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회 사 歷 史 의 과학적 인식을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한 역사철학자는 歷 史 는 오늘의 관심과 시각에서 지나간 사실을 재구성하여 놓은 것 이라 고 했습니다. 지나간 사실은 불변입니다. 그러나 관심과 시각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있는 것, 진화하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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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 日 國 際 學 術 會 議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日 時 : 2009 年 9 月 18 日 ( 金 ) - 20 日 ( 日 ) 場 所 : 麗 水 The Ocean Resort 主 催 :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東 北 亞 歷 史 財 團

2 개 회 사 歷 史 의 과학적 인식을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한 역사철학자는 歷 史 는 오늘의 관심과 시각에서 지나간 사실을 재구성하여 놓은 것 이라 고 했습니다. 지나간 사실은 불변입니다. 그러나 관심과 시각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있는 것, 진화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100년 전에 인식했던 임진왜란 이라는 역사는 그래 서 지금 다시 해석하는 임진왜란 과 같을 수 없습니다. 문학으로서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작가의 관심에서 보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을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서 선명하게 들어내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像 을 독자들에게 각인 시켜 줄 수 있고 독자는 그 像 을 간직하고 거기서 감동도 얻고 배움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 건을 그 사건에 영향을 미친 모든 변수를 동원하여 객관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보 려 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엄청난 많은 변수가 작용합니다. 관련된 사람들 의 사상, 생각, 지식, 그리고 전쟁이라면 당사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실태가 모두 관련되고 나아 가서 당시의 국제정치도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과학기술 수준도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한일문화교류기금은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으로 오늘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 이 라는 주제로 의미 있는 학술회의를 엽니다. 한국과 일본, 특히 한국에서는 수천번 되돌아보았던 임진왜란을 왜 다시 논의하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하는 분도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다루는 사건 은 같아도 다루려는 방법은 다릅니다. 한일양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임진왜란 을 과학으로 재 분석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간과해 왔던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임진왜란을 재조명해보고 일한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체계를 검토해 봄으로써 임진 왜란 을 객관화해보려는 시도입니다.

3 오늘 회의의 제3부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한일양국 국민들이 기억하는 임진왜란을 비교해 보 려합니다. 한일양국의 임진왜란 인식의 차는 한일간의 상호이해를 깊이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 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회의는 비록 하루 동안 진행되는 작은 규모의 회의이지만 그 의미는 크다고 생각합 니다. 이 회의에는 양국의 전문학자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北 島 万 次 교수, 堀 新 교수, 久 芳 崇 교수, 米 谷 均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측에서는 孫 承 喆 교수 등 10명의 전문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좋은 토론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희 한일문화교류기금은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간의 상호 이해를 높여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깊게 하는 일을 목적으로 설립한 기관입니다. 그동안 한일관계는 역사 인식의 차이에서 생긴 오 해로 항상 긴장 속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기금에서는 앞으로도 과거 역사를 객관화하 여 양국 국민들이 공동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좀 더 상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이런 회의를 계속해 나가려 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임진왜란의 주전장의 하나였던 이 아름다운 여수에서 사적지도 둘러보 고 맑은 한국의 남해안 바다도 감상하시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9일 (재)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 李 相 禹

4 환 영 사 안녕하십니까? 한국 동북아역사재단의 사무총장을 맡고있는 신연성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9월 설립 이후 보편적 역사인식 구축과 한 중 일 공동의 역사인식을 지향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습니다. 여러 방면의 연구 및 지원사업을 통해 한 중 일 등 동 아시아 지역의 상호이해와 협력, 그리고 공동번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한일문화교류기금과 공동으로 한 일 양국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이라는 의미있는 주제에 대한 심도있는 논 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임진왜란 이라고 부르는 한 일 간의 7년 전쟁은 당시 조선과 일본은 물론,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국제전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 임진왜란과 동아 시아세계의 변동 에 관한 활발한 발표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논의와 알찬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는 이곳 여수는 한국의 명장 李 舜 臣 장군의 본거지 全 羅 左 水 營 이 있던 곳입니다. 학술회의를 전후하여 여수와 순천 일대 현장답사도 병행하면서 생 생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5 오늘 기조강연을 해주시는 기타지마 만지( 北 島 萬 次 ) 교수님, 그리고 호리 신( 堀 新 ), 쿠바 다카 시( 久 芳 崇 ), 요네다니 히토시( 米 谷 均 )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귀중한 발표를 해주시는 한명기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석학과 참가자 여러분께 감사 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금번 학술회의를 준비하시느라고 애쓰신 이상우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님과 김수웅 사무국장님, 강원대 손승철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9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愼 年 晟

