나온다 관풍각( 觀 뿔 聞 ) 춘당대 남쪽에 있다. 앞에 논이 있어 임금이 친히 나와서 농사짓는 것을 구 경하고 매해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면 근신( 近 닮)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춘당도( 春 樓 힘)라고 한다 관덕 정 ( 觀 德 후) 춘당대 동북쪽에 있으며, 곧 사정 ( 射 亨 )이 다 단풍정 ( 月 뼈후) 춘당대 곁에 있는데,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요, 정자는 없다. 장원봉( 狀 元 총) 곧 춘당대 맞은편 언덕이다. 과거 볼 때에 지방에서 뽑혀온 선 비 [ 學 人 ]들이 여기에 모여 앉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성종이 정희( 貞 熹 ) 인수( 仁 뽑) 안순( 安 順 )의 세 대비를 위하여 창덕궁 동쪽 수강궁( 壽 康 宮 ) 터에 창경궁을 짓고, 15 년 갑 진 (1484) 에 대제학 서거정( 徐 居 正 )을 명하여 전각 이름을 지었는데, 전을 명정 문정 수령 환경 경춘 인양 통명, 당을 양화 여휘, 각을 사성( 思 誠 ), 정자를 환취( 環 짧)라 하였다 덕수궁( 德 壽 宮 ) 정종 2년 (1400) 에 태상왕( 太 上 王 )을 봉하여 높이고 궁의 칭호를 세웠다. 인 수궁( 仁 壽 宮 )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이다. 계운궁(땅 運 宮 ) 인조 원년 (1623) 에 인헌왕후를 봉하여 높여 연주부부인( 連 珠 府 夫 人 )으로 하고 궁의 칭호를 세웠다. 혜경궁( 惠 慶 宮 ) 정종 원년 ( 1 776) 에 혜빈( 惠 績 ) 홍씨를 위하여 궁의 칭호를 세웠다. 수강궁( 壽 康 宮 ) 창경궁의 별전이다. 단종 을해년 (1455) 에 손위( 遊 位 )한 곳이며, 원경왕후( 元 敬 王 尼 )와 세조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경모궁 경모궁( 景 幕 宮 ) 동부 숭교방(몇 敎 행)에 있다 영종 40년에 처음으로 북부 순화방( 順 化 행)에 세웠으며, 처음 이름은 사도묘( 思 뱀 顧 )였는데 곧바로 수은전( 畢 恩 顧 )으로 고쳤다. 정종 초년 에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궁으로 승격하고 어필로 현판을 썼다. 장헌 세자( 莊 歡 世 子 )를 향사하는데, 영종이 어펄로 신주를 썼다 정종 순조 익종의 어용을 망묘 루( 望 蘭 樓 )에 봉안하였다 궁 서쪽의 일첨문( 日 廳 門 )과 월근문( 月 觀 門 ) 두 문이 유첨문( 追 體 門 )과 유근문( 追 觀 門 ) 두 문과 서로 통한다 0 매해 사중삭( 四 件 湖 ) 상순에 큰 향사를 거행 하며, 매달 삭망 및 다섯 명절에 작은 제사를 거행한다. 혼전 문소전( 文 昭 願 ) 성 안에 있는데, 태조 신의왕후( 神 廳 王 텀)의 혼전이며 어진( 倒 員 )을 봉안하 였다. 처음 이름은 인소( 仁 昭 )였는데 후에 문소( 文 昭 )로 고치고 인하여 원묘( 原 朝 )로 삼았다. 경복궁의 문소전이 아니다. 세종조에 새 문소전을 궁성 안에 세우고, 태조 태종의 위판을 합하여 모시니, 예전 문소전은 그대로 폐지되었다. 인안전( 仁 安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0 신 덕왕후( 神 德 王 尼 )의 혼전이다. 인덕전( 仁 德 願 ) 인덕궁에 있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혹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하고, 흑은 인덕궁( 仁 德 宮 )으로 개국 초의 이궁( 離 宮 )이었다 하는데, 자 세하지 않다. 정종( 定 宗 ) 정안왕후( 定 安 王 텀)의 혼전이다 광효전( 廣 孝 嚴 ) 성 안에 있는데 태종 원경왕후( 元 敬 王 fr -) 의 혼전이며 그대로 원전( 原 嚴 )이 되었다 세종조에 문소전에 옮겨 봉안하니, 폐지되었다. 휘덕전( 輝 德 嚴 ) 장소가 자세하지 않은데 혹은 별궁에 있었다 하고, 혹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한다 세종 소헌왕후( 昭 憲 王 尼 )의 혼전이다 경희전( 景 禮 嚴 ) 소재 지가 자세하지 않은데, 흑은 동궁의 자선당( 資 善 堂 )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에 또 영창전( 永 昌 嚴 ) 태경전( 泰 慶 嚴 ) 두 전이 되었다. 현덕왕후( 顯 德 王 텀)의 혼전이다. 영창전( 永 昌 願 ) 수강궁( 壽 康 宮 ), 지금 창경궁에 있는데, 세조의 혼전이다. 태경전( 泰 慶 嚴 ) 장소가 자세 [J

38 하지 않다. 정희왕후( 貞 熹 王 尼 )의 혼전이다. 경안전( 景 安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예종 장순왕 후( 章 順 王 텀)의 혼전이다 소경전( 昭 敬 願 ) 경복궁 안에 있다. 성종 공혜왕후( 悲 惠 王 텀)의 혼 전이다. 효경전( 孝 敬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0 정현왕후( 貞 顯 王 尼 )의 혼전이다 문덕전( 文 德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문정왕후( 文 定 王 尼 )의 혼전이다. 영모전( 永 暴 願 ) 경복궁 안에 있다. 0 인종의 혼전이다. 효경전( 孝 敬 願 ) 경복궁 안에 있다, 인성왕후( 仁 聖 王 텀)의 혼전이다. 경 모전( 敬 幕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인순왕후( 仁 順 王 텀)의 혼전이다 영모전( 永 幕 願 ) 경운궁 ( 慶 運 宮 )에 있는데, 곧 당시의 이궁( 離 宮 ) 이며 선조의 혼전이다 효경전( 孝 敬 願 ) 남별전( 南 ~lj 嚴 )에 있는데, 곧 지금 영희전( 永 禮 嚴 )이며 의인왕후( 露 仁 王 팀)의 혼전이다 효사전( 孝 思 嚴 ) 경덕궁( 慶 德 宮 )에 있는데, 인목왕후( 仁 樓 王 텀)의 혼전이다. 숭은전(몇 恩 嚴 ) 남별궁에 있는데, 인헌왕후( 仁 敵 王 尼 )의 혼전이다. 영사전( 永 思 願 ) 창덕궁 안에 있는데, 인조의 혼전이다. 숙녕 전( 關 寧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인렬왕후( 仁 烈 王 텀)의 혼전이다. 효사전( 孝 思 嚴 ) 창경궁 안 에 있다. 0 장렬왕후( 莊 烈 王 텀)의 혼전이다. 경모전( 敬 幕 願 ) 창덕궁 안에 있다 0 효종의 혼전이다 경사전( 敬 思 嚴 ) 경덕궁 안에 있다 0 인선왕후( 仁 宣 王 텀)의 혼전이다. 효경전( 孝 敬 願 ) 창덕궁 안에 있다. 0 현종의 혼전이다. 영모전( 永 흙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명성왕 후( 明 聖 王 尼 )의 혼전이다 효령전( 孝 寧 願 ) 경덕궁 안에 있다. 0 숙종의 혼전이다. 영소전( 永 昭 嚴 ) 경덕궁 안에 있다. 0 인경왕후( 仁 敬 王 텀)의 혼전이다. 경녕전( 敬 寧 願 ) 창경궁 안에 있 다. 0 인현왕후( 仁 顯 王 尼 )의 혼전이다 효소전( 孝 昭 嚴 ) 창덕궁 안에 있다 0 인원왕후( 仁 元 王 텀)의 혼전이다. 경소전( 敬 昭 願 ) 창경궁 안에 있다. 0 경종의 혼전이다 영휘전( 永 徵 嚴 ) 창덕궁 안에 있다. 0 단의왕후( 端 짧 王 尼 )의 혼전이다. 경휘전( 敬 徵 歐 ) 경희궁( 慶 熙 宮 ) 안에 있다 0 선의왕후( 宣 歸 王 尼 ) 의 혼전이다. 효명전( 孝 明 嚴 ) 경희궁 안에 있다. 0 영종의 혼전 이다 휘령전( 徵 寧 願 ) 창덕궁 안에 있다. 0 정성왕후( 貞 聖 王 尼 )의 혼전이다. 효안전( 孝 安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정순왕후( 貞 純 王 텀)의 혼전이다. 口 口 전 口 口 궁 안에 있다. 0 진종의 혼전이다. 연복전( 延 福 嚴 ) 口 디궁 안에 있다 0 효순왕후( 孝 純 王 尼 )의 혼전이다 효원전( 孝 元 願 ) 창덕궁 안에 있다. 정종의 혼전이다 효희전( 孝 熺 願 ) 창경궁 안에 있다, 0 효의왕후 ( 孝 歸 王 尼 )의 혼전이다. 디디전 창경궁 안에 있다, 0 순조의 혼전이다. 효정전( 孝 定 願 ) 창덕 궁 안에 있다 0 순원왕후( 純 元 王 텀)의 혼전이다. 口 口 전 창경궁 안에 있다. 0 효명세자( 孝 明 世 子 )의 혼전이다 휘정전( 徵 定 顧 ) 창경궁 안에 있다. 0 효현왕후( 孝 顯 王 尼 )의 혼전이다 효문전( 孝 文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철종의 혼전이다. 口 口 궁 창경궁 안에 았다. 0 혜빈 ( 惠 複 )의 혼전이다. 현사궁( 顯 思 宮 ) 창경궁 안에 있는데, 유빈( 績 續 )의 혼전이다. 0 이상의 혼전과 궁은 모두 부묘(떼 關 ), 입묘( 入 願 )한 후에 폐지되었다. 후원 창덕궁 창경궁 후원 두 후원이 서로 통한다 열무정( 關 武 후)이 있고, 정자 곁에 네 개의 우 물이 있으니, 마니( 摩 尼 ) 파려( 破 瓚 ) 유리( 統 調 ) 옥정( 王 井 )이라 하는데, 세조 때에 판 것 이며, 최항( 崔 J면)의 서문이 있다. 0 또 어수당( 魚 水 堂 ) 닥민정( 樂 民 후) 관풍각( 觀 뿔 聞 )과 경성( 慶 成 ) 청심( 淸 心 ) 척뇌( 腦 倫 ) 취규( 聚 奎 ) 관덕( 觀 德 ) 양심( 養 心 ) 낙선( 樂 善 ) 월지 ( 月 志 ) 애련( 愛 違 ) 등의 정자가 있다. 0 세조가 명하여 무일전( 無 速 願 )을 지으니,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고 여기에 나와서 수양하려는 것이었다. 0 성종 9 년 (14 78) 에 채상단( 採 쫓 增 ) 을 후원 가운데 쌓고 왕비가 명부( 命 歸 )들을 거느리고 친잠례( 親 鍵 禮 )를 행하였다. 0 옥류 천( 玉 流 흉)은 춘당대( 春 塊 臺 ) 북쪽에 있는데, 곁에 농산정( 龍 山 亨 )이 있다 0 일찍이 담연문 ( 淡 煙 門 )이 있었는데, 중종이 명하여 영숙( 永 關 )으로 고쳤다. 0 영종 22 년 (17 46) 봄에 임금 - 4 -

39 이 친히 관풍각에 나아가 어제시( 倒 製 詩 ) 한 수를 지었으며 동궁은 삼자시( 三 字 詩 ) 두 구절 을 지어 올렸다. 상럼 10 경( 上 林 十 景 ) 관풍 춘경( 觀 뿔 春 執 ) 망춘 문앵( 望 春 聞 鷹 ) 천향 춘 만( 天 香 春 H 免 ) 어수 범주( 魚 水 / 冊 ) 소요 유상( 週 逢 流 觸 ) 희우 상련( 喜 雨 賞 運 ) 청심 제월 ( 淸 心 露 月 ) 관덕 풍림( 觀 德 뼈 林 ) 영화 시사( 奭 花 試 士 ) 능허 모설( 俊 虛 흉 雪 )이다. 0 정종 ( 正 宗 )의 어제시가 있다. 효종 기해년 (1659) 5월에 상럼에서 한밤중에 홀연 크게 탄식하는 소리가 있더니, 며칠 뒤에 효묘가 승하하였다 이완( 李 洗 )이 밤에 북영( 北 營 )에서 숙직하다 가 들었다 함춘원 함춘원( 含 春 짧) 하나는 창덕궁에 있는데, 요금문( 嘴 金 門 ) 서쪽 건너 산기숨이며, 경복궁 동 쪽 담과 서로 연접했다. 하나는 창경궁에 있는데, 홍화문( 弘 化 門 ) 동쪽 건너 산기숨이며, 경 모궁( 景 寒 宮 )의 서쪽 담장과 서로 연접했다 후원의 동쪽은 곧 경모궁의 일첨문( 日 擔 門 )이 며, 후원의 서쪽은 유첨문( 追 體 門 )이라 하고, 북쪽은 유근문( 追 觀 門 )이라 한다. 동북쪽에 좌 액문( 左 被 門 )이 있고, 동남쪽엔 우액문이 있는데, 모두 정종( 正 宗 ) 경자년 (1780) 에 지은 것 이다. 매해 봄 가을에 병조 공조 한성부의 당상과 낭관들이 본궁의 제조와 함께 두루 다 니며 간심( 看 審 )한다. 0 하나는 경희궁에 있는데, 개양문( 開 陽 門 ) 남쪽 건너 산기숨이며, 담 장을 두르고 수목을 보호하며 기른다. 관서 문직 공서( 文 職 公 暑 ) 종친부( 宗 親 府 ) 북부 관광방( 觀 光 행)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를 따라 창설하였다. 열성조 어보( 細 語 )를 받들어 모시고 왕과 왕후의 의대( 衣 樹 어의) 를 받들어 올리며 선원( 覆 源 왕성)의 여러 파 및 종실의 여러 군( 君 )을 통솔하는 부( 府 )이 다. 대군 왕자군 때에는 계급이 없으며 아문( 衝 門 )의 종친은 일정한 수가 없으며, 양첩( 良 쫓)의 소생은 l 등을 낮추고 천첩( 購 훌)의 소생은 또 1 등을 낮춘다. 0 이어받는 직은 아버 지가 죽은 뒤에 제수하며, 친연( 親 緣 )이 다 되면 문무 관원의 자손의 규례에 의하여 조정에 틀어 가 벼슬한다. 0 종정 경 ( 宗 正 뼈)은 여 러 군( 君 ) 및 종성 ( 宗 姓 )의 조정 관원 중 2품 이상 으로 일정한 수 없이 아뢰어 임병하며, 도정( 都 正 ) 1 원을 더 두었는데 종성의 문관으로 임 명한다. 유사( 有 司 )는 으레 전첨( 典 戰 )을 겸하는데 대군 때에 자벽( 自 맑 자의로 추천하는 것)하며, 전부( 典 樓 )는 대군이나 왕자군 때에 자벽한다. 주부( 主 揮 )는 언제나 자벽하고, 직장 ( 直 長 )은 생원 진사가 아니면 임명하지 않으며, 참봉 충의 낭청( 忠 義 郞 廳 ) 각각 1 원씩은 역 시 종성인( 宗 姓 人 )으로 언제나 자벽하게 한다 또 겸냥청 1 원이 있다. 0 대군 왕자 적실 ( 觸 室 )아들 군 왕자 서자 영종정경( 領 宗 正 뼈) 대군 왕자 군을 으레 겸한다 군 정 l 품 판종정경( 判 宗 正 9 郞 ) 정 1 품 군 종 1 품 대군이 이어 받으며 적장자에게 처음 제수된다. 지 종정경( 知 宗 正 聊 ) 정 2품에서 종 1 품까지 군 종 2품 세자 중자(댔 子 )와 대군 중자가 이어 받 으며 적장 증손 왕자군이 이어 받으며, 적장손이 처음 제수된다. 종정경 종 2품 도정 정 3품 정( 正 ) 정 3품 세자 중증손(댔 曾 孫 ), 대군의 중손( 聚 孫 ) 왕자군의 중자가 이어 받으 며, 적장 증손에게 처음 제수된다 정 l 원 조정 관원인데 원래 종부시( 宗 灣 좋)에 속한다. 부정( 副 正 ) 종 3품관인데, 대군의 중증손, 왕자꾼의 중손에게 처음 제수된다. 수( 守 ) 정 4 품 증손의 관인데 왕자 군의 중증손에게 처음 제수된다. 전첨 1 원 조정관원 부종( 副 宗 ) 종 4품 영( 令 ) 정 5품 전부 1 원 조정 관원 부령( 副 令 ) 종 5품 감( 藍 ) 정 6품 주부 1 원 조정 관원인데, 원래 종부시에 속하였다. 직장( 直 長 ) 1 원 조정 관원인데 원래 종부시에 ζ J

40 속한다. 참봉 1 원이 있다. 0 신익성( 申 翊 聖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의정부( 議 政 府 ) 경 북궁 광화문 남쪽의 왼편에 있으니, 곧 북부 관광방이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 여 도평의사( 都 評 議 司 )를 설치하고, 또 문하부( 門 下 府 )를 설치하였는데, 정종( 定 宗 ) 2 년 (140( )에 도평의사를 파하고 의정부로 만들었으며, 태종 원년 (1400) 에 또 문하부를 파하고 본부에 병합하여 백관을 총할하고 모든 정사를 공평히 하며 음양( 陰 陽 )을 다스리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들을 맡도록 하였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각 1 원씩 정 1 품, 좌찬성 우찬성 각 1 원 종 1 품, 좌참찬 우참찬 각 1 원 정 2품, 사인( 舍 人 ) 2 원, 검상( 檢 詳 ) l 원, 사록( 司 錄 ) l 원, 공사관( 公 事 官 ) 11 원 원래는 비변사 냥청에 속하였다., 문관 2 원, 무관 참상(양 上 종 3 품 이하 6품 이상) 5 원, 참외( 泰 外 참상 이하) 4 원을 두었다. 0 그 관속 중 사인 검상은 양사( 兩 司 )에 부속되었다. 0 도상( 都 相 )은 원임 의정 겸 당상( 原 任 議 政 暴 堂 上 )인데, 정한 수 효 없이 아뢰어 임명하며,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판서와 삼영( 三 營 ) 의 대장, 좌포 장 우포장이 으 레 겸한다. 그 중 4원은 유사당상( 有 핀] 堂 上 )이라 칭하며, 8 원은 팔도 구관 당상( 八 道 句 管 堂 上 )을 겸임하는데, 원임 장신( 將 톰)이 당상관으로 계하(양 下 )된다. 0 의정의 아문 청사가 불타서 찬성의 아문 청사로 대신들의 아문 자리를 삼았는데, 금상 을축년 (1865) 에 중건하였다. 서남쪽에 행랑[ 月 郞 ] 수십 칸이 있는데, 남쪽 행랑은 백관들이 서계 (촬 威 )를 받는 곳이다 0 사인사( 舍 人 司 )가 북쪽에 있는데 정풍각( 淸 風 聞 )이라 현판하였으 며, 연못이 있다. 이극감( 李 克 權 )의 양사제명기( 兩 司 題 名 記 )가 있다. 0 제언사(뚫 盧 러)에는 제조 l 원 본부의 유사 당상이다 과 겸냥청 본부의 공사관이 겸한다. 이 있다. 충훈부( 忠 勳 府 ) 예전에는 북부 광화방( 廣 化 야)에 있었으며 중종 초에 중부 관인방( 寬 仁 행)으로 옮겨 지 었는데 여러 공신들의 관부이다. 태조조에 공신도감( 功 톰 都 藍 )을 설치하였는데, 태종조에 충 훈사( 忠 勳 司 )로 고쳤으며 세조조에 부로 승격하였다 개국 초기에는 장생전( 長 生 嚴 )을 짓고 모양을 그렸다. 0 군( 君 ) 정 1 품 은 친공신( 親 功 닮)이고 왕비의 부친은 부원( 府 院 ) 두 자를 더하며 군 종 l 품 군 정 2품 군 종 2품 은 모두 정한 수가 없다. 경력( 經 歷 ) 1 원, 감도사 ( 減 都 事 ) 1 원, 겸도사 1 원은 적장 충의(뼈 長 忠 義 ) 6품 이상이 전의 직함으로 자벽( 自 群 )한 다, 0 당상관 3원은 아뢰어 임명하며, 유사는 친공신이 없으면 승습( 承 靈 )한 군으로 차출한 다 0 따로 기공각( 記 功 聞 )을 짓고, 태조 세조 원종 효종의 훈첩( 勳 뼈)을 받들었다. 0 권람( 權 擊 )의 기문과 장유( 張 維 )의 어제판기( 倒 題 板 記 ), 19 공신 제명판기( 題 名 板 記 ), 이이명 ( 李 願 命 )의 기공각기( 紀 功 聞 記 )가 있다 의빈부( 燒 홈 府 ) 예전엔 중부 정선방( 貞 善 행)에 있었 는데, 연산군 11 년 0505) 에 다른 곳으로 철거하여 옮겼으며, 중종 11 년 0516) 에 북부 광화 방( 廣 化 행)으로 옮겨 지었다. 개국 초기에 창설하였는데, 공주와 옹주(컸 主 후궁 소생의 왕 녀)에게 장가든 이들의 관부이다 위(텀) 정 1 품 위 종 1 품 는 공주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 음 제수하며, 위 정 2품 위 종 2품 는 옹주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며, 부위( 副 펴) 정 3품 는 군주( 部 主 왕세자의 적실녀)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며, 첨위(혔텀) 정 3품 종 3품 는 현주( 縣 主 대군 군의 딸)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는데, 모두 일정한 수 효가 없다 경력( 經 歷 ) 1 원, 감도사( 減 都 事 ) l 원을 두었다. 돈녕부( 敎 寧 府 ) 중부 정선방에 있 다. 0 왕의 친족과 외척의 관부이다. 태종 14 년 0414) 에 창설하고 선보( 覆 諸 왕실의 계보) 를 봉안하였다. 영사( 領 事 ) 1 원 정 l 품 은 왕비의 부친으로 처음 제수되는 자도 제수한다. 흑 관직이 낮거나 아직 벼슬하지 않았으면 먼저 도정( 都 正 )을 제수한 후에야 비로소 제수한 다 판사 1 원 종 l 품, 지사 l 원 정 2품, 동지사( 同 知 事 ) 1 원 종 2 품, 도정 1 원 정 3품 이며, 가 설 도정 1 원은 대원군의 봉사손( 奉 祝 孫 )으로 대대로 이어받게 하며, 만일 자급이 올라가면 품계에 따라 더 설치한다. 정 GE) 부정( 副 正 ) 첨정(혔 正 ) 각 l 원씩이며, 감판관( 減 判 官 ) 2 (h ]

41 원에 l 원은 감하고, 주부( 主 續 ) 2 원에 1 원은 감하고, 직장( 直 長 ) 2원에 l 원은 감하고, 봉사 ( 奉 事 ) 2원이며 감참봉( 減 泰 奉 ) 2 원에 l 원은 감한다 의금부( 義 禁 府 ) 중부 견평방( 堅 平 행)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순군만호부(파 軍 萬 戶 府 )를 두었는데, 태종 2년 0402) 에 순위부(파 衛 府 )로 고치고 3 년에 또 고쳐서 의용순금사( 義 勇 센 禁 司 )로 하였다가 14 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추국( 推 웹)하는 일을 맡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세조조에 감찰 정보( 鄭 保 )가 가산이 몰수된 후에 그 집으로 관부의 정아( 正 衝 ) 대청을 삼았다 고 한다. 남 쪽에 호두각( 虎 頭 聞 )이 있고, 서쪽에 연정( 運 亨 )이 있다 서쪽의 l 칸, 2 칸, 3칸은 모두 조정 관원 중의 경범 죄인을 가두는 곳이요, 동쪽의 13 칸과 남쪽의 15 칸은 모두 역옥( 進 쳤) 및 삼성 죄인( 三 省 罪 人 )의 중죄수를 가두는 곳이다 0 속한 건물로는 경력소( 經 歷 所 )가 있고 또 당직청( 當 直 廳 )이 있는데, 연산군 때에 밀위청( 密 威 廳 )으로 고쳤다가 중종 초에 예전대로 하였다. 사서인( 土 딴 人 )들의 하소와 소장 등에 대한 일을 맡았다. 신문고( 申 聞 鼓 )를 진선문 ( 進 善 門 )에 두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이들에게 치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원통함을 호소하는 이가 없었다. 쇠를 차비문( 差 備 門 왕이 거처하는 편전의 앞문) 밖에서 치도록 허 락했는데, 격쟁( 擊 짧)이라 한다. 지금 다시 북을 두었는데,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 金 虎 門 ) 밖 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밖에 있다. 0 유성원( 柳 誠 源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0 본부에는 옛날 옥패( 王 牌 )가 있었는데, 무릇 삼사(르 司 )에서 금부에 나오변 본부에 서는 또 옥패로써 금부 이속들을 출동하여 삼사의 금리를 규찰하였다. 임진란 후에 옥패를 분실하여 마침내 폐하였다 0 판사 1 원에 지사와 동지사( 同 知 事 )는 혹은 1 원이고, 혹은 2 원으로 4 원을 충당하였다 그 관속은 경력 감도사 5원이요, 참상도사 5 원, 참외 디 口 이다 이 조( 更 費 ) 의정부 남쪽, 중부 징청방( 燈 淸 행)에 있으며, 태조 원년에 설치한 것은 다른 조 ( 暫 )와 같다. 문관을 선임하고 [ 文 選 ], 훈봉( 勳 封 )과 고과( 考 課 고시)의 정사를 맡는데, 그 아 래에 문선사( 文 選 司 )가 있어 종친 문관 잡직의 증직( 觸 職 ) 제수( 除 授 ) 고신( 告 身 임명장) 녹패( 錄 牌 )와 문과 생원 진사의 사패 차정( 陽 牌 差 定 )과 취재( 取 才 ) 개명( 改 名 ) 및 장오 패 상인( 職 펀 敗 常 人 )의 녹안( 錄 案 ) 등의 일을 맡으며, 고훈사( 考 勳 司 )에서는 종재( 宗 宰 ) 공신의 봉증 보호( 封 體 諸 號 ) 향관 노직 ( 享 官 老 職 ) 명부 작첩 ( 命 歸 뽑뼈) 향리 급첩( 獅 更 給 牌 ) 등의 일을 맡으며, 고공사( 考 功 司 )에서는 문관의 공과( 功 過 ) 근만( 動 慢 ) 휴가와 여러 관청 아전 ( 衝 前 )의 출사일( 出 { 土 日 )의 변리( 辦 理 )와 향리 자손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 0 판서 1 원 종 2품, 참판 1 원 종 2품 은 경연( 經 흉)에서 추천한 후보자에서 낙점하며, 참의( 參 議 ) 1 원 정 3 품 은 국자감( 國 子 藍 국학)에서 추천한 후보자에서 낙점한다. 정랑(표 郞 ) 3원 정 5품 중 1 원 은 친히 정사할 때에 임명하되 임시 감하기도 하며, 좌랑( 依 郞 ) 정 6품 3원 중 l 원은 친히 정사할 때에 임명하되 임시로 감하기도 한다. 호조( 戶 暫 ) 한성부 남쪽 옛날 예조동( 禮 費 洞 ) 에 있으니, 곧 중부 정청방이다. 호구 공부( 頁 眼 ) 전량( 田 根 ) 식화( 食 貨 ) 등의 정사를 맡 았는데, 그 관하의 판적사( 版 籍 司 )는 호구 전토 조세 부역 공헌( 責 敵 ) 권과 농상( 動 課 農 쫓) 고험 풍흉( 考 驗 뿔에) 및 진대( 飯 資 ) 염산( 歡 散 ) 등의 일을 맡았고, 회계사( 會 計 司 )는 경외( 京 外 )의 저장[{; 諸 積 ] 과 1 년 회계의 인계[ 解 由 ] 휴흠( 顧 X) 등의 일을 맡았으며, 경비사 ( 經 費 司 )는 경중( 京 中 )의 조달[ 支 調 ] 및 왜인( 優 人 )의 양료( 根 料 ) 등의 일을 맡았다 산원( 算 員 )이 56 명인데, 교수( 敎 授 ) 별제( 別 提 ) 훈도는 본업인( 本 業 人 )을 선택하여 임명한다. 경비 사는 지금 별례방( 別 例 房 )이라고 한다. 또 전례방( 前 例 房 )이 있어서 제향( 奈 享 ) 공상( 供 上 ) 사행 방물( 使 行 方 物 ) 예장( 禮 賽 )을 맡고, 판별방( 版 別 房 )은 무시 별무( 無 時 別 質 )를 맡으 며, 별영색( 別 營 色 )은 훈국(넓 II 局 ) 군병의 요미[ 料 ] 주는 것을 맡고 별고색( 別 庫 色 )은 공물 차하를 맡으며, 세폐색( 歲 뺑 色 )은 절사( 節 使 )의 세폐( 歲 網 )를 맡고, 응판색( 應 辦 色 )은 사객( 使 - 7 -

42 客 )에 대한 공급을 맡으며, 은색( 銀 色 )은 금은을 맡는다. 0 판서 참판 참의가 각 1 원씩이 며, 정랑이 3 원인데 2원은 자벽하고, 좌랑이 3원이다 산학 교수( 算 學 敎 授 ) 겸교수 별제 산사( 算 士 ) 계사( 計 士 ) 산학 훈도 회사( 會 士 )가 각 1 원씩이다. 0 분조( 分 費 )는 남부 회현 방( 會 賢 행), 예빈시( 禮 좁좋) 서쪽에 있다. 광해군 원년 (1608) 에 세웠으며 조사(짧 使 )의 공급 에 대비하였다. 0 별령( 別 營 ) 별고( 別 庫 )에도 모두 창고를 설치하였다 예조( 禮 費 ) 경복궁 광화문 남쪽의 오른편에 있으니, 곧 서부 적선방( 積 善 功 )이다. 예악( 禮 樂 ) 제사 연향(훌 享 ) 조빙( 朝 體 ) 학교 과거의 정사를 맡았다. 0 관하에 계제사( 積 制 司 )가 있어서 의식 제도 조회 경연 사관( 史 官 ) 학교 과거 인신( 印 信 ) 표전( 表 쫓) 책명( 冊 命 ) 천문 누각( 偏 刻 ) 국기( 國 료 ) 묘휘( 顧 譯 ) 상장( 喪 聲 ) 등의 일을 맡았으며, 전향사( 典 享 司 )는 연향 제사 생두( 姓 豆 ) 음선( 飯 廳 ) 의약 등의 일을 맡으며, 전객사( 典 客 司 )는 사신 왜( 優 ) 야인( 野 人 )의 영접과 외방의 조공과 연설(훌 設 ) 사여( 陽 與 ) 등의 일을 맡았다 0 판서 참판 참 의 각 l 원씩과 정랑 좌랑 각 3원씩이 있다. 0 세상에서 전하기를 정도전( 鄭 道 傳 )이 일찍 이 정부와 군부( 軍 府 )가 일체(- 體 )라고 하면서 제도에 의하여 정아( 正 衝 )를 세워서 동 서 에서 대치하게 하였는데, 그가 쫓겨난 후에 삼군부( 三 軍 府 )를 취하여 조( 暫 )로 삼았기 때문 에 제도가 극히 장려(밤 麗 )하다 지금 과거를 보아 선비를 뽑는 장소가 되었는데, 일소( 所 )라고 칭한다. 병조( 兵 費 ) 사헌부 남쪽에 있으니 곧 서부 적선방이다. 내조( 內 費 )가 둘 있 는데, 하나는 창덕궁 진선문( 進 善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안에 있다. 무선( 武 選 ) 군무( 軍 務 ) 의위( 嚴 衛 ) 우역( 郵 繹 ) 병갑( 兵 甲 ) 기장( 器 {j::). 문호 관약( 門 戶 管 鎬 )의 정사를 맡았다 그 안에 무선사( 武 選 司 )가 있으니 무관 군사 잡직의 제수 고신( 告 身 ) 녹패( 除 牌 ) 부과 급가( 附 過 給 興 ) 및 무과( 武 科 ) 등의 일을 맡는데 지금은 정색( 政 色 )이 라고 칭한다. 승여사( 乘 與 司 )는 노부(협 續 ) 연여( 輩 與 ) 구목 (I많 救 ) 정역( 程 羅 ) 보충대( 補 充 隊 ) 조예(털 轉 ) 나장( 羅 將 ) 반상( 伴 個 ) 등의 일을 맡는데 지금은 마색( 馬 色 )이라 칭하 고, 겸하여 입마( 立 馬 ) 노문( 路 文 ) 장과( 章 科 )도 맡는다 무비사( 武 備 司 )는 군적( 軍 籍 ) 마 적( 馬 籍 ) 병기 전함 점열군사( 點 關 軍 士 ) 훈련 무예 숙위 순작보(센 繹 뭘) 진수( 鎭 守 ) 비어 ( 備 쩔) 정토( 狂 討 ) 군관 군인의 차송( 差 送 ) 번휴(짧 休 ) 급보( 給 保 ) 급가( 給 興 ) 시정 ( 待 T). 복호( 復 戶 ) 화포( 火 抱 ) 봉수( 峰 爆 )의 개화( 改 火 ) 분화(찢 火 ) 부신( 符 信 ) 경첨( 更 靈 ) 등의 일을 맡는다. 일군색( 一 軍 色 )은 용호영( 龍 虎 營 ) 호련대(훌 整 隊 ) 내취 제보( 內 吹 諸 保 )의 포목을 맡고, 이군색( 二 軍 色 )은, 기병( 騎 兵 )과 보병( 步 兵 )의 보포( 保 布 군보( 軍 保 )가 바 치던 포목)의 궐흠과 내외 각사의 고립( 塵 立 )을 맡으며, 유청색( 有 廳 色 )은 충순위( 忠 順 衛 ) 충찬위 ( 忠 贊 衛 ) 충장위 ( 忠 봐 衛 ) 소관 첨 병 ( 簽 兵 ) 여 정 ( 餘 T) 의 번포(짧 布 군정 에 게 입 번 대 신 받는 포목)를 맡으며 도안색( 都 案 色 )은 별기병( 別 騎 兵 )의 보포를 맡으며 결속색( 結 束 色 ) 은 궐내 및 어가 출동 때에 금훤( 禁 웰)한다. 0 판서 참판 참의 참지 정 3품 각 1 원, 정 랑 4원 중 2 원은 자벽하며, 좌랑 4원이다. 형조(쩌뽕) 병조 남쪽에 있으며 서부 적선방이다. 병률( 兵 律 ) 헌사송( 謝 詞 뚫) 노예의 정사를 맡는다, 그 안에 상복사( 詳 覆 司 )가 있으니, 큰 범죄 를 자세히 복심하는 일을 맡으며, 고율사( 考 律 司 )는 법률 안핵( 按 嚴 )하는 일을 맡고, 장 금사( 掌 禁 司 )는 형옥(쩌 歡 ) 금령( 禁 令 )의 일을 맡으며, 장예사( 掌 慧 司 )는 노예의 부적( 揮 籍 ) 및 부수( 浮 因 포로) 등의 일을 맡는다 0 판사 참판 참의 각 l 원, 정랑 좌랑 각 3원이 며, 율학 교수( 律 學 敎 授 ) 겸교수 각 1 원, 별제 2 원, 명률( 明 律 ) 심률( 審 律 ) 율학( 律 學 ) 훈도 검률( 檢 律 ) 각 1 원이다. 0 정아 GE 衝 ) 청사 벽 좌우에 영종의 어필로, 태공 흠재 면 수법문( 太 公 왔 歲 助 守 法 文 )의 여넓 큰 글자와 태공 지정 근수 법문( 太 公 至 표 護 守 法 文 )의 여넓 큰 글자를 나누어 걸었다. 계단 아래에 왼쪽으로 아름다운 돌이 있는데, 위는 깎고 아래는 n

43 넓으며 길이가 3 척 8촌이요, 오른쪽으로 돌이 있는데, 아래는 둥글고 위는 날카로우며 길이 가 5 척 4촌이고 사방에 여닮 모가 졌다, 0 예전 정부 검상 겸 정랑은 어느 때부터 폐지되 었는지 모르는데, 지금 조( 費 ) 안에 검상청이 있으며, 또 정랑 1 원이 금화사 별좌( 禁 火 司 別 座 )를 겸하였는데, 금화사를 파한 후에 폐지되었다. 0 선조 임진란 때 거가( 車 罵 )가 성을 나간 후에, 난민( 亂 民 )들이 먼저 장예원 및 형조를 불지르니, 대개 두 관청에 공사 노비( 公 私 如 輝 )의 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공조( 工 暫 ) 형조 남쪽에 있으며 서부 적선방이다 산택 ( 山 澤 ) 공장( 工 [!L)- 영선( 營 續 ) 도야( 關 治 )의 정사를 맡는다. 그 안에 영조사( 營 造 司 )가 있 으니 궁실 성지( 城 池 ) 공해( 公 廠 ) 옥우( 屋 宇 ) 토목 공역( 土 木 工 投 ) 피혁( 皮 童 ) 전담(활 關 ) 등의 일을 맡으며, 공야사( 攻 治 허)는 백공( 百 工 )의 제작, 금 은 주옥 동( 鋼 ) 납( 鎭 ) 철( 鐵 )의 야주( 治 옳), 도와( 隔 互 ) - 권형( 權 衝 ) 등의 일을 맡으며, 산택사( 山 澤 司 )는 산택 진 량( 律 梁 ) 원유( 園 圖 ) 증식( 種 植 ) 탄(벚) 목( 木 ) 석( 石 ) 주거(판 車 ) 필묵( 筆 뿔) 수철( 水 鐵 ) 칠기(앉 器 ) 등의 일을 맡는다. 0 판서 참판 참의 각 1원 정랑 좌랑 각 3원이다 0 서거정( 徐 居 正 )의 낭관제명기( 郞 官 題 名 記 )가 있다. 한성부( 漢 城 府 ) 자세한 것은 아래 보 인다. 제도에 사헌부( 司 憲 府 ) 중추부( 中 樞 府 ) 남쪽에 있으며 서부 적선방이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의하여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시정( 時 政 )을 논집( 論 휩)하고 백관을 규찰( 料 察 )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한 일을 펴 주고 외람하고 거짓됨을 금하는 일들을 맡는다. 0 대사헌 종 2품 집의 종 3품 각 l 원, 장령 정 4품 지평 정 5품 각 3 원, 감찰 정 6품 13 원 중 문관 3 원, 무관 5 원, 음관(흡 官 ) 5 원이다. 0 다시청( 茶 時 廳 ) 제좌청( 齊 坐 廳 ) 성상소( 城 上 所 )가 있다. 0 서거정의 제명기와 제좌청기 성현( 成 f 見 )의 감찰청벽기( 藍 察 廳 뿔 記 )가 있다 0 권 근( 權 近 )이 상대별곡( 雷 臺 別 曲 )을 지었는데, 본부 소미연( 燒 尾 훌)에서 부른다. 승정원( 承 政 院 ) 하나는 경복궁 월화문( 月 華 門 ) 밖에 있는데 후에 불탔으며,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동쪽 연영문( 延 英 門 ) 안에 있다. 정청( 正 廳 )에 계자판(양 字 板 )을 모셨는데, 누( 樓 )가 있어 육선( 六 山 )이라 현판하였다. 북쪽은 당후 주서 직소( 堂 尼 注 書 直 所 )라 하는데 누가 있어 사선( 四 仙 ) 이라 현판하였다. 당 뒤 북쪽 방에 또 l 칸의 작은 방이 있으니 속칭이 곽방( 擺 房 )인데, 곧 기주서( 記 注 書 )가 사초( 史 草 )를 간직하는 장소로서 다른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며, 당 뒤 동 쪽 방은 곧 한럼 익춘추( 輪 林 益 春 秋 )가 거처하는 곳이다. 하나는 창경궁 금마문( 金 馬 門 ) 남 쪽에 있는데, 후에 불타고 그대로 폐지되었으며,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중추원을 설치하였는데, 세조조에 고쳐 설치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왕명의 출납을 맡도록 하였다. 0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 부승지 동부승지 정 3품 각 l 원씩이며, 주서 정 7품 2원인데 사고가 있으면 가주서를 선임 하며, 사변가주서는 1 원이다. 0 숙종조에 왕이 은잔 l 벌을 하사하였다. 0 유의손( 柳 義 孫 ) 의 제명기( 題 名 記 )와 조서강( 趙 瑞 康 )의 신당기( 新 堂 記 )가 있다. 0 영종 20 년 (17 44) 에 창경 궁의 승정원 에 불이 나서 선조 신축년 (1601) 이후 1 백여 년 간의 시정기( 時 政 記 )가 모두 불 타 버렸다. 0 대루원( 待 隔 院 )은 창덕궁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는데, 곧 승지가 새벽에 나 가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곳 이다. 사간원( 司 課 院 ) 북부 관광방( 觀 光 행)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문하부 냥사( 郞 舍 )로 헌납( 敵 納 ) 간쟁( 課 끓) 박정( 默 표)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태종 2 년 (1402) 에 비로소 따로 관청을 설치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연산조에 혁파하였으며 중종조에 복구하여 간쟁과 논박의 일을 맡게 하였다. 대사간 정 3품 사간 종 3품 헌납 정 5품 각 l 원이며, 정언 정 6품 2원이다 0 서거정의 제명기가 있다 경연청( 經 뿔 廳 ) 관직은 있지만 관청이 없는데, 경전을 강독하고 정사를 의논하며 생각하는 책임을 맡 는다. 세조 2 년 (1456) 에 영사( 領 事 ) 지사( 知 事 ) 동지사 각 3원과 참찬관( 泰 贊 官 ) 정 3품 - 9 -

44 승지 부제 학 겸 시 강관( 暴 待 講 官 ) 정 4품 시 독관( 待 讀 官 ) 정 5 품 검토관( 檢 討 官 ) 정 6품 사경( 司 經 ) 정 7품 설경( 說 經 ) 정 8 품 전경( 典 經 ) 정 9품 을 두었는데, 시강관 이하는 홍 문관의 직제학 이하가 품계에 따라 겸임한다. 홍문관( 弘 文 館 ) 예전에는 경복궁 승정원 서쪽 에 있었는데 곧 옛날의 집현전( 集 賢 願 )이다. 장서각이 있었는데 후에 불타고 그대로 폐지되 었다 하나는 창덕궁의 내의원 서쪽, 규장각 동쪽에 있으니 곧 옛날의 사인사( 舍 人 司 )이며, 하나는 창경궁 승정원 동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다 하나는 경희궁 금상문( 金 商 門 ) 안에 있는데, 또 옥당이라고 한다. 내부( 內 府 )의 경적( 經 籍 )을 맡고 문한( 文 輪 )을 다스려서 임금의 고문( 顧 問 )에 대비하였다. 세종 2년에 처음으로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고 고금 경적을 모 으며, 재덕( 才 德 )과 문학이 있는 이들을 뽑아서 전고( 典 故 )를 토론하여 고문과 진강( 進 講 )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파하였다. 8 년에 양성지( 梁 誠 之 )의 건의에 의하여 장서 내 각( 藏 똘 內 聞 )을 이 름하여 홍문관이라 하고 비서( 秘 書 )의 출납을 맡게 하였다. 성종 10 년에 관직의 호칭을 고쳐 정하고 내부의 경적을 맡으며 문한을 다스려서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으 며, 연산군 10 년에 진독청( 進 讀 廳 )으로 고쳤다가 중종 초에 복구하였다. 0 영사( 領 事 ) 1 원, 대제학 정 2품 제학 종 2품 부제학 정 3품 직제학 정 3품 도승지 겸 전한 종 3품 응 교 정 4품 부응교 종 4품 각 1 원, 교리 정 5품 부교리 종 5품 수찬 정 6품 부수찬 종 6 품 각 2 원, 박사 정 7품 저작( 著 作 ) 정 8품 각 1 원이며, 정자( 正 字 ) 정 8품 2원은 규장각 검 서관( 檢 書 官 )의 전직자 중 2 원을 본관에서 겸검서관으로 자벽한다. 0 직려( 直 盧 )에는 영종 의 어필로 학사관( 學 土 館 )이라는 액자 글씨가 있고, 들보에 옥등잔 4쌍을 달았으며, 또 어사 한 은잔이 있다 예문관( 藝 文 館 ) 예전에 경복궁 승정원 서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타 창덕궁 의 인정전 서쪽으로 옮겨 설치하여 향실( 香 室 )과 서로 연하였다. 하나는 경희궁 숭의문(몇 義 門 ) 안에 있었으며 사명( 歸 命 임금의 말과 명령)의 제찬( 制 擺 )을 맡았다. 개국 초기에 고려 조 제도에 의하여 예문춘추관을 설치하였는데, 후에 나누어 예문관을 설치하였다. 연산군 병인년 (1506) 에 혁파하였으며, 중종 반정 초에 곧 회복하였다. 영사 대제학 제학 직제학 응교 각 1 원이며, 봉교( 奉 敎 ) 정 7품 대교 ( 待 敎 ) 정 8품 각 2 원, 검열( 檢 關 ) 정 8품 4 원인 데, 속칭 한림( 輪 林 )이라 한다 0 영종 14 년 (1738) 에 친히 사각( 史 聞 )에 나와서 대공사필 ( 大 公 史 筆 ) 네 자를 써서 벽 위에 걸었으며, 32 년에 또 친히 근수고풍( 動 守 古 風 ) 네 자를 써 서 걸었다 0 민진원( 閔 鎭 遠 )의 한원제명록지( 輪 행 題 名 錄 識 )가 있다 성균관( 成 均 館 ) 동부 숭교방(몇 敎 행)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였다. 유학을 가르치는 소임을 맡았다. 중국 사신 김식( 金 뽑)이 풍수학( 風 水 學 )에 능하였는데, 성균관 터를 크게 칭 찬하면서 인재를 배출할 땅이라고 하였다 한다. 0 지사 l 원, 동지사 2 원, 대사성 정 3품 1 원, 혜주( 聚 酒 ) 정 3품 l 원인데, 학행( 學 行 )으로 사림간에 명망 있는 이를 공천하여 임명하며 l, 2품 관원이 또한 겸한다 사성 종 3품 l 원, 사예( 司 藝 ) 정 4품 2 원, 사업( 司 業 ) 정 4품 1 원, 동왜주( 同 쩔 酒 ) 직강 정 5품 4 원 중 1 원은 자벽하고, 전적 정 6품 13 원 중 l 원은 자벽하며 4 원 종 8품 은 승문원의 참외관( 參 外 官 )으로 한다 박사 3 원, 학정( 學 正 ) 정 8품 3 원, 학록( 學 錄 ) 정 9품 3 원, 학유( 學 論 ) 종 9품 3 원이다. 0 그 아래에 정록청( 正 錄 廳 )이 부속되었다 0 명륜당은 문묘 북쪽에 있으며, 스승과 생도가 모여서 권학 강독하는 장소로 삼는다. 당 남 쪽에 좌우로 협랑(쨌 厭 )이 있어 많은 선비들이 거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동재( 東 짧)와 서재 ( 西 顆 )라 칭한다 항상 생원 진사 l 백 명을 양성하고 있다. 동쪽 제 1 랑( 郞 )에 북을 달았는데 이것이 흔고(빠 鼓 )이며, 매일 아침 저녁 식사 때에 쳐서 선비들을 모으니 또한 식고( 食 鼓 )라 고 칭한다. 좌협랑 동쪽에 정록청( 正 錄 廳 )이 있으니, 곧 낭관들이 당직하는 곳 이다. 청 남쪽 에는 부엌이 있고, 또 그 남쪽에 식당이 있다 모두 태조 7년 (1398) 에 이루어졌다. 존경각 - n U

45 ( 尊 經 聞 )은 당 동쪽에 있는데 경사( 經 史 )와 백가( 百 家 )의 여러 서적을 간직하였으며, 성종 6 년에 짓고 왜란 때 불탔는데 선조 30년에 중건하였다. 육일각( 六 - 聞 )은 존경각 동쪽, 향관 청( 享 官 廳 ) 서쪽에 있는데, 대사례( 大 射 禮 ) 때에 사용하는 활 화살 의복 기구를 간직한 다. 당의 북쪽 일만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곳을 벽송정(뽕 松 후)이라 부르며, 정자 서쪽 에 비천당(조 關 堂 )이 있으니 대개 주자( 朱 子 )의 이른바 성상을 도와 큰 계교를 크게 빛내고 [죠 關 ] 사특한 것을 억제하고 더불어 바른 데로 나간다는 뜻을 딴 것이다. 앞 뜰이 극히 넓 은데 담장을 둘러 쌓아서 과장( 科 場 )으로 하여 선비를 시험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이소( 二 所 ) 라고 칭한다 당 서남쪽에 일양재( - 兩 젊)가 있으니, 대개 주자가 일찍이 불사( 佛 좋)를 폐지 하고 유궁 Cf 需 宮 )을 세우고서 일거양득(- 學 兩 得 )이라고 말한 뜻을 딴 것이며, 벽입재( 關 入 寶 )는 대개 정자( 程 子 )가 이씨(= 民 불교와 도교를 말함)의 해를 논하기를, 물리친[ 關 ] 후 에야 도에 들어갈[ 入 道 ] 수 있다. 고 말한 뜻을 딴 것이다. 문묘 남문 밖에 느티나무를 벌 려 심었으니, 이것이 괴시( 塊 市 )이다. 0 성간( 成 떠)의 명륜당기, 서거정의 존경각기, 송시열 ( 宋 時 烈 )의 비천당기가 있다. 0 성종 6 년 (1475) 에 반수(? 半 水 )를 파서 개통하고 돌을 쌓아 둘렀으며, 13년에는 친히 제사드리고 명륜당에 나아가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연산군 갑자년 (1504) 에 다른 곳으로 철거하여 옮겼다가 중종 원년 (1506) 에 다시 설치하였다. 션조 임진 년 0592) 병란에 불탔는데, 39 년 (1606) 에 명륜당을 다시 완성하고 인조 4년 0626) 에 존경 각 정록청 양현고( 養 賢 庫 )를 다시 세웠다 현종 5년 (1664) 에 여승 사원을 철거하고 그 재 목과 기와를 옮겨다가 비천당을 짓고 또 일양재 벽입재를 지었다. 영종 18 년 (17 42) 에 어 펄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기를, 보편적이고 편당하지 않는것은 군자의 공심( 公 心 )이요, 편당하고 보편적이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의( 私 意 )이다. 하고 이어 명하여 비석에 새겨 반 수교 u 半 水 橋 ) 가에 세우게 하였다- 19년에는 친히 대사례( 大 射 禮 )를 반궁 u 半 宮 성균관과 문 묘의 통칭)에서 거행하고, 명하여 육일재( 六 - 齊 )를 지었다. 0 효종 6 년 (1655) 에 은잔 2 별 을 하사하였으며, 정종 22년 Cl 798) 에 또 잔 1 벌을 하사하였는데, 가운데에 아유가빈( 我 有 嘉 좁) 네 자를 새겼다. 0 성종이 편치 않으니 대비가 근심스러워 궁인을 명하여 벽송정에서 굿을 하였는데, 태학생 이목( 李 種 )이 여러 생도들을 선동하여 그 무당을 때려 쫓았다 중종 조에 동지관사 윤탁( 尹 庫 )이 행단(쁨펄) 제도를 모방하여 손수 문행( 文 츄 은행) 두 그루를 강당 앞 뜰에 심었는데, 해마다 열매가 맺어 땅에 떨어질 때마다 썩은 냄새가 매우 나쁘고, 또 수복들이 따라 다니며 줍느라고 문묘 뜰에서 떠들어, 성균관의 한 관원이 제사드리며 미 안한 뜻을 고하니 이로부터 다시 열매를 맺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괴이하게 여겼다 0 새 로 굽제한 사람이 관에 들어가면 선생이 포목류를 나누어 받아들여서 마시며 노는 비용을 삼았는데, 여름철에 성균관에서 이것을 거행하니 이름하여 벽송음(뽕 松 歡 )이라 하였다. 춘추 관( 春 秋 館 ) 예전에 경복궁 상서원 서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으며, 보록각( 寶 錄 開 ) 이 있는 데 관직은 있지만 관청은 없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예문춘추관을 설치하였 으며, 후에 춘추관을 나누어 설치하여 시정( 時 政 )을 기록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0 영사 1 원, 감사( 藍 事 ) 정 l 품의 좌의정과 우의정 2 원, 지사 2 원, 동지사 2원이며, 수찬관( 修 擺 官 ) 편수관( 編 修 官 ) 기주관( 記 注 官 ) 기사관( 記 事 官 )이 있는데 모두 문관으로 하고 다른 관직으 로 겸대하게 하였다 규장각( 奎 章 聞 ) 위에 자세하게 나왔다 열성조의 어제 어필과 선보( 落 語 ) 세보( 世 語 ) 고명( 顧 命 왕의 유언)과 정종( 正 宗 )의 어진( 倒 員 ), 순조의 어제 어필을 받 들어 모셨다 0 제학 종 2품에서 종 l 품까지 2 원, 직제학 정 3품 당상관에서 종 2품까지 2 원, 직각( 直 園 ) 종 6품에서 정 3품까지 1 원, 대교( 待 敎 ) 정 9품에서 7품까지 이다. 또 각감( 聞 藍 ) 2 원이 있어 어진을 봉안한 곳을 수직하며, 사권( 司 卷 ) 2 원 지금은 폐지됨 은 전령( 傳 令 ) 품

46 계( 票 햄) 등의 일을 맡고, 검서관( 檢 書 官 ) 4 원 5품 참외관( 參 外 官 )으로 품계에 따라 한 직함 을 붙임 은 각신( 聞 톰)을 보좌하여 교서( 校 書 ) 사서( 寫 書 )의 일을 보며, 영첨( 領 靈 ) 2 원 지 금은 폐지됨 은 어제를 버l 껴 쓰고 교열하며 어제를 봉안하는 등의 일을 맡으며, 감서( 藍 書 ) 6 원은 계 하 문서 (양 下 文 書 ) 응제 문자( 應 製 文 字 )를 나누어 맡아 정 리 하고, 사자관( 寫 字 官 ) 8 원, 화원( 畵 員 ) 10 원이 차비대령( 差 備 待 令 )으로서 본각에 속하고, 검율( 檢 律 ) 1 원은 형조의 검율로 대령하게 한다 교서관( 校 書 館 ) 예전에 경복궁 사옹원 남쪽에 있는 것을 내관( 內 館 ) 이라 칭하였는데 후에 불탔으며, 남주 훈도방( 薰 隔 행)에 있는 것을 외관( 外 館 )이라 칭하였는 데, 후에 중부 정선방( 貞 善 행)으로 옮겼다 - 정종( 正 宗 ) 6년에는 창덕궁 돈화문으로 옮겨서 규장각의 부속 관청을 삼았는데, 외각( 外 聞 )이라고 하였다. 개국 초기에 교서감( 校 書 藍 )을 설치하여 경적을 판각하고 반포하며 향축( 香 祝 ) 인전( 印 쫓 인장의 조각)의 소임을 맡겼으 며, 또 서적감( 書 籍 藍 )을 설치하였다가 태종 원년 (1400) 에 합하여 교서관으로 만들었다 세 조조에 고쳐서 전교서( 典 校 暑 )라 하고 성종 15 년 (1484) 에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0 제 조 4 원, 부제조 2 원, 판교( 判 校 ) 정 3품 1 원, 교리 l 원, 겸교리 1 원, 직각 겸별제( 暴 別 提 ) 별좌( 別 坐 ) 모두 감함 박사 저작( 著 作 ) 정자( 正 字 ) 부정자 각 2 원씩인데, 박사 이하 대 교는 품계에 따라 겸 한다. 또 사준( 司 準 ) 10 원, 사감( 司 動 ) l 원과 창준 (P 昌 準 ) 보자관( 補 字 官 )이 있다 0 이승소( 李 承 검)의 기문이 있다 역서( 暫 書 ) 1 천 권을 판박하여 여러 서적을 간행하는 자금을 보충하였다. 승문원( 承 文 院 ) 처음 북부 양덕방( 陽 德 행)에 있었는데, 세종 15 년 (1433) 에 경복궁 흥례문( 弘 禮 門 ) 밖에 옮겨 지었다. 장서각이 있는데 극히 높고 크며, 명 나라 조정의 고칙( 語 刺 ) 관계 여러 문서를 간직하였는데 후에 불탔으며, 정종 11 년 (1787) 에 다시 중부 정선방( 貞 善 행)에 설치하였다. 하나는 경희궁의 숭의문 안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문서응봉사( 文 書 應 奉 司 )를 두어서 사대 교린( 事 大 交 憐 ) 문서를 맡게 하였다. 0 도제조가 3원이요, 제조 부제조는 정한 수효가 없으며, 판교( 判 校 )는 l 원 이요, 참교감( 參 校 動 ) 교리는 모두 감하였다. 교검( 校 檢 ) 정 6품 1 원, 박사 저작( 著 作 ) 정 자( 正 字 ) 부정자 각 2원이며, 또 제술관( 製 述 官 ) 2 원이 있는데 1 명은 문관, 1 명은 음관( 陰 官 )이다. 이문학관( 更 文 學 館 ) 3원 이문습독( 更 文 習 讀 ) 20 원, 사자관( 寫 字 官 ) 40원이다 이문 원( 樓 文 院 ) 창덕궁 금호문( 金 虎 門 ) 안 홍문관 오른쪽에 있는데, 곧 예전 도총부( 都 擔 府 )이다. 정종(표 宗 ) 5 년에 내각의 여러 신하들이 여러 날 계속해서 당직하는[ 約 直 ] 장소로 삼았다 어펼 현판을 달았는데 청사가 넓어서 여러 관부 중에서 으뜸이다 앞 대들보에 안에서 하사 한 특종( 特 鍾 )과 특경종( 特 聲 鍾 )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명 나라 영락( 永 樂 ) 연간에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또 어사품인 투호( 投 뚫) 금슬( 琴 쫓) 은잔 큰 벼루 각각 1 개씩, 옥 등잔 6 매( 板 )가 있어 대청 대들보에 나누어 걸려 있다 뜰에는 구리 측우기( 測 雨 器 )를 설치하였고, 길들인 학 한 쌍이 있다. 0 대유재( 大 쩔 濟 )는 원 북쪽에 있는데, 동이루( 東 二 樓 )가 있어 그 안에 서적을 간직하였다. 소유재( 小 쩔 濟 )는 원 왼쪽에 있는데 곧 어재실( 倒 顆 室 )이었다가 마 침내 검서관이 수직하는 곳이 되었다. 상서원( 尙 瑞 院 ) 예전에는 경복궁 보루각( 報 偏 聞 ) 남쪽 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으며, 창덕궁 인정문 남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배설방( 排 設 房 )이 넷 인데,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다. 0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상서 사( 尙 瑞 司 )를 두고 쇄보( 靈 寶 ) 부패( 符 牌 ) 절월( 節 錄 )을 맡았다가 후에 원으로 고쳤다. 0 정( 正 )은 1 원이요, 판관은 감하였으며, 직장( 直 長 ) 부직장이 각각 1 명씩이다 통례원( 通 禮 院 ) 예전에는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후에 중부 정선방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합문(탬 門 )을 설치하고, 예의( 禮 燒 ) 조하( 朝 買 ) 제사 찬알( 贊 調 ) 등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후에 통례문으로 고쳤으며 태종 때에 다시 문을 고쳐 원으로 하였다. 0 좌 /

47 통례 우통례 정 3품 각 l 원, 상례( 相 禮 ) 종 3품 익례( 翊 禮 ) 종 3품 각 1 원이며, 봉례( 奉 禮 ) 는 감하였다 찬의( 贊 廢 ) 정 5품 l 원, 인의 (51 嚴 ) 종 6품 8 원, 겸인의 종 9품 6 원, 가인의 종 9 품 6원이다 봉상시( 奉 常 좋) 예전엔 서부 여경방( 餘 慶 행)에 있었는데 후에 인달방( 仁 達 해)으 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고,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하는 일을 맡 게 하였다. 태종 9 년에 전사사( 典 祝 司 )로 고쳤으며, 세종 3 년에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 司 農 풍)를 설치하였는데, 태종 원년에 고쳐 전농시( 典 農 츄)라 칭하고 자성(뚫 盛 나라 제사에 쓰는 곡물)을 맡았으며, 후에 봉상시에 합 병하고 분시( 分 좋)라 칭하였다. 동적전( 東 籍 田 ) 서적전이 속한다. 0 도제조 제조 각 l 원, 정( 正 ) l 원이며, 부정은 감하며, 첨정 종 4품 판관 각 1 원인데 자벽하며, 주부 2 원, 직장 봉사 부봉사 참봉 각 l 원이다. 0 신주( 神 主 )의 재목인 밤나무 생산지에 경차관( 敬 差 官 ) 범철관(흡 鐵 官 )을 보내는데, 경상도에는 식년( 式 年 )마다 한번씩 채취하며, 충청도 전라도는 식년을 건너서 한 번씩 채취하고 강원도는 국가 수요가 부족하면 간흑 별도로 베어 취하기 도 한다. 0 서쪽 동산에 신실( 神 室 ) 6 칸이 있어 단사(뱉 洞 ) 신위판 34 위( 位 )를 봉안하였다. 0 윤자영( 尹 子 傑 )의 제명기( 題 名 記 ) 와 최숙정( 崔 淑 精 )의 세심당기( 洗 心 堂 記 )가 있다. 사옹원 ( 司 餐 院 ) 하나는 경복궁 승정원 남쪽에 있는데 후에 불탔으며, 하나는 창경궁 명정전( 明 政 觀 ) 북쪽에 있는데 후에 불타서 아울러 그대로 폐지하였다 하나는 창덕궁 승정원 동쪽 단 양문( 端 陽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광달문( 廣 達 門 ) 서쪽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사선서( 司 睡 暑 )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고쳐서 사용원을 설치하여 어선( 淑 睡 ) 의 공급 및 궁궐 안 공궤( 供 體 ) 등의 일을 맡겼으며, 구운 자기( 磁 器 )는 l 년에 2차씩, 봄 가 을로 진상한다. 0 도제조 l 원, 제조 4 원, 부제조 5 원, 정 l 원이며, 가례( 嘉 禮 ) 때에는 제거 ( 提 學 ) 제검( 提 檢 )을 모두 4 원을 차출하고, 사신을 잔치할 때에는 첨정(혔표) l 원을 차출한 다. 판관은 감하고, 주부 3 원, 직장 2 원, 봉사 3원이요, 참봉은 그대로 감하였다. 내의원( 內 醫 院 ) 예전엔 관상감( 觀 象 藍 ) 남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타고, 창덕궁의 예문관 서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하나는 경희궁의 건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전의감( 典 醫 藍 )을 두었는데, 후에 나누어서 내의원을 두어 어약( 倒 藥 )의 조제를 맡게 하였 다 0 도제조 제조 부제조 정 첨정 판관 주부 직장 각 1 원, 봉사 부봉사 각 2 원, 참봉 l 원이다. 0 영종 39 년 (1763) 에 명하여 내국( 內 局 )에서 제사드리는 신농씨( 神 農 民 )의 위판의 궤[ 續 ]를 정청( 正 廳 )에 설치하고 공경하게 하였다. 0 영종의 어필로 삼기성편 대소 의심( 豪 줌 性 偏 大 小 宜 審 )의 여닮 글자를 써서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0 영종조에 태의 외원 ( 太 醫 外 院 )을 창덕궁 궐문 밖에 설치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도로 파하였다. 약방이라고도 하고, 내국( 內 局 )이라고도 한다. 상의원( 尙 衣 院 ) 예전에는 경복궁 영추문( 迎 秋 門 ) 안 관상감 북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타고, 창덕궁 단봉문(꺼 鳳 門 ) 안으로 옮겼으며 불면각( 敵 흉 聞 )이 있 다.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안에 있으니 곧 옛날의 승문원이요, 후에는 종친 문안청 ( 宗 親 問 安 廳 )이 되었다. 숙종 신묘년 0711) 에 상의원이 되었는데, 치미각( 致 美 聞 )이 있다. 개 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공조서( 供 造 暑 )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고쳐 상의원을 설치 하여, 어의대( 倒 衣 樹 ) 및 내부 재화( 內 府 財 貨 ) 금보( 金 寶 ) 등의 물건 공급을 맡았다. 0 제 조 2 원, 부제조 1 원, 정 1 원이며, 관례( 冠 禮 ) 때에는 첨정 l 원을 차출한다. 별좌( 別 坐 ) 판 관 모두 감함 주부 별제( 別 提 ) 각 1 원, 직장 l 원이다. 0 영종 어제의 봉안각기( 奉 安 聞 記 ) 및 김만기( 金 萬 基 )의 기문이 있다. 사복시( 司 廣 꿈) 중부 수진방( 壽 進 행)에 있다. 개국 초 기에 고려조 제도를 인하여 설치하였는데, 여마( 與 馬 ) 구목( 觀 收 ) 등의 일을 맡는다 0 내 시( 內 폼)는 예전에는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다.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 宣 仁 [J

48 門 ) 안 덕응방( 德 應 행) 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개양문( 開 陽 門 ) 안에 있는데, 내구( 內 魔 )의 어 승( 徒 O 乘 )을 맡는다. 0 제조 2 원 정 1 원이요, 부정은 감하였으며, 첨정 판관 각 l 원인데 모두 자벽하며, 주부 2원 중 l 원은 자벽하고, 내시( 內 휴)에는 내송( 內 乘 )이 2원인데 1 원은 당상관이며, 또 이마( 理 馬 ) 4 원, 마의( 馬 醫 ) 3 원이 있다. 0 내구( 內 鳳 )에는 말 60필을 기르 고 외구에는 말 口 필을 기르는데 내시에서 매달 1, 11, 21 일에 관조마( 官 調 馬 말의 조련)를 행하고, 5, 10, 15, 20, 25, 30 일에는 후원( 後 짧)에서 조마하며, 7, 17, 27 일에는 사조마( 私 調 馬 )를 행하는데, 외시( 外 츄)의 관조마는 내시와 같고 일에 사조마를 행한다. 동 가( 動 罵 ) 때 및 봉명( 奉 命 ) 때에는 각신( 聞 톰 규장각의 관원)이 내구마를 타고 어가를 수행 하도록 허락하며, 국구( 國 훨) 종친 의빈( 嚴 좁) 승지와 사관 옥당 승전선전관( 承 傳 宣 傳 官 ) 별군직( 別 軍 職 )은 모두 내구마를 타는 것을 허락한다 운구( 雲 鳳 ) 서부 정릉동( 貞 陸 洞 ) 에 있는데, 바로 말을 기르는 곳이다 또 기구( 觀 癡 )는 본 사복시에 있으며, 인구( 職 많)는 경 복궁 안에 있고, 용구( 龍 廠 )는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다. 0 영종의 어제어마원기( 倒 製 倒 馬 院 記 ) 및 이숙감( 李 淑 減 )의 내승 제명기가 있다. 0 시(좋) 곁 큰 내에 여름 장마철이면 말 이 번번이 떠내려가 죽었는데 주부 이시현( 李 時 顯 ) 이 도랑을 파고 뚝을 쌓은 뒤로는 그 우 환이 없어졌다. 군기시( 軍 器 츄) 서부 황화방( 皇 華 행)에 있다. 개국 초기에 군기감을 설치하 고 병기 기치( 題 l 熾 ) 융장( 決 ft). 죽물( 竹 物 )의 제조를 맡게 하였는데, 태종조에 승격하여 시(좋)로 삼았다 0 도제조 1 원, 제조 2원이요, 정 부정 첨정은 각 1 원씩 자벽한다. 별좌 는 감하고, 판관은 자벽하며 주부와 함께 각 2원씩이다 직장 봉사 부봉사 참봉 각 1 원 이다 0 화약고( 火 藥 庫 )는 소격서( 昭 格 暑 )에 있고, 자문감(쌓 門 藍 )은 궁궐 안에 있다. 0 선 조 1 3 년 (1580) 5 월에 시(휴) 안의 못 물이 솟아올라 높이가 1 길쯤이나 되었다 0 정이오 ( 鄭 以 홈)의 화약고기가 있다 내자시( 內 資 츄) 서부 인달방( 仁 達 행)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 조 제도를 인하여 의성고( 義 成 庫 )를 설치하였는데, 태종 3년 (1403) 에 고쳐서 내자시로 하였 다. 내공미( 內 供 米 ) 국수 술 장 기름 꿀 채소 과일 내연직조( 內 훌 織 造 ) 등의 일을 맡았는데, 내연직조는 지금 폐지되었으며, 권초각( 橋 草 聞 왕비의 산실)이 있다 0 제조 l 원 이요, 정 부정 첨정 판관 모두 감함 주부 직장 봉사 각 1 원이다. 내섬시( 內 擔 폼) 처 음에는 북부 준수방( 俊 秀 해)에 있었는데 서부 인달방( 仁 達 행)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의 관제에 따라 덕천고( 德 果 庫 )를 두었는데, 태종 3년에 내섬시라고 고치고 각궁과 각전에 바 치는 물건,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왜인( 慶 人 ) 야인( 野 人 )에게 주는 음식, 그리고 직조( 織 造 ) 등의 일을 맡겼는데, 지금은 폐지하고 기름 초( 醒 ) 및 소선( 素 體 채소)을 바친다 0 제 조 l 원이고, 정( 正 ) 부정( 副 正 ) 첨정(했 正 ) 판관( 判 官 )은 모두 감( 減 )하고, 주부( 主 續 ) 직 장( 直 長 ) 봉사( 奉 事 )는 각각 1 원씩이다. 사도시( 司 藥 좋) 예전에는 경복궁 내의원의 남쪽에 있었는데 지금 창덕궁 금호문 밖 북부 광화방( 廣 化 야)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요물고( 料 物 庫 )를 두었는데, 태종 원년에 공정고( 供 표 庫 )라고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 으로 고쳤다. 어름( 倒 屬 임금의 미콕 창고)의 미콕과 궐내에 바치는 겨자와 장( 醫 ) 등 물건 을 맡는다 0 제조 l 원이고, 정 부정 모두 감하고, 첨정 주부 l 원이고, 직장은 감하고, 봉사 1 원이다. 예빈시( 禮 좁 좋) 예전에는 의정부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양생방( 養 生 행) 으로 옮겼으며, 정종( 正 宗 ) 2 년에 남부 회현방( 會 賢 야) 남별궁( 南 別 宮 ) 안에 옮겨 설치했다 오로지 칙사( 動 使 상국의 사신)에게 소용되는 물건을 바치는 일을 맡는다. 개국 초에 고려 의 제도를 따라 설치하고 빈객(훨 客 )에게 술과 음식을 베푸는 일, 종친 재신에게 음식을 내리는 일, 조신( 朝 몸)의 치제( 致 쫓)를 맡겼다 태종 3 년에 의순고( 義 順 庫 )를 본시( 本 놓)에 합쳤다. 정 부정 첨정 제검( 提 檢 ) 별좌( 別 座 ) 판관 별제( 別 提 ) 모두 감하고, 주부 2 원, - A

49 직장 1 원이고, 봉사는 감하고, 참봉 2 원이다. 군자감( 軍 資 藍 ) 예전에는 서부 여경방( 餘 慶 행) 에 있고 분감( 分 藍 )이 숭례문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구 폐지되고, 강감( 江 藍 )이 용산강( 龍 山 江 ) 북쪽에 있다 개국 초에 두어 군수 물자를 축적해 두는 일을 맡기고, 다만 제사( 諸 司 ) 의 미두( 米 豆 ) 및 금려 위사( 禁 旅 衛 土 )와 액정( 被 底 후궁( 後 宮 ) 여관( 女 官 )의 거처) 소속의 하인과 공장( 工 Ill:) 의 급료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다 지금은 급료를 나누어주는 곳이 되었다 0 도제조 제조 각 1 원씩, 정 l 원이고, 부정 첨정은 감하고, 판관 주부 직장 봉사 이 상은 일에 따라 가설( 加 設 )하여 3원을 갖추고, 부봉사 참봉은 감하고, 판관 이하 4 원이 창 고를 나누어 맡았는데 일소장(- 所 掌 ) 이소장 삼소장 사소장이라고 부른다. 0 판관과 봉사의 자벽 C EiH'f) 및 봉사 이하의 승급 규정은 광흥창주( 廣 興 용 註 )에 상세히 보인다. 제용 감( 濟 用 藍 ) 중부 수진방( 壽 進 행)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제용고( 濟 用 庫 )를 두 었다가 곧 감( 藍 )으로 고쳤다. 나라에 바치는 저마포(추 麻 布 ) 피물( 皮 物 ) 인삼( 人 훌) 사라 (웹 羅 ) 능단( 績 段 ) 포화( 布 貨 ) 직조( 織 造 )를 맡았는데 지금은 폐지했다. 0 제조가 1 원이 고, 정 부정 첨정 모두 감함, 판관 1 원, 주부 2원이고, 직장 봉사 부봉사가 l 원씩이고, 참봉은 감했다. 선공감( 續 工 藍 ) 처음에는 북부 의통방( 義 通 功 )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여경방 으로 옮겼다. 강감( 江 藍 )은 용산강( 龍 山 江 )에 있는데 개국 초에 두었으며, 토목( 土 木 )과 영선 ( 營 續 )을 맡는다 자문감( 緊 門 籃 )은 창덕궁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고, 분감( 分 藍 )은 서부 인 달방( 仁 達 행)에 있는데 대궐 안의 영선을 맡는다. 0 제조가 2원이고 정은 감하고, 부정이 l 원이고, 첨정 판관 모두 감하고, 주부가 l 원이고, 직장은 감하고, 봉사가 2 원, 부봉사가 1 원이고, 참봉은 감하고, 감역관( 藍 投 官 ) 가감역관( 假 藍 彼 官 )이 3원씩이다. 장악원( 掌 樂 院 ) 처음에는 공서( 公 暑 )가 없어 태시( 太 춤)에 붙여 있다가 뒤에 봉상시 악학( 奉 常 휴 樂 學 )에 거 처하였고, 뒤에 서부 여경방 봉상시의 동쪽으로 수십 보 되는 곳에 세웠는데, 넓은 집과 뛰 어난 구조가 여러 관청 청사 가운데에서 제일이라 백관( 百 官 )이 의식( 嚴 式 )을 익히는 곳이 되고, 또 과장( 科 場 )으로 선비를 시험보이는 곳 이 되었다. 뒤에 다시 남부 명례방( 明 禮 행)으 로 옮겼다. 개국 초에 전악서( 典 樂 暑 ) 아악서( 雅 樂 暑 )를 두었는데, 세종조에 아악으로 태상 시에 붙여 관습도감( 慣 習 都 藍 )을 설치하여 하나의 부서로 만들어 악학도감( 樂 學 都 藍 )이라 부 르고, 아악서와 전악서를 합쳐서 한 부서로 만들어 장악서( 掌 樂 暑 )라 부르며, 아악 향악( 獅 樂 ) 당악( 庸 樂 )을 합쳐서 좌우방( 左 右 행)을 설치하고 음률[ 聲 律 ]을 가르치고 검열하는 일을 맡겼다 - 뒤에 악학도감을 폐지하고, 장악서를 승격시켜 원으로 했다. 연산군 11 년 (1505) 에 연방원( 聯 芳 院 )으로 개칭했다가 중종 초에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또 함방원( 含 芳 院 ) 진 향원(상 香 院 )이 있었으나 모두 반정( 反 正 ) 뒤에 폐지했다. 0 제조가 2 원, 정 부정이 1 원씩 이고, 주부가 2 원이고, 직장은 감하고, 또 전악( 典 樂 ) 2 원, 부전악( 副 典 樂 ) 1 원, 전률( 典 律 ) 부전률( 副 典 律 ) 전음( 典 音 ) 2 원씩, 부전음( 副 典 품) 4 원, 전성( 典 聲 ) 10 원, 부전성( 副 典 聲 ) 23 원이 있다. 악사( 樂 師 ) 악공( 樂 工 ) 악생( 樂 生 ) 관현( 管 鉉 )은 맹인(릅 人 )이다 0 아악( 雅 樂 )은 좌방( 左 해) 에 속하는데 악사 2 명, 악생 1 백 95 명이고, 속악( 倚 樂 )은 우방( 右 행)에 속 하는데 악사 5 명, 악공 4 백 41 명이다. 매월 2 일과 6 일에 원중( 院 中 )에서 좌기( 坐 起 )하여 주 악을 익히고, 전좌( 願 坐 임금이 좌기하는 것)를 떠나는 날에도 행하는데, 만약 그날 사고가 있으면 다음 날로 물려서 시행한다. 성현( 成 { 見 )의 기문[ 記 ]이 있다. 사재감( 司 쩔 藍 ) 처음에 는 북부 의통방( 義 通 야)에 있었는데 뒤에 순화방( 順 化 행)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 에 따라 설치하였다. 물고기 고기 소금 펠나무 햇불 등의 일을 맡았는데, 햇불은 지금 폐지했다. 0 제조가 1 원이고, 정 부정은 감하고, 첨정 주부 직장 봉사가 1 명씩이며, 참 봉은 감했다 관상감( 觀 象 藍 ) 경복궁 상의원의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타고, 하나는 북부

50 광화방( 廣 化 행)에 있는데 일영대( 日 影 臺 해시계의 한 가지)가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서운관( 書 雲 觀 )을 두고 천문( 天 文 ) 지리( 地 理 ) 역수( 歷 數 ) 점주(러뚫) 측후( 測 候 ) 각루( 刻 偏 ) 등의 일들을 맡겼는데, 세종 15 년 0433) 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연산군 때 에 사력서( 司 歷 暑 )라 개칭했다가, 중종 초기에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0 영사( 領 事 ) l 원, 제조 2 원, 정 l 원이고, 부정은 감하고, 첨정 판관 주부가 1 원씩이고, 천문학 교수가 l 원 이고, 지리학 교수는 폐지했고, 천문학 겸교수가 3 원이고, 지리학 겸교수는 폐지했고, 명과 학 겸교수( 命 課 學 暴 敎 授 )가 1 원, 직장 봉사가 2 원씩이고, 부봉사가 1 원이고, 천문학 훈도 지리학 훈도가 1 원씩, 명과학 훈도가 l 원, 참봉이 2 원, 천문학 습독관( 天 文 學 習 讀 官 )이 10 원, 금루관( 禁 偏 官 )이 30원이다 일월식술자( 日 月 食 述 者 ) 명과( 命 課 )는 맹인이다 0 영종 46 년 (1770) 에 본감에 흠경각(뤘 敬 關 )을 세우게 하여 개국 초의 석각천문도 c::s 刻 天 文 圖 )를 보관하였다 0 임금이 지은 기문과 임금이 쓴 편액이 있다. 매년 역서[ 歷 日 ]4 천 건을 간행 하여 여러 중앙 관서와 각도 및 종친과 문신 무신의 당상관에게 배포한다. 전의감( 典 醫 藍 ) 중부 견평방( 堅 平 행)에 있다. 개국 초에 설치했다, 대궐 안에서 쓰는 의약( 醫 藥 )을 바치고 신하에게 약을 내려 주는 일을 맡는다. 선조 36 년에 치종청( 治 睡 廳 )을 다시 설치하였다 가 후에 본감( 本 藍 )에 합쳤다 0 제조 2 원, 정 1 원이고, 부정은 감하고, 첨정 판관 주부 의학교수 1 원씩, 직장 2 원, 봉사 1 원, 부봉사 2 원, 의학 훈도 1 원, 참봉 2원, 습독관( 習 讀 官 ) 30원이다. 사역원( 司 譯 院 ) 서부 적선방에 있고, 개국 초에 설치했다. 여러 나라의 말을 번역하는 일과 사대( 事 大 ) 교린( 交 憐 )하는 일을 맡았다. 한( 漢 ) 청( 淸 ) 몽( 豪 ) 왜( 慶 )의 사 학( 四 學 ) 및 우어청( 偶 語 廳 )이 있다 0 도제조 1 원, 제조 2 원, 정 l 원이고, 부정은 감하고 첨정 판관 주부가 1 원씩이고, 한학교수 4 원 중에서 1 원은 문신( 文 뚝)으로 차출하는 수도 있고, 직장 1 원, 봉사 부봉사 2 원씩, 한학 훈도 4 원, 청학( 淸 學 ) 몽학( 豪 學 ) 왜학( 慶 學 ) 훈도 2 원씩, 봉사 2 원, 한학 습독관( 漢 學 習 讀 官 ) 30원이다 0 원( 院 )에 열 口 루( 例 口 樓 )가 있 다. 0 통문관지( 通 文 館 志 ) 4 권이 있다. 세자시강원(받 子 待 講 院 ) 하나는 창경궁 집현문 ( 集 賢 門 ) 밖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세자궁( 世 子 宮 ) 소속으로 두었다. 경서( 經 書 )와 사서( 史 書 )를 시강( 待 講 임금 세자 등에게 강의하는 것) 하고 도의( 道 義 )를 바로잡아 간하는 일을 맡았다. 뒤에 시강원( 待 講 院 )으로 고쳤다. 0 사( 師 ) 부( 傳 ) 모두 정 1 품 이사(흉 師 ) 종 1 품 좌빈객( 左 좁 客 ) 우빈객( 右 홈 客 ) 모두 정 2품 좌부비객( 左 副 좁 客 ) 우부빈객( 右 副 홈 客 ) 모두 정 2품 찬선( 贊 善 )은 학문과 행동이 선비들 사이에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의망( 擬 望 )하여 차출하고, 진선( 進 善 )도 같고, 보덕( 輔 德 ) 겸보덕( 暴 輔 德 ) 모두 정 3 품 진선( 進 善 ) 필선( 弼 善 ) 겸필선( 暴 弼 善 ) 정 4품 문학( 文 學 ) 겸문학( 暴 文 學 ) 모두 정 5품 사서( 司 書 ) 겸사서( 暴 司 書 ) 모두 정 6품 설서( 說 書 ) 겸설서( 暴 說 書 ) 모두 정 7품 자의( 諾 議 ) 정 7품 는 특별히 천거하여 쓰는데, 합당한 사람이 없으면 묘당( 關 堂 비변사)에 물어서 유학 ('4/J 學 )이라도 관계 없이 1 원씩을 차출한다. 세손강 서원( 世 孫 講 書 院 ) 세종 30 년 (1448) 에 창설했다. 직무는 시강원과 같다. 인조 27 년 0649) 에 다시 두었고, 영종 27 년 (1751) 에 다시 두었고, 35년에도 다시 두었고, 순조 29 년 (1829) 에 다시 두었다. 0 사 부 모두 종 l 품 좌유서( 左 論 書 ) 우유서( 右 論 書 ) 3품당상부터 종 2품 까지 좌익선( 左 翊 善 ) 우익선( 右 翊 善 ) 종 4품 좌권독( 左 歡 讀 ) 우권독( 右 歡 讀 종 5품 은 학문과 행동이 선비들 사이에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의망하여 모두 단부( 單 付 )하고, 좌찬독 ( 左 贊 讀 ) 우찬독( 右 贊 讀 ) 종 6품 은 1 명씩이다- 전설사( 典 設 꾀) 경복궁 홍례문( 弘 禮 門 ) 밖에 있었는데, 뒤에 불타서 창덕궁 진선문( 進 善 門 ) 왼쪽으로 옮겼다 하나는 경희궁 건병문( 建 明 門 ) 안에 있는데 창설한 햇수는 자세하지 않다. 어막( 倒 幕 )을 맡았고 대궐 안팎의 여러 상사 (b

51 ( 上 司 )에 소용되는 차일( 週 日 ) 휘장을 진배( 進 拜 )한다 0 수제검( 守 提 檢 ) 정 4품 종 4품 별좌( 別 坐 ) 모두 감하고 별제( 別 提 ) l 원 별검( 別 檢 ) 1 원이다. 광흥창( 廣 興 용) 서부 서강방 ( 西 江 행)의 와우산(없 牛 山 ) 아래에 있다. 백관의 녹봉( 禮 棒 )을 맡았다. 0 수( 守 ) 정 4 품 영 ( 令 ) 각 1 원씩, 주부( 主 傳 ) 1 원, 직장( 直 長 ) 봉사( 奉 事 ) 자벽( 自 많)하는 것이 모두 같다 는 가설( 加 設 )하고, 영 이하는 일에 따라 옮겨서 2 원을 갖추고, 부봉사( 副 奉 事 )는 감한다. 0 제 일루( 第 一 樓 )와 정종( 正 宗 )의 어제시( 倒 製 詩 )가 있다. 내수사( 內 需 司 ) 서부 인달방( 仁 達 행)에 있다 본조에서 창설했다 대궐 안에서 쓰이는 미곡 포목 및 잡물( 雜 物 )과 노비 등의 일을 맡는다 0 전수( 典 需 ) 별좌( 別 座 ) 부전수( 副 典 需 ) 별제( 別 提 ) 전회( 典 會 ) 전곡( 典 뤘) 1 원씩, 전화( 典 貨 ) 2원 서제( 書 題 ) 20원이다. 종묘서( 宗 關 暑 ) 종묘의 담 안 동쪽에 있으며, 사당[ 寢 關 ]을 지키는 일을 맡는다. 0 도제조 제조 l 원씩, 영( 令 ) 2 원, 직장( 直 長 ) 1 원이며, 봉사( 奉 事 )는 감하고, 부봉사( 副 奉 事 ) l 원이다. 사직서( 社 樓 暑 ) 사직단 밖 북쪽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단 (f흠)을 두었다가 바로 서( 暑 )로 고쳤다. 제사지내는 곳의 청소를 맡았다. 0 도제조 제조 1 원씩 영 3원이고 직장 참봉 모두 감함 이다 0 구리 시루[ 鋼 영Ei] l 좌( 座 )가 있는데, 풍년을 비는 큰 제사의 기장[ 梁 ] 밥을 지을 때, 시루가 천퉁치듯이 울면 풍년의 정조라고 한다. 경모궁( 景 幕 宮 ) 궁 담 안에 있다. 정종( 正 宗 ) 초년에 설치했는 데, 궁묘( 宮 關 )를 수위하는 일을 맡는다. 0 도제조 제조 1 원씩, 영 3 원, 직장 참봉 모두 감함 이다. 0 경모궁지( 景 寒 宮 志 ) 口 권이 있다. 영희전( 永 禮 嚴 ) 전( 嚴 )의 담 안에 있는 데, 침전( 寢 觀 )을 경비하는 일을 맡는다. 0 도제조 제조 1 원씩, 영 3 원, 참봉 l 원이다. 평 시서( 平 市 暑 ) 예전에 중부 견평방( 堅 平 功 )에 있었는데 뒤에 중부 경행방( 慶 幸 功 )으로 옮겼 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경시서( 京 市 暑 )를 두고 시장을 단속하고 두량과 척도를 고 르게 하고 물가를 올리고 내리는 등의 일을 맡는다. 평시서로 이름을 고친 햇수는 자세하지 않다 0 제조 영 주부 직장이 1 원씩이고, 봉사( 奉 事 )는 감했다. 의영고( 義 짧 庫 ) 서부 적 선방( 積 善 행)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설치하여 유밀( 油 密 기름과 꿀로 만든 과자) 황랍( 黃 轉 ) 소물( 素 物 소찬( 素 購 )으로 쓰는 나물 등속) 후추 등의 물건을 맡았는데, 계속해서 오로지 소선( 素 歸 소물로 만든 요리) 재료 및 대궐 안에서 밤에 켜는 초를 공급하 는 일을 맡았다. 태종 3 년 0403) 에 연복궁( 延 福 宮 )을 본고( 本 庫 )에 합쳤다 0 영은 감하고, 주부 직장 봉사가 1 원씩이다 장흥고( 長 興 庫 ) 예전에는 남부 장흥방( 長 興 행)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인달방( 仁 達 해)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자리 유둔 ( 油 휩 기름을 먹여 비를 막는 차일 같은 것) 종이 등의 물건을 맡겼다. 태종 3 년에 흥신궁 ( 興 信 宮 )을 본고( 本 庫 )에 합쳤다. 또 뒤에 풍저창(뿔짧룡)을 본고에 합쳤다 0 제조 l 원이 고, 영은 감하고, 주부 직장 봉사가 1 원씩이다. 0 대궐 안의 여러 상사( 上 司 )에서 쓰는 종이를 매월 정해진 규식대로 진배( 進 排 )한다. 빙고( 水 庫 ) 동고( 東 庫 )와 서고( 西 庫 ) 두 고를 두어서 얼음의 저장과 발급을 맡는다- 동고는 두모포( 豆 毛 浦 )에 있어 제사 소용에 바치며,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저자도( 樓 子 島 ) 사이에서 개천의 하류를 피하는데, 얼음의 저장량은 1 만 2 백 44 짝 [T] 이다. 이곳에 옥호루( 玉 뚫 樓 )가 있어 명승( 名 勝 )이라 일걷는다. 서고는 한 강 하류 둔지산(휩 智 山 ) 기숨에 있다. 어주( 倒 團 임금의 부엌)에 바치고 백관에게 나누어 주 며, 얼음의 저장량은 13 만 4천 9 백 74 짝이다. 내빙고( 內 水 庫 )는 자문감(뽕 門 藍 )에 붙여서 대궐 안에 두어 오로지 임금에게만 썼는데, 정종 13 년 (1789) 에 양화진( 楊 花 律 )에 내다 설치 했다. 0 제조가 l 원이고, 별좌( 別 座 )는 감하고, 별제( 別 提 ) 별검( 別 檢 )이 2원씩인데 동고와 서고로 각기 l 원씩 나눈다. 0 종묘 사직 이하의 제향( 聚 享 )에는 동고에서는 3 월 1 일부터 시작하여 상강일( 雷 降 日 )에 이르러 그치고, 대궐 안의 각전( 各 嚴 )에 바치는 것은 서고에서

52 월 1 일부터 시작하여 10 월 그음날에 이르러 그치므로 2 월부터 10 월 사이에 얼음을 바치는 일은 아주 없다. 비변사 승정원 홍문관 시강원 익위사 춘추관 병조 내의원 양현고 는 5 월 보름 이후로부터 7 월 보름 이전까지 얼음을 나누어 주고, 종친( 宗 親 )과 동반( 東 班 )과 서반( 西 班 )의 정 2품 이상, 육승지와 삼사( 三 司 )의 장관, 육조( 六 홈)의 여러 상사( 上 司 ), 규장 각의 시임 관원과 원임 관원에게는 6 월 1 일부터 그뭄까지 나누어 준다. 0 매년 6 월에 제 사( 諸 司 ) 종친 및 문무 당상관과 내시부 당상관으로 70 세 이상의 한산 당상관( 閒 散 堂 上 官 ), 활인서( 活 人 暑 )의 환자,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 전생서( 典 性 暑 ) 목벽산( 木 첼 山 ) 남쪽, 남부 둔지방(면 智 행)에 있는데, 희생( 構 뺨 ) 을 기르는 일을 맡는다. 0 판관 1 원이고, 주부는 감하고, 직장 1 원이고, 봉사는 감하고, 부봉사 1 원이고, 참봉은 감한 다. 0 이병연( 李 秉 淵 )의 간촬헌기( 看 EB 함 記 )가 있다. 곁에 지정( 池 享 )이 있는데, 편액을 불 구정( 不 뾰 享 )이라 했다. 장원서( 掌 행 暑 )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는데, 바로 성삼문( 成 三 問 ) 의 옛 집으로 손수 심은 소나무가 있다. 이상의 빙고 전생서 장원서 세 서(옳)는 혹 은 개국 초에 창설했다고도 하나, 햇수는 모두 자세하지 않다 원유(행 固 임금의 동산)의 꽃 과 과일나무를 맡는다. 0 제조 l 원이고, 장원( 掌 짧) 정 6품은 감함, 별제 2 원, 봉사 1 원이 다 또 별감( 別 藍 ) 20 원, 신화( 慣 花 ) 신과( 慣 果 ) 신금( 慣 萬 ) 부신금( 副 慣 뽑) 1 원씩, 신수 ( 慣 數 ) 부신수( 副 慣 數 ) 3원씩 이 다. 0 경 원( 京 짧)은 용산 한강 등지 에 있고, 외 원( 外 젤)은 강화부( 江 華 府 ) 남양( 南 陽 ) 개성부( 開 城 府 ) 과천( 果 J 11) 고양( 高 陽 ) 양주( 楊 州 ) 부평( 富 平 ) 등지에 있는데, 각각 원직(짧 直 )이 있다 0 매년 중양( 重 陽 9월 9 일)에 대궐과 내각( 內 聞 )에 국화 화분을 바친다. 사포서( 司 團 暑 ) 북부 준수방( 俊 秀 행)에 있는데 뒤에 북부 수진방 ( 壽 進 행)으로 옮겼다. 본조에서 창설했는데, 원포( 園 團 )와 채소를 맡는다. 0 제조 l 원이고, 사포( 司 團 ) 정 6품은 감함, 별제 2 원, 직장 1 원이고, 별검( 別 檢 )은 감한다. 양현고( 養 賢 庫 ) 성 균관 북쪽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했는데, 성균관의 유생에게 쌀과 콩 등 의 물건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0 주부 직장 봉사가 l 원씩이다 조지서( 造 紙 暑 ) 창의문 ( 影 義 門 ) 밖 탕춘대( 覆 春 臺 )에 있고, 세종조에 창설했다. 표전( 表 塞 ) 자문지(흉 文 紙 ) 및 여 러 가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맡는다 - 0 제조 1 원이고, 사지( 司 紙 )는 감하고, 별제가 3 원이 다. 혜민서( 惠 民 暑 ) 남부 태평관( 太 平 館 ) 에 있다 개국 초에는 혜민고국( 惠 民 庫 局 )을 두었는 데, 태종조에 혜민서로 고쳤다. 의약( 醫 藥 ), 백성의 질병을 고치는 일 및 의녀( 醫 女 )를 교육 하는 일을 맡는다. 인조 15 년 (1637) 에 폐지하고 전의감( 典 醫 籃 )에 합쳤다가 곧 다시 설치했 다. 0 제조 2 원, 주부 의학교수( 醫 學 敎 授 ) 직장 봉사 의학훈도( 醫 學 회 導 ) 1 원씩, 참봉 4원이다. 도화서( 圖 輩 暑 ) 예전에는 중부 견평방( 堅 平 功 )에 있었는데 뒤에 남부 태평방( 太 平 행)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도화원( 圖 畵 院 )을 두어 그럼 그리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서( 暑 )로 고쳤다 창설한 햇수는 자세하지 않은데, 혹은 개국 초에 세웠다고도 한다. 0 제조 l 원이 고, 별제는 의논해서 감하고, 겸교수( 暴 敎 授 ) 선화( 善 뿔) 선회( 善 續 ) 화사( 畵 史 ) 1 원씩, 전 자관(흉 字 官 ) 2 원, 회사( 續 史 ) 2 원, 화원( 畵 員 ) 30원이다. 전옥서( 典 歡 暑 ) 중부 서린방( 瑞 斷 행)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두었는데, 죄수를 맡았다. 0 부제조 1 원, 주부 1 원이고, 봉사는 감하고, 참봉 2원이다 0 세상에 전하기를, 서의 터가 매우 길하기 때문 에, 여기에 옥( 끓)을 두어 죄수들로 하여금 여위고 죽는 우환을 없게 하고자 했다고 한다 서의 문 밖에 홍전문( 紅 網 門 )을 세웠다. 활인서( 活 人 暑 ) 동서( 東 暑 )는 동부 연희방( 熊 喜 행)에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못 쓰게 되었고, 서서( 西 暑 )는 용산강( 龍 山 江 )에 있는데 성안의 전염병 환자들 이 모두 나아가 치료를 받는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동대비원( 東 大 悲 院 )과 서대비원을 두었다가 뒤에 동활인서와 서활인서로 고쳤다. 도성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Q ]

53 일을 맡는다. 0 제조 l 원, 별제 2원이고, 참봉은 감한다. 와서( 互 暑 ) 남부 둔지방(띤 智 功 )에 있다. 개국 초에 동서요( 東 西 쫓)를 두었다가 곧바로 와서( 互 暑 )라고 고쳤다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는다. 또 별서( 別 暑 )가 있어서 기와를 구워서 흥정해 파는 일을 맡는다. 0 제조 l 원, 별제( 別 提 ) 2원이다 중학( 中 學 ) 북부 관광방( 觀 光 행)에 있다. 태종 11 년 0411) 에 처음으로 학당( 學 堂 )을 두었는데 곧 고쳐서 중 동 서 남의 사부학당( 四 部 學 堂 )을 두었 다. 관할하는 유생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을 맡았고, 유생 l 백 명을 맡아 양성하는 것은 사학이 같다. 뒤에 북부학당을 더 두었으나 곧 폐지했다. 선조 임진년 병화 뒤에 서울 안에 중학과 서학 두 학만을 세웠는데, 광해 기유년에 사학을 옛 제도와 같이 다시 세웠다 현종 2년에 북학을 다시 두었다가 곧 폐지했다 0 교수( 敎 授 ) 훈도가 각각 1 원씩이다 유생 5 명을 양성하는 것은 다른 학당도 모두 같다. 동학( 東 學 ) 동부 창선방( 影 善 행)에 있다. 남학 ( 南 學 ) 남부 성 명 방( 誠 明 행)에 있다. 서 학( 西 學 ) 서 부 여 경 방( 餘 慶 행)에 있다. 중부( 中 部 ) 동 부( 東 部 ) 남부( 南 部 ) 서부( 西 部 ) 북부( 北 部 ) 모두 아래 한성부( 漢 城 府 ) 편에 상세히 있다. 기로소(홈 老 所 ) 중부 징청방( 燈 淸 행)에 있다. 태조 3년에 임금의 나이가 60을 념자 기사(흉 社 )에 들어가, 문신 재신으로 정 2품 실직( 實 職 )에 있으면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을 선발 하도록 명하여 비로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하되 음관( 陰 官 ) 무관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서 로 모이는 곳이 되었다. 0 숙종대왕 45 년에 임금의 나이 60세에 기사에 들어갔고, 영수각 ( 靈 壽 聞 )을 세워서 어첩( 倒 牌 왕실의 보첩)을 봉안( 奉 安 )했다. 영종대왕 19 년에 임금 나이 50 세에 기사에 들어갔다, 0 정 2품 실직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나이가 70세인 사람은 모두 종 2품으로 1, 2 명을 옛 규례에 따라 계품하여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0 당상( 堂 上 )은 정한 수가 없고, 수직관( 守 直 官 ) 2원이다 0 태조가 서루( 西 樓 ) 벽 위에 친펼로 어휘( 倒 證 ) 를 썼는데, 뒤에 병란( 兵 亂 )으로 불탔다. 0 김육( 金 增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0 옛 풍 속으로 해마다 3 월 상사( 上 社 )와 9 월 9 일에 기영회(좀 英 會 )를 베풀어서 보제원루( 普 濟 院 樓 ) 에서 잔치를 하며 투호( 投 뚫)하고 낙양춘곡( 洛 陽 春 曲 )을 연주하였다. 또 기영회를 훈련원이 나 혹은 반송정( 盤 松 후)에서 베풀기도 했는데, 종친 재선으로 나이가 70세인 2품 이상 및 정 1 품 이상의 경연 당상관이 참가하였다. 비변사( 備 邊 司 ) 중부 정선방( 貞 善 행)에 있고, 하나 는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밖에 있다. 명종 10년에 창설하여 중외( 中 外 )의 국정( 國 政 )과 군 사( 軍 事 )에 관한 중요한 사무를 총괄하여 거느리는 일을 맡았는데 일명 주사(뚫 司 )라고 한 다.0 도제조 제조 부제조 낭청 12 원이다. 0 지금은 의정부에 속한다 제언사(뚫꿇 司 ) 본조에서 창설했다. 각도의 제방을 보수하는 일과 수리( 水 利 )를 맡았다. 관서의 이름은 있으 나 정사는 없다 중간에 폐지했다가 현종 3 년 (1662) 에 다시 두었는데 뒤에 또 폐지하여 비 변사( 備 邊 司 )로 사무를 옮겼다. 0 도제조 3 원, 제조 2 원, 낭청 l 원이다. 장생전( 長 生 觀 ) 북 부 관광방( 觀 光 행)에 있다. 세종 14 년 0432) 에 창설했다. 동원 비기( 東 園 秘 器 궁궐에서 쓰 는 관곽( 相 鄭 ))를 봉장( 奉 藏 )했다. 0 도제조 l 원, 제조 낭청이 3 원씩인데, 호조 예조 공 조( 工 뽕)의 판서와 낭관이 각각 겸직한다. 선혜청( 宣 惠 廳 ) 내청( 內 廳 )은 서부 양생방( 養 生 功 ) 에 있으니, 곧 인애궁( 仁 愛 宮 )의 옛터이다. 인조 갑자년 0624) 에 지었는데, 별창( 別 용)은 용 강( 龍 江 )에 있고 북창( 北 용)은 삼청동(프 淸 洞 ) 에 있으며, 동창( 東 용)은 옛 장용영(셔 土 勇 營 )에 있다 개국 초 성종 신축년이라고도 한다. 에 상평청( 常 平 廳 )을 창설하여 오로지 오참( 五 站 ) 의 칙사 비용을 맡았는데, 광해 무신년에 처음으로 경기청( 京 離 廳 )을 두었다가 상평청에 합 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대동미( 大 同 米 )와 포전( 布 錢 )을 출납하는 일을 맡았다. 인조 2년 (1608) 에 강원청( 江 原 廳 )을 두어 호조에 붙였고, 효종 3년 (1652) 에 호서청( 湖 西 廳 )을 두 어 강원청과 함께 모두 본청에 붙였고, 9년에 호남청( 湖 南 廳 )을 두고 숙종 3 년 0677) 에 영 19

54 남청( 領 南 廳 )을 두었으며, 12 년에 진흘청( 願 뼈 廳 )을 본청에 이속( 移 屬 )하였다. 34 년에 해서 청( 海 西 廳 )을 두고, 영종 29 년 (1753) 에 균역청( 均 投 廳 )을 본청에 합쳤으며, 청의 소속에 또 공잉색( 公 剩 色 색은 지금의 계( 係 )와 같음)이 있는데 강원청에 붙였다. 0 도제조 3 원, 제조 3원이고, 냥청은 5원인데, 영남과 경기를 겸찰( 暴 察 )하며 호남 강원을 겸찰하며 호서와 해 서를 겸찰하며, 진흘청과 상평청을 겸찰하며, 균역청과 상진청( 常 騙 廳 )을 겸찰하여, 오소( 五 所 )로 나누어 정 하여 다섯 낭청 이 각각 주관한다. 0 선조 계사년 0593) 에 환도( 還 都 )하여, 임금이 용산창( 龍 山 용)에 가서 남아 있는 곡식을 창고에서 내어 방민( 功 民 도성 안의 백성) 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흘청( 眼 빼 廳 ) 소의문( 昭 義 門 ) 안에 있다. 인조 4 년에 비변사에게 구 황청( 救 흙 廳 )을 관할하게 하면서 상평청( 常 平 廳 ) 에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비국에 붙 였다. 현종 신축년 (1661) 에 새로 설치하고, 숙종 12 년 (1686) 에 본청( 本 廳 )으로 이속하였다. 균역청( 均 彼 廳 ) 남부 훈도방( 薰 關 행)에 있다. 지금은 남창( 南 룡)이라고 부른다. 영종 27 년 (1751) 에 창설하여 균역법( 均 投 法 )을 시행하며, 옛 수어청( 守 떻 廳 )에 창고를 설치했는데, 29 년에 본청에 붙였다 32 년에 상평청 진흘청과 합청( 合 廳 )했 다 36 년에 또 더 늘려서 이곳 에 옮겨 세웠는데, 별하고( 別 下 庫 )가 있다. 준천사( 灌 川 司 ) 중부 장통방( 長 通 행)에 있다, 영 종 36 년에 창설하여 성 안의 개천과 도랑을 소통하도록 파는 일과 사산( 四 山 )을 지키는 일 을 맡았다. 0 도제조 3원 제조 6 원, 도청( 都 廳 ) 1 원, 냥청 3 원이다. 주교사( 冊 橋 司 ) 정종 14 년 (1790) 에 창설했다 임금이 거둥할 때에 배다리와 양호( 兩 湖 호남과 호서)의 조운( 漫 運 ) 등의 일을 맡았는데, 준천사에 붙였다 임금이 거퉁하여 물을 건빌 때의 주사대장(왜 師 大 將 )은 유도 장신( 留 都 將 토)으로 차출한다 0 도제조 제조 도청은 모두 준천사에서 예겸 ( 例 暴 )한다. 주자소(뚫 字 所 ) 선인문( 宣 仁 門 ) 안에 있다. 태종 3년 (1403) 에 비로소 주자소를 두어 고주시 전( 古 註 詩 傳 ) 과 좌씨 전( 左 民 傳 ) 의 자본( 字 本 ) 수십 만 자를 주조하고, 정 해자 CT$: 字 )라 이름하고, 권근( 權 近 )이 발문(없 文 )을 지었다. 세종 2년 (1420) 에 그 글자가 바르지 못하므로 다시 녹여서 새로 주조했는데, 글자 모양이 정밀하며 이름하여 경자자( 康 子 字 )라 한다. 변계량( 下 季 良 )이 발문을 지었다. 16 년에 또 경연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 順 事 實 ) 위선음즐( 寫 善 陰 鷹 ) 논어( 論 語 ) 등의 책을 내다가 자본( 字 本 )을 삼았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으며, 20 여만 자를 주조하고, 이름하여 갑 인자( 甲 寅 字 )라 한다 또 세조를 명하여 강목( 網 텀) 의 큰 글자체를 납으로 틀을 만들어 강목& 을 박으니, 즉 지금 이른바 사정전훈의( 思 政 願 訓 義 ) 이다. 김빈( 金 鎭 )이 발문을 지었다. 문종 2 년 (1452) 에 경자자를 다시 녹여서 안평대군( 安 平 太 君 )에게 명하여 쓰게 했는 데, 이름하여 임신자( 王 申 字 )라 하고, 강희안( 姜 希 頻 )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이름하여 을해 자(ζ 玄 字 )라 한다 10년에 원각경( 圓 覺 經 )을 박으려고 정난종( 鄭 蘭 宗 )에게 명하여 쓰게 했 는데 글자체가 바르지 못하며, 이름하여 을유자 (Z., 西 字 )라 한다. 성종 2년 (14 71) 에 왕형공 구양공 집자( 王 체 公 歐 陽 公 集 字 )를 사용하여 주조했는데, 글자체 가 경인자보다 작고 더욱 정 밀하며, 이름하여 신묘자( 辛 때 字 )라 한다. 또 중국의 신판 강목자( 新 板 網 텀 字 )를 얻어서 주 조했는데, 이름하여 계축자(쫓표 字 )라 한다. 영조 48 년 정종이 춘저( 春 邱 )에 있을 때 갑인자 를 자본으로 하여 15 만 자를 주조하게 하여 교서관에 처장하고, 정종 원년에 전의 자본을 사용하여 또 15 만 자를 주조하여 규장각에 저장했는데, 이것을 정유자 CT 西 字 )라 한다 18 년에 모두 지금의 주자소, 즉 옛 흥문관에 옮겨 보관하고, 이름하여 전자소( 鏡 字 所 )라고 했 다. 또 자전자( 字 典 字 )를 사용하여 나무로 대소 32 만여 자를 새겼는데, 생생자( 生 生 字 )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또 생생자를 본으로 하여 본자( 本 字 )와 같이 주조하여 정리의 ( 整 理 嚴 )를 박았는데, 이름하여 정리자( 整 理 字 )라 한다 0 정종조에 폐청으로 내각주자소( 內

