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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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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 2)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대한노총의 활동과 변화 3) 이승만 정부 시기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 2. 한국전쟁과 이후의 노동운동 1) 한국전쟁 시기의 노동운동 2) 한국전쟁 이후의 노동운동 제3장 4월혁명과 대한노총의 몰락 그리고 노동운동의 분출 월혁명과 노동환경의 변화 1) 대한노총의 몰락과 한국노총의 출범 2)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개편과 변화 3)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특성 2. 4월혁명 시기 광주ㆍ전남지역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 노동운동 2) 전남지역 노동운동 제4장 정부에 의해 개편된 노동조합과 유신체제 하의 노동운동 박정희 정부의 노동정책과 한국노총 1) 노동정책과 한국노총의 출범 그리고 노동관계법 개정 2) 노동환경과 노동운동 지원 단체 2. 박정희 정부 시대, 광주ㆍ전남지역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 노동운동 2) 전남지역 노동운동

6 제5장 노동운동의 재기와 노동자 대투쟁 전두환 정부 집권기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의 재기 1) 노동관계법 개악과 노동자 배제 정책 2) 1980년대 전 중반기의 노동환경 3) 노동운동의 재기 4) 노동자 대투쟁의 배경 2.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노동운동 1) 신군부 집권 초기 2) 신군부 집권 후반기 광주지역 노동운동 3) 신군부 집권 후반기 전남지역 노동운동 3. 노동자 대투쟁 1) 광주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2) 전남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3) 노동자 대투쟁의 주요 쟁점과 특성 제6장 민주노조 건설운동과 전국적 연대조직의 결성 노태우 정부의 노동정책과 민주노조 건설운동 1) 노동정책: 노동조합 통제와 공권력 투입 2) 노동법 개정 투쟁 3) 민주노조 건설운동과 전국적 연대조직의 확대 4) 노동조합운동의 지원 단체들 5)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 환경과 현실 2. 노태우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2)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3) 1991년 5월정국과 분신 노동자들 제7장 노동정치의 시대와 노동법 개정 총파업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환경 1) 노동정책: 노사 자율에서 정부 주도로 2) 노사의 임금 합의와 협의 구조: 상급단체 가입 변경 3) 노동조합 연대조직의 확대와 재편

7 4) 김영삼 정부 시대의 노동 환경과 현실 년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 1)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 2)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노동법 개정 총파업 3. 김영삼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임금 단체협약 협상을 중심으로 1)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2)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제8장 종결 213 참고문헌 223 연표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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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1. 문제제기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맞추어 사회운동의 주요 영역과 내용은 달라졌다. 오늘날 광주 전남지역을 상징하는 사회운동으로 5 18민중항쟁이 거명되고 있으나, 5 18민중항쟁은 광주 전남지역을 배경으로 발생했던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일부일 따름이다. 중장기적 맥락에서 보면, 이 지역에서 5 18민중항쟁의 발발했던 원인을 우발성에서만 찾기에는 한말 이후 이들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의 지난한 항거가 갖는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만,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다른 지역들과 비견할 때 상당하다. 사회운동의 측면에서는 이들 지역이 독보적인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사회운동들 가운데 노동운동은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게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고찰할 때,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활동이 충실하게 정리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에서 잘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이 한국의 노동운동 더 나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을 무조건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노동운동이 점차 성장하고 있던 초기의 국면과 오늘날을 비교해 보면, 이들 지역의 노동운동의 양상과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에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대기업 사업장들이 광주 전남지역에 수적으로 적음으로 인해, 집단화된 노동자의 수와 규모도 적고, 노동조합 등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노동자의 조직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대규모 공업단지와 대기업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환경이 취약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전국적인 시야에서 잘 포착되지 않으며, 실제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노동운동사 7

10 있다. 둘째,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노동운동에 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에 관한 자료는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즉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탄압이 강화되었던 시기에는 노동운동이 억압될 수밖에 없었고, 언론도 노동운동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언론에 보도된 노동운동 관련 내용들은 서울과 수도권 또는 대규모 산업체가 위치한 도시와 지역에서 발생한 사례들을 보도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광주 전남지역은 배제되었거나 누락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노동운동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활성화되면서부터는 노동조합 회보를 비롯해 많은 유인물과 자료 등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이 제대로 수집 관리 보존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자료들도 관리 부실이나 의도적인 폐기 등으로 인해 역사적 서술을 위한 근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셋째,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터이지만,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에 관한 조사와 연구 환경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다음 절에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터이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역사에 관한 글, 논문, 서적 등은 매우 적은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사건적으로 많은 부분들이 조사 연구되지 않았거나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시와 군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간한 각종 역사서들의 경우도 다소 편차가 있기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빈약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을 종합적인 구조와 구성을 제2차 문헌 자료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운동의 역사에 관한 시선을 보다 멀리에 두면,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역사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음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들 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은 한말 근대화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발생하고 있었다. 한말의 노동운동의 근대화의 물결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항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이를 대표했던 곳이 목포였다. 당시 항구 도시 목포에는 많은 노동자가 집결해 있었고, 이들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쟁의를 벌었다. 즉 목포에서는 개항한지 5개월 만인 1898년에 2월에 목포항의 부두노동자 600여 명이 참여한 동맹파업을 벌어졌다. 부두노동자들은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의 임금 인하와 임금을 지불시 인신매매식 강제 요구를 반대하면서 7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이 사건은 근대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노동자 파업으로 알려져 있다(목포시, 1990: 53). 이와 같은 쟁점들을 바탕으로 한 파업은 그해 9월에도 재연되었다. 2월의 임금인하 파업의 처리가 미흡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노동자들이 임금문제를 다시 쟁점화 하여 10일 동안 동맹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 전남지역은 한국 노동운동의 서막을 열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러한 유형의 노동쟁의는 항일운동의 성격으로 변화하면서 1903년 12월까지 계속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20; 이철우, 1983). 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 일제 강점기에도 광주 전남지역 여러 곳들에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특성상 항일운동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사회운동의 양상을 지녔다. 노동운동은 근대적 산업시설이 배치되어 있던 장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장소들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부두노동자, 수선노동자, 인쇄노동자, 탄광노동자, 제유노동자, 정미노동자, 목공노동자, 토공노동자 등이 중심을 이루어 다양한 직종과 분야들에서 노동조합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노동회 로 명명되었던 수많은 노동조직 혹은 노동조합들이 지역별로 결성되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에서의 노동운동을 일정한 수준에서 용인했던 조선총독부는 만주사변을 기화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전면 규제와 통제로 방침을 선회했다. 조선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 강도가 극대화되면서 어느 정도 활동이 전개되고 있던 노동자 집결지들에서의 노동운동도 쇄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 광주 전남지역의 경우는 여러 곳에 산업시설이 존재했으나, 노동자가 집결된 지역은 몇 군데로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 전남지역은 산업시설과 노동집단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정근식, 1990: 181~182), 1)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의 당수가 되었던 박헌영이 광주시 백운동 소재 벽돌공장에 은거해 있으면서 화순탄광, 종연방직(전남방직), 목포의 항만노동조합 등의 노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보여주고 있듯이(안종철, 1991: 48),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에서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광주 전남지역은 섬유공업이 가장 큰 산업시설이었고, 이어서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섬유공업은 노동자 수의 측면에서도 다수를 점했다. 당시 섬유공업의 대공장으로는 전남도시( 道 是 )제시공장, 약림( 若 林 )방직 광주공장, 종연( 鐘 淵 )방직 광주공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장에서는 일제 말에 해체되었던 노동조합들이 해방과 더불어 복원 또는 설립되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과정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참여했고, 식민지 유산의 청산 작업에도 한 몫을 담당했다. 미군정시대에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산업체는 화순탄광과 전남방직이었다. 해방 직후의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전국에서 분출되었던 자주관리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들은 중규모의 이상의 공장들에서 거의 대부분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사무직이거나 고참 노동자들은 미군정이 선정한 관리인들과 대립했다. 실질적 의미에서의 노동조합운동 지도자들은 미군정이 회사를 접수하는 것을 계기로 부상했다. 초기에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가 자주 관리나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종연방직이나 화순탄광 약림제사의 경우는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남로당의 주요 인물이었다(정근식, 1990: 256). 미군정은 1946년 2월부터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되었다. 특히 여성 1) 1941년 당시 전남지역에서 5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체는 총 938개였고, 이들 사업체에 약 24,000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 다. 산업별 고용 형태를 보면, 공업이 14,000여 명, 광업이 6,000여 명이었다. 노동운동사 9

12 노동자들이 많거나 규모가 작은 공장들이 집중적 공략대상이었다. 남성노동자가 집중해 있는 화순탄광의 노동조합은 1946년 8월 사건을 계기로 11월에 강제적으로 무력화되었다. 미군정의 노동운동 탄압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노동운동 조직을 대표했던 광주평의회와 목포평의회는 1945년 12월에 결성되어 1947년 상반기까지 활동했다. 산별 체계에 기초했던 이들 조직은 일찍이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개별 노동조합에 대한 이들 단체의 구체적 지도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다고 한다. 종연방적이나 화순탄광의 경우, 다른 회사나 공장과 규모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보였는데, 화순탄광은 남로당이 특별 구역으로 설정하여 관리했다(정근식, 1990: 256). 대한노총은 1946년에 현장의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광주지부를 결성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1947년 중반기부터 회사 단위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 임원들은 사무직이거나 중견 간부들로 채워졌다(정근식, 1990: 256~257). 정부는 노동조합을 불온시 했고, 확실하게 통제가 가능하거나 친정부의 성격을 갖는 경우에만 용인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거의 활동하지 못했다. 다소 급진적인 사람들은 생산 현장에서 해고되었거나 축출된 상태였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기반들마저도 완전하게 소거시켰고,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불모지에서 다시 발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7년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인해 산업의 구조 조정과 노동자의 대량 해고 그리고 노동운동의 급속한 위축과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이전시기까지에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을 정치 사회 역사의 측면에서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3절에서 보다 상세하게 언급할 것이지만, 이 책에서 주로 규명하는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이다.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운동의 일부이지만, 역사적으로 지속성을 갖고 전개되었으며,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현장 노동자의 요구와 활동을 상대적으로 잘 보여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2. 기존 연구의 검토 노동운동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양한 주제와 접근들로 분화되면서 꾸준하게 이루어져왔다. 이들 가운데 노동운동의 역사를 일찍이 다루었던 연구로 김윤환 김낙중이 1970년에 발행했던 한국노동운동사 가 있다. 이 책은 장기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당시의 정치 사회적 정세에서 이러한 주제의 책을 발행했다는 것만으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노동운동사의 개요와 같았는데, 서울과 부산 등 산업시설이 밀집되었던 대도시에 관한 내용이 근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1978년에 이와 유사한 성격의 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 한국노동조합운동사 가 두 권으로 발행되었는데(조창화, 1987), 서술 시기가 5 16군사정변 직후로 제한되어 있다. 노동문고 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던 이들 책은 국가의 노동 정책, 법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주로 다루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1979년에 발행했던 한국노동 조합운동사 로 파악된다. 이 책은 근대 시기 이후부터 유신체제 출범 이전 시기까지를 조망했는데, 해방 이후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으로 점철되었던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즉 이 책은 출판 시기와 주체를 고려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데, 5 16군사정변 이전 시기에 관한 기록이 특히 주의를 끈다. 위의 책과 같은 시기에 관한 연구들이 새롭게 발견된 자료와 기록에 근거하여 발표되고 있지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선행 연구로서 가치가 여전하다. 그리고 한국노동조합운동사 는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내용들도 적지 않게 적시하고 있어서 당시에 관한 기록과 자료가 빈약함으로 인한 갈증을 다소나마 면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넘어 한국노동운동사를 종합적으로 고찰되었던 것은 2001년에 최영기 등이 집필했던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했던 이 책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외환위기 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전에도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룬 책들은 종종 출간되었으나,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자 및 노동운동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었던 사례는 드물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구분 시점과 쟁점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도 시사점이 크다.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의 주관 하에 2004년에 총 6권으로 발간되었던 한국노동운동사 는 한말부터 1997년까지 약 100년을 망라하여 다루었다. 그래서 한국노동운동사 는 이 연구의 시대적 배경을 구성하고, 체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 책들은 이전에 발간되었던 노동운동사들에 비해 폭넓은 시기를 포괄하고 있으며, 여러 권으로 출간되었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은 역시 제한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기존 연구들을 광주 전남지역으로 범위를 좁혀서 고찰하면, 몇 가지 특성들을 보여준다. 첫째,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가 특정 시기에 편중되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는 주로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그리고 1980년대 이후시기에 한정되어 있다(정근식, 1992; 정근식 나간채, 1992; 김경일, 1992). 근래에 1950년대 전남방직 여성노동자와 그들의 공장 노동 을 소재로 일생생활을 다룬 연구가 발표된 바 있으나(이희영, 2009), 노동운동에 초점을 두고 작성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에 관한 연구는 두 개의 글로 압축된다. 하나는 1986년에 발표되었던 광주지역 공단 실태조사 이고(이광석, 1986), 다른 하나는 1993년에 발표되었던 1980년대 광주지역 노동운동 연구 이다(황효, 1993). 전자는 제목으로 보면 노동운동에 관한 글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문자 자료로 잘 포착되지 않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상황에 관한 노동운동사 11

14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후자는 오늘날에는 접하기 쉽지 않은 당시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수집한 문자 자료들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 1990년대에 관한 대표적인 노동운동 연구로는 송미성의 논문을 들 수 있다(송미성, 2010). 이 논문은 광노협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당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오늘날 자신들의 생활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따라서 노동운동 그 자체에 관한 내용들은 그다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두루 망라한 연구로는 광주지역 노동운동 전개과정 이 있다(홍성우 강현아, 2003). 이 책의 두 개의 장에서 광주지역 노동운동사가 정리되고 있는데, 제조업과 비제업체로 구분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목차의 배치는 노동운동의 보다 세부적인 구분에 바탕을 둔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의미가 있지만, 노동운동 일반과 다른 세부 운동들과의 관계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인식 구조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제약이 따른다. 그렇지만 1980년대 광주지역 노동운동에서 주요한 사건들이 무엇인가를 개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는 지역별로 큰 편차를 띠고 있다. 즉 기존 연구의 대부분은 광주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므로 전남지역에 관한 연구는 협소한 편이며, 특정 도시에서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조명되었다. 전남 서부권의 경우는 일제하 목포 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을 다룬 김경일의 연구(1992)가 있고, 김자룡의 연구(2008)가 있다. 특히 후자는 1980년대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완성된 논문은 아니지만 관련자들에 대한 면접 자료를 연구에 활용하고 있는 점 등 여러 측면들에서 의미가 있다. 전남 동부권의 경우는 여수 지역 노동운동이 주로 조명되었는데, 주종섭의 연구(2001)가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여수산업단지 건설노동조합의 출범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활동을 다루었다.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1) 연구 대상의 특성 이 연구의 대상은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보다 주목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사 이다. 개념의 위계와 포괄성으로 보면, 노동운동이 상위 개념이고, 노동조합운동은 하위 개념이다. 이 연구는 노동조합운동을 근간으로 하고, 그 밖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위치로 설정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노동조합운동이 약 50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역사 전반을 관류하는 활동을 보여주는 분석 단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살펴보면, 노동조합운동 외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고, 각종 노동운동단체와 사회운동이 노동조합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치거나 견인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처럼 노동운동과 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는 일관성을 보이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즉 노동운동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은 가장 지속적으로 근간을 형성했다. 반면, 노동조합운동 외부의 노동운동은 존재 양태와 활동의 특성 등에서 상당한 기복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연구가 장기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안목에서 진행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사가 근간이 될 수밖에 없고, 노동조합운동 외부는 노동운동의 일반성과 종합성을 규명하기 위해 언급되는 위치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구는 노동조합운동사의 흐름을 근간으로 하고, 이와 관련된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일반을 함께 조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자 한다. 둘째, 연구에 필요한 자료에 대한 접근과 수집의 제약으로 인한 현실적 한계로 기인한 측면이 있다. 연구 자료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지만,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 연구에서 현실적으로 자료의 수집과 고찰이 어느 정도 가능한 분야는 노동조합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에 관한 자료의 접근이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고, 노동조합 외부의 노동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료화와 고찰이 용이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에 자료의 수집과 정리 상태에 따라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은 다시 집필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노동운동의 다양성을 고려하기 위함이다. 노동운동의 특성과 전개는 시대와 시기에 따라 여러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이 자료와 현실에서 명확히 분리되고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를테면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때, 노동조합과 상급단체의 성격별로 확연하게 차이가 나거나, 이를 자료들에서 규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다양한 특성들을 포괄해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 연구의 대상은 광주와 전남지역이다. 광주와 전남은 본래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이 공포되면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에 의거하여 송정시와 광산군이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이와 같이 광주와 전남이 분리된 것이 25년이 넘었고, 광주에서 전남도청이 이전해갔지만, 일상에서 두 지역은 많은 대부분에서 여전히 하나의 지역처럼 인식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과 일상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공간적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에 관한 통계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산업단지와 시설들이 다수 분포되었던 광산시와 하남공단의 통계가 1988년부터 광주지역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이 연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부터 경기위기로 한국 사회가 전면적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지로 한정한다. 이 연구의 시작점을 한국전쟁으로 한정한 이유는 이 시기에 노동운동 관한 법률들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며, 비록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융위기 시대를 종기로 설정한 것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이 크게 변화했고, 노동에 관한 관계가 크게 달라졌기 노동운동사 13

16 때문이다. 이를테면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었던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다수의 업체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10여 년에 걸쳐 구축 및 발전시켰던 노동운동의 기반이 급격하게 붕괴 또는 위축되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2) 광주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 광주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통계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광주직할시와 광주광역시가 발행했던 광주통계연보, 전라남도가 발행했던 전남통계연보, 그리고 노동부가 발행했던 노동통계연감 이다. 그런데 이들 통계 자료들은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표 1> 광주시 전라남도 소재 노동조합의 변화에서 볼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한 자료들에서 광주지역 노동조합에 관해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은 광주직할시로 재출발했던 1986년부터였고, 전남지역의 경우에는 1988년부터 관련 통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표 2> 광주시 전라남도 노동조합 현황은 노동부에서 발간한 노동통계연감 에 따른 것인데, 1986~1990년까지만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노동조합에 관한 통계가 기록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하여 1986~1987년의 전남지역에 관한 통계는 노동부의 자료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밖에 없다. <표 1> 광주시 전라남도 소재 노동조합의 변화 (단위: 년, 개소, 명) 광주시 전라남도 구분 조합원수 조합원수 조합수 조합수 계 남 여 계 남 여 ,944 14,690 7, ,959 9,505 4, ,989 17,034 5, ,304 16,757 3, ,108 21,381 7, ,953 21,545 4, ,886 22,468 7, ,594 20,610 3, ,774 23,714 6, ,147 21,153 3, ,023 23,396 6, ,458 19,960 3, ,891 23,654 5, ,219 36,073 6, ,447 24,148 5, ,790 34,278 5, ,623 24,304 5, ,962 34,195 4, ,169 22,383 4, ,668 36,032 4, ,315 23,215 4, ,926 29,042 3, ,642 24,071 2, ,481 29,036 3,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 * 자료 : 광주직할시, 광주통계연보, 각 년도. 광주광역시, 광주통계연보, 각 년도. 전라남도, 전남통계연보, 각 년도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표 1>과 <표 2>의 수치가 오차라고 이해하기에는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특히 1986년과 1987년의 통계 수치가 큰 차이를 보여주는데, 노동부가 제시한 자료가 당시 추세와 흐름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1986년에서 1990년까지 광주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노동부의 자료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1991년부터는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발간한 통계 자료를 참조했다. 구분 <표 2> 광주시 전라남도 노동조합 현황 (단위: 년도, 개소, 명) 전국 광주시 전라남도 단위노조 조합원 수 단위노조 조합원 수 단위노조 조합원 수 ,658 1,035, , , ,086 1,267, , , ,142 1,707, , , ,882(17) 1,932, , , ,697 1,886, , ,319 * 주 : ( )안은 한국노총 산업노조 숫자. * 자료: 노동부, 노동통계연감, 각 년도. 위의 표들에서 알 수 있듯이, 광주지역 노동조합 수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증가하다가 1993년 부터 감소세를 나타냈다. 1996년에는 감소세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통계 수치로만 보면 이 때에 많은 노동조합들이 해산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이 있다. 1995년 11 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이 출범한 것이다. 민주노총은 기업별 노동조합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일대 재편을 단행했던 바,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통계 기준과 수치가 크게 달 라졌던 것 아닌가 추정된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1998년까지 노동조합의 수가 계속 감소했던 것은 분 명하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조합원 수의 변화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전반적으 로 등락을 보이며 급변하지는 않았으나, 감소세를 띠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변화는 1997년 말부 터 본격화되었던 외환위기 시대로 인한 영향으로 판단된다. 한편 노동조합원의 성별 구성비를 보면, 남성 조합원이 여성보다는 수적으로 월등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성별 차이는 시대에 따라 일정한 양 상을 보여 주었다. 즉 1986년에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약 2:1이었지만, 1998년에는 약 10:1에 이 를 정도로 노동조합이 남성 중심으로 점점 더 편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사 15

18 전남지역의 경우는 광주지역에 비해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수가 적었으나, 1993년부터 크게 반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전남지역의 경우에 노동조합의 숫자가 1993년부터 전년에 비해 크게 증가했던 이유 를 자료상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수는 광주지역에 비해 다소 늦게 감소했는데, 1997년에 큰 낙폭을 보여준다. 이것은 광주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외환위기 시대로 인한 영향으로 설 명될 수 있다. 전남지역 노동조합원의 성별 구성비는 1988년에 약 5:1정도였지만, 1997년에 약 8:1 의 대비를 보였다.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노동운동 연구를 위한 자료는 몇 가지로 유형화가 가능하다. 첫째, 노동운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활동 과정에서 생산되었던 제1차 자료들이다.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되었던 제1차 자료는 관련 단체와 기관의 협조 하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현존 여부를 파악하는 것마저 어려운 현황을 나타냈다. 1980년대 이후에 생산되었던 자료의 경우도 여러 이유들로 대다수가 망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 자료들은 기관과 개인 등에 산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노동운동 단체들은 해산하면서 자료를 파기했거나, 보관 관리의 주체가 불분명해지면서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리고 공권력의 탄압에 대비하여 자료를 생산하지 않거나, 압수수색으로 망실한 경우가 많았다고 응답했다. 접촉했던 노동조합들도 자료를 제대로 보관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보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곤란한 형편이었다. 둘째, 노동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나 자료집을 들 수 있다. 노동조합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은 주로 전국적인 차원에서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로는 외기노련, 한국부두노동조합, 항운노동조합, 광산노동조합, 철도노동조합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단체들이 발행했던 노동조합의 역사에 관한 책들은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내용은 매우 드물었고, 협소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사 를 행한 사례도 극히 드물었고, 2) 어떠한 형태이든 노동조합운동사를 정리한 사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노동운동 단체의 활동을 수집한 자료집으로는 1997년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가 생산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가 있다. 총13권으로 구성된 이 백서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활동과 자료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백서에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에 관한 내용과 기록은 일부에 불과했다. 3) 부노협, 전북노련, 마창노련, 부양노련 등에서는 이 백서를 2)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광주은행노동조합이 1996년에 발간한 광주노조20년사 로 확인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주요 구성은 기수별 노동조합 조합장과 간부들의 명단, 그리고 주요 사업에 관한 내용을 명시한 것 이다. 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는 2003년에 개정되는데,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백서발 간에 필요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 바탕으로 지역 운동사를 집필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여하한 준비와 노력이 없었다. 2001년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를 발간했다. 제목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민주노조 라는 개념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노동조합운동사를 정리했다. 이 책의 시간적 대상은 1970년부터 2000년까지였다. 이 책에 수록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경우에만 중소규모의 사업장들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되고 있고, 그 외의 시기에는 대기업 사업장이나 전국적으로 크게 관심을 모았던 사례들만 포함되었다. 셋째,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발간했던 지방사의 일부로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경우이다. 하지만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사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의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수록한 경우는 목포시사(사회 산업편) 뿐이었다. 목포시사(사회 산업편) 은 개항부터 1970년대까지의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을 노동조합의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했다(목포시, 1990). 전라남도지 는 제9권에서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기술했는데, 사회운동의 일부로 소개되는 수준이었다(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그 외 광주 전남지역들의 지방사들은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기술한 경우는 있지만,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국한되어 있었다. 넷째, 중앙과 지방에서 발행되었던 신문들에 수록된 기록이 있다. 기록된 내용과 수준에서도 중앙지와 편차가 있었다. 지역 사회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지방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에 보다 빈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항상 그랬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여건상 이들 신문을 모두 일람하기란 불가능했고, 조건과 여건이 허락하는 수준에서 기초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회운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통치 체제의 성격에 따라 노동운동에 관한 신문기사의 내용과 정도는 기복을 이루었다. 이를테면 민주화운동과 민주화가 보다 진전되던 국면에서는 관련 기록들이 빈번하게 수록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잘 기사화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관련자들 주장과 신문 기사의 내용이 상이하거나 누락된 점들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다른 문자 자료나 증언 자료가 적절히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적 여건을 감안할 때,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이 연구에서 노동운동 관련 내용을 중요하게 살펴보았던 신문은 전남일보, 광주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이다.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이 연구의 우선적인 목적임을 감안하여 문자 자료들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주요 문자 자료는 위에서 언급한 신문과 노동운동 관련 단체들에서 발간했던 것 가운데 수집이 가능했던 유인물과 자료집 그리고 책자 등이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사의 초고가 작성되면서 수차례에 걸친 노동운동사 17

20 중간보고회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토론자들 4) 의 의견과 몇몇 관련자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수정 작업이 후속되었다. <표 3>은 이 연구에 자문을 해주신 주요 관련자들을 제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면접이나 자문을 구해야 하는 분들이 많았으나, 이양현 정향자 등 여러 분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구술 자료들에서 관련 내용을 활용했음을 밝혀둔다. <표 3>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 관련 주요 자문자 성 명 자문 일시 자문 내용 주요 경력 기타 박동환 월혁명 국면의 노동운동 전남방직 노조위원장 예비검속 이 황 년 이전 노동야학 노동 야학 함성지, 고발지 사건 김상집 년대 초 중반기 노동운동 주경미 년대 중후반 노동운동, 광노협 전남기독교 노동자총연맹 광주여성노동자회 회장 이수영 년대 노동운동, 광노협 광노협 사무차장 5 18민중항쟁 유공자 5 18민중항쟁 유공자 4) 중간발표회의 지정 토론자는 노영기(조선대), 강현아(광주여성재단), 이광일(한신대) 등이었다. 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어 수년이 흘렀으나, 노동과 관련된 법률은 제정되지 않았다. 비단 이 시기는 노동 관련 법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법률과 제도가 미비한 상태였다. 따라서 노동 환경과 노동자 권익을 보호할 법률적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말해도 그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동 관련 정책과 행정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 했던 것은 미군정과 과도정부에 의해 제정 공포되었던 법률들이었으나, 노동자 보호와 정책이 일부에 국한되어 적용되었고, 노동자 전반의 기본생활 보장과 권익 보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송종래, 2004: 194).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동 관련 법률들을 제정할 시기는 더 늦추어졌다. 한반도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거나 전쟁으로 인한 상흔에 고통을 받고 있고, 사회구성원들의 생사가 순식간에 갈리는 상황에서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은 후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 국면이 지속되면서 노동자 삶과 노동 환경의 열악성을 면하지 못했고, 개선을 위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이 점차 문제시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와 국회는 노동 관련 법률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부와 국회는 1953년 초반에 집단적 노동관계 3법과 근로기준법을 포함한 이른바 노동 4법 을 제정했다. 즉 1953년 1월 27일에 노동조합법 이, 1953년 1월 30일에 노동쟁의법 이 각각 국회를 통과했다. 1953년 4월 15일에는 근로기준법 이 국회를 통과하여 노동 제법의 입법화가 이루어졌다. 노동조합법 은 1953년 3월 8일에 법률 제280호로 공포되었다. 노동쟁의조정법 은 1953년 3월 8일에 법률 제279호로 노동조합법 과 동시에 공포되었다. 또한 노동위원회법 도 당일에 법률 제281호로 공포되었다. 근로기준법 은 1953년 5월 10일에 법률 제286호로 공포되었다. 이러한 법률들에 의거하여 1953년 3월 보사부(사회부) 산하에 중앙노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노동운동사 19

22 지방노동위원회는 각 시와 도지사 산하에 설치되었다. 이들 법률의 제정 배경과 과정 그리고 성격과 특성은 기존 연구들에서 어느 정도 규명이 이루어졌다(송종래, 2004: 166~192). 그렇지만 이들 법률의 집행과 현실화 여부를 분석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법률의 제정 공포와 확산 정착, 더 나아가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시 공간적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한국전쟁과 전쟁 복구라는 시대상이 노동 현장에서 이들 법률이 의미와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많은 장벽들로 작용했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중요하게 착목할 점은 이들 법률이 당시 노동현장에 실효성을 갖고 있었는가와 노동자가 이들 법률을 인식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에 관한 자료들, 특히 전남지역에 관한 자료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기록들을 통해 이를 우회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아마도 1955년에 순천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에 대한 전남도의회의 활동이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사건은 1955년 8~9월경 순천서전사( 順 天 瑞 電 社 )에서 근무하던 한 노동자가 자살한 것에서 발단했다. 한 노동자가 임금체불 로 인해 경제적 고통이 가중되고 견딜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자 자살했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던 시기로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유로 자살하는 현상을 통해 목도할 수 있듯이, 이 사건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개인의 죽음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남도의회가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면서 개인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 무렵은 차기 선거가 임박했던 국면으로 의원들의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던 국면이었다. 5) 전남도의회 본회의는 이 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실태조사 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전남도의회가 처음 발표했던 계획에 따르면, 조사 기간은 9월 16일부터 약 1주일이었다. 그리고 조사반은 광주와 목포 그리고 여수 순천 등 3개 지방으로 구분하여 각각 5명의 의원들을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루어진 노동실태조사 는 기관과 기간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사 기관으로 전남도의회 산하에 노동대책 특별조사위원회 가 구성되었고, 조사는 9월 21일부터 10일 동안 이루어졌다. 조사는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의 혜택을 받고 있는가와 기업주들의 일방적 의사에 좌우 또는 유린되고 있는가 등을 규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56년 1월 21일 조사 결과는 전남도의회 본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이는 전남지역의 모든 사업장이 아니라, 특정 사업장으로 조사가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지역은 전남제사 6) 와 화순탄광이 조사 대상 사업장이었는데, 이교은( 李 敎 銀 )이 대표로 보고했다. 전남제사는 견사( 繭 糸 )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대다수가 여성노동자였다. 그러므로 전남제사에 대한 조사는 당시 여성노동자의 노동실태와 환경을 대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의원은 전남제사가 출산한지 4일에 불과한 5) 이 도의원들은 1952년 5월 10일에 선출되었다. 다음 선거는 1956년 8월 13일이었다. 6) 1926년에 설립되었던 전남제사는 1935년 종연방직 전남공장이 설립될 때까지 전남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장이었다. 1954년 박인천이 공장을 인수하면서 전남제사로 개칭했다. 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 여성노동자를 공장에 출근하게 했음을 밝혔다. 이는 명백하게 근로기준법 을 위반한 것이었고,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도 보장받지 못한 시대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화순탄광에 관한 조사에서는 수개월 동안이나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는 실상이 보고되었다. 화순탄광은 월 평균 5천여 만환의 흑자를 내고 있었으나, 1954년부터 2~4개월의 임금 지급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노동자의 생활은 곤궁에 처해 있었고, 극빈한 상태에서 생계가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이 지적되었다. 목포 지역에 관한 노동실태는 김형기( 金 基 )가 대표로 보고했다. 그는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으며, 심지어는 노동법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고 하면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토로했다. 목포 지역 조사반은 약 3,600명(자유노동자, 염전노동자 제외)의 노동자가 비참한 생활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이들의 하루 수입은 1~7백환 사이였다고 밝혔다. 이를 1일 평균으로 환산하면 275환인데, 5인 가족으로 산출하면 1인당 생활비가 55환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김 의원은 전라남도가 관리하는 노동대책비 2백 만환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악질 기업주에 경종을 울리라고 촉구했다. 끝으로 순천 여수 지역에 대한 조사 보고는 순천서전사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정성순( 鄭 成 淳 ) 은 이 사건에서 회사가 임금을 지급하지 못했던 것은 자금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애로가 조속히 타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은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개선되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조사 이후에 진행되었던 노동쟁의의 쟁점과 진행 양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가 1959년 9월에 집계했던 그해의 노동쟁의 양상은 이를 잘 보여주는 실상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그해 9개월 동안 7,577명이 참가한 가운데 총 2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쟁의의 쟁점은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불, 이유없는 해고 반대 등이었다. 이후 그해 11월까지 5건의 노동쟁의가 추가로 발생했다. 이들을 모두 합산하여 보면, 1959년에 전남지역에서는 26건 이상의 노동쟁의가 발생했으며, 주요 쟁점들은 1950년대 중반과 별다른 다르지 않았다. 즉 이승만 정부 말기에도 이들 지역들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열약했던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주체는 대한노총이었다.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간부들 가운데 다소 비판적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대한노총 이외의 노동조합이 형성되었던 적이 없었다. 즉 대한노총과 다른 전국적 노동조합으로 1959년에 출범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에 전남지역의 노동조합들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4월혁명이 발발하기까지 전남지역에서 대한노총의 역할은 실로 중요했으나, 활동은 미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4월혁명이 발발하면서 대한노총이 집중적으로 토로되었는데, 전남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5년 10월 21일 전남방직의 일부 공장이 휴업에 들어갔다. 전략사정이 매우 심각해져 전남방직뿐만 아니라 산업체 전반에서 문을 닫는 공장이 속출했던 것이다. 전남방직에서는 4천여 노동운동사 21

24 명의 노동자 가운데 800여 명을 해직시켰다. 전남방직은 전력사정이 완화되면, 희망자에 한해 복직시킨다고 하면서 임금과 여비 그리고 퇴직금 등을 지급했다. 그렇지만 이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일방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전남방직은 전력사정이 해소되자 500여 명의 노동자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생산품의 가격과 구매력이 낮아지고 있어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전남방직의 운영은 난관이 봉착할 것이라고 했다. 대한노총 산하의 섬유노동조합은 1959년 9월 2일부터 8시간 노동제 실시를 요구했고, 9월 21일부터는 이를 실현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금성, 대한, 삼호, 조선, 대전 등의 6개 회사는 1960년 1월부터 이를 실하기로 약속했고, 태창, 경성, 전남 등의 3개 회사에서도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중소섬유 공장에서는 근로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9년 10월의 대구 합동직물노동조합에서 일요휴무를 요구한 쟁의가 그 일례이다. 하지만 1960년에도 8시간 노동제는 실제로 이행되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기업주가 대부분이었다. 대한노총은 1960년 1월 5일, 방직업자들이 연약한 여공들을 혹사하여 막대한 폭리를 취한다고 비난했다. 대한노총은 1월 12일에 기업주의 불참으로 노사협약이 결렬되자 단위 노조 위원장 회의를 열고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노동시간과 관련한 문제는 섬유노조위원장 김원영( 金 湲 永 )과 부위원장 고일하( 高 一 河 )가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시간 노동제가 실시되지 않은 것과 임금인상 결의가 유효한 성과를 가져오지 못함으로 인해 섬유노조가 분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섬유부분에서의 여공 혹사실태는 아주지역 섬유대회에서 한국의 노동관계 당국에 보내 온 성명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성명서는 한국의 여직공의 12시간 노동을 거론하면서 비인간적 착취행위를 조속히 시정할 것을 요구했으며, 여공을 혹사하는 나라는 한국과 홍콩뿐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2) 광주 전남지역에서 대한노총의 활동과 변화 7) 1953년 3월 8일 노동조합법이 공포되면서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해체되고, 새롭게 조직을 구성했다. 대한노총도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전국대회를 소집했으나, 정대천( 丁 大 天 ) 세력과 이준수( 李 俊 洙 ) 세력이 갈등을 벌였다. 그렇지만 정대천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장악했다. 이후에도 이와 대립하는 세력들이 형성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충돌이 빚어졌다. 이들은 이합집산의 파법 싸움을 계속해서 벌이면서 대한노총을 장악하는데 집중했다.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부와 긴밀하게 결탁됨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그것은 어느 파가 대한노총을 장악해도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와 대한노총의 결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은 무수하게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1956년 3월 13일 경전노동조합이 이승만의 대통령 3선 재출마를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는 사실은 7) 이 절은 한국노총(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 에서 광주 전남지역에 관해 서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 압권이라고 할 것이다. 이때 경전노동조합 조합장은 정대천이었다. 대한노총에서의 경력은 선거에서도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한노총 소속으로 총21명이 출마했는데, 당선자는 없었다. 전남에서 목포구 박기봉( 朴 基 奉 ) 국회의원(전 철도연맹 위원장)이, 목포구 김대중( 金 大 中 ) 목포부두노조 공인이 출마했었다. 1958년 5월에 치러진 4대 민의원에는 대한노총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19명이 입후보했고, 7명이 당선되었다. 전남지역으로 보면, 나주 을구 이진수( 李 鎭 洙 ) 무소속 전 노총 최고위원이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나주 갑구에 출마한 이사동( 李 社 烔 ) 무소속 잠사노조 위원장은 당선되었다. 대한노총의 활동을 전남지역으로 좁혀 살펴보면, 1957년부터 잘 드러난다. 10월 26일 [대한노동 조합총협의회 결성 준비위원회] 명의의 성명서 가 발표되었는데, 여기에 여수지구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 이재식( 李 載 植 ), 목포지구노동조합연합회 대표 정순기( 丁 淳 基 ), 광주지구노동조합회 위원장 최유식( 崔 有 植 )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정대천과 김기옥 세력이 연대한 것이었다. 1959년 7월 30일 개최된 대한노총 전라남도연맹 임원 선거도 당시 전남지역에서 누가 노동조합을 주도하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선과 결과 위원장에는 최유식이 22표로 당선되었고, 부위원장에는 목포부두노조위원장 배석천, 화탄노동조합 위원장 박석기, 여수부두노조위원장 김판석, 순천철도노조위원장 곽수송이 당선되었다. 선거 후 임원 임기를 2년으로 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시기 전남의 노동운동은 조합원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대한노총 소속의 지역별 또는 산업별 조합장 일부의 활동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특성을 이해하고, 4월혁명 시기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활동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사람은 오랜 기간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최유식이다. 그는 1946년 6월 중순에 대한노총 광주지부(지부장 전영배)가 결성될 때부터 청년부의 간부로 활동했다(정근식, 1992: 132). 최유식은 1947년 10월 26일 이청천의 참석 하에 개최되었던 대동청년단 전남단부(단장 서민호)의 산업국장을 맡 았 고(임 선 화, 2009: 122), 1948년 11월 4일 에 는 여 순 사 건 에 대 응 하 기 위 해 결 성 되 었 던 긴급사태대책위원회 상임위원 겸 정보부에 편성되어 활동했다. 그는 1949년에는 국민회 전남본부와 광주지부에서 중임을 맡았으며, 여러 행사들에서 사회를 보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8) 그리고 1952년 4월 15일 실시된 지방의원 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다방면으로 전남지역에서 영향력을 갖는 인물로 성장했다. 1954년에 이르면, 최유식은 대한노총에서 8명으로 구성된 회계감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8) 그는 1949년 6월 11일 국민회 광주지부 주최로 개최된 38선 철폐 광주국민대회 에서 미 국무성에 보내는 대회 결의문 을 낭독했다( 대한국민회, 38선 철폐 광주국민대회를 개최, 동광신문, ). 노동운동사 23

26 1958년 10월에 김기옥( 金 琪 玉 )이 대한노총의 위원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회계감사위원들이 대체로 지역별 또는 산업별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것으로 보면, 관행적으로 배분되었던 직책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대한노총 내에는 여러 세력들이 경쟁과 야합을 벌였는데, 9) 최유식은 정대천( 丁 大 天 ) 계열이었다. 정대천과 최유식의 행보는 거의 일치했다. 최유식이 1957년 10월에 등장했던 대한노총과 별개로 전국적 노동조합을 지향했던 대한노동조합총협의회(이하 대한노련) 이 발족하는데 깊숙이 개입했다는 점은 이를 확신하게 한다. 대한노련은 그 해에 대한노총의 권력 장악에 실패한 정대천과 김기옥 세력이 연대하여 결성을 시도했던 단체였다. 정대천은 경전노동조합 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던 인물로 자유당 내 제2인자였던 이기붕의 최 측근이었다. 그는 이러한 배경을 활용하여 한동안 대한노총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로 군림했다. 한편 최유식은 김기옥 계보라고 파악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1958년 10월에 대한노총 위원장에 김기옥이 당선되어 집행부를 구성했는데, 최유식이 배제되었던 것이다. 김기옥이 대한노총을 장악하면서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반 김기옥 세력들이 확대되면서 대한노총과 별개의 전국적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협) 의 결성이 시도되었다.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지도위원은 5명이었는데, 정대천과 최유식의 이름이 확인된다. 또한 선전위원에서 화순탄광노조위원장 박석기의 이름이 확인된다. 정대천과 최유식은 그해 10월 26일 전국노협 결성 이전에 대한노총으로 복귀하고, 비판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최유식은 4월혁명 직전에 상당히 영향력을 갖춘 노동조합의 전국적 지도자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보건사회부가 개입하여 화합을 종용했다. 정대천, 김기옥, 김주홍 3인은 대한노총 깃발 아래 대동단결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화합이 성사된 것은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가 계속된 상태로 1959년 10월 7-8일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노협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10월 26일 서울 태화관에서 결성식을 했다. 그리고 임원을 선출했는데, 최유식과 박석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전국노협 결성에 정대천 일파는 물론, 대한노총 내 반 김기옥 세력 그리고 광산노동조합 등이 모두 탈퇴했던 것이다. 정대천 일파는 김기옥 일파와 자유당의 화합전략에 포섭되고 있었고, 광산노동조합 등도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은 대한노총의 파쟁이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정부 및 고용주와는 주종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노동자의 권익보호에는 진정성을 갖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대한노총 산하의 각 노동조합도 이러한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한노총의 최고 지위를 획득하려는 일부 노조 간부들은 장기간에 걸쳐 대한노총 본부는 물론 그 산하의 각 노조에 세력을 강화하고 지배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노총 본부에서 9) 대한노총 내 세력들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연합, 정부와 자유당의 개입과 관계 등에 대해서는 임선자(2007)를 앞의 책을 참조. 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 일어나는 사건은 항상 그 산하 노조에 영향을 미쳤고, 산하단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도 대한노총에 영향을 미쳤다. 3) 이승만 정부 시기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 전남지역의 산업시설들은 인구가 집중된 몇몇 도시들과 자원의 채취와 활용이 용이했던 장소들에 분포되어 있었다. 전남지역을 대표했던 산업시설은 일제강점기 광주에 건립되었던 전남방직공사 10) 와 전남제사 등으로 주로 여성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었다. 항구가 발전한 목포와 여수에는 부두와 관련된 업종과 해운업이 발달하고, 화순과 광양 등에는 광업이 발전하여 남성노동자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전남지역은 일제강점기에도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사회운동이 빈발했고, 해방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안종철 외, 1995). 195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산업의 물적 시설들이 크게 변하지 않고 존속했기 때문에, 11)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이 갖는 위상은 오늘날에 비해 높았다.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북한군이 전남지역을 점령했던 기간은 2달여 정도였지만, 좌우 갈등과 전투 등으로 산업시설들 다수가 파괴되었다. 항구나 광산 등에 관한 피해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각종 기계 설비들로 작동하는 공장들은 피해도 심각했고, 원상 복구까지 시일이 소요되었다. 전남지역의 전쟁 피해와 양상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자료들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다른 지역의 상황도 유추할 수 있다. 광주의 경우는 전남방직 광주공장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는 북한군이 공장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군의 폭격으로 기인했다(대한방직협회, 1987). 손실 규모는 공장건물 10,431평을 비롯하여 방직기 38,368추, 직기 1,510대였는데, 전국 방직회사들 가운데 세 번째로 피해가 컸다(대한방직협회, 1968: 459~460). 파괴된 시설은 1954년경에 보다 발전된 신규 설비들로 대체 복구되었으나(전방주식회사, 1984: 430), 노동자의 수도 복원되었는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광주시사 에 의하면, 전남방직의 노동자가 1949년에는 4,002명이었으나, 1955년에는 2,689명으로 대폭 감소했던 것으로 확인된다(광주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1995: 526). 그 이유는 또 다른 원인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전력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력이 부족하여 공장이 가동될 수 없었고, 회사는 1955년 10월경에 대거 휴직처분을 했던 것이다. 이후 전력사정이 호전되면서 노동자 수가 증가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최대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의 경우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상황이 상대적으로 잘 파악되어 있다(목포시, 1990: ). 10) 1934년 9월에 일본종연방직공업주식회사 광주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공장은 1948년 6월에 전남방직공사로 명명되었고, 1951년 11월에 민간에 불하되어 1952년 11월에 전남방직주식회사로 새롭게 발족했다. 1961년 4월에 전남방직주식회사 와 일신방직주식회사로 분할되었다. 11) 전남지역은 1960년대에 건설의 시대 라고 불릴 만큼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전라남도 지 9권, 217). 이것은 그 이전의 시대에는 산업시설이 해방 당시와 크게 변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노동운동사 25

28 목포시사 에 의하면, 섬유, 화학, 제빙, 요업 등 다양한 산업시설들이 파손되었던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부두나 항운 시설에 관한 내용은 집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실상을 알 수가 없는데, 피해가 미비했거나, 근거 자료가 없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목포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산업시설은 대동유지화학공장으로 865,998,710원의 피해를 입었고, 이어서 대한면업공사가 682,782,335원의 피해를 당했다. 대한면업공사는 조면기 100대와 직기 150대 등 기계 일절이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들은 목포의 산업노동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환경의 악화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2. 한국전쟁과 이후의 노동운동 12) 1) 한국전쟁 시기의 노동운동 한국전쟁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운동을 박멸시켰다. 노동운동 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국가 수립을 둘러싼 갈등 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맥은 거의 소멸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나마 노동운동의 형식을 취했던 것은 1946년 이승만의 발언이 계기가 되어 창립되었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제압 및 박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자유당의 일원이었던 대한노총뿐이었다. 대한노총 중심의 노동운동과 별개로 노동운동이 진행되었던 사례는 극히 드물었고,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이 계속 중이던 1952년 2월 대한노총 광산연맹은 중앙본부 위원장 및 노동조건추진위원장 이름으로 대한석탄공사와 상공부장관 등 요로에 초과 작업시간에 대한 임금계산 기준의 개정과 미불 임금 및 미가 보상금 지불요구 등 9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날로 폭등하는 쌀값과 광산노동자의 심각한 생활난을 시급히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진정 활동에는 영월, 도계, 장성, 은성, 화순 등 국내 주요 탄광노조들이 동참했다. 이들은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당시 대한노총 광산연맹에서 제시한 9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초과 작업시간에 대한 임금계산 기준의 개정, 2 식량배급에 대한 부양가족 수 제한 폐지, 3 미가 보상금 시가( 時 価 ) 환산, 4 정부 기준배급미 인상 차액의 지불, 5 공상부조의 규정제도의 실시, 6 위험작업 수당 지불(외선전공 운탄작업 노동자), 7 야근근무 수당 지불, 8 자동차 운전 킬로 당 수당, 9 미불 임금 및 미가 보상금 지불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사회부 노동국은 광산 노조의 진정을 받고 즉시 상공부, 석탄공사, 농림부 등 관계당국과 연석회의를 열고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미지불 임금 8억 원 문제는 심각하므로, 2월 21일까지 석탄공사가 우선 반액을 지불 청산토록 했다. 12) 이 장은 한국노총(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 에서 광주 전남지역에 관해 서술한 내용과 전남일보 등에 의거하여 구 성했다. 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9 그러나 기일이 넘어도 석탄공사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광산연맹은 3월 4일 다음 5개조의 요구 조건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즉 1 미불된 제 임금 및 보상미를 즉시 지불할 것, 2 정부기준 배급미가 인상으로 인한 인상 전과의 차액을 지불할 것, 3 정부기준 배급미에 대한 부양가족 제한을 폐지하고 부양가족 전원에 급여할 것, 4 야간근무 수당은 직원에 한할 것이 아니라, 일용 종업원에게도 해당 지급할 것, 5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인상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성명서에는 3월 10일 정오까지 이러한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파업을 단행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탄공사는 광산연맹의 태도가 강경하자, 3월 14일 이에 대응하여 광산연맹과 합의하고 조인했다.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체불노임 등은 3월 20일까지는 지불한다. 2 미가 인상 차액은 노동자 측의 요구대로 응한다. 3 부양가족 배급제한 폐지한다. 4 야간근무 수당은 일용부에게도 해당시킨다. 5 임금인상은 4월부터 대책을 세운다. 그러나 임금 인상 요구가 보류됨으로써, 단지 부분적인 승리밖에는 못 거둔 노동쟁의가 되었다. 2) 한국전쟁 이후의 노동운동 한국전쟁 이후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운동은 몇몇 사업장들에서만 발생했다. 산업화 수준이 미진했고, 한국전쟁에 의해 파괴된 생산시설의 복구 등으로 인해 도시 중심의 일부 사업장들에만 노동자가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남지역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이 1955년 보관되고 있어 이전에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책과 자료에서도 이 시기에 관한 부분이 크게 취약한데,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대한노총이 자유당의 기간단체로 포함되어 있어서 정부의 지침을 이행하는 역할이 주요했다는 점이다. 둘째,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셋째, 기반과 환경이 취약하여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이 시기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주요 산업체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며, 내용의 파악이 명확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감안하여 이 시기 전라남도에서 전개되었던 주요 노동쟁의들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한석탄광산노동연맹 화순광업소의 노동쟁의 대한석탄공사(이하 석공)는 국영기업체로 산하에 영월, 도계, 장성, 화순, 고성 등의 광업소를 두었다. 사회부는 1954년 3월에 석공 산하 광업소들에 대해 임금 지불 실태와 재해보상 지불 실태, 위법 행위 사실 등을 조사했다. 그렇지만 조사를 마친 사회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953년 6월 14일 근로기준법에 제정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영기업체도 이를 지키지 않았고, 정부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화순광업소를 비롯하여 영월, 동계, 은성광업소의 노동자 7,000여 명은 생계를 영위하는 것이 더욱 노동운동사 27

30 어려워지기에 이르자 1954년 12월 2일 파업을 들어갔다. 당시는 한파로 연료난이 극심해서 48시간 파업이 사회에 미친 파급이 컸다. 노동조합은 지난 10월 26일 석공을 상대로 정식 쟁의보고서를 제출하고, 당국의 조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국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을 월 23,175환 평균율로 인상할 것, 미지불임금(4개월분)을 즉시 청산할 것, 석공은 왜잔( 倭 殘 )의 관료정책을 버리고 노임정책을 시정할 것,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여 1953년 8월 8일부터 소급 실시 할 것이었다. 대한노총은 파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요구조건 관철을 위한 방편이므로 48시간 파업 기간이 만료되는 12월 4일에 작업을 재개할 것이라고 했다. 양측 사이에 가장 쟁점이 되었던 미불임금은 약 3억 환 정도였다. 상공부와 석공은 이 문제는 탄값을 인상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했다. 이에 석탄광산 노련에서는 1954년 12월 7일 임금인상 및 미불노임의 해결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 목적을 관철할 것이며, 12월 14일 2차 파업을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사태가 악화되어가자 보건사회부는 석탄공사 사장을 근로기준법과 노동쟁의 조정법 위반을 이유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하는 행정조치를 취했다. 정부는 석탄 산업에 위기감이 조성되자 군대를 파견하여 노사관계 개선을 기도했다. 그러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상공부로 하여금 6억 환을 석탄공사에 융자함으로써 노임을 지불하게 했다. 노동쟁의와 종결과 더불어 석탄공사는 1955년 1월부터 54%의 임금인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석탄공사의 임금지불과 임금인상 약속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55년 9월 11일에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는 쟁의가 다시 발생했던 것이다. 1956년 6월 대한노총 석탄광노동조합연합회가 성명서 를 발표했다. 참가단체들 가운데 화순탄광노동조합 위원장 박석기( 朴 石 基 )가 있었다. 그리고 1956년 6월 11일 양측의 협정서 가 체결되었는데, 여기에도 박석기가 참여했다. 그렇지만 이런 양상은 매년 반복되었다. 1957년에 노동조합은 파업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하여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다시 상황이 고조되자 석탄공사는 1957년 4월 8일에 노동조합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고, 임금인상 쟁의가 종결되었다. (2) 금융조합연합회에 대한 자유노련의 파업 전국의 각 항만과 주요 철도역에는 자유노련 산하의 노동자 17,00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 금융조합연합회는 1953년 11월부터 자유노련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소급 인상하여 지급해야 했지만, 지연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한 투쟁으로 자유노련은 1954년 9월 30일부터 48시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자유노련에서는 9월 22일에 인천, 장항, 군산, 목포, 여수, 마산, 부산, 포항 등지의 자유노조 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금융조합연합회로부터 하역을 청부하고 있는 사업체가 9월 30일까지 임금을 인상하여 소급 지급해야 된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1 파업할 것임을 결의했다. 자유노련 노동자들은 당일이 되어서도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결국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국 8개 주요 항만에서 48시간 예정으로 단행하기로 했던 파업은 4개 장소에서만 7시간가량 이루어졌다. 총파업은 자유노조 자체의 조직적 취약성만을 드러내고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분규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결이 이행되지 않음으로 인한 노동쟁의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조직적 취약성을 발견한 자유노련은 1954년 12월에 금융조합연합회와의 투쟁을 조직 강화의 계기로 만들었다. 즉 자유노조는 성과를 도출하진 못했으나, 12월 20일에 다음과 같은 3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호소문에서 쟁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1 지난 8월 30일 체결된 중앙노동위원회와 금용조합연합회와의 노임 150% 인상만을 즉시 실시하라. 2 전기 협정에서 확약한 바에 의하여 1953년 11월 1일부터 소급 실시키로 된 인상 노임 전액을 1955년 1월 20일까지 지불하라. 3 재정업의 절차에 의하여 노임지불이 지연되면 사회부 당국은 이에 대한 선후책을 강구할 것이고 반드시 1955년 1월 20일까지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3) 조선운수주식회사의 노임 부정 착취 금액 반환 쟁의 대한노총 자유연맹 산하의 여수와 마산 부두 하역업에 종사하는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단체협약에 규정된 정당한 노임 전액을 지급받지 못했다. 검찰과 보사부가 기업주인 조선운수주식회사(이하 조운)를 조사한 결과, 일부를 부정 착취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일은 노동자의 권익투쟁을 회피한 자유노련의 어용성을 확실히 보여주는 실례였다. 외자청으로부터 정부물자 하역작업을 청부받은 조운은 여수와 장항 부두 하역작업과 관련하여 노사의 임금배분율을 기본임금은 3:7제로, 기타의 과분한 관리비와 우천시, 위험품 등의 작업은 할증금을 지급해야 된다는 특별조항을 내용으로 하는 노사 간의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운이 이를 무시하고 기본임금을 삭감하여 할당하고 나머지는 할증금의 명목으로 부정 취득했다. 이에 자유노련은 1954년 12월에 조운을 상대로 쟁의를 벌었으며, 1955년 3월 13일 자유노련위원장 김기동( 金 起 東 )의 명의로 조운 사장 임봉순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사건이 확산되자 국회 본회의와 보사부는 미지급된 각종 할증금을 즉시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도록 시달했으나, 조운은 노임지불을 계속 거부했다. 이 사건은 여수, 장항, 군산, 목포 등 항만부도 모두에 해당되었다. 조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표방했던 자유노련은 1955년 9월 13일 개최되었던 통합대회를 기점으로 태도를 선회했다. 통합대회에서 선출된 간부들이 노동쟁의보다는 정치적 타결책을 모색한다는 내용의 성명서 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간부들은 서울지방검찰청에 계류 중인 공문서 위조 및 노임 횡령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이들은 노동권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노동자들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이것은 김기옥 체제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 일로써 12월 5일에는 조운과 노임인상 노동운동사 29

32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쟁의종결보고서를 보사부에 제출하여 종전까지 받지 못한 각종의 할증금까지 스스로 묵살시켰다. 이로써 결국 노동자들의 노임을 불법적으로 착취한 내막은 은폐되었다. 1958년 목포 세관 구내 하역 작업권 쟁탈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특히 현지 하역작업 업주(강성복)와 노동자(6분회, 25명) 사이에 대립이 심각하여 전라남도 노동쟁의조정위원회에 판정을 요구했다. 쟁점은 하역 업주가 수차례에 걸쳐 돈을 거출했는데, 강성복은 세관당국에 교선비조로 사용했다고 하고, 6분회는 이의 구체적 집행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강성복은 1957년 9월 7일에 오천영 외 25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강성복을 1958년 4월 21일 경찰에 고발했다. 1958년 6월 17일 전라남도 노동쟁의조정위원회가 소집되어 강성복이 노동쟁의 조정법 제11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정하고 해고자들의 복직을 판정했다(중앙노동위원회, 1980: 112~114). 7월 17일 강성복을 기소한 검찰은 오천영 외 25명을 해고하고 노동쟁의 기간 중에 황치관 외 43명을 채용함으로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한양운수에서는 1957년 7월 17일 임금 70% 인상을 결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선주에게만 일방적으로 50% 이상을 지급하고, 노동자 28명에게는 임금을 인상하지 않았다. 이에 목포지구해상노동조합은 1959년 3월 한양운수를 상대로 노동쟁의를 시작했다. 사건이 격화되자 전라남도 사회과에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4) 부두노동조합의 야합과 파업 국회 본회의는 인천 부두노동조합의 십장제 폐지 등 대한노총의 노동쟁의 관계에 관한 현지조사를 1959년 6월 8일 벌이기로 했다. 국회는 인천, 부산, 여수, 목포, 군산, 마산에도 조사반 파견을 결정하고, 십장의 임금중간착취의 실태를 규명하려 했다. 십장제를 비롯한 부당한 임금 구조가 부두노동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국회조사단은 현지조사를 통해 노조 간부의 노동자 착취를 조절하는 입법조치를 마련할 것임을 공언했다. 하지만 거액의 노임횡령 사건은 규명하지 못했고, 십장제의 모순과 폐해도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지 못했다. 집권당과 노동조합의 긴밀한 이해관계가 이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들이 전남지역에서도 확인된다. 목포부두노동조합에서 발생한 부정사건이 대표적인데,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통제하기 유리한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다. 목포부두노동조합 간부가 1954년 4월부터 1957년 4월 사이의 비료포대 중량 노임인 367만환을 포기하는 대신에 한국운수로부터 250만환을 개인부채 반제 형식으로 수령했다. 이후에도 노동조합 간부는 같은 방법으로 200만환을 지불받아 900만환의 조출료( 早 出 料 ) 흥정을 1년 동안 지연시켰다. 이런 사실이 공론화되자 경찰은 1958년 7월 대한노총 중앙쟁의부장이며, 목포노조위원장인 배철( 裴 哲 )에게 금족령을 내렸으나, 20일경 서울로 도피했다. 부두노동조합 부차장 회의에서는 배철의 사표 제출을 권고했으며, 분회장들은 그가 불법을 저지른 것이라고 시위를 벌였다.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3 그런데 이 사건에는 경찰이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었다. 경찰은 2개월 전부터 목포부두노동조합 개편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배철의 부정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했던 것이다. 7월 31일 경찰은 사찰 형사들을 동원해 부두노동자들을 유달초등학교 강당에 집결시켰다. 경찰은 출입을 금지시키고, 5회에 걸친 거수투표 끝에 김진해( 金 鎭 海 )를 위원장에 당선시켰다. 그러나 부위원장 2명을 비롯해 다른 간부진들의 기존 노동조합 세력은 그대로 존속했다. 자유당은 경찰의 개입과 조정에 대해 불법이라고 지적하고, 집회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자유당은 경찰의 행위를 규탄했고, 목포부두노동조합은 목포경찰서장 외 1명의 경찰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또한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를 비롯하여 정부 부처에 청원서를 보냈다.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경찰 개입설에 대해 유감이라고 하면서 부정사건 관련자인 배철을 구속한 것이라고 했다. 1958년 8월 19일 소집된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는 노동조합법 제33조 1항에 의거하여 목포부두자유노동조합은 해산하고 32조 2항에 의거하여 부두노조의 임원을 개편할 것 등을 의결 했다. 이에 목포부두자유노동조합은 부당성을 주장하며, 기존 부두노동조합과 하등 관련이 없이 새로 성립된 것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김진해는 전라남도지사를 상대로 광주고등법원에 부두노조 해산명령 취소 에 관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9월 8일 광주고등법원 위의 취소 신청을 각하했다. 그리하여 9월 17일 대한노총 부두노조의 개편을 위한 총회가 개최되어 1,083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선거를 했는데, 배철이 위원장에, 배석천( 裴 錫 天 )과 정순기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59년 6월 한국운수 목포지점과 목포부두노동조합 사이에 1년 동안 전개되었던 조출료 9백만 환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한국운수는 노동조합의 무성의로 조출작업 가동률이 낮아 9백만 환의 비용이 소비되었으며, 특별한 단체협약 조항이 없는 한 조출료는 노동자에게 지불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반면 노동조합은 조출료를 정당한 임금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전액 지급을 요구했다. 이는 한 회사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임금협상에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얼마 후 한국운수 목포지점과 목포부두노동조합 간부들 사이에 비밀 회담이 2~3년 전부터 있었고, 노동자들 모르게 임금 가운데 4,500천환이 개인 부채인 것처럼 지불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이 돈을 수령하고, 조출료 지연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배철이었다. 경찰은 이 사건에 관해 수사를 개시했고, 배철은 사표를 제출했다. 6월 28일 대한노총 목포부두노동조합은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위원장 선거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배석천( 裴 錫 天 )이 위원장에, 추성엽( 秋 成 葉 )이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배철( 裴 哲 )은 임금 횡령으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돈의 용처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여수부두에서는 1959년 11월 23일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여수부두노동조합이 여수어업조합을 상대로 노임 인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선에서 위탁 판매장까지의 운반비를 한 상자 당 노동운동사 31

34 15환에서 25환으로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 쟁의는 어업조합과 노조 사이의 조정을 통해 1상자 당 18환으로 3환 인상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5) 기타 노동쟁의 1959년 7월 3일부터 6일까지 나로도어업조합 소유의 제빙공장 노동자 20여 명이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4년 여 걸쳐 약 500만환의 노임이 체불되었다고 주장했다. 나로도어업조한 이준형 이사는 회사를 매각한 뒤에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음 이사에게 업무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행방을 감추었던 것이다. 1959년 8월 4일에는 여수 신항부두 확장공사를 하던 노동자 약 400명이 시행사인 계림토건을 상대로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2월부터 7월까지 임금 1,200여 만환 가운데 700여 만환이 전표로 지급되어 큰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현금이 필요했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20% 할인 금액으로 전표를 넘겼던 것이다. 계림토건은 여수시로부터 600여 만환의 자금만 지급받아 임금 500만환을 지불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상당한 자금이 영달되었으나, 계림토건이 다른 곳에 사용하려고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은 계림토건을 경찰에 고발할 것임을 예고했다. 1959년 11월 4일에는 광주송정 간 도로 포장용 돌을 송정공원 뒷산에서 채석하던 노동자 100명이 미불 임금 3백 만환의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11월 5일 회사가 2백 만환을 우선 지급하자 파업은 중단되었다. 이 회사는 과거에는 임금 지불을 지연하여 노동자들이 전표를 20% 공제 매도하여 불이익을 당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1959년 11월 여순토건노동조합(위원장 김윤문)이 협성토건회사(대표 최익주)를 상대로 노동쟁의를 제기했다. 이 회사는 1957년 2월부터 8월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876명에 대한 임금 130여 만환을 체불했는데, 이때까지도 지급하지 않았다.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는 12월 1일 최익주에게 출두를 통보했다. 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5 제3장 4월혁명과 대한노총의 몰락 그리고 노동운동의 분출 1. 4월혁명과 노동환경의 변화 1) 대한노총의 몰락과 한국노총의 출범 4월혁명 당시 대한노총 지도부는 정대천, 이기주, 김기옥 등으로 이루어진 연합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1957년 제10차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김주홍 일파를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대한노총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들은 집권당이었던 자유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4월혁명이 발발한 이후, 노동계에서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은 김기옥 위원장과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집행부들을 규탄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김기옥은 제11차 대한노총 전국대회에서 5인 지도제를 구성하고, 이를 매개로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다. 4월혁명 기간에 자유당과 대한노총은 동일체로 인식되고 있어서 노동자들은 김기옥 집행부에 대해 거세게 사퇴를 요구했다. 위기를 직감한 김기옥은 4월 24일 자유당 산하에서 떠나 본연의 노동운동으로 돌아가겠다 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 발표에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중견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에 소재한 김기옥을 파괴하기도 했고, 노동조합 개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로 인해 대한노총 지방조직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1948년 4월 10일 근로자의 복지향상과 기업주와의 투쟁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설되었던 대한노총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노총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아래와 같이 매우 좋지 않았다. 대한노총 비판자들을 규합하여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1959년 10월에 새로 발족한 노동조합 전국조직이었던 대한노동조합협의회 였다. 사용주와 대결하는 노자투쟁에서 단 한번 승리한 사실 없고, 경제적 불안정에서 오는 불완전 고용 과 실업자의 격증 그리고 직업 연령의 연장으로 취업의 불균형 등 헤아릴 수 없는 위협과 함정이 생 산 근로자를 뒤따르고 있었으나, 대한노총은 헤게모니 쟁탈 자기 일파의 이권을 위한 집권당과 사용 노동운동사 33

36 주와의 야합 등 가지가지의 비행만을 연속해온 것이다. 13) 대한노총 위원장과 집행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사태의 전개를 예의주시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자유당이 붕괴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5월 2일에 정대천과 김주홍이, 그리고 5월 3일에 김기옥이 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집행부의 일괄사퇴가 아니었다. 대한노총의 기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지만, 기존 간부들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기존 간부들은 기득권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다져놓은 인적 유대 관계를 모두 가동했다. 대한노총은 위원장을 비롯해 지도부 몇 명만 바뀌었고, 얼마간은 유지되었다. 그래서 전국 철도노조연맹, 전국 전업노조연맹, 전국 광산노조연맹, 전국전매노조연맹, 전국체신노조연맹 등의 단체에서는 조직체가 개편되지 않고 잔존했다. 오랜 시일을 두고 형성된 조직과 인적유대는 계속하여 뿌리 깊게 노동조합의 개편과 민주적 발전의 저해했다.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60년 5월 9일 대한노총의 모든 간부진이 사퇴를 했다. 대한노총은 사실상 해산된 상태였고, 10여 명의 수습위원들이 활로를 모색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5월 한 달 동안에 170여 개의 단위노조를 개편 포섭하여 16만 명의 조합원을 흡수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합법적인 노동쟁의는 주로 노동조건의 개선 및 임금인상의 요구를 내걸고 점차 증대되었다. 그 추세는 단위 노조에서 산별 노조에로, 지역적인 범위에서 전국적인 범위로, 평화적인 방법에서부터 파업 등 실력행사로, 일회의 쟁의에서부터 반복적인 쟁의로 발전해간다. 보사부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1960년 한 해 동안의 노동쟁의는 발생건수가 227건에 참가인원이 64,335명이었다. 1959년의 95건에 참가인원 49,813명과 비교하면,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쟁의 발생 건수로 보면, 이 수치는 1953년 이후부터 자유당 말기까지에 발생한 쟁의건수에 육박했다. 이 수치는 보사부의 통계로, 행정적 절차에 의해 신고된 것만을 집계한 것임을 감안하면, 실제의 노동운동은 이 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이승만 정부에서는 대한노총과 전국노동협의회라는 두 개의 전국적 노동자 단체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 두 단체는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대립과 반목으로 일관해왔다. 노동조합 조직률이나 조합원 수 그리고 설립 역사 등으로 보면, 대한노총이 압도적인 위상과 힘을 갖고 있었으나, 4월혁명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되어 갔다. 노동자들은 대한노총을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일부로 보았고,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전국노동협의회는 대한노총의 이러한 점들을 부각시키면서 세력을 확대했으나, 이들 역시 대한노총에서 분리되었던 세력의 일부였고, 근본적으로 차별적인 조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1960년 9월 15일 두 13) 폭악스런 사용주, 전남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7 단체는 전국 산업별 대표 17명과 지역별 대표 18명이 모여 회합한 결과 무조건 통합을 추진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국노동단체통합대의원대회 소집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지도위원으로 진진한과 양일동 등 7명을 선출하고, 10월 1 2일에 통합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때 최유식은 통합대회 실행위원의 심사분야에, 목포의 배철은 연락분야에 참여했다. 1960년 9월 15일 통합발기조합이 이루어졌는데, 전남도연맹 대표 최유식( 崔 有 植 )과 목포지구연합회 위원장 김판술( 金 判 述 )이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1일 개최된 통합대의원대회에는 노조연맹을 비롯하여 자동차노련, 조양사노련, 전업노련 등 24개 노조연맹을 대표한 324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임시의장단으로는 성주갑(대한노총 대표), 김말룡(전국노동협의회 대표), 송밀성이 선출되었다. 양대 세력들은 통합연합체의 대한노총과 한국노총 두 가지 명칭 결정을 놓고 격돌했다. 이들은 서로 비방하는 발언 등이 폭발하면서 통합대의원대회는 결론을 맺지 못하고 해산했다. 1960년 11월 25~27일 전국노동단체통합결성대회가 재개되었다. 통합노동단체의 명칭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으로 합의되었다. 11월 27일 중앙운영위원들이 선출되었는데, 최유식의 이름이 확인된다. 4월혁명을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전남지역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었다. 그는 한때 전국노동조합 최고위원이나 위원장을 역임했던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11월 30일 한국노련 임시 정 부의장 및 사무총장이 결정되었는데, 의장에 경북지역노동조합위원장이었던 김말룡이 선출되었고, 사무총장에 최유식이 선임되었다. 전국노협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던 김말용이 한국노련 의장에 선출되었던 것은 전국노협이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최유식 등은 비록 전국노협 결성에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않았으나, 대한노총 내에서 비판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이것이 그가 4월혁명 국면에서도 무사히 지위를 보전했고, 더 나아가 새롭게 출범했던 전국노동자단체에서 요직에 선임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전국노동단체 통합대회 실행위원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던 전진한은 한국노련의 중앙위원회 임시부서를 불법이라고 성명을 내고,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새로운 임원진을 발족시켰다. 12월 6일 김말룡 세력과 전진한 세력들은 노련회관(구 노총회관) 점유 문제 등으로 충돌했다. 이날 전진한 일파의 사무총장 이종성이 최유식을 구타했다. 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최유식은 김말룡 일파로 명시하고 있다. 이종성은 3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두 세력 사이의 대립이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통합 논의가 확산되었으나, 두 사람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지연되었다. 양측은 1961년 5월 말경 통합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5 16군사정변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한편 대한노련은 민주당 정부가 입법 추진했던 반공특별법 및 데모규제법이 노동운동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제약한다고 보고,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부의 비민주적 지향을 규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세력들 내에 대한노련이 참여했다는 것에서 당시 이들이 어떤 지향과 위상을 지녔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노동운동사 35

