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보고 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연구 책임자 :김주관(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 연 구 원 :신동호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 연구 보조원 :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원) 행정,촬영지원 :엄경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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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기록원 연구용역보고서 6 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역사를 기록으로,기록을 문화로

2 연구보고 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연구 책임자 :김주관(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 연 구 원 :신동호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 연구 보조원 :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원) 행정,촬영지원 :엄경식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원) 사)현대사기록연구원

3 제 출 문 국가기록원장 귀하 이 보고서를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6 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08년 12월 사단법인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 - III -

4 본 보고서는 (사)현대사기록연구원이 국가기록원의 연구용역 의뢰를 받아 수행한 연구의 결과입니다.보고서의 내용은 연구진의 의견이며, 국가기록원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 IV -

5 <목 차> 1.사업명 1 2.사업기간 1 3.사업의 필요성 1 4.사업내용 사업 추진단 사업 추진단 역할분담 사업 추진일정 사업 추진단 회의 면담 대상자 및 질문지 4 (1)면담 대상자 및 추진상황 4 5.사업 결과물 5 6.사업 평가 및 제언 5 - V -

6 *첨부. 첨부 1.구술자 요청사항 6 첨부 2.구술자 상세목록 7 고성광 7 김도현 33 박정훈(1차) 83 (2차) 121 이수용 153 이현배 183 최혜성 234 현승일 277 첨부 3.구술동의서 및 구술기록이용 허가서 VI -

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 6 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1.사업명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사업기간 2008년 10월27일 ~ 2008년 12월 29일 3.사업의 필요성 6 3항쟁은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대학생이 중심이 된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시발점이 었으며,1987년 6월 항쟁으로 일단락을 짓게 되는 오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서막이 었다.6 3항쟁은 표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추진한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였 지만,실질적으로는 4 19혁명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쿠데타로 억누르고 등장한 군사정권의 반민주적인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독재적 행태에 대한 항거였던 것 이다. 이처럼 6 3항쟁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일정한 역할을 해주었던 대학생 주도의 학생운동사에 첫 장을 여는 중요한 학생운동이었으며,여기에 참가하였던 많은 인사들이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에도 불구 하고,그간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가까운 과거라는 역사적인 사료로서의 가치에 대한 회의 등을 이유로 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바가 없다. 6 3항쟁의 주축이 되었던 세력은 1964년 당시 대학교 4학년생들이었는데,이들의 현 재 연령이 67세 안팎에 달해 최근 고령으로 인한 사망이 잇따르고 있어 이들의 사망

8 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이전에 6 3항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특히 6 3항쟁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구술증언의 채록은 지금까지 조사된 공공 기록,민간기록,언론보도 등의 기록물에서 오류가 있거나 누락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으 며,나아가 추후에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한 근거자료를 생 산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그리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다. 4.사업내용 4-1사업 추진단 연구책임자 :김주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 연 구 원 :신동호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보조원 :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4-2사업 추진단 역할분담 추진인력 성 명 역 할 연구책임자 김주관 사업계획 수립 조정,인터뷰,평가보고 연 구 원 신동호 인터뷰,설문지 연구보조원 박재홍 설문지 수정보완 면담,보조인터뷰,자료수집 행정지원(연구원인력) 엄경식 (사)현대사기록연구원 행정 촬영지원

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 4-3사업 추진일정 10월 11월 11월 11월 11월 12월 12월 12월 12월 27일 1주 2주 3주 4주 1주 2주 3주 4주 1)사전준비(계약) 2)상세계획서작성 3)문헌자료검토 4)인터뷰대상확정 4)기초자료수집 및 정리 5)설문지작성 6)구술자 대상 사전 예상 질문지 설명 및 협조 7)구술자 인터뷰 및 녹취 8)구술결과 해제 및 구술자 녹취 검수 9)관련문건 생성 및 최종보고회 9)보고서 출판 4-4.사업 추진단 회의 1)1차 회의 -일 시 : (16:00-18:00) -장 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참 석 :송철원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김주관(연구책임자), 신동호(연구원),박재홍(연구보조원),엄경식(행정지원) -회의내용 :연구용역 구술 사업추진계획,인터뷰 일정 및 진행계획 2)2차 회의

10 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일 시 :2008년 11월 12일 (16:00~18:00) -장 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참 석 :김주관(연구책임자),신동호(연구원),박재홍(연구보조원),엄경식(행정지 원) -회의내용 :구술 인터뷰 질문지 검토 및 인터뷰 대상 및 면담자 확정 (면담자 확정 :고성광,김도현,이수용,이현배,현승일,박정훈,최혜성) 3)3차 회의 -일 시 :2008년 12월 19일 (15:00~17:00) -장 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참 석 :김주관(연구책임자),신동호(연구원),박재홍(연구보조원),엄경식(행정지 원) -회의내용 :구술 인터뷰 정리(내부 검수)및 최종보고회에 관한 논의 4-5.면담 대상자 1)면담대상자 및 추진상황 면담자 TapeMpeg2변환, 연 번 이 름 촬 영 (면담 보조자) 음성추출 1 현승일 신동호(엄경식) 외주촬영 외주 2 김도현 김주관(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국가기록원 3 이수용 신동호(박재홍) 외주촬영 외주 4 이현배 김주관(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국가기록원 5 최혜성 신동호(엄경식) 외주촬영 외주 6 고성광 김주관(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국가기록원 7 박정훈 권미현(엄경식) 국가기록원 지원 국가기록원 면담일시 오후 3시 장소 자택 오전 10시 개인 사무실 오전 10시 오전 10시 연구원 12.1 개인 사무실 오후 2시 오후 2시 오후 3시 12.3 오후 3시 연구원 개인 사무실 연구원 *외주촬영을 제외한 촬영장비 및 기자재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운용.

1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 5.사업 결과물 구술자 녹화테이프(개) 녹취문(부) DVD(장;영상 및 음성포함) 사진(장) 1 고성광 김도현 이수용 이현배 현승일 박정훈 최혜성 합계 사업 평가 및 제언 본 사업은 시간과 비용의 제약으로 소수의 인원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한계를 가지지 만,면담자들의 태도에서 이 사업이 확대되어 진행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우선은 면담자들이 구술증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으며,추후에 보충조사를 한다하더라도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6 3항쟁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사료의 수 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는 본 사업에 참여한 면담자들이 사안에 따라 어떤 인사를 면담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보다 정확한 자료의 수집을 위해서는 면담대상자의 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는 면담대상자들 중에 몇몇 인사들은 이미 많은 부분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 우들이 있어 본 사업을 확대할 필요성과 함께 그 시급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본 사업은 향후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던 6 3항쟁에 대한 사료의 수 집과 이들을 활용하기 위한 인프라의 구축이 시급하며,따라서 향후 확대된 형태의 사업에 대 한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과 더불어 면담의 과정에서 많은 면담자들이 자신들의 의식 형성과정에서 4 19혁명이 중요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사업의 시한을 6 3항쟁으로 한정하는 것 보다는 4 19혁명까지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12 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첨부1.구술자 요청사항 연번 구술자 요청사항 비 고 1 고성광 2 김도현 3 이수용 4 이현배 5 박정훈 외부 녹취록 공개시 허사,간투사 및 불필요한 반 복적 표현을 삭제 후 공개 요청함(문장의 연결성을 강조함) 6 현승일 7 최혜성

1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 첨부2.구술자 상세목록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3항쟁 주요사건 구 술 자 고성광 면 담 자 김주관 면담일자 (목) 면담장소 내수동 4번지 옥빌딩 501호(개인사무실) 면담차수 1차

14 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고 성 광 (한 자 : 高 成 光 ) 면담자 성 명 : 김 주 관 (소 속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촬영자 성 명 : 박 재 홍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녹취자 성 명 : 박 재 홍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1차 (목) 개인 사무실 (내수동 4번지 옥빌딩 501호 ) 및 2차 장소 3차 녹화테이프 2개 산출물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1부 1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구술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관련 자료를 보고 당시 기억 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셨지만 관계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기 면담상황 설명 억을 상기시켜 적극적으로 구술에 응함.또한 구체적으로 모 르는 사실이나 관계되는 사실에 대한 확인은 해당 관련당사 자를 소개하며 추가적인 인터뷰의 여운을 남김.마지막으로 구술을 진행하는 동안 시간상 제약에도 불구하고 6.3과 학생 운동의 역사적 소명에 대해서 소회를 밝힘. 비고

1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9)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고성광 (한자) 高 成 光 나이 67 자택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소 생년 월일 전화번호 : 직장 :서울 종로구 내수동 4옥빌딩501호 전화번호 : 출생지 서울 결혼연도 1971년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이은희 처 1949 주부 가족 고재만 장남 1974 기자 매일경제 고재범 차남 1977 사원 고원기술 고재우 삼남 1982 군근무 대졸 경복중 고등학교 학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1.EBS뉴스 자문위원(2002) 2.방송문화진흥회 감사(1999) 3.대전 MBC 사장(1996) 4.MBC 동경지사장(1993) 주요 약력 5.MBC 보도본부장(보도이사)(1991) 6.MBC 보도제작국장(1990) 7.MBC 입사(1967년)

16 1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4.19,4.19혁명,4.19학생동지회,문리대,스푸트니크,5.16,5.16쿠데타, 군사쿠데타,한일회담,3.24,단식농성,김종필,5.20,6.3,계엄령,MBC,YTP, 靑 思 會,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새세대,학생 회,불꽃회,30사단,괴소포,폭약,폭발물,몰로토프칵테일,김도현 상세목록 Tape 혁명 3.24시위 의 참여배경 조직 전개 과정(00:00-25:37) 2. 괴소포 및 YTP 사건(25:38-28:26)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28:27-37:48) 4. 학생회 의 역할(37:49-41:35) 5. 문리대 단식농성 과 계엄령 (41:36-45:52) 6. 졸업 후 진로(45:53-48:30) 5. 민비연 과 불꽃회 사건(48:31-54:20)(Tape2.00:36-01:35) Tape2. 6. 몰로토프칵테일 사건의 전개과정(01:36-36:50) 7. 김도현 씨와의 관계(36:51-40:33) 운동 의 의의 및 개인적 소회(40:34-45:59)

1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1) 5)예비질문지 고성광 선생님 항쟁 관련당사자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시위를 주도한 세력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습니까? (보충질문1:당시 한일회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습니까?) (보충질문2:당시 학생운동에 대한 시각은 어떠했습니까?) (보충질문3:이학부 학생들의 문리대에 대한 소속감이 어느 정도였고,학생운동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습 니까?) (보충질문3:3.24시위에는 참여했습니까?) 시위와 이어진 3.26시위 등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어떤 입장과 행동을 취했습니까?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3.4월 들어 괴소포 사건과 서울문리대에서 4.17한일회담성토,4.19영령추도식,4.20(4.19네 돌 기념식), 4.21시위 등 집회 시위가 계속됐습니다.이때 무엇을 했으며,또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4.4월 23일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개최했습니다.당시 학원사찰과 YTP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3>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시위와 관련해 기억나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4>문리대 단식농성과 6.3사태 6.5월 31일부터 시작된 문리대 단식농성에 참여한 적 있습니까.그 당시의 기억을 말씀해 주십시오.

18 1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6.3시위 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5>민비연 사건 년 졸업 후 무엇을 했습니까? 9.2차 민비연 사건(일명 몰로토프칵테일사건)의 빌미가 된 폭발물 제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은 언제입 니까? (공소장:1964년 7월 31일경 서울 용산구 후암동 27-7(김중태의)하숙집(*1심 판결문도 동일)에서 내가한 공소외 동교 정치학과 4년생 김도현과 소리만 크게 나는 폭약을 10여개 만들어서 동년 8월 6,7,8일경 약 100여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대법 판결문:원심은 :00시내 충무로 소재 피고인 최혜성의 집에서 피고인 김중태,같은 최 혜성,공소외 김도현이가 모인 자리에서 김중태가.) (보충질문:7월 31일 모의 장소가 이처럼 바뀐 이유를 압니까?) 10.김도현과는 어떤 관계였습니까.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11.김중태 김도현 최혜성 등에게 폭탄을 만드는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만 참고해도 간단히 만들 수 있다 고 얘기했다는데,사실입니까? (보충질문:참고인 진술 때는 다르게 말했지요.) (대법 판결문:8월 4일 16:00경 피고인(김중태)집에서 피고인 최혜성,위 김도현,고성광 등이 모인 자리 에서 고성광이 말하기를 폭발물이라 휘발유와 모래만 가지고는 제조될 수 없고,폭음만 크게 나고 사 람이 상하지 않는 것을 제조하려면 병 안에 대나무를 잘라서 넣고 몇 가지 화학품을 넣어 폭파시키면 소리가 크게 나면서 대나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것을 사람이 맞아도 상하지 않는 소위 죽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제조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시일도 많이 걸리며,또 만들어서 시험도 해보아야 하 는데 시험 장소도 없고 하여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하였고,이어서 위 김도현도 폭발물 사용죄에 대 한 형법 규정을 보니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으니 위험한 짓은 그만두자고 말하여 같이 있 던 전원이 이에 동의하고 그 이후에는 폭발물 관계는 일체 논하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하였고.) 12.가죽장갑을 낀 고대생이 회합에 나타나 폭탄을 만들어주면 비준국회에 던지겠다 고 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13.몰로토프칵테일 사건과 관련해 어떤 조사와 진술,고초를 받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14.이밖에 6.3항쟁이나 학생운동,한일국교정상화 등과 관련해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1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3) 6)녹취문 고성광 선생님. Tape1. 면담자 :오늘은 11월 27일 이고요.고성광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데 6 3운동(6.3민주화 운동, )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예,저는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대로 김주관입니다. 면담자 :그러면,62년도에 군대를 가셨었나요? 구술자 :62년,음(잠시 생각에 잠김)뭐예요.9월6일 날 군대를 갔습니다. 면담자 :그때 군대를 입대를 하셨고,그러고 64년 9월 6일 날 1). 구술자 :제대를 했죠. 구술자 :이게,(서류를 지적하며)제대를,군대를 갔을(갈)때도 2) 내가 연기원을 냈는데도 영장이 나왔어 요.근까(그러니까)가서 왜 연기원을 냈는데 영장을 나왔느냐.30사단에서 물었더니,에.그 뭐(왼손으 로 손짓하며)저쪽에서 불러 더니 그 내 (잠시 침묵) 연기원을 냈는데 왜 영장이 나왔느냐 그 여기 사 정이 있을 거 아닙니까? 했더니,저희가 알아보겠습니다.그래서 알아 봤더니 데모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이(학생은)연기원을 내도 쓸 데 없다. (웃음) 면담자 :아,그때부터? 구술자 :응 그렇지.그렇지.근가(그러니까) * 그 안 나오면 어떻게 되냐,안 나오면 재미없다. (웃음), 이게,저 뭐 정(징계)하겠다.처벌도 하고 응 데모에 의한 죄를 묻고,(손짓을 하며)또 그 다음에 영 장 받고 안 나갔던 거,응 기피 한 걸로 하겠다. 그래서 그 다음날로 내가 나갔어요. 면담자 :62년,군대 가시기 전에는 어떤 일로 그 학생운동을 하신 걸로? 구술자 :제가,그 60년.(오른손을 턱에 괴며)에 입학 3) 을 했어요.물리학과,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를 입 학을 했습니다.그래서 그런데 입학을 했는데,1학년 때 이제 아무것도 모를 때죠.모를 땐데,갑자기 와서 박정방(박청방)이라는 사람이 와가지고,그 왜,그 4 19혁명 학생동지회 회장이에요.그 사람이, 이 사람이 우리 아저씨뻘이 됩니다.아저씨뻘이 되는데 이 사람이 와서, 야,그 문리대 이학부는 내가 아는 사람이 없다.응,니가 넌 이학부니까 아는 사람이 있지 않냐. 그래서 내가 친한 사람 공대생하 고 끌고,같이 저 4 19(4 19혁명, )전에 데모하기 전 회의에,덕수궁회의 참석하고 참석했 어요.그래서 응 그러니까 그쪽에서,뭐 문리대 조그만 아닙니까?(양손을 손짓하며)이학부 애들 안 나 온다고요.응,공부 쎄게 했어요.고등학교하고 똑같더라고 이학부는,데모하러 나갈 수가 없어.그래서. 1) 제대일을 잘 못 말함(1964년 3월 14일) 2) 재학생일때 연기원을 신청 했으나 거절됨 3) 1960년 서울문리대 물리학과 입학, 1961년 서울문리대 정치학과 재 입학

20 1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이학부 자체 분위기가 그랬습니까? 구술자 :분위기도 그렇고,그땐 공부(공부를)쎄게 하기 때문에,그거 57년도에 스푸트니크(러시아:세계 최초의 인공위성)가 올라갔어요.그래서 우리나라,그 자연과학 미 미소대립,우리나라는 너무 이게 그 좀 차이가 난다.그러고 앞으로 이 미국이 소련한테 지고는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이게 이학부 학생 들한테는 굉장히 혜택이 될 거다.미국이 가만히 있을 나라는 아니다.모든 브레인들 끌어다가 로케트 도 개발하고 뭐 이럴 테니까 열심히 해라. 응,선생님도 이러고 학생들도(학생에게도)대개 일리가 있 는 얘기 아닙니까?그래서 별로 그 데모에 아예(손사래를 치며)참석을 안 했어요.그래서 거기 나가서 인제 그랬더니, 너네들밖에 할 사람이 없으니까 (웃으면서)너네들이 나서서 좀 해라. 그렇게 해서 인제 나하고 물리학과 들어간 사람,화학과 들어간 몇 사람이 그 4 19전에도 그렇고 찾아 갔어요.밤 에,밤에 찾아가서 다들 학생들이고 데모,독재 항거,항의를 했는데 이학부생만 가만히 있으면 되겠 냐,(손짓하며 웃음)몇 사람 나가자 그러니까 얘기를 했는데 나간 사람이 없어.사실은 나중에 몇 사 람 나오긴 나오는데,이학부 사람들은 4 19나기 전까지도 몇 사람 참석을 안 했어요.참석을 안 했는 데,흠.그니까(그러니까)그때 수학과에 누구도(희생자도)있었고,뭐 몇 명밖에 없었어요.대개는 지 방에서 온 사람,학생들이 많았고 서울에서 그 고등학교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그래서 인제 으. 제가 그 나고 저기(손짓하며)청진동 해장국집 건너편에,농협 건너편에 4 1(4 19) 4 19학생동지회 란데 사무실을 차렸어요.거기도 나가고 그랬어요.그래서 인제 뭐야(4.19이후),등 등록을 해야 되니까, 그 뭐 이사를 해라 말이야.이학부생 너무 없어서 안되겠다.(웃음)일단 난 해도 별일 없는데, 이학부 사람 너무 없다 너하고 누구하고 두세 명 해야 이게 되지 않나.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인제 등록을 할 려고 하는데 저기 났단 말이야.5 16(5 16군사쿠데타, )이 난거야.한 1년 사이지만 4 19 나고 학생들끼리 주도권 고대가 뭐 했다,뭐 서울대가 했다.서로 (양손을 들고)혁명 학생동지회(4 19 혁명 학생동지회)를 서로 지네학교로 가져 갈려고,서로 가져갈려고.한참 싸웠지.그것 때문에 싸웠는 데,결국은 그게 합의가 된 게 인제 에.그 4 19때 4),연말쯤 됐어 연말 가까이 연말가까이 돼서 다 합쳐서 만들자 이래가지고,명단도 있고 그럴 텐데 등록은 안 한 걸로 알고 있어요.근데 5 16이 나니 까 취하 한 거라고 취하. 면담자 :그때 4 19관련해서 하신 것 때문에,이제 그? 구술자 :아니,그 뭐 좀 찍혔겠죠.(목소리를 높임)이학부 사람이 없었으니까.그거 때문에 난 내 생각에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5 16,5 16나고 얼마 안 돼가지고 62년에 내가 연기원을 분명히 냈는 데,응 영장을. 면담자 :4 19있고 나서 군사 쿠테타(쿠데타)까지는 뭐 크게 학생운동들이 없었습니까? 구술자 :아니(목소리를 높혀 손사래를 침)했다니까 하긴 했는데,그 교내에서 했단 말이야.응,교내에 서 나갈려도 나갈 수가 없었어. 면담자 :5 16? 구술자 :5 16나고도 뭐 며칠 뒤에도 했지.그래가지고,그래도 하는데 군대(군대가)오더라고 그 다음 에,착검 탁 하더라고,그 당시에 얼어가지고,(호탕하게 웃음)몇 놈 나가 가지고 문리대 앞에 저기 있 4) 4.19때란 4.19가 일어난 해를 지칭함.

2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5) 잖아?개천이 있었어.그 밀어 넣더라고.(잠시 찾아온 방문객과 대화) 면담자 :그러면 그 물리학과 계시다가 과를 옮기신 것은 언제 옮기셨는지? 구술자 :62년 저 4월에 인제 시험을 다시 쳤죠. 면담자 :시험을 다시 보시고 들어가신 거,과를 그러니까? 구술자 :전과한 게 아니라,전과를 했으면 좋겠다고 저 *(교수님을)찾아갔더니 안 된데. 면담자 :정치학과로? 구술자 :정치학과 시험을 다시 쳤죠.(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시 잠김) 면담자 :어.대단하신. 구술자 :대단하. 면담자 :남들은 한번 들어가기도 힘든데,(웃음)정치학과로 옮기시고 나니까 좀 분위기가 다르던 가요? 구술자 :정치학과로 옮기고 나자마자 그냥 5 16이 났잖아.(전화가 와서 잠시 인터뷰가 끊김)어,기분 이 좋을 리가 없잖어(없잖아).(웃음)저 이거 뭐야 독재가 끝나고,저 이게 뭐야 물리학을 하는 거 보 다는 응,정치적 자유가 민주화 때문에 세상이 좋아질 것 아니냐.그래가지고 과를 옮겼는데 옮기자마 자 저 5 16이 났어.(어이없다는 듯이)그래서 인제 이건 뭐 기분이 안 좋았고 여러 가지 인제 이건(군 사쿠데타)절대 안 된다.이런 생각을 가졌지. 면담자 :그니까(그러니까)그 당시에 뭐 어쨌거나,제가 62년도에 태어났거든요.근데 저희가 지금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 학생운동,4 19학생운동이 일어나고 5 16쿠테타(쿠데타)가 일어나는 그 시기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그런 것들이 있었고 일부는 초기에 5 16군사쿠테타(쿠데타)에 대해 서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다고 알고 있는데 그 당시에 그럼 대학생들은? 구술자 :4 19때는,저 그 그는 독재(이승만,자유당 정권)를 타도한다.이래가지고. 면담자 :5 16군사쿠테타(쿠데타)에 대한 평가는 어땠? 구술자 :이건 절대로 안 되는 거죠.그 뭐야 민주주의를 하고 쿠테타(쿠데타)아닙니까.거기다가 선거 이런 거를 전부 없애버리고 최고위원회,뭐 이래가지고 하는데,소위 모든 자유와 정치적 자유와 이런 걸 억압을 하면서 이거를 그도(그것도)군인들 중심으로 해 나가는데 이게 절대 잘 안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했죠.이건 항의(5.16군사쿠데타)를 해야 된다.국제정세도 있고 남북 갈려 있는 처지에다가 이 게 에.또 뭐 미국 식민지론이라고 있었어요.신 식민지 그래서 무력으로 하다가 앞으로 그 경제적인 침략으로 해서 상품 원료의 조달적(조달지)인 상품시장으로 만들지 않겠느냐.(두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이런 게 있었죠.이 사람들이 결국은 여기에 앞장서고 이걸 뒷받침으로 해서 쿠테타(쿠데타)가 난 게 아니냐.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확고한 듯이) 면담자 :상당히 정확한 인식,후대에 와서 평가를 해보면 그 당시? 구술자 :아니 근데,저희 일가중 하나가 또 김도연씨라고 있어요.김도연씨라 있는데 그분이 총리도 할 뻔하고 그랬거든요.장면(장면총리)이 하고 표 대결에서 졌거든요.개인적인 이유도 있죠.그죠.그렇잖 습니까.응,4 19가 성공했으면 (웃음)나는 어디 가서 부빌 대가 있었는데,이거 어 군인이 잡고 그러 니까,이거 군인 중에선 우리집안엔 군인이 하나도 없다고.(웃음) 면담자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한일회담 에 대한 평가는?

22 1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니까(그러니까)그 한일회담 을 하는 게,이게 뭐 그때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아니 일본에 서 뭐야 독립한지 얼마 안 됐는데 그 다른 뭐 맘에 안 들어도 일본에 대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좀 엄 격하게 했다고.근데 친일파는 많이 등용 했지만,근데 이거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중용하지 말 아라.나라가 말이지,응 소위 친일 적인 사람을 끌어서 했는데,이게 한일회담 을 해서 이렇게 되면 미국이 하는 냉전의 대립,저 대립 세계전략구도에서 일본은(일본이)결국은 앞잡이 아니겠냐.미국의, 그러니까 이건 식민지주의적인 정책이고 우리나라에는(우리나라를)예를 들면 원료의 조달지,그 상품 의 시장 이렇기 위해서(이렇게 하기)본격적으로 하는 게 아니냐.이렇게 생각을 했죠.(고개를 끄덕거 림) 면담자 :대부분의 문리대 분위기가 그 당시 문리대 분위기가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일회담 에 반대하는? 구술자 :그렇죠.그죠,반대는 뭐 아니 거기 일가가 있든지,자기 형이 있든지,자기 아버님이 있든 진 몰라도 학생으로서 찬성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예,인제 어른들 중에는 혹시 무슨 불만이 있 는 수가 있어요.뭐냐 하면 그게 4 19가 나면서 학생데모가 계속 있었다고(손으로 휘저으며 반복적으 로 표현함),응,4 19가 나면 학생데모가 없어질 줄 알았는데 계속 있는 거야. 면담자 :그럼,그 좀 구체적으로 3월 24일 시위에는 참여를 하셨었던가요? 구술자 :예 3월24일( )에는 참여 했어요. 면담자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었는지 좀? 구술자 :3월2일 날 그때 누가 그걸 붙였더라.(잠시 침묵)문리대 현관에다가 이거 붙였어요.모여라.그 때 기억에 뭐야,뭐 그때 기억이 뭐 뭐야 그게,결국 한일회담 반대 아니었냐.군사 군사독재 반대 한 일회담 반대 이 이 목적이었을 겁니다.그래서 문리대에서 모였는데,문리대에서 모였는데 얼마 안 됐 어요.내가 볼 때에 200명도 안 됐더라고여(됐더라고요).그래서 그 3월24일 날에는 음.24일 나왔는지 27일에 나왔는지 그거는 모르겠어요.하여튼 현관 앞까지 나온 건 사실이니까. 면담자 :3월24일 시위를 실질적으로 누가 주도하고 뭐 그런? 구술자 :아 그 누가 정치학과 뭐 사회학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면담자 :정치학과 사회학과, 그럼 그 이후에도 3월24일 시작되어서 그 이후에도 며칠 동안 시위가 계속 있었는? 구술자 :근까(그러니까)있었는데 제가 인제 3월24일 있었던 것 (책을 보면서)같은데,제가 그 3,3월 6 일 날인가 제가 30사단에 갔었어요.일주일동안 30사단에 있었어.30사단에,그리고 왜 그 저 제대복 입고 가는 거 있잖아요.일주일동안 교육받는 것,그랬기 때문에 아마 나온 게 이 3월 한 13일쯤에서 인제 제대복입고 나온 것 같애. 면담자 :3월 13일쯤 나오셔 가지고 학교로 바로? 구술자 :응,그래서 인제 6개월이 남았으니까 5) 등록할 때,그니까(그러니까)학교에 한번 가봤는데 그 친 한 친구들 있으니까,뭐 그날 나와라.보자.이래가지고 이날 나간 거 같애요. 면담자 :그래서 만나신 분들하고 시위에 관한 얘기는 안 하셨습니까? 구술자 :시위에 관한 얘기는 그 전에 했어요.그 전에 그 전에 3월 이때부터 계속 시위에 관한 얘기를. 5) 제대 후 복학 때 까지

2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7) 면담자 :뭐 어떤 분들 같이 말씀 하셨어요? 구술자 :그 뭐 김중태도 있었고(눈을 반쯤 감으며 생각에 잠김)그 현승일 김도현이도 있었고 말이야. 아.여기 있는 사람은 다 있었잖아.손정박이라는 사람도 있었고,그 다음에 우리보다 위에 무슨 몇 분 몇 사람 있었고,늘 거기서 만나서 교정에서. 면담자 :문리대 안에서? 구술자 :문리대 안에서도 만나고 문리대 밖에 나오면 그 뭐야 그게,뭐 쌍과부 집도 있고 그 내려오다 오면 맥주집이 있어요.맥주 마시기는 좀 힘들었는데,맥주는 잘 샀다.누가와서 내(지불한다).내가 누 군지는 알지만 (웃음)학생과장이 와서 내주는 수도 있고,그 다음에 차형사가 내주는 경우도 있고,또 뭐지,그 다음에 또 누구야 하여튼 그래 내주는 사람이 있어.(웃음) 면담자 :뭐,동향을 파악할려고? 구술자 :그러는 것도 있었죠. 그러는 것도 있었는데 그러기보다도 그 사람 임무니까.학생과에 학생이 뭐하는지 알아야 될 거야 아닙니까.그래서 임문데(임무인데)뭐 그 뭐랄 수 있어.(웃음)그 뭐 동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나와 있고,또 시경 정보과에서 나와 있고 그거 뭐 어떡해. 면담자 :그러면 3월14일(3월 24일)이후에 시위들을 쭉 하시는 동안에는 뭐 경찰에 연행되시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까? 구술자 :한 번 있어여.27일인가 연행 한번 됐었는데 동대문 경찰서 까지 연행됐는데,어.오후 저녁 저 녁 먹고 내 줍디다.저녁 먹고. 면담자 :문리대에서 연행 되신 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고(그)문리대 앞에서,앞에서 나오다가,시위대가 있었고 이 시위대가 나하고,그 뭐야 그 시위 대 진압하고,학교 도망 가버리고 거기서(학교 앞에서)어슬렁어슬렁 거리는 놈 잡는 거야.그래서 잡 혔어.근데 무조건 버스에다 실어가지고 동대문 경찰서야.수사과에 때려 넣더라고 그러면서 형사들이 요렇게 앉아가지고(손으로 형사들 위치를 설명)요기 앉아 형사들이.요 머리에 뭐지 머리 드는 놈은 때리는 거야.(웃음)꼼작 못하게.근데 인제 저녁은 라면인가 줍디다.주고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인 제 그 뭐 그래서 난 학생도 아니라고,어떻게 학생이 아니냐.그래서 난 지금 군대에서 제대를 해 가 지고 학교에(학교에는)어떻게 뭐 돼 있나,뭐 등록은 어떻게 해야 되나,온 사람이지, 무슨 데모를 가 서(하려고)왔겠느냐.난 거기 3월13일 날 나는 겨우 30사단에서 나와 가지고 며칠 안 된다 그랬더니, 1차 훈방 조치를 (웃음)거기 뭐 *. 면담자 :그때 같이 연행 됐던 분들 중에는 뭐 더 계시다가 나오신 분들도 있으신가요? 구술자 :으 그때는 내가 있을 때는,그때 3월,3월 27인가 그런데,그 저기 밖에 못 나왔을 거야.아마 그 어디죠 거기,하여튼 못 나오게 해가지고,저 뭐야 미대 그 앞에 로타리(로터리)근처도 못 나왔을 거야. 면담자 :혜화동 쪽? 구술자 :혜화동 반대쪽,그 뭐야 종로 쪽 나갈려고 했는데 종로에서 이 쪽 막고 저 쪽 막고 요샌 길이 뚫렸는데 그 쪽 길이 동대문 나가는 길이 없었다고,그래서 뭐야 그때는 나가질 못 했어.경찰이 워낙 쎄져 가지고.

24 1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27일 날 한번 연행 되시고 그 이후로는 뭐? 구술자 :그래서 그다음엔 야 이거 잡히면 클란다(큰일 난다).(웃음)그리고 주도하는,주도하는 사람은 다 도망갔어.그게 결의야.무슨 걸리면 또 그건 못하잖아.이거야.몽땅 잡히면 근까(그러니까),몇 사 람 위로(데모 핵심 주동자)는 빠져라 말이야 그랬는데,하여튼 몽땅 잡혀가면 어떡해 그게 전략이겠죠. 뭐. 면담자 :혹시 4월(1964.4)들어서 그 괴소포 배달사건은? 구술자 :음 그건 잘 모릅니다.나는 잘 모르고 으. 한일회담 성격 6) 때는 있었고 영령 추도식(4.19네 돌 기념식 후 4월혁명 기념탑에 모여 영령추도식을 가짐)때는 없었고 그리고 4월20일 날도 없었던 거 같고 4월 23일도 난 없었어요. 면담자 :이때는 아직 복학하시기 전이니까? 구술자 :아니야 복학하기전인데,그 3 24때 나가 가지고 혼나고 또 나갔다가 연행 되가지고 또 혼나고 이거 나갔어는(나가서는)안 되겠구나.이거 잡히면 군대 또 가는 줄 알았어.그때. 면담자 :그래서? 구술자 :어디 근데 잡히면 군대 다시 끌고 가겠다고 그러더라니까. 면담자 :학교를 아예 안 가시고 댁에 계시다가? 구술자 :그렇지,그렇지 (웃음)뭐 뒤에서 친구들 전화 걸고 그래서 어떻게 됐나.그러고 그랬지.그땐 안 나갔어 으 그 5월 민족주의 장례식(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에도 안 나갔어. 면담자 :'YTP'(YouthThoughtParty, 靑 思 會 )조직은 'YTP사건'. 구술자 :험,난 정확히 잘 몰라요. 면담자 :그러고. 구술자 :뭐 아니 나중에 들어서 알긴 아는데,그 당시에는 몰랐어. 면담자 :언제쯤 그 얘기를 들어셨는가요? 구술자 :나중에,나중에 4월 뭐 5월 달 이정도 돼서 알았지. 면담자 :이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가요? YTP사건. 구술자 :에.난 거기 뭐 가입한 적도 없고 그랬으니까. YTP 를 누군가 만들었다 이렇겠죠 뭐.그래서 그거를 정 정보기관이나 정부에서 만들은 게 아니냐.학원공작을 위해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근 데 나중에 뭐 물어봐야지.김덕창이 한테 물어봤을 수도.(웃음) 면담자 :그러면 4월23일 날 학원사찰 성토대회를 가졌었는데 그때도 참석을 안했었던? 구술자 :응 참석을 안했지 6 3( )때만 나갔어. 면담자 :6 3때 그러면 5월 20일. 구술자 :가만있어,가만있어 단식농성이 언제야? 면담자 :그게 으 5월 31일(5월 30일)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구술자 :이땐 나갔어.단식농성 중,그러고 6월 3일 날 나갔죠.예,6월3일 날 거적 쓰고 나갔죠. 면담자 :그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은 참석을 안 하셨지만? 6) 여기서 한일회담 성격에 참여란 한일회담 성토대회를 지칭함.

2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9) 구술자 :안 했어요. 면담자 :그 사전에 그런 계획이나 혹시 그런 얘기를 들? 구술자 :아 그런 얘기는 들었어요.듣고도 안 나갔어요. 면담자 :요 요 그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시위는 어떤 분들이 조직을 하시고 준비를 하셨어요? 구술자 :김중태도 있었고 그다음에 이게 뭐 민비연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이란 게 있잖아요. 면담자 :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구술자 :거기 사람들이 주로 한 걸로 기억을 하고 있어요. 면담자 : 민비연 쪽에서,선생님도 그 새세대 (서울문리대 신문)쪽하고는 관련이 없었는지요? 구술자 :사람이 많았는데,그니까 새세대 는 문리대,문리대 신문인데 뭐 뭐,김정남이도 했고 그 전부 글 그걸 뭐야 칫솔부대라 그러는데. 면담자 :칫솔부대 왜 칫솔부대라 그랬는지? 구술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칫솔밖에 (웃음)없어.으응,칫솔밖에 없어가지고,뭐야 동가씩 서가 씩 하는 거지 뭐,그래서 잉 가방을 뭐야 인제 오늘은 A집에 갖다 놓는 거야. 으응,거기서 하룻밤을 자,그럼 이제 거기다 쌀을 넣어 줘야 돼.(웃음)그러면 쌀을 밥을 끓여 먹어야 되니까,그러고 뭐 이 제 뭐야 데모가 있었어.수배됐어.그랬지만,수배 안 되어도 하여간 한 하숙을 한다던 지 그러면 전부 그리로 몰려가 있으니 누가 좋아해.(웃음)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도 그렇고 그때 여러 모 왜 이렇게 모였냐면 최혜성이네 집도 근가(그러니까)진고개의 왜식,적산가옥에 있었는데 거기가면 저 최혜성이 좀 살았으니까 밥도 내오고 그래요.으이 뭐 몇 있어 몇 손정박이 집에도 있고 뭐 왔다 갔다 하는 집 에 있어 민병기 집도 있고,요 문리대 새세대 사람들은 고 잡지 만드는 사람들 아냐.글 쓰는 사람, 잘 쓰더라고 난 그렇게만 알았어. 면담자 :선생님은 사무실에는 안 가셨던 가요? 구술자 :안 갔어.일부러 안 갔어.일부러. 면담자: 왜 일부러 안가셨어? 구술자 :아니,이제 난 아르바이트를 해서 먹고 살면서 공부를 해야 되는 사람이야.뭐 갈 시간이 없어 시간이. 면담자 :그때 무슨 아르바이트를? 구술자 :가정교사였지 뭐 가정교사. 면담자 :그때도 가정교사를 하시면 괜찮았던 거? 구술자 :응 응 괜찮았지. 면담자 :하숙비는 얼마만큼 금액이? 구술자 :으응 그건 훨씬 더 벌지.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문리대 물리학과 다음에 정치학과를 들어 갔잖아.그래가지고 그냥 뭐 브랜드야 브랜드.그가 정치학과에 들어갔으니까 영어는 잘하겠다.(웃음) 물리학과에 들어갔으니 수학은 잘할 거 아니야.응,근데 국어 가정교사 국어 잘 가리켜 가지고는 아무 득이 없거든,영어,역시 영어,수학.(웃음) 면담자 :그때부터 영어,수학은?

26 2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웃음)근까(그러니까)시간이 없었어.어울리지를 못 했어.교정에서 만나고 뭐 어디 저 뭐야 밥 먹으로(먹으러)가면 같이 몰려가고 맥주 먹으러 가면 몰려가고 그랬. 면담자 : 민비연 쪽은 민비연 도 어떤 그 조직이 있었는가요? 구술자 :있죠. 면담자 :거기는,거기는 참가를 안 하셨어요? 구술자 :회원가입은 안 했어요. 면담자 :거기도 회원가입을 해야 되고,이런? 구술자 :응 가입했지.근데 하. 면담자 :구체적으로 민비연 은? 구술자 :아 아니 나중에 잡혀가니까 7) 나보러 회장하라 그러더라고. 면담자 : 민비연 회장을? 구술자 :으 (웃음)난 안한다고.초대가 박범진인가 그럴 거야.그래서 초대가 박범진이니까.나하고 고 등학교 동기거든.응,근데,나는 이제 물리학과 들어갈 때 정치학과 들어갔고 응 박범진이는,나는 1년 꿇어서 다시 정치학과를 들어갔으니까,나는 그 사람을 동기로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동기로 안 생각해도 별로 할 말은 없다고.난. 면담자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이신데? 구술자 :아니 그러고 문리대 똑같이 들어 왔지만 고 다음에 저 정치학과로 들어 왔으니까,1년 후배라고 보면 후배니까 근께,그러니까 뭐 쫓아 댕겼는데 나중에 다 잡혀갔는데 나보러 뭐 그 회장하라고(회장 을하라고)맡아 라고(맡아 달라고)하는데 내가 그거 맡겨 생겨서 안 한다. 면담자 :안 맡으신 이유가 위험하기 때문에? 구술자 :위험도 하고 박범진이가 나하고 동긴데 초댄데 내 거절하니까 나중에 *내가 회장은 뭣 하러 하냐고,근데 또 하나는 실력도 없고 연설은 잘해야 되잖아 그지. 면담자 :그 당시에는 민비연 사람들 분들이 시위 같은 것을 주도할 때 상당히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던 가요? 구술자 :그렇지,근까(그러니까)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인제 새세대 에 있던 사람들 그 사람이 김도현 응 또 김정남 그 다음 이런 사람들 필진들 인가 거기 뭐 윤식이 뭐 조선일보에 있던 윤식이 하고 또 뭐 있나 그니까(그러니까)필진들이 쟁쟁했어. 면담자 :그 새세대 쪽 사람들하고 민비연 쪽 사람들 하고 이런 쪽이 시위를 주도? 구술자 :아 그거 민비연 사람들이 많이 했지.같이 하는 거니까 어느 쪽 그 새세댄 (새세대) 새세대 모이는 사람들이고 또 민비연 은 민비연 대로 지들끼리 모이는 사람들이고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고,또 뭐 거기 많았어.거기 학교별로 또 있다고 그게 어느 학교는 어느 학교끼리 모이고 이렇게 됐 으니까. 면담자 :대학,고등학교? 구술자 :고등학교끼리 모이고 뭐 새세대 에 있는 거는 지방학교 출신들이 많았고,허. 민비연 쪽은 저 7) 본인이 잡혀서가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다 잡혀간 것을 지칭함.

2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1) 뭐야 서울에서 고등학교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면담자 :그 당시에 또 하나 조직이라 그러면은 학생회가 있었을 텐데 학생회는 어땠습니까? 구술자 :학생회는 믿지를 않았지.응,이미 이때쯤 와서는 저 YTP 얘기 나오고 이래가지고 어느 놈이 YTP 인지도 모르고 어느 놈이 직접 가서 일러는 놈인지도 모른단 말이야.학생회는 데모하자 하면 안 하는데,뭐 저 사람들은 근데 명목 있으면 하거든,명목 있으면 하지만 명목 없으면 또 안 한단 말이 야. 면담자:그도 뭐 시위를 명목 없이 한 시위는 없었을 텐데? 구술자 :아니 근데 학생회에서 허라(하라)거러며는(하면)안 한다 안 한다고.학생회가 학생회 간부가 빠 지면 그 다음에 인제 새세대 뭐 그 사람들 민비연 그 사람들이나 이렇게 된다고. 면담자 :그 당시 학생회는 운동권(민비연,새세대)하고 별로 이렇게 잘 지내는 관계는 아니었었나 보네 요? 구술자 :근데 그 당시에는 학생회장이 허.학생회장이 나하고 동긴데. 면담자 :김덕룡씨? 구술자 :나하고 동기야 그 사람도.데모를 열심히 한 건 아니야.(웃음)데모 데모를 열심히 한 건 아니 고 국회의원인데 한 분은 아 그 당시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대통령이)비서로 데려다 쓰고 그랬으니까. 면담자 :그 당시 자료를 보니까 시위가 있고 나서,뭐 학생회 전국대학생 학생회 간부들을 정부에서 만 나더라고요? 구술자 :아니 그렇지도 않고,처음에 5 16이 성공을 해 가지고 김종필씨가 문리대로 왔었다고 강단에서 공개 토론을 했어. 면담자 :군사 쿠테타(쿠데타)이후에? 구술자 :응 그렇지,그렇지,그래서 그 했는데 밖에서 웅성하고 안에서 질문하고 그래서 그냥 가 뻐렸지 (버렸지).그래서 그거를 김종필이가 망쳐났다고 그런 거지.지금 뒤에 정리가 그때 민족주의. 면담자 : 민족주의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구술자 :응,그거 그거 비판하고 말이야.그 왜 혁명공약에서 나오는 거 있지.미사어구 그 다 허위다. 응,정권욕에서 나온 거 아니냐.이렇게. 면담자 :실제로 김종필씨 한테 그런 얘기들이? 구술자 :뭐,뭐 이 욕심이 철철 넘치고,이렇게 연설을 하던데 질문을 하면서,그 어디 정리가 돼 있을 텐데 김종필씨가 강단에 와가지고 학생 4-500명을 놓고 공개토론 하자고 공개토론 위해서 왔대니까,그 니까 학생대표가 연단에 몇 명 있고 대답을 하고 밑에 애들이 질문을 하고 그러고 있어. 면담자 :그 그러면 문리대 단식농성 중에는 참여를 하셨었던가요? 구술자 :응,단식에는.한 단식농성에도 했어요.거의 첫날부터 했을 거야.근데 나는 단식은 못 했어.(웃 음)단식은. 면담자 :농성만 하셨던 가요? 구술자 :아니,그 저 저 하다가.나는 아르바이트하기 때문에 가야 된다고 사람들이 알어. 면담자 :그럼 그때 농성하시면서 뭐 기억나는 일이,어떤 분들이 참여를?

28 2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아니 기억나는 사람이 누가 있나.아 다 있었어.이 사람들 다 있었고 손정박이라는 사람이 저 저거야 이 이 다른 사람들 참자 그랬는데,마지막에 끌고 나온 사람이 손정박이야.거적 쓰고 이 때 터 진 거 이 날 계엄이 터졌지.위수령이 터졌던가.계엄이 터졌던 가. 면담자 :계엄령이? 구술자 :그러면 그게 3 24때 위수령이야. 면담자 :저도 3 24때? 구술자 :하나는 위수령( )이고 하나는 계엄령(비상계엄령, )이야. 면담자 :6 3에는 아마 계엄령에서? 구술자 :모르겠어.이건 하여튼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고.나도 그래서 그거 저 해가지고,아. 6 3 데 모 계엄령이 맞다. 면담자 :그럼 5월 31일부터 그 단식농성에 뭐? 구술자 :낮에는 있었어.하여튼 낮에는 낮에는. 면담자 :6월3일까지 계속? 구술자 : 계속 있었어.낮에는.그러고 6 3날 나올 때 까지 계속 있었고,음 맞을 거야. 면담자 :6 3시위 때는 같이 인제 다 밖으러 나가셨던 건가요? 구술자 :중앙청까지 갔지. 면담자 :그 당시에는 연행되거나 하시지는 않으셨어요? 구술자 :안 했어.계엄령 떨어지자마자.그 때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은 뭐 죽기까지 할 수 없잖아.이게 계엄령이 떨어진 걸로 해서 이게 학생운동으로서는 일정한 목적을 달성한 거란 말야.나머지는 정치인 이라던 지 국제정세라던 지 이런 거지.학생이 군인 군인정권을 때려 엎을 수 있을 것 같애.아 땡크 (탱크)가 있는데 총도 있고,인제 이게 계엄령까지만 가면은 이 사람들의 그 뭐야 헌신성(헌정으로)은 들어가는 거다 세계만방에 이렇게 생각을 한 거지. 면담자 :계엄령이 내려질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렇지 커지면 계엄령이 분명히 떨어질 거다. 면담자 :혹시 그 그때 다른 학교들 다른 대학들하고 연락하고 뭐 그럴 때는 역할을 안 하셨는지? 구술자 :안 했어,안 했어.난 전혀 안 했어.나 그때 폭발물에 걸려가지고 할 수가 없었어.(웃음) 면담자 :그러면 그럼 65년도에 졸업을 하신? 구술자 :65년도에 졸업을 했죠. 면담자 :65년도에 2월에 졸업을 하셨는 건가요.그때는? 구술자 :아니지 65년도에 61년에 들어갔던 사람이 졸업했고,나는 군대를 1년6개월 가고 6.2년을 마쳐 서 복학을 했으니까.66년에 아 67년에 했지 67년에 2월에 3월인가 2월인가. 면담자 :졸업을 하시고 바로 어디? 구술자 :음,KBSKBS음,방송공사 기자 1기생으로 들어갔고 고 다음해에 MBC. 면담자 :MBC에 오래 계셨던 가요? 구술자 :MBC에서 30년을 했었으니까.그래서 내가 결국은 대전 MBC에서 69년 3월까지 있었고,그다음

2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3) 에 95년까지 또 방송문화 MBC 8) 유임을 했어.거기에 감사 였어 감사. 면담자 :취직하실 때는 이 시위전력이 문제가? 구술자 :나는 나는 시위전력이 걸린 게 없어 거의. 면담자 :기록에 남아 있는 게 없은? 구술자 :아 그렇지 그렇지.내가 재판정에는 한번 저 안기부에는 끌려갔었고. 면담자 :언제쯤 끌려갔었는지? 구술자 :그 뭐 재판 받을 때(2차 민비연사건:일명 몰로토프칵테일 사건).음,재판이 언제 였나 건(그건) 몰라.그건 재판이 언제였나. 면담자 :65년에 재판이? 구술자 :맞어. 면담자 :대법원 판결이 난 걸로 돼 있습니다.64년에 기소가? 구술자 :그래 64년야. 6 3 나고 나서 바로일거야 바로.그때 튀었으니까들. 면담자 :6 3나고 바로 다들 그때 그 지도부 중에서는 연행되었던 사람이 있나요? 구술자 :아니 다 연행이 되었는데 재판 다 받고,음 그런 뭐야.지금 누가 지도부라고해서 지도부가 아 니고 이게,뭐 지도를 줘서 지도부가 아니고 이게 뭐 저 정식으로 회의를 한 것도 있고 당국에서 붙여 준 것도 있어 당국에서. 면담자 :당국에서 지도부다? 구술자 :그렇지 *독서클럽 불꽃회 아냐.이렇게 해줬지.아 동백림 사건 ( ),간첩단 사건, 우린 뭐 간첩이다 노동당 가입했다 했나.이게 나중에는 역사란 게 이렇게 되는 건데 그치 민비연 (민 족주의 비교연구회)은 있었어.회장도 있고,응 근데 새세대 사람들로는 새세대 세력이 있을 뿐 이지 새세대 사람은 문리대 학생신분이야.응,근까(그러니까)1학년 기자 2학년기자 3학년기자 4학년기자 있고,음 뭐 편집장 있고 그거지 무슨 새세대 어떻게 전부 나서서 음 무슨 회의 만든다 그런 식 없다 고.하여간 그까(그러니까)뭐 새세대 기자 그룹부가 되잖아.근까(그러니까)거기서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하면은 서로 친해지니까.되면 같이 모 이고 또 그 사람이 연설 잘해요.글 잘 쓰는 사람 연설 잘 하잖아.이게 선동력이 있는 거지.그렇게 된 거지.그게 뭐 그때 뭐 그래 난 불꽃회 도 불꽃회 도,나 는 그게 불꾳회 도 자기들끼리 붙였다.붙여 데,하여튼 붙여 다고 하는데 나는 당국에서 붙여준 것 같 애.왜그러냐 하면 아니 불꽃이라는 건 이스크라야,이스크라,이스크란데 이스크라는 레닌 주의거든 (레닌이 내던 신문이거든),레린 뭐야 일종의 레닌이 해외 해외에 망명해가지고 거기서 저 소련에 대해 서 자꾸만 들여보낸 그 잡지라고,근데 그 다 아는 사람들이 우리는 그 불꽃회 라고 하자 이랬을 리가 없다고 보는데,음 근까(그러니까)안기부에 잡혀가니까, 니네들 마 그 사상이 어떤 것이야.(웃음)니 네 이 새끼들 불꽃회 야. 그때 이렇게 된 거지.자기들이 불꽃회 라 붙였을까.난 그건 모르겠어.나 는 저 안 붙였다고 믿고 있어요.그건 아주 병신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붙이겠어.그럼 레드스타라고 붙일까.(웃음)아 우리 단체는 레드스타 할 거야.적성( 赤 星 ),하여튼 내가 사회부장도 많이 해보고 그 래서,저 뭐야 학생 기소하고 그런 기소문 이라든지 내가 사회부장도 3-4년 했거든.경찰기자도 한 6년 8) 방송문화 진흥회(MBC소유재단)를 MBC로 잘 못 지칭함.

30 2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하고 그래서 그도(그것도)기자하면서 학생데모를 따라 다닌 것도 많아.(웃음) 면담자 :옛날,옛날 기억이 좀 나시던가요? 구술자 :음 나지.나지. 면담자 :그때 기분이 어떠시던가요? 구술자 :야,나는 그 달주(후광:김대중 아호)김대중씨가 동대문에서 연설하고 나오는데,고 시간이(그 시 간에 연고전이)마쳤더라고,그래서 그때 연고전이 동대문운동장에서 연고전이 벌어졌어.그날 난 뒤집 어 지는 줄 알았어.(웃음)그 통칭 70만이라고 그랬으니까.그 또 젊은 사람들이 연고전이 있었으니까 들떠 있잖아.응,이 사람들이 앞장서서 뒤에 따라오는데 그 또 야당에 별똥대(별동대)가 있다고,트럭 타고 댕기는(다니는)사람들,지금은 버스지만 그때만 해도 트럭이거든 트럭에 가득 타요.아,어깨들이 야 대단한 사람들이야. Tape2. 면담자 :나중에 뭐 얘기도 못 들어 셨던? 구술자 :아 들었지 도현이가 누가 100불(괴소포사건, )보내왔다.야,술 먹자 이랬지.(웃음) 면담자 :그 후에? 구술자 :못 들었어.야,북한에서 북한에 과연 보냈을까.그런 의심은 하고. 면담자 :근데 이거 받은 분 받으신 분 아무 피해가 없었던가요? 구술자 :으.그세 다 감옥에 갔는데 피해가 (호탕하게 웃음)아 참 미치겠네. 면담자 :이거(괴소포사건)자체로? 구술자 :없었어 없었어.이거 신고를 했어.신고를 하자 이렇게 됐어.내가 농담조로 얘기했는데 야 근 데 왜 그렇게 큰 거냐.야,이거 술 한 잔 먹자 그랬더니 회의를 하더라고,그러더니 야 이거 이상하다 신고해야 된다.신고했어.뭐 기억은 나(자료를 보면서)기억은 나는데 4 19혁명추도식도 이거를,가는 거를 보고 난 안 갔어.저 저기서 했을 거야.어디 문리대에서 했나?아 그건 모르겠어. 면담자 :그러면 그 폭발물제조하고 관련 된 거는,그 어느 분이 선생님한테 부탁을 하셨었? 구술자 :이거는,맞어 이거,(자료를 보면서)3 24일 그게 나기 전에 나기 전에 나기전에 내가 허.(침묵) 내가 그 30사단에 인제 귀휴를 왔는데 거기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어.아니 30사단에서,그니(그러더 니)오래는 거야 갔더니 사단장실 옆에 있더라고,근데 주번 사령이야 주번 사령,험 내 친구가. 면담자 :고향친구 셨던가요? 구술자 :음 내 중 고때.아냐.고등학교 친구.그런데 이 친구가 임관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거기 온 모 양이더라고. 면담자 :장교? 구술자 :장교로 왔지.그니(그러니),주번사령이 됐지.주번사령은 저 뭐야,소령급 이상이 되어야 된데. 자기는 주번사관이라는데 주번사관 9) 도 나갔다 이거지.(웃음)주번 나보고 그러는 거야. 내가 여기 있 9) 주번사령을 주번사관으로 잘 못 말함.

3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5) 을 동안에는 봐줄 거 뭐 있냐. 그러더니 너,너 금요일 날 들어와라. 이거야.음 근 어떻게 나가냐 그랬더니 (손짓을 하며) 내가 알아서 할게. 근데 그게 제대복이니까 군복 같으면 걸리잖아.그지.근데 이게 제대복이니까 이게 민간 반 군바리를,그러더니 저거 짚차를,사단 짚차를 탁 내주더니 역까지 갔 다고,태워서 내려주더라고,그래서 제대할 적 (웃음)제대복입고 시내로 들어왔지.그때,그때가,여기 인제 뭐야 (자료를 보면서)공소장에는 64년 7월30일경이라는데 3 24전이야.3 24전에,응 3 24전 에 으(자료를 보면서 생각에 잠김)김중태,그때 마누라 저 결혼했는지 모르겠다.애인집인지가 이 번 지 인줄 몰라.응,후암동에서 회의를 했어.회의를 했는데,뭐 이거 말이야.학생이 맨 날 데모를 하고 그러니 되지도 않더라.그날은 강경파가 굉장히 많았어.고대서도 오고 이대서도 오고 뭐 숙대서도 오 고 학생회 간부들이 다 모였어.유명한 사람 다 모였어.고대서도 오고,그런데 거기서 얘기,얘기가 된 거야.이게 뭐냐 하면, 이거 말야 맨 날 몇 명 나오지도 않고 나와 보니 경찰에 막혀서 아무것도 안 된다. 이거야.경찰 저지선을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뭐가 필요하다.(웃음)그래서 그랬더니 의견이 분분한 거야.뭐 하자 뭐 하자.응,음 근데 왜 별놈의 얘기가 다나오고 총 디리(가지고)쏠까.그래서 인제 했는데 (침묵)거기서 말야. 너 이학부니까 말야.너 뭐 좋은 거 없어. 이랬는데 좋은 게 있긴 있는데 잘 힘들걸 그랬더니,근까(그러니까)폭약이다 폭약.응 폭약을 어떻게 만드냐.만들 수 있는데 에.하여튼 그 조사를 해보자.근데 그때 인제 내가 책을 어디서 봤어.그 프랑스에 저 좌파사야 거기 서 사재폭탄 얘기가 몇 개 나와.그 프랑스에 있는 솔로몬 대학 여자 남잔데 그 사람이 좌파 운동을 하다가 브라질로 이민을 갔어.못 견디겠으니까,부부가 이민을 가서 재봉틀질을 했어.도저히 못 살겠 는 거야.그래서 이 사람이 귀국을 해가지고 프랑스 국회에서 던졌어.의사당에서 응 터졌어.다행히 저,죽은 사람도 없고 찰과상만 조금 재판을 받았어.응,무죄야 프랑스에서 무죄,근데 그게 보면 이제 장치를 하는 게 있어.사람들이 안 다치도록 (손동작으로 표현함)응 뻥 터지게만 하도록 소리만,그래 서 그것도 읽은적이 있고 그러니까,그 뭐 근데 좀 그래서 내가 그랬어.제일 좋은 거는 훔치는 거다. 이거 (웃음)제일 좋은 거는 훔치는 거 광산에 말이야 다이너마이트 쓰니까 그 조금 훔쳐가지고 도화 선에 부쳐서 던지 면 된다 말이야.그 뭐 몰로토프칵테일 이란게 있는데 니네들 아느냐.모른데.(웃음) 야 그거 말야.1905년에 나온 건데 휘발유에다가 휘발유 담아 가지고 솜방망이로 솜 털고 휘발유 그냥 던져서 불 안 난다 말이야.(손동작으로 표현)그 팍 그래서 솜에다 불을 붙여라 이거야,터지진 안는다 이거야.솜에 솜이 타 들어가니까 휘발유를 빨아 들어 가지고,근데 그거 불을 부쳐가지고 던지면 (웃 음)탁 보도에 떨어지는 순간에(탁자를 내리치면서)팍 깨지면서 그런다 말이야.근데 그거는 사람이 좀 다칠 위험성도 있다. 면담자 :화염병의 시초? 구술자 :그래서 나보고 몰로토프(몰로토프칵테일)난 만든 적도 없어.난 책에 본대(본대로)그대로 얘기 한 거야.이거 뭐,이거는 뭐 휘발유 그때는 휘발유 많이 살 수 있었어.휘발유만 되는 게 아니라 알코 올도 된다.응,그 다음에 등유도 된다.등유 백등유도 석유,석유 응,근데 석유는 믿을 만 하지가 않 다.안 터질 수 있다.(웃음)휘발유하고 이거 알코올은 틀림없다 그랬더니 이거 그 카고(그렇게 하고) 뭐 우리가 말야,뭐야.결사적으로 하자.각 대학 학생들이 쭉 오니까 전부 에스컬라이트(에스컬레이터) 타는 거야.여자도 있고 (웃음)하자 이렇게 된거야.나 보로(더러)책임지고 알아보라는 거야.(웃음)

32 2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알았다고 그래서 두 번인가 만났을 거야.그리고,그리고 그 내일 어디서 만나자.만난 게 뭐냐 하면 요거는(요것은)둘이가(둘이서)의논을 했지만은 진고개에 있는 최혜성네 집에서도 고(그)다음날 만났 어.그래서 만나가지고,(침묵)어제 찾아보니까 응 6법전서를 찾아봤을 거 아니야.이건 걸리는 거니 까,근까(그러니까)내가 그랬어. 다이너마이트 훔치는 거는 이거 폭발물 죄 딱 걸리는 거다. (웃음) 근데,7년 이상이야 당시에.이하의 저게(죄가)없어.그래 돼 있어.뭐 한자는,폭발물 응 사람을 향해 서 폭발물 던진 놈,응 수괴는 사형 이렇게 돼 있어.(손동작을 하면서 크게 웃음)7년 이상,7년 이하 는 없단 말이야.어차피 7년은 살아야 된다.죽으나 사나.그래서 내가 얘기한데로,이건 저 광산에서 이거 쌔벼서(훔쳐서)던지는 거 딱 떨어지는 응,이건 화폐 아니냐.이거 화폐 응 화폐를 만들 때도 똑 같이 안 만든다.위폐를 만들 때도 틀리게 만든다 이거야.그래야 형량이 감해 지는 거라고,똑같이 만 들면 그거는 아 형량이 높아요.응,그래서 * 똑같이 안 만들어 엉성하게 만들지 그래야 쓰다가 걸 려도 별일 아니 단 말이야.1년 안에는 나올 수 있다고 누가 봐도 이건 *쓰면 그 받을 수 있단 말이 야.그랬더니 그러면 너가 맨들 수 있냐. 그래서 맨들 수 있다.그랬더니 왜 맨들 수 있냐 그랬더니, 내 해본 적 있다.(웃음)내 이게 내가 57년도에 음 고등학교 때 그 뭐야 과학반이야.경복고등학교인 데 담임선생 지도하에 이 우리 개교 기념식날 로켓트 함 올려보자고,음 1957년에 스푸트니크가 올라 갔거든,그래서 전부 그거에 관심 있을 때야.그래서 거기서 스터디 그룹이 연구를 했어.고등학교 2-3 학년 학생이지만 대단한 거라고 또,그래서 몇 개를 해봤어.(호탕하게 웃음)그래서 터지는지 안 터지 는지 아는 거야.근데 그래가지고 흑색화약으로 해보고 글리세린계(로)한번 해보고 회농계(페놀계)도 함 해 봤어.알코올 해 보고 그 알코올 왜 해봤냐.그래서 국방과학쪽에서도(국방과학쪽에)가서 조사 도 하고 그때 로켓트라는 게 만들 수 있다는 것뿐이지.으흠 만들면 만들 수가 있을 것 같애.왜 그러 냐 하면 로켓트가 벌써 1차대전 2차대전 때부터 맨 든 거 아니야.다만 저 뭐야 (두손을 위 아래로 내 리며)위성에 올리는 위성궤도까지 올리는 게 이게 문제지 그지.그래서 낙하산 달아가지고 개교기념 일 날 싸악 낙하산 탁 내리 이렇게 하자 이거야.그래서 인제 근데 인제 로켓트를 만들면 인제 여기다 (종이에 공식을 쓰며)화약을 뭘 넣어야 되냐.연료지.분출구의 크기를 얼마로 해야 되느냐.응,그래 야 추진력으로 올라올 거 아니야.근데 제일 중요한 게 재야 재.재가 되면 안 돼.재가 구멍을 막아. 그럼 폭발해 재가 제일 안 나는 게 뭐냐.그래서 그때 스푸트니커(스푸트니크)뭐 이거 했을 때는 저 뭐야 알코올 썼어.알코올 굉장한 거 쓴거 갔지.알코올이 완전히 타면 재가 안 남으니까,구멍을 안 막는다고,이런 건 뭐 흑색화약 뭐 트리니토 글리세린(니트로글리세린)이런 거 쓰면 재가 남아.안 돼, 로켓트 못 만들어.그래서 인제 전부 실험을 했거든 알코올가지고 해보고 흑색화약으로 해봤어.음 그 래서 내가 그랬지.이 제일 그 간단하게 하는 거는 소리만 나면 되지 않냐.그럴려면 대나무를 짤라가 지고 맨들고 요기다 구멍을 낸다 이거야.화약을 넣고 요거는 훔쳐라 도화선 어디 가서 살 수 있으면 사고 (웃음)불을 부쳐가지고 던지면 된다.이거는 틀림없이 터지니까 음 그런데 파편은 안 튄다 이거 야.대나무기 때문에 뻥소리만 나고 안전하다.이렇게 회의를 했어.(잠시 생각에 잠김)그러고 난 인제 야 이거 겁도 나고 말이야.응,또 근데 이상하게 아무소리도 안 해.이런 게 있다고 아무도 직접 맨들 어 보자 이러니까 이게 전부 겁났을 거야.이게 7년.근데 김도현이가 왔어.김도현이,거기에 있어.응, 왔어 말이야 어디 던질 놈이 하나 생겼으니까,그거를 맨드는 방법을 가르쳐 돌라 말이야.그러잖으면

3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7) 만들어 달래(웃음)그래서 두 장을 써 줬어.화약 만드는 방정식하고 배열 성분 배열 그러고 써주고 이 런 정도의 과학상식이면 된다 이거야.그런데 으 이거 상식 같으면 이런 힘들거다.요렇게 해라.뒤에 다 어디 가서 뭘 사라고 썼어.응,숯을 빻고 숯을 빠아야 된다.유황은 어디가면 산다.응,그다음에 을지로에 화학상 방에 가서 전자기에 들어가는 이산화망간 달라고 하면 줄 텐데 안주면 어떻게 하냐. 전지약 까라 (웃음).조연제거든.그래서 줬는데,그러고 가지고 갔어. 면담자 :김도현선생님이 가져 갔었.? 구술자 :잊어버리고 있었지 나는.학교 갔더니 학교 갔더니 난 난 수배 걸렸더래.(웃음)응 넌 찾는다 이거야 그래서 나는 찾을 리가 없는데 그랬더니. 면담자 :언제 쯤 학교 갔을 때 인가요 3월? 구술자 :고건(그건)모르겠어.6 3이 끝나고 난지 고걸(그것을)모르겠어 6 3이훈지(이후인지). 면담자 :6 3이후에? 구술자 :6 3이후겠지.응,근까(그러니까),고런(그런)얘기가 있는 건 64년도 였어.64년도에 하고 도현 이하고 나하고 같이 있었거던.내가 그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가지고 거기서 애들도 가르키고 밥도 해먹고 이런 자취를 시도를 하는데 응 거기 와서 도현이가 수배가 됐어.인제,나하고 같이 몇 개월 같 이 있었어.한 한 달 정도나 뭐 20일정도.근데 우리 집 내가 인제 그 아는(왼손을 들어 가리킴)사람 한테 빌렸거든.내가 공부도 해야 되고 그러니까 좀 있을 때가 있으면 좋겠다.그랬더니 예전 우리 동 네에 담 같이 하던 집 애,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인데 그 아버님이 우리 애를 좀 가리켜달라.음 좋다고 가리켜 줬는데,그 대신 어디 가리킬 때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거야.그래서 경기여고 뒤에다가 그 사람이 경기초자 사장이야.화장품공장이 하나 망했어.근데 제일 비싼 게 또 병 값이더라고 경기초자 에서 병을 만들어 줬는데 병값을 안 갚는 거야.그래서 집을 잡았어.(웃음)그러면서 집에다 관리인을 뒀지.근데 나보러 방을 하나 큰방을 쓰라.그래서 썼는데 도현이가 온지 한 20일쯤 됐을 거야. 면담자 :6 3이후인가요.6 3전에? 구술자 :6 3전 10) 같애.그래서 (머리를 긁적이며)난 잊어버리고 있었지.어디 던질 놈 있다고 해서.그 래서 근 반드시 도화선을 훔쳐야 된다 이거야.도화선 팔 질 모르겠다.그래서 도화선 만만하게 팔지 않을 텐데 그랬어.광산 같은데서는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선 의심을 할 거 아니야.도화선 왜 어따 쓸려고 대따(바로)걸려.응,그래서 다른 건 다 아니 숯 사서 빠 빻는 건 누가 뭐라겠어 그치. 유황은 유황은 사서 빻는 건 누가 뭐라겠어 그치.응,그 다음에 이산화망간은 이렇게 튜브 식으로 돼 있어.튜브에 치약처럼 돼 있다고.그게 조연제야.그걸 못 사겠거든 안 판다고 그러면 뭐야 전지약을 까라 이거야.고기 있지 전지액 고게 이산화망간이야.그랬더니,그러니 도현이 안 만난거야 어느 날 가니까 내가 수배가 됐다는 거야.그래서 뭘로 수배가 됐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뭐 뭐 6 3에 나갔어 그랬는지 나 알 수가 있어야지 (웃음)그래서 튀어라 (호탕하게 웃음)그래서 튀었어 집에도 안들어가 고.응 가정교사도 옮기고 말이야 그래가지고. 면담자 :멀리 어디 안 가시고 서울시내 계셨었는가요? 구술자 :멀리가면 걸려 (웃음)내 친구 보니까 동대문 운동장에서 야구 구경하고 있더라고.(경험담을 얘 10) 6.3 후를 6.3전으로 지칭 함.

34 2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기하면서 웃음)그 안 걸려.괜히 숨는다고 숨으면 걸려 그런 식이야 그지.그래서 근데 더디어 걸렸어 잡혔어. 면담자 :언제 어디서 잡혔었나요? 구술자 :집에서 잡혔어.뭐야,순경까지 같이 왔어.짚차까지 탁 가져왔어.까만 짚차 탔지. 면담자 :며칠쯤 됐는가요? 구술자 :그게 재판이 한 재판이 1,2개월 전이야.재판 재판이 언제지?그게 뭐 재판에 증언대에 섰는데 뭐 그래서. 면담자 :연행돼서 바로 어디로 가셨는지 어디? 구술자 :음 11) 동대문 수사에 잡혀 갔지.잡혀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아니야.그랬더니 이 새끼가 폭발물 전문가라며 막 때리는 거야.(몸을 좌우로 흔들며 호탕하게 웃음)니가 폭발물 전문가야 막 때 려.그래서 짚차에서부터 때리는 거야 무조건,짚차에 이 새끼가 니가 그 사람도 잡으러 뭐 댕겼으니까 (다녔으니까)얼마나 힘들었겠어 그치.(웃음)그래도 한 달 이상은 잡으러 댕겼을 거 아니야.내가 튄 뒤부터 그렇게 됐는데.그래서 내가 그랬어 그 어떻게 된 거냐 그랬더니,마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웃음)새끼 니가 폭발물 전문가야 또 때리고,(웃음)그래서 아 내 물어나 봅시다.그래서 뭐야 김도현 씨는 어디 갔소. 고놈(그놈)어딨는지 대라 이거야.(웃음)아 도현인 안 잡혔구나.갔어 조사과에 가니 까 그래서 난 아무것도 모른다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랬지.응 전혀 모릅니다 그랬더니,(잠시 침묵)으 근데 도현이 한 테 써준 그게 나오네.방정식 그게, 니가 써 준거야.(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책상에 서 류를 보면서)제가 쓴 건데요. (웃음)근 내 글씬데 뭐 어디 부인을 해 그러더니 니가 임마 이걸로 폭발물을 만들라 그랬대메,왜 그랬냐. 걔네들이 말야,데모를 하는데 맨 날 저지선도 돌파 못 하고 그래서 누가 이 이런 화약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하면은,으응 저 막 막히는(막는)사람들이 놀라서 뚫 릴 거 아니냐.이래서 적어줬다고 그 어디서 적었냐. 이거야.뭐 그래서 이거는 고등학교 화학 교과 서에 다 있단 말이야.(웃음)인제 음 근데,근데,하룻밤 잤어.그랬더니 사정 얘기하고 그랬더니 나가 래.인제 저 넌 거기 12) 없었어.왜냐하면 30사단에 전화 걸어 본 모양이야.난 거기 그 회의에 참석 안 한 걸로 돼 있어.30사단에서 훈련받은 걸로 그러니 용케 그렇잖으면 내가 MBC에 어떻게 들어 어떻게 들어가 나 구속 될 뻔 했는데,그게 전부야 그리고 그리고 내가 그 다음에는 음 재판할 때 나와라 이 거야.근데 알지 내란음모 아니야.뭐 내란 뭐 선동 내란,근데 폭발물 얘기가 중심이야.그래서 나는 그 뭐 폭탄으로 그 폭탄도 안 되는 거 같고 나는 고등학교에 있는 흑색 화약 만드는 방정식하고 그 뭐 질량만 가리켜 줬다.거기도 질량은 다 써 줬어요.몇 그람 몇 그람 (웃음)거기 내 글씨 쓴 건데 어떡 해.그래가지고 나중에 무죄가 됐을 거야.1심에서는 무죄가 안 됐어. 면담자 :선생님은 그때 재판은 단지 증인으로만 나왔? 구술자 :증인으로만 나왔지 여기 나오더라고(책을 보면서)여기. 면담자 :설계도를 김도현 선생님 한테 드렸는데 어떻게 경찰에서 그 입수를 했을까요 김도현 선생님 잡 히기 전인데? 11) 안기부, 동대문수사로 지칭 함. 12) 회의장소를 말하는 것.

3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9) 구술자 :누구를 줬데요.자기 던지겠다는 놈한테,근 또 만들겠다는 놈도 있을 거 아니야.그 이놈이 갔 다 이거 (웃음)이놈이 경찰 끄나풀인 것 같애.나는. 면담자 :그 던지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얘기를? 구술자 :난 몰라.도현이만 알아.난 그 사람 만난 적도 없고,응 (책을 보면서 잠시 침묵)그거야 나는 그 밖에,뭐 아 그래서 나 난 이 얘기하는 것도,아 나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데 그래요.걸리면 걸리는 거 아니야 안기부에서는 알더라.아니 내가 안기부에 대녀(잡혀)갔다는 건 알아. 면담자 :아 그러면 이? 구술자 :폭발물에 관련이 되어 있고 그러면 아니더라고 안기부장이 나 한테 그러더라고 당신이 폭발물 전문가야(웃음).내가 부장하고 있는데 장세동이가 그러더라고. 면담자 :그 기록이 남아 있었는가? 구술자 :아니지 올렸지.내가 거기 가서 표창장이나 뭘 받을려고 갔는데 여러 사람 있을 거 아니야. 근데 그게 내가 두 번째 상이야.으응 MBC 사장하고 난 민간인 먼저주고 군인들 주는 건데,탁 들어 오더니 그러더라고 이게 아 대통령처럼 도열을 탁 시키더라고,1번 2번 처음에 들어오기 전에는 다과 이렇게 먹고 있었잖아.누가 고성광씨가 어디야. 예 전디요.(접니다) 자네가 뭐 폭발물 전문가라 매. (웃음)그러더라고. 면담자 :근 뭐 이 일 그 폭발물하고 관련해서 큰 고생을 한 거는? 구술자 :고생한 거 없어.음 없고,다만 내 생각에는 30사단에 전화를 걸은 것 같애.넌 거기 없었다고 그래서 (자료를 보면서 생각에 잠김)내가 7월 30일경 이 이게 이게 이 전에 만난 게 나는 기억력이 분명한데,왜 그러냐면 저 3월6일 날 춘천에 춘천 *있었으니까,으 거기서 군복을 입고 30사단에 와 서 군복을 갈아입고 제대복을 입어단 말이야.그 거기서 인제 뭐야 일주일 있는 거 아니야 원래 근데 내가 중간에 월요일 날 나와 가지고 금요일 날 들어갔어.이게 금요일인가 토요일 수료 수료장을 주는 날이야 그날이.그까(그러니까)아마 뭐 거기서 확인을 해준 모양이야 30사단에서 여기 훈련 받았다 고. 면담자 :그럼 처음 회합을 처음 모이신 거는 김중태 선생님 하숙집에서 모이신거는 3월경인가요? 구술자 :3월경으로 난 기억하고 있어 그때 한번 그러고도 혜성이네 집에서도 모인 기억이 있는데,그거 는 3월이 아니야 이후일 수가 있는데,딱 고 근처야 7월은 아니야.내 7월이었으면 딱 걸렸게. 면담자 :근까(그러니까)공식적으로 제대를 하시기 전에 훈련을 가신기간동안? 구술자 :아니 왜 군대를 갔다 왔어.군대를 갔다 오면 제대 특명을 받잖아.그러면 예비사단을 가잖아. 그러면 옷 딱 반납을 하고 제대복으로 갈아입고 인제 민간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하잖아.총도 한번 쏴보고 뭐 예비군이니까 그지. 면담자 :보통 회합들이 그 기간 동안에 회합이 있었던가요. 구술자 :있었는 것 같은데 여기 여기에는. 면담자 :공소장에나 판결문에는 7월로? 구술자 :7월로 나와 있으니까. 면담자 :요건 조금?

36 3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요거는 아니 회합 한번만,이게 무슨 어떤 때는 회라지만 회가 아닐 수도 있어.왜냐면 야 우리 집에서 내가 저녁 낼게 그러면 죽 가는 거 아니야. 그러면 이대생도 부르고 고대도 부르고 되는 그게 회지 뭐,그면 회가 무슨 결사반대 으응 폭발물 뭐 이렇게 부치진 않는다 말이야. 면담자 :김도현선생님하고 특별히 친했었던가요.김도현선생님 도피도 선생님 댁에서 하시고 그런 거 보 면은 학교 다니실 때? 구술자 :친했지 친했지 그럼 친했지. 면담자 :김도현 선생님은 새세대 이기도 하시고 그러셨는데,뭐 어떤 계기가 있었셨던가요.김도현선생 님하고? 구술자 :아니 같은 학관데 뭐 그래,맨 날 같이 술 먹고 돌아다니고 (웃음)근데 남의 집에 식숙 얻기도 힘들어요.아니 수배중인 사람인데 광화문에 다 붙어 있는데 친하지 않은 사람은 못 가. 면담자 :혹시 뭐 그때도 수배중인 학생들을 숨겨 주거나 그랬을 때 피해를 받았는가요.숨겨준 사람? 구술자 :그래 받았지 조사받고 압송됐지.근데 나는 내가 방을 하나 쓰고 그 관리인 있잖아 관리인,관 리인의 눈치가 이상해 나한테 방 빌려 준 사람이 날 보자고 그러더라고,아니 내가 그 집에 가야 되니 까 가서 애를 가리켜야 되니까,갔더니 그러더라고 자네 집에 김도현이 비슷한 사람이 있다고 그러데. (웃음)야 으음 그 뭐 이거 저 관리인이 그러더라.괜히 거기 있다가는 그까(그러니까)잘못하면 신고할 수도 있으니까. 면담자 :그러면 김도현선생님 그 선생님 같이 계시다가 나가시고? 구술자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야 이 아무래도 관리인이 이상하다 근데 골목에 나가자마자 붙어(수배전단 이 붙어)있어(웃음)세종로 파출소 바로 옆이거든. 면담자 :그게 인제 6 3이후에 6 3있고 바로 연행되신 건가요. 구술자 :응 그런 거 같애.아니 이거 재판이야 재판.재판이,(자료를 보면서)재판을,응 받기 전에 증거 보강을 하기위해서 잡았는데 도현이는 안 잡혔을 거야.도현이는 안 잡혔어.재판 받을 때까지 그래서 도현이가 대학 졸업을 못 했을 거야.완전 제적이 됐어.그래 문민정부시절에 뭐야. 면담자 :복교 하셨는지? 구술자 :복학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건 몰라.(웃음)이 사진 봐 있어,없어 도현이가.안 잡힌 거 같애. 없어 도현인 그때까지 안 잡혔어.의문 나는 일이 있으면 또 오고 뭐. 면담자 :예 마지막으로 그 6 3운동이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는지? 구술자 :(잠시 침묵)그런데,이게 이게 4 19서부터 그 독재를 반대하는 그런 학생운동,그 다음에 인제 한일협조문 그래서 험 뭐냐 소위 말하면 그 뭐라 그러냐,그깐(그러니까)이게 거창하게 갔었지만 자 주,민주,응 그 다음에 뭐지 이게 반식민,반독재운동에 학생들이 참여한 운동인데,그 처절하게 실패 했지 않냐 이렇게 보는.뭐 지원세력이 없으니까,응 지원세력이. 면담자 :실패 한,실패 했다고 보시는 게 6 3운동 이후에 지속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구술자 :그럼 그럼,음 뭐 그래서 결국은 지금에 와서 흠 지금에 와서도 그 세력이 이 사회에 이 사회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니냐.이게 근데 이게 저 성공을 할 수 있는 운동이 못 돼.이 학생들끼리 이 렇게 했으니 뭐가 되겠어.근데 정치인은 안 낄려고 했어.4 19때는 왕창 달라 붙었잖아.뭐 교수 무

3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1) 슨 예술인 응 정당 정치인 다 달라붙었으니까,그나마 성공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게 그러니까 뭐야 민 주독재라고 그러나 이승만같이 민간인이 하는 독재는,이게 데모에 의하면(의해)반성도 하고 물러날 수도 있고 그렇지만,군사 군사 쿠테타(쿠데타)를 해서 저 한 정권에 대해서 학생이 그냥 뭐 꽥꽥 반대 나 한다고 물러난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어.(웃음)그까(그러니까)그런 것이 그러나,그러나 그런 학 생운동의 정신이라든지 반독재,반민주 이런 정신은 살려야 될 거 아니냐 또 살아 있지 않느냐.그래서 결국 문민정부를 세우는데 하나의 커다란 힘이 됐지 않느냐 당시로는 실패한 거. 면담자 :4 19와 비교해 봤을 때 이 6 3에 뭐 일반국민들이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은 이 유는 어떻게 봐야 될지? 구술자 :뚜렷한 효과가 없었지 않았나 그치.그게 그 이제 이 박정희 이쪽 쪽에서도 아 교묘하게 다 그 래서 인제 학생을 이렇게 자꾸만 데모에서 거리로 나오도록 그래서 폭삭폭삭 이렇게 핼(할)뿐이지. 면담자 :혹시 그 이슈 자체가 4 19때와는 달리 한일회담 을 지지하는 세력들도 좀 있었기 때문이 아니 었던가요? 구술자 :(잠시 침묵)음 그게 뭐 역사적으로 따지면 친일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본하고 이렇게 협 조하는 걸 생각도 할 수 있고 추진도 할 수 있고,음 그랬던 거고 그걸 보고 가령 예를 들면,정치인 윤보선씨나 이런 사람 반대도 했어.그러나 뭐 개인적으로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생각을) 그때도 했어.정당이 그렇게 치열하게 달라붙은 것 같지는 않았어.정강정책으로 아주 6 3을 지지한다 이런 거는 아닌 것 같았어 마 학생을 지지한다는 소문은 있었다고. 면담자 :예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38 3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면담후기 고성광씨의 경우 6 3항쟁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거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었던 것으로 보 이지는 않는다.당시 중요한 시위나 회합에 참가한 횟수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이 상당히 흐려 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준 것으로 알려진 몰로토프칵테일 사건에 대해서는 상대 적으로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으며,다른 면담자들의 증언이나 기존의 기록과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면담의 내용에서 당시 대학생들의 생활이나 사회상들에 대한 정보를 단편적이나마 담고 있 어 60년대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언급을 찾을 수 있다.기억이 흐리고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꺼이 기억을 더듬어 면담에 응해주었다.

3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3)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3항쟁 주요사건 구 술 자 김도현 면 담 자 김주관 면담일자 (수) 면담장소 당주동 세종아파트 1008호(개인사무실) 면담차수 1차

40 3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김 도 현 (한 자 : 金 道 鉉 ) 면담자 성 명 : 김 주 관 (소 속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촬영자 성 명 : 박 재 홍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녹취자 성 명 : 박재홍,여성동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1차 (수) 개인 사무실 (당주동 세종아파트 1008호 ) 및 2차 장소 3차 녹화테이프 4개 산출물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1부 2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인터뷰 당일 날 개인사무실이 외부 방문객으로 인해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적극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면서 인터뷰에 응 면담상황 설명 해 줌.그리고 식사 후 잠시 휴식시간에 동료분과 바둑을 두 시면서 인터뷰의 긴장감을 해소 시켰으며 약 4시간에 걸친 시간에도 불구하고 6.3학생운동에 대한 당위성과 소명에 대 해 개인적인 소회를 밝힘. 비고

4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5)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김도현 (한자) 金 道 鉉 나이 만 65세 주소 생년 월일 자택 :서울 강서구 화곡8동 전화번호 : 직장 : 전화번호 : 출생지 경북 안동 결혼연도 1975년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정명옥 처 1949 사회복지사 가족 김완수 자 1977 회사원 김민수 자 1979 대학원학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학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4년 제적 1.문화체육부차관 2.민주통신(민주화추진협의회 기관지)주간 3.영남일보사 논설위원 주요 약력

42 3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3 24,민비연,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투쟁위원회,한일회담, 문리대,제3세계,5 16,4 19,새세대,6 3,6 3운동,민족적 민주주의 장 례식,5 20,학생회,YTP, 靑 思 會,괴소포배달 사건,단식농성,쿠데타,계엄 령,인혁당,몰로토프칵테일,폭발물,6 8,민청학련,현실정치,5공화국,수배 상세목록 Tape 시위 의 배경 및 전개과정과 민비연,그리고 김중태,현승일과 의 관계(00:00-51:16) 2. 괴소포 및 YTP 사건(51:17-56:56) Tape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00:00-13:56) 4. 문리대 단식농성 과 6.3 사태(13:57-42:18) 5. 민비연 및 몰로토프 칵테일 사건의 전개과정(42:19-57:05),(Tape 3. 00:00-42:26) Tape , 6.3 참여 계기 및 개인적 소회(42:27-56:30),(Tape4.00:00-20:56)

4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7) 5)예비질문지 김도현 선생님 항쟁 관련당사자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년 6.3사태 당시 문리대 학보인 <새세대>기자이자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하 민비)회원,김중태 씨가 회장으로 있던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이하 투위)의 위원 신분이었습니다.3.24시위와 민비, 민비와 투위의 관계,그리고 김중태,현승일과 김 차관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보충질문1:민비,민통련,신진회 등 서울문리대의 전통적인 학생운동권과의 관계,참여자의 면면) (보충질문2:<새세대>와 문리대 운동권,<대학신문>,문리대 학생회와의 관계,그리고 <새세대>출신 운 동권 인맥과 3.24과정에서의 역할) 2.김 차관님께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김중태 현승일 등과는 동문 관계 외에 다른 인연이 있습니까?) 3.당시 정국에 대한 학생운동권 일반과 3.24주도세력,그리고 김 차관님의 인식은 어떠했으며,차이점이 있었습니까? (공소장 내용:현 정치정세는 부정부패와 무능독선의 극에 달하였고 경제질서는 그 정책빈곤으로 파탄에 이르러 천정부지의 물가고로 민생고가 극심하여 민족분열의 위기에 놓여 있고 한일회담은 매국적 굴 욕회담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화하는 일보 전에 있다고 망상단정하고 현사태는 정부전복의 요 인이 됨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형법87조 내란죄 위반 부분) 시위가 처음부터 서울문리대,고려대,연세대의 동시다발 거사로 기획되었나요?3개 대학 연대시 위를 결정한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시위 준비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그들이 한 역할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김중태가 조직과 고려,연세 등 타교와의 연락 등 중심 역할을 하고 현승일이 현장 지휘,최혜성이 자 금,김도현이 선언문 등 문건 작성을 분담,한 학년 아래인 박삼옥 박용한,김헌출,전계수,이현배 등 도 각각 역할을 맡아.-6.3동지회,6.3학생운동사) (보충질문:61학번 중심의 주도세력뿐 아니라 선배그룹이나 후배그룹의 역할에 대한 인지 여부,시위 모

44 3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의 장소 등) 6.그 중에서 김중태,현승일,김도현 3명이 특히 유명해진 까닭이 무엇입니까?세 분 사이에 다른 역할 분담은 없었습니까? 시위 준비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정보 누설로 인해 3월 17일 결행을 24일로 연기한 과정,3월 23일 민비 주최 한일관계 강연회 때 학생 들의 반응 등) 8.시위대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는데,김 차관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나요? 시위 다음날 정부가 사태 수습을 위해 서울시내 36개 대학 학생대표 92명을 초청했고 서울문리대 에서 김덕룡(학생회장)김용환(정치학회장)등이 갔는데,시위 지도부에서 이들과 사전 협의나 교감을 한 바가 있었습니까? 성토대회와 3.26시위 등 3.24이후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투위 지도부의 역할과 김 차관께 서 하거나 겪은 일을 기억을 말씀해주십시오.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11.4월 들어 괴소포 사건과 서울문리대에서 4.17한일회담성토,4.19영령추도식,4.20(4.19네 돌 기념식), 4.21시위 등 집회 시위가 계속됐습니다.김 차관께서 선언문 작성을 도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4.19 제5선언문은 누가 썼습니까? 12.4월 23일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개최했습니다.당시 학원사찰과 YTP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3>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13.당시 공소장에는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시위를 5월 14일 기획해서 16일 확정한 것으로 되어 있 는데,실제는 이와 다르지요? (공소장 내용:피고인 김중태 동 현승일은 1964년 5월 14일 오후 3시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출입문으 로부터 약 50미터 상거한 잔디밭에서 정권타도에 관한 모의를 한 후 시내 각 대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동년 5월 16일 오후 7시경 동교 월편 진아춘 중국요정 2층에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대표로 피고인 김중태,동 현승일,동 김도현,공소외 송철원,동 최혜성,동 이원재가 참석하고 동국대학교 대표로 공

4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9) 소외 장장순,동 박동인,성균관대학교 대표로 공소외 박형길,동 박광렬 외 4명,건국대학교 대표로 김영목,동 백승홍,서울사범대학 대표로 공소외 김길렬 외 2명 등 21명이 참석 회동하여.)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기획하게 된 배경과 계기,준비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5월 초 동국대 박동인의 민비연 방문,애초 황소식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아이디어의 출처, 5월 16일에서 20일로 거사일 변경 사유,대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이하 연합회)의 조직에 관한 사항 등) 15.공소장과 실제 상황에서 주동자의 역할이 다르게 나와 있는데,그렇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공소장=(준비)김도현 선언문 결의문 한일회담-5.16성토문 작성,송철원은 조사 민생고 학원사찰 성토문 작성,장장순 회식진행총사회관,최혜성 자금조달 유인물 인쇄,현승일 공보관계 및 한양대생 8000명 동원,김중태 연대 성대 동대 등 각 학교별로 최저 1000명의 학생 동원,이원재 서울대 학생 동원,김 용술 모의관 두건 죽장 구입/(진행 담당)송철원 조사 낭독,이재우 5.16성토문 낭독,김영목 한일굴욕 회담성토문 낭독,정성철 학원사찰성토문 낭독//(실제 진행)박동인 선언문 낭독,민승 결의문 낭독,김 광렬 5.16성토문 및 민생고성토문 낭독,송철원 조사 낭독) (실제 상황=조사는 김지하가 작성,선언문은 김도현 김정남이 초안,정세연이 작성한 대회사를 장장순이 낭독 등) 16.시위 현장을 언제 떠났으며,떠나기 전의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원래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로 했는데,이는 누가 진행하기로 했습니까?) <4>문리대 단식농성과 6.3사태 17.시위 현장을 떠난 후 주로 어디에 숨어 있었으며,김중태 김도현 등 도피자 및 학내 단식농성 주도 자와 어떻게 연락을 취했습니까? (보충질문1:김중태를 숨겨준 송홍민은 범인은닉죄로 기소됐는데,나머지 수배자 2명의 도피를 도와준 사 람은 왜 기소되지 않았습니까?) (보충질문2:투위 지도부가 송철원 린치사건,5.25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서울문리대 단식 현장에 어떤 지침을 내렸습니까?) 18.연합회 또는 투위는 난국타개궐기대회를 주도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가칭 한국학생총연합회, 이하 한학련)과는 어떤 관계였으며,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습니까? 19.당시 김중태,현승일,그리고 문리대 후속 지도부와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입장차는 없었습니까?

46 4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수배 중이던 현승일,김도현,김중태의 경찰 자진출두를 결정한 배경과 이유가 무엇입니까? 21.경찰에 출두한 뒤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보충질문1:6.3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언제 알았고,그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보충질문2:6월 3일 일제 거사 계획은 투위 지도부가 미리 설정하고 확산한 것이었습니까,아니면 지도 부와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5>민비연 사건 22.재판 중에 터진 불꽃회 사건과 (1차)인혁당 사건 때 이와 관련해 따로 조사를 받았나요?주로 어떤 조사를 받았습니까? 23.계엄사보통군법회의 검찰부가 작성한 공소장을 해엄 후 민간 검찰부가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죄명만 내란 에서 소요 및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으로 변경하지요.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보충질문:수감 생활 및 재판 과정에서 인상적인 경험들을 얘기해 주십시오.) 24.민간 검찰이 공소 내용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무죄를 받게 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 까? (무죄부분:금지 통고를 받고도 집회 시위를 감행하였다는 점 및 소요의 점.선고내용: 일자로 서울형사지법 합의1부 징역8월 집행유예 2년 선고) 25.2차 민비연 사건(일명 몰로토프칵테일사건)의 빌미가 된 폭발물 제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언 제,어떤 계기에 의해서였습니까? (공소장:1964년 7월 31일경 서울 용산구 후암동 27-7(김중태의)하숙집(*1심 판결문도 동일)에서 내가한 공소외 동교 정치학과 4년생 김도현과 소리만 크게 나는 폭약을 10여개 만들어서 동년 8월 6,7,8일경 약 100여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대법 판결문:원심은 :00시내 충무로 소재 피고인 최혜성의 집에서 피고인 김중태,같은 최 혜성,공소외 김도현이가 모인 자리에서 김중태가.) (보충질문:7월 31일 모의 장소가 이처럼 바뀐 이유를 압니까?) 26.7월 31일 회합에서 인명에는 피해가 없고 소리가 크게 나서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관들에게 던지면 경찰관들이 흩어져 도망가는 등 혼란해질 만한 위력이 있는 폭발물 을 만들기로 한 이유가 무엇입니 까? 27.김 차관께서는 기술을 담당해 기술자를 물색하기로 했는데,구체적으로 누구누구를 만나 어떤 정보

4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1) 를 얻었습니까? (후속질문:작고한 이동규 전 KBS종합기획실장의 말로는 강원도 탄광에서 폭탄을 구하려고 했으며,적 군파 소책자만 참고해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28.8월 2일 저녁 11시경 김중태로부터 3000원을 받아 시험 제작을 하기로 했는데,실제로 제작해 폭파 시험을 했습니까? (대법 판결문:8월 4일 16:00경 피고인(김중태)집에서 피고인 최혜성,위 김도현,고성광 등이 모인 자리 에서 고성광이 말하기를 폭발물이라 휘발유와 모래만 가지고는 제조될 수 없고,폭음만 크게 나고 사 람이 상하지 않는 것을 제조하려면 병 안에 대나무를 잘라서 넣고 몇 가지 화학품을 넣어 폭파시키면 소리가 크게 나면서 대나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것을 사람이 맞아도 상하지 않는 소위 죽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제조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시일도 많이 걸리며,또 만들어서 시험도 해보아야 하 는데 시험 장소도 없고 하여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하였고,이어서 위 김도현도 폭발물 사용죄에 대 한 형법 규정을 보니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으니 위험한 짓은 그만두자고 말하여 같이 있 던 전원이 이에 동의하고 그 이후에는 폭발물 관계는 일체 논하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하였고.) 29.가죽장갑을 낀 고대생이 회합에 나타나 폭탄을 만들어주면 비준국회에 던지겠다 고 한 것이 어느 시점이었습니까? 30.언제 낌새를 채고 도피했습니까.어디에 도피했고,무엇을 했습니까? 31.몰로토프칵테일 사건과 관련해 사후 조사를 받거나 조치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이를테면 1967년 3차 민비연 사건 때)

48 4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녹취문 김도현 선생님 Tape1. 면담자 :예,오늘은 2008년 11월26일입니다.오늘 어 김도현 선생님을 모시고 6 3운동과 관련한 증 언을 뭐 증언이라기보다는 제보를 좀 받고자 해서 왔습니다.아 여기는 아 김도현 선생님 사무실 이고요.6 3그 6 3사태(6 3민주화운동)당시에 어 그 문리대 학보 '새세대'(서울문리대 신문)기 자셨었나요? 구술자 :그게 이 6 3사태(6.3민주화운동)는 1964년도고요.어 저는 62년,3년(63년)그렇게 '새세대'일을 했어요.인제 2년 62년에는 그 말하자면 기자로서 했고,63년에는 편집장이든가 주간이든가,뭐 그런 이름으로,말하자면 편집하고 신문 만드는 책임을 했었죠.64년도에는 그걸 고만(그만)둔 고만(그만) 뒀죠.4학년이 되어가지고. 면담자 :64년도에 4학년? 구술자 :예.그렇죠.그렇습니다. 면담자 :그 당시에 그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에 대해서 조금 좀 말씀을. 구술자 :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는 사실은 내가 깊이 알지 못해요.그게 아마 그게 내 3학년 때나 2학년 때라고 생각을 하는데,우리 과에 있는 뭐 김중태,현승일 그런 분들이 만들었는데 내가 거기에 그 무 슨 모 이렇게,이렇게 무슨 말하자면 핵심 회원의(이)아니었어요. 면담자 :그럼 뭐 '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쪽은 뭐 자세히는 잘 모르시고요? 구술자 :예.예.예. 면담자 : 그러고 그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가 그 당시에 몇 년도에 만들어졌습니까? 구술자 :그런데 제가 기억하기에는 그 투쟁위원회라는 무슨 그런 게 정규적인 그런 조직은 아니었던 것 같고 예를 들어서 뭐 규약이 있다든지 뭐 임원이 분담이 되어서 정해져 있다든지 그런 건 아니었던 걸 로 기억을 해요.이걸 하는데 있어 그걸 하는 사람들은 대외적으로 나중에 뭐 유인물 같은 것 만들고 할 때 그런 이름을 썼잖나 싶은데 뭐 조직이나 규약을 가진 그런 단체는 아니었던 것 면담자 :가까이 모이는 구술자 :가까이 모이는 사람들이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만난 것 같지는 사실 않는데 나중에 뭐 그렇게 그냥 비쳐진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면담자 :핵심멤버들을 그냥 위원으로 나중에 구술자 :새로 말해서 위원이란 이름을 누구한테 줬다든지 그렇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면담자 :그러면 3 24시위( )하고 관련해가지고는 이 '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이나 또 그

4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3) 투쟁위원회 같은 데 어떤 역할들 하셨던? 구술자 :제 기억으로는 그 3 24는 64년도에 일어났는데 63년 그 전 해지요.그 전 해에 '한일회담'이 진 전되는 거에 대해서 그 뭐 사회에서도 관심이 있었고 학생들도 상당히 관심이 있었어요.그래서 제 기 억으로는 가령 일본 NHK 기자들이,기자가 와서 전 한 번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는데,'한일회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뭐 이런 거 인터뷰 한 적 있고.그래서 그 때는 그 인터뷰를 아마 좀 상당 히 했을 거예요.하고 뭐,한 두 시간 했지 싶어요.하고 NHK 기자가 라이타를 하나 선물로 저한테 주고 간 기억이 나는데 전 담배를 안 피워서 라이타가 가만 내가 누굴 줬지 싶은데 제 얘기는 그래서 인제 학생들 중에 한일 회담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는 그런 학생들이 인제 많아졌죠.저도 관심 을 좀 가지게 되어가지고 뭐 이 책이 책 같은 것을 보게 됐는데,뭐 예를 들며는 당시 재일교포들이 낸 잡지라고 기억을 하는데 한양 이라는 게 있었어요.일본에서 찍었는지 종이가 그 하얀 종이 요새는 흰 종이가 많은데 그 때는 되게 하얀 종이가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한양이라는 잡지에서 '한일회담'을 많이 다루었어요.그런 것도 있었고 또 뭐 사상계 같은데서 그런 걸 다루었고 그래서 어떻든 '한일회담 '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들을 가졌죠 그 전에.가지고 어 그래서 아마 끼리끼리 모여가지고 뭐 그 얘기 들을 하고 이렇게 했는데 아마 새로 제가 기억하기에는 그러나,무슨 그런 정규적인 조직을 규약을 가 진 그런 조직의 형태로 움직였던 것 같지는 않고요.또 음 그 때는 '한일회담'하고,그 그 박정희 말하 자면 군사정권하고 같은 한 묶음으로 늘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박정희 군사정권을 어떻게 보느냐 그런 거에 대한 그 관심에서 나온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네요.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하 면은 대개 한 그 두 가지 세 가지 쯤으로 생각이 나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는 말하자면 박정희 군 사 쿠데타가 그 부패하고 그 다음에 무능한 그런 그 구 정치권에 대한 구정치권을 청소를 하고 뭔가 새로운 힘을 보여주는 그러면서 또 표방하기를 뭐 민족적 이런 말을 많이 썼어요.그건 그런 걸 긍정 적으로 보는 그런 흐름이 하나 있었고,오 저 또 하나는 그 좀 자유 지금 얘기 지금 말로 하면 자유민 주주의라고 할까요?그런 입장에서 이 사람들이 군사정권을 만드는 게 아닌가 이래서 아주 좀 비판적 으로 본 그런 흐름이 있었고,또 하나는 좀 그 이 그렇게 그렇게 중층된 복합된 판단이 아주 어떻게 할 수가 하기가 어렵다라는 지금 기억으로는 박 정권이 군사정권이 등장하자마자 말하자면 혁신계 그 때 뭐 민족통일 이런 걸 많이 주장하던 혁신계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민족통일연맹 이런 것을 굉장히 인제 탄압을 하고 막 하자마자 다 잡아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흑 새 생각하고 생각을 좀 비슷 하게 하는 사람들도 잡혀 가면서도 뭔가 그 박 정권에 대해서 기대를 하는 그런 흐름이 상당히 광범하 게 있었어요.그런데,인제 그 정권이 '한일회담'을 추진을 하니까 '한일회담'에 대해서 또 생각들이 아 마 좀 이 저 군사정권이 추진하는 거니까 아 좋은 게 아닐 것이다 이런 흐름도 있었고,무언가 기대를 해 보는 흐름도 있었고 그렇지 않았나 싶어요.음 그래서,음 그 때 세계적으로도 그 때는 그 소위 제3 세계 뭐 아시아 아프리카 인제 민족해방운동 뭐 이런 거에 대한 기대들을 반둥회의니 뭐 이런 게 있어 가지고 그런데 기대를 상당히 하는 젊은 층이 많이 있었죠.학생층에서도.그래서 뭐 아프리카 같은 데 서도 뭐 뭐 그렇고 그 해엔가에 쿠바 쿠데타가 기대를 하고 이런 그런 흐름이 있었어요.있었는데 그 런 거하고 이 '한일회담'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좀 그런 흐름하고 달리 가는 게 아닌가 라는 말하자면 미국이 그 이 저 어 이 동북아시아에서 결국 다시 이 일본하고 미국하고 그 안보동맹을

50 4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하면서 한국을 안보동맹 속에 끼워 넣고 그것도 바로 끼워 넣는 게 아니고 미국 저 일본을 통해서 일 본의 하위 이 그런 것으로 한국을 끼워 넣지 않는가라는 그런 시각이 그래서 한국한테 '한일회담'을 상 당히 그 강박을 하고 또 일본에 대해서도 강박을 하고 그런 게 아니었나 한다.그게 거의 그렇게 아마 학생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죠.나중에는 뭐 그 그 그 점에 대해서 구체적인 자료로 그 때는 문헌으 로 나온 건 없었는데 나중에는 그게 뭐 문헌으로도 그런 근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면담자 :그 당시에 보셨던 잡지 한양 이나 사상계 같은 경우에는 '한일회담'에 대한 논조들이 대체로? 구술자 :그 논조들이 인제 어 두 가지로 비판적이었는데 두 가지 비판적인 각도는 좀 달랐지 않았나 싶 어요. 한양 같은 데는 다소 그 지금으로 보면 좌경적인 그런 시각이 있는 것 같고 말하자면 인제 미 국이라는 어떤 그 제국적인 그런 세력이 그 일본이라는 그 자기네의 그 좀 자기네보다 좀 종속적인 그 런 제국주의를 앞세워가지고 한국을 그런 동북아 자기네의 방위동맹에 전위로 편입하기 위해서 한다라 는 그런 기본적인 틀 위에서 '한일회담'을 만들어간다.그래서 이것은 한국경제를 일본에 예속을 시키 고 또 일본이 그 때 그런 시대평가로는 일본이 인제 6 2(6.25)를 6 25전쟁을 통해 가지고 경제적으로 부흥을 했는데 고 무렵이 되어 가지고는 경제 발전이 상당히 그 생산 이런 것도 과잉 상태에 이르러서 뭔가 인제 새로운 시장이 필요로 하고,그런 단계에 와 있는 걸로 인제 그 막 썼지 않았나 싶어요.그 런 각도에서 '한일회담'을 비판했던 게 한양 같은 데는 그랬던 것 같고,사상계 같은 데는 그거하고는 좀 다른 각도에서 예를 들며는 그 이승만 박사 시절에도 '한일회담'을 준비했기 때문에 그 때 상당히 자료를 '한일회담'에 임하는 한국 쪽의 자료를 만들었다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금괴를 뭐 얼마를 가져 갔다느니 문화재를 얼마를 수탈했다느니 뭐 그런 등등의 것을 만들었는데 지금 일본 당시의 정부 군사 정권은 그러한 그 자료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다.굉장히 '한일회담'을 빨리 타결하기 위해 가지고 그 런 자료들을 그 묵살하고 아주 좀 우리한테 그 저자세로 그렇게 한다라든지 그런 좀 다른 각도에서의 비판이 있었다고 봅니다.어,그런데,음 그래서 예를 들어서 인제 아직도 그 때 '한일회담'이 전모를 드러내기 때까지는 말하자면 돈을 받아 온다라고는 모두 생각을 했지마는 그 돈이 정확히 뭐냐 무슨 보상이냐 배상이냐 뭐 나중에 일본사람들이 표현한대로 경제 협력자금이냐 이런 게 저희 기억으로는 어 완전히 전몰될(전모가 드러날)때까지는 불명확한 어 그러니까 그 일반적인 국민들은 뭐 지금도 그 렇겠지마는 정서나 우리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논리로는 당연히 배상이나 보상 그런 거여야 한다라 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마 뭐 경제 협력 이런 정도로 드러나고 또 액수라는 것도 그 나중에 저 3억 불 더하기 2억불 더하기 1억불 이런 식으로 타결이 되긴 했지마는 그 때 그렇게 나오기 전까지도 알려 지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규모나 액수에는 못 미칠것이다라는 얘기가 나오니까 아 그런 두 가지 쪽에서 비판이었다고 생각해요. 면담자 :그러면 한양 쪽은 조금 막스주의적인(마르크스주의적인)세계제국주의적인? 구술자 :음 좀 그런 각도 면담자 :시각에서 보는 것이었고,사상계 쪽에는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구술자 :음 그렇게 분류를 할 수도 있겠네요. 면담자 :그 당시에 그러면 그 제3세계 에 관한 어떤 정보들이나 이런 것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술자 :기 제3세계 의 정보는 뭐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뭐 그 신문 어 또 간간히 그 일본신문들 그리

5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5) 고 뭐 어 인제 뭐 저 미국대사관 미국공보원이죠.미문화원 같은 데 있는 무슨 잡지들 뭐 이런 거 정 도였고 뭐 북한 방송을 듣는 경우는 그렇게 저희 기억에는 많지 않았죠.단 간간히 잠간씩 듣는 사람 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자세하게 듣는다든지 그런 경우는 아마 거의 드물었지 않았나 생각이 되 네요. 면담자 :그럼 그렇게 그 '한일회담'에 관한 성격 규정들이 어떠한 뭐 사실 전체적으로 어떤 컨센서스를 이룰 만큼 돼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3 24( )시위나 6 3시위( )를 준비 하면서 그럼 그 성격규정을 적어도 어 그 뭐 '민비연'이나 혹은 투위(투쟁위원회)같은 데서는 그 어떤 성격규정에 기반을 해서? 구술자 :게 아까 말씀드렸듯이 두 가진데 하나는 군사정권 자체에 대한 그 불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 어 주도를 했기 때문에 저도 좀 불신하는 쪽 편에 섰기 때문에 '한일회담'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성격규정 속에다가 다 포함을 시키는 말하자면 다소 미국을 제국주의나 일본을 그 아래 종속된 제국주 의나 이렇게 보는 것도 포함을 시키고,또 그 한일관계를 새 출발하면서 우리가 따져야 될 것들 뭐 합 방조약이 무효라든지 그 다음에 뭐 경제적인 수탈 그 다음에 무슨 뭐 어 침략행위 뭐 이런 거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거 이런 거를 그러니까 '한일회담'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뭘 좌니 우니 할 것 없이 전부 다 게 모아 모아가지고 비판하는 그런케(그렇게)성격을 규정했지 어느 한 쪽만 으로 규정한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면담자 :그럼 그 당시에 뭐 박정희씨 입장에서 보면 이제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고 정권 초기면 어 일반 국민들이 그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인식하고 어 문리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권이 가 지고 있는 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인식하고의 차이가 좀 있었다? 구술자 :음.그런 일반 국민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식은 그 두 가지라고 생각을 하는 데 하나는 소위 구정치인들 그 5 16쿠데타( )로 오 마 된서리를 맞은 민주당 자유당 그 전에 뭐 4 19때 된서리를 맞았지만 그런 입장에서는 박 정권이 독재를 한다,자유 뭐 이런 것을 억압을 하 니까 그런 쪽의 비판이 하나 있었고,또 하나는 정말 가난한데 그 가난을 가난에 대해서 구정권이 굉 장히 무능했다 무능하니까 이 사람들한테 이 사람들이 뭐 그 저 가난을 없애겠다고 주장을 하니까 거 기다가 뭔가 기대를 해볼라고 하는 그런 흐름도 있었죠.있었는데 어 문리대 쪽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두 가지 흐름이 있어서 하나는 그래서 뭐 좀 뭐 군사정권에 대해서 좀 기대를 해볼라는 그런 흐름도 있었고,하나는 아이고 기대할 게 뭐 있냐,지금 어차피 잘 되어봤자 군사독재고 못되면 저거끼리 해먹 는 거고 부패정권이고 뭐 이렇게 보는 그런 시각이 있었는데 '한일회담'을 비판하는 쪽 사람들은 군사 정권에 대해서 불신 그런 거가 뭐 저 흐 흐 주 조류였나(주 조류였지)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면담자 :그럼 그 뭐 3 24시위나 이런 걸 준비를 하시면서 그 몇몇 거론되는 분들이 뭐 김중태 선생님 이나 현승일 선생님 같은 분들이 거론되는데 어 김 선생님하고 관계는? 구술자 :나는 인제 정치학과 우리 같이 입학을 했는데 김중태니 현승일이니 다른 친구들 같이 입학을 했는데 나는 고향이 경상북도 안동인데 김중태 현승일 이 사람들은 대구가 고향이고 경북고등학교를 나왔어요.고향은 같은데 고등학교는 나는 서울에서 나왔고 이 사람들은 안 경북 13) 에서 나왔는데 음 13) 구술자 : 경북을 지칭함.

52 4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그 중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죠.어울린 편이었는데 그러나,꼭 같이 마중 출신 고등학교 14) 가 달라서 그 렇지 달라서 그런지 아주 긴밀하게 그랬던 건 아니었지 않나 약간씩 생각이 그래서 달랐지 않았나 생 각되요.드는데 김중태 같은 경우는 그 전에도 그 나하고 상당히 가까이 지내고 얘기도 많이 했던 했 어요.그래서 이런 얘기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김중태는 고등학교를 내보다 두해 먼저 나왔어요.나 와서 입학할 당시에 그 4 19( )뒤에 그 우리가 4 19가 난 그 이듬해 대학을 입학을 했는데 4 19로부터 1년 사이에 학생사회에서 있었던 그런 흐름을 상당히 잘 알아요.그래서 민통 같은 것 했 던 선배들을 그 중 민통했던 선배들 민통이 인제 윤식이 윤식씨 이수정씨 뭐 박한식 뭐 이런 분들이 많이 관계돼.경북고등학교를 나오고 김중태하고는 아마 그러니까 고등학교 그걸로 하면 1년 차이죠. 대학은 몇 년 차이가 되지마는.그래서 그 그 그 분들하고 김중태는 이미 입학 당시에 친숙하게 알고 그 흐름을 많이 알아요.알아서 인제 에 지금은 이런 얘기 할 수도 있는데 그 책 같은 것도 그 때 만 든 지금 보면 그게 좌익 서적인데 뭐 무슨 저 무든(무슨)대중철학이니 해방직후에 나온 한글로 된 책 그 참 한글이 아니라 우리말로 된 책,그 다음에는 그 그리고 일본에서 발간된 일본책들 이런 책들을 어 김중태가 그 읽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나한테 소개를 해준 게 이쪽에서 나도 소개를 해 주기도 했 고 나중에 또 보관할 데가 없다 그러면서 나한테 어디 한 상잔가 두 상자를 좀 보관하자고 가져온 적 도 있고 그래서 김중태는 우리보다가는 조금 더 그런 거를 깊이 흐름도 알았고 그런 거도 있었고.오, 그래서 '한일회담'얘기를 김중태는 우리보다는 조금 더 정치적으로도 그 말하자면 그 이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많이 발전을 하면은 정권을(정권이)바꿔지는 운동으로까지 나간다라는 얘기를 뭐 꼭 보편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마는 간헐적으로 그렇게 했단(했던)기억이 있고 나는 그 점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는 정도고 반드시 그렇게까지 나갔으면 좋겠다든지 나가야한다든지 나가도 뭐 괜찮다 고 생각했지 그게 아주 저 투철하게 그런 인식까지는 안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 요. 면담자 :현승일 선생님하고는? 구술자 :현승일도 자주 만나고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5 16이 나가지고 그게 하마 아마 하루나 이틀 쯤 됐는데 스,승(현승일),현승일이하고 같이 학교에서부터 저 여기 어디 시내까지 같이 걸어가면서 5 16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났는데 응 현승일이도 5 16정권에 대해서 굉장히 부 정적으로 봤죠.내 기억으로는 이거 뭐 잘 돼봐야 그 군사정권이지라는 저 걸로 이야기를 했는걸 기억 이 나고,나도 좀 그렇게 그 비슷하게 생각을 했고 우리는 그 때 인제 문리대에서 그 민병태 교수가 정치학과에서 제일 나이가 마 마(많은)말하자면 제일 그 위의 교수였는데,에 말하자면 좌장이 되는 교수였는데,민병태( 閔 丙 台 )교수가 정치학 강의하면서 많이 주로 얘기하는 게 라스키를 얘기를 많이 했 어요.그 그러니까 다원주의 이런 얘기를 많이 해서 라스키를 민 교수 얘기를 듣고 우리가 인제 다른 뭐 그걸 현승일이하고는 같이는 아니고 다른 우리 몇몇 친구들이 라스키의 그 영어로 된 저 IntroductiontoPolitics 라는 책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우리가 몇 명이 따로 모여가지고 한 댓명이,읽 읽기도 그랬는데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했는데 라스키는 뭐 아시다시피 좀 이제 사회주의적 영국에서 는 노동자 노동 노동당을 했지마는 또 그리고 당시에 우리가 보기에도 어 우리나라에서도 그걸 민주사 14) 출신고등학교를 지칭함.

5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7) 회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뭐 그렇게 얘기는 할 수가 있지만 출발은 좀 자유주의에서 지금 우리,내 기 억으로는 어떻든 자유가 모든 평등으로 가는 인제 가장 기본적인 권리고 시작이다라는 그런데서 출발 을 했던 그런 입장이니까 아 그 정치학과에서 민병태 교수의 에 새 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은 강의를 많이 들은 쪽은 어떻든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인 그런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그런데 그거는 라스키 민병태 교수는 그렇고,또 김성식(김성희, 金 成 嬉 )교수나 인제 최문환( 崔 文 煥 )교수 어 최문환 교수와 같은 흐름이라고 보는데 박희범( 朴 喜 範 )상과대학 박희범 교수 이런 쪽은 뭔가 민족적인 것 그 래서 민족적인 것 더하기 인제 계획경제가 우리 경제를 빨리 발전시킬 수 있다라는 그런 흐름으로 생 각을 했어요.그런데 그 학생들은 그게 좀 복합이 되어 있지 않았는가 계획경제가 한국경제를 빨리 발 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흐름도 상당히 강하게 가지 저 생각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 또 어떻든 4 19이후에 그 막 그 넘쳐났던 어떤 자유로운 분위기 열정 이런 게 5 16으로 한꺼번에 그냥 다 뭐 무 압사를 당하니까 그거에 대한 아주 강한 어떤 반발 이것이 복합적인 복합적인 그런 비판의 입장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요.나도 뭐 그 비슷한 그런 것 짓 같고요. 면담자 :그 선생님께서는 그 시위나 혹은 3 24나 6 3준비하시면서 그 전에 그 '새세대'같은 경우에는 주간까지 하고 나오 그만 두셨으니까 그 쪽 인맥들하고는 어느 정도? 구술자 :'새세대'는 조금 잘 못 알려져 있는데 '새세대'는 그 문리대 신문인데 그것은 어 내가 나온 뒤에 64년 이후에는 내 사실 '새세대'를 자세히 안 봤는데 굉장히 학생운동이 인제 저 학생운동이 특히 인제 반정부 어 이런데 그 강하게 그걸 했는데 내가 만들 때는 그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어요.학생운동을 많이 저 관심을 가지고 다루기는 했고 그것 말고도 무슨 이 좀 저 전위적인 예술운동 같은 것 이런 것 을 거 많이 우리 내가 만들 당시의 '새세대'는 저 뭐 학과별로 분류를 하면은 내 기억으로는 이 저 정 치학 뭐 이런 거 쪽에 있는 거는 나 하나였고 아 나 하나는 아니지 그 밑에 인제 내가 저 편집장 할 때에는 이현배니 심재준(심재주)이 이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몇 명 되었습니다.그런 흐름이 하나 있 었고,또 하나는 문학 뭐 미술 유평근이라고 불문학하는 그 친구는 불문학은 했는데 미술 이쪽에 많이 관심가지고 있었어요.그래서 뭐 폴크 레니 뭐 이런 거 소개를 하고,오 또 그 그 또 뭐 나중에 독문 학하는 안삼환 거긴 또 우리 하나 위는 김주연이라고 독문학하는 그 쪽은 문학 많이 했고 그래서 '새 세대'자체는 인제 정치 사회 쪽은 학생운동에 많이 관심가지고 있고 또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그 런 걸 많이 다루 다루고 싶어 했고 또 다른 쪽은 문화나 이런 쪽은 그런 뭐 프롤레타리아 문학 이런 쪽보다가는 굉장히 전위적인 어 문화 문학이나 문화를 다룰라고 했던 그런 분위기였죠.근데 근데 그 게 조금 그 그래서 나중에 뒤섞여지는데,뭐냐 하면 그건 신문 '새세대'고 '새세대'라는 사무실이 있었 는데 학생들 신문 맹글기(만들기)위해서 거기에 인제 뭐 내가 거기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려와 오는 거야.몰려 와갔고 그 땐 뭐 요새 들으면 좀 이상하지만 그 땐 뭐 잠 잘 때 없는 학생들이 많았 어요.거기서 뭐 저 잠 잘 때 없는 사람들은 뭐 밤에 자고 뭐 아침에 그냥 어슬렁어슬렁하면서 친구들 한테 돈 얻어 가지고 아침도 얻어먹고 점심도시락 사(싸)오는 것 그것 갈라먹기도 하고 이래서 대 '새 세대'를 중심이라기보다 '새세대'를 거점으로 해서 그양(그냥)그렇게 모여 있는 그런 사람 군이 있었 어.그 사람 군이 나중에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그 저 그 어 그 저 잠깐만요.그래서 사람 군이 학생 운동에 많이 관여를 하게 되었죠.그리고 뭐 나중에는 김지하 같은 친구 학생운동관계 뒤에는 '새세대'

54 4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사무실 벽에다가 뭐 이 저 무슨 검 검정색 먹인지 페인튼지 가지고 그림도 그리고 벽화도 그리고 뭐 이래가지고 어 그래서 인제 신문 '새세대'하고 '새세대'를 거점으로 몰려있는 그 학생군하고 그 그런 좀 구별이라기보다는 그런 게. 면담자 :그럼 그 당시에는 그 당시에도 대학신문이 있었나요? 구술자 :대학신문이 있었죠.대학 신문이 있었는데 에 그 때 문리대라는 대학이 좀 무슨 저 대학 중의 대학 뭐 이런 식으로 문리(문리대)학생들이 생각을 하고 이래가지고 좀 대학 그 그래서 따라서 서울대 학 전체보다가 문리대가 좀 좀 특별하면서 더 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그거 하고 곁따라가지고 신문도 대학신문보다가는 좀 '새세대'가 좀 수준이 높은 게 아닌가라는 그런 뭐 생 각들 하고 했는데 에 사실은 대학신문은 전문 기자들이 만들고 학생들은 인제 기자로서 그냥 취재정도 를 하는 거였고,어 대 우리 '새세대'는 완전히 학생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뭐 교수는 학생과장이 인제 그 이 학생과장 발행인 학장이었고 학생과장이 결재를 맡아 가지고 신문을 내긴 했지마는,그 내가 할 때에는 강두식 교수가 독문학하신 분인데 이 분이 학생과장인데 그 분이 사람이 아주 호인이고 그래서 그렇게 별로 관여를 하지 않았어요.학생들이 말하자면 마음대로 맨들었죠(만들었죠).어,만들어서 뭐 어 좀 학생문제를 다룬 거는 나와가 나오며는 배부를 가령 이제 4 19를 앞두고 뭐 신문이 나오며는 배부를 못하고 있다가 4 19지나가지고 배부를 한다든지 뭐 그런 경우가 어 상당히 있었죠.있어서 있었는데 어 그래서 그 '새세대'는 학생들 손으로 완전히 만들었기 때문에 에 뭐 전체가 다 그렇게는 안 생각했지마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새세대'가 더 좋다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을. 면담자 :그럼 '새세대'도 이게 신문의 형식이었습니까? 구술자 :예 신문 신문 4페이지,4페이지로 해 가지고 내가 몇 장 있는데 종이가 바스라졌더라고 오래 되 니까 그 지포제.그걸 내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지 어디 서울대 어디 도서관에 줘 버릴려고 생각하는데 종이 전부 부숴지더라고.오 그 뭐 지금도 보관되는지 안되는지마는 저 그 때는 신문이 나오며는 대학 저 서울대학도서관하고 국립중앙도서관하고,그 다음에 각 대학도서관에 보내기도 했는데 보관되었는 지 안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4페이지고 3천장을 찍었지.인쇄는 일요신문이라고 지금 그 남대문 앞에 어 있었는데 거기서 찍었고. 면담자 :예.그러면 어 *먼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구술자 :그 인제 그 김중태 이 이 이 이 이 패들이 말하자면 그 뭐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고 또 해서 그 때 63년도에 아마 아까 잠깐 얘기를 했습니다만 저 그 NHK니 이런데서 학생 저 저 저 '한일회담'에 대해서 나한테 취재도 해 가고 뭐 그래서 나도 '한일회담'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한일 회담'에 대해서 어떤 학생들이 태도를 보여야 된다라는 그런 모임을 64년도에 데모가 있었고 63년도에 뭐 몇 번 항거는 가졌는데 내가 무슨 많은 발언을 했다든지 뭐 무슨 뭘 이렇게 주도적인 뭐를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고요.않고 거 어디 거 맨들어(만들어)온데도 그런 걸 써 뒀두만.처음에는 내 기억 에 그 3월24일이 아니라 3월17일인가 뭐 그래 그날 뭘 데모를 하기로 했 했어요.그까지는 인제 그 날 모이는 자리에 내가 있었고 그 때 징집 신체검사를 하기 위해서 아마 하라고 통지가 와 가지고 그 그 그 무렵에는 내가 3월 17일 그 전에는 에 안동을 갔 그 때 고향에서 인제 그 신체검사를 받는데 갔어 요.가서 나는 3월17일 왜 데모를 못했냐고 인제 그랬죠?그랬는데 못했더라고요.못하고 거 서울에 왔

5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9) 더니 인제 뭐 내 왜 못했다는 거에 대해서는 이유는 내가 지금 잘 모르겠어요.기 기억을 못 할 수 없 고.어쨌든 그렇게 되었는데 그 문건을 못 만들었다고 오 내한테 뭘 써 달라고 그러더라고.그래서 내 가 썼어요.뭐 무슨 선언문인 선언문이죠 아마?그걸 썼어요.썼는데 어 에 에 에 그래서 그 모임에 내 가 저 참석은 몇 번 했는데 뭘 주도적인 그런 건 내 기억에 한 것 같지는 않고 선언문을 쓴 것도 내가 쓰겠다고 그런 건 아니었고 뭐 어떻게 돼서 하여튼 쓸 사람이 없다고 내보고 좀 쓰라고 그래서 썼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면담자 :그럼 그 당시에 그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이제 정치적으로 3 24준비과정이나 혹은 6 3준비 과정에서 어떤 컨센서스를 이룬 상태에서 운동을 시작을 했었던가요? 구술자 :그 모이는 사람은 컨센서스를 이뤘다고 봐야죠.봐야 되는데 음 그게 학생들 전체적으로 봐서 그런 컨센서스를 이루었는가는 이 조금 달리 봐야 될 겁니다.저 새로 말해가기고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합적인 마 지금 그 때도 그렇겠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렇고 굉장히 복 합적인 에 꼭 무슨 주도자의 생각하고 같아서 거기에 동조해 가지고 그 시위에 참여하고 운동에 참여 한 것 같지는 않아요.어 왜냐하면 그 그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 자체가 복합적이기 때문에 에 말하자 면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인 식민지가 되지 않을까 무슨 또 그 사람들의 그 반공 뭐 그 어 방위망 구축 의 무슨 그 톱니바퀴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이런 비판도 있고 또 민족적인 자존심이라는 입장에서 일 본과의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교섭이 정말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게 아니가 그런 것도 있고,오 또 직 접적으로 주도하던 그 군사정부가 독재적인 정부고 부패한 정부를 가지고 이놈들이 뭐 나중에 뭐 신용 하 같은 교수들은 최근에 에 뭐 당시에 그 일본에서 돈을 미리 뭐 얼만가를 받았다는 게 CIA문서에서 나왔다라고 최근에 인제 신문에서 난 것도 낸 것도 봤습니다마는 그 때는 구체적인 제시가 없이도 그 런 말들이 유언비어로 아이 저 정치자금 마련할라고 돈들 미리 받고 말이지 이렇게 한 게 아닌가 이런 그런 이렇게 복합적인 그런 거가 좀 느슨한 그런 컨센서슨데 그게 자꾸 진행이 되면서 그 군사정부의 탄압 같은 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하니까 어 점점 컨센서스가 좀 강해지는 게 아닌가 그런 인식 을. 면담자 :3 25시위하고 관련해서는 그 때 어 문리대하고 고려대 연세대가 다 참여한 걸로 되어 있는데 그게 그 과정에서 어떤 계획이나 뭐 그렇게 연대 시위를 하기로 한 구술자 :아마 그 내가 직접 교섭한 것은 아니고 나는 그냥 짐작정도만 하고 있었고 그 때도 눈치들은 있어서 그런 것 뭐 남이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던 것 자세히 알라고는 안했어요.왜냐하며는 그 전 에 우리가 몇 차례 그런 시위가 학생운동 시위가 있었다고.61년도에 그 그 한국 여자가 그 이 동두천 인가 의정부에서 그 린치를 당했다고 한 그래서 마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라고 그래가지고 시위를 한 번 했던 적이 있고 또 그 다음해는 인제 박정희 군사혁명 세력들이 민정으로 넘어가느냐 안 넘어 어 민정하겠다 그랬다가 말았다 그랬다가 해가지고 그것을 비판하는 그런 시위도 있었고 해서 어 그 이미 당국도 마 안 그래도 그 때는 학교에 경찰이니 뭐 정보기관이니 많이 와 있었으니까 다른 학 저 그런 운동할 때 그저 눈치껏 이렇게 아는 거지.누가 뭘 하고 어디하고 연결하고 아니고 자기가 맡은 일이 아니면,비교적 그 나는 다른 사람볼 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생각인데 나는 별로 관심을 안,저 가질라고 안했죠.안했는데 짐작하기에는 그 때 김중태가 많이 노력한 걸로 생각을 하는데 고려대학의

56 5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최장집 어 저 서진영 아마 최장집 그런 쪽하고 접촉을 했 했고,연세대학도 또 정준성 뭐 박동혁 박영 철인가 또 이영철 뭐 이런 친구들하고 접촉을 했어요.했을 거예요. 면담자 :이제 이걸 보면 또 그 3 24시위하고 관련해가지고는 어 김중태 선생하고 현승일 선생님하고 김도현 선생님 세 분이 특히 많이 알려졌다고. 구술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지.그렇게 되었는데 나는 내 자신이 그 이걸 주도적으로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사실은 별로 안했어요.안했는데 인제 그 3 24선언을 그 때 준비가 안됐다고 그래서 나한테 쓰라고 해서 썼고,썼는데 당일날은 나는 그날 프린트를 한다고 그러기에 밤을 세워서 막 졸립고 해 가지고 그 때 뭐 사실은 뭐 집도 없고 뭐 어디서 잤는지도 기억도 안나요.뭐 친구 집에서 자기도 하 고 뭐 길가에서도 자기도 하고 이래서 기억도 잘 안 나는 것은 잠을 어떻든 못자고 해서 그 날 내 데 모에 현장에 없었어요.3월 24일은.없었고 그 데모가 인제 그 어 글쎄 인제 서울 저 문리대에서 하고 어 이 이렇게 한 뒤에는 그 전국적으로 확산이 돼가지고 저 이십 24일부터 24일 25일 26사흘 동안 확 산이 돼 가는데 확산까지 준비했거나 그렇지는 않았죠.그런데 상당히 자 자 자연발생적으로 확산이 되어 가는 걸로 갔고,그 다음에 음 그렇게 된 뒤에 며칠 뒤에 그걸로 해 가지고 김중태를 구속을 했 어.4월 뭐 7일인지 8일인지 모르겠네 하여튼.구속을 했는데 김중태를 구속을 아.3월24일 데모 뒤 에.그 내가 잘 아니 아니 그 때라지.구속을 했어.그 구속 그리고 몇이 모여가지고 야 이거 사흘 한 뒤에 그냥 꺼져서는 안 되겠다.그러고(그리고)김중태도 구속이 되었다.그리고 4 19도 오고 하니까 우리가 이거를 불씨를 살려야겠다.이래가지고 뭐 데모를 하는데 그 뭐 나는 뭐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데모하자고 나서서 이렇게 큰 소리로 얘기하는 그런 일은 별로 안했던 사람인데 뭐 할 사람이 별로 없 더라고.그래갖고 뭐 뭐 좀 좀 우발적으로 어 뭐 이케(이렇게)여러 사람 앞에서 이거 해야 한다고 얘 기를 했 했죠.그래서 그게 4월 그 아마 9일인가 데모 한 번 했을 거예요.하고 다시 4월 뭐 4월 17일 인가 또 한 번 데모를 했을 거예요.그 데 그 데모에서 인제 내가 좀 앞장을 선 셈이지.뭐 해야 된다 고 연설 비슷하게 말도 하고 뭐 이랬고 뭐 그쯤 했어요.그 쯤 했고 인제 나 그리고 4 19때에는 행사 를 했는데 뭐 내가 아마 4 19선언문이라는 것을 써 가지고 그 학생회를 그 학생회에서 발표를 하는 데 그 때 회장이 김덕용(김덕룡)이었는가 하여튼 뭐 그랬 그랬어요.그래 내 그대로 발표 내가 쓴 대로 발표되었는지 가필하고 수정되었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뭘 써주긴 써 준 것 같은데 제 4선언문이거든 요.그 전에도 내가 써 줬는데 그대로 발표되었는지 수정이 되었는지 이창수 회장할 때도 3선언 가능 성인데 그래서 그랬죠.그랬고 셋이라고 나온 거는 그 계기는 그 5월20일 날 그 문리대 교정에서 한 소위 황소식민족적민주주의의 장례식 그 때 인제 내가 글을 몇 가지 썼죠.몇 가지 쓰고 뭐 그 다음에 인제 김지하더러 조사를 쓰라고 한 사람도 내가 인제 그 김지하 마당에 벤치에 앉아 있길래 김지하는 그 전에 인제 그 '새세대'를 내가 편집장으로 만들 때 김지하 글을 한 번인가 실은 적이 있어요. 추의 미학 인가 그런 글을 실었고,또 김지하는 그때 그걸 포말이즘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뭐 이렇게 형상을 시를 뭐 예를 들어서 뭐 물고기 모양으로 시를 이렇게 쓴다든지 한반도 모양으로 써 이래가지고 전시 회를 하고 뭐 그리고 술도 좀 가끔 먹고 해서 그래서 내가 김지하가 내 생각에 저 친구가 그런 글을 쓰면 잘 쓰겠다고 싶더라고.그래가 그래서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보고 저 당신이 이걸 좀 쓰라고.그 래서 김지하가 쓰게 되었을 거예요.아마 조사를.쓰게 되고 나는 뭐 선언문하고 뭐 격문 뭐 이런 거

5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1) 하여튼 여러 가지를 썼죠.여러 가지를 쓰고.그래서 음 그 시위가 있은 뒤에 경찰에서 현상수배를 했 어요.그 저 우 우리 사진도 있습니다.그리고 저 현상금 만원 해가지고 그 세 중 저 김중태 현승일 저 세 사람을 붙여가지고 그래서 유명해진 거죠.유명해진 거죠.경찰에서 유명하게 만든 거죠. 면담자 :3월24일 날 시위가 있고 그 이후로도 쭉 이제 구술자 :했죠. 면담자 :상기 한 4월19일 정도까지가 이제 전부 다 5월20일 구술자 :5월20일 날도 하고. 면담자 :그리고 3 24시위 다음에 이제 정부에서 학생대표들을 초청했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 당시에 게 그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씨하고 정치학회장 김용한(박용환)씨 등이 갔었는데 그 당시에 학생회하고 그러면 시위를 주동했던 쪽하고의 관계는 어떻고,또 이 사람들 학생회 대표들이 어 어떤 그 운동을 지휘했던 사람들의 대표성을 가지고 어 이 정부의 사람들을 만났다든지. 구술자 :그 시위 자체는 학생회하고 아무 관계가 없고 그냥 뭐 어 관 관계없이 저 만들어갔고 그러니까 나중에 저 정 그 뭐 뭐 청와대 갔다고 들었는데 그 때 제 기억으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그 거에 대해서.없었는데 그 사람들하고 무슨 제가 알기에는 뭐 상의를 했던 것 같지는 않고 학생회도 뭐 다 이름 얼굴알고 아는 사람이니까 아 뭐 특별히 그걸 나쁘게 생각한 것 같지는 않는데 하여튼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그런데 상의를 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모르겠어.나 나는 모르겠어. 면담자 :예.그러 그 혹시 그 괴소포 배달사건에 대해서는. 구술자 :괴소포 배달사건은 뭐 특별히 아는 게 아니라 어 그 학교에 왔다고 그러더라고.왔다고 그러고. 신문에 난 거 봤고. 면담자 :학교로 배달이. 구술자 :학교로 배달이 됐죠.에. 면담자 :선생님한테는 뭐. 구술자 :나한테는 안 왔지.아마 어 그게 아마 저 김중태하고 현승일도 왔는가 하고 고려대학의 박정문 (박정훈)가고오고 거기 거기 몇 군데 왔을 거예요. 면담자 :그런데 *님께서는 그러면 4월19일 날 선언문이 그게 제4선언문였던? 구술자 :예.예,예.그렇게 쓴 것 같애요(같아요).쓴 것 같은데 그대로 발표를 했는지 뭐 그 가필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면담자 :그럼 그 그 4선언문 뭐 5선언문 뭐 이런 게 또 있을 건데. 구술자 :그 아마 회마다 에 했죠. 면담자 :회마다. 구술자 :그 인제 이수정씨가 쓴 게 제일 먼저 쓴 거고 그건 4 19때 한 거고.그 다음에는 음 그 다음에 는 5 16직전이 되잖아요? 면담자 :예 구술자 :그건 아마 누가 쓴지 모르겠어요.그건 아마 뭐 누구 모르겠고 3선언은 또 내가 쓴 것 같은데 그 때는 이창수가 회장이었는데 에 내가 3학년 때죠.거기 그대로 발표했는지 그냥 가필이 되었는지는

58 5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모르겠고요.에.4선언도 그런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고. 면담자 :그 당시에 또 뭐 그 이후로 뭐 80년대까지 계속 하신,학생 학생 운동권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그 학원사찰 문젠데 그 당시에 학원사찰하고 그 'YTP'(YouthThoughtParty, 靑 思 會 )조직하고 에 대해서는 뭐 기억나시는 대로. 구술자 :음 그거는 학원사찰이 있다는 것은 그 때 학생들 뭐 학생들 뿐 아니라 학교의 관계있는 사람들 도 다 아는 얘기고 이거를 온데서 나왔으니까 뭐 동대문경찰서,시경,치안국 뭐 어 그 다음에 뭐 정보 국 정보부 뭐 그 다음에 또 나름대로 군 정보기관들 뭐 이리 했을 거예요.했는데 다 아는 얘긴데 그 게 'YTP'(YouththoughtParty, 靑 思 會 )라는 조직을 갖추었는지는 에 모르지요.몰랐죠.몰랐고 나는 또 게 더구나 몰랐고 몰랐는데 내가 그것 때문에 조금 어디 저 그런 거기 누구 저 저 저 경향신문에 있던 그 사람의 글인가 책인가에 그런 걸 쓰기도 했더니만 송철원이하고 나하고 그 하숙을 같이 했지요.그 전 해에 송철원이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오고 어 집안이 뭐 당시로서는 밥도 먹고 어 뭐 부자는 아니지 만 그냥 잘 잘 살았는데 좀 뭐 이렇게 어울리는 것 좋아하고 그래서 3학년 2학년 땐가 나하고 몇 달 하숙을 같이 했어요.어 그랜 그래서 친하죠.또 나는 고향이 경상북도지마는 그 서울에서 사대부고를 나와서 조금 인제 그 경 경북고등학교나 이런 데 출신하고는 조금 또 서울 사 학생들의 분위기를 아니 까 좀 달르죠(다르죠).그래서 그랬는데 그 때 인제 경기고등학교 나온 선배가 그 정보국에 들어갔다라 는 말이 있었지.김덕창씨가 있어서.내가 조금 그 경기고등학교 출신들 저 송철원이 말고도 한 후배인 이영섭이니 이런 친구들 또 우리 동기는 민병석이라고 그 때 학생회장 출마를 했던 친구가 있는데 난 내가 그 친구랑 또 친하고 그 친구 선거 때는 내가 또 선거 좀 운동도 좀 했어요.나중에 안 되기는 했지만.그런데 그래서 내가 송철원이한테 조금 약을 올리는 뭐 경기고등학교 출신들은 왜 그러느냐? 이런 약을 올리는 말을 했을 했을 거예요.아마.했는데 그런 게 송철원이한테는 좀 자극이 되었다.그 런~그게 자극이 되었지 않나 그렇지 싶더라고.그래서 송철원이 나중에 누굴 조사를 해 가지고 뭐 본 인이 막 끌려가서 인제 린치를 당하고 했는데,나 자신은 'YTP'(YouthThoughtParty, 靑 思 會 )니 이런 게 학원사찰이 있다는 것은 알았겠 알았지마는,그 그런 학생 그런 조직이 있었다는 거에 대해서는 사 실 잘 모르고,몰랐고 또 그거 조사하는 과정도 나는 잘 몰랐어요. 면담자 :그 괴소포가 배달.선생님 조금 쉬셨다가. 구술자 :목이.자꾸 얘기를 해서. 면담자 :그 괴소포 배달사건하고 관련해서는 그게 배달된 후에 뭐 어떤 학교 내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 는가요? 구술자 :글쎄 그 뭐 학교로 배달됐다고 얘기 듣고 어 신문에 났고 어 그래서 그건 그걸 기관에서 장난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죠.뭐 직접 나한테 배달된 게 아니래서 더 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면담자 :그걸 그 일로 해서 뭐 불이익을 받은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은 없었나요? 구술자 :그 불이익 없었을 거야.뭐 신고했을 걸요?받은 사람이 그냥.그게 아마 지금 내 기억으로는 비밀리에 온 게 아니고 그냥 학교 우편함에 와 있었지 싶은데.그렇지 않았던가요?보도가 있을 거예 요.