55 聞 흉흉 字 所 )를 삼고, 규영신부( 奎 遍 新 府 )라고 편액했다. 또 판당( 板 堂 )이 있어서 책판( 冊 板 )과 주자(옳 字 )를 보관해 두고 무릇 내각에서 서적을 박을 때에는 언제나 이 주자소를 개국( 開 局 )한다 장치( 藏 置 )한 동주자( 鋼 覆 字 )는 이름이 생생자다. 0 곁에 고문관( 考 文 館 )이 있는데, 어느 때 창설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흑은 바로 옛 홍문관이라고도 한다- 무직 공서( 武 職 公 暑 ) 중추부( 中 樞 府 ) 서부 적선방( 積 善 행)에 있으니, 곧 예조의 남쪽이 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중추원을 두었는데 정종 2 년 (1400) 에 삼군부( 三 軍 府 )로 고쳤고, 태종 9 년 (1409) 에 삼군부를 폐지하여 다시 중추원을 두었으며, 세조조에 부( 府 )로 고쳤다. 맡아보는 일은 없고, 문신 무신 당상관으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한다 0 영 사( 領 事 ) 1 원, 판사 2 원, 지사 6 원, 동지사 8 원, 첨지사(혔 知 事 ) 8원이고, 경 력( 經 歷 ) l 원과 도사 2 원은 소속 경력소( 經 歷 所 )에 붙인다. 오위도총부( 五 衛 都 擔 府 ) 예전에는 경복궁 광화문 동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창덕궁의 홍문관 서쪽에 있었는데, 정종 5 년 (1781) 에 창경궁 연광문( 延 光 門 ) 안, 동룡문( 鋼 龍 門 ) 북쪽에 옮겨 설치하니, 옛 연복전( 延 福 嚴 )이다. 하나는 창경궁 홍화문( 弘 化 門 ) 안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경희궁 개양문( 開 陽 門 ) 안 서쪽에 있다. 태조 2년 (1393) 에 고려 제도를 따라 의흥삼군부( 義 興 三 軍 府 )를 두었고, 태종 9 년에 삼군부를 폐지하고 진무소( 鎭 換 所 )를 만들어 병조에 예속시키고, 금려( 禁 旅 )를 거느리고 윤번( 輪 짧)으로 숙위( 宿 衛 )하는 일을 맡겼다. 정종 28년에 또 삼군진무소를 고쳐서 다시 의흥부라고 불렀다. 문종 원년에 삼군을 오위( 五 衛 )라고 고쳤다 세조조에 진무소를 고 쳐서 오위도총부로 하여 오위를 맡아 다스리고 군무( 軍 務 )를 전적으로 맡겨, 병조에 예속시 키지 않았다. 선조 임진년 뒤에 위제( 衛 制 )를 아주 폐지하여 관명( 官 名 )만 남아 있다. 0 도 총관( 都 擔 管 ) 정 2품 5 원, 부총관( 副 擔 管 ) 종 2품 5 원, 경력 6 원, 도사 6 원이다. 0 서거정( 徐 居 正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오위( 五 衛 ) 지금은 오위 병제(표 衛 兵 制 )가 아주 폐지되어 관 명만 남았다. 장( 將 )과 부장( 部 將 )이 순번을 나누어 입직하여 순경(젠 更 야간 순행)한다. 의 흥위( 義 興 衛 ) 중위( 中 衛 )이다. 0 갑사보충대( 甲 士 補 充 隊 )가 속한다. 0 서울의 중부( 中 部 ), 개성부( 開 城 府 ), 경기의 양주( 楊 州 ) 광주( 廣 州 ) 수원( 水 原 ) 장단( 長 쁨)의 진관 군사( 鎭 管 軍 士 )가 중부( 中 部 )에 속하고, 강원도의 강릉( 江 陸 ) 원주( 原 州 ) 회 양( 堆 陽 )의 진관 군사가 좌 부( 左 部 )에 속하고, 충청도의 공주( 公 州 ) 홍주( 洪 州 )의 진관 군사가 우부( 右 部 )에 속하며, 충주( 忠 州 ) 청주( 淸 州 )의 진관 군사가 전부( 前 部 )에 속하고, 황해도의 황주( 黃 州 ) 해주( 海 州 )의 진관 군사가 후부( 後 部 )에 속한다. 용양위( 龍 購 衛 ) 좌위( 左 衛 )이다 0 별시위대( 別 待 衛 隊 ) 군사가 속한다. 0 서울 동부( 東 部 ), 경상도 대구( 大 邱 )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경주( 慶 州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진주(품 州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고, 김해( 金 海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상주( 尙 州 ) 안동( 安 東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호 분위( 虎 貴 衛 ) 우위( 右 衛 )이다- 0 족친위( 族 親 衛 ) 친군위( 親 軍 衛 ) 팽배( 影 排 호분위에 딸린 군사)가 속한다. 0 서울의 서부, 평안도의 안주( 安 州 )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의주 ( 義 州 ) 귀성( 龜 城 ) 삭주( 湖 州 )의 진관 군사와 창성( 昌 城 ) 창주( 昌 씨 ) 방산( 方 山 ) 인산( 購 山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성천( 成 J 11)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며, 영변( 寧 邊 ) 강 계( 江 界 ) 벽동(뿜 違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평양( 平 壞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 다. 충좌위 ( 忠 住 衛 ) 전위 ( 前 衛 )이 다. 0 충의 위 ( 忠 義 衛 ) 충찬위 ( 忠 贊 衛 ) 파적 위 ( 破 敵 衛 )가 속한다. 0 서울의 남부( 南 部 ), 전라도의 전주( 全 州 )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순천( 順 天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나주( 羅 州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며, 장흥( 長 興 ) 제 주( 濟 州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남원( 南 原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충무위( 忠 武 衛 ) 후위( 後 衛 )이다. 0 충순위( 忠 順 衛 ) 정병( 正 兵 ) 장용위(밤 勇 衛 )가 속한다. 0 서울의 n - ζ

56 북부( 北 部 ), 영안도( 永 安 道 )의 북청( 北 춤)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갑산( 甲 山 )의 진관 군사, 삼수( 三 水 ) 혜산( 惠 山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온성( 穩 城 ) 경원( 慶 源 ) 경흥 ( 慶 興 )의 진관 군사, 유원( 柔 遠 ) 미전( 美 錢 ) 훈융( 訓 했)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고, 경 성( 鏡 城 ) 부령( 富 寧 ) 회 령( 會 寧 ) 종성( 鍾 城 )의 진관 군사와 고령( 高 領 ) 동관( 運 關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영흥( 永 興 ) 안변( 安 邊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0 위의 오위 는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의흥친군 십위( 義 興 親 軍 十 衛 )를 두니 좌위( 左 衛 ) 우위( 右 衛 ) 응양위 ( 隨 揚 衛 ) 금오위 ( 金 홈 衛 ) 좌우위 ( 左 右 衛 ) 신호위 ( 神 虎 衛 ) 흥위 위 ( 興 威 衛 ) 비 순위( 備 젠 衛 ) 천우위( 千 牛 衛 ) 감문위( 藍 門 衛 )이다. 문종 원년에 오위라고 고쳐 부르고 군 무( 軍 務 )를 맡겼는데, 그 소속의 부장청( 部 將 廳 ) 군직청( 軍 直 廳 )의 장( 將 )과 부장( 部 將 )이 순번을 나누어 입직해서 순경한다. 0 의흥위는 지금은 외소( 外 所 )라고 부르고, 조사위장( 費 늠] 衛 將 )이 주관한다. 0 외소 군직청( 軍 職 廳 )은 모두 창덕궁 돈화문( 敎 化 門 ) 밖에 있으니, 중부 정선방( 貞 善 행)이다. 남소( 南 所 )는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 金 虎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 희궁 개양문( 開 陽 門 ) 안에 있다. 서소( 西 所 )는 하나는 창덕궁 요금문( 權 金 門 ) 안에 있는데 반송( 盤 松 )이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의문(뿔 義 門 ) 안에 있다. 동소( 東 所 )는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 宣 仁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안에 있다. 북소( 北 所 )는 하나는 창경궁 경화( 景 化 ) 숭지(몇 智 ) 문 안에 있는데 연못이 있고, 하나는 경희궁 무덕문( 武 德 門 ) 안에 있다. 0 장( 將 ) 15 원 정 3품 내조사( 內 暫 司 ) 2 원, 부장( 部 將 ) 25 원 이 다. 0 따로 상호 군( 上 護 軍 ) 8 원, 대호군( 大 護 똘) 12 원, 호군( 護 軍 ) 4 원, 부호군( 副 護 軍 ) 69 원, 사직( 司 直 ) 11 원, 부사직( 副 司 直 ) l 백 2 원, 사과( 司 果 ) 21 원, 부사과( 副 司 果 ) 1 백 83 원, 사정( 司 표) 20원, 부사정( 副 司 正 ) 2 백 50 원, 사맹( 司 益 ) 15 원, 부사맹( 副 司 益 ) 2 백 8 원, 사용( 司 勇 ) 24 원, 부 사용( 副 司 勇 ) 6 백 60원이 있다. 0 부장( 部 將 ) 25 원 안에 참외( 參 外 ) 11 원, 남행 참외( 南 行 參 外 과거를 보지 않고 임관한 벼슬아치) 1 원이 있다. 0 외위( 外 衛 )는 폐지한 뒤에 내삼청 ( 內 三 廳 )에 붙였다 내삼청( 內 三 廳 ) 개국 초에는 사복( 司 樓 )을 두었고 성화( 成 化 ) 연간에 또 내금위( 內 禁 衛 )를 두어 겸사복( 暴 司 樓 )에 소속시켰고 효종 원년 (1649) 에 금군( 禁 軍 )을 더 두었고, 현종 7 년 (1664) 에 금군청( 禁 軍 廳 )을 설치하여, 7 번으로 나누어 겸사복 2 백 명, 내 금위 3 백 명, 우럼위(쩌 林 衛 ) 2 백 명인 삼청( 三 廳 )으로 만들었다. 영종 30년에 용호영 직소 ( 龍 虎 營 直 所 )를 고쳐서 두었는데 하나는 창덕궁의 인정전( 仁 政 嚴 ) 남랑( 南 願 )에 있고, 하나 는 경희궁 숭정전(몇 政 嚴 ) 남랑에 있다. 0 겸사복장(했 司 樓 將 ) 정 3품 이 3 원인데 금군청에 속하고 정 3품, 내금위장( 內 禁 衛 將 ) 3 원, 우림위장(쩌 林 衛 將 ) 3원이다. 선전관청( 宣 傳 官 廳 ) 하 나는 창덕궁 승정원( 承 政 院 ) 북쪽, 선정문( 宣 政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다. 처음에는 관원을 두어 대궐 안을 윤직( 輪 直 )했는데, 뒤에 청( 廳 )을 설치하여 형 명(께 名 ) 계라(양 轉 ) 시위( 待 衛 ) 전명( 傳 命 ) 부신( 符 信 )을 출납하는 등의 일들을 맡았다. 0 선전관 25 원 안에 행수( 行 首 ) 정 3품 l 원, 당상( 堂 上 ) 3 원, 참상( 參 上 ) 품계는 정하지 않 음 이 7원이고, 참외( 參 外 ) 종 9품 1 4 원 안에 남행( 南 行 ) 2 원, 문신( 文 닮) 종 6품 2원인데, 무 겸청( 武 暴 廳 )에 속한다. 부청( 附 廳 )은 하나는 창덕궁 광범문( 光 範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 궁 금상문( 金 商 門 ) 안 북쪽에 있다, 0 무신겸직 50원 안에 참상( 參 上 ) 정한 품계가 없음 40 원, 참외( 參 外 ) 종 9품 10원이다 이식( 李 植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별군직청( 別 軍 職 廳 ) 하나는 창경궁 회춘문(며 春 門 ) 안 곧 시민당( 時 敏 堂 ) 옛터에 있었고, 하나는 경희궁 건 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다. 효종( 孝 宗 ) 7 년에 창설하여 잠저군관( 增 邱 軍 官 )으로 심양( 灌 陽 )에 모시고 갔던 사람 8 명을 구처( 區 處 )하여 청( 廳 )을 설치했는데, 세상에서 팔장사( 八 밤 土 )라고 부르며, 그 뒤로 점차 늘었다. 0 별군직( 別 軍 職 )은 정한 품계가 없고 정원이 -없다. 어전친 2

57 막제명첩( 徒 O 前 親 幕 題 名 뼈 )이 있다 훈련원( 訓 練 院 ) 남부 명철방( 明 哲 행)에 있다. 개국 초에 훈련관( 訓 練 觀 )을 두어 군사의 재능을 시험하고 무예를 닦고 무경( 武 經 )을 익히고 공부하는 일을 맡는데, 뒤에 관을 원( 院 )으로 고쳤다. 또 무관( 武 官 )의 과거 보는 곳 이 되었으며, 무일 소( 武 - 所 )라고 부른다. 0 지사( 知 事 ) l 원 도정( 都 正 ) 2 원 안에서 l 원은 겸직이고, 정( 正 ) l 원, 부정( 副 표) 2 원, 첨정(했 正 ) 12 원, 판관( 判 官 ) 18 원, 주부( 主 繹 ) 38 원, 참군( 參 軍 ) 2 원, 봉사( 奉 事 ) 2원, 권지( 權 知 ) 口 口 원, 습독관( 習 讀 官 ) 30 원, 권지( 權 知 ) 口 口 원 이다. 0 성간( 成 떠)의 사청기( 射 廳 記 ) 가 있고, 원의 동쪽에 연자루(월 子 樓 )가 있다. 세자익위사( 世 子 翊 衛 司 ) 하나는 장경궁 시강원( 待 講 院 ) 북쪽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두었고, 또 하나의 이름은 계방( 桂 房 ) 이다, 동궁( 東 宮 )을 배위( 暗 衛 )하는 일을 맡 는다 0 좌익위( 左 翊 衛 ) 우익위( 右 翊 衛 ) 정 5품 l 원씩, 좌사어( 左 司 쩔) 우사어( 右 司 찢) 종 5 품 l 원씩, 좌익찬( 左 翊 贊 ) 우익찬( 右 翊 贊 ) 정 6품 l 원씩, 좌위솔( 左 衛 率 ) 우위솔( 右 衛 率 ) 종 6품 l 원씩, 좌부솔( 左 副 率 ) 우부솔( 右 副 率 ) 정 7품 1 원씩, 좌시직( 左 待 直 ) 우시직( 右 待 直 ) 정 8품 l 원씩, 좌세마( 左 洗 馬 ) 우세마( 右 洗 馬 ) 정 9품 1 원씩이다. 세손위종사( 世 孫 衛 從 司 ) 본 조에서 창설했고, 맡아보는 일은 익위사와 같고, 설치는 강서원( 講 書 院 )과 같이 했다 0 좌 장사( 左 長 史 ) 우장사( 右 長 史 ) 종 6품 1 원씩, 좌종사( 左 從 司 ) 우종사( 右 從 司 ) 종 7품 1 원씩이 다 수문장청( 守 門 將 廳 )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남쪽에 있다. 처음에는 장( 將 )을 두고 일정한 관서는 없었는데, 뒤에 청( 廳 )을 설치했고, 대궐문 지키는 일을 맡는다. 0 장( 將 ) 29 원인데 그 중 참상( 參 上 ) 종 6품 15원 참외( 參 外 ) 종 9품 14 원이다. 충익위( 忠 翊 衛 ) 직소( 直 所 ) 하나 는 창경궁 선인문( 宣 仁 門 ) 속한다. 0 장( 將 ) 3 원-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口 口 문 안에 있다. 공신( 功 닮)의 자손이 충장위( 忠 밤 衛 ) 직소. 하나는 창덕궁 인정문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 궁 금상문( 金 商 門 ) 안에 있다 전사자의 자손이 속한다, 0 장 3 원, 공궐위( 空 關 衛 )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의 수직( 守 直 )을 맡는다. 0 장 3원 국출신청( 局 出 身 廳 ) 창덕궁 요금문( 魔 金 門 ) 안 영숙문( 永 蕭 門 ) 밖에 있다. 인조 정축년 (1637) 에 남한( 南 漢 )에 따라갔던 군병 출신자 1 천 3 백 84 명을 7국( 局 )으로 나누어 영숙문에 입직( 入 直 )하게 하였는데, 무용청( 武 勇 廳 )이 라고도 한다, 효종조에 수를 줄여서 3국을 만들었다가 또 4국을 만들었다. 현종 4년 (1663) 에 비로소 3국의 국마다 50 명으로 정했다. 숙종 을축년 ( 16 85) 에 3국에서 각각 10자리씩을 빼고 무예청( 武 藝 廳 ) 출신자로 보충하여 소속시켰다 정종 계묘년 (1783) 에 무예과( 武 藝 棄 ) 30 명을 제하여 장용영(셔 土 勇 營 )을 옮겨 설치했다가 순조 임술년에 장용영을 폐지하고 무예과 를 을축년 제도와 같이 3국에 다시 소속시켰다 0 별장( 別 將 ) 3 원, 능마아청( 能 應 兒 廳 ) 중 부 정선방( 貞 善 행)에 있다. 인조조에 창설하여 여러 장관( 將 官 )에게 병서( 兵 書 )를 고강( 考 講 ) 시키고 공부를 권장하는 일을 맡는다. 영종 을유년 Cl 765) 에 훈련원에 합쳤다. 0 당상 3 원, 낭청 4 원이다. 한려청( 漢 旅 廳 ) 효종대왕이 심양( 灌 陽 )에서 돌아올 때 8 성( 姓 )의 따라서 동으로 왔는데 그 자손을 口 口 국( 局 )에 붙이고, 한인 아병( 漢 A 牙 兵 왕, 중국 사람이 대장군, 천자 가 친히 지휘하는 군사)이라고 이름하였다. 정종 경술년 (1778) 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명례문( 明 禮 門 )에 입직( 入 直 )하는데, 숭지문(몇 智 門 )이라고도 한다 0 군관( 軍 官 ) 口 口 원이 다. 사자관청( 寫 字 官 廳 ) 口 부 口 口 방에 있으며, 사자관( 寫 字 官 ) 40원이다. 의장고( 嚴 f 大 庫 ) 중 부 정선방에 있다. 내고( 內 庫 )는 口 口 궁 口 口 문 口 口 에 있는데, 곧 고려 제도의 위위시( 衛 텀 휴) 이다 각전( 各 嚴 )의 의장을 맡으며, 병조 승여사( 乘 與 司 )에 속한다. 0 낭청 2 원 부장( 部 將 ) 겸직. 사산( 四 山 ) 처음에는 감역관( 藍 投 官 ) 4 원을 두어 서울 성 안의 동서남북의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시키는 등의 일을 나누어 맡았는데, 뒤에 참군( 參 軍 )으로 고쳤다. 서도( 西 道 ) 는 훈련도감에 붙이고, 동도는 어영청에 붙이고, 남도는 금위영에 붙이며, 북도는 총융청에 ω

58 붙였다. 0 각각 참군( 參 軍 ) 종 9품 1 원씩이다. 훈련도감( 訓 練 都 藍 ) 신영( 新 營 )은 서부 여경 방( 餘 慶 행)에 있는데, 선조 27 년 갑자년 Cl 594) 에 1 백 97 칸 반을 창설했다. 0 도제조 l 원, 제조 2 원, 대장( 大 將 ) 종 2품 중군( 中 軍 ) 종 2품 1 원씩, 별장( 別 將 ) 천총( 千 擔 ) 2 원씩, 국별 장( 局 別 將 ) 모두 정 3품 상국정 파총( 詳 局 廳 把 擔 ) 종 4 품 6 원이며, 종사관( 從 事 官 ) 종 6 품 4 원 중에 서 l 원은 문관( 文 官 )이 다, 금위 영 ( 禁 衛 營 )과 어 영 청 ( 細 營 廳 )의 동초관( 同 탬 官 ) 종 9품 34 원, 지구관( 知 뤘 官 ) 10 원, 기패관( 庫 牌 官 ) 20 원, 별무사( 別 武 士 ) 68 원, 군관( 軍 官 ) 17 원, 별군관( 別 軍 官 ) 10 원, 권무관( 動 武 官 ) 50 원, 국출신( 局 出 身 ) 1 백 50원이다. 상세한 것은 국 청( 局 廳 )에 있다 북영( 北 營 ) 창덕궁 서쪽 공북문( 媒 北 門 ) 밖에 있고, 영사[ 魔 字 ]는 2 백 35 칸이다. 영( 營 )의 남쪽에 또 군향색고( 軍 節 色 庫 )가 있고, 또 군자정( 君 子 享 )과 몽답정( 夢 路 후)이 있다. 순조 24 년 0824) 에 용호영( 龍 虎 營 )을 이곳에 옮겼다 북일영( 北 - 營 ) 북영 남쪽 에 있는데, 15 칸이다. 북사영( 北 四 營 ) 경희궁 단(떨) 밖에 있는데, 9 칸이다. 남영( 南 營 ) 창덕 궁 돈화문 밖 동쪽에 있는데, 32 칸이다 서별영( 西 別 營 ) 마포( 麻 浦 )에 있다. 동별영( 東 別 營 ) 옛 장용영(밤 勇 營 )에 있다. 양향청( 樓 館 廳 ) 남부 훈도방( 薰 關 행)에 있는데, 선조 26 년 (1593) 에 창설했고, 군수( 軍 需 )를 대주는 일을 맡아서 훈련도감 군사들의 옷 기계( 器 械 병기) 정 기( 族 題 ) 금고( 金 鼓 )의 자료 및 여러 가지 원역( 員 彼 )의 공포( 工 包 ) 요포( 料 布 급료로 주는 포목)의 수요( 需 要 )에 대비한다. 현종 7 년( 1666) 에 훈련도감으로부터 옮겨서 호조에 붙였다. 0 도제조 1 원, 제조 3 원, 종사관 1 원이다. 하도감( 下 都 藍 ) 남부 병철방( 明 哲 행)의 훈련원 남쪽에 있는데, 3 백 90칸이다 별영 OJI 營 ) 마포에 있는데, 현종 14 년에 세웠다. 선조 병신년 (1596) 에 훈국 군사들에게 급료를 주는 곳으로 설치했다고도 한다. 0 읍청루( 抱 淸 樓 )가 있 는데 강을 임해 있어 명승지라고 칭한다. 군향색고( 軍 館 色 庫 ) 남북영 남쪽에 있는데, 1 백 12 칸이다. 염초청(씹 碩 廳 ) 마전교( 馬 塵 橋 ) 개울의 남변에 있다. 0 숙종 갑술년 (1694) 봄에 갑자기 돈 자국이 기퉁 들보 담 벽에 박혀 있어 둥글퉁글 서로 이어져 모양이 매우 이상 하고 글자 획도 뚜렷하며, 처마끝 대들보 서까래 중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혹은 며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혹은 열흘동안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며, 또한 해가 지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 까닭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0 1 백 12 칸 이다. 광지영( 廣 智 營 ) 창경궁의 궁담 정북쪽 응봉( 鷹 홍) 아래에 있는데 1 백 15 칸이다 직방 ( 直 房 ) 돈화문( 敎 化 門 ) 밖에 16 칸,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14 칸 반, 흥화문( 興 化 門 ) 밖에 8 칸, 경모궁( 景 暴 宮 ) 어귀에 8 칸이 있다. 금위영( 禁 衛 營 ) 신영( 新 營 )은 중부 정선방( 貞 善 행) 금호 문( 金 虎 門 ) 밖에 있고, 영사( 營 舍 )는 3 백 62 칸이다. 인조조에 정초청( 精 妙 廳 )을 설치 했는데, 숙종 8 년 0682) 에 훈련군총(뢰 ii 練 軍 總 )을 감해서 그 중부 별대( 中 部 別 隊 )와 병조의 정초군 ( 精 妙 軍 )으로써 금위영( 禁 衛 營 )을 설치하고, 병조에서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영종 갑술년 (1754) 에 비로소 어영청의 예( 例 )와 같이 영( 營 )을 따로 설치했다. 0 도제조 제조 대장 ( 太 將 ) 중군( 中 軍 ) 별장( 別 將 ) l 원씩, 천총( 千 抱 ) 4 원, 기사장( 騎 土 將 ) 정 3품 3 원, 파총 5 원, 외방겸파총( 外 方 暴 把 總 ) 12 원, 종사관( 從 事 官 ) 2 원, 초관(뼈 官 ) 41 원, 교련관( 敎 練 官 ) 12 명, 기패관( 雄 牌 官 ) 10 명, 별무사( 別 武 士 ) 30 명, 군관( 軍 官 ) 5 명, 별군관( 別 軍 官 ) 10 명, 권무 군관( 勳 武 軍 官 ) 50 명 기사( 騎 士 ) 1 백 50 원, 별기위( 別 騎 衛 ) 32 명이다. 남영( 南 營 ) 개양문( 開 陽 門 ) 위에 있는데, 12 칸이다. 남별영( 南 別 營 ) 남부 낙선방( 樂 善 껴) 묵동(뿔 洞 )에 있는데, 1 백 39칸이다 영종 6 년 (173 이에 창설했다, 남창( 南 용) 남별영의 남쪽에 있는데, 1 백 1 칸이 다, 하남창( 下 南 용) 남별영의 북쪽에 있는데, 1 백 4칸이다 화약고( 火 藥 庫 ) 口 口 남창( 南 용)의 서쪽 건너 산기숨에 있는데, 17 칸이다. 서영( 西 營 ) 창덕궁 경추문( 景 秋 門 )의 서쪽 건너편에 있는데, 11 칸 반이다. 직방( 直 房 ) 경희궁( 慶 熙 宮 ) 어귀에 있는데, 8 칸이다 어영청( 倒 營 廳 )

59 신영( 新 營 )은 동부 연화방( 運 花 功 )에 있고, 5 백 5칸이다 인조 2년 (1624) 에 창설하고, 6년에 국( 局 )을 설치했다. 효종 3년 (1652) 에 비로소 군영( 軍 營 )을 두었고, 숙종 병술년 (1706) 에 1 영( 營 ) 5 부( 部 )의 제도로 고쳤다. 0 도제조 제조 대장 중군 별장 l 원씩, 천총 5 원, 별 후부 천총( 別 後 部 千 擔 ) l 원, 기사장( 騎 土 將 ) 3 원, 파총( 把 擔.) 5 원, 외방겸파총 1 원, 종사관 2 원, 초관 41 원, 교련관 12 명, 기패관 11 명, 별무사 30 명, 군관 38 명, 별군관 10 명, 권무군 관 50 명, 가전별초( 罵 前 ;51j 妙 ) 52 명, 기사 1 백 50명이다 남소영( 南 小 營 ) 남부 명철방( 明 哲 야) 남소문( 南 小 門 ) 동쪽에 있는데, 1 백 94 칸이다. 남창( 南 용) 남소영의 북쪽에 있는데, 1 백 37 칸이다. 화약고( 火 藥 庫 ) 남소영 안에 있는데, 52 칸이다. 동영( 東 營 ) 선인문( 宣 仁 門 ) 아래에 74 칸이 있고, 또 개양문( 開 陽 門 ) 아래에 10칸이 있다 북이영( 北 二 營 ) 예전에는 삼청동( 三 淸 洞 )에 있었는데, 뒤에 사직동( 社 樓 洞 )으로 옮겼다 현종 기유년에 세웠는데 68 칸이다, 집춘 영( 集 春 營 ) 창경궁 집춘문( 集 春 門 ) 밖 남쪽에 있는데, 16 칸이다. 직방( 直 房 ) 하나는 금호문 ( 金 虎 門 ) 밖에 있는데, 23 칸이요, 또 흥화문( 興 化 門 ) 밖에 10칸이 있다. 수어청( 守 쩔 廳 )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다. 예전에는 경희궁 오른쪽에 있었는데, 곧 옛 용호영( 龍 虎 營 )의 본영 ( 本 營 )이다. 인조 4년 (1626) 에 창설하여 광주( 廣 州 ) 등 진( 鎭 )의 군무( 軍 務 )를 절제( 節 制 )했 다. 숙종 9 년 (1683) 에 남한( 南 漢 )으로 진을 옮겼고, 18 년에 옛 제도로 환원했다. 영종 26 년 Cl 750) 에 또 남한으로 진을 옮겼다가 35 년에 다시 옛 제도로 환원했다. 정종 19 년 (1795) 에 또 남한으로 출진( 出 鎭 )했다. 0 뒤에 호조에 이속( 移 屬 )되어 본물( 本 物 주요한 물건)을 들 여 쌓았다. 0 사( 使 ) 정 2품 중군( 中 軍 ) 1 원씩, 진영장( 鎭 營 將 ) 3 원, 별장 2 원, 파총 2원, 초관 26 원, 교련관 17 원, 기패관 19 원, 별군관( 別 軍 官 ) 9 원, 수첩군관( 守 樓 軍 官 ) 61 원이다 조방( 朝 房 )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는데, 14 칸이다, 총융청( 憶 決 廳 ) 예전에는 북부 진장방( 鎭 長 功 )에 있었는데, 영종 26 년에 창의문( 影 義 門 ) 밖 연융대( 練 攻 臺 )에 옮겨 설치했으며, 신영 ( 新 營 )의 영사( 營 舍 )는 3 백여 칸이다. 인조 2년에 창설하여 수원( 水 原 ) 광주( 廣 州 ) 양주( 楊 州 ) 장단( 長 備 ) 남양( 南 陽 ) 등의 진( 鎭 )과 오영(죠 營 )의 군무( 軍 務 )를 절제( 節 制 )한다. 영종 정묘년( 174 7) 에 경리청( 經 理 廳 )을 폐지하고, 북한영성장( 北 漢 營 城 將 ) 이하를 본청에 소속시 켰고, 경오년에 또 경기 병사( 京 折 兵 使 )를 겸하여 북한( 北 漢 )에 출진( 出 鎭 )했다가, 경진년에 출진을 폐지하고 병사( 兵 使 )를 감했다. 정종조에 수원에 영( 營 )을 설치한 뒤에 수원진( 水 原 鎭 )의 군무를 절제했다가 폐지했다 헌종 병오년 0846) 에 총영( 擔 營 )이라고 개칭하였다가, 기유년에 복구하여 청( 廳 )을 설치했다 0 사 중군 1 원씩, 천총 2 원, 진관장( 鎭 管 將 ) 3 원, 파총 2 원, 초관 10 원, 교련관 15 명, 기패관 2 명, 군관 10 명, 본청군관( 本 廳 軍 官 ) 3 명, 별부 료군관( 別 付 料 軍 官 ) 2 명 감관( 藍 官 ) 2 영 수문부장( 水 門 部 將 ) 1 명 한량군관( 閒 良 軍 官 ) 1 백 50 명이다. 또 관성장( 管 城 將 ) 파총 l 원씩, 초관 6 원, 교련관 기패관 5 명, 수첩군관( 守 樓 軍 官 ) 2 명, 군기감관( 軍 器 藍 官 ) 1 명, 소임군관( 所 任 軍 官 ) 3 명, 부료관( 付 料 官 ) 20 명, 성문부장 ( 城 門 部 將 ) 3 명이 있는데 이상은 경리청( 經 理 廳 )으로부터 옮겨왔다. 책응소( 策 應 所 ) 창경궁 선인문(효 仁 門 ) 밖에 있다. 옛 장용영(밤 勇 營 )의 직방( 直 房 )이고, 곧 지금의 동영( 東 營 )으로, 군수물을 쌓아 두는 곳이다. 경리청( 經 理 廳 ) 중부 향교동( 獅 校 洞 )에 있고, 북한청( 北 漢 廳 )은 - 이상은 쓸데없이 낀 문구이다 - 태고사( 太 古 좋) 곁에 있는데, 숙종 38 년 Cl 712) 에 창설하 여 북한산성의 사무를 관리한다. 0 도제조 제조 냥청이 있었다. 영조 23 년 (174 7) 에 폐지 하여 총융청에 붙였다 평창( 平 용) 창의문(훌 義 門 ) 밖에 있는데, 상 하 두 창(용)이 있고, 또 연융대( 練 攻 훌)가 있다. 숙종 임진년에 창설했다. 0 부평( 富 平 ) 인천( 仁 川 ) 안산( 安 山 ). 양천( 陽 川 ) 양주( 楊 州 ) 용인( 龍 仁 ) 고양( 高 陽 ) 파주( 被 州 ) 과천( 果 川 ) 시흥( 始 興 ) 교 하( 交 河 )의 11 개 고을로부터 본청( 本 廳 )에 대동미( 大 同 米 )를 들여왔다. 0 지금은 총융청에 야 ω

60 붙였다. 용호영( 龍 虎 營 ) 처음에는 북부 양덕방( 陽 德 행) 에 있었는데 순조 24 년 (1824) 에 훈국 군향소( 訓 局 軍 館 所 ) 자세한 것은 북영( 北 營 ) 조에 있다. 로 옮겨 설치했다 0 영종 30년 Cl 754) 에 금군청( 禁 軍 廳 )을 용호영( 龍 虎 營 )으로 고치고, 7 번의 금군( 禁 軍 )을 총령( 擔 領 )했다 겸사복( 暴 司 樓 ) 내금위( 內 禁 衛 ) 우럼위(% 林 衛 )의 도합 7 백 명으로 l 청( 廳 )을 삼고 7 번 으로 나누었는데, 번마다 3 정 CT) 9 령( 領 ) 이다. 배종( 暗 從 )하고 입직( 入 直 )하는 일을 맡으며, 병조 판서가 통령( 統 領 )한다. 0 선전관 취재출신( 宣 傳 官 取 才 出 身 ) 48 원, 부장취재출신( 部 將 取 才 出 身 ) 15 원을 뽑아서 붙인다. 0 7 번 안에서 가후금군( 罵 後 禁 軍 ) 50 명을 뽑아 임금이 행차할 때에 시위( 待 衛 )한다- 순조 계사년 (1833) 에 내금위 1 백 명을 감해서 지금은 6 번이 되었다. 상세한 것은 내삼청( 內 三 廳 )에 있다. 0 당상 군관( 堂 上 軍 官 ) 16 명, 교련관( 敎 練 官 ) 14 명, 별부군관( 別 付 軍 官 ) l 백 20 명이다 조방( 朝 房 )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는데, 14 칸이 다. 마군영( 馬 軍 營 ) 금호문 밖에 있고, 청파( 淸 被 ) 노원( 盧 原 ) 두 역( 繹 )의 역마( 羅 馬 )가 병 조에 입소( 立 所 말을 대기 시키는 것)한다. 호위청(를 衛 廳 ) 장임( 將 任 )이 머무르는 데에 따 라서 옮겨 설치한다. 인조 원년 (1623) 에 4 청( 廳 )을 창설하여 호위(를 衛 )를 맡았는데, 뒤에 3 청으로 고쳤고, 숙종 3년 (1677) 에 4 정으로 환원했다가 뒤에 또 3 청이 되었고, 정종 원년 (1776) 에 또 합쳐서 1 청을 만들었다 0 대장( 大 將 ) 1 원, 별장( 別 將 ) 3 원, 군관( 軍 官 ) 3 백 50 원, 소임군관 3 원, 당상별부료군관 1 원이다. 직방( 直 房 ) 하나는 창덕궁 상서원( 尙 瑞 院 ) 서 쪽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정문(뿔 政 門 ) 밖에 있다. 포도청( 補 짧 廳 ) 좌청( 左 廳 )은 중부 정 선방( 貞 善 행) 파자교( 把 子 橋 ) 동북쪽에 있고, 우청( 右 廳 )은 서부 서린방( 瑞 購 행) 혜정교( 惠 政 橋 ) 남쪽에 있다. 본조에서 좌청과 우청을 창설하여 도둑과 사기치는 자를 잡고, 경( 更 )을 나누어 밤에 순찰하는 일을 맡겼다. 창설한 연조는 자세하지 않은데, 국조( 國 朝 ) 중기( 中 期 ) 에 세웠다고도 한다 0 대장 1 원 씩, 종사관 3 원씩, 부장( 部 將 ) 4 명씩, 무료부장( 無 料 部 將 ) 26 명, 가설부장( 加 設 部 將 ) 12 명이다. 0 분직( 分 直 )하는 부장은 8 명씩인데, 군사 14 명씩을 거느리고 도성 안팎을 순찰한다. 0 삼강문외금군( 三 江 門 外 禁 軍 )은 양청( 兩 廳 )에 나누어 속 하여 기찰( 讀 察 )하게 한다 순청(센 廳 ) 좌청은 중부 정선방에 있고, 우청은 중부 정청방( 漫 淸 야)에 있다. 본조에서 창설했고, 밤 순찰을 맡는다 창설한 연조는 자세하지 않은데, 개국 초에 세웠다고도 한다 0 장 당상이 정한 품계도 없고 정한 수도 없다. I 권설직( 權 設 職 ) ] 보양청( 輔 養 廳 ) 개국 초에 세자 세손이 나이가 어릴 때에 설치했는데, 강학청( 講 學 廳 )이라고도 부른다. 현종 때에 강학청을 창설했다 0 보양관( 輔 養 官 ) 口 口 품 口 원이다. 0 대군사부( 太 君 師 傳 ) 종 9품 왕자사부( 王 子 師 傳 ) 왕손교부( 王 孫 敎 傳 ) 종 9품 내시교관( 內 待 敎 官 ) 종 9품 동몽교관( 童 쫓 敎 官 ) 4 원이다. 봉조하( 奉 朝 貴 ) 15 원이다. 0 공신 ( 功 토)은 무슨 군( 君 ) 봉조하라 부르고, 나머 지 는 무슨 관( 官 ), 무슨 직 ( 職 ) 봉조하라고 부른 다. 0 실행 아래도 같음 정일품직자( 實 行 표- 品 職 者 실지로 정 l 품 관직에 있는 사람) 공 신 정 3품 공신 적장( 觸 長 )과 범인( 凡 人 ) 종 4품 실행 종 1 품 공신 종 3품 공신 적장 종 5품 범인 정 7품 실행 정 2품직자 공신 종 4 품 공신 적장 정 6품 범인 종 7품 실행 종 2품 직자 공신 종 4품 공신적장 종 6품 범인 종 8품 실행 정 3품 당상 관직자 공신 정 5품 공신 적장 정 9품 범인 정 9품이다 0 원래 통정대부( 通 政 大 夫 ) 이상으로 작산인( 作 散 A 실 무가 없는 직위에 전보된 사람)에게 녹( 錄 )을 붙여준 직( 職 )이었는데, 지금은 정년이 되어 물러난 다음에야 비로소 봉조하에 붙이며 정한 수는 없다. 부연사신(합 熊 使 톰 중국에 가는 사신) 동지겸사은정사(쪽 至 暴 謝 恩 正 使 ) 정 2품 부사( 副 使 ) 종 2품 서장관( 書 狀 官 ) 당하 정 3품 1 원씩, 당상 역관( 堂 上 譯 官 ) 2 원, 당하 역관( 堂 下 譯 官 ) 21 원이다. 그런데 의정( 議 政 )이 나 종반( 宗 班 )이 정 l 품 겸사은( 暴 謝 恩 ) 진주( 陳 奏 ) 등의 칭호로써 가게 되면 당상 역관 1 원 캔

61 과 자벽( 自 많)한 당하 역관 1 원을 더 買 ) 진향( 進 香 ) 진위( 陳 愈 ) 등의 사( 使 )는 당상 역관 2 원, 정하며, 사은( 謝 恩 ) 주청( 奏 請 ) 변무( 辦 표) 진하( 進 당하 역관 17 원이고, 고부사( 告 計 使 )는 당상 역관 1 원, 당하 역관 11 원이고, 문안사( 問 安 使 )는 당상 역관 2 원, 당하 역관 4 원이며, 한번 행차할 때마다 사자관( 寫 字 官 ) 화원( 畵 員 ) 양의사( 兩 醫 司 )의 의원( 醫 員 ) 운 대관( 雲 臺 官 ) 1 원씩이다 0 칙사( 動 使 )를 맞을 때에는 원접사( 遠 接 使 ) 정 2품 문례관( 問 禮 官 ) 口 口 품 1 명씩이고 관( 館 )에 머물러 있을 때는 관반사( 館 伴 使 ) 口 口 품 l 원이며, 칙사를 보낼 때는 반송사( 伴 送 使 ) 정 2품 1 원이다. 부왜사신(월 優 使 많 일본에 가는 사신) 통신정사 ( 通 信 正 使 ) 디 口 품 부사 口 품 종사관( 從 事 官 ) 口 口 품 l 원씩, 제술관( 製 述 官 ) 口 원, 당상 역관 3 원, 당하 역관 9 원, 양의사의 의원 사자관 2 원씩, 화원 1 원이다. 0 관백( 關 伯 일본 의 최고의 신하, 실권자)이 새로 서면 그가 사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를 기다려 3 명의 사 신을 차출해서 보내되 함께 가고 함께 오도록 하고 따로 다니지 못하게 한다. 0 대마도주 ( 對 馬 島 主 )가 강호( 江 戶 일본의 서울)로부터 돌아오면 문위역관( 問 황 譯 官 )을 차출해서 보낸 다. 0 대차왜( 大 差 慶 일본에서 사신으로 오는 고관)가 나오변 경접위관( 京 接 황 官 )을 차출하 여 보낸다. 산실청( 塵 室 廳 ) 중궁전( 中 宮 願 )과 세자빈궁( 世 子 續 宮 )이 임신한 달에 청( 廳 )을 설 치해서 기다려 거행한다. 0 권초관( 橋 草 官 ) 口 口 품 은 복력( 福 力 )이 있고 아들이 많은 사람 으로 차출한다. [ 잡직 공서( 雜 職 公 暑 ) 족친위( 族 親 衛 ) 종성( 宗 姓 임금의 일가)의 단문(챔 免 )과 이성( 異 姓 ) 의 시마(, 總 麻 석달복) 이상, 친왕( 親 王 임금의 아들 또는 형제)의 비( 紀 )의 시마 이상의 친 족, 세자빈( 世 子 續 )의 기친 (1 년 복을 입는 친족)이 속한다. 선왕( 先 王 )과 선왕후에 관해서도 같다. 내시부( 內 待 府 ) 북부 준수방( 俊 秀 껴)에 있다. 개국 초에 환시(졸춤) 삼부( 三 府 )를 두어 대궐 안의 음식을 감독하는 일, 명령을 전달하는 일, 소문( 橋 門 )하고 소제하는 일을 맡겼다. 0 상선( 尙 體 ) 종 2품 상온( 尙 臨 ) 상전( 尙 傳 ) 상단( 尙 月 ) 응방( 鷹 행) 체아( 週 兒 ) 대전 설리( 大 嚴 廳 里 ) 주방( 酒 房 ) 대객당상( 對 客 堂 上 ) 왕비전 승전색( 王 紀 嚴 承 傳 色 ) 설리( 蘇 里 ) 체아 상호( 尙 孤 ) 대전 응방 궁방(런 房 ) 왕비전 주방( 王 紀 嚴 酒 房 ) 문소전 설리( 文 昭 願 醒 里 ) 세자궁 장번( 世 子 宮 長 짧) 상탕( 尙 努 ) 대전 상고( 大 願 뼈 庫 ) 등촉방( 燈 爛 房 ) 다인설리 ( 多 人 醒 里 ) 감농( 藍 農 ) 세자궁 설리( 世 子 宮 옳 里 ) 상세( 尙 洗 ) 대전 장기( 大 願 掌 器 ) 장무 ( 掌 務 ) 화약방( 火 藥 方 ) 사약방( 司 鎬 房 ) 장내원( 掌 內 짧) 왕비전 등촉방( 王 紀 願 燈 爛 房 ) 문 소전 진지( 文 昭 願 進 止 ) 세자궁 주방( 世 子 宮 酒 房 ) 빈궁 설리( 複 宮 靜 里 ) 주방 상촉( 尙 爛 ) - 대전문 차비( 大 願 門 差 備 ) 왕비전문 차비( 王 뻐 願 門 差 備 ) 장무( 掌 務 ) 왕세자궁문 차비 각 궁 설리문 차비 상설( 尙 設 ) 상제( 尙 除 ) 상문( 尙 門 ) 상경( 尙 更 ) 상명( 尙 행)에서 종 9품에 이르기까지 도합 1 백 40 원이 있다, 0 대전 장번( 大 嚴 長 짧)은 정한 수가 없고, 출입번( 出 入 짧) 42 원, 왕비전 출입번 12 원이요, 세자궁 장번은 정한 수가 없고 출입번 12 원, 빈궁 출입 번 8 명 이 다. 0 각처 에 상직 ( 上 直 )하는 소환( 小 줌)은 90 명 이 다. 내 반원( 內 班 院 ) 경 복궁 경 회 남문( 慶 會 南 門 ) 서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창덕궁 선정문(효 政 門 ) 안 동쪽 에 었는데, 연산군 때에 철거했다가 중종반정( 中 宗 反 正 ) 뒤에 다시 두었다. 0 장렬왕후( 莊 烈 王 尼 )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0 김종직( 金 宗 直 )의 기문( 記 文 )이 있다. 액정서( 被 健 暑 ) 각 궁 궐 안에 있다. 개국 초에 두었는데, 전알( 傳 調 ) 및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를 바치는 일, 대 궐 문을 거는 일, 대궐 뜰에 포설( 輔 設 )하는 일을 맡는다. 0 사알( 司 調 ) 1 명, 사약( 司 續 ) 1 명, 부사약( 副 司 鎬 ) 1 명, 사안( 司 案 ) l 명, 부사안( 副 司 案 ) 3 명, 사포( 司 輔 ) 2 명, 부사포( 副 司 輔 ) 3 명, 사소( 司 補 ) 6 명, 부사소( 副 司 橋 ) 9 명이다. 배설방( 排 設 房 ) 창덕궁 숙장문( 簡 章 門 ) 밖에 있는데, 어막( 倒 幕 )을 포설하는 일을 맡은 곳이다. 무예청( 武 藝 廳 ) 각 궁궐 안에 있다 있? ι

62 인조 8년 (1630) 에 창설하여 30 명을 두었는데, 뒤에 10 명을 늘렸다. 숙종 을묘년 (1675) 에 20 명을 늘렸고, 영종 무진년에 40 명을 늘혔으 며, 정종 을해년 (1795) 에 50 명을 늘렸다가 을 사년에 10 명을 줄였고, 순조 임술년 (1802) 에 58 명을 늘려서 도합 1 백 98 명인데, 좌번( 左 짧)과 우번( 右 짧)으로 나누었으며 각각 통장( 統 長 ) l 원이 있어서 거느린다 0 훈국의 마군 ( 馬 軍 )과 보군( 步 軍 ), 별감 족속( 別 藍 族 屬 ) 중에서 기운이 있고 신수가 좋고 기예( 技 藝 )에 능 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기예를 늘 익혀 별초군 (,'51j 妙 軍 )이라 부르고, 또 별초군 중에서 후 보를 뽑아 의망( 擬 望 )하면 낙점( 落 點 )을 받아 그 청( 廳 )의 별감으로 삼는다. 궐내각차비( 關 內 各 差 備 ) 대전 반감( 飯 藍 ) 6 명, 별사옹( 別 司 賽 ) 14 명, 탕수색( 覆 水 色 ) 14 명, 상배색( 狀 排 色 ) 10 명, 적색(종 色 ) 6 명, 반공( 飯 I) 12 명, 포장( 泡 l!r) 2 명, 주색( 酒 色 ) 4 명, 다색( 茶 色 ) 4 명, 병공( 簡 =디 2 명, 증색( 薰 色 ) 10 명, 등촉색( 燈 爛 色 ) 4 명, 성상( 城 上 ) 34 명, 수병( 水 兵 ) 18 명, 별감( 別 藍 ) 46 명이며, 왕비전 반감( 飯 藍 ) 4 명, 별사용 6 명, 탕수색 4 명, 상배색 4 명, 적색 4 명, 반공 6 명, 포장2 명, 주색 2 명, 다색 2 명, 병공 2 명, 증색 4 명, 등촉색 4 명, 성상 8 명, 수 공( 水 工 ) 6 명, 별감 16 명이요, 세자궁 반감 4 명, 별사용 4 명, 탕수색 4 명, 상배색 4 명, 적색 4 명, 반공 6 명, 포장 2 명, 주색 2 명, 다색 2 명, 병공 2 명, 증색 4 명, 등촉색 2 명, 성상 10 명, 수공 4 명, 별감 18 명이며, 세손궁에 반감 2 명, 등촉색 2 명, 주색 2 명, 성상 2 명, 별감 10 명이다. [ 혁폐 공서( 章 廢 公 暑 ) 승녕부( 承 寧 府 ) 정종 2년 (140( )에 태조를 높여서 태상왕( 太 上 王 )으 로 하고 관직을 두고 관부를 설치하였다. 0 태종 3 년 0403) 에 내장고( 內 藏 庫 )를 소속시켰 다. 공안부( 悲 安 府 ) 태종 경진년 (1400) 에 정종을 높여 상왕( 上 王 )으로 하고 관부를 세웠다. 0 3년에 보임고( 保 愈 庫 )를 소속시켰다. 인녕부( 仁 寧 府 ) 태종이 정종 순덕왕 대비( 定 宗 順 德 王 大 紀 ) 김씨를 높여서 부( 府 )를 세웠다. 경흥부( 敬 興 府 ) 태조 원년에 중궁( 中 宮 )을 위하여 부를 세우고 요속( 際 屬 )을 두었다 경승부( 敬 承 府 ) 태종 2년에 세자를 위하여 부를 설치하였 다 인수부( 仁 壽 府 )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부를 설치하였다- 려 사평부( 司 平 府 ) 개국 초에 고 제도에 따라 삼사( 三 司 )를 두어 봉급을 주고 재정 지출을 계획하는 일을 맡겼는데, 태종 원년에 사평부라고 고쳤다 0 폐지한 연조는 알 수 없다. 초기에 있었다. 충익위( 忠 翊 衛 ) 북부 양덕방( 陽 德 해)에 수령부( 壽 寧 府 ) 영락( 永 樂 ) 연간 있는데 개국 초에 창설했다 원종공 신( 原 從 功 뭄 개국공신)들의 관부이다 뒤에 폐지하여 충훈부( 忠 勳 府 )에 합쳤다 광해군 때에 다시 설치했다가 곧 폐지하여 병조에 붙였고, 인조 때에 다시 충훈부에 합쳤으며, 숙종 2년 (1676) 에 다시 병조에 붙였고, 6 년에 또 충훈부에 합쳤다가 15 년에 다시 병조에 붙였고, 27 년에 다시 충훈부에 합쳤다. 0 도사( 都 事 ) 2 원. 장례원( 掌 慧 院 ) 공조 남쪽에 있는데, 개 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형조 도사(쩌뽑 都 事 )를 두어 노예의 부적( 續 籍 )과 판결( 判 決 )에 관한 일을 맡았다. 세조 12 년 0466) 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선조 임진년에 난민( 亂 民 )들 이 불태웠다, 영종 40 년 (1764) 에 폐지하여 형조 본원에 도로 붙였다가 뒤에 보민사( 保 民 司 ) 로 만들고, 51 년에 아주 폐지했다. 0 판결사( 判 決 事 ) 정 3품 l 원, 사의( 司 議 ) 정 5품 3 원, 사 평( 司 評 ) 정 6 품 4 원이 있었다. 종부시( 宗 積 폭) 처음에는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었는데, 뒤에 북부 관광방( 觀 光 행)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전중시( 嚴 中 츄)를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종부시를 두어 선원보첩( 落 源 諸 牌 ) 을 지어 기록하는 일과 종실( 宗 室 )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맡겼다, 중종 때에 효사전( 孝 思 嚴 )을 폐지하여 본시( 本 놓)로 하였고, 지금 임금 2년 (1865) 에 종친부( 宗 親 府 )에 옮겨 붙였다, 0 도제조 제조 2 원씩, 정( 正 ) 1 원이고, 첨정은 감하며, 주부 직장 l 원씩이다. 0 윤자영( 尹 子 傑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0 소각( 小 聞 ) 이 있어서 선원 보략( 瓚 源 語 略 ) 과 선원록(짧 源 錄 ) 을 봉안( 奉 安 )한다 제생원( 濟 生 院 )

63 북부 양덕방( 陽 德 행)에 있다. 태조 6 년 (1397) 에 창설하여, 약의 재료를 저장해 두고 가난한 백성의 병을 치료하고 또 각도( 各 道 ) 각리( 各 里 )의 의학원( 醫 學 院 )에 교수( 敎 授 )를 나누어 보내서 약을 주어 병을 고쳤다. 뒤에 모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사섬시( 司 體 풍) 예전에는 동부 숭교방(몇 敎 행)에 있었는데, 현종 때에 그 옛터를 성균관( 成 均 館 )에 하사 하여 반촌( 伴 村 )을 보충하였다. 지금은 서부 사직동( 社 樓 洞 )에 있다 태종 때에 사섬서( 司 體 暑 )를 두었는데 뒤에 시(좋)로 승격하였다. 돈을 만드는 일과 외거노비( 外 居 如 輝 제 집에서 사는 노비)의 공포( 頁 布 베 를 세금으로 바치는 세의 한 가지)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인조 병자란 뒤에 폐지하여 제용감( 濟 用 藍 )에 붙였다가 22 년에 다시 두었다 숙종 31 년 (1705) 에 폐지하여 호조에 붙여서 사섬색( 司 體 色 )이라 불렀으며, 상용[ 經 用 ]하는 백휴지( 白 休 紙 )를 맡 는다. 0 정 부정 첨정 주부 직장 l 원씩이 있었다. 내부시( 內 府 촉) 개국 초에 고려 제도 를 따라 설치하여, 재화( 財 貨 )를 창고에 저장하고 복식( 服 節 )을 내고 들이며, 등촉( 燈 獨 )을 벌려놓는 등의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자세하지 않다. 풍저창(뿔{ 諸 홍) 북 부 의통방( 義 通 행)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했고, 쌀과 콩 초둔( 草 휩) 지지( 紙 地 ) 등의 물건을 맡았다. 뒤에 폐지하여 장흥고( 長 興 庫 )에 붙였고, 지금은 내시( 內 待 ) 의 봉급, 노인의 세찬( 歲 購 새해에 음식을 내리는 것), 사신( 使 토)에게 내려주는 쌀을 맡는 다. 0 수( 守 ) 주부 직장 봉사 부봉사 l 원씩이 있었다. 의염창( 義 醒 용)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하여 염세( 靈 親 )에 관한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전농사( 典 農 司 ) 성현( 成 現 )의 용재총화( 爛 鷹 蕭 話 ) 에 말하기를, 김자갱( 金 子 鍵 )이 판사가 되고 성간( 成 況 )이 직장이 되었는데, 뒤에 폐지하여 군자태창( 君 資 太 흥)이 되었다. 하였다. 가각고( 架 聞 庫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도서[ 圖 籍 ]를 모아 저장하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해전고( 解 典 庫 ) 개국 초에 고려 제도 를 따라 설치하여 전당( 典 當 )에 관한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사 온서( 司 臨 暑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술과 단술 바치는 일을 맡았으며, 서부 적선방( 積 善 행)에 있었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0 영( 令 ) 주부 직장 봉사가 1 명씩이 있었다 사축서( 司 좁 暑 ) 무악( 母 폼) 남쪽에 있고 분서( 分 暑 )는 남부 회현방 ( 會 賢 행)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전구서( 典 願 暑 )를 두어 여러 가지 가축 먹이 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사축서로 이름을 고쳤다 - 인조 15 년 0637) 에 폐지하여 전생서( 典 뺨 暑 )에 합쳤고, 영종 43 년 Cl 767) 에 호조에 옮겨 합쳐서, 양 돼지 염소 거위 [ 庸 確 ] 집오 리 등을 진배( 進 排 )하는 일을 나누어 맡았으며 가두어 기르는 양과 염소는 40마리이다. 0 제조 사축( 司 좁) l 원씩과 별제 2원이 있었다 - 귀후서( 歸 ] 享 暑 ) 용산강( 龍 山 江 )에 있다. 분서 ( 分 暑 )는 납부 회현방에 있다 태종 6년 (1406) 에 창설하여 관곽( 相 鄭 )을 만들어서 팔고, 나 라의 예장( 禮 聲 )에 공급하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정종 3 년 (1779) 에 폐지하여 선공감( 續 工 藍 )에 합쳤다 0 제조 1 원, 별제( 別 提 ) 6 원이 있었다 0 정 이오( 鄭 以 콤)의 기문( 記 文 )이 있 다. 소격서( 昭 格 暑 )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었는데 본조에서 창설했다 삼청성신(르 淸 星 辰 )에게 초제( 醒 察 ) 지내는 일을 맡았었다 삼청전( 三 淸 嚴 )이 있어 옥황상제( 玉 皇 上 帝 ) 태상 노군( 太 上 老 君 ) 보화천존( 普 化 天 尊 ) 재당제군( 掉 鐘 諸 君 ) 등 10 여위( 位 )를 제사지내는데 모 두 남자의 모습이다. 태일전( 太 一 嚴 )에서는 칠성제수( 七 星 諸 宿 )를 제사지내는데, 모두 머리 깎은 여자의 모습이다. 또 안팎 여러 제단( 奈 벨)이 있어 사해용왕( 四 海 龍 王 ) 신장( 神 將 ) 명부시왕(홍 府 十 王 ) 수부제신( 水 府 諸 神 )을 제사지내는데, 제명( 題 名 )한 위판( 位 板 )이 무려 수백이다 중종 14 년 (1519 ) 에 폐지했다가 25 년에 다시 설치했고, 선조 임진란 뒤에 드디어 폐지했다 0 곁에 우물이 있는데, 옛적에 초제할 때 사용하던 것이므로 성제정( 星 짱 井 )이라

64 고 한다. 또 아래에 보인다, 0 제조 영 1 원씩, 별제 참봉 2원씩이 있었다. 도염서( 都 梁 暑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천에 물들이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하여 제용 감에 합쳤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열무서( 關 꼬 暑 ) 무당과 박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활인서 ( 活 人 暑 )가 되었다 창설하고 폐지한 연조는 알 수 없다. 전함서( 典 廳 暑 ) 중부 정청방( 憶 淸 행)에 있고, 외사( 外 司 )는 서강( 西 江 )에 있다 개국 초에 사수감( 司 水 藍 )을 두어 전함( 戰 職 )을 만들고 고치 며 수송을 감독하는 등의 일을 맡았었다. 세조 을유년 (1465) 에 전선( 典 船 )이 라 고치고,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경기 좌우도수참( 京 折 左 右 道 水 站 )에 붙였다가, 뒤에 폐지하여 공조에 붙였다. 0 도제조 제조 제검( 提 檢 ) 별좌( 別 坐 ) 별제( 別 提 ) l 원씩, 수운 판관( 水 運 判 官 ) 2 원, 해운 판관 1 원이 있었다. 0 남곤( 南 홍)의 기문( 記 文 )이 있다 전연사 ( 典 消 司 ) 경복궁 홍례문( 弘 禮 門 ) 서쪽에 있는데 본조에서 설치하여 궁궐의 물이 잘 흐르도 록 하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폐지하여 선공감에 합쳤다. 0 제조 l 원, 제검 별좌 별제 모두 5 명, 직장 2 원, 봉사 2 원, 참봉 6 원이 있었다. 수성금화사( 修 城 禁 火 司 ) 종루( 鍾 樓 )의 동쪽에 있는데, 본조에서 설치하였다. 도성( 都 城 )과 궁성( 宮 城 )을 고쳐 쌓는 일, 그리고 궁궐 관공서 방리(행 里 )의 집집마다 불끄는 등의 일을 맡았고 야간 출순소( 出 센 所 )를 주관했 다 뒤에 폐지하여 불끄는 일은 한성부에 붙이고, 성을 고치는 일은 병조에 붙였다, 0 도제 조 1 원, 제조 2 원, 제검 4 원, 별좌 6 원, 별제 3 원이 있었다. 보민사( 保 民 司 ) 호조의 서쪽 가 에 있었으니, 곧 옛날 장례원이다 영종 40년 Cl 764) 에 창설하여 형조와 한성부의 속전( 購 錢 죄값으로 내는 돈, 벌금과 비슷함)을 맡았는데, 51 년에 다시 폐지하고, 지금은 호조의 주요 한 물건을 들여 쌓는다 예의상정사( 禮 嚴 詳 定 司 ) 예의상정소라고도 부른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했다가 뒤에 폐지했다 전제상정소( 田 制 詳 定 所 ) 세종 26 년 (1444) 에 창설 했는데, 뒤에 폐지했다 경복궁 제거사( 景 福 宮 提 學 司 ) 태조 3 년 (1394) 에 창설하여 소제하는 일과 자물쇠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가 뒤에 폐지했다 종학( 宗 學 ) 세종 원년에 창설하여 종실( 宗 室 )을 바로잡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연산군 때에 폐지했고, 중종 초에 다시 설 치했다가 뒤에 또 폐지했다. 0 도선( 導 善 ) 전훈( 典 訓 ) 1 원씩이요, 사회( 司 讀 ) 2 원이 있었 다 0 경복궁 제거사부터는 모두 폐지한 연조를 알 수 없다. 북학( 北 學 ) 태종 때에 증설( 增 設 )했다가 곧 폐지 했고, 뒤 에 자수원( 慧 壽 院 )이 되 었다 현종 2년 (1661) 에 원( 院 )을 헐고 다 시 세웠는데, 흉년때문에 준공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남구만( 南 九 萬 )이 북학교수( 北 學 敎 授 ) 였다. 언문청( 證 文 廳 ) 세종 때에 설치했다 신숙주( 申 淑 冊 ) 성삼문( 成 三 問 )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짓게 했다. 내경청( 內 經 廳 ) 세조 때에 대궐 안에 청을 설치하고, 조정의 선비 홍응 ( 洪 應 ) 강희 안( 姜 希 頻 ) 성 임 ( 成 任 ) 정 난종( 鄭 蘭 宗 ) 조치 규( 趙 雅 圭 ) 이 기 수( 李 期 똥) 등에 게 명하여 불경( 佛 經 )을 쓰게 했다. 대청관( 大 淸 觀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하여 독( 廳 천자 대장군 왕을 표시하는 큰 기( 題 ))을 간직해 두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 데, 연조는 알 수 없다. 비계사( 備 成 司 ) 연산군 때 창설하여 철갑( 鐵 甲 )을 맡았다. 뒤에 폐지 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홍귀달( 洪 貴 達 )의 기문이 있다. 응방( 鷹 행) 개국 초에 좌우방 ( 左 右 행 )을 두었다가, 숙종 41 년 Cl 715) 에 폐지했다. 장용영(밝 勇 營 ) 동부 연화방( 運 花 행)에 있다 정종 을사년 Cl 785) 에 창설하고 11 년에 이 현 별궁(젖뼈 別 宮 )을 영( 營 )으로 삼았다. 순 조 원년 (180( )에 폐지하고 지금은 훈국( 訓 局 )의 동영( 東 營 ), 혜청( 惠 廳 선혜청)의 동창( 東 용)이 되었다 연방원( 聯 芳 院 ) 연산군 갑자년 이후로 몸매가 좋고 예쁜 부녀자들을 대궐 안 으로 뽑아 들였는데, 처음에는 백으로 헤아리다가 끝내는 만으로 세게 되기에 이르렀다. 기 생의 이름을 고쳐서 운평( 運 平 ) 이라 하고, 대궐에 들어간 기생을 흥청( 興 淸 )이라 하며, 따라 들어간 사람을 계평( 繼 平 ) 속홍( 續 紅 )이라 하고, 악공( 樂 工 )을 고쳐서 광희( 廣 熙 )라 하고, m ω

65 이들이 있는 곳을 연방원이라고 불렀다. 원각사( 圓 覺 폼)를 국( 局 )으로 하고, 또 의성위( 宜 城 힘) 남치원( 南 致 元 )의 집을 함방원( 含 芳 院 )으로 하며, 제안대군( 齊 安 大 君 )의 집을 부양원(옳 陽 院 )으로 하고, 견성군( 觀 城 君 )의 집을 진향원(& 香 院 )으로 하여, 흥청 및 현수( 鉉 手 )들을 열을 지어 거처하게 했다 취흥원( 聚 紅 院 ) 창경궁 명정전( 明 政 願 ) 오른쪽에 있었는데, 흥청 가운데 뽑힌 사람이 살았고, 병을 앓는 사람은 청흠각( 淸 款 聞 )에 있었다 자수궁( 慧 壽 宮 )을 회록각( 會 錄 聞 )으로 삼아서 일찍이 임금의 사랑을 받은 일이 있는 사람을 살게 했다. 두탕 호청사( 柱 漫 護 淸 司 ) 나인( 內 人 ) 가운데에서 예쁨이 쇠퇴한 사람이 살았다. 호화고( 護 華 庫 ) 흥청들의 음식 재료를 저장했다. 전비사( 典 備 司 ) 흥청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추혜서( 追 惠 暑 ) 나인을 호상( 護 喪 )하던 곳이다, 광혜서( 廣 惠 훌) 효사묘( 孝 思 蘭 ) 곁에 있는데, 나인을 제 사지내 는 곳 이다. 포염사( 布 梁 司 ) 아상복(않램 服 )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 봉순사( 奉 順 司 ) 사 냥하는 데 쓰는 그물의 도구를 실어 나른다. 이상은 모두 연산군 때에 설치한 것으로 곧 폐 지했다. 충의위( 忠 義 衛 ) 공신( 功 뭄)의 자손이 속했다. 충찬위( 忠 贊 衛 ) 원종공신( 原 從 功 토)과 자손 지속 이 상과 첩의 아들로서 종가( 宗 家 )를 이은 사람이 속했다. 충순위( 忠 順 衛 ) 이성( 異 姓 )으로 시마( 總 麻 )복을 입는 외 6촌 이상, 친왕비( 親 王 紀 )의 사마복을 입는 외 5촌 이상의 친 족이 속한다. 선왕 선후( 先 王 先 尼 )에 관해서도 같다 또 동반( 東 班 문신) 6품 이상, 서반( 西 班 무신) 6품 이 상으로 일찍이 실지 높은 벼슬을 지냈던 사람, 문과와 무과 출신 생원 진 사, 나라에 공 이 있는 사람의 자손과 사위 아우 조카가 속한다. 친군위( 親 軍 衛 ) 영안( 永 安 ), 지금의 함경도 (I 或 鏡 道 ) 사람에서 남도와 북도 각각 20 명씩을 붙인다. q 니

66 신증동국여지숭람 제 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 1 권 경 도( 京 都 ) 문소전( 文 昭 願 ) 성 안에 있는데, 태조 신의왕후( 神 짧 王 텀)의 혼전이며 어진( 倒 員 )을 봉안하 였다. 처음 이름은 인소( 仁 昭 )였는데 후에 문소( 文 昭 )로 고치고 인하여 원묘( 原 願 )로 삼았다 경복궁의 문소전이 아니다. 세종조에 새 문소전을 궁성 안에 세우고, 태조 태종의 위판을 합하여 모시니, 예전 문소전은 그대로 폐지되었다. 인안전( 仁 安 願 ) 경복궁 안에 있다. 0 신 덕왕후( 神 德 王 尼 )의 혼전이다. 인덕전( 仁 德 嚴 ) 인덕궁에 있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혹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하고, 흑은 인덕궁( 仁 德 宮 )으로 개국 초의 이궁( 離 宮 )이었다 하는데, 자 세하지 않다 정종( 定 宗 ) 정안왕후( 定 安 王 팀)의 혼전이다 광효전( 廣 孝 嚴 ) 성 안에 있는데 태종 원경왕후( 元 敬 王 텀)의 혼전이며 그대로 원전( 原 嚴 )이 되었다 세종조에 문소전에 옮겨 봉안하니, 폐지되었다 휘덕전( 輝 德 嚴 ) 장소가 자세하지 않은데 혹은 별궁에 있었다 하고, 혹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한다 세종 소헌왕후( 昭 憲 王 尼 )의 혼전이다. 경희전( 景 禮 嚴 ) 소재 지가 자세하지 않은데, 흑은 동궁의 자선당( 資 善 堂 )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에 또 영창전( 永 昌 願 ) 태경전( 泰 慶 願 ) 두 전이 되었다 현덕왕후( 顯 德 王 텀)의 혼전이다. 영창전( 永 昌 願 ) 수강궁( 壽 康 宮 ), 지금 창경궁에 있는데, 세조의 혼전이다. 태경전( 泰 慶 嚴 ) 장소가 자세 하지 않다 정희왕후( 貞 熹 王 텀)의 혼전이다. 경안전( 景 安 願 ) 경복궁 안에 있다 예종 장순왕 후( 章 順 王 텀)의 혼전이다. 소경전( 昭 敬 願 ) 경복궁 안에 있다. 성종 공혜왕후(옆 惠 王 텀)의 혼 전이다 - 효경전( 孝 敬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0 정현왕후( 貞 顯 王 텀)의 혼전이다 문덕전( 文 德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문정왕후( 文 定 王 尼 )의 혼전이다. 영모전( 永 暴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0 인종의 혼전이다. 효경전( 孝 敬 嚴 ) 경복궁 안에 있다. 인성왕후( 仁 聖 王 尼 )의 혼전이다. 경 모전( 敬 幕 願 ) 창경궁 안에 있다. 0 인순왕후( 仁 順 王 尼 )의 혼전이다. 영모전( 永 寒 願 ) 경운궁 ( 慶 運 宮 )에 있는 데, 곧 당시의 이궁( 離 宮 )이며 선조의 혼전이다 효경전( 孝 敬 願 ) 남별전( 南 別 嚴 )에 있는데, 곧 지금 영희전( 永 禮 觀 )이며 의인왕후( 鉉 仁 王 尼 )의 혼전이다. 효사전( 孝 思 願 ) 경덕궁( 慶 德 宮 )에 있는데, 인목왕후( 仁 種 王 텀)의 혼전이다. 숭은전(몇 恩 嚴 ) 남별궁에 있는데, 인헌왕후( 仁 敵 王 尼 )의 혼전이다 영사전( 永 思 願 ) 창덕궁 안에 있는데, 인조의 혼전이다. 숙녕 전( 關 寧 願 ) 창경궁 안에 있다. 0 인렬왕후( 仁 烈 王 尼 )의 혼전이다. 효사전( 孝 뾰 嚴 ) 창경궁 안 에 있다 0 장렬왕후( 莊 烈 王 尼 )의 혼전이다. 경모전( 敬 寒 觀 ) 창덕궁 안에 있다. 0 효종의 혼전이다. 경사전( 敬 뽕 嚴 ) 경덕궁 안에 있다. 0 인선왕후( 仁 宣 王 텀)의 혼전이다. 효경전( 孝 敬 嚴 ) 창덕궁 안에 있다 0 현종의 혼전이다 영모전( 永 흙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명성왕 후( 明 뿔 王 텀)의 혼전이다 효령전( 孝 寧 嚴 ) 경덕궁 안에 있다 0 숙종의 혼전이다 영소전( 永 昭 嚴 ) 경덕궁 안에 있다. 0 인경왕후( 仁 敬 王 텀)의 혼전이다 경녕전( 敬 寧 願 ) 창경궁 안에 있 다. 0 인현왕후( 仁 顯 王 尼 )의 혼전이다 효소전( 孝 昭 嚴 ) 창덕궁 안에 있다. 0 인원왕후( 仁 元 王 尼 )의 혼전이다. 경소전( 敬 昭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경종의 혼전이다. 영휘전( 永 徵 願 ) 창덕궁 안에 있다. 0 단의왕후( 端 露 王 텀)의 혼전이다. 경휘전( 敬 徵 願 ) 경희궁( 慶 熙 宮 ) 안에 있다. 0 션의왕후( 宣 廳 王 尼 )의 혼전이다. 효명전( 孝 明 願 ) 경희궁 안에 있다. 0 영종의 혼전 이다. 휘령전( 徵 寧 嚴 ) 창덕궁 안에 있다 0 정성왕후( 貞 聖 王 텀)의 혼전이다 효안전( 孝 安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정순왕후( 貞 純 王 尼 )의 혼전이다. 디 口 전 口 口 궁 안에 있다 0 진종의 혼전이다 연복전( 延 福 願 ) 口 口 궁 안에 있다 0 효순왕후( 孝 純 王 텀)의 흔전이다 효원전( 孝 元 觀 ) 창덕궁 안에 있다. 정종의 혼전이다 - 효희전( 孝 熺 嚴 ) 창경궁 안에 있다 0 효의왕후 ( 孝 廳 王 텀)의 혼전이다. 口 口 전 창경궁 안에 있다. 0 순조의 혼전이다, 효정전( 孝 定 嚴 ) 창덕 궁 안에 있다. 0 순원왕후( 純 元 王 尼 )의 혼전이다. 口 口 전 창경궁 안에 있다. 0 효명세자( 孝 ιm

67 明 世 子 )의 혼전이다 휘정전( 徵 定 散 ) 창경궁 안에 있다 0 효현왕후( 孝 顯 王 텀)의 혼전이다. 효문전( 孝 文 願 ) 창경궁 안에 있다. 0 철종의 혼전이다 口 口 궁 창경궁 안에 있다. 0 혜빈 ( 惠 績 )의 혼전이다. 현사궁( 顯 思 宮 ) 창경궁 안에 있는데, 유빈( 紙 績 )의 혼전이다. 0 이상의 혼전과 궁은 모두 부묘( 附 顧 ), 입묘( 入 蘭 )한 후에 폐지되었다. ω

68 ~t혈풍 보원정비 가본계획연구 3. 반기요람

69

70 만기요람 군정편 1( 軍 政 編 -) 순라(센 選 ) 총례( 總 例 ) 대궐 안에는 위장과 부장( 部 長 )이 각각 군사 5 명씩을 거느리고 경( 更 )을 나누어 순행한다. 명례문( 明 禮 門 ) 안에서 통화문( 通 化 門 )까지에 이른다. 초경에 만일 동소( 東 所 )의 위장과 서 소의 부장이 순행한다면, 다음 2경에는 남소의 부장과 북소의 위장이 순행하여 이러한 순서 로 돌려가며 순행한다. 병조와 도총부의 번드는 낭관은 밤마다 순행 검찰하고, 문의 자물쇠 를 검사한다. 병조는 건양문에서 서쪽이고 도총부는 건양문에서 동쪽이다. 궁성 밖에는 훈 련 도감과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각 영의 번드는 초관 1 명과 군사 20명으로 경( 更 )을 나누 어 순행하되 남영( 南 營 )은 초경( 初 更 ), 서영( 西 營 )은 2 경이요, 광지영( 廣 智 營 )은 삼경( 三 更 ), 집춘영( 集 春 營 )은 4경 동영( 東 營 )은 5 경으로 하여 한 바퀴 돌고는 다시 시작하여 각각 두차 례씩 행순( 行 젠)한다 0 삼군문( 三 軍 門 )의 담당구역 [ 字 內 ]. 훈련 도감은 집춘문의 서쪽 수 문( 水 門 )에서 공북문(# 北 門 )까지다. 0 금위영은 공북문에서 종묘의 대문까지다 0 어영청 은 종묘의 대문 동쪽에서 상수문( 上 水 門 )까지. 0 담 밖의 군사 주둔처는 20 개소다. 훈련 도감 구역 6 개소, 0 금어영 구역 8 개소. 0 어영청 구역[ 倒 廳 字 內 ] 6 개소, 포( 輔 )마다 군사 2 명씩. 0 삼군문의 패장 1 명은 번드는 군사 5 명을 거느리고 각기 구역을 따라 밤을 새며 특별히 순찰하고, 3 영의 번드는 장관( 將 官 ) 각 l 명은 군사 5 명을 거느리고 파루( 罷 챔)를 칠 때부터 날이 셀 때까지 구역 안을 검찰하며, 또 장교와 군졸 각 1 명씩을 선정하여 도순( 都 센 각 군영의 순라가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를 조사하든 일)하며 병조에서도 또한 때때로 도 순하여 부정을 적발한다 0 사직의 담 밖에는 삼군문의 패장 l 명과 군사 3 명이 일자를 나 누어 돌려가며 순라(젠 鍵 )한다. 0 경성( 京 城 )의 내 외에는 삼군문과 양 포도청에서 각각 장교와 군졸을 선정하여 8 패( 八 牌 )로 만들어 구역을 나누어 순행하는데, 삼군문에서는 일자 를 나누어 돌려가며 담당한다. 훈련 도감은 초일( 初 日 ) 인일( 寅 日 ) 신일( 申 日 ) 사일 (E, 日 ) 해일( ~ 日 ) 에 패장 8 명 군사 80 명 1 패는 관현( 館 뼈)에서 주자동(뚫 字 洞 )까지 0 2 패는 장원서( 掌 짧 暑 )에서 남산동( 南 山 洞 )까지. 0 3 패는 돈의문( 敎 義 門 ) 남쪽에서 종각( 鍾 聞 )까지. 0 4 패는 돈의문 북쪽에서 종각까지 0 5 패는 숭례문(몇 禮 門 ) 밖에서 서강( 西 江 )까지. 0 6 패는 숭례문 밖에서 한강( 漢 江 )까지. 0 7 패는 흥인문( 興 仁 門 ) 밖에서 종암( 鍾 嚴 )까지. 0 8 패는 숭례문 밖에서 대현( 大 뻗)의 서쪽 마포( 麻 浦 )까지. 금위영은 중일( 中 日 ) 자일( 子 日 ) 오 일( 午 日 ) 묘일(때 日 ) 유일( 西 日 ) 에 패장 8 명 군사 78 명 1 패는 흥인문 북쪽에서 삼정동 ( 三 淸 洞 )까지. 0 2 패는 흥인문 남쪽에서 남산 밑까지. 0 3패는 돈의문 남쪽에서 남산 밑 까지. 0 4 패는 돈의문 북쪽에서 삼청동까지 0 5 패는 홍제원( 弘 濟 院 )에서 3문 밖을 거쳐 0 6패는 마포에서 서빙고( 西 永 庫 )까지. 0 7 패는 토정( 土 亨 )에서 망원 이태원(젖 太 院 )까지. 정( 望 遠 후)까지. 0 8 패는 동교부( 東 했 部 )의 구역을 전부 담당한다. 어영청은 종일( 終 日 ) 진 일( 辰 日 ) 술일( 成 日 ) 축일(표 日 ) 미일( 未 日 ) 에 패장 8 명 군사 64 명 l 패는 오간수문( 五 間 水 門 ) 북쪽에서 삼청동까지. 0 2 패는 오간수문 남쪽에서 숭례문까지. 0 3 패는 광혜교 ( 廣 惠 橋 )에서 돈의문까지. 0 4 패는 광통교( 廣 通 橋 )에서 수각교( 水 聞 橋 )까지. 0 5 패는 돈의 문 밖에서 아현( 阿 뼈)까지. 0 6 패는 흥인문 밖에서 무네미고개 [ 水 輸 뼈]까지 0 7 패는 숭 례문 밖에서 이태원까지. 0 8 패는 대현( 大 뼈)에서 양화진( 楊 花 鎭 )까지. 좌포도청 군관 8 명 군사 22 명 l 패는 숭례문 남쪽에서 타락동( 點 騎 洞 )까지 0 상 2 패는 타락동 동쪽에서

71 영희전( 永 禮 嚴 ) 서쪽 담 밖까지. 0 하 2 패( 下 二 牌 )는 주자동에서 생민동( 生 民 洞 )까지. 0 3 패는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 水 口 門 )까지. 0 4 패는 파자교( 把 子 橋 ) 동쪽에서 흥인문까지 0 5 패는 파자교 서쪽에서 전동( 典 洞 )까지. 0 6 패는 종각 및 구리재[ 鋼 뼈]에서 오간수문까 지. 0 7패는 흥인문 밖[ 外 ]에서 관왕묘( 關 王 關 )까지다. 우포도청 ; 군관 8 명 군사 16 명 1 패는 육조( 六 뽕) 동쪽에서 삼청동까지. 0 2 패는 육조 서쪽에서 창의문( 影 義 門 ) 밖까지- 0 3 패는 공조( 工 暫 ) 뒷동리의 남쪽에서 소의문까지. 0 4 패는 소의문( 昭 義 門 )과 종각에서 숭례 문까지. 0 5 패는 돈의문 밖 북쪽 모화관( 暴 華 館 )에서 대현까지. 0 6 패는 돈의문과 약재 [ 藥 뼈]에서 숭례문까지. 0 7 패는 숭례문 밖에서 만리재[ 萬 里 l 現 ]와 돌모루 [E 隔 ]까지. 0 8 패는 이문동( 里 門 洞 ) 에서 외남산( 外 南 山 )까지. 0 병조판서( 兵 費 判 書 )와 삼군문의 대장과 좌 우 두 포도대장은 간간이 나아가 도순한다. 0 좌 우순청( 左 右 센 廳 )은 구역을 나누어 순 행하며, 불 단속[ 禁 火 ] 시간 얄리기[ 傳 源 ]의 경계[ 申 節 ] 및 각 성문 순번에 대한 제비 뽑 는 것 등을 도맡아 실시한다, 순장(센 將 )과 감군( 藍 軍 ) 각 2 명은 매일 병조에서 점호를 받 고, 신시( 申 時 )에 궁전의 뜰에서 패( 牌 )를 받았다가 이튿날 반납[ 還 納 ]한다. 좌청의 구역은 종각부터 동쪽인데 순장 감군 각 1 명이 역원( 投 員 ) l 명과 군사 2 명을 거느리고 순행하고, 유청군관( 有 廳 軍 官 )은 3 인이며, 軍 ) 각문 혜화문 흥인문 오간수문 광희문 에는 추첨군( 抽 靈 3 명 수첨군( 收 靈 軍 ) 1 명이다. 우청의 구역은 종각부터 서쪽인데 각문 숭례문 돈의문 창의문 숙정문( 薦 靖 門 ) 의 순장 이하는 위와 같다. 성의 내 외의 경수소( 警 守 所 ) 일반으 로 복처( 代 處 )라 한다 는 16 개소다. 우 1 패는 의정부 앞이며, 2 패는 공조 앞이며, 3 패는 송 파교( 松 把 橋 )며, 4 패는 소의문 안이며, 5 패는 경영고( 京 營 庫 ) 앞이며, 6 패는 소의문 밖이며, 7 패는 숭례문 밖 연못 가이며 8패는 도저동( 挑 補 洞 )이며, 좌 1 패는 회현동의 병문(합 門 )이 며, 상 2 패는 남산동이며, 하 2 패는 필동( 筆 洞 )이며, 3 패는 정교( 淸 橋 )며, 4 패는 의동( 義 洞 )의 병문이며, 5패는 재동( 顆 洞 )이며, 6 패는 수표교( 水 標 橋 )며, 7 패는 흥인문 밖이다. [주 D-001] 남영( 南 營 ) 창덕궁 정문 앞에 있는 훈련 도감의 분영( 分 營 ). [주 D-002] 서영( 西 營 ) 창덕궁 서쪽에 있는 금위영의 분영 [주 D-003] 광지영( 廣 智 營 ) ; 창덕궁 뒤 응봉( 鷹 m종) 밑에 있었음 [주 D-004] 집춘영( 集 春 營 ) 창덕궁 집춘문 밖에 있는 어영청의 분영임 [주 D-005] 동영( 東 營 ) 창덕궁 동쪽에 있던 어영청의 분영 [주 D-006] 삼군문( 三 軍 門 ) 훈련 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세 군문 일명 삼영문. [주 Dl-001] 어영청 구역[ 倒 廳 字 內 ] ; 어영청 구역[ 倒 廳 字 內 ] 의 廳 이 어느 본에는 營 으 로 되어 있음 [주Dl -002] 광통교( 廣 通 橋 ) ; 광통교( 廣 通 橋 ) 의 通 이 어느 본에는 惠 로 되어 있음. [주 Dl-003] 양화진( 楊 花 鎭 ) ; 양화진( 楊 花 鎭 ) 의 鎭 이 어느 본에는 律 으로 되어 있음. [주Dl-004] 수구문( 水 口 門 ) ; 수구문( 水 口 門 ) 의 門 이 어느 본에는 洞 으로 되어 있음. [주 Dl -005] 파자교( 把 子 橋 ) ; 파자교( 把 子 橋 ) 의 子 가 어느 본에는 字 로 되어 있음. 다음 에 나오는 것도 같음. [주 Dl -006] 밖[ 外 ] ; 밖[ 外 ] 이 어느 본에는 없음. [주 Dl-007] 약재 [ 藥 뼈]. 약재 [ 藥 l뺑] 의 藥 이 어느 본에는 榮 으로 되어 있음 [주 Dl-008] 병조판서( 兵 費 判 書 ) ; 병조판서( 兵 뽑 判 書 ) 가 어느 본에는 없음. [주 Dl 009]2 패 - 2 패 로부터 7 패 까지가 어느 본에는 각각 3 패 로부터 8 패 까지로 되어 ]_Q_.M 0. 이 /-

72 군정편 3( 軍 政 編 三 ) 어영청( 倒 營 廳 ) 궁장 파수 자내( 宮 뽑 把 守 字 內 ) 정종 2년 무술에 규례를 정하였다. 집춘문( 集 春 門 ) 남쪽에서 통화문까지 집춘영의 입직군이 담당한다 내사복시( 內 司 樓 춤) 앞 수문 모퉁이에서 동영까지, 내농포( 內 農 團 )에서 돈화문 동 쪽까지. 동영의 입직군이 담당한다. 0 무너지변 파수를 보는데, l 칸에 8 명, 2칸에 10 명, 3-4 칸에 15 명, 5 6 칸에 20 명 만일 7 8칸이 넘으면 적당한 수를 참작하여 증가하되 모두 병조의 지시를 받아서[ 待 ] 실시한다 삼군문에서 힘을 합하여 수축하는데 호조에서의 급료 와 병조에서 지급하는 삼베가 있다. 경모궁의 담과 함춘원( 含 春 행)의 담을 수축하는데도 마 찬가지다. [주 D-001] 내농포( 內 農 團 )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으며, 환관(똘 官 )이 채소를 심는 것을 맡 아서 공상( 供 上 ) 하였음. [주 Dl-001) 집춘문( 集 春 門 ) 집춘문( 集 春 門 ) 의 門 이 어느 본에는 營 으로 되어 있음. [주 Dl-OC 2) 받아서 [ 待 ] 받아서 [ 待 ] 가 어느 본에는 付 로 되어 있음, 군정편 3( 軍 政 編 三 ) 어영청( 倒 營 廳 ) 궁장 밖의 순라[ 宮 境 外 젠 鍵 ] 인조 6년 무진 (1628 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4 경 집춘영( 集 春 營 )의 초관이 입직군 20 명을 인솔하고 두 바해를 순행한다 5경 동영의 초관이 입직군 20 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 한다. 또 특별 순찰이 있는데 영종 9 년 계축 (1733 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장교 1 명, 군병 5 명이 초경부터 날이 셀 때까지 순행한다. 종묘 대문 동쪽에서 월근문( 月 觀 門 )까지는 번을 나가는 초관 1 명과 동영의 입직군 5 명이 담당한다. 월근문 동쪽에서 집춘문 북쪽[ 集 春 門 北 ] 과 상수문( 上 水 門 )까지는 출신군관 본정군관 별초 가운데 1 명이 번갈아 들며 집춘영의 입 직군 5 명이 담당한다. 또 교련관 별군관 별무사 가운데의 한 사람을 따로 정하여 번갈아 서 전체를 순찰 감독한다.[ 輪 며 察 節 ] 장관도 또한 감찰한다. 초일에는 신영에 입직하 는 당상장관, 중일에는 동영에 입직하는 기사장, 종일에는 동영에 입직하는 파총이 언제나 파루를 친 뒤에 모두 입직군 5 명을 거느리고 날이 셀 때까지 구내를 순찰 감독한다 0 군 포( 軍 輔 ). 종묘 대문의 동쪽에서 집춘문 북쪽과 상수문 남쪽까지 모두 6 개포다. 만일 무너지 면 영선사( 營 績 司 )와 번갈아서 수리한다 포마다 군병이 2 명씩인데 낮에는 나오고 밤에는 입직한다 0 처음에는 병조에서 샀군을 사서 세웠는데 금상 5 년 을축 (1805 년)에 각 영의 군병으로 나누어서 수직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0 사직단( 社 樓 휩)의 담장 밖 순행 종일마다 실시한다 은 장교 1 명, 군졸 3 명이다. 본청군 관 출신군관 기사 가운데 1 명 경군 1 명 지방군 2 명. [주 Dl-001) 집춘영( 集 春 營 ) 집춘영( 集 春 營 ) 의 營 이 어느 본에는 門 으로 되어 있음. [주 Dl-002) 집춘문 북쪽[ 集 春 門 北 ] ; 집춘문 북쪽[ 集 春 門 北 ] 이 어느 본에는 集 春 營 北 으 로 되어 있음. q ]

73 [주 Dl -003) 번갈아서 감독한다[ 輪 回 察 節 ] ; 번갈아서 순찰 감독한다[ 輪 回 察 節 ] 의 輪 回 가 어느 본에는 節 다음에 있음 군정편 2( 軍 政 編 二 ) 병조각장사례( 兵 暫 各 掌 事 例 ) 성기색( 省 記 色 ) 총례( 總 例 ) 궁궐 안에 있는 각 관청과 궁궐 밖에 있는 종묘 사직 전( 願 ) 궁( 宮 ) 두 궁궐[ 兩 宮 창덕궁 창경궁] 및 각영( 各 營 )의 각문 숭례문(몇 禮 門 ) 흥인문( 興 仁 門 ) 혜화문 ( 惠 化 門 ) 돈의문( 敎 義 門 ) 숙정문( 蕭 靖 門 ) 창의문(꿇 義 門 ) 소의문( 昭 義 門 ) 광희문( 光 熙 門 ). 오간수문(죠 間 水 門 ) 좌 우순청( 左 右 젠 廳 ) 남산봉수장( 南 山 峰 錄 將 ) 동영( 東 營 ) 서영( 西 營 ) 남영( 南 營 ) 북영( 北 營 ) 광지영( 廣 智 營 ) 집춘영( 集 春 營 ) 금위영( 禁 衛 營 ) 어영청( 倒 營 廳 ) 위 소( 衛 所 ) 종각( 鍾 聞 ) 군기 시 ( 軍 器 좋) 관상감( 觀 象 藍 ) 등 외 의 입 직 도 모두 본조에 서 성기( 省 記 )하는데 관원은 모두[{ 具 ] 성명을 기입하고, 하인에 대하여는 그 수자만을 적는 다. 에 번을 드는 관원과 장교 이하를 매일 신시( 申 時 )에 성기( 省 記 )를 작성하여 상주하는데 냥관이 직접 바친다 원본 성기 중에 중요한 장소에 번드는 관원에 대하여는 또 작은 목록 [ 小 單 子 ]으로 적어 넣는다. 병조의 당상 1 명, 도총부의 당상 2 명, 승지 2 명, 주서( 注 書 ) 1 명, 사관( 史 官 ) 2 명, 규장각의 관원 1 명, 홍문관( 弘 文 館 )의 관원 2 명, 선전관 4 명, 종묘 사 직 전 궁 훈련원의 관원 각 1 명, 관상감의 관원 4 명도 원본의 성기와 함께 적어 넣는다. 입 직 ( 入 直 ) 궁궐 안에 입 직 하는 장관( 將 官 ) 훈련도감의 국별장( 局 別 將 ) 파총( 把 擔.). 초관(뺑 官 )과 금위영( 禁 衛 營 )의 파총 초관과 내삼청( 內 三 廳 )의 장( 將 )과 수문장( 守 門 將 ) 의 번드는 단자( 單 子 )를 중일( 中 日 )마다 상주하여 결재를 받는다. 순행[ 行 젠] 순장(젠 將 ) 결속색( 結 束 色 )에서 추천하여 상주한다 과 감군( 藍 軍 ) 본조와 도총부 의 낭청과 선전관을 전원 수대로 써 넣는다 은 매일 상주하여 결재를 받고[ 受 點 ] 순장 2 명, 감군 2 명 순장과 감군은 신시에 궁궐에 나아가서 패를 받아가지고 장소 일소(- 所 )와 이소 ( 二 所 ) 를 나누어 순행하며 사찰한다 담당구역 안에 만일 화재가 있을 경우에는 상황을 곧 문서로 상주한다 군호( 軍 號 ) 자세한 것은 순라편(젠 鐘 編 ) 에 나타나 있다. 0 병조에서 번드는 당상이 직 접 써서 봉함( 封 織 )하고 수결( 手 決 )을 치면 낭관이 국왕에게 나아가서 바치고 결재를 받는 다. 신시에 성기와 함께 올린다 궐문을 잠글 때에 궁궐 안팎의 각 관청과 각 영( 營 )에 분배 한다. 군호는 모두 29 장인데 어람( 倒 寶 )이 2 장, 병조판서에게 l 장, 도총부에 1 장, 금위 대장 에게 l 장, 어영 대장에게 1 장, 호위 대장에게 1 장, 금군 별장에게 1 장, 좌포도 대장에게 1 장, 우포도 대장에게 1 장, 홍화문의 초관에게 l 장, 건양문의 파총에게 1 장, 집현전( 集 賢 願 ) 의 초관에게 l 장, 동룡문의 초관에게 l 장, 숭지문(몇 智 門 )의 국출신( 局 出 身 )에게 1 장, 호위 별장(를 衛 別 將 )에게 l 장, 국별장( 局 別 將 )에게 1 장, 내직초관( 內 直 뺑 官 )에게 1 장, 내삼청에 1 장, 동소( 東 所 )에 1 장, 서소( 西 所 )에 1 장, 남소( 南 所 )에 1 장, 북소 ( 北 所 )에 1 장, 한려( 漢 旅 )에 l 장, 위장소( 衛 將 所 )에 1 장, 외병조( 外 兵 暫 )에 1 장, 북영( 北 營 )에 l 장, 좌순청( 左 파 廳 )에 l 장, 우순청( 右 젠 廳 )에 1 장이며, 국왕이 거둥하여 유축할 때[ 時 ]에는 3장을 더 마련하여 유도소 ( 留 都 所 )에 1 장, 수궁대장에게 1 장, 총융청( 總 뤘 廳 )의 유진( 留 陣 )에 1 장. 만일 국왕이 교외에 거퉁하였다가 유숙할 때에는 다음날의 군호를 날짜별로 적어 올려 미리[ 先 ] 상재를 맡아 순 장(젠 將 ) 감군 및 번드는 사람의 명단과 성기와 군호를 미리 상주하여 결재해 달라는 뜻을 먼저 문서[ 草 記 ]로 상주하고 당일에 환궁할 때에는 그 전날의 순장과 감군이 그대로 사무를 - 4 -

74 집행하게 할 일을 또한 문서로 상주한다, 승정원에 두고, 궁궐을 지키는 본조의 낭관이 날 마다 받아와서 각처에 분배하며 행재소( 行 在 所 )의 군호는 본조의 판서가 상주하여 결재를 받아서 반포한다. [주 Dl-001] 궁( 宮 ) ; 궁( 宮 ) 이 어느 본에는 願 앞에 있음 [ 주 Dl ] 종각( 鍾 聞 ) ; 종각( 鍾 聞 ) 이 어느 본에는 各 種 으로 되어 1 으L λao [주Dl ] 모두[{ 具 ]. 모두[{ 具 ] 가 어느 본에는 具 로 되어 있음 [주 Dl - 004] 때 [ 時 ] ; 때[ 時 ] 가 어느 본에는 特 으로 되어 있음. [주 Dl - OC 5] 유진( 留 陣 ) ; 유진( 留 陣 ) 이 어느 본에는 留 陳 으로 되어 있음. [주Dl 006] 미리[ 先 ] 미리[ 先 ] 가 어느 본에는 薦 로 되어 있음, [주 Dl-007 ] 문서 [ 草 記 ] ; 문서 [ 草 記 ] 가 어느 본에는 下 記 으로 되어 있음. 군정편 3( 軍 政 編 三 ) 어 영청( 倒 營 廳 ) 공해( 公 魔 ) 신영( 新 營 ) 이 현(잦 l 現 ) 에 있는데 505 칸이다 남소영( 南 小 營 ) 남소동( 南 小 洞 )에 있는데 194 칸 이다. 동영( 東 營 ) 2 개 소 하나는 선인문( 宣 仁 門 ) 밑에 있는데 74 칸이며 하나는 경희궁( 慶 熙 宮 ) 개양문( 開 陽 門 ) 밑에 있는데 10칸이다. 집춘영( 集 春 營 ) 집춘문 밖에 있는데 1 6 칸이다 남창( 南 흥) 남소동에 있는 데 137 칸이다. 화약고 남소영 안에 있는데 52 칸이다. 북이영( 北 二 營 ) 경희궁의 무덕문( 武 德 門 ) 밖에 있는데 68 칸이다. 약방( 藥 房 ) 저전동(추 塵 洞 )에 있는데 22 칸이 다. 직방( 直 房 ) 2 개소 하나는 금호문 밖에 있는데 22 칸이며, 하나는 경희궁의 홍화문 밖에 있는데 1 0 칸이다. 식목소( 植 木 所 ) 경모궁의 앞 산 및 관현( 館 뼈) 흥인문의 안과 밖 모두 3 개소다. 각각 장졸 을 정하여 수호하고 금양( 禁 養 )한다. 경모궁의 패장은 근무한 지 457~ 월에 달하면 장기 근 무자는 진임시킨다. 0 양어소( 養 魚 所 ) 흥인문 밖에 있다. 군병을 정하여 붕어를 사서 기른 다. [ 주 D l- 001 ] 식목소( 植 木 所 ) ; 식목소( 植 木 所 ) 가 어느 본에는 種 木 所 로 되어 있음, 홍재전서( 弘 薦 全 書 ) 제 45권 비답( 批 答 ) 4 야금( 夜 禁 )을 범한 반유 Ct 半 f 需 )를 정식에 따라 법사에 이송할 일로 훈국이 아흰 것에 대한 비 ci- 반촌( 伴 村 )의 민가는 집춘영(않 春 營 ) 건물과 더불어 기와와 기퉁이 서로 닿아 있으니, 야금 을 범한 것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근래에 조관( 朝 官 )과 선비를 막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 서 술의 풍류( 風 流 )가 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능히 술 마시는 취향을 아니 매우 가상하다. 외영( 外 營 )의 군향색( 軍 節 色 )이 외상 술값 조의 쌀 l포를 제급( 題 給 )하 도록 하여, 술에 취하게 하여 그 덕을 살핀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경은 대죄하지 말고 초관(템 官 )은 논죄하지 말라 h ι

75 ~t캘풍 복원정비 기본계획연구 그 - } 죄 저 L 처 O 저 L 口 τ 다 다 저 L 허 저 L 하 님 카 다 0 다 저 내 때 경 취 명 양 휘 화 춘 역 경 묵 안 희 경 화 사 쩌 디 자 환 통 정 여 야 경 순 환 공 함 연 연 통 펴 L 내 피 ν 다. 를 켜 F A4T

76

77 자경전 기축진찬 의궤 정례 의궤 배설 내외배설 낳상방 영창 8짝 쌍창 4짝 동온돌 채화지의 2부 북상방 2 남상방 2 북반침 3 동온돌북반침 2 즈 드 3 '--ι 즈 E도i 4 서상방 영창 12 짝 북상방 4 6 서온돌 채화지의 4부 \ Jλ L 님 L 4 서남온돌 2 - 북반침 3 서옹돌북반침 반자 2 서가퇴 쌍창, 사창 만살장자 대청 분합 12 짝 6 대청 6 남퇴 6 북퇴 3 청서퇴 5 가퇴 5 북퇴 4 남온돌 2.5 통행각 만살장자 7 전청 3.5 동퇴 9 온돌 3 청 3 북청 2 서퇴 6 북온돌 1.5 전청 3 서행각 만살장자 5 온돌 3 보경문서행각 3( 內 ) 온돌 1 남행각 전 청 1 남퇴 3 온돌 1 청 1 퇴 3 (자 경 문서행각 5) 환취정 남온돌 3. 5 't1-그되 Lι- 도 g므=- q

78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 a to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 - 자경전. h wp 1 口 자경전 일성록) 정조 즉위년 병신 (1776,건륭 41) 8월 24 일(계해) 자경전( 慧 慶 嚴 ) 영건 당상( 營 建 堂 上 ) 정홍순( 鄭 弘 淳 )과 낭청 정지검( 鄭 志 險 )을 존현각에서 소 견하였다. 0 이때 자궁( 忽 宮 )을 받들기 위해서 창경궁 내에 자경전을 짓고 있었다. 검 見 忽 慶 願 營 建 堂 上 鄭 弘 淳 郞 廳 鄭 志 f했 子 尊 賢 聞 時 寫 奉 쯤 宮 營 嚴 於 릅 慶 宮 內 也 일성록) 정조 즉위년 병신 (1776,건륭 41) 8월 25 일(갑자) 자경전을 영건( 營 建 )하는 역소( 投 所 )의 축석( 第 石 )과 식목( 植 木 )을 병조 판서 구선복이 감동 ( 藍 童 )하라고 명하였다. 일성록) 정조 2년 무술 (1778,건륭 43) 4월 28 일(무오) 자전( 孫 嚴 )과 자궁( 孫 宮 )을 모실 길일을 다음달 초로 택해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0 하교하기를, 자전을 동조( 東 朝 )의 위차( 位 次 )에 모시고 자궁을 자경전( 孫 慶 願 )에 모실 길일을 예조로 하 여금 다음달 초로 택해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일성록) 정조 2년 무술 (1778,건륭 43) 4월 29 일(기미) 예 조가, 자전을 동조 에 모시고 자궁을 자경전에 모실 길일을 받아 아뢰었다, 0 오는 5월 2 일 사시 CE 時 )와 오시( 午 時 )이다. 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건륭 45) 3월 9 일(무자) 가 례 ( 嘉 禮 )를 자경전( 慧 慶 願 )에서 하라고 명하였다 0 하교하기를, 가례 의 처소는 자경전으로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 습의( 內 習 廢 ) 처소는 자경전으로 하라, 도감 당상과 낭청은 별궁( 別 宮 )에 나간 다음 즉시 와서 습의( 習 展 )를 행하되 빈양문(좁 陽 門 )으로 들어와 자경문 밖에서 편리한 쪽으로 대 령하 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납채( 納 중)는 습의를 행한 뒤에 거행하라. 하였다. 정조 4년 경자 (1780,건륭 45) 3월 12 일 (신묘) 실록) 자경 전( 慧 慶 嚴 )에서 화빈( 和 題 )의 가례( 嘉 禮 )를 행하였다. 일성록) 자경전(쯤 慶 嚴 )에서 가례( 嘉 禮 )를 행하고 이어 동뢰연( 同 年 훌)을 행하였다 0 내가 걸어서 환취 정( 環 짧후)의 소차( 小 次 )에 나아갔다 원유관( 遠 遊 冠 )에 강사포( 降 約 뻔)를 갖추고 자경전에 나아가 동뢰연을 행하였다 /

79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 a tor 바 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2 일성록) 정조7년 계묘 (1783,건륭 48) 3월 12 일(계묘) 왕대비전이 책보( 冊 寶 )를 받는 곳은 통명전( 通 明 顧 )으로 하고, 혜경궁( 惠 慶 宮 )이 책인( 冊 印 ) 을 받는 곳은 자경전( 經 慶 嚴 )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0 하교하기를 왕대비전에 존호( 尊 號 )를 올릴 때 책보를 받는 처소는 통명전으로 하고, 혜경궁에 존호를 올릴 때 책인을 받는 처소는 자경전으로 하며, 책보와 책인을 올리는 처소는 명정전( 明 政 願 )으로 하라. 하였다. 일성록) 정조 7년 계묘 (1783,건륭 48) 3월 1 3 일(갑진) 예조가 존호를 올리는 습의( 習 嚴 )의 길일을 잡은 것에 대해 아뢰었다. 0 해조( 該 홈)가 아뢰기를, 왕대비전, 경모궁, 혜경궁에 존호를 가상( 加 上 )하는 습의의 길일을 일관( 日 官 )으로 하여금 잡게 하니, 첫 번째 습의는 3 월 17 일이, 두 번째는 같은 달 20 일이, 세 번째는 같은 달 21 일이 모두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왕대비전의 세 번째 내습의( 內 習 歲 )는 통명전( 通 明 願 )에서, 혜경궁의 세 번째 내습의는 자경전( 慧 慶 願 )에서 거행하며, 책보( 冊 寶 )와 책인( 冊 印 )을 대내 ( 大 內 )로 들이는 것은 21 일 묘시(때 時 )에 우선 거행하며, 경모궁에 존호를 올리는 이의( 疑 嚴 ) 및 세 번째 습의도 2 1 일에 함인정(패 仁 후)에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윤허하였다 실록) 정조 7년 계묘 (1783,건륭 48) 4월 1 일 (신유) 혜빈( 惠 續 )에게 존호를 더 올렸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친히 의절에 따라 책인( 冊 印 )을 올리고 나서 자경전에 나아가 의절대로 치사, 전문, 안팎 옷감을 올렸다. (승) 3월 12 일 王 大 紀 嚴 上 號 時 受 冊 寶 處 所, 以 通 明 嚴 寫 之 惠 慶 宮 上 號 時 受 冊 印 處 所, 以 孫 慶 願 寫 之 (일) 進 冊 寶 冊 印 處 所, 以 明 政 嚴 寫 之 실록) 정조 8년 갑진 0784,건륭 49) 8월 7일 (경인 ) 왕세자가 사( 師 ) 부( 傳 ) - 빈객(좁 客 )들과 상견례( 相 見 禮 )를 자경전( 忽 慶 嚴 )에서 거행하였다 임 금이 직접 이것을 보았다. 일성록) 정조8년 갑진 (1784,건륭 49) 9월 1 8 일 (경오) 경모궁( 景 寒 宮 )에 책인( 冊 印 )을 올리고 친제( 親 쯤)를 행한 뒤 도로 자경전( 孫 慶 嚴 )에 나아가 혜경궁( 惠 慶 宮 )의 존호 책인( 尊 號 冊 印 )을 친히 올렸다. 0 때가 되자, 면복(옳 服 )을 갖추고 걸어서 묘내( 願 內 )에 나아가 의주( 燒 註 )와 같이 존호 책인을 친히 올리고 이어서 친제를 행하였다 이어서 출발하여 홍화문( 弘 化 門 )으로 들 어가서 명정문( 明 政 門 ) 밖에 이르렀다. 연에서 내려 여를 타고 월대( 月 臺 ) 앞에 나아가 여에 서 내려 판위( 版 位 )에 나아갔다 혜경궁의 존호 책인을 직접 받들어 요여와 채여에 봉안하 였다. 고취( 鼓 吹 )가 전도( 前 導 )하고 상호도감 도제조 이하가 따라갔다 이어서 여를 타고 배 진( 暗 進 )하여 혜경궁의 합문( 閒 門 ) 밖에 이르렀다. 상전( 尙 傳 )이 책인을 받들어 상궁( 尙 宮 )에 게 주어서 들이게 하였다. 이어서 여에서 내려 자성 선(?쉰 "- () 에 나아가 책인을 친히 올리 q ]

80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rato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즘 문 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 - 자경전.hwp 3 고, 치사( 致 詞 ), 전문( 養 文 ), 표리( 表 훌)를 올렸다 예를 마치고 대내로 돌아왔다. 일성록) 정조 9년 을사 (1785,건륭 50) 6월 24 일(신축) 광주 목사( 光 州 收 使 ) 흥원섭( 洪 元 燮 )은 전직( 前 職 )에 영임( 仍 任 )하라고 명하였다. 0 호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정랑 흥원섭은 오늘 정사에서 광주 목사로 옮겨 제수되었습니다. 흥원섭은 별례방 ( 別 例 房 )의 낭청으로서 자경전( 慧 慶 嚴 ) 차비문( 差 備 門 ) 안의 행각( 行 聞 ) 및 명정전( 明 政 嚴 ) 뒤 강서( 講 書 )하는 당( 堂 )의 수보( 修 補 )할 곳을 막 봉심( 奉 審 )하고 나서 물력( 物 力 )과 제반 도구를 지금 마련하는 중 이 고 와전( 互 觀 )의 문제점에 대해서 현재 또 상의하여 바로잡으려 고 하고 있는 데 아직 끝내지 못하였습 니 다 지금 만약 생무지에게 이 일을 맡기면 구애되는 일이 많이 있게 될 것이니 광주 목사 흥원섭을 전직에 잉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초기는 매 우 사체에 맞는 것 이 다. 경의 말대로 시행하고, 이어 잉임으로 자리가 빈 광주 목사의 후임을 즉시 해조( 該 暫 )로 하여금 오늘 정사에서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일성록) 정조 9년 (1785) 7월 19 일 命 慧 慶 嚴 修 改 待 下 敎 始 投 戶 費 탬 言 慧 慶 願 差 備 內 行 關 及 講 書 堂 修 改 놈 日 今 月 二 十 二 日 二 十 A 日 以 何 日 學 行 乎 敎 以 以 二 十 二 日 始 投 寫 好 修 改 處 自 有 輕 重 之 珠 方 此 商 量 日 子 更 待 下 敎 始 投 0 호조가 아뢰기를, 자경전 차비( 差 備 ) 안쪽의 행각( 行 聞 )과 강서당( 講 書 堂 - 명정전 뒤)을 수개할 수 있는 길일 ( 吉 日 ) 이 이 번 달 22 일 28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로 거행해야 하겠습 니 까? 하여, 하교하기를, 22 일 에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만 수개할 곳은 본디 경중의 차이 가 있으므로 현재 이 렇게 헤아 리고 있으니 날짜는 다시 하교하기를 기다려 일을 시작하도록 하라 하 였다. 숭정원일기) 정조 9년 을사(1785,건륭 50) 8월 27 일 (갑진) 이 극문(흉 極 文 )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 리 에 수강재( 壽 康 齊 )를 세 웠다. 자경전( 慧 慶 觀 )을 영건( 營 建 )할 때 에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산( 假 山 )을 만들었었 다. 이 때 에 이 르러 이를 철거( 敵 去 )하고 그 우물을 파고는 소재( 小 驚 )를 세 워 내 려 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태 조조( 太 祖 朝 ) 수강궁( 壽 康 宮 )의 옛터로서 여지승람( 與 地 勝 贊 ) 에 기재되 어 있다. 이 어 그 재( 濟 )를 수강재( 壽 康 驚 )라고 이름을 지었다 실록) 순조 2년 임술 (1802, 가경 7) 8월 11 일 (기유) 대 왕 대 비전과 왕대비전의 책보( 冊 寶 )를 자경전( 忽 慶 嚴 )에서 올리고, 인정전( 仁 政 嚴 )에서 진 하( 陳 뿔)를 행하였으니 권정 례( 權 停 例 )였다. 실록) 순조 3년 계해 (1803, 가경 8) 12월 17 일 (무인) 시임 대 신 원임 대 신 및 영돈녕 호조 판서 형조 판서를 소견하고, 임금이 인정전( 仁 政 嚴 )을 - 4 -