38 2)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개편과 변화 4월혁명의 여파로 대한노총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영향력과 지지 세력은 여전히 상당했다. 노동조합을 둘러싼 세력들은 한동안 교착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기구와 운영을 새롭게 준비할 여유 없었다. 즉 노동조합의 조직과 기구 등 외적인 틀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들의 변화는 위원장과 지도부의 변화를 중심으로 확인해야 된다. 그렇게 보면,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는 지속형, 교체형, 신설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지속형 :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지속형은 기존의 노동조합 위원장과 진도부가 개편되지 않고 존속한 경우를 의미한다. 4월혁명의 격랑 속에서도 전남지역의 주요 노동조합 위원장과 간부진은 건재했다. 이러한 특성을 보여준 사례들은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 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이었다. 이들 노동조합이 시류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위원장들의 활동 및 지향과 관련이 깊다. 4월혁명이 발생하자, 최유식은 새로운 전국적 노동조합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의 활동은 9월 15일 전국노동단체통합대의원대회 소집위원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11월 25 27일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의 결성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 30일 한국노련 의장에는 최말룡이, 사무총장에는 최유식이 선출되었다. 명실상부한 전국적 노동조합의 핵심 인사가 된 것이다. 최말룡은 자유노련 위원장 겸 대구지구노동조합 위원장이었는데, 이 둘은 전국노협 결성을 준비하던 무렵 이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은 공공연하게 최유식을 최말룡 계보로 분류했다. 이와 같이 최유식은 대한노총 및 자유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나, 1959년부터 일탈하기 시작했다. 그는 4월혁명을 거치면서 구세력을 대신할 노동조합을 창설하는 인물로 변신했고, 한국노련이라는 새로운 노동조합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최유식은 6 25전쟁 이후 전남지역에서 경쟁자 없이 10여 년 이상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의 입장과 위원장의 견해가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장악력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최유식이 노동조합운동에서 비판 세력으로 표상되었던 만큼,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위원장과 지도부가 바뀔 개연성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 곳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이었다. 산업별 노동조합이었던 광산노동조합은 전국적 노동조합의 여러 입장들 가운데 비판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14) 무엇보다 광산노동조합이 대한노총에 비판적 입장을 갖는 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주요했다.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위원장은 박석기( 朴 石 基 ) 15) 로, 여러 해에 걸쳐 위원장을 연임하고 있었다. 1959년 8월에 전 14) 김말룡은 4월혁명 직후 잡지에 수록한 글에서 지역으로는 대구, 부산, 마산, 인천이, 산업별로는 광산과 전기 계통이 대한 노총 내에서 혁신 세력이었다 고 했다(김말룡, 1960, 노동조합운동의 전망, 새벽 7권 7호, 새벽사, 150쪽). 15) 박석기는 이승만 정부에서는 자유당 화순군당 사회부장이었다( 경향신문, 1963년 1월 1일자, 구 정치인 171명을 해 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9 전국광산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이주기( 李 周 基 )가 대한노총 사무총장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국노협 결성에 동참했고, 당시 전국광산노동조합 위원장 김정원( 金 正 元 )도 참여했던 만큼, 박석기도 선전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최유식과 같이 박석기도 전국노협 결성까지 함께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활동과 관계는 4월혁명 이후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거의 그대로 존속되었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4월혁명 직후인 5월 14일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조합원 약 800명은 광장에 집결하여 제13차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정기총회 안건은 위원장과 집행부 선출이었다. 박석기는 압도적인 표차로 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1명은 기존의 부위원장이었고, 1명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이 선거는 노동조합에서 박석기의 기반이 매우 공고했으며, 흔들림이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박석기는 1961년 8월 31일에 한국노총 산하에 새롭게 설립되었던 노동조합에서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전국광산노동조합, 1969: 79). (2) 교체형 : 목포부두노동조합과 철도연맹 순천지부 교체형은 노동조합의 위원장과 지도부가 교체되었던 경우이다. 교체형은 진행과정 양상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갈등이 없이 자연스럽게 교체가 이루어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갈등의 과정을 거쳐 교체된 경우이다. 목포부두노동조합의 사례가 전자라면, 철도연맹 순천지부의 사례는 후자에 해당한다. 목포에서의 4월혁명은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그 정점은 4월 19일과 26일이었는데, 특히 26일은 서울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김부련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대규모 군중집회와 시위가 벌여졌다(4 19부상자회 광주 전남지부 외, 1995: ). 이 러 한 정 세 는 목 포 부 두 노 동 조 합 에 영 향 을 주 었 다. 4월 혁 명 당 시 목포부두노동조합은 1959년 6월 28일에 선출되었던 배석천을 위원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그간의 노동조합 운영과 지향 등을 쟁점으로 위원장과 지도부를 탄핵하고 책임을 추궁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비판과 항의를 견딜 수 없음을 인식하고, 5월 2일에 일괄 사퇴를 했다. 며칠 후 새 위원장과 집행부를 선출하는 선거가 개최되었는데, 배철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배철은 배석천보다 오랜 기간 목포부두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목포부두노동조합의 주도권을 두고 임일남( 林 一 南 )과 김진해( 金 鎭 海 ) 세력들이 대립했다. 전반적으로는 임일남 세력이 우세했다. 1954년 7월 대한노총목포지구연맹이 결성되었을 때, 위원장은 임일남이었고, 배철은 부위원장이었다(목포시, 1990: 48). 임일남에 이어 위원장이 된 제 ). 그는 38세였던 1960년 11월 전남 화순 1구 도의원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경향신문, 1960년 12 월 13자, 도의원당선자 ). 박석기는 5 16 이후 정치정화법 해당자로 분류되어 규제를 받다가 1963년 12월 31일자로 해제되었다. 이 과정에 재건국민운동본부 화순군 상무위원으로 활동한 것이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 경향신문, 1962년 4월 30일자, 정정법해당자 70명, 재건운동본 지부 간부에 ). 이후에도 박석기의 노동조합 활동은 계속되어 1965년부터 1974년경까지 전국광산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연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전국광산노동조합, 1974: 213). 노동운동사 37

40 배철은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연임했다. 그렇지만 1959년 6월에 더 이상 위원장직을 계속할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배철이 조출료( 早 出 料 ) 지급 지연 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배철 사건에는 밝히기 어려운 흑막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배철은 1958년 경찰에 쫓기던 무렵 대한노총 중앙쟁의부장을 역임하는 등 전국적 노동조합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57년경부터 대한노총에 반발하는 흐름에도 합류했다. 앞서 언급했던 1957년 10월에 결성을 준비했던 대한노협의 기획위원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된다. 대한노협 결성준비위원회에는 최유식과 배철을 비롯하여 여수지구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 이재식( 李 載 植 )의 이름도 있다. 그 밖에도 배철과 최유식은 활동에서 이름이 종종 함께 등장한다. 1960년 10월 1 2일에 개최되었던 전국노동단체 통합대의원대회에서 최유식은 심사분야의 실행위원이었고, 배철은 연락분야의 실행위원이었다. 이러한 점들로 보면, 배철은 목포지역의 노동운동에서 대한노총 비판 세력으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바탕으로 4월혁명 직후에 위원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목할 사실은 배철과 배석천이 완만한 관계였다는 점이다. 1958년 9월 배철 세력이 노동조합 주도권 획득에서 위기에 처했던 무렵에 개최되었던 총회에서 배철은 위원장에, 배석천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목포부두노동조합의 위원장과 지도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시켜준다. 목포부두노동조합 개편을 갈등하던 계파들이 연합집행부를 구성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송종래, 2004: 472). 그렇지만 한국노총의 출범 과정과 이후에는 배석천이 다시 주도권을 장악했다. 순천에서의 4월혁명은 4월 27일에 학생들이 주도하여 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4 19부상자회 광주 전남지부 외, 1995: 188). 그런데 발생 시기와 규모 그리고 빈도 등에서 광주나 목포에 비해 저조했다. 따라서 4월혁명의 파장이 크지 않았고, 이는 순천지역 노동조합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한노총 철도연맹 순천지부는 위원장과 지도부 장악을 두고 두 세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순천지부 의장단은 4월혁명 직후에 사퇴를 표방했으나,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후속 문제를 결정짓기로 했다. 5월 17일 순천에서 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식전부터 두 집단은 충돌했다. 한 집단은 기존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광주와 목포 등에서 온 대의원들이었고, 다른 집단은 순천지구 소속 몇몇 병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정화위원회였다. 정화위원회는 대의원대회가 불법이고, 기존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대의원이 선별되었다고 주장했다. 갈등이 계속되자, 총 대의원 33명 가운데 19명이 참석하여 기존 의장단 사퇴를 선언했고, 2명의 수습대책위원을 선출하여 27일에 대의원대회를 다시 개최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산회했다. 그런데 대의원대회가 재개되었던 날은 6월 1일이었고, 33명의 대의원 가운데 24명이 참석했다. 두 세력은 회의 진행 과정에서 계속 충돌했으나, 의장단 선거는 강행되었다. 선거에서 당선된 임원들은 대의원의 다수를 점한 기존 세력들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위원장이 바뀌었으므로, 세력 교체로 보일 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1 수 있지만, 새 위원장은 기존 체제에서 간부였고, 수습대책위원이었던 강성순( 姜 成 順 )이었다. 즉 철도연맹 순천지부는 단절이 아니라, 계승의 성격을 갖는 교체였다. (3) 신설형 4월혁명 이후, 노동조합들이 활발하게 신설되었다. 대규모 사업장을 비롯해 중소 규모의 사업장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지만, 아직 결성되지 않은 사업장들이 더 많았다. 다음 <표 3-1>은 1960년에 전남지역의 노동조합과 조합원 신고 설립 취소 및 변경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그해 말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은 83개로, 17,425명의 노동조합원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29개의 노동조합이 4월혁명 이후에 신설되었고, 새로 가입한 노동자는 2,850명이었다. <표 3-1> 1960년 전라남도 노동조합 및 조합원 신고 설립 취소 및 변경 상황 노동조합 (개) 노동조합원 (명) 신고 설립 년 말 노동조합 수 신고 설립 총수 년 말 조합원 수 사무원 노무원 남 녀 남 녀 ,850 17, ,080 1,985 * 주 : 보건사회부, 1960, 통계연보, 479쪽.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495쪽. 노동조합이 신설된 시기는 대부분 4월혁명 직후였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이 신설된 사업장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모두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60년 5월 13일에 대한노총 산하 순천마차노동조합이, 5월 14일에 광주비료와 나주의 호남비료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에 나주노동조합연맹이 결성되었다(한국노동조합초연맹, 1979: 527). 그 밖에 목포 소재 농기구제조업체였던 선일기공사와 남양수산 등에서 노동조합이 신설되었다. 이를 지역별로 감안하여 보면, 광주, 나주, 목포, 순천 등 전남 전역에서 노동조합이 신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특성 4월혁명 직후부터 전국에서 노동쟁의가 급증했다. 1960년에 전국에서 227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64,355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469). 노동쟁의 발생 건수로 보면, 정부 수립 후 4월혁명 이전까지 발생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이를 조정하고 중재할 중앙노동위원회와 지방노동위원회는 마비상태였다.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면서 6월 초순까지 노동운동사 39

42 중앙노동위원은 1명도 선임되지 못했다. 전남지역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7월 5일에 이르러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 9명이 선임되었다. <표 3-2> 1960년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노동쟁의 현황 발생월일 사업장 주요 쟁점 참여자 수 기타 호남비료 체불임금 지급 500여명 공장 건설노동자 한국운수 광주지점 체불임금 지급 7 80명 순천 철도국 화차의 객차 사용 시정 국장 약속, 소강 한국운수 목포출장소 체불임금 지급 50여명 한국운수 여수출장소 체불임금 지급 2,000여명 5. 전남방직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광주여객 관리직원 교체, 임금인상 200여명 지방노동위 중재 중앙여객 단체협약 체결, 임금인상 124명 지방노동위 상정 전남운수 임금인상, 노동환경 개선 버스 332대 운행 중단 전남방직 미지불 임금 지급 133명 전남방직 단체협약 체결(수당 증액과 노동조건 등) 10.초순 목포염전 단체협약 체결 지방노동위 상정 10.초순 천생건설사 (목포) 연장근로 및 휴일근로 수당 지급 10명 지방노동위 상정 10.중순 여수 4개 인쇄소 단체협약 체결, 해고반대, 체불임금 1960년 전남지역 노동쟁의들 가운데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는 <표 2>와 같이 14건으로, 16) 4월 1건, 5월 5건, 6월 1건, 7월과 9월 각각 1건, 그리고 10월 5건이 발생했다. 노동쟁의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호남비료 공장이 건설되고 있던 나주였다. 이 노동쟁의는 공장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운수부문에서 노동쟁의들이 발생했는데, 화물이나 물건을 운반하는 육체노동자들이 주체였다. 이들 노동쟁의는 한국운수의 지점과 출장소에서 16) <표 2>보다 훨씬 많은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신문자료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4건이었다. 비 록 일부 노동쟁의들이 누락되었지만, 당시 쟁의의 양상과 특성을 도출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3 5월 한 달 동안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쟁점은 역시 체불임금 지급이었다. 노동쟁의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체불임금이 이 시대의 고질적인 갈등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월부터는 교통부문에서 노동쟁의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5월에 철도부분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이는 성격이 달랐다. 교통부문의 노동쟁의는 운전기사들이 주도했는데, 사업장과 노동환경에 따라 쟁점의 차이가 있었다. 교통부문은 사회적 파급효과가 커서 지방노동위원회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정황들이 확인된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전남방직은 각각 다른 쟁점들을 매개로 노동쟁의가 반복해서 발생했다. 노동쟁의의 강도와 기간은 전반적으로 사업장 규모가 크고, 전국의 산업별 노동조합 차원에서 쟁의가 진행된 경우에는 갈등이 심각하고 장기화되었다. <표 3-3> 전라남도 노동위원회 제6회 본회의 상정 안건 회사 노동쟁의 조정 당사자 노동조합 지역 쟁점 조선토건주식회사 호남비료공장 노동조합 나주 시간외 근무수당 임금지급 조선기선회사 여수대리점 여수지구 자유노동조합 여수 단체협약 체결 천생건설주식회사 목포지구 축항노동조합 목포 단체협약 경신 한국운수 진도출장소 목포지구 진도부두노동조합 진도 체불임금 지급 호남비료주식회사 외 7개 토건사업주 호남비료공장 노동조합 나주 단체협약 체결 한국미창 영산포출장소 목포지구 부두노동조합 나주 작업 침해 여수지구 해운노조 이사장 외 14업주 여수지구 해원노동조합 여수 임금인상 여수어업조합 여수지구 자유노동조합 여수 임금인상 노동위원회는 사용자의 부당한 노동행위로 인해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그 권리를 침해당한 경우에 구제 신청을 한 사안을 다루는 준사법적 기관이다(중앙노동위원회, 1976: 523~525). 통상적으로 노동위원회가 다루는 사안은 심각한 것이며,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들이다. 그러므로 노동위원회가 관여한 노동쟁의들은 사회적으로 주시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1960년과 달리, 1961년에는 지역신문에 노동쟁의 관련 기사가 잘 등장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보면, 1961년에는 전남지역의 노동현장이 안정화되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운동사 41

44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표 3-3>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의 제6회 본회의 상정 안건들이다. 지역신문에는 지방노동위원회에 관한 기사가 부실하게 게재되었는데, 제6회 회의의 경우는 예외였다. 본래 이 회의는 1961년 5월 16일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5 16이 발발함으로 인해 잠정 연기되었고, 그 요건이 소멸하면서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회의 안건은 1961년 전반기 전남지역 노동쟁의의 특성을 이해하는 정도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제6회 본회의에는 총 8건의 안건이 상정되었는데, 17) 이는 전남지역에서의 노동쟁의가 5 16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감소하지 않고, 계속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상정된 안건들의 사업장이 위치했던 지역들을 보면, 여수와 나주가 각 3건, 목포와 진도가 각 1건이었다. 4월혁명 직후에 노동쟁의가 활발했던 사업장들에서는 분규가 대체로 일단락되었던 반면, 다른 사업장들에서 노동쟁의가 주로 발생했던 것이다. 노동쟁의는 부두노동조합, 자유노동조합, 운수노동조합, 그리고 호남비료공장의 건설과 관련된 노동조합들이 중심이었다. 노동쟁의가 발생한 목적과 이유는 복합적이었으나, 대표 의제를 중심으로 보면, 단체협약 체결과 임금에 관한 것이 주요 쟁점들이었다. 즉 단체협약 체결과 경신이 3건, 임금인상이 3건, 체불임금 지급이 1건, 작업 침해 분쟁이 1건이었다. 2.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전남지역 노동쟁의에 관한 자료들은 사안에 따라 편차가 크다. 전개 상황이 개괄적으로 확인되는 노동쟁의가 있는가 하면, 발생 일자와 사업장만 확인되는 노동쟁의도 있다. 그러므로 노동쟁의를 구성할 수 있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이 시기 노동쟁의의 전개 양상과 노동조합 및 노동자의 주장 그리고 노사관계를 고찰할 것이다. 1) 광주지역 노동조합운동 (1) 제조업 :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쟁의가 빈발했던 사업장은 전남방직 광주공장이었다. 1960년에만 각기 다른 쟁점으로 3번에 걸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4월혁명 이전에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근로조건 개선 등을 쟁점으로 노동쟁의가 전개되었던 경험이, 그리고 10여 년 전 미군정 시기에 적산기업체의 경영과 불하를 둘러싸고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경험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첫 노동쟁의는 5월경에 발생했는데,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이 쟁점이었다. 노동조합은 임금 5할 인상과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했다. 회사와 노동조합은 협상을 계속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17) 이 외에도 1961년 3월 31일에 남선전기 목포지점에서, 4월에 목포노동병원에서, 5월 5일에 화순광업소에서 각각 노동쟁 의가 일어났다. 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5 노사는 6월 14일에서야 합의했는데, 하루 노동시간을 9시간으로 하되 임금을 56% 인상한다 는 것과 노무자 대우 등도 개선한다 였다. 이 노동쟁의가 전개되고 얼마 후 노동조합 위원장이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아 물러났다.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임된 사람은 노동조합 총무였던 박동환이었다. 박동환은 전 노동조합 위원장이 어용은 아니었으나, 회사와 노동조합의 대립 관계를 잘 해결하지 못해서 조합원들이 지지를 철회했다고 했다. 새로 들어선 노동조합은 집행부는 10월 3일부터 노동쟁의를 개시했다. 위원장 등 133명은 106명의 장기 근속자들에게 6 25전쟁 이전에 전남방직이 국영에서 민영으로 불하될 때 약속한 공로주( 功 勞 株 ) 1할의 배당과 6 25전쟁 당시 지급되지 않은 1개 월 간의 임금을 지불할 것 등을 주장하며 본사 상경투쟁을 벌였다. 10월 4일 노사면담에서 회사 측은 요구조건들 가운데 임금 1개월분만 지급할 것이며, 다른 요구 조건들은 수용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다. 이에 노동자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회사 측은 공권력을 요청해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노동자들은 10월 9일 광주로 내려와 노동쟁의를 계속할 것임을 밝혔다. 이어서 다른 쟁점들도 노동쟁의에 추가되었다. 이 노동쟁의는 15일부터 고조되었다. 노동조합은 특근수당 증액과 휴일 및 여성노동자의 생리휴가 증가, 8시간 노동제 실시, 퇴직금 지급, 작업복 2벌 지급, 중식 제공 등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다. 노동조합은 20일에 전라남도 사회과에 노동쟁의를 접수하고, 파업을 준비했다. 이 파업은 1주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들 노동쟁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노사단체협약도 체결되었고, 회사는 약 1천만 원을 노동조합에 지급했다. 노동조합은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수령액을 분배했다. 그 가운데 5%는 4월혁명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금 명목으로 전남매일신문 에 기탁했다. 그리고 당시 결식아동이 많았던 임동 소재 서림초등학교에 쌀과 연필 등 문방구를 구매하여 기증하기도 했다. 서림초등학교는 전남방직에 인접한 학교로 노동자들의 자녀가 많이 다녔고, 낙후 지역의 특성상 빈곤층 학생들이 많았다. 전남방직의 노동쟁의 쟁점들을 살펴보면, 10여 년 전부터 해소되지 않았던 다양한 쟁점들이 4월혁명의 정국을 통해 표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자의 주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장이 가동되던 상황과 열악했던 노동환경 등을 감안할 때, 매우 혁신적인 것들이었다. 1987년 7 8월 이후에 보편적 요구로 정착되었던 주장들이 이 시기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주장들은 수용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지만, 비교적 고무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과 6개월 사이에 연거푸 세 차례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는 것은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노사관계가 회사 일방이었던 1950년대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회사의 대응이 계속 수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1년 4월 20일 전남방직이 2개(동공장은 일신방직, 서공장은 전남방직)의 회사로 분리되었던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의 분리는 작업 공정의 특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균등 분할한 것이었다. 이 노동운동사 43

46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배제되었고, 노동자의 분배도 각 회사 경영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5 16군사정변이 발발한 다음날 노동조합장은 경찰과 특무대에 의해 방첩대로 연행되어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으며, 석방 이후에는 전남방직에 근무할 수 없게 되었다. (2) 운수업 1 한국운수회사 광주지점 하역노동자 4월혁명 이후에, 광주에서 처음으로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것은 한국운수회사 광주지점 산하의 하역노동자들이었다. 이 회사에는 약 7~80명의 노동자가 일했는데, 임금 지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회사는 3달분의 노임을 지급하지 않다가, 4월 하순 경에 2달분은 지급하고, 나머지 1달분은 지급 예정일을 뚜렷한 이유가 없이 넘김으로서 갈등이 전면화 되었다. 노동자들은 5월 5일에 사무소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감으로서 노동쟁의를 개시했다. 노동자들이 주장은 지난달의 노임을 속히 지불하라, 중간착취를 말라 등이었다. 지점장은 본사에서 후속조치가 없어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했다. 2 버스업계 운수부문 노동쟁의는 전국에서 발생했다. 5월 24일 서울시내 버스노조가 서울시내 14개 노선 600여 대의 버스운행을 총파업하겠다며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이 밝힌 성명의 내용은 1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 2 운전사는 월급 7만환, 차장 및 조수는 33,000환으로 해 줄 것, 3 고용계약 확인과 종업원의 신분 보장, 4 사고의 원인이 되는 차량 경쟁운영을 시정할 것, 5 차량구조상의 사고원인 배제와 사고발생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차주가 처리할 것, 6 업무 중 사고로 구속, 구금될 때에는 가족 생계비로 매월 75,000환을 지급할 것, 7 퇴직금과 제반 보조금을 적기에 지불할 것, 8 배차원의 월급 48,000환을 인상 지급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어떤 해결도 가져오지 못한 채 쟁의와 파업이 종결되었다. 이는 버스노동조합이 차주와 결탁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동차 부분의 노동쟁의는 서울시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광주여객자동차(대표이사 박인천) 소속 차장 등 200여 명은 1960년 6월 1일 밤 9시에 승무를 거절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문지회 외 5명을 대표로 한 50여 명의 노동자들은 당일 밤에 광주여객 사장 집을 방문하고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첫째, 독재자이고, 무능하며, 차장을 부당하게 착취 하는 회사 간부들을 인사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었고, 둘째, 현재의 봉급 기본인 2만환을 3만환으로 인상해 달라는 것이었다. 임금 인상은 일정 수준에서 합의되었으나, 간부들에 대한 인사 조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광주여객의 노동쟁의는 10월 11일까지 계속되었고,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는 사건을 취하하도록 권유 결정을 했다. 한편 9월 8일에는 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7 전남운수 소속의 버스 332대가 운영을 정지했다. 이후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되지 않는데, 곧 노사가 합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 운수업 분야에서 노동쟁의가 가장 장기화되었던 사업장은 중앙여객이었다. 중앙여객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90개 코스를 운행하는 규모가 큰 운수회사였다. 1960년 7월 23일에 발생했던 노동쟁의는 다음 해 3월경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장기화된 노동쟁의가 제6차 전라남도 노동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이전에 쟁의가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중앙여객 노사쟁의의 쟁점은 단체협약 체결이 핵심이었고, 그 외에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최저선의 임금 보장이었다. 노동조합은 다른 회사들에서 이미 체결했던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는데, 회사는 이를 거부했다. 협상의 성과가 없자, 노동조합은 10월 10일 전라남도에 쟁의발생을 신고했다. 10월 11일 개최되었던 지방노동위원회는 회사 측에게 단체협약에 성실히 임할 것을 약속받고, 노동조합에게 사건을 취하도록 권유 결정했다. 그런데 중앙여객이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한 단체협약 내용은 임금 조항이 삭제되어 있었고, 노사위원 간에 체결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반려되었다. 이후 아무런 진척이 없었는데, 12월 27일에 노동조합이 단체협약 내용에 동의를 거부하면서 제2차 노동쟁의가 시작되었고, 1961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지방노동위원회는 중앙여객에게 출석을 요구했으나, 중앙여객은 이를 거부했고 알선 조정에도 응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월 봉급 3만환, Km 운행 수당 10환 계상, 근속수당(3년까지 월 3천환, 3년 초과는 월 1,500환) 가산,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최저선의 확보를 요구했다. 파업에는 운전기사 124명과 대의원 20명이 참여했다. 중앙여객은 운행 중단이라는 노동조합의 실력행사에 한편으로는 버스운행을 재개할 신규 운전기사를 채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 운행 후 협상을 주장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중앙여객의 노동쟁의가 장기화되고, 노사의 합의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은 회사의 구조적 특성에 기인했다. 당시 중앙여객이 운행했던 차량은 48대였는데, 차주가 29명이나 되었다. 다수의 차주들로 인해 회사 측이 입장을 도출하는 것이 난항을 겪었고, 결과적으로 회사와 노동조합의 협상 체결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중앙여객 노동쟁의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중앙여객 노동쟁의는 회사 경영진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관련 법률들의 존재와 집행이 무시되었고, 심지어 노동위원회의 권위와 결정도 수용되지 않았던 척박한 노동환경의 일면을 드러낸다. 또한 당시 운수업체들의 영업 상황이 광주여객을 제외하면 대체로 매우 열악했으며, 법률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 고용주 중심의 관행이 만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장기간의 파업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서민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노동운동사 45

48 2) 전남지역 노동운동 (1) 운수업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어용노동조합과 간부들을 규탄하며 새로운 노동조합을 건립하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들은 쟁의와 시위 등을 벌이면서 노동운동의 재편을 위해 노력했다. 어용노조를 해체하고 새롭게 발족한 목포지구 부두노동조합 대표 맹원들은 5월 10일에 50여 명이 한국운수 목포출장소에 모여 9일까지 지급하기로 약속한 560명의 체불 노임 1,500만환의 지급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1961년 1월 언론에 보도된 내용, 즉 현 600여 명의 맹원들 중 ⅓이상이 기아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의 수습책은 시급을 요구하고 있다. 데모를 해봤자 효과가 없고, 특출한 체불 노임 요구책을 구상 중에 있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 신항인 죽동부두에서는 1960년 5월 7일부터 한국운수 여수출장소를 상대로 하는 노동자들의 쟁의가 개시될 조짐이 나타났다. 노동쟁의는 체불된 노임 600여 만환의 지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때마침 입항한 모랙썬(Mormacsun) 호의 관수용 비료를 하선할 동안에 체불 임금 지급을 요구했으나, 여수출장소는 한국운수 본점의 지시만을 기다리면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결국 5월 20일 새벽 3시를 기하여 부두노동조합 조합원 약 1,000명이 노동쟁의에 돌입했다. 1960년 10월 13일 전국자유노조연맹은 각종 하역 노임 인상을 요구하고, 경쟁 입찰에 반대하며 사회보장정책 실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임금은 5년 전에 책정된 것으로, 하루 노임은 700~800환이었다. 그리고 한 달에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은 10일 내지 15일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의 한 달 수입은 약 20,000환에 불과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13). 쟁의 대상자들은 석탄공사, 교통부, 국방부, 농림부, 전매청, 외자청 등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기관은 각종 하역작업노임의 단일화와 임금인상 요구에 대하여 수긍할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하역노동자들은 1960년 12월 20일 제1차로 36시간 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국가예산을 이유로 들어 방관했고, 노동자들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 1961년 1월 21일 전국자유노련에서는 전국에 걸쳐 제2차 72시간 파업을 선언했다. 1월 25일에는 부산 부두노조 산하의 무역물자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4,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제3차 총파업을 단행했다. 노사 쌍방은 상여금 150%를 지급하고, 임금은 18%를 인상하기로 합의했고, 8시간 노동제도와 퇴직금 제도의 확립에 타협을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1961년부터 실시하기로 하고 쟁의도 종결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13~514). 목포 지역 부두노동조합은 심각한 내적 갈등을 안고 있었다. 다양한 성격의 분회들이 하나의 산업별 노조에 묶인 관계로 목적과 이해가 달랐고, 때로는 상충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업무 분장이었다. 1961년 3월 12일 한운노동조합과 미창노동조합 사이에 발생했던 목포역 대화물 적차를 둘러싼 갈등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선박의 하역권을 놓고 갈등한 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9 적도 있었다. 3월 23일에는 양측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난투극을 벌이는 양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충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보다 많은 이권을 획득하려는 욕구와 이들의 이해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는 부두노동조합의 내적 힘 관계가 결합한 결과였다. 이 갈등은 노동운동들이 숨을 죽이고 귀추를 예의주시하던 5 16군사정부 시기에도 중단되지 않았으며, 중앙총노조연맹의 엄격한 조정에도 불구하고 재연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2) 광업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는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광산업시설이다. 4월혁명 당시 화순광업소에는 800여명 이상의 광부가 근무했다. 1957년에 작성되었던 보건사회부 노동국 자료에서 밝힌 석탄 광업에 종사하던 노동자가 총 8,505명이었음을 감안하면(이종구 외, 2009: 52), 화순광업소의 노동자가 전국 석탄 광부의 1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화순광업소 노동조합은 5월 14일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단합을 다졌다. 그러자 화순광업소는 노동쟁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 노무관리를 강구한다. 화순광업소장은 6월 4일 각 직종의 노동자 대표 약 20명과 간부들의 합동 모임을 개최하고, 운영 방침을 안건으로 회의를 열었다. 소장은 노동자들의 실정을 청취하고, 운영방침을 피력했다. 그런데 소장은 회의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소장의 이러한 행위와 조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큰 갈등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화순광업소가 노동쟁의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운영을 둘러싼 논쟁의 발화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이와 같은 조치를 했던 것이다. 이는 전남지역의 다른 사업장에서는 볼 수 없는 노무관리 방식이었다. 화순광업소의 대응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확인되지 않지만, 전남지역 전역이 노동쟁의로 들끓던 1960년에 화순광업소에서는 아무런 노동쟁의도 발생하지 않았다. 대한석탄공사 산하 사업장들에서 가장 먼저 노동쟁의가 일어났던 곳은 강원도 영월군 소재 상동광산으로, 발생 시점은 1961년 2월 13일이었다(전국광산노동조합, 1969: 37). 이와 같이 광업 부문의 노동쟁의는 다른 산업 부문들보다 뒤늦게 발생했다. 화순광업소의 노동쟁의는 전국광산노동조합이 추진했던 노동쟁의에 가담했던 6개 광산노동조합 가운데 하나로 참여하면서 발생했다. 1961년 4월 26일 전국적으로 약 9,000명의 노조원들이 24시간 파업을 단행했는데, 요구사항은 임금을 5만여 환에서 97,000환으로 인상하라는 것이었다. 대한석탄공사가 노동조합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24), 전국광산노동조합은 5월 5일 제2차 파업을 단행했다. 화순광업소 노동조합도 파업에 돌입했으나, 8일로 예정된 임금인상에 대한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며 작업을 재개했다. 대한석탄공사는 20% 임금인상으로 노동쟁의를 종결지으려 했다. 그러나 전국광산노동조합은 이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화순광업소 노동조합도 5월 9일에 2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노조위원장 박석기가 서울에서 내려올 예정이었던 11일까지 어떤 지시도 무시하고 작업을 중지할 것임을 선언했다. 노동조합은 5월 13일 대의원 회의를 개최했는데, 당초 요구했던 임금 50% 인상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지만, 작업은 노동운동사 47

50 개시한다고 결의했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은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유지창을, 부위원장에 기주욱과 임금조를 선임했다. 노동쟁의는 5 16군사정변이 발발하면서 좌초되었다. (3) 보건의료 공공 사무 금융업 1961년 4월에 재 개업했던 목포노동병원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대한노총 목포지구가 운영했던 이 병원은 흑자 경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 3개월분의 직원 봉급 90여만 환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 많은 빚이 있었고, 의약품 외상 대금 등 여러 가지로 병원 운영상에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결국 의사진이 전부 사직함으로서 의사 없는 병원이 되고 말았다. 광주 전남지역 철도의 중심 도시인 순천에서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960년 5월 6일 순천철도 노동조합원들이 궐기했다. 이들은 현재 화차를 객차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시정할 것 등을 주장했는데, 운전사무소장이 이들의 주장을 불온시하고 배척하면서 악화되었다. 이들의 궐기는 5월 16일에 순천철도국장이 개선을 약속하고, 진상조사를 착수해 책임자를 문책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4) 건설업 건설업은 4월혁명 시기에 가장 먼저 노동쟁의가 발생한 부문이었다. 노동쟁의의 주요 쟁점들은 미지급되거나 지연 지급되고 있는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사례들이 확인되는데, 나주 소재 호남비료 공장 건설 현장이 대표적이었다. 이곳은 전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곳으로, 이 사업에는 7개의 도급업체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한국공업과 천양공업을 제외한 5개 업체가 1 3개월분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들 업체에 고용된 건설 노동자는 약 500명이었다. 노동자들은 임금 지급 지연과 춘궁기가 연계되면서 생계를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도급업체들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전표는 1할 5부로 할인 매매되어 큰 손해가 발생했다. 그렇지만 전표의 매매는 최소한의 음식을 구입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금 지급 지연이 해결되지 않자, 일부 노동자들이 1960년 4월 25일부터 작업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작업 중단에 동참한 노동자들은 점차 늘어났고, 공장 건설은 지연되었다. 임금 지급 지연은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공장 건설의 수송 작업에 참여했던 업자들도 비용을 지급받지 못했다. 도급업체들은 호남비료에서 공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하고, 호남비료는 공사비를 예정대로 전액 지불했다고 하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공장 건설이 계속되고, 공사비가 지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지불이 원활하지 않은 이유는 참여 업체들의 출혈 경쟁이 심하여 결손을 전제로 한 공사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도급업체들은 이익금을 남지지 못했고, 그 여파는 임금과 수송비 등의 지급 지연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게다가 호남비료의 공사비 지불이 너무 지체되어 도급업자들의 자금난이 가중되었다. 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1 이러한 상황은 5월 하순이 되어도 개선되지 않았다. 당장 지급해야 할 노임은 2천 만환 이상이었으나, 호남비료주식회사가 보유한 자금은 100만환에 불과했다. 자금이 고갈된 주요 이유는 주주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주금( 株 金 )이 제대로 유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면한 문제와 갈등을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5월 27일 호남비료주식회사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이사회는 상공부에서 제의한 자본금 투자를 전라남도 내로 국한하지 말고, 국내 전역에 문호를 개방하자는데 합의했다. 그렇지만 자금 조달은 9월까지 계속 지연되었고, 체불 임금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마침내 9월 1일에 호남비료회사의 약 400명의 노동자들이 체불 노임 지급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도급업체와 호남비료는 여전히 체불 노임 지급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했다. 제1차 시위에서 도급업체는 7일까지 체불된 임금 33,800,000환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9월 8 오전 8시부터 약 400명의 노동자들이 우리 노동자에게 빵을 달라, 책임감 없는 중역은 물러가라 등을 기록한 플래카드를 들고 2시간에 걸쳐 거리 시위를 벌였다. 갈등이 격화되자, 회사 서무부장과 노동자 대표 그리고 지방유지 등이 참석한 사태수습 회의가 열렸다. 서무부장은 10일까지 밀린 임금을 완불할 것을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인책하겠다고 확답함으로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4월혁명을 전후 한 시점에 전라남도 곳곳에서는 저수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저수지 건설 사업은 해당 지역들의 수리조합에서 주관했는데,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사례들이 상당히 많았다. 전라남도 지사가 1960년 6월 19일 도의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체불 임금이 약 7억 환이었다. 도지사는 정부당국의 도움을 받아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저수지 건설 현장들은 암울했다. 광양군 봉강면 저수지 건설공사의 경우, 1959년 공사를 착공한 이래 1960년 9월 말경까지 약 1년 동안 6천만 환에 달하는 임금과 자재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건설 회사는 임금과 대금 지급을 회피하고 차일피일 시일을 늦추었다. 이에 노동자와 상인들은 관계 요로에 청원서를 내고, 동맹휴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마침내 양측이 아우성과 육박전을 전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심각한 갈등은 경찰이 동원되어 일단 수습되었으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주군 다도면에서도 발생했다. 다도수리조합의 노임 체불로 인한 분규는 이미 갈등이 큰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는데, 여전히 완전하게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즉, 1960년 9월 말 당시 3년 동안 체불되었던 임금 1천만 환 가운데 겨우 280만 환만이 지급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라남도 농지개량과에서 임금 체불에 관한 사무 감사를 벌이고, 공사 청부업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노동운동사 49

52 (5) 인쇄업 1960년 10월 중순경 여수시 소재 여흥일보사와 천일인쇄소, 중앙인쇄소, 명진인쇄소를 상대로 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여흥일보와 천일인쇄소에 대해서는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고, 중앙인쇄소에 대해서는 해고반대를, 명진인쇄소에 대해서는 8개월간 미지급된 임금 8백만 환의 지급을 요구했다. (6) 기타 1960년 10월 초순경, 목포에서는 2건의 노동쟁의가 전개되었다. 하나는 목포염전의 노동자들이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생건설사에서 기계공 10명이 연장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 약 1천 만환을 요구한 것이었다. 두 쟁의는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되었는데, 회사가 불성실하게 대응하여 공분을 샀다. 1961년 목포의 노동쟁의는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다. 언론은 남선전기 목포지점 산하 노동조합이 3월 31일 민의원 상공위원회에서 통과한 전업 3사 통합 반대 와 임금인상 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3 제4장 정부에 의해 개편된 노동조합과 유신체제 하의 노동운동 1. 박정희 정부의 노동정책과 한국노총 1) 노동정책과 한국노총의 출범 그리고 노동관계법 개정 18) (1) 한국노총의 출범과 노동관련 구조의 변화(개편) 1961년 5월 22일 5 16군 사 정 변 과 함 께 출 범 한 국 가 재 건 최 고 회 의 는 포 고 령 제6호 를 발동했다. 이 포고령은 모든 노동조합의 해산 명령을 담고 있었다. 즉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월 31일까지 소정의 절차에 의거하여 정치성이 없는 구호단체, 노동단체, 종교단체는 재등록을 실시하라고 공고했다. 재등록 결과 단위노조 155개, 연맹체 22개가 기일 내에 등록을 미필했거나, 유명무실한 조합이라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한국교원노조연합회는 5 16군사정변 이전에 허가를 받지 못한 단체이므로 재등록할 자격이 없다고 하여 해산되었다. 5 16군사정부는 1961년 8월 3일 근로자 단체 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을 제정했다. 이 법률은 노동조합 허가주의를 규정했다. 또한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 이 공포되어 노동단체의 등록이 이루어졌다. 이들 법률이 제정되면서 그동안 해산되었거나, 활동을 중지했던 노동조합들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군사정부는 이때 과거의 집권당과 관계를 가진 간부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한국노총은 정치적 간부들을 배제시켰고, 8월 30일 결성될 때 강령의 세 번째에 정치적 중립을 포함시켰다(이원보, 2004: 153). 군사정부는 노동조합을 과거와 같은 연맹체제가 아니라, 전국 단일 산업별 체제의 노동조합 재건을 추진했다. 노동조합 재건과 관련하여 군사정부가 밝힌 담화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종전에 각 정당의 중앙위원 이상 및 예하 각급 당 간부 정 부 책임자급에 있던 자 및 당직을 갖고 노동단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고유의 조합 활동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 자, 2 종전 조합 활동에 있어 회사에 어용화 하여 조합고유 활동과 조합원의 권익에 해를 끼친 자, 3 노동조합 간부로서 조합원의 18) 이 절은 주로 한국노총(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 에 의거하여 구성했다. 노동운동사 51

54 의사를 무시하고 독재를 하거나 조합 활동을 통하여 사리를 추구한 자, 4 민주적인 조합 활동을 떠나 파벌과 반목을 일삼아 사회를 불안케 하고 산업 발전을 저해한 자, 5 과거 용공운동에 관여한 자, 6 병역 미필자, 7 공민권이 박탈된 자, 8 반혁명적인 언동을 하는 자, 9 사이비 노동자, 기타 노조 간부로서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는 포함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70~571). 군사정부는 8월 4일 산업별 노동조합 조직 책임자를 지명하여 이규철( 李 奎 哲 )을 의장으로 하는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는 1961년 8월 12일 서울시립 노동회관에서 총회를 열고 앞으로 조직될 노동조합의 운영과 재정자립 및 실무지도에 관해 기본방침을 세웠다. 각 산별 노동재건조직위원회는 1861년 8월 16일부터 25일까지 기본방침과 조직요강에 따라 12개 산별노조를 재건했으며, 1961년 8월 30 31일 서울시 용산에 소재한 교통부우회관(현재 청우회관)에서 관계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전력노조를 제외한 11개 산별에서 선출한 대의원 80명 중 78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결성대회가 이루어졌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71~573). 전국전력노동조합은 9월 23일에 당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았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75). 그리고 전국부두노동조합은 1961년 9월 20일, 전국연합노동조합은 9월 21일에 각각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이로서 15개 산별노조를 계획했던 가운데 출판노조를 제외한 14개 전국 산별 노조의 결성이 완료되었다. 출판노조는 1963년 7월 6일에 결성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76~577). 1961년 8월 30일 한국 최초의 단일 산별노동조합의 연맹체인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14개 산별노조를 발족시켰다. 군사정부는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했지만, 강력한 군사정부 하에서 결성된 노동조합은 친 정부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이원보, 2004: 153). 전남지역에서는 10월 10일 전국부두노동조합(중앙위원장 이춘희) 목포지부 결성대회가 조직요원 3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목포지부장으로 배석천이 선출되었다. 여수지부 결성대회는 11월 1일에 조직요원 38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전국부두노동조합 지부 결성대회에서 지부장이나 부지부장으로 선출된 인물의 대부분은 위원장 이춘희가 위촉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산별노조와 지부 조직 사이의 인적인 관계는 긴밀했다. 한편 전국적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별노동조합의 각 지부들이 결성되고 있을 무렵인 10월 13일에 중앙노동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전국노동조합 지역협의회는 1962년 2월 6일 결성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77). 1962년 12월 6일 계엄령 해제와 더불어 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활동이 허용되자 이제까지 한국노총의 재조직 과정에서 배제된 구 한국노련계의 간부들이 기성조직의 일부와 미조직 분야를 조직하기 시작하여 노동계는 또 다시 분규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1963년 2월 17일 한국노동 조합총연합회(한국노련) 결성준비대회를 개최했다. 민정이양을 앞두고 한국의 노동운동계는 노총과 노련으로 갈라졌다. 그렇지만 한국노련은 1963년 4월 17일 개정된 법률에 의거하여 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5 관계당국으로부터 신고필증도 교부받지 못하고 사회단체 등록도 하지 못한채 불법 노동조합으로 낙인을 받았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581). 한편 1963년 9월 1일 노동청이 발족했다. 산업별 노동조합들도 분리도 이루어졌다. 1963년 11월 15일 전국운수노동조합에서 전국자동차 노동조합이 분리하여 결성되었고, 1970년 12월 12일 전국철도노조에서 전국관광노조가 분리하여 결성되었다. 이로서 17개 산별노조가 되었다. 한국노총은 교육효과를 높이기 위해 국내외 학교나 특별강좌 등에 조합원과 조합간부를 파견하여 연구교육을 시켰다. 국내에서는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소와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에 파견교육을 시켰으며, 해외파견교육의 경우는 인도에 있는 아시아노동대학, 필리핀의 아시아 노동교육원,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캐나다 노동대학, 이스라엘 협동 및 노동교육원, 기타 각종 국제세미나에 노동조합 간부들을 파견하여 교육을 시켰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609). (2) 노동 관련 법률의 재편과 개편 1963년 4월 17일 노동조합법이 개정 공포되었다. 이전까지는 구 노동조합법과 근로자의 단체 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이라는 법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법률은 노동조합 설립의 허가주의와 복수노조 금지 규정을 담았다(이원보, 2004: 126). 그것은 국가 권력의 개입 강화와 노동쟁의를 규제 제한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노동운동의 상황을 악화시킨 법률이 개정되고 있었다. 11월 19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노동쟁의의 사전 적법판정제와 단체교섭 당사자의 기업별 환원 등을 가미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한국노총과 각 산별노동조합 대표들은 11월 29일 노동법의 반민주적 개악을 배격한다 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2월 7일 개정 법률은 공포되었다. 한국노총은 즉시 위헌노동법 반대 투쟁위원회 를 설치하고 공익위원 편중의 노동위원회 무용론을 주장하며 12월 31일을 기해 각급 노동위원회 노동자 위원을 일제히 철수시켰다. 한국노총은 이러한 개정 법률들은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과 노동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이라고 규탄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616). 한국노총은 박정희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노동관계법 개악을 저지하지 못했다. 1964년 1월 7일 오후, 노총 간부와 산별 대표들은 노총회관에서 위헌노동법 반대투쟁위원회 를 개최하고, 반민주적이며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노동 3법의 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노총은 1월 8일 국회에 청원을 했지만, 수용될 리가 만무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용자 단체들은 연이은 개악 공세를 계속해서 펼쳤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을 법률적으로 제약하는 환경들이 더욱 확대되었고,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졌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616~619). 정부와 여당 그리고 한국노총 사이의 갈등이 크게 고조되었던 두 번째 사건은 1968년 6월 노동운동사 53

56 27일 자본시장 육성법안 이 국회에 상정된 것이었다. 이 법안은 노동 관련 단체는 배제하고 경제인연합회의 입장을 반영하여 제안된 것으로 7월 4일까지 제정을 목표로 했다. 이에 한국노총은 7월 3일 해운노조 산하의 조선공사, 해운공사, 준설공사의 조합원 4천명을 비롯하여 철도, 광산, 전력, 체신 등 정부 관리 기업체 및 공무원 노조원이 속해 있는 노조 지부에서 35,000여 명의 백지위임 사표를 제출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노총은 국회 및 정부의 위헌적인 자본시장 육성법안의 전격 제정 책동을 규탄하면서 이의 저지를 위해 결사 투쟁할 2백만 노동자의 굳은 결의를 천명 했다. 그리고 그 결의 표시로 각 지부에 동원 지시를 내려 재경 노조원 1천여 명을 동원 대기시키고, 하시라도 국회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할 결의임을 표명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620~622). 세 번째 사건은 1969년 11월 성안되었던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 의 국회통과를 반대한 활동이었다. 한국노총은 11월 24일 이 법안의 제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집회를 개최하는 등 당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12월 22일 밤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한국노총은 이 법이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기본권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항거했지만, 박정희 정부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끝내 철회되지 못했다. 비록 이 법률은 가결되었으나, 노총의 운동기조인 노동조합주의 라는 기업 내 경제투쟁의 원칙을 깨뜨리고 노총의 정치 참여의식을 일깨워 1970년 1월 노총의 정치 참여 선언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623~625). 이와 같이 박정희 정부는 지속적으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활동을 위축시켜왔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예비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의 수위를 점차 높였다. 물론 노동조합에 대한 통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1년 12월 27일 국가보위법에 의거하여 노동조합의 핵심적 권리이자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봉쇄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621). 1972년 1월 1일 공포된 이 법률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노동운동을 크게 위축시키게 했고, 노동조합의 존립 자체도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신체제 이후의 전개되었던 상황과 비교하면, 미약한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 등을 포함한 대통령 특별 선언 을 발표했다. 이어서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박정희는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일에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유신헌법 제29조는 노동3권을 법률로 유보시킬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에 실린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제한 또는 불인정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1996: 46).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규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73년에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노동조합법은 사용자와 노동조합이 상호협조를 통해 생산성을 도모 한다는 이유로 노사협의회 를 설치하도록 했다. 노사협의회 설치는 1963년 노동조합법 개정에서 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7 포함되었던 것이었다(이원보, 2004: 324~325). 그렇지만 노사협의회 설치를 실행할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는데, 노동조합법의 개정을 통해 이를 실질화한 것이었다. 노사협의회의 설치 목적은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쟁의조정법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 또는 사업체를 공익사업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노동쟁의의 실행을 제약한 것이 핵심이었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1996: 46). 박정희 시대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1974년에 다시 이루어졌다. 1974년 1월 14일 선포되었던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 의 해제가 그 해 12월로 예고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노동관계법을 개정한 목적은 경기 침체 속에서 부당해고, 임금체불, 근로기준법 위반 등이 자행되고, 자본가의 해외 재산도피와 위장 이민 등이 사회문제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근로기준법 적용을 상시고용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했으며, 16세 이상 18세 미만의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상의 특례 보호규정을 두었다. 또한 노동관계에 대한 모든 권한이 보건사회부에서 노동청으로 이관되었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1996: 46~47). 그러나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조치들이 노동 현장에서는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2) 노동환경과 노동운동 지원 단체 (1) 열악한 노동환경 5 16군사정변과 더불어 발동되었던 계엄령은 1963년 12월에 해제되었다. 그리고 정치활동이 허용되었다. 그러자 다음 해에는 노동쟁의가 다시 크게 증가했다. 1964년 4월까지 전라남도 노동위원회에 접수되었던 노동쟁의가 총 16건일 정도였다. 노동쟁의를 유형화하면, 단체협약 갱신과 임금인상 등에 관한 사안이 6건, 부당노동행위 구제가 8건, 해산 예고 예외 인정 신청이 2건이었다. 이 가운데 9건은 처리되었고, 7건은 미해결 상태로 남았다. 전국적인 노동쟁의 발생 건수를 보면, 1965년에 97건(88,500여 명), 1966년에 104건(121,000여 명), 1967년에 105건(15만여 명), 1968년에 112건(20여만 명), 1969년에 70건(10만여 명), 1970년 8월 말에 60건(13만여 명)이었다. 노동쟁의 발생 건수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크게 감소하는 추세를 띠었다. 이 시기 노동쟁의의 주요 쟁점은 권리분쟁과 임금문제 등이었다. 반면에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되었던 노사분쟁의 사례들은 이 보다 많았다. 이를테면, 1969년에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된 노사분쟁은 총 304건이었는데, 281건은 처리되었고, 23건이 미결로 남았다. 이를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서울이 51건, 경기가 45건, 강원이 33건, 충북이 20건, 충남이 51건, 전북이 8건, 전남이 35건, 경북이 27건, 경남이 8건, 제주가 3건, 부산이 23건이었다. 이와 같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노사분쟁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사 55

58 더욱이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된 사안들은 노사의 대립과 갈등이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심각한 경우임을 감안할 때, 광주 전남지역의 노사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시기 노동쟁의의 쟁점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임금체불이었다. 1970년 추석을 앞둔 9월 8일 노동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전국 96개 사업장에 약 3억 원의 임금이 체불되어 있었다. 그리고 9월 10일 한국노총이 자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 16개 산별노동조합 가운데 9개 노동조합 50여개 사업장에 435,420천원의 임금이 체불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조사는 매우 심각한 임금체불 상태에 놓인 다수의 기업들에 대한 조사가 누락된 것이었다. 한국노총 한 간부는 체불임금이 10억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노동청의 조사에 의하면, 임금체불이 가장 심각한 산업부문은 광산업으로 30개소에서 155백만 원이, 다음으로는 섬유제조업으로 12개소에서 49백만 원이 체불되어 있었다. 지역별로 보면, 전남지역은 8개소에서 2,100만원의 임금이 체불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금액을 기준으로 보면, 전남지역은 서울과 강원에 이어 임금체불이 가장 심각했다. 총96개의 임금체불 업체 가운데 1,000만 원 이상을 체불한 업체가 8개소였는데, 전남지역의 경우에는 광주에 소재한 건설회사였던 (주)삼양공무사( 三 洋 工 務 社 )가 이에 해당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분신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소 및 영세기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이 재고되었고, 노동조합 조직의 전변 확대 운동이 최소한 보호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1971년의 기본 과제로 1백만 노동자의 조직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17개 산업별 노동조합은 적극적인 확대 작업에 나섰다. 그래서 그 어느 해보다 노동운동이 격화될 것임은 예고되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전태일의 죽음이 가져온 효과였고, 그의 죽임이 노동현장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도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의 죽음이 발생한 뒤 전라남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노동운동은 아세아자동차 광주공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것이었다. 1971년 9월 16일 김재식 전라남도 지사는 체불임금 일소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김 지사는 도낸 497개 사업체의 사업주에게 9월 20일까지 체불임금을 완불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도내 5만 근로자가 노임체불로 인해 어두운 추석을 맞이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고 호소했다. 전라남도는 다음 날 본청과 각 시군 건설사업의 체불임금 8억 8천만 원을 방출하고, 추석 전인 10월 2일까지 지불토록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임금체불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유신체제 하에서도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던 주요 이유가 되었다. (2) 노동운동 지원 단체 1 종교단체: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도시산업선교회 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9 박정희 시대에 노동운동을 지원했던 대표적인 종교단체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도시산업선교회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2010: 489).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JOC의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JOC는 청년 노동자를 평신자 사도로 훈련시키는 활동을 하는데 목적을 두고 1958년에 창립되었다. 청년 노동자의, 청년 노동자에 의한, 청년 노동자를 위한 을 표어로 내걸었던 JOC는 노동계의 인간화와 복음화를 이루려는 운동을 벌였다(김석순, 2012: 115). JOC는 전국 본부를 두고, 각 교구에는 노동청년연합회가, 성당에는 노동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편, 1981; 332~333). JOC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196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김종남 신부의 지도로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JOC가 구성되었고, 이어서 전남대학교 부속병원과 북동성당에서도 JOC가 발족했다. JOC는 1962년에 전남방직에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던 한 여성 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회원이 증가했고, 노동운동의 성 격 을 분 명 히 하 게 되 었 다(김 석 순, 2012: 117~120). 1970년 대 JOC는 광 주 지역에서 는 북동 임동 중흥동 방림동 학운동 월산동 팀과 넝쿨팀이, 전남지역에서는 장성과 순천 매곡동 팀이 각각 구성되었다(김석순, 2012: 121). 일반적으로 JOC의 활동은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들에서 활발했다. 1970년대 말을 기준으로 보면, JOC 회원들이 분포되었던 사업장은 로케트전기, 전남방직, 일신방직, 어망공장들, 잠사공장들 등이었다. 당시 섬유업계 산별노동조합 산하에는 17개의 단위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12개 사업체에 소그룹이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 노동자는 JOC와 YWCA 사회문제부를 매개로 소그룹 활동을 하면서 민주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했다(이윤정, 2011: 83). 19) 5 18민중항쟁이 발발하자 정향자, 김성애, 윤청자, 신양희, 김순희, 정숙경, 조수자 등 JOC 회원들은 곧바로 참여했다. 이들은 대자보 작성, 전단지 배포, 검정리본 제작, 부상자 후송,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비롯한 식사 제공 등에 관한 일을 했으며, 피해자를 돌보았다. 한편 홍순권은 시신을 수습하는 일 등을 하다가 5월 27일 도청에서 사망했다(안 진, 2007: 49; 김석순, 2012: 123~124; 5 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5 18기념재단 엮음, 2006b: 425~431;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50년의기록출판위원회 등, 2009: 168~173). 도시산업선교회는 1957년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으로 몇몇 성직자들과 기독학생들이 구속되면서 정부로부터 불온시 되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편, 1981; 13). 그러나 1950년도 초반부터 공장 내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목포의 모 방직공장에서도 예배실을 마련하여 노동자들이 예배를 보았다(대한예수교장로회 편, 1981; 14). 도시산업선교회는 19) JOC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민주노조로 신설 및 변화를 모색했던 사업장은 삼양제사, 로케트전기, 일신방직, 전남제 사, 남해어망, 광주어망, 전일섬유, 한일섬유, 화천기공사, 광산잠사, 화순잠사, 인초공장 등이었다(김석순, 2012: 122). 노동운동사 57

60 전대 대상을 노동자로 설정했으므로, 노동문제 해결과 노동운동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엮음, 1988; 179).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을 광주 전남지역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노동자에 대한 교육활동이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편, 1981; 63). 그렇지만 광주 전남지역에서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광주지역에서는 1966년부터 배성룡 목사가 산업전도 활동을 시작했고, 한국 특수지역선교위원회와 기장의 한국산업선교위원회가 한때 활동을 했으나, 1981년 이전에 활동이 중지된 상태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 편, 1981; 90). 20) 기록으로 보면, 도시산업선교회가 광주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1979년 무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신석 최연석 목사 등이 지원활동을 했으며, 광주YWCA에서 노동자교육이 상설적으로 이루어졌다(강현아, 2013). 1979년 후반기부터는 광주YWCA와 JOC는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윤정과 김성애가 주관했는데, 매월 또는 매주 교육이 이루어졌다. 1980년 5월 18일 에 도 광 주YWCA에 서 는 버 스 안 내 양 과 남 해 어 망 노 동 조 합 원 등 약 50여 명이 문병란 교수의 강의를 들었고, 전남대학교 앞 살레지오 수도원에서는 로케트전기, 삼양제사, 호남전기, 일신방직, 매일유업 노동자 약 50명이 이창복 선생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50년의기록출판위원회 등, 2009: 169; 이양현 구술, 2014). 2 노동야학과 소모임 1970년대 중반 이후 노동자들의 저항이 증가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야학을 통해 노동자를 의식화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했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1975년경부터 등장했던 노동야학이었다. 노동야학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던 현장론 과 관련이 있었다. 노동야학은 학생들이 노동자와의 만남을 통해 현장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 이전을 준비하는 장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있었다(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엮음, 1988: 181~182). 광주지역에서는 1970년대 하반기 무렵에 여러 개의 노동야학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노동야학들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직화와 의식화 교육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광주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야학은 들불야학과 백제야학이었다. 들불야학 21) 은 1978년 7월 23일에 제1기 입학식을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들어갔다. 명칭은 야학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유현종의 소설 들불 과 미국의 노동운동 20) 광주도시산업선교회는 1979년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YH사건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사회선 교협의회가 발표한 성명서 에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21) 들불야학에 관한 내용은 신영일을 생각하는 모임 펴냄(1998), 신영일을 배우자, 편집위원회 엮음(2002), 들불의 역 사,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1991), 들불의 초상 에 의거하여 정리되었다. 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1 비사에 나오는 들불 에서 착안되었다. 들불야학의 활동 배경이 되었던 곳은 광주시 서구 광천동 650번지 소재 광천시민아파트와 그 일대였다. 들불야학의 설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서울대 재학 중 시위로 제적되어 고향으로 내려온 김영철과 전복길, 군 입대를 위해 휴학했던 외국어대 최기혁, 전남대 재학 중이던 박기순, 나상진, 임낙평, 신영일 등이었다. 김영철, 전복길, 최기혁은 서울대 인근 신림동에서 겨레터야학 에 참여했던 경험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박기순은 전남대 사범대학에 재학하던 중에 민주교육지표 사건에 관련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그녀는 광주시 광천동에서 들불야학 을 창립하고, 강학으로 활동했다. 박기순은 1978년 12월 26일 밤에 과로한 상태에서 잠이 들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들불야학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후 점차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박관현이었다. 그는 1980년 일시적으로 형성된 자율화 국면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5 18민중항쟁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거리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던 박관현은 5 17조치로 은신했다가 1982년 4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7월부터 재소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 개선, 정치범에 대한 차별대우 금지 등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50여 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가 10월 12일 새벽, 장기단식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들불야학 강학과 노동자들은 5 18민중항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시민군, 유인물 제작과 배포와 같은 선전 활동, 취사, 도청 상황실 관리, 시신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안 진, 2007: 58~59). 특히 들불야학 팀은 5 18민중항쟁 당시 투사회보 라는 제호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유인물을 제작 및 배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5월 19일 들불야학의 윤상원과 광대팀이 5,000매의 유인물을 제작하여 5월 20일 녹두서점으로 가져왔다. 이 유인물은 시내 곳곳에 배포되었다. 이후 이들은 투사회보 라는 제호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5월 22일 새벽에 유상원 등은 투사회보 제4호를 제작하고, 차량시위대를 이용하여 배포했다. 이들을 이끌었던 인물은 윤상원이었다.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박기순에 이끌려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했다. 1980년 5 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27일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싸우다 전남도청에서 사망했다. 윤상원은 노동법 을 강의했다. 그는 동일방직 노동조합 사건들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윤상원은 들불야학을 졸업한 노동자들을 따로 선발하여 소모임을 꾸리고, 노동의 역사, 제3세계, 세계노동운동사 를 가르쳤다. 박용준은 1956년생이었다. 학동 소재 영신영아원과 무등고아원에서 생활했다. 숭의실업고등학교를 마쳤으며, 1970년대 말에는 광천동 소재 YWCA신협에서 근무했다. 이때 들불야학에 인연을 맺게 되고, 지역 주민운동을 전개했다. 박용준은 투사회보 와 민주시민회보 제작에 참여했고, 5월 26일 밤 전남도청에 들어가 마지막 항전을 위해 무기를 지급받았다. 그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YWCA 내 양서조합 사무실에서 사망했다. 노동운동사 59

62 들불야학 참여자들은 5 18민중항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고, 어렵사리 활동을 재개했으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강학들에 대한 공안당국의 수배, 재정적인 어려움, 학당 공간 마련 등이 문제 등 중복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들불야학은 1981년 7월 제4기 졸업식을 끝으로 사실상 폐교되었다. 들불야학이 해체된 이후, 1981년 후반기에 새로운 야학들이 등장했다. 들불야학 제4기 강학이었던 최종희, 이종영 등 전남대 학생들이 주도가 되어 농성1동 소재 무등교회(교원공제회관 옆)에서 무등야학 을 운영했다. 또한 제4기 강학이었던 박현주의 주도로 조선대 학생들이 농성동 성당에서 샛별야학 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 야학 역시 들불야학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후 야학운동은 Y야학, 무등배움터, 한얼야학 등으로 이어졌다. 광주지역의 또 하나의 중요한 노동야학은 방림신용협동조합 지하실에서 운영했던 백제야학이었다. 백제야학에서는 학과 공부를 기본적으로 진행하고, 이와 더불어 노동조합 결성이나 노동법 등에 관한 강의도 수반되었다. 전남대 학생들이었던 김홍곤, 김문수, 손남승, 박용성 등이 강학으로 활동했는데, 이들의 일부는 윤상원의 후배들이었다. 윤상원은 들불야학에 참여하면서 백제야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강신석, 최연석 목사와 이양현도 이들을 후원했다(이양현 구술, 2014). 백제야학에서는 김민기가 창작한 공장의 불빛 이라는 노래굿을 공연하기도 했다. 백제야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1975년 서울 평화시장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오랜 피신 생활을 걸쳐 광주로 다시 내려온 이양현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이양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농민 등도 함께 했다(이양현 구술, 2014). 이양현은 중심이 되었던 학습 소모임은 1977년 말 경부터 활동을 했다. 여기에는 로케트전기에서 해고되고 JOC에서 상근활동가로 근무했던 김성애, 빛고을 학생교회 출신 이윤정, 정유아 등과 로케트전기, 삼양제사, 남해어망 등에서 근무하던 여성노동자 이정희, 임미령, 정향자, 이진행 등을 대상으로 소그룹을 결성하여 학습을 진행했다. 또한 각 사업장의 노동조합 설립과 임금인상 투쟁 등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1979년 겨울에 이정희가 로케트전기의 최초 여성 노동조합 지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이윤정, 2011: 83; 이양현 구술, 2014). 이양현은 1980년 5월 25일 윤상원과 김종배가 주도하여 새롭게 구성했던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 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손남승 등 백제야학 강학과 노동자들도 5 18민중항쟁에 참여했다. 또 다른 노동자들의 소모임은 계림동성당을 회합 장소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황은 1977년경 계림동 옛 광주시청 인근에 한국교육문화사 를 개업하고 인근 호남전기와 남해어망 등의 노동자들에게 한문학습지 배달사업을 했다. 그는 이 사업을 매개로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조비오 신부가 담당하고 있던 계림동성당을 빌려 노동법과 노동조합 등에 관한 강의와 교육 그리고 토론을 했다. 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3 이 모임에는 이윤정, 이정, 김순이, 최정림, 임미령, 이정희, 윤청자 등이 참여했다. 1979년에는 이 모임이 들불야학과 결합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으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이 발생하면서 무산되었고, 사실상 해산되었다. 2. 박정희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 노동운동 4월혁명의 열망을 딛고 군사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쟁의는 끊이지 않았다. 이는 광주 전남지역 노동자의 삶과 노동 환경의 열악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관한 노동운동들은 사건에 관한 간단한 기록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 제조업 : 섬유, 금속 1 전남방직 일신방직 1961년 전남방직공사는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두 개의 회사로 분리되었다. 1951년 11월 3일 불하받았던 주역들이 분열을 했기 때문이었다. 전남방직은 포항의 삼일상회 설립자로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역임한 김용주가, 일신방직은 미군정 통역관이었던 김형남이 소유하게 되었다. 두 회사로 분리되면서 시설과 건물 그리고 노동자들이 양분되었고, 임동 공장 내부에는 담장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이 회사가 달라졌다고 왕래가 단절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래서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의 노동운동은 동시에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두 회사로 분리된 후, 첫 노동쟁의는 1964년에 일어났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노동자들은 3월 26일 당시 임금이었던 100원 선에서 120원 선으로 인상을 요구하면 쟁의를 시작했다. 여론은 이 노동쟁의가 다른 지역들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여 예의 주시했다. 두 회사의 노동쟁의가 섬유노동조합 임금협상의 전국적 전개 양상에 전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로 인해 회사와 노동조합 사이의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신방직은 4월 14일 노동자 119명을, 5월 18일에 140명을 해고했다. 전남방직도 4월 18일 노동자 109명을 해고했다. 박정희 시대에 면방업계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쟁의 가운데 가장 컸던 사건은 1969년에 있었다. 당시 전남방직 사장(김용주)이 대한방직협회 회장이었다. 면방업계의 전국 15개 방직회사는 5월 26일에 각 사업장을 상대로 현행 8시간 기본임금을 본공은 253원에서 325원으로, 임시공은 125원에서 160원으로 28.8% 인상해달라는 요구를 하면 쟁의를 시작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779). 임의중재위원회가 설치되어 여러 차례 회의를 개최했으나, 대한방직협회는 296원을, 노동조합 노동운동사 61

64 측은 306원을 주장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969년 7월 1일 섬유노동조합은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를 제기했다. 노동조합은 7차례에 걸친 노사교섭에도 불구하고, 대한방직협회 측의 무성으로 진전이 없자 7월 20일 쟁의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쟁의 가부투표를 한 결과 투표참여자 가운데 99.3%가 지지했다. 대한방직협회는 7월 26일 서울고등법원에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쟁의적법 판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한 가처분 신청 을 냈으나, 8월 21일 기각되었다. 서울고등법원의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노사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대한방직협회는 양보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측은 실력 행사의 불가피성을 통보하고, 8월 23일 노동청과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신고를 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780). 이번에는 노동청이 중재에 나서 301원을 제시했으나, 노동조합이 거부함으로써 합의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24일부터 26일 사이에 광주를 비롯한 전국 8개 도시에서 임금인상 교섭 보고대회를 개최하고, 단결을 호소했다. 그러자 1969년 9월 13일 전남방직은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대한방직협회 회장은 1968년에 전 방직공장이 10억 원의 적자를 보았고, 인건비는 상승한 반면 제품 값은 3년 전보다 10% 하락했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심각해지자 정부가 조정 차원에서 개입하여 9월 17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노사 양측이 302원선으로 8월 1일부터 임금인상에 합의함으로써 115일 만에 종결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781). 유신체제 하에서도 섬유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는 계속되었다. 1975년 3월 15일 일신(전남)방직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3시부터 집단성토대회를 벌였다. 1975년 5월 19일에는 전라남도 담양에 소재한 임일섬유 노동조합 조합원 336명이 임금 30% 인상 요구하면서 작업을 거부했다. 이들은 25% 인상에 합의하고 작업을 재개했다. 1977년과 1978년에는 면방업체와 전국섬유노동조합이 일괄적으로 임금협상을 했는데, 노동청이 조정신청을 하여 이를 따르도록 했다. 그리하여 1977년에는 24.6%의 임금인상이 결정되었고, 1978년에는 전국섬유노동조합이 60.5%의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나, 24%로 결정되었다. 2 전남제사 전남제사는 1926년 설립된 전남도시제사공장에서 출발했으며, 광주시 양동 61번지 즉, 현재 양동 삼익, 우진, 금호 아파트가 들어선 장소에 위치했다. 전남제사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았다. 전남제사는 1935년 임동에 종연방직 전남공장이 설립될 때까지 광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1954년에 박인천이 이 공장을 인수하면서 전남제사로 명명했다. 전남제사는 견사 수요가 격감하자 폐업했고, 설비는 장성의 삼양제사로 이전했다. 전남제사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1967년 12월 13일이다. 이날 전남제사 노동자 380명이 임금인상 및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쟁의를 벌였다. 이는 1968년의 대규모 노사 갈등의 전조였다. 전남제사는 1968년 4월 30일에 자동제사기를 설치하고, 410명의 노동자 가운데 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5 216명을 해고했다. 5월 11일 해고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부당해고 철회 요구 쟁의를 신고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5월 27일 부당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공장 입구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회사는 범퍼에 철조망을 두른 전남 영 210호 등 3대의 버스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집합 장소로 돌진케 했다. 이 사고로 김용순(22세, 섬유노동조합 전남부회 조직부장)과 정정순(25세, 대의원) 등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언론은 이를 노사관계 또는 노동법 이전에 인간적인 면에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사건 으로 평가했다. 노동쟁의가 악화되자, 6월 13일 전국섬유노동조합은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6월 14일 쟁의부장(김상문) 외 6명이 광주의 현장으로 내려 보내 투쟁에 동참하도록 했다. 상황이 점점 확대되자, 회사는 6월 19일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행했다. 노동조합의 요구는 해고된 216명을 복직시킬 것, 휴업보상(임금의 60%)를 지급할 것, 임금은 다른 제사업체에 준할 것, 단체협약 경신을 7월 3일까지 체결할 것 등이었다. 1971년 7월 14일 전남섬유노조 전남지부가 전남제사주식회사, 광산잠사산업주식회사, 나주잠사주식회사를 상대로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를 제기했다. 1979년에도 약 한 달 반 동안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향상 등을 주장하며 준법투쟁이 발생했다. 회사 측은 임금 30% 인상과 노동 조건 향상을 제안했고, JOC 회원들이 다수 참여했던 노동조합은 이를 수용했다(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50년의기록출판위원회 등, 2009: 125~126). 3 아세아자동차 전국금속노동조합 전남지부는 1970년 11월 하순부터 외자업체로 피아트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던 아세아자동차공업주식회사(사장 장상태)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했다. 유인물에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경우 법의 보호와 근로조건 및 후생복지의 유지개선과 사회적 지위 향상 등이 이루어진다고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12월 24일 지급된 연말 보너스의 금액이 간부 등 일반사원과 기술노동자가 크게 다르다는 점도 적시되었다. 회사는 보너스의 차이를 7개월 동안 공장 가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12월 31일 아세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75명의 노동자가 전국금속노동조합 전남지부 아세아자동차 분회를 결성했으며, 지원영을 분회장으로 선출했다. 아세아자동차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무기휴업으로 대응했다. 아시아자동차는 평상시 밤 10시까지 연장근무를 시켰지만, 설 연휴가 끝난 1971년 1월 4일에는 작업량이 없다고 하면서 무기휴업을 공고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793). 1월 6일 광주공장 노동조합 간부들이 회의를 갖고, 이어서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김병룡)과 광주공장 분회장 등이 모임을 갖고 타결책을 찾았다. 회사와 노동조합은 휴업을 둘러싸고 서로 양보할 것을 주장했다. 회사는 1월 8일에 노동조합 간부 등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24명을 본사, 서울, 부산 등지로 전보 발령을 냈다. 전보 발령을 받은 노동자들 가운데 18명은 1월 12일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부당노동행위를 노동운동사 63

66 즉시 철회하라!, 부당 인사 조치를 취소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220여 명의 노동자와 함께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또한 노동자들은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제출했다. 회사의 대응은 양면적이었다. 회사는 1월 12일 노조원의 일급제를 사원들과 같이 월급제로 대우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다음날부터 조업 재개를 선언했고, 실제로 재가동되었다. 그러나 회사는 1월 16일 전출을 수용하지 않은 노조 간부 18명 가운데 10명을 해고시켰다. 회사의 처분에 격분한 노동자 100여 명은 1월 20일 농성을 재개했다. 지원영과 간부 4명은 공장 내에서 몸에 전기 고압선을 감고, 한 손에는 스위치를 연결할 태세를 취하는 한편, 한 손에는 청산가리를 들고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위협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은 회사와 노동조합의 입장의 조율했다. 그리하여 발령 및 해고했던 노조 간부 및 대의원 28명을 종전대로 환원시키고,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날 광주시로부터 노조설립증이 발행된 것도 농성을 중단시켰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회사는 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회사는 2월 1일 노조 간부 등 56명의 조합원을 회사 내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이유로 고발했다. 노동조합은 2월 11일 단체협약 체결, 임금인상, 상여금 지급, 1월분 봉급 전액 지급, 회사측에 의한 조합원들의 고발 조치 취하 등을 요구하며, 쟁의를 결의했다. 극한 대결로 치닫던 상황은 2월 24일 노동조합이 회사의 56명 집단 고발 취하를 조건으로 임금인상 요구를 철회하면서 노사분규는 일단락되었고, 노동조합 결성은 마무리되었다. 아시아자동차의 노사분규는 1972년에도 발생했다. 아시아자동차는 1월 14일 장기휴업을 공고하고, 135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4 기타 이외에 발생한 노동운동 또는 노동문제는 다음과 같다. 1964년 2월 22일부터 화공노동조합 광주지부 산하 조합원 120명이 임금인상을 주장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당시 임금은 한 켤레 당 150원이었는데, 노동자는 55%를 인상한 250원을 주장한 반면, 사용주는 200원을 제시했다. 전라남도 노정당국은 215원선으로 조정했으나, 회사가 이를 거부하여 결렬되었다. 그리고 1964년 전국금속노동조합 전남지부는 대양자동차공업사를 상대로 단체협약 갱신체결, 임금인상, 휴가수당 지급 등을 요구하여 화해 처리되었다. 1967년 6월 23일 광주 무등양말이 부당노동행위로 노동청에 고발되었다. 1968년 2월 19일 광주 동양캐비닛이 단체협약체결을 거부하여 검찰에 고발 송치되었다. (2) 운수업 광주지역 운수업계의 노동운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유신헌법이 선포되기 전까지 다양한 사업장들에서 단체협약과 임금체불 및 임금인상을 쟁점으로 단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유신체제 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7 말기에는 광주고속 안내양들의 승차거부 파업이 전개되었다. 노동운동이 발생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4년 전국운수노동조합 전남지부에서 남선연탄을 상대로 단체협약과 하역자금 인상을 요구하여 화해 처리되었다. 1965년 4월 23일 광주와 송정을 오고가는 천일버스 노동자들이 오후 5시 이후 운행을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체불과 단체협약 불이행 등을 요구했다. 천일버스는 603,000여 원의 임금을 체불했고, 10시간의 근로시간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단체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 파업은 체불임금 지급을 약속함으로서 하루 만에 종료되었다. 10월 13일에는 전국운수노동조합 전남지부 광주분회 노동자 약 200명이 광주역 대화물광장에서 근로기준법상 규정된 8시간 노동시간을 엄수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보통 밤 10시에 작업을 시작하여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를 했는데, 야간작업 수당을 지급받지 못했고, 한 달 수입이 6천여 원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 노동자는 단계적으로 임금인상에 관한 쟁의도 벌이기로 했다. 1970년 6월 5일에는 전국운수노동조합 산하 광주석탄분회와 남광주분회 회원 147명이 무연탄 하역노임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1971년 6월 6일에는 광주금성여객 종업원 400여 명이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또한 9월 18일은 광주시 지원동 소재 국제버스유한회사(공동대표 이사 김준수) 소속 시내버스 30대의 운전사 45명과 차장 88명 등 133명이 체불임금을 지급할 것을 주장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체불된 임금은 7~8월분 540만원과 설 상여금이었다. 이 노동쟁의는 회사와 지입 차주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차주들은 회사 사장이 이익금의 일부를 횡령했다고 주장했고, 사장은 적자를 메꾸는데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차주들의 고소로 검찰이 조사를 진행하게 되면서 파업은 7일 만에 종료되었다. 그런데 9월 24일 이번에는 차주들이 시내버스 8대의 번호판을 떼어가면서 다시 운행이 중지되었다. 1978년 10월 7일 광 주 고 속 안 내 양 120여 명 이 승 차 근 무 를 거 부 하 고, 서 울 시 소 재 남산야외음악당에 집결했다. 광주고속에 안내양이 배치되었던 것은 1970년 5월이었다. 안내양들은 다른 고속버스와 같은 수준으로 임금을 인상해주고, 처우개선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회사의 적절한 조치가 있을 때까지 무기한 파업을 할 것임을 선언했다. 회사는 노동쟁의를 차단하기 위해 안내양 7명을 사전이 납치하려는 소동을 빚기도 했고, 안내양들이 근무를 이탈하면 전원 해고 하겠다 고 협박하기도 했다. 농성에 참여한 한 안내양은 근무환경이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고 호소했다. 즉 하루 평균 12시간의 노동을 하는데, 월 수령 기본급은 13,000원, 수당은 30,000원, 식대는 18,000원이었고, 3일에 한번 지방의 숙소에서 숙박을 하는데 식대는 개인 부담이었다. 안내양들이 주장했던 주요 요구는 월 6만원 수준의 봉급을 다른 회사와 같이 85,000원 내지 90,000원으로 인상해달라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사 65