5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3) 면담자 :예.예.그 뭐 정부에서 만약 조작을 하고자 했었다면 뭐 그 이후에 학생 운동권에 뭐 탄압이라 그럴까?그런 것하고 관련을 해서 보면 그런 걸로 해서 뭐 이렇게 구속을 시킨다든가 이런 일들이. 구술자 :그런 것보다가는 만약에 그걸 받고 신고를 안 하고 숨겨 가지고 있었다면 뭐 그런 식으로 학생 운동을 탄압하는 빌미로 나갈 수 있었겠지만 아마 신고를 했을 것도 그 신고안할 사람 없고요.다 빤 히 아는데.그거 보다는 나는 인제 그런 그 이 오히려 인제 그런 이거 봐라 이 학생들이 이상한 학생 들이니까 이런 게 오지 않느냐라는 그 여론으로부터 어 말하자면 고립을 시킬라고 하는 그런 거였겠지 요. Tape2. 면담자 :다음에는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하고 관련해서 어 이 시위가 당시 그 공소장에 보면 5월14일 날 기획해서 16일 날 확정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과정을 조금 설명을 구술자 :내 날짜는 뭐 하나도 기억이 없어서 모르겠고요.어쨌든 인제 에 4월 4 19까지 데모가 있었고 또 구속이 되었던 김중태는 나왔고.나도 그게 내가 4월 달에 잡혀갔는지 3월.4월이었던 모양이지.잡 혀갔어요.잡혀가서 사흘인가 있다가 나왔지요. 면담자 :그 당시에 그 때 세 분 수배되어. 구술자 :그거 말고 그 전에 4월에 5월20일 전에 사흘인가 있다가 인제 아~3 24뒤에 잡혀갔나?하여튼 박대통령이 그 내보내라고 그래서 그냥 그냥 석방이 되었는데 사흘 형무소.내 기억에는 그 때 아마 성유보 그 때 이름이 성철순데 성철수도 잡혀갔고.그 때 모두 막 꿰 갔어요.한 예난 명 잡혀갔지 싶 어요.김중태는 혼자 잡혀갔고 우리는 한꺼번에 잡혀갔고.어 그랬는데 그 때 인제 그 한승헌( 韓 勝 憲 ) 씨가 그 때 나중에 인권변호사를 하는 한승헌씨가 그 때 서울 공안부 우리 담당 검사였어.그래서 그 뭘 내보내는 날 불러가지고 어 나만 부른 게 아니라 10명이든지 20명이든지 한꺼번에 불러가지고 훈계 를 하면서 내 보내더라고.그래서 우리가 좀 그 훈계하는 걸 못마땅해서 자기가 내 보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내보라고 해서 내보는 건데 왜 그렇게 훈계를 하느냐라는 조로 좀 말은 그렇게 안했지만 좀 웃었던 건 그런 기억이 있는데 어떻든 한 번 잡혀갔다가 나왔고.그래서 뭐 그건 그렇고 그래서 뭔가 좀 대규모적인 좀 시위를 해야겠다.요거는 5월 달 5 16을 일으켰으니까 5 16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 도 할 겸해서 그래서 그 대규모적인 우리가 뭘 한바탕하자 이래서 인제 5월20일 기획이 되었는데 에 내가 뭐 여러 명이 모인 자리였는지 뭐 어떤 자리는 잘 모르겠는데 어떻든 민족적 민주주의를 아주 저 뭘 아주 그 아마 내 생각에는 김중태가 이름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하자라고 얘기했던 게 아 닌가 싶어요.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그래서 내가 야~이 그런데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당시로서 는 상당히 그 또 호응을 받는 그런 측면이 있었어요.뭐 그 저 뭐냐 하며는 뭔가 또 그 당시에 제3세 계의 신생국들이 민족이란 말을 많이 썼고 이래서 또 민주주의라는 게 그냥 서구식 민주주주의가 꼭 우리한테 맞느냐라는 뭐 이런 뭐 그런 분위기도 있었고 그래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상당히 그 호응을 받는 측면이 있었어요.그래서 내가 그 이거는 그런 측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는 그렇 게 나쁜 말이라고는 꼭 말할 수가 없으니까 아 끝에 공화당이 소위 출범을 해 가지고 공화당의 상징이

60 5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황소'였죠.그래서 인자 내가 '황소식'이라고 앞에 하나 붙이자 그래 내가 얘기를 했던 것 같애요(같아 요).그래서 그걸 정식으로 붙였는지 안 붙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떻든 그래서 인제 그래서 '황소식 민 족적 민주주의'뭐 이렇게 된 거 되었어요.그래서 인제 그걸 그런 큰 행사를 하기로 했고 그 준비하면 서 여러 사람 모인 자리에서 그랬는지 어짼지 난 사실 기억이 없습니다.없는데 내보고 뭐 글을 좀 쓰 라고 그래서 내가 뭐 선언문 뭐 격문 뭐 무슨 5 16성토하는 것 뭐 이런 글을 썼고 어 김영일 김지하 한테 내가 조사를 좀 쓰라고 부탁을 했고 그러고 아마 그 날 그 날이 아니야.그래 써 가지고 그걸 프 린트를 최혜성하고 나하고 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같이 했던 것 같애.했어요.어디 저 충무로 최혜성의 집이 충무로였는데 글쎄 글귀는 그 때는 그걸 뭐라 그러더라 원지라 그러고 철판 위 에서. 면담자 :가리방 구술자 :가리방.가리방.가리방 위에서 이렇게 그 철필로 긁 긁어가지고 그 다음에 프린터로 밀어가지 고 프린트를 하는데 아마 몇 천 장 했을 거예요.아마 최소한 뭐 천 장이나 이 천 장해야 돼.그런데, 그 때로서는 뭐든지 제일 힘든 게 프린트하는 일이었어요.요새는 뭐 복사를 하고 타자를 치지마는.프 린트하는 일이 아주 그리고 또 가리 뭐 가리방이니 시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돈 받고 해 주는데 가서 해야 되는데 돈 받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위험하니까 안 해주니까 그걸 어떻게 하 는 것이 제일 힘들었어요.힘들었는데 최혜성이하고 나하고 어디 가서 밤새도록 했지 싶어요.해 가지 고 택시를 타고 새벽에야 그걸 누구한테 전달했는지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전달하고 졸려가지고 얼릉 (얼른)어디 가서 잤지 싶어. 면담자 :5월20일 날 구술자 :예.낮에는 잤지 싶어요.잤는가 아니면 그 때는 며칠 취직을 해 있었는데 세대 라는 잡지 취직 을 해 있는데 거 가서 졸고 앉아 있었는지 않았는가 모르겠어.졸고 앉아 있었는 것도 같애요(같아요). 그 그래서 내 그 5월 5월20일은 그건 내가 글을 그렇게 썼죠.그리고는 한 이틀 뒤에 수배가 내려졌는 지 뭐 그럴 거예요.그래서 뭐 수배 내리고는 숨었죠.도망 다니 그렇죠 뭐.5월20일 관계한 거는 그저 내 글 써 준 것,글 써 주고 프린터 맹글어(만들어)준 것. 면담자 :그리고,그 나중에 보면 실제로 그 장례식을 준비를 하고 실행을 하셨던 분들하고 나중에 인제 기소되는 분들하고가 좀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건 구술자 :그 모르겠는데 뭐가 달랐는지 면담자 :지금 어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로는 뭐 조사는 그 김영일씨가 김영일 선생님이 작성하시고 선언 문은 선생님이 작성하시고 뭐 김정남 선생님도 초안을 작성하고 그러셨는데 어 실제로 구성 그 뭐 구 속이 될 때 보면 송철원 선생님이 조사를 작성한 걸로 되어 있고 뭐 이런 식으로. 구술자 :그걸 몰라서 그랬는지 모르지.송철원이는 읽었죠.읽었으니까 기소장에 그렇게 되어있는가?모 르겠는데 내 내가 기소장이 있는데. 면담자 :예.그. 구술자 :송철원이가 읽었지.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는데요. 면담자 :뭐 예컨대 뭐 시위 지도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뭐 그랬다든가 뭐 이런.

6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5) 구술자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왜 그럴 수 없는가하면 그게 우리 전부 잡혀 갔거든요.그리고 그 때 그 다음에는 조사가 아주 강도가 높았기 때문에,에 그거는 그러기 어려웠을 겁니다.거기 저 처음 어 잡혀가기는 그 김중 저저 현승일이는 5그 6월 달 전에 갔어요.아마 29일쯤인가 뭐 그 쯤 갔고,나는 6월 6월1일 날 저 출두했고,승일이라고는 내보다 한 이틀 전에 출두했고 중태는 6월4일 날 출두를 했 거든요.하고 계엄령이 떨어져가지고 6월3일 날 계엄령이 떨어졌 떨어지고 떨어지자 계엄령이 떨어지 자 그 사건 자체가 군 검찰의 지휘를 받았다고 그러면서 그걸 계엄령의 명분도 맹글고(만들고)이래야 되기 때문에 내란으로 했다고 처음에 그걸 그 조사를.그래서 그리고 또 그 동안의 조사 자체가 아주 강도가 높았어요.뭐 그 내가 다는 모르지만 아주 치안국에서도 제일 그 그 아주 저 뭐야 그 간첩을 다루던 그런데서 했고 뭐 우리 조사받은 데가 어 처음에는 동대문경찰서에로 갔는데 동대문 경찰서에 서 그 다음에는 한 하루에 여러 차례 가 놓으니 내 헷갈리는데 어떻든 아마 그 뒤에 그렇지 그건지는 모르겠데.하여튼 저 이 남산에 있는 남산에 있는 서울시경 분실이 있고 어 서울역 앞에 있는 서울역 맞은 편 창녀촌에 있던 서울시경 분실은 신한무역인가 뭐 신한공산가 그랬고 어 남 남 저 서울시 맞은 편에 있던 것은 남일무역인가 뭐 그런데 그건 치안국 분실이었고 또 충무로 영화거리에 치안국 분실 이 삼일무역이라는 분실이 있었고 그런 데 15) 를 다니면서 조사를 했기 때문에 별로 뭐 보호를 하고 싶 어도 보호할 수 없었을 거예요.보호할 것도 별로 없고. 면담자 :그러면 남산에 있던 게 후에 저 중정? 구술자 :아아 그건 다른 거지.저 정보부가 아니고.그 때는 정보부 조사는 남산이 아니었고 그걸 그 때 는 우리가 정보부 조사는 안 받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 뒤에 육 저 동백림 사건 '민비연'(민족주의 비 교연구회)사건으로 잡혀갔을 때 조사한데는 그 때 정보국(정보부)분실이 고양군청 그게 어디냐 하며 는 서울운동장 맞은편에 거기가 거기 고양군청이 있었어요.덕수상고 옆에 고양군청에서 거기 거기 정 보국(정보부)분실이 있었어요.정보 정보수사 분실이 있었어요 거기서. 면담자 :그럼 그 그 장례식까지 제가 제가 이렇게 자료를 보면서 보니까 아마도 대체로 장례식까지 그 이전까지는 정부에서도 운동권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았거든요. 구술자 :예.그게 에 뭐 그 정부당국자가 아니니까 모르겠는데,어 3월24일 날 25일 날 26일 날 데모를 한 뒤에는 박대통령이 인제 그걸 평가를 했지요.뭐 뭐라고 그랬던가?애국적인 시위라 그랬던가?뭐 이렇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조 조 조 오 나쁘지 않게 이야기를 했어요.했는데 그 뒤에 인제 5월20 일 날 시위는 그건 내가 도망 다니면서 극장에 가서 뉴스를 봤는데 뉴스에도 막 틀고 그랬어요.막 돌 던지는 걸 하는 걸 틀고 했죠.했는데 5월20일 날 시위가 연장이 되었잖습니까?그 뒤에 인제 그 학생 들이 문리대 학생들이 그 4 19탑 앞에서 단식을 했지요.그게 인제 쭉 단식 수가 뭐 처음에는 한 2-30 명 하다가 나중에 아마 마지막에는 한 백여 명 이상으로 불어났는 것 같은데 내가 내가 6월1일 날 출 두를 했는가?그래서 5월 달 30,5월 달 31일까지 있나? 면담자 :일 이 삼 구술자 :31일까지 있구나.31일 날 밤에 내가 그 뭐 문제는 더 도망 다닐 때가 없더라고.도 하 도망 다 니 때도 없고 힘도 들고.또 뭐 생각해 보니까 이 뭐 도망가서 얘기해버리면 되고.또 뭐 별로 잘못한 15) 구술자 : 남산 시경분실, 신한공사, 창녀촌 남일무역 치안국 분실, 충무로 삼일무역 치안국 분실을 지칭함

62 5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것도 없고.또 뭐 아이 또 처음에 잡혀 들어갔을 때는 겁이 났는데 한 번 잡혀 들어갔다 나오니까 들 어가면 또 나오겠지 그런 생각도 들고 해서 어 31일 날 내가 학교에 가서 학교를 들어갔어.그 데모 그래서 인제 그 '새세대'정말 그 때 새세대 가서 잤지.하룻밤 자고 술도 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자고 이튿날 아침에 그 데모 현장에 그러니까 4 19탑 앞에 가가지고 내가 학 그 뭐 연설이라고 할까요?뭐 얘기를 했지.내가 저 그동안 대 잡혀 다녔는데 도망을 다녔는데 어 뭐 사람들 이 뭐 나를 보고 신고하지 않더라.그런걸 봐서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여러분들이 투쟁을 잘 해주면 여러분 힘으로 내가 갔다 석방이 될 거다.그러고 한 10분 얘기를 하고 그러고 인제 그 학 교 문 쪽으로 걸어 나왔지.걸어 나오니까 인제 동대문경찰서에서 나와 있다가 인제 나를 데리고 경찰서 로 갔지요.어 그랬어요.그래서 그러고 그 다음에 인제 상당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지요.그 네.네. 면담자 :그 당시에 강도 높은 조사라 하면 뭐 그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그 이후의 군사정권에서 했던 것과 같이 고문을 하거나 그런 것같이. 구술자 :고문은 안했어요.고문은 그 때는 몰 다른 사람도 안했을 거예요.고문을 안 한 이유는 나는 그 때 우리가 이미 그 사람들이 현상수배를 뭐 벽보를 전부 내다 부쳤고 나도 내가 그 벽보를 봤으니까 내 그 길에서 보고 했으니까.어 고문은 안했 안했어요.잠을 안 재우기는 했지마는 때리거나 그러지 는.위협은 했어요 위협은.심지어 뭐 권총 같은 것을 핑그르르 돌리면서 말이야 뭐 뭐 말이지 뭐 뭐 뭐 양명궤(양면제지)한 장 16) 이면 고만이니(그만이야)이런 이야기는 했지만 때리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요.그건 아마 내 생각에는 워낙 저 신문에 크게 되고(나게 되고)해가지고 수배성 수배까지 해서 어 야당이 그 때는 굉장히 그 동조를 동조가 아니라 야당하고 같은 였으니까 고문은 안했어. 면담자 :그게 인제 장례식 같은 경우에는 어쨌거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일종의 비판. 구술자 :뭐 일종이 아니라 아주 그건 아주 저 노골적인 정면 그 비판이었죠.비판이었는데 그 뒤에 인제 계엄령이 떨어졌는데,음 그 우리 나 그게 나는 뭐 정부에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나중에 자료나 증거가 없어서 모르 모르죠.모르겠는데 우리가 형무소 안에서 생각하고 또 듣기에는 또 그 때 야당 김도연씨가 연설을 한 걸로 생각을 하는데 그 데모를 좀 나중 5월20일을 했고 그 다음에 문리대에서 단식데모를 했고 그 다음에 6월1일인가 2일부터 나와 드디어 6월3일 날 데모까지 발전했는데 6월3일 날 데모는 그 정부에서 정부쪽에서 좀 조장을 해가지고 폭도가 하기를 좀 조장을 했다 계엄령을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들었어요.듣고 일부 야당에서는 그렇게 표현을 했지 싶어요.했는데 실제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우리는 지도부라고 표현해도 될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그런 걸 안 들을라고 조심을 했지요.표현 같은 것도 가급적이면 좀 완곡한 표현에서 뭐 이미 잡혀 들어간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됐을 때 뭐라고 변명해야 될까에 대해서 굉장히 그 굉장히라는 것도 의식해가면서 글 문건도 맹글고(만들고)말도 하고 했기 때문에 그랬는데 그 6월3일 날 데모는 정부 물러가라고 나 왔다고 그러더라고.그래서 이거는 좀 어디서 뭘 끼워 넣어가지고 계엄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 게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을 했지요. 면담자 :그러면 이제 그게 뭐 우리가 생각을 해 보면 상식적인 수준으로 생각을 해보면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던 날을 맞추는 게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았을 것 같은데 굳이 5월20일 날로 날짜가 잡힌 것은 어 16) 구술자 : 당시에는 보고서 용지를 양면제지를 썼음.

6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7) 떤? 구술자 :그걸 모르겠는데요.그건 모르겠습니다.왜 5월20일이었는지 지금 기억이 안 납니다.그게 나중 에 인제 조사 저 저 저 군 검찰관하고 얘기를 할 때 어 그 때 내를(나를)다루었던(취조했던)그 검찰 관이 조성욱이라는 분인데 군 검찰관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이가 뭐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 같아 요.30이전이었을지도.우리는 뭐 나는 뭐 그 때 64년도는 43년생이고 만으로 치면 21살밖에 안되었는 데 그렇게 나보고 너가(네가)정부를 뒤엎을라고 한 거 아니냐?유혈투쟁을 그 선동해가지고 정부를 엎을라고 한 거 아니냐?뭐 왜 유혈투쟁을 내가 선동했느냐?그러니까 네가 피의 투쟁 을 전개하자고 그랬지 않느냐?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그래서 그걸 피의 투쟁이란 건 투쟁의 강도를 좀 강조를 한 거지.그러면 결서투쟁(결사투쟁)은 그보다 이건 피보다 훨씬 더한데 그럼 결사투쟁은 뭐냐?이렇게 내 가 검 군 검찰관에게 따진 적이 있어.우리 뭐하면 걸핏하면 결사투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느냐?그럼 결사는 피보다 더 더 더 센데 그래가지고 싸운 다툰 기억이 있는데.그래서 우리는 계엄까지 발전하는 것은 사실은 바라지는 않았죠. 면담자 :그럼 선생님 5월20일 날 있고 어 또 어느 정도 이제 그 20일 날 이후에. 구술자 :그 20일부터 31일까지 그러니까 한 열흘 도망을 다닌 셈이지. 면담자 :고 고 기간 동안에는 어디로. 구술자 :친구들 하 자취방에 하루 이틀 잤지 싶고.그 다음에는 내가 며칠 또 있은 집은 허허 그건 좀 재미있는 집인데 이동준( 李 東 俊 )씨라고 그 때는 재벌이었어.그 분이 저 제비 제비표 시멘트 저거였고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야.명륜동 큰 한옥인데 지금도 있지.지금 형태,성균관대학 앞에 있는 한옥인데 그 조카가 이 이건환이라고 나하고 내 중학교 고등학교 후배고 또 그 집안이 우리 집하고 아주 가까운 집 우리 종 종조부하고 이동준씨 어른하고 아주 친한 사이고,뭐 그 퇴계 자손인데 우리 집하고는 가 까운 집안이었어.어른들은 내가 잘 모르지만 그 내 조카인 이건환이가 내가 잘 친하게 지내니까 그 건환이한테 얘길 해가지고 그 집에서 내가 한 사오일 있었는데 그 집은 집이 하도 커가지고 그 때는 요새는 그런 집이 없겠지만 손님이 하도 많아서 누가 누군지도 몰라.그냥 자면 그냥 이틀 아침에 아 무도 물어보지 않고 바로 밥 한 그릇 밥 한상 갖다 놓으면 먹고 또 저녁에 가서 자고 마 이런 식이야. 잤는데 나중에 붙잡혀가서 어디서 잤냐하고 다른 데는 대면 전부 고생할 것 같아서 그 집 얘기만 했 지.바로 이동준씨네 집에서 잤다고.이동준씨는 그 때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었어.그래서 내가 이동준 씨는 워낙 거물이니까 뭐 가서 조사는 했겠지마는 뭐 무슨 야단은 안쳤어.안 쳤는데 나중에 나와서 그게 한 핸가 두 핸가 지나서 우리 종조부를 뫼시고 그 집에 한 번 갔더니 종조부가 그 집에 저 갈 일 이 있어서 날 앞세워서 뫼시고 갔더니 이동준씨가 나를 보고 뭐라 그러더라고.야,너 너는 니는(너는) 말이지.와서 자면 잔다고 말이라도 하지.말도 안하고 자고 말이지 그러냐고.그런 일이 있어 있었어. 면담자 :별 다른 분들 다른 분들? 구술자 :다른 집은 내가 기억이 잘 안 납니다.안 나고 아마 내가 얘기를 안했을 거예요.얘기하면 전부 내 난리가 나니까 그 사람만 이야기했을 거예요. 면담자 :그 때 그 주동했던 분들 중에서도 그 다 이렇게 도피를 하셨을 텐데. 구술자 :음 그 계엄이 떨어질 때까지는 많이는 안했지.저 저 우리 셋은 현상수배를 했고 계엄 떨어질

64 5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때까지는 안했으니까 문리대에서 그 다시 농성했던 것 아닌가?몰라 더러 잡혀갔는지도 모르겠는데. 계엄 떨어지고는 다 잡아들였고. 면담자 :그럼 그 장례식 하고 나서 세 분은 이제 도피를 가시고 그러고 남은 사람들이 그게 인제 구술자 :남은 사람들이. 면담자 :단식농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어떤 분들이? 구술자 :그 뭐 뭐 저 손정박( 孫 正 博 )이도 있고 김지하도 있고 그 때는 학생회 쪽에서도 좀 관계 했을 거 예요.김덕룡 그 쪽에서 좀 했지 싶은데 내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나.그리고 후배들도 있고. 뭐 이현배( 李 賢 培 )니 뭐 뭐 뭐 뭐 그런 패들이 뭐 박삼옥( 朴 三 玉 )이니 그런 패들이 좀 했지 싶어. 면담자 :그럼 그 이전까지는 그 장례식 하는 동안에도 어떤 준비하시면서도 다른 학교들하고. 구술자 :다른 학교하고 연락은 그 했지요.했는데 내가 하지는 않았어요.내가 하지는 않았고.나는 아까 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잡혀가 본 경험도 있었고 또 추측컨대 많이 아는 게 내한테 도움이 안 되지 싶어서 내가 하는 일 외에는 거의 저 뭐 이렇게 관심을 안 가질라고. 면담자 :그 송철원 선생님 린치사건은 어떤? 구술자 :그거는 사실 나는 잘 모르지요.내 신문 방송보고 알았지.모르는데 인제 그걸 뭐 그 추측컨대 는 어 송철원이가 인제 학원사찰을 조사를 하니까 그 관계된 기관에서 했다고 생각하는데 글쎄 내 추 측으로는 아마 그 저 그 그 때 정보부에 가 있었던 김덕창씨가 개인적으로 송철원이하고 그 경기고등 학교 선후배고 선후배일 뿐 아니라 아주 친해.나도 뭐 친한 사이였어.왜냐하면 김덕창이가 김덕창씨 가 학생회장을 했다고.학생회장이 아니라 무슨 상임위원장인가를 했어.그래서 그 그리고 영어신문에 문리대에서 내는 영어 신문에 학생 저 우리말 신문은 '새세대'고 영어신문에 아카데미 트리뷴 이라는 영어신문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중에 고대교수를 한 저 오 뭐 영어 잘하는 오 오 뭐 오택섭( 吳 澤 燮 )이. 그리고 저 요새 영어 그 책가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화유( 曹 和 裕 )이런 사람들이 관계를 했는데 그 김덕창씨도 경우 좀 관계를 했는지 하여튼 그래서 가까이 지냈어.그러니까 김덕창씨하고 송철원씨하 고는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의 선후배고 뭐 이러 되고.그런데 송철원이가 앞장서니까 김덕창씨 가 더 기분 나빴는지도 모르겠어.더 기분 나빴는지.나는 잘 모르고. 면담자 :예.그러면 그 김중태 선생님 숨겨줬던 손경민씨. 구술자 :손홍민( 孫 洪 敏 ). 면담자 :손홍민씨는 구속이 나중에 기소가 되게 되는데 이 분 한 분만 기소가 됐더라고요? 구술자 :그 뭐 대표적으로 시켰겠죠.그리고 혹시 모르지 당국에서는 손홍민씨는 그 김중태를 좀 무슨 뭐 돈도 좀 주고 그런 그랬지 않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그건 내가 이 분 저쪽에서 판단이 왜 시 켰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걸 줘야 되지 않겠어요?그래야 다시 안 숨겨주지 다른 사람도.우리 나 는 뭐 숨길 수가 잡아 구속시킬 수가 없겠지.이동준씨네 집에 잤다고 얘기를 했으니까 이동준이는 뭐 아까도 말했지만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니까. 면담자 :그러면 그 이후에 뭐 그 5월25일 날 학생총궐기대회나 이런 거는 도피 중에 있어서 잘 모르시 겠. 구술자 :있어서 잘 몰랐고

6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9) 면담자 :혹시 그 제가 자료를 보니까 총학생회가 이제 운동권에 관여를 하기 시작하는 거가 대체로 이 장례식 이훈 것 같은데. 구술자 :예 면담자 :그 그 당시에 그 선생님하고 같이 지도부 운동권 지도부하고 어 그 학생회 지도부하고 간에는 입장의 차이나 그런 건 없었습니까? 구술자 :음 입장의 차이 어떻든 우리가 더 데모를 적극적으로 했고 학생회에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안했 죠.안했는데 뭐 학생들 분위기가 하니까 뭐 떠 밀려서 했다는 표현이 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어 떻든 그래서 나중에 같이 하게 되었는데,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사실 은 내가 알 수 없는데 나중에 들은 얘긴데 계엄이 나자 그 우리는 다 잡혀 들어갔고 학생회 간부들은 별로 안 잡혀왔어.안 잡았어.안 잡았는데 이건 사실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그런데 그저 그냥 들리 는 얘기는 국 그러니까 사건 사건 지휘가 군으로 넘어가니까 군 검찰관은 젊었단 말입니다.뭐 내 생 각으로는 30이전이 아니었던가 싶어.그건 그 때는 사 그 고시가 되면 군대에 가가지고 군 군 검찰관 하게 되니까.그 쪽 사람들이 보니까 왜 이거 학생회 얘들 하나도 안 잡아넣었느냐?이놈들은 이상한 놈들 아니냐?그래가지고 전부 다 잡아넣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잘 모르겠고.그 래서 어 몰라.다른 사람은 많이 연락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뭐 별로 학생회 간부들하고 데모를 놓 고 의견 차이를 보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서로 상의한 적도 없고. 면담자 :학생회가 참여하게 배경은 그러니까 단순하게 많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게 되고 그런 측면에서 인제 학생회도 참여를 해야 되겠다라고 결정을 한 건지 아니면? 구술자 :그건 내가 잘 모르겠는데요.그건 누구 학생회 했던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면담자 :경찰에서 자진 출두하게 되신 거는 뭐 그냥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구술자 :그 뭐 잘 데도 없고 그거 한 열흘 그거 하는 것도 내가 인제 여러 사람 앞에 뭐 날 잡아갈 사 람도 없고 해서 뭐 저 내가 죄 안 지은 것 같더라.뭐 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 그냥 자유롭게 있어 도 그 때 밥 먹을 데도 없고 잠 잘 데도 없었는 판인데 그 뭐 숨어서 지낸다는 게.또 뭐 돈이 있나 요?뭐 다닐라면 돈도 있고 그 때 인제 내 내 지금 생기억으로는 야구장에 낮에는 야구장 극장에 가고 밤에는 뭐 어디 친구 집 찾아가가 이렇게 자고 이래야 되는데 야구장도 돈이 있어야 가지.친구들한테 돈 얻는 것도 또 돈 있는 친구가 누가 있나요?야구장엘 한 번 갔는데 그 때 내 이름하고 비슷한 사람 이 뭐 있었는가봐.선수 중에.뒤에 누가 김도현 뭐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깜짝 놀래가지고 이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아 이것은 내가 아니고 선수 중에 누가 있었던 모양이야. 면담자 :그럼 다른 두 분도 뭐 현승일 선생님이나 김중태 선생님 같은 경우에도 그냥 단순하게 이제. 구술자 :잡힌 게 그제 그 사람들도 자진 출두를 했는데 그것도 아마 뭐 뭐 잘 데도 없고 그래서 갔을 거예요.몰라 그런데 물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그리고 또 하나는 그 자꾸 당국에서 그 뭐 이상한 학 생들이 배후에 있고 이상한 방향으로 맹글어(만들어)간다라고 자꾸 이렇게 선전을 하는 것 같아서 가 서 얘기를 하는 게 그 학생운동을 위해서 좋겠다라는 그런 생각이 있었죠. 면담자 :제가 그 당시에 자료를 찾아보니까 그 당시에 정부 쪽에서도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그 뭐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이 대학생을 바라보는 시각하고는 달리 상당히 그 대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

66 6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거든요.뭐 정부의 총리도 학생들을 만나서 의견을 나누거나 뭐 이런 것들을 보 면. 구술자 :글쎄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정치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별로 없어요.없는데 내가 안 만났지 마는 우리 생각에 우리가 굉장히 그 똑똑하고 능력이 굉장히 있는 줄 알았어요.저 여론을 움직이고 그런 줄 그렇게 생각했어요.그래서 정치인 만났을 때는 선배 후배 이런 식이 아니고 아주 그 말하자 면 좀 당돌하게 에 우리가 큰 세력이다 학생세력이.너 우리하고 말 우리한테 동조해주지 않으며는 저 오히려 우리가 늘 정치세력을 끌고 나가는 것 같은 심 기분이었다고.실제는 모르겠어.내 내 다소 내 가 나중에 그 이듬해 인제 내가 그 김한림 여사라고 있는데 이 분이 부산 동래여고를 나온 분인데 그 일본문학을 하던 김소운( 金 素 雲 )씨 전 부인인가 전 부인인가 뭐 어떻든 하여튼 김소운씨 부인이었는데 이 분이 그 그 윤보선 대통령 전 대통령 부인인 공덕귀 여사하고 동래고등 동문 관계고 그 분의 선배 야.선배고 나이는 비슷한데 이 분이 선생을 할 때 공여사가 학생을 했지.아주 두 분이 가까워.그 분 이 연결을 해 가지고 인제 김중태가 미리 먼저 그 윤보선씨하고 접촉을 했죠.그 이듬 그 이듬해였는 지 그 전에였는지는 나는 그건 모르겠고 나는 어떻든 그 다 저 3 24다음에 했 저 아니 그 64년 이후 에 했는데 그 만 내가 만났을 때도 우리를 굉장히 그 평가한 거예요.아주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그래 서 우리도 그렇게 생각을 했죠. 면담자 :이 사람 자료를 보면 상당히 놀랍더라고요.그 이후에 70년대 80년대 오면서 그 정치권의 정부 에서 대하는 학생 운동권에 대한 인식하고 그 당시하고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구술자 :그럴 거.뭐 내가 67년 66년,66년 67년에는 내가 윤보선씨가 그 때 신한당 대표였는데 총잰가 뭐 이랬는데 그 분의 기조연설을 써 주고 그랬는데.나중에 거기 저 그 때 민중당하고 신한당하고 하 나중에 한일협정의 비준을 둘러싸고 저 저 탈당 의원직을 내놓은 다섯 분이 있었는데 그 분들 중심으 로 신한당이 만들어졌고 그 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민중당이 되었는데 그러다가 또 나중에 합당을 했어요.합당을 했는데 합당해서 다시 윤보선씨가 총재가 되었는데 그 때 인제 이 신한당 쪽은 송원영 씨가 대변인이고 저 민중당 쪽은 김대중씨가 대변인이었는데 에 내가 쓴 연설문은 어 어 인제 윤보선 씨가 신한당 쪽이니까 그 김대중씨도 써오고 했는데 내가 쓴 걸 채택을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가 굉장 히 그 저 당돌하게 놀았지.아주 당돌하게 놀았지.그 때 김대중씨하고 나하고 싸운다고 그랬어 사실. 면담자 :그럼 조사를 받으시는 동안에 이제 6 3이. 구술자 :계엄령이 떨어졌지. 면담자 :계엄령이 떨어지고 그렇게 되는데 계엄령이 내려진 그 6 36월3일 날 운동이 일어날 거라는 시위가 있을 거라는 거는 알고 있었는가요? 구술자 :있을 거라고는 뭐 짐작은 했지마는 꼭 6월3일 있을 거라고는 뭐 생각을 나는 사실 하지는 않았 는데 내가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인제 붙잡혀 앉아 있는데 밖이 막 시끄럽고 그렇더라고.그러더니 계엄이 저 밤 밤이 되니까 계엄 떨어졌더라고 그러더라고.그런데 사실은 어린 나이에도 제일 겁이 나 는 것은 전쟁이 난다든지 이래 하면은 우리를 죽여 버리지 않 죽여 버리지 않겠는가 귀찮아서.어 뭐 한 때 그런 말을 들었는지 하여튼 그런 생각을 해서 그 전쟁 나는 건 한 번은 깜짝 놀랜 게 있었는데 형무소에 있을 땐데 보니까 죄수들을 전부 보따리 싸가지고 바깥에 쫙 불러내 바깥으로 다 내 몰아내

6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1) 더라고.야~이거 전쟁이 터져 가지고 인제 저놈들이 뭐 어떻게 하고 우리 같은 놈 불러서 죽이는 것 아닌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겁을 냈는 겁을 내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이를 이하고 빈 대를 잡을라고 DDT를 칠라고 전부 끌어냈는데 그건 그거고.계엄령이 떨어졌다는 얘기를 그 동대문경 찰서 유치장에서 들었죠.듣고 중태도 잡혀 왔다는 얘기를 듣고. 면담자 :아 그럼 다 그 김중태 선생님이나 현 선생님이 잡혀 오신 것도 다 경찰서 안에서 들으셨나요? 구술자 :에 그래서 현승일이는 내보다 미리 출두했으니까 아는 거고,김중태 저 출두하고 잡혀왔다는 소 리는 형무소 저 유치장 안에서 들었고 그랬었죠.격련 아주 좀 뜻밖이기도 했지만 사실 좀 두려웠죠. 면담자 :그럼 그 이전에 그 장례식을 치루면서 '6 3'같은 시위를 준비를 하셨었나요? 구술자 :준비를?글쎄 다른 사람을 잘 모르겠는데 나는 준비했다고는 생각지 않고요.그 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인제 그 5월20일 이후에 문리대에서 계속 단식 농성이 이어졌기 때문에 그게 뭔가 인제 발전할 거라고 그런 생각은 했죠.커질. 면담자 :예측만 예상은 하고 계셨셨던.그 '불꽃회'사건은 어떤 사건? 구술자 :그거는 난 잘 몰라요.그건 그게 그 해 발표를 했는가 했는데 그건 사실 나는 잘 몰라요.개인 적으로는 뭐 김정강이니 뭐 김정남이니 잘 알지만 그 조직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면담자 :'인혁당'(인민혁명당)사건하고도. 구술자 :'인혁당'(인민혁명당)사건을 사실은 잘 모르지요.형무소 안에서 신문에서 글쎄 그런 발표를 했 다고 듣 들었죠.듣고 나중에 가보니까 나와 보니까 그 신문 발표문에는 도표 속에 내 이름도 들어가 있더라고.그런데 우리는 조사받지는 않았어요 그. 면담자 :아 '인혁당'(인민혁명당)사건하고 관련해서 조사를 따로 받지는? 구술자 :조사는 안하고 발표만 그렇게 했더라고.그 저 지금도 이상해. 면담자 :거기에 그런데 따로 조사를 받진 않으셨다고. 구술자 :내가 내 내 기억에는 받은 기억이 없어. 면담자 :그러면 그 재판은 어디서 받으셨나요? 구술자 :재판은요.인제 처음 6월3일 저 잡혀 들어가 가지고 조사를 경찰 뭐 이런데서 조사를 받고 어 계엄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인제 그 군법회의가 설치가 되고 군 검찰로 넘겨 -우린 민간검찰한테는 처 음에는 안 받았죠 -군 검찰한테 받고 군법회의를 받는데 필동 요기 그 때 수도경비사령분가가 필동에 있었어.필동에 군법회의가 인제 설(설치되고)그 거기에서 법정에서 열려 가지고 거기서 한 참 더울 때 아마 7월 달에 받았지 싶어요.몇 번 재판 했는지 기억에 안 나는데 한 서너 번 불려나간 게 아닌 가 싶어요.줄들 해 가.재판받 본격적인 심리까지는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하여튼 정말 갔더 니 얼핏 이렇게 돌아봤더니 윤보선씨가 떡 앉아 있더라고.그리고 뭐 뭐 윤보선씨만 해도 뭐 당시에는 정말 전 전 대통령이니까.전 대통령이 형사 피고인 법정에 방청을 나온다는 일은 그건 굉장히 말하자 면 대통령이 국가의 상징을 상징이었던 사람인데 그래서 우리도 굉장히 놀래 놀래면서 한편 애고 인제 우리는 죽지는 않겠구나.뭐 그런 생각을 했지.죽지는 않겠구나하고 말이지. 면담자 :그럼 조사는 군 검찰한테 받으시고 기소도 그럼 군 검찰이. 구술자 :군 검찰이 했지.하다가 나중에 계엄이 해제되고 해제되면서 인제 민간검찰로 넘어오면서 공소

68 6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장이 바뀌어졌을 거예요.처음에는 이만큼 두터운 내란 형법 그게 뭐 27조든가 내란 수괴야 우리 그게. 내란 수괴는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밖에 없는 건데 우리 세 명은 내란수괴로 인제 그걸 받았고 기소가 되었고 그래서 인제 재판 도중에 심리를 좀 했는지 모르겠는데 -했는 것 같은데 -심리 중에 계엄 해 제되어 민간법정으로 넘어오면서 그 그 내란은 없어지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그리고 소요가 적 용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난 정확하지 못한데 내 기억에는 적용이 안 된 걸로 아는데 왜냐하면 소요는 우리 때까지는 소요사태로 5월20일을 소요로 받는지 안 받는지 고게 인제 지금 불분명한데 안 받,적 용이 안된 것 같애 소요는.어 그 때 하여튼 내란군법회의에서 그 했을 때 이 모두에 변호사들이 얘기 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 이런 기억이 나요.그 때 그 사람들이 변호인들이 내란으로 기소를 했는데 삼일운동도 일제가 내란으로 기소하지 않았다.소요로 기소를 했는데 그 그래서 이것 아마 공소기각을 주장할라고 그랬는지 몰라.이건 이거 공소의 대상이 안된다.왜냐하면 법적용을 잘못했기 때문에 뭐 이런 주장을 할라고 그랬는지 어떻든 삼일운동도 저 내란으로 기소를 안했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면담자 :그러면 그 민간검찰로 넘어와서는 따로 조사를 받진 않으셨나요? 구술자 :그게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건 그 때 검사조사는 뭐 따로 받을 필요 없죠.한 번 불러내서 그냥 확인하는 정도지.뭐 그랬어요. 면담자 :그럼 민간검찰들도 아마 군 검찰에서 조사한 조서에 바탕을 해서. 구술자 :예.예.아니 뭐 했는지도 모르겠는데?그렇게 무슨 기억에 남을만한 조사를 한 것 같지는 않은 데.검사가 누군지도 생각이 안 나고.군 검찰하고는 하도 싸워서 지금도 얼굴까지 생각이 나는데. 면담자 :예.그러면 어 그 재판을 받는 동안에는 어디 수감을 어디에? 구술자 :저 수감은 형 저 서대문 형무소하고 인제 저 재판받을 때는 필동에 거기 오며는 거기 필동 거 기는 언제 맨들었는지(만들었는지)정말 기다리는 동안에 이 유치장이 이 아마 가로세로 1미터 넓이가 1미터쯤 될 거예요.뭐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하는 뭐 서기도 어려운 그런데서 인제 앉아 기다 리다가 앉아 기다리다가 서다 서다 어디?응.기다리다가 인제 그래 저걸.저. 면담자 :그럼 수감되어 계실 때는 세 분이 같이 계셨? 구술자 :아니 독방에 면담자 :독방에 다들 계시고. 구술자 :나는 형무소 여러 차례 갔는데 도둑놈들하고 같이 있었던 건 제일 처음에 갔을 때 사흘밖에 없 었고 나중에 '민비연'사건 때도 내가 거의 2년 쯤 미결로 있었는데 다 독방이에요. 면담자 :그럼 거기 그 선고할 때까지만 서대문형무소에 계시고. 구술자 :그렇죠.그 그 때 집행유예로 나왔으니까.10그게 11월이나 12월쯤 되어서 나왔을 거예요.그 때 이명박씨하고도 같이 이케(이렇게)내가 있는 건물 그 내가 18사엔가 있었는데 10사에 있었구나.10 사에 있었는데 이명박씨가 8사에 있어서 간 어 한 마당을 한 한 20미터 간격을 두고 20미터 더 되었는 지 모르겠는데 이명박씨가 독방에. 면담자 :아 그럼 6 3에 관련되어서 구속된 사람들하고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장례식하고 관련해서 구 속이 되신 거잖아요? 구술자 :예 예

6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3) 면담자 :다 같은 데 계셨어요? 구술자 :그렇지 같은 데 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 방이 여러 개니까 딴 데다 흩어놨고,그 우리 셋은 독 방에 넣어놨고. 면담자 :그 뭐 일부 무죄를 받게 된 배경은. 구술자 :뭘 일부 무죄라고 그러는지 난 모르겠는데. 면담자 :그거 그 당시 아마. 구술자 :아 그런데 기소문이 있는데 저 무죄 일부 무죄가 없어요.몰라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우리 케 이스는.그 나중에 기소장을 바꿨어요.집회시위에 관한 법률로.바꿨는데 그 때도 그 변호사들 주장은 그 유죄가 아이라고(아니라고)자꾸 주장을 무죄가 아이 유죄가 아이라고(아니라고)주장을.왜냐 그 때는 그게 옥외집회거든요.옥외집횐데 변호사들 주장은 학교운동장은 옥외냐 옥내냐 이걸 가지고 변 호사들 이야기는 그게 왜 옥외냐?마당에서 하면 그럼 옥외냐 그게?이런 식의 주장을 하더라고.우리 좀 보기에는 좀 억설 같애(같아)보일지도 모르는데 변호사는 그렇게 주장하더라고.신고 안한 집회를 한 걸로 저. 면담자 :미신고집회 때문에. 구술자 :예.그리고 고(그)5월20일 이전 거는 그 이미 그 때 처분 다했기 때문에 아니고 5월20일건만 가지고 우리가 인제 나중에 민간재판에서 기소됐는데 5월 5월 205월20일건은 신고하지 않은 집회로. 면담자 :그 이전에 뭐 조사받고 시위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술자 :그거는 처분은 이미 받았거든. 면담자 :아니 되게 보면 이제 전과가 있으면? 구술자 :아 그때 그건 인제 전과는 아니죠.그건 그건 저 기소 저 불기소처분으로 나갔던 거니까 무슨 처벌을 받은 게 아니고 불기소 처분 처분을 받았으니까. 면담자 :그 이후에 70년대 80년대 보면 학생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몇 번 시위를 했던 경력이 있으면 뭐 그 집행유예를 보통 안하고. 구술자 :그거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저 법적으로는 뭐 누범가중 이렇게 된 거는 유죄에 해당하는 그 러니까 기소유예를 최소한 기소유예라도 받았든지 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 전에 받았던 것은 그 자체를 그냥 불기소해 버린 거야. 면담자 :경찰조사만 받고 나오시고.그 지금 말씀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그 '민비연'사건이라는 것이 그 2차 민비연'사건인가요?보통 어 그 '인혁당'(인민혁명당)사건을 1차 민비연'사건이라고. 구술자 :그걸 그런 명명은 오늘 처음 듣는데 인제 그 어 우리가 잡혀 들어간 뒤에 인제 '인혁당'사건을 인제 발표를 했지요.했는데 우리는 거기 조직원으로 발표는 했는데 김형욱씨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 했는데 사실상은 조사를 안 받았고,조사하지 않았고 그 쪽 관계없는 줄도 그 사람들도 아니까 조 사를 안 받았고 그래서 그건 뭐 지금 이 자리에서 1차 '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사건이라고 붙이 니까 내가 듣는 거고. 면담자 :그럼 그 '민비연'사건의 빌미가 된 게 그 폭발 폭발물 제조 관련 있다고 그러던데. 구술자 :그거는 빌미가 된 거는 아니고요.6064년도에 인제 '한일회담'이 그래가지고 나중에 타결이 되

70 6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잖습니까?그 65년도에 비준이 되는데 그래 64년 그 11월인가에 우리가 나와 석방이 됐다고.되면서 65년도에 비준을 앞두고 우리가 반대 학생운동을 계속해 해야 된다.그래서 우리는 어 저 잡혀갔다 나 왔으니까 우리가 인제 직접 하는 거는 그 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까 다른 새로운 거 그걸로 하자. 이래서 인제 에 우리 모 그 중에 우리 아래 학년도 있고 또 같은 학년이지만 군대 갔다와가지고 늦게 들어 온 사람도 있고 그래서 말하자면 지도부가 넘어간 셈이지요.넘어가서 넘어가는데 그 대신에 우 리가 아 뭐 배후라 그러면 이상하지마는 그 사람들을 만나가지고 어 계속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아 주 긴밀하게 저 저걸 했지요.그런 중에 인제 그 사람들 중에 말하자면 인제 뭐 지금 노동부 장관하는 법대 이영희( 李 永 熙 )라든지 이 또 요 모 저 어 저 저 이화대학에 저 진민자( 陣 敏 子 )씨 신춘자( 辛 春 子 )씨 신인령( 辛 仁 鈴 )나중에 이름을 신인령이라고 개명했습니다만 저 법대 이대 총장하는 신인령이라든지 또 문리대는 뭐 또 우리 후배들이니까 뭐 쭉 있었고 후배 아닌 사람들도 있어요.저 선배 선배지만 뭐 선배 같은 학년이지마는 또 제대하고 복학해온 사람들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인제 주도를 하게 되는데 그러나 우리가 매일 접촉하고 매일 같이 얘기하고 그랬죠.그런데 그 때는 어 아마 아까 잠간 말했던 김한림씨 소개로 윤보선씨하고도 우리가 만나고 그랬어요.그래서 인제 그 비준반대운동을 학생운동이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제 아까 말한 폭발물 뭐 사건 그 그래서 그 배후를 인제 나중에 비준반대 학생운동이 일어나니까 그 막 8월쯤 잡아넣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그 잡아넣었죠.잡아넣었는데 그 과 정에서 폭발물 얘기가 나왔죠. Tape3. 면담자 :폭발물 만든 거는 거기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죠? 구술자 :그게 인제 65년도에 비준반대운동을 학생운동을 하는데 인제 나하고 그 김중태하고가 그 때 인 제 운동에 말하자면 지도부를 자주 접촉을 했지요.거의 매일이다시피 접촉을 했는데 그 이화대학생이 진민자. 면담자 :예 구술자 :신춘자 나중에 신인령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화여대 총장 신 신춘자 그 다음에 차명희라고 나중에 그 여성문제연구소 이태영( 李 兌 榮 )박사가 한 면담자 :예 구술자 :거기에 와 있던 차명희 이 세 사람이 이제 이화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주도를 했는데 그 사람들 을 내가 자주 만나는 과정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말이 어떤 사람이 폭탄을 맹글어 주며는(만들어 주면) 그걸 국회에 가져가서 비준국회에 던져서 여론을 환기를 하겠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그 그 렇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면담자 :예 구술자 :그래서 내가 음 뭐 그걸 열심히 하겠다는데 거 하지 말라고 하기가 참.우리는 어떻든 비준이 안되었으면 좋겠다라는 학생운동 입장인데 어 그걸 하지 말라고 하기가 참 어렵더라고.그래서 한 번 연구를 해보자고 연구를 해 보자고.그래 인제 그 얘기를 그렇게 했죠.그 그 그래서 그래서 음 그런

7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5) 인제 그러고 나는 인제 우리 친구들 가령 예를 들어서 김중태니 이렇게 만나서 내 그때 무슨 얘기 했 는지는 뭐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든 중태하고는 얘기했어요.현승일이는 65년도에 관여를 안했 어요.다른 인제 김중태 내 그 친구라고 얘기를 하니까 그 사람 얘기를 해 보자고.그러면서 인제 내 생각에는 내가 나만 그렇게 생각했는지 딴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 폭발물이라는 게 어딜 어디 보니까 굉장히 엄하더라고.엄해서 이 폭발물이라면 곤란하겠다.뭘 같은 효과를 내면서 폭발물이 안되 는 방법이 없을까?그러니까 남한테는 그 좀 파장을 일으키면서 법률적으로 폭발물이 안되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그래서 혼자 생각이 무슨 예를 들어 대나무 통 같은 데 만들어 가지고 하며는 그건 소리만 났지 뭐 괜히 살상을 안 하니까 폭발물 취급을 안 받을 수도 있는가?뭐 그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이 친구들하고 상의를 했던 그러나 그러나저러나 간에 일단 폭약은 한번 있었 으면 좋겠다.껍데기를 뭘 씌우든지.그리 얘기를 했더니 김지하도 같이 있었는지 뭐 따로 있었는지 모 르겠으나 김지하는 원주 쪽에 있어서 원주에는 그 광산이 많아서 폭약이 그 쉽게 구한다 이렇게 얘기 를 하더라고.그래서 그러며는 한 번 구해보라고.그 얘기를 했더니 아마 지하가 이동규라고 있어요. 그 나중에 KBS에 갔던 이동규 농대 나왔지 거기 농대 그 때.그 때도 재학 중이었는지 나왔는지는 모 르겠어.재학 중이었을 거야 아마.이동규한테 부탁을 해서 한 번 알아본다고 그러더라고 원주 쪽에. 나중에 거기 가서 인제 알아보니까 구하기 어렵다고 그래 답이 왔어.그 고성광이라고 우리 정치학과 동기가 있는데 그 그 친구가 인제 정치학과 동긴데 정치학과 들어오기 전에 물리학과를 다녔어.자기 그 친구하고 얘기를 하는 중에 아 그 뭐 자기 고등학교 때 물리반을 했는데 그 폭탄 맹글기(만들기)나 뭐 적색화약인가 뭐 흑색화약인가 맹그는(만드는)거 그 어렵지 않다고 그러더라고.그 그 어떻게 맹그 냐(만드냐)고 그랬더니.아 뭐 그 쉽 고등학교 교과서만 그래도 다 나온다고.그래가지고 그 친구 그걸 고등학교 교과서를 써 줬어.방정식을.이렇게 이렇게 맹글면(만들면)된다고.그래 내가 인제 방정식 쓴 것을 받았지.받았는서 내가 맹글어(만들어)주는 거는 좀 사실 내가 맹그는(만드는)것은 부담도 있 고 내가 막상 만들기도 좀 어렵고 그래서 하겠다는 사람을 하지 말라고 그러면 그것도 좀 그런 것 같 고 이상한 것 같고 이상하다기보다도 또 좀 그랬으면 싶고 그래서,에이 뭐 그 친구가 지가 알아서 그 내가 그 폭탄이 되면 위험하다는 얘기나 해주고 니가(네가)이런 방법으로 오 하여튼 뭐 대나무를 씌 우든지 해가지고 살상 인명한테 피해가 안가고 소리만 나는 것을 뭐 이걸로 이렇게 맹글면(만들면)쉬 만든다니까 해봐라라고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인제 그 저 그 이화대학생들을 만났어.만났 그 그 그 친구를 만나자 그 때 그 친구를 나는 그 친구를 그 뒤에 못 봐서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얼 굴이 바싹 마르고 어 이렇게 장갑을 그 때 여름인데 그 얇은 가죽장갑을 딱 끼고 그 이화대 저 서울대 학교 문리대하고 법대 사이에 조그마한 고 다 다리위에 판잣집 막 끝에 대포집이 있었어.그걸 우리는 라스트라바라고 그랬는데 불어로 아마 스트리트간가 봐요.그 라스트라바에서 인제 그 친구를 만나가 지고 낮인데 그래 내가 인제 그 친구한테 이거 폭탄은 그런 위험성이 있으니까 내 생각에는 마 폭약을 맹글(만들)수 있으면 거기다 뭐 대나무 통 속 좀 넣으면 어떻게 소리만 나고 살상이 안되고 그 효과 를 내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다고.싶고 난 그 폭약을 그럼 당신이 한 번 맹글어(만들어)보라라고 고성 광이가 써 준 그 방정식을 그 친구를 줬어 종이를.그게 인제 전부죠.전분데 나중에 인제 그 이 저 65 년도 비준반대운동이 일어나니까 아 우리 친구들을 그 배후라고 그래가지고 데모를 일으키기 위해 인

72 6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제 부추긴다 이래가지고 죽 김중태 최혜성 뭐 송철원 뭐 이래 몇 명을 잡 잡아갔어.잡아갔는데 그 친 구들이 잡혀가 보니까 그 쪽지가 그 수사팀한테 와 있더라는 거야.그런데,수사팀한테 와 있고 그 다 음에 그거 쪽지도 고성광이가 뭐 써 준걸로 이미 어떻게 거의 알려져 있더라는 거야.그래서 나는 이 건 나중에 들은 얘기고,나는 일단 도망을 갔지.그 그 친구들 막 잡혀가는 바람에.그래서 나는 그 때 부터 한 4월(4개월)이었던가?여름이었는데 그 해 12월경까지 인제 숨 숨었어요.도피를 해서 도피를 했는데.그 친구들은 인제 붙잡혀 가가지고 나중에 잡혀가서 인제 조사를 받고 뭐 기소가 되고 했는데 기소가 뭘로 됐는지 모르겠는데 그 중에 인제 폭 폭탄 맹근 것(만든 것)도 그게 되었는데 나중에 얘기 를 들으니까 그 방정식대로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한 번 해봤대.해 보니까 그게 안 만들어지더래.안 만 들어져서 이제 신문에만 나고 뭐 불능범이라고 뭐 판결 받아서 그 부분은 무죄가 되었다고 그러더라 고.되고 인제 뭐 데모하고 데모배후하고 한 거 이거가지고 징역을 살았지 않나 그렇게 생각이 되고 나는 안 안 붙잡혔고.그래서 그 이듬해 그 친구들이 다시 집행유옌가를 받고 나왔어요.나오고 그래 그래서 나도 다시 나돌아댕기기(나돌아다니기)시작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그러 그러고 인제 그것 때문에 내가 인제 그 64년도에 그 6 3사태로 한 번 인제 제명을 받아 학교에서 제적처분 받았는데 그 다음에 65년도에도 다시 그 사건 때문에 나는 잡혀가지는 않았지만 뭐 더 다른 친구들도 제명을 받고 나도 또 제적을 받았죠. 면담자 :아 그 때는 구술자 :두 차례 제적 그러니까 다시 복학이 되었다가. 면담자 :다시 않으 않으셨었는데도 제적을. 구술자 :제적을 시켰죠.제적시켰는데 나는 인제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까 그 때는 그 학칙에 인제 학장 이 제적을 결정해도 그 교수회의의 결의가 있어야 돼.있어야 되는데 다른 사람은 전부 통과가 되었는 데 나는 인제 그 부결이 되었다고 그러더라고.왜냐하면 내가 직접 확인은 안 해 봤지만 내 생각에는 그 때 그 이숭융(이숭녕)교수,최재희 교수,이인기 교수 이런 주 문리대 중진급 몇 분 교수가 아주 나하고 가까웠어.말하자면 나하고 가까운데 아니고 우리 백부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라서 뭐 정말 오 랜 세의가 있는 그런 집안이어서 그 분들은 김도현에 대해서는 하여튼 무조건 내 내 편을 드는 그런데 서 나는 부결이 되었다고 그러더라고.그런데도 인제 총장이 그 때 유기천씨인데 그 그냥 뭐 저 그냥 제적을 시켰다 그러더라고.그래 인제 그거 그래서 이따 다 풀어진 뒤에 음 내가 인제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 때 신태악이라고 그 야당 쪽 분인데 변호사였어.그 분 쭉 그 '6 3'사 태 때도 우리 변호하고 했던 분인데 그 분이 그 분이 권했는가 내가 물었는가는 모르겠는데 그러면 취 소행정소송을 하자고 그런데 내가 소송을 넣었어.넣었더니 그 그 때 그 뒤에 유기천씨 때 취 제적을 시켰는데 그 때는 최문환씨가 총장으로 돼 가지고 총장비서실장이 인제 이수성씨였는데 그 그 최 총장 이 학 내가 내가 인사를 갔는지 불렀는지 최 총장을 만났더니 최 총장은 우리 백부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고 우리 백부한테 한문도 배우고 또 그 아버지가 최항묵씨란 분인데 우리 종조부하고 아주 친한 사이어서 우리 집안하고는 뭐 소위 세의라고 하는 오랜 가까운 사이인데 날보고 야 니가(네가)원고가 되고 내가 피고가 되었다 이러더라고.그런데 그 때 요새는 뭐 그런 일이 자주 있지만 그 때는 뭐 원 고 피고라는 게 별로 그 좋은 말이 아니었다고.말하자면 그 때는 송사 자체를 좋은 걸로 안 본 땐데.

7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7) 그렇게 말도 하고.이수성씨가 하는 말이 야 니는(너는)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변호사를 대야 되는데 그 때 남은 나는 그 뭐 야당 변호사니까 그냥 그렇게 하지마는 총장이 변호사를 댈라면 돈을 많이 부 담을 해야되는가봐?야 예산도 없다 우리는 변호사.말하자면 인제 그 재판 안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래서 나는 고만 그 재판에 그 뒤에 무슨 출석을 안했어요.저 저 변호사 보고도 뭐 가 가 해 달라는 말도.그래서 재판이 그냥 남아.뭐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몰라.안 안 한 것 되어 버렸죠.하여튼 그 런 일이 있었어요. 면담자 :예.그러면 실제로 그 그 폭약을 만들어 보신 적은? 구술자 :없죠.못 만들었죠. 면담자 :어 그런데도 그 아마 그 64. 구술자 :기소는 했죠. 면담자 :예.그 때 폭약을 만든 걸로 돼있는데 한. 구술자 :만든 걸로는 안되어 있었을 거예요.만들라고 그랬다가 그래 되었으니까.만든 던지겠 던질라고 했다고.그 사람은 잡히지도 않고 기소가 아마 안되었을 거예요.그 그 그 던지겠다는 사람은. 면담자 :그 던지겠다는 사람은 누군지는 모르? 구술자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모르는데 고려대학생들은 나중에 내가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 사람을 알더라고.뭐 별명을 개팔이라고 그랬다는데 나는 그것밖에 모르고. 면담자 :고대생이었나 보죠? 구술자 :고대생이라고 그랬다 그러는데 내가 신분증까지 확인한 것은 아니니까.그랬다 그래요.고대생 들은 알더라고요.나는 지금.아마 생존해 있지 않다 그러더라고요.죽었다 그래요. 면담자 :여기 뭐 공소장에 보면 뭐 여기 어 64년 7월30일 경 서울 용산구 후암동 27-7김중태 하숙집에 서 뭐 이렇게 10여 개 정도를 제작을 했다라고. 구술자 :아 영 그쯤해서 그 뭐 아니. 면담자 :그럼 이 당시에 그런데 대법원 판결문에서는 어 충무로 소재 최혜성의 집에서 만든 걸로 또 나 와 있다고. 구술자 :맨들진(만들진)않았고 어디서든지 만들진 않았고. 면담자 :아 모인 자리에서. 구술자 :모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그건 뭐 두 군데서 다 했을 수도 있죠.그것 때문에 조금 고 민 했으니까.자 이거 아들(애들)하자고 사실 하기도 어렵고 또 말이지 죄도 무겁고 하는데 어떻게 해 야 될 될지 모르겠다 뭐 이런 식의 아마 고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면담자 :그럼 이 이 폭발물을 만드실려고 생각하신 거는 그 고대생이 구술자 :하자고 그랬어. 면담자 :얘기를 했기 때문에 만들려고 한 것이지 뭐 단순히 뭐 애시당초. 구술자 :내가 뭐 아 나도 무슨 무슨 좀 자극적인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지 꼭 그 미 폭탄 을 맹글(만들)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그 이화대학생들이 와 가지고 그걸 하겠다는 사 람이 있다고 그러더라고.그러니까 뭐 하지 말라고 그러기도 참 뭣 하고 말이지.왜냐하면 그 때는 데

74 6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모를 우리는 좀 하라고 자꾸 하는 쪽이었으니까.그리고 65년도에는 어떻든 그 우리가 그 '6 3'사태로 상당히 유명해 져 있었기 때문에 행동은 자유롭지 않았지마는 어떻든 좀 많이 그 역할을 했어요.한데 뭐 예를 들면 그 윤보선씨 집을 출입을 하면서 가령 야당의 정책 같은 것도 무슨 이런 성명을 냅시다 그래서 성명서도 써다 주고 써다 줄 뿐 아니라 그 쓴 성명을 그 때 동아일보 김원기( 金 元 基 )기자가 우리하고 가까왔는데 김원기 기자하고 미리 사전에 그 상의를 하는 거야.신문에 언제쯤 지면이 있다. 날 만하다.그러면 인제 윤보선씨한테 가서 성명을 내일 내십시오.그러면 동아일보에 크게 납니다.이 래가지고 그거 아마 그게 한 두 건인가 세 건 이상 그런 일을 했어요.해고(하고)뭐 돈도 좀 뭐 김원 기한테도 조금 얻었지.그런데 윤보선씨한테는 내가 내가 얻은 적은 없고 김중태는 얻었는지 안 얻었 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떻든 이런 저런 선배들한테 돈도 좀 구해다 얻어다 주고 좀 그 사람들 주고 뭐 큰 돈은 아니지만 하여튼 프린트 값 뭐 이런 거 대주고 뭐 그래 그랬었죠. 면담자 :비준반대운동을 그 실제로 그러니까 운동을 했던 거는 후배 그룹들인데. 구술자 :그런데 말만 후배지.학교 뭐 나이가 후배는 아니고 어떻든 다음 그룹들이 한 건지. 면담자 :그런데 그 계속 그러면. 구술자 :계속 접촉을 했죠.65년도. 면담자 :경찰에서도 계속 그럼 주시를 하고? 구술자 :주시를.우리는 굉장히 조심을 했는데.인제 주시를 했으니까 체포 그 벽으로 잡아넣었겠지.주 시를.추적을 했겠죠. 면담자 :선생님 어떻게 도피를? 구술자 :그런데 나는 그 때는 인제 도피를 하기가 좀 어려웠는데 어. 면담자 :그럼 그 당시에 이미 뭐 김중태 선생님이나 이런 분들은 다 잡혀? 구술자 :다 잡혀갔지.그건 뭐 뭐 뭐 내가 결국은 내 자세히는 잘 기억은 안되지만 뭐 또 친구들 집에를 저 친구들 자취방 같은 데를 잤지 않겠어요?자니까 잡혀 갔다는 소식 듣고 뭐 이래 되었죠.되었는데 내가 그래도 몇 달 도망할 수 있었던 거는 건국대학교를 나온 노원태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인제 나를 그 도망을 시켜주더라고.그 분을 그 뒤에는 나는 거의 못 만났어요.못 만났는데 그 분이 나를 저 어디 난 지금도 그 뒤 잘 몰라.저게 그 *그 분하고 어떤 분 아는 어떤 사람의 저기 처 그 경기 도 연천 철원이지 철원.신철원인데 거기에 있는 전곡이라는 데 있는데 거기 농장에 가서 인제 그 배 그 계곡에 있는 배추밭인데 거기 가서 그해 한 여름에 갔지.여름에 가 가지고 그해 겨울까지 그냥 그 뭐 저걸 하러 갔다고 그러면설랑 뭐 뭐 뭐야 뭐 요양 겸 농사일 거들어 주러 왔다 그러면서 거서(거기 서)그냥 거기에 있는 일꾼들하고 같이 그냥 한 몇 달 동안 배추밭에 물 주고 있었죠.근데 그 그 사람 들은 지금도 나를 모를 거야 아마.모를 거야 이름을 얘기 안했으니까.김성수라고 그랬던가 뭐. 면담자 :그럼 이 노원태씨는 누가 소개를 해주셨나요? 구술자 :노원태씨는 그 64년 이후에 알았어요.그 분은 그 우리 말하자면 선배 그룹들하고 아는 사인데 뭐 그렇게 하여튼 그래 도와줬어요. 면담자 :그럼 그 때 뭐 그 그 도피한 데까지는 아직까지는 뭐 경찰에서는 정보력이 닿지 않았었나 보 죠?

7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9) 구술자 :그 그렇죠.몰랐죠. 면담자 :그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거기에? 구술자 :예.예.몰랐어요.그건 뭐 전혀 몰랐을 거예요.전혀 몰 몰 몰랐 몰랐을 거예요.모르고 또 그 때는 그것 자체는 64년도에는 뭐 무지무지하게 찾 찾고 또 나중에 내가 67년도에 다시 인제 민비련 사 건 가지고 또 잡혀갔는데 그 때도 무지무지하게 찾았는데 65년도는 그 일정한 시간이 더 지나가지고 우리 친구들 다 잡혀 들어간 뒤에는 별로 찾지를 않더라고.않았는지도 몰라.덜 찾은 것 같애(같아). 왜 어떻게 그걸 아느냐하면 그 나를 찾기 위해가지고 뭐 64년도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보니까 수백 집 을 찾아간 거야.예를 들어서 내 고등학교 그 동창들 뭐 거의 전 뭐 전부는 아니지만 하여튼 뭐 하여 튼 백 명 이상을 예를 들어서 뭐 앨범 졸업앨범이나 하고 옆에 있다든지 뭐 그런 관계에 있는 친구들 집 다 찾아가고 그 다음에 또 우리 친척들 집 예를 들면 뭐 우리 고모 뭐 이모 뭐 외가 뭐 우리 일가 해가지고 그러면 우리가 저 안동 집안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것도 뭐 예를 들어서 고모 이모 외가 뭐 어 뭐 그 다음에 가까운 뭐 청수에 친척 이런 거 그것만 해도 한 백여 명이 된다고.그런 집까지 다 다 뒤졌더라고.그래서 하여튼 나는 그 뭐 모르지.누구 집에 갔는지.나중에 평생 몇 십 몇 십 년 이 지나도 야 그 때 말이지 니(너)니(너)때문에 우리가 혼났다 그러면서 그 찾아온 얘기를 하고 그러 더라고. 면담자 :그럼 그 후에 그 67년도 민비련 사건하고 관련되서 그러니까 그 어 65년 이후로는 구속되신 적 이 또 없으셨? 구술자 :65년 이후에 이제 민비연 사건은 다시 그러니까 67년도에.그러 그러니까 그래서 비준이 끝났 죠.끝났는데 그 때는 인제 비준이 끝나고 오 비준이 끝나니까 이제 그 김중태하고 윤보선씨하고는 상 당히 저 자주 접촉을 했고 나도 윤보선씨 집에 가 가 가끔 가고 했는데 그래서 윤보선씨가 인제 비준 때 그 비준 반대한다고 국회의원 다섯 명이 그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그 때 뭐 윤재술,정 정성태,어 윤보선,또 누구던데 누군지 지금 생각이 안 나네.그래서 그 분들하고 같이 신한당이라는 당을 만들었 는데 어 그래서 어 신한당 당을 만들고 어 이제 그랬었는데 인제 김중태는 기왕 이렇게 된 거니까 자 기는 정당에 들어가서 그 국회의원을 해야겠다 이러더라고.그러고 또 그 과정에서 그 백기완씨를 또 우리가 자주 만났어요 같이.그래서 같이 윤보선씨 집에 드나들었죠.드나들었는데 신한당 만들고 인제 다른 데 거 뭐 나도 뭐 예를 들어서 내가 뭐 그 정당 관계 글을 뭐 많이 써줬었어.써 가지고 써 가지 고 인제 새벽에 윤보선씨 집에 가 가지고 어 이렇게 하십시다 그러면 상당히 아마 내가 쓴 글을 여러 건 채택을 해서 성명서도 내고 뭐 그 때 하자 그러고 그랬는데.나는 뭐 나이가 어려가지고 뭐 국회의 원 출마할 나이도 안됐어.그 때 66년이면 내가 43년 생이니까 만으로 치면 뭐 스물 셋인가 뭐 뭐 둘 인가 넷인가 밲에(밖에)안돼 가지고 나는 그런 생각 안하고 어 김중태를 이제 그러면 국회의원 맹글 자(만들자)이래가지고 최소 김중태는 어 근처까지 갔었지.저 뭐 그 때 운영위원이라는 걸 그 윤보선 씨가 맹글었는데(만들었는데)운영위원 전부 숫자가 뭐 한 뭐 20명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중에 김중태 를 넣고 이래가지고 굉장히 중요하게 그걸 했죠.나는 김중태를 국회의원 만들라고 말이지 도와준 셈 이지.그러다가 그 김중태가 합 야당이 합당이 되고 김중태가 공천이 안됐어.그래서 인제 국민 국회의 원은 안됐죠.안됐는데 그러나 어떻든 중요한 정당의 자리를 차지했지.나는 그냥 뭐 입당도 안하고 그

76 7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냥 그 윤보선씨한테 글이나 써다 주고 그랬는데 음 67년에 인제 선거가 있었죠.국회의원 선거가 있었 는데 그 전에 대통령 선거가 한 번 있었는데 몇 년돈지 모르겠네.육십 몇 년도?그 그 전에 있었을 거예요.저 윤보선 그 때는 내가 인제 좀 윤보선씨 서기였을 것 같은 것을 좀 써다주고 그랬죠.그런데 그 그 67년 국회의원 선거 때 그 6 8선거지.6 8선건데 그게 끝나고 어 6 8선거 부정 6 8선거가 부정선거다 이래가지고 그 규탄운동이 벌어지는데,그 인제 중태는 뭐 직접 나가서 연설도 하고 그런 데 나는 뭐 그때 그 윤보선씨 성명서 같을 것 써 주고 이랬는데,그 학생 그게 또 다시 학생운동으로 번져 나갔지요.번져 나갔으니까 우리 짐작에 야 이거 또 이번에 이거 애들 데모하며는 어 우리보고 또 배후라고 치겠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학생들하고는 나는 접촉을 안했어 전혀.그리고 내 혼자 생각에도 야 이거 뭐 괜히 배후 뭐 이래가지고 만나면 걔 나도 걔들 데모하다가 잡혀가면 걔들도 배후가 없 있으면 더 힘들고,우리도 그 때 잡혀 갔을 때 자꾸 배후를 대라고 그러더라고.그러니까 없으면 없다고 그러면 간단하데(간단한데),있으면 숨기기도 어렵고 어 뭐 그렇 그렇더라고요.그래서 인제 그 아 나는 65년 이후 65년도는 하고 65년도 이후에는 학생들 접촉을 나는 거의 안했죠.그 때 했다며는 그 무슨 저 지금 손학규,뭐 송성락이라고 미국을 간 경제학 한 정치학과에 다니는 서너 명 그 학생들만 내가 인제 만나가지고 뭐 어디 술값 같은 것 생기면 술도 사 주고 뭐 얘기 좀 하고 뭐 그 래서 갸들이(걔들이)좀 잘했으면 좋겠다 이렇는데 갸들이(걔들이)그 사람들이 내가 접촉하지 않는 동 안 인제 나중에 보니까 김지하 아 이현배 이런 사람들하고 계속 접촉을 해 가지고 그 또 나중에 뭐 데 모를 하고 그랬더라고.그래 인제 그 65년도에 학생운동이 벌어지니까 우리 내 짐작은 야 또 이거 배 후라고 또 잡혀 잡아 넣겠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판에 인제 그 동백림 사건이 터졌죠.동백림 사건 이 터지니까 그 때 '민비연'지도교수를 한 인제 황성모 교수가 지도교수였는데 황성모 교수가 그 분들 하고 연결은 없는데 어떻든 황성모 교수가 유학시절에 동베를린을 방문을 했어.관광으로 방문을 해가 지고 뭐 어 북한 대사관에 가서 접촉을 했다라는 걸로 인제 나중에 기소가 되었는데 황 교수의 말은 내가 동베를린을 그 관광으로 방문을 했지마는 그 제가 북한대사관을 접촉한 건 아니다는 것이 황 교 수의 주장이고 그때 인제 그 수사 때는 뭐 황 교수 고문을 굉장히 해 가지고 접촉한 걸로 시인했는지 모르겠어.그 그런데 황 교수는 인제 그 전에 인제 그 뭐야 국대안 반대 때 해방 직후에 어 이 이 정 부기관에서는 좌익학생운동에 관계했다고 생각하고 본인은 아니라고 말하 말씀하고 그 그러고 인제 거 기 뭐 나중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인제 황 교수의 말로는 아 자기 아 그 다음에 또 사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사실은 황 교수가 그 공 저 저 공화당 사전조직에 관계를 했어.사전 조직에 인제 틀을 짜 주고 뭐 이런 상당히 깊이 관계했어.그러니까 말하자면 황 교수는 정치권에 그러니까 그 때 당시의 여권에 상당히 그 깊숙하게 핵심부하고 아는 사이야.그런데 인제 권력투쟁으로 말하자면 황 교수는 JP선인데 그 이후락( 李 厚 洛 )선에서 황 교수 말로는 청와대에서 불러가지고 자기가 한 번 갔는 데 그 때 이후락 비서실장이 이후락이를 이후락이를 몰랐다는 거야.저 황 교수가 청와대에서 박정희 만난 거를.그래서 그게 자기가 잡혀간 그 이유가 아니겠느냐라고 자기는 생각하더라고.그러니까 황 교수는 말하자면 복잡하지요.하나는 권력투쟁,또 하나는 베를린에 유학할 때 북한하고 접촉했다는 거,또 하나는 그걸 접촉했어,했는 그런 색 그걸 가지고 있으면서 민비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조종을 해 가지고 인제 데모를 조종을 했다라는 이게 인제 말하자면 황 교수가 어 공화당 사전 조직과 청와대

7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1) 하고 그런 선이 이후락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표면으로 얘기하지 않으면서 내 내밀로 말하는 황 교수가 잡혀간 이 황 교수가 생각한 이유고,어 인제 겉으로는 인제 그 공산당하고 접촉해 북한대사관 하고 접촉해가지고 '민비연'을 맹글어서(만들어서)그게 에 데모를 지도했다라는 이걸로 인제 그 했죠. 그래서 '민비연'은 뭐 아시다시피 그래가지고 그 이 김 황 교수,김중태,박범진( 朴 範 珍 ),이종율( 李 鐘 律 ).박범진은 우리보다 한 해 선배고 그 때 조선일보 기자를 했고,이 이종율도 한 해 선밴데 그건 동 아일보 기자를 했고 이종율씨는 지금 죽었지.나중 국회 뭐 뭐 국회의원 되었습니다만.그 다음에 박지 동이라고 그건 우리보다 한 해 후밴데 인제 그 다음에 '민비연'회장을 했다고 그래고.김중태 현승일 은 둘 다 회장했고.그 다음에 인제 조봉계라고 회장을 우리 동긴데 사회학과인데 군대 가 있었는데 회장했다고 그건 군에서 잡 그 있으면서 잡혀갔고,그 나는 인제 회장을 안했는데,안했는데 나는 인제 '민비연'중요구성분자라고 잡 잡혀갔어.회장 아닌 사람은 나 하나였고 다른 사람은 다 회장을 했는데 그 '민비연'에서 나는 그 때 좀 늦게 잡혀갔어요.뭐 그 다른 사람 다 잡혀간 뒤에 한 보름이나 스무날 이나 지나가지고 광화문에서 잡혀 갔는데 그 쪽 그 때 길에서 이동규( 李 東 圭 )를 만났더니 이동규가 저 홍하다방이라는 데서 만났는데 지금도 그 다방은 없어졌지만 자리는 있더라고.아 그 저 그 그 때 그 시대 우리도 잡혀가기 전에 이미 신문에 확 공개가 되었어.뭐 사건내용까지 다 났어.그 다음에 아 근 뒤에 당 당신하고 지금 이보일인가 누구밖에 두 사람만 안 잡혀갔는데 이거 다니면 어떻게 하겠냐고 그러더라고.그 이튿날 또 다방에 나왔는데 종로경찰서 형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왔더라고.와 가 지고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이 왜 왜 점잖은 사람이 왜 이래.왜 그러긴 그 잡혀갔지.그래서 어 잡혀 가보니까 그 때는 고문을 했다 그러더라고.황 교수는 많이 당했고.했는데 나는 들어가 보니까 이미 고문이고 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사건이 다 다 나와 있고.뭐 내 뭐 내가 뭐라고 얘기한 것까지 다 나와 있어 다.내가 얘기할 여지도 없고 이미 다 되어 있어서 그냥 나는 예 예만 하면 돼.그런데 내가 생각해보니까 이거 뭐 내가 아니라고 버텨봐야 예를 들면 뭐 뭐 뭐 황 교수가 간첩인줄 알았지?알았 습니다,뭐 이거 하자 그랬지?예 했습니다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 되어 있으니까 내가 뭐 아니라 고 그래봐야 뭐 이미 그 사람들 자신이 다 했다고 해놨는데 뭐 얻 얻어맞긴 얻어맞지 뭐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해서,하이고 뭐 이미 일은 다 끝났고,그 사람들도 나한테는 때릴 것도 없고 공갈은 좀 쳤지 마는 잠만 안 재웠지.잠은 며칠씩 안 재웠지.그 외에는 때리거나 이러지는 않았고.그래서 뭐 그리 알아서 맞.그랬 그랬는데 인제 보니까 내 바깥에서 전국에 이미 내 범죄 사실이 신문에 다 공개가 되 었기 때문에 본관이나 뭐 묻고.어디까지 내 본적을 안동군 서해면이라고 써 놨더라고 신문에.그래서 뭐 그 보니까 그 기소 저 조사하면서도 서 서해면 카길래(하길래)그 땐 예,예,뭐든지 하라는 대로 틀렸 내 이름도 가령 뭐 박동일이라고 썼으면 예 하고 찍었을 거야.예 그래 예 그러고.그 나중에 보 면 기소장도 그렇게 써놨더래.그런데 법정에서 그랬지.저 사실은 나에 대해서 조사한 게 아무 것도 없다.신문에서 보니까 서 안동군( 安 東 郡 )서해면( 西 海 面 )이 본적이라고 했는데 그 기소장 봐라 거기도 서해면이라고 써 있는데 서해면이 아니고 서후면이다 서후면( 西 後 面 ).그런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그 래서 그랬는데 그게 인제 법정에서 와서 인제 황 교수가 아니라고 그랬지.내 이북 같이 사람하고 접 촉한 건 아니다.관광 안 갔지마는 그러고 뭐 얻어맞은 얘기 하고 뭐 뭐 뭐 그랬었죠.고문당한 얘기 하고.

78 7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그러니까 그 67년 '민비연 사건 으로 그 구속되셨을 때는 인제 6 3운동(6 3민주화운동)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가? 구술자 :그게 어 그게요.사실은 똑같은 사실인데 결국 6 3사태 때 6 3때 데모한 얘긴데 그걸 그 때 는 데모했다고 잡아간 거고,이번에는 인제 민비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맨들어서(만들어서)그 데모를 말하자면 했다 그거죠.요번에는 인제 그 어 활동은 같은 활동인데 그걸 요번에는 민비연 이라는 반국 가단체를 맹근 걸로(만든 걸로)해서 어 그래 저 잡아넣은 거죠.잡아넣은 건데 나는 그 때 사실은 그 내가 나 회원이 아니라고 그랬어.그런데,사실 회장도 안했고 그 때 회원이 뭐 긴지 아닌지 뭐 그 때 뭐 어 뭐 당국의 발표는 그랬지만 누가 뭐 회원이라고 회원명불 맹근(만든)것도 아니고 뭐 출석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회원이라면 그러면 회원이고 아이라고(아니라고)그러면 아닌 거였어요.그래 난 아 이고 뭐 회원 나 입회 입회한 적이 없다고.그래서 인제 어 그래서 좀 공개하기 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그 교수 한 분하고 우리 동창 한 분이 증인으로 나왔어.나왔는데 그런데 그 분들은 모르니까 인 제 뭐 시켜서 검찰 쪽 증인으로 나왔어.'민비연'회원 뭐 무슨 내가 물어봤지?그 예를 들어서 내가 회원 회비 내는 거 본 적 있느냐?회원 회의에 참석한 것을 당신 눈으로 본 적이 있느냐?그 사람들도 실제 본 적도 없으니까 본 본 적도 없다 없다 그러니까 그 그런데 왜 회원이냐?아이고 듣고 보니 회 원인지 아닌지 자기들도 잘 모르겠다.(웃음)그런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있어서 그거 뭐 그러고 또 회장도 안하고 해서 그런지 1심에서 무죄를 내렸어.나는 나는 무죄를 냈는데 구형은 10년인가 했 받 아가지고 무죄를 내렸는데 2심에서 다시 유죄를 내 버렸어.그랬어요.그래가지고 1심에서 무죄내도 구 형량이 10년이면 석방을 안 시켜.그 그 그 아 형무소 안에서 2심에서 유죄가 났으니까 또 대법원에 올라갔더니 대법원에서 파기를 했어요.파기를 해 가지고 다시 또 고법에 내려와 가지고 어 무죄를 다 시 받았어.그러니 다른 사람은 유죄를 받아가지고 유죄 받은 대신에 인제 보안법에서 반공법으로 바 뀌고 뭐 간첩 부분 이런 거는 무죄가 되고 그 인제 반공 반 그러니까 공 저 공산권에 동조한 단체를 맨든(만든)부분은 그 무죄를 아마 받고 뭐 동 찬양 고무 이것만 유죄를 받아서 형량 자체는 작아지고 뭐 2년 3년 이렇게 되고 어 인제 징역은 살 살았죠.그 박범진하고 이종률은 미리 나갔을 거예요.박진 홍(박지동, 朴 智 東 )하고 셋은 신문사에 다 있었는데 신문사였기 때문에 나갔는 걸로 사실은 뭐 그럴지 모르지만 인제 이유는 거기는 뭐 전에 뭐 체포사실도 없고 이런 식이었고 그 다음에 우리 친구들은 그 거 받은 적 있으니까 황성모하고 김중태 현승일이는 징역을 살았고 나는 무죄로 나왔는데 나는 무죄로 나오긴 나왔지만 뭐 미결수로 1년 18개월인가를 있었으니까.그래.나중에 형사보상금 저 청구를 해가 지고 하루에 뭐 400원씩 쳤던가 그랬었어.200만 원쯤 받아가지고 한 자리에서 술 먹고 나니까 마.(웃 음) 면담자 :그러면 저 '민비연'사건 같은 걸 통해서 볼 때 어쨌거나 그 '6 3운동 을 지도했던 지도부들이 그 이후에 학생운동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들을. 구술자 :에 이렇게 볼 수 있을 거예요.그 6 3사 6 3운동을 주도했던 사람 중에서 어 뭐 지금 김중태 는 65년도까지 67년도까지는 관계를 했고 어 그 뒤에는 미국가고 없었으니까 그렇고 현승일이는 65년 도 이래에는 관계를 안했고 다른 사람들 뭐 김지하니 뭐 박재일( 朴 才 一 )이니 최혜성( 崔 惠 成 )이니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관계를 했죠.그 나는 65년도 이후에는 학생하고는 관계를 안했고 그런데 인제 그

7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3) 뒤에 내가 그 공화당 정부에 말하자면 협력을 안했죠.안하고 뭐 그 '민비연'사건 뒤에 나오니까 뭐 장준하씨 이런 분들이 우리를 좀 도와줬더라고.다른 게 아니라 변호사 같은 거를 좀 사주고 이래가지 고 인제 장준하씨 같은 분하고 친 가까이 지내고 자주 만났는데 장준하씨가 뭐 박대통령 어 하고 뭐 원수처럼 싸워 싸웠으니까 나도 가깝고 같이 또 그 뒤에 뭐 백범사상연구소니 뭐 또 민족학교니 뭐 이 래서 장 선생하고 삼선개헌반대운동이니 이런 걸 장 선생 옆에서 많이 거들고 나중에 장 선생이 저거 (서거)할 때까지 저 유신철폐 운동할 때까지 가까이 지내고 했으니까 하여튼 뭐 틈만 나면 뭐 틈만 나면이 아니라 학생문제만 생기면 일단 나를 데려가는 거야.데려가 가지고 뭐 나는 학생들하고는 사 실 관계를 안했는데 데려가서 계속 묻고 뭐 이러고 하니까 내가 아주 그 그 때부터 아주 습관적으로 남의 이름 기억 안하고 더구나 후배들하곤 뭐 후배들 이름 같은 기억안하는 걸로 버릇이 되어 버렸어 요. 면담자 :그래도 학교 쪽 학생들 입장에서 볼 때는 뭐 상당히 중요한. 구술자 :학생들은 이제 그 물론 우리하고 같이 했던 사람들이 인제 나중에 뭐 에 저 이현배 뭐 누구야 손학규( 孫 學 奎 )손학규는 나중에 좀 떠났지마는 뭐 이런 사람들이 그 그 유신반대운동 그 민청학련 그 사건까지 연결이 되었는데 나는 개입을 안했지마는 그랬으니까 인제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 내가 뭐 다 른 친구들 뭐 미국 그 김중태 현승일 같은 친구는 미국가고 했는데 나는 그 미국도 안가고 이랬으니까 학생들 사이에서는 또 나는 계속해서 장준하씨하고 같이 인제 장 장준하 백기완( 白 基 玩 )이런 분들하 고 같이 반박정희 뭐 그런 선에서 저걸 했으니까 학생들 사이에서는 저 날 이름 아는 사람이 많고 그 랬 그랬던 것 같은. 면담자 :어 선생님이 쭉 보시면 어 64년 뭐 3 24시위부터 해서 쭉 일련의 학생 중요한 우리 현대사에 서 중요한 운동에 참여를 하셨는데 가장 근본적으로 이런 그 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이유랄까 뭐 그런 거는? 구술자 :그 이 지금은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여러 가지 인제 경제성장을 뭐 시켰다 이런 걸로 해 서 그 평가를 달리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나도 일정한 부분 어 그런 점이도(점도)있다고 생각은 하는 데 그 때 우리는 그 박정희 쿠데타 자체가 지금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그 쿠데타를 안 했으며는 4월 4 19혁명을 토대로 해가지고 어 그 민주당 정권이 되든지 뭐가 되든지 에 그 쪽 그렇게 통해서 경제 발전을 해서 더,그래도 경제발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 어 실제 박정희식(박정희씨)초기의 몇 년간은 지금 사람들이 잘 모르고 뭐 박정희는 경제 밖에 안 생각했는데 뭐 이 사람들은 정치만 생각 이렇게 하는데,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며는 박정희 정권 초기 한 4-5년간은 아무 것도 경제정책 사실 한 게 없어요.그냥 처음 정치만 했지.맨날 뭐 무슨 구정치인 묶는 것 군정 연장하느냐 안하느냐 뭐 그 다음에 뭐 이런 것만 했지 실제 경제정책은 한 게 없어요.그 그리고 어 한 4-5년 지나서 그 때 인 제 일본 청구권 자금이 들어오고,어 경제계획이 인제 그 진전되고 했는데 그 경제계획 자체도 박정희 씨만 했다고는 그 때 우리 그렇게 생각을 안했죠.뭐 이미 경제계획은 뭐 4 19이전에 에 자유당 말 기부터 뭐 맨들어져(만들어져)시작을 했고 또 민주당 정권 때에는 본격적인 그 경제개발 계획을 세울 라고 지금 단계였고,오 장준하( 張 俊 河 )씨 같은 경우에는 국토개척단이니 뭐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이 미 그런 일 착수를 하고 있었고,오 그리고 그 원시자본을 축적하는 단계에서 뭐 선진국은 인제 그 가

80 7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혹한 그 그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가혹한 어 정책을 써서 원시자본을 축적했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겠 습니까?그 단계에 그래서 뭐 다 저 자본론의 토대도 그런 토대가 되는 현실도 만들어지고 뭐 이렇게 했지마는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우리나라도 원시축적 자본축적단계에서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죠.얘기할 수 있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저항 자체를 그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 가지로 그렇게 않고도 자본 축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생각을 해서 그래서 인제 박 정희씨의 정 정권에 대해서 그 반대해 왔고 더구나 우리 가까이 지내던 장준하씨 같은 분은 음 두 가 지 점에서 하나는 민족적으로 봐서 그 장준하는 광복군 을 했고 박정희는 저 일본 장교를 했는데 그 우리 저 해방된 조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 그 뭐 그 얘기만 놓고 본다며는 그건 말의 여지없이 어 우리가 그 박정희씨 편을 들을 수 없는 거고 또 자유민주주의라고 헌법상에 되어 있는데 국민의 정말 모든 자유권을 그렇게 억압당해있는데 말이지.그 그 어떻게 할 수 없는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거고. 그러니까 이 나중에 인제 내가 뭐 민족학교라는 거 뭐 이름으로 강연회를 전국에 하고 다녔는데,그 때 처음에는 인제 나중에는 신상철(신상초, 申 相 楚 )씨가 유신에 가담했지마는 처음엔 우리하고 강연도 했다고.그래서 유신 헌법에 가담한 뒤에 신상철(신상초)씨를 내가 만난 적이 있어.만났더니 한 일언 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그 신상철(신상초)씨가 그 내 박정희 반대하다가 나중에 돌아섰기 때문에 유 신헌법 이 나온 뒤에 신상철(신상초)씨가 TV에 나와 가지고 한 1시간짜리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 유신 헌법에 대해서.그 거이 거이 그거 뒤에 신상철(신상초)씨가 박대통령을 만났대.그래서 신상철(신상초) 씨한테 내가 직접 들은 얘기야.그 박대통령을 만났더니 박대통령이 그 당시에 나가서 얘기해 줘서 고 맙다.그런데 당신 그 말한 게 그게 생방송이요?녹화요?그러더라고.그랬더니 녹화다.그러면 녹환데 당신 말한 대로 다했소?그러더라고.말한 대로 다 하지 않았더냐고?뭘 뭘 뺐더냐고?그랬더니 신상철 (신상초)이가 이렇게 했다는 거야.내가 사실 거기 뭐라고 그랬냐하며는 그 하 일부 학자들이 이 헌법 은 뭐 불란서 뭐 5공화국 헌법을 뭐 모델로 해서 만들었느니 뭐 이런 얘기를 하는데 에 그렇지 않다. 이 헌법은 박정희라는 탁월한 영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해가지고 만든 헌법이다.내가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이 대목을 지웠다.이렇게 신상철(신상초)이 이야기했더니 박정희가 야 그거 미친놈들이 아니냐 고?그걸 왜 지우냐고 말이야.그런데 그게 신상철(신상초)이라는 분은 우리가 오래 인제 접촉을 해서 아는데 그게 묘한 말이라고.아주 칭찬이기도 하고 또 지식 인테리(인텔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그 야유이기도 하고 야유 겸 지식 그 진담이기도 하고 말이지.신상철(신상초)씨 말로 그러더라고.그러니 까 새로 얘기해서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뭐 이러저러한 설명을 붙이고 이론을 갖다 붙였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편하게 더 오래 하자는 게 그 박정희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괜 히 학자들이 나서가지고 뭐 어쩌고저쩌고 갖다 붙였다 그 얘기를 신상철(신상초)은 노골적으로 하는 거야.어떤 나 신상철(신상초)한테 본인한테 들었으니까 뭐 그 그렇게 봐 봐야겠지. 면담자 :기본적으로 이제 그 4 19에 대한 그 당시의 평가들은 그 4 19로 인해 4 19혁명으로 인해서 어 새로이 만들어지는 사회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박정희씨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 자체가 무리다라는. 구술자 :그렇게 보인거지.지금 결과를 놓고 박정희씨가 17년인가 집권을 해서 경제발전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뭐 그거 결과를 놓고 봐서 그런지 안 그런지 그걸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 때를 추

8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5) 억하는 거에 대해서는 나는 근본적으로 그 말도 안되는 소리였어.왜냐하며는 지금 우리는 어떤 위대 한 영도자가 나와도 17년 맽길(맡길)수가 없어.제도적으로 안되게 되어 있어.그럼 지금 누굴 맽겨(맡 겨)가지고 5,6년 시행착오한 뒤에 5,6년 뒤부터 잘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그러니까 그 때 경험을 얘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얘기를 나는 좀 한다고 보 보지요.도대체 처음부터 불가능한 얘기를 지금 누가 누구를 저 17년 집권시킬 수가 있나요? 면담자 :그래서 선생님 같은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해 주시면 제가 62년생이거든요.그러니까 저의 이 같 은 경우에는 제가 뭐 제 경험 그 4 19라든가 5 16을 후에 뭐 들어서 아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그 실 제로 그것들이 일어났던 공간에서 어떤 평가들을 받고 있었는지? 구술자 :그 박정희씨 자신도요.나중에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자기도 처음부터 예측하고 했던 것은 아닙 니다.왜 아닌 게 확실한가 하며는 박정희씨는 초 그 때는 박정희도 그랬고 김종필도 그랬고 따른 다 른 사람들도 많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계획경제가 어 상당히 경제발전을 빨리 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그래서 박희범 교수 같은 분이 계획경제를 그 사람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마는 계획경제를 상당히 그 좋아했던 사람이거든요.좋아했고 또 전문가고.그 박희범씨가 등 아주 중용은 안되었지마는 초기에 굉장히 영향을 줬다라고 그러더라고요.그 그래서 박정희씨 자신도 어 처음에 계획경제를 할라 고 했는데 하다가 보니까 미국이나 부 저 돈 많은 사람들이 뭐 이병철이니 뭐 정 정주영이니 그 사람 들은 자기 돈 버는 거와 함께 한국이 경제 발전한 거 아닙니까?한국경제도 발전 커졌고 그러면서 자 기가 없는 돈 만들었고 만드는 과정을 박정희가 권력으로 밀어줬고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이 렇게 생각하고 했던 건 아니죠.그러니까 그 해외의존형으로,뭐 좋게 말하면 수출주도형이고 또 달리 보면 해외의존형이 되었는데 그 뒤에 뭐 YS(김영삼)때 IMF까지 갔지마는 또 그 이후에 격렬하게 그 노사문제가 터졌지마는 그게 다 박정희 때 축적이 되었던 문제가 그 때 그 때 그때마다 해소하면서 극 복해 올라간 게 아니고 그 때 때려 눌러놨던 게 터질 터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그래서 그 그래서 한 국민의 전체적인 역량으로 봐야지.난 달리 생각해요.뭐 또 심지어 내하고 좀 같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난 뭐 백범노선에 대해서 꼭 이 노선이 살 길이다 이렇게는 지금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 백범 연구를 내가 좀 했던 사람인데 그리고 제일 먼저 나온 백범어록이라는 걸 말하자 면 내 혼자 만든 건 아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해서 그 때 도서관에서 전부 이렇게 에 뭐 이런 자료 하나도 없을 때 직접 카메라로 내 손으로 찍어가지고 그래 인제 해서 맨들었습니다마는(만들었습니다 만)우리가 지금 얘기하면 미국 줄을 섰기 때문에 오늘날 잘 살게 되었다는데 그것도 일리 있겠지마는 그럼 같은 미국 줄 선 필리핀은 왜 못살아요?그건 너무 그렇게만 단순화시켜가지고 뭐 이렇게 해서 우리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난 생각하지 않죠.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진데 자꾸 지금도 그 논쟁이 계속됩디다마는 가령 어 백범 같은 사람이 집권을,마 집권할 수도 없었지만,해서 가지고 어 분단이 아닌 다른 형태의 어떤 정부가 섰다며는 최소한 6 25전쟁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물론 소련이 이 부추 겼다고도 하겠지만,어 김일성이가 김일성이하고 소련하고 분단 맨들었으니까(만들었으니까)일어났던 일 아닙니까?그러면 지금 우리가 마 솔직히 말해서 지금 우리가 그러면 이 따뜻한 방에서 자고 좋은 옷 입고 사는 게 에 좋은 거냐?에 6 25전쟁을 치러가지고 부모가 죽고 오 형제가 막 갈라지고 한 게 해독 그러면 어 20년 뒤에 따뜻한 옷만 입고 있으며는 지금 그렇게 하 하겠느냐 한다며는 지금 아마

82 7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다시 누가 그런 질문을 한다고 치며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최소한 나는 따뜻한 옷을 안 입더라도 부모 죽는 것은 반대입니다라고까지는 못하더라도 선뜻 나는 부모가 죽어도 좋으니까 20년 후에 따뜻한 옷 을 입겠소라고라고 말하기는 아마 지금도 어려울 거예요.그렇게 우리가 해방 뒤의 그 정국을 본다며 는 무슨 이 남한 단정에서 단정을 반대했던 사람을 마치 뭐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없게 맨들었던(만들 었던)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했으면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북한이 되었을까 이케(이렇게)생각하는 거 는 나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뭐 내하고 물론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겠지마는. 면담자 :저기 저 말씀 듣고 보니까 갑자기 아 생각이 안 납니다.그럼 그 6 3그 운동을 같이 하셨던 분들이 그 이후에도 뭐 각 부분으로 나가셨겠지만 쭉 그렇게 친분관계를 가지고 만나? 구술자 :뭐 친분관계를 뭐 가졌다고.에 가졌죠.가졌는데 물론 그 중에는 생각도 좀 많이 그 뒤에 사회 가 많이 분화되었으니까 뭐 특히 박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어 우리하고 생각이 달랐던 사람들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6 3들 관계되었던 사람은 박대통령과의 관계에서는 비교적 거의 반대 입장에 마지막까지 있었던 것 같애요(같아요).그건 뭐 그건 왜 그랬는지 난 뭐 하여튼 그랬던 것 같애요(같아요).물론 경 제계로 간 사람은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계로 갔지 뭐 직접 박정희 뭐 뭐를 들어간 사람은 좀 수가 많지 않는 것 같애요(같아요). 면담자 :아 뭐 그건 아마 예. 구술자 :지금부터는 뭐 6 3하고 관계없는 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어 글쎄 뭐 이런 기록이.난 사실 난 옛날 얘기하기를 별로 좋아 안하는데 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뒤에 6 3에 대해서 긴 글은 아니고 어디 청탁을 받아가지고 쓰라고 그래가지고 짤막하게 쓴 게 한 두 권쯤 있어요.하나는 어 동아일보에서 무슨 뭐 해방 몇 십 년 뭐 뭐 몇 십대 사건 뭐 이래가지고 했는데 '6 3'관련 부분을 어 뭐 원고지로 치면 한 긴 글은 아니고 한 2,30매짜리 하나 쓴 게 있고 또 조선일보에서도 무슨 뭐 해방록 몇 십 주년 사건으로 보는 뭐 뭐 이래가지고 맨든(만든)책에 내가 그건 더 짧게 쓴 게 있는데 어 뭐 그 외에는 내가 별로 그 기억도 정확하지를 않고 해서 뭐 별로 뭐 옛날 얘기 자꾸 하는 것도 난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래서 뭐 그 뒤에 내가 뭐 별로 잘 잘 된 것도 없고,잘됐다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내 내 뜻대로 뭐가 잘 이루어진 것도 없고 해서.글쎄요.난 뭐 그러네요 사실. Tape4. 그래서 그런데 에 이런 거는 예를 들어서 그게 인제 지금 새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대목인데 학생시절 이나 이런 시절에 결국 그 공동체와 내가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될 것인가를 고민을 해 보는 것이 좋은 건지 안 해보는 게 좋은 건지 그게 인제 좀 그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 과제가 되겠더라 생각해서 결과 적으로 봐서는 뭐 그 그 때 그런 고민을 했는 것이 자기의 발전과 또 그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된 사람도 있고,또 안 그런 공동체라는 생각은 별로 안했는데 또 나중에 자기도 발전하고 공동체의 발전 에도 기여를 하게 된 경우도 있으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는데 우리는 그 때 그런 뭐 우리나라 전체가 다 어려운 시기,사실은 어느 땐들 안 어려운 시기였겠습니까마는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하여튼 공 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그 고민했던 거 그건 사실이었던 같고.뭐 좀 어리석은 말로 하면 나 혼

8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7) 자 뭐 탈출해가지고 뭐 가령 뭐 내 혼자 탈출해서 부자가 좀 되어 보겠다든지 나 혼자 탈출해서 어 뭐 좀 출세를 해보겠다든지 그런 거 안 그거는 좀 잘못된 게 아닌가라는 게 우리 생각이었는데 나는 지금 은 그 생각이 꼭 맞다고 주장하지는 않아요.뭐 뭐 그런 게 아마 그런 고민이 아닌가?내 그 때 그게 앞으로도 문젠데 요새 인제 남북문제가 나오니까 그런데 어떤 기회에 황장엽씨를 이렇게 한 열댓 명하 고 만나서 황장엽씨를 만났던 적이 있는데 뭐 이것저것 뭐 딴 친구들 북한에 대해서 묻고 뭐 이러고 있는데 내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얘기를 황장엽씨에게 물어 봤어.당신 생각에는 북한에서 지금 북한 에서 어 가치 있는 일이 우리가 그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뭐랑 뭐 같으냐?아 내 그런 얘기를 한 번 물어 봤던 거 같애(같아).표현은 그 표현을 잊어버렸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개념으로는 가치 있다 고 생각하는 게 있다며는 북한에는 공동체를 좀 존중하는 그런 거가 가치 있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한 다라고 황장엽씨가 말하는 것 같은 내 지금 기억인데 글쎄 그것도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고.(웃음) 지금 참 아 이건 녹화하고 관계없습니다마는,사실 우리가 지금의 오늘날 북한에 대해서 뭐가 가치 있 는가,북한에 있는 것 중에 도대체 우리가 건져야 될게 뭐가 있는가,이걸 묻는다면 지금 남쪽에 있는 사람의 아마 100명 중의 뭐 주사파 빼 놓고는 하나도 가치 있는 게 없다라고 대답할 거예요.사실 뭐 그게 문제지. 면담자 :그 6 3주역들이 저 현실정치에 좀 등장하기 시작? 구술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뭐 일단 그 공식적으로는 뭐 박정희씨 죽은 뒤지요.죽은 뒤에 인제 그 등장하기 시작하는 건데.그 그렇죠.근데 인제 가령 나 같은 경우에는 내가 그 때 인제 영남일보라는 대구에 있는 신문사에 있었는데 왜 있었느냐하며는 내가 70년에 그 영남일보라는 데 논설위원을 하자 고 그래서 내가 한 1년 1년까진 못했어.했는데 그 때 70년 12월에 그 선언이름을 잊어 버렸네.그 그 게 인제 유신의 전 단곈데.뭐 뭐더라?해가지고 뭐 뭐 노동운동에 대해서 보도도 못하고 뭐 뭐 그런 조치가 내렸어.그래서 내가 그만 둬 버렸어요.두다가 어떤 사건이 생겼냐 하면 김지하가 그 '인혁당' (인민혁명당)사건이지 아마 그걸로 다시 붙잡혀 갔는데 김지하의 자술서에 자기가 인제 공산주의잔데 에 김도현이하고 손정박( 孫 正 博 )이하고 김중태하고 뭐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진술이 나 와 있어.그래 손정박이는 그 때 잡혀 들어갔다고.그러니까 진 손정박이 진술은 수사 쪽에서 확보되어 있는 거고 증거는,김중태는 미국에 있었으니까 잡을 수가 없고,그래 남아있는 나를 붙잡아가지고 김 중태(김지하)한테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영향을 줬느냐라는 증언을 받아내야 될 판인데 그래 나를 잡으 러 다닌 거야.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게 내 일 같으면 뭐 끝까지 내 아니라고 버티다가 뭐 뭐 아 이 그랬다라고 해도 고만인데 이건 내 가만 생각해 보니까 김중태 17) 가 빨갱이 만드는데 내가 그랬게 했다라고 해 놓으면 아 이거 이상하게 될 것 같더라고.또 저 사람이 잡을라고 하는 사람은 내가 내 주장대로 관철되도록 나를 놔두겠느냐 그거야?죽여도 자기네들이 필요한 증언을 받아내지.그러니까 아 도저히 이건 안되겠더라고요.안 잡혀야 되겠다 싶더라고.그래서 거의 한 6개월 정도 내가 그것도 그래가 그건 김중 저 김지하 자술서 그 대목은 그건 바깥에 유출이 됐어.내 다 읽어봤어.읽어 보니까 그 내 이름이 나오고 내 그렇게 했던 걸로 되어 있더라고.아 한 6개월 인제 도망을 댕겼는데(다녔는 데)아 이건 뭐 안되겠더라고.더 도망 다니기도 힘들고 말이야.그래서 내가 그 영남일보 사장한테 17) 구술자 : 김지하를 김중태로 잘 못 지칭함..

84 7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다시 가 가기고 사주한테 가서 내가 대구에 가서 좀 새로 영남일보 일을 하겠다.어 그 내 생각에는 영남일보 일을 하며는 그걸로 그 때 신문사라는 게 전부 정부하고 협력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나 를 죽 꼭 잡아넣을 생각이 없다며는 그걸로 그냥 내버려두는,왜냐하면 그 때는 계속해서 해마다 나를 데려가는데 무슨 학생들 데 데모는 계속 일어나지 하니까 내하고 관계있느냐 없느냐 뭘 안했냐니 그러 면 그 사람들 말로는 이북 방송에도 내가 나온다는 거야.내가 안 들어봐서 모르겠는데.그래서 아 그 거 좀 면하지 싶었고,또 하나는 잡혀 가더라도 저 지난 번에 민 '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사건 때 보니까 무슨 신문사 이런 직장에 있는 게 훨씬 낫더라고.그래서 사장한테 그 얘기를 했지.어 내가 좀 가서 대구에 가서 요번에 일을 하겠다.그랬더니 그 신문사에는 사람도 필요했고 또 그 때 그 유혁 이(유혁인)라고 그 청와대 정무수석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주 박정희하고 아주 가까웠고 실력자 지 실력자.그런데 그 분이 우리하고는 나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고.그 우리 백모가 그 분의 고몬데, 우리 우리 백부 그러니까 우리 저 그러니까 내 사촌하고는 외사촌 사이지.어릴 때 또 우리 집에서 이 양반이 학교를 댕겼어(다녔어).컸어.내하고는 뭐 맨날 장난치고 형님 형님 하고 그랬는데 아주 힘쓰 는 사람이라서 내가 그 집에 가서 그랬어.내가 대구에 갈 테니까 잡아넣을 테면 넣고 말테면 말라고 말이지.아니면 뭐 마음대로 하라고.그래서 유혁이(유혁인)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날 그 김지하 증언에서 더 찾지 않아 버렸다고.않게 되었다고.그래서 내가 대구에 가서 박정 희 죽을 때까지 있었죠.있었는데 그 비슷했 뭐 박정희 죽을 때까지 대구에 있었죠.있었 아 맞다.정 계 진출 때문에 그랬지.그런데 인제 박정희 죽고 나서 그 전두환 집권하니까 내가 또 잘렸네.그 해직 강제 해직을 시켰네.시키니까 그 딱 얘기를 하는데 그 저 이 때 요번에 해직된 친구들은 취직이 안된 다는 거야.그 뭐 내가 취직이 안되도 뭐 그 그렇게 꼭 억울한 거는 아니지마는 어떻든 취직이 안된다 그러니까 뭔가 그 좀 새로운 길을 찾긴 찾아야겠는데 그래서 인제 뭐 그 때 꼭 정치를 할 분위기는 사 실 아니었는데 테스트 겸 해서 내가 이것도 안될 거다 안 넣을 거다고 그래 인제 해서 서울에 올라왔 더니 그 김정남씨가 신상우하고 가까운데 신상우( 申 相 佑 )가 뭐 야당을 맨든다고(만든다고)그러더라고. 신상우를 만났더니 어 뭐 힘들 것 같지만 자기가 노력해 보겠다고.이랬는데 내 고향이 안동이래서 그 런데 그 때 저 민정당을 권정달( 權 正 達 )씨가 맹그는(만드는)책임을 맡았다고.그 권정달씨가 안동사람 이에요.그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알지 못하고.그런데 이사람 권정달이가 안동 가보니까 실제 내 이렇 게 뭐 훌륭한 사람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은 아닌데 예를 들어서 우리 집안 같은 거는 우리 집안이 크 니까 뭐 우리 종손 같은 사람한테 가서 요번에 출마할라면 좀 절하는데 하면 이 사람들이 꼭 아 뭐 도 현이가 출마안하면 뭐 도와주겠지만 대부분 만나면 도현이가 출마안하면 이렇게 자꾸 얘기를 하니까 나를 굉장히 크게 아마 의식을 했지 않나 싶어.그래서 나를 정개법 으로 못 묶은 거야.나를 묶었다간 저 기 권정달이 지 할라고 묶었다라고 저 줄줄줄 끌어.안 묶은 거야.못 묶기도 하고 안 묶기도 하고. 그래서 인제 그 하라고 신상우 안 묶였으니 신상우한테 가서 그래서 야당에 넣어 주슈 그랬더니 아이 고 안 안된다고.왜 안되냐고 그랬더니 며칠 뒤에 아 권정달이가 끝까지 이건 안 들어오기로 하고 안 묶었는데 이거 들어오면 곤란하다고.나보고 권정달이 좀 찾아가서 찾든지 어떻게 해가지고 좀 권정달 이하고 풀고 오라고 그러더라고.난 권정달이하고 직접 알지도 못하고 말이지.그래서 김길홍( 金 吉 弘 ) 이라고 있어요.나중에 유정회 유정회가 아니라 뭐야 그 전국구 국회의원 중의 한 사람인데 경향신문

8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9) 에서 박정희 저 전두환이 칭찬기사를 막 내리다 저 한 페이지를 써 버렸지.김길홍이 김길홍이는 우리 일가야.내가 내가 좀 알죠.중학교도 같은 데고.그 김기룡이한테도 그 얘기를 했지.했더니 아 그건 당신 그 출 그 야당 안하기로 한 걸로 해서 안 묶었는데 이래되면 곤란해진다고.그러면 국회의원 꼭 할라면 내가 그 저 민정당 전문위원을 하 시켜 줄 테니까 그 야당하지 말라고 말이야.그래서 내가 뭐 민정당 뭐 반대다 그런 말은 안하고 민정당 전문위원이야 나 말고 하고 싶은 사람 많은데 그 사람들 주고 나는 그냥 뭐 지금 뭐 취직도 안되고 그런데 그 뭐 지금 국회의원 둘 뽑았다고 둘 뽑는데 말이 지.뭐 그렇다고 내 때문에 권정달씨가 안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그랬더니 그래서 나중에 얘 기를 하는데 뭐 신상우씨 얘기가 전 기관에서 반대를 했대.정보부에서 반대하고 보안사에서 반대하고 기 재향군인회 18) 에서.왜 반대를 하냐?아 김도현이 친구는 그 대개 정당에 들어오는 친구들은 나중에 박 대통 즉 공 박 대통령 전 대통령 정부하고 무언가 이렇게 뭐 글쎄 표현이 이상합니다만 무언가 그 양해나 타협이 있었는데 이건 하나도 없다고 그래.없어 들어왔으니까 도저히 안된다 그러더라고.그런 뭐 하여튼 그런 과정을 밀고 댕기고 하다가 어떻게 마지막에 인제 넣어줬지요.그 야당에 공천 주 주 기로 했는 했어요.했는데 인제 뭐 그 동안 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서 뭐 뭐 뭐 나중에 뭐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지만 뭐 정보부에서 했다고 그러더라고요.해 가지고 뭐 떨어뜨리기했다 이래서 떨어 졌죠.그래서 그래서 나는 정계 진출이 인제 말하자면 실패한 셈이 됐죠.그 뒤에도 계속해서 실패했 고.딴 사람들은 김중태는 본인이 얘기해야 되는데 내가 얘기하기에는 뭣한데,그 박정희 죽은 뒤에 들 어왔는데 좀 김중태는 확실히 나보다 성격이 활발해요.그래서 접촉을 여러 사람을 했죠 뭐.군부도 접 촉하고 어 YS(김영삼)도 접촉하고 했는데 전두환이 들어서니까 무슨 접촉이 있었는 걸로 아는데 하여 튼 그러나 있긴 했는데 이 사람이 딱 그 마음에 들며는 그러니까 저쪽 상대방 분 박 전두환이나 이런 사람 보기에 딱 지 걸(제 걸로)마음에 들며는 될 수도 있는데 저거 내가 좀 다루기 곤란하다는 그런 측면도 좀 보여주는 사람이야 이 사람이.아마 그렇게 봤지 않나 싶어서 묶여 버렸어.그 뒤에 김중태 가 정계에 진출시도를 몇 번 했는데 잘 안됐죠.잘 안 뭐 잘 안됐어. 면담자 :하여튼 그 주역들이 지금 뭐 정계뿐만 아니고 보면. 구술자 :그 뒤에 다른 사람은 많이 진출했어. 면담자 :학계에도 그렇고 하여튼 5공화국 이후로 한국사회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구술자 :예 많이 했어요. 면담자 :한 대로 가는데 어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이 6 3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어 떤 그 역할들을 하고 어떤 의의가 있었는지? 구술자 :그래서 인제 아까 말했듯이 6 3학생운동이 어떤 젊었던 시절에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 나중에 활동을 하고 어 사회활동을 하는데 에 국가에 기여하는 그런 뭔가 바탕이 되었 느냐?나는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어 실제 되었느냐 안되었느냐는 뭐 그건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이 평가해야 될 일이겠고.음 많이 활동은 할 그 때는 6 3사태 때는 거 의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마는 참여를 했어요.그 그 뒤에 아주 완전히 직장인이 되고 정치인이나 사회와 무관하게 된 사람들도 참여를 많이 했고,또 어떤 건 학생운동 같은 데에 좀 비판 18) 구술자 검수과정 재향군인회 삭제.

86 8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적이었던 사람도 참여를 많이 했고,또 좌파 소위 말하는 좌파도 많이 참여를 했고 또 좌파가 아닌 그 런 사람들도 많이 참여를 했고.또 그렇체(그렇지)그래.모~예를 들어서 모 에 지금 좌파가 되었습니 다만 저 뭐 그래 저 최장집( 崔 章 集 )같은 사람은 오~지금 좌파가 돼서 최장집 되문 열심히 했던 사람 이고 또 우파가 된 무슨 송진혁 19) ( 宋 鎭 赫 )이나 뭐 이런 사람도 그 열심히는 아니지만 참여했고 또 뭐 그 중간 어떤 데 있은 성유보 20) ( 成 裕 普 )같은 사람도 참여를 했겠고 또 뭐 김지하 같은 사람 물론이고 많이 그. 면담자 :그 6 3운동의 경험들이 중요한 그 역할들을 했었다고 생각을 하시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 그 중추적인 자리에 있어서 움직일 때. 구술자 :글쎄 6 3운동 나는 그 이후에 하도 그런 일이 많아서 특별히 뚜렷하게 그거이 그것이 기억되 지는 않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6 3운동이 상당한 영향을 줬을 거야.긍정적인.왜냐하면 그것 때 문에 단기적으로는 불이익을 다 한 번씩은 받았기 때문에,심한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사회진출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아마 거의 잊혀지질 않을 거예요.나는 그거 말고도 하도 그게 많아 가지고 (웃음)특별하게 그렇지 그렇 그런 그런데.그 언제든지 신원조회하면 그것 쫓아 나왔으니까.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이해 못할 거고 그 때는 그것이 저 언제든지 쫓아 나왔으니.뭐 예를 들면 나 같으면 뭐 박정희 죽기 전에는 그 외국에 갈 생각 자체를 안했으니까.죽자말자 한 일이 여권 만드는 일이 제 일 먼저 한 일이지.(웃음) 면담자 :예.한 가지.그 그 당시에 이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말을 써셨었었던나요? 구술자 :안 썼었어요.그건 저 경찰에서 붙여준 이름이라서. 면담자 :아~경찰에서 붙여준 이름이고.그러면,6 3관계해서 달리 또 주실 말씀은? 구술자 :(웃음)아니 뭐 내가 저 특별한 얘기는 아닌데 이 어떻든 6 3이 이 일본과의 관계가 한국에서 는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을 인제 새로 시작하는 말하자면 이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에 처음으로 시작 하는 그런 계획이었기 때문에 에 6 3에 대해서 6 3학생운동 아니면 또 그 때 '한일회담'에 대한 국민 의 비판에 대해서 저 그것을 실제 추진하던 정부가 좀 더 그 깊은 인식을 가졌으며는 그 이후에 지금 까지도 굉장히 그 좋았지 않았겠느냐?예를 들며는 가령 기본조약 같은데서 그거를 어떻게 관철을 해 야 되느냐는 그 내가 확실하게 방안을 제시할 수 없지마는 가령 합방에 에 침략경위의 그 무효시점 같 은 문제 이런 것을 좀 더 분명하게 했으면 그 뒤에 한일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들이 상당히 해소 를 하고 시작을 했을 텐데 음~그랬지 않냐?아까 말한 저 동아일보에서 낸 뭐 저 사건 60한국 60대 사건인가 그런 별책으로 낸 신동아에서 낸 별책인데 그 책에 6 3문제에 대해서 내가 썼고,고 바로 앞 페이지인가 뒤 페이지에 당시 외무부 장관 이동원( 李 東 元 )씨가 한일외교에 대해서 회고해 놓은 쓴 거이(것이)있다고.그런데 바로 고 대목을 어 한일합방조약의 조약의 무효시점,이 대목을 일본인하고 톡 일본외상하고 얘기를 하다가 이 쓰잘데 없는 그 사람 표현 그대로 이 쓰잘데 없는(쓸데없는)논쟁 은 어 서로 편한 대로 하기로 합의를 봤다라는 표현이 딱 있어.나도 그 표현 사실 못 봤는데 송철원 이가 저 뭐야 기록 기증하면서 내보고 한마디 하라고 그래서 나도 기억이 안 나니까 내가 써 놓았던 19) 중앙일보 논설위원. 20) 한겨레신문 편집장.