81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rato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4 중건하는 역사는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문하자, 좌의정 서용보( 徐 龍 輔 )가 말하 기를, 정전(표 觀 )은 사체( 事 體 )가 중대하므로 마땅히 도감( 都 藍 )을 설치해야 하겠지만, 만약 당상 과 냥청을 많이 차출한다면 긴요하지 않은 낭비가 매우 많아질 것입니다. 경모궁( 景 寒 宮 ), 규장각( 奎 章 聞 ), 자경전( 忽 慶 散 )을 영건할 때에는 아울러 단지 호조의 당상과 낭청만으로 이 를 하였었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록) 순조 8년 무진 (1808,가경 13) 7월 26 일 (경 인) 내각( 內 聞 )에서 어제( 倒 製 ) 자경전기(껄 慶 嚴 記 )의 인본( 印 本 )을 바치니, 베낀 각신( 聞 멀) 서 영보( 徐 榮 輔 ) 등에게 시상하였다 실록) 순조 21 년 신사 (1821,도광 1) 3월 9 일 (기미) 오시( 午 時 )에 왕대 비 전(효의왕후)이 자경전( 慧 慶 嚴 )에서 승하하였다. 빈전( 領 嚴 )은 환경전( 歡 慶 嚴 )으로 정하고, 곡반( 哭 班 ) 처소는 명정전( 明 政 嚴 )으로 정하라 일성록) 王 大 紀 顧 昇 週 子 쯤 慶 觀 敎 日 誠 孝 漢 演 今 日 午 時 王 大 떠 散 昇 週 子 孫 慶 散 固 極 ~p 兪 凡 諸 等 節 令 該 暫 依 例 學 行 續 願 命 以 歡 慶 觀 薦 之 敎 日 續 嚴 以 歡 慶 嚴 寫 之 哭 班 處 所 以 明 政 願 寫 之 실록) 순조 27년 정해 (1827,도광 7) 7월 28 일 (신미) 하령하기를, 중궁전( 中 宮 嚴 )에 존호를 올릴 장소와 양전( 兩 願 )에 진작( 進 罷 )할 장소는 자경 전( 忽 慶 願 )으 로 하라. 하였다. 실록) 순조 27년 정해 (1827, 도광 7) 9월 9 일 (신해) 임금과 중궁전이 존호 책보를 받다. 옥책문의 내용 임금이 자경전( 慧 慶 嚴 )에 나아가 존호 책보( 尊 號 冊 寶 )를 받고, 중궁전( 中 宮 願 )도 같이 존호 책보를 받았다. 왕세자와 세자빈이 예를 거행하여 대치사( 代 致 詞 )와 산호( 山 呼 )를 의식대로 하였다- 실록) 순조 27년 정해 (1827, 도광 7) 9월 10 일 (임자) 자경전( 慧 慶 嚴 )에서 진작례( 進 뽑 禮 )를 받았다. 실록) 순조 28 년 무자 (1828, 도광 8) 2월 12 일 (엄오) 왕세자가 자경전( 慧 慶 嚴 )에 나아가서 대전( 大 嚴 )과 중궁전( 中 宮 嚴 )에게 술잔을 올렸다. [ 왕 세자의 배위( 拜 位 )는 문발 밖에, 왕세자빈의 배위는 문발 안에, 공주( 公 主 )의 배위는 왕세자 빈 배위의 뒤에, 좌 우명부( 左 右 命 歸 )의 배위는 그 뒤에, 의빈( 屬 좁)과 척신( 威 멀)의 배위는 자경문 밖에 설치하였다 수주정( 壽 酒 享 )과 다정( 茶 후)은 뜰 위에 설치하였다. 시각이 되자 왕세자빈은 예복 을 갖추어 입고 편차( 便 次 )에 들어왔고, 왕세자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 고 소차( 小 次 )에 들어왔다. 조금 뒤에 왕세자빈과 왕세자가 들어와 배위에 섰다. 왕비는 적 R ]

82 C; Documents and Sett i ngs Ad mi iistrat 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 1 0 부) 자경전 사료 - 자경전.hwp 5 의(쫓 衣 )에 수식( 首 節 )을 하고 나왔으며, 임금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좌석에 올라앉자, 왕비도 좌석에 올라앉았다 세취( 細 吹 )가 만수영무강인( 萬 壽 永 無 覆 引 )을 연주하자,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행례하였다. 실록) 순조 31 권, 30년 (1830 경 인 / 청 도광( 道 光 ) 10 년) 7월 15 일(경오) 3번째기사 9 월 신해( 辛 玄 )에 주상 전하( 主 上 散 下 )에게 존호( 尊 號 )를 올리기를, 연덕 현도 경인 순희( 淵 德 顯 道 景 仁 純 禮 ) 라고 하였으며, 중궁 전하( 中 宮 嚴 下 )에게는 명경( 明 敬 ) 이라고 올리고 친 히 책보( 冊 寶 )를 올렸었다. 무자년 5574) 에 모비( 母 紀 )의 춘추( 春 秋 )가 40 이 갔다고 하여 2 월 임오( 王 午 )에 자경전( 慧 慶 嚴 )에서 진작( 進 짧)하였는데 양전( 兩 願 )에서 함께 임어하여 받 으셨으 니, 자애와 효도가 융흡( 醒 治 )하여 상서롭고 화목한 기운이 궁궐에 넘쳤다. 이 진작에 호조 [ 度 支 ]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궁중에서 조판( 惜 辦 )하여 행하였다 명년( 明 年 )인 기 축년 5575) 에 성상( 聖 上 )의 보령( 寶 敵 ) 또한 40 에 올랐으므로, 2월 계축(쫓표)에 백관( 百 官 ) 을 거느 리 고 명정전( 明 政 嚴 )에서 진찬( 進 購 )하며 구작례( 九 뽑 禮 )를 행하고 3 일 뒤 에 또 자경 전( 經 慶 嚴 )에서 소작( 小 配 )을 올렸으며 이어서 내연( 內 훌)을 행하였다. 일성록) 헌종 2년 (1836) 11 월 8 일 命 親 傳 冊 寶 處 所 仁 政 散 徒 O 座 處 所 慧 慶 願 寫 之 禮 暫 以 上 尊 號 時 親 傳 冊 寶 處 所 及 大 王 大 紀 願 王 大 ~[, 嚴 徒 n 座 定 於 何 觀 양훌 敎 以 親 { 專 處 所 仁 政 散 寫 之 細 座 處 所 以 孫 慶 願 寫 之 일성록) 헌종 2년 (1836) 12월 1 일 大 王 大 紀 願 命 上 號 時 孫 慶 觀 親 受 之 節 置 之 大 王 大 떠 嚴 敎 日 尊 뽕 陳 賢 時 養 文 暴 附 於 피텀 關 陳 쩔좋 文 差 員 事 分 付 上 號 時 慧 慶 顧 親 受 之 節 置 之 事 分 付 일성록) 헌종 10년 (1844) 4 월 10 일 命 初 練 擇 處 所 慧 慶 嚴 薦 之 吉 時 午 時 薦 之 禮 暫 양 言 今 四 月 二 十 二 日 初 操 擇 時 處 所 及 處 子 뚫 關 時 門 路 以 何 處 學 行 敎 以 處 所 慧 慶 願 薦 之 門 路 魔 金 門 薦 之 又 땅 言 今 四 月 二 十 二 日 初 練 擇 吉 時 令 日 官 推 擇 則 同 日 때 時 午 時 慣 솜긍 以 何 時 學 行 敎 以 午 時 寫 之 일성록) 헌종 10년 (1844) 行 初 據 擇 手 慧 慶 嚴 4 월 22 일 듬듭 關 處 女 副 護 軍 金 公 鉉 女 행 學 徐 觀 淳 女 期 寧 都 守 金 在 쯤 女 社 樓 令 金 在 敬 女 懷 德 縣 藍 徐 慶 輔 女 司 寶 直 長 鄭 世 b'i: 女 戶 費 正 郞 金 萬 根 女 續 I 奉 事 鄭 基 承 女 副 司 果 徐 容 輔 女 生 員 朴 興 壽 女 童 쫓 敎 官 尹 奎 錫 女 前 都 事 趙 秉 繹 女 功 學 沈 購 之 女 副 護 軍 申 錫 愚 女 功 學 趙 秉 和 女 前 正 郞 洪 在 龍 女 副 司 果 申 泰 運 女 副 司 直 金 構 根 女 金 應 均 女 행 學 金 炳 箕 女 O 大 王 大 ~[, 願 敎 日 前 표 郞 洪 在 龍 女 童 豪 敎 官 尹 奎 錫 女 副 司 直 申 泰 運 女 혜 學 徐 觀 淳 女 副 護 軍 金 公 鉉 女 續 工 奉 事 鄭 基 承 女 生 員 * 興 壽 女 拉 再 練 擇 入 之 其 餘 許 婚 [O

83 c Doc u men t s and Settings Administ ato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 자경전. h wp 6 命 再 練 擇 處 所 평 慶 散 寫 之 門 路 魔 金 門 寫 之 禮 團 양 言 今 四 月 二 十 六 日 再 據 擇 時 處 所 及 處 子 품 關 門 路 以 何 處 學 行 敎 以 經 慶 顧 寫 之 門 路 魔 金 門 薦 之 又 양 言 再 練 擇 吉 辰 令 日 官 推 擇 則 同 日 辰 時 뿔 時 명 吉 코 以 何 時 學 行 敎 以 뿔 時 寫 之 일성록) 헌종 10년 (1844) 4월 26 일 行 再 據 擇 手 慧 慶 觀 듬듭 關 處 女 前 正 郞 洪 在 龍 女 童 쫓 敎 官 尹 奎 錫 女 副 司 果 申 泰 運 女 功 學 徐 觀 淳 女 續 I 奉 事 鄭 基 承 女 生 員 * 興 壽 女 O 大 王 大 紀 嚴 敎 日 前 正 郞 洪 在 龍 女 副 司 果 申 泰 運 女 續 工 奉 事 鄭 基 承 女 프 練 擇 入 之 其 餘 拉 許 婚 일성록) 철종 3년 (1852) 11 월 21 일 受 冊 寶 處 所 慧 慶 願 寫 之 因 該 暫 걷양 票 有 是 命 也 일성록) 철종 3년 (1852) 11 월 22 일 上 號 內 習 慶 命 依 正 日 例 百 官 行 禮 於 仁 政 願 鷹 內 底 習 嚴 處 所 以 慧 慶 願 薦 之 中 宮 散 行 禮 習 嚴 之 節 同 日 學 行 禮 暫 햄 言 純 宗 大 王 追 上 尊 號 大 王 大 紀 散 加 上 尊 號 習 嚴 當 寫 擇 日 學 行 而 外 習 嚴 則 依 例 都 藍 堂 郞 及 諸 執 事 行 禮 於 議 政 府 而 內 習 慶 則 依 正 日 例 百 官 行 禮 於 仁 政 觀 展 而 加 上 尊 號 內 底 習 優 處 所 以 何 觀 빨 練 乎 敎 以 忽 慶 觀 馬 之 又 량 言 加 上 尊 號 時 며 宮 嚴 行 禮 當 有 習 嚴 之 節 請 內 習 慶 日 同 寫 學 行 允 之 일성록) 철종 5년 (1854) 5월 3 일 命 親 上 表 훌 處 所 慧 慶 散 寫 之 因 禮 團 햄 棄 有 是 命 승정원일기) 고종 2년 을축 (1865, 동치 4) 10월 26 일 (정사) 영건도감이 자경전의 철거의 일자 등을 정하여 보고하였다 0 영건도감이, 자경전( 慧 慶 嚴 ) 철거는 이달 29 일 신시에, 자미당(쌓 微 堂 ) 정초( 定 廳 )는 11 월 22 일 오시에, 입주( 立 柱 )는 12 월 3 일 축시에, 상량( 上 樓 )은 12 월 15 일 축시에 하기로 정 하였다. 원문) 營 建 都 藍, 慧 慶 없~f 散 앓, 今 月 二 十 九 日 申 時, 쌓 微 堂 定 廳, 十 - 月 二 十 = 日 午 時, 立 柱, 十 二 月 初 三 日 표 時, 上 짧, 同 月 十 五 日 표 時 - 7 -

84 -,. -- U B 핵. * 횡 이!내 까? 쩌 생 - 그럼 띤맞 꺼펴 씌꿇 잖 κ - 싸 펴 젠 씨 샤 4 꼽 f 쓸 * 파 - 4 l % - * ι끼 긴 않 니 펴 z y싸 kb f 개 흰 Jμ 꺼 젠J I u 원 -펜 1 썩 체 ι ψ 짜 싸 시 깎 i Yκ 펴 t ; 때 t 젠 ψ 냐 싸W 깐 샤 메 r γ υ f서 승 니페 니 4 ψ벨 κ 쉰 - X - 씨세 / 씨 r μ f 끼? 까 R 펴 띤 μ 원 냉 L. - z 찌 앙 M t ι 1 f 4% 내 - - 7? 끼 서 기 i -씨 - j- T ι rr U 애 i J 깨 R y 1 승정원일기 - ν 씨 ι ; ι 파 이 j 껴 J ν h h 사 t 갓 - -ι ι ι ι!, ι 1 깨 시 r -- 上 υl 쩌 진L - 까 - 씌 3 p 추 J GL 강 써 내 펴 싸 짧 션 껴 꽉 ; ι ν X + ι γ 선 ιo. 씨 μ? l 짜 - - 니 샤 까 / 1 씨 -. 이 끼 안 샤, 강 f / L 따 * 싸 λ /?ι - i A 씩 γ ι - a α 싸,.! 씨 -- % ili-- J 멧 J j f x E ta k 소 J 에 비 찌- C; Documents and Settings Ad ni iis t a tor 바탕 화면 2 ; F a / 앙)/ if - - ι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7 r L J 이 JA 강 * 쩌,, 져 U L q a 흥 티 - f -왔 주 간 1 ι. 다 안 끼 1865 년 10 월 26 일(일성록) 營 建 都 藍 以 孫 慶 嚴 移 建 짧 微 堂 양 뽕 慶 願 澈 짧 今 月 二 十 九 日 申 時 짧 微 堂 定 廳 十 - 月 二 十 二 日 午 時 立 柱 十 二 月 初 三 日 표 時 上 樓 同 月 十 五 日 표 時 J f -n - - 니- μ 1 까 나 녀 떼 낼 녀 나 써 빼닝 싸 냐 빼 LJ ṟ, 그림 캘 A흉 때 좋 흉 빼 빽i 뼈 값 내 념 激 뻐 칼 k 써 - 내 l i f겨 내 -- - l 뺏 i f 빼- t - - B 빼뺑 - j if 낼 J빡 낸 t 랜 짧 ti ι 1 1! l I- il 빼! l - -- 좋 i - 1il 송- 옛 - -- 싫 *l } L 2 일성록 - - 잃. 뿔 뺀 녀뻐끼뼈 야 쳤 꽤 젠 팩 % 뻐 뺑K 없 - 1 f 싸 얘 껴 싫 뼈 ι 뼈 흥 * A 네 M 대 x 빼 a Ak 낸 ηi 너 -*# * * % 꺼4 흙π 파 ι μ * 힘 A? L돼 벼 냉 세 너낸 빼 내 냐 내 촉 잖 권 - 파 쩌 뻐 윷 g %--!! /?,. - - * * 쩌 4팍 * ω싸 lji 빼 g - 애 - 써 짜% - f % - A - 반기요람1) 1) 순조( 純 祖 ) 8년 ( 년)경에 시임( 時 任 ) 호조 판서( 戶 뽑 判 쉰) 서영보( 徐 榮 輔 )와 부제학( 副 提 學 ) 심상규( 沈 家 奎 ) - 8 -

85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rato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8 재용편 4 I 호조 각장 사례( 戶 費 各 掌 事 例 ) / 별례방( 別 例 房 ) 보계( 補 階 ) 0 경 례시( 慶 禮 時 )면 전당( 願 堂 )에 보계( 補 階 )를 설치하는 예가 있으니, 그 때 를 다달아 하교를 기다려서[ 待 ] 거행한다. 영화당( 奭 花 堂 )은 정종 무술년 관무재( 觀 武 才 ) 때에 78 칸( 間 ), 을사년 알성 ( 謂 聖 ) 때 에 82 칸, 이 뒤 대 비 ( 大 比 ) 경 과( 慶 科 ) 때 에 는 이 에 의 하여 궁중에 배설하고[ 入 排 ] 당저( 當 수) 계해년 알성( 調 聖 ) 때나 갑자년 경과( 慶 科 ) 정시( 底 試 ) 와 정묘년 경과 정시 및 알성 때의 간수( 間 數 )도 모두 위와 같음. 0 경복전( 景 福 願 )은 정종 계묘 Cl 783, 정조 7). 갑진 (1784, 정조 8) 에 존호( 尊 號 )를 올릴 때에 연달아 입 배( 入 排 )했음. 0 정 미년에 존호를 올릴 때에 하교( 下 敎 )하기를 이미 자교( 慧 敎 ; 헌경 황후 홍씨( 敵 敬 皇 l즙 洪 民 )의 전교( 傳 敎 ))를 받들어 금번( 今 짧) 존호를 올릴 때에는 병자(영조 32). 임진 Cl 772, 영조 48) 의 예에 의하여 보계판( 補 階 板 ; 보계에 쓰는 생판( 生 板 ))을 설치하지 말라. 하였 음 0 당저( 當 수) 갑자년에 존호를 올릴 때에 는 30 칸( 間 ). 0 자경전(혔톨짧헤은 정종 계묘(쫓 gp) 년 갑진년에 연달아 입배( 入 排 )하였고, 당저 임술년 (1802) 책보( 冊 l를 올랄 때에 15칸 0 중 희당( 重 熙 堂 ; 창덕궁 안 관물헌( 觀 物 휩) 동쪽에 있음)은 정종 갑진년 세자( 世 子 ) 책례( 冊 禮 ) 때에 입배( 入 排 )했음. 0 수정전( 壽 靜 願 은 창덕궁 안 욱화당( 玉 華 堂 ) 북쪽에 있음)은 정종 을묘년 존호를 올릴 때에 65 칸. 0 연희당( 延 禮 堂 : 창경궁 안에 있음)은 을묘년 혜경궁( 惠 훌 宮 ) 환갑 진찬( 進 빼 때에 52칸. 0 대 조전( 大 造 願 창덕궁 안 곤전( 坤 嚴 )의 정당( 正 堂 )) 당저( 當 수) 임술년 가례( 嘉 禮 ; 정조( 正 祖 )의 혼례시) 때에 45 칸. 0 희정당( 熙 政 堂 창덕궁 안 대 조전( 大 造 願 ) 남쪽의 편전( 便 嚴 ))은 당저 갑자년 부마( 關 馬 )를 간택( 練 擇 )할 때에 1 6 칸- 0 함인정(뼈 仁 亨 ; 창경궁 안 명정전( 明 政 嚴 )의 서쪽에 있음)은 당저 무진년 도기유생( 到 記 f 需 生 ) 시취( 試 取 )에 친임( 親 臨 )할 때에 12 칸. 매양 입배( 入 排 )할 때에 는 호조 당( 堂 ) 냥( 郞 ) 자문감역(쌓 門 藍 投 ) 이 공장( 工 IK). 모군( 幕 軍 공사에 샀을 받고 품팔이하는 자)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거행한다. 입배( 入 排 )한 것을 철거하는 것은 낭청과 감역( 藍 投 )이 거행함 0 경희 궁( 慶 熙 宮 ) 영취정( 奭 짧 享 경희궁 안 광명전( 光 明 願 ) 북쪽에 있음)의 담장 가에 보계( 補 階 ) 10 칸쯤 이 있으니, 병신년 이전[ 며 申 前 ]부터 시작한 것으로서 근년 에 는 정내( 享 內 ) 에 거 두 어 두고 가림( 罵 臨 )한다는 명( 命 )이 있으면 수직( 守 直 )하는 중관( 中 官 )이 영선( 營 續 ) 에 분 부하여 예대로[ 依 舊 ] 베풀어 설치함 목물고( 木 物 庫 ) 0 교량 보계의 재료와 체 대 ( 體 大 )한 목물( 木 物 )을 모아서 예전 보민사( 保 民 司 ) 예전 장 례 원( 掌 練 院 )으로서 호조 서변( 西 邊 )에 있음 에 들여 쌓고, 정묘년에 또 예전 수어청( 守 쩔 廳 )을 청득( 請 得 )하였다 경희궁( 慶 熙 宮 ) 우변( 右 邊 )에 있으 니 그전 용호영( 龍 虎 營 ) 이었음. 0 계사( 計 土 ) 2 인을 따로 정하여 주야로 윤번으로 수직하여 출납( 出 納 )하는 것 을 맡아서 보게 하였었는데, 당저 정묘년 에 예전 수어청을 본조( 本 塵 )에 소속시키고 목물( 木 物 )을 들 여 쌓을 것으로 호조 판서 서영보가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음. 신중동국여지승람 창경궁( 昌 慶 宮 ) 창덕궁 동쪽에 있으며, 예 전 수강궁( 壽 康 宮 ) 터이다. 성종 14 년 0483) 에 정 희왕후( 貞 熹 王 尼 ) 인수왕대비( 仁 拜 王 大 紀 ) 안순왕후( 安 順 王 텀) 세 궁( 宮 )을 위하여 지었다, 선조 25 년 0592) 왜란 때 불타 광해군 8년 (1616) 에 중건 하였다. 명정전( 明 政 散 ) 성종이 매 양 정월 동지 때가 되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세 궁에 하례드리고, 이 전 에 나와서 조 회를 받았다 넓이가 5 칸, 세로가 4 칸이며, 동향이다 동쪽을 명정문( 明 政 門 )이라 하며, 문 가 같이 비 국유사당상( 備 局 有 司 堂 上 )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 構 進 )한 것이다. Q ]

86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rato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9 밖의 어구( 倒 構 다리)를 옥천교( 玉 川 橋 )라 한다. 전 뜰의 남쪽 문을 광정( 光 政 )이라 편액하 고 북쪽 문을 원범( 元 範 )이라 편액하였다. 문정전( 文 政 嚴 ) 명정전 남쪽에 있으며, 숭화문(몇 化 門 )을 口 口 라 한다. 인양전( 仁 陽 嚴 ) 명정전 서쪽에 있다 경춘전( 景 春 願 ) 수강전( 壽 康 嚴 ) 북 쪽, 환경전( 歡 慶 散 ) 서쪽에 있다 소혜왕후( 昭 惠 王 텀) 인현왕후( 仁 顯 王 텀)가 승하하였으며, 혜빈( 惠 續 )이 이 전에서 승하하셨다 정종 헌종의 태어난 곳인데, 어펼로 탄생전(짧 生 嚴 )이 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동쪽 벽에는 장헌세자( 莊 歡 世 子 )가 그린 묵룡도(뿔 龍 圖 )가 있는데, 정조가 기문을 지었다. 0 서쪽에 가효당( 嘉 孝 堂 )이 있고, 남쪽에 희강당( 喜 康 堂 )이 있다. 통 명전( 通 明 願 ) 경춘전 북쪽에 있는데, 인순왕후( 仁 順 王 텀)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푸른 기 와를 이었는데, 정종조에 불탔다. 고려 때 세운 것이다. 환경전( 歡 慶 嚴 ) 경춘전 동쪽에 있는 데, 중종이 승하하였다. 순조 30년에 불타 중건하였다. 수령전( 壽 寧 散 ) 인양전( 仁 陽 願 ) 북쪽 에 있다. 자경전( 慧 慶 願 ) 명정전 북쪽에 있는데, 효의왕후( 孝 露 王 텀)가 승하하였다. 정종이 자전( 慧 嚴 )을 이 전에 모셨다. 통화전( 通 和 嚴 ) 요화당( 搖 華 堂 ) 동남에 있다. 양화당( 養 和 堂 ) 환경전 북쪽에 있다. 여휘당( 麗 8 軍 堂 ) 통명전 서쪽에 있는데, 인열왕후( 仁 烈 王 텀)가 승하하였 다 숭문당(몇 文 堂 ) 명정전 서쪽에 있다 함인정(패 仁 享 ) 명정전 서북쪽 빈양문(좁 陽 門 ) 안에 있다 환취정( 環 짧후) 통명전 북쪽에 있는데, 경종이 승하하였다, 김종직( 金 宗 直 )의 기문이 있다. 영춘헌( 迎 春 野 ) 집복헌( 集 福 幹 ) 동쪽에 있는데, 정종이 자궁( 慧 宮 )을 모시던 곳이다. 정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공묵각( 悲 默 聞 ) 환경전 남쪽에 있다 동궁( 東 宮 ) 건양문( 建 陽 門 ) 밖에 있는데, 예전 구현전( 求 賢 嚴 )의 광연정( 廣 延 후) 터이며, 앞에 연못이 있다. 성종 22 년 (1491) 에 짓고 춘궁( 春 宮 )이 라 고쳐 불렀다. 동남쪽에 동룡문( 鋼 龍 門 )이 있다, 중희 당( 重 熙 堂 ) 동궁( 東 宮 )의 서연( 書 建 )이며, 신료(멀 燈 )들을 불러서 보는 곳이다. 헌종이 여기서 승하 하였다. 곁에 소주합루( 小 富 合 樓 )가 있는데, 정종조 때 팔분( 八 分 )으로 정구팔황 호월일가( 底 짧A쁨 胡 越 - 家 ) 여닮 자를 써서 당의 문 위에 걸었다 남문을 중화문( 重 華 門 )이라 하며, 또 그 남쪽을 이극문(핫 極 門 )이라 하는데 곧 동궁의 정문이다 성정각( 誠 正 聞 ) 중희당 오른쪽에 있는데,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만나보는 곳이다. 숙종의 어필 현판이 있다 정종 5 년 (1781) 에 조윤형( 曺 允 亨 )을 명하여 경계 십잠도( 做 폈 十 歲 圖 )를 그려서 걸었다 수강재( 壽 康 薦 ) 중희당 동쪽에 있다. 시민당( 時 敏 堂 ) 수강재( 壽 康 驚 ) 동쪽에 있는데, 동궁의 외당( 外 堂 ) 이다 청정( 聽 政 )과 조참( 朝 양) 등의 일을 이곳에서 행한다 건극당( 建 極 堂 ) 신독재( 慣 獨 驚 ) 북쪽에 있다. 의춘헌( 宜 春 휩) 바로 건극당 동쪽 방이다. 0 효순왕후( 孝 純 王 信 )가 여기서 승 하하였다. 저승전( 蘭 承 嚴 ) 건양문( 建 陽 門 ) 밖에 있다 명성왕후( 明 聖 王 팀)가 승하하였다. 취 선당( 就 善 堂 ) 저승전 서쪽에 있는데, 경종이 태어났다 진수당( 進 修 堂 ) 시민당 북쪽에 있는 데, 진종(률 宗 )이 승하하였다 집복헌( 集 福 휩) 영춘헌 서쪽에 있으며, 장헌세자( 莊 敵 世 子 )와 순조가 태어났다. 양심각( 養 心 聞 ) 口 口 口 口 口 에 있는데, 순원왕후( 純 元 王 尼 )가 승하하였다 보 루각( 報 源 聞 ) 동룡문 옆, 시강원 동쪽에 있다. 광해군 갑인년 (1614) 에 지었는데, 지금은 폐 지되었다. 일영대( 日 影 臺 )가 있다. 0 대궐 안에는 전루소( 傳 源 所 )가 모두 12 곳이니, 동룡문 동수구( 東 水 口 ) 어정( 倒 井 ) 경화문( 景 化 門 ) 광정문( 光 政 門 ) 진선문 마군영( 馬 軍 營 ). 돈화문 경추문( 景 秋 門 ) 북수각( 北 水 聞 ) 영숙문( 永 蕭 門 )이다. 대궐 밖에는 6 곳이니, 소( 所 ) 마다 군사 2 명이 있다. 사정( 射 享 ) 내사복시에 있다 효종조에 세웠는데, 바로 옛날 철장 목 마( 鐵 校 木 馬 )의 뜻이다 후에 정자가 폐지되었는데 영종 18 년 (17 42) 에 고쳐 지었다 춘당대 ( 春 熺 훌) 바로 궁궐 안 후원( 後 행)인데, 선비를 시험보이고 무사( 武 士 )를 사열하는 곳이다 성종조에 파가 창경궁 후원에서 났는데, 한 줄기에 9 개의 가지가 자라니 당시에 서총( 瑞 짤) 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연산군 을축년 (1505) 에 이곳에 대를 짓고 서총대( 瑞 줬 臺 )라 이름하여 10 -

87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rato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10 방탕하게 놀이하는 장소로 삼았다 대 를 쌓을 때에 하삼도( 下 三 道 )의 군민( 軍 民 )을 정발하여 고역( 屬 投 )시키며 포목을 많이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옷 속의 솜을 뜯어서 다시 포목을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 색깔이 연기에 그을린 듯 검고 치수가 짧았다 이 때문 에 지금도 거친 면포 옷을 서총대포( 瑞 청 훨 布 )라 한다. 0 성종이 하루는 춘당대에 나가서 집춘문( 集 春 門 )으로 성균관 유생 Cf 需 生 )들을 불러 경서를 강( 講 )받고 과거 급제를 주었는데, 지금도 미담( 美 談 )으로 여긴다. 0 선조 5 년 0572) 에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고 다음날 방방( 放 樣 )하 니,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이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0 임금이 거둥 할 때마다 배설방( 排 設 房 )에서 큰 베 장막을 펼쳐 차일( 週 日 )을 영화당( 興 花 堂 ) 처마 앞 동 쪽에 치는데, 큰 대나무 가지로 기둥을 삼아서 대( 臺 ) 곁에 열 길이나 되게 세우니, 높은 나 무들이 모두 그 아래로 들 어간다. 또 당( 堂 ) 섬돌에 잇따라 붉은 널마루[ 朱 板 野 ], 곧 보계판 ( 步 階 板 )을 설치하고 용수석( 龍 覆 席 )으로 덮으니, 그 위에 수삼백 명이 앉을 만하며 마루 밑 으로는 사람이 서서 다닐 만한데, 9층 나무 층계를 만들어서 밖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못이 있는데, 가물 때 못가에 도마뱀과 동자( 童 子 )를 만들어서 비를 11 차례나 빌되, 무신 종 2품 관이 제관이 되며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시장을 옮겼다. 도마뱀을 사용하는 일은 지금은 폐지되었다. 12차의 오방 토룡제( 五 方 土 龍 짤)에는, 당하( 堂 下 ) 3품관이 제관이 된다. 어수당 ( 魚 水 堂 ) 불로문( 不 老 門 ) 안에 있는데, 돌을 깎아 문을 만들었다. 효종조에 창건하였다. 영화 당( 奭 花 堂 ) 춘당대 위쪽에 있는데, 앞에 연못이 있다. 당 뒤에도 못이 있는데, 바로 주합루 (옮 合 樓 ) 앞 못이다. 0 무릇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시험할 때에 임금이 여기에 나온다. 진장각( 珍 藏 聞 ) 어수당 후록( 後 麗 ) 아래에 있는데, 천한각명( 天 輪 聞 銘 )이 있다, 곧 숙종 갑술 년 Cl 694) 에 규장각을 종부시( 宗 鷹 츄) 경내에 짓고서 세운 것이다. 연경당( 演 慶 堂 ) 어수당 서 북쪽에 있다 순조 27 년 (1827) 익종( 寶 宗 ) 이 동궁에 있을 때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하였는 데, 그때 대조( 大 朝 순조를 말함)에게 존호( 尊 號 )를 올리는 경사스런 예( 禮 )를 만났고 마침 연경당을 낙성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석거각 CE 떻 聞 ) 口 口 口 에 있는데, 석거문 CE 案 門 )이 있다. 관풍각( 觀 뿔 聞 ) 춘당대 남쪽에 있다. 앞에 논이 있어 임금이 친히 나와서 농사 짓는 것을 구경하고 매해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면 근신( 近 많)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춘당도 ( 春 裡 힘)라고 한다. 관덕정( 觀 德 훈) 춘당대 동북쪽에 있으며, 곧 사정( 射 亨 )이다. 단풍정( 月 뼈 享 ) 춘당대 곁에 있는데,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름 한 것이요, 정자는 없다. 장원봉( 狀 元 옳) 곧 춘당대 맞은편 언덕이다. 과거 볼 때에 지방에 서 뽑혀온 선비 [ 靈 人 ]들이 여기에 모여 앉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성종이 정희( 貞 熹 ) 인수( 仁 繹 ) 안순( 安 順 )의 세 대비 를 위하여 창덕궁 동쪽 수강궁( 壽 康 宮 ) 터에 창경궁을 짓고, 15 년 갑진 (1484) 에 대제학 서거정( 徐 居 正 )을 명하여 전각 이름을 지었는데, 전을 명 정 문정 수령 환경 경춘 인양 통명, 당을 양화 여휘, 각을 사성( 思 誠 ), 정자를 환취 ( 環 짧)라 하였다. 홍재전서 고전번역서 > 홍재전서( 弘 짧 全 풀) > 홍재전서 제 182 권 > 군서표기(꿇 書 標 記 ) 4 0 어정( 倒 定 ) 4 > 최종정보 자궁주갑탄신갱재축( 慧 宮 周 甲 짧 辰 廣 載 轉 ) 간본 을묘년 6 월 18 일은 자궁( 孫 宮 )의 주갑이 되는 생신 날이다. 내가 명정전( 明 政 願 )에 가서 몸 소 치사( 致 詞 )와 전문(쫓 文 )과 표리( 表 훌)를 드 리고 연희당( 延 禮 堂 )으로 돌아와 술잔을 올려 헌수( 鳳 壽 )하였다. 자궁의 동성( 同 姓 ) 1 0촌 이내의 친척과 이성( 異 姓 ) 6 촌 이내가 모두 참여 - 11

88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rator 바당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자경전 사료-자경전.hwp 11 하였다 교태문( 交 泰 門 ) 내외에서 문무( 文 武 ) 제신( 諸 멀) 에게 음식을 내려 주었고, 전문을 올 린 유생들에게도 명륜당( 明 倫 堂 )의 앞마당에서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아래로 여러 군영( 軍 營 )의 교졸( 校 후)과 여러 관청의 아전과 하례( 下 慧 )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떡과 과일을 나누 어 주었다. 정오( 正 午 )에는 다시 주찬(훌 購 )을 올렸다 나는 진찬( 進 體 )은 진연( 進 훌)과 다르 고 주찬은 또 진찬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어 장용영(봐 勇 營 )에 지시하여 소리가 여린 관현 악( 管 鉉 樂 )을 연주하게 하고, 이어서 오언 율시(죠 言 律 詩 ) 한 수를 지어 삼가 경사를 기록해 두는 성의를 표하였다. 이 시에 갱재한 이는 외빈( 外 좁)이 128 명 제신( 諸 톰)이 178 명이다. /

89 λ1 등을-짜LA:: 2-i O-L. 정조 1 권, 즉위년 ( 병신 / 청 건륭( 乾 隆 ) 41 년) 3 월 10 일(신사) 1 번째기사 경희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하다 영종 대왕 52 년 Cl 776) [ 청나라 건륭 41 년이다. ] 3월 병자일(쩍 子 日 )에 영종이 홍( 覆 )하고, 6 일 만인 신사일( 辛 E 日 )에 왕이 경희궁( 慶 熙 宮 )의 숭정문(뽕 政 門 )에 즉위하였다. 왕은 영종 28 년 Cl 752) [ 임신년 이다 > 9월 기묘일(~깨 日 ) [ 22 일 축시(표 時 )이다 > 창경궁( 昌 많 宮 )의 경춘전( 景 春 願 )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장헌 세자가 신룡( 神 龍 )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끔을 꾸고서, 꿈을 캔 다음에 손수 꿈속에 서 본 대로 그림을 그리어 궁중벽에 걸어 놓았었다. 탄생하면서 영특한 음성이 큰 종이 울리듯 하므로 궁중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영종이 친럼하여 보고서 매우 기뻐하며 혜빈( 惠 鎭 )에게 하교하기를, 이 애는 너무도 나를 닮았다. 이런 애를 얻었으니 종사가 근심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하고, 그날로 원 손( 元 孫 )으로 호를 정하였다. 30년 (1754) [ 갑술년이다. 가을에 보양청( 輔 養 廳 )을 설치했고 35 년 Cl 759) [ 기묘년이다. 2월 계해일(쫓X 日 )에 왕세손( 王 世 孫 )으로 책립( 冊 立 )되었다가 윤 6 월 경자일( 康 子 日 )에 명정전( 明 政 嚴 )에서 책( 冊 )을 받게 되었고, 37 년 (1761) I 신사년이다. 3월 기유일 Cc 西 日 )에 입 학하였고 8 일 만인 정사일 (TE 日 )에 경현당( 景 賢 堂 )에서 관례( 冠 禮 )를 행하고 38 년 Cl 762) [ 임오년이 다. ] 2월 병인일( 困 寅 日 )에 어의궁( 於 義 宮 ) [ 효종( 孝 宗 )의 장저( 慣 邱 )인 곳이다. ] 에서 가례( 嘉 禮 )를 거 행하니, 빈( 題 )은 김씨( 金 民 )이다. [ 본적은 청풍( 淸 風 )이고 청원 부원군( 淸 原 府 院 君 ) 김시묵( 金 時 默 )의 딸 이다. 윤 5월에 장헌 세자가 홍하였고 7월에 명( 明 )나라의 고사에 의하여 세손궁( 世 孫 宮 )을 동궁( 東 宮 ) 으로 칭하며 다시 춘방( 春 행 )1) 과 계방( 桂 防 )2) 을 설치했고, 40년 Cl 764) I 갑신년이다. ] 2월 임인일 ( 王 寅 日 )에 왕을 효장 세자( 孝 章 世 子 )의 후사로 삼아 종통( 宗 統 )을 이 어 받도록 하고, 51 년 Cl 775) [ 을미 년이다. 12 월 경술일( 康 成 日 )에 서정( 應 政 )을 대청( 代 聽 )하며 경현당( 景 賢 堂 )에서 조하( 朝 賢 )를 받았다 이에 이르러 영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 註 1] 춘방( 春 행) 세자 [ 註 2) 계방( 桂 행) ; 세자 익위사. 용 정조 1 권, 즉위년 (1776 병신 / 청 건륭( 乾 隆 ) 41 년) 3월 16 일(정해) 인산( 因 山 ) 뒤에는 혼전( 塊 嚴 )을 창경궁의 문정전( 文 政 願 )으로 고쳐 정하고, 정축년 17) 의 사례대로 휘령 전( 徵 寧 願 )을 강서원( 講 書 院 )으로 옮기어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 註 17]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Gr 정조 11 권, 5년 Cl 781 신축 / 청 건륭( 乾 隆 ) 46 년) 3 월 10 일(계미) 6번째기사 이문원( 據 文 院 )을 도총부( 都 擔 府 )로 옮기고, 도총부를 창경궁( 昌 慶 宮 )의 구부( 舊 府 )로 환접( 還 接 )하게 하 였다. 이문원이 옛날에는 금원( 禁 짧 )2574) 에 있었는데 영숙문( 永 蕭 門 ) 밖 국별장청( 局 別 將 廳 )2575) 으 로 옮겨 설치하였다. 규장각 제학 유언호( 兪 彦 鎬 )가 차자( 節 子 )를 올려 말하기를, 내각의 설치에 있어서, 위로 성모( 聖 諸 )를 받드는 것은 멀리 용도각( 龍 圖 聞 )2576) 과 보문각( 寶 文 聞 )2577) 을 모방하였고, 아래로 인재를 기르는 것은 가까이 집 현전( 集 賢 願 )과 호당( 湖 堂 )2578) 을 참 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성려( 聖 慮 )로 오로지 먼 뒷날을 도모하려는 마음을 품으시고 거듭 각신( 聞 톰)에게 명하여 의식( 燒 式 )을 품재( 棄 載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문원을 영숙문 밖으로 옮긴 일에 이를 것 같 으면 더욱 대성인( 大 聖 人 )의 깊고도 원대한 모유( 諸 敵 )를 볼 수 있습니다. 대개 그 직책은 태친( 太 親 )이 나 위치가 너무 깊숙하여 주선( 周 族 )하고 기거( 起 居 )하는 데 항상 두려워 스스로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 으니, 이것이 옮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세( 地 勢 )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옥우( 屋 宇 )도 좁아서 의식( 懷 式 )은 비록 이미 정하였을지라도 땅은 이를 시행할 가망이 없습니다 만일 터를 넓혀 고쳐 지으려 한다면, 또한 비용을 아끼기 위한 본의( 本 意 )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고 끼 <]

90 / 1 트르--{?; 2 - C그 --'-- 르고 너른 땅에 전과 같은 장소를 점거해 얻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옮길만 한 곳을 찾는 다면 금중( 禁 中 )의 제성( 諸 省 ) 가운데 오직 도총부에 신구( 新 舊 ) 두 곳이 있습니다 다만, 그곳은 어첩 ( 倒 牌 )을 봉안하는 곳이고, 선조( 先 朝 )께서 일찍이 임어하신 곳이라서 신이 이 때문에 주저하고 있습니 다 부중( 府 中 )의 고실( 故 實 )을 가지고 상고하여 보니, 어첩을 모시는 각( 聞 )은 애당초 일정(- 定 )한 장소 가 없었습니다. 대개 만수궁( 萬 壽 宮 )의 구기( 舊 基 )에서 동소( 東 所 )로 옮겼으며 또 구부( 舊 府 )로 옮겼다가 경희궁( 慶 熙 宮 ) 창덕궁( 昌 德 宮 )의 양부( 兩 府 )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옮김이 무상( 無 常 )하였습니다 또한 삼 가 선조의 경진년 2579) 에 도총부에 어제( 徒 n 製 )를 게판( 揚 板 )한 것을 살펴보건대 임진년 2580) 에서 갑 오년 2581) 에 이르기까지 제배( 除 拜 )되어 입직( 入 直 )한 월일( 月 日 )을 빠짐없이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숙 묘조( 蕭 願 朝 )의 여러 일기( 日 記 )를 상고하건대, 임진년에서 갑오년까지의 시어소( 時 倒 所 )가 모두 경희궁 에 있었다고 되어 있으니, 선조께서 일찍이 임어하신 곳은, 곧 경희궁의 도총부이지 창덕궁의 도총부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도총부를 구소( 舊 所 )로 되돌리고, 본원( 本 院 )을 이곳으로 옮긴다면 양쪽이 다 사의에 맞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효종조( 孝 宗 朝 )에는 일찍이 유신({ 需 닮)이 본관( 本 館 )을 옮길 것을 청한 상주( 上 奏 )로 인하여 유사( 有 司 )에게 땅을 살펴보고 고쳐 지으라고 특별히 명하여 지금껏 성 대한 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본각( 本 聞 )의 사면( 事 面 )은 옥서( 玉 뿔 )2582) 보다 중하고, 번거롭 게 터를 닦거나 지을 것도 없으므로 또한 매우 간펀한데, 무엇에 구애되어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란 먼저 그 대본( 大 本 )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본각( 本 聞 )의 설시( 設 施 )는 비록 이미 여 러 해가 되었으나 아직껏 관사( 館 舍 )로 정한 곳이 없기 때문에 무릇 모든 규도( 規 度 )가 다 말무( 末 務 )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가 오직 방편( 方 便 )에 관한 방도에 대해 그 좋은 생각을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올 라온 경의 차본( 節 本 )을 보니, 이미 직책은 태친( 太 親 )이나, 위치가 너무 궁중 깊숙이 있다는 것으로 걱 정을 하였고, 계속해서 경용( 經 用 )을 허비하면서 새로운 터 [ 基 ]를 경영( 經 營 )하는 것을 걱정하였는가 하 면, 위부( 衛 府 )2583) 에 대해서는 위부를 옮긴 제도를 상고하였고 옥서에 대해서는 옥서를 옮기기를 청 한 것으로 증거하였다. 내가 이에 가만히 느끼는 바가 있는데 효묘( 孝 關 ) 이전의 위부( 衛 府 )의 주접소( 住 接 所 )는 바로 구부( 舊 府 )임이 분명하니 구부가 성조( 聖 祖 )께서 임어하신 곳이었음을 또 우러러 알 수 있 는 것이 경의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이 대궐과 저 대궐의 부( 府 )는 모두 양성( 兩 聖 )2584) 께서 임어하시 던 곳이니, 더욱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차자에서 청한 것은 아흰 대로 시행하라. 지금 이후로 각( 聞 )과 부( 府 )가 의당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으니, 일거 양득(- 學 兩 得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경이 옛일을 상고한 노력에 의지한 바가 많고도 크다. 원( 院 )을 옮기고 나서 어펼( 倒 筆 )로 이문지 원( 擺 文 之 院 ) 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내리겠으니, 정청(표 廳 )에 걸고 시임( 時 任 ) 원임( 原 任 )의 각신( 聞 뭄) 은 전문( 塞 文 )을 올려 사례하게 하라. 하였다 [ 註 2574] 금원( 禁 짧) - 대궐의 후원. G<' [ 註 2575] 국별장청( 局 別 將 廳 ) 훈련 도감에 속한 [ 註 2576] 용도각( 龍 圖 聞 ) 중국 송나라 때 어서( 倒 書 ) 문집( 文 集 ) 보록( 諸 錄 ) 보물류( 寶 物 類 )에 관한 일 을 맡아보던 관부( 官 府 ) [융 [ 註 2577] 보문각( 寶 文 聞 ) ; 고려 때 경연과 장서( 藏 書 )를 맡아보던 관청 c_;:r [ 註 2578] 호당( 湖 堂 ) ; 독서당( 讀 書 堂 )을 고쳐 부른 이름. * [ 註 2579) 경진년 : 1760 영조 36 년 l효 [ 註 2580] 임진년 1712 숙종 38 년, 냥 [ 註 2581] 갑오년 숙종 40 년. 다r A 낙

91 실록-정조 [ 註 2582 ] 옥서( 玉 暑 ) 홍문관의 별칭, 양 [ 註 2583 ] 위부( 衛 府 ) 오위 도총부. 졸 [ 註 2584 ] 양성( 兩 聖 ) ; 효종과 숙종 a 일성록 정조 즉위년 병신 (1776, 건륭 41) 9월 30 일(무술) 0 창의궁( 影 義 宮 )에 나아가 이안제( 移 安 察 )를 거행하고, 이어 신주를 모시고 경모궁에 나아가 봉안 ( 奉 安 )한 뒤에 친제( 親 聚 )를 거행하였다. 0 포과익선관( 布 覆 靈 善 冠 ), 포단령포( 布 團 領 뻔)를 갖춰 입고 연( 養 )에 올라 창의궁에 나아가 이안제를 행하였다. 광화문에 나아가 지영( 祝 迎 )한 뒤에 이어 신련( 神 흙)을 모시고 경모궁( 景 薦 宮 )에 봉안하고 의 례 대 로 제사를 행하였다. 연에 올라 홍화문( 弘 化 門 )을 지나 명정문( 明 政 門 ) 밖에 이르러서 연에서 내려 여 ( 與 )를 타고 영 화당( 奭 花 堂 )으로 나아갔다. 이 어 서 향각( 書 香 聞 )에 나아갔다. 정조 즉위년 병신 (1776, 건륭 41) 10월 1 일(기해) 0 문과 정시( 文 科 흉 試 )는 명정전( 明 政 嚴 )에서 설행하고, 무과 정시( 武 科 度 試 )는 영화당( 曉 花 堂 )에서 설행하였다. 0 포과익선관( 布 奏 寶 善 冠 )과 원령포( 圓 領 뻔)를 갖추어 입고 영화당에서 여( 瓚 )를 타고 청 양문(춤 陽 門 ) 을 경유하여 명정전에 나아가 시제( 試 題 )를 내건 뒤에 영화당으로 돌아와서 무과 시험을 보였다. 정조 즉위년 병신 (1776, 건륭 41) 10월 3 일(신축) 0 문신( 文 톰)의 중시( 重 試 )는 명정전( 明 政 願 ) 에 서 설행하고, 무신( 武 닮)의 중시는 춘당 대 ( 春 樓 臺 )에서 설행하였다 문시( 文 試 )의 시관은 정존겸( 鄭 存 讓 ), 서명선( 徐 命 善 ), 정창성( 鄭 昌 聖 ), 임득호( 林 得 浩 ), 정상 인( 鄭 象 仁 ), 이 진형( 李 鎭 衝 ), 서형수( 徐 뀐 修 )이고, 무시( 武 試 )의 시관은 이은( 李 澈 ), 구선복( 具 善 復 ), 서호 수( 徐 浩 修 ), 이 장엽( 李 長 爆 ), 윤홍렬( 尹 弘 烈 ), 변성화( 邊 聖 和 ), 안숙( 安 爛 )이다. 0 포과익선관( 布 賽 쫓 善 冠 )과 원령포( 圓 領 뻔)를 갖추어 입고 여( 與 )를 타고 숭지문(몇 智 門 )을 경유하여 명정전으로 나아가서 표문( 表 文 )의 제목을 당( 庸 ) 나라 군신( 群 멀)들이 하례하는 뜻에서 영주( 靈 州 )에 다 비석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서 백왕( 百 王 )에게 갚고 간흉을 제거하여 천고( 千 古 )에 알린다 는 당 태 종( 太 宗 )의 시( 詩 )를 새 긴 것 에 비 의( 比 擬 )하다. 는 것으로 삼았다. 정조 1 년 정유 Cl 777, 건륭 42) l 월 27 일(갑오) 연주( 練 主 )를 제작하는 일을 명정전( 明 政 願 )에서 하라고 명하였다 0 예 조가 아뢰기를, 봉상시( 奉 常 츄)가 보고하기를, 연주를 제작하는 장소는 으레 비어 있는 궁궐 에 설치하였습 니 다 하였 습 니 다, 영종 대 왕( 英 宗 大 王 )의 연주는 어느 궁궐에서 제작하여 봉안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명정전으로 하 라. 하였다. 정조 1 년 정유 Cl 777, 건륭 42) 3월 10 일(병자) 모화관( 寒 華 館 )에 나아가 칙사를 전송하였다. 0 포과익선관( 布 裵 靈 善 冠 ), 백포포( 白 布 抱 ), 포과오서대( 布 裵 烏 뿜 帶 )를 갖추고 여( 與 )를 타고 흥태문 - c ι

92 로-저 ;t E므 --, 그 -'- ( 興 泰 門 )을 나와서 효명전에 나아가 전배( 展 拜 )하고 전( 願 ) 안으로 들어가 봉심하였다. 내가 가교를 타고 숭례문을 경유하여 홍화문( 弘 化 門 )으로 들어와서 여( 與 )를 타고 협양문( 協 陽 門 ) 안으 로 들어와 여에서 내려 대내로 돌아왔다. 정조 1 년 정유 (17 77, 건륭 42) 9월 3 일(을축) 효명전( 孝 明 嚴 )에 나아가 전알( 展 調 )하고, 이어서 경모궁( 景 暴 宮 )에 나아가 전배( 展 拜 )하였다 0 포과익선관( 布 賽 寶 善 冠 ) 에 포원령포( 布 圓 領 뻔)와 포과대( 布 裵 帶 )를 갖추고 여( 與 )를 타고 빈양문( 홈 陽 門 )을 나가 건복문( 建 福 門 ) 밖에서 여를 멈추고 효명전 (분경진으보 생각-펀 )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예 를 마치고서 여를 타고 홍화문( 弘 化 門 )을 나가 경모궁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전내( 願 內 )에 나아가 봉심( 奉 審 )하고 도로 재실( 薦 室 )로 갔다

93 자경전 자경전기 자경전의 존엄함이 거의 법전과 같다 자경전에서 이루어진 잔치 목록 자경전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 - 동궐도 - (정해)자경전진작정례의궤 순조 27 년 9월 - (무자)진작의궤 순조 28 년 2월 수리 환취정 남상방 제 1 칸, 영창 배 설 자경전 동온돌 북상방 2 칸, 남상방 2 칸, 북반침 2칸 청서퇴 5 칸, 가퇴 5칸 북퇴 4 칸 대 청 6칸 남퇴 6 칸 북퇴 3칸 - (기 축)진찬의 궤 >> 순조 29 년 2 월 권 2 排 設 / 자경전 동상방 영창 8짝, 쌍창 4 짝, 동온돌 채화지의 2부 서 上 房 영장 1 2 짝 서가퇴 반자 2칸 -쌍창, 양 짤, 만살장자 서온돌 채화지의 4 부 대 청분합 12 짝 대청채화지의 l 부 동행각만살장자 7칸 서행각 만살장자 5 칸 자경문 정목갑장 l 건 ; 鴻 청목 7폭갑각장 5 척 3촌 보경문 親 청목갑장 1 건 ; 體 청목 7폭갑각장 5 척 환취정 온돌 3 칸 반

94 자경전내외배설 자경 전 동온돌 북상방 2칸, 南 上 房 2 칸 북반침 2칸 서온돌 북상방 4 칸, 북반침 3 칸 남상방 4 칸 카곰 원 북퇴 4 칸 대청 6 칸 남퇴 6칸 북퇴 3 칸 통행각 남온돌 2 칸 반 前 廳 3칸반 동퇴 9 칸 북온돌 l 칸반 전청 3 칸 남행각 온돌 1 칸 전청 1 칸 남퇴 3 칸 서행각 온돌 3 칸 환취정 남온돌 3칸반 - Q ]

95 자경전 μ 구건성물 ~ "'궤 \ 정례의궤 (무자)진작의궤 (기축)진찬의궤 수리 수리 권 2 排 設 자경전 순조 27 년 순조 28 년 2월 순조 29 년 2월 자경전 동온돌 4-(통상방 1) 동온돌-북상방 2 동온돌-북상방 2 북반침 2 LO L 人 L 닙 L ') ι L 口 4λ H L σ ι 북반침 2 북반침 2 청동퇴 4 (동상방 영 창 8 짝, 쌍창 4 짝) 서온돌 6-(서상방 1) 서온돌-북상방 4 서온돌-북상방 4 서남온돌 2칸 북반침 3 L 口 -!-. 人 L 님 L t J1 남상방 4 북반침 3 북반침 3 전후좌우퇴 청서퇴 5 청서퇴 5 가퇴 5 가퇴 5 북퇴 4 북퇴 4 (서상방 영창 12 짝) 서가퇴(반자 2 칸, 반살장지) 대청 6 대청 6 대청 6(분합 12 짝) 남퇴 6 남퇴 6 북퇴 3 칸 보계 동서 9칸=72자 북퇴 3 칸 보계 동서 9칸 = 72자 동행각 온돌 3 남옹돌 2.5 청 3 前 廳 3.5 북청 2 동퇴 9 서퇴 6 서퇴 6 북온돌 L5 전청 3 칸 (만살장지 7 칸) 남행각 온돌 1 온돌 1 청 1 전청 1 퇴 3 남퇴 3 자경문서행각 5칸 서행각 3 칸 (만살장지 5 칸) 환취정 Ll- <;감:T ') 7,} ~. 드시 lj 1 낚-온판 3 칸 온돌 3 칸 반 대정 (낚싱-방 제 ] 칸, 영 칭 ) *편차 (대전편차) -동온돌 동상방 l 칸 대차-동온돌 북상방 대차-동온돌 북상방 쌍창, 사창, (=북상방 서 2 戶 ) 소차(세자)-자경문밖 서보계 세자-환취정남온돌, 자경전 중궁전 편차-서온돌 서상방(= 위에 군막을 동향으로 설치 동행각 남온돌 북상방 동 2 戶 ) 세자빈-보경문밖 남쪽 가까 세자빈- 興 慶 門 내 서계 상 세자-환취정 남온돌내 동상방 세자빈궁, 옹주 편자-서 행각 이 북향으로 설치 니)

96 자경전 領 實 我 寧 考 老 홈 老 之 意 亦 純 祖 ( 朝 蘇 ) 擺 ; 徐 榮 輔 ( 朝 蘇 ) 奉 敎 書 청구기 由 쯤 宮 흉 顧 之 漸 高 而 欣 祝 호 奎 慶 賞 之 盛 意 也 其 慶 之 寫 言 간행년대 [ 純 祖 8 年 (1808)] 책권수 l 뼈 (14 折 27 面 ) 권수 0001 此 之 謂 也 聖 人 微 萬 之 意 小 사이즈 cm 판본사항 拍 本 子 雖 不 敢 --띠 測 而 二 字 嚴 領 之 名 實 合 慧 宮 之 德 及 夫 어제자경전기 王 EX; 堆 我 王 大 ~[, 嚴 下 位 尊 f뼈 製 忽 慶 散 記 昌 慶 之 宮 有 願 염 O 之 嚴 也 륨 我 쯤 嚴 所 徒 O 寧 考 以 千 乘 孝 養 之 志 萬 無 꿇훌$댔 祝 之 顧 뚫 命 有 司 용 IJ 建 - 願 於 是 有 司 흉 走 童 I 越 事 周 家 靈 훌 有 R한 民 子 來 而 成 漢 朝 長 樂 寫 太 上 稱 壽 而 起 海 톰뭄 華 風 雷 寫 慶 金 門 뎌E 泰 玉 階 영E 著 景 雲 常 뿜 鳳 彩 方 爛 人 神 훔뺀 誠 禮 交 至 上 喜 甚 途 告 於 慧 宮 力 請 移 徒 0 ~ 宮 雖 不 喜 嚴 宇 之 宏 麗 感 寧 考 之 聖 孝 염 O 移 徒 U 此 嚴 自 此 之 後 萬 靈 降 피 止 百 神 合 奏 吉 辰 慶 日 玉 獨 時 和 上 途 以 此 薦 東 朝 而 願 옮 ] 未 違 付 참 宮 以 願 忽 嚴 日 我 受 千 乘 之 養 於 先 朝 今 則 我 於 景 春 之 顧 亦 足 安 身 大 紀 其 處 此 嚴 養 閒 優 遊 受 王 上 無 第 之 孝 答 老 人 動 옛영 之 意 쯤 嚴 麗 者 再 三 不 得 已 承 命 因 ~ 日 移 徒 O 於 此 嚴 因 舊 修 흡 略 治 月 彩 於 我 宮 之 命 慧 慧 흉상 移 居 於 此 嚴 責 小 子 遇 追 乎 先 志 몽 不 盛 且 美 歲 小 子 때 年 램힘 難 未 有 傳 師 之 링 多 味 於 政 治 全 賴 顧 宮 之 뢰 論 日 三 視 睡 之 道 朝 깃릎 훔 之 禮 實 是 我 朝 之 家 法 而 誠 有 所 未 運 禮 有 所 不 及 每 體 兩 字 之 짧 題 實 有 滿 心 之 漸 此 願 之 扁 題 B 忽 慶 嚴 統 數 盛 載 夫 孫 者 쯤 恩 也 慶 者 慶 錄 也 뽕 r 桂 쯤 宮 郞 下 配 合 륨t 極 곁좋 德 克 훌Z짧 我 寧 考 網 我 寧 考 及 小 子 之 生 也 覆 育 成 長 之 恩 昊 天 無 極 是 故 寧 考 敎 小 子 日 我 慧 宮 之 德 非 但 輔 予 뢰 導 實 有 꾀 業 於 國 家 也 嗚 呼 小 子 承 뿜 玉 音 若 乎 昨 也 其 孫 之 흙 義 此 之 謂 也 祝 南 山 l맹 何 者 以 慧 宮 明 仁 之 좁 德 授 Z 以 쯤 願 종홍 願 受 之 以 敎 小 子 而 小 子 學 問 不 明 未 答 兩 聖 相 傳 之 心 法 其 於 행g 賴 之 有 名 율 非 予 小 子 之 所 日 夜 束 然 而 警 易 者 乎 講 學 以 明 理 通 務 而 致 治 府 幾 對 揚 兩 忽 聖 之 응집 敎 予 小 子 方 自 옛며 動 於 此 適 於 承 候 之 時 慧 願 不 以 小 子 寫 不 敏 命 寫 嚴 記 小 子 萬 年 之 壽 析 北 斗 千 歲 之 罷 놈 神 쫓 建 켜3 國 無 꿇훌 以 至 人 瑞 之 受 命 以 來 恐 聖 意 不 效 價 m

97 心 致 思 護 拜 手 積 首 敬 寫 之 記 B 昌 德 之 宮 有 門 B 望 春 自 望 春 門 至 十 餘 步 X 至 - 門 日 迎 確 g 迎 雅 至 數 十 步 而 近 郞 是 嚴 也 是 願 也 我 寧 考 之 所 孝 奉 慧 宮 而 建 者 我 쯤 宮 之 所 付 我 ~ 願 f뽀 受 小 子 孝 奉 之 嚴 也 我 寧 考 所 以 錫 名 종종 慶 至 今 日 而 益 符 以 影 大 롯 柳 齊 佛 於 金 裡 觀 趙 臨 離 龍 而 學 語 黃 顧 選 好 技 而 送 흡 紅 綠 相 間 罪 罪 췄쥬 萬 갖 千 찮 態 光 { 具 在 實 遭 禁 행 之 緊 華 可 謂 上 淸 之 f 山 ; 景 此 嚴 之 春 景 也 洛 蘭 場 而 揮 :x: 花 是 謂 宮 中 之 故 事 坐 芳 草 而 陰 뿔 林 亦 勝 春 花 之 q 士 芳 播 挑 結 子 子 實 三 千 嘉 樹 陣 嗚 嗚 聲 上 下 倚 葉 千 효 香 氣 遠 近 淸 1흘씀 池 亦 似 活 水 廣 邊 傳 日 大 德 必 得 其 壽 壽 然 後 可 以 久 其 慶 又 日 一 人 有 慶 萬 엠 成 寧 寧 然 後 亦 可 以 寫 治 옳 我 孫 願 配 體 寧 考 德 冠 千 古 有 徵 規 於 鳳 關 應 敏 굉 깐쨌양 閔 J 享 坤 承 乾 剛 而 贊 패 六 宮 頭 樓 木 以 數 德 黃 흉 播 놈 A~ 管 紀 美 至 子 康 申 之 後 뚫 位 深 逢 寶 흉흉 愈 高 敬 事 慧 宮 童 童 之 念 - 是 不 懶 洞 洞 之 孝 屬 屬 之 誠 達 於 解 色 造 次 問 忽 此 是 ~ 願 之 孝 思 是 以 慶 運 隆 開 聖 壽 千 春 此 非 所 以 - 德 者 乎 亦 非 所 以 德 招 慶 者 乎 是 故 雖 嚴 聞 亦 若 被 慧 宮 之 德 諸 般 光 輝 增 氣 色 於 萬 歲 也 若 夫 吃 iljz 離 훌 光 臨 納 淸 之 內 훌홀훌훌 J단 構 相 連 寶 慶 之 中 通 明 廣 鎔 之 基 環 중중흙없 R 少 之 亨 星 뽕번 第 刊 E슴 曉 相 對 密 適 흥 宮 之 居 其 觀 景 春 遠 看 淸 輝 之 門 其 행 秋 景 被 緊 微 而 立 極 冊 黃 道 而 開 輯 f뚫 構 看 照 日 之 塵 R옳 環 聞 { 半 瑞 震 之 웅흡를훔 此 嚴 ~ 望 之 景 也 좁 陽 웅f ~뚫 淵 氣 昭 回 花 共 發 於 騎 園 植 播 花 以 數 十 置 圍 紅 熟 階 上 置 奇 草 之 百 餘 효 益 異 성 三 康 熱 휠- 暑 氣 不 慢 不 勞 宮 女 之 搖 養 엽 有 淸 歐 之 i 條 標 此 願 之 夏 景 也 林 뼈 布 鎬 秀 했 交 芳 秋 月 揚 明 光 輝 照 鍵 白 露 {중 據 廣 R줄 若 훌 收 雨 漂 之 柳 隱 rz 淸 虛 之 蕭 氣 於 是 八 域 奏 뿔 萬 姓 同 樂 今 如 昨 年 明 如 今 年 年 年 如 此 野 聞 鼓 頭 之 聲 朝 有 進 뿔 之 請 此 願 之 秋 景 也 散 樹 結 玉 須 看 六 花 之 출 舞 宮 編 恩 線 鏡 買 陽 之 初 回 至 若 千 秋 節 屆 三 O 乎 頭 購 燈 光 禮 色 冠 뻐 ~:E횡 人 成 彩 隊 和 益 區 宇 此 嚴 之 쪽 景 也 予 小 子 識 不 足 以 贊 慧 德 之 至 善 蘇 不 足 以 輔 是 願 Z 佳 處 草 草 悲 述 實 出 微 명 之 l뼈 略 略 陳 i탬 恐 失 記 體 之 格 然 在 誠 不 在 父 文 물 必 求 其 至 堆 識 實 事 而 E훗 몇 順 紀 元 後 百 有 八 十 - 年 著 獲 執 徐 六 月 二 十 九 日 奉 慧 敎 護 記 몇 政 太 夫 行 戶 曺 判 書 暴 jlj /

98 義 禁 府 事 知 經 흉 事 弘 文 館 提 學 奎 章 開 檢 校 直 提 學 五 衛 都 擔 府 都 總 管 E2: 徐 榮 輔 奉 敎 護 書 m ι

99 환취정 景 宗 德 文 寶 武 純 仁 宣 孝 大 王 昇 週 子 昌 慶 宮 之 環 앓후 甲 辰 八 月 二 十 五 日 서거정 / 四 佳 文 集 卷 之 三 / 記 類 / 環 짧훔 記 年 刊 권책 詩 集 25 권 詩 集 補 遺 3권 文 集 6 권 文 集 補 遺 2권 합 27 책 행자 1 2 행 1 9자 규격 (cm) 어미 上 下 花 救 魚 尾 소장처 詩 集 文 集 文 集 補 遺 국립 중 앙도서관, 詩 集 補 遺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 번호 詩 集 文 集 文 集 補 遺 한 , 詩 集 補 遺 奎 7027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環 쭉중훔 記 / 虛 白 先 生 續 集 卷 之 죠/ 記 저자 홍귀달( 洪 貴 達 ) 권수제 虛 白 후 文 集 ( 原 集 ) 판심제 간종 간행년 권책 행자 규격 어 미 虛 白 享 集 목판본 年 刊 3권 3 책 11 행 21 자 (cm) 上 下 二 葉 花 級 魚 尾 소장처 고려 대 학교 만송문고 소장도서번호 01 -Al 951 총간집수 권수제 虛 白 先 生 續 集 ( 續 集 ) 판심제 간종 간행년 권책 행자 규격 어미 소장처 虛 白 先 生 續 集 목판본 1843 年 刊 6권 年 諸 합 3 책 1 0 행 20자 (cm) 上 下 二 葉 花 救 魚 尾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 번호 古 文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4 잉

100 λ1 르르 "'--, 성종 168 권, 15 년 (1484 갑진 / 명 성화( 成 化 ) 20년) 7월 5 일(기축) 5번째기사 창경궁 통명전 북쪽에 환취정을 짓고, 김종직으로 하여금 기문( 記 文 )을 짓게 하다 임금이 창경궁( 昌 慶 宮 )의 통명전( 通 明 嚴 ) 북쪽에 정자 하나를 꾸며 친히 환취정( 環 젊후)이라 이름짓고, 좌부승지( 左 副 承 冒 ) 김종직( 金 宗 直 )을 시켜 기문( 記 文 )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성종 195 권, 17년 (1486 병오 / 명 성화( 成 化 ) 22 년) 9월 17 일(기미) 2번째기사 환취정에서 종친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월산 대 군 이 정 등 이 입시하다 임금이 환취정( 環 짧 享 ) 에서 종친( 宗 親 ) 에게 잔치를 베 풀었는 데, 월산 대 군( 月 山 大 君 ) 이정 ( 李 停 ) 등이 입시( 入 待 )하였고 작은 과녁에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연산 55 권, 10년 (1504 갑자 / 명 홍치( 弘 治 ) 17 년) 8월 28 일(을유) 2번째기사 정자나 담 쌓는 등의 여러 공사 중 인양 전을 먼저하게 하다 유순 강귀손이 아뢰기 를, 영조( 營 造 )하도록 명하신 곳, 차양각( 週 陽 聞 ) 환취정( 環 짧흑) 및 명정전( 明 政 願 ) 계단 밑에 돌 까는 것과 수라간( 水 刺 間 ) 인정전( 仁 政 嚴 ) 문소전( 文 昭 嚴 )의 온돌, 모화관( 幕 華 館 ) 열무정 ( 關 武 후) -황부( 黃 車 ) 열무정 망원정( 望 遠 享 ) 연영문( 延 英 門 ) 선정전( 宣 政 願 ) 에서 숙장문( 關 章 門 )까지 어로( 倒 路 )를 쌓고 은구( 隱 構 )를 내며, 승정원의 겨울과 여 름 좌청( 坐 廳 ) 및 온방 명정전 보계( 補 階 )와 좌우 행랑 빈청(홈 廳 ) 경양문( 景 陽 門 ) 남쪽에서 선인문( 宣 仁 門 )까지 담 장 쌓는 것, 사복시( 司 樓 춤) 대문 맞은 편에 문 만드는 것과, 사복시 서쪽에 남향으로 문 만 드는 것, 함춘원( 含 春 짧) 남쪽 모퉁이에서 사복시 담 모퉁이까지 담장 쌓고, 그 사이에 대문 을 만들고 좌우에 협문( 爽 門 ) 두는 것, 사복시 동쪽 담 밑의 양쪽 수구( 水 續 ), 선인문 담 밑 수구의 돌문, 이 궁( 離 宮 ) 50 칸, 사복청 앞에 새 문을 만들고 좌우에 담장 쌓는 것, 창덕궁 ( 昌 德 宮 ) 협양문( 協 陽 門 ) 과 궁 방( 딛 房 ) 에서 누상고( 樓 上 庫 )까지의 수리, 창경궁( 昌 慶 宮 ) 홍문 관( 弘 文 館 )의 남쪽 행랑 4 칸 대내 행각( 大 內 行 聞 ) 35 칸, 월랑( 月 郞 ) 85 칸 중에서 어느 곳을 먼저 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먼저 인양전( 仁 陽 嚴 )부 터 하라- 하였다 명종 22 권, 12년 (1557 정사 / 명 가정( 嘉 靖 ) 36 년) 2월 22 일(병오) 2번째기사 환취정에 나아가 유생들에게 강하게 하다 경종 15 권, 4년 (1724 갑진 / 청 웅정( 獲 IE) 2년) 8월 6 일(병자) 1 번째기사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기다 임금이 창경궁( 昌 慶 宮 ) 환취정( 環 짧 享 )으로 이어( 移 倒 )하였다. 경종 15 권, 4년 (1724 갑진 / 청 옹정( 獲 표) 2년) 8월 25 일(을미) l 번째기사 환취정에서 승하하다 밤에 유성( 流 星 ) 이 앙성(문 星 )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정성( 井 星 ) 위에서 도 나왔다 축각(표 刻 )2 159) 에 임금이 환취정( 環 짧 享 ) 에서 승하( 昇 週 )하 니,

101 경종 15 권, 4년 (1724 갑진 / 청 옹정( 羅 正 ) 2 년) 8월 25 일(을미) 1 번째기사 환취 정 에 서 승하하다 밤 에 유성( 流 星 ) 이 앙성(문 星 ) 아래에 서 나왔으며 또 정성( 井 星 ) 위에서도 나왔다. 축각(표 刻 )2 1 59) 에 임금 이 환취정( 環 짧후)에 서 승하( 昇 週 )하니, 승정원일 기 )경종 4 년 8 월 25 일 (을미) 원본 572 책/탈초본 3 1 책 (49/5 1) 년 羅 正 ( 淸 / 世 宗 ) 2년 昌 慶 宮 環 짧후 에서 大 願 이 朋 倒 하 여 쳐검 徒 O 한 뒤 의 皇 復 嚴 式 등을 행함 0 甲 辰 八 月 二 十 죠 日 표 時, 上 大 漸 子 昌 慶 宮 Z 環 짧후, 將 復 右 副 承 릅 權 益 淳, 禮 房 承 듭 當 入, 而 右 承 冒 兪 命 避, 家 在 城 外 未 得 入 來, 故 益 淳 以 代 房 入 注 書 閔 離 갖 등릅 環 중증후, 흑 在 熙 政 堂 之 東, 由 數 門 而 入, 所 由 路 左 右, 列 植 繼 l 獨, 후 重 竹 嚴, 廳 內 j 獨 光 輝 魔, 후 之 四 面, 女 人 哭 聲 已 大 振, 禮 費 判 書 李 員 險, 先 E 持 죠 禮 嚴, 立 於 底 下, 益 淳 鍵, 拉 立 於 l률 檢 之 f 旁, 少 選, 入 待 注 書 李 壽 益, 出 呼 益 淳, 問 號 復 之 嚴 於 員 {했 時 乃 표 正 員 f했 考 見 죠 禮 嚴 而 對 日, 當 令 內 待 馬 之 按 禮 喪 大 紀 日, 小 ~ 復 減 日, 小 몸, 君 之 近 톰 內 待 日, 康 子 例, 亦 令 內 待 寫 之, 途 令 內 待 寫 之, 而 及 其 升 榮 也, 橫 用 內 짧 庫 所 藏 救 火 操, 蓋 古 例 공 按 喪 大 紀, 升 엽 東 榮, 榮 則 屋 靈 也 中 屋 廣 危, 北 面 三 號, 據 衣 投 手 前, 러 服 受 之, 降 멈 西 北 偶 l하l 日, 三 號 者, 一 號 於 J::. ' 薰 塊 自 天 而 來, 一 號 於 下, 靈 塊 g 地 而 來, 一 號 於 中, 薰 塊 g 天 地 四 方 而 來, 其 麗 뿔 某 復, 뿔 長 聲 也 三 號 畢, 乃 據 했 此 衣, 自 前 而 投 下, 司 服 者, 以 慶 受 之, 復 之 小 톰텅 p El 西 北 榮 而 下 也 時 夜 톱 黑, 且 悲 哀, 용후 未 能 詳 知 其 節 次 휠 復 뚫, 入 待 藥 房 三 提 調 及 輪 林 注 書, 碼 山 君 林 等, 哭 於 堂 上, 員 險 益 淳 離, 哭 於 廣 下, 未 移 時, 入 待 諸 ~ 皆 哭, 而 下 階 立 底 下, 向 享 上 哭 盡 哀, 以 次 退 出 순조 31 권, 30년 (1830 경인 / 청 도광( 道 光 ) 10년) 8월 l 일(병술) 1 번째기사 환경전 에 불 이 나다 오시 ( 午 時 )558 1 ) 에 환경전( 歡 慶 嚴 )에 화재( 火 )가 나서 함인정(뼈 仁 후) 공묵합( 悲 默 間 ) 경 춘전( 景 春 願 ) 숭문당 (옳 文 堂 ) 영춘 헌 ( 迎 春 野 ) 오 행 각(죠 行 聞 ) 빈 양문( 實 陽 門 )을 연달아 태 웠 다. 빈 궁 ( 領 宮 )은 실 화( 失 火 ) 한 뒤 에 재 실( 掉 室 )을 연기 와 화 염 가운 데 서 봉출 ( 奉 出 )하 여 미시 ( 未 時 )558 2) 에 환취 정 ( 環 짧후) 에 임 시 로 안치 하였 다 숭정원일기 영조 24 년 10월 2 일 (계미) 원본 1035 책/탈초본 56 책 (25/25) 영 n 令 算 員 考 算, 則 因 짧 門 藍 所 報, 以 中 使 分 付, 歡 慶 嚴 及 左 右 南 行 聞 集 福 野 及 左 右 南 行 聞 蘭 香 聞 及 東 西 南 行 聞 몇 文 堂 環 짧후 喜 雨 亨 層 層 聞 改 않 次, 증중많- 千 五 百 十 二 Fr, 朱 土 九 百 규, 大 互 九 百 張, 防 草 七 百 二 十 張 上 下, 而 通 計 其 價, 則 寫 一 千 七 百 六 十 兩 零 훗 ~ 意 以 薦, 많 無 新 造 嚴 聞 之 事, 決 無 如 許 多 入 之 理, 故 提 來 짧 門 待 令 假 像 E 훌 問, 則 樣 l!i 以 薦, 元 無 改 溶 願 聞 之 事 긍 R 使 書 更, 持 文 書 往 問 於 內 官, 則 以 寫, 元 無 分 付 之 事 긍긍 π μ

102 통명전 실록 경종 6 권, 2년 (1722 임인 / 청 강희( 康 熙 ) 61 년) 1 월 6 일(임진) 1 번째기사 밤에 통명전( 通 明 嚴 ) 행각( 行 聞 )에 불이 났으므로, 숙위( 宿 衛 )하고 있던 군사를 불러들여 끄 도록 명하였다. 정조 14년 경술 (1790, 건륭 55) 통명 전( 通 明 觀 )에 불이 났다. 1 월 1 일(임오) 정조 14년 경술 (1790, 건륭 55) 1 월 2 일(계미) 시 원임 대신 들을 소견하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 李 福 源 ) 등이 아뢰기를 통명전이 재해를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고 걱정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 를, 이는 불조심을 하지 않은 탓이다. 방( 房 )과 난간[합], 옆채[ 寶 郞 ]를 합해서 모두 1 백여 칸 이 넘는 것이, 잠깐 사이에 다 타버렸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임진년의 병화( 兵 火 )에도 양화당( 養 和 堂 )은 우뚝 남아 있었는데, 금번 에도 역시 통명전과 가까이 있는 이 양화당에 불이 옮겨붙을 뻔하다가 결국 화재를 변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때의 불길은 인 력( 人 力 )으로 잡을 수가 없었던데다 설날 아침에 화재가 났다는 것은 참으로 경계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하였다 김익( 金 燈 ) 등이 아뢰기를, 놀란 뒤끝에, 재계( 驚 械 )에 앞서 행하는 다짐[ 활 ]을 친히 행하다가는 흑시 건강을 잃을 수 도 있으니, 청컨대 대신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앙

103 통명전 5 성종 15 년 갑진 0484) 2월 11 일 (무진) 좌찬성 서거정이 새 궁전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다 의정부 좌찬성( 議 政 府 左 贊 成 ) 서거정( 徐 居 正 )이 명( 命 )을 받들어, 신궁( 新 宮 )의 여러 전각( 觀 聞 )의 이름을 지어서 올 렸는데, 전( 嚴 )은 명정전( 明 政 嚴 ) 문정전( 文 政 嚴 ) 수녕전( 壽 寧 嚴 ) 환경전( 觀 慶 願 ) 경춘전( 景 春 嚴 ) 인양전( 仁 陽 願 ) 통명전 ( 通 明 願 )이고, 당( 堂 )은 양화당( 養 和 堂 ) 여휘당( 麗 8 軍 堂 )이고, 각( 聞 )은 사성각( 思 誠 聞 )이라 하였다. I 원전 ] 10 집 6 성종 15 년 갑진 0484) 7월 5 일 (기축) 창경궁 통명전 북쪽에 환취정을 짓고, 김종직으로 하여금 기문( 記 文 ) 을 짓게 하다 임금이 창경궁( 昌 慶 宮 )의 통명전( 通 明 嚴 ) 북쪽에 정자 하나를 꾸며 친히 환취정( 環 짧후 )이라 이름짓고, 좌부승지( 左 副 承 릅) 김종직( 金 宗 直 )을 시켜 기문( 記 文 )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 원전 ] 10 집 605 면 [ 분류 *왕실-종사( 宗 社 ) 7 성종 16 년 을사 (1485) 윤 4월 13 일 (계사) 시강관 정성근이 임금이 사치를 경계해야 함을 아뢰다. 신은 생각건대, 불가하다고 여겁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주( 約 )은( 股 )나라의 최후의 임금.가 상저( 象 著 )상아로 만든 젖가락를 만들었으니, 반드시 옥배( 玉 杯 )를 만들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작은 물건이지만, 그 조 짐이 장차 우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명전( 通 明 願 ) 앞에 샘물이 있어서 뜰로 넘치기 때문에, 이것을 끌 어서 못으로 8 성종 16 년 을사 (1485) 윤 4 월 26 일 (병오) 통명전 앞의 못에 설치한 구리로 만든 수통을 철거하고 돌로써 대치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願 ) 앞의 못에 설치한 구리로 만든 수통( 水 第 )을 철거하고 돌로써 대치하였다. 돌을 운반할 때에 동쪽 담장 두 곳과 난간( 爛 千 )을 헐고, 구리로 만든 수통을 승정원( 承 政 院 )에 내리며 전교하기를, 이것이 정성근( 鄭 誠 護 )이 말한 사치( 著 f 多 )한 물건이니, 승지( 承 읍)들은 이것을 보라. 지금 만약 깨뜨려버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반드 시 내가 후일--- 9 중종 39 년 갑진 (1544) 11 월 15 일 (경술) 중전이 문정전에 빈전을 설치하고자 명하다 김승보가 와서 말하기를, 중전( 中 願 )께서 문정전( 文 政 嚴 )을 빈전( 續 嚴 )으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고, 조금 있다가 다 시 말하기를, 중전께서 찬궁( 瓚 宮 )을 통명전( 通 明 嚴 ) I 내전의 깊숙한 곳에 있다 > 에 설치하고 여차( 盧 次 )는 여휘당 ( 麗 彈 堂 )에 설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였다. 빈전 도감이 아뢰기를, 통명전은 협착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10 중종 39 년 갑진 (1544) 11 월 19 일 (갑인) 밤 오경에 재궁을 봉안하여 통명전에 나아가 찬궁 앞에 안치하다 재궁에 봉안하니 이때는 밤 오경이었다. 총호사 빈전 도감 및 정원이 명정전( 明 政 嚴 )에 나아가 일을 처리하고 새벽 에 재궁을 받들고 홍교문( 弘 敎 門 )으로부터 바로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 찬궁( 瓚 宮 )의 앞에 안치하였다. [ 원전 l 19 집 159 면 I 분류 *왕실( 王 室 ) 11 중종 39 년 갑진 0544) 12 월 14 일 (무인) 헌부가 삭망전의 정지와 독하는 의식의 중지가 잘못임을 아뢰다 요사스러운 승니들은 빨리 물리치도록 명하시고 대전관은 예문에 따라 참례시키고 도감과 제조 등은 추고하소 서. 하니, 답하였다. 요망한 승니에 관한 일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 전에 이러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자전께 아 뢰었다. 도감의 당상들은 자전께서 통명전( 通 明 嚴 )에다 빈을 설치하도록 전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니 추고 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 제 긴

104 12 인종 1 년 을사 0545) 7 월 1 일 (신유) 사정전에 빈전을 설치하다 예종(흉 宗 ) 때의 전례에 따라 충순당( 忠 順 堂 )에 빈전을 설치하는 것만큼 옹편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영상 좌 상이 회계하기를, 전일 중종 대왕( 中 宗 大 王 )의 상( 喪 ) 때에 합당한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통명전( 通 明 願 )창경궁 ( 昌 慶 宮 )의 정전( 正 嚴 ) 에 빈전을 설치했었는데 물의가 이제까지도 그르게 여기니, 이제 어찌 다시 잘못할 수 있겠습 니까. 더구나 충 13 인종 1 년 을사 0545) 7월 3 일 (계해) 중전이 빈전 도감에 비 현각으로 옮길 뜻을 전교하다. 해서는 반드시 애써 따르신 것을 위중전에서 친히 보셨으니, 애써 따르소서.또 비현각으로 옮기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 신들이 들어가 살펴보니, 외처( 外 處 )에 가까와서 늘 계실 수 없겠습니다. 중종께서 홍서( 農 밟)하시자 통명전( 通 明 願 )창경궁( 昌 慶 宮 )의 정전( 正 觀 ).에 빈소를 모셨는데, 한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겼습니다 상사는 예문( 禮 文 )에 따라 야 하는데, 내처 선조 8년 을해 (1575) 1 월 2 일 (임인) 통명전에 빈소를 차리다 통명전에 빈소( 續 所 )를 정하였다. [ 원전 21 집 319 면 [ 분류 ] *왕실-의식( 展 式 ) 15 선조 8 년 을해 (1575) 1 월 2 일 (임 인) 인순 왕후가 승하하다 성의전( 聖 歸 願 )인순 왕후 께서 4 경( 更 ) 4 점( 點 )에 통명전( 通 明 願 )에서 승하( 昇 週 )하니, 상이 상사( 喪 事 )를 치를 것을 명하였다. 삼공( 三 公 )이 백관( 百 官 )을 거느리고 호곡( 號 哭 )을 하고, 미시( 未 時 )에 습전( 製 쫓)염습(했 靈 ) 후 올리는 제 사 할 때에도 곡을 하고 사배( 四 拜 )하고 물러났다. 신시( 申 時 )에도 통명전 뜰로 들어가서 석곡(것 哭 )을 하고 곡이 끝 16 광해군 1 년 기유 (1609) 7월 13 일 (임진) 자전께서 부묘한 후 통명전을 즉시 수리 단장할 것 등을 이르다 비망기로 일렀다. 자전께서 지금 비록 임시로 중별당( 中 別 堂 )에 임어하고 계시지만 부묘( 附 願 )한 후에는 통명전( 通 明 願 )을 즉시 수리 단장해야 하고, 기타 수리해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이어( 移 倒 )하신 후에도 정파( 停 罷 )할 수 없으니, 도감( 都 藍 )에 필요한 것을 반드시 지금 요리해 놓아야만 거의 궁색하고 급한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 < 차지( 次 知 ) 내 광해군 1 년 기유 (1609) 7월 19 일 (무술) 사헌부가 세자 책봉의 예를 늦훈 당상과 낭청을 추고할 것 등을 아뢰다. 으니, 내가 참작하여 출발시키면 될 것이다. 해조에서는 애당초 뒤로 미루자고 계청한 일이 없으니, 어찌 추고할 수 있겠는가. 우선 논의를 그치도록 하라. 궁궐의 역사는 원래 보태 지으려는 것이 아니고, 부묘( 附 關 )한 후에 통명 전( 通 明 嚴 )을 수리 단장하여 자전께서 들어가실 곳으로 삼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기타 그만둘 수 있는 역사는 마땅 히 도감과 함께 헤아 광해군 3년 신해 (1611) 10월 17 일 (계미) 예조에서 진풍정 의주와 좌차에 대한 일로 아뢰니 시행하게 하다 때 달리 좌차를 정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마련하기는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 재결을 받아서 시행해야 하겠고, 잔치를 베풀 처소도 어디로 해야 할지 함께 상의 재결을 받아서 시 행해야겠으므로 아휩니다. 하자 답하기 를, 사세가 그렇 다면 아흰 대로 시행하라 잔치 장소는 통명전( 通 明 嚴 )으로 하라 하였다. I 원전 태백산본 [ 분 류 *왕실-의식( 嚴 式 ), % ω

105 19 광해군 3 년 신해 0611) 11 월 8 일 (계묘) 통명전에서 진풍정 연회를 행하다 통명전( 通 明 願 )에서 진풍정( 進 豊 물) 연회를 행하였다. [ 원전 ] 31 집 659 면 I 분류 *왕실-의식( 歲 式 ) 20 광해군 8년 병진 (1616) 5월 3 일 (임신) 야대청 환경전의 수리, 왕자 사부청 등의 조성을 명하다 을 선수 도감에 말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창경궁( 昌 慶 宮 )을 수리하는 일은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다. 환경전( 歡 慶 願 )의 전당( 願 堂 )과 월랑( 月 郞 )의 단청( 月 좁)이 떨어져 나간 곳도 일일이 수리하여 고치도록 하고, 통명전( 通 明 嚴 ; 의 판자( 板 子 )는 대조전( 大 造 嚴 )의 예에 의하여 바꾸어 붙이도록 하라. 하였다. [ 원전 32 집 471 변 [ 분류 *왕 실-궁관( 광해군 12 년 경신 (1620) 4 월 1 일 (무신) 통명전의 습의와 존호 올리는 습의의 준비를 명하다 전교하였다. 비가 이처럼 내리고 있으니 결채( 結 採 )색실 색헝깊 색종이 등을 다리나 지붕이나 문 위에 내걸어 오색 ( 五 色 )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 임금의 행차나 중국의 칙사를 맞이할 때 환영하기 위해 만옮. 등의 일은 결코 하 기 어려울 것이다. 내일 통명전( 通 明 願 ) 안에서 습의( 習 屬 )를 실시하되, 존호를 올리는 습의는 4 일에 하고, 정시( 健 試 )는 5 일로 차 광해군 12 년 경신 (1620) 4월 7 일 (갑인) 대례준비에 소홀한 관리를 처벌하다 차일 2, 3장을 여러 차례 전교한 뒤에야 비로소 쳤다 이 습의가 어떤 대례( 大 禮 )인데 미리 준비하지 않고 이 처럼 소홀하게 하는가. 해조 당상과 색냥청, 전설사( 典 設 司 )의 색관( 色 官 ), 배설방( 排 設 房 ) 사약( 司 鎬 )은 모두 처벌하 도록 하라 통명전( 通 明 嚴 )과 잠단( 靈 펄) 및 의춘문( 宜 春 門 ) 밖의 유차일은, 친적 도감( 親 籍 都 藍 )과 호조의 색냥청, 전설사 23 효종 1 년 경인 (1650) 윤 11 월 24 일 (계묘) 왕대비가 통명전으로 이어하다 이날 왕대비가 통명전( 通 明 願 )으로 이어하였다 [ 원전 l 35 집 462 면 [ 분류 *왕실-비빈 c~c 續 ) 24 효종 2년 신묘 0651) 7월 24 일 (기해) 예조가 왕대비 존호 올리는 의식의 예행 연습에 대해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대비의 존호 올리는 의식의 예행 연습은 마땅히 통명전( 通 明 嚴 )에서 행해야 하는데 오례의 에 무릇 경례의 진하 때에는 중전은 내정전에 납시고 대전은 정전에 납시어 하례를 받는다.[ 凡 慶 禮 陳 買 時 中 嚴 徒 O 內 正 願 大 願 徒 O 正 願 受 買 ] 는 조문이 있으니, 이번 존호를 올릴 때 전하께서는 인정전( 仁 政 願 )에 납시고 백관은 인정전의 뜨락에서 진하해야겠지만 효종 6 년 을미 (1655) 11 월 17 일 (정유) 자전이 거처하는 수정당이 좁아 수리하는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이 일찍이 통명전( 通 明 嚴 )에 거처하셨는데, 재차 옴 이 편찮으셨다. 지난해 비록 더러운 물건들을 깨끗이 제거하였지만 그대로 이 전에 계신다는 것이 마음에 몹시 불안 하였기 때문에 여름에 수정당( 壽 靜 堂 )으로 받들어 모신 것이다. 그런데 이곳도 산을 등지고 땅이 비좁아 오래 거처 하시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 효종 6 년 을미 (1655) 12 월 3 일 (계축) 양사가 서루의 칸수를 줄이라고 청한 것을 대신들과 상의하다 대간이 있겠으며, 또 어찌 이와 같은 조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부제학만을 옳게 여긴다, 서루의 칸수를 줄 이라는 논의는 더욱 몹시 근거없는 것이다. 오늘은 바로 결단을 내는 날이니, 양사는 모름지기 어느 하나를 지적하 여 말하라. 양사가 불가하다고 한다면 내가 통명전( 通 明 嚴 )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대비를 대조전( 大 造 歐 )에 모실 것이 다. 하고, 이어서 노. m j

106 27 현종(개수실록) 5 년 갑진 (1664) 12 월 18 일 (을해) 약방 도제조 허적이 자전의 거처를 통명전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자전(혈 願 )께서 계시는 걷 안에 귀매( 鬼 蘇 )의 변이 있었는데, 통명전( 通 明 顧 )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대궐 안의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0: 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옮기시게 하고자 하였으나 자전께서 따르지 않으신다 하였다 [ 원전 ] 37 집 현종 5 년 갑진 (1664) 12 월 18 일 (을해) 허적이 도깨비의 변괴가 있다 하여 자전의 거처를 옮길 것을 건으 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가 민간의 말을 들으니, 자전께서 거 처하시는 궁중에 도깨비의 변괴가 있는데 통명전( 通 明 嚴 )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궐내의 다른 곳에 옮기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 전부터 옮기려고 하였으나 자전께서 따르지 않으신다. 하였다. I 원전 36 집 443 변 I 분 현종 7 년 병오 (1666) 7월 18 일 (정유) 신하들을 인견하여 칙사의 조사 궐내의 요변 등의 일을 논의하다 ---초래하였으니, 그야말로 작은 일을 차마 못하여 큰 계획을 그르쳤다. 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 등이 아뢰기를, 외 인( 外 人 )의 말을 들으니 근래 대내에 귀신이 요변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 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통명전( 通 明 嚴 ) 근처에 정말 그런 일이 있다 돌덩이가 날아오거나 의복에 불이 붙거나 궁인의 머 30 현종(개수실록) 7년 병오 (1666) 7월 18 일 (정유) 정 태화 홍명하 등과 자전의 거처를 옮기는 일 등을 논의하 다 으로 도망쳐 들어와 친척을 만나보려고 한 정상을 측은히 여겼다가 오늘과 같은 일을 초래하였으니, 그야말로 이 른바 작은 일을 참지 못하여 큰 계획을 그르쳤다 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 등이 아뢰기를, 외인( 外 A) 의 말을 들으 니 근래 대내에 귀신이 요변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거처하시 는 통명전( 通 明 嚴 ) 31 현종 13 년 임자 (1672) 9 월 8 일 (경진) 희정당 통명전 양화당 인정전의 수리를 명하다 상이 뜸을 였다. 도승지 김휘( 金 徵 )에게 일렀다 희정당( 熙 政 堂 )과 통명전( 通 明 嚴 ), 양화당( 養 和 堂 )에 기울고 무너진 곳이 있으며, 인정전( 仁 政 嚴 )에도 기와를 고칠 곳이 있다. 3 조( 三 暫 )에 말하여 개수하게 하라. I 원전 37 집 26 변 I 분류 *왕실 - 국왕( 國 王 ) / *왕실 - 종사( 宗 社 ) / *건설-건축( 建 第 ) 32 현종(개수실록) 13 년 임자 (1672) 9 월 8 일 (경진) 인정전의 기와를 바꾸라 명하다 상이 뜸을 뜨는 중에 도승지 김휘더러 이르기를, 희정당( 熙 政 堂 ) 및 통명전( 通 明 嚴 ) 양화당( 養 和 堂 )에 기울어 무너 진 데가 있고, 인정전( 仁 政 嚴 )에도 기와를 바꿀 데가 있으니 삼조( 三 暫 )에 말하여 수개( 修 改 )토록 하라. 하였다. [ 원 전 l 38 집 123 면 [분류 *왕실-궁관( 宮 官 ) / *왕실-국왕( 國 王 ) / *건설-건축( 建 찢) 33 숙종 3년 정사 (1677) 11 월 19 일 (임진) 통명전에서 잔치를 열다 통명전( 通 明 嚴 ) I 왕대비( 王 大 紀 )께서 계시는 전( 嚴 )이다. 에서 진연( 進 훌)하였다. [ 원전 38 집 373 면 I 분류 * 왕실-의식( 嚴 式 ) ωm

107 34 숙종 9 년 계해 (1683) 12 월 28 일 (을축) 김석주가 왕대비의 행장을 찬진하다 부르셨는데, 유지( 論 릅)가 격절( 激 切 )하니, 비록 완악하고 사특하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유시 ( 有 司 )가 비로소 정( 植 )과 연( 裡 )의 죄를 감정( 動 定 )하여 남쪽 변방에 곧 유배( 流 配 )하였다. 후(텀)께서는 을묘년 i6n 숙종 원년.부터 통명전( 通 明 嚴 )으로 이어( 移 倒 )하셨는데 환후( 愚 候 )가 미류( 鋼 留 )하시어 병진년 1676 숙종 2 년. 6월 에 35 숙종 10년 갑자 (1684) l 월 15 일 (신사) 봉조하 송시열이 왕대비의 지문을 올리다 - - 분명한 증거가 있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궁인을 국문(웹 問 )하시매 궁인이 다 사실대로 자수하니, 정 연 등이 비로소 죄받게 되었는데 후께서는 또 정 등의 죄를 관용하여 그 궁인과 어울려 찬배(뚫 配 )만을 명하도록 성상 께 권하셨습니다. 후께서 을묘년 1675 숙종 원년 부터 선왕의 혼궁( 塊 宮 )에 가까이 계시느라 통명전( 通 明 嚴 )에 옮겨 계실 때에 조금 숙종 13 년 정묘 (1687) 9월 13 일 (무자) 만수전이 불타서 자의 대비가 통명전으로 거처를 옮기다 자의 대비( 慧 歸 大 紀 )가 통명전( 通 明 願 )으로 이어( 移 倒 )했는데, 만수전( 萬 壽 願 )이 불탔기 때문이다. I 원전 I 39 집 109 면 분류 *왕실-비 빈( 紀 續 ) / *군사-금화( 禁 火 ) 37 숙종 27 년 신사 (1701) 10월 2 일 (을묘) 왕명을 받들어 좌의정 이세백 등이 정국을 내병조에 설치하고, 숙정 등을 국문하다... 내 왔는데, 죽은 새 쥐 붕어를 아울러 각각 7마리씩 담았습니다. 그리고 대궐에서 밖으로 내보냈던 버드나무 상자 를 철생( 鐵 生 )으로 하여금 대궐 안으로 들여 보내도록 하였는데 철생은 흑은 내용을 알기도 하고, 혹은 내용을 모르 기도 하였습니다. 설향이 글을 보내 와 보고하기를, 한 상궁( 韓 尙 宮 )과 황씨( 黃 民 ) 숙이( 淑 伊 )와 통명전( 通 明 嚴 ) 대조 전( 大 造 願 )의. 38 숙종 27 년 신사 (1701) 10 월 3 일 (병진) 모역한 죄를 실토한 숙정의 결안 내용 치마를 만들고 남비단( 藍 排 段 )으로 옷을 만들었으며, 죽은 새 쥐 붕어 각각 7마리를 아울러 대궐에서 내보낸 버 드나무 고리에 담아 철생으로 하여금 대궐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설향이 글로 보고하기를, 한 상궁( 韓 尙 宮 )과 숙이 ( 淑 伊 )가 통명전( 通 明 願 ) 대조전( 大 造 顧 ) 침실 안에다 같이 묻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역( 說 進 )이 적실( 的 實 )한 죄입 니다 [ 원전 숙종 27 년 신사 (1701) 10월 7 일 (경신) 국청 죄인 숙정 숙영 등이 흉물을 궁전에 파묻은 사실에 대해 하교 하다 하교하기를, 모역(짧평)한 죄인 숙정( 淑 正 )과 숙영( 淑 英 ) 등이 저주한 일을 자복한 뒤 각씨( 角 民 )와 참새 쥐의 뼈가 루 등의 물건을 대조전( 大 造 嚴 ) 동쪽가 침실 안에서 찾아 내었다. 이외의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으로서 대조전과 통 명전( 通 明 嚴 )의 섬돌 아래에서 파낸 것도 또한 많았다 하였다. [ 원전 ] 39 집 621 면 [분류 ] *왕실 -비빈( 紀 續 ) / *왕실-궁. 40 숙종 27 년 신사 (1701) 11 월 25 일 (무신) 국청 죄인 민언량 성임의 면질 내용 국청 죄인(휩 廳 罪 人 ) 민언량( 閔 彦 良 )과 성임( 成 任 )을 한곳에서 변질( 面 質 )시켰다. 민언량이 성임을 향하여 말하기 를, 네가 와서 나를 보았을 때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권중경의 집에서 왔다 대조전( 大 造 嚴 ) 및 통명전( 通 明 嚴 )에 묻었던 흉물을 파낸 일이 있었는데, 권중경과 친한 사람이 대궐 안에서 이를 듣고 마치 목도한 것처럼 와서 말하였 인

108 다, 고 하였는데 숙종 32 년 병술( 1706) 7 월 14 일 (기사) 연례는 인정전에서 설행하고 내연은 통명전에 정하게 하다 예조( 禮 暫 )에서 말하기를, 인정전( 仁 政 嚴 )은 바로 법전( 法 嚴 )임금이 백관( 百 官 )의 조하( 朝 賞 )를 받는 정전( 正 嚴 ) 이므 로 연례(훌 禮 )는 인정전에서 설행( 設 行 )하고, 내연( 內 좋)은 통명전( 通 明 嚴 )에 정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원전 l 40 집 203 면 분류 *왕실 의식( 屬 式 ) / *왕실-종사( 宗 社 ) 42 숙종 32 년 병술 (1706) 8 월 28 일 (계축) 통명전에서 내연을 행하다 통명전( 通 明 嚴 )에서 내연( 內 훌)을 행하였다. I 원전 40 집 226 면 I 분류 *왕실-의식( 嚴 式 ) 43 경종 2 년 임인 (1722) 1 월 6 일 (임진) 통명전의 행각에 화재가 발생하다 밤에 통명전( 通 明 願 ) 행각( 行 聞 )월랑( 月 郞 ).에 불이 났으므로, 숙위( 宿 衛 )하고 있던 군사를 불러들여 끄도록 명하였 다 [ 원전 41 집 194 면 I 분류 *군사-금화( 禁 火 ) 44 경종(수정실록) 2 년 임인 Cl 722) 1 월 6 일 (임진) 통명전의 행각에 화재가 발생하다 밤에 통명전( 通 明 嚴 )의 행각( 行 聞 )에 화재가 발생했다. I 원전 41 집 361 면 [분류 *군사( 軍 事 ) 45 경종 4 년 갑진 Cl 724) 1 월 13 일 (무자) 창경궁 통명전으로 이어하다 임금이 창경궁( 昌 慶 宮 ) 통명전( 通 明 嚴 )으로 이어( 移 倒 )하였다 I 원전 41 집 310 면 [ 분류 *왕실( 王 室 ) 46 영조 2 년 병오 Cl 726) 9월 10 일 (기해) 예조에서 오례의 의 책례의를 고찰하여 존숭과 책봉례에 관하여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 五 禮 廢 ) 의 책례의( 冊 禮 燒 )를 고찰해 보건대, 왕비( 王 紀 )께서 책봉( 冊 封 )을 받은 다 음에는 백관( 百 官 )이 궁문( 宮 門 )밖에서 상례처럼 진하( 陳 貨 )한다. 고 했습니다.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嚴 )과 왕대비전 ( 王 大 멍 散 )께 존호( 尊 號 )를 올릴 때와 중궁전( 中 宮 嚴 )께서 책봉례를 받을 때에 통명전( 通 明 願 )에 어좌( 倒 坐 )하시게 되 는데 통명전과 영조 3 년 정미 (1727) 8월 28 일 (신해) 예조( 禮 홈)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친영( 親 迎 )하는 예( 禮 )는 어의동 본궁( 於 義 洞 本 宮 )에서 행해야 하겠습니다마는, 동뢰연( 同 후훌)은 어느 전( 願 )에서 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병전( 通 明 嚴 )에서 행해야 한다. 하였다. 48 영조 3년 정미 (1727) 9월 29 일 (임오) 왕세자가 별궁에 나가 친영례를 행하다 ----가 빈( 複 )을 인도하여 방( 房 )에서 나와 모(뼈)의 동북쪽에 서서 남향( 南 向 )하니, 왕세자는 위차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전안( 尊 鴻 )하였다. 엎드렸다 일어나 재배( 再 拜 )를 마치고 나서 내려와 나가니, 사복시 첨정( 司 樓 촉했표)이 내문( 內 門 ) 밖에서 연( 輩 )을 탔다. 왕세자가 대문 밖으로 나아가 연을 타고 환궁( 還 宮 )한 뒤에 통명전( 通 明 願 )에서 동 뢰례( 同 49 영조 19 년 계해 (1743) 7월 17 일 (정유) 대신들이 진연을 극력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가 대왕 대비의 타이름 에 따라 윤허하다. 혜에 감복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옮은 시임.의 뜻을 본받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옛날 신하들을 모아 군신( 君 톰)의 정의를 펼 뿐이다. 어연( 倒 좋) 이라고 이름하여 나의 뜻을 보이려 하니 영화당( 映 花 堂 )에서 설행하고, 자전의 연회는 경

109 통명전( 通 明 觀 )에서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3 집 108 면 [ 분류 ] *왕실 - 비빈(~[. 複 ) / *왕실 - 의식( 優 式 ) /. 50 영조 23 년 정묘 (1747) 2월 19 일 (기묘)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식 절차와 교문. 어앉아 외판( 外 辦 )을 아뢰니, 임금이 면복(훌 服 )을 갖추고 여( 與 )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 織 屬 )과 시어( 停 倒 )는 평상 시와 같았다 헌가가 음악을 연주하면 좌우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고, 임금이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가니 음악 연주가 그쳤다. 인의( 引 歲 )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여 정해진 자리로 들어갔다. 대왕 대비가 통 명전( 通 明 願 )으 51 영조 27 년 신미 0751) 1 1 월 29 일 (신묘) 내의원 제조 홍상한의 청에 의해 묘소 도감이 복정한 진청미를 반 감할 것을 명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갔다 내의원 제조( 內 醫 院 提 調 ) 홍상한( 洪 象 漢 )이 아뢰기를 이번에 도감( 都 藍 )의 모든 것을 성상께서 절손( 節 揚 )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창의궁( 影 義 宮 )에 보내는 것에 있어서도 또한 무신년에 비해 절반 을 줄이도록 하였습니 다. 그런데 지금 묘소 도감(홍 所 都 藍 )에서 복정( h 定 )공물( 頁 物 ) 이외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상급 관청에서 결 영조 28 년 임신 ( 1 752) 3월 4 일 (을축) 왕세손이 통명전에서 홍서하다 왕세손이 통병전( 通 明 嚴 )에서 홍서( 農 밟)하였다 - 하교하기를, 몇 달 사이에 며느리를 잃고 손자를 잃었으니, 이 마음 을 어디에 비유하랴? 세손이 지금 3 월 초 4 일 묘시(때 時 )에 홍서하였다 예조에서는 자세히 알아 두라. 하였다. 원 전 43 집 438 면 분류 *왕실 - 경 연( 經 옳) 53 영조 28 년 임신 (1752) 3월 5 일 (병인) 묘소에 차등을 두는 일에 관해 하교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觀 )에 나아가 3도감의 당상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묘소에 차등을 두라고 이미 하교하 였으니, 문석( 文 E) 망주( 望 柱 )-장명등( 長 明 燈 ) 외에는 단지 호석( 虎 E) 과 마석( 馬 石 )을 각각 한 쌍씩만 설치하되 종전 의 제도에 비하여 모두 4 분의 1 을 감하고 혼유석( 塊 遊 石 )과 표석( 表 E) 도 두 자 [RJ 를 감하며 정자각 CT 字 聞 )의 길 이와 넓이도 영조 28 년 임신 (1752) 5월 12 일 (임신) 의소 세손을 장사지내다 ( 遭 쏠)을 행하였다 견전을 마치자 독애책관( 讀 哀 冊 官 ) 한광조( 韓 光 뚫)가 책안( 冊 案 ) 앞에 나아가 애책문을 읽기 를, 유세차( 維 歲 次 ) 임신( 王 申 ) 3 월 초 4 일 을축 (Z, 표)에 의소 세손이 창경궁의 통명전( 通 明 嚴 )에서 졸하시어 석 달이 지난 5월 신유삭( 辛 西 湖 ) 12 일 임신( 王 申 )에 양주( 楊 州 ) 안현( 嚴 뼈)의 남쪽 기숨에 옮겨 가려하니 예에 따른 것입니 다 소역-- 55 영조 29 년 계유 (1753) 11 월 28 일 (기묘) 사전의 휘호를 도감에 봉안하다 - - 注 書 )가 정서(표 書 )하여 주함( 朱 困 )에 담고 영의정( 領 議 政 ) 김재로( 金 在 쩔)가 받들어 예조 판서( 禮 費 判 書 ) 김상성 ( 金 尙 星 )에게 전하고 김상성이 꿇어앉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꿇어앉아 받아서 펴 보고 나서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 동조( 東 朝 )에게 보이고 임금이 다시 꿇어앉아 예조 판서에게 주었다. 우승지( 右 承 듭) 황경원( 黃 景 源 )이 봉교 경의( 奉 敎 敬 依 ).. 56 영조 29 년 계유 Cl 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願 )에 존호( 尊 號 )를 가상( 加 上 )한 뒤에 중궁전( 中 宮 願 )이 빈궁( 複 宮 ) 이하를 거느리고 표리( 表 ω