68 (3) 보건의료 1969년 9월 국립의료원 인턴 30여 명이 수당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정부는 주동자를 입영시키는 조치 등을 취하면서 강경하게 대처했다. 1970년 9월 3일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인턴 42명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의료기관의 파업은 국립의료원, 우석대학교 부속병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김태동 보건사회부 장관은 신분보장과 수당 인상을 약속하는 한편, 파업을 지속하는 병역미필자는 입영 조치하겠다고 양면책을 사용하여 수습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급여를 30% 인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971년에도 유사한 노동쟁의가 다시 발생했다. 6월 16일 국립의료원 인턴 32명이 파업을 시작했다. 이경호 보건사회부장관은 초 강경책을 사용했다. 그러자 사태가 더 악화되어 레지던트 53명이 파업에 동조했다. 당시 국립병원 인턴의 수당이 19,000원이었는데, 이에 비해 사립병원은 2만 원 가량이 더 많았다. 이와 같은 의료기관의 파업은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도 발생했다. 6월 28일 이 병원의 인턴 17명이 대우개선을 요구하면 48시간 단식에 들어갔다. 이들은 현행 보수를 3만 원 이상으로 인상할 것과 국립의료원 인턴들의 해임 조치를 취소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런 파업은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서도 발생했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7월 6일에는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병원 레지던트 400여 명이 보수개선을 요구하며 48시간 동안 파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인턴은 26,000원 선, 레지던트는 31,000원으로 봉급이 조정되어 7월 9일 업무에 복귀했으나, 이는 갈등의 씨앗을 내재한 것이었다. 이들은 복귀에 앞서 병원으로의 복귀가 우리의 주장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며 당국이 앞으로도 종전과 같은 미봉책을 쓴다면 장차 더 악화된 사태의 장기화를 가져올 것이다 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의무직 공무원이 되지 않음으로 인해 대우가 묵살되었고, 수당도 받지 못하며, 신분상 여전히 불안하고, 해외여행 완화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별다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자, 9월 6일과 7일에 걸쳐 서울대, 부산대, 전남대, 경북대 대학병원의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전남대 부속병원의 경우는 7일 오전에 김두상 병원장에게 인턴 한정수 등 17명이 사표를 제출했고, 8일에는 레지던트 73명 가운데 조국현 등 54명이 사표를 냈다. 이 사태는 우석대학병원, 경찰병원, 가톨릭의과대학병원, 세브란스병원, 국립의료원, 적십자병원 등으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9일까지 사표를 처리하지 않으면 수리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병원 당국이 이들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교수들의 설득으로 다소 누그러졌던 분위기는 정부가 10일까지 복귀 시한을 제시하고 전보로 통첩을 보내자 다시 격앙되었다. 10일 밤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교수와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회의를 개최했다. 교수들은 요구조건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우리도 같이 사퇴하겠다 고 설득했다. 수련의들은 복귀성명을 발표한 후, 11일부터 업무를 재개했다. 서울대 병원의 갈등 상황이 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9 정리되면서 다른 병원들에도 수련의들이 복귀했다. (4) 건설업 전라남도 송정군(현 광산구) 소재 국제공항 기지 공사현장은 5 16군사정변 이후 광주지역에서 처음으로 노동쟁의가 발생한 사업장이었다. 1964년 2월 4일부터 건설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미국인 회사인 드레이크 킹케이드를 대상으로 임금 50%를 인상하거나, 일기불순에 의해 작업이 불가능할 때에 임금지불과 기본 시간 수당 인정 및 위험수당, 퇴직수당 등을 지급할 경우는 임금 25%를 인상해 줄 것을 요구했다. 회사는 임금 15% 인상안을 제시하고, 2월 10일까지 작업을 재개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회사는 관계 기관에 갈등 조정을 요구했는데, 광산군수와 노동청 근로감독관 등을 포함한 관계기관들은 회사의 결정이 노동법에 저촉된다고 판정했다. 이에 현장 감독은 본사와 협의를 진행했고, 결국은 회사의 입장대로 임금 협상이 타결되었다. (5) 서비스업 등 서비스업에서의 노동운동은 단편적인 사례들만 확인되었다. 1962년 1월 14일 광주시내 연탄 배달원이 태업을 했다. 1963년 11월 27일 광주시내 이용분과위원회 노동자 525명이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을 주장하며 쟁의를 벌였다. 1971년 11월 22일에는 전국연합노동조합 광주지역지부 노동자 297명이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 신고를 했다. 이들은 광주시 소속 청소부들인데, 일당 4백 원(월 12천원)의 임금을 35% 인상해 줄 것과 1970년 9월말까지 만료된 단체협약을 경신해줄 것을 요구했다. 1971년 11월 25일 연합노조 광주지부가 대흥양복점 등 32개 업주 대상 임금인상요구쟁의를 벌였다. 그리고 12월 20일에는 연합노조 광주지부가 대흥양복점 등의 노동자들이 33개 업자를 상대로 노동쟁의와 실력행사를 결의하고, 본조에 인준 요청을 했다. (6) 외국 기업체 22) 유신헌법이 선포될 무렵, 광주공항에서 부당노동행위 지정을 요구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광주공항의 공병영선 업무를 담당하는 초청업체인 UAE(대표 로드하우스)는 과거 서울지부, 오산지부, 부평지부 산하에서 용역하청을 담당했던 회사로, 반노동조합정책에 집착했다. 이 회사는 전남지부장이 영내에서 조합가입원서를 접수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1972년 10월 박종열( 朴 鐘 烈 )지부장에게 20일간 정직처분을 했다. 그리고 정직기간이 만료되자 박 지부장을 22) 외기노련20년사발간위원회, 1981, 외기노련 20년사, 284쪽을 참조하여 구성. 노동운동사 67

70 군산으로 전보 발령하여 정당한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부당노동행위를 했다. 노동조합은 이 사안을 지부 임원에 대한 중대한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하고, 미군 측에 시정을 요구했으며, 1973년 3월 25일 노동청에 쟁의 조정을 의뢰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UAE는 박 지부장의 전출을 취소했으나, 원대 복귀시키지 않고 평택에 출장 형식으로 보냈다. 노동조합이 계속 시정을 요구하다가 극한투쟁의 방침을 표방하자, UAE는 73년 4월 2일 박종렬 지부장을 광주공항으로 원대 복귀시켰다. 그리고 지난 20일의 정직도 취소하고, 임금을 전액 지불했다. 이후에도 UAE는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여 빈번한 노사분규를 야기했다. (7) 기타 노노갈등이 가장 크게 발생한 사업장은 광주고속이었다. 1977년 11월 16일 광주고속에서는 2개 노조가 결성되어 조직관할과 관련한 분규가 발생했다. 자동차노동조합은 11월 22일 광주고속분회의 정상화를 위해 관할권을 전남지부에서 고속지부로 이관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의거하여 자동차노동조합 고속지부는 12월 6일 광주고속분회 조직정상화를 위한 조직지원대책위를 설치했다. 그리고 한국노총은 12월 19일 광주고속분회의 조직관할권 문제에 전남도협의회가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2) 전남지역 노동운동 (1) 제조업 : 섬유, 금속 1 목포 유리공장 1965년 12월 19일 전국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 산하 목포유리공장 노동자 149명이 임금인상과 연장근로수당 지급 등 5개 항목을 쟁점으로 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회사는 공장을 폐쇄했다. 이로 인해 다수의 노동자들이 아사의 상황에 직면했고,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일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탈퇴했다. 목포지구노동조합 지역협의회가 여기에 개입하여 해결방법을 찾기로 했다. 2 나주 호남비료 1971년 10월 1일 밤 호남비료 화학노동조합 나주지부 노동자 300명이 퇴직금, 정근수당, 특근수당 등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했다. 회사가 이에 불응하자, 노동조합은 10월 2일부터 집단행동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한편 1971년 11년 24일에는 호남비료 노동자 569명이 숙식비 인상 등 요구 쟁의를 벌였다. 당시 호남비료의 운영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충남비료와 통합 방침이라는 상공부장관의 발언이 있었고, 당기손실금과 누적금이 매우 많았다. 노동조합이 회사에 우선적으로 문제시 했던 것은 경영진이 노사협의에 독선적이었으며, 오만 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1 불손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회사 경영의 어려움을 빌미로 단체협약을 무시한 각종 규정을 도입했으며, 노동자들 사이의 반목과 질시를 유발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2달여의 기간 동안 갈등을 벌인 노사는 12월 1일 체불임금 지급 등 4개항에 합의했다. 3 호남고무 23) 호남고무(주)(사장 김종한)는 日 本 고무회사가 일본 내 노동자 인건비가 상승하자 三 和 고무회사와 합작하여 1974년 7월 2일 목포시 상동 51번지에 설립한 회사였다. 서류상으로는 삼화그룹의 자회사로 되어 있었다. 호남고무는 자본금 약 3억 2천만 원으로 출발했는데, 노동자는 약 120명이었고, 매월 작업화 15,000켤레를 생산하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화학노조 호남고무지부 1976년 1월 20일에 결성되었다. 지부장은 진완식이었고, 노동조합원은 약 120명이었다. 호남고무노동조합은 다른 노동조합과 달리 사장과 과장 등을 제외한 직원 전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회사는 1978년에 자본금이 약 30억 원으로 증자되면서 노동자가 약 1,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노사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노동쟁의가 빈발했다. 호남고무(주)는 회사에 대한 중간관리자의 지나친 과잉충성과 아부, 노무관리자의 노동권을 짓밟는 전근대적 횡포로 인해 폭행사건을 비롯하여 다양한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되었다. 회사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는데, 무슨 노동조합 활동이냐고 노사교섭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 공장장에게 잘 보이려고 늘 한국인 종업원을 하인 다루듯 하는 총무과장은 무법자 행세를 했다. 노동조합은 화학노조를 선택함으로 인해 결성 당시부터 연합노조와 조직관할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내부적 이유 등으로 인해, 노동조합은 미약한 상태였다. 노동조합은 회사 측의 계속되는 부당노동행위를 1년 정도 감내했다. 노동조합은 1977년 2월 1일 노동청 목포지방사무소에 각종 근로기준법 위반을 이유로 회사를 고발했다. 노동조합이 제시했던 1년 동안의 위법 행위들은 다음과 같았다. 1976년 1월 31일 총무과장은 경비원 김정학을 재떨이로 폭행을 가해 12일 이상의 상해를 입혔다. 총무과장은 가짜 화장품과 옷감, 상품권을 상인과 결탁하여 조합원에게 강매하여 봉급에서 공제했다(당시 임금은 남자 20,000원, 여자 13,000원).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여 주종숙을 76년 추석상여금 지급에서 제외했다. 노동조합의 후생부장 조동연(조합원 300명 중 1명 뽑는 특채사원)이 사무실 책상 위의 칡뿌리를 먹었다고 해고되었다. 총무과장이 밉게 본 여성 조합원 김송백이 결혼한 것을 이유로 권고사직케 했다. 공장 보일러에서 기계로 통하는 폐수를 노동자들에게 사용케 했다. 여자조합원, 신은자, 윤형숙 등이 반장에게 구두로 전하고 하루, 이틀 결근한 것을 이유로 부당해고했다(취업규칙에는 3일 무단결근이면 해고). 매일 2시간 이상의 잔업이 이루어졌는데, 2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산업선교25주년기념대회자료편찬위원회, 1984, 노동현장과 증언, 풀빛, 쪽 을 참조하여 구성. 노동운동사 69

72 여공들이 동상( 凍 傷 )에 걸려 정해진 작업량을 끝내지 못하면 끝날 때까지 강제노동을 시켰다. 단체협약에도 없는 강제적금을 매달 1,000원식 공제했다. 지부에서 사사건건 귀찮게 한다고 지부 사무실 책상을 일방적으로 치워버리고 식당 귀퉁이로 쫓았다. 이상의 부당노동행위는 목포지방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목포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노동조합 상임집행부 회의에서는 2월 22일까지 이러한 문제들이 시정되지 않으면 농성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화학노동조합 본조는 목포지역의 한국노총간부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관계기관에 엄벌을 요구했다. 그리고 삼화노동조합 지부장과 동행하여 회사 사장을 만나 즉각 총무과장의 인책과 노조 정상화를 촉구했다. 그러자 회사 사장과 지부장은 2월 23일 다음과 같이 합의하고, 노동쟁의를 종결했다. 합의사항 1 단체협약을 부산삼화지부에 준하여 체결한다. 단, 그 체결권을 삼화지부장에게 일임한다. 2 지부장의 전임활동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단, 조합원의 후생문제인 식당운영에 관하여 지부 장은 적극 협조한다. 3 노조사무실을 목공실 옆에 설치함을 회사는 인정한다. 4 전기의 목적 달성을 위하고 근로자의 고정 처리를 위하여 월1회의 정기노사협의회 상무 노무 과장, 노조 측에서 지부장 부지부장 총무부장이 한다. 5 총무과를 총무 노무 양 과로 분할하여 윤 총무과장은 근로자 전반에 관한 업무(인사 임금 예비군관계 노무행정 등)를 노무담장과장에게 인계하고, 윤 과장은 상호간 온화한 분위기 조성 에 배전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1977년 2월 23일 사장 김종한 지부장 진완식 1978년에도 호남고무에서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조합은 10월 7일 무단해고 및 퇴직금 지급연기 등 120여 가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며 집단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청 목포지방사무소는 사용자측 부당노동 행위자에게 200만원의 벌금과 인사조치 및 시정하라고 중재하여 쟁의가 종결되었다. 4 남양어망 1978년 5월 14일 김봉기 외 86명이 전국섬유노조 전남지부(지부장 이순각) 산하의 남양( 南 陽 )어망 분회를 목포시 용당동 소재 하나제과점에서 조직했다. 이들은 다음날 남양어망(주)을 방문하여 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3 노동조합결성을 통보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서 관계서류를 구비하여 5월 17일 목포시청 사회과 노정계에 노동조합설립신고서를 접수시켰다. 그러나 5월 18일 설립신고서의 하자를 이유로 서류가 반려되었는데, 실제 이유는 회사가 노조설립을 방해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5월 20일 설립신고서를 보완하여 제출했으나, 목포시청은 서류를 전라남도에 전달하지 않고 계속 보류했다. 이에 분개한 전남지부 조직부장이 목포시 보성장여관에 투숙하면서 조합원 교육 및 조합운영에 대해 의논을 했다. 이를 탐지한 회사 측은 노사간담회를 개최했다. 섬유노조 측에서는 즉시 회사를 방문하여 회사 측 제안을 검토했다. 회사 측의 제안은 1남양어망(주) 부산1공장과 목포2공장을 통합하여 단일지부 결성을 요망, 2목포분회로 결성할 경우, 78년 7월 31일까지 공장 가동을 중단하겠음, 3현재까지의 경비를 회사에서 지급할 것이니 목포 보성장에서 투숙하고 있는 전남지부간부 철수요망 이었다. 섬유노조 목포분회는 회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목포시에 접수한 신고서가 처리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목포시는 5월 25일 노조설립신고서 처리의 유보통지를 보내왔다. 섬유노동조합은 관계기관에 목포시의 노조설립 유보의 부당성을 진정하고, 목포시장으로부터 노조설립신고에 대한 회신을 접수했다. 노동조합은 6월 13일 목포시장을 방문하여 전라남도에 전달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그 결과 6월 30일경 노조설립신고 접수 서류를 전달받았다. 이 서류가 접수된 7월 2일 전라남도 사회과 노정계는 회사의 방안을 수락할 것을 노동조합에 촉구하고 조정했다. 그러나 섬유노동조합은 이를 계속 거부했다. 한편, 노사갈등이 계속되고 있던 1978년 8월 30일 회사를 지지하는 노동자 15명이 화학노동조합 본부 사무실에서 고소웅을 지부장으로 하는 화학노조 남양어망지부를 결성했다. 화학노동조합에서 남양어망지부를 결성한 사실을 확인한 섬유노동조합 측은 광주시 산하 섬유노동조합 분회 임직원 약 100명을 목포로 보내 목포남양어망 정문 앞에서 조직적인 행동을 했다. 이들은 3개 여관에 예약 투숙하면서 10월 29일까지 농성을 계속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섬유노동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여 합법제정을 인정하고, 섬유노동조합이 화학노동조합 산하 남양어망조직을 그대로 인수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3개 여관에 투숙했던 임직원들이 10월 30일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회사도 중앙노동위원회의 합법제정을 인정하고, 11월 14일 부산 제2공장에서 섬유노동조합 남양어망지부로 재결성했다. 11월 20일 섬유노조는 노동청으로부터 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았고, 노사분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종료된 이후, 회사 측은 1978년 5월 14일 이전에 섬유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일부 근로자들을 부산공장으로 전출시키는 등 단체조직의 힘을 과시하지 못하도록 했다. 5 반도가발공장 1970년에 목포시내에 소재한 일부 가발공장들은 임금을 체불하고, 검사한 제품을 본인에게 노동운동사 71

74 반환하지도 않은 채 임금을 배액 공제하여 노동자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곳은 죽교동 111번지 중앙공설시장 2층에 위치한 반도가발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70여 명의 노동자에게 60여만 원의 임금을 체불했으며, 가발 개당 임금 100원에서 4월에는 80원으로, 6월에는 50원으로 임으로 인하했다. 이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도 생활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파악한 전국연합노동조합 목포지역본부는 1970년 5월 26일 전라남도노동위원회에 이들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제출했다. 2 목포 지역의 여러 사업장 1967년 12월 4일 전국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 산하 양복공, 초공( 草 工 ), 출판부 회원 등 125명이 중앙노동조합으로부터 노동쟁의 인준을 받았다. 이들은 현재 5~6천원의 임금을 70% 인상을 줄 것은 3개월 전부터 요구하고 있었다. 1970년 1월 19일에는 전국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 양화점 기술공 분회원(회장 김안익, 48세) 200여 명이 임금 30% 인상을 주장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41개 양화점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는데, 1월 6일과 12일에 화상조합과 협의를 진행했으나, 결렬되었다. 1971년 10월 4일 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는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쟁의 돌입을 결의하고, 본조에 인준을 요청했다. 1972년 9월 26일 전국연합노조 목포지역지부가 대평산업회사의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재심청구를 중앙노동위에 제기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4: 666). (2) 운수업 1 항운 목포부두의 작업권에 대한 노동조합들의 갈등 한국노총의 출범과 새로운 체계가 구성되면서 목포부두노동조합은 목포지부장으로 백석천을, 운수노동조합은 이사장으로 배철을 선출했다. 배석천은 전 한국운수노동조합파였고, 배철은 전 미창노동조합파였다. 두 노동조합은 이승만정부에서부터 작업권을 둘러싸고 대립과 갈등을 빚어왔다. 5 16군사정부 시기에도 이들의 대립은 여전했다. 두 세력은 서로를 질시하고, 당국에 끊임없는 투서전을 벌였다. 경찰은 투서 내용에 근거하여 두 사람과 노동조합을 수사하고, 1961년 11월에 두 사람을 업무상 배임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분열은 더욱 치열해졌다. 시민과 노동자의 여론은 5 16군사정부 이전에 활동했던 노동조합 간부진들이 모두 사퇴하고, 새로운 적임자가 단일 노동조합으로 규합하는 것이 유일한 수습방안이라고 했다. 이들의 갈등은 중앙노동조합총연합회의 작업 한계권 설정 지시도 무시하고, 1962년 전반기까지 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5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언론은 작업권을 둘러싸고 수년간 계속되어 오던 당지 노동계 분쟁은 외자선이 입항하여 작업할 때마다 싸움이 일어났으며, 심지어 외국선박에서 노동자들이 유혈극을 연출하였는가 하면 이권 타툼으로 난장판을 이루었던 일이 허다하여 목포항 발전에 암적인 존재라고까지 지적 했다. 그러나 이들의 갈등은 정부의 개입, 여론의 비판, 중앙노동총연합회의 중재 등으로 일단락되었다. 목포부두노동조합 노동쟁의 목포부두에서의 노동쟁의는 1963년부터 계속해서 발생했다. 하역비 인상과 임금 인상이었다. 1963년 8월 목포부두노동조합은 화주 측에 하역비 인상을 요구했다. 하역비는 1961년 4월 20일 목포상공회의소에 의해 중계 조정되었는데, 물가 앙등을 이유로 건당 양륙, 하륙 포함 하역비를 5원에서 10원씩으로 인상했다. 이에 대한 여론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목포부두 노조원들의 횡포로 목포항 발전에 큰 저해를 가져오고 있다 고 하면서 당국의 단속과 조정정책을 요구했다. 1965년에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부두노조 목포지부는 1965년 2월 10일 임금인상을 합의했고, 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는 12월 15일에 임금 100% 인상에 합의했다. 1967년 6월 27일 목포부두노동조합 목포지부의 임금 인상이 상공회의소의 중재로 결정되었다. 양곡운반과 하역노임이 50% 인상되었다. 인상 이유는 4년 전 노사 간에 결정되었던 노임이 물가인상 등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1969년 3월 10일 목포시내 전남석유, 대창석유, 대원석유 종업원 김선환 등 50명이 임금 인상과 노동자의 권익을 찾게 해달라고 탄원을 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1962년부터 임금인상을 요구해 왔으나, 기업주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1967년 10월 1일 전국부두노동조합 유류연합회에 가입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 노동쟁의의 쟁점은 1968년 10월부터 기계화(유류탱크차 도입)가 이루어지면서 작업량이 80% 감소했고, 이로 인해 1인당 월수입이 1,500원 이하로 격감함에 따라 살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1969년 8월 12일 부두노동조합 목포지부와 호남연탄공장(사장 김삼성)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호남연탄이 공장 위치를 목포역 철도 인입선으로 이동시키고, 노동자 100여 명을 해고시킴으로서 발생했다. 호남연탄은 공장종업원만으로 하역작업을 할 수 있어 부두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970년 2월 26일 전국부두노동조합 조합원 21,600명이 전국 12개 지부에서 컨테이너 도입 반대 전면 파업 가부 투표에 들어갔다. 컨테이너선 작업이 실시되면, 상차작업과 입고작업이 사실상 필요 없게 된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찬성하여 3월 3일부터 전국적으로 파업이 예정되었으나, 3월 1일 회사 측이 실업구제 차원에서 상차 작업료를 인상하는 것으로 합의를 함으로서 종료되었다. 1971년 10월 대한통운 목포지점과 부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하역 노임 등 협정 요금 인상에 대해 노동운동사 73

76 합의를 보지 못해 갈등을 빚었다. 노동자들은 760여 명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하면서 20% 인상 금액을 1월부터 소급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반면 대한통운 목포지점은 관수물자 효율의 운임을 기준으로 고집해 서로 대립했다. 이들은 수차례 협상을 진행하다가 10월 25일 대한통운 목포지점이 노동조합의 안을 받아들임으로서 종결되었다. 1972년 4월 25일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전국부두노조 목포지부장(배석천) 등 3명을 업무상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여수부두노동조합 노동쟁의 노동문제는 여수의 부두도 심각했다. 5 16군사정변이 이후 언론이 이 지역의 노동문제를 처음 다룬 곳은 여수였다. 동방운수 여수출장소는 1961년 1월에 구입한 해태상자의 하역작업에 관한 노임 약 7만원을 6월 중순까지 지급하지 않았다. 회사는 이 상자들은 여러 회사들이 공동으로 구매한 것으로, 수금 지연으로 체불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사가 모든 임금을 체불했던 것이 아니라, 선적비를 비롯하여 기타 노임은 지불던 것이다. 임금체불에 대한 갈등은 엄중한 정세로 인해 심각한 갈등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언론에서 다룰 만큼 중요한 사안했다. 여수부두노동조합 유류 작업 관련 노동자들이 1964년 5월 5일부터 임금 12% 상을 주장하며 노동쟁의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8년 전에 결정된 관허 노임이 인상되지 않고 있는 점, 일반여객선 선적 노임과 입고 노임이 20원이나 차이가 난 점 등이 문제라고 주장다. 1971년 9월 15일 여수부두노동조합 여수지부 소속 쌍용시멘트 여수공장 노동자 76명이 임금인상 건의가 관철되지 않자 파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야근수당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은 8월 초에 하역회사인 대한통운 여수지점과 전라남도지방노동위원회에 60.5%의 임금인상을 건의했다. 그 결과 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28% 인상 조정안을 받았으나, 대한통운 여수지점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파업을 하게 되었다. 목포해상노동조합 노동쟁의 1963년 8월 해상노동조합 목포지부는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목포지부는 6월 1일부터 165명의 조합원에 대한 50% 임금 인상을 해줄 것을 선주 측과 절충하기 시작했다. 양측은 7월 21일에 기본급에서 21%의 임금을 인상하고, 6월분부터 소급 지급하는 것에 합의하여 해운국에 접수했다. 그러나 8월 중순이 되어도 선주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목포지부는 8월 14일 노동자 약 800명이 참여한 노동쟁의를 벌였다. 목포지부의 요구는 임금 지불 일률화(4~6%), 5개 항목에 달하는 음성적 공제금을 배제 등 8개 조항이었다. 노동쟁의는 1964년에도 발생했다. 전국해상노동조합 목포지부는 대한통운 목포지점을 상대로 단체협약체결과 더불어 현행 평균임금 3천원을 7천원으로 인상, 공휴일 수당 지불, 후생비와 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7 연장근로 수당 지불 등을 요구하는 쟁의를 제기했다. 이 노동쟁의는 전라남도노동위원회에 접수되어 단체협약 체결을 수락하고, 임금 4,200원 선으로 인상하기로 중재되어 5월 2일 쟁의가 종료되었다. 또한 위 노동조합은 남양수산회사를 상대로 단체협약체결 및 노임 40% 인상을 요구했다. 이 노동쟁의는 전라남도노동위원회에 접수되어 임금 24% 인상과 단체협약 체결 수락으로 중재되어 5월 2일 쟁의가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1964년 목포지부의 노동쟁의가 완료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박회사에서 종사하는 약 100명의 노동자들이 노임 80% 인상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현재 하급 선원이 월 3,000원을 받고 있는데, 이로서는 생활유지가 안되며, 선박업자들은 상상 이외의 수입을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목포지부는 목포통운회사를 상대로 임금 100% 인상을 주장했다. 이들은 이 사안을 목포지방선원노동위원회에 접수했는데, 7월 23일 적법한 것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이에 노동자들은 22일에 실시했던 쟁의행위 투표를 25일에 개표했다. 목포해상노동조합 목포지부(지부장 강병원)의 1966년의 노동쟁의는 매우 큰 규모로 장기적으로 진행되었다. 통상적 노동쟁의의 협상 및 종결과 달리, 다양한 관련 정부 부처가 중재를 이유로 개입했다. 이 노동쟁의에 관계 당국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은 파업이 진행될 경우, 목포항을 중심으로 왕래하던 여객선과 1일 평균 5천여 명의 승객들의 발이 묶이게 되어 지역 사회에 미친 파급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1967년 11월 2일 해상노동조합 목포지부 조선공분회는 임금 46.6% 인상을 해운조선소 외 3개 조선소에 제기하며 쟁의를 통고했다. 124명의 노조원들은 상승한 물가로 인해 현 임금 일당 759원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고 46.6% 인상한 1,100원을 지급해 주기를 요구했다. 전라남도 노동위원회는 이 사안에 대해 11월 6일에 적법 판정을 내리고, 23일에 임금을 1,000원으로 인상하고, 인상 시기를 1968년 2월 15일로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900백 원으로 할 것으로, 노동조합 측은 인상 시기를 1968년 1월 1일로 하라면서 중재안을 거부했다. 115명이 참석한 노동조합 회의에서 위의 사안이 안 될 때는 11월 29일부터 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결국 1968년 12월 10일 목포통운지점 노동자 801명이 임금인상 쟁의를 시작했다. 목포선원노동조합 노동쟁의 목포지부 선원들 166명(전체 217명)은 2월 17일 임금 110%와 상여금 100% 인상 등을 주장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목포선원노동위원회는 임금 20% 인상과 상여금 100% 인상으로 조정했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3월 31일 양 측은 중앙노동중재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는데, 5월 6일에 쟁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선원들은 5월 19일 파업을 예고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임박해지자, 경찰과 해운국이 중재에 나섰고,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이 목포로 내려왔다. 5월 20일 제시한 해운국의 중재안은 목포선원노동위원회의 중재안보다 개선된 것이었다. 선원들은 중재가 진행되고 있어 파업을 하지는 않았으나, 해운국의 중재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약 4개월에 노동운동사 75

78 걸친 노동쟁의는 사실상 선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짐으로서 6월 13일에 종료되었다. 최종 조정안은 하급선원은 2천원에서 4천원으로 100% 이상, 상급선원(선장, 기관장)은 8천원에서 11,000원으로 약 30% 인상, 관허요금 인상, 이와 별도로 30% 인상을 부칙 조항에 삽입 등이었다. 목포해운노동조합 노동쟁의 1971년 9월 17일 전국해운노동조합 목포지부(지부장 강병원) 여객선원 노동자 321명이 임금인상을 주장하며 노동쟁의에 들어갔다. 노동조합은 현행임금에서 선장과 기관장은 100%, 선원은 150% 인상, 단체협약체결, 외지근무특근수당 지급, 선발직별 TO제 엄수 등을 주장하며 대흥상사 등 18개 여객선 선박회사에 쟁의를 벌었다. 9월 21일 해상노동위원회는 노동쟁의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양측은 수차례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결국 10월 21일 조합원 총파업 가부 투표를 실시했다. 노동쟁의 참가자 260여 명 가운데 찬성이 253표, 반대가 2표, 기권이 5표로 총파업이 결정되었다. 1973년 5월 26일 운수노조 목포지부 조합원 91명이 4월 1일에 해고되었다. 이들은 5월 25일 상경하여 대한통운에 취직 보장을 요구했다. 2 자동차노동조합 노동쟁의 1964년 8월 5일 해남군 해남여객에 종사하던 노동자 52명이 단체협약 경신 체결을 주장하며 쟁의를 벌였다. 1970년 6월 27일 순천버스합동조합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쟁의를 벌였다. 1972년 5월 22일 자동차노동조합 목포지부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4월 26일 시내 자동차 운전사 60여 명이 모여 노동조합 결성대회를 갖고, 전라남도에 신청한 결과 이날 정식 인가를 받았다. 당시 목포시에는 1,200명(운전사, 정비공, 조수, 차장 등)의 운수업 종사자들 가운데 120명 만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던 이유는 그 해 10월에 보도된 신문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전국자동차 사업장의 근로자들 가운데 목포시내 사업체의 노동자가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고, T여객의 경우 운전사 하루 17시간 씩 격일제로 일하는 상황이었다. 목포시 당국과 세무서 등이 고시 가격 위반에 대해 합동단속을 벌였음에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3 조선내화(완도영업소) 1968년 12월 조선내화 완도광업소(소장 이용남)는 일본으로 납석 수출 작업부의 노임을 톤당 96원으로 인하했다. 이상수 외 114명의 노동자들은 1969년 1월 11일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14일에 노사회의 개최와 노사협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조합원들을 해고시키고, 아주 낮은 노임으로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부당간섭 배격, 종전 임금 부활, 단체협약 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9 체결, 해고자 원상 복구 등을 주장했다. 2월 1일 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는 전라남도노동위원회에 조선내화 완도광업소를 상대로 부당노동행위구제 신청서를 제출했다. (3) 건설 1 목포 삼학도 매립 현장 1961년부터 목포 삼학도 매립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공사의 시행사인 흥성실업은 노동자 107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연합노조에 가입되어 있던 노동자들은 회사에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나, 회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사법부에 소송을 진행했고, 서울고등법원을 거쳐 1963년 4월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사법부의 판결에 근거하여 1961년 9월부터 1963년 9월까지 기간 동안의 임금 30%를 인상 지급할 것을 요구했으나, 회사는 여전히 수용하지 않았다. 1964년 5월 1일까지 단체협약 갱신일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이를 또 무시했고, 결국 노동자들은 전라남도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했다. 2 나주 비료공장 건설 현장 1962년 12월 28일 나주 비료공장(호남비료) 준공식이 열렸다. 시제품은 1963년 4월 27일에 생산되었다. 본격적인 제품 생산은 7월부터였다. 1963년 5월 21일 호남비료주식회사법이 공포되었다. 호남비료의 첫 노동쟁의는 1963년 6월 14일에 595명이 참여한 가운데 발생했다. 그렇지만 이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호남비료 노동쟁의는 이 후에도 종종 발생했다. 1964년 3월 31일 684명의 노동자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고, 4월 30일에도 노동자 680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1971년 10월 나주지역 노동쟁의의 쟁점은 체불임금이었다. 검찰과 노동청이 추석 이전에 체불임금을 일소토록 기업주들에게 강력히 지시했으나, 잘 이행되지 않았다. 체불임금이 지급될 기미가 보이지 않다, 10월 1일 밤 나주군 공산면 소재 덕음광업소 천기실업주식회사(대표 이규헌, 유선호) 광부 200여 명이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체불된 임금 1,940만원을 지불해달라고 서울까지 도보로 행진하려다가 공산면 상방리 삼자고개에서 경찰에 제지되었다. 10월 2일 새벽에 노동자들은 버스로 영산포에 도착하여 서울로 가려다가 나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 해남 우수영농협지소 건설 현장 해남군 우수영농협지소 청사는 1963년 11월 8일에 착공하여 1964년 1월 28일에 준공됐다. 이 공사에는 목공과 인부 30명이 일했는데,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2월 19일 노동운동사 77

80 신축공사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4) 광업 1 연료 전환정책과 광산노동운동 24) 정부는 연료근대화라는 이름하에 1966년 초부터 유류전환을 권장했다. 국무회의는 그 해 말부터는 관공서의 보일러 시설을 벙커C유로 전환할 것을 의결했다. 그리고 발전소, 비료, 시멘트공장 등 기간산업체는 물론, 학교, 호텔, 병원, 기타 빌딩 등에서도 보일러를 개조하여 벙커C유를 사용하도록 했다. 정부의 급격한 연료 전환정책으로 석탄 생산이 감소했고, 판매가 부진했으며, 폐광 및 감원, 노임 체불 등 석탄산업이 파탄나기 시작했다. 석탄광 종사 노동자와 가족들의 생계는 절망적으로 위협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67년 12월 20일 경에는 심포( 深 浦 )탄광의 5개 탄광이 폐광사태에 직면했다. 그러자 8,000여 명의 실직자가 속출했고, 18억 원 이상의 체불로 수만 명의 광산노동자와 가족들의 생계가 막연해졌다. 1967년 9월 27일 전국광산노동조합은 석탄산업의 파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전국광산노동조합은 결의를 통해 연료화정책시정투쟁위원회 를 구성하고, 10월 17일부터 정부에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하는 연료 수급정책 시정 건의 를 했으나, 별다른 답변을 받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연좌 농성 시위, 가두 데모 등을 전개했는데, 경찰이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그리하여 12월 30일 열린 제4차 광로기획위원회는 장성, 황지, 도계, 영월, 정선, 문경, 화순 등 7개 지역을 선택하고, 1968년 1월 20일까지 연료정책시정투쟁 궐기대회를 개최하면서 항의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노총에 이에 적극 개입하여 1968년 1월 19일 노총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탄광 노동자 실직대책위원회 를 구성하여 전력 지원 투쟁을 하기로 결의했다. 1968년 1월 16일과 18일에는 장성, 도계지구 데모에 이어 1월 20일에는 황지, 영월, 점촌, 정선, 화순 등 4,000여 명의 광부들이 궐기대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화순에서는 520여 명의 광부들이 유류대책 결사반대, 감원 결사반대 등 기치를 내걸고 궐기대회와 시위를 벌었다. 시위의 확산과 더불어 국회를 상대로 한 요구 투쟁도 계속되었다. 정부는 시책의 과오를 인정하고 체불 노임 청산조로 도합 13억 원의 융자조치와 석탄소비 및 생산계획을 재조정하고, 중 소도시 및 농어촌에 분구( 焚 口 ) 개량자금을 확보하여 소비 확대를 도모케 했다. 그리고 비수요기 저탄자금 30억 원 이내의 유장 결정에 따라 16억 원이 방출되었으며, 석탄사업의 기본방향을 각의에서 결정, 석탄을 국가보호 산업으로 그 기초를 확립하고 장래 입법화를 약속함으로써 광산노조의 주요종탄정책 시정투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24) 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한구노동조합운동사, 쪽을 참조하여 구성. 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1 2 체불임금 지급과 임금인상 쟁의 광업에서의 노동운동은 화순탄광지대에서 주로 발생했다. 이 지역의 노동쟁의들을 주도했던 전국광산노동조합 화순탄광지구지부는 1964년 5월 8일에 설립되었다. 화순군 소재 광산업 현장들에서의 노동쟁의는 수차례 발생했다. 1965년 2월 12일 대한광업노동조합 화순광업소 지부 노동자 429명이 대동건설회사와 안광건설 외 2개 하청업자를 상대로 쟁의를 제기했다. 쟁의의 내용은 임금 50% 인상과 1964년 4/4분기와 1965년 1/4분기의 법정수당의 지불이었다. 전라남도노동위원회는 2월 23일 이 쟁의가 적법한 것으로 판정했다. 당시 월 평균 최저생활비가 6,870원이었는데, 이들의 월 평균 임금은 3,710원에 불과했다. 1966년 3월 7일 화순탄광 임동저탄소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주장하며 쟁의를 벌였고(광주일보사, 1993), 10월 13일에는 화순탄광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906). 1967년 12월 7일 전국광산노동조합 화순지구(지부장 김영진)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연탄 값을 개당 16원에서 14원으로 환원해 달라고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연탄 값이 인상되어 연탄이 팔리지 않아 임금을 못 받고 있다고 했다. 또한 외지에서 저렴한 연탄이 유입되어 판매가 억제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15일까지 연탄 값을 내리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연탄을 제조해 팔겠다고 했다. 1972년 3월 20일 전국광산노조 전남지부가 호남탄좌의 임금체불에 강력 항의했고, 1977년 12월 29일에도 호남탄좌 호남공업소를 부당노동행위 사실을 들어 근로기준법 위반혐의로 고발했다. (5) 서비스 언론 등 1 목포일보(호남매일신문) 목포일보 는 일제 강점기에 창간되었던 목포신보 의 속간 형식으로 지령까지 승계하여 해방 후 발간되었다. 목포일보 는 1952년 주식회사 형식으로 바뀌기까지 재정난과 불의의 재난으로 김대중 등 네 사람이나 사장이 바뀌면서 회생을 도모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남정미소를 경영하던 김문옥이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탈바꿈하면서부터 과감하게 투자를 했다. 목포일보 는 1956년 9월 1일부터 타블로이드 배판 2면 15단조로 지면을 늘렸으며, 1958년 8월 1일부터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4면을 발행했다. 신문 내용도 충실을 기해 비정을 규탄하는 데 서슴지 않아서 당국은 때로는 공갈협박하고, 때로는 직원의 신상에 위협을 가했다. 이에 기자들은 백지 사설로 항거하는 등 대응투쟁을 했다. 1965년 1월 1일부터 신문의 광역화를 위해 호남매일신문 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그러나 1966년 7월 7일 김문옥 사장이 사망하면서 사세가 기울었고, 김 사장의 부인 장기순이 후임 사장이 되면서는 더욱 가중되는 정보기관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1967년 1월 1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문사를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요인이며, 군 출신인 김병삼에게 양도하게 됐다. 그는 노동운동사 79

82 신문사를 정계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공화당 공천으로 출마해 야당후보인 김대중과 겨뤘다가 낙선했다. 그러자 신문사의 경영상태가 급격히 기울었다. 1972년 호남매일신문의 경영주였던 이동국은 폐간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원들의 대폭 감축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신문의 폐간을 재촉했다. 즉 6월 25일에는 퇴직사원 25명이 기자협회 및 대통령에게 퇴직금 지급을 탄원하는 사태로 발전했으며, 법원에 퇴직금 지급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함으로써 신문사의 입장은 대내외적으로 더욱 궁지에 빠졌다. 결국 1973년 5월 31일 신문사는 폐간되었다. 100여 명의 사원들은 수습대책위원회(대표 박금장)를 구성하여 회사 측에 체불임금 및 퇴직금 지급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들의 요구는 1973년 8월에 이행되었는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노사쟁의를 벌여 권리를 쟁취함으로서 언론계의 노동운동 역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2 목포시 소재 양복점과 양화점 1967년 12월 4일 전국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 산하 양복공, 초공( 草 工 ), 출판부 회원 등 125명이 중앙노동조합으로부터 노동쟁의 인준을 받았다. 이들은 현재 5~6천원의 임금을 70% 인상을 줄 것은 3개월 전부터 요구하고 있었다. 1971년 11월 3일 연합노조 여순지역지부, 여수양복상조합 상대로 임금 40% 인상요구쟁의 제기했는데,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1972년 1월 17일에는 목포지역 양화공 등이 현행 노임의 50% 인상 등을 요구하며 노동쟁의를 벌였다. 1970년 1월 19일에는 전국연합노동조합 목포지부 양화점 기술공 분회원(회장 김안익, 48세) 200여 명이 임금 30% 인상을 주장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41개 양화점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는데, 1월 6일과 12일에 화상조합과 협의를 진행했으나, 결렬되었다. 3 극장 이용업 1965년 2월 5일 목포시내 7개 극장 종업원 24명이 노동쟁의를 개시했다. 이들은 2년 동안의 휴일수당 1,613,949원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고, 1964년 12월에 체결했던 노사협정의 이행과 극장에서 조합원들의 활동 보장 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전라남도 노동위원회는 쟁의가 적법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1965년 10월 담양군 소재 18개 이발업소에서 업주와 종업원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업주들은 종전 1개월에 10일 간격으로 3회의 휴업을 하던 것을 월 15일 간격으로 2회 휴업을 주장하고, 근로시간 연장도 획책했다. 이에 50여 명의 종업원들은 현재의 월 3회 휴업을 고집하고, 근로시간 연장도 반대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1969년 4월 22일 목포시내 112개소 이용 종업원 472명이 임금인상을 주장하며 태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현행 120원의 서비스료를 30원 인상할 것, 휴일을 월 3회에서 4회로 늘이고 휴일을 통일할 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3 것 등을 주장했다. 종업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5월 21일경에 다시 임금인상을 주장하며 파업을 개시했다. 노동운동사 81

84 제5장 노동운동의 재기와 노동자 대투쟁 1. 전두환 정부 집권기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의 재기 1) 노동관계법의 개악과 노동자 배제 정책 신군부는 군사독재의 완전한 종식과 민주화를 열망하며 1980년 전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과 5 18민중항쟁을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게 사회구성원들의 진정한 바람은 반정부적인 것이었다. 또한 구 군부 시대와 이념상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신군부가 서민과 노동자의 빈곤한 삶에 대해 고민할 리가 없었다. 신군부에게 박정희 정부의 몰락과 서울의 봄 사이에 전개되었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 활동은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하고 혼란을 확산시키는 지극히 불손하고 불온한 행위로 여겨질 뿐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통제가 본격화되었던 것은 1980년 7월부터였다. 5 18민중항쟁을 경과하면서 한국 사회가 경색되고 서슬파란 공포 통치에 위축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신군부의 노동정책들은 이를 보다 구체화하고 실질화 하는 것을 의미했다. 신군부는 7월 1일부터 11월 12일까지 10회에 걸쳐 노동청을 경유하여 노동과 관련한 지침들을 한국노총과 산별노동조합 위원장에게 발송했다. 심지어 그동안 친정부 입장과 활동이라고 노동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던 한국노총과 산업별노동조합연맹의 대의원대회도 개최하지 못할 만큼 철저한 통제 일변도의 정책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8월 21일 하달되었던 노동조합 정화지침 과 8월 27일 하달되었던 노동조합 정화지침 보완 은 신군부의 노동정책 기조를 선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이를 경험했던 노동자와 노동조합 참여자들은 오늘날에도 손 사레를 칠 만큼 극단적인 것이었다. 이 지침들은 노동조합에 적극적인 참여자들은 구속, 해고, 삼청교육대에 입소를 시켰고, 노동조합을 해산시키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노동 부문에 대한 지침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던 신군부는 1980년 12월 31일 국가보위입법회의 에서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 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5 제정하여 공포했다. 이와 같은 노동관계법들의 개정과 제정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위한 법률적 기반을 구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화조치를 통해 노동 분야에서 조금이라도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거한 신군부는 노동관계법의 개악을 통해 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기업별 노동조합체계로 강제 전화시켰다. 개악된 노동관계법들은 1980년대는 물론 1990년대까지 노동법 개정운동이 계속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제대로 개선되지 않은 채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법률적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전두환 정부가 이때 개정한 주요 내용은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제3자 개입금지, 25) 노동조합 설립요건 강화, 기업별체계로의 전환, 유니온샵제의 폐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국 공영기업체 방위산업체 공익사업에서의 쟁위 행위 금지 등이었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1: 85). 그리하여 어렵게 일구어 놓은 민주노동조합들이 해산되거나 활동 중지 혹은 다시 어용화되었다.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와 생존을 대변하지 못하는 사실상 사용자측의 노무관리 기관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의 발생 건수는 해마다 급감하거나 사라졌으며, 노동쟁의의 다수는 휴 폐업에 따른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전개되었다. 1983년 말부터 유화국면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노동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블랙리스트 였다. 블랙리스트는 기업체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포되었는데,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블랙리스트에는 성명, 출신도, 성별, 주민등록번호, 근무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수도권 일대에서 노동자 입사와 해고자를 선발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1984년 1월부터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노동부 장관은 3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블랙리스트의 실재 등에 대한 질문하자 이를 전면 부인했다. 블랙리스트는 정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었지만, 정부의 묵인 혹은 비호 아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될 때까지도 계속해서 관리 및 활용되었다. 이와 더불어 해고자들의 복직운동도 전개되었다. 그런데 노동계의 이들 두 가지 쟁점은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이 다시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1984년에 이 두 가지 운동이 전개되면서 신규 노동조합들이 설립되기도 하고, 조합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자 의식도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야당이 크게 승리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형성되었다. 1985년 6월에 전개되었던 이른바 구로지역 노동조합 동맹파업 은 바로 이러한 노동 환경의 변화가 바탕을 이루어 전개되었던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이 무렵부터 노동조합운동이 재기를 위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5) 제3자 개입금지는 노동조합법 제12조 1항에 해당한다. 이 조항은 직접 근로관계를 맺고 있는 근로자나 당해 노동조합 또 는 법령에 의해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노동조합법의 설립과 해산, 노동조합에 가입 탈퇴 및 사용자와의 단 체교섭에 관하여 관계 당사자를 조종 선동 방해하거나 기타 이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 다 고 규정했다. 노동운동사 83

86 전두환 정부의 노동정책은 회사와 긴밀히 결합하여 강압적인 노동 통제와 공권력을 동원한 진압을 우선시했는데, 1987년 1월 1일 노동조합법을 개정함으로서 다시금 진면목을 드러냈다. 개정된 노동조합법의 쟁점은 상급단체가 단위노동조합 임금교섭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단위노조 조합원 과반수의 동의를 얻고 관할 행정관청에 신고를 거쳐야 한다는 것으로 사실상 현실성이 희박한 조건이었다. 또한 임단협 협약을 사업주와 단위노동조합 조합장이 반드시 체결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률적 조항들은 1987년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차츰 무력화되기 시작했고, 노동자 대투쟁 국면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 대투쟁 국면에서의 노사분규와 노동쟁의는 노동관계법을 대부분 무시한 채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마무리된 뒤인 그해 11월 30일 노동법 일부가 개정되었으나, 근본적인 내용은 유지되었다. 2) 1980년대 전 중반기의 노동환경 1980년대 전반기에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다양한 이유들로 노사갈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언론에서 확인되는 시점은 1984년 무렵부터였다. 갈등이 발생한 이유의 절대 다수는 임금 체불이었다. 임금 체불은 정부 수립 이후부터 해소되지 않은 노사갈등의 고질적인 사안이었는데, 당시의 정세를 감안할 때 언론에 보도가 될 정도이면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음에 분명하다. 임금 체불에 대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누적되었고, 이것이 격화될 때에는 종종 집단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했으나, 노동조합운동의 관점으로 고찰하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는 노동조합운동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 시기 노동조합운동의 규모가 소규모였던 측면도 있지만, 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방송과 언론이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 보도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신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노동자 배제하는 노동정책이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었던 1980년대 전반기에도 임단협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사용자측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거나 통제 하에 있었고, 집단행동은 엄두를 내기도 어려운 시기였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임단협 협상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노동부 광주지방사무소가 1985년 6월에 발표했던 자료는 이를 보여준다. 광주지방사무소가 주시했던 사업장은 상시 근로자가 100명 이상인 경우인데, 이에 해당하는 사례는 87개 업체였다. 그해 4월말까지 이들 가운데 60개 업체가 평균 6.1%의 임금을 인상했고, 27개 업체는 임금협상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였다. 흥미로운 점은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는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들 사이에 임금 인상의 수준이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이 결성된 47개 사업장 가운데 임금 협상이 이루어진 27개의 사업장에서 평균 7.8%의 임금 인상이 이루어진 반면,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은 40개 사업장 가운데 34개 업체에서 임금 인상이 이루어졌는데 평균 5.6%였다. 이러한 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7 점들은 노동조합이 결성된 사업장의 임금협상이 보다 까다롭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에 비례하여 임금 인상률도 높았음을 보여준다. 임금 수준을 보면, 약 10%가 저임금으로 평가되었다. 노동부 광주지방사무소가 1985년 4월에 발표한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광주시 소재 10인 이상의 사업장 가운데 월 10만원 미만이 지급되고 있는 저임금의 사업장들이었다. 1984년에 광주시 소재 10인이 근무하고 있는 1,800여 개 사업장 가운데 153개가 저임금 사업장으로 파악되었다. 1985년 4월에는 127개가 저임금 사업장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광주지방사무소의 저임금 지도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율이 매우 저조했다. 이와 같은 저임금 사업장들은 1986년 1월에 이르면 크게 감소했으나, 개선된 임금들 대부분은 10만원에 근접해 있었다. 5인 이상으로 확대해서 살펴보면, 1987년 1월 광주지방사무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월 1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는 노동자가 1985년에는 201개 제조업 사업장 가운데 92개 사업장 2,646명이었으나, 1986년에는 52사업장 1,601명이었다. 개선이 미흡한 사업장은 석유, 식료품, 전자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었다. 언론은 이러한 변화를 제조업체의 경기가 전반적으로 활성화되고, 정부의 저임금 해소를 위한 지도 효과로 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기가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1987년 임금 인상은 예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광주지방사무소는 1987년 4월까지 광주시 소재 100인상 사업체 117개사 가운데 임금인상 타결이 이루어진 경우는 64개(54.7%)로 전국의 평균에 비해 7.3%가 낮았다고 발표했다. 임금 인상률도 1986년과 비슷한 6~7% 수준이었다. 그런데 노동자 대투쟁 직전의 광주 전남지역의 평균 임금인상률은 1986년보다 오히려 후퇴한 상태였다. 광주 전남경영자협회가 100인 이상 기업들을 대상으로 5~6월에 조사한 87년 임금 조정 동향 에 의하면, 상반기 평균 임금인상률은 8.6%로, 이는 1986년보다 1.4%, 전국 평균보다 0.5%가 낮은 것이었다. 사용자측은 임금 인상 압박에 대해 불경기 시기의 부채 정리, 불황에 대비한 자본 축적, 재투자 등을 회피 요인들로 들었다. 이는 경기 호황으로 증가한 수익금을 사용자 또는 회사에 축적하고, 노동자에게는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목포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목포시에서 근무 여건이 매우 좋은 편에 속하는 행남사의 경우, 1980년대 전반기 노동자의 임금이 월 10만원 이하였다. 여성 노동자는 일당 2,620원에 야근수당은 시간당 100원을 받았고,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에 비해 1,000원 가량 더 받았다. 26) 이들의 임금은 각종 공제와 식대 등을 제외하면 생계를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조퇴는 급여에서 제외시켰고, 회사에 불만을 토로할 때는 강제 사직을 시켰다. 다른 후생복지 수준도 형식적이거나, 극히 미흡했다. 그렇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노동조합은 유명무실했고, 사실상 회사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김자룡, 2008: 100~101). 사업장의 작업 환경은 박정희 정부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열악했다. 무엇보다 광주 전남지역은 영세 사업장이 많아서 작업장 환경 개선에 투자할 자본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업종의 26) 호남고무는 초임 일당이 여자는 2040원이었고, 남자는 2,450원이었다(김자룡, 2008: 108). 노동운동사 85

88 특성상 작업장 환경 개선에 상대적으로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 당시 광주 전남지역에서 단일 기업으로 규모가 가장 컸던 전남방직을 사례로 살펴보면(이광석, 1986), 1,300여 명의 노동자가 교대 근무를 하는 작업장의 환경은 실로 심각했다. 작업장은 공정상의 한계로 인한 이유의 측면도 있었겠지만, 먼지가 날린다는 이유로 환풍기와 선풍기도 설치하지 않았으며, 먼지를 낙하시킬 스팀 장치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작업장 환경은 여름에는 한증막과 같았고, 겨울에는 건조한 실내 공기로 인해 호흡기 질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 조사 결과는 그 밖의 다른 업체들의 작업장 환경도 매우 열악한 상태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동시간 측면에서도 조사가 이루어진 51개 사업체들 가운데 70% 이상에서 주당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었다. 산업재해 처리의 경우는 13%만이 근로기준법에 따라 보상해주었고, 70%는 개인의 실수 등을 적용하여 등급과 지급액을 감액했다. 그리고 10%는 산재처리를 해주지 않고 치료비 보상으로 마감한다고 응답했다. 3) 노동운동의 재기 광주 전남지역은 5 18민중항쟁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말할 나위가 없고, 사회운동이 박멸된 상태였다. 사회운동가들 대다수는 계엄당국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폭력과 고문을 동반한 고초를 겪었다. 용케 화를 모면한 사람들은 도피 중이거나 은신하여 인적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단기간 구금되었거나 피해가 적었던 사람들도 대인기피증을 앓는 등 광주 전남지역은 5 18민중항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오랫동안 떨치지 못했다. 1980년 5월 이후의 광주 전남지역은 동토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1) 노동야학과 소모임 그리고 대학생의 현장 투신 5 18민중항쟁을 이후 JOC는 관련자들의 다수가 연루되어 활동이 조심스러운 상태였고, 무등교회를 중심으로 한 산업선교회의 활동도 위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70년대 말에 그랬던 것처럼, 노동야학 을 매개로 은밀하게 노동운동의 토대가 형성되도록 했다. 노동야학은 현장론의 주장이 구체화되었던 대안의 하나로 적극 모색되었다. 노동야학은 학생신분을 유지하면서 노동운동에 기여할 방안을 찾을 수 있는 접합점이었고, 노동야학을 경험했던 학생들은 직접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기도 했다(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엮음, 1988: 232). 광주지역의 한 야학이 1981년 사용했던 교육 커리큘럼을 보면, 국어, 근로기준법, 기초한문, 경제, 정치, 국사, 음악, 요구학습, 신문, 자유학습, 회의 등이었다. 1982년 중반부터 점차 활기를 되찾은 노동야학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학습이 중심을 이룬 소모임 형태를 띠었으며, 사회과학을 학습하는 소모임들도 다시 만들어졌다.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소모임들이 한때에는 100여 명에 이를 8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9 정도로 확대되었다(황효, 1993: 25). 5 18민중항쟁의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들불야학은 1981년 7월에 폐교했다. 하지만 관련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아니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강학들을 중심으로 무등야학 이 만들어졌다. 무등야학은 광주시 서구 농성1동에 소재했던 무등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학습활동을 계속했다. 백제야학 은 5 18민중항쟁으로 인해 관련자들 다수가 구속되거나 도피하면서 해산해야 했지만, 백제야학 졸업생들의 일부는 유대를 지속하면서 학습모임을 계속했다. 5 18민중항쟁이 종료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성되었던 샛별야학 은 농성동성당 교육관을 근거로 활동했다. 얼마 후, 샛별야학은 성당 앞에 건물을 얻어 모임을 지속하면서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임금론 등을 공부했다. 새별야학에는 동신강건에 일했던 다수의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983년에 어렵사리 노동조합을 설립했으나, 탄압을 받아 곧 해산했다. 농성동에 있던 또 다른 소모임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르나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했으나, 역시 곧 해산되었다. 여기에는 학생운동 출신가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고백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얼야학, 전남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Y야학, 황토야학(이후 용봉야학으로 개칭)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특성은 대학생의 노동현장 투신이었다. 앞서 잠시 본 것처럼, 대학생들은 각종 사업장들에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취업을 했고, 노동자들과 소모임을 갖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노동현장 투신은 1982년부터 차츰 늘어났다. 노동현장에 투신한 대학생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는 않지만, 광주지역에서만 많을 때는 70여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산되곤 한다. 학생운동 출신가들의 노동현장 투신은 점점 늘어났다. 이들은 초반에는 개인적으로 현장 투신을 준비하고 사업장을 물색했으나, 일정한 시점 이후부터는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방식으로 현장 투신을 준비했다. 노동현장에서 필요한 사전 학습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먼저 현장에 들어갔던 선배들로부터 교육을 받기도 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일부는 타 지역의 노동현장으로 갔고, 일부는 광주, 목포, 여천 등의 사업장으로 유입되었다. 광천공단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김전승, 김학덕, 김영곤, 조진태, 국윤택, 김영집, 고대호, 신양식 등이었고, 타 지역으로 갔던 사람들은 이수영, 조익문, 손태복 등이었다. 목포 지역 사업장으로는 나기백과 문현 등이, 여천공단건설 현장으로는 신동호와 장채열 등이 갔다. 그 외에도 윤영님, 기원필, 김경희, 최경희, 김화자, 인택, 윤난실 등이 노동운동을 위해 현장으로 갔다. 노동현장에 들어간 학생들은 철저히 신분을 감추었으나, 나름의 연결망을 통해 활동 방향과 소식 등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조직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업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모임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같은 사업장 내의 다른 활동가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할 만큼 개별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학습을 받았던 사상과 이념에 따라 현장에서 갈등하면서 고뇌했으며, 열악한 작업환경에서의 노동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활동을 노동운동사 87

90 중단하거나, 병이 들어 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과학 학습을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조합을 설립하거나 노동기본권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활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당시 노동운동가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사람은 도경진이었다. 그녀는 1982년에 전남대학교 가정교육과에 입학하여 민족문화연구회 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1984년에는 임동성당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황토야학 에서 강학으로 활동했다. 1985년 5월에 광주 광천동 소재 대하섬유에 노동운동을 위해 취업한 도경진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근로환경개선 투쟁을 벌이다가 발각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제적되었다. 김경희는 1981년 전남대학교 어문계열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하다가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서울 소재 한 봉제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가 1985년부터 광주로 내려와 북구 두암동 소재 대명전자, 서구 농성동 소재 한국에르나 등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활동은 곧 발각되어 해고되었으며,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학연대 투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대학생들의 현장 투신은 노동조합운동이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게 되면서 점차 축소되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다수는 해고되거나 새로운 사회운동을 찾기도 했다. 노동운동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노동자들의 해고도 증가했고, 이들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모임과 활동이 전개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6년 9월 10일부터 신민당 신기하 의원 사무실에서 해고자들이 벌였던 점거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2) 종교단체들과 노동운동 노동야학과 소모임이 종교 시설들을 이용하고 있었고, 종교인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1980년대에 종교와 노동운동이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가톡릭노동사목(노동사목), 그리고 한국기독교노동자광주지역연맹(기노련)을 들 수 있다. 첫째, JOC는 1970년대 말부터 광주를 중심으로 노동 현장에 개입하고 있었으며, 5 18민중항쟁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이광석, 1986: 234). 그렇지만 5 18민중항쟁 이후 JOC의 모든 업무는 정지 상태에 놓였다(김석순, 2012: 124). 1980년대 JOC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1980년 6월에 전국금속노동조합 호남전기(현 로케트전기)지부 지부장이었던 이정희가 보안사에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해고되었던 사건이다. 또한 호남전기 노동자였던 윤청자는 1983년에, 최연례는 1985년에 노동조합운동과 관련하여 각각 해고되었다. 이들이 해고되었던 배경에는 JOC가 있었다. 윤청자를 비롯해 JOC 회원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장소에 공간을 마련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공부했다. 이들의 활동에는 메리놀외방선교회, 골롬반외방선교회, 성베네딕도수도회 등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결합되어 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1 있었다(김석순, 2012: 127). 해고를 당한 윤청자는 광주가톨릭센터 5층에 위치한 JOC 사무실에서 가톨릭노동사목연구팀이 결성되는 일에 참여했다. 노동사목은 노동자들의 상담과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방안들을 고민하고 협의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1985년에는 여수시 여천공단 소재 석유화학 노동조합 설립에 필요한 노동자교육을 실시하여 노동조합이 설립되도록 지원했고, 1986년에는 대한상호신용금고 노동조합이 설립되도록 일조했다(김석순, 2012: 127). 둘째,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다. 광주에서는 1983년에 동신강건과 한국에르나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가 곧 해산을 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유사한 상황의 재발에 대비하기 위해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할 대안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신군부의 노동법 개정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이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되면서 개별 사업장의 노동조합들이 보다 심각한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광주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가 1984년부터 시작되었고, EYC 산하에 기독노동자회를 결성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때마침 서울에서 유동우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기독교 노동자 단체의 조직이 준비되고 있었다. 광주에서의 모임은 서울과 연결되어 협의를 한 결과 KNCC 산하 기구로 1985년 6월 16일에 한국기독교노동자연맹 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광주 전남에서는 1985년 2월 3일에 전남기독노동자총연맹 이 창립되었고, 이를 근간으로 광주시 임동 소재 낙동교회에서 노동자와 청년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기독교 노동자 광주지역연맹(기노련) 으로 개칭 출범했다. 아래의 기노련의 창립선언문은 이 단체가 무엇을 지향했는가를 보여준다. 짓밟힌 생명본능의 당면의 요구인 보다 인간다운 삶의 추구와 정의로운 사회실현을 위한 모든 노력 과 주장은 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노동정책과 이의 비호를 받고 있는 악덕 기업주들에 의하여 가차없 이 탄압받고 있다. 일찍부터 이 지역 노동자들은 이중의 수탈을 당해왔다. 모든 산업과 금융은 서울을 비롯한 일부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극도의 영세 기업과 높은 실업률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타 지역 노동자에 비해 훨씬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고 있다. 전남기독노동자총연맹은 그리스도 의 복음에 따라 이 지역 노동운동의 발전을 통하여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고 진정한 민주노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의 주체적 조직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전남지역운동의 중요한 한 부문운동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민주노동사회건설은 노동자 뿐 아니라 부 당한 제도와 세력에 의해 억압당하고 소외받는 농민, 도시빈민, 서민대중 등 모든 민중 전체의 강철 같은 단결과 확고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 지역의 각 부문운동과의 강력한 연대를 통하 여 우리의 힘을 결집할 것이다. 기노련은 5월 노동자 라는 책자를 발행하여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재기를 위한 발판을 노동운동사 89

92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노련은 공개기구로 활동을 시작하여 1986년 7월부터는 회원을 바탕으로 한 공개적 대중조직으로 전환했고, 198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27) 기노련은 단위사업장의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작업장 내에서 해내지 못하는 정치적 성격의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황효, 1993: 35, 38). 기노련의 활동에 대해 종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점, 조직의 위상이 단위 대중조직과의 연관성을 볼 때 불분명하다는 점 등에서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홍성우 강현아, 2003: 101), 당시 신군부가 통치하던 공안정국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노련은 1987년 3월 16일에 노동상담소를 개설하여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각종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했으며, 1988년에는 민중운동 이라는 저널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중순경에는 [민노위]에서 탈퇴하여 공개반합 대중조직으로 위상을 정립하고, 선진노동자 훈련을 위한 조직화에 역점을 두어 활동했다. 28) (3) 노동운동 지원단체와 연대기구 신군부의 노동자 배체 일변도 정책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노동운동을 복원하기 위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은 단위 사업장의 역량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사업장들은 정화 조치와 블랙리스트 관리 및 통제 등으로 인해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사업장을 넘어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했다. 1983년 12월 26일에 결성되었던 민주노동운동자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 나 1984년 3월 10일에 결성되었던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1983년 9월 30일에 결성되었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운동의 부문별 연대 단체들도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노동운동 부문의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러한 활동에는 종교단체들의 지원과 역할이 매우 컸다. 수도권에서 노동운동이 재기되었던 시점에 비하면, 29) 광주 전남은 다소 늦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5 18민중항쟁을 치유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고, 노동운동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 현장과 노동자의 규모에서 차이가 컸다. 광주 전남에서 종교의 특성을 띠지 않은 연대 단체의 성격을 갖는 노동운동 혹은 노동조합운동이 등장한 것은 1986년부터였다. 이들 단체들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운동을 다각적으로 지원하고,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대표적인 사례들과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85년 말 광주에서 임금인상투쟁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남기독노동자총연맹, 현장활동가, 남해어망 등이 결합하여 광주지역 27)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기노련의 향후 조직적 전망, 1989년 초반 제작 추정, 5, 17쪽. 28)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기노련의 향후 조직적 전망, 1989년 초반 제작 추정, 18쪽. 29) 1985년 1월부터 5월 24일까지 전국에서 90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것은 1984년에 발생했던 41건에 비교할 때, 반 년도 되지 않아 2배로 늘어난 수치였다. 노사분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임금인상 요구와 이익분쟁을 중심으로 한 단체교 섭이 증가였다. 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3 민주노동자 생활임금쟁취 투쟁위원회(민생투위) 를 결성했다. 민생투위는 제1차적 사업목표로 생활의 고통에 찌들을 대로 찌들은 광주지역 5만 여 노동자들의 너무나도 절박하고 절실한 요구인 생활임금의 확보를 위하여 우리들의 모든 요구와 힘을 하나로 결집하고, 이를 기초로 올해는 생활임금 일당 6,500원을 기필코 쟁취 할 것임을 제시했다. 민생투위는 금성기계, 에르나전자 의 사업장에서 임금인상을 위해 노력했으나,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그간의 활동에 대한 평가에서 내부 이견이 도출하고, 분열이 가속화되었다(황효, 1993: 37). 그리하여 민생투위는 1986년 5월 1일에 해체되었다. 30) 둘째, 민생투위가 해체되면서 공개기구론이 대두되었고, 활동가조직을 중심으로 1986년 9월말 비밀산별체계 조직을 재편하고 산별반합법구조로 광주지역노동자권익쟁취위원회 ( 전남지 역노동자권익재취위원회 에서 곧바로 개명)가 건설되었다. 이 조직의 구성원은 주로 학생운동 출신가들이었다(황효, 1993: 37~38). 그러나 이 조직은 비밀 활동이라는 한계에 직면하여 해체되기 시작했고, 1987년 2월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해산했다 31). 셋째, 노동자 대투쟁이 분출하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가 이를 지원하기 위해 7월 8일에 산하 기구로 민주헌법 쟁취 전남노동자 공동위원회(민노위) 를 발족시켰다. 민노위는 광주YWCA에 사무실을 두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헌법과 민주사회를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 조직임을 표방했다. 민노위에는 광주노동자위원회, 전남기독노동자연맹, 일꾼마당, 전남해고노동자복직운동협의회 등 광주 전남지역 노동단체와 노동자가 참여했다. 민노위는 발족성명서에서 경제성장의 주역이면서도 성과의 분배에서 소외된 노동자가 대접받는 사회가 이룩될 때 진정한 민주화임을 선언하고, 1 구속 노동자 즉각 석방, 2 해고노동자 즉각 복직, 3 언론, 집회, 시위, 결사, 사상의 자유 완전 보장, 4 8시간 노동제 실시, 5 노동자와 가족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즉각 실시, 6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3권의 완전 보장, 7 실업자의 생계보장 등을 요구했다. 민노위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면서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던 노동관계법 개정을 가장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파악하여 1987년 7월 15일에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 를 개최했다(황효, 1993: 37~38). 또한 민노위는 각 단위 사업장별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 의식 고양을 목적으로 소식지 민주노동 을 부정기적으로 발간했다. 민노위는 8월 22일 광주YWCA 강당에서 노동자 등 600여 명이 참석한 직장사회 민주화를 위한 광주노동자대회 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투쟁사례 발표, 토론회, 마당굿 순으로 진행되었다. 1988년에는 11월 10일과 17일에 기노련과 함께 광주지역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토론회 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지역 활동가들은 1 단일한 대중조직을 굳건히 건설해야 한다. 이는 산업별 형태를 지향해야 하며 그 과정으로서 상정해야 30)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기노련의 향후 조직적 전망, 1989년 초반 제작 추정, 3쪽. 31)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기노련의 향후 조직적 전망, 1989년 초반 제작 추정, 3쪽. 노동운동사 91

94 한다. 2 이는 민노협의 강화로 힘이 모아져야 한다. 3 지금 민노협이 포괄해내지 못하는 부분(미조직사업장, 어용노조 등)을 포괄해 내는 체제변환을 가져간다면 지금의 각 단체의 성격이나 위상의 변화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4 상설협력기구를 만들어서 위에서 말한 사항을 해결하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등에 합의했다. 넷째, 해고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했던 단체였다. 서울과 경기도 등지에서는 해고자 복직운동이 일찍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6월항쟁 이후 사회적 분위기가 호전되면서 실현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87년 7월 12일 150명의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목표로 광주 전남해고노동자 복직운동협의회 가 창립되었다. 주요 구성원들은 이화택시 해고기사, 로케트전기 해고노동자, 위장취업자, 광우라지에타 노조설립과정 중에 해고를 당했던 노동자들이었다(황효, 1993: 38). 이들은 1987년 7월 21일 가톨릭센터에서 집결하여 해고노동자복직으로 민주화 확인하자 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행진을 벌였고, 노동부 광주사무소와 민정당 전남도지부 앞에서 해고근로자 전원복직과 최저임금제 실시 등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1988년 2월 26일부터는 광주 전남지역 부당 노동행위로 해고된 노동자 일동 이라는 명의의 단체가 광주노총에서 연대농성을 전개했다. 농성 주도자들은 노동자 대투쟁 과정과 이후 노동조합 건립 등의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사람들로 하남의 광주레미콘, 서산콘크리트, 동일산업, 세화공업, 강진의 동일 콘크리트, 서산기업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1월부터 모임을 갖고 해고문제를 논의하다가 11명이 부당해고 살인행위 생존권을 보장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성명서를 배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32) 그 결과 3개 노동조합 해고자가 복직되어 1차 해산을 하고, 이후 노동자 1명을 제외한 모든 해고자도 복직되어 농성을 해제했다. 33) (4) 기념일 투쟁 노동절 투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전개되는 대표적인 노동운동이다. 그렇지만 한국전쟁 이후 노동자들이 노동절을 주도적으로 개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동절은 사실상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행사와 다를 바 없었다. 노동절 이 생겨날 당시의 기념일은 5월 1일이었으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승만 정부 말기에 3월 10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정부가 1963년 4월 17일에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등을 개정하면서 근로자 로 명명하고,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3월 10일에 기념행사를 개최해왔다. 따라서 노동절 행사를 노동자들의 주도로 개최한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과 같았다. 이러한 양상은 신군부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1984년에 광주에서 개최되었던 노동절은 32) 광주 전남지역 부당노동행위로 해고된 노동자 일동, 해고는 노동자의 사형선고, ) 노동자해방투쟁동맹, 광주 전남지역 6개 노조 노총 농성투쟁 평가서,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5 이를 잘 보여준다. 제39회 노동절 기념행사는 3월 10일 광주시민회관에서 도지사와 각급 기관장 그리고 노동자와 노동조합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행사의 중점은 국무총리 축사를 도지사가 대독하는 것, 훈 포장을 수여하는 것, 결의문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노동자의 의식을 그나마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실질임금 향상, 노동 3권 보장, 고용기회 확대, 부당노동행위 근절 등 9개항으로 구성된 결의문이었다. 결의문의 내용으로만 보면,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목표들과 거의 유사했다. 그렇지만 이 결의문은 그해 8월 5일 한국노총 위원장이 부당노동행위가 늘어나고 있다고 발표했던 것에서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듯이, 아무런 권한과 영향력도 갖지 않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실태는 1985년 제40회 노동절 기념행사에서도 거의 모든 내용들이 반복되었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를 대표한 도지사는 노 사간에 협동과 인화로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자 고 했고, 한국노총 전남도협의회 의장은 합리적인 소득재분배, 고용안정으로 최저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자 고 했다. 심지어 10개항의 결의문 내용까지도 비슷하다는 것은 지난해의 결의문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은 공염불임을 입증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부가 주관하는 노동절 기념행사와 다른 변화가 공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광주 전남의 노동운동이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 이 었 다. 1985년 에 도 노 동 절 행 사 는 5월 1일 로 환 원 되 지 못 하 고, 정 부 가 정 한 3월 10일 기념행사를 개최되었다. 보다 많은 노동자의 참여를 도모하고, 노동절에 대한 노동자의식 수준이 낮았던 당시에는 휴일이었던 3월 10일에 기념행사를 개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민사회가 주관한 노동절 기념행사는 종교단체들이 주도했다. KNCC 전남인권위원회와 EYC 노동선교분과 등 기독교 단체들은 광주YMCA 대강당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노동절이 5월 1일에 기념되지 못함을 규탄하며 마당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최했다. 한편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 단체들은 임동성당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와 100여 명의 학생 및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개최하고, 영화와 마당극 등으로 프로그램으로 하는 노동자위안 대잔치를 열었다. 이들 행사들은 5 18민중항쟁 이후 한국노총이 주관하던 기념식과 별개로 개최되었던 공식적인 첫 노동절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노동절 행사를 개최한 주체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계가 노동절 기념행사를 주관했으나, 기독교와 천주교가 각각 별도로 개최했다. 분명한 것은 이들 행사가 노동부문에 관한 역량이 재기하려는 노력이 외현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11월 17일에는 전남 JOC가 주최하여 가톨릭센터 7층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15주기 추모제 가 열렸다. 이것은 1980년대에 들어 전태일을 주제로 개최되었던 광주 전남지역의 첫 번째 공식 대중행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1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전남대 민족수호, 민중생존권쟁취 투쟁위원회 명의의 전태일 열사 15주기에 즈음하여 광주시민께 드리는 글 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했으며, 노동부 광주지방사무소에 노동운동사 93