6 學術大會 日程 9月 18日(金) 12 : 30 金浦空港(國內線 Lobby) 集合 일본팀과 합류 麗水向發 15 : 00 麗水 鎭南館, 船所 見學 19 : 00 晩餐 (韓日文化交流基金) 9月 19日(土) 開會 및 基調講演 (09:30 10:30) 開 會 辭 : 李 相 禹(韓日文化交流基金 理事長) 歡 迎 辭 : 愼 年 晟(東北亞歷史財團 事務總長) 基調講演 : 乱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附 : 壬辰倭亂硏究의 回顧와 展望 (文書 報告) 진행 : 李 薰(東北亞歷史財團) 北島万次(日本 共立女大) 主題發表 進行 : 鄭熙鐥(順天 청암대) 第1部 : 第1部 : 壬辰倭亂과 東아시아 國際關係 (10:40 12:00) 1. 東아시아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2. 東아시아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韓明基(明知大) 閔德基(淸州大) 堀 新 (共立女大) 申東珪(翰林大) 中 食 第2部 : 朝 日軍이 使用한 武器(船舶)의 科學性 (13:30 14:50) 1. 朝鮮軍의 軍船과 武器의 科學的 檢討 2. 日本軍의 船舶과 武器의 科學的 檢討 朴晢晄 (戰爭紀念館) 久芳崇(日本 西南學院大學) 李敏雄(海士) 邊東明(全南大) 第3部 : 兩國民의 戰爭認識과 記憶 (15:00-16:20) 1.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米谷 均(日本 中央大) 2.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孫承喆(江原大) 金文子(祥明大) 盧永九(國防大學院)

7 綜 合 討 論 : 李 啓 煌 ( 仁 荷 大 ) (16:40-18:20) 閔 德 基 ( 淸 州 大 ) 申 東 珪 ( 翰 林 大 ) 李 敏 雄 ( 海 軍 士 官 學 校 ) 邊 東 明 ( 全 南 大 ) 金 文 子 ( 祥 明 大 ) 盧 永 九 ( 國 防 大 ) 踏 査 : 19 : 00 晩 餐 ( 東 北 亞 歷 史 財 團 ) 18 日 午 後 : 麗 水 鎭 南 館, 船 所 ( 可 能 한 분만) 20 日 午 前 : 順 天 倭 城 址

8 목 차 개 회 사 開 會 辭 2 환 영 사 歡 迎 辭 5 學 術 大 會 日 程 7 기조강연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기타지마 만지( 北 島 万 次 ) 13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기타지마 만지( 北 島 万 次 ) 35 발표문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韓 明 基 55 -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明 淸 日 關 係 를 중심으로- <토론> 민덕기 66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호리 신( 堀 新 ) 71 <토론> 신동규 89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朴 晢 晄 95 <토론> 이민웅 111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久 芳 崇 113 <토론> 변동명 132 豊 臣 秀 吉 의 日 本 國 王 冊 封 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米 谷 均 135 <토론> 김문자 149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孫 承 喆 153 <토론> 노영구 170