8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81) 걸 한 번 봤더니 바로 앞에 이동원이 글이 있어서 읽어 봤더니 그런 표현이 있더라고.그런데 그 사람 들의 인식은 그런 문제를 쓰잘데 없는(쓸데없는)거라고 생각을 했고 우리는 거의 쓰잘데 없는(쓸데없 는)게 아니라 제일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고,그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쓰잘데 그 조목 을 그렇게 타협받기 때문에 '한일회담'을 쉽게 타협 봐서 어 뭐 좋았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거고,아 니면 그 때 해결을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무슨 교과서 문제니 뭐니 하는 게 가령 그 때 그 대목을 을 그 뭐 침략을 시인하는 게 확신(확실)하게 에 어떤 식으로 기본조약이 들어갔다며는 교과서 분쟁 같은 거 다 무신(무슨)필요 없는 거지 지금.또 이북에 대해서도 이북이 지금 그 한일수교 21) 를 하며는 어떻 든 당장에 돈이 최소한 100억불에서 150억불이 생기는데 어 이북한테도 굉장히 편하게 그걸 할 수 있 게 될 텐데 그런 건 생각이. 면담자 :예.장시간 구술자 :(웃음) 면담자 :고맙고요. 구술자 :예.예.계획이 저저 기억이 뭐 그렇지 않아서.여러 사람 하니까.예.저 수고하셨습니다. 면담자 :예.고생하셨습니다. 21) 구술자 북일수교를 한일수교로 잘 못 지칭함.

88 8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면담후기 김도현씨는 6 3항쟁의 전 과정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자신이 6 3항쟁의 주도세 력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이론적인 기반이 있었고 이에 기반한 군사정부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김도현씨의 증언은 기존에 밝혀진 사실들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없었으며,이는 기존의 자료 가 주도 세력의 증언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몇몇 사실들에 대해서는 다 른 면담자들의 자료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8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83)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 3항쟁 주요 사건 구 술 자 박정훈 면 담 자 권미현 면담일자 (목) 면담장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면담차수 1차

90 8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박 정 훈 (한 자 : 朴 正 勳 ) 면담자 성 명 : 권 미 현 (소 속 :국가기록원 특수기록관리과) 촬영자 성 명 : 엄 경 식 (소 속 :현대사기록연구원) 녹취자 성 명 : 엄 경 식 (소 속 :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및 장소 1차 (목)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2차 3차 산출물 녹화테이프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2개 1부 1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건강상태와 기억력이 나쁘다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거 라고 하셨으나,막상 면담이 시작되자 다양한 이야기를 재미 면담상황 설명 있게 구술하심.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당시에 정황에 대해서 세세하게 이야 기함.특히 기존에 알려져 있던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사실 에 대해서 구술해 주어 흥미를 더함. 비고

9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85)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 박 정 훈 (한자) 朴 正 勳 나이 67세 자택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470하이팰리스아파트 403호 주소 직장 : 생년 월일 출생지 결혼연도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가족 학력 주요 약력 1961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5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7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수료 1990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99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고위정채과정 수료 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감사 ~1992년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상무이사 년 제14대 국회의원(민주,전국) 년 민주당 원내부총무 년 IPU 환경개발회의 한국대표 년 APPU 부의장 ~2000년 제15대 국회의원(국민회의,전북 임실 순창) 년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위원회 위원 ~1998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 ~2000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간사 ~2005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간사 ~2002년 (사)6 3동지회 회장 ~2006년 한국 화재보험협회 이사장

92 8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경기고,정치외교학과,사상계,3.24시위,YTP,괴소포배달사건,간담회,명 동 학사주점,군입대,난국타개성토대회,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부활식 상세목록 Tape1. 1.학생운동을 하게 된 동기(집안분위기,전공,교우 등),학생회 및 연구회 활 동 등(00:00~18:00) 2.박정훈 사단(18:00~22:00) 3.사상적 배경(22:00~29:00) 시위 준비과정(29:00~37:00) 5.대통령 주재 대학생대표 간담회(37:00~40:00) 6.체육부의 방해공작(40:00~51:00) 7.학사주점 모함사건(51:00~60:00) Tape2. 8.징계(00:00~07:00) 9.괴소포 배달 사건(07:00~20:00) 10.징계로 인한 군입대 및 군에서 조사받은 사건(20:00~31:00) 11.난국타개 성토대회(31:00~49:00)

9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87) 5)예비질문지 박정훈 선생님. 6.3항쟁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1.선생님께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으며,이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입 니까? -경기고 시절에 대한 내용/집안 분위기/6 6데모 등 2.선생님께서는 1964년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장으로서 3.24시위를 주도하셨습니다.3.24시위에 직간접적 으로 참여한 고려대 학내외 공조직과 사조직은 무엇이었습니까? 3.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이 조직과 정경대 학생회 또는 선생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체육부,민정회,민사회,석우회,의활단 등 4.흔히 얘기되는 소위 박정훈 사단 은 어떤 성격의 세력이었고,그 구성원은 누구였습니까? (보충질문1:소위 박정훈 사단 은 어떤 성격의 세력이었습니까?) (보충질문2:구성원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5.당시 정국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은 어떠했으며,선생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점 또는 다른 점은 무엇이 었습니까? 시위와 관련해 최장집(현 고려대 교수)이 서울 문리대와 연락관계를 맡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관여한 것입니까?아니면 그러한 연합시위 계획을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까? (보충질문1:3개 대학 연대시위를 결정한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94 8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시위 준비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그들이 한 역할을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보충질문1:김중태,현승일,김도현 등 서울 문리대팀과 사전에 만날 일이 있었습니까?있었다면 어떤 논의를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1:총학생회장 구자신,법대 학생회장 이경우,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등 총단과 단대 대표들과 는 어떤 식으로 소통을 했습니까?) (보충질문1:교양과정부 학생회장 정성헌과는 3.24때부터 소통했습니까?) 시위 준비과정에서 우역곡절은 없었나요? (보충질문1:고려대가 3월 13일 단독으로 시위하기로 한 까닭과 그 계획이 불발된 내막을 말씀해 주십 시오.) (보충질문1:서울 문리대에서 정보 누설로 인해 3월 17일 결행을 24일로 연기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9.3월 24일 당일 집회 과정에서도 우역곡절이 있었지요?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교생의 집결 상황 및 준비 사정과 이를 말리는 학교 당국의 저지로 오후 2시 30분부터 시위에 돌 입했다.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의 연설과 법학과 신광옥의 호소문 낭독과 이어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했다.-6.3동지회,6.3학생운동사) 시위 다음날 정부가 사태 수습을 위해 서울시내 36개 대학 학생대표 92명을 초청했는데,3.24이 후 학생대표로서 정부 관계자나 박정희 의장을 만난적이 있습니까? 집회가 시위로 번져 가두진출 했을 때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성토대회와 3.26시위 등 3.24이후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이후 명동 학사주점 사건과 괴소포 사건 등 선생님 주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먼 저 명동 학사주점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2.선생님과 서진영에게 괴소포도 배달되었지요?

9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89) (보충질문1:당시 고려대에 일어난 학원사찰과 관련한 일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3.당시 체육부가 고려대 데모에 상당히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선생님께서는 이들 방해세력 을 어떻게 극복했으며,또 일부를 학생운동에 끌어들였는지요. (보충질문1:체육부장 문영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4.서울문리대에서 4월 23일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개최했습니다.당시 YTP나 이와 관련한 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3>5.20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1.서울문리대에서 황소식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을 서울시내 대학 연합으로 연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습 니까? (보충질문1:김중태,현승일,김도현,안성혁 등과 소통이 있었습니까?) 시위와 관련해 서울문리대와 접촉한 창구는 어떤 조직이며 책임자는 누구였습니까? (보충질문2:선생님께서는 5.20시위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고려대는 민사회를 주축으로 일부 민정회 회원이 참여하였다.이 대회에서 민사회의 박경구(문리대) 가 민생고를 성토하여.민사회 최장집,김병길,민정회의 박철현 등이 각 대학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였 다.-6.3동지회,6.3학생운동사) 3.고려대 학생지도부와 선생님께서 5.20시위를 실패 로 평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4>5.25난국타개궐기대회와 6.2데모,6.3사태 1.한국학생총연합회(한학련)가 언제 결성되었고,어떤 학교,어떤 사람이 참석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보충질문1:서울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과 이때부터 소통이 있었습니까?)

96 9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보충질문2:5월 초에 선생님의 주도로 조직한 구국항쟁전국대학생연맹은 한학련의 활발한 모임으로 자 연스럽게 조직이 해소된 겁니까?) 난국타개궐기대회의 모의가 구체화된 것은 5월 22일 종로 여왕봉다방(?)에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습니다(신동호,오늘의 한국정치와 6 3세대),이 모임에 참석하셨습니까? (보충질문1:학생회 중심으로 연대해 궐기대회를 가지려는 구상은 원래 어디서,어떻게 제기되었습니 까?) (보충질문2:김중태 등 서울문리대 중심의 투위와는 어떤 관계였고,투위를 어떤 시각으로 보았습니 까?) 3.당시 고려대는 5월 22일,23일 독자적으로 거사할 계획이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최종적으로 5월 24일 고려대에서 22개 대학 대표들이 회합해 5.25궐기대회의 계획을 점검했는데,난국 타개학생총궐기대회라는 대회 명칭도 이때 선생님의 제안으로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그 과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5.5월 25일 집회 후 곧바로 시위에 돌입하지 않고 1주일 유예기간 을 선언한 후 해산했습니다.그 까닭 이 무엇이며,그 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이날 12시 고려대 운동장에는 1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궐기대회가 열렸다.김중석(총학생회 교도부 장,한학련 대변인)이 개회사,박정훈이 선언문,이경우(법대 학생회장)가 기조선언문을 각각 낭독했다. 그러나 고려대는 1시 5분쯤 대회를 마치고 그들이 주장이 관철될 전기가 마련될 것인지 두고보기 위해 이날은 데모를 하지 않기로 하고 해산해 버렸다.-신동호,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보충질문1:당시 대정부 투쟁에 대한 각 학교 대표단의 입장 차이가 있었지요?) (보충질문2:고려대 일부 학생 세력이 5월 23일 민족적민주주의 부활식을 기도했다는데,거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6.1주일 유예기간이 지난 6월 1일 저녁 법학회실에서 6.2데모에 대한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이 모임이 있기 까지 그 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9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91) 7.3년 전에 성북경찰서에서 고려대박물관에 기증한 고려대 6.3데모 조직도를 담은 고대데모사건개요 라 는 문서가 공개된 적 있습니다.조직도를 보면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이재하이고 이경우,박정훈, 이명박이 부위원장으로 되어 있습니다.이 조직도는 그동안 알려진 내용(신동호,오늘의 한국정치와 6.3 세대 118쪽)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보충질문1:그렇게 진용이 짜여진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2: 박정희 하야 라는 강경주장을 복학생 이기명이 제기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보충질문3: 주관적 애국충정은 객관적 망국행위임을 직시하고 박정권은 하야하라 는 구호가 최장집의 작품이라는데 맞습니까?) (보충질문4:당시 서울문리대 단식캠프와 소통이 있었습니까?) (보충질문5:대부분의 학교가 6월 3일 일제히 가두시위에 돌입했습니다.이는 사전에 약속된 바가 있었 던 것인가요?고려대는 왜 그 하루 전에 올인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까?) (보충질문6:6월 1일 결사 때 비밀을 지키기로 각자 서약서를 썼고,그걸 이명박이 보관하기로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8.6.2데모 당일의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1:그날 저녁 8시 법학회실 대책모임에 왜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9.6.3데모에는 왜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보충질문1:6.3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언제 알았고,그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5>한일회담 비준반대 시위 1.6.3계엄령 후 체포되지 않으셨지요?어떻게 도피생활을 했고,그 뒤 졸업은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보충질문1: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동료들의 소식은 어떻게 들었으며,그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보충질문2:6.3사태와 관련해 사후에 따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나요?) 년 4월 12일 이른바 왕좌다방 사건 에 연루되어 경찰에 연행되었지요?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 씀해 주십시오.

98 9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보충질문1:1965년 졸업한 뒤에도 학생운동에 관여한 이유가 뭡니까?) (보충질문2:1965년 후배들의 조인반대,비준반대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충질문3:6.3학생운동이 선생님의 인생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어떠한 후회 는 없으십니까?) 3.지금까지 제가 질문한 것 외에 추가로 더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거나,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 으시면 해 주십시오.

9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93) 6)녹취문 박정훈 선생님. Tape1. 면담자 :예.오늘 2008년 11월 27일이구요.예 국가기록원에서 발주한 6.3항쟁 구술기록 수집용역 어 구술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음.오늘 면담하실 구술자분은 고려대 출신이신 박정훈 선생님이시구 요.저는 면담자 국가기록원 기록연구사 권미현이구요.예.오늘 6.3항쟁 주요사건에 대해서 구술 증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아까 인사드렸지만 안녕하십니까? 구술자 :네.안녕하세요? 면담자 :제가 일단은 뭐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면 선생님께서 이렇게 생각나시는 대로 이렇게 설명해 주 시면 됩니다.이제 총 이제 5개 큰 주제 하에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는데요.오늘은 시간되는 데까지,이제 선생님 건강이 허락하는 그 하에서 이제 시간 배분해서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먼저 인 제 3.24( )시위의 배경,그 다음의 조직의 전개과정 이런 부분에 대해서 여쭤 볼,여쭤 볼 건데 요.이제 선생님께서 처음에 학생운동을 참여하게 된 동기가 있으실 것 같애요?그러니까 그런 동기라 는게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뭐 자라온 환경이라던가 아니 면은 뭐 집의 그런 가풍이라던가?아니면 학교를 경기고등학교 졸업하셨잖아요?경기고등학교가 지금도 굉장히 명문이지만,예전에 선생님 다니 실 때에는 정말 명문이었잖아요.경기도(고).경기고 재학시절에 어떤 받았던 선생님의 영향이라던가 아니면 그때 학풍이라던가 그런 게 또 있는지?아니면 그 3.24시위 전에 그 6.6시위가 있었잖아요?그 런 거랑 무슨 또 영향이 있는지 뭐 요런 거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구술자 :그 저는 인제 고등학교 때는 (예)학생운동이다 사회운동이다 정치운동이다 이런 데는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면담자 :아하.그러셨었군요? 구술자 :예.그러다가 어떻게 해 가지고 고대 정외과를 저 입학을 하게 됐어요.그런데 인제 우리 집안 이 아버지가 자유당 때 어 국회의원도 하셨고,법사위원장도 하시,하셨고 그 영향을. 면담자 :영향을. 구술자 :조금 받았는데 실제로 저는 정치할 생각도 별로 없었고 그랬는데.고대 입학해가지고 같이 어울 리다 보니까 아 그때 인제 가까운 친구들한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제일 많기로는 아시다시피 그 지금 그 고대 교수하는 서진영이 최장집 이런 친구들 뭐라 그럴까?뭐 의식이 충만한 애들이예요. 우리들보다.저 한발 앞서간 친구들인데,이 친구들한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또 저 대학교에 가 서 아시다시피 사상계라는 잡지가 그때 그 영향을 우리들한테 많이 줬어요.근데 그 사상계를 제가 아 주 애독을 했다구요.어 그리고 인제,그 중에는 우리 그 민족운동 하던 독립운동 하던 이런 선현들 이 런 사람들의 발자취,또 그 다음에 투쟁사 이런 거를 보면서 저도 저 길을 가는 것이.

100 9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맞다. 구술자 :네에.그런 영향을 받았어요.그래서 이제 그 학생운동에 뛰게 들게 되었다고 봐야죠. 면담자 :뭐 물론 집안 영향도 있으셨고 뭐 또 대학을 대학 갈 때 전공을 선택해서 가잖아요?그 정외과 를 선택하신 것도 어쩌면 그런 집안의 영향이 좀. 구술자 :조금은 있었는데,실제로 우리 과연 내가 정외과를 꼭 가야 되는지 안 되는 건지도 잘 모르고. 그러고는 과를 선택하다 보니까 정외과를 갔는데,아시다시피 지금 그게 61동기회예요,고대.근데 아 주 인물들이 많아요.(손으로 헤아리시면서)우리 단체 우리 가까운 그 61동기회 중에서 아시다시피 대 통령도 나오고,그 다음에 그 대법원관,대법관도 나오고 국회부의장도 나오고 그래서 좌우간 장관이 3 명이 있고 국회의원 수만 열여섯 명이예요 헤아려 보니까.그때 인재,인재들이 많았어요.우리 동창 사회에 아주 많았어요.그 영향이 많이 왔다고 봐야죠. 면담자 :이렇게 아주 걸출한 인물. 구술자 :아.그렇죠. 면담자 :선생님을 포함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서로의 그런 생각이나 사고 이런 거를 교류 하는.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장이 생겼고 그런 영향이 있었다 말씀을 하셨구요.선생님은 그때 인제 64년 1964년 때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장이셨잖아요?그래서 이때 3.24시위를 주도를 하셨는데 그때 이때 이제 3.24시위를 뭐 총학생회장이 직접,총학생회에서 전체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각 단대별로 이렇게 좀 움직 임이 있었잖아요?그런데 그 중에서 그,그 정외과 학생회뿐만 아니라 그 무슨 학생회 조직들이 있잖 아요.단체라던가?예. 구술자 :조직들이 있는데 처음에는,처음에는 학생회가 같이 참여를 했어요. 면담자 :아. 구술자 :총학생회장,회하고 우리 정경대학,법대,상대 학생회장들이 다 참여를 해 가지고 데모를 주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에서는 이제 총학생회 간부들하고 우리들하고는 별개가 됐어요.그래서 대립되었 다고 할까.(손으로 대립적이다는 표현을 하시면서) 면담자 :아 그게 잘못. 구술자 :그래 가지고 나중에 6.2,6.3데모 때는 어 총학생회는 배제가 돼 버리고.그리고 인제 저 법대 상대 정경대학이 중심이 됐는데,초기에 초기에 3.24데모 할 때는 어~ 총학생회도 같이 참여를 했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가 조금 중심이었다고 그럴까?조금 그런,그랬어요.초기에.그래서 데모를 실 제로 3.24를 준비한 게 우리 정경대학에서 몇 사람 우리,우리가 중심해서 준비를 하다가 그것이 이제 나중에 3.24로 폭발이 됐는데 근데 그걸 얘기를 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면담자 :예 괜찮습니다. 구술자 :그게 어떻게 되었냐하면 3월 18일,18일 날.아 우리가 정경대학 저 학생회 주관으로 그 유명 인사들을 모시고 강연회를 준비를 했어요.그때 인제 함석헌선생님,장준하선생 이런 분들을 모셔가지 고 데모를 시도를 했어요 그때.그런데 이게 이 저,저 학생처장이 그 유명한 현승종,나중에 총리도

10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95) 하시고 현승종 총장이 막 학생처장이 이거를 반대를 하셨어요.그래 가지고 본인들한테도 다 초빙연사 로 말씀드리고 우리가 플랑카드까지 다 준비를 하고 집회 허가를 다 맡아 놨는데,이 학생처장님이 집 회 안돼!그러고는 전부 찢어 버린 거예요.인제.(손으로 허가서를 찢는 표현을 하시면서) 면담자 :아이구. 구술자 :그거를.인제 그런 내용이 그 당시에 고대 신문에 나왔어요.그러니까 원래 3 24를 3월 1,18일 날. 면담자 :하기로 했는데. 구술자 :그렇죠.정경대학 주관으로 준비를 하다가 이게 실패를 했다는 게 나왔어요.그랬다가 그 뒤에 3월 인제 근데 사회 분위기가 전국 분위기가 굴욕외교를 반대해야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고요.전국적 으로.그래가지고 우리가 날짜를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 그렇게 이제 숙고를 하고 있는 있는데 서울 문 리대에서 또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인제.그러다가 인제 3월 18일 날 3월 24일 당일 날인데,그 날 ROTC 교육을 받고 있었어요.ROTC 교육은 아침 8시부터 해요.그러니까 9시 정상적인 수업보다는 일찍을 하는데 그런데 학생회 간부들이 전부 대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그래서 제가 와서 결정을 해 달라 이렇게 된 거예요.그래 무슨 일이냐 하니까 간부들이 전부 있어요.아침 ROTC 교육을 마치고 들어갔더니 쭉 있는데 최장집이가 와서 하는 얘기가 오늘 서울 문리대에서 학생 데모가 준비 해가지고 그러니까 그게 화형식이예요.이완용이하고 뭐. 면담자 :아.화형식. 구술자 :근데 이 화형식해서 3월 24일 날 데모를 하는데 우리가 해야 될까 아니냐고 요청이 온 거예요. 저한테 온 거예요. 면담자 :같이 해야 되지 않느냐? 구술자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걸 이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그래서 제가 오늘 무조건 데 모다 이렇게 해 버린 거예요.그때 총학생회 간부들 학생회 간부들이랑 쭉 있는데 오늘은 무조건 데모 다 그래 가지고 하자 해 가지고 준비를 했었어요.그래서 학생회실에서 저 플랭카드도 만들고 뭐 준비 를 하고 있는데 학생처장이 또 부르는 거예요. 면담자 :또 하지 말라고? 구술자 :네.그래 가지고 제가 끌려갔어요.교무(학생)처장을 교무(학생)과장을 오라 그래 가지고 학생처 장하고 저하고 단둘이 앉았어요.이렇게.그 현승종 처장하고 저하고 이렇게 있는데 그래가지고 커피 잔을 둘이 놓고 하다가 안 된다 이거야 오늘도.아주 열을 되게 받은 거예요 제가.지난번 일 때문에 감정이 엄청 상했거든요 제가.아니 다 본인이. 면담자 :하라고 해놓고. 구술자 :집회 그렇지 집회 다 싸인을 해줬는데 근데 그 집회 허가라는 것은 정경대학 학장이 먼저 승낙 을 하시고 그것을 학생처장이. 면담자 :허락을 해주시는 거. 구술자 :해 주시는 거거든요.정경대학 학생 학장님이 싸인이 먼저 나오는데 그때 조동필 교수라는 분이 그 유명한 조동필 저 학장님이 싸인을 해 주셨는데 아 그런 걸 무시하고 말이죠.자기도 싸인을 했는

102 9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데 그거를 싹뚝 찢어버렸으니까 얼마나 그래서 제가 아주 무례한 짓을 했어요.나오면서 이 저 학생처 장님 방의 문을 발길로 차 버리고 나왔다구요.그 당시에.인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학생처장하고 저 하고 옥신각신 하니까 이게 안 되겠어요.큰일 나겠어요 이게.다 데모를 준비를 하고 있는데.그래 가 지고 저 아주 실례되는 아니 저 처장님 아주 실례되는 말씀이신데,처장님은 너무 친여적이다 이거지. 여당 아니냐 그렇게 쏴 붙였어요.허 그랬더니 이 처장님이요 커피 잔을 잔을 그냥 깨 버린 거예요(직 접 내려치시는 시늉을 하시면서).그러고는 물이. 면담자 :다 튀었겠네요? 구술자 :튀어버려 가지고 커피 잔을 나를 때릴려고 이러시더라고요.그래서 막고 이러고 있었죠.그랬더 니 내가 평생에 제자를 가르치는 교수가 내가 제자한테 이렇게 혹독한 모함을 들어본 일은 처음이다. 이거죠.내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나 그 자리에서 그냥 대성통곡을 하시는 거예요.엄청.그렇게 하 고 있는데 학생 간부들이 들어 왔어 인제 거기를.그러니까 구자신 총학생회장도 거기 오고 총무부장 도 오고 우리 가까운 이제 서진,저 최장집이나 고대 카스트로 그 유명한 이 내 참모들이예요 그때 옛 날.우리 참모라기보다 다 우리 친구들인데 다 몰려 온 거예요.그래 갖고 전부 다해서 7,8명이 쭉 둘 러싸이다 있는데 그 광경을 다 본 거예요.막 이거 하고 대성통곡을.그래 가지고 인제 이걸 엄청 실 수를 했더라구요.교수님한테.그래서 얼른 처장님 죄송합니다.제가 말씀을 잘 못 했습니다.그런데 제 변명은 있습니다.그러고는 그때 수사기관에서 늘 나오던 사람들. 구술자 :네.학교마다 배치가 됐었죠. 면담자 :그렇지.그렇지.배정된 그중에 보안사에 있는 한모라는 사람이 나와 가지고 이 사람이 나한테 해 준 얘기가 학생처장이 친여적이다 라는 얘기를 해 준 거예요.그 사람이.그래서 그걸 댔죠 그렇게 안 되면 은 내가 누명,아니 저 선생님을 모함한 것 밖에 되지 않나요?내가.그러니까 그 안모 한모 이 사람이 저 처장님이 이만저만해 가지고 시녀적이라는 얘기를 해 줘서 그래서 내가 얘기를 핸 겁니 다 해야죠.사실대로.그래가지고 인제 분위기 이상하게 됐다가 인제 우리 갑니다.그 양반은 눈물만 흘려,흘리고 계셨는데 다 밖으로 나온 거예요.그게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면담자 :원래하기로 했던 시간보다? 구술자 :그렇지 오래 걸렸어.인제 그러다가 튀어나와 가지고 나도 울었어요.그렇잖아요?선생님한테 죄송하다고 하고 나도 막 울고.근데 나중에 현승종 처장이 학생운동 그 뒤에 하면서 글에다가 글에 다가 쓴 옛날 데모할 때 내가 제자하고 같이 둘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 글이 써 있더라고요.내가 우 연히 그걸 봤어요.또 봤더니 처장이 제자가 나하고 오해가 있어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데모 얘기를 했다 그 얘기가 나와요 인제.그래 가지고 나와서 무조건 집결이다 했어요 대운동장에 전부 집결이다. 그래가지고 오후에 나와 가지고 그러니까 인제 처장님도 다시는 나타나지를 못하지요 인제.그 상태에 서 어떻게 나오시겠어요.그래 가지고 그날 모여가지고 오후에 자 인제 데모다.그래 가지고 인제 마이 크를 제가 잡아서 선동을 했다고요 학교서.그래서 그리고 준비했던 선언문이나 하고 그리고 튀어 나 간데 3.24데모가 됐는데,사실 시간적으로 보면은 문리대가 먼저 했고 우리가 그 뒤에 뛰쳐나가고 그 러니까 문리대나 고려대가 튀어나오니까 그날 그날 연세대에서 함석헌,장준하 선생님을 모셔다가 강 연회를 했는데 끝나고 튀어나온 게 그래서 3개 대학이 동시다발로 3.24학생 데모가 됐어요.

10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97) 면담자 :그때 이제 보면 선생님이 되게 중심에 계셨던 것 같아요? 구술자 :좀 그랬어요. 면담자 :이제 학생처장 면담하실 때도 왔던 친구 분들이 보면 학생회장도 계시고 그 다음에 각 단대회 장도 계시고.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이렇게 학생회 간부도 있지만 의식적인 면을 이렇게 좀 담당하는 담당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쪽에 연구회나 이런 쪽이 많잖아요? 구술자 :아 그렇죠.그러니까 그런 게 아시다시피 연구회라는 것이 분야가 다 달라요.예를 들면 경제문 제하면 경제하고 학술하면 다 다른데 그래도 시대사조라고 할까.그거를 핸거 정치색이 강했던 것이 민정회와 민서.민사회라고 하는 게 두 개가 있었는데,민정회 멤바들은 우리들이 멤바들예요.우리 정외과 출신들.이 사람들이 중심이 됐는데,이게 정외과 멤바들이고.민사회라는 건 법대 사람들 그 다음에 다른. 면담자 :단대 사람들. 구술자 :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이 모여가지고 민사회 이렇게 둘이 있었는데 두 그룹다 열심히 했죠.데 모에.그리고 의식이 좀 있는 사람들이예요.유난히 정치의식이라고 그럴까?사회의식이 많았던 그런 사람들이 참여를 했죠. 면담자 :그렇군요.계속 반복되지만은 이제 선생님이 중심에 계셨는데 제가 다른 책을 읽어봐도 박정훈 사단 이런 표현을 많이 하더라구요?그 지금까지도 얘기되는 그 박정훈사단이라는 그거는 뭐 어떤 셩 격이었나요? 구술자 :그건 어떻게 되었냐 하면요.우리 가까운 사람들이 그걸 정경대학학생회냐 아니냐 민정회냐 이 런 것보다 인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명명을 그렇게 핸 거예요.박정훈 사단이 아닌데.내가. 면담자 :선생님이 그 속에서 항상 중심에 계셨고 뭔가 리더십을 발휘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구술자 :그래서 박정훈사단 박정훈사단 그렇게 선배들도 그러고 주변에서 박정훈사단 박정훈사단 이런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어요.그랬던 거예요. 면담자 :여기 박정훈사단이라 불리는 이 분들이 과도 틀리고 뭐 단대도 틀리고 뭐 이렇게 좀 틀리는데 어떤 이유에서 같이. 구술자 :원래는 정외과 출신들이 우리 중심에 있었는데,아시다시피 고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치루고 하 면서 의식들 의식이 같은 사람들.예를 들자면 동질의식이랄까 이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진 거예 요.그러니까 총학생회장 선거가 3학년 때 했거든요.가을에.그리고 인제 저 3.24데모는 그 다음 해에 핸거고 그러니까 나하고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 아니예요?중심은 정외관데 고대 각 저 학과별로 전부 많은 사람들이 참여 했어요.그래 가지고 그게 우리 숫자가 한 30명 가까이 됐어요. 면담자 :정말 사단이네요? 구술자 :예.많아요.한 30명 가까이서 그 언론,그 고대 신문사에 있는 사람들도 박정훈 사단이라고 하 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정외과 아니예요.근데 예를 들자면 이제 김현중이다 뭐 이런 고대 신문에 있는 사람,이런 사람들이 데모를 하고 하면 다 참여를 다 했어요.또 이름을 잘 기억을 못 하겠는데

104 9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그때 각 과별로 응집돼 있던 그게 인제 박정훈사단이라는 건데,그게 인제 아시다시피 저 외부에서 명 명해 준 거예요.박,박아무개 사단이네 뭐네 이렇게 표현을 했던 거지요. 면담자 :그 30명이라는 구성원이 다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어떤 분들이 계셨는지 좀? 구술자 :그 핵심이 아시겠지만 (직접 손으로 꼽으시면서)저 국회 부의장하던 김덕규,김덕규 그 다음에 인제 저 또 3선의원하던 조홍규 의원 두 사람은 그거고.그 다음에 교수가 서진영,최장집 교수 그리고 고대 카스트로라고 응원단장. 면담자 :손. 구술자 :손옥백이 이 사람들이 이제 우리 박정훈사단의 핵이고. 면담자 :핵심멤버고. 구술자 :핵심멤버이고.그리고 그 주변에도 많았어요.우리 주위에 그런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라 그 사람들은 거명이 잘 안되지만 우리 가까운 사람들이 응집돼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몇 십 명이 언제 든지 모여하면 딱 모여 가지고 그냥 활동할 수 있는 그거를 인제 박아무개 사단이라고 이렇게 불렀어 요. 면담자 :그랬군요.저는 인제 97년 97학번 이예요.학번이 굉장히 늦죠.그러니까 저는 어른들이 말씀하 시는 좋은 시절에 학교에 다녔다고 저희 때는 데모 같은 것도 별로 없었고.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좀 그랬었는데요.그때 당시는 4.19부터 해서 좀 어수선한 그런 정국이었잖아요. 구술자 :아 그럼요. 면담자 :저는 제가 대학 다닐 때 가졌던 사상보다 이때 당시 선생님 세대 때 사상은 감히 생각할 수 없 을 만큼 사상적 면이 굉장히 높이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이때 당시 그 어지럽던 그런 정국 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이 전반적으로 어땠는지가 되게 궁금하거든요? 구술자 :그런데 아시다시피 후진국가일수록 정치의식이 높을 수밖에 없었어요.선진국가이다 뭐 하면은 요 정치가 안정돼 있지 않느냐 이거죠?그래 가지고 특히 우리만 해도 대학생들,대학생들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해지는 거예요.이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이 강하고 그런데 인제 그 해니까 그 당시에 아시다시피 대학생수라는게 얼마 안 돼요.작아 요.이 사람들이 소위 우리 사회의 엘리트집단인데 그 숫자가 요새 같지 않고 소수다 이거죠.근데 이 소수는 뭐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왜 국가가 어지럽고,왜 국가가 이 좀 저기 융성하지를 않느냐?그거 에 대한 책임이 대부분 정치인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대부분이. 면담자 :예.그렇죠. 구술자 :그래 가지고 사회 비판의식이 주로 지식사회에서 나오게 돼 있어요.그렇게 된 것 같아요. 면담자 :그렇군요.그때 당시 그런 보편적인 학생들 대학생들의 그 인식이랑 선생님이 가졌던 그런 사회 에 대한 그런 비판의식이라든가 이런 게 거의 일치를 했나요? 구술자 :아니 꼭 일치는 안했어요.그러고 예를 들자면 데모를 주도해 가지고 할 때도 대부분이 이 저 지지했지만 열성적으로 뛰어나와서 허는 사람들 중에서 다수는 어떤 때는 내가 상당히 미안하다는 생 각을 해요.도서실,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 조용하게 공부하던 사람들을 끌어낸 거 아녜요.데모하자고.

10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99) 면담자 :그렇죠.네. 구술자 :그러니까 죄의식 같은 걸 우리가 느끼는 거예요.아니 이제 저 자기 공부 열심히 하고 자기 장 래를 위해서 하는 그 사람들을 우리가 야 데모하자고 선동해 가지고 끌고 나와서 이 이거 해야지 않느 냐 그래서 그 상당히 그거 미안하게 생각해요.자꾸 내가 꼭 이걸해야 되느냐 그런 생각이 많았는데, 그런데 대다수는 예를 들자면 그 때 박정희 대통령하고 윤보선대통령하고 대통령 선거를 치루지 않았 어요?그런데 우리는 이 독재정권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박정희를 저 지지를 못했다구요.그런데 대다수 학생들은 아녜요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마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더 많았을지 몰라요. 면담자 :표현을 안 하는 것 뿐이죠. 구술자 :그렇지 표현을 잘 안 했지 상당히 많아요.또 우리도 초기에는 초기에는 혁명을 한다고 그래 가 지고 우리도 상당부분 지지를 했다고요.국가를 발전시키고 또 어떤 기본적인 개혁을 할라면 혁명적인 사조가 와서 휩쓸지 않으면 이게 안 되지 않느냐?그런 생각을 우리도 했는데,조금 있다가 보니까 성 명,공약.공약이다 뭐다 하는 게 전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인제 그렇잖아요?그래서 이 사람들은 아니다.우리 순진한 생각에도요.정치를 한다고 하더니 *그렇죠.정권을 민간한테 넘겨주고 우리는 군복을 벗겠다.그런 공약들이 전혀 안 지켜지고.그러면서 이건 아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그렇지는 않았다는 거예요.왜 우리 생각이 꼭 앞서가는 거는 아니었다 또 절대 다수 는 아니었어요.대학생 사회에서. 면담자 :그래도 다수는 아니었지만 영향력은 큰 영향을.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주는 그런 생각이었다는 거네요?일단은 그 3.24때 서울대가 하고 있다라는,할 거라는 얘기는 이제 최장집.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교수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하셨잖아요?처음부터 그 서울대랑 이런 걸 하겠다는 연락을 받 고 같이 추진을 하신,거기 일정을 맞추어서 계속 추진을 하신 건가요? 구술자 :아니구요.그건 아니구요.최장집이가 문리대하고 연결이 돼 있어 가지고(직접 손으로 표현을 하 시면서)연결고리 역할을 해 줘 가지고,그래서 우리가 저걸 까지는 그전에도 저 정보가 있었어요.어 장집이가 최장집 교수가 이제 이렇게 이렇게 진행된다.그 정보는 우리 받고 있었는데,초기에는 3.24 때까지는 그 연결이 그런 정도 였지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사전에 음모를 하고 모의를 하고 면담자 :연합하고. 구술자 :어 연합하고 그런 건 3.24이후에 생긴 거. 면담자 :3.24이후에 생긴 거.아 그렇군요. 구술자 :네.그렇죠. 면담자 :그러면은 3.24를 이제 고대 연대 뭐 서울대 다 있었지만 고대만 두고 봤을 때 3.24시위를 준비 했던 과정을 잠깐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이거를 함께했던 주요 인물들이 누구고 그 인물들이 하신 역할 들이 있을 것 같애요?그 역할들을 간단하게 좀 말씀해 주세요?

106 10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3.24면은 그러니까 아시다시피 저 그 총학생회장 구자신이. 면담자 :구자신회장. 구술자 :하고,또 이 경우. 면담자 :법대회장. 구술자 :이명박. 면담자 :상대회장. 구술자 :그 다음에 정외과에서는 나중에 하지만 최장집이,손옥백,김덕규 이 사람들이 이제 핵심 이루 고 있었고 그러고 어 그 다음에 그때만 해더라도 유준상이 어 그런 총무부장 이런 사람들도 참여를 했 어요.그런데 나중에 이제 그쪽은 나중에 우리하고 좀 멀어져가지고 데모를 안 했지만 유준상이 김중 석이 이 저 총학생회 이 간부들이 처음에는 다 같이 같이 했었어요.처음에는. 면담자 :주로 이 핵심멤버들이 모이는 장소는 어디였어요?그때. 구술자 :아니 그러니까 저 이렇게 됐죠.우리 이제 이 얘기하자면 박정훈사단이다 뭐다 이거는 정경대 학생회실에서 주로 학생회실. 면담자 :모이고. 구술자 :모이고 그 다음에 이 저 3.24데모나 뭐 할 때는 총학생회 사. 면담자 :아.사무실. 구술자 :거기서 했어요.총학생회 학생회실에서 모여서 의논을 했죠. 면담자 :요즘도 왜 데모를 준비하다보면 이렇게 플랭카드도 만들고 이렇게 뭐 선언문이나 결의문 같은 것을 다 이렇게 복사해서 나눠주고 하잖아요.그런 거를 할 때도 뭐 역할 분담이나. 구술자 :아.당연하죠. 면담자 :글 같은 것 누가 썼어요?주로? 구술자 :그러니까 그때는 최장집이가 글을 썼고.그 다음에 그 전에는 고대는 딱 그래요.이 저 6.6데모 할 때 한미행정협정 반대하는 그때는 서진영이가 선언문을 썼고.어 3.24나 이 저 저때는 저 최장집교 수가 쓰고 그 다음 또 그 다음에는 주로 조홍규,조홍규의원이 주로 쓰고 그랬어요.우리 우리들한테도 조홍규의원이 많이 제출해 준 거예요.이런 문장 이런 걸.이 세 사람이 문장력도 있고 또 실력이 있고 그래서 세 사람이 아주 이 재원이예요.이 얘기하자면은. 면담자 :그렇군요.그 그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이셨던 정성헌선생님 하고는 이때부터 계속 연락을 하신 거예요? 구술자 :그렇죠.근데 정성헌이가 정외과 출신이 됐어요.그게 정외과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쉽게 끌어 들이기가 쉽지가 않을 텐데 정성헌이가 또 마침 또 정외과 출신이었어요.교양학부 학생회장이.그리고 또 지리적으로 이 본교관이 한참 멀리 떨어졌어요.몇 백 미터 밖에 교양학부가.그래서 정성헌이가 초 기부터 참여를 한 것예요.같이 중요할 때 참여를 해가지고 그 친구도 징역도 같다오고 했죠.다 이러 고 했죠.정성헌이가. 면담자 :그럼 처음부터? 구술자 :처음부터 했어요.

10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01) 면담자 :그 아까 전에 3.24준비하실 때도 시간까지 맞춰놨는데 하라 그랬던 학생처장이 하지 말라고 하 신 변수가 발생하듯이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뭐 사람들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고 뭐 이렇게 그런 힘들었던 점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구술자 :어 우리 고대는 그렇게 힘이 힘이 안 들었어요.그래서 이제 우리가 결정을 해 가지고 데모 한 다하고 그것만 되면은 확 몰렸어요. 면담자 :결집력이 좋았네요? 구술자 :아 그럼 결집력이 아주 좋고 또 그 이 박수를 치고 전부 뛰어 들어와가지고 했던 거예요.데모 를. 면담자 :그때도 민족고대였어요? 구술자 :아.그렇죠.그건 옛날부터. 면담자 :옛날부터 이름에서부터 그. 구술자 :그랬어요. 면담자 :결집력이 이런 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요.아까 전에도 말씀하셨지만 원래는 24일이 아니었는데 문리대에서 정보가 누설되면서 24일로 미뤄졌다라는 그 얘기가 있더라구요.그건 맞나요? 구술자 :그런데 그건 인제 우린 잘 모르고 우리처럼 문리대도 준비를 하다가 24일로 간걸로는 우리가 알고 있어요. 면담자 :정확한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고. 구술자 :그건 잘 모르고. 면담자 :그래서 그 아까 전에 말씀하셨는데 학생처장님이 하지 말라 그래서 오후부터 했다고.이때 이제 선생님께서 회장님께서 연설을 하셨고 그죠?호소문 낭독을 또 누가 하셨네.이게 법학과 신광옥이라 고. 구술자 :신광옥이요. 면담자 :이 호소문은 누가 쓰신 거예요?쓰시고 낭독까지 하시는 건가요? 구술자 :그때 근데 그거는 내가 잘 몰라요.신광옥이가 법대거든요.그리고 고시파 거든요.근데 보통의 경우에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데모에 나오는 경우가 드문데 어떻게 해서 신광옥이가 썼는지,저 호 소문을 낭독했는지는 그거 잘 모르겠어요. 면담자 :이 신광옥이라는 분은 그 전부터 계속 참여하시지는 않으셨는데 이때 호소문을 낭독하신 건가 요? 구술자 :근데 그거가 제가 기억이 잘 없어요.신광옥이는. 면담자 :그러니까 핵심멤버는 아니셨네요? 구술자 :아니었거든요.아니었는데,왜 저 신광옥이가 근데 이런 거 있어요.신광옥이가 광주일고 출신이 예요.그래 가지고 머리가 좋아요.그래서 인제 아시다시피 저 청 청와대 수석 비서관도하고 저 법무부 에서 지도 기획조정실장도 하고 또 이래 가지고 머리가 좋은데 이 조홍규하고 같이 동창이거든요.홍 규 말 들어보면 이게 이 친구가 어릴 때부터 웅변을 했다고 그래 가지고 웅변을 잘 한데요.아이 내가. 면담자 :초빙을 한 거 같은데요?

108 10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글쎄.웅변을 잘 한,내가 우연히 신광옥이가 연설을 잘 하더라고 내가 지난번에 듣고 그 얘기 를 했더니 아 걔가 원래 웅변을 했어 웅변을 잘 해 그래서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면담자 :호소문 같은 경우에 굉장히 이게 또 전달력이 좋아야 하니까. 구술자 :네에.그랬나 싶어요. 면담자 :그때 당시에 시위에 돌입해서 선생님께서 연설을 하시고 이 신광옥선생님이 호소문을 낭독하시 고 그 다음에 이명박 현대통령께서 선언문을 또 낭독하셨네요.그리고 나서 이제 뛰쳐나가신 거죠?예 구술자 :음 예 그렇다고 보고.허허허. 면담자 :또 이제 3.24시위 있은 다음날 정부에서는 학생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니까 어수선하잖아요? 그래서 뭐 서울시내 학생들을 대표학생들 모아서 그 무슨 뭐 뭐라 그래야 되나 이렇게 간담회 같은걸 했다고 그럴까.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저희 국가기록원에 보면 대한뉴스에서 이렇게 보관하는 기록에도 보면 검색해 보니까 박정희대 통령이 학생들 모집해서 뭐 간담회한다 이런 뉴스가 있더라구요.그때 대표로서 참석을 하셨어요? 구술자 :어 처음에 직후에는 인제 고대에서 아마 이제 구자신이 나하고 그 다음에 이경우가 된 거 같애. 한 세 사람인가를 선발해 가지고 그 저 중앙청에 참석을 했고,나중에 나오는 박정희하고 면담하는 과 정은 그때는 총학생회 한 사람들만 저 갔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안 갔고 구자신이가 갔고.한 사람 이.그래서 처음에는 우리가 중앙청에 가 가지고 참석을 했죠. 면담자 :처음에는 그랬고 나중에는 대통령을 만날 때는 학생회 회장만 가셨고.그러면 그때 중앙청에서 하셨을 때는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구술자 :아 그때 해가지고 문교부 장관 와 가지고 어 이렇게 화해 제스처라고 그럴까 그래가지고 인제 이런 얘기를 하는데 우리가 짜고 들어간 거예요.사실. 면담자 :말려들어가지 말자. 구술자 :그래 가지고 구자신이가 먼저 낭독을 했어요.우리가 이 모임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그래 가지 고 강경하게 딱 연설을 하고 나와 버린 거예요.그날.근데 이게 전부 1면에 깔린 거예요.고대 학생회 총학생회장이 이렇게 했다 해가지고 그 신간에는 구자신이가 아주 떴다고요.인물이.그때는 그랬어요. 면담자 :그렇겠네요. 구술자 :구자신이가 딱 비토를 하고 나와 버린 거예요.우리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짜고 가서 하 고 나와 버렸어요.그때. 면담자 :그랬군요.3.24시위를 한 다음에 가두진출을 하셨잖아요?보통 이렇게 요즘은 학교 안에는 경찰 이 들어올 수 없고 학교 안에 있으면 항상 보호를 받을 수 있는데 이제 일단 밖으로 나가버리면 학교 에서도 보호를 못 해 주잖아요.그래서 막 어수선하고 이랬을 텐데 그때 상황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 세요? 구술자 :그 어수선.그때 그런데.그런데 다른 데모하고 좀 달랐어요.3.24때 정부가,정부가 아 호의적 이었어요. 면담자 :아.그러면.

10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03) 구술자 :그 데모를 인정한다는 식으로 3.24때. 면담자 :뭐 이렇게 대치하거나 이런 것도 없었고. 구술자 :안 하고. 면담자 :평화적인 시위였네요? 구술자 :그렇지.3.24일에는 대치가 됐는데 인제 3개 대학하고 대치를 했는데 그 다음 날에는 데모를 정 부에서 허용을 했어 풀어버렸어요.전부. 면담자 :자유롭게 나와서 데모를 하라. 구술자 :그렇죠.그러니까 모두가 나가서 다 3월 25일 날은 전부 데모들을 핸 거예요. 면담자 :3월 25일이 성토대회라고 불리는? 구술자 :아니예요.이게 그때 이게 고대에서는 치욕적인 일이 하나 있었어요.치욕적인 일이.그게 뭐냐 면 3월 이건 뭐 이건 아주 치욕적인 일이예요.3월 25일 날 학생회장 간부들이 다 모여가지고 데모를 그날은 인제 정부에서도 허락을 했으니까 고등학생까지 다 뛰어 나오는 거예요.이제 막 하는 판인데. 이제 저걸 하고 있었어요.준비를 총학생회실에서.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플랑카드 만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체육부 애들이. 면담자 :아 체육부 어깨들. 구술자 :그렇지 어깨들이(덩치 크다는 표현을 하시면서)그중에서도 문영배라는 그 아주 우두머리가 있 어요. 면담자 :문용배? 구술자 :문영배.문영배라고 그 럭비부 주장인데. 면담자 :진짜 몸이 좋겠다. 구술자 :아.몸이 좋구요.그러고 또 이 사람이 체육부,체육부장이야.근데 이거는 체육을 하는 열 몇 개 단체가 전부 모아 가지고 이 사람이 체육부장인데. 면담자 :요새말로 짱! 구술자 :이 사람이 막강해요.체육부장이니까.그래 이 사람이 몇 사람들 뭐 태권도부주장,역도부주장도 있고 운동 사람들을 끌고 와 가지고 총학생회장 아니 총학생회에 난입이 됐던 거예요. 면담자 :아.시위를 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구술자 :그렇지.그래가지고 딱 온 거예요.딱 오더니 무조건 오니 학생회 다 있었어요.총학생회장 각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다 모였어요.이제 5개 단과 그러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딱 튀어오더니 야 박 정훈이 이새끼 나와 이렇게 된 거예요.거기서 그래서 나도 뭔가 했더니 너 이리 앉아 이 새끼야 이렇게 된 거예요.그래 가지고 이 책상을 앞에 두고 나를 보고 나를 딱 앞세워 놓고 그리고는 고대 카스트로 너 이 새끼 나와 이렇게 된 거예요.하고서 둘이,둘이 벌 받는 식으로 핸 거예요.원체 이 가다들이 다 있는데 뭐 대항이 안돼요.인제 거기서는 그 순간에는 안 되잖아요.그래 가지고 야 하더 니 왜 니네들 맘대로 데모를 해 이렇게 해 가지고 협박을 하는 거예요.전부가.그런데 그날 아침에 우리가 총장실에 방문을 해가지고 총장실에.그래 가지고 유진오 총장하고 우리가 다 모여가지고 학생 회 간부들이 다 모여가지고 해 가지고 오늘은 저 오늘은 저희가 데모를 하겠습니다.그러니까 총장님

110 10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도 양해를 해 주십시오.그래 가지고 유진오 박사가 그러면 저 뭐야 사고 없이 질서 있게 오늘 하라고. 그렇게 총장한테 허락을 받고 왔어요.지금 왔어요.와 자기고 인제 의기양양해 가지고 데모를 준비하 는데 그런데 거기에 체육부들이 난입해 가지고 박정훈이 손옥백이 해 놓고는 협박을 하니까 이게 이 상황이 풍비박산이 돼 버린 거예요.그날. 면담자 :그 전에도 가만있던 그분들이 왜 체육과 그분들이 왜 갑자기 하지 말라고? 구술자 :아니 이제 거기에 이유가 있지.그게.그래 가지고 왜 너네 맘대로 학생들 동원하고 뭐 하느냐 고 막 그래 핸 거예요.그러고 나서 인제 멍하니 인제 망연자실이지.그야 말로.딱 끝나고 선배들이 다 돌아갔다고 그게 또 다른 친구들은 우리들하고 대립을 못해요.그런데 이 문영배라는 사람은 우리 보다도 3년 선배예요.그래 가지고 고대에서 1학년 때 1학년 때 고대 총가다야 1학년 때.정상적으로 하면 4학년이고. 면담자 :나이도 있고 덩치도 좋고 하니까? 구술자 :그렇지 덩치도 있고.그러니까 문영배하면 그래가지고 고대는 문영배라는 문영배라는 사람 때문 에 고대는 럭비부가 제일 쎄요.젤 쎄.젤 쎈 이유는 문영배 때문에 젤 쎄요.럭비부가.그런데 이 사람 이 와 가지고 해 노니까 그냥 이상했죠.근데 갔어.가고 나서 학생회다 가고 나서 모인 거예요.그러 니까 데모할 기분이 안 나죠.더군다나 거기다가 나 같은 경우는 막 데모 한다고 협박을 해 노니까.내 가 지금 끌고 갈 입장이 못 되잖아요.거기서.그래서 그날 하는데 그때 전부가 데모를 못 한다고 그랬 는데 그런데 이경우가 딱 이경우가 혼자 지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체육부가 와서 시끄럽 게 해 놓고 간 거 밖에 없는데 그냥 우리가 데모를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이경우가.데모를 그냥 하 자이래 된 거예요.그런데 할 의사가 무서워서 아무도 못하지 그날.허허허.그래가지고 사실 그 체육 부한테 완전히 굴복했던 일이예요.그러니까 치욕적인 얘기지.학생을 주먹으로. 면담자 :힘으로? 구술자 :힘으로.근데 인제 뒤에 들어난 얘기지만 장경순씨란 분이 자 이 5.16( )쿠데타의 중심인 물이었고 국회 부의장도 하고 장경순씨의 처남이예요.문영배씨가. 면담자 :차남? 구술자 :처남.그래 가지고 의심을 의혹을 많이 샀지. 면담자 :실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장경순이란 분이 그 처남에게 하지 못하게 하라고? 구술자 :그런 거는 안 했겠지만. 면담자 :안 했겠지만 가족관계가 그러니까 의심을? 구술자 :그렇죠.그래가지고 장경순씨가 해서서(해서)의심을 많이 샀어요.그 다음에 그 다음에 또 이제 문영배의원이 문선배가 나를 또 불러 갔어요.저기 체육부실로 그러더니 다른 덩치 제일 큰 놈을 시켜 가지고 그래 갔지요.뭐 갔더니,데모 뭐 이런 걸 할려면 나도 체육부장아니냐 이거야 나도 연락을 해 달라고 또 그러더라구요.알았다고 알았다고. 면담자 :통보를 해달라는 얘기였네요. 구술자 :그래 놓고 왔는데 그런데 또 최장집이를 불러 갔어요.그런데 최장집이가 조그만한(조그마한) 사람이 무슨 힘이 있어.그냥 주먹으로 따귀 한번 치니까(직접 손으로 표현을 하시면서)몇 바퀴 나가

11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05) 서 떨어진 거지 맞았어요.최장집이는 가서 맞았어요.그런데 그때 나는 때리기가 좀 어려웠어.나도 깡도가 원래 좀 있었고,웬만한 사람한테는 우리 저 이 깡으로 내가 안 져요.웬만한 경우는 다 선배로 우리가 했지.그러고 있고,그때는 박정훈이한테 손을 댔다 하면은 그건 사쿠라다 이렇게 해버린 거예 요.그렇죠.그때는 사쿠라론이 많이 있을 테니까 문영배도 그 생각을 했을 거란 말이죠.자기가 나한 테 주먹질을 했다 그러면 그건 사쿠라지 뭐 그때는.그렇지 않아요?그래서 나한테는 손을 못 댔는데 최장집이는 갔다가 혼을 한 번 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뒤에 그 뒤에 6.2,6.3을 할 때는 연락을 해 준 일도 없고,그 사람들한테 문영배나 뭐 연락할 일도 없고 그건 뭐 그거잖아요?굴복을 하는 꼴이 아니냐 이거지.그래서 나중에는 그때 인제 YTP다 뭐다 해 가지고 정부에서 학생조직에 사쿠라 집단 들을 많이 저 포섭해가고 배치를 시켜놓고.뭐 공작을 했다고요.그래 가지고 그 왜 유명한 송철원이 얘기도 막 나오잖아요? YPTP아니 YTP이.그래서 그 다음에 데모할 때는 그냥 YTP처단하라 폭살 하라 딱 써 붙인 거예요.그러니까 이거 보고 자중해라 이거지 데모하는데 와서 시끄럽게 하지 말으라 고 그랬어요.나중에는. 면담자 :그러면 뭐 나중에라도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으셨어요?체육학과 분들은? 구술자 :말리는 입장이었는데 했는데 그런데 몇 사람들이 체육부라고 해서 일체 전부 똑같이는 아니니 까 그중에 그중에 우리한테 동료하는,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문,문선배한테 휘하에서 무서워서 이렇게 못 도운 사람들도 있었고. 면담자 :방해까지는 안 했군요?그냥? 구술자 :그 다음에는 방해가 안 되죠.그 다음에는 잘 안되죠. 면담자 :지금 또 지금 고 말씀이 나와서 그 YTP사건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이때 뭐 3.24이후에 뭐 명동 에 학사주점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던데 이건 뭐예요? 구술자 :아휴.그게 예를 들자면 그 저 정보부 공작이예요.공작.그게 정보부 공작인데,그 친구가 주먹 아주 쎄고 역도부의 아주 강자예요.근데 걔가 박정훈사단이야 예를 들자면 처음부터 내 가까운 그런 데 얘가 엉뚱한 짓을 핸 거예요.그래서 아 이게 공작이었구나 우리가 알았는데,인제 3.24데모 조금 있다가 학사 저 명동에 있는 학사주점이라고 있어요.왜 거기가 대학생들이 많이 모여요. 면담자 :각 대학에 있는 분들이? 구술자 :그렇지.모여가지고 술 먹는 데에요.막걸리하고 시국담을 논하고 이런 댄데,그때 학사주점이 어떻게 됐냐 하면은 그 우리나라의 낙서문의 처음 이예요.효시예요 그게.그래 가지고 낙서를 전부 우 리가 써 놔요.이렇게 막 천장이고 온통 낙서장으로 써놔.젊은 날의 낭만이야 이게 예를 들자면 술도 하고 시국비판도 하고 인생도 논하고 그래 가지고 이래 했는데 거기에 보면은요 이런 글이 있어요.크 게 [우리에겐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이렇게 딱 써 놨어요 누가.[우리에겐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근데 이게 인제 이어령 교수가 옛날에 고등학교 때 우리 국어 선생을 하셨어요.이 이어령씨가 근데 그 사 람 표현을 대로면 이게 인제 뭐 유페님적 해 가지고 역설인거야.이쪽에.그 양반대로 하면은 이거는 표현이 이렇게 이어령씨는 우리 [비극은 없다] 그건 너무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비극은 없다 라고 영 화를 붙인 거예요.영화 제목을.그게 그 당시에다가 6.25사변을 저걸로 해 가지고,소재로 해가지고 영 화가 나왔는데 [비극은 없다].

112 10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비극인데. 구술자 :그럼 비극이다. 면담자 :반어법으로? 구술자 : 그러니까 반어예요.반어법이야.인제.그래가기고 인제 우리에게 절대로 절망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저렇게 썼다.우리는 그렇게 인제 인식을 하는 거예요.[우리에게 절망뿐이다]그러면서 내가 친구들하고 술 하면서 참 저게 저 말에 의미를 우리가 새겨야 된다.저거 는 절대로 우리가 절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을 반어법으로 저렇게 쓴 거다.그래가지고 내가 학 사주점을 자주 갔다고요.그런데 글쎄 이렇게 술을 먹다가 우리끼리 먹었으면 됐잖아요.그런데 한 친 구가 한 친구가 나와 가지고 저쪽 테이블에 있는 친구들하고 싸움이 붙은 거예요.이렇게.(싸움이 붙은 시늉을 하시면서) 면담자 :갑자기요? 구술자 :갑자기.그런데 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요.갑자기 싸움이 붙은 거예요.이렇게.그래 가지고 우 당탕탕하고 싸움을 하고 끝나고 나왔어요 인제.근데 그렇게 뭐 큰 저 이 상처가 나거나 그런 것도 아 니야.그래 가지고 밖으로 나왔는데 백차가 딱 두 대가 대기를 하고 있다가. 면담자 :어디서 알고 또 그렇게? 구술자 :그러니까 짜고 온 거지.애를 시켜서 싸움을 붙여놓고 우리를 싹 끌어 간 거예요.그래 여섯 명 을 전부 짚차에다 다 태운 거예요.그래 가지고 딱 중부서에다 데려다 놓은 거예요 갑자기.그래 가지 고는 그래 가지고는 인제 그 이튿날 그 이튿날 하는데 그날 저녁에 나는 학생,그때가 현승일이 김덕 룡이 김도현이. 면담자 :김중태 이런 분들. 구술자 :이 친구들하고 우리 학생회 간부들하고 만나기로 했어요.광교에 있는 다방에서 광교다방이라는 데서.그래서 인제 거기를 내가 가야 되겠더라구요.그래서 가지고 그 경찰서 중부서에서 나갔다가 내 일 오겠다.나 아무개다 했더니 아 경찰은 왜 잡아놨는지 몰라요.지금. 면담자 :경찰도? 구술자 :경찰이 몰라.백차에다 갔다 노니까 그냥하고 지시만 받는 거예요 인제.그래 어 갔다 오시래. 그래서 나와 가지고 그 이튿날 인제 아침에 9시까지 들어간다고 그래 가지고 모임하고 그 이튿날 아침 9시에 갔어요.그랬더니 아 왔냐고?그러고는 있는데 하루 종일 조사도 안 받고 연락도 없고 그냥 있 는 거예요.하루 종일 경찰서 하여튼 몇 시까지 있었냐 하면 오후 5시까지 우리를 놔 둔거야.조사 하 나도 안 받고.그게 인제 고위층에서 중앙정보부에서 이걸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 이게 된 거야. 면담자 :결정을 못 내린 거네요? 구술자 :그렇지.결정을 못 하다가 하루 종일 있다가 오후 5시가 되니까 여러분들 지문을 하나 써라,찍 어라 이거야.그래서 지문을 찍었어요 우리도.그리고 인제 내 주나 했더니 타라 이거야.그래가지고 나갔더니 서대문에 있는 그 저 뭐야 구치소 되기 전에. 면담자 :형무소요 옛날 형무소? 구술자 :글쎄 형무소 가기 전에 거기 인제 잡범 범죄자들 있는데 거기다가 딱 집어넣는 거예요.그래서

11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07) 추운데서 이렇고 있었더니 밤에 인제 껌껌해졌어요.밤이.한 밤 저 아마 껌껌해서 8시나 됐는데 나와 라 이거예요.그래 갔더니 아니 검찰로 나를 데리고 간 거예요 우리들을 검찰이.가서는 검사가 아무개 아무개 맞냐 이거야.아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왜 싸움들 하냐 이거예요.아 싸움 안 했습니다 우리 맞 고,말린 일 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아니야 박아무개는 말이야 이 주전자를 들어 이게.허허(그때 기 억이 나시는 듯 표현을 하시면서)그 순간에 촬영을 해 놓은 거야.그쪽에서. 면담자 :아 주전자를 들고 있는 장면을? 구술자 :그렇지.어 그러고 어제 싸움한 그거를 촬영을 다 해 놓은 거야.사진을 이렇게.봐라 이거야 분 명 싸움 했어 안 했어.근데 보니까 막 싸운 한 것처럼 돼 있어.인제. 면담자 :그렇게 막 움직이고 말리고 이런 거를? 구술자 :그렇지 그러니까 뭐 싸움한 것처럼 됐지.아 저게 인제 공작이구나.그날,그날 알았죠.이거를. 그래 세상에. 면담자 :선생님,선생님 지금 말씀이 너무 재미있으신데요.테이프가 거의 다 됐어요.요 말씀을 꼭 화면 에 담고 싶으니까 테이프를 좀 잠깐 바꾸고요.쌤 테이프 바꿔주세요.바꾸고,물도 한잔 드시고,목소 리가 좀 많이 쉬셨어요.말씀 잘하시는데요?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시간이 이렇게 오래됐는지 모르 고. Tape2. 면담자 :예 조금 전에 쉬기 전에는 그 이제 저 학사주점사건 때문에 검찰까지 가셔 가지고 검찰에서 그 선생님도 모르게 찍히신 그런 사진을 보고 이렇게 싸움을 했다라고 오해를 받으셨는데,누명 어떻게 보면 누명을 받게 되신 건데 그때부터 말씀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구술자 :그래 가지고 그래서 인제 나도 당황한 거죠.세상에 이런 것을 무슨 사진이라고 찍어서 그걸 다 보여주고 그래서 당신은 구속이다 이거예요. 면담자 :아 그러니까 집단폭행 이렇게 들어가셨네요? 구술자 :그래서 가지고 그날 저녁에 서대문구치소에다가 다 우리를 수감을 시켜 버린 거예요.그런데 그 전에도 유치장도 가고 뭐 했지만은 서대문에는 안 갔거든요.그래 가지고 인제 서대문에 갔어요.모두 다,근데 밤늦게 거기가 아시다시피 저녁 8시나 8시 반이면은 취침,취침 시간이예요. 면담자 :그러면 자야 돼요 그때? 구술자 :그러믄요.8시반이면은.그러니까 우리가 간 게 9시가 넘어서 간거예요.그러니까 뭐 조그마한 방에다가 전부 집어넣더라구요.그래 가지고 참 그때 참 일생동안을 통해서 가장 어려운 밤을 보낸 거 예요 거기서.그래서 좁은데 가서 어디서 잘 때가 없나 이래 했더니 누가 소리를 팩 질러요. 야 새끼 야 저 귀퉁이에 가서 누워서 자라 이거지.그래서 인제 초범들 처음에 가보면은 뼁기통이라고,변기 통,그걸 뼁기통이라고 그러거든요.변기통 옆에 자리를 주는 거예요.그래 가지고 인제 거기서 고생을 하면서 있었어요.이랬는데 그런데 문제가 어디서 났나하면 그러다가 이 처음에는 신문에서 뭐라 그랬

114 10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냐면은 아 학생데모 말이지 애국적인 데모를 하는데,학생들이 폭력이나 행사하고 뭐 거기 갔다 이래 가지고 기사가 그렇게 나온 거예요.그런데 상상을 해 보세요 큰 싸움도 아니고. 면담자 :누가 다친 것도 아닌데. 구술자 :그렇죠 아무것도 아닌데 학생들을 서대문에다가 그것도 유치장에 들여보내지도 않고 경찰이 수 사도 핸 일도 없고 그래 놓고 서대문에 딱 가둬 놓으니까 기자들이 이 예민하잖아요?이 수상하다 이 래 된 거예요.하루는 신문에 나온 거예요 인제.어 데모 이상하다 이거야 데모 주동자들을 몽땅 갖다 가 잡아넣었다 이래 돼 버린 거예요 신문에.그러자 고대 학생들 속에서도 여론이 인제 아주 나빠졌어 요 정부가.이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해 가지고는 있었더니 그때 인제 중앙정보부에 학원 담당하던 분이 계세요.선밴데 그 분이 인제 우리 4년 선배고 그 양반이 저걸 하셨어.태권도부 주장을 하셨어요.그리고 이 가다예요.응?근데 그 사람이 결국은 송철원이 린치사건으로 형무소를 들 어가요.박세혁이라는 분이.근데 박세혁선배가 면회를 온다고 서대문을 온 거예요 인제.그래 가지고 인제 본인 얘기로는 중앙정보부에서 우리를 몽땅 잡아넣고 나니까 여론도 나빠지고 그리고 이게 말이 안 되는 일 아닙니까?그래 가지고 이 선배가 우리를 면회하면서 자기가 석방운동을 중심으로 했다 이 렇게 된 거예요.그래서 석방으로 해 가지고 여러분 풀려나겠다 이래 가지고 일주일 만에 우리가 석방 이 된 거예요.그거이 이제 처음 3.24나자 젤 먼저 그러니까 된 게 문리대 김중태가 저 잽혀 가고 그 다음에 나하고 우리 일행이 이제 거가서 공작에 의해서 바로 들어간 거예요.그래 가지고 일주일 동안 을 거기 있었더니 이제 석방을 시켜 줬는데 사람이라는 게 다 양심이 있잖아요.양심이라는 게.그래 가지고 이 맞은 사람이,맞은 사람이 미안하니까 자기가 뭐 맞은 것도 아닌데 모처에서 모처에서 붕괴 를 칭칭 감고 나오라고 그랬대요.그래서 얼굴에다가 붕대를 칭칭감고 팔도 뭐 붕대.이렇게 이렇게 쇼 를 핸 거예요.큰 싸움이나 난 것처럼.그런데 그 사람이 미안하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사실 자기 본 의 아니게 이런 게 있었다고.그 얘기를 나중에 내가 다른 걸 폭로 할 때 익명으로 그 고대에서 동아 일보에 상아탑의 수난이라고 이렇게 큰 기사가 한번 났어요.그래 나를 취 취재를 한 거야.어느 사람 이.그래서 내 이름을 감추었고 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고 또 이러이러 이런 게 YTP사건 비슷한 프락 치사건 이런 얘기를 내가 한번 저걸. 면담자 :당한 적이 있다. 구술자 :그랬어요.그게 기사로 한번 나온 적이 있어요.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때 학교에 가니까 또 현 승종씨가 딱 제재하더라구요.우리가 무슨 제적 맞을 짓이 뭐 있어요?그래서 나랑 우리들을 모두,아 제적이 아니고 뭐죠? 면담자 :정학,징계 같은 것. 구술자 :그렇지.그러니까 정학처분을 해 준거예요.정학.그래 가지고 당신네는 일정기간 동안학교 나오 지 마라 그랬어요.그래 가지고 그게 인제 학사사건이예요.학사주점사건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 면담자 :그렇군요.그럼 이때 이제 학사주점사건과 관련해서 이 무렵에 또 막 그 송철원선생님한테도 막 괴소포 배달되고 그렇잖아요? 구술자 :그래 가지고 인제 바로 학교를 등교했다고요.인제 석방돼가지고.석방돼가지고 하루만이예요.

11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09) 하룬가?그래 가지고 석방돼 가지고 학교를 갔다고요.갔는데 그 학생처에 가 보면은 학생처에 직원들 이 이렇게 있어요.그런데 정경대학 담당이라는 분이 있어요.그 사람이 인제 이 학생처에서 담당을 하 고 있는데 이 사람이 말이죠.저를 좀 보자 이거예요.그래서 갔어요.갔더니.부산에서 아는 사람이 있냐 이게예요? 면담자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냐? 구술자 :그래서 아이 무슨 부산에 아는 사람 무슨 얘기냐 했더니 소포가 왔다 이거예요. 면담자 :부산에서 선생님 앞으로 학교로? 구술자 :그렇지.소포가 왔다 이거예요.부산에서 발송을 한 걸 소포가 왔다 이거예요.그러냐고 그러냐 고 그런데 이거를 받아가라 이거죠.그래 가지고 나하고 서진영이하고 둘이한테 소포가 온 거예요.그 래 가지고 그 둘이 그렇게 받았어요 인제.받아가지고 서진영하고 그 저 고대 앞에 음식점에 가서 밥 먹는 집에 들어갔어요.그래 가지고 점심식사를 하다고 그걸 끌러 본 거예요 이렇게.끌러 보니까 거기 에 인제 괴소포가 나온 거예요.근데 유인물이 몇 통 있어요.몇 통.그게 인제 조국통일 뭐 평화 이런 유인물 또 뭐 유인물 그러고 거기다가 사(서신)신으로 유인물이 아니라 사신(서신)으로. 면담자 :서신으로 쓴. 구술자 :해 가지고 거기다가 귀하들의 영웅적인 활동에 그 투쟁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뭐 이래 가지 고. 면담자 :무슨 북한에서 보낸 것 같은 그런 느낌에? 구술자 :그렇지.그걸 썼어.하고 백달라를 보낸 거예요.백달라를. 면담자 :그때 당시 백달라면 큰 돈 이지 않나요? 구술자 :백달러가 얼마나 크냐 하면은 우리가 우리가 4학년 1학기 등록금이 5,800원인데,5,800원인데 백 달러가 20,000원이예요.그러니까 세 사람. 면담자 :세 명이. 구술자 :학비야.그러니까 엄청 큰 돈이예요.세 사람 걸,그걸 받은 거예요.그래서는 수상한데 우리가 그런 아까 그랬지만,학사주점도 그런 저 경계심이 없어서 저렇게 당했는데 이런 것도요 우리는 쉽게 쉽게 생각을 한 거예요. 면담자 :뭐냐고. 구술자 :이런 게 있지.그러고는 야 일단 술값은 됐으니까 술이나 먹자.허허허.아 그러고 인제 그러고 는 근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게 아무래도 말이야 서울대 문리대하고 사람들도 받았을 받을 가능성이 높 다.우리는 그렇게 본 거예요.문리대 애들도 이거를 3.24데모를 같이 했으면은 거기도 아마 이것을 받 았을 거다.일단 그거는 알아보자 그리고 인제 덮어둔 거예요.덮어 두었는데 그날 저녁이야,그날 저 녁에 그 정경대학 학생처. 면담자 :처장. 구술자 :직원이 직원이 나를 좀 만나자 이거예요. 면담자 :그 소포를 전달해 줬던 사람? 구술자 :전달해 준 사람이 만나자 이거예요.그래서 아니 무슨 일로 만나냐 했더니,아니 좀 볼일이 있

116 11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다고요.그래서 만나자 했더니 어떤 이상한 데예요.서울대 아니 서울역에서 그냥 만나자는 거예요.다 방도 아니고. 면담자 :서울역 앞,그냥 길가에서요? 구술자 :그렇지.길가에서,그래가지고 수상하다 해 가지고. 면담자 :무슨 접선하는 것도 아니고. 구술자 :글쎄.허허허.하여튼 이 사람을 서울대 아니 서울역 앞에서 만났어요.만나가지고요,둘이서 인제 남산 길을 걸어 올라가는 거예요. 면담자 :이상한데요? 구술자 :쭉,쭈욱 올라가는데 요지는 이걸 공개하지 말고 놔둬라 이거야. 면담자 :아 소포를 공개하지 말고 묻어라. 구술자 :그렇지,그렇지.놔둬라 이거야.요지는 그거예요.그렇게 해서 그것도 인제 공작이야 그것도 인 제 공작을 꾸미는 거예요.이렇게.그래서 수상하긴 되게 한데,알았다고 좌우간 좀 덮어두겠다고.그러 고 인제 돌아왔는데,그 이튿날 그 다음날 저녁에 내가 가끔 친구들하고 자주 어울리니까 같이 소주잔 도 한잔씩하고 자주 어울리잖아요.그때가 학생운동 한다고 해 가지고.그래 가지고 하루 종일 돌아다 니다가 밤 11시 반쯤해서 집에를 도착을 했다고요.그래서 도착해가지고 혹시 무슨 동아일보에 뭐 신 문 안 났나하고 봤더니 3면 톱에 현승일,김중태,현승일이가 저 이 괴소포를 받았.받았다. 면담자 :받은 것을 폭로를. 구술자 :그거를 폭로를 핸 거예요.그것도 서울 문리대에서 학생처장하고 같이 있는데서 폭로를 한 거예 요.그러니까 막 대문짝만하게 아 3면에,그때는요 아시다시피 신문이 4개면만 있어요.그러니까 정치, 경제,사회 그 다음에 문화체육 뭐 이런 것들 이제 4.그러니까 3면이라는 게 독자들이 제일 시선을 집 중하는 것이 3면이예요. 면담자 :그렇겠죠. 구술자 :그래 가지고 그게 크게 났으니까 그래 가지고 아차 나도 이거 받았는데 걱정이 되더라구요.그 래 가지고 그걸 가지고 내가 아버지한테 그 밤중에 그 괴소포를 보여준 거예요 아버지한테.그리고 아 버지 이만저만 해서 저도 이걸 받았는데 이리했다 그랬더니 야 너두 큰일 날 뻔 했어 그러시더라고. 그러고는 내일 아침에 이게 아버지 코치예요.내일 아침에 그 학생처장한테 연락을 해라 이거예요.그 래 가지고 나하고 사이도 안 좋은 학생처장한테 또 아침에 전화를 한 거예요. 저 처장님 이만저만 해 서 저도 괴소포라는 걸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아 그러냐고 그러면은 아침에 8시에 저 자기 처장실로 좀 나와라 이거예요.아침에 가지고 나와라 이거예요.가지고 오고,날 좀 만나자고.그러니까 우리가 참 비정치,정치적이예요.그러니까 또 그 말만 듣고. 면담자 :또 갖고 가셨구나. 구술자 :가지고 가서 다 드렸지.인제.학생처장한테 다 하고 했더니 너희 기자들 오니까 만나지 말아라 이거예요.또 그것을 곧이듣지.듣고 이제 피해 다닌 거예요.이제.그런데 본청 앞에 이렇게 가니까 연합신문사 뭐 이런 거 있죠?통신사 각 신문사 차가 앞에 팻말 붙어가지고 동아일보 뭐 한국일보 8개 차가 나와 있어요.그게 인제 우리 때문에 온 거예요.이제 뭘 취재하려고.그런데 학생처장이 당신 피

11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11) 해있으라고 그랬고 다른 때 같으면 우리도 가서 딱 하고 좀 폼 잡을 텐데 무서워 가지고 학생처장님 말씀이 옳은 줄 알고 피해 갔어요.피해 다녔는데 저 위에 갔더니 이종률이라고 있어요.이종률,이종 률이가 민비의 초대 회장이에요.그러니까 2대가 김중태,3대가 현승일이 이래요.그 초대 회장이 이종 률인데 이종률이가 그때 동아일보 기자예요.그래 가지고 이 사람이 이제 슬슬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나를 만난거야 그 우연히.그래 만나가지고는 나보고. 면담자 :얘기하라고? 구술자 :당신이 틀림없이 받았다 이거야.당신이.그래서 뭘 받았냐 하니까 당신이 괴소포를 받았으니까 취재를 좀 해 달라 이거예요.그래서 이제 우리 학생처장님이 야단치니까 나 안한다고,사진을 하나 달 라고 그래.아이 나는 사진도 없다고 말이야 안한다고 그래 가지고 인제 했더니 그럼 한마디만 뭐라고 해 달라 그래요.그래서 받긴 받았다 우리가 거짓말할 수 없으니까.받긴 받았는데 그 외에는 할 얘기 가 없다,그리고 인제 피해 버렸다고요 나는.그러니까 모두 와 가지고 나를 취재하려고 왔는데 아무도 못 만난 거예요.이종률이만 만났어요.그랬더니 이종률이가 그날 거기다가 박아무개가 괴소포를 받고 본인들은 뭐라 했더라고 한구절만 해요.그날 인제 안성혁이가 연세대학교 안성혁이가 괴소포를 받았 는데 이 친구는 뭐 공개적으로 그거를 저걸 받은 거예요.공개적으로 그 백 불을 불을 태워 버린 거예 요.허허허.불을 태웠데,좌우간.그래 가지고 안성혁이가 받고 박아무개는 좀 뭐라고 인제 나온 거예 요 인제 저하고.그런데 안성혁이는 그래도 사진도 나오고 이랬어요 인제 괴소포 받았다고.그리고 나 서 그 다음날인가 바로 그래요.그 이튿날 총장이 이 저 학생처장이 좀 같이 가자예요.가자 이거예요. 그래 어디 갑니까?이러니까 따라 오라 이거야.그래 가지고 학교차를 우리가 타고 나하고 서진영이 가 갔더니 저 치안본부 그때는 그 치안본부장이라는 직함이 아니라 치안국장이었어 치안국장.그러니 까 서울 시경국장 이런 것보다 높은 거지.치안국장이 박영수예요.박영수.이 사람이 우리를 대동해 가지고 소집을 했어요.그래 가니까 인제 서울대 김중태는 징역 들어가 있고.현승일이가 나왔고 연세 대학교 안성혁이가 왔고 나하고 서진영 해 가지고 넷이 갔는데,네 사람을 다 학생처장이 동반해서 같 이 데리고 온 거예요.동행해서 같이.그래 가지고 했더니 거기서 인제 뭘 하냐 하면은 북한에서 저 유 인물 날라 온 거 그걸 다 이렇게 이렇게 보여주고.뭐 오만 쇼를 다 하는 거예요.뭐 하고,뭐 신문도 말이죠.이거 했는데 한국일보는 인제 1면은 우리,우리 신문에 그대로 인쇄가 돼있고.2면,3면을 딱 넘기면 거기 인제 남조선 막 저. 면담자 :비방하는. 구술자 :그렇지.그런 거 이런 걸 막 해.이런 걸 보여주면서 여러분들 이럴 수도 있다.요지는 그렇지. 이럴 수도 있다.이러고 하더라구요.인제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니까 언론에서 가만있어요.괴소포 받 았다는 거 왜 소식이 없냐 이거야.그것도 사람이 누구누구가 우편물을 붙였다는 몽타주를 다 낸 거야. 부산에서. 면담자 :누가 이런 거 붙였냐? 구술자 :그렇지.그 사람이 우체국에서 붙인 그거를 그거를 몽타주를 내 가지고 신문에 냈어요.이 사람 들이 몽타주를 내 놓고 잡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전부 잡아라.잡긴 뭘 잡아요?나중에 들으니까 정보 부 자기들이 핸 건데,그걸 무슨 수로 잡아?그래 가지고 유야무야 됐지.사설에서 맨날 때려봐야 뭐

118 11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시간,사설이라는 게 또 그때만 지나가면 되잖아요.그때만 넘어가면.그래 됐어요.그래 가지고 괴소포 사건이 그렇게 된 거예요. 면담자 :그럼 어쩌면 인제 3.24시위 이후에 이런 그 학사주점사건도 있고 이런 괴소포를 받아서 잘못, 자칫 잘못됐으면 아주 큰 죄를,그렇게 누명을 쓰고 그렇게. 구술자 :그렇지.그러니까 딱 쓸 뻔 했지.그 인제 문리대에서 현승일이가 그거 하는 바람에 우리가 살 았고,그 다행이지.그리고 이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연결이 안 되는데 간첩하고 연결이 되겠어 요?무슨 집안하고 뭐가 되겠어? 면담자 :옭아 맬 만해도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개연성이 없어서. 구술자 :없어요.없는 짓을 걔네들이 그걸 했어요.했어요. 면담자 :이런 뭐 괴소포 사건이라는 게 다 어쩌면 정부가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사찰하거나 탄압하 기 위해서 그런 하나의 방편이었던 거 같네요? 구술자 :그래 가지고 우리가 툭하면은 말이지.공작정치 음모정치 이런 거. 면담자 :공안정부. 구술자 :해제하라고 막 떠드는 거야.공작,공작을 한 거 아니에요.전부 이런 공작들이.중앙정보라는 게 맨 그런 거 만들고 그렇지 않았어요.옛날에.공작하고. 면담자 :이 대표적 그 당시에 이 대표적인 두 사건이외에 또 다른 학원사찰이나 탄압과 관련된 또 소소 한 일들이 많았었나요? 구술자 :다른 건 없었는데 내가 ROTC를 했단 말이죠.그런데 원래는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은 내가 글쎄 ROTC 이 그거를 그때만 해도 3.24데모가 나올 줄 모르고 ROTC를 신청을 해 가지고 장교 를 하는 그거를 잘 받고 있었잖아요 그간.근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나를 감시를 하는 거야 ROTC쪽에 서.그래 가지고 학생회장 출마하는데 ROTC 단장이 왜 나보고 출마하지 말라는 얘기를 왜 하며,우리 정경대학 학장이 윤천주 학장이거든요.근데 윤천주씨가 알다시피 그전에 공화당에 사무총장이 되시고 또 문교부장관도 하시고 국회의원도 하고 근데 완전히 친여적인 사람이예요.윤천주라는 분이.그런데 이 양반도 공개적으로 박아무개는 학생회장 출마를 안 하도록 하라고 해지 말라 얘기죠.그러니까 완 전히 압력이지 뭐 저한테.그러다가,그러다가 이제 ROTC 도중에 나를 제명 처분을 한다고 그래 가지 고 제명시킨다고 ROTC에서 인사위원회가 딱 열린 거예요.근데 내가 딱 보니까 그때는 이제 3.24직후 야.내가 보니까 얘네들이 나를 그 제명 딱 시켜 놓고 군대 보낼라고 그러더라 이거야.내가 보기로는. 그래 가지고 안 되겠어요.그래 가지고는 학생 간부들을 다 데리고 그 부단장이 소령인데,ROTC 단장 은 대령이고,소령인데 소령이 인사위원회 위원장이야.예를 들자면은.근데 그 양반 집을 찾아갔어요. 우리 간부들을 쭉 데리고,가 가지고 따졌다구요.나를 왜 왜 제명시킬려고 그러냐고 따진 거지 내 얘 기가.그랬더니 할 말을 못 찾어.이 사람이요.그래 가지고 결석을 한두 번 했다 이거야.아니 저 결 석.학생운동 하다보면 한두 번 빠질 수 있잖아요. 면담자 :그쵸. 구술자 :근데 그게 뭐 제명사유가 되느냐 이거야.한두 번 했다고.그래 가지고 이제 막 압력을 우리가 넣은 거예요.그러고 나 승복 못하겠다고 그랬더니 그 양반이 쭉 간부들 쭉 있는데서 뭐라고 하느냐면

11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13) 그래도 군대라는 것은 국가기관이다 이거야.국가에서 결정한 일이니까 저 승복을 해라 이거야.그래 가지고 이제 옥신각신 했어요 했는데.근데 저 그 그 좋은 사람이 있어.세상 보면은.인사위원 중에 한 분이 그 육사를 나오셨어요.그런데 내가 기억을 해요.임복기씨라는 분이 13기예요 3기.그래 가지 고 내가 그때 저 이춘구씨하고 군대에서 만나가지고 아 내 임복기씨를 아느냐고 하니까 잘 알더라고 그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서독에 국비로 유학을 보낸 사람이에요.어 근데 이 임복기라는 그 대위가 이건 안 된다고 나를 변론,변호를 핸 거야.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그렇잖아요?이렇게 해서 어떻 게 인사위원회 이거를 합니까.하고 나를 이양반이 구해 준거야.사실 그때 나를 제명해 가지고 군대 보내 버릴라고.아니 이게 그러니까 몇 가지 지금 시나리오를 한 거야.몇 가지를. 면담자 :몇 단계에 걸쳐서. 구술자 :그럼,몇 단계에,그래가지고 인제 했어요.그런데 결국은 제가 제명을 당했어,결국은 제가 제 적을 당하고 6.3데모 때문에 결국은 제적을 하고 그리고 쫄병으로 논산을 또 갔어요.인제. 면담자:사병으로? 구술자 :사병으로. 면담자 :현역을 입대를 하신 거네요? 구술자 :네.네.막 군대 내에서도 엄청 이 저걸 감시도 많이 받았고 엄청 많이 받았어요.그러고 뭐 이런 이런 이런 쭉 있는데.인제 그때 이제 이 얘기도 하자면은 여기 뭐 나오던데,나도.6.3에 대해서 그 다음에 뭐 조사 받은 일이 있냐?그 뒤에 경찰에서는 조사를 안 받고,그러니까 65년도 사건으로는 조사를 다 받았고 그때는 아닌데,그때 저 동대문 옆에 옛날 고양군 군청 자리 그게 인제 그 중앙정보 부 수사국이에요.그 무시무시한 수사국.주로 이제 사람 때리고 뭐. 면담자 :고문하고 막 이러는데. 구술자 :그럼 고문하는데.거기를 날 데려 간 거예요.인제.군대 있을 때. 면담자 :군대에 있는 군인을. 구술자 :그렇지 군대에 있는 군인을 가자고.그래서 갔는데 거기서 이제 아침부터 쭈욱 조사를 받았어 요.이제.6.3데모 또 의활단이라는 단체 있어.그걸 그냥 집중적으로 이제 의활단이라는 걸 이거를.그 래 비밀결사라고 해서 했는데 이거를 고양군청에서 했는데 저녁식사가 됐다고 저녁식사.그랬더니 이 쪽으로 와 가지고 이제 수사 끝내고 와 가지고 밥을 먹어라 이거죠.그쪽에 와 가지고 그러면서 설렁 탕을 한 그릇 주더라구요.그래서 먹고 있는데 김중태가 그때 온 거예요 거기를. 면담자 :거기에? 구술자 :네에.그게 67년도 아니 65년도지 65년도.그래서 가지고 내가 야 별일 없냐? 그랬더니 저 자 기 곧 나갈 것 같다 이거지요.그래서. 면담자 :다행이다. 구술자 :그러고.최장집이 얘기를 들으니까 강릉에 왔었다면서 하고 내가 그랬더니 쉿 이러더라고 그 걸 비밀로 했던 가봐요.최장집이 집에 갔다는 걸 비밀로,나는 그것도 모르고. 면담자 :군대에 계셨으니까. 구술자 :그냥 쉿 이러더라고.그래 가지고 나는 이제 그때 뭐 군대에 가 있는데 뭐 내가 잘 못 했어

120 11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요?그래 가지고 조사만 받고 나왔는데,그 길로 김중태가 2년 동안 형무소 살이를 했지요 바로.어 그 랬어요.그리고 나오고 그게 이제. 면담자 :아.현승일. 구술자 :현승일이 아니고 김중태가.그러고 중앙정보부에서. 면담자 :만났을 때. 구술자 :그렇지 만났는데,만났는데 그 길로 사건으로 저 해가지고 2년간 인가를 징역 살았어. 면담자 :말씀으로는 곧 나갈 것 같이 말씀 하셨는데. 구술자 :그렇지.금방 나온다고 그랬는데,쭈욱 해 가지고 징역살이.아 그때가 2년인지 다 살았고 그 나 머지에는 우리가 3선 개헌 반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김중태가 나한테 얘기를 하더라구요.야 너는 자기한테 비하면 너는 행복하다 이거예요.너는 대학 졸업했지.집안도 괜찮지.그래서 나는 말이야 졸 업장도 없지.지금 경제사정,경제적으로 어렵지 하니까 아주 처절하게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중태가. 아주 그 한다고.그래 그러면서 해고 그때 그 이야기를 하더라구요.나 이번에 독방에서 2년을 감옥살 이를 하고 왔다 이거야 중태 얘기가.자기가 2년 동안을 감옥살이를 하고 왔다고 그러고 나서 결국은 미국으로 간 거예요 중태는.그리고 갔어요 인제. 면담자 :한국에. 구술자 :이제 이후락이하고 김성곤이하고 뭐 이런 사람들이 하고 인제. 면담자 :보내 버렸네요. 구술자 :이제 가거라.그래서 김중태는 갔고,우리는 우리는 그때 또 3선 개헌 한다고 막 설치고 설치고 다니고 그랬어요. 면담자 :그래도 다행히 그런 정부의 탄압이나 공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이렇게 실형을 살 거나 그 당시에는. 구술자 :없었어요. 면담자 :별 일 없어서 다행이네요? 구술자 :인제 우리 인제 저 했는 게 그래도 내가 그 뒤로도 3선 개헌 반대다 민주회복운동이다 뭐 이런 거 하면서 징역살이를 자꾸 하잖아요?근데 다행스러운 게 우리 아버지가 법조인이에요 변호사.아버 지가.그래 가지고 아버지 휘하에,아버지가 대표변호사로 있었는데 그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유명 한 한승헌변호사 이세중변호사 이런 사람들이 그. 면담자 :그러니까 변호를 잘 해주셨네요? 구술자 :그렇지.이분들이 다 저 인권변호사를 아주 날리던 사람들이야.근데 이런 분들이 내 변론을 열 심히 해 주신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저 사람 빨리 나온다고 그랬는데,실제로는 우리 아 버지가 고생을 많이 한 거야 그 사람들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석방시킬라고.아버지 얘기로는 야 내가 우리 아들 징역 보내만 놓고 내가 무슨 낯짝으로 변호사를 하고 있느냐?이거 거예요.자식 못 빼면서, 그래 가지고 그런 또 아버지한테 얽힌 얘기가 또 많아 나하고 인제 이런 얘기들이.근데 그래 가지고 좀 우리는 빨리 저 덕을 좀 본 거예요 집안에. 면담자 :어쨌든 다행인거 같아요?

12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15) 구술자 :그럼 다행이었죠.그럼. 면담자 :이제 조금 주제가 바뀌는데 그 후에 이제 5월 20일에 그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이게 그 박정희 정권 때 교조적 뭐 맞나요?민주주의인가? 구술자 :어 한국적 민주주의. 면담자 :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해야 하나요.그거를 좀 빗대서 비판하는 의미에서 민족적민주의. 구술자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 이제 민족적민주주의라고 바꿔 놨어요.박정희 정권에 서. 면담자 :그렇죠.이거를 이제 비판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장례식을 치르는데 서울대에서.이제 이거를 이 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주체는 서울대였지만,서울 문리대였지만 이게 서울시내에 있는 연합 대학 들이 연합해서 이제 하기로 한 거잖아요?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건가요? 구술자 :근데 그때는 거 이게 이렇게 됐어요.내용을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우리가 4학년 때 인제 수학여 행을 가는데 수학여행.그거를 우리 고대에서 한 20명이 인제 제주도로 가기로 핸 거예요. 면담자 :제주도로? 구술자 :그래 가지고 이제 한 일주일 동안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하고 있었어요. 면담자 :아 고대에 계셨던 분들은 제주도에 계셨던 거예요?그 당시에? 구술자 :그렇지.우리는 저 정외과만. 면담자 :정외과의 20명이? 구술자 :정외과만 수학여행을 저 면담자 :졸업여행이죠 뭐. 구술자 :그렇지.하고 있었는데 이제 민족적민주주의가 그게 준비 된 거예요.그래가지고 결국은 마지막 에사 마지막에사 우리가 왔어요. 면담자 :거의. 구술자 :인제.왔는데 인제 서울대는 미리 연락받고 이걸 못하고.그러고 뭐 한다고 그러 길래 인제 저 뭐야 박철현이,서안정이 이런 옛날 우리 패들 우리 후배들 걔네들이 이제 저 고대 이름으로 그 4.19민 주 정신은 살아있다 이런 플랭카드를 가지고 참여를 했어요 거기를.근데 우리 후배들이 참여를 했고 우리는 그때 참여를 안 했고 그랬어요. 면담자 :그러니까 처음부터 뭐 연락을 받아서 같이 준비를 하거나 그렇게 한 건 아니었네요? 구술자 :네.그렇지는 않았어요. 면담자 :음.그렇군요.그럼 뭐 이때 당시에는 뭐 참여를 안 하신 거네요? 구술자 :그렇지.이 민족적민주주의는 전혀 참여를 안 했는데. 면담자 :아까 말씀하셨던 박철현,김광길,서안정 이런 분들만. 구술자 :그렇지.걔네들이 인제 참석을 했어요. 면담자 :후배들이신거죠? 구술자 :그런데 그때 또 그때 공작이 있었어요. 면담자 :공작이 있었어요?

122 11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공작이 그럼.이 정부라고 할지 중앙정보부라고 할지 이 공작이 들어왔는데,뭐냐면은 고대 학 생들 가운데 나쁘게 말하면 사쿠라집단이지.얘를 들자면은.근데 몰려 와 가지고 저한테 무슨 일이냐 면 민족적민주주의가 잘못 됐으니까 그거를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해 달라 이거예요. 면담자 :아 그러니까 서울대에서 개최한 이 장례식이 잘못됐으니까. 구술자 :잘못됐으니까. 면담자 :반대하는 거를 하자? 구술자 :그렇지.반대를 하자 이거예요.그래서 내가 얘기를 듣다가 그게 말이 되느냐 이거예요.말이 안 된다 소리다 이거지.학생 그거 운동을 우리가 지원을 못할망정 그것을 무슨 하자는 얘기야.단호하게 잘랐어요.그건 안 된다.그랬더니 그 몇 사람들이 어울려 가지고 민족적,그거를 하자고 자꾸 그래서 그건 안 되고.해 가지고 인제 5월 25일,25일 날 난국타개 대학생 총궐기 해가지고 이거를 준비를 핸 거예요.해는데 각 대학교 학생회장들 한학련. 면담자 :한학련. 구술자 :한학총. 면담자 :한국학생총연합회. 구술자 :그렇지.한학총 그 모임이 있다 그래 가지고 내가 저 구자신이한테 고대 총학생회장한테 야 이 걸 해서 난국 대학,저 대학생 총궐기대회를 준비를 했으면 좋은데 너 의사가 어떠냐?내가 타진을 해 봤다고요.그랬더니 자기가 학생회장단들하고 의논을 해보겠다 이거예요.그래 의논을 해봐라.그랬더 니 건의 해가지고 제목도 그렇게 정했다고요.난국타개. 면담자 :난국타개총궐기대회. 구술자 :또 그렇게 하자고 했다 이거야.그래서 내가 그럼 잘 됐다.그래서 그 사람들을 고대에서 전부 초청을 하자.그래 가지고 인제 고대에 학생 총학생회장들을 다 집결을 시켰어요 이제 고대에다가.그 게 그게 인제 일요일 날인데,일요일,일요일 날 다 집결을 시켜 놓은 거예요.시켜 놓고 인제 거기서 인제 이 선언문 행동강령 결의문 뭐 이런 걸 해는 거예요.그래 가지고 누가 인제 한사람 해오고 하고 해서 인제 내가 나도 인제 행동강령 뭐 이런 걸 내가 썼다구요.준비를 했어요 인제 우리 사람들을 시 켜가지고.그래 가지고 그걸 인제 대우,아이 참 고대,고대에서 싹 모여 가지고 그 준비를 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인제 어떻게 됐냐 하면 마지막에 일주일 유예가 유예기간을 둔 거예요.그게 왜 그랬냐 면은 너무 일방적으로 하니까 분위기도 좀 고조를 시켜야 되겠고,또 정부에서도 어떻게 나오는가도 보자.그래 가지고 일주일 유예기간을 두고 그거를 준비를 했어요.했는데,했는데 이거를 인제 갑자기 월요일 날 아마 내가 기억으로 월요일 날이예요.이거를 전국 대학생 34대학이 몽땅 들고 나와서 이거 할려면 홍보가 안 되잖아요.그렇잖아요. 면담자 :그렇죠.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신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술자 :그렇지.그래 가지고 그걸 누가 갔냐면 연대 저 총학생회장 저 안성혁이하고. 면담자 :안성혁. 구술자 :정정길이 지금 비서실장. 면담자 :네.정정길.

12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17) 구술자 :그 친구하고 나하고 셋이서 한국일보에 가 가지고 한국일보 그 편집국장님께 뭐라 그랬냐 하면 이거를 일요일 날 저 헬리콥타로 전부 서울시내에다가 이 삐라를 좀 뿌려 달라. 면담자 :뿌려달라. 구술자 :그랬어요.아 그런데 실제로 뿌려줬어요.거기서.그러믄요.우리가 전부 삐라를 해 줘야지.우리 가 지금 연락이 잘 안되니까 좀 해 달라 그렇게 요청을 했어요.인제 거기다가.그러고 일주일이 그리 고 나서 고대는 일부 데모를 하자 말자 했는데.그건 안 된다 약속대로 하자 그래 가지고 5월 25일 날 은 정상적으로 진행이 된 거예요.인제.그래 인제 내가 예를 들자면 내가 선언문을 읽었고,그다음에 이경우가 뭐 기조선언문을 하나 더 읽고.그리고 그리고 인제 총학생회 김중석이가 이제 저 사회를 보 고 그래 가지고 하고 일주일 기간,기한을 뒀던 거예요.그게 이제 됐는데. 면담자 :그러니까 저기 질문지에는 보면 원래 독자적으로 할려고 했다가 취소돼서 이게 다 같이 한 거 라고 얘기를 들었는데. 구술자 :그렇죠.그것도 사실인 게.나는 그 현 총장하고도 그렇고 여러,여러 우리가 연계되는 다른 대 하고는 그냥 저 결정적이게 딱하면 결정적인 데모를 한 번 하자 이랬어요.요지는 박정권하야 데모를 하자는 그런 요지에 이야기로 해서 이제 각 대학을 연락을 쭉 했는데 그런데 총학생회를 이용하는 게 훨씬 쉽다구요.그렇잖아요?그런데 총학생회서 마침 구자신이가 말을 들어 준 거예요 우리 얘기를.우 리 이렇게 이렇게 하자.그래서 여러 각 대학이 들고 나와 가지고 총학생회장으로 해서 일주일 유예를, 기간을 두고 그날 성토대회를 5월 25일 날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거예요. 면담자 :그렇군요. 구술자 :인제 각 대학에 쭉 열린 거예요. 면담자 :그럼 여기 질문지를 이제 기본적으로는 신동호 경향일보 경향신문 신동호기자님이 만드신 걸 제가 수정한 건데.제가 요 앞서 질문 드렸던 520,5월 20일 그 장례식 시위 때 그 직접적으로 참여하 지 않으셨잖아요?그런데 고려대나 선생님께서는 그때 그런 게 좀 실패한 게 아니냐라고 평가를? 구술자 :아 그런 일은 없어요.우리가 실패했다 뭐 했다 한 일은 없고,서울,우리 고대 진영에서 회색분 자들이 이걸 막 비판한 거예요. 면담자 :비판하자. 구술자 :그런데 내가 막았죠 오히려.그 무슨 소리냐고 고거는 좀 잘 못 된 거예요. 면담자 :잘 못 된 거다. 구술자 :우선,실패다 뭐다 이런 얘기는 나온 일이 없고.그거에 민족적민주주의 연장선에서 5월 25일 난국타개 데모가 있었고,성토대회가 있었고.그리고 일주일 유예를 줬는데,그런데 6월 1일이 월요일 인가 돼요.6월 화요일이 우리가 6월 2일 날 그걸 하는데,그런데 그 다음날 일주일이 됐는데 총학생회 장들은 전부 인제. 면담자 :연합하기로 했었던. 구술자 :그런데 움직일 생각이 없고 움직일 수 없고 그리고 들리는 소리는 전부 회유한다 이거야 총학 생회장들을. 면담자 :하지 못하게?

124 11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정부에서.전부 회유를 당해 가지고 안 된다.이렇게 된 거예요.그래 가지고 판단이 그렇게 된 거예요.총학생회.이건 각 대학에서 안 된다.그 결론이 나 가지고 그러면 우리가 먼저 치고 가자.우 리가 치고 나가면은 아 이미 약속도 있으니까 유예 약속도 있으니까 우리가 치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 그래 사실 고대로 한 거예요.우리가.일주일이 됐고 일주일이 됐고 각 대학별로 움직이는 총학생회장 이 안 움직일려고 허고 있고.그런데 저쪽이든 이쪽이든 이건 한번 해야겠다.그래 가지고 들고 나온 게 6월 2일. 면담자 :6월 2일. 구술자 :6월 2일 날 고대에서 박정권 하야하라고 정식으로 딱 들고 나오면서 정국이 인제 소용돌이 치 고 인제 계엄령이. 면담자 :발효되고. 구술자 :발효되고 그래 된 거예요. 면담자 :아 그렇군요.고 전에 일주일 유예기간이 있었고 6월 2일 데모가 있기 전에 고려대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그 민족적민주주의 부활식을 뭐 5월 23일에 할려고 뭐 시도를 했었다는 설도 있는데. 구술자 :그런데,그런데 그 따지고 보면 있었어요.글쎄. 면담자 :다 같은 마음이 아니네요? 구술자 :아니지.그런데 일부에서 그 사람들은 우리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민족적민주주의 부활식을 하자는 또 살리자는. 면담자 :죽이지도 않았는데 또 뭐를. 구술자 :근데 그게 아니 지금 이 데모 주도하는 사람들 뜻하고는 전혀 안 맞는 건데.그래서 그거는 뭐 문제가 안 됐어요.전혀.그래서 무슨 실패다 뭐다 이런 얘기는 아니고.그게 내가 보는 연장선상에서 그게 된 거예요 결국은. 면담자 :좀 정리를 하면 그 민족적민족주의,민주주의 장례식은 서울대 문리대가 좀 중심이 돼서 이렇게 주도가 됐다면 이 난국타개 학생 총궐기대회는 이제 고대가 중심이 돼서 대학연합을 이렇게 고대가 구 심점에 있고 각 대학 총학생가 연대해서. 구술자 :꼭 그런 것만이 아니에요. 면담자 :아.그건 아니구요.발의를 하기는. 구술자 :그렇지.발의를 우리가 하고 우리가 그런 모임으로 난국 그걸 주도를 했지만 각 대학교에서는 독자적으로. 면담자 :추진을. 구술자 :같이 하자 같이,같이.그래서 5월 25일 날도 알다시피 아까 얘기했던 정정길이다 안성혁이다 둘 다 총학생회장이라고 저 거기에서.근데 고대는 알다시피 좀 미묘했다고 구자신이하고 나하고 관계 가.옛날부터 좀 미묘한 입장이라 구자신이가 그런 데모에는 끼어들기가 좀 어려운 입장에 있었어.구 자신이 표현대로 한다면은 저는 하다보니까 나하고 라이발이 됐는데 저는 재벌,재벌집.구씨니까 재벌 가고.나는 아버지 때문에 야당가다 이거야 야당.우리 아버지가 야당을 하셨으니까.허허허.그런 얘기 들을 아니 인제 하더래요 누가.우리 이렇게 하더라고,그 얘기를 하더라고,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12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19) 면담자 :거의 50분 정도 됐죠?지금 이제 6.2데모 까지를 했는데 이제 그 다음에 제가 질문드릴 내용이 인제 6.3데모 6.3항쟁 본격적인 그 얘기를 시작을 해야 될 것 같은데,지금 벌써 이제 아까 60분 지금 거의 50분 2시간 가까이 말씀을 나누셔서 말씀해 주셔서 오늘은 좀 더 진행하는 게. 구술자 :네.못해요. 면담자 :네.힘드실 것 같아서. 구술자 :오늘도 내가 지금 내가 잘 몰라요.내가 말이 지금 정상적으로 됐는지 안 됐는지 몰라,몰라. 면담자 :말씀 굉장히 잘 하시구요.제가 인제 책에서 읽었던 거라 뭐 이렇게 그 거기에 이제 나타나지 않은 어휴,정말 이랬을까 제가 의심을 했던 부분에 대해 굉장히 속 시원하게 되게 말씀 잘 해 주셨구 요.건강이 좀 안 좋으시다는 말씀을 들어서 제가 더 길게 말씀을 여쭙기는 좀 어렵고 한 번 더 만나 주실 거죠? 구술자 :네.그럼요. 면담자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좀 말씀해 주신거구요.제가 또 돌아가서 좀 정리를 하고 선생님도 이 렇게 좀 말씀을 하신 걸 이렇게 좀 정리를 하시면 또 다음에 더 재밌는 얘기를 또 많이 기억해서 해 주실 것 같구요.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할께요.뭐 다른 더 하실,오늘 면담한 것에 대해서. 구술자 :없어요.없어. 면담자 :너무 감사드리고요. 구술자 :무슨 말씀을요. 면담자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구술자 :그렇게 하세요. 면담자 :감사합니다.

126 12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면담후기 구술자는 서두에는 말을 잘 못하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자 자세하게 구 술을 해주었다.사전에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어 오랜시간 구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란 예상을 했지만,1차에 2시간 정도의 구술을 무난히 소화해주었다.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간투사 등이 적었고,오래전 일이지만 비교적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어 풍부 한 구술을 받을 수 있었다. 면담자는 정치학이나 근현대사를 전공한 연구자는 아니고,구술사 및 기록학을 전공하여 해 당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이 없었다.하지만 사전에 읽은 2권의 저서는 많은 도움이 됐고,연구 논문 등에서 제시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부분도 확인할 수 있었다.촬영에 있어서는 장소 가 협소하여 구술자의 정면을 찍지 못하고,옆면만을 찍어야 했다.2차 면담시에는 이러한 점 을 보완하여 촬영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2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21)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 3항쟁 주요 사건 구 술 자 박정훈 면 담 자 권미현 면담일자 (수) 면담장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면담차수 2차

128 12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박 정 훈 (한 자 : 朴 正 勳 ) 면담자 성 명 : 권 미 현 (소 속 :국가기록원 특수기록관리과) 촬영자 성 명 : 엄 경 식 (소 속 :현대사기록연구원) 녹취자 성 명 : 엄 경 식 (소 속 :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및 장소 1차 (수)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2차 3차 산출물 녹화테이프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2개 1부 1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차에 걸친 면담 이후 다시 만난터라 처음의 어려움 이나 어색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어 있었음.면담자가 약속시 면담상황 설명 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였으나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음.2차 면담시에는 본격적으로 6 3시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눔.후 반부에서는 구술자의 국회의원 시절에 대한 내용이 많이 구 술됨. 비고

12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23)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 박 정 훈 (한자) 朴 正 勳 나이 67세 자택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470하이팰리스아파트 403호 주소 생년 월일 직장 : 출생지 결혼연도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가족 1961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5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학력 1967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수료 1990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99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감사 ~1992년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상무이사 년 제14대 국회의원(민주,전국) 년 민주당 원내부총무 주요 약력 년 IPU 환경개발회의 한국대표 년 APPU 부의장 ~2000년 제15대 국회의원(국민회의,전북 임실 순창) 년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위원회 위원 ~1998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 ~2000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간사

130 12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난국타개총학생궐기대회,6 2시위,6 3시위,계엄령,재판,왕좌다방사건,군 입대,국회의원,유신반대 상세목록 Tape 시위 준비과정(구호 및 선언문 작성 등)(00:00~06:30) 2.6 2시위 이후 도피,6 3시위장에 깜짝 등장 등(06:31~16:50) 3.6 3시위 이후 계엄령,도피,재판관련 (16:51~24:45) 4.시위 주모자로 학교에서 징계(24:46~28:10) 5.4월 대학생데모준비,왕좌다방 사건(28:11~32:45) 6.군대입대(32:46~43:01) 7.시위에 대한 평가 및 인생에 미친 영향(43:01~58:52) Tape2. 8.전체적으로 6 3시위가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 구술(00:00~29:25) 9.학생운동 이후 유신반대 및 국회의원 시절,투옥된 것 등에 대해 구술 (29:26~끝)

13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25) 5)예비질문지 박정훈 선생님. 6.3항쟁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1.선생님께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으며,이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입 니까? -경기고 시절에 대한 내용/집안 분위기/6 6데모 등 2.선생님께서는 1964년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장으로서 3.24시위를 주도하셨습니다.3.24시위에 직간접적 으로 참여한 고려대 학내외 공조직과 사조직은 무엇이었습니까? 3.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이 조직과 정경대 학생회 또는 선생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체육부,민정회,민사회,석우회,의활단 등 4.흔히 얘기되는 소위 박정훈 사단 은 어떤 성격의 세력이었고,그 구성원은 누구였습니까? (보충질문1:소위 박정훈 사단 은 어떤 성격의 세력이었습니까?) (보충질문2:구성원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5.당시 정국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은 어떠했으며,선생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점 또는 다른 점은 무엇이 었습니까? 시위와 관련해 최장집(현 고려대 교수)이 서울 문리대와 연락관계를 맡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관여한 것입니까?아니면 그러한 연합시위 계획을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까? (보충질문1:3개 대학 연대시위를 결정한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132 12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시위 준비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그들이 한 역할을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보충질문1:김중태,현승일,김도현 등 서울 문리대팀과 사전에 만날 일이 있었습니까?있었다면 어떤 논의를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1:총학생회장 구자신,법대 학생회장 이경우,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등 총단과 단대 대표들과 는 어떤 식으로 소통을 했습니까?) (보충질문1:교양과정부 학생회장 정성헌과는 3.24때부터 소통했습니까?) 시위 준비과정에서 우역곡절은 없었나요? (보충질문1:고려대가 3월 13일 단독으로 시위하기로 한 까닭과 그 계획이 불발된 내막을 말씀해 주십 시오.) (보충질문1:서울 문리대에서 정보 누설로 인해 3월 17일 결행을 24일로 연기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9.3월 24일 당일 집회 과정에서도 우역곡절이 있었지요?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교생의 집결 상황 및 준비 사정과 이를 말리는 학교 당국의 저지로 오후 2시 30분부터 시위에 돌 입했다.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의 연설과 법학과 신광옥의 호소문 낭독과 이어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했다.-6.3동지회,6.3학생운동사) 시위 다음날 정부가 사태 수습을 위해 서울시내 36개 대학 학생대표 92명을 초청했는데,3.24이 후 학생대표로서 정부 관계자나 박정희 의장을 만난적이 있습니까? 집회가 시위로 번져 가두진출 했을 때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성토대회와 3.26시위 등 3.24이후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이후 명동 학사주점 사건과 괴소포 사건 등 선생님 주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먼 저 명동 학사주점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2.선생님과 서진영에게 괴소포도 배달되었지요?

13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27) (보충질문1:당시 고려대에 일어난 학원사찰과 관련한 일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3.당시 체육부가 고려대 데모에 상당히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선생님께서는 이들 방해세력 을 어떻게 극복했으며,또 일부를 학생운동에 끌어들였는지요. (보충질문1:체육부장 문영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4.서울문리대에서 4월 23일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개최했습니다.당시 YTP나 이와 관련한 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3>5.20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1.서울문리대에서 황소식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을 서울시내 대학 연합으로 연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습 니까? (보충질문1:김중태,현승일,김도현,안성혁 등과 소통이 있었습니까?) 시위와 관련해 서울문리대와 접촉한 창구는 어떤 조직이며 책임자는 누구였습니까? (보충질문2:선생님께서는 5.20시위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고려대는 민사회를 주축으로 일부 민정회 회원이 참여하였다.이 대회에서 민사회의 박경구(문리대) 가 민생고를 성토하여.민사회 최장집,김병길,민정회의 박철현 등이 각 대학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였 다.-6.3동지회,6.3학생운동사) 3.고려대 학생지도부와 선생님께서 5.20시위를 실패 로 평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4>5.25난국타개궐기대회와 6.2데모,6.3사태 1.한국학생총연합회(한학련)가 언제 결성되었고,어떤 학교,어떤 사람이 참석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보충질문1:서울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과 이때부터 소통이 있었습니까?)

134 12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보충질문2:5월 초에 선생님의 주도로 조직한 구국항쟁전국대학생연맹은 한학련의 활발한 모임으로 자 연스럽게 조직이 해소된 겁니까?) 난국타개궐기대회의 모의가 구체화된 것은 5월 22일 종로 여왕봉다방(?)에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습니다(신동호,오늘의 한국정치와 6 3세대),이 모임에 참석하셨습니까? (보충질문1:학생회 중심으로 연대해 궐기대회를 가지려는 구상은 원래 어디서,어떻게 제기되었습니 까?) (보충질문2:김중태 등 서울문리대 중심의 투위와는 어떤 관계였고,투위를 어떤 시각으로 보았습니 까?) 3.당시 고려대는 5월 22일,23일 독자적으로 거사할 계획이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최종적으로 5월 24일 고려대에서 22개 대학 대표들이 회합해 5.25궐기대회의 계획을 점검했는데,난국 타개학생총궐기대회라는 대회 명칭도 이때 선생님의 제안으로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그 과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5.5월 25일 집회 후 곧바로 시위에 돌입하지 않고 1주일 유예기간 을 선언한 후 해산했습니다.그 까닭 이 무엇이며,그 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이날 12시 고려대 운동장에는 1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궐기대회가 열렸다.김중석(총학생회 교도부 장,한학련 대변인)이 개회사,박정훈이 선언문,이경우(법대 학생회장)가 기조선언문을 각각 낭독했다. 그러나 고려대는 1시 5분쯤 대회를 마치고 그들이 주장이 관철될 전기가 마련될 것인지 두고보기 위해 이날은 데모를 하지 않기로 하고 해산해 버렸다.-신동호,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보충질문1:당시 대정부 투쟁에 대한 각 학교 대표단의 입장 차이가 있었지요?) (보충질문2:고려대 일부 학생 세력이 5월 23일 민족적민주주의 부활식을 기도했다는데,거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6.1주일 유예기간이 지난 6월 1일 저녁 법학회실에서 6.2데모에 대한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이 모임이 있기 까지 그 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13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29) 7.3년 전에 성북경찰서에서 고려대박물관에 기증한 고려대 6.3데모 조직도를 담은 고대데모사건개요 라 는 문서가 공개된 적 있습니다.조직도를 보면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이재하이고 이경우,박정훈, 이명박이 부위원장으로 되어 있습니다.이 조직도는 그동안 알려진 내용(신동호,오늘의 한국정치와 6.3 세대 118쪽)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보충질문1:그렇게 진용이 짜여진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2: 박정희 하야 라는 강경주장을 복학생 이기명이 제기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보충질문3: 주관적 애국충정은 객관적 망국행위임을 직시하고 박정권은 하야하라 는 구호가 최장집의 작품이라는데 맞습니까?) (보충질문4:당시 서울문리대 단식캠프와 소통이 있었습니까?) (보충질문5:대부분의 학교가 6월 3일 일제히 가두시위에 돌입했습니다.이는 사전에 약속된 바가 있었 던 것인가요?고려대는 왜 그 하루 전에 올인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까?) (보충질문6:6월 1일 결사 때 비밀을 지키기로 각자 서약서를 썼고,그걸 이명박이 보관하기로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8.6.2데모 당일의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1:그날 저녁 8시 법학회실 대책모임에 왜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9.6.3데모에는 왜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보충질문1:6.3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언제 알았고,그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5>한일회담 비준반대 시위 1.6.3계엄령 후 체포되지 않으셨지요?어떻게 도피생활을 했고,그 뒤 졸업은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보충질문1: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동료들의 소식은 어떻게 들었으며,그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보충질문2:6.3사태와 관련해 사후에 따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나요?) 년 4월 12일 이른바 왕좌다방 사건 에 연루되어 경찰에 연행되었지요?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 씀해 주십시오.

136 13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보충질문1:1965년 졸업한 뒤에도 학생운동에 관여한 이유가 뭡니까?) (보충질문2:1965년 후배들의 조인반대,비준반대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충질문3:6.3학생운동이 선생님의 인생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어떠한 후회 는 없으십니까?) 3.지금까지 제가 질문한 것 외에 추가로 더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거나,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 으시면 해 주십시오.

13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31) 6)녹취문 박정훈 선생님. Tape1. 면담자 :오늘 2008년 12월 3일이구요.6.3항쟁 주요사건에 대한 구술증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제 고려대 박정훈 선생님을 지난 11월 27일에 1차로 만나 뵜었구요.오늘 2차를 면담을 진 행하겠습니다.저는 면담자 국가기록원 기록연구사 권미현입니다. 면담자 :음.선생님께서 지난번에 이제 그 3.24시위 배경부터 시작해 가지고 6.2,6.3고 시위 전까지 아 주 자세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요.정말 저도 재미있게 들었었고,말씀 뭐 기억 안나신다 그러시면 서 되게 세세하게 말씀 잘 주셔 가지고 저희한테 참 많은 도움이 됐었습니다.그래서 오늘은 이제 지 난번에 이어서 그 6.3이제 시위가 시작된 그 무렵에 대해서부터 이제 시작해서 말씀을 나눌 텐데요. 음.제 질문지에 있는 내용을 보면 이제 3년 전에 이게 성북 경찰서에다,경찰서에서 고대박물관에다가 뭐 기증한 그런 조직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구술자 :예.맞습니다. 면담자 :그 조직도에 뭐 고대데모사건개요라는 문서라는 게 있다던데요.그 조직도에 그려진 그 그림을 보면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이재하선생님이시고. 구술자 :김재하예요. 면담자 :아.여기 잘못돼 있네요.김재하선생님이시고 거기에 이제 박정훈선생님이나 그 이경우선생님이 나 이명박 지금 현 대통령 이런 분들이 부위원장으로 되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이 조직도는 그동안 이제 사람들에 이제 증언이나 이런 기억으로만 알려져 있던 조직도와 거의 일치를 해 가지고 뭐 그랬 다고 그러던데,이제 이렇게 진용이 짜여진 그런 과정이나 배경이나 이런 거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세 요? 구술자 :지난번에 내 얘기했지만 각 대학에서 5월 25일 날 난국타개대학생총궐기대회,그거를 일주일 유 예 시간을 두고 했는데 그게 성숙이 안 됐어요.전혀!각 대학에 동요가 없었어요 별로.그래 가지고 저는 이것도 약속이지만 또 각 대학교에 가까운 친구들한테도 결정적인 데모를 한 번 하자.근데 그게 박정권 하야다.이게 내심으로 그렇게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그러다가 6월 2일 2일 날 동 태를 보니까 각 대학에 데모를 할 것 같지 않아요.그래서 그날 저녁에 고대에서 우리가 먼저 치고 나 가자 그러면은 각 대학이 따라올 거다.이래 가지고 그날 저녁에 인제 고대 법대 학생회실에서 전부 집결을 했어요.그게 인제 데모 주동자들 몇 명이 다 들어간 거예요 인제.그런데 그날 저녁에 인제 모 여 가지고 얘기를 하다가 이제 결국은 그 이명박이가 했다고 그러는데 좌우간 구국투쟁위원회라는 명 칭을 달았어요.그러고 나서, 자 그러면 위원장은 누가 할 거냐?구국투쟁위원장은 누가 할 거냐? 그

138 13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러니까 자연스럽게 인제 박아무개로 결정이 나 버린 거예요.그래 전부 박정훈이가 해야 된다,이렇게 됐는데,나는 나는 생각에 법대 학생회장도 있고 상과대학 학생회장도 있고 그러고 또 나는 총학생회 에서 나고,그 전에 학생회장선거도 치르고 그리고 라이벌 관계도 좀 있었어요.그래서 이건 내가 위원 장 하는 게 아니다고 싶은 거예요 제가.그래서 전부 아 그럼 박정훈이가 해야 된다,이렇게 공론이 됐 는데 본인인 내가 이렇게 하지 말고 내가 안을 내놓겠다.그래 가지고 그 중에서 김재하라는 분은 복 학생 선배고 데모에 한번도 참여를 안 했는데,이 양반이 알다시피 법대 선배신데 인물이 좋으세요.그 리고 똑똑해요.아주,아주 똑똑하고 인물도 좋고 이래 가지고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시키고 그리고 부 위원장으로 나도 맡고 셋이 동시에 맡자.이러니까 자연스럽게 이 문제가 해결이 나버린 거예요.그래 서 해 놓고 나는 그 대신 이거는 하자 그래 가지고 기획부서 기획위원장이예요 따지고 보면은.그거를 최장집이를 시키고,그 다음에 조직책임자를 손옥백 카스트로를 시키고 그리고 김덕규를 홍보위원장을 이렇게 선발을 하는데 그 지명을 내가 했다고요.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정외과고 또 박정 훈사단예요.핵심들이예요.그래가지고 그날 성북서에 조직 도표에도 나오지만 이 사람,.세 사람이 핵 심을 이루는 거예요.그러니까 위원장,부위원장 그 다음에 최장집,손옥백,카스,아니 저 김덕규 이렇 게 하고 그 밑에 부위원장이나 부 책임자 그거는 내가 관여를 안 했어요.여기서 선발을 해 달라.그래 가지고 그 중에 인제 김남흥씨도 들어가고 몇 사람이 이렇게 들어가 가지고 조직을 완전히 정비를 했 어요.그게 6월 1일 날 저녁에 모의한 그날 그 회합에서 결론이 난 얘기고.그리고 그날 저녁에,그날 저녁에 다는 안 갔지만 대부분이 우리 집에 그날 간 거예요.우리 집이 그 어디냐 하면 멀었어요.청파 동에 있었거든,청파동. 면담자 :청파동. 구술자 :고대에서 갈려면 상당히 멀어요.그런데 야 내일 아침에 이걸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저녁에 준비 를 해야 될 거 아니야?플랭카드도 쓰고 선언문도 이거 준비를 하고 다 써야 하니까 아예 우리 집을 가자.그래 가지고 한 열 명 정도가 우리 집을 데려 간 거예요.가서 인제 그날 완전히 준비를 해 가지 고 그 이튿날 나가가지고 그게 인제 오전 시간에,오전 시간에 6월 2일 날 하는데.제일 이렇게 문제는 그날 이렇게 된 거예요.이 구호를 뭘로 하느냐? 면담자 :아 구호? 구술자 :어 구호를,슬로간을 뭘로 하느냐 이렇게 됐는데.그 김재하 하고 같이 온 사람이 이기명이란 분이 법대에 있는데,이 선배가 그 얘기를 한 거예요.[주관적인 애국충정이 객관적인 망국행위임을 직 시하고 박정권 하야 하라]이 구호가 어쩌냐 이렇게 핸 거예요.그런데 우리는,우리는 어차피 마음을 결심이 됐으니까 선뜻 받아들인 거예요.자 그렇게 하자!어 그래 가지고 이기명이가 내 놓은 구호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최장집 교수가 인제 선언문을 쓰고. 면담자 :아~그러면은 책 같은 데 보면 이 구호를 최장집 교수가 쓴 거라고 그러는데,처음 아이디어는 구술자 :아이디어는 이기명씨가. 면담자 :이기명 선생님이 내고. 구술자 :슬로건을 내 놓고 그 선언문을 그거를 인제 최장집이가 전부 선언문을 쓰고 그렇게 해서 된 거 예요.