96 화염병과 돌을 투척했다. 노동절 기념행사는 1986년부터는 본래의 기념일로 환원되는 듯했다. 1986년 4월 27일에 광주지역민주노동자생활임금쟁취투쟁위원회 주최로 1986년 임금투쟁 평가 및 메이데이 기념 제3차 실천대회 를 개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87년에는 다시 3월 10일에 남동성당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한국가톨릭 노동청년회 광주대교구연합회와 한국기독노동자전남지역연맹이 공동으로 주관했던 이 기념행사에는 500여 명의 노동자 등이 참가했다. 당일 전남지역 노동자선언 이라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는데, 당면 쟁점이 임금인상에서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제로 발전해야 하고, 정치투쟁도 지향해야 함이 제시되었다. 4) 노동자 대투쟁의 배경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자 대투쟁은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던 노동부문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5 18민중항쟁의 아픔을 아로새기며 사회운동의 재기를 가속하고 있었던 광주 전남에서는 노동자 대투쟁 직전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에 들어서 여러 노동쟁의들이 발생하고 있었고, 노동운동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도 보다 증가하고 있었다. 1987년에 들어서는 노동현장들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택시업계에서는 오랜 기간 임단협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고, 5월에는 광우라지에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987년 4월에 전국섬유노련 소속의 어망 회사들의 노동조합이 한국노총의 4 13특별담화 지지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앞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노동절 기념집회가 성황리에 개최되는 등 5 18민중항쟁의 후유증을 떨쳐버리고, 노동부문이 상당부분 활성화 되고 있었다. 2월 9일에는 광주시 소재 서광택시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3월 17일에는 기사와 가족 7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 농성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3월 8일에 표정두가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내각제 개헌 반대 를 주장하며 분신했다. 표정두는 호남대학교를 중퇴한 학생운동 경력자이지만, 노동 현장에서 몸담고 생활하여 광주 전남 여러 단체들을 자극했다. 아울러 1987년 1월 4일에 광주 고백교회에서 결성되었던 전남지역 노동청년회, 3월 16일 기노련이 노동상담소를 개소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1987년에 광주 전남의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운동 조직의 관계도 더욱 긴밀해지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무렵에 JOC와 노동사목은 광주어망, 남해어망, 전남제사, 삼양제사, 전일섬유, 한일합섬 등의 사업장들과 공장 내 소모임 조직이 구성되어서 활동하던 금호타이어, 아시아자동차, 대우전자 등의 사업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김석순, 2012: 124~125).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의 과정에서 부당해고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즉, 노동사목은 상담활동을 통해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등을 지원했고, 법률적인 부분은 지역 변호사들과 연계시켜 적절한 도움을 받도록 했다(김석순, 2012: 128).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전두환 정부는 경제적으로 3저 호황에 힘입어 자본이 양보할 수 9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7 있는 물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다. 경제성장은 곧 노동자의 확대와 이들의 확대를 의미했다. 전두환 정부 말기의 노동자는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정부 전 중반기 다른 성격을 띠어갔다. 경제는 호황을 이루고 있었지만, 기업들은 이를 노동자들에게 분배할 의사가 없었다. 1987년 광주지역 노동계의 임금협약 체결은 미진한 상태였다. 즉, 4월말에 100인 이상의 사업장들에서 임금협상이 마무리되어야 했는데, 노동부 광주지방사무소에 의하면, 5월 8일에 64개(54.7%) 업체만 임금협상이 이루어졌고, 이는 전국 평균 62%에 비해 낮은 것이었다. 이들 업체의 임금인상률은 동결이 15개(23.4%), 5%이 하 가 13개(20.3%), 5~7%미 만 14개(21.9%), 7~10%가 19개(29.7%)였 다. 그리하여 1987년의 임금 인상률은 1986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것은 3저 호황으로 형성되었던 성과가 노동자에게 적절하게 분배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광주 전남지역의 임금협상이 부진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본사와 다른 대도시의 결정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노동운동 1) 신군부 집권 초기 1970년대 노동운동은 대체로 여성노동자들이 집결되었던 사업장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광주 전남은 이러한 환경들이 취약한 형편이었다.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집결되어 있는 대표적인 노동 현장이었고, 1960년대에 집단 해고 등에 맞서 항거를 했던 사업장이기는 했으나,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소수만이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광주가 서울과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상원과 이태복이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전국 단위 비공개 반합법 노동운동단체 결성을 모색하여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을 설립했다. 1980년 4월 30일 인천시 부평에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 모임이 열렸는데, 윤상원은 발기인으로 참석했으며, 광주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80년 5 18민중항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국면에도 노동운동은 유신체제의 억압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활동은 광주 전남지역 모두에서 확인된다. 광주지역에서는 3월 21일 호남전기에서 전개되었다. 호남전기 노동조합은 당일 밤을 지새우며 단식농성을 전개하면서 해고자 복직, 노동자 탄압 기구 해체와 담당자 처벌, 체불임금 지급, 임금 인상, 복지 향상 등을 주장했다. 노사의 대치는 상당기간 계속되었는데, 3월 31일 회사가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종료되었다(광주광역시5 18사료총서편찬위원회, 1997a: 472, 497~498, 503~507). 5월에는 아시아자동차에서 해고근로자들이 노동자합의 어용성과 조합비 횡령 그리고 회사와의 유착 노동운동사 95

98 등을 밝히는 유인물을 배포했다(광주광역시5 18사료총서편찬위원회, 1997: 640~641). 전남지역에서는 1980년 초 목포시 소재 호남고무에서 발생한 노동쟁의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고무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위한 직권조정신청을 목포지역노조지부에 위임했다. 목포지역 화학노조지부는 임금인상 직권조정신청을 전라남도 노동위원회에 접수하여 현 임금보다 41%를 인상하라는 조정결정통보를 받았으나, 회사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3일간의 2차 쟁의에 들어갔다(당시 호남고무섬유노조지부장은 김재철).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회사 주변에 출동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경찰이 회사 내로 진입할 것에 대비해 괭이, 삽 등을 준비하고 농성했다. 회사는 노사합의를 통해 3개월 소급분 임금까지 지급하기로 하고 쟁의를 종료했다. 그러나 회사는 현금을 지급한 후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와 노동청에 전남노동위원회 직권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국보위는 이의를 받아들여 22%로 환원 조치하도록 했다. 이에 화학노조 목포지역위원장인 진완식은 상경하여 노동청에 항의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위원장은 관계기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5 18민중항쟁 이후 노동쟁의가 가장 먼저 발생했던 사업장은 목포시 소재 태원여객이었다. 1984년에 발생한 이 노동쟁의는 안내양 60여 명이 수입금 강요 철폐와 근로복지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하루 동안 승차거부를 벌였다. 34) 2) 신군부 후반기 광주지역 노동운동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이 재활하기 시작했던 것은 1985년부터였다. 1985년에 광주지역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사업장은 총 5개이다. KM사에서는 2월 15~28일에 민주노조 건설, 해고자 복직, 임금 인상, 환경 개선 등을 쟁점으로, 하남전자에서는 2월 25일~3월 29일에 노동조합 결성, 임금인상, 환경 개선, 퇴직금 지급, 비인격적 대우 철폐 등을 쟁점으로, 남해어망에서는 3월에 임금 인상을 쟁점으로, 로케트전기에서는 8월 29~31일에 민주노조 건설 등을 쟁점으로, 삼면스테인레스에서는 9월에 해고자 복직 등을 쟁점으로 각각 노동쟁의가 발생했다(이광석, 1986: 251~252). 1985년에 발생한 노동쟁의에 대해 중앙언론은 물론 지방언론도 대다수가 침묵했다. 아래에서 살펴볼 하남전자의 노동조합 설립투쟁은 1달여 동안 전개되었던 사건이었지만, 지역 언론은 한 건의 기사도 싣지 않았다. 1980년대 전반기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고찰은 이러한 특성을 충분하게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1985년부터 1986년 그리고 1987년 전반기에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했던 노동쟁의들을 각종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주요 쟁점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4) 이 노동쟁의는 문자로 확인되는 기록들 가운데 1984년에 발생한 유일한 노동쟁의 사례인데, 입증할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 다. 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9 (1) 제조업 1 하남전자 하남공단의 하남전자는 대우전자, 삼호전자, 삼성전자 등의 가전제품의 전자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로 연간생산액이 약 15억 원이었다. 하남전자 노동자들은 1985년 2월 25일 전남노총회관에서 89명 가운데 49명이 참여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엄혹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하남전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건립하려 했던 것은 근무환경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의 자료가 보여주듯이, 하남전자 노동자들은 장시간의 노동과 최저생계비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임금 등으로 극빈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오전 8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점심시간 10~15분을 빼고 저녁 9시 30분까지 13시간 정도 를 일해야 합니다. 하루 13시간 노동, 이것은 어느 기업에서도 볼 수 없는 최장시간의 노 동이었다. 그것도 의무적으로 저녁 7시까지는 일을 해야 하고, 7시 이후 부분에 대해서만 연장근로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 10시간을 의무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어 있 어 2시간만큼 부당하게 연장근로를 시켰다. 저녁 9시 30분까지 일했을 때, 500원짜리 자 장면, 거기에 한 달에 2~3번씩은 특근을 하게 되어 있고, 보통 1개월 평균 100시간 정도 의 연장근로를 하고 있어 건전한 가정생활이나 충분한 휴식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여기에 임금실태를 살펴보면, 남성노동자의 경우 평균 견습공이 일당 3,190원, 3개월 후 에는 3,520원(월 105,600원), 여성노동자의 경우 2,210원에서 3개월 후에는 2,450원(월 73,500원)으로, 1984년 5월 말 기준 노총발표 최저생계비 16만원(일당 5,533원)은 상상할 수도 없고, 노총의 최저임금 하한선인 월 10만원에도 못 미치는 기아임금에 시달렸다.(하 남전자노동조합탄압사건임시대책위원회, ) 35)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사용자측은 2월 26일 노동조합 위원장을 불러 온갖 협박을 하면서 회유했다. 27일에는 조합원 전원을 강제 연금시키고 3월 1일에 노동조합을 해산할 것을 강요했다. 사용자측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해산할 조짐이 없자, 3월 1일에 비조합원과 소극적인 조합원들을 집결시켜 노사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회사가 작성한 서류로 노동조합 해산식을 거행했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해산식을 반대했으나, 조합결성 4일 만에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3월 3일에 18명의 노동자들이 두 번째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노동조합 임원들로 선출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무 기간이 1년 미만이어서 노동조합법상 임원 자격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구성의 적법성을 두고 논의를 하다가 3월 15일 해산한다. 그러나 이 35) 홍성우 외(2003), 101~102쪽 재인용. 노동운동사 97

100 해산은 제3차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3월 17일 2차 노동조합 결성식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14명이 다시 모임을 갖고, 3월 29일에는 조합원 11명이 한국노총 광주사무실에서 단신 농성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처절한 활동의 결과 4월 1일에 노동조합 설립을 인가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 번에 걸친 농성투쟁이 전개되었고, 광산경찰서에 연행되어 2박 3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전남인권선교위원회, 신한민주당,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등이 공동으로 하남전자 노조탄압사건 임시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고 단식농성투쟁을 지원하면서 성명서, 지원방문 등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들이 바탕이 되어 노조설립을 인정한다. 퇴직금은 즉시 지급한다. 노조탄압을 하지 않는다. 취업을 보장한다. 탄원서는 철회한다 는 5개 항의 서면합의가 이루어졌다. 2 무등양말 36) 무등양말은 광주시 본촌동에 소재한 섬유회사로, 1986년 당시 설립 51년의 오랜 역사를 갖는 지역의 대표 기업체였다. 무등양말은 약 7백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2개의 공장이 있었고, 기업주는 대창운수, 대창석유를 비롯해 창평고 등 많은 기업체와 교육기관을 소유했다. 무등양말에서는 1985년 8월에 노동자들의 집단농성이 발생했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학생들의 지도로 임동성당 내에서 학습모임에 참가했던 향토야학 소속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농성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등양말 노동자들이 목표를 달성했던 노동쟁의는 1986년에 발생했다. 무등양말에서는 8월 25 26일에 170여 명의 노동자가 단식 파업 농성을 통해 월차생리휴가 지급과 사칙공개, 중식 개선, 상여금 170% 획득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9월 15일에 문옥자를 위원장으로 하는 노동조합 설립하고, 17일에 광주시청에 서류를 접수시켰다. 그러자 회사 측은 구사협의회 를 결성하여 9월 22일까지 노조원 탈퇴와 탄압 그리고 폭행 등을 단행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회사 측의 폭력을 피해 도망친 60여 명의 노동조합원들은 고백교회, 한빛교회, 무등교회 등을 전전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23일부터 한빛교회에서 농성했다. 이 가운데 15명의 노동조합원들은 전남 기노련에서 농성을 하면서 광주노동자들에게 드리는 글, 호소문,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부모님께 드리는 글, 무등양말 동료 여러분께 등을 제목으로 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사용주는 9월 23일 노조위원장 등 노조 임원 8명을 상관폭행과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했다. 24일에는 본촌공단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던 노조원 이재옥 등 3명이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았고, 농성장 앞에서 기노련 회장 정봉희가 연행되어 집시법, 3자 개입금지 조항 위반, 국가보안법 등으로 구속되었다. 이에 9월 24일 광주지역 민주화운동 16개 단체는 무등양말 노조탄압 전남지역 공동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고, 불매운동과 항의규탄을 했다. 회사 측은 유인물과 구사회를 활용해 36) 이에 관한 내용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1987), 166~167쪽에 의거해 작성되었다. 9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1 계속 압박과 강경 자세를 고수했다. 28일 광주지역 노동자 100여 명은 무등양말 노조탄압 규탄 실천대회 를 개최하고, 농성장 앞에서 지지 시위를 벌였다. 8월 29일 한빛교회 목사 등과 노동자 대표 그리고 회사 측은 총 4개 항의 합의를 보았고, 노동자들은 당일에 농성을 해산했다. 그렇지만 회사 측은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았고, 9월 1 4일 회사에 출근한 노동자들에게 온갖 수모와 폭행을 가하고, 혈서와 각서를 작성 및 낭독, 충성맹세 등을 강요하면서 협박과 공갈을 그치지 않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조합원 40여 명이 사직했다. 1986년 8월의 무등양말 노동쟁의 및 노동조합 결성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했던 매우 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업주가 신군부의 통치체제에 편승하여 다양한 형태의 탄압을 자행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특별했다. 이 노동쟁의는 8명 해고와 40명의 강제 사표 그리고 노동운동가의 구속 등으로 마무리되었으나, 5 18민중항쟁 이후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연대하여 단체를 결성하여 파업을 지원했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혼합되어 분출되었던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황효, 1993: 31). 3 로케트전기(호남전기) 건전지 생산업체인 로케트전기 노동자들은 1985년 8월 29일에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인 조합원에 대해 부서 이동과 사직 협박 등을 하자, 이에 맞서 싸웠다(이광석, 1986: 234). 100여 명의 조합원들은 사무실을 점거하고, 부당 노동행위 중지, 강제 사직 즉각 철회, 어용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의 강제사직 및 사직 공고 통보 즉각 철회, 노동조합 및 조합원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즉시 중지, 어용 노동조합 집행부 전원 퇴진, 조작극인 대의원대회는 무효, 회사는 더 이상의 부서 이동을 중지하고 원직에 복직시켜라 등을 담은 우리의 주장 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항거했다(황효, 1993: 33). 하지만 사용자측은 8월 30일에 관리직 사원과 남자종업원을 동원하여 강제로 농성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조합원 4명에게 1주일의 근신을 처분했다. 4 한국에르나전자 한국에르나전자의 노동자들은 작업의 특성상 여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1986년 1월 14일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이 사건은 외국자본(일본인 사업주)에 대해 광주지역 최초의 파업이 발생한 것이었다 37) 전라남도, 2003: 343). 노동자들은 쪽바리 게다짝 잇속 채워주는 현대판 이완용 같은 회사, 한국에르나 라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사업장의 실태를 알렸다. 1986년 4월 1일에는 임금 28%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전개되었다(황효, 1993: 31, 39). 37) 전라남도(2003: 343)는 이 사건을 광주지역에서 외국계 회사를 상대 전개되었던 최초의 노동운동이라고 했으나, 이는 옳지 않다. 노동운동사 99

102 5 신흥금속 노동자의 분신 항거 1987년 2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하적장 부근에서 표정두가 분신했다. 표정두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에서 출생했고, 광주 송정중학교와 대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3년에 호남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으나, 1986년에 학교를 자퇴학고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1987년 2월에 광주 하남공단 신흥금속에 입사하여 노동자로 생활했다. 표정두가 분신하면서 주장한 것은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 는 구호를 외치면서 주한미대사관 앞으로 30미터 가량 달리다 쓰러졌다. 이때 행인 2명이 발견하고 웃옷을 벗어서 불을 끄려고 했으나, 끄지 못하고, 교통경찰 2명이 근처 가게에서 분말소화기로 불을 껐다. 이후 고려병원으로 이송되어 담당의사에게 나는 광주 사람이다. 광주 호남대학을 다니다가 돈이 없어서 그만두고 하남공단에 있는 신흥금속에서 근무 중인 노동자다 라고 말하며 집 전화번호와 유서를 인근 다방에 놓아두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분신 당시의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반대 라는 쪽지와 슐츠의 방한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신문 뭉치 등이 들어 있었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42) 표정두의 시 친구야. 오월의 화려한 계절의 자유도 잠시 뿐. 오월의 화려한 계절의 해방도 잠시 뿐. 지금은 모두 다 비싼 눈물로 잠들어 버리고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여러 천년의 기억 속으로 달음질한다. 생명의 시작과 끝이 같다고 믿는 모든 이들을 너와 나의 축제에 초대하자. 6 기타 1987년 4월에 전국섬유노련 소속의 어망 회사들의 노동조합이 4 13특별담화를 지지하는 한국노총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5월에는 광우라지에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2) 운수업 1980년대 전반기 노동쟁의에서 운수업은 다른 부문들보다 선행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택시업계에서 주로 발행했다. 택시업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노동쟁의의 쟁점은 사납금 과 1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3 관련된 것이었다. 1985년 1월 초부터 광주시 택시업계는 사납금을 두고 노사의 충돌 조짐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당시 택시노동자는 평일 48,000~50,000원, 토 일요일은 52,000 55,000원의 사납금을 납부해야 했고, 연료비도 각자가 부담해야 했다. 이 정도의 수익은 준법운행을 하지 않고, 18 20시간 동안 운전할 때 가능한 수준이었다. 사납금은 택시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가장 절박하게 사안이었고, 이는 사업주의 이해와 충돌이 불가피한 사안이었다. 사납금을 둘러싼 광주시 택시업계 노사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가자, 1985년 1월 18일 노동부 광주사무소 회의실에서 한국노총 전남도협의회 의장, 광주사무소장, 79개 택시업계 노동조합장 등이 참석한 노 정 간담회가 열렸다. 조합장들은 사납금의 일원화와 복지 증진, 노동부 주관 노 사 정 대화기구 설치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간담회의 성과가 가시화되지 않았다. 그러자 1월 24일 광주택시노동조합 조합장 40여 명이 전남택시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사납금제 폐지, 월 16일 근무의 만근, 우수업체 및 개인택시 심사위원으로 노동조합 대표 참가의 의무화, 지정주유소 철폐 등을 요구했다. 26일에 경영주 대표들과 노동조합 조합장들은 2월 5일부터 사납금 납입제도를 폐지하고, 타코미터기에 의해 운송수입금을 납부한다는 것을 비롯해 제 쟁점들에 합의했다. 이는 전국 최초로 사납금 납입제도를 폐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하지만 이 합의 이후에 사용주들은 택시노동자들을 개인별로 협박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보복했다. 그래서 택시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은 사납금 납입제도가 재개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더불어 최저생계비를 보장받기 위한 임금인상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은 3월에도 계속되었다. 38) 한편 1985년 임단협 협상은 5월 24일부터 10여 차례 개최되어 6월 15일에 타결되었다. 협상의 주요 내용은 월 15일 만근에 25만원의 임금이 지급된다는 것이었고, 그 외 상여금 인상, 노동조합 조합장의 전임 일수 합의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노동조합들은 회사의 공작과 결탁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따라서 노동조합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민주노동조합 설립이 시급했다. 그리하여 많은 노동쟁의의 쟁점으로 민주노동조합 설립운동이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광주시 소재 한일택시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6월 17일 한일택시 노동자 18명은 사내 기사 숙소에서 농성을 하면서 민주노동조합 설립과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 사항은 조합원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중지, 어용집행부 퇴진 등이었다(황효, 1993: 29). 노동자들이 주장한 주요 구호는 사납금을 자율화하라, 사납금 가불금을 환원하라, 예비군 훈련시 수당을 지불하라, 세차비를 환원하라, 노동조합 탄압 말라, 년차 수당 지급하라 등이었다. 1987년에는 3월말부터 임단협 협상이 시작되어 6월 초까지 20여 차례의 교섭이 진행되었다. 38) 1985년 3월 10일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제40회 노동절을 맞이하면서 발표했던 노동자의 노동절을 위하여 라는 유인물 의 내용 전반가량이 택시노동조합의 노동쟁의에 관한 것이었다(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1997b: 576~577). 노동운동사 101

104 장기간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안에만 합의가 이루어졌고, 수입금 납부 형태와 월 급여 액수 등 핵심 쟁점들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임금 25.8% 인상을 주장했지만, 사용자측은 전년도 수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6월항쟁의 막바지였던 27일에 임금 9% 인상과 별도의 업적금 등을 지급하는 것에서 합의를 보아 타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택시업계 전반에 효력을 갖지 못했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광주 신흥택시와 유창택시 그리고 이화택시 등에 소속된 택시기사들이 6월부터 7월 초에 이르기까지 철야 농성을 전개했다. 이러한 흐름들은 곧이어 전개되었던 노동자 대투쟁으로 합류되었다. (3) 건설 산업 : 홍기일의 분신 전두환 정부시기에 건설과 산업 분야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이 전개된 사례들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1987년 4월에 광주시 소재 레미콘 회사들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동쟁의가 발생했다는 것 정도이다. 그런데 임단협 협상과 달리 살펴보아야 할 사건이 있다. 그것은 5 18민중항쟁 이후 광주시에서 민주화를 호소하는 분신자가 발생했는데, 그는 건축노동자 홍기일이었다. 홍기일은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출생했고, 전남중학교 3학년을 중퇴했다. 그는 1980년 5 18민중항쟁에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그는 건축노동자로 생활했다. 인천직업훈련원을 마친 그는 1984년 2월에 사우디에 미장공으로 취업하여 근무하다가 1985년 3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경기도 화성군에서 노동일을 했다. 그는 8월 1일에 건축 노동을 하여 벌어온 62만원을 부모님께 전해드리면서 나의 마지막 효도가 될 것 같다 고 했다. 14일 저녁에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잘 있거라.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1985년 8월 15일 낮 12시 40분경 광주시 동구 금남로 1가 YMCA와 광주관광호텔 사이 차도에서 홍기일은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다음 불길에 휩싸인 채 광주시 동구청까지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그는 8 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 라는 제하의 유인물 50여장을 배포했다. 그는 전남대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홍기일의 분신 소식이 알려지자 전남지역의 15개 시민사회단체는 당일에 민주투사 홍기일 분신 항거 대책위원회 를 결성했다. 대책위원회는 이날부터 홍기일의 장례식이 개최된 다음 날인 8월 25일까지 일보전진 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총 8호까지 제작 배포했고, 민주투사 홍기일 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했다. 8월 22일 새벽 0시 30분 경 홍기일은 임종을 지켜보는 아버지에게 절대 비굴해지지 마십시오. 저 사람들(경찰)과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의사가 산소호흡기를 제거하자 사망했다. 그렇지만 산소호흡기를 제거하자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고 팔다리가 움직인 점, 그리고 22일 오후 인위적으로 강제 산소호흡을 시켰던 점 등에서 그의 사망 시간을 새벽으로 늦추어 경찰이 시신을 임의로 처리하기 좋게 하려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10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5 그가 사망하자 경찰 1,000여명이 재야인사와 시민 그리고 학생을 강제 연행했다. 또한 경찰은 형을 따라 죽겠다, 열사를 두 번 죽일 수 없다 는 동생과 가족들의 절규 속에서 시신을 탈취, 미리 준비한 관에 입관하여 영구차 승차를 거부하는 유족들을 구타, 위협하면서 아버지를 화순군 도안면 백제리 야산의 매장지로 강제 동행시켜 아버지 입회하에 가족장으로 관을 매장했다. 이에 대책위원회는 8월 24일 한빛교회에서 장례식을 개최하기로 했는데, 경찰은 이를 차단하고 조문객 36명을 비롯해 아버지까지 사전 연행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서울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야단체 인사들이 광주로 내려가려고 함을 인지하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간부 등 14명에 대해 자택 감금을 시도했는데, 민통련 부의장 계훈제와 동월교회 허병석 목사 등 8명의 소재가 불분명했다. 8 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 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가 자유가 뜨거움의 아픔으로 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아픔이 아픔 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4강의 각축장에서 미국은 미국의 안보를 위한 (한국의 핵기지화와)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한계를 넘 어 군사적(문화적) 침략에 우리 민족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현 전두 환 군사정권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의 대한침략의 길을 더욱 개방함으로써 우리들의 사상과 주체성이 서서히 허물어짐으로써 이 현실의 8 15의 의미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현 정권의 무책임한 정책으로 인하여 날로 가속화 되어가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종속은 농촌과 도시산업의 파괴로서 서서 히 다급하게 말라죽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대오각성을 해야 합니다. 온갖 억압의 배 고픔보다 우리 스스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속의 배고픔)에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 들의 주체성이 아주 결여되어 있습니다. 민주의 앞이 민족의 아픔이 민족통일의 아픔이 온갖 허위와 쾌락과 무지와 몽둥이의 두려움 속에 잠 들고 있습니다. (저 사랑하는 동생과 어린 자식의 노동자를 보십시오) 침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마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담해야 합니다. 뭉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만세! 민족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무등을 사랑하는 홍기일 3) 신군부 후반기 전남지역 노동운동 이 시기 전남에서 발생한 노동운동은 드물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내용도 확인되지 않는다. 39) 39) 이 내용은 목포시(1990; 76)와 목포개항백년사편찬위원회(1997; 381)에 의거해 정리함. 노동운동사 103

106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건은 1984년 목포시 소재 태원여객 안내양 60여 명이 수입금 강요 철회와 근로복지시설개선 등을 요구하면 1일 동안 승차거부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 노동쟁의는 회사와 원만한 타결을 보아 바로 종료되었다. 1985년에는 목포시 택시업계인 (유)영진기업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4월 4일 이 회사 조합원 19명은 노동조합장 재선과 관련한 내부의 갈등과 납입금 강요의 시정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갈등은 회사가 주동자를 고소하여 관계법에 의해 처리되고, 수입금 문제는 완만히 합의되어 쟁의가 종결되었다. 목포시 택시업계의 노동쟁의는 광주지역 택시업계의 노동쟁의가 일단락된 이후 같은 쟁점들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앙교통, 우진택시, 상무택시 등에서 수입금 문제를 둘러싼 쟁의가 있었다. 같은 해 9월 24일에는 목포 남도택시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납입금 강요와 노동자 폭행을 규탄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 폭행을 당한 노동자가 사업주를 고발했던 바, 관계법에 의해 처리되면서 노동쟁의가 마무리되었다. 3. 노동자 대투쟁 광주 전남의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었던 기간은 대체로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로 한정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광주 전남에서 발생한 모든 노동쟁의의 통계는 9월 9일을 기점으로 살펴보면, 광주에서는 39건, 전남에서는 67건 등 총 106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전남에 포함되어 있었던 송정시(현 광산구)에 하남공단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광주보다는 전남에서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한 노동쟁의 발생 사례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노동쟁의들은 회사택시업계 제외하고는 대부분 9월 8일로 타결이 되었다. 광주 여수 순천에서 전개되었던 회사택시업계의 노동쟁의는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고, 새로운 노동쟁의가 발생하기도 했다. 노동부 광주지방사무소는 7월 30일에 6 29선언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광주 전남에서 14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지만, 언론에서는 이에 관한 내용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의 개연성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하나는 언론에 보도될 만큼 노동쟁의가 심각하지 않거나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에서 이를 중요한 사안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살펴보면, 7월 21일 시작되었던 여천공단 내의 호남에틸렌의 노동쟁의를 주목할 수 있는데, 이는 회사합병에 따른 사안이 쟁점이어서 노동자 대투쟁의 일반적인 흐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 대투쟁의 흐름에서 보면, 7월 27일 발생한 일성섬유공업사의 노동쟁의가 의미가 큰 사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기를 다룬 자료들과 기록들에서도 이 사업장의 노동쟁의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고, 언론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다루었다. 광주 전남의 노동자 대투쟁은 산업시설과 노동자들이 집결된 도시와 공단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들에서의 노동자 대투쟁은 조직적 체계를 갖추지 않았고, 일관된 구조를 10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7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수업에서는 회사들 사이의 연대 행동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사업장들의 경우에는 회사별 개별 파업의 형태를 띠었다. 그래서 도시 내에서 사업장들 사 이의 상호성과 연대 활동이 미약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공간을 중심적으로 고려하여 노동자 대투쟁의 전개 양상과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광주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1) 제조업 제조업에서의 노동자 대투쟁은 대체로 10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던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들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기도 했지만, 사업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노동자 대투쟁은 임금인상과 더불어 민주노동조합 건설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자 료 로 는 7월 18일 에 대 양 섬 유 에 서 근 로 기 준 법 위 한 시 정 요 구 서 명, 7월 20일 대하섬유 에서 상여금 인상 요구와 금호타이어 하청업체로 금형을 제작하는 광산구 소촌공단 소재 트라이센 에서 임금인상 요구 파업이 있었다. 7월 21일에는 광우라지에이타에서, 22일에는 그랜드호텔에서, 24일에는 삼양버스 정비공이, 26일에는 대하전자에서 노동쟁의가 촉발되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 이들 사업장들에서의 노동쟁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유사한 업종과 회사 규모의 노동쟁의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회사 측의 대응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폐업하거나 노동자의 요구 조건을 최소 수준에서 수용하는 것이었다. 1 일성섬유공업사 광주시 북구 유동에 위치한 일성섬유공업사는 백양메리야스의 하청업체였다. 일성섬규공업사의 노동쟁의는 이 지역 내에서는 비교적 빨리 발생한 것이었고, 노사갈등에 대응도 서툴렀다. 그리하여 노동자 대투쟁의 국면의 노사갈등으로 전국에서 처음 직장폐쇄가 이루어졌던 사업장으로 기록되었다. 노동자들은 7월 27~28일 업무를 마치고 각각 2시간 동안에 상여금 400% 지급, 시간외 잔업 폐지 등 6개항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하지만 사용자 측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7월 29일 7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마친 후 철야농성을 벌이면서 사용자 측에게 수용 여부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용자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7월 30일에 폐업신고를 했다. 7월 31일에 노사는 근로감독관 입회하에 8월 10일까지 폐업수당 1개월분과 7월분 임금을 지급할 것임을 합의하고 해산했다. 회사가 폐업을 했으나, 20여 명의 노동자들은 농성을 계속하며 회사를 되살리기 위한 운동 을 노동운동사 105

108 한 달여 동안 전개했다. 그 결과 9월 1일에 회사명을 선일섬유 로 개칭하여 재가동되었다. 노사는 상여금 100% 신설, 임금인상 문제는 사용자 측에 일임하며, 희망자에 한해 취업을 보장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2 금호타이어 중소기업에서의 노동쟁의가 소강국면에 접어들자 대기업 사업장들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첫 사례는 송정시(광산구) 소촌공단 소재 금호타이어였다. 8월 6일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 과 임금 및 상여금 인상 등 10개항의 수용을 요구하며 본관 앞 잔디밭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분진과 고열로 인한 열악한 근로조건을 상징하기 위해 온몸을 그을린 허수아비를 농성 현장에 세워놓았다.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노조쟁취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노사협정을 벌였다. 회사는 민주노조쟁취대책위원회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사용자 측이 1차 협상을 통해 타결했던 6개항의 합의사항을 폐기했다. 금호타이어 노사는 12일에 상여금을 100% 인상하여 500% 지급 등 12개 항에 대한 합의를 했지만, 임금인상은 1988년에 교섭하기로 했다. 그동안 노동자 800여 명은 5차에 걸친 협상을 갖고 어용노조 퇴진, 상여금 500% 지급 등에 대해서 합의를 보았지만, 임금 30% 인상과 연봉제 부활에 대해서는 민주노조가 설립되면 즉시 검토하겠다고 답변하여 일부 노동자들이 13일 새벽까지 농성이 벌어졌던 것이다. 회사는 협상 타결의 분위기를 지속시키기 위해 8월 14일 노동자 3천여 명을 공장 운동장에 집결시키고 근로자 결속대회 를 개최했다. 박정구 사장까지 참여했던 이 결속대회는 회사 발전을 위해 노사가 단합하자고 제창했다. 그러나 회사의 이러한 행동이 무의미한 것임은 곧 확인되었다. 이는 금호타이어 정상화의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 총회에서 드러났다. 15일 개최된 총회의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절대다수의 노조원들이 파업에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근거가 되어 노사협상이 재개되었으나, 타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사협상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8월 15일 정상조업이 시작되었으나, 8월 26일 600여 명이 조업을 거부하고, 심야수당 50% 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3 아시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 노동자 1천여 명은 8월 11일부터 종합사무실 앞에 집결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어용노조 퇴진, 기본급 25% 인상, 상여금 인상, 가족수당 신설, 자격수당 일률지급, 휴게실과 오락실 등 복지시설 확충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의 수용을 주장했다. 회사는 다른 사항들은 수용할 수 있지만, 임금인상은 기아그룹 본사와 협의 중에 있으므로 응답할 수 없다고 했다. 회사는 12~14일 휴업을 하겠다는 공고문을 게시했다. 노동자들은 만족스럽지는 못했으나, 8월 12일 농성을 해제했고 13일 1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9 노사협상을 잠경 타결했다. 노사협상은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8월 17일에 최종 타결이 이루어졌으며, 18일부터 정상 조업이 시작되었다. 18일에 출근한 노동자 1,500여 명은 노조위원장이 임금인상 등은 기아그룹측의 조정에 따른다 는 등 14개 노사합의 사항을 발표하자, 500여 명이 불만을 표시하며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아시아자동차 사장은 노동자들을 설득했고, 이에 농성을 해제했다. 아시아자동차는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계열부품업체들의 휴업 등으로 인해 부품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시한부 휴업에 들어갔다. 아시아자동차의 노동쟁의는 9월 11일 오후에 재개되었다.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당초 제시한 14개 요구사항에 관한 노사협의가 흡족하지 않다고 농성을 벌인 것이다. 이 농성은 회사 측의 설득으로 4시경에 해산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던 아시아자동차의 노동쟁의는 12월 28일에 1,8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연말보너스 150% 지급을 요구하며 작업 거부가 단행되었다. 4 대우전자 주방기구와 음향기기를 생산하는 하남공단 내 대우전자의 노동쟁의는 (다른 기록에는 7월로 되어 있음) 8월 13일부터 개시되어 28일에 타결되었고, 31일에 정상 조업에 들어갔다. 대우전자 노동쟁의의 쟁점은 총 18개항이었다. 생리 월차 연차보장, 학력별 임금 격차 해소 등 12개항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합의되었으나, 임금인상, 상여금 600% 지급, 근속수당 인상, 가족수당 지급 등에 대해서는 합의가 지연되었다. 또한 어용노조퇴진과 직선제 실시도 핵심 쟁점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상황의 전개에 따라 농성 해제와 재개를 했으며, 농성을 진행하는 동안에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노동자들은 8월 14일 임금인상 등 17개 항의 요구 사항에 대한 협상을 노동조합에 일임하여 타결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 후 농성을 해제하고, 15일에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당초 노동자들은 18개 항을 요구했지만, 17개로 줄어든 것은 회사측이 농성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현재의 노동조합을 통해 협상을 벌이자고 제의함에 따라 어용노조 퇴진, 직선제 실시 를 요구사항에서 제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1일에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농성에 돌입했다. 이러한 결집력을 바탕으로 28일 오후에 민주노조 대표 윤양준과 회사 측 대표 이영서 전무가 기본급 2만원 인상, 금년 말까지 노조지부장 직선제 선출 등 4개항을 합의했다. 그런데 이후에도 또 한 차례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일부 노동자들이 18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벌였는데, 9월 26일 휴가와 월차 등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았으나, 임금 및 수당과 관련된 항목들에 대해서는 합의가 지연되었다. 노동운동사 107

110 5 금성알프스 금성알프스 공장에 8월 13일 직장민주화추진위원회 를 명의로 하는 금성알프스 근로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 이라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유인물은 1 임금인상을 일률적으로 1,000원 이상 인상하라, 2 상여금 550% 지급하라, 3 어용노조 즉각 퇴진하라, 4 생산직 근로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라 등 10개항이 명시되어 있었다(황효, 1993: 43). 그러자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회사 정문 앞 광장에 모여 11개 항의 수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회사는 부품공급 조달이 안 된다는 이유로 14일부터 17일까지 휴무를 선언했다. 휴무가 해제된 18일에 출근한 6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등 8개 항의 요구사항을 내 걸고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회사는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 고 강조해왔다고 이를 역이용하여 구호로 사용했다. 당시 금성알프스는 임금을 일당으로 지급했는데, 최저가 3,400원 최고가 3,900원이었다. 19일에 노동자들은 24일까지 요구 사항에 답변하겠다는 회사의 약속을 받고 업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는 노사협상이 타결된 것은 아니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한다고 했으나, 8월 31일에 개최된 그룹 차원의 중앙노사위원회 협의가 결렬되면서 이러한 합의마저 무산되었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기존의 노사합의보다 요구 조건을 더 강화하여 일당 1,500원 인상, 보너스 600% 지급 등 11개 항으로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2일부터 무기한 휴업을 발표했다. 6 일신방직 광주시 북구 임동에 소재한 면방업체인 일신방직에는 남자 286명, 여자 2,344명 등 모두 2,630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일신방직에서는 면산과 직물 등을 생산했고, 쌍방울, 태창, 백양 등에 공급되었다. 일부 노동자들이 7월 초부터 출근 거부 투쟁을 벌였으나, 노동쟁의가 본격화된 것은 8월 중순부터였다. 8월 18일 오후 일신방직의 노동자 60여 명이 민주노조 결성을 직선제로 할 것과 기본급 3만원씩을 일률적으로 인상해 줄 것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일신방직 민주노조 결성위원회 명의의 우리의 요구 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유인물에는 1 어용 노조 퇴진, 2 임금 기본급 3만원 인상, 3 1호봉 당 여성근로자 150원, 남성근로자 250원 지급하라, 4 상여금을 600%로 인상하라, 5 월차 생리 수당으로 지급하는 것을 휴가로 시정하라, 6 남자사원 심야업무의 잔업수당 지급하라 등의 10개 조항이 수록되어 있었다(황효, 1993: 42). 19일에 농성자가 5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올려라 올려라 임금 올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당일 밤에 남성노동자 20여 명이 농성장에 합류하자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농성을 주도하는 노동자들은 1985년 12월부터 1986년 11월까지 당기순이익이 69억 원이었는데, 기본급 3만원 인상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라 고 호소했다. 일신방직의 노동쟁의는 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20일까지 계속되다가 15개항의 요구조건이 수용되면서 타결되었다. 10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1 7 광우라디에이타 광산군에 위치한 광우라디에타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노동쟁의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첫 번째는 7월 21일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리고 8월 18일에도 노동자 20여 명이 노동조합 결성을 탄압하지 말 것과 해고 근로자의 복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노동쟁의는 19일에 노사 합의를 이루어 타결되었다. 하지만 사용주 측은 이들 노동자들 가운데 13명을 근무지를 이탈하는 등 사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8월 20일 해고했다. 광주 전남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이와 같이 사용자 측이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 주장에 대해 해고라는 극단적인 처분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다. 이를 달리 살펴보면, 광우라이에타의 노동조합운동 환경이 극히 열악했고, 노동조합에 대한 사용자측의 인식과 대응이 시대적 흐름에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8 기타 광주시 서구 광천동 소재 삼면스텐레스 노동자 100여 명이 7월 29일부터 근속장려수당을 현금으로 지급할 것 등 9개항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당일에 노사협의가 진행되었고, 휴가비 90% 지급, 상여금 100% 인상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삼면스텐레스 는 노동자의 요구를 최소 수준으로 수용한 사례이다. 하남공단 내 대창자동차정비사 정비사들이 8월 13일 임금 평균 9.3% 인상에 합의했다. 그러나 8월 24일에 48명의 정비사들은 사무직과 대창버스 운전사에 비해 임금 인상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상여금 250% 인상, 장기근속수당 일류지급 등 4개항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송정시(광산구) 소재 매일유업 호남공장 노동자 50여 명이 8월 9일 정문 앞에서 상여금 600%, 임금 30% 인상, 장기근속수당 지급 등 20개 항을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는 8월 10일에 타결되었고, 11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광주 소하동에 소재한 섬유제품 제조업체인 삼전교역에서 노동자 50여 명이 8월 13일부터 휴기기간 연장, 차별 없는 휴가비 지급 등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다. 대명전자에서 8월 15일부터 노사 분규가 진행되었다. 광주 송암공단 내 경동자동차 정비공업사 노동자 50여 명이 8월 17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광천공단 내 말발굽제조회사인 K M사에서 8월 18일부터 노동자 50여 명이 임금 17% 인상과 상여금 260% 지급 등 3개항의 요구 수용을 내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녹음기에 흘러나오는 노동가요를 따라 부르고 기름통과 양동이 등을 두드리며 철야 농성을 했다. 이 노동쟁의는 19일에 임금 14% 인상, 상여금 100% 인상 등에 합의가 이루어져 타결되었다. 광주어망 노동자 80여 명은 8월 28일 임금인상과 상여금 신설 등을 요구하면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운동사 109

112 (2) 운수업 : 대중교통 운수업은 노동자 대투쟁의 효과가 지역 사회와 시민에게 가장 도드라졌던 업종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투쟁이 선행되었던 분문은 택시회사들이었다. 뒤를 이어 용달회사들과 버스회사들로 대투쟁이 확산되었다. 운수업 노동자 대투쟁의 주요 쟁점은 임금인상, 불법행위 엄금, 민주노동조합 설립 등이었다. 노동자들은 주장의 관철 압박을 높이기 위해 농성, 집회, 시위, 파업 등과 같은 집합행동을 벌였는데, 노동 관련 법률들에 의거하여 보면 대부분이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6월항쟁의 성과와 노동 관련 법률의 문제점 그리고 이와 같은 대규모로 노동자의 집합행동 등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유 등으로 인해 별다른 토제와 제재를 받지 않았으나, 얼마 후부터는 공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1 택시 택시 노동자의 대투쟁은 다른 업종과 사업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7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 4시 30분부터 밤 9시 30분까지 택시조합 앞에서 운전기사들은 농성을 벌였다. 다음 날 4일에는 오전 7시경 66개 택시회사의 운전기사 2백여 명이 100여 대의 택시를 금남로에 집결시키고, 임금협정이 부당하다 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시위를 벌였던 이유는 6월 29일에 타결되었던 9% 임금 인상안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운전기사들은 LPG 값이 4%로 인하되었으므로 이에 부합하게 임금이 재조정되어야 하며, 1년 미만자의 근무자에 대해서는 상여금을 주지 않는다는 조항이 신설되어 사실상 임금이 하락했다고 주장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 운전기사들의 집합행동은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8월 20일을 전후하여 재개되었다. 먼저 8월 20일부터 청송택시 운전사 30여 명이 임금인상 등을 내걸고 회사 회의실에서 농성을 개시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당일에 이루어졌다. 기존의 노동조합에 비판적인 세력들을 중심으로 민주택시운전자협의회(이하 민운협) 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7월 초에 이루어졌던 집합행동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운전기사들이 주장한 바는 외형적으로 임금인상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했던 것은 기존의 노동조합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었다. 민운협은 출범하면서 1987년 임금교섭 결과에 책임을 지고 현 노조집행부의 퇴진, 이후 사용자와의 단체교섭은 민운협이 진행, 기본급 30% 인상과 상여금 400% 인상 등 9개항을 주장했다. 그러자 다음 날인 8월 21일 광주택시회사 노동조합 지부장 44명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1986년 3차례 유가인하분에 따른 이익금이 운전사 복지 향상에 쓰이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가족 및 위험수당 신설, 퇴직금 누진제 실시, 택시감식기 폐지 등 7개의 사항을 요구했다. 지부장들은 요구사항이 25일까지 수용되지 않으면, 26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것임을 밝혔다.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던 8월 24일부터 천일교통 운전기사 20여 명이 민주노동조합 인정 등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했다. 1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3 회사택시 사용자 측은 두 단체의 요구들을 모두 수용하지 않았다. 예정했던 것처럼, 8월 26일부터 파업이 시작되었다. 기존 노동조합 측은 광주택시노동조합 분실에서, 민운협은 신안동 소재 광주택시운송사업조합 앞길에서 각각 집회와 농성을 벌였다. 27일 오후에는 광주택시노동조합 분실 앞에서 양 측의 노동자들이 합류해 집회를 열기도 했지만, 입장 차이가 좁혀진 것은 아니었다. 사용자는 운전사들의 입장이 나뉘어져 있음을 이유로 단체재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사용자는 8월 28일 민운협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면서 광주시에 휴업계를 냈다. 운전사들은 이동식 집회와 농성을 벌이면서 9월 6일까지 단체교섭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상황의 장기화에 낙심한 일부 운전사들은 9월 3일부터 운행을 재개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두 단체를 압박했다. 그리하여 9월 6일에 조합장 40명이 선 운행 후 협상 에 합의하고, 노사교섭위원에 민운협 대표들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노노 갈등은 한 고비를 넘겼다. 9월 7일부터 운행을 재개한 운전사들은 16일까지 노사 간 임금교섭을 계속하지만, 결렬되면 17일부터 파업을 재개할 것임을 결의했다. 그렇지만 노사협상은 여전히 난항이었다. 노동자들을 대표했던 두 단체들의 입장 차이로 인해 노사협상이 지연되었다. 민운협은 임금협상에 앞서 비조합원들의 선 노조 가입 보장 을 주장한 반면, 기존 노동조합은 선 임금 협상 을 주장했다. 약 2달 보름에 걸친 노동쟁의 끝에 9월 17일 노사협상이 종료되었다. 당일 새벽에 노사는 1986년 대비 14.1% 임금인상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장기간의 노동쟁의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가 적지 않았다. 영업 손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 의해 개인택시 41대와 회사택시 22대 등 총 65대의 택시가 파손되었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파업 기간 동안의 활동과 관련하여 경찰에 구속되거나 수배를 받았다. 민운협 소속 부회장이었던 박석기(대우교통) 등 8명의 운전사는 임금교섭을 위한 자료수집 등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바, 사용자는 이를 무단결근으로 해고했다. 해고된 운전사들은 복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90년 3월 20일 서울고법 특별2부는 이들의 활동은 정당한 조합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며, 복직 판결을 내렸다. 2 시내버스 시내버스업계에서는 8월 9일 새벽부터 운전사들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7개 시내버스 회사 가운데 대창, 현대, 삼아, 대진, 천일 등 5개 버스회사 소속 운전사 200여 명이 운행을 중단하고, 대창운수 차고지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였다. 곧 이어 다른 버스회사 운전사들도 파업에 합류하면서 시내버스업계의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운전사들의 주장은 1 어용조합장 퇴진과 직선제 추진, 2 기본급 135,000원 부활, 3 장기근속 수당 100% 인상, 4 상여금을 통상임금 30일 기준으로 400% 지급, 5 연차수당(50% 가산) 부활, 6 유급휴일 년 12일 부활, 7 식대 450원에서 900원으로 인상, 8 정년 60세로 환원, 9 사고 자부담 철폐, 10 부당징계 철회, 부당 해고자 복직 등이었다. 시내버스 운전사들의 농성은 2곳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운전사들이 가장 많이 집결한 곳은 노동운동사 111

114 두암동 소재 대창시내버스 차고지였다. 이곳에는 대창버스, 현대교통, 대진교통, 삼아교통 소속의 노동자 300여 명이 농성을 벌였다. 다른 한 곳은 송하동 소재 삼양시내버스 차고지로, 이 회사 운전사 150여 명이 농성을 했다. 농성 과정에서 사용자 측과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8월 11일 밤 대창시내버스 직원들과 이 회사 차고지에서 농성하던 운전사들 사이의 충돌로 인해 5명의 운전사가 부상을 당했다. 당시 농성에는 운전사 가족들도 참여하고 있어서 이들이 극단적으로 상황이 확산되는 것을 예방했다. 이후 운전사들은 차고지 입구 철문을 차단하고 어용노조 퇴진 과 영업부직원 직권 남용 마라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한편, 농성장 주위에 감시조를 배치했다. 광주시는 시내버스 파업에 대응하여 예비군 수송버스, 스쿨버스, 봉고차 등을 버스 노선에 투입했고, 자가용 운행도 허용했다. 또한 비번인 기사를 강제로 동원하여 버스를 운행하도록 했고, 경찰이 버스에 동승하기도 했다. 언론은 또는 시민불편이 운전사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보도했고, 심지어 파업 참가를 호소하는 농성 운전사들을 매도하기도 했다. 이에 광주시내버스운전자 권익운동 공동위원회 는 시민의 양해를 구하는 자체 홍보를 강화했으며, 광주국민운동본부와 민헌노위 는 학생들과 함께 호소문, 벽보를 통해 운수노동자의 권익투쟁을 지지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82). 시내버스 운전사들은 행동 방침을 일치하여 공유하지 않았다. 지금껏 연대 활동을 벌여본 경험이 미비했고, 갑작스럽게 연대 의식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시내버스 운전사들은 회사별로 독자적인 행동하기도 했다. 8월 11일부터 규모가 가장 컸던 대창운수, 삼양버스 2개사를 제외한 현대교통 22대, 천일버스 61대, 대진운수 33대 등 5개 회사가 운행에 들어간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파업을 계속하던 운전사들이 이들의 운행을 차단하여 멈추기도 했지만, 곧 재개되었고, 그러다가 일부가 13일 운행을 다시 중단했다. 시내버스 노사는 팽팽하게 대립했다. 사용자들은 1984년 8월 이후 동결된 시내버스 요금으로는 그 이상의 처우개선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운전사들은 현재에도 충분한 수입을 이루어지고 있으며, 안내양이 없는 버스들의 경우는 이에 부합하는 임금이 운전사에게 추가로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사협의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은 임금인상률로 노동자들은 30%를 주장한 반면, 사용자들은 10%를 제시했다. 노사 양측은 8월 15일 새벽에 5차 임금협상을 통해 급료 후생비 상여금을 포함하여 임금을 18% 인상하여 월평균 485,000원을 지급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렇지만 농성에 대한 민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사용주가 거절하면서 막바지까지 논란이 되었다. 또한 회사별로 임금인상률이 차이가 있었던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다른 회사들에 비해 임금인상률이 낮았던 대창버스와 현대교통 운전사들이 농성을 해제하고 18%로 인상 조정하면서 완전 타결되었다. 광주 시내버스 667대는 8월 16일부터 운행을 재개했다. 한편 노동자 대투쟁과 관련하여 10월 17일 광주시 대창운수 시내버스 노조위원장이 폭행치상 혐의로 구속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8월 11일에 발생한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이 해소되지 1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5 않은 상태로 한 피해 운전사가 9월 26일 노조위원장을 고소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3 시외버스 시내버스 파업이 정상화된 지 얼마 후인 8월 22일 시외버스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제히 전개되었다. 당일 새벽 광주고속 안내양 200여 명은 기본급 인상 등을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안내양들의 파업은 23일에 기본급 50% 인상, 상여금 800%, 월 만근 23일 등을 내용으로 노사합의를 하면서 24일부터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광진교통에서는 운전사와 안내원 100여 명이 21일부터 임금인상에 관한 노사협상을 시작했다. 운전사들과 안내원들은 22일부터 농성을 벌였으나 곧 협상이 타결되었고, 23일부터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광성여객에서도 운전사와 안내원 등 100여 명이 기본급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전개했으나, 오후부터 정상운행을 했다. 4 기타 운수업종 택시노동자들의 파업이 한창이던 8월 7일 오전 9시에 개인용달 화물자동자 지입차주 150여 명이 동구 계림동 소재 광주시청 앞길에 집결하여 점거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당일 오후까지 용달회사의 위장직영을 철회하라, 악덕업주 처벌하라 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82). 한편 8월 30일 광산 소재 광주레미콘 노동자 15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3) 보건의료 공공운수 사무 금융업 1 보건의료 보건의료업계의 노동자 대투쟁은 8월 중순경부터 시작되었다. 8월 20일 남광병원 간호사와 기능직 사원 등 100여 명이 기본금 8만원 추가 인상과 상여금 400% 지급 등 17개 항을 요구하며 진료 행위를 거부했다. 이들은 사용자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농성을 벌였으나, 그날 밤 10시 경에 해산했다. 그리고 8월 27일부터는 전남대병원 용역업체인 대양종합개발 노동자 30여 명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보건의료업계의 노동쟁의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광주기독병원이다. 광주기독병원에서는 8월 28일 의료기사회 회원 40여 명이 병원장과의 대화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8월 31일에는 30여 명의 기공사와 20명의 행정직이 병원 예배실에서 농성에 참여했다. 이들은 보너스 600% 인상, 위험수당 신설 등 21개항의 수용을 요구했다. 광주기독병원의 노동쟁의는 9월 3일 사용자 측이 요구 조건의 일부를 수용하면서 농성이 해제되었다. 노동운동사 113

116 2 방송 언론 1987년에만 해도 광주 전남의 신문사와 방송사에는 노동조합이나 언론인들의 결사체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엄혹한 언론통제 정책으로 인해 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운동이 매체를 통해 유포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대한 보도 논조가 부정적인 경우가 다수를 이루었는데, 6월항쟁 국면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6월항쟁으로 인해 사회전반에서는 민주화의 물결이 일었지만, 언론과 방송 분야에서는 사실상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지 않고 답보상태였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방송사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7월 20일 광주문화방송 기자와 PD 등 사원 116명은 언론민주화선언 결의대회를 갖고, 7월 13일 서울 MBC 민주언론선언 결의를 적극 지지하며 공정한 보도와 방송에 최선을 다한다는 4개항을 결의했던 것이 그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4개 요구사항은 공영방송 체제 철폐, 관선 경영진 즉각 퇴진, 기관원 사내 출입금지, 해직기자 복직이었다. 광주문화방송 직원들은 군부출신 사장 퇴진과 공정한 방송보도 등 3개항을 결의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8). 이들은 21일 오전부터 라디오와 TV의 지방뉴스방송을 중단했다. 7월 22일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실현 가능성이 있어 낮 12시부터 방송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8월 11일부터는 기독교 광주방송국 사원 28명이 방송기능 정상화를 요구하며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들은 14일 한국교회가 방속기능 정상화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므로 단식기도를 마친다 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오는 9월 15일 전국 5개 기독교방송이 뉴스를 실시한다는 자체 결의를 이행할 것 등 5개항을 결의했다. 방송분야에서의 노력에 비해 신문의 변화는 더디었다. 변화가 있었던 방송 분야도 보도내용으로 보면 인식이 크게 개선된 것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민주화투쟁에 대한 광주지역 보도기관들의 태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를 잘 보여준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8). 그래서 6 29선언 이후 이렇다 할 실질적인 민주화조치가 진척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보도 내용 가운데 이에 대한 지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노동쟁의에 대해서는 파업 농성의 근본원인에 대한 진단 및 처방은 좌시한 채 노동자들에 대한 비난, 야유의 기사제목을 뽑기가 일쑤였다. 광주일보의 노동쟁의에 대한 기사제목, 예를 들면, 정말해도 너무 한다 라든가 시민 우롱 처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4) 기타 산업 광주에서는 노동자 대투쟁의 흐름이 중반을 넘었을 무렵부터 노동조합을 비롯해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부 소규모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7 8월 17일에는 당시에는 전남이었던 송정시 신성화학 노동자 40여 명이 상여금 400% 지급 등 13개 요구사항에 합의하고, 10시간 만에 농성을 자진해산했다. 또한 송정시 소재 타이어 제작업체인 트라이선 노동자 70여 명도 이날 선 작업 후 협의에 합의하고 농성을 풀고 10월 18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8월 20일에는 일화식품 전남지점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8월 25일부터 대창정비 노동자 60여 명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29일 밤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8월 26일에는 그랜드호텔 조리사 20여 명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등을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고, 남미전자 노동자 70여 명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등을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8월 28일에 하남전기의 노사분규가 타결되었다. 2) 전남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1) 전남 서부권 : 목포, 나주 등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할 무렵 목포에는 몇몇 기업과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으나,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노동조합들은 사용자 측과 긴밀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유명무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될 당시 목포는 노동운동에 매우 취약한 환경이었다. 이를테면 1987년 5월 말 현재, 목포의 주요 산업체 22개 가운데 20개(90.9%)가 임금인상폭을 결정지었는데, 이는 광주 전남에서 가장 높았다. 이는 노동조합이 사용자 측에 포섭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목포의 노동자 대투쟁은 사실상 노동조합과 관련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쟁의가 발생하고 전개되는 경향을 보였다. 목포의 노동자 대투쟁도 운수업계의 선도성과 주도성이 확인된다. 운수업계, 특히 택시업종의 운전기사들이 대투쟁에 먼저 나선 것은 6월항쟁과 유관성이 깊다. 목포에서는 1984년경부터 택시업종의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활동이 표출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번번이 좌절되었지만, 활동 경험과 결집력은 축적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6월항쟁 초반부터 운전기사들은 월급제 를 주장하면서 쟁의에 돌입했다. 6월 11일 오후 3시부터 목포지역 택시노동조합 사무실에 11개 가운데 5개 회사의 노동조합 임원진 24명이 집결했다. 이들은 근로조건 개선하라, 사용자는 각성하라 등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 다음날 집회와 시위는 더욱 확대외어 오후 2시에 100여 명의 택시기사들이 집결하여 교통사고가 발생할 때 사용자 측이 피해액을 부담할 것 과 월급제 실시 등을 주장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택시기사들은 35대의 택시에 분승하여 경적과 폭발음을 내며 도심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시위행렬을 환대했으나, 경찰은 목포시청 앞에서 차량행렬을 차단했다. 경찰은 64명을 연행하여 조사를 한 후 약 2시간 후에 석방했다. 하지만 목포 택시노동자들의 노동쟁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이날의 시위는 목포지역의 노동자들에게 크게 고무시켰다. 택시업종의 총파업은 8월 24일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10개 택시회사 소속 노동운동사 115

118 200여 대가 4일째 운행을 중단했다. 사용자 측은 파업이 장기화되자 9월 1일에 휴업계를 제출했다. 장기간의 노동쟁의는 9월 4일 새벽에 노사협상을 통해 종결되었다. 시내버스업종의 노동쟁의는 택시업종에 비해 뒤늦게 시작되었다. 8월 26일 새벽부터 태원여객, 유진운수 운전기사 400여 명이 임금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은 9월 1일에 20일제 근무를 15일로 단축하지만, 기본급은 인상하지 않고 임금은 335,000원, 상여금은 300% 인상한다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런데 버스회사 사용자측은 노동조합의 존재를 부인했다. 이는 명백하게 근로기준법 위반이었다. 노동조합 인정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첨예했던 사업장은 68대의 시내버스를 보유했던 유진운수였다. 노사갈등이 계속되었던 유진운수에서는 12월 10일 노조위원장이 버스 열쇄를 유기하고, 5대의 버스를 펑크를 내어 운행을 중단시키는 사건이 빚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노조위원장은 경찰에 입건되었다. 제조업계의 노동자 대투쟁은 행남사 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행남사 산정공장 노동자 400여 명은 14일부터 임금인상 20%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사용자 측이 17일 무렵에 답변해주겠다는 회사측의 약속을 받고 농성을 해제했다. 8월 17일 노동자 1,100여 명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산정공장 광장에서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대표들에게 11개 항의 요구사항의 협상권을 일임했다. 행남사의 노동쟁의는 8월 19일 평균 임금 10.16% 인상 등 4개 항에 합의하고 타결되었다. 소맥분을 생산하는 호남제분 에서 9월 3일에 80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파업이 발생했다. 이 회사는 160여 명의 노동자 가운데 104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호남제분은 1987년 3월 12일에 정기임금 인상을 단행한 바 있고, 8월 17일에도 노사 간의 협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정상조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파업은 비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으로 요구 사항은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퇴진 등 10개항이었다. 이들은 회사 측과 협상이 없이 곧바로 파업에 돌입했는데, 노동조합이 사용주 측에 파업의 장기화는 손실의 확대로 나타날 것임을 인지시키면서 다음 날인 4일에 임금 12% 인상과 상여금 530% 지급 등에 합의하면서 종료되었다. 호남제분의 사례는 노동조합의 성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데, 비조합원들의 노동쟁의를 노동조합과 회사 측이 협력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무마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9월 9일에는 목포사료공장 노동자 9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다. 9월 10일에는 사료제조공장인 목포삼양사에서 100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임금 20% 인상 등 12개 항을 요구하며 농성이 시작되었다. 17일에 임금 9% 인상과 상여금 150% 지급 등 6개 항에 합의하고, 정상 조업에 들어갔다. 한국노총 소속의 노동조합들도 임금협상 등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목포해원노동조합 연안여객선과 안강망어선이 대표적이었다. 연안여객선의 경우는 5월부터 진행한 임금협상이 지연되다가 8월 19일에 즈음하여 합의를 보았고, 농성을 해제했다. 안강망어선의 경우는 8월 1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9 30일 보합제 조정, 어구 보수비 폐지 등 4개 항에 걸쳐 협상과 농성을 진행했는데, 8월 31일에 타결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88: 89~90). 그 밖에 8월 27일에 해조류가공수출업체인 일신산업 노동자 80여 명이 임금 20% 인상, 상여금 300% 지급 등 5개 항의 요구를 수용할 것으로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8월 30일 목포 근해 안강망 어선 노동자 100여 명이 목포시 안강망수협 앞에 모여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3 그 외 전남 서부 지역 8월 20일부터 무안군 소재 구일산업 노동자 90여 명이 임금 40% 인상 등 16개 항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출근을 거부하고 있다. 함평에서는 8월 13일 함평택시 운전사 20여 명이 임금인상 등 5개 항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이 요구는 당일에 타결되어 농성을 풀었다. 8월 22일 완도 항운노조의 노동쟁의는 노사합의로 타결되었다. (2) 전남 동부권 : 여수 여천, 순천, 광양 등 1 여수 여천 여수 여수 순천 여천에서는 광주와 같이 1987년의 임금협상 타결이 부진한 상태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여수의 경우 5월말 현재 100인 이상이 고용된 기업체 36개 가운데 23개 기업체에서만 임금이 타결되었다. 임금협상이 타결된 것은 63.9%였지만, 임금인상률은 낮거나 정체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노동쟁의는 대부분 8월에 들어서 표출되었다. 이 지역들에서도 운수업계의 노동쟁의가 선행되었는데, 목포와 달리 버스업종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8월 16일부터 동양교통과 오동운수 운전기사 100여 명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 등 7개항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사용자 측은 당분간 휴업 이라는 공고를 내걸고 출입자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회사의 규모가 컸던 동양교통의 노동쟁의가 보다 크게 전개되었다. 70여 명이 참여했던 동양교통의 노동쟁의는 20일까지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내버스 90여 대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오동운수에서도 20여 명의 운전기사들이 파업에 참여하여 16대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들 두 회사의 파업은 24일에 타결되었고, 25일부터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택시업종의 파업은 시내버스 파업이 일단락된 이후에 시작되었다. 8월 30일에 12개 택시회사 33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등 6개 항의의 수용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회사택시 289대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9월 9일 전남교통, 신광교통 등 5개 노동운동사 117

120 회사 180여 명의 노동자들이 선 운행, 후 협상 을 결의하고 당일 오후 2시부터 운행을 재개했다. 11일에는 모든 회사택시들이 동일한 이유로 노동자들이 농성을 해제하고 운행을 재개했다. 택시회사 노사 간의 최종 협상이 이루어지고, 정상운행이 이루어진 것은 13일부터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여수 택시업계 노동쟁의가 완전히 종료되었던 것은 아니고, 9월 17일에도 2개 택시회사들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산업구조의 특성상 여수에서 다른 업종들의 파업 발생은 적었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8월 22일부터 여수자동차 정비공업사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노동쟁의는 26일에 타결되었고, 27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8월 28일에는 여수 고려원양 노동자 200여 명이 시간당 임금을 410원에서 550원으로 인상할 것 등 4개항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한편 여수 해원노조원 40여 명은 8월 29일부터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여천 여천에서의 노동자 대투쟁들은 노동쟁의가 주로 발생했던 공간을 기준으로 여천공단과 여천공단 이외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산업시설들이 집결한 여천공단에서 많은 노동쟁의들이 발생했고, 대규모였고, 격렬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구분하여 노동자 대투쟁의 전개와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천지역 일반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쟁의들이다. 8월 12일 여수항운노조 남해화학 출장소 산하 노동자 250명이 파업을 시작했는데, 17일부터 정상하역작업에 들어갔다. 8월 18일에는 한국화약 제2공장인 여수공장에서 오전 8시 30분부터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운동장에 집결하여 기본급 5만원 인상, 어용노조 퇴진, 노조지부장 직선제 등 5개항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운수업계의 파업도 있었다. 8월 20일 여천군 돌산읍 여천택시 운전사 22명이 단체협약체결과 상여금 신설 지급 등 8개항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8월 24일에는 여천택시 운전기사 20여 명이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같은 날 여수자동차정비공업사 노동자 50여 명이 노동쟁의를 벌였다. 이상에 비해 여천공단에서의 파업과 노동쟁의는 훨씬 많고 다양하며, 일찍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노동자 대투쟁의 흐름에서 보면, 노동쟁의의 쟁점과 전개 성격이 다소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7월 21일 여천공단 내 호남에틸렌에서 발생한 노동쟁의가 주목된다. 이날 이 회사 노동조합원 520여 명은 대립그룹 흡수통합에 반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대림기업이 흑자운영으로 인한 근로조건과 임금 그리고 인력 등이 흡수통합으로 악화될 것을 우려하며, 흡수통합에 반대한다는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호남에틸렌의 흡수합병을 둘러싼 갈등은 8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8월 10일부터 호남에틸렌 노동자 430여 명이 대림사업과의 합병에 반대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8월 18일 서울에서 온 사장이 주재한 노사협의에서 합병에도 인원감축을 하지 않으며, 후생복지를 계속 1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1 개선하고, 노동쟁의에서의 노동자 처벌을 하지 않으며, 우리 사주 40억 5천만 원 반환과 퇴직금 누진제 실시는 계속 협상한다는 확답을 받고, 당일 농성을 해제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보면, 8월 11일 여천공단 내 주식회사 금강 에서 발생한 노동쟁의가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사 노동자 50여 명은 노동조합 결성 승인 등 8개 항의 요구 조건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는데, 사용자 측은 12일부터 휴무를 선언했다. 그러나 노사협상은 계속 진행되어 13일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방주탄산도 원만한 노사협상 타결을 이루어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여천공단 입주 사업체들의 특성상 이 곳에서의 노동쟁의들은 화학공장들에 주로 발생했다. 규모와 갈등 양상으로 보면, 한국화학 여수 제2공장에서 8월 18일부터 노동자 7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되었던 노동쟁의가 가장 컸다. 이들은 기본급 5만원 인상, 상여금 600% 지급 등의 요구조건을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노조 대표에게 11개 항의 요구사항에 대한 협상과정을 일임한 뒤 농성을 이어갔다. 노동자들의 활동에 대해 사용자 측은 휴업공고를 한 후 휴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더불어 민주노동조합 대표를 인정할 것과 더불어 시위주동자 불이익 배제 등을 요구했다. 마침내 21일에 사용주 측이 새 노동조합 집행부를 인정하면서 협상이 본격화되어 7개항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부 노동자들은 합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금호석유화학 공장에서도 파업이 발생했다. 금호석유화학 제1공장은 노동자 50여 명은 8월 20일부터, 제2공장 노동자 40여 명은 21일부터 임금인상, 상여금 500%, 퇴직금 누진제 실시 등 9개 항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금호석유화학의 노동쟁의는 8월 25일에 타결되었다. 하지만, 9월 4일부터 노동자 40여 명이 농성을 재개했다. 이 농성은 9월 9일에 노사가 임금인상과 안정수당 지급 등 10개 항에 합의하면서 농성을 해제했다. 한편 호남석유화학에서는 8월 25일부터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남해화학에서는 8월 29일 노동조합 집행부 대의원 30여 명이 노동자 권익 보장, 부당노동행위 근절, 조합원을 폭행한 관리자 문책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8월 31일 오후 5시까지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농성에 합류할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사용자 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8월 31일에 400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9월 4일 오후에 노사협의가 개최되어 임금인상과 폭행사건 관리자 문책 등에 관한 협상을 타결했고, 5일부터 정상조업을 했다. 한편 한국화약 계열회사인 한양화학 에서 9월 10일에 2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특별상여금 지급 등 4개 항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는데, 17일에 타결되었다. 화학업종 이외의 사업장들에서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여수항운노조 남해화학 연락소 노조원 250여 명은 8월 11일부터 임금 30% 인상 등 10개항을 요구하며 비료 출고 작업을 거부했다. 이들은 8월 14일까지도 파업을 계속했다. 노동운동사 119

122 8월 21일에는 여천공단 용역회사인 범아실업공사 소속의 호남정유 경비를 맡고 있는 청원경찰 100여 명이 임금 20%, 상여금 200% 인상과 출근버스 운행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다. 그리고 9월 1일에는 여천공단 호남기업 노동자 15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으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져 2일에 농성을 해제했다. 여천공단에서도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비, 정비, 일반 노무, 청소, 영선 업무 등을 담당하는 용역업체 노동자들도 노동쟁의를 전개했으나, 여전히 임금과 고용상태가 열악했다. 10월 8일 광주일보에 따르면, 용역업체들만 이득을 보고, 여기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대우는 여전히 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 순천 순천의 노동자 대투쟁은 8월에 주로 이루어졌는데, 운수업계가 주도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먼저 노동쟁의가 시작된 것은 시내버스업계였다. 순천교통 운전기사 등 135명은 임금인상 등을 주장하며 노사협상을 요구했다. 19일에 임시적으로 임금협상을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순천교통 운전기사들은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임금 수준을 요구하며 농성을 중단하지 않았다. 8월 23일에 순천교통의 노동쟁의가 종결되었고, 24일부터 운행이 재계되었는데, 임금 16% 인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8월 21일 동신교통 운전사 180여 명을 비롯한 종업원들이 임금 30% 인상을 요구하며 단체협약에 들어가 10월 1일부터 임금 7.5% 인상하는 것 등에 합의하고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시내버스업계의 노동쟁의가 일단락되자, 택시업계의 노동쟁의가 촉발되었다. 택시업계의 노동쟁의는 광주에서 촉발되어 전남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었다. 8월 24일 영일운수의 파업이 시작이었고, 8월 28일 저녁부터는 동승택시와 시민택시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동승택시 운전기사 21명과 시민택시 운전기사 51명은 사납금 고정, 임금인상 등을 요구했다. 8월 29일에는 파업이 더욱 확산되어 영일운수 23대, 동승운수 19대, 현대교통의 택시들이 운행을 중단했다. 곧이어 시민택시 28대도 운행을 중단하면서 순천 시내 주요 택시회사들이 멈추게 되었다. 노사 합의가 지연되자, 택시회사 사용자들은 순천시에 휴지 허가원을 제출하면서 운전기사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순천시는 노동쟁의가 타결되면 운행 개시 신청을 한다는 조건으로 4대 택시회사의 휴지 허가원을 받아들였다. 한편 삼신교통 등 3개의 택시회사들에서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이들은 비교적 빨리 노사협상을 타결하고, 9월 1일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삼신교통에서는 9월 6일부터 운전기사들이 5%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재개하기도 했으나, 일부 항목에서 협상의 타결을 보고 12일부터 운행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순천시내 4대 택시회사의 노동쟁의는 회사별로 각각 달리 진행되어서 시민택시는 9월 21일부터, 동승택시는 23일부터 운행을 재개했고, 현대교통과 영일운수에서는 이후에도 파업을 계속 진행했다. 시민택시는 10% 임금 인상, 상여급 200% 인상 지급에 합의했고, 1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3 동승택시는 기준급 10%, 상여금 50% 인상하고 무사고시 수당을 신설하기로 타결했다. 제조업 분야의 노동자 대투쟁은 대동제지, 세진기업, 순천보해산업에서 발생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대동제지에서는 8월 24일 40여 명이 참가한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세진기업에서는 9월 1일부터 노동자 30여 명이 상여금을 120%에서 180%로 인상할 것, 휴일근무 수당 100%에서 150%로 인상할 것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여 2일에 타결되었다. 그리고 순천보해산업에서는 9월 5일 70여 명의 노동자가 임금 4% 인상과 상여금 350% 지급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사는 8일에 협상을 체결했고, 농성이 해제되었다. 3 그 외 전남 동부 지역 여수 순천 여천 광양을 제외한 전남 동부 지역에서 발생했던 주요 노동쟁의들은 다음과 같다. 곡성군 8월 22일부터 곡성 삼원기업과 동명공업사(지역은 불분명)에서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 쟁의는 8월 26일에 타결되었고, 27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한편 8월 27일부터는 곡성택시 운전사 15명이 사납금 개선 등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노사는 9월 2일에 현재의 사납금 35,000원을 31,000원으로 인하할 것에 합의하고 운행을 재개했다. 고흥군 8월 22일부터 고흥 동방교통 안내원 11명이 월급 2만원 추가 인상과 숙박시설 개선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 대투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후에도 고흥군에서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2월 24일 고흥종합병원 간호사 등 40여 명이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고흥종합병원은 1987년 5월에 200병상으로 개원했으며 105명이 근무했다. 병원측은 재정난을 이유로 체불임금 지급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에 농성이 계속되었다. 보성군 8월 19일부터 보성 일대를 운행하는 송광교통에서 안내원 18명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20일부터는 운전사 20명이 가세했다. 송광교통의 노동쟁의는 22일에 해소되었고, 23일부터 정상 운행되었다. 승주군 8월 14일 승주군 대림콘크리트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8월 26일부터 승주군 서면 대성기공 노동자 230명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등을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8월 29일 노동운동사 121