9 발표문 일본어 원문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北 島 万 次 175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 いて 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北 島 万 次 197 東 アジ ア 國 際 關 係 に 見 る 壬 辰 倭 亂 堀 新 215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久 芳 崇 231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 めぐ る 認 識 の 格 差 米 谷 均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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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조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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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13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기타지마 만지 ( 北 島 万 次 ) 들어가며 나는 지금까지의 壬 辰 倭 亂 연구에서 日 本 朝 鮮 明 각각의 사료를 취급해 왔다.조선 쪽 사료 로서는 朝 鮮 王 朝 實 錄 懲 毖 錄 亂 中 雑 錄 壬 辰 錄 그리고 亂 中 日 記 등의 사료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중에서 朝 鮮 王 朝 實 錄 懲 毖 錄 등은 朝 鮮 王 朝 상층부의 동향을 중심으로 한 편찬물 또는 覺 書 이다. 또 亂 中 雑 錄 壬 辰 錄 등은 중간층에서 일반서민에 이르는 광범위 한 계층의 움직임까지도 기술한 覺 書 이다. 이에 대하여 亂 中 日 記 는 리얼타임의 사료이다. 이 日 記 는 壬 辰 倭 亂 이 발발했던 해인 15 92년 정월부터 李 舜 臣 이 1598년 11월 19일 露 梁 海 戰 에서 戰 死 하기 전전날, 즉 11월 17일까지의 일기이다. 亂 中 日 記 는 朝 鮮 水 軍 전체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던 李 舜 臣 이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備 忘 記 이며, 水 軍 과 관련된 인물의 동향, 군사상의 정보, 海 戰 의 준비와 陣 立, 海 戰 의 경위 등 水 軍 을 지휘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을 메모한 것이다. 더욱이 亂 中 日 記 에는 水 軍 을 지휘하는 현장에서 보았던 중앙관료들에 대한 의견과 불만, 고생하면서 明 의 水 軍 과 협조했던 내력, 日 本 과 和 議 를 권유하려는 明 측 및 이를 시인하려는 朝 鮮 내부의 특정인물에 대한 분노, 明 册 封 使 에 수행하여 日 本 으로 향하는 黄 愼 의 通 信 使 에 대 한 선박 조달 양상, 水 軍 병사와 格 軍 ( 船 軍 )의 모습, 水 營 에서 水 軍 을 그늘에서 지원했던 목수 등 기술자들의 모습, 倭 亂 의 여파를 피해 이리 저리 떠돌거나 李 舜 臣 의 戰 果 에 기뻐서 덩실거리 는 민중, 전란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倭 賊 으로 변장하고 약탈행위에 나선 민중, 降 倭 가 된 日 本 人 의 취급과 그 모습, 자기 가족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인간들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4 1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오늘의 이야기는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면서, 亂 中 日 記 를 통하여 전란 속의 민중은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Ⅰ. 도적 절도에 나선 하층민 1. 倭 人 으로 변장하고 도적이 된 下 層 民 1593년( 宣 祖 26) 7월,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하층민이 임진왜란의 혼란을 틈타 倭 人 으로 변 장하고 약탈행위를 감행했던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음의 사례이다. *사례 년( 宣 祖 26) 7월 8일. 李 舜 臣 은 倭 賊 이 光 陽 縣 을 침범했고, 왜적은 이미 官 舎 와 창고를 불태웠다 는 소문을 들었다. 李 舜 臣 은 즉시 군사를 보내려고 했지만 소문을 그대로 믿을 수 없 어서 蛇 渡 鎭 의 軍 官 金 鵬 萬 을 탐색차 光 陽 에 파견했다( 사료 1). *사례 년( 宣 祖 26) 7월 9일. 南 海 縣 令 奇 孝 謹 이 李 舜 臣 에게 와서 光 陽 과 順 天 은 이미 불에 탔 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光 陽 縣 監 魚 泳 潭 順 天 府 使 權 俊 및 軍 官 宋 希 立 金 得 龍 鄭 思 立 일행을 현지로 출발시켰다. 그 뒤에 李 舜 臣 은 全 羅 右 水 使 李 億 祺 慶 尚 右 水 使 元 均 과 사건의 경위에 대 하여 논의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어 全 羅 左 水 營 의 探 候 船 이 돌아와서 光 陽 縣 을 침범했던 賊 은 왜적이 아니라 慶 尚 道 의 피난민이 왜적으로 변장하고 光 陽 에 돌입하여 마을을 불태웠다고 전 했다( 사료 2). *사례 년( 宣 祖 26) 7월 10일. 蛇 渡 鎭 의 軍 官 金 鵬 萬 이 돌아와서 광양사건은 사실이며, 倭 賊 100 여명이 陶 灘 (현재 全 羅 南 道 求 禮 郡 土 旨 面 把 道 里 )으로부터 침입하여 光 陽 을 침범했다고 李 舜 臣 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 舜 臣 이 그 倭 賊 이라는 자들의 행위를 자세히 캐물었더니 총을 한 발 도 쏘지 않았다고 전했다. 李 舜 臣 은 倭 賊 이라면 절대로 총을 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사료 3). *사례 4