110 훌)를 바치는 하의( 賢 嚴 )는 이러하였다. 그날 상침( 尙 寢 )이 대왕 대비의 자리 [ 座 ]를 통명전( 通 明 願 ) 북벽( 北 뿔)에 님 향하여 설치하고 보안( 寶 案 )을 좌전( 座 前 ) 동쪽 가까운 곳 에 설치하고 또 예물함( 禮 物 핍) 의 안( 案 )을 보안 오른쪽으 서쪽 가까 영조 29 년 계유 0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의 존호를 영복으로 가상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願 )의 존호( 尊 號 )를 영복( 永 福 )이라 가상( 加 上 )하고 책보( 冊 寶 를 바쳤다 [ 원전 43 집 506 면 분류 ] *왕실-종친( 宗 親 ) 58 영조 29 년 계유 Cl 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할 때 책보를 올리는 의식, 인의가 종친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 4 품 이상은 조복( 朝 服 )을 입고 5품 이하는 흑단령( 黑 團 領 )을 입는 다. J 들어 가 자리에 나아가고, 상례( 相 禮 )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들어가 자리에 나아간다. 대왕 대비가 통명전( 通 明 嚴 ) 에 출 어( 出 倒 )하는데 시위( 待 衛 )는 의식대로 한다. 인의가 사자( 使 者 )를 인도하여 명정전 첨계( 慶 階 ) 아래 동쪽 가 까운 곳 에 나아가-- 59 영조 29 년 계유 0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할 때 왕세자가 입참하여 예를 행하는 의식 상례가 꿇어앉아 막차에서 나가기 를 찬청( 贊 請 )하면, 왕세자가 막차에서 나가고 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동문( 東 門 )을 거쳐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는데 [ 승지( 承 冒 ) 사관( 史 官 ) 궁관( 宮 官 )으로 응당 전정( 願 底 )에 따라 들어가야 할 자는 조복( 朝 服 )을 입는다.] 산선 배위( 階 衛 )는 문밖에서 멈춘다. 대왕 대비가 통명전( 通 明 願 )에 출어( 出 倒 )하는데 의식대로 시위한다 영조 29 년 계유 0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할 때 책보를 올리는 의식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嚴 )에 존호( 尊 號 )를 가상( 加 上 )하고 책보( 冊 寶 )를 올리는 의식( 嚴 式 )은 이러하였다. 하루 전에 상침( 尙 寢 )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의 자리 [ 座 ] 를 통명전( 通 明 嚴 ) 북벽( 北 활)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보안( 寶 案 )을 좌전( 座 前 ) 동쪽 가까운 곳에 설치하고 상책안( 上 冊 案 ) 상보안( 上 寶 案 )을 그 다음에 설치하고 향안( 香 案 ) 둘을 전외( 願 外 영조 29 년 계유 (1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한 뒤 친히 표리를 지어 바치는 하의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嚴 ) 에 존호( 尊 號 )를 가상( 加 上 )한 뒤에 전하가 친히 표리( 表 훌)를 바치는 하의( 賞 慶 )는 이러하였 다. 그날 상침( 尙 寢 )이 대왕 대비의 자리[ 座 ]를 통명전( 通 明 嚴 ) 북벽( 北 뿔)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보안( 寶 案 )을 좌전 ( 座 前 ) 동쪽 가까운 곳에 설치하고 또 치사함( 致 詞 퍼) 예물함( 禮 物 핍)의 안( 案 )을 좌우( 座 右 ) 서쪽 가까운 곳에 설치 하고 향 62 영조 29 년 계유 0753) 12 월 26 일 (병오)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嚴 ) 에 존호( 尊 號 )를 가상( 加 上 )한 뒤에 왕세자( 王 世 子 )가 표리( 表 훌)를 바치는 하의( 貨 嚴 )는 이 러하였다. 그날 상침( 尙 寢 )이 대왕 대비의 자리 [ 座 ] 를 통명전( 通 明 願 ) 북벽( 北 뿔)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보안( 寶 案 )을 좌전( 座 前 ) 동쪽 가까운 곳에 설치하고 또 치사함( 致 詞 困 ) 예물함( 禮 物 困 )의 안( 案 )을 좌우( 座 右 ) 서쪽 가까운 곳에 설치하 63 영조 31 년 을해 (1755) 6월 5 일 (정미) 통명전에 나가 봉원 도감 제조 이하를 인견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 봉원 도감 제조( 封 園 都 藍 提 調 ) 이하를 인견하였다. 김상로( 金 尙 흉)가 원소( 園 所 )의

111 도형을 올리고 아뢰기를 원소의 사초 (-pj 草 )잔디.로 들어갈 양을 지방관 및 인근 고을에 나누어 정했으니, 정컨대 힌 결같이 계유년 1753 영조 29 년,의 예에 의해 저치미( 懶 置 米 )를 획급하여 민폐를 없애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 64 영조 31 년 을해 Cl 755) 12 월 1 일 (경자) 예조 판서 이정보의 건의로 조경창에게 좌찬성을 추증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니,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보( 李 鼎 輔 )가 말하기를, 자 전( 慧 願 )께 칭경( 稱 慶 )하는 날을 맞이하여 전하께서는 양지( 養 志 )양친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함-하는 방도 를 다하셔야 합니다. 또 명성 왕후( 明 뿔 王 팀)의 외조 송국택( 宋 國 澤 )에게 추증( 追 體 )한 고사( 故 事 )가 있습니다. 대왕 대비전( 大 王 65 영조 32 년 병자 (1756) 1 월 14 일 (임오) 동궁을 탑전에 입시케 하여 동궁이 지은 춘첩시에 대해 이야기하다. 慶 華 )는 편안함으로 말미암아 시작한다. 고 했는데 이 말은 경사( 慶 事 )와 영화( 榮 華 )는 모두 편안함에서 말미암는 다는 말인가? 하니, 동궁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통명전( 通 明 願 )을 보았느냐? 옛 날에는 안일하지 말 것[ 所 其 無 速 ] 으로 게판( 揚 板 )하였는데, 너는 지금 안( 安 ) 자로써 춘첩에 썼으니, 내 이를 보고 서 나도 66 영조 32 년 병자 (1756) 4 월 24 일 (신유) 통명전에 나가 통명전의 어필 소지를 짓고, 박문수의 치제에 대해 전교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願 )에 나아가 편차( 編 次 )를 맡은 사람인 이철보( 李 喆 輔 )를 소견(김 見 )하였다. 통명전의 어필 소지 ( 倒 筆 小 識 )를 짓기를 마치자, 전교( 傳 敎 )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아! 영성( 靈 城 )이 춘방( 春 功 )에 있을 때부터 나 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 년이다. 자고로 군신( 君 톰) 중에 비록 제우( 際 遇 )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 성과. 67 영조 33 년 정축 Cl 757) 3월 30 일 (신유) 대렴을 행하고 통명전으로 옮겨 봉안하고 재궁에 내리다 대렴( 大 했)을 행하고 통명전( 通 明 願 )으로 옮겨서 봉안( 奉 安 )하였으며, 인해서 재궁(햄 宮 )에 내렸다 원전 ] 43 집 644 면 [분류 ] *왕실-경 연( 經 뚫) 68 영조 33 년 정축 (1757) 4월 17 일 (무인) 통명전 여차에 나가 영의정 이천보 등과 대행 왕비의 졸독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의 여차( 盧 次 )에 나아가 승지에게 수의( 收 議 )한 일을 독주( 讀 奏 )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이 천보( 李 天 輔 )는 말하기를, 졸곡(후 哭 )은 우제( 廣 쫓)와 달라서 길제(놈 察 )에 관계되는데, 국조( 國 朝 )의 전례( 典 禮 )에 있 어서 비록 전례( 前 例 )가 없다 하더라도 예서( 禮 書 )를 상고하면, 대행 왕비의 졸곡은 대행 대왕 대비의 졸독 뒤로 물 려서 행하-- 69 영조 33 년 정축 (1757) 4 월 21 일 (임오) 통명전 여차에 나가 발인 반차도를 올리게 하고, 빈전의 단오 물선 을 봉진토록 하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의 여차( 盧 次 )에 나아가 예조 판서 이익정( 李 益 파)과 병조 판서 이후( 李 KC O_E8C9) 를 불러 발인( 發 햄 )할 때의 반차도( 班 次 圖 )를 올리게 하고, 크고 작은 빈전( 續 嚴 )의 단오 물선( 端 午 物 體 )을 전례대로 봉진( 封 進 )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 43 집 646 면 [ 분류 *왕실-경연( 經 뚫) X }

112 70 영조 33 년 정축 (1757) 5월 16 일 (병오) 좌의정 김상로의 건의로 개성 유수 서종급을 파면시키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의 여차( 慮 次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개성 유수 서종급( 徐 宗 댔)을 파면하도 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 金 尙 흉)가 말하기를, 장단 부산( 長 偏 府 使 ) 이적( 李 橋 )을 잡아다 추문하는 일로 인하여 송 도( 松 都 ) 아병( 牙 兵 )의 신역( 身 投 )에 대한 일을 들으니, 양군( 良 軍 )은 돈 l 냥( 兩 ) 5 전( 錢 )을 받고, 사노( 私 뼈)는 6 전을 71 영조 33 년 정축 (1757) 5월 23 일 (계축)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의 여차( 魔 次 )에 나아가 대신과 예조 판서 경기 감사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 정홍순 ( 鄭 弘 淳 )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문하기를, 비의 혜택이 과연 두루 흡족하였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그 렇습니다. 하자 하문하기를, 도내( 道 內 )에 품처(훌 處 )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니, 정홍순이 아뢰기를, 죽산( 竹 山 )괴 파주( 被 州 ) 72 영조 33 년 정축 (1757) 5월 23 일 (계축) 삼강 어사 남태저 홍양한이 복명에 따라 폐단을 조치토록 하다 삼강 어사( 三 江 倒 史 ) 남태저( 南 泰 著 )-홍양한( 洪 良 漢 )이 복명하니,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의 여차( 盧 次 )에서 소견하였 다. 남태저가 종신( 宗 많) 서청수( 西 淸 守 ) 축( 願 )이 이웃에 사는 박씨 성 [ 朴 姓 ]의 사람을 죽인 일을 아뢰니, 잡아다 추 문( 推 問 )하여 엄중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또 아산( 牙 山 )에 살고 있는 홍호( 洪 톱)의 아들이 역적( 進 戰 ) 이성 ( 李 KC 영조 33 년 정축 (1757) 5월 29 일 (기미) 임금이 예방 승지와 편차인( 編 次 人 )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명전( 通 明 嚴 ) 곁에 샘이 있는데, 이름을 열천 ( 例 果 )이라고 부르도록 하라 하고, 소지( 小 識 )를 불러주어 쓰게 하고,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전( 願 ) 에서 네 차례 진연( 進 흥)하였고, 휘호( 徵 號 )를 올린 것이 여닮 차례였는데, 지금 화변( 福 變 )을 만났으니, 여기에서 슬 픔과 영조 33 년 정축 (1757) 6 월 5 일 (을축) 통명전에 나가 총호사와 삼도감 당상 이하에게 상을 내리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 총호사, 삼도감의 당상 낭청, 여사 대장( 靈 士 大 將 )에게 상( 賞 )을 내렸다. 총호사 이 천보( 李 天 輔 ) 김상로( 金 尙 쩔)에게는 구마( 魔 馬 )를 대변하여 내리고, 빈전 도감 제조 이익정( 李 益 표) 이정보( 李 鼎 輔 ) 신 회( 申 H 每 )에게는 숙마( 熟 馬 )를 내리고, 김한철( 金 漢 喆 )에게는 아마( 兒 馬 )를 내렸으며, 도청( 都 廳 ) 김시묵( 金 時 默 ) 정존 겸( 鄭 영조 33 년 정축 (1757) 7월 2 일 (임진) 충청도 안집 어사 홍경해, 회장관 채제공 등을 불러 민폐에 대해 묻 다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 여차( 盧 次 )에 나아가 충청도 안집 어사( 安 集 倒 史 ) 홍경해( 洪 景 海 )와 회장관( 會 舞 官 )인 이천 부 사( 伊 川 府 使 ) 채제공( 蔡 濟 悲 )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채제공에게 묻기를, 민폐( 民 뺑)를 아휠 만한 것이 있는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천의 동북쪽 다섯 면이 양향청( 根 節 廳 )의 둔전(면 田 )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초 갑술년 1754 영 조 30 년. 76 영조 33 년 정축 (1757) 7월 9 일 (기해) 임금이 통명전( 通 明 嚴 ) 영외( 橋 外 )에 나아가서 인원 왕후( 仁 元 王 尼 )의 우제 축문( 慮 察 祝 文 )과 빈전( 續 嚴 )의 다례 축문 $

113 ( 茶 禮 祝 文 )을 쓰라고 명하였다. [ 원전 ] 43 집 655 면 [ 분류 ] *왕실-경연( 經 鐘 ) 77 영조 33 년 정축 (1757) 7 월 9 일 (기해) 3 년의 복제에 포로 안비를 싸고, 기년 복제에 화식을 버리도록 하다 임금이 또 통명전 영외에 나아가니, 승지 정간( 鄭 幹 )이 아뢰기를, 지금 백관( 百 官 )의 복( 服 )은 바로 기년(흉 年 )의 복 제( 服 制 )로서 3 년의 복제와는 다른 까닭에 금옥 관자( 金 玉 貴 子 )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신이 조신( 朝 댄)들의 밀 안장을 보매, 아직도 청도(춤 紹 )를 걸치고 있으니, 예( 禮 )에 불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듣자니 당상 78 영조 44 년 무자 Cl 768) 6 월 23 일 (기묘) 임금으로 66 세에 친영한 사람을 묻고 하교하다 ---한 구절인데, 형제와 화목하고 즐겁게 산다는 뜻임.만 외고 있다. 아침 햇살이 창에 비추는데, 의릉( 露 陸 )경종 에도 또한 비치는가? 오늘은 또한 무슨 날인가? 곧 기묘년 1759 영조 35 년에 통명전( 通 明 嚴 )에서 알현을 받았고, 인정천 ( 仁 政 嚴 )에서 하례를 받았던 날이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과연 기억하고 있는가? 하였다. 원전 44 집 290 면 79 정조 14 년 경술 (1790) 1 월 1 일 (임오) 통명전에 불이 나다 통명 전( 通 明 嚴 )에 붙이 났다. 원전 46 집 84 변 [ 분류 *왕실( 王 室 ) / *군사( 軍 事 ) 80 정조 14 년 경술 Cl 790) 1 월 2 일 (계미) 시 원임 대신들을 소견하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들을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 李 福 源 ) 등이 아뢰기를, 통명전이 재해를 입었으므로 시 람들이 놀라고 걱정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불조심을 하지 않은 탓이다. 방( 房 )과 난간[ 野 ], 옆채 [ 寶 郞 ]를 합해서 모두 l 백여 칸이 넘는 것이, 잠깐 사이에 다 타버렸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임진년의 병화( 兵 火 ; 에도 양화당( 養 헌종 3년 정유 (1837) 2월 26 일 (갑술) 통명전에서 삼간택을 행하다 통명전( 通 明 嚴 )에서 삼간택( 三 練 擇 )을 행하였다. [원전 48 집 449 면 분류 *왕실( 王 室 ) 82 헌종 14 년 무신 (1848) 3월 16 일 (경인) 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하는 등 경하하다 임금이 인정전( 仁 政 嚴 ) 에 나아가 대왕 대비전( 大 王 大 紀 歐 )과 왕대비전( 王 大 紀 願 )에 존호( 尊 號 )를 가상( 加 上 )하고, 도 로 통명전( 通 明 願 )에 나아가 치사( 致 詞 )-전문( 塞 文 ),표리( 表 훌)를 친히 올리고, 인정전에 나아가 교서( 敎 書 )를 반포하 고 진하( 陳 寶 )를 받고 사유( 敵 看 )하였다. I 원전 48 집 529 면 [ 분류 *왕실( 王 室 ) / *사법-행형( 行 升 ~) 83 헌종 14 년 무신 (1848) 3 월 17 일 (신묘) 진찬례를 행하다 통명전( 通 明 願 )에서 진찬례( 進 體 禮 )를 행하였다. [ 원전 48 집 529 변 [ 분류 ] *왕실( 王 室 ) 84 헌종 14 년 무신 0848) 3 월 19 일 (계사) 회작례를 행하다 임금이 통명전에 나아가 회작례( 會 配 禮 )를 행하였다 원전 48 집 529 면 I 분류 *왕실( 王 室 ) 85 철종 7년 병진 0856) 12 월 3 일 (병술) 내진찬 처소를 통명전으로 하게 하다 내진찬 처소( 內 進 體 處 所 )를 통명전( 通 明 嚴 )으로 할 것을 명하였다- 원전 48 집 609 면 [ 분류 *왕실( 王 室 ) 86 철종 8 년 정사 (1857) 3월 15 일 (정묘) 통명전에서 진찬례를 행하다 통명전( 通 明 願 )에서 진찬례( 進 購 禮 )를 행하였다. I 원전 ] 48 집 611 면 [분류 ] *왕실( 王 室 )? ω

114 87 철종 8년 정사 (1857) 3 월 17 일 (기사) 통명전에서 회작례를 행하다 통명전( 通 明 嚴 )에 나아가 회작례( 會 配 禮 )를 행하였다. I 원전 48 집 611 면 분류 *왕실( 王 室 ) 잉ω

115 처 F므 李 宗 城 (이종성) 1692(숙종 18)-1759( 영조 35) 뺨 川 先 生 集 卷 之 九 記 正 陽 門 重 修 記 a_2 14_222c 箕 之 城 有 三 重 內 城 之 第 始 於 勝 國 成 宗 之 時 進 南 而 圖 蒼 光 之 鎭 屬 之 於 防 水 提 止 휠 其 南 面 而 門 者 B 正 陽 也 其 外 隱 然 隆 高 抱 內 城 環 之 者 外 城 也 世 傳 箕 子 Z 所 第 也 天 양 甲 子 殺 內 城 而 小 之 ]Jlj 設 ιifl"j ii. 까 途 廢 춧 然!'!IJ 城 之 址 施 ~필 於 內 城 外 城 Z 間 如 在 田 之 龍 當 門 處 )(.D 牙 然 中 開 尙 可 以 識 者 中 城 也 箕 城 自 樓 君 來 代 薦 國 都 至 我 朝 始 寫 젠 察 使 治 有 事 變 則 寫 元 帥 府 山 河 Z 固 人 物 之 盛 最 於 諸 路 而 獨 城 小 而 不 能 容 聚 民 皆 病 之 歲 辛 갖 송 以 獅 史 受 命 而 西 時 與 箕 之 父 老 짧 所 謂 中 城 者 排 f 回 歡 q 差 於 朋 t를 斷 暫 之 上 未 흘 不 歸 讓 於 甲 子 之 彼 而 亦 恨 守 土 者 Z 不 能 增 修 以 從 民 望 也 今 年 夏 按 節 是 웹 先 調 箕 子 關 於 蒼 光 山 下 未 及 九 廳 t흡 數 百 武 得 正 陽 故 基 則 木 :& I 或 具 蓋 將 因 其 맺 然 者 而 設 關 훨 問 其 作 者 日 딴 尹 李 候 也 問 其 費 日 指 摩 也 問 其 工 日 貨 人 也 未 一 月 而 告 成 凡 寫 樓 者 十 播 흉 爛 쫓 如 m 朱 日 煥 然 也 於 是 三 城 士 女 莫 不 欣 然 相 告 樂 其 有 成 也 嗚 呼 物 之 興 廢 有 時 時 在 乎 人 不 有 以 염 f 昌 之 황l 有 以 繼 之 표 陽 之 廢 今 百 有 餘 年 李 候 興 之 又 安 知 中 城 之 增 修 不 權 與 於 斯 而 後 之 몇 觸 紹 媒 ill형! 傑 而 u함 峰 者 非 向 之 南 펄 斷 暫 껴n며 而 漢 9 差 者 耶 힘 有 繼 此 而 復 中 城 者 緊 李 候 f 昌 之 之 力 也 宜 乎 百 姓 之 相 貨 而 喜 也 雖 然 重 門 떻 暴 人 和 寫 大 致 和 之 道 在 察 其 寫 病 者 而 去 之 箕 A 之 病 { 責 錢 짧 甚 훌톱 免 氣 滿 題 홀흉 然 無 樂 生 之 意 其 於 和 遠 훗 不 幸 而 有 事 變 尙 可 以 有 'I좋 乎 如 欲 據 重 關 隱 麗 權 合 聚 心 而 成 城 則 堆 務 去 其 病 之 者 而 E 숫 以 不 才 受 收 쩔 之 責 與 斯 民 守 흉fr 城 使 不 忠 委 之 而 去 願 與 李 候 뺑 之 李 候 名 環 德 水 A 也 觀 於 斯 投 而 其 寫 政 可 知 是 薦 記 m 갱

116 정양문 正 陽 門 승정 원 일기 1. 영조 4 년 / 1 2 월 /23 일(기해)/ 朝 雪 강 陰 / - -- 惡 藏 於 諸 王 家, 故 人 莫 敢 藏 寶 於 家, ii I써 I" 外, 布 列 市 앓 者, 2. 영조 1 6 년 / 0 2 월 /22 일(계사)/ 情 / ; 直 鳳, 事 體 未 安 今 當 出 付 政 院, 須 於 正 陽 門 外, 盛 之 於 龍 후 子, 3. 영조 22 년 /03 월 /28 일(갑오)/ 情 / ; -- 故 然 훗 又 러시\ 紙 B, 午 門 如 仁 政 門 耶? 正 陽 門 薦 표 門 乎? 觀 影 B,.. 4. 영조 23 년 /02 월 / 1 6 일(병자 )/B좁/ 於 聞 外 進 之 훗 上 日, 以 聞 外 言 z, 則 正 테 1- "J 寫 間 外 훗 然 則 寫 越 臺 영조 33 년 /06 월 /02 일(임술)/ 淸 / ; T표 六 月 初 二 日 辰 時, 上 倒 111씨 I" J, 禮 房 承 릅 入 待 時, 6. 영조 36 년 / 06 월 /05 일(정해 [ 정축 ] )/ 朝 陰 깃 靖 / --- 黃 爛 所 供, 則 챔 近 百 封, 明 政 願 建 仁 門 正 陽 門, 皆 用 之, 而 甚 至 영조 42 년 /08 월 / 1 3 일(경술)/ 朝 雨 흉 情 / --- 禮 成 門 行 厭, 考 例 輔 陳 똥 依 例 醫 行, 只 正 陽 門 帳 學 行, 左 右 月 郵 購 정조 2년/0 5 월 / 0 4 일(계해)/ 情 / 大 嚴 陳 寶 則 以 仁 政 顧 寫 之, 可 也 上 就 J]. 싸 門 外 幕 次, 少 間 還 內 [@ 成 五 月 初 四 日 깨 時, 上 듬읍뼈1 仁 享 內 習 嚴 入 함 時, 行 都 承 듭 洪 國 榮, 行 左 承 冒 鄭 民 始, 右 承 冒 徐 有 防, 左 副 承 답 李 普 行, 右 副 承 릅 李 鎭 衝, 同 副 承 冒 申 應 顯, 記 事 官 柳 굶 養 鄭 東 浚 徐 龍 輔 金 助 柱, 以 次 待 立 上 日, 都 籃 堂 上 入 倚 購 몸 承 命 出, 與 工 費 判 書 洪 樂 性, 戶 費 判 書 具 允 廷, 禮 費 判 書 李 景 祐 f 皆 入 上 命 習 嚴, 習 嚴 굶 上 日, 王 大 紀 顧 上 冊 寶 及 陳 買, 以 J1Fz 꾀 寫 之, 大 嚴 陳 寶 則 以 仁 政 願 薦 之, 可 也 上 就 1 U%H"I 外 幕 次, 少 間 還 內 諸 닮 以 次 退 出 9. 정조 2년/05 월 /06 일(을축 )/B춤/ ;. 興 平 身, 少 間, 上 乘 與 由 明 政 願, 품 正 陽 門 外 小 次, 內 待 땅 請 外, DGEl<: 五 月 初 六 日 때 時, 上 품 明 政 觀 月 臺 上 冊 寶 入 待 時, 行 都 承 듭 洪 國 榮, 行 左 承 륨 鄭 民 始, 右 承 冒 徐 有 防, 左 副 承 듭 李 普 行, 右 副 承 듭 李 鎭 衝, 同 副 承 듭 申 應 顯, 記 事 官 柳 굶 養 鄭 東 浚 徐 龍 輔 金 動 柱, 以 次 待 立 上 具 B 免 服, 乘 與 由 뼈 仁 享, 듬듭 明 政 嚴 東 月 臺 下 小 次, 左 通 禮 양 請 降 與, 上 降 與 入 小 次, 少 間, 左 通 禮 량 請 出 次, 上 就 月 臺 上 板 位 北 向 立, 左 通 禮 양 請 四 拜 興 平 身, 上 四 拜 興 平 身, 左 通 禮 함 請 擔 圭, 上 擔 圭, 左 通 禮 양 請 짧, 上 鏡, 棒 冊 寶 官 應 敎 林 훌- 喆, 修 擺 南 觀 聞, 棒 王 大 ~[', 嚴 玉 冊 文 臨 進, 國 榮 普 行 뾰 受 趙 進, t 親 受 以 授 尙 傳, 尙 傳 鏡 受, 校 理 洪 明 浩, 修 擺 金 흘, 棒 王 大 ~c 嚴 護 뻗 趙 進, 國 榮 普 行, 많 受 鏡 進, 上 親 受 以 授 尙 傳, 尙 f 專 뾰쫓, 左 通 禮 혐 請 f 府 i:k 興 平 身, 上 t 府 i:k 興 平 身, 少 間, 左 通 禮 땅 請 펌 圭, 上 指 圭, 左 通 禮 혐 請 再 拜 興 平 身, 上 再 拜 興 平 身, 左 通 禮 양 請 뾰, 上 鏡, 修 擺 沈 有 鎭, 校 理 黃 昇 源, 棒 惠 慶 宮 竹 冊 文 뾰 進, 國 榮 普 行, 鏡 受 鏡 進, 上 親 受, 以 授 尙 傳, 尙 傳 鏡 受, 兵 暫 正 郞 趙 時 偉 朴 祐 源, 棒 惠 慶 宮 護 볕 距 進, 國 榮 普 行, 鏡 受 뾰 進, 上 親 受, 以 授 尙 傳, 尙 傳 鏡 受, 左 通 禮 양 請 t 府 i:k 興 平 身, 上 冊 { 興 平 身, 少 間, 上 乘 簡 由 明 政 嚴, 듬릅 正 陽 門 外 小 次, 內 f휴양 請 外 板, 上 入 正 陽 門 內 行 禮, 少 間, 上 還 품 小 次 上 B, 致 詞 塞 文 빼, 皆 不 待 令, 妹 極 縣 然, 濟 用 藍 當 該 郞 廳, 薦 先 'It 去 拿 處 出 楊 敎 上 B, 濟 用 藍 當 該 提 調, 寫 先 週 差 出 楊 敎 上 B, 尙 衣 院 官 員 拿 處 出 楊 敎 上 命 書 傳 敎 日, 今 짧 學 行 事, 多 有 寒 心, 戶 暫 判 書 具 允 廷 罷 職 X 命 書 傳 敎 日, 不 欲 줍 察, 而 學 行 則 實 多 縣 然, 禮 房 承 冒 李 普 行, 寫 先 推 考 仍 還 內, 諸 ~ 以 次 退 出 - 40

117 13. 정조 7 년 /03 월 /18 일(기사[기유])/ 陰 / ; -- 古 例 習 嚴 及 표 日, 都 藍 堂 郞 隨 入, 止 於 표 陽 門 外, 今 짧 則 止 於 映 훨... 쫓 gp 三 月 十 八 日 辰 時, 上 倒 誠 표 聞 右 承 冒 入 待 時, 右 承 冒 李 在 學, 假 注 書 尹 行 任, 記 注 官 金 鳳 顯 金 健 修, 都 藍 提 調 徐 有 憐 鄭 一 備, 都 廳 尹 東 H 免 李 喆 模, 以 次 進 ti\ 뚫 上 日, 嚴 R줄 浮 階, 今 日 R 量 以 出, 明 영 n 排 設, 好 훗 命 書 楊 敎 B, 今 日 政, 新 除 授 參 贊, 待 下 批, 牌 招 淸 驚 X 命 書 傳 敎 B, 明 日 展 拜, 三 司 不 可 不 備 員, 淸 驚 在 外 及 未 關 拜 人 員, 拉 許 週, 政 官 牌 招 開 政 差 出 又 命 書 傳 敎 日, 景 福 嚴 慧 慶 嚴 補 階 處, 戶 費 堂 上, 當 馬 備 員, 分 짧, 在 外 參 議 許 週, 今 日 政, 以 在 京 無 故 A 擇 差, 待 下 批, 仍 염 n 牌 招 察 任 又 命 書 傳 敎 日, 王 大 紀 嚴 上 尊 號 處 所, 前 以 ;,끄 l!jj)j싼 寫 之 事 分 付, 而 通 明 嚴, 與 慧 嚴 時 倒 之 嚴 稍 間, 以 -- 動 臨 嚴, 有 防 調 嚴 薦 敎, 處 所, 以 景 福 宮 願 醒 練, 伊 日 明 政 願, 親 上 冊 寶 後, 進 듬릅 景 福 願, 進 致 혜, 以 此 分 付 古 例 習 嚴 及 正 日, 都 藍 堂 郞 隨 入, 止 於 11- 씨 I"; 外, 今 짧 則 止 於 映 뿔 門 外 事 分 付, 冊 寶 親 上 後, 奉 품 時, 由 lljjtl페j앉 써 } 따 JW,; I" J.;,f~ '.;(I J. i~/r1~'f"j 꾀 lfht'j 얻따 I 'J 셨 따 ' J 이,'Jr꾀 l"j 싸?? J 센 이 "J 至 景 福 歐 行 禮, 以 此 - 體 ~ ;용 處 所 改 鷹 練 後, 嚴 宮 習 嚴 鍵 嚴, - 日 之 內, 勢 難 薦 之, 王 大 紀 願 上 冊 寶 三 度 習 優, 以 二 十 日 馬 之 上 命 退, 諸 톰 以 次 退 出 14. 정조 7년/03 월 /21 일(임신[임자 ])/B품/ ---, 食 代 後, 待 令 上 乘 與 由 集 瑞 門 正 陽 門, 倒 慧 慶 門 外 小 次, 쫓 gp 三 月 二 十 - 日 째 時, 上 倒 誠 正 聞 左 承 릅 右 承 冒 左 副 承 冒 入 待 時, 行 左 承 冒 鄭 志 險, 右 承 릅 李 在 學, 左 副 承 릅 徐 鼎 修, 假 注 書 尹 行 王, 記 注 官 金 健 修, 記 事 官 李 昆 秀, 以 次 進 ti\ 뚫 上 日, 都 藍 都 提 調 入 待 購 E2 承 命, 與 徐 命 善 { 皆 入 進 ti\ 命 善 日, 都 廳 李 喆 模, 新 除 臺 職, 有 難 {± 進 於 都 藍, 自 前 多 有 陳 達 變 通 之 例, 何 以 寫 z? 敢 票 上 日, 許 週, 可 也 命 善 日, 令 該 暫, 열 n 寫 口 傳 付 軍 職, 何 如? 上 B, 依 薦 之 出 學 條 命 書 傳 敎 日, 兩 司 亞 長 及 掌 令 在 外 未 關 拜 人, Yti_ 許 週, 今 日 政 差 出 上 乘 與 由 짧 雲 훔, 徒 ~ 困 仁 후 小 次, 女 官 諸 執 事, 在 댐 仁 享 階 之 東 西, 嚴 { 大 待 衛, 在 뼈 仁 享 底, 樂 作, P 昌 廳 習 上 冊 寶 慶 上 B, 日 勢 E,B 免, 內 歐 習 屬, 當 於 飯 後 寫 之, 都 藍 堂 郞, 以 下 率 差 備, 始 薦 退 去, 食 代 後, 待 令 上 乘 與 由 iu폐 l"j 1U;싸l l j 띠U 칩 lζ "J 까 小 次, 女 官 諸 執 事, 具 優 入 內 嚴 習 禮 畢 仍 命 退, 諸 E2 以 次 退 出 15. 정조 7 년 /07 월 /19 일(무신)/ 雨 / :.. I 憐 請 其 筆 上 日, 從 當 下 敎 춧 於 是 上 自 正 陽 門 前 路, 由 康 寧 門 朱,,. 쫓때 七 月 十 九 日 째 時, 上 듬릅 瓚 源 願 展 拜 時, 先 徒 O 養 志 堂, 命 承 史 及 戶 禮 工 判 入 待, 大 멀 入 就 外 位, E 手 - 齊 整 待, 工 暫 判 書 鄭 民 始, 戶 暫 判 書 徐 有 憐, 禮 費 判 書 李 在 協, 檢 校 直 圍 徐 龍 輔, 待 敎 尹 行 任, 行 都 承 冒 沈 뿔 -z. 行 左 承 릅 李 亨 達, 行 右 承 듭 朴 祐 源, 左 副 承 듭 李 在 學, 同 副 承 冒 趙 興 鎭, 假 注 書 李 敵 徐 灌 修, 記 事 官 李 祖 承 李 昆 秀, 以 次 교 待 子 前, 領 府 事 金 尙 喆, 領 議 政 鄭 存 課, 判 府 事 徐 命 善, 判 府 事 쏠~ 弘 淳, 判 府 事 李 徵 之, 判 府 事 洪 樂 性, 領 敎 寧 金 煙, 以 次 入 就 外 位 上 由 報 春 門, 展 拜 子 覆 源 嚴 太 멀 以 下, 各 入 就 位, 行 四 拜 禮 上 由 昨 階 升 嚴, 諸 멀 由 西 階 從 升 上 親 開 嚴 門 奉 審 後, 命 諸 大 톰 進 前 奉 審, 途 圍 門 命 戶 禮 工 判, 招 入 륨 手 付 投, 諸 大 톰 仍 於 散 前 童 投 上 由 永 8 軍 門, 듬릅 景 福 嚴, 염n 王 大 紀 差 備 也 命 購 g~듭 員 嚴, 使 戶 暫 判 書 率 E 手 入 來, 修 改 雨 續 處, 本 散 投 事, 則 使 戶 醫 參 判 趙 時 俊 入 來 代 藍 購 뭄 承 命, 5읍 l률 嚴 投 處, 與 戶 團 判 書 徐 有 憐 f 皆 入 有 l 憐 部 分 E 手 付 投 上 還 倒 員 願 之 後 行 聞, 親 審 投 事, 在 位 者 相 與 族 動, 間 敢 或 침 上 謂 民 始 B, 聊 於 省 橋 往 來 之 路, 歷 見 離 둠 農 形, 今 年 年 事, 果 不 至 大 歡 耶? 民 始 日, 以 治 路 所 聞 言 之, R8.R 之 地, 雨 B 易 不 同, 面 里 之 間, ~ 實 各 異, 故 一 물 東 西, 此 含 n 南 而 彼 u 帝 슐ll 者, 在 在 皆 然 若 總 八 路 而 較 諸 昨 年, 則 今 年 띠

118 似 勝 공훗 上 B, 離 湖 之 民, 熺 建 南 完, 今 又 存 歡, 將 何 以 接 濟? 予 方 玉 食 摩 납, 容 衣 不 遺 옷 亨 達 B, 離 힘 則 j댐 被 數 둠, 甚 於 昨 年, 而 其 餘 農 形, 足 可 免 歡 죠쫓 民 始 B, 因 훗 判 流 請, 自 軍 門 招 致 巧 思 人, 造 出 龍 尾 車 롤, 故 ~ 試 取 見, 則 雖 是 試 可 之 制, 其 功 用 之 博, 似 非 結 繹 之 比 쫓 上 日, 龍 尾 車 與 水 車 不 同, 水 車 則 自 古 有 之, 龍 尾 車 則 其 制 新, 自 西 洋 出 來, 載 於 徐 光 양 農 政 全 書 中 今 所 造 出 者 雖 小, 亦 足 驗 其 利 澤 之 짧 深 否? 民 始 日,- 文 之 地, 似 可 激 而 行 之 옷 上 命 承 冒, 前 望 單 子 入 之 徐 龍 輔 落 點 仍 命 新 除 授 承 듭 牌 招 察 任 出 楊 敎 承 듭 房 望, 亦 命 염 n 寫 書 入 購 R 出 去, 傳 命 後 還 入 上 命 購, 以 關 內 雨 病 各 處 執 l댐 5Jlj 單, 領 示 諸 大 大 톰 諸 大 톰 相 率 被 寶, 則 홍종 補 之 破 傷 者 寫 千 餘 處, 橋 題 之 庸 壞 者 馬 數 百 處 上 日, 此 皆 各 觀 差 備, 不 得 不 修 改 處, 而 휩 歲 I1)t, 宜 加 節 約, 故 - 例 置 之, geo 等 之 意, 何 如? 命 善 日, 王 者 之 居, 宜 尊 體 線, 朝 群 R 而 致 其 義, 養 三 老 而 致 其 仁, 子 以 領 月 令 而 奉 天 時, 千 以 聽 政 治 而 修 人 事, 故 J6 高 明 廣 大, 然 後 斯 可 以 展 禮 文, 必 i 緊 j 爭 深 逢, 然 後 :Wr 可 以 嚴 內 外 蕭 何 治 未 央 宮 밤 麗, 高 祖 感 之, 何 日, 天 子 以 四 海 寫 家, 非 꺼 土 麗 無 以 重 威 朱 子 每 論 此 語, 以 寫 得 體 R 固 知 聖 學 高 明, 亦 必 穩 知 此 等 義 理, 而 ~~ltt 隨 없 隨 補, 尤 與 營 建 不 同, 及 其 類 ±c 之 未 甚, 웰 加 續 修, 乃 所 以 薦 省 費 之 道 - 向 架 源, 執 l 煩 漸 多, 則 後 日 之 魔 財, 율 不 倍 徒 於 今 耶? 上 日, 뼈 言, 是 훗 且 如 趙 朴 핸{ 中 種 者, 亦 皆 以 쁨 歲 興 作 寫 關 騙 之 要 道, 則 就 民 完 投, 未 必 不 薦 實 惠, 而 非 特 民 力 個 殘, 有 難 重 勞 以 投, 텀 今 經 費,울 容 運 議 於 張 大 之 事 乎? 諸 大 톰 齊 聲 奏 日, 判 府 事 之 言, 廣 有 意 見, 聖 意 雖 在 於 節 財 用, 而 如 不 及 今 修 治, 則 容 入 百 金 者, 後 必 至 千 金 롯 上 日, 予 意 不 專 在 於 惜 費, 適 當 存 흉흉, 民 情 違 急, 홈E 屋 難 食 之 狀, 常 若 森 然, 於 九 重 훌 閔 之 時, 其 中 - 二 處, 雖 緣 所 重 有 在, 略 加 흡 理, 而 至 於 - 新 修 改, 終 非 予 心 之 所 安 훗 上 命 明 日 出 宮 門 路, 以 協 陽 門 寫 Z 出 楊 敎 t 謂 在 學 日, 景 寒 宮 動 罵 時, 路 由 館 뼈, 則 館 學 生 例 皆 成 班 禮 迎, 而 近 來 或 行 或 否 今 훔, 則 申 節, 可 也 乃 命 諸 大 R 先 退, 待 孫 嚴 宣 體 罷 歸 又 命 時 俊, 員 嚴 橋 外 放 席 及 四 慶 簽 帳, -뺨 修 改 上 由 萬 壽 門, 倒 日 짧 歷 羅 熙 門, 至 愛 運 顆, 命 節 景 福 願 改 Ii ; 之 彼 仍 由 映 훨 門 至 大 明 門 前, 命 節 景 福 嚴 東 偏 投 事 途 至 f슴중증횡f, 命 戶 判 隨 後, 往 來 看 審 境 펄 投 事, 戶 判 看 投 處, 以 參 判 代 之 上 命 於 小 商 突 元 處, 藉 草 設 重 席, 席 上 安 徒 O 座, 諸 텀프 皆 左 右 待 품 有 l 憐 日, 上 林 행 t옮펄, 年 年 修 治, 隨 郞 類 ±c, 此 由 於 典 守 之 無 人 若 使 t홈 外 居 民 分 界 典 守, 則 其 在 支 久 之 道, 必 大 有 效 훗 上 目, 此 則 自 뼈 團, 從 { 更 寫 之, 可 也 仍 命 諸 R 進 前, 領 %* 嚴 宣 購 뚫 上 日, 臨 皇 望 遠, 眼 界 爽 쯤, 登 泰 山 小 天 下, 登 東 山 小 쩔, 聖 人 之 言, f 盡 有 味 훗 且 王 都 者, 八 方 Z 中 央, 山 川 之 氣, 뺑빠 碼 爾, 蓋 至 此 而 秀 者 益 秀, 麗 者 益 麗 經 動 l 九 徐, 願 在 左 而 社 在 右 者, 我 太 祖 흥 lj 業 之 宏 規 也 休 養 百 年, 前 有 朝 而 後 有 市 者, 我 列 朝 守 成 之 洪 諸 也 홈 木 錯 陰, 人 煙 雜 찔, h 年 八 百, 警 如 周 家 之 定 쨌 鄭, 擇 地 上 體, 警 如 漢 室 之 '.'{:; 關 中, 予 與 群 R, 其 可 不 念 我 祖 宗 付 任 之 重, 而 탬 所 以 繼 其 志 述 其 事 耶? 諸 R 成 # 手 承 命, 無 不 感 發 많 碼 者 t 指 點 承 華 樓 扁 願 B, 諸 R 眼 力, 有 能 認 彼 三 字 者 否? 祐 源 日, 此 是 報 春 樓 中 - 字, 獨 可 辦 其 寫 春 훗 上 笑 日, 獅 以 寫 報 春 樓 耶? 予 則 但 見 其 혔 承 華 樓 也 上 仍 指 熙 政 堂 日, 今 日 諸 멀, 曾 有 出 入 此 堂 者 否? 뿔 ZB, R 於 年 前 親 政 時, 入 待 熙 政 堂 훗 上 日, 此 則 當 수 親 政 時 也 亨 達 日, 톰 於 先 朝, 홈 入 待 熙 政 堂 훗 上 日, g~p 可 謂 舊 닮훗 上 謂 亨 達 日, 仁 政 嚴, 創 自 何 時? 亨 達 B, 或 傳 是 前 朝 所 建 롯 上 B, 此 乃 仁 祖 朝 所 重 建 也? 宮 嚴 外 屋 梁 之 열몇 者, 황l 與 及 此? 亨 達 日, 外 둠놓 刺, 例 皆 껄몇, 而 未 有 及 此 者 堆 興 仁 門, 似 可 相 方 훗 上 命 購 많, 問 看 投 戶 뽕 郞 廳 續 l 籃 投 姓 名 以 奏 購 톰 出 問 還 奏 於 是, 上 展 日 짧, 由 映 뿔 門 入 永 8 軍 門, 奉 審 l률 顧 播 外 輔 陳 之 改 修 者, 由 萬 壽 門 歷 養 志 堂 前 路, 出 嘉 會 門 徒 O 日 짧, 以 待 令 運 帶, 亨 達 請 當 該 司 鎬, 令 {~ 司 科 治 上 命 담 本 院 動 罪, 歷 짧 月 門 同 春 門 前 路, 入 蕭 淸 門 上 住 與, 視 t좀 헐 改 第 之 功, 始 命 因 地 形 꺼 集, 영또 投 作 也, 復 命 如 初 由 正 智 門, 歷 壽 靜 堂 王 華 堂 在 德 堂 前 路, 命 節 太 和 堂 寶 慶 堂 投 事 皆 쯤 嚴 嚴 宇 也 至 玄 武 門 前 路, 검 諸 토 敎 日, 此 얻 n 大 造 嚴 之 北, 奉 諸 堂 之 南 樓 外 也 謂 有 憐 日, 兩 願 差 備, 此 其 界 也 不 可 以 不 門, 故 架 흉흠풍 蓋, 貼 且 就 簡, 而 年 朝 [ 塵 易 之

119 費 倍 入, 可 易 以 互 謂 諸 톰 B, 故 事, 凡 大 內 堂 宇, 죠 年 一 修 補, 三 年 - 修 理, 春 秋 奉 審, 而 故 相 閔 鎭 遠, 故 判 書 朴 文 秀 寫 度 支 時, 最 稱 {I 參 題 每 第 t옮 m, 必 書 堂 郞 及 走 H9:1fr 手 姓 名 子 펄탤 之 面, 蓋 欲 考 其 動 慢, 核 其 賞 뽑 也 古 人 之 務 實 如 此, 後 世 任 度 支 者, 亦 可 以 知 所 則 也 乃 自 炳 景 門 前 路, 由 芳 華 門 至 없 憐 J:Zf 上 住 與, 검 諸 톰, 指 土 宇 日, 此 염 n 宮 中 歡 也 宮 中 有 士 宇, 又 有 北 휴 歡, 重 因 則 或 因 土 字, 或 因 극놓 微, 而 其 升 O 校, 以 률 木 짧 三 模, 大 如 股, 受 之 者 解 能 自 全, 故 츄 歡 ~IJ 蕭 顧 朝 罷 之, 쩌 校 則 先 朝 甲 子, 多 有 我 減, 而 追 予 剛 服, 엽n 罷 土 宇, 款 빼 典 則 領 下 之 後, 升 O 具 之 未 及 覆 改 者, 皆 減 其 制, 廣 不 過 五 六 #, 훔 不 及 - -t, 9~0 等 詳 此 委 折 否? 혔 日, 今 承 下 敎, 列 聖 朝 敎 빼 之 德, 我 聖 上 繼 述 之 孝, 實 不 勝 敎 띠롯 途 自 九 容 顆 前 路, 由 中 正 門 歷 權 華 堂 前 路, 出 萬 福 門, 歷 泰 安 門 前 路, 由 長 慶 門 星 鳥 門 嘉 應 門, i훨 興 敎 門 前 路, 出 日 華 門 亨 達 見 門 內 行 聞 類 刺 無 餘, 進 前 奏 日, 此 聞 之 宜 修 而 不 修 久 훗 今 不 修, 後 恐 無 益 於 修, 請 修 之 上 日, 非 所 急 也, 可 E 之 由 永 群 門, 過 歡 慶 嚴 꿨 默 聞 前 路, 出 集 義 門, 倒 景 春 嚴 上 謂 諸 fil: 日, 此 郞 惠 慶 宮 差 備, 而 王 申 짧 生 願 也 與 寶 慶 堂 事 體 無 異, 今 其 챈 陳 敗 餐, 行 將 告 類, 而 不 有 以 챔 完, 如 國 體 何? 各 處 執 뼈, 指 不 勝 樓, 而 獨 於 l를 嚴 及 값 1111, 1 11싸 씨 ff따, 特 命 修 改 者, 予 有 所 훤 量 而 然 쫓 至 於 샤 默 폐, 염n 先 朝 T 표 居 盧 之 所, 雖 非 표 嚴, 所 重 存 휠, 故 亦 命 - 體 修 改, 9~0 等 須 惠 予 意 亨 達 日, E2: 於 先 朝 T 표, 亦 홈 入 待 子 옆 默 聞 쫓 上 日, 今 日 諸 톰, 前 홈 出 入 규 二 悲 默 聞 者, 只 有 9~D- 人 훗 亨 達 日, 尙 記 IX;. 근 年 間, 닮 以 春 야, 次 對 則 入 對 子?1퍼 f ; 깎, 講 앓 則 入 對 子 德 成 開 훗 上 寫 之 쫓 感 者 久 之, 命 有 憐 依 列 朝 故 事, 書 揚 짧 生 願 三 字 子 월휴 1꾀 有 憐 請 其 筆 上 日, 從 當 下 敎 롯 於 是 上 自 1!; 써 門 前 路, 由 w 평!111 ;,/-:: fi~ 비 폐 111~1 "h파값!" j 써!i,~ l"j, 還 內 諸 닮 由 댄! {,, l" 'J, 過 熙 政 堂 前 路, 出 熙 仁 門, 轉 宣 化 門 退 出 16. 정조 1 8 년 / 1 2 월 / 1 9 일(임신)/ 購 / ; 盛, 彩 與 奉 入 時, 必 多 P 且 嘴 之 慮 此 是 正 陽 門 外, 則 亦 一 聞 門 也 甲 寅 十 二 月 十 九 日 辰 時, 上 徒 Of 更 嚴 都 承 답 上 號 都 藍 堂 上 尙 衣 提 調 同 寫 入 待 時, 行 都 承 冒 沈 煥 之, 假 注 書 李 允 讓, 記 注 官 金 良 f 周 承 鷹 祚, 上 號 都 藍 堂 上 戶 훨 判 書 沈 願 之, 禮 홈 判 書 閔 鍾 顯, 行 副 司 直 李 得 톰, 行 大 司 成 李 家 煥, 尙 衣 提 調 徐 有 防, 以 次 進 {;k 뚫 上 日, 慶 禮 當 前, 在 予 歡 祝 之 心, 凡 係 稱 貴 嚴 文, 울 不 欲 盡 誠 盡 美, 而 事 或 近 於 張 大, 則 恐 非 때 承 孫 敎 之 道, 故 隨 事 參 配, 以 寫 順 志 之 方 옷 第 上 冊 寶 處 所, 當 於 壽 靜 嚴 寫 之, 而 門 路 甚 俠 없, 彩 簡 奉 入 時, 必 多 P 且 嘴 之 慮 此 是 1f ISW f"l 外, 則 亦 - 聞 門 也 所 重 何 如, 事 體 f 可 如? 此 則 不 可 不 修 改, 以 寫 容 族 之 地 戶 判 與 該 郞, 率 工 E 隨 入, 親 審 時, 計 其 補 階 容 入 之 數, 門 路 修 改 之 投, 可 也 仍 行 親 審 뚫, 還 徒 n 便 願 上 日, 始 投, 以 何 日 寫 之? 願 之 B, 二 十 - 日, 놈 好 코롯 上 日, 什 - 日, 則 都 政, 담 多 빼 應 者, 機 務 相 妹, 什 一 日 外 물 無 可 擇 之 日 乎? 願 之 日, 自 什 二 日 至 H 每 日, 無 可 取 之 日 공, 若 始 投 於 什 - 日, 則 始 投 以 後 事, 無 日 不 可 롯 上 日, 然 則 什 - 日 始 投, 可 也 鍾 顯 티, 慧 嚴 慧 宮 上 冊 寶 冊 印 處 所, 以 壽 靜 嚴 馬 之 事, 命 下 윷 外 嚴 親 上 處 所, 以 何 處 聽 練 乎? 上 B, 흡 我 成 蘭 朝, 薦 貞 훌 仁 條 安 順 三 大 92, 建 明 政 願, 每 當 표 至, 率 群 E2: 寶 三 嚴, 仍 徒 O 是 嚴 受 朝 賞 其 後 經 嚴 大 禮, 每 行 於 是 願, 今 짧 亦 於 明 政 願 寫 之, 可 也 出 學 條 鍾 顯 B, 쯤 宮 寶 觀 周 甲, 稱 慶 陳 賢 時, 養 文 致 詞 表 훌, 似 當 以 親 上 醒 練, 故 敢 此 때 達 롯 上 日, 明 政 願, 先 行 上 尊 號 之 禮, 次 行 親 上 冊 印 致 詞 表 훌 之 禮 於 壽 靜 願, 次 行 慧 宮 周 甲 陳 賞 於 明 政 願, 次 當 臨 嚴 受 寶, 領 散 中 外, 依 此 寫 z, 可 也 出 學 條 鍾 顯 日, 慧 嚴 上 冊 寶, 景 暴 宮 上 冊 印, 慧 宮 上 冊 印 時, 內 習 嚴 - 次, 外 習 慶 - 次 寫 之 事, 命 下 롯 當 寫 擇 日 뚫 行, 而 在 前 外 習 嚴, 則 都 藍 堂 郞 及 諸 執 事, 行 於 議 政 府, 而 內 習 嚴, 則 依 正 日 例, 百 官 皆 寫 入 參 於 嚴 底 롯 今 흉흉 習 嚴 處 所, 以 何 處 寫 之 乎? 上 B, 明 政 願 壽 靜 嚴 寫 之, 可 也 出 學 條 鍾 顯 日, 景 흙 宮 上 冊 印 時, 흉용 嚴, 亦 當 於 明 政 嚴 薦 之 乎? 上 日, 依 薦 之 當 親 듬듭 願 底, 禮 畢 還 內, 依 先 朝 故 事 寫 之 훗 出 짧 條 鍾 顯 日, 평 嚴 冊 寶, 景 薦 宮 冊 印, 孫 宮 冊 印, 內 入 則 以 同 日 推 擇, 內 出 則 當 寫 臨 時 請 出, 故 敢 此 띠 達 %

120 훗 上 日, 依 寫 之 出 學 條 鍾 顯 B, 冊 寶 冊 印, 內 入 內 出, 以 何 觀 醒 練 乎? 上 日, 明 政 嚴 寫 之, 可 也 出 學 條 鍾 顯 日, 죠종 願 寶 敵 望 六, 加 上 尊 號 陳 寶, 忽 宮 寶 顧 周 甲 陳 賢, 慧 宮 加 上 尊 號 陳 賢 時, 願 下 所 進 致 詞 쫓 文, 中 宮 嚴 所 進 致 詞, 當 寫 흡IT 期 擺 進, 以 薦 女 官 鍵 習 之 地 大 提 學 徐 有 닮, 令 政 院 票 릅 牌 招, 百 官 所 進 좋 文, 亦 令 承 文 院 멸 P1훨 學 行, 何 如? 上 日, 依 寫 之 出 學 條 鍾 顯 B, 톰 昨 tk 承 聖 敎, 今 짧 嚴 宮 上 號 時, 內 外 命 歸 參 班, 拉 許 꺼 參, 而 莫 大 之 慶, 屬 文 不 可 不 備, 內 願 行 禮 節 次, 則 特 令 取 考 久 遠 優 動, 依 禮 文 뿜 練 훗 護 考 本 暫 所 藏 嚴 動, 뒷 IJ 堆 蕭 顧 困 寅, 莊 烈 大 Pc 周 甲 稱 慶 上 號 陳 賢 時, 我 聖 祖 特 令 優 홈, 議 定 中 嚴 進 致 詞 表 훌 優 註, 又 因 該 홈 所 양, 問 子 大 몹,빨 練 節 텀 其 時 大 톰 金 壽 興 閔 鼎 重 鄭 知 和 歡 議 中, 或 引 通 典 及 文 歡 通 考, 或 引 五 禮 展 及 成 宗 朝 故 事, 以 馬 必 可 行, 而 自 上, 命 做 五 禮 優, 王 世 子 朝 寶 懷 뿜 練 훗 廢 動 l 所 載, 明 有 可 據, 當 此 無 前 之 大 慶, 方 講 應 行 之 盛 典, 而 此 優 註 之 復 寫 邊 用 於 百 餘 年 Z 後 者, 事 容 不 偶 今 此 慧 顧 忽 宮 上 號 時, 中 宮 嚴 行 禮 慶 註, - 從 困 寅 年 仁 顯 聖 母 之 行 於 莊 烈 大 紀 者, a룡 練 以 入 恐 好, 故 敢 此 1r~ 達 훗 上 日, 是 顧 之 行 是 禮, 歡 祝 之 下 情, 益 有 倍 휠 燒 節 - 遭 其 時 票 定 條 件 寫 之, 而 取 見 其 時 燒 動, 內 外 命 歸, 其 時 - 體 參 班 載 錄, 而 外 命 續 則 府 夫 人 公 王 弱 主 外, 文 武 官 正 二 品 以 上 쫓 及 六 承 릅좋, 例 皆 入 參 然 於 百 餘 年 來, 未 홈 如 例 學 行, 以 是 族 因 收 議, 朝 官 쫓 無 入 參 之 文 鐘, 此 所 以 今 짧 權 除 者 也 此 - 款, 依 此 知 惠, 可 也 出 學 條 鍾 顯 日, 明 春 園 幸 時, 依 定 例, 設 科 等 節, 當 寫 票 定, 而 E용 成 年 設 文 武 科 底 試, 염 n 日 放 樣 옷 今 훔 亦 依 此 寫 之 乎? 上 日, 依 薦 之 出 學 條 鍾 顯 日, E월 成 年 則 水 原 廣 j 果 川 三 둠 原 居 f 需 生 許 起, 而 今 짧 則 꺾 川 f 需 生, 亦 當 許 走 L 故 敢 此 때 達 훗 上 B, 一 體 許 走!:, 可 也 出 學 條 有 防 B, 慧 嚴 쯤 宮 加 上 尊 號 時, 中 宮 嚴 行 禮 時, 進 徒 D. 露 衣 諸 具, 例 自 尙 方, 造 製 以 入, 今 꿇 亦 當 依 此 學 行, 故 敢 此 frp 達 훗 上 日, 今 훔 則 皆 自 內 惜 備, 只 以 件 記 書 下 者, 或 次 入 或 造 入, 可 也 出 醫 條 命 退, 諸 토 以 次 退 出 17. 정조 21 년/윤 06 월 /21 일(기미)/ 購 / ; 而 所 食 只 有 委 樓 而 E 行 到 北 京, 入 正 陽 門 內, 望 大 淸 門 黃 極 고종 5 년 /04 월 /28 일(병오)/ 購 / -- - 後 保 和 願, 自 太 淸 門 南 向 數 百 步 許, 有 正 陽 門, 맨 內 城 門 也 上 틴,. 고종 10년 계유 (1873, 동치 12) 2월 1 일 (경술) (승정원일기) 대왕대비전 등에 존호를 가상할 때 쓸 음악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묻는 예조의 계 0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하는 날 안뜰에서 예를 행할 때 쓸 음악은 고사 ( 聲 師 )와 여령( 女 冷 )이 거행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러나 삼가 등록( 擔 錄 )을 상고해 보니, 을묘년 이후로 연달아 특교( 特 敎 )로 인해 그만두었습니다. 신축년 (1841, 헌종 7) 에 존호를 올릴 때도 역시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하교에 따라 음악을 쓰는 절차는 정해년 (1827, 순조 27) 에 존호를 올릴 때의 예대로 헌가악(휩 架 樂 )은 통명전( 通 明 願 ) 정양문( 正 陽 門 )의 바 깥 뜰에 설치하고, 등가악( 登 歌 樂 )은 정양문의 바깥 계단 위에 설치하는 것으로 마련하여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중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고사와 여령이 거행하는 것은 정지하라. 헌가악은 강녕전( 康 寧 願 ) 향오문( 響 五 門 ) 바깥 뜰

121 에 설치하고, 등가악은 향오문 바깥 계단 위에 설치하는 것으로 마련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고종 19년 엄오 (1882, 광서 8) 12 월 20 일 (임신)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추가해 올릴 때 음악을 마련할 것인지를 묻는 예조의 계 0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대왕대비전께 존호를 추가해 올리는 날 내정( 內 展 )에서 은 으레 고사( 響 師 )와 여령( 女 { 令 )으로써 보니, 예를 행할 때 사용하는 음악 거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가 등록( 體 錄 )을 상고해 을묘년 이후로 잇달아 특별 분부로 인하여 사용하지 않았고 신축년에 존호를 올릴 때에도 또한 그만두라는 명이 있었으나 하교로 인하여 사용하는 음악의 절차를 정해년 존호 를 올릴 때의 예에 의거하여 통명전( 通 明 願 ) 정양문( 正 陽 門 ) 외정( 外 훨)에 헌현(환 戀 )을 설치 하고 정양문 밖 계단 위에 등가( 登 歌 )의 음악을 마련하였으며, 계유년에도 또한 이 거하여 마련해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계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예에 의 π %

122 여휘당 기 1 프료 E 중종 105 권, 39 년 (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 년) 11 월 15 일(경술) 21 번째기사 중전이 문정전에 빈전을 설치하고자 명하다 승-씀승 -6} 시어1 (칭경능- 환경잔에서 승하) 김승보가 와서 말하기를, 중전( 中 嚴 )께서 문정전( 文 政 願 )을 빈전( 續 觀 )으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말하기를, 중전께서 찬궁( 瓚 宮 )을 통명전( 通 明 嚴 ) [ 내전의 깊숙한 곳에 있다. 에 설치하고, 여차( 盧 次 )는 여휘당( 麗 8 軍 堂 )에 설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였다. 빈전 도감이 아뢰기를, 통명전은 협착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이하는 모두 중전의 명이다 J 금명간에 마음대로 들어와 보아도 좋다. 사신은 논한다. 빈전의 설치는 의당 대신이 의논해서 하는 것인데 명이 중전으로부터 나와 이것으로 결정이 되었으니 이미 크게 잘못되었다. 그런데도 도감은 계품을 하면서 겨우 협 착할 것이라는 우려만 하고 끝내 너무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예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우려 한 사람은 없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비단 여러 신하들이 우러러 애통한 마 음을 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곡하는 자리를 함부로 옮겨 예를 문란하게 하고 분 의( 分 義 )를 변개시켰으며, 대전관( 代 尊 官 )을 들이지 않고 궁첩( 宮 흉)이 뒤섞여 있어도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였으니 아 1 통탄스럽다. 명종 31 권, 20년 0565 을축 / 명 가정( 嘉 靖 ) 44 년) 7월 29 일(계해) 1 번째기사 대신 등이 조보를 청하다 대신 등이 아뢰기를, 임금께서 큰 국흉( 國 뼈)을 만나 별당에서 거려( 居 盧 )하는 것이 비록 상례( 喪 禮 )의 떳떳한 도리이지만, 만일 질병이 있으면 흑 임시 변통하는 도리도 있습니다. 옛날 정희 왕비( 貞 熹 王 Pc) 의 상에 성묘( 成 關 )께서 오래도록 보경당( 寶 慶 堂 )에 거처하시니 그때 정신( 廷 뭄)이 대내 ( 大 內 )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은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휘당( 麗 輝 堂 )의 천박( 漢 演 )한 곳에 나가 거처하시는데, 마침 서늘한 가을철 을 만나 바람과 이슬이 침투하기 쉬우므로 조섭하시는 데에 크게 해로우니, 선들은 민망하 고 염려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지난날 왕대비전께서 신들에게 전교하시어 신들로 하여 금 계청하도록 명하셨으니, 왕대비의 분부를 우러러 생각하시고 신민의 간청을 굽어 따르시 어, 내전( 內 嚴 )으로 옮기고 편리한 대로 조보( 調 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근일 열이 오르는 증세가 있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조리하면 저절로 쾌복하게 될 것 이다. 상례가 지극히 중하니 고례를 따라야 한다. 중묘조( 中 關 朝 )에도 낮에는 흑시 때로 대

123 내에 출입함이 있었으나 침소는 마침내 여소( 盧 所 )에서 거처하셨다. 내가 마땅히 이 전례대 로 할 것이지 어찌 대내에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내가 거처할 여소를 내가 어찌 가리지 않 았겠는가. 비록 여휘당이라 하더라도 해롭지 않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신 등이 세 번 청하기에 이르니, 답하기를, 경들이 누차 아뢰니, 내가 기후( 氣 候 )를 살펴보아 선처하겠다. 승정원일기 인조 16 년 4월 10 일 (계묘) 원본 64 책/탈초본 4 책 (3/6) 1638 년 몇 順 ( 明 / 敎 宗 ) 直 言 을 구하고 麗 8 軍 堂 으로 避 願 함 0 求 直 言 減 睡 澈 樂, 避 표 嚴 於?ι ll'1 li채 11 년 정조 원년 8월 2 일 (을미) 원본 1403 책 /탈초본 78 책 畢 投 後 原 冊 子 中 存 減 及 近 日 書 下 者, X 與 內 外 各 處 所 入 草 單 書 양, 以 防 虛 實 相 豪 之 慶 X 命 書 傳 敎 B, 大 造 願 西 溫 埈 及 前 退, 白 救 席 寫 之, 忽 戶, 補 孔, 大 造 嚴 小 廣 房 等 行 聞, 只 廢 偏 處 補 孔, 쫓 뿔 從 略 寫 之, 只 改 張 板, 꺼 寫 輔 陳 X 命 書 傳 敎 日, ij' L'. l~ li'f; ;: 補 孔 房 及 廳, 白 放, 退 則 草 席 又 書 傳 敎 B, 大 比 不 遠, 而 隨 從 亦 與 없 隨 從 有 異, 俠 冊 亦 與 借 述 有 異,많 停 - 學 以 示 節 勳 今 春 藍 試 時 及 文 科 會 試 時, 以 率 隨 從 寫 手 事 及 俠 冊 走 t 試 事, 停 學 f 需 生, 解 停 上 命 退, 承 史 以 次 退 出 ν

124 c- Documents and S ettings Adm in i s trat o r 바탕 화면 2 건 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 口 앙화당. hwp 1 口 양화당 승정원일기) 영초 6년 5월 8일 (을해) 원본706잭/탈초본39잭 (14/19) 李 承 源, 以 修 理 所 言 양 B, 養 和 堂 澈 앓, 以 今 月 初 七 日 辰 時, 初 九 日 깨 時 中, 推 移 學 行 事, 많 E 草 記 양 下 쫓 今 日 辰 時, 澈 없 始 投, 而 所 入 材 木, 私 { 諸 則 組 無 可 得 之 處, 水 上 流 下 之 木, 僅 得 十 餘 珠, 而 新 俊 水 傳, 乾 正 未 易, 誠 寫 可 慮 之 意, ltl!l:l 敢 양 傳 日, 知 道

125 경춘전 홍재전서 제 14 권 기( 記 ) 경춘전기( 景 春 嚴 記 ) 시경 에 이르기를, 상(쫓)과 재( 桂 )는 반드시 공경해야 한다. 했고, 그를 풀이한 자는, 아버지가 심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심으신 나무도 감히 공경을 다하지 않으 면 안 된다는 것인데 하물며 부모가 거처하시던 곳, 또 자신이 태어난 집이야 반드시 공경 하기를 어찌 뽕나무나 재나무 정도로 할 뿐이겠는가 공경을 하다 보면 느끼고 사모하게 되 고, 느끼고 사모하다 보면 늘 돌아다보여 잊을 수가 없고, 사랑스럽고 보호하고 싶어 차마 폐할 수 없는 것이 누구나 사람이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창경궁 환경전( 歡 慶 嚴 ) 서쪽에 경 춘( 景 春 )이라는 전( 嚴 )이 있는데, 우리 숙종( 輔 宗 )과 인원성후( 仁 元 聖 尼 )가 계시던 곳이고, 그후에는 선친( 先 親 )께서 그전에 계셨으며, 이 소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국조( 國 朝 ) 전 례가 왕이 탄생한 전각( 願 聞 )이변 반드시 사실을 기록한 현판을 달게 되어 있으므로 황조고 ( 皇 祖 考 )께서 늘 소자에게 하교하시기를, 이 일이 정령( 政 令 )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아도 이 뒤에 자손들이 이 집에 와서 저 현판을 보게 되변 경건한 마음과 감회가 자연히 생기는 것이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너도 나의 이 말을 꼭 잊지 말아라. 하셨다. 아, 어려 부 모를 여의고 그 슬픔 그지없는 나로서 저것을 보았을 때 그 감회와 존경심이 과연 어떠하겠 는가. 저번에 유사( 有 司 )가 두 궐( 關 )을 수리해야 한다고 내게 청했을 때 내가 듣지 않았던 것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 살기가 곤궁하기 때문이었지만 저 궁전만은 수리를 않으면 금방 무너질 것이고, 만약 무너진다면 그것은 내가 그 집을 아끼고 돌보는 마음이 아니기에 유사 를 명하여 수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수리는 해도 그저 서까래 몇 개 갈고, 주추 하나 바로하고 하여 우선 기울지나 않고 비가 새지나 않게 한 것일 뿐 칠이 낡고 뭉개지고 문창 살이 삐뚱어지고 한 것들은 손을 대지 말게 하였다- 이유는 비용 절감도 절감이려니와 되도 록이면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여 추모( 追 菜 )의 뜻을 붙이려는 것이었다 공사가 끝난 후 탄 생전( 誠 生 嚴 ) 세 글자를 써서 문지방 위에다 걸고 이어 이렇게 기( 記 )를 쓴 것이다 아, 시경 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슬프고 슬프다 부모님이여 날 낳으시느라 힘드셨다 라고. 힘드신 그 은혜를 생각지 않은 자 누가 있으랴만 그래도 나와 같은 자는 없을 것이다. 아. 궁전 동쪽 벽에 용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날 밤 선친( 先 親 ) 꿈에 용이 침 실로 들어왔는데, 나를 낳고 보니 흡사 꿈속에 보았던 용처럼 생겨서 그것을 손수 벽에다 그려 아들을 낳은 기쁨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지금 보아도 먹물이 젖은 듯하고, 용의 뿔 과 비늘이 움직이는 것 같아 내 그 필적을 볼 때마다 감회가 극에 달해 눈물이 쏟아지곤 하 는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기록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그 그림이 보배로운 것임을 알아 감히 더럽히지 말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 49

126 어제경춘전기 所 處 身 所 受 生 之 室 必 뽕 必 敬 쫓험; 倒 製 景 春 嚴 記 편저자 純 祖 ( 朝 蘇 ) 擺 ; 沈 象 奎 ( 朝 蘇 ) 奉 敎 書 쫓햄 已 乎 之 文 不 覺 聲 淚 交 發 我 寧 考 짧 於 此 觀 而 亦 혐됐 感 而 致 敬 奎 뼈 裝 1 뼈 (13 折 25 面 ) 폴 況 予 小 子 以 껄 壞 摩 速 之 痛 廳 cm 寧 考 所 짧 生 之 嚴 而 敢 不 起 感 於 此 昌 慶 宮 有 - 願 日 景 春 其 嚴 向 東 而 背 西 嘉 孝 測 其 西 喜 康 在 其 南 열 n 內 願 也 멈 予 功 時 雖 知 此 嚴 之 在 而 未 知 其 在 於 何 處 떻 自 康 申 始 廳 此 嚴 而 亦 知 其 寫 大 內 正 嚴 而 E 未 풍솟D 其 薦 起 感 起 敬 ~J 也 也 - 日 偶 廳 嚴 之 東 뿔 有 훌훌 龍 小 子 띠 問 忽 宮 慧 宮 륨좋 演 敎 日 此 景 薦 宮 之 흉 輩 也 音 我 先 朝 짧 生 之 前 깃 景 暴 宮 夢 有 龍 入 我 之 寢 室 많 覺 喜 甚 知 其 有 켜5 國 之 慶 途 因 夢 中 之 龍 畵 於 願 起 敬 於 此 嚴 乎 是 故 每 當 l 視 隱 之 時 必 廳 짧g 賴 而 懷 不 能 自 己 者 也 껄 宮 떻 自 王 成 更 倒 此 願 及 子 ζ 표 予 遭 貞 純 聖 母 國 血 居 慶 於 此 嚴 之 靈 聞 自 二 月 十 四 日 깃 有 微 惠 慧 宮 命 移 居 此 嚴 仍 愚 훨 幸 賴 嚴 宮 之 保 護 句 餘 而 平 復 予 於 此 暗 喜 者 非 寫 一 身 之 故 也 恐 貼 觀 宮 흉 흉 之 憂 也 忽 宮 喜 日 此 宗 社 Z 慶 也 生 民 之 福 也 율 可 無 記 仍 命 小 子 記 小 子 自 受 是 命 也 不 敢 但 以 暴 者 之 돗 愈 薦 之 解 日 嗚 呼 景 春 嚴 東 뿔 之 上 寶 뿔 煙 熺 光 彩 燦 爛 購 角 若 動 明 日 先 朝 짧 降 염n 王 申 秋 九 月 二 十 有 二 日 也 歲 쫓째 仍 뿔 上 z 畵 作 - 網 福 每 擔 望 感 淚 先 發 今 當 主 上 之 問 홈 心 倍 悲 切 훗 仍 親 指 嚴 南 門 上 日 此 先 朝 親 書 揚 板 又 指 嚴 北 門 上 日 此 先 朝 親 記 萬 暴 也 未 知 前 日 知 之 乎 小 子 對 日 未 知 훗 仍 體 兩 處 之 a끊 賴 南 門 書 日 짧 生 願 北 門 有 徒 n 製 嚴 記 三 百 四 十 有 - 言 其 左 有 小 識 九 十 有 二 言 倒 製 記 有 日 堆 쫓 與 *후 必 경 敬 止 釋 염n 我 關 圍 1 仁 元 聖 尼 所 倒 之 嚴 也 亦 我 景 寒 宮 慧 宮 所 倒 之 嚴 也 X 我 寧 考 짧 生 之 嚴 也 列 朝 重 熙 累 治 聖 子 神 孫 繼 繼 編 觸 我 東 方 憶 萬 年 無 題 之 休 담 是 始 훗홈 不 盛 且 休 歲 是 以 嚴 領 B 景 景 者 大 也 B 春 春 者 壽 也 古 今 稱 祝 之 解 也 莫 不 以 大 歲 乾 元 馬 君 德 八 千 寫 春 寫 君 壽 得 名 得 位 得 壽 坐 鎭 올 圖 如 間 如 車 如 山 增 線 寶 뚫 堆 我 孝 康 쯤 熺 貞 宣 微 種 惠 複 郞 下 配 德 릅t 極 功 昭 二 南 至 柔 而 剛 女 中 좋놓짧 至 靜 Z 者 日 父 之 所 樹 也 父 之 所 樹 之 樹 獨 不 敢 不 致 옆 敬 況 父 母 所 處 身 所 受 生 之 室 必 悲 必 敬 쫓좁쫓*후 E 乎 q 意 小 子 生 於 十 二 未 知 此 薦 我 寧 考 誠 生 之 願 U 子 亦 悲 歲 小 子 종홉 念 聚 義 之 痛 人 子 之 至 情 쫓 掉 之 敬 孝 心 而 方 今 世 # 王 妙 l짧 我 寧 考 前 * 有 쩔 朝 之 神 夢 敬 事 英 願 堂 號 有 嘉 孝 之 美 稱 此 非 我 孫 宮 之 大 德 者 乎 뼈 JI업 慧 惠 終 無 1 解 港 定 省 훌훔 一 是 不 월 奉 事 兩 聖 尼 不 避 寒 暑 經 人 世 所 不 꺼흉 之 痛 而 以 義 制 心 歷 人 之 自 然 也 f* 觀 寧 考 之 記 至 父 母 m ω

127 世 所 不 權 之 悲 而 以 孝 寬 心 此 非 我 慧 宮 之 大 孝 者 乎 禮 運 古 規 廳 美 思 齊 隊 木 之 德 六 宮 1 或 頭 苦 心 曲 體 勞 課 至 甚 꿨 讓 著 於 뼈 微 至 行 顯 於 不 言 則 本 支 百 世 慶 仍 振 振 此 非 我 쯤 宮 之 大 仁 者 乎 檢 約 節 射 F후 去 著 z 順 擬 觀 澤 慶 益 風 煙 延 熺 稱 觸 介 壽 母 之 黃 髮 奉 壽 進 體 出 寧 考 之 至 孝 雲 成 五 色 重 體 慧 天 之 有 喜 花 覆 千 官 相 寶 今 日 之 大 慶 八 域 之 大 g쩔 於 春 t읍 f 意 % 之 댔 歸 於 人 瑞 此 莫 非 我 종종 宮 邱 下 福 1 除 뭄 建 景 運 華 抱 有 커밍흰 周 無 異 면홍 不 以 位 高 而 옳 著 堆 以 節 險 而 寫 폈 以 至 服 節 之 物 器 用 之 屬 莫 不 - 從 簡 約 常 敎 小 子 以 節 {했 小 子 Z 凡 - 事 之 慣 - 物 之 愛 莫 不 承 J I 頂 我 國 者 此 非 我 慧 心 以 延 於 츄B 忽 宮 Z 大 f했 者 乎 WI. 興 夜 探 戰 戰 就 脫 夜 以 繼 書 及 其 寶 뚫 觸 高 動 勞 不 息 或 節 宮 女 而 動 醫 績 防 線 之 屬 或 被 古 書 而 論 賢 愚 治 홈Lz 別 小 子 朝 而 待 則 뿜륨 日 未 及 承 之 敎 깃 而 待 則 奉 흡 日 未 及 知 之 회 II 何 可 以 - 二 計 也 행 憶 人 황l 無 弘 開 此 所 以 寫 春 之 謂 也 亦 所 以 寫 春 之 謂 壽 也 凡 於 宮 室 顧 聞 之 可 美 物 態 光 景 之 可 麗 者 特 - 小 節 而 予 많 常 目 觀 者 뿔 敢 不 記 其 萬 一 人 有 言 日 宮 室 必 取 宏 麗 予 實 以 寫 不 然 也 夫 흙 天 下 之 人 主 也 生 民 之 父 母 也 萬 취3 之 所 ffp~~ 民 之 所 廳 則 宮 室 宜 其 R 土 麗 節 以 金 銀 加 以 珠 玉 使 耳 덤 t:xj쫓 心 志 兄 썽 而 未 聞 흙 時 有 如 此 之 事 史 稱 之 日 土 階 三 等 쫓윷 不 평 若 使 凡 人 끊 看 뚫 之 {혔 德 似 過 훗 而 萬 취3 諸 候 未 聞 由 是 而 有 不 뿔 不 孝 至 於 小 子 早 經 周 極 之 痛 全 賴 願 宮 之 愛 小 子 雖 不 혐물 敢 斯 須 忘 慧 宮 恩 斯 動 斯 昊 天 同 大 之 恩 此 非 我 慧 宮 之 大 動 者 乎 是 故 慧 德 光 輝 徵 품 播 찮 內 而 宮 휩 之 所 敎 ffp 遠 而 朝 野 之 所 瓚 頭 能 動 乎 天 地 能 感 乎 鬼 神 在 小 子 體 때 德 化 尤 當 如 何 是 以 天 瑞 중중 E 可 t 也 符 슛효 盧 上 天 之 載 無 聲 所 助 者 J I 頂 萬 靈 之 社 畢 至 永 추 手 休 此 所 以 寫 景 之 謂 也 亦 所 以 薦 景 之 謂 大 也 於 休 盛 歲 以 至 寶 훌훌 受 萬 年 之 壽 洛 書 開 五 福 之 神 八 千 春 秋 五 百 甲 子 小 子 之 願 祝 者 也 人 有 慶 萬 壽 無 讀 小 子 之 析 頭 者 也 쫓 但 小 子 之 願 祝 析 頭 實 是 八 方 之 常 所 同 聲 同 情 由 是 之 故 齊 隆 長 樂 受 養 千 乘 떻 自 흉 年 始 而 百 瑞 爭 奏 三 辰 合 慶 萬 年 搖 fllj 九 좋 金 懷 之 心 然 則 著 而 失 檢 而 得 물 虛 語 也 予 每 擔 此 願 門 戶 깜 聞 處 處 짧 補 쫓휠흩 月 R훌풍O 落 폼 R댄 雖 頭 孫 宮 之 險 德 亦 土 階 쫓윷 之 一 模 然 亦 非 所 以 受 隆 養 示 尊 嚴 之 意 又 況 小 子 之 所 起 感 起 敬 者 尤 有 倍 於 我 寧 考 徒 O 記 之 聖 J 心 者 乎 及 當 更 徒 O 之 時 小 子 敢 請 改 흡 因 舊 貴 而 新 之 於 是 乎 離 梁 짧 陳 非 著 而 燦 爛 鐘 權 雲 f 眉 非 f 多 而 照 擁 } 眉 8 每 明 而 朝 開 강 閒 易 寒 暑 而 쪽 溫 夏 淸 錫 陳 環 映 於 쌓 t를 賽 龍 首 而 張 鳳 쫓 聞 園 1 同 開 於 黃 道 爛 g~n 雲 而 陽 和 風 寶 뿔에't7뽑뿔 上 神 物 靈 動 雷 雨 之 象 雲 漢 昭 며 植 間 f짤 題 光 射 斗 牛 之 塊 於 千 萬 年 콤 慶 擾 建 子 子 孫 孫 不 젠 不 忘 猜 歡 盛 종k 휠 是 我 쯤 宮 所 倒 之 嚴 也 予 小 子 C J

128 學 問 不 明 智 識 未 /슴 雖 效 古 A 承 志 予 不 許 蓋 馬 歲 歡 而 民 困 也 堆 此 願 不 修 Jl.IJ 將 ±c±c 則 뭘 予 勝 顧 愛 之 心 每 有 微 誠 不 速 之 歡 所 以 훌 容 無 횡 心 常 ~:U'.k 者 염 P1fP 答 慧 德 之 萬 一 也 夫 護 拜 手 積 首 敬 記 옳 順 紀 元 後 百 有 八 十 一 年 著 獲 執 徐 七 月 六 日 嘉 善 大 夫 禮 暫 參 判 暴 同 知 經 護 之 心 했 乃 命 有 司 修 之 而 易 數 緣 正 - 魔 祝 以 支 { 煩 防 源 而 E쫓 훨 之 漫 刺 門 總 之 敬 filjk. 者 꺼 之 有 改 非 堆 節 費 要 以 存 舊 觀 而 萬 追 幕 也 工 많뚫 書 誠 生 嚴 三 字 揚 之 備 間 而 馬 之 記 如 右 q풍 詩 X 不 굽 建 春 秋 館 事 奎 章 聞 檢 校 直 聞 죠 衛 都 總 府 副 擔 管 g;: 沈 象 奎 奉 敎 護 書 乎 哀 哀 父 母 生 我 뼈 勞 웬b 勞 之 恩 人 황l 不 懷 而 융 有 如 予 者 乎 憶 願 之 東 뚫 有 畵 龍 훨 蓋 予 生 之 前 것 先 親 夢 有 龍 入 寢 室 많 生 予 則 途 깨 像 其 夢 中 所 觀 手 畵 Z 륜훌 景 春 嚴 記 편저자 표 祖 ( 朝 蘇 ) 擺 ; 沈 象 奎 ( 朝 蘇 ) 청구기호 奎 郞 昨 七 年 秋 七 月 護 書 徒 O 製 景 春 嚴 記 詩 日 維 쫓 與 뺑 必 옆 敬 止 釋 之 者 日 父 之 所 樹 也 父 Z 所 樹 之 樹 增 不 敢 不 致 悲 敬 況 父 母 所 處 身 所 受 生 之 室 其 必 경~ 敬 쫓훔쫓*후 E 乎 켰 敬 則 感 幕 感 幕 則 體 권 顧 而 不 能 忘 愛 護 而 不 忍 廢 人 心 之 所 同 然 也 昌 慶 宮 歡 慶 散 之 西 有 嚴 上 所 以 志 h 熊 之 喜 也 至 今 紙 뿔 如 i됐 購 角 若 動 予 每 擔 玩 手 跳 未 홈 不 感 極 而 佛 1 九 爛 也 鉉 拉 識 之 t뽑 後 A 知 其 寫 寶 뿔 而 不 敢 漫 펀굽 爾 予 염n 昨 七 年 쫓띠굶 秋 下 漸 日 景 春 蓋 我 蕭 願 仁 元 聖 팀 所 홉 徒 O 也 其 後 先 親 徒 O 此 嚴 予 小 子 훗 生 휠 國 朝 凡 於 짧 生 嚴 聞 必 獨 記 識 之 文 皇 祖 考 每 敎 小 子 日 此 事 似 無 關 於 政 令 而 後 之 子 孫 升 此 堂 廳 此 扁 自 然 有 起 感 起 敬 者 X 日 爾 亦 必 不 忘 予 此 言 嗚 n 乎 孤 露 흉J1lfn ~퉁 壞 摩 速 則 其 所 起 感 起 敬 於 斯 者 當 如 何 也 乃 者 有 司 以 修 흡 兩 關 請 야ι

129 순역헌 무진 진찬의궤 1848 년 수리,배설 수리 대청과 온돌 / 분합쌍창, 온돌반자, 연창 배설 북온돌 2 칸, 남온돌 3 칸, 대청 3 칸, 전퇴 잉

130 함안각 승정원일기 영조 33 년 3 월 29 일 (경신) 원본 1142 책/탈초본 63 책 (13/13) X 命 書 傳 敎 B, 文 政 嚴 內 臨 廳, 以 몇 文 堂 寫 之, 徵 寧 顧 內 臨 廳, 以 成 安 聞 寫 之 事, 分 付 영조 93 권 35 년 2월 12 일 (계해) / 함안각에 나가 예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인견하고 원 손의 책봉에 대해 말하다 영조 93 권 35 년 2월 14 일 (을축) / 함안각에 나가 강서원 입직 관원을 인견하고 원손의 강 학에 힘쓰기를 하교하다 영조 93 권 35 년 2월 25 일 (병자) / 함안각에 나가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다 영조 93 권 35 년 3월 14 일 (갑오) / 함안각에 나가 대신을 소견하고 평안 감사 민백상의 장계를 처리하다 영조 93 권 35 년 4 월 4 일 (갑인) / 함안각에서 예조 판서가 입시하자 효소전 부묘의 윤음을 내리다 영조 93 권 35 년 4월 14 일 (갑자) / 함안각에 나가 유신을 불러 심경 을 강하고 속자 성편 i 의 서문을 짓다 영조 93 권 35 년 4 월 28 일 (무인) / 함안각에서 내린 부묘 때 주악을 사용치 말라는 하교 영조 93 권 35 년 5월 2 일 (신사) / 함안각에서 도감 당상을 보고 이익보를 군직에 붙여 도 감을 관장토록 하다 영조 93 권 35 년 5월 6 일 (을유) / 함안각에서 도감의 당상 이하, 친제 집사에게 상을 내리 다 %

131 환경전 내각일력 2. 정조 24 년 六 月 월 二 十 九 日 일 에서 ; 王 大 紀 嚴 以 承 傳 色 口 傳 下 敎 日 Y좁 嚴 以 歡 慶 嚴 寫 之 3. 정조 24 년 七 月 월 初 二 日 일 에서 靈 皮 移 奉 歡 慶 嚴 正 時 子 初 三 刻 르 更 三 點 4. 정조 24 년 七 月 월 初 二 日 일 에서 --- 靈 皮 移 奉 歡 慶 嚴 時 時 原 任 聞 ~J곰 從 入 參 移 奉 後 王 大 紀 嚴 惠 慶 宮 中 宮 散 嘉!I 頂 宮 t받 子 宮 奉 평 問 安 答 B 間 5. 순조 5 년 正 月 월 十 五 日 일 에서 ; --- 午 時 靈 皮 奉 移 칸 二 I폼 慶 願 後 大 嚴 口 傳 問 安 答 Bfc뢰 極 王 大 紀 願 中 宮 嚴 惠 慶 宮 嘉 順 宮 單 子 問 安 答 日 間 極 進 6. 순조 15 년 十 二 月 윌 十 五 日 일 에서 傳 日 續 嚴 以 歡 慶 嚴 薦 之 7. 순조 21 년 츠 月 월 十 = 日 일 에서, 大 行 王 大 紀 嚴 靈 if 移 奉 子 歡 慶 嚴 표 時 西 初 初 刻 8. 순조 21 년 三 月 월 十 二 日 일 에서 ; 大 行 王 大 紀 嚴 靈 뚱 移 奉 子 歡 慶 嚴 後 本 聞 口 傳 問 安 答 日 R뢰 極 進 參 上 同 9. 순조 22 년 十 二 月 월 二 十 八 日 일 에서 ;, 申 時 移 奉 嘉 JI 頂 宮 (수빈박씨, 정조의 후궁, 순조 모) 靈 皮 子 歡 慶 願 金 祖 淳 沈 象 奎 李 存 秀 朴 宗 薰 鄭 基 善 朴 統 壽 李 館 秀 暗 哭 後 本 聞 奉 향 問 安 答 Bfc뢰 極 中 10. 순조 23 년 正 月 월 初 - 日 일 에서 --- 遺 之 典 處 分 非 常 觸 以 寫 過 훗 夫 9좁 宮 處 所 之 定 以 歡 慶 願 因 於 事 勢 之 不 得 不 然 非 以 寫 應 行 之 禮 也 彼 兩 f 需 所 陳 斷 11. 순조 23 년 二 月 월 初 三 日 일 에서 ; --- 轉 轉 沈 欲 途 及 不 證 竟 없 我 嚴 下 終 天 之 動 悲 夫 願 下 遭 古 禮 服 總 治 喪 事 嚴 節 多 像 生 續 手 歡 慶 嚴 徒 O 筆 改 園 官 號 寫 參 12. 순조 30년 죠 月 월 初 七 日 일 에서 --- 靈 皮 移 奉 子 歡 慶 嚴 時 時 原 任 聞 暗 進 入 參 與 進 參 同 移 奉 後 續 宮 口 傳 問 安 答 B 安 寧 進 參 上 同 大 嚴 中 宮 嚴 口 13. 순조 30 년 五 月 월 初 九 日 일 에서 ; 成 服 屬 上 自 內 품 歡 慶 觀 時 至 服 훌 服 入 就 位 哭 承 史 聞 宗 親 文 武 百 官 皆 服 훌 服 而 哭 上 止 哭 代 홍 官 三 上 香 執 옳 尊 14. 순조 30년 八 月 월 初 - 日 일 에서. 午 時 歡 慶 嚴 失 火 15. 헌종 15 년 六 月 월 初 六 日 일 에서. 大 王 大 紀 嚴 以 承 傳 色 口 傳 下 敎 日 續 嚴 以 歡 慶 願 寫 之 16. 철종 8 년 八 月 월 初 四 日 일 에서 ; 傳 日 Y좁 願 以 歡 慶 觀 寫 之 17. 철종 8년 八 月 월 初 七 日 일 에서 大 行 大 王 大 紀 嚴 靈 皮 移 奉 子 歡 慶 願 後 本 聞 口 傳 問 安 答 Bft린 極 18. 철종 8년 十 二 月 월 十 七 日 일 에서 ;. 文 仁 光 聖 隆 禮 正 烈 宣 徵 英 德 ** 敵 春 成 弘 定 純 元 王 尼 昇 週 子 昌 德 宮 之 養 心 開 移 續 子 歡 慶 嚴 以 是 年 十 二 月 여 申 期 十 七 19 철종 14 년 十 二 月 월 初 八 日 일 에서 ; 大 王 大 紀 嚴 以 承 傳 色 口 傳 下 敎 B 9좁 願 以 歡 慶 觀 寫 之 20. 헌종 15 년 六 月 월 初 六 日 일 에서. 大 王 大 떠 嚴 以 承 傳 色 口 傳 下 敎 日 續 嚴 以 歡 慶 嚴 薦 之 따ι

132 환경전 실록 광해 25 권, 2년 (1610 경술 / 명 만력( 萬 歷 ) 38 년 ) 2월 13 일(기미) 7번째기사 영건청의 혁파 문제에 대해 불가함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근래 영건청을 혁파하자는 일로 삼사가 논열하는데 그 말이 매우 옳다, 그래서 나는 매번 감탄하였다. 나도 사람의 도리를 조금은 아는데 이처럼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바닥나 나 라일이 극히 어려운 때에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한 일인 줄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신책방( 新 冊 房 )을 기어이 지으려 하는 것은 하릴없이 놀고 잔치하는 곳을 만들려는 것 이 아 니 고 의도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세 대 궐이 있기 때문에 안에서 비록 일이 있더라도 편리에 따라 옮겨 거처했었다. 지금은 자전께서 마땅히 창경궁에 사셔야 하고 창덕궁은 전우( 嚴 宇 )를 비록 그전 제도대로 회복하였으나 중랑( 重 願 )과 복각( 複 聞 )이 답답하고 음침해서 한 곳도 환하게 소통된 곳이 없 으며, 침전( 寢 嚴 )은 궁인들이 드는 곳과 멀지 않아서 잡다하게 떠드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 나는 본 래 심병이 있어서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가장 싫어하므로 거처는 반드시 소통되고 확트인 곳이어야 한다, 건강이 좋고 병이 없을 때라면 비록 침전에 거처하더 라도 흑 견 디어 낼 수 있겠지만 마음과 몸 이 편치 못할 때에 다시 한가하고 조용하게 병을 요양할 곳이 없기 때 문에 신책방을 그 옛터에 따라서 짓게 하였고, 그 규모를 조금 더 넓게 한 것 은 병을 조섭하는 별당으로 삼고자 해서이다. 전갈방( 全 喝 房 ) 내간( 內 間 )에 혹 질병이 있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갈 곳이 없고 옛 수라간 ( 水 刺 間 )은 전부터 부장( 部 將 )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지에서 수직하는 곳이며 그 공역도 대 단하지 않다 그리고 동궁의 독서당( 讀 書 堂 )은 그전 규모가 너무 좁고 또 서연청( 書 鐘 廳 ) 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 개조해야 한다. 사세가 이렇기 때문에 하려 는 것이지 실지 쓸 데 없고 관계없는 공사를 하기 좋아서 하려는 것이 아니니 정지하기는 좀 어 려울 듯하다. 환경전( 歡 慶 願 )과 영화당( 曉 花 호)의 일은 아울러 짓지 말고 공의를 따르도록 하라. [이 궁전들을 뒤에 다 지었다. 또 별전( 別 嚴 ) 두세 곳을 더 지어 널리 기이한 꽃과 이상한 나무와 괴이한 돌을 모아 정원을 가득 채웠고, 꽃과 돌 사이에 이따금 작은 정자를 지어 유람하는 곳을 갖추어 놓는 등, 그 기교함과 사치스러움이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것 들이었다. 환경전 상량문 권수제 略 魔 集 판심제 略 I흙 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年 刊 권책 原 集 12 권, 附 錄 합 4 책 행자 10 행 19 자 규격 (cm) 어미 上 下 雜 魚 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

133 환경전 소장도서 번호 奎 4741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87 代 以 三 뀔 七 魔 t:jt 영앙 微 前 星 當 少 陽 之 位 上 陳 下 宇 取 大 밤 東 宮 近 至 尊 之 居 舊 制 重 新 嘉 名 再 揚 뽕 堆 王 世 子 邱 下 資 全 仁 孝 德 싹 元 良 博 l훔 高 明 敎 輯 熙 於 問 學 릎훔 溫 淸 盡 'I쯤 泰 於 情 文 屬 鉉 問 寢 之 憂 動 每 念 權 移 之 폐 隨 臨 徒 OE, 했 堂 階 不 嚴 雖 뽕윷 士 階 在 古 聖 而 可 法 而 樓 뺨쏠 擊 亦 前 人 之 成 規 況 斯 學 之 易 寫 Jt 흉 lj 始 而 願 省 敵 彼 移 此 不 欲 徵 麻 而 勞 民 蓋 Ii 級 觀 堆 是 幕 I 而 鍵 投 뺨 雷 置 韓 開 률t 極 於 뚫 塊 明 뽑 建 宮 翊 八 柱 於 乾 紀 如 有 鬼 物 之 來 相 不 日 而 成 途 致 士 府 之 聲 觀 힘 完 而 美 左 職 右 平 之 互 設 龍 樓 轉 禁 之 相 連 H 尼 待 講 뚫 承 玉 音 之 짧 耳 월 R옵 文 石 覺 天 香 之 罷 衣 } 或 謂 居 養 之 {I)(: 寧 횡l 공{ 多 摩 之 徒 事 詩 書 禮 樂 不 廢 春 쪽 保 傳 홈 師 常 在 左 右 華 扁 歡 慶 想 見 至 樂 之 廳 關 熊 寢 淸 閔 可 러 用 功 之 造 隨 뼈[ 效 張 老 之 善 頭 仍 助 뭄~!K 之 歡 諸 꺼객짧 東 曉 色 睡 R 龍 瑞 旭 紅 內 賢 出 門 傳 吉 語 滿 堂 和 氣 扁 春 風 체끄 j 梁 西 흉 靈 初 龍 禁 樹 低 賴 有 金 il 權 繼 룡 讀 殘 黃 卷 夜 還 據 체격 標 南 向 B 免 薰 風 據 짧 凰 別 顧 寂 청 淸 훌 永 玩 心 經 링 ii 好 第 探 짜깅 探 北 維 斗 昭 明 終 不 않 試 將 一 理 驗 뼈 中 f 府 띠 乾 坤 贊 衛 L 德 地 짧 上 朝 흉 雲 煙 各 珠 狀 待 得 天 H춤 氣 醫 消 때 看 日 月 何 淸 購 체끄 樣 下 뭘 靜 街 頭 辦 農 夜 城 郭 連 雲 井 落 開 生 靈 按 複 需 王 化 代 願 上 標 之 後 年 뿔 人 樂 海 윷 河 淸 當 新 構 之 告 成 四 月 維 夏 效 華 封 之 歡 祝 千 歲 寫 春 重 門 洞 開 爭 喜 太 平 之 有 象 法 宮 載 嚴 f수 看 洪 祚 之 無 讀 머좁 魔 集 卷 之 九 인

134 공묵합 홍재전서 제 14 권 기( 記 ) 공묵합기( 悲 默 開 記 ) 계묘년 내가 즉위한 지 7 년 후인 계묘년 가을에 유사( 有 司 )가 하는 말이, 두 궐( 關 )을 너무 오래 수 리하지 않아 무너지고 낡은 곳이 많으므로 수리해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수리도 물론 해야겠지만 지금은 거듭된 흉년으로 백성들이 먹고살기가 어려우므로 재정 절약이 더 급선무이지 역사를 할 때가 아니다. 아직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유사는, 지금 수리하 지 않으면 나중에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고 했지만 내가 다시 이르기를, 비록 그렇더라 도 우선 내 마음이 편치 못한 일이니 천천히 하기로 하고, 다만 진전( 員 願 )의 지붕 새는 곳 은 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역사가 끝난 후 신하들을 이끌고 전우( 嚴 宇 )를 둘러보다가 공묵합( 悲 默 聞 )에 와서 보니, 이곳은 바로 경춘전( 景 春 願 ) 동쪽에 위치한 합( 開 )으로서 정축 년 (1757, 영조 33) 우리 선대왕께서 거려( 居 盧 )하실 때 신하틀을 접견하던 곳이었다. 기와는 깨지고 서까래는 부러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어서 내가 보고는 탄식하며, 다른 곳은 다 그만두더라도 이 집만은 수리해야겠다. 선대왕께서 오래 계시던 곳인데 손질하지 않고 그대 로 두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했더니 수행 신하들도 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유사를 불러 명하기 를, 농사가 아무리 다급해도 이 합의 수리만은 늦 추어서는 안 되겠으니 빨리 서둘러 일을 착수하도록 하라. 그러나 너무 광범위하게도 너무 사치스럽게도 말고 그저 쓰러지지만 않도록 하여 선대왕을 추모하고 백성을 돌보는 나의 마 음이 함께 나타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합의 서까래를 갈고 기와를 다시 인 다 음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여 선대왕이 쓰신 합지( 聞 識 ) 왼편에 걸어 두기로 한 것이다. 이어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께서는 역대 어느 왕보다도 검소하셔서 사사로이 거처하시는 곳 이건 신하를 접견하는 자리이건 꾸미지 않아 당우( 居 盧 ) 시절의 검소한 거처라 해도 그 이 상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의 신서(닮 府 )들이 지금까지도 그것을 일걷고 있다. 이 소자( 小 子 )는 만분의 일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역시 천성이 번화한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요즘 신료(토 燈 )들을 대할 때 반드시 사사로이 거처하는 작은 실내에서 하고, 그 실 내에다는 전석( 前 席 ) 하나를 깔아 두었을 뿐인데, 그것은 억지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평소 습관이 그렇기 때문이다. 기묘년 (1759, 영조 35) 에 세손( 世 係 )으로 책봉된 이후로는 항상 그 합에 거처하였는데, 합 북쪽에 위치한 작은 협실 반 칸이 바로 내가 독서하던 곳이었다. 그 협실에 들어가 독서하다 보면 흑 밤을 새기도 했는데, 선대왕께서 언젠가 소자에게 하교하 시기를, 네 학문이 자리를 잡았느냐? 네가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고 오직 독서만을 좋아하 니, 그 정도로 담박( 擔 빔)하면 되었다 하시기에 스스로 이름 붙이기를 담연( 灌 然 ) 이라고 하고 그후 궁빈( 宮 홈)에게 담연 와기( 擔 然 萬 記 ) 를 쓰도록 하여 걸어 두었는데, 그것은 그러 한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집을 보니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벌써 몇십 년 전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옛날을 생각하노라면 마음이 서글퍼져 다시 이렇게 써서 나의 감모 ( 感 흙)의 뜻을 나타내기로 한 것이다. 이해 7 월 하순에 절을 올리고 삼가 기록하다 띠씨

135 徒 O 製 옆 默 聞 記 어제공묵합기 서명 倒 製 옆 熱 關 記 표 祖 ( 朝 解 ) 操 ; 徐 有 憐 ( 朝 蘇 ) 奉 敎 書 책권수 1 貼 (2 折 4 面 ) 사이즈, lcm 판본사항 뻐 本 年 ( 正 祖 7) 표 祖 가 泰 熱 聞 을 重 修 하고 쓴 것으로 徐 有 憐 이 奉 敎 書 하여 陰 刻 印 메한 3 福 半 을 作 뼈한 글, 奎 9981 徒 n 製 悲 默 開 記 倒 製 켰 默 間 記 予 염 PW!= 之 七 年 쫓때 秋 有 司 言 日 兩 關 久 不 修 類 웹 者 多 請 修 之 予 B 修 之 固 可 顧 今 휴 軟 民 難 食 急 於 節 財 投 則 非 其 時 m 其 止 之 有 司 B 今 不 修 後 且 費 距 予 日 雖 然 非 予 心 所 敢 安 站 徐 Z 但 就 員 嚴 覆 播 鍵 偏 處 흡 理 之 投 많 完 引 諸 R 周 視 嚴 宇 至 悲 默 閒 聞 在 景 春 願 之 東 郞 我 先 大 王 T 표 居 盧 時 품 接 之 所 也 凡 짧 緣 握 將 且 順 ±[. 予 顧 而 憶 日 他 可 以 不 修 此 而 不 修 可 乎 先 大 王 之 所 久 倒 而 不 克 堂 構 竟 至 類 廢 뿔 亦 予 心 之 所 敢 安 歲 諸 RI 或 日 然 予 乃 進 有 司 而 命 之 日 民 事 雖 急 此 聞 之 投 亦 不 可 鍵 也 宜 웰 靈 之 雖 然 投 不 宜 廣 不 宜 { 多 第 修 其 握 앓 者 個 無 底 順 ±[. 而 止 使 予 追 先 빼 民 之 心 - 學 而 拉 行 可 也 於 是 易 其 緣 改 其 IL 途 記 其 事 獨 子 先 大 王 倒 製 聞 識 Z 左 仍 tk 堆 我 先 大 王 檢 德 高 出 百 王 凡 웰 處 쯤 接 之 所 不 加 修 節 居 盧 之 操 補 素 題 無 以 尙 폭등- 國 닮 R한 至 今 調 之 予 小 子 無 能 述 其 萬 - 而 性 顧 不 喜 緊 華 故 近 日 폼 接 Rf: 登 亦 必 於 熊 寢 小 室 室 中 컸 置 - 前 席 非 옳혔 也 素 習 者 然 耳 덤 己 째 冊 世 孫 以 後 l면 居 此 聞 而 聞 北 小 俠 室 半 間 흉 n 予 讀 書 之 所 也 入 此 室 讀 書 或 至 竟 夜 先 大 王 홈 敎 小 子 若 B 爾 學 入 定 乎 爾 於 物 無 所 好 所 好 堆 書 擔 펴 如 此 可 自 號 日 擔 然 其 後 要 宮 좁 擺 擔 然 鷹 記 揚 之 蓋 因 有 是 敎 也 今 見 此 室 歷 歷 如 昨 而 居 然 數 十 年 間 事 也 杓 念 隱 音 心 馬 용 傷 途 復 奎 連 를흘 之 以 識 予 感 寒 之 意 긍 爾 是 年 七 月 下 句 拜 手 護 記 資 憲 大 夫 戶 費 判 書 暴 知 春 秋 館 事 同 知 經 뚫 事 藝 文 館 提 學 텀E 徐 有 憐 奉 敎 뿔 m 끄

136 함안각 실록) 1 영조 35 년 기묘( 1759) 2월 12 일 (계해) 함안각에 나가 예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인 견하고 원손의 책봉에 대해 말하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聞 )에 나아가 예조 판서와 병조 판서 및 이조( 更 費 )의 행공 당상( 行 公 堂 上 )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 元 孫 )은 벌써 책봉( 冊 封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지 금까지 지회( 選 回 )시킨 것은 왕년( 往 年 )을 추사( 追 思 )한 것인데, 만약 3년을 지난다면 어디 에 아뢰야 하겠는가? 오늘은 심정을 억제하고 진전( 員 願 )과 효소전( 孝 昭 嚴 )에 아뢰어 원-- 2 영조 35 년 기묘 (1759) 2월 14 일 (을축) 함안각에 나가 강서원 입직 관원을 인견하고 원손의 강학에 힘쓰기를 하교하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聞 )에 나아가 강서원( 講 書 院 )에 입직( 入 直 )한 관원( 官 員 )을 불러보고 하교 하기를, 비록 범인( 凡 人 )이라 하더라도 그 자손( 子 孫 )을 위하여 그 교도( 敎 導 )를 부탁한다면 일을 마땅히 성심( 誠 心 )으로 가르쳐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인군( 人 君 )의 부탁하는 바이겠느 냐? 삼종( 三 宗 )의 혈맥( 血 服 )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너희들은 착실히 선도( 善 導 )토록. 3 영조 35 년 기묘0 759) 2월 25 일 (병자) 함안각에 나가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聞 )에 나아가 하직( 下 直 )하는 수령( 守 令 )을 불러 보았다. [ 원전 ] 4 면 [ 분류 l *왕실-국왕( 國 王 ) 44 집 4 영조 35 년 기묘 (1759) 3 월 14 일 (갑오) 함인정에 나가 대신을 소견하고 평안 감사 민백상의 장계를 처리하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閒 )에 나아가 대신( 大 몸)을 불러 보았다. 승지에게 평안 감사 민백상( 閔 百 함)의 장계( 狀 양)를 읽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선천부( 宣 川 府 )에서 보고한 바 점마( 點 馬 )의 폐단이 이와 같으니 태복시( 太 廣 츄)로 하여금 10 년을 한정하여 점마를 하지 말 라. 옛사람이 말의 수를 세어 대답했으니, 마정( 馬 政 )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 비록 기한 5 영조 35 년 기묘 (1759) 4 월 4 일 (갑인) 함안각에서 예조 판서가 입시하자 효소전 부 묘의 윤음을 내리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開 )에 나아가니 대신과 예조 판서가 입시( 入 待 )하였다. 임금이 효소전( 孝 昭 嚴 )을 부묘( 附 顧 )하는 윤음( 編 音 )을 내리기를, 묘 (I 朝 )에 부( 附 )하는 예( 禮 )를 고례( 古 禮 )에 서 자세히 상고하니 성묘( 成 關 ) 이전에 정묘( 定 關 ) 광묘( 光 顧 ) 양조( 兩 朝 )에서는 모두 납향 (ij없 享 )으로 인하여 달을 넘겨서 행하였고 성묘 이후에는 모두 담월( 障 月 )에 행하였,

137 6 영조 35 년 기묘 (1 759) 4 월 14 일 (갑자) 함안각에 나가 유신을 불러 심경 을 강하 고 속자성편 의 서문을 짓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聞 )에 나아가 새벽에 입직( 入 直 )한 유신({ 需 면)을 불러들여 심경( 心 經 ) 을 강하고 장차 속자성편( 續 담 省 編 ) 을 제술( 製 述 )하려 하여 먼저 서문( 序 文 )을 지었다. [ 원전 44 집 8 면 [ 분류 ] *왕실-경연( 經 鐘 ) 7 영조 35 년 기묘 (1759) 4 월 28 일 (무인) 함안각에서 내린 부묘 때 주악을 사용치 말 라는하교 임금이 함안각( 威 安 聞 )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정( 情 )은 비록 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 ( 禮 )는 절도가 있는 것이다. 고례( 古 禮 )에는 부묘( 耐 願 )하고 회가( 回 罵 )할 때에 가요( 歌 證 )를 채택( 採 擇 )하는 일이 있었으나, 우리 성조( 聖 祖 )께서는 이를 제( 除 )하셨고 전후부( 前 後 部 )의 고취( 鼓 吹 )를 우리 성고( 聖 考 )께서 또 진열( 陳 列 )만 하고 주악( 奏 樂 )은 하지 말--- 8 영조 35 년 기묘 (1 759) 5월 2 일 (신사) 함안각에서 도감 당상을 보고 이익보를 군직 에 붙여 도감을 관장토록 하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聞 )에 나아가 도감 당상( 都 藍 堂 上 )을 불러 보았는데, 돈장( 敎!ft) 의 중요 한 일을 생무지[ 生 手 ]에게 붙이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여겨 이익보( 李 益 輔 )를 특별히 서용 하여 군직( 軍 職 )에 붙이고 이어 도감( 都 藍 )을 관장하라고 명하였다. [ 원전 ] 44 집 9 면 분류 ] *인사-관리 ( 管 理 ) / *공업 -관청 수공( 官 廳 手 工 ) 9 영조 35 년 기묘 (1759) 5월 6 일 (을유) 함안각에서 도감의 당상 이하, 친제 집사에게 상을 내리다 임금이 함안각( 成 安 聞 )에 나아가 도감( 都 藍 )의 당상( 堂 上 ) 이하 및 친제( 親 察 ) 때의 집사( 執 事 )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리도록 명하였다. [ 원전 1 44 집 10 면 분류 *왕실-의식( 嚴 式 ) / *인사-관리( 管 理 ) 허

138 연희당 국조보감 제 74 권 정조 1 9 년(을묘, 1795) 혜경궁( 惠 慶 宮 )에게 휘목( 徵 種 ) 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때에 고사( 警 師 ) 와 여령( 女 冷 )을 생략하도록 명하였는데, 자궁의 뜻을 체념( 體 念 )한 것이었다. 명정전에 나 아가 자궁의 회갑을 진하하는 치사( 致 詞 ) 전문( 塞 文 ) 표리( 表 훌)를 올리고, 신하들의 하례 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문관 시종, 무관 장수, 음관 준직( 準 職 ) 이상으로서 61 세가 된 사람의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0 상이 자전과 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나아갔는데, 이때 중전도 함께 나아갔다. 작헌례( 配 敵 禮 )를 행하였으니 이날이 장헌세자의 회갑날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매번 월근문( 月 觀 門 )을 통하여 한 달에 한 차례 전배하였는데, 이해에는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여 오향( 五 享 ) 및 속 절( 倚 節 )과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를 모두 직접 행하였으며, 간흑 며칠 동안 재전( 驚 顧 )에 머 물기도 하였으니, 1 년 동안 전배한 것이 모두 50 여 차례였다. 0 윤 2월 상이 장차 자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려 하였다. 태복시( 太 樓 풍) 가 자궁의 가 교( 罵 轉 )를 만들었는데, 편전( 便 嚴 )의 앞뜰로 가져오도록 명하여 수레의 덮개, 발, 휘장 등을 하나하나 직접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또 직접 가마 안으로 들어가서 간살이 넓은지, 구조가 편리한지를 시험해보았다. 0 혜경궁의 탄일에 안에서 직접 치사( 致 詞 ) 전문( 塞 文 ) 표리( 表 훌)를 올리고, 또 연희당 ( 延 禮 堂 )에서 음식상을 올혔다. 직접 노래의( 老 菜 衣 ) 5 장( 章 )과 만년( 萬 年 ) 5장을 지어 전후 로 노래부르는 악장을 삼았으며, 술잔을 올리고 예를 행할 때마다 원자가 나아가 발 안으로 들어가서 술잔을 올리고 곧바로 배위( 拜 位 )로 가서 예를 행하였다. 조관( 朝 官 )으로서 61 세가 된 사람을 대궐 뜰에서 선온( 宣 盟 )하였다 국조보감 제 77 권 순조 9 년(기사, 1809) 0 2월 이에 앞서 상이 연석에 임하여 하교하기를, 이해는 혜경궁께서 관례( 冠 禮 )를 치른 지 회갑년이 되는 해이다. 의당 휘호( 徵 號 )를 천양하 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지만, 겸양하시는 자궁의 덕을 우러러 체념하여 단지 음식상만 올리 려 한다. 하니, 대신 김재찬이 아뢰기를, 자궁께서는 겸양을 덕으로 여기시고 전하께서는 뜻을 받드는 것을 효로 여기시니, 이 일은 실로 역사책에 빛날 것 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경춘전( 景 春 嚴 )에 나아가 혜경궁에게 음식상을 올렸는데, 정묘( 正 願 ) 을묘년 연희당( 延 禮 堂 ) 에서 음식상을 올리던 때의 의식을 따랐으니, 이로써 지난날의 효성 을 봄받고자 함이었다 야ι