13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33) 카메라 조작으로 잠시 중단(06:03-06:30) - 면담자 :그래서 집에서 모이셔 가지고. 구술자 :그래 가지고 하는데,우리가 제일 염려스러운 게 다른 건 괜찮은데,체육부 특히 문영배 체육부 장을 중심으로 방해 책동이 있으면은 낭패 되잖아요.그래 가지고 엄청 신경을 썼어요.그거를.그래 가지고 집에서 만들어 온 팻말을 만들어 가지고 YTP색출엄단 막 이런 소리를 했어.YTP는 다 색출해 내라.그건 뭐냐면은 상징적인 얘기죠.너희들 까불지 말아라 이거지.그러면 우리가 이걸 몽둥이를 가 지고도 대항할 수 있다.이래서 인제 그걸 만들어 가지고,그래 가지고 6월 2일 날 데모를 시작을 하는 데 어 진짜로 사람이 학생이 운집을 했는데 거기 문영배 선배가 딱 나타나 가지고 이 학생회 저 운동 부 사람들이 한 열 명 정도가 딱 모여가지고 한쪽에서 모여서 뭐 온 거,깜짝 놀란 거예요.이 사람들 이 정보가 없었으니까.그렇잖아요?우리 집에 준비해서 나갔으니까. 면담자 :할 거라는 예상을 못하고. 구술자 :전혀 못하고.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모여 있는데 불안하더라고요.그래서 내가 먼저 선동연설을 하고 그리고 튀어 나가서 한 열 명들 모여 있는데 거길 뛰어 들어간 거예요.가서 아이 문선배 오래간 만이라고 그러고 악수하면서 오늘 다 참여하쇼.(연설,악수 등의 표현을 직접 하시면서)그랬죠.참여하 라고.그러니까 멍하니 인제 멍하니 인제 보고 있는 거예요.거기서 뭐라 그럴 거예요?근데 학생들은 막 몰려오고.그래 가지고 6월 2일이 성공적으로 데모가 됐는데.아시다시피 그때는 이 차단을 핸 거예 요.경찰병력이. 면담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구술자 :그래 가지고 신설동 일대에서 그냥,나도 조홍규 표현을 들으면은 내가 이만한 몽둥이를 가지고 막 이러면서 지휘를 하더래요.(몽둥이를 휘두르는 표현을 하시면서)자기 눈에 선하다 이거예요.홍규 얘기는.그래 가지고는 그래 가지고 그냥 가서 학생들이 막 깨진 거예요.인제.경찰하고 막 부딪히기 도 하고,그래 가지고 시내에 나오지도 못하고 풍비박산이 됐어요.그런데 내가 지금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아주 얌전한 우리 후배가 와 가지고 저한테 항의를 하더라구요. 면담자 :무슨? 구술자 :선배님 이게,이게 무슨 꼴이냐 이거냐.왜 이런 데모가 와중에 다 학생들을 잡아 놓고,이렇게 적대적으로 싸우고 말이지 이러면 됐겠느냐고 나한테 항의를 하는데 찔금하더라구요.내가.상당히 그 양심에 좀 찔리는 게 있어요.그렇잖아요.그래 가지고 6월 2일 날 인제 데모를 마쳤어요 그날은.마치 고. 면담자 :그날 큰 사건은 없이. 구술자 :그런데 손옥백이랑 일부는. 면담자 :연행되어 가고. 구술자 :연행돼 가고 연행돼 가고.그러고 주동자만 수배를 하는 거지.다 잡아갈 수는 없는 거고.그래 서 손옥백이는 현장에서 체포가 되고.그 다음에 이제 사람들이 이렇게 옥신각신 이렇게 그날을 했어

140 13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요.하고,이제 나는 김덕규하고 둘이 몸을 어디 가서 몸을 감추고 사태를 봤지요.그런데 그날 저녁에 다시 이경우 이명박이 중심으로 그날 저녁에 모의를 또 했더라구요.하고 6월 3일 데모가 또 진행되는 데 나는 가서 집엘 못 들어가고 어디서 잠을 자고,덕규하고 이제 아침에 눈을 떠 가지고 집에 전화를 했더니 새벽 5시에 잡으러 왔더라 이거예요.6월 3일 전에 저 아침에. 면담자 :6월 3일 새벽에 그죠? 구술자 :잡으러 왔더라 이거죠.그래서 인제 있는데.안 잡혀 가고 있는데,그날 그러니까 아주 초조하게 라디오방송을 경청을 핸 거예요.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이거야.그러니까 우리 의도대로 대학생들 이 대거 진출을 하면은 우리가 성공했다고 보고 만일에 유야무야 해버리면 이게 우리만 말이지 이 소 수파가 돼 가지고.그래 가지고 엄청시리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아니나 다를까 아침 10,11시 되니까 대학생이 전국적으로 인제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그런데 심지어는 수원 수원 농대에서도 서울, 서울까지 차편으로 데모한다고 오고.그것도 또 인제 방송에 나온 거예요.그리고 쭈욱 해가지고 데모 가 저 이 국회의사당,시청 앞 일원에 쫘악 이제 데모가 나온 거예요.그러니까 어저께하고는 다르지. 6월 2일하고.그건 고대만 차단했는데,이건 이제 각 대학하고 고등학생까지 튀어 나오니까 이거 어떻 게 할 수가 없잖아요?그래서 인제 오후 2시쯤 돼가지고 김덕규하고 저하고 현장을 다시 뛰어 들어간 거예요.국회의사당 앞에.그랬더니 모다 고대생들만 있고 다른 각 대학생들이 쭉 있더라구요.근데 그 날 비가 엄청 왔어요,비가. 면담자 :비가? 구술자 :비가 와 가지고 데모.저 운집한 다중이 못 모이고 비가 막 쏟아지고 핸 거예요.그래 그런 가 운데 아시다시피 뭐 무기고,무기고를 탈취를 했네 뭘 했네 그러고 청와대 저지선을 돌파를 하네 뭐네 하고 하다가 했는데.그때 또 저는 거기서 인제 학생들이 다시 지휘봉을 잡아라 이거예요 저한테. 면담자 :선생님한테요? 구술자 :네~네.그래서 할려고 하는데,그때 성북 경찰서에 정보계장이 있어요.정보계장이라고 키가 짤 땅만하고 했는데 우리하고 평소에 좀 가까워요.그런데 이 사람이 와 가지고 꼭 누구를,총학생회는 저 홍모 부장을 이름을 대는 거예요.저쪽에서 당신을 좀 만나자고 그러는데 좀 가봐라 이거예요 거 뒤에. 그런데 수상하지 우리는 그렇잖아 아,정보과 정보계장이 왜 그걸 할 일이 있어.그런데 또 와 가지고 저쪽에서 홍 아무개가 기다리고 있는데 좀 만나라고 만나라고,만나자고.근데 그거를 낚아채 갈려고 준비를 하는데,내가 그렇게 그런 정도는 속지를 안잖아요.않지요.(그때 생각이 나시는 듯 미소를 지으 시면서) 면담자 :그렇죠. 구술자 :그래 가지고는 알았다고 그러고는 청중 속에 뛰어 들어가 버린 거죠.인제.몸을 또 인제 숨었 죠.인제 청중 속에.그러다가 저녁때가 되니까 바로 계엄령 선포가 딱 나버린 거예요. 면담자 :네.계엄령. 구술자 :그러니까 우리는 인제 전부 삼십육계.그게 돼 버린 거예요. 면담자 :그럼 이때 그 아까 전에 이제 6.36월 3일 날 일제히 다 가두시위를 했는데 고대는 전날 하셨잖 아요.그거는 뭐 다 같이 하기로 했는데 별로 움직임이 없어서 먼저.

14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35) 구술자 :그래서 했죠. 면담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고,그런 걸 이렇게 모의라고 하면 그렇지만 그런 걸 막 회의를 하실 때가 6월 1일이잖아요.그때 막 이 다 비밀을 지키자고 무슨 서약서 같은 걸 쓰셔 가지고 그 서 약서를 이명박 지금 대통령이 갖고 있다라는 그런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구술자 :근데 그거는 나는 확인한 사실은 없고,내가.하고 서약서를 썼는지 안 썼는지는 잘 기억이 없 어요.예 다만,다만 우리 집에 몰려 갈 때나 뭐냐면 오늘까지는 비밀을 지켜 달라.이건 얘기 할 수밖 에 없는 게.방해 세력 때문이라니까요.방해 세력이.근데 거기에 체육부만 그런 게 아니고 그때는 정 보 활동이 활발할 때예요.그래 가지고 우리가 움직이는 학생 활동에 대해서 아시다시피 중앙정보부, 보안사,저 치안국,시경,성북서 이게 다 나오는 거예요.한군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그래서 이 비 밀을 유지할 필요성은 절대로 있었는데.그건 어떻게 썼는지 안 썼는지는 잘 기억이 제가 별로 없어요. 면담자 :그리고 서약서나 뭐 문서는 없더라도 어쨌든 이런 걸 이제 모의하는 걸 우리끼리만 알고 있고. 발설하지 말자는 뭐 합의는 구두로 다 하신 거네요? 구술자 :그렇죠.얘기로는 그랬죠. 면담자 :그 다음에 6.3때는 참석하지 않았다라는 이런 질문지가 만들어져 있는데,그러니까 처음부터 시 작부터 참여를 안 하신 거지 그 저기 중앙청 앞에 다 모였을 때는 거기에 나가신 거죠?그죠? 구술자 :나갔었어요.그날도. 면담자 :이제 오후에 계엄령이 내렸잖아요.그 계엄령이 딱 내린 걸 아시고 나서는 그 심정이 어떠셨나 요? 구술자 :아니 인제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또 다른데.나는 그때 첫 수배이자 처음 인제 수배령이 내린 거예요.소위 그때는 지명수배다 이래 가지고 수배가 된 거예요.일생을 살다 살다 살다 보면은 저는 그 후로도 징역도 여러 번 가고 수배도 여러 번 받아봤어요.그 이후로도 여러 번 받았는데,그때 인제 첫 번째 수배령이 내려가지고 그래 가지고 인제 그러니까 도피할 수밖에 없죠. 면담자 :그 계엄령이 내리면 이제 선생님도,선생님 개인적으로 이렇게 운신이 어려워 졌겠지만 그 대한 민국 사회 전체로 봤을 때도 되게 뭐라 그래야 되나?혼란스러운 상황이잖아요? 구술자 :그렇죠.우선 질서와 안정이 잘 안되고 그러고 아시다시피 계엄령 하에서는 그 뭐랄,질서나 이 런 권한이 전부 계엄사로 가니까 그러니까 이게 잘못하다가는 그때 우리가 들은 것은 친위 쿠데타가 날 가능성도 있었고 또 어떻게 보면은 박,박정희 대통령이나 박정권이 권력을 강화하는 저 효과도 가 질 수 가질 수 있었고.근데 이런 복합적인 이거를 우리 머리로 계산은 잘 안 나온다 이거죠.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를 잘 모른다 이거죠.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계엄령을 받았어요.받아 가지고 하는 데.그때 인제 또 이 얘기가 중에 하나 이제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하자면은.내가 수배를 했는데,제가 조동필 교수가 우리 학장이시고 제가 아주 존경하는 교수님이시죠.그 양반하고 이상하게 이상하게 내 가 1학년 때 입시 시험을 보러 갔는데 그 양반이 우리 선생을 하는 거예요.이 저 시험감독. 면담자 :시험감독. 구술자 :그때부터 친해졌어요.조동필 교수님하고.그러고는 인제 그 양반이 학장하고 내가 학생회장하 면서도 아주 가까웠다고요.그래 가지고 언제 전화를 핸 거예요.근데 그때 이미 도청이 될 때예요.6.3

142 13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때도. 면담자 :그때두요? 구술자 :그럼요.그래 가지고 조동필 학장님한테 아 선생님 저 별 일 없으십니까 그랬더니 어우 자네 잘 있나 아 잘 있습니다 그랬더니 몸 조심하라고 별일 없냐고 그리고 어떻게 지내냐고 그래서.아 여기,내가 그냥 거짓말로 그랬어.여기 청량리 어디에서 좀 몸을 피하고 있다고. 면담자 :청량리에 안 계셨는데? 구술자 :그렇지.나는 노량진에 숨어 있었는데,그랬더니 아니 그냥 청량리 일대를 다 뒤진 거예요 인제. 내가 그렇게.그래 가지고는 아무 연락이 없으니까 조동필 선생 집에를 경찰이 들이 닥친 거예요.아 그래 가지고 교수님 집을 가서 발칵 뒤집어 놓은 거예요 전부.그런데 뭐 내가 없잖아요?그랬더니 그 집에 식모,그때 요새는 파출부라고 그러는데 그때는 식모라고 그랬어요.식모를 데려간 거예요 경찰서 에.데려다가 아무개 본 일이 있냐 없냐 막 핸 거예요.그러니까 없으니까 이 양반이.그래 가지고 갔 다 도로 나오고.내 동생도 둘이나 경찰서에 잽혀가 가지고 저녁 늦게까지 그냥 조사를 받고 그랬는데 나중 얘기에,나중에 그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조동필 교수님이 우리 후배들 만나면은 그 얘기를 가 끔 하셨다고.내가 너네들 선배 중에 박아무개 그 사람 때문에 애 먹었다.우리 집에 와 가지고 전부 뒤지고 우리 집 식모를 다 경찰서에 잡혀.그런 얘기를 선생님이 재밌으라고 우리 후배들한테 해 주고 그랬었었어요.그래 가지고 나도 몰랐지.후배한테 들으니까 그런 얘기를 하더래요 선생님이.그래서 그때사 얘기를 들었지요 선생님.그래 가지고 쭈욱 하다가 그리고 인제 계엄령,저 해제가 되고 그러고 아시다시피 인제 6월 달,시간대 별로 인제 그 뭐야 그 주동자냐 아니냐 그걸 가려 가지고. 면담자 :아 시간대 별로? 구술자 :그럼.그럼.점차적으로,아니 시간대가 아니라 날짜에 맞춰가지고 그래 가지고 인제 빨리 석방 된 사람은 이제 구자신이도 보름 동안 있다가 나가고,그 문영배라는 사람도 잽혀 왔다가 나가고.그러 니까 이 사람들이 다 주동자 같이 보여 가지고 그래서 했는데 별로 죄가 없다고 그래 가지고.이 사람 들이 다 석방이 되고 그리고 쭈욱 가다가 아시다시피 9월 달쯤 해 가지고 이제 손옥백이 정도가 다 석 방되고 손옥백이,김병길이,김남흥이 이 친구들이 석방이 되고 그리고 맨 마지막에 10월 달에 이제 이 명박,이경우 이 사람들이 되고,그런데 그게 다 그 죄목이 내란음모죄가 된 거예요.내란죄가 됐어요. 면담자 :근데 내란이면 사형되지 않나요? 구술자 :아.허허허.그럴 수도 있는데,그때 인제 이런 얘기가 있었어요.일제 치하에서도 이게 소요죄 지.일제 치하에서도 이게 내란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었다.그래 가지고 인제 법정공방이 있었어요.변 호사들 간에.그래 가지고 그 고대 재판에 바로 우리 아버지하고 그때 박한상 의원이라고 있어요. 면담자 :박한상? 구술자 :유명한 저 국회의원도 몇 선 하시고 유명한 변호사신데 그 박한상 변호사님하고 우리 박세경 변호사하고 그 사건을 맡아서 처리를 핸 거예요.저 재판을.고대 재판을. 면담자 :이거는 좀.그러면 선생님은 언제 잡히신 거예요? 구술자 :그러니까 나는 안 잡혔죠. 면담자 :이때는 안 잡히신 거죠?나중에 그 후에 다른 사건 때문에.

14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37) 구술자 :그렇죠.그 뒤에죠.그리고 안 잡히고 나서,11월 초예요.11월 초.근데 아시다시피 문교부에서 는 아무리 출석률이 없더라도 3분의 2는 기본적으로 학교를 등교를 해야 저게 되는 거예요.저 그 이 졸업을 되는 거예요. 면담자 :졸업을.저희도 인제 4,4한 학기를 네 번 나눠가고 4분의 3분은 나와야지. 구술자 :그렇죠.그러니까 3분의 2는 해야 되는데,우리는 1학에 시험도 안 쳤고 그리고 2학기가 이제 다 돼 가는 거예요.9월 10월 11월에 들어와 가지고. 면담자 :기말고사 치셔야 되는데요? 구술자 :네.그런데 그때 학교에서 교무위원회가 열린 거예요.교무위원회는 인제 총장하고 학장들,학생 처장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자 이걸 어떡할 거냐?그래서 아시다시피 그때 신문에 난 거 있잖 아.몇 사람 만일 출두 안하면 제적 하겠다고 뭐 협박을 해 놓은 게 그게 있어요.그러니까 자연히 제 적이 됐지요.그것도 문교부장관하고 계엄사령,사령관이 공언을 했는데 그렇잖아요?그러니까 책임지 고 출두를 하라 아니면 제적 시키겠다.그러니까 학교에서 어쩔 수 없이 다 제적이 된 거예요.그러니 까 나하고 최장집하고 김재하하고 세 사람은 제적이 되고 이명박이 하고는 제적이 안 됐어요.출두가 된 거예요 어떤 형태로든.그래서 다른 사람은 그냥 학교가 복학이 됐는데 우리는 제적이 돼 있더라구 요.그런데 교무위원회에서 아이 이 사람들 자기 잘못이 아니라 사회,사회상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렇 게 됐는데 졸업을 시키는 게 어떠냐?이래 가지고 교무위원회에서 명령이,복학하는 명령이 떨어진 거 예요.그래서 1학기,1학기 점수를 받아야 할 거 아니에요.그러니까 교수들한테 쫓아다니면서 그러면 레포트를 내라 뭘 내라 해가지고 1학기 점수를 11월 달에 쫓아다니면서 받고.그리고 11월 말일이나 12월 초에는 또 2학기 가서 시험을 치고 그래서 무난히 졸업이 된 거예요 우리가. 면담자 :다행이시네요? 구술자 :네.그래서 우리 때 6.3,.그 다음에는 이제 조홍규 같은 경우는 제적이 돼 버렸는데 우리 때는 제적이 한 명도 없고 다 구제가 된 거예요. 면담자 :아.구제가 됐군요.그때 당시에는 이제 6월에 이런 일이 있고 거의 뭐 10월,11월까지 돼야지 이제 구속됐던 분들도 풀려나고 요러잖아요.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선생님은 이렇게 도피생활을 하시면서 그런 소식을 듣게 되잖아요.그때 심정이 좀 어떠셨어요? 구술자 :아이.근데 그 심정이 그렇더라구요.내가.하이고 어떻게 3년간만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어 요.세상에 어떻게 쪼들리고 뭐 사람을 잡으러 돌아다니까.아이 빨리 한 3년 세월이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어요.그때 심정이.(그때 생각이 나시는 듯 손으로 표현을 하시면서) 면담자 :그러셨구나.근데 이게 조금 뭐 추상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그 이렇게 학생시위를 뭐 이렇게 조직하고 이렇게 뭐 시위도 앞장서서 하시고 하셨던 것은 그때 당시에 박정희 정권이 갖고 있었던 그 런 타당성도 없을 뿐더러 세상이 좀 잘 안 굴러간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세상을 좀 바꾸자. 좀 더 낫게 바꾸자 이런 의도에서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계엄령이 내려지고.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바뀌어진 건 없고 뭐 이런 상황이 돼 버렸잖아요.그랬을 때 조금 저 같으면 자괴감이 들었을

144 13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구술자 :그런 것도 있지만,어~우리 애초의 목적이 달랐어요.그래 저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젊었 을 때,우리가 일제치하에서 그 식민,식민지 생활을 하지 않았어요.그리고 일제에 엄청 탄압을 많이 받았잖아요.우리가.그래 가지고 소위 식민사관,그게 지금까지 연결된다고 저는 보는 거예요.그게 일 본 놈들이 한국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맨,그리고 서로 파벌싸움 만들어 놓고 부채질하고.예?그래 가지고 민족성에도 엄청 피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예요.저는.그리고 아시다시피 이 저 제암리 교회다 뭐다 언뜻 따지고 보면은 일이 일어나,그래 가지고 일본에 대한 원천적인 민족적 감정이 많이 쌓여 있었어요 그 당시에.그런데 지금 제대로 전 국민을 설득도 안하고 소위 굴욕회담이라 그래 가지 고 그냥 막 몰아가지 않았어요?그거가 원인이 어디 있느냐?그러니까 이게 한쪽으로는 알다시피 미국 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출발한 거고,그러니까 미국 사람이 일본하고 한국 하고를 묶어 가지고 핸 다음 에 여기서 반공전선을 해야 될 거 아니예요?그래서 동아시아정책에서 나온 게 하나 있었고,또 하나 는 박정희 대통령 정권에서는 미국의 신임도 받아야겠고 또 경제건설을 할려니까 자금이 필요했고 그 래 가지고 이거를 졸속으로 추진을 했던 거고.그런데 최소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이 이렇게 우리 가 제대로 못 하고 나서 지금 그때 아니면 우리가 이런 민족적인 감정을 어디서 풀겠냐는 이거예요. 어디서 풀겠냐는 이거예요.그래 가지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을 발로를 해야 된다 는 생각이었어요.그러니까 액수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라도 한일회담 할 때 젊은 사람들은 투쟁을 하 고.그냥 이걸 일본한테 경종을 줘야 된다는 그런 목적이 다분히 있었어요.실제로.정권을 깨뜨린다는 건 우리가 불가능한 거고.그런데 계속 박정권이 우리가 보기로는 뭐 감언이설이라고 할까?그리고 회 유하고 뭐하고 그런 원칙 없이 말이지 그렇게 우왕좌왕 하고 하니까.이거에 우리도 경종을 준다는 의 미에서 박정권 하야를 들고 나왔고,그리고 일본에 대항해서는 진짜 우리의 민족적 감정이라도 풀어 버리자.이런 감정이 많았던 거예요.그러니까 우리가 그 사건 6.3사건 자체,자체를 가지고 이게 성공 했냐 실패했냐 이런 논리는 잘 성립이 잘 안되고 예?우리가 뭘 가지고 성공했냐 이거야 뭘 실패했냐 이거야.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일부분 저 전달이 됐다!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면담자 :선생님은 인제 6.3시위 이후에 이렇게 구속되거나 이렇진 않았잖아요?그런데 그 후에 이렇게 진정이 되고 뭐 석방이 되고 사건이 다 종료된 후에 혹시 따로 조사를 받으신 적은 있으세요? 구술자 :아 그러니까 그거는 인제 저때는 안 받고. 면담자 :6.3때는. 구술자 :6.3은 안 받았는데,군대 갔을 때. 면담자 :군대 갔을 때. 구술자 :군대에 가서 지난번에 얘기했지만 중앙정보부에 가서 조사를 한번 받았고 그리고 방첩대에 가 서 조사를 받았고.그거는 인제 군인신분이기 때문에 경찰에서 조사를 안 하고 그래서 그걸로 받았고. 근데 그 다음해에 또 연결이 돼요 그 다음해에.하여튼 6.3사태는 끝나고 내가 졸업을 했는데,했는데 그 다음 해에 4월 달에 또 대학생데모가 또 이렇게 인제 준비가 될 때예요.그때 어떻게 됐냐 하면 그 날짜도 사실은 제가 적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인제 그때는 6.3동지들도 많고 한국학생총연맹이라는게 각 대학에 전부 있었어요.그래 가지고 졸업한 사람들도 있고 재학생도 있고 그래 가지고 연결을 해

14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39) 가지고 야~4월 13일 날 각 대학에 동시에 데모를 추진하자 이랬던 거예요.그래 가지고 그때 왕좌다 방사건이 벌어지는 거예요.근데 그때 또 이런 일이 있었어요.그때 저를 엄청 감시를 할 땐데.하루는 요 광교 옆에서 옆에서 우리가 광교다방이라는 데가 있었어요.광교다방.그런데 인제 거길 자주 몰려 가서 차도 많이 마시고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해요.근데 그 옆을 지나가는데 나를 제대로 못 알아보는데 알아본 사람이 경찰이 세 명이 정보부의 형사 같애.하면서 혹시 박정훈이 아니 세요 하더라구 그러니까 나도 언뜻 이렇게 봤어요.(뒤돌아 보시는 표현을 하시면서)그랬더니 아 왜 그 러시냐고 그랬더니 아 이양반이 맞구만 저 좀 가서 조사를 받을게 있다 이거예요.그래서 무슨 조사 냐 조사냐 그랬더니.그때 경향신문 사장 22) 사건이 나 있었어요.경향신문사 사장,유명한 얘기예요.이 사람이 반공법으로 구속이 되고 조사를 받고 할 때예요.근데 지금은 이름이 제가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사장한테 증언을 받을 일이 있으니까.날 가야 된다 이거예요.근데 내가 그렇잖아요?내가 무슨 반 공법에 걸릴 일도 없고 경향신문 사장도 내가 몰라요.근데 그 사람 사건에 날 데리고 가겠다 이거예 요.그래서 아 그러시냐고 그럼 가야죠.잠깐만 계시라고 다방에 우리 친구들이 있으니까 잠깐 간다온 다고 그리고 다른 문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내가.그래 가지고 인제 튀어 버렸는데,그 다음 바로 이 삼일 후에 왕좌다방에 내가 김덕규하고 둘이 나타난 거예요 거기를.나타났더니 인제 고대생들 각 대 학교 사람,학생들들 인제 재학생들이예요.쭉 이렇게 해서 차를 마시고 인제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고 있는데,형사가 저쪽에 둘이 딱 있다가 아이고. 면담자 :박정훈씨. 구술자 : 잘 만났습니다.좀 갑시다 그래 가지고 인제 어디로 갔냐면 마포서로 우리가 연행이 됐어요. 그래 가지고 저녁에 내내 거기 있더니 그날 아마 밤중일 거예요.성북서에다가 이첩을 딱 하더라구요. 하고 인제 성북서에 가서 그 이튿날 인제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았어요.그때 인제 6.3얘기도 나오고 뭐. 하루 종일 인제 조사를 받았어요.받고 그 이튿날이 됐는데,이걸 가지고 그 검찰에다가 구속영장을 신 청을 한 거예요 나를. 면담자 :아 조사한 내용을 가지고 검찰에? 구술자 :그렇죠.근데 나는 잘 몰라요 그 이유를.아 이 사람이 말이죠.나한테 불리한 진술을 한다고 하 는데,자기 의견서 쓰고 내 진술하는데 나한테 굉장히 도움을 주는 것 같더라구요. 면담자 :경찰서에서 담당자가? 구술자:경찰이.그러니까 보통 아니잖아요.검찰이나 경찰이라는 게 사건을 만들라고 막 해야 되는데,그 러지 않고 내가 봐도 이 사람이 나를 굉장히 많이 봐준다 그걸 느낀 거예요.많이 봐준다.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그 구속영장 신청을 했는데 하루종일 기다리고.근데 생각해 보니까 왜 신청했는지 짐작만 가지 잘 모르는 거예요 그날 저녁에.그래 저녁때가 됐는데 씁쓸하게 와요.그래서 내가 구속영장 집 행 안됐죠?오늘.안 떨어지죠? 그랬더니 씨익 웃으면서 대답을 안 해요 그날 저녁에.그러더니 오늘 은 같이 좀 가서 잠을 자야 된대.그래 어디 가서 잠을 자냐고?그때 이틀은 잤어요 경찰서에.근데 이 틀.48시간인가 그 안에. 면담자 :구속영장. 22) 이준구사장

146 14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렇지.영장이 안 떨어지면 보내야 돼요.그러니까 이 사람이 밤에 나와 가지고 돈암동,그 성 북서가 돈암동이예요.돈암역,돈암역 옆에 가니까 돈암장이라는 여관이 있는데 상당히 좋은 여관이예 요.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그래 가지고 인제 김덕규 의원하고 나하고 셋이서 그 경찰하고 같이 간 거예요.그 방을 잡아 주더니 여기서 자자 이거예요.그래서 별 수 없이 잔 거예요.그날 거기서.하 루를 또 자고 그 이튿날 다시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그러니까 이게 법망을 피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 면은.불구속을 못 시키는 거 아니예요 경찰서에서 나를 맨날.그래서 했던 것 같아요.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아침에 가 가지고 또 조사를 받은 거예요.쭈욱 조사를 받아 가지고 또 가지고 가더라구요.그 런데 영장이 안 떨어질 것 같아요.내가 봐도.근데 인제 오락가락하지.영장이 떨어진 날은 나는 도리 없이 가는데 이 사람이 진술하는 게 나한테 불리하게 안 하더라구요.아주 불리한 거 같으면서도 그렇 게.그래 가지고 그날 저녁에도 결국은 저 영장이 안 떨어졌어요.그러니까 그날 저녁에 서장이 나를 부른 것 같아요 서장이.그러더니 당신 그거 고생했다고 돌아가시라고,돌아가시라고.그래서 인제 갔 는데 사실은 그 과정에 우리 아버지가 경찰서장하고 그 얘기가 있었다는 거예요.우리 아들 군대에 내 보낼 테니까,군대로 가면 되지 않느냐?그러니까 구속은 시키지 말아라.예?그런 식의 서로 얘기가 좀 있었던 것 같아요.일종의 타협이지.그래 가지고 나는 석방이,석방이 아니라 구속 자체가 안 되고. 영장.그래 가지고 그냥 풀려났죠.풀려나고 그 다음에 가까운 시일 내에 인제 군대에 가게 된 거예요. 면담자 :그럼 졸업하신 그 다음에 65년 때 정도? 구술자 :그렇죠.그래 가지고 6월.인제 2월 달에 졸업이죠.2월 달에.그래가지고 4월 초에 손옥백이가 군대를 가고 그 다음에 5월 5일 어린이날 그때 또 저는 입대를 하고 또 그래 가지고 서울,어디죠?논 산훈련소를 갔는데 갔는데,거기서도 6.3데모에 얽힌 얘기가 많이 나와요.그 다음 해에 또 계속 데모 가 있었잖아요.그래 가지고 인제 고 얘기는 또 다 하자면 복잡해.그런 얘기가 있어가지고 군대를 가 서 마친 거예요. 면담자 :그때는 군대가 몇 년이었어요? 구술자 :원래 3년이었는데 우리 3년보다도 좀 줄어가지고 32개월 쯤 되면은 제대가 됐는데,그런데 저 우리가 제대하자마자 김신조 일당이. 면담자 :내려와서. 구술자 :와 버리는 바람에 다시 몇 달 또 연장이 된 거예요. 면담자 :거의 3년 된 거? 구술자 :거의 3년 가까이 됐어요.그런데 우리 때는 30개월 막 넘을 정도로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인제 군대를 갔었죠. 면담자 :그럼 그때 인제 선생님은 4월 12일 그때 이제 이른바 그 왕좌다방사건 이후에 군대에 가시게 된 거잖아요?한 달 후에.군대를 가시고 난 뒤에도 계속 그 67년,뭐 67년 이때가지 데모가 진행되잖 아요?후배들에 의해서.뭐 비준반대 뭐 조인반대 뭐 이런 식으로. 구술자 :그해. 면담자 :그거를 인제 그거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구술자 :그러니까 인제 우리와 비슷한 생각이 많았던 거예요.그래서 아까도 얘기 한데로.내가 그 얘기

14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41) 하기로는 어차피 이게 자의,자의로 하는 게 아니다 이거지 우리 힘으로.그래 가지고 한일회담을 하는 게 아니다.이런 얘기에서부터 여러 가지 정황들이 그렇게 쉽게 타결되지기 어려웠던 그때 그런 정치 정세가 있었기 때문에.그렇게 때문에 학생들은 줄기차게 그냥 비준반대 투쟁을 했던 거예요 그게.65 년도.65년도에 그런 투쟁을 했고 우리는 군대에 가 있으면서도 혹시 저 감시를 많이 받았고 우리가. 그리고 혹시 외부 학생하고 연결 되지 않는가 그런 감시도 받고 그러면서 그랬죠 뭐.그래 가지고 지 나고 보니까 인제 아시다시피 보통,보통의 학생운동이라면 옛날에 하나는 민주화 운동이고 하나는 민 족운동이예요.그렇죠?3.1운동이다 뭐다 이런 거는 민족운동이었고 그러니까 외세강점이나 외치에 대 해서 저항하는 그런 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민주화운동이었고.그런데 6.3운동은 두 가지를 같이 겸해 가지고 민족운동도 되고 민주화운동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그러고 이런 운동이 전개가 됐는데.인제 지나고 보니까 학생운동도 많이 변질이 되잖아요.예를 들자면 80년도 운동 이런 거는 우리 잘 알다시 피 PD파다 NL파다 이래 가지고 소위 이 좌파적 색깔이 아주 짙은 그런 걸로 변질이 막 되더라구요. 우리가 생각 못하던 그런 학생운동으로 많이 변질이 되는 것 같아요.그 다음에는. 면담자 :그렇죠.그러면 그 후배들이 이제 운동을 진행하는 걸 보셨을 때,그러면 그 선생님 세대인 선 배들이 했던 거를 인제 뭐라고 그럴까.그대로 이렇게 고수를 했다고 해야 되나?표현이 맞나 모르겠 지만. 구술자 :답습. 면담자 :답습은 좀 나쁜 의미인 것 같고.선배들의 그런 의지나 뭐 사상이나 이런 거를 그대로 밀고 나 갔는지 아니면 뭐 다른 의견을 냈던 건지? 구술자 :그러니까 그게 그것도 그 사회상이나 시대상의 이슈가 좀 달라지는 거예요.예를 들자면은,그 러니까 예를 들자면은 이런 거예요.그럼 왜 전두환 정권에 유난히 그 좌파적 색깔이 짙고 반미구호가 튀어나오고 이렇게 왜 그렇게 됐느냐 그게 요인이 있을 것 아니냐.이거죠.옛날에는 우리 때에는 한일, 한미행정협정촉구 데모 이런 것도 주장을 했지만 우리는 반미가 없었어요.국내,국내에는.근데 아시 다시피 광주사태다 뭐다 이거를 그때,그때 제가 운동권에 있었어요.따지고 보면은.아주 중심에 있었 어요.제가.그런데 제가 그때 중앙정보부에 정치국장이면 막강해요.삼국장이라면.그런 사람이 고대 최 모 국장이.그 다음에 이양반이 경상남도 지사도 했는데,이 양반이 저하고 하루는 식사를 하자고 이렇게 하더라구요.그래 가지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제가 얘기가 나쁘게 말하면 주둔군 사령관 이 행세를 하고 있는데,한미 저 그때 그 뭐야 8군 사령관이 사람들이.이게 민족의 비애다 이래.왜 우리 한테 옛날 식민지시대도 아닌데 왜 전두환 정권을 밀어주고 말이지.뭐 저 국민들 들쥐 같다고 이따위 소리나 하고 말이지 이럴 수가 있느냐?그래 내가 이게 큰 문제다.인제 우리도 항의를 해야 된다 막 이랬던 거예요.그런데 아시다시피 광주사태가 나고 나니까 갑자기 돌변하는 거 아니예요 상당히.미국 이 전부 수락해 가지고 진압하고 광주사태에 전두환이한테 힘을 실어주고 전부 했던 거 아니냐 이거 지.그러면서 반미 이런 감정이 막 튀어나왔던 거 아니예요.그런 과정에서 일부 진보적이고 사회주의 적인 이런 색깔도 학생들한테도 막 유포가 되고 그랬던 것 아니예요.그게 옛날에는 보이지 않았던 거 거든.옛날 학생운동에서는 그런 건 없었다구요.거의. 면담자 :지금까지 이제 64년부터 65년 그 초까지 선생님 군대 가시기 전까지 그러니까 대학교 4학년 때

148 14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부터 이제 데모를 시작하신 거나 마찬가지잖아요?그 때가 한 스물 세 네 살 정도 되셨을 땐데 아직 나이도 젊고,보통 보통 인제 물론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인생을 좀 결 정하기도 하지만 또 그 나이 때가 되면 또 졸업 무렵 이렇게 되면 자기의 전체 인생을 뭐 설계하기도 하고 또 그 때 겪은 일들이 전체 인생에 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렇지,그렇잖아요? 구술자 :아.그러믄요.예.예. 면담자 :그럼 이 때 이걸 즉 3.24시위부터 시작해서 전체를 6 3운동이라고 총칭해서 말씀을 드리면 그 기간 동안에 선생님은 주도적 역할도 하셨고 중심에도 서셨고 도피생활도 하셨고 뭐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시면서 결국은 군대까지 가셨는데,그 시기의 동안에 겪으신 일들이 일이라던가 아니면 그 런 사상이라든가.그 때 선생님이 갖고 있었던 그런 소신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이제 선생님 전체 인생 에서 어느 만큼의 비중을 차지했고 영향을 미쳤는지? 구술자 :애.그러니까 이거를.아 내가 인제 내가 저거에요.그 60이 될 때,60이 될 때,나는 대학교 때 부터 매년,금년에도 할 거에요.매년 10대 뉴스를 적어요.대학교 때부터.그럼 왜 적었냐.신문을 보 니까 대학교에.저 12월이 되니까 국내 10대 뉴스,또 해외 10,10대 뉴스가 늘 나오더라고요.아 그러 면 나도 이렇게 한 번 적어보자.이래가지고 대학교 때부터 늘 내 10대 뉴스를 적어. 면담자 :자신의 10대 뉴스를 1년 동안. 구술자 :그렇지.1년 동안에. 면담자 :오~괜찮네요. 구술자 :어떤 때는 10개 넘을 때도 있고 요새 같은 때는 줄어 들어가지고 그 10대 뉴스가 좀 줄고.거기 보면 인제.그러니까 1년 동안 내 10대 뉴스가 뭐냐 그래가지고 늘 적어와요.지금까지.그런데,그런데 내가 60이 됐다고요 이제 60.회갑이 될 때는 내 일,일생을 일생에 대한 10대 뉴스를 적어,적어 본거 야.나 혼자.내 일,일생에 대해서.그러니까 역시 1위,1위가 6 3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그거하고 연결 돼 가지고 민주화 운동한 게 내한테는 첫 번째 뉴스가 되는 거예요 저한테는. 면담자 :긍정적인 면에서요? 구술자 :아 아니 좌우간,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면담자 :부정적이든. 구술자 :나한테 10대 뉴스는 그렇게 된 거예요.그러고 두 번째는 그래도 국회의원 두 번 했다는 게. 면담자 :기억나시는 게? 구술자 :그게 두 번째 되고.그 다음에 이제 알다시피.그 다음에 대우인거예요.대우에 가서 내가 10년 동안 그 근무를 했는데 중역으로 근무를 핸 그런 거.그 다음에 인제 마누라하고 결혼을 한 것,고대를 나온 것.뭐 이런데 뉴스를 쭈욱 하는데 하여튼 지나고 보니까.저 6월부터 6 3이후로 민주화운동하는 과정이 굉장히 길었어요.제 기억으로는.그러니까 저,저 80년도 DJ내란음모로 내가 수배를 받아 가 지고 그 때 인제 현상수배예요.인제 그 때 돈으로 100만원 뭐 현 현상 걸어놔 가지고.TV에 막 나오 고 그 때까지 인제 하니까.따지고 보니까 대학교부터 이때까지 거의 20년간을 내가 민주화운동을 한 거예요.6.6데모할 때부터. 면담자 :예 그러네요.

14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43) 구술자 :거의 20년 가까운 동안을 내가 수배 받고 징역가고 오만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나 더 지나간 얘기지만 내가 여기 종로에서 국회의원 출마했던 일이 있어요.77년도에.그런데 그때,그때도 신문에 다가 내가 징역.그때는 인제 저 광주사태 나기 전 얘기지.징역을 내가 세,세 번을 갔다 오고 유치장 을 아홉 번을 갔다 오고.그리고 내가 수사기관 정보기관에 50여 차례를 저 다녔다.이거 신문에 다 났 어요 내가.그러고 그 때 뭐 여기서 유신반대의 그 연설을 하는데 아주 극적이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보통 극적인 게 아니야.그래 가지고 신문에도 여기 저 서울 문리대에서 마지막에 연실,연설을 하는데 내 연설 딱 끝나고 나오는데 30분 사람들이 몰려와 가지고 사인 뭐 공세를 받은 거예요.그냥 쫘악,젊 은 애들이 대학생들이 그냥 전부 몰려오고 내가 그 그 때도 돈이 없어가지고 사무실도 제대로 안 열고 여관방을 딱 빌려 가지고 있는데 매일 여 여관에 맥주다 사이다다 콜라다 그냥 맨날 사다 놓고 찾아와 가지고는 마 전화가요 불티나게 나.아~당신 용감하다 이거지 이런,이런다고.아 뭐 그래서 야 이 민 심이라는 게 자기의 이 박,박정희 정권에서는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맨 날 떠들었는데 그거 아니다 이거지.그렇게 열렬하게 지지자가 많을 수가 없었어요.어 결국에는 내 떨어지긴 했지만, 면담자 :그래도 뭐. 구술자 :그런데 그 때 보통 인기가 좋았던 게 아니예요 그 당시에.그런데 이런 게 뭐냐면은 내,내 그 의지 이런 게 있는데 아주 우리 저 이 얘기 박진목씨가,아니 나는 많은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그런데 박진목씨라는 분이 계세요 박진목. 면담자 :목? 구술자 :그런데 이 양반이 옛날 항일운동을 열심히 했어요.항일운동을.그래 가지고 마지막에 징역도 갔다 오시고.그런데 이 분이 쓴 책이 [내조국 내산하]이래요. 면담자 :내조국 내산하 구술자 :[내조국 내산하].그런데 우리나라 알다시피 백범일지가 아주 걸 걸 걸작품이고 대단한 거고 어. 그리고 우리 저 조상들이 날 뭐 무슨 무슨 장준하 선생 또 문장이 좋고 괜찮은데 다른 많은 중에서 저 박진목씨가 쓴 내조국 그 내산하라는 책이 아주 좋아요.그래서 그 책을 내가 수 십 권을 일부는 사고 얻어 가지고 내 동 저 가 가까운 친구한테 다 나눠주고.(직접 나눠 주시는 표현을 하시면서) 면담자 :나눠주기도 하고. 구술자 :이 거 정말 좋은 책이라고 응?전부.그런데 박진목씨가 어 오셔 가지고는 그 때 그 무렵에 여 기 연설을 딱 들어 들어 들으신 거야 이분이. 면담자 :아 선생님 말씀에 연설을 그때 들은 거예요? 구술자 :그렇지.와서 들은 거야.그리고 이 박진목씨는 특히 저 송남헌씨라고 해서 송남헌.인제 이 분 이 그 옛날 박 저 김구 선생하고 그 김일성이 면담을 같이 갔다 오신 분이고 이 양반이 김규식 박사의 아마 비서실장인가 하고.이러니까 독립운동가예요.송,송남헌씨는 이름이 있는 사람이예요.이제 송남 헌씨,또 윤길중씨 이런 분들하고 저 교분이 두터워요.박진목,박진목씨가.박진목,박진목씨가 그러니 말이 나왔더니 여럿이 있는데서 아~그게 박 박 후보는 그 때 내 후보니,박후보는 딱 보니까 사상관. 관이 딱 서있는 사람 같더라.자기표현이 그러더라고 에.내가 여기서 연설할 때.그 때는 유신 때예요. 유신 이후에 나만큼,나만큼 강력한 저 연설을 핸 분이 하나도 없었어.(손사래를 치시면서)정치인 중

150 14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에.하나도 없었어.장준하 선생도 도저히 어림도 없었어.못했어요.그런데,내가 여기서 77년도에 연 설을 딱 하고 나니까 그냥 파장이 일어났는데 그 다음 해 국회의원 국회에서 열리는데 뭐라고 그랬냐 하면 아 속기록에 다 나와 어.박 아무개 아 였는데 내가 여기서 김대중씨 저 진 진주 교도소에서 어 머리 빡빡 깍고 수감,수감 생활한다는 얘기,22일 동안 문익환 목사님이 저 단식한다는 얘기,그 다음 에 김지하가 징역,징역살이를 하는데 진짜로 휴 휴지를 안 줘 아무 것도,그래가지고 자기 손으로 거 기를 닦아 냈다 이거예요.그 그런 얘기를 아주 공개적으로 막 핸 거예요 여기서 어.그리고,어디 중 앙정보부에서 고문 당 당했다는 소리를 무서워서 누가 해요?그런데,우리가 인제 유신 치하에서 중앙 정보부에서 응 고문당하고 막 이런 걸 막하고 심지어는 인제 6 3때 박정권 하야를 내가 주도했거든요. 이 이런 이 얘기를 막 해니까 발칵 핸 거에요.그래 가지고 전부 무슨 관심이냐 하면 저게 현장에서 잽혀 가냐 안 잽혀가냐? 면담자 :안 잽혀가냐? 구술자 :잽히느냐?안 잽히느냐?전부 그걸 인제 저 번에 전화 온 게 잽혀갔더냐 안 잽혀갔더냐 전부. 그래서 안부를 묻는 거예요. 면담자 :괜찮냐? 구술자 :괜찮냐?안 괜찮느냐?그런데 선거가 딱 끝나고 나니까 저는 인제 그리고 좀 쉴려고 저 무주 구천동에 좀 갔어요.갔다가 와 가지고 잽힐거냐 안 잽힐거냐 했더니 당신 아마 그 잽히지는 않을 이 것 설이 잡혀 가지는 않을 거 같다.그러니까 안하고 옛날 사건 옛날 사건을 캐 가지고 그 정치활동을 못한다고 딱 그렇게 법적으로 뭐 대법원에서 판결이 내릴 내릴 거라고.그 당시에는 정치 못한다 이거 죠.에 그렇게 그걸로 다행이었죠.그 그 그런 정도로.그런데 너무 공개가 됐으니까.그래 우리도 심지 어는 그래서 몇 천 명이 모이고 장충단 이런 데서는 만 명이 신문에 난대로 만 명 이상이 모였어요. 그 그렇게 정치집회가 없었으니까 유신 때.그런데,거기 와서 내 그 얘기를 한 마디만 더 하자면요. 이런 거예요.내 내 사람이 많았어.야~20명 30명이 막 몰려다니고 어 했는데 이제 장충단에 가서 첫 번째 유세를 하는 거야.첫 번째 연설을.그런데 아시다시피 이 장충단 공원에 저 청중은 쫘악 있고 연 단은 저 우에 가 있는 거야.저 우에 계단으로 저 우에 가.그런데 인제 이 3,4,5번이 딱 걸린 거예 요.3번이 오제도,4번이 나,이제 5번이 이제 정대철,어 이렇게 세 사람이 3,4,5번으로 핸 거예요. 그 때는 출마도 많았어요.15명이 출마를 했으니까.그래서 하는데 내가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 을 시작을 했는데 박수를 그냥,난 그런 거 처음 봐요.조용~해.만 명이 숨소리도 안 나는 거야.내 연 설하는데 긴장이 되어 가지고 긴장이 되어 가지고 어 쉼 숨소리도 안 나.조용~해.그러니까 얼마나 신나?이 연 연설을.그냥 하는데 끝까지 박수도 한 번을 못 봤고.그리고 인제 끝났어요 인제.끝나고 내가 나오,나오는데 인제 끝날 때는 조금 눈치 봐 가면서 조금 박수 좀 하고 끝나고 나오는데 내 친 구들이 10명이 둘러 쌓였던 사람들이 현장에서 잽혀가는 줄 알고 진짜 다 도망갔어요.한 사람도 없어 내 주변에.그러니 후보가 이렇게 초라 초라할 수가 없어 거기서.바로 연단에서 연설을 내가 세 번 하 고 쭈~욱 내려오는 동안에 사람들 눈치만 주고 악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다들.다 다 피해 다 피 해버렸어요.에 다 피해버린 거에요.하고 100여 미터까지 내려올 때까지 다 피하더라고.그런데 그날 저녁에 잽혀 가는 줄 알았는데 이게 안 잽혀갔다 이거야.그 이튿날 종로에서 선거연설을 하는데 이거

15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45) 는 그냥 박수가 쏟아지는데,그 다음날 이 저 사람도 저 잽혀가지도 않고 저렇게 투쟁을 했는데 우리 가 이럴 수 있냐고 막 박수를 하고 그래 가지고 그때 그,그때 야당성이 강한 국회의원들이 와 가지고 그 때 알다시피 그 때 뭐 오세응 선배 이택돈 선배 전부 다 내 편이야.신순범씨랑 어 이런 사람들이 와 가지고 전부 연설 그 테이프를 가져가고 전부 핸 거예요.직접 녹음을 하고.그래가지고 내가 연설 끝난 다음에 그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녹음 하는데다가 의뢰를 핸 거야.이거 좀 해 달라고.그런데 여 기서 보더니 무섭다고 다 안 하는 거야 이게 무섭다고 연설.아니 공 그거 무슨 상관이냐 이거예요.그 렇지 않아요?내가 연설하는데.그런데 그걸 안 해 주더라고요.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 그 연설 때문에 그 다음해에 그 다음해가 인제 아~10대국회예요.10대 국회.10대 국회가 12월 달에 있었는데, 그 때 전국. Tape2. 면담자 :그런.그런 그 유신이고 그 다음에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씀하실 용기 가 생기신 거는 그 전부터 이제 대학 다닐 때부터 가졌던 소신이 이제. 구술자 :그리고.근데 거기서 그 이야기가 나와요.내가 드러내 놓고 나는 그 이 저 뭐 그냥 드러내 놓 고 나는 독 어떤 독재 권력하고도 항쟁을 하겠다.(단호한 입장을 표현하시면서)그래 그 얘기도 나오 고.그리고 여러분들 내가 번호가 7번인데 7번인데,내가 이 국회로 가는 것이 행운이 될지 내가 징역 으로 가는 게 행운이 될지는 모르겠다.아니 공개적으로 그런 거예요.내,그러니까 인제 소문은 나지, 박정권 하야해라고 그랬지,징역 가겠다고 떠들었지,뭐 했지.그래가지고 저 그 다음 해 그 저 국회의 원 선거 때는요?전국적으로 내 테이프를 다.가서.이 사람 이 정도해도 안 잽히더라 이거지?구속이 안 되더라 이거지?물론 협박도 많이 받고 심지어는 그것도 다 나지만 선거공보.왜 이 저 그,그 때는 그게 없어요.운동하는 사람 없어요 네.선고 공보 집으로 가는 거 있죠?거기다가 그 못해?법적으로 손질 못하게 돼 있는데.이걸 긴급조치 위반이다 그러고 싹 비워 버렸다니까요 아 공백으로.내 선거 공보를 이렇게 뜯은. 면담자 :아,그러니까 선생님 부분만요? 구술자 :그렇지.아 쓰는데 일부는 싹 공백으로 빼 버렸어.그러고 선거벽보 있죠?벽보도 내 것만 새까 맣게 얼굴을 다 못 알아보게.그랬어요.실제로. 면담자 :어 그러면 안 되잖아요?그죠? 구술자 :안 되는데도 했다니까?전부 유신이.그러고는 저쪽에서는 협상 안한다.국회의원 시켜 줄 테니 까 자기들하고 타협지라고 타협하자고.아 내가 지금 타협하게 생겼냐고?아 그랬어요.그래 가지고 아 그래서 그 해에 야당이 선거에 1.1%를 이겨요.십,십대 국회에.그게 도화선이 된 거예요.야당 의원들 이나 전부 민심이 이렇게 돌아갔구나 인제 에.그래가지고 그 다음 해에 그 다음 해에 인제 이 국회에 의석수도 많고 득표율도 여당을 더 많이 이겼으니까 인제.그 다음에 하는데 그 과정에서도 또 김상현 의원하고 저하고 큰 역할을 했어요.김영삼 총재 시키는 그 역할을 해 가지고 음 그래서 에 김영삼씨 하고 어 뭐 해 가지고 결국은 유신을 넘어뜨리는데 일익을 담당 핸 거예요 저도.처음부터 어 담당을

152 14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해 가지고 이 유신정권은 넘어 넘어가야 된다 이래 이래 했던 거예요.그러고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하자면 그럼 왜 유신이 됐냐?유신을 했냐하면 인제 우리가 민주회복국민,국민회의도 하고 민주회복 청년회의도 하고 또 준비를 하고 있을 때거든요?에 그래 가지고 내가 원래 얘기하면 우리 친구들 전 부 저 저걸 핸 거예요.저 연말에 파티를 하자.에 그래 가지고 장소를 얻을래야 얻을 데가 없어요.장 소를 얻을 데가.그래 가지고 무교동에 있는 호수그릴이라는 데를 예약을 한 거예요.거기는 인제 밥 먹는 대니까 할 거다.가지고 거기를 인제 했는데,안기부에 정치부 정치과장이 온 거예요.저한테.그 런데 이 정치과장이 고대 선배인 송원영씨하고 양정고등학교의 친구예요 정치과장이.하고 인제 만났 어요.만났더니(오랫동안 말씀을 하셔서 기침을 하심,물을 조금 드심)그 당신네들 그 장준하 선생이 랑 하는 그 백만원 백만인 청원 그거 운동을 하는 거 아니냐?그래서 할 생각은 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다.연말이니까 연말에다 그냥 그 우리 파티를 한다.그걸 이해를 해 달라.그 장소도 못 얻는데 말이야.응 했더니.알았다고 그런데 그래 가지고 거기서 그냥 고분고분히 수락이 된 거예요.근데 호 수그릴에다가 우리를 젊은 세대들을 한 200명까지는 안 돼.한 150명을 집결을 시켰는데 그 때 제일 그 저 그 포커스가 어디있냐하면 알다시피 함석헌 선생,장준하 선생,에 그 다음에 아니,함석헌 선생, 김재준 목사.김재준 목사,장준하 선생,김동길씨.그 때 재야의 최고.어 지학순씨.그 때 기록을 보 면 이 분들이 최고의 그 지도부야.예들 들자면은.이 분들 하고 지금 하는 거하고 저 저기 정치권에서 는 내가 선발을 핸 거야.정일형 박사,에 정일형 박사,홍익표 선생,에 홍익표 선생,그리고 윤길중 선생,에 이렇게 해고 물론 그 안에 한승헌씨,한성헌씨다,계훈재씨다,김철.김한길이 아버지 어 김철, 이 사람들을 대거 집결을 시킨 거요.그래 가지고 제가 거기서 인사말을 하고 응,거기서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사항이 함석헌 선생님이 그 때 우리가 매일매일 그 전에 삼선개헌 반대도 그렇고 뭐 할 때면 내가 종로 4가에 가서 마이크를 돈 주고 사다가 장치를 해놔요.왜냐하면 저 꺼지니까 자꾸 쟤네들이 응.장난을 하니까.그래 가지고 거기 가서도 이걸 잠깐 그 마이크 저 준비해라 준비해라 우리가 준비 를 해놓고 자기네도 했어.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이 마이크를 딱 잡아서 몇 마디 하니까 마이크가 딱 간 거예요 에 마이크가.그러니까 이 때 이 함선생님께서 그런대로 얘기를 마치셨어.그러니까 인제 김 재준 목사님이 옛날 나치 얘기를 하면서 어 아 그랬어요.이이 우리가 이이 저 마이크도 없는데 그런 데 불 불이 싹 가 버린 거야. 면담자 :조명까지요? 구술자 :아이 불이 다 가 버린 거예요.그 일대 다 보내 버린 거에요.인제 거기에서.어 그래가 그 그래 가지고 거 거기서 모임을 했는데 촛불을 전부 저 준비를 하나요.안하지.해서 가서 사 온 거요 사온 거.탁 촛불을 놓고(직접 사다가 놓으시는 시늉을 하시면서)어 그리고 거기서 회합을 핸 거예요.합 거 어 그런데 거 김동길씨 장준하 선생,정일형 박사 이런 사람들 얘기를 다 한 마디씩 다 들어 드려 야 될 거 아니예요?거기 오신 분들이니까.그러니까 거물이야 우리나라에.정계에도 그렇지만 재야에 사의 제일 어른들이야.함석헌,김재준,지학순 그렇죠?장준하 이 사람들이 아주 어른들이야.그러니 다 모셔 다 놓고 해니까 마 이제 불이 다 갔어요.우린 나중에 들은 얘긴데 나중에 들은 얘긴데 경찰 이 200명이 포위를 하고 있었어요.오 그럼.완전히 거기를 포 포위 하고 있어요.경찰이 200명이 와 가지고.오 포위를 하고 있었고 조금 있다가 그게 인제 11월 말일 쯤 되요.1월 1일 날 그 저 이 저명

15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47) 인사들 신년 왜 신년 대담 이렇게 나오잖아요?그런데,김대 김독신길(김동길)교수님이 내가 그.그. 그 그걸 써 봤어요.동아일보에다가 내가 어 지난번에 어느 모임에 갔더니 이만저만 해서 전깃불도 다 나가 버리고,마이크도.아 그걸 썼어요. 면담자 :어 김동길씨. 구술자 :김 김대 김동길씨도 거기다가 거기다가 써 놓고.그 그런 그런데 그 때도 DJ가 동교동에 있었 는데 지데 지데 DJ도 우리를 적극 지지하는데. 면담자 :지원하는데. 구술자 :자기는 못 나오는 거지 지금 이판에는.에 그러니까 그런 류의 그 얘기가 많아요.죄다 에 이를 테면 민주화운동하는 과정에서 에.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돼 가지고.어 그래서 결국은 그 그러다가 이 제 마지막으로 얘기 하자면은 중앙정보부를 수도 없이 끌려 다닌 거야 제가 에.가 가지고 그냥 고문 도 받고 뭐 뭣도 받고 뭐 하고.그런 세월을 쭉 보낸 거야.그런 세월을 에. 면담자 :그러면은 선생님 이렇게 어린 시절을 또 보면 아버님이 변호사도 하시고 국회의원도 하시고,뭐 그렇게 남부럽지 않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셨고. 구술자 :그랬어요. 면담자 :학교도 들어가셨는데,물론 집안 환경을 보면 뭐 정치를 하시거나,변호사가 되셨거나 정치는 하셨을 것 같애요.근데,이 정치를 하시는 그런 성향이라고 해야 하나?이게 학생운동을 하신 이후에 조금 더 정 정부를 뭐 이렇게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것을 바꾸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신 것 같애요.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친 거죠.선생님 인생에서 그죠? 구술자 :많이 영향을 많이 하고 우리가 조금 이 뭘 나쁘게 말하면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네가 아 내가 그냥 내가 죽냐 네가 죽냐?해보자 뭐 그랬던 것 같애요.유신 때 이런 때는 특히.어 니 가지고 인제 그 빠지지,이 12월 26일 날에 10월 26일 날 10 26날 박정희 대통령이 인제 저거 이쪽에서는 시해 했다고 그러지만,우리 쪽에서는 살해됐다고 그러지,시해라는 용어는 안 써요. 면담자 :그렇죠. 구술자 :그런데,박정희 사건이 났을 때 고 날 낮 낮 낮에 지금도 있습니다.그 저 국제라고 국회의사당 앞에 지금도 호텔이 있는데 거기서 저 정보부 사람을 우연히 만났어요.근데 만났더니 이제 좀 고만하 고 어디 직장을 가 가든지 뭐 해라. 면담자 :선생님 보고요? 구술자 :에 해라 이거야.어 이 이 정권이 언제 끝날지 알 알고 어 이 세월까지 맨날 이러고 사느냐 이 거지.그때 얘길 하더라고.그래 맞는 얘기 같애요.내가 봐도 야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어?그런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때 박정희 하고 타 타협할 생각은 그 쪽에서 얘기하는 거는 추호도 이 없 고 참 이렇게 세월이 세월이 이만저만 해 내가 30대 후반 아녜요?후반까지 지금까지 살아왔다 하니까 한심한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때.그런데 웬 걸?그 날 저녁에 보니까 박정희가 그 사건. 면담자 :사건이 구술자 :그러니까 뭐 우리도 네 저 그렇게 봤죠.독재 권력이라는 거는 철사 줄처럼 휘질 않고 그냥 뚝 부러진다는 거 아니에요?그러니까 그걸 그걸 늘 예상을 했어요.저 정권은 어느 땐가 단호하게 딱 끊

154 14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어질 거다 저거는 어.독재정권이라.그렇지 않으면 뭐 부지기수로 그냥 영영 그거는 아닐 거다.어 그 런 예측은 그냥 가지고 살았는데 그런데 그런 건 지나고 보니까 맞는 얘기도 되지만 어떻게 보면 틀리 는 얘기도 돼요.뭐냐면요?한국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 저항의식이 제일 많아 보이지만 제일 적어요. 우리나라가.그래서 알다시피 조선왕조가 실권을 가지고 500년을 이 버텼는데 전 세계적으로 실권을 가지고 500년 왕조 간 나라는 하나도 없고.대한민국이 실례를 하면 일본이나 중국에 보면은 난이 많 아 일본은 맨 무슨 난 난 난이 굉장히 많고,중국도 한 200년쯤 되면은 근 근세사에서 이 정권이 교체 되고 이렇게 가는데 한국은요 저항이 많은 것 같지만 참 없어요.조선왕조에 무슨 난이 있었냐 이거. 어 세 세조가 어 찬탈했다고 그러지만 그것도 왕. 면담자 :왕끼리. 구술자 :그거 했지.별로 없고. 면담자 :민중에게 일어나거나 이런 거는. 구술자 :홍경래라는 것도요 그 책을 보면은 별로야.별로 그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어.크 크게 그럼 지 방에서 토호 저 작게 그 웅대한 포부를 못 가졌어요.어 그리고 인제 동학난 난 난 정도로 그리고 없 어 한국이.그래서 이렇게 보면은 보세요.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보라고.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없잖아 요 지금.공산사회에서도 세습은 용인이 안 되는 거예요.공산 그렇잖아요?세습을 어떻게 하느냐 이거 야.거 거기도 저 민주주의 저 민주주의를 저 주창하고 허는데 공산주의 국가에도.그런데 북한쪽 보면 은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요 박정희도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은 권력이 어떻게 될지도 몰라.왜냐하면은 권력주변에 몰리는 사람들이 원체 그 권력에 지향을 하고 가는 거지.어 이게 정의다 이게 목숨 먼저 걸고 이건 때려 부숴야 된다.이 숫자는 적고 대다수는,대다수는 권력에 그 기생을 해가지고 어째 협 조를 해가지고 이렇게 가는 거예요.내가 보기는 그래요 내가 봐 보기는.그러니까 한국이 한국 사람이 어 막 그 허지만 아닌 것 같고 아닌 것 같고,다만 평등사학는 사상은 또 대학교수 얘기 들으면 세계 에서 이거래요.한국에 평등상.그래 가지고 예를 들자면은 한국에서요 돈 권력 많고 돈 많은 사람들은 배간시해 그리고 존경할려는 생각이 없어.존경 안 해 우리나라에서는.왜 너 너만 돈을 가졌느냐 이거 야 기분 나쁘다 이거야.왜 니,너만 권력을 가졌느냐 이거야.그렇죠?그러나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국 회의원도 존경을 못 받어 한국사회에서.그러니까 저 어떻게 보면은 뭐 민족성이라고 하였지만 꼭 그 런 것만도 아니야.평등사,사,사상은 한국 사람들이 아주 강해요.그런데 또 이래요.아이 국회의원들 은 다 어 좀 욕을 많이 하느냐 이거야.나도 무지무지하게 욕을 먹어 살았어.그런데 개인적으로 내가 욕 욕 욕을 먹어본 일은 없어 도대체.그런데 국회의원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욕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다 자기 지역에 가면은 다 그 똑똑한 놈들이 국회의원 돼요 그죠?그리고 나 나를 욕 국회의원 욕한다고 그러지만 그래도 어디 가면은 축사하라고 그러 그러고 그러잖아요?축시하라고 그 러고 뭐 기부 하라고 그러고 또 이 받들어줘요.한국에서.아 그 많아요.많이 받들어 줘요.욕만 하는 게 아니라고.이게 이 이중적인 그 그런 스타일이에요.또 이 이런 거 같애요.세상 다.이렇게 저렇게 얘길 내가 많이 했습니다.이렇게. 면담자 :말씀 잘 들었습니다.저희가 지금 두 차례에 걸쳐서 이제 6 3,물론 이제 선생님을 이렇게 전 생애의 생애사를 들었으면 훨씬 더 많은 시간동안 더 자세한 얘기를 많이 들었겠지만 저희 그 이번 구

15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49) 술증언 수집 프로젝트가 6 3항쟁에 좀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좀 짧게 진행이 됐었는데요.어쨌든 어 제가 책에서 읽은 거에 비해서,읽은 것보다 더 상세하고 또 잘 몰랐던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너 무 저는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구요.또 제가 이제 오늘까지 말씀을 듣고 나니까 선생님 전 생애에서 이 시기에 있었던 사상이나 그 소신이나 이런 게 평생을 사시는데 이제 좀 영향을 미쳤고,그렇지 않 았나 예 그런 생각이 들구요.네 이제 선생님 이제 지금 연세도 있으시고 현직은 거의 이제 은퇴를 하 신거잖아요?이게 지금 실제적으로 뭐. 구술자 :아이 뭐 은퇴했어요. 면담자 :이렇게 막 튀어서 일하시지는 않으시니까.그렇게 뭐 일을 인제 접고 은퇴를 하고 그러고 있으 면 이렇게 좀 자기 인생을 이렇게 반추를 하게 되잖아요.그러면 선생님 아까 전에 뭐 10대 매년 10대 뉴스 자신의 10대 뉴스도 만드시고 60세가 되셨을 때는 뭐 60세 동안 10대 뉴스도 만드시고 이러셨는 데.저 되게 좋은가 배운 거 같애요.저도 이제 앞으로 한번 해볼까 이런 생각이 들고,그리고 반성도 되고 이런 것 같애요.그 10대 뉴스에서도 이 6 3이라는 게 큰 비중을 차지했었고 선생님 같은 분들이 이제 뭐 같은 세대를 살지만 어쨌든 선배 세대잖아요.저희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좀 이런 좀 지금 그 래도 지금 어렵다 어렵다 해도 그 옛날에 비하면 많이 자유로와졌고. 구술자 :아.그럼요. 면담자 :민주적이고 그런 좋은 환경이 된 거는 이런 선배 세대 분들이 이렇게 사상을 갖고 세상을 바꿀 려고 노력도 하셨고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구요.존경 받어 마땅하시구요.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그리고 제가,제가 질문한 거에 비해서 선생님이 너무 말씀을 잘해 주셔 가지고 제가 별로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요.어쨌든 제가 질문을 하고 드리고 선 생님께서 말씀을 여러 가지 해 주셨는데 추가로 뭐 더 그러니까 저희가 국가기록원이란 기관이 있잖아 요.저희 기관은 이렇게 정부 뭐 대통령 이런 기록물을 수집을 해서 관리를 하는데 이렇게 기록을 잘 관리를 하면 기록이라는 게 어떤 사람의 행위의 결과물이잖아요?그리고 조직은 조직의 행위의 결과물 이니까 이 사람이 제대로 일을 했는지 제대로 의사결정을 했는지를 볼 수 있는 기록이에요.그래서 기 록,저희가 제가 공부할 때는 기록관리가 잘 되면 정말 세상이 투명해지고 부정부패가 없어진다 그런 얘기를 듣고 공부를 했었는데 이 구술기록도 마찬가지거든요.그러니까 기록으로 볼 수 없는 그런 결 락 부분을 이렇게 선생님 같이 경험자가 막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기존에 있는 기록이랑 이 기록이랑 이렇게 날실 씨실 이렇게 해가지고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게 돼요.그러니까 저희 가 앞으로 이런 작업을 쭈욱 하게 될 것 같아요.선생님들이 많으시니까 이렇게 또 연세들이 점점 드 시니까 시급한 사업으로 진행이 될 것 같은데 뭐 이런 물론 이렇게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 관련해서 도 그렇지만 아니면 다른 선생님께서 이렇게 쭈욱 사시면서 아 이런 주제는 구술로 좀 남겨 주는 게 좋지 않겠냐 저희한테 제안을 해 주셔도 되고? 구술자 :아주 좋으신 말씀이시고 제가 여하튼 그 말이 좀 유창하지 못해가지고. 면담자 :아니요.충분히 유창하세요. 구술자 :그래 가지고. 면담자 :너무 재밌게 잘 들었어요.

156 15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런데 제 얘기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요.그 자유당 정권하고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은 그 이기붕씨가 아시다시피 저 국회의장도 하시고 그리고 부통령이 되다가 결국은 저 4 19를 저 열매 맺게 만들은 장본인이 됐는데 내가 그때 생각을 핸 거예요.하도 어릴 때도.세상은 명예라는 거 하고 불명 예하고는 아주 구분을 해야 된다는 걸 생각해요.명예하고는.예 그러니까 그래 보면은 감투를 쓰거나 출세했다고 그래서 그걸 명예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지.예를 들자면 이기붕씨는 그게 명예냐 이 거예요?불명예지. 면담자 :그렇죠.호호호. 구술자 :또 그걸 내가 거 4 19날 때 그런 생각을 해 봤어요.그리고 나서부터 그 내가 젊었을 때부터 늘 해는게 나는 명예스러운 인간이 세상에 다 되겠다.그 그래서 나 난 아시다시피 내가 국회의원 하 는데 하는 동안에도 음 예를 들자면,언 언론의 지탄을 받거나 또 부정이나 불의의 관계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저는.아주 깨끗해요.그런 걸.그리고 그것 자체를 아주 죄악시를 해요 어.가난하고 깨 끗하고 청빈하고.그래 이 이 저,저게 조금 달라요.정치자금하고 저 이 부정부패하고는 조금 다른데, 예를 들자면 그 공직자들 그런 사람들은 청빈해야 되고,그래야 나라가 깨끗해지고,정치인은 정치자금 을 좀 써야 되니까,그래서 합법적으로 후원금이다 뭐다 이렇게 하는가,거기서 불의한 돈을 받았,받 았거나 또 불의하게 이 저 이권을 챙기거나 이건 안,안 된다는 생각해요.특히 저거는 일생을 살아오 면서 내 명예를 아주 송 소중하게 새 생각해야 된다는 그게 아주 딱 있어요.어릴 때부터 아주 어 명 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그런데 이 일을 나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안 많아요. 면담자 :그렇죠? 구술자 :응.별로 안 많아.그리고 명.명예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졌어요.지금.명예라는 게.예를 들자 면. 면담자 :명예가 권력? 구술자 :아 그것도 전혀 아니에요.권력은 아니에요.그래서 그 옛날 보면은 영국에서 신사도 하면은요? 자기 명예에 손,손상을 입었다고 해 가지고 격투,실 실 신청을 하고 이게 명예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중시한다 이거야.목숨을 걸고 결투를 할 정도로 명예를 중시하는 게 영국 사람들 인데.내 얘기는 한국사 한국에서도 명예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그런 사회의식이 이런 게 색 생겨나야 된다 이런 거지.그래서 내 아시다시피 저 내가 대우에 입,입사를 해 가지고 처음에 김우중 회장을 뵈어 가지고 처음 얘기가 회장님,회장님 저 미국에는요,미국에는 예를 들자면 강철왕 카네기, 자동차왕 포드,이 석유재벌 록펠러 뭐 이런 그 다음에 보험왕,무슨 저 은행왕 뭐 뭐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정치인들보다도 훨씬 존경을 받습니다.명예스러운 사람들입니다.그래 가지고 내 가 김우중 회장님한테 회장님!돈을 버는 것은 회장님 돈 많이 벌지 않았습니까?그러니까 기업인으 로서 국민들한테 존경받는 그런,그런 재벌이 돼 주십시오. 첫 마디로 그걸 얘기를 했는데. 면담자 :결국은? 구술자 :그런데,그런데 김우중 회장님의 세[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거기 첫 장 첫 구절에도 그 얘 기가 맨 처음에 나와요.내가 그래,내한테 한 얘기가 내가 어 저 대학교수나 성직자처럼 내가 사업하 는 사람으로서 나는 국민한테 존경을 받고 싶다 그 얘기가 처음에 나오는 거예요.

15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51) 면담자 :참.그 학교사업도 지원해 주시고 또 하시다가. 구술자 :많이 하셨지. 면담자 :그 마지막에. 구술자 :마지막에 저렇게 됐는데 이 기래 회장님한테도 정말 그 이 존경받는 그래서 회장님 우리 다음 세대에 교육적인 가치가 아주 중요합니다.나도 김우중이처럼 어 사업을 하고 싶다.나도 대우처럼. 면담자 :대우같은 기업이. 구술자 :기업을 키워 보고 싶다.이런 교육적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그러니까 회장님도 정말 이 저 존경받는 저 기업인이 돼 주십시오.네 회장님이 그 얘기를 중요하게 여겨 가지고. 면담자 :책에다가. 구술자 :그 다음에 그 책에도 그 얘기가 나와요.에 그래서 저 저 생각은 우리 사회에서도 저 예를 들면 그래요.이거 보면은 아 저런 사람이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데 부패 돈 먹었고 먹고 그러고도 떳떳하 게 말이죠.그렇죠?우리사회.그리고 또 국회의원 출마해서도 당선도 되고.그 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야 삼류 국가.그렇잖아요?안 돼 안 되는 그런 일이 한국에는 참 많았어요.어 그런데,이 이 이 이 사회에 그런 병폐 어 그런 폐해를 인제는 시정을 해야 되요 이제는.그래 가지고 정말 명예스러운 인 인간이 자꾸 나와야 된다 이거야.그게 제 어릴 때부터 신념이야 따지고 보면 신념이 그랬어. 면담자 :예.음 뭐 더 더 하실 말씀이. 구술자 :아니 됐어요.이제 힘들어요. 면담자 :어우 힘드시죠?예?거의 오늘도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말씀해 주셨고 오늘 쉬지도 못하시고 쭈욱 하셨는데 지난번에 두 시간 하고 해서 많은 시간 말씀 감사드리고요.저희가 이제 국가기록원에 서 영구보존 자료로 잘 관리를 해서 뭐 지금 지금부터 인제 소스가 되겠지만 연구자들도 있고 아니면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고 아니면 이 분야에서 관심 있는 뭐 다른 일하시는 분도 있을 텐데 와서 이런 걸 관심 있어서 보면서 볼 수 있게도 할 거고요.어 조 아주 소중한 말씀 남겨주신 것 잘 관리해서 활 용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네.고맙습니다.감,네 네.고맙습니다. 면담자 :예.고맙습니다.예.건강하십시오.

158 15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면담후기 1차면담에서 어느 정도 라포(rapport)를 형성해 둔 터라 2차면담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2차 면담에서는 6 2시위부터 6 3시위의 전반적인 상황 및 6 3항쟁이 구술자에 인생에 있어 미친 영 향 등을 중점적으로 구술했다.Tape2는 거의 구술자의 학생운동 이후의 삶,즉 유신반대운동 및 국회의원,대우그룹 이사로서의 생활 등에 대해 구술을 했다.구술자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6 3의 영향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차 때보다 짧은 시간 면담을 했으나,사전에 들은 바대로 구술자의 건강이 여의치 않았는지 목소리가 떨리거나 갈라지는 등 건강상이 이상신호 가 간혹 보이기도 하였다.다행히 면담을 무사히 마쳤으나,앞으로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구술 자들이 많아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시급한 사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53)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3항쟁 주요사건 구 술 자 이수용 면 담 자 신동호 면담일자 (토) 면담장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면담차수 1차

160 15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이 수 용 (한 자 : 李 壽 勇 ) 면담자 성 명 : 신 동 호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촬영자 성 명 : 정 선 호 (소 속 :와인미디어) 녹취자 성 명 : 박 재 홍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및 장소 1차 (토)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2차 3차 산출물 녹화테이프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2개 1부 1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면담상황 설명 주말 인터뷰의 시간상 제약에도 불구하고 6.3항쟁과 학생 운동의 당위성에 대해서 인터뷰 진행기간 동안 상당히 적극 적으로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구술에 응해주셨다. 비고

16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55)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이수용 (한자) 李 壽 勇 나이 68 자택 :서울시 종로 통인동 주소 생년 월일 전화번호 : , 직장 : 전화번호 출생지 경남 결혼연도 1971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김천덕 모 세 가족 전민영 처 1948 꽃집경영 60세 이현경 녀 1987 학생 21세 구혜초등학교 졸업(경남 함안 대산) 학력 마산동중학교 졸업(경남 마산) 마산고등학교 졸업(경남 마산 -59)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60-67) 학생운동 참여 2.약 20여년 재야 민주화운동(3선개헌반대 및 반유신운동) 3.신민당 정책실 상공전문위원 4.신민당 당보 민주전선 주간 주요 약력 5.민중민주당 정책실장 6.6.3동지회 사무총장,상임부위원장 7.한나라당 새정치 봉사단장 8.(주)연산건설 대표이사

162 15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6 3,4 19,3 15,5 16,김종필,민통련,한미행협,3 24,민비연,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제2차민비연,괴소포,YTP,학원사찰,5 20,민족적민 주주의 장례식,문리대,단식농성,계엄령,불꽃회 사건,내란음모,평화선사 수,한일회담,재판 상세목록 Tape 항쟁 참여 배경(00:00-16:19) 시위 참여기(16:20-29:33) 3.괴소포,YTP,학원사찰(29:34-34:0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시위(34:01-38:16) 5.서울 문리대 단식농성과 6 3데모(38:17-58:50) Tape2. 6.몰로토프 칵테일 사건과 내란음모 사건(00:00-14:26) 7.감옥 생활과 재판 과정(14:27-22:23) 8.6 3항쟁 이후 삶의 변화(22:24-42:53)

16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57) 5)예비질문지 이수용 선생님 항쟁 관련당사자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시위를 주도한 세력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2.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3.당시 정국에 대한 이 선생님과 주변의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시위와 그 후 벌어진 시위에서 주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시위 준비 및 실행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그들이 한 역할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김중태가 조직과 고려,연세 등 타교와의 연락 등 중심 역할을 하고 현승일이 현장 지휘,최혜성이 자 금,김도현이 선언문 등 문건 작성을 분담,한 학년 아래인 박삼옥 박용한,김헌출,전계수,이현배 등 도 각각 역할을 맡아.-6.3동지회,6.3학생운동사) 시위 준비와 실행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7.시위대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는데,이 선생님께서는 그때 어디에서 무엇을 했나요? 성토대회와 3.26시위 등 3.24이후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이 선생님께서 하거나 겪은 일을 기억을 말씀해주십시오.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9.4월 들어 괴소포 사건과 서울문리대에서 4.17한일회담성토,4.19영령추도식,4.20(4.19네 돌 기념식), 4.21시위 등 집회 시위가 계속됐습니다.이때의 상황과 역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10.당시 학원사찰과 YTP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164 15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기획하게 된 배경과 계기,준비 과정,그리고 이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애초 황소식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아이디어의 출처,5월 16일에서 20일로 거사일 변경 사 유,대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이하 연합회)의 조직에 관한 사항 등) 12.시위 현장을 언제 떠났으며,떠나기 전의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원래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로 했는데,이는 누가 진행하기로 했습니까?) <4>문리대 단식농성과 6.3사태 13.김덕룡이 주도한 난국타개궐기대회,5월 29일부터 전개된 서울 문리대 단식농성 때 어떤 역할을 했 습니까 시위 때 어떤 역할을 했으며,그때의 경험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6월 3일 일제 거사 계획은 투위 지도부가 미리 설정하고 확산한 것이었습니까,아니면 지도부 와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5>민비연 사건 계엄령 후 어떻게 도피 생활을 했습니까. 16.불꽃회 사건에 연루되었는데,이와 관련해 어떤 조사를 받았습니까 사태로 구속됐다가 공소취하로 석방된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1964년 9월 12일 서울지검에서 3.24,5.20,6.3데모 등을 주동타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으나 검사의 공소취하로 석방된 사실이 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있음) 18.2차 민비연 사건 때 내란음모 혐의가 적용되는데요,주로 6.3동지회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3동지회의 결성 과정과 1965년 한일회담 조인 및 비준반대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 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왜 6.3동지회에서 혼자만 기소됐습니까.) 19.내란음모,내란선동의 빌미가 된 구국학생총연맹은 실제로 조직하려는 논의가 있었습니까.

16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59) (1965년 7월 18일부터 서울문리대 천문기상대 옥상 휴게실 등에서 김중태 최혜성 진민자 이수용 신춘자 이원범 등이 회합한 것으로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음) 24.폭발물 제조 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까. 25.체포된 과정과 구속,재판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경험을 말씀해 주십시오.

166 16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녹취문 이수용 선생님 Tape1. 면담자 :지금부터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싼 그 6 3항쟁(6.3민주화운동, )에 주도적으로 참여 하신 이수용 선생님에 대한 구술을 시작하겠습니다.그 지금은 2008년 11월 22일 10시10분이고 장 소는 서울 운니동 현대사기록연구원 사무실이고 면담자는 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 신동호입니 다. 면담자 :원래 그 선생님,그 함안,고향이 함안이신데,어떻게 해서 그 마산을 거쳐서 저기,서울대 정치 학과에 61년도에 입학하셨죠? 구술자 :60년. 면담자 :60년 예,고렇게(그렇게)된 거고. 구술자 :(기침을 한 뒤 미소를 띠며 잠시 생각에 잠김)음,그 참 너무 오래된 일이고 한데,촌놈이 서울 에 올라오느라고 참 애썼지.뭐 애썼는데,사실은 정치학을 하게 된 건 사실은 계기가 좀 있었어요. 음.내가 고등학교 때 그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관념철학이랄까,뭐 철학책 같은 거,그 당시에 뭐 실 존주의도 있고 여러 가지 새로 나오기 시작했거든,그런 책들을 우연히 좀 많이 접했어.그러다 보니 까,(기침)그 어떤 진실이다 정의다 카는 게(하는 게)파워가 없이는,음 몽땅 헛것이다는 그런 어떤 생각을 도달하게 돼가지고 파워가 작용하는데 가장 어디가 좋은가를 따져 보니까 정치학이더만.그래 서 정치학과를 재차 지망을 해가지고 처음에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고집을 부려서 아버지는 법대를 가라고 뭐 난리를 쳤지.난 굳이 정치학을 하게 된 이유 거기에 그 그냥한 건 아니고 파워를 음 어떤 정의다 뭐 실현 할라며는(할려면)파워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글로 가게 된 게 그 계기고 그. 면담자 :그 그때,4 19(4.19혁명, )나 3 15(3.15부정선거, )나 그거 하고는 그때 이미 졸업 하셨을 때죠. 구술자 :아니죠,그.3 15때는 서울에 있었으니까.난 1학년이니까.음,4 19를 1학년 때 맞이한 거 지.맞이해서 한 1년 동안 4 19이후에 그도(거기도)참여하고 선배들하고 같이 한 1년 동안 소위 4 19활동이 거의 음 6.61년도에 저기 나잖아.아 5 16(5.16군사쿠데타, )이 나기 전까지는,음 4 19활동이 계속 되거던.소위 민통련 (민족통일연맹)이다 뭐 남으로 오라 북으로 가자 음 그런 정도 요즈음 말로 하면 진보적인 거라 걸까,좀 좌 적이라 그럴까,하여튼 그런 행태의 운동이 한 1년 동안 계속 됐고 그러다가 내가 인제 에.61년 초에,음 군을 갔어 면담자 :아 그렇습니까? 구술자 :군을 가서 소위 61학번들하고 합류하게 되는데,군을 가게 되는 계기가 응 소위 학생들은 참 순

16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61) 수한 마음으로 그 혁명을 했는데 그 당시 민주당 정권이.그 내각제 아니었어요.내각제가 지금도 아 마 그런 결함이 나타날 거다마는,파벌이나 부패 예상이 극에 달했다고,그걸 보면서 약간 회의를 느꼈 어.그러면서 정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군대를,그 통에 군대를 갔다 오자.군대를 가서 군에서 5 16을 맞이했지.그래서 음 그 다음에 계속 이야기를 쭈우욱(쭉)하까(할까).음,그러니까 한 1년,우 리가 그때 학번으로는 1년 반이야 1년 반이니까,61년,62년 후학기에 복귀가 된다 말이야.62년 그러 면서 그때는 박정희 군사정부 치하이지.그럴 때에 에.(기침),우리 문리대에서 그때 JP(김종필)를 함 불런 적이 있어요.JP불러 가지고 JP에 대한 그때 그 문리대가 통일 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어요. JP의 그 과거 경력이나 여러 가지로 볼 때 JP가 아 그때는 민족주의의 유행이었거던.우리민족을 위해 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 아니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상당수가 있었고,그건 아니다 저거는 사 이비다 하는 쪽으로 나중에 정리가 돼 가는데 초창기에는 상당히 그래서 음 JP쪽 지지하는 애들도 많 이 있었어요.나중에 그 정리가 되어가지,거 거의가 이 4 19.를 계승했다 그럴까 그런 거,진보적인 맥락이 이 문리대에서는 쭈우욱(쭉)흘러왔거든,계속 흘러 왔는데 JP를 거기에 부합 하는 걸로 처음에 는 혼돈을 좀 했었다고,하다가 나중에 인제 6.2년 말 63년경에 정리가 된다고,아 저거는 군부 쿠데 타 완전히 쿠데타로 반 반동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가 나중에 된다고 그게,그때 사상계에 이영일씨 같 은 분은 동의하는 글을 쓰기도 했어.예를 들면,그 혼란이 좀 있었다는 얘기지(입에 손을 갖다되며 기 침)혼란이 많이 있었어. 면담자 :정치학과 이영일씨? 구술자 :이영일씨,내 선배지 두해 선밴데,그니까 주로 4 19정통파는 그 민통 (민족통일연맹)남북통 일을 향한 민통 이 주류고 잡다한 세력들이 또 얽혀 있었으니까,생각이 하여튼 생각 흐름 이런 주류 는 민통 이라고 봐야지.그 선배들이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계속 후배들 하고 연계를 맺고 이렇게 돼 오고 있었지.그런 과정에서 63년경에 에 63년도 될 거야 그때 한미행협 (한미행정협정)그 반대,반대,개정반대,뭐 하여튼 하여튼. 면담자 : 행협 데모 6.8시위(한미행정협정체결 데모, )는 62년도. 구술자 :62년도인가?아아 그런가,내가 잘 기억이 연도가. 면담자 :62년도는 저. 구술자 :연도,연도가 정확히 잘 모르겠어.행협 반대지.정확한 명칭도 내가 기억이 안 나는데,하여튼 그때 미국 놈들이 그 뭐 우리 여자애들 오리라고 오인해서 쏘고 빨래하는 여자애들 말이야,이런 일들 이 벌어지고 그래 머리 깍아서 뭐 어떻게 하라는 린치도 있고 여러 가지 반미가 문리대에서는 상당히 강했다고 봐야지 그때 한미행협 반대하고 또 한편으로는 애들이 (기침) 면담자 : 행협 체결을 촉구하는? 구술자 :체결을 촉구 하는 거 였나? 그 당시에? 면담자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구술자 : 행협 이 한미행정협정이 제대로 체결이 안된 상태였던가 보네.개정이 아니고(웃음)그렇지 그 런 모양구만,그런 시위를 하고 인제 상의도 하고 선후배끼리,그러고 한편으로는 애들이 그때 시골서 올라온 가난한 애들이 많았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전체를 상대를 포함한 전체를 근로 학생회 카는(라고

168 16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하는)거를 조직해 가지고 상당히 그 꽤 활발히 움직였어.그것도.그게 아마 64,63년경 되는 구나.그 러고 인제 뭐 41(4 19)근게 이게 이 3 24( )란 게 뚝 떨어진 게 아니고 4 19의 그런 전통, 문리대의 그런 흐름,이런 것이 합쳐진 거지.3 24일 날 그날 아침 시위도 급조 되었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그냥 모이자 하자 더 나아가 그전에 저런 일이 있었어.(기침)그 민비 를 만들었거든 민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가 63년인가 정치학과 중심으로 다른 과들도 포함시켜서 만들었어.내 또래들이 주로 만들었지.60년생들이 주로 만들고 그때 60년생 졸업을 두고 앞두고 있는 거고 23),나는 복귀해서 니까 늦고 좀 고런(그런)상태는 친구들이니까, 민비 를 만들고 내가 그때 민비 에서 저걸 강연 했어. 한일회담 한일회담 의 동인 추진동인,그전에는 무슨 그런 식의 문구가 유행 이었어.추진동인 뭐 이 런 식으로,(웃음)그래 가지고 강연했는데 그 내용은 저런 거야.그 당시 조류에 맞는 얘긴데 한일회 담 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미 일이 짜고 미 매판 세력을 끌어들여서 저 거 필요에 의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그니까(그러니까)우린 몽땅 손해만 가고 있다.이런 내용이 아마 주로 됐었지 않나 싶은데.(손을 입으로 가져다가,기침)그땐 그런 생각이 뭐 그런 생각이었으니까,그 런 민비 를 통해서 강연도 하고 뭐 이래저래 모여서 맨 날 얘기를 하는 것이 좀 진보적인 얘기를 이런 걸 많이들 하고 있었던 거지.그런 차에 한일회담 을 계기로 해서 에. 한일회담 자체를 저거를 무산 시켜야 된다는 생각도 있지만,음 동시에 그건 박정권의 바탕이 되니까 박정권도 저것도 무너트려야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작용 같은 거야.같은 거야.한가지인데 에. 한일회담 을 계기로 하는 게 좋겠 다.요런 생각으로 대강 정리가 되어 있는 거지 그 당시에 음. 면담자 :이제,앞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처음에 저 정치학과에 입하시고 민통련 활동이 있었. 민 통련 에 회원으로 참여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때에 참여는 물론 했는데,1학년이니까,아 선배들 얘기 듣는 정도로 정치과 회의실이 있거 든,과실,과실,과 회의실이나 과가 있는 거기에 에.한해 선배들이나 두해 선배들 뭐 다 그 당시에 뭐 얘기하고 뭐 그런 거지.그 조직이라 카는(하는)거는 잘 모르겠고 조직 상태는 너무 느슨하다고 봐 야 되겠지.그런 상탠데 그때 인제 한해 선배들 중에는 박한수,배춘실 이런 사람들이 이론적인 리더그 룹들이야.그 위에 인제 윤식이 이영일이,그 위에 유근일 24) 이런 식으로 쭈우욱(쭉)이렇게 음 있는 데,대게 그때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했으니까,아.저쪽 김일성이가 남북을 통틀어 정통성을 갖는 것 이 옳지 않았나 생각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애.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애. 면담자 :인제 고(그)다음에 민비연 같은 경우에 그때 주로 동기들이 주축이 되어서,입학동기가 주축 이 되었었는데,거기에는 뭐 어떤 식으로 참여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 내 직함을 몰랐는데, 연구부장이라고 맨들어(만들어)놨더라고,(웃으며 말함)그래서 뭐 그 런가보다 하고 나는 그랬는데,그냥 뭐 상의하고 그랬으니까,그 나중에 보니까 연구부장으로 되어 있 더라고,그래서 뭐 발표하고 그랬었는데,에. 민비연 이라는 게 민족주의 비교연구거든,그 당시에는 컨피터티비 애널리스 25) 이니 컴피터티브 어프로치 26) 같은 게 유행이었어.비교연구가,민족주의를 그 23) 여기서 60년생이란 60학번을 지칭. 24) 지금은 류근일(전 조선일보 주필)로 표기함. 25) comparative analysis

16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63) 만하면 좀 냄새가 강하니까 비교를 부치면 냄새가 좀 죽는다.그런 것도 있고 비교연구가 일종의 유행 이었어. 면담자 :흔히 인제 민비연 을 그 저 6 3그 학생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많이 얘기하는데,선생님은 그 당시에 그 어떤 식으로 얘기를 했어요? 구술자 :그 맞죠.아 이론적인 문리대의 말이 좀 어쩔렀는지 모르는데,문리대의 이론적 지지를 바탕으 로 해서 전국 대학교의 학생들이 따랐다고 봐야지.아무래도 안 그러면 안 되는데 문리대의 그 진보성 에 비해서 고려대학의 경우에는 진보와 보수 요즘 말로 하면 분리되어 있었고,진보 쪽이 최장집 교수 나,지금 음.서진영씨라고 또 있어,그런 쪽이 있고 고대에,그 다음에 박정훈이나 이경우 해서 고대 그 다음 애들은 대게 보통 보수적인 애,진보적 생각까지는 이르지 않은 사람들이고,연세대쪽은 주로 보수 쪽이고 타 대학들도 거의 보수 쪽인데,이런 요인은 있어요.내가 그때 주로 한 일이 그 지방조직 관계,내 부산을 몇 번 왔다 갔다 하고 그랬는데,에.지방에도 그 민통 (민족통일연맹)의 뿌리들이 남 아 있었거든.그 선배들이,그래서 그 사람들이 후배들을 리더하고 이러니까,아.후배들이 아직 따라 가지는 못 해도 그런 진보성에 이끌려 가고 있는 상태였다고 봐야지. 면담자 :근데(그런데)인제,처음에 3 24( )는 상당한 준비를 거쳐서 3개 대학이 동시에 했다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그 처음에 3 24이전에도 뭔가 어떤 운동을 만들어 낼려는 활동이 꾸준히 있 었던 걸로? 구술자 :예 쪼금,뭐 크게 있었던 건 아니고,각 대학들 리더그룹들하고 내가 지금 기억나는 건 동국대 앞 무슨 중국집이던가 해서 애들 만났던 기억이,장장순이랑 이렇게 만나서 얘기한 기억이 나는데, 에.고대 쪽에는 사실은 내가 고대에서 4 28데모에,내가 참여를 했어.고대 4 28데모에 참여하고 고대 앞에서 자고 4 19때 일로(이리로)왔는데 27),그래서 고대 쪽에도 이런저런 연을 좀 가져있고,뭐 이래 저래 하긴 했는데 특별히 뭐 큰 활동은 아니고. 면담자 :예,지방 그 부산 쪽으로 간 시점이던 3 24에 대한? 구술자 :그 그 이전에도 가고 그 이후에도 갔는데 3 24를 꼭 위해서 간 건 아니에요.그냥,이.저런 아까도 내가 얘기(이야기)했지만 박정희는 안 된다 쿠데타라는 결론을 가져 있었으니까,뭔가 뭔가는 어떻게 해 놔야 되는데,그 논의지 인제 꼭 건가(그런가)좀 너무 추상적이라 그럴까,사건중심으로 움 직인 거는 아니고. 면담자 :부산에 간 게 그 어떤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가신 겁니까?아니면 어떤 여러 가지 어떤 논의를 거쳐서 역할분담이 되어서 가신 겁니까? 구술자 :그 나중에는 역할분담이 되었고 나중에,나중에는 역할분담이 처음에는 꼭 역할분담이라기 보다 가 어.선후배들 돌아보기도 하고,뭐 얘기도 하고 그런 형태였지. 면담자 :인제 구체적으로도 3월 24일 날,64년 3월 24일 어 동시에 시위를 한다.그 계획을 그 안 시점 이 언제쯤인지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그 나는 지금 기억이 없네(기침).(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서)그건 나 잘 모르 26) comparative approach 27) 여기서 4.28데모는 4.18데모를 잘못 말한 것.

170 16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겠어. 면담자 :그때 당시에 그 김중태씨가 주축이 돼서 이걸 준비 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그 김중태씨 그룹 들 있잖습니까? 구술자 :(머리를 끄덕이며)음 그분들. 면담자 :그분들하고 언제부터 같이 이렇게 여러 가지 논의를 했는지 좀 기억하십니까? 구술자 :(몸을 좌로 약간 흔들면서 눈을 지그시 감으며)그 난 그런 날짜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그런데, 그 소위 중태그룹이라 하며는(하면)중태(김중태),도현(김도현)이,현승일이 최혜성이 송철원까지,나는 주로 현승일이 하고 행동을 많이 했는데,에.그거를 꼭 (코에 손을 가져가면서)그룹이라 뭐 그럴 것 도 없고 응 약간 학생회장 선거라던가 무슨 운동을 하는데서 이.약간 파벌성이라 그럴까,약간은 있 었지.그 당시에 예를 들면 경북고 중심이라든가 아니며는(아니면)서울에서도 경기,서울의 대립이라 든가.이런 약간은 있어가지고 그렇긴 했는데,난 그런 걸 별로 느껴 보지 못했는데 사후에 분석해 보 면 그렇다 말이지.그냥 뭐 이래 선후배들인가 친구들인가 어울려서 얘기하는 정도지 조직적으로 꼭 꼭 무슨 해야 되겠다는,조직적으로,예를 들면은 행협 (행정협정)촉구 뭐 그것도 그렇고 그냥 얘기하 면서 하고 뭐 공부도 하고 시위도 하고 뭐 그런 식이다 말이야. 면담자 :그 당시에 인제 뭐 정치학과로 오셨다고 해서 다 6 3항쟁 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거는 아닐 텐 데요? 구술자 :없지.물론이지. 면담자 :그 동조는 했겠지만. 면담자 :다는 아니고,그 상당히 소수야.우리 때만 해도 이 4 19에 참여를 한 친구도 나.정도가 좀 특별하고 나중에 인제 나중에 다 (고개를 끄덕이며)참여하는 식으로 박범진도 참여하고 박범진도 상 당히 깊숙이 전적으로 그 참여를 했지.데모 현장에 직접 나갔던 사람은 아마 내 동기 중에는 내뿐이 지 않나 싶은데,그리고 이종률이 지금 죽었는데,이종률이도 아주 나중에 이래 참여하고 민비 (민비 연)를 종률이가 나중에 발동이 걸린 거지.말하자면 민통 (민통련)이 움직이고 하면서 아 이게 안 되겠 다고 생각 했나 해서 민비연 을 만들 때도 종률이가 주축이 되어서 해서 만들었거든,종률이가 그때 따랐고,그 외에는 별로 보이질 않아,우리 동기 중에는 내 동기가 중간에 낀 세대야.쉽게 말하면,6 3이나 4 19고 낀 세대 아니야.고렇게(그렇게)되고 6 3학생운동을 통해서도 뭐 내 동기 중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봐야지.그런 상태에 (웃으면서 왼손을 좌우로 휘 저으며)내가 낀 세대로서 아래 위를 왔 다갔다한 꼴이 되어 있는 거지 말하자면. 면담자 :그렇게 된 뭐,좀 특별한 뭐,개인적인 동기나 뭐 계기 같은 게 있었습니까? 구술자 :그 (생각에 잠기며)그게 뭐라고 할까,그게,특별한 게 군대 갔다 오니까 늦었고 늦다 보니까 지금도 내가 보며는(보면)후배 애들하고도 뭐 친구처럼 그냥 후배 놈들이 그냥 선배(웃으면서)라 소리 도 안하고 같이 지내거든,친구라 지낸다 말이야,한해 후배 놈들이 선배들,전부다 친구라 말이야.후 배 애들이 친구가 많다고 살다보니까,감방도 같이 댕기고,이러다 보니까 그렇게 돼 있는데,음 특별 한 거는 없었던 것 같애.그런데 약간 이런 거,말로하자면 60년 입학생들이 그 문제의식이 약했던 것 같애.이 지내 놓고 생각을 해보면 다들 뭐 그 심지어 말리기도 하고 했는데,고시를 치를려고 하고 뭐

17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65) 외무고시 볼려 하고 사법고시 볼려고 하고 야 임마 그럴려고 하며는(하면은)법대를 가지 미칬다고(미 쳤다고)일러(이리로)왔나. 그러고(그렇게)말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문제의식이 좀 약해.고런(그런) 낀세대니까 고렇게(그렇게)됐을 거야.(옛생각이 나는지 호탕하게 웃음) 면담자 :3 24시위때 그 준비과정에 구체적으로 무슨? 구술자 :난 한거 없어. 면담자 :(의자에 옆으로 기대면서)(기침)역할을 맡았다? 구술자 :전혀 기억이 없는데.(기침)그날 아침에,데모 하여튼 대로에 그때 몇 시쯤인가 모르겠는데,시 간이 일찍 이른 시간인 거 같은데,한 10,9시 반이나 같은데,내 (오른손을 허공에 가리키며)그 때 당 시에 하숙을 문리대 바로 뒤에서 하고 있었고,어 무슨,그니까 또 후배들 (오른손을 허공에 돌리면서) 중태 한해 후배들이니까 내 하고 직접 교섭이 없었던지도 모르겠고,하여튼 데모 현장에 나가니까 중 태가 담뱃불을 뭐 뭐 그때 이께다 무슨 망령 해 갖고 불 지른 장면이,기억나는 게 중태가 뭐 뭐 여기 가 담뱃불을 던져라 해쌓고(하고 있고),하여튼 선동을 잘하더라고,한데 그건 특별한 기억이 없어. 면담자 :3 24그때 인제 그 이께다와 이완용 허수아비를 화형식을 하고 가두진출을 했잖습니까?그때 그 현장에 인제 계속 계셨습니까? 구술자 :가두진출을 하고 계속,계속 아마 있었을 거야.현장에 있는 게 아니라 데모를 같이 했지.같이 하다가 뭐 도망가고,그게 일이지 뭐,3 24그때 현승일이가 격문을 갖다 붙이고 뭐 하고 해쌓는데(하 고 있었는데),현승일이가 글을 잘 썼어.격문을 참 잘 썼어.한문을 말이야,격문을 붓으로 쓴 것 같은 데 참 잘 쓴 거 같아.지금 명필인 것 같애.음 (웃음)내용은 기억 안나고.(기침)주로 승일이하고 상 의하면서 뭐 일을 했던 것 같은데,3 24이후에는 계속 현장에나 가두에 있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계속이지.안 그러면 치안본부나 뭐 안기부에 안기부 한 20차 갔을 테니까 하여튼 날보고 안기부 놈들 이 그랬어,저렇게 끈질긴 놈 처음 봤다 그랬으니까.그런 식으로 뭐 각종 작고 큰 데모들이 계속 되잖 아 그다음에 무슨 평화선 수호(1965년)뭐 별걸 자꾸 만들고 왜냐하면 불씨를 살려나갈려고 하며는(하 면은)하다보니까.애들이 하다보면 빠지기도 하고 뭐 기가 꺾이기도 하고 저 짝(쪽)에서 군부에서 협 박을 가하면 꺾이고 그러잖아.그런 통에 살려서 연장해 나갈려고 하다 보니까 항상 그쪽에 현장이든 그쪽으로 도는 거야.그래서 아마 내가 그 이후에 두 번,세 번째가 마지막 그게 간 게 세 번째인가, 마지막 가서 10달 이상 있었던 게 세 번째,소위 말하면 그게 제2민비연 (몰로토프칵테일 사건,1965 년)그 전에 한번 가서 2~3달 있고,그 전에 또 한번 가서 그 전에 맨 먼저 한 달 정도 있다 나오고 이랬던 거 같애.동대문서에서 잡혀가면 그 현장에 있다가 어느 건인지 난 구별을 잘 못하지. 면담자 :지금 기록에 나와 있는 거는 저기 9월 달에 64년 9월 12일? 구술자 :(의자 옆으로 기대며 생각에 잠김)64년 9월 12일이면 그게. 면담자 :6 3나고 난 뒤에? 구술자 :그러니까 마지막 잡혀간 거 아니야 그때가 면담자 :그 마지막 잡힌 건 그 다음해 였죠. 구술자 :65년도.소위 제2민비연 사건 이라는 게 면담자 :몰로토프칵테일 사건

172 16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게 65년도에 잡혀가서 66년도에 나온다는 말인가.난 그걸 잘 기억을 못 하겠어. 면담자 :예 근데,그전에는 기록이 없어요.아마 제가 볼 때에는 3 24이후 과정에서 뭐 연행돼서 뭐 유 유치장에 있다가 나왔거나 그런 것들은? 구술자 :여기 보니까 기소중지 뭐 그런 있잖아. 면담자 :그건 63년(64년)계엄령 나고 했는데 그 검사가 공소 취하를 했는데 그때는 아마 거의 정리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애요.그때는 9월12일 같으면 인제 계엄도 해제된.고? 구술자 :계엄이 해제 되었을 때. 면담자 :해제된 후 그동안 검거가 안 되었거든 거죠.계엄이 해제 된 후에 검거가 되었으니까,고거는(그 거는)좀 차차 말씀을? 구술자 :그건 관계가 없어.근 주로 내 집에는 형사들이 죽 치고 있으니까 집에는 못 가고 바깥에 댕기 거나(다니거나)감방을 가는 게 그게 일인데,기억이 잘,내가 송철원이 조사해 봐라 하는데 어디 가서 조사하는 건 그렇고. 면담자 :기억을 살리는 의미에서,고(그)시간대별로 해서 3 24 시위가 나고,그 시위가 인제 그 달 3 월말까지 이어지는데요.그 4월 달 들어서 약간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초에 괴소포사건 이라든가. 구술자 :그때 YTP폭로사건(YouthThoughtParty, 靑 思 會 ) 면담자 :YTP와 관련된 여러 가지 소문. 구술자 :괴소포는 뭐 인제 중태한테 그때 온 거고,어.YTP는 폭로사건은 송철원하고 내하고 문리대 정원에서 했지.했고,뭐 그다음에 4 19무슨 몇,제 몇 회. 면담자 :4 19영령추도식. 구술자 :응. 면담자 :4 19몇 월 기념식 이런 것들 구술자 :그런 걸 현승일 총장하고 나하고 주로 많이 빠졌어.그때 소강상태로 들어갔으니까 억지로 해갔 고(해서)시민들 끌고 나오고 이런 짓도 하고 그랬는데.그리고 또 다른 대학 학생들하고 연계를 위해 서 수준을 좀 낮추어 가지고 평화선 수호 뭐 투쟁위원회(평화선사수투위 결성, )이런 것도 하 고,이런 식으로 어 간헐적으로 밖에 안된 것 같애.그러면서 잡히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뭐 모르 겠어.언제 잡혀서 가서 터진 건지도 지금은 기억이 없지만은 치안본부 분실 혹은 안기부 분실 보안사 분실 이런데 뭐 지금 그 위치를 기억을 그 위치 지금은 없지.(손으로 가리키며)없어졌는데 남대문 근 방 광화문에 초동에 종로 5,6가에 정보 분실 이런데 뭐 수시로 끌려 갔으니까 모르지. 면담자 :송철원.학원사찰 조사위원회를 같이 하셨습니까? 구술자 :나는 그거를 잘 몰라 사실은,그 YTP 란 얘기도 듣고 그런 사람이 누구가 있다는 것도 뭐 대략 지금도,그 이름도 대략 기억나기도 하지만은 YoungThoughtParty (YouthThoughtParty)인가 뭐, 종필이가 자기들 하부세력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얘긴데,으음(의자에 뒤로 기대며)또 내가 날 가까이 했던 선배가 정치학 선배 하나 있는데 그 양반도 나중에 보니까 기라고(그렇다고)그러더라고,난 그것 도 몰랐지.촌놈이니까,응 그래 보니까 나중에 송철원이 린치 당하고,뭐 이러면서 그게 많이 알려지 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거는 그냥 그 행사만 같이 뭐 참여하고 뭐 그런 거지.구체적인 건 잘 몰라 사

17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67) 실은. 면담자 :그 당시에 어떤 괴소포를 보내고,뭐 YTP 조직 이런 것도 조직을 기도하고 이랬던 걸 보면은 당시 그 학원사찰이 학원에 대한 심했던 것 같은데요.꼭 그때 그게 아니더라도 학원사찰과 관련해서 좀 기억나는 그런 일 있으면? 구술자 :학원.사찰.정도가 아이고(아니고)우리,나 같은 경우에 말하면 나는 항상 그 따라 붙어 있 었으니까,짚차 한 대가 안기 저기 안 안기부 정보부에서 늘상 각 따라 다녔으니까 늘상,그 뭐 그건 뭐 우리 집이고 내가 가는 데는 다 따라 당겼으니까(다녔으니까).근께(그러니까)사찰 정도가 아니지 사찰 넘지 넘고,으음 뭐라고 거 얘기해야 되네.그건 자기들 집권하는 데는 이건 뭐 눈에 응 가시 정 도가 아니지 이건 없애,없애야 되는 인물이야. 면담자 :고(그)다음에 그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대해서 좀 기억나는 것을 말씀해주셔야 되는데요.배 경이라든가,계기,준비과정 그리고 이 선생님이 맡았던 역할.이런 거와 관련해서 좀 기억나는 대로 한번 쭈우욱(쭉)말씀해주셔. 구술자 :그것도 사실 그때 문리(문리대)그건 소위 김지하가 주도를 했다고 봐야 되는데,나는 직접 그 거기서 뭐 맡아서 핸(한)건 없어 그 그때가 문리대에서 인제 단식을 해가지고 단식을 해서 새롭게 불 씨를 지피는 일을 하고 있은 거지 말하자면. 면담자 :단식은 고(그)다음으로 제가 알고 있고요. 구술자 :단식 이후에 단식 그걸 가지고 5 20(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을 한 거야.거기 거꾸로 알고 있 는 것 같은데? 면담자 :예 예 단식은 5월 30일부터. 구술자 :고거는(그거는)(왼손을 펴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제2차거나 뭐 그럴 거야.먼저 단식을 해가 지고.거기서 불씨를 부쳐가지고 5 20을 하게 된 거,내가 틀렸는가?5 20전에는 단식이 없나? 면담자 :단식은 민주적민주주의 장례식 을 하고,고(그)다음에 이 한학련 이라고 학생회장단,전국학생 회장단에서 궐기대회를 5월 25일 날 하게 되고요.고걸(그걸)그러면서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하면서 김중태,현승일,뭐 김도현 이런 분들이 수배 되잖습니까.그래서 다 지도부가 사실 보면 공식적으로 활동 구술자 :와해되는 면담자 :못하는 그런 시점에 학생회장단이라는 공조직들이 학교 공조직들이 거기 궐기대회 하는데 그게 좀 그런 고비가 있었고,그걸 이어받아서 나중에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인제 문리대에서 단식을 시 작 하죠.그게 나중에 6 3( )까지 가는 거구요. 구술자 :아.그렇게 되는 거 일이 거꿀로(거꾸로)기억하고 있네.아 그건 난 단식이 먼전 줄 알았더니 지금 기억이 그러네.그때는 5 20때는 그 그때도 내가 동국대 애들하고 5 20을 위해서 그 동국대학 애들하고 그때 중태도 있었나.같이 동국대 중국집에서 술 먹으면서 얘기 했던 게 그건가? 면담자 :그런 정황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술자 :그런,그런 면담자 :동국대하고 접촉한 그런.

174 16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런 면담자 :근데 인제. 구술자 :잘 모르겠네. 면담자 :그 장례식하는 문리대 교정에서 그 뭐 사람들이 모여서 뭐 관,관을 메고 인제 시위를 위해 들 어가는 그런 현장에는 그때 그 없었습니까? 구술자 :현장엔 잠시 있다가 잠시 있다가 없어젼(없어져)없어지고 사후에 점검하러 갔다가 잡혔어요. 다 끝난 이후에 (입가에 미소를 띄며)주로 바로 현장에만 뛰기보다는 좀 뒤로 빠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는데,나중에 점검하러 가다가(갔다가)잡혀가지고 동대문서 끌려간 건,실컷 얻어맞았는데.(웃음) 면담자 :그럼 그때 동대문서 가서 조사를 뭐 받은 기억들이 좀 남아? 구술자 :음 고 앞에 파출서에서 잡혔는데 문리대 앞에 파출소가 있었는데,거기 들어가서 얻어 터지고 나서 동대문서로 가서,뭐 빨리 나갈라면 하여튼 주모자 쪽에서는 빠지는 것이 뻘리 나가는 길인데,그 때 빨리 못 나갔던 것 같으네,그때 아마 꽤 꽤 한달 가까이 잡혀 있었나 모르겠네.그 잘 모르겠어. 좀 있었던 것 같애,금방 못나가고. 면담자 :한 달까지는 안 되는 것 같고요..그 다음에 문리대 단식이 그 시작이 되는데요.5월30일부터 시작이 되는데,그 단식하는 현장에도 가 봤을 것 아닙니까? 구술자 :아 아니 단식하는 현장에 처음에 못 가고 나중에 갔어.나중에 그게 한 1주일이나 이래 지나고 간 것 같애.내 생각에.고대 쪽으로 해서 어디서 와가지고 내가 그 현장에 갔던 것 같은데,지금 어스 름 어스럼 하네.기억이. 면담자 :예 단식 현장에서 뭐 좀? 구술자 :내가 특별하게 한 건 없어요. 면담자 :근데 그 보신 거 중에 기억나는 거 없습니까?그때. 구술자 :주로 지하가 이끌고 있는 것만 기억을 하지.기억이 나고 지하가 잘하나,상당히 잘하더라고 보 니까 응(웃음). 면담자 :좀 인상 깊었든 것 그런 거 말씀 해 주십시요? 구술자 :지하가 뭐 벙거지 하나 뒤집어 쓰고,응 판소리에 맞춰서 말야,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 이끄는 모습이 아주 어울리더라고,참 타고 났다 싶더라고,역시 그 끼가 천부적이야.지하가.그러고 여기저기 서 먹을 거 먹을 거 단식하는데 먹을 거 그런 거 좀 이상하지만은 그런 거,물이든 그런 거 공급이 되 고 하는 기억이 나고 뭐 그냥 친구들 몇이 만나서 그 이런 저런 잡담하는 정도지,그 특별히 단식하는 데 앉아 있을 이유는 난 있다고 생각 안했으니까.그리고 봐서 위로라 하는 거 위로라 그럴까 참여라 그럴까 하고 나와서 딴 일하고 돌아 댕겼지(다녔지). 면담자 :그때 그때 주로 그 누구 누구하고 이렇게 활동했는지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거의 지금 기억이 없는데 누구누구 했는지,지하만 지하 그런 거만 기억나고 다른 기억은 거의 없네. 면담자 :고(그)단식현장 말고. 구술자 :단식현장.

17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69) 면담자 :단식현장 말고,그 6 3데모 때 까지. 구술자 :아니,고(그)이후엔가 한 석달 동안 간 게 언제야? 감방에,기소중지 된 게 한 석달 그게? 면담자 :그게 여기 9월 12일자로 되어 있거든요. 구술자 :(머리를 쑥이며)그게. 면담자 :예,9월12일 구속기소 되었다가,이 나중에 검사의 공소취하로 석방 됐다는 게,그 다음해 65년 도 조서에 나옵니다. 구술자 :아 고게(그게). 면담자 :9월12일 그 구속기소 되었다는 얘기는.검거는 그 전에 됐겠죠. 구술자 :그러니까 그 정확히 모르겠는데,그렇겠지 그때 내 기억에 남대문서에 한 한달.을 있었거든.남 대문서에,그때는 그때가 장마철인 것 같애.그 그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갖다 놓고 남대문서에 부르기 도 하고 아니면 남대문서에 그냥 놔두기도 하고 그때는 그 뭐 예를들면 20일까진가 서에다 놔 둘 수 있지.그러고 나서는 절로 넘겨야 되잖아.20일까지는 입빠이(완전히 채워서)서에 놔두고 그다음 넘겨 놓고,또 불러가지고 서에다 갖다놓고,또 취조하고,이런 장마 때 인 것 같으니까 아마 그게 얼추 맞 을 것 같으네.그때 그게 뭔지 나는 그걸 모르겠네.뭔지. 면담자 :예,그전에 인제 문리대 단식농성 은,그때 인제 김덕룡씨가 그때 문래대 학생회장이있는데? 구술자 :그렇지. 면담자 : 학생회 가 따로 있다가,그 이쪽 6 3투위(투쟁위원회)조직하고는 따로 있다가 그때 같이 결 합해서 단식농성을 하는 걸로 돼 있는 거 거든요.이 선생님은 그 김덕룡씨 하고는 그 당시에 어떤? 구술자 :난 그게 없어요. 면담자 :크게 접촉하거나 관계한 사실이. 구술자 :김덕룡이 문제는 조금 복잡하다고,그게. 면담자 :어떤 점이. 구술자 :에,회장선거 부정 뭐 이래가지고 좀 시비가 있었거든.그 예를 들면 박범진이하고 덕룡이하고 고등학교 동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회장 선거 부정,그 (진상을)밝히는 추진위원장을 박범진이가 했다고,그 또 내 동기란 말이야.그러다 보니까 내가 덕룡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안 좋지.심지어 뭐 사쿠라 란 얘기도 있고 그 때문에 내가,그 이미지 때문에 손해 보는 게 참 많아.여러 가지 많은데 오 랫동안 못 버렸어.그거를 나중에 YS(김영삼)쪽에 가서 내가 공천 문제를 상의하는데 좀 좋지 않은 영향도 있고 그랬어.그랬는데 하여튼 지금은 덕룡하고 지금은 인제 나이 먹다 보니까 과거에 뭐 그렇 게 해쌓던 건(했던 건)다 잊어먹고 이제는 인간적으로 서로 친구고 잘 지낸다고,다 6 3에도 훌쩍 뛰 어 넘어서 얘기지만 사이비가 지금 상당히 많단 말이야.말하자면,마지막까지 6 3가입을 안 시키는 사람이 하나 있어.누구냐 하면 고대 유준상이야,몇 번을 가입시키(가입시켜)달라고 하는데도,난 그 럼 말 안 해.그냥 말 안하고 있는데 내가 인제 6 3에 사무총장이나 뭐 상임부회장을 이런 걸(것을) 쭈우욱 해 놓으니까 서울대학 쪽에서는 거의 내가 뭐 6 3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단 말이야.다른 친 구들은 잘 안 나오니까,응 근데 거기서 지금 현재 유해성이란 친구가 있어.현재 6 3에 부회장을 하 는 건국대학 출신인데 이거도(이 사람도)너달라 너달라(가입시켜 달라).마찬가지로 한 2,3년 3년쯤

176 17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됐나.할 수 없이 너어 준 거야(입회시켜 준거야).당시에 무슨 솔직히 사쿠라 라(거짓말)말하나 회장 단,회장단 쪽에는 그런 사람들 많았잖아.방해하고 우리 뭐 고자질하고 말이야,말이야.이런 것들이 많았거든.그런 것들이 조금 남아 있어,남아 있기는 근데 나이 먹어서 다음 편안히 지내는데,그런 거 를 너무 가리는 것도 그렇고 안 가리는 것도 그렇고 좀 그렇더라고,내 마음은 그래서 덕룡 문제는 어 지금은 괜찮은데 그 당시에는 같이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어.인정도 안했고,그.그동안 자기 그 좀 진보적인 선배들이나 친구들 만나서 따로 상의 하는 것이 주 일이지. 면담자 :근데 그 6 3.6월3일 날 인제 거의 모든 학교가 일제히 인제 집회를 하고 가두시위를 하지 않 습니까?이게 좀 밝혀지지 않은 사실인데요.(몸을 옆으로 기대면서 질문에 집중함)그게 어떻게 분위기 가 그렇게 만든 건지 아니면 어떤 보이지 않는 서로 연락체계를 갖고 그날 일제히 중앙청 앞으로 모이 자 이렇게 했는지 이런 거에 대한 단서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그 당시에는 뭐 어떤 생각이었습니 까? 구술자 :난 전연 6월 3일 날,시위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네.이.6월 3일 날 니가 지금 어떻게 했난.그 또 생각이 없는 내가 데모를 했던 것만은 했던 거 같은데,에 그때.6월 3일 날 하자고 기획됐던 것 같지도 않고,고대(고려대)아깨(아까)내 얘기했지만 최장집이다,서진영이다,경우도 만나고 경우도 만 나고 응 그랬는데 28),그런 것도 그렇고 문리대에서도,음 중태나 현승일하고 거의 붙어 댕기다(다니다) 시피 했는데,별로 기억도 없고,그때가.그때 (생각에 잠겨)내가 잠시 시골에 내려가 아니 그 마지막 제2차 민비연 이 육십. 면담자 :65년입니다. 구술자 :5년 64년 끝나고 65년?5년(65년)언제쯤 돼요(오른쪽 귀를 잡고)?그게. 면담자 :그게,8월말 9월쯤 ( )되서 사건화되어 흘러 간 건데. 구술자 :65년,아. 면담자 :고(그)뒤에 65년도 활동은 좀 기록들이 있습니다. 구술자 :65년도도.뭐. 면담자 :고(그)기록들은 이따가 제가 함 보여 드릴게요. 구술자 :응. 면담자 :그때,64년도 문제가 그때 그러면,어쨌든 뭐 3 24,5 20,6 3데모를 그 주도한 걸로 되어 있 거든요.그때 당시에 저걸 보면 기록.수사 기간의 기록을 보면 이수용,인제 소외( 訴 外 )로 되어 있을 때도 있고 소( 訴 )에 포함됐을 때도 있지만,하여튼 3 24,5 20,6 3데모를 주동한 인물로 이렇게 돼 있는데 6 3데모를 어떻게 주동하셨습니까? 구술자 :아 건데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데모했다는 기억밖에 없는데,꼭 그 어떤 데모를 주동했다 그런 말이 난 말이야,말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그건 모르겠어.내가 지금 그니까(그러니까)기억나는 거는 마지막 사건.마지막 사건 이것도 아무 것도 아니거든,중태하고 아 아 그때 그 얘기하다 보니까 생각나네,그때 문리대 옥상에서 진민자 하고 뭐 만난 기억은 나는데(손에 든 자료를 보면서)이게 언제 인진 모르겠어.진민자,신춘자 하고 이 몇이 옥상에 올라가서 얘기하던 기억이,하여튼 만났단 사실만 28) 경우는 이경우를 지칭.

17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71) 대략 기억이 나,언젠가 모르겠는데.그렇고 그 다음 제2차 민비연 사건 한 1년 가까이 있었던 그것도 중태하고 그때 전국 조직 다시 하자는 것뿐이거든,다시 데모를 어떻게 맨들어 보자 그러고 문리대에 서.문리대 강당인가 어디서 뭐 하고 논의하고 뭐 이런 얘기한 정도야. 그기(그것이)뭐 내란음모가 되고 이상하게 된 건데 사건이 너무 커진 거지.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부산도 갔다 왔다하고 그냥 뭐 라고 그럴까,이게 무슨 낭만적인 혁명가를 자처한다,그럴까.장난이라 그러면 이상하고,생각이 100%로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음 그런 상태야.그게 아까(앞에서)얘기했지만 내가 분실에 끌려 가고 안기부 끌려간 게 20몇 차례 넘는다고 그러잖아,계속 돌아 댕기기는 했는데 꼭 사건 한 개를 짤라서 이걸 어떻게 했다,뭐 이런 건 내가 플래카드도 만들어본 적도 없고 저 뭐 막후라 그럴까.막후 라 그럼 좀 이상하고 응. 면담자 :이제 64년도는 각종 데모를 주동 한 걸로 되어있고요.65년도는 배후조정 한 걸로.(면담자,구 술자 웃음)하여튼 6 3계엄령 나던 고(그)전후에 일은 기억나시죠? 구술자 :계엄령이 있었던 건 기억나지.계엄령( )이 있었다 그래서 6 3이 된 거 아니야.6 3이 계엄선포한 날 아니야 그날 데모도 심하게 있었고 고런 정도(그런 정도)야 고런 정도(그런 정도)만 기 억나고. 면담자 :중앙청에 시위. 구술자 :중앙청 앞에까지 갔던 것도 기억나. 면담자 :시위현장에 있었던 것도 기억. 구술자 :나도 갔으니까 면담자 :그 뒤에 인제 보면 수배 수배자로 돼 있었고 바로 검거가 안 된 걸로 되어 있는데,잡힌 건 기 억나실 것 아닙니까? 구술자 :잡힌 것도(웃음)그 뭐 잡혔다,풀려났다가 뭐 그랬으니까.어느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고 도망 가는대도 선수니까 우리 집에는 늘상 그.(오른손으로 옛 사람을 지명하듯이)한 담당경찰서에서 오지 안기부 29) 에서 오지 늘상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얘들 놔두고 난 도망가야 해,그런 재주도 있으니까, 으응 밖에 한 서너 명 세워놓고 도망가니까,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우리 집에 안기부 탁 들어 왔더래,마누라 보고 나가보라 하 그러고 난 뒷문으로 토끼고(도망가고)뭐 이런 거 뭐 부지기수니까, (그 시절 경험이 떠오르는 듯 웃으면서)그게 무슨 뭐라 그럴까,낭만적인 혁명가 뭐 이런 거라 그러잖 아 그런 기분으로 뛰었으니까,쉽게 말하자면 면담자 :그때 결혼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내가 결혼한 게 65년돈가(도인가)했을 거예요.65년돈가(도인가)결혼을 정식으로 핸 게(한 게) 65년도 감방에서.감방에서 나와 가지고 했던 것 같,내가 들어가서 애를 낳았나,내가 감방에 있을 때 애를 낳았거든,65년 결혼을 하고 내가 감방에 갔구나.응 그러고 애를 놓으니까(낳으니까),내 친구 들만 백일잔치를 하고 나는 감방에 있었던. 면담자 :고(그)다음에,그 6 3계엄령이 나고 그 뒤에 인제 불꽃회 사건 이라고 인제 보도가 크게 되 었는데요. 29) 여기서는 당시 중앙정보부를 지칭.

178 17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크게 되기는 뭐 그랬지. 면담자 :그때 불꽃회 사건 의 당사자가 김정강씨가 아닙니까?그 분과의 관계라던가 이런 거에 대해서 좀 기억나는 거 있으면? 구술자 :내하고 참 친한데,한해 선밴데,그 양반은 그 자기가 그 호지명(호치민)이라고 자처를 했지.(오 른손으로 입을 가리며)근 뭐 사실이야.문리대의 이게 유행이었고.(웃음)이상한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었어.그랬는데,어 그 양반 지금은 극우로 바뀌었어.극우 논지의 글도 많이 계속 써,그 때문에 내 가 함 만났는데,이상하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정 반대로 바뀌더라고.음 면담자 :예,그 당시에는 그 당시에 인제 기억을? 구술자 :그러니까,그 당시에는 사실 그 NL지금 말하면 NL이라 그러나,김일성주의자라 그러나,주사 파라 그러나.뭐 그런데,그 당시에는 문리대에 말하자면 오해를 할 수 도 있고 그래서 우리나라가 통 일되기 전에는 말을 명명백백하게 하기가 참 어려운 처지란 말이야.JP(김종필)가 뭐 색깔 안 밝힌다 캐쌓고(하고)그런 소리를 함 하더란 말이야.그 당시의 문리대의 이 강경파들은 NL계열이라고 봐야지. 정강이도 그런 사람 중에 한사람이라고 봐야 될 거야.근 좀 꼭 NL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유사한 생 각들을 문리대의 주류는 가졌었다라고 봐야지. 면담자 :그분이 인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인제 많은 후배들을 이렇게 접촉을 해서. 구술자 :그러니까. 면담자 :뭐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졌던 걸로 되어 있는데요.이 선생님도 함 만난 적이 있습 니까? 구술자 :만난,만난다는 기도 아니고,뭐 수시로 만나기도 하고 도표를 보니까 정강,정남(김정남)이도 나와 있고 뭐 그렇다고 도표를 신문에 본 것 같은데,또 사대에 김각이.그게 각이하고 정남이 하고는 아마 삼촌 처,뭐 삼촌 삼촌관계인 거야 이럴 거야.친인척 관계니까 이렇게 가깝게 만나고 이럴 거 아 니야.거기 도표가 완성 되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안기부 30) 가 보니까 임마들이 도표를 만들더라고,나도 예를 들면 도표 이거 어디 딱 이게 있더라고.내가 깜작 놀래서 그 이후에 내가 다른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고 그런데,지금은 얘기해도 되겠지만,어.저런 사건이 있었어요. 통혁당 (통일혁명당)사건 기억나지,그러고 인혁당 (인민혁명당)사건도 기억나지,신문에 조그만 하게 났던 그 남조선해방전략 단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란 게 있었어.거의 기억이 없을 거야.그건 거의 안 비쳤으니.거기는 소 위 말하면 수괴지.대장이 동국대학교 뭐 교수였는데 그 양반 사형됐어.그기(그것이)내용이 뭐냐 하 면,이.어용노조를 제대로 된 노조를 바꾸자는 운동이야.거기에 내가 중요 멤바로(멤버로)하여튼 그 렇게 된 거야.그래가지고 신문에 뭐 이렇게 저렇게 몇 번 글 재탕,삼탕해 먹었어,임마들이.그런.그 게 연도가 말이야 62년도 65년돈가 내 기억이 없어. 면담자 :고럼(그럼)그 이후. 구술자 :고(그)이후에 하여튼 불꽃회 라는 것도 일종의 자생적인 그런 뭐라 그럴까.사회주의 공산주의 적 사회주의적인생각,진보적인 생각 뭐 이런 가진 애들인데,거기 그 애들만 엮어서 그런 건데 생각 흐름이 비슷했던 거야.대략,큰 차이가 난건 아이고 고거(그거)아마 콕 집어갖고 거기 필요하단 말이 30) 당시 중앙정보부를 지칭.

17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73) 야.저짜 정권(군사정권)에서 필요 한 거야.그래서 고 집힌 거지 말하자면,그 정강이하고 고넘(그놈) 이야긴 과,과 회의실에 가면 그런 얘길 하는 놈이 한두 놈이야.뭐 그 마음 이래저래 이 땅의 정통성 을 가진 놈은 어떤 놈이다 얘기는 그냥 하는 얘기야.뭐 면담자 :일단 뭐 시간이 한 시간되어서. 구술자 :한 시간 되었어요 면담자 :쉬었다가 구술자 :많이 떠들었네.(웃음)그 쉽시다.난 안 쉬어도 괜찮은데. Tape2. 면담자 :선생님께서 64년도에 그 조사하고 이런 걸,이런 게 다 사태가 마무리되고 난 뒤에 6 3동지회 가 결성이 되잖습니까.처음에는 그 출옥 6 3그 출옥자 동지회 이런 형태로 출발한 것 같은데,고때 (그때)상황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 말씀해 주십시오. 구술자 :그때 내가 직접 아마 개입을 처음에 못 핸 것(한 것)같애.(고개를 숙이고 왼손을 아래위로 내 리며)그때 내가 저 안에 있다가 나오니까 밖에서 애들이 이미 만들고 있었다.주로 그 만(만들어)했 던 친구들이 이원범 전 의원하고 성균관대학교 오성섭,지금은 고인이 된 경희대학교 이재우라고 있어. 이런 분들,고대 이경우,이런 사람들이 먼저 주축이 되 가지고 만들고,음 저 안에서 나오는 애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그래서 인제 나오니까 같이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는데,처음에 소위 6 3동지회 지금 이름이 처음에 뭔지도 그것도 모르고 약간 불미스러운 일도 중간에 있었고. 구술자 :구체적으로 그게.? 면담자 :왜냐하면,그 우리가 안에 있으니까,우리한테 넣어주라는 영치금 뭐 이런 게 중간에 떼먹은 놈 도 있고 뭐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조금 시끄럽기도 하고 그랬어.그런 거.그게 아마 아까(앞에서)그 런 얘기.원범이,뭐 원범이 도망가는 거 그런 거 연결이 될 거야,아마 아마 그런 얘기,그런 건 어디 에나 다 있는 일들이니까 그렇고,(웃으면서 오른손을 머리를 쓰다 담으며)6 3동지회,참 사실 그 6 3동지회라는 게,음.서울대학 쪽에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어.그게 인제 다른 대학들에서 다.그 만 들자고 열심히 했던 거고 서울대학은 참여만 하는 거니까.뭐 주로 내가 참여하고 최혜성이가 가끔 참 여하고 송철원이도 가끔 참여하고,그렇지 뭐.그랬는데 6 3동지회 그 뭐 그 그걸 결성을 할 때는 사 건이 다 거의 끝난 상태 아니야 그지(그렇지)? 면담자 :그렇죠. 구술자 :비준도 거의. 면담자 :아뇨. 구술자 :전인가 비준 전인가? 면담자 :64년 말에. 구술자 :말인가?