15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년( 宣 祖 26) 7월 10일. 蛇 渡 僉 使 金 浣 이 李 舜 臣 에게 돌아와서 광양사건은 光 陽 주민이 倭 服 으로 변장하고 일으킨 사건이며, 光 陽 뿐만 아니라 順 天 樂 安 도 이미 모두 불에 탔다 고 보 고했다. 또한 光 陽 에서 돌아온 呉 壽 成 은 光 陽 의 도적은 모두 晋 州 및 光 陽 縣 백성이며 그들이 이런 흉계를 꾸몄다. 관청의 창고는 텅 비었고, 마을도 모두 인적이 끊어졌다. 피해는 順 天 이 가 장 심하고 樂 安 이 그 다음으로 심했다 고 보고했다( 사료 4). 2. 倭 賊 습격의 헛소문을 퍼뜨리고 소를 훔친 鮑 作 人 1597년( 宣 祖 30) 8월. 全 羅 道 於 蘭 浦 에서 慶 尚 道 唐 浦 의 鮑 作 人 이 왜적이 쳐들어왔다고 헛소 문을 퍼뜨리고 소를 훔친 사건이 있었다. *사례 년 8월 25일. 李 舜 臣 이 全 羅 南 道 於 蘭 浦 에 주둔하고 있을 때, 唐 浦 의 鮑 作 人 이 방목 중 인 소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쳐들어왔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李 舜 臣 이 그 흉계를 알고 헛소문 을 퍼뜨린 두 사람을 잡아서 斬 梟 했다( 사료 5) 사례1~5에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倭 亂 으로 생활난에 빠진 전라도 光 陽 경상도 晋 州 의 하층민들이 倭 人 으로 변장하고 약탈 행위를 하였다. 2그러나 이 무렵 光 陽 晋 州 지역뿐만 아니라 忠 清 慶 尚 全 羅 3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하 층민들이 혼란을 틈타 약탈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른 상황이 확산되고 있었다( 사료 6). 3또한 (사례 5)는 丁 酉 倭 亂 때인데, 이때도 鮑 作 人 이 식량난으로 헛소문을 퍼뜨리고 소를 훔 쳤다. * 鮑 作 人 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한다. *다음으로, 생활고로 인하여 약탈행위를 감행했던 하층민 문제에서 벗어나 全 羅 左 水 營 의 기 술자( 職 人 )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16 1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Ⅱ. 水營 을 지탱했던 기술자 집단 1. 목수 a. 造船과 船材 운반 사례 년(宣祖 26) 6월 22일. 全羅左水營에서는 戰船을 建造하기 위하여 坐塊①을 시작했다. 耳匠②240명, 運搬役③으로 全羅左水營에서 72명, 防踏鎭에서 35명, 蛇渡鎭에서 25명, 鹿島鎭 에서 15명, 鉢浦鎭에서 12명, 呂島鎭에서 15명, 順天府에서 10명, 樂安郡에서 5명, 興陽縣과 寶 城郡은 각각 10이었다( 사료 7). (注) ①坐塊 ; 배를 만들 때 배 바닥의 판자 아래 굴림목으로서 둥근 통나무를 설치하는 일. ②耳匠 ; = 목수. 목수 역할과 토목공사를 하는 사람. 여기서는 船大工. ③운반역 ; 잡역부. 사례 년(宣祖 26) 6월 23일. 新船의 底板作業이 종료하였다( 사료 8). 사례 6~7을 통하여 다음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亂中日記 에는 船大工에 관한 것을 耳匠 으로 기록하고 있다. 耳匠 이란 목수 라고도 부르며, 선박 건조를 비롯하여 목수의 작업과 관련된 기술자이다. 日記 의 이 부분에 의할 때, 이 시점에서 全羅左水營(麗水)에 240명이나 되는 다수의 耳匠(船大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船大工이 造船의 첫 작업인 坐塊에 착수하였다. 그때 船大工의 작업을 보조하기 위하여 船材 를 운반하는 많은 잡역부( 運役 )가 左水營 및 左水營 관할하의 防踏鎭 蛇渡鎭 鹿島鎭 鉢浦鎭 呂島鎭 등 각 鎭營과 順天府 樂安郡 寶城郡 興陽縣에서 동원되었던 것이다. 船大工이라는 기술자 집단이 左水營에 있고, 그들의 전문작업 이외의 일을 잡역부가 담당하 는 구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 船大工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는가? 이에 대하여 다시 사례를 들어보자.