139 연희당 흉재전서 쳐1182권 군서표기(훌.홉 記 ) 4 0 어정(휩 定 ) 4 갱재촉( 廣 훨혐) 48권 자궁추갑탄신갱재촉(훌 宮 周 甲 뚫 辰 廣 월 輪 ) 간본 을묘년 6 월 1 8 일은 자궁( 慧 宮 )의 주갑이 되는 생신 날 이다, 내가 명정전( 明 政 嚴 )에 가서 몸 소 치사( 致 詞 )와 전문( 塞 文 )과 표리( 表 훌)를 드 리 고 연희당( 延 禮 堂 )으로 돌아와 술잔을 올려 헌수( 敵 壽 )하였다. 자궁의 동성( 同 姓 ) 10촌 이내의 친척과 이성( 異 姓 ) 6촌 이내가 모두 참여 하였다. 교태문( 交 泰 門 ) 내외에서 문무( 文 武 ) 제신( 諸 많) 에게 음식을 내려 주었고, 전문을 올 린 유생들에게도 명륜당( 明 倫 堂 )의 앞마당에서 음식을 내렸다. 그 리고 아래로 여러 군영( 軍 營 ) 의 교졸( 校 후)과 여러 관청의 아전과 하례( 下 慧 )에 이 르기 까지 모두들 떡과 과일을 나누 어 주었다. 정오(표 午 )에는 다시 주찬(훌 購 )을 올렸다. 나는 진찬( 進 購 )은 진연( 進 훌)과 다르 고 주찬은 또 진찬과 다른 것 이라고 생각되어 장용영(봐 勇 營 )에 지시하여 소리가 여린 관현 악( 管 鉉 樂 )을 연주하게 하고 이어서 오언 율 시(죠 言 律 詩 ) 한 수를 지어 삼가 경사를 기록해 두는 성의를 표하였다 이 시에 갱재한 이 는 외빈( 外 좁 )이 12 8 명, 제신( 諸 톰) 이 178 명이다. 警 修 堂 全 華 冊 二 十 二 東 陽 申 繹 漢 탤 山 房 紀 恩 集 三 甲 午 (1834) 九 月 至 十 - 月 東 關 顧 願 書 寫 人 領 賞 日 悲 紀 - 詩 a_291_496c 以 營 建 都 몽ii'21J 單 f 專 B 大 造 願 戀 板 書 寫 官 大 護 軍 李 翊 會 熙 政 堂 應 板 書 寫 官 前 判 書 金 追 根 1흘 光 樓 戀 板 書 寫 官 領 議 政 沈 象 奎 景 薰 聞 戀 板 書 寫 官 暴 戶 뽑 判 書 趙 萬 永 玉 華 堂 戀 板 書 寫 官 I 或 鏡 藍 同 曺 鳳 振 隆 慶 훨f 戀 板 書 寫 官 水 原 留 守 李 光 文 興 福 홍f뺀; 板 書 寫 官 大 護 軍 徐 略 輔 養 {; 開 戀 板 書 寫 官 永 明 텀 洪 顯 周 通 明 嚴 戀 板 書 寫 官 右 議 政 朴 宗 薰 景 春 願 戀 板 書 寫 官 廣 州 留 守 金 屬 載 養 和 堂 應 板 書 寫 官 大 護 軍 朴 周 壽 歡 慶 願 應 板 書 寫 官 行 都 承 릅 申 繹 뼈 仁 훔 戀 板 書 寫 官 奉 朝 賢 金 屬 陽 迎 春 후f 應 板 書 寫 官 奉 朝 賢 南 公 敵 延 禮 堂 應 板 書 寫 官 前 藍 司 權 數 仁 各 內 下 大 塵 皮 - 令 陽 給 同 日 傳 日 營 建 都 藍 提 調 趙 萬 永 田 十 죠 結 ~j뿔 田 四 口 陽 給 楊 前 定 尊 東 關 重 新 有 此 年 規 模 險 質 不 歸 前 f 扁 紅 聖 世 收 醫 春 得 與 諸 公 酒 輪 聯 禁 扁 月 좁 金 훨 煥 lle 須 훌찮고흉경깅 毛 宣 偶 徵 T - 元 權 佳 話 詞 家 異 日 傳 숭 見 石 庫 尙 書 敵 言 今 짧 賞 典 숭 比 諸 公 應 消 得 十 領 塵 皮 E 崔 日 何 以 故 숭 B 記 륨 先 朝 宰 ~ 有 權 陰 官 有 T 一 元 者 合 T 姓 名 三 字 當 不 得 權 - 姓 字 之 半 時 人 爛 調 以 寫 口 實 今 諸 公 扁 書 諸 嚴 聞 比 송 書 歡 慶 二 字 緊 簡 相 戀 而 例 受 - 領 皮 不 幾 近 於 權 丁 之 請 耶 石 崔 大 笑 日 송 則 以 따 牌 失 塵 皮 向 *꺼 薦 此 言 也 蓋 賞 典 之 法 一 人 雖 尊 數 事 無 得 활 受 故 石 崔 之 言 如 此 동 잉 ω

140 실륙) 숙종 26 년 경진 (170( 강희 39)8 월 14 일 (갑술) 밤에 갑자기 미령한 증후가 있어 치료 받다 밤 이경( 二 更 )에 임금이 갑자기 미령( 未 寧 )한 증후가 있어 약방( 藥 房 )에서 연희당( 延 禮 堂 )의 와내(없 內 )에 입진( 入 該 )하였다, 정초 19년 을요 (1795,건를 6이 6월 18일 (정유) 명정전에 거둥하여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전하고 내전에 가서 예를 행하다 명정전에 거둥하여 치사( 致 解 )와 전문( 塞 文 )과 표리( 表 훌)를 친히 전해주고, 내전( 內 嚴 )에 가 서 직접 올리는 예( 禮 )를 행한 뒤 자궁( 慧 宮 )에게 음식상을 차려 올렸다. 하루 전에 상침( 尙 寢 )이 내전에 자리를 설치하였다 자궁의 자리는 남쪽을 향해 설치하고, 대전( 大 嚴 )의 자리는 자궁 자리의 동쪽에 서쪽을 향해 설치하고 중궁전( 中 宮 嚴 )의 자리는 자궁 자리의 서쪽에 동쪽을 향해서 설치하였다 내명부( 內 命 歸 )와 외명부( 外 命 歸 )의 시위( 待 位 )는 자궁 자리의 남쪽에 서쪽 가까이 설치하되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고, 또 의빈( 慶 좁)과 척신( 底 몸)의 시위는 앞 기퉁의 발[ 嚴 ] 바깥에 좌우로 설치하되 북쪽을 위로 하여 서로 향 하게 하였다 외정( 外 底 )의 신하들에게 음식을 차려주도록 명하였다 2품( 品 ) 이상 및 삼사( 三 司 )는 명정 전( 明 政 嚴 ) 동쪽 곁채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시종( 待 從 )인 당상관과 당하관은 명정전 북쪽 곁채에서 대접하고, 문신 당상관과 당하관으로서 시임( 時 任 )과 전임( 前 任 )들 모두에게는 광 정문( 光 政 門 ) 안에서 대접하고, 당상관 이하의 문관 음관(흡 官 ) -무관 및 잡직( 雜 職 )으로서 을 묘년에 출생한 자들에게는 영청문( 永 淸 門 ) 안에서 대접하고, 무신 중 변어( 邊 쩔) 이하 및 당 상관과 당하관으로서 시임과 전임들 모두에게는 명정문 바깥 길 북쪽에서 대접하고, 잡직으 로 시임과 전임들에게는 금청교( 禁 淸 橋 ) 가에서 대접하고, 각신( 聞 톰)-승지 사관은 연희당( 延 禮 堂 ) 문 밖에서 대접하면서 초계 문신( 妙 땅 文 2 ) 도 그 자리에 끼게 하고, 가승지( 假 承 듭)는 교태문( 交 泰 門 ) 밖에서 대접하고 전문( 養 文 )을 올린 유생(( 需 生 )에 대해서는 대사성으로 하 여금 명륜당( 明 倫 堂 ) 앞 뜰에서 감독하여 먹이게 하고, 장용영(밤 勇 營 )의 장관( 將 官 ) 원역( 員 投 ) 침 약( 誠 藥 )-화사( 畵 師 ) 궁인(런 人 ) 시 인( 失 )\ )- 호위 별장(를 衛 別 將 ) 국 별장( 局 別 將 ) 금군장 ( 禁 軍 將 ) 화성 장교( 華 城 將 校 ) 각 군문( 軍 門 )의 장관 친경 전( 親 執 田 ) 노인 금군( 禁 軍 )과 국 출 신( 局 出 身 )으로서 어가( 倒 罵 )의 앞과 뒤를 호위하는 군관 문을 지키는 갑사( 甲 土 ) 한려위( 漢 旅 衛 )와 충익위( 忠 翊 衛 )와 충찬위( 忠 贊 衛 )와 충장위( 忠 뾰 衛 )의 유청 군관( 有 廳 軍 官 ) 무예정 ( 武 藝 廳 )의 각문을 입직( 入 直 )하는 파총( 把 f 恩 ) 초관(뺑 官 ) 군졸 등에 대해서는 각기 책임자가 인솔하고 궐내에서 나눠 먹이게 하고, 각사( 各 司 )의 이예( 更 鐘 )에 대해서는 장용영에서 각각 떡을 먹이게 하였다. 국조보감 제 74 권 μ 야

141 정조조 6 19 년(을묘, 1795) 0 1 월. 60 세 이상 된 대신과 경재(맺O 宰 )에게 특별히 세찬( 歲 購 )을 하사하라고 낭관을 보내 어 안부를 물었는데, 자궁이 회갑을 맞는 경사스러운 해이기 때문이었다. 0 혜경궁의 탄일에 안에서 직접 치사( 致 詞 ) 전문(쫓 文 ) 표리( 表 훌)를 올리고, 또 연희당 ( 延 禮 堂 )에서 음식상을 올혔다. 직접 노래의( 老 泰 衣 ) 5 장( 章 )과 만년( 萬 年 ) 5 장을 지어 전후 로 노래부르는 악장을 삼았으며 술잔을 올리고 예를 행할 때마다 원자가 나아가 발 안으로 들어가서 술잔을 올리고 곧바로 배위( 拜 位 )로 가서 예를 행하였다. 조관( 朝 官 )으로서 61 세가 된 사람을 대궐 뜰에서 선온( 宣 臨 )하였다. ***O 연희당( 延 禮 堂 ; 창경궁 안에 있음)은 을묘년 혜경궁( 惠 慶 宮 ) 환갑 진찬( 進 購 ) 때에 52 칸. %

142 연경당 영조 6 년 4 월 11 일 (기유) 원본 704 책/탈초본 38 책 (28/38) X 以 修 理 所 言 혐 日, 今 此 修 理 時, 建 極 堂 寶 慶 堂 振 舊 土 之 投, 今 幾 重 畢, 演 新 土 土 뿔 等 事, 次 第 始 投, 延 l 熺 堂 演 慶 堂 集 福 휩 蘭 香 聞 桂 月 聞 짧 輝 野 搖 華 堂 等 處 房 뿔 廳 板, 盡 數 澈 웰, 拉 與 階 底 舊 土, 盡 寫 握 去, 今 方 運 致 新 土, 次 第 樓 充, 修 續 等 事, 亦 薦 始 投, 而 大 造 觀 後 面 廳 板 下 及 簽 階 下 舊 土, 亦 方 握 去, 連 日 運 出 之 意, 敢 양 傳 B, 知 道

143 통화전 ]λ내료츠 E 영조 52 년 1776 년 3 월 19 일(경 인) 延 福 願 以 孝 純 願 舊 친명 嚴 命 f훨 定 敎 日 延 福 散 以 昌 慶 宮 延 禮 門 內 孝 純 願 舊 塊 嚴 寫 定 승정원일기) 고종 15 년 무인 (1878, 광서 4) 8월 17 일 (갑오) 여차에서 봉심하고 온 대신 이하를 소견할 때 동부승지 박정양 등이 입시하여 신백을 매안 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0 신시( 申 時 ), 상이 여차( 盧 次 )에 나아갔다. 봉심하고 온 대신 이하가 입시할 때, 동부승지 박정양, 가주서 이희봉, 기사관 차유성, 별겸춘추 홍승헌, 영중추부사 이유원, 영돈녕부사 김병학( 金 炳 學 ), 판중추부사 홍순목( 洪 淳 種 ) 영의정 이최응( 李 最 應 ), 판중추부사 김병국( 金 炳 國 ), 관상감 제 조 김수현( 金 壽 鉉 ), 예조 참의 임변호( 任 옳 鎬 )가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동조( 東 朝 )께서 하교하시기를, 우제를 지낸 뒤에 신백( 神 뿜)을 혼전( 塊 嚴 ) 근처에 매안( 理 安 )해야겠으나, 전에 궁궐의 담을 수축할 때 신백함( 神 멈 困 )이 담 근처에 노출되었기에 비록 내관을 시켜 즉시 불에 태우기는 하였지만 지면과 가까워서 정결하지 못하여 지극히 미안하 였다. 이 뒤로는 능소( 陸 所 )에 매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계해년에는 미처 하교하지 못했 는데 지금 비로소 하교한다. 하셨다.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예법은 일분( 一 分 )을 보댈 수도 감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열성조( 列 聖 朝 )에서 흔히 수교 ( 受 敎 )를 내려 상례보편 의 소주( 小 註 )를 증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만약 특별하신 하교가 있다면 당연히 준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능소에 봉안하는 것이 더 정결할 것 같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예( 禮 )란 천자에서부터 서인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사가( 私 家 )에서 우제를 지낸 뒤 흔백 을 묘정(훌 處 )에 묻는 것을 예가( 禮 家 )에서는 허용하고 있지 않지만 더러 이를 허용하는 경 우도 있습 니 다. 국조( 國 朝 )의 전례( 典 禮 )에서 신백을 혼전의 북쪽 뜰에 묻는 것은 예로 보아 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만 우제를 지낸 뒤에 능소에 매안하는 것도 또한 매우 정결하겠습 니다. 그러니 신에게 무슨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예의 쓰임은 귀천이 따로없이 마찬가지입니다. 사가의 경우를 말하면, 혼백을 사당의 양계 ( 兩 階 )에 매안하는 것이 예 본래의 뜻이 담겨 있는 바이기는 하지만, 외진 곳의 정결함을 취하여 묘정에 묻는 경우도 역시 많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가에도 역시 이 런 예( 例 )가 있는가? n ω

144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백을 능소에 매안하는 것이 비록 새로운 예( 禮 )이기는 하지만 만약 하교가 있다면 받들 어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우제의 축문과 고유( 告 由 )를 겸하여 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축문을 지을 때 고유문도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 이 이르기를, 혼전을 흔히 통화전( 通 和 願 )으로 했는데, 아마도 내독림청( 內 哭 臨 廳 )에 가깝고 편리해서 그 랬을 것이다. 그런데 정사년에는 문정전( 文 政 願 )으로 했었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동조( 東 朝 )께서 신백함이 드러난 것을 직접 보시고는 순원왕후( 純 元 王 尼 )에게 여쭈어서 불 에 태우기까지 한 것이 이제 벌써 30 여 년이 되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불에 태운 것은 과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고, 김병국 이 아뢰기를, 예법의 절차를 갑자기 바꾸어서 규례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신중하게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그러나 일찍이 매안한 신백이 더러운 곳에 드러나서 동조 전하께서 이를 친히 보 시고는 불에 태우셨으니 나중에 계상( 階 上 )이 불결해질 것은 가히 우러러 짐작할 수 있는 일입 니 다. 반우한 뒤에 능소에 매안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3 년이 지나면 혼전은 폐하여 사용하지 않으니 정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능소에 매안하면 3 년 이 지나더라도 영구히 정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만년토록 영원할 유궁(뼈 宮 )이니 선의 이치 또한 당연히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의절( 慶 節 )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전교가 있은 뒤에 해조에서 초기하여 거행할 수 있을 것인바, 예조 당상이 의당 배진( 暗 進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의장( 燒 tt) 또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며, 예조 당상이 성문 밖에서 배진하고 산릉도감의 당상 1 원이 중로( 中 路 )에 나가 기다려서 배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나가서 서로 참고해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미 우주( 廣 主 )를 받들어서 신( 神 )을 옮기었으니, 신백을 배진할 때에 채거(** 車 )나 향정 자( 香 후 子 )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

145 신백련( 神 뿜 輩 )은 사용해서는 안 될 듯하다. 하자, 이유원이 아뢰기를, 북도( 北 道 )의 본궁( 本 宮 )에 의대( 衣 樹 )와 향촉( 香 爛 )을 배진한 의절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 니, 예조 당상과 각신이 배진하여 기백( 離 伯 )에게 받들 어 전하고 기백이 양주 목사( 楊 州 收 俠 )에게 받들어 전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의장을 사용한다면 역시 오부(죠 部 )의 자내( 字 內 )에 서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의절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교를 의당 전왈( 傳 日 ) 이라고 써야 할 것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상례보편 의 수교분류( 受 敎 分 類 )에, 무릇 하교가 있는 곳에는 모두 전왈 이라고 썼습니 다. 하였다 상이 쓰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효휘전의 우제 뒤에 신백을 산릉에 매안하는 의절을 예조로 하여금 마련토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이어서 하교하기를, 비록 이와 같이 전교하였지만, 연석(옳 席 )의 이야기는 상세히 기록해야 할 것 같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사년에는 재우( 再 廣 )를 시흥( 始 興 )의 행궁( 行 宮 )에서 행하였는데 재우 뒤에 신백을 매안 했던 듯하고, 정사년에는 재우하고 반우한 뒤 행하였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릉에는 사잇길을 따라 다녀왔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사잇길은 30 리 길인데 가깝고 편리하기 때문에 이 길로 다녀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길이 어떻던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희릉( 禮 陸 )의 청룡(좁 龍 )을 넘어서 홍살문 밖을 지나게 되는데 거둥하는 길로는 할 수 없 겠습니다 하고, 이최응이 아뢰기를, 길이 논밭 사이를 지나고 주위에 총묘( 家 흉)가 많아서 큰길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조조( 純 祖 朝 )에 일찍이 하교가 있어서 동릉( 東 陸 )에 행행할 때 새벽녘에 떠났는데 저물기 전에 돌아왔다 그런데 서릉( 西 陸 )은 날이 밝기 전에 떠났는데도 환궁하면 언제나 밤이 깊 었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재를 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m

146 하자, 상이 이르기를 헌종조( 憲 宗 朝 ) 신축년의 거둥 때는 밤이 갚어서 환궁하였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때 신이 가주서로 배종했는데 과연 삼경 무럽이 되어서야 환궁했습니다 하고, 이최응이 아뢰기를, 모화현( 幕 華 뼈)과 녹번현(많 播 뼈)과 여현( 碼 뼈)이 모두 험준한 고개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셋밤에는 제법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연로의 농사 형편은 어떠한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밭곡식은 모두 소생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풍년이 들어야 예전의 흉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10년간은 풍년이 들어야 그런대로 복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실록 1 순조 16 년 병자 (1816) 3월 5 일 (을유) 통화전( 通 和 願 )으로 반우하였는데, 임금이 숭례문(몇 禮 門 )에서 경건히 맞이하였다. 2 순조 21 년 신사 (1821) 3월 14 일 (갑자) 혼전( 塊 嚴 )을 통화전( 通 和 願 )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3 순조 30 년 경인 (1830) 8월 2 일 (정해) 혼궁( 塊 宮 )을 통화전( 通 和 願 )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4 순조 30년 경인 (1830) 8월 4 일 (기축) 창경궁( 昌 慶 宮 )의 통화전( 通 和 嚴 )에서 반우( 退 盧 )를 행하였다. 일성록 순조 16 년 (1816) 3월 5 일 강 退 盧 手 通 和 嚴 목 時 至 內 待 棒 廣 主 置 安 於 훌 神 멈 困 置 其 後 進 發 嚴 衛 導 從 如 式 至 書 停 所 行 훌 停 쫓옮 進 發 如 初 入 몇 禮 門 由 弘 化 門 明 政 門 奉 安 子 通 和 嚴 강 목 親 行 退 盧 祝 迎 子 뚫 禮 門 外 具 쫓 善 冠 願 抱 烏 廣 帶 乘 與 出 協 陽 門 至 仁 政 門 外 降 與 乘 훌 出 敎 化 門 뽕 禮 門 등릅 祝 迎 所 降 輩 入 f 握 m

147 次 盧 主 整 至 改 具 功 服 出 握 次 t 府 {:;IC 哭 祝 迎 如 優 뚫 還 入 握 次 改 具 靈 善 冠 際 혐 烏 동즙 帶 廣 主 輩 進 發 出 l 握 次 乘 養 P곰 從 盧 王 擊 入 몇 禮 門 至 宗 顧 洞 口 降 養 乘 輩 入 弘 化 門 至 明 政 門 外 降 整 乘 屬 入 延 喜 門 入 齊 室 改 具 功 服 親 行 再 盧 찢 如 屬 禮 畢 出 延 喜 門 入 明 政 門 由 좁 陽 門 還 內 강 命 후 哭 쩔 以 親 行 뽑 練 조E ' 강 R_ ' 강 遺 承 듭품 大 報 t훔 奉 審 補 好 藥 院 以 澈 直 양 일성록 순조 21 년 (1821) 塊 嚴 命 以 通 和 嚴 寫 之 3 월 14 일(갑자) 일성록 순조 30 년 (1830) 命 塊 宮 以 通 和 嚴 寫 之 8 월 2 일(정해)

148 통화전 일성록)철종 재위년도 년 11 월 2 일(기묘) 강 강 목 강 목 강 목 校 理 尹 致 聖 以 父 病 陳 院 L찜 出 批 許 救 護 週 副 修 擺 李 建 春 政 院 以 建 春 在 外 양 請 下 論 敎 以 許 週 適 弘 文 提 學 金 炳 學 물 麗 也 命 李 喆 伊 等 六 名 始 薦 放 送 左 右 補 廳 양 름 日 前 因 大 톰흉 退 聞 命 열 Pi:!'. 廳 提 得 可 疑 者 姜 七 孫 先 使 究 問 則 所 告 內 떻 居 生 子 統 內 以 擔 負 資 生 춧 中 宮 觀 內 人 劉 民 乘 輯 軍 多 年 往 來 自 然 親 知 之 致 造 給 門 牌 故 差 備 內 無 難 出 入 而 去 月 初 生 適 入 關 內 훗 逢 看 素 親 明 禮 宮 質 率 尼 在 吉 語 次 之 間 以 關 內 火 變 等 說 得 聞 於 86 女 긍긍 故 聽 過 而 別 無 f 也 語 출 問 於 在 솜 則 可 以 樓 爛 굽 在 吉 所 告 內 葉 以 明 禮 宮 質 환 尼 之 彼 仍 居 宮 內 롯 去 九 月 塞 南 設 行 時 關 內 各 宮 內 A 等 出 往 黑 石 里 堂 主 86 女 家 而 案 伊 時 入 짧 之 致 不 得 出 去 火 變 等 說 出 於 堂 主 포 女 之 頁 手 而 觀 光 諸 人 傳 播 故 聞 之 좁 問 於 86 女 則 可 以 洞 爛 둥꼬 女 興 觀 所 告 內 뚫 以 堂 主 포 女 去 九 月 塞 南 時 因 神 言 所 發 可 不 健 歲 可 不 灌 歲 긍 則 續 嚴 色 掌 內 人 李 a; 寫 神 手 祝 日 三 年 之 內 幸 望 太 平 而 或 無 大 Xz 慮 乎 案 神 導 以 答 日 數 次 火 x 恐 有 不 輕 - 大 - 小 宜 其 慣 歲 宜 其 쉴흉k 而 已 別 無 他 說 공 更 推 밟 之 提 來 時 關 內 火 變 E 寫 ~D 之 공 緣 何 事 而 預 知 之 乎 興 觀 更 招 案 之 所 懷 B 達 於 前 招 而 證 ;tl 則 各 願 所 親 宮 女 處 問 安 次 每 月 修 送 適 以 去 月 二 十 九 日 領 嚴 內 人 南 尙 宮 許 修 ;tl 問 安 次 使 뚫 使 煥 金 所 며 入 送 쫓 以 失 火 之 致 門 禁 至 嚴 不 得 入 送 適 逢 親 知 於 義 宮 質 率 尼 給 ;tl 而 未 염 n 受 答 出 來 提 致 金 所 며훌 問 則 可 以 洞 1 觸 긍 金 所 回 所 告 內 뚫 居 生 子 堂 主 86 女 家 去 月 因 主 人 所 使 書 ;tl 傳 納 手 大 王 大 紀 嚴 內 人 千 尙 宮 공 故 往 子 關 門 外 則 門 禁 至 嚴 不 得 入 送 適 逢 於 義 宮 質 率 尼 而 日 흉 不 得 受 答 歸 路 { 則 聞 差 備 軍 士 與 近 { 大 軍 士 빼랍 之 言 則 昨 夜 續 願 火 變 不 能 接 팀 긍긍 故!lt 言 傳 及 於 主 女 外 無 他 可 達 之 解 공 質 率 尼 廣 積 所 告 內 去 月 二 十 九 日 午 後 王 大 紀 願 內 人 使 煥 次 出 來 通 化 門 外 適 逢 堂 主 86 女 之 使 煥 金 所 回 則 給 - 封 請 ;tl 日 此 볕 O 堂 主 86 女 之 孔 傳 納 子 大 王 大 紀 願 內 人 千 尙 宮 Z 說 떻 以 耳 寶 之 致 誤 聽 不 知 何 處 所 傳 持 入 差 備 內 適 逢 王 大 紀 散 洗 짧 房 金 a; 內 人 傳 給 而 至 今 未 知 何 處 所 去 훗 今 因 本 廳 分 付 始 認 誤 傳 其 書 ;tl 當 還 推 以 納 此 外 無 他 可 達 之 雖 공 罪 人 李 喆 伊 則 居 生 統 內 擔 負 資 生 去 月 望 後 續 歐 內 人 車 a; 什 物 - 負 負 置 於 壽 進 宮 內 人 處 所 - 負 %첩 嚴 內 人 郭 尙 宮 什 物 負 置 於 往 十 里 居 名 不 知 裵 哥 處 - 負 不 知 何 內 人 之 什 物 但 聞 所 傳 置 而 出 給 故 負 置 於 關 洞 居 宣 壽 雨 家 공 鄭 石 伊 則 居 生 統 內 擔 負 資 生 去 月 望 後 續 願 內 人 車 a; 之 什 物 - 負 負 置 於 壽 進 宮 一 負 不 知 何 內 A 之 什 物 但 聽 所 傳 而 出 給 故 負 置 於 樓 聞 rr힘 居 姓 名 不 知 人 家 공 金 用 伊 則 居 生 統 內 擔 負 資 生 去 月 望 後 續 願 內 人 車 a; 之 什 物 一 負 負 置 於 壽 進 宮 內 人 處 - 負 領 嚴 內 人 郭 尙 宮 什 物 負 置 於 往 十 里 居 名 不 知 裵 哥 處 - 負 通 和 願 洗 體 房 內 人 李 a; 什 物 負 置 於 南 寧 댐 宮 內 人 金 a; 處 공 金 者 fr 孫 則 居 生 統 內 擔 負 資 生 去 月 望 後 王 大 紀 願 外 燒 廣 房 內 人 姜 民 衣 織 一 坐 修 補 次 負 置 於 廣 通 橋 居 市 民 名 不 知 崔 哥 處 - 負 領 嚴 內 A 金 \;;ft 物 負 置 於 水 口 門 內 內 人 本 家 죠 方 납 孫 則 居 生 統 內 擔 負 資 生 去 月 望 後 花 草 庫 間 前 德 伊 聞 a; 擺 - 默 負 置 於 景 祐 宮 굽* 龍 孫 則 居 生 統 內 擔 負 資 生 今 짧 宣 仁 門 失 火 處 投 所 只 立 幕 軍 關 內 內 人 什 物 初 不 擔 負 공 今 此 就 補 諸 因 之 罪 犯 屬 度 盤 嚴 而 姜 七 孫 則 以 擔 負 之 漢 使 煥 於 宮 人 而 與 在 吉 女 逢 場 傳 播 回 淑 之 說 騎 擾 A 心 歸 之 於 堂 主 포 女 處 金 所 回 5!1J 以 86 女 使 煥 { 專 ;tl 時 申 任 於 質 率 尼 廣 積 使 之 替 傳 於 內 人 則 別 無 隱 情 86 女 興 觀 則 稱 以 堂 主 86 女 如 此 重 大 之 言 敢 薦 發 說 於 神 事 之 席 iffi 感 人 心 究 其 設 心 萬 敎 獨 輕 李 喆 伊 等 六 名 則 負 h 률 投 之 漢 因 質 率 尼 指 揮 各 房 內 A 什 物 隨 其 出 給 運 去 而 他 無 情 節 諸 罪 人 等 拉 貼 嚴 因 以 待 處 分 e 等 不 動 f 貞 探 大 承 嚴 敎 不 勝 慢 恐 而 즈E 女 則 平 問 之 下 難 以 取 服 請 施 威 嚴 問 允 之 敎 以 李 喆 伊 等 六 名 別 無 更 問 之 端 貼 薦 放 送 끼 ι

149 **캘끊 복원정비 가본계획연구 4. 건물관련 사료 쿼 E 내 7 LU - 감 μ 주 동 카 끼 료 여 바 푼

150

151 궐내각사 (1) 정치, 행정 - 국가의 정치 및 행정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관서 빈청, 정청, 대청,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세자시강원, 춘추관 (2) 군문 - 국왕, 왕실 가족의 호위, 궁궐 수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관서 내병조, 오위도총부, 내삼청, 선전관청, 무겸청, 호위청, 동소, 서소, 남소, 세자 익위사(?) (3) 궁궐관리 - 왕실의 활동 지원 궁궐을 유지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관서 상서원, 사옹원, 내의원(약방), 상의원, 내반원, 향실, 전설사, 배설방, 보루각

152 여 여 cl-;<: ]-u j 형식(궁궐지) 위치 통명전 朝 陽 門 일각문 통명전 동간장 納 淸 門 일각문 통명전 북간장 迎 和 門 일각문 통명전 서간장 朱 逢 門 영화문 남쪽 建 仁 門 자경전 積 慶 門 E즈1 7-} 조 J: 자경전 북간장 炳 景 門 일각문 자경전 서간장 含 陽 門 迎 碼 門! 벼 겨 Q 드 J- 년 D 쪼 ' 연희당 萬 春 門 ~르] z ~ 투 J- 연희당서행각 간장 영춘헌 歡 陽 門 인,,,_zJ- 무 "- 영춘헌 동간장 迎 和 門 일각문 북간장 집복헌 用 數 門 일각문 남간장 無 題 門 困 仁 추 弘 仁 門 일각문 함인정 서간장 짧 明 門 진상문 서쪽 건너편 취명문 북쪽 통화전 通 德 門 dzr 투 J: 명덕문 수각 서쪽 간장 꺼그다 이 E 과, 正 中 門 + 행각 = 6 행각내 ~ -τ I그r 딩L 奏 # 門 (진상문) 숭문당 북간장 通 慶 門 진설청 內 /

153 추자소 고전번역서 > 국조보감( 國 朝 젠 鍵 ) > 국조보감 제 74권 > 정조조 6 이 책은 조선시대( 朝 蘇 時 代 ) 역대( 歷 代 ) 군주( 君 主 )의 업적( 業 績 ) 가운데 선정( 善 政 )만을 모아 펀찬한 편 년체( 編 年 體 ) 사서( 史 書 )인 국조보감( 國 朝 寶 鍵 ) ( 奎 章 聞 所 藏 本, 90 卷 28 冊, 王 辰 活 字 本, 隆 熙 3 年 1909 年 刊 行 ) 0 우리 동방에 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에 시작되었다. 태종조에 경연청에 소장된 고주본( 古 註 本 ) 시( 詩 ) 서( 書 ) 좌전( 左 傳 ) 을 본으로 하여 이직( 李 樓 ) 등에게 명해서 10 만 자를 주조 하였으니 이것이 계미자(쫓 未 字 )이고, 세종조에 이천( 李 藏 )등에게 명하여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 이 경자자( 康 子 字 )이다.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조밀하다는 이유로 경연청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 順 事 實 ) 위선음즐( 薦 善 陰 驚 ) 등 책을 본으로 하여 김돈( 金 激 ) 등에게 명해서 20 여만 자를 주조하게 하 였는 데, 이것이 갑인자( 甲 寅 字 )로서 300년간 사용되었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 대조( 大 朝 )에 우러러 청 하여, 안에 서 내 려준 갑인자로 인쇄된 심경( 心 經 ) 만병회춘( 萬 病 며 春 ) 두 책을 본으로 하여 5 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 것이 임진자( 王 辰 字 )이다. 원년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갑인자를 본 으로 하여 1 5 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고, 또 임인년 에 관서 관찰사에 게 명하여 본조( 本 朝 ) 사람 한구( 韓 構 )의 글씨를 본으로 하여 8 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임자년 에 명하여, 중국 사고전서( 四 庫 全 書 ) 취 진판식( 聚 珍 板 式 )을 모 방하여 자전( 字 典 )의 글자체를 모아서 나무로 크고 작은 32 만여 자를 새기게 하 고는 이 를 생 생 자( 生 生 字 ) 라고 이 름하였고, 또 생생자를 본으로 해서 글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 이 끝나니, 큰 글자가 16 만, 작은 글자가 1 4 만여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 整 理 字 )라고 이름하였 다 그 리 고는 일곱 개 의 서가( 書 架 )에 나누어 꽂아 규영 선부( 1?11;서t!ff i 감 I~ ) 에 보관하였다. 감인소( 藍 印 所 )를 주자소(뚫 字 所 )로 개칭할 것을 명하였는 데, 국초에 처음 설치했던 때 의 옛 명칭을 따른 것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與 地 觸 覺 ) > 신중동국여지숭람 제 2권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 1권 > 최 종정보 주자소 < L, γ (1f) 선인문( 宣 仁 門 ) 안에 있다. 태종 3년 0403) 에 비로소 주자소를 두어 고주시전( 古 註 詩 傳 ) 과 좌씨 전( 左 民 傳 ) 의 자본( 字 本 ) 수십만 자를 주조하고, 정해자( 丁 갖 字 )라 이름하고, 권근( 權 近 ) 이 발문(없 文 )을 지었다. 세 종 2년 (1420) 에 그 글자가 바르지 못하므로 다시 녹여서 새로 주조했는 데, 글자 모양이 정밀하며 이름하 여 경자자( 康 子 字 )라 한다. 변계량( 下 季 良 )이 발문을 지었다, 16 년 에 또 경 연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 順 事 實 ) 위선음졸( 薦 善 陰 鷹 ) 논어( 論 語 ) 등의 책을 내 다가 자본 ( 字 本 )을 삼았는 데, 경자자에 비 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으며, 20여만 자를 주조하고, 이름 하여 갑인자( 甲 寅 字 )라 한다. 또 세조를 명하여 강목( 網 目 n 의 큰 글자체를 납으로 틀을 만들어 강 목 을 박으니, 즉 지금 이른바 사정전훈의(면 政 嚴 힘 II 義 ) 이다 김빈( 金 錯 )이 발문을 지었 다 문종 2년 0 452) 에 경자자를 다시 녹여서 안평 대 군( 安 平 大 君 )에 게 명하여 쓰게 했는데, 이 름하여 임신자( 王 申 字 ) 라 하고, 강희안( 姜 希 頻 ) 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이름하여 을해자 (Z.,~ 字 )라 한다. 10년에 원각경( 圓 覺 經 ) 을 박으려고 정난종( 鄭 蘭 宗 )에게 명하여 쓰게 했는데 글자체가 바르지 못하며, 이름하여 을유자 (Z., 西 字 ) 라 한다. 성종 2년 0471) 에 왕형공 구양공 집자( 王 해 公 歐 陽 公 集 字 )를 사용하여 주조했는데, 글자체가 경 인자보다 작고 더 욱 정밀하며, 이름하여 신묘자( 辛 깨 字 )라 한다. 또 중국의 신판 강목자( 新 板 網 目 字 )를 얻어서 주조했는데, 이름하여 계축자(쫓표 字 )라 한다 영조 48 년 정종이 춘저( 春 fill) 에 있을 때 갑인자를 자본으로 하여 15 만 자를 주조하게 하여 교서관에 저장하고 정종 원년에 전의 자본을 사용하여 또 15 만 자를 주조하여 규장각에 저장했는데, 이것을 정유자 C T 西 字 )라 한다. 18 년에 모두 지금의 주자소, 즉 옛 홍문관에 옮겨 보관하고, 이름하여 전자소( 鎬 字 所 )라고 했다. 또 자전자( 字 典 字 )를 사용하여 나무로 q u

154 대소 32 만여 자를 새겼는데, 생생자( 生 生 字 )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또 생생자를 본으로 하여 본자( 本 字 )와 같이 주조하여 정리의( 整 理 優 )를 박았는데, 이름하여 정리자( 整 理 字 )라 한다. 0 정종조에 폐청으로 내각주자소( 內 聞 옳 字 所 )를 삼고, 규영선부( t'패 Xii 11 J) 라고 편액했다. 또 판당( 板 堂 )이 있어서 책 판( 冊 板 )과 주자(흉 字 )를 보관해 두고, 무릇 내각에서 서적을 박을 때에는 언제나 이 주자소를 개국( 開 局 )한다. 장치( 藏 置 )한 동주자( 鋼 흉 字 )는 이름이 생생자다 0 곁에 고분판( ιf띠) 이 있는데, 어느 때 창 설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흑은 바로 옛 홍문관이라고도 한다 국조보감 철종조 3 9 년(무오, 1858) 0 주자소( 濤 子 所 )가 불탔다. 조두순( 趙 斗 淳 )이 아뢰기를, 끊임없이 유포되던 나라의 문자가 모조리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 5 백 년을 귀중하게 보존해 오던 것이 드디어 전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다시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윤허하여 규장각을 시켜 주조하게 했는데, 9 개월 만에 일이 끝났다. 그리하여 정리대자 ( 整 理 大 字 ) 8 만 9 천 2 백 3자와 소자( 小 字 ) 3 만 9천 4 백 16자 및 한구자( 韓 構 字 ) 3 만 1 천 8 백 29 자를 타고 남은 온전한 글자 17 만 5천 6 백 98자와 함께 유( 類 )와 부( 部 )별로 분류 정리하여 주자소에 보관하 였다. 다산시문집 제 4권 시( 詩 ) 유월 십이일 한서를 하사받고 삼가 그 은덕에 관하여 쓰다 [ 六 月 十 二 日 쫓 陽 漢 書 悲 述 恩 念 ] 병서( 井 序 ) 그날 밤 달빛이 유난히 맑아 혼자서 죽란( 竹 爛 )에 앉았더니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각리( 聞 更 )였다. 10권의 한서선( 漢 書 選 ) 을 들고 와서 옥음( 玉 音 )을 전하기를, 지금 주자소(훌 字 所 ) 를 다른 곳에다 옮겨 지었는데, -이때에 규영부( 奎 鎭 府 )가 춘방( 春 야)이 되었음- 아직은 벽이 마르지 않 았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들어와서 날 위해 종전처럼 교서( 校 書 )도 하고 직숙( 直 宿 )도 하라. 그리고 지금 내린 한서선 10권에 제목( 題 目 )을 써서 5권은 도로 들여 보내고 나머지 5권은 집에다 두고 전 가( 傳 家 )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이 누누하였고 깊은 권념(흉 念 )을 아끼 지 않았는데, 이 는 내가 탄핵을 당하고 나서 한 쪽에 엎드려 있기 이미 일년이 흘렀기 때문에 이같이 기억해 주시는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편찮으시기 시작하여 28 일에 승하하시고 말았으니 그렇다면 그 한서선 X 10권이 바로 군신( 君 많) 사이에 영원한 이별을 알리는 선물이 되고 만 셈이었다. 책을 껴안고 흐느껴 울면서 그날 생각했던 시를 지금 여기다 옮겨 적는다. 동으로 소 내에 가 고기잡이에 맛들였는데 / 東 出 흠 漢 學 補 魚 님이 부르신 초록 명주가 전려에까지 왔네그려 / 綠 練 恩 검 到 田 盧 주자소를 이미 옮겨 별관을 열었으며 / 己 移 좁행 開 庸 館 황색보로 곱게 싸서 한서를 내리셨다 / 別 奏 鋼 織 降 漢 書 간괴를 버리신 것 님께서도 언짧으시변 / 聖 主 應 爛 棄 줍 剛 이생인들 어찌 차마 초어를 하오리까 / 此 生 何 忍 憶 推 뺑 산으로 갈 이펼 계획 영원히 포기하고 / 長 빼 李 泌 歸 山 計 처자 데리고 서로 와 살 곳을 정했다네 / 좋 子 西 來 X 홍 居 4 -

155 [주 D - 001] 간괴 ; 노끈을 꼴 수 있는 풀의 이름 전하여 썩 좋지는 못하나 그런 대로 쓸모가 있는 물건 사마( 絲 麻 )가 아무리 많더라도 간괴( 蒼 剛 )도 버리지 말아야지. 하였음 左 a 成 公 9 年 [ 주 D-002 ] 산으로 계획 당( 庸 )의 이필( 李 泌 ) 이 재주가 대단하고 박식하였는데, 평소에 신선( 神 仙 ) 방술을 사모해오다가 현종( 玄 宗 ) 때에 한림학사( 輪 林 學 士 )로서 동궁( 東 宮 )을 보좌하여 동궁으로부터 융 숭한 예우를 받았으나 양국충( 楊 國 忠 )의 미움을 사 영양( 顆 陽 )에 가 숨어 살았다 그 후 숙종( 簡 宗 ) 대 종( 代 宗 ) 덕종( 德 宗 ) 대에 걸쳐서도 부름을 받고 나왔다가 곧 은거( 隱 居 )하였음. 居 書 卷 139 연려실기술 별집 제 14권 문예전고( 文 훌 典 故 ) 주자( 覆 字 ) 0 영종 임진년 지금 임금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세종조의 갑인자( 甲 寅 字 )를 대본으로 15 만 자를 주조 하여 외각( 外 聞 )에 간수할 것을 명하였고, 원년 정유년에 앞의 대본을 사용하여 또 15 만 자를 주조해서 내각( 內 聞 )에 간수하였다가 갑인년에 창경궁( 昌 慶 宮 ) 의 옛 홍문관( 弘 文 館 )에 모두 옮겨서 간수하고 주자 소(흉 字 所 ) 라고 이름 하였다 또 자전( 字 典 ) 의 글자를 사용하여 크고 작은 목각( 木 刻 ) 활자 32 만여 자를 만들어 생생자( 生 生 字 ) 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을묘년에 정 리의궤( 整 理 嚴 軟 ) 를 간행하기 위해 생생자를 대본으로 하여 본래의 글자와 함께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정리자( 整 理 字 ) 라는 것이다. 정사년 에 소 학( 小 學 ) ) 오륜행실(죠 倫 行 實 ) 향 례합편( 鄭 禮 合 編 ) 을 편찬하였는데, 소학 과 향 례합편 에는 정유자 CT 西 字 )를 사용하고, 오륜 행실 에는 정리자( 整 理 字 )를 사용하여 간행하도록 명 하였다. 홍재전서 제 11 권 서인( 序 引 ) 4 I 익정공주고전 례류서( 寶 靖 公 奏 훌 典 禮 類 없 ) 공은 또 수상( 首 相 )으로서 혜국( 惠 局 )을 관장하면서 곡식 을 출자하여 완영 ( 完 營 )에 있는 자양(짧 陽 )의 강목( 網 目 ) 인판( 印 板 )을 다시 만들기도 했는데, 주연에 올린 말이 바로 그 본으로서 몇백 년 동안 드물게 있었던 것이다. 요즘 와서 갑인본 주자( 靈 字 )를 다시 만든 것과 같은 뜻이라고나 할 것이다. 장 고( 掌 故 )를 살펴보면 헌릉( 歡 陸 ) 때 집현전( 集 賢 願 )을 두고 늘 곁에서 금과( 金 科 )를 읽게 하고 또 늘 곁 에 있으면서 고문에 응하게 하고, 또 주자소(잠n: 페)를 설치하고 구리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인쇄하게 했는데, 이직( 李 樓 )과 박석명( 朴 錫 命 )이 그 일을 주관했었다. 우리 영릉( 英 陸 ) 때 와서 또 구리 활자를 주조했는데, 그것이 갑인 활자( 甲 寅 活 字 )라는 것이다 - 내가 갑인년 (1794, 정조 18) 에 다시 삼경대전( 三 經 大 全 ) 과 사서대전( 四 書 大 全 ) 을 인쇄하고 또 춘추좌씨전( 春 秋 左 民 傳 ) 을 인쇄했으며, 창경궁 ( 昌 慶 宮 )의 고문관( 考 文 館 )에다 주자소를 다시 설치하고 내각( 內 聞 )이 그것을 주관하도록 명했는데, 그 역시 선대의 일을 이어 가기 위한 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홍재전서 제 164 권 일득록( 日 得 錄 ) 4 문학( 文 學 ) 4 상이 이르기를, 주자소(뚫 字 所 )는 태종조( 太 宗 朝 )부터 시작되었는데, 영릉( 英 陸 )의 전성기에 집현전( 集 賢 嚴 ) 신하들이 명을 받들어 편찬한 책이 모두 주자소에서 인쇄한 것이었으니, 지금 내각( 內 聞 )에 주자 소가 있는 것과 부신( 符 信 )을 맞춘 듯이 일치한다 갑인년 겨울에 주서백선 X 을 인쇄하느라고 옛날의 홍문관에서 개인( 開 印 )한 다음, 내각과 외각( 外 聞 )의 주자(뚫 字 )를 보관해 두고 비로소 감인소( 藍 印 所 )라 고 이름 붙였다 지금은 고사( 故 事 )에 따라서 주자소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전후로 인쇄한 책들은 모두 여기에서 한 것이다. 흑자( 或 者 )는 규성( 奎 星 )이 이 땅을 비춘다고 말하니, 땅의 문명( 文 明 ) 또한 기다리 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다. R ]

156 중추부( 中 樞 府 ) 서부 적선방( 積 善 행)에 있으니, 곧 예조의 남쪽이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중추원 을 두었는 데, 정종 2 년 (1400) 에 삼군부(르 軍 府 )로 고쳤고, 태종 9 년 (1409) 에 삼군부를 폐지하여 다시 중추원을 두었으며, 세조조에 부( 府 )로 고쳤다 맡아보는 일은 없고, 문신 무신 당상관으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 우한다. 0 영사( 領 事 ) 1 원, 판사 2 원, 지사 6 원, 동지사 8 원, 첨지사(혔 知 事 ) 8 원이고, 경력 ( 經 歷 ) 1 원과 도사 2원은 소속 경력소( 經 歷 所 )에 붙인다. 오위도총부(죠 衛 都 擺 府 ) 예전에는 경복궁 광화 문 동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창덕궁의 흥문관 서쪽에 있었는데, 정종 5 년 (1781) 에 창경궁 연광문( 延 光 門 ) 안, 동룡문( 鋼 龍 門 ) 북쪽에 옮겨 설치하니, 옛 연복전( 延 福 願 )이다 하나는 창경궁 흥화문 ( 弘 化 門 ) 안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경회궁 개양문( 開 陽 門 ) 안 서쪽에 있다. 태조 2 년 (1393) 에 고려 제도를 따라 의흥삼군부( 義 興 三 軍 府 )를 두었고, 태종 9 년에 삼군부를 폐지하고 진무소( 鎭 換 所 )를 만들어 병조에 예속시키고, 금려( 禁 旅 )를 거느리고 윤번( 輪 짧)으로 숙위( 宿 衛 )하는 일을 맡겼다. 정종 28 년 에 또 삼군진무소를 고쳐서 다시 의흥부라고 불렀다. 문종 원년에 삼군을 오위(죠 衛 )라고 고 쳤다. 세조조에 진무소를 고쳐서 오위도총부로 하여 오위를 맡아 다스리고 군무( 軍 務 )를 전적으로 맡겨, 병조에 예속시키지 않았다. 선조 임진년 뒤에 위제( 衛 制 )를 아주 폐지하여 관명( 官 名 )만 남아 있다. 0 도총관( 都 擔 管 ) 정 2품 5 원, 부총관( 副 總 管 ) 종 2품 5 원, 경력 6 원, 도사 6 원이다. 0 서거정( 徐 居 표)의 제 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오위( 五 衛 ) 지금은 오위 병제( 五 衛 兵 制 )가 아주 폐지되어 관명만 남았다. 장( 將 )과 부장( 部 將 )이 순번을 나누어 입직하여 순경(센 更 야간 순행)한다. 의흥위( 義 興 衛 ) 중위( 中 衛 )이다. 0 갑 사보충 대 ( 甲 士 補 充 隊 )가 속한다. 0 서울의 중부( 中 部 ), 개성부( 開 城 府 ), 경기의 양주( 楊 州 ) 광주( 廣 州 ) 수원( 水 原 ) 장단( 長 圖 )의 진관 군사( 鎭 管 軍 土 )가 중부( 中 部 )에 속하고, 강원도의 강릉( 江 陸 ) 원주( 原 州 ) 회양( 堆 陽 )의 진관 군사가 좌부( 左 部 )에 속하고 충청도의 공주( 公 州 ) 홍주( 洪 州 )의 진관 군사가 우부 ( 右 部 )에 속하며, 충주( 忠 州 ) 청주( 淸 州 )의 진관 군사가 전부( 前 部 )에 속하고, 황해도의 황주( 黃 州 ) 해 주( 海 州 )의 진관 군사가 후부( 後 部 )에 속한다. 용양위( 龍 癡 衛 ) 좌위( 左 衛 )이다 0 별시위대( 別 待 衛 隊 ) 군 사가 속한다. 0 서울 동부( 東 部 ), 경상도 대구( 大 邱 )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경주( 慶 州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진주(촬 州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고, 김해( 金 海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 고, 상주( 尙 州 ) 안동( 安 東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호분위( 虎 貴 衛 ) 우위( 右 衛 )이다. 0 족친위( 族 親 衛 ) 친군위( 親 軍 衛 ) 팽배( 影 排 호분위에 딸린 군사)가 속한다. 0 서울의 서부 평안도의 안주( 安 州 ) 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의주( 義 州 ) 귀성( 龜 城 ) 삭주( 期 州 )의 진관 군사와 창성( 昌 城 ) 창주( 昌 洲 ) 방산( 方 山 ) 인산( 觀 山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성천( 成 川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며, 영변( 寧 邊 ) 강계( 江 界 ) 벽동(뽕 運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평양( 平 壞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 한다. 충좌위( 忠 住 衛 ) 전위( 前 衛 )이다 0 충의위( 忠 義 衛 ) 충찬위( 忠 贊 衛 ) 파적위( 破 敵 衛 )가 속한다. 0 서울의 남부( 南 部 ), 전라도의 전주( 全 州 )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순천( 順 天 )의 진관 군사는 좌부 에 속하고, 나주( 羅 州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며, 장흥( 長 興 ) 제주( 濟 州 )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 하고, 남원( 南 原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충무위( 忠 武 衛 ) 후위( 後 衛 )이다. 0 충순위( 忠 順 衛 ) 정 병( 正 兵 ) 장용위(밤 勇 衛 )가 속한다. 0 서울의 북부( 北 部 ), 영안도( 永 安 道 )의 북청( 北 훔)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갑산( 甲 山 )의 진관 군사, 삼수( 三 水 ) 혜산( 惠 山 )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온성( 穩 城 ) 경원( 慶 源 ) 경흥( 慶 興 )의 진관 군사, 유원( 柔 遠 ) 미전( 美 錢 ) 훈융(굉 뤘)의 하고, 경성( 鏡 城 ) 부령( 富 寧 ) 회령( 會 寧 ) 종성( 鍾 城 )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 진관 군사와 고령( 高 領 ) 동관( 運 關 )의 진관 군 사는 전부에 속하고, 영흥( 永 興 ) 안변( 安 邊 )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0 위의 오위는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의흥친군 십위( 義 興 親 軍 十 衛 )를 두니, 좌위( 左 衛 ) 우위( 右 衛 ) 응양위( 鷹 揚 衛 ) 금오 위( 金 홈 衛 ) 좌우위( 左 右 衛 ) 신호위( 神 虎 衛 ) 흥위위( 興 威 衛 ) 비순위( 備 센 衛 ) 천우위( 千 牛 衛 ) 감문위 ( 藍 門 衛 )이다 문종 원년에 오위라고 고쳐 부르고 군무( 軍 務 )를 맡겼는데, 그 소속의 부장청( 部 將 廳 ) 군 직청( 軍 直 廳 )의 장( 將 )과 부장( 部 將 )이 순변을 나누어 입직해서 순경한다. 0 의흥위는 지금은 외소( 外 - 6 -

157 所 )라고 부르고, 조사위장( 塵 司 衛 將 )이 주관한다. 0 외소 군직청( 軍 職 廳 )은 모두 창덕궁 돈화문( 敎 化 門 ) 밖에 있으니, 중부 정선방( 貞 善 햇)이다. 남소( 南 所 )는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 金 虎 門 ) 안에 있고, 하나 는 경희궁 개양문( 開 陽 門 ) 안에 있다. 서소( 西 所 )는 하나는 창덕궁 요금문( 健 金 門 ) 안에 있는데 반송( 盤 松 )이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의문(몇 義 門 ) 안에 있다. 동소( 東 所 )는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 宣 仁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 희 궁 흥화문( 興 化 門 ) 안에 있다 북소( 北 所 )는 하나는 창경 궁 경 화( 景 化 ) 숭지 (몇 智 ) 문 안에 있는데 연못이 있고, 하나는 경희궁 무덕문( 武 德 門 ) 안에 있다 0 장( 將 ) 15 원 정 3품 내조사( 內 뽑 司 ) 2 원, 부장( 部 將 ) 25 원이다. 0 따로 상호군( 上 護 軍 ) 8 원, 대호군( 大 護 軍 ) 12 원, 호군( 護 軍 ) 4 원, 부호 군( 副 護 軍 ) 69 원, 사직( 司 直 ) 11 원, 부사직( 副 司 直 ) 1 백 2 원, 사과( 司 果 ) 21 원, 부사과( 副 司 果 ) l 백 83 원, 사정( 司 正 ) 20 원, 부사정( 副 司 正 ) 2 백 50 원, 사맹( 司 銀 ) 15 원, 부사맹( 副 司 益 ) 2 백 8 원, 사용( 司 勇 ) 24 원, 부사용( 副 司 勇 ) 6 백 60원이 있다 0 부장( 部 將 ) 25 원 안에 참외( 參 外 ) 11 원, 남행 참외( 南 行 參 外 과거를 보지 않고 임관한 벼슬아치) l 원이 있다 0 외위( 外 衛 )는 폐지한 뒤에 내삼청( 內 三 廳 )에 붙였다 내삼청( 內 三 廳 ) 개국 초에는 사복(허 樓 )을 두었고, 성화( 成 化 ) 연간에 또 내금위( 內 禁 衛 )를 두어 겸사복 ( 暴 司 樓 )에 소속시켰고, 효종 원년 (1649) 에 금군( 禁 軍 )을 더 두었고, 현종 7년 (1664) 에 금군청( 禁 軍 廳 ) 을 설치하여, 7 번으로 나누어 겸사복 2 백 명, 내금위 3 백 명, 우럼위(% 林 衛 ) 2 백 명인 삼청( 三 廳 )으로 만들었다. 영종 30년에 용호영 직소( 龍 虎 營 直 所 )를 고쳐서 두었는데, 하나는 창덕궁의 인정전( 仁 政 歐 ) 남랑( 南 厭 )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정전(몇 政 嚴 ) 남랑에 있다. 0 겸사복장( 暴 司 樓 將 ) 정 3품 이 3 원인 데 금군청에 속하고 정 3 품, 내금위장( 內 禁 衛 將 ) 3 원, 우림위장(% 林 衛 將 ) 3 원이다. 선전관청( 宣 傳 官 廳 ) 하나는 창덕궁 승정원( 承 政 院 ) 북쪽, 선정문( 宣 政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 다. 처음에는 관원을 두어 대궐 안을 윤직( 輪 直 )했는데, 뒤에 청( 廳 )을 설치하여 형명(쩌 名 ) 계라(땅 轉 ) 시위( 倚 衛 ) 전명( 傳 命 ) 부신( 符 信 )을 출납하는 등의 일들을 맡았다. 0 선전관 25 원 안에 행수( 行 首 ) 정 3품 l 원, 당상( 堂 上 ) 3 원, 참상( 參 上 ) 품계는 정하지 않음 이 7원이고, 참외( 參 外 ) 종 9품 14 원 안에 남행( 南 行 ) 2 원, 문신( 文 뭄) 종 6품 2원인데, 무겸청( 武 暴 廳 )에 속한다. 부청( 附 廳 )은 하나는 창덕궁 광범 문( 光 範 門 )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금상문( 金 商 門 ) 안 북쪽에 있다. 0 무신겸직 50원 안에 참상( 參 上 ) 정한 품계가 없음 40 원, 참외( 參 外 ) 종 9품 10원이다. 이식( 李 植 )의 제명기( 題 名 記 ) 가 있다. 별군 직청( 別 軍 職 廳 ) 하나는 창경궁 회춘문( 回 春 門 ) 안, 곧 시민당( 時 敏 堂 ) 옛터에 있었고, 하나는 경희궁 건 명문( 建 明 門 ) 안에 있다. 효종( 孝 宗 ) 7 년에 창설하여 잠저군관( 價 邱 軍 官 )으로 심양( 灌 陽 )에 모시고 갔던 사람 8 명을 구처( 區 處 )하여 청( 廳 )을 설치했는데, 세상에서 팔장사( 八 밤 士 )라고 부르며, 그 뒤로 점차 늘 었다. 0 별군직( 別 軍 職 )은 정한 품계가 없고 정원이 -없다. 어전친막제명첩( 倒 前 親 幕 題 名 貼 )이 있다, 훈 련원( 訓 練 院 ) 남부 명철방( 明 哲 행)에 있다. 개국 초에 훈련관( 訓 練 觀 )을 두어 군사의 재능을 시험하고 무 예를 닦고 무경( 武 經 )을 익히고 공부하는 일을 맡는데, 뒤에 관을 원( 院 )으로 고쳤다. 또 무관( 武 官 )의 과거 보는 곳이 되었으며, 무일소( 武 - 所 )라고 부른다. 0 지사( 知 事 ) 1 원, 도정( 都 正 ) 2원 안에서 l 원은 겸직이고, 정( 正 ) l 원, 부정( 副 正 ) 2 원, 첨정(혔표) 12 원, 판관( 判 官 ) 18 원, 주부( 主 繹 ) 38 원, 참군( 參 軍 ) 2 원, 봉사( 奉 事 ) 2 원, 권지( 權 知 ) 口 口 원, 습독관( 習 讀 官 ) 30 원, 권지( 權 知 ) 口 口 원이다. 0 성간( 成 떠)의 사청기( 射 廳 記 )가 있고, 원의 동쪽에 연자루( 斯 子 樓 )가 있다. 세자익위사( 世 子 翊 衛 司 ) 하나는 창경궁 시 강원( 待 講 院 ) 북쪽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 明 門 ) 안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두었고, 또 하나의 이름은 계방( 桂 房 ) 이다. 동궁( 東 宮 )을 배위( 暗 衛 )하는 일을 맡는다. 0 좌익위( 左 翊 衛 ) 우익위( 右 翊 衛 ) 정 5품 l 원씩, 좌사어( 左 司 쩔) 우사어( 右 司 찢) 종 5품 1 원씩, 좌익찬( 左 翊 贊 ) 우익찬( 右 翊 贊 ) 정 6품 1 원 씩, 좌위솔( 左 衛 率 ) 우위솔( 右 衛 率 ) 종 6품 1 원씩, 좌부솔( 左 副 率 ) 우부솔( 右 副 率 ) 정 7품 1 원씩, 좌시직 ( 左 待 直 ) 우시직( 右 待 直 ) 정 8품 l 원씩, 좌세마( 左 洗 馬 ) 우세마( 右 洗 馬 ) 정 9품 1 원씩이다. 세손위종사 ( 世 孫 衛 從 司 ) 본조에서 창설했고, 맡아보는 일은 익위사와 같고, 설치는 강서원( 講 書 院 )과 같이 했다 0 좌장사( 左 長 史 ) 우장사( 右 長 史 ) 종 6품 l 원씩, 좌종사( 左 從 司 ) 우종사( 右 從 司 ) 종 7품 l 원씩이다 수문장 - 7

158 청( 守 門 將 廳 ) 경희궁 흥화문( 興 化 門 ) 남쪽에 있다. 처음에는 장( 將 )을 두고 일정한 관서는 없었는데, 뒤 에 청( 廳 )을 설치했고, 대궐문 지키는 일을 맡는다 0 장( 將 ) 29 원인데 그 중 참상( 參 上 ) 종 6품 15 원, 참외( 參 外 ) 종 9품 14 원이다. 충익위( 忠 翊 衛 ) 직소( 直 所 )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 宣 仁 門 ) 안에 있고, 하나 는 경희궁 口 口 문 안에 있다. 공신( 功 멀)의 자손이 속한다 0 장( 將 ) 3 원. 충장위( 忠 봐 衛 ) 직소, 하나는 창덕궁 인정문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금상문( 金 商 門 ) 안에 있다 - 전사자의 자손이 속한다. 0 장 3 원. 공궐위( 空 關 衛 )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의 수직( 守 直 )을 맡는다. 0 장 3 원, 국출신청( 局 出 身 廳 ) 창 덕궁 요금문( 魔 金 門 ) 안 영숙문( 永 蕭 門 ) 밖에 있다. 인조 정축년 (1637) 에 남한( 南 漢 )에 따라갔던 군병 출 신자 1 천 3 백 84 명을 7국( 局 )으로 나누어 영숙문에 입직( 入 直 )하게 하였는데, 무용청( 武 勇 廳 )이라고도 한다. 효종조에 수를 줄여서 3국을 만들었다가 또 4국을 만들었다. 현종 4 년 (1663) 에 비로소 3 국의 국 마다 50명으로 정했다 숙종 을축년 0685) 에 3국에서 각각 10자리씩을 빼고 무예청( 武 藝 廳 ) 출신자로 보충하여 소속시켰다 정종 계묘년 (1783) 에 무예과( 武 藝 童 ) 30 명을 제하여 장용영(밤 勇 營 )을 옮겨 설치 했다가 순조 임술년에 장용영을 폐지하고 무예과를 을축년 제도와 같이 3국에 다시 소속시켰다. 0 별 장( 別 將 ) 3 원. 능마아청( 能 뺨 兒 廳 ) 중부 정선방( 貞 善 껴)에 있다. 인조조에 창설하여 여러 장관( 將 官 )에게 병서( 兵 書 )를 고강( 考 講 )시키고 공부를 권장하는 일을 맡는다. 영종 을유년 Cl 765) 에 훈련원에 합쳤다 0 당상 3 원, 낭청 4 원이다. 한려청( 漢 旅 廳 ) 효종대왕이 심양( 灌 陽 )에서 돌아올 때 8 성( 姓 )의 중국 사람 이 따라서 동으로 왔는데 그 자손을 口 口 국( 局 )에 붙이고, 한인 아병( 漢 人 牙 兵 왕, 대장군, 천자가 친히 지휘하는 군사)이라고 이름하였다. 정종 경술년 (1778) 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명례문( 明 禮 門 )에 입직 ( 入 直 )하는데, 숭지문(뿔 智 門 )이라고도 한다. 0 군관( 軍 官 ) 口 口 원이다 사자관청( 寫 字 官 廳 ) 口 부 口 口 방 에 있으며, 사자관( 寫 字 官 ) 40원이다. 의장고( 嚴 야 庫 ) 중부 정선방에 있다 내고( 內 庫 )는 口 口 궁 口 口 문 口 口 에 있는데, 곧 고려 제도의 위위시( 衛 댐춤)이다 각전( 各 願 )의 의장을 맡으며, 병조 승여사( 乘 與 司 )에 속한다. 0 냥청 2 원 부장( 部 將 ) 겸직. 사산( 四 山 ) 처음에는 감역관( 藍 投 官 ) 4 원을 두어 서울 성 안의 동 서남북의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시키는 등의 일을 나누어 맡았는데, 뒤에 참군( 參 軍 )으로 고쳤다. 서도 ( 西 道 )는 훈련도감에 붙이고, 동도는 어영청에 붙이고, 남도는 금위영에 붙이며, 북도는 총융청에 붙였 다. 0 각각 참군( 參 軍 ) 종 9품 1 원씩이다. 훈련도감( 訓 練 都 藍 ) 신영( 新 營 )은 서부 여경방( 餘 慶 행)에 있는 데, 선조 27 년 갑자년 (1594) 에 1 백 97 칸 반을 창설했다. 0 도제조 1 원, 제조 2 원, 대장( 大 將 ) 종 2품 중군( 中 軍 ) 종 2품 1 원씩, 별장( 別 將 ) 천총( 千 擔 ) 2 원씩, 국별장( 局 別 將 ) 모두 정 3품 상국청 파총( 詳 局 廳 把 擔 ) 종 4 품 6 원이며, 종사관( 從 事 官 ) 종 6품 4원 중에서 1 원은 문관( 文 官 )이다. 금위영( 禁 衛 營 )과 어 영청( 倒 營 廳 )의 동초관( 同 뺑 官 ) 종 9품 34 원, 지구관( 知 뤘 官 ) 10 원, 기패관( 題 牌 官 ) 20원, 별무사( 別 武 士 ) 68 원, 군관( 軍 官 ) 17 원, 별군관( 別 軍 官 ) 10 원, 권무관( 歡 武 官 ) 50 원, 국출신( 局 出 身 ) 1 백 50 원이다. 상세 한 것은 국청( 局 廳 )에 있다- 북영( 北 營 ) 창덕궁 서쪽 공북문( 媒 北 門 ) 밖에 있고, 영사[ 廢 宇 ]는 2 백 35 칸 이다. 영( 營 )의 남쪽에 또 군향색고( 軍 節 色 庫 )가 있고, 또 군자정( 君 子 亨 )과 몽답정( 夢 짧훔)이 있다. 순조 24 년 (1824) 에 용호영( 龍 虎 營 )을 이곳에 옮겼다. 북일영( 北 - 營 ) 북영 남쪽에 있는데, 15 칸이다. 북사영 ( 北 四 營 ) 경희궁 단(벨) 밖에 있는데, 9 칸이다. 남영( 南 營 ) 창덕궁 돈화문 밖 동쪽에 있는데, 32 칸이다. 서별영( 西 別 營 ) 마포( 麻 浦 )에 있다. 동별영( 東 別 營 ) 옛 장용영(봐 勇 營 )에 있다. 양향청( 樓 館 廳 ) 남부 훈도 방( 薰 圖 해)에 있는데, 선조 26 년 (1593) 에 창설했고, 군수( 軍 需 )를 대주는 일을 맡아서 훈련도감 군사들 의 옷 기계( 器 械 병기) 정기( 族 題 ) 금고( 金 鼓 )의 자료 및 여러 가지 원역( 員 投 )의 공포 (I 包 ) 요포( 料 布 급료로 주는 포목)의 수요( 需 要 )에 대비한다, 현종 7 년 (1666) 에 훈련도감으로부터 옮겨서 호조에 붙 였다. 0 도제조 1 원, 제조 3 원, 종사관 1 원이다. 하도감( 下 都 藍 ) 남부 명철방( 明 哲 행)의 훈련원 남쪽에 있는데, 3 백 90칸이다 별영(딩 lj 營 ) 마포에 있는데, 현종 14 년에 세웠다. 선조 병신년 (1596) 에 훈국 군사 들에게 급료를 주는 곳으로 설치했다고도 한다. 0 읍청루(펌 淸 樓 )가 있는데 강을 임해 있어 명승지라고 칭한다. 군향색고( 軍 館 色 庫 ) 남북영 남쪽에 있는데, 1 백 12 칸이다 염초청(껍 隔 廳 ) 마전교( 馬 塵 橋 ) 개울 n

159 의 남변에 있다 0 숙종 갑술년 (1694) 봄에 갑자기 돈 자국이 기둥 들보 담 벽에 박혀 있어 둥글퉁 글 서로 이어져 모양이 매우 이상하고 글자 획도 뚜렷하며, 처마끝 대들보 서까래 중방에 이르기까 지 모두 그렇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혹은 며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혹은 열흘동안 있다가 없어지 기도 하며, 또한 해가 지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 까닭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0 1 백 12 칸 이다 광지영( 廣 智 營 ) 창경궁의 궁담 정북쪽 응봉( 鷹 옳) 아래에 있는데, 1 백 15 칸이다, 직방( 直 房 ) 돈화 문( 敎 化 門 ) 밖에 16 칸,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14 칸 반, 흥화문( 興 化 門 ) 밖에 8 칸, 경모궁( 景 暴 宮 ) 어귀에 8 칸이 있다. 금위영( 禁 衛 營 ) 신영( 新 營 )은 중부 정선방( 貞 善 功 )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고, 영사( 營 舍 )는 3 백 62 칸이다. 인조조에 정초청( 精 妙 廳 )을 설치 했는데, 숙종 8년 (1682) 에 훈련군총( 訓 練 軍 擔 )을 감해서 그 중부 별대( 中 部 別 隊 )와 병조의 정초군( 精 沙 軍 )으로써 금위영( 禁 衛 營 )을 설치하고, 병조에서 겸하여 관 할하게 하였다 영종 갑술년 (1754) 에 비로소 어영청의 예( 例 )와 같이 영( 營 )을 따로 설치했다. 0 도제 조 제조 대장( 大 將 ) 중군( 中 軍 ) 별장( 別 將 ) l 원씩, 천총( 千 擔 ) 4 원, 기사장( 騎 士 將 ) 정 3품 3 원, 파총 5 원, 외방겸파총( 外 方 暴 把 總 ) 12 원, 종사관( 從 事 官 ) 2 원, 초관(뺑 官 ) 41 원, 교련관( 敎 練 官 ) 12 명, 기패관 ( 雄 牌 官 ) 10 명, 별무사( 別 武 士 ) 30 명, 군관( 軍 官 ) 5 명, 별군관( 別 軍 官 ) 10 명, 권무군관( 觀 武 軍 官 ) 50 명, 기사( 騎 士 ) 1 백 50원 별기위( 別 騎 衛 ) 32 명이다 남영( 南 營 ) 개양문( 開 陽 門 ) 위에 있는데, 12 칸이다. 남 별영( 南 別 營 ) 남부 낙선방( 樂 善 챙) 묵동(뿔 洞 )에 있는데, 1 백 39 칸이다. 영종 6년 (1730) 에 창설했다. 남 창( 南 룡) 남별영의 남쪽에 있는데, 1 백 1 칸이다. 하남창( 下 南 용) 남별영의 북쪽에 있는데, 1 백 4 칸이다. 화약고( 火 藥 庫 ) 口 口 남창( 南 용)의 서쪽 건너 산기숨에 있는데, 17 칸이다. 서영( 西 營 ) 창덕궁 경추문( 景 秋 門 )의 서쪽 건너편에 있는데, 11 칸 반이다 직방( 直 房 ) 경희궁( 慶 熙 宮 ) 어귀에 있는데, 8칸이다 어영청 ( 倒 營 廳 ) 신영( 新 營 )은 동부 연화방( 違 花 행)에 있고, 5 백 5 칸이다. 인조 2년 (1624) 에 창설하고, 6년에 국 ( 局 )을 설치했다. 효종 3년 (1652) 에 비로소 군영( 軍 營 )을 두었고, 숙종 병술년 Cl 706) 에 l 영( 營 ) 5 부( 部 ) 의 제도로 고쳤다 0 도제조 제조 대장 중군 별장 1 원씩, 천총 5 원, 별후부 천총( 別 後 部 千 抱 ) 1 원, 기사장( 騎 士 將 ) 3 원, 파총( 把 總 ) 5 원, 외방겸파총 1 원, 종사관 2 원, 초관 41 원, 교련관 12 명, 기패관 11 명, 별무사 30 명, 군관 38 명, 별군관 10 명, 권무군관 50 명, 가전별초( 罵 前 別 妙 ) 52 명, 기사 1 백 50 명이 다. 남소영( 南 小 營 ) 남부 명철방( 明 哲 功 ) 남소문( 南 小 門 ) 동쪽에 있는데, 1 백 94 칸이다. 남창( 南 용) 남소 영의 북쪽에 있는데, 1 백 37 칸이다. 화약고( 火 藥 庫 ) 남소영 안에 있는데, 52 칸이다. 동영( 東 營 ) 선인문 ( 宣 仁 門 ) 아래에 74 칸이 있고, 또 개양문( 開 陽 門 ) 아래에 10 칸이 있다. 북이영( 北 二 營 ) 예전에는 삼청동 ( 三 淸 洞 )에 있었는데, 뒤에 사직동( 社 樓 洞 )으로 옮겼다. 현종 기유년에 세웠는데 68 칸이다. 집춘영( 集 春 營 ) 창경궁 집춘문( 集 春 門 ) 밖 남쪽에 있는데, 16 칸이다. 직방( 直 房 ) 하나는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는 데, 23 칸이요, 또 흥화문( 興 化 門 ) 밖에 10칸이 있다. 수어청( 守 쩔 廳 )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다 예전 에는 경희궁 오른쪽에 있었는데 곧 옛 용호영( 龍 虎 營 )의 본영( 本 營 )이다 인조 4 년 (1626) 에 창설하여 광주( 廣 州 ) 등 진( 鎭 )의 군무( 軍 務 )를 절제( 節 制 )했다. 숙종 9년 (1683) 에 남한( 南 漢 )으로 진을 옮겼고, 18 년에 옛 제도로 환원했다. 영종 26 년 Cl 750) 에 또 남한으로 진을 옮겼다가 35 년에 다시 옛 제도로 환 원했다 정종 19 년 (1795) 에 또 남한으로 출진( 出 鎭 )했다. 0 뒤에 호조에 이속( 移 屬 )되어 본물( 本 物 주 요한 물건)을 들여 쌓았다 0 사( 使 ) 정 2품 중군( 中 軍 ) 1 원씩, 진영장( 鎭 營 將 ) 3 원, 별장 2 원, 파총 2 원, 초관 26 원, 교련관 17 원, 기패관 19 원, 별군관( 別 軍 官 ) 9 원, 수첩군관( 守 樓 軍 官 ) 61 원이다. 조방( 朝 房 )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는데, 14 칸이다. 총융청( 擔 행 廳 ) 예전에는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었는데, 영종 26 년에 창의문( 影 義 門 ) 밖 연융대( 練 攻 훨 )에 옮겨 설치했으며, 신영( 新 營 )의 영사( 營 舍 )는 3 백여 칸 이 다 인조 2 년에 창설하여 수원( 水 原 ) 광주( 廣 州 ) 양주( 楊 州 ) 장단( 長 浦 ) 남양( 南 陽 ) 등의 진( 鎭 )과 오영( 五 營 )의 군무( 軍 務 )를 절제( 節 制 )한다 영종 정묘년 (17 4 7) 에 경리청( 經 理 廳 )을 폐지하고, 북한영성 장( 北 漢 營 城 將 ) 이하를 본청에 소속시켰고, 경오년에 또 경기 병사( 京 析 兵 使 )를 겸하여 북한( 北 漢 )에 출 진( 出 鎭 )했다가, 경진년에 출진을 폐지하고 병사( 兵 使 )를 감했다 정종조에 수원에 영( 營 )을 설치한 뒤에 Q ]

160 수원진( 水 原 鎭 )의 군무를 절제했다가 폐지했다. 헌종 병오년 0846) 에 총영( 抱 營 )이라고 개칭하였다가, 기유년에 복구하여 청( 廳 )을 설치했다 0 사 중군 l 원씩, 천총 2 원, 진관장( 鎭 管 將 ) 3 원, 파총 2 원, 초 관 10 원, 교련관 15 명, 기패관 2 명, 군관 10 명, 본청군관( 本 廳 軍 官 ) 3 명, 별부료군관( 別 付 料 軍 官 ) 2 명, 감관( 藍 官 ) 2 명, 수문부장( 水 門 部 將 ) 1 명, 한량군관( 閒 良 軍 官 ) 1 백 50 명이다. 또 관성장( 管 城 將 ) 파총 1 원씩, 초관 6 원, 교련관 기패관 5 명, 수첩군관( 守 樓 軍 官 ) 2 명, 군기감관( 軍 器 藍 官 ) 1 명, 소임군관( 所 任 軍 官 ) 3 명, 부료관( 付 料 官 ) 20 명, 성문부장( 城 門 部 將 ) 3 명이 있는데, 이상은 경리청( 經 理 廳 )으로부터 옮 겨왔다 책응소( 策 應 所 ) 창경궁 선인문( 宣 仁 門 ) 밖에 있다. 옛 장용영(봐 勇 營 )의 직방( 直 房 )이고, 곧 지금 의 동영( 東 營 )으로, 군수물을 쌓아 두는 곳이다. 경리청( 經 理 廳 ) 중부 향교동( 獅 校 洞 )에 있고, 북한청( 北 漢 廳 )은 - 이상은 쓸데없이 낀 문구이다. - 태고사( 太 古 츄) 곁에 있는데, 숙종 38 년 (1712) 에 창설하여 북한산성의 사무를 관리한다. 0 도제조 제조 냥청이 있었다. 영조 23 년 (174 7) 에 폐지하여 총융청에 붙였다 평창( 平 용) 창의문(꿇 義 門 ) 밖에 있는데, 상 하 두 창(홍)이 있고, 또 연융대( 練 決 臺 )가 있다, 숙 종 임진년에 창설했다. 0 부평( 富 平 ) 인천( 仁 川 ) 안산( 安 山 ) 양천( 陽 川 ) 양주( 楊 州 ) 용인( 龍 仁 ) 고 양( 高 陽 ) 파주( 被 州 ) 과천( 果 J 11) 시흥( 始 興 ) 교하( 交 河 )의 11 개 고을로부터 본청( 本 廳 )에 대통미( 大 同 米 )를 들여왔다. 0 지금은 총융청에 붙였다. 용호영( 龍 虎 營 ) 처음에는 북부 양덕방( 陽 德 행) 에 있었는데 순조 24 년 (1824) 에 훈국군향소( 訓 局 軍 館 所 ) 자세한 것은 북영( 北 營 ) 조에 있다. 로 옮겨 설치했다. 0 영종 30년 (1754) 에 금군청( 禁 軍 廳 )을 용호영( 龍 虎 營 )으로 고치고, 7 번의 금군( 禁 軍 )을 총령( 擔 領 )했다. 0 겸사복( 暴 司 樓 ) 내금위( 內 禁 衛 ) 우림위(% 林 衛 )의 도합 7 백 명으로 1 청( 廳 )을 삼고 7번으로 나누었 는데, 번마다 3 정 CT) 9 령( 領 )이다. 배종( 暗 從 )하고 입직( 入 直 )하는 일을 맡으며, 병조 판서가 통령( 統 領 ) 한다. 0 선전관 취재출신( 宣 傳 官 取 才 出 身 ) 48 원, 부장취재출신( 部 將 取 才 出 身 ) 15 원을 뽑아서 붙인다 0 7 번 안에서 가후금군( 罵 後 禁 軍 ) 50명을 뽑아 임금이 행차할 때에 시위( 待 衛 )한다, 순조 계사년 (1833) 에 내금위 l 백 명을 감해서 지금은 6 번이 되었다. 상세한 것은 내삼청( 內 三 廳 ) 에 있다. 0 당상 군관( 堂 上 軍 官 ) 16 명, 교련관( 敎 練 官 ) 14 명, 별부군관( 別 付 軍 官 ) 1 백 20 명이다. 조방( 朝 房 ) 금호문( 金 虎 門 ) 밖에 있는데, 14 칸이다- 마군영( 馬 軍 營 ) 금호문 밖에 있고, 청파( 淸 被 ) 노원( 盧 原 ) 두 역( 羅 )의 역마 ( 繹 馬 )가 병조에 입소( 立 所 말을 대기 시키는 것)한다. 호위청(를 衛 廳 ) 장임( 將 任 )이 머무르는 데에 따라 서 옮겨 설치한다. 인조 원년 (1623) 에 4 청( 廳 )을 창설하여 호위(를 衛 )를 맡았는데, 뒤에 3청으로 고쳤 고, 숙종 3 년 (1677) 에 4 청으로 환원했다가 뒤에 또 3 청이 되었고, 정종 원년 (1776) 에 또 합쳐서 1 청을 만들었다 0 대장( 大 將 ) 1원 별장( 別 꺼용) 3원 군관( 軍 官 ) 3 백 50원 소임군관 3원 당상별부료군관 1 원 이다. 직방( 直 房 ) 하나는 창덕궁 상서원( 尙 瑞 院 ) 서쪽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정문(몇 政 門 ) 밖에 있다 포도청( 補 짧 廳 ) 좌청( 左 廳 )은 중부 정선방( 貞 善 행) 파자교( 把 子 橋 ) 동북쪽에 있고, 우청( 右 廳 )은 서부 서 린방( 瑞 觀 행) 혜정교( 惠 政 橋 ) 남쪽에 있다. 본조에서 좌청과 우청을 창설하여 도둑과 사기치는 자를 잡 고, 경( 更 )을 나누어 밤에 순찰하는 일을 맡겼다. 창설한 연조는 자세하지 않은데, 국조( 國 朝 ) 중기( 中 期 ) 에 세웠다고도 한다 0 대장 1 원씩, 종사관 3 원씩, 부장( 部 將 ) 4 명씩, 무료부장( 無 料 部 將 ) 26 명, 가설부 장( 加 設 部 將 ) 12 명이다 - 0 분직( 分 直 )하는 부장은 8 명씩인데, 군사 14 명씩을 거느리고 도성 안팎을 순 찰한다. 0 삼강문외금군( 三 江 門 外 禁 軍 )은 양청( 兩 廳 )에 나누어 속하여 기찰( 誠 察 )하게 한다. 순청(센 廳 ) 좌청은 중부 정선방에 있고, 우청은 중부 정청방( 燈 淸 행)에 있다 본조에서 창설했고, 밤 순찰을 맡는다 창설한 연조는 자세하지 않은데, 개국 초에 세웠다고도 한다. 0 장 당상이 정한 품계도 없고 정한 수 도 없다, [ 권설직( 權 設 職 ) ) 보양청( 輔 養 廳 ) 개국 초에 세자 세손이 나이가 어릴 때에 설치했는데, 강학청( 講 學 廳 )이라고도 부른다. 현종 때에 강학청을 창설했다. 0 보양관( 輔 養 官 ) 口 口 품 口 원 이다. 0 대군사부( 大 君 師 傳 ) 종 9품 왕자사부( 王 子 師 { 專 ) 왕손교부( 王 孫 敎 傳 ) 종 9품 내시교관( 內 待 敎 官 ) 종 9품 동몽교관 ( 童 쫓 敎 官 ) 4원이다 - 봉조하( 奉 朝 뿔) 15 원이다 0 공신( 功 뚝)은 무슨 군( 君 ) 봉조하라 부르고, 나머지는

161 무슨 관( 官 ), 무슨 직( 職 ) 봉조하라고 부른다. 0 실행 아래도 같음 정일품직자( 實 行 正 一 品 職 者 실지로 정 1 품 관직 에 있는 사 람) 공신 정 3품 공신 적장( 觸 長 )과 범인( 凡 人 ) 종 4품 실행 종 1 품 공신 종 3품 공신 적장 종 5품 범인 정 7품 실행 정 2품직자 공신 종 4 품 공신 적장 정 6품 범인 종 7품 실행 종 2품직자 공신 종 4 품 공신적장 종 6품 범인 종 8품 실행 정 3품 당상 관직자 공신 정 5품 공신 적 장 정 9품 범인 정 9품이다. 0 원래 통정대부( 通 政 大 夫 ) 이상으로 작산인( 作 散 A 실무가 없는 직위에 전 보된 사람)에게 녹( 除 )을 붙여준 직( 職 )이었는데, 지금은 정년이 되어 물러난 다음에야 비 로소 봉조하에 붙이며 정한 수는 없다. 부연사신(합웰 使 멀 중국에 가는 사선) 동지겸사은정사(. 至 暴 謝 恩 正 使 ) 정 2품 부사( 副 使 ) 종 2품 서장관( 書 狀 官 ) 당하 정 3품 l 원씩, 당상 역관( 堂 上 譯 官 ) 2 원, 당하 역관( 堂 下 譯 官 ) 21 원이다. 그런 데 의정( 議 政 )이나 종반( 宗 班 )이 정 1 품 겸사은( 暴 謝 恩 ) 진주( 陳 奏 ) 등의 칭호로써 가게 되면 당상 역관 l 원과 자벽( 自 짧)한 당하 역관 1 원을 더 정하며, 사은( 謝 恩 ) 주청( 奏 請 ) 변무( 辦 륜) 진하( 進 買 ) 진향( 進 香 ) 진위( 陳 함) 등의 사( 使 )는 당상 역관 2 원, 당하 역관 17 원이고, 고부사( 告 計 使 ) 는 당상 역관 l 원, 당하 역관 11 원이고, 문안사( 問 安 使 )는 당상 역관 2 원, 당하 역관 4 원이며, 한번 행 차할 때마다 사자관( 寫 字 官 ) 화원( 畵 員 ) 양의사( 兩 醫 허)의 의원( 醫 員 ) 운대관( 雲 臺 官 ) 1 원씩이다. 0 칙사( 動 使 )를 맞을 때에는 원접사( 遠 接 使 ) 정 2품 문례관( 問 禮 官 ) 디 口 품 l 명씩이고, 관( 館 )에 머 물러 있을 때 는 관반사( 館 伴 使 ) 口 口 품 l 원이며, 칙사를 보낼 때 는 반송사( 伴 送 使 ) 정 2품 1 원이다. 부왜사신 (한 慶 使 많 일본에 가는 사신) 통신정사( 通 信 正 使 ) 口 口 품 부사 口 품 종사관( 從 事 官 ) 口 口 품 l 원씩, 제 술관( 製 述 官 ) 口 원, 당상 역관 3 원, 당하 역관 9 원, 양의사의 의원 사자관 2 원씩, 화원 1 원이다. 0 관 백( 關 伯 일본의 최고의 신하, 실권자) 이 새로 서면 그가 사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를 기다려 3 명의 사 신을 차출해서 보내되 함께 가고 함께 오도록 하고 따로 다니지 못하게 한다. 0 대마도주( 對 馬 島 主 ) 가 강호( 江 戶 일본의 서울)로부터 돌아오면 문위역관( 問 感 譯 官 )을 차출해서 보낸다. 0 대차왜( 大 差 慶 일본 에서 사신으로 오는 고관)가 나오변 경접위관( 京 接 현 官 )을 차출하여 보낸다. 산실청( 盧 室 廳 ) 중궁전( 中 宮 願 )과 세자빈궁( 世 子 複 宮 )이 임신한 달에 청( 廳 )을 설치해서 기다려 거행한다. 0 권초관( 握 草 官 ) 口 口 품 은 복력( 福 力 )이 있고 아들이 많은 사람으로 차출한다 잡직 공서( 雜 職 公 暑 ) ] 족친위( 族 親 衛 ) 종성( 宗 姓 임금의 일가)의 단문(샌 免 )과 이 성( 異 姓 ) 의 시마( 總 麻 석달복) 이상, 친왕( 親 王 임금의 아들 또는 형제)의 비 C ~c) 의 시마 이상의 친족, 세자빈( 世 子 續 )의 기 친 (1 년 복을 입는 친족)이 속한다. 선왕( 先 王 )과 선왕후 에 관해서도 같다. 내시부( 內 待 府 ) 북부 준수 방( 俊 秀 행)에 있다, 개국 초에 환시(졸좋) 삼부( 三 府 )를 두어 대궐 안의 음식을 감독하는 일, 명령을 전달하는 일, 소문( 補 門 )하고 소제하는 일을 맡겼다 0 상선( 尙 睡 ) 종 2품 상온( 尙 臨 ) 상전( 尙 傳 ) 상단( 尙 꺼) 응방( 鷹 행) 체아( 週 兒 ) 대전 설리( 大 嚴 옳 里 ) 주방( 酒 房 ) 대객당상( 對 客 堂 上 ) 왕비전 승전색( 王 紀 嚴 承 傳 色 ) 설리(짧 里 ) 체아 상호( 尙 孤 ) 대전 응방 궁방(딩 房 ) 왕비 전 주방( 王 떠 嚴 酒 房 ) 문소전 설리( 文 昭 顧 廳 里 ) 세자궁 장번( 世 子 宮 長 훔) 상탕( 尙 努 ) 대전 상고( 大 嚴 뼈 庫 ) 등촉방( 燈 爛 房 ) 다인설리( 多 人 廳 里 ) 감농( 藍 農 ) 세자궁 설리( 世 子 宮 簡 里 ) 상세( 尙 洗 ) 대전 장기( 大 願 掌 器 ) 장무( 掌 務 ) 화약방( 火 藥 方 ) 사약방( 司 짧 房 ) 장내원( 掌 內 행) 왕 비 전 등촉방( 王 떠 願 燈 爛 房 ) 문소전 진지( 文 昭 嚴 進 止 ) 세자 궁 주방( 世 子 宮 酒 房 ) 빈궁 설리( 複 宮 醒 里 ) 주방 상촉( 尙 爛 ) 대전문 차비( 大 願 門 差 備 ) 왕 비 전문 차비 ( 王 ~c 嚴 門 差 備 ) 장무( 掌 務 ) 왕세자궁문 차비 각궁 설 리문 차비 상설( 尙 設 ) 상제( 尙 除 ) 상문( 尙 門 ) 상경( 尙 更 ) 상명( 尙 짧)에서 종 9품에 이르기까지 도합 l 백 40원이 있다. 0 대전 장번( 大 嚴 長 훔)은 정 한 수가 없고, 출입번( 出 入 짧) 42 원, 왕비전 출입번 12 원이요, 세자궁 장번은 정한 수가 없고 출입번 12 원, 빈궁 출입번 8명이다 0 각처에 상직( 上 直 )하는 소환( 小 줌)은 90 명이다. 내반원( 內 班 院 ) 경복궁 경회남문( 慶 會 南 門 ) 서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창덕궁 선정문( 宣 政 門 ) 안 동쪽에 있었는데, 연산군 때에 철거했다가 중종반정( 中 宗 反 正 ) 뒤에 다시 두었다 0 장렬왕후( 莊 烈 王 尼 )가 이곳에서 돌아 가셨다. 0 김종직( 金 宗 直 )의 기문( 記 文 ) 이 있다. 액정서( 被 훨 暑 ) 각 궁궐 안에 있다. 개국 초에 두었는

162 데, 전알( 傳 調 ) 및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를 바치 는 일, 대궐 문을 거는 일, 대궐 뜰에 포설( 輔 設 )하는 일을 맡는다. 0 사알( 司 調 ) 1 명, 사약( 司 鎬 ) 1 명, 부사약( 副 司 鋼 ) 1 명, 사안( 司 案 ) 1 명, 부사안( 副 司 案 ) 3 명, 사포( 司 輔 ) 2 명, 부사포( 副 司 輔 ) 3 명, 사소( 司 橋 ) 6 명, 부사소( 副 司 橋 ) 9 명이다 배설방( 排 設 房 ) 창 덕궁 숙장문( 關 章 門 ) 밖에 있는데, 어막( 倒 幕 )을 포설하는 일을 맡은 곳이다. 무예청( 武 藝 廳 ) 각 궁궐 안 에 있다. 인조 8 년 (1630) 에 창설하여 30 명을 두었는데, 뒤에 10 명을 늘렸다. 숙종 을묘년 (1675) 에 20 명을 늘렸고, 영종 무진년에 40 명을 늘렸으며, 정종 을 해년 (1795) 에 50 명을 늘렸다가 을사년에 10 명을 줄였고, 순조 임술년 0802) 에 58 명을 늘려서 도합 1 백 98 명인데, 좌번( 左 짧)과 우번( 右 짧)으로 나누었 으며 각각 통장( 統 長 ) 1 원이 있어서 거느린다, 0 훈국의 마군( 馬 軍 ) 과 보군( 步 軍 ), 별감 족속( 別 藍 族 屬 ) 중에서 기운이 있고 신수가 좋고 기예( 技 藝 )에 능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기예를 늘 익혀 별초군 C51J:t 少 軍 )이라 부르고, 또 별초군 중에서 후보를 뽑아 의망( 擬 望 )하면 낙점( 落 點 )을 받아 그 청( 廳 )의 별감으로 삼는다. 궐내각차비( 關 內 各 差 備 ) 대전 반감( 飯 藍 ) 6 명, 별사용( 別 퍼 賽 ) 14 명, 탕수색( 覆 水 色 ) 14 명, 상배 색( 狀 排 色 ) 10 명, 적색(것 色 ) 6 명, 반공( 飯 I) 12 명, 포장( 泡 llc) 2 명, 주색( 酒 色 ) 4 명, 다색( 茶 色 ) 4 명, 병 공( 館 工 ) 2 명, 증색( 薰 色 ) 10 명, 등촉색( 燈 爛 色 ) 4 명, 성상( 城 上 ) 34 명, 수병( 水 兵 ) 18 명, 별감( 別 藍 ) 46 명이며, 왕비전 반감( 飯 藍 ) 4 명, 별사용 6 명, 탕수색 4 명, 상배색 4 명, 적색 4 명, 반공 6 명, 포장 2 명, 주 색 2 명, 다색 2 명, 병공 2 명, 증색 4 명, 등촉색 4 명, 성상 8 명, 수공( 水 I ) 6 명, 별감 16 명이요, 세자궁 반감 4 명, 별사옹 4 명, 탕수색 4 명, 상배색 4 명, 적색 4 명, 반공 6 명, 포장 2 명, 주색 2 명, 다색 2 명, 병 공 2 명, 증색 4 명, 등촉색 2 명, 성상 10 명, 수공 4 명, 별감 18 명이며, 세손궁에 반감 2 명, 등촉색 2 명, 주색 2 명, 성상 2 명, 별감 10 명이다. [ 혁폐 공서( 童 廢 公 暑 ) 승녕부( 承 寧 府 ) 정종 2 년 (1400) 에 태조를 높여서 태상왕( 太 上 王 )으로 하고 관 직을 두고 관부를 설치하였다 0 태종 3 년 (1403) 에 내장고( 內 藏 庫 )를 소속시켰다. 공안부(옆 安 府 ) 태종 경진년 (1400) 에 정종을 높여 상왕( 上 王 )으로 하고 관부를 세웠다. 0 3 년에 보임고( 保 穩 庫 )를 소속시켰 다. 인녕부( 仁 寧 府 ) 태종이 정종 순덕왕 대비( 定 宗 順 德 王 大 紀 ) 김씨를 높여서 부( 府 )를 세웠다 경흥부 ( 敬 興 府 ) 태조 원년에 중궁( 中 宮 )을 위하여 부를 세우고 요속( 燈 屬 )을 두었다 경승부( 敬 承 府 ) 태종 2 년 에 세자를 위하여 부를 설치하였다. 인수부( 仁 壽 府 )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부를 설치하였다 사평부( 司 平 府 )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삼사( 三 司 )를 두어 봉급을 주고 재정 지출을 계획하는 일을 맡겼는 데, 태종 원년에 사평부라고 고쳤다. 0 폐지한 연조는 알 수 없다. 수령부( 壽 寧 府 ) 영락( 永 樂 ) 연간 초 기에 있었다. 충익위( 忠 翊 衛 ) 북부 양덕방( 陽 德 행)에 있는데, 개국 초에 창설했다. 원종공신( 原 從 功 톰 개 국공신)들의 관부이다 뒤에 폐지하여 충훈부( 忠 勳 府 )에 합쳤다 광해군 때에 다시 설치했다가 곧 폐지 하여 병조에 붙였고, 인조 때에 다시 충훈부에 합쳤으며, 숙종 2년 (1676) 에 다시 병조에 붙였고, 6 년에 또 충훈부에 합쳤다가 15 년에 다시 병조에 붙였고, 27 년에 다시 충훈부에 합쳤다. 0 도사( 都 事 ) 2 원, 장례원( 掌 慧 院 ) 공조 남쪽에 있는데,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형조 도사(쩌 費 都 事 )를 두어, 노예의 부적( 傳 籍 )과 판결( 判 決 )에 관한 일을 맡았다. 세조 12 년 (1466) 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선조 임진년에 난민( 亂 民 )들이 불태웠다. 영종 40 년 (1764) 에 폐지하여 형조 본원에 도로 붙였다가 뒤에 보민사( 保 民 司 ) 로 만들고, 51 년에 아주 폐지 했다. 0 판결사( 判 決 事 ) 정 3품 1 원, 사의( 司 議 ) 정 5품 3 원, 사평( 司 評 ) 정 6 품 4 원이 있었다. 종부시( 宗 繹 좋) 처음에는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었는데, 뒤에 북부 관광방( 觀 光 功 ) 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전중시( 願 中 좋)를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종부시를 두어 선원보첩( 覆 源 語 體 ) 을 지어 기록하는 일과 종실( 宗 室 )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맡겼다. 중종 때에 효사전( 孝 思 嚴 )을 폐지하 여 본시( 本 놓)로 하였고, 지금 임금 2년 (1865) 에 종친부( 宗 親 府 )에 옮겨 붙였다. 0 도제조 제조 2원 씩, 정 (le) 1 원이고, 첨정은 감하며, 주부 직장 l 원씩이다. 0 윤자영( 尹 子 傑 )의 제명기( 題 名 記 )가 있다. 0 소각( 小 閔 )이 있어서 선원 보략( 瓚 源 讀 略 ) 과 선원록( 落 源 錄 ) 을 봉안( 奉 安 )한다. 제생원( 濟 生 院 ) 북부 양덕방( 陽 德 행) 에 있다. 태조 6 년 (1397) 에 창설하여, 약의 재료를 저장해 두고 가난한 백성의 1 끼 /}

163 병을 치료하고 또 각도( 各 道 ) 각리( 各 里 )의 의학원( 醫 學 院 )에 교수( 敎 授 )를 나누어 보내서 약을 주어 병 을 고쳤다. 뒤에 모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사섬시( 司 觸 츄) 예전에는 동부 숭교방(뽕 敎 행) 에 있었는데, 현종 때에 그 옛터를 성균관( 成 均 館 )에 하사하여 반촌( 伴 村 )을 보충하였다. 지금은 서부 사 직동( 社 樓 洞 )에 있다. 태종 때에 사섬서( 司 擔 暑 )를 두었는데 뒤에 시( 휴)로 승격하였다. 돈을 만드는 일 과 외거노비( 外 居 뼈 轉 제 집에서 사는 노비)의 공포( 責 布 베를 세금으로 바치는 세의 한 가지) 등의 일 을 맡아 보았다. 인조 병자란 뒤에 폐지하여 제용감( 濟 用 藍 )에 붙였다가 22 년에 다시 두었다. 숙종 31 년 (1705) 에 폐지하여 호조에 붙여서 사섬색( 司 觸 色 )이라 불렀으며, 상용[ 經 用 ]하는 백휴지( 白 休 紙 )를 맡 는다. 0 정 부정 첨정 주부 직장 1 원씩이 있었다 내부시( 內 府 놓)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 치하여, 재화( 財 貨 )를 창고에 저장하고 복식( 服 節 )을 내고 들이며, 등촉( 燈 爛 )을 별려놓는 등의 일을 맡 았다. 뒤에 폐지했는 데, 그 연조는 자세하지 않다 풍저창(뿔{ 諸 용) 북부 의통방( 義 通 야)에 있다. 개국 초 에 고려 제도를 따 라서 설치했고, 쌀과 콩 초둔( 草 휩) 지지( 紙 地 ) 등의 물건을 맡았다. 뒤에 폐지하여 장흥고( 長 興 庫 )에 붙였고, 지금은 내시( 內 待 )의 봉급, 노인의 세찬( 歲 購 새해에 음식을 내리는 것), 사신 ( 使 토)에게 내려주는 쌀을 맡는다, 0 수( 守 ) 주부 직장 봉사 부봉사 l 원씩이 있었다. 의염창( 義 轉 용) 개국 초 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하여 염세( 靈 脫 )에 관한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 데, 그 연조 는 알 수 없다 전농사( 典 農 司 ) 성현( 成 { 見 )의 용재총화( 爛 顆 農 話 ) 에 말하기를, 김자갱( 金 子 響 )이 판 사가 되고 성간( 成 但 )이 직장이 되었는데, 뒤에 폐지하여 군자태창( 君 資 太 용)이 되었다 - 하였다 가각고 ( 架 聞 庫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도서[ 圖 籍 ]를 모아 저장하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 는 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해전고( 解 典 庫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전당( 典 當 )에 관한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사온서( 司 臨 暑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 여 술과 단술 바치는 일을 맡았으며, 서부 적선방( 積 善 야)에 있었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0 영( 令 ) 주부 직장 봉사가 l 명씩이 있었다. 사축서( 司 좁 暑 ) 무악( 母 톰) 남쪽에 있고, 분서( 分 暑 )는 남부 회현방( 會 賢 행)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전구서( 典 願 暑 )를 두어 여러 가지 가축 먹이는 일을 맡았는데 뒤 에 사축서로 이름을 고쳤다. 인조 15 년 (1637) 에 폐지하여 전생서( 典 뺨 暑 )에 합 쳤고, 영종 43 년 Cl 767) 에 호조에 옮겨 합쳐서, 양 돼지 염소 거위 [ 居 雅 ] 집오리 등을 진 배 ( 進 排 )하 는 일을 나누어 맡았으며, 가두어 기르는 양과 염소는 40마리이다. 0 제조 사축( 司 좁) 1 원씩과, 별제 2원이 있었다 귀후서( 歸 훔 暑 ) 용산강( 龍 山 江 )에 있다 분서( 分 暑 )는 남부 회현방에 있다 태종 6년 0406) 에 창설하여 관곽( 相 擺 )을 만들어서 팔고, 나라의 예장( 禮 聲 )에 공급하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정 종 3 년 (1779) 에 폐지하여 선공감( 續 工 籃 )에 합쳤다. 0 제조 l 원 별제( 別 提 ) 6 원이 있었다. 0 정이오 ( 鄭 以 흠)의 기문( 記 文 ) 이 있다. 소격서( 昭 格 暑 ) 북부 진장방( 鎭 長 행)에 있었는데 본조에서 창설했다. 삼 청성신( 三 淸 星 辰 )에게 초제( 醒 察 ) 지내는 일을 맡았었다. 삼청전( 三 淸 嚴 ) 이 있어 욱황상제( 玉 皇 上 帝 ) 태 상노군( 太 上 老 君 ) 보화천존( 普 化 天 尊 ) 재당제군( 棒 鐘 諸 君 ) 등 10 여위( 位 )를 제사지내는데 모두 남자의 모습이다. 태일전( 太 - 願 )에서는 칠성제수( 七 星 諸 宿 )를 제사지내는데, 모두 머리 깎은 여자의 모습이다. 또 안팎 여러 제단( 聚 t훨)이 있어 사해용왕( 四 海 龍 王 ) 신장( 神 將 ) 명부시왕(홍 府 十 王 ) 수부제신( 水 府 諸 神 )을 제사지내는데, 제명( 題 名 )한 위판( 位 板 )이 무려 수백이다. 중종 14 년 (15 1 9) 에 폐지했다가 25 년에 다시 설치했고, 선조 임진란 뒤에 드디어 폐지했다 0 곁에 우물이 있는데 옛적에 초제할 때 사용하던 것이므로 성제정( 星 聚 井 )이라고 한다. 또 아래에 보인다. 0 제조 영 l 원씩, 별제 참봉 2원씩이 있었 다. 도염서( 都 梁 暑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천에 물들이는 일을 맡았다 - 뒤에 폐지하여 제용감에 합쳤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열무서( 關 포 暑 ) 무당과 박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활인서( 活 /\훌) 가 되었다 창설하고 폐지한 연조는 알 수 없다 전함서( 典 籃 暑 ) 중부 징청방( 燈 淸 행)에 있고, 외사( 外 司 ) 는 서강( 西 江 )에 있다 개국 초에 사수감( 司 水 藍 )을 두어 전함( 戰 職 )을 만들고 고치며 수송을 감독하는 등의 일을 맡았었다. 세조 을유년 0465) 에 전선( 典 船 )이라 고치고, 뒤에 지금의 이 름으로 고쳤다 경기 q ]

164 좌우도수참( 京 析 左 右 道 水 站 )에 붙였다가, 뒤에 폐지하여 공조에 붙였다. 0 도제조 제조 제검( 提 檢 ) 별좌( 別 坐 ) 별제( 別 提 ) 1 원씩, 수운판관( 水 運 判 官 ) 2 원, 해운 판관 l 원이 있었다. 0 남곤( 南 홍)의 기문 ( 記 文 )이 있다. 전연사( 典 消 司 ) 경복궁 홍례문( 弘 禮 門 ) 서쪽에 있는데, 본조에서 설치하여 궁궐의 물이 잘 흐르도록 하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폐지하여 선공감에 합쳤다. 0 제조 1 원, 제검 별좌 별제 모 두 5 명; 직장 2 원, 봉사 2 원, 참봉 6 원이 있었다 수성금화사( 修 城 禁 火 司 ) 종루( 鍾 樓 )의 동쪽에 있는데, 본조에서 설치하였다. 도성( 都 城 )과 궁성( 宮 城 )을 고쳐 쌓는 일, 그리고 궁궐 관공서 방리(행 里 )의 집 집마다 불끄는 등의 일을 맡았고 야간 출순소( 出 젠 所 )를 주관했다 뒤에 폐지하여 불끄는 일은 한성부에 붙이고, 성을 고치는 일은 병조에 붙였다. 0 도제조 l 원, 제조 2 원, 제검 4 원, 별좌 6 원, 별제 3 원이 있었다. 보민사( 保 民 司 ) 호조의 서쪽 가에 있었으니, 곧 옛날 장례원이다. 영종 40년 Cl 764) 에 창설하여 형조와 한성부의 속전( 購 錢 죄값으로 내는 돈, 벌금과 비슷함)을 맡았는데, 5 1 년에 다시 폐지하고, 지금 은 호조의 주요한 물건을 들여 쌓는다. 예의상정사( 禮 嚴 詳 定 司 ) 예의상정소라고도 부른다. 개국 초에 고 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했다가 뒤에 폐지했다. 전제상정소( 田 制 詳 定 所 ) 세종 26 년 (1444) 에 창설했는데, 뒤에 폐지했다. 경복궁 제거사( 景 福 宮 提 學 司 ) 태조 3 년 (1394) 에 창설하여 소제하는 일과 자물쇠를 관리 하는 일을 맡았다가 뒤에 폐지했다. 종학( 宗 學 ) 세종 원년에 창설하여 종실( 宗 室 )을 바로잡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연산군 때에 폐지했고, 중종 초에 다시 설치했다가 뒤에 또 폐지했다. 0 도션( 導 善 ) 전 훈( 典 訓 ) 1 원씩이요, 사회( 司 讀 ) 2 원이 있었다. 0 경복궁 제거사부터는 모두 폐지한 연조를 알 수 없다. 북학( 北 學 ) 태종 때에 증설( 增 設 )했다가 곧 폐지했고, 뒤에 자수원( 孫 壽 院 )이 되었다. 현종 2년 (1661) 에 원( 院 )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흉년때문에 준공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남구만( 南 九 萬 )이 북학교수( 北 學 敎 授 )였다. 언문청(끓 文 廳 ) 세종 때에 설치했다 신숙주( 申 政 꺼) 성삼문( 成 三 問 )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짓 게 했다. 내경청( 內 經 廳 ) 세조 때에 대궐 안에 청을 설치하고, 조정의 선비 홍응( 洪 應 ) 강희안( 姜 希 頻 ) 성 임 ( 成 任 ) 정 난종( 鄭 蘭 宗 ) 조치 규( 趙 雅 圭 ) 이 기 수( 李 期 몇) 등에 게 명 하여 불경 ( 佛 經 )을 쓰게 했다. 대청관( 大 淸 觀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하여 독( 廳 천자 대장군 왕을 표시하는 큰 기( 魔 )) 을 간직해 두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비계사( 備 威 司 ) 연산군 때 창설하여 철갑( 鐵 甲 )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홍귀달( 洪 貴 達 )의 기문이 있다. 응방( 鷹 행) 개국 초에 좌우방( 左 右 행)을 두었다가, 숙종 41 년 0715) 에 폐지했다. 장용영(밤 勇 營 ) 동부 연화방( 運 花 행)에 있다. 정종 을사년 (1785) 에 창설하고 11 년에 이현 별궁(짧 l맹 別 宮 )을 영( 營 )으로 삼았다 순조 원년 (1800) 에 폐지하고, 지금은 훈국( 訓 局 )의 동영( 東 營 ), 혜청( 惠 廳 선혜청)의 동창( 東 용)이 되었다 연 방원( 聯 芳 院 ) 연산군 갑자년 이후로, 몸매가 좋고 예쁜 부녀자들을 대궐 안으로 뽑아 들였는데, 처음에 는 백으로 헤아리다가 끝내는 만으로 세게 되기에 이르렀다 기생의 이름을 고쳐서 운평( 運 平 )이라 하 고, 대궐에 들어간 기생을 흥청( 興 淸 )이라 하며, 따라 들어간 사람을 계평( 繼 平 ) 속홍( 續 紅 )이라 하고, 악공( 樂 工 )을 고쳐서 광희( 廣 熙 )라 하고, 이들이 있는 곳을 연방원이라고 불렀다 원각사( 圓 覺 좋)를 국 ( 局 )으로 하고, 또 의성위( 宜 城 텀) 남치원( 南 致 元 )의 집을 함방원( 含 芳 院 )으로 하며, 제안대군( 齊 安 大 君 ) 의 집을 부양원( 當 陽 院 )으로 하고, 견성군( 觀 城 君 )의 집을 진향원( 珍 香 院 )으로 하여, 흥청 및 현수( 鉉 手 ) 들을 열을 지어 거처하게 했다. 취흥원( 聚 紅 院 ) 창경궁 명정전( 明 政 嚴 ) 오른쪽에 있었는데, 흥청 가운데 뽑힌 사람이 살았고, 병을 앓는 사람은 청흠각( 淸 款 聞 )에 있었다, 자수궁( 忽 壽 宮 )을 회록각( 會 禮 聞 )으로 삼아서, 일찍이 임금의 사랑을 받은 일이 있는 사람을 살게 했다. 두탕호청사( 柱 覆 護 淸 司 ) 나인( 內 人 ) 가 운데에서 예쁨이 쇠퇴한 사람이 살았다. 호화고( 護 華 庫 ) 흥청들의 음식 재료를 저장했다 전비사( 典 備 司 ) 흥청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추혜서( 追 惠 著 ) 나인을 호상( 護 喪 )하던 곳이다 광혜서( 廣 惠 暑 ) 효사묘( 孝 思 關 ) 곁에 있는데, 나인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포염사( 布 梁 피) 아상복(펴햄 服 )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 봉순사( 奉 順 피) 사냥하는 데 쓰는 그물의 도구를 실어 나른다. 이상은 모두 연산군 때에 설치한 것으로 곧 폐지했다. 충의위( 忠 義 衛 ) 공신( 功 멀)의 자손이 속했다 충찬위( 忠 贊 衛 ) 원종공신( 原 從 功 멀)과 자손 지 1 A 약