180 17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말에 결성이 된 걸로 되어 있는데요.거기서 6 3동지회 그 회원들 중심으로 65년도 그 조인, 비준반대 시작이 되는데 2월 달 부터 그게 그런 게 언론에 좀 보도되기 시작합니다.그리고 아까 그 말씀하셨든 평화선사수투위 ( )도 그때 결성되고. 구술자 :그땐가? 면담자 :근데 어째든,65년도 들어와서 인제 소위 말하는 2차 민비연 사건이라고 터지고. 구술자 :고게(그게)최종이란 말이야.내 경우에 6 3사태와 관련한 최종 연관된 게, 제2민비연사건,고 게(그게)한 열 달인가,안에 있다 나오니까 사건이 다 거의 종료가 되는 상태가 되는 거지. 면담자 :고(그)사건을 보면 2차민비연 사건은 4가지 그 죄목이 적용되거든요.고걸로(그것으로)적용되 어서 인제 기소가 되는데요.이제 그게 뭐냐면 내란음모,내란선동,그 다음에 폭발물 사용음모,그 다 음에 반공법위반,이 네 가지가 따로 따로 된 사건인데 하나로 엮어서 2차민비연 사건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데요.여기에 이 선생님은 그 첫 번째 내란음모 죄목이 적용되어서 기소가 되거 든요.그 어떻게 근데 이제.제가 좀 궁금했던 게,그 내란 그 음모라는 그 그걸 학생들의 시위를 배 후조종했다라는 내용인데 6 3동지회에서 상당히 배후조종한 걸로 되어 있는데 6 3동지회 회원으로는 이 선생님 유일하게 기소가 됐거든요.다른 분들 많은 분들 조사는 받았지만.그렇게 된 특별한 이유 가 있었습니까? 구술자 :말로 하자면 항상 행사가 처음에 행사가 기획될 때는 문리대에서 하는 게 아냐.그게 아까 얘기 했지마는 중태하고 내 둘이서 좀 신중히 상의를 몇 번 했지.고(그)문제에 대해서 그러고 타 대학 친 구들은 만나서 이래저래 얘기하고 인제 일의 진행을 위해서 사전 조직이라 그럴까,뭐 점검,그것 때문 에 시골도 갔다 왔다는 얘길 했지만,이런 상태에서 일도 못하고 잡힌 거지.말하자면 그렇게 된 거고 그니까 이 6 3동지회 다른 애들은 깊이 개입을 못했지.말하자면 음 그런 상태였지 그 당시에,사전 에 그냥 이게 빨리 그렇게 되었으니까.(면담자를 응시하며)막 상의하는 중에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까.그때는 그러니까 내 생각은 인제 중태가 나 말고 따로 만난 게.최혜성이도 만났을 테고,그런데 그런데 내하고 인제 마이(많이)상의를 했지.중태가 마이(많이)상의를 해서 그렇게 일을 하고,그러니 까 내가 개입이 되고 최혜성이도 그렇고.반공법 조항은 아마 송.(송철원) 면담자 :예,송철원. 구술자 :송철원하고 저기도 걸리나,저기 우리 박재일이도 걸리냐?반공법이 저거 저거 때문에 걸리는 거 아냐 코민테른 조항이 뭐 인용 한 거.응 살짝 기억이 나는데 재일이가 드러누워가지고 이거 한 개 넣자 캐쌓고(하고) 하고 그랬던 거 기억하는데 우학명 집에서 내. 면담자 :그 자리에도 계셨습니까? 구술자 :물론 그러니까 있었지.허허. 면담자 :근데 이 기록에 저 기록에 보면 이 선생님은 거기 안 나타나는데? 구술자 :뭐 그건 나타나고 안 나타나고.(웃음)근까(그러니까)재일이가 한줄 드러누워 넣자 케쌓고(하고) 그걸 넣은 게 화병이 된 거지. 면담자 :그래서 박재일씨하고 그 송철원씨 두 분이 인제 반공법위반 적용이 된 거죠. 구술자 :걸렸지.나는 그쪽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한 피할려고 했던 거지.최대한.내 인식이,에.그 뭐

18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75) 안 좋은 거다,결국 그렇게 가면 죽는다.그때 상황이 하여튼 그쪽으로 연계가 되며는(되면)가는 거니 까.근데 거기 나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연결이 되어 그런 사건이 생기기도 했는데,그때 내 가 완전히 피했고 잽혔으면(잡혔으면)사형됐을 거야.그 사건은 그 완전히 만들어진 거니까.하여튼 그쪽은 뭐 어쨌든 피할려고 내가 애를 쭈우욱(쭉)써 왔지.정강이하고 나하고 그런 얘기지만,사적으 로 이렇게 저렇게 뭐 그런 걸 얘기하는 거하고는 다르게 그걸 공식적인 표현으로는 절대로 삼가 해야 되는 문제라고 난 보는 거지.프락치가 또 바로 코앞에도 있고 그랬으니까. 면담자 :우선은 65년이 되어서 그 전해에 6 3항쟁에 가담했던 분들 다 졸업을 하고 선생님은 군대 갔 다 온 바람에 늦어서 그때 재학 중이었잖습니까. 구술자 :(졸업이)67년돈가 되어 있더만. 면담자 :근데 인제,그래서 아마 재학생과 졸업생을 연결해주는 여러 가지 역할을 6 3동지회에서도 한 것 같은데요.65년도에 4월 달에 조인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데,그때 당시 4월13일 시위를 위 해서 저기에 6 3 동지회 분들하고 거기에 적극 참여를 하는 쪽으로,이게 좀 당시 어떤 형사사건기록 에 나와 있거든요.그러니까 65년 4월11일경 시내 서대문구 대현동 번지미상 소재 성명 미상 가에서 6 3동지회원 뭐 누구누구.이런 사람들이 그 서로 제휴하여 들어와서 평화선사수투위를 구성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때 상황을 좀? 구술자 :(의자에 뒤로 기대어 눈을 감고)그 또 사실은 별거 아니라고,그 내가 약간 기억이 나는데 플 래카드를 문리대에서 그 누가 맨들어(만들어)왔던가, 평화선 사수 를 내가 기억이 그걸 들고 행진 핸 (한)것 까지는 생각이. 평화선 사수 를 내가 말씀을 아까 했지만 일단 수위를 낮춰 가지고 다시 끌어 올리자.와 닿는 부분부터 해야 되니까,평화선 이승만이 만들어 난 건데 이거까지 팔아물라(팔아먹으 려)해가지고.쉽잖아요.또 이해하기가 쉬운 데부터 시작해서 올리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일을 해 나 간 거야.호응이 뭐 그렇게 좋지 않았어.별로 뭐 하긴 좀 하기도 했는데 그냥 뭐 플래카드 들고 시내 왔다 갔다 한 정도고,평화선 사수니까 그것 가지고 그렇게 뭐 탈 잡지도 안 했던 것 같애.크게 뭐 잡 혀가고 이런 것도 별로 없었던 것 같애. 면담자 :나중에 보면 7월경으로 나오는데요.1965년 7월18일부터 서울문리대 천문기상대 옥상휴게실에서 김중태,최혜성,진민자,이수용,신춘자,이원범 등이 회합을 했다 이게 인제. 구술자 :(손에 든 자료를 보면서)그게 언제? 면담자 :7월 18일요. 구술자 :몇 년도? 면담자 :65년 7월 18일. 구술자 :65년. 면담자 :그때 이게 내란음모,내란선동 빌미가 된 구국학생총연맹 이란 그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근 데 실제로 그때 이런 조직을 구상했습니까? 구술자 :(입가에 미소를 띄며)근데 그 명칭이 내 그런 건지 모르겠어.명칭까지 그때 결정된 것도 아니 고 구국총학생.그런 생각은 했는데 꼭 명칭이 정해지진 않았던 것 같애.내 생각으로는 중태가 항상 대장을 했으니까.그 무슨 논의를 하고 상의를 하고 내 신춘자하고 옥상에 올라갔던 기억도 나는데 그

182 17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게 9월 달이라고? 면담자 :7월 18일. 구술자 :그때 약간 썰렁한 기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근데 그 때문에 그래 내가(옛 지방에 다니 는 생각이 나는지 손을 우에서 좌로 가리키며)서울에 각 대학 지방대학까지 이래서 함 대대적인 데모 를 함 더 하자는 거지.구국 뭐든 간에 이대로 놔 둬서는 안 된다.비준이 아직 되기 전입니까? 면담자 :7월 18일이면. 구술자 :65년. 면담자 :예,비준이 된 거죠. 구술자 :된 이후입니까? 면담자 :7월 14일로 알고 있는데. 31) 구술자 :비준이?기억이 잘 안 되는데,하여튼 불씨를 이 박정희 정권에 타도에 대한 불씨를 살려야 되 니까.음 내란음모 어떤 의미에서는 맞지 뭐,내란음모가 (웃음)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박정희 타도니 까 실제로 쉽게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목표는 거기에 있는 거니까.음. 면담자 :그래서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그 당시 이런 그 얘기는 뭐냐면 국회에서 비준이 되었는데 그 비준국회를 해산시키고 비준을 무효화하자.그러기 위해서는.그래서 폭발물 얘기도 나오잖습니까?폭 발물. 구술자 :몰로토프칵테일! 면담자 :예,그 폭발물 제조 논의도 그 시기에 쭉 여러 차례 있었던 걸로 나와 있는데,거기에도. 구술자 :난 관여가 안 되어 있어.거기에는 고성광이가 했다는 거 아니야.그 저 공대 화공과(서울대 문 리대 물리학과를 잘못 기억함)를 댕기다가 문리대 정치학과로 왔으니까.그 담당이 전담이지 뭐 지가 그거는,난 그 폭발물 문제는 전혀 모르고 하여튼 수류탄 대항 뭐 최루탄에 대항하는 방법이 그런 방 법은 생각할 수 있었겠지.그니까)그러니까)나는 그 당시에 보며는(보면)이래 내가 핸(한)건데 문안 도 아까 얘기했지만 문안 반쯤 뭐 반쯤 장난이랄 거면 이상하지만 낭만이랄.그럴까,드러누워 그래 책 보면서 이거 한 구절 넣으면 어때 뭐 이런 식이란 말이야.언 놈이 그걸 좀 넣고 빼고 이러 쌓는 형태이니까 그게 신문에 나오니까 그렇게 댕긴데(되었는데)그렇게 해서 문안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게 나는 총체적인 모습,(양손을 주먹을 잡고 들면서)응 전국을 이렇게 해서 이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하자 그런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는 일만 하는 거지,항상.그 구체성에대해서는 좀 약하다는 거지.내 위치가 또 선배라는 위치도 또 있고,그런 것 때문에 아마 그런 것 같애.성격도 좀 그렇고. 면담자 :그때 혹시 그 장명봉씨는 어떻게? 구술자 :장명봉이는 그때는 알긴 알았는데 후배니까,장명봉이가 통일문젠가 뭔가 논문을 낸 기억이,내 가 신문에 상을 탔을 거야.어 이놈이 통일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데 좀 엉터리다,이런 생각을 했 지.왜냐하면 문리대쪽은 장명봉이 그때 통일논문을 쓴 것이 소위 좌파적인 계열에서는 그렇게 타당한 견해가 아니었을 거야.내용은 기억 안 나는데 우리나라 통일 논의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잖아요.여러 가지 거지 좌에서부터 우까지 아주 무성한데 장명봉 이놈이,근데 지금은 보니까 꽤 친북 쪽으로 장명 31) 실제로 한일협정 국회 비준일은 1965년 8월 14일.

18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77) 봉이 돌아다니더라고,내 하지 마라 그랬는데,그 하여튼 장명봉이가 그렇게 해서 통일 이런 운동에 관 심을 가지는 구나 그런 정도. 면담자 :그 당시에 65년 비준반대운동 (한일회담 비준반대운동)에 중심인물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구술자 :그렇게 되데.나중에 보니까 그렇데,에 나중에 보니까,응 법대에서는 장명봉이고 문리대에서는 누가하노?조 가만있자(오른손으로 눈을 쓰다듬으며)후배들 있는데, 후배들이 문리대에서도 여러 명 있는데 비준반대 여러 명 있는데 지금. 면담자 :그때 이제 문리대에는 크게 부각이 안 되고. 구술자 :크게 부각이 안 되는구나. 면담자 :크게 부각이 안 되고 법대 장면봉씨를 중심으로 한 다른 대학하고의 연합체가 있었거든요.거기 에 진민자,신춘자 이런 분들 있고. 구술자 :또래니까,같은 또래니까. 면담자 :예 그러고 이 선생님 그런 분들하고 접촉을,재학생 그룹들하고 접촉을 한 게 내란음모 빌미가 되는 거죠. 구술자 :아 그게 그러면 제2민비연 사건 (몰로토프칵테일 사건)이 그러면 비준 이후의 사건이 돼요? 면담자 :그렇제,예. 구술자 :고렇게(그렇게)됩니까.아 그게 계속 그 애들을 결국에 후배들하고 할 수가 없잖아.지금 소위 말하면 6 3동지회 그 밑으로 6 3민비.저게 뭐야 비준반대는 6 3동지회 쪽에서 밑에 거든.밑에 애 들이거든.한해 두해 이래 밑에 애들인데,그게 나이를 별로 상관 안하니까,같이 섞이고 이렇게 된 건데 계속 문제를 이끌어 가는 데는 계속 후배들하고 하는 수밖에 수가 없는 거지.걔들하고 계속 되 었던 거,그니까 후배들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데 비준반대 그때도 계속했던 것 같으네,지금 생각해보 니까. 면담자 :그러다가 8월 26일 이 위수령이 발동했. 구술자 :(고개를 끄덕이면서)고대 고대 침입사건. 면담자 :고대에 인제 군인들이 침입하고,그러면서 서울지역에 위수령을 하면서 군을 전 학교에. 구술자 :문리대는 닫히지. 면담자 :예,학교에 (군을)진주시키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데,그 당시에 좀 기억이.그때 뭐 도피를 했거나 뭐 그런 기억이 있습니까? 구술자 :하여튼,문리대에 군인들이 진주 했다는 건 기억나는데,그다음에 진주하고 위수령이 그 쪼금 하다가 해제됐을 걸.아마 한 달도 안 갔을 것 같은데. 32) 면담자 :예 그렇죠 구술자 :그러고 나서 학교로 우리가 들어가서 중태하고 상의를 했던 것 같은데,그 아까 무슨 내란음모 사건이 그렇게 나오는 것 같은데 아닌가. 면담자 :그때 사건은 아닌 것 같구요.그래서 그 뒤에 그때 했던 핵심인물들을 검거를 하면서 그때 이 선생님도 검거를 해서 재판에 회부가 되는데요.물론 인제 그 당시에 김지하씨라든가 김도현씨,이런 32) 꼭 한 달 만인 1965년 9월 25일에 위수령이 해제됨.

184 17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분들은 검거가 안 되어서 공소외로 기소중지가 되고.근데 그때 체포되는 과정이라던가 도피했던 시 기에 기억 같은 것들 나는 게 있으면 좀.? 구술자 :체포,체포 어디서 됐는 건지 모르겠네,그게 말,그게 어떻게 체포가 되었는지. 면담자 :기억이 잘 안 나십니까? 구술자 :체포가 어떻게 해서 됐는지 모르겠는.전현 기억이 없거든.없네.마지막 그 모양인가 본데,그 게.하도 뭐 왔다 갔다 해 노니까(놓으니까)언제 것이 어느 건지 도체(도대체)기억을 못하니까. 면담자 :고(그)이게 재판 과정에서 아까도 말씀했듯이 이 뭐 중형을 구형을 하고 무죄가 나고 뭐 상고 를 하고 결국 무죄가 되는 그 재판 과정이 아주 여러 가지로 좀 파란만장했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신문에 크게 났지.동아일보 1면 톱으로도 몇 번 나왔을 걸. 면담자 :그 재판 과정에 대한 뭐 좀 재미나는 기억들이 있습니까? 구술자 :재판 과정.그것도 뭐 신태악 변호사가 대장이고.변론대장이고 김은호 선생님이 그 꼬붕(부 하)인데 열심히 제일 열심히 한 양반이 김은호 선생님이고 신태악 선생님은 이름만 걸어놓고 그냥 놀 았고 (웃음),그러고 그때 우리가 한 일 년 가까이 있으니까 그 여자들이 이(오른손으로 하나하나 거론 하면서)최혜성이 엄마,송철원이 엄마,내 마누라,박재일이 마누라,또 누구야 현승일이 누나.뭐 이 렇게 어울려 댕기면서(다니면서)박순천 당수하고 굉장히 친했어.맨날 빼내,우리 빼내고 뭐 하는 것 때문에 박순천한테 같이 살다시피 하고 그쪽에서도 환대를 해주고 보니까.우리는 박순천이 잘 모르지 만,그 사람들은 친하게 지냈어.그렇게 늘상 감방에 왔다 갔다 하면서.그게 그 사람들 일이었고,우 리는.독방에 있었어. 면담자 :아,독방에. 구술자 :독방에 있어서 난 참 좋더라고,책보기도 좋고 뭐 거기서 난 내가 고시를 목표로 했으면 아마 고시공부를 했을 거야.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주로 이 경제학 대사전이나 말이야 철학대사전이나 이 런 걸 넣어 달라 했지.왜냐하면 책을 검열을 해 가지고 보고 싶은 책이 잘 못 들어온다고,사전은 요 런 것들은 다 볼 수 있으니까 큰 사전 말이야.에.그런 뭐 유물 예를 들면 유물변증법이다 그러면 사 전 철학사전가지고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고 종합하면,그 뭐 책 한권 보다시피 빠지고 이러니까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한 거지.(웃음)그런,독방에 있으니까,난 좋던데 상당히 이건 전에 들어갔을 때인데 현 총장은,이 엄마 아빠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가,좀 약하더라고 그 안에서 강한 놈이 중태하고 나야.중태는 뭐 골초 그 안에서도 골초였어.내가 4사 상에 있고 저쪽 3사 하엔가 있었는데,이렇게 보여 대각선으로 밑에 있으니까 담배연기가 배어서 나오고 이런 정도야 (웃음).중태는 그냥 즐기고 있 었던 것 같애.거기 있는 게 지도 독방이지.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에 불 꺼질 때까지는 거의 책하 고 살았지.그랬으니까.뭐 감방이라는 생각을 거의 해 본 적도 없이 그냥 편하게 있고 나로서는,그러 고 인제 간첩으로 잡혀 있는 사람들하고 이렇게 통방하다가 한번 걸리기도 하고,왜냐하면 호기심 때 문에 그러고 같이 묶여서 재판받으러 걔들하고 나오면 또 물어본다 말이야,옆에 가서.글마들은(그 사 람들은)우리하고 접근할려고 또 그런다고,쉽게 접근이 된다고 걔네들,이런저런 문제 그 어떤 문제. 북한의 현상을 이런 걸 알고 싶으니까.운동을 나가는 가,이런 데서 하다보면 걸 데서 또 뭐하기도 하 는데,직접 그 문제로 간수들도 약간은 봐 주는 것 같애.그런 기억이 임자도 사건,임자도 사건 기억

18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79) 나요?임자도 사건이라는 것이 간첩단 사건 일종의 납치해가지고 데리고 올라 갈려고,애들 데리고 올 라 갈려고,그런 사건 이름은 내가 모르겠는데 북한에 마누라가 있다고,근데 끝까지 전향을 안 하고 사형을 당했을 거야.내 생각으로는 지금 모르겠는데 그 이후로는 뭐 모르니까,근데 그 그런 의지가 어디서 왜 나오는가 이런 게 내 내 관심사야 말이야.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말이야.사람이,산다는 건 대단히 중요하고 더군다나 마누라가 저쪽에서 영웅 마누라로 대접받고 있겠지.그렇다고 하더라도 거 기 그렇게 죽는다는 게 말이야.저런 소릴 하더라고. 자기가 만일 이게 죽지 않으며는(않으면)이 운. 자기 운동이 계속 될 수가 없다 이거지. 잘라진다 이거야.신임이 끊어질 것 같아,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애.배 선장을 하다가 저쪽 간첩을 실어다가 실고 가고 하는 선장을 그거 하다가 잡힌 친군데 몸 참 (선장을 생각하는지 허공을 응시하면서)튼튼하게 생겼더라고.그 놈 얘기가 우리보고 묻더라고,여 기는 왜 대학 졸업생을 군대로 보내느냐고 이거야.인력 낭비 아니냐,이거야 그러더라고,아 그래서 임마들이 사고가 상당히 효율적인 사고를 하고 있나,이런 의심을 한 적도 있고,하여튼 호기심 연구 북한의 진정성이 어떤 건질 알고 싶은 그런 생각을 좀 가져 있었던 것 같애.그게 결국은 남북을 통일 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거하고 연결되는 것 같애.그때 인제 좌 쪽에서는 영세중 립,통일 영중통 뭐 중립통일라는 여러 가지 안이 또 가지고 있었잖아.그래서 어느 것이 정말 옳은 통 일의 모습,우리의 사는 모습이냐.여기에 나만 그런 거는 아닐 거야.대부분이,대부분이 우리 통일 민 주화는 통일의 어떤 전제정도라만 생각 했을 거야.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론,그게 4 19때는 민통(민 족통일연맹)으로 나왔고 6 3에서는 차원이 좀 낮게 나왔지만은 궁극 목표는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봤 거든.근까(그러니까)매판이나 일본 미국이 합체 지며는(지면)잉 통일에 방해된다고 보는 게 깔려 있 는 거지.민주화하고 통일하고 이런 방향으로 계속 가야 거꿀로(거꾸로)간다고 보지.그런 것이 6 3 문리대에서는 그게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그게 사건 그때,그때 이걸 나뉘어보면 누가 어땠고 카는(하는)건,이건 나는 의미를 안 둬,아까(앞에서)예를 들면 진민자 라 누구다 캐쌓는데(했는데)각 대학별로 우리가 조직을 하고 하는데 이게 의식이 이 문제의식이 이 그렇게 높지를 못해.참 그 그래서는 안 되는데 어쨌든 현실적으로,응 어떤 통일문제나 아 고 다음 민 주문제까지도 까놓고 논의를 하기에는 상당히 힘들어.지금도 6 3이 보면 이 택도(턱도)아닌 소리를 하는 놈들이 많거든,보수 꼴통 이상의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는 들이 참 많다고 6 3내부에도 그렇 게 의식이 퇴화되어 있는 거야.그게 여기다 대놓고 무슨 소릴 하다보면 좀 이상하게 되지.그니까(그 러니까)이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생각을 좀 더 순화하고 거기에 맞춰가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지. 면담자 :그때 그 무죄판결.최종판결 받고 나올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구술자 :(웃으면서 확신에 찬 듯)아 그건 무죄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했던 거고,응 아 아까(앞에서) 내란음모라고,내란음모라고 뭐라고 말할 수도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뭐,그게 그러고 학생들이 학생 때 했는데 그게 무슨 소감이랄 것도 없고 그냥 한 일 년 쉬다 나왔다 이런 정도로 생각 하지,바깥에서는 고생 좀 했지.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뭐 세상 편핸(편한)거지.몰라,사람마다 다 르게 생각하는지 몰라도,나는 뭐 그런 일로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난 전현(전혀)그건 감방이라는 생 각도 없고,처음에 감방을 (옛 생각의 기분을 말하는 듯)뜨르륵 하고 철문이 닫히니까,기분이 그렇더

186 18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라고.두 번 세 번 갈 때는 그냥 내 집 드나드는 것 같은 기분이야.아무렇지도 않. 면담자 :그때 뭐 이 사건을 비롯해서 저 그때 6 3항쟁에 참여한 그 때문에 여러 가지로 뭐 좀 달라진 건,인생 달라진 건. 구술자 :6 3항쟁,인생이 확 달라져 버렸지.확 달라져 버렸지.참 지내 놓고 보니까 그니까(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정리를 해야 될려나(되나).지금도 몰라 지금도 잘 모르는데 지금도 집도 한 칸 없거든. 그러고 스무살 부터 한 마흔살 넘게까지,고 다음에 3선 개헌반대,유신 때는 그때 긴급조치 4호부터 9 까지 다 걸렸어.토꼈으니까(도망갔으니까)다행이지.토끼(도망)는 데는 선수라 그래,그래 박정희하고 싸우면서 한 20년 다 간 거야.그러다보니 청춘은 가버린 거야.눈을 떠 보니까 이미 늦어 진거야.그 거를 처음엔 뭐 그건 각오를 했던 거지.소위 그거 낭만적인 어떤 혁명가라 각오를 했던 거니까,그렇 긴 한데 나중에 보니까 남들은 다 돈푼이나 벌고 집도 서넛 가지고 있는데 너무 없으니까,너무 힘드 니까,아 이게 내가 잘못 살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누라하고 원망도 많이 받았단 말이야.그 다시 뭐 예를 들어 살아라 그런다면 실리를 택할 거야.(웃음)근까(그러니까),너무 큰 꿈은 문제가 있어. 이.게 왜 단계적인 것을 거부했느냐 하며는(하면)우리가 배울 때 학교에서 배울 때 단계적으로 하다 보면 거기로부터 오염되고 변질되고 해가지고 나중에는 없어진다고 보거든.근데 일반적으로 거기 맞 잖아.다들 그런 거지.근데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왔다 갔다 하고 변질되고 해 가면서 이렇게 커가지 고 하든지 말든지 해야지.그전에는 못 큰다 이거야.(눈을 약간 지그시 감으며)내 할아버지 보고 내 보고 할아버지가 내보고 직수무음( 直 樹 無 陰 )이요.청수무어( 淸 水 無 魚 )라. 할아버지가 내보고 맨날 그 랬어. 응 곧은 나무는 그늘이 없고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으니 잉 좀 왔다 갔다 해라,내보고 맨 날 그러는데 그놈이 타고난 팔잔 것 같애.근데 지금도 뭐 한나라당이다 민주당이다 다 개판인데,6 3 도 그렇고 민주 하나 더 민주화란 게 별거 아니잖아요.이게 절차적인 민주,소위 군부의 제거는 되었 는데 절차적인 민주는 어느 정도 되었지만,노무현이가 사실은 꽤 했지.지금 거의 수평 사회로 거의 되다시피 했지만,아직까지도 이 민주의 내용,자유의 고양,평등적 자유의 고양이랄까,상당히 평등하 지 않으면서 진정한 자유는 없는 거 아냐.이건 철학적인 얘기야,내는 사회주의 이런 얘기가 아니고 경제적인 평등이 없이 자유를 아무리 줘 봐야 굶어 죽으라는 자유밖에 없는 거 아니야.그 이기 두 개 다가 통합하는 어떤 더 고양되는 삶,이게 실현되는 게 민주주의 아니야,세 개가 다 글로(그곳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고,거기 학교에서 배운 거지.이기(이게)평생 그런 생각을 가지고 머릿속에 어렴풋 이 남아 있으니까 일이 안 되는 거지.돈이 안 벌리고 공부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그러다 죽으면 죽을 때가 오는 거지.그니 이런 기록을 남겨서 내가 뭐 기록해서 기록에 별 의미가 없는 거지. 본질적인 문제에 당도해 버렸는데 근 파워도 힘도 없고,뭐 없고 실패한 인간으로서 끝나는 거지.그는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살았던 그 한계 내에서 그냥 살아가는 사회 적응을 못 하는 거지.그 많은 친구 들이 인제 적응하고 출세도 하고 다 했는데 몇몇 이렇게 적응을 못한 내 선배들도 있고,나도 있고,후 배들도 있을 거야.적응을 했으.정치학과 나왔다 그러면 다 이렇게 저렇게 성공을 하잖아,부영(이부 영)이도 성공을 하고 다 이리 붙어서 저리 붙어서 성공을 하는데,결국은 빠져버렸으니까 모르겠어.지 금 명박,MB(이명박)하고도 뭐 상당히,상당히 친했거든,본래 옛날에.요즘 봤는데,(기침)지 약혼식 에도 내가 가서 술 먹고 같이 떠들고 한 것도 있더만,기억이 전혀 없어.간 기억도 없는데,다 경춘이

18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81) 가 조선일보에 사진이 났다고 가져왔더라고,그니까 보니까 있더라고 사진을 빼달라고 얘길 했는데,거 니 지금 뭐 인제 나이도 먹고 하니 할 일도 그렇고 벌써 육십구거든.명년이면 70인데 뭐 어디다 쓰겠 어.문제야 문제.내 개인적인 문제가 지금도 필요도 없는 얘길 하곤 했는데,(웃음)마무리를 이젠 해 야겠는데. 면담자 :더 하시고 싶은.우선 6 3과 관련된 뭐 기록이라든가,그 당시 그 말해줄 수 있는 그런 것들 이 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게 있습니까? 구술자 :기록도 없고,그게 그런 기록들이 뒤지면 어디 나올라는가 모르겠는데,그 왜냐하면 저런 것도 있었잖아.그 늘상 집에 와서 책도 내 책 안기부에서 가져간 것 많아 그건 가져가 버리니까,가능하면 사진으로 안 남길라고 그러고 보관을 안 할려고 그러지,그렇게 해놔서 뭐 별로 신통치 않을 거야.안 기부에서 가져가서 회수 안 된 책이 내 책만 하더라도 아마 수십권이 될 걸.이 새끼들은 그냥 무조건 가져가 버리니까 응. 면담자 :마지막으로 더 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구술자 :참,(잠시 생각에 잠기면서)사실은 그 남북통일을 하고 그거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을 한번 해 보고 싶은 게 내 생각이었는데,지금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어.그 비전에 대해서 얘기 하 라면,지금도 아마 얘기할 수 있을 거야. 늘상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고,책도 보고 그러니까,그게 이 밥벌이는 못하는 거지만,지금 MB(이명박)가 참 MB지금 체제를,예를 들면 6 3에서 어떻게 뒷바라 지 해야 되느냐,MB는 비전을 지금 어떻게 제시해야 되느냐,이런 게 내 고민거리 중 하나야.그런데 그거를 현재 비서진이나 장관이나 6 3이나 모두 깊이 있게 고민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애.왜 그런지 난 이해가 안 가.예를 들면 지금 이번에 소위 좌파 10년 정권에서 어 우파로 바뀌었다고 말하는데,난 그렇게 안 본다 말이야.그전에 우파가 한 30년 이상 군부든 뭐든 했고 좌파가 10년 했으면 이번엔 통 합단계로 가야 되야.진테제의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진테제 33) 의 단계로 가야한단 말이야.좌파가 이렇 게 해 논건 바탕으로 해서 응 보수가 거기다 더 나아가면 되는 거지.그걸 무시한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그럼 그럼 어 비전 그러면 우파 쪽으로 만들 것이냐.통합적으로 만들 것이냐.이게 과제 아니 야.이걸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흐리멍텅 하단 말이야.이건 우도 아니고 통합도 아니고 말이 야.응 그게 또 우리나라 국가에서만 되는 것도 아니고 남북한을 포함해서 동북아 전체까지 포함 이런 비전을 국민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수준으로 해내야 되는데,그러니 참 어려운 시대를 지금 받아서 지 금 있는데 6 3이 할 일이 뭐가 뭘 해야 되느냐,이런 걸,예를 들면 포럼도 많고 뭐 사람은 많은 게 있지만 6 3이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응 6 3은 역사적인 사명이 끝났느냐,나이들 있고 하니까, 끝났다고 그러면 친목단체나 하고 놀면 그 뿐인데 그러기에는 아직 조금 빠른 것도 같고,현직 대통령 도 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런 노력이 좀 있으면 좋지 않겠나 하는 내 생각이야. 면담자 :긴 시간,또 귀중한 말씀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술자 :(웃으면서)난 더욱 더 고맙습니다.나같이 별로 할 일 없는 사람 갖다놓고 신기자 수고 많았고 사진 찍으시는 분 참 수고 많았습니다.고맙습니다. 33) Synthese

188 18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면담후기 이수용 전 연산건설 사장이 6.3항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다.61학번,경북고 출신의 주류그룹과 다소 동떨어진 60학번,마산고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964년도 한일회담 반대운동뿐 아니라 1965년도 조 인 및 비준반대운동에도 깊이 참여한 몇 안 되는 인물에 들기 때문이다. 6.3항쟁의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한 점에 더해 지도부와 가장 가까이 교감하면서도 한발 떨어져 있는 점,4.19세대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 점 등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그는 6.3항쟁의 전 과정을 구술할 적임자에 해당한다.그런데 이런 점이 오히려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부분에서는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너무 오래,너무 많이 활동한 것이 오히려 기억에 혼선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면담자는 1994년 같은 주제로 이 전 사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당시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인 터뷰는 한 시간을 넘지 못했다.세부적인 기억을 되살리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많은 사건과 사실 관계가 뒤엉켰고,어떤 것은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번 구술은 과거의 원활하지 않았던 기억 재생의 경험에서 한걸음 나아간 것이었다.진술조서와 공 소장,판결문 등 당시의 기록 가운데 그와 관련된 부분들을 정리해 제시함으로써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 움을 주었다.그 결과 14년 전의 인터뷰의 두 배에 이르는 구술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실에서 진행된 이 전 사장의 구술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그는 진지하게 구술에 임했고,기억나는 부분을 최대한 말하려고 노력했다.기억을 되살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면담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시작하고,말투 속에 경상도 사투리가 평소보다 더 많이 섞이기도 했다. 구술이 끝난 뒤 이 전 사장은 자신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 젊은 시절의 사건과 경험에 대 해,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털어놓고 구술기록으로 남긴 데 대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하고 시대적 요구도 달라졌지만 6.3항쟁과 여기에 참여한 6.3세대의 시대적 소임에 대해 서는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18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83)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3항쟁 주요사건 구 술 자 이현배 면 담 자 김주관 면담일자 면담장소 면담차수 (월) (사)한국윤활유공업협회 사무실 (문래동3가 우리벤처타운1001호 ) 1차

190 18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이 현 배 (한 자 : 李 賢 培 ) 면담자 성 명 : 김 주 관 (소 속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촬영자 성 명 : 박 재 홍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녹취자 성 명 : 박 재 홍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1차 (월) (사)한국윤활유공업협회 (문래동3가 우리벤처타운1001호 ) 및 2차 장소 3차 녹화테이프 5개 산출물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1부 2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면담상황 설명 인터뷰 전 비서를 통해 직원들의 출입을 제한하라고 하시 면서 6.3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구술에 응해 주셨다. 비고

19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85)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이현배 (한자) 李 賢 培 나이 64 자택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1동 주소 생년 월일 전화번호 : 직장 :사)한국윤활유공업협회 전화번호 : 출생지 충남 결혼연도 1974년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최영희 처 1947 약사 가족 이주헌 아들 1974 연구원 충남 홍성초등학교 학력 경복중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수료 1.사)한국윤활유공업협회 상근부회장 2.(주)대흥고문 3.시민의신문 부사장 4.(주)조양 대표이사 주요 약력 5.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제2대 상임 집행위원장) 6.은평구(을)한겨레민주당 출마-낙선 7.(주)세동양행 대표이사 8.(주)교하산업 전무이사 9.(주)대봉 근무 10.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

192 18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새세대,한일회담,문리대,민자통,민비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복학 파,4 19,4.19혁명,2 28,3 24,YTP, 靑 思 會,괴소포사건,단식농성,6 3, 6 3운동,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민추협,신민당,함춘원,5 20,민족적민주 주의 장례식,학생회,계엄령,부관학교,6 8,불꽃회사건,인혁당,폭발물,몰 로토프칵테일,민청학련,민주화운동 상세목록 Tape1. 1. 새세대 참여과정 및 3 24시위의 배경 조직 전개과정(00:00-46:44) 2. 괴소포 배달사건 및 YTP사건 (46:45-54:44),(Tape2.00:00-08:23) Tape2. 3. 학생회 의 역할(08:24-14:47) 4.군 입대 계기 및 야당(김영삼,김대중)과의 관계(14:48-25:35)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25:36-39:15) 6.서울대 문리대 단식농성 전개과정(39:16-52:13),(Tape3.00:00-05:45) Tape3. 7. YTP 송철원 폭로사건과 6 3시위 전개과정(05:46-40:26) 8. 군 입대 계기 및 학생운동 참여과정(40:27-52:25),(Tape4.00:00-16:32) Tape4. 8. 민비연 사건(16:33-29:13) 9. 몰로토프 칵테일 사건 및 내란음모 사건(29:14-48:04) 항쟁 의 의의 및 개인적 소회(48:05-51:38),(Tape5.00:00-08:48)

19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87) 5)예비질문지 이현배 선생님. 6.3항쟁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1.학생운동 또는 한일회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시기가 언제이며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보충질문:후배그룹의 입장에서 당시 학원 분위기와 시위 정국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거사 계획에 대해서 안 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알고 나서 어떤 입장과 역할을 취했습니까? (보충질문:후배로서 선배들이 하는 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3.원래 3월 17일 거사하기로 했는데 24일로 연기된 비화를 알고 계시지요. 4.3월 24일 벌어진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5.3월 25일,26~29일 어떤 일이 벌어졌고,무엇을 했습니까. (*3월 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일본의 재침입의 상징이라며 호텔 뉴코리아 간판을 떼어 불질렀다.-6.3동 지회,6.3학생운동사)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6.4월 들어 터진 괴소포 사건과 학원사찰 등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는데,이와 관련해 기억나는 일을 말씀 해 주십시오. 7.서울문리대에서 4.17한일회담성토,4.19영령추도식,4.20(4.19네 돌 기념식),4.21시위 등 집회 시위가 계속됐습니다.이 가운데 4.19영령추도식은 학생회가 주최했는데,당시 투위와 학생회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이때 이 선생님께서 주로 무엇을 했습니까?) 8.4월 23일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개최했습니다.당시 학원사찰과 YTP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194 18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의 모의와 전개 과정,그리고 이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10.시위 당일 어디에 있었으며,그 뒤의 행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4>문리대 단식농성과 6.3사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에는 어떤 형태로 참여했습니까.대회를 주도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 장단(가칭 한국학생총연합회,이하 한학련)과는 어떤 관계였으며,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습니까? 12.5월 30일부터 시작된 서울문리대 단식농성이 어떻게 계획되었고,어떤 과정을 거쳐 성사되었습니까? 13.투위 지도부가 수배로 와해된 상황에서 단식농성 지도부는 어떻게 구성되었습니까? (보충질문:이 선생님은 어떤 역할을 맡았습니까?) 에서 5.20까지,그리고 단식농성의 전 과정에 참여한 사람이 이 선생님 말고 누가 또 있었습니까? (보충질문1:단식농성 참여자 가운데 인상깊게 기억나는 분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2:단식농성 중에 기억나는 이벤트나 일화를 소개해 주십시오.) 15.단식농성 분위기를 확산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습니까? (보충질문:동아방송 앵무새와는 농성 지도부 또는 서울문리대 학생운동권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습니까?) 16.단식농성 중 김중태 피살설이나 계엄선포설 등 흉흉한 소문들이 많이 나돌았는데,농성장에 어떤 영 향을 미쳤으며 이 선생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17.수배 중이던 현승일,김도현,김중태의 경찰 자진출두를 결정한 데는 단식 지도부와 모종의 협의가 있었습니까? 18.6월 3일 가두진출을 예상하고 입원 중인 송철원을 농성장으로 빼내오려는 아이디어는 누구에 의해서 나왔습니까? (보충질문:송철원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빼내온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19.6월 3일 모든 대학이 일제히 중앙청 앞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합니까.이심전 심으로 전달된 것이었습니까,아니면 수배 중인 투위 지도부의 지침이었습니까?

19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89) 20.6월 3일 가두진출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언제부터 계엄령을 예상했고,실제 계엄령이 내려지자 그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5>민비연 사건 21.저학년으로 주로 일선에서 활동했는데,계엄령 후 왜 비중 있는 주동자로 수배되었다고 생각합니까? 22.수배 중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23.불꽃회 사건과 (1차)인혁당 사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김정강과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24.군 입대는 어떤 생각으로 했나요?수배 전력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196 19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녹취문 이현배 선생님. Tape1. 면담자 :오늘 2008년 12월 1일이구요.지금 3시경입니다.이현배 선생님 사무실에서,이현배 선생님 과 6 3에 관한 전 후 배경에 대해서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면담자 :6 3이 일어나던 해에 그럼 몇 학년 이셨지요. 구술자 :(자료를 손에 들고 보면서)2학년. 면담자 :2학년, 62년 63년도에? 구술자 :63년에 입학을 했습니다. 면담자 :63년에 입학을 하셔가지고 입학은 정치학과로 입학을? 구술자 :아니요 사학과에. 면담자 :사학과로 입학을 하셨던,아 그때는 문리대니까? 구술자 :문리대 사학과,국사 동양사 서양사 안 나눠지고. 면담자 :그때는 다 같이 있었는가요? 구술자 :예,사학과요.예. 면담자 :그러면 으.그 한일회담 하고 관련해서 응.이 군부정권에서 한일회담 을 시작하게 하고 있고 뭐,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신 거는 언제쯤부터 관심을 가지신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기침)한두 가지 경우로 얘기해야 되는데요.첫 번째는 어 당시에 문리대 서울대학에 는요.대학신문이라고 전체 서울대학 신문이 있었고,또 각 단 단과대학에 단과대학 신문들이 있었어 요.문리대에는 새세대 라는 신문이 있었고,법대에는 그때 자유종 인가 뭐 이래 가지고 있었고,상대 에도 뭐 신문이 있었어요.근데(그런데)인제 문리대 새세대 가 제일 활발했고,어.그 뭐 이 (미소를 띠며)내가 관여해서 그렇게 자랑하는 건지 몰라도 여타 대학에 대학신문보다도 더 평이 좋고 이렇게 있었어요.제가 1학년 때,근까(그러니까)1학년.여름인가 가을인가 모르겠네요. 새세대 신입기자 인 제 그 저 시험이 있었어요.그래서 인제 그냥 응시를 했죠.그랬더니 인제 그 당시에 남자 3명,여자 2 명 그렇게 뽑는데 어떻게 뽑혔더라고요.선발이 됐더라고요.그래서 인제 새세대 신문에 문리대 새세 대 신문 기자로 다 일을 했고,그 인제 새세대 신문은 당시는 어 인제 월 2회 발행했으니까.응.하 여튼 인제 국가나 사회나 학교나 이런데서 일어나고 있는 제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죠.그러고 이제 그러므로 제가 1학년 때 2학년 때 한참 1학년 때부터 국가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거는 나중에 가면 또 얘기가 나오겠지만 소위 6 3운동(6.3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 인제 뭐냐 얘기 할 때 그중에 하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게 민주화운동 이거든요.그런데 인제 그 우리가 나는 인제 어 중학교,고등학교는 서울서 다녔고 경복고등학교 다녔고 국민학교(초등학교)는 다

19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91) 충남 홍성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녔어요.인제 우리 어렸을 때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다닐 때나 중학교,고등학교 다닐 때나 전 사회적으로 소위 자유당의 독재와 부패에 대해서 그 엄청난 정도의 국 민적인 비판이 있었거든요.(왼손을 들면서)그랬고,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국민학교(초등학교)때부터 그걸 죽 들어왔죠.자유당 나쁜 놈들 뭐 어쩌고 민주당의 사람들 고생하고 뭐 이러고 이제,자유당 중 에서도 저 이 저 온건파보다도 저 *(강경파)란 놈들이 더 나쁜 놈들,뭐 해가며 온갖 소리를 다 들었 죠.그러니까 인제 아 저 저 독재정권을 무너트리면서 민주화를 이뤄야 된다 하는 것 같은 게,은연중 에 그냥 우리세대는 우리세대 때에는 머리나 이래 맘에 각인이 되었죠.그러고 인제 (기침)해서 60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4 19가 났어요.4 19가 났는데,그때 나는 그 이종사촌형인 이영섭이라고 문 리대 국문과 다녔는데 경기 다녔고,근데 그 형 고등학교 2학년,난 고등학교 1학년 때 둘이 인제 그 우리들 딴에는 이것이 참 의거고 장한 일이다 이래(이렇게)생각을 해서 인제 그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인제 채혈을 하러 갔어요.부상자들,그러니까 4월 한 20,20며칠 되겠죠.채혈하러 갔는데 그 엄청나 게 채혈자들이 많아서 채혈 희망자들이 많아서 우리도 줄을 쫘아악(쫙)서서 그러니까 기다려서 들어 갔는데,또 들어갔더니 이미 이렇게 채혈 그 희망자들이 많은데 자네들은 고등학교 학생이기 때문에 더 좀 먹고 와야지 그냥 가 라고 그래서 채혈을 못하고 왔거든요.인제 그런 기억 그리고 61년도에 인 제 쿠테타(쿠데타)가 났거든요. 군부 쿠테타(쿠데타)가 그랬을 때 어린마음에도 이런 뺏긴 것 같이,그 뭐가 잘 못 돼가고 빼긴 것 같은 이런 생각을 가졌죠.그건 나만이 아니라 이렇게 그 하여튼 그 당시 또 지금도 우리가 논리적으로다 모든 걸 정리 해내든 못 내든,하여튼 그 정서적으로는 다 느꼈어요. 그 우리 또래는,그래가지고 인제 어 학교에 들어가서 부터 인제 학교 들어가서 새세대 에서 활동을 하게 되고,또 그러면서 바로 인제 그 6 3이라는 한일회담 반대 요런 거 부딪히게 되고 하니까,내가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게 되죠. 면담자 :그 당시에 들어가실 때 새세대 에 편집장 일까 편집주간은 어느 분이? 구술자 :예 응 새세대 는 응 그 저 원래 나중에 교문수석 했던 김정남씨 그 사람이 편집장이었다.그 다 음에 서울신문사 편집 저 문화일보 편집장하고 지금 인권위원하고 있는 김호준씨,그 사람 편집장하다 그 다음에 나 때는 내가 들어갔을 때는 내가 1학년 그 사람 3학년,(양손을 들어 설명함)김도현,김도 현씨가 편집장이야.그러고 인제,그 이 내 또래가 인제 그 남자만 나까지 셋,여자가 둘이 있었는데, 응 그 위 그러니까 편집장은 하나,3학년 하나고,2학년이 인제 우리 군대용어로 사수들이에요.사수들 인데,그 당시 새세대 는 어떤 형태로 되어 있냐 하면은 4면으로 되어 있어요.1면이 이 일면이 그러고 그냥 논문 이랬는데 1면이 논문이에요.그냥 한마디로 딱 논문 썼져(썼지요).이제 예를 들면 뭐 이 소 외론,뭐 이러다보면 인간으로서의 소외,노동으로부터의 자기소외,뭐 이런 것과 해가지고 막 쫘아악 (쫙)한편이 깔려요.그 다음에 또 소위 그 한일회담 이면 한일회담 문제에 대해서 쫘아악(쫙)깔리고 그 또 어떨 때는 마 2,3회 연재해 버리고 첫 면이 그래요.그러고 인제 2면이,인제 사회 내지 학부,3 면이 학교 소식,4면이 문예 그러고 인제 문예는 그때 그 새세대 를 최고로 잘 활용하고 그러고 인해 큰 사람들이 이청준,그 또 저 무진기행 쓴 사람 누구지 김승옥,김승옥,김지하,이 사람들이 다 새세 대 를 통해서 컸죠.그러고 인제 그 1면 논문,그것이 제일 그 아주 주 주요페이지인데,메인 페이지인 데 고것을 인제 중앙일보 편집위원장(편집국장)편집국장 했던 김영배씨 당시 문리대 철학과 2학년,그

198 19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리고 김영배씨가 인제 1면 담당이고 내가 바로 이제 문리대 조수(1면 조수)그랬죠.그래서 그 새세대 그렇게 하고 그래가지고 인제,그러니까 잉 그 논문 하여튼 거기에 시위라든지 뭐 또 여러 가지 또 논 리라든지 적절한 거 찾아 했다고 봐야지. 면담자 :그럼 새세대 그 뭐 새세대 있던 분들이 대체로 학내분위기를 이렇게 이끄는데 어떤 선도적인 역할들을 하셨는가요? 구술자 :그건 못했죠.우선 학년이 좀 저학년이었고,어 위가 김도현씨인데,김도현씨가 3학년인데 3학년 도 김도현씨가 제해에 들어왔거든요.그러고 김영배씨 나보다 위에(위의)사람도 제해에 들어오고,나 도 제해에 들어오고.그러니까 전부 그런데,잘 알다시피 그 당시는 참고로 거의 뭐 우리과만 해도 20 명 입학하는 데서 4명,5명인가 빼곤 다 재수 삼수한 애들이거든요.그러니까 인제 그 도현이 형이 정 치학과에 임무를 썼지만(입학을 했지만),뭐 그 위에 선배들이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 로 인해서,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 영향력을 받아 들여서,문리대 분위기 그 형성되는 어떤 형성하는 어떤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하여간 그런 분위기를 받아들여서,그래서 그것을 학내 (학교)에 전파한다고 그럴까 반영하는 그런 역할이었죠.예,주도는 못했어요. 면담자 :그럼,그 당시에 주도그룹이셨든 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 구술자 :음 주도.그룹은 어 여러 가지 있는데 한 3개 그룹 정도를 볼 수 있어요.뭘까 지금 편의상 나 뉘는 건데,어 인제 그 하나는 제일,제일 두개를 우선 크게 나뉘어 볼게요.두 개는 뭐냐 하면 어 그 복학생파 이게 뭐냐 하면은 이 복학생파 뭐냐 하면은 4 19가 나가지고 소위 민자통 (민족자주평화통 일협의회)하다가 민자통 아시나? 면담자 :그것도 설명을 좀 해 주시? 구술자 :어 저 그 4 19나고 난 뒤에 소위 학생들하고 일반 사회인 중에서 혁신계하고 합해가지고,어 민자통,민주자주 민주 민족자주통일이든가,민족자주통일연맹 이였나,통일 인가 민주자주통일였나, 나도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런 걸 구성해서 소위기억이 날거예요.그래가지고 직접 학생과 시민단체 들이 북과 통일협상을 해야 된다 해서 오라 남으로,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막 하는 그거예 요.그게 에 그때 민자통 대의장이 유근일씨였고,뭐 인제 그렇게 되서 이 민자통 을 했던 사람들이 모조리 붙잡혀 들어갔다가,그러니까 저 이 박정희 아니 저 박정희 쿠테타(쿠데타)에서 모조리 붙잡혀 들어갔다가,이 사람들이 2년씩 형을 살고 복학을 했어요.전부 다시 그래서 복학을 했어요.이 사람들 이 그까(그러니까)주로 뭐냐 하면 허적(구술자 삭제),김정강,서정복 또 뭐 그 누구야 이영일,윤식, 뭐 뭐 이런 사람들이 전부 이렇게 복학을 했어요.그래서 이 사람들이 복학파고 또 인제 그 다음에 인 제 또 하나는 복학파 말고,소위 나중에 민비연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을 구성하지만 이 인제 그 복 학파 말고 인제 재학하던 사람들 가운데서,특히 특히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해서 인제 여러 가지 그 당시 문제 사회문제,북한 문제를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든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아 1학년 때(구술자 당시 1학년 때)그니까(그러니까)바로 1학년 때 민비연 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를 만들거든요.거기 에 누구냐 하면은,(잠시 침묵)누구야 잘 이름이 조금 아까까지 뭐 했는데 박범진,김경재,(구술자 추 가,이종율)그 다음에 음.김중태,현승일.사실은 박범진,김경재 애(이)들보다 김중태,현승일 한 학 년 아래예요.박범진,김경재 그러고 인제 그 사람들하고 그 다음에 박범진,김경재 쓰리스타였는데 이

19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93) 적(이종률),이 누구야 나중에 국회의원도 하고 동아일보 기자 하다가 나중에 국회의원도 하고 했는데, 박정희 그 그쪽 쫓아서 한 저 저 전라도 저 전주 사람(이종률),음.아고 그게 누구더라.이 누구가 있 었요.그 사람들이 민비연 의장단 구성하고,그 의장이 하여튼 그러고 현승일,김중태가 부위원장을 하고,그리고 김도현이니 사회학과 뭐 이원재니 이런 사람들이 이제 민비연 을 구성했죠.그래서 이 민비연 파들하고 민비연 들하고 복학파 들하고 이렇게들 있었어요.근데 이 복학생들 복학 쪽이 이쪽 도 뭐 였지만 복학 쪽이 오히려 큰 흐름을 주도했죠.그러고 복학 쪽은 응 근까(그러니까)전체 문리대 분위기라는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63년도에 문리대 분위기라는 것은 좀 달라요.일반 사회 보면 은,해방구 같은 분위기야 거기가.다 복학해서 왔고 또 이렇게 되니까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그러니까 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두드려 부숴야 되고 다 뺏긴 거고(당시 분위기를 살리는 듯이 두 손을 모 아 확신에 찬 듯)우리가,꼭 찾아야 되고,이런 분위기 그러고 인제 그러고 그런 어떤 사회.개혁,민 주화 그러니까 그 논리는 다분히 인제 여러 이론이 온갖 잡탕이론이 다 섞여 있어요.뭐 하다 못해 손 민의 삼민주의 니, 동학 이니,무슨 온갖 다 있지만 역시 그래도 가장 많이 설득력을 갖던 거는 사회 주의 계통이론인데,사회주의 계통이론도 대체로 어 복학한 중에서 어 김정강이 쪽은 소위 그 노동자 중심의 사회개혁 이론을 주로 얘기를 하고,그리고 어 서정복씨는 어 농민중심 그러니까 저쪽은 레닌 이론을 따르고 이쪽은 마오이론을 이런 그런 쪽이었고,대신 인제 어 대체로 김중태나 현승일이나 뭐 이쪽들,또 지금 현재 성유보나 뭐 이런 사람들,이쪽들은 대개 응 디모크래티,디모크래티,디모크래디 트(디모크래틱)쇼설.니즘 쪽이예요.인제 얘기가 하여튼 대체로 논리나 이런 거는,왜냐하면 당시에 우파정권이라든지,군대정권이라든지 또는 우파정권론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이거를 정확히 어떤 설명 을 해주고 행동철학까지 얘기 해 줄 수 있는 논리가 없거든요.당시엔 더 그러니까,근까(그러니까)인 제 거기서 인제 도구가 사회인식을 하거나 또는 그거에 대해서 어떤 행 행동의 규범 같은 걸 생각해내 고 하는 것이 대개 이 밑바탕이 사회주의 이론이었는데 그런 것도 아까도 얘기한데로 레닌 쪽에 기울 어졌든 사람,마오 쪽에 기울어졌든 사람,또는 디모크래티(디모크래틱)쇼설리즘에 유럽사회주의에 기 울었든 사람,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어있죠. 면담자 :이념적으로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양하게? 구술자 :예 이념 굉장히 다양해요.개중에는 동학가지고 인제 막 죽어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뭐 또 저 크로포트기능 갖고 무정부주의 얘기하는 사람에,뭐 또 손문의 삼민주의를 얘기하고 하는 바로 많 아.(양손을 펴면서)뭐 그 온갖 잡탕 다 백화제방 이죠.그 중에서도 제일 그런 대로 영향력 있고 뚜렷 했던 것이 사회주의적 계통이고 사회주의계통에서도 인제 일부 이랬지만,영향력은 김정강이나 서정복 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어요.실질적으로 그 어떤 그 지금 말 추종자라고 하면 너무 심한얘기지만,하 여튼 팔로우는 어 뭐 물론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이쪽이 많았고 그런 상황이었고 그랬죠.(잠시 질문 에 대해 생각함)왜 내가 그런 대답을 했지 지금 뭐 물었었더라. 면담자 :예 그 당시 분위기. 구술자 :그래서 인제,그래서 그 당시의 문리대 분위기는 어 4 19혁명의 연장 분위기이에요.연장 분위 기고 또 그것을 맡아서 수행하겠다는 어떤 전사적 입장이었다고,모든 학생이 그러는 건 아니에요.인 제 소위 우리가 얘기하는 운동권들이.

200 19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리더그룹들이? 구술자 :예 그렇죠.그렇게 돼 있었고 그러고 당시 분위기는 그런 분위기였어요.여기에 인제 또 한 가 지를 더 가미한 그러니까 6 3을 만드는 데 까지 요인들 중에서.그니까(그러니까)당시 분위기를 설 명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가 4 19혁명인데 4 19혁명,그러고 사람들이 복학 와서 실질적으로 막 우 리하고 직접 부딪혀서 다 하니까 그러고 또 하나가 어 김중태,현승일 이 사람들로 대표되는 대구 경 북고등학교 출신들이에요.이 대구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 뭐냐면,아.이 그 4 19나기 전에 어 3 15부정선거에 규 3 15부정선거 규탄 하느라고 마산에서 데모를 해서 시작이 되지만,그 이전에 그 이전에 그러니까 막 강제 선거를 하고 학생들을 동원하고 했을 때,3월15일이 선거 날이지만 2월 28일 날 이 이런 선거는 있을 수 없다.이건 독재선거고 이건 있을 수 없다 해 가지고 대구 경북고등 학교에서 2 28데모를 해요.그때 인제 3학년이,3학년이 김중태,현승일,이 사람들이고 김중태,현승 일,박재일 뭐 저 이원재,이 사람들이고 다음에 그 다음에 고(그)다음 학년이 아까도 얘기했던 김영 배,나중에 삼성건설 회장(사장)하던 사장하던 어 김헌출,또 또 박삼옥,쌍용이사하던 홍승재,인제 이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인제 그 이 2 28데모를 한 사람들이에요.그 당시 2학년 3학년이 근까(그러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이 그 그건 자기들대로 2 28데모하고 뭐 여러 가지 책이 있으니까.근데 뭐 어떻게 됐던 간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을 떴어요.사회문제 그 민주화에 대해서 그리고 그거에 대해서 어떤 의식을 갖게 되고 또 그것을 직접 실천해야겠다.문제의식을 가져요.그니까(그러 니까)예를 들면은 가령 이래요.(머리를 긁적이며)우리가 대체로 그 문과에서 공부 잘하는 놈이,문과 쪽에서 공부 잘하는 놈이 대개 1등을 하든 놈이 법대를 가고,2등하든 놈이 상대 가고 3등하든 놈이 문리대 오거든요.그런데 그때 경북고등학교는 어떻게 됐냐 하면은,각반에서 그러니까,예를 들면은 안,안삼환이라 지금 연대교수하고 있는데 안삼환이라는 사람은 자기반에서 일등을 했어요.그 문리대 독문과를 오고,2등을 한 사람은 서울법대를 가고,3등을 한 사람은 서울상대를 갔거든요.(손을 들어 설 명함)그러니까 당시에 각반 반장 뭐 2학년에 그 저 했던 김영배,홍승재,뭐 김헌출 전부 각반에서 1, 2등하던 애 전부 문리대로 왔어요.근데 문리대의 정치학과,또 철학과,사회학과,이쪽으로 다 왔어요. 다.그래 인제 그 사람들이 민비연 의 주축 이예요.그니까(그러니까)위가 박범진,뭐 저 저 그 저 누 구야 김경재 있지만 실질로(실지로)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경북고등학교 출신의 문리대생들이 (손바닥 을 치며) 민비연 의 주축이에요.그래서 이 민비연 의 주축과 제 복학한 사람들이 가져오는 4 19적 영향과 이것이 믹싱이 되면서 거기서 인제,그러면서 그 당시의 분위기,그니까(그러니까)완전히 이건 무슨 혁명당 분위기고 해방구 분위기고,전혀 지금 생각해 봐도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았대니까.(웃으면 서)우리 논리가 달라 우리끼리 얘기하는데 밖에 나와서 고등학교 동창들하고 뭐 어쩌구 얘기하면 전 혀 달라 그랬었으니까.(미소를 띠며 설명) 면담자 :전반적으로 문리대 분위기가 다? 구술자 :그렇지 대충.그것을 받아들여질 만한 그런 어떤 토양은 돼 있었지.왜냐하면 인제 어 자유당 독재에 대한 어떤 염증,또 그 다음에 그거에 대해서 4 19가 되었지만 뭐 그쪽으로다가 보수주의라든 지 또는 질서 운운하고 또는 뭐 반북 얘기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는 뭐 군사정권 뭐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지지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만,인제 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군사쿠데타에서 뺏긴 것,우리 이

20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95) 제 민주 말하자면 지금 인권 이런 거,뺏긴 것 같은 토양이 있는데다가 그것을 더 적극적으로 이제 실 천 할려는 의지와 또 논리적으로 그거를 확립하려는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했지.그게 문리대의 풍토에 요.그러니까 법대 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법대가 아래에 붙어 있으니까,또 상대도,늘 문리대로 많은 사람들이 문리대로 놀러와요.와서 자고가고 막 그랬죠.(면담자를 응시하며) 면담자 :그 새세대 사무실이 칫솔부대들의 아지트였다고? 구술자 :그렇죠,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되냐면 이렇게 되요.인제 그 6 3이라는 거를 6 3이 일어날 만 한 분위기 또는 주체가 어떻게 되냐면은,그 분위기라는 게 이 혁명 4 19혁명과 그 다음에 2 28쪽이 직접적인 엘리트들을 공급했었어요.(양손을 들어 설명)이렇게 돼서 했는데,근데 여기서 어 그 저 뭐 야 그래가지고 대개 인제 이 2 28을 중심으로 해서 경북대학(경북고)중심으로 해서 뭐 이쪽사람들이 인제 민비연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을 맨들고(결성하고)이랬잖아요.그런데 거기에 대체로 이 민비연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쪽하고도 관계도 되고 저쪽 4 19혁명 쪽하고도 관계가 되고 그런 사람들 가 운데 서 그런 사람들 부대라는 게 묘한 부대가 인제 그 밤의 새세대 에요. 밤의 새세대.근요(그거는 요) 밤의 새세대 는 왜 만들어 졌나하면,인제 오고 갈 데가 없는 사람들 오고 갈 때가 없는 사람들이 인제 새세대 신문사가 문리대 뒤에 그 뒤에 낙산 쪽으로 그쪽 맨 끝에 사무실이 있었는데,거기서 인 제 자고 오고,자고 그러는 거,먹는 거야 밖에 나와서 어떻게 재주껏 먹고 거기서 자는데,그때 거기 서 나도 나도 집이 시골이라(턱을 만지며)인제 알바이트 입주해서 알바이트 하다가,인제 어떻게 쫓겨 나다가,뭐 그 맘에 안 맞으면 나와 갔고 새세대 가서 잦거든요.근데 인제 그때 새세대 에서 쭈욱 자 고 있는데 내가 이미 이미 새세대 갔을 때 그 사람들 밤에 새세대 에서 자고 있었는데 대체로 누구 누구였나면 쭈욱 고정으로 자고 있던 게 이문승씨,그 저 연합통신인가 뭐 이문승씨,배춘실씨 저기 저 기 어디야 (잠시 회상) 대한일보 있다가 나중에 고만두고서 뭐 배춘실씨,김정남씨도 처음에는 쭈욱 고정멤버였어요.그다음에 김정남씨 삼촌인 김각,그 사대,사대 김각 그러고 어 아 그리고 아고 어 그 사람 누구야?시인(주성윤)하나 있었어요.그 한국일보 그 쪽으로 뭐 하다가 자살한 시인이 있는데 그 사람 지 뭐였나.하여튼 시인 쭈욱 있었고 그 사람은 사람들하고 어울리질 못했요.그래가지고 왕따 당하고 구박 당하고,근데 진짜 갈 데가 없어서 거기서 살고,나 고정멤버가 그렇고 그 다음에 유인멤 버(유입멤버)가끔 와서 자는 사람,가끔 와서 자는 사람이 송철원,최혜성,이원재,최동전,박재일 또 김중태,또 (침묵)법대 심재택,이 사람은 저 이 그 4 19때 붙잡혀 들어갔다 온 사람이거든요.법댄데 심재택 이렇게 온 사람들이 거기서 자죠.뭐 가오리도 보면서 막 겨울에도 자요.겨울에 추워도 자고 거기서 그랬죠.근데 이 사람들이 뭐 했냐 하면 그러니까 그 사실상 처음에 3 24뭐 이렇게 하고 이 거를 하는 거는 민비연 이 중심이 되서 하기로 됐었어요.꼭 민비연 이름으로 안 걸고 나와도 인제 김중태를 중심으로 해서 민비연 그 인제 2,3학년들이 인제 하기로 했는데 그러면서 인제 이것을 서포 팅 했죠.복학한사람들도 서포팅하고 새세대 사람들도 서포팅하고 이러면서 해나가다가 그 민비연 쪽이 그 제대로 동력을 갖지 못했어요.(양손을 들어 마주보며)여러 가지 허점 때문에 동력을 못 가졌 죠.그래서 적어도 3월 하여튼 3 24 하고 고 초기,그 뒨 전부다 야간 새세대 사람들에 의해 주도 되 요.실질로 6 3 이란 것은 야간 새세대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 되는 거예요. 면담자 :낮에 새세대 멤버하고 밤에 새세대 멤버하고 전혀 다른 사람?

202 19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전혀 달라요.나는 양쪽으로.(웃음) 면담자 :그러면 선생님 같은 경우에 3 24전체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이 실제로 3 24운동 까지 그 과정들을 잘 알고 계시는지? 구술자 :잘 몰라요.아니 어 (의자에 뒤로 기대며)3 24그까(그러니까)5월 30일,5월 30일 보다도,이 건 뭐 5월 25일 정돈데,5월25일 정도서부터,하여튼 그 몇 차례의 데모는 내가 혼자 주도했고,또 5월 30경일부터 6 3까지 6 3당일까진 내가 다했어요.그러나 그 처음시작 처음시작은 나도 잘 몰라요. 그니까(그러니까)내가,내가 3 24에 대해서 안거는,인제 이.소문으로 최동전씨나 이원재씨나 뭐 이 사람들이 얘기해 줘서 한바탕 붙을 거다.인제 그러고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김(면담자: 김주관)교수 같은 경우 데모 같은 거 많이 겪어보고 그랬지만,그 당시로서 우리로서는 상당히 뭐라 고 군사정권이 그대로 있고.아 저 1월 달에 아 저 저 64년에 63년에 선거를 했구나.선거에서 민간정 권 했지만,아직도 군 통치하는 입장이고 근데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데 참 겁도 나고 막 그렇죠.그런 데 하여튼 그렇게 할 거다.인제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6.4년 인데 64년,내가 보기에 나는 그게 63년 12월,64년 1월경으로 봤는데,내가 보기에는 지금도 이렇게 나중 생각해 보면 64년 2월이었지 않 나 나는,64년 2월에,2월에 인제 이원재 형이 내가 그 하여튼 그 당시에는 한일회담 반대도 잘 몰랐 어.하여튼 반군사정권 데모를 한다.이제 대개 이렇게 쭈욱 그랬는데 그 1월 한 중순쯤인가,1월 하순 쯤인가,1월 하순,아 2월,2월,2월 중순쯤일 거예요.2월 중순쯤에 (손을 마주 잡으며)이원재씨가 나 보고 어디 좀 가자고 그러더라고요.그래서 가니까 삼선교에 있는 김영배씨 하숙집인데,그 거길 가니 까 김영배씨,김헌출씨,홍승재씨,박삼옥씨,이 사람들은 전부 다 당시에 문리대 3학년이고 경북고등학 교 출신들이고 경북고등학교 엘리트들이고 민비연 핵심멤버들이고,그 사람들이 뭘 부지런히 준비하 더라고요.글도 모으고 플래카드도 만들고 뭐도 하고,그러고 나니까 아 3월초에 한다는 거예요.준비 를 하더라고요.그래서 아주 임박했구나.인제 그래가지고 뭐 내가 뭐 도와줄 거 있느냐 그러니까, 에 도울 거 없어. 그래서 인제 왔지요.그러고서는 그 다음부터는 인제 뭐 누가 인정을 하고 안하고 그런 것도 없고 뭐하니까,인제 고정멤버 격으로 내용을 다 알고 그러니까 고정멤버 쪽으로 얘기할 것도 하 고 연락할 것도 하고 왔다갔다 그랬죠.그래서 고때부터(그때부터)알았어요. 면담자 :근까(그러니까)3월 24일 데모는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를,오랫동안 오래전에부터 준비를? 구술자 :예 했죠.중태형이 그 제일 잘 알아요.그 어떤 선배들도 어떨 때 잘 모르더라고요.어떻게 다만 분위기상으로 정확히 그런 것이 있을 거라 다 알지만,그게 불을 누가 댕기고 (손으로 지적하며 강조 함)어떻게 댕겼는지는 우리도 정확히 몰라요.다만 인제 민비연 쪽에서 했고 민비연 쪽에서도 그걸 뭐 민비연 전반으로 공표했고 표결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민비연 의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 했어요. 두말할 것 없이 준비를 했는데,근데 인제 그게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어떻게 됐냐 하면은,(자료를 보 면서 생각에 잠김)3월 17일 날,원래 3월 17일 거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3월 17일 날,원래 거사하는 날짜였는데,이게 인제 그러니까 저 뭡니까?내가 2월 중 하순경이니까 아마 중순경이니까,한 달 정 도거든요.3월 17일 이니까,그니까(그러니까)그 이전부터 준비들 해 온 거지.그 이전에 모의를 하고 이런 거 하겠죠.근데 이 3월 17일 날 하기로 했어요.근데 인제 3월 17일 날 인제 하기로 대개 이렇게 했는데,정확한 날짜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민비연 핵심 들은 알아요.그 날짜로 3월

20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97) 17일로,철원이 형도 3월 17일 몰랐어요.다만 인제 곧 한다.이것만 알았고,나중에 3월 17일이 3월 24 일로 늦춰졌다는 거 알지.철원이 형도.근데 그게 어떻게 됐냐 하면 김덕창이라는 사람이 있어요.혹 시 들어보셨는지 몰라도 이 사람은 뭐냐면 경기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대학교 중문과,그 때 당시에 중문과 인재들이 많았는데,왜 그러냐 하면은 중문과가 정치학과나 외교학과에 떨어진 놈이 2.2지망 으로 많이 와서 우수한 인재들이 거기로 많이 왔어요.하여튼 중문과를 나와서 어 정보부,그니까(그러 니까)학교 다닐 때부터 정보부 프락치였어요.그건 몰랐지 학생회장 하면서도 그러고 하고 정보부에 가서 정보부에 에 과장.이나 뭐 고보다 좀 더 하고 나와서 내외통신 사장인가 뭔가를 했어요.저 그런 사람이에요.이 사람이 김덕창이라는 사람이,인제 송철원 린치문제와 관련되는 사람이에요.(자료를 지 적하며)아주 유명한 사람이에요.근데 김덕창이 나도 김덕창이를 알거든요.그 인제 하루는 교정에서 김덕창이가 나보고 어이 이현배씨. 예,그러니까 김덕창이가 나보다 한 4년 선밴가,4년 선배다,4년 선배,학교,나이는 좀 더 많고,이현배씨,왜 그러냐니까 하니까 왜 요새 뭐 좀 이상하지 않어. 뭐 가 이상해,이상 하긴 맨날 문리대 시끌벅적 하지. 그랬더니 아 요새 뭐 중태가 뭐 하는 모양이야.중 태를 좀 만났으면 좋겠어.그래서 뭘 하긴 해요.그 사람 맨날 바람이나 피고 다니지 인제 그랬더니 중태 만나게 해 달라. 알았어요.연락처를 받고 그러고 중태 형한테 연락을 했어요.덕창이 형이 그 러더라.형을 좀 만났으면 좋겠다는데 뭐 좀 냄새도 맡는 거 같고 어쩌고 하는데 어떡해.만날 테야. 함 만나볼게. 왜냐면 뭘 어떻게 하는지를 좀 알아야 되겠거든. 그래서 내가 주선을 해가지고 고(그) 문리대 앞에 진아춘이라고 중국집 음식점이 있어요.그 진아춘에서 셋이 만났어요.셋이 만났는데 의외 로 김덕창이가 아는 게 많은 것 같고,좀 하여튼 냄새를 많이 맡는 것 같고,그 당시에 정보부원 아주 그 드러난 정보부원 이었으니까.그러니까 거기서 김중태씨가 나 소변보고 오께 하고 나가 갔고 뒤에 화장실 옆 창문열고 도망가 버렸다고,그니까 나하고 김덕창이,김덕창이가 나 잡아가 보면 뭐 할 거 야.제일 후배 잡아가 뻐면(잡아가면),그래서 그러니까 으이 이 사람 싱겁긴. 하고 갔죠.도망간 거 알고,그러고서 김중태 형이 그것이 언제냐 하면,음 거사 날,거사 닷 세 전인가,그렇게 될 거예요.3 월 12일경 되겠죠.3월 12일경 그러고선 중태 형이 연기하겠다.나도 그때 며칠간이나 연기하는지 몰랐 어요.그러나 좌우간 연기하겠다.그래갔고 연기해서 3월 24일.이게 인제.(웃음) 면담자 :3월 24일 그 시위 할 때는 참여를 하셨었는가요? 구술자 :다 하죠 했죠.문리대 교정에서 했으니까.(손에 들고 있는 자료를 내리면서)저 거기 문리대 교 정에 가서 이렇게 해 놓고,그 다음에 그 저 누구야 김중태 올라가서 아지테이션 하고 그러고 뭐,그 당시 저 이.그때 도현이 형이랑 도현이 형도 올라가서 했던,했던 것도 같고 뭐 아닌 것도 같고,그 런데 하도 데모가 많아서 하여튼 그래가지고 중태 형이 아지테이션 한 거는 내가 확실히 알고,했고, 그래가지고 당시 3 24를 아 하기 전에 바로 전에 어.소위 음. 한일회담 반대 한일회담 반대 투쟁 위원회 를 만들었어요.그리고 김중태를 위원장으로 했어요.그러곤 인제 이 한 거예요.그것이 아마 2, 3일 전 일거예요.3 24.그러고서는 하고 그러고서 저 누구야 저 누구야 그 그때 그 김종필이 하고, 그 오히라 하고 그 허수하비 맨들어서 불태우고,그러고 밖으로 나가고 데모를 했죠.데모를 하다가 문 리대 학생이 원래 많지가 않으니까,그 데모를 하다가 내 쫓겨 들어왔어요.그것이 3 24고 나는 인제 앞에서 맨 앞에서 인제 김중태씨 아지테이션 하는 거,불도 지피는 거,그 허수아비 맨들고(만들고)플

204 19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랭카드(플래카드)맨들고,불 지피고 뭐 이런 거 다하는 거는 경북고등학교 출신 문리대 민비연 의 핵 심 멤버들.예,이 사람들이에요.이 사람들이 했고,이 사람들 같이 나가고 그러고 나서 인제 경찰 저 지에 부딪혀 갖고. 면담자 :교문 밖으로? 구술자 :예,나갔죠.나가서 미대 앞에 로타리 근처 까지 갔다가,음 인제 해산 당했죠.해산당하고 일부 는 학교로 돌아오고 일부는 집으로 갔고 그게 3 24예요.그게 인제 그것이 인제 소위 이 군정 어 군 정이.들어오고 나서 어 옛날 이창홍 이라고 하는 사람이 단독 시위한 것은 있으나 한-일 행정협정 체 결하라고 어 미국대사관 앞에 단독으로 군사정권 때 시위를 한 거 있는데,그런 거 빼놓고 집단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 집단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항의를 표시한 것은 처음이거든요. 3 24가 처음이니까.인제 신문들이 그 당시에 신문사들도 대체로 정서는 우리 비슷했거든요.인제 4 19에 열광했다가 5 16에 그냥 그 뒤집힌 과거 이런 사람들이거든요.그러니까 특히 그 당시 동아일보 앞장서서 인제 각 신문 보도를 했죠.저녁뉴스로 라디오 뉴스로 막 동아방송 뉴스로 막 나와 가지고 하니까 그래 됐죠.그 다음에 인제 3월 24일,우리가 이렇게 일을 벌려놓으니까,인제 막 그다음에 언 론이 맡았죠.언론이 맡아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죠.인제 뭐 깜짝들 놀랬지.인제 뭐 저 명목은 한일회 담 반대지만 인제 군사정권에 대한 도전이니까,깜짝들 놀랬거든.그러고서는 그날은 그렇게 끝나고 어 누가 시키지도 않고 또 전부 다 조직 되지도 못하고,조직 되지도 못하고 누가 시키지도 못하고,그 러고 그 이 3월 25일 날,그 다음날 각 대학에서 그냥 거의 아지테이션도 없고 조직도 없고 그냥 그냥 그 자연스럽다고 할 정도로,뭔 (손을 들고)고대 연대 동국대학 뭐 성균관대학 할 것 없이 서울시내 전 대학이 다 떠들썩했어요.물론 문리대도 나갔지요.그러니까 이 이쪽에서 그 참 잘한 거예요.놀래 갔고 이쪽에서 안 나갔어요.아예 아예 경 저 청와대 들어가는 길만 따악 막고는,그냥 다 그냥 풀어 버렸어요.그래서 그날은 인제 3월 25일은 데모대들이 막 다 막 다니면서 해가지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성토대항하고,그렇게 지금 시민 시의회 회관,(양손을 펴고)부민관 자리 거기 국회의사당자리였으니 까,그 앞에서 막 성토대회 하고 막 야단들 났었죠.그래서 인제 거기 어디야 청와대 쪽으로 올라갔는 데 그쪽은 완강히 막으니까,아니 그것도 가서 뭘 것도 없고 시내가 전부 해방된 샘이니까 맘대로 돌 아 다녔죠.그러고 인제 그날 시위는 내가 주도했어요.왜냐하면 선배들이 다 도망가 버려 가지고,그 까(그러니까)이제 전날 주도했으니까 붙잡혀 갈 거다.이래 생각했었는지 전부 싹 잠적해버렸어요.그 러니까 사람들이 *어떡해.그래서 내가 나가서 인제 아지테이션이랄 것도 없고 리딩 스피처 좀 했 지.같이 나가서 인제 반도호텔이 그 당시에 그 일본상사 많았는데,(손을 머리뒤로 가져가며)우리가 그때 얘기하는 것이 한일회담에서의 최고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인제 소위 경제적인 속국이 된다.이 런 거 였는데,그리고 그것 속국을 경제적인 속국을 이루는데 앞장서는 것이 매판자본이다.이래 가지 고 매판자본이 제일 많은 것이 반도호텔에 있다.내가 데모대를 댈고(이끌고)나가면서 반도호텔에 불 을 지르자 그랬더니,어이 사람들이 저 저 새끼 저거 사쿠라다.저거 개새끼다. 그래가지고 내가 리 던데.(웃음)아무소리도 못하고 저거 했는데 나중에 기록 보니까,어디서 불을 질렀더라고 앞에다가 다른 학교 인제 서울대학,하여튼 문리대는 아니고,그러고 인제 3 24를 생각할 때 이렇게 되요.중태 형이 제일 잘 알고 그러는데,내가 아는 거로는 인제 고대하고 연대하고 인제 같이 할려고 그랬거든요.

20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199) 고대에서는 누가 중심이 됐었냐 하면은 최장집씨,최장집 교수가 중심이 되었어요.그래서 고대에서는 최장집교수가 이렇게 이 앞장을 서고 아지테이션 하고 이러고 앞장서서 나오는데,그러면서 우리하고 마주치게 돼 있으니까 나오는데 역도부,고대 역도부 애들이 나와서 뭔 사주를 받았는지 어쨌는지 모 르겠지만 다 막고,막 둘러메치고 막 이래 갖고서는 해산 시켰죠.그래서 고대 못나왔어요.연대도 아 예 못나오고,내가 아는 건 안성혁씨하고 인제 서로 좀 얘기했던 걸로 아는데 최장집씨 하고 내가 분 명히 알고 그래서 최장집씨하고 서로 그래가지고 인제,그쪽도 좀 우리만 혼자 했었지.3월 24은 그랬 는데 인제 그러고 3월 25은 그렇게 되고,3월 26일 부터는 쭈욱 좀 당분간 시위가 없어요. 면담자 :아무것도? 구술자 :근데 인제 25일 날 너무 싱겁게 끝나고 그러니까 인제 뭐였죠.그러고서 동시에 우리 쪽 내부에 서는 인제 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 를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로 갈고(변경하고),왜냐면 여기저 기서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하는 거냐.사실은 그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고 한일회담 자체보다도 그 정권을 반대 핸 건데,뭐 그럴 수는 없으니까,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로 이름을 바꿨죠. 3월 말쯤,3월말쯤에 그렇게 바꿨어요.그러고 나서는 4월로 옮아가죠. 면담자 : 그럼 25일 날 있었고,26일부터 그 3월 말까지는 별로 크게 없어? 구술자 :별로 없었어요.별로 없었어.내가 아는 걸로는 다른 대학도 없고 우리도 없었고. 면담자 :그럼 4월에 그 넘어가서 그 괴소포사건에 대해서는 들으셨어? 구술자 :(손에 든 자료를 보면서)예 들었죠.뭐 그런 게 왔다는,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크게,뭐 뭐 그 렇고 거기 뭐가 들었고 그랬는지 모르겠어요.아니 괴소포가 오고 어쩌고 그니까(그러니까),이거는 어 무슨 인제 소포를 보낸 사람들 이쪽은 뭐냐 하면은,인제 그 영웅적인 어떤 그 저 이 이 그 뭐 국가 수호,뭐 뭐 민주화를 위한 투쟁 이러니까,저쪽에서 북에서 북에서 고무찬양 하는 것 같이 보낸 그런 문서들이거든요.근데 뭐 보지도 못했고 또 그까짓 게 시답지도 않았고 그것이 또 와도 웃기고 웃기게 어떻게 왔냐 하면은 학교 학생처에서 찾아가게 이렇게 왔다구요.소포가.주소를 몰라서 그랬겠지.뭐 누구도 왔는데,뭐 가령 현승일이면 현승일,학생처에서 누가 학생처에서 그거 내주고,뭐 학생처 이렇 게 왔으니까,웃긴 근까(그러니까)그냥,그냥 별 미친놈들이 다 있네.저게 대한민국 정보부 수준인가 하고 하는 해프닝이지.큰 영향 별거 없었어.(입가에 웃음을 띠며) 면담자 :정보부 쪽에서는 뭐 그걸로 이렇게 뭐 엮을 라고 그랬었던 거? 구술자 :아마 그럴 수는 있었겠죠.그런데 아마 그 어떻고 너무 미숙해서 그랬는지,일체 그 어떤 피해 걔들도 이쪽도 문제 삼지 않았죠. 면담자 :그것 때문에 뭐 피해를 입거나? 구술자 :예 하나도 없어요.내가 아는 한 모르겠어요.하도 오래전 일이라.(영상 촬영자를 보면서)또 직접 피해를 본 분이 있으면 몰라도 난 안 왔으니까,괴소포가 내가 아는 한,인제 아까도 말씀드렸는 데 명색이 그래도 신문기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갔다 무슨 일 생기면 쫒아 다녔거든요.하여튼 그래 알고 있어요. 면담자 :그 당시부터 그 이후 저도 80년대,인제 학교를 다니면서 그때는 뭐 이렇게 그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취직은 안 시키고 돈 주면서 프락치활동도 시키고 이런 것들이 많았는데,그 당시에도 이 아까

206 20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그 김덕창씨 같은 역할 말고도 이 학원사찰을 엄밀하게 시작을 했었든가요? 구술자 :예,그래서 인제 근데요 사실은 어 이 서울대학교 내에서는 서울대학교에서는 우리가 그 당시 학원사찰 반대 집회를 했는데 그때 내가 집회를 할 때 지금 정신문화연구원 하는 이수인(이수윤)교수, 그리고 철원이형 이 사람들하고 같이 했는데,같이 해서 했는데 별것도 아니죠.가 가지고는 (확성기를 잡은 듯이 두 손을 모아서) 아 모이십시오.지금부터 뭐 학원사찰 규탄대회를 하겠습니다.집회를 하 겠습니다.여러분들 빨리빨리 오십쇼. 그리고 인제 4 19탑 앞에 모이면 그게 집회 시작되는 거든요. 집회죠.근데 어 그 그날 내가 주로 아지테이션을 했어요.성토발언을 하고 밖으로 안 나갔으니까,뭐 아지테이션이랄 것도 없고,하여튼 성토발언을 했는데 내 요지도 그렇고 그날 모였던 그 주 요지는 뭐 냐면,학원 안에 경찰이,다 이 저 정보부원 들어오지 말라는 거였거든요.그것 거기 그 주였어요.그래 서 내가 심하게 얘기한 거를 어 인제 내가 어디서 얼핏 들은 건데,그 뭐 자꾸 그 뭐 그 인제 일본 애 들 한참,그 저 60년대 그 뭐 할 때 그니까(그러니까)우리보다 좀 먼저 그 먼저 그 할 때 학원사찰 경 우에,들어오면 학교 동대(동경대학)동(동경대학)형사를 갖다가 2층에 떨어뜨렸다.뭐 한 있는데 나중 에 보니까 확인이 안 되더라고요.하여튼 내가 그런 얘기를 했지.동대(동경대학)에서는 어 그런 일까 지 있었다.그러니까 너네 여기 경찰이나 정보부 프락치 들어오면 위에다가 가차 없이 옥상에다 내려 떨어뜨리겠다.그 요는 대상,자꾸 그 사람들이 들어와서 하니까 그거였거든요.그런 인제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인제 나도 그걸 몰랐어.그 저 철원이 형이 그런 걸 준비하고 있는 것을 몰랐는 데,그 다음에 등장한 게 철원이 형이 소위 YTP (YouthThoughtParty, 靑 思 會 )란 걸 폭로 했어요.근 데 인제 물론 그 당시 철원이 형이 3학년인데,3학년 학생이 뭐 그럴 수도 없고,또 그래가지고 인제 치밀하게 이제 저 조사하고 뭐 하는 게 아니라,그런 것이 있다고 들었다.그래서 조사를 해보겠다.이 런 식으로만 얘기한 거예요.그러니 YTP 청사회 (Youth ThoughtParty, 靑 思 會 )가 있다.각 대학으로 있다.이래서 음,이것이 각 학원에 대한 이 점거(정보)조직이요.동시에 파괴조직이다.그리고 이것은 공화당 사무국에서 하는 것이 아닌가로 본다.그래서 이것은 전국적인 규모로 있고 서울대학에게도 있 는 거로 얘길 들었다.그래서 조사를 해보겠다.이것은 엄청난 얘기 아니에요.(강조해서 말함)지금도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엄청난 얘기기 때문에 도하 각 신문,뭐 방송에 왕왕 때렸단 말이야.제일 문제 는 철원이 형 자신이 그런 얘기를 들었다.그래서 조사를 해 보겠다 한 거지.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었거든요.그러고 보니까 뭘 구체적으로 뭘 얘기해야 되거든,자꾸 기자들이 와서 얘기하니까,뭐 횡 설수설하고 뭐 그랬죠.그래가지고 그 철원이 형하고,철원이 형하고 친한 사람들 몇몇이서,어 그거를 굉장히 자기들 나름대로 얘길 들었던 거를 해서 추적해가지고 추적 했어요.추적을 해서 약간의 실마 리는 잡았던 걸로 알아요.그러고 전국적 조직에 대해서도 약간의,약간의 실마리는 잡고 서울대학교에 대해서도 약간의 실마리는 잡았는데,그것이 밖에서 얘기 되는 것처럼 무슨 정부(정보)파괴적인 조직, 이런 거 저런 거는 아니고 소위 인제 그 나중에 그렇게 쓰던 어째든,그 무슨 학원 내에 그 이 공화당 의 서포터로 서포터조직으로 이렇게 둘려고 했던 거 같애요.하여튼 나중에 어떻게 쓰던 간에 하여튼 고런 정도까지도 그것도 나중 일이에요.근데 인제 나중에 인제 철원이 형 같은 경우에 그렇게 해 갖 고 이렇게 모였는데,인제 그러고 보면 (머리를 긁적이며)인제 그걸 갖다가 김경재씨가 김형욱이 회고 록 쓰는데 뭐라고 그랬냐 하면은,송철원이가 YTP 두목이었는데 인제 그 양심선언을 했다.그렇게 써

20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1) 버렸다고,그러니까 막 그 저 김형욱이 회고록은 그 저 김경재씨가 박사학위 위해 한 거고 많은 사람 들이 봤거든요.그러니까 그냥 전부 그럴듯하잖아요.그게. YTP 두목인데 양심선언을 했다는 게 그 럴듯하잖아요.그러니까 막 그 뒤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하고 아주,아주 애먹었죠.철원이 형이. Tape2. 면담자 :김경재씨가,이 회고록을 출판한 게 몇 년도에 출판하셨는? 구술자 :음.(침묵)일단 그게 박정희 말기거든요.근데 일단 우리한테 들어온 거는 박정희 죽고 나서예 요. 면담자 :제가 저도 대학교 다닐 때 이걸 읽었었거든요.그 전에는 그러니까 아마 이 출판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 김형욱씨가 그 박(박정희)정권하고 딜을 했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뭐 그러면서. 구술자 :딜은 했었을 거예요.딜이 안 되고 그러니까,이쪽은 그까(그러니까)출판한다는 거,그리고 그 당시 미 의회에 증언한다는 거,그거 때문에 없애버렸죠.그런데 이것은 인제 김경재씨가 가서 뭐해가 지고 좌우간 상당히 에 오랜 기간 진행된 거예요.구술해 주고 구술해 주고,또 어떤 날은 김형욱이가 난 안 한다고 하고 그러다가 몇 달 있다 하고 그래서,쭈욱 이렇게 계속 돼서,내가 아는 걸로는 박정 희가 죽기 얼마 전에야.아니 그니까(그러니까)김형욱이가 죽기 얼마 전에 끝났고,그 다음에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걸 나중에 가족들 얘기 보태고 이래가지고 한 걸로 알거든요. 그니까(그러니까)김형욱 그러곤 우리나라에는 못 들어오고 박정희 죽고 난 뒤에 들어왔으니까. 면담자 :그러면 YTP사건 을 송철원 선생님이 했다는 것도 알려진 것도 그럼 한참 후겠네요.책이 출판 된? 구술자 :아니 그 당시에도 이제 그 당시에는 YTP 를 송철원이 폭로했다.근데 인제 어떻게 되냐 하면, 언론에서 YTP 를 송철원이가 (목이 잠김)폭로해서 폭로해서,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서 그 보복으로 인 왕산에 끌고 가서 린치를 했다.이러거든요.신문이나 이런데 그래서 그러니까 시나리오가 쓰여 질려면 (쓰여 지려면)이 사람이 단순히 건드려서 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배신을 했다.이렇게 해야 얘기가 잘 되가니까,그 당시에 언론이라던 지 이런 경우가 아무런 아무런 YTP 실체조차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또 송철원이가 그것을 얼마만큼 파헤친 줄도 모르고 내가 뒤에 송철원이 한테도 다들은 얘기도 해봐도 그렇고,그 당시 문리대 분위기랑 여러 가지 그래서 하여튼 이런 식으로 각색을 해서 대개 나 왔다고요.그거를 김경재가 한번 확 확인을 해서 확인사살을 해 줬지. 면담자 :그럼 이 YTP사건 이 꽤 큰 어떤 그 반영(반향)을 가져 왔었던가요? 구술자 :예 반영(반향)을 가져왔죠.깜짝 놀랬죠.에 국회에서도 꽤 야단을 하고,그렇잖아요.그니까(그 러니까)나중에 들었을 땐 뭐,그 그때가 철원이 형한테 나중에 들은 건,뭐 그런 정도 조직은 아니었 다.또 다른 실체 밝혀진 것도 없고 이랬지만,실지로 그 당시에 철원이 형이 은근히 풍긴 얘기,또 그 것을 언론 쪽들이 각색한 것,내용은 뭐냐면 학원 내 정보조직겸 파괴조직,뭐 하여튼 히틀러 유겐트보 다도 더 강한 조직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거든요.그러고 공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왜냐하면 공 화당이 공화당 사무국이란 걸 조직했거든요.이 공화당 사무국이란 걸 조직할 때 그거를 이 공개 이

208 20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채용을 했어요.상당히 그 저기 응시율이 높았어요.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뭐냐면 공화당 사무국 직원 으로 해서 앞으로 정치엘리트들을 키워 내겠다는 얘기였거든요.그런 거로 하고. 면담자 :JP(김종필)가 주도를 하고 구술자 :예,JP가 고때고(그때고)그러는데 그런 애들이었으니까.그러고 그 사람들은 그런 조직을 좋아 했어요.그러니까 조인했을 거라 봤죠. 면담자 :그러면 뭐 공화당 하부조직으로서 보다는 학원사찰이라는 쪽에서 훨씬 더? 구술자 :특수조직으로 봐야 되겠지요.근까(그러니까)히틀러 유겐트처럼,그렇게,그렇게 인식을 했어요. 그러니까 반향이 컸죠.(양손을 펴고)뒤이어 실체라든지 뭐 이런 게 드러나지 않으니까,더 이상 파문 이 오래 가질 못했죠.그러나 우선 지금 얘기로는 그게 (자료를 보면서)4월 며칟날 인가야 이게. YTP 어쩌고저쩌고 한 게 근데 나도 이걸 정확히 모르겠는데,하여튼 4월 며칟날 인데,(잠시 회상 함)철원 이 형이 가서 린치를 당한 것이 5월,5월,한 20,25일,20일,5월20일경이에요.4월 20일경에 하고 5월 20일경에 린치를 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요.정확히 얘기하면 철원이 형이 린치를 당한 건 김덕창이 하고의 관계예요.왜냐면 김덕창이가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을 할 때,서울대학교 학생회장을 했는데,서울 문리대 학생회장을 했거든요.문리대(서울대학교)학생회장은 서울대 12개 단과대학 학(학 생)회장들이,회장들이 모여서 순번으로 로테이션으로 해요.전체 대학생을 근까(그러니까)내가 문리 대 학생회장일 때 내 차례가 안 오면,상대 차례면 난 못하는 거지요.그러나 다행히 그때 문리대 차례 가 와서,그래서 서울대 학생회장 겸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핸(한)걸로 알아요.그러고 인제 문리대 학 생회장을 대개 할 때 그 당시 학생회장 선거는 출신 학교별 싸움이니까,근게 인제 경기고등학교 그니 까(그러니까)경기고등학교에 그걸 적극적으로 도왔던 사람이 돕고 참모 노력한 게 송철원이에요.김덕 창이는 정보부원으로 갔잖아요.김덕창이는 계속해서 송철원이를 거기 활용하고 애 먹일라고 한 거죠. 그니까(그러니까)송철원이가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저항을 하니까,끌어다가 린치 한 거라고.근 데 인제 이걸 뭐 YTP 로 연관시키고 나중에 김경재가 확인사살을 한 거라고.(웃음) 면담자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어 4월 달에 쭈욱 몇 번의 그 시위들이 있었는데? 구술자 :있었죠.그건 학교 주변에서 주로 일어났어요.왜냐하면 막으니까.4월 한 21일이나,4월 달에 나하고 승일이 형하고 같이 그 데모를 한 것도 있어요.내가 짚차 위에 서서 위에 올라타고 승일이 형 은 그 안에,그 조수 저 저기 뭐야.좌석서 거기에 타가지고,그 무슨 뭐 때문에 짚차 비슷한 거 우리 가 얻어 탔는데 영업차였는지 뭐 예가지고,그때 혜화동 뭐 여 저 원남동일대를 둘이서 막 그냥 아지 테이션 하고 데모대 인솔하고 막 하고 고때쯤(그때쯤)승일이 형하고 같이 했던 게 기억이 나요. 면담자 :그게 아마 4월 21일 날. 구술자 :고때쯤(그때쯤)일거예요. 면담자 : 그럼 그 전에 4월 17일이나 19일,20일,이때 시위가? 구술자 :대개 집회가 있고,문리대의 경우에 집회가 있고,그 앞에 언제든지 집회 있으면 나갈라 그랬거 든요.또 좀 나가보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어 하여튼 4월,(입에 손을 대고)그 4 19 중심으로 해서 그 당시에는 어 크게 멀리 가진 못했어요.하여튼 학교주변에서는 늘 그렇게 인제 기회만 닿으면 했죠. 면담자 :이 당시에 그 학생회하고는 학생회는 어떤 역할들을 주로 했습니까?

20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3) 구술자 :어 그 서울대학교는,서울대학교는,서울대학교가 아니라 어찌됐던 4 19이후로 4 19때는 고대 가 컨트롤을 했지만,하여튼 인제 그 4 19가 일단 정권교체에는 성공을 하고 이렇게 해서 인제 사회 혁명이 아직 이루어지 못하고 할 때,그것을 주도해 나간 것 민자통 이라든지 이래가지고 그 주도해 나간 것은 서울대학이거든요.그러고 그 이후로는 그 이후로는 모든 대한민국의 학생운동은 서울대학 이 주도하고,서울대학 운동은 문리대가 주도했어요.지금은 인문 사회를 나눠나서 나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문리대가 주도를 했거든요 모든 건.근까(그러니까)인제 뭐였죠.질문이?(잠시침묵) 면담자 :그 학생회의 역할이? 구술자 :아 예,그래 왔잖아요.예 엄격하게 말해서 이렇게 학생회하고요.언제든지 이 소위 사회운동, 사회운동의 경우는 투쟁위원회 형태로 나와요.투쟁위원회 형태로 나오고 당시에도 인제 저 사람들 소 위 학교에서 운동권 하듯이,저 사람들 혹은 하는 식으로 아예 대개 패가 되어 있어요.아까 얘기도 뭐 인제 그 사람들은 학교를 잘 안 나왔지만 복학파 들,또 인제 뭐 그런가 하면 민비연 쪽들 또 뭐 우 리 저 새세대 야간파 또는 주간,야간파 이런 것들은 자타가 공인하게 인제 패거든요.운동 지향적이 거든요.그러니까 인제 그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인제 투쟁조직을 맨들어요.(만들어요) 대개 투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그러고 학생회는 학생회 대로고 그리고 이 투쟁위원회는 학생회를 불신 하죠.쭈욱 불신해 와요.그런 인제 예를 들면 학생회는 학생회기 때문에,그 학교 학생처라든지 이런 델 좀 간섭을 받아야 되고,또 뭐해야 되고 그렇잖아요.그러기 때문에 에,그러고 또 학생회장에 당선 되는 사람들 근까(그러니까)내 때에 학생회장이 김덕룡이었는데 김덕룡,고 위가 이창수,그 다음에 김덕창 이런데 대체로 그 사람들이 학생회장하는 거는 어떤 명예 같은 것 때문에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대개 출세 지향적이거든요.그러고 또 학교와의 관계.뭐 이런 거 있기 때문에,이.학교 하 고,학교 학생처,학교 학생처 하고,학(학생처)그 학생회가 밀접 돼 있고,또 학교 학생처는 어 문교 부내지 정보부에 직접적인 명령,그 수령 기구고,근까(그러니까)우린 불신하죠.그래서 인제 그건 학 교 따라 달라요.고려대학 같은 경우엔 언제든지 학생회장 내지 부학생 회장으로 학생총단,이 총단의 결의가 이 움직임이 없으면 안 돼요.우리는 전혀 학생회 하곤 아무 상관없이 서울대는 언제든지 투쟁 위(투쟁위원회)형태로다,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조직을 맨들었어요(만들었어요).그리고 그래서 서울대 학 쪽에서 얘기하라고 한다면 전통적으로 뭐 하여튼 학생회라는 건 인정하지 않고 뭐 별로. 면담자 :80년대에처럼 운동권에서 학생회를 뭐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 같은 경우는 없었나요? 구술자 :아 있죠.계속 했죠.그래서 했는데,그 다음에 그러니까,음.김덕룡 때까지만 해도 4.1(4 19), 6 3 전이니까 6 3 전인데 그 후에 인제 박영조라는 사람이 학생회장이 되었는데 그 사람은 경북고 등학교를 나와서 문리대 정치학과를 나오고 데모에 적극 가담은 안 했지만은,아까도 얘기했던 민비 연 핵심멤버중 하나고,인제 이래요 그러니 전부 걔를 밀었죠(손을 뻗어서). 면담자 :6 3후에 이제. 구술자 :예 6 3후에 65년도 면담자 :운동권하고 긴밀한 관계? 구술자 :예,예,운동권이 장악 해버렸죠.그런데 이 버릇 병신 같은 새끼가,하여튼 무슨,(잠시 침묵) 이 학교 밖에 어떤 술집여자 하곤 가,뭐 이런 무슨 스캔들 같은 게 있어가지고,뭔 공금을 또 술집에

210 20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썼니,어쩌니 뭐 그래 그래가지고 괴 망신만 당하고 중도하차 했죠.하여튼 그래가지고 인제 그 뒤로 노력은 하지만 안 해.차라리 그게,하여튼 박영조라고,박영조라고 65년도 학생회장이 됐죠.그랬는데, 어 뭐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내가 그때 군대에 있을 때니까,그 좀 불미스러운 일로다 인제 중도 하차 했고,그러고 그 뒤 어 내가 제대하고는 내가 학생회를 장악해 볼려고 근까(그러니까)다른 애들 을 시켜서 밑에 후배들을 시켜서 해봤다가 내가 실패를 했는데,그렇다고 해서 나하고 성격이 완전히 다른 애가 된 것도 아니고.뭐 그러고 그땐 크게. 면담자 :선생님 군에는 몇 년도에? 구술자 :64년도 군 얘기 전에 요거마저 합시다.(자료를 손에 들면서)그래서 인제 4 19전으로 대게 많 은 산발적인 데모는 있었지만 크게는 없었고,근데 인제 내가 요게 요게 승일이 형하고 얘기가 맞아 들어가야 될 텐데 이걸 내가 정확히 지금 못 끗는다는,난 4월 말쯤 아닌가,4월 촌가,4월 말인가,4월 초 같기도 하고 4 19이전인지 이훈지 정확히 모르겠는데,이런 문제가 있어요.현승일씨하고 나하고 지금 노동부장관하고 있는 이영일(이영희)씨 법대,그다음에 김각씨 서울사대,그렇게 넷이,4월 촌 것 같애.4월 초,같이 김영삼씨를 그 만났어요.이제 미리 만나자고 해서 만났죠.만났는데 김영삼씨가 그 때 에 뭐냐 하면은 대변인 이예요 대변인.야당 대변인인데,그래서 만나서 많이 여러 가지로 원내 활 동에 좀 협조해 달라 이런 얘기하고,그 다음에 우리 좀 자금 좀 지원해 달라 그랬어요.그러니까 그랬 는데 김영삼씨가 뭐라고 그랬냐 하면,내가 며칠 전에 일주일도 채 안됐다.며칠 전에 김중태한테 그런 대로 쓸 만큼은 줬는데,이랬단 말이야.근데 김중태씨가 와가지고 이일을 얘기 안했다고요.그러니 (입 가에 미소를 띠며)우린 말도 못하고 무척 아 좀 그저 면괴스러워 줬죠.마치 이승만이 상해정부에다 한 짓 같이 똑같이 했다고,미주에서 돈 거둬 주니까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아무 소릴 안고 저 혼자 썼거든요.그니 (웃음)김중태 선생이 참 그 참 걸물이거든요.근 인제 그래가지고,그래서 인제 어 일 종의 김중태 청문회를 했어요.그 아 비밀리에 그때 한참 뭐 우리 잡으러 다닐 때니까,장위동 저 하숙 집에서 인제 최동전씨,나,이원재씨 또 그때 최혜성씨도 있었나.뭐 이렇게들 있어가지고 인제 김중태 를 데려다 놓고 니 받았나? 받았다. 우쨌노. 야,술도 먹고 잠도 자고 좀 썼다. (웃음)그런 것, 세상에 그러면 되나. 그래가지고 인제 어쩌고 이 김중태,최동전,이원재,박재일,이건 다 경상도 사 람들이거든.그런께 말이 되나 그래가 김중태가 사의를 표명하고 그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 (한일굴욕 외교반대투쟁위원회)에 에.그 회장 자리를 사의를 표명하고 현승일이를 대체한 거예요.근데(그런데) 그건 별로 아름답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얘기를 안 하는데,이제는 얘기를 해서 왜 그때 중간에 현승일 로 교체 됐는지,현승일이 그 다음에 위원장을 했어요.근데 그 아직 (손을 머리에 가져가며)인제 어 후일담 중에 한 후일담인데,그 김영삼씨가 인제 그 신민당 그러니까 그 이 몇 년 13대 땐가 13대 때 이철이가 국회의원 될 때,근 그 사람 단식농성하고 나와서 어 그 민추협 (민주화추진협의회)맨들고 (결성하고)그 민추협 을 중심으로 해서 신당을 맨들었는데(만들었는데_ 신민당 을 맨들었을(만들었을) 때에 그 그 사람이 김상현씨가 동교동계를 대표하고 이 사람이 상도동을 대표하면서 이렇게 해가지고 했거든요.그래가 인제 원래 상도동 반 동교동 반,그런데 상도동이 추천한 사람은 동교동이 추인을 해 야 되고,이렇게 추인을 했어야 되는 그런 식으로 인제 그때 공천을 했어요.공천을 하고 했는데 인제 김상현씨가 나를 추천을 했어요.성북에,성북에,그래서 나를 추천했는데,인제 그래가지고 어 막 그

21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5) 사람 다급해 가,나 그때 부산서 사업하고 있는데 급히 좀 올라오고 해서 올라오니까 김상현씨가 나보 고 어디 좀 가자고 그래가지고,가면서 차에서 저 우리 저 이쪽에서 어 공천을 할 테니까 공천할 테니 까 받어 받어라고,그러면서 그런데 가서 저 김영삼씨를 만나야 된다고 해서,(손으로 지적하며)저 남 산 외교 구락부에 나하고 김상현씨하고 그 다음에 김영삼씨하고 설훈이가 그때 김상현이 비서였거든, 넷이서 거기서 식사를 하면서 인제 김상현씨가 성북에서 나를 추천한다고 이랬다고요.그러니까 그 김 영삼씨가 어 그 나한테 메모를 메모형식으로 이력서를 좀 달라고 그랬죠.대충 적어서 줬죠.그러고서 인제,아 그러냐 그러면서 나도 그때 젊었을 때라고 그러더라고요.6 3때란 거 인제 그러면서 내가 그 래서 뭐 뭐지 뭐였지,전 총재님을 그 여러 번 뵙는데 그중에서 제일 처음 뵈었을 때가 그 저 저 우미 관 건너편에 화신백화점 건너편에 2층 아주 낡은 건물에 대변인실에 계실 때,승일이형하고 이영희 하 고 김각씨 하고 나하고 이렇게 가 가지고 만나서 좀 부탁하고 그랬던 적 있다. 그때 그 왜 김중태가 돈 먹고 그런 거 말이지. 그러더라고요 그게 몇 년이냐 말이에요 그게,그걸 기억하더라고요. 아 그 때 제일후배 후배 그 당신이었구나. 예,(미소를 띠며)아 그러더라고요 참 그러면서 내 손을 꼭 꼭 잡더니, 성공할지 실패할지 몰라 이번에 저놈의 새끼들,저 군부놈들 또 야당 삶을지 몰라.나는 몰라 도 자넨 또 감옥가야 되는데,이(이현배)동지 또 한 번 하지. (웃음)사람이 그래요.내가 김.대중씨 가 날 80년 봄에 무척 여러 번 얘길 하고 만나고,그러면 난 김대중씨는 어떤 논리나 이해갖고 나를 이렇게 끌어 댕길려고 그래,논리 갖골(가지고)했는데 그 논리란 게 현실 얘긴데,뭐 그렇게 뭐 뭐 대 단한 거 아니고,그 사람이 너무 심하게 논리 얘기하다가는 그 교수나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한테 오히 려 역으로 책잡히거든,미친놈 완전히 그 저 김대중 이한테 혹한사람 빼놓고는,그러니 그 다음에는 살 짝 이해관계로,대신 김영삼씨는 그런 거 없어요.(몸짓을 하며 강조) 아,안 그렀나.야 야 한번 감옥 함 가자. 시원한 맛은 있죠.하여튼 그게 그니까(그러니까)김중태씨가 물러나고 현승일씨가 인제 회 장이 됐던,그 뒷면에 큰 후일에 인제 또 그런 일이 있었어요.근까(그러니까).(웃음) 면담자 :그때 출마를 하셨었나요. 구술자 :안,안 했죠.그날 인제 어떻게 됐냐 하면은 그래서 승낙을 하고 왔어요.승낙을 하고 왔는데, 그날 저녁에 내가 인제 유인태,이해찬,설훈 또 안양로,또 어.(잠시 침묵)또 그때 근태는 없었던 것 같다.하여튼 그렇게 인제 후배들을 모아 모아가지고 어떻게 생각하느냐?해찬이 하고 설훈인 적극 적으로 나가야 된다.기회가 잡히는 데로 나가야된다.이런 얘기고,인태하고 양로 하고는 그 집단으로 가야지 개별로 들어가면은 거기에 물든다.타락해버리고 거기에 하수인 밖에 안 된다.그래서 아 뭐 후 배들이 전부다 뭐 저 일치단결해서 돕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난 안한다.그래가 그 다음날 새벽 네 시에,그러고 또 하나는 그때 인제 아까 얘기한 김영배씨,김영배씨가 그때 정치부장인가 뭐 그랬 어.내가 김영배씨한테 전화 하니까. 사석작전인데, 근까(그러니까)그때 김영삼씨 정당이 그렇게 이 길 줄은 사람들이 생각을 못 했지.그까(그러니까) 사석작전인데 뭐 갔다가 명분해서 사석작전인데, 글 왜 끼어 드냐. 정치부 부장이 중앙일보 그 다음에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이었나 뭐 했던 놈이 이준 (이이춘)이라고 나하고 사학과 동기예요.그까(그러니까)걔가 미쳤냐,너 정치건달 되고 싶어서 그러 냐. 그러더라고요.그러지 후배들은 그러지 그래서 그 다음 새벽 네 시에 가서 김 김상현씨 댁에 가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우리 집이 불광동이었고 김상현씨 댁이 창천동이라 가깝거든,가서 그냥

212 20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서로 맞절했어요.그래가지고 내가 이제 고만 두겠다니까 다시 생각하라고 김상현씨 그러고,또 나는 아 고 못하겠습니다.김상현씨는 나보고 빳지 달으십시오. 난 못 달겠습니다.그 나중에 총재한테 직 접 얘기하라고,난 죽어도 못하겠다고,그래서 인제 내가 그만두고 그래서 부랴부랴 나중에 찾은 게 이 철이야.이철이 당선되고 그래서 철이가 정치인생을 시작했지.(웃음)고거는 김상현씨가 어 어디에 썼 더라.신동안가(신동아)어디에 자세히 썼더라.(자료를 보며)고것이 4월 촌가 말인가 이런데,고것이 그런 대로 우리가 인제 하나 밝혀둘 일이기 때문에 밝혀두고,그 다음에는 이제 5월로 5월 20일로 오 죠. 면담자 :그러면 4월 말부터 이 5월 20일 사이에는 뭐 별일? 구술자 :별일이 없었어. 면담자 :별일이 없었고 5월 20일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은? 구술자 :어 이거는 인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냐 뭐냐가 아니라 어떻든 운동을 재현시켜야 된다. 이래갖고 아 5월,어 5월 초부터,5월 초부터 여러 사람들이 얘기를 하게 됐어요.그 인제,그랬는데 인 제,그래가지고요,여러 사람들이 얘기를 하고 이랬는데,에 그때 누가 회의를 소집하고 했었는지 내가 모르겠는데,(회상에 잠기면서 설명)인제 그 어 문리대 바로 앞에 전주집인가, 우리가 그걸 배때기 집이라 그러는데 음식점 이 있어요.배때기 집 2층에서 5월 한 10일경,인제 그 회의를 가졌죠.그때 인제 모인 게 김지하,나,사대 김각,그때 민승이가 참가를 했던 것 같아요.그때 단국댄(단국대)가 건 국댄(건국대)데 단국대 일거야 아마.민승이,그리고 또 내가 알기로는 이런 다음에 인제 이원재,박재 일,뭐 최혜성,이렇게 한 열 명 가까이 참석을 했어요.배때기 집에서.그래서 거기서 운동을 다시 인 제 데모형태로 하고 큰 대회를 치르기로 하고 그 대회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으로 하기로 하고 그 래가지고 그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을 하는데,아.하고 그래서 인제 누가 모으느냐 그래서 내가 민족적 민주주의 를 장례식을 하면은 장례식을 하면은 조사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조사를 하자.조사 를 김지하가 쓰기로 하고 그 조사를 법대 정성철이가 읽기로 했어요.그니까(그러니까)행사 준비까지 전부 다 했었어요.그래 정성철이 그때 참석도 안하고 정성철이 나보다 1년 위지만 내가 서로 잘 아는 데 법대 쪽이 좀 있어야 되고 그래서 인제 정성철이를 끌어넣어서 하고 어.(침묵)가만있어봐,음 5.20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전에 뭔가 또 좀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아 그렇다,여기에는 인제 뭐 가 있냐면 이게 그러니까 내가 4월,4월 초에 음,그 현승일이 하고 김중태하고 교체됐는데 그 교체되 기 전에 그거 4월 초 교체되기 전에요.그깐(그러니까)이 사람들이 교체 된 게 4월 중순 아닐까,뭐 이래보는데 하여튼 4월 초에 김중태씨가 나한테 그 그 우리가 서로 그 연대투쟁 해야 되는 게 고대, 연댄(연세대)데 이쪽이 전부 다 지금 연락 잘 안되고 안 된다.시원찮은데 동국대학교 하고 했으면 좋 겠다.그래서 그런데 동국대학교는 내가 지금도 분명히 기억,제대학우회가 학교 전체를 움직이고 있고 그 제대학우회는 장장순이 하고 박동인이가 인제 중심이다.그러더라고요.형이 가보지 그러니까, 야 내가 가다 거기 가다가 붙잡히면 또 뭐냐. 알았어.내가 가께.내가 가 가지고 동국대학 가서 제대학 우회를 찾아서 장장순이 박동인이를 만나가지고 인제 얘기도 전하고,그러고서 어디에서 몰래 인제 김 중태하고 만나기로 이렇게 하고 그래 하고,그러고서 그 뒤 동국대학하고 전적으로 이렇게 아주 찰떡 궁합이 되었죠.그때부터,어 어떤 때는 나는 인제 선배들이 나가니까 난 안 나가기도 했지만,뭐 오대

21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7) 오로 동수로다가 동국대하고 만나기도 하고 또 하여튼 그래도 동국대가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그 다 음해에는 김중배란 애 죽기까지 하고,지금도 6 3동지회 주축이 그니까(그러니까)주축이 처음에 맨든 건(만든 건)문리대 애들이 맨들었는데(만들었는데)지금은 주축이 동국대학이에요.하여튼 인제 그런 그래서 동국대학이 들어오게 됐고,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은 동국 배때기 집에서 할 때는 동 국대학 안 그 저 대표가 없었는데 나중에 동국대학하고 연락돼서 동국대 하고 전적으로,그니까(그러 니까)문리대,법대 그러고 또 동국대학 하여튼 동국대학하고 서울대학하고 이렇게 합해 갖고 인제 같 이 한 거예요.그러고 인제 이 그래가지고 5월 초서부터 운동을 재현시키자 이래가지고 쭈욱 얘기되다 가 인제 그 그 누가 회의를 소집했는지 내가 고(그)잘 모르겠어요.근데 여하튼 나보고도 오라고 해서 갔고,그러고 김지하라는 사람은요.3월,3 24이전에 자기 회고록 보면은,뭐 뭐 함춘원쪽에서 김중태 하고 먼저 만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고 뭐 어쩌고저쩌고,그 우리가 알기로는 대개 그런 잘 못된 생각인 것 같고 착각인 것 같고,3 24서부터 어 4월 이때까지 김지하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어요.아주 시니컬하게 아주 시니컬하게 비판적이었어요.그랬는데 나중에 뭐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난 모르겠는 데 5월 초에서 와서 4월 말,5월 초에 와서 상당히 적극적으로,적극적으로 돌아섰더라고요.그래서 김 지하가 나보다 어.4년이 선배거든요.4년이 선배고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그 사람이 위니까 그래가지 고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니까,자연히 그 사람에게 따르고,여하튼 본격적으로 앞으로 뭐 해 나온 건 그 사람이 5월10일경에 배때기 집에서 우리가 어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회합을 할 때 나와 갖고 그분이 주도했어요.김지하가 그리고 그 뒤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활동을 하죠.(침묵) 면담자 :5월 10일 날 회의에서 모든 역할분담이나 이런 것들이 다 결정 다? 구술자 :거의 다 됐어요.거의 다 돼 가지고 엄 약간의 음 뭐 문제들,뭐 뭐 개회하고 사회는 누가보고 그 다음에 사회는 누가 봐 다 정했어요.근데 기억이 안 나지만,난 조사를 정성철이 읽게 시키자 내가 얘기를 해서 정성철이 조사 읽고,그 때문에 감옥 붙잡혀가고 그랬죠.변호사 아들인데 저 치안국장 아 들이 그 뒤 치안국장,그래서 음 그리고 동국대 애들이 동국대 애들이 관 맨들어(만들어)오고,굴건 이런 거 맨들어(만들어)오고. 면담자 :완장 뭐 이런? 구술자 :동국대 애들이 다.그러고서는 나오면서 아주 치열하게 데모를 했죠.왜 그게 그 치열했냐면 그 날 이 그때 나오다가 맥혀서 도시 들어갔는데. 면담자 :아침 몇 시부터 시작을,아침에 오전부터 시작을? 구술자 :오전부터 했죠.오전부터 했을 거예요.하여튼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는데,대개 우리가 하면은 11시나 그 10시 11시 이렇게 했는데,근데 언제 이렇게 데모하다가 나오다가 밀려들어가고 대신 또 일 부가 저쪽 앞에 건너편 (손으로 지적하며)약대,약대,의대 있는 이쪽에 있게 되서 경찰이 밀어내게 해서 가운데 있었다고.그러니까 양쪽에서 돌멩이를 집어 던지니까 엄청 당했지.경찰이.그날 막 굉장 히 많이 다쳤어요.그러고 그날 밤에 횃불데모까지 하기로 할려고 했는데,준비가 여 어쩌고저쩌고 우 리가 사실은 리더가 없거든요.그 뭐 현승일씨가 인제 위원장이라고 했지만 현승일씨도 몇 개의 공식 적인 집회에 나와서 뭐 한 거뿐이지,데모 모의하고 이런 데는 현승일씨는 거의 참석을 안했어.주로 인제 새세대 야간파 들 이쪽이 인제 하고 그래가지고 그날 야간 데모하기로 했었는데 횃불 만들고 그

214 20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막 하다가 못했어.그러고는 인제 그렇게 되고,인제 그날 경찰들도 많이 다치고 학생도 많이 다치고 이래가지고 굉장히 5.20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이 상징하는 의미도 크고 여러 가지로 크게 거론. 면담자 :그러면 몇 시쯤 해산을? 구술자 :약 우리가 저 저 횃불데모까지 할려고 했으니까,엄 해산은 한밤중 돼서야 해산을 했을 거예요. 면담자 :계속 그때 까지 경찰하고? 구술자 :예 경찰이 밖에 있고,우리가 안에 있고,그래서 우리가 안에서 횃불을 들고서 막 할려고 했지 그러다가 뭐 횃불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 만들 준비가.근까(그러니까)그전에 준비가 안 되었으니 까 잘 못하고 하여튼 그랬죠. 면담자 :520일 이후에는 그 그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 끝난 다음에는 뭐 이걸로 인해서 수배되 거나 그랬던 사람들은 없어? 구술자 :바로는 그걸로 인해서 수배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다만 바로 제들이 체크해 놨다가 6 3,6월 3일 날 계엄선포하면서 6월 4일 날 정성철이니 뭐니 할 것 없이 모조리 할 것 없이 체포에 들어갔어요.인제 고때에(그때). 면담자 :그러면 20일 날 시위가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또 6월 3일까지는 별로 큰 시위들이 없었던? 구술자 :예 5월 25일 정도까지,5월 25일 정도까지는 소강이에요.인제 또 소강이 되니까.인제 또 좀 뭐 하자.그래서 인제 대개 그냥 이심전심으로 그때 대개 그 인제 밖에 나갈 수도 없고 또 실질로 솔직하 게 5월 21일 이후에는 인제 동력도 많이 줄었어요.그래서 와라,잘 안 와요(웃음).사람들이 그니까 그 러니까 할 수 없이 앉아버티기 연좌데모 할 수밖에 없거든요.근데 인제 그런 걸 해야 된다.그런데 그 러면 그게 불어 나야되는데,불어 날거냐 안 불어날 거냐,뭐 인제 설왕설래 하면서 이러다가,이러면 서 5월 25일 날 어 학생회,우리가 학생회 보고 그 하라고 그랬죠.그 당시에 김덕룡씨가 학생회장인 데, 넌 뭐냐,학생회가 이 난리치는 통에 단 한,단 한 번의 집회도 한 적 없고,뭐 성명발표 한 것도 없고, 그래서 어 어 (잠시 생각)그 당시 이름이 무슨 학생회에서 이름을 붙였어요.어, 시국수습학생 대횐 가 뭐 그랬던가 뭐 아니면 그 한일 저 한일굴욕외교반대 학(학생회)학(학생회)이거는 꺼려했어 요.학생회가 쓰기를 꺼려했어요.우리는 그 이름이지만 시국 수습 무슨 학원 결의대회나 뭐 이런 식으 로 했어요 집회를.그래서 오전에 그 집회를 가졌거든요.4 19탑 앞에서 4 19탑 아시나? 면담자 :응,예 얘기는 들었습니다. 구술자 :그 앞에 있는데, 아 미친놈의 새끼들 그걸 왜 그냥 그 어디로,어디로 옮겼는지 모르겠어. 면담자 :관악으로 옮겼. 구술자 :관악으로 미친놈의 새끼들 거기다 그냥 두지.왜냐하면 그 4 19기념탑 앞이 맨날 장소거든.그 러니까 인제 이 6 3이라든지 6 8부정선거 규탄도 내가 했는데,그때는 모두가 거기가 인제 집합소 니까 산 역사의 증인 장소라고,그걸 관악에 갖다 놓으면 뭐할 거야.(목소리가 크짐) 면담자 :관악에 처음에도 그걸 옮겨 말이 많았었는데 옮겨오면서도 제일 구석진데 저 산 밑에다 갖다 나가지고. 구술자 :(차를 한잔 마시면서)봐서 다시 원위치 시키자고 해야지.그 저 제반 민주화운동에 그 집결지 로서 상징성이 굉장히 큰 거예요.