124 황월택시 노동자 9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화순군 화순군은 탄광 및 석탄채굴과 관련한 사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화순군에서 가장 먼저 노동쟁의가 발생한 사업장은 화순군 한천면 호남탄좌였다. 호남탄좌에서는 JOC 출신의 황세연이 활동하고 있었다. 호남탄좌 광원 80여 명은 8월 4일부터 임금 15% 인상, 상여금을 200%에서 400%로 인상 지급, 가족수당 1인당 5천원 지급, 어용노조 퇴진 등 8개항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8월 10일에는 경동탄광의 광원 70여 명이 탄광입구에서 상여금 400% 지급 등 14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8월 14일에는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하청업체인 남일기업사, 홍성기업사, 화산기업사 등 3개 업체 광원 30여 명이 상여금 400% 지급 등 5개 항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은 당일 밤에 해제했고, 15일에는 정상 근무하면서 사용자 측과 협상을 벌였다. 이처럼 화순 지역 탄광에서의 노동쟁의는 8월 초순부터 중순경에 주로 발생했는데, 언제 어떻게 종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한보요업사의 노동쟁의는 시종이 분명했다. 8월 12일부터 한보요업사 노동자 250여 명이 임금인상 등 11개 항의 수용을 주장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당일에 사용자 측은 무기한 휴업을 선언하고, 29일까지 회사가 정상 가동이 되지 않으면 폐업할 것임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회사정문 앞마당에서 임금인상 30%, 보너스 400% 지급 이라고 정부미 자루로 만들어 쓴 옹색스런 플래카드를 흔들며 농성을 이어갔다. 한보요업사의 노동쟁의는 수차례의 노사협상에도 불구하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17일 임금 20% 인상, 상여금 250~300% 지급 등에 노사합의가 이루어지면서 해제되었다. 8월 20일부터 광주와 화순을 운행하는 송광교통, 광우교통, 광전교통 등 4개 군내버스회사 노동자 40여 명이 임금인상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했다. (3) 전남 북부권 : 장성, 담양, 영광, 함평 등 전남 북부권에는 대규모 산업시설들이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소규모의 사업체들이 위치했다. 따라서 노동자 대투쟁의 사례도 적고, 전개 양상도 소규모였다. 북부권에서 가장 먼저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지역은 담양군이었다. 8월 17일부터 담양군에 소재한 아륭기계 노동자 125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사용자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휴업계로 대신했다. 20여 명의 노동자들은 19일까지 농성을 이어가면서 휴업 철폐를 요구했다. 19일 오후에 노사합의가 이루어져 업무가 재개되었다. 함평군에서는 8월 24일 행전자기 노동자 140여 명이 노동쟁의를 벌였다. 그리고 함평문장택시 운전사들이 파업을 벌였는데, 8월 28일에 노동쟁의가 타결되었다. 장성군에서는 8월 31일에 삼양건업 노동자 100여 명이 임금 20% 인상 등 10개 항을 주장하며 1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5 농성에 들어갔으나, 당일 밤에 노사합의가 이루어져 작업이 재개되었다. 3) 노동자 대투쟁의 주요 쟁점과 특성 1987년 6 29선언이 발표되고 난 뒤 얼마 후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이 봇물처럼 분출했다. 4월혁명 직후에 노동운동이 폭발했던 것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광주 전남에서도 노동자들이 그동안 억압되었던 요구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투쟁에서 가장 공통적인 요구 사항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임금 인상이었다. 임금 인상은 비단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쟁의의 주요 쟁점이 아니라,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제기되었던 사안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광주 전남에서의 임금 인상 요구는 그간의 인상률에 근거해 볼 때, 강도 높게 주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근로조건 개선에 관한 요구들은 사업장의 환경과 노동조합의 성격 등에 따라 제기되기도 하고 제기되지 않기도 했다. 노동자 대투쟁의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노동자들이 사용주를 대상으로 한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측면이 더 컸던 노동조합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시기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모든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은 사업장에서는 사용자측이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지 말고, 임단협의 상대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노동조합이 아닌 임시적인 대표를 선출하여 임단협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와 같은 사업장은 노동쟁의가 복잡한 양상을 띠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던 사업장이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장기화하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쟁점은 이른바 민주노동조합 건립이었다. 1985년에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KM사, 로케트전기 등에서도 민주노동조합 건립이 주요 쟁점으로 제기되었던 것처럼, 이것은 노동자들의 오랜 숙원이었으나, 쉽게 해결하지 목하는 과제로 남아 있었다. 사용자 측은 노동조합의 성격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고, 사용자 측에 최대한 유리한 노동조합이 건립되도록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를테면 광주 시내버스회사의 하나였던 삼양버스의 한 노동자는 근로자를 보호해야 할 노조가 근로자를 징계하고 있으며 회사의 한 기구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어용이 아닌가 라고 규탄했다. 따라서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면서 노동자들은 그간의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었고,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가 되기 위해서는 개편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용노동조합 퇴진과 민주노동조합 건립은 노동 관련 당국이 노동쟁의에 쉽게 개입할 수 없는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전라남도는 이 점에 대해 노사분규가 있는 대부분의 사업체 노동자들이 이미 구성돼 있는 노동조합을 어용노조로 규정, 불신임하고 있어 노동조합의 지도감독권을 갖고 있는 행정기관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고 했다. 한국노총도 사업장에서 어용노동조합 퇴진 요구 주장을 노동운동사 123

126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주장의 대상은 다름 아닌 한국노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노총은 산하 조직에 대해 대표성 시비가 일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해야 한다 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노동자 대투쟁 국면에서 어용노동조합 퇴진과 민주노동조합 건립이 중요한 요구 사항으로 주장되었던 것으로 명확하게 확인되는 사업장들은 다음과 같이 10여개 이상이었다. 광주지역에서는 대우전자, 금호타이어, 아시아자동차, 시내버스, 회사택시, 일신방직 등이, 전남지역에서는 화순탄광, 여수 시내버스, 목포 행남사, 여천공단 호남석유화학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주노동조합 건립이 실제로 성사되었는가를 잘 확인되지 않는다. 1988년 이후에도 민주노동조합 건립이 계속해서 주요 쟁점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대다수 사업장들에서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업장들에 따라 민주노동조합 건립을 위한 과정과 성과가 차별적이었다. 이를테면 금호타이어에서는 민주노조로 재편하지 못했다. 기존의 노동조합을 비판하면서 민주노조쟁취대책위원회 가 결성되었고, 이 위원회가 사용자측과 임금 협상을 벌여 결과를 도출했지만, 노동자들은 이 위원회도 어용이라고 퇴진을 요구하고 농성을 벌였다. 회사택시의 경우에는 기존의 노동조합이 끝내 해산하지 않았고, 이들을 비판하며 결성했던 광주시민택시운전사협의회 와 병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사용자측은 기존의 노동조합만을 인정하여 노동쟁의가 장기화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결국 기존 노동조합측과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공동으로 임금 협상에 임하게 되었으나, 이들 사이에 합의점 도출이 지연되면서 노동쟁의를 장기화시기도 했다. <표 5-1> 광주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관련 주요 사례 발생일 주체 또는 기관 사건 전개 택시기사(광주) 60여 개 택시회사 운수노동자들이 임금협정 부당 요구 시위 민주헌법 쟁취 전남노동자공동위원회 발족 대우전자(광주) 임금인상과 민주노조 설립 등을 주장하며 파업 농성 민노위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 대양섬유 근로기준법 위반 시정요구 서명 대하섬유 150여 명, 노동시간 준수 요구 농성, 상여금 인상 요구 트라이센 70여 명, 근로기준법 준수 농성, 금호타이어 하청업체 광우라디에타 150여 명, 월차, 생리휴가 제도화 등 요구 농성 1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7 그랜드호텔 3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 농성 일성섬유 180여 명, 임금인상 요구 파업. ( 폐업, 조일섬유로 재 개업) 삼면스텐레스 350여 명, 국경일 휴무 등 요구하며 농성 호남탄좌 100여 명 금호타이어 1,20여 명, 어용노조 퇴진, 임금 30% 인상 요구 농성 8. 매일유업 휴가비 지급, 상여금 인상 요구 농성, 하루 만에 타결 8. 아시아자동차 1,000여 명, 임금 25% 인상 등 14개항 요구 걸고 농성 시내버스 임금인상 요구 동맹 파업 단행 고속버스 안내양들 임금인상 요구하며 파업 대우전자 어용노조 퇴진, 기본급 5만원 가산지급, 상여금 600% 지급 요구하며 농성, 완전 타결 안된 채 조업, 협상 금성알프스 임금인상 등 요구하며 농성하자 휴업 중 타결 일신방직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 아시아자동차 관련 부품업체의 쟁의로 부품수급 안돼 휴무 택시 택시노동자들 전면 파업 광주고속 임금인상 타결 안되자 휴업 * 자료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발간위원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제1권 (2003), 321쪽을 토대로 재구성. 한편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정부의 태도 전환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대기업들로 노동조합 운동이 확산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다양한 방책들을 고심했다. 전반적인 기조는 초반에는 사회 안정 위협과 무질서 그리고 경쟁력 상실 등의 논리를 통해 언론의 담론을 주도하다가, 후반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노동쟁의 등을 과격 폭력 행위로 규정짓고 공권력을 투입하여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 절정을 이룬 것은 8월 20일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대통령의 하계 회견과 합동조사본부의 설치였다. 다른 지역들에 비해 광주 전남의 노동자 대투쟁은 온화한 편이었지만, 정부의 입장 전환과 관련하여 지역 내에서 상대적으로 갈등이 격화되었던 회사택시 노동쟁의가 공권력의 주시를 받았다. 회사택시 노동자들은 노동쟁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택시들의 운행을 방해했는데, 이 과정에서 총 65대의 택시가 파손되었고, 파손에 가담한 많은 노동자들이 사법적 처벌을 받았다. 노동운동사 125

128 광주지역 노동자 대투쟁을 전개 흐름에 따라 살펴보면, 1987년 7월말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되었고, 8월 중순에 이르면 일단락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업종별로 보면, 중소기업들을 중심으로 시작되다가 8월에 들어서면서 대기업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에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매우 많은 노동쟁의가 발생했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아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노동자 대투쟁의 범주로 분류되는 첫 노동쟁의는 7월 4일 광주시내 택시기사들이 임금 재 협정을 주장하며 전개했던 가두시위였다. 대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7월 20일 경이었다. 금호타이어 하청업체인 주식회사 트라이센(노동자 70명)과 대하섬유(여성노동자 150여 명)에서 발생했다. 7월 21일에는 광우라디에타(150여 명), 7월 22일에 그랜드호텔(조합원 30여 명), 7월 24 25일 삼 양 버 스 정 비 공(52명), 7월 28일 대 하 전 자(130여 명), 7월 29 30일 은 최 초 폐 업 신 고 로 보 도 된 일 성 섬 유(180여 명)와 삼 면 스 텐 레 스(350여 명) 등 에 서 분 규 가 계속되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 8월에 들어서는 대기업으로 노동쟁의가 확산되었다. 임금인상, 하기 유급휴가 등을 요구하는 광주지역 노동쟁의는 호남탄좌(화순) 광부 100여 명의 농성(8월 4일)을 거치면서 중소제조업 중심에서 대기업 및 운수업계로 노동운동의 중심이 옮겨갔다. 1987년 8월 6 14일 금호타이어(송정)의 노동자 1,200여 명이 어용노조 퇴진 및 30%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여 5%인상 타결이 되었다. 매일유업(송정)의 경우는 휴가비 지급,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하였는데, 하루 만에 타결되었다. 아세아자동차(광천공단)는 1,000여 명의 노동자가 임금인상 25% 등 14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하였다. 8월 12 14일에는 대우전자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 기본급 5만원 가산 지급, 상여금 600% 지급 등을 요구하며 농성했다. 8월 14일 금성알프스에서는 휴업했고, 8월 19일에 타결되었다. 그런데 광주지역 대기업 노동쟁의는 가두시위보다는 회사 내 시위농성으로 일관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노동운동의 민주적 역량이 극히 미약하여 어용노조를 퇴진시키지 못한 채 잠정적 합의 또는 조업 및 협상병행의 경우가 일반적이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 이들 업체들의 노동쟁의는 1987년 8월 22일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의한 노동자 이석규의 사망사건과 시신의 광주 망월묘역에 안장되는 문제가 거론되면서 재연될 조짐을 보였다. 즉 대우전자에서는 8월 22 23일 양일간 다시 휴무에 들어갔으며, 아세아 자동차에서는 관련 부품업체의 쟁의로 인한 부품수급 차질을 이유로 8월 22 27일간 휴무에 들어갔다. 그 동안 금호타이어에서도 동일계 기업인 광주고속에서의 임금인상 여파가 회사 내에 번질 조짐이 보이자 8월 27일(이석규 장례일)에 또 다시 휴업에 들어갔다. 한편 광주시의 운수업 쟁의는 6 29선언 직후인 7월 1~4일에 거쳐 요구조건을 관철시키지 못한 일부 택시운전자들의 가두시위를 벌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157).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광주 전남지역 노동자 대투쟁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 첫째, 가두시위, 방화, 폭행 및 구타, 간부 1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9 및 관리직 사원 감금, 각목부대 동원과 같은 파격적인 양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조운동의 영향력이 커가고 있는 대기업(특히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회사 측의 무성의와 회유와 이간책 등으로,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격렬한 노동쟁의 양상이 나타나는 것일 일반적이다. 그러나 광주지역의 대기업에서는 어용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큰 반면, 일반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하고 대변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싹은 유아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며 노사 간 마찰은 격렬한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광주지역 대기업의 노동쟁의 가두시위보다는 회사 내의 시위농성으로 일관되었다. 민주노동운동의 역량이 매우 미약하여 어용노조를 퇴진시키지 못하고 잠정 합의를 하거나 조업 및 협상을 병행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 둘째, 중소기업에서의 쟁의는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많다. 임금인상 요구가 주요 이슈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근로시간 준수(대하섬유), 월차 생리휴가 제도화(광우라디에타), 근로기준법 준수(트라이센), 국공휴일 휴무(삼면스텐레스), 인권존중 및 예비군 훈련일 유급제도화(삼양버스), 정기휴가의 유급휴가 처리(호남탄좌) 등의 기본권인 근로기준법의 준수가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다. 임금 차별화, 노조활성화 등을 통한 합법적인 노동통제보다는 폭력행사, 가부장적 노동통제, 근로기준법의 준수사항의 불이행 등을 통한 노동통제가 중소기업에서 일반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경찰력의 투입을 되도록 자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정책에 의한 경제개발 과정에서의 지역적 소외(지역감정) 등의 문제 때문에 국가권력의 개입에 대해서는 민감한 대응을 하는 것이 광주지역 대중들의 특성이다. 이에 반해 기업 차원의 노동통제에 대해서는 지역 내 노동운동의 취약성, 노동자 대중의식의 미성숙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타 지역(특히 경인 지역)에 비해서 노동대중들의 결집력이 약한 상태이다. 넷째, 단위 기업의 문제에 대한 지역 내 연대투쟁의 방안이 낮은 차원에서나마 모색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에 대해 폐업신고로 대응한 일성섬유 사장이 화니백화점 사장의 큰사위라는 사실, 대창버스에서 삼면스텐레스 및 무등양말(1986년 노동쟁의), 창평중고등학교를 소유 운영하고 있다는 점, 삼양버스와 화니백화점이 동일인 소유라는 점 등을 선전함으로써 단위사업장 노동자들의 싸움에 대응해서 타 사업장에서의 지역 내 연대투쟁(농성, 불매운동 등)을 모색하는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농성 시위대의 느슨한 규율, 정치적 색체가 약한 노래(사나이로 태어나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 올려라 올려라 임금 올려라 등이 중심), 식사제공 및 농성합류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잘 조직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 가족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노동운동사 127

130 제6장 민주노조 건설운동과 전국적 연대조직의 결성 1. 노태우 정부의 노동정책과 민주노조 건설운동 1) 노동정책: 노동조합 통제와 공권력 투입 노동자 대투쟁이 한고비를 넘기면서 노동조합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각 사업장별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조합운동도 중요하지만, 자연발생적이고 고립적인 성격이 강했던 노동자 대투쟁이 한 단계 성장하려면 노동조합들의 연대 기구 결성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른바 민주노동조합운동 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노총 일변도의 노동조합 중심성에서 탈피하거나 거부하고 새로운 흐름의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요구가 광범위하게 형성되도록 촉구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정부 또는 기존 노동조합 지배세력과 대립과 충돌이 불가피함을 의미했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던 1988년 3월에 노동부는 노동조합 업무처리 지침 을 하달했다. 이 지침은 노사자율의 기반 확립,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운동의 정착, 건전한 노사관행의 정착, 노동조합 근로자 대표 기능의 강화, 노동조합 운영의 내실화, 준법질서의 확립, 외부 불순세력의 노동조합 침투 방지 등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1988년에는 정부가 노동쟁의와 노사갈등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과 관여를 최대한 자제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블랙리스트 와 관계기관대책회의 에 의한 통제를 폐지할 것임을 발표했고, 기업주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할 것임을 표방했다. 40) 그러므로 노동쟁의에 대한 강경대응 방침을 발표하고 각종 제도를 통해 통제의 강도가 차츰 높아졌기는 하지만(김금수, 2004: 63), 1988년은 노동조합운동이 고양될 수 있는 정치 제도적 조건이 한층 긍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는 집권이 안정화되고, 사회운동 전반이 급성장하자, 이를 반전시킬 계기를 구축했다. 1988년 12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의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담화 가 그것인데, 이것은 노동운동뿐만 40) 노태우 정부 집권 초기의 노동정책의 변화에 대해 여러 연구자들은 노동운동의 고양, 계급정치 지형의 변화, 물적 토대 및 양보의 여력, 민주화 공약, 여소야대 국회, 정부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의 한계 등으로 인한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평가했 다. (김금수, 2004: 63). 1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1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공안국면 초입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이행하기 위해 1989년 벽두부터 공권력을 동원한 강경진압을 시작했다. 또한 2월 18일에는 대통령이 개정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다만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수용되어 근로시간이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되었고, 휴업수당 등 법정임금 기준이 상향조정되었다. 또한 임금지급에서도 한결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양상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은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노태우 정부 집권기 최고의 공안정국이 형성되었고,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강압적으로 바뀌었다. 공안정국을 조성한 노태우 정부는 노동정책은 임금가이드라인의 재도입, 임금결정기구 구성, 노동조합에 대한 업무조사권 발동, 무노동 무임금, 경영 인사권의 준수, 행정조치에 의한 불법 쟁의행위 유형 규정 등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조합운동의 전개가 격렬한 방식으로 바뀌도록 자극했다. 이는 이전과 달리 노동쟁의는 곧 당국의 사법 처벌을 의미했고, 해고와 불이익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피해였다. 1988년에는 구속된 노동자가 80명이었으나, 1989년에는 611명으로 크게 증가했던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공안정국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1989년 4월 30일 여의도에서 개최하려 했던 노동절 행사는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집단으로 상경하려했으나 경찰에 저지되었다. 노동자들은 전남대학교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망월묘역을 참배했다. 다음날 각 노동조합별로 노동절 기념식을 개최하고, 6시부터 광주YWCA 강당에 집결하여 민족민주운동탄압분쇄 및 노정권 퇴진결의대회 겸 세계 노동절 100주년 기념 광주 전남 노동자대회 를 개최했다.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가 주최했던 이날 행사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 그리고 학생이 참여했으며, 행사 후 거리행진을 벌였다. 2) 노동법 개정 투쟁 정부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쟁점들 가운데 제도적 문제를 일부를 수용하고, 신군부 집권기 만들어졌던 노동관련 법률의 불합리성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관계법 개정을 추진했다. 이전의 노동관련 법률들은 불필요한 노동쟁의의 격화와 불법화를 차단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노동조합운동도 이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에 따른 대응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한 노동자 의식의 성장과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압둔 지배체제에게 노동관계법 개정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전과 비교해 보면, 1987년 11월에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었다(김금수, 2004: 62). 노동조합법 은 노조설립 요건 완화, 노조조직 형태의 자율결정 보장, 단체교섭권 위임제도 도입, 노동조합활동에 대한 행정관청의 규제 완화, 유니온샵 제도의 부활, 노조 임원의 자격제한 규정 삭제 등이 주요하게 달라진 점들이었다. 노동쟁의조정법 은 공익사업 범위의 축소와 노동운동사 129

132 일반사업의 쟁의권 보장 그리고 냉각기간의 축소, 노동위원회로 알성 기능의 이관과 공익사업에 대한 중재회부 건의 전속 등이 눈에 띄는 변화였다. 그렇지만 노동통제의 주요 수단이었던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 금지, 노동조합 정치 활동 금지, 공무원과 교원의 노동3권의 제한, 공익사업에 대한 직권중재 제도 존속, 사업장 외 쟁의행위 금지, 방위산업체 종사자의 쟁의행위 금지 등은 존속되었다. 1987년 12월 2일에 광주 YMCA에서 3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화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광주지역 노동자대회 가 열렸다. 이 대회의 명칭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기본권에 대한 욕구가 확대되고 있었고, 지역을 단위로 하는 집합행동이 실현되고 있었다. 명칭으로는 광주지역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광주 전남지역을 포괄했다. 또한 이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목소리를 드러내려는 목적도 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노동조합들이 발간했던 각종 유인물들을 살펴보면,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운동이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고, 그러한 경향을 지향하면 운동이 전개되는 경향이 있었다. 단순히 노동조합운동만으로는 노동기본권의 쟁취와 개선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 인식의 폭이 확장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1988년의 노동조합운동은 12월 3일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던 노동악법 개정투쟁 광주지역 보고대회 를 통해 마무리되었다. 노동법 개정투쟁은 1988년 하반기에 전국적으로 가장 큰 이슈였는데, 10월 6일 노동법개정투쟁본부 가 구성되면서 한층 가속화되어서 10월 9일과 10일에는 여러 지역들에서 노동자 집회가 개최되었고, 11월 13일과 28일에는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며 노동법 개정을 촉구했다. 노동악법 개정 투쟁은 1989년에도 계속되었다. 1989년 1월 18일 한국노총 광주 전남협의회는 광주공원 광장에서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악법 개정 촉구 및 부당 노동행위 규탄궐기 대회 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노동 3권 보장,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 철폐, 부당 노동행위와 위장 휴 폐업, 구사대 폭력 만행을 자행한 기업주를 처벌할 제도적 장치 강구, 방위산업 노동자 파업권 행사 보장, 주 44시간 노동제 확립 등을 촉구하고, 노조 파괴 회사의 제품 불매운동 등 11개 항을 결의했다. 이들은 한국노총 회관까지 구호를 외치며 횃불 시위를 벌였고, 노동악법 및 악덕 기업주 화형식도 개최했다. 3) 민주노조 건설운동과 전국적 연대조직의 확대 (1)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와 전남의 노동조합협의회들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또는 성과로 인해 신규 노동조합 결성과 조합원 가입율이 급증했다. 1987년 7월부터 12월까지 1,360여 개의 노동조합이 신설되었고, 22만여 명의 조합원이 새로 가입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결성된 노동조합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노총에 가입했고, 그 산하 노동조합연맹들에 가입했다. 제도적으로 혹은 업무적 차원에서 한국노총에 가입하고 1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3 산별연맹의 인준증이 있을 때, 행정관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곧 중단되었다. 많은 노동조합들이 설립 인가를 받은 이후에는 한국노총을 이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사무금융노련, 병원노련, 언론노련은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은 산업별 연맹을 결성했다(우리노동문제연구원, 1989: 88~89). 이와 같이 노동조합들은 산업(업종)별, 지역별, 그룹별로 연대단체를 결성하면서 세분화되고 한국노총과 다른 성격의 세력을 형성해갔다.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사업장별로 노동쟁의를 진행했던 것의 한계와 문제점을 절감했던 노동자들은 지역과 산업 등을 매개로 하는 연대하거나 협의하기 위한 단체의 조직화를 구체화했다. 노동조합은 정부의 노동정책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역별 업종별 공동임금교섭과 공동임금인상을 추진했다. 광주 전남지역에도 임금투쟁본부가 결성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연대투쟁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임금인상의 측면에서 보면, 1989년에 광주 전남지역은 큰 성과를 거둔 해였다. 광주지역의 임금 인상률은 다른 지역에 비해 거의 모든 업종에서 높았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광주지역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에 기인한 것일 수 있고, 노동시장에서의 조건이 유리했다는 점과 노동조합의 활동성과가 결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홍성우 강현아: 2003: 121).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들이 연대를 모색하게 되었던 계기는 1988년 8월 13일 우리데이타의 사용주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던 폐업의 철회를 요구하며 172일간에 걸친 농성과 노동부 등에 대해 항의가 이루어졌던 사건이었다. 특히 9월 16일에 개최되었던 우리데이타 위장폐업철회촉구를 위한 광주지역 노동자 지지대회 에서 연대조직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우리데이타 노동조합은 세창물산, 녹십자병원 등과 함께 위장폐업분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전국노동자대회 등 전국적인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비록 우리데이타의 폐업 철회는 성사되지 못했고, 1989년 1월 31일 광주지역 노동자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조합은 해산했지만, 광노협 건설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황효, 1993: 48). 연대투쟁은 1988년부터 모색되었던 지역별 업종별 노동단체의 결성에 한걸음 나아간 것 을 의 미 했 다. 특 히 1988년 11월 20일 개 최 되 었 던 광 주 지 역 노 조 운 동 의 발 전 을 위 한 토론회 와 이를 바탕으로 결성되었던 광노협추진위 등은 지역별 업종별 노동조합의 결성이 현실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1989년 3월 5일 광주시 화정동 소재 추선회관에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 가 창립되었다. 창립대회에는 광주지역 15개 업체의 노동조합과 60여 명의 대의원 그리고 1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석했다. 출범 당시 광노협에는 15개 노동조합이 참여했고, 조합원은 2,300명이었으며, 파견대의원은 38명이었다. 한편 1989년 4월 28일에는 한국노총 전남지부 회관에서 전국금속 노동조합연맹 광주지역 철공업노동조합 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89년 7월 24일 광주지역 금속노동조합 으로 개칭했고, 광노협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홍성우 강현아: 2003: 121~122). 일반적으로 제조업 분야의 노동조합은 지역별로, 노동운동사 131

134 비제조업 분야의 노동조합은 업종별로 결집했다. 제조업 노조는 한국노총 내부에 편재되어 있었고, 단위 노동조합들은 지역별로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자본의 통제와 탄압에 연대하기 위해 지역별 결집이 요구되었다. 반면 비제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았던 산업이 대부분이어서 산업(업종)별 동질성에 기초해 결집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선언문 억압과 굴종의 굴레 속에 허덕여 온 1천만 노동형제들의 피맺힌 함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87년 위대했던 노동자 대투쟁의 외침이 광주지역 10만 노동형제들의 가슴 속에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광주지역의 모든 노동형제들이 하나 되어 나아가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 날 우리 노동자는 생산의 주체이며 역사발전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끝없이 소외당하고 노예의 삶을 강요당해왔습니다. 이제 1천만 노동형제들의 바램을 철저히 짓밟아 온 권력과 자본, 그리고 이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 해 온 노동귀족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된 노동운동은 철저한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서 새로이 태어나 야 합니다. 노동자로서 주인된 삶을 위해 떨쳐 일어섰던 노동자 대투쟁의 뜻을 이어받아 새롭게 건설된 우리 노동조합은 지난날의 타락한 풍토에 물들기를 단호히 거부하여 진정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펼쳐나가고자 합니다. 오늘 광노협이 탄생하기까지에는 해고와 구속, 죽음을 불사하는 가열 찬 투쟁을 전개해 왔던 선배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가 이 사회의 역사발전의 주체임을 깊이 인식하면서 더 이상의 노예적인 삶을 단호히 거부하며, 뜨거운 동지애와 신뢰로 강철같이 단결하여 우리가 전국의 1천만 노동형제들과 굳센 연대의 손을 맞잡고 노동자가 주인되는 노동행방의 그 날까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전진할 것을 다짐하며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결성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출범 이후 광노협에는 9개 노조 3,400명이 가입하였으나, 뢰동산업과 하남리라의 노동조합이 해산되어 1989년 10월말에는 19개 노조, 4,765명의 조합원, 1990년 3월에는 22개 노동조합에 5,60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되었다. 광노협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은 대우캐리어, 로케트전기, 세화산업, 세화기계, 대하전자, 금성알프스, 한국알프스, 로케트정밀, 삼양섬유, 태광산업, 1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5 삼광정밀, 광일기공사, 미도전자, 럭키호남판매, 정신전자, 영화산업, 동아합성, 순음사, 조일전자, 리라전자, 건축사직원, 삼령산업, 광주매일유업 등이었다. 가입노조 전체가 제조업이고, 이중 ⅔이 금속산업이었다(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1990: 39~41). 그런데 광노협에 가입한 노동조합이 항상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광주매일유업의 경우는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광노협을 탈퇴하기도 했다. 광노협은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향상과 노조 간 연대활동 및 가입노조의 조직 강화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지역 금속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과 제 권리의 실현을 위한 노동조합들의 연합체였던 이 단체는 1990년 현재 8개 분회 및 1개 지부가 가입되어 있다. 광노협은 개별 사업장의 노동조합 결성과 임단협 협상 그리고 노동자에 관한 교육 등을 주로 담당했고, 정치적 사안과 현안에 대해서도 강력한 목소리를 냈으며, 노동조합들의 공통된 사안들을 조율하고 관련 활동을 주관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절 행사 개최, 노동법 개정 투쟁, 연대 투쟁 등이 대표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에 관한 쟁점들은 광주지역에서는 광노협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광노협은 1989년 3~4월에는 현대노동조합 탄압 규탄 및 지원투쟁을 벌였다. 또한 4월 22일에는 89 임금 투쟁 전진대회 를 개최하고, 각 사업장의 임금 인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광노협은 노동법 개정운동과 임금인상을 1989년의 활동 목표로 제시하고, 메이데이를 기점으로 역량을 집중했다. 아울러 구사대의 폭력과 공권력의 노동조합 탄압에 대비하여 100여 명의 파업자위대를 결성했다. 광노협은 1990년에는 사회운동 단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 활동을 벌였던 것이 특징이었다. 남대협 학생들은 4~5월에 걸쳐 노동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시위와 집회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는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한 노동운동 탄압을 대상으로 했다. 5월 1일에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와 90광주지역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임금인상투쟁본부 의 주최로 메이데이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이 행사는 비단 광주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광주지역의 경우는 5월 1일과 5월 4일에 집중되었다. 5월 1일에는 총 12개 업체에서 전면파업이, 1개 업체에서 부분파업이 이루어졌고, 5월 4일에는 총 9개 업체에서 부분파업이 이루어졌다(황효, 1993: 59). 5월 14일에는 광노협 소속 19개 노동조합 대표 등 30여개 노동조합 대표들이 모임을 갖고, 16~20일까지 특근 및 잔업거부, 17일 오후에는 5 18민중항쟁 기간에 맞춰 광주지역 노동자대회를 개최할 것임을 결의했다. 5월 17일 집회에는 500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는데, 노동운동 탄압을 규탄하고, 정치 민주화를 촉구했다. 그리고 1990년에 이루어진 광노협 활동의 특징은 임금인상공동투쟁본부(이하 공동임투본) 를 결성한 것이었다. 1991년 광노협 활동에서 공동임투본 결성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광노협은 1월부터 수련회와 임투학교 등을 통해 공동임투본 결성을 시작했다. 3월 22일 17개 노동조합 대표자회의를 걸쳐 공동임투본을 결성했고, 4월에는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을 비롯해 대기업 노동조합까지 노동운동사 133

136 포함하여 26개 노동조합이 참여했다. 1992년에는 총액임금제 철회가 쟁점이었다. 4월 20일 광노협 소속 노동자 60명은 북구 중흥동 소재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21일에는 광주지방노동청을 방문하여 총액임금제 실시 철회를 요구했다. 한국노총도 총액임금제 철회를 요구하는 활동을 4월 초부터 본격화했다. 또한 5월 1일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었던 92 노동절 기념 및 임금 억제를 위한 총액 임금제 분쇄 결의대회 에 참석했으며, 다른 노동자 8천여 명은 장성 군민회관에 모여 노동절 행사와 함께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결의대회를 개했다. 전노협과 광노협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당국은 광노협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서 핵심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1989년 12월 28일 광주광산경찰서는 사전영장이 발부된 광노협 의장 박종현(대우캐리어 위원장)과 사무처장 김철문(세화기계 위원장) 등을 업무방해 노동쟁의조정법 위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박종현에게 적용된 위법 사항은 10월 10일부터 12월 2일까지 대우캐리어에서 낮 12시부터인 점심시간에 15분 늦게 급식하게 해 작업을 지연시켰고, 머리띠를 두르고 각 작업장을 돌며 노조활동에 동참을 요구하는 등 작업을 방해하거나 능률을 저하시켜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였다. 1990년에는 년 초부터 당국의 강경 대응이 시작되었다. 1월 15일 치안본부는 각 시 도경 국장에게 전언통신문을 내려 보내 전노협 결성 저지를 위해 노동부 지방자치단체 등 관계기관과의 지역별 대책회의 활성화, 전노협에 적극 가담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노조 및 노조지도자에 대한 정보활동 및 순화교육 강화,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 등 주요 노동조합에서 전노협에 대의원을 파견하지 못하도록 개별 접촉을 통해 압력을 행사할 것 등을 지시했다. 당국은 3월부터는 노조업무조사와 관련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노동조합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고 노조위원장을 구속시키거나 수배했다. 3월 13일을 기준으로 이에 해당하는 노동조합의 사례는 50여개였는데, 광주지역에서는 금성알프스, 대우캐리어, 로케트정밀이 포함되었다. 1987년 노동관계법이 개정된 이후 정부가 노동조합 업무에 대한 조사를 이처럼 대대적으로 벌였던 것은 처음이었고, 이처럼 많은 노동조합 대표를 고발한 것도 처음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3월 14일 전노협 소속 150개 노동조합은 서울을 비롯해 전국 12개 지역에서 일제히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전노협 위원장 구속을 비롯해 노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조치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의결했다.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한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한 대아산업 노조위원장을 후원하기 위해 14개 회사 조합원들이 성금을 거두자 경찰은 각 노조들을 방문하여 진술서 등을 받아갔다. 노동자들은 노동자 후보에 대한 탄압 이라고 반발했다. 광노협에 대한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광노협이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연대 조직이었다면, 전남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노동조합 단체는 결성되지 못했다. 다만 노동자들이 많이 집결되어 있던 도시들을 중심으로 연대 조직이 1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7 만들어졌는데, 목포민주노동조합협의회(민노협) 이 그것이었다. 이 단체는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결성되었던 노동자대중조직으로, 민노협은 노동현장의 주요 활동가들과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조합원들이 모여 학습을 하거나, 성명서 발표, 노동현장에 대한 지원투쟁 등을 전개했다. 민노협은 1988년 4월에 노동절 투쟁을 주도했고, 1989년 노동절에는 4월 30일에 목포전문대학교 체육관에서 노동자, 시민, 학생 등 300여 명이 모여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들은 행사 후 목포역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다음 날인 5월 1일에는 목포시 자유광장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이 노동절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 참가자들은 시가행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이를 봉쇄하자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비록 학생들은 노학연대의 차원에서 노동절 행사를 열었지만, 노동자의 사전에 협의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9년의 노동절 행사가 격렬했던 것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고, 노태우 정부의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에 항거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989년 2월 18일 광양제철 연관 공단 및 협력업체 등 14개 사업체에서 노동조합들이 동광양시민주노동조합협의회 를 결성했다. 이후 30여개 사업장의 노동조합으로 가입단체가 증가하면서 안정화되는 듯 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1990년에 와해되었다. 와해 조짐은 1990년 초반부터 나타나고 있었는데, 1월 18일에 17개 노동조합이 참여한 한국노총 동광양지구협의회 결성식이 개최되었는데, 이들의 다수는 광양지역민주노조연합회에서 탈퇴한 노동조합들이었다. (2) ILO공대위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1990년대 초반 무렵 전노협을 비롯하여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 등이 건립되어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대 활동을 전개되었다. 다양한 노동조합들의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91년 하반기에 이루어진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 의 결성이었다. ILO공대위는 전노협와 업종회의가 중심이 되고, 여러 노동운동단체들이 참여함으로서 공동투쟁의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ILO공대위의 지역단위 조직은 1991년 11월 10일 여의도에서 개최되었던 전국노동자대회를 전후하여 그해 12월까지 결성이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서 ILO공대위는 전국적 공동투쟁의 중요한 구심으로 체계가 완성되었다. 지역단위의 ILO공대위는 사실상 전노협 산하 지노협이 주도하고 있었다. 노동조합과 노동단체의 연대가 긴요하고 중요하다는 인식은 노동부장관의 노동법 개악 발표를 규탄하는 활동이 확산되면서 한층 가속화되었다. 민주노조 진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와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운동 단체들은 일회적, 사안별 공동투쟁과 연대활동을 극복하고, 노동자 공동의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지속적이고 안정적 연대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김영수 외, 2013: 252~253). 광주 전남에서는 1991년 10월 15일에 ILO공대위가 광주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광주와 전남을 굳이 분리해서 사고할 필요는 없지만, ILO공대위에 참여한 단체들의 대부분이 광주를 기반으로 노동운동사 135

138 활동하고 있었다. 즉 ILO공대위에 참여한 노동조합은 광노협, 전교조 광주지부, 전교조 전남지부, 병원노련 광주지부, 언론노련 소속 노동조합, 금융노조 등이었다. 41) 광주 ILO공대위의 특성은 다른 지역과 달리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또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단체들이 참가단체로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광주는 일찍이 노동조합 중심으로 노동운동의 주체가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LO공대위의 지부가 최종 결성된 것은 수원지구로 1992년 3월이었다. 42) 그런데 ILO공대위의 활동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국의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ILO공대위가 결성되었지만,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이하 전노대) 결성이 준비되면서 위상과 역할이 모호하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ILO공대위가 전노대로 발전 혹은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의미를 갖지 않았다. 전노협은 ILO공대위를 통해 조직을 확대시키고, 민주노조 진영을 결집시키려는 의도를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민주노조 진영이 실질적인 동의가 기반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매우 사소한 이유들로도 빈발하게 갈등을 했고, 이견들에 대해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노협이 갖는 이미지 및 지향과 업종회의 조합원의 성격과 인식의 차이가 적지 않았으며, 정부의 탄압에 따른 부담도 상당했다. 또한 ILO공대위의 조직적 위상과 정세에 대한 시각 차이도 적지 않았다. 전노대는 1993년 6월 1일에 출범했다. 전노대의 결성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각축을 벌였다. ILO공대위 확대 강화안과 새로운 민주노동조합 결성안이 그것이었다.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수차례의 회의가 열렸으나, 논쟁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93년 4월에 10:9 라는 표결 결과에 따라 새로운 노동운동 조직으로 전노대를 창립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러한 결정은 전노협 한계론과 위기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전노협과 지노협의 방침이 없이, 지역의 의사수렴이 없이, 상층 중심으로 다수결 투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고, 전노대의 발족식이 지연되기도 했다. 전노대의 출범에 관한 전노협의 문제제기와 비판은 계속되었고, 업종회의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만을 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특히 우려했던 점은 공대위의 위상과 성격이었다. 전노대의 창립 논의는 ILO공대위가 활동하고 있는 시기와 중복되고 있어서 다양한 범주와 수준이 논란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들이 합의한 것은 전노대는 공동사업을 추진하는 조직이며, 전노협이나 업종회의 그리고 현총련이나 대노협과 같은 여러 노동조합들의 상급조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전노대는 전국노운협이나 전국노련 등과 같은 노동운동단체와 일정하게 분리된 노동조합들만의 조직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전노대가 노동조합의 상급조직이 아니라는 합의는 불과 수개월 만에 무화되었다. 사실 41) 전노협 백서 4권, 243쪽. 42) ILO지역공대위가 결성된 지역은 서울, 인청, 광주, 대구, 부산, 마창, 전북, 부천, 경기였다. 경기 지역의 경우는 안산, 안 양, 수원 지구로 다시 분화되었다. 1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9 전노대의 집행위원회는 대노협과 현총련이 긴밀하게 결합하지 않고 있었고, ILO공대위에 비해 포괄하는 노동조합의 규모와 연대 활동 사안들이 대폭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할만한 조직적 구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전노대도 전노협과 업종회의 중심으로 운영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노협이 기본조직들이 지노협이 지역공대위와 지역노대 등의 더 많은 사업들을 떠맡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전노협은 결성된 지 3년만인 1992년부터 현장 조직력과 투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있었는데,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4) 노동조합운동의 지원 단체들 (1) 광주노동연구소 광주노동연구소는 1989년 5월 27일에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온 근로민중이 참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결정, 실천하는 자주성이 직장과 사회 모든 곳에서 관철되는 그날까지 근로민중과 함께 노력하 기 위함이었다. 주요 활동은 노동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및 상담, 교육 사업을 통해 현장 노동활동을 지지, 지원하는 사업을 전개였다. 광주노동연구소는 1991년 1월부터 노동자문제연구회보인 자주노동 을 발간했다. 1992년 2월에 발간한 자주노동 5 에 의하면, 주요 활동 내용으로 1. 노동조합의 설립, 운영, 일상 활동 등에 대한 상담 및 교육, 2. 근로기준법, 임금, 해고, 퇴직금, 산재문제 등 상담, 3. 노동정세분석, 노동판례 수집, 노동운동 등에 대한 조사연구, 4. 회보, 교육자료 등의 발간사업을 전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광주노동연구소, 1992). 광주노동연구소가 매월 실시하는 교육 사업을 소개한 내용을 보면, 1. 노동조합법과 노동조합의 일상생활(첫째 주), 2. 단체교섭과 단체행동 어떻게 하나(둘째 주), 3. 올바른 삶: 우리나라 노동자의 철학과 사상, 4. 한국사회구조와 노동자가 나아갈 길(마지막 주) 이다.(광주노동연구소, 1991) 1990년 당시 소장은 민동곤이었고, 그 외 주요 활동가는 김영집(상임연구원), 손태복(연구원), 임택(상임연구원), 진병기(상임연구원) 등이었다. (2) 여수 여천 민주노동자연합(민노련) 43) 여수 여천 민주노동자연합은 1989년 9월 30일 전라남도 여수 오천동 백사장에서 22명의 노동자들이 발기인 대회 겸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출범했다. 민노련 출범 이전에 노동문제 상담소, 임투대책위원회, 여민청 노동반 등 노동운동을 보조하는 기구가 있었으나, 이러한 단체들이 현장투쟁을 조직적으로 지원, 지도해 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민노련은 노동운동을 43) 나종훈의 글(1990: 35~36) 참조. 노동운동사 137

140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단체를 통해 현장 노동자와 깊숙히 결합하여 현장 투쟁 및 노조 지원 사업의 필요성을 해소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민노련이 노동조합활동을 지원하는 노동운동 단체로서 목표로 한 활동은 1 상담활동; 해고, 체불임금, 산재, 노조결성과 운영상담, 2 노조지원활동; 노동정보 및 자료제공, 노조결성과 운영상담, 3 교육활동; 회원 교육, 노동교실, 초청 강연회 개최, 교육지 아침햇살 발간, 4 선전활동; 민노련 신문 민주노동자 발생, 각종 홍보 활동, 5 조사연구 활동; 노동실태조사, 정세 및 투쟁 전술 연구, 6 연대활동; 조합 간 연대 활동 매개, 각종 행사 및 집회 개최, 지역단체 연대 사업 참여 등이었다. 민노련은 각성 노동자가 참여하고, 대중적 방식으로 활동해 나가는 대중조직임을 표방하였다. 민노련은 노동조합운동 지원활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으나, 전위조직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다만 정세에 필요에 따라 반민자당 투쟁이나 통일투쟁 등도 함께 하였다. 주요 활동가로 사무국장이 나종훈이었다. (3) 광주지역 노동운동 탄압저지 공동대책위원회 1990년 3월 22일 광 주 지 역 의 노 동 운 동 을 지 원 하 기 위 해 결 성 되 었 다. 결 성 에 앞 서 3월 19일에 시민에게 드리는 글 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공동대책위원회에는 28개 단체가 참여했다. 주요 참여단체들은 광주기독교노동자광주지역연맹, 무등노동자교육상담소, 광주노동연구소, 광주지역여성노동자회(준), 전국교직원노동조합광주지부, 전남농민운동연합(준), 전남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동광주민주시민회, 서광주민주시민청년연합, 남광주민주청년회, 북광주민주청년회, 민주쟁취국민운동전남본부, 광주 전남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정토구현광주불교운동협의회,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 진보정치연합준비모임광주지부,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 광주 전남준비회의,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광주 전남지부, 건강사회를위한한약사회 광주 전남지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광주 전남지회, 광주 전남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준) 등이었다. (4) 광주여성노동자회 1988년을 기점으로 광주지역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이 당하는 특수한 억압과 고통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당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가 있었으나, 여성부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1970년대 광주 전남지역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했던 여성 활동가들과 전남방직 해고자 그리고 새한전자 여성노동자 10여 명이 광주지역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1989년 12월부터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금성알프스 구속노동자 가족 조직화 및 두암소비자협동조합 1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1 여성노동자 구타사건 조사, 그리고 투쟁지원 등의 활동을 통해 힘을 결집했다. 1990년 3월 광주시 신안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7월 8일에 광주YWCA 소강당에서 창립대회를 가졌다. 전남방직에서 해고되었던 최경희가 회장이었고, 리라전자, 새한전자, 삼양물산, 우리데이타 등 폐업사업장 여성노동자가 중심이 되었다. 회원은 20대 초반에서 중반의 50여 명으로 실무는 학생운동권 출신이 맡아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와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어냈다(전라남도, 2003: 345~346). 광주여성노동자회는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문제를 조직적이고 집단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여성노동자들의 힘을 집결시켰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지엽적인 문제로 취급해 온 여성근로자들의 모성보호나 평생노동권 확보를 독자적인 영역으로 다룰 것을 선언했다. 특히 여성들이 많은 섬유업체나 영세하청업체를 대상으로 열악한 노동환경개선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각 단위 노조사업장의 여성부 모임을 갖고 여성문제에 대해 교육했다. 노동조합 결성, 임금,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육아문제 해결을 위한 탁아소 튼튼이 어린이 집 을 운영했다. 이들은 5개 현장 소모임과 2개 취미 소모임을 주축으로 회원을 확대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으며, 광주 전남여성문제특별위원회 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활발한 연대활동을 벌였다. 광주여성노동자회는 여성노동자 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1993년 3월 27일 결성된 일사랑 자주여성회(대표 조영임) 과 더불어 여성노동자 권익 보호에 적극으로 나섰다(전라남도, 2003: 347~348) 광주여성노동자회는 1992년 3월에 광주지역 직장탁아소 설치를 위한 기초 자료집 을 발간했다. 이 자료집에는 담배인삼공사의 직장탁아소를 찾아 운영 실태를 살펴보았고, 탁아소의 필요성, 단체협약에 나타난 모성보호조항 실태와 단체협약 모범안, 직장탁아소 설치를 위한 설문조사 분석 3 8여성대회, 여성노동자교실 안내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여성노동자회, 1992). (5)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이하 광주노운연)은 1991년 5월투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노동운동 단체연합으로 통일하자는데 의견을 모은 후 3개월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광주노동운동 단체연합준비위 를 결성했고, 9월 28일 YWCA 4층 소강당에서 9개의 가입 참관단체 대의원 40여명이 참석하여 창립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출범했다(광주노동연구소, 1991: 64). 광주노운연은 노동자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노동운동단체간의 통일단결을 도모하여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있다 라는 목적 하에 설립되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 교육 선전사업, 2 조직사업, 3 문화사업, 4 제 노동단체 및 민주세력과의 연대 사업, 5 기타 목적사업에 필요한 사업 등을 수행하는 것을 사업 내용으로 했다(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 1992: 11). 노동운동사 139

142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 창립선언문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과 함께 자주ㆍ민주ㆍ통일의 기치 들고 전진하자!! 주인된 삶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광주지역 노동자와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의 창립을 선언합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의 창립은 계급 적ㆍ민족적 각성과 노동자의 생명인 단결을 강화함으로서 새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지위와 역할을 높여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은 노예와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권력과 자본의 집요하고 집중적인 탄압과 분열책동에 굽힘없이 맞서 투쟁 속에서 단련되고, 패배 속에서 교훈을 찾고, 경험 속에서 지혜를 쌓으며 승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압도적 다수의 대중이 주인, 주체가 되는 자주적 단결을 이룩하고 경제투쟁과 동 시에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 서 있습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과 이후 노동운동의 경험과 교훈을 계승하여 자 주적ㆍ민주적 노동운동의 전초기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조국통일을 위한 대장 정의 향도자가 될 것입니다. 지난 시기 노동운동단체들은 나름의 영역에서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광범한 대중을 주인, 주체로 일으켜 세우고 자주적 단결을 강화할 것을 절대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현 재의 시기에도 노동운동단체의 역할과 임무는 더욱 증대하고 있으며 나아가 단체 간 통일ㆍ단결을 절 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기 노동운동단체 간 분산, 고립적 활동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전면적으로 옹호하기 못하고 사업과 활동에서 수공업성을 면치 못했으며, 대중에게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91년 5월 투쟁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을 조직, 지도했어야 할 노동운동단체들이 오히려 무력하게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던 것은 분산, 고립의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며 단체 간 통일, 단 결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요청임을 대중들이 직접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은 노동운동 단체 간 굳건한 통일, 단결을 기초로 지난날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계급 앞에 놓여진 과제를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은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노동3권의 폭력적 유린, 물 가 집세폭등 등 반민중적 경제 정책으로 인한 실질임금 하락과 최저생계비 부족, 산업재해와 직업병, 장시간 노동, 실업의 불안 등과 정치ㆍ사회ㆍ경제적인 불평등한 환경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받고 있습 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은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확고히 서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노동3권 완전쟁취, 완전한 주 44시간 노동실현, 최저생계비 확보 등 노동기본권과 노동자의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입니다. 1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3 우리나라 노동자계급의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우리나라가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남북으로 분단 된데 있습니다. 외세와 이에 결탁한 한줌도 못되는 군부, 매판재벌, 관료세력들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 며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통일을 가로막고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영세수공업자 등 민중들을 억압하 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은 노동자계급의 지도성과 주도성을 높여 각계각층 민중과 통일, 단결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위해 투쟁하는데 앞장 설 것입니다. 특히 당면정세는 매국적 반민주세력과 애국민주세력의 첨예한 대결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광주노동 운동단체연합은 민중이 중심에 서고 모든 민주세력이 총결집하는 민주대연합과 전 민중적 투쟁으로 민주정부 나아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매진할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은 조국과 민중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할 계급입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선전, 회유와 탄압 그리고 노동운동 내부의 분열적인 교조주의, 급진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노동자계급은 충 분히 단결하고, 조직되어 있지 못합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은 권력과 자본의 개입을 배격하고 소 수 간부 중심의 활동방식을 극복하여 대중의 자주성에 입각한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실현할 것입니다. 또한 노동운동 내부의 분열주의를 청산하고 다양한 노동자 조직들이 통일, 단결을 위해 노력할 것입 니다. 어떠한 난관과 장애도 자주ㆍ민주ㆍ통일과 자유롭고 주인다운 삶의 실현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 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은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불굴의 투혼으로 노 동자계급의 대의와 내용을 채우고 기초를 다지며, 각 단체, 성원의 주체적 참여와 자주적 단결을 높여 나갈 것입니다. 상호 뜨거운 애정과 의리, 신뢰를 토대로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을 쉼 없이 걸 어갈 것입니다. 노동운동 만세! 자주ㆍ민주ㆍ통일 만세!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 만세! (6) 광주청년노동자회 1992년 5월경에 결성되었다. 회장 및 부장 체제, 산악반, 풍물반, 노래반, 역사기행반, 독서토론반 등으로 나뉘어진다. 회장은 손현주이고, 사무국장은 이덕준이었다. (7) 기타 그 외에 순천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동부지역노동자협의회, 여수 여천지역 임금인상투쟁 노동운동사 141

144 본부에서 개편되었던 여수민주노동자연합준비위, 광양지역 노동운동과 민중생존권 투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광양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있었다. 5)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 환경과 현실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었고, 커대한 전환점이 되었던 노동쟁의가 1988년 8월에 발생했다. 우리데이타 위장폐업 반대운동이 그것인데, 이는 일개 사업장의 노동쟁의를 넘어 지역의 시민사회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국회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위장폐업이 이루어진 사업장들의 대명사처럼 관심을 받았다. 이 사건은 1989년까지 이어졌고, 광주지역노동조합 협의회추진위원회 가 창립되었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와 같은 노동체제의 변화를 반영하듯이, 1988년 3월 10일까지 아세아자동차의 정당하게 보너스를 지급할 것에 대한 요구를 비롯해 대하전자, 미도전자, 광일기공 등에서 최저임금제 확보 및 근로조건 개선 요구 투쟁이 발생했다. 또한 MBC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아시아자동차에서는 직선제를 통한 민주집행부 건설투쟁이 있었으며, 세화공업, 서산기업, 광주레미콘, 서산콘트리트 등 7개 사업장에서 해고되었던 노동자들의 연대 농성이 한국노총 광주시협의회에서 전개되기도 했다. 또한 3~4월에는 세화기계, 남해어망, 우리데이타, 대산금속 등의 중소사업장과 대우전자, 대우캐리어, 금성알프스전자 등의 대기업 사업장에서도 임금인상과 최저생계비 보장 등을 쟁점으로 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들 노동쟁의들 모두가 긍정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도, 목표했던 요구사항을 성취했던 것도 아니지만, 5월에 이르면 노동쟁의는 거의 대부분 타결되었다. 그리고 4월에는 현대그룹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는 연대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지역을 넘은 노동자연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88년의 노동절 행사는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거의 재조정되는 과도기 양상을 띠었다. 3월 10일에 임금인상 투쟁 결의대회 가 열렸지만, 이는 노동절 행사라기보다는 춘계투쟁의 첫걸음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노동절 행사는 5월 1일 전남대학교에서 노동자와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노동절 기념식 및 노동자 대동단결한마당 으로 명명되었던 이날 행사는 민주쟁취전남노동자위원회 등 3개 단체가 주관했는데, 참석자들은 금년도 임금인상투쟁과 노동운동탄압사례보고에 이어 노동쟁의조정법철폐 등 7개항을 결의했다. 그리고 5월에는 대우캐리어, 럭키호남판매, 영화산업 등에서 노동조합이 신규로 설립되었고,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또한 5~6월에 걸쳐 택시와 버스 등 운수업계에서 임금인상 투쟁이 벌어졌으며, 우주전구, 청진, 뢰동산업, 전남방직, 적십자혈액원 등에서 신규가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생존권 투쟁이 7~8월까지 계속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980년대 후반 상승했다가 1990년대 초에 하락했다. 그리고 다시 중반 이후 상승했다. 이는 임금인상과 관계가 깊다. 다른 지역에 비해 임금인상률이 높은 1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5 것이다(홍성우 강현아, 2003: 54). 또한 전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 광주 전남 조직률이 하락하지 않은 주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노조에 대한 신뢰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노동조합 가입의 이득이 비용에 비해 컸던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노태우 정부 후반기 노동정책은 광노협의 결성에서 지역연대 노동조합들의 연합체인 전노협이 결성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광노협이 결성된 것은 1989년이지만, 노동조합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전노협이 창립되고 또한 당일에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등장했던 1990년 1월 22일 이후가 중요한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운동에서는 광노협이 결성되었던 1989년이 갈등이 가장 격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1990년부터는 단위 사업장의 노동쟁의나 눈에 띄게 줄어들고, 지역별 업종별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었던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1990년의 노동절 행사는 임금인상투쟁본부와 광노협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1980년대와 달리 노동절 행사는 시민사회단체가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자 조직들이 직접 주관하는 기념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1990년 4월 18일에는 노동쟁의조정법 가운데 처음으로 제3자 개입금지조항 위반죄를 적용하여 삼양시내버스 총무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일은 당시 노동 관련 법률의 적용이 점차 엄격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1991년과 1992년에는 노동조합운동으로 인한 갈등의 발생 빈도가 크게 감소했다. 이는 정부와 기업주가 노동쟁의를 차단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방법들을 강구했고,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 노조 간부나 특정 조합원을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청구 는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이는 1990년 10월 정부가 불법 쟁의행위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적극 활용하라 라는 지침을 하달한 이후 시행되었다. 2. 노태우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노동자 대투쟁은 노사 모두에게 노동환경이 앞으로 격변할 수밖에 없을 인식시켜주었던 중요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는 사용자 측 일방의 임금 산정과 열악한 노동조건의 수용을 강제하는 것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미 부여와 노동조합 결성 그리고 노사 간의 단체협상에 관한 기대치가 크게 상승했다. 이로 인한 영향은 1988년의 노동조합운동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정부의 노동정책 변화와 노동운동의 연대 조직화 및 노동조합운동의 일상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양상을 표출했다. 노동운동사 143

146 1)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1) 제조업 1 전남방직 전남방직 노동조합은 4월혁명 직후에 민주노조가 결성되어 6개월 정도 활동하다 5 16군사반란이 일어나면서 해산되었다. 그 이후 28년 여 동안 어용노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노동조합 집행부는 9년째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광명을 중심으로 한 남자사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현장 내 작업 조건 등 여타의 근로조건과 노조의 어용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89년 대의원 선거가 다가왔다(전남사회문제연구소, : 16~17). 노동자들은 노동자 대투쟁 당시 평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작업 거부를 전개했다. 당시의 투쟁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무리되었지만, 일정정도 자신감과 시각의 확대를 가져왔다. 한편 1988년에는 9차례의 노사협의를 걸쳐 파업이 없이 13~14% 임금 인상을 결정했다. 1989년에는 대의원 선거 국면이 되자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진 방적2과 정방부서를 중심으로 4월 20일에 어용노조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대의원 후보로 출마했고, 4월 25일에 10여 명이 당선되었다. 그러자 회사측은 대의원으로 당선된 학생출신 조합원을 상사명령불복종 으로 5월 16일 해고시킬 것을 준비했다. 5월 13 14일에 이 소식을 들은 노동자 40여 명은 해고저지를 위한 투쟁을 결의했다. 5월 16일 계장, 과장, 대리, 직장 등의 지휘를 받아 방실장들이 해고 대상 대의원과 조합원 7명을 집단으로 구타하고, 지하실에 감금 및 폭행했다. 대의원들은 예고대로 해고되었고, 조합원들은 기숙사에서 강제 퇴사 조치되었다. 5월 27일 대의원 해고 반대투쟁에 가담했던 조합원들이 출근정지를 당하고, 조합원들은 출근투쟁 및 유인물 배포 등을 통해 선전활동을 강화했다. 7월 10일 부모님과 동석한 공장장과의 면담에서 출근정지 후 바로 원직 복직될 것과 기숙사 입기가 분명히 되어 출근투쟁이 뜸해지자 다시 탄압이 시작됨. 이에 다시 출근투쟁이 시작되었다. 1989년 8월 28일 평민당사 점거농성을 시작하면서 전원복직, 폭력관리자 처벌, 현장 내 탄압 중지, 공개사과와 치료비 보상 등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충분하게 조직화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투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8월 28일 평민당 점거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전원 원직복직, 폭력관리자 처벌, 현장 내 탄압 중지, 공개사과와 치료비 보상 등을 요구했다(전남사회문제연구소, : 16~18). 광노협, 광주 전남여성회, 남대협, 광주NCC인권위원회 등 11개 사회단체는 1989년 9월 7일 전방 노동탄압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방(주)은 민주노조를 만들어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찾겠다는 여성노동자들을 감금, 구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등 탄압하다가 마침내 해고, 강제퇴사, 1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7 전출시켰다면서 부당징계철회 원직 복직, 폭력 관리자 엄중 처벌 등 5개항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임을 밝혔다. 일신방직에서도 1988년에 9차례의 노사협의를 걸쳐 파업이 없이 13~14% 임금 인상을 결정했다. 2 금성알프스 금성알프스는 여성 1,120명, 남성 80명의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 투쟁을 거치면서 어용노동조합을 퇴진시키고 민주노동조합(지부장 김순임)을 세워 조합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노동조합을 운영했다. 노동조합의 간부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금성알프스의 노동조합운동이 유명해진 것은 노동자의 성별을 두고 대립각이 형성되고,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즉 노동조합 사수투쟁이 전개될 때, 여성노동자는 민주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서 남성노동자는 구사대가 되어 이를 해체시키기 위해 격돌했다. 회사 측은 노동조합 활동가가 대부분 여성이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노조를 간섭하고 탄압해 오다가, 1990년 임금협상을 앞두고, 지부장과 부지부장을 집시법과 노동조합법 위반 등을 이유로 구속되도록 했다(전라남도, 2003: 343~344). 금성알프스 노조는 이에 반발하여 준법투쟁을 하며 맞서자 또 다시 교육선전부장과 사무장을 구속시키고 40여명의 여성간부 모두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정직, 출근정지, 해고 등을 단행하였다. 해고자 9명 모두가 미혼 여성간부였다. 회사측은 여성 조합원들을 구타하고 실신시켜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구사대의 폭력에 항의하는 집회가 계속되었다. 9명의 해고자들은 매일 회사로 출근투쟁을 전개하였고, 회사측은 경비와 노무과 직원을 동원하여 또 다시 폭력을 행사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하는 사람이 생기고 다른 업체에 취업하기도 하면서 복직투쟁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1993년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정부의 복직 발표에 힘입어 다시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이들 가운데 LG본사를 상대로 복직투쟁을 하는 해고자도 있었고, 결혼한 해고자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 앞에서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여성은 해고를 시켜도 결혼하면 그만이니까 라는 생각으로 무자비하게 해고시킨 회사 측의 생각을 깨고, 이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하는 바람으로 활동을 지속했다. 1989년 5월 31일부터 노동조합 대의원과 상임집행부 간부 19명이 노동조합 임시총회 등으로 인한 휴무시간분을 지난달 급여에서 공제한 것에 반발하여 철야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조합장이 독단으로 임금협상을 체결한 것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임시총회를 소집했고, 노동절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4시간을 휴무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회사측은 단체협약상 임시총회의는 노사합의 사항이며 근무시간 이외에 개최해야 한다고 하면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한 것이라고 노동운동사 145

148 주장했다. 1990년 5월 12일 노동조합 지부장 등 노조 간부 4명이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정상조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사용자 측은 30일 노조지부장 직무대리 등 2명을 취업규칙 위반과 업무 방해 등을 이유로 해고하고, 1명은 사직 권고, 노조 간부 28명에 대해서는 출근정지 견책 등의 처분을 내렸다. 사용자 측은 노동조합이 근무시간 중 임시총회 등으로 조업을 중단시켜 13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징계를 받은 노동자들은 31일 출근하려다가 회사 정문 앞에서 제지를 받았다. 이에 조합원 300여 명은 노조 간부에 대한 징계와 출입 시 소지품 검사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벌였다 년 새한전자레크전자 휴폐업 철회 투쟁 1989년 4월 12일 현재 새한전자가 노사분규가 발생하여 회사 측이 휴업을 공고하여 조업이 중단된 상태이다. 1989년 6월 30일 새한전자 노조원 20여 명은 폐업철회 투쟁에 들어갔다. 이들은 전 사장의 집으로 찾아가 농성을 벌이다가 사장과 함께 차를 타고 회사를 향하던 중 차량이 파출소로 진행하자 2명이 내리려다 다쳤다. 4 금호타이어 1988년 4월 22일 기본급 15% 인상에 노사가 합의했다. 이와 같이 노사 간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상황은 1989년에 이르면서 급변했다. 노동조합은 임금 75.2% 인상안을, 사용자 측은 16% 인상안을 주장했다. 노동조합은 4월 15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97%의 지지로 찬성이 가결되자, 4월 20일 89 임투 결단식 을 개최하고, 임금협상이 결렬되자 즉각 태업에 들어갔다. 노동조합은 17일에 광산구청과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신고를 했으나, 광산구청은 방위산업체라는 이유로 신고서를 반려했다. 이로 인해 생산량이 축소되자, 사용자 측은 22일 노조위원장을 비롯하여 임금투쟁위원 13명을 노조원 선동 및 불법쟁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4월 27일 노동조합은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사용자 측이 태업으로 인한 손실을 4월분 급료에 반영하자 조합원들이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일부 노동자들은 노조집행부와 협의없이 단체행동을 하기도 하고, 일부 노조원들은 임금인상이 관철되지 않으면 노조집행부를 불신임할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여 노노갈등의 상황도 나타나고 있었다. 협상이 지연되자 4월 29일 회사는 휴업을 공고했다. 하지만 협상은 계속되어 5월 4일 파업 9일 만에 노조위원장은 직권으로 임금 21% 인상, 완전정상조업을 조건으로 금여감액분을 생산장려금으로 지급 등에 합의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처럼 조업이 정상화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원들은 위원장에 대한 불심임안을 가결했고, 농성을 계속했다. 회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5월 20일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보다 수용한 입장을 제시했으나, 노동자들은 파업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1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9 징계철회조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주장했다. 결국 파업 32일 만인 5월 26일 회사는 징계철회를 받아들이면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29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1990년 8월 23일 노조민주화를 주장하며 입후보한 손종규가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에 참여했다. 이들은 1991년 2월 12일 수련회를 마치고 나오던 중 검찰에 의해 노동쟁의조정법 제3자 금지조항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에 금호타이어에서는 3일째 항의 집회를 개최했다. 또한 설 연휴인 2월 14-16일에도 노조간부들은 조합 안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항의농성을 계속했다. 5 아시아자동차: 방위산업체 논쟁 1988년 6월 23일 부 터 아 시 아 자 동 차 생 산 직 노 동 자 1,500여 명 이 사 무 직 과 의 임 금 격 차 해소 등 4개항의 요구사항을 주장하며 작업을 거부했다. 또한 이들은 5명의 해고자 복직 등 4개항을 요구했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27일에 아시아자동차 부품협력업체 노동자 2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의 조업 중단에 대한 우리의 입장 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신속한 조업재개와 분규 타결 등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6월 30일에 노사협의를 통해 해고근로자 복직 허용, 생산장려금 8천원 및 근속 수당 15% 추가 인상 등 4개항이 합의되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당초 요구했던 수준의 임금 인상 등 6개항의 주장을 계속하여 정상 조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7월 1일에 노동조합은 조합원 찬반 투표를 부쳤으나 부결됨에 따라 노동조합 위원장이 사임했다. 그렇지만 노사협의 타결 조건을 일단 가결된 것으로 보고 조업이 재개되었다. 10월 19일 사용자측은 노동조합이 노사협의에 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작업을 거부하여 9억 5천 6백만 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로 노조위원장을 비롯하여 집행부 5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1989년에는 아시아자동차에서는 노사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4월 26일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임금교섭이 결렬되자 쟁의발생신고를 하고, 정시출근 등 준법투쟁을 벌였다. 노동조합은 임금 28% 인상을 회사는 20% 인상을 제시하여 타결되지 않았다. 5월 18일 노사는 금년 4월부터 기본급 71,800원 인상 소급 지급, 5월부터 주 44시간 근무, 상여금은 관례 준용, 사원주택 건립 추진 등에 합의하면서 파업을 종료했다. 그 해 12월 에 는 1990년 단 체 협 약 을 당 겨 서 진 행 했 다. 4일 노 동 조 합 의 요 구 로 90년 도 단체협약을 체결 하는 과정에서 단체협약출정식을 열었다. 노동조합은 퇴직금 누진제, 노사동수 인사 징계위원회 구성, 근로시간 단축 등을 요구했다. 사용자 측은 출정식에 참석했던 조합원 12명을 근무지 이탈 등을 적용하여 사유서 제출을 강요했다. 이에 12월 6일 조합원 126명이 노조활동 탄압 중지, 사용자 측의 공개 사과 등을 요구하며 집단조퇴서를 제출하고 태업에 들어가 노동운동사 147

150 일부 공정의 조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서구청은 아시아자동차가 방위산업체이므로 노동쟁위조정법에 따른 적법행위가 아니라며 상황이 계속되면 법에 따라 조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989년의 노사갈등은 1990년으로 이어져 1월에도 수차례에 걸쳐 협상이 진행되었다. 아시아자동차의 단체협약 갱신안은 68개 조항이었다. 핵심 쟁점은 경영권 참여, 인사권 참여, 노조 활동 보장, 쟁의시 무노동 무임금 철회 등이었다. 1990년부터 5개 자동차노동조합이 공동임금협상을 진행했다. 이는 그동안 정부가 추구해온 업종별 공동임금협상에 응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아시아자동차에 이에 맞추어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단체협상의 양상은 전년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0년 6월 4일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전면 태업에 돌입했다. 6월 5일 조합원 투표에서 71.75%의 찬성으로 파업이 결정되었고, 쟁의행위 돌입 여부는 노조 위원장 등 간부 12명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에 일임되었다. 1991년에 단체협상과 관련하여 파업이 결의되었고, 이행되었다. 6월 19일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총회에서 파업을 결의했다. 노동자들은 21일부터 부분적인 조업 중단에 들어갔고, 22일에는 사실상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기본급 기준 23.96% 인상을 주장한 반면, 사용자는 9.9%인상과 수당 인상을 제시했다. 회사는 24일부터 무기한 휴업을 공고했다. 주요협력업체의 노사분규로 부품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상조업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출입을 통제했지만,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회사 운동장에 집결하여 휴무조치 철회 등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6 대우캐리어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은 1989년 6월 9일 단체협약 101개 가운데 미 타결된 퇴직금누진제, 인사권 참여, 복지수당신설 등의 관철을 요구하며 쟁의발생신고를 한 뒤 6월 18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7월 4일 노사는 기본급 1만원 인상, 가족수당 2만원 신설, 파업기간 중 생계보조금 10만원 지급 등에 합의하여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1989년 12월 사용자 측이 무노동 무임금 적용방침을 밝히자 노동조합이 이에 반발하여 임시총회를 열고 작업을 거부하자, 29일 사용자 측이 노조위원장 등 7명을 광주지방노동청에 고소했다. 7 대우전자 광주공장 1988년 4월 6일부터 대우전자 광주공장 노동자 2,600여 명은 임금 24.2% 인상 등을 주장하며 협상을 개시했다. 15일부터 대우전자 노동자들은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신고를 한 뒤, 임금협상을 계속했으나 수용이 되지 않자 27일 오후부터 작업거부에 들어갔다. 28일 출근과 동시에 공장 앞 잔디밭에 집결하여 연좌 농성을 계속했다. 대우전자의 파업은 구미, 광주, 주안, 인천공장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17일에 10차의 노사협상 끝에 타결되었고, 18일부터 정상근무에 1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1 들어갔다. 기본급 17% 인상, 생산수당 5천원과 근속수당 3천원 지급, 전 직원 1호봉 추가 승급, 파업 기간 중의 임금 미지급 등에 합의했다. 1990년 11월 대우전자 광주공장에서 발생했던 화재를 수습하고 공장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생산직 노동자 일부를 영업직으로 전화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노동자들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농성을 전개해왔다. 1991년 3월 5일 오전에 대우전자 광주공장 노동자 1천 여 명이 회사 정문 앞에서 노동조합 간부 7명에 대한 해고와 정직 조치 철회 등을 요구하며 30여 분간 농성을 벌였다. 또한 오후에는 노조사무실 앞 잔디밭에서 회사측의 폭력 규탄대회 를 열고 오전 출근투쟁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한 경비원과 사용자 측을 규탄했다. 대우전자의 노동쟁의는 8일과 9일에도 재개되었다. 관리자들이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서 등을 가져가고 대자보를 훼손하자, 노동자들은 이를 노조 활동 탄압으로 규정하고, 공개사과와 징계 철회 등을 주장하며 더 격렬하게 항거했다. 노사갈등이 해결되지 않자 사용자 측은 13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출근하려던 노동자들은 정문 앞에서 관리 경비직 사원들과 충돌했고, 경찰이 출동하여 노동자들을 해산시켰다. 경찰은 8일의 집회를 문제 삼아 12일이 회사 측이 고소를 하자 16일에 노조부지부장 등 4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추가 구속했다. 그러자 18일 대우전자 광주지부 민주노조추진위원회 소속 노동자 50여 명은 평민당 광주시지부 사무실을 점거하여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사건이 악화되자, 3월 20일 본사의 노사대표들과 노동조합 광주지부 수습대책 대표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업을 재개한 후 노사분쟁 사항들을 협의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간의 노동쟁의의 사안들이 해결된 것이 아니었고, 미봉책이었다. 3월 22일 정상조업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던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되었던 노동자가 구속되었던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파업과 휴업이 장기화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는 상황을 우려했던 95%의 노동자들은 당일 출근하여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8 기타 로케트전기 1988년 4월 23일 노사합의로 임금인상을 마무리했다. 트라이선 1988년 4월 6일 쟁의신고를 하고, 2~3시간 간격으로 회사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치고 있는 정상조업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사 149