165 속 이상과 첩의 아들로서 종가( 宗 家 )를 이은 사람이 속했다 충순위( 忠 順 衛 ) 이성( 異 姓 )으로 시마( 總 麻 ) 복을 입는 외 6촌 이상 친왕비( 親 王 떠)의 사마복을 입는 외 5 촌 이상의 친족이 속한다. 선왕 선후( 先 王 先 尼 )에 관해서도 같다. 또 동반( 東 班 문신) 6품 이상, 서반( 西 班 무신) 6품 이상으로 일찍이 실지 높은 벼 슬을 지냈던 사람, 문과와 무과 출신 생원 진사,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자손과 사위 아우 조카가 속한다. 친군위( 親 軍 衛 ) 영안( 永 安 ), 지금의 함경도 (J 或 鏡 道 ) 사람에서 남도와 북도 각각 20명씩을 붙인 다 [주 D-00 1] 산하 백이( 山 河 百 二 ) ; 국방상의 요해지가 되는 지리적 조건을 의미하는데, 옛날 중국 진( 奏 ) 나라의 서울을 보호하는 요새가 1 백 2 라는 뜻이다. [ 주 D-002 ] 오관 사력(죠 官 司 層 ) 천문을 맡아보는 관원들을 말하는 것인데, 중국에서는 당대( 當 代 )이후 로 오관정( 五 官 正 ) 오관부(죠 官 副 ) 등의 관원이 있어 사시절의 천문을 맡아 보았다 [주 D - 003] 사유( 四 游 ) 무한히 넓은 면적을 의미하는데, 옛날에는 천문학적으로 볼 때에 28 수( 宿 )의 분 야 외에 다시 상 하 동 서로 1 만 5천 리씩의 넓은 면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사유라 한다는 것이다. [주 D - 004] 강일( 剛 日 ) 천간 10자 중 갑 병 무 경 임에 해당하는 날을 강일 을 정 기 신 계 에 해당하는 날을 유일( 柔 日 )이라 한다. [ 주D-005 ] 경력소( 經 歷 所 ) ; 의정 양사 금부의 세 관청 관원이 모여서 심문하던 중범 죄수를 말한다 고문관 실록) 정조 22년 무오 0798,가경 3) 두육분운 을 완성 하다 7월 22 일 (갑신) 두육분운( 柱 陸 分 題 ) 이 완성되었으므로 신하들에게 반사( 領 陽 )하였다. 상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시교( 詩 敎 )가 느슨해진 뒤로 시경( 詩 經 ) 의 남긴 뜻을 잃지 않은 것을 찾아 본다면 오직 두보( 柱 南 )가 거기에 가까운데 율( 律 )은 특히 성( 聖 )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송( 宋 )나라 의 육유( 陸 游 ) 역시 그 체( 體 )가 순수하고 음(흡)이 우아하여 낮게 깔리며 애조를 띠는 것과는 같지 않 다. 고 하여 특별히 드러내어 밝혔었다. 그리고는 여러 문신( 文 토)들에게 명하여 이문원( 據 文 院 )과 고문 관( 考 文 館 )에 모여서 교정하는 일을 분담케 한 뒤 운서류( 題 書 類 )의 체재로 편집하고 정리자( 整 理 字 )로 간행케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당시의 풍조에 침을 가해서 교정하기 위함이었다. [주 D-00 1 ] 시교( 詩 敎 ) 시를 통한 인간 교육과 사회 정화. [ 주 D - 002] 이문원( 擺 文 院 ) 규장각, [주 D-003 ] 고문관( 考 文 館 ) 홍문관 [주 D - 004] 정 리 자( 整 理 字 ) ; 정 조 때 주조한 동활자( 鋼 活 字 ) 정조 24 년 경신 (1800,가경 5) 윤 4월 1 3 일 (을축) 주자소를 의영고로 옮겨 설치하다 - c ι

166 주 :.Z] 스(, f llj[ )-년 의장고( 嚴 f 大 庫 )로 옮겨 설치하였다- 검교 직제학( 檢 校 直 提 學 ) 이만수( 李 B 免 秀 )가 아뢰기 E크 E크, 주자소는 곧 어정 책자( 倒 定 冊 子 )를 찍어내는 곳으로서 당초 설치할 때의 규모는 태종조( 太 宗 朝 )의 고 사를 따랐으니, 가볍지 않은 체모와 소홀히 하기 어려운 사정은 운각(릎 聞 )보다 한층 더 중하다 할 수 있는데, 춘방( 春 행)과 계방( 桂 야)의 직소( 直 所 )가 연이어 들어와 자리잡은 뒤로 본소( 本 所 )를 옮겨 설치 할 장소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홍화문( 弘 化 門 ) 오른쪽 익랑( 寶 厭 )의 의장고 대청( 大 廳 )과 동북 위장소( 東 北 衛 將 所 ) 및 어영군 번소( 倒 營 軍 짧 所 ) 등 도합 10 여 칸을 차지한다면 가까스로 자 리를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의장( 展 {j::) 은 돈화문( 敎 化 門 ) 좌우의 익랑이 본디 의장을 나누어 두었던 곳이 니, 그쪽에다 합치는 것이 형편상 매우 좋겠으며, 동북 위장소는 본디 일정한 장소가 없어 일찍이 여러 번 옮겼던 일도 있으니 장서각( 藏 書 聞 ) 행각( 行 聞 )으로 또한 옮기게 하는 것이 좋겠고, 입직( 入 直 )하는 향군( 獅 軍 )은 그 수효가 많지 않으니 선인문( 宣 仁 門 ) 근처로 이주하든지 아니면 동룡문( 網 龍 門 ) 직소로 나누어 자리잡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이 분배한다면 별로 문제될 만한 소지가 없겠습니다만, 사안이 관청의 이전과 군병( 軍 兵 )의 거취에 관계되어 감히 독단으로 조처할 수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만수가 또 아뢰기를, 춘방은 주자소에 들어가 자리잡았으나 계방은 고문관( 考 文 館 )의 옛 위종사( 衛 從 司 )에 임시로 자리잡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는 주자소가 의장고로 이전하게 되었으니 계방의 직소가 춘방의 동쪽 행각( 行 聞 ) 으로 들어가 자리잡게 하소서. 하니,따랐다 I 원전 ] 47 집 265 면 분류 *행정 -중앙행정( 中 央 行 政 ) / *건설( 建 設 ) / *출판-인쇄( 印 빼) [ b

167 동룡문 기병의 파수 분담[ 騎 兵 分 把 ] 대보단( 大 報 펄) 4 명. 돈화문( 敎 化 門 ) 17 명 금호문( 金 虎 門 ) 13 명. 단봉문( 月 鳳 門 ) 10 명. 요금문( 嘴 金 門 ) 7 명. 선인문( 宣 仁 門 ) 10 명. 홍화문( 弘 化 門 창경궁 ( 昌 파 宮 )의 정문( 正 門 )) 4 명. 통화문( 通 化 門 위의 도총부( 都 抱 府 ) 조에 보임) 9 명. 경추문( 景 秋 門 위의 위장소조에 보임) 4 명. 동소( 東 所 ) 5명 서소( 西 所 ) 5 명. 남소( 南 所 ) 5 명. 북소( 北 所 ) 5 명. 동룡문( 鋼 龍 門 창경궁 안에 있는 문) 전루군( 傳 패 軍 ) 2 명. 동수구( 東 水 口 ) 전루군 2 명. 어정( 細 井 ) 전루군 2 명. 경화문( 景 化 門 ) 전루군 2 명. 광정문( 光 政 門 창경궁 명정전( 明 政 願 )의 남문) 전루군 2 명. 인정문( 仁 政 門 창덕궁 인정전( 仁 政 嚴 )의 정문) 전루군 2 명 진선문 ( 進 善 門 ) 전루군 2 명. 마군영 ( 馬 軍 營 ) 전루군 2 명 돈화문( 敎 化 門 ) 전루군 2 명. 경 추문 전루 군 2 명. 북수각( 北 水 聞 ) 전루군 2 명 영숙문( 永 蕭 門 ) 전루군 3 명. 내병조( 內 兵 暫 ) 3 명 상의 원( 尙 衣 院 ) 2 명 금루( 禁 源 ) 급수군(냈 水 軍 ) 2 명 규장각( 奎 章 開 ) 3 명. 승정원( 承 政 院 ) 1 명 종묘( 宗 關 ) 20 명. 사직( 社 樓 ) 7 명. 영희전( 永 禮 願 ) 8 명. 경모궁( 景 寒 宮 ) 9 명. 문희묘( 文 禮 關 ) 3 명. 경복궁( 景 福 宮 ) 5 명. 경희궁( 慶 熙 宮 ) 12 명. 군기시( 軍 器 츄) 3 명. 화약고( 火 藥 庫 ) 2 명, 의금부( 義 禁 府 ) 12 명 이군색 도안정( 都 案 廳 ) 각 1 명 위장소( 衛 將 所 ) 관방직( 官 房 直 ) 1 명, 조사위장( 暫 司 衛 將 )의 야직( 夜 直 ) 2 명. 서원청( 書 員 廳 )의 방직( 房 直 ) 2 명, 사령방( 使 令 房 )의 군사 1 명, 분군부장( 分 軍 部 將 )의 사후( 同 候 ) 2 명, 취 반직 ( 吹 飯 直 ) 1 명 도여수( 都 旅 帥 )의 경 생군( 更 뺨 軍 ) 1 명, 유영군( 留 營 軍 ) 2 명. 궐내 교대군( 關 內 交 代 軍 ). l 명. 0 병이 있는 자는 교대한다

168 ~t캘풍 복원처비 기본계획연구 4. 건물판련 사료 71 E} 스 0 여 L 워 E 문다 희다 근 디τ - 보정문 - 연희문 - 정일재 - 만수전 저승전 - 자경당 - 강서원 - 치 i 여 님 τr

169

170 선인문 이 문은 조선 성종 15 년 (1484 년)이전에 있던 것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명칭만 같을 뿐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년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광해군 8 년 (1616 년 중건하였는데 철종 8년 (1857) 11 월 빈전 도감 가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동북소부장청 위장청 주자소 대청판당 등과 함게 소실되 었으므로 고정 14 년 0877 년) 복원하였다. 동궐도에는 월근문과 같이 2단의 솟을 문이나 현재는 변형되었다.(고종때 변형으로 추정)

171 태해 기 1 프료 2--, 연산 5 1 권, 9 년 0503 계해 / 명 홍치( 弘 治 ) 16 년) 11 월 17 일(경진) 2 번째기사 경수소 철거할 때 궁궐을 내려다 본 군인의 일로 병조의 관리를 국문케 하다 전교하기를, 통화문( 通 化 門 ) 밖 경수소( 警 守 所 )를 철거할 때, 대궐 안이 환히 바라다보이는 곳을 가린 뒤에 부역(합 投 )하여야 할 것인데, 군인들이 집에 올라가 환히 바라다 보았으니, 병조( 兵 뽕) 의 관리를 국문하라 하였다. 중종 1 05 권, 39 년 0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 년) 11 월 10 일(을사) 4번째기사 정원에 전교하여 창경궁으로 피전할 것을 명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내 가 오래도록 병을 앓아 한 곳에 오래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 미시( 未 時 )에 창경궁( 昌 慶 宮 )으로 피전( 避 嚴 )하려 하니 통화문( 通 化 門 )을 열어 아랫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하라. 또 정 원-약방 등은 곧 옮겨와야겠지만 긴급하지 않은 관아는 내일 옮겨와도 된다. [ 미시 말에 정원이 창경궁으로 옮겨갔는데 담장은 퇴락하고 창은 모두 찢어져서 행궁( 行 宮 )과 다를 것 이 없었다 대 내( 大 內 ) 또한 훼손되어 모든 일이 군색하다고 했다. ] 중종 105 권, 39 년 0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 년) 11 월 15 일(경술) 11 번째기사 폐비 신씨를 궁에 들였다는 소문이 나다 사알 이수천이 정원에 말하였다. 입내( 入 內 )하는 궁인( 宮 人 )이 있어 통화문( 通 化 門 )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 놓았기에 들어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는데, 들으니 상이 임종시에 폐비( 廢 紀 ) 신씨( 慣 Jf;)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입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문을 열어놓고 신씨를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는 대개 헛소문이다, 자세히 물 어보 니 상의 옥체가 미령하기 때문에 요사스러운 여승들을 불러다 기도를 드리려고 한 것이 었다고 했다. 인조 38권, 17년 (1639 기묘 / 명 숭정(뚫 順 ) 12 년) 1 월 28 일(병술) 1 번째기사 좌의정 신경진 우의정 심열 호조 판서 이명을 인견하여 세폐에 대해 의논하다 김세렴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통화문( 通 化 門 )에서 신부( 信 符 )를 차고 출입하는 여인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물어보았더니 척리( 蘭 里 )의 문안비( 問 安 陣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제왕이 친족을 친애 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말류의 폐단이 마침내 궁금( 宮 禁 )이 엄하지 않게 될까 염려됩니다. 듣건대, 대전( 大 嚴 ) 중전의 신부( 信 符 )는 각각 정해진 수효가 있는데, 지금은 점차 많아졌다 고 하니 살피시기 바랍니다 - /

172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인조 45권, 22년 (1644 갑신 / 명 숭정(옳 順 ) 1 7 년) 8월 15 일 (경오) 1 번째 기 사 원손이 돌아오자, 백관 시종관들이 맞이하다 원손( 元 孫 )이 돌아오자, 백관이 모화관( 寒 華 館 )에 나가 교외에서 맞이하였고, 시종관( 待 從 官 ) 들은 통화문( 通 化 門 ) 안에서 맞이하였으며, 보양관 이식( 李 植 ) 이목( 李 쫓) 등이 문안하였다. 숙종 38권, 29년 (1703 계미 / 청 강희 ( 康 熙 ) 42년) 12월 15 일 ( 병 술 ) 2번째 기 사 연잉군의 관례를 절목에 따라 요화당에서 행하다 임금이 연잉군( 延 祝 君 )의 관례( 冠 禮 )를 요화당( 搖 華 堂 )에 행하게 하고, 빈(좁 )12219) 을 정 2 품( 正 二 品 )으로, 찬( 贊 )12220) 은 종 2품( 從 二 品 )으로 차출하여 세자( 世 子 )의 관례에 비해 한 등급을 낮게 하도록 명하였다. 예조에서 절목( 節 目 )을 찬정( 擺 定 )하였는데, 전례가 없던 일 이라고 하여 세자의 관례에 의거하여 차등( 差 等 )을 두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분수에 넘치는 바가 많아 여론이 아주 해괴하게 여겼다. 판부사( 判 府 事 ) 서문중( 徐 文 重 )은 공식 석상에서 그 절목 이 타당하지 못하고 거행 장소도 합당치 못함을 극력 말하자, 예조 판서 조상우( 趙 相 愚 )가 드디어 상소하여 인구(린 쯤)하고, 대신( 大 톰 )에게 자문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대신( 大 멀)에게 명을 내려 절목을 첨삭(폼 創 )하도록 하였다. 예조 참의( 禮 暫 參 議 ) 신임( 申 짧)이 또한 대신( 大 토) 이 잘못을 지적하였다 하여 상소하였는데, 이르기를, 무릇 군명( 君 命 )으로 일을 처리할 때에 사연( 陽 훌)이나 사시( 陽 論 ) 같은 여러 길흉사( 吉 ~ 事 )는 해당 관청에서 직접 진배( 進 排 )12221) 하는 것이니 지금 각사( 各 司 )에서 진배( 進 排 ) 한 것은 군명( 君 命 )을 공경하는 바입니다. 장소가 이미 성교( 聖 敎 )에서 나와 사제( 私 第 )에서 행할 수 없었으니, 별당( 別 堂 )으로 정한 것 또한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종백( 宗 伯 ) 12222) 의 소( 流 )에 절목( 節 텀)이 마땅하지 않다고 대충 말하였으므로, 어떤 일 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니, 진배( 進 排 )한 일을 지적한 것 같다. 해당 관원이 직접 진배하는 것은 군명( 君 命 )을 공경할 뿐만 아니 라, 사체( 事 體 )를 보존( 保 存 )한 것이다 이는 옛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일반적인 규칙에 불과할 뿐이고, 본래부터 사리( 事 理 ) 에 해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임 대신( 原 任 大 닮)이 홀로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 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내가 실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조금 후에 예조에서 절목( 節 目 )을 가지고 대신( 大 톰 )에게 가서 의논하니, 서문중( 徐 文 重 )은 의논하기를, 친왕( 親 王 )의 관례( 冠 禮 )에 대해서는 집례회전( 集 禮 會 典 )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오례의( 五 禮 嚴 ) 에는 빠졌습니다. 예조( 禮 費 )에서 등록( 鷹 錄 )한 것으로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면, 그것은 새로 만들어 행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예법( 禮 法 )을 자세히 검토하여 보고 명백히 법식을 정해야 할 것인데, 예를 거행하는 장소를 요화당( 搖 華 堂 )으로 정하였으 므로, 신은 미안( 未 安 )한 일로 생각합니다. 대개 성인( 成 )\) 이 되는 예는 삼가례( 三 加 禮 )에서 시작되므로, 동서( 東 序 )12223) 와 동서 밖에서 관( 冠 )을 씌우고 호( 戶 )의 서쪽에서 예주( 體 酒 )를 먹으니, 관례를 행하는 장소가 같지 않은 것은 명분( 名 分 )을 엄하게 하고 등급의 차별 q ]

173 을 밝히려고 하기 때 문입 니 다 왕세자의 관례도 또한 동궁( 東 宮 )에서 행하는데, 지금 유독 사제( 私 第 )에서 거행하지 않고 대내( 大 內 )의 별당( 別 堂 )에서 거행하니, 차례를 크게 잃은 것 이 아니 겠습니까? 주원(함 院 )12224) 에서 예주( 禮 酒 )를 준비하고 상방( 尙 方 )12225) 에서 의 복을 진열( 陳 列 )하여서 모두 왕세자 관례의 의식을 따랐으니 비록 차등( 差 等 )은 두었다고 하나 어찌 혼동하고 핍존( 遍 尊 )하는 혐의가 없겠습니까? 해당 관원의 직접 진배( 進 排 )하는 것은 조그마한 절차에 해당되는 것이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미안( 未 安 ) 한 하교를 받고 송구스러워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문의( 問 議 )하심을 받고 보잘것 없 는 의견을 대략 진달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여( 李 좋)는 의논하기를, 황조회전( 皇 朝 會 典 ) 에는 황태자( 皇 太 子 )의 관례( 冠 禮 )를 봉천전( 奉 天 願 )에서 거행하고, 친왕( 親 王 )의 관례는 홍무( 洪 武 )12226) 때는 왕저( 王 郞 )에서 정행( 定 行 )하였고, 성화( 成 化 )때 는 다시 봉천문( 奉 天 門 외조의 정분 ) 앞 동무( 東 顧 )로 정하였습니다. 지금 왕자( 王 子 )의 관 례를 대내( 大 內 )의 별당( 別 堂 )에서 거행하는 것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홍무( 洪 武 ) 때 정한 바로 볼 것 같으면 사제( 私 第 )가 알맞은 장소이겠습니다. 비 록 성화( 成 化 ) 때 바꾸어서 정한 의식으로 말하더라도 마땅히 대내( 大 內 )에서 행하지 않는 것 이 분명합니 다. 예주( 體 酒 )를 준비하고 의복을 진열하는 것도 예조에서 이미 그 절목( 節 目 )을 고쳤으니, 지금 의논할 것은 없습니다. 해당 관원이 직접 진배( 進 排 )한 것도 모두 자 기들의 임무이 니, 이것에 대하여서는 혐의스럽게 볼 것 이 없습니 다. 또한 대명집례( 大 明 集 禮 ) 를 상고하여 보 니 황태자의 관례에는 삼공(프 公 )중 1 인이 빈(좁)이 되고 태상경( 太 常 맺~)이 찬( 贊 )이 된다 하였고, 친왕( 親 王 )의 관례에는 예부( 禮 部 )와 태상관( 太 上 官 )이 빈(좁)과 찬( 贊 )이 된다고 하였으니 태상관 중 경 (9 郞 )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예부 관이란 것도 또한 반드시 상서( 尙 書 )는 아닐 것입니다. 찬( 贊 )이란 본래 빈(좁)의 종자( 從 者 ) 인 데, 이른바 태 상관이라고 한 것은 박사( 博 士 ) 등속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아경 ( 亞 9 郞 )으로 찬( 贊 )을 삼는 것은 역시 과중( 過 重 )한 것 같습니다. 이미 의심난 바가 있어서 감히 이것을 아울러 아휩 니 다. 하고, 다른 대신( 大 멀)은 병 때문에 헌의( 鳳 議 )하지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전교하기를, 관례의 장소를 요화당(짧 華 堂 )의 뒤로 정하는 것은 의아함이 없지 않아 회전( 會 典 ) 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대내( 大 內 )의 별당( 別 堂 )도 온당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바야흐로 참 작하여 변통하려 하는데 대신의 의견이 또한 이와 같으니, 장소는 통화문( 通 化 門 ) 안의 동 쪽 월랑( 月 願 )으로 정하고, 빈(좁)은 종 2품, 찬( 贊 )은 종 3품으로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또 절목( 節 ~)을 대략 고쳐서 아흰 뒤에 드디어 관례를 행하니, 당시 사람 들은 서문중( 徐 文 重 )이 체통을 얻었다고 하였다 정조 17 권, 8년 (1784 갑진 / 청 건륭( 乾 隆 ) 49 년) 5월 22 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에서 감문 절목을 올리다 병조에서 감문 절목( 藍 門 節 )을 올렸다 이 날에 내사복( 內 司 樓 )의 소동문( 小 東 門 )이 저절 로 열려 병조에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문고리는 넓고 자물쇠는 작은 소치이지 다른 간사한 정( 情 )은 없을 듯하나, 일이 숙위( 宿 - 4 -

174 衛 )의 분군( 分 軍 )하는 것이 효잡( 消 雜 )스런 것과 관계되니,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고하라 하고, 병조에 명 하 여 옛날에는 좌직( 坐 直 )3719) 절목을 만들라고 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하는 승지가 합문에서 조석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에 저녁 문안 후 자물쇠를 청하여 문을 닫고 아침 문안 때 열쇠를 청하여 문을 열었다 근래에는 이 규 정이 없어졌으 니, 마땅히 즉시 참조하여 획일적인 규식을 정하라. 지금부터는 열쇠 내주는 것을 좌직하는 승지가 전담하여 보관하고, 자물쇠를 연 후에는 해방 승지( 該 房 承 릅)가 주관 하여 관장하되, 마땅히 수리해야 하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변 해당 승지를 의금부에 내려서 중히 감죄하고, 주서( 注 書 )와 총랑( 總 郞 ) 선전관( 宣 傳 官 ) 사약( 司 鎬 ) 가운데서 해당 문을 관리 하는 사람 역시 유사( {i:l<: 司 )로 하여금 감단( 動 斷 )하라. 병조에서 순검하면서 자물죄를 확인하 는 것은 본디 직장( 職 掌 )이니 건양문( 建 陽 門 ) 동서를 경계로 하여 수문장( 守 門 將 )과 위장( 衛 將 )과 함께 같은 죄를 주고, 만일 파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해야 하며, 색송지( 色 承 듭)가 수리하는 한 조항은 신시( 申 時 ) 이전은 해방( 該 房 )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 坐 直 ) 하위( 下 位 )가 관장하는 것으로 정식( 定 式 )하여 신명하라. 이후로 성문 궐문의 자물쇠 는 호조 낭관 이 감독해 만들어서 판서가 구검( 句 檢 )하는 것을 일체, 절목으로 만들어 계하 하라. 이 렇게 정식하면 도총부 낭관이 돈화문( 敎 化 門 )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선전 관이 돈화문을 관 리 하고, 도총부 냥관은 통화문( 通 化 門 )과 선인문( 宣 仁 門 )을 관리하라. 하였다. I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각문( 各 門 )의 개폐( 開 閒 )는 옛날 예대로 승정원이 주관한 다. 자물쇠를 잠근 후에 열쇠는 좌직( 坐 直 ) 하위( 下 位 )가 친히 받아서 사( 司 )에 보관한다 그 출납은 자물쇠를 연후에 자물쇠와 열쇠를 해방 승지가 친히 받아서 보관하고, 신시( 申 時 ) 이 후에는 상직( 上 直 ) 하위 승지에게 전해 보관하게 한다. 1. 각문의 관할은 건양문( 建 陽 門 ) 동서를 경계로 한다. 서쪽은 서 남 양소( 兩 所 )에서 분장하는 데 병조의 담당이다. 동쪽은 동 북 양소에서 분장하는데 도총부 담당이다. 수문장은 각기 그 부근에 가는데, 소남문( 小 南 門 ) 은 단봉문( 月 鳳 門 ) 수문장이 겸관( 暴 官 )하고, 소동문( 小 東 門 )은 선인문( 宣 仁 門 ) 수문장이 겸 관하는 데, 만일 섭가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법으로 감처( 動 處 )한다. 1. 각문의 자물쇠에 만 일 파손되어 고쳐야 할 곳이 同 )하여 각각 그 자내 ( 字 內 )에 있으면 해당 문의 수문장이 해소( 該 所 ) 부장( 部 將 )을 안동( 眼 가서 고하면, 병조나 혹은 도총부의 낭청이 친히 가서 살피어 승정원에 고하는데 고치는 절차는, 신시 이전에는 해방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승지가 관장한다. 1. 각문을 개폐할 때 감약( 藍 鎬 )은, 돈화문( 敎 化 門 ), 요금문( 魔 金 門 ), 단봉 문(꺼 鳳 門 )은 선전관이, 금호문( 金 虎 門 )은 주서( 注 書 )가, 흥화문( 弘 化 門 ), 선인문( 宣 仁 門 ), 통 화문( 通 化 門 )은 도총부 냥청이 담당하되 각 해당 문의 수문장 및 담당 사약( 司 짧)이 안동하 여 內 )에 거행한다 1. 병조 낭청 및 도총부 낭청이 야순( 夜 파)할 때 각문의 자물쇠는 그 내자( 字 따라서 해당 수문장을 안동하여 살피되, 소동문( 小 東 門 ), 소남문( 小 南 門 )도 일체로 조 검( 昭 檢 )한다. 1. 각처 수문( 水 門 )의 중대한 열쇠를 해소에 보관하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 니, 남수각( 南 水 聞 ) 수문( 水 門 )은 돈화문 수문장이 겸관하고, 북수각( 北 水 聞 ) 수문은 요금문 수문장이 겸관하여, 파손된 곳의 수리와 조검( 照 檢 ) 때살피는 등의 절차는 다른 문의 예에 의해서 시행한다. 1. 성문과 대궐문을 잠그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지금을 시작으로 해서 자물쇠를 수리할 때에는 호조 낭청이 몸소 감조( 藍 造 )하고, 판서가 구검( 句 檢 )한다. 1. 각문 을 나누어 담당시키는 것이 비록 건양문 동서를 경계로 삼았으나 병조는 이미 궐내 각처를 관할하는 처지이 니 경계를 정하였다 하여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건양문 동쪽 역시 총괄 하여 검찰해야 한다 ] C J

175 정조 31 권, 14 년 (1790 경술 / 청 건륭( 乾 隆 ) 55 년) 9 월 13 일(경인) 4 번째기사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밤에 불러 접견하다 밤에 편전( 便 嚴 ) 에 나아가 승지 윤행임( 尹 行 任 )에게 이르기를, 달빛이 매우 밝은데 과거에 새로 합격한 사람 중에는 필시 풍악을 벌이며 거리 를 누비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불러보고 싶다. 하고는 통화문( 通 化 門 )을 잠그는 것을 보류하고 주서 서유문( 徐 有 聞 )을 시켜 나가 보게 하였 다. 한참 뒤에 유문이 진사 서준보( 徐 俊 輔 )와 서임보( 徐 任 輔 ) 서노수( 徐 溫 修 ) 심응규( 沈 應 奎 ) 이노익( 李 쩔 益 ) 이존수( 李 存 秀 ) 와 함께 들어왔다. 서준보와 서임보는 판서 서유방( 徐 有 防 ) 의 아들이고, 서노수는 영중추부사 서명선( 徐 命 善 ) 의 아들 이고, 심응규는 고 직제학 심염조( 沈 念 祖 ) 의 아들 이고, 이노익은 판서 이병모( 李 秉 模 )의 아들이 고, 이 존수는 판서 이문원( 李 文 源 ) 의 아들이다. 상이 이르기 를, 너희들이 어린 나이에 경과( 慶 科 )에 진사가 되었으니, 나는 몹시 가상히 여긴다. 하고는 드디어 응제( 應 製 )를 명하고 술 과 음식을 내렸다. 글을 다 지어올리자 상이 친히 고 평하고, 제생 들 에게 이르기 를, 너희들은 이 시권을 가지고 돌아가 부형 들에게 보이라, 하였다 [ h ]

176 승정원일기 현총 14년 8월 2 일 (기해) 원본 235 책/탈초본 12 책 (10/10) 1673년 康 熙 ( 淸 / 聖 祖 ) 12년 明 善 公 主 의 喪 은 昌 德 宮 과 昌 慶 宮 의 兩 宮 중 어느 문으로 나갈 지에 대해 묻는 承 政 院 의 계 0 政 院 양 日, 明 善 公 主 之 喪, 昌 德 昌 慶 兩 宮 中, 從 何 門 出 送 乎? 敢 票 傳 日, 公 主 喪, 則 從 宣 仁 門 出 送, j띠 化 i "l, 텃 lj 留 門, 以 짧 手 把 守, 可 也 뢰 I I 局 體 錄 숙종 18년 7월 29 일 (병자) 원본349 책/탈초본 18 책 (5/9) 1692년 康 熙 ( 淸 / 聖 祖 ) 31 년 出 宮 과 還 宮 의 節 次 와 f 需 生 의 춤 陽 門 入 底 에 대해 고쳐 付 標 하겠다는 禮 費 의 계 0 l 禮 暫 햄 日, 昌 德 宮 移 倒, 많 定 於 初 七 日, 則 習 日 春 塊 臺 試 才 時, 當 自 內 出 細 帳 嚴, 試 才 節 텀 中, 出 還 宮 節 次, 改 付 標 以 入, f 需 生 入 鷹, 曾 以 集 春 門 定 養, 而 今 則 通 化 門 外, 많 無 作 門 之 學, 依 前 例, 學 子 以 춤 陽 門 入 底 事, 亦 寫 改 付 標 以 入 之 意, 敢 햄 傳 日, 知 道 숙종 26년 9월 1 일 (경인) 원본393 책/탈초본 20 책 (9/11) 1700년 康 熙 ( 淸 / 聖 祖 ) 39 년 내 일 春 塊 臺 의 f 需 生 處 試 때 弘 化 門 의 左 右 俠 門 을 열 어 留 門 할 것을 청하는 承 政 院 의 계 0 政 院 양 日, 明 日 春 樓 臺 f 需 生 흙 試 時, 通 化 門, 當 寫 留 門 以 入, 而 同 門 俠 갤, 多 土 入 門 時, 必 有 紹 路 짧 觸 之 뿔, 弘 化 門 左 右 俠 門, 開 寫 留 門, 何 如? 傳 日, 允 경종 4년 윤4월 29 일 (임인) 원본 567 책/탈초본30 책 (11/12) 1724년 羅 正 ( 淸 / 世 宗 ) 2년 王 大 紀 願 의 進 훌 때 각 宮 人 들 이 데 리고 오는 무리의 소란 이 없도록 通 化 門 守 門 將 등을 각별히 申 節 할 것을 청하는 兵 團 의 계 0 兪 命 癡, 以 兵 暫 言 양 日, 來 五 月 初 - 日, 王 大 紀 願 進 훌 時, 諸 宮 家 眼 隨 之 類, 各 宮 人 帶 率 之 輩, 似 不 無 關 入 擾 口 之 쩔, 通 化 嘴 金 兩 門 守 門 將, 各 別 嚴 節, 而 第 念 內 間 之 事, 有 難 區 別, 差 備 內 官 處, 亦 寫 申 節, 何 如? 傳 日, 允 영조 7 년 2 월 1 8 일 (신 해 ) 원본 71 8 책/탈초본 39 책 (10/10) 년 羅 正 ( 淸 / 世 宗 ) 9 년 傳 子 李 뜰 世 日, 二 컸 主 추핸, 通 化 門 則 出 去 後 下 續, 外 八 門, 近 來 早 閒 롯, 西 小 門 待 出 去 後 郞 閒 事, 分 付 兵 團 영조 7 년 4 월 19 일 (신해) 원본 72 1 책/탈초본 39 책 (36/44) 년 羅 正 ( 淸 / 世 宗 ) 9 년 0 傳 子 韓 師 善 日, 通 化 門 內 設 布 帳, 設 橋 時 閒 通 化 門 - 7 -

177 관덕정 궁궐지(헌종) 성종 3 년 채상단 옛터에 지었고, 공혜왕후 한시(성종비)가 항상 이곳에서 잠례를 행하엿다. 인조 20 년 임오에 세웠는데 처음 이름은 짧 微 혹 이었다. 현종 5 년 (1664) 갑진에 개수하고 관덕정으로 고쳤다. 숙종 8 년 (1682) 가을에 못 가운데에서 연꽃이 피었다. 숙종 관덕풍럼 정조, 관덕풍럼 현종의 어필로 편액하였다 Q Q

178 건물멀 자료 숭문당.hwp, 1 스 다 일성록 순조 30년 년 8월 22 일(정 미 ) 강 목 검 見 遠 接 使 金 在 昌 子 養 心 聞 홈 ~앞 也 강 命 動 行 時 別 問 安 使 以 迎 황 使 中 從 便 學 行 딩 lj 致 謝 則 中 路 勞 問 承 冒 惜 語 致 謝 목 承 冒 朴 l뼈 壽 햄 言 動 使 苦 除 京 外 훌 享 則 有 ;31J 違 問 安 使 中 路 致 謝 之 例 춧 預 寫 下 論 價 톰 處 以 迎 평 使 中 依 例 從 便 鎭 行 似 好 롯 又 양 言 I져 午 助 行 時 以 뽕벼 羅 陽 察 且 흉 文 中 麗 語 體 훨짖 有 別 遺 致 謝 之 特 命 훗 今 짧즙 文 解 語 之 銀 훨!많 無 異 於 며 午 링 1 似 當 有 ;31j 致 짧 之 學 中 路 勞 問 承 듭 以 此 解 意 惜 語 致 謝 之 意 f좁닮 處 - 體 下 論 似 好 훗 拉 從 之 강 節 西 路 支 動 時 民 뺑 목 敎 日 動 行 似 當 在 近 而 使 命 從 此 相 屬 西 路 Z뺑 深 可 關 念 凡 於 靈 行 有 薦 民 뺑 者 蘭 堂 -- 察 節 至 於 出 待 之 太 預 團 傳 之 { 多 tk. 亦 所 嚴 節 之 事 諸 般 事 務 - 遭 困 午 E 例 以 盡 上 下 不 젠 不 忘 之 義 事 分 付 f홉 百 道 E2: 等 處 강 목 戶 뽑 以 쏠 文 堂 寶 陽 門 改 建 吉 日 推 擇 행 該 暫 탱 言 벚 文 堂 훨 陽 門 改 建 솜 日 令 日 官 推 擇 則 來 九 月 初 二 日 午 時 짧솜굽 以 此 日 時 畢 行 강 목 改 差 冊 { 諸 都 藍 都 廳 徐 箕 淳 以 尹 心 圭 代 之 該 都 藍 양 言 本 都 籃 都 廳 徐 箕 淳 有 身 病 不 得 學 行 改 差 其 代 應 敎 尹 心 圭 請 差 下 使 之 察 任 允 Z - 9 -

179 건물멸 자료 문이름.hwp, 1 도L l 트르 "- I r그 국역비변사등록 숙종 42 년 0716) 12 월 7 일 기사제목 각 연도의 載 省 文 書 를 상고하여 각 관아의 責 物 과 用 度 를 줄였다는 계와 載 減 JJIJ 單 병조( 兵 曺 ) 각 전( 嚴 )과 각 문( 門 ) 것으로 우선 줄이는 별단 대전( 大 願 )의 대객방( 對 客 房 ) 2 명 내에 l 명, 별감방( 別 藍 房 ) 2 명 액정서( 被 底 暑 ) 2 명. 및 궁중 각처의 수직군사에 대해 을해년에 별지를 붙여 계하되었던 내에 1 명 서방색( 書 房 色 ) 곳간직( 庫 間 直 ) ; 2 명 내에 1 명. 물선직( 物 睡 直 ) 1 명. 사약방( 司 鎬 房 )의 대졸( 隊 후) ; 본래 2 명 내에 1 명, 곳간직( 庫 間 直 ) 2 명 내에 1 명. 내궁방( 內 덤 房 )의 별조역군( 別 造 投 軍 ) ; 7 명 내에 3 명. 내시학청( 內 待 學 廳 ) ; 2 명 내에 1 명. 중궁전( 中 宮 嚴 )의 주다방( 酒 茶 房 ) ; 2 명 내에 1 명. 별감방 ; 2 명 내에 1 명. 사약방 2 명 내에 1 명. 배설직( 排 設 直 ) ; 2 명 내에 1 명. 곳간직 2 명 내에 l 명, 세자궁( 世 子 宮 )의 별감방 ; 2 명 내에 1 명. 공상청( 供 上 廳 ) ; 2 명 내에 1 명. 사약 곳간직 2 명 내에 1 명 창경궁( 昌 慶 宮 )의 영청문( 永 淸 門 ) 2 명 내에 1 명 흥교문( 興 敎 門 ) ; 2 명 내에 1 명. 영생문( 迎 生 門 ) ; 2 명 내에 1 명 가응문( 嘉 應 門 ) ; 2 명 - 홍교문( 弘 敎 門 ) ; 2명 건복문( 建 福 門 ) 2명 숭화문(몇 化 門 ) 2 명. 문정 전( 文 政 願 ), 2 명 후원의 숭덕문(옳 德 門 ) ; 2 명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n u

180 건물별 자료 문이름.hwp, 2 영조 l 년 (1725 년) 12 월 27 일 各 司 의 責 物 과 용도를 困 午 年 정월부터 12 월까지 F딩 申 年 의 例 대로 載 減 하는 別 單 벼 ;z --'- 각전( 各 嚴 ) 각문( 各 門 ) 및 액정( 被 底 ) 각처 수직군사로 을해년에 부표를 붙여 재가받은 것을 잠시 재감한 별단 대전( 大 觀 ) 대객방( 對 客 房 ) 2 명 내에서 1 명 별감방( 別 藍 房 ) 2 명 내에서 1 명 액정서( 被 健 暑 ) 2 명 서방색( 書 房 色 ) 고간직( 庫 間 直 ) 2 명 내에서 1 명 물선직( 物 體 直 ) 1 명 사약방( 司 鎬 房 ) 대졸( 隊 쭈) 본 2 명 내에서 1 명 고간직 2 명 내에서 1 명 내궁방( 內 딛 房 ) 별조조역군( 別 造 助 彼 軍 ) 7 명 내에서 3 명 내시학청( 內 待 學 廳 ) 2 명 내에서 1 명 중궁전( 中 宮 願 ) 주다방( 酒 茶 房 ) 2 명 내에서 1 명 별감방( 別 藍 房 ) 2 명 내에서 1 명 사약방( 司 鎬 房 ) 2 명 내에서 l 명 배설직( 排 設 直 ) 2 명 내에서 1 명 고간직( 庫 間 直 ) 2 명 내에서 1 명 세자궁( 世 子 宮 ) 별감방 2 명 내에서 1 명 공상청( 供 上 廳 ) 2 명 내에서 l 명 사약 고간직 2 명 내에서 1 명 창경궁( 昌 慶 宮 ) 영청궁( 永 淸 宮 ) 2 명 내에서 1 명 흥교문( 興 敎 門 ) 2 명 내에서 1 명 영생문( 迎 生 門 ) 2 명 내에서 1 명. 복구 가응문( 嘉 應 門 ) 2 명- 흥교문( 弘 敎 門 ) 2 명 복구 건복문( 建 福 門 ) 2 명 숭화문(뽕 化 門 ) 2 명 문정전( 文 政 願 ) 2 명 후원 숭덕문( 後 행몇 德 門 ) 2 명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승정원일기 정조 7년 7월 19 일 (무신) 원본 1537 책/탈초본 83 책 (18/19) 0 쫓때 七 月 十 九 日 띠 時, 上 품 f쩔 源 嚴 展 拜 時, 先 徒 n 養 志 堂, 命 承 史 及 戶 禮 工 判 入 傳, 大 멀 入 就 外 位, E 手 - 齊 整 待, I 暫 判 書 鄭 民 始, 戶 홈 判 書 徐 有 l 憐, 禮 費 判 書 李 在 協, 檢 校 直 聞 徐 龍 輔, 待

181 건물열 자료 문이름.hwp, 3 敎 尹 行 任, 行 都 承 冒 沈 뿔 之, 行 左 承 답 李 亨 達, 行 右 承 冒 朴 祐 源, 左 副 承 冒 李 在 學, 同 副 承 릅 趙 興 鎭, 假 注 書 李 敵 徐 獲 修, 記 事 官 李 祖 承 李 昆 秀, 以 次 立 停 子 前, 領 府 事 金 尙 喆, 領 議 政 鄭 存 讓, 判 府 事 徐 命 善, 判 府 事 鄭 弘 淳, 判 府 事 李 徵 之, 判 府 事 洪 樂 性, 領 敎 寧 金 燈, 以 次 入 就 外 位 上 由 報 春 門, 展 拜 手 瓚 源 嚴 大 몸 以 下, 各 入 就 位, 行 四 拜 禮 上 由 昨 階 升 嚴, 諸 E2: 由 西 階 從 升 上 親 開 嚴 門 奉 審 後, 命 諸 大 톰 進 前 奉 審, 途 園 門 命 戶 禮 工 判, 招 入 E 手 付 投, 諸 大 g 仍 於 願 前 童 投 上 由 永 8 軍 門, 등듭 景 福 願, 멸 n 王 大 g[. 差 備 也 命 購 gg듭 員 嚴, 使 戶 暫 判 書 率 E 手 入 來, 修 改 雨 源 處, 本 嚴 投 事, 5llJ 使 戶 團 參 判 趙 時 俊 入 來 代 藍 購 g 承 命 듬듭 員 觀 投 處 與 戶 뽕 判 書 徐 有 憐 借 入 有! 憐 部 分 E 手 付 投 上 還 徒 ~i률 嚴 Z 後 行 聞, 親 審 投 事, 在 { 立 者 相 與 故 動, R펀 敢 或 ;힘 上 謂 民 始 B, 맺O 於 省 橋 往 來 之 路, 歷 見 離 물 農 形, 今 年 年 事, 果 不 至 大 歡 耶? 民 始 日, 以 l심 路 所 聞 言 之, RBR 之 地, i팎 B 易 不 同, 面 里 之 間, ~ 實 各 異, 故 -울 東 西, 此 含 n 南 而 彼 댐쉴ll 者, 在 在 皆 然 若 總 八 路 而 較 諸 昨 年, 則 今 年 似 勝 공롯 上 日, 離 湖 之 民, 層 廣 F협 完, 今 X 存 軟, 將 何 以 接 濟? 予 方 玉 食 摩 #, 쩔 衣 不 j울 훗 亨 達 B, 離 힘 則 備 被 數 둠, 甚 於 昨 年, 而 其 餘 農 形, 足 可 免 歡 킬훗 民 始 日, 因 更 判 邱 請, 담 軍 門 招 致 巧 思 人, 造 出 龍 尾 車 굽, 故 톰 試 取 見, 則 雖 是 試 可 之 制, 其 功 用 之 博, 似 非 結 提 之 比 훗 上 日, 龍 尾 車 與 水 車 不 同, 水 車 則 g 古 有 之, 龍 尾 車 則 其 制 新, 自 西 洋 出 來, 載 於 徐 光 양 農 政 全 書 中 今 所 造 出 者 雖 小, 亦 足 驗 其 利 澤 之 짧 深 否? 民 始 日, - 文 之 地, 似 可 激 而 行 之 쫓 上 命 承 륨, 前 望 單 子 入 之 徐 龍 輔 落 點 仍 命 新 除 授 承 冒 牌 招 察 任 出 獨 敎 承 릅 房 望 亦 命 흠Pi훨 書 入 購 g 出 去, 傳 命 後 還 入 上 命 購 톰, 以 關 內 ffi t 扁 各 處 執 煩 ~lj 單, 領 示 諸 大 大 뭄 諸 大 톰 相 率 被 寶, 則 좋휠 補 之 破 傷 者 寫 千 餘 處, 橋 題 之 爛 壞 者 薦 數 百 處 上 日, 此 皆 各 願 差 備, 不 得 不 修 改 處, 而 쁨 歲 I 投, 宜 加 節 約, 故 一 例 置 ~. g~n 等 之 意, 何 如? 命 善 日, 王 者 之 居, 宜 尊 體 鏡, 朝 群 g 而 致 其 義, 養 三 老 而 致 其 仁, 子 以 領 月 令 而 奉 天 時, 子 以 聽 政 治 而 修 A 事, 故 必 高 明 廣 大, 然 後 斯 可 以 展 禮 文, : i 緊 뺑 深 逢, 然 後 斯 可 以 嚴 內 外 蕭 f 可 治 未 央 宮 밤 麗, 高 祖 쨌 之, 何 B, 天 子 以 四 海 寫 家, 非 셔 土 麗 無 以 重 威 朱 子 每 論 此 語, 以 寫 得 體 E 巨 固 知 聖 學 高 明, 亦 必 穩 知 此 等 義 理, 而 션 鉉 隨 짧 隨 補, 尤 與 營 建 不 同, 及 其 類 tc 之 未 甚, 행 加 續 修, 乃 所 以 馬 省 費 之 道 - 向 架 源, 執 j 項 漸 多, 則 後 日 之 魔 財, 뿔 不 倍 徒 於 今 耶? 上 日, 聊 言, 是 훗 且 如 趙 :rr F면 件 演 者, 亦 皆 以 옆 歲 興 作 寫 周 眼 之 要 道, 則 械 民 完 投, 未 必 不 薦 實 惠, 而 非 特 民 力 個 殘, 有 難 重 勞 以 投, 딩 今 經 費, 물 容 i뚫 議 於 張 大 之 事 乎? 諸 大 g 齊 聲 奏 日, 判 府 事 之 言, f 盡 有 意 見, 聖 意 雖 在 於 節 財 用, 而 如 不 及 今 修 治, 則 容 入 百 金 者, 後 必 至 千 金 춧 上 日, 予 意 不 專 在 於 惜 費, 適 當 存 購, 民 情 i울 急, 홉E 屋 難 食 之 狀, 常 若 森 然, 於 九 重 훌 閔 之 時, 其 中 - 二 處, 雖 緣 所 重 有 在, 略 加 흡 理, 而 至 於 - 新 修 改, 終 非 予 心 Z 所 安 롯 上 命 明 日 出 宮 門 路, 以 協 陽 門 寫 之 出 楊 敎 上 謂 在 學 日, 景 幕 宮 動 罵 時, 路 由 館 l 現, 則 館 學 生 例 皆 成 班! 低 迎, 而 近 來 或 行 或 否 今 짧, 텃 申 節, 可 也 仍 命 諸 大 톰 先 退, 待 뽕 願 宣 體 罷 歸 又 命 時 俊, 員 嚴 播 外 救 席 及 四 魔 簽 帳, -힘 修 改 上 由 萬 壽 門, 倒 日 짧 歷 羅 熙 門, 至 愛 運 驚, 命 節 景 福 嚴 改 互 之 投 仍 由 映 뽕 門 至 大 明 門 前 命 節 景 福 願 東 f 扁 投 뿔 送 至 治 짧 野, 命 戶 判 隨 後, 往 來 看 審 f옮펄 投 事, 戶 判 看 投 處, 以 參 判 代 之 t 命 於 小 簡 突 元 處, 藉 草 設 重 席, 席 上 安 倒 座, 諸 E2 皆 左 右 待 휠 有 憐 B, 上 林 짧 t옮펄, 年 年 修 治, 隨 염n 類 tc, 此 由 於 典 守 之 無 人 若 使 t옮 外 居 民 分 界 典 守, 則 其 在 支 久 之 道, 必 大 有 效 롯 上 日, 此 則 自 聊 醫, 從 便 寫 之, 可 也 仍 命 諸 g 進 前, 領 慧 嚴 宣 體 꿇 上 日, 臨 뿔 望 遠, 眼 界 爽 짧, 登 泰 山 小 天 下, 登 東 山 小 쩔, 聖 人 之 言, 盧 有 味 훗 且 王 都 者, 八 方 之 中 央, 山 川 之 氣, R짧없많 E종 碼, 蓋 至 此 而 秀 者 益 秀, 麗 者 益 麗 經 動 l 九 徐, 關 在 左 而 社 在 右 者, 我 太 祖 용 IJ 業 之 宏 規 也 休 養 百 年, 前 有 朝 而 後 有 市 者, 我 列 朝 守 成 之 洪 護 也 홈 木 錯 陰, 人 煙 雜 쟁, ~ 年 八 百, 활 如 周 家 Z 定 쨌 鄭, 擇 地 上 體, 警 如 漢 室 2::: 關 中, 予 與 群 E2:. 其 可 不 念 我 祖 宗 付 狂 之 重, 而 思 所 以 繼 其 志 述 其 事 耶? 諸 멀 成 # 手 承 命, 無 不 感 發 jjt_l;ij 團 者 上 指 點 承 華 樓 扁 題 B, 諸 톰 眼 力, 有 能 認 彼 三 字 者 否? 祐 源 B, 此 是 報 春 樓 中 - 字, 獨 可 辦 其 薦 春 훗 上 笑 B, 聊 以 薦 報 春 樓 耶? 予 이 /

182 건물 멀 자료 문이름 hwp, 4 則 但 見 其 寫 承 華 樓 也 上 仍 指 熙 政 堂 g 今 日 諸 멀 曾 有 出 入 此 堂 者 否? 뿔 Z 日, 멀 於 年 前 親 政 時, 入 傳 熙 政 堂 춧 上 El, 此 則 當 수 親 政 時 也 亨 達 El, E2 於 先 朝, 훌 入 待 熙 政 堂 롯 上 日, 쩨 可 謂 舊 E2 롯 上 謂 亨 達 日, 仁 政 嚴, 흥 lj 自 何 時? 亨 達 日, 或 傳 是 홉tr 朝 所 建 훗 上 日, 此 乃 仁 祖 朝 所 重 建 也? 宮 願 外 屋 梁 之 껄몇 者, 횡l 與 及 此? 亨 達 日, 外 둠촉 刺, 例 皆 쩔몇, 而 未 有 及 此 者 堆 興 仁 門, 似 可 相 方 훗 上 命 購 E2, 問 看 投 戶 暫 郞 廳 續 l 藍 投 姓 名 以 奏 購 멀 出 問 還 奏 於 是, 上 휩 日 짧, 由 映 뽕 門 入 永 8 軍 門, 奉 審 員 嚴 橋 外 輔 陳 之 改 修 者, 由 萬 壽 門 歷 養 志 堂 前 路, 出 嘉 會 門 倒 日 짧, 以 待 令 選 帶, 亨 達 請 當 該 司 鋼, 令 {~ 司 科 治 上 命 自 本 院 動 罪, 歷 짧 月 門 同 春 門 前 路, 入 簡 淸 門 上 住 與, 視 쳐흠 를 改 集 之 功, 始 命 因 地 形 꺼 第, 많 投 作 也, 復 命 如 初 由 正 智 門, 歷 壽 靜 堂 玉 華 堂 在 德 堂 前 路, 命 節 太 和 堂 寶 慶 堂 投 事, 皆 忽 願 嚴 宇 m 至 玄 武 門 前 路, 검 諸 E2 敎 日, 此 영 n 大 造 願 之 北, 奉 誤 堂 之 南 t홈 外 也 謂 有 憐 El, 兩 願 差 備, 此 其 界 也 不 可 以 不 門, 故 맞팅흩쫓 蓋, 站 且 就 簡, 而 年 朝 [ 塵 易 之 費 倍 入, 可 易 以 互 謂 諸 E2 日, 故 事, 凡 大 內 堂 宇, 五 年 - 修 補, 三 年 一 修 理, 春 秋 奉 審, 而 故 相 閔 鎭 遠, 故 判 書 朴 文 秀 寫 度 支 時, 最 稱 修 學 每 集 境 t를, 必 書 堂 郞 及 走 t 投 llc 手 姓 名 子 펄뿔 之 面, 蓋 欲 考 其 動 慢, 核 其 賞 뽑 也 古 人 之 務 實 如 此, 後 世 任 度 支 者, 亦 可 以 知 所 則 也 乃 g 炳 景 門 前 路, 由 芳 華 門 至 몹A 獨 혜i 上 住 與, 검 諸 E2, 指 土 宇 日, 此 郞 宮 中 歡 也 宮 中 有 土 字, X 有 北 좋 歡, 重 因 則 或 因 土 宇, 或 因 좋 歡, 而 其 升 U 校, 以 員 木 斷 三 接, 大 如 股, 受 之 者 蘇 能 自 全, 故 걷F 歡 則 薦 關 朝 罷 之, 升 IJtt!'!IJ 先 朝 甲 子, 多 有 載 減, 而 追 予 關 服, 염n 罷 土 宇, 敎 뼈 典 則 領 下 之 後, 升 O 具 之 未 及 運 改 者, 皆 減 其 制, 廣 不 過 五 六 #, l 享 不 及 -#, g~ o 等 詳 此 委 折 否? 혔 日, 今 承 下 敎, 列 聖 朝 款 뼈 之 德, 我 聖 上 繼 述 之 孝, 實 不 勝 款 {fp 옷 途 自 九 容 짧 前 路, 由 中 正 門 歷 羅 華 堂 前 路, 出 萬 福 門, 歷 泰 安 門 前 路, 由 長 慶 門 星 鳥 門 嘉 應 門, i훨 興 敎 門 前 路, 出 므편려 亨 達 見 門 內 行 聞 類 刺 無 餘, 進 前 奏 日, 此 聞 之 宜 修 而 不 修 久 훗 今 不 修, 後 恐 無 益 於 修, 請 修 之 上 日, 非 所 急 也, 可 E 之 由 永 神 門, 過 歡 慶 顧 옆 默 聞 前 路, 出 集 義 門, 徒 O 景 春 願 上 謂 諸 톰 日, 此 郞 惠 慶 宮 差 備, 而 王 申 짧 生 願 也 與 寶 慶 堂 事 體 無 異, 今 其 힘 陳 敗 獲, 行 將 告 類, 而 不 有 以 챔 完, 如 國 體 何? 各 處 執 j 煩, 指 不 勝 樓, 而 獨 於 l률 嚴 及 景 福 願 景 春 嚴, 特 命 修 改 者, 予 有 所 웹 量 而 然 롯 至 於 悲 默 聞, 염 n 先 朝 T 표 居 盧 之 所, 雖 非 正 嚴, 所 重 存 훨, 故 亦 命 - 體 修 改, g~p 等 須 쪼 予 意 亨 達 日, E2 於 先 朝 T 표, 亦 홈 入 待 子 옆 默 開 훗 上 El, 今 日 諸 많, 前 홈 出 入 子 悲 默 聞 者, 只 有 맺 D - A 훗 亨 達 日, 尙 記 여 己 年 間, E2 以 春 행, 次 對 則 入 對 子 뼈 仁 亨, 講 옳 則 入 對 子 德 成 開 훗 上 寫 之 쫓 感 者 久 之, 命 有 憐 依 列 朝 故 事, 書 播 짧 生 願 三 字 子 景 春 願 有 憐 請 其 筆 上 B, 從 當 下 敎 훗 於 是 上 自 正 陽 門 前 路, 由 康 寧 門 朱 훌 門 迎 j 嗚 門 逢 素 門 開 泰 門, 還 內 諸 E2 由 望 春 門, 過 熙 政 堂 前 路, 出 熙 仁 門, 轉 宣 化 門 退 出 q 니

183 문의 이름과 영역 논문 자료정리 대회논문집, 제 20 권, l 호, 2000, 4, 29 권역별로 냐타난 창덕궁 문의 연구, 김버 들, 조정식, 대한건축학과 학술바료 궁궐을 조영하는 경우 궁실의 기능성을 수용하기 위해서 궁궐내 각 권역의 성격이 설정되어 야 함은 물론 각 권역간의 동선체계 또한 합리적으로 처리되어야 함은 물론 각 권역간의 동 선체계 또한 합리 적으로 처리되 어 야 한다. 이러한 권역을 규정하는 w ndy 한 요서는 담이며 권역간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 것이 문이다 문은 일반적으로 통과는 출입의 기능 외에 담과 함께 권역을 한정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같 갖는다 창덕궁의 문은 궁궐내 각 권역간의 연계를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소단이 되며 각 권역의 성격에 따라 문의 구조와 의장을 달리함으로서 각 권역의 상징체계를 구성하는 요소 로 활용되 었다. 문의 종류(동궐도) 홍살문 -대 보단 판문-우 리 판문 장막문 - 청목갑장 궁궐지 四 角 門, - 角 門, 月 門 문의 표기는 간, 개소, 좌 여 여 신하들의 各 司 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신하들 이 이라는 곳으로 궐 내 각사가 모여 있다. 정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정규 관원들의 활동공간과 왕실의 경 비 와 호위 를 하는 군 사 기구, 왕실의 시중을 드는 관리기구가 있다. 표4 훌룰이를를여 4) 火 I ± 빼 밤 빼 l 中 톨 1ffi I lt 朱 쏠 홈을훌 송.몸 I 보힘각 그림 l> 김영모 전통공간의 구성원리에 관한연 구, 서울시립대 1998 왕과 신하의 공간-외전 임 금 이 드나드는 문과 협문이 같이 나타나고 있 다 - 4

184 월 근 홍재전서 제 30 권 교( 敎 ) 1 월근문( 月 觀 門 )을 세우라는 하교 일찍이 내가 동궁에 있을 때 실록에서 상고해 낸 것을 보니, 예전에 태종조( 太 宗 朝 ) 때 종 묘 북쪽과 궁성 남쪽의 담장이 있는 곳에 문 하나를 잇대어 만들어 놓고 초하루와 보름이면 의위( 嚴 衛 )를 놓아두고 소여( 小 與 )로 거퉁하여 전배례( 展 拜 禮 )를 행하곤 하였다. 나 소자가 이 일을 알고부터는 삼가 마음에 깊이 새겨 두고 감히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일첨문( 日 廳 門 )을 새로 세웠으니 우러러 우리 성조( 聖 祖 )의 남기신 뜻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 궁궐의 담장을 개축하는 일이 막 그 공사를 완공하게 될 듯하여 또 일첨문 가까운 곳 에 문 하나를 세우려 하였다. 지금은 이미 훼손되는 대로 개축하도록 정하였으니 만약 다 개축될 기일을 기다린다면 수십 년 뒤에나 있을지 알 수 없는바 실로 뜻만 지니고 이루지 못한다는 한탄을 품게 되 었다. 그런데 마침 장신( 將 멀)이 입시함으로 인하여 그 형편 및 사역( 事 投 )에 대해 물으니, 문을 빠른 시일 내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소자에게 있어 혹 조금이라도 정( 情 )과 예( 禮 )를 펴 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지극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오늘 이미 명하여 문을 세 우는 것을 심의하여 정하였다. 종묘 북문( 北 門 )의 예에 따라 문이 완성되면 내가 그 의위를 간략히 하여 승지와 사관 그리고 입직한 도총부와 병조의 당상과 낭청만을 수가( 隨 驚 )하도 록 하고, 이 문을 따라 혹 한 달에 한 번씩 전배( 展 拜 )하거나 한 달씩 걸러 두 달에 한 번 전배하여 나의 사모하는 마음을 펼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으라. 문의 자물쇠도 종묘 북문 의 자물쇠를 잠그는 예에 따라 정원에서 주관하여 여닫도록 하라. - R ]

185 ( 廣 智 營 ) 자내의 파수꾼으로써 시행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춘영에서는 자기의 자 내가 아닌 데 도 경솔하게 첩보( 牌 報 )하였고, 광지영에서는 진작 순찰하지 않다가 뒤늦게 비 로소 알아내었으니, 모두 다 놀랍습니다. 두 영( 營 )의 초관과 수직 내관에 대해 해부( 該 府 ) 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집춘영의 초관에 대해서는 이미 훈련도감의 초기에 따라 태거하였으니, 논하지 말라 광지 영의 초관에 대해서는 그대로 시행하고, 후원의 수직 중관에 대해서는 월봉일등( 越 棒 - 等 ) 하라. 대저 이 일은 첫째도 병조의 일이요 둘째도 병조의 일이니, 초관이나 중관이 잘못 알렸거나 늦게 보고한 것 따위는 오히려 사소한 일이다 초기를 하고 관문( 關 文 )을 보낸 데 대한 잘 못은 모두 다 병조가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병조 판서 이휘지를 엄하게 추고하 라. 하였다. 정조 3년 기해 (1779, 건륭 44) 8월 17 일(무진 ) 입직( 入 直 )하는 군병을 훈련도감의 군병으로 교체하지 말고, 각처에 3분의 1 만을 남겨두 어 유영( 留 營 )하며, 나머 지는 모두 전상( 前 뼈)과 후상( 後 뼈) 에 소속시 키 라고 명 하였다. 0 하교하기를, 건양문( 建 陽 門 )과 서영( 西 營 )에 입직한 금위영 군병과, 집춘영( 集 春 營 ) 동영( 東 營 )에 입직한 어영청 군병을 훈련도감의 군병으로 교체하지 말고, 각 처에 3분의 1 만을 남겨두어 유영하 며, 나머지는 모두 전상과 후상에 소속시켜서 각 4초 c~혐)의 수를 채우라고 해영( 該 營 )에 분 부하라 이 어 병조로 하여금 절목 가운데 부표( 付 標 )하게 하라. 하였다 정조 5년 (1781, 건륭 46) 1 월 10 일(계미) 다. 동영( 東 營 )과 집춘영( 集 春 營 )의 입직군을 외영( 外 營 )의 입직군으로 교대시키라고 명하였 0 훈국이 아뢰기를, 이번 1 월 11 일 종묘( 宗 關 )에 거둥할 때 동영과 집춘영에 입직하고 있는 어영청의 군병을 훈국의 군병으로 교대하여 입직시켰다가 환궁( 還 宮 )한 뒤에 도로 입직시키는 문제에 대해 병조에 서 절목( 節 目 )을 계하(양 下 )받았습니다. 동영에 입직할 군병 50 명, 집춘영에 입직할 군병 50 명을 어영청의 군병과 교 대 하여 입직시켰다가 환궁한 뒤에 교체하여 입직시키겠습 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이미 당일로 환궁하는 것인데 수효를 맞추어 교대시킨다변 자못 휴식하게 하는 뜻이 아니 다. 두 곳에 각각 10명씩을 외영의 입직군으로 환궁할 때까지 교대시키라. 하였다. - (h ]

186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 r ato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보징문.hwp, 1 보정문 1. 정조 19 년 /01 월 / 1 3 일(병신)/ 靖 / ; -- - 屬 如 嚴 뚫 上 乘 與 出 # 辰 門 춤 陽 門, 入 保 定 門 還 內, 諸 많 以 次 退 出 정조 1 9 년 윤 2월 1 일 에서 敎 日 今 聞 該 房 承 宣 所 奏 生 進 回 精 當 合 務 P 昌 名 於 今 式 生 進 而 文 武 科 回 橋 人 亦 將 同 寫 陽 花 陽 牌 陽 蓋 陽 舞 童 陽 酒 / 陽 看 則 嚴 注 合 有 몇 定 者 굽 果 然 可 謂 醫 職 훗 文 武 科 放 橋 親 臨 則 百 官 朝 服 參 班 生 進 放 樣 親 臨 則 待 닮 及 l!-9 館 黑 團 領 뼈 班 今 於 文 武 回 樣 服 色 與 參 班 當 用 文 武 科 例 而 百 官 則 不 但 張 大 底 除 似 難 容 初 六 日 放 樣 時 徒 O 흉 龍 뻔 諸 ~ 黑 團 領 二 品 以 上 及 待 ~ 參 班 而 除 致 詞 節 次 事 令 嚴 曺 層 練 優 注 然 則 設 嚴 手 T hl"j 外 帳 顧 於,:, :, 八 } 外 位 於 f~~ ';ij"j 事 亦 寫 分 付 2. 정조 19 년 윤 2월 1 6 일 에서.. 入 몇 禮 門 至 敎 寧 府 前 路 益 運 請 解 嚴 從 之 由 敎 化 門 建 陽 門 入 保 定 門 萬 入 門 還 內 3. 정조 19 년 윤 2 월 21 일 에서 : 倒 春 塊 臺 行 園 幸 隨 罵 將 士 橋 館 具 軍 服 秉 馬 出 保 定 門 由 춤 陽 門 꿇 春 塊 臺 降 馬 쩔 座 小 開 門 升 t훔 及 將 ~ 參 現 節 次 2. 정조 19 년 /03 월 /09 일(경신)/ 情 / 良 個, 以 次 待 立 上 具 平 攻 服, 乘 與 出 保 定 門, 由 줌 陽 門 품 春 塊 臺 정조 19 년 /03 월 / 13 일(갑자)/ 或 陰 或 情 / --- 承 命 出 傳, 上 乘 與 出 춤 陽 門, 由 明 光 門 入 保 定 門 還 內 諸 e 退 出 4. 정조 19 년 /04 월 /07 일(정해)/ 情 /,.. 뚫 上 具 平 꼈 服, 乘 與 出 萬 八 門, 罵 至 保 定 門 外, 命 五 衛 將 宋 文 奎 정조 19 년 /06 월 /16 일(을미)/ 購 /. --- 三 等 二 十 四 名, 內 外 좁 1* 熟 設 所, 設 千 保 定 門 北 月 郵, 堂 上 判 敎 寧 정조 19 년 /07 월 / 18 일(정묘)/ 情 / ; --- 上 具 寶 善 冠 쫓 龍 抱, 乘 與 出 萬 八 門 保 定 門 몇 智 門 集 禮 門, 정조 19 년 /08 월 /03 일(신사 )/B줌/ ; 待 立 上 倒 平 決 服, 乘 與 出 萬 /\ 門, 由 保 定 門 上 B, 入 格 f 需 生 待 정조 19년/08 월 /25 일(계묘)/ 情 / :,.. 立 上 具 tx: 服, 乘 與 出 千 五 門 萬 八 門 保 定 門, 入 좁 陽 門, 降 與 정조 19 년 /08 월 /29 일(정미)/ 情 /. 往 1 半 宮 收 應 製 試 췄 仍 乘 與 出 춤 陽 門, 由 保 定 門 還 內 命 書 楊 敎 日, 정조 1 9 년 /09 월 /03 일(신해)/ 隔 /. 善 冠 쫓 龍 챔, 乘 與 出 千 五 門 萬 A 門 保 定 門, 由 춤 陽 門 入, 降. 11. 정조 19 년 /09 월 /11 일(기미)/ 情 / 東 西, 入 健 武 新 恩, 未 盡 入 者, 立 於 保 定 門 外 引 燒 P 昌 文 武 新 恩 行 정조 19 년 /10월 /2 1 일(무술 )/B줌/ ; -- - 動 柱 待 立 上 具 平 攻 服, 乘 與 出 萬 八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줌 陽 門,

187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 ato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보정문.hwp, 정조 19 년 / 10월 /28 일(을사 )/B춤/ ;. 在 棒 卷, 可 ill 乘 與 由 춤 陽 門 明 光 門 保 定 門 還 內, 諸 닮 以 次 退 出 정조 19 년 / 11 월 / 11 일(무오 )/B춤/... 善 冠 쫓 龍 뻔, 乘 與 出 千 五 門 萬 A 門 保 定 門 뽕 智 門 弘 化 門, 15. 정조 19 년 / 11 월 / 12 일(기미)/ 靖 / ; --- 命 宣 傳 官, 出 標 信 解 嚴, 由 몇 智 門 保 定 門, 入 萬 八 門 千 五 門 정조 19 년 /12 월 /20 일( 정유)/ 情 /.. 待 立 上 具 靈 善 冠 쫓 龍 抱, 乘 與, 出 保 定 門, 由 좁 陽 門, 뚫 春 정조 20 년 /01 월 /07 일(갑인)/ 雨 /. 降 座 乘 與, 出 좁 陽 門, 由 明 光 門, 入 保 定 門 萬 八 門 還 內 諸 톰 以, 18. 정조 20 년 /01 월 /20 일(정묘)/ 隔 / --- 次 隨 罵 上 具 軍 服, 乘 聽, 出 萬 八 門 保 定 門, 由 建 陽 門 進 善 門 정조 20 년 /02 월 /17 일(계사)/ 或 靖 或 ffi/. --- 寶 善 冠 쫓 龍 뻔, 乘 罵 輯, 出 萬 八 門 保 定 門 몇 智 門 弘 化 門, 20. 정조 20년/06 월 /14 일(무자 )/B춤/. 外 應 練, 何 以 寫 之 乎? 上 B, 萬 八 門 與 保 定 門 外, 因 地 形 從 便 排 立, 정조 20 년 /09 월 /18 일(경신)/ 雨 / 立 上 具 決 服, 乘 馬 出 千 五 門 萬 八 門 保 定 門, 入 훔 陽 門, 下 馬 22. 정조 20년/12월 /10 일(신사)/ 購 / - -- 立 뚫 上 具 平 攻 服, 乘 馬 出 萬 八 門, 由 保 定 門 明 光 門 춤 陽 門 上 23. 정조 20년 /12 월 /19 일(경 인)/ 購 / ; --- 記, 全 不 護 慣, 出 宮 門 路, 誤 書 以 出 保 定 門, 由 光 政 門 據 雲 門 24. 정조 21 년 /01 월 /28 일(기사)/ 情 / --- 命 益 運 書 楊 敎 日, 明 日 出 宮 內 門 路, 以 保 定 門 薦 之 益 運 日, 南 願 配 정조 21 년 /0 1 월 /29 일(경오)/ 購 / ; 禮 lf!양 外 辦 上 具 軍 服 乘 輯, 出 萬 八 門 保 定 門, 由 建 陽 門 薦 章 門,,. 26. 정조 21 년 /02 월 /01 일(임신)/ 購 / - 入 敎 化 門 進 善 門 蘭 章 門 建 陽 門, 由 保 定 門 萬 A 門 還 內, 諸 g,,, 27. 정조 21 년 / 03 월 /10 일(경 술)/ 靖 / - 以 次 待 교 上 具 平 決 服, 乘 與 벼 萬 八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入 줌 陽 門 정조 21 년 /03 월 / 24 일(갑자)/ 雨 / 次 待 立 뚫 上 具 平 決 服, 乘 馬 出 萬 /\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좁 陽 門 정조 21 년 /06 월 /17 일(병술)/ 靖 / --- 以 次 待 立 上 具 平 決 服, 乘 與 出 萬 A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入 좁 陽 門 정조 21 년 /08 월 /19 일(을묘)/ 情 /. 入 敎 化 門 進 善 門 關 章 門 建 陽 門, 由 保 定 門 萬 八 門, 還 內 諸 정조 21 년 /08 월 /27 일(계해)/ 靖 / 待 立 뚫 上 具 決 服, 乘 馬, 出 萬 /\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좁 陽 門 32. 정조 21 년 /09 월 /26 일(임진)/ 陰 / ; 次 待 立 뚫, 上 具 뤘 服, 乘 與 出 萬 八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춤 陽 門 33. 정조 21 년 /12 월 /19 일(갑인)/ 情 /, - 上 具 平 夜 服, 乘 輯, 出 萬 八 門, 由 保 定 門 明 光 門 춤 Q Q

188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 a tor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보정문 hwp, 3 陽 門, 정조 22 년 /02 월 /01 일(을미)/ 或 陰 或 購 / 禮 鏡 양 外 辦 上 具 軍 服 乘 轉 出 萬 八 門 保 定 門 景 化 門, 由 建 陽 門, 정조 22 년 /02 월 /05 일(기해)/ 隔 / ;, 由 進 善 門 蕭 章 門 建 陽 門 景 化 門 保 定 門 萬 八 門 還 內, 諸 톰.,. 36. 정조 22 년 /03 월 /09 일(계유)/ 購 / 以 次 待 立 上 具 平 決 服, 乘 與 出 萬 八 門 保 定 門, 由 明 光 門 入 줌 陽 門 정조 22 년 /09 월 /19 일(기묘)/ 情 /, 以 次 隨 罵 上 具 平 或 服, 乘 與 出 萬 /\ 門 保 定 門, 入 춤 陽 門, 품 春 정조 23 년 /07 월 /01 일(정사)/ 雨 / ; 地, 可 也 輩 路 由 줌 陽 門 明 光 門, 臨 保 定 門 外 命 退, 承 史 以 次 정조 23 년 /09월 /0 1 일(병진)/ 靖 / 命 輪 對 官 先 退, 命 承 史 隨 罵 由 춤 陽 門 保 定 門 還 內, 承 史 以 次 退 出 정조 23 년 /09 월 /22 일(정축)/ 情 / ;. 톰 未 知 其 所 以 然 롯 上 命 民 始 B, 聊 見 保 定 門 外 新 設 門 짜 處 乎? 民 始 정조 24 년 /01 월 /16 일(기사 )/B훔/ ; --- 禮 鏡 양 外 辦 上 具 軍 服, 乘 輯 出 萬 八 門 保 定 門 光 德 門 集 禮 門 景 정조 24 년 /01 월 /18 일(신미)/ 購 / ; --- 陽 門 鋼 龍 門 景 化 門 集 禮 門 光 德 門 保 定 門 萬 八 門 還 內 諸 ~ 以 43. 정조 24 년 /03 월 /28 일(경오[경진 ])/B좁/ ; --- 代 以 加 設 人 I쩔 實 上 日, 還 內 待 衛, 以 保 定 門 立 之 X 敎 日, 諸 試, 정조 24 년 /06 월 /28 일(기묘)/ 雨 / ; --- 口 傳 入 票 子 王 大 紀 願 B, 多 有 醫 行 之 事, 保 定 門 集 禮 門 永 淸 門 建. 45. 순조 즉위년 /07 월 /02 일(신사[임오])/ 雨 / ;. 멀 大 顯, 以 爛 後 5곰를, 當 寫 進 參 롯 保 定 門 外 留 廳, 以 暴 中 軍 e 순조 9 년 /01 월 /30 일(경 인)/ 靖 / ; 暫 判 書 記 過 分 據, 上 乘 馬 由 좁 陽 門, 入 保 定 門 還 內, 承 史 以 次 退 出 순조 9년/02 월 /08 일(무술 )/B춤/ 官 申 在 植 以 次 隨 품 上 具 平 決 服, 乘 馬 出 保 定 門, 由 明 光 門 춤 陽 門. 48. 고종 3 년 /08 월 /0 1 일(정해)/ 靖 / --- 乘 座 馬, 出 훔 輝 門 좁 陽 門 永 淸 門 - 保 定 門 明 光 門 줌 陽 門, 49. 고종 3 년 /10월 /20 일(을사 )/B줌/ ; -- - 양 源, 副 提 調 宋 熙 正, 進 前 問 候 뚫 由 保 定 門 좁 陽 門, 등릅 春 樓 臺

189 c- Documents and Settings Administ ato 바탕 화면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연희당 -1.hwp, 1 보정문 -1 정조 19 년 6 월 16 일 (을미) 원본 1746 책/탈초본 92 책 (35/36) 1795 년 乾 隆 ( 淸 / 高 宗 ) 60년 0 ζ깨 六 月 十 六 日 때 時, 上 徒 H 更 嚴 都 提 調 以 下 進 購 所 來 待 堂 郞 惠 堂 戶 費 堂 郞 入 待 時, 右 承 冒 李 動 脫, 記 事 官 趙 台 榮, 記 注 官 金 良 f 周, 記 事 官 吳 泰 曾, R 土 勇 都 提 調 洪 樂 性 進 購 所 堂 上 行 司 直 沈 願 之 徐 有 憐, l 禮 費 判 書 閔 鍾 顯, 京 離 藍 司 徐 有 防, 工 뽕 判 書 李 家 煥, 戶 뽑 判 書 李 時 秀, 行 副 司 直 徐 龍 輔, 行 大 司 成 李 뼈 秀, 敎 寧 都 正 尹 行 똥, 華 城 留 守 趙 心 泰, R 土 勇 大 將 徐 有 大, 宣 惠 堂 上 李 命 植, 都 廳 直 聞 李 始 源, 郞 廳 副 司 果 金 近 淳, 戶 뽕 正 郞 尹 光 心, 以 次 進 뚫 樂 性 日, 雖 當 康 잣, 日 氣 H훔 好, 聖 體, 若 何? t 日, 一 樣 훗 樂 性 日, 王 大 紀 願 氣 候, 何 如? 上 日, - 樣 롯 樂 性 B, 惠 慶 宮 氣 候, 何 如? 上 日, 樣 훗 樂 性 B, 今 日 藥 院 日 次 問 安, 而 양 解 批 듭, 未 及 ff 承 훗 上 B, 聊 及 提 調, 今 많 登 앓, 以 知 道 領 布, 可 也 樂 性 日, 텀 逢 今 年, 何 日 非 慶 辰, 而 十 八 日 今 隔 兩 훔, 닮 等 之 歡 欣 慶 祝, 不 可 以 言 語 形 容 行 達 훗 上 日, 日 日 觀 企, 在 於 此 日, 쩨 等 之 歡 까 如 此, 況 予 心 乎? 樂 性 B, 텀E 等 之 所 析 祝, 명 p~ 延 學 훌 禮, 賣 節 千 一 之 慶, 而 未 쫓 兪 흡, 群 情 柳 첼훗 上 B, 以 予 小 子 愛 日 之 沈, 逢 此 日 行 此 禮, 물 或 虛 徐, 而 평 心 讓 抱, 未 獲 助 回, 養 親 莫 先 於 養 志, 홈ITE 塵 등 兪, 今 훔 則 只 欲 進 數 器 小 配, 凡 係 燒 文, 比 華 城 進 體, 益 從 省 約, 而 整 理 所 많 經 今 春 學 行, 故 使 其 時 諸 堂, 分 掌 諸 務, 實 出 於 體 慧 志 揚 뽕 德 之 意 也, 繼 自 今 於 千 於 萬, 無 非 稱 觸 歡 壽 之 日 也, 何 必 以 今 日 之 未 行 훌 禮, 薦 k 事 耶? 上 日, 再 明 進 體, J.Jlj 無 張 大 之 學, 而 亦 當 有 諸 具, 排 設 優 節, 鐘 習 補 階, 使 之 今 日 預 設, g~o 等 看 檢 學 行, 可 也 諸 2: 承 命,,:삼11Jpf~ I/; 延 禮 堂 l'_ 끼u니 1젤 끼 u살싱 지 IM I { ; l hf/\], 배 1 { L<V 니! J I꾀 hll:j, 慧 宮 進 購 排 設, 在 延 禮 堂 正 堂, 堂 內 嚴 下 行 禮 版 位, 在 東 階 J::.' 外 寶 參 훌, 在 版 位 後, 中 宮 顧 行 禮 版 位, 在 西 階 上, 內 홈 參 훌, 在 版 位 左 右, 設 朱 購 於 堂 之 東 西 播 及 補 階 三 面 上 B, 此 堂 之 底 魔 間 架, 雖 願 俠 Z듣, 而 此 是 慧 宮 掌 倒 之 所, 今 짧 凡 事, 務 從 節 省, 故 必 欲 於 此 堂 行 禮 훗 華 城 則 只 隨 罵 外 좁 入 參 롯, 今 짧 則 在 京 ~ 2: 等, 無 論 遠 近, 皆 許 參 班, 以 萬 廣 慶 同 l야 之 意, 座 次 分 排 時, 從 便 設 席, 偉 得 容 族 也 補 階 많 畢, 宣 廣 子 諸 담~. 仍 以 酒 肉 時 果, 分 館 更 慧 工 E 上 日, 今 짧 進 購 凡 事, 使 整 理 諸 堂 主 管 者, 馬 其 熟 習 於 今 春, 而 本 營 自 多 相 關 之 事, 故 提 調 亦 令 同 參, 但 今 뽑 參 班 諸 많 及 f 需 生 軍 校 等, 倍 多 於 華 城 時, 購 品 熟 設, 必 須 各 所 分 掌, 可 無 밟 於 學 行 之 端, 9~D 等 預 寫 分 定 處 所, 前 期 整 備, 딩 進 購 所, 各 所 堂 郞, 分 排 書 入, 可 也 樂 性 日, 慶 禮 隔 日, 9~D 宰 待 從 堂 上 堂 下 罷 散 人 員 拉 鉉 用 仍 令 該 暫 口 傳 付 軍 職 使 之 參 班 何 如? 上 日 依 寫 之 聊 宰 함 從 及 武 멀 關 帥 以 上 뚫 配 外, 罪 名 拉 覆 峰, 與 未 付 軍 職 者, 令 該 塵 口 傳 付 軍 職, 文 흡 武 前 衛, 亦 依 今 春 例, 冠 帶 常 tt, 使 之 參 班, 可 也 出 學 條 上 敎 命 植 日, 再 明 日 創 民 陽 米, 팀 辰 廳 擔 當 學 行, 而 륨 在 先 朝, 多 有 臨 門 陽 米 之 例, 考 出 前 例, 先 寫 草 記, 可 也 樂 性 以 進 購 所 堂 郞 員 投 分 排 書 進, 都 策 應 所, 設 手 꺼 土 營 別 庫, 都 提 調 領 議 政 洪 樂 性, 提 調 判 中 樞 府 事 李 命 植, 都 廳 副 Pl 果 洪 守 榮, 몽습 官 嘉 義 下 世 義, 陽 德 縣 藍 洪 樂 左, 將 校 R 土 勇 衛 李 珍 國 崔 碩 良 張 安 金 光 福, 員 投 ~± 勇 營 書 更 尹 翊 運 高 有 讓, 離 營 更 韓 壽 -, 셔 土 勇 營 庫 直 金 憶 年 等 二 名, 題 手 李 壽 贊 等 十 九 名, 都 房 子 張 貴 金, 使 令 朴 快 得, 文 書 直 尙 得 等 二 名, 使 煥 軍 世 得 等 十 名, 書 員 梁 德 敏 等 二 名, 庫 直 車 必 元, 使 令 金 鐵 得, 使 煥 軍 根 大 等 三 名, 都 廳 設 手 千 죠 門 南 行 聞, 堂 上 行 司 直 沈 願 之, 京 離 籃 司 徐 有 防, 戶 暫 判 書 李 時 秀, 行 副 司 直 徐 有 大 徐 龍 輔, 敎 寧 都 正 尹 行 똥, 都 廳 奎 章 聞 直 聞 李 始 源, 續 I 副 正 洪 大 榮, 員 投 戶 費 書 更 尹 仁 桓 李 聖 표, 內 聞 書 更 朴 允 默, 셔 土 勇 營 書 更 金 景 魔, 宣 惠 廳 書 寫 趙 彦 植, R 土 勇 營 鎭 手 朴 道 文 等 二 名, 戶 홈 使 煥 軍 再 福 等 二 名, 進 體 所 設 子 運 府, 堂 上 判 中 樞 府 事 李 命 植, 水 原 府 留 守 趙 心 泰, 行 副 司 直 徐 有 大, 敎 寧 都 正 尹 行 똥, 都 廳 副 司 果 洪 守 榮, 郞 廳 副 司 果 金 近 淳, 江 西 縣 令 金 龍 淳, 將 官 前 兵 使 吳 敎 常, 被 州 救 使 徐 榮 輔, 將 校 꺼 土 勇 營 솟n뤘 官 李 海 昇 金 昌 仁 洪 樂 佑, 員 &~ 土 勇 營 書 更 孫 後 成 朴 興 {1쫓 黃 度 章, 書 寫 元 敬 身, 庫 直 李 奎 文 等 = 名, 使 令 치 松 得 等 四 名, 題 手 朴 仁 興 等 十 名, 文 書 直 弼 m ι

190 c. Doc ument s and Settings Adm inist a tor 바탕 화먼 2 건물관련고증문헌자료 (10 부 ) 연희당 1.hwp, 2 興, 私 庫 直 興 石, 使 煥 軍 春 三 等 二 十 四 名, 內 外 홈 tr 熟 設 所, 設 子 保 定 門 北 月 郞, 堂 上 判 敎 寧 府 事 徐 有 I 憐, 敎 寧 都 正 尹 行 f좀, 將 官 前 承 듭 李 쯤 秀, ~lj 軍 職 李 합, 깅 ii 練 院 표 趙 뼈, 將 校 셔 土 勇 營 知 觀 官 徐 繼 修 奏 洞 奏 東 運 呂 從 周, 敎 練 官 金 命 遇, 員 彼 M± 勇 營 書 更 * 東 植, 書 寫 金 城, 庫 直 朴 信 興, 題 手 朴 再 平 等 十 九 名, 使 令 李 得 千 等 = 名, 文 書 直 福 實, 私 庫 直 同 伊, 戶 暫 使 煥 軍 點 孫 等 二 十 드 名, i 及 水 軍 十 二 名, 朝 廷 皮 熟 設 所, 設 子 셔 士 勇 衛 廳 堂 上 戶 暫 判 書 李 時 秀, 郞 廳 짧 德 縣 藍 李 i 路 秀, 將 官 黃 海 兵 使 李 海 愚, 21J 軍 職 申 鴻 周, 將 校 R 土 勇 營 솟n뤘 官 李 完 基, 敎 練 官 王 道 源 史 廷 煥 金 宗 爆 皮 聖 購 李 源 培, 2U 武 土 韓 大 彦 李 重 爆, 員 1~M 土 勇 營 書 更 孫 宗 大 白 弘 寶, 備 邊 司 書 훗 金 允 文, 戶 暫 書 更 崔 道 植 盧 守 -, 셔± 勇 營 庫 直 李 光 默 等 二 名, 鎭 手 金 鼎 泰 等 十 名, f뽕 TX: 廳 使 令 崔 聖 II 原, 戶 費 使 煥 軍 르 十 名, i 及 水 軍 四 名, 待 衛 百 官 tr 熟 設 所, 設 手 딩 房, 堂 上 京 離 籃 司 徐 有 防, 郞 廳 星 까 收 f 更 具 鷹, 將 官 定 州 收 使 金 爆, 宣 傳 官 李 東 善, 出 身 吳 應 常, 將 校 M± 勇 營 知 좋샀 官 李 彦 戀 千 圭 錫, 敎 練 官 鄭 道 寬 成 鳳 文, 前 敎 練 官 徐 命 漸, 員 1~W 土 勇 營 書 훗 鄭 嗤 信, 宣 惠 廳 書 更 朴 禮 復, 戶 團 書 更 金 致 德 河 敬 쩔, 庫 直 李 珪 神, 8 土 勇 營 題 手 金 得 哲 等 五 名, 宣 惠 廳 使 令 徐 廷 遇, 戶 暫 使 煥 軍 成 大 等 六 名, W± 勇 營 學 tr 軍 三 十 名, 냈 水 軍 十 二 名, f 需 生 陽 購 所, 設 手 셔 土 營 別 庫, 휠 上 大 司 成 李 뺏 秀, 將 官 宣 傳 官 鄭 周 誠 金 鎭 鼎, 前 府 使 朴 宗 和, 前 部 守 金 懶, 將 校 셔 士 勇 營 知 뤘 官 金 宗 煥 成 元 柱, 敎 練 官 金 驚 福, 員 投 R 土 勇 營 書 更 韓 相 圭 嚴 在 性, 宣 惠 廳 書 更 李 } 享 根, 庫 直 金 聲 振, W± 勇 營 뱃 令 李 有 福, 戶 暫 使 煥 軍 廣 喆 等 四 名, 將 校 員 投 軍 兵 館 購 所, 設 子 集 禮 門 짧 所, 堂 上 行 司 直 沈 願 之, 行 副 司 直 徐 龍 輔, 將 官 前 那 守 尹 願 東 李 鷹 福, 將 校 W± 勇 營 知 뤘 官 金 商 鎭, 敎 練 官 金 命 淑, 守 쩔 廳 敎 練 官 金 鎭 喆, f뽕 TX: 廳 敎 練 官 崔 道 興, 員 投 셔 土 勇 營 書 更 金 命 뼈 吳 得 購, 守 떻 廳 使 令 柳 技 生, 戶 豊 使 煥 軍 世 興 等 四 名, 優 節 次 知 堂 上 禮 費 ~lj 書 閔 鍾 顯, 行 副 司 直 徐 龍 輔, 致 詞 塞 文 鍵 留 次 知 堂 上 行 司 直 沈 願 之, 禮 費 判 書 閔 鍾 顯, 燒 { 文 檢 節 堂 上 I 暫 判 書 李 家 煥, 別 武 士 姜 漢 範 黃 觀 景, 書 更 尹 龍 得 池 元 達, 魔 手 - 名, 使 煥 軍 一 名, 命 依 此 分 排 學 行, 都 提 調 先 退 上 B, 補 階 많 設, 購 內 外 及 補 階 輔 陳, 試 薦 排 設 至 於 進 體 嚴 節, 雖 有 明 日 之 習 優, 而 女 執 事 學 行, 或 有 生 陳 之 慮, 今 日 略 習 節 次 以 寫 껴해 熟 之 地 好 롯 且 今 훔 進 購 之 嚴, 與 華 城 有 異, 女 { 令 差 備, 많 不 如 例 빨 練, 只 以 東 西 P 昌 及 樂 章 先 後 P 昌 女 冷, 使 之 習 屬, 可 也 習 嚴 꿇 上 B, 行 禮 之 中 節, 專 在 於. 記, 而 女 官 女 令, 많 異 鴻 R 盧, 購 內 購 外, 各 有 節 次, 學 行 之 際, 易 致 相 混, 今 此. 記, 獨 多 陳 源, 禮 判 及 擔 帥, 更 寫 覆 正, 以 待 明 日 習 慶, 可 也 命 退, 諸 E2 以 次 退 出 η /

191 연희문 일성록) 정조 1 0 년 ( 17 86) 5 월 12 일 續 宮 都 藍 꿇; 텀 - 都 藍 處 所 延 喜 門 內 燈 爛 房 排 設 - 堂 上 郞 廳 依 前 例 除 本 섬; 上 直 凡 公 m ι

192 俊 虛 關 漫 鎬 卷 之 - 정일재 精 - 寶 解 井 小 序 O 王 申 a_251_008d 권수제 판심제 俊 虛 關 漫 鎬 간종 활자본( 整 理 字 ) 간행년 1814 年 刊 권책 7권 3 책 규격 어미 (cm) 上 黑 魚 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 156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51 경쫓 虛 關 漫 橋 取 精 - 薦 精 - 二 字 之 意 而 作 集 福 之 西 北 養 和 之 正 東 有 - 小 顆 名 日 精 - 庸 述 - 語 以 表 顆 名 之 所 以 作 其 解 B 大 歲 顆 名 輩 於 書 經 聖 護 孔 影 炳 若 月 춤 何 以 謂 精 何 以 謂 - 擇 휠 則 精 執 之 日 - 故 精 - 執 中 쫓 舞 禹 之 授 受 建 中 建 極 場 文 武 之 冒 끓 且 人 心 危 何 察 乎 其 隱 密 道 心 微 何 守 乎 其 省 察 佳 精 而 察 佳 一 而 守 然 則 精 乃 擇 善 一 乃 固 守 是 以 精 未 可 以 뽑 一 - 然 後 而 執 中 뚫 聊 識 歲 至 正 大 中 숭정원일기) 영조 6년 4월 13 일 (신해) 원본 704 책/탈초본 38 책 (25/25) 1 730년 羅 正 ( 淸 / 世 宗 ) 四 月 十 三 日 午 時, 上 徒 O 資 政 散 훌 講 入 待 時, 8 년 上 B, 養 和 堂 有 得 之 者 훗 廷 濟 日, 텅 n 今 逢 變 處, 不 得 已 改 之, 而 元 來 類 :tc 處, 多 不 得 不 略 改 之 옷 上 日, 此 乃 舊 堂, 自 先 朝, E 擇 網 옷 昌 慶 宮 最 久, 뚫 華 蘭 香 則 近 造 笑 顯 蘭 朝, 作 慣 獨 齊 i'1l) r,;'.f, 寫 讀 書 所, 而 有 先 朝 徒 O 製 옷 昌 慶 宮 則 不 得 E 可 改 處, 略 略 改 z, 可 也 淳 B, 修 改 畢 後, 待 其 蕭 淸, 小 民 皆 望 還 倒 쫓 上 B, 其 心 果 不 無 옷 上 日, 洗 峰 巨 投, 故 方 有 所 思 영조 27년 11 월 23 일 (병술) 원본 1076 책/탈초본 59 책 (44/44) 1751 년 乾 隆 ( 淸 / 高 宗 ) 16 년 辛 未 十 - 月 二 十 三 日 西 時, 上 徒 O 克 l 績 蘭 上 B, 予 之 溫 幸 時, 寫 日 記 B, 某 日 某 時, 某 A 去 時, 送 某 購 공굽, 故 予 示 於 領 敎 寧, 而 納 子 륨 室 훗 書 至 建 極 堂 上 日, 此 볕 n 顯 關 륨 年 15fr 居 之 室 也 j,! - ;! 桂 月 開 뚫 華 堂 蘭 香 聞, 皆 在 於 其 近 處, 而 使 四 都 텀 讀 書 之 處 也 其 命 名 義, 皆 不 偶 然 옷 많즈F 篇 上 日, 承 冒 讀 之 讀 뚫 서명 / 저자 벚용 集 / 李 用 休 ( 朝 解 ) 著. ω

193 판심제 없음 간종 훨 印 寫 本 간행년 筆 寫 年 未 詳 권책 不 分 卷 l 책 행자 1 0 행 25자 (cm) 규격 어미 上 下 - 葉 花 放 魚 尾 소장처 서울 대 학교 규장각 소장도서 번 호 奎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23 銘 精 一 顆 銘 a_223_0 18a 擇 Z 不 精 或 認 擁 薦 親 或 指 東 寫 西 而 限 界 未 漫 執 之 不 - 或 龍 飛 於 天 或 庸 出 於 뼈 而 按 tk 不 定 審 之 於 짧 錄 훌 覆 f 少 忽 幾 微 之 間 而 第 其 辦 불 非 至 明 守 之 於 起 居 歡 食 動 靜 둡 寫 之 際 而 專 其 力 謂 之 存 誠 如 定 盤 針 如 $쭈 物 鍾 雖 四 面 八 方 一 絲 千 fr 之 不 齊 홈 之 中 則 不 많 如 雜 抱 때 如 錯 守 7 雖 暴 風 騎 雨 ill 혈 震 雷.z;옳 作 흠 之 念 則 不 息 羅 則 륨 楊 網 則 子 莫 若 失 之 則 階 於 홈 歡 之 域 종놓 授 舞 舞 授 禹 前 聖 冒 談 父 傳 子 子 傳 孫 잦 lj 朝 心 法 家 齊 國 治 天 下 平 本 於 此 輯 熙 光 明 純 不 E 由 乎 是 不 聊 之 銘 述 古 語 建 極 之 化 望 當 수 영

194 만수전 : 조선왕조실록 효종 18 권, 8 년( 1657 정유 / 청 순치( 順 治 ) 14 년) 4 월 2 일 갑술 4 번째기사 왕대비가 萬 壽 願 으로 거처를 옮기다 효종대왕 행장 정유 (1657) 년 겨울 대략 연의(훌 優 )를 갖추 어 진연( 進 흥) 이라 이 름하고 만수전에서 대비에 게 상수하였는데, 의식은 간략했지만 예법을 잘 갖추었고 화기 애애 했으므로 중 외( 中 外 ) 가 모두 기뻐하였다. 현종대왕 숭릉지 계축년 1285) 에 종친 영림 부령( 靈 林 副 令 ) 이익수( 李 寶 秀 )가 상소하여 영릉( 寧 陸 )의 봉분 ( 封 慣 ) 석물 (:6 物 ) 에 틈이 생겼다. 고 말하자 왕이 크 게 놀라고 근심 하여 능을 옮기기로 의 논을 결정하였다. 이 해 겨울 10월에 마침내 효종의 능을 여릉( 騙 陸 )으로 옮겼는데 예에 따 른 것이었다. 이때 왕이 위 로 자의 대비( 孫 露 大 紀 )와 인선 대비( 仁 宣 大 紀 )를 받들어 모시되 마음을 다하고 음식물을 두루 구비하여 융숭히 봉양하였다 효종 때에 건립된 만수전( 萬 壽 嚴 )은 자의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서쪽에 있고 왕이 또 특별히 전( 願 ) 한 채 를 지어 집상 전( 集 l 洋 願 )이라 이름하였 는 데 이는 인선 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동쪽에 있었다 이는 한 ( 漢 )나라 장락궁( 長 樂 宮 ) 장선 궁( 長 信 宮 )의 제도와 같았다. 자의대비 ; 인조의 계비 장렬( 莊 烈 )왕후 조씨 ( ) 숙종 6 권, 3 년( 1677 정사 / 청 강희( 康 熙 ) 16 년 ) 11 월 16 일 기축 1 번째기사 만수전( 萬 壽 嚴 ) [ 대왕 대비( 大 王 大 떠)께 서 계시는 전( 嚴 ) 이다. ] 에서 진연( 進 훌)하였다 숙종 10 권, 6 년( 1680 경신 / 청 강희( 康 熙 ) 19 년) 11 월 20 일 을해 1 번째기사 대왕 대비가 어의통 ( 於 義 洞 ) 별궁에서 만수전( 萬 壽 嚴 )으로 돌아왔다. 숙종 18 권, 1 3 년( 1687 정묘 / 청 강희( 康 熙 ) 26 년) 9월 2 일 정축 1 번째기사 밤에 만수전( 萬 壽 願 ) 에 화재가 났다. 만수전은 곧 대왕 대비( 大 王 大 紀 )가 거처하는 전( 顧 )인 데, 깊은 밤에 불이 나 불의 기세가 매 우 급했으므로 복어( 服 倒 )와 기완( 器 玩 )이 모두 타버 리고 오직 책보( 冊 寶 )만 겨우 모셔 내게 되었는데 그 래도 손상한 데가 있으니, 임금이 다시 만들 어서 올리도록 명하였다. 숙종 1 8 권, 13 년( 1687 정묘 / 청 강희( 康 熙 ) 26 년) 9 월 13 일 무자 l 번 째기사 자의 대비( 慧 露 大 紀 )가 통명전( 通 明 嚴 )으로 이어( 移 倒 )했는 데, 만수전( 萬 壽 嚴 )이 불탔기 때문 이다. 숙종 18 권, 13 년( 1687 정묘 / 청 강희( 康 熙 ) 26 년) 9 월 29 일 갑진 2번째기사 봉조하( 奉 朝 夏 ) 송시열( 宋 時 烈 )이 상소하기를 야ι

195 삼가 듣건대, 만수전( 萬 壽 願 )에 화재가 나 삼궁( 三 宮 )께서 두려워하고 놀라게 되셨다고 하 니, 그욱이 놀라고 정신없게 되는 마음이 지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만수전은 곧 우리 효종 대왕( 孝 宗 大 王 )께서 동조( 東 朝 )6092) 때에 친히 합당하게 맞추시고 백성이 또한 자래 ( 子 來 )6093) 하여 상서로운 화기( 和 氣 )가 모인 곳이기에 아름다운 이름에 부합되기를 기대 했었는데,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으니, 더욱 처참하고 황송한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는 비록 사람이 불을 낸 것이지만 실지는 하늘이 낸 불이니, 마땅히 더욱 수성( 修 省 )하는 도리 를 닦아 하늘의 마음이 편해지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삼가 듣건대 요사이 전하께서 노 여움이 매우 진동하신다는데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오직 심성( 心 性 ) 위에 있어서는 공부에만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병을 요양하고 수명( 壽 命 )을 양 성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방해됨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욱 함양(패 養 )하고 성찰( 省 察 )하는 공력을 다하시어 중화( 中 和 )와 위육( 位 育 )에 관한 능사( 能 事 )6094) 를 순치 해 가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우( 嚴 宇 )의 화재는 뜻밖에 생긴 일로서 놀랍고 두려워서 편치 못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었다. 상소 내용의 훈계는 격언( 格 言 ) 아닌 것이 없어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기뻐 하니, 나라 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함을 알 수 있다. 유의 하며 잘 지켜서 잠시라도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물며 지금 천재와 이변이 거듭되고 겹치어 간난( 難 難 )하고 우려되는 일이 눈앞에 그득하니, 숙덕( 宿 德 )과 중망( 重 望 )이 우뚝하여 온세 상의 본보기가 되는 경(맺~)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전복( 顧 覆 )됨을 붙잡아 세우고 위태함을 지 탱해 가며 국가의 형세를 만회하게 될 수 있겠는가? 경은 과인(흉 人 )의 간절한 뜻을 체득하 고 옛사람의 국궁 진춰I] ( 輪 射 盡 후)한 의리를 생각하며, 소원한 마음을 시급하게 돌려 홀연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 영인본 39 책 112 면 I 분류 *정론-정론( 政 論 ) / *군사 - 금화( 禁 火 ) / *역사-전사( 前 史 ) [ 註 6092) 동조( 東 朝 ) 세자( 世 子 )를 뜻함. 용 [ 註 6093) 자래( 子 來 ) 부모의 일에 자녀들이 모이듯 하는 [ 註 6094) 능사( 能 事 ) ; 중화( 中 和 )는 사람의 성정( 性 情 )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와 발로된 성정이 절도에 맞는 것이고, 위육( 位 育 )은 위의 중화를 실현하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제대로 생장하는 것이며, 능사( 能 事 )는 중화가 이루어지고 위육이 되도록 하는 것임. [경 경종대왕묘지문 신축년 2227) 에 이르러 왕께서 사속( 剛 績 )이 없어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하다고 여겨 우리 전하( 嚴 下 )2228) 를 책봉( 冊 封 )하여 왕세제( 王 世 弟 )로 삼으셨으니, 이는 종묘( 宗 關 )와 사직( 社 樓 )을 중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세제가 다섯 번 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매, 왕께서 비 답을 내려 위유(현 論 )하고 또 권면하기를, 소섬 익익( 小 心 寶 寶 )2229) 하며 부지런히 하고 또 부지런히 하여 국인( 國 人 )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고 하셨다- 당시 왕께서는 위로 혜순 대비( 惠 順 大 웹 )2230) 를 받들어 모시면서 양지( 養 志 )하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경복

196 당( 景 福 堂 )이 본래 만수전( 萬 壽 觀 ) 옛터에 있었는데, 왕이 미리 이를 위해 손수 수영( 修 營 ) 하시고 유사( 有 司 )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그 편호( 扁 號 )를 바꾸어 경복전( 景 福 願 )이라 하였다가 임인년 2231) 상기( 喪 期 )를 마치기에 미쳐서 대비( 大 紀 )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어 ( 移 倒 )하게 하였다. 또 한 번 잔치를 베풀어 상수( 上 壽 )를 하려고 하셨는데, 모비( 母 紀 )께서 하려 하시지 않으시자 감히 억지로 하지 아니하셨고, 천천히 다시 틈을 타서 여러번 말한 뒤에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받들어 올리는 물품에 이르러서도 모비( 母 紀 )께서 백성의 힘 을 덜어 주고자 하시면 역시 그 뜻에 순응하여 받들어 행하였고, 오래지 않아 다시 개 진( 開 陳 )하여 전대로 회복하곤 하였다. [ 註 2228] 전하( 願 下 ) 영조를 가리킴. 여 [ 註 2229 ] 소심 익익( 小 心 露 靈 ), 대단히 조심하고 삼가는 [ 註 2230] 혜순 대비( 惠 順 大 紀 ). 숙종의 계비 인원 왕후( 低 元 王 [ 註 2231 ] 임인년 1722 경종 2 년, 않 경종대왕 행장 왕께서 위로는 혜순 대비( 惠 順 大 紀 )를 받들어 효도로 봉양( 奉 養 )하는 도리를 훌륭히 다하였 는데, 경복전( 景 福 願 )을 만수전( 萬 壽 嚴 ) 옛터에 영조( 營 造 )하시고 임인년( 王 寅 年 )2345) 에 상( 喪 )이 끝나자 대비( 大 紀 )를 받들어 이어( 移 倒 )하게 하셨고, 바로 잔치를 베풀어 상수( 上 壽 )를 하려고 하였으나 모비( 母 紀 )께서 하고 싶어하지 않으시매 역시 감히 억지로 하지는 않았으며, 서서히 틈을 타서 말씀하기를 여러번 한 뒤에야 비로소 청원( 請 願 )에 2-l _Q_ } λj τ7 -, 2 c-,m, 대하여 허 저승전 명종 l 권, 즉위년( 1545 을사 / 명 가정( 嘉 靖 ) 24 년) 7월 14 일 갑술 l 번째기사 윤인경 등이 또 아뢰기를 내일 빈전( 續 嚴 )에 망제( 望 쫓)를 지내야 합니다 모든 제사를 일일이 친행하신다는 것은 실 로 어려운 일이지만 내일은 곧 처음 행하는 제사이니 친행하시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 다 하니, 답하기를, 내일 친제( 親 쯤)해야 한다는 말은 진실로 당연하다. 다만 근래 기후( 氣 候 )가 순조롭지 못하 여 행례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또한 뒷날도 있으니 물려서 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혼전 ( 塊 嚴 )을 예조에서는 사정전( 思 政 顧 )에 그대로 설치하려고 하는데, 이 궁전은 대내( 大 內 )와 가까울 뿐 아니라 중국 사신이 오면 또한 반드시 여기서 행례를 하게 된다. 창덕궁( 昌 德 宮 ) 의 서연청( 書 옳 廳 )은 혹 쓸 수 없겠는가? 대신들은 빨리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윤인경 등이 회 계( 回 양)하기를, 다른 데는 혼전을 설치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예조에서도 마지못하여 사정전으로 아뢰 었던 것인데, 사정전이 불가하다는 것은 과연 전교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서연청은 협 착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오직 창덕궁의 동궁 저승전({ 諸 承 嚴 )이 합 건