21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09) 구술자 :여하튼 그래서 인제 그 4 19기념탑 앞에서 그 시 시국수습위원회 같은 뭐 그런 시국 시국을 뭐 시국수습을 위한 학원결의인가 뭔가 하여튼 이런 대회를 했어요.그러고 난 뒤에 쫘악 한 게 뭐냐 하면은 헤어지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라.그래서 연좌데모가 시작 되요.그래서 인제 뭐 해가지고 밤에도 안가고 인제 남아가지고 인제,그 당시에 한 열 명,열 명,열 명 체 안 될 것 같애.열성분자 들,나 같은 놈들,인제 모여 갖고 뭐 노래도 불르고(부르고)어쩌고 했어요.아침에 와 보니까 이것들 그냥 있거든 근까(그러니까)좀 안됐다 그래서 같이 와서 또 앉아 주는 거예요.순전히 가만히,가만히, 인제 그날 앉아 있다가 그날 저녁하면서 사실 그걸 며칠까지 어떻게 한다.이런 뭐도 없어요.계속한 다. 좌우간 가마니 구하자.선배들,선배들이 인제 가서,(방향을 지적하며)저기 저 명륜동 그 시장 그쪽으로 가서 가마니 이런 걸 잔뜩 사왔어요.사다가 깔고 5월,그 저 5월 말이니까 5월 25일이니까 따뜻하거든,안 춥거든,그래서 인제 해서 낮에도 모여서 노래하고 뭐하고 하는데,인제 어 그 다음날 바로 그 다음날 일거야.5월 25일 그러고 그 날 저녁 그 다음날 아침부터 아니면 그 전날 저녁부터든 지 아침부터 김지하 형이 참여를 했거든요.김지하 형이,김지하 형과 또 김지하 형을 잘 따르는 후배 들이 있어요.지금 유홍준이,뭐 저 그 뭐야 그 뭐 고적 문화보호보존처(문화재청)가,임진택이 뭐 그 다음에 저기 그 지금 누구야.그 진보학자 작가라고 저 파리 난 파리 운전 수 쓴 놈 홍?(구술자 요청: 몇 년 뒤의 일과 착각 함) 면담자 :홍세화씨. 구술자 :홍세화,그 사람들이 지하 형,손학규 그때 손학규도 그랬다.추종자들,잘 따르고 그러니 인제 그중에 다는 안 왔지만 지하 형이 걔들하고 같이 와가지고,인제 전부 어떤 이벤트화 해 나가요.그 집 회를,그니까(그러니까)막 자기가 뭐 그 박두진씨의 나두야 간다.뭐 이런 걸 갖다가 인제 뭐 좀 해서 막 읽고 자기가 시 써서 막 읽고 그러고 또 인제 여러 가지,그때 송철 저 뭐야,여러 가지,각자 인제 막 노래도 하고 뭐 뭐하고 또 뭐 하니까 굿판이 생겼거든 굿판이,사람들이 더 오지 그러고 밤새하니 까 거기서 인제 막 앵무새(동아방송)가 막 전국적으로 막 떠들어주지,앵무새 알아요? 면담자 :앵무새가 동아방송. 구술자 :예,동아방송 그러니까 앵무새,언론 떠들어주지 그러니까,막 그 모여들지 문리대 다니는 놈은 거기 가서 안 앉아 있으면 이거는 진짜 아닌 것 같이 되어 버리거든.(웃음)인제 그러고 인제 함석헌 씨 뭐 뭐 들 사람들 와서 함석헌씨 좀 뒤에 왔다.인제 하여튼 그래가지고 사람들 불어나고 그러니까 뭐 인제 그래가지고 막 그 여학생들이,여학생들이 문리대 여학생들이 주로 문리대 여학생들이 와가지 고 자기들이 무슨 뭐 뭐 4중창도 하고,뭐 2중창도 하고,어떤 때는 막 솔로도 하고 막 노래를 하지. 지 딴에는 노래 잘하는 놈이 또 노래 뽑아 되지.뭐 김지하가 뭐 그 그때 탄아탄아 최루탄아 뭐 뭐 우 리눈에 피지 마라 *박가분이 지워진다,그거 인제 또 개사한 건데,그 해가지고 막 퍼져서 또 막 신 나게 부르지.막 야단났죠.그러고는 인제 막 대개 인제 노래들하고 또 지하 형이 좋은 시 같은 거 많 이 읽고 자기 시도 읽고 여학생들이 와서 노래하고,그러고 인제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서 인제 자기가 글을 써 가지고 시든 산문이든 써서 성토문이든 써서 읽고 그래갖고 인제 그 맛 아주 분위기 좋고 열 기 좋게 거의 뭐 각본 없는 드라마다.(단식농성을 회상)인제 그 25일 밤 하여튼 26,27,28그리고 인 제 하여튼 3,4일 계속 되었어요.근데 내가 25일인지 그게 학생회 그 대회를 하고 그냥 그대로 주저

216 21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앉았는.그게 25일인지 27일인지 기억이 안나요.하여튼 어 문리대 4 19기념탑 앞에서 우리가 했던 것 이 연좌데모를 하다가 한 이틀 연좌데모를 하다가 쪼금 더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단식데모에 들어갔어 요.단식데모로 들어갔는데 밤중에 되면은 뭐 전부 그냥 먹고 그랬죠.미련하게 나는 꼬박 단식을 했어 요.그래서 인제 나 나처럼 미련한 놈들도 꽤 있었어요.그래가지고 또 먹은 또 사람들도 있고 먹은 사 람이 약지.먹어야 그래야 지속이 되니까.근데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 같은 경우에 막 쓰러지고 그러니 까 막 함춘원에,함춘원 아시나?그 약대(의대)옆에.함춘원에 임시 치료본부를 서울대학교에서 만들어 가지고,인제 막 가서 난 쓰러지면 가서 뭐 얼음찜찔 하고 링크(링겔)만 맞고,그러고 좀 깨면 또 오고 막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웃으면서)참 참 단순하기도 하고 뭐 하지만 서울대학교 쪽에서 함춘원에 의료시설에서 전부 하지,뭐 여학생회고 인제 나중에 전 서울대학교 여학생회가 다 오지.전 애들이 오 지.그러고 인제 그랬지.막 단식으로 들어갔죠.그래서 그냥 연좌가 이틀,단식이 한 삼일 그렇게 된 거 같애.그러고 단식하는 데모하는 동안은 더욱 앵무새(동아방송)가 뭐 뭐야 말없이 짖어 대니까,함 석헌씨 오고 무슨 그때 정일형씨도 온 것도 갖고,하여튼 그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철원이 형 아버지 가 해,스크랩 해 논걸 찾아봐도 되겠고 하면 다 나오죠.많이 오고 성금도 오고 막 돈도 오고 쌀도 갖 다 주고 막 그랬어요.(잠시 눈을 감고)그래놓고 그다음에 3.0,3.0일 인가 31일인가 내가 기억이 안 나요.30일나 31일 그때까지 거기서 하고 한 닷새 엿새 하고 그러고 비가 왔어요.비가.비가 와서 거 기서 있으면 비를 맡게 되니까,5월 비가 제법 왔어요.그래서 그때 어디로 했냐면 지금은 그 건물이 뭔 진 몰라도 옛날에 우리 그 그 과학관 천문대 첨성 천문대 있는데 같은 과학관 그걸 넓혔어요.(소능 로 건물을 묘사)그 이렇게 교사를 확장해서 확장해서 그 공사를 하느라고 위는 못하고,뭐 때문에 못 했는지 그때는 공사를 안했어요.그러곤 아래는 슬라브만 다 쳐놓고,그러니까 4층인가 5층 건물 그 뼈 대만 잡아놓고 그래놓고 못 해놓으니까 맨 밑은 아주 좋잖아요.비 비도,덥지 않을 때니까.그래서 거 기로 다 옮겼다고요.거기로 인제 옮겨서 그때는 단식,철 단식 끝내고 그러고는 인제 뭘 했죠.근데 근데 인제 거기로 옮긴 뒤부터 30일인지 31일쯤 될 거야.31일쯤 됐는데 그쪽으로 옮긴 뒤부터는 지하 형도 선배들도 하나도 다 없어졌어요 다.아마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모양이에요.그러니 전부 어디로 없어지고 그래서 인제 뭐 싫든 좋든 제가 전체. 면담자 :아무 귀띔도 없이,다 그냥? 구술자 :예,별 귀띔도 없이 슬금슬금 그리 가더라고요.저 저기 62학번에 저 그 저 민비연 중심이 됐 던 62학번 경북고등학교 출신들 이 사람들도 3 24 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놓고 그 뒤에 슬슬 가만히 보니까,뭐 어떻게 어떻게 하니까 슬금슬금 빠져서.다 그러니까 61학번들이 중심이 되어서 3 24 를 했는데,그러면 그 뒤 그 사람들이 그 어떤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뭐 인제 잡혀가거나 잠적하거나 하 면은 그 뒤 62학번들이 맡아 해야 하는데 62학번이 먼저 도망갔거든.(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손으로 자 신을 지칭하면서)그러니까 63학번인 나한테 내려온 거예요.그냥 다 없어 졌으니까.그래서 내가 이제 그날부터 그러고 6.5,3월 25일 날도 다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했고,그러고 인제 또 그런 대로 인제 야간 새세대, 주간 새세대 뭐 이래저래 많이 왔다 갔다 하고 하니까,인제 그 그 밑으로 옮긴 뒤로 부터는 전적으로 제가 인제 전부 통제하고 리더하고 했죠.그런데 인제 근데 그때 인제 문제는 농성만 계속함으로,농성만 계속함으로 이것이 언론이 받아주니까,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말이죠.그냥

21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11) 농성만 하고 있으면 되요.우리가 술 먹고 막 개판 부리든 뭐든 술 먹고 개판부린 놈은 없지만,그러니 까 인제 농성을 하게끔 저 그런 거죠.그러고 인제 농성을 하는 동안에는 인제 수시로 인제 뭐 그 뭐 선배들까지,그 6월 2일 같은 날에는 중태 형이 나와서 자기 나름대로 연설을 하고 자긴 자수해버리고 뭐 인제 그랬지만,여하튼 그렇게 와서들 뭐 하고 해서 하여튼 농성을 했어요.그러고 제가 다른 선배 들이 없었어요.그러고 나는 인제 그 새세대 새세대 신문사에 인제 우리 전화가 있으니까,그거를 놓고 내 친구들을 통해서 각 대학 다른 대학하고 (손을 뻗어서)인제 연락을 하죠.동정을 알거나 연락 을 하고 연락을 받고,인제 그래가지고 그래왔는데 그러고는 인제 6월 2일 날,6월 2일 날,엄 6월 2일 날,엄 그 새세대 쪽으로 이렇게 전화가 어 와서 송철원씨가 어 나한테 전화하고 메모를 좀 전했다.그 러면서 세브란스병원 몇 호에 있는데 나가고 싶다 그랬더라고요.그래서 야 뭐 송철원이가 어떻게 됐 냐면,4월 20일경에 YTP 폭로를 하고,그러고 나서 그 뒤 이 좀 뭐 어디를 끌려갔느니 어쩌니 소문이 돌았는데,그래서 사실은 별일 없었는데 그러다가 5월,5월 한 중순경,5월 15일경에 여하튼 그 누구한 테 끌려갔는지는 모르게 눈을 가리고 끌려 가갔고 인왕산에 가서 린치를 당했다고요.그래서 그것이 덕창이지 않겠나.우린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도 명확하지 않다고 철원이 형한테 또 물어봐야지.그래 가지고. Tape3. 구술자 :동호(신동호,경향신문 기자)는 인제 그런 게 의문스럽더라고.의문스러운 모양이더라고.그 어 마어마한 사건인데 그걸 어떻게 2학년 학생이 했느냐?(웃음)하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밀려서 밀려 서 어떻게 한 건데. 면담자 :그러니까,5월 25일 거는 이제 학생회가 일단을 주도를 해서? 구술자 :집회만 했어요.집회만. 면담자 :집회만 하고,그게 끝난 다음에 그 연좌농성 들어간 거는 선생님이? 구술자 :꼭 내가 아니라,거기 인제 있던 몇 있던 여러 사람들하고. 면담자 :그러면서 그게 자연스럽게 단식농성까지? 구술자 :연좌농성에서 단식농성으로 이어지고,다시 단식농성이 인제 저 그 저 뭐 뭐야 교양,교양,교양 학부 신축공사장 밑으로 인제 옮겨지고 이랬죠.그래서 인제 그 연좌단식농성 할 때까지는 지하 형이 모든 걸 지휘했어요.나는 지하 형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죠.그런데 그리고 그쪽으로 옮기고 난 다음엔 어떻게 지하 형 없어지고,지하 형 그거를 그날 인제 그러고 거기서 없어지고 인정 안하다더라 고요.그러고 6 3데모 현장에서도 있었다고 그러는데 근 여러 다 알아요.사람들이 지하 형 안 나타났 다고 뭐 겁나서 어더로(어디로),맹활약을 했으니까 연좌단식농성 할 때 그러니까 겁이 나니까 어디로 좀 피 피했었지(미소를 띠며). 면담자 :그 단식농성,연좌농성,단식농성 이어지는 기간 동안에 뭐 이렇게 같이 있으셨든 분들이 기억 나시는 분들이 있나요?

218 21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험.(기억을 회상하는 듯이)뭐 뭐 철곤이라든지,뭐 내 우리 동기들 또 뭐 지금은 막상 또 거론 하라니까 잘 안되네.많이들 있었어요. 면담자 :그 당시에 이렇게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들리는데 있었나요?예를 들어서 김중태 피살설이든 지 뭐 이런? 구술자 :근데,(잠시 침묵)근데.여하튼.(침묵)그건 이미 그 당시에도 조금 지나서 우리가 김중태 지 가 자가발전 한 거로 이미 전부 모여서 그런 건 괴소문이라도 할 것 없이 없애버리는 게 좋아요.그건 특히 김중태 애인이 있었거든요.손 뭐라든가 인제 걔가 인제 적극적으로 김중태가 시켰.시켜갖고 정 보부 지하실에서 맞아 죽었니 뭐니 퍼트리고 그랬는데,(기침)그건 우린 뻔히 알았고,뭐 뭐 글쎄요. 가끔 가다 보면은 그런 어떤 필요에 의해서 하겠죠.그런 있더라고요. 면담자 :5월말 경에 이미 그 계엄령이 떨어질거다라는 소문들은 있었는 건가요? 구술자 :전혀,전혀 없어(목이 잠김). 면담자 :그러면,그 때 그 위에 현승일 선생님이나 뭐 김중태 선생님,김도현 선생님 같은 경우는 수배 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였었던가요? 구술자 :그렇게 보입니다.뭐 정확히 난 그때 내가 신문 보고 그럴 여지도 없었고 (웃으면서)그럴 시간 도 없었고 그렀는데,내가 알기로 수배령이 내린 걸로 알아요.그래서 그 사람들이 6월 1,2일,뭐 5월 말 전후해서 자기들 발로 다 갔어요. 면담자 :그 뭐 자진출두? 구술자 :자진출두. 면담자 :하실 거라는 거는 선생님 연락을? 구술자 :나한테 연락을 안했죠.또 연락할 필요도 없고 자기가 그러고 그 당시에 조직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그까(그러니까)그런 얘길 했지만 그 조직체라기보다도 열심인 사람들,그 열성분자 몇이 모 이면 그게 곧 회의체예요.그것이 무슨 밥집에서 모였든,잔디밭에서 모였든,또는 어디 하숙집에서 모 였든,그쯤 와서 아주 그러나 인제 근본적으로 더욱 열심히 이렇게 모인 것 같은 건 5.20민족적 민주 주의 장례식 같은 경우는 좀 조금 치밀하게 준비했고 다른 건 대개 이러고,6 3은 학생회에서 그래서 그 뒤 연좌로,단식으로 이렇게 한 것 같으면 거의 자연스럽게 갔어요(고개를 끄덕이며). 면담자 :아까 잠깐 말씀하신 그 송철원 선생님을 그 병원에서 데리고 오신 상황? 구술자 :6월 2일 날,그까(그러니까)인제 6월 2일 날,그 메모를 받 받았어요. 면담자 :송철원 선생님한테? 구술자 :아뇨,송철원 형이 다른 사람한테 인제 자기 잘 아는 후배한테 인제 얘기를 해서 고 메모를 나 한테 갖다 줘라.그런 거죠.받아보니까 인제 연대 있는데 나오고 싶다 그랬더라고여.이미 그 당시 에 그 밖으로와 신문에는 YTP 건의 폭로문제로 해서 송철원이 린치 당했다는 식으로 쫘아악 나갔거든 요.그러고 인제 정보부는 그걸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하여튼 그 저 연대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이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그러더라고요.어 실지로 내가 아는 거로는 정보부에서 시키지는 않았는데 그 당시엔 나도 정보부가 때린 걸로 알았죠.나중에 인제 철원이 형하고 얘기하면서,근 인제 그러나 하여튼 정보부가 그러면서 이건 정보부가 안 했는데도 정보부가 뒤집어쓰고 또 나가서 무슨 소리를 해

21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13) 제낄지 모르니까 그래서 못나가게 한 것 같애요.(고개를 옆으로 숙이며)하여튼 그래서 그걸 내가 받 고 그러고 나는 인제 뭐에 6월 1일이 그러고 30일,1일,2일이,뭐에 인제 그 굉장히 그 저 목말랐었 냐하면,이 그 참석자들 한 5-60명 내지 그것보다 좀 더 된 거 100명 정도 더 됐을까.근데 이 참석자 들에 열기를 유지시켜야 되거든요.그니 그 당시에 내 2학년이 뭘 안다고 와서 아 떠들어대도 떠드는 소릴 하도 들어서,그 뭐 뭐 하고 무슨 그 당시에 뭐 누가 와서 참 노래를 한번 해준다고 그러면 그 노래 듣는 동안은 좀 있지만,그 다음에는 산만 해지고 자기네들 끼리 얘기하고 뭔 짓해가면서 산만해 지고,전부 집중시킬 필요는 없지만 유지는 돼야 되거든요.그러니까 인제 그때마다,그때마다 어떤 조 그마한 하다못해 카피지(유인물)라도 있어야 되거든요.그러니까 철원이 형이,그래서 아 이거 잘됐다. 그러는 중에 내가 인제 그 사람한테 다시 해서,연락해가지고,(기억을 잠시 다시 상기시키며)연락 안 했구나.연락 안 하고 내가 갔어요.가고 택시를 밑에다가 대절시켜놓고 고 밑에 쪼금 쪼금 떨어진 곳 에 택시를 대절시켜놓고,그래 인제 내가 문병 간 것 같이 하고 그래서 불시에 찾아온 것처럼 하고 철 원이 형하고 얘기를 하면서 철원이 형 잘 가라,그러면서 또 따라 나와,환자복 그대로 입고 그러고 따 라 나오면서 뭐 어쩌고 (웃으면서)인사말 하면서 잘 가라 남들 듣게 어쩌고저쩌고 택시 타는데 까지 와서,잘 가라 어쩌고 그래,탁 문 열면서 왔죠.(호탕하게 웃음)그래가지고 그래가 인제 그 거 내가 안 시켰는데 누가 그랬는지,하여튼 참,하여튼 뭐야 근데 또 철원이 형이 이렇게 왔는데 얼마시간이 지났는데 어떤 사람들이 또 당가를 맨들었다고 그냥 나뭇데기 뭐 이런 거 해가지고 천 해가지고,거기 다 철원이 형을 또 눕히더라고,(웃음)그래가지고 인제 철원이 형이 저 늦게죠.저녁에 왔는데 6월 2 일 저녁에 내가 철원이 형을 데리고 왔더니 중태 형이 막 인제 농성하는 사람들 앞에서 인제 그 자기 연설을 하고 그러곤 인제 자진 출두하러 갔다고 그러더라고요.그러고 나서 인제 서로 엇갈리고 그리 곤 난 철원이 형 데리고 들어왔고,철원이 형이 거기서 뭐 어쩌고저쩌고 인제 얘기하고 그것이 6월 2 일이에요.6월 2일이고 그러고 6월 3일 날인데,근데 인제 6월 2일이 동시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면은, 가만.서 철원이 형이 6월 1일 날 왔나.2일 날 왔나.하룻밤 잤던 것도 같은데,아냐 하룻밤은 잤는데 이틀 밤 잤나,하룻밤 잤나,거기서 농성장에서,하룻밤 잔 것 같애.2일 날 왔던 것 같애.근데 인제 2 일 날,2일 날 그 이 우리가 연좌단식 그리고 인제 또 이쪽에 가서 계속 연좌 이렇게 했는데,이거를 계속해서 동아방송 뿐 아니라 다른 매스컴에서 전부 일제히 다루고 동아방송은 아주 시간대로다 방송 을 해 줬거든요.그러니까 인제 음 6월 2일 날,6월 2일 날 그 고려대하고 고려대,연대,근데(그런데) 대학들은 잘 모르겠어요.인제 고려대는 확실하고 하여튼 많은 대학이 한일굴욕외교반대 데모를 나왔 어요.그래서 인제 그러고서는 그 다음날 따라서 인제 우리가 그냥 상식적으로 아는 것은 그 다음날은 전국의 학생들 특히 서울시내에 있는 전 대학 학생들이 다 나올 거다 하는 걸,다 사람들이 입으로 뭐 하고 또 다 느꼈다 구요.그래서 인제 그날 인제 그 몇 사람들하고 토론하고 그랬는데 왜냐면 어 그 다음날 인제 그 이 전 대학들이 이렇게 나오면 엄 인제 그때 처음 그런 얘기들이 나온 거예요.계엄령 이라는 어떤 조치를 취하면 우리가 여기를 더 버티고 있지도 못 한다.그러니까 모여야 되지 않느냐, 내지는 참 엉뚱한 환상도 가졌어요.우리가.이길 수도 있다.전국적으로 내일하면 이길 수도 있다.근 데 인제 그러나 문리대가 이렇게 남아있는 것 이것이 기지다.이거로 인해 확산 된다.그니까(그러니 까)따라서 우리가 한 100명 정도 더 참여 해 봐도 그렇고 안 참여 해봐도 별 의미가 없다.그러니까

220 21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끝까지 기지를 사수해야 된다.그러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서 우리가 잡혀도 다 같이 잡혀가면 되지 않느냐.이런,이런 애 또 인제 나가서 붙어야 된다.그러고 그쪽에는 다소,다소 낙관적인 견해들이 있 었어요.경찰이나 이쪽이 밀릴지도 모른다.4 19때 같이 뭐 하여튼 인제 그러고 또 한 면으로는 나가 자는 파가 난 또 다른 논의를 계엄령이나 뭐 어떤 것이 되면은 돌아오지 못한다.그러니까 활짝 태울 수 있는 것은 다 태워야 된다.이런 거 그래서 6월 2일 날 저녁에 인제 새세대 거기서 인제 뭐 가만 김정강 형도 좀 있었던 같은 기분이야,하여튼 몇 사람들 내 지금 기억 안 나는데 뭐 박재일 형이나 최혜성 이런 사람들 일거예요.같이 논의하고 그러고서는 결론을 못 내리고 왜냐면 그 다음날 상황 봐 서 한다.그래가지고 그 다음날 내가 인제 고대하고 연대하고만 사람을 보냈어요.내 친구들을 보내서 (손으로 하나하나 거론)고대가 교문을 나오고 어디까지 대개 진출했다.인제 고거를 내가 인제 내 친 구한테 받고 연대도 어디까지 왔다.그리고 어디까지 나왔다.왜냐면 고댄(고려대)전에 나오다 실패한 것도 있고 그래서,나왔다는걸 듣고 그러고서는 오후 늦게 막 막 뭐 벌써 이미 뭐 시내는 거의 인제 그 무정부상태 상태였다고요. 막 버(버스),츄럭이니 뭐 버스 이런 거 차에 타고 막 막 질주하고 막 돌아다니고 막는 사람 하나 없고 시내 텅 비었어요.인제.그렇게 되고 그러니까 막 전부 모였는데 근 데 그 꼭 그거에 계엄령을 다시 선포 하고 안하고 둘째 쳐놓고,그렇게 나도 그때 어릴,어릴 때고 지 금 한대도 또 그럴 거예요.그 분위기에 내가 휩쓸리지 거기 가고 싶지.여기 남아서 기지 지키고 앉아 있을 생각 안 나더라고요.그니까(그러니까)인제 만약 연대,고대가 안 나왔으면 지키지.나는 지키고 본부 그 있든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한테도 지키라고 할 텐데 다 나왔거든요.막 그러고 야단났거든요. 막 그러고 방송 들으니까 막 야단났거든요.그래서 우리가 오후에,오후에 한 3시,4시,그때쯤 인제 나 왔죠.나와서 우리가 그 앉아 있던 거적 데기 뒤집어쓰고 그러고 나와서,원래는 저쪽 그 반도호텔 앞 으로 해서 국회의사당 앞으로 기어 올라올려고 했는데,시간이 너무 늦고 그래서 그냥 그 저 어디야 미대 앞으로 해서 원남동으로 해서 그렇게 해가지고 어디로 중앙청 앞으로 갔죠.그래가지고 인제 그 갈 때 가는데 인제 중앙청 앞에서 중앙청 앞에 쯤 중앙청 이제 조금 중앙청 그 당시 중앙청 지금 정부 청사 자리 해무청이 있었거든요.해무청이 있고,그 다음에 인제 좀 앞에 경복궁,경복궁에서 청와대 쪽으로 조금 올라간 데에 바리케이트를 쳤어요.인제 그 청와대쪽으로 인제 그니까(그러니까)가는 중 앙청 앞으로 동탑,그 당시 박범진 형은 그때 민비연 초대회장이 박범진 이었을 거예요.박범진 형이 었는데,그 당시 조선일보 기잔데 날 보고 쫓아왔더라고요.(당시 대화 상황을 표현) 어 현배야,이제 박정희 퇴진 아주 공개적으로 외쳐 공개적으로. 왜냐면 우리가 구호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했거든요. 그래서 끝내 공개적으로는 박정회 퇴진을 얘기 못했어요.6 3때.그까(그러니까)어 한일굴욕외교 그 또 처음에는 한일회담 반대 그래서 우리가 사실 반댄데 그거 또 이제 여론 때문에 굴욕외교반대,자 세의 문제,이런 쪽으로 하고 그래가지고 사실은 자세,그 다음에 내용,그러고 실질로는 정권에 대한 거분데 그때 궁극적으로 전부 이렇게 그런 생각을,그러고 데모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 다 그러면서 도 그거를 우리가 에스컬레이션을 못 시켰어요.구호는.그까(그러니까)이제. 면담자 :던지면 위험,생각하다고? 구술자 :예,예,그렇죠.위험과 그 다음에 그 여론에 시민의 동조,그거를 무쟈게(굉장히)신경을 썼거든 요.그런 차차 싸워가면서 인제 에스컬레이 시킬려 그랜거죠.그니까(그러니까)범진이 형이 쫓아와서

22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15) 조선일보 기잔데,아 뭐 박 박정희 물러가라,박 박정희 타도하라고 하더라고요.알았어.알았어.내일 부터 할 게 그러고 인제 그러면서 갔죠.그래 갔는데,우리가 인제 원 근원이니까,가니까 각 대학 학 생들이 빡빡이 들어찼더라고요.우리가 가니까 또 자리를 내 줘여.그 복잡한 속에서 맨 앞자리 바리케 이트 밑으로 바로 우리가 갔죠.가 가지고 인제 했는데,우리 들어오고 나서 좀 뒤에 서울농대 애들이 수원서부터 걸어올라 오고,인제 와서 인제 또 문리대 애들이 중심이라고 와서,우리 왔다고 보고 그 또 이 대학 저 대학 나왔다고 얘기하고 그러더라고요.그래서 그 안에 거기 서서 구호도 외치고 그러 하는데,그 다음에 그러가지고 인제 우리가 3시정도에 나갔으니까,4시나,5시쯤에 인제 거기 닿고 4 시나 4시 반쯤이나 닿거나 천천히 갔으니까.그러곤 거기서 인제 구호도 좀 외치고 노래도 한두 가지 불렀던 것 같고,하여튼 구호 외치고 뭐 했어요.그랬는데 그게 몇 신지 정확히 내 모르겠는데 여섯 시 나 뭐 어떻게 됐던지,뭐 그렇게 됐겠죠.여섯 시,여섯 시 좀 넘었어요 여섯 시정도,여섯 시,일곱 시 초,초일 거예요.이 최루탄을 보냈는데 최루탄을 그 사람들도 그렇죠.그땐 인제 대규모 군중과의 그 어떤 대치는 그 사람도 처음 그 사람들도 처음이에요. 면담자 :경찰들. 구술자 :경찰들,군인,뭐 군인,하여튼 처음이니까,우리도 조심스럽고 그 사람도 조심스럽고,근까(그러 니까)하다못해 그 당시 우리가 단식데모 한다고 함춘원에다가 임시 의료반을 서울대학교에다 편성해 놓고,그거 뭐 그런가 보다 내규에 어떻고 할 정도니까.그 뒤 박정희 후기 같으면 그 뭐 얘기가 됩니 까?말도 안 되는 얘기죠.근까(그러니까)낭만시대지.그래도 그러니까 최루탄을 안 쏘는 거예요.최루 탄을 쏘으면 직접 화상도 입고 그 파편 때문에 다치고 화상도 입고 막 그러거든요.그러니까 뭐 어디 서든지 몰라도 이렇게 바리케이트가 이렇게 있잖아요(장소를 표현 함).혹은 인제 여기가,여기가 이렇 게 인제 쭈욱 하니 청와대 들어가는 길이란 말이여.그러고 인제 이렇게 까지 쭈욱 여기서 인제 지금 여기가 중앙청이에요.중앙청이고,이렇게 쭈욱 가고 큰길로 이렇게 가고 이렇게 이렇게 여기에 다 모 여 있는 거에요.여기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이쪽으로 또 치고 이렇게 치고,근데 어디서 어떻게 날라 오는지 몰라도 최루탄 연기가 최루탄 계속 날라 오는 거야.우리한테.근까(그러니까)인제 최루탄을 피워서 쏘거나 피워서 송풍기로 보내는 거지.송풍기로 그런 거야.그때 얼마든지 하니까 송풍기로 인 제 보내는 거야. 그니까(그러니까)처음에는 좀 메케한 거 같더라고요.그냥 그런 정도,그냥 약간 에 어디 들어왔나 시간이 얼마 지나니까 점점 쌓이잖아요.여섯시 반,아마 일곱 시,여섯시 반,여섯시 반 에서 40분쯤 됐는데 인제 견디기 어려운 정도가 됐는데,그쪽에서 경찰이 온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뭐 라고 한 것도 아니에요.이제 견디기 어렵고 오히려 저쪽이 아무런 행동도 안보이니까 공포심이 생겨 갖고 가운데쯤에서 무너지기 시작했어요.그니까(그러니까)도망가기 시작했다고,자릴 이탈한 거지. (당시 상황을 강조 함)그러니까는 걷잡을 수 없더라고,큰 사고 안 난 게 다행이지.그니까(그러니까) 막 뭐가 막 뒤에서 쫓아오는 거 같고,우리는 인제 바로 바리케이트 앞에 있었으니까,우리가 그때 인 제 뭐하고 난 그때 뭐 어찌됐던 간에 뭐 그 사람들하고 같이 왔으니까,내가 가자고 하고 왔으니까,각 대학생들 빠져 나가는 거,이왕 나가는 거,도망가는 거 어떡해.그 목청껏 침착해라.아무 일 없다.침 착해라.침착해라.잘 못 하면 다친다.이래갖고 다 빠지고 우리도 빠지고,우리도 빠져서 막 빠져서 이 렇게 내려오는데,시내는 또 막 그런 대로 막 이 그 흔히 얘기하는 양아치랄까,이런 사람들 막 차타

222 21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고,막 야단나고 그러더라고요.우린 이미 빠지는데 밑으로 내려오는데 그러는데,그래서 내가 그런 걸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깐(그러니까)중앙청 앞에서 광화문에 멀리 바라보고 섰을 때쯤,어디서 확성기가 했는지,누가 했는지,누가 가르쳐 줬는지 모르지만 계엄 선포됐다고 그러더라고요.그때까지만 하더라 도 문리대 같이 내려오고 있었거든요.그래서 문리대 내려오던 사람들한테 급히 학교로 되돌아가라 그 랬죠.광화문 쪽에 나가다가 학교로 전부 각자 각자 해산해서 학교에서 모이라고 그랬죠.그러니까 학 교로 다시 모였죠.계엄은 이미 선포되고 계엄은 아마 소급해서 선포되었을 거예요.6신가,7시,6신가 그랬을 거예요.그러고 내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 게 무너졌던 게 느낀 게 6시 반이나,40분쯤에 내가 계엄령 선포됐다는 거를 안 것이 중앙청 앞에서 광화문을 보면서 앞에서였고,그깐(그러니까)한 일곱 시 그렇게 됐을 거예요.그래서 전부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인제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막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 돌아왔어요.또 오히려 거기 농성하던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왔어요.그러니까 인제 밖이 야단났으니까,인제 그 농성장에는 없었지만 그 데모하는데 와서 끼거나 구경하거나 하는 사람들 가운 데에서도 대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되나 해가지고,또는 동국대학 애들도 오고 막 막 왔어요. 전부 학교로,학교로 왔는데 들어올 땐 몰랐는데 이미 들어와서 보니까,그 이렇게 개천 변 이쪽으로 군인들이 있고 그 다음에 앞에는 그 문리대 앞에 문은 군인 이었나,경찰 이었나,난 모르겠어요.좌 우간 하여튼 막고 앞에도 경찰들이 특히 사복경찰들이 쫘악 깔려서 인제 아예 뭔지 인제 잡는데,소위 뭘 잡느냐 하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내가 봤을 때 그때 한 2-3,2-3백이나 1-2백 되는데 걸 다 잡을 수 없잖아요.그러니까 뭘 잡느냐하면 사진 찍혀있는 주모자 요걸로 잡는데 요렇게 보니까 그러더라고 요.나는 내가 전부 해산하라고 그랬거든요.재주껏 빠져나가라.계엄령까지 선포되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손을 뻗어서).뭐 그야말로 지금 같으면 아예 그냥 콱 붙잡아 놓고 나도 그렇고 굶어 죽을 때까지 버틸 수도 있을 텐데,그때만 해도 그런 생각도 그런 용기도 안 나더라고요.그러니까 해산을 시켰어요.전부 돌아가라고 그랬는데 뒷문으로 저어 그니까(그러니까)낙산 쪽으로 이렇게,서울대 이 렇게 있는데 그 낙산 쪽으로 철망으로 문이 있었거든요.철조망,철조망 그거를 잠겨 있으니까 타 넘 고,가시,가시 덩굴 같은 것은 없었거든요.그니까(그러니까)인제 타넘어,타넘어 간 놈들은 다 잡혔 어 무조건 다 잡혔어.그러니 인제. 면담자 :다 지키고 있었었나보죠? 구술자 :예,뺑 둘러 쌌었니까.그걸 몰랐죠.우린 뺑 둘러 싼 거를,그니 인제 나는 가만 보니까 나가기 막막하더라고요.그러고 인제 그 딱하니 *면 잡아가지고,뭐 뻔 하거든요.그래갔고 인제 옷을 내가 다른 친구하고 바꿔 입고,바꿔 입고,그러고 모자를 운동모자 같은걸 뒤집어쓰고 이전에 나하고 새세 대 같이 기자하던 애가 중문과에 이영자인가,김영자인가.지금 주섭일씨 저저저 중앙일보 논설위원하 고 하는 주섭일씨 부인인데,그때는 걔도 2학년,나도 2학년,같이 새세대 기자하고 그래서 야 영자 야 이리와 이리와. 그러고 인제 걔 꼭 끌어안고 그러고 나서는 막 꼭 달라붙어 가지고 빠져 나왔지. (웃음)그래가지고 빠져나왔는데 그때 붙잡힌 게 정성철이 뭐 뭐 철곤(최극언)이 뭐 할 것 없이 또 김 헌출이 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어요.나는 도망 나오고 그러고 인제 그러곤 뭐 군인이다 뭐 하고 막 학교 앞도 군인도 지키고 학교 앞도 못 들어가게 하고 하니까 그 날 저녁에 해산을 하고 잔거죠.그래가지고선 일단 6 3이라는 건 그거로 끝나고.

22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17) 면담자 :그럼 6월 3일 날 그 가두진출 할 때 애시당초(애당초)의 목표가 중앙청으로 가는 걸로 목표를 정하셨었는가요? 구술자 :예,예,그리고 나두 다분히 그런 생각을 했지만 실패한다는 것 보다는 밀어 쨌긴다,깨지는 한 이 있어도 밀어 째긴다,한번 붙자,이길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생각도 했어요.(웃음)지금 들으면 허 허 하는지 몰라도. 면담자 :뭐 4 19경험이 있었으니까 충분히? 구술자 :글쎄,인제 이 글쎄 인제 정권도 무너,무너트려 보고 이랬으니까.그 어 전 어떤 농민이나 대중 봉기로 무너뜨릴 수 있다.이래 생각을 했어요.근데 6 3 때 그날 그렇게 될 거냐,안 될 거냐 그거에 대해서 확신은 못 섰어도 될 수 있다.꼭 비관적으로는 생각을 안 했어요.그러니까 열심히 했죠.(웃 음) 면담자 :그 당시에 좀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그룹들은 어떤 그룹들에서? 구술자 :(손을 턱에 대고)비관적으로 생각한 그룹들 많고,또 인제 겁이 나서,인제 겁이 나서,겁이 나 거나 인제 대부분 많이 인제 그 좀 앞장을 서야 될,또는 앞장섰던 사람들 가운데서 인제 그 참여를 안 한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이 아버지들이 아버지가 인제 현직 공무원,고위공무원,그래서 서울대학 이라는 게 요즈음도 돈 많은 놈들 자식들이 가기가 쉽지,그때는 어찌됐던 간에 과외니 뭐니 안 해도 일류고등학교 이렇게 가고 하는 거,그러니까 쉬운 거 아니거든요.근까(그러니까)돈 많은 놈 자식들 이 오고.근까(그러니까)현직 고위관리들의 (손으로 지적하며)아들들이 많거든요.근까(그러니까)걔들 이 다 빠지고 그러고 인제 빠지면서 지가 뭐라고 얘기,저 빠지는 걸 얘기하기 좀 어려우니까 비관론 을 퍼트리는 거지(미소를 띠며).그러고 인제 또 그렇잖아도 인제 겁이 나는 놈,또 시골 놈들 가운데, 시골 놈들 가운데,흔히 그런 놈들이 많아요.이 출세지향적인 놈들,그 난 시골서 어렵게 자랐는데,서 울에 와서 내가 중학교,고등학교 다니면서 뭐 때문에 내가 그렇게는 안됐는지 나도 모르겠어요.근데 나중에 이렇게 보면은요.아주 일찍부터 고등학교 때 이럴 때부터도 특히 전라도 애들,경상도 애들이 많아요.일찍이 고시를 해가지고 출세를 하겠다.근까(그러니까)출세의 최고 수단이 당시는 고시거든 요.물론 국회의원 뭐있는데,국회의원은 그 자유당 때라든지 이때 야당 국회의원 한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고,여당 국회의원 이라는 건 어느 정도 관록을 가지고 그쪽하고 손잡아야 되는 거고.근까 (그러니까)그게 그건 뭐 좀 하고,그게 제일 쉬운 게 머리 좋은 놈들이 제일 할 수 있는 게 고시거든 요.아니면 사법고시,행정고시,인제 그런 거 볼라고 하는 놈들 이런 놈들 빠지죠(머리를 기울이며). 빠지고 인제 이런 놈들은 비관론을 퍼트리죠.비관론 아니라 그냥 현실론이지.그놈들 얘기가 맞어(웃 으며),맞는데.글쎄 언제든지 꼭 그 젊은이라는 것이(눈을 감으며)언제 희생을 당해야 된다는 건 아니 지만 나이가 있건 없건 간에 어떤 때 역사적 대의명분 앞에서는 때로는 희생할 수도 있어야 되는데, 뭐 좌우간 내가 그때 이렇게 쭉 보면은 집안이 고위공무원 집의 자식들,또 출세를 할려고 하는 애들, 나중에 출세하더라고,이런 애들 빠지고,빠지면서 비관론을 퍼트리고. 면담자 :그때도 문리대에서 고시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문리대는 별로 없었어요.문리대는 별로 없었는데,어 대신 문리대는 뭘 하고 있냐하면 행정고 시를 좀 했어요.어 근까(그러니까)외교학과 애들은 전부 다 외무고시 볼,보려니 하고 그래서 보고,

224 21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그 다음에 극히 일부가 행정고시,사법고시는 문리대 쪽에서 한데는 애들이 없었고 행정고시,정치학과 애들 뭐 이런 애들이. 면담자 :경제과나 뭐 정치학과? 구술자 :경제학과 상대에 있었고 정치학과 애들이 일부 행정고시를 했어요.지금도 그 애들 보면은 그걸 그렇게 됐더라고요.그거 외교학과들 애들 외교,그 다음엔 그 시험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 했다고요. 면담자 :그럼 선생님은 이 6 3으로 해서 수배를 받게 되신 건가요. 구술자 :예,수배 받았죠.그러니까 인제 6월 3일 날,난 도망갔잖아요.난 도망갔고 인제 만든 사람이 도망갔어요.예를 들면 이원재씨,지금은 경기대학교 교수 하다가 정년퇴임한 이원재씨 같은 경우 내가 고(그)이전에 얘기를 할 게요.이 6 3은요.6 3이것을 인제 이거는 그 분위기라든지 이거는 그 4 19복학생들 또 2 28 을 했던 경북고등학교나 이 사람들이 분위기도 맨들고(만들고)또 실지로 그것 을 처음에 제기한 거는 민비연 이고 민비연 에 민비연 에서도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에요.그래놓고 그것을 초기에 좀하고 그것을 이어받아서 꾸준히 하고,꾸준히 앞에 들어나거나 또는 안 들어나거나 뒤에서 꾸준히 한 거는 새세대 야간파 에요. 그래서 그 그 인물들이 그게 누구를 대개 인제 얘기해야 하면은,그 내가 지금 보면은 송철원,인제 새세대 야간파 로만 얘기하면,송철원 어 박재일,지금 한 겨레,한살림 박재일,이원재 경기대학교 교수 하다가 인제 정년퇴임 했고 이원재,최동전,또 최혜성, 김각 그깐(그러니까)사대,어 인제 그러고 그 다음에 민비연 쪽으로,(잠시 생각에 잠김)그 민비연 쪽으로,그 이렇게 하면서 좀 했던 사람들이 인제 김중태,현승일,김도현 이 사람들은 초기에 좀하고 나중에 뭐 어느 정도 했지만 좌우간 그 제반 모의와,뭐 인제 또 다시 일 꾸미고 전부 한 거로는 아까 얘기한 이 사람들이에요.다 이 사람들. 면담자 : 새세대 야간파 구술자 :예,그러고 다 한 거죠.그 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하고 그 사람들이 주로모여 있는 것,전부 그 랬어요.때로는 우리가 필요하면,그 사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해 현승일이 갖다 붙여보자,앞에 세우고 때로는 그걸로 하고 저 이렇게 그래서 민비연 에서부터 시작이 됐고, 민비연 에서도 민비연 그 창립자들,그는 박범진,김경재,뭐 이 사람들인데 그쪽이 아니라 민비연 (민족주의 비교연구회)그 그 어떤 뭐랄까 실세들,경북고등학교 출신의 2,3학년,서울대학교 3학년,4학년,3학년,4학년,요쪽들 이 제기를 해 놓고 그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가 얘기한 뭐 저 저 어 야간 새 세대 파라고 하는 사람에 박재일이나 이원재나 이런 사람 경북고등학교 출신이고,최동전 이나 이런 사 람들은 경주고등,아 대구 계륜고등학교(계성고등학교)출신이고,거의 인제 그렇거든요.그래서 그쪽 이어받았어요.그렇고 그쪽에 이어받는 데서 내가 인제 그 하도 어떤 위,아래 사람들한테 저항 안 받 고,그 내가 그 앞에 나서서 할 수도 있고 또 뭐 할 수 있었던 게 그런 배경이죠(고개를 끄덕이며). 면담자 :그러면 수배,수배 되신 거는? 구술자 :바로 수배됐죠.그러니까 음.6월 3일 날 이렇게 하고,그 다음에 6월.하여튼 뭐 6월.4일이 나 5일쯤 됐을 거예요.인제 바로 수배명단을 인제 그 계엄사령부에서 발표를 했어요. 면담자 :선생님은 그 이전부터 경찰 쪽에서 주목은 하고? 구술자 :당연하죠.당연,당연하고(강하게 긍정함).

22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19) 면담자 :6 3으로 인해서? 구술자 :예,예,그러고 인제 그래가지고 인제 나뿐아니라 여러 사람이 인제 그거에 대한 내가 봤을 때 잘못된 것도 있고 뭐 그렇지만,하여튼 이렇게 수배를 했죠.지명수배를 했는데 지명수배를 하면서 어 떤 식으로 했느냐면,근까(그러니까)6월.25일인가 까지 학교에 에 학교로 근까(그러니까)수사계통이 아니라 학교로 자진 학교로 등교하지 않으면 제적시킨다.이래 된 거예요.(침묵)해서 음 인제 그래가 지고 많은 사람들이 제적 됐죠.그러고 일부 붙잡혀 들어가 버리고,왜냐면 그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 또는 어디 일부는 집에서 붙잡혔어요.누가 이제 지명수배 미리 인제 이렇게 해 놨으니까,나도 그날 집에 들어갔으면 집에서 붙잡히죠.근데 인제 하여튼 그렇게 붙잡혀서 많이 인제 들어갔어요.가령 동 국대학의 장장순이나 박동인이나 또 뭐 법대의 정성철이나 지금 변호사 잘 하고 있지만 정성철이나 또 저 나중에 삼성건설 사장했던 그 김헌출이나,뭐 뭐 최우근이 많이 붙잡혀 갔죠.그러다가 붙잡혀 가고 이원재나 최동전이나 뭐 저 이런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이원재씨 같은 경우는 가서 머슴 했잖아.머슴. 면담자 :어디 가서 머슴을? 구술자 :저 밀양 어디 가서 머슴 했다고,안 잽히고,(웃음)그리고 나는 그때 인제 대학교 2학년 때이니 까.고등학교 졸업한지가 얼마 안됐으니까.내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다녔다고,나중에 이철이가(이 철)인제 그 수배 받았을 때 내 얘길 듣고 인제 글을 썼지.그러다가 난 전혀 안 잽히고(잡히고),안 잽히는(잡히는)정도가 아니에요.그래서 왜냐면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난 들어가서 장장순이니 박동인 이니,그 뭐 전부 가서 면회를 했어요.(호탕하게 웃음)그러다 인제 그러고서 인제 제적이 됐죠.제적 이 되고 다들 제적이 됐죠. 구술자 :제적이 됐는데 인제 어 당시에 인제 우리 이모부가 검사였어요.그러니까 인제 그러니까 인제 검사니까 인제 아 이거 제적되고 지명 수배됐으니까,왜냐면 얘를 자진 출두시켜야 되나,어떡하냐.그 러고 인제 그 이 수사기관에 물은 모양이에요.그러니까 군대 보내면은 아무소리 안 하겠다.그래서 너 군대 갈래.또 이 사람들 와서 뭐 끌려가고 뭐 이렇게 저렇게 할래.그래서 나 군대 가겠다고 그래서 군대를 간 거죠. 면담자 :64년에? 구술자 :64년 9월에. 면담자 :9월에? 구술자 :입대를 했어요. 면담자 :그 전까지는 계속 인제 이렇게 숨어 다녀? 구술자 :도피생활,도피생활 하는데 그렇게 변장하고 다니니까(웃으면서),뭐 하는 것도 없이 내가 면회 까지 갔대니까.다른 사람 신분증 가지고.(웃음) 면담자 :군에 입대하셔가지고는 뭐 별 문제가 없으셨는가요? 구술자 :음 논산훈련소에서는 인제 몇 차례 인제 날 불러서 조사를 하고 그랬어요.그런데 엄.일단,일 단 그 저기 뭐야 서울에서의 문제는 끝난 거니까 끝났고,그 다음에 인제 군에서 내가 뭐 어디든 뭘 한다든지 하면 몰라도,아무 나 연고도 없고 뭐 아무 친구도 아무것도 없이 나 혼자 입대 했거든요.나 혼자 그냥 입대를 해보니까 인제 보니까 그냥 내버려 두더라고요.그래서 군 생활 그냥 잘하고 만기제

226 22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대하고 그러고서 1964년 9월.에 입대를 해 가지고 1967년 4월 1일 날 제댄데.이제 물론 물론 인제 그 것도 (미소를 띠며)행인지 불행인지 내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인제 그 논산훈련소에 갔는데 논산훈련소 에서 내 나를 어디로 보냈냐면 부관학교 로 보내더라고요.부관학교라는 거 아세요?(면담자를 응시하 며)행정 보는 거,옛날에 저 영천,반포,그 저 대구 옆에 반포에 그 학교가 있었어요.헌병학교,부관 학교,행정 저 저 경리학교,그 다음에 정보학교,네 개 학교가 있었거든요.부관학교로 보내더라고요. 한 거기서,한 기가 한 200명 가까이 되요.한 기가,하여튼 거기로 갔어요.부관학교에서 인제 그 매준 가 8주,12주였나.12주 교육받았나.매주 시험을 치더라고요.시험을 그래갔고 또 거기서 3등 안에 드 는 사람은 충지 중에서 지가 골라 갈 수 있어요.다행히 어떻게 보여 가지고 나는 인제 서울도 지겹고 다 지겨워서 제주도 지국경비다 가겠다.그랬더니 지국경비대가 해체됐더라고요.그러고 없어서 서울로 가겠다.그래서 육군본부로 갔죠.육군본부라서 원효관리국에 근무를 했는데 원효관리감실에 근무했는 데,육군본부는 참 다른 거는 몰라도 참 좋은 게,어 내가 일선서도 근무 해 봤는데 전방도 전방은 외 출을 나가거나 외박 나가는 것이 굉장히 조금 인제 허락을 받아야 되지만 육군본부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어요.애들 말에 의하면 쌀 절약하기 위해서 그런다는 전부 다 다 보내요.그냥 토요일이면 다 다 외출 외박 다 시켜 다 내보내거든요.일요일 저녁에 들어오게.그러니까 인제 내가 가면 어디가요. 맨 날 문리대 와서,인제 그 또 인제 (웃으며)어울려가지고 그 당시는 인제 그러니까 65년이 됐거든 요.6.4년인지,그런데 그 65년이 되던 65년은 인제 뭘 했냐하면 이미 인제 그 저 상호간 국가 간의 조약을 했어요.그 뒤 비준 그래서 비준반대,65년에 비준반대운동이 6 3운동보다 더 더 더 많은 사람 은 동원되고 어 치열함은 조금 덜 했던 것 같지만,하여튼 더 많은 사람들이 동원 됐어요.그때 서울대 학교에서 그 비준반대운동을 어 적극적으로 그 인제 이 그 그런 대로 그 저 이 여러 가지로 저 사주하 고 한다할까,뭐 설득하고 하던 게 김지하,김정남,그 사람들은 서울대학교 뿐 아니라,전 대학을 상대 로 해서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김지하,김정남에 의해서 65년 비준반대운동이 있었다 해도 할 정도로. 그러고,그러고 인제 문리대에서 인제 그 밑에 (의자에 기대며 잠시 생각 함)인제 비준반대운동에 열 심히 쫓아다닌 것이 인제 그 저 저 뭐 한일상이니 지금 현재 저 경제특 저 언론특보하고 있는 이성준 이니 인제,인제 얘들이 인제 저학년이었으니까.얘들이 학번이 64학번이었으니까 그때 2학년이니까 얘 들이 인제 행동도 맡고 그 다음 제일 일선 심부름은 그 당시에 인제1학년이었든 손학규 이런 애들 맡 았었죠.그니 비준반대였고 그러고 인제 그 김정남,김지하,이 사람들이 저 모여가지고 이대에서는 이 화대학에서는 진민자,어 신인령,총장 했던 신인령,그 사람들이 가장 활발하게 하고 또 중앙대학에서 는 이재오,뭐 얘들은 활발하게 하고 그 다음에 연세대학교에서는 이영철,지금 저 미국에 있는 이영 철,이 사람이 활발하게 하고 고려대학교에서는 박정훈,박정훈 뭐 이 사람들이 활발하게 했죠. 면담자 :그런데 어떻게 군에 계실 땐데 다 기억을 하시? 구술자 :알죠.난 백날 와서 거기 사니까(손을 뻗어 강조 함)인제 그 알고 그러죠.근데 인제 그 왜 그 러냐하면 어떤 때는 콩나라,팥나라도 하고,왜 그러냐하면 그 어 그 당시는 그 데모꾼들이 토요일,일 요일도,일요일 집에도 못 있어요.좀이 쑤셔서 그니까(그러니까)학교로 온단 말이에요.학교로 오면은 인제 이 당시에는 소주가 그렇게 많이 할 때는 아니에요.소주가 맛도 없고 소주를 먹을 때도 있고 대 부분 많이 막걸리를 마시거든요.그러면 인제 그 당시 어 내가 아 64년 이때는 그 그 명륜 시장 들어

22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21) 가는 앞에 그 쌍과부집 그리고 아까 얘기한 그 우리 저 5.20민족주의민주주의 장례 그 논의 하던 배 때기집 이런 데를 가고 그랬는데,65년도에 내가 인제 군대에서,군대에서 그 외출 받아오니까 오니까, 그 빠라크라고 생겼더라고요.빠라크라는 술집이 그 혹시 기억할려는지 몰라요.저기 관악에서 입학했 죠(면담자에게 질문)?그니까(그러니까)동숭동은 모르지 전혀.동숭동은 이렇게 지금은 거의 다 부서서 새로 맨들.(손으로 장소,건물 위치를 설명)이렇게 인제 문리대가 있고,그러고 이렇게 해서 이 이화 동 이화장,낙산 쪽 올라가는 길 있단 말이에요.고 옆으로가 공업연구소 예요.지금 뭐로 됐는지 공업 연구소 바로 밑이 법대고 그리고 그 그 위로도 구름다리로다 이렇게 우리가 구름다리 이렇게 다니게 돼 있는데 공업연구 그리고 옆으로는 강 개천 세느강,이 세느강,그 구정물 세느강,인제 그게 흐르고 그러니까 인제 그러면 세느강 흐르는데다가 문리대 이렇게,그 저기 낙산 올라가는 담벼락으로 이렇게 세느강이 흐른다 말이야.이런 식으로 낙산 올라가고 담벼락으로 요기로다가 여기다가 찰싹 붙여서 빠 라크를 지었어요.조그마한.절룩거리는 사람이.근데 인제 거기는 오로지 뭐 막걸리 소주도 있었는지 모르지,막걸리 파는데 안주가 딱 두 가지야.꽁치대가리하고 저 파 파 삶은 거,파 삶아서 요렇게 요 렇게 저 이쁘게 맨들어(만들어)논거,근데 인제 거기를 김지하,김정남,뭐 할 것 없이 전부 고기서 앉 을 자리도 별로 없어.요렇게,요렇게,바 같이 요렇게 고기서 복작 거리고 인제 거기서 안 되면 문리 대 교정으로 가고 *군대있을 때 오니까 그렇더라고,인제 거기가 많이 집합서더라고,근까(그러니까) 인제 또 모여서 뭐 아니면 집으로 들도 다니고,뭐 이래가지고 알죠.그러고 어 법대에서는 그때 이영 희,지금 노동부 장관 그 다음에 에 정성철 변호사,나 때문에 감옥 갔다 와서 그때 그날 적극적으로 안 했지만 그래도 했고,그 다음에 이협이,이협이 그리고 어 그러고 맨 밑으로는 법대에서 조영래,조 영래 변호사,인제 이 사람들이 일했지.왜냐면 조영래나 손학규가 동긴데 다 1학년이었거든요.그 당 시에 근데 왜 또 조영래나 손학규가 그렇게 일찍 1학년인데도 끼어들었느냐.어 6 3때 그 한일굴욕 외교 반대 데모에 참여했던 고등학교가 경기고등학교,광주일고 두개뿐이 없어요.그래서 경기고등학교 때 그거를 조영래,손학규,신동수란 놈이 있어요.이 세 놈이 기획하고 했었다고요.끌고 나왔거든요. 그니까(그러니까)바로 걔들이 인제 연장선상이니까.그래가지고 그러고 보면은 자식들 공부 잘했어. 고3때 데모하고 염병하면서 한 놈은 서울법대가고 한 놈은 문리대 정치학과 가고 그랬으면 잘했어 공 부들 하여튼. Tape4. 면담자 :그럼 제대하실 때가지 계속 서울에 계셨? 구술자 :아뇨,음 (잠시 침묵)근 뭐 그러니 뭐 그 군대생활 좀 그러니까 역마살이 끼었어.내가 감옥을 여러 번 살았거든.그리고 군대도 그렇게 되더라고,역마살이 끼니까 육군본부에 와서 있었는데,내가 육군본부에 2년인가 2년,1년 반,1년 반쯤 있었는데,인제 그 이 대전 병참 학교로 인제 그 전출을 시 키더라고,왜 그러냐하면 육군본부에 인제 그 장성들 백으로 이렇게 이 여러 병과 보병였던 뭐였던 많 은 사람들이 사실은 내가 그 MI *709,부관학교로 709내지 700들이 근무하게 돼 있어요.그거는 인 제 무엇보다 이렇게 많이 와요.오며는 나중에 추려서 너무 인원이 (손으로 상황을 표현)많아지니까

228 22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추려서 육군,육군 직할부대로 내려 보내야 되요.나는 인제 백도 돈도 없이 그냥 왔으니까,이거는 뭐 그 보내더라고요.인제 그랬죠.대전 육군 직할부대 병참학교로 갔다가 또 웃기는 거죠.저 병참학교에 서 요새는 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그러더라고요.옛날에는 인제 육군 부감실,장교 기록계에서 그거에 대해서 인제 여러 가지 준비 자료를 해서 인사과로 넘기면 그 인사과에서 장교를,인사를 심사하는 결 정하는,그런데 인제 군인들은 그 고과표가 있어요.1년에 한 번씩 그 상급관이 하는 게 있고 또 누가 있어.그렇게 고과표에 가서 동그라미만 치면은 그거를 갖고 와서 점수화 계량화해야 되요.그런데 그 게 그 전 군의 장교가 몇 만 명이니까.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그러고 그 다음에 그거를 점수화하 고 그 다음에 이렇게 다 캐비넷이 있어요.캐비넷에 이렇게 보면 가령 군사 *학교 2기,그러면 고기 에 이렇게 캐비넷에 보면 박정희 누구누구 이렇게 있어요.그 사람 인제 파일이 있어요.파일 딱 꺼내 면 박정희가 상받은 거,벌 받은 거,뭐 어디서 어디로 전출가고 어떻고 어쩌고 한 거,하여튼 모든 것 이 다,고 자료는 다 있어요.그 자료를 뽑아서 뭐뭐뭐 첨부시켜서 카피(복사)를 떠서 첨부해서 인사참 모부에 보내야 되요.그러니까 인제 그게 많은데 1년에 한번 있으니까,8월쯤에 시작해서 12월에 인사 결정을 하니까,장군인사가 12월에 결정되니까,고 이전에 결정되나.7월 이때쯤부터 해요.그러면 인제 사람이 부족하니까,또 예 예하 직할부대에 인제 그 709부관학교 출신들을 차출을 보내라.(웃음)그 래서 또 인제 부관감실로 차출 돼서 왔어요.내려간 지 한 6개월 만인가,3개월 만인가,뭐 하여튼 또 차출 돼서 왔어요.그래서 인제 그냥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내가 뭐 굳이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 랬는데,장교가 햐 이 자네 참 그 여러 가지 아주 재빠르게 일 잘한다고 부관감실에 그냥 있지 않겠 냐고. 그러니 뭐 대전까지 가고 싶지도 않고 그러라고 또 서울에 있으니 그래서 서울로 다시 왔지.이 번엔 원효관리국,원효관리국이라는 거 뭐하는 거냐 하면 장교의 복지시설 그러고 PX 관리,그랬는데 그니까(그러니까)인제 부관감실로 왔다가,인제 가끔 그 원효관리감실로 갈 거 아니에요.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착해서 원효관리감실 행정실장이 소령인데,이 사람이 나를 뽑아서 거기 보냈는데 이게 눈앞에 안 나타나야 되는데 이게 나타나니 괴롭단 말이야.(웃음)그래서 나한테 인제 파월 원효근무부대라고,인제 우리 때 월남 갔거든요.파월 원효근무부대 거기를 가자고 자기가 부대장 이라고 자기가 날 책임진다고,그러면 파월 원효근무부대가 뭐하느냐 하면 세 파트이에요. PX 관리, 근까(그러니까)미군한테서 물자를 받아서 한국군 주둔군 PX에 물자를 날라 주는 거 수송하거나,그 다음에 또 하나는 저기 휴양소 바낭 (베트남 지역이름)뭐 이런데 우리 휴양소가 있어요.그거 관리하 는 거 참 별장지기 참 편하죠.그 다음에 또 한 개는 뭐냐면 연회반,그니까(그러니까)여기서 무슨 이 미자가 위문 오면은,걔를 이미자가 위문 온다고 하면 그거를 갖고 짜는 거예요.어디어디로 어떻게 보 내야 되나.걔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거죠.그거 세 개 하는 거예요 상당히 좀 좀 군인 같지 않은 짓 이죠 외국경험도 해볼 겸 한번 가볼까 나보고 뭐라고 몇 대일 됐어요.해보라고 가자고 같이 했죠.했 는데 암만 해도 불편해,암만해도 불편해,남의 나라 솔직하게 해방전쟁 하는데 내가 구경 가겠다고 거 기를 가야,가야 되나 말이야.이건 뭐 도무지 양심상 안 되더라고요.그래서 저 횡성 가서 특수부대 특수교육 받거든요.그 파월 저 특수부대기 때문에 근데 교육 다 받고 끝나는 날 끝나기 전에 내가 그 우리 부대장들 모두 다 바뀌었어요.왜냐 그러면 그 자리가 노른자위에요.노른자위 주월 사령관 메겨 사귀는 노른자위,그래서 막 밀고 들어온다고요.부대장은 대령인데 내가 있는 동안 3번 바뀌고,대장

22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23) 은 우리 저 소령인데 2번 바뀌고,멋대가리도 없고 더럽고 치사하고 그리고 장교,장교 3명에 사병 한 명 꼴이에요.이렇게 돼 있어요.부대편성이.그리고 하이고 남의 나라 해방전쟁 하는데 뭐 하러 가냐. 그래가 야맹이 심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인제 그래가지고 저기 오미 그 또 파월부대 인제 그 집결소로 거기로 갔다.거기서 7사단으로 가서 7사단에 마침 헌병중대 서무자리가 비어서 7사단 헌병중대 서무 로 한 1년,1년 정도 했나,많이 돌아 다녔죠.(웃음) 면담자 :진짜 군대를 여러 군데 갔었어.? 구술자 :예,예 근까 전방 7사단 화천이거든요.전방 파월 부대,뭐 대전 뭐 병참부대,후방 뭐 육본 다 다녀 봐가지고,뭐 군대 얘기 나오면 신바람 나죠.(웃음) 면담자 :그러면 67년 4월 1일 날 제대를 하시고 바로 복학을 하셨는가요? 구술자 :예,바로 복학을 했죠.근데 인제 4월 1일 날 내가 복학을 했는데 인제. 면담자 :그때는 학기가 몇 월 달에 시작? 구술자 :4월서. 면담자 :4월에 학기가 시작? 구술자 :4월에 시작했어요.그래가지고 복학을 했는데,그 해 6월에 인제 그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 어요.그런데 그 아주 그 뭐 4월서부터도 뭐 그 선거 조작하느라고 뭐 야단났었거든요.그래서 어야튼 부정 여러 가지 부정선거를 하고 그래서 이미 선거를 하기도 전에 이 선거를 원초적으로 부정하고 반 대데모를 하자 해가지고,인제 그 데모 모의를 했어요.처음에 누가 했느냐 하면 어 죽은 조영래,손학 규,그 다음 지금 서울대 저 김세균교수,인제 얘들이 인제 했어요.그래놓고는 그래서 데모를 하기로 하고 지들끼리 인제 그 데모를 하자,이래놓고 인제 이걸 모였는데 인제 이 아무개가 7월 4월(4월7일) 에 제대해서 돌아 왔다니까 이 아무개를 갖다 대빵(리더)으로 세우자.그래서 인제 나한테 왔더라고요. 4월에 데모(제대)해가,저 복학해가지고 5월에,5월인가,5월 중순 되니까 나보고 인제 하겠다고 그러 고 인제 뭐 하라고 하자 나보고 맡으라고 그렇게 한 거죠 그래가지고 음 6.8부정선거 규탄 음 서울대 학교 위원장을 맡고 어 그때 인제 조영래가 전체 부위원장겸 법대 위원장,김근태가 상대 위원장겸 전 체 부위원장급 하고 손학규가 부위원장급 하고,뭐 해가지고 그렇고 여러 애들 하고 해가지고 어 데모 를 하는데 그게 인제 우린 하도 인제 데모를 내가 군대에 있을 때도 나와 보고 그랬으니까,하도 많이 봐서 자 우리가 이번에는 쟤들이 명분도 약하다.그러니까 데모를 시작하자마자 아 계엄령이나 위수령 을 필거다 위수령을 필거다.이번에는 그러면 인제 그때 역시 군인 진주하는 거니까,그러니까 군 학교 를 못 들어가고 그럼 이 연속될 수 가 없다.운동을 계속을 못 한다.그러니까 모든 걸 짜고 하자.그 래가지고 6월,6월 8일 날 선거가 끝나면,개표가 끝나는 6월 11일,그때쯤 데모를 하기로 했어요.그래 서 그 안에 전부 이렇게 손발을 마쳐놓고 위수령이 발표되면은 어디로 1차 집결지,어디 2차 집결지 어디,막 각 대학하고서 그때 거의 이 하여튼 서울시내에서 연대,고대,성균관대학,건국대학,경희대 학,건국대학,그리고 우리 서울대학까지 해서 7개 대학이 전부 행동통일을 하기로 했거든요.그런데 이게 그 6월 8일 날,인제 선거 끝나고 개표도 되기 전에,개표도 되기 전에 선거중인데 법대 애들이 우루룩 데모를 나왔어요.그 왜 어떻게 된 거냐.나중에 영래 얘기로는 막 어 이런 선거 있을 수 없다. 자발적으로들 전부 나오는데 거기서 야 이거 다 다 다 다른 학교하고 짬 했으니까 나가지마 하고 손

230 22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벌릴 수야 없잖느냐 이거예요.그러니 그냥 나왔다 이거예요.그래서 법대만 혼자 나오고 전 위수령이 나와 가지고 전체가 다 막혀버렸잖아요.그래서 내가 인제 그 이제 위수령이 전에 얘기했던 위수령이 일단 되면은 서울대학교는 어디로 모여라.그래가 인제 내가 어디로 모여라 그랬냐면 음대로 모여라 그랬다고.음대는 그 당시에 을지로 6가에 있었거든,그리고 거긴 무풍지대거든 그래서 그때 인제 저 공대 애들이 많이 모였어.서울대 각 대학들 인제 공대 애들 많이,문리대 애들하고 거기서 한바탕하고 그 다음에 인제 다시 그 다음 다음 날인가 정해서 이 일곱 개 대학이 전부 같이 하기로 했어요. *그 래서 이 고(고대),연대는 저기 중앙우체국 앞 우리는 경남극장 이라고 아는지 모르겠어요.요기 저 저 기 저 저 어디야.저 그 이 저기 하여튼 저 그 조선호텔 건너편 요 근처에 경남극장 있잖아요.그 경남 극장 앞에 서울대,그리고 고대는 시공관,시공관 앞에,건대는 명동공원,거기서 전부 그날 몇 시까지 탁 모이기로 했는데 이 인제 각자 사정 때문에 다 맥히고(막히고)우리는 정시에 갔어.서울대학교는. 근데 고대,연대,아무데도 못 오고 그래가지고 각개격파 당하고 그러고서는 인제 못했지.그래갖고 6 8데모고 그 뒤는 더 못했죠.6 8데모고 그러고는 나만,나만 붙잽혀 갔고 인제 죽도록 맞았지.고 대,연대를 뭐 했는데 워낙 지들이 명분이 없어서 이거를 확대시키지 못한 거야.그러니 나를 붙잡아다 놓고,인제 저쪽하고 연관이 되는 거.그래서 그때 그 그때 그 박성준씨,지금 한명숙 총리 남편 저 통 혁당 이렇게 됐었는데 그 사람 그때 상대였거든,나하고 같은 때 다녔거든, 박성준이하고 너하고 친 하지 않느냐. 그래가지고 참 많이 맞았네.그 참 그러고 거기서 몰면 그쪽으로 삐그듬해요.그쪽으로 모는 거지 나중에 인제 워낙 잘 버틸 수 있는 게,뭐 암만 뭐라 해도 모르니까 서로 모르니까,이거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지.그러고는 그 뒤 막 억지 부리더라고,억지 뭐 데모하는데 낯모르는 사람이 와서 수건에 싼 걸 건네줘서 보니까,뭐 돈이 얼마 있더라.그걸 쓰고 받아쓰고 도장 찍으라는 거야.아 새 끼들 참. 면담자 :연행된 건,그때가 처음이신,연행되신 건 그때가 처음이셨던? 구술자 :아뇨,그전에 (침묵)군대가기 전에 잠깐 들어갔었죠.들어가고. 면담자 :6 3전인가요? 구술자 :아니 6 3. 면담자 :6 3으로? 구술자 :하여튼,인제 그 그때는 뭐 그냥 가 가지고 이렇게 확인만 하고 말았으니까.너 군대 갈거냐,안 갈거냐.그래서 간다고.그래서 연행당한 건 그때가 처음이죠. 면담자 :그럼 불꽃회사건 이나 인혁당사건 (인민혁명당사건)은 군에 계실 때? 구술자 :아니요 불꽃회사건, 인혁당사건 은 어 불꽃회사건 이요.64년,64년,아마 8월경일거예요.그리 고 인혁당 도 거의 곧 뒤따라서, 불꽃회사건 이 7월,7월,7월쯤이고 인혁 (인혁당사건)이 8월쯤이에요. 하여튼 금방이었어요. 면담자 :두 사건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게? 구수라 :하.그 인혁당 이라는 경우,나중에 그 전부 무죄 되고,뭐 또 뭐 이래가지고 뭐 뭐 했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것 밖에는,나는 사람들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고 하나도 몰라요. 인혁당 에 관해서는 불꽃회 에 대해서는 김정강이라는 사람을 학교 때 알았으니까요.어 나 그까(그러니까)이 당시에 그

23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25) 문리대내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에 하나였어요.김정강이가.그까(그러니까)6 3전에 그래서 거 의 공공연하게 자기는 막시스트고,레니스트라고 자임하고,또 한국의 그 당시에 경제사회적 단계를 어 이 반 어 반 자본식민주의로 이렇게 규정하고 앞으로 더 식민화가 진행될수록 노동자가 더 많이 양상 되고,따라서 이들이 사회의 중심이 된다.이래서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해야 된다.사회주의 정권을 세워야 된다.이런 생각을 하고 학교에서 학생 노동자들은 뭐냐.알바이트생이다.그래서 알바이트 연 합횐가 뭔가 김정강이가 주도해서 만들었어요.그때에 (웃음)그 난 알바이트 한 거니까 거기 들어가 서,인제 역시 조직이라는 건 좋아요.가령 내가 술 먹고 게으름 부려서 내가 내 쫓겼잖아요.그래도 얼마,얼마 일했으니까 줘야 된다.난 낯짝 없어 못가거든요.우리가 가서 받아 올 테니까 주십시오.그 러면 여기 뭐 서울대학교,뭐 근로학생회입니다.근로학생회야 이름이 근로학생입니다.딱 그러면 다 줘요.(웃음)근데 그걸 김정강이가 조직했어요.(웃음)그렇게 그 자기 나름대로 이론도 있고 이론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활동을 했어요.알죠,아는데 나중에 인제 이래저래 뭐 했다고 했는데 일기장에다 가 뭐 어떤,어떤 식으로 하고 또 누구누구를 포섭해야 되겠다,그러는데 음 그거는 확실해요.그거는 확실해요.지가 쓴 거 맞아요.맞고 또 그런 구상을 한 것도 맞고,다만 이것이 자기구상만 이었나,또 실제로 일했느냐.요거는,요거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앞으로 시간이 해결 해 주겠지.근 어디 가봐야 돼요.그 건으로 김승균씨,뭐 이런 사람들이 들어갔었거든요.근데 인제 그 뭐 어떻게 됐는지 난 그거 는 잘 모르겠어요.하여튼 그러고 김정강씨가 그랬나 하면은 서정복씨는 나중에 정보부에 끌려가서 고 문 받고는 사람이 정신이 좀 이상해졌죠.근데 서정복씨는 대신 인제 여기를 반 봉건사회(봉건식민사 회)로 규정을 하고 그 그 이 아직도 어 자본주의화가 덜 됐다.그리고 아직도 엄연히 여러 가지적 그 사회적인 어떤 정서나 이런 것이 농민공동체 정서가 남아있고 이렇기 때문에 농민을 위주로 해서 그 지역,지방부터 해가지고 대도시로 풀어야 한다.모택동 전법 에 의해서 그렇게 해야 된다 해가지고, 그 사람은 그 농촌,농촌 계몽,농촌 뭐 였더라.농촌 뭐 그니까(그러니까)지금 현재 학생들이 농활, 농활 하는 건데 농촌 뭐 였든가,해가지고 그거 출정식 나가 나가는 전날 같은 밤 이면은 그 문리대 어떤 그 본부지,교정에 초원 굿을 하고 뭐 굿 같은걸 하고 요란했어요.근까(그러니까)그리고 또 뭐 그 사람 얘기는 그 사람 공공연하게 자기는 마오이론 지지하고 다니고 인제 문리대가 그랬었더라고, 그러니 김정강씨 하고도 알죠.아는데 음. 면담자 :문리대 들어오고 나서 만난? 구술자 :아,물론 문리대 와서 만났죠.와서 만났는데.음. 면담자 :개인적으로도 친분관계가 좀 있었는지? 구술자 :까맣게 선배니까.그 당시에는 뭐했죠.근데 나중에 보니까 저기 돈키호테 비슷하더라고요.그래 서 그때 그렇지 않았나 그러니 나하고 이 사람이 참 우연찮게 문리대 이후로 우연찮게 두 번인가 두 번인가 이렇게 조우를 했어요.만났는데 아주 우연찮게 공화당 그 당시 공화당 그 무슨 사무실에서 만 났는데 인제 이 내가 해외를 나가는데 해외를 나가는데 그 그 3급이상 공무원 세 명인가,두 명인가 이상,두 명인가 이상,세 명이다,세 명이다,세 명이상의 보증을 얻거나 뭘 또 어떻게 해야 되고 국회 의원 뭐 몇 명이상의 보증해야 되는데,그것도 야당 국회의원으로 되면은 안되더라고,그 당시에 해외 를 처음 나갈려고 하는데,그래서 그때 인제 내가 보증을 얻으러 갔는데 누가 보증을 해줬냐 하면은

232 22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김정례씨가 해줬어요.보사부장관하는 김정례씨가 자기 밑에 국장하나를 또 시켰어요.그리고 또 다른 국장을 하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안 했어요.이 사람이 아무리 장관 말씀이라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을 어떻게 보증하느냐고,그래서 한 사람을 더 해야 돼서 그 누구야 최 그 최틀러라고 하는 사람 조선 일보 있고 나중에 당,최병렬이 최병렬이가 그때 공화당 전국구의원인가 뭐 그랬어요.그러니까 최병렬 씨한테 가서 받아라고 그러더라고,그러면서 자기가 전화해 주겠다고,난 최병렬이 모르거든요.전화해 줬어요.최병렬씨를 만났는데요.마침 최병렬씨 방에 김영작씨도 와 있더라고요.그 당시에 국회의원인 김영작이는 나하고 광주에서 감옥을 같이 살았거든요.그래서 감옥에서 알거든요.그 사람이 뭐 담당이 었냐 하면 책 담당했어요.출력해가지고 그니 김영작씨 알아요.자기가 나한테,자기 동경대학 그 박사 논문도 나줘서 보고 잘 아는데,하여튼 거기 김영작 있더라고요. 영작이 형 웬일이냐고. 아 인제 그 때 국회의원이었거든요.그러고 김영작이가 사표를 내나,안 내나 발언을 너무 강하게 해가지고 그랬는 데 인제 최병렬씨가 사인을 해주더라고요.보증을 해주더라고요.그래서 인제 셋 다됐고 그랬는데 영작 이형이 내방에 가자고 오랜만이라고. 그 또 그 방에 가니까 김정강씨가 있더라고요.근데 인제 보니 까 어 인제 뭐 그 김영작이 보고 난 참 달갑지 않았거든,그 저 뭐야 공화당 공화당이야 뭐야 그 누구 야 누구지,전두환이,전두환이,아니 할 일 이 없어 전두환이 똘마니 하고 앉았는데 안 되면 저기 저 밀항이라도 해서 일본 가서 귀 저 뭐야,그 저 뭐야 귀화 신청하고서 그 저 거기서 교수나 하든지 뭐 나 해먹지 동경대학에서 학교 뭐니까,그런데 지가 빨갱이 했으면서 뭐 빨갱이 뭐라고 막 그냥 비난을 하고 그래가지고 내가 들어도 참 너무 심하게 했더라고.그 인제 고만 두나 안두난데 그날 김정강이가 그냥 열을 올리면서 그만 둬서는 안 된다는 거죠.근데 논지는 그 사람들이 4 19때 거든 요.4 19, 4 19세대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있어야 된데.그런 치사한 얘기가 어딨어.그래서 참 그 그렇구 나.그 뒤 또 인제 함 만났는데,그 뒤 만났는데 우연히 또 만났는데,이번엔 또 김.영삼씨를 돕는다 고 그러더라고.그러면서 그래서 저 그때 김영삼씨,김대중씨에 대해서 내가 한꺼번에 비난을 했거든 요.그 그 단일화를 유지 못한다는 건 죄인이다.김정강씨는 또 그러더라고 아 뭐 자유주의하에서 그 자기 자기가 필요하면 자기가 나오는 거 아니냐. 그러니 그때 내가 김정강씨한테 그랬어요.오늘의 김 영삼씨나 김대중씨가 완전히 어느 정도 지금 몇 세대 지나서 자유롭게 자기들 얘기를 하거나 또 정치 적 기반이 그렇게 될 수 있는,심지어는 어떤 정책이나 이념에 대해서 되는 게 아니다.오늘의 김대중 이나 김영삼은 우리들의 무한한 희생을 위해서 이룬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이다.따라서 이걸 완성시 켜야 되는 의무가 있는 거다.개 쥐뿔도,지들 대통령하라고 우리가 한 게 아니다.따라서 지들 합해서 이걸 합하고 민주화 운동만이라도 좀 세력을 단일화 시키고,그것을 완성시켜야 되는 것은 명령이다. 무슨 잡소리냐 그래요.그러니까 김정강씨가 내 얘기 옳다고 그러더라고요.그리고 또 그래가지고 그 또 전두환 얘기,김영작이 보고 전두환이 얘기 전두환이를 옹호하고 그러니까 김정강이 전두환쪽으로 옹호하더라고요.그 논리가,논리가 뭐냐면 현실론을 갖고 얘길 하는데 마오의 모순론이나 실천론 같은 걸 갖고 얘기하더라고,마오의 모순론이나 실천론을 그런데 팔아먹으라고 만든 게 아니거든요.그 이 사람이 이게 이게 이게 한 때 문리대에서,그 전체의 어떤 사상.을 참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하던 사 람인가 아니면 이게 그때 그때 막 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돈키호테도 되지 못하는 이게 무슨 뭐 저 좀 저능안가 난 그렇게 봐요.이상한 사람으로,그러니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 어떤 엉뚱한

23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27) 짓을 해가지고 남한테 까지 피해를 줬을 거다.이런 거지.불꽃회 사건 해서 그 당시에. 면담자 :혹시 폭발물 만들고 하는 이런 거는 얘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구술자 :그거는 그 뒤에 그 65년도 할 때에 그때 인제들 했데요.나는 인제 군대 있을 땐데,그래갔고 해서 몰로토프,몰로토프칵테일 문제 뭐 해가지고 하고 또 그것을 몰로토프칵테일 이니 그 문제들을 언제 모였냐면 그 박정희 정권이 6.6년인가 아 66년인가,66년인가,하여튼 민비연 사건 해가지고 그 걸 갖다가 학생운동을 그러니까 민청학련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같은 인혁당 (인민혁명당)에다 몰아 넣고,뭐 하듯이 또 이 저 민비연 을 같다가 동백림 사건 에다 끌어넣어 가지고 묶어 널려고 하면서, 그때,그때,65년 데모 때 인제 뭐 한 얘기들 그 속에서 그게 나오는 거예요.난 전 알지도 못하고. 면담자 :그러면 돌이켜 보실 때 그 뭐 6 3이 어쨌거나 가장 그 기본적인 슬로건이 한일회담 을 반대한 거였는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한일회담을 반대한? 구술자 :가장 근본적인 거는 그 반파쇼 운동이죠.반파쇼 운동인데 이 반파쇼의 그 이 반파쇼와 소위 민 족이익수호거든요.그래서 인제 우리가 한일회담을 이루어지면 경제적 속국이 된다.그거에 대해서 어 그 당시 제 저 그 제3세계 이론은 제3세계이론으로는 나오질 않았어요.그러나 식민지 이론으로 제국 주의 이론으로 어 소위 제국주의 이론으로 쭈욱 그냥 가령 예를 들면은 어 나 1학년 때 저 제일 많이 읽었던 거 혹시 모르겠는데 김성동씨가 쓴 재벌과 빈곤 뭐 이런 거 재벌은 나날이 커가고 빈곤은 나 날이 빈곤한 저 이렇게 되고,또 인제 뭐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서 분화 커지고 이렇게 되 고,뭐 하여튼 거의 전통적인 맑스주의,사회학적인 이론이죠.김성동(김성두)씨가 인제 쓴 거 같은 거 그런 거,왜냐면 나한테 우리 때 많이 읽었던 것이 어 저 누구야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 같은 거 또 그 때 많이 읽었던 것이.라이트(C.라이트 밀스,1916~1962)누구던가 사람이 썼던 큐바 들어라 양키들 아 이런 것들이고 하니까,소위 제국주의,그니까(그러니까)우리의 안목이라는 것은 그때 그 제국주의 는 실제 되고 있고,무서운 것이고,그리고 우리도 또 우리도,또 일본한테 또 신 산업형태로,직접식민 지였지만 지금은 경제 식민지로 또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그 아주 컸죠.컸고 인제 그 인제 그 그래 서 민족이익을 수호하겠다.이런 거와 반파쇼 운동,반파쇼의 경우에는 그 내용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 를 했잖아요.리더급으로 참여를 했든,그냥 하나의 그 시위 참여자였든,그 참여자들의 경우는 순수하 게 소위 서구적 자.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을 어 희구해서 참여한 사람들도 있고,또는 어떤 형태의 것 이었던,조금 더 조금 더 이쪽으로 갔건,아니면 좀 온건했건,근까(그러니까)전에 얘기한데로 유럽사 회주의 형태에서부터 레닌이즘까지,마오이즘까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다양했으니까.근까(그러 니까)인제 그런 근까(그러니까)인제 약간 사회주의 적인 안목으로 볼려는 사람들,그 사람들이 생각 하는 민주화라는 것은 좀 더 다르거든요.사회개혁 깊이 생각하는데 근까(그러니까)반파쇼 운동,반파 쇼민주화 운동이라는 건 그 내부에 양 두 갈래 다 갖고 있었어요.자유민주주의인 것과 사회주의인 것, 사회주의적인 것은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다른 것들이 나오죠.그래서 그런 문제는 아직도 청산이 안 된 거예요.해결이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어쨌든 좋은 방법으로 해결은 돼야 되는데 그걸 해결 못하고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민주화 운동을 해왔던 거에 의해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해요.역사적 정 통성을 저 그런데 그것이 거기서 부터 그렇게 시작돼요.저번에 된 적도 없고 그러고 저 저 김대중이 나,김영삼이나,노무현이 같은 거는 도대체 정의는 둘째 치고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고,그래가

234 22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지고 인제 그렇죠.그래가지고 그 민족이익수호와 반파 민주화운동이에요.민주화운동이고 민주화운동 에는 약간의 요런 문제가 있어 지금 우리한테도 이런 문제를 가져온다.이런 것이 되겠죠. 면담자 :당시에 이 반파쇼민주화 운동이라고 성격규정을 하시면 결국은 그 규정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규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거죠? 구술자 :예,바로 되는데 인제 에 첫째는,그로 인해 직접 받을 수 있는 물리적 탄압 요것을 좀 회피해 보고 싶었고,그 다음에 두 번째는 그 이 소위 그 저 단계에서 소위 전략론이지.이제 우리가 흔히 저 전략론에 의해서 에스컬레이트 시킬려고 그랬고 그런 생각에서 모였어.그러니까 내가 동국대학교 애 들을 만나서 같이 소주 한잔을 할 때,사실 기본적인 게 반파쇼지.근까(그러니까)이놈 군사정권 없애 는 거지.걔들 얘기가 이거야. 야 염병할 것 내가 한일회담이 뭔지 뭐 어떻게 되는지,거기서 돈이 왔 다 갔다 하는데,그런 게 이익인지 손핸지 어떻게 아냐,그러나 나 죽어라 나와서 데모한다. 그 왜하 냐 그러니까 그 박정희가 하면 안 되니까 그렇지. 이게 일반적인 생각이라고요.그때 그니까(그러니 까)지금 와서 자꾸 중태형조차도 어 뭐 어 저 반 정권적인 경향을 한다.물론 앞에,앞에 내세운 어떤 슬로건이던 구호 같은 거는 없었어요.분명히 없었고,저번에 내가 아까 얘기 핸 데로 범진이 형이 6월 3일 날,당일 날,허겁지겁 뛰어 와 쫓아와서 어 지금 분위기 많이 고조됐다. 하라고 (웃음)그런데 그 내용은 그래요 내용은 아주 명백하게 그랬고,우리가 그냥 속에다 꿍꿍꿍꿍 뭉쳐갖고 있었지. 면담자 :그 당시에 근까(그러니까)학생들 분위기뿐만 말고 전체적으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는 그 대학 생들의 6.3시위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나요? 구술자 :예,지지했죠.그러니까 그 그러니까,어 6 3당일 날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고,또 그 동아 일보를 비롯해서 여러 매체들이 인제 그런 식으로 해오고,뭐 할 때 그러고 그 또 우리가 데모를 이렇 게 나갈 때 같은 경우에는 박수도 치고 물도 떠다 주고,인제 우리 데모 많이 안 나갔지만,근까(그러 니까)인제 처음에 좀 나가고 할 때 그래서 인제 난 많이 지지받았다고 봐요.그리고 인제 여러 가지가 쌓여 있었죠.인제 아까도 얘기한데로 우리가 어려서부터 소위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권 이라든지,이거 에 대한 부패 이런 거에 대해서 어 보다 더 깨끗한 사회 또 민주화 사회,이거에 대한 열망,이런 것이 우리또래 애들한테는 각인 돼 있어요.그리고 그것이 좀 했는데 이 사람이 좀 잘못했던,잘했던,불과 8개월 만에 뒤집어 엎었다는 것,이거 자체는 용납될 수가 없고 또 그런 방법에 의해서 군사정권에 의 해서 사회발전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생각이죠.그게 여기서 문제가 이런 게 있어요.이 당 시에 그러면 어 그 내가 새세대 일면 담당 기자였는데,6 3전에,6 3전에 이 소위 경제개혁문제가 많이 얘기가 나왔어요.인제 개발개혁 완전히 세워지진 않았지만 인제 개혁문제가 나올 때 여하튼 정 부쪽에서 얘기한 것은,소위 그 외자에 의한 성장이론이거든요.아주 쉽게 외자 갖다가 음 그 열매 중 에 일부는 성공하고 일부는 잔존시킬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얘기고,거기에 대해서 그 안병직이나 돌아 가신 박현철선생이나 이런 사람들은 소위 어 내수성장론 이걸 얘기하면서 그거 자체는 소위 그 예속과 빈곤을 극대화 시킬 뿐이다.소위 남아서 잔존시킬 아니 호구조차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잔존가치가 남지 않는다 하는 게 그 사람들의 얘기였거든요.따라서 이쪽에서 소위 내수경제 키 키워야 되고 이런 방향으로 가야 된다.이 그쪽의 얘기가 사회경제적으로 우릴 뒷받침 했어요.많이 그리고 내가 편집도 하고 했던 이 그 새세대 일면에 어 그런 이론이 아주 거의 일면에 63년,63년엔 거의 막 63엔 후반엔,

23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29) 거의 막 몇 차례 쓰일 정도였거든요.그리고 그때 안병직씨가 제일 앞장서서 했는데,그러면 지금 와서 이문제가 돼야 되요.그들 그들의 어떤 사회경제적 이론이 우리 배경,이 운동의 배경이었는데 그러고 인제 무슨 정치적으로라던 지 이런 거는 반파쇼 얘 얘기라는 던지,뭐 이런 것이 우리의 배경인데 그 러면 지금 현재 와서,지금 현재 와서 어찌됐던 외자에 의한 성장이론이라는 것이 표피적으로는 성공 한 거로 나온다 말이에요.그러면 이것이 어떤 성공이냐 그러니까 단순하게 사상누각이냐 아니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성공이냐 이것부터 봐야 되거든요.그런 거,지금현재 와서 사상누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만약에 실패한다 해도 그 뒷사람이 실패지.그 자체가 완전,완전히 그 잘 못 됐다고 보 기가 어렵단 말이에요.그러면 이걸 우리가 수정 시정해야 되거든요.시각을 그러면 그때 얘기랑 그러 고 특히 그러면,그러면 그런 그 그 극도로 그 외자에 의한 성장이론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사람들은 마치 이영희 교수가 자기이론에 관해서 소위 그 인간문제에서 Y란,Y이론,Y론과,X론에서 X축과,Y축 이 문제에 대해서 소위 사회주의 인간성이라는 거에 대해서 자기가 잘 못 생각했다,순진하다 하고 그 러고 뭐든 그래갔고 뭐 잘못된 게 버껴지는 건 아니지만,그 후학들 위해서를 해야 되거든요.아무 놈 도 안하거든요.물론 돌아가셨으니까 모르지만 그거 이어받는 놈도 안하는데 하물며 안병직이 같은 경 우는요.그 앞장서서 그러던 놈이 어 지금와가지고 자본주의 만세,뭐 무슨 식민지 근대화,아니 단 한 마디래도 저는 그 당시에 대해서 그 난 안병직이 뿐만 아니라 전부가 다 그 당시 우리 어떤 미스를 했 고,근까(그러니까)지금 현재를 인정한다면 부분적으로도 인정한다면 그럼 그때 우린 무슨 미스를 한 거고 지금 우린 현재 이렇게 봐야한다.그러고 돌아가고 그러고 얘기를 해야지.어 죽으면 말고,박현 태 같은 경우도 죽어 버렸으니까 그만이지만,나는 굉장한 분노를 느껴요.그 사람들한테 난 니들한테 사기당한 기분이야.이런 기분이에요.지금도 많이 헷갈리고,이거 참 이런 성장이 바른 건지 뭐 또 어 떤 건지 모르겠고 그 다음에 거기서 제일 웃기는 것이 안병직 이 같은 경우에는,아 그놈 지금 뭐야 최고의 자본주의 전도사가 돼가지고 돌아다니거든요.그 참 인제 안병직씨 얘기를 하면은 내가 분명히 기억나는 것들이 몇 개 있어요.19.그러니까 196.8년이나 9년도일거야.그 역사학대회,역사학대회가 있는데 그 인제 그 우리 인제 그 근대역사가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는데 대해서 신용학 선생하고 안병 직 선생하고 콱 붙었거든요.근데 인제 안병직 선생은 나름대로 자기 나름대로 얘길 하니까 신용학 선생은 그런 결정론,딱 맑시즘 결정론이라곤 말 못하고 그런 결정론을 가지고는 사회가 설명 안 됩 니다.사회가,역사가 설명 안 됩니다. 그러니까, 원칙과 원칙적인 툴이 없이는 사회를 조명 할 수 없 습니다. 안병직이 이랬거든요.그러던 친구가 또 그 뒤 2천,한 199.십 몇 년이나 됐나 그 대전 유성 에서 내가 경실련 2대 상집 위원장 했었는데,내가 위원장 할 땐가,상집위원장 할 땐가 대전에서 우리 가 뭐 워크샵이 있었어요.그때 안병직씨하고 그 다음에 누구야 이.낙 그 저 또라이 있죠.버스타고 이북 갔다 오고 한사람,고대 그 저 지난번도 간첩혐의로 들어갔다 나온 사람,그 사람하고 인제 냅다 붙었는데,하여튼 마 듣기 민망할 정도로 자본주의 예찬론을 피더라고요.안병직씨가 그래서 인제 전 가까웠어요.그 사람하고.저것도 사람인가,아니 정리를 해줘야지 자기는 학자예요.선생이고 저 가고 싶은 데로 가면 그 시정잡배지,그 뭐 근까(그러니까)그 당시 6 3을 이렇게 돌아보면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은 했다.그런 생각이고,어.또 그것이 우리 그 지금 현재 그나마 민주화가 이런 정도 자리 잡 고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그때 그 당시 아주 치열했거든요.끊임없이 6 3,6 8,뭐 3

236 23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선 개헌반대,뭐 또 민청학련,그까(그러니까)거의 전 세계에서 그렇게 꾸준하고 치열한 적은 없거 든요 그것이 인제 오늘날 이렇게 해 왔는데,그러면 그런 면에서 그 안에 있었던 파쇼정권들의 경우는 그 존재가치를 모조리 부정해야 되느냐.또 일말의 가치 인정해줘야.나도 모르겠어요.지금 현재 누구 야?엊그제께 보니까,뭐 저 그 이해찬이도 뭐 뭐 였던가,하여튼 일부 인정해야 돼야 하지 않느냐 얘 기들 하고 있는데,현실적으로는 일부 인정해야 된다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인정이 안 되더라고요.나 같 은 경운 그런 인제 그런 거 그래서 그거는 내가 인제 감정을 다스려야죠.그래서 인제 그 무엇이 뭐 주가,그러나 단 그 당시의 배경이 됐던 6 3이 학생들과 뭐 이 사람들이 주 중심이 되었으면 이 사람 들에 대해서 배경이론,배경이 되었던 어떤 이론을 사회경제적 이론을 얘기했던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지금 현재 해석을 해줄 필요가 있고 반성하라면 반성해줄 필요가 있어요.그런데 우리,우리사회는요. 좌가,좌고,우고요,지난 어떤 평가와 그 다음에 반성이라는 건 없어요.하나도.근 큰 문제예요.큰 문 제. 면담자 :선생님께서 6 3나가시면서 조금 낙관적인 입장에서 생각 하셨었다고 그랬다.이길 수도 있. 근데 제가 지금 보면 그렇지만 어떤 것이 4 19하고 비교해서 볼 때 6 3이 이기지 못한 이유가 어떤 이유일까요?저쪽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걸까요.아니면? 구술자 :그 인제 우리가 그거를 어 잘 못 했는데,왜냐면 대중운동이라는 것은요.전략적일 수 없어요. 정보도 미흡하고요.그냥 우발적으로 나가서 그 힘이 기존체제를 무너트리는 거잖아요.근데 그도 우리 를 그걸 보는 거지.그거에 대해서 아 어떻게,어떻게,다 그거는 인제 어떤 정당이나 특히 맞수들이, 인제 그 그거를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전략이나 전술 이니 얘길 하는데,그거는 정당이나 이런 것들이 하는 거지,그 일반대중이나 그것이 학생의 어떤 일반적 뭐였던 그 참 어려운 일 안 되는 일이에요.그 러니까 다만 움직여 가는 것에 그렇게 인제 볼 수 있다.이거죠.그러나 근데 인제 4 19,4 19하고 6 3하고 차이가 뭐냐.4 19는 군이 충성을 포기해 버렸어요.정권에 대해서 그래서 끝난 거고 이거는 군이 충성이 아니라 군이 완전히 예속당해 있었거든요.그러니까 인제 못 한 거죠.그런데 그러면 4 19때 군이,군이 충성을 포기하게 했던 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요.그 봉기의 규모가 컸다는 거,또 그것이 전국적이었다는 거,뭐 이런 것도 있지만,또 여기는 지금 이 일반 대중들이 주장하는 것의 어 떤 타당성,이것을 어.어 어느 정도로 근까(그러니까)도무지 인정 안할 수 없다는 부패라든지,독재라 든지 이런 것이 있었던 건데,음 그러고 거기서 하나는 그런 거지만 또 하나는 인제 그 내가 아는 거 로는요 미국이 우리나라 군에 대해서 미온적이었잖는 것.것,그 미온적이었거나 아니면 반 이승만적으 로 태도를 표명했어요.명시적이건 묵시적으로,묵시적으로,그런데 우리는 미국은 그런 것이 안 했거 든요.그러니까 인제 종주국 미군이 뭐 하는데,에 군을 군,군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이런 거에 대 해서 그 4 19때보다도 대중적 힘이 약했다 하는 거와 함께 미군이 그랬다,이런 것이 뭐고,다만 그런 것까지 전부 다 계산 한다고 하면,그건 뭐 정치나 국가대 국가의 싸움이지,우린 대중운동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면담자 :장시간에 고맙고 마지막으로 6 3에 대해서 정리를 하실 수 있다면?

23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31) Tape5: 구술자 :인제 그 문제는요.상당히 심각한 문젠데,그 이 6 3이나 그 이 그 뒤 6 8이나 또 민청학련 이나 6월 항쟁 이나 또 광주민주화운동 이나,그것이 전체적으로,문제는 자기들이 한 일이 뭔가 자기 들이 한일 민주화운동 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그거에 대해서 깊은,깊거나,짧거나 언 제든지 의식을 해야 되거든요.마치 우리가 그런,그러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이것에 연면성에 대해서 소 위 역사성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 돼요.그런데 우리는 어 이것 자체의 의미 이거는 극히 개인적 또는 단편적으로 많이 생각을 하고,또 따라서 이것을 단면적으로 본다고요(손을 움직이며).그러니까 여기 서 어떠냐하면 무거움을 모르는 거예요.이것이 그 근거를 가지고 발전돼 나가야된다는 이것이 아무것 도 없는 거예요.그러니까 이 양반집의 자손들은 그 양반에 그 양 우리 조상들이 했던 거에 대한 자부 심이 있고,내가 한 거 이 자부심일 까(몸짓을 통해 강조 함)그 무게를 가지고 그 무게를 가지고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거든요.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건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역사적 짐이에요.짐 이고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역사성을 생각하고,그래서 그것 속에서 나의 일부를 생각해야 되는데,이것이 그 의미도 개별적으로 그러고 단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니까 책임감 을 못 느껴요.그러니까,이 새끼들 타락도 하고 응 가서 돈 받아 처먹고 개짓도 하고,응 응 전부 선 배보기를 그 뭐 성질나면 뭐 목소리 높여 같이 덤벼들고 이게 전부 이렇게 돼 있거든요.이거 어떻게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래서 예를 들면 80년 이 80년도 운동을 하는 놈들은 70년,60년도 운동 을 한 인정을 안 해요.알지도 못하고 인정도 안하더라고,내가 386 놈들 그 386 등장하기 전에 그 저 저거 (손으로 이마를 치며)뭐야 저거 내가 한겨레민주당 그거를 할 때 걔네들,아니다 한겨레민주당 할 때가 아니고 저 그 그 저 후보 단일화 문제,김대중씨가 저 *어쩌고저쩌고 후보 단일화 할 때 내 가 그 386 이랑 몇하고 만나가지고 어떻게 얘기하다가,뭐 내가 낸 중에다 어떻게 살 건가 하는 건가 하고,그 다음 제국주의 대해서 제국주의론에 대해서 몇 가지 얘기를 하니까,이 새끼들이 웃기는 얘기 를 하더라고, 아 선배님 그런 책들을 어떻게 읽으셨어요. 이러더라고,지들만 읽어야 되는 거예요.그 (웃음).그 그런 식으로 단절이 되어 있다고 그러고 인제 그래서 선배들이 이렇게 해 왔고 이런 걸로 인해서 생각하는,연면성으로 생각하는 그러고 또 인제 그 그 역,단면성이 있어요.왜냐면 어 그 새끼 들은 빨갱이에요.우리하고 달라요.근데 인제 위가 아래를 대개 그렇게 얘기해요 (웃으면서) 386 그 새끼들은 빨갱이에요.빨갱이.정제되지 않은 빨갱이,우리는요,그래도 좀 얘기를 했지만 사회 나와서 정제가 됐어요.그니 아주 날 빨갱이에요.날 빨갱이,나이 든 놈들이에요.이게,이게 일반적이에요.그 인제 우리풍토가 이렇다고요.그러니까 부패도 하고 그러니까 이용당하고,김대중이가 뭐라고 한다고 끌려가고,김영삼이가 뭐라고 한다고 끌려가고,노무현이가 뭐 한다고,뭐 그러니까,그래가지고 소위 이 정체성 그리고 주체성 확보 못해요.정체성과 주체성은 아까도 얘기한데로 자기가 자기존재의 의미, 이것을 철저히 깨닫고 그것의 역사성 이것을 깨닫고,그거에 의해서 어떤 장래 비전을 가지고 가져야 되거든요.그기 우리한테 제일 문제예요.그걸 누가 할 거냐?참으로 참 나는 어 내가 우리 후배들한테 노골적으로 그런 얘기하고,이 그 이 파편 같이 돼있는 이거 자체는 아무것도 되질 못한다.그리고 그 런 파편상황 속에서 우리가 민주화 운동 어쩌고 역사에 기여 어쩌고 하면 그건 오히려 역으로 널 욕하

238 23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는 거다.그러고 얘기를 하는데 그렇다고 나도 뭐라 모르죠.내가 철이나 인태 애들 보고도 얘기하고, 또 그 밑에 애들 보고도 얘기하고 해찬이 보고도 얘기하고,(얼굴을 찡그리며)해찬이 이놈 새끼는 내 말도 안 듣고,그걸 또 역사적으로 큰 배신한 적도 있고,다 그런데 근데 내가 그렇게 얘기하면 뭘 해, 걔들이 국회의원이 됐다,안됐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도 못하는데 힘드는 데 어떻게 걔들보고 하라고 그러겠어요.인제 조금이라도 내가 노력을 하고 그러니까 지금 현재 민청학련 (전국민주청년학 생총연맹)재심 뭐 이런 거 하고,그 다음 그 내가 지금 그 다음에 기획하는 게 그 민주화운동관련자 유공자로 올리고,또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광복회 처럼 민주화운동 그 동지회 이런 걸 만들어서 그것 자체가 자체 정화능력을 갖고,또 자기발전능력을 갖게 하여튼 작게나마 시작하고 그러고 내가 가다가 뭐하면 뒤에 에스컬레이트 받는 사람도 있을 거고,난 그렇게 생각해.그러니까 그 의미를 생각 해야 되고 자기 스스로 우긴다고 죽어라 하고 젊을 때 하고 역사 속에서 대의인데 그걸 갖다가 아 까 짓것 뭐 그냥 청년일 때 한번 한 거지. (기침)아 청년일 때 한번 옆에 순이 사랑한 것도 그 소중한 그 자룐데,그 뭐 그러고 인제 무슨,무엇이,무엇 의미였나 그렇고 해서,어떤 연계 역사성이 있는가. 그래서 그것이 우리한테도 뭐,근까(그러니까)만약에 대한민국에 존재에 대해 대한민국을 받치고 있 는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걸로 꼽아라 한다면 난 독립운동 하고 민주화운동 이거든요.그거에 의해서 지금 현재 민족국가가 탈 민족이 됐던 어찌 됐던,학문적이고 사회적인 얘기지.그 완전히 세계 화 돼서 세계 인민이 하나가 되는 것 같으면 그렇게 되고 그렇게 될 거지만 이건 요원하거든요.아직 은.그러니까 우리가 민족국가로서 아직 우리 우리가 지금 현재 우리가 우리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거 또 이런 이나마 민주국가로서 우리위치를 누릴 수 있는 거,그 실제로 무슨 저 파쇼정권에서 경제개발 은 뭐 그런대로 또 뭐 인정을 좀 하거나 어떤 방법으로 해야 되겠지만,뒤집어서 얘기하면 그거의 주 체는 사실 공돌이 공순이였고,또 이.같이,같이 시작을 했을 때 그 인제 미국에서 소위 그 저 후진 국 개발 성장이론으로 해서 던져 주었을 때,그걸 받아 먹었는 게 대만,홍콩,우리,싱가폴(싱가포르) 인데 물론 전부 그 저 싱가폴(싱가포르)이나 대만,싱가폴(싱가포르)은 거의 그 소위 그 자의적인 어떤 독재 형태고,대만은 또 뭐 그러지 못하고,홍콩 같은 경우는 또 전혀 하는 거지만 다 그런 대로 어째 든 간에 순조롭게 뭐하지만,우리같이 인권을 파괴시키면서 그 이렇게 한 것은 없거든요.그래서 그건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되지만,좌우간 난 그렇게 생각해요. 독립운동 과 민주화운동,이것이 지금 현 재 또 앞으로,앞으로 우리들의 생존을 위해서 지켜라,발전시켜라 할 가치다,이렇게 보거든요.그 중 에서도 한 민주화운동,난 일생을 바친 거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을 해요. 면담자 :예,장시간 고맙습니다.

23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33) 7)면담후기 이현배씨는 6 3항쟁 과정의 중간에 주도 인물로 부상한 사례로 원래 주도했던 인물들보다 학년이 낮 은 경우이다.비교적 항쟁의 전 과정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적극적으로 기억을 찾아 증언해 주었 다.나름대로 6 3항쟁의 방향성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으며,선배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평 가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공식적인 면담이 끝난 자리에서 오고간 얘기는 6 3항쟁의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관한 언급이 있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 당사자가 생존해 있기 때문 에 밝힐 수 없는 것이 아쉽다

240 23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3항쟁 주요사건 구 술 자 최혜성 면 담 자 신동호 면담일자 (토) 면담장소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면담차수 1차

24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35)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최 혜 성 (한 자 : 崔 惠 成 ) 면담자 성 명 : 신 동 호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촬영자 성 명 : 정 선 호 (소 속 :와인미디어) 녹취자 성 명 : 엄 경 식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및 장소 1차 (토)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실 2차 3차 산출물 녹화테이프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3개 1부 2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최혜성선생님이 청각장애가 있으시기에 질문과정에서 큰 소 면담상황 설명 리로 하거나 재차 설명하는 등의 애로사항이 있었음 또한 다른 답변을 바로 잡는 과정이 있었기에 구술시간도 예 상보다 길어졌음 비고

242 23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최혜성 (한자) 崔 惠 成 나이 67 자택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동성1차 A 주소 생년 월일 전화번호 : , 직장 : 전화번호 중국 출생지 길림성 결혼연도 1971 통화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김상미 처 1946 무 고등학교 교사 출신 가족 최원도 자 1971 은행원 최형도 자 1973 체육공단 최효진 녀 1975 사업 학력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1.신흥제본사장 주요 약력 2.백범사상연구소 부소장 3.한살림모임 상임위원회 위원 4.통일부 연구위원

24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37)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한일국교정상화,만주,철학과,4.19,5.16,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3.24,6.3,학원사찰조사위원회,YTP,계엄령,학림제, 동대문서,불꽃회,몰로토프칵테일,3.24제2선언문,내란음모,반공법,비준반대운 동,문리대,위수령,정보부,민비연,민주화운동 상세목록 Tape 항쟁 참여 배경(00:00~09:45) 시위 참여기(09:46~27:26) 3.학원사찰 조사와 YTP(27:27~35:23)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시위(35:24~46:23) 5.6.3데모와 계엄령 전후(46:24~58:51) Tape 제2선언문(반공법 위반)사건(00:00~12:02) 7.몰로토프 칵테일 사건(32:47~61:42) Tape3. 8.김중태 등 내란음모사건(00:00~13:26) 위수령,체포와 재판(13:27~36:23) 항쟁이 삶에 미친 영향(36:24~60:40)

244 23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5)예비질문지 최혜성 선생님. 6.3항쟁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시위를 주도한 세력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2.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경기고 운동권 인맥 현황,60학번 철학과 운동권 3인방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된 이유 등,학년 이 늦어진 사연 등) 3.당시 정국에 대한 최 선생님과 주변의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시위 이후 주로 자금책(재정위원장)을 맡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시위 준비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그들이 한 역할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김중태가 조직과 고려,연세 등 타교와의 연락 등 중심 역할을 하고 현승일이 현장 지휘,최혜성이 자금, 김도현이 선언문 등 문건 작성을 분담,한 학년 아래인 박삼옥 박용한,김헌출,전계수,이현배 등도 각 각 역할을 맡아.-6.3동지회,6.3학생운동사) 시위 준비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자금문제 등) 7.시위대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는데,최 선생님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나요? 성토대회와 3.26시위 등 3.24이후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최 선생님께서 하거나 겪은 일을 기억을 말씀해주십시오.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9.4월 들어 괴소포 사건과 서울문리대에서 4.17한일회담성토,4.19영령추도식,4.20(4.19네 돌 기념식),

24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39) 4.21시위 등 집회 시위가 계속됐습니다.이때의 상황과 역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10.송철원 손정박 이영섭 등과 학원사찰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당시 학원사찰과 YTP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3>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11.당시 공소장에는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시위를 5월 14일 기획해서 16일 확정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실제는 이와 다르지요? (공소장 내용:피고인 김중태 동 현승일은 1964년 5월 14일 오후 3시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출입문으 로부터 약 50미터 상거한 잔디밭에서 정권타도에 관한 모의를 한 후 시내 각 대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동년 5월 16일 오후 7시경 동교 월편 진아춘 중국요정 2층에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대표로 피고인 김중태,동 현승일,동 김도현,공소외 송철원,동 최혜성,동 이원재가 참석하고 동국대학교 대표로 공 소외 장장순,동 박동인,성균관대학교 대표로 공소외 박형길,동 박광렬 외 4명,건국대학교 대표로 김 영목,동 백승홍,서울사범대학 대표로 공소외 김길렬 외 2명 등 21명이 참석 회동하여.)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기획하게 된 배경과 계기,준비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5월 초 동국대 박동인의 민비연 방문,애초 황소식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아이디어의 출처, 5월 16일에서 20일로 거사일 변경 사유,대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이하 연합회)의 조직에 관한 사 항 등) 13.공소장과 실제 상황에서 주동자의 역할이 다르게 나와 있는데,그렇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공소장=(준비)김도현 선언문 결의문 한일회담-5.16성토문 작성,송철원은 조사 민생고 학원사찰 성토문 작성,장장순 회식진행총사회관,최혜성 자금조달 유인물 인쇄,현승일 공보관계 및 한양대생 8000명 동원,김중태 연대 성대 동대 등 각 학교별로 최저 1000명의 학생 동원,이원재 서울대 학생 동원,김 용술 모의관 두건 죽장 구입/(진행 담당)송철원 조사 낭독,이재우 5.16성토문 낭독,김영목 한일굴욕 회담성토문 낭독,정성철 학원사찰성토문 낭독//(실제 진행)박동인 선언문 낭독,민승 결의문 낭독,김 광렬 5.16성토문 및 민생고성토문 낭독,송철원 조사 낭독) (실제 상황=조사는 김지하가 작성,선언문은 김도현 김정남이 초안,정세연이 작성한 대회사를 장장순이 낭독 등) 14.시위 현장을 언제 떠났으며,떠나기 전의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원래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로 했는데,이는 누가 진행하기로 했습니까?)

246 24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문리대 단식농성과 6.3사태 15.김덕룡이 주도한 난국타개궐기대회,5월 29일부터 전개된 서울 문리대 단식농성 때 어떤 역할을 했습 니까? 시위 때 어떤 역할을 했으며,그때의 경험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6월 3일 일제 거사 계획은 투위 지도부가 미리 설정하고 확산한 것이었습니까,아니면 지도부 와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5>민비연 사건 계엄령 후 어떻게 도피 생활을 했습니까? 18.불꽃회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습니까.김정강과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사태와 관련해 기소되지 않았는데,어떻게 (법망을)빠져나왔습니까? (공소장:1964년 7월 중순 5.20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집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 검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훈계방면된 사실이 있음) 20.2차 민비연 사건은 (1)내란음모 (2)내란선동 (3)폭발물사용음모 (4)반공법위반 등 4가지 죄목으로 기소 된 사건이었지요?최 선생님께서는 1~2심에서 (1)(2)(4)의 죄목이 적용되었으나,최종심에서는 (1)(2)(3) 의 죄목에 해당되는 재판을 받았습니다.어떤 연유입니까? (*1965년 3월 22일 밤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서울 서대문구 교남동 우학명의 집에서 김지하,박재일,송철 원과 코민테른을 인용한 3.24제2선언문을 작성한 혐의를 받았으나 최종심에서는 이 부분 대신 폭발물 사용혐의가 적용됨) (추가질문:박재일도 마찬가지이고,유일하게 이 건이 송철원 혼자에게만 적용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21.공소장에는 코민테른을 인용한 3.24제2선언문 작성자가 최혜성,박재일로 되어 있는데,실제로는 누구 였습니까? (보충질문:우학명은 선언문과 격문을 인쇄해 경향신문 권영대 기자에게 주었다고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 는데 왜 기소되지 않았습니까?) 제2선언문을 인쇄까지 해놓고도 후배들한테 전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23.내란음모,내란선동의 빌미가 된 구국학생총연맹은 실제로 조직하려는 논의가 있었습니까?

24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41) (1965년 7월 18일부터 서울문리대 천문기상대 옥상 휴게실 등에서 김중태 최혜성 진민자 이수용 신춘자 이원범 등이 회합한 것으로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음) 24.폭발물 제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언제,어떤 계기에 의해서였습니까? (공소장:1964년 7월 31일경 서울 용산구 후암동 27-7(김중태의)하숙집(*1심 판결문도 동일)에서 내가한 공소외 동교 정치학과 4년생 김도현과 소리만 크게 나는 폭약을 10여개 만들어서 동년 8월 6,7,8일경 약 100여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대법 판결문:원심은 :00시내 충무로 소재 피고인 최혜성의 집에서 피고인 김중태,같은 최 혜성,공소외 김도현이가 모인 자리에서 김중태가.) (보충질문:7월 31일 모의 장소가 이처럼 바뀐 이유를 압니까?) 26.7월 31일 회합에서 논의한 인명에는 피해가 없고 소리가 크게 나서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관들에게 던지면 경찰관들이 흩어져 도망가는 등 혼란해질 만한 위력이 있는 폭발물 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했습니까? 27.폭발물을 만들어 직접 실험도 해보았다는 설이 있는데,실제로는 어땠습니까? 28.체포된 과정과 구속,재판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경험을 말씀해 주십시오.

248 24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6)녹취문 최혜성 선생님. Tape1. 면담자 :예,지금부터 1964년과 1965년 그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6.3항쟁에 그 주도적으 로 참여하신 최혜성 선생에 대한 구술을 시작하겠습니다.지금은 2008년 11월 22일 오후2시 15분이 고 여 이곳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 현대사기록연구원 사무실입니다.면담자는 현대사기록연구원 연 구위원 신동호입니다.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구술자 :(질문지 들여다 보며)대충 이게 원안이죠? 면담자 :이 스토리로 가는데요.그 좀 그때그때 따라서 하시고 싶은 말씀 하시면 되고 또 뭐 저 급하게 말씀하실 필요 없이 좀 생각을 더듬는다든가 예 좀,이렇게 해도 됩니다.생방송으로 나가는 거 아니니 까 충분히 여유를 갖고 하시면 됩니다.지금 시작할까요?그 선생님 저 고향이 울진이지 않습니까? 구술자 :예.경북 울진.원자력 발전소 있는 데. 면담자 :그 어떻게 해서 그 서울에 학교 다니면서. 구술자 :출생은 거기서 안 했습니다.저의 할아버지가 한일합병 직후에 에.일본 놈 밑에서 못 살겠다 생각하고 아주 일찍이 만주,남만주,저 저 그 당시에는 서간도라 그랬습니다.서간도로 이주하셨고 거 기 가서 나라가 *이 나라 망했다 생각하셔서 원래 증조부께서 저 진사,최 진사이셨는데,하여튼 뭐 (웃음)그 주자학 때문에 결국 망했고 나라가 다시 찾으려면 서양 문물을 받아 들여야 된다.이래 생각 하셔서 기독교를 아주 일찍이 만주 들어가서 기독교를 했습니다.그리고 저의 아버님은 그 할아버지 영향도 있고 그래가지고 농사지으면서 신흥무관학교를 다니셨고 졸업한 후에 어 그 당시에 국민부라는 자치 당시 정부 비슷한 게 있었습니다.우리 서간도에,산하에 조선혁명단,조선혁명군이 있었죠.조선 혁명군 양세봉( 梁 世 奉 )장군 휘하에서 조선혁명군 소대장을 하셨어요.그래가지고 저의 아버님 직속상 관이 김학규( 金 學 奎 )장군이.그래서 만주 조선혁명군에 복무하셨다가 만주사변 때 에 죽게 되었죠. 도생을 위해서 숨어 살면서 중국인 양자로 들어갔어요.양자로 해서 목숨을 구했고 그래가지고 이제 만주 *몰래 숨어서 살았는데 집에 노부모님이 계시고 큰아버님이 좀 장애인이었어요.처자식이 있고 하니까 그 당시에 상해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못가고 이제 만주에서 숨어 사시다가 해방을 맞았죠.그 래서 제가 만주에서 태어났습니다.만주 통화( 通 化 )라는 데.통화라는 데가 저 압록강 건너에 광개토왕 비 있는.거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통화라는 데가 있죠.만주국 때는 통화가 한 개의 성이었 어요.지금은 길림성이지만.길림성 통화에서 제가 태어났죠.근데 울진은 저희 저희 400년 저 선산도 다 울진에 있고.할아버지 묘가 만주에서 실묘가 되었지요,만주에서 돌아가신 바람에,찾아가 봤는데 못 찾겠어요.하도 뒤집어 놔서. 면담자 :그 선생님,그 철학과

24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43) 구술자 :철학과에 왜 댕겼냐(다녔냐)? 면담자 :철학과에 보면 최동전 선생님과 이명현,보통 세 분을 이제 60학번. 구술자 :뭐 철학과 삼인방 그 철학과 삼인방. 면담자 :어떻게 해서 학생운동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특별한 계기라든가 동기가 있었습니까? 구술자 :에.제가 4.19( )나는 해에 입학을 했습니다.그까 4.19나고,입학해서 며칠 안 되니까 4.19가 났어요.그땐 4월에 입학이었거든.입학하자마자 4.19가 나서 그때 선배들이 선동하는 데에 따라 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동성고등학교하고 같이,경무대 앞까지 진출했어요.그때 이제 경무대에서도 총 을 쏘았기 때문에 그때 막 나도 잘못 될 뻔했어요.내 앞에 몇 사람들 총 맞는 거 보고 납작 엎드려 요렇게 있다가 기어가지고 골목 그 당시 경복궁 담 옆에 집들이 있었어요.글로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그때 경험도 있었죠.그러다가,4.19나고 일 년 뒤에 5.16( )나지 않습니까?그까 5.16나니까 학내도 뒤숭숭하고 맘도 뒤숭숭하고 그래가지고 아 빨리 군대 갔다 오는 게 좋겠다.이렇게 생각하고 그 당시에는 학 대학 재학 중에 가면 1년 반,복무기간을 1년 반 하는 그 학보병제라고 했는데 그게 4.19아니 5.16뒤에 없어진다는 얘기가 있었어요.그래서 빨리 갔다오는 게 좋겠다 생각해 가지고 그 해 5.16나는 해 8월에 군대 입대했습니다.입대해 가지고 11사단 논산훈련소 훈련받고 해서 11사단 13 연대 2소대에서 저 소총수로 복무 마,복무 하다가 제대해서 복교를 했죠.그래서 복교하고 나니까 난 사실 아무도 그 철학과 입학동기하고 한 1년쯤 다니고,주변학과 쪽 가끔 가다,박재일은 그때 1학년 때 만났어요.그 60년 입학생들 *철학과 동기생들하고 몇몇 사람만 알았고 군대 갔기 때문에 사실 6.3( )을 주도했던 61년 학번,특히 정치과,경북고등 출신들 하고는 직접 인연이 없었습니다.그 런데 그 복학을 한 뒤에 최동전이 동기 철학과 동기거든요.동전이가 그 친구들하고 오랫동안 어울려, 군대도 안 가고 쭉 있었으니 어울리고.그 친구 소개로 이제 그 김중태,김도현,또 도준호 하숙방에서 내가 김도현하고 송철원 이렇게 알게 되고 김정남도 그때,김정남은 그 전에 알았다,내가 휴가 중에 한번 나와서 동전이하고 만나서.뭐 그래가지고 알게 됐죠.알게 되고 뭐 그 당시에 5.16군사정권이 한 일회담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안이 원래 아버지는 독립군에 종사하셨고 또 일테면 항일의식이 상당히 강했어요.그러고 또 기독교 장로시고 그러고 해서 항일의식도 강하고 그래서 그런 영향이 강 했기 때문에 그 당시 한일(한일회담)박 정권이 시도하던 한일회담이 상당히 반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그래서 그 반대하는 생각을 갖고 뭐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같이 어울리게 되었죠. 면담자 :그 당시 그 이 64년 그 64년 인제 3월 24일 처음으로 인제 그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가 3개 대 학에서 동시에 이뤄지지 않습니까?그런데 준비 과정이 제가 알기로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거기에 대 한 준비과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준비과정에서 선생님께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준비 과정 자체에 대 한 기억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구술자 :제가 제대하고 나서 학교 가보니까 61년 입학생,특히 정치과 학생들 사이에 상당히 4.19의 그 뭐 좌 편향된 학생운동이 있었거든요.민통이라고 그랬나,민통련,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그게 다 끊어 졌단 말이예요.5.16때문에.근데 내가 군대 있을 때 무슨 행협데모 34) 라든가 이런 걸 하면서 학내에 상당히 학생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어요.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히 이제 한일회담이 굴욕적 34) 1962년 6월 8일 서울대 한미행정협정체결 촉구시위를 지칭.

250 24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이다,그 현 정권이 비민주적이고 군사독재정권이다,여기에 반대하는 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얘기 가 오고가다가 결국은 3.24를 기획하게 된 거죠.근데 그게 시간적으로 사실상 3.24이전에 했는지 이 후에 했는지 모르지만 그때 서울 문리대는 학생회는 전연 관계가 없었어요.그리고 한일굴욕회담반대 투쟁위원회 35) 라는 걸 임의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어 했는데 그 중심이 김중태였고,어 제가 처음 만났 을 때부터 상당히 언변도 좋고 내가 깜짝 놀랐다고 상당히 뭐라 할까 (웃음)예리하면서도 과감하고 결단력도 있고 그런 친구라고 느껴지더라고요.그래서 같이 그 얘기를 좀 하게 됐죠.얘기를 하다가 그 때,뒤에 질문이 또 있데요 그건 나중에 하고.그래서 3.24전날 나는 3.24전 까지는 저 현승일은 몰랐 어요.현승일은 몰랐고,중태하고 김도현 김정남 송철원은 알았어요.현승일은 그 전에 몰랐어요.근데 인제 3.24전날 내가 중태하고 같이 여관에서 같이 잤습니다.중태가 연설문 쓰는데 인제 서로 의논도 하고 하룻밤 지내고,그때 현승일은 다른 곳에서 무슨 화형식,일본 이께단가 누구하고 이완용하고 이 렇게 무슨 허깨비 같은 거 만들어서 화형하는,그런 걸 준비했던 걸로 아는데 나는 몰랐어요.그걸 중 태가 그런 얘길 해서 알았어요.중태하고 여관에 가서 연설문 쓰는 걸 서로 의논하다가 3.24당일에 이 제 데모에 참가했죠.그때 현장에서 저거한(지휘한)건 현승일인데 그때 내가 현승일을 처음 봤고 또 경북고등학교 출신 그 62학번들,뭐야 저 박영조 뭡니까 누굽니까 박삼옥이 뭐 이런 친구들.백승진이 니 이런 친구들 그때 다 알게 됐죠.3.24날 알았어요.그 이전에는 저 중태하고 도현이만 알(고)있고. 그래가지고 3.24날 데모에 참여했다가 갑자기 데모대가 교외로 나가 진출해서 종로5가에서 경찰봉에 두들겨 맞았어요.내가 정신을 잃어가지고 동대문경찰서에 연행이 됐었죠. 면담자 :예 그 나중에 여러 가지 법정에서의 뭐 기록이라든가 수사기관 기록 같은 걸 보면 최혜성은 김 중태의 제1급 참모로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더라고요. 구술자 :그래요? 면담자 :그러고 보면 3.24라든가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라든가 이런 과정에서 주로 그 자금책을 많이 맡으셨더라고요.기록에 보면.실제로 뭐 자금책을 맡았고,왜 맡았다면 왜 또 그런 자금책을 맡 으셨는지? 구술자 :그게 아마 제가 원래 저 군대를 갔다 오고.또 그 당시 4.19.군대 갔다 왔으니까 학생운동하 고는 관계가 없었죠.그래서 동대문서에 연행되고서도 단순가담자로 돼서 그냥 훈방되고 말았거든요. 그 다음날.근데 하여튼 3.24데모하기 전인 거 같아요.문리대 잔디밭.그 저 4.19탑 앞 마로니에 있 는 그 잔디밭 앞 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하여튼 거기서 뭐 하여튼 3.24에 대한 모의를 좀 했어요.그때 정확하게 기억 안 나는데 그때 김중태하고.김도현이도 있었던 거 같고 승일이는 그때 없었던 거 같아 요.하여튼 얘기할 때 그때 김정강이가 참여했어요.난 그 사람을 거기서 처음 봤는데,김정강이가 처 음에,김정강이 그랬던가,나 보고 자금책을 해달라는 거예요.그 이후론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 주변 친구들이 다 가난한 지방 출신이거든요.나는 사실 좀 서울 출신인데다가 저는 집에서 그 당시에 제본업,제본업을 했어요,가내수공업이긴 하지만.좀 크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먹고살기에 좀 여유가 있었죠.그래서 그리고 또 내가 이제 학교 다니면서 그 당시만 해도 제가 막내기 때문에 아버님은 연 로하고 저의 형님은 유학 가 있었고 독일에 형수님하고 이 조카들하고 부모님들하고 이렇게 공장 운영 35)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지칭.

25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45) 하면서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제가 저 한몫을 해야 돼요.그래서 주로 배달 배달하고 이 수금하는 일을 내가 이 좀 도왔지요.그러다보니 자연히 좀 융통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그래서 제가 그 당시 다들 어려울 땐 데 내가 술도 좀 사는 편이었고 그래서 아마 나보고 자금책을 맡아 달라 그랬지 않았 나 그렇게 생각합니다.하 뭐 또 얘기해서,옳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좀 부담스럽더라도 해야 겠다.받아들였죠. 면담자 :그런데 그 어떤 그 당시에 각자 역할분담을 한 걸 쓴 걸 보면요,그 나오는걸 보면 인제 6.3동 지회에서 쓴 그 <6.3학생운동사>에 나오는데,김중태가 조직과 고려대,연세대 등 타교와의 연락 등 중 심역할을 한다,현승일은 현장 지휘를 한다,최혜성은 자금을 맡는다,그 다음에 김도현이 선언문과 같 은 문건 작성을 담당한다.그 다음에 인제 한 학년 아래 62학번,박삼옥,박용환,김헌출,전계수,이현 배 36),이런 사람들도 각각 역할을 맡았다,이런 식으로 되어 있거든요.그게 그 선생님이 기억하시기에 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까? 구술자 :하여튼 제가 6.3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도 하고 6.3이전에 이제 뭐 좌편향된 이념서클 같은 것도 있은 걸로,뭐 얘기,신간회(신진회) 37) 같은 거 그 영향으로 민비연이 생겼다 또 얘기하고,물론 그런 게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그런데 그 사람들이 별로 시위에 영향을 미친 게 없어요,오히려 부 담만 줬죠.나주에 부담만 됐습니다.결국.근데 대충 그렇게 된 건 맞아요.그 당시 중태가 고대의 최 장집,또 연대 최준성(정준성) 38) 을 잘 알더라고요.그래서 저도 그 당시 3.24이전에 그 친구들을 봤어 요.그리고.저 가만있어 그 할머니 이름이 뭐지,김송월(김한림).김.하여튼 정준석(정준성)어머니 하고,하여튼 뭐 하여튼 그 친구들하고 사전에 아는 거 같아요.그리고 중태는 아마 이 문제를 아주 오 래 전부터 생각을 하고 하내 문리대 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아는 친구들하고 연락을 해가지고 아마 그런 저,그게 맞는 얘긴 것 같고 현승일은 그렇게 간 거 맞습니다.왜냐하면 그날 그 현승일은 그 3.24현장에서 현승일을 처음 봤지만 그때 하숙집에서도 그 뭐 여러 가지 시위 도구를 만들어 가지 고 왔고,또 거기 주로 행동,기획,행동 대원으로 62학번 경북고 후배들.그러니까 다 3.24중심 세력 은 경북고등학교 출신 문리대,경북고 출신 정치과 내지 그밖에 사회학과 뭐 사학과 뭐,하여튼 경북고 등학교 출신 문리대 생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한 건 맞습니다. 면담자 :그 3.24때도 이 자금 문제를 맡았습니까 자금담당,3.24때도 자금을? 구술자 :그때 시작해가지고 제가 이 제일 큰돈 드는 게 뭡니까.제일 그 데모에 가장 *대관 하는 것 도 아니고,학교 교정에서 하고 거리로 나가는 거니까.제일 큰 문제가 유인물을 만드는 겁니다.근까 유인물 작성하는 거하고 유인물 제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제작하는 데 돈이 들지요.그게 제일 돈이 많이 들고.물론 그건 거마비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필요하지만 제일 필요한 게 그건데.저 우리 집이 그 당시 제본업,종이를 다루는 책을 만드는 그러기 때문에.종이를 다루잖습니까.그래서 종이하고 제 가 조금 알고 또 뭐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수금 같은 거 하면 좀 아버지 몰래 저거 해서 그걸 자금으로 인제 데모 유인물 만드는 거 그밖에 필요한 비용에 충당했죠.그래서 그러는 과정에 이제 자연히 뒤에 36) 이현배는 63학번임. 37) 4.19 이전에 있었던 서울 문리대의 대표적 이념서클인 신진회( 新 進 會 )를 잘못 말한 것임. 이하 같음. 38) 정준성을 잘못 말한 것임.