152 호남샤니 1988년 7월 2일부터 양산동 소재 호남샤니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회사 측은 휴업 조치를 단행하여 조업이 중단되었다. 노사는 4일에 노동조합 인정, 부상 근로자 치료, 파업기간 중 임금 지급과 민형사 책임 면제 등 모두 8개 항에 합의했다. 호남샤니는 6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우주전구 양산동 소재 우주전구 노동자 50여 명이 1988년 7월 25일부터 노동조합 인정과 일당 2천원 인상, 근로시간 1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작업을 중단했다. 노동자 160여 명 가운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100여 명은 정상 근무했다. 대호산업 1989년 1월 13일부터 신촌동 소재 대호산업 노동자 70여 명이 감원 철회, 작업복 지급, 최저임금제 실시, 상여금 200% 지급 등을 주장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1월 17일 노사는 상여금 100% 지급 등에 합의하고 파업 철회했다. 대호산업의 노동쟁의는 최저임금제 적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삼면스테인레스 1989년 4월 12일 현재 하남공단 입주업체인 삼면스테인레스 노조원 3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4월 21일에도 계속되었다. 광일기공 1989년 4월 광일기공에서도 파업이 시작되어 21일에도 파업 중이었다. 로케트정밀 1989년 6월 1일 일곡동 소재 건전지 생산업체인 로케트정밀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은 곧바로 교섭에 들어가 임금 23% 인상, 상여금 100% 인상 등을 요구하며 회사 측과 교섭을 벌였다. 노동조합은 협상이 결렬되자 2일에 쟁의발생신고를 냈고, 10일에 파업을 결의하고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대우캐리어 1989년 6월 14일 현재 대우캐리어에서 노사가 임금협상과 단체교섭에 난항을 거듭하다 쟁의 발생신고를 내고 회사 측과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1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3 삼양물산(주) 1989년 6월 14일 현재 삼양물산(주)에서 노사가 임금협상과 단체교섭에 난항을 거듭하다 쟁의발생신고를 내고 회사 측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리라전자산업(주) 1989년 11월 14일 화정동 소재 리라전자산업(주) 여성노동자 20여 명이 회사 사장 집으로 가서 위장폐업 철회 등을 주장하며 30분간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사장이 적자 등을 이유로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노동자들이 회사를 자체 경영하여 흑자로 전화하자 10월경부터 다시 개입하기 시작하여 임금을 포함한 흑자액 1천 여 만원을 부채변제금 명목으로 지출하고, 11월 11일에는 노동자들 몰래 폐업신고를 했다고 비판했다. 세화기계 1989년 11월 16일 아시아자동차 하청업체인 세화기계에서 단체협상과 관련 노동조합이 임시총회를 개최하자 태업했다는 것을 이유로 위원장 등 노동조합 간부를 광주지방노동청에 고소했다. 일국중공업 1992년 9월 14일 금호타이어 계열사인 하남공단 내 일국중공업 노동조합이 상여금 지급 기준, 징계위원회 노사 대표 참여 비율 등의 단체협약 협상이 결렬되자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사용자는 9월 18일 전남지노위에 직장폐쇄를 신고했다. (2) 운수업: 대중교통 1 시내버스 1988년 삼양시내버스 노동쟁의 1988년 6월 22일 삼양시내버스가 운행을 중단했다. 삼양시내버스의 운행 중단은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현 노동조합 조합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단행하여 가결시키고, 그의 사표를 받아줄 것을 광주시에 요구하면서 발생했다. 운전기사 247명은 5월 25일 노사가 체결한 임금 18.8% 인상을 무효화하고, 노동조합 위원장의 퇴진 등을 요구했다. 운전기사들이 노동조합 위원장을 불신임한 것은 그가 사용자 측과 밀실 협상을 진행했고 절차를 생략한 채 임금협정을 체결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합장은 자신의 문제를 다룰 임시총회 소집을 거부했고, 광주시 당국은 6월 9일과 18일에 걸쳐 조합원들이 요구했던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을 거부했다. 결국 아무런 해결책을 노동운동사 151

154 찾지 못한 운전기사들은 6월 23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언론은 노노의 갈등으로 보도하면서 운전기사들의 직업적 공익성과 책임성을 강조함. 삼양시내버스는 27일 정상운행을 개시했다. 노조위원장이 사퇴를 전제로 운행재개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노사는 종래의 단체협약은 인정하되, 불합리한 부분은 재교섭하고, 민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으며, 기타 미비점은 노사협의회에서 논의할 것 등 5개 항에 합의했다. 1989년 삼양시내버스 노동쟁의 1989년 6월 5일 전남지방노동위원회는 삼양시내버스가 낸 쟁의발생 신고가 무효라고 결정했다. 삼양시내버스는 1981년 이후 관행으로 해오던 공동교섭에서 탈퇴하여 5월 7일 개별교섭을 요구하면서 회사 측과 대립했다. 이것은 교섭방식을 둘러싼 노사의 이해가 충돌한 것이었다. 11일 노동조합은 임시총회를 열고 노동위원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개별교섭을 통한 단체협약 체결을 회사 측에 거듭 요구했다. 6월 23일 노동조합원 287명은 송하동 소재 회사운동장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단체협약거부에 대한 대응방안, 조합규약 개정, 상조회 개정문제들을 협의하면서 버스운행을 중단했다. 광주지방노동청과 사용자 측은 업무 방해 행위라고 경고했고, 광주시는 운휴를 해제하고 준법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요구는 일면 타당성이 큰 주장이었다. 1981년 공동교섭의 단체협약을 통해 임금을 비롯해 근로조건이 악화되거나 근소한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행 노동법은 기업별 노동조합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서 단위사업장별로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6월 28일부터는 일부 노선에서 버스 운행이 재개되었다. 그렇지만 사용자 측은 조합장과 노동조합 간부 등 6명을 업무방해 및 3자 개입 등의 협의로 경찰에 고발했고, 29일 경찰은 12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7월 1일에 이들 가운데 4명을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 개입금지 및 업무방해 위반으로 구속했다. 그러자 버스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7월 8일 노사는 구속된 노동자에 대한 회사 측의 고소 취하와 이들의 석방을 위한 회사 측의 노력, 석방 후 해고 조지 금지, 차량 운행 정상화, 구속자 석방 후 회사 측에 사과, 노사화합 등 6개 항에 합의하고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1990년 4월 18일 노조 총무 임재복에게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노동쟁의조정법 중 3자 개입금지조항 위반죄를 적용하여 징역 3년이 구형되었고, 노조위원장 등 4명에게는 업무방해죄가 적용 징역 1년 6개월씩이 구형되었다. 삼양시내버스를 제외한 7개 시내버스회사 노동조합은 7월 14일 전남지방노동위원회와 각 구청에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노동조합은 임금 28.6% 인상을 요구하며 단체교섭을 벌여왔다. 사용자측은 당국의 버스요금 인상, 세제혜택, 할인제 폐지 등을 요구하며,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냉각기간이 끝나는 30일부터 파업이 가능했다. 노동자들은 23일 쟁위행위 찬반투표를 벌인 결과 1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5 현대, 대창, 동양, 동화 등 4개 버스회사에서 쟁의 돌입을 결의했다. 광주시는 29일 광주 전남지방 노동위원회에 직권중재를 요청했다. 7개 회사 노동조합원들의 당국의 직권중재 회부결정에 반발하여 집단파업에 돌입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8월 8일 광주 전남지방노동위원회가 중재한 16.8% 임금인상안에 합의했다. 주목할 점은 버스업계의 단체협상이 서울 등 전국 5개 도시와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6대 도시 노동조합들은 8일 전면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으나, 서울시에서 타결이 이루어지면서 광주시도 임금인상이 합의되었다. 1992년 광주시내버스 노동쟁의 1992년 2월 20일 광주시내버스 노사의 임금협상이 결렬되면서 회사별로 파업 찬반투표에 들어갔다. 투표 결과 파업 지지가 높아 27일까지 협상이 완료되지 않으면, 28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것을 선언했다. 임금협상은 노조는 40% 인상한 1백만 원을 주장한 반면, 사용자는 버스요금이 당초 요구액보다 적게 인상되었음을 이유로 임금 인상이 무리라는 것이었다. 노사는 협상을 계속했는데, 노조는 23%를 사용자는 18%를 제시했다. 당국은 냉각기간 내의 파업이라며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혐의로 강경 대처할 것임을 선언했다. 사용자는 쟁의발생 신고를 내고, 노동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했다. 노동조합은 이를 비판하면서도 협상을 계속하여 27일 밤 임금인상을 20%하고, 구체적인 조율은 선 운행 후 협상한다는데 합의했다. 2 택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택시 노동자들은 지역의 노동조합을 연대한 단체의 결성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 광주지역 택시노동조합 조합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제 권리 쟁취를 위한 활동 전개할 목적으로 하는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부가 결성되었다. 당시 지부장은 강성렬이었다. 1988년 광주지역 택시업계 노동쟁의 1988년 택시업계의 최고 쟁점은 타코메타기 철거와 임금협정 체결이었다. 이를 쟁점으로 한 노동쟁의는 광주 전남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발생했다. 광주지역에서는 6월 2일부터 전국택시노조 광주택시분실을 중심으로 노사협상이 이루어졌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핸 8일부터 교섭위원 5명이 삭발을 하면서 단체협약 및 임금인상 투쟁 4단계 행동에 돌입했고, 14일에도 타결을 촉구하기 위해 40여 명이 추가로 삭발을 했다. 노사는 5월 17일부터 단체협약안 교섭을 시작했지만, 총 94개의 조항들 가운데 10개항에만 합의를 했고,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6월 17일에 파업에 들어갈 것을 예고했다. 6월 15일 광주택시지부는 파업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광주 애향 민주 시민에게 드리는 노동운동사 153

156 글 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광주택시 노사 간의 협상에서 최대 쟁점은 근로조건 개선에 있었다. 특히 유니온샵 제도 인정, 근무시간 중 노동조합 활동 인정, 노동시간 단축, 유급 휴일 확대 등에서 노사의 입장이 대치했다. 그런데 단위 사업장별로는 예고한 날보다 일찍이 파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6월 10일부터 신안동 소재 합자회사 유창교통 노동자 34명이 병가 신청한 운전기사 기본금 지급, 정비공 채용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6월 11일 송하동 소재 대광교통 운전기사 50여 명이 송암공단에서 백운동로터리까지 30여 대의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1/4분기 노사협의사항 중 일부 조항의 무효를 주장했다. 노사협상이 타결되지 않자, 광주택시지부는 6월 17일부터 작년에 이어 또 다시 택시노동자 파업이 개시되었다. 당일 광주역 광장에서는 운전기사 1,000여 명이 참석하는 88단체협약 및 임금인상 투쟁 결의대회 를 열렸다. 노동자들은 광주시 택시운송조합 이사장의 인형 화형식을 갖고, 도심으로 진출하려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이를 넘어 도심으로 진출하여 한국노총 앞에서 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에 대해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여 해산시켰다. 노동자들은 광주시청과 광주서부경찰서 등지로 진출하여 농성을 벌였으며, 이날 경찰에 13명의 운전기사가 연행되었다. 사용자 측은 20일 광주시청에 휴지계를 제출했으나, 광주시는 이를 반려했다. 400여 명의 노동자들은 20일에 신안동 소재 택시조합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노동조합 교섭대표 8명은 광산동 소재 광주지방노동청 청장실을 점검하여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광주경찰서 앞에서 이들의 연행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18명의 노동자들도 연행되었다. 택시파업이 장기화되자, 6월 21일 총 59개 회사택시 가운데 56개 회사택시 사용자들이 광주직할시와 노동위원회에 직장폐쇄신고를 했다. 택시노동자들과 학생 그리고 시민 100여 명은 6월 22일 전남대병원 영안실 팡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6월 23일에는 광주역 광장에서 단체교섭 조속 타결 등을 주장하면 농성을 벌였는데, 정경수 등 3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7월 2일부터는 개인택시들이 회사택시들의 동조 파업 요구를 수용하여 이행하고, 회사택시 조합원들이 자가용 영업을 차단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데 개인택시들의 영업 중단은 제한적인 것이어서 4일 새벽부터 재개되었다. 7월 15일 광주역 광장에서 택시파업 조기 타결을 위한 광주 노동자, 시민 촉구대회 가 운전기사와 시민, 학생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들은 이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13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7월 21일에도 광주공원 광장에서 교섭 촉구대회를 열었다. 사용주 측은 23일부터 비노조원을 중심으로 운행을 재개하려고 시도하다 노동조합원들의 활동에 막혀 실행하지 못했다. 일부 운행된 택시들은 조합원들의 영업 방해를 받거나 학생 등의 공격을 받아 운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7 7월 30일 광주시장이 직권중재를 요구하여 이를 전남지방노동위원회가 수용함으로서 파업이 종료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장기간의 파업으로 인해 즉시 정상 운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8월 1일에 완전 정상화되었다. 전남노동위원회 중재위원회는 8월 12일 월 근무 일수를 26일로 확정했으며, 상여금 300%, 월평균 임금은 상여금을 포함하여 11.8% 인상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노사 양측에 통보했다. 그리고 나머지 단체 임금협약은 87년도 현행 단체협약을 그대로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광주지역 택시업계 노동쟁의 1989년 택시업계는 전국택시노련 광주지부의 주도로 6월 20일 광주역 광장에서 89임금인상투쟁 출정식 및 제2차 결의대회 를 시작으로 촉발되었다. 59개 택시노조 가운데 52개가 교섭권을 위임하여 공동교섭으로 진행되었는데, 기본급 9만원 인상, 가족수당 신설, 월차수당 휴가대체 등 5개 항을 주장했다. 8월 1일 광주직할시택시운송사업조합 노사교섭위원들은 임금 28% 인상과 사납금 16% 인상 그리고 업적금을 6대 4로 배분하는 것에 잠정합의했다. 1989년 9월 16일부터 신안동 소재 새한택시회사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공정한 배차와 식대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과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조합 조합원과 광주지역 택시노동자 200여 명은 10월 18일 새한택시 장기파업 조기타결과 구속동지석방 촉구대회 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은 구속자 석방과 식대지급, 출퇴근 시간 보장 등을 요구했다. 경찰은 10월 26일 병력을 투입하여 농성 중이던 노동자 22명을 연행하고, 시위 도구와 파업 일지 등을 압수했다. 노동조합은 27일에 회사가 조합원들의 업무방해에 대한 고소를 취하면서 업무재개에 잠정합의했고, 경찰은 연행자들 가운데 2명을 구속하고 나머지를 훈방했다. 1990년 광주지역 택시업계 노동쟁의 1990년 7월 12일 광주택시운송사업조합은 근무일수 조정, 노조활동 보장, 주택조합 설립, 상법위원회 구성 등의 주요 쟁점들에서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 신고를 냈다. 노조가 결성된 62개 사업장 가운데 61개 사업장의 노동조합이 위임을 받았다. 노사 간 단체 및 임금협상이 결렬돼 사용자측이 쟁의발생 신고를 낸 것은 이 지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조합원 1천여 명은 무등경기장 앞에서 단체협상 조속 타결 촉구 및 기본급 3% 인상 분쇄를 위한 제2차 전 조합원 비상총회를 개최했다. 1991년 광주지역 택시업계 노동쟁의 1991년의 광주지역의 택시업계 노동쟁의는 2월에 인상된 택시요금에 따른 사납금 인상과 업적금 분배를 주요 쟁점으로 발생했다. 택노련 광주지부는 3월분 월급부터 이를 반영해 줄 것을 노동운동사 155

158 요구했지만, 사용자 측은 5월에 있을 단체교섭을 거친 뒤 적용시키겠다고 맞섰다. 결국 4월 11일에 회사택시 노동자들은 운행거부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총 66개 회사 2,392대 가운데 11개 회사 330대가 참여했는데,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렇지만 이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광주지부는 완전월급제, 상여금 400%, 징계조항 삭제, 월 25일 근무 등을 주장했으나, 광주시 택시운송사업조합은 원급 6% 인상, 상여금 300%, 징계조항 존치, 월 26일 근무를 제시했다. 6월 17일 택시노련 광주시 지부는 파업여부를 묻는 찬반투표를 통해 82% 찬성 지지를 확인하고, 18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에 참가한 택시는 2,514대 회사택시 가운데 49개사 1,700여대였다. 20일에는 77개사 2,580여대의 택시가 참여하여 사실상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광주지검과 광주시 그리고 노동청은 불법 파업으로 규정하고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광주지부는 18일 광주역 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불법 집회로 간주하자, 조선대학교 노천극장에서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입금 인상분쇄와 91임금 투쟁 승리를 위한 5천 택시노동자 결의대회 를 개최하고 광주역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검찰은 이 대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강성렬 지부장 등 노조간부들 4명을 노동쟁의조정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운행 중인 택시를 파손한 기사들은 업무방해 혐의로 검거할 것을 지시했다. 21일 광주시지부는 전남대에서 제2차 임금투쟁결의대회를 가졌다.? - 당국 불법 규정 7월 2일 양측은 주 44시간 근무(2시간 단축), 운송수익금(사납금) 8.4% 인상, 총임금 12.1% 인상, 5 6월 미지급 임금과 업적금은 7월 임금에 합산 지급, 파업중 일어나 민 형사상 문제에 대한 각 사업장에서의 불이익 처분 금지 등 7개 항과 구속된 지부장의 형사처벌 후 복직 등에 합의했다. 1992년 광주지역 택시업계 노동쟁의 1992년 광주시 지부는 6월 13일 정부의 택시요금 인상안을 거부하고 현행 요금을 그대로 받기로 했다. 노동자들은 택시문제의 제도적 개선이 없는 미봉책 인상이라는 주장이다. 노조들은 택시요금 기습인상은 미봉책이며, 경영난을 시민에게 떠넘기는 행정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1992년 임금협상의 전초전이었다. 6월 14일의 정부의 택시요금 인상으로 인해 발생한 사납금 조정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사용자는 사납급 조정문제를 단체협약 갱신에서 우선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노동조합은 일괄 처리를 주장했다. 노조는 사용자가 단체교섭에 불성실하거나 회피한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광주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로 고소장을 냈으며, 각 회사별로 임시총회를 갖고 7월 분 임금으로 지불하지 않고 별도 관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진정서를 제출했다. 갈등을 계속하던 노사는 10월 15일 새벽에 파업을 시작했으나, 그동안에 합의를 이루어 낮부터는 운행을 재개했다. 노사는 특별휴가 5일에서 6일 확대, 명절날 상여금 기본급의 10% 일괄지급, 가족수당 1만원 신설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요금 인상분 처리에 대한 근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체협상과 임금협상 자체가 노사간의 교섭이 되지 않아 아예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1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9 노동조합의 요구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물러서지 않아 파업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12월 3일 광주지부는 가족 수당 지급 협상 결렬로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3 기타 운수업계 1988년 2월 29일 한국노총 광주시협의회에서 레미콘업체 해고자 27명이 복직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1988년 6월 30일 광주시청 앞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 광주개인용달 조합원 27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6월 29일부터 70여대의 용달차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용달회사에 증차하기로 한 52대의 용달차 면허를 즉각 취소하고, 차주들의 생계를 위협받는 일이므로 증차 요인이 있을 때에는 사주들과 협의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에서 연행자가 많았던 것은 이 시위로 인해 민원인들의 불편이 컸고, 불법행동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7월 2일 29대만 증차하고, 나머지 23대는 연말에 개인용달조합측과 협의해서 결정하기로 하며 향후 2년간 증차를 억제한다는데 합의하여 해산했다. 그러자 용달회사 사용자 측이 광주시청을 방문하여 항의했다. 1988년 8월 21일부터 신안동 소재 신양관광에서 차량의 정상 운행을 요구하며 10여 명의 노동자가 농성에 들어갔다. 22일에는 농성 중이던 한 노동자가 분신을 시도하다가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23일부터는 노동자들이 버스 10대에 분승하여 광주시청과 광주지방법원 등 시내에서 차량시위를 벌였다. (3) 보건의료 공공운수 사무 금융업 1 보건의료 전남대병원 전남대병원 노동조합의 활동이 확인되는 것은 1989년부터이다. 노동조합은 광주노동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결성되었는데, 주요 구성원은 간호조무사, 방사선과 기사, 미화 요원 등 일용잡급직 120여명이었다. 노동조합은 1월 23일에 지난 3년 동안 185명의 수당 지급과 임금 80% 인상, 각종 수당 신설 등을 주장하며 전남지방노동위원회와 광주시에 쟁의발생 신고를 냈다. 이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는 1월 26일 노사 양측의 입장을 듣고 쟁의를 알선하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자 노동조합은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것임을 밝혔다. 이 무렵 전남대병원에서는 노동조합과 구성원을 달리하는 전남대병원 평간호사회 가 1월 28일에 결성되었다. 간호사 157명이 참여한 이 모임은 노동조합과 같은 법적 보장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성 목적과 역할에서는 노동조합과 다름이 없었다. 복수노동조합이 설립될 수 없었던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노동조합 구성원과는 업무 성격이 다르고 공무원 신분이었던 간호사 집단이 근로조건 노동운동사 157

160 개선과 임금인상 등을 목적으로 단체를 결성했던 것이다. 평간호사회가 주장했던 것은 야간근무 수당 인상, 법정 유급 휴가제 실시, 근무 중 질병 감염 시 치료 대책, 복지 시설 확충 등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은 과중한 업무를 감소하는데 필수적인 인원 확충과 평간호사회 인정이었다. 평간호사회의 요구에 대해 전남대병원 경영진과 문교부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론의 형성을 위해 평간호사회는 3월 27일에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러자 전남대병원 경영진은 인원 확충은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며, 간호사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단체행동을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에 항의하여 4월 3일 180여 명의 간호사들은 항의 표시로 2주간 평상복 근무를 했다. 하지만 별다른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조선대병원 조선대병원은 사립대학의 의료기관이어서 전남대병원에 비해 노동조합 설립이 상대적으로 앞섰다. 또한 노동조합에는 다양한 직급들이 망라했으며, 간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대병원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노동조합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1987년부터 조선대학교 학원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대학교에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사학운영체제가 붕괴되면서 재편되는 시기에 접어들었고, 이로 인해 조선대병원의 노사관계도 크게 변화했던 것이다. 조선대병원에서는 1988년부터 노동쟁의가 확인된다. 조선대병원에서는 1월 25일 노사 간의 단체협상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조선대병원 경영진은 8시간 근무제 등 노사 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았고, 2월부터 개시하기로 합의했던 정년 시한에 대한 교섭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노동조합은 7월 25일에 전남노동위원회와 광주시에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1989년에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조합은 쟁의발생 신고를 냈으나, 협상이 바로 진행되어 타결되었다. 노사는 행정조무원 남 여 동일임금지급, 약사 간호조무사 공무원보수규정 적용, 기성회수당 인상 등에 일괄 타결했다. 1992년에는 공용직의 기능직 전환, 간호사 직급 조정, 일용직 경력 100% 인정, 당직전담제 도입 등을 두고 노사의 협상이 이루어지지지 않아 파업직전까지 이르렀다. 노동조합은 5월 29일 찬반투표를 실시하고, 6월 2일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타결이 되었다. 당시 조선대병원 노동조합은 조합원 가입률이 높아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즉 간호사 190명 가운데 165명, 의료기사 57명 가운데 50명, 행정직 81명 가운데 58명, 기능직 13명 가운데 12명, 기술직 4명 가운데 2명, 약사직 13명 가운데 10명이, 간호조무사 70명과 고용직 96명은 모두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1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1 광주기독병원 광주기독병원에서는 1989년 2월 28일 노동조합이 임금인상 등 협상 결렬을 이유로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노사는 9차례의 임금협상을 벌였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3월 15일 노사는 노동부측의 주선으로 임금 10% 정률 인상, 생계 보조비 2만원 지급, 군 경력 인정, 위험수당 지급 등 10개항이 일괄 합의했다. 기타 1991년 10월 19일부터 정기국회에 상정된 의료기사법 개정법률안 가운데 치과기공소의 설립조항이 누락된 것에 항의하여 전국치과기공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광주 전남에서도 300여 명이 동참했다. 2 사무 금융 이 시기 사무 금융 분야의 주요 노동조합운동은 지역의료보험과 금융업 그리고 증권회사에서 발생했다. 노동조합운동이 상대적으로 격렬했던 분야는 지역의료보험이었다. 1987년 2월 17일 지역의료보험 전남지역 노동조합은 조합원 480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YWCA에서 총회를 갖고 노동조합 활동 보장과 임금인상 등 7대 합의 조건을 요구하면서 정부가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으면 파업에 들어갈 것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3월 7일부터 전라남도 내 1시 21군의 노동조합 조합원 564명이 참석한 가운데 13일까지 시한부 파업을 벌였다. 주요 쟁점은 전국의료보험의 통합 일원화와 국고 지원금 확대 요구였다. 지역의료보험 노동조합은 1992년에도 파업에 들어갔다. 4월 9일 광주직할시 지역의료보험조합 노동조합 노조원 178명은 9~10일 집단 연월차 휴가원을 내고, 동구지부 사무실에 집결하여 쟁의행위에 돌입했다. 노동조합은 단체협약 갱신에서 노조 간부 인사이동 때의 노조 지부장과 협의, 인사위원회에 노조 지부장 배석, 직원 공개 채용 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광주지역 의료보험 조합 각 구별 대표이사는 노동조합의 주장을 거부하고, 노동조합 간부의 노조활동 시간을 기본 근로 시간에서 삭감하자고 주장했다. 노사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파업 35일 동안이나 진행되었고, 5월 14일부터 정상화되었다. 금융업 분야에서는 1989년 6월 10일부터 광주 전남지역 시중은행과 외환은행 등으로 구성된 시중은행 노동조합협의회는 임금인상을 두고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서울시와 중앙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발생신고를 냈다. 은행원들은 6월 13일부터 평상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근무를 했으며, 점심시간 동시 사용과 마감 후 손님 안 받기 등의 태업을 벌였다. 증권업 분야에서도 1989년에 노사갈등이 발생했다. 8월 30일 동남증권 등 증권사 노동조합협의회 소속 25개 증권사 400여 명은 광주YMCA에서 파국 증시 안정대책을 촉구하는 증권 노동자 노동운동사 159

162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인원 감축과 점포 10% 축소 및 통폐합, 임금동결 추진 등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3 정보통신: 우리데이타 노태우 정부 시기 광주 전남에서 발생한 노동운동들 가운데 가장 장기간에 걸쳐 노동쟁의가 전개되었고, 지역사회와 조합원들에게 영향을 크게 미쳤던 것은 우리데이타 위장폐업 철회 투쟁 이었다. 우리데이타는 광주시 풍향2동 번지에 소재했던 컴퓨터 관련 기업으로 전산 자료를 처리하던 회사였다. 이 회사는 1987년 8월 24일 서울에 소재한 한양전자계산(주)에서 근무하던 여성노동자들 가운데 광주 전남지역 연고자 80여 명을 주축으로 하여 대승시스템 이란 상호로 분할한 사업장이었다. 사용자는 이들에게 한양전자계산(주)와 동등한 근로조건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용자는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1988년 1월 13일 노동조합(위원장 이미례)이 결성되어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지만, 회사 측은 교섭은 고사하고 입사 순서에 따라 52명에 대해 해고 예고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다. 노사는 4월 24일에 대승시스템의 업무과를 법인으로 분리시키기로 합의하여 정상성을 업무과장을 사장으로 하는 우리데이터 로 다시 출범했다. 그렇지만 이는 회사를 폐업시키기 위한 절차의 일환이었다. 기업주는 8월 12일에 누적적자로 인한 경영난과 자본 능력 부족, 건강을 이유로 폐업신고를 했다. 이때부터 90여 명의 노동자들은 위장폐업 철폐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재개했다. 비단 위장폐업은 우리데이타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광주에서만 4개 업체에서 위장폐업과 관련해 노동쟁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들은 [위장폐업 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연대투쟁을 모색하기도 했다. 우리데이타 노동쟁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8월 21일 우리데이타 노동자들은 올림픽 평화구역에서 농성을 벌였다는 이유로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사례는 처음이었다. 또한 26일에는 농성을 벌이던 한 노동자가 유인물을 배포하다 감전 사고를 당해 추락하여 중태에 놓이게 되자 시민사회는 위장폐업 철회 투쟁 및 고순석 사고공동대책위원회 를 결성하여 연대투쟁에 들어갔다. 그리고 9월 3일에는 300여 명이 이와 관련하여 가두시위를 벌였고, 9월 16일에는 우리데이터 위장폐업 철회 촉구를 위한 광주지역 노동자 지지대회 를, 9월 19일에는 평민당 광주시 북구지구당 위원장 정웅 의원 사무실에서 위장폐업 철회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그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집회와 시위 그리고 사건이 연속되면서 사용자 측의 행위를 규탄하는 활동이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전개되었다. 국정감사에서도 쟁점이 되어 노동부 광주지방청장이 회사 측에 책임이 있으며 조속히 정상업무 재개에 힘쓰겠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노동부는 10월 23일 노동부는 그간의 근로 감독의 결과를 바탕으로 사업주를 노동조합법과 1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3 근로기준법 위반 등이 있었음을 판정했고, 10월 24일 전남지방 노동위원회는 노동조합법 제39조에 의해 부당노동행위 판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사업주가 검찰에 형사 입건 송치되었지만, 회사 폐업에 관한 사업주의 입장은 끝내 강경했다. 10월 29일 노동자와 학생 등 300여 명은 회사 사무실 앞에서 위장 폐업 철회를 위한 전국노동자촉구대회 를 개최했다. 11월 22일에는 전국연합노동조합연맹 광주 전남지역협의회(지부장 이기남)의 주최로 회사 앞에서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위장폐업 및 부당노동행위 규탄대회 를 열었다. 이들은 당시 쟁점이 되고 있던 노동운동의 신속한 타결을 주장했다. 결국 1989년 1월 28일 검찰과 광주지방노동청의 중재로 노사 양측은 보상금(5,417만원) 지급, 법적인 문제에 책임을 묻지 않음 등 8개 항의 합의약정서에 서명함으로서 170일의 장기간 노동쟁의는 종결되었다. 시민사회단체는 1월 30일에 노동자 시민 학생 등 500여명이 참가한 노동운동밑거름대회 를 대회를 개최하고 우리데이타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데이타 노동쟁의는 노동운동에 대한 지역 사회와 시민사회단체의 관심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재확인시켜주었고, 이러한 유형의 사건에 대응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함을 공유하도록 했다. 4 기타: 언론 등 1988년 5월 25일부터 KBS광주방송총국 시청료 징수원 70여 명이 생존권 보장 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7월 1일부터 징수원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일자리를 잃게 되자, 생계대책 마련과 KBS사장 퇴진 등을 구호를 외쳤다. 1989년 8월 30일부터 MBC문화방송 파업을 단행했다. 단체교섭에서 보도 편성국장 임명동의제와 10개 국장 신임평제 등을 두고 대립했다. (4) 건설 건설업에서 노동쟁의는 사업장별로 발생했는데, 주요 쟁점은 체불임금이었다. 1988년 4월 12일 광주시 두암동 소재 신축 공사장 노동자 60여 명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17일에 회사의 설득으로 농성을 해제했다. 1988년 5월 18일부터는 광산구 장덕동 소재 광주레미콘에서 임금인상을 둘러싸고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노사양측은 6월 12일에 기본급 20% 인상, 회전수당 200원 인하 등 4개 항에 합의하고, 13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이 사안은 농성이 장기화되자 11일에 평민당 광주시 레미콘 노사분규 실태조사단 이 내광하여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조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레미콘의 노동쟁의는 같은 해 10월 22일에도 재개되었다. 노동자 40여 명은 체불임금 지급과 임금인상 인상 약속 이행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운동사 161

164 광주지역 건축사사무소 노동조합원 360명은 1988년 11월 22일부터 대인동 소재 건축사회관에서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임금 일관 8만원 인상, 상여금 600% 지급, 의료보험 실시, 퇴직금제 실시 등을 주장했다. 이 노동쟁의는 12월 20일에는 노동조합원들이 광주시청에서 농성을 벌이는 등 격화되었다. 건축사사무소 노사는 당국의 중재로 협상을 재개하여 1989년 1월 19일 임금 14% 인상, 상여금 200% 지급, 퇴직금 사용자 부담 70% 근로자 부담 30% 등에 합의하고 최종 타결되었다. 한편 1989년 10월 17일에는 제1회 영호남산업박람회장 공사인부 20여 명이 중흥3동 소재 진흥산업개발유한회사에 몰려가 체불임금지급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5) 사업관련서비스업 1988년 10월부터 광주시 화정동 소재 삼익아파트에 근무하던 경비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아파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임금 인상과 단체 협약 체결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교섭을 벌어왔다. 하지만 아파트의 특수성으로 인해 거주민들은 사용자 대표를 맡지 않으려 하면서 갈등이 장기화되었다. 이에 삼익아파트 노동조합은 2월 22일 광주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 신고를 냈다. 이처럼 광주에는 금호맨션, 농성맨션 등 11개의 아파트에서 200명의 경비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렇지만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막막했고, 결국은 3월 7일 조합원 27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9일에는 조합원 33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504세대의 난방과 수도 공급이 중단되었다. 13일 조합원들은 아파트관리위원장을 부당 노동행위와 법정 수당 미지급 등을 이유로 광주지검과 광주지방노동청에 고소했다. (6) 도소매업 음식업 화니백화점 1989년 9월 7일 화니백화점 노사는 추석 휴무일 지정을 두고 대립했다. 노동조합은 사용자 측의 방침이 명백한 단체협약불이행이라고 규정하고 평상복 근무에 들어갔고, 8일에는 단축 근무에 들어갔다. 이 외에 화니백화점 파업(기본급 인상과 상여금 지급 등을 쟁점으로)이 있었음. 무등산관광온천호텔 1991년 4월 23일과 24일 무등산 관광온천호텔 노동자 60여 명이 어용노조해체와 민주노조건설 등을 요구하며 시위와 농성에 들어갔다. 이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320명인데, 호텔이 개업할 당시 11명으로 설립된 노동조합이 당시 위원장을 그대로 한 채 존속했다. 노동자들은 항의 표시로 53명이 사표를 제출했는데, 회사는 16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1992년 10월 20일에는 7명의 노동자들이 체불임금으로 인해 생계비 확보 차원에서 회사공금을 1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5 유용한 일이 드러나, 회사가 이들을 경찰에 업무상 횡령 및 영업방해 혐의로 진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조합은 4명에 대한 징계 방침 철회를 요구하며 10월 15일부터 농성을 벌였는데, 회사는 이 부분에 대해 영업 방해 혐의로 진정했다. 회사는 4명 이외에도 20여 명이 약 2천 만 원의 호텔 공금을 임의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고 수수로 부담과 현금 결제 지연으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11월 11일 노조위원장과 부위원장, 노조 간부 등 3명을 업무방해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광주지역 복장노동조합 양복기능인노조인 광주지역 복장노조는 한국복장기술 경영협회 광주지부와 임금 및 단체협상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수공임 평균 60% 인상, 상여금 지급, 퇴직금 보장 등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1992년 11월 25일 광주 시내 400여 개 양복점 노조 가운데 155개 양복점이 파업을 시작했다. 67개 양복점은 10일 각 구청과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직장 폐쇄 신고를 냈다. 2)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44) (1) 제조업 1 행남사 목포에 소재한 주방용 식기를 생산하는 기업체 행남사에는 1989년 당시 1,70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이 회사의 노동조합은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행남사민주노동조합추진위원회(일명 행민추) 가 결성되었고, 2~3년 동안 민주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행민추는 목포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의 틀을 형성했지만, 인근 사업장들인 호남고무나 남양어망과는 연대하지 않았다. 행남사에서는 1989년 7월 21일 파업이 발생했다. 2 남해어망 남양어망은 행남사와 비슷한 규모의 목포 소재 사업장이다. 남양어망에서는 목포지역의 제조업체들 가운데 처음으로 1988년에 3일에 걸쳐 처우개선요구 투쟁이 발생했다. 당시 남양어망은 민주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파업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고, 이를 많은 노동자들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이 투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부서이동 징계를 받았지만, 민주노동조합 설립은 성사되지 못했다. 일부 의식을 갖춘 노동자들이 단기적으로 44) 이 시기 목포 지역의 노동운동은 김자룡(2008)을 많이 참조하여 구성되었다. 노동운동사 163

166 일으킨 노동쟁의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남해어망에서는 1989년 7월 21일에도 파업이 발생했다. 3 호남고무 호남고무는 목포 상동에 소재한 회사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유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1988년 4월 12일 노동자 200여 명이 임금인상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고 임금 인상과 현 노동조합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임금 1,700원 일률 인상, 위생수당 3천원 인상, 가족수당 5천원 지급, 상여금 400% 인상, 호봉제 개선, 월차 생리 휴가 실시 등을 주장했다. 호남고무 노동쟁의는 4월 23일까지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와 같이 노동쟁의가 장기화되었던 주요 요인은 노동조합 지지자와 비판자로 노동자들의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코스모스전자 1991년 4월 8일부터 무안농공단지 내 코스모스전자 노동자 28명이 노동조합을 와해하기 위해 사용자 측이 공장이전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민당 무안군지구당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1990년 2월 1일부터 307명이 고용되어 수출용 소형 흑백TV를 생산했는데, 1991년 2월 23일 사용자 측이 경영압박 등을 이유로 휴업계를 내고 조업을 중단했다. 5 전남제사 전남제사는 1975년 4월에 설립되어 견직물을 전량 일본과 미국에 수출하던 장성군 소재 삼양물산의 자회사였다. 1990년에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사용자는 2월 26일 폐업을 공고했다. 사용자는 최저임금제 시행에 따라 임금상승 요인이 커졌다고 했다. 이에 299명의 노동자들은 위장 폐업이라고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삼양물산은 광주지방노동청과 장성군의 건의를 받아 폐업을 3월 31일로 변경 공고했다. 결국 178명의 노동자가 퇴사했고, 공장은 재가동이 불능 상태에 빠졌다. 사용자는 4월 7일 사원모집 공고와 더불어 퇴사자 재입사 권고 활동을 벌였다. 그렇지만 필요한 노동자들을 충원하지 못했고, 5월 1일 최종 폐업하고 말았다. 노동조합은 사용자가 회사 정상화를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사원모집도 형식적으로 진행했으며, 폐업시한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수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6 호남에틸렌 여천공단은 전남 동부권의 가장 큰 산업시설로 성장했고, 많은 기업체들이 입주해 있었다. 이 가운데 노태우 정부시기에 노동운동으로 가장 주목되었던 사업장은 호남에틸렌이었다. 호남에틸렌은 1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7 여천화학단지에서 사용될 기초원자재의 생산을 목적으로 1975년에 정부의 전액출자로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4년 만인 1979년에 민영화 조치로 대림산업이 주식 93%, 롯데가 7% 비율로 인수하여 대림산업 계열회사가 되었다. 여천공단 내에 입주한 석유화학 업체들의 노동조건은 높은 수익률에 따라 비교적 좋았으나, 호남에틸렌은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호남에틸렌은 1987년 대림산업으로 완전히 합병되었는데, 합병 후 순이익이 급격히 감소했다. 뿐만 아니라 대림측의 경영권 장악으로 자율성의 축소되고 불이익의 증대했으며, 수익금이 대림의 적자를 충당하는데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호남에틸렌의 주요 쟁점은 합병과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호남에틸렌에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전개된 것은 1989년에 들어서면서였다. 1989년 1월 13일 결성된 제5대 노동조합은 제5공화국 때 폐지된 퇴직금누진제 부활, 대림사업으로부터의 독립채산제 실시, 일상적인 임금인상, 단순용역직의 직원화, 호봉체계 개선, 성과금 제도화 등을 이슈로 쟁의를 시작했다. 노동조합은 3월 11일 단체교섭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4월 28일까지 노동쟁의가 계속되었다. 특히 노동쟁의가 격화되었던 시기는 4월 26~28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4월 24일에 법정 냉각기간 10일을 보내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96%가 파업에 찬성하고, 노동조합 집행부는 조합사무실에서 농성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4월 25일에는 근무자를 제외한 노동자들이 운동장에 집결하여 농성을 시작했다. 시장, 도지사, 정부 상공국장, 노동국장 면담을 주선하고, 장효규 시장이 내려와 교섭에 임했으나, 퇴직금누진제 환원은 체제에 관계되는 문제여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4월 26일 노동자들은 단체행동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4월 27일에 퇴직금 부분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요구안이 타결되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종료되지 않고 4월 28일에 전면파업으로 확산되었다. 회사는 퇴직금 누진제 부활을 제외한 모든 요구안은 수용하기로 했으나, 이것만은 계속 문제가 되었다. 협상이 계속되었고, 퇴직금 누진제 부활은 1년 1.85개월 선을 수용하는 것으로 하고 쟁의가 종결되었다. 이 후에도 호남에틸렌에서는 1990년과 1991년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1990년은 3차례의 단체협상을 시도했으나 사용자측의 불참으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10월 12일 호남에틸렌 제1공장 6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사용자측의 단체협상 불참 규탄대회 를 열었다. 그런데 이 집회가 불법으로 간주되어 다음 날 여천지역건설노동조합 선전부장 이광일이 연행되었다. 1991년에는 3월 8일부터 단체협상이 시작되어 6월 4일까지 총 8차에 걸쳐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타협을 이루지 못했다. 쟁점은 동종업체 최고 수준달성, 일하는 현장에 대한 자긍심 부여, 물가인상으로 인한 불가피한 두 자리 수 이상의 임금 인상 및 기본급 9.5% 인상 등이었다. 노동조합은 6월 11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90%의 찬성을 얻어 쟁의를 신고했으며, 6월 14일 13시 30분 총파업을 선언했으나, 공장의 안전 문제로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주요 쟁점은 기본금과 상여금 등을 통합한 임금으로, 노동조합은 25.1% 인상을, 사용자는 13.8% 인상을 주장했다. 협상에 진척이 없자 노동조합은 17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이 시작된 지 4일째에 노사는 부사장이 참석한 노동운동사 165

168 가운데 단체협상을 진행하여 기본급 9.4%+정액 3만원 인상에 타결했다. 7 호남정유 여천공장 1992년 12월 9일 호남정유 여천공장 노동조합 간부 15명이 올해의 성과급 제시액이 너무 적다며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삭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조합은 올해 임금협상이 총액임금제에 따른 3% 인상과 경영실적에 따른 성과급을 조정 지급키로 한 합의의 달리 12월 급여 지급 시 100% 성과급만을 지급하겠다고 한 것에 250% 지급을 주장했다. 사용자는 지난 5월 회사 창립일에 100% 성과급을 지급했고, 12월 급여 시 100%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8 기타 제조업 1989년 6월 8일부터 전남 장성군 소재 삼양견업에서 노동자 50여 명이 임금협상 결렬을 이유로 작업을 거부한 채 한동안 농성을 했다. 1989년 7월 11일부터 담양군 소재 레크전자에서 노동조합원 30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1991년 4월 17일부터 광양제철소 자회사인 제철설비에서 노동쟁의로 인해 파업이 발생했다. 노동조합은 4월 23일에 휴가비 기준 임금 50% 지급, 노사화합특별격려금 지급, 파업기간 중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 등의 합의하고 작업에 복귀했다. (2) 운수업 1 시내버스 군내버스 목포 시내버스 노동쟁의 1988년의 목포 지역은 노동자 대투쟁의 여운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또한 여전히 노동쟁의의 쟁점들이 해소되지 않았고, 국회의원 선거가 임박한 가운데 민주화의 열풍이 불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시기에 노동쟁의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해가 1988년이었다. 이 해에 목포지역에서 노동쟁의가 가장 먼저 발생했던 업종은 운수업이었다. 운수업은 냉혹한 시기에도 결집력이 높은 노동운동 양상을 보였고,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운동성이 더욱 고양되었다. 순천 시내버스 노동쟁의 1992년 4월 19일부터 순천시내버스 순천교통의 77개 버스가 차량정비 불량을 이유로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7일 단체협상 결렬과 관련하여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 신고를 1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9 했으며, 준법 투쟁을 해오다가 이날 부분 파업에 들어갔다. 23일부터 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의 조정안 19.6% 인상을 거부하고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순천에는 2개의 시내버스회사가 영업 중이었는데, 순천교통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 군내버스 노동쟁의 1988년 6월 22일 전남 화순, 함평, 영광, 강진의 군내버스들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운행을 중단했다. 같은 날 영광, 함평, 화순 군내버스 64대도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운휴 통보서를 내고 파업에 들어갔다. 담양과 장성 군내버스들은 1988년 6월 24일에 운행을 중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함평군내버스는 27일에 임금 15%, 상여금 33% 인상에 합의하고 운행에 들어갔다. 반면 26일에 강진군내버스가 운행을 중단했다. 6월 30일에는 영광군내버스가 임금 인상에 합의하고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1991년 9월 16일 영광 군내버스인 영광교통 노동조합 운전사들 12명이 임금협상에 대한 항의 표시로 집단 사표를 냈다. 운전사들은 기본급 27.3% 인상을 주장했으나, 회사는 13.7% 인상을 주장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17일 기본급은 회의 주장으로 하되 분기당 상여금 20만원 지급의 협상안에 합의하고, 파업기간 동안의 민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데 합의했다. 2 택시 목포 택시 노동쟁의 1988년 2월 29일부터 목포택시기사 노사 간의 임금협상이 시작되었다. 주요 쟁점은 8시간 근무와 월 평균 임금을 35만원으로 인상이었다. 3월에 어렵사리 협상이 타결되었으나, 회사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는 협상 중에 노조원들이 회사 측 대표를 감금했다고 고발조치하여 그동안의 관계를 무화시켰다. 조합원들은 쟁의행위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고, 4월 1일부터 5일까지 교섭대표들이 단식농성이 들어갔다. 회사 측은 4월 5일 노동부 목포지방사무소에서 협상을 재개하여 논란이 되는 점들을 해소했으나, 곧 바로 이를 다시 취소함으로서 재 결렬되었다. 1988년 10월 20일부터는 목포 시내 5개 택시회사 노조원 80여 명이 운행을 중단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타코미터기 철거와 유가 인하에 따른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갈등과 협상의 관계는 1988년 11월까지 계속되었고, 노동시간 단축과 월 임금 27만원을 성취했다. 그렇지만 택시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쟁점들은 여전히 많았는데, 운행 도중 교통사고 발생할 때 이를 처리하는 문제가 큰 문제였다. 노동조합원들은 근로조건 개선은 노동자 의식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독서모임을 갖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이 1991년에 대규모 노동운동이 전개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1988년 12월 1일 목포 시내 회사택시 288대가 타코미터기 설치 반대, 유가 인하에 따란 임금 인상, 노동운동사 167

170 최저 생계비 보장 등을 요구하며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 남도택시 등 5개 회사는 11월 25일부터 목포시내 용해동 시청 앞에서 점거 농성을 벌여왔다. 이로서 목포 시내 모든 회사 택시가 운행을 중단했다. 12월 25일에는 목포 지역 택시조합원 40여 명이 타코미터기 사용 반대와 생계비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22일부터 회사와 갈등을 빚어온 영진택시 조합원들의 주장을 지원하기 위해 유가인하에 따른 사납금 인하를 주장했다. 1991년 3월 16일부터 목포 시내 9개 회사택시 300여 대가 임금협상과 관련하여 사용자 측의 배차중단으로 영업을 하지 못했다. 노조원들은 3월 25일 신민당 목포지구 지구당사에서 택시 불법운행 중단 철회 등 4개 항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목포의 택시 영업은 재개되었으나, 임금협상이 결렬되면서 5월 15일부터 일부 택시회사들이 배차를 중단해 영업이 중단되었다. 목포지역 회사택시 노사갈등의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자율임금제 가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아 하루 운송수입에 대한 판정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광주지역 등에서는 노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타고메타기가 설치되어 어느 정도 임금 산정 기준이 형성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목포의 경우에는 운송수익금을 둘러싸고 노사의 불신이 깊었다. 그리고 회사별 교섭에서 업종별 공동교섭으로 변경하려 한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또한 관계기관들도 해결 대안을 찾지 못해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5월 15일부터 노동자 9명은 신민당 목포지구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경찰은 시위를 벌인 것과 관련하여 10여명의 노동자들을 조사했다. 여수 택시 노동쟁의 1988년 5월 22일부터 여수 시내 13개 택시회사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국동 어항단지광장에 집결하여 타코메타기 설치 반대와 철거 그리고 임금인상 체결 등을 전개했다. 이들은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한 기존 관념을 버려라 는 등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노동자들은 운행을 거부하기도 하면서 항거를 계속했으나 진전이 없자, 6월 7일에 노동자와 가족 등 300여 명이 문수동 소재 여수시청 앞에 집결하여 결의대회와 근로자 가족단합대회를 개최했다. 택시노동조합은 17일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과 관련하여 쟁의발생 신고를 내고, 파업을 계속했다. 사용자 측은 단체협약은 3년에 한번 하기로 했다고 주장하며, 임금협상만을 고집한 반면, 노동조합은 1일 2교대 임금인상안을 다시 제기했다. 노조는 수입금 5천원 인상에 대부분을 전자에게 돌려줄 것으로 주장했다. 가장 큰 쟁점은 근무일을 원 26일에서 24일로 축소하는 것이었다. 여수 회사택시들은 75일 동안 파업을 하다가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직권 중재로 8월 3일부터 정상 운행되었다. 8월 16일 전남지방노동위원회는 타고메타기를 설치하되 이를 근거로 노동자에 대한 불이익 배제, 1일 2교대제, 일정 금액 이상으로 입금된 사납금은 절반씩 분배, 월 26일 이상 근로한 노동자에게 월 30만 원 이상의 임금 등을 근간으로 하는 중재 재정안을 노사 양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노사 모두가 각각 불리한 조건이라고 하면서 중앙노동위에 재심 청구를 했다. 한편 1988년 1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1 10월 29일 여수 호남교통 택시 운전기사 20여 명이 전 노동조합 위원장에 대한 사용자 측의 고발은 노동탄압 행위라며 이의 철회 등 6개항을 요구하며 운행 거부에 들어갔다. 강대식은 여수시 소재 남진교통 노동조합위원장이었다. 남진교통은 1991년 6월 1일부터 조합원과 비조합원에게 차별대우(즉, 조합원은 운행시간을 통제하고, 비조합원은 입 출고 시간을 제한하지 않음. 운송 수입금이 차이가 나게 하는 등 불이익을 줌)를 했다. 6월 8일 오전 9시경 노조 위원장인 강대식은 사장에게 시정을 요구하면서 내가 죽으면 책임질테냐 라고 했다. 사장은 죽을 테면 죽어라. 회사팔면 그만이다 등의 발언을 하자 이에 격분하여 신나를 끼얹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다행히 조합원들의 제지로 무마되었으나, 이때 여수 여천 택시 분실장과 여수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사장실로 들어서면서 이렇게 회사를 운영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했고, 이에 사장은 내가 회사를 그만 두던지, 노조가 없어지던지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 순간 강대식은 시너를 끼얹고 다시 사장실로 올라가 분신을 시도했다. 조합원들은 강대식에게 붙은 불을 끄고, 전남병원으로 후송했으나 3도 화상을 치료할 수 없다는 말에 따라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러나 병실이 없어 조선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시작했다. 강대식의 분신 소식이 전해지자 여수 여천지역 택시노동조합 조합원 약 300명은 6월 8일 오후부터 남지교통 앞에서 강대식 동지 분신보고대회 를 갖고, 이 사실을 여수 시민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6월 9일 오전에는 남진교통 앞에서 노조탄압 규탄 집회를 갖고, 사장의 집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한 6월 10일 오후에는 시청 앞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면서 시장 면담 요구, 근무환경 개선, 분신사건과 관련된 사장 구속, 임금교섭 결여 등을 요구하였다. 계속되는 택시노조 노사분규에 대해 여수 순천사회운동단체협의회 는 연대 투쟁을 권하였으나, 택시노조측이 이에 불응했다. 1991년 6월 10일 여수 여천택시분실 소속 조합원 200여 명은 여수시 봉산동 남진택시 정문 앞에서 운행을 중단한 채 노조탄압 중지 등을 초구하며 집회와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여수시청까지 가두행진을 벌인 뒤 청사 내로 진입하려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다음날 조합원 317명은 임금교섭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기한 운행을 거부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관내 470여 대의 택시 가운데 비노조원이 운행하는 320여대만 운행되고, 150~200여대는 운휴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은 사장이 도피하여 접촉할 수 없자, 7월 5일 여수시 신민당 사무실을 점거하고 회사와의 협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다른 택시노동조합은 회사에 사납금 60여 만 원을 분할로 변상할 것을 협상한 채 7월 11일부터 정상업무에 들어간 상태였다. 신민당은 김복관 서완석 의원 등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여수시, 경찰서, 노동조합에 사장과의 협상을 중재할 것으로 요구했다. 노동조합이 요구한 사항은 강대식 조합장 치료비 및 제반비용 전액부담, 보상비 추후 협의, 마채권 및 임병민 등 부당해고자 복직, 후생복지시설, 정비사, 안전관리자 마련, 남진노조탄압 노동운동사 169

172 중지 등이었다. 1991년 11월 1일부터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관내 택시회사들 간의 사업구역 분쟁으로 여천군 돌산 관내 택시 30여 대가 운행을 중단했다. 이들은 전라남도가 1986년 11월 여수 여천지역 주민공청회를 열고 돌산읍과 여수 여천시는 상호인접, 승객 왕래가 빈번한데도 사업구역 분쟁으로 이용객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동일사업구역으로 통합하고서도 지금까지 유보하고 있다고 대책을 촉구했다. 순천 택시 노동쟁의 1988년 5월 전남 순천지역에서 근무했던 한 택시 노동자 장용훈이 분신했다. 장용훈은 전라남도 승주군 월등면에서 출생했고, 1987년 당시 전남 순천시 현대교통에 입사하여 택시노동자로 일했다. 사건이 발생할 때 그는 순천시 인제동 사글세방에서 부인과 1남 1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장용훈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 대변하는데 앞장서오다가 1988년 2월 28일 자전거와 경미한 접촉사고가 발생하자 자비로 합의했다. 그런데 현대교통 과장은 이 일을 빌미로 3월 5일 장용훈에게 불리한 경위서를 강요했다. 장용훈이 이를 거부하자, 과장은 일방적으로 승무 정지시키고 집단 폭행했다. 그는 원통한 마음으로 검찰과 노동부에 고소와 탄원을 했으나 이들은 합의만을 종용한 채 방관했다. 회사는 고소에 대한 보복으로 노사협의회도 거치지 않고 부당 해고를 통지했다. 장용훈은 억울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여수시의 노동담당 부서를 비롯해 서울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절차만을 따지면서 무성의로 일관했다. 결국 1988년 5월 24일 장용훈은 회사 사무실에서 몸에 시너를 끼얹고 뒤를 잘 부탁한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가정은 파괴당하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이놈의 세상 비통해서 살 수 없다 라고 외친 후 분신자살을 시도했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73). 그는 순천의료원을 거쳐 전남대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했다. 장용훈의 유고의 글 회사에 대해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회사측의 횡포로 집단폭행 당시 비조합원 3~4명이 있었으 며, 시민, 택시 조합원 1명, 회사조합원 1명이 이를 말렸다. 그때 당한 폭행으로 치료비 170만원의 빚더미를 짊어진 채 하소연 할 길이 없어 사장, 상무, 과장 이영세의 폭행에 분하고 원통해서 고소를 하였다 고 말하며 동료에게 여러분이 잘해라! 기죽지 말아라, 내가 놀고 있을 때 나에게 짜장면 몇 그릇 사준 사람도 있었다. 고맙다 회사는 1만원도 안 해주었는데. 나를 위해 조합장 이하 조합원들이 데모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생이 많은 줄 잘 안다 고 말하 였으며, 동생에게 형 노릇 못해 미안하고 어머님께 불효해서 미안하다 며 어머님 미안합니다! 죄송 1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3 합니다! 사장, 상무, 이영세 과장은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사죄하면 조금은 용서해 주겠다 며 관 계된 사람들과 힘 모아 밀어 붙여 꼭 복수를 해야 한다, 잘 살아 선의의 복수를 꼭 해주라! 며 부인 에게 소원이가 보고 싶다 사는데 애로점이 있더라도 잘해 달라 며 유언처럼 병상에서 한 말이다. 곡성 택시 노동쟁의 1989년 3월 곡성택시 노동조합은 임금 35% 인상을 요구했으나, 사용자 측이 임금동결을 계속하자 19일부터 8명의 노조원이 택시 운행을 중단했다. 6월 28일 100여일이 경과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3 해원 1988년 4월 15일 목포해원노조가 7개 선사를 상대로 노동쟁의 발생신고를 내고, 19일부터 조합원 160명이 임금 23.5% 인상 등 13개항의 수용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45) 파업이 진행되자 목포 인근 60여개의 도서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통행이 차단되면서 큰 불편이 야기되었다. 노조원들은 지난 해 10월과 올해 3월 등에 걸쳐 유류대가 인하되었던 반면 운임은 인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의 평균 임금은 최전생계비의 85%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선사 측은 연륙화 사업으로 인한 육상교통의 확대와 승객 및 화물량의 감소 그리고 해상운임이 낮음으로 인해 11% 이상 인상할 수 없다고 맞섰다. 노사는 23일 11차례의 교섭 끝에 보통 선원을 기준 임금 20% 인상, 상여금 20%를 인상하여 160% 지급, 1989년 3월 말 이전에 임금인상 요인이 발생하면 노사 협의를 거쳐 재조정 등에 합의하고 운행을 재개했다. 4 항운 여수항운노동조합 여수항운노동조합은 여천공단 내의 남해화학, 광양제철, 동양 쌍용시멘트 등의 화물 하역작업을 전담했으며, 여수항이 사업장이었다. 그런데 이 노동조합은 28년 동안 이동근이 노조위원장을 독식하고,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그래서 1988년 5월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과 운영 상황 공개 등을 주장하며 3명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자, 이들을 제명하고 항구에서 일을 할 수 없도록 고발했다. 당시 경찰에는 노동조합의 비리를 기록한 투서가 접수되었는데, 조합원들은 이곳은 노동부도 시청도 경찰도 없는 별천지 라고 자조했다. 45) 목포시사편찬위원회(1997: 689~690)에는 준법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언론에는 파업이 이루어진 것으 로 보도하고 있다. 노동운동사 171

174 전남항운노동조합 광양군지부 1988년 5월 2일부터 전남항운노동조합 광양군지부 조합원 120여 명이 광양군 태금역에서 광양제철 연관단지 운송사업을 전담하는 서강기업(주)에 작업권 확보와 임금협정 체결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분쟁은 서강기업이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적용하여 유연탄 상차작업을 진행함에 따라 기존 노동자들과 임금협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조합원들은 광양제철 건설로 인해 고향과 소득을 잃은 금호도와 태인도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갈등이 발생했다. (3) 건설 산업 1 여천지역 건설노동자 다른 업종에 비해 건설과 산업분야의 노동조합운동은 드문 편이었다. 이 분야는 노동조건의 특성상 노동자들의 단결과 구심이 형성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노동조합 결성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1988년 여천에서 발생했던 일용직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주목되었고 파급 효과도 컸다. 일용노동자는 장기간 노동과 낮음 임금, 열악한 근로조건, 불안정한 고용과 강제 해고 등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1988년 당시 여천지역 일용노동자는 7천여 명 이상이었으며, 만 명에 이르던 때도 있었다. 1988년 6월 25일 여천지역 일용근로자 노동조합 이 결성되었다. 조합원의 다수는 배관, 용접, 전기 등의 분야 노동자들이었다. 제1기 노동조합은 반장급이 중심이어서 권익보다는 합법성 쟁취에 급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조합원들의 지지가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제2기 여천지역 일용근로자 노동조합 은 12월 18일에 결성되었다. 제2기 노동조합은 1989년 1월 23일부터 1월 13일 현행 일당으로 8시간 노동제 실시, 주 월차 휴가 및 휴가 근로수당 지급, 퇴직금 지급, 부당해고 금지, 해고 30일 예고제 실시, 조합 활동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집회 및 파업을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벌였다. 파업은 울산에서 기능공협회 를 중심으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했다는 소식이 들여오면서 활기를 띠었다. 이들은 1월 27일에는 산업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으며, 공단 내 다른 노동자들의 농성 참여를 촉구하며 폭력행사하기도 했다. 또한 31일에는 여천시청과 노동부 여수지방사무소를 폭력으로 점거했던 16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여천시로부터 여천지역 건설노동조합 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들의 파업으로 인해 여천공단 내 여러 산업시설들의 공사도 중단되었다. 노동조합은 대표적 원청업체인 대림, 럭키, 덕산토건, 광주고속 건설 사업부, 삼성 종합건설, 현대 중공업 등 6개 업체를 대상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이처럼 여천공단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폭력을 동반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다. 2월 1일에는 여수경찰서 앞에서 200여 명이 1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5 집결하여 연행자들 가운데 미 석방된 5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2월 11일에는 제일모직 여천공장 공사현장에서 60여 명이 농성을 벌이다가 코리안엔지니어링 사무실로 몰려가 농성에 참여하지 않고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노사 및 노노 갈등이 해결된 기미가 보이지 않은 것은 노사협상의 대상이 분명하게 형성되지 않았고, 건설업의 고용구조의 복잡성 때문이었다. 즉 건설업의 특성상 노동자들의 고용 상태가 발주, 원청, 하청 업체들로 다양화되어 있고, 노동자들의 기술 수준이 다양하여 일괄 타결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위 및 파업이 전개되면서 16명의 연행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부상자에 대한 보상 및 구속자 석방 등도 협상의 내용에 포함되었다. 파업 37일째이던 2월 28일 MBC 9시 뉴스는 임금 26.5% 인상으로 협상이 타결되었으며, 3월 2일부터 작업하기로 했다는 방송을 했으나, 이는 왜곡된 것이었다. 오히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원청업체와 하청업체가 서로 책임을 전가했다. 1989년 3월 2일에는 여수대학교에서 노동자와 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3백 50만 일용건설 노동자 8시간 노동제 쟁취 확정대회 가 열려 투쟁의 흐름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다음 날인 3월 3일 조합원 150여 명이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지만, 700여 명의 비조합원들은 경찰의 호위 받고 정상 출근하여 조업을 재개했다. 3월 16일 일급제 임금 체계를 시급제로 전환, 임금 10% 인상, 수당 지급, 퇴직금 지급, 합법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 17개 항에 합의하면서 파업을 종료했다. 노사는 구속된 노동자의 조기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부상 노동자의 치료 및 생계를 지원하는데도 합의했는데, 파업 기간 동안의 임금 지급은 포기했다. 하지만 파업의 여파는 3월 27일까지 계속되었다. 여천지역건설노동조합의 파업은 해마다 계속되었다. 1990년에도 3천 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약 50일간 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1991년 10월 15일에는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 발생 신고 접수 후 단체협상 투쟁을 개시했다. 10월 27일 여수수대 민주광장에서 여천지역 건설 노동조합원 들이 단체협상을 위한 집회를 개최했다. 2 건설운수 1988년 11월 23일 나주레미콘 노동자 17명이 광주시 유동 소재 한국노총회관에서 부당노동행위 자행하는 기업주를 구속하라, 차량 지입차주제 철폐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내리고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이 사안의 쟁점은 사용자 측이 지입차를 도입하고 임대차량을 판매하여 사업 규모를 축소함으로서 노동자를 해고 예고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4) 공공사회서비스 1988년 7월 26일 노사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철도 기관사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기관사들은 주요 역들을 중심으로 농성을 했다. 경찰은 농성 현장에 병력을 투입하여 순천에서 141명, 노동운동사 173

176 목포에서 63명, 광주에서 3명 등 207명을 연행했는데, 199명은 훈방되었고, 3명은 즉심 처분, 5명은 구속되었다. 경찰의 진압 이유는 철도특별단체교섭추진위원회를 정식 노동조합이 아니며, 공무원으로서는 금지된 단체행동인 파업 등을 벌인 것이라고 했다. 한국노총은 철도 기관사들의 파업에 대해 국민적 지지를 상실하고 있으니 원칙으로 돌아가 달라 고 성명을 발표했다. (5) 보건의료 고흥병원은 1988년 6월부터 9월까지 임금을 체불했다. 고흥병원 경영주는 운영이 어렵다며 폐업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에 20명의 의사, 간호사, 마취사 등이 사직을 하자, 다음날 신문에 모집 공고를 냈다. 또한 9월 30일 전라남도가 보낸 공중보건의 6명에게도 병원 폐업을 이유로 재 발령을 요구하여 10월 6일 현재 고흥병원은 진료가 마비되었다. (6) 금융 보험 1992년 11월 5일 전남지역의보노조는 단체협상 거부와 관련하여 임시대의원대회를 갖고 6일 광주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 신고를 하기로 결의했다. (7) 광업 1988년 4월 22일 화순군 한천면 호남탄좌개발주식회사 조광업체인 삼성광업소 해고노동자를 포함하여 노동자 100여 명이 광주YWCA에서 막장에서 쫓겨나는 광부의 갈 곳은 어디인가 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호남탄좌가 도급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삼성광업소 측에 조광권 취소를 통보하자 이의 철회를 주장하며 농성을 계속했다. 4월 29일 농성 중이던 50여 명의 노동자들은 호남탄좌 사장의 집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주요 주장들은 권 사장 퇴진, 폭행당한 근로자에 대한 보상 및 폭력집단 해체, 근로의 자유와 기본생존권 보장 등이었다. 노동자들은 5월 9일 오후 자신 해산하고 귀가하고 호남탄좌의 대응여부에 관계없이 11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5월 1 6일에 호남탄좌와 삼성광업소 사이의 분탄 수송을 둘러싼 대치가 발생하여 일대 교통이 두절되었다. 근로감독관의 설득으로 운행이 재개되었으나, 분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8) 기타 1988년 5월 30일부터 목포문화방송국에서 노동자들이 노조 간부 징계 철회 등 7개 항에 대한 항의 농성을 시작했다. 갈등은 6월 7일에 타결되어 8일부터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1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7 3) 1991년 5월정국과 분신 노동자들 (1) 윤용하 윤용하는 1969년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출생했고, 순천중앙초등학교 5년에 재학 중 중퇴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유년기부터 중국집 배달원, 가방공장 공원 등으로 일했다. 1989년부터 성남피혁에서 근무했다. 이때 민주화운동 직장청년연합 회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초 대학출신 현장 활동가를 만나면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 민주화직장청년연합의 풍물강습반에 등록해 활동했다. 그는 평소에 망월동 참배를 원했으며, 1991년 5월에는 5월 9일 국민대회에 맞춰 광주로 갔고, 5월 9일 분신해서 투병 중이던 전남대 박승희의 문병을 가기도 했다. 윤 용 하 는 1991년 5월10일 조 국 의 참 된 자 주 민 주 통 일 을 위 해 많 은 젊 은 이 들 이 노태우 정권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는 유서를 남기고 전남대학교에서 분신했다. 그는 분신 이틀 후인 12일, 노동해방을 위해 분신을 생각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운명했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128). (2) 정상순 정상순은 1966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출생했으며, 1985년 2월에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노동자가 되어 여러 직종들을 전전했다. 그는 1991년 계속되는 분신에 괴로워하던 가운데 학교 후배인 김철수가 분신하여 전남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자 두 번을 찾아와 울고 갔다고 한다. 그는 5월 22일 위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 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했다. 그는 5월 29일 운명했다(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428). 노동운동사 175

178 제7장 노동정치의 시대와 노동법 개정 총파업 1.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 46) 과 노동환경 1) 노동정책: 노사 자율에서 정부 주도로 김영삼 정부는 신군부 세력과 3당 합당을 기반으로 집권했으나, 스스로 문민정부 임을 강조하면서 출항했다. 김영삼 정부는 탈 군부의 이미지를 가시화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 국면부터 기존 정권들과 차별적인 노동 정책들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김영삼 정부가 노동정책의 전환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에는 당시의 경제 상황과 노사관계도 작용했다. 1993년은 지난 시기에 비해 경제가 침체되어 있었으며, 노사분규도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므로 기존 정부들과 차이를 갖는 노동정책을 집행하는데 유리한 환경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난 수년 동안 계속되었던 격렬한 노사갈등을 경험하면서 노동자와 사용주 그리고 정부 모두가 노동환경과 노사관계 그리고 노동운동이 재편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저변에 형성되기도 했다. 1993년 2월 25일 전국 시 도와 지방노동위원회사무소들이 집계하여 발표한 자료는 이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즉, 조합원들의 자체 결의나 회사의 휴 폐업 등의 요인들에 의해 해산하는 노동조합과 2년 동안 활동하지 않은 이른바 휴면 노조 도 증가했다. 1989년에 193만여 명이었던 조직노동자 수가 1995년에는 161만 4천여 명으로 감소했다는 점은 이러한 실태를 잘 보여준다(이원보, 1997: 58). 이와 같은 양상은 광주 전남지역도 다르지 않았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28개 사업장의 노동조합이 해산했으며, 전남 화순의 광산노동조합을 비롯해 30여 개의 노동조합이 휴면상태로 파악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집권 초기에 표방했던 노동정책은 노사자율 과 합리적 노사관계 로 정리된다 46) 노동정치(labor politics)는 국가, 자본, 노동 3자의 정치적 전략적 상호작용 일반을 일컫는다(노중기, 1997: 130~131). 노중기는 노동정치를 국가와 자본의 노동통제와 노동운동의 저항이 함께 어우러지는 영역으로 정의했는데(노중기, 1995: 25), 여기에서 더 나아가 어느 주체 일방의 전략적 대응 측면으로 제한하기보다는 행위주체들 간에 그리고 이들 주체 내 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다양한 복수의 전략을 경유하여 상호작용하는 관계적인 개념 으로 확대 정의되기도 한 다(이병훈 유범상, 1998: 6).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어느 정도 형식적인 틀을 갖춘 구 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9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1996: 200). 정부는 집권 초기에는 가능한 노사관계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며, 노사갈등이 발생할 시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종결시키려 하지 않았다. 1993년 5월 1일에 개최되었던 제104주년 세계노동절 기념식의 개최 양상으로 살펴보면, 정부의 노동정책이 크게 전환되었다고 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1958년 이후 35년 만에 노동절 집회를 허용했으며, 25,000여 명의 노동자가 연세대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이르는 거리를 행진하도록 보호했다. 노동자도 500여 명의 질서유지대를 편성하여 집회와 거리행진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그렇지만 노동절 대회에서 채택되었던 결의문은 현 정부가 고통분담 을 내세우며 추진하는 신경제 정책 은 기업에 대한 일방적 지원으로 가득찬 재벌 위주 성장정책의 재판 이라고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은 신경제 5개년 계획 에 새로운 노사관계제도와 관행의 정착 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노동정책 기조를 근간으로 노사의 사회적 합의 를 모색했지만, 긍정적 성과보다는 역효과가 더 컸다. 김영삼 정부에서의 노동환경이 정부 내 개혁파의 의지만으로 노태우 정부의 정책과 절연이 될 수 없는 것이었고(노중기, 1997; 149~151), 노동정책이 잘 관철되려면 한국노총 외부에서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노동조합과 회사의 이해관계 등을 면밀하게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다음 절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노사 단일임금인상률 결정을 추진한 것이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노동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했고, 1993년 후반기부터 변화가 분명해졌다(노중기, 1997; 143).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고 신장시키는 방침 전환이 종종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집권 초기에 보여주었던 친 노동자적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그러졌고, 사법부와 경찰 등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조합운동을 진압했던 군사정부 시대 노동정책의 특성으로 변모해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더 극단적으로 위협하고 탄압을 가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노동자의 연대와 집단화 그리고 세력화가 확대되었던 양상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중반기부터는 노동정책의 기조를 갈등과 대립의 노사관계를 협력과 생산적 관계로 전환하고, 임금은 생산성 범위 내에서 인상케 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며, 국가 주도 하에 노동력 공급관리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기업의 탄력적인 고용정책을 뒷받침한다 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정책기조를 실행하기 위해 1제3자 개입 차단, 노조 전임자 축소, 무노동 무임금 엄격 적용, 노조 정치활동 금지 등 노동법 적용을 강화하고, 2 임금연구회 를 통해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3고용보험제 실시를 바탕으로 한 산업인력 개발체제 구축 및 외국인력 수입양성화 등이 제시되었다(김금수, 2004: 339). 그럼에도 김영삼 정부가 노동자를 포함시켜 중요한 노동정책을 결정짓는 구조를 계속 만들려고 했다. 정부 일방의 노동정책은 노동자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며 통합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1996년 국회의원 총선 직후였던 4월 24일 노동운동사 177