197 당합니다. 또 외재궁( 外 掉 宮 ) 본판( 本 板 )의 일면(- 面 )에 미세한 틈이 있기 때문에 당초 세 개의 판자를 연이어서 쓰려고도 하였으나 이는 실상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필시 동궁을 짓고 남은 재목 중에 길고 커서 쓸 만한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재목을 켜서 살펴보아 쓸 만하면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영상 좌상 등이 바야흐로 의논하다가 결단을 짓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마 침 승전 내시( 承 傳 內 待 ) 박한종( 朴 漢 宗 )이 이 저승전을 말하였던 것이다. 답하기를, 저승전에 혼전을 설치하는 것이 과연 편리하겠다. 외재궁도 아흰 대로 하는 것이 옳겠다. 널리 쓸 만한 것을 구하여 씀으로써 뒷 날의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명종 l 권, 즉위년( 1545 을사 / 명 가정( 嘉 靖 ) 24 년) 7 월 16 일 병자 1 번째기사 사간원이 정전이 아닌 저승전을 혼전으로 삼는 것이 부당함을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 저승전(짧 承 嚴 )은 동궁이 평소 거처하는 처소로 정전(표 嚴 )도 아닌데, 지금 이를 혼전으로 삼는 일이 매우 부당하고 정으로 보아도 미안하니 정전에다 설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저승전도 역시 정전이다. 그러나 아흰 바가 이와 같으니 다시 원상들과 의논하여 조처하 겠다. 하였다. [ 영인본 19 책 271 면 명종 l 권, 즉위년( 1545 을사 / 명 가정( 嘉 靖 ) 24 년) 7 월 18 일 무인 1 번째기사 창덕궁의 선정전을 혼전으로 정하다 영의정 윤인경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오늘 저승전을 봉심( 奉 審 )하니 너무 협착하여 결코 쓸 수가 없었습니다 사정전( 思 政 願 )은 쓸 만하나 아마도 3 년 안에 시사( 視 事 )할 곳이 없을 것 같으니, 창덕궁의 선정전( 宣 政 顧 )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흑 이어( 移 倒 )하실 때가 있게 되면 역시 시사할 곳이 없게 되 어 실로 결단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득이 이 두 곳 중에서 하나를 정해야 할 것인데, 아래에서 독단해 정하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이 두 곳 중에서 택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정전을 혼전으로 삼을 것을 대신들이 처음에 이미 말하였으나 다만 여기에 오랫동안 있 게 되면 시사할 곳이 없기 때문에 나도 또한 어렵게 여긴 것이다. 저승전의 형세가 과연 이 와 같다면 선정전을 혼전으로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대왕 대비에게 아뢰기를, % ω

198 신들이 근자에 듣건대 빈전( 續 嚴 )에서 곡성( 哭 聲 )이 그치지 않고 밤낮없이 계속 된다고 합 니다. 이는 필시 왕대비께서 지나치게 슬퍼하시는 때문인데 아랫사람 또한 더 심한 점이 있 는 것입 니다. 정은 무궁하더라도 예( 禮 )는 절도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왕대비전에 이해시키시어 그 슬픔을 절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 또한 항상 미안하게 여겼었다. 이제 대신의 뜻으로 이해시켜 드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또 왕대비전에 아뢰기를, 신들은 듣건대 빈전에서 호콕( 號 哭 )하는 소리가 주야로 끊이지 않는다 합니다 예문( 禮 文 ) 에 성빈( 成 續 )하기 전에는 곡성 이 끊이지 않아야 하지만 성빈한 뒤에는 슬픈 감정이 이르 면 곡한다. 하였고, 대행 대왕의 유교에도 모든 상사( 喪 事 )는 한결같이 예문을 따르라. 하 였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행 대왕의 유교를 준행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나 내가 미망인( 未 亡 人 )으로서 무엇을 기 다리고 구차하게 살겠는가. 다만 이 로 나 또한 차마 금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곡성은 하인들이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소치이므 광해 14 권, 1 년( 1609 기유 / 명 만력( 萬 歷 ) 37 년) 3월 19 일 경자 3 번째기사 홍문관 부제학 정협 등이 환경전을 더 건조하지 말기를 아뢰다 홍문관 부제학 정협( 鄭 協 ), < 전한 김신국( 金 靈 國 ), 부응교 이성( 李 慢 ), 교리 이빈( 李 짧) 김 지 남( 金 止 男 ) 등이 > 상차하기 를, 삼가 생각건대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몸으로 논사( 論 思 )의 즉위하신 지 자리에 있으면서 성상께서 1 년이 넘도록 한 번도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서 품고 있는 생각을 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두렵고 걱정되어 날마다 부르짖으며 인접( 引 接 )해 주시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일전에 일단 며칠 기다리라는 전교가 계셨으므로 물러나 삼가 성상의 분부만을 기다렸습니다. 다만 오늘날 국사는 날로 점점 어려워지고 천재( 天 %) - 시변( 時 變 )은 근고에 없던 바이며 북 로( 北 廣 )의 흔단과 백성의 곤궁이 이에 극심해졌습니다 게다가 산릉을 수개( 修 改 )하는 일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조사를 영접할 날이 또 가까이 닥쳤으니, 군신 상하가 두려워하며 날마다 계책을 강구하더라도 오히려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이런 때에 다른 일을 생각하겠습니까. 궁궐을 영선( 營 繹 )하는 것 또한 그 적당한 시기가 아닙니 다만, 성상의 거처가 여염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궁궐의 중건( 重 建 )을 시작하신 것은 실로 선왕의 뜻을 계승한 것입니다 그 러므로 이미 모아놓은 재목을 가지고서 역사( 彼 事 )를 거의 완성하여 정전 법궁( 正 嚴 法 宮 )이 m Q

199 다행히 대략 완성되어 거처를 옮기실 날도 길일( 吉 日 )을 잡아 놓았으니, 그 가운데 비록 미 비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 거처하고 계신 좁고 누추한 곳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미 완성된 궁전으로 서둘러 거처를 옮기시고, 기타 전우( 願 宇 )는 형편에 따라 추후에 건 조하는 것이 가합니다 신들이 삼가 궁궐 도감에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자전( 忽 觀 )께서 임시로 저승전({ 諸 承 嚴 )에 거 처하고 계시는 것이 미안하기 때문에 도감이 양화당( 養 和 堂 ) 사정합( 思 政 聞 )을 자전의 처소 로 삼고, 또 환경전을 세워 어재실( 倒 짧 室 )로 삼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정전에 거처하고 태후( 太 尼 )는 동전( 東 嚴 )에 거처하기 때문에 태후의 거처 를 동조( 東 朝 )라고 하였으니, 임시로 저 승전 에 몇 달을 거처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성상 의 마음은 실로 공경을 다하고 예를 다하는 지극하신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신들은 진실로 받들어 따르는 데 겨 를 이 없어야겠으나, 환경전을 더 건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 다. 환경전과 혼전의 거리는 여휘전( 麗 輝 嚴 )에 비교하면 비록 차이가 있으나 또한 그리 멀지 않 으므로, 건축하는 사이에 소리가 혼전까지 들릴 것이니 그 고요함을 숭상하는 도리에도 이 미 미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10월에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하신다면 부묘일( 耐 關 日 ) 과 다만 3 개월의 간격이 있을 뿐입니다 일이 많은 이 때를 당하여 다시 작지 않은 역사를 일으켜 실낱 같은 국력을 다 들여 석 달 동안의 비용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세로 헤아려 볼 때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도감은 공사를 주관하는 관원으로 그 폐단을 알면서도 감히 진술 하지 못하고 대간은 간하는 일을 맡은 신하로 그 말을 듣고도 능히 아뢰지 못하고서, 이리 저리 눈치만 살피면서 그 책임은 지지 않고 한편에서는 피난할 계책을 강구하고 한편에서는 토목 역사를 일으키니, 신 등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 다시 재결하시 어 < 속히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 보니 그대들의 지극한 뜻을 잘 알겠다 마땅히 도감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 하게 하겠다. 하였다. 인조 48 권, 25 년( 1647 정,해 / 청 순치 ( J I 頂 治 ) 4 년) 8월 16 일 갑신 2번째기사 동궁의 저승전과 평선당을 새로 짓다. 동궁( 東 宮 )의 저승전({ 諸 承 觀 ) 평선당( 平 善 堂 )을 새 로 지었다. 수리 도감( 修 理 都 藍 )이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도 또한 흉물이 많이 묻혀 있다 하니 그대로 거처할 수가 없습니다. 지 금 대내( 大 內 )의 공역이 절반도 더 마쳤는데, 미포( 米 布 )가 아직도 남았으니, 공장이를 파하 기 전에 인경궁( 仁 慶 宮 )의 동궁( 東 宮 )을 헐어 옮겨서 전( 願 ) 하나와 당( 堂 ) 하나를 세우는 것 이 일이 매우 편합니다/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흉물을 묻은 그날의 일이 참 이상도 하다. 현재 임금이 계시는 창경궁의 대 내뿐만 아니라 인경궁과 경덕궁( 慶 德 宮 )에까지 모두 흉물이 묻혔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또 세자의 궁에서 파낸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이 더욱 많아서 이런 영선( 營 續 )하는 일이 있게 m ω

200 되었다. 만약 귀신이 파묻지 않았다면 어찌 네 가 궁안에다 여기저기 흉물을 묻을 수 있겠는 인조 48 권, 25 년( 1647 정해 / 청 순치( 順 治 ) 4 년) 11 월 16 일 임자 2번째기사 수리 도감( 修 理 都 藍 )에서 남은 미포( 米 布 )는 명년 봄 저승전(짧 承 嚴 )을 수리하는 역사에 옮 겨 쓰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이시방으로 하여금 맡아 관리하게 하여 속히 그 역 사를 마치게 하였다 인조 49 권, 26 년( 1648 무자 / 청 순치( 順 治 ) 5 년) l 월 8 일 갑진 2번째기사 저 승전(짧 承 嚴 )을 지 었다 인조 49 권, 26 년( 1648 무자 / 청 순치( 順 治 ) 5 년) 3 월 25 일 경신 3 번째기사 수리 도감이 저승전 외랑 섬돌 밑에서 파낸 흉물을 아뢰다 수리 도감( 修 理 都 藍 )이 저승전({ 諸 承 願 ) 외랑( 外 郞 )의 서쪽 처마 아래의 성돌 안쪽 땅 한 자 반쯤의 깊 이에 서 썩은 뼈 두어 줌을 파내었다. 드디어 행랑의 섬돌 안쪽을 두루 파헤쳐 썩 은 뼈, 마른 까치 [ 體 ], 옷을 태운 재 등의 물건을 많이 얻었다- 도감이 이런 내용으로 아뢰 고 인하여 신생( 辛 生 )을 불러 물으니, 신생이 묻은 곳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역강( 道 姜 )의 소행입니다. 강( 姜 )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지 않아 이 궁 을 떠나야 하니, 이것을 묻어 뒤에 이 궁에 와서 거처하는 자를 해치게 하겠다. 고 했습니 다. 하였다, 도감이 아뢰기를, 흉칙하고 더러운 물건이 이토록 냥자하니, 전의 행랑을 모두 철거하고 구토( 舊 土 )를 파내 어 버린 다음 새 흙을 가져다가 개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헐어내지 말고 단지 그 흙만 파내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지금 이 저승전에 흉한 물건을 묻은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자기가 현 재 거처하고 있는 궁실에다 스스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어 뒤에 이 궁실에 거처하는 사 람을 해치게 하려고 했다 하는데 흉하고 더러운 것을 묻고 나서 강( 姜 )이 즉시 떠나지 않았 으 니, 그 사특한 빌미가 반드시 뒤에 거처하는 사람만 해치고 현재 거처하고 있는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간악한 자의 소위는 반드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강( 姜 )이 병술년 2216) 에 죽었는데 어짜하여 그가 살았을 적에 묻은 마른 까치가 땅속에서 두어 해나 지났는데도 형체가 완전 히 갖추어져 있는 채 부패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신생은 강과 함께 악한 짓을 한 사람으로서 이미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 강의 악역( 惡 평) 에 대한 정 상을 다 토로하였으며, 대내( 大 內 )에 묻은 흉물( 씩 物 )들도 일일이 발굴해 내었다. 그런데 또 강에 대해 무슨 애석하게 여겨 돌아볼 것이 있어서 저승전에 묻은 흉물에 대해서는 한마디 도 언급하지 않았다가 이제 도감에서 발굴한 뒤에야 그곳을 가리켜 말한단 말인가 이것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아, 신생을 잡아다가 외정( 外 廷 )에 맡기고 이러한 의심스러운 단서를 가지고 엄히 국문하고 분명히 신문한다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다-) q u

201 인조 49 권, 26 년( 1648 무자 / 청 순치( 順 治 ) 5 년) 3월 28 일 계해 l 번째기사 수리 도감이 또 저승전 서남쪽 모퉁이에서 흉물을 파내다 수리 도감이 또 저승전 외랑( 外 郵 )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흉칙하고 더러운 물건을 파내었다. 신생에게 물으니, 신생이 말하기를 이 뼈는 대부분 심양( 灌 陽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담장 위와 기와 사이 및 시민당( 時 敏 堂 ) 처마 아래의 섬돌에서도 더욱 많은 사람의 뼈를 파내었다. 도감이 아뢰기를, 신생은 더없이 흉악한 사람으로 그가 실상을 다 실토한다는 것은 진실로 기필하기 어려우 니, 북쪽 담장을 철거하고 개축하소서 그리고 시민당 진수당( 進 修 堂 )과 장경각( 藏 經 聞 ) 등처 는 아울러 벽의 묵은 흙을 제거하고 새흙을 다시 바르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담장은 헐지 말고 기와만 고치라고 명하였다. 인조 49 권, 26 년( 1648 무자 / 정 순치( 順 治 ) 5 년) 3 월 28 일 계해 2번째기사 헌부가 고변자 신생을 국문할 것을 9 개월간 건의하나, 정배하도록 명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수리 도감의 계사를 살펴보건대, 저승전의 월랑( 月 郞 )과 시민당 등처에 을 묻은 것이 낭자했다고 했습니다. 신생은 본디 역강(팽 姜 )의 으니,?τ I그 힌r 걷r 심복으로 그의 지휘에 따랐 처음부터 그의 죄악은 럴끝만큼도 용서해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청에서 국문하 기를 청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양사에서 잇따라 소장을 올려 논집한 지도 오래 되었는 데, 전하께서는 여론을 따르지 않고 흉악한 자를 곡진히 비호하면서 그가 자수한 일이 있음 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난 곳은 모두 전일 발고한 곳이 아니니, 이 밖에 숨 기고 있는 곳이 또 얼마인지 모릅니다. 속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여 나라의 법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선생의 정상이 흉사스럽기는 하지만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는 상이 신생에게 자수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허락하여 신생이 자수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양사가 합계하고 옥당도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다. 9 개월이 지나도록 논쟁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고 단지 정배하라고만 명하였다. 인조 49 권, 26 년( 1648 무자 / 청 순치( 順 治 ) 5 년) 윤 3 월 3 일 무진 l 번째기사 수리 도감이 저승전의 동북쪽 섬돌과 담장을 개축하다가 옥보( 玉 寶 ) 2 개를 얻어서 올렸다. 인조 49 권, 26 년( 1648 무자 / 청 순치( 順 治 ) 5 년) 4 월 2 일 병신 l 번째기사 수리 도감이 저승전 추경원 동쪽 담장 밑에서 흉물이 나옴을 아뢰다 수리 도감이 아뢰기를, 저승전( 諸 承 嚴 ) 추경원( 秋 景 짧)의 동쪽 담장 밑 두 곳에서 또 썩은 뼈 몇 말과 나무로 깎아 만든 인형을 발굴했습니다. 원내의 흙을 다 파헤쳐 의심스러운 곳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 파낼 필요는 없다. 의심스러운 곳만 수색하여 찾아내게 하면 된다. 숙종 7 권, 4 년( 1678 무오 / 청 강희( 康 熙 ) 17 년) 4 월 15 일 갑신 2 번째기사 창경궁의 저승전에 이어하다 임금이 창경궁( 昌 慶 宮 )의 저승전({ 諸 承 嚴 )에 이어( 移 倒 )하였다 m 야

202 숙종 14 권, 9 년( 1683 계해 / 청 강희( 康 熙 ) 22 년) 7월 25 일 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창경궁의 저승전으로 이어하다 임금이 창경궁( 昌 慶 宮 )의 저승전({ 諸 承 嚴 )으로 이어( 移 倒 )하였다- 어떤 이는 궁내( 宮 內 ) 에 재 변( % 變 ) 이 있었으므로 이어( 移 倒 )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숙종 14 권, 9 년( 1683 계해 / 청 강희( 康 熙 ) 22 년) 7월 30 일 기해 1 번째기사 왕대비가 저승전으로 이어하다 왕대비( 王 太 紀 )가 저승전({ 諸 承 願 )으로 이어( 移 倒 )하였다. 숙종 14 권, 9 년( 1683 계해 / 청 강희( 康 熙 ) 22 년) 10월 21 일 무오 1 번째기사 약방에서 입진하다. 왕대비가 약방을 창경궁의 내병 조에 옮겨 설치하라고 하교하다 약방( 藥 房 )에서 입진( 入 앓)하고, 좌의정( 左 議 政 ) 민정중( 閔 鼎 重 ) 또한 입시( 入 待 )하였다 이날 부터 임금이 단지 약방 도제조( 藥 房 都 提 調 ) 김수항( 金 壽 펄)과 하번( 下 짧)인 한림( 輪 林 ) 이현 조( 李 玄 祚 )가 의 관( 醫 官 )과 함께 침 소( 寢 所 )에 입 시 ( 入 待 )하고 그 나머지 여 러 사람들은 모 두 외무( 外 顧 ) 아래에서 진후( 進 候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청사( 廳 事 )에서 군호( 軍 號 )를 올 리는 것은 선조( 先 朝 )의 온천( 溫 果 ) 행차 때의 예( 例 )에 의하여 십수 일을 기한하여 미리 날 짜대로 배치( 配 置 )해 계하(양 下 )하라고 하고, 입직군사( 入 直 軍 士 )의 시재( 試 才 )와 각 군문( 軍 門 )의 시사( 試 射 ) 등 일 및 대계( 臺 양)를 아울러 오늘부터 임시로 정지시키라고 하였다. 두 의(옳 醫 ) 유상( 柳 햄)을 불러 입시( 入 待 )케 하고 이어서 내의( 內 醫 ) 일곱 사람을 뽑아 항상 약방에 입직( 入 直 )케 하고, 매번 입직할 때마다 더불어 같이 들어오게 하였다. 약방을 처음 에 시강원( 待 講 院 )과 익위사( 翊 衛 司 )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왕대비( 王 大 紀 )가 하교( 下 敎 )하기 E므 등5, 대내( 大 內 )에 너무 가까우니, 창경궁( 昌 慶 宮 )의 내병조( 內 兵 費 )로 옮겨서 설치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저승전( 簡 承 嚴 )에 있었으니 대개 약을 의논하는 데 가깝고 편리함을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숙종 14 권, 9 년( 1683 계해 / 청 강희( 康 熙 ) 22 년) 12 월 5 일 임인 l 번째기사 왕대비 김씨가 저승전에서 홍서하다 왕대비( 王 大 紀 ) 김씨( 金 民 )가 저승전( 禮 承 嚴 )에서 홍서(흉핸)하였다 임금이 자후( 慧 候 )가 대 점( 大 漸 )함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다가 예관( 禮 官 )에게 명하여 종묘( 宗 關 )와 사직( 社 樓 )과 산천( 山 川 )에 가서 기도하게 하였는데, 막 전지( 傳 듭)를 받자마자 자성( 慧 聖 )이 이미 속광( 屬 繼 )4564) 하였으니, 곧 미시( 未 時 )였다 시약청( 待 藥 廳 ) 과 정원( 政 院 ) 예조( 禮 暫 )-옥당( 玉 堂 )의 여러 신하들이 이극문(흉 極 門 ) 밖에 모두 모여 시복 ( 時 服 )으로 거애( 學 哀 )하였는데, 마침내 백포( 白 뺨) 오각대( 烏 角 辯 )로 바꾸고, 백관( 百 官 )이 인정전( 仁 政 願 ) 대정( 大 底 )에 모여 콕( 哭 )하였다. ω

203 숙종 29 권, 21 년( 1695 을해 / 청 강희( 康 熙 ) 34 년) 8 월 10 일 기해 1 번째기사 궁중에 작은 재앙으로 인해 저승전으로 이어하다 임금이 저승전(짧 承 嚴 )으로 이어( 移 倒 )하였으니, 궁중( 宮 中 )에 작은 재앙이 있기 때문이었다, 숙종 50 권, 37 년( 1711 신묘 / 청 강희( 康 熙 ) 50 년) 11 월 16 일 신축 2번째기사 왕세자가 창경궁 저승전에 나아가 재숙하고 중궁전에 문안례를 행하다 예조( 禮 暫 )에서 왕세자( 王 世 子 )가 창경궁( 昌 慶 宮 ) 저승전({ 諸 承 嚴 )에 나아가 재숙( 驚 宿 )한 뒤 중궁전에 문안례( 問 安 禮 )를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르면서 선인문( 宣 仁 門 ) 길을 거쳐 가라고 명하였다. 이날에 왕세자가 저승전에 나아가 재숙하고 2 일 동안 머물렀다가 19 일에 환궁하였다. 영조 10 권, 2 년( 1726 병오 / 청 옹정( 羅 正 ) 4 년) 10월 16 일 갑술 l 번째기사 왕대비전이 저승전으로 이어하다 왕대비전( 王 大 紀 嚴 )이 저승전(짧 承 願 )으로 이어( 移 獅 )하였다. 영조 41 권, 12 년( 1736 병진 / 청 건륭( 乾 隆 ) l 년) 1 월 4 일 기해 2번째기사 송인명이 조진번을 궁료로 뽑을 수 없음을 아뢰다 임금이 저승전( 蘭 承 嚴 )에 나아가 세자를 곁에 두고 우의정( 右 議 政 ) 송인명( 宋 寅 明 )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좌의정 [ 左 相 ]은 바로 세자부( 世 子 傳 )이니 예절( 禮 節 )에 구애됨이 있기 때문에 경 CY태)만 부 른 것이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덕스런 모습이 숙성(힘 成 )해 보이니, 실로 동방( 東 方 )의 한없는 복( 福 )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송나라 태종( 太 宗 )이 소년 천자( 少 年 天 子 )란 말을 비웃었다 영조 63 권, 22 년( 1746 병인 / 청 건륭( 乾 隆 ) 11 년) 3 월 2 일 무진 1 번째기사 저승전의 윌랑에 화재가 발생하다 저승전( 懶 承 嚴 )의 월랑( 月 厭 )10951) 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영조 104 권, 40 년( 1764 갑신 / 청 건륭( 乾 隆 ) 29 년) 12 월 18 일 을미 1 번째기사 이극문과 저승전에 불이 나다. 대신과 호조 판서가 수리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이날 밤에 이극문(값 極 門 )과 저승전({ 諸 承 嚴 )에 불이 났다. 대신과 호조 판서가 다시 수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복궁에 화재가 났을 때에도 감히 중건을 못하였는데 비록 이 전( 嚴 )이 없더라도 무슨 지 장이 있겠는가? 조종의 검소하신 덕을 법받아야 한다. 하였다. [d A 야

204 영조 115 권, 46 년( 1770 경인 / 청 건륭( 乾 隆 ) 35 년) 8월 28 일 신축 4 번째기사 저승전 행각의 책을 훔친 용동궁의 종을 유배시키다 용동궁( 龍 洞 宮 )의 종이 저승전({ 諸 承 願 ) 행각( 行 聞 )에 몰래 들어가서 소장된 서책( 書 冊 )을 훔 쳐 가지고 나오다가 수문장에게 붙잡혔는데, 곤장을 친 다음 섬으로 유배시켜 종을 삼으라 고 명하였다 정조 28 권, 13 년( 1789 기유 / 청 건륭( 乾 隆 ) 54 년) 10월 7 일 기미 4 번째기사 어제 장헌 대왕 지문 해시(갖 時 )에 현궁( 玄 宮 )을 내렸다. 천전( 選 흉) 때가 되자 정해진 절차대로 예를 거행하였다 천원 도감에서 발인할 때의 절차대로 흰빛의 의장( 燒 { 大 )과 각색 초롱을 벌려 놓았다 방상 씨( 方 相 民 )가 퇴광( 退 續 ) 위에 이르러 창으로 네 귀퉁이를 두드리고 나왔다- 증옥( 體 王 )과 증백( 體 멈)을 수도각 안의 동남쪽에 벌려 놓았다. 섭상례( 構 相 禮 )가 무릎을 꿇고 고하여 상 여에 오를 것을 청하자 재궁을 받드는 관리가 조예 무신들을 데리고 재궁을 받들어 상여에 올리고 수도각으로 나아가 녹로차( 輔 廳 車 )에 올려놓았다 [ 녹로차는, 예전에는 굴대와 정지 하는 기구의 제도가 있어 오례의(죠 禮 嚴 ) 에 나타나 있다. 이때에 이르러 별도로 한 제 도를 만들었는 바, 먼저 좌우 받침대를 놓는데 길이가 9자, 너비가 9 치, 두께가 6푼이다. 좌 우 받침대의 양쪽 머리 부분에는 모두 기둥을 세우는데 높이가 2자 6치이고 받침대에 들어 가는 부위는 너비가 5치 5푼 두께가 2치 5푼이다 기둥의 윗쪽 끝에는 가로와 세로로 2 개 의 흠을 파내는데, 세로 홈은 깊이가 5치로서 그 밑을 퉁글게 만들어 축( 顧 )이 들어가게 하 고, 가로 흠은 갚이가 l 치 5푼으로서 가름대[ 橫 架 ]가 들어가게 한다. 축은 길이가 9 자, 둘 레가 1 자 2치로서 앞뒤의 기퉁 끝을 관통한다. 세로 홈의 위쪽을 향하는 둥근 구멍은 축이 놓이는 구멍보다 2 치 5푼을 줄이며, 가름대의 좌우 기둥 끝에 홈을 파는 것은 네 기둥을 받 침대에 튼튼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갈고리쇠 [ 句 鐵 ]는 모난 갈고리로서 속명( 倚 名 )이 등자철( 鐘 子 鐵 )이다. 두 다리를 받침대에 꽂으며 다리와 다리 사이에는 맛줄이 들어가게 하 는데, 그 수는 8 개로서 좌우로 서로 마주 향하게 한다 하나의 받침대에는 4 개의 갈고리가 있는데 그 간격은 l 자이다. 쇠통[ 鐵 倚 ]은 속명( 倚 名 )이 토시쇠 [ 套 手 鐵 ]인데, 모난 갈고리의 위에 둘러씌우되, 그 안둘레를 헐렁하게 하여 마음대로 돌아가게 한다. 좌우의 축에는 모두 튼튼한 쇠이빨[ 鐵 牙 ]을 박는데 그 길이는 l 치쯤 되게 하고, 두 이빨이 맞물리게 하며, 그 사이에도 맛줄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하나의 축에는 8 개의 이빨을 박는데, 그 자리는 네 모난 갈고리를 보아 정한다 맛줄은 베로 만드는데, 네 끝을 세로로 주름을 잡아서 꿰매되 모두 8겹으로 하며, 두 끝은 도로 꺾어서 갈고리를 만들고, 나무비녀[ 木 警 ]를 가로질러 나 머지 두 끝에 꿰여 왼쪽 쇠이빨에 건 다음, 아래로 향하여 왼쪽 모난 갈고리와 오른쪽 모난 갈고리에 꿰고, 갈고리 위의 쇠통에다 비스듬히 위로 향하여 오른쪽 쇠이빨에 건다. 나머지 세 맛줄도 똑같이 한다. 축의 두 끝에는 십자로 교차된 두 폭( 騙 )을 끼우고 바퀴폭[ 輪 醒 ]을 만든 다음, 테두리처럼 네 끝을 붉은 실띠로 연결시킨다, 두 받침대를 광중( 樓 中 ) 위의 좌우 로 오가게 된 판( 板 )에 놓고, 판의 두 끝에는 못을 박아서 흔들리거나 돌아가는 것을 방지 한다. 십자형 바퀴 4 개는 힘을 같이 받아, 늦추어지거나 팽팽해지거나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차이가 없도록 하는데, 바깥쪽을 향하여 회전하면 맛줄이 풀려서 아래로 내려 드리우며, 안 쪽을 향하여 회전하면 맛줄이 감기면서 위로 올라간다- 받침대의 안쪽 끊어진 부분에 해당 하는, 모난 갈고리가 놓이는 곳은, 둥그렇게 하여 맛줄이 오가기에 편리하도록 하고, 기둥 야ω

205 끝의 둥근 홈에는 기름과 밀랍을 두껍게 바르는데, 수월하게 회전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하 려는 것이다. 퇴광( 退 樓 )의 굴대판[ 輪 對 板 ]에 내려놓고 싸맨 것을 풀었다. 장생전 제조( 長 生 嚴 提 調 ) 이문원( 李 文 源 )이 가하우판( 假 下 關 板 )을 열고 외재궁( 外 掉 宮 ) 안을 깨끗이 닦은 다음, 집사( 執 事 )되는 자가 관( 植 )을 싼 헝깅을 벗기니, 식재궁관( 批 掉 宮 官 ) 김 종수( 金 鍾 秀 )가 수건으로 닦아냈고, 내시가 유의( 遺 衣 )를 그 위에 놓았다. 집사되는 자가 세 겹으로 된 관싸개[ 相 衣 ]를 덮고 명정( 銘 族 )을 그 위에 씌웠으며, 보삽( 輔 쫓) 불삽( 敵 쫓) 화삽 ( 畵 쫓)을 관싸개 좌우쪽에 그혔다. 때가 되자 관을 절차대로 내려놓았다. 상이 곡을 하며 하 직하는 예를 거행한 후, 구슬과 비단을 전하는 자리에 나갔다. 봉증옥관( 奉 賴 玉 官 ) 이만수 ( 李 硬 秀 )와 봉증백관( 奉 體 뿜 官 ) 서매수( 徐 遭 修 )가 각자 무릎을 꿇고 구슬과 비단을 올리니, 상이 영의정 이재협( 李 在 協 )에게 친히 전하였는데, 이재협이 무릎을 꿇고 받아서 퇴광( 退 據 ) 의 서쪽에다 놓았다. [ 예법에는, 의복과 평소 즐겨 지니던 물건이나 그릇 따위를 놓도록 되 어 있었으나, 이번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 실컷 곡을 하고 절을 하였다. 장생전 제조가 외재궁( 外 掉 宮 )의 밑바닥 판자를 닫고 윷칠한 베로 그 이음새 부분을 둘러썼 다 영의정 이재협이 봉폐( 封 閒 )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봉폐관( 封 閒 官 ) 박성태( 朴 聖 泰 )가 신이 삼가 봉( 封 )합니다.[톰 護 封 ] 라고 쓰고 도장을 찍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9삽의 흙을 덮자, 총호사가 역군들을 거느리고 앞쪽에다 회(까)를 다지는 동시에, 퇴광에 관보다 낮게 회를 채우고 지석( 誌 石 )을 묻었다. 어제( 細 製 ) 지문( 誌 文 )은 다음과 같다. 현륭원( 顯 隆 園 )은 수원부( 水 原 府 ) 화산( 花 山 )에 있는데 계좌 정향(쫓 坐 T 向 )입니다. 기유년 가을에 금성위( 鎬 城 댐) 박명원( 朴 明 源 )이 옛 원( 園 )은 체제상 결함이 많다고 건의하 면서 고쳐 쓰자고 청해서, 드디어 화산에다 자리를 잡았는데, 점을 친 사람의 말이, 그 곳은 서려있는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하였으며, 대소 관원이 따르고 일반 백성들 도 동조하였습니다. 이에 이해 겨울 10월 기미일에 이장( 移 賽 )하고 원의 이름을 현륭 이라 고 고쳤습니다 아, 불효한 이 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 럽고 모질게 목석마냥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사를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에 그 뜻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지극한 심정으로 비나니, 아, 하늘이시여.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늘이 들어주는 것인데, 이 소자는 감히 기필코 이렇게 해야만 소자가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천하 후세에 떳떳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덕행( 德 行 )을 들어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현궁( 玄 宮 )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휘( 證 )는 이선( 李 떤)이고 자( 字 )는 윤관( 允 寬 )이다. 숙종 원효 대왕( 簡 宗 元 孝 大 王 )의 손자이 고 영종 현효 대왕( 英 宗 顯 孝 大 王 )의 아들로 영빈 이씨( 奭 續 李 ff;) 소생이다. 삼가 행록( 行 錄 )을 상고하건대, 태어나시기 수삼일 전부터 상서로운 빛과 구름이 보이더니, 태어나시자 해와 같은 자표(쫓 表 )가 사람들에게 환히 비치고, 울음소리는 큰 종을 치는 것 $

206 과 같았다. 이에 영묘( 英 顧 )가 매우 기뻐하시면서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세 종통의 혈맥이 끊어질 뻔하더니,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변목이 서게 되었다. 고 하시었다 숙묘 ( 簡 蘭 ) 경오년의 고사를 따라 곤전( 坤 嚴 )의 아들로 삼아 원자( 元 子 ) 로 칭호를 정하도록 하 였으니, 이때가 을묘년 정월 21 일이었다.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중외에 대사령( 大 敬 令 )을 베풀었다. 뛰어난 자질이 숙성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벌써 두세 살짜리 아이와 같았는 데, 영묘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들어와 보도록 명하시고는, 이어 가까이 모시는 신하더러 성 ( 誠 ) 경( 敬 ) 두 글자를 써서 들어 보여주게 하였더니 마치 조심스레 받듯이 자세히 바라보 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 보양관( 輔 養 官 )과 상견하는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효경( 孝 經 ) 의 장구( 章 句 )를 뽑아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날마다 앞에서 외워 익히게 하였다. 병진년에 세자로 세웠는데 3 월 15 일에 의장과 호위를 갖추고 양정합( 養 正 間 )에서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연신(뚫둠) 조현명( 趙 顯 命 )이 아뢰기를, 저하( 邱 下 )가 효묘( 孝 顧 )의 모습 을 매우 닮았으니 이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복입니다, 고 하였다. 영묘께서 궁관에게 문 왕 세자편( 文 王 世 子 篇 )을 병풍에 써서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글자의 뜻을 이해하여 왕( 王 ) 자를 보고서는 영묘를 가리켰으며 세자( 世 子 ) 라는 글자를 보고서는 자기를 가리켰 다. 그 뿐만 아니라, 천( 天 ) 지( 地 ) 부( 父 ) 모( 母 ) 등 63 자를 해득하였다. 정사년에 처음으로 서연( 書 鐘 )을 열고 효경 과 소학 의 글을 뽑아 강독하였는데 궁관의 진독( 進 讀 )하는 것을 해득하고는, 손으로 문왕( 文 王 ) 이라는 두 자를 궁관에게 짚어보이었다. 궁관이 소리내 어 읽어보기를 청하니 읽는 소리가 또렷하여 몇 줄을 읽도록 착오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 라, 큰 글씨로 다섯 글자를 썼는데 획이 힘차고 바르며 전실( 典 實 )하였다. 궁중( 宮 中 )에서 언젠가 한 번은 팔패( 八 환) 모양의 가루떡을 올렸는데, 이를 들지 않고 말하기를, 팔패를 형상한 떡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복희도(장 義 圖 )를 찾아보고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앞에 내걸도록 한 다음 여러 번 절을 하면서 공경심을 나타내었다. 역학( 易 學 )에 깊이 심취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 해 가을에 비로소 사부와의 상견례를 거행하였다 천자문( 千 字 文 )을 읽다가 사치할 치 [{ 多 ] 자에 이르러서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춧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를 장식 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다.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 영묘께서 일찍이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물으니, 무명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으며, 또 어느 것을 입겠느냐고 물으니,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하였다. 영묘께서는 이에 기뻐하시고는 여 러 신하들을 대하여 이와 같음을 말하였다. 자란 후에는 항상 무명옷을 입었으니, 검소한 덕행은 타고난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역적들의 음모에서는 도리어 화를 뒤집 어씌울 계제( 階 橫 )로 삼았으니, 이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어느날 하루는 저녁상을 받다가 영묘께서 부르시자, 입안에 넣었던 밥을 즉시 뱉고는 대답 을 하면서 일어났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하고 물으니, 소 학 에 이르기를 입에 밥을 물었으면 뱉어야 된다고 하였다. 고 말하였다 그러자 영묘께서 는 이제 겨우 세 살 밖에 안 되었는데도 체인( 體 認 )의 공부를 안다. 고 말씀하였다 무오년 에 영묘께서 빈청(좁 廳 )의 경연( 經 箕 )에 임어하셨는데, 이조 판서 조현명이 앞으로 나서서 아뢰기를, 신은 빈청의 경연에 참여하는 관리로서 동궁( 東 宮 )에 있는 세자를 바라보니, 슬 기로운 자질이 뛰어나고 영특한 기개가 호방하여, 천고에 보기드문 기상을 지니고 있습니? ω

207 다. 그러니, 교육하는 방법에서 서두르거나 방치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성 취에 대한 책임은 전하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그후 소조( 小 朝 )가 말씀하시기를 풍원( 豊 原 )4987) 의 이 말은 나의 마음에 꼭 틀어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우를 시종 일관 변함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고 하였다 기미년에 영묘께서 묘당에 비망기를 내리어, 을유년의 옛 전례에 따라 임금 자리를 물려주 면서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지 이제 15 년이다. 임금 자리를 마치 초개처럼 여기고 있는데, 다행히도 세자가 벌써 만 5세가 되었다. 내가 비록 자리를 내놓는다고 한들 어떻게 백성들 을 홀시하겠는가. 송 태종( 宋 太 宗 )의 나를 어떤 데에다 두려는가. 라는 말 4988) 은 이것 이 무슨 마음인가. 라고 하였다. 명령이 내리자, 조정 신하들이 극력 간청하였으므로 그만 중지하고는, 이어 세자에게 명하여 시민당( 時 敏 堂 )에서 축하를 받게 하였다. 그것은 임금 자 리를 양보하는 것을 바로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에 왕대비에게 휘호( 徵 號 )를 올렸 는데, 법복( 法 服 )을 갖춰 입고 예식을 진행하는 동안 동작에 법도가 있어 전연 실수하는 일 이 없었으므로, 궁중에서 다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였다 기주( 記 注 )를 살펴보면, 궁관( 宮 官 ) 조중회( 趙 重 臨 )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을 단번에 보면 알 수 있 습니다. 보기에 비상하여 의젓하기가 어른과 같으니 이것은 정말 하늘이 내신 성인( 聖 人 )입 니다. 4, 5 일에 한 번씩 요속( 際 屬 )들을 만나며 8, 9 일에 한 번씩 빈객을 만나는 것을 규례 로 삼으소서. 하니, 그 의견을 따랐다. 이때부터 늘 서연에 나왔는데, 두어 번도 훌어보기 전에 벌써 암송을 해냈으며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임술년에 종묘에 참배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예식이 끝난 다음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곁 에 있기에 언제 사묘( 私 蘭 )에 갈 것인가를 물었더니, 그가 8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예절을 표시하려고 하였다. 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사묘에 나아가 참배하였는데, 도성 백성 들이 슬기로운 모습을 바라보고 춤을 추며 환성을 질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예 의범절을 익히어 거동함에 착오가 없으니, 신령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해 3 월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유생의 옷차림을 하고 문선왕( 文 宣 王 )에게 술을 따라 올린 뒤 명륜당( 明 倫 堂 )에 이르러 박사( 博 士 )의 자리 앞에 나아가 소학 의 제사( 題 解 )를 강론하였는데, 반수교 u 半 水 橋 )를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한 번은 학문을 강론하다가 강관( 講 官 )이 세자에게 평소에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요순(흙 舞 )을 배우고 싶을 뿐이고 이밖에는 알지 못한다. 고 하였다. 그러자 강관이 물러나와 말하기를, 삼대( 三 代 ) 때와 같은 태평 성대를 다시 볼 수 있게 되 었다. 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효제( 孝 佛 )와 성경( 誠 敬 )에 힘쓰라고 권변하는 자가 있자, 즉시 이 네 글자를 써서 자리 곁에 붙여두었다 강관이, 정성 [ 誠 ]과 공경 [ 敬 ]을 공부함에 있어 어느 것이 우선적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물으니, 정성과 공경은 수레의 두 바퀴 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둘로 가를 수 없다. 고 대답하였다. 궁관( 宮 官 )이 직접 지은 시를 보자고 청하여, 그 가운데 해가 동방에 떠올라 온누리를 비추네. 라는 시구가 있는 것을 보 고는,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 시구의 기상은 예조( 藝 祖 )의 일출시( 日 出 詩 )4989) 와 꼭 들어 맞는다. 고 하였다 계해년 3 월 17 일에 관례( 冠 禮 )를 거행하였는데, 법복( 法 服 ) 차림으로 임금을 볍고, 물러나와 % ω

208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행록( 行 錄 )을 살펴보면, 언제인가 한 번은 영묘( 英 關 )를 옆자리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영묘께서, 우리 나라의 조정 관리들은 예로부터 당파의 논의가 있는데 어 떻게 하면 그만두게 할 수 있는가? 고 물으니, 똑같이 보고 함께 등용하면 펼 것입니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영묘는 매우 기특히 여기고 기뻐하였다. 영묘께서 정사를 보면서 간혹 밤 이 이속할 때까지 있으면,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기다린 후에 야 잠을 갔다 또 글을 읽을 때변 반드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므 로, 영묘는 늘 그만하도록 하곤 하였다. 병이 나서 영묘께서 임하여 살피시는 경우에는, 반 드시 의복을 입고 일어나 앉았으며, 혹시라도 괴로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궁중기문( 宮 中 記 聞 ) 에 의하면, 갑자년 l 월 11 일에 혼례( 婚 禮 )를 치렀는데, 영의정인 풍 산 홍씨( 豊 山 洪 民 ) 홍봉한( 洪 鳳 漢 )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흘만에 빈궁( 續 宮 )과 함께 임금 을 따라 종묘에 참배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혜성의 이변이 발생하였는데, 혼례 를 치를 때가 되자 혜성이 갑자기 없어졌다. 상이 고경중마방( 古 鏡 重 摩 方 ) 4990) 의 편 제( 篇 題 )를 써서 궁관으로 하여금 진강( 進 講 )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묻기를 마음을 어찌하 여 거울에다가 비기고 정성과 공경을 어찌하여 가는[ 摩 ] 일에다 비기는가? 하니, 대답하기 를, 공경은 위와 아래를 관철하는 수양이고, 정성은 진실함을 뜻하는 말로서, 정성과 공경 이 곧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입니다. 고 하였다. 빈객(좁 客 ) 이종성( 李 鍾 城 )이 이어 이 설을 부연( 數 仍 )해서 대답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진지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성의에 감동 되어 매우 융숭하게 대우를 하였다. 그해 겨울에 상이 펀치 않다가 병이 낫게 되자, 진연례 ( 進 훌 禮 )를 거행하였다. 이유고 강석( 講 席 )에 임하시니, 강관이 묻기를, 서연에 나와 글을 읽는 것과 연회에 참가하여 음악을 듣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고 물으나, 대답하기 를, 글을 읽는 것은 이치를 탐구하자는 것이고 음악을 듣는 것은 곧 어른을 모시고 즐기려 는 것이니, 글을 읽는 것이 좋은 일임은 분명하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은 일이다 고 하였 다. 을축년에 상이 상훈( 常 힘 )을 지어 가지고 읽으라고 명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글자의 음을 더듬거리지 않고 읽어내고, 부연해서 대답을 하는 말에도 근거가 뚜렷하니, 이야말로 신령이 말없이 돕고 요속( 燈 屬 )된 자들이 잘 인도한 덕분이다. 고 하였다. 그해 봄에 주강(훌 講 )을 행하여 소학 을 강론하면서, 북제( 北 齊 )의 태자( 太 子 )가 고윤( 高 允 )을 두둔한 문제 를 놓고 궁관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잘못한 것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고윤이 사실대로 쓴 것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의 원칙이고, 죽일 만한 죄가 아니다. 이러한 뜻으로 두둔하다가 태무( 太 武 )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해도 될 일이다. 라고 하였다. 병인년 봄에 상을 모시고 후원에서 벼를 심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농사짓는 일이 어째서 힘들다고들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무더운 여름에 물이 펄펄 끓듯이 뜨거 운데도 농사꾼들은 농기구를 가지고 일을 하니 그 고생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 하 였다 상이 풍경을 보고 시를 지어보라고 명하시고는, 이어 지은 시를 보고서 말씀하시기를, 수구( 首 句 )는 가뭄을 걱정하여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고 낙구( 落 句 )는 나더러 먹을 닦 으라고 권변하는 것이다.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넘어섰는데도 세자로부터 더 힘쓰라는 말을 들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룩하기도 하다 라고 하였다 이어 야대( 夜 對 )를 행 하고 말씀하시기를, 오늘 세자의 시를 보니 뜻이 크고 원대하다 큰 비가 내린다. 는 한 구( 句 )는 대풍가( 大 風 歌 ) 4991) 의 기상이 있으니 나의 마음은 이로부터 믿을 데가 있게 되 m 갱

209 었다. 라고 하였다. 한 번은 궁관과 더불어 신축( 辛 표) 임인( 王 寅 )년에 있었던 일 4992) 을 논 하였는데, 의리( 義 理 )의 근원을 환히 변론하였고, 이어 애일잠( 愛 日 歲 )을 내리어 자기의 뜻 을 표시하였다. 이때 상이 몸조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약원( 藥 院 )의 신하들을 불러 만 나보자 부제조( 副 提 調 ) 홍상한( 洪 象 漢 )이 아뢰기를, 어제 세자가 밤이 새도록 곁에서 모시 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체로 효도라는 것은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어린 나 이에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종묘와 사직의 복입니다 고 하였다. 또 상이 친 히 권학가( 勳 學 歌 )를 지어 깨우치면서 말씀하시기를, 세자가 근래에 다시 글읽기에 열중하 여, 비록 밤이 이속해진 후에도 일어나 앉아 독서를 하고 있다 내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세 자의 글읽는 소리를 듣노라면, 기운이 한결 솟는다. 고 하였다. 정묘년에 궁중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 慶 德 宮 )에 피우( 避 萬 )하도록 명하였으나, 매양 삼전( 三 願 )에 오랫동안 문안을 드리지 못하는 점을 염려하며 지냈다. 어떤 연신( 鐘 많)이 상 에게 이 일을 아뢰자,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씨가 가룩하 다. 라고 하고는, 당장 그날로 임어하였다. 상이 대궐로 돌아올 때 미쳐 또 다시 몸소 문안 을 드리겠다고 자주 청하므로, 상이 처소에 돌아오도록 특명하였다. 한 번은 친히 보리를 심으니, 묻기를, 심을 만한 물건들이 많은데 기이한 꽃이나 특이한 나무를 심지 않고, 꼭 보리를 심은 의도는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리는 곡물이므로 그것이 열매를 맺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고 하였다. 이에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해 5월에 상이 환경전( 歡 慶 願 )에 납시어, 빈객(좁 客 ) 춘방( 春 행) 계방( 桂 행)의 관원들을 입 시하도록 명하여 서연을 열고는 저녁이 다 되도록 강독하고 논란하다가 파하였다 상이 대 단히 기뻐하여 세자궁의 요속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겨울에 또다시 경덕궁으로 피접 ( 避 接 )하였는데, 이듬해 무진년 봄에 이르러 궁관으로 하여금 문안드리겠다고 청하였으나, 상이 그만두라고 유시하였다. 문안을 드리는 궁관이 갈 때마다, 꼭 부주( 附 奏 )하는 것을 으 레 하는 일로 삼았다. 궁관 이이장( 李 暴 章 ) 등이 고사( 故 事 )를 진언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치고 누 구인들 큰 효자가 아니었겠는가마는, 공자께서 유독 우순( 盧 舞 )을 칭찬한 것은, 일반 사람의 심정은 사물의 변천에 쉽사리 동요되지만 우순은 온 천하를 가지고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 기 때문에 칭송한 것이다 거친 밥에 푸성귀를 먹고 살던 때이건 임금이 되어 비단옷을 입 고 거문고를 뜯던 때이건, 우순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윤( 伊 尹 )은 이 도( 道 )로 백성들을 깨우쳤는데 이 도라고 하는 것은 곧 요순(흙 舞 )의 도이 다. 요순은 남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고 이윤은 요순보다 늦게 깨달았으며, 백성들은 그보다 더 늦게 깨달았다. 깨닫는 데는 크고 작음과 얄고 갚음이 있으나 깨달으면 마찬가지이고 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백리해( 百 里 쫓)가 우공( 盧 公 )에게 간하지 않 은 일에 대하여, 맹자는 그를 슬기롭다고 칭찬하였으나 장남헌( 張 南 野 )은 응당 간해야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간하지 않았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남의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섭기는 도리는 마땅히 남헌의 설을 옳게 여겨야 할 것이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진이를 좋아하는 성의가 있으면, 한 사람의 군자를 천거하는 것으로 충분히 수 많은 소인들을 이겨낼 수 있다- 맹자는 설거주( 醒 居 州 )가 외톨이로 되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군자가 고립하게 되면 걱정스러운 점이 어찌 일개 설거주뿐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말하 때

210 기를, 기( 氣 )는 몸체에 차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잘 가꾸면 요순(흙짧)이 되고 제대로 가꾸 지 못하면 도리어 일에 해로우니 예를 들면 한( 漢 )나라 무제( 武 帝 )가 그런 경우이다. 이는 기의 탓이 아니라, 요는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한 번은 서연에 임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진 이와 사특한 이가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에는 나라의 흥망이 관계되어 있다. 곁에 있는 여러 대부들과 온 나라 사람들이 다들 말하는 이상, 쫓아내거나 승진시키는 데에 무슨 의심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신중하게 대하는 것은, 진정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과 공적인 것 사적인 것을 명백하게 구분 하지 않을 경우, 여론의 칭송과 비방을 또한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뭇 사람이 비방하는 중에서도 광장(똘 章 )을 취하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중에서도 중자( 件 子 )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의 권도로써 판단을 내리고 취사를 한 다음에 야, 주견이 흔들리는 것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지 않으면 태아검( 太 阿 劍 )을 거꾸 로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화란이 있게 된다. 라고 하였다. 또 서연에 임어하여 맹자가 논한 바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해 강론하면서 말하기 를, 주( 周 )나라의 덕이 지극하여 온 천하가 다들 복종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주나라의 신하 가 되지 아나 한 자들은 모두 못된 마음을 품고 백성들을 괴롭힌 자들이다 천리( 天 更 )된 자 로서 어찌 이런 자들을 정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일의 선비들이 반드시 주( 約 )의 못 된 행실을 도와주었다. 거나, 민심이 상( 商 )나라를 떠났다 는 등의 말로 무왕( 武 王 )을 위하여 변명하니, 이는 소견이 좁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선( 善 )이란 천하의 공리( 公 理 )로서, 성심으로 즐겨 취한다면, 천하의 선은 모두 자기의 것이 된다, 이것은 위 대 하신 순임금의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아는 것이 명백하지 못 하면 남의 착한 것을 알 수 없으므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식을 넓히는 것을 우 선시 하여야 한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란 한 몸의 주재( 主 宰 )인 셈이니, 잠깐 동안이나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 마음이 풀어지는 날이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利 )치고 인의( 仁 義 )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것이 주역( 周 易 ) 에서 이른바 의( 義 )와 이( 利 )로 천하를 이롭게 한다, 는 것이다. 맹자가 인의( 仁 義 )만 얘기하고 이를 말하지 않았다는 이는 바로 의( 義 ) 리( 利 )의 이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 다 또 말하기를, 공자( 孔 子 )는 관중( 管 件 )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오랑캐가 되고 말았 을 것이다 고 하였는데, 맹자는 관중이 쓰던 패도( 觀 道 )는 증서( 曾 西 ) 같은 자도 쓰지 않았다. 고 하였다. 이는 때에 따라서 상황에 적절하게 한 말로 각각 일리가 있는 것이지, 공자와 맹자가 어찌 견해가 달랐겠는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군들 때를 제대로 파악 한 그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화평 옹주( 和 平 弱 主 )가 죽었다. 이에 앞서 세자가 태어나시던 초기에 상께서 영빈( 奭 複 )에게 말하기를,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는 것이니, 칭호를 정하는 이 초기에 마땅히 그 규모를 크게 하여, 일시의 보고 듣는 것을 존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백 일이 지나자 세자에게 명하여 경묘( 景 願 )께서 전에 거처하시던 전각에 이어하도록 하고, 전 각의 이름을 저승전(짧 承 願 )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관( 女 官 )과 시인(풍 人 )들은 모두 전 에 경묘를 섭기다가 갑진년과 경술년에 내보냈던 사람들로 충당하였는데, 그것은 누명을 벗 져 불안해하는 자들을 안심시킴으로써 화기( 和 氣 )를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 A,

211 리들은 도리어 남몰래 자기들이 득세한 점을 다행으로 여기고서, 얼마 지나지 않자 주퉁이 를 놀리고 손빽을 치면서 자기들 무리에게 타이르기를, 영빈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하였으 나 이는 사친( 私 親 )이다 군신( 君 멀)의 의리가 있는 만큼 자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고 하 여 만날 때는 반드시 빈( 複 )으로서 정전( 正 觀 )에 나아가 볍는 예법을 적용하여 예절과 의식 절차 틈바구니에 제약을 받게 해놓았다. 그리하여 영빈은 자주 가보지 못하고 하루에 한 번 이나 하루 건너 한 번, 또는 며칠 건너 한 번 가기도 하고, 간혹 한 달에 한두 번 가기도 하였다. 꾀가 이미 이루어지자 이번에는 또 대조( 大 朝 )께서 자주 임어하시는 것을 꺼리어, 궁궐의 골목에다 사람들을 늘여세워 임금의 동정을 엿보았으며, 날마다 허튼소리를 퍼뜨려 현혹을 시켰다. 세자가 이런 상태를 상에게 자세히 아뢰자, 상이 그제서야 후회를 하였다. 그러나 여관과 시인들은 곧 경묘조 때에 있던 오래된 자들이었으므로 차마 사형에 처하지 못하였으나, 상의 뜻은 자연히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때에 옹주가 울면서 아뢰기를, 일이 경묘와 관계된다는 것은 그 혐의가 매우 적고, 세 종통의 혈맥은 관계된 바가 매우 큰 것인 데, 어떻게 일시적으로 혐의를 없애기 위해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 때문에 두 궁( 宮 ) 사이에는 화기가 점차 삭막해지고 있으니, 당장 통곡을 하며 세 상을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고, 또 모빈( 母 續 )에게 간절하게 간하였다. 이때 상은 집복 헌( 集 福 野 )에 있었는데, 저승전( {, 諸 承 願 )과의 거리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묘년이 되 자 경춘전( 景 春 願 )에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거리가 가까운 편리함을 취하고 옹주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옹주는 갑자기 병이 나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다. 세자는 봅시 슬퍼하면서 변고에 대처할 방도를 갚이 찾았는데, 이 일을 아는 바깥 조정의 사람들은 다틀 세자가 위태롭다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풍원 부원군( 豊 原 府 院 君 ) 조현명( 趙 顯 命 ), 영성 군( 靈 城 君 ) 박문수( 朴 文 秀 ) 우빈객( 右 좁 客 ) 이종성( 李 鍾 城 ) 등이 위기에 임해 적절하게 호위 할 것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였다. 기사년 봄에 세자에게 서정(딴 政 )을 대리( 代 理 )하도록 명하였다. 기주( 記 注 )를 살펴보면, 정 월 22 일 밤 4 경( 更 )에 상이 한 통의 봉서를 승정원에 내려보냈는데 그것은 내선( 內 輝 )에 관한 일이었다. 승지가 청대하여 되돌려 올리면서 아뢰기를 조금 전에 덕성합( 德 成 聞 )을 지나왔는데, 세자가 벌써 등촉을 밝히고 앉아있었습니다. 그 놀라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이 더욱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유고 세자가 대조( 大 朝 )의 문 밖에 나아와서 엎 드려 눈물을 흘렸다. 영의정 김재로( 金 在 흉 ) 등이 입시하여 봉서를 뜯어보니, 처음에는 내선 에 관하여 얘기했고 다음에는 대리( 代 理 )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 아가며 도로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세자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재차 명하였다. 세자 가 어좌 앞에 나아가 엎드려 목메어 울면서 간곡히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부터 전례 가 있던 일이니 놀라지 말라. 고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아뢰기 를, 신축년에 정사를 대리 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서연에 임하였는데, 어찌하여 전하는 그 날의 전하 심정을 가지고 세자의 오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라고 하자, 임금 이 비로소 깨닫고 명을 중지하였다- 이어 현명이 아뢰기를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다행 히도 도로 취소한다는 승인을 받았는데 비록 두 번째 문제라고 하더라도 신들이 어찌 감히 받들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세자가 여전히 엎드린 채 눈물 을 흘리고 있었는데 상이 누차 명을 하자 비로소 물러갔다 그로부터 6 일 후에 시민당( 時 敏 호)에 나아가 대리 조참( 朝 參 )을 행하였는데, 영지( 令 톱)를 내려 대소 신하들로 하여금 결백한 마음가짐으로 서로 협동하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보 %

212 좌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도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업을 각별히 보살피도록 하였다 또 경외 의 혼례나 장례를 제때에 치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청에서 돌보아주도록 하였다. 우 참찬 원경하( 元 景 夏 )가 상에게 아뢰기를 신들이 초연( 初 鐘 ) 때 내린 영지( 令 륨)를 보니, 누 구인들 서로 전하며 고무되어 결백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합심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 까. 라고 하였으며, 호조 판서 박문수(헤 文 秀 )가 아뢰기를 대리하라는 어명이 내렸을 때, 세 자가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채 의롭게 대처하고 예절에 맞도록 한 일에 대하여, 외부 사람 들이 듣고서 다들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세자 가 나보다 낫다. 고 한 상의 하교로 인하여, 문수가 세자를 보살필 데 대한 말을 극력 진술 하였으며, 또 며칠 뒤에는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을 돌봐주는 문제로써 면대( 面 對 )하고 하교 하시어 세자로 하여금 법을 따르게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제왕가( 帝 王 家 )의 가볍( 家 法 )은 엄격한 것이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줄곧 너무 엄해서는 안 될 것입니 다. 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의 가법은 본래부터 이러하다. 옛날에 조심하는 마음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나 또한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다 고 하였다 궁중기문 X 을 살펴보면, 서연( 書 鐘 )에서 시경 을 강론하다가 궁관( 宮 官 )에게 말하기를 척호( 隆 뻐) 편( 篇 )에서 자 기가 부모를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만을 말하였다. 효 자는 부모의 심정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며, 자기가 부모를 생각하는 심정도 자연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고 하였다. 또 상서 를 강론하다가 말하 기를 요순(뚫 舞 )은 큰 성인인데도 그 신하는 오히려 게을리하지 말고 황탄(옆짧)하지 말도 록 경계를 하였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고하는 도리는 응당 어려운 일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니 임금이 요순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신하가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은( 股 )나라의 세 임금과 주( 周 )나라의 문왕( 文 王 )은 안일하지 아니한 까닭에 나라를 오랫동안 유지하였고, 순임금은 사람을 등용하여 일을 맡긴 까닭에 편안하여 임금 자리에 가장 오래 있었다. 이것이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안일하지 않 아야만 편할 수 있는 법이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안일하지 않는 것을 제쳐두고 다른 무엇 을 취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경오년 8 월에 의소 세손( 露 昭 世 孫 )이 태어났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대사령( 大 敏 令 )을 반포하 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9월에 영묘께서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그 이튿날 비가 내렸다. 서울 에 남아있는 대신( 大 닮) 영의정 조현명( 趙 顯 命 ) 등을 불러 이르기를 대가( 大 罵 )가 떠나자마 자 어제 비가 많이 내렸으니, 성상의 체후가 손상되셨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애가 타고 답답 하여 경들을 불러 만난 것이다 라고 하고는, 이어 서울에 머물러 있는 군사들을 위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로부터 대궐에 돌아올 때까지 거의 20 일 가까이, 밤이면 옷을 단정히 가다듬 은 채로 아침까지 밤을 새워 걱정하면서, 오랫동안 천안( 天 頻 )을 볍지 못하는 것 때문에 밤 낮 그리워하며 걸핏하면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곤 하였다. 궁중에서 이를 매우 의아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이후로 부모와 처음 멀리 떨어지고 보니, 어버 이가 그리운 마음에서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 하였다, 상의 수레가 돌아와서, 영 묘께서 이 얘기를 듣고는 세자의 일은 늘 상상 밖이다 고 말씀을 하시었다 기주( 記 注 )에 의하면, 신미년 가을에 제도에 돌럼병이 극성하자, 영지( 令 冒 )를 내리어 방백 ( 方 伯 )들에게 특별히 보살피고 돌봐주도록 신칙하였다. 임신년 봄에 대조( 大 朝 )께 존호( 尊 號 )를 올라는 문제로 여러 날 정청( 處 請 )을 하니, 상이 황단( 皇 펄)에 나아가 청명( 請 命 )하는 %

213 거조를 행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울면서 내전( 內 散 )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가 편복( 便 服 ) 차림으로 걸어나가서 임금 앞에 이르러 울면서 간청해 마지않으 니, 자전( 孫 願 )에게만 존호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내전으로 돌아오자 세자가 명정전( 明 政 嚴 ) 월대( 月 臺 )에 나아가 날이 셀 때까지 합문( 聞 門 )에 엎드려 있었다 이해 3 월에 의소 세손이 죽었는데, 세자는 스스로 마음을 다지어 슬픔을 억제하고, 위로 삼 전( 三 觀 )을 위로하였다, 9 월에 원손( 元 孫 )이 태어나자 하교하기를 오늘의 경사는 경오년의 경사보다 낫다 고 하였다. 겨울에 세자에게 홍역의 증세가 있었으므로 약원( 藥 院 )이 직숙( 直 宿 )을 하였는데, 인접할 때이면 반드시 예절을 차리었다. 여러 신하들이 침실에서 누워 접견 할 것을 청하자 겹옷 하나 걸치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신하들을 누운 채로 만나겠는가. 고 하였다. 이 무렵 조정의 의논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영묘께서 약을 물리치니, 세자가 승지 에게 말하기를 내가 4 년 동안 대리( 代 理 )하면서 성교( 聖 敎 )를 몽받지 못하여 약을 물리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는가 라고 하였다 11 월에 상이 어떤 일로 격해져서 전선( 傳 輝 )하겠다는 하교를 내렸다가 금새 도로 취소하였다. 12 월에 송현궁 ( 松 뼈 宮 )에 행차하여 또 전선( 傳 輝 )을 병하였고, 며칠 후에는 선화문( 宣 化 門 )에 나아가 앞서 의 명을 다시 선포하였다. 세자가 엎드려 눈물을 떨구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청명( 請 命 )을 하였는데, 이마에서 흘러 떨어진 피가 자리를 적시었다. 영의정 이종성( 李 宗 城 )이 아뢰기를 세자가 비오듯 눈물을 흘리니, 그 성의와 효성이 지극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취소하도록 허 락하신 이상 식언( 食 言 )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감기라도 걸릴까 몹시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중한 병을 앓고 난 후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종성 등을 중도 부처( 中 途 付 處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육상궁( 敏 詳 宮 )에 가니, 세자가 옷자락을 잡고 극력 요청을 하려 했는데, 상은 즉시 행차를 돌려 창의궁(꿇 義 宮 )으로 가서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이날 밤 세자가 걸어서 대궐문 밖에 나아가 상소하 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새벽까지 명을 기다리다가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도로 취 소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는, 서둘러 궁궐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 다음날 밤에 또 대궐문 밖에 나아가서 엎드려 있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돈화문( 敎 化 門 ) 밖에 물러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렸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날 계속하였다. 상이 북한 산 성( 北 漢 山 城 )의 행궁( 行 宮 )으로 가려 하자 세자가 울면서 승지에게 말하기를 나의 죽고 사 는 것이야 진실로 돌아볼 것도 못되나 이처럼 몹시 추운 때를 당하여 성체( 聖 體 )에 바람을 쏘이니,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고 하고는, 즉시 약원( 藥 院 )의 신 하로 하여금 상에게 인삼차를 다시 올리게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상이 비로소 대궐로 돌아왔으며, 앞서의 명을 취소하였다 궁중기문 을 살펴보면, 이 무렵 화협 옹주( 和 協 줬 主 )의 상사( 喪 事 )가 있었는데, 애통하고 아쉬움을 억제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 누이에 대해 각별히 고념( 顧 念 )하는 정이 있 는데, 이제 갑자기 죽었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기겠는가, 직접 가서 슬픔을 쏟아내지 못하는 처지가 나의 지극한 아쉬움이다. 라고 하였다. 계유년 정월에, 영의정 이종성이 탄핵 을 당하여 성밖으로 나갔다가, 3 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향리( 獅 里 )에 돌아갔다. 이때에 문녀 ( 文 女 )4993) 가 영태를 하였으므로 중외가 뒤숭숭하였는데, 이종성이 호위하자는 논의를 극 력 주장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하마터면 딴 뜻을 품은 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을 뻔하였는 데, 이때에 와서 너무도 모해( 說 害 )가 더욱 심해져서 종성은 성문 밖까지 물러나갔으나 끝 44

214 내 향리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3 월 초에 문녀가 딸을 낳자 비로소 말하기를 우리 집안 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만큼, 시속 사람들이 내쫓으려 한다는 이유로 나의 평소 뜻 을 움직일 수는 없다. 설사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퍼붓더라도 오직 나아가는 것 뿐, 물 러설 수는 없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일 따름이다. 이제는 다행히 옹주가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내가 귀향할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 하고는, 드디어 글을 올려 향리로 돌 아가겠다고 고하였다 이에 세자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제아무리 이러콩저러풍 말을 하더라도 문녀의 일에 대해서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한다. 설사 그런 일이 있더 라도 일월처럼 밝으신 대조( 大 朝 )께서 어찌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지 않으리라 걱정하겠는 가. 단지 뭇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염려를 상신( 相 톰)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 라 고 하였다. 이해 겨울에 명을 받들어 사형수( 死 쩌 因 )들을 세 번 심리하였는데, 죽지 않고 목숨을 보전 하게 된 자들이 많았다 이후로는 해마다 이렇게 하였다 밤에 궁관을 불러 강론을 하다가 자정이 되자, 공물로 올라온 률을 궁관에게 하사하였다. 달을 다 먹자 쟁반 안에 시( 詩 )가 있었는데, 궁료들이 즉석에서 차운시( 次 題 詩 )를 지어 화답하였다 갑술년에 각도로 하여금 환곡( 還 혔)이 많은 데에서 모아 부족한 쪽을 보태주는 정사를 거행 토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스런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으며, 대동 군포( 大 同 軍 布 )를 돈으 로 대납( 代 納 )하는 방납( 防 納 )은 금지시 켰다 태학( 太 學 )의 유생들 이, 재예( 濟 轉 )가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가지고 밤에 나오다가 순찰 도는 군졸에게 붙잡혔다는 이유로, 드디어 식당( 食 堂 )에 들어가는 일을 중지하니, 하교하기 를 대조( 大 朝 )께서 유생들을 중시하는 덕의( 德 意 )가 얼마나 큰데, 감히 하찮은 일로 소란을 일으키어 성인의 사당에 사람이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병조의 장관을 엄중히 문책하겠다 라고 하고는, 재유( 顆 f 需 )들을 권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일찍이 논어 를 강론하다가 삼월 불위( 三 月 不 違 ) 장에 이르러, 강관이 아뢰기를 이는 공 자( 孔 子 )의 말씀인 만큼, 안자( 頻 子 )의 이름을 휘( 證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고 하니, 말씀하 기를 공자가 말을 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하대의 사람이다. 하고는, 드디어 휘하고 이 름을 부르지 않았다. 또 영지( 令 듭)를 내리어 밖에 있는 서연관들을 모두 참가하게 하고는 사물잠( 四 꺼 歲 )을 강론하다가 말씀하시기를 대저 사욕( 私 愈 )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고 작은 것과 얄고 깊은 것이 있지만, 하찮은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점차 큰 과오를 빚어 낸다면, 그 해로움은 마찬가지이다. 소열제( 昭 烈 帝 )가 말하기를 자그마한 악( 惡 )이라고 해 서 그 악을 저지르지 말라. 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더없이 지당한 말이다. 고 하였다. 상께 서 이를 들으시고 가상히 여기어 학문을 강론한 효력이 참으로 얄지 않다. 고 하였다 또 소학 을 강론하면서 말하기를 애연( 讀 然 )하게 사단( 四 端 )이 느낌에 따라 나타나는데, 일 단 나타나게 되면 넓게 확충해야 되며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도 모름지기 공경을 위주로 삼 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발로되지 않았을 때에 공경을 위주로 한 다음에야 절도에 알맞게 발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경한다는 것의 뜻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손사막( 孫 思 選 )이 이르기를 마음은 조심하면서도 담이 커야 한다 고 하였다. 무왕( 武 王 )이 군사를 거느리고 맹진(굶 律 )을 건넌 것은 바로 씩씩한 기상이었다 π %

215 그런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두려운 심정이다 고 하였으니, 성인의 심소 담대( 心 小 擔 大 )한 점을 여기에서 역시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겨울에 날씨가 추우니,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을해년 역변(팽 變 ) 때 상이 장전( 帳 嚴 )에 납시어 죄수들을 국문하면서, 세자더러 옆에서 모 시라고 명하고는 하교하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에 상소하였던 여섯 명의 역적과 구휘(좀 輝 )4994) 를 이제야 비로소 역률(팽 律 )을 소급해 시행하였다. 이제부터 의리가 비로소 밝혀 지게 되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목( 網 目 ) 을 강론하다가 말하기를 즉묵성(염 O 뿔 城 )이 굳게 버티어 함락당하지 않은 일은 위왕( 威 王 ) 때 상을 받은 대부( 大 夫 )가 일찍이 보장책( 保 章 策 )을 시행한 공이 있어 이 날에 그 힘을 본 것인 듯하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의 총애를 받는 아흡 신하가 이미 전단( 田 單 )을 참소하였건만, 오직 초발( 紹 動 )만이 그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나섰다. 이때 제( 齊 )나라 임금은 의당 전단 에게 사심( 私 心 )을 두어 두둔하는 것이 아닌가. 고 의심을 했을 법한데, 의심을 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등용을 하였으니, 제나라 임금은 참으로 현명한 군주이다. 라고 하 였다. 또 민지( 潤 池 )의 회합에 대하여 논하기를 협곡(혔갑)에서 만났을 때 공자가 예의로써 임금을 인도한 결과 제( 齊 )나라 임금이 겁을 먹고 감히 노(쩔 )나라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였 다. 과연 상여( 相 如 )가 공자처럼 처음부터 예로 따졌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힘이 들지는 않 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 漢 )나라 문제( 文 帝 )는 어진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황로( 黃 老 )를 숭상하고 상기( 喪 期 )를 단축하는 제도를 정하였으며, 가의( 賣 誼 ) 같 은 훌륭한 인재가 있는데도 등용하지 못하였으니, 끝내 후세의 기의( 識 議 )를 변하기 어렵다. 다만 가의의 상소문은 한갓 시정( 時 政 )의 득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본질적인 병통에 대해 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동자( 重 子 )가 주장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논의 에다 비교 할 때 자연히 차등이 있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 庸 )나라 현종( 玄 宗 )은, 조정의 일은 재상에게 맡기고 변방의 일은 장수한테 맡기고는,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에 이른바 어진 인재를 찾아내는 데에 애쓰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데서 몸이 편하게 된다. 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현종은 어진 이를 찾아내는 데에 애를 쓰지 못하고, 단 지 사람에게 맡기면 편하다는 것만을 안 나머지 천보( 天 寶 ) 연간의 난리 4995) 를 초래하였 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한휴( 韓 休 )와 소숭( 蕭 홉)을 논할 때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 사적으로 얘기를 한 것은, 그가 이미 성심껏 어진 이를 좋아하지 못하고 억지로 거스르는 뜻이 있었으니, 이것은 계속적으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 아니다. 그 정치 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위( 衛 )나라의 사군( 關 君 )은 선대 임금이 물려준 토지를 일개 죄수와 바꾸었는 데, 법을 세운 것은 엄격하였으나, 경중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악의( 樂 殺 )가 제( 齊 )나라를 정별할 때, 극신( 劇 辛 )은 고립된 군대를 끌고 갚숙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논란을 하였다 그러나 위( 鍵 )나라는 송( 宋 )나라를 공략( 攻 略 )하고, 조( 趙 )나라는 하간( 河 間 ) 지역을 거머쥐어, 충분히 제나라의 군대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거에 성 공을 하였다. 이 때문에 병법에서는 형세를 살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라고 하였 다

216 이해 여름에 날씨가 무더우니 궁관이 서연( 書 뚫) 시각을 개정하자고 정하였다 이에 명령하 기를 아침 저녁에는 조금 선선하므로 글읽기에 알맞을 뿐 아니라 대조( 大 朝 )께서 한낮에 주강(훌 講 )을 하시는데 내가 어찌 감히 더운 것을 꺼리어 시각을 고치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허락하지 않았다. 서연관 송명흠( 宋 明 款 )이 현( 縣 )의 관원이 되어 하직 인사를 하니, 특별히 소대(검 對 )를 명하여 대학( 大 學 ) 의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 는 내용을 토론하였는데, 조용하게 주고 받는 말이 마치 메아리와 같았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설을 송( 宋 )나라 황제는 듣기 싫어하였는데, 저 하( 邱 下 )께서는 심오한 뜻을 밝히면서 꾸준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여기서 저하가 학 문에 진실한 마음으로 노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또 맹자(굶 子 ) 를 강 론하다가 궁관에게 말하기를 우( 禹 )임금이 용사( 龍 뾰)를 내몰아 진펄에다 살게 하였는데, 우는 어떻게 용사를 내몰았는가. 우가 이미 물길을 터서 길을 뚫음으로써 늪을 진펄로 만들 고 나자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용사가 따라간 것으로서 이는 저절로 내몰아 쫓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세가 그러했을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성인이 때 를 살피고 기미 를 살피어 어디를 들어가든지 터득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도 역시 그 형세에 순응하기 때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퇴( 進 退 )와 존망( 存 亡 )의 기미를 아는 것은, 시중( 時 中 )의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병자년 5 월 낙선당( 樂 善 堂 )에 화재가 났다. 기주( 記 注 )를 살펴보면, 세자가 영지( 令 듭)를 내 리어 불초한 내가 외람되게 대리( 代 理 )를 받든 지가 벌써 8년이 되었으나, 어느 일 하나 성 상의 뜻을 제대로 받든 것이 없이 늘 성상의 마음에 걱정만을 끼쳐드리며 오늘날에 이르렀 으니, 신하들을 대하기가 참으로 부끄럽다. 다행히 우리 성상의 지극하신 인애( 仁 愛 )에 힘입 어 지내고 있는데, 삼가 어제의 하교를 받들자, 감격과 송구스러움이 교차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조정에 있는 대소 신하들은 나를 변변치 못하다고 보지 말고, 일에 따라 올 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상이 그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세자의 자신을 탓한 말이 어찌 덕이 없어서 그리된 것이겠는가. 조상의 신령이 돌보아주심을 받은 셈이니, 대소 신하들은 우리 세자의 이 뜻을 몸받아 지성으로 보좌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궁중기문 에 의하면, 세자가 본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점은 궁중의 대소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이때에 그와 상반된 말이 돌았다. 세자는 성인의 가르침에 힘쓰지 못했다 는 내용의 지시를 내리어 반성하면서 자책을 하였고, 또한 술을 지나치 게 마셨다고 상 앞에 말씀드렸다. 이때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없는 일을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성실하지 못 한 것이 된다. 고 말하자, 답하기를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병철하신 전하께서 스스로 그 것의 허실을 판별할 수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 겠는가. 고 하였다. 얼마 후에 상이, 세자가 영지( 令 틈)를 내리어 자신을 책하였다는 것을 듣 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런 말이 나도는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고 하면서 누차 감격하 고 깨닫는 의사를 드러내 보였고, 그뿐만 아니라 성의( 聖 意 )를 중외 에 반시( 領 示 )하였다. 이에 앞서 화재가 발생한 이튿날 상이 여러 신하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근래의 일을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조정 신하들 중에 믿을 만한 자가 없다 고 하니, 적신( 戰 톰) 김상 로( 金 尙 쩔 )가 대답하기 를 세자도 역시 두렵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라 η버

217 고 하였다 그런 다음 승지에게 물으니, 승지 이이장( 李 흉 章 )이 아뢰기를 세상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장차 이런 신하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 라고 하니, 상이 이 르기를 옳다 승지가 한 말이 과연 옳다. 라고 하였다 이장이 또 아뢰기를 아비에게 잘못 이 있으면 아들이 간하지 않는 적이 없는 법이니,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아비에게 간쟁 하는 아들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비로서 나무라지 않는 적이 없는 법이니, 그래서 옛글에 이르기를 어진 아버지와 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 고 하 였습니다. 부자간에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나무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이른 바 아비는 아틀을 위하여 허물을 숨겨주고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허물을 숨겨준다. 는 것은, 간쟁하고 책망을 하되 다른 사람들이 그 간쟁하고 책망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허물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하신 말씀은 실로 성인의 허물을 숨겨준다. 는 말과는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라고 하였다. 상 이 드디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아흰 말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승지 같은 사람은 이 처럼 걱정을 하지만, 고약한 무리들은 반드시 듣고서 기뻐할 것이다 고 하였다 이장은 오 히려 본사( 本 事 )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만 아뢰고 말았던 것이다. 세자 의 영지( 令 탑)가 먼저 내리고 임금의 전교( 傳 敎 )가 뒤이어 내리자, 궁중과 외정( 外 廷 )에서 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를 축하하여 말하기를 감동하고 깨닫게 된 것은 성상의 인자한 마 음에서 나온 것이고, 감동하고 깨닫게 만든 것은 역시 세자의 효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라 고 하였다. 또 영지( 令 듭)를 내리어 올곧은 말로 극력 간할 것을 구하였으며, 중외에 신칙하여 농사를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의 고충을 알아보았다 이해 겨울에 두환(첼 愚 )을 앓다가 회복되자, 축하를 올라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정축년 2 월에 정성 왕후( 貞 聖 王 尼 )가 세상을 떠나자, 세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슬퍼 어쩔 줄 몰랐다 빈소를 차릴 때부터 발인을 할 때까지 다섯 번의 전(훗)과 일곱 번의 곡 ( 哭 )을 할 때마다 죄다 친히 참가하여 그 성의를 나타내었고, 밤낮으로 울음소리를 거의 그 치지 아니하였다. 왕실 친척들과 의식을 거드는 집사( 執 事 )들이 다들 감격하여 찬탄하였으 며, 중외에서도 이를 듣고 역시 눈물을 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슬픔에만 겨워 지내지 않고 있는데, 지금 세자가 갚이 슬퍼하는 것을 보니 어찌 슬픔을 누를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 판부사 유척기( 兪 拍 基 )가 아뢰기를 지난번 성 후( 聖 候 )가 불편하셨을 때 숭문당(몇 文 堂 )에 입시하였다가 삼가 동궁을 우러러보니 밤새도록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큰 병환이 생길까 염려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감정대로 슬 퍼하게 놔둔다면, 틀림없이 몸을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보살피셔야 될 것 입니다, 고 하였다. 이해 3 월에 인원 왕후( 仁 元 王 텀)가 또 세상을 떠나자, 상이 정도에 지나 치게 슬퍼하였는데, 세자가 곁에서 모시면서 정례( 情 禮 )를 다하여 위로를 하였다. 6 월에 정 성 왕후를 발인하였다. 궐문 밖에 이르러 곡을 하면서 하직하였는데, 그 슬퍼함이 좌우를 감동시켰으며, 서울의 사녀들이 서로들 모습을 보려고 눈물을 훔치며 앞을 막았다, 길잡이 들이 그들을 밀쳐내자, 사람을 다칠까 싶으니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우반( 盧 退 ) 때가 되자 교차(했 次 )에서 신연( 神 훌)을 맞이하여 한동안 슬피 콕을 하였는데 자리에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고, 장례 행렬이 나의 의장( 嚴 {j:) 과 서로 막히어 바라볼 수가 없으니, 대오를 나누어서 가게 하라 고 하였다. 유궁(뼈 宮 )의 지문( 誌 文 )을 친히 지어 간직해 두었는데, 바깥 신하들

218 은 모두들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로 본래 앓던 병이 매우 위독하였으나, 병을 무릅 쓰고 두 혼전( 塊 願 )에 일곱 번의 우제( 廣 짤)와 삭망제( 期 望 쩔)를 거행하였는데, 병이 위독해 질수록 슬픔도 더욱 더하였다, 이때 보덕 윤동승( 尹 東 昇 )이 보살피면서 주선한 힘이 매우 컸는데, 매번 말하기를 동승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나의 정리를 환히 드러낼 수 있었겠는 가. 라고 하였다. 기주( 記 注 )를 살펴보면, 무인년 가을에 상이 혼전( 塊 嚴 ) 뜰에 엎드리어 구두로 주달( 奏 達 )하 였는데,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어 사관( 史 官 )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으며, 영의정 이천보( 李 天 輔 )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도승지 채제공( 蔡 濟 옆) 등이 여 러 승지와 사관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전하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신하 된 자로서 감히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보지 않아야 하는 일이니, 붓을 잡고 기주( 記 注 )에 누가 감히 옮겨 적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되돌려 올리고, 물러가 엎드리어 처단을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이어 소매 속에서 구두 주달 ( 奏 達 )의 등본( 鷹 本 )을 꺼내어 무릎을 꿇고 상의 앞에 놓았다. 한참 지난 후에 상이 이르기 를 말인즉 옳다 내가 마땅히 받아들이겠다. 라고 하였다. 이달 그뭄에 상이 명정전( 明 政 嚴 ) 월대( 月 臺 )에 임어하였는데, 세자는 시민당( 時 敏 堂 ) 뒷뜰 에 거적자리를 깔고 대죄( 待 罪 )하였다 영부사 이종성( 李 宗 城 )이 구대( 求 對 )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40년 동안 학문에 힘쓰고도 이제 군신 부자간에 처신을 이렇게 하시니, 이것을 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또 나를 탓하니, 나는 장차 물 러가겠다. 라고 하면서 이어 일어서려고 하였다 대신이 영부사가 한 말이 뜻을 충분히 표현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품고 있는 생각을 다시 진술하게 할 것을 청하자, 종성이 다시 말하 기를 신의 말이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신하로서의 의( 義 )는, 대조( 大 朝 )에 있으면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고, 소조( 小 朝 )에 있으면 세자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는 것입니다 - 오늘의 일에 대하여, 신들의 심정은 물론이고 비록 모든 군사와 만백성 이라고 하더라도 목을 빼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은,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 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 종묘 사직과 신인( 神 A.) 이 의탁해 있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바라는 것은 오직 과실( 過 失 )에 대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고, 불행하게 과 실이 있더라도 또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천리나 인정상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이유를 말할 것 같으면, 바로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전 하와 동궁은 바로 한 폼이나 같은데 어떻게 둘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한 몸을 둘로 나누 어 보시니, 이것을 신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 간사한 자들을 멀리하고 참소하는 자들을 물리칠 데 대하여 말머리를 꺼낸 후, 다 마치지 않은 채 물러갔다. 제공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시민당 뜰에 돌아와서 세자를 만나니 세자가 자신을 탓하고 도움을 바 라는 하교를 내리므로, 종성과 제공이 성의를 쌓아 임금의 마음을 돌려세울 방도에 대하여 번갈아가며 진술하였다 궁중 기문 에 의하면, 이듬해 정월 영부사 이종성이 죽었는데 죽을 무럽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제대로 죽을 수 없게 될 듯하다. 낙선당( 樂 善 堂 )에 입시하여 죽음으로써 스 스로 밝히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명정전( 明 政 嚴 )에 입시하여 또 죽음으로써 통 렬히 진술하려 하였으나 그만 지레 물러나왔는데, 이제는 다 끝났다, 살아서는 나라를 저버 얘

219 린 사람이 되었으니,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원혼( 免 塊 )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보 고가 들어가자, 상이 놀라면서 오랫동안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었다, 세자는 흰 띠를 두르고 소선( 素 睡 )을 들었으며, 성복( 成 服 )하는 날까지 고자( 孤 子 )를 보살피고 제수( 察 需 )를 하사하 기를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기묘년에 세손( 世 孫 )의 책례( 冊 禮 )를 행하였고, 중궁( 中 宮 )의 책례를 행하였다 행록( 行 錄 )에 의하면, 세자는 중궁을 정성 왕후( 貞 聖 王 尼 )와 똑같이 섬겼으므로 궁중에서 모두들 효성( 孝 誠 )이 독실하다고 우러러 보았으며, 영묘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세자가 내전( 內 願 )을 모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을 수 없겠구나 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내전도 더없이 세자를 사랑하였다 이 해에 훈국( 訓 局 )에 무기신식( 武 技 新 式 ) 을 반포하였다. 궁중기문 을 살펴보면, 세 자는 유년 시절부터 지도( 志 度 )가 이미 뛰어나 놀이를 할 때면 반드시 병위( 兵 威 )를 진설하 곤 하였다. 상이 시험삼아 그의 소질을 떠보려고 물어보면 조목조목 대답을 해내곤 하였는 데 매우 상세하였다. 일체의 행동 거지와 임기 응변하는 방도를 모두 손으로 그리고 입으로 대면서 혹시라도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병가( 兵 家 )의 서적을 즐겨 읽어, 속 임수와 정당한 수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묘리( 妙 理 )를 은연중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 었다. 효묘( 孝 願 )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변 북원( 北 짧)에 납시어 말을 달 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좁 龍 刀 )와 쇠로 주조한 큰 몽퉁이가 여직껏 저승전({ 諸 承 嚴 )에 는 15, 16 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 또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을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췄으며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 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 그러자 궁중에서 서로들 말하기를 풍원군( 豊 原 君 )이 연석( 鐘 席 )에서 효묘( 孝 願 )를 빼닮았다고 한 말에는 과연 선견 지명이 있었다- 고 하였다. 이때 장신 ( 將 톰)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책 하나를 엮어 이름을 무기신식( 武 技 新 式 ) 이라고 달아 반포하였다 이는 대체로 척계광( 減 繼 光 )의 책에 실려 전하는 무예가 단지 여섯 가지 기 예뿐으로서 곤봉( 樞 棒 ) - 등패( 購 牌 )-냥선( 狼 第 ) 장창( 長 擔 )-당파( 錯 把 )--상수도( 雙 手 刀 )인데, 연습하는 규정에 그 방법이 대부분 잘못되었으므로, 옛책을 가지고 모조리 고증하 여 바로잡았다, 또 죽장창( 竹 長 擔 ) 기창( 雄 樓 ) 예도( 說 刀 ) 왜검( 慶 劍 ) 교전 월도( 交 戰 月 刀 ) 협 도( 俠 刀 ) 쌍검( 雙 劍 )-제독검( 提 督 劍 ) 본국검( 本 國 劍 ) 권법( 寧 法 ) 편곤( 輔 樞 ) 등 열두 가지 무예 를 새로 만들어 도식을 그려가지고, 찌르고 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 책을 전서( 全 書 )로 편찬하여 훈국(뢰 局 )에 주어 연습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 慶 )와 접 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이니, 바로 옛날의 중원( 中 原 )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변경에 경보가 없지만, 마땅히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하여 야 한다 더구나 효묘( 孝 願 )께서 뜻하신 일을 실현할 데가 없는 데다가, 북쪽 동산[ 北 圖 ]의 한 자 되는 단(펄)은 나를 자다가도 탄식하게 한다 아, 병기( 兵 器 )는 비록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편안한 시기라고 하더라도, 성인들은 오히려 만들어 둠으로써 갑작스런 외적을 대처하 였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에는 효묘께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도간( 關 써)이 매일 벽돌 1 백 장씩을 날랐다는 말 4996) 을 외울 때마다 고요 한 밤 한가한 때이면, 문득 스스로 시험하곤 하였다 m ι

220 또 말하기를 의술이라는 것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장부( 藏 附 )와 심장 - 간장을 비록 모조리 알기는 어렵지만, 모색( 模 쫓)하고 유추( 類 推 )하면 역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 나라 를 치료하는 수법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진실로 약재( 藥 材 )의 성질을 대강 알고 맥( 服 )의 이치를 약간 안다면, 하루에 한 사람을 고치고 이틀에 두 사람을 고치면서 점차 숙련되어 자연히 한때의 명의가 될 것이다. 선비들의 학문도 의심을 가지는 데로부터 의심이 없어지 도록 하는 것인데, 더구나 의원이 의심을 가지고 의심을 풀어나가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처방만 내리면 당장 효험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재주라고 하여 유의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옛날에는 의복 제도가 각기 상징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 말하는 창옷[떻 衣 ]과 소매가 둥근 옷[ 圓 俠 衣 ]을 나는 일찍부터 싫어했다. 창옷은 세 면이 막히고 뒤폭만 터졌는 데, 그 형상이 음에 속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은 양에 속하고 이적(몇 秋 )은 음에 속 한다. 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창옷 제도가 나오자 비로소 북쪽으로 건주위( 建 州 衛 )와 통 하는 조짐이 발생하였다 퉁근 소매 옷은 앞면은 두 폭을 겹치고 뒤에는 한 폭을 늘어뜨렸 으니, 이 역시 남쪽을 향하고 음을 등지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한가롭게 지낼 때이면, 반 드시 와룡관(없 龍 冠 )을 쓰고 학창의( 題 做 衣 )를 입는데, 학창의는 사마광( 司 馬 光 )의 심의( 深 衣 )를 모방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정복 GE 服 )은 깃이 둥근 옷[ 團 領 ]과 철념 [뼈훌]인데, 깃이 퉁근 옷은 바로 제왕들이 회동( 會 同 )할 때 입는 옷이고, 철닉은 바로 황제 ( 黃 帝 )의 의복 제도이다. 군복( 軍 服 )의 경우, 소매가 좁은 것은 모두 옛 제도를 숭상한 것이 고 싸울 때에 입는 옷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의 습속( 習 倚 )에서는 미리 마련해두는 계책과 근검 절약하는 도리를 모른 다 미리 마련해두면 걱정이 없어지고, 검박하게 지내면 재물이 넉넉해진다. 지금의 의복과 그릇들 가운데, 화려하여 사치스런 감이 있거나 산뜻하여 몸에 편리한 것들을 나는 가까이 한 적이 없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네들의 잘못을 나에 게 와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고발한 사람과 고발당한 사람을 서로 대질시켜, 만약 증 거가 없을 경우 고발한 사람을 죄주고, 설령 그런 사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양쪽을 다 다스 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남의 허물을 고자질하는 일이 조금 가라앉았다. 라고 하였다. 사직( 司 直 ) 박치원( 朴 致 遠 )이 글을 올려 힘쓸 것을 진언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답하였 다. 후에 중신( 重 많) 서지수( 徐 志 修 )가 연석(옳 席 )에서 진계( 陳 械 )한 것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 전후로 세자의 덕( 德 )에 관련된 말을 한 자들 은 다들 장려하는 말씀을 받았다. 일찍이 계방( 桂 행)의 나삼( 羅 흉)이 전에 서연( 書 앓)에서 입바르고 강직한 말이 많았다 하여 후에 궁료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안부를 묻곤 하였다. 하루는 궁관( 宮 官 )이 시사의 염려스 러운 것에 대하여 물어보는 자가 있자, 매우 엄하게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두 궁( 宮 )을 이간시키는 것이다. 도적이란 지목은 바로 이런 무리들을 이르는 것이다. 라고 하 였다 기주( 記 注 )에 의하면, 이때에 대궐 하인들 중에 영( 令 )이 내렸다는 핑계하에 민간에 나가 횡 ζ J

221 포를 부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일이 드러나자 즉시 유사( 有 司 )에게 넘기게 하고는, 이어 영 지( 令 톱)를 내리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이후로도 이런 폐단이 없을지 알 수 없다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사( 法 司 )가 곧장 스스로 판단하여 잡아다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진년 가을에 상이 경희궁( 慶 熙 宮 )에 이어( 移 倒 )하였다. 7월에 옹천에 행행하였다가 8월에 환궁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이때에 세자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으므로 영묘께서 온천 에 가서 목욕하라고 명하였다 행차가 강가에 이르니 물이 붙어나서 뱃길이 안전하지 않으 므로, 날이 저문 후에야 비로소 건녔다.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 李 壽 鳳 ) 등과 함께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는 설( 說 )을 강론하였다. 그 이튿날 수원부( 水 原 府 )에 이르렀다 부의 소재지 북쪽에 화산( 花 山 )이 있었는데, 바로 기해년에 영릉( 寧 陸 )을 표지해 둔 곳이었다 거 기에 올라가서 두루 둘러보고 좋은 곳이라고 감탄을 한참 하다가 처소에 돌아왔다. 산성에 서 무예를 열병하였다. 행차가 지나는 길가에서, 부로들이 에워싸고 막아서서 다투어 바라 보면, 번번이 행차를 멈추고 질고를 물어보고는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하였으므로, 일로가 크게 기뻐하였다. 어느 호위 군사의 말이 달아나 콩밭에 들어가서 마구 짓밟고 뜯어 먹었는데, 지방관을 불러 밭 주인에게 값을 후하게 갚아주라고 하였으며, 호위 군사의 죄를 다스렸다. 고을 안의 나이 많은 자들을 돌봐주었으며 시골에 파묻혀 있는 선비들을 간곡히 불렀다 온천에 도착하여서는 날마다 강론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역대 임금들이 온천에 갔 을 때에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던 옛 일을 따른 것이었다. 절구시( 總 句 詩 ) 1 수를 내리어 궁 관에게 화답하라고 지시하였다. 달이 바뀌자, 망궐례( 望 關 禮 )를 행하는 것의 당부( 當 否 )를 궁료에게 묻고, 이어 말하기를 오 랫동안 서울 궁궐을 떠나 있자니, 그리운 심정을 견디기 어렵다. 고 하였다. 이날 드디어 행 차를 돌렸으며 곧바로 경희궁에 나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려 하였는데, 영묘가 지신( 知 申 )4997) 을 보내어 성밖에서 마중하여 유시( 論 示 )하기를 앓고 난 뒤에 말을 달려 왔으니 마땅히 바로 돌아가서 몽조리를 하고, 조금 지난 후에 차차 와서 만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상신( 相 닮)이 나아가 볍고 아뢰기를 학어( 購 倒 )4998) 가 한 번 임하자, 호중( 湖 中 )의 인사 들이 비로소 세자의 덕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부로나 서인들치고 덕의를 찬송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신민의 행복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번 행차 때 궁 궐에서 나갈 때부터 행차가 돌아올 때까지 번번이 수봉( 壽 鳳 )으로 하여금 경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농사에 손상을 입힌 것을 살피도록 하였다. 또 날씨가 몹시 무더운 때였으므로 약원( 藥 院 )에 명하여 약을 조제하여 도중에서 더위를 먹 은 장수와 병졸들을 구료하게 한 결과 돌아온 뒤에 한 사람도 앓는 자가 없었다 신사년에, 당시에 조치해야 될 계책에 대해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대신들이 대답하지 못하 였다. 드디어 관서( 關 西 )의 고을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이는 상에게 명을 청하여 도적들의 모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신( 戰 뭄) 홍계희( 洪 양 禮 )가 내부에서 변란을 저지르 려 하자, 세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재촉하여 곧장 몰아왔다. 이때 한 승지가, 상에게 아 뢰어 조정 신하가 세자에게 올린 글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는데, 세자가 몸소 임금 앞에 나아가, 변란을 처리하려 했던 본의를 빠짐없이 고하니, 상이 그제 서야 의심이 풀렸다. 후에 세자가 빈연(좁옳)에 임어하였을 때 상이 말하기를 세자 또한 임 m 4

222 금이다 명색은 신하로서 섬긴다고 하면서 간악한 음모를 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역적 계희(양 禮 )가 무엄하다는 내용의 하교를 잇따라 내리어 한 무제( 漢 武 帝 ) 때의 간신 강충( 江 充 )에게 비기었다. 이때로부터 음모가 더욱 긴박해졌다. 임오년 5 월에 적인( 戰 人 ) 나경언( 羅 景 彦 )이 복주( 代 試 )되었다. 기주( 記 注 )와 궁중기문( 宮 中 記 聞 ) 에 의하면, 경언이 형조에 글 한 통을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는 전하의 곁에서 가까 이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불충한 생각을 품고 있어 변란이 눈앞에 닥쳐왔다 는 말이 있었 다 이에 형조의 관리가 본조의 좌석으로부터 그 글을 소매 속에 넣고 청대를 하였는데, 이 때 역적 계희는 기백( 離 伯 )으로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이 모두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고, 이어 형조의 관리가 그 글을 상에게 고하자, 상이 크게 놀라서 내시에게 묻기를 경언은 대궐 하인 나상언( 羅 尙 彦 )의 족속인가? 라고 하니, 내시가 대답하기를 상언의 형으 로서 전에 대궐 하인으로 있던 자입니다. 고 하였다. 상이 역적 계희에게 묻기를 궁성을 호 위해야 하겠는가? 라고 하니, 역적 계희가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궁 성을 호위하는 일은 무신년에도 이미 행한 적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즉시 성문을 닫고 군사를 동원하여 궁문을 파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사복시에 나아가 경언을 국문하자 경언이 옷의 솔기 안에서 또 하나의 봉서를 꺼냈는데, 길이는 5치를 넘고 둘레는 한 줌이 차는 것이었다. 그것을 올리니, 상이 보고 나서 좌상( 左 相 )에게 보였는데, 좌상이 겨우 두어 줄을 보자마자 소리를 내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먼저 죽어야 하겠습니다. 동궁이 만약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신이 가서 위로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판의금부사 한익모( 韓 쫓 證 ) 등이 말하기를 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상을 속여 세자를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 죽여야 마땅합니다. 엄하게 국문하 여 법대로 다스리소서. 라고 하니, 상이 비로소 형장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사서( 司 書 ) 임성( 任 城 )이 분연히 나서서 익모에게 말하기를 흉악한 말을 어찌 경언이 스스로 지어 낸 것이겠는가. 라고 하니 익모가 또 사주한 자를 한시바삐 사핵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노 하여 익모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대사간 이심원( 李 心 源 )이 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 다. 익모 등이 이미 쫓겨난 다음 경언이 세자를 무함하였다고 자복을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 하들이 이구 동성으로 극률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동의금 이이장( 李 흉 章 )이 말하기를 여느 사람을 무함해도 오히려 역적이 되는데, 더구나 세자를 무함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 니까 흉악한 말은 이미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고 죄인이 이미 자복을 하였으니, 이러한 역 적과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앞으로 나서서 극 력 말하였는데, 책망하는 하교가 누차 내렸건만 말은 갈수록 강직하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세자가 대궐문 밖에 걸어가서 대명( 待 命 )하고 있다가, 상이 들어오라고 명하자 드디어 대궐 뜰에 나아와 엎드렸 는데, 흐르는 눈물이 도포자락을 적시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날이 밝을 무럽에 정휘량( 鄭 뿔 良 )이 비로소 접견을 청하여 아뢰기 를 죄인이 이미 세자를 무함했다는 네 글자를 가지고 자복한 이상 그 죄를 단 하루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상이 이에 경언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세자가 환궁하여 여러 신 하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지극하신 자애심 덕분에 함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라고 하였 다. 이씨

223 이해 윤 5 월 21 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 思 맴) 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궁묘( 宮 훌)의 호칭 을 수은( 畢 恩 ) 이라고 내려주었다. 7월 23 일에 양주( 楊 州 )의 배봉산( 拜 峰 山 ) 갑좌( 甲 坐 )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사 지내는 날에 상이 광중( 購 中 )에 임어하여 어펄로 신주를 썼다. 그 다음달에 조재호( 趙 載 浩 )를 북쪽 변방에 귀양보내었고 또 그의 조카인 조유진( 趙 維 鎭 )이 죄 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대신( 臺 멀)이 볍대로 처단하자고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저 동룡( 鋼 龍 )4999) 을 쳐다보면 나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여러 신하들로서는, 마땅히 차마 말 하지 못하는 나의 심정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고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라고 명 하였고, 이어 말한 자에게 죄를 주었다. 유진은 여러 번 고문을 받았으나 항언을 하면서 두 말을 하지 않았고, 원지( 遠 地 )에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죽었다. 기주( 記 注 )를 살펴보면, 윤 5 월 13 일에 검열 윤숙( 尹 훨)이 대궐 뜰에 내려가 이마를 두드리니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호위 구역 밖으로 뚫고 나가 의관( 醫 官 )을 불러 약을 구해 가지고는 소조께 올렸다 이때에 여러 대신들이 합문( 聞 門 ) 밖에 있으면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윤숙이 호위 군사들 을 꾸짖고 몸을 빼어 뛰쳐나가서는 대신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왔다. 윤숙이 신만( 申 硬 ) 등 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처럼 위급한 시기에 대신들이 대궐 섬돌에 머리를 찔고 죽기로 작정 하면서 힘껏 간하지 않는다면 장차 대신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라고 하였다. 적신( 戰 멀) 구 선복( 具 善 復 )과 홍인한( 洪 購 漢 ) 등이 각기 음흉한 꾀를 부리는 바람에, 윤숙은 마침내 흑산 도( 黑 山 島 )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이 사람이 아깝다고 연신 말을 하였다. 분사( 分 司 )의 한림 임덕제( 林 德 體 )가 뒤이어 뜰 아래에 엎드린 채 곁에서 떠나지 않으니, 상 이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도 땅에 버티어 앉은 채 일어나지 않자 호위 군사가 끌어내 려 했는데, 덕제는 꾸짖어 말하기를 나의 손은 사필( 史 筆 )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잘렬지 언정 끌릴 수는 없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정의현( 族 義 縣 )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윤숙과 덕제를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후에 덕제를 등용하였다. 궁관 임성( 任 城 ) 권정침( 權 正 沈 ) 등은 한사코 나가지 않았으며, 분주서( 分 注 書 ) 이광현( 李 光 鉉 )도 몸을 빼어 뛰쳐나가 의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도승지 이이장( 李 꿇 章 )은 머리를 조아리 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사코 간쟁을 하니 상이 노하여 군문( 軍 門 )에 넘겨 효수하라고 명하 였다. 그러자 일단 나갔다가 다시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전교 ( 傳 敎 )를 쓰라고 명하자, 울면서 말하기를 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겠습니다. 감히 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는 나가 금오문( 金 홈 門 )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패초( 牌 招 )를 명하 였으나 끝내 나아오지 않았다. 후에 묘소의 공사를 감독하는 직임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는 데, 송영중( 宋 瑩 中 ) 등이 대간( 臺 課 )으로서 다른 말을 꾸며 규탄을 하니, 상이 영중 등을 엄 하게 배척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며, 나라가 어 지러우니 어진 정승이 생각난다. 는 하교가 있었다 분사( 分 司 )의 제조 한광조( 韓 光 擊 )는 대궐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와서 관을 벗고 울부짖으니, 상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광조가 말하기를 신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신 이 한 마디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또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광조는 통곡을 하면서 기어나갔다. 그의 아비는 말하기를 머리를 부딪쳐 죽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조신( 朝 톰)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는, 드디어 반교( 領 敎 )하는 데에 불참하 였다 광조는 대정현( 大 靜 縣 )에 귀양갔다가 곧이어 석방되었다. 후에 상이 말하기를 얼마 %

224 전의 처분을 내 자신이 뉘우친다. 라고 하였다. 광조가 세상을 떠나자 친히 제문(쫓 文 )을 지 었는데, 그 제문에는 부자가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뜨거운 충성을 다하였다 고 하였으며, 이어 그의 아들을 녹용( 錄 用 )하였다. 승지 조중회( 趙 重 8 每 )는 눈물을 흘리면서 극력 진술하니, 섬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가 곧 이어 도로 취소하였다. 중회는 또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어 항언하며 굽히지 않다가, 원지( 遠 地 )에 귀양을 당하였다 후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야 꺾이지 않는 굳센 풀을 알 수 있다. 는 하교가 있었으며, 누차 승진을 시키어 이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제학 한익모는 소명을 다섯 번이나 어기면서 교문( 敎 文 )을 짓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명분과 의리상 그럴 수 있는 것이니,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또 치사( 致 詞 )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 였으나, 소패(검 牌 )가 모두 여넓 번이나 내렸어도 끝까지 나아오지 않고, 의금부에서 짚자리 를 깔고 대죄하다가 삭직을 당하였다 후에 누차 그를 칭찬하였으며, 발탁하여 영의정에 임 명하였다. 승지 이익원( 李 寶 元 )은 극력 항거하면서 전교를 쓰지 않았으며, 승지 정순검( 鄭 純 檢 )은 전각 ( 嚴 聞 )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을 죽여 주소서 신이 비록 죽을지언정, 감히 이 하교를 반포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총관 이태화( 李 泰 和 )는 관 을 벗고 머리를 부딪치면서 극력 간하였는데, 후에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갑신년 가을에 입묘례( 入 關 禮 )를 행하였는데 상이 임어하여 살펴보았다. 을유년 5 월에 제삿 날을 하루 앞두고 시사( 視 事 )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조정 신하들에게 윤음을 내리기를 작년 이후 처음으로 이날을 맞는다. 경연을 정지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편함을 위한 것이겠 는가. 아, 마음이 이와 같지 않다면 부모가 아닐 것이고, 또 어떻게 영혼을 위로하겠는가. 아, 신하들이 80을 바라보는 자기 임금의 오늘 심정을 알고 신하로서의 분수를 지킨다면, 부산을 떨고 세력 다툼을 벌이는 마음은 마치 봄눈이나 봄얼음과 같이 저절로 풀릴 것이 다, 고 하였다 대신 등이 정섭( 靜 構 ) 중에 계신 만큼 즉시 상선( 常 睡 )을 드시라고 청하였다. 그 이튿날 또 수은묘( 畢 恩 훌)의 헌관 홍낙인( 洪 樂 仁 )에게 명하여, 제사를 행한 후에 국내( 局 內 )를 간심하고 돌아와 아뢰도록 하였다, 낙인이 연석( 錢 席 )에 오르자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상세하게 물었다 가을이 되자, 상이 어의궁( 於 義 宮 ) 에 행차하여 세손( 世 孫 )더러 사당에 가서 참배하라고 명하 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보내고는 옛일을 추억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이어 후원의 기 숨에 걸어 올라가서, 담장에 기대어 한동안 멸리 바라보았다 이후로는 매일 밤중에 번번이 문지방을 두드리면서 한탄하기를 옛적에 사자궁( 思 子 宮 )과 망사대( 望 思 臺 )가 있었는데 내가 어찌 스스로 이런 처지를 당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연신( 進 멀)에게 말 하기를 그때의 조정 신하들 가운데 과연 안금장( 安 金 藏 )500( ) 과 같은 충성심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이제 와서 협잡하여 다시 제기하는 것은 억하 심정인가. 라고 하였다 무자년에 상이 전각 뜰에서 향 지영례( 香 祝 迎 禮 )를 행하였는데 효장묘( 孝 章 關 ) 이하 각묘의 향축( 香 祝 )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압존( 壓 尊 )이라는 이유로 즉시 몸을 굽히지 않자, 상이 R ι

225 성난 소리로 배참( 暗 參 )한 신하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고 이어 병조 판서와 시위( 待 衛 )한 신하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한 모퉁이의 푸른 언덕[좁묘]은 바로 조선 이다. 세자의 신령을 맞이하는 의식을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감히 하지 아니하는가 아, 수 은( 重 恩 )아. 오늘의 여러 신하들 중에는 10 년 동안 신하로서 섬기던 자가 많으니, 세자가 죽어서 무심하다고 말하지 말라. 무심 두 글자를 이런 경우에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자정전( 資 政 嚴 )에 돌아와 대신과 제신들을 전각 앞에 불러놓고, 칙유( 節 論 )를 내리 어 10 년 동안 신하로서 섬긴 의리를 알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에 대정( 大 政 )을 행하였는데, 또 대소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아, 임오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자질(쫓 質 )이 훌륭하였건만, 내가 정말 인자하지 못하였다. 라고 하 였다, 경인년에 왕부( 王 府 )에 임어하여 하교하기를 지난 일을 새삼스레 제기하여 나에게 들 리도록 하는 것은 반역하는 심보이다/라고 하였다. 갑오년 여름에 가뭄이 들었는데 친히 묘소에 나아가 제문을 친제( 親 製 )하고 전작례(훗 配 禮 ) 를 행하였다. 세손( 世 孫 )이 뒤를 따라갔다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오늘 단비 가 내릴 것이다. 고 말하고는, 이어 찬례( 贊 禮 ) 이하 행차를 따라간 근신들에게 차등있게 상 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병신년 봄에 이르러 정원일기( 政 院 日 記 ) 와 공가( 公 家 )의 문적 중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 의 차마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 내용은 모두 세초( 洗 草 )하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세 손( 世 孫 )의 이 상소문을 보고 특별히 그의 청을 허락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슬픔 을 견딜 수 없다. 라고 하고는, 옥루( 玉 淚 )를 비오듯이 떨구었다 -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밤낮으로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조종( 祖 宗 )이 물려준 나라에 있다. 금 번의 이 조처는 실로 나이 어린 아들을 위한 것이다. 아, 임오년 윤 5월의 일기에 대하여 사 도( 思 掉 )가 까마득한 저승에서나마 아는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눈물을 삼키면서 내가 장 차 여한이 없게 되었다. 고 여길 것이다. 그 때의 일기를 실록의 규례에 따라 승지와 주서 가 함께 차일암( 週 日 嚴 )에 가서 세초하도록 하라 아 내가 덕이 없는 탓에 만고에 없는 일 을 당하였는데 말세의 인심이 수선을 떨고 있다. 비록 일기를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문 자( 文 字 )를 다시 제기하고 나선다변, 마땅히 무신년 못된 무리들의 잔당으로 쳐서 엄하게 정치할 것이다 더구나 훗날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 임오년의 일을 언급할 경 우, 마땅히 역률로 논죄할 것이니, 모두가 이것을 듣고 나라의 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 라. 어린 아들이 이미 변유( 面 論 )를 받들었으니, 내 이제는 마음놓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 다. 고 하였다. 그 이튿날 또 세손( 世 孫 )에게 명하여, 묘소에 가서 전배( 展 拜 )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누워서 세손의 오늘날 심정을 생각해 보건대, 어찌 다만 어린 자식의 심정 뿐이겠는가. 나의 심정 또한 어떻겠는가. 오늘날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라 하였다. 궁원의( 宮 園 嚴 ) 를 살펴보면, 병신년에 장헌( 莊 鳳 ) 이라는 시호( 諸 號 )를 소급하여 올리고, 궁호( 宮 號 )를 경모( 景 暴 ), 원호( 園 號 )를 영우( 永 祐 ) 라고 고치었다. 계묘년에 존호를 소급하 %