252 24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나오겠습니다만 송철원이 그 YTP(Youth ThoughtParty, 靑 思 會 )폭력 이후에 김원기 동아일보 기 자를 통해서 동아일보가 종이를 좀 대줬어요,우리한테.그런 일이 있었지요.그래서 사실은 3.24서부터 5.20까지 계속 그 일을 맡아 했지요. 면담자 :근데 자금 문제에 뭐 애로사항 같은 거는,특별한 애로 사항 같은 거는. 구술자 :응,많지요.애로사항은 많 뭐 뭐 보면,나중에도 얘기하겠지만 3.24가 이제 문리대 중심으로 하 다가 그 저 문리대하고 고대 연대하고 하다가,그 뒤 이제 동국대학 같은 게 4월 달 들어서 동대 같 은.참여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여러 학교가 연대해야 한다는 연합전선을 펴서 연대해야 된다는 필 요성이 있고 실지로 그렇게 추구를 해서 동대하고 주로 제일 가깝게,위치도 서로 가깝고,이상하게 동 대 친구들이 문리대를 좋아하고 고대 아바 그쪽 보다 우리 쪽하고 많이 했죠. 고대 동대는 그 이제 주도 세력이 제대 복학생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얘기가 주욱 되고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들어요.우리 쪽에서 아무래도 비용을 더 많이 쓰게 되었고,뭐 하여튼 아까도 얘기했다. 그 수금한 거에서 일부 좀 융통도 하고 동아 김원기씨가 주는 종이,그 왜냐하면 제본소에 거기 갖다 주면 그걸 쓸 수도 있고 그걸 팔 수도 있단 말,하여튼 좀 뭐 어렵죠.그리고 다 어디 데모만 따로 합 니까?술도 마셔야 되고.그랬죠.항상 부족한 가운데서 계속 그냥 하게 됐죠. 면담자 :그 3.24당일 날 그 붙잡혀서 연행이 되었다고 그랬는데 바로 또 나오셨 나오셨다고 했잖습니 까? 구술자 :동대문서에 종로5가쯤에서 경찰하고 충돌해서 순간적으로 경찰봉에 맞아서 정신을 잃어서 해가 지고 동대문서에 끌려갔는데,이게 끌려가니까 유치장 너무 작고 그러니까 큰 강당 같은데 몰아놓고 하룻밤 아마 조사하고 분류하고 하는 모양이야.그 나는 과거에 군대도 갔다 오고 집안 보니까 저 기 독 영락교회 장로도 하고 그러니까 하여튼 일반 시위참가자라 그렇게 봤는지 그 다음날 석방됐어요. 훈방이지요.석방이라. 면담자 :그 다음날도 시위가 있었고 3월말까지 시위가 있었는데. 구술자 :나는 조금 뭡니까.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도 많은 편이니까,주로 행동대는 그 62학번,63학번, 이런 친구들이 하고,특히 경대(경북고)경북고 출신들이 주로 맡고,나는 그런 유인물 만들고 공급하 는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데 앞장서지는 않았죠.그렇지만 하여튼 그 3월 달에 시작 3.24부터 시작 돼 서 6.3까지,다만 5.20까지 내가 쭉 저 그 유인물이다 이런 거,뭐 유인물 작성은 주로 김도현,김정남 이도 좀 한 일이 있고.그 다음에 5.20민족주의,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때에는 장례식이라는 형식을 두니까 조사가 있어야 될 것 아니.그때 이제 김지하가 에 그걸 썼는데,김중태가 요구해 가지고 썼는 데 뭐 하여튼,그 작성한 그 유인물과 뭐 그런 거 내가 다 만들어서 배분해야 돼.시위대에 시위 하게 끔 준비를 해야 하니까,그건 제가 다 했죠. 면담자 :4월 달 들어서 데모가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괴소포 사건이라든가 학원사찰 문제라든가 이런 게 대두하는데,물론 그 서울 문리대에서도 4.17,4.19,4.20,4.21이런 시위는 이제 있었는데 4월은 주로 학원사찰에 대한 분위기가 좀 있었던 거 같은데 그 그때 그때 집회에도 계속 유인물 공급이란 이런 거 계속 했었죠? 구술자 :관계 했으니까.그까 4월 달 이게 3월 4(3.24)에서 3월말까지 아마 쭉 데모가 있고 4월 달 들어

25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47) 서도 데모가 주욱 있었죠.근데 아마 그 당시 뭐 몇 가지 수법으로 전부 다 계속 김중태,저 현승일이, 그밖에 고대 그 누굽니까.박정훈이 이런 사람들한테 괴소포가 왔다,내용은 돈 좀 넣고 뭐 건투를 빈 다,북한하고 연관 있는 거 같이 해서 그래가지고 뭘 만들려고 그랬던 거 아닌가.하여튼 난 직접 직접 봤다.중태가 보여줘서.그 다음에 그 당시에 학원 그 사찰이 심했고 고거(그거)프락치가 사실 있었어 요.왜 그러냐하면 데모하는 과정 속에 보면 이게 나갈 턱이 없는데 하여튼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거 든요.하여튼 그래서 어 4월 달 들어서 이제 그 또 뭡니까.4.193주년 기념 39) 그 전후로 해서 굴욕회 담에 대한 반대뿐만 아니라 박,5.16군사정권 전반의 특히 부정부패,그 다음에 5.16정권이 감싸는 이 재벌들에 대한 규탄,이런 거까지 그 이슈에 이제 담게 되면서 조금 확대되는 그 좀 성격이,단순히 한 일회담뿐만 아니라 박정권 반대 에 그런 성격이 4월 들어서면서 쪼께(조금)나타나기 시작했죠.그 그 런데 송철원이란 친구 있잖아요.저 친구가 경기고등학교인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 친구들이 3.24주 도 세력들한테 별로 호감을 못 받고 있었어요.왜 그러냐하면 김덕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63 년인가 62년인가 그 학생회장을 했어요.문리대 학생회 하고,그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단과대학 학생회 돌아가면서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총학생회장.이 자가 이 정보부에 들어갔는데,그 그때쯤에는 정보부이지 아닌지 몰랐죠.그래서 하여튼 경기고 출신 중에는 프락치가 많다 이런 얘기가 돌았어요. 그러는데 그때 김도현이가 송철원이가 프 저거다 이거라 해서 프락치,뭐 이렇게 소문도 내고 그래가 지고 그때 송철원이 뭐 데모 3.24난 아마 데모에 아마 나왔을 거예요.그리고 동대문경찰서에도 같이 갔고 그래서 경찰서에서 나하고 같이 하룻밤 같이 지냈는데 그 다음날 나온 뒤에 아마 유학 간다 그래 서 학교에 안 비쳤어요.그때 이제 그 김도현이가 송철원이에 대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그러다가 송철원이 나와서 그게 아마 이제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 내가 뭐 학원사찰진상을 조사하겠다 그래서 그 활동을 개시했죠.그런 과정에 이제 그 YPT 사건이 터졌고 그거 때문에 괴한들한테 붙잡혀 가 가 지고 쥐어터지고,송철원이가 병원에 입원하고,이게 또 또 기름이 되어 가지고 시위가 확산되는 계기 가 됐죠. 면담자 :그때 학원사철조사위원회에 그 손정박,이영섭씨,이런 분들과 함께 그 최 선생님도 학원사찰조 사위원회 활동을 한 걸로 되어 있는. 구술자 :그게 아마 3.24이후에 에.한동안은 중태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중태하고 현승일이,현승일은 4월 달까지 있었고,하여튼 저기 좀 도피 그게 도피생활을 했어요.그래서 그 당시에 그 주로 학원에 이제 3.24주도했던 인물들이 좀 전면에 나올 수가 없는 왜냐면 감(감시)도피,그래서 이제 김도현이 하고 나하고 주로 얘기하다가,그 당시엔 조금은 소강이거든요.그래가지고 도현이가 나하고 아마 그래 서 이제 김도현이가 아까 얘기 했듯이 그런 소문도 퍼뜨려 가지고,이게 내가 그 생각.송철원이하고 원래 친하거든요.근데 그런 소리를 아마 송철원이를 데모에 합류시키려고 그랬던 거 같아요.그렇게 해 가지고 이제 송철원하고 나오니까 그 당시 이제 시위하는 과정이 약간 약간 소강상태거든요.소강 상태 들어갔으니까 인제 자연히 학원사찰 저 송철원 자기 자기와 경기고등학교 출신들의 명예를 위해 서 그 저 학원사찰 활동을 했죠.그래서 거기 자연히 인제 끼게 되고 학원 4월 한 이십 며칠 경에 성 토대회를 했을 거예요.학원사찰 성토대회,보고서 및 성토대회 이런 걸 했어요. 39) 4주년을 잘못 말한 것.

254 24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4월 23일에. 구술자 :그 뒤에 송철원이가 YTP 관련해가지고 저 괴한들한테 납치되어 가지고 부상당하고 병원에 입 원하고 그렇게 됐죠.근데 저는 경기고등학교하고 관계없이 대광고등학교 출신이거든요.근데 그거 때 문에 한 게 아니라 어쨌든 그게 3.24때부터 시작된 그 운동의 연속성 때문에 그냥 참여하게 된 거죠. 면담자 :그 다음 중요한 그 포인트가 그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5월 20일 벌어진 그건데.그 이게 나중 에 인제 계엄령이 나고 주도 주모자들이 기소를 당할 때 공소장에 보면 5월 14일경에 기획을 해서 16 일 날 확정을 했다. 구술자 :11번 질문이지요? 면담자 :예 11번. 구술자 :이게 조금 너무 이렇게 한 에 과정이 길어요.이거.근까 4월 달에 우리가 4월 달에 3.24이후에 한일굴욕회담반대 시위가 연속됐고 그 다음에 4월 들어와서 조금 소강상태에 있으면서 학원사찰진상대 회에 중점을 두어서 저걸 했고 그 다음에 5월 들어서면서 이래 이렇게 각 대학이 나눠서 하는 거보다 는 좀 더 광범위하게 연합해서 어 시위를 조직해야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 생각을 해서 에 5 월초서부터 아마 그 당시 김중태나 현승일이나 나나,고대 40) 에 제대학생 교우회 장장순이,박동인이, 김 김영 뭐더라.김영일(김영남)인가가.김,아니.하여튼 그런 제대학생교우회와 교류 같이 교 어.교 류하면서 같이 의논을 했죠.그러면서 이제 5월초서부터 주욱 여기 그 저 주로 문리대는 그 당시 감시 망이 심했고,그래서 동대는 사실 4월 이전에는 데모를 안 했거든요.그때 당시에 처음 데 별로 데모를 그 전에 안했기 때문에,동대 제대학생교우회 사무실에서 그 당시 이제 문리대 측하고 동대측이 모여 서 이제 의논을 했죠.5월 한 초쯤 될 겁니다.두 차례 서 너 차례 그렇게 의논을 하다가 처음에는 동 대에서 아마 하기로 했죠.장례식을.근데 동대가 그때 무슨 축제인가 뭐 그랬고,그래서 하여튼 문리 대 쪽으로 또 진출하기에 동대 진출하기가 좀 나쁘죠.입구가 좁고,문리대가 그럼 그래도 그 다음에 동숭동은 진출하고도 좋고,그래서 동숭동으로 옮겼고.원래는 5.163주년 되는 걸 상징적으로 해서 하 려고 했는데 왜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냐 하면 그 당시 5.16군사정부가 자기들의 그 그 뭐 랍니까.명 분,이념을 아 뭐야 민족적민주주의라고 그랬거든.그니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자기 했는데 전부 다 사이비다 가짜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장례식.즉 말하자면 5.16군사정부에 대한 반대정권이라는 반대를 의미하는 거지요.장례식이라는 거는.그 당시 박 대통령한테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볼 볼 수 있지요. 그 전에 한일회담은 굴욕적이라 해서 했고,또 정부의 부정부패 얘길 했는데 이건 아주 전문적인 5.16 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었죠.그래서 이제 장례식이라는 게 붙여졌고.그고(그러고)그날을 5.16이 난 3주년이 되는 5.16일에 하려고 했는데 얘기가 바뀌기도 하고 그래서 아마 어 연기가 된 거 같습니다.연기가 됐고 그 다음에 동대뿐만 아니라 각 대학,성균관대학,경희대,건국대 이런 데하고도 연락해 가지고 같이 하기로 해서 어 5월 20일 아마 우리학교 문리대 앞에 그 중국집 뭐더라 진아춘, 거기서 아마 여러 대학 학생 대표들하고 문리대 친구들이 모여서 5월 5월 20일 황소식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을 하기로 최종 결정했죠.하고 하루 전날 저 중태하고,그때 송철원도 있었,몇 사람이 모여서, 우리 집에 충무로3가 있던 우리 집에 모여서,이제 그땐 조금 비장했죠.왜냐하면 박정희한테 노골적으 40) 동국대를 잘못 말한 것.

25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49) 로 대드는 거니까.그때 마 그 전만 해도 조금 학생들에 대해서 조금 봐줄 수도 있는 정도에 그런 거 그런데 완전히 정면도전이고 뭐 아주 조직적으로 정면도전하는 거니까 조금 그래 그랬죠.그래서 19일 날 우리 문리대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 집에 모여서 그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20일 날은 다른 대학 친구 들하고 만나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5.20장례식을 치렀는데 아무래도 이게 시발 이 돼서 더 이제 운동을 끌고나가야 되기 때문에 우리 문리대는 배후에서 모 기획하고 모의라 그럴까 요 뭐 거기에만 참여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기로 했었죠.그러고 끝나면 아무래도 대검거령이 내릴 테니까 각자 재주껏 도생하는 그런,19일 날 만나서 그렇게 얘기하고 20일 날 또 타 타교 학생들 을 골고루 나눠서 그 행사를 진행시킬 수 있도록 결정해가지고,그 참여 했습니다.그렇게 하기로 하고 5월 20일 날 저희는 무대 위에 안 나서고 그 그냥 뒤편에 참여하고 있다가 장례식 끝나고 인제 시위가 시작되면서 에 저희는 뒷문으로 해서 저 도피해서. 면담자 :그때 뭐 전날 김중태씨하고 있는 자리에서 뭐 굉장히 비장했다면서요,비장,그때 인제 심경이 아주 비장한 심경이었다. 구술자 :난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나는 어쨌든 간에 그때 뭐 군대 갔다 왔다고 해도 20대 초반인데,하 여튼 뭐 그때 무시무시한 그 군사정권에 아예 정면도전하니 어린 마음에 한편으로 겁도 나면서 비장한 생각도 들고.(웃음)그 뭐 일종의 객기죠. 면담자 :이게 실제로 그 원래 계획했던 것 시나리오대로 안 된 걸로 이제 그날 현장에. 구술자 :5.20장례식 까지는 잘 된 거죠.근데 그때 쯤 그 데모 군중이 많이 모였고 그래서 그게 상당히 파워풀하게 시위가 전개됐으면 했는데 아마 그렇게 못 됐을 거예요.내가 기억으로 어디까지 아마 종 로5가 정도까지 나갔나. 면담자 :예 그 당시에 그 공소장에 보면,공소장, 검찰이 공소장에 보면 각자 준비할 때 그 장례식 준 비를 할 때 송철원이 조사,민생고,학원사찰 학원사찰 성토문을 만들기로 했다는데 이건 실제로 그건 조사를 김지하씨가. 구술자 :조사는 김지하가 썼죠.조사 김지하로 쓴 걸로 안 되어 있습니까. 면담자 :그 이제 공소장에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구술자 :그럼 누가 한 걸로? 면담자 :송철원이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술자 :송철원인 아마 읽어,문리대 친구들 중 그 당시에 저 무대에 나서서 장례식 주도하는 무대에 나 선 건 송철원이가 유일합니다.그건 왜냐하면 송철원이가 그때 아마 조사를 낭독했을 거예요.그리고. 면담자 :조사 작성도 당시 송철원이 한 걸로 되어 있는데 이건, 구술자 :그건 김지하.김지하가 그걸 씀으로 인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인연을 맺게 된 거죠.근데 그 때 기억,나도 나는데 내가 김중태하고 나하고,김지하는 당시에 데모에 관심도 없었고.연극 김지하는 그 당시에 뭐 연극 좀 준비하고 있었는데,(웃음)거기 와가지고,나는 김지하를 그때 처음 알았어요.김 중태는 뭐 옛날부터 이전부터 알았지만.64년 당시에 김지하는 거기서 처음 봤죠.김지하한테 이제 그 김지하 문학적인 문장 문학적인 재질이 있으니까 김중태가 김지하한테 부탁을 했고 그렇게 해서 김지 하가 조사를 쓴 거죠.뭐.아주 아주 조사를 보면 나중에 나오는 <오적>시 비슷한 그런 문구 나오잖아

256 25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요. 면담자 :예.이제 그때 그 공소장이 그렇게 잘못 작성된 있었던 거는 사실과 다르게 작성 작성된 그 이 유는 아마 그때 당시에는 인제 김지하가 노출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구술자 :고거는 아마 그 당시에 나는 이제 그 저 저 6.3때 저거지요.(자료 뒤적이며)그때 아마 이렇게 됐을 거예요.제가 이제 5.20까지 하고 도피를 했거든요.그래서 도피하니까 지금 완전히 운동 학생운 동 그 핵심부가 증발되어 버린 거지요.그럴 때 이때까지 그 학생투위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이가 학생회 차원에서 어 단식농성을 하기 시작했어요.그게 이제 작업하고 그때 이제 김지하가 아주 아주 독특한 미술적(예술적)방식으로 뭐야 대회 농성장을 리드하면서 이게 6.3까지 발 전하거든요.아마 그래서.그 아마 송철원도.송철원.송철원 6.3때 저 계엄령 때 들어갔습니까? 면담자 :아니죠.도피했지요. 구술자 :안 들어갔죠.그 뭡니까.잽혔죠. 구술자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3월 24일 41) 계엄령 터지고,그 공소장이지요,지금 얘기하시는 공소장이. 면담자 :예,세 분에 대한 공소장입니다. 구술자 :아마 당시 김지하는 처음 저거했고 42) 그 당시 누가 진술해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친구가 보호 차원에서 이렇게 했을 거예요.이미 다 까놓고 5.20때 조사까지 낭독했던 송철원이,학 원프락치 조사했던 송철원이,그 사람이 쓴 걸로 해버리면 김지하는 노출이 안 되니까,그래서 그렇게 된 거 아니겠나 싶어요.제가 5.20나고 3월 24일까지 도피생활을 했거든요.저는 그때 묘하게 도피했 어요.저희 집이 충무로3가인데 저희 아버님이 독립군으로 고생 많이 했고,또 6.25때 우리 형이 의용 군으로 끌려갈 걸 숨기기 위해서 충무로3가에 저희 아버님이 6.25이후에 서울에 와가지고 제본업을 하면서 충무로3가에 공장 겸 집을 샀는데,산 게 아니라 지었어요.그때 천정에,지붕 밑에 숨을 수 있 는 공간을 만들었어요.허드레 물건들 갖다 놓고 그랬는데 내가 거기 올라가 있었어요.3.24나서 며칠 도망 다니다가 돈도 떨어지고 그래가지고 살짝 눈치 봐가지고 후배 하나 데리고,송병섭이 철학과 2년 후배 데리고 우리 집 근처 갔더니 저희 형수님이 계셨는데,여기 경찰이 매일 오는데 오늘 없다 그러 는 거예요.우리 어머님도 몸이 불편하셨어요.우리 부모님이 다 연세가 많았어요.다 마흔 몇 살에 늦 둥이로 낳았기 때문에.그래서 집에 들어갔다가 나올려고(나오려고)하는데 경찰이 덮친 거예요.그때 살림집 안에 폭 들어가 있었거든요.그래서 지붕 천정에 다락으로 들어갔어요.형사들이 들여다보고 나 를 못 찾았어요.그래가지고 형사들이 매일같이 지키고 앉아 있으니까 나갈 수도 없고 그래서 천정에 갇혀서 하루하루,3월 24일 43) 그때 청와대 앞으로 시위대가 진출해 가지고 서울에 치안이 완전히 공백 상태가 되었을 때,그때 나왔어요.1주일 이상 천정 위에서 지냈어요. 면담자 :3월 24일이 아니고 6월 3일 계엄령 날 때까지. 구술자 :그래가지고 6월 3일날 그 학교로 쫒아 갔더니 이제 경사(형사)저 문 앞에 형사가 없어서(팔을 좌우로 흔들며),우리 형수가 없다고 그러고 나가라 그래서,나가서 학교에 왔더니 그 문리대 그 농, 41) 6월 3일을 잘못 말한 것임. 42)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의 의미. 43) 6월 3일을 잘못 말한 것임.

25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51) 농,농 당시 농성하던 팀이 계엄령 나가지고 핵으로 학교로 돌아왔어요.그때 제가 학교에 갔었죠. 면담자 :아~~그러면 그 다시 농성 문리대 단식농성 할 때는 거기 못 갔겠네요. 구술자:응?(잘 안 들리는 듯 면담자 앞으로 다가서며) 면담자:농성장에는 가볼 수가 없었겠네요. 구술자 :그렇지요.6.3그 그렇죠.농성장에 마지막 날 가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 갔겠죠.그게 그전까 지는 도피,그땐 뭐 김중태도 없었고,김중태 그 도피하다가 그때 사실 우리가 조금 그래도 떳떳하. 학생운동을 하면서 어떤 여러 가지 떳떳했던 거는,그건 이런 정도 아닌데 요새 왜 뭐,중태가 그 때 그 농성장에 스스로 나왔어요.나와 가지고 자진출두했어요.그 때 그랬어요.아마 현승일도 그 때? 하고 그러니까 사실 옛날엔 김덕룡이하고 별로 안 좋았어요.감정도.왜냐하면 우리는 김덕룡이를 조금 좀 이 저 저 정부 저 친정부적인 걸로,저 뭐 우리 6.3데모하는데 무슨 지나 추 뭐 저 뭐 뭐야 축 제만 열고 말이지,뭐 이대생들하고 무슨 댄싱파티도 그거 뭐 무슨 문리대 뭐 축제 이름이 뭐 있는데. 면담자 :학림제.학림제. 구술자 :아.학림제.학림제.우리가 저 3월 24일 저 극구 뭐야 저 한일회담협정 뭐 한일회담을 하는데 시위를 하는데 그것 그것 뭡니까?축제 열고 말이지.학림제 열고 44).그 결국 뭐 또 대개 서로 안 좋았 죠.그런데,그 그 이제 5월 20일 이후에 완전히 그 지도부가 이제 완전히 다 도피했기 때문에 공백상 태인데 그때 그 바톤을 어 김덕룡이가 얘기가.지금까지도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는 겁니다.그 후 그때 그 김지하가 아주 그 역량을 발휘해 가지고 그 촉발된 단식 방법,그때가 아마 처음이리라.단식이라는 게 아마 학생운동 사이에. 면담자 :예. 구술자 :단식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동정,그 저 국민들의 동정도 얻고,그래서 많은 뭐 심지어 고등 학교 학생들까지도,그때가 경기고등학교도 이제 시위대가 오고 그래서 사실 6.3당일 그 시위는 거의 육이 4.19에 버금갈 정도의 시위였습니다.그런데 그 현장엔 나는 도피중이어서 못 갔고 마지막 그 계 엄령이,아무래도 집엔 계속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하여튼 그 치안이 좀 흐트러진 상황에 학교에 갔더 니 뭐 계엄령이 터져가지고 회군을 해서 왔더라고.그래서 그 이후에 긴 도피생활을 했습니다.계엄령 해제될 때까지.그래도 뭐 긴급까지 하고 했죠. 면담자 :그때 그러면 그 문리대 교정에 인제 갔을 때 그 날 6.3그 밤이었을 거 아닙니까? 구술자 :저요.그날 아마 좀 날이 안 좋았어요. 면담자 :예.비도 부슬부슬 오고. 구술자 :좀 인제 날이 흐린가 비가 내렸던가 하여튼간에.그 당시 저 문리대에 이 저쪽 그 천문대 근처 에 이 건물을 하나 새로 짓고 있었어요.그러니까 거기 거기가 공사장이지요.건물이 덜 된 상황에 있 었기 때문에.거기에 이제 그 비가 오고 뭐 그러니까 농성 그러니까 농성대원들,그 때 뭐 보니까 나는 저 친구가 아주 빤질빤질해서 데모에 참여안할 것 같던 친구들이 다 거기 와 있더라고.우리 철학과에 최창한이란 친구는 그 아주 연극을 아주 녹 나한텐 아주 친한데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이제 반대하고 박정희 찬양하고 그랬어요.그런 친구들도 여기 와 있더라고.그 때 뭐 저 친구는 저런 데 있을 리가 44) 학림제는 5.20 전후인 5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열렸음.

258 25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없을 텐데 하던 사람들이 *으로 많이 참여한 걸로 보아서 그 시위가 상당히 그 방당수(상당수)의 학 생들과 국민들한테 상당히 그 감명을 줬던,농성이 그 단식농성이 많이 그런,준 게 아닌가?그래서 그 6.3까지 가게 된 게 아닐까,그렇게 생각합니다. 면담자 :예.일단 여기까지 하고 좀 쉬었다가 진행하도록 하지요. Tape2. 면담자 :그 6월 3일 그 계엄령이 나고 난 뒤에 그 뒤에도 인제 수배돼서 그 수배됐지 않았습니까?그리 고 도피생활을 했는데 그때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어떻게 도피생활을 하고. 구술자 :도피생활 과정. 면담자 :예. 구술자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1학년만 마치고 군대 갔다 왔고 그 그랬기 때문에 학생 4.19이후 의 학생운동 특히 *이나 이런 것하고 연관이 별로 없었죠.그래서 아마 당시 수사당국에서 나에 대해 잘 몰랐었던 것 같아요 6.3.그런데 몰랐는데 하여튼 3.23때 그냥 일반 데모 참여자인줄 알았는데 쭉 보니까 계속 참여하거든요.그리고 좀 뭐야,사전 뭐 준비과정에도 좀 개입하는 거 같고 그러니까 ) 나고 삼 3.24계엄령 46) 이 난 뒤에 수배령이 내렸어요 나한테.수배령이 내렸어.그땐 이제 아마 5.20 주모자다 이렇게 보고 아마 수배를 마.그래서 그 그때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거 안 잡히라면 그 나름대로 하여튼 좀 아주 먼 옛날 인연을 찾아서 몸을 좀 피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릴 때 내가 저 충무로4가에서 살았습니다.거기 때 어릴 때 같은 친 같은 자랐던 친구가 있는데 이현재라고. 그 당시 서울의대 학생이었어요.지금 의사고.그 그 친구 집이 돈암동에 있었는데,충무로 살다 이사 가서 돈암동에.이 친구 집은 아무도 모를 거 같더란 말이에요.그 6.25전서부터 친구기 때문에.내가 일곱 살 때 만주에서 서울 왔기 때문에 그 뭐 모를 거 같애요.그런데,그 뒤에도 이제 서울 의대 댕기 고(다니고)하니까 서로 알고 지내고 뭐 가까이 지냈거든요.그렇지만 나는 뭐 그러다 군대 갔고 또 와 가지고 이러니까 수사당국이 그것까진 몰랐을 거로 봐 이렇게 내 아마 그럴 것 같아서 그 집에 가서 오래 지냈어요.그 다음에 이제 또,또 너무 오래있기 미안하잖아요.해여튼(하여튼)그 친구는 하여튼 뭐 하여튼 그 또 뭐하고 따닥 바로 우리 옆집에 살아 왔으니까.지금도 붙어 있어.그 다음에 또 송병 섭이라고,어 철학과 나보다 2년,아마 62년 입학생일 거예요.그 친구 집이 그 성북동 어딘가인데,그 다 좀 비교적,아주 잘사는 집은 아니지만,좀 그런 규모 있게 사는 집이었어요.그 집에,그 친구는 이 제 좀 학문에 대한,철학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그 저 이런 일하고 관계없이 거기 저 그런 일로 가끔 가다 얘기도 나누고 또 그랬던 상당히 가깝게 지냈는데 그 친구도 아마 모를 거 같아서 그 친구 집에 도 좀 가 있었고.또 그 다음에 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동창생 김형석이라고 있는데,걔는 나하고 또 그 동네도 같은 동네에 살고 그래서 아주 친했어요.뭐 그렇게 아주 먼 인연에,그렇다고 세상에 알려 45) 5.20을 잘못 말한 것. 46) 6.3계엄령을 잘못 말한 것.

25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53) 지지도 않은.그 다음에 이제 우리 어머니가 영락교회 권사님이었었는데 그 그 영락교회 교인들 집에 도 좀 가있었고.이렇게 해서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무사히 도피를 생활을 했습니다.그때 보면 우리 친척,갈 데 다 갔어요.심지어 저 이 고모님이 그 당시에 아주 노령이셨는데 그 저 경북 안강,경주 옆에 안강에 사셨는데 거기까지 갔다고.가 뭐 뭐 힘 닿을 데까지,뭐 아주 무슨 우리 내 관련 그 친 척,가까운 그 때까지 알려진 무슨 친구,이런 덴 다 갔어요.그런데,제가 그 피한 데는 미처 몰랐던지 하여튼 무사히 도피생활을 했습니다.그래서 검거되지 않고 어 저 아마 계엄령 해제되고 아마 그렇게 됐을 거예요.아마 그 뒤에 아마 그 땐가 아마 해제 뒤인가 그땐가 아니면 저 그 다음인가,그 땐 거 같은데.그때 이제 동대문서에 마지막에 검거되었나 그래가지고.동대문서에.그땐가?그 자 가만 있어 보자.(자료를 뒤적이며) 면담자 :여길 보면 7월 중순에 그 피검되었다고 그랬거든요.7월 중순. 구술자 :어.하여튼 동대문서에 갔다가,하여튼 내가 그 원래 저 자기들 그 당시엔 뭐 신간회(신진회), 그 옛날엔 뭐 신 통 민통련,4.19이후의 민통련,그 뒤에 뭐 신간회(신진회),이런 좌 좌익 경향의 학 생운.서클이 좀 있었거든요.그걸 내 아래 또 다음에 그런 층 그렇다고 또 데모의 주력부대는 경북하 고도 *고 전연 연관이 없는 그러니까 나는 이쪽에 올 독 좀 특이한 존재였죠.그 그 당시 그 학생운 동사회에,하고 뭐 정치학과도 아니고 좀 그렇다고 뭐 경북고등학교도 아니고 그 다음에 뭐 무슨 그렇 다고 경기고등학교도 아니고.그래서 그런지 이 나에 대한 그 자료가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그래서 하여튼 계 계엄령도 해제돼 버렸고 그래가지고 아마 그 뭐 뭐 훈방인가 하여튼 불구속,하여튼 경찰에 서 하여튼 훈방 내린 거 같아.불 뭐. 면담자 :후에 인제 증거불충분으로 훈계 방면되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거든요.근데 그 당시에 그 피검 되었다는 얘기는 자진출두를 하신 겁니까?아니면 그 자수를 한 겁니까?아니면 그 어디서 잡힌 겁니 까?체포된 겁니까? 구술자 :아마 내 자진 출두했을 거예요.그 당시에 내가 이제 도피생활하다 계엄령 해제했다 된 뒤에 그 당시에 내가 학교에서 또 제적을 당했거든요.무기 무기정학인가 제적인가,무기정학 무기정학일 거야. 무기정학을 받았거든요.그리고 뭐 나도 이제 계엄은 끝났고 그리고 또 뭐 그래서 큰 위험은 없겠다 생각해서 아마 자진 출두했다 그런 거 같애요. 면담자 :네.그 당시 그런 저기 저 거기 있었어요. 구술자 :하고 사실 나는 그 5.20과정에도 그렇게 저 저쪽에서 집중해서 주목한 대상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뭐 제대로 나에 대해서 몰랐을 거에요.그래서 뭐 하여튼 뭐 그렇고 또 저 사상경향이 무슨 그 좌편향적인 그런 무슨 흐름이 흔적이 있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고.왜냐하면 그런 조직에 관련한.나 는 민비연에도 가입 안 했.안 했거든요.그래서 아마 아마 그 쪽에서 계엄도 해제되고 그래서 아마 그 때 자진출두해가지고 아마 그 때 며칠 그 하여튼 저 유치장에 있었어요.며칠 유치장에 있다가 조 사받고 나왔습니다. 면담자 :예.그 사이에 이제 도피중인 기간에 도피중일 때 그 때 인제 불꽃회 사건이라고 발표가 된 적 이 있지요. 구술자 :아 그 내가 전에 이야기했지 봤.그건 불꽃회는 아마 언제 터졌지요 그게?

260 25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7월.7월 초순에. 구술자 :7월 중순입니까? 면담자 :초순.초순. 구술자 :하여튼 불꽃회는 저는 신문을 통해서 알았어요.김정강이는 난 별로 모르고 잘 모르고.내가 알 기론 그 3.24그 데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투위를 조직하고 그럴 때 한번 본 거 같아요.그런데 내 그 친구 좀 기분이 안 좋았어요.첫 인상이.왜냐하면 도리우찌 같은 거,떡 베레모 같은 거 레닌모 비슷 한 도리구찌를 쓰고 뭐 좀.저희 집은 뭐 그렇게 반공주의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대해서 저희 아버님, 특히 우리 아버님은 김일성이가 당신이 그 복무했던 조선혁명군,그걸 흉내내가지고 조선인민혁 조선 원래 조선혁명군이거든요.그런데 조선 김일성이 그 소위 그 유격부대를 명칭을 그렇게 조선혁명 조선 인민혁명군인가 뭐 그렇게 붙였을 거예요.그러니까 흉내 낸 거지요.그래가지고 그 조선혁명군이 사실 그 만주사변 때 이제 괴멸되었거든요.근데 그걸 계승한 걸로 이제 해 했고.우리가 인제 만주에서 나 오는 동안에 북한 평양에 좀 몇 달 이렇게 있었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저 김일성이가 초청해서 이제 무슨 요새라고 하는 *비슷한 데 한 번 초청된 적이 있어요.그건 뭐냐 하면 혁명군 선배 저걸로 초 청을 했어요.그때 갔다 와서 갔다 오고 저희 어머님이 특히 기독교 신앙이 독실했기 때문에 김일성이, 그 당시에 그 북한정권이 정식으로 서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그 그 핍박이 있었고 그래서 서 울로 내려왔지요.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하여튼 그 좌익과 관련된,내 좀 알 느끼긴 했어요.진작에 보니까 좀 그런 냄새나고.심지어 너무 나보고 뭐 동무 동무 하고 말이지.그래서 좀 그런 게 좀 전 석 연치 않게 전 생각을 했는데,아 그 친구하고 저 김정남이 하고 뭐 이렇게 불꽃회,내 아마 도피생활중 일 거야,그때 터졌더라고. 면담자 :그리고 졸업을 안 하신 거죠,못 하신 거죠. 구술자 :졸업은,제가 64년에 4학년이었죠.하고 그리고 65년에 또 그 형무소 갔을 때는 한 학기 남아 있었어요. 면담자 :네.그러니까 졸업한 상태에서. 구술자 :그건 뭐냐 하면 6.3계엄령 나고 한번 무기정학 때까지 복적되고 복학되고,그 다음에 또 두 번 째 5065년 8월 달 검거돼가지고,검거되면서 내란음모 이런 걸로 검거되면서,그 때 또 그 때 아마 제 적 처분 받았을 거고 그랬던 것 같애요.그러니까 다시 복학을 했지요,나중에 나중에.그래서,67년, 67년 제가 원래 저 군대 갔다 와도 정말 그 예 없어서도 그 시절에 졸업했을 텐데 67년 8월 그 후기학 기에 졸업했습니다. 면담자 :그래서 인제 그때 그게 인제 6.3사태는 정리되었지만,그 6.3과 관련된 그 신상 문제는 다 정리 가 되었지만 졸업은 못한 상태에서 65년을 맞았지 않습니까?인제 65년 그 8월 달에 대한 그 사건이 제가 보니까 인제 네 가지 사건이 인제 겹쳐 있는 거더라고요.죄목이,죄목도 네 가지고요.이게 뭐냐 하면 내란음모가 있고,내란선동,그 다음에 폭발물사용음모,그 다음에 반공법위반,그 네 가지가 있는 데,그 어쨌든 그 최 선생님은 이 네 가지 건에 다 개입이 되어 있더라고요.관여가 되어 있더라고요. 우선 그 저걸 보면 관련된 거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난 그 사건이 반공법위반사건이지 않습니까?그 관 계된 기록이 있는데 제가 잠깐 고 (자료를 보며)65년 3월 20일 경에 그 문리대 교정에서 그 박재일씨

26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55) 가 인제 제의한 걸로 되어 있거든요.3.24제2선언문을 만들어서 발표하자. 구술자 :3.24제2선언문 얘기죠? 면담자 :예.그래서 그날 저녁에 서대 서대문구 교남동 우학명의 집에서 그 에 참여자가 김영일(김영남), 그 김지하씨죠.송철원,박재일,그 다음에 최혜성 그래서 네 분이 인제 그런 그 선언문을 3.24제2선언 문을 작성해서 인제 배포할 것을 모의를 했는데,그 거기에 인제 뭐 인제 코민테른 문구를 인용했느니 이런 저이 나오지 않습니까?어 요때 정황에 그 이때 고 얘기를 좀 그 기억나는 게 있으시면. 구술자 :예.알겠습니다.에 6.3계엄령이 그 해 7월인가 8월인가,7월쯤 해제되었지요? 47) 그리고 아마 김중태가 한 8월쯤 나왔을 거예요.그래서 이제 오래된 학생운동과 말하자면 도피생활,그 다음에 이제 그 수감생활,뭐 이래서 좀 지쳐서 조금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고러고(그리고)현승일이도 좀 집에 가 있었고,문제가 있던가?그때 방학이 되어가지고,좀 좀 지친 상태이기 때문에,그 마 현승일이는 집이 대구니까 대구에 갔던 거 같고 그래서 조금 이미 운동이 소강상태에 있었는데 그래 방학을 마치 고 65년 신학기가 되면서 3월 24일이 도래하는데 그때 인제 지금 얘기한 김영일(김영남),김지하,박재 일,송철원하고 같이 그땐 중태도 아마 조금 어 그 때 하여튼 조금 쉬고 있었어요,몸도 안 좋고 그 때.쉬고 있어서 저 3.24쉬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 나머지 사람들이,좀 그 당시에서 보면 조금 3.24 에서 보면 좀 2선이라고 볼 수 있지요. *3.241주기를 해서 제2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운동을 다시 재 발동시켜야 되지 않겠는가.그 그 당시 아마 아 뭐 그 때 비준,그 하여튼 저 저 한일 가조인되고,뭐 더 어 *가조인되고 그 다음에 체결되고,뭐 김 JP가 돌아오고,뭐 뭐 그러고 이제 국회에게 비준 뭐 뭐를 기다리고 있었지 않았습니까?그럴 때죠.그 때 뭐 인제 문리대를 그동안 이제 6.3고시까지 6.3 때 너무 인제 그 저거 *제대로 움직이기 좀 어려운 상태에 이제 3.24를 인제 추진했죠.그때 추진해 서 그 김지하,박재일,송철원,나 이렇게 그걸 추진하다 그 때 이제 박 그 우학명,저 송철원이 고등학 교 동기가 인제 우학명인데 우학명이 인제 좀 늦게 대학에 들어왔어.난 잘 몰라요.그런데 송철원이가 이제 동 자기 동창이니까 고등학교 동창이니까 잘 알아서 이 집에 가게 된 거예요.그래 갔는데 그때 인제 아 박재일이가,박재일이 고향이 저 영덕이거든요.영덕 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에 대구에서 그 저 허허 고서점에서 코민테른 관련 책을 하나 샀어요 허허.그 어디서 그저 그저 그렇게 조금 뭐 그런 데 호기심이 있고 그럴 때라서,책을 사 가지고 그 이제 마치(마침)올라오는 날이에요.그 그 시골서 올라 그 학교 학교 근처에.학교에 하여튼 그 올라와서 바로 만났어요 그 때.만나가지고 이제 그렇게 며칠 그렇게 모여서 우학명 집에 갔는데 선언문은 아무래도 이제 당대의 허허 문장가고 문학가인 김지 하가 쓰는 건 당연하죠.김지하가 쓰는데 인제,쓰다가 그 박재일이가 그 선 코민테른 선언문 중에 그 그 무슨 한 대목이 아주 표현이 근사하니까 그 아마 그걸 뭐 그것 참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오는 데,하여튼 그 뭐 하여튼 거에(거기에)있는 문장을 좀 따온 거예요.따와서 그 선언문에 집어넣었죠. 면담자 :거기 그 관련해서 여기 나오는 게 인제 굳센 쇠사슬로 일련의 동남아를 자기 몸에 얽매어 놓은 뒤 이들 제국이 감히 자기의 신성한 의지에 정하지 못하도록,이 문구하고,그 다음에 발톱 끝까지. 구술자 :에 지금 발톱 끝까지,뭐 그런 표현이 이제 젊은 사람 젊은 시대 시절이니까 자극적이고 좋은 거 같아서 이제 넣었던.그렇게 이제 그렇게 해서 넣었죠.그래서 제2이 선언문을 작성하고 그걸 할라 47) 1964년 7월 29일자로 해제되었음.

262 25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고 그러는데 그 그 정보가 수사당국에 유 알려진 거 같아요.그래서 유 3.24데모 제2선언 내외를 못했 죠.그리고 문리대에서 이제 그 그런 데모를 못하니까 이젠 그 땐 법대 쪽에서 이제 이제 그 그 때,또 그 다음에 학원사찰문 이걸로 해서,그 송철원이가 이제 경기 출신이니까,경기고 그 인맥 들이 하고 연결이 많았거든요.그런데 법대 그래서 정성철이라고 송철원이 1년 후배든가 뭐 하여튼 그 친구가 그 5.20데모에 그 학원사찰 관련 부분에 그 나와서 뭘 발표를 했어요.그러니까 그때 참가를 했죠,그 친구는.그런 인연도 해서 그 뒤에 이제 법대하고 교류가 많았어.그러 자연히 이제 문리대가 기진해 있으니까 법대 쪽에서 아마 아마 그 시위를 다시 그,이제 그 뭐 그때 아마 가 가체결인가 뭐. 면담자 :예,가조인 상태에서 구술자 :가조인 상태에서 그건 거 반대하고 뭐 하여간 저 비준반대운동이 주욱 확산되기 시작했죠.법대 에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죽 죽 확산됐는데,그 그렇게 되는 우린 3.24데모는 저 거 저 경찰에 저 하여 튼 사전 저거 돼서,해서 사실 잘 뭐 저거 우학명이가 얼마 전에 죽었어요.근데 난 솔직하게 이런 얘 기 할 얘기는 아니지마는,그 우학명이가 이제 그 그때 김정강이가,아니 그 김정강이 아니고,저 학 죽은 죽은,김 나 뭐죠?경기,서울 문리대 그 학생회장 하고. 면담자 :김덕창?김덕창. 구술자 :아,김덕창.김덕창이가 그때 그 우리 그 하여튼 저걸 개입을 많이 했다고요.저 중정에.내 저 내가 그게 왜 그렇게 됐나 지금 하여튼 그 당시에 우학명이 저게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개 인적으로.그래도 그게 다.하여튼 그때 하여튼 그 3.24제2선언문은 불발로 끝이 났고,그러니까 그때 그 친구한테는 지금은 미안하지만,그 친구가 갖고 있는,김덕창이 그거 저거 있지 않았나?그 당시에 는 그렇게 의심도 했었죠. 면담자 :아,그렇게.충분히 뭐 정황은 있는 거 같고요.에.그때 당시 인제 3.24제2선언문을 작성하고, 격문하고 프린트해서 할려다가 이게 인제 그 중간에 그걸 포기했잖습니까?폐기를 했는데 그게 저 송 철원씨가 하나 갖고 가고,그 다음에 그걸 저 보도를 할려고 저 이 경향신문 권영대 기자한테 줬다 했 는데 그것도 다시 인제 보도 못하게 하고 됐고,그러면 남아 있는 게 인제 우학명이 갖고 있던 그거는 불태워라 이래 가지고 불태운 걸로 되어 있는데 그게 나중에 인제 조사받을 때 가보니까. 구술자 :있었죠. 면담자 :그게 있었단 말입니다.그래서 어딘가 거기에 인제 주위에서 유출된 거라고. 구술자 :예.아마 그래서,나는 하여튼 그 당시에 누군가가 저걸 했다고 생각합니다.근데 그게 누가 참, 뭐 저 그거 고인한테 좀 누가 될까 해서 그 얘긴 안 했으면 좋겠다. 면담자 :그런데 일단은 그 보면 우학명씨도 이때 같이 조사를 받지 않습니까?그리고 이게 다 어떻게 보면 다 공범일 수가 있는데,우학명씨는 인제 기소가 안 되고. 구술자 :에,기소가 안.난 뭐 그 친구가 저 뭐 기소 뭐 조사받았는지도 모르겠어요.왜냐하면 어 뭐 나 중에 보니까 이제 나와 나중에 보니까 이제 기소유예 되어 있더라고요.그런데 인제 결국은 제가 고 당시 과정을 한 번 죽 한 번 내 나름대로 기억을 한 번 더듬어 볼게요.오 65년 3.24지지선언문을 할려 다 아 누출 노출된 거 같아서 취소하고 그 다음에 이제 서울법대를 위시 비롯해서 그 시작해서 비준반 대운동이 전국적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일어나 가지고 중태하고 뭐 저 나하고 송철원이,뭐 또 뭐 박

26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57) 재일이 이렇게 해 가지고 연대,연대에 가서도 농성(논의)을 많이 했는데,연대 그 저 안성혁이,이영철 이,하여튼 연대 또 그때 고대,난 고대 친구들,연대 친구들,그 저 안성혁이니 저 박동훈이 그때 봤어 요.그래서 *인제 비준무효화운동을,8월 몇 일인가 국치일에,8월 그 우리 저 국치일,한일합방된 그날을 기해서 대대적인 이제 비준반대운동을,비준무 그땐 반대도 아니고 다 뭐 무효화운동,뭐 그런 걸 하기로 어 각 대학 간에 협의가 됐 되고,그걸 진행하는 과정에 그에 저 비준반대운동이 격화되니 까 다시 저 박정권이 계엄령은 아니고 그때 위수령인가 그걸 발동했어요.그래서 이제 그.계획했던 그 대규모시위는 수포로 돌아가고 또 도피 도 도피를 하게 되었죠.그래서 저거 당시에 나는 도 김도 현하고 주로 좀 한동안 같이 움직여 도피생활 하다가 김도현이 뭐 아는 친구들 뭐 거기도 좀 댕기다가 (다니다가)또 도현이하고 헤어져 가지고 우학명이가 자기 친구 집이라고 소개해 줬어요.그런데 하여 튼 그때 그 그 집에 가 가가(가지고)내가 버스 칸에서 중정요원에게 체포되었거든요.버스 칸에서.저 거 그 집이 그냥 우학명이 하여튼 그 집 보고 가는데 그 그 동대문을 지나서 신설동인가 숭의동 그 정 도에서 버스 칸에서 막 덮치더라고,딱 옆에 끼고.그 그 버스를 끌어서 저 저 동대문 옆에 있는 파출 소에 갖다 대고 나 파출소로 끌고 들어가 가지고 허리띠 빼고,뭐 하여튼 완전히 그래서 이제 그 그때 검거가 돼 갔는데.내가 도 그날 도현이하고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요.약속을 했는데 그 당시 서로 위험하니까 10분 이상 안 나오며는 무조건 현장에서 떠나기로 둘이 약속을 했거든요.사실 그날 도현이하고 약속을 했거든요.오후에 만나기로.종로5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근데 검거 가 내가 검거가 된 거예요.검거가 돼 가지고 그 당시 동대문운동장 앞에 중앙정보부 분실이 있었어요. 거기 끌고 가서 다짜고짜 그냥,내 평생 그렇게 맞아보기 처음이었어요.한 대여섯 명이 그냥,내 평생 에 그렇게 맞아 본 일은 처음이에요.내가 게다가 내가 좀 학생 때 운동도 좀 하고 그래 가지고 목이 (몸이)상당히 체격이 좋았어요,그 당시에.그 선수는 아니지만 하여튼 각종 스포츠 좋아하기 때문에 당시에 체격 체격이 좋았고,아 그놈 맷집 좋다고 막 줘 패면서 나보고 김도현이 만나는 데 어디냐 이 거야.그걸 걔때 그래 그걸 넣 고비를 넘길라고 하여튼 그 수 죽을 지경으로 맞고 그러고는 안 불었는 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시간적으로 갈 때가 보니까 도현이하고 만나기로 한 시간 한 거의 한 한 시간 반 이상 지났어요.그 얻어맞는 동안에.그래서 나중에 아 뭐 나중에 종로5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고.그러니까 이제 끌고 나를 끌고 거기 벌집 차에 태워 가지고 종로에 가는데,그땐 난 그 정도면 서로 약속을 했으니까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저기 보니까 김도현이가 가는 거예요.이제 내가 안 가기로 해 안 떠나라고 말이야.10분 정도 안 오면 무조건 없어지라고 했는데 아마 그때 우리가 중요 하게 뭐 좀 만나야 했던 게 있었던 거 같애,그 때.근데 보니까 도현이가 거기서 떠 정류장에서 이제 움직이기 시작해 가지고 걸어오는 거예요.하여간 이놈들은 모 글 모 도현이를 모르는 거죠,그 때.그 케 도현이하고 그 버스정류장하고 만나기로 했는데,도현이는 거꾸로 이렇게,우리가 잡혀가 이렇게 가 는데 이렇게 가 보도로 지나갔다고요.그래서 가슴이 철렁했지요.글쎄 그래가지고 중앙정보부에 검거 돼가지고 그 다음에 이제 그 그 그 저 각 대학 대학하고 비준무효화운동 한 거 그거에 대해서 이제 말 이지,조사를 하면서 그냥 내 저 물고문 그때 처음 받아봤어요.물고문 받고,하여튼 좀 괴로움을 좀 당했죠.그래가지고 이제 저 조사를 저 받게 받았는데,서울지검 박종연 검사라고 아주 악질이에요.그 사람한테 아주 혼났어요.그때 보니까 그 3.24선언문이 나왔잖아요.그래서 내가 우학명이를 그렇게 의

264 25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심하게.왜냐하면 김덕창이가 한 거 아니겠느냐.김덕창이가.그걸 무슨 뭐 독 나는 걔가 우학명이가 무슨 돈을 먹고 했다든가 그렇게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우학명이는 그 당시에 좀 뭐 나 그렇게 가난 한 집안은 아니었거든.나 정도 나 비슷한 가정 형편이 나랑 나 정도 비슷했어요.그렇게 잘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궁핍한 것도 아니고.그런데 어쨌든 간에 3.24그게 거기서 튀어나왔고 그거 코민테른, 그 그 사실 뭐 별로 큰 것도 아니었거든요.그건 옆에서 보지 않았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란 말이 야.그걸 그 3.24가 있다,그 선언문을 입수했다 하더라도 그게 코민테른 고 구절에서 고것 따온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그러니 자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그래서 하여튼,뭐 아마 그 것도 적용받고 폭 또 폭발물에 관한 건 이렇게 된 거 같아요.그 비준반대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게 이제 8월 달에 큰 대규모시위를 계획하고 이제 각 대학 만나고 다니면서 그 과정에서 경찰저지선 을 어떻게 돌파 할 거냐 이런 얘기를 하다가 김중태가 이따 무슨 하여튼 그걸 어떻게 돌파하느냐,김 중태가 그 김중태 중심으로 모여서,에 우리 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그때 있었고.김중태가 그 당시에 그 애인이 있었어요.그 애인이 서울 미대 댕겼는데(다녔는데)그 집이 이 쪽 후암동에 있었거든.그 집에서 그랬는가 하여튼 그런 얘기를 또 한 차례도 아닐 거예요.한 몇 차례 그 폭발물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그건 시위대를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그럴 때 내가 그때 내 기억으로 내 내가 항가리 의거 때 항가리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몰로토프 칵테일 아니 저 병에다가 휘발유를 넣고 요즘 말하자면 화약 화 염병이죠.그런 걸 던지는 걸 내가 영화에서 봤다 그랬더니 중태가 그래 그래 하여튼 몰르토프칵테일 이란 거다 그게.그게 그거 하면 그거 하면 어떠냐 뭐 이런 얘기까지 나왔어요.그러다가 이 얘기가 김 도현인가 누군가가 하여튼 발전시켜 가지고 소리만 나고 소리만 나고 살상 뭐 이렇게 피해는 안 나는 이게 공갈탄 비슷한 그런 걸 공포탄 비슷한 걸 그런 걸 만들 수 만들면 어떻겠느냐?그리고 할 수 있 느냐?그 당시에 그 저 데모에는 직접 참여는 별로 안 했던 정치학과 그 61학번 고성광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서울 60년에 물리과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그 다음해 정치과로 다시 시험쳐서 들어왔거든 요.그러니까 좀 그런 데에 대해서 좀 잘 알,이학,공학적인,좀 물리적인 그런 이론 지식이 있기 때문 에,화학적 물리화학에 대해 좀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 물리학을 상의하면 그런 문제가 해 결될 수 있지 않을까?그렇게 얘기가 오고갔어요.그래 가지고 이제 폭발물 관련 그걸 된 거죠.그러니 까 우리가 그 그 8월 말에 그 계획했던 비준무효화,8월 뭐 그때 한 8월29일인가?국치일이 8월29일이 죠?그날을 기해서 이제 서울 각 대학이 연합해가지고 비준무효화투쟁을 했다는 걸 내란죄로 내란음모 로 보고 그 다음에 반공법은 그 자 내가 얘기했듯이 그 저 코민테른 박재일이가 사온 코민테른 그 책 의 선언문의 한 구절을 고런 식으로 좀 바꿔서 표현한 거,그거 가지고 반공법,그 다음에 그 폭발물은 지금까지 내가 얘기한 그런 과정에서 이제 내가,사실 실 그 실 그 실 내가 알기에는 실행되지 않았어 요.폭발물도. 면담자 :실험을 했다는 뭐 얘기도 있던데요. 구술자 :글쎄 그건 내가 그건 도현이가 그 얘기를 했거든요.도현이가 그 얘기를 해서 그 나 고성광이란 친구를 모르거든,그 그 이전에는,그러니까 도현이하고 고성광이 선에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하 여튼 그런 일이 있어가지고 내가 이제 그 항가리 의거 때 휘발유에 모래 좀 같은 걸 섞어가지고 넣어 가지고 불 붙여가지고 그 헝겊 같은 걸 끼워가지고 헝겊 그 해서마로,화염병을 만들어서 그 힘세게

26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59) 저 뭐야 경찰저지선을 뚫자 이런 얘길 했더니 그 그건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김중태가 인제 받았고 그 다음에 김도현이가 소리만 나는 공갈탄 비슷한 걸 만들자,그거 고성광이하고 의논하면 가능할 거 같다,뭐 이렇게 얘기했던 거 같애요.그걸 그걸 우리 집에서 했는지 그 저 손혜영이라고 김중태 그 애 인 집에서 했는지 고건 나 잘 모르겠어요.아마 두 군데서 다 얘기가 있었을 거예요. 면담자 :그러니까 이제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요.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65 년도 사건은 아까 얘기했던 그 3.24제2선언문 사건하고, *사건에,그때 최 선생님 역할이 (판결문 뒤적이며)그때 인제 작성자가 3.24제2선언문 작성자가 기록에는 최혜성,박재일로 되어있거든요.그런 데 실제로는 김지하씨가 구술자 :그건 뭐 김지하 *있었으므로. 면담자 :이때 뭐 김지하씨가 안 잡혔으니까. 구술자 :김도현이도 안 잡히고,김지하도 안 잡혔어.현승일도 그땐 참여 안 했고. 면담자 :예.그런데 그 이중에 인제 그 상당히 구체적인 혐의가 우학명씨가 선언문과 격문을 인쇄해서 경향신문 권 권영대 기자한테 주었다,주어서 보도하게 했다,물론 그것도 인제 보도하지 마라고 나중 에 취소를 했지만.근데 인제 우학명씨는 기소가 안됐단 말씀입니다.그래서 그 그 당시엔 그런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 있었겠네요.그리고. 구술자 :어쨌든 간에 그게 이제 그 이 저 그 참여했던 사람,우학명을 포함해서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 그 얘길 한 일이 없고 또 취 그 후에 그 모임은 취소가 됐고,그 그 3.24선언문은 내가 다 만들다가 만 들었다가 폐기했고,어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경찰당국이 그걸,아니 그 당시에 검사가,아니 정보부가 그걸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단 말이야.누가 하여튼 제보를 했기 때문에 그게 넘어간 거지.그거 어떻게 또 선언문이 있다 하더라도,입수했다 하더라도 고게 고 코민테른 고 부분 고렇게(그렇게)된 걸 어떻 게 알겠어요.그러니까 당연히 그를 의심은 말할 수가 없었죠,그때. 면담자 :근데 이게 인제 3.24제2선언문도 그 당시에 문제가 안 되고 그러니까 거의 뭐 5개월 지나서 그 뒤에 문제가 된 거 아닙니까.그러니까 그것도 좀 약간 좀 의심스럽고. 구술자 :그 당시 군사 어 박정희 정부가 학생시위의 대책이 그런 방식이었을까?6.3이전에도 혹은 그 김정강 불꽃회,또 인혁당 사건,이런 걸 연결시켜가지고 그 학생운동이 이런 좌익세력의 조정을 받고 어 하는 거다.그 그렇게 해서 이제 학생운동을 억압하려고 그런 의도로 정책을 썼죠,그거하고 똑같은 방식인가?그러니까 그 당시 3.24제2선언 때는 그게 시작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거니까 그 사실 법적 으로는 손댈 수도 없는 거고.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 한일회담반대가 이제 비준반대,또 비준무효화, 이렇게 바뀌면서 또 이 전 서울 전체 대학이 이 합동해서 연합해서 연합전선을 펴가지고 저 저 대규모 시위를 무효화 투쟁을 할려고 하니까 이걸 조져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때 거를,그 코민테른 그 거하고 또 다음에 폭발물,그것도 그 당시 이전 학생운동에선 보지 못하던 거거든요.그러니까 충분히 이제 꺼리가 된 거죠.그리고 이제. 면담자 :그러니까 그걸 미리 미리 그걸 이제 다 그 당시에 그 정보를 다 확보하고 있다가 나중에 인제 그 이게 격화되니까 8월 달 되어서 그때 오이 그때 같이 엮은. 구술자 :그렇죠,그때 엮 그것 그건 완전히 저 정보부가 한 거예요.정보부가 나 검거할 때부터 김도현

266 26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이 그렇게 잡을라고 했던 거,김영일(김영남)이 잡을라고 했던 거,그때 당시만 해도 뭐 그게 뭐냐 하 며는 그걸 막기 위해서 아예 이 이제 이제 코민테른 가지고 좀 이념적으로 수상하다 그 다음에 이놈들 폭발물까지 어 위험한 하고,그리고 말이야 한일협정을 무효화시키고 국회를 아예 해산시키고,그런 거 사실 해 국회 우리 수로 아무리 해도 국회 해산이 되겠어요?(웃음)해산시키고 그러니까 이제 내란죄 가 되 내란 음모했다는 거죠.그렇게 몰아 막 만든 거 만든 거죠.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다 무죄가 된 거 아니에요? 면담자 :예.근데 인제 보면 네 가지 죄목 중에 내란음모,내란선동,폭발물사용음모,반공법위반,네 가 지 죄목 중에 마지막으로 인제 그 반공법 위반은 뭐 박재일씨라든가 최 선생님이라든가 다 이 걸려 있 잖아요?걸려 있는데 나중에 이게 다 빠지고 그 송철원씨만 인제 반공법위반으로 나중에 최종적으로 죄목이 적용되더라고요.그게 왜 그런지 좀. 구술자 :가만 있어 보자.그거 진짜 아까 보니까 그렇더라,내 그거 무슨 얘긴지 잘. 면담자 :(판결문 보이며)여기 구체적으로 여기 보시면요.판결문. 구술자 :몇 번 질문인가요? 면담자 :그 인제 20번요. 구술자 :아,우학명은.아,박재일도 마찬가지,유일하게 이 건은,그러니까 이 건이란 건 저 반공법 위 반이죠? 면담자 :예.예. 구술자 :(판결문을 중얼중얼 읽다가)가만 내 생각하기에는 아마 이런 거 같습니다.저 내란음모선동은 이제 그거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8월 달 대규모 이제 연합시위를 음모했다는 거고,그 다음에 폭발물 은 이제 아까 얘기했듯이,그 그건 나 나도 관련되어 있는데,거기 관련된 게 김중태,나,김도현,고성 광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그 다음에 반공법에는 3.24제2선언문작성 때 김지하,김,어 김지하,송철원, 나,박재일,이러니까,그리고 박재일이가 거기서 사온 거란 말이에요.코민테른을 박재일이가 소지하고 있었고,그걸 그 재료를 제시한 게 박재일이란 말이에요.어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나도 처음에는 인 제 반공법으로 몰다가 나는 사실 반공법이 그거 그거 그 장소에 있을 뿐이지,내가 착 선언문을 작성 한 것 당사자 작성자도 아니고 또 내가 그 코민테른을 소지한 것도 아니고,말한 것도 아니고 하여간 나는 사실 거기 빠질 수 있죠.그건 아마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 심의과정에서 그렇게 된 거 같고,박 재일이는 그 저 하여튼 박재일이가 그때 그 코민테른 관련 책자를,그런데 박재일이가 왜 그 반공법에 서 빠졌는지는 고건 나 모르겠고. 면담자 :빠졌거든요.대법원에서는 빠졌어요. 구술자 :그건 모르겠고.송철원이가 이제 그 반공법 관련은 송철원이가 다 썼 한 걸로만 됐다 이런 얘기 아닙니까?근데 그걸 아나 글쎄.폭발물은 나도 관련이 있으니까 나는 폭발물에는 분명히 저 관련이 있어요.김도현,나,에 저 김중태,이렇게 아 고성광.고성광은 그때 뭐 좀. 면담자 :기소가 안 됐지요. 구술자 :그 저 예외이니까,뭐 수사대상도 아니었으니까.그래 그렇게 관련 있으니까 나는 반공법에 관 련한은 그냥 그 장소에 참여했을 뿐이지 그 문장을 작성하는데 내가 물론 거기에 동의했다는 거,그

26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61) 정황은 알고 있었다는 거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여튼 내가 직접적으로 한 거는 아니니까 아마 나중에 아마 폭발물 관련만 넣고 그건 뺀 거고,너무 마 재판부가 봐도 너무 마 너무 과 자기 과하죠.그리고 내 짐작입니다만 김덕창이가 송철원에 대한 그 뭐랄까 그 (원한관계)미움,배신감,이렇게 후배고 믿 고 이제 뭔가 좀 할라고 그랬는데 이놈이 거꾸로 자기를 한데 하여튼 역으로 공격을 해왔으니까 보복 심,그런 거 아닌가.그런 게 작용을 해서 그런 게 된 게 아닌가?글쎄 모르겠네요.그러고 하여튼 어 쨌든 간에 이 당시에 정보부가 개입했고,그때 하여튼 박종연 그때 그 검사는 정보부에 가서 살았어요. 우리 수사 검사가 수사하다가 저 심문하다가 더 중앙정보부 올라갔다 내려오고 말이지.그때 뭐 뭐 지 금도 가깝잖아요.남산.갔다 대개 그 사람 알거야.김덕창이가 관련,저 소위 이건을 만드는 실무선에 김덕창이가 관련이 있었고 그래서 우학명이도 그 어떻게 관련된 게 아닌가,말하자면 우선 자기가 자 발적인 게 아니라 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 아닌가.하고 우학명이도 저 그 *이건 내 짐작입니다 만 혹시 김덕창이가 송철원에 대한 그 미움 때문에,근데 사실 송철원이도 직접 관련된 건 아니거든요, 반공법에.그렇게 그게 그게 난 좀 그게 이해가 잘 안 되고,나도 그냥 하여튼 우학명에 대해서 그런 의심을 했던 건 사실이죠.당시에 의심을 했고 상당한 기간을 난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면담자 :그런데 인제 여기 보면 인제 그 7월 18일로 되어 있거든요.1965년 65년 7월 18일. 구술자 :65년 7월. 면담자 :7월 달에 문리대 천문기상대 옥상 휴게실에서 김중태를 비롯해서 최혜성,진민자,이수용,신춘 자,그리고 동국대 이원범 등 20명이 모여서 각 대학과 6.3동지회 그리고 한학청으로 나오는데요,한학 청.한학청이 다 연합해서 시위를 하자라는 모의가 이뤄졌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그 뭐 그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까? 구술자 :그 뭐 있죠.그런 일이 있는데,그 거는. 면담자 :한학청은 여기서 무슨. 구술자 :그 저 비준 저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어 과정 과 그 뒤에 인제 비준반대운동 하는 과정 속에서 어 뭐 하여튼 각 대학에서 연합해서 하는,하고 그거 물론 처음엔 문리대에서 법대 친구들,또 이대 뭐,하여튼 문리대 그 천문기상 건물에서 했던 건 사실이에요. 면담자 :그런데 그 이거는 인제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거고요,사실은 그전부터 이런 논의가 있었던 걸 로 짐작이 되는데. 구술자 :그 전부터.그렇죠.왜냐하면 한일문제가 끝난 게 아니라 그게 또 체결되어 버리고,우리가 반대 했는데도 불구하고 체결이 되어 버리고 그 다음에 저 비준을 위해서 이제 정부가 비준을 준비하고 있 었으니까 그럼 논리적으로라도 우리가 일관성을 가져 가져야 될 거 아닙니까.그러고 6.3그 전에 64년 운동과정에서 많은 경험도 없고,뭐 하니까 이제 그 다음에 또 다른 대학 학생들한테도 이제 서울대가 상당히 그 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향력이 좀 생긴 거지요,그때만 해도.그때만 해도 이런 연 합,특히 그 김중태는 그 당시에 완전히 중심 리더로서 허허 저 뭐 떴다고 볼 수 있죠,그때.요새 표 현으로 하면.그러니까 그런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각 대학,서울대에도 가까운 법대 뭐,그 밖에 그 다음에 연대,고대,뭐 그 밖의 여러 서울시내 모든 대학,또 심지어 여 여 저 이화대,다 이렇게 모 여서,하도 그땐 하도 우리 계획은 아주 어마어마하게 크게 한 번 할라고 했었죠.어 그게 논의가 상당

268 26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히 오래 진행된 거예요.오래 진행되고 그게 그게 정부는 계속 주시를 하고 있었던 거죠.이놈들 진짜 어떻게 나가나 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뭐 할 거 같으니까 추석 전에 8월 달에 위수령 내리고 검거한 거 지.미리 예 예비검속한거지.그래가지고 그걸 그렇게 3.24때부터 시작해서 이놈들이 이렇게 사상적으 로도 의심스럽고 위험한 방법으로 폭력으로 이런 내란,국회를 해산 할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몰고 간 거죠. 면담자 :그러니까 그 인제 7월 19일 기록되어 있는데요.다음날입니다.그 서울 문리대 부근 종로2가 낙 3동 김도현의 집에서 김중태의 제의로 김도현,최혜성,진민자,신춘자와 밀회해서 여야 국회의원에게 비준반대를 위해 소속 당을 탈당하라는 이제 서신을. 구술자 :아마 그런 것도 있었을 거야. 면담자 :이제 작성하라.이러한 걸 이제 모의를 했던 게 이제 여기 기소 요건 중에 하나에 포함이 되는 데요.거 사실 뭐 실제로 이거 저 서신은 전달이 되었거든요.저 진민 저 신춘자,그 다음에 동국대 그 권석충씨 그런 그때 인제 그 각 대학 연합 그 현역그룹들이 있었죠.그 실제로 그 국회의사당에 몰래 들어가서 그 전달하고 뭐 성명서도 그 내용도 읽고,해서 어떤 그게 예전에 뭐 취재된 적이 있는데요. 이런 것도 기억이 나시죠? 구술자 :예.예.그 그 그러니까 3.24데모가 좌절되고 비준반대운동이 이제 에스컬레이트 되는 과정 속에 서 예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죠.연합해서 역량을 키워서 연합해서 어 국회의원들 국회에 압력을 가해서 비준 못하도록 어 이렇게 노력을 하,그러니까 어 시위도 뭐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죠.그러 니까 그런 노래가(노력이)상당히 그 오래,그 하루 이틀이 한 게 아니라 상당히 오래 그 진행이 되었 다고 봐 생각되었다고.그 당시엔 상당히 그 서울시내 그 대학 간에는 상당히 그 뭐 뭐가 교류가 많았 어요.하고 특히 조직이 이어 각 그 각 대학마다 그 분산되게 이가 아니라 상당히 소조직화되고 연합 연대가 되고 그래서 그때 갔죠.그러니까 그 뭐 그런 일이 다 벌어졌어요.그때 해서 이제 그때 아마 권,진민자가 진민자는 여자고,허허 여자니까 좀 좀 적극적으로 부드럽잖아요,저 저 쪽에서.또 그 또 권석충이 같은 경우도 상당히,그때 저학년이거든요.뭐 그 하여튼 그래서 그 친구들 그때 간 간 거 아 닌가?이렇게 생각이 되네요.그런 일이 있었어.하여튼 분명히 있었어. 면담자 :그게 여기에 나오는데요.7월 22일 6시에 후암동 김중태의 집에서 김도현,최혜성과 8월 칠팔일 칠팔일 경에 각 대학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극 극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데모를 감행해서 정부를 굴복시키자,이제 합의했다 이런 내용이 나오고.7월 30일 아까 말씀하시고 몰로토프 칵테일 얘기는 어 떻게 나왔냐 하며는 7월 30일경 충무로 최혜성의 집에서 재차 밀회를 해서 최혜성이 이후 데모는 2홉 들이 소주에다 모래와 휘발유를 넣고 심지를 만들어 붙여서 점화하여 투척하는 헝가리 의거시의 저항 투쟁방법으로 하자 이렇게 제의를 했다고 되어 있거든요.그러니까 그 소위 말하는 몰 몰로토프 칵 칵 테일을 만들자는 제의를 처음 한 게 최 선생님이 인제 집에서 모인 자리에서 처음 했다는 걸로 나타나 거든요. 구술자 :그 맞어.맞어. 면담자 :예.그러니까 인제 거기서 인제 역할분담을 하기를 인제 김중태씨는 자금조달을 하고 김도현씨 는 그 기술자를 물색을 해서 하자 이랬다가 인제 그 이 폭발 폭음탄을 만들어서 인제 어떻게 쓰느냐?

26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63) 인제 명동극장 앞에 학생들을 이렇게 이렇게 저 사전에 인제 저거해서 집결시켜서 조선호텔을 거쳐서 시청 앞을 진출을 하면 그 그 중에 인제 오십 명을 선발해서 각자 인제 두 발씩 만든,이홉들이 소주 병으로 만든 그걸 소위 화염병을 갖고 있다가 인제 군이나 경찰이 인제 최루탄을 발사하면 그 시계가 이제 흐려진 틈을 타서 그걸 투척하는 걸로 뭐 이렇게 모의를 했다고 되어 있거든요.그런 그런 그 얘 기들이 좀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오 오 하여튼 그때 아마 그 표현 고대로인지는 모르겠지마는 그 비슷한 내용으로 얘기는 됐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 문제는,그 뭐 요새 학생들이 또 보고 마찬가지지만,저지선을 어떻게 뚫고 나가느 냐?저지선을 뚫고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이제 내가 처음 얘기했을 때는 그 소 소주병 같은데다가 휘 발유하고 모래를 넣고 거기 심지를 달아가지고 불 붙여서 던지는 저 몰로토프 칵테일 얘기가 나왔다가 그 다음에 김도현이가 폭음탄으로 발전됐다가 뭐 그렇게 얘기됐고.실제로 또 8월 29일 날 그런 시위 를 할라고 했으니까.하다가 이제 위수령이 때문에 그걸 못한 거죠.내가 알 기억으로는 그런 것 같습 니다. 면담자 :네.좀 그 그러다가 아마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뭐 인명에 피해가 없고 소리가 크게 나서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관들에게 그 경찰관들이 흩어져 도망가는 이제 고런(그런)효과를 볼 수 있는 그 폭발물 을 만들자.이래야 한다.인명 피해는 없고 소리만 크게 나는. 구술자 :아.글쎄 물론이죠.소리만 나는.그러니까 인명피해나 무슨 위험성은 없고,뭐 뭐 뭐 애들 딱총 같은 거,그런 개념이죠,개념이.그러니까 소리만 꽝 나고 공 공포탄 같은 거 있잖아요?군대에서 쓰 는 공포탄이나 애들이 그 딱총이나 그 같이 어떻게 그 물리화학적으로 잘 저거하면 폭음만 내는 그런, 가만 이제 경찰이 저지 뭐야,시위대를 저지하고 막는 그 경찰들이 놀래가지고 그 틈으로 이렇게 치고 나간다 뭐 이런 계획이었죠. 면담자 :그 폭발물은 뭐 상당히 논란이 많은데요.그 다음에 저기 어떤 8월 20일 좀 지나서,인제 한참 그 이후로 인제 한참 지나서 그게 안 된다 하는 게 이제 8월 20일경에 나와 있거든요.최혜성,김도현, 고성광,김중태 등이 밀회해서 이런 이런 폭탄을 만드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이 실험장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결론을 내리고 그 남은 돈 이제 그걸 할려고 했던 그 돈 중에 남은 돈 5천 원을 그 최혜성에게 데모자금으로 이제 그냥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 교부를 했다.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구술자 :예.그 맞 맞습니다. 면담자 :예.그 기억이 나십니까? 구술자 :왜냐하면 그 당시에 뭐 저 주도 뭐 저 시위의 주 멤버가 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인문계 다니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문계 출신 인문계기 때문에 자연히 학생 때 뭐 물리화학 배 워도 건성으로 배웠지 제대로 알고 배운 게 아니거든요.그러니까 자연히 이제 우린 자 기술적으로 그 게 가능하게,하여튼 그 당시 김도현이가 그런 제의를 했고,또 고성광이가 그런 물리학과 출신인 고성 광이가 어 이렇게 잘 알 거 같으니까 얘기를 하다가,아마 고성광이가 그런 얘기를 했나,하여튼 저 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현실적으로 해낼 수 없다 우리가.왜냐하면 실험장소도 없고 또 잘못하다가 사 람 다치면 이거 정말 큰일이니까 우리가 뭐 그런 그런 반국가적인 행위를 할 수 없으니까 자연히 포기

270 26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한 거죠. 면담자 :좀 쉬었다 하죠. 구술자 :허허허.다 되었습니까? Tape3. 면담자 :(판결문을 보면서)또 그 1965년 8월 24일 날 서울 문리대 여학생 휴게실에서 박재일 이수용 진 치남 박영호 그리고 홍사덕.물론 김중태씨도 있었고 그리고 또 여기는 성명미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데요,네 명이 같이 있었다.여기에서 인제 그 6.3때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고교생까지 고등학생까지 동원해서 구국학생동맹을 결성하자,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당시 있었던 12개 대학 연합체를 접수 를 하자,이 조직으로 접수를 하자,그래서 진치남에게 8월 27일까지 연합체 12개 대학 연합체를 접수 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 이런 내용들이 나오거든요.그런데 그런 내용이 좀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아,하여튼 진치남이가 그 위수령 이후에 검거될 때 검거돼서 같이 재판받았거든요.근데 거기 누구누구라 그랬지요? 면담자 :김중태 최혜성 박재일 이수용 진치남 박영호 그리고 조양,홍사덕.이름이 나오는 건 이 정도. 구술자 :홍사덕이도 있었나 그때.조양은 여학생,조양.아아,누군지 알겠다.이제 기억나. 면담자 :법대죠. 구술자 :박영호는 서울고등학교 학생회,김덕룡이하고 경쟁했던 그 친구가 그쵸 그 친구죠?예,그런 거 같습니다.뭐 지시하고 그런 표현은 뭐한 거 같고 그때 그런 뜻으로 구국학생총동맹 이름이 그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비슷한 명칭으로 이제 서울대학생총.아니 서울 고등학생까지 학생총동 맹 비슷한 그런 걸 만들려고 했던 것은 사실인 거 같고,그 수행을 진치남이한테 지시를 했다 그건 좀 모르겠고요,하여튼 진치남이는 법대생인데 그 이전에 참여를 안 하다가 65년 4월 이후에 법대가 활발 하게 운동을 전개했거든요,시위를 여러 번 했고,그때 법대가 상당히 선두에 나서서 했어요.그래서 인제 11개 대학은 문리대는 학생회,6.3때 학생회가 참여하게 됐지만 중심은 사실 학생회 중심은 아니 거든요.그런데 다른 대학은,고대도 아마 박정훈이가 총학생회장은 아닐 거예요. 면담자 :정경대,정경대 학생회장. 구술자 :정경대 학생회장인가 그럴 거예요.총학생회장은 그 당시에 구자신인가 그랬고.그리고 인제 연 세대학은 안성혁이가 공식적인 학생회장이고 6.3때부터 3.24때부터 이제 같이 했고.그러니까 소위 공 식적인 학생회 중심으로 그런 모임이 좀 64년 3.24이후에 있었단 말이에요,그래서 대통령하고 면담도 하고 그랬던 일이 있거든요.그때 이제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그 당시에 서울 문리대 입장은 투위 중 심으로,학생회관을 투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했었기 때문에 서울 전체 규모의 학생조직을 갖기 위해 서는 공식기구부터 포섭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의논을 했을 걸로 생각됩니다. 면담자 :그리고 좀 약간 특이한데요,이게 같은 날 최 선생님을 비롯해서 박재일,김중태,동국대 장장 순,그리고 연세대 정준성,박영남,정정덕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까 얘기했던 그런 계획 하에 인제 시위를 하는데 그때 최 선생님이 그런 이런 걸 제의를 했다고 그래요.최 선생님이 최루탄 한 개를 들

27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65) 고 갔다고 그러는데,거기 최루탄을 보여주면서 소주병에다 모래와 휘발유를 부착하여 점화시킨 후 투 척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자,아까는 그 계획을 다 인제 포기를 했잖습니까?포기했다고 그랬잖습니 까?그런데 뒤늦게 다시 얘기가 나왔다는데. 구술자 :아마 그런 거 같습니다.내가 어느 데모인지 모르겠소만,데모할 때 최루탄이 내 앞에 불발로 굴러왔단 말이예요.그래서 내가 그걸 실험삼아 내가 일단 최루탄이 터지는 건 봤지만 실물은 본 일이 없었는데 그걸 가져왔던 일이 있어요.그래서 친구들 앞에 보여도 주고 그렇게 했던 일이 있는데.그 때 아까 얘기했듯이 그렇게 전국적인 그 조직 학생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연세대에서 적극 사람들을 다 모았을 거예요.그 당시에.연세대도 다 모았고,동국대 장장순이도 모았고,하여튼 했는데.전에 포기 한 거는 소위 폭음탄을 사람한테 상처를 주지 않고,피해를 주지 않고 살상 이런 거 없이 소리만 크게 해서 폭음탄을 만들자고 김도현이 제의를 했는데 고성광하고 의논을 해보니까 굉장히 비용도 많이 들 고 그 다음에 잘못하면 사람 다칠 수 있고 또 한 놈은 뭐 효과가 실험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실험도 해 야 하는데 사실상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걸 인제 포기한 거고,제가 그 이전에 얘기한 몰로 토프 칵테일은 손쉽게,요새 대학생들 다 하잖아요,그 뒤 학생운동에서 매일 보는 게 화영볌 아니네 요.화염병 투척.그건 내가 제일 처음에 제의를 했고,사실 그거는 내 생각으로는 병에다가 불 넣고 무슨 폭발물을 던졌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지만은 그냥 시위대 앞 경찰 앞에 턱 던지면,그 뒤에도 많 이 그런 시위가 있었잖아요 휘발유 병이 깨지면서 휘발유에 불이 붙어도 그게 큰 위험이 있다고는 생 각을 하지는 않았지요.(직접적으로 재연을 하시면서)그러니까 그때 아마 그런 얘기는 했을 거예요.그 때제가 조금 열혈한 면도 없지 않아 있어서.그 당시에 하여튼 항상 고민이 그거야.경찰이 저지선에 서 무릎 꿇려서 끌고 가서,그런 고민을 많이 했고 또 그 당시에 우리가 시도했던 계획했던 그 정도의 일을 벌일라면은 최소한도 경찰저지선을 뚫고 상당한,청와대나 이쪽을 향해서 상당히 진출을 할 수 있어야 된다,하여튼 적어도 4.19상태까지 갈라면은,거기 4.19에 준하는 상태까지 갈라면은,뭐 그래 서 내가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그래 가지고 지금 기억나는데 박종연이한테 수사받을 때 검 찰에서,박종연 검사가 나보고 뭐라고 하냐면 이 새끼 너 죄 또 하나 첨가할 거야 그게 뭐냐면 점유 물이탈죄라하는 거 거든,그게 뭐냐 하면 최루탄이 경찰 소유인데 그걸 이제 쏘다가 불발이 되고 하니 까.그걸 이탈.저기 흘린 돈 주우면 그게 이제 점유물이탈죄거든.그걸 인제 적용한다고 뭐 이 새끼 가 공갈치고 그랬어요.허허허.그래서 내가 속으로 웃고 그런 일들이 있었었죠.아마 그때 이제 그런 저지선을 경찰저지선을 뚫어야겠다는 목적의식하고 그 다음에 그 최루탄을 내가 그날(줍는 시늉을 하 시면서).그런 것들이,아마 내 머리에서 아마 화염병에 대한,몰로토프 칵테일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됐 고 그걸 또 얘길 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돼요. 면담자 :실제로 그 화염병을 만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구술자 :그거 만들지는 않았어요.(고개를 가로저의시면서)왜냐하면 그런 계획을 진행하다가 위수령이 그냥 터지고,터지면서 검거령이 내렸으니까.행동을 위해서 서로 만나고 모의하는 과정만 있었지,그 래서 내란음모,선동 아니에요.그러니까 완전히 실행한 건 아니거든.6.3은 그래도 실행했잖아요?근데 실행하기 전에 계엄령,위수령,그러니까 6.3은 사태가 상황이 벌어진 뒤에 계엄령을 발동한 거고 위수 령은 우리들이 그런 모의과정으로,물론 산발적으로 시위는 계속 있었지요.있었지만 그런 규모로 할려

272 26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던.그러니까 6.3은 에스컬레이터되어 간 거고,이거는 이제 그 과정에서 최고의.의도적으로 만들려 고 했던 거거든.그래서 저쪽에서 알고,수사당국에서 알고 위수령을 발동하고 예비검속을 한 거죠.그 러니까 그래 가지고 잡혀간 거죠.그러니까 그 뒤에 다 도망가기.예비 검속하니까 다 도망가기에 바 빴죠.그러다가 이제 나는 내가 얘기한 대로 그런 식으로 도피하다가 잡혀 들어갔고.김도현이하고 김 지하는 잡히지 않아서 저거 됐고.그렇지.하고 그 진치남이니 그런 친구들은 다 그 과정에 사실 주 류,주도세력은 아니거든요.하지만 연루가 되니까 일종의 구색 맞추기로 법대도 하나 넣고 그러다보니 까 저거 하고,박영호도 막 처음부터 이렇게 시위에 참여한 게 아니라 뒤늦게 6.3을 거치면서,이 친구 도 학생회장에 출마했을 정도니까 좀 참여하고 싶은 저게 있었던 거 같고 그래서 참여하게 했던 것 같 고.뭐 대체로 맞는 거 같습니다. 면담자 :그런데 이렇게 이제 디데이를 8월 29일로 잡고 계획을 차근차근 이렇게 진행해나가던 중에 인 제 8월 26일 날 위수령이 발동이 되지 않았습니까?그때 상당히 좀 실망스러웠겠네요?상당히 실망스 러웠겠네요?하기도 전에. 구술자 :그렇지요.뭔가 이제.나는 그 당시에 조금,원래 성격은 그렇지 않은데 조금 상황에 몰입을 했 다고 할까요?그런 데에서 상당히 열심히 한 편이었습니다.또 저희 집안이 내력이 원래 그래요.저희 아버님도 그러니까 항일운동도 다른 것도 아니고 무장항일투쟁을,하기에는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거 든요?그건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일이니까.그러니까 이제 몰입을 하다 보니까 자연히 거기 해보지도 못하고 도망가는 신세가 됐을 때 좀 그랬죠.마음이 섭섭했다고 할까,좀 불만스러웠다고 할까,그래서 조금. 면담자 :검거된 건,체포된 건,위수령이 발동되고 난 뒤였죠.발동 전이었습니까? 구술자 :그러니까 위수령이 8월. 면담자 :26일입니다. 구술자 :26일이지요.아~(그때를 기억하시려고 애쓰시면서)그때 추석이 아마 며칠 뒤에 추석이 왔을 겁 니다.그런데 중태는 이미 그때 잽혔어요.잽혔고.나는 도현이하고 같이 숨어 다니다가 헤어지고 우학 명이 소개로 어디 다른 데 가다가 체포됐던 거예요.그러니까.조금 전에 뭘 물은 거죠? 면담자 :아,위수령 전에 체포되셨는지 아니면 위수령 후에 체포가 된 건지. 구술자 :위수령 후에 잽혔지.왜냐하면 위수령 후에 검거.아,내가 에피소드 하나 얘기할께요.문리대 에 그 당시에 정보부는 참.심하게 학생 탄압하고 사찰도 심하게 하고,특히 나 김덕창이가 아직,지 금도,김덕창이가 울진에 사람입니다.우리 동향인인데,아 지금도 나는 사실 지금까지도 그 사람에 대 한 이미지는 안 좋습니다.그런데,그 하여튼.조금 전에 핵심이 뭐였죠?아,전에 잡혔냐,후에 잡혔 냐.근데 이 경찰은 동대문서에 나오는 차 형사라고 있었어요.문리대 담당.오래.우리 데모하기 오래 전부터 서울 문리대 담당이었는데. 면담자 : 차 교수 48) 라는 그 분 아닙니까? 구술자 :우리를 사찰하다가 우리하고 친해졌어요.그런데 내가 위수령 발동되고 한.얼마 안 있다가 저 미대 조금 더 나가서,내가 종로5가 근처,미대 더 나가서 그 양반 딱 만난 거예요.내 가슴이 철컹 했 48) 서울대 담당을 오래 한 차익수 전 경감의 별명.

27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67) 지요.그런데 이 양반이 무슨 이유인지 나를 검거하지 않고 야,임마 뭐 하여튼 몸조심하라고 그러고 웃고 헤어졌어요.날 잡지 않고.왜 그랬는지 난 지금까지 의문인데.그걸 내가 중정에 가가지고 두들 겨 맞고 고문 받고 추궁 받고 이랬는데 내가 변명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했어요.난 내가 수배된 줄 몰랐다.그쵸?그건 뭐냐.내가 모처에서 우리 동대문서 문리대 담당 차 형사를 만났는데,그 양반이 아무 얘기 그냥.아무 얘기 없었다.그래 난 내가 수배된 줄 몰랐다,도망간 거 아니다,그렇게 얘기를 했어요.그래서 그 양반이 정보부 가서 혼났어요.그런 에피소드라고 할까 그런 게 있었죠.그런데 그 당시 경찰은 조금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았어요.그런데 저.결국 위수령 나고 도피한 거죠.위수령 나고 도피한 거고,그 전에는 전혀 손도 안 댔어요.전부.손도 안 댔고,다만 키워가지고 그걸 한꺼번 에 씌울라고 했던 거 같아요.하고 모든.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그 당시에 김덕창이가 정보 부 소위 끝.일선조직이거든요.예?김덕창이가.그 친구의 그 저걸로 이렇게 엮어진 거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그 왜냐하면 3 24때 제2선언문 한 거나 뭐 이런 거,하여튼 정보부가 그 당시에 참 우리를 때려잡으려고.그때가 아마 김형욱이 때입니까?그때가 누구 때.정보부장이? 면담자 :그때가. 49) 구술자 :하여튼 그 당시에 모든 사태는 정보부가 다 관장하고 정보부가 시나리오를 만들어가지고 뭐 그 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고 비슷한 건 했죠.했지만,그렇지만 내란에 해당한다거나 진짜 위험 한 폭발물을 사용하려고 했다든가 몰고 그러고 또 좌경세력이념에 경도되었다든가 또 다른 세력하고 연결되었다든가 이런 건 사실 없었어요.사실 뒤에 보면 옛날 4 19직후에 있었던 민통련 또 그때 나오 는 사람들 뭐 김승균,뭐 저 김.하여튼 그런 사람들 사실 한일회담,3 24이후에 우리들을 만나고 심 지어 소위 인혁당 하시는 분들도 괜히 우리한테 짐만 됐어요.우리는 그런 거 상당히 경계를 했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좀 냄새가 나는,좀 좌경한 듯 한,그런 냄새가 나는.난 뭐 잘 모르니까.그런 데 중태는 조금 경북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도 하고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하고 조금 알고는 지냈을 거예요.그런데 김중태도 자기 집이 자기 아버지가 기독교 장로이고 그래서,좌익에 좀 관심은 가졌지 만은 그렇게 깊이 연관되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해요.다 마찬가지에요.박재일이도 경북고 출신이니 까 조금 그렇지만 그런 좌경.김정강이 같은 그런 건 아니라고 봐요.김정강이나 그 당시 또 박 누구 에요?박종열이.이런 사람들 괜히 말이야.뒤에서 숙덕숙덕하고 지들 깐에 무슨 큰 혁명이나 하는 듯 하면서 우리한테 자꾸만 저거 할라고 그랬지.그런데 실지로 그 사람들이 학생시위나 운동을 주도하는 게 아닙니다.지들끼리 가서 자가발전한 거예요.그러다가 김정강이는.뭐 그 사람도 괴상한 사람이야. 내가 보기에는 조금 이거라고(지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듯 한 행동을 하시면서)봐요. 면담자 :정보부에 검거돼서 가서 구타를 많이 당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그때 김도현씨의 어떤 소재 에 대해서 그거 때문에 맞은 겁니까?아니면. 구술자 :왜냐하면 여기 보다시피 쟤네들 시나리오에 폭발물로 관련된 거는 김도현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이거거든요.그러니까 그게 시나리오에 되어 있을 거 아닙니까?그러고 김지하도 저. 3 24제2선언문 그걸 쓴 사람이고 하니까.그러니까 그 둘을 꼭 잡아야 잡아야 이게 시나리오가 제대 로 되는데,날 일단 검거하고,내가 김도현이 하고 있었던 건 아마 알았던 거 같아요.그래서 나를 조 49) 김형욱은 1963년 7월 12일부터 1969년 10월 20일까지 제4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274 26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져 가지고 김도현까지 체포하려고 했던 거지요.왜냐하면 그 폭발물에 관한 건 자기들 시나리오.또 그것도 김도현이가 그런 쪽에 있고 하니까,김도현이를 꼭 잡기 위해서 나를 아주 초기에 아주 나를 엄청나게 줘 패고 그 다음에 물고문하고 그랬어요.김도현 잡으려고,특히 김지하보다 김도현 잡으려고 많이 애썼죠.내가 그래서 많이 시달렸죠.그것 때문에.도현이도,김도현이도 그거 알아요.자기 때문 에 내가,내가 그걸 그래도 끝까지.지금 생각하면 지금 같으면 못 견뎠을 거예요.그 당시엔 내가 체 력도 좋고 해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그렇게 구타를 당하면서 견뎠어요. 면담자 :그런데 그때 저 유명한 오영감인가.오영감한테 조사를 받았습니까? 구술자 :누구? 면담자 :정보부의 그 유명한 오영감이라고. 구술자 :오영감이라고 있었지.거기서 조사 받았지.정보부에선 그 오영감이.줘 패는 건 물론 이제 다 른 놈이지만,그 수사는 오영감이지.그 오영감이 지시해서 고문도 하고,그 사람은 이제 경찰 출신인 데 기술자죠.완전히 김근태.하여튼 이근안이 같은 최고 기술자입니다.일제 때부터. (잠시 전화통화)23:37~23:42 구술자 :그 오영감은 일제 때부터 고등계 하던 사람이죠.그러니까 아주 그런 전문가지.그 오영감이 했 고,그 다음에 검찰에 가면 박종연,아,그 사람(몸서리를 치시면서),둘 다 귀신같았어요,귀신.그 사 람들 얼굴 지금도 떠올리면 몸서리쳐요.하고 또 하나 재밌는 거는,그때 박종연이가 내 담당 검사인데 보조로 박찬종씨가 그때 검사로 들어왔어요.박찬종씨가 보조로.왜냐하면 여러 명이 했잖아요.하여간 박종연이가 다른 일에 바쁘고,하고 그러면 이제 박종연이가 이제 나하고 저 박재일이 하고,김중태는 이제 그 박검사가 맡고 그런데 가끔 가다,다른 사람들은 다른 검사들이 했는데.저 박찬종이가 그때 아주 소싯적이죠.아주 젊은 검사고 검사된 지 얼마 안 됐을 거예요.그때.그래서 그 사람.그 양반하 고 첫 대면은 그때.허허허.검사하고 피고,피의자로 거기서 만났지요.그래서 그 뒤에도 박찬종씨 만 나서 그 얘기 하면 아이구(손을 내 저으시는 흉내를 내시면서)얘기 하지 말라고. 면담자 :재판 과정에서는 뭐 좀 특별히 기억나는. 구술자 :재판 과정에서.내가 저.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이영일이라고 우리 문리 한 3년 선배,2년인가 3년 선배,정치학과,저 나중에 국회의원도 신군부시대 때 국회의원도 하고 한 친구 있 어.그 사람이 전두환이,아니 김두한이 하고 뭐 저거해가지고,그게 무슨 학생.무슨 방위.하여튼. 면담자 :학원방위군. 구술자 :학원방위군인가 뭐 이상한 걸로 뭘 하다가 김두한이 하고 잡혀 들어왔어요.근데 그때 아마 김 두한이하고 김중태가 그때 학교에서 제적된 뒤에 신민당에 그때 좀 개입.관계했나.그래서 하여튼 김두한이 하고도 만나서 그런 얘길 했던 모양이야,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그 사람들도 거기 감방에 들어와 있었거든요.김두한씨 하고 저 이영일이,또 있어요,고대.누구더라. 면담자 :박상원의원.고대 4 19세대 박상원. 구술자 :네.네.그런데 사실 이영일씨가 굉장히 집이 가난했습니다.의정부에 살았는데 정말 천막에서

27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69) 살았어요.그렇게 가난했다고.그런데 하여튼 그 양반 뭐 하여튼.그때 내가 같은 옥사에 나는 이쪽 끝에 있었고 이 양반은 중간쯤에 있었어요.그런데 이제 고(그)앞이 교차로에,그러니까 고(그)앞에 교도관이 지키고 있거든요.근데 한번은 저희 어머니가 면회를 왔는데 그때 이제 미결수니까 저걸 주 고 그랬는데.우리 어머니가 이제 옆에 있던 형무.교도관한테 사정을 하고 뭐 했든지,아마 밖에서 어떻게 좀 했던 모양이야.그때 걱정이 되어가지고 불고기를 해가지고,그걸 이제 교도관 양해 하에 그 러니까 비공식이지요,비공식으로 불고기를 넣어줬어요.그래서 내가 그걸 이영일씨가 나하고 같은,거 기 다 독방이니까 사방에 있었으니까.그 양반한테 그걸 줬더니 어떻게 좋아하고 저거 하는지 말이지 그 양반 그때 그 기억이 지금 아직 에피소드죠.기억이 나고.그때 김두한씨도 이제 내 앞 건물에 거기 에 있었는데 창문으로 이렇게 내다보면 보여요.이 양반은 직접 알지도 못하는데,감방에서 왔다 갔다 할 때 좀 봤고.그 다음에 내가 또 하나 그.참,인간의 사형수의 심정,그걸 내가 본.근데 그건 이 거하곤 관계없는.그때 내가 처음에는 독방에 있다가 또 합방을 시키더라고요.근데 그때 딱 두 사람을 합방을 시키더라고.한 사람은 그 당시에 사형수인데 그 사람은 저 4 19직후에 육사 초병을 죽이고 총을 빼앗아가지고,강도하기 위해서,그러다가 잽혔어요(잡혔어요).잽혀서 사형언도를 받고 있었는데, 그래서 나하고 교도관이 조금 학생이고 하니까 상당히 호의를 베풀고 그랬어요.그래서 그 또 그 양반 이 사형수고 하니까,교도관이 우리한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뭐냐 하면,그 감방 제일 끝에 목욕하고 세수하는 데가 있어요.거기 가서 이제 빨래도 하고 얼굴도 씻고 뭐 목욕은 못하지만 하여 튼 빨래를 하고 이러니까,그걸 허용해주는 게 상당히 큰 시혜를 베푸는 건데,그때 같이 나가서 얘기 도 하고 자기 얘길 쭉 들었어요.그런데 어느 날 같이 둘이 나가서 그렇게 거기 수돗가에서 그렇게 얘 기하고 있는데 보통 사형수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거든요.그 사람이 딱 서 가지고 아무 얘기도 안하 는 거야.딱 서 가지고 있어요.그래서 이렇게 턱 돌아보니까 거기 교도관이 와 있더라구요.그러고 그 사람 얼굴을 보니까 그 사람의 얼굴이 백짓장이에요.그러면서 나보고 잘 있으라고 그러고 갔지.처음 엔 뭔지 몰랐어요.그런데 보니까 형장으로 가는 거예요.근데 그 사람은 군법 위반으로 됐기 때문에 넥타이공장으로 간 게 아니라,어디야.군인이 끌고 가 가지고 앰블런스에 실고 가 가지고 사형. 총 살을 했는데,그때 그 인상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그 백지장같이.그리고 또 내가 고문의 고통이,물고 문 같은 거 당하는 것도 크지만 고문받기 전에 옷을 벗기거든요.그것도 자기들이 벗기는 것도 아니고 나보고 벗으라고 그래요.완전히 나체로.그때 오는 두려움과 그 수치감,참 심각하더라고요.그래서 고문에 대해서 난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고,어떠한 고문도 사실 용납하기 어렵다.옷을 벗고 이.걸 내놓고,그때 수치감과 두려움,오히려 물고문 자체보다 그 두려움이 더 무서워.(그때 경험이 떠오르시 는 듯)좌우간 그런 경험도 해봤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고 지금도 가끔가다 꿈에도 고문 받던 일이 보이고 그래요.그리고 10년,제가 1심에서 받았거든요.10년이나 못해. *.뭐 10년이나 그것도.난 그래도 재판부는 조금.그때까지 재판부는 학생사건에 대해서 참 호의적이었는데 10년이나 되서 참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내가 10년 받았잖아요.김중태가 15년 받고,1심에서.그 당시는,그 당 시에 벌써 64년 때와 달리 완전히 정보부가 사법부,검찰,사법부,경찰 다 휘어잡고 압력을 넣고 그럴 때에요.그래서 1심에서 그렇게 나온 거 아니야.그렇게 생각이 들어요.그렇지만 그러나 그 당시만 해 도 사법부가 완전히 그렇게 죽지는 않았어요.그래서 2심 때 백남민 판사 때,우릴 무죄를 줬고 김중태

276 27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는 감형됐고.하여튼 뭐 2심에서 무죄가 됐죠.아마 다 무죄가. 면담자 : (항소심 재판장인)백낙민 판사가 백남치 의원 부친. 구술자 :아,그렇습니까?그건 몰랐네. 면담자 :학원방위군 사건하고 민비연.2차 민비연 사건,이게 인제 상당히 공통점이 있는데,굉장히 이 제 중형을 구형하고 뭐.거기도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이거든요.그러니까 내란음모 이렇게,내란수괴 이 렇게 했는데 다 보면 최종심에서 다 무죄가 되지 않습니까?그게 약간 좀 하나의 그. 구술자 :그게 뭐냐면 그 당시에 정권이 두려움을 갖고 수단을 쓴 거예요.뭐 비슷한 건 했죠.반대도 하 고 시위도 했고.또 그런.조금 김두한씨도 좀 잘은 모르지만 그런 성격이 좀 짐작은 가고.또 김영 일 50) 은 졸업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그 양반은 뭘 하여튼 좀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고 상당히 활동적이 고,그 양반 꿈이 그 당시에,우리한테.나한테 그때 어느 자리에서 한번,자기 꿈이 국회 진출해서, 하여튼 그 뭐라고 그러죠?방해연설하는 거,영어로 뭐라 그러나,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면담자 :필리버스터. 구술자 :필리버스턴가?그걸 한번 멋지게 하는 국회의원이 꼭 되겠다고 그런 얘길 할 정도로 언변도 좋 고 활동적이고 열성적이고 그런 사람이었죠.그런데 그 사람이.한독당 그거 맞습니다.그렇게 해 가 지고 같이 동시에 다 엮어 들어갔어요.그때 위수령 나고. 면담자 :상당히 6 3항쟁에 참여한,많은 분들이 참여했지만,최 선생님은 3 24부터 마지막 그 위수령까지 끝까지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그 6 3항쟁에 인제 학생시절에 인제 참여하고 한 것들이 상당히 어떤 개인의 어떤 인생관,가치관,그 다음에 이제 삶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거 같은데 지금 되돌아보면 좀 어떻습니까? 구술자 :사실 제가.저희 형님이 독일 유학을 가 있을 때고,내 6.3하고 있을 때,나도 형님한테 영향을 받았고,또 우리 집안이 이제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어렸을 때부터 기독교.그래서 조금 그 당시에 반항심이 좀 있었습니다.그래서 제가 이제 고등학교 때 니체에 심취해 있었어요.그래서 철학과를 갔 고.그리고 그때 꿈은 독일 쪽이나 이런데 가서 공부해 가지고 대학 같은 데 남으려고 이런 생각을 했 었어요.원래.그런데 이제 군대 갔다오면서 최동전이,사실 아까 삼인방이라고 했는데,최동전이가 나 를 운동권으로 끌어들였고,내가 이명현이를 끌어들였고,이명현이는 3 24이때는 아니고 나중에 나중 에 내가.이명현이가 YS진영에서 장관하게 된 건 사실 나 때문에 된 거에요.하하하.내가 뒤늦게 인 제 끌어들인거지.그때 신군부시절에.그때 그랬는데,사실 6 3때문에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우선,결혼도 내가 김중태 동생하고 했고,그 외에 그 다음에 민비연 2차사건이이라고 흔히들 하지만, 그런데 거기에 김중태,김도현이 이후에는 민비연이 없어요.사실 말로 그냥 편의상 별칭을 붙인 거지. 사실 민비연은 그 뒤거든요.그 뒤에. 면담자 :그렇죠.그걸 3차 사건 51) 이라고 하지요. 구술자 :그렇죠.그 뒤에 여러 가지 사태가 있었잖아요.3선개헌이다 그 이전에도 뭐 67년에도 뭐가 있 었고.그러니까 그때 완전히 박살을 낼려고 학생운동세력 내지 반대세력을 부숴버리려고 민비연을 조 50) 이영일을 잘못 말한 것. 51) 1967년 발생한 동백림간첩단사건을 지칭.

27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71) 진 거거든요.그때 민비연 지도교수가 황성모라고 그 양반이 독일유학을 했기 때문에 그 양반을 동백 림하고 연결시켜 가지고,완전히 좌익으로 몰아가지고 뽀갤라고 그랬거든요.그 다음에 그 뒤에 인혁당 하고도 저거 할려고.그때 이제 그 민비연을 죽 잡기 시작했어요.그래서 민비연 초대회장서부터 마지 막 회장까지,이종률,2대회장이 아마 김중태일 거고,3대가 현승일이,4대가 조봉계.조봉계는 한번도 안 했는데 조봉계도 3 24때부터 그 이선에서 활동했고.그 다음에 5대가 박지동,5대가.이 사람들 다 집어넣었잖아요.근데 그 당시에 이종률과 박지동은 동아일보 기자였고 박범진이는 조선일보 기자였고 김중태하고 현승일이,현승일이도(옛날 생각을 더듬이시면서)그때 동양통신에 들어갔든가 안 들어갔든 가 52),하여튼 김중태하고 김도현이,현승일이만 무직자란 말이에요.바로 그 당시에.김도현이는 아마 그 당시까지 제적되어 있었고 김중태도 제적상태였었고.그래가지고 이제 검거가 됐잖아요.그래서 이 걸 동백림 사건하고 연결시키니까 그동안 학생운동 과정에서 재판하면 우릴 변론을 해주던 변호사 분 들이 등을 돌리고 또 야당도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어요.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거예요.그리고 그 당시 기독교인들도 많이 우릴 지원했었거든요.영락교회 여전도회니 그런 할머니들이 우리 어머니하고 인연 으로 많이 돕고 그랬는데 그런 양반들도 다 등을 돌렸단 말이에요.그러니까 누가 변론을 해주는 사람 이 없는 거예요.그런데 이종률이하고 박지동이는 동아일보가,문 누군가 하는 사람이 변호를 해주고, 박범진은 또 조선일보가 자기 사비를 회사가 돈을 내 가지고 변호사 박 누군가가.하여튼 변호사를, 그러고 나머지는 변호사가 없는 거예요.그래서 그때 내가 형무소 나와 가지고 이제.그때 67년쯤 됐 나. 면담자 :예,67년. 구술자 :내가 그때 백기완씨하고도 그 양반하고 그때 자주 접촉을 하고 또 장준하 선생을 자주 접촉하 기도 했어.그때 장준하 선생이 국회에 진출해 계셨기 때문에 장준하선생이 우리한테 백기완씨하고 같 이 장준하선생한테 가서 상황이 이렇다 하고 얘기를 하니까,장 선생이 내가 어떻게 돈을 좀 마련해서 어떻게 해 보겠다,그래서 장준하 선생이 그 당시에 김성곤씨한테 만나서,여보 당신도 젊었을 때 한번 좀,그때는 아마 장 선생도 아마 우리가 좌익 그런 게 좀 있지 않나 짐작을 해서 그랬는지 김성곤이한 테 그랬대요.당신들이 젊었을 때 한번 사회주의 같은데 경도되어 보는 게 젊은 사람이지,그것도 못해 보는 게 무슨 젊은 놈들이냐 그렇게 해서 인제 김성곤이한테 저걸 해서 김성곤이한테 돈 좀 얻어내고 그 밖에 국회의원한테도 모금을 해가지고.아,그때 거금이에요,거금.그래서 문인구,동아일보에서 이 종률과 박지동을 위해서 선임한 문인구하고,조선일보에서 선임한 박범진을 위해서 선임한 박승일이든 가 박 뭐라고 있어,그 분들한테 김중태,김도현,현승일을 같이 좀 변론해 달라고 그때 유료로 돈을 상당한 거금을 그때 평생 처음 변호사비라는 걸 주고 선임을 했습니다.그 뒷바라지를 사실 내가 했습 니다.내가 쭉 그 뒷바라지를 내가 했고.그 뒤에 이제 후배들하고,이 6 3이 사실 6.3이 우리나라 민주 화운동의 시발점입니다.실질적인.실질적인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입니다.우리 때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우리 다음 때 손학규,조영래 뭐 이렇게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그 당시에 상대 같은 건 변방이 에요.변방이고.왜 통혁당 사건 알지요?통혁당 보면 말이죠.문리대는 김질락,김질락 삼촌 김종태, 그리고 아버지 김.뭐.김질락만 문리대고 나머지는 다 상대에요.다 상대라고.그러니까 상대는 데모 52) 현승일은 당시 동양통신 재직 중이었음.

278 27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의 현장에는 나서지 않고 좌경서클활동만 열심히 했고 김종태는 분명히 김일성이하고 연결이 됐었고. 거기까지 또 그랬었던 거예요.그런데 그 뒤에 인혁당 사람들도 있고,하여튼 그 당시에 그 당시까지 우리로 인해서 쭈욱 사실 민주화운동이 학생운동이 흘러나간 겁니다.그렇기 때문에,뭐 요새 젊은 세 대들이 우리들보고 실패한 뭐,아,그 당시 박정희가 5 16쿠데타해가지고 정권 잡은 사람인데 우리가 그만큼이라도 했으니까 그 뒤에 민주화운동의 흐름이 생긴 거지,무슨 뭐 실패한 어쩌고 말이지,물론 현실적으로는 실패했죠.그 흐름이 쭈욱 지나서 80년대 와서 민주화된 겁니다.그리고 YS니,DJ가 다 우리 때문에 반박운동에 나섰던 거고.또 윤보선도 마찬가지고.그 당시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우리 6 3 이 끼친 영향은,비록 운동 자체는 외형적으로 실패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상당히 중요한 운동이었다 고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면담자 :거기에 또 큰 일역을 담당했던 최 선생님. 구술자 :하하.근데 나는 조금 유감인게,우리나라 세대간에도 불행한 세대가 있고 좀 유복한.좀 뭐랄 까 행운이 깃.행운의 세대가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사실 이 요새 386세대라는 사람들,그 사람들이 야말로 대한민국 단물만 다 빨아먹은 사람들입니다.그 사람들이 60년대 태어나서,우리 학생일 때 그 때 태어나서,그래가지고 80년대 대학학생운동하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은 그때만 해도 신군부.광주고 가 요즘 광주고가 386세대를 만들어놨는데,그것 때문에 그 반작용이라 볼 수는 있지만은 어떻게 김일 성이 만세 할 수 있어요?주사파가 될 수 있냐고요.나는 그건 좀 반대에요.물론 북한하고 꼭 반공, 그렇게 꼭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더라도 지금은 그 뒤의 학생운동 특히 386세대는.그 사람들 보세요. 신군부가 자기 원죄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억압도 못했어요.오히려 대량 투옥해가지고 감옥 속에서 일종의 그 학생운동사관학교를 만들었다고요.그래서 그자들이 공개적으로 김일성주의자들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나는 사회민주주의까지는 나도 생각해봤어요.그렇지만 우리 세대는 김일성의 전체주의 소위 소련식 전체주의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고 더더군다나 김일성의 주체사상,그런 전체주의는 용 납할 수 없어요.사실 그건 민주주의하고 배치되는 거예요.그런데 386세대는 그 당시에 얼마나 신군부 가 정치적으로 그랬지만 우학명적으로 상당히 박정희 때 뿌린 씨앗을,중화학공업에 투자했던 그게,신 군부가 거뒀잖아요.그래 경제가 한창 일어나가지고 그때 386세대는 솔직하게 지방대학까지도 몇 개 직장 몇 군데 저거 받아놓고 골라서 갔잖아요.데모 그렇게 실컷 하고도 직장 골라서 갔어요.그리고 YS뒤에 DJ,노무현정권 오면서 완전히 정권까지 찾아 먹었잖아요.그런데 김일성,김정일을 추종하는 건 난 용납 안 해요.하고 그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내가 잘 알아요.나는 3 24에서 6 3으로 끝 난 게 아니라 그 뒤에 소위.아까 얘기했듯이 3차 민비연 사건 뒷바라지도 했고 그 뒤에 또 백기완씨 하고 김도현 뭐 우리 6 3.하고,저 김중태야 주욱 감옥에 있었거든.대전에.그 뒷바라지도 했고.그 래서 내가 김중태 동생하고 결혼을 하게 된 거예요.왜 같이 대전 면회도 가고,같이 뒷바라지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사실 6 3때문에 완전히 인생이,하고 난 심지어 독일 엘버트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기 로.오길남이라고 알죠?오길남이가 그 당시에 우리보다.62년 입학생인데 학생운동에 참여도 안 하 고 독일어를 무척.독일문학 같은 독일어를 하여튼 무척 잘해.이 친구가 그 당시에 엘버트재단이라고 독일 사민당,사민당에서 후진국노동운동을 지원한다고 사람을 파견했는데,그 당시 홀트라는 사람이 파견돼 있어요.그 사람하고 같이,쉽게 말해서 통역을 해줬단 말이에요.그래서 오길남이가 나를 많이

27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73) 따르고 그래서,그 뒤에 하여튼 홀트가 주선을 해서 내가 엘버트재단 장학금까지 받았어요.엘버트재단 이란게 뭐냐 하면 독일 사민당에서 바이마르정부 초대대통령이 앨버트거든요.사민당.그 앨버트를 기 념하는 재단을 만들었어요.그래서 시민정치교육을 한다고요.그리고 기민당에는 저 뭐야.독일 초대 수상 그 양반 이름 붙여서 재단을 만들었고.거기서 저걸 받았는데 그래서 독일 유학을 할려고,그땐 유학 함부로 못 갔거든요.유학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그래서 시험 쳐서 합격을 했고 그리고 그거를 받고 그래서 이제 신청을 저걸 했더니,외무부에 저걸 했더니,정보부에서 나를 딱 불러서 데려 가더라 고.가서 그때 뭐라 그러면 1급 이상 공무원 다섯 명의 보증을 세워라,그러면 보내주겠다.그런데 내 가 어디서 그걸.그 당시에 있긴 있었어요,이종률이가 그때 아마 유신 때 저것도 하고 그랬어요.그 래서 몇 명 모으면 할 수는 있었는데 치사해서 포기했어요.그래서 난 유학 가서 철학공부 해서 대학 교수 해보겠다는 꿈도 잃어버렸고,그래서 할 수 없어 아버님이 하던 제본업 그걸 이어받아서 내가 경 영을 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김중태 동생하고.6 3때문에 김중태 동생하고 결혼을 하고,그 다음에 백기완씨하고 백범사상연구소 하고 또 장준하 선생 도와서 민족학교니 뭐 이런 거 하고 또 장준하 선 생.후배들 장준하선생님 보좌관으로 집어넣고.허현이라든가.그래서 장 선생 죽 돕다가 장 선생이 저렇게 비명에 가시니까 그 뒤에 내가 사실 좀 실의에 빠진 거지.실의에 빠지고 백기완씨하고도 결별 하고.왜?백기완씨 친구가 결국 산행를 유도해가지고 장 선생이 돌아가셨거든.그때 백기완씨 거기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고,그 당시에 언동이 없었고,거기에 대해서 죄책감도 못 느끼는 것 같더라고.그 래서 내가 아,이 양반은 아니다 생각했고,그 이후로는 그 양반하고 싸우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뭐 언 쟁은 좀 했지요.저 김희로라는 사람,백기완씨 친구 때문에 장 선생이 그렇게 됐거든요.사고를 당했 거든요.내가 그거 때문에 언쟁은 있었지만,뭐 그렇다고 해서 저거 한 건 아니지만 내 스스로 좀 마음 이 멀어진거죠.그 양반하고.그래 가지고 이제 그 뒤에는 저 김덕룡이가 YS비서실장을 하면서 그 당 시 재야민주화운동을 하고 하니까 거기에 인제 하고,저 광주 사태 이후에 서울의 봄이 왔을 대 YS가 자기를 위한 일종의 젊은 참모들 그룹을 하나 만들었습니다.낙원동 아파트,옛날 아파트에 사무실이 있었는데,그때 인제 창당기에 김중태가 미국서 돌아와서 오고,물론 김덕룡이가 중심이 됐었고 김덕 룡,김중태,그 다음에 이영희.법대의 이영희,그리고 내가 끌어들여서 이명현이 오고.하여튼 그밖 의.하여튼 그 YS를 위한 그런 어드바이스 그룹을 운영했었지요.그러다가 뭡니까?12.12나고 뭐 이 러니까 또 엉망이 된 거지요.하하하.그래 가지고 YS.그러니까 뭐 그 당시에 YS도 좀 돕고,신군부 때 YS가 그러고 있을 때,민주산악회도.내가 민주산악회도 시발은 사실 내 권고에 의해 시작이 된 거예요.내 자랑이 아니라,그때 김덕룡이 하고 그때 실의에 빠져 김덕룡이 무슨 술집도 내고 그랬어 요.최기선이 하고 YS비서진들이 술집도 내고 그랬는데,YS저게 좀 풀린 뒤에,내가 옛날 장준하 선 생하고 참 어려울 때 등산을 많이 다녔어요.사실 내 장 선생 모시고 등산을 많이 했어요.장 선생이 등산을 한 이유가 있어요.장 선생이 그때 재야운동하면서 어려울 때 전국으로 산을 자주 다녔는데 그때 제가 많이 동행했어요.거의 다 거의 동행을 했지요.그리고 제가 원래 산도 좋아하고,사실 내가 장준하 선생 모시고 전국 안 가본.상당히 많은 곳을 가봤지요.그때 내 경험을 되살려 김덕룡이한테 YS한테 등산을 하시게 하라,그러고 그룹이 YS그룹이 등산을 하면 조직의 결속,그 당시 신군부 탄압 속에서 조직을 유지하면서 저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등산이 제일이다,내가 김덕룡이한테 그렇게

280 27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권유했어요.그러니까 진짜 김덕룡이가 YS를 모시고 등산을 하기 시작하다가,그게 이제 민주산악회가 되고,발전을 한 거지요.그래서 우리나라 민주화에도 상당히 기여를 했고,그 다음에 YS집권에도 간 접적이나마 조그만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하여튼 그 뒤에 YS는 주로 저걸 했고,그래서 그 덕으로 그나마,나는 솔직히 남한테 뭐 이렇게 이런 거 잘 못해요.그런데 덕룡이가 그때 저 통일원 쪽에 가보라고 그래서 통일원에 한 5,6년 있게 된 거지요.허허,그렇습니다.그러니까 나는,내 인생은 3 24때문에 인생이 항로가 바뀌어졌지요.그러고 사상적으로도,난 처음에는 소위 실 존주의,즉 말하자면 인간의 삶,특히 기독교를 집안에서 강요하고 그랬는데 거기에 좀 공감했고.사실 제가 미국에 대한 반감을 좀 갖고 있었는데 근데 왜 3 24때 보면 미국이 배후에서,케네디 정권이 한 일국교정상화를 종용한 거거든요.그런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그래서 사실 3 24에도 참여를 하고 저 3.24도 당연히 참여하고 그렇게 됐는데,처음에는 사실 전 정치적인 것, 정치적 관심은 별로 없었어요.나는 원래 철학적인,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쪽에 대해서 공 부하려고 생각도 했고.그런데 저는 3 24이걸 하면서 사회문제 정치문제 또 경제문제에 대해서 저절 로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맑스에 대한 공부도 해봤고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하지만 거기에 빠 지진 않았어요.그러고 나는 참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살 게 된 거,그게 결국은 하나님 덕이라고 생각하고,참 우리 민족 보세요.우리가 중국의 속국으로 수 천 년 살다가 간만에 뭐 독립운동이라고, 독립협회가 뭡니까,독립운동이 뭡니까?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지요.그러다가 그새에 친일,일본을 업 고서 그 운동을 하다가 또 일본,친일이 되었잖아요.그래가지고 근대국가 건설에 실패했잖아요,그래 서 우리 국민이 이 꼴이 된 건데.그나마 그래도 우리가 이 정도까지 왔다는 거는 많은 우리 조상,선 대 분들의 고생과 인내 또 해방 이후 주욱,나는 그래서 다 긍정하는 편이에요,요새는 다 긍정하는 편 이에요,박정희도 충분히 기여를 한 거지요.우리가 이만큼 경제적인 토대 위에서 살 수 있는 건,박정 희의 독재는 비판받아 마땅하지요,그러나 기여를 했다고 생각을 하고,또 역사관도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역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지금 보슈.우리 가 언제 옛날 소련이 저렇게 망하리라 생각했으며 오늘날 미국이 저런 경제적 총 위기에 봉착하리라 누가 생각을 했어요.역사라는 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되어가는 거예요.젊었을 때 생각이 많이 바뀌 었지요,지금은.아마 늙었다는 징조겠지요. 면담자 :예. 구술자 :됐습니까? 면담자 :지금 이게 작동되는 겁니까? 카메라 :아,테잎을 바꿀까요? 면담자 :지금 인제 테잎이 끝나고 저거 했거든요.그러니까 이제 세 시간 동안 하셨습니다.말씀을 세 시간 하셨는데요.조금 더 할까요,아니면. 구술자 :좋으신 대로 하세요.제가 뭐. 면담자 :많이 좀. 구술자 :이왕 뭐.6 3때문에 내가 누구한테 얘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검찰에서 조사 받거나 정보 부에서 조사받을 때 외에는 누구한테 얘기해 본 일이 없어요.아마 신 기자하고는 그런 일이.

28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75) 면담자 :예전에 한 번 인터뷰했었죠. 구술자 :한번정도 있었고 난 별로 얘기해본 일이 없어요.그런데 이왕 이렇게 내가 살았던 길이고 내가 걸어왔던 길이고 그 시대에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이고 또 흘러왔던 과정이니까 이왕 얘 기한 김에 하여튼 열심히 할 테니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내가 요새 좀 이상해져 가지고 소변이 자주 마려워요.

282 27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7)면담후기 최혜성 전 통일원 연구위원은 1964~65년 6.3항쟁의 전 과정에 참여한 이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과 관련 해 구술이나 글을 남긴 적이 없다.면담자가 1994년 인터뷰한 적이 있었으나 30분 안팎 동안 짧게 소회 를 피력한 데 그쳤다. 그는 청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특히 왼쪽 귀의 청력이 약해 거기에다 보청기를 하고 있었다.그래서 면담자와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보청기를 한 왼쪽에 면담자가 앉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서였다. 면담은 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실에서 이수용 전 연산건설 사장에 대한 구술이 끝난 뒤에 시작되었다. 이번 구술에서 그는 기억나는 모든 것을 말하려고 노력했다.구술 시간도 3시간에 이르렀다.청각 장애 때문인지 그는 시종일관 높은 톤으로 말했으며,성급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는 태도를 보였다.젊은 시 절 덩지가 크고 강건했다는 그는 14년 전보다 눈에 띄게 노쇠한 모습이었는데,이는 세월의 연륜보다 6.3 항쟁과 그 후의 치열했던 그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는 6.3항쟁의 리더였던 김중태씨와의 각별한 인연(그는 김씨의 여동생과 결혼했다)으로 인해 6.3으로부터 비롯된 민주화 여정에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연루되었다.나이 들어 나타난 그의 청각 장애는 6.3항쟁 때 조사 과정에서 받았던 고문수사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구술을 통해 베일을 벗은 사건 가운데 하나가 2차 민비연사건,몰로토프칵테일사건 등으로 불린 복합사건이다.이 가운데 반공법 위반 부분,즉 3.24제2선언문 사건은 몇몇 관련자만이 알고 있었던 행 위였다.이것이 수사당국에 노출된 것은 내부에서 제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그는 그 혐의를 우학명에게 두었고,이를 부추긴 사람이 김덕창이라고 주장했다.우학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김덕창은 현재 생존해 있다(김씨는 과거 이와 관련한 면담자의 인터뷰 요구를 거절한 바 있다). 이번 구술에서 실명으로 거론된 두 사람의 신상은 당분간 공개 대상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김덕창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설득을 통해 스스로의 입으로 6.3항쟁과 관련한 자신의 사찰활동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8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77) 6.3항쟁 구술기록 상세목록 1)면담정보 면담주제 6.3항쟁 주요사건 구 술 자 현승일 면 담 자 신동호 면담일자 (일) 면담장소 현승일선생님 자택(정릉동) 면담차수 1차

284 27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면담일지 구술자 성 명 : 현 승 일 (한 자 : 玄 勝 一 ) 면담자 성 명 : 신 동 호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촬영자 성 명 : 정 선 호 (소 속 :와인미디어) 녹취자 성 명 : 엄 경 식 (소 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일 시 장 소 면담 일시 및 장소 1차 (일) 현승일 총장님 정릉동 자택 2차 3차 산출물 녹화테이프 녹취문 DVD 사진 등 관련자료 3개 1부 2장(영상 및 음성파일) 사진 2매 현승일 총장님의 일정상 하루에 면담이 이루어져야 하는 면담상황 설명 상황이었기에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진행하였음 현승일 총장님께서 자료를 미리 준비해 보여주시는 등 면담 이 알차게 진행되었음 비고

28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79) 3)구술자신상기록카드 성명 (한글)현승일 (한자) 玄 勝 一 나이 66 자택 :서울시 성북구 정릉4동 대우 A 주소 생년 월일 전화번호 : 직장 :통섭정경연구원 전화번호 : 출생지 경북 칠곡 결혼연도 1973 이름 관계 출생년도 직업 비고 현목영 딸 회사 임원 미국 골드만삭스 부사장 가족 현목유 딸 회사 임원 미국 메릴린치 부사장 현진혜 딸 학생 미국 UCLA 현진아 딸 학생 미국 UCLA 경북중학교 학력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미)유타주립대학교 사회학과 ph.d. 1.동양통신사 외신부기자 2.국민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3.KoreaHerald 객원 논설위원 주요 약력 4.국민대학교 총장(5대,6대) 5.한국사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 6.한국대학교육협의회( 大 敎 協 )회장 7.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 8.국민대학교 학교법인 이사 9.(사)통섭정경연구원 회장 10.대구 경상고등,경상여자고등학교 2학년 영어 보충교사(봉사)

286 28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4)검색어/상세목록 검색어 -경북고,문리대,정치학과,6.3,4.19,5.16,한일문제,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 위원회,민비연,3.24,황성모교수,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난국타개궐기대회, 괴소포,학원사찰,YTP,계엄령,동대문서,불꽃회,위수령,몰로토프칵테일,사회 안정법,보안처분,민주화 상세목록 Tape 항쟁 참여 배경(00:00~15:05) 시위 준비 및 현장 지휘(15:06~46:29) 3.괴소포 사건과 학원사찰(46:30~56:47,Tape2.00:00~02:41) Tape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시위(02:42~25:12) 5.도피와 자진출두,그리고 6 3계엄령(25:13~53:55) 6.불꽃회 사건에 대한 기억(53:56~58:43) Tape3. 7.누더기가 된 공소장(00:00~11:45) 8.민비연 사건과 재투옥(11:46~28:35) 9.6 3항쟁과 삶의 변화(28:36~41:55) 항쟁의 의의(41:56~45:30)

28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81) 5)예비질문지 현승일 선생님. 6.3항쟁 구술 증언채록 예비질문지 <1>3.24시위의 배경,조직,전개 과정 년 6.3사태 당시 김중태씨 후임으로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하 민비)회장,김중태씨가 회장으로 있 던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이하 투위)의 부위원장 신분이었습니다.3.24시위와 민비,민비와 투위 의 관계,그리고 김중태씨와 현 총장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보충질문:민비,민통련,신진회 등 서울문리대의 전통적인 학생운동권과의 관계,참여자의 면면) 2.현 총장님께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3.당시 정국에 대한 학생운동권 일반과 3.24주도세력,그리고 현 총장님의 인식은 어떠했으며,차이점이 있었습니까. (공소장 내용:현 정치정세는 부정부패와 무능독선의 극에 달하였고 경제질서는 그 정책빈곤으로 파탄에 이르러 천정부지의 물가고로 민생고가 극심하여 민족분열의 위기에 놓여 있고 한일회담은 매국적 굴욕 회담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화하는 일보 전에 있다고 망상단정하고 현사태는 정부전복의 요인이 됨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형법87조 내란죄 위반 부분) 시위가 처음부터 서울문리대,고려대,연세대의 동시다발 거사로 기획되었나요?3개 대학 연대시위 를 결정한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시위 준비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과 그들이 한 역할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김중태가 조직과 고려,연세 등 타교와의 연락 등 중심 역할을 하고 현승일이 현장 지휘,최혜성이 자금, 김도현이 선언문 등 문건 작성을 분담,한 학년 아래인 박삼옥 박용한,김헌출,전계수,이현배 등도 각 각 역할을 맡아.-6.3동지회,6.3학생운동사) (보충질문:61학번 중심의 주도세력뿐 아니라 선배그룹이나 후배그룹의 역할에 대한 인지 여부,시위 모 의 장소 등) 6.그 중에서 김중태,현승일,김도현 3명이 특히 유명해진 까닭이 무엇입니까?세 분 사이에 다른 역할

288 28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분담은 없었습니까? 시위 준비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정보 누설로 인해 3월 17일 결행을 24일로 연기한 과정,이케다 이완용 허수아비 제작과 학내 반입 과정 의 어려움,3월 23일 민비 주최 한일관계 강연회 때 학생들의 반응 등) 시위 때 제국주의자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을 거행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고,어떤 효과를 노 린 것이었습니까? 9.처음 시위를 현장 지휘할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10.시위대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는데,현 총장님께서는 어디서 연행돼서 언제 나왔습니까? 시위 준비 때 거사 이후의 일정이나 지침을 미리 수립했나요? 시위 다음날 정부가 사태 수습을 위해 서울시내 36개 대학 학생대표 92명을 초청했고 서울문리대 에서 김덕룡(학생회장)김용환(정치학회장)등이 갔는데,시위 지도부에서 이들과 사전 협의나 교감을 한 바가 있었습니까? 성토대회와 3.26시위 등 3.24이후 3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투위 지도부의 역할과 현 총장께 서 하거나 겪은 일을 기억을 말씀해주십시오. <2>괴소포 사건과 YTP사건 14.4월 들어 시위가 잠잠해지더니 괴소포 사건이 터지지요?현 총장께서 4월 8일 오후 4시쯤 받아서 제 일 먼저 이를 폭로했는데,그때 겪은 일을 얘기해주십시오. 15.4월 들어 서울문리대에서 4.17한일회담성토,4.19영령추도식,4.20(4.19네 돌 기념식),4.21시위 등 집 회 시위가 계속됐습니다.이 가운데 4.19영령추도식은 학생회가 주최했는데,당시 투위와 학생회의 관 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나머지 투위 주최 시위의 진행 과정,현 총장 및 투위 지도부의 역할) 16.4월 23일 학원사찰조사위원회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개최했습니다.당시 학원사찰과 YTP조직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28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83) <3>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17.당시 공소장에는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시위를 5월 14일 기획해서 16일 확정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실제는 이와 다르지요? (공소장 내용:피고인 김중태 동 현승일은 1964년 5월 14일 오후 3시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출입문으 로부터 약 50미터 상거한 잔디밭에서 정권타도에 관한 모의를 한 후 시내 각 대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동년 5월 16일 오후 7시경 동교 월편 진아춘 중국요정 2층에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대표로 피고인 김중태,동 현승일,동 김도현,공소외 송철원,동 최혜성,동 이원재가 참석하고 동국대학교 대표로 공 소외 장장순,동 박동인,성균관대학교 대표로 공소외 박형길,동 박광렬 외 4명,건국대학교 대표로 김 영목,동 백승홍,서울사범대학 대표로 공소외 김길렬 외 2명 등 21명이 참석 회동하여.)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기획하게 된 배경과 계기,준비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5월 초 동국대 박동인의 민비연 방문,애초 황소식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아이디어의 출처, 5월 16일에서 20일로 거사일 변경 사유,대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이하 연합회)의 조직에 관한 사 항 등) 19.공소장과 실제 상황에서 주동자의 역할이 다르게 나와 있는데,그렇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공소장=(준비)김도현 선언문 결의문 한일회담-5.16성토문 작성,송철원은 조사 민생고 학원사찰 성토문 작성,장장순 회식진행총사회관,최혜성 자금조달 유인물 인쇄,현승일 공보관계 및 한양대생 8000명 동원,김중태 연대 성대 동대 등 각 학교별로 최저 1000명의 학생 동원,이원재 서울대 학생 동원,김 용술 모의관 두건 죽장 구입/(진행 담당)송철원 조사 낭독,이재우 5.16성토문 낭독,김영목 한일굴욕 회담성토문 낭독,정성철 학원사찰성토문 낭독//(실제 진행)박동인 선언문 낭독,민승 결의문 낭독,김 광렬 5.16성토문 및 민생고성토문 낭독,송철원 조사 낭독) (실제 상황=조사는 김지하가 작성,선언문은 김도현 김정남이 초안,정세연이 작성한 대회사를 장장순이 낭독 등) 20.시위 현장을 언제 떠났으며,떠나기 전의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원래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로 했는데,이는 누가 진행하기로 했습니까?) <4>문리대 단식농성과 6.3사태 21.시위 현장을 떠난 후 주로 어디에 숨어 있었으며,김중태 김도현 등 도피자 및 학내 단식농성 주도자 와 어떻게 연락을 취했습니까? (보충질문1:김중태를 숨겨준 송홍민은 범인은닉죄로 기소됐는데,나머지 수배자 2명의 도피를 도와준 사 람은 왜 기소되지 않았습니까.)