17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17 b. 船 大 工 의 장악과 통제 *사례 년( 宣 祖 27) 1월 24일. 軍 船 의 재목 벌채를 위하여 宋 德 馹 1이 耳 匠 41명을 인솔하고 나 갔다( 사료 9). ( 注 ) 1 宋 德 馹 ; 壬 辰 倭 亂 발발 당시 國 王 을 호위하고 平 安 道 까지 扈 従 했다. 1594( 宣 祖 27)년 李 舜 臣 휘하에 가담했고, 耳 匠 (목수)를 이끌고 山 役 을 행했다. 丁 酉 倭 亂 때 珍 島 郡 守 가 되었고, 鳴 梁 海 戰 에서 활약했다( 朝 鮮 人 名 辞 書 ). *사례 년( 宣 祖 28) 11월 27일. 軍 官 金 應 謙 이 2년생 나무를 벌채하기 위하여 耳 匠 5명을 인솔 하고 산으로 갔다( 사료 10). *사례 년( 宣 祖 30) 10월 30일. 李 舜 臣 은 軍 官 黄 得 中 에게 명하여 耳 匠 을 이끌고 島 北 의 산기슭 에서 건설용 목재를 베도록 했다( 사료 11). 사례 8~10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례 8)에서는 船 大 工 이 軍 船 의 목재를 벌채하고, 그들을 통솔한 사람이 李 舜 臣 의 부장 宋 德 馹 이었으며, (사례 9)도 船 大 工 이 목재를 벌채하고, 그들을 李 舜 臣 의 軍 官 이 통솔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船 大 工 이 造 船 用 목재를 벌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에서 船 材 를 운 반하는 잡역부의 존재를 언급하였다. 造 船 用 목재도 이들 잡역부에게 맡겨도 좋을 듯하지만, 船 大 工 이 직접 목재를 벌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는 문제가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造 船 用 목재의 선정이다. 船 材 에 적합한지 어떤지 여부는 船 大 工 이 판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수가 직접 船 材 를 탐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사례 10)은 1597년 9월 17일 鳴 梁 海 戰 뒤의 사례이며, 이 무렵 李 舜 臣 은 全 羅 右 水 營 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그 청사 건설 때문이었는지 船 大 工 도 건설용 목재의 벌채에 동원되었다. 그

18 1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리고 (사례 10)에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李 舜 臣 의 軍 官 黄 得 中 이 船 大 工 을 이끌고 작업에 임했 다는 사실이다. 亂 中 日 記 의 다른 부분을 보면 黄 得 中 은 船 舶 과 銃 筒 用 鐵 材 의 運 搬 등도 담당 하고 있으며( 亂 中 日 記 丙 申 2월 18일 19일), 아마도 철재 목재의 조달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휘하에 耳 匠 등의 기술자가 편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세 가지 사례에서 李 舜 臣 의 軍 官 이 이들 船 大 工 를 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船 大 工 편성 구성은 李 舜 臣 軍 官 船 大 工 집단이며, 그 外 延 에 大 工 의 전문작업을 보조하는 잡역 부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c. 船 大 工 의 출장 작업 이어서 船 大 工 의 출장 작업에 대하여 다음의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 년( 宣 祖 29) 2월 6일. 李 舜 臣 은 耳 匠 ( 船 大 工 ) 10명을 巨 濟 島 로 보내 선박을 건조하도록 지시하였다( 사료 12). *이 사례에서 다음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李 舜 臣 은 閑 山 島 로 본거지를 옮겼다. 日 記 에 따르면 船 大 工 도 李 舜 臣 을 따라 閑 山 島 에서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 船 大 工 중에서 10명이 造 船 작업을 위하여 巨 濟 島 로 출장을 갔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李 舜 臣 휘 하의 船 大 工 은 巨 濟 島 이외의 각 鎭 營 의 船 倉 에도 작업을 하러 출장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石 工 亂 中 日 記 에는 石 工 ( 石 手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례 년( 宣 祖 25) 1월 16일. 城 底 ( 城 부근)의 土 兵 (토착 병졸) 朴 夢 世 가 石 手 ( 石 工 )를 인솔하고 先 生 院 1의 鎖 石 採 石 場 에 갔다( 사료 13).