226 여 올려 수덕 돈경( 條 德 敎 慶 ) 이라고 하였으며, 갑진년에 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홍인 경 지( 弘 仁 景 社 ) 라고 하였다. 사당 내의 제례( 察 禮 )는 태묘( 太 顧 )보다 한 등급 낮추었으며, 원 의( 園 嚴 ) 또한 이에 준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소세손( 歸 昭 世 孫 )으로서 휘( 譯 )가 이정( 李 탤)이고, 차남은 바로 소자로서 이름은 이산( 李 페)이다 딸들은 광산( 光 山 ) 김기성( 金 箕 性 )과 오천( 烏 川 ) 정재화( 鄭 在 和 )에게 출가하였다 서자가 3 명 있는데 이인( 李 뼈), 이진( 李 禮 ), 이찬 ( 李 禮 )이 고, 서 녀 하나는 당성 ( 居 城 ) 홍익 돈( 洪 益 淳 )에 게 시 집 갔다고 한다. 자손들에 대 한 기 록은 우선 옛 행장을 따라 간략히 쓰니, 오르내리는 신령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 영인본 46 책 59 면 [ 註 4987) 풍원( 豊 原 ), 조현명의 봉호. C효 [ 註 4988) 송 태종( 宋 太 宗 )의 나를 어떤 데에다 두려는가 라는 말 ; 이는 송나라 태종 이, 순화( 淳 化 ) 연간에 수왕( 壽 王 ) 항(벨)을 태자로 세운 후, 태자가 종묘에 알현하는 행차를 구경하던 서울 사람들이 소년 천자( 少 年 天 子 ) 라고 추켜세우며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유쾌한 심정이 되어 측근에 있던 구준(끓 準 )을 불러 말하기를 인심이 벌써부터 태 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떤 지경에다 두려고 이러하는가. 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송사( 宋 史 ) 권 281 구준열전(좁 準 列 傳 ). 숨 [ 註 4989) 예조( 藝 祖 )의 일출시( 日 出 詩 ) 예조는 송 태조( 宋 太 祖 ) 조광윤( 趙 똘넓 L) 을 가리킨 다. 그가 아직 세력을 얻기 이전에 어떤 자가 해돋이를 구경하면서 그에게 시를 옳어보라 고 하였는데, 즉시 옳어내기를 태양초출광혁혁 천산안산여화발 일륜경각상천구 축퇴군성여 잔월( 太 陽 初 出 光 備 爛 千 山 萬 山 如 火 發 - 輪 h 頁 刻 上 天 魔 i쪼 退 群 星 與 殘 月 ) 이라 하였는 바, 이 시를 후인들이 일출시( 日 出 詩 )라고 일걸었다. 경계시화( 康 漢 詩 話 ) 권상( 卷 上 ), 용 [ 註 4990) 고경중마방( 古 鏡 重 摩 方 ) 퇴계( 退 홉) 이황( 李 漫 )이 옛 성현들의 잠( 歲 ) 명 ( 銘 ) 찬( 贊 ) 77수를 모아 엮은 책 책이름은 주자( 朱 子 )의 임희지를 전송하는 시[송임희지시 ( 送 林 熙 之 詩 )] 가운데 고경중마요고방 안명편여일쟁광( 古 鏡 重 摩 要 古 方 眼 明 偏 與 日 爭 光 ) 이 라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 책의 서두에 영조( 英 祖 )의 어제( 倒 製 ) 편제( 篇 題 )와 시가 실려 있 다, 해동문헌총록( 海 東 文 敵 總 歸 ), 당 [ 註 4991] 대풍가( 大 風 歌 ) ; 한 고조( 漢 高 祖 ) 유방( 劉 웹)이 칭제( 稱 帝 )한 후, 고향인 패현(뼈 戀 )에 가서 옛 친구들을 불러모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변서 부른 노래로서, 내용은 대 풍기혜운비양 위가해비혜귀조향 안득맹토혜수사방( 大 風 起 兮 雲 飛 揚 威 加 海 內 兮 歸 故 獅 安 得 益 土 兮 守 四 方 ), 이다. 사기( 史 記 ) 한고조본기( 漢 高 祖 本 紀 ). 땅 [ 註 4992) 신축( 辛 표) 임인( 王 寅 )년에 있었던 일 : 1721 년(경종 1) 과 그 이듬해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노론( 老 論 )과 소론( 少 論 ) 사이에 일어난 당화( 黨 網 )를 가리키며, 일명 신임 사 화( 辛 王 士 網 ), 임인 옥사( 王 寅 歡 事 )라고 불린다 당의통략( 黨 議 通 略 ), 다 - [ 註 4993 ]문녀 ( 文 女 ) 숙의 ( 淑 嚴 ) 문씨 ( 文 民 ) [호 [ 註 4994) 구휘(좀 輝 ) ; 조태구( 趙 泰 좀) 유봉휘( 柳 鳳 輝 ). 냉 [ 註 4995) 천보( 天 寶 ) 연간의 난리 - 천보( 天 寶 )는 당 현종( 居 玄 宗 ) 말기의 연호( 年 號 )이다. 7 I ζ

227 초기에는 정사( 政 事 )에 부지런하여 개원 지치( 開 元 之 治 ) 라 불리는 유례가 드문 태평 성대 를 이룩하였던 현종이, 나중에는 양귀비( 楊 貴 紀 )에게 흑( 感 )하여 정사를 소홀히 하다가 안록 산( 安 鳳 山 )의 반란을 초래하여 피난을 떠나는 등 말정( 末 政 )이 불미( 不 美 )하였다. 신당서 ( 新 居 書 ) 권 5 현종기 ( 玄 宗 紀 ). [ 註 4996] 도간( 隔 맘)이 매일 벽돌 1 백 장씩을 날랐다는 말 ; 도간은 진(품)나라 때 반양( 鄭 陽 ) 태생으로, 자는 사행( 士 行 )이다. 그는 광주 자사( 廣 州 刺 史 )로 재임하면서 업무가 한가한 때이면 아침에 벽돌 백 장을 손수 집 밖에 날라다 두었다가 저물녘이 되면 다시 집 안에 날 라 들여놓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한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진서(품 書 ) 권 66 도 간전( 階 1JTL 傳 [ 註 4997] 지신( 知 申 ) [ 註 4998] 학어( 聽 倒 ) ; 세자의 행차. g [ 註 4999] 동룡( 同 龍 ) ; 동룡문( 鋼 龍 門 )의 약칭 동룡문은 한( 漢 )나라 때 태자궁( 太 子 宮 )의 문 이름이다. 여기서는 사도 세자( 思 'I벌 世 子 )의 살던 집을 가리킨다. 한서( 漢 書 ) 성제기( 成 帝 紀 ). Gr [ 註 50( ( ]안금장( 安 金 藏 ) 당( 庸 )나라 측천 무후( 則 天 武 텀) 때의 충신. 당시 황사( 皇 빼)로 있던 예종(흉 宗 )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 誌 告 )가 일어나 황사의 측근들이 국문(뚫 問 )을 받 던 중 다들 형신( 升 訊 )을 견디다 못해 자무( 自 땀)를 하려 하였다. 이에 안금장이 칼로 배를 그어 창자를 꺼내어 보임으로써 황사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신당서( 新 庸 書 ) 권 191 안금 장전( 安 金 藏 傳 ). 많 띠씨

228 자경당 일성록) 정조 즉위년 병신 (1776,건륭 41) 4월 15일(병진) 지제교 이병모( 李 秉 模 )를 시상( 施 賞 )하였다. 0 하교하기를 자경당( 孫 慶 堂 )의 상량문( 上 樓 文 )을 딱 맞게 지어 올렸다고 하겠다. 지제교 이병모에게 특 별히 초피 립( 紹 皮 쏠)과 이엄( 耳 據 ) l 부( 部 )를 내려주라. 하였다. 일성록) 정초 즉위년 병신 (1776,건륭 41) 4월 16일(정샤) 지제교 이병모( 李 秉 模 ) 서장관 이진형( 李 鎭 衛 ) 행 사직 채제공( 蔡 濟 꿨)을 여차에서 소견 하였다. 0 내가 채제공에게 자경당( 孫 慶 堂 )의 상량문을 읽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잘 짓고 잘 썼다. 하니, 승지 홍국영( 洪 國 榮 )이 아뢰기를, 근래의 지제교 가운데 이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진형에게 이르기를, 춘궁( 春 宮 )에 있을 때부터 밤새도록 강학( 講 學 )하고 토론하면서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었는 데, 지금 만리 길을 가게 되니 내 마음이 울적하다. 하니, 이진형이 대답하기를, 신이 강연( 講 뚫)에 드나든 지 이미 몇 해가 되니, 어찌 차마 잠시라도 떠날 수가 있겠습니 까 그러나 국사( 國 事 )에 진력하는 의리를 생각할 때 이 먼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으니, 섭 섭하고 허전한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 를, 서장관 이진형에게 인삼 3 냥( 兩 ), 청심환( 淸 心 九 ) 50환을 특별히 지급하라. 하였다, 정초 흑위년 병신 (1ns,건를 41) 9월 21 일(기혹) 윤대관( 輪 對 官 )을 흥정당에서 소견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자경당( 慧 慶 堂 )의 역사를 재촉하여 거둥하기 전에 마칠 수 있겠는가? 하니, 호조 좌랑 정지검( 鄭 志 險 )이 아뢰기를, 한창 밤낮으로 공사를 감독하고 있으나 마치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승지 김종수( 金 鍾 秀 )에게 이르기를, 만동묘( 萬 東 關 )의 선판(짧 板 )을 써서 내리겠다. 승지는 모레 하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선전관 한성양( 韓 聖 養 )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요사이 기강이 해이해져 무릇 죄인을 잡아오는 일을 대부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나라의 체 모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전라 우수사에 이르러서는, 시사( 試 射 ) 때는 각 고을의 수령이 직접 시사에 참가하는 것이 통영( 統 營 ) 및 본영의 등록( 鷹 錄 )에 실려 있는 바 인데, 그가 감히 나라의 기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바로 대장( 代 將 )에게 응사( 應 射 )하게 하였 다. 지금은 새로 정사하는 초기인데 기율( 紀 律 )이 놀랍다. 그대는 내려가서 새 수사가 인수 객m

229 인계하기를 기다려 즉시 병부( 兵 符 )를 빼앗고서 잡아와 영하( 營 下 )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에 기강이 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정초 원년 정유 (1π7,건를 42) 2월 27일(계해) 존현각에서 내의원 부제조 홍국영( 洪 國 榮 )과 공조 판서 구윤옥( 具 允 廷 )을 소견하였다. 0 하교하기를, 부제조는 가감심신탕을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곳이 많던가? 하니, 구윤옥이 아뢰기를, 무너지고 넘어진 곳이 매우 많아서 장차 모두 수리해야 할 형편입니다만, 우선 창덕궁부터 먼저 수리하기 시작해야겠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자경당( 忽 慶 堂 )의 공사도 시작할 생각인가? 하자, 구윤옥이 아뢰기를, 역시 날을 가려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구윤옥이 아뢰기를, 성정각( 誠 正 聞 ) 역시 장차 개수해야겠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이곳은 곧 전일의 동궁 처소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경비가 고민스러우 니, 모든 수리하는 공사를 간략하게 해서 조속히 마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죠원년 정유 (1777, 건륭 42) 2월 27일(계해) 존현각에서 내의원 부제조 흥국영( 洪 國 榮 )과 공조 판서 구윤옥( 具 允 狂 )을 소견하였다. 0 하교하기를, 부제조는 가감심신탕을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수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곳이 많던가? 하니, 구윤옥이 아뢰기를, 무너지고 넘어진 곳이 매우 많아서 장차 모두 수리해야 할 형편입니다만, 우선 창덕궁부터 먼저 수리하기 시작해야겠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자경당( 孫 慶 堂 )의 공사도 시작할 생각인가? 하자, 구윤옥이 아뢰기를, 역시 날을 가려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구윤옥이 아뢰기를, 성정각( 誠 正 聞 ) 역시 장차 개수해야겠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m ω

230 이곳은 곧 전일의 동궁 처소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경비가 고민스러우 니, 모든 수리하는 공사를 간략하게 해서 조속히 마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초원년 정유 (1777,건륭 42) 2월 29일(을축) 존현각에서 내의원 부제조 홍국영과 영건 낭청( 營 建 郞 廳 ) 홍낙빈( 洪 樂 t~) 을 소견하였다. 0 하교하기를, 부제조는 가감심신탕을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7- ]- 경 딩 (칩 1_ι )의 공사도 이미 시작하였는가? 하니, 홍낙빈이 아뢰기를, 택일하는 문제 때문에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였습나다. 하여, 내 이르기를, 당상은 날마다 들어가서 볼 수가 없을 테니, 낭청이 전심하여 잘 살펴 검사하도록 하라. 정초원년 정유 (1777, 건륭 42) 3월 6일(임신) 영건도감( 營 建 都 藍 )이 창덕궁( 昌 德 宮 )을 수리할 길일을 가렸다고 아뢰었다. 0 해도감( 該 都 藍 )이 아뢰기를, 창덕궁을 수리할 길일을 가리니 이번 3월 7 일 오시( 午 時 )가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경복전 ( 景 福 嚴 )과 자 경당( 씀 따 'i ;;:) 의 수리를 이날 이 시간에 먼저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실록) 정초 1 년 정유 (1777,건륭 42) 5월 16일 (경진) 자경당이 완성되다 7:]- 경 당( 씀 lι ; ~-:) 이 완성되었다. 이 당( 堂 )은 창경궁( 昌 慶 宮 )에 있었는데, 이때 임금이 이어( 移 倒 )할 뜻이 있어 혜경궁( 惠 慶 宮 )을 임어하기 위하여 영건( 營 建 )하였는데, 구윤옥( 具 允 廷 )을 영건 당상( 營 建 堂 上 )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소자( 小 子 )가 아침 저녁 시봉( 傳 奉 )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새로 짓는 것이니 절 대로 크고 사치스럽게 하지 말아서 겸약( 讓 約 )하게 하려는 자의( 慧 意 )를 우러러 본받도록 하 라. 하였다 실록) 정초 1 년 정유 (1777, 건륭 42) 6월 7일 (신축) 창덕궁 대내 수리 도감 당상 구윤옥 등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다 창덕궁( 昌 德 宮 ) 대내( 大 內 ) 수리도감당상( 修 理 都 籃 堂 上 ) 구윤옥( 具 允 표) 등에게 차등 있게 상 ( 賞 )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자정당( 쉰 ι1;;:) 의 영건( 營 建 )을 인하여 대내를 수리하라고 명하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실륙) 쟁초 1 년 정유 (1π7,건를 42) 7월 30일 (계샤) 금중의 변괴로 이어( 移 倒 )를 윤허하고 수비를 더할 것을 명하다 m

231 8 월에 창덕궁으로 이어( 移 倒 )하겠으니, 영종( 英 宗 )의 혼전( 塊 嚴 )은 문정전( 文 政 嚴 )에 옮기어 모시고 진종( 員 宗 )의 신위( 神 位 )는 위선당( 寫 善 堂 )에 옮기어 모시라. 하고, 또한 이어할 때 궁전( 宮 嚴 )의 수리를 확대하지 말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혜경궁( 惠 慶 宮 )의 의장( 優 {::1::) 은 마땅히 대비전( 大 紀 願 )보다는 감해야 하나 또한 마땅히 지 난날보다는 더해야 하니, 금럽과( 金 立 따) 하나를 더하고 은립과( 銀 立 띠) 하나를 더하며 금장 도( 金 經 刀 ) 하나를 더하고 은장도도 하나를 더하며 청개(좁 蓋 )는 둘을 더하되, 교의( 交 橋 )와 각답(뼈] 體 )은 검은 윷칠한 것 각각 하나씩을 그대로 정식( 定 式 )으로 삼는다. 하였다. [주 D-002] 영 항( 永 흉) ; 궁중의 긴 복도, [주D-0 )3] 금립과( 金 교 Jli) : 의장( 燒 야)의 한 가지. 금칠한 참외처럼 생긴 모양의 것을 창대 와 같은 붉은 막대 꼭대기에 세워 박은 것 은 칠한 같은 모양의 은립과( 銀 효 Jli) 가 있는데 모두 나무로 만옮 정초 1 년 정유 (1π7,건를 42) 8월6일 (기해) 창덕궁으로 이어하다 창덕궁( 昌 德 宮 )으로 이어( 移 倒 )하였다. 왕대비전( 王 大 紀 嚴 ) 혜경궁( 惠 慶 宮 ) 중궁전( 中 宮 嚴 )도 같은 날 이어했다. 임금이 연관( 練 冠 )을 갖추고 효명전( 孝 明 嚴 )에서 고동가제( 告 動 罵 쫓)를 거행하였으며, 백포( 白 布 )로 싼 익선관( 寶 善 冠 )과 백포로 된 도포와 띠로 고쳐서 갖추고 창 덕궁으로 나아가 휘령전( 徵 寧 嚴 )에 전배( 展 拜 )하고, 명정문( 明 政 門 ) 밖으로 나아가 왕대비전 과 혜경궁의 연여( 輩 屬 )가 이르자 지영( 祝 迎 )하여 환내( 還 內 )하였다 정조2년 무술 (1778, 건륭 43) 4월8일(무술) 구윤옥이 아뢰기를, 자경당( 孫 慶 堂 ) 수리는 언제 합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통명 전( 通 明 顧 ) 계단을 배설한 뒤에 하교가 있거든 거 행하라. 하였다. 정초2년 무술 (1778,건륭 43) 4월 17일(정미) 성정각( 誠 표 聞 )에서 승지 흥국영( 洪 國 榮 )을 소견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휘녕전의 대제( 大 쩔)가 임박했는데 대제학이 계속 패초를 어기면서 아직도 제문(쫓 文 )을 짓 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만약 끝까지 소명에 응하지 않으면 부득이 전 대제학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도록 하겠다,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만약 끝내 소명을 어긴다면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h η ] /

232 자경당( 慧 慶 堂 )의 도배 는 하교하기를 기다려서 거행하라고 전에 이미 호조 판서에게 하교 하였다 지금 부묘( 附 蘭 )할 시기가 임박했으므로 자전( 慧 嚴 )의 이어( 移 倒 )와 자궁(혈 宮 )의 이 차( 移 次 )도 차례대로 해야 할 것이니, 서둘러 수리한 뒤에야 군색해질 우려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호조 판서와 좌승지는 입시하라 하니, 호조 판서 구윤옥( 具 允 廷 )과 좌승지 정민시가 앞으로 나왔다. 내가 구윤옥에게 이르기 i크 E프, 자경당의 도 배 를 서둘러 한 뒤에 즉시 이차해야 할 것이니,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바 닥에 까는 자리도 자내( 自 內 )에서 써서 낸 것에 의거하여 배설하되, 경이 낭청과 자경당에 나아가서 즉시 일을 시작하라. 하였다 구윤옥이 아뢰기를, 통명전( 通 明 顧 )의 계단은 언제 배설합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혜경궁( 惠 慶 宮 )께서 자경당으로 이차한 뒤에 배설하라 하였다. 내가 정민시에게 이르기를, 반차도( 班 次 圖 )를 다 판각해 냈는가? 반차를 습의할 때의 군병과 의장을 분배하는 등의 절 차를 경이 병조 판서와 함께 착실히 보고 검열해서 당일에 혼잡스럽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부제조는 가감교제탕( 加 減 交 濟 場 )을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내가 이 르기를, 경복전( 景 福 歐 ) 에 는 수리할 곳이 특별히 없던가?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바닥에 까는 자리도 바꾸고 도배도 새로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이것도 호조 판서가 한번 간심한 뒤에 거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일성록) 정조2년 무술 (1778,건륭 43) 4월 21 일 (신해) 성정각에서 약원 부제조 흥국영을 소견하였다. 0 하교하기를, 부제조는 가감교제탕( 加 減 交 濟 場 )을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자경당( 慧 慶 堂 )의 도배를 이미 마쳤다고 하니, 내가 장차 간심( 看 審 )하겠다 경은 사관과 함께 따라오라. 하고, 이어서 자경당에 나아갔다 안팎을 간심한 뒤에 전퇴청( 前 退 廳 )에 나아가 호조 판서와 호조 낭청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내가 호조 판서 구윤옥( 具 允 廷 )에게 이르기를, 이 자경당을 건축한 초기부터 경의 노고가 많았다. 이번에 도배 및 바닥에 깔아 놓은 자리 도 모두 극히 정갈하니, 매우 다행스럽다 자궁에서 하사한 음식물이 약간 있으니, 경이 낭 청과 더불어 나누어 먹도록 하라. 잉 ω

233 하였다. 조금 지나서 내가 구윤옥에게 이르기를, 경복전( 景 福 顧 )을 연전에 이미 수리하였으니, 지금은 별로 수리할 곳이 없는가? 하니, 구윤옥이 아뢰기를, 연전에 수리한 뒤로 아직 간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 를, 내가 친히 가서 간심할 것이니, 경은 낭청과 함께 따라오라. 하고, 내가 경복전으로 가서 간심하였다. 하교하기를, 단청( 月 좁)은 간흑 퇴색된 곳이 있으나 약간씩 채색을 더하면 새로 수리한 것과 차이가 없 겠으나, 도배와 바닥에 까는 자리는 새로 갖추어야 하겠으니,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무신( 武 멀)의 전강( 嚴 講 )은 전혀 모양새 를 갖추지 못하였다 전후로 신칙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강습을 성실히 하지 않아 아직까지도 효과가 없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병법( 兵 法 )의 도를 알겠으며, 어떻게 지략( 智 略 )이 있는 사람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니, 흥국영이 아뢰기를, 근래에 무변( 武 井 ) 들 이 전혀 병법에는 유의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하면 실 로 믿을 곳이 없으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비단 책을 강( 講 )하는 것만 볼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기예도 과연 월등한 사람이 없으니, 이것도 한심하다.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특출한 인재를 얻기란 진실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연소한 무변 중에서도 활 잘 쏘는 자가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군문( 軍 門 )은 조금 나은가? 하니, 흥국영이 아뢰기를, 착실히 하기 때문에 상당히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하였다. 실륙) 정초 7년 계묘 (1783,건를 48) 3월 21 일 (임자) 경모궁과 혜경궁에 존호를 올리는 의절을 함인정(패 仁 후)에서 익혔다. 실륙)정초 7년 계요 (1783,건를 48) 4월 1 일 (신유) 혜빈 에 게 존호를 더 올리고 신하들에게 시상하다 혜빈( 惠 複 )에게 존호를 더 올렸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친히 의절에 따라 책인( 冊 印 )을 올리고 나서 자경전에 나아가 의절대로 치사, 전문, 안팎 옷감을 올렸다. 심륙) 정초 7년 계요 (1783,건를 48) 6월 18일 (무인) 명정전에서 혜경궁의 탄일 하례를 거행하다 명정전에 나아가 혜경궁의 탄일 하례를 거행하였다

234 강서원 일성록) 1 정조 즉위년 (1776) 3 월 17 일(무자) 혼전( 塊 嚴 )을 문정전( 文 政 願 )으로 하라고 명하였 다. 0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의 인산( 因 山 )을 치른 후에 혼전을 창경궁( 昌 慶 宮 )의 문정전으로 하고, 휘녕전( 徵 寧 嚴 )은 정축년의 예( 例 )에 의거하여 강서원( 講 書 院 )으로 옮겨 봉안하도록 도감에 분부하라. 하였다. 2 정조 즉위년( 1776) 4 월 12 일(계축) 진종 대왕과 효순왕후의 새 신주를 옮겨 봉안하 는 것은 졸곡(후 哭 ) 뒤에 택일하도록 명하였다 0 예조 판서 정상순이 아뢰기를, 연복전을 이미 강서원( 講 書 院 )에 정하였으니, 진종 대왕과 효순왕후의 새 신주를 옮겨 봉안하는 날짜를 미리 품지하여 정한 뒤 새 신주를 옛 신주를 봉안했던 사당에 봉안해야 합니다. 봉안할 날짜 및 책보를 올리는 길일을 차례로 잡아야 하 기에 감히 여줍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졸곡 뒤에 차례로 택일하도록 하라. 하였다. 3 정조 원년 (1777) 2월 3 일(기?;~) 흥정당( 興 政 堂 )에서 예조 판서, 공조 판서, 승지, 이 조 참의를 소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휘지( 李 徵 之 ), 공조 판서 홍낙순( 洪 樂 純 ), 승지 홍국영 ( 洪 國 榮 ), 이조 참의 유언호( 兪 彦 鎬 )이다. 0 내가 이르기를, 공조 판서를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하니, 홍낙순이 아뢰기를, 신이 강서 원( 講 書 院 )에서 대죄( 待 罪 )할 때 입대( 入 對 )한 후 지금 처음으로 입시하였습니다. 하였다. 내 가 이르기를, 수어사( 守 쩔 使 )는 과인의 몸을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사( 宗 社 )를 안정시켰 다. 그래서 내가 진작부터 경을 한번 만나 보고 수립하여 성취한 바를 찬미해 주고 싶었. 4 정조 2 년 (1778) 9월 24 일(경술) 희정당( 熙 政 堂 )에서 차대를 행하고, 하직하는 수령을 소견하였다. 충주 영장( 忠 州 營 將 ) 정격( 鄭 格 ), 상주 영장( 尙 州 營 將 ) 변성화( 邊 聖 和 ), 단천 부 사( 端 川 府 使 ) 김상훈( 金 相 勳 ) 부평 부사( 富 平 府 使 ) 손상룡( 孫 相 龍 ) 거창 부사( 居 昌 府 使 ) 허 경( 許 몇), 김해 부사( 金 海 府 使 ) 이철운( 李 喆 運 ), 영종 첨사( 永 宗 했 使 ) 이인수( 李 仁 秀 ), 곤양 군수( 昆 陽 那 守 ) 이상리( 李 尙 廣 ), 삼가 현감( 三 嘉 縣 藍 ) 신희( 申 탤), 장련 현감( 長 連 縣 藍 ) 김성 신( 金 省 身 )이 입시하였다.. 고,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였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농사가 풍년이 들지 않았으니, 농사를 권장한 실효가 없다 하겠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으니, 하직하 는 수령을 선유( 宣 論 )하는 것은 승정원에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승문원( 承 文 院 )을 강서원( 講 書 院 )으로 이입( 移 入 )하라. 하였다. 5 정조 3년 Cl 779) 5 월 20 일(계묘) 헌관방( 敵 官 房 ) 감찰방( 藍 察 房 ) 등의 처소를 호조 판서가 친히 살펴보고 글로 아뢰라고 명하였다 야

235 0 하교하기를, 혼궁( 塊 宮 )을 이미 옛 강서원( 講 書 院 )으로 정하였는데, 헌관방, 감찰방, 별사 옹원( 別 司 賽 院 )에 입번하는 종실방( 宗 室 房 ), 충의방( 忠 義 房 ), 도설리( 都 짧 里 )와 설리( 廳 里 )가 나아가 머무는 내관 전례청( 內 官 典 禮 廳 )의 수복방( 守 樓 房 ), 수라간( 水 刺 間 ), 수라간의 곳간 등의 처소를 애당초 품정(훌 定 )하지 않았으니, 장차 어떻게 마련하려고 하는가 6 정조 4 년 (1780) 6월 24 일(신미) 추조( 秋 뽕)가, 삽화부( 三 和 府 )의 정배 죄인( 定 配 罪 人 ) 배덕오( 裵 德 五 )를 용서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내용으로 아뢰었다, 0 형조가 아뢰기 를, 문화현( 文 化 縣 ) 봉강서원( 鳳 周 書 院 )의 원생( 院 生 ) 배덕오가 서원 앞에 서 말을 달런 일로 삼화부에 정배되었는데, 조율( 照 律 )할 때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 으니 그대로 정배해 두어서는 안 되고 용서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이미 해도( 該 道 ) 에 물어 아뢰라는 명이 있었으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고 하교-- 7 정조 4 년 Cl 780) 7월 4 일(경진) 시수( 時 因 ) 김이인( 金 屬 仁 )을 의처하라고 명하였다. 0 의금부가 아뢰기 를, 문화 현감( 文 化 縣 藍 ) 김이인이, 봉강서원( 鳳 間 書 院 )의 원생( 院 生 ) 배 덕오( 裵 德 五 )가 서원 앞에서 말을 탄 일로써 도배( 徒 配 )의 형률을 적용하였으니, 제대로 살 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형추( 升 따옳)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형추하지 말고 의처하라. 하였다. 8 정조 5년 (1781) 윤 5월 11 일(계축) 오늘 창경궁( 昌 慶 宮 )으로 이어( 移 倒 )하겠다고 명하 였다.. 생길 것이다. 오늘 창경궁으로 이어할 것이니, 이러한 뜻을 정원으로 하여금 잘 알아서 거 행하게 하라. 하였다 0 또 하교하기를, 창경궁에 이어할 때 각사( 各 司 )의 이접( 移 接 )은 전례 가 한결같지 않다. 이번에는 정원은 승문원( 承 文 院 )에 이접하고, 옥당은 옛 강서원( 講 書 院 ) 에 이접하고, 병조는 총부( 擔 府 )에 동접( 同 接 )하고, 약방은 북소( 北 所 )에 이접하고, 향--- 9 정조 5년 (1781) 9월 18 일(정사) 성정각에서 시원임 각신( 時 原 任 聞 톰)을 소견(검 見 )하 였다. 직제학 심염조( 沈 念 祖 ) 정지검( 鄭 志 檢 ), 전( 前 ) 직제학 정민시( 鄭 民 始 )가 입시하였다. ---자의 기록이 다만 신사년 (1761 영조 37) 에 그쳤으니, 이것이 매우 애석하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이러한 강의는 실로 얻기 쉽지 않은 글이 니 내가 기록하여 놔둘 것이고, 강서 원일기( 講 書 院 日 記 ) 에도 기록해 넣는 것이 좋겠다, 그의 경학( 經 學 )을 논하자면 지금 세상 에는 이만 한 사람이 없다. 문집을 간행하여 배포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아직 하지 못하 정조 5년 (1781) 11 월 11 일(기유) 성정각에서 병조 판서 이성원( 李 性 源 )과 참판 정 창성( 鄭 昌 聖 )을 소견(김 見 )하였다. 하니, 승지 김우진( 金 宇 鎭 )이 아뢰기를, 도목 정사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차하하기 곤란합

236 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근래 정주( 政 注 )가 한창 진행되고 있으니 실로 체차하기 곤란하 겠다. 하고, 내가 이르기를, 책자( 冊 子 일성록( 日 省 錄 )을 말함)는 어느 정도 초출( 妙 出 )하여 수정하였는가? 하니, 정창성이 아뢰기를, 강서원일기( 講 書 院 日 記 ) 와 춘방일기( 春 행 日 정조 5 년 (1781) 11 월 17 일(을묘) 성정각에서 병조 참판 정창성( 鄭 昌 聖 )을 소견하였 다 待 坐 )하고 개강( 開 講 )했을 때의 강연 내용도 모두 주( 註 )를 달아서 기록하는 것이 좋겠습 니 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이것은 모두 누락되고 흩어져서 잘못된 것을 증명하여 바로잡기 어려우니, 정원일기( 政 院 日 記 ) 를 가져다가 서로 비교하여 고찰해 내고 춘방고사( 春 행 故 事 ) 도 참고하여 기록하라. 강서원일기( 講 書 院 日 記 ) 와 춘방일기( 春 功 日 記 ) 및 연 석의 12 정조 5년 (1781) 12 월 14 일(임오) 성정각( 誠 正 聞 )에서 직각 김재찬( 金 載 瓚 )을 소견 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어제 뽑은 일기( 日 記 )를 직각은 모두 다 썼는가? 하니, 김재찬이 아뢰기 를, 이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이 일기를 검서관( 檢 書 官 )과 내각( 內 聞 )의 서리( 書 更 ) 중에서 글씨를 잘 쓰는 자로 하여금 즉시 베끼게 하되, 만일 고찰할 만한 곳이 있으면 강서원일기( 講 書 院 日 記 ) 를 참조하여 고찰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13 정조 8 년 Cl 784) 윤 3 월 2 일(정사) 성정각( 誠 正 聞 )에서 승지 홍수보( 洪 秀 輔 )와 이시수 ( 李 時 秀 )를 소견하였다. - --? 하니, 홍수보가 아뢰기를, 지금 순흥( 順 興 )에 거주하는데 문장과 식견은 뛰어나지만 과 장( 科 場 )에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고례( 故 例 )를 상고해 보았는가? 하니, 이시수가 아뢰기를, 자의( 諾 議 )는 강서원( 講 書 院 )에서 하유하였고, 지평( 持 平 )은 애초에 부직( 付 職 )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인용할 만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하여 정조 8 년 (1784) 7 월 2 일(을묘) 선정전에 나아가 친정( 親 政 )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조시준( 趙 時 俊 ), 참판 심풍지( 沈 뿔 之 ), 참의 김우진( 金 字 鎭 ), 병조 판서 이재협( 李 在 協 ), 참판 김사목( 金 思 種 ), 참의 안성빈( 安 聖 秘 ), 참지 유의( 柳 誼 )가 나왔다- 0 하교하기를, 시강원( 倚 講 院 )과 강서원( 講 書 院 )에는 당상 자리가 없으므로 유선( 論 善 )은 선조의 특교에 따라 당상 자리로 올렸지만 보덕( 輔 德 )에 대해서는 아직 품계를 올려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에 이름 있는 선비들의 논의에서 의당 당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많이 말하였고 선조 을미년 (1775, 영조 51) 에도 연석(흉 席 )에서 하교하셨다. 춘방 15 정조 8 년 (1784) 1 2 월 27 일(무신) 윤방( 尹 햇)을 도총관으로 삼았다 야

237 0 하교하기를, 아침에 연석에서 말이 나온 것으로 인하여 내가 잊지 않고 있는 뜻을 보였 다. 기묘년 (1759, 영조 35) 에 내가 세손( 世 孫 )으로서 책례( 冊 禮 )를 행할 때 강서원( 講 書 院 )의 요속( 燈 屬 )을 특교로 인하여 엄선해서 차출하였고, 이 재신( 宰 닮)이 이 판부사( 李 判 府 事 )와 함께 좌우 익선( 翊 善 )이 되어 춘방( 春 껴)의 보덕( 輔 德 )처럼 책함( 冊 困 )을 함께 정조 9 년 (1785) 7 월 6 일(계축) 경국대전 과 속대전 을 바로잡도록 총재 대신 ( 擔 載 大 톰)에 게 전유( 傳 論 )하라고 명 하였다. 0 하교하기를, 이전( 更 典 ) 호전( 戶 典 ) 예전( 禮 典 ) 형전(페 典 ) - 공전 ( 工 典 ) 5 개 전( 典 )의 증조( 增 條 ) 초서본( 妙 書 本 )을 살펴보았다. 이전 가운데 강서원( 講 書 院 ) 아래의 주( 註 )는 자질구레한 듯하다. 지의금( 知 義 禁 )이 승품 Cl쩔 品 )하게 되면 판사( 判 事 ) 로 하비( 下 批 )하되 비록 시임 판사가 있더라도 승품하는 데 구애하지 않는다 고 하였 17 정조 10 년 (1786) 6 월 16 일(무자) 춘추관( 春 秋 館 )이 실록( 實 錄 ) 을 상고해 낸 데 대한 별단을 올렸다. ---니다. 하였다.영조조 갑술년 (1754 영조 30) 윤 4 월 정사일 (8 일)에 상이 의소세손( 露 昭 世 孫 )의 담제( 禮 聚 )에 친림하였을 때 원임 대신 예전의 사부( 師 傳 ) 예전의 요속( 傑 屬 )이 참석 하였는데, 대축( 大 祝 ) 이 신위를 받들어 연여( 養 與 )에 안치하고 효장세자묘로 이봉( 移 奉 )하려 할 때, 예전의 요속은 차례로 여( 與 )를 모시고 강서원( 講 書 院 )의 관원이 오른 정조 11 년 (1787) 2 월 20 일(무오) 희정당( 熙 政 堂 )에 나아가 초계 문신( 妙 양 文 닮)의 친시( 親 試 )와 과강( 課 講 ) 및 문신( 文 닮)의 제술( 製 述 )을 행하고, 동지 회환 정사(쪽 至 며 還 正 使 ) 황인점( 黃 仁 點 ), 부사( 副 使 ) 윤상동( 尹 尙 東 ), 능은군( 績 恩 君 ) 구윤명( 具 允 明 ), 영변 부사 ( 寧 邊 府 使 ) 서용보( 徐 龍 輔 )를 소견(검 見 )하였다. 초계 문신의 강제 시관( 講 製 試 官 ) 오재순( 吳 載 純 ) 이성원( 李 性 源 ) 박우원( 朴 祐 源 ) 이병모( 李 秉 模 ) 서정수( 徐 鼎 修 ) 정대용( 鄭 大 容 ), 윤행임( 尹 行 任 ), 문신의 제술 시관 이재협( 李 在 協 ) 정창순( 鄭 昌 順 ) 신기( 申 홉) 박천형( 朴 天 衝 ) 김이희( 金 屬 禮 ) 이기( 李 廳 )가 입시하였다. ---나 맞지 않습니다. 적은 양이 누적되어 1 근(듀), l 석( 石 )에 이를 뿐만 아니라 또한 종핵 ( 結 核 )하는 정사가 아니니, 바로잡아 싣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 기를, 속 대전 이전( 更 典 )에, 시강원의 관원은 등제( 等 第 )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강 서원( 講 書 院 )은 모든 일이 한결같이 시강원과 같은데, 강서원 역시 등제하지 않는 19 정조 11 년( 1787) 8 월 19 일(갑인) 호조 판서 이재간( 李 在 簡 )을 삭직하라고 명하였 다 - --꺼 병자년의 직숙( 直 宿 )한 데 대해 상전을 베푼 일병자년의 일 영조실록 에 의하 면, 병자년인 영조 32 년 11 월 17 일에 왕세자, 즉 사도세자에게 두창(찮 樓 )의 증세가 나타나 자 영조가 약원( 藥 院 )의 신하들에게 강서원( 講 書 院 )에서 직숙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후 l 월 19 일에 두창이 평복( 平 復 )되어 사면령 등을 내렸는데, 아마 이때 직숙했던 관원들에게--- %

238 집춘영( 集 春 營 ) 국역 일성록 정조 2년 무술 (1778, 건륭 43 ) 윤 6월 1 일(기미 ) 희정당( 熙 政 堂 )에서 윤대관( 輪 對 官 )을 소견하였다. 0 내가 이르기를, 방금 광지영( 廣 智 營 )에 물어보니 그곳이 과연 훈련도감의 자내( 字 內 )라고 하던가? 하니, 승지 서유방( 徐 有 防 )이 아뢰기를, 미처 알아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집춘영( 集 春 營 ), 광지영, 동영( 東 營 ), 서영( 西 營 )에 입직하는 군병은 어영청이 200 명이고, 훈련도감과 금위영이 각각 100명인데 분배하여 파수하는 때에는 어영청에는 애당초 자내 를 나누어 맡기지 않으니 실로 이해할 수 없다 당초에 파수를 분배할 때에는 반드시 이와 같이 균등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승지는 나가서 자세히 물어보고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 2년 무술 (1778, 건륭 43) 7월 17 일(갑진) 집춘영( 集 春 營 )과 광지영( 廣 智 營 )에 입직한 포수도 통틀어 함께 환위( 環 衛 )하라고 명하였 다. 0 숙위소가 환위하기를 계품한 것으로 인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다. 정조 3년 기해 (1779, 건륭 44) 2월 22 일(정축) 도감 별장( 都 藍 別 將 ) 이장엽( 李 長 懷 ) 등을 태거하였다. 0 훈련도감이 아뢰기를, 집춘영( 集 春 營 )의 군병이 수직( 守 直 )하는 것으로 병조에서 초기하여 거행하였는데, 입직 초 관은 숙위소에 보고도 하지 않았고 영전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단지 북영( 北 營 )의 입직 별 장의 영기( 令 雄 )만으로 지레 수직하러 나갔으니, 사체가 매우 놀랍습니다. 신칙하지 못한 잘 못에 대해서는 황공히 대 죄하거니와 별장 이장엽과 초관 유광두( 柳 光 斗 )는 태거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윤허한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정조 3년 기해 (1779, 건륭 44) 2월 23 일(무인) 병조 판서 이휘지( 李 徵 Z)를 엄하게 추고하였다. 0 병조가 아뢰기를, 어제 집훈영( 集 春 營 )의 입직 초관( 入 直 뺑 官 )의 수본( 手 本 )에 본영 자내( 字 內 )의 궁장( 宮 禮 ) 이 무너졌습니다 하였으므로, 입직군 8 명을 파견하여 파수하는 것으로 초기하였습니다. 그 런데 지금 또 후원( 後 짧)의 수직 내관( 守 直 內 官 )의 보고에 옥류천( 玉 流 川 ) 북쪽의 궁장이 무너졌습니다. 하였으므로, 역시 즉각 파수하는 것으로 한편 초기하고 한편 간심( 看 審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무너진 곳은 애초부터 두 군데가 아니라 한 군데였으며, 의당 광지영

239 ~ti갱풍 복원정비 기본계획연구 4. 건물관련 사료 창덕궁

240

241 홍재전서 제 54 권 잡저( 雜 著 ) 1 수강재( 壽 康 驚 ) 상량문( 上 梁 文 ) 을사년 Cl 785) 명당( 明 堂 )에다 좌우( 左 右 )의 곁방을 만드니 일곱 자리에 여넓 개의 들창을 내었으며, 기범 ( 箕 範 ) 구오( 九 五 )의 조짐에 맞으니 마룻대를 올리고 서까래를 얹었도다. 아름다운 이름을 처음으로 내리니, 군자( 君 子 )가 편안하게 여기는 바이도다. 이에 수강궁( 壽 康 宮 )의 터를 돌 아보니, 바로 중희당( 重 熙 堂 )의 곁이도다 황하( 黃 河 )가 한번 맑아질 운수가 열리니 동정성 ( 東 井 星 )이 신령함을 나타내고, 자궐(쌓 關 )이 만년의 상서를 점지하니 뭇별들이 북극성에 둘 러 있는 듯하도다. 성조( 聖 祖 )께서 나라를 세우신 공렬( 功 烈 )을 상상하고 황도( 皇 圖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에 집을 지을 터와 방향 등의 일이 기재되었도다 자손을 도와 편안 하게 하는 계책을 물려주고 땅의 기운이 집을 지을 곳을 보호하였도다. 날아갈 듯한 대마루 는 붉은 칠을 한 대궐의 섬돌에 닿아 있어 조회에 임하여 정사를 듣는 법아( 法 衝 )가 없지 않으나, 그림이 그려진 내실이 세자궁에 이어져 있어 따로 강학( 講 學 )할 새 집을 지었도다. 그것이 그런대로 완벽하고 그런대로 편안하기를 생각하였는데, 이에 아름답게 높다렇고 아 름답게 성 대함을 보겠도다. 공역( 公 投 )은 한제( 漢 帝 )가 대( 臺 )를 쌓는 것처 럼 줄였는데도 저 절로 눈앞에 우뚝함을 이루게 되었으며, 의리는 주왕( 周 王 )이 동산을 만든 일을 따라 대강 마음속으로 경영함이 있었도다. 날아갈 듯한 처마며 복도로 된 냥하는 바로 겨우 무릎을 움 직일 수 있을 정도일 뿐이며, 서늘한 대(풀)와 따뜻한 정자는 어찌 보기 좋은 것을 취하였 겠는가 화봉인( 華 封 人 )이 요(흙)임금을 위하여 축원하는 데에도 장수[ 眉 壽 ]가 들어 있고, 임금이 백성에게 법을 시행할 때에도 낯빛을 편안히 한 자는 받아 주었다. 띠로 인 지붕과 흙으로 만든 계단이 비록 내 집의 참된 아름다움이기는 하지만, 우거진 대나무와 무성한 소 나무는 넓은 집의 추위를 막으리라 장인은 20 일이 안 되어 완성을 하였고, 창문으로는 사 계절의 경치가 바라보이도다. 화려한 건물에 태양이 빛나는 좋은 계절이면 국화 향기가 따 르고, 지붕이 하늘을 찌르는 높다란 헌함( 野 權 )에 푸른색의 구름을 접할 수 있겠도다. 연침 ( 蘇 寢 )은 궁실을 낮게 지어 다스린 우( 禹 )임금을 사모하여 겨우 손님을 맞이하고 책을 시렁 에 올려놓을 정도이며, 학금( 題 禁 태자( 太 子 )의 궁전)에서 서연( 書 鐘 )을 여는 의식을 거행하 고, 경사( 慶 事 )를 만나 기쁨을 표하는 뜻을 부쳤도다 복( 福 )은 늘리면 백배가 되는데 어찌 나 한 사람만 근심이 없겠는가. 기반은 천년토록 튼튼할 것이니 또한 모든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리로다.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조용한 여가에 내 방에 들어오는 이는 어진 사대부( 土 大 夫 )들이고, 거북점과 시초점을 따라 이날을 가려 뽑았으니 청명하고 명랑하도다. 이에 들보를 들어 올림을 송축하며 어여차 소리를 돕는도다. 어여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 郞 偉 빼 梁 東 수강재에 비치는 햇빛은 중추가 분명하도다 / 壽 魔 分 明 秋 中 중양문 밖에는 날 새는 빛인데 / 嘴 色 重 陽 門 外 세자궁에서는 강독하는 소리 들 려오도다 / 講 聲 來 g 춤 宮 어여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 郞 偉 빼 梁 西

242 상서로운 빛이 처마 위에 두루 비치도다 / 祚 R 軍 遍 照 破 題 용루의 새벽 침소에 와서 문안하니 / 龍 樓 曉 寢 來 候 세자가 닭 우는 소리를 듣는도다 / - 點 前 星 聽 짧f 어여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 郞 偉 地 梁 南 궁궐에는 아침마다 맙은 남기( 凰 氣 ) 둘렸네 / 뿔 聞 朝 朝 8춤 凰 수놓은 장막에는 푸른빛이 쌓였는데 / 蒼 짧 影 패 觀 幕 모든 관원들 일제히 만세를 세 번 부르도다 / 百 燈 齊 敵 홈 三 어여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리니 / 兒 郞 偉 빼 梁 北 모든 별들 북극성을 향하여 둘렀도다 / 짧 星 環 續 廣 極 중궁전에 새로운 가요가 전파되니 / 六 宮 新 播 歌 護 다투어 꽃떨기를 가져다 집에 보태도다 / 爭 取 花 뚫 徐 屋 어여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리니 / 兒 郞 偉 빼 梁 上 금문을 이른 아침에 처음으로 개방하도다 / 金 門 早 朝 初 放 비단으로 머리를 싸맨 학사들 자주 서연을 열어 / 鎬 l뻐 頻 開 휩 錢 주역 이패( 離 숲 r) 제왕의 덕을 먼저 강론하도다 / 義 經 先 講 明 兩 어여차 들보를 아래로 들어 내리니 / 兒 郞 偉 빼 梁 下 여닮 기둥에는 순수한 복을 비는 글 새로 붙였도다 / 八 짧 新 뼈 純 調 봉래 갚은 곳에는 향이 타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 逢 菜 深 處 香 뼈 아침에 제왕이 일과를 끝내니 한가한 시간 많도다 / 朝 罷 萬 幾 多 H밟 들보를 올린 뒤에 만세( 萬 歲 )토록 순수한 도를 얻어 강녕( 康 寧 )하고, 덕( 德 )을 밝힘이 날로 새로워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게 하며, 아름다운 상서가 시뱃물처럼 이르고, 인을 실천하여 아주 편안하기를 삼가 바라노라 [주 D-001] 기범( 箕 範 ) 구오( 九 죠) ; 기범은 기자( 箕 子 )가 무왕에게 말해 준 서경( 書 經 ) 홍범( 洪 範 )을 가리키고, 구오는 홍범의 내용 중에서 다섯 번째인 구오복( 九 죠 福 )을 가리키는 데, 첫째는 수( 壽 )이고, 둘째는 부( 富 )이며, 셋째는 강녕( 康 寧 )이고, 넷째는 덕( 德 )을 좋아하 는 것이며, 다섯째는 제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수강재( 壽 康 顆 )란 이름은 이 구오 의 첫째인 수( 壽 ) 자와 셋째인 강녕( 康 寧 )의 강( 康 ) 자를 취한 것이다. [주D 002] 화봉인( 華 封 人 )이 들어 있고 ; 요임금이 화( 華 )에 유람 갔을 때 그곳의 봉인 ( 封 人 )이 장수[ 壽 ], 부유함[ 富 ], 많은 아들[ 多 男 子 ] 세 가지로 축수하였는데 요임금이 모두 사양하였다. 莊 子 天 地 [주D-003] 임금이 받아 주었다 서경( 書 經 ) 홍범( 洪 範 )의 오황극( 五 皇 極 )에, 임 금이 극( 極 )을 세워 백성들에게 복을 베풀면 백성들이 그 극을 함께 보호할 것이다 또한 백성들이 극에 맞추지 않더라도 허물을 범하지 않았으면 받아 주고, 백성틀이 얼굴빚을 편 안히 하여 내가 좋아하는 바가 덕( 德 )이다. 라고 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어라. 라고 되어 있 다 [주D-004] 금문( 金 門 ) 한( 漢 ) 나라 때 궁궐의 문 이름이다 금마문( 金 馬 門 )이라고 하는데, 학사( 學 士 )들이 조칙(젊 動 )을 기다리는 곳이다 /

243 壽 康 齊 重 修 上 짧 文 [주; 여 申 ] V원문보기 25b 처 음으로 述 夫 子 王 母 受 忽 萬 千 歲 f쁘 昌 偶 熾 廠 R한 民 錫 '& 九 五 福 日 壽 日 康 所 以 奉 老 之 堂 萬 此 祝 運 之 義 蓋 聞 自 古 福 禮 之 盛 莫 如 壽 考 且 寧 寫 君 傷 無 能 各 封 A 之 請 祝 聖 者 事 親 諸 有 深 愛 文 王 則 日 安 喜 之.좁 我 쫓존 嚴 멍 京 室 之 婚 配 聖 人 之 尊 徵 柔 짧 悲 之 風 自 團 門 而 關 發 含 弘 光 大 之 德 遍 統 與 而 패 1 需 영또 陰 功 之 죠 影 宜 天 休 之 滋 至 堆 予 小 子 * 承 堂 擺 載 짧@졸 聞 漢 長 樂 之 歡 兪 * 且 效 千 乘 之 養 쩔 關 宮 之 斯 喜 擬 追 三 朋 之 詩 伊 寒 웰 節 適 之 方 盡 誠 力 之 收 到 當 릎톱 定 省 之 際 恐 많 步 之 或 違 i명 鉉 有 齊 於 樂 善 之 f 旁 *옳 V 원문보기 26a 처 음으로 扁 以 壽 康 之 號 蘭 芳 桂 嚴 因 舊 制 而 重 修 漢 井 絡 옮L 運 新 巧 而 增 餘 뚫땅 南 戶 τf 草 之 陣 方 합 乃 臨 北 堂 瑞 萱 之 葉 初 長 於 휠 f당 嚴 光 徒 O 子 職 敬 供 三 百 有 六 句 寶 鷹 紀 壽 星 之 次 八 -- 萬 歲 法 鐘 進 康 老 之 젊 f돗 f 失 짧I 千 S 奇 竹 흉 而 松 a; 떻뚫 我 屋 願 地 久 而 天 長 百 複 斯 興 六 領 載 짧 兒 郞 偉 標 東 騎 넓 8춤 光 入 統 擺 好 是 柳 絲 如 手 線 望 春 門 外 舞 春 風 兒 郞 偉 fjt 樓 南 供 日 當 깜 鳥 語 n 南 待 女 輕 搖 金 옳 扁 嚴 波 浮 動 午 風 含 V 원문보기 26b 처 음으로 兒 郞 偉 fjt 標 西 出 水 훗흉 高 復 低 金 ffl 折 花 來 敵 壽 훨 倚 깊표 勝 휩얀 破 瓚 兒 郞 偉 標 北 풍중중 莫 據 書 不 得 最 愛 鷹 뿔 多 秀 氣 參 天 - 柱 擇 震 極 兒 郞 偉 標 上 圓 宇 쫓흠* 文 畢 似 帳 十 = 環 樓 最 高 處 神 光 쫓 女 齊 8 層 望 兒 郞 偉 標 下 萬 戶 煙 罷 甲 Z 舍 壽 域 흡심 光 滿 眼 來 細 車 細 馬 香 塵 意 ft 願 上 傑 之 後 海 훌훌짧 萬 萬 呼 奏 三 洞 開 灌 龍 之 門 륨뽀륨뽀 含 율읍 之 樂 密 i짧 續 벗I 之 室 를홉 讀 舞 짜 之 情 靈 f규 V 원문보기 27a 처 음으로 九 還 普 施 壽 民 之 要 뚫 擊 壞 -P 昌 府 和 康 衛 之 希 音 [ ]

244 창덕궁-서향각 이 왕비 전하( 李 王 紀 願 下 )의 양잠( 養 醫 ) (비원내( 秘 행 內 ) 서향각( 書 香 聞 )에서) 매일신보 1911 년 6 월 23 일자 잠업시기( 靈 業 時 期 )를 당( 當 )하매 이왕비 전하( 李 主 紀 顧 下 )께옵서는 재작년래( 再 昨 年 來 )의 전례( 前 例 )를 의( 依 )하여 (친잠권업, 親 醫 動 業 )의 대의( 大 意 )로서 귀체( 貴 體 )의 고로( 苦 勞 )함 을 불염( 不 厭 )하시고 냥일래(낭 日 來 )로 친( 親 )히 양잠( 養 醫 )을 행( 行 )하시는 중( 中 )인데 좌 ( 左 )에 기( 其 ) 친잠( 親 醫 )하시는 상세( 詳 細 )를 기( 記 )하건대 창덕궁 비원내( 昌 德 宮 秘 행 內 ) 서향각 정면( 書 香 開 正 面 )에는 ( 親 醫 勳 業 )이라하는 대서( 大 書 ) 의 편액( 扁 賴 )을 게( 揚 )하였으니 차( 此 )는 작춘( 昨 春 )에 친잠( 親 鍵 )을 행( 行 )하선 후( 後 ) 왕비 전하( 王 紀 願 下 )께서 친서( 親 書 )하사 기시( 其 時 ) 농상공부 대신( 農 商 工 部 大 몸) 조중응씨( 趙 重 應 民 ) 에게 하사( 下 陽 )하신 기념( 紀 念 )인데 금년( 今 年 )에도 역( 亦 ) 기( 其 ) 서향각( 書 香 聞 )을 양잠실( 養 醫 室 )로 정( 定 )하시고 전례( 前 例 )를 의( 依 )하여 농상공부( 農 商 工 部 )의 이와타 잠업 기사( 岩 田 쫓좋 業 技 師 )로 하여금 감독( 藍 督 )케 한 후( 後 ) 카도쿠라 하루꼬( 門 會 春 子 )와 전판서 ( 前 判 書 ) 김세기씨( 金 世 基 民 )의 근친 모( 近 親 某 )와 전강화군수( 前 江 華 那 守 ) 한영복씨( 韓 永 福 民 )의 질녀( 佳 女 ) 등을 지휘( 指 揮 )하여 동소( 同 所 )에서 침식( 寢 食 )하고 직접( 直 接 )으로 양잠 ( 養 醫 )을 방조(혐 助 )케 하였는데 소럽의량( 橋 立 轉 量 )은 2 돈(몬메)이라. 1 일 오후부터는 성기( 醒 期 )에 입( 入 )하였고 잠가( 醫 架 )는 청결( 淸 燦 )하여 일점(- 點 )의 진애 ( 塵 埈 )가 무( 無 )하며 전면, 측면( 前 面, 測 面 )에 개 극세( 皆 極 細 )한 사망( 舍 網 )을 장( 張 )하였 고 무수( 無 數 )한 잠아( 醫 兒 )는 청상( 淸 j 末 )에서 안면( 安 眼 )하는 중( 中 )이오, 잠가( 醫 架 )는 정변 중앙( 正 面 中 央 )에는 한난계( 寒 援 計 ) 건습계( 乾 隱 計 ) 등의 설비( 設 備 )가 유( 有 )하고 온도( 溫 度 )는 70 도( 度 )가 최( 最 )히 적당( 適 當 )하다는데 비전하( 紀 嚴 下 )께서는 시시( 時 時 )로 임장( 臨 場 )하샤 작년( 昨 年 )까지는 잠아( 醫 兒 )가 수( 手 )에 촉( 觸 )함을 불호( 不 好 )하시더니 거 1 일( 去 一 日 ) 즉( 郞 ) 목요일( 木 魔 日 )은 이왕 전하( 李 王 嚴 下 )의 정례산보일( 定 例 散 步 日 )인 고( 故 )로 오 후 1 시경에 양전하( 兩 願 下 )께서는 식물관( 植 物 館 )에서 오찬( 午 餐 )을 진어( 進 倒 )하시고 역시 ( 亦 是 ) 동행( 同 行 )하사 서향각( 書 香 聞 )의 양잠실( 養 靈 室 ) 에 임어( 臨 倒 )하셨는데 비전하( 紀 嚴 下 )께서는 친수( 親 手 )로 잠아( 醫 兒 )를 집( 執 )하시고 이왕 전하( 李 王 嚴 下 )께 대( 對 )하여 각종 담화( 各 種 談 話 )가 유( 有 )하실 뿐 아니라 양잠( 養 廳 )에 대( 對 )하여 대( 大 )히 취미( 趣 味 )가 유 ( 有 )하시고 열심( 熱 心 )을 유( 有 )하심에는 무불감동( 無 不 感 動 )하였다 하니 대저상( 大 振 上 )에서 호( 好 )하는 바는 하( 下 )에서 차( 此 )를 방( 做 )하는 법( 法 )이라, 재작년( 再 昨 年 )에 친잠( 親 醫 )을 실행( 實 行 )하선 이후( 以 後 )로 작년( 昨 年 )은 황족( 皇 族 ), 원로 4 -

245 ( 元 老 ), 대관( 大 官 )의 각가정( 各 家 處 )에서도 성( 盛 )히 잠아( 醫 兒 )의 사육( 創 育 )을 시( 試 )하여 금년( 今 年 )에는 기 구역( 其 區 域 )이 일층확장(- 層 據 張 )하였고 서민(딸 民 )의 가정( 家 底 )에도 양잠( 養 醫 )을 실행( 實 行 )하는 자( 者 ) 다( 多 )하니 실( 實 )로 왕비전하( 王 紀 嚴 下 )의 친( 親 )히 양 잠( 養 醫 )하심 이 장업 장려 ( 靈 業 雙 勳 )의 귀 감( 龜 鍵 )을 작( 作 )하였슨즉 방가(웹 家 )를 위 ( 寫 )하여 최 ( 最 )히 축( 祝 寶 )할 자( 者 )이 라 하겠더 라.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與 地 勝 魔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 권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 1 권 서향각( 書 香 聞 ) 주합루 서쪽에 있는데 조윤형( 曺 允 亨 )이 현판을 썼다. 어진 및 어제 어필 을 옮겨다 볕을 쪼이는 곳으로서, 이안각( 移 安 聞 )이라고도 한다. 또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 으며, 해마다 사계절 첫 번째 달 보름에 규장각 신하들이 계품(양훌)하여 전봉 포쇄( 展 奉 爆 1 麗 )를 행한 후에 봉모당( 奉 護 堂 )을 봉심( 奉 審 )한다. 0 각의 남쪽 누대는 향명루( 衛 明 樓 )라 현판을 달았는데, 강세황( 姜 世 훈)이 편액을 썼다.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병신 (1776, 건륭 41) 9월 25 일 (계사)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세우고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 관원을 두다 임하필기 제 13 권 문헌지장편( 文 敵 指 掌 編 ) 규장각( 奎 章 聞 ) 숙종 20 년 0694) 에는 종부시( 宗 揮 촉)를 세우고 어필( 倒 筆 )로 이를 편액하였다 정종 병신년 (1776, 정조 즉위년)에는 처음으로 대내( 大 內 )에 주합루( 富 合 樓 )를 세우고 정종이 이를 어필 로 쓴 다음 당저( 當 수)의 어진( 倒 員 ), 어제, 어필, 책보( 冊 寶 ) 등을 모셨으며, 봉모당( 奉 讀 堂 ) 에는 열조( 列 朝 )의 어제, 어필, 어화( 倒 뿔), 고명( 顧 命 ), 유고( 遺 語 ), 밀교( 密 敎 )와 선보( 樓 讀 ), 세보( 世 語 ), 보감( 寶 鍵 ), 장지( 狀 誌 ) 등을 모셨다 열고각( 關 古 聞 )과 개유와( 皆 有 용)에는 모두 중국본 도적( 圖 籍 )을 보관하였으며, 이안각( 移 安 聞 )은 본래의 이름이 서향각( 書 香 聞 ) 이었는 데 어진, 어제, 어필 등을 옮겨 모셔와서 이를 포쇄( 爆 H 麗 젖거나 습기찬 것을 바람에 쏘이고 햇볕에 말리는 것)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서고( 西 庫 )에는 국내본 도적을 보관하였으며, 이 문원( 擔 文 院 )은 금호문( 金 虎 門 ) 안의 흥문관 오른쪽에 있었는데 옛날 도총부가 있던 자리로 서 정종 5 년 Cl 781) 에 이를 각신( 聞 멀)의 표직소( 約 直 所 휴일의 근무 장소)로 삼고 어필로 편액을 걸었다 완역 이옥 전집. 규장각부-아울러 서문을 적는다 奎 章 聞 眼 #* C J

246 ~t혈풍 복원정비 가본계획연구 4. 건물판련 사료 경모궁 (h ]

247 정조 경모궁 출궁 경로 승정원 일 기 정조 14 년 10월 8 일 (을묘) 원본 책 /탈초본8 9 책 (36/ 37) 년 乾 隆 ( 淸 / 高 宗 ) 乘 與 出 永 淸 門 明 政 門 弘 化 門, 由 i힐 廳 門 듬듭 景 흙 宮 55 년 上 由 弘 化 門 明 政 門 上 B, 짧 源 語 略, 禮 房 承 듭 與 宗 揮 官 員, 暗 進 f 更 觀, 可 也 罵 由 永 淸 門 還 內, 정조 15 권, 7 년 (1783 계묘 / 청 건륭( 乾 隆 ) 48 년) 3 월 18 일(기유) l 번째기사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릴 장소를 경복전으로 마련하다 하교하기 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렬 장소를 전 에는 경복전으로 마련하였다. 그날 명정전에서 임 금 이 직접 책보( 冊 寶 )를 올린 뒤에 경복전으로 나아가 치사( 致 詞 )를 올 렸다. 고례에 의절을 익 힐 때나 행사하는 날 도감의 당상과 낭청이 따라 들 어가서 정양문(표 陽 門 ) 밖에서 멈추었는데, 이번에는 영벽문( 奭 뿔 門 ) 밖에서 멈추고 책보를 친히 올린 다음 명정전, 빈양문(좁 陽 門 ), 집 서문( 集 瑞 門 ), 주경문( 朱 景 門 ), 주작문( 朱 줄 門 ), 영안문( 迎 R휠 門 ), 취미문(짧 微 門 ), 취화문( 짧 華 門 ), 요서문( 魔 瑞 門 ), 영벽문( 奭 풍 門 ), 경화문( 景 華 門 )을 거쳐서 경복전에 이르러 예를 거행할 것이니, 이 를 알게 하라- 하였다. 정조 18 권, 8 년 ( 갑진 / 청 건륭( 乾 隆 ) 49 년 ) 9월 9 일(신유) 1 번째기사 명정전에서 태실과 왕대비전에 책보 올리 는 습의를 행하다 명정전( 明 政 願 )에 나아가 태실( 太 室 )에 책보( 冊 寶 )를 올리는 습의( 習 優 )와 왕 대비 전에 책보 ( 冊 寶 )를 올리는 습의 를 행하였다. 이어서 함인정(빼 仁 추)에 나아가 왕대비전의 책보를 받들 고 집서문( 集 瑞 門 ) 정양문( 正 陽 門 ) 주작문( 朱 逢 門 ) 영안문( 迎 鴻 門 ) 취화문(짧 華 門 ) 금마문( 金 馬 門 ) 공신문( 快 辰 門 ) 요서문( 鍵 瑞 門 ) 영벽문( 映 뿜 門 )을 거쳐 왕대비전의 내전( 內 歐 )에서 행하였다. 왕대비가 마련한 음식 [ 宣 購 ] 을 도감의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습의 를 - 7 -

<BFBEBEC6C0CCB5E9C0C720B3EEC0CC2E20B3EBB7A120C0CCBEDFB1E220C7D0B1B3202D20C0DAB7E1322E687770>

<BFBEBEC6C0CCB5E9C0C720B3EEC0CC2E20B3EBB7A120C0CCBEDFB1E220C7D0B1B3202D20C0DAB7E1322E687770> 놀이노래이야기 학교 자료집 1. 놀이, 노래 이야기의 재미와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2. 노래와 놀아요. 3. 재미있는 말놀이와 놀아요. 4. 이야기와 놀아요. 1. 옛 아이들 놀이, 노래 이야기의 재미와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편해문(옛 아이들 놀이노래이야기 연구소장) 얼마 전 유치원,

More information

해양푼화재 제 7 호 / 2014

해양푼화재 제 7 호 / 2014 해양푼화재 제 7 호 / 2014 E조 -, 차 [기획논문] α8 고려로 유입된 중국 동전의 기능과 용도 - 원재료의 활용을 중심으로 - / 임태경 079 I 수중 발굴을 통해 본 고려시대 금속제 생활용품 / 주경미 135 I 태안 마도 3호선 출수 정동유물의 금속학적 연구 / 강승희 [일반논문] 161 I 마도 1 호선 발굴선빅 복원과 고려시대 조운선 /

More information

I. 현대적 명승의 개념 및 관련 법규 01. 문화재보호법과 명승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관광학과 대학원장 김창규 - -------........... 7 02. 명승의 개넘과 용어해설 흔μ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재관광학과대학원장 - 김호딴 ----- ---- --- -----------------...... 13 03. 명승관련법규의 적용과 해석 한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재관광학과대학원장

More information

저 11 회 고대 고분 국제학술대회 고분을통해본 호남지역의 EH 외교류와 연대관 Dating and Cultural exchanges as seen th ough the tomb in Honam region 국립나주문확쩨연구소 Naju National Research

저 11 회 고대 고분 국제학술대회 고분을통해본 호남지역의 EH 외교류와 연대관 Dating and Cultural exchanges as seen th ough the tomb in Honam region 국립나주문확쩨연구소 Naju National Research 저 11 회 고대 고분 국제학술대회 고분을통해본 호남지역의 EH 외교류와 연대관 Dating and Cultural exchanges as seen th ough the tomb in Honam region 국립나주문확쩨연구소 Na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제 1 호 고대 고분 국제학술댄회

More information

3232 편집본(5.15).hwp

3232 편집본(5.15).hwp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45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표지)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 46 2 중기( 重 記 ) 중기( 重 記 )란 호조에서 각 관청의 회계를 감독하거나 경외( 京 外 )의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 는 국가 재산의 누수를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작성하도록 규정한 회계장부나 물품조사서

More information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More information

?읜춎킴잖?

?읜춎킴잖? 口 특집/갑오경장 100 년 기념 캅오경장기의 문법 우 교수) 1. 서 론 개화기싼 팍써사얘서는 정흉서1 국어와 근대국어에서 현대픽써 단계효 넙써가는 중요한 과도기작 성쩍윷 밀 썩 q 그동안 중세국어와 현대꽉어쩌11 엽꾸어l 비해서 근 대국어에 대한 연구는 상대척으로 소흘하였으며 특히 개화기 시대는 과도기로 취급되 어 독자적인 연구대상으로 주목율 크게 받지

More information

2008.3.3>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2001.2.10>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2008.3.3>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2001.2.10>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시행 2010. 3. 1] [보건복지가족부령 제161호, 2010. 2.24, 일 보건복지가족부 (노인정책과) 02-2023-85 제1조 (목적) 이 규칙은 노인복지법 및 동법시행령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1조의2 (노인실태조사) 1 노인복지법 (이하 "법"이라 한다)

More information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시행 2012.2.5] [보건복지부령 제106호, 2012.2.3, 타법개정] 제1조(목적) 이 규칙은 노인복지법 및 동법시행령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1조의2(노인실태조사) 1 노인복지법 (이하 "법"이라 한다) 제5조에 따른 노인실태조사의 내용은 다음 각

More information

소사벌 25호

소사벌 25호 명택 문뺑l 황?빠 담0배{는 훌활문얘지 혈훨명택문확원 .._ j ~ 납 十 E과 I ~at~ 를.... 색 촌솟 u발강셔 l n키울마 7.! nt셔냐는 7...& I c 닙 ""'C" j 슬 I 7 十 들 을딴셔! 처녁 켠 71 건떡셔 를}고 딩녁 ~ t내수 배 l 효 7 十 ~I운 고_7 서 n품 벌 E 펴 스 j 발겨 l l L. 논뱉파 :it I ""

More information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Ⅰ 가이드라인 개요 >>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지주회사법

More information

a킹종꺼j책 획용깡호. 그 후 양 L걷(Z006 ZOIO)

a킹종꺼j책 획용깡호. 그 후 양 L걷(Z006 ZOIO) 를흥. F 씀 문와쩨청 ~,o후닌 --! Anniversary a. -"" a웅종쟁융켈 활틀생홀 - 그 승 T 양L착(Z006 zoao) 영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원림 동천석실에서 본 부용동전경 ----mjw 랍口 그 - NC 뼈 ι ι 빼 m 빼 빼 빼 뾰 괴빼 A4.m a킹종꺼j책 획용깡호. 그 후 양 L걷(Z006 ZOIO) a굉승짱캠 빨~'h-,

More information

이거l 폭발하면 엄청난 방사능 낙선이 떤어져 혈단도안지나서 지구표면은달표연차펌 황폐해져버렐 겁니다! (-- ) 제정선 박힌 사랍이라면 반사시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 둠스데이 마신은 자동 발사되도록 션겨l 뇌어 있습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또는 나는 어휠게

이거l 폭발하면 엄청난 방사능 낙선이 떤어져 혈단도안지나서 지구표면은달표연차펌 황폐해져버렐 겁니다! (-- ) 제정선 박힌 사랍이라면 반사시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 둠스데이 마신은 자동 발사되도록 션겨l 뇌어 있습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또는 나는 어휠게 이거l 폭발하면 엄청난 방사능 낙선이 떤어져 혈단도안지나서 지구표면은달표연차펌 황폐해져버렐 겁니다! (-- ) 제정선 박힌 사랍이라면 반사시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 둠스데이 마신은 자동 발사되도록 션겨l 뇌어 있습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또는 나는 어휠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시효념}게 되었는기 에서 소련 대사사데스키기 한 밀 -- 슬. ;: 경제학책에서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6. 29 ( ) 11:00 20 0 1. 6. 29 2 3 ( ).( 397-0781) 1. 2. 3. 4. 5. 1. ( : 2 ) 2 8607, 306 19, 7 6 28, 95 3 - (5 ) (,,,,,, ) - 1 - 2. -, - -, - 2 - 3.,, 1,700, 827 ( ) 1,700 8 27 803 469 560 227 289 117 48

More information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More information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일부개정 3 5.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일부개정 4

More information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인 천 광 역 시 의 회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More information

<2> 2014 년 11 월 25일 -LI훌톨흘클--- 드프 ι셔끼 AI c::::i O......, 술킬수없는체납액, 끝까지 추적한다! 지방세 세외수입 체납액 정수대책 보고회 개최 이학재 부군수주재로각실과소읍면장등관계자들이 체납액 징수 방안에 대해 논의 지방재정의 자

<2> 2014 년 11 월 25일 -LI훌톨흘클--- 드프 ι셔끼 AI c::::i O......, 술킬수없는체납액, 끝까지 추적한다! 지방세 세외수입 체납액 정수대책 보고회 개최 이학재 부군수주재로각실과소읍면장등관계자들이 체납액 징수 방안에 대해 논의 지방재정의 자 ~ /ι - * \ Lg EUMSEONG NEWS --ε흩l해ξ크뜯씹률틀잠- 2014년 11 월 25일 발행인 음성문수 편집 음성소식편집위원회 구독문의 O쩨 871-3051-5 홈페이지 빼 es21.go.kr I 사랑의 김장으로 따뜻한 겨울을 음성군여성단체협의회(회장 윤효숙) 회원 40명이 참여한 독거노인을 위한 김장담그기 행사가 지난 13일 여성회표뻐 서

More information

나다 하 o. 2013년 05월 21 일 화요일 AOl 면 종합 벼떠 2Aλ 동아일보-채널 A- 딜로이드 대학명가 굉운대 우송대 한국산업기술대를 포힘한 25개 대학이 취업 또는 칭업 프로그랩을 동아일보와 채덜 A가 딜로이트컨설팅과 함께 실시한 명가는 대학생에게 초점을

나다 하 o. 2013년 05월 21 일 화요일 AOl 면 종합 벼떠 2Aλ 동아일보-채널 A- 딜로이드 대학명가 굉운대 우송대 한국산업기술대를 포힘한 25개 대학이 취업 또는 칭업 프로그랩을 동아일보와 채덜 A가 딜로이트컨설팅과 함께 실시한 명가는 대학생에게 초점을 2013년 05월 22 일 수요일 A03면 기 획 TI 닙 '~I i.그..., 0 c::: 웹 앓J3i협캘등뭘찮밝 (2) 취업률 뺀 인프라만 살펴보니 취업 역링 영가 항목별 순위 -총장님까지 발로 띔니다 현장에선 허리를 속 였습니다 학교 간판 이 빛나지 않아 학생이 취 업 시ε뻐 서 눈물 흥리지 않게 만들겠다고 지방대 교직원의 일이다 총장을 중심으로 졸 업생이

More information

TVHomeShopping_final_report.PDF

TVHomeShopping_final_report.PDF TV 2003. 12. . 1 1. 1 2. 2 3. 2 4. 2. 3 1. 3 2. TV3 3. TV 4 4. 4. 9 1. 9 2. 9 3. 13 . TV 17 1. 17 2. TV 19 3. TV 20. 32 1. 32 2. 33 3. TV 34. 36 1. 36 2. 36 3. 36 1. 37 2. 38 . 1. 1995 8 TVTV.,,, 30

More information

z - 객펀!l. 켈풀 Il 한국애출종합합교 영상원 영확과 D믿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 -, School offilm and Multi-MediajDept. Film Making 큐f 줬! 훌훌 정선주 1971 년 서울 출생 1994 년 숙명여대 행정학과 졸업 2000 년 영상원 시나리오 예술전문사 2JI 입학

More information

일에 매이지 않고 벗어날 수만 었다면 대개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하려고만 든다면, 할 일은 많다. 1931년 3월, 헨리 포드24

일에 매이지 않고 벗어날 수만 었다면 대개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하려고만 든다면, 할 일은 많다. 1931년 3월, 헨리 포드24 일에 매이지 않고 벗어날 수만 었다면 대개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하려고만 든다면, 할 일은 많다. 1931년 3월, 헨리 포드24 0 삼! ;; 실업이 뭐 복잡할게 있나요? 실업은경제의 가장기본적인 문제 중하나입니다. 그래도가장기 초적인 경제학 개념 중 하나인 수요와 공급 을 통해 실업의 문제 에 접근한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More information

<BCBAC1F6BCF8B7CA28C3D6C1BE2933C2F72E687770>

<BCBAC1F6BCF8B7CA28C3D6C1BE2933C2F72E687770> 大 巡 대학생 하계 성지순례 자 료 집 宗 團 大 巡 眞 理 會 目 次 성지순례의 취지 11 행사 일정표 12 계룡산 동학사 13 천호산 개태사 31 반야산 관촉사 41 모악산 금산사 54 황토현 전적지 92 상제님 생가 시루산 104 모악산 대원사 115 종남산 송광사 126 진안 마이산 135-1 - 도 기 ( 道 旗 ) 우주 자연의 근원적 의미가 도(

More information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 광고법 시행 1년 표시 광고규제 법규는 통합되어야 한다! 정은종 호텔롯데 경영지원실/지적재산권법 석사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입법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표시광고법이 제정되어 시행( 99년 7월)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공정거래법 23조1항6호의 부 당표시광고 규정이 분가하여 탄생한 표시광고법은 기존 공정거래법이 부당표시광고(허위 과장, 기만,

More information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More information

률멸 M 선 Mirror 집 이윤정 선배를 만나다-송지선/박새봄 선배를 만나다-김특영 /검민선 선배를 만나다 김태형/글쓰기 1 무 / 장-김나연 / 口 록보살-엄경석/개새끼 / 사팅_01 가연 / 병적 / 굶주림-이유리/그리움-정종욱/극직 습 1 장면 쓰기-오제호/장면 쓰기-이명연/인물 만들기-지강숙/인물 만들기-초 은0 1 /극작연습 3 미 인괴 공사 권지혜

More information

05.PDF

05.PDF ODD JOHN / ....?,. ( ), ( ).. < > 4 12 19 24 31 36 42 49 57 70 76 80 87 92 99 108 115 128 130 4. ",?", ' '. ".",. ".?.".., 6.,...,. 5 4.,...,. 1,..,. ",!".,.. ' ".,. "..",. ' '. 6 7.,.. 4,,.,.. 4...,.,.,.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6. 29 () 11:00 ( ) 20 0 1. 6. 29 11( ).(397-1941) 1. 2. 3. 4. 5. 1. 28, 60() (,, ) 30 619(, 6. 29) () 6 (,,,,, ),,, - 1 - < > (, ), () < > - 2 - 2.,,, 620,, - 3 - 3. ( ) 1,614,, 864 ( ) 1,6 14 864 () 734

More information

부벽루 이색 핵심정리+핵심문제.hwp

부벽루 이색 핵심정리+핵심문제.hwp 부벽루 - 이색 알맹이 정리 시 대 : 고려말 갈 래 : 5언 율시 성 격 : 회고적 표 현 : 어 조 : 지난날의 찬연한 역사를 회고하며 그와 대비되는 현재의 모습에서 무상감에 젖어 있 운 율 : 압운(루, 추, 유, 류) 특 징 : 장엄한 표현.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 이미 지로 표현(4연) 주 제 : 지난 역사의 회고와 고려 국운 회복의 소 망 작가소개

More information

?읜춎킴잖?

?읜춎킴잖? 口 특집/한국의 속담 韓 톰f칸줬썩R협 係 論 著 目 錄 現 在 (연도순)- - 成 現 : ij홉뿜 藏 옮. (14잃"'1뼈) 李 陣 光 : 효 峰 類 說 卷 16. (læg,... l없) 魚 꿨 權 : 釋 官 廳 G. (16 世 紀 ) 尹 所 : 漢 鷹 뺑 擊, 洪 萬 宗 : 李 훌 : 李 德 흉 : 뺑l 上 方 룹(좁짧없초올) (100 句 ). (1껴 1"'1뺑)

More information

<B1B8B8AEB5B5B8C5BDC3C0E5BAB8B0EDBCAD2DB0EDB7C12E687770>

<B1B8B8AEB5B5B8C5BDC3C0E5BAB8B0EDBCAD2DB0EDB7C12E687770>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 중장기발전계획 수립에 관한 연구 2011년 8월 동국대학교 산학협력단 제 출 문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 사장 귀하 본 보고서를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 중장기발전계획 수립에 관한 연구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1년 8월 연구책임:권승구(동국대학교) 연구참여:김태선(동국대학교 푸드시스템연구소) 송동흠(동국대학교 푸드시스템연구소)

More information

?읜춎킴잖?

?읜춎킴잖? 57 韓 國 人 의 이름의 變 選 南 豊 鉉 (단국대 학교 교수. 국어 학) I. 序 韓 國 에서 人 名 이라고 하연 여러 종류를 생각할 수 있으냐 우선 제 1 감 으로 떠오르는 것은 性 과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姓 의 기원이나 변천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름의 變 遭 만을 논의 의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사랍의 이릅은 본래

More information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2006.11. 20,2009.6.15>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2006.11. 20,2009.6.15>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실 내 수 영 장 운 영 내 규 1999.6.1. 내규 제50호 개정 2001. 3.19 내규 제 82호 개정 2005.12.29 내규 제135호 2002. 3.25 내규 제 92호 2006.11.20 내규 제155호 2002. 8.28 내규 제 94호 2009. 6.15 내규 제194호 2005. 5.20 내규 제129호 2011.11.10 내규 제236호

More information

1과 첫 수업

1과 첫 수업 1 1과 경 험 한국에서의 경험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1과 2 주제 어휘 다음은 유학 생활 중 해 볼 수 있는 체험들입니다. 관계있는 것을 찾아 연결하세요. 가) 놀이공원 1) 한국의 전통 문화 체험 나) 고궁 관람 다) TV 프로그램 방청 라) 찜질방 체험 마) 홈스테이 2) 한국의 현대 문화 체험 바) 한옥 마을 구경 사) 사물놀이

More information

°ø±â¾Ð±â±â

°ø±â¾Ð±â±â 20, 30, 40 20, 30, 40 1 2 3 4 5 6 7 8 9 10 3.1 6.3 9.4 12.6 15.7 18.8 22.0 25.1 28.3 31.4 2.4 4.7 7.1 9.4 11.8 14.1 16.5 18.8 21.2 23.6 7.1 14.1 21.2 28.3 35.3 42.4 49.5 56.5 63.6 70.7 5.9 11.9 17.8 23.7

More information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2 0 0 2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2 0 0 2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죄증감 Z 서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탁 유형 및 대처방안 연구 2 O O 2-9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2 0 0 2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쯤 f g g 陣 폼 究 좋 f E 홉 對 外 經 濟 政 策 昭 究 院 昭

More information

기사스크랩 (160504).hwp

기사스크랩 (160504).hwp 경향신문 / 2016.05.03(화) "갈등없는 성과연봉제 도입" 홍보하던 동서발전, 부당노동행위 정황 성과연봉제 노사합의안 찬반투표 당시 동서발전 울산화력본부 기표소 모습 공기업 발전회사 중 처음으로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에 대한 노사합의가 이뤄진 한국동서발전이 직원 들의 찬성 투표를 유도하기 위해 부당노동행위를 벌인 복수의 정황이 나왔다. 직원들에게 동의서를

More information

5. 회 의내용 < 제 1호 안 : 2011학년도 법 안 회 제 철 산(안 )> 법인 사무국장의 성왼 보고에 이이 의장이 이사회 개회 용 선언하고 회계판려부장에 게 제 l 호 안인 20 11 학년도 입인 회계 결산(안)에 대한 성명융 지시함 회계판리부장이 2011 학년

5. 회 의내용 < 제 1호 안 : 2011학년도 법 안 회 제 철 산(안 )> 법인 사무국장의 성왼 보고에 이이 의장이 이사회 개회 용 선언하고 회계판려부장에 게 제 l 호 안인 20 11 학년도 입인 회계 결산(안)에 대한 성명융 지시함 회계판리부장이 2011 학년 학교법언한성학원 2012학년도 제 2차 이사 회 회 의 록 구 ss 01 사 감사 일원징수 8인 2인 재적잉윈 7인 2인 참석잉원 5인 인 1. 연 시 : 2012년 5월 22일(화) 10:30 11:10 (회의소집 상보일 : 2012.5.10.) 2. 장 소 경성대학교 정보판 10충 회의실 3. 엄원 출 결 사항 참석임웬 (5명) : 김대성, 이동철, 김순칭,

More information

사상체질의학회지

사상체질의학회지 사상의학회지 1 o f C o r n t M o o o l 1 0 N o 2 1 9 9 8 四 象 人 耳 目 壘 口 의 퓨Z 態 學 的 特 徵 짧 究 洪 錫 喆 高 炳 熙 宋 - 炳 A M o r p h o r l o g i c a l S t u d y o f E a r, E y e, N o s e a n d M o u t h a c c o r d i n g

More information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 시행 2015.9.9] [ 산림청훈령 제1262 호, 2015.9.9, 일부개정] 산림청( 산림병해충과), 042-481-4038 제1장 총칙 제1 조( 목적) 이 규정은 산림보호법 제3 장 " 산림병해충의 예찰 방제 에서 위임된 사항과 산림병해충( 이하 " 병 해충 이라 한다) 의 예방 구제를 위하여 병해충의 발생조사와

More information

호랑이 턱걸이 바위

호랑이 턱걸이 바위 호랑이 턱걸이 바위 임공이산 소개글 반성문 거울 앞에 마주앉은 중늙은이가 힐책한다 허송해버린 시간들을 어찌 할거나 반성하라 한발자국도 전진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일삼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느냐 고인물은 썩나니 발전은 커녕 현상유지에도 급급한 못난위인이여 한심하다 한심하다 호랑이 턱걸이 바위! 이처럼 기막힌 이름을 붙이신 옛 선조들의 해학에 감탄하며 절로 고개가

More information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와 그 위헌 여부에 관한 소론 - 서울고등법원 2011.2.1.자 2010아189 위헌법률심판제청결정을 중심으로 한국정보법학회 2011년 5월 사례연구회 2011. 5. 17.발표 변호사 김기중 미완성 원고임 1. 서론 헌법재판소는 2002. 6. 27. 99헌마480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등 위헌확인사건에 서 불온통신 의 단속에

More information

<5344555FB9AEC3A2B0FA5FC3A5C0DA2E687770>

<5344555FB9AEC3A2B0FA5FC3A5C0DA2E687770>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공모 주최 : 서울디지털대학교(SDU) 주관 : SDU 문예창작학부 문학 계간 시작 후원 :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서울디지털대학교는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신인작가를 발굴하 기 위해 을 공모합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참신한 상상력을 기다리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More information

Ⅰ- 1 Ⅰ- 2 Ⅰ- 3 Ⅰ- 4 Ⅰ- 5 Ⅰ- 6 Ⅰ- 7 Ⅰ- 8 Ⅰ- 9 Ⅰ- 10 Ⅰ- 11 Ⅰ- 12 Ⅰ- 13 Ⅰ- 14 Ⅰ- 15 Ⅰ- 16 Ⅰ- 17 Ⅰ- 18 Ⅰ- 19 Ⅰ- 20 Ⅰ- 21 Ⅰ- 22 Ⅰ- 23 Ⅰ- 24 Ⅰ- 25 Ⅰ- 26 Ⅰ- 27 Ⅰ- 28 Ⅰ- 29 Ⅰ- 30 Ⅰ- 31 Ⅰ- 32 Ⅰ- 33 Ⅰ- 34 Ⅰ- 35

More information

src.hwp

src.hwp 발간등록번호 11-1130000-000223-01 다이어트 성형 피부관리 분야의 부당광고 개선을 위한 연구 - 최종보고서 - 2011. 11. 위 연구용역보고서는 부분공개 보고서입니다. [비공개 항목] 부당광고 조사결과 관련 항목 [비공개 근거]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 [제5호] 의사결정과정과 관련된 내용으로 공개될 경우 공정위의 공식입장으로

More information

320110.PDF

320110.PDF *.. 1. 2. < > 3. 4...,.,.?. * - 150 - (, ),,,.,,.,,. 2-4.. 50. ( ),,.. - 151 - ., : : :,,,......, - 152 - .. 1.,,,,.... ( ) ( ) ( ) ( ),,,,.,,, - 153 - ,,. (BC 1 ),,. (BC 37 ),,,,,, (BC 18 ),,,,.. (, ),.,,,,.,,.,,.

More information

凡 例 一. 이 글은 朝 鮮 日 報 에 成 均 館 大 中 文 學 科 全 廣 鎭 敎 授 가 連 載 한 생활한자에서 拔 萃 하였다. 逃 가지런할 도 走 달릴 주 도주( 逃 走 ) 피하여 달아남. 도망( 逃 亡 ). 필사의 도주/그 피의자는 도주의 우려가 없어 보석금을 내고

凡 例 一. 이 글은 朝 鮮 日 報 에 成 均 館 大 中 文 學 科 全 廣 鎭 敎 授 가 連 載 한 생활한자에서 拔 萃 하였다. 逃 가지런할 도 走 달릴 주 도주( 逃 走 ) 피하여 달아남. 도망( 逃 亡 ). 필사의 도주/그 피의자는 도주의 우려가 없어 보석금을 내고 凡 例 一. 이 글은 朝 鮮 日 報 에 成 均 館 大 中 文 學 科 全 廣 鎭 敎 授 가 連 載 한 생활한자에서 拔 萃 하였다. 逃 가지런할 도 走 달릴 주 도주( 逃 走 ) 피하여 달아남. 도망( 逃 亡 ). 필사의 도주/그 피의자는 도주의 우려가 없어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경찰은 범인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철통같은 경계망 을 폈다./그들은 부대가 도주를

More information

국통 7 3-6 - 47 南 北 韓 數 學 敎 科 書 撚 較 分 析 國 土 統 - 院 차 a l l 터 리 말 l 2 교과서 의 중 별 2 가 학 린및 종록 2 f 학는시 간수 : G 라 교과서의 체제 L 5 (l) 피형적 인 향대 5 州 내부적인 헝 태 f#t # 7 3 교 과 서 의 내유 9 가 수 학 류 터 # f 9 (l) 인역어가 라 른 경우 ~

More information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에 대해 사실이 아닌 주장을 쏟아내고, 지도부를 향한 음해와 비난을 일삼으며 방송용으로는 적 절하지 않은 표현들을 남용한 것에 대해 심의를 요청한다는 민원에 대해 방송내용을 확인하고 논의한 결과, 진행자(장성민)와 출연자(김태현 변호사, 이종훈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에 대해 사실이 아닌 주장을 쏟아내고, 지도부를 향한 음해와 비난을 일삼으며 방송용으로는 적 절하지 않은 표현들을 남용한 것에 대해 심의를 요청한다는 민원에 대해 방송내용을 확인하고 논의한 결과, 진행자(장성민)와 출연자(김태현 변호사, 이종훈 의결일/ 의결번호/ 심의부문 2015년도 9월 심의의결 현황(종합편성채널 부문) 방송사/프로그램명 방송일시 문제방송내용 관련조항 심의의결 내용 박원순 서울 시장과 정청래 최고위원에 대해 비하하고 인신공격성 내용을 방송한 것에 대해 심의를 요청한다는 민원에 대 해 방송내용을 확인하고 논의한 결과, 삼자대면 코너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물 중 박원순 서울시장의

More information

- 2 - 정보 1 北 조평통, 박근혜 후보 대북정책 공약 비난 "이명박 대결정책과 다를 바 없어" 북한은 8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최근 발표한 대북정책 공약을 `전면대결공약'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

- 2 - 정보 1 北 조평통, 박근혜 후보 대북정책 공약 비난 이명박 대결정책과 다를 바 없어 북한은 8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최근 발표한 대북정책 공약을 `전면대결공약'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 - 1 - 북한구원 월요기도운동 주간국가기도소식 2012년 11월 2주 (11/11-11/17) 에스더기도운동 www.pray24.net 02) 711-2848 1. 대통령 선거(12/19)를 위한 기도 1. 대통령 선거(12/19)를 위한 연합금식기도회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More information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제2 발제문 임을 위한 행진곡 의 문제점 임 과 새 날 의 의미를 중심으로 양 동 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어떤 노래가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혹은 지정 되지 않고 제창되려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그 가요(특히 가사)에 내포된 메시지가 기념하려는 사건의 정신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

More information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500 0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500 0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2013년도 본예산 일반회계 환경위생과 ~ 환경위생과 세 출 예 산 사 업 명 세 서 부서: 환경위생과 단위: 환경정책 환경위생과 8,231,353 3,622,660 4,608,693 국 2,472,543 기 144,000 도 976,102 시 4,638,708 자연환경보호(환경보호/환경보호일반) 5,910,247 1,462,545 4,447,702 국 1,817,800

More information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2011 어르신 생활문화전승프로그램 柯 亭 里 義 兵 마을 백년터울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걷는다 주관 춘천문화원 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차 례-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1. 역사적 측면 2. 문화적 측면 3. 미래 삶의 터전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제3장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2. 고흥 류

More information

354 한국문학논총 제 61집 둘째 fí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제 1판에 와서 제목을 부여하려는 시 도가 나타났다. ( 序 詩 ) 라 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부제를 달 았다. 하지만 점션을 둘러놓음으로써 본문의 시들과는 구별했다. 셋째, 제 2판에 와서

354 한국문학논총 제 61집 둘째 fí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제 1판에 와서 제목을 부여하려는 시 도가 나타났다. ( 序 詩 ) 라 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부제를 달 았다. 하지만 점션을 둘러놓음으로써 본문의 시들과는 구별했다. 셋째, 제 2판에 와서 한국문학논총 제 61 집 (2012. 8) 353385쪽 윤동주의 이 른바 서시 의 제목 문제 이 복 규 * I 여는말 차 려 m 출판본 하늘과바람과별과시 에서 II. r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에서의 이른바 서시 제목의 원형 1. 이른바 서시 제목의 원형 2 이른바 서시 에 제목이 없는 현 의 이른바 서시 의 변형 1. 정음사본 제 1 판에서 제4판까지의 변형

More information

006 007 007 009 012 012 012 013 013 013 018 019 033 045 051 052 060 066 067 077 083 084 099 108 117 118 122 135 140 141 141 142 143 143 145 148 154 01 006 007 007 009 " # $ % 02 012 012 012 013 013 013

More information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불교학과반(1년 과정) 기초교리반(6개월 과정)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저녁 7시 5월 5일 5월 12일 5월 19일 5월 26일 어린이날 휴강 인도불교사 2 / 이거룡 교수님 인도불교사 3 / 이거룡 교수님 중국불교사 1 / 이덕진 교수님 5월 7일 5월 14일 5월 21일 5월 28일 백련암 예불의식 및 기도법 / 총무스님 성철

More information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313232332E687770>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313232332E687770> 2013 소외계층 독서 인문학 프로그램 결과보고서 - 2 - 2013 소외계층 독서 인문학 프로그램 결과보고서 c o n t e n t s 5 22 44 58 84 108 126 146 168 186 206 220 231 268 296 316 꽃바위 작은 도서관 꿈이 자라는 책 마을 기적의 도서관 남부 도서관 농소 1동 도서관 농소 3동 도서관 동부 도서관

More information

7,560일간의 드라마 여행

7,560일간의 드라마 여행 7,560일간의 드라마 여행 흐르는강물처럼 소개글 로케이션매니저의 자전적 에세이 스크린 테마기행 목차 저 푸른 수평선 너머로(그대그리고나) 6 우도속의 섬, 비양도(올인) 10 길은 차밭으로 통한다(SK텔레콤) 14 빵꾸 똥꾸 산골소녀(지붕뚫고하이킼) 16 우포 강가에 앉다(사랑따윈필요없어) 20 떠나요 삐삐롱스타킹 23 왕초 따라가기(왕초) 27 가문의 영광이로소이다(가문의영광)

More information

<38BFF920BFF8B0ED2DC8F1BFB5BEF6B8B620C6EDC1FDBABB2E687770>

<38BFF920BFF8B0ED2DC8F1BFB5BEF6B8B620C6EDC1FDBABB2E687770> 통권 제67호 대구공동육아협동조합 http://cafe.gongdong.or.kr/siksikan 함께 크는 우리 아이 여는 글/03 교육평가 및 교육계획/05 터전소식/38 몸살림 체조 강좌 후기/43 단오행사 후기/44 게릴라 인터뷰/46 책 읽어주는 방법 찾기/50 특별기고/52 맛있는 인문학/55 편집후기/58 2010. 8 함께 크는 아이, 더불어

More information

50 새국어생활 제8권 제 1호 ('98년 봄) 한다. a 풍샤의 판단 2.1. 자렵명샤가 의존척 기능을 하는 갱우 의존명사의 품사를 판단하는 문제의 어려움은 한글 과 금성 에 각각 등재된 의존명사의 수를 비교해 보아도 엿볼 수 있다". <한글 에는 740여 개, 금성

50 새국어생활 제8권 제 1호 ('98년 봄) 한다. a 풍샤의 판단 2.1. 자렵명샤가 의존척 기능을 하는 갱우 의존명사의 품사를 판단하는 문제의 어려움은 한글 과 금성 에 각각 등재된 의존명사의 수를 비교해 보아도 엿볼 수 있다. <한글 에는 740여 개, 금성 랩 샌 펀찬에 대한 국어학적 껍근 의존명사의 사전적 처리 채 완 동되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셔론 사전에서 의존명사를 기술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문법 정보 즉 품 사를 결정하여 표시해 주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기존 사전들을 비교해 보면 의존명사의 품사 처리가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편찬 중 인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

More information

<3038323020C1A633B1C75FC3D6C1BE5FBCF6C1A4BABB2E687770>

<3038323020C1A633B1C75FC3D6C1BE5FBCF6C1A4BABB2E687770> 목 차 Contents 제3권 기술이전 관련 법령 제6장 법령/시행령 / 1 [법령/시행령1] 지식재산기본법(안) 3 [법령/시행령2]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19 [법령/시행령3]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47 [법령/시행령4] 발명진흥법 67 [법령/시행령5]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 91 [법령/시행령6]

More information

北 韓 및 共 産 圈 接 觸 交 流 를 通 한 政 治 心 理 의 展 關 方 向 國 土 統 - 綜 이 報 告 書 는 國 土 統 一 院 73 年 度 下 半 類 學 術 f 役 에 關 한 畢. 終 報 告 書 로 理 出 합니다 l 9 7 3 년 il원 긴 硏 究 機 關 京 鄕 諒 間 社 安 保 統 - 硏 究 委 員 會 硏 漆 養 員 責 任 者 : 료 國 植 委 員

More information

빈면

빈면 용역보고서 2 0 0 4-0 3 한국의 스수자집단의 사회경제적 싱태와 복지증진방안 연구 최협 정근식 윤형숙 검은실 서통진 김철주 김형수 이태진 김찬호 오정진 보 건 복 지 부 한국문화인류학회 빈면 머리맏 지난 수십년간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 다 국내적으로는 1 9 6 0 년대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이 추진되면서 숨가쁜

More information

177

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More information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여는말 풀꽃, 제주어 제주어는 제주인의 향기입니다. 제주인의 삶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삶의 향기이고, 꿈의 내음입니다. 그분들이 어루만졌던 삶이 거칠었던 까닭에 더욱 향기롭고, 그 꿈이 애틋했기에 더욱 은은합니다. 제주어는 제주가 피워낸 풀잎입니다. 제주의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비바람 맞고 자랐기에 더욱 질박합니다. 사철 싱그러운 들풀과 들꽃향기가

More information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정보나눔 섭이와 함께하는 여행 임강섭 복지과 과장 여름이다. 휴가철이다. 다 들 어디론가 떠날 준비에 마음 이 들떠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여행 매니아까지는 아니 지만, 나름 여행을 즐기는 사 람으로서 가족들과 신나는 휴 가를 보낼 계획에 살짝 들떠 있는 나에게 혼자만 신나지 말 고 같이 좀 신났으면 좋겠다며 가족들과 같이 가면 좋은 여행 눈이 시리도록

More information

01Report_210-4.hwp

01Report_210-4.hwp 연구보고서 210-4 해방 후 한국여성의 정치참여 현황과 향후 과제 한국여성개발원 목 차 Ⅰ 서 론 Ⅱ 국회 및 지방의회에서의 여성참여 Ⅲ 정당조직내 여성참여 및 정당의 여성정책 Ⅳ 여성유권자의 투표율 및 투표행태 Ⅴ 여성단체의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운동 Ⅵ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향후 과제 참고문헌 부 록 표 목 차 Ⅰ 서 론 . 서론 1.

More information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총선 이후 우리 교육의 방향 당 체제에서 우리 교육의 전망과 교육행정가들의 역할 박 호 근 서울시의회 의원 교육위원회 위원 서론 년 월 일 제 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는 바로 민의 의 반영이기 때문에 총선결과를 살펴보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가를 분석해 본 후 년 월 일을 기점으로 제 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시 작되는 상황에서 우리 교육이 어떻게

More information

목 차 營 下 面 5 前 所 面 71 後 所 面 153 三 木 面 263 龍 流 面 285 都 已 上 條 367 同 治 六 年 (1867) 正 月 日 永 宗 防 營 今 丁 卯 式 帳 籍 범례 1. 훼손 등의 이유로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기함. 단, 비정 이 가능한 경우는 ( ) 안에 표기함. 2. 원본에서 누락된 글자는 [ ] 안에 표기함. 단, 누락된

More information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우리 시의 향기 사랑하는 일과 닭고기를 씹는 일 최승자, 유 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문학평론가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More information

639..-1

639..-1 제639호 [주간] 2014년 12월 15일(월요일) http://gurotoday.com http://cafe.daum.net/gorotoday 문의 02-830-0905 대입 준비에 지친 수험생 여러분 힘내세요 신도림테크노마트서 수험생과 학부모 600명 대상 대입설명회 구로아트밸리서는 수험생 1,000명 초대 해피 콘서트 열려 구로구가 대입 준비로 지친

More information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1 361호 [별책 3] 중학교 교육과정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2 와 같습니다. 3.

More information

시험지 출제 양식

시험지 출제 양식 2013학년도 제2학기 제1차 세계사 지필평가 계 부장 교감 교장 2013년 8월 30일 2, 3교시 제 3학년 인문 (2, 3, 4, 5)반 출제교사 : 백종원 이 시험 문제의 저작권은 풍암고등학교에 있습니다. 저 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전재와 복제는 금지 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3. 전근대 시기 (가)~(라)

More information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80 < 관용 표현 인지도> 남 여 70 60 50 40 30 20 10 0 1 2 3 4 5 6 70 < 관용 표현 사용 정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4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5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6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70 < 속담 인지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1 2

More information

6±Ç¸ñÂ÷

6±Ç¸ñÂ÷ 6 6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과천심상소학교 졸업증서(문헌번호 03-004) 일제강점기 과천초등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장이었던 맹준섭임을 알 수 있다.

More information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More information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해제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이 자료는 한말의 개화파 관료, 김윤식 金 允 植 (1835~1922)이 충청도 면천 沔 川 에 유배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문 傳 聞 한 것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책 이다. 수록한 부분은 속음청사 續 陰 晴 史 의 권 7로 내제 內 題 가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로 되어 있는 부분 가운데 계사년 癸 巳 年

More information

조선왕조 능 원 묘 기본 사료집 -부록 : 능 원 묘의 현대적 명칭표기 기준안 차 례 서 장 : 조선왕실의 능 원 묘 제도 11 제 1부 능 원 묘 기본 사료 Ⅰ. 능호( 陵 號 ) 및 묘호( 廟 號 )를 결정한 유래 1. 건원릉( 健 元 陵 ) 21 2. 정릉( 貞 陵 ) 22 3. 헌릉( 獻 陵 )

More information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07 1.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07 10 12 16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9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More information

E1-정답및풀이(1~24)ok

E1-정답및풀이(1~24)ok 초등 2 학년 1주 2 2주 7 3주 12 4주 17 부록` 국어 능력 인증 시험 22 1주 1. 느낌을 말해요 1 ⑴ ᄂ ⑵ ᄀ 1 8~13쪽 듣기 말하기/쓰기 1 ` 2 ` 3 참고 ` 4 5 5 5 ` 6 4 ` 7 참고 ` 8 일기 ` 9 5 10 1 11, 3 [1~3] 들려줄 내용 옛날 옛날, 깊은 산골짜기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 이

More information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조 례 익산시 조례 제1220호 익산시 주민감사 청구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 1 익산시 조례 제1221호 익산시 제안제도 운영조례 일부개정조례 3 익산시 조례 제1222호 익산시 시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 12 익산시 조례 제1223호 익산시 시세 감면 조례 전부개정조례 13 익산시 조례 제1224호 익산시 행정기구설치조례 19 익산시 조례 제1225호 익산시

More information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권2 동경잡기 東京雜記 동경잡기 173 권2 불우 佛宇 영묘사(靈妙寺)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632) 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인데 체제가 특이하다. 속설에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메 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지금은

More information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1. 재미있는 글자 단원의 구성 의도 이 단원은 도비와 깨비가 길을 잃고 헤매다 글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글자 공부를 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칫 지겨울 수 있는 쓰기 공부를 다양한 놀이 위주의 활동으로 구성하였고, 학습자 주변의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흥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각 단계의 학습을 마칠 때마다 도깨비 연필을

More information

0429bodo.hwp

0429bodo.hwp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이 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의 후손 또는 연고자로부터 이의신청을 받기 위해 작성 되었습니다. 이 인물정보를 무단 복사하여 유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전 파하는일체의행위는법에저촉될수있습니다. 주요 훈포상 약어 1. 병합기념장 2. 대정대례기념장 3. 소화대례기념장

More information

38--18--최우석.hwp

38--18--최우석.hwp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 崔 宇 錫 1) 1. 序 文 2.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3. 結 語 1. 序 文 沈 德 潛 (1673-1769)의 字 는 確 士 이고 號 는 歸 愚 이다. 江 南 長 洲 (현재의 江 蘇 省 蘇 州 ) 사람으로 淸 代 聖 祖, 世 宗, 高 宗 삼대를 모두 거쳤다. 특히 시를 몹 시 좋아한

More information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과 임제 신해진(전남대) 1. 머리말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사육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남효온( 南 孝 溫 )의 (1492년 직전?), 임제( 林 悌 )의 (1576?), 김수민( 金 壽 民 )의 (1757) 등이 있다. 1) 첫 작품은 집전( 集

More information

cls46-06(심우영).hwp

cls46-06(심우영).hwp 蘇 州 원림의 景 名 연구 * 用 典 한 경명을 중심으로 1)심우영 ** 목 차 Ⅰ. 서론 Ⅱ. 기존의 경명 命 名 法 Ⅲ. 귀납적 결과에 따른 경명 분류 1. 신화전설 역사고사 2. 文 辭, 詩 句 Ⅳ. 결론 Ⅰ. 서론 景 名 이란 景 觀 題 名 (경관에 붙인 이름) 의 준말로, 볼만한 경치 지구와 경치 지 점 그리고 경치 지구 내 세워진 인공물에 붙여진

More information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진한기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 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 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More information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통합 우리나라 ⑵ 조상님들이 살던 집에 대 해 아는 어린이 있나요? 저요. 온돌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했어요! 네, 맞아요. 그리고 조상님들은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았어요. 주무르거나 말아서 만들 수 있는 전통 그릇도 우리의 전통문화예요. 그리고 우리 옷인 한복은 참 아름 답죠?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바지와 조끼를 입어요. 명절에 한복을 입고 절을

More information

상품 전단지

상품 전단지 2013 2013 추석맞이 추석맞이 지역우수상품 안내 안내 지역우수상품 지역 우수상품을 안내하여 드리오니 명절 및 행사용 선물로 많이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경기동부상공회의소 임직원 일동 -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More information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시 민 문서번호 어르신복지과-1198 주무관 재가복지팀장 어르신복지과장 복지정책관 복지건강실장 결재일자 2013.1.18. 공개여부 방침번호 대시민공개 협 조 2013년 재가노인지원센터 운영 지원 계획 2013. 01. 복지건강실 (어르신복지과)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More information

2

2 1 2 3 4 5 6 또한 같은 탈북자가 소유하고 있던 이라고 할수 있는 또 한장의 사진도 테루꼬양이라고 보고있다. 二宮喜一 (니노미야 요시가즈). 1938 년 1 월 15 일생. 신장 156~7 센치. 체중 52 키로. 몸은 여윈형이고 얼굴은 긴형. 1962 년 9 월경 도꾜도 시나가와구에서 실종. 당시 24 세. 직업 회사원. 밤에는 전문학교에

More information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年 花 下 理 芳 盟 段 流 無 限 情 惜 別 沈 頭 兒 膝 夜 深 雲 約 三 십년을 꽃 아래서 아름다운 맹세 지키니 한 가닥 풍류는 끝없는 정이어라. 그대의 무릎에 누워 애틋하게 이별하니 밤은 깊어 구름과 빗속에서 삼생을 기약하네. * 들어가는 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아이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불 옆에 앉아 있다. 얼음장 같은 날씨에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More information

ÆòÈ�´©¸® 94È£ ³»Áö_ÃÖÁ¾

ÆòÈ�´©¸® 94È£ ³»Áö_ÃÖÁ¾ 사람 안간힘을 다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 허세욱을 그리다 - 허세욱 평전 작가 송기역 -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원 허세욱.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 해 미국은 사죄하라는 투쟁의 현장에 서 그 분을 처음 만났다. 평택 대추리 의 넓은 들판을 두 소녀의 목숨을 앗 아간 미군들에게 또 빼앗길 순 없다며 만들어 온 현수막을 대추초교에 같이 걸었다. 2007년

More information

歯1##01.PDF

歯1##01.PDF 1.? 1.?,..,.,. 19 1.,,..,. 20 1.?.,.,,...,.,..,. 21 1,.,.,. ( ),. 10 1? 2.5%. 1 40. 22 1.? 40 1 (40 2.5% 1 ). 10 40 4., 4..,... 1997 ( ) 12. 4.6% (26.6%), (19.8%), (11.8%) 23 1. (?).. < >..,..!!! 24 2.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