180 대통령의 신노사관계구상 발표에 따라 설치했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 는 이러한 노동정치를 위해 김영삼 정부가 중요하게 활용했던 조직이었다(이병훈 유범상, 1998: 89). 노개위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5월 9일에 출범했다. 노개위는 노 사 공익 위원 3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노동법관계 개정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노개위 위원으로 한국노총 대표 3명과 전 국 민 주 노 동 조 합 총 연 맹(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 : KCTU, 민 주 노 총) 대 표 2명이 할당되었는데, 민주노총을 제도권 내 협의 대상의 일원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렇지만 노개위 운영과 안건 토의는 노동자보다 사용자의 입장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에 민주노총은 10월 1일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항의했다. 하지만 노개위는 민주노총의 불참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를 계속했고, 한국노총과 경총 그리고 공익위원을 중심으로 노동법개정을 추진했다. 민주노총은 불참 전술이 실익을 거두지 못하자 11월 7일의 회의에 복귀를 했으나, 당일 공익위원들만의 만장일치로 노동관계법 개정 수정안이 의결되었다(이병훈 유범상, 1998: 97~98). 결국 노개위 위원들은 모든 항목에서 합의를 이루어지 못했고, 쟁점이 된 사안별로 정리하여 정부로 이관한다. 정부는 11월 13일 14개 부처장관으로 구성된 노사관계추진위원회 를 발족하고, 개정작업 마무리하여 12월 10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후 국회에 상정했다. 이런 상태에 이르자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예고하고 하는 등 크게 저항의 목소리를 냈지만, 12월 26일 신한국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이는 이후 노동자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학생과 야당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와 사법부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탄압했지만, 결국은 이를 철회하고, 1993년 3월 10일에 여야 합의로 노동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2) 노사의 입금 합의와 협의 구조: 상급단체 가입 변경 한국의 노동정책의 변화에서 김영삼 정부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의 대표단체와 사용주의 대표단체가 임금인상 기준을 자율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은 노사협조주의를 통해 미연에 노사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미연에 예방하고, 자율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의 결정은 대표성, 공정성, 적절성 등에서 필연적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정책은 노동자에게 심각하게 인식되었는데, 그것은 노사가 이 기준을 준수해야 하는 지침처럼 변용되었고, 정부가 이를 기준으로 임금협상을 체결하도록 직간접적으로 강제하여 임금가이드라인처럼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1: 206).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김영삼 정부는 지난 정부들과 달리 일부 변형된 임금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이것이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노동자에게 수용할 것을 압박하는 정책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노사가 단일 임금인상안을 합의하여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와 같은 정책은 1993년 2월 9일 한국노총(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이 1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1 노사대표 회담을 가졌던 것에서 발단이 되었다. 두 단체는 총 9차례의 회담을 갖고, 4월 1일에 올해 노사 단일임금인상률이 4.7~8.9%로 타결 됐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정부와 노동자, 사용자 등 경제 주체의 고통 분담을 위해 10개 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는데, 촉구와 권고 수준이었다. 총액임금제가 실시되던 1992년에 한국노총이 15%를, 한국경총이 4.7~6.7% 인상안을 각각 발표했던 것과 견주어 살펴보면, 1993년의 단일임금인상률은 사용자측에 매우 유리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동부는 경제문제 해결에 큰 기여를 할 것 이며 한 차원 높은 성숙한 노사관계를 보여준 전례 없는 일 이라고 극찬했다. 이와 달리 노동자들은 경제적 고충에 따른 고통분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규탄했다. 언론에서는 이 결과에 대해 사용자측의 완승 또는 판정승 에 가깝다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이 발표는 당시 임단협 협상을 진행하고 있던 단위노동조합들은 물론 한국노총 소속의 산별노동조합이 산하 노동조합에 제시했던 임금인상률 마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노총이 단위노동조합들로부터 교섭권 위임받지도, 위임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당일 전노협은 노총의 상층 귀족들과 경총간의 소위 임금인상 단일안을 단호 거부한다 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각 지역별로 서명운동, 규탄 집회와 광고 등의 방법들로 비판이 잇따랐다(김금수, 2004: 303). 단일임금인상률은 권고인 것처럼 발표되었으나, 노동자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93년 임금교섭지도지침 을 작성하는 근간이 되어 4월 8일에 국무회의에 보고되었다. 그런데 이 내용은 한국노총과 한국경총이 발표했던 것보다 후퇴한 것으로 실질적인 임금 인상률은 1.5%에 그친 것이었다. 그러자 한국노총은 노사자율협상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며 통제 위주의 비민주적 임금억제정책을 강행하려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고, 한국경총은 오히려 노사 간의 자율협상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지도지침의 작성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5월 1일 개최된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서도 한국노총과 한국경총 간의 임금인상안 합의 거부 및 노동자의 실질생활 보장이 요구되었다. 단일임금 합의와 정부의 임금교섭지도지침 발표로 노동자들의 저항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노총은 1994년에도 임금인상을 쟁점으로 한국경총과 지난해와 유사한 협상을 또 벌였다. 한국노총은 이 협상에 정부도 참여하여 노사정 3자 협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 를 이루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부는 협의에 실무자를 참여시키는 차원을 주장함으로서 노사자율이라는 기본 방향을 고수하려고 했다(김금수, 2004: 315). 정부는 단일임금인상률의 결정에 자신들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회피하려 했다. 그리하여 3월 30일에 94년도 중앙 노사임금 및 정책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 결과로 임금인상 5~8.7%라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아울러 작년과 같이 세 부담 경감 및 형평조세 실현,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해 구속 중인 노동자에 대한 행형상의 특별조처,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근절 및 노동관계법의 엄정한 집행 등 12개 항의 정책 및 제도개선 사항이 합의되었고, 노동운동사 179

182 정부가 이의 실현을 약속했다고 했다. 그러나 전노대 등 재야노동계는 31일에 기자회견을 갖고 단위 노조별 합의 거부 결의 등 전면반대 투쟁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외면적으로 노사자율 협상이었으나, 1994년의 협상에서도 정부는 다양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합의를 종용했다. 한국경총은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린 반면, 한국노총은 이러한 전략들에 끌려가면서 사회적 합의가 아닌 국가적 또는 강제적 성격을 띠었다. 한국노총은 지난 해 노동자들의 비판을 고려하여 토론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노조간부와 조합원의 의견을 모으고, 전국 산별연맹별 중앙위원회를 통해 그 결과를 수렴했다고 했으나, 이를 이행한다고 해서 교섭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규모 사업장들에서 협상안에 대한 거부결의가 잇따랐고, 단위사업장별 임금협상에서 회사의 근거로 활용되면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불만과 항의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한국노총 내에서도 반발이 증가하여 8월 25일 기준으로 37개 노동조합이 한국노총에서 탈퇴했으며, 135개 노동조합이 회비 납부 거부를 결의했다(김금수, 2004: 315).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여 광주의 대표적인 대규모 사업장인 아시아자동차의 노동조합도 7월 4일 한국노총을 탈퇴했으며, 이듬해에 민주노총에 가입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47)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8월 27일 노동부장관은 중앙단위 임금합의를 대폭 개선하여 업종별 노사 대표가 업종 조건에 맞게 임금 합의를 하는 방식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한국노총은 1994년 11월 17일 전국노조대표자회의에서 정부의 개혁정책 추진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1995년부터는 중앙단위 사회적 합의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최영기 외, 2001: 419). 이로서 김영삼 정부가 2년 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한국노총과 한국경총의 임금인상합의는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정부가 임금가이드라인 제시 정책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1992년에 총액임금제를 실시했던 것처럼, 1995년에는 정부가 임금인상에 개입하는 것으로 퇴행적 양상을 드러냈다. 정부는 노동부의 주관으로 한국노동연구원장 원장 등을 비롯해 노동경제학자 11명으로 구성된 임금연구회 라는 임의조직을 만들고, 이들에게 부담을 전가시켰다. 임금연구회는 3월 21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임금협상에서 임금가이드라인을 통상임금 기준 5.6~8.6%, 평균 7.1%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노동조합들은 임금연구회는 법적 근거가 없는 조직이고, 이들의 발표 결과는 현실적 근거가 없으며, 설득력도 부족하므로 이 발표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임금연구회가 제시한 임금인상안을 받아들여 3년 만에 부활된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을 22일에 발표하고, 임금협상 지도지침을 만들어 전국 45개 지방노동관서에 시달했다. 이것은 한국노총이 요구한 12.4%,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가 요구한 14.8%, 한국경총이 발표한 5.4% 등과 더불어 큰 갈등의 유발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준비위원회는 각각 성명을 내고 47)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1995년 10월 20일에 민주노총 가입을 결의했다. 이 외에도 10월 23일에는 금속노조 광주지부 가, 12월 6일에는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이, 12월 8일에는 대우모터 노동조합이, 1996년 2월 21일에는 무등산관광호텔 노 동조합이 민주노총 가입을 결의했다. 1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3 임금가이드라인의 철회를 요구하며, 시정이 안 되면 공동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저항이 거세어지자 대통령은 3월 28일에 경제 5단체장들과 오찬을 하면서 정부의 임금인상 권고선에 준해서 임금인상이 이루어지도록 기반을 조성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한국노총이 정부 및 한국경총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일시적이었다. 한국노총과 한국경총은 3월 30일에 1995년 산업평화 정착을 위한 노사공동선언문 을 발표했다(김금수, 2004: 336). 그 내용은 협력적 노사관계를 모색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는데, 임금인상 권고선을 두고 발생한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부는 이 발표에 대해 정부차원의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노사 여론을 적극 수렴하겠다고 함으로서 사실상 두 해에 거쳐 도모했던 효과를 지속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노동현장에서 임금가이드라인은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각 지방의 노동청들과 노동위원회 등은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각 사업장의 임단협 협상에서 강제력을 갖는 기준으로 적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임금을 직간접으로 통제하는 정책은 단위 사업장의 임금협상에 혼선과 부작용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무력화되었다. 이후 임금가이드라인 제시하는 것은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에서도 더 이상 실효를 거두지 않았다. 3) 노동조합 연대조직의 확대와 재편 48) 김영삼 정부는 전국적인 노동조합 연대조직의 확대와 재편으로 노동조합운동의 전면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이는 한국노총과 다른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건설, 즉 복수노동조합의 건설을 위한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몇 번의 전국 단위의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했던 전노대는 1993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민주노총을 결성하기 위한 상급조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즉 민주노총 조기건설론 이 급속하게 등장하면서 전노대를 확대하여 민주노총 결성을 위한 준비조직으로 전화되었다. 여기에는 1993년에 이루어진 전노협위원장 선출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민주노총준비위 결성 선포는 1994년 8월 전노대 대표자수련회에서 이루어졌고, 이를 위해 그해 9월 30일에 민주노총건설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3일에 개최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건설 준비위원회 발족이 공식 선언되었다. 민주노총 건설이 준비되면서 나타난 주요 현상은 한국노총 탈퇴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활성화시켰던 것은 1993년과 1994년에 노 경총 임금합의를 한국노총이 주도했는데, 이에 대한 노동조합들의 반발이었다. 노동조합들은 한국노총에서 탈퇴하거나 맹비를 납부하지 않음으로서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흐름이 확산되자, 한국노총은 민주노조 진영의 존재를 인정하고, 48)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건설에 이르는 노동조합 조직의 변화에 대해서는 최영기 외의 책(2001: 349~354)과 김영수 외의 책(2013: 252~395)에 수록된 내용에 크게 의존하여 구성되었다. 노동운동사 181

184 조건없는 통합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금속산업별노동조합과 운수산업별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노동조합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1994년 11월 4일에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 가 결성되는 등 산업별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민주노총 건설을 자극했다. 민주노총준비위는 1년 동안 13회의 대표자회의, 16회의 운영위원회 회의, 40회의 집행위원회 회의, 2회의 단위노조대표자 수련대회 등을 거치면서 민주노총 창립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995년 11월 11일에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민주노총 창립대의원대회를 개최했고, 11월 12일에 여의도에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집결한 가운데 출범을 선언했다. 당시 노조 조직률은 14.5%였다. 한편 12월 3일에 전노협은 대의원대회에서 6년여에 걸친 활동을 평가하면서 해산했다. 전노협은 해산하면서 미가입 노조의 조직화와 산별노조 건설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고, 민주노총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임을 표방했다. 전노협과 민주노총은 무관한 관계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노총이 전노협의 정신과 이념을 계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주지역에서는 지역경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1992년 하반기부터 광노협의 주요 기반이 되었던 대규모 사업장의 노동조합에서 급격한 조직력 약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광노협의 새로운 지도 집행력에 대한 대안 부재로 인해 대중 조직으로써 민주노조진영의 단결과 연대를 꾀하기란 사실상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1993년까지도 계속되었다. 광노협 제6년차 정기대의원대회 결의문 은 광노협이 침체상태에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49) 이로 인해 광노협은 협의체로서의 명맥유지와 현안사업에 급급해 하고 있었다(강현아, 2003: 133). 아울러 광노협은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이 중앙 기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노동법 개정 투쟁 등과 같이 전국적인 사안들이 쟁점이 되면서 주변적인 위치로 전락해가는 양상을 보였다. 광주지역은 1994년 10월경에 광주지역 노동조합 대표자 모임 준비위원회 를 구성하여 전노대의 지역담당 주체로 활동했다. 그리고 1995년 2월에 광주지역 노동조합 대표자 모임(광노대) 으로 개편하면서 지역에서의 민주노총 건설 사업을 주관했다. 특히 광노대가 역점을 두었던 활동은 민주노총 건설의 필요성과 노동조합 조직의 재편을 단위 노동조합에 설명하는 간담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광노대는 광노대의 결성에 따라 광노협의 역할이 위축된 점과 지역사회에서 노동운동을 담당할 인력의 중복과 한계로 인해 임금단체협약에 관한 사업까지 담당해야 했다. 하지만 조직적 위상의 한계로 인해 광노대는 짧은 기간만 존속할 수 있었고, 4월 28일에는 민주노총 광주지역본부(준)으로 재편되었다(홍성우 강현아, 2003: 135~136). 전반적으로 보면,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들은 전노대, 민주노총준비위 등과 같은 전국적 조직 변화들에서 중요한 49) 위 결의문(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록하여, 광노협의 기반이 위협받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광노협은 지도부의 공백으로 어렵고 힘들게 지켜왔지만 노동법개정투쟁 과정과 대공장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를 통해 보여준 지역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은 다시 한 번 광주지역의 민주노조운동의 활성화와 발전 전망을 고민 하면서 새로운 한 해의 도약을 기약하고 있다. 광노협의 침체는 가입노조 조합원들만의 책임이 아닌 지역 노동자 모두의 반성으로 여기며, 1994년 임단투 투쟁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 총단결과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발전을 위해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이다. 1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5 역할을 하지 못했고, 흐름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민주노총 건설의 구체화는 광주 전남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민주노총은 전노협의 중심이었던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를 해산하고 소속 노동조합들이 산업(업종)연맹, 그룹별 연맹 등으로 재편해야 했다. 이로 인해 광노협의 존재와 위상은 사실상 소멸되었고, 각 노동조합들을 산업과 그룹에 따라 연맹 단위로 재편성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편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사실상 광주지역에서만 연대적 기구로 노동조합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소속 문제도 해결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1995년 11월 30일에 민주노총 광주지역본부(준)는 제8차 대표자회의에서 광주 전남지역을 포괄하여 지역본부를 건설하기로 잠정 결정하고 규약 변경했다. 50) 광주 전남지역은 민주노총 출범 초반에는 지부로 명명되다가, 이후에는 광주 전남지역본부로 개칭되었다. 민주노총은 1995년 11월 11일에 출범했지만, 산업별 지역별 상황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51)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가 어느 정도 안착되는 국면에서 노동법 개정 국면이 시작되었다. 광주 전남지역본부는 민주노총 중앙의 결정에 따라 지역에서 사업들을 진행했으나, 52) 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의미와 영향력을 갖는 존재감을 드러냈던 계기는 1996년 12월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민주노총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동자들의 피해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피해는 구속, 수배, 해고 등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피해가 중복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 가운데 해고자들은 사업장, 그룹, 지역 별로 복직투쟁을 벌여오다가 1992년 10월 8일에 전국 구속 수배 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 를 구성하기 이르렀다. 광주지역에서는 1993년에 광주지역 해고자협의회 가 중심이 되어 투쟁의 통일성을 구축하고 단위 사업장 조합원과 결합하여 임금인상 투쟁을 강화하는데 기여하며, 시민 선전전 등을 통해 노동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해 정부와 자본측을 압박하여 실질적인 복직을 쟁취한다 는 투쟁 기조에 따라 금호타이어, 대우캐리어, 동화기계, 대우전자, 로케트전기, 서울차체 등을 대상으로 지역 차원의 투쟁을 전개했다(김금수, 2004: 306~311). 4) 김영삼 정부 시대의 노동 환경과 현실 김영삼 정부시기에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50)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는 2007년에 광주지역본부와 전남지역본부로 분리되었다. 51)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 건설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정부의 탄압이 무엇보다 난관이었다. 민주노총 광주지 역본부 건설을 주관하던 핵심인물들을 구속한 것이다. 즉 1995년 11월에 김상진(전 광노협 의장), 유상열, 장은정 등이 구 속되었고, 8월에는 김미순(교육부장)이 구속되었다. 이들에게 적용되었던 법률은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52) 1996년 6월 19일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는 광주YWCA에서 노동법 개정과 1996년 임단협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를 개최했다. 노동운동사 183

186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월 19일에 노동계 대표 39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점심을 함께 하면서 산업평화 를 위한 협력을 당부했다. 참석자들은 노동정책 또는 노동환경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광주 전남지역을 대표해서는 한국노총 광주본부 서수정 의장이 참석했다. 서 본부장은 대통령에게 광주는 기업이 빈약해서는 노사분규도 심하지 않다. 노사분규가 나면 기업이 새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서 잘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당시 한국노총 광주본부가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의 수준이 낙후되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노동운동이 활발하지 않거나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광주본부의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은 민주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확산되고 있었지만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고, 회사의 관점과 거의 흡사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현장들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계속되었던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예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노무관리를 하던 시대와 같이 회사가 조직을 이용하여 노동자를 관리 통제하고, 노동기본권을 무시하는 행태들은 크게 감소했었다. 특히 산업현장에 노동조합들이 결성되고, 민주적인 성격을 갖는 노동조합들로 재편되고, 지역과 부문 그리고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들이 건설되면서 노동현장들이 환경이 노동자들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되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노무관리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노동현장들도 있었고, 노동자의 인식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으며 노동자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은 노동현장들도 있었다. 이를 언론의 보도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업장은 삼면이었다. 삼면은 1973년 광천공단에서 설립되었고, 1981년 하남공단으로 이전했던 광주의 중견기업체였다. 이 회사는 스텐레스로 재질로 하는 양식기 제품을 생산했는데, 노동자는 160여 명으로 다수가 여성이었다. 이 회사의 노사갈등이 외부로 알려진 것은 1993년 2월 초에 미혼노동자 14명이 법정근로시간이 준수되지 않고 있으며 강제로 잔업을 시키고 있다고 광주지방노동위원회에 고발하면서였다. 그리고 이들은 1992년 종무식의 유급처리를 요구하고, 다른 노동자에게 노동조합 가입을 권유했는데, 회사는 이러한 행동들을 이유로 해고와 출근 정지 징계를 내렸다. 이에 해고자들은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회사가 불법으로 직장수호사우회 를 조직하고 임금 1%를 일괄 공제했으며, 매주 10여 시간씩 연장근로를 시키고, 부당한 이유로 징계 조치를 내리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사우회는 노동자가 입사할 때 날짜가 적히지 않은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강요하고, 현장 노동관리 주체가 되어 각종 부당 노동행위를 주도했다. 전남지방노동위원회는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받아들여 회사측에 징계노동자를 원상 복직시키라고 판정했다. 광주지방노동청은 4월 13일에 (주)삼면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즉각 직장수호사우회를 해체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판정과 조치들에 의거하여 해고노동자 11명이 5월 19일부터 출근했지만, 일부 1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7 관리직과 기혼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차단되었다. 해고노동자들은 5월 31일에 다시 출근했으나, 회사측에 동조한 이들은 작업장 입실을 차단하고, 강당과 노동조합 사무실에 이들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삼면은 5월 31일부터 1주일째 조업이 중단되었고, 폭행을 당한 4명의 노동자는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이를 견디다 못한 5명은 사직서를 냈다. 사건이 악화되었지만, 회사 경찰 노동 당국은 노 노 갈등이라고 방관했다. 삼면의 노사갈등은 사법부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해고노동자들은 광주지방검찰청에 폭행에 가담한 회사 간부와 노동자 21명을 고소했다. 공안부는 6월 4일 회사 대표를 근로기준법 위반과 폭행 등의 혐의로 소환했지만, 회사 대표는 응하지 않았다. 회사는 6월 11일 지방 일간지에 해명 광고를 게재했다. 해고노동자들은 회사의 광고가 자신들을 모함한 것이며 명예훼손 혐의로 추가 고소했다. 기혼 여성 노동자들이 이들의 행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법정근로시간을 준수하면 임금이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삼면은 그해 10월에 폐업했다. 53) 공안기관들의 민간인 사찰이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정치사찰은 각종 정보기관들이 관행처럼 해오던 것이었으나, 문민정부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부에서도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1994년 10월에 공안기관들에 의한 정치사찰이 서울, 부산, 광주, 수원, 창원, 파주, 강화 등 다양한 지역들에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그 대상들도 정치인, 재야인사, 교수, 학생, 노동운동가 등으로 다양했다. 이와 관련하여 광주에서 드러났던 사례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1994년 10월 12일에 조선대학교 총학생회가 기자회견을 통해 폭로한 것이었다. 총학생회는 11일에 전남경찰청 정보과 소속 경찰관으로부터 1992년부터 현재까지 조선대학교 전반에 대한 사찰 자료 20여 종 300여 점을 확보했다고 했다. 경찰은 당시 조선대학교 노동조합이 파업 중이어서 이에 관한 정보 수집을 위해 학내를 출입한 정당한 정보활동이며, 경찰관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학생들을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사법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전남경찰청은 더 이상 문제를 확산시키지 않을 경우 불문에 부치겠다고 하면서 파장을 최소화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였고, 조선대학교 총장과 학생처장, 교수협의회, 학생 대표 등은 유감을 뜻을 담은 항의 서한문을 전달했다. 둘째, 11월 24일에 광주서부경찰서 보안과 소속 경찰이 금성알프스 한 여성노동자를 이용해 광주가톨릭노동사목 이 운영하는 사랑방 노동교실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광주지역의 천주교단체와 노동단체는 경찰이 경제적으로 빈곤한 여성노동자를 금성알프스에 취업시켰고, 이를 빌미로 삼아 정보사찰 활동을 강요했다고 규탄했다. 그 밖에도 경찰과 검찰은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집단행동의 조짐이 포착되거나 예고되면, 정당한 절차 이행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사법처리할 것이라고 무수히 선포하곤 했다. 그리고 이는 공권력을 동원한 통제와 탄압으로 빈번하게 이어졌기도 했는데, 때로는 극단적으로 대처하고, 때로는 관용으로 53) 회사 대표는 2002년과 2003년에 언론 인터뷰에서 위장취업 종업원으로 인한 노사분규가 해결되지 않아 폐업 했으며, 스텐산업이 사양 산업인데다 노사분규까지 이어지면서 도저히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다 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삼면 의 노동환경과 노무관리 등에서의 위법성과 당국의 시정 조치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노동운동사 185

188 대처하는 등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노동자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극단적 대처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며, 사회적 통념과 공감대를 좌시하고 공권력을 집행했지만 결국에는 요구가 수용됨으로서 공권력 집행의 중립성과 공정성의 추락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년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 1)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 노동관계법 개정의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노동관계법이 개정되었지만, 대부분 노동자 단체와 협의와 조정에 근거하지 않고, 정부와 사용자의 정책적 판단과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의 노동관계법 개정 요구는 뜨거운 논란만 남긴 채 번번이 중단되었다. 노동관계법 개정은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접맥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으로 분출될 개연성이 많았다. 노동관계법 개정은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 명약관화해서 합의가 쉽지 않은 노동 분야의 핵심 과제였다. 그래서 지난 정부들은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파생하는 부담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띠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사회적 변화와 노동환경의 변화에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관계법 개정은 노동자에게 긍정적인 기대보다 부정적인 우려를 확대시키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정부는 노사 갈등의 주요 쟁점들이 되었던 노동관계법의 주요 사안들을 바꿀 것임을 피력했으나, 이를 통해서 도달하려는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시기를 회고해 보면, 정부는 일정한 방향과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던 3월 초반 경에 노동부는 연 월차 휴가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노동관계법을 개정할 것임을 시사했던 바 있었다. 이것은 경기 침체로 인한 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경제활성화 우선 이라는 노동정책의 기본방향을 명시화 하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가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책 일방을 고수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노동부는 5월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이나 해고무효확인 소송 중인 노동자는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행정지침을 바꾸어 조합원 자격을 인정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경영자총연합회를 비롯해 사용자측도 노동관계법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강화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관계법 개정을 둘러싼 노사의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부는 신중하게 개정할 것임을 밝히면서 당장 결론을 내지 않을 것임을 드러냈다. 1993년에 착수되었던 노동관계법 개정은 김영삼 정부 임기 1여 년을 앞둔 1996년 12월 26일 새벽 4시에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 노동관계법은 노동법과 안기부법에 관해 야당을 비롯해 노동자 단체들과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기습 강행처리한 것이었다. 개정된 18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9 노동법에는 복수노조 상급단체 3년 유예조항을 포함하고 있어서 민주노총의 반발이 불보 듯했고, 경영상의 이유로 인한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노동자의 격렬한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노동법 개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쟁점들인데, 변형된 정부안을 강행 통과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개정된 노동법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시민사회단체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형국을 초래했고, 당연하게도 정치투쟁의 성격을 갖는 전국적인 노동자 총파업으로 표출되었다. 총파업은 노동법이 개정된 당일부터 1997년 3월 10일 국회에서 노동법이 재개정되기 까지 4단계에 걸쳐 단행되었다. 노동법 재개정 요구 투쟁은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대규모 사업자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과 도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동안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진영도 대규모 사업장들이 구심을 형성하고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노동법 재개정 요구 투쟁을 전개했다. 즉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민주노총의 주도와 한국노총의 참여 아래 아시아자동차, 금호타이어, 한라중공업 등의 노동조합이 주도적으로 파업을 이끌었다. 노동자의 총파업은 급작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1996년 5월 9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어 노동관계법 개정을 협의했던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의 협상이 사실상 결렬되고, 정부의 노동법개정안이 12월 10일 국무회의를 걸쳐 11일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다(최영기 외, 2001: 495). 특히 민주노총으로서는 법률에 근거하여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어서 노개위 참여, 불참, 복귀 등으로 대응했으나, 의미가 있는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한국노총도 각 정당 및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입장을 전달하고, 로비활동을 했으며, 지역순회 토론회와 집회를 개최하는 등 노동법 개정을 앞두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최영기 외, 2001: 486~488). 이와 같이 노동법이 개정되기 이전부터 양대 노총은 준파업 상태에 돌입하고 있었다. 총파업은 양대 노총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였다. 54) 민주노총은 단계별 파업을 주도했는데, 제1단계는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2일까지, 제2단계는 1월 3일부터 1월 14일까지, 제3단계는 1월 15일부터 1월 19일까지, 제4단계는 1월 20일부터 28일까지 이루어졌다. 단계에 따라 파업에 참가했던 분야들이 차이가 있었고, 단계 내에서도 파업이 참여하는 시점과 방식이 달랐다. 그럼에도 파업은 단계별로 확산되는 흐름을 보였는데, 3단계 국면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참가가 가장 두드러졌다. 민주노총은 제2단계 파업 국면에서 한국노총이 연대파업투쟁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사법부는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지도부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검거하여 파업의 확산 기세를 꺾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의 효용성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1월 21일에 구속영장 철회 방침을 밝혔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전면파업에서 수용파업으로 전환하고 54) 양대 노총의 개정 노동법 반대운동에 관한 총파업이 전개되는 내용은 최영기 외(2001: 495~510)에 크게 의존하여 구성 했다. 노동운동사 187

190 매우 토요일에 전국에서 동시에 집범국민 결의대회를 개최하는 등 전반적으로 파업 전술을 바꾸면서 국면이 정리되어갔다. 한국노총은 27일부터 파업에 들어갔고, 단계별로 진행했지만 민주노총과는 양상을 달리했다. 한국노총의 총파업은 제1단계는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제2단계는 1997년 1월 14일부터 15일까지였다. 원래는 제2단계 파업을 1월 4일부터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한국노총 의장단이 신한국당과 노동부 장관을 항의 방문하고, 대통령의 재개정할 의사가 없음을 발표할 때가지 파업을 연기했다. 제2단계 파업은 1월 9일 회원조합 대표자 회의에서 결의되었다. 한국노총은 제2단계 파업 이후인 1월 18일 민주노총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밝혔다. 양대 노총의 공동투쟁이 가장 정점에 이른 것은 1월 25일에 전국에서 날치기 노동법 안기부법 무효화와 민주적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를 개최한 것이었다. 이날 서울 중앙대회 외 10개 지역에서 50여 만 명이 참여한 집회가 열렸다. 파업 국면이 수그러든 것은 2월 17일 여야가 노동법 재개정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여야는 쟁점 사항에 대해 절충하여 2월 28일에 16개 사항은 합의에 이르고, 6개 사항은 미합의로 정리했는데, 3월 8일에 3당 정책위 의장단 회의에서 최종안을 확정하고, 3월 10일에 지난 노동법의 폐지안과 여야 합의안을 동시에 제출하여 일괄 처리했다. 노동운동 진영은 총파업을 통해 개정된 노동법이 발효되는 것을 저지하고, 노동자의 집합성과 단결력을 보여주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노동법이 재개정되는 과정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재개정된 노동법은 상급단체 복수노조 즉시 허용, 정리해고 2년간 시행 유보, 노동조합 업무조사권 삭제 등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1996년 12월 개정되었던 노동법의 일부 쟁점들을 완화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애초 정부안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여전히 배제된 사안들이 많았는데, 공무원과 교원의 단결 금지, 공익사업 직권 중재,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점진 축소와 5년 후 금지, 변형근로시간제 신설 등이 그것들이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1: 224). 이 쟁점들은 이후 노동운동에서 갈등의 주요 의제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여러 가지 측면들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노동법 개정 총파업 1996년 12월 말부터 1997년 2월까지 노동조합운동의 최대 현안은 신한국당 단독으로 기습 처리된 노동법과 안기부법이 저지하고 재개정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벌이고, 규탄 집회를 개최했는데,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항의 집회와 시위는 광주 전남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특성상 광주지역에 소재한 단위 노동조합들이 주도를 하고, 전남지역 단위 노동조합들이 참여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12월 26일에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는 긴급대책회의를 갖고, 오후 1시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아시아자동차, 한라중공업, 대우캐리어 등의 노동조합들이 1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1 회사별로 총파업 출정식을 갖고, 오후 2시 30분경부터 광주역 광장에서 날치기 규탄과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회 를 개최했다. 27일 오후부터는 한국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 산하 40여개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이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총파업은 점차 확산되어 28일에는 민주노총 산하 대우모터와 금속노동조합 등이 합류함으로서 10여 개의 대형사업자들에서 조업이 중단되었다. 병원노련의 지침에 따라 전남대병원 등 광주지역 5개 병원들도 파업선포식을 갖고, 30일부터 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병원노련의 유보 지침에 따라 실행되지는 않았다. 한편 광주은행 등 전국금융노동조합 광주지부 소속 노동조합들은 28일부터 항의 표시로 사복 차림으로 근무했다. 12월 31일에는 민주노총이 주도한 제1단계 총파업이 마무리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아시아자동차, 금호타이어, 한라중공업 등을 비롯해 파업을 계속하던 14개 노동조합 조합원과 시민 등 5,000여 명이 광주역 광장에서 노동법 개악 철회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도심에서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 그리고 파업으로 1996년을 보내야 했고, 50여 명의 민주노총 간부들은 신정연휴 기간 동안 광주 임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며 경찰의 검거에 대비했다. 이러한 활동은 1997년에도 계속되어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신정 휴일 후 작업에 복귀하지 않았고, 아시아자동차와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은 3일부터 재파업에 들어갔다. 제2단계 총파업은 1997년 1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제1단계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자동차, 금호타이어, 한라중공업 등 민주노총 소속의 노동조합들은 회사별로 파업 전진대회 를 갖고, 광주역 광장에서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규탄 및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 를 열었다. 전국택시노련 광주지부 산하 70개 노동조합들도 이 집회에 참석했으며, 노조위원장 50여 명은 삭발투쟁을 벌였다. 노동부는 총파업의 상황을 축소해서 발표하는 데 급급했다. 제2단계 총파업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월 6일에 다시 증폭되었다. 아시아자동차, 한라중공업, 대우캐리어 등 민주노총 소속 13개 노동조합이 파업을 재개했다. 1월 7일에는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병원 노동조합이 총파업에 동참했다. 이들 노동조합들은 각 병원 로비에서 집회를 열고 노동법 개정을 규탄하며 파업을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KBS광주방송국, 광주문화방송, 광주기독교방송 노동조합들도 파업에 들어갔다. 총파업은 1월 10일을 기점부터 완화되었다. 아시아자동차는 긴급대의원 총회를 열고 4시간 부분조업에 들어갔으며, 대우캐리어도 조업을 재개했다. 1월 11일은 양대 노총의 연대투쟁이 실현된 날이었고, 다른 부문운동들도 연대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했다. 1월 14일 자정을 기해 택노련 광주지부 소속 76개 노조 3,300여대의 회사택시는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에 참가한 택시 노동자들은 회사별로 집회를 갖고 오후 2시 광주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한편 전면 파업을 선언했던 금융노련 소속 은행들은 사복 착용 후 정상근무로 파업 형태를 변경했다. 제3단계 총파업은 1월 15일에 개시되었는데, 당일 정점을 이루었다. 양대 노총 조합원들과 학생 노동운동사 189

192 및 시민 등 10,000여 명은 광주역 광장에서 집회와 거리행진을 벌이고 파업을 재개했다. 이날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광주기독병원과 아시아자동차, 한라중공업, 광주상공회의소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택시노동조합은 이틀째 파업을 계속했으며, 한국노총 소속이 아닌 사업장들에서도 파업이 이루어졌다. 버스노동조합들도 시한부 전면파업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타 도시와 행동통일과 시민 불편 등을 이유로 파업을 유보했다. 이날의 파업은 전남지역 주요 도시들에서도 전개되었다. 한국노총 순천지역본부 소속 조합원 400여 명은 오후에 노동법 철폐규탄대회를 열고 도심에서 거리행진을 벌였으며, 여수 순천 광양지역 120여개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로 구성된 노동법 개악 철회 전남동부지역 대책본부 와 20개 단체로 구성된 목포지역 대책위원회도 각각 집회와 거리행진을 벌였다. 1월 16일에는 광주 전남 무등일보와 광주매일의 노동조합이 파업출정식을 갖고 시한부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전남일보사 앞길에서 신문사 노조 파업 결의대회 를 갖고 광주역 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주관 집회에 참가했다.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과 관련하여 광주시민단체인 광주시민연대는 16일에 시국성명을 발표했고, 광주지역 138개 사찰이 결합한 광주불교사암연합회와 11개 기독교 교단 단체로 구성된 광주기독교연합회도 17일에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1월 17일 민주노총은 앞으로는 주중에는 수요일에 그리고 주말에는 토요일에만 시한부 파업을 하기로 총파업 전략을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총파업이 연일 계속되면서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고, 장기파업에 따른 지지세 감소와 참여율 저하 등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여권 내에서도 노동관계법 재개정론이 부상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에 따라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 등은 정상조업에 복귀했다. 수요파업 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제4단계에 들어갔음을 의미했다. 1월 22일은 첫 수요파업이 열린 날이었다.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오후에 4시간 동안 파업을 벌였으며,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노조위원장 등 4명이 구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간부와 대의원 등 70여 명이 구속자 석방, 고소고발 취하 등을 요구하며 회사 로비에서 벌여온 농성을 계속했다. 민주노총 소속 10여개의 노동조합 2,000여 명은 광주역 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수요파업은 부분파업에 그친 사업장이 많았고, 경찰도 집회 등을 적극적으로 차단하지 않아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개정 노동법은 정부 관련 부처들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로 논란이 되고 이견이 해소되지 않아 입법예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계 인사들의 대통령 면담과 여야 영수회담 등을 거치면서 개정된 노동관계법의 의미가 크게 반감되었다.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은 물론 학생과 시민 그리고 정당들을 비롯해 정부 내에서도 갈등이 해소되지 않자, 노동법의 재개정 가능성은 높아져갔다. 이와 대비적으로 총파업 기세가 주춤해지자 회사측이 노동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주)광주캐리어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캐리어는 1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 노동조합 위원장과 간부 18명을 대상으로 1인당 10억씩 총 19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1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3 1997년 1월 13일 사이에 벌인 파업으로 총 230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대우캐리어가 광주 전남지역에서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장임을 감안한 조치라고도 볼 수 있는데, 경제적인 방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옭죄는 것은 노동자가 안고 있는 가장 취약점을 공박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을 비판하는 집회와 시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활동에 노동자들도 계속해서 참여했으나, 전면 혹은 부분 파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집단성은 점차 기복을 보이면서 약화되어가는 형세를 띠었다. 2월 1일 광주공원에서 노동법 안기부법 무효화를 위한 광주시민 결의대회 가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노동자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2월 24일에는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 소속 노동자 30여 명이 신한국당 광주시지부를 방문하여 한보비리를 철저히 규명하고 노동법 개정에 성실히 임할 것 을 촉구했다. 2월 25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연합으로 광주역 앞에서 10,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노동법과 안기부법 백지화 요구 집회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개최했던 가장 대규모의 마지막 행사였다. 물론 이후에도 노동조합의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 반대운동은 계속되었는데, 마무리되는 시점은 2월 28일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 산하의 아시아자동차, 한라중공업, 금호타이어 등에서 사업장별로 노동조합 간부 중심으로 4시간 시한부 파업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김영삼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임금 단체협약 협상을 중심으로 1)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1) 제조업 1 금호타이어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했던 노동조합운동들 가운데 규모와 파급 효과 등의 측면에서 가장 주목되었던 것은 1994년에 금호타이어 광주공장과 곡성공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파업이었다. 그 발단은 1973년 7월에 설립된 금호타이어의 노사가 임단협 협상 방식을 두고 다른 인식을 가졌던 것에 있었다. 금호타이어에서는 1987년 이후 매년 노동조합 총회에서 임단협 협상이 이루어진 안이 부결됨으로서 노사갈등이 쉽게 종료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노동조합 위원장이 협상안에 직권조인 55) 을 했고, 이것을 이유로 위원장이 사퇴하는 사건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임단협 협상과 노사관계에서 회사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므로, 회사는 이러한 구도를 어떻게든 55) 위원장 직권조인 에 의한 임단협 협상은 금호타이어뿐만 아니라 여러 사업장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주노동조합의 성향을 띨수록, 직권조인을 노동조합운동의 큰 장애로 여기고 있었다. 1993년 6월 현대그룹에서도 직권조인이 쟁점화 되 어 현총련을 중심으로 한 공동협상과 연대파업이 이루어졌다(남구현, 1996: 207). 노동운동사 191

194 유지시키려고 했다. 게다가 회사는 그동안의 노사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파악하고, 1994년 임단협 협상에서는 더욱 고삐를 쥐어 노동조합 간부들이 노동조합원을 만나지 못하도록 현장출입을 통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했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1: 209). 결국 1994년의 101개에 대한 임단협 경신 협상 과정에서 노사 갈등은 폭발했다. 노사양측은 5월 25일부터 6월 25일까지 총 11회의 임단협 협상을 진행했으나,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최고의 난항은 회사가 교섭위원 자격과 징계위원회 노사 동수 참여 불가 등을 이유로 협상을 방기한 것이었다. 회사는 노동조합 집행부가 교섭권을 갖고 최종 체결권은 노동조합 총회를 통해 확정되는 방식으로 임단협 협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노사의 감정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노동조합은 6월 10일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신고를 냈지만, 대표권 문제 등은 쟁의발생 신고사항이 아니라는 해석을 내리고 반려했다. 양측의 갈등이 더욱 더 악화되었던 이유는 노사교섭 중에 임원을 감금 폭행하여 부상을 입혔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것과 임단협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일체의 투쟁을 하지 않을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업 여부는 6월 27일에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6월 25일 오후 3시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조합은 24일부터 회사 서류 등이 공장 외부로 반출되고 있었고 공장 주변에 경찰이 배치되는 등 원활한 협상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여서 파업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회사는 회사 서류의 외부 반출을 부인하고, 파업에 이르는 모든 절차가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더 나아가 회사는 헬기를 띄워 사원들에게 드리는 호소문 을 살포했고, 밤 11시 30분경 경찰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했다. 회사는 26일에 노조위원장 등 노조 간부 8명을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에 경찰은 8명에 대한 사전구속영장과 금호타이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1988년에 금호타이어가 주요 방위산업체 로 지정되었다는 것도 부정적인 압박 요인이 되었다. 금호타이어 파업을 둘러싼 양상이 급속히 악화되었던 것은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금호타이어의 파업이 진행될 무렵 김영삼 정부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출범했던 전노대가 전국의 소속 사업장들에게 철도와 지하철 파업과 연계해 총파업에 돌입하라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당국은 노동부와 경찰은 물론 검찰 등을 동원하여 이 파업이 전노대의 총파업 지침에 따른 것이며, 전노협과도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여론을 호도하면서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특히 이 갈등의 직접적 주관 부처인 노동부의 입장이 강경했다. 노동부는 26일에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전노대의 연대파업 지침은 제3자 개입이며, 방위산업체인 금호타이어의 파업이 철회되지 않을 때는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할 것임을 밝혔다. 정부와 회사의 공동 대응으로 수세에 처하게 된 노동조합은 파업이 전노대와 무관한 것이라고 항변했고, 퇴직금 누진제와 생산직의 고졸 수준 임금 인상 요구는 관철되어야 한다고 19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5 주장했다. 금호타이어의 노사갈등은 27일에 노사협상이 재개되어 해결 기대를 심어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공권력 투입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다. 6월 29일 아침에 전남지방경찰청은 헬기 3대, 중장비 20여 대, 35개 중대 4,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관리직 사원들의 안내를 받아 1,200여 명이 파업을 벌이고 있던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 진입했다. 경찰은 1시간 여 동안에 걸친 작전을 통해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전 현직 노동조합 간부 2명을 포함하여 417명의 조합원을 연행했다. 공장과 그 일대는 노동자들이 경찰의 진압에 대응하여 바리게이트와 담장 둘레에 쌓은 타이어에 붙은 화재로 화염, 연기, 유독가스와 경찰이 살포한 소화액, 최루탄 가스, 그리고 교통통제 등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는 금호타이어에 공권력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연대 지지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금호타이어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규탄한다! 6월 29일(금) 오전 6시 55분 페퍼포그를 난사하면서 전경 40여 개 중대 500여 명의 병력이 금호타이 어에 투입되었다. 28일(화) 밤 11시 55분 송정리역쪽 벽을 포크레인으로 뚫으면서 한때 진입을 위한 예비 작업을 한 데 이어 29일 새벽 전경들이 쇠파이프로 무장하면서 공장안으로 들어갔고 금호 노조 원들은 결사항정하고 있다. 공권력이 투입되자마자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 되어 있던 해고자 정두희씨를 비롯한 수많은 조합원들이 연행되어 가고 있다.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파업에 들어간 이후 계속적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 히 하였고,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과 단협 요구조건 중 최종적으로 퇴직금 누진제 하나만 이라도 들어준다면 파업을 풀고 조업에 들어갈 의사를 밝혀왔다. 이것은 다수 노조원들의 가장 절실 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노동조합의 의지이며, 8개월간의 선거투쟁을 통해 절대적인지지 속에 탄생시킨 노동조합 지도부들을 수사하려는 조합원들의 의지이다. 그러나 파업을 유도한 발언과 행동을 한 회사측은 계속적인 노조의 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대화의 노력도 없었으며 광주 전남연합 의장과 시의회 의원들의 중재에서도 최소한의 요구조건 조 차 들어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분명히 하여 공권력 투입을 방조하함으로써 노조원들의 생존권과 안위 는 전혀 안중에도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김영삼 정권은 노동조합에서 계속적으로 화학공장이므 로 공권력이 투입될 시 위험사태가 발생하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하였다. 김영삼 정권은 신공안정국으로 남총련 탄압, 전지협에 대한 침탈에 이어 계속적으로 노 동자, 민중에 대한 탄압을 가해왔고 오늘 금호타이어에 대한 공권력의 투입으로 반민중적, 반노동자 적 정권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는 이번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강력히 규탄 하며 이에 대한 책임은 회사측과 김영삼 정권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생략)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노동운동사 193

196 경찰은 입체적인 해산작전으로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밀어냈지만, 오히려 파업이 장기화되는 이유가 되었다. 파업 개시에서 공권력 진압까지는 불과 5일간이었으나, 공장이 재가동되기까지는 한 달 여가 요구되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전남대로 집결했다. 노사는 광주시장, 광주시의회, 광산구의회 등의 중재에 의해 협상을 벌이기도 했으며, 일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협상 조건들이 좁혀지기도 했으나 끝내 합의는 성사되지 않았다. 회사측은 조합원 현장 복귀 시한 제시와 징계 수위 조정, 해고예고통지서 발송, 노동조합 간부 21명을 불법노동쟁의 혐의로 고발, 조합원 74명과 그들의 신원보증인 78명에게 32억 원에 손해배상 청구 등 다양한 냉온 전략을 구사하면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56) 금호타이어 협력업체들과 광주 전남 경제단체들도 조속한 정상조업 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복귀를 촉구했다. 광주시의회와 30여 개의 지역사회 종교단체들은 노사 대화를 요구했고, 전남대 총장은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동자들이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집행부는 더 이상 파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시간이 갈수록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점점 더 고립되는 양상으로 사건이 전개되었다. 결국 7월 22일 노동조합 집행부는 현장 복귀를 결정했다. 조업이 재개되었던 것은 25일이었다. 약 1달에 걸친 금호타이어 사건으로 인한 인적 경제적 사회적 피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25명이 구속되었고, 152명에게 손해배상이 청구되었으며, 46명이 고소 고발되었고, 8명이 수배되었다. 수배자들은 8월 중순까지 체포 또는 자수 등의 절차를 밟아 모두 구속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말까지 구속자 40명에 대해 업무방해, 가택침입, 방화, 폭력 등을 이유로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전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9권), 2003: 518~519). 57) 광주 전남의 노동조합운동사에서 이와 같이 단일 사업장에서 대규모 구속자가 발생하고 재판을 받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또한 당국에 연행된 사람들은 고문을 받았고, 파업을 지원했던 광노협 김상진 의장(대우캐리어 노조위원장)은 8월 9일에 사주를 받은 폭력배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1: 209). 58) 회사는 파업에 따른 생산량 감소, 매출 손실, 공장 파손, 관련 업체 피해 등 약 1,000억 원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집계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미친 유무형의 피해도 상당했다. 이와 같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지만, 임단협 협상의 결론은 여전히 원점이었다. 56) 금호타이어 회사측이 입사할 때 사원이 서류에 기입했던 신원보증인을 대상으로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은 민간 기업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57) 구속자는 신복섭, 정두희, 이연형, 신남호, 김명수, 남일동, 이진선, 박병렬, 이삼자, 장갑곤, 이석행, 설동윤, 이관균, 조 성수, 정성무, 노수진, 박대중, 이종민, 이기범, 오수도, 최명선, 조래훈, 김희동, 한생남, 김영만, 오한종, 김옥진, 강경원, 전구, 조삼수, 김승철, 하태정, 민영선, 최종거, 신호식, 배현수, 장영렬, 정관채, 김옥현, 노일성이었다. 58) 김상진 폭행사건이 발발하자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는 8월 12일과 22일에 걸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의 엄 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 따르면, 8월 9일에 김상진이 광주 동부경찰서 폭력계 소속 형사로부 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사람에게 테러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었다. 당시 경찰은 금호타이어 파업과 관련하여 현상수배가 된 곡성지부장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 이에도 금호타이어 해고노동자 유상렬 등이 심각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고 하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 다. 19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7 이후 몇 년 동안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상처와 피해를 복구하는데 전념해야 했다. 비록 경제적 피해는 막대했지만, 회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조합원들은 국가와 자본가의 강고한 벽과 탄압에 좌절하고 의지를 상실했으며, 후유증을 치유하는데 오래 시간이 필요했다.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의 파업이 재개되었던 시점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1996년 12월 30일부터 다음 해 1월 초까지였다. 즉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의 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던 제2차 총파업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1994년의 파업 이후, 임단협 협상과 관련한 노동쟁의와 파업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호타이어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연속 무쟁의로 임단협 협상을 마무리했다.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은 1996년에는 6월 13일에, 1997년에는 7월 8일에 기본금 5.6% 인상과 품질 향상 장려금 20만원 지급 등으로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임단협 협상 잠정합의안을 가결했다. 2 아시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는 광주 전남지역에 소재한 대표적인 대규모 사업장이다. 아시아자동차에서는 임단협 협상과 관련하여 크고 작은 노사갈등이 빈발했다. 아시아자동차는 광주지역에 소재한 몇 안 된 대기업이어서 노동쟁의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부시기에 아시아자동차의 노사갈등은 거의 매년 발생했는데, 규모와 성격에서는 다양했다. 1994년은 김영삼 정부시기에 아시아자동차 광주공장이 전개되었던 임단협 협상 가운데 노동쟁의가 대규모로 발생한 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6월 전노대 차원에서 전국 규모의 연대파업과 임단협 협상이 전개되던 무렵에 아시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도 협상이 이루어졌다. 아시아자동차에서는 6월 27일까지 기본급 인상, 주당 근무시간 단축, 정년 연장, 상여금 인상 등을 의제로 11회의 단체교섭을 벌였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7월 2일에 상여금 지급율 확대, 정년 연장, 장기 근속자 대우, 해고 제한 등을 회사측이 수용하여 협약 개정이 교섭위원회에서 합의되었지만, 이것은 아시아자동차의 1994년 노동쟁의가 본격화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노동조합은 먼저 7월 5일에 조합원 투표를 통해 91.6%의 찬성으로 한국노총 탈퇴를 결의했다. 임단협 협상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정부 및 회사와의 유대관계에 보다 관심을 가졌던 한국노총의 운영방식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노동조합이 상급단체인 한국노총을 탈퇴에 의견을 모은 것은 한국노총과 경총의 임금합의안 결정이 노동조합의 임단협 협상에 부정적으로 기준으로 작용하는 등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조합원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던 임금합의안이 한국노총 탈퇴로 나타났던 광주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노동조합은 7월 6일에 파업찬반 투표를 실시했는데, 조합원 76.6%가 파업에 찬성했다. 아시아자동차 노사갈등의 주요 쟁점은 기본급 인상률이 노조는 15.83%를, 노동운동사 195

198 회사는 5.63%를 제시함으로서 너무 편차가 컸던 것이 관건이었다. 광주지방노동청은 노동조합에 냉각기간의 준법투쟁과 총회에서 결의된 전면 파업은 불법이라고 판정하고, 아시아자동차는 방위산업체인 관계로 파업 결의도 불법이라고 경고했다. 노사 간의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7월 13~20일까지 부분파업에 들어갔고, 21일에는 시한부 전면 파업을 벌였다. 22일에 교섭위원들은 기본급 7.85% 인상, 일시금 60만원, 사원복지기금 5억 원 출연 등을 골자로 한 임금협상에 장정 합의하고, 23일에 조합원 투표를 실시했으나 조합원 55%가 수용을 거부하여 다시 부결되었다. 같은 해 12월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은 삼성의 승용차 산업 진출 허용방침이 발표되자 이에 반발하여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이 동시에 과천의 정부종합청사 앞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각 사업장별로 파업에 돌입한다는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이 파업은 기존의 임단협 협상 난항으로 이루어지는 파업과는 다른 성격을 지녔다. 아시아자동차에서의 파업은 12월 8일 노조원 5,200여 명이 긴급대의원대회를 갖은 후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파업이 가능했던 것은 회사도 이 사안에 대해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존 자동차업계 종사자들의 공동 대응과 파업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승용차 산업 진출은 재고되지 않았다. 아시아자동차의 1995년 임단협 협상은 기존 자동차업계의 위기의식으로 넘어갔지만, 1996년에는 파업으로 나타났다. 노동조합은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79.8%가 찬성함에 따라 6월 19일 하루 동안 전 생산라인에서 작업을 중단했으나, 파업은 계속되었다. 회사측은 6월 13일에 광주지방법원에 쟁의행위 가처분 신청을 하여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 결정문을 17일에 게시했지만, 노동조합은 파업을 강행했다. 이 파업은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한 20일 보다 하루 앞서 진행한 것으로, 17일 노동부장관이 불법 파업을 벌일 경우 전 행정력을 동원, 엄정히 법질서를 지키겠다 고 선언한 다음날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의 파업 결정은 정부와 사법부의 탄압을 예견한 상태였지만, 강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주장한 임단협의 핵심 사안은 기본급 13.28% 인상, 상여금 800% 지급, 학자금 및 유류 지원 확대, 근로자의 작업중지권 인정, 주 40시간 노동보장이었다. 노동조합은 물가 상승에 따른 생계비 인상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고, 회사는 월평균 임금이 광주지역에서 최고수준이며, 경영실태가 3년 연속 적자임을 근거로 제시했다. 노조는 회사의 주장을 투자 예측 잘못과 경영 실패라고 일축했다. 노동조합은 이런 현상은 노동조합의 경영 참여가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적자 여부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노사 교섭위원들은 21일 어렵사리 기본급 7.8% 인상, 주 42시간 근무의 명문화, 유아교육비 36만원 지급 등의 임단협 잠정합의안을 도출하여 22일부터 조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잠정합의안에 대해 조합원 찬반 투표를 실시한 결과 부결되었다. 노사는 다시 임단협 협상을 재개했으나, 8월 2일 1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9 생산장려금 등의 사안에서 협상이 결렬되었고, 3일부터 재파업에 들어갔다. 이날 노사 교섭위원들은 협상을 재개하여 주 41시간 노동, 복지수당 7천원 지급, 생산손실분 만회시 생산격려금 30만원 지급 등에 합의하고, 8월 4일 조합원 찬반 투표를 통해 임단협을 마무리 짓고 조업을 재개했다. 1996년의 임단협은 마무리되었으나,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은 12월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에 반대하면서 즉각 파업에 돌입했다. 아시아자동차는 1997년 2월까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 반대운동 국면에서 한라중공업, 금호타이어, 대우캐리어 등과 더불어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면 혹은 부분 파업과 집회 및 시위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항거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참여했던 사업장이었다. 노동조합이 1996년의 임단협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조합원들의 튼튼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김영삼 정부에서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의 마지막 노동쟁의였다. 1997년 6월에 노동조합은 81,400여 원의 임금인상안을 제시하여 임단협을 시작했는데, 한국 전반에서 형성되었던 극심한 경기불황과 대기업 연쇄부도 등이 위협하고 있었다. 아시아자동차의 경영 상태도 심각한 위기로 나아갔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1996년과 같이 격렬한 임단협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은 7월 2일에 회사측이 제시한 경영합리화를 위해 전체 임직원의 18.6%에 해당하는 1,447명의 감축하는 안에 동의했다. 또한 임금인상 여부도 회사측에 완전 위임하여 사실상 동결하고, 7월 8~9일에 노동조합 간부 40여 명이 광주시 도심에서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노동조합 위원장은 행정 및 언론 기관을 방문하여 협조를 구했다. 그럼에도 아시아자동차의 부도 위기는 점점 현실화되었고, 3자 매각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노동조합은 9월말부터 10월까지 파업과 집회 등을 통해 경영정상화를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11월 노동조합 집행부 파업 결정에 반대하고, 법정관리 수용과 조업재개 등을 주장하는 [아시아자동차현장조직건설추진위원회]라는 새로운 노동조직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은 이 단체 소속 대의원들에 대해 제명 조치를 취했는데, 이들은 광주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하여서 노노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IMF시대의 도래는 그동안 일관성을 띠었던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의 활동에 큰 위기와 충격을 주었고, 노동조합의 분화 또는 분리 현상을 가져왔다. 3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해지고, 노동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실력행사를 하게 되면서 노사갈등은 한층 격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운동과 임단협 협상에 따른 노동쟁의로 인해 다수의 해고노동자들이 발생했다. 또한 사용자측은 노동조합의 무력화, 노동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회복 등 다목적으로 사법부를 활용하는 사례들이 증가했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 노동쟁의 가처분 소송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용자측의 행위들은 노동조합을 위축시키고, 노동자의 결속과 단결을 저해하는데 효과가 컸다. 김영삼 정부시기에는 사용자측의 노동운동사 197

200 이러한 행위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대우캐리어와 금호타이어의 사례들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대우캐리어의 사례는 유사한 사례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1994년 3월 27일에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59) 비슷한 시기에 소송과 재판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인해 파업의 합법과 불법에 대한 판정이 노동쟁의에서 매우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대우캐리어가 사용자측과 정부의 집중적인 주시 대상이 되고, 공략의 대상이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소속의 핵심 사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대우캐리어 노동조합 위원장이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대우캐리어는 남성 중심의 사업장이어서 노동쟁의의 양상이 보다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특성을 보였다는 점도 중요했다. 1993년 3월 31일 대우캐리어는 전 노조위원장 등 10여 명의 해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1억 8천여 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회사는 1992년도 단체협약에서 노조위원장 등이 불법 파업을 하여 16일 동안 공장이 가동되지 않아 손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고노동자들은 사용자측이 노동부의 해고자 복직 방침을 회피할 목적으로 소송을 냈다고 비판하면서 전원 복직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밝혔다. 그래서 1993년 대우캐리어 임단협에서 해고자 복직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사용자측은 임단협 협상안에서 해고자 복직은 제외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노동조합은 이를 포함할 것을 주장한다. 이로 인해 7월까지 노사교섭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후에도 김영삼 정부시기에 대우캐리어에서는 거의 매년 임단협 협상과 관련하여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사회적 관심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즉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노동쟁의의 한 사례로만 파악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1994년의 경우, 전노대 소속 노동조합 111개 가운데 19개의 사업장이 7월경에 파업 중이었다. 대우캐리어도 임금인상과 관련하여 파업을 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금호타이어의 노동쟁의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대우캐리어의 사례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원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기도 어려웠다. 1996년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은 대우캐리어는 기본급 15% 인상과 일방 중재 신청 조항 삭제 등을 요구하며 7월 22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얼마 후 노동조합은 파업을 철회하고 임단협 협상을 계속했으나, 8월 7일에 다시 결렬되었다. 노동쟁의가 지속되자 전남지방노동위원회가 중재결정을 내렸다. 노동조합은 이를 거부하고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1996년 12월말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폭발하는 국면에서 대우캐리어의 노동자들은 아시아자동차와 한라중공업 등의 노동자들과 더불어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은 회사에서 출정식을 갖고, 광주역 광장에서 개최되는 규탄집회에 참석했다.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이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에 즉각 대처했던 것은 위원장이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부장을 겸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우캐리어는 1997년 1월 3일 신년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민주노총의 59) 대법원 민사3부는 학교법인 계명기독대학이 대학부설 동산의료원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간부 7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불법파업은 노동쟁의조정법 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 시했다. 19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1 지침에 따라 곧바로 제2단계 파업에 들어갔다. 대우캐리어 노동자들은 광주역 광장에 모여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규탄 및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 를 개최했다. 또한 1월 6일에도 아시아자동차, 한라중공업 등 13개 노동조합과 더불어 파업을 재개했다. 2) 운수업: 대중교통 운수업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시내버스와 택시 업계와 대중교통을 담당하는 사업장들이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 부문의 노동조합은 공히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했는데, 임단협 협상에서 노동쟁의의 대부분이 유발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시내버스업계에서 주요 쟁점은 임금인상과 처우 개선에 관한 것이었고, 택시업계에서 주요 쟁점은 사납금 인상과 임금인상에 관한 것이었다. 운수업의 노동조합운동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의 일부 쟁점들에 참여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또는 단위 사업장을 기반으로 경영 상태와 운영 형태(지입제와 도급제의 문제) 그리고 상급 노동조합의 성격 등의 요인들에 의해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한 경우였는데, 후자가 일반적이었다. 1 버스업계 버스업계의 노동조합운동은 시내버스 회사들에서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1993년 시내버스 회사들에서의 임단협 협상은 6개 도시의 연대로 이루어졌다. 노사 협상의 대상은 광주시내버스공동관리위원회 와 전국 6대도시 시내버스 임투 대책 광주 전남 지부 (이하 임투 대책위)였다. 포괄적 쟁점은 임금인상이었지만, 이를 구성하는 세부 사항들은 기본급 인상, 1일 교통비 인상, 식대 지급 등으로 다양했다. 6대 도시가 연대하여 협상을 진행하기 때문에 임투대책위는 다른 도시들의 협상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광주지역의 버스업계는 1992년 임단협 협상에서 다른 도시의 협상 추이를 고려하지 않고 먼저 협의를 마무리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임투대책위는 임단협 협상이 결렬된다면 3월 3일부터 파업을 강행할 것이라고 정해놓았지만, 파업 강행은 유보되고 협상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4일 오후에 제7차 임금 협상을 통해 기본급과 상여금 근속 수당 등을 8% 인상하고, 무사고 근무 수당을 3만원으로 인상하며, 버스 1대당 3식 식사 제공 등 7개 항에 합의하여 1993년 임단협을 체결했다. 1994년에도 전국 6개 도시 시내버스 노동조합이 연대하여 임단협 협상이 진행되었다. 광주지역 시내버스 노동조합은 임투대책위를 결성하고, 2월 14일부터 임금과 상여금을 포함한 총액 기준 17.0% 인상, 퇴직금 누진제 실시, 한 달 만근을 26일에서 24일로 단축 등을 요구하며 협상을 진행했다. 임투대책위는 3회의 협상에도 진전이 없자 2월 22일 한국노총 광주본부회의실에서 임투 승리 및 선진교통문화 실천결의대회 를 갖고 28일부터 준법 운행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임단협 노동운동사 199

202 협상이 타결되지 않자 전국자동차 노연 광주버스지부는 3월 8일부터 준법 운행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3월 29일 13회 협상에서 임금 7.5% 인상, 근속 수당과 무사고 수당 인상, 김장비 신설, 만근시 월차 수당 지급에 합의하여 총액 기준 9.5% 인상으로 임단협을 타결했다. 1995년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임단협 협상이 이루어졌다.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자노연) 광주지부는 3월 10일부터 지부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가면서 13일부터 파업을 시작할 것임을 발표했다. 이에 광주지검은 노동부, 광주시, 전남경찰청 관계자들이 참석한 회의를 개최하고, 강력 대처할 방침을 논의했다. 이러한 대응은 정부가 세계화 추진에 따른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관계 정립을 추구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노연 광주지부는 공권력이 즉각 개입할 수 있다는 부담을 안고 임단협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임단협 협상은 11일에 광주시의 시내버스 요금 인상 발표, 12일의 타 도시에서의 협상 소식 등과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2일에 노사는 각종 수당을 포함한 임금 7%와 상여금 19.7% 인상에 합의했다. 이와 같이 시내버스업계의 임단협 협상은 노사 내부의 협상력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외부 요인들이 더 크게 영향력을 미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96년 시내버스업계의 임단협 협상은 노동조합이 1월부터 14.8%의 임금 인상안을 쟁점으로 한 임단협 협상을 요구했지만, 회사측은 광주시가 타 시도의 요금 인상률을 비교한 후 광주시 요금 인상이 결정된 이후 협상에 임하겠다는 자세를 견지하여 지체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3월 15일 조합원 파업 찬반투표를 통해 20일부터 파업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18일부터 집행부는 한국노총 자노련 광주 전남지부 사무실에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 결국 20일 새벽 6시부터 파업이 시작되었으나, 집행부는 파업 1시간 만에 운행-협상 병행 으로 지침을 바꾸면서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반발로 파업의 효과가 일시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노사는 20일 총액 기준 9% 임금인상을 골자로 한 임단협안에 합의했다. 1997년에도 광주지역 시내버스업계의 임단협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노동조합은 6개 도시 시내버스 노동조합들과 연계하여 임금 15.7% 인상, 상여금 50% 추가 인상, 격주 2일 휴무제 등을 요구했다. 사용주측은 요금 인상 전에는 임금 인상 불가를 주장했다. 6회에 걸친 협상이 결렬되자, 노동조합은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86.4%의 조합원이 파업에 찬성함으로서 3월 26일부터 파업이 예고되었다. 그러자 3월 25일에 대검찰청 공안부가 시내버스업계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사법처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예정했던 파업 돌입 시점이 다가오자 노동조합은 파업을 일단 유보하고 협상을 계속한다는 방침으로 변경했다. 그렇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양상, 즉 노사의 협상 결렬, 노동조합의 파업 선언, 공안당국의 개입 발표, 노동조합의 파업 번복과 임단협 합의에 불만을 가진 일부 노조원들은 파업을 강행했다. 이 파업은 비록 제한적이고 일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국면에서 시내버스 노동자 파업이 이루어진 이후에 처음으로 버스 운행이 중지된 것이었다. 임단협 협상은 27일 계속되어 임금 5% 인상, 상여금 50% 인상에는 2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3 합의되었지만, 근속수당 인상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타결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던 임단협 협상은 4월 3일에도 타결이 되지 않았으나, 파업하지 않는 상황에서 곧 마무리되었다. 임단협 협상이 해마다 유사한 쟁점과 방식으로 되풀이되자, 시민사회 단체들은 버스회사의 경영 적자를 노사분규를 계기로 삼아 요금 인상으로 타개하려 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시내버스 회사들이 진정 경영 적자를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객관적인 실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시민단체의 주장은 노동쟁의에 대한 시민사회가 갖고 있던 긍정적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사회는 시내버스업계의 파업이 시민 생활의 불편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정부와 보수 언론의 담론을 넘어 노사가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이해가 합치되는 부분이 많으며, 시내버스업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긴급하게 요구된다는 인식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택시업계 택시업계의 노동조합운동은 1991년에 전개되었던 택시파업과 관련하여 유죄판결을 받아 해고되었던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부 전 부지부장이 자신이 근무했던 전남교통을 상대로 낸 해고 무효 확인 청구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판결의 요지는 노사 간 협약서에 처벌 후 복직시키기로 약정했다면 유죄판결을 이유로 해고시키는 것은 무효 라는 것이었다. 이 판결은 사법부의 하급심이 노사 간 협약서가 갖는 법적 효력에 관해 판시한 것이었지만, 노사 간 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사용자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택시업계의 노동조합운동은 1993년 2월에 상당수의 택시회사들이 지입제 와 도급제 라는 불법적이고 변칙적인 운영을 하고 있으므로, 이를 시정해주고 관련자를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광주시청과 광주지검에 제출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 문제를 선도적으로 실행한 것은 광산구 송정동에 소재한 동방교통 노동조합이었다. 지입제와 도급제는 택시업계의 고질적인 불법 관행으로 널리 알려진 음성화된 사실이었으나, 택시회사들은 서류 작성과 논리를 앞세워 회피하고 있어서 단속과 처벌이 쉽지 않은 문제였다. 노동조합이 이 쟁점에 대해 예각을 세우는 것은 운송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물론 노동조합 조합원의 조직화와 단결을 위해하는 주요 요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광 주 지 역 택 시 업 계 노 사 는 1992년 임 단 협 협 상 을 체 결 하 지 못 한 상 태 에 서 1993년 8월 2일까지 총 37회에 걸쳐 1993년 임단협 협상을 했다. 오랜 협상에도 불구하고 협의를 도출하지 못했던 것은 임단협 협상 방법에 관해 노사의 견해가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은 임금과 단체협약을 분리해서 교섭할 것을 주장한 반면, 사용주측은 일괄 타결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단체협약은 8월 4일에 타결되었지만, 임금 협상은 합의가 지연되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1992년 12월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했던 쟁의 발생신고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를 노동운동사 201

204 바탕으로 8월 9일 광주역 광장에서 1,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총파업 결의대회 를 개최했다. 노동조합은 20.6% 임금인상을 주장한 반면, 사용주측은 경영난을 이유로 3.9% 인상을 주장하여 노사의 견해 차이가 너무 컸다. 사용주측은 8월 7일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 신고를 했다. 결국 10일 개최되는 노사정 간담회에서 타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관의 직권 중재가 불가피하게 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노사는 임금과 사납금 인상률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노동조합은 8월 11일 파업에 돌입했다. 광주지역 77개 회사택시 가운데 69개사 4,230여 명의 노조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광주지방노동청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사법부에 처리를 의뢰할 것이라며 압박했다. 택시 파업으로 교통 불편이 야기되자 여론이 부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대외적인 비판과 압력이 가중되자 노사는 12일 밤에 임금은 13.58%를 인상하며, 사납금은 중형택시는 4,400원, 소형택시는 2,340원 인상하는 것에 합의했고, 13일부터 정상운행에 들어갔다. 1994년 1월 16일부터 시작된 택시업계의 임단협 협상은 노동조합의 공동 교섭과 사용주 측의 기업 내 개별 교섭이 대립하면서 처음부터 충돌했다. 지입제와 도급제 그리고 정액제 등 다양한 택시회사 운영을 둘러싼 갈등의 쟁점들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 상존하는 문제로 남아 있었다. 각 택시회사 노동조합들은 전택노련에 임단협을 위임하고, 전택노련은 광주지부에 교섭권을 위임했으나, 사용주측은 회사별로 교섭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3월 7일에 광주지부는 한국노총 회의실에서 18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임단협 대책을 강구했다. 광주지부는 이 여세를 몰아 3월 9일 광주역 광장에서 전체 조합원이 참여하는 결의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급한 일정상 성사되지 않았다. 결의대회는 16일 오후에 조합원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임단협 교섭 주체와 방법을 두고 노사가 팽팽하게 대립했던 1994년 택시업계의 임단협은 4월 20일부터 공동교섭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사납금과 임금 인상 수준의 차이가 너무 커서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노동조합은 5월 16일 광주역 광장에서 성실 교섭 촉구 및 임단투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 를 갖고, 20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집회 직후부터 노사협상이 시작되어 자정을 넘겨 임금 19.5% 인상과 사납금 19.0% 인상안이 합의되었다. 그런데 이 협상안에 동의하지 못한 조합원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5월 20일 개최된 5 18민주기사의 날 행사에 참여하여 임금협상 무효화를 요구하며 도심 차량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차량의 이동을 저지하자 조합원들은 200여 대의 택시를 7시간 동안 주차시켜 놓고 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은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관련자 20여 명을 교통방해 등 혐의로 구속 또는 수배를 내리면서 종결되었다. 1995년 1월부터 택시업계는 노사갈등이 조짐이 나타났다. 5개의 택시회사들이 차량 운행에 관한 모든 정보를 기록하는 첨단미터기를 도입했던 것이 갈등의 발원이었다. 사용주측은 경영관리의 20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5 정상화 합리화라고 주장했지만, 노동자들은 완전 월급제가 실현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할 때 노동통제일 수밖에 없다고 반박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다양한 행동을 전개했다. 첨단미터기 도입은 광주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노사갈등의 첨예한 쟁점이었다. 광주지역의 회사택시들은 5월 1일까지 대부분 미터기를 교체했다. 임단협 협상은 5월 4일부터 시작되었으나, 사용자측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사용자측은 7월 26일로 예정된 택시임금 인상을 볼모로 삼아 임단협 협상을 기피했다. 광주지부는 시민 서비스 개선이 없는 요금 인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자 회사는 요금 인상 반대를 철회한다면, 협상에 임하겠다고 했다. 광주지부는 사납금 동결 및 임금 13.9% 인상, 서비스 개선이 없는 요금 인상 반대, 불법 경영 근절 등을 임단협의 협상안으로 제시했다. 장기간의 협상에도 진척이 없자, 광주지부는 8월 24일에 쟁의행위 찬반 투표를 했고, 9월 5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다. 광주지부는 당일 오후 광주역 광장에서 택시제도 개선 및 임투 승리를 위한 조합원 결의대회 를 개최하여 결집력을 과시했고, 9월 2일에는 광주시에 택시운전자격증 2,100여 매를 반납하고 농성을 벌였다. 광주지검 공안부는 파업 예고 시점이 임박하자 9월 4일에 광주시, 노동청, 경찰 관계자 등이 참석한 실무대책회의를 주재하고,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후 강경 대처할 것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일 아침부터 파업이 시작되었고, 광주지부는 전남대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었다. 광주지검은 광주지부 파업 지도부에 대한 사전구속 영장을 발부받아 전원 검거할 것이며,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택시 운행을 저지하는 사람은 전원 구속하라는 지침을 경찰에 하달했다. 이와 더불어 추석 귀성과 광주비엔날레 행사 등이 파업 지속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6일에 광주시의 직권중재로 임단협이 타결되었고, 파업이 종료되었다. 합의 내용은 임금 인상 시 45일 내 별도 교섭 체결, 장려수당 월 2만원 지급, 이번 쟁의행위와 관련된 민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 등 7개항이었다. 광주시 택시업계의 1995년 임단협은 일단락되었지만, 수년 동안 임단협의 방법과 절차가 극적인 갈등 양상으로 치닫는 것을 비판하는 여론도 형성되었다. 언론은 택시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 없이는 이와 같은 양상이 반복될 것임을 지적했다. 게다가 임금 인상과 이후 재협상이라는 과제는 광주시가 해결할 숙제로 남으면서 향후 광주시 택시업계의 노사관계와 임단협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택시업계의 지입제와 도급제 문제는 1996년에도 또 다시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1995년 9월에 광주지부가 지입차와 도급차 215대를 조사하여 광주시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1996년 2월 초반까지도 어떤 해결도 도출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법인택시 증차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였다. 따라서 택시회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반응했으며, 언론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보도하자 기자를 감금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원들 내부에서도 조합 운영과 지향 그리고 임단협 협상 태도 등에서 이견을 달리하는 집단이 생겨나면서 노동운동사 203