19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19 (注) ①先生院 ; 省生院 또는 成生院이라고도 한다. 駅院의 하나. 현재 全羅南道 麗川郡 栗村面 新豐里. 사례 년(宣祖 25) 2월 15일. 石手들이 새로 쌓은 포구의 塹壕가 많이 무너졌으므로 처벌하기 로 하고 다시 쌓도록 했다( 사료 14). (사례 12)는 全羅左水營 주변의 土兵(토착 병졸)이 석공을 인솔하고 돌을 캐러 나갔다는 것 이다. 이 경우 土兵과 石工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①石工도 李舜臣 휘하에 편성되어 있었 고, 그들을 李舜臣의 명령에 따라 土兵이 인솔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船大工을 인솔한 것은 李 舜臣의 軍官이었는데 이 경우는 왜 土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②석공은 그 지역 의 土兵 휘하에 배속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앞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사례 13)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석공은 원래의 업무로서 참호공사(돌쌓기)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사례 12)에서 보았듯이 석공은 채석에서부터 돌쌓기까지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3. 弓匠 과 冶匠 弓匠이든 冶匠(제련기술자)이든 船大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출장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사례 를 다음에 들어보자. a. 弓匠의 출장 작업 사례 년(宣祖 29) 7월 7일. 弓匠 智伊와 춘도가 本營(全羅左水營)으로 돌아왔다( 사료 15). 이 사례에서 다음 사항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즉 이 시기에 李舜臣은 閑山島에 본거지 를 두고 있었다. 弓匠이 本營(全羅左水營)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들 弓匠이 활 만드는 일 때문 에 全羅左水營에서 閑山島로 출장을 가 있었으며, 작업이 끝났으므로 全羅左水營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 사실은 船大工이 巨濟島로 출장을 갔던 것과 동일한 문제이며, 左水營의 弓匠職人은 李舜臣 관할하의 鎭營으로 출장 작업을 가기도 했던 것이다.

20 2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b. 冶匠의 출장 작업 冶匠(제련기술자)의 출장 작업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례가 있다. 사례 년(宣祖 30) 10월 23일. 李舜臣은 冶匠 許莫同을 羅州로 보내려고 初更(오후 8시)이 끝 날 무렵 하인에게 부르러 보냈는데 복통 때문에 올 수 없었다고 한다( 사료 16). 이 사례의 마지막에 冶匠이 腹痛으로 李舜臣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제련 기술자 역시 全羅左水營에 있으면서 船大工 弓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李舜臣이 관할하는 각 지역으로 출장 작업을 나가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4. 湖左水營誌 에 보이는 기술자 집단 亂中日記 를 통하여 船大工(耳匠) 石工(石手) 弓匠 冶匠의 사례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163 1년(仁祖 9)에 저술된 湖左水營誌 에 의할 때 左水營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자가 편성되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耳匠 46名 火砲匠 45名 沙工(船頭) 48名 弓矢人(造弓匠) 37名 漆匠 8名 銀匠(金 銀 銅細工製造) 2名 扇子匠 26名 木手(木工) 30名 驄匠(葬送具 祭器製造) 3名 環刀匠 4名 筒箇匠(竹筒細工) 24名 刀子匠(小刀製造) 3名 鍮器匠(眞鍮器具製造) 1名 朱錫匠(朱錫は眞鍮の一種) 1名 竹席匠(竹皮の敷物細工) 10名 笠子匠 6名 官木手 3名 水鐵匠(銑鐵匠 ) 37名 沙鐵吹錬匠 10名 皮鐵匠(皮細工職人 ) 3名 磨造匠(研ぎ師 ) 3名 螺鈿匠 2名 蓋匠(屋根葺き職人) 2名 瓦匠(瓦職人) 6名 湖左水營誌 가 저술된 시점의 左水營의 실태는 李舜臣이 水使가 되었던 당시와는 약간의

21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21 차이가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壬辰倭亂 시기에 있어서 船大工(耳匠) 石工(石 手) 弓匠 冶匠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자들이 水軍에게 필요한 군수물자를 중심으로 하는 각종 물 품의 제조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水使 직속의 軍官 아래 편성되어 水軍의 수요에 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Ⅲ. 船軍 이 된 降倭 1. 투항하는 倭卒 과 그 이유 여기서는 투항했던 倭卒의 사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사례 년(宣祖 27) 10월 6일. 場門浦 永登浦海戰이 끝나고 李舜臣 휘하로 투항했던 倭卒 있음. 심문한 바 永登浦에 진을 친 시마즈(島津) 부대의 병졸이었다( 사료 17). 사례 년(宣祖 29) 1월 8일. 慶尚道 加德島 시마즈(島津) 부대의 병졸이 축성공사 등 혹독한 부 역을 견디지 못하고 閑山島의 李舜臣 휘하로 투항함. 李舜臣이 도망한 이유를 캐물었더니 그들 의 대장인 시마즈씨(島津氏)의 성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사료 18). 사례 년(宣祖 30) 7월 3일. 慶尚左兵使 成允文 휘하의 軍官이 降倭 2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 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병졸이라고 한다( 사료 19). 이들 사례의 降倭에 관하여 투항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마즈(島津) 부대의 경우(사 례 16, 17) 1594년 10월의 場門浦 永登浦海戰 무렵에는 巨濟島 永登浦에 倭城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히데요시(秀吉)를 日本國王에 封하는 明의 冊封使가 慶尚道로 갔을 때, 倭軍이 慶尚道 일대의 倭城을 파괴하고 朝鮮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시마즈 부대의 永登浦倭城도 파괴하게 되었고, 시마즈 부대는 加德島로 이동 했는데 이곳에서 다시 축성공사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시마즈 부대의 대장인 시마즈 타다쯔