290 28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보충질문2:투위 지도부가 송철원 린치사건,5.25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서울문리대 단식 현장에 어떤 지침을 내렸습니까?) 22.연합회 또는 투위는 난국타개궐기대회를 주도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가칭 한국학생총연합회, 이하 한학련)과는 어떤 관계였으며,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습니까? 23.당시 김중태,김도현,그리고 문리대 후속 지도부와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입장차는 없었습니까? 24.수배 중이던 현승일,김도현,김중태의 경찰 자진출두를 결정한 배경과 이유가 무엇입니까? 25.경찰에 출두한 뒤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보충질문1:6.3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언제 알았고,그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보충질문2:6월 3일 일제 거사 계획은 투위 지도부가 미리 설정하고 확산한 것이었습니까,아니면 지도 부와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5>민비연 사건 26.재판 중에 터진 불꽃회 사건과 (1차)인혁당 사건 때 이와 관련해 따로 조사를 받았나요?주로 어떤 조사를 받았습니까? 27.계엄사보통군법회의 검찰부가 작성한 공소장을 해엄 후 민간 검찰부가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죄명만 내란 에서 소요 및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으로 변경하지요.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보충질문:수감 생활 및 재판 과정에서 인상적인 경험들을 얘기해 주십시오.) 28.경찰로부터 5.20장례식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한다는 서면 통고를 받은 적 있습니까? 장례식 전인 5월 18일 집회신고서를 작성해 동대문경찰서에 등기우편으로 발송한 사실을 기억하 십니까? 30.민간 검찰이 공소 내용을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무죄를 받게 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 까? (무죄부분:금지 통고를 받고도 집회 시위를 감행하였다는 점 및 소요의 점.선고내용: 일자로 서울형사지법 합의1부 징역8월 집행유예 2년 선고) 31.2차 민비연 사건(일명 몰로토프칵테일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29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85) 6)녹취문 현승일 선생님. (사)현대사 기록 연구원 송철원이사장 모두 발언 사단법인 현대사연구원 송철원입니다.본 법인은 2008년 10월 10일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서 녹화 구술 사업을 2008년 11월 22일부터 착수하게 되었습니다.제 1차 사업으 로 당시 학생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여덟 분을 대상으로 녹화구술 작업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작업은 2,3차에 걸쳐서 중요한 인사,이번에 구술작업에 빠진 분을 대상으로 할 것이고,더 나아가서 각 대학을 중심으로 한 활동사항에 대한 구술 작업을 병행할 예정입니다.지금 예정으로는 앞으로 이 작업이 1년 정도 계속될 예정이고,그렇게 됨으로써 자료를 정리하면 6.3학생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실상을 상세히 파악하고 그 자료가 후대에 남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감사합니다. Tape1. 면담자 :6 3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님에 대한 구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은 일 10시 15분,면담 장소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 그 현 총장님 자택입니다.면담 자는 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 신동호입니다. 면담자 :선생님,경북고등학교를 나오시고 그 다음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입학하셨는데 특별히 정치 학과를 지망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구술자 :그냥 막연한 동기죠.어떻게 정치가가 돼야겠다는 막연한 동기고,그 당시 우리 고등학교 때 아 주 좋은 선배들이 정치과를 많이 갔어요.그래서 나도 저 같은 선배처럼 되어야겠다,그런 것이었죠. 면담자 :1년 늦으셨죠.그렇게 된 과정이? 구술자 :60년도에 제가 정치학과 시험을 쳤는데 불합격했어요.그리고 제 2지망으로 중문과에 합격을 했 습니다.그래서 그 당시에 전과제도라는 게 있었지만 전과라고 하는 게 아주 힘이 들어서 제가 재시험 을 쳤었죠. 면담자 :60년도에 ),4 19의 시발점인 2 18이 현 총장님과 관계가 있는 경북고에서 일어났고,그리 고 4 19( )주도세력이라던가 그 뒤에 있는 민통 활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선배들하고 관계 가 있는 분위기속에서 입학을 하셨는데. 구술자 :맞습니다.네. 면담자 :그런 것들이 선생님한테 영향을 좀 많이 미쳤습니까? 구술자 :그렇다고 볼 수 있죠.네. 면담자 :그래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겠네요? 53) 2.18대구 학생의거( )

292 28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렇죠.그렇죠.네.그 우리 가까운 선배들이 민통에 많이 참여 했었고 또 우리 바로 1년 후배 가 2 18을 하고 이렇게 해서 앞뒤로 그런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경북고등 출신들한테는 많이 있었습니다.그래서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는 게 생소한 일이 아닌 그런 분위기였었죠. 면담자 :그 선배들하고 후배들 중에 좀 기억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구술자 :많죠.우리 선배 중에는 윤식 선배,또 이수정,황선필,그 이외에 현소환,그런 분들이 아주 출 중했고요.그 당시에.또 후배로는 이대우,장주효,하여튼 그 친구들이 아주 똑똑했습니다. 면담자 :뭐 또 문리대에 들어온 분들도 많죠?정치학과. 구술자 :제가 방금 말한 그 분들은 문리대에 들어왔던 분이고 우리 후배들,그 두 사람은 문리대 나오지 않았어요.그러나 이제 다른 후배들도 문리대에 아주 똑똑한 친구들이 여럿 왔었죠. 면담자 :그 6 3( ).1964년 그 6 3운동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단순한 계기로 촉발된 게 아니라 오 랜 어떤 준비기간 그리고 또 어떤 배경,내력이 있는데.일단은 현 총장님께서 그 세대가 쭉 했던 거 는 62년 6 6데모라던가 그 다음에 63년 군정연정 반대데모 이런데도 직간접적으로 참여를 한 걸로 알 고 있는데,현 총장님은 그때는 뭐 그때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그 활동과 관련해서. 구술자 :고(그)때는 사실 우리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운동이 단절되던 시기였습니다.5 16이 나서 그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4 19선배들이 대량으로 검거되고 또 퇴학되고 이러고 또 계엄령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저희 대학 4학년이 될 때까지 대학 3학년이 될 때까지 사실 학생운동이 억압되던 그런 시기였 죠.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6 6데모니 이런 거는 그 중간에 틈새에 있었던 일이예요.그래서 제가 거기 에는 적극적으로 참여를 못 했구요.저희들의 그 억압이다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있다가 대학 3학년이 되니까 그때 민정이양이 됐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당선이 되셨죠.그래 가지고 계엄령이 해제가 되자 학원이 해빙이 왔던 거예요.또 그러고 그때는 4 19도 이후고 5 16( )도 겪고 했기 때문에 후진국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만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이 굉장히 높았습니다.그리고 또 학생들이 뭔가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도 많았구요.그 즈음에 인제 그런 사회적인 해빙 무드와 학생들의 그런 참 여의식 이런 것이 합쳐져 가지고 이제 저희 서울대학교에서는 민비연이라는 것을 조직했었습니다.근 데 민비연이 순수 학술단체를 표방하긴 했습니다마는 역시 현실참여에 대한 관심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대학교이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를 통한 이제 현실참여다 그런 생각이 있었고,저는 그 때에 한일회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그 때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그래서 민비연(민족주의비교 연구회)을 통해서 한일회담 문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주변 친구들하고 토론도 많이 하고 했습 니다.그리고 저 자신도 그에 대한 글도 쓰고 했었어요.근데 여기 제가 하나 찾아 놨는데 (미리 찾아 놓으신 책을 펼쳐 보이시며)이게 김학준씨가 쓴 책이예요.독도에 관한,<독도는 한국 땅이다>라는 책 이고 이것이 이제 일본어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한국의 논리 해 가지고.여기 저 이야기가 인용이 돼 있어요.보십시오.이때가 대학 3학년 때예요.63년 6월이니까요.민비가 창설되기도 이전이었어요.이 때 벌써 한일문제에 대한 의식이 학생들 가운데 있었고 민비연이 10월경에 창설이 되면서부터 이 한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야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있어 가지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 당시에 이미 한일문 제에 대해 상당히 공부도 학고 이것을 반드시 이슈화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강했죠.그거를 우리 친 구들하고 학내에 전파시키기기 위해 그 민비연을 동원을 했었는데,거기서 우리가 두 번의 강연회를

29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87) 했었어요.한번은 홍성유를 모시고 그때 홍성유 54) 씨도 참여를 하고 또 다른 어떤 분이 했는데 다 기억 이 나지 않습니다만 정치과 학생들하고 토론회를 가졌고,또 11월경에 가서 서민호씨를 모시고 또 대 학교에 강당에서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그래서 그 때는 본격적으로 한일문제를 이제 다루기 시작했던 거예요.학교에서.그래서 점차 그 의식이 확대되어 갔습니다.그러다가.좀 이야기를 할까 요? 면담자 :잠깐 그 때 당시에 보니까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 학생이던 현승일은 1963년 6월 10일자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평화선 양보는 국토의 매각이다 라는 시론을 발표했다.평화선을 양보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취지의 그 국내에서의 전문적인 문서는 이 시론이 아마도 최초에 속할 것이 다 55) 이렇게 돼 있네요.그러니까 일찍부터 그 학생.의식 있는 학생그룹의 전반적인 그 흐름 속에서 나오기 이전에 이미 총장님은 거기에 대한 상당한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구술자 :우리가 뭐 어린 학생이 의식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알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근데 그때 한일 문제나 평화선 문제는 이미 바깥에서 이미 그것이 논의가 되고 있었어요.사실.이 책에서는 최초로 최 초의 시론이다 그러지만 사회에서는 간헐적으로 이곳저곳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나왔는데 제가 그걸 정리했다고 할까요?아니면 저 나름대로 조금 연구를 했다고 할까요?그렇게 해서 그것을 대학신 문에 발표를 했던 것이지요.그러니까 이 한일문제에 대한 그 이슈는 마.제가 대학에다가 도입하기 시 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면담자 :그때 그래서 민비가 중심이 돼서 한 강연회에서 홍성유가 와서 강연을 했을 때 그때 뭐 좀 느 낌이 어땠습니까?그 홍성유에 대한 인상이랄까 학생들의 뭐 기타. 구술자 :그때 그 홍성유 말 중에 그 독도를 다이너마이트로 터트려 버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그런 이 야기가 있었어요.그분이 농담 겸해서 한 말이겠지요.그런데 그것이 세상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 다.아주 젊은 장교가 뭐랄까 오만불손하다 할까 기고만장하다고 할까 하는 그런 인상을 사회에 던져 줬던 거예요.우리도 역시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저런 분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자리에 있어서 되 겠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그래서 홍성유의 그런 발언이 있은 후에 한일문제에 대해서 이 학생 들이 저항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식이 사실상 높아진 계기가 됐습니다. 면담자 :뭐 다른 분들 얘기는 그때 홍성유가 상당히 똑똑하고 아주 명철하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들 하던데요? 구술자 :똑똑하고 명철한 느낌을 주긴 주었겠죠.주긴 줬지만은 저런 사람 손에 나라의 운명이 맡겨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면담자 :그 뒤에 그 민비가 두 번째 강연회를 하고 난 이후에 인제. 구술자 :그래서 상당히 학교에서 한일문제에 대해 의식이 고무가 됐어요.고무가 되자 이거를 하여튼 저 지를 시켜보자 좀 저지를 시켜보자 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앞으로 이야기가 나온 걸로 봅니다만 좌우간 여기에 대해서 우리 학생들의 태도표명을 입장표명을 하자,이렇게 해서 사실 데모를 준비했던 거지요.그래가지고 겨울방학 때 그때 63년 겨울 방학 때에 저는 그 고향에 내려가는 것을 54) 서울상대교수 55) 김학준 지음, <독도는 한국 땅이다>에서 인용.

294 28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포기했습니다.포기를 하고 서울에 있으면서 최초의 이 문제를 가지고 상의를 한 게 김중태하고 했어 요.그래서 김중태와 이제 합의를 한 후에 우리가 역할 분담을 했죠.김중태는 외부학생들하고 타 대학 하고의 접촉을 하기로 하고 나는 내부적으로 준비를 하기로 하고 인제 이렇게 해서 겨울 방학 내도록 사실상 준비를 한 것이죠.그런데 그게,우리가 데모를 안 해봤기 때문에,남들이 하는 데모에 가담하 는 것은 쉬웠습니다만 막상 자기가 일으키려고 하니까 그게 저 좀 떨리기도 하고 말이죠.뭐 준비를 한다고 하는 게 구체적인 일을 하나하나 처리해 가는 게 아니고 그저 모여서 우리가 데모를 해야 되지 않겠냐는,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는 비분강개에서부터 시작해서 좌우간 두서없는 그런 준비를 했었죠. 해서 그때가 개학이 보통 3월 초 아닙니까?그래서 개학을 하면 거사를 하기로 했던 것이 3월 24일로 그렇게 결정이 됐던 것입니다. 면담자 :그러면 처음에 김중태씨와 처음 상의를 한 시점이 언제쯤인지? 구술자 :그게 63년 11월경이었습니다.그때 역시 중태도 대구에 내려가지 않았어요. 면담자 :그래서 그러면 여러분들이 3 24( )준비과정에 여러분이 계속 참여를 하지 않습니까?(참 여를 하죠)고런 어떻게 그 사람들을 참여시켰는지 거기에 대한 과정에 대해서 좀. 구술자 :우리가 중태하고 나하고 거사 할 것을 합의를 한 후에 이제 가까운 친구들부터 서로 이야기를 해서 쉽게 인제 동의를 얻었죠.그러고 지금은 작고를 하고 안 계십니다만 우리의 그런 계획을 황성모 교수한테 가서 상의를 했었죠. 면담자 :아.황성모 교수하고 그 시위에 대한 상의도 하신. 구술자 :그렇죠.황교수가 우리의 의도에 대해 별로 언급을 안 하셨어요.학교의 일은 학생들이 알아서 하는 게 아닌가.하는 식으로 함으로써 묵시적인 승인을 했다고 할까,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말리시지 않으셨으니까.그때 대학교수로서 그 정도 말씀하시면 그래 알았다,너희들이 알 아서 해라 하는 것으로 저희들이 받아들였죠. 면담자 :준비과정 초기에 어느 선까지 그걸 알렸습니까?뭐 이를테면 상의한 대상이 논의한 대상이 이 를테면 민비연 그 한 기 위 60학번 있잖습니까? 구술자 :물론이죠.우리가 한 기 위는 주로 상의한 사람이 이종률,박범진이었습니다. 면담자 :초기부터 그쪽에 같이 했고. 구술자 :그렇죠.네.네.근데 그 사람들은 그 때 벌써 입사시험을 쳐서 합격을 해 두고 있는 그런 상태 였어요. 면담자 :선배들도 동의를 했습니까? 구술자 :아.물론이죠.물론이죠. 면담자 :그래서 인제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라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그 6 3항쟁을 거의 중심으 로 이제 이끌어 갔던 조직이. 구술자 :근데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은 우리가 모의 과정에서 선배를 접촉할 때 우리가 의도적으로 회피한 게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옛날에 민통했던 선배들,그들은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았습니다.왜 냐하면 민통은 그때 사회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고 당국으로부터도 지목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 민통하고 연관된 것처럼 인상을 줘서는 좋지 않다,이렇게 해서.미숙한 우리끼리 하도록 그렇게

29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89) 했었죠. 면담자 :그때 민통하고 관련 있었던 분들이 아직 그 학내에 남아 있었던 분들이. 구술자 :예.좀 있습니다.있었습니다. 면담자 :얘를 들면 기억나는 분들이 누구누구 정도입니까? 구술자 :그때 박한수씨도 있었고. 면담자 :아,아직 그 때 졸업 안한 상태였습니까? 구술자 :졸업 안한 상태에서 박한수씨도 있었고 김정복이,이정복이,(서정복)아.서정복씨 같은 분도 있었고 좀 있었습니다.좀 있었습니다.홍성유씨도 있었고 있었으나 우리가 그분들하고 접촉을 피했 죠.또 뭐 굳이 상의할 이유도 없고. 면담자 :이제 투쟁위원회라는 게 그 뒤에 계속 뭐 사실 하나의 조직처럼 알려져.이제까지도 알려져 왔 는데 실제로 이렇게 조직을 했습니까?투쟁위원회라고 정식으로 위원장은 누구고 이렇게 했습니까? 구술자 :그게 이렇게 되었습니다.그렇게 역할분담을 하면서 조직은 민비라는 조직 하나예요.사실은 하 난데 김중태가 투위 위원장을 맡기로 하고 제가 민비 회장을 맡기로 했어요.그때까지는 김중태가 민 비 회장이었습니다.2대 회장이었습니다.그래서 중태는 인제 투쟁 일선으로 나가기로 하고 저는 뒷감 당하는 걸로 해서 민비 회장을 맡았죠.그런데 그 사람은 다 중복 돼 있는 거예요.명칭만 그렇게 두 개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면담자 :근데 그 김중태씨라든가 아니면 또 다른 선배그룹,후배그룹 간에 어떤 그 당시 정국에 대한 인 식이나 아니면 거기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뭐 시위방식이나 수위,투쟁방향 이런 것에 대한 논의 과정 에서 이견들은 없었습니까? 구술자 :이견 이견이 있었죠.있었는데 우선 3 24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면요.3 24는 사실 어떻게 일으 키느냐,이게 사실 데모로서 성공을 할 거냐,학생들 몇 명이 모일 거냐,이런 것이 상당히 관심이었습 니다.저희들 주동하는 입장에서는.그래서 말은 투위,민비 이렇게 갈라져 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다 같이 한 것이죠.주로 민비가 다 했던 거예요.그래서 3 24때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56) 이라고 있죠.이 케다하고 이완용이,홍성유를 상징하는 허수아비였습니다.이완용이하고 이렇게 해서 허수아비를 불태 웠는데,근데 그 허수아비를 만든 게 저희 하숙집에서 만들었어요.그거 아시죠?그렇게 해서 그걸 밤 중에.그 때 서울대 앞에 내( 川 )가 있었습니다.내를 건너서 옮겨 가지고 그걸 학교 건물에 숨겨 놓았 다가 12시 정각에 했는데 그것이 상당한 저 충격을 사회에 줘가지고 데모가 아주 크게 불이 붙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데모를 일으킬 것인가,이게 성공하는가 하는 것이 주 관심이었고 사실 은 노선에 대해서는 별 논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그런데 이 데모가 한번 시작이 되니까 이것이 눈덩 이가 산에서 굴러 내려오듯이 굴러 내려오면서 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그러고 속도도 가속이 붙고 말 이죠.이렇게 되었을 적에 4월 말경이 되어서는 이 정국이나 데모의 방향에 대해서 우리 내부적으로 상당히 본격적인 그런 논의가 되었습니다. 면담자 :그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중에 또. 구술자 :질문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56) 민족반역자화형식을 잘못 말한 것임.

296 29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면담자 : 말씀하실 기회가 있을 것 같고.하여튼 3 24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울 문리대 단독이 아니라 이걸 좀 넓혀서 다른 대학과 연합해서 동시에 일으킨다는 그런 얘기가 언제부터 나왔습니까? 구술자 :그거는 처음부터 나왔습니다.서울대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 대학하고 같이 한다.그런데 그거를 담임한 책임을 중태가 맡았던 거예요.그래서 우리가 전략을 어떻게 세웠냐 하면은 24일 날 일 어나는데 이것이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일으키기로 했어요.그래서 서울대학에서는 12시에,고대는 1시 반에,연대는 3시에.그것이 합의대로 다 되었습니다.그러니까 이 오후가 3월 24일는 오후 전부가 데 모판이예요.그러니까 서울대,연대,고대가 지리적으로 좀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그러니까 경찰 병력 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일어나고 하니까 말이죠.데모가 첫날부터 굉장히 대규모 의 데모로서 불을 지피게 되었던 거죠.그건 우리가 완전히 합의해서 이뤄졌던 거예요. 면담자 :처음부터 3개 대학만 대학에 집중한 것입니까?아니면. 구술자 :그렇습니다.처음에는 3개 대학만 우리가 모의를 했었죠. 면담자 :그러면 다른 대학과의 연계는 김중태씨가 다 맡고 총장님은 그때 다른 대학과 전혀 접촉을 하 지 않았습니까? 구술자 :3개 대학의 연계는 김중태가 다 맡았습니다.나중에 모의 과정에 저도 가끔 참여를 해서 거기 누가 주동자라 하는 인사를 하고 했었죠.그런데 타 대학들은 3개 대학이 하고 난 이후에 좀 자연발생 적으로 저절로 일어났다고 할까 그렇게 보는 게 좋습니다.모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타 대학에서는 저희들을 찾아왔죠.찾아와서 문건도 얻어가고 또 서로 의견도 나누고 이렇게 해서 타 대학이 나온 것 은 그렇게 조직적으로 된 것은 아니에요.그런데 5 20( )은 우리가 타 대학하고 연계를 해서 했 던 겁니다. 면담자 :그 준비 과정에서 이제 데모 방식에 대해서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허수아비 상 이완용이하고 이께다 허수아비를 화형식을 하겠다는 그 아이디어 내지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구술자 :그거요.허허.내하고 송진혁이하고.허허.그 이야기 중에 발상을 얻었던 것이에요.송진혁이 아시죠?저 조선일조(중앙일보)논설위원하고,근데 송진혁군하고 저하고 하숙을 같이 했어요.정릉에 한집에서 하숙을 같이 했었어요.그러면서 이걸 뭔가 조금.혹시 학생들 안 모이면 어떡하나.그래서 해서 그때는 그 상징성 그 자체보다는 학생을 동원하는 하나의 술책으로 그렇게 했던 거예요. 면담자 :그 전 시위에 그렇게 화형식을 하거나 이런 게 등장한 예가 별로 없었죠? 구술자 :별로 없었죠.우리가 알기로는 별로 없습니다. 면담자 :그 사진들이 지금도 남아 있고 그 불태우는 장면이 저희 경향신문사,거기 사진에도 있는데 그 당시에 그런 것이 학생들한테 상당히 자극을 줄 수 있는. 구술자 :그렇죠.네. 면담자 :그 그런 것을 만들고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자금들도 자금이 많이 소요될 텐데.그 당시에 뭐 다들 돈이 없던 시절 아닙니까?그런데 그런 것을 어떻게. 구술자 :저는 좀 있던 학생에 속했구요.저는 좀 있던 학생에 속했고,그래서 그 우리가 등록금을.신학 기 등록을 안 하고 그걸 데모 자금으로 다 썼었죠. 면담자 :아.그랬습니까?

29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91) 구술자 :그래서 결국 등록금을 집에서 한 번 더 타 가지고 썼습니다마는.그때 우리 자금책이 누구냐 하면 최혜성이었어요.그래서 최혜성이 많이 댔고 우리도 형편이 되는 학생들도 다 냈죠.다 댔죠. 면담자 :그 중에 뭐 집 판 학생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구술자 :조봉계.조봉계.조봉계라고는 이 고등학교부터 서울서 공부를 했어요.그래가지고 서대문 가는 데 아현동,아현동 거기 올라가는 골목길에 하꼬방을 하나 갖고 있었어요.그 원래 집을 자기 집에서 사 줬어요.좋은 집은 아니지만 학생이 자취하기 충분한 그런 집을 하나 사줬는데 그런데 데모 자금이 필요하니까 그 집을 팔았죠.허허허. 면담자 :집 팔아서 데모 했다는 게 지금 지금의 시각,시점으로 어떨지 모르지만 보면 상당히 쇼킹한데 요? 구술자 :그래요.허허.그때는 그런 시절이니까 데모라고 하는 게 그 다음 우리 세월이 바뀌어서 노동운 동을 할 때는 자기 이해관계에 의해서 데모를 하고 투쟁하지 않았습니까?근데 우리 60년대만 해도 그 런 게 아니고 옛날에 독립 운동하던 기분으로 하던 거니까 집도 팔고 등록금도 대고 그랬죠. 면담자 :그러니까 3 24준비과정에서 3월 24일 날 시위를 한다는 그 정보를 알 정도로 어.좀 상당한 수준의 가담자가 어느 정도 됐습니까?한 몇 명 정도. 구술자 :어.구체적으로 숫자를 대기는 곤란하지만은 가까운 민비회원들은 전부 다.전부 다 적극적인 가담자고요. 면담자 :3월 24일 한다는 것을 다 알았습니까? 구술자 :그럼요.그러나 그게 보안이 다 유지가 되었습니다.유지가 되었고 또 학생들이 영민하니까 정 보를 피해가기 위해서 헛소문도 퍼뜨리고 3월 26일 한다,3월 28일 날 한다 이렇게 하고.그런 정도는 모의할 필요도 없었어요.그때 학생들이 다 그랬으니까. 면담자 :민비 회원이 한 200명 정도 되었다고? 구술자 :한 100여명. 면담자 :100여명 정도요? 구술자 :그러고 민비회원 바깥에서도 가까운 사이에서는 거의 다 알았죠.그러면서도 이 보안이 유지 되 었던 겁니다.대개 경찰에서는 26일이나 7일쯤 할 걸로 알았던 것 같애요. 면담자 :그러니까 그 당시에 뭐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에 경찰이나 수사기관에서 언제가 시위를 한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그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몰랐던.저기 원래 17 일 날 하기로 했다가 24일로 정보가 누출돼서 24일로 연기했다는 그 설도? 구술자 :네.그 설도 사실입니다.그것도 사실입니다. 면담자 :그 준비 과정에 쫌 다른 우여곡절이나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구술자 :뭐 모두가 우여곡절이죠.허허허.그때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고 전부 인쇄도 인찰지에다 그 등사판에다가 밀던 시절 아니에요.그런 거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참여 했습니다.사실.그리고 분위기 가 공포스러웠고 사전에 검거되거나 발각되면 안 되니까 엄청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숨어서 그렇게 하 곤 했죠. 면담자 :네.그 정릉 하숙집이 뭐 지금 여기.

298 29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이 부근 쯤 될 거야 아마. 면담자 :이 부근 쯤 됩니까? 구술자 :이 부근 쯤 될 거야 아마. 면담자 :그때 당시에는 좀 그 구술자 :상당히 좀 동네가 좋지 않은. 면담자 :좀 외진 데였습니까?아니면. 구술자 :그렇죠.외진 데였죠. 면담자 :그래서 그 허수아비를 만들고 그러면 주인집도 알고 여러 가지로 알게 될 텐데. 구술자 :물론 알지요 주인집 아들이 나중에 데모 주동자가 됐어요.그 때 동국대 홍성유이.그때가 대학 2학년 이예요.그래서 우리가 심부름 시켰죠.그러니까 주인 아들하고 같이 한 것이죠. 면담자 :그런데 그걸 대낮에 옮길 수는 없고.밤중에 그것도 서울 길거리를 가다보면 누군가가 볼 거고 수상하게 여길 텐데. 구술자 :리어카에다 끌고 리어카에 실어가지고 학교로 가져갔죠.그때 리어카를 끌은 친구가 한양대학교 김언휘라고 있어요.지금은 미국 갔습니다마는 그 친구가 주로 자기 친구들 동원해 가지고.저도 따라 갔습니다.그랬고 아주 힘들이 좋은 친구들이예요. 면담자 :그분은 어떻게 여기. 구술자 :그건 우리 고등학교 동기예요. 면담자 :고등학교 동기였습니까? 구술자 :네.고등학교 친구죠.그래서 대학.개천의 물이 그래도 발목이 잠길만한 물이 있잖아요.그걸 밟고서 딛고서 넘겼죠.넘겼죠. 면담자 :망을 봐가면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옮겼어야 됐겠네요. 구술자 :그렇죠.네.네. 면담자 :그 바로 전날 3 24바로 전날 그 민비 주최로 한일관계강연회를 열었다는 연 사실은 기억하십니 까? 구술자 :바로 전날.그랬을 거예요. 면담자 :그때 대한 기억은 아주 없습니까? 구술자 :어,했어요.했는데 3 24가 하도 커 가지고 기억에 묻혔네요.그것도,강연회 한 것도 데모를 하 기위한 예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면담자 :그 때 3 24현장을,그날 현장 지휘를 현 총장님이 맡았고 또 직접 하셨는데.그 전에 시위를 주도하고 집회를 이끌고,집회를 주도하고 시위를 이끈 경험들이 없었다고 했는데.연습은 좀 하셨습 니까? 구술자 :연습요?허허.그 연습요.그때 왜 그렇게 됐냐 하면 중태가 투위 위원장이잖아요.그래서 제가 데모 현장에서 지휘를 한 건 완전히 우발적이었어요.계획된 게 아니었습니다.중태가 바로 잡혀 가버 렸어요,그 현장에서.현장에서 잡혀갔는데 우리가 어리석게도 잡혀가면 누가 지휘 한다는 게 사전에 전혀 이야기가,준비가 안 돼 있었던 거예요.그래서 대열이 뭐랄까 혼란스러워졌다고 할까 이렇게 돼

29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93) 서 제가 엉겁결에 거기에 지휘로 나섰던 거예요. 면담자 :그러면 공소장에 나오면 역할 분담 사후에 만들어 진 거구만요? 구술자 :아니지.우리가 모의 때는 역할 분담을 했었는데.허허.역할분담이 철저하지 못해 가지고 그날 3 24당일 날 깨져 버렸던 거예요,그게.그래 가지고 김중태는 잡혀가고 제가 인제 데모 현장 지휘자 로 그냥 대두가 된 거지요. 면담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구술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그게 왜냐하면 데모 준비과정에 제가 중심에서 했기 때문에 아무래 도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던 거죠. 면담자 :그 당시만 해도 현 총장님에 대한 수사기관.경찰이나 이쪽에 주목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죠? 구술자 :심하지는 않았지요.그러나 내가 민비 회장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아마 주목을 하고 있었 을 겁니다. 면담자 :그날 그 현장 지휘를 해보니까,처음으로 해보니까 어떠했습디까?그게 저. 구술자 :처음에는 상당히 두려웠지요.이게 과연 되는가 두려웠지만 해보니까 또 돼 더라구요. 면담자 :제가 다른 분들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하여튼 시위하고,집회와 시위를 리드하는 그 모습이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구술자 :그랬습니까?하하.제가 그게 최초로 해본 시위였어요. 면담자 :그래서 어디까지 가셨습니까? 구술자 :하여튼 종로까지 갔던 것 같아요. 면담자 :당시 보도로 보면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는데. 구술자 :의사당까지 갔었던가?데모를 그 이후에 하도 많이 해서 모르겠어.하하. 면담자 :중간에 그때 연행되지 않았습니까? 구술자 :연행됐어요. 면담자 :어디서 연행됐는지는 기억 안 나십니까? 구술자 :제가 종로에서 연행됐었던 거 같아요.그랬던 거 같애요.연행돼서 동대문 경찰서로 갔던 것 같 아요.그러니까 제가 종로까지 갔던 기억이.허허허. 면담자 :그때 좀 심하게 조사받은 기억은 없구요? 구술자 :뭐 별로 경찰에서 심하게 받지 않았습니다.그 때만 해도.큰 조사도 없었구요.거의 우리가 앉 아 있었지요.아마 수사방향이 안 정해져 있었는지 그냥 대기상태에 있다가 이틀 만에 풀려났어요.풀 려난 게 동대문경찰서로 또 학생들이 와 가지고 구속학생 석방하라고 데모하는 바람에 그 힘으로 풀려 났어요.그러니까 정부에서도 이걸 학생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확실한 방침이 안 섰던 것 같애요.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히 유화적으로 나왔죠.그래서 대통령께서도 학생 데모를 충정을 이해한다,그런 말씀도 하시고.그러니까 충정을 이해하니까.뭐 데모 주동 학생들이 경찰서에서 다 나왔죠. 면담자 :그때 먼저 잡혀간 김중태씨도 같이 나왔습니까? 구술자 :그때 같이 나왔죠.중태는.그렇죠.같이 나왔죠.같이 나왔지. 면담자 :연행 됐을 그 이후에도,연행된 뒤에도 인제 계속 매일이다시피 집회와 시위가 있었던 걸로 알

300 29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고 있고,그게 거의 3월말까지는 지속이 되고 다른 대학들도 하고 고등학생까지 나왔잖습니까?그때는 그때 기억 남는 게 없습니까?그때 뭐 시위를 조직하고 아니면 다른. 구술자 :그때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학생 연구실이 있었어요.그 동숭동에.동숭동에 거기에 교수님들 연구실이 쭈욱 있는 그 건물 제일 갓 방을 학생들이 쓰는 연구실이예요.그러니까 그게 연구실이 아니 고 학생들이 인제 휴게실처럼 평소에 사용이 됐는데,거기가 데모 본부가 돼 버린 거예요.거기가.거 기 막 프랑카드도 쳐 지고 말이죠.전부 거기 모여서 이제 공개적으로 한 겁니다.그때부터는.주동자 고 뭐고 다 드러났으니까.그래서 상당히 그 뭐 온갖 논의들이 오가고 재미있었죠. 면담자 :저 김도현씨는.그때 처음부터 3 24때부터 선언문도 쓰고 이렇게 하면서. 구술자 :그 준비과정에 다 참여 했었죠.도현이는 원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에요 공부를 깊이 한 사람이 라서 그래서 대부분의 문건은 다 김도현의 손에서 나왔습니다.나중에는 이제 김지하,송철원,이렇게 합세가 됐지만은 초장에는 김도현이 주로 썼죠. 면담자 :그 김정남 수석도. 구술자 :그렇죠.김정남씨도 김정남이는 처음부터 이렇게 전체 모의에 참여했다기보다는 김도현이 하고 개인적인 연계로 거기 참여를 많이 했을 겁니다. 말씀을 오래하셔서 기침을 하시는 관계로 잠시 말씀이 중단됨(40:38-40:45) - 구술자 :그런데 김정남이는 민비 회원이 아니었어요.민비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공동 모의에는 쫌 덜 참여 하게 됐던 것 같아요.그러나 다 같은 우리 정치학과 친구들이니까 주로 김도현이하고 관계로 문안을 같이 작성하지 않았나 봅니다. 면담자 :3 24준비과정에서 김지하씨라던가 이런 분들은. 구술자 :없었어요.3 24때는 없었어요. 면담자 :그래서 3 24이후에 대학가에 시위가 확산되니까 정부가 학생대표들하고 자꾸 대화를 몇 차례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 뭐 서울 문리대에서 김덕룡,정치학회장 김용환 이런 분들이 갔다고 들었는 데 그쪽 그룹들하고 좀 이렇게 서로 소통이 없었습니까?학생 공조직하고는. 구술자 :준비 과정에서는 없었습니다.준비 과정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없었구요.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는 의사소통이 있었죠.있었죠.있었는데.우리 학생회는 상당히 뭐 호흡을 같이 했으니까요.운동 과 정에 뭐 갈등 같은 것은 없었구요. 면담자 :이를테면 저 김덕룡씨가 그때 학생회장 김덕룡 학생회장이 정부관계자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투위나 아까 뭐 저 시위 지도부 쪽하고 좀 사전에 무슨 조율이라던가.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 니면 갔다 와서 뭐 어떤 얘기를 했다든가.이런 거를 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구술자 :있을 거예요.그런데 그게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기억에 남는 게 없습니다.정부에서 오라 고 하는데 가볼까,그러면 가봐라,가도 괜찮겠나,뭐 왜 안가도 안가야 할 이유가 뭐 있나,그런 정도 였겠죠.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없습니다.그런데 의사소통은 항상 되고 있었습니다.다 가는 줄 알았었고 또 갔다 와서 우리한테 알려줬고.그래서 평화선 보러 간다 하길래

30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95) 물위에 줄 쳐놨나 하고 농담도 하고 그랬었는데.허허허.물위에 줄 쳐 놨는지 한번 잘 좀 가보라고 말이죠.허허허. 면담자 :3,24과정이라던가 그 이후에 3월말까지 계속된 시위 과정에서 또 다른 뭐 특별하게 또 좀 기억 나시는 일들이 있습니까? 구술자 :괴소포사건 따로 묻습니까?그때 기억나는 게 괴소포사건이예요.사실.그냥 데모는 늘상 하는 거고.하는 거고 괴소포사건이 일어나 가지고 그게 새로운 기폭제를 만들어 줬죠.그거 이야기 할까 요.괴소포. 면담자 :네.네. 구술자 :그 괴소포를 그 공식화한 게 어쩌다가 제가 최초의 학생이에요.이미 괴소포가 다른 학생들한테 이게 전달도 됐었어요.고려대학 연대.근데 그것이 사회에 떠오르지 않았어요,전달됐다고 하는 사실 이.내가 학교에 갔었는데 그 학생처의 직원이 그 당시에 김주임이라고 주로 학생을 문제를 전담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근데 그분이 학생처로 뭔가 소포가 왔다고 해서 찾으러 갔죠.갔더니 요만한 책자 예요.그 <주부의 친구>라고 하는 거지.[ 主 婦 の 友 ]그 책이예요.그 책을.소포로 왔더라고.보니까 일본 잡지인데 그걸 열어 보니까 그 중간에 칼로서 지폐만한 크기로 파고 거기 돈 100불을 넣어 놓고 거기 편지가 하나 들어 있어요.그 편지 내용은 뭐 영웅적인 당신의 투쟁에 대해서 우리는 열렬한 지 지를 보낸다 하는 북한 방송 비슷한 그런 문구로 해 놨더라구.그래서 저는 즉각적으로 아,이게 장난 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동아일보에다가 전화를 했어요,바로 그 자리에서.그래서 동아일 보 기자가 와서 그걸 사진을 찍고,이래서 신문에 아주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죠. 면담자 :네.사진도 나오고. 구술자 :사진도 하고 보도가 되니까 다른 대학에서도 아,나도 어제 받았다 이렇게 해서 전부 받은 학 생이 한 대여섯 명 되었죠.그게 소위 괴소포사건입니다.이게 국회에서도 논의가 되고 사설에도 나오 고 말이죠.인제 그렇게 되니까 이 학생들을 또 크게 한번 자극을 한 것이에요.그래서 데모가 다시 또 불을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그런데 날짜가 어디쯤 됐는지 몰라. 면담자 :4월 8일. 구술자 :네.아마 그쯤 됐을 거야.그래서 조금 소강상태로 가던 데모가 괴소포 사건으로 인해서 다시 전국으로 확산이 됐어요.그게 큰 사건이었습니다.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기 때문에. 면담자 :그 때 괴소포를 받은 분이 김중태,현승일,고려대 박정훈,서진영 그리고 연세대 안성혁 이렇게 되거든요. 구술자 :네.네.그게 다 주동자들이죠. 면담자 :근대 서진영씨 같은 경우는 잘 그 당시에는 안 드러났을 텐데. 구술자 :어 핵심 멤버였어요.그 당시에.그 당시에 문안을 쓰는 사람이었어요.나중에 학자가 됐지만 은. 면담자 :지금 이렇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출처가 어떻게 되는 것 같습니까? 구술자 :그거야 너무 뻔하죠,뭐.지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당시에 이미 유치한 장난을 치는구나.이렇

302 29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게 생각을 했죠. 면담자 :그러니까 그 당시 그. 구술자 :우리 학생 때. 면담자 :네.그 당시 당시 정보당국이라고 보는 거죠? 구술자 :그렇죠.그렇게 보는 거죠.하여튼 정부 사인에 의해서 정부 수사나 정보 당국에서 그렇게 했겠 죠. 면담자 :그 발신지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그 당시 발신지. 구술자 :발신지 보면은 부산시에 현승욱인가 이렇게 이름을 내 이름하고 비슷하게 하나 만들어가지고 발신을 했더라고. 면담자 :아 부산에서 말입니까? 구술자 :네.부산에서.주소는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그러니까 정부에서는 그 범인을 잡는다고 야단을 떨었죠.야단 떨었지만 그 잡힐 범인이 아니고.허허.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죠.다 비웃고. 면담자 :4월 달 들어서는 이제 괴소포사건으로 이후에 다시 또 4 19그때 4주년 이었습니까? 구술자 :네.그래서 괴소포사건을 제가 맞이하면서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생각이 앞으로 당분간 안 잡혀 가겠구나,당분간 안 잡혀가겠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어차피 크게 한번 다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 이 동시에 들더라고. 면담자 :아.그렇습니까. 구술자 :그래서 사실 안 잡혀가고 한 한 달 동안 했죠.괴소포사건을 일으키고 난 후 우리를 잡아 갈 수 없었어요.그렇지 않습니까?그래서 그게 쭈욱 4월 달을 넘겼는데 그 과정에 전국에서 뭐 제주도까지 안 일어 난데가 없어요.그러고 자연히 전국의 학생들이 자연히 우리 대학 연구실로 다들 왔다구요.와 서 뭐 선언문도 가져가고 뭐도 가져가고 말이지.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그 투위가 전국 연대를 맺 게 됐어요.그리고 또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이 저절로 나타나더군요.나타나 가지고 전국 조직 비슷한 게 돼서 그것이 5월 20일 날 소위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라고 하는 쪽으로 가게 됩니 다. 면담자 :근데 이게 5월 달 전에 4월 달은 주로 학원사찰문제,그러고 뭐 어떤 공작문제,이런 것들이 대 학가의 중심 이슈가 되고 마침 4 19를 전후로 해서 집회와 시위가 좀 발생하게 되는데,그 보면 인제 서울 문리대의 경우는 4 19영령추도식은 학생회가 주최한 걸로 돼 있더라구요.나머지는 투위가 한 걸로 돼있는데.어떻게 좀 조율된 상태에서 그렇게 한 겁니까? 구술자 :구체적인 조율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협의를 거쳤을 거예요.원래 4 19행사는 학생회 소관이니 까. 면담자 :그리고 인제 4월 23일 학원사찰 조사 위원회가 그동안 조사했던 학원사찰 성토대회를 하는데 그건 뭐 그때 투위에서 뭐 어떤 투위의 어떤 지침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투위가 이제 공인한 뭐 저거 였습니까?학원사찰 조사 활동이. 구술자 :네.그렇죠.그렇죠.그건 우리 투위로서는 처음에는 예상을 못하고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요.그 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자 그것을 중심으로 한 사람이 우리 정치학과 4학년 송철원군이었어요.그러니

30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97) 까 자연히 가까운 친구들 아니에요.그러니까 저절로 투위의 일이 돼버린 것이죠.학생운동이라는 건 그런 게 참 많아요.미리 사전에 계획됐다기보다도 우발적으로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고 그것이 내부적 으로 흡수되고 말이죠.그러다가 보면 통제 불능한 상태도 맞이하는 거고.허허. 면담자 :그러니까 뭐 6 3항쟁 자체가 그런 식으로 흘러간 것. 구술자 :그렇죠.그렇습니다.그게 사회운동의 특징 아니겠습니까.학생데모라는 하는 것은 다 그런 것 이죠.그 당시까지의 데모는 다 그런 거예요.어떤 우발성 절반,계획성 절반,이렇게 이루어 졌죠.요 즘은 운동이 많이 달라졌습디다마는 면담자 :좀 더 조직화된. 구술자 :훨씬 더 조직화 됐죠.그러고 목적성이 더 뚜렷하고.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운동권이라 하는 것이 따로 없었어요.운동권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70년 이후입니다.우리 60 년대는 어떻게 보면 전부 다가 운동권이고 전부 다가 비운동권이고 그렇지요.그래서 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도 4학년이 하잖아요.4학년이 하면 자동적으로 리더가 되고 1,2,3학년은 그냥 따라오고,그렇 게 했죠.달랐습니다. Tape2. 면담자 :그 때 괴소포는 받아서 그걸 공개를 하고,그건 어떻게 처리 했습니까?괴소포는. 구술자 :동시에 경찰서에 연락해서 가져가게 했죠. 면담자 :그게 뭐 지금 경찰서에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구술자 :남아 있을 수도 있지. 면담자 :없을 수도 있고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처리를 했습니까? 구술자 :그게 인제 다른 친구들은 경찰에 보내거나 그렇지 않고 집에 나(놔)두었던 모양이야.나뒀는데 그게 신문에 보도가 됨으로써 아마 경찰에 다 가져가고 그랬을 거예요. 면담자 :그래서 그게 실물을 가지고 있는 분은 없겠네요? 구술자 :모르겠어요. 면담자 :하여튼 그때 송철원씨가 조사한 학원사찰 결과를 4월 23일 날 성토대회를 통해서 공개도 하고 했는데 이때만 해도 YTP에 대한 그 구체적 실체가 폭로된 거는 그 다음이고 이때는 폭로가 안됐는데 그래도 YTP에 대한 소문은 좀 이렇게 퍼져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구술자 :그렇죠.그 전에도 우리가 YTP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들었는데 설마 했었죠.설마 서울대학 생이 그거 하겠나 말이야.그래서 YTP가 청사회의 무슨 저기.영어 표기라고 그것까지는 알고 있었 죠. 면담자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학원사찰의 어떤 정도,그 다음에 YTP조직에 대해서 총장님은 그 당시 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까? 구술자 :그런 게 어느 정도 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저는 사실 믿지를 않았어요.설마 서울대학 학생이 하겠냐고 말이지,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저기 학원사찰 성토대회를 한 때 아 우리도 있구나 하는 생각

304 29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을,인식을 하게 됐죠.저는 그런 점에서 뒤늦게 인식을 하게 된 겁니다. 면담자 :특별히 그 과정에서 사찰을 당했던 기억은 없습니까? 구술자 :없습니다.없습니다.저는 모릅니다.없었습니다.모르죠.저는 모르죠. 면담자 :4월 달이 그렇게 지나가면서 5월 들어서 어떤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민족적민주주 의장례식이 계획되는데,5월 초에 민비연 사무실에 동국대 대표들이 찾아와서 처음으로 동국대하고 연 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그 전에 5월 달 시위에 대한 지도부의 어떤 여러 가지 논의와 고민이 있 었을 것 같은데,그 과정 중에 기억나는 것 좀 말씀해 주십시오. 구술자 :그때 전국적으로 데모가 확산이 됐습니다.확산이 되고 전국 연맹이,연합이 아마 조직이 됐을 거예요.굴욕회담반대전국투쟁위원회,그런 것이 됐을 겁니다.됐는데 그것이 뭐 확고한 군대 같은 조 직체계도 아니고 그냥 어설픈 루즈 컨퍼더레이션 비슷하게 그런 형태를 갖추게 된 거예요.갖추게 되 니까 이제 전국적인 연락망도 형성되고 했었지마는 우리 서울대학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거예요,그때.데모는 일단 시작은 해 놨는데 이걸 어디까지,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지 말이죠.사실 상당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그러고 일단 데모가 되고 전국조직이 되니까 밑에서부터 압 력이 올라오는 거예요.올라오고 또 그 과정에는 정부의 조직적인 공작하는 패들도 이미 개입하기 시 작한 거예요.그래서 구호 같은 것도 전혀 엉뚱한 구호를 갑자기 내세운다든가,이렇게 됐습니다.이렇 게 돼서 데모를 어디까지 어떤 전략으로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 한편으로 논의가 되면서 어차피 한 번 하지 않을 수 없는 또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그러니까 그거는 다시 말씀드리면 지도 부에서 무슨 계획을 해서 주도적으로 했다기보다는 그 힘 자체가 그런 식으로 이렇게 몰려들어서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됐던 거예요,그때는. 면담자 :실제로 나중에 재판을 받을 때 공소장에는 5월 14일 오후 3시 출입문에서 50m 떨어진 잔디밭 에 이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에 대한 모의가 이뤄진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요.그거 요걸 민족적민주주 의장례식을 처음 기획한 시점이 언제쯤으로 기억하십니까? 구술자 :그게 아마 5월 초 쯤 될 거예요.5월 초쯤.그때는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그 이름까지는 정해지 지는 않았고 하여튼 전국적인 단위에서 한번 할 수밖에 없다 하는 식으로 힘이 몰렸던 것이 5월 초부 터 그런 형성이 됐습니다.그래서 공소장에는 시,월,날.무슨 때와 장소를 분명히 밝혀야 되니까 무 슨 잔디밭에서 했다 이렇게 됐는데.물론 잔디밭에서도 모였죠.그러나 여러 장소에서 여러 기회에 그 것이 논의가 됐던 거예요.그래서 조금 형태를 그 갖춘 모임은 진아춘에서 있었습니다.그것이 공소장 에도 나오지,아마.진아춘에서. 면담자 :5월 16일,5월 16일 오후 7시 진아춘에서 2층에서 김중태,현승일,김도현,송철원,최혜성,이원 재 그리고 동국대 대표 장장순,박동인 성균관대 대표 박형길 홍성유,건국대학교 대표 김영목 백승홍, 서울사범대 대표 김길렬 등 21명이 참석해서. 구술자 :근데 그 중에 한 사람은 보안사 프락치였어요.나중에 알고 보니까.제가 이름은 거명은 않겠 습니다만.지금 신 기자 말씀한 그 중에 한 명은 나중에 보니까 보안사 프락치였더라구.근데 그 사람 이 논의 중에 제일 과격한 주장을 많이 했어요.아주 뭐 거.스탈린적인 과격한 주장을 많이 했었죠. 이 전국 데모는 전국적인 폭동으로 가야 한다는 둥 구호는 반미 또 친북적인 그런 구호.그러니까 그

30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299) 걸 그쪽으로 유도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거죠.그래 결국 학생들 데모를 진압하기 위한 것이 방 법이었겠지.괴소포를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 이예요.좌익으로 잡으려고 하는.우릴 공산당으로 몰려고 하는 그런 음모였죠. 면담자 :그런데 인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어떤 규모적인 면도 있지만 5 20,5월 20일 날 이루어진 민 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라는 건 성격이,기존의 3 24는 대일굴욕외교반대였는데 이거는 어떤 민족적민주 주의라는 건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어떤 상징이었는데,이제 장례식을 한다는 거는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의 성격을 가진 시위의.어떤 성격이 이제 좀 바뀌는 거 아닙니까? 구술자 :전환되는 거지요.네네 맞습니다. 면담자 :이렇게 된 여러 가지 계기나 요렇게 성격을 결정한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좀.그게 궁금 하네요? 구술자 :근 자연스러운 논리적이 귀결로 반정부로 갈 수밖에 없죠.이 현 정부가 처음부터 이론은 이렇 습니다.3 24를 하게 된 것은 현 정부가 군사정부이기 때문에 국민적인 정통성이 부족하다,그래서 이 사람들이 외세에 의존함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할려고 하는 목적이 깔려 있다,국교 정상화에는.그렇게 때문에 굴욕적인 회담을 이렇게 강행을 하고 있다 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 기저에 깔려 있었습니다.3 24때부터.3 24때부터 깔려 있었는데 처음부터 반정부로 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닙 니까.기술상.그러면 처음부터 탄압을 받을 테고,그리고 두려움을 갖는 시위자들이 참여를 안 한다 말이야.그러니까 그건 처음부터 그랬던 거예요.반정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그런데 이것 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 것은 그동안 시위가 이제 대중화됨으로써 자신감을 얻었고 간이 커진 것이지 요.또 하나는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과격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이게 같은 노래를 계속 틀면은 이게 흥행이 안 되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이게 과격화하게 마련이예요.그래서 사실은 과격화돼 가고 있 는 거기에 대해서 이 우리 측 지도부라고 말하면 어패가 있어요.우리 서울대학 측이나 고대 연대 이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고민이 많았죠.이걸 어느 선까지 가야하느냐.어차피 과격으로 가게 마련 이고 반정부까지 가는 건 공통적이었어요.그런데 이걸 어디까지 가느냐.계엄령까지 가야 할 것이냐 아니면은 조금 계엄령이 안 가는 선에서 멈출 것이냐.거기서 논의가 많았습니다.많아서,그래서 반 정부로 가게 됐죠.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면담자 :그 당시도 어떤 계엄령의 어떤 가능성을 좀 예측한 겁니까? 구술자 :예측했죠.근데 그 예측도 그 의견이 서로 달랐어요.계엄령을 필거다 하는 예측을 했던 사람들 하고 계엄은 못 필거다 하는 두 가지 예측이 있었습니다. 면담자 :총장님은 그때 어떻게 보셨습니까? 구술자 :난 계엄령이 날걸로 예측하는 축에 들어갔지요. 면담자 :김중태씨는? 구술자 :계엄이 못 난다고 봤죠.그래서 의견이 조금 틀렸습니다,그때. 면담자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5월 16일. 구술자 :아니.아니.말을 조금 수정해야 겠구만.계엄이 날 경우에 김중태의 견해는 뭐냐면 계엄은 못 필거다,만약 계엄이 난다면은 그건 정권붕괴하고 연계될 거다,이렇게 봤던 겁니다.그게 김중태의 의

306 30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견이었어요.근데 저는 조금 생각이 달랐죠.우리는 계엄이 나면 우리 학생운동이 좌절될 거라고 봤죠. 면담자 :이게 원래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라는 건 사실 5 16,그 당시 혁명이라고 불렸는데.5 16혁명 세력을 이제 장사지내는 그런 의미에서 4주년.4주년이 됐나 57) 그때.4주년인 5월 16일 날 하기로 처 음에 얘기가 됐다가.이게 인제 너무 준비가 촉박해서 20일로 연기했다고 그러는데.뭐 그런 그 과정 에서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까? 구술자 :그럴 거예요.그때 뭐 날짜는 여러 번 변경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다반사로 있었던 일입니다. 면담자 :그때 주로,그때 당시 총장님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준비 과정에서. 구술자 :준비과정에서 이것저것 다 했는데요.대외적으로 제가 대변인 역할을 했어요.이게 언론 담당. 면담자 :거기 보면 이제 저쪽에는 그 당시 공소장에는 김도현이 선언문,결의문,한일회담,5 16성토문을 작성하고,송철원은 조사 민생고 학원사찰 성토문 작성,그리고 장장순은 회식진행총사회관,최혜성은 자금조달 유인물 인쇄,현승일은 공보담당,어.공보 관계 및.이게 조금 궁금한데 한양대생 8000명 동원,이렇게 기록돼 있더라구요. 구술자 :그렇게 기록이 돼 있는데 그건 좀 틀린 거예요.그 당시에 한양대를 대표한다고 한 친구가 조금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자기가 8000명을 동원해 오겠다.그렇게 주장을 했 었어요.근데 그 학생하고 저하고 접촉을 하도록 그렇게 아마 분담을 했을 거예요.그러니까 공소장에 그렇게 나왔던 거지.제가 한양대생을 동원할 수는 없죠,직접적으로. 면담자 :그리고 김중태는 연대 성대 동대 등 학교별로 최저 1000명의 학생 동원,이원재는 서울대 학생 동원,김용술 모의관 두건 죽장 구입,이렇게 뭐 돼 있고.돼 있었는데 조금 제가 좀 궁금한 게 김용 술씨가 이렇게,처음 이렇게 등장하는데요.그전에 뭐 특별히 3 24준비과정에나 이런 데서는. 구술자 :그렇지는 않습니다.우리 3 24준비 과정에서는 저 방에 계신 송철원이도 아마 크게 관여 안했 을 겁니다.중태하고 개별적인 관계는 있었을 테지만은 크게 관여 안하고.이게 갈수록 점점 확대된 거 야,그렇지 않습니까.갈수록 확장이 된 거죠. 면담자 :근데 김용술씨가 어떤 모의관과 죽장을.두건,죽장,이걸 담당했는데 이걸 확보하는 것을 담당 을 했는데.실제로 그렇게 한 걸로 알고 있고 그런데 이 분이 이걸 맡은 특별한 거기에 이유가 있습 니까? 구술자 :특별한 이유가 없고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아마 맡았을 거예요. 면담자 :아.하겠다고 해서.그 이원재씨도,이원재씨는 저 3 24부터 계속. 구술자 :모의 과정에는 참여를 별로 안했구요.제가 알기로는.3 24가 일어난 이후부터 열심히 했죠.데 모 현장에서 열심히 했죠. 면담자 :그리고 이게 인제 실제로 진행이 된 거는.아,이제 그날 현장에 현장을 어떻게 할 것이냐.이 걸 보면 처음에 계획은 송철원이 조사 낭독,이재우가 5 16성토문 낭독,김영목이 한일굴욕회담성토문 낭독,정성철이 학원사찰성토문 낭독,이렇게 계획이 되었다가 나중에 실제로는 약간 조금 달라지거든 요. 구술자 :조금 바뀌었을 거예요. 57) 3주년을 잘못 말한 것임.

30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01) 면담자 :그리고 처음에 명칭이 황소식민족주의민주주의장례식,이렇게 결정된 건 김중태씨의 아이디어였 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구술자 :아마 그럴 거예요.아마 그럴 거예요. 면담자 :여기 시위에 어떤 제목이,타이틀이 굉장히 성격하고 대외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황소식민족주의민주주의장례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총장님도 당시에 동의를 하신 겁니까? 구술자 :물론이죠.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이 다 동의를 했죠.모의에서 아마 공식적으로 됐을 거예요.그 러니까 조사 준비다,관 준비다,두건 준비다,다 된 거죠. 면담자 :김지하씨는 5 20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여기 참여를 하게 된 거죠? 구술자 :그렇습니다.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면담자 :그 전에 김지하씨는 좀 이런 쪽에 좀 유명했던 셈입니까?조사 그리고 인제. 구술자 :조사를 함으로써 김지하가 인제 데모현장에 그게 데뷔를 했는데요.그전에는 김지하가 뭘로 유 명했냐 하면은 연출가였어요.학생 연극하는데.저 연출담당가로 유명했죠.그전에도 이미 천재성이 번뜩이던 사람입니다.그런데 데모에 뛰어들지 않았는데 그 5 20을 계기로 해서 지하가 아주 주동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면담자 :처음에 5 20,5월 20일 날 시위를 한 때 그 준비했던 지도부는 다 현장에서 피신을 한다,피신 을 해서 한다고 그 때 그렇게 그렇게 세운 걸로 알고 있는데. 구술자 :그렇죠.그 계획에 보면은 중태나 저나 도현이나 그 현장에 안 나타나기로 돼 있습니다.그 뭐 냐면 우리를 뒷 선으로 피하도록 한 거지요.하고 정면에 나가는 사람들은 좀 2선에 있던 사람들이 정 면에 나서게 된 것이에요.그러니까 사실상 피신할 걸 마음을 먹었던 거지요.한번 크게 소나기가 쏟아 질 걸 예감을 가졌던 겁니다. 면담자 :그리고 저 그 당시에 차후에 일 년 후배들,차후에 운동을 이끌어갈 그런 분들도 몇 명은 피신 시킨 걸로 되어 있거든요? 구술자 :그렇게 까지 조직적이지 못했던 걸로 아는데.그렇진 않았어요.우리가 그렇게 까지 치밀하지 못했어요. 면담자 :그때 그러면 그렇게 준비를 해 놓고 그날 장례식을 하는 현장에는 안 가셨습니까? 구술자 :현장에 갔었죠.가서 다 구경했죠.제대로 돼 가나,안 돼가나 뒤에 서서 다 봤죠. 면담자 :그때 본 그 기억을 좀 살려 주시죠. 구술자 :허허.장례식이 거창하더군요. 축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이라고 말이죠,휘장이라고 하나 만장이 라고 하나 만장.그것이 아주 긴 장대에다가 밑으로 늘어뜨린 걸 가져왔는데 아주 근사합디다.근사하 고,두건을 써가지고 했는데,뭐 장례식 거창했지요.우리가 생각보다도 준비가 더 잘 됐어요.그런데 그런 만장 같은 것은 바깥에 사회인들이 제공했습니다.그런 걸 하겠다니까 자기들이 만들어 주고 말 이죠.그래서 그날 굉장했습니다.그날 굉장했을 겁니다. 면담자 :그런데 이건 거 수사당국에서는 몰랐던 겁니까?이날 시위에. 구술자 :알았죠.알았습니다.알면서도.알았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아니면 수사당국에서 는 이 시위를 계기로 해서 우리를 잡으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이 시위 자체를 과격화할려고 했

308 30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던 시도들을 몇 군데를 봤었거든요.실제로 한양대에서는 8명도 안 나오는데 8000명이 나온다고 막 허 위선전을 했고,거기 과격화 구호를 집어넣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했었고,그건 그때 우리가 막았습 니다만.그래서 뭔가 큰 회오리가 치겠구나 하는 건 예감을 했었죠.그런데 시위 자체를 막으려고 하 지 않았습니다,당국에서. 면담자 :어떻게 보면 방조를 하면서. 구술자 :방조를 하면서 어떤 시위를 진압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았던 게 아닌가,이렇게 봅니다. 면담자 :뭐 또 다른 그때 정황들은 없습니까? 구술자 :예컨대 어떤. 면담자 :그 어떤 약간의 공작의 어떤 느낌이 드는. 구술자 :그게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데모들 있잖아요.5월 20일까지.5 16때도 이제 나오고 했는데,거기에도 그 구호들이 우리는 뭐 친진보 반보수 라든지 그런 구호들은 공작의 냄새들이 많이 나는 것이었습니다.많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면담자 :그 전날 김중태씨를 비롯해서 이 시위를 주도했던 핵심지도부는 제가 알기로는 이 시위를 하면 탄압이 아주 거세질 것이다.약간 엄청난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 비장감,그 비장감이 있었다고 제가 들었는데. 구술자 :예.예.저는 괴소포 때 이미 예감을 했습니다만 5월 20일 때는 인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했죠.그런데 그걸 피할 수가 없었어요.아까 설명을 된 게 그게 한 게 통했는지 모르지만 이것 을 안 할 수 없었다구요.죽는 한이 있어도 안 할 수가 없는 힘과 무게가 막 실려서 갔기 때문에 우리 가 각오를 하고 했던 거지요.그래서 소극적인 방법으로 인제 시위현장에서 무대에는 올라가지는 않고 뒤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다 체크하고 있었죠. 면담자 :그리고 다음에 도피를 했지 않습니까?어디로,주로 어디로 도피를 했습니까? 구술자 :(회상을 하면서)미리 도피를 할 곳도 마련하지 못했구요.그냥 그 우리를 현상수배를 했습디 다.하고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집에 저희 본가에 또 저희 고향에 막 형사들이 와서 진을 치고 이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제가 그때 이종률이를 찾아갔어요.이종률이가 동아일보 기자였습니다.지금 사태가 이렇게 됐다.그랬더니 이종률이가 자기하고 하숙을 같이 하던 사람이 국회의장을 한 김원기 씨예요.김원기씨는 연대 정치과를 나온 분이거든.그래 두 분이 상의를 해가지고 나를 어디로 데려갔 냐 하면 안국동 9번지로 데려 갔습니다.안국동 8번지는 윤보선 대통령가 바로 옆집에 고래 등 같은 그런 좋은 기와집에로 저를 데려갔어요.그것이 김원기씨가 아는 집이었어요.거기서 숨었습니다.그래 서 나를 피신시켜준 사람이 그 이종률 김원긴데 그 집에 안국동에 연대 2학년 학생이 있었어요.그 사 람이 윤영오 박삽니다,지금. 면담자 :아,그랬습니까? 구술자 :허허허.그래서 인제 윤영오 박사가 주로 나를 도와 줬지요.바깥에 가서 신문도 사오고 연락하 라면 어디 가서 연락도 하고.이래서 우리가 나중에 검거되고 난 후에 윤영오씨가 잡혀와서 아주 혼 났죠. 면담자 :아 그때 그러면 5월 31날 그 출두할 때까지 계속 거기.

30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03) 구술자 :네 거기 있었죠. 면담자 :나중에 보면 저거 한때 보면 김중태씨를 숨겨준 홍성유이라는 사람은 기소돼서 참 고생을 많이 했는데.그래서 저게 이상하더라고요.왜 현 총장님하고 김도현씨는 그도 분명 숨겨준 사람이 있고 도피를 했을 텐데.허허허.범인 은닉 자체가. 구술자 :그런데 당국에서도 심리적인 것,국민들의 여론,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겠어요.그러니까 우리를 숨겨준 사람을 갸륵하잖아요.그러니까 그 사건을 확대를 안하고 숨겨준 본인들만 잡아다가 고문만 실 컷 해서 내 보냈죠.윤영오씨는 그때 상당히 물리적인 고문을 많이 당했죠. 면담자 :아 그렇습니까? 구술자 :덩치도 좋고 하니까. 면담자 :어쨌든 5월 20일 시위는 그 당시에 어떤 5 16주체세력들한테는 굉장한 어떤 충격을 준 것 같 습니다.왜냐하면 거기에 대한 영장을 무더기 청구했는데 그걸 기각하니까.막 법원에 (법원까지 난입 하고)법원에 난입하고 그 다음에 양헌 판사를 찾아가서 그 집까지 찾아가서. 구술자 :네.굉장했죠. 면담자 :그렇게 하고 그리고 송철원씨를 납치해서 린치를 가하고 그런 이제 굉장히 어떻게 보면 무리수 를 둬서 그게 사태를 악화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구술자 :근데 그때까지는 정부가 은인자중을 해 온 거야.사실 학생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 건지 뚜렷 한 방책이 없다가 5월 20일 민족적민주주의(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거를 계기로 해 가지고 학생들한 테 칼을 뽑아들은 거죠.그때 대통령이 그랬습니다.뿌리를 뽑겠노라고 말이죠.그렇게 하면서,무차별 사정없이 막 했죠. 면담자 :그때 보면 그 이제 6 3항쟁에서 그 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김중태,현승일,김도현,이때 이제 전 국적으로 유명해 지는 거죠?동시에 수배가 되면서. 구술자 :그렇습니다. 면담자 :근데 또 김도현씨는.그때 갓 참여한 사람이 많고 정도의 차이도 뭐 어떤지 모르지만 근데 김 도현씨가 같이 트로이카로 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구술자 :음.확실한 트로이카였어요.끼인 게 아니고.저 데모에는 문건이 중요한 거 아니에요.문건이 근데 문건 일체를 거의 다 김도현이 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거지요.처음 부터.물론 나중에는 문건 분담해서 씁니다.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김도현이 책임 밑에서 이루어지 는 거예요. 면담자 :데스크.데스크였죠. 구술자 :그렇죠.그건 도현이가 알아서 해 이렇게 되는 거야.그러면 김도현이나 김정남 수석한테 맡기 거나 지하한테 맡기거나 송철원한테 맡기거나 이렇게 해서 문건은 좌우간 김도현이가 차질 없이 만들 어 왔으니까.그러니까 트로이카였죠.그건 정부에서 제대로 본거지요,수사당국에서. 면담자 :그때 인제 또 중요한 거는,저 또 중요하게 생각되는 게 이때는 그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라는 어떤 약간의 상징적인 방법으로 이렇게 도전장을 낸 거지만 그 보면 나중에 전남대에서.5월 27일 전 남대에서 처음에 이제 처음 박정희 하야 구호가 플래카드에 등장을 하고 고려대 6 2데모 때 그 박정

310 30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권은 하야하라 는 그게 나오거든요.박정권에 대한 구체적으로 명시해서 그렇게 어떤 홍보하는 시위를 하는 그런 거는.뭐 그런 거에 대한 논의는 없었습니까? 구술자 :그런 것이 나온 것은 필연적으로 나올 걸로 우리는 예견을 했지만은 그때 뭐 지도부라고 할까 우리 자신이 그것을 결정한 바는 없습니다.결정한 바는 없어요.나올 거다,그건 나올 거다,틀림없이 나올 거다,두고 봐라,이렇게 됐지 그것을 하자 해서 준비를 하거나 문건을 만든 적은 없습니다. 면담자 :그럼 그때 도피 중에 있으면서,세 분이 도피 중에 있으면서 연락을.서로 소통을 한 걸로 알 고 있는데요.연통을 보낸 거는 아까 말한 그 윤영오씨 이런 분들,이런 분들을 통해서. 구술자 :네.그렇습니다.그래서 나가는 걸 우리가 타이밍을 맞췄어요.이틀 간격으로 나가기로.그래 제 가 제일 먼저 나가고 그 다음에 도현이가 나가고 중태가 나가고 시간을 맞춰서 우리가 나갔죠. 면담자 :처음에 그때 도피 중에 일어난 중요한 일이 5월 25일 한학련이라고 전국 대학생 학생회장단 모 임을 중심으로 난국타개궐기대회를 동시에 하는데 이게 뭐 학교마다 달랐던 것 같고,여기서 친진보, 뭐 반보수 이런 문구도.그걸 빼자고 했는데 그걸 넣어서 발표하는 학교도 있었고 좀 노선의 어떤 혼 선이 심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거기에 관여한 것은 아닙니까? 구술자 :아니죠.아니고 이건 뭐 아주 오래된 예날 이야기니까.학생 사회의 치부이기도 하지만은 그때 의 학생회는 학교마다 다 사정이 달랐습니다.어떤 학교는 소위 노 YTP(Youth ThoughtParty, 靑 思 會 )하고 아주 연관이 돼 있었던 학교도 있었고 어떤 데는,상당히 정부 사찰 당국으로부터 이렇게 영 향도 받는 데도 있었고,또 거기에 저항하는 학생회도 있었고,또 완전히 독립된 학생회도 있었고,이 랬기 때문에 전국구국궐기대회를 할 때도 말이지 각개 학교마다 입장이 다 달랐을 거예요.달랐는데 이게 5 20이라는 큰 일이 벌어지고 나니까 투위 중심으로 벌어지고 나니까.전국의 학생 공식적인 학 생회 조직도 뭔가 안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어요.안할 수가 없는 분위기인데,서울대학 같은 경우는 상당히 건전히 투위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가지고 했습니다만.이야기 들어보면 또 우리가 느끼기도 했습니다만.어떤 학생회는 완전 테러조직처럼 돼 가지고 투위를 테러하고 그런 적도 있어요.그래서 거기는 우리 측에서 관여하거나,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전혀 못 됐습니다.전혀 못 됐습니다. 면담자 :그래서 5월 서울대 같은 경우,문리대 같은 경우에는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그걸 하는데 학 생회장 김덕룡 회장이 주도해서 하는데.제가 알기로는 투위 쪽하고 학생회 쪽하고 묵계가 있었던 걸 로 제가 들었거든요.그러니까 5 20에는 학생회는 참여하지 않는다.그리고 학생회는 학림제가 끝나면 투위에 합류한다.이런 뭐 묵계가 있었다고,김정남 수석을 통해서. 구술자 :그랬지.그랬습니다. 면담자 :그래서 저 학생회가 이제 단식 또 5월 30일 이루어지는 단식도 학생회이름으로 처음에 단식을 선포하지 않습니까?이제 고런 관계는 그런 도피 중에도 그런 연락을 받고 구술자 :연락은 받고 있었죠. 면담자 :알고는 있었습니까?뭐 단식에 관한 기획 같은 걸 하지는 않았고요? 구술자 :아니요.우리는 도피 중에 그 기획할 역량이 없었습니다.그저 단식을 학생회에서 주도한다 하 는 것만 알고 있었지요. 면담자 :그때 어떻게 평가를 했습니까?단식하는 게 좋은 방법이다라고 생각을 하셨습니까?아니면.

31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05) 구술자 :저는 찬성을 했던 것 같아요.어차피 뭔가 끝장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 진했고요.진했는데,단식 이라는 것은 자기희생적인 무저항투쟁 아닙니까?그래 그 방법 좋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그때 어리 석은 생각으로 어떻게 해서든 계엄이 안 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허허허.턱도 없는 생각 을 하고 있었지요.우야든지 계엄은 안 나도록 해야겠다.이 계엄이 나면은 이 운동은 이제 좌절되고 한일회담은 곧장 타결되고 말 것이다.이래 가지고 계엄이 안 나면서도 이런 운동을 지속적으로 좀 장 기화할 수 없을까,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면담자 :그러니까 단식농성 같은 경우는 그런 측면에서는 구술자 :네.찬성을 했었지요. 면담자 : 좀 효과적인. 구술자 :네.제가 아마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던 걸로 생각이 듭니다. 면담자 :거기 이제 도피 중이었던 세 분 사이에는 그런 입장 차이는 없었습니까? 구술자 :좀 있었죠. 면담자 :단식과 그 다음에 투쟁의 어떤 수위라든가,성격 같은 걸 놓고. 구술자 :그런데 저는 계엄을 막자 하는 쪽이었고 중태의 경우는 계엄을 유발하자는 쪽이었어요.중태는 계엄이 나면 이 정권은 붕괴된다고 봤던 겁니다.거기에 아주 현저한 견해차가 있었지요. 면담자 :거기 저 김도현씨는 뭐. 구술자 :도현이는 중태 쪽에 가까웠을 거예요.아마. 면담자 :그때 김도현씨는 어디에 어디에 도피하고 있었는지 혹시 서로 도피처는. 구술자 :어.중태가,도현이가 어디 있었나.(과거를 회상)거 어디 친구 집에 있었어요. 면담자 :그래서 나중에 서로 31일부터 이제 순차적으로 이렇게 자진출두해서 단식현장에 나왔다가 인제 이렇게 경찰에 자진출두하지 않습니까? 구술자 :저는 단식 현장에도 안 가고 바로 갔습니다.그때는 제대로 봉기가 되기 전이기 때문에. 면담자 :그러면 그때 서로 어떤 연락이 있었습니까?출두를 하자든가. 구술자 :어.출두를 하자고 했지요.그래서 이틀 간격으로 우리가 출두하기로 했어요.내가 젤 먼저 나 가마,이래가지고는 도저히 안 된다,내가 좌우간 먼저 나가겠다.저는 이제 출두할 때 우야든지 계엄 은 안 나가는 쪽으로 해야겠다.우리라도 뒷전으로 감옥에 가 있으면 이게 조금 소강으로 빠지지 않을 까 하는,이런 어리석은 기대를 했던 거죠.그래서 뭐 출두 할 때야 다 겁 좀 나잖아요.허허.그래도 그 길을 택했던 거지요. 면담자 :서로 이렇게 동의를 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세 분이 서로 떨어져 있는 데다가 서로 연락을 통 해서 출두를 하자 그러면 서로 이게 출두하게 서로 납득이 돼야 되지 않습니까?거기에? 구술자 :우리가 납득이 됐으니까 다 나갔잖아요.셋이 약속대로 다 나갔으니까. 면담자 :그런데 저 김중태씨 같은 경우에는 조금 제가 볼 때는 생각이 달랐을 수도 있잖습니까? 구술자 :생각이 달랐을 수도 있지만은 그때 어떤 사태가 있었냐 하면 김중태가 중앙정보부에서 피살됐 다고 하는 피살설이 확 나돌았습니다.그거 아시겠습니까? 면담자 :네.그때 있었죠.네.

312 30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러니까 중태로서는.그땐 우리 출두를 촉진시킨 것이에요,그 신문에 난 루머가.이 피살설을 듣고도 안 나가면 계속 국민을 속이는 거 아닙니까?국민은 피살됐다가 믿을 것 아닙니까?거기에 대 한 어떤 양심적인 부담을 가졌던 거예요.그러니까 중태도 그 부담 때문에 나왔던 거예요.나 죽지는 않았다.이런 헛소문을 끝까지 피해 있으면 결국 그 소문을 확산시키는 그런 고약한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잖아요.그것 때문에 결국 안 나갈 수가 없었을 겁니다.그 피살설 때문에.제가 출두 할 때도 내가 알기로는 피살은 안 됐다 하고 나갔으니까. 면담자 :그런데 6월 3일 날 이제 대규모 시위가.뭐 그 이전에 고려대에서 6월 2일 날 크게 하긴 하지 만,6월 3일 날 대규모 시위를 하는데 이게 자연발생적으로 다 6월 3일 날 다 가두진출을 하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대학 간의 서로 어떤 연락을 통해서 우리 6월 3일 날 동시 에 다 나가자,이렇게 됐는지 그게 잘 파악이 안돼요? 구술자 :근데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릅니다,사실은.제가 그때는 5월 30일 날 이미 들어갔기 때문에 저 는 자진출두해서 피검자 구속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왜 6월 3일 날 그날 같이 동시에 나왔는지 그 부분은 잘 모릅니다. 면담자 :그런데 그전에 그런 것 있더라구요.온갖 소문 뭐 7 7=49 그건 4 19고,7 8= 이고 7 9=636 3이다. 구술자 :맞아.허허허. 면담자:6 3,6월 3일 날 뭔가 큰 일이 일어난다 그런 소문도 있었다고 그러던데.그 전에 고려대 같은 경우를 보면 그 때 한학련이 주도한 5월 25일 날 한 난국타개 궐기대회 때 정부에 대해서 어떤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일주일 유예기간을,일주일 유예를 주는데 그게 일주일 유예가 6월 1일 날 끝나잖습니까? 그래서 고대는 그 명분 때문에 6월 2일 날 나갔다고 그랬거든요.일주일 유예 기간이 끝났으니까 그 다음날 이제 나갔다고 그러는데.그거하고 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구술자 :그렇지.고대가 나간 것이 6 3을 일으키는 아마 그 단초가 됐을 거예요.고대는 4 19때도 4월 18일 날 나왔거든요.그 하루 먼저 좀 나오는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고대는.허허허. 면담자 :근데 동대문서에 인제 출두를 해서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현 총장의 급한 전화로 잠시 중단(43:27~43:45) - 면담자 :그 동대문서에 출두해서. 구술자 :제가 어떤 대접을 받았냐고요?그때부터 인제 칙사 대접을 받았죠.허허.온갖 대접을 다 받았 죠.어.그러고 계엄 전까지는 사실 우리를.그냥 수사를 별로 안 했어요.안하다가 계엄이 되고 나서 는 우리 몸을 이곳저곳으로 옮겼습니다.어느 한 동대문경찰서에만 있는 게 아니고 종로로도 갔다가 어디로 갔다가.갔는데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 갔어요.가 가지고 우리가 잠 안자는 고문을 심하게 당했죠.잠을 며칠이나 안 잤는지도 모르겠어요. 면담자 :계엄 나고 난 뒤에는.계엄 난 건 언제 알았습니까?

31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07) 구술자 :계엄 난 거는 그날 바로 알았죠.계엄이 났다는 건.그러니까 이제 계엄이 나자 우리가 경찰에 서 했던 특수.아마 수사를 받았을 거예요.굉장히 좀 심하게 받았어요.받고.우리 신분은 인제 계엄 군법회의로 넘어 갔거든요.계엄 군법회의로.(예전 기억이 생각나시는 듯) 면담자 :또 재판 얘기는 따로 하게 될 텐데. 구술자 :계엄 군법회의로 갔어요.(계속해서 예전 기억이 생각나시는 듯) 면담자 :동대문서에 있다가 이틀 후에 김도현씨가 또 출두해서 그 쪽으로 왔을 때 그 뭐 어땠습니까? 반가웠습니까? 구술자 :뭐,반가워요?허허허(허탈 웃음을 지으심).반갑긴.전혀 반갑지 않았구요.그 뭐 지옥에 들어 왔는데 반가워 할리도 없고.허허허. 면담자 :그러니까 동대문서에 쭉 같이 계셨던 거죠? 구술자 :아니죠. 면담자 :세 분이? 구술자 :같이 있다가 떨어 졌다가.모르죠 뭐.수사는 개별적으로 받았으니까.한 건물 안에 있었는지 어쩐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면담자 :계엄이 선포됐다는 걸 알았을 때 그걸 이제 우려했던,그 우려했던 상황에서 그런 일이 결국 기 어이 벌어졌을 때 그 때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구술자 :글쎄 우려했던 그때 것은 잊어버리고 계엄이 됐구나,계엄이 왔구나,그런 생각을 했죠.그러고 모든 운동이 좌절됐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죠.계엄이 선포되니까요.경찰이 사기가 굉장히 등등해 집 디다. 면담자 :경찰이요? 구술자 :네.사기가 굉장히 등등해 집디다(생각이 나시는 듯 되풀이하심).금방 말하는 것이 달라져요. 그 동안 아마 이 경찰이 이런데서 상당히 위축돼 있었던가 봐요.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고 말이지.그러 다가 계엄이 나니까 신이 납디다,신바람이.신바람이 났어요.경찰에서.그때는 뭐 구타도 마음 놓고 하고 그러던데요. 면담자 :어디 구타라든가 고문이라든가 이런 것도? 구술자 :왜?많이 당했죠. 면담자 :아 그렇습니까.경찰에서 아니면? 구술자 :그게 경찰인지 정보부인지 모르겠어요.뭐 밤에 어디 건물에 끌려갔는데 경찰서는 아니에요.경 찰서 분실인지 정보부 분실인지 군대 분실인지 알 수가 없죠.보는.처음 보는 사람들이고,생면부지 이고. 면담자 :그 외 아까 그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과 6 3으로 이어진 과정에서 좀 뭐 생각나는 것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시죠? 구술자 :하여튼 저 우리 우리나라 데모사상 아마 그게 제일 큰 게 아닌가 싶은데 그 후에 그런 만한 데 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이게 말이죠.통제 불능이 됩디다.결국.결국 그것이 자기운동법칙 에 의해서 굴러가더라고.그러니까 우리가 주동자로서 역할을 한 거는 5 20까지예요.그러니까 5 20부

314 30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터 이게 절반은 떠밀려서 했던 거예요,사실.그러고 그 이후부터는 그냥 저절로 굴러 가더라고요.그 리고 제가 자진 출두해 들어갈 때는 인제 내 손을 떠났다하는 생각이 많았어요.사실은.내 손을 떠났 다,여기서 아무것도 안 된다,인제.그러고 우리가 안 해도 이제는 데모는 저절로 될 것이다.무슨 계 엄이 되든 뭐가 돼든 말이지.그런 생각이 아주 강합디다.그것이 6 3직전의 제 심정이었어요. 면담자 :아까 말씀하진 5 20때 5 20을 준비한 조직이 대일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란 이름으로 돼 있 다고 나중에 공소장에 기록이 돼 있는데 실제로 이렇게 그 명칭을 이렇게 정했습니까? 구술자 :그랬습니다.그때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학교 투쟁위원회,고려대학 투쟁위원회 해가지고 전 국대학이 전부 다 조직이 되었어요.심지어 고등학교들까지 이름 똑같이 뒤에 어느 학교 투쟁위원회 이것만 달랐지.그래서 그것이 금방 전국 조직화했습니다.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군대처럼 무슨 사 령부가 있고 무슨 참모진이 있고 해서 일사불란한 그런 조직체가 아니고 엉성한 연합체였습니다,엉성 한 연합체.어떤 데는 체 연락도 못하고,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면담자 :여기에 보면 대부분이 다 학교의 공조직이 아닌 따로 조직된 투위지만 일부는 공조직 자체가 투위이기도 한 데도. 구술자 :이기도 한 데도 있었어요. 면담자 :있었죠.주로 동국대가 제일 그 역할을 많이 한 구술자 :야전군이죠 면담자 :네.그런 걸로 돼있고,동국대 이외에 다른 대학에서 특히 좀 적극적으로 많이 참여한. 구술자 :성균대학이죠.성균관대는 서울대하고 가깝잖아요.그러니까 데모를 서울대에서 시작을 하면은 병력은 성균관대에서 다 오는 거예요.그러니까 성대 학생들은 농담으로 그럽니다.자기들은 편하대요. 데모 준비할 일이 없대요.서울대에서 연락 오면 오면 되니까.허허허. 면담자 :그때 이제 성균관대 쪽에서 주로 같이 참여 했던 분들 중에 기억나는 분들이 누구? 구술자 :아휴 많죠.지금도 다 동기로 있죠.오성섭,홍성유,박훈이 이런 사람들이 다 동기들이죠. 면담자 :그 당시 인제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할 때도 서로 인제 얼굴을 알고 지내는. 구술자 :아.물론이죠.그 때 상당히 친했습니다.그때.동국대학교도 그렇고,우리 하숙집에도 많이들 오고.박동인이,장장순이는 덩치들이 크잖아요.우리들은 조그마한 학생들이고 이 친구들은 벌써 나이 도 근 서른이 돼 가는 장부들이예요.우리 하숙집 아주머니들이 저 사람들은 장군 같다고 그랬어. 현 형~ 하면서 들어와.허허. 나 박동인이요~ 면담자 :그때도 정릉 하숙집에 그때 까지도 있었습니까? 구술자 :네.네.지금 다 6 3동지회 멤버들 아닙니까? 면담자 :이따가 저 말씀.재판,재판 과정하고 그 다음에 이제 그 뒷얘기를 따로 할 텐데요.하여튼 3 24에서 6 3까지가 상당히 박정희 정권에 민간.민정이양,민정으로 전환 이후에 구술자 :직후지. 면담자 :박정희 정권의 큰 어떤 전환점이랄까 될 수 있는데. 구술자 :그때 이제 홍성유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지 않았어요?그래가지고 또 최두선 내각이 붕괴됐죠. 그 6 3이전에.그게 방탄 내각이었는데 6 3그 당시에는 정일권 내각으로 내각이 바뀌었을 겁니다.그

31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09) 아시죠,다.그리고 정부조직 자체가 온건내각에서 과격내각으로 바뀌었어요.그러고 외무부 장관도 이동원씨로 교체가 됐죠.이동원씨가 그때 40댄지 30댄지 청년이었는데 필리핀 대사를 하다가 하루아 침에 외무장관으로 등극이 됐죠. 면담자 :그렇죠.그리고 뭐 중앙정보부장도 구술자 :그럼요. 면담자 :김형욱씨로 바뀌고. 구술자 :바뀌고,완전히 과격한 돌격내각으로 내각이 개편됐습니다.그 6 3을 거치면서. 면담자 :그 뒤에 군재,그때 아마 군 계엄이 해제되기 전이었던 시점인데요.7월 10일쯤에 불꽃회 사건 이라고 발표가 되지 않습니까?사실 6 3항쟁의 어떤 배후조직으로 만들려다가 나중에 실패한 그런 걸 로 제가 파악되는데요.그 불꽃회 사건 때 당연히 그와 관련한 조사를 받았을 거라고 짐작이 되는데. 구술자 :전혀요. 면담자 :불꽃회 사건. 구술자 :불꽃회라고 하는 세 자체가 없어요.없어.불꽃회라고 하는 이름은 있었는지 그것도 의문이예요. 거기에 김정강이 한 사람이예요.한 사람인데,이 김정강씨가 뭐 이 일기장을 적어 놓았는데 친구들 이 름을 많이 적었던 모양이에요.근데 그 친구를 좋게 적어 놓은 게 한명도 없대요.그러니까 그게 조직 이 되는 게 아니지.이 친구는 이래서 못 쓴다,이 친구는 못 쓴다,전부 친구를 나쁘게 적어 놓았대요. 그래가지고 형사가 와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더라고.너는 김정강이가 이렇게 평가해 놨더라고 말이지. 허허허. 면담자 :그때 그랬습니까? 구술자 :그걸 우리한테 와서 알려줬어.허허허.그래서 우리가 불꽃회라고 하는 걸 알았어요.그러니까 아무런 연계도 없었고,또 실체도 없는 개인적인 무슨 관계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이 불꽃회예요.만약 그게 있었다고 하면 가만 두겠어요? 면담자 :어쨌거나 김정강씨가 상당히.그 당시에 4 19세대 아닙니까?4 19세대 선배 그룹으로서 뭐 그 당시까지 활동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학교 다니던 중에,그리고 3 24를 준비한 시기라던가 아니면 그 이후라던가 김정강씨를 만난 적이. 구술자 :없죠.없고. 면담자 :없습니까? 구술자 :김정강씨가 그 이후에 3 24다,6 3운동의 배후라고 자칭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는 자기가 그 저 상상하는 이야기지 사실하고는 아무런 관계없는 이야기예요. 면담자 :지도부하고는 직접적인 그 어떤. 구술자 :그것도 없고 밑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그때 자기가 끼어들었으면 몇 마디 할 수는 있겠죠.그 렇지만 그것이 무슨 뭐.그 당시에 데모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김정강씨는 그렇 게 영향력도 없었어요.그분이 좀 괴짠 게 4 19이후에 아마 저기 수배를 받았던 것 같애요.그래서 자 기 가명을 썼다고.김정강이가 아니고 강 뭔가 뭐 이랬어요.그러니까 우리 저 사람이 김정강인지 아는 데도 자기는 난 강아무개요 인사하고 그랬다고.그래서 저 사람 뭐 이래 된 거 아닌가.허허허.그랬

316 31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던 기억이 나요.실제로 6 3운동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면담자 :그 당시에 저 소위 말하는 좌파적.좌파적 조류,거기에 상당히 좀 민감하게 이렇게 저걸 했 던. 구술자 :그 사람이 좌파의 보스였을 거요.아마 자칭. 면담자 :했던 분이 제가 듣기로는 김정강,박종렬,서정복 이런 분들인데. 구술자 :아마 그랬을 거예요. 면담자 :그런 분들하고의 교류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까? 구술자 :전혀 없었죠.누군지는 알았지.서로.서로 얼굴은 알았지만은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어요.그 사 람들하고 교류해서는 될 일도 안 되니까. 면담자 :서정복씨 같은 경우에는 학교 선배 아닙니까? 구술자 :선배죠. 면담자 :선배로서 뭐 이렇게 좀 구술자 :별로 면담자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는 아니었나요? 구술자 :그런 건 아니에요.그 분은 철학과였고. 면담자 :일단 뭐 이번 이까지 6 3까지는 일단 여기하고 좀 쉬었다가 나머지는 또 하도록 하겠습니다. Tape3. 면담자 :동대문서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던 중에 6 3계엄령이 터졌죠.계엄 하에서 군사재판을 받게 되잖 습니까?그때 이제 나왔던 공소장이 보도가. 구술자 :내란으로 됐지.내란. 면담자 :그 때 당시에 내란죄로 기소가 되었는데.내란죄에 대한 근거들이 쭉 나오다가 나중에 민재로 넘어가면서 내란.그 다음에 소요와 집시법.그걸로 공소장을 변경해서 기소를 하지 않습니까? 구술자 :맞습니다.맞습니다. 면담자 :그런 과정들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구술자 :그러니까 계엄 군재에 갔었거든요.계엄령이 났으니까 계엄보통군법회가 구성이 됐다고요.그래 서 가지고 검찰하고 인제 법정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은.필동입니다.필동.필동이고.검찰청도.군대 는 뭐라 그러지.검찰청이라 안 그러고 군대 검찰.군대 검찰.거기 내 담당검사가 조성욱 검사였어요. 나중에 법무부 차관 하신 분인데,아주 잘 생긴 미남이죠.그 분이 담당했는데,하여튼 우리가 정부 전 복을 기도했다는 그 책임을 우리가 다 졌어요.그 때는 인혁당 사건이나 동베를린 사건,이런 걸 조작 하지 못했어요.못했는데 계엄은 현실적으로 폈고 그 계엄의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한다고.그걸 우리 3 인이 진 거예요.그래서 형법 89조 1항이지 아마.그게 뭐냐 하면 내란 수괴에요.내란 수괴.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이제 2항,3항 이랬는데.1항은 말이죠.수괴는 죄목이 하나밖에 없어.사형에 처한다,

31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11) 이거밖에 없었어요.그래 가지고 우리를 설마 죽이려고 했겠습니까만은.혹시 저 친구들이 죽이면 어 떡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긴 들더라고요.조항이 딱 하나 뿐이니까.그래 그거를 재판을 했는데 그때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변호사들이 붙었죠.그 대표적인 분이 신태악 변호사예요.신태악,박한상,김 은호,뭐 차지수. 면담자 :서차수. 구술자 :서차수.미안해요,서차수.이렇게 인제 여러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붙었죠.붙었는데,이분들 이 재판을 자꾸만 지연술을 쓰더라고요.그러니까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이 지연술을 쓰고,그리고 검 찰부와 재판부도 재판을 그렇게 강행할 의사가 없습디다.그러니까 이 변호사측에서 지연하는 그런 무 슨 재판관할권 재정신청을 한다든가.무슨 증인채택을 한다든가.이러면서 자꾸 공판을 연기를 시키는 거예요.그게 왜냐하면 재판하고 싶지 않거든.그렇지 않겠어요?어린 학생들을 내란 수괴라 붙여 놓니 말이지 엄청스럽단 말이야.그래서 재판 진행이 안됐어요.결국 재판이 지지부진 가다가 계엄령이 해제 가 됩니다.그것이 한 10월 쯤 되었나요?계엄령이. 면담자 :계엄령 해제는 7월 29일. 구술자 :그렇게 빨리 됐습니까?그래서 계엄령 해제와 동시에 우리가 민재로 넘어왔어요.그러니까 민간 검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그래서 죄목이 소요 및 집시법 위반입니다.이제 내란은 빠졌어. 그래서 재판을 받았죠.받았는데,우리 그때 이준성 검사가 내 담당 검사가.그리고 판사님이 문 뭐 씬데.맞아.문영극 판사였던가.문영극 판사였는데. 면담자 :1심에서는 문영극 판사였습니다. 구술자 :맞아.1심에서.그래서 이 문영극 판사가 아주 쾌활하신 분이고 재판을 시원시원해서 우리가 가장 작은 형벌을 준 거였어요.그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집회 시위법 위반,그것도 웬만한 부분 은 다 무죄로 때렸어요.다 때리고,이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한 그런 재판이었다고 느껴져요.그래서 아주 가벼운 형을 받고서 그래서 나왔죠.그 바람에 학교에서는 제적을 당했죠.우리 셋이가 제적을 당 했어요.제적을 당하고 이제 졸업도 못하고 그렇게 됐는데,그런데 저는 복학이 되었어요.요행이 복학 이 되었어요.세 명이 다 제적이었는데.그 하나의 에피소드인데 우리 정치과 교수님들이 우리 셋에 대해서 전부 제적이 부당하다고 항의를 한 거예요.그 당시 총장이 유기천 총장님이셨는데 그 분이 나 중에는 반독재 투쟁으로 돌아섰는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엄한 그런 분이었어요.학생들은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니까 이런 애들은 빨리 제거를 해야 한다,바이러스는 제거를 해야 한다,이렇게 하신 분인 데.총장님하고 우리 교수님하고 그 타협의 결과가 뭐냐면 한 사람만 구제를 하는 걸로 됐어요.그래 서 내가 운 좋게 거기에 걸린 거예요.그래서 내 하나는 일 년 늦게 졸업을 하게 되고 중태하고 도현 이는 영원히 졸업장을 못 받았어요,그 바람에.그래서 아주 희생이 컸죠. 면담자 :그 당시 재판 과정에서 구체적인 어떤 죄목을 혐의를,팩트를 적용시키려면 6 3은 배후조종했다 는 증거가 없잖습니까?그러니까 6 3당일에 있지도 않았으니까 5월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그걸 갖 고 하는데 그게 집시법 금지 부분에.당시에 경찰이 장례식을 한다는 걸 알고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한 다고 서면통보를 했다고 돼 있는데 그때 받은 적 있습니까? 구술자 :받았죠.우리가 집회 시위 허가 신청을 했어요.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할 때는 이미 공개적으

318 31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로 했거든.그래서 허가를 안 날 걸 알았지만은 우리가 그거를 집회시위 허가 신청을 했습니다.신청을 하니까.이제 그 신청은 제가 했죠.왜냐하면 내가 공보담당이니까.그래서 내가 했고,그쪽 편에서 안 된다는 통보를 저한테 해 줬어요. 면담자 :그 당시에 기록을 보면 장례식 전인 5월 18일 집회신고서를 작성해서 동대문경찰서에 등기우편 으로 발송했다 돼 있는데 그건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네.맞아요.제가 했어요. 면담자 :민간 검찰에서,민재에 넘어가서 민간 검찰에서.이 부분도 일부 유죄를 나중에 선고하잖습니 까?그게 뭐냐면 금지 통보를 받고서도 집회를 강행했다는 점,그리고 소요의 점,이 부분은 무죄를 선 고한다고 했거든요.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렇게 선고가 나왔는데.그렇게 된 배경이 상당히 제가 볼 때는 어떻게 보면 엄격하게 적용을 안 하고 좀 느슨하게 적용했다고 할 수 있는데,그 배경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술자 :그러니까 그때 제 기억으로는요.우리는 그것이 집시법 위반이 될 걸로 생각했는데 재판부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때리면서 설명이 그거예요.집시법의 취지가 신고를 하는 것으로서도 그것이 유효하다고 그랬어요.반드시 허가가 나야 되는 게 아니다 이거야,법 취지가.그런 식으로 판결 이유 를 이야기했습니다.했고.그러고 그날 그 일이.데모가 소요에 이르는 정도가 아니다.소요라는 것 은 다중의 힘으로 사회 공공질서가 완전히 억압되는 상태가 가야 소요래요.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의 사를 표현하는 집회시위에 관한 것인데,그건 이미 신고를 했기 때문에 그건 무죄다.이렇게 해서 그 부분이 무죄가 났어요.그러니까 나머지 사소한 걸로 집행유예를 받았죠.우리도 그렇게 경하게 나올 줄 몰랐어요. 면담자 :오히려 보면 고려대 팀이 더. 구술자 :더 많이 받았죠.그러니까 허허허.우리 판사님이 우릴 제일 작게 때렸다니까.고대가 우리보다 더 많이 받았어요.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라던가 그렇게 받았지.그것은 판사님의 그거야.재 량이었어요. 면담자 :그 당시에 이제 검찰이나 재판부에서 상당히 지금 봐서도 그게 깜짝 놀랄 만한 어떤 판결이나 저거도 기소 거부를 했잖습니까?그 인혁당 사건도. 구술자 :어.그랬죠. 면담자 :검사들이 처음 기소거부를 하고,그래서 그때 검사의 사표를 다 수리하고 새로 기소를 했는데, 다른 검사가 기소를 했는데,재판부가 또 아주 경미하게 때리고 항소심에 가서는 무죄 선고를 해 버리 고.인혁당사건도 그렇고 불꽃회 사건도 그렇고 나중에 이 세 분에 대한 그 내란죄,그것도 그렇고. 다 그냥 아주 경미하게 판결이 나 버리죠. 구술자 :지금 아주 중요한 대목을 지적을 하셨어요.그거는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회의 민심의 동향을 말해 주는 겁니다.이 박정희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 초기에는 굉장히 인기가 없었습니다.초기에.6 3 날 그 당시만 해도 박대통령이 무슨 경제성과의 실적이 있기 이전 아닙니까?그때의 5 16군사정권이라 고 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그런 분위기였어요.그러고 박대통령의 과거 경력이.일제시 대 관동군 출신에다가 또 좌익운동을 했다가 전향한 사람이고 풍채도 그렇고.여러 가지가 뭐 도대체

31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13) 하나의 권부로서의 그걸 권위와 신뢰를 전혀 못 받았어요.그때는 법원이고 검찰이고 언론이고 말이 죠.학원이고 할 것 없이 전부 그 분위기가 학생데모를 지지하는 쪽이었어요.전부.그러니까 전 국민 적인 호응 속에서 데모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상당히 그 사법부에서도 동정적이 었죠.이 박정권의 초기라고 하는 것은 정말 허무하게 출발한 그런 정권이예요. 면담자 :그래서 어떻게 보면 거의 강력한 조치인 계엄령을 선포해서 군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될 상황 이.사태가 벌어졌는데,거기 책임질 사람은.심하게 책임질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어떻게 보면 김중태.그 당시에 김중태 등 내란 사건으로 돼 있는데,인제 그걸 재차 65년도에 다시 사건명은 일명 몰로토프칵테일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그 사건에 다시 김중태,김도현이 연루가 되지 않습니까? 구술자 :저는 그때 빠졌죠. 면담자 :그때 빠지게 된 그런 내력을 좀 설명을. 구술자 :(여러 만감이 교차하시는 듯)그 때 내가 대구에 가서 연탄차를 끌고 다녔어요.그것 때문에 빠 졌는데,저희 아버님이 아프셨어요.그래 우리가 역전에 조그마한 연탄공장 겸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가사를 도우는 바람에 빠지게 됐죠. 면담자 :그 때 김중태씨라든가 서울에 있는 65년도에도 활동을 동기들이라든가 이런 분들한테 참여하라 는 압박은 없었습니까? 구술자 :아니.그때 서울에 있는 친구들도 실제로 활동을 해서 잡혀간 게 아니라고 저는 봐요.그 무죄 받았잖아요.전부.서울에 남아 있으니까 잡아간 거죠,정부에서. 면담자 :거기 있을 때 그러면 대구에 계속 계실 때 중간에 서울에서 시위도 일어나고 나중에 같이 했던 김중태씨라던가 이런 분들이 나중에 구속도 되는데 구술자 :구속이 됐죠. 면담자 :그때마다 뭐 그쪽에 수사기관이라던가 이런데서 여러 가지 또. 구술자 :그래서 내가 연탄을 인제 우리 연탄을 끄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도우고,인제 아버지가 아파서 그렇게 내가 가사를 도왔는데.대구서 소문은 어떻게 났냐 하면은 저 친구 국회의원 출마하려고 한다 고 저런다고 말이지,그런 에피소드가 있죠. 면담자 :그때 뭐 경찰.형사들이 감시는 없었습니까? 구술자 :왜요?많았지. 면담자 :항상 이제 동향 체크해서.그 나중에 아니 그 당시에 다른 분들이 어느 정도 활동한다는 그런 건 좀 알았습니까,그런 정도는? 구술자 :우리 후배들이 사실상 이걸 모든 것을 테이크 오브를 했다고.그리고 중태나 그 당시에 최혜성 이나 이 사람들은 그저 서울에서 모여서 잡담을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그러니까 사실상 활동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어요.우리는.만날 경찰이 따라다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면담자 :근데 그걸 몰로토프칵테일을,그 칵테일 사건을 2차 민비연 사건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물 론 김중태,김도현 두 분이 거기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긴 하지만.그 사건도 결국 65년도 8월 26일 내려진 위수령에 대한,그걸 단죄하기 위한,위수령을 유발한 거기에 대한 단죄하기 위한 걸로 받아들여지는데요.

320 31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구술자 :그래요.좋은 말씀이신데 정부에서는 말이죠.계엄령도 폈고 위수령도 폈는데 우리가 너무 어 렸기 때문에 그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없었던 거예요.그러니까 처음에는 내란 수괴다,이렇게 했지만 그것이 도저히 사회에서 용납이 안 되니까.우리가 결국 집시법으로 풀려나고 말았는데 정부에서는 좌우간 우리를 한번 처벌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확고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그것이 나중에 민비 연 사건으로 재현이 됩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데모를 한 배후가 있었다 하는 걸 끊임없이 만들 어 냈어요.그러니까 우리 처음에 6 3당시에는 그런 걸.사건을 조작을 못하다가 인제 시간이 좀 흐 르고 나서 그걸 조작한 것이 소위 인혁당 사건이예요.그래 가지고 이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하수인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그 배후는 있었다.이렇게 해서 불꽃회 때도 그걸 한번 시도 했었고,그 다음에 인혁당 사건 때도 그걸 시도했어요.그래 우리가 한때는 우리가 인혁당 피고인인 것 처럼 다루어졌어요.신문에 발표도 그렇게 나고.했는데,실제는 그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신문에 발표만 대대적으로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우리가 뭐 실제로 구속영장이 떨어지거나 그러 지도 않았다고.그리고 몰로토프칵테일 사건도 마찬가지죠.그 위수령에 대해서 뭔가 책임을 물어야겠 는데 물을 사람이 없으니까 중태,도현이가 서울에서 왔다갔다 하니까 거기다가 책임을 물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끝에 나타나는 사건이 민비연 사건입니다.67년도요.근데 민비연 사건 때는 뭔가 과거 64년 도 그 계엄령 사태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되지만은 67년 그 자체가 선거를 하던 해였어요.그때는 개 헌을 해기 위해서,3선 개헌일 거예요.3선개헌 내지 유신개헌을 하기 위한 계획이 이미 서 있었던 것 같아요.그래 가지고 국회 3분의 2석을,이걸 확보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됐습니다.그 렇게 해서 도시에서는 뭐 거의 전멸하다시피 당선이 안됐지만은 시골에서는 다 되었잖아요.이래서 거 의 3분의 2선이 넘었던가 3분의 2선이 육박했어요.그렇게 부정선거다 하는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니까 학생들이 또 부정선거 반대하는 데모가 학원가에서 꿈틀거렸다고.그러니 이것을 또 잠재울 필요가 있 었던 거예요.이렇게 해서 거기 맞아떨어져서 우리가 잡혀 들어간 거예요.그게 소위 민비연 사건입니 다.근데 그때 공교롭게도 동베를린 사건이 터졌어요.그 동베를린 사건은 실체가 있는 사건이예요.거 기에 그 연루자들의 몇 이가 실제로 북한에 다녀왔고 북한에서 적은 돈이지만은 그래도 자금도 받고 이런 실체가 있는 사건이 터.난 거예요.그러니까 우리 민비연 멤버들을 동베를린 사건에 붙여 놓은 거예요.우린 그때 이미 유명해져 있는 그런 학생운동의 리더들이니까 말이죠.우리 이름이 들어가야 또 이게 효과가 있단 말이야.그래서 해서 우리를 동베를린 사건의 하수인으로 집어넣은 거예요.그래 거기에 인제 동베를린은 간첩단이니까 우리가 간첩으로 피검이 됐어요.우리 죄명이 다 간첩이었었죠. 그런데 인제 검찰에 가서 조사를 하니까 연결이 안 되거든.그 연결고리가 겨우 황성모 교수가 독일에 서 공부했다는 그 사실 뿐이고,그 밑에 있는 학생들하고 동베를린하고는 도저히 이게 관련이 안 된다 말이야.이래서 그거를 사건을 분리한 게 소위 민비련 사건입니다.민비련.민비련이 내란 음모사건이 죠 58).정부를 3년 전에 전복하려고 했다하면서 옛날 데모를 재탕한 거예요.그 사건은 맨날(만날)그거 예요.그거.공소장 내용도 그거예요.근데 다만 그거는 황성모 교수가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가지 고 그 교수의 지령에 의해서 학생들이 움직였다,이렇게 돼 있죠.민비련 사건이.우리가 그 때 혹독하 게 당했죠.왜냐하면 그 인제 그 시나리오를 우리가 맞춰야 되니까.우리를 그 시나리오에 맞추기 위 58) 민비련은 민비연(민족주의비교연구회)을 잘못 말한 것임.

32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15) 해서 굉장히 혹독하게 당했죠.당했는데,이게 안 되는 거야 연결이 안 되는 거야.너 아무개 알지.했 는데.인제 어려우니까 우리가 아무개를 안다고 했는데 또 그 다음에 이야기가 전개가 안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그때 좀 많이 당했죠.당하고. 면담자 :그때는 동양통신에 다니고 있을 때 아닙니까? 구술자 :맞습니다. 면담자 :그러면 다니던 중에. 구술자 :출근해서 잡혀갔죠.출근해서 그렇게 잡혀가니까 동양통신사에서는 슬그머니 적을 빼버렸어요. 그때가 입사한지 얼마 안 되니까 회사로서도 골치가 아프니까 적을 빼버렸죠.제가 통신가 견습 4기 거든요. 면담자 :그때 가서 그럼 조사를 심하게 받으셨겠네요? 구술자 :그렇죠.동베를린 사건으로.그러고 처음에는 아마도 황 교수가 뭔가 동베를린 사건에서 뭔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가정하지 않았나 모르겠어요.그래서 황 교수는 참 많이 당했어요.그 양반은 물을 먹어 가지고 혁대가 터질 정도로 당했어요.물먹고 혁대 터지면 그거 오죽하겠어요,그래.혁대가 다 터졌다고. 면담자 :총장님은 그때 뭐 고문은 안 당하셨습니까? 구술자 :고문당했죠.우리는 황 교수 고문당하는 것 보고 혼비백산을 했는데,황 교수가 혹시 간첩일지 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워낙 허허허.(옛날 회상하심)거기서 그러니까,그러니까.그러고 황 교 수가 이렇게 이렇게 너희들에게 지시를 했지.근데 우리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는데,이건 완전 히 간첩이 그 밑에 하는 그런 지시 내용이예요.인제 그런 적이 없다고 하다가 많이 당했죠.그러고 또 누구누구하고 알지.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누구누구 알지.워낙 고문하니까 압니다 했는데,그 다음에 넘어가면 또 모르는 거예요.그래서 그런 것을 엮기 위해서 아주 혹독하게 했죠.그러니까 결국 그게 엮어지지 않으니까 우리는 민비 사건으로 분리해서 했는데,이제 반국가 단체 민비연이 반국가 단체였다,이적을 목적으로 했다,그러고 우리가 데모를 한 것은 그런 이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데모를 했다,북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했다,그랬죠. 면담자 :그래서 그 당시 민비연 초대 회장부터. 구술자 :다 들어갔지. 면담자 :마지막 회장 그리고 저 주위 인물들이 다. 구술자 :허허.김학준이까지. 면담자 :상당히 어떻게 보면 한번 심판한 걸 다시 심판한 게 되고 또 소급해서 구술자 :재탕했죠. 면담자 :재탕한 사건이죠? 구술자 :그래서 얼마 전에 중앙정보부에서,자체 조사에서 민비연 사건은 그건 완전히 엉터리 조작이었 다고 자체적으로 결론을 냈더라고.그거 보셨어요?그래 가지고 거 뭐 우리 민주화 보상하는데서 왜 민비연 사건을 왜 신청하지 않느냐고 연락이 왔어.그래서 자기들이 설명이 그래.그러면서 내한테 보 여주더라고.과거사에 대한 정보부 자체 조사예요.거기 보면은 민비연은 그건 완전히 날조된 거고 엉

322 31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터리였다,동베를린 사건은 실체가 있다.좀 과장이 되었으나.이렇게 해서 우리가 완전히 깨끗하다는 것을 자기들 스스로 시인을 했대요. 면담자 :재심을 하고 그럴 사항은 아니죠?그 시간이. 구술자 :안 했지 다 지나갔지.근데 그 자체적으로 정보부에서 그렇게 인제 결론을 내렸고 민주화보상위 원회에서도 그걸 기초로 해서 조사를 하더라고.우리 재심 청구 같은 걸 하지 않았습니다. 면담자 :그 당시에 결과적으로는 다들 실형을 받고 상당히 고생을 했지 않았습니까?그것 때문에 뭐 여 러 가지로 인생이 달라지게 됐는데. 구술자 :어.많이 달라졌죠.달라졌다면 많이 달라진 거죠. 면담자 :그 때 그걸로 인해 가지고 상당히 저.감옥살이를 했었죠? 구술자 :어..들어가서 구형을 받았는데요.내가 구형을 15년 받고.10년인가.아 10년이다.황성모 교 수가 구형을 무기를 받고 중태가 15년을 받고 내하고 도현이가 10년을 받았어요.그러고 나머지 7년,5 년,3년 이렇게 쭈욱 받았단 말이야.그런데 1심에서 무죄가 났어요.내까지 무죄가 나고 황 교수님하 고 김중태만 유죄가 났어.2년 형을 났어요.그런데 검찰에서 항소,상고,항소.상고는 대법원일 때 가 상고지.그래서 고등법원에 갔어요.갔더니 이제 내가 유죄가 됐어.무죄가 유죄가 되어서 1년 6월 을 받았어요.그리고 도현이는 또 여전히 무죄를 받았어요.그래서 그 다음에 상고를 한 거야.상고를 하니까 이제 다른 사람 다 나가고 황 교수하고 중태하고 나하고 셋이가 남았어요.남았는데 대법원에 서 파기 환송이 됐어요.그래서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다시 했어요.그러니까 또 같은 형량이 떨어졌어. 그래서 또 대법원에 또 갔어요.그거 하는 동안이 2년이 걸렸어요.2년이 걸렸으니까 확정 판결이 나니 까 나는 벌써 형을 오바해서 살았어요.나는 1년 반을 받았으니까 이미 오바돼서 그래서 그날로 바로 나오고 중태하고 황 교수님은 며칠 더 살다 나오고 그렇게 됐었죠. 면담자 :그러면 그 오바한 그거는 보상이 이루어집니까? 구술자 :근데 이게 저 형을 산입하는 게 있어요.미결 수금 일수 중 며칠 산입을 한다 했잖아요.그 오 바한 부분은 산입이,계산 안 해주면 그만이예요.그래서 딱 맞춰서 산입해서 그 날 나오도록 했더라 고.근데 나는 실제로 산 것은 서너 달 더 살았죠.근 2년을 살았으니까 허허허.(과거회상) 면담자 :마지막에 아주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르셨구만요? 구술자 :네.그래서 그 6 3때 했던 데 대한 대가를 치렀지요.대가를 치렀는데,근데 그것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애를 많이 먹었지.난 또 갔다 와서 바로 군대에 가지 않았어요. 면담자 :근데 그 때는 얼마 이상을 살면 면제되는 그런 제도가 없었던 모양이죠? 구술자 :그.그런 제도가 없었습니다.그 형 살 면은 안 가는 것도 그 후에 생긴 거예요. 면담자 :6 3에 대한 인제 전체적으로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6 3의 전 과정을 통해서 특별히 뭐 좀 하시 고 싶으신 말씀이나 아니면 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구술자 :글쎄.뭐를 말하지.그 당시에 우리가 뭐 에피소드라 그런 건 별로 생각이 안 나고요.그 당시 에 우리가 서울대학 정치과를 다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 시대에 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짐을 우리 가 스스로 졌던 거 같아요.그러고 그 때는 학생이면서도 감옥을 갈 것 같은 예감이 늘 상 있었어요, 그때는.그런 시대였어요.그렇기 때문에 감옥에 갔다 온 게 별로 억울하지도 않고요.소감이 있다면

32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17) 요.또 그로인해서 뭐 누구를 유감을 삼는 그런 마음도 별로 없고요.그저.그저 자연스런 그런 시기 를 몸으로 때우면서 지냈다,한편으로는 좋은 경험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습니다. 면담자 :그 당시에 많은 분들이 참여 했지만 특히 김중태,현승일,김도현 이 세 분은 연일 그때 매스컴 이랄까 이런 걸 통해서 요즘으로 치면 어떤 대중적으로 아주 구술자 :많이 알려졌죠. 면담자 :중요한 인물로 알려졌는데,그런 것들이 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까? 구술자 :좀 부담스러웠죠.그때는 가짜 현승일도 있고 했으니까.허허허.그런 게 에피소드라면 에피소 드지. 면담자 :가짜 현승일은 뭡니까? 구술자 :자기가 현승일이라고 자처하고 다니는 거예요.우리가 워낙 유명하니까,그 유명한 게 부러웠던 모양이에요.그게 죽는 건지도 모르고.그런 사람들이 가짜 현승일을 자처하고 다녔어요.시간적 여유 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할게요.내가 국민대학교 교수를 하고 있을 땐데 어떤 여성이 찾아왔어요.찾아와서 연구실로 왔는데,아주 뭐 여성도 아주 부티가 나는 그런 여성이더라고, 옷도 잘 입은 여성이 말이야.그래서 내 방에 와서 당신이 현승일이네.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한참 울더라고.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왜 우시냐고 했더니,어제 신문에서 내가 쓴 칼럼을 봤다는 거야.봤는데.거기 보니까 6 3데모를 했던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글이더라는 거야.그래서 누군가 확인하기 위해서 왔대.그래 와보니까 내가 진짜 현승일이 같은데 자기가 속았다는 거야.자기가 현승 일이를 자처하는 사람하고 대학 때 동거생활을 했답니다.그 여성이 모 대학을 다녔어요.그리고 그 놈 한테 사기를 엄청 당했다는 거야.그러고 그 사람이 사라졌대요.그래 자기는 오늘날까지 하루도 그 사 람을 잊은 적이 없대.증오심에 꽉 차 있었대.내가 그랬어.여성이 함원을 하고 있으니 내가 그동안 그렇게 재수가 없었던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고 그랬는데.허허허.그래 자기가 6개월간 동거를 했대 요.그래서 내가 내가 진짜 현승일이 맞는데 하면서 옛날 우리 6 3때 찍은 사진 있잖아요?그거 보여줬 어요.이게 내라고 말이야.그랬더니 그런 것 같대.그래서 내가 진짜 현승일이 하고 가짜 현승일이 하 고 어떤 게 낫냐고 했더니 진짜 현승일이 낫대요.허허허.그런 일도 있었어요.그러니까 그만큼 유명 했어요. 면담자 :그리고 그 뒤에 갔다 와서,석방돼서 군대 갔다 와서 그 다음에 미국에 가셨죠? 구술자 :미국을 갔죠.근데 그때는 박정희 장군이 유신을 해 가지고 사회안전법이라 하는 법을 만들었어 요.그 법은 과거에 중범을 지었던 간첩이나 무슨 정치법은 보안처분이라는 것을 해요.그건 판사가 하 는 것도 아니야.좌우간 어느 기관에선가 보안처분을 하면 그거는 주거의 자유가 없어요.일주일에 한 번씩 경찰에 가서 신고를 해야 돼요.그러고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정부에서 영장 없이 한시라도 체포 구금할 수 있는 대상자가 보안처분이예요.내가 보안처분을 받았어요.군에 갔다 오니까.그러니까 꼼 짝달싹을 못하는 거예요.만날 경찰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신고해야죠.우리 집은 형사들이. 형사가,담당 형사가 한둘이 찾아오면 친해져서 나중에는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말이죠.그런 사이가 됐는데.그러니까 그때 회사에서 나를 복직을 시켜 줬습니다.그런데 외신기자로 내근을 시키더군요. 외근을 시킬 수는 없잖아요.회사에서도 아마 부담이 됐겠죠.부담도 됐고 한편으로는 날 또 사랑한 그

324 31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런 선배들이 있었어요.그래서 내가 성곡언론재단의 장학생이 됐습니다.근데 그 때 우리 편집국장하시 던 이지웅 국장이 저를 한번 부르더니,자네 그냥 한국이 놔둬선 인간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외국에 나 가서 공부를 좀 해서 멀리 내다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래요.그래서 나 그 소망을 하지만 제가 어떻 게 외국을 나갑니까.했더니.성곡언론재단 장학생시험을 한번 쳐보라고 해요.합격만 하면,합격만 하면은 그 다음은 밀어주시겠다는 그런 취지로 하라고 하셨어요.그래서 시험을 쳤어요.쳤는데 합격했 어요.합격을 했더니,그 다음에 신원조회랑 뭐 이런 걸 말이지 잘 회사에서 처리해 줬어요.그래서 내 가 성곡언론재단의 11기 장학생이예요,11기.그래서 그걸로 외국을 나가게 됐지요.인제 그것이 질곡 을 벗어나는 단초였어요.아이고 미국 갔더니 어떻게 좋은지 말이지(그 당시가 생각나시는 듯).자다가 도 꿈에도 햐 미국을 못나가 가지고 이렇게 해매는 꿈을 꾸다가도 눈을 떠보면 미국이야.야.이제는 자유구나 내가 형무소에서 하늘을 나는 새가 한번 돼 봤으면 언제 한번 펄펄 날라 보나 했는데 정말 내가 날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그래서 미국서 유학을 했죠.근데 떠나갈 때 그 우리 국장 이 공항에 나오셨어요.나오셨길래.저 열심히 공부해 와서 신세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했더니.자네 가 무슨 신세를 갚아 갚기는 가서 공부나 잘하고 니 맘대로 하라고 하더라고.허허. 면담자 :그때 미국 가서도 공부를 마치고도 귀국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가. 구술자 :귀국 못했죠.그때는 인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이 한국에다 연락을 해보면 귀국해 도 됩니까 하면 오지 마라고 그랬어,선배님이.니가 오면 자연스럽게 활동도 못할 때고 차라리 거기에 좀 있어봐라 해서 한 2년을 못 왔죠.한 2년을 못 왔는데,또 그렇게 될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하와이에 이스트웨스트센터(동서문화센터)의 그 연구원으로 가 있었는데,전두환 대통령인가 그 당시에 뭐 하여튼 의장인가 할 그 시절에 하와이를 방문했어요.그런데 하와이에서 대대적인 데모가 일어났어 요.그런데 미국 학생들이란 게 세계적인 일을 가지고 데모를 해요.걔들은 국내적인 이슈가 없으니까 세계의 독재자들이 오면 다 데모를 하는 거예요.마르코스가 오면 마르코스 반대를 하고 뭐 다 하는 거예요.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이 오니까 인제 하와이 한가한 하와이 대학생들이 신바람이 난 거예요. 독재자 타도한다고.허허.그래서 데모가 아주 대대적으로 났어요.일어났는데 거기 영사관에서 리포트 를 하면서 여기 하와이에는 마침 현승일이가 와 있다.그 친구가 배후 주동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이 렇게 보고가 돼 있었던 거예요.그런 연유가 있어 가지고 내가 귀국을 못했죠.못했는데.그걸 이야기 를 다하면 길어지는데.좌우간 한국의 모 국회의원이 미국을 방문하러 왔어요.왔을 때,내가 평소에 아는 분이기 때문에 내가 가서 사정 설명을 했어요.내가 사실 이런 연유 때문에 귀국을 못하고 있는 데 날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그분들이 한국에 와가지고 정보부에 가서 다 소명을 했어요,소명을.그 국회의원 이름이 남재희 김덕규예요.그때 남재희씨는 여당이었고 김덕규는 내 친구 아니에요?그래서 이 두 분들이 적극적으로 소명을 해 가지고 인제 귀국 가( 可 )하다 그런 통지가 와서 그래서 내가 귀국 했어요.그래서 제가 한 2년 못 들어오고 있었죠.학위 끝나고. 면담자 :김중태씨가 먼저 들어왔다가. 구술자 :중태요?허허.중태 들어왔다가 정정법 59) 에 걸려 버렸잖아요.나도 그때 들어왔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밤중에,내가 하와이에 이스트웨스터센터에 취직해 있을 때였는데,한 밤중에 문을 두 59) 정치활동규제법

32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19) 들겨.그러니까 세크러터리가 와서 장거리전화가 왔는데 내일 전화하라고 해도 도대체 말을 안 듣고 기어코 너를 깨워달라는 네 프렌드가 있다 이거야.그때 방방이 전화가 있을 때가 아니에요.복도에 가 서 전화를 받았더니 중태야. 나 지금 귀국하는 길이다 그래.어쩐 일이냐 했더니.시애틀 공항에 서 지금 전화를 하는데 나 한국에 들어간다 이거야.그래서 내가 너 학위는 끝났나 하니까 에이 학 위 그까짓 꺼 무슨 필요 있나,나 뭐 거의 다 써 가는데 치우고 들어간대.내가 들어가니까 니도 들어 오너라 잉 하고 갔어.그러고 중태가 들어와 여기와 정정법에 걸려 버렸어.그때 중태가 학위만 하고 들어왔어도 여기 어디 가서 그래도 좀 일하기 낫잖아요. 면담자 :좀 마음이 급하셨구만. 구술자 :마음이 급했지.자기는 한국을 빨리 구출해야 된다고 생각했겠지.허허허. 면담자 :원래는 김중태씨하고는 고등학교는 이렇게. 구술자 :한해 위에요. 면담자 :한해 위 저거잖아요?그 그런 관계가 같이 하는데 쫌 약간 부담스럽지 않았습니까? 구술자 :뭐 대학 같이 다녔는데요.뭐.전혀 그런 거 없었습니다.처음 대학 1학년 때는 조심스러운 선배 를 했는데.나중에는 전혀 그런 거 없었어요.허허허. 면담자 :그래도 고등학교 선후배 그거는 관계는 꼭. 구술자 :그래도 뭐 대학에서 친하게 워낙 지냈고,같이 고문당하고 뭐 하는 판국에 무슨.허허허. 면담자 :6 3학생운동,6 3항쟁에 대한 전체적으로 한번 평이라고 할까.한다면 어떻게 좀 하실 수 있을 까요? 구술자 :그게 우리나라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의 시초였어요.그 표출의 시초였어요.군사쿠데타에 대한. 그것이 나중에 민주화운동으로 연결된 계기가 됐죠.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우리가 5 16군사 정권을 하여튼 6 3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내가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운동 전체에서 반군사정권운동으 로 나타났잖아요.5 16은 4 19의 배반이다.이렇게 되고.군부 독재라고 하는 것이 이런 굴욕외교를 가 져오는 것이다.그러니까 그때는 반정부가 되니까 말이지 정부를 다 있는 대로 규탄하는 거예요.이론 은 거기서 다 나오는 거예요.그렇잖아요.국민의 주권을 유린하고 외세에 기생해서 살려고 하는 군사 독재고 뭐 인권을 탄압하고.온갖 거 다 나오죠.그런데 이것이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80년대까지의 운 동의 시초였습니다,그게.그것의 단초가 된 것이죠.근데 그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우리나라가 물론 박 대통령 덕분에 산업화가 되고 경제개발이 되고 해서 그분의 공로 를 우리가 절대 부인하지 않습니다.부인하지 않지만은 한편으로 만약에 그것만 있었다면 이 나라가 무슨 미얀마나 후진국처럼 말이지 독재국가로서 꼼짝도 못하고 언론의 자유도 없고 말이야.그런 그 냥 돈만 갖고 있는 인권이 없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었죠.그런데 우리나라는 다행히 민주화 투쟁이 쭈욱 지속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얼마나 선진국이 됐나요?경제적인 산업화도 돼있지 정 치적인 민주화도 되었지.국민이 불편이 없잖아요,지금.정치적으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잖아요.우리 나라 국민은 너무 자유가 많아 탈이지.허허.자유가 모자라서 신음하는 사람이 지금 누가 있어요.그 것이 민주화의 덕분인 거예요.그러니까 그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는 우리 6 3운동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내가 한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군사문화를

326 320)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죠. 면담자 :그 밖에 뭐 또 추가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하시고 이제 마무리 좀 하겠습니다. 구술자 :별로 없습니다.오늘 너무 잘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면담자 :오늘 뭐 말씀하시는 중에 상당히 또 중요한 말씀,그리고 알려지지 않았던 그런 여러 가지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구술자 :좀 나왔습니까?허허허. 면담자 :귀중한 말씀 제가 감사드립니다. 구술자 :수고하셨어요.고맙습니다.

327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21) 7)면담후기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의 정릉 쪽에서 북한산으로 진입하는 등산로 입구의 아파트에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지난해 상처( 喪 妻 )한 데다 자녀들도 품을 떠난 터라 최근 이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한다.정릉 일대와 아리랑고개 쪽의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특별한 공직을 맡지 않고 가끔씩 강의를 나가면서 연 구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에게는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김중태,김도현과 더불어 6.3삼총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6.3항쟁을 대표하는 인사답게 그는 당당 하게,그리고 대범하게 구술에 임했다.최초로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든 학생운동인 3.24시위를 기획하 게 된 배경과 거사 과정,괴소포 사건,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수배와 도피,자진출두와 계엄령,구 금 생활,재판,그리고 3년 후에 사건화한 민비연(민족주의비교연구회)사건 등의 전말 등에 대해 비교 적 명료하게 기억을 되살렸고,당시의 생각뿐만 아니라 현 시점에서 나름대로 평가를 내렸다. 내용을 과장 또는 과시하거나 격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학자적인 자세로 주관적 경험을 객관 화해서 말하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의 구술은 당시의 진술조서,공소장,판결문 등 공기록에 담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사건의 형해화 한 구조에 살을 붙이는 내용으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특히 6.3항쟁의 핵심 지도부인 김중태,김도 현과의 정국 인식에 대한 이견과 논쟁,그리고 자진출두를 결정하게 된 배경 등은 이와 같은 구술기록 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생하게 남길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술은 약 3시간 동안 진행됐다.현 전 총장은 사전에 취소하지 못한 점심 약속이 있었으나 식당에 전화를 걸어 부득이하게 못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구술을 계속했다.점심은 면담자와 보조연구원,촬영 기사 등과 함께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현 전 총장은 오래 된 기억을 되살려 구술기록으로 남긴 데 대해 만족스러워 했다.44년 동안 잠재워 왔던 가슴의 응어리를 토해낸 듯한 모습이었다.면담팀은 구술을 마무리한 뒤 현 전 총장과 기념촬영 을 했다.

328 322)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첨부 3.구술동의서 및 구술기록 이용 허가서 고성광

329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23) 김도현

330 324)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박정훈

331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25) 이수용

332 326)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이현배

333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27) 최혜성

334 328)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현승일

335 6.3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329) 사단법인 현대사기록연구원 The Research Institute for Archives and Records of Contemporary History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65-1 월드오피스텔 206호 Tel.(02) /FAX.(02)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6. 29 ( ) 11:00 20 0 1. 6. 29 2 3 ( ).( 397-0781) 1. 2. 3. 4. 5. 1. ( : 2 ) 2 8607, 306 19, 7 6 28, 95 3 - (5 ) (,,,,,, ) - 1 - 2. -, - -, - 2 - 3.,, 1,700, 827 ( ) 1,700 8 27 803 469 560 227 289 117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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