206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부와 광주지역 택시노동조합으로 양분되었다. 9월 3일에 광주지역 택시노동조합 이 67개 노동조합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YWCA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발족했다. 한편 60여 개의 단위 사업장으로 구성된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부는 1997년 4월 4일에 한국노총에서 탈퇴하고,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을 포함하여 전국 300여 개의 택시 노동조합은 5월 20일에 광주에서 전국민주택시노동자연맹 창립대회를 갖고, 민주노총에 정식 가입했으며, 광주시의 경우는 광주지역본부로 개칭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1996년 택시업계에서는 별다른 노사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2월 26일 노동법과 안기부법이 개악되자 다른 노동조합들과 마찬가지로 즉각 정치파업에 동참한다. 1997년 1월 4일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부 산하 70여개 노동조합들은 사업장별로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오후 2시 광주역 앞 광장에서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가 주최한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규탄 및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 에 참여했으며, 50여 명의 노조위원장들은 삭발항거를 했다. 택시 노동자들의 파업은 민주노총 광주 전남본부와 한국노총 광주시지부의 2단계 파업에 지침을 따라 1월 14일에도 재개되었다. 택시업계의 노동조합들은 임단협 관련 협상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법적 그리고 합당한 근거를 축적한 후 어렵사리 단기간 파업을 했지만, 노동법 개정 관련 정치파업에서는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파업에 동참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에 대한 규탄과 파업이 전국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이 총력을 기울여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에 고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주지역 택시 노동조합은 이러한 단결력을 바탕으로 1997년의 임단협 협상에서는 완전월급제 획득하는 것에 목표를 설정했다. 완전월급제는 1994년에 개정된 자동차운수법에 따라 3년간 유예기간을 두어서 1997년 9월 1일부터는 시행될 예정이었다. 건설교통부는 7월 말까지 관련 작업을 완료하고, 9월 1일에 실시토록 구체적인 시행 지침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택시회사들은 신형 미터기 교체로 인한 비용 부담과 업무 특성상 감독이 어려우며 각종 세금과 부담금이 증가돼 경영난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5년간 유예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법률상 완전월급제 실시 시점은 임박했으나, 실행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은 완전월급제 실시를 쟁점화하기 위해 민주기사의 날을 맞은 5월 20일 광주시 소재 무등경기장에서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출범식을 개최했다. 완전월급제 실시를 요구하는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역본부의 결의대회는 8월 12일에도 개최되었다. 결의대회는 9월 1일이 도래한 시점에서 완전월급제가 실행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용자측은 완전월급제 실행을 늦추려 하고 있었고, 정부는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광주지역본부는 9월 20일까지 완전월급제가 실시되지 않으면 파업을 단행할 것임을 선언했다. 58개의 노조 조합원들의 89%가 파업에 찬성함으로서 이 문제가 택시업계의 뜨거운 현안임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9월 20일이 되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광주지역본부는 22일에 20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7 단위 노동조합 위원장들 회의를 개최하고, 전액월급제 미실시 업체 고발, 택시운전자격증 반납, 대규모 항의 집회 등을 통해 택시제도 개선과 완전월급제 도입을 위한 대정부 투쟁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완전월급제 실시는 택시 노동자들의 임단협 협상에서 해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정부는 1997년 12월 31일에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하여 전액관리제 를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신설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전액관리제 규정은 현실적으로 강행성이 없는 임의규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판정을 하면서 오늘날에도 택시 노동자들의 숙원으로 남아 있다. 3 기타 1993년 7월 12일 광주시 동구가스 판매회사 운전사들이 배달제에서 월급제로 환원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었다. 1993년 7월 시외버스 회사들의 노동조합이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2~3개 사업장에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노동쟁의가 발생할 소지를 보여주었다. (3) 보건의료 공공 사무 금융업 1 보건의료 1993년 광주지역 보건의료부문의 노동조합운동은 광주기독병원과 조선대병원에서 주도했다. 광주기독병원 노동조합운동은 그해에 광주지역에서 처음 발생했던 파업이었고, 병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지역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광주기독병원 노사는 3월부터 인사위원회와 징계위원회 노사 동수 참여, 임금 10% 인상 등을 의제로 20여 차례의 임단협 협상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노사는 5월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노동조합은 5월 29일 전남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신고를 제출하면서 준법투쟁에 돌입했다. 100여 명의 조합원은 성실한 협상을 요구하면서 병원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노동조합에는 전체 직원 750명 가운데 391명이 가입해 있었는데, 노조원의 84.9%가 파업 찬반투표에서 찬성 의사를 밝혔다. 6월 16일 오후 1시부터 노동조합은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 원무과 등 필수 인력은 제외하고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광주기독병원 교섭위원들은 협상을 계속하여 18일에 기본급 35,000원과 체력단련비 100% 인상 그리고 인사위원회 노사 동수 참여 등에 잠정 합의를 이루었으나, 사용자측 대표가 21일까지 최종 협상에 응하지 않음에 따라 파업이 계속되었다. 노동조합이 사용자측에 파업과 관련한 민형사상 책임 면제, 징계 철회, 파업 기간을 근무로 인정할 것 등을 제안한 것이 최종 협상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당시 노동부의 방침이 무노동 무임금 이었으므로, 노동조합의 주장은 정부 방침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파업 장기화에 따른 입원 환자 고통 가중과 150여 명의 환자가 퇴원하는 등 불편이 가중되자, 노동조합은 22일 정상근무에 들어갔고, 병원 운영진에게 최종 합의를 요구했다. 노동운동사 205

208 1996년 광주지역 보건의료업의 임단협 협상은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노련) 60) 의 주도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6월 19일경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순천중앙병원 등에서 쟁의발생 신고를 한 상태였다. 병노련 광주 전남 지부는 19일 전남대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각 병원 사용자측의 불성실한 교섭 태도를 비판했다. 광주 전남지부는 조선대병원은 19~20일에, 전남대병원은 22~24일에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갖고 파업 돌입 여부를 결정할 것임을 밝혔다. 이러한 계획 하에 전남대병원에서는 20일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의료개혁 및 임 단협 투쟁 승리를 다짐하는 집회를 열었다. 전남대병원은 20일 오후에, 조선대병원은 25일에 쟁의돌입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했다. 전남대병원 노동조합은 기본급 7.5% 인상 등을 요구하는 임단협 협상이 결렬되자 22~24일 조합원 600여 명을 대상으로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조선대병원은 19~20일 실시한 파업 찬반 투표를 25일 개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순천중앙병원은 25일 파업찬반투표를 벌일 예정임을 밝혔고, 광주기독병원과 목포 성골롬반병원도 쟁의발생 신고를 준비했다. 전남대병원은 27일에, 조선대병원은 7월 2일부터 쟁의행위를 예고했다. 전남대병원은 27일 새벽에 임단협 협상에 잠정 합의하여 파업 위기를 넘겼다. 노동조합은 사용자측이 제시한 임금 총액 대비 13.02% 인상과 인원 25명 충원안을 수용했다. 조선대병원도 노동조합이 주장하는 대학 직원과 동일한 인금 인상안(9.2%)을 사용자측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남대병원은 3일 조합원 찬반투표로, 조선대병원은 2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각각 임단협 협상을 타결했다. 목포 성골롬반병원은 임금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7월 25일부터 부분파업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노동조합은 18.41%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병원 측은 8.81%를 제시하여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996년 광주지역 병노련의 임단협 협상 투쟁은 활발했지만, 12월 발생한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에서의 병노련 광주 전남지부의 역할은 미비했다. 전남대병원과 광주기독병원 등은 12월 30일에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병노련 산하 12개 병원들이 정상업무에 복귀하자 파업을 유보했다.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은 1997년 3월까지 계속되었지만, 자료에서는 별다른 역할이 확인되지 않는다. 1997년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이 종결되자, 병노련은 4월부터 3개월 동안 임금 12.8% 인상, 고용안정 확보, 공정한 인사제도 확립, 의료민주화 등을 담은 공동 요구안을 바탕으로 임단협 협상을 벌였다. 사용자측은 병노련의 요구에 성실하게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다른 병원들의 협상 진전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지연했다. 외형적으로 병노련을 중심으로 공동교섭을 벌인 것으로 보이지만, 병원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협상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다. 전남대병원 노동조합은 총액 대비 12.3% 인상과 임시직 근로자의 처우 개선 등을 요구했다. 사용자측은 공무원 수준의 임금 인상 60) 병노련은 1987년 12월 12일 결성되었던 전국병원노동조합협의회 를 기반으로 1988년 12월 17일에 결성되었다(민주화 운동직장청년회 준비위, 1989: 183). 병노련은 1998년 2월에 산업별 노동조합의 형태인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으 로 전환되었다. 2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9 및 노조원의 경영 참여 불가 등을 주장했다. 조선대병원 노동조합은 총액 대비 8.9% 임금 인상과 유니온삽 도입, 시급 산정 기간 단축 등을 요구했으나, 사용자측은 임금 동결을 제시했다. 한편 광주기독병원 노동조합은 총액 대비 8.7% 임금 인상과 적정 인력 확보 등을 주장했다. 세 병원 노동조합들은 파업 찬반투표를 거쳐 조정신청기간이 끝나는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7월 16일부터 병노련 산하 10여개 노동조합이 단계적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중앙병원과 한양대병원은 임단협 협상이 타결되었으나,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광주기독병원 등은 결렬되었다. 병노련 광주 전남지부는 19일에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으나, 7월 18일 전남대병원과 광주기독병원은 입단협 협상안에 잠정 합의했다. 한편 임단협 협상이 결렬된 조선대병원의 노동조합은 19일 오전 15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병원 1층 현관 로비에서 시상총회와 파업 출정식을 가졌으나, 21일 밤 노사는 기본급 5% 인상과 업무보조비 5만원 지급 등에 잠정합의하고 파업을 철회했다. 2 공공운수 사무 금융 공공운수 사무 금융은 철도, 통신, 철도, 사무, 은행, 보험 등의 사업장을 주로 포괄한다. 김영삼 정부시기에 이 부문의 노동조합운동은 특정한 사업장에서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어 임단협 협상을 쟁점으로 하는 노동쟁의가 주로 발생했다. 노동조합운동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업종은 철도였다. 1994년 철도부문의 노사관계는 1996년에 철도청이 공사로 개편되면서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대량 감원 등이 예고되었다는 점이 중요 쟁점이었다. 전국기관차협회(전기협)은 변형근로제 철폐,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했으며, 전기협 존립이 위태롭다고 판단했다. 그로 인해 전국에서 공동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전국기관차협회(전기협) 순천 광주 목포지부는 각 지부별로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6월 15일 조합원 92%의 찬성으로 파업이 결정되었다. 6월 14일부터 광주역 광장에서는 광주지부 간부들이 농성에 들어갔다. 파업이 결정됨에 따라 순천 광주 목포지부는 6월 16일부터 전기협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다. 정부는 18일에 초과근무시간 인정 방법 개선 등을 골자로 하는 철도 현업 직원 처우 개선 대책 을 발표했으나, 전기협은 개악된 변형근로시간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상항이 악화되자 노동부는 6월 22일에 철도 및 지하철 근로자에 대한 호소 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파업을 철회하면 전기협 간부가 철도노동조합 지부장 자격으로 노사교섭에 참여하여 전기협이 요구한 변형근로제 등을 협상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담화문이 발표되던 당일에 순천지방철도청은 관할 경찰서장 앞으로 공권력 투입 요청서 를 제출했다. 전기협은 23일부터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그러자 즉시 정부는 서울, 광주 등 전국 14개 지역 전국기관차협의회 사무실에 53개 중대 6,000여 명의 경찰력을 투입했다. 경찰은 전국에서 농성 노동운동사 207

210 중인 노동자 613명을 연행했는데, 광주가 18명, 순천이 21명, 목포는 28명으로 총 67명이었다. 경찰은 전기협을 한국철도노동조합과 별개의 임의 단체로 규정하고, 이는 복수노조가 인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조합법을 위반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들이 노조비를 모금한 것은 기부금품모집법 위반이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임을 밝혔다. 당시 정부 주도로 노동관계법 개정이 진행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전기협의 노동쟁의에 이러한 법률 위반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었다. 철도청은 조합원들에게 25일까지 근무지 복귀를 명령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중징계 조치할 것임을 밝혔다. 순천 광주 목포에서 연행되었던 67명의 노동자들은 철도정상화에 참여하겠다는 각서와 전기협 가입을 반성하는 시인서를 쓰고 훈방되었다. 한편 경찰은 26일에는 농성장인 경희대학교와 기독교회관에 경찰력을 투입하여 전기협 및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노조원 그리고 대학생 등 369명을 연행했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현장에 복귀하는 노조원들은 늘어났다. 전기협의 파업은 27일로 강제 종료되었지만, 노사 간의 임단협 협상 쟁점은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통신노동조합의 노동쟁의는 두 차례 발생했다. 1995년 5월 26일 한국통신노동조합 전남지방본부는 임단협 협상이 결렬되자 전국의 전화국과 동시에 준법투쟁에 돌입했다. 준법투쟁에는 전남사업본부와 광주전화국 등 35개 사업장에서 4,600여 명의 전체 조합원 가운데 90%가 참여했다. 준법투쟁이 장기화되자, 정부는 직권 중재를 제안했다. 노동조합은 직권 중재를 거부하고 파업 돌입 계획을 세웠지만, 너무 큰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노동쟁의 전략을 수정했다. 노동조합은 7월 29일로 단체행동을 중단하고, 행정소송 등의 직권 중재 무효와 투쟁을 벌였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던 것에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건과 김대중의 신당 창당 등에 따른 국민 여론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61) 1996년 한국통신노동조합의 임단협 협상은 민주노총 산하의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노대)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공노대는 6월 19일 자정에 냉각기간이 종료되므로 20일부터 한국통신, 서울지하철공사, 전국지역의료보험조합 등 5개 노조가 파업에 들어갈 것임을 선언했다. 19일에 노동부는 중앙노동위원회에 직권 중재를 신청했고, 대검찰청은 파업에 들어가면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력 대처할 것임을 밝혔다. 공노대의 결정에 따라 한국통신 전남사업본부는 20일부터 농성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파업은 중지되었다. 당시 지역의료보험노조 광주 전남지역본부 산하 지부들도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병노련 등의 파업도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었다. 의료보험 부문에서도 두 차례의 노동쟁의가 발생했으나, 협상으로 타결되었다. 1994년 6월 10일 전국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총연맹 산하 9개 단위노조가 오전 일제히 해당지방노동사무소에 쟁의발생신고를 냈다. 그리고 1996년 6월 20일 전국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총연맹이 파업이 들어가기로 했으나, 이전에 임단협 협상이 합의되었다. 61) 정부 중재안 무효화 법적 투쟁, 광주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1 은행업 부문에서도 두 차례 노동쟁의가 있었으나, 파업에 이르지는 않았다. 1993년 4월 광주은행 노사는 임금협상을 시작되었다. 광주은행은 지방은행노사협의회가 공동교섭을 진행했으나 무산됨에 따라 7월 7일부터 개별 교섭이 시작되었다. 노동조합은 통상임금 기준 8.9% 인상을 회사에 요구했으나,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아 갈등이 커졌다. 1996년 12월에는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과 연계되어 금융업에서의 파업이 예고되었다. 그 일환으로 광주은행 등 전국금융노동조합 광주시지부 소속 노동조합원들은 28일 사복 근무를 했지만, 파업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처럼 은행업의 노동조합운동은 다른 산업 업종의 노동조합운동에 비해 소극적이었던 바, 조합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4) 기타: 언론 등 1993년 3월부터 7월까지 무등일보 노사는 10차례의 임단협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되었다.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은 편집국장의 임기제, 임원 및 조합원의 임명과 이동시 조합과 사전협의, 시간외 수당지급 등이었다. 노동조합은 9일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14일에 전면파업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94년 10월 10일 조선대학교 노동조합 미화원 정식직원화 등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2)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이 안정화되고, 전국적인 연대 기구 또는 단체의 특성을 갖는 노동조합들이 결성되면서 대도시와 대공장 그리고 공단 등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업장을 넘어 서지 않은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적으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조합운동의 존재감은 전반적으로 감소했으며,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사례들도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특성을 감안하여 노동조합운동이 상대적으로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사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조업 전남지역의 제조업 분야에서 발생했던 노동조합운동은 몇 가지 사례들에서 확인된다. 1993년 여천시 여천공단에 소재한 한국화인케미컬(이하 화인케미컬)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화인케미컬의 노사는 3월 12일부터 임단협 협상을 개시했지만 6월 중순까지 타결이 되지 않았다. 화이케미컬은 자동차 내장재 신발밑창 등에 사용되는 우레탄 원료인 톨루엔 디 이소시아네이트(TDI)를 생산하는 업체로,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110여 명이었고 전국화학노조연맹을 상급단체로 두고 있었다. 임단협 협상의 주요 쟁점은 무주택 사원 주택 자금, 호봉 및 상여금 조정, 노동조합의 인사권 참여 보장 등 19개 항이었다. 노동조합은 6월 23일에 쟁의행위 찬반 투표를 노동운동사 209

212 실시했는데, 투표 조합원의 95.6%가 파업에 찬성함에 따라 28일 밤부터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화인케미컬에서의 노동쟁의가 단발적인 노동조합운동이라면, 한라중공업에서의 노동쟁의 반복된 양상을 띠었다. 한라중공업은 전국 여러 곳에 사업장을 두고 있었는데, 전남지역에서는 영암군 삼호지방공단 내에서 삼호조선소가 있었다. 김영삼 정부시기에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전남지역에서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사업장으로 조합원은 약 700명이었다. 1995년 10월 23일 노동조합 총무부장이 구내식당 앞 게시판에 민주노총 창립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를 부착하던 중 회사 노무팀 직원과 시비가 발생했다. 노무팀 직원은 총무부장을 구타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회사의 공식 사과와 책임자 징계 등을 주장하면서 26일까지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공단 내 삼호조선소와 인천조선소 그리고 충북 음성 조선소 등이 27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것임을 경고했다. 이 갈등은 곧 무마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대규모 사업장에서도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하여 노사 간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96년 한라중공업에서는 파업이 실제로 단행되었다.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임금인상과 월급제 실시 등을 쟁점으로 하는 임단협 협상이 결렬되자, 쟁의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22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한라중공업은 영암군 삼호면 삼호조선소와 인천, 충북 음성 3곳에서 7월 15일 노조원 찬반투표를 통해 72.1%의 찬성으로 쟁의행위 돌입을 결정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노동조합이 쟁의발생 신고를 제출하자 대상이 아니라는 행정지도명령을 내렸다. 이에 회사는 쟁의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노사 교섭위원들은 26일에 기본급 55,000원 인상하고, 월급제 실시는 제도개선위원회에서 협의 등을 골자로 한 잠정합의안을 도출하고, 27일에 조합원 찬반투표를 벌었으나 부결되었다. 이에 조합원들은 휴가와 출근거부 투쟁으로 파업을 이어갔다. 8월 5일에 조합원들은 정상 출근했으나, 파업은 계속되었다. 회사는 잠정합의안이 부결된 이유를 노동조합 내의 강경 조합원들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라중공업의 파업은 장기화되었다. 한 라 중 공 업 노 동 조 합 은 1996년 12월 말 부 터 1997년 2월 까 지 전 개 되 었 던 노 동 법 개 정 반대운동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와 관련하여 전남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던 사업장이 한라중공업이었다. 1996년의 임단협 협상이 조합원들의 지자를 받아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이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활동으로 인해 1997년 1월에 한라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을 비롯하여 집행부 4명이 구속되자, 노동조합 간부와 대의원 등 70여 명이 구속자 석방, 고소고발 취하 등을 요구하며 회사 로비에서 벌여온 농성을 계속했다.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노동법 개정 반대운동이 일단락되었던 2월 말까지도 집회와 시위에 참가했다.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이 임단협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노동법 재개정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민주노총 산하 금속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금속연맹은 민주노총에서 강성으로 분류되었고, 다른 사업장들의 노동조합들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2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3 노동법 재개정 운동 이후 상황은 반전했다. 이 변화를 유발했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경기 불황과 대기업 연쇄 부도 등에 의한 파고가 밀어닥쳤기 때문이었다. 또한 회사가 노사관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것도 중요했다. 한라중공업에서는 1997년 5월 28일 삼호조선소에서 21세기 초일류 기업을 향한 노사화합선포식 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 노사는 쟁의 없는 사업장을 선언했고, 경쟁력 제고에 노사가 함께 나설 것임을 밝혔다. 이것은 5월 30일부터 시작될 임단협 신속하게 마무리하자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회사는 이 행사를 기해 전 직원에게 30만원의 특별상여금을 지급했다. 당시 한라중공업 삼호조선소의 조합원은 2,609명이었다. 그렇지만 임단협이 신속히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임금은 회사에 위임했으나, 사내 복지 확충, 작업 환경 개선 등은 7월 중순까지도 협상을 타결하지 못했다. (2) 건설 영광원자력발전소에는 원자력발전소 설계 감리를 맡고 있는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주)의 노동자 16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1993년 6월 23일 노사가 합의한 임단협 안에 즉각 서명할 것을 요구하며 작업을 중단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파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6월 3일에 노사는 단체협약안에 잠정합의했지만, 사용자측이 인건비 조정 등은 이사회에서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하면서 협약 체결 내용을 번복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영광원자력발전소에는 직원을 파견하는 방식이어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관할이었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 원자력과 화력발전소 현장 노동자들의 공통된 문제였다. (3) 광업 1995년 12월 13일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광장에서 광부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화순광업소의 노동조합은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도 있었지만, 한동안은 침체되어 있었다. 이를 인지한 회사는 노동조합에 대한 간섭과 탄압을 노골화했다. 이날의 집회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참석했는데, 조합원들은 노조지부장의 면직에 대해 항의했다. 화순광업소 노조탄압 저지투쟁위원회가 주관했던 이 행사는 노조탄압 중단, 노조감사 중지, 부당징계 철회 등을 주장하면서 조합원 50여 명이 삭발을 단행했다. 갈등의 발단은 회사가 노동조합 조합비 집행 내역을 감사를 노동조합의 반대에도 무릎서고 강행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지부장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하자, 회사는 지부장을 폭행 혐의로 고소한 뒤 징계위원회를 열어 면직 처리했다. 정부나 회사가 노동조합의 조합비를 감사하는 것은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활용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었다. 회사가 조합비를 감사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와 감사의 기준이 무엇인가 등을 두고 여러 사업장들에서 논란이 이었다. 화순탄광은 노동운동사 211

214 노동조합 탄압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조합원들은 회사 민영화와 폐광의 수순을 밟기 위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는 일환이라고 파악했다. 한편 1993년 7월 6일 곡성군 오곡면 소재 삼원콘크리트 노동조합 조합원 2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노동조합은 회사가 1992년에 협약 시 체결했던 상여금 600% 가운데 지급하지 않은 1억 1천만 원의 지급을 요구했다. 회사는 회사재정 상황이 호전되면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4) 보건의료 광주 전남지역 종합병원들은 1996년의 임단협 협상을 동시에 진행했다. 각 병원 노동조합들은 임금협상이 결렬되고 협상이 장기화되자, 6월 하순경 각각 파업을 예고했다. 전남지역에서는 순천중앙병원과 목포 성콜롬반병원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순천중앙병원 노동자들은 6월 25일 파업찬반투표를 벌이고, 30일부터 파업 결행 여부를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협상이 타결되어 파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포 성콜롬반병원의 노동조합은 임금 18.41% 인상을, 사용자측은 8.81% 인상을 주장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7월 25일부터 응급실과 수술실 등 필수 근무자를 제외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이 병원에서는 1997년에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조합은 7월 25일부터 협약갱신, 임금인상, 의료민주화 요구 등을 요구하며 부분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27일 새벽까지 노사협상이 계속되었으나, 타결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27일 오후 6시부터 노조탄압 분쇄를 위한 시민선전전 및 의료봉사 활동 에 나섰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청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5) 기타 1993년 목포 신광택시 등의 사업장에서 해고자 복직 요구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는 김영삼 정부가 노동자 권익 보호를 확대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2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5 제8장 종결 한국의 사회운동 연구에서 노동운동은 다른 부문운동들에 비해 보다 우월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고려되어왔다. 무엇보다 이는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일반적 특성을 노동자와 노동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서 기인할 것이다. 또한 한국 근현대사의 특성상 노동운동은 독립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항일운동들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고, 사상운동 등과도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은 특성을 갖는 식민지 시기의 노동운동은 해방 이후에는 대체로 이념적 대립구도에 따라 재편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은 사회운동 내에서도 이념 갈등과 기본권 등의 요구 범위와 방법을 둘러싼 논쟁들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다양한 입장들의 각축을 벌이는 부문운동의 특성을 띠고 있다.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길을 걸었던 한국에서는 안보와 발전을 우선시하는 정부들이 연이어 집권했고, 이것은 노동운동의 기반을 협소화시켰다. 따라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현실적 선택지는 근래까지도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즉 정부 및 사용자와 긴밀한 유대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자를 배제한 노동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과 대척점에서 탄압과 피해를 이겨내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본연의 궤도에 올려놓을 것인가? 물론 두 가지의 길은 민주화의 진전, 정부의 성격 변화, 시민사회의 성장, 노동자의 조직화, 노동운동의 활성화, 세계 지배체제의 변화와 경제적 변동 등 다양한 요인들의 관계 맺음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재구성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관성이 여전히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사회운동의 흐름과 맥락에서 광주 전남지역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 이는 중장기사적 흐름에서 현대사를 고찰해도 확인할 수 있으며, 여러 사건들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효과의 측면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광주 전남지역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던 사회운동들은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사회라는 시각에서 조망해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각 부문운동들로 세분화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을 살펴보면, 그 위상과 의미가 미비하게 평가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이다. 이 책은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을 재조명하는 것에 일차적인 노동운동사 213

216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은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역사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함으로 인해 한국노동운동사에서 누락되거나 부차화 되고 있음을 고려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운동사에서 노동운동이 적절하게 인식되거나 기록되고 있지 못함을 주목했다. 그렇지만 문제제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여러 가지 여건들로 인해 전 시대를 아우르지 못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에서 외환위기 시대 이전에 이르기까지 대략 50년을 포괄했다. 시작과 마무리의 시점은 중장기적 맥락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고찰하는데, 결정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다 장기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면, 이 책에 포함시키지 못한 시기도 일관된 흐름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현존 자료의 미비와 접근의 제약 그리고 자료 생산을 위한 환경의 미비 등으로 인해 보다 풍부하고 상세하게 노동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조망하지 못한 것도 한계이다. 한국전쟁 이후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절대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비단 광주 전남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전역에서 해방부터 전쟁으로 이어지는 8여 년 기간 동안에 진보적 성향을 지녔던 노동운동의 기반과 세력은 궤멸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광주 전남지역은 여순사건과 빨치산 토벌 작전 등이 이루어진 공간이었고, 극심한 좌우의 충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질곡과 영향이 더욱 심각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광주 전남지역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집결되어 있던 사업장들의 물적 인적 피해가 상당해서 노동운동의 물질적 기반도 붕괴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보존된 노동환경도 극히 열악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쟁점들은 임금인상, 임금체불, 해고 반대 등 경제적 요구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임의적인 모임이나 단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인지는 잘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 노동운동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단체가 사실상 대한노총이 유일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부와 긴밀히 결탁되어 있었다. 대한노총은 노동부문을 담당했던 정부의 한 기관이라고 보아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 실정이었다. 물론 대한노총 내부에서는 다양한 분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고도 무질서한 경쟁과 공방 그리고 때로는 사용주와 야합을 벌였다. 여기에는 당시로 보면 민주적 입장을 견지한 세력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광주 전남지역의 대한노총과 노동조합은 주류 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사람들이 다소 우세를 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들도 대한노총의 기본 입장이나 경향의 자장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광주 전남지역의 대한노총 소속 주요 사업장들의 노조위원장들이 사용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고, 노동자에게 지급되어야 할 임금을 임의로 사용했다는 사실들이 이를 말해준다. 도덕성과 지도력에서 취약했던 대한노총은 노동자의 단결과 집합행동을 지속시키거나 납득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당국은 이러한 약점을 포착하여 노동조합의 자치권에 개입하기도 했는데, 노동조합은 수세적으로 방어하거나 회피했다. 심지어 정부도 공감한 사안에 대해 사용자측이 수용하지 않은 행태를 보였던 것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세력화가 크게 2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7 미흡하여 존재감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회사들의 자산과 사업장들의 운영 실태의 열악성 그리고 사용자들의 의식이 취약하거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다소 비판적인 노선을 취했던 것은 이념과 노동조합의 지향에 관한 관점에서 발로한 것이라기보다는, 중앙의 주류에서 배제되었던 주변인이어서 상대적 비판성을 지녔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이들은 해방 이후 오랫동안 노동조합을 독점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4월혁명은 대한노총의 몰락과 더불어 노동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던 중요한 사건이자 국면이었다. 대한노총은 4월혁명 이후의 변화에 포복하면서 존속을 위해 다양한 출구를 찾았다. 4월혁명이 미친 여파는 거세어서 대한노총에서 이탈한 노동조합들은 새롭게 결성되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가입했다. 하지만 새로운 노동조합이 설립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대한노총의 영향력이 일순간에 제거될 수 없었던 것이며, 새로운 노동조합 설립을 주도한 세력들도 기존의 흐름과 완전하게 단절하고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흐름의 형성도 단일한 양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노동조합 재편의 흐름이 광주 전남지역에 끼쳤던 영향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들은 대한노총의 주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세력들이 더 많았음을 중요하게 고려할 수 있으며, 이들 지역 내에서 노동조합의 환골탈퇴를 주도할 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시기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노동운동도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모임 외부에서 이루어진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변화를 통해 4월혁명 국면에서의 노동운동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노동조합의 성격은 지속, 교체, 신설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등은 기존의 노동조합 주도 세력이 지속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노동조합의 주도 세력이 교체되었던 사례는 목포부두노동조합과 철도연맹 순천지부였는데, 전자는 사실상 교체라고 말하기 어렵다. 노동조합이 신설되었던 경우는 약 30%가량이었다. 그러므로 4월혁명 이후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은 의미를 부여할 만큼 큰 변화는 없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노동쟁의는 4월에서 10월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했는데, 5월과 10월에 노동쟁의가 보다 많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에도 광주 전남지역 곳곳에서 노동쟁의들이 확인되지만, 사회적 관심은 차츰 줄어들었다. 노동쟁의의 발생 빈도는 두 지역에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노동쟁의의 주요 쟁점은 초기에는 체불임금 지급이 많았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체결 그리고 근로조건 개선에 관한 것이 우세했다. 한편 전남방직의 경우는 수차례 반복해서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노사협상의 대상이 한국전쟁시기에 발생했던 사안들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차이들은 사용자측 일방의 노사관계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모임이 강화됨으로 인해 일정 수준으로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노동운동의 보다 일반적인 쟁점들이 노동운동사 215

218 부상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쟁의의 강도와 기간은 사업장 규모에 비례하는 경향을 보였고, 개별 사업장 단위가 아닌 산업별 전국노동조합의 주도 하에 노동쟁의가 전개된 경우에는 격렬하고 장기화된 양상을 띠었다. 노사갈등을 조정하는 기관이었던 전라남도 노동위원회는 1961년에 들어서야 의미를 갖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장기화된 노동쟁의의 대부분은 전남지역에서 발생했는데,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사업장들이었다. 또한 노동쟁의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사업장들이 많아서 노사협상의 대상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며, 쟁점들에 대한 협의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제도와 경험이 미진했던 점들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4월혁명을 통해 어렵사리 복원되었던 노동운동의 기반들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다. 1961년에 발발한 5 16군사정변이 약 1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성과들을 붕괴시켰던 것이다. 5 16군사정부는 즉시 노동조합의 해산을 명령했다. 1961년 8월부터 노동조합의 재건이 이루어졌지만, 이때는 군사정부의 지침과 통제에 따른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노동조합이 정치적 활동과 색체를 갖는 것을 금지했고, 전국 단일 산업별 체제의 노동조합 건립을 강제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8월 30~31일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결성하도록 했으며, 다음 해 2월 6일에는 전국노동조합 지역협의회를 결성하게 했다. 군사정부는 한국노총 이외의 전국적 노동조합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산업별 노동조합의 기본체계는 대체로 1863년에 완성되었으나, 1970년에도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총 17개 산별노동조합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노동관계법을 수차례 개정했다. 개정 이유는 국가의 입장과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노총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동관계법이 개정될 때마다 노동운동의 기반은 축소되었던 반면, 국가와 자본의 힘과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계속해서 높은 강도를 추구하여 유신헌법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억압적 통치 수준을 최대화한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노동관계법 개정이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개선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기도 했지만, 이를 추구했던 목적과 효과는 다각적인 의도성을 갖고 있었다. 전태일이 죽음으로 항거했듯이, 박정희 시대의 노동환경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임금체불이었다. 4월혁명 시기에 비하면, 노동쟁의의 발생 건수는 크게 감소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금체불의 문제는 단체협약 체결이나 임금 인상 요구와 다른 차원에서 노동자들의 생존 기반을 나락에 빠뜨리는 것이었고, 명확관화한 불법 행위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노동운동이 이전과 크게 차별성을 갖는 것은 노동조합 외부에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는데, JOC와 도시산업선교회가 그 구체적 대상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광주지역을 2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9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JOC의 활동이 보다 활발했다. 1961년 광주지역에 만들어졌던 JOC는 1962년에 회원이 크게 증가했고, 1970년대에는 광주지역에서 7개의 팀이 전남지역에서 2개의 팀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말에는 12개 사업체에 소그룹이 조직되어 있었다. JOC의 활동 수준과 내용이 일관성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지속성과 연대성을 도모했고, 5 18민중항쟁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한편 도시산업선교회는 1966년부터 광주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던 시점은 1979년이었고, 5 18민중항쟁 이후에는 활동이 중지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종교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살펴볼 점은 노동야학과 소모임의 등장이다. 노동야학은 학생운동과 연계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에 광주지역에서는 여러 개의 노동야학이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학생운동 경험자, 사회운동가 등과 노동자가 결합한 소모임들에서 활발하게 토론과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각자의 경험들이 공유되고 있었다. 노동야학과 소모임의 성과는 노동조합의 설립과 활동 그리고 민주노동조합으로의 개편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이들의 다수는 5 18민중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박정희 시대의 노동운동, 즉 노동쟁의는 대체로 유신체제 이전에 발생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의 쟁점도 4월혁명 시기에 제기되었던 것과 유사했다. 주로 확인되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큰 사업장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전 시기와 다른 점들도 있었다. 노동쟁의가 발생하는 산업분야가 늘어난 것이다. 이를테면 보건의료 분야에서 신분보장과 처우 개선 등을 주장하면서 인턴들이 파업을 벌인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파업은 지역 내로 국한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외국 기업체를 상대로 노동쟁의가 전개되었던 것도 다른 점이었다. 외국 기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사례는 사실 드물었고,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더욱 찾아보기 어려운데, 유신체제가 시작된 국면에서도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언론계에서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호남매일신문의 폐간을 둘러싼 갈등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유신체제 하에서 노동운동이 소멸했다는 것은 아니다. 유신체제 하의 노동운동은 목포에서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남고무(주)와 남해어망 그리고 호남매일신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호남고무(주)의 노동쟁의는 부당노동행위에 관한 것으로 노동조합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회사 간부의 근로기준법에 대한 인식이 저열했음을 잘 보여주며, 남해어망의 경우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아 지부를 설립하려는 것을 회사와 지방 정부가 연대하여 저지하려 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5 18민중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곧바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에 들어갔다. 통제는 노동청을 경유하여 한국노총과 산업별 노동조합 위원장들에게 10회에 걸쳐 지침을 하달하면서 개시되었다. 이어서 이루어진 노동조합 정화지침 은 신군부의 노동정책의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행위였다. 또한 노동관계법들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제정하여 노동조합 활동을 노동운동사 217

220 법률에 의거해 실질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만들었고, 노동운동의 터전을 일소시켰다. 유화국면이 시작되면서 드러났던 블랙리스트는 신군부의 정책이 지향했던 목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블랙리스트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쟁점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던 사례는 찾지 못했다. 1980년대 전반기 광주 전남지역은 5 18민중항쟁의 후유증으로 심각했다. 그럼에도 노동야학들이 재기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목적과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노동현장에 유입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 새로운 변화였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노동기본권 신장을 위해 노동현장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소모임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워할 정도로 현장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여력이 축적되면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민주노조로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편에서는 1970년대 말기와 같이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종교단체들의 활동도 계속되었고, 보다 강화되고 있었다.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기독교계에서의 활동이 보다 활발해졌다. 전남기독노동자연맹의 결성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연합체적 성격을 갖는 조직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1985년 말부터 등장하는데, 공개기구 또는 반합법기구의 성격을 지향했다. 그렇지만 이들 조직은 오랫동안 존속하지는 못했다.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전망을 가졌던 조직들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념일 투쟁도 이전과 다른 노동운동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전에도 기념일 투쟁은 있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시대와 신군부 초기에는 기념일 투쟁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노동운동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하기 이전에 광주지역은 정부가 기준으로 삼았던 월 1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는 사업장이 점차 감소하고 있었으나, 1/4 수준이었다. 이 통계는 광주지역의 10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을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므로, 전남지역이나 10인 미만을 고용한 사업장의 경우에는 이 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은 상대적으로 영세한 사업장들이 많아서 노동환경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노사관계도 대부분의 사업장들이 일방적인 관계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5 18민중항쟁 이후 광주 전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노동쟁의가 발생했던 사업장은 1984년 목포시 소재 태원여객에서 발생한 하루 동안의 파업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이는 예외적인 사례였고, 노동운동이 보다 활발해졌던 시점은 1985년부터였다. 이는 일부 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발생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간에 주로 쟁점화 되었던 노동쟁의의 쟁점들과 더불어 민주노조 건설을 목적으로 제기했던 사례들이 여럿이었다는 점이 눈에 띤다. 그해 광주지역에서는 택시업계에서 사납금 문제를 둘러싸고 장기간 노동쟁의가 발생하여 노동운동의 생태계가 변하고 있음을 현시했다. 택시업계는 1987년 6월 초에도 노사협상이 시작되어 6월항쟁의 막바지에 2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1 타결되었으나, 노동자 대투쟁이 발발하면서 재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정치 민주화와 5 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 등을 주장하며 목숨을 버렸던 노동자가 발생한 것도 이전과 양상이 다름을 보여준다. 그들은 홍기일과 표정두였다.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6월항쟁은 정치 민주화와 더불어 5 18민중항쟁에 대한 정치 사회적 해결 욕구가 혼융되어 전개되었던 만큼, 다른 어느 지역보다 뜨겁고 정열적이었다. 이러한 열정들이 노동자 대투쟁으로 고스란히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얼마간의 지체와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은 7~9월 사이에 발생했다고 말해지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경우에는 8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자 대투쟁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온순했으며, 노동쟁의는 대체로 사업장 내에서 전개되었다. 노동쟁의의 쟁점은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 그동안 이행되지 않았던 근로기준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노사관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광주지역 택시 노동조합과 같이 민주노조 건설과 같이 노동조합 내부의 문제로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크게 쟁점화 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 대투쟁에 공권력의 투입되어 강압적으로 중단된 경우도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노동자들의 규모가 크지 않고,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했던 광주 전남지역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활동 성과들을 바탕으로 1987년 11월 노동관계법이 개정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많은 독소 조항들을 안고 있었지만, 한결 개선된 것도 사실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한 뒤에 들어섰던 노태우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노동부를 통해 노동조합 업무처리 지침 을 하달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 지침이 관철되기를 기다리면서 가능한 노사갈등에 직접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노태우 정부의 노동 정책은 그해 말에 발표되었던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담화 를 계기로 전환점을 돌았으나, 적어도 1988년에 노동조합이 제자리를 찾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흐름에 바탕으로 두고 민주노동조합 건설운동이 증폭되었고, 노동법 개정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조합 건설운동은 오랫동안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았던 한국노총의 기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정부와 사용주 그리고 한국노총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은 이러한 활동 성과들이 결집한 산물이었다. 광노협의 결성은 1988년에 지역 노동계의 가장 커다란 사건으로 부각되었던 우리데이타 위장폐업 사건에서 실질적인 추동력을 얻었다. 이는 개별 사업장의 노동조합만으로 사용주를 상대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교훈으로 남겨주었다. 그러므로 1989년 3월 5일 광노협의 창립은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광노협은 경제적 이익 확보투쟁을 넘어 민주화운동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도 적극적으로 결합했고, 노동현장의 노동자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가졌다. 그래서 여기에 가입했던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지역의 노동운동은 한동안 광노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운동사 219

222 전남지역에서도 목포민주노동조합협의회나 동광양시민주노동조합협의회와 같이 광노협과 유사한 노동조합 연합체적 성격을 띤 단체들이 결성되었지만, 얼마간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 단체가 포괄범위가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외부와의 연대가 원활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대 들어서는 노동운동에 대해 강경한 기조를 노골화했다. 전노협 결성 저지를 목표로 다양한 탄압 지침들이 실행되었던 바, 광노협의 경우에도 위원장을 비롯해 핵심 간부들에 대한 구속과 처벌이 잇달았다. 또한 광노협에 가입되어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조합에 대한 업무조사를 이유로 탄압의 강도를 높였으며, 1991년 시행되었던 지방자치제 선거에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참여를 차단하는데도 열중했다. 그리고 1991년에 ILO공대위가 결성되고, 여기에 광노협이 참여하게 되면서 광노협 중심의 노동운동은 일차적인 변화를 맞는다. 곧 이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등장하면서 광노협의 위상은 흔들렸고, 노동운동의 구심은 민주노총이 출범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단체들이 결성되었던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광노협 출범을 전후하여 표출되었는데, 대부분은 1990년대 초반에 활동력이 약화되었고, 일부 단체들은 시민단체로 위상을 전환시켜 오늘날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노동운동 세력이 강화되는 만큼 사용주의 대응도 커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을 크게 위축시켰던 것은 손해배상청구 였다. 이는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가운데 노동운동을 하는 위원장들을 비롯해 활동가들의 존립 기반의 붕괴를 가져왔다. 노태우 정부시기의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 외부의 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중심은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운동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법도 했지만, 현장의 상황은 혹독했다. 사용자는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에 대해 해고, 징계, 고발, 고소 등의 조치를 취했고, 정부는 각종 법률을 적용하여 활동가들을 구속시켰고 처벌했다. 심지어 노노갈등으로 노동조합의 토대가 붕괴되기도 했고, 사용자측의 회유와 통제 기법은 나날이 진화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장기화되었던 것은 운수업계였다. 보건의료 분야의 노동쟁의는 파업에 이른 경우는 드물지만, 긴장감을 유지하는 노사관계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사무와 금융 분야에서도 노동쟁의가 발생한곤 했다. 한편 건설업계의 노동쟁의는 여천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한편 1991년 분신정국에서는 노동자였던 윤용하와 정상순이 분신했다. 문민정부를 표방했던 김영삼 정부는 노사자율과 합리적 노사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착을 노동정책으로 제시했다. 김영삼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표방했던 근간에는 노동자 대투쟁 이후 계속되어온 첨예한 노사갈등과 강경한 탄압의 후과로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관계법 개정 등을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하려 했으나, 노동자단체의 역할은 미비했으며, 그나마 다양한 흐름을 수용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를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이라는 전제하에 신한국당 단독으로 노동관계법 개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2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3 이는 곧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항거로 분출되었고, 정권 말기에 여야 합의로 다시 노동법을 개정해야 했다. 이렇게 개정된 노동관계법에서도 독소조항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으나, 노태우 정부시기에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규제하고 탄압했던 주요 조항들은 사라졌다. 임금인상도 이 시기의 중요한 쟁점이었다. 정부는 한국노총과 한국경총을 포한 모임에서 해마다 노사협상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던 임금인상률을 결정지으려 했고, 실제로 그에 근거한 발표도 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한국노총의 영향력을 축소시켰고,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이렇게 만들어진 임금가이드라인이 다양한 사업장에서 일관성을 갖고 관철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해마다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실효성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편 민주노총의 출범은 전국적인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노동조합들이 산업별, 그룹별 연맹으로 재편되면서 지역별 노동운동의 구조도 크게 달라졌고,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연대체인 민주노총을 구심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노사관계는 불신과 적절한 협상 방안을 찾지 못해 한층 격렬한 방식으로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노동쟁의가 분출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광주지역에서는 1994년에 금호타이어에서 발생했던 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파업을 종료시키기 위해 무려 4,500명의 경찰력이 동원되었고, 417명의 조합원을 연행했으며, 40여 명을 구속시키고, 152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엄청난 피해가 유발되었다. 전남지역에서는 1996년에 7월에 발생한 한라중공업의 파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파업으로 다수의 구속자가 발생했으며, 1997년 2월까지 장기화되었다. 1997년 말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오랫동안 축적해온 노동운동의 성과를 급속하게 후퇴시켰다. 정부와 사용자측은 외화위기가 발생한 원인이 노동계와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의 영향력 강화, 높은 임금, 해마다 반복되는 노동쟁의, 낮은 생산력 등이라고 호도했다. 외환위기를 벗어난 사용자측은 경영합리화 혹은 신경영 전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이전과 완전히 다른 노동환경과 생태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은 이에 면밀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노동조합활동의 기반은 점점 약화되었다. 게다가 동일 사업장에서도 노동 조건이 차별화되면서 노동자 집단은 동질성보다는 균열과 차이로 분화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와 조건들은 노동운동의 약화로 이어졌고, 노동운동은 새로운 이념과 활동 방향을 찾아야 했다. 노동운동사 221

224 2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5 참고문헌 1. 단행본과 논문 광주일보사 광주 전남 100년 연표.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엮음 산별노조운동의 현황과 과제. 한울. 김 준 년대 철도노조의 조직과 활동. 1950년대 한국 노동자의 생활세계. 한울. 김경일 일제하 목포지방의 노동운동. 전남사회운동사연구. 한울. 김금수 한국노동운동사 6. 지식마당. 김석순 가톨릭노동청연회(JOC)가 걸어온 길. 광주대교구 사회운동단체 세미나. 광주인권평화재단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김영수 ~70년대 한국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현장과 노동조합. 역사문화연구 22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김영수 김원 유경순 김경원 전노협 1990~1995. 한내. 김영집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현황과 방향. 민주조선 2호. 조선대학교. 김영태 도큐멘터리 노동운동 20년사 (4). 노동공론 3. 김윤환 김낙중 한국노동운동사. 일조각. 김 준 개별적 노사관계의 원형적 질서의 형성. 사회와 역사 74집. 김자룡 목포지역 노동운동의 성장과 한계: 1980년도를 중심으로, 제17회 역사학전공 학생학술심포지엄 발표 자료집. 목포대학교 역사사학과. 김창우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 후마니타스. 김희중 한국 면방직업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나간채 광주지역 노동자조직과 그 이데올로기. 지역사회학 제1호. 한울. 나종훈 단체 소개 : 노동자의 주인된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여수 순천 민주노동자연합, 지역과 전망 제3집.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남구현 민주노총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과제. 이론 14호. 노중기. 1995,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에 관한 연구: 1987~1992.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223

226 노중기 한국의 노동정치체제 변동, 1987~1997. 경제와 사회 36호. 한울. 노중기 한국의 사회적 합의, 그 가능성과 한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의 비교분석. 한신문화논집 16-2호. 노중기 노사정위원회 5년, 평가와 전망. 동향과 전망 56호. 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편 교회와 도시산업선교회.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들불의 열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돌베개. 민주화운동직장청년회 준비위 사무직 전문직 기술직 노동운동. 백산서당. 박노영 외 대전지역 민주노조운동사. 한울. 송미성 광주지역 노동운동 참여자 의 정체성 변화 :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 광노협 활동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 4 : 정부수립기의 노동운동. 지식마당. 안종철 광주 전남 지방현대사 연구. 한울. 안종철 미군정기 지역사회의 정치지형과 갈등구조. 전남사회운동사연구. 한울. 안 진 광주항쟁에서 여성 주체들의 특성. 젠더와 사회 6월 1호. 우리노동문제연구원 민주노조운동의 현황과 전망. 백산서당. 위경혜 광주지역 하청 중소기업의 노동조합운동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유혜경 이승만정권 시기의 노동운동과 노동법. 노동법학 27호. 이광석 광주지역 공단 실태조사. 지역운동과 지역실태. 민중사. 이광일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한국 급진노동운동의 형성과 궤적. 메이데이. 이동언 해방직후 전남지방의 농민운동에 대하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병훈 유범상 한국 노동정치의 새로운 실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비교 평가. 산업노동연구 4-1호. 이원보 노동운동 양대 세력,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동향과 전망 35호.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5 : 경제개발기의 노동운동. 지식마당. 이윤정 월민중항쟁과 여성운동 : 송백회 활동을 중심으로. 서석사회과학논총 4집 1호. 이윤정 오월 광주항쟁의 송백회운동에 관한 연구 : 참여와 연대의 동학을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철우 광무년간의 목포부두노동운동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학술논집 제7집. 이태호 엮음 최근노동운동기록. 청사. 이태호 불꽃이여 이 어둠을 밝혀라: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돌베개. 2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7 이희영 년대 여성 노동자와 공장 노동 의 사회적 의미. 1950년대 한국 노동자의 생활세계. 한울. 임선화, 2009, 해방 이후 전남지방의 우익단체 연구, 전남대학교 박사논문 임송자 우천 전진한의 협동조합 및 우익노조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6. 임송자 년 대한노총의 내부갈등과 그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봄호(제28집). 임송자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 : 1945년 해방 1961년까지. 선인. 임송자 월혁명기와 5 16 이후 부두노동조합 재편 과정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동향. 사회와 역사 93집. 한국사회사학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9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사례 연표 명단. 현장에서 미래를. 전라남도 전남여성 100년. 정근식 해방 직후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사회와 역사 23권. 한국사회사학회. 정근식 해방 직후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전남사회운동사연구. 한울. 정근식 나간채 년대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호남문화연구 21집. 정재호 배충진 김경국 이강복. 들불야학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시론 (사회진보연대 자료실). 조창화 한국노동조합운동사 (상, 하). 한국노동문제연구원. 주종섭 우리들의 현장: 건설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 기록. 서울기획. 주종섭 지역 건설노조 사상 2번째 단체협약 합의. 비정규노동 13호.한국비정규노동센터. 중앙노동위원회 노동위원회판례집 제1호. 중앙노동위원회 년도 노동위원회 판례집 제9호. 최영기 김준 조효래 유범상 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한국노동연구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엮음 ~8월 노동자 대중투쟁. 민중사. 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엮음 한국 노동운동의 이념. 정암사. 홍성우 광주지역 노동자 상태. 지역개발연구 21권 1호.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 홍성우 강현아 광주지역 노동운동 전개과정. 전남대학교 출판부. 황 효 년대 광주지역 노동운동 연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황현옥 사월혁명 당시 노동운동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 노동(조합)운동 및 지역사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가톨릭노동사목 20년.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강인순 한국여성노동자 운동사 2. 한울. 참고문헌 225

228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1997a. 5 18민중항쟁사료총서 1.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1997b. 5 18민중항쟁사료총서 2. 김금수 박현채 외 지음 한국노동운동론 1. 미래사. 목포개항백년사 편찬위원회 목포개항 백년사. 사단법인 목포백년회. 목포시 목포시사(사회 산업편). 목포시. 목포시 목포시사 Ⅲ. 목포시. 전국부두노동조합 한국부두노동조합 100년사. 전국항운노동조합연맹 항운노동조합 111년사.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 9권.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25년사. 분도출판사.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50년의기록출판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50년의 기록. 한국광산노동조합 광노 25년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산업선교25주년기념대회자료편찬위원회 노동현장과 증언. 풀빛.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운동사. 3. 증언, 자서전, 평전 등 5 18민주유공자유족회 엮음. 2005a.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기념재단. 5 18민주유공자유족회 엮음. 2005b.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기념재단. 노준현추모문집발간위원회 엮음 남녘의 노둣돌 노준현. 미디어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윤상원. 박수정 세상이라는 그물을 짜는 사람: 정향자.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아름다운 사람들. 신영일을 생각하는 모임 펴냄 신영일을 배우자. 산하기획. 오월여성회 오월 여성의 이야기들. 광주광역시. 이양현 구술 우리가 바라는 이상사회로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 5 18의 기억과 역사 기념재단. 이윤정 구술 우리 여성도 항쟁 지도부였다. 김양현 강현정 엮음. 5 18항쟁 증언자료집 Ⅳ. 전남대학교출판부. 장두석 황일봉 김현주 광주양서협동조합. 민주주의사회연구소 편. 양서협동조합운동. 대성.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들불의 초상. 풀빛. 2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9 정근식 외 김형남 전남방직공장의 관리인.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 엘리트. 새길. 정향자 구술 무언의 약속, 니가 죽든 내가 죽든. 조지 카치아피카스 면접, 나간채 이명규 엮음. 5 18항쟁 증언자료집 Ⅰ. 전남대학교출판부. 편집위원회 엮음 들불의 역사. 들불기념사업회. 참고문헌 227

230 연 표 1950년 석탄공사가 화순 남선탄광(주)을 인수 1952년 여수 수산계 분쟁 종식. 선주의 양보로 1억 원 반환, 업자와 선주 간에 임금문제를 둘러싸고 일대 분쟁 계속돼 온 대한노총여수지구 해원노조조합사건 일단락 1954년 영월, 도계, 은성, 화순 등의 광업소에서 48시간 시한부 파업 1955년 임금지불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화순 등의 광업소에서 쟁의 발생 10. 전남방직에서 1,000여 종업원 휴직 처분 1956년 8. 광주 국립구호병원 간호사들이 진료 행위 불만에 파업 1955년 대한노총 목포지구연맹 결성 **. **. 진도군 자유노동조합 설립 1959년 8. 전남 계림토건노동자 임금투쟁 11. 목포일보 종업원 처우개선 투쟁 여수부두노조 쟁의 제기 1960년 2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1 5. 2. 목포부두노조 간부 축출 순천철도노조원 궐기 노총 산하 순천 마차노조 결성 광주비료( 肥 料 ) 노조 결성 나주노동자연맹 결성 5. 광주 전남방직 파업, 임금인상 요구) 광주농민 궐기대회 전남운수 332대 휴업 1961년 전남방직 일신 전방으로 분할키로 주주총회서 결정(4. 2. 각각 발족) 전남도 교조 법정수당 지급요구 데모 전남지역 교육자들 법정수당 요구 궐기대회) 나주서 교원 데모 광주시내 8백여 교직자 법정수당 지급 요구 데모) 대우개선 요구 광주 중앙여객 운전사들 파업 한국노동조합총연맹 14개 산별노조를 발족 1962년 광주시내 연탄 배달원 태업 전국노동조합 지역협의회 결성 1963년 노동조합법 공포 호남비료 595명 쟁의 노동청 발족 광주 이용분과위, 525명 임금인상, 처우개선 요구 쟁의 1964년 송정국제공항 한인종업원 노임인상 파업( 임금 15% 인상 타결로 재취업) 호남비료 684명 임금인상 요구 쟁의(파업)) 일신방직 119명 부당해고( 명 해고) 전남방직 109명 집단해고 호남비료의 노동자 680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전국광산노동조합 화순탄광지구 지부 설립 해남여객, 단체협상 경신 체결 쟁의, 52명 참가 참고문헌 229

232 1965년 화순탄광 429명 임금인상 요구 쟁의 전남도내 교육자들 연구 수당 인상 요구키로 결의 목포서 교직자대회 열고 처우개선 등 요구 1966년 광주 노동회관 기공 화순탄광노조 파업 돌입 1967년 2. 여천에 중화학공업 단지 조성 고시 광주공단 부지확보 위해 토지 수용령 발동 무등양말 부당노동행위 노동청에 고발 노임 밀린 화순탄광근로자들 연탄 값 인상 건의 전남제사, 임금인상 및 처우개선 요구 쟁의, 380명 참가 **. **. 호남정유공장 기공 1968년 운수노조 전남지부 회의서 조합원끼리 난투극 광주 동양캐비닛 단체협약체결 거부, 검찰에 고발, 송치 호남비료 임금인상 쟁의, 721명 참가, 전남제사 부당해고 철회 요구 쟁의, 218명 참가 전남제사의 부당해고 노동자 200여 명이 쟁의 후에 복직 광주 전남제사근로자들 대량 해고에 반발 철야 농성하자 회사 측이 화물차로 농성장에 돌진 수명이 중경상 전남제사 부당해고 218명 목포통운지점 임금인상 쟁의, 801명 참가 1969년 광주공업단지 합동기공식 호남정유공장 준공. (일산 6만 배럴, 시험 가동) 1970년 전국 부두노조 컨테이너 도입반대 파업 가부투표 실시 97% 찬성 대한간호협회 6천 여 명 주사행위 집단 거부 전국운수노조 산하 광주석탄분회 및 남광주 분회 회원 147명 무연탄 하역노임인상 요구 파업) 2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3 순천버스합동조합원 급료 인상 등 요구 쟁의 전태일 사망 아시아자동차 광주공장 노동조합 결성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설립운동 / 아세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결성 1971년 아세아자동차, 공장 폐쇄 아시아자동차, 지난 31일 노조 결성하자 강제휴업(21일 타결)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원 220여 명이 단식농성, 공장 폐쇄 반대 파업 아세아자동차 노조간부가 전기 자살로 위협 목포 공업단지 착공 광주금성여객종업원 400여 명, 봉급 인상 체불 노임 지급 등 요구 파업 전대 의대 인턴, 봉급인상 요구 단식 농성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등 국립대학 병원 실습생 400여 명이 보수개선을 요구하며 48시간 동안 파업 전남대 등 국립대학병원 레지던트 400여 명 보수 개선 요구 48시간 총파업(8일 학교 측 봉급 38천원 인상 조정) 전남 섬유노조 전남지부, 전남제사주식회사 광산잠사산업주식회사 나주잠사주식회사를 상대로 전남도 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 제기 전남도내 기업체 근로자들 월 평균 임금 전국 근로자 평균 임금보다 25.1%나 낮아 전국 최하로 밝혀짐 전대의대 병원 인턴 15명 처우개선 안되자 집단 사표 전남대의대병원 인턴 집단사표에 이어 레지던트 45명도 집단사표로 병원 마비 광주 국제버스유한회사 소속 시내버스 운전사 45명과 차장 88명 등 133명 체불금 지불 요구 파업 나주 덕음광산 광부 250명, 체불 노임 요구 철야 농성 연합노조 목포지부,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쟁의돌입 결의하고 본조에 인준 요청 연합노조 여순지역지부, 여수양복상조합 상대로 임금 40% 인상요구쟁의 제기, 이를 본부에 보고 호남비료 569명, 숙식비 인상 등 요구 쟁의 연합노조 광주지부, 대흥양복점 등 32개 업주 대상 임금인상요구쟁의 화학노조 호남비료지부, 체임 등 4개항 요구 노사합의로 종식 전국연합노조 목포지부 산하 양장분회, 노동쟁의에 대한 실력행사, 인준을 본조에 요청 연합노조 광주지역지부, 대흥양복점 등 33개 업자 상대 노동쟁의, 실력행사 결의, 본조에 인준 요청 참고문헌 231

234 1972년 아시아자동차회사에서 장기휴업을 공고, 공원 135명 감원 목포지역 양화공 등 현행 노임의 50% 인상 등을 요구하며 노동쟁의 제기 목포공업단지 준공 전국광산노조 전남지부, 호남탄좌의 임금체불에 강력 항의 광주지검 목포지청, 전국부두노조 목포지부장 등 3명을 업무상 횡령혐의로 구속 기아산업, 노사협의를 통해 임금 17% 인상 합의 범아공사(석유공사와 호남정유의 정비하청공사) 종업원 480명이 임금 40% 인상을 걸고 노사회의 계속 목포일보(호남매일신문) 노사분쟁 범아실업(석유공사와 호남정유의 정비하청공사) 노사교섭을 통해 현행 임금 15% 인상에 합의 전국연합노조 목포지역지부, 대평산업회사의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재심청구를 중앙노동위에 제기 1973년 건설부, 목포 등 8개 지구 공단장려지구 지정 운수노조 목포지부 조합원 91명, 지난 4월 1일부터 일터 잃고 25일 상경, 취직 보장을 대한통운에 요구 1974년 한국근로복지공사 발족 전남일보 전남매일 기자들 언로자유 수호선언 및 결의문 채택 1975년 일신방직(광주) 노동자들, 임금인상요구 3시부터 집단성토대회 전남방직(광주) 노동자들, 임금인상요구 3시부터 집단성토대회 임일섬유(전남 담양) 노조원 336명, 임금 30% 인상 요구 작업 거부, 25% 인상 합의 1976년 여천 석유화학공장 합동 기공식 1977년 광주고속에 2개 노조가 결성되어 조직관할 분규 발생 전남 목포 소재 환상기업 관할권을 연합노조에 인정 자동차노조, 광주고속 분회의 정상화를 위해 관할권을 전남지부에서 고속지부로 이관 지시 자동차노조, 광주고속분회 조직정상화를 위한 조직지원대책위 설치 2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5 노총, 광주고속분회 조직관할권 문제에 전남도협의회가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 광산노조, 호남탄좌 호남공업소를 부당노동행위 사실을 들어 근로기준법 위반혐의로 고발 1978년 목포남양어망 노동조합분쟁 호남고무 노사분쟁 광주고속 안내양 120여 명, 남산야외음악당에 모여 임금인상요구농성, 시위 1983년 가톨릭노동청년회 25주년 기념 미사를 농성동 천주교회에서 개최 1984년 목포태원여객 안내양 파업 1985년 사단법인 목포노동병원 개설 허가 광양제철 종합 기공 근로자의 날 40주년 행사를 KNCC 전남인권위원회와 EYC 노동선교분과 등 기독교 단체 주최로 YMCA 대강당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가톨릭 단체 주최로 임동성당에서 노동자 200여 명과 학생 및 시민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절 기념식 개최 금성알프스 전자(주)광주공장 준공(하남공단) 영진기업(목포 택시업계) 노사분쟁 광주 한일택시 생존권 사수를 위한 무기한 단식 농성 광주기독노동자총연맹 을 광주 무등교회에서 창립 한일택시 노조민주화운동 8. 로케트전기 노조민주화운동 홍기일이 전남도청 앞에서 민주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라는 구호를 외치고 분신 광주 로케트전기 부당노동행위 중지 요구 농성 남도택시(목포 택시업계) 노사분쟁 전남가톨릭노동청년회 주최로 가톨릭센터 7층에서 전태일 열사 15주기 추모제 개최. 노동자 200여 명 참석 대우캐리어 광주공장 기공(하남공단) 1986년 한국에르나전자 파업 참고문헌 233

236 광주지역 민주노동자 생활임금쟁취 투쟁위원회 결성 광주 에르나전자 임금인상 요구파업(28% 인상승리) 호남YMCA 중등교사협의회 교사 229명, 광주카톨릭센터에서 교육민주화 실천대회를 갖고 결의문 채택 광주 무등양말 임금인상 요구 파업 단행 전남도교위, 한국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회장인 윤영규교사(51) 등 3명을 교육민주화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섬 등 벽지로 발령 광주경찰서, 한국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회장 윤영규, 회원 주진평, 김경옥 등 을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 광주 본촌공단 세화노동자 탄압에 대한 연대투쟁 결의 광주 무등양말 노동조합 결성 전남NCC 무등양말 민주노조 탄압공대위 결성 1987년 광주 고백교회에서 전남지역 노동청년회 발족 2 9. 광주 서광택시 노동조합 결성 3 6. 표정두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내각제 개헌 반대 를 주장하며 분신 광주 기노련 노동상담소 개소 광주 서광택시 임금인상 농성 광주 삼전레미콘 일요일 특근 거부 투쟁 광주 광일택시 노조탄압 중지 농성 광주 남해어망 등 노총의 4 13지지 성명 반박 성명 발표 광주 택시기사 87임금협정 철회 및 재협정 요구 가두시위 민주헌법 쟁취 전남노동자 공동위원회 발족 광주 민노위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 광주 대양섬유 근로기준법 위반 시정 요구 서명 광주 대하섬유 상여금 인상 요구 광주 트라이센 임금인상 요구 파업 광주 일성섬유 임금인상 요구 파업 광주 금호타이어 임금인상 요구 파업 광주 시내버스 임금인상 동맹 파업 광주 CBS직원, 뉴스, 광고방송 부활요구하며 단식 철야기도회(14일까지) 광주 대우전자 파업 광주택시 노동조합 임금인상 등 7개항 요구하며 전면 파업 금호타이어 생산직 노동자 500여 명은 조업을 거부하고, 심야수당 50% 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 2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7 민주화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광주지역 노동자대회가 3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YMCA에서 열림 아시아자동차 노동자 1,800여 명, 연말보너스 150% 지급을 요구하며 작업 거부 1988년 노동부, 87년 노사분규가 발생한 곳은 3,750여개 사업장으로 집계하고, 노사분규 특별대책 본부 설치해 분규 예방 활동에 역점을 두기로 함 주년 노동절 기념 대잔치 노동단체 각종 행사 개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가 광주지역민주노조협의회 준비위 로 개칭 목포 호남고무 노동자 200여 명이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퇴진 요구 시위 대우전자 쟁의 신고 화순군 호남탄좌 노사 분규 전남대 5 18광장에서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행사 개최 민주기사의 날 선포식 여수시내 13개 택시회사 노동자들이 국동 어항단지에 집결 집회 장용훈(운수노동자) 분신 사망 광주KBS 노동조합 결성 우리데이타 농성사건 / 새한전자, 레크전자 휴페업 철회투쟁 9. 가톨릭노동사목 광주 노동사목 결성. 18일 광천동으로 광주 성요셉 근로자의 집 이전 개소 우리데이타 관련 위장폐업 철회를 위한 전국노동자촉구대회 개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전태일 추모 노동문화제 개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1,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악법 개정투쟁 광주지역보고 대회 개최 목포지역 택시조합 노동자 40여 명이 타코미터기 사용 반대와 생계비 보장을 요구하며 시청 앞 도로 점거 농성 1989년 여천일용노동자 파업시위 우리데이타 노사 양측이 8개 항의 합의약정서에 서명. 170일 간의 갈등 종료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주최로 노동운동탄압분쇄 및 노동악법, 반민주악법철폐를 위한 전국노동자궐기대회 호남권 집회 개최 광주 화정 삼익아파트 노동조합이 아파트 노동조합으로서 처음 노동쟁의 신고 광주지역노동자협의회 건설 전국연합노련 광주 전남지역협의회, 광주 노총회관에서 전국 최초로 노조행동대 발족 호남에틸렌노동조합운동 현대노조탄압 규탄 및 지원 투쟁 참고문헌 235

238 광주기독병원 임금인상 등 노사협상 타결 화니슈퍼체인 노동조합 임금인상 관련 파업 전남대에서 광노협 89 임금인상 완전 승리 쟁취 및 현대 탄압 규탄대회 개최 호남에틸렌 노동자들이 부분 파업 돌입 금호타이어 임금협상 타결 광노협, 5 18민중항쟁부상자협의회 등 광주 전남지역 26개 단체 구성된 5월항쟁공동투쟁 본부 결성 대우캐리어 노동조합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새한전자 노동조합 폐업철회 요구 농성 새한전자 폐업 광주문화방송 기자, PD 등 사원 116명, 언론민주화선언 결의한 뒤 뉴스 중단 광주 전남방직 근로조건 개선 및 어용노동조합 반대 투쟁 근로자 평민당사 점거농성을 시작 우리데이타 노동자, 학생 등 200여 명은 외환은행지점 앞 사거리에서 위장폐업철회, 평화 구역철폐 등 구호와 함께 시위를 벌이다 해산 새한택시 업무재개 잠정 합의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는 전국노동자대회 탄압규탄 및 노동악법철폐, 전노협 건설을 위한 광주지역 노동자결의대회 광노협 의장 박종현과 사무처장 김철문 구속 1990년 한국노총 동양광지구협의회 결성 광주지역노동운동탄압저지 공동대책위원회 결성 광노협 소속 노동자와 남대협 소속 대학생 800여 명은 세계노동절 정신계승 투쟁결의 대회 를 갖고 시위를 벌임 광노협 노동자들 5월항쟁 계승 시위 참여 결의 광주여성노동자회 광주YWCA 소강당에서 창립대회 여수여천민주노동자연합, 건설노동자 고 정종호 열사 추모 및 산재 추방 결의 대회 참여 여천건설노동조합 노동쟁의 / 금성알프스 노동조합 사수투쟁 여천건설노동조합 단체협상 요구 집회 개최 1991년 대우전자 광주공장 노동자들 해고 등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조업 거부 목포시내 9개회사 택시 임금협상과 관련해 회사 측의 배차 중단 대우전자 광주지부 민주노조추진위원회 소속 노동자 50여 명, 평민당 광주시지부 사무실을 점거 노동절 기념집회 2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9 윤용하 사망 강대식(여수 남진교통) 노조위원장 분신 여수 여천 택시분실 소속 노동자 317명, 임금교섭 타결시까지 무기한 운행거부 선언 호남에틸렌 노동조합운동 광주, 택시 파업으로 운행 중단 치과기공사들 의료기사법 개정법률안 반대 항의 파업 광주노운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사례발표회 서울노동운동단체연합, 인천민중운동연합,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등이 노동자정당건설 추진위원회를 결성, 한국노동당(가칭) 창당 선언 광주 태광운수 노동자들이 파업 결의 1992년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자노련) 광주 전남지부 파업 결의 광주직할시 지역의료보험 노동조합 인사 문제 관련 단체협상 결렬로 파업 광노협 소속 노동자 60명, 중흥동 소재 사무실에서 총액임금제 철회 요구 농성 순천교통 노동조합 임금인상안 관련 파업 광노협 주최 메이데이 기념행사 및 총액임금제 분쇄 결의대회 조선대학교 부속병원 노동조합 파업 찬반 투표 실시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시 지부는 노총회관에서 산하 68개 노조 간부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택시제도개선과 92년 투쟁승리를 위한 결의대회 개최 광주청년노동자회 8 15범민족대회, 8 15 통일을 위한 영 호남 노동자 등반대회 참가 광주문화방송 노동조합은 파업출정식을 갖고 무기한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 택노련 광주지부 0시부터 단체협약과 임금협상 결렬로 파업 광주YWCA 창립 70주년 기념식. 광주 전남 현직 교사 2,350명,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회복을 위한 교사선언 (오후 6시 광주YWCA) 발표 광주지역 복장노조(양복점 종업원들) 오전부터 파업 돌입. 양복 1벌 당 도급액 2만5천원 인상. 퇴직금제 신설 등 요구 순천경찰, 사노맹 호남지역 하부 조직 순돌회 4명 구속 광주시내 67개 양복점, 10일 각 구청과 광주지방노동위원회에 직장 폐쇄 신고 1993년 (주)대우캐리어 회사 측이 노동조합 위원장 등 10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제기 광주기독병원 노동조합 부분 파업 단행 6. 전국노동자대표자회의(전노대) 결성 택노련 광주지부 전면 파업 돌입 참고문헌 237

240 1994년 광주시내버스 노동조합 준법 투쟁 시작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파업 개시 경찰 4,500여 명이 투입되어 금호타이어 파업 강제 해산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 회사 측과 협상 결렬로 파업 개시 조선대학교 노동조합 조합원이 정식 직원 전환 등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12. 8~9.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 삼성의 승용차 진출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임 1995년 민주노총준비위원회 주최로 광주역 앞에서 현대자동차, 한국통신 노동운동 탄압 분쇄 및 광주학살 주범 기소 촉구 결의대회 개최 후 행진을 벌임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시지부 조합원들이 회사 측과 임금협상을 벌이다가 결렬되자 9월 5일부터 파업에 돌입 1996년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본부 창립대의원대회와 창립대회 개최 광주시내버스 노동조합 찬반투표 실시하고 연대파업 찬성 결의 광주문화방송, 목포문화방송, 여수문화방송 노동조합 연대파업 돌입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회사 측과 잠정합의안 결렬로 공장 가동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시작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 노사 협상 타결 실패 전남대병원 노동조합 등 총파업 등 강경투쟁을 벌일 것임을 밝힘 광주지역 택시노동조합 67개 노동조합 대표들이 참가하여 창립총회 개최 광주YMCA에서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광주 전남지역본부 발족 민주노총 광주 전남본부 노동법 및 안기부법 강행 처리에 반발. 규탄대회 개최 민주노총 광주 전남본부 산하 노동조합들이 연이어 파업선포식을 갖고, 각 노동조합의 여건에 맞춰 파업이나 농성을 벌임 1997년 민주노총의 2단계 무기한 총파업 돌입에 따라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금호타이어 등 대형사업장들에서 파업이 계속됨 공공노동조합 총파업에 가세하여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광주기독병원 노동조합이 총파업에 들어감. 광주지역 방송 3사도 파업에 돌입 한국노총 소속 광주 전남지역 회사택시 노동조합이 노동법 철회를 요구하여 파업에 돌입. 금융노련 소속 은행원들은 사복착용 후 정상근무로 파업 형태를 전환 2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1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 본부와 한국노총 광주시지부가 노동법 등의 백지화를 주장하며 제3차 파업결의대회 개최. 광주 시내 병원 노동조합들과 제조업체들이 전면 파업에 돌입 아시아자동차와 한라중공업 등 대형사업장 노동조합이 노동법 개정을 촉구하면 집회를 개최하고 파업을 벌임 광주공원에서 노동자와 학생들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법 안기부법 무효화를 위한 광주시민 결의대회 개최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 본부와 한국노총 광주시지부가 주최하는 노동법 백지화 요구 연합 집회 개최 민주노총 광주 전남지역 본부 산하 노동조합 4시간 시한부 파업 광주시내버스 노동조합 파업찬반투표를 벌여 파업안 가결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지부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 가입 결의 광주 전남기자협회 등 3개 언론단체가 대량감원과 임금동결 반대 기자회견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 경영합리화를 위해 전체 임직원 18.6%인 1,447명 감축 합의 병원노련 산하 광주시내 종합병원 노동조합들이 임금 및 단체협상안 결렬. 조선대학교 노동조합은 7월 19일부터 파업 돌입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시지역본부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개최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 광주시지역본부 완전월급제 도입을 주장하며 대정부투쟁 돌입 경의 아시아자동차노동조합 아시아자동차 경영정상화를 위한 결의대회 개최 아시아자동차노동조합 아시아자동차 3자 인수 기도 음모 분쇄 결의대회 개최 1998년 민주노총 노사정 합의안 부결 처리 참고문헌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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