22 2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네(島津忠恒)는 永登浦倭城 안에 공을 차는 정원과 茶室을 만들고 여러 다이묘들과 교제하는 일 에 밤낮을 보내고 있었다. 加德島로 이동한 뒤에도 시마즈 타다쯔네는 그곳에서도 축성공사를 시작하고 다시 축구장과 茶室을 만들었다. 降倭가 大將의 성격이 좋지 못하다 고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또 가토 기요마사의 병졸이 투항한 사례(사례 18)에 관하여 언급하자면, 기요마사 부대가 주 둔하고 있던 西生浦倭城도 시마즈 부대의 永登浦倭城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파괴했던 것이다. 그 러나 日明 강화교섭의 파탄에 따라 丁酉倭亂이 시작되자 기요마사는 다시 西生浦倭城의 수축에 착수하였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축성공사에 혹사당하던 병졸이 慶尚左兵使 成允文에게 투항했 던 것이다. 이들 사례에서 보이는 降倭의 특징은 도망이며, 慶尚道 友鹿洞의 투항장 沙也可(=金忠善)이 투항했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개별적으로 투항했던 것이며, 沙也可의 경우는 집단투항 이다. 다음으로 그 차이점에 관하여 지적해 두고자 한다. 2. 두 가지 유형의 투항 a. 降倭將 定住型 주지하다시피 沙也可는 加藤清正 부대의 선봉장이며, 1592년(宣祖 25) 4월 조선침입 직후에 휘하의 병졸을 이끌고 조선쪽에 항복한 인물이다. 沙也可는 朝鮮의 예의와 중화문물이 성행하는 모습을 흠모하여 휘하의 병졸을 이끌고 조선쪽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조선군에 종사하며 왜군과 싸워 공적을 올리고, 金忠善으로 개명하고 朝鮮에 뼈를 묻었으며, 자손은 友鹿洞에서 번영하였 던 것이다. 이 沙也可의 경우와 동일한 사례가 亂中雑錄 에도 보인다. 사례 19 경상도에 주둔 중이던 金向義 라는 이름의 倭將은 점점 심해지는 전투와 노역에 혐오감을 느끼고 慶尚右兵使 金應瑞에게 부하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 후 조선 측에 종사하며 전공을 세 우고 通政大夫(정3품의 宗親 文武官 儀賓 등의 堂上官 위계) 嘉善大夫(종2품의 宗親 儀儐 文 武官 등의 堂上官 위계)에 올랐으며, 密陽에 거주하면서 농사와 누에치기에 종사하였고 자손도 번창하였다( 사료 20). 沙也可와 金向義의 경우는 부하를 이끌고 투항했으며, 상대방의 戰力이 되었고, 안주의 땅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戰國争亂에서도 볼 수 있는 반란이다. 일본 쪽의 입장에서

23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23 보자면 배신이다. 따라서 조선쪽도 그에 상당하는 대우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유형의 降 倭 를 降 倭 將 定 住 型 이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降 倭 가 모두 降 倭 將 定 住 型 은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의 降 倭 가 있었다. b. 兵 卒 勞 役 型 이 유형의 降 倭 는 앞에서 본 시마즈 타다쯔네와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도망한 경우이며, 이들은 部 將 에게 이끌려 투항했던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도망한 것이다. 그 사례로서 시마즈 부대에서 투항했던 병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사례 년( 宣 祖 31) 5월. 요에몽( 與 右 衛 門 또는 要 汝 文 )이라는 이름의 시마즈 부대의 병졸이 조 선쪽에 투항했다. 都 元 帥 權 慄 이 조사한 결과, 그 자의 공술에 의하면 1요에몽( 與 右 衛 門 )은 나 이가 30세이고 弓 矢 와 放 砲 기량을 가진 병졸이라는 점, 2양친은 이미 타계했고, 형제는 모두 왜란의 여파에 말려들어 고생 중이며 요에몽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의 몸이라는 점, 3그리고 요에몽은 끝없이 계속되는 축성공사에서 사역하였고, 4그러한 때 조선쪽이 降 倭 를 후대한다는 말을 듣고 시마즈 진영에서 도망했던 것이다( 사료 21). 요에몽의 투항은 명백하게 沙 也 可 와 金 向 義 의 경우처럼 반란 배반이 아니라 단순한 개 별적인 도망이다. 이들 降 倭 는 조선쪽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이에 대하여 朝 鮮 王 朝 實 錄 에 다음의 사례가 있다. *사례 년( 宣 祖 27) 9월, 조선정부 수뇌는 降 倭 의 취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밝혔다. 즉 降 倭 중에서 才 技 가 있고, 더욱이 恭 順 하여 國 用 에 쓸모가 있는 자는 陣 中 에 머물도록 하고, 나 머지 降 倭 는 閑 山 島 의 水 軍 으로 보내서 船 軍 ( 格 軍 )으로 사역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료 22).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兵 卒 労 役 型 降 倭 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들 船 軍 ( 格 軍 )에게 주목 해 보자.

24 2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Ⅳ. 바다를 아는 鮑作人 1. 朝鮮 水軍 의 戰力 과 梢水軍 水軍 병력은 射手(弓手와 砲手)와 梢水軍(船頭와 格軍 船漕ぎ)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1595 년(宣祖 28) 朝鮮國王이 明에 회답했던 朝鮮 水軍의 실태를 도표로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 水軍의 戰力 -1595년(宣祖 28) 3월- 射手 (弓手 砲手) 統制使李舜臣配下 (含, 全羅左水營) 慶尚右水使裴楔配下 全羅右水使李億祺配下 慶尚左水使李守一配下 計 梢水軍 (船頭 格軍) 亀甲船 戰船 哨探船 717명 3072명 5척 26척 31척 55명 425명 31명 398명 2171명 240명 0척 0척 0척 10척 24척 3척 10척 24척 3척 1228명 5881명 5척 63척 68척 出典 : 萬曆 23년 3월 4일 朝鮮國王回咨( 事大文軌 12). 이 도표에서 다음 사항을 지적해 둔다. 제일 먼저 지적할 것은 射手에 비하여 梢水軍, 특히 格軍(船軍)의 인원수가 많다는 점이다. 射手 1228명에 대하여 梢水軍은 5881명이며, 梢水軍은 射手의 4.5배에 상당한다. 이것은 動力으 로 움직이는 현대의 선박과 달리 格軍(船軍)의 人力에 의존하는 선박의 경우 格軍(노젓는 병사) 의 숫자가 海戰에서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선박 1척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格軍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 도표에 올 린 軍船 전체의 수는 136척이며, 格軍은 5881명이다. 따라서 평균을 내면 軍船 136척=A 格軍 5881명=B, B/A=43명이 되는데, 軍船에는 亀甲船에서부터 哨探船 까지 크고 작은 선박이 있다. 이전에 내가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의 鄭鎭述씨로부터 들은 설명에 의하면, 亀甲船의 경우 노(櫓)는 좌우에 8本씩 합계 16本이며, 櫓 1本당 4명의 格軍이 배치(그 중 2인은 교대요원)된다. 따라서 亀甲船 1척의 格軍은 64명이라고 한다. 이 도표에 표시한 亀甲船은 5척, 戰船은 63척, 합계 68척이 된다. 따라서 여기에 배치되는 格 軍(노젓는 병사)는 68척 64명 4352명이 된다. 그리고 5881명(格軍=노젓는 병사 전체수)-4352명(亀甲船 戰船에 배치되는 格軍) 1529명이 哨探船

25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25 등 소형 선박에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들 格 軍 (노젓는 병사)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을까? 이들은 앞에서 말한 降 倭 외에 奴 婢 土 兵 鮑 作 人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鮑 作 人 에 대하여 서 술해 두고자 한다. 2. 鮑 作 人 이란 무엇인가? 鮑 作 人 이란 鮑 尺 人 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朝 鮮 総 督 府 가 작성한 朝 鮮 語 辞 典 에 의하면 鮑 尺 이란 물속에 들어가서 전복( 鮑 )을 채취하는 자 라고 되어 있다. 亂 中 日 記 癸 巳 3월의 메모에 도 鮑 作 으로 기록된 부분에 沿 海 人 이라는 注 記 가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鮑 作 人 이란 沿 海 를 생활터전으로 하는 海 民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朝 鮮 국가뿐만 아니라 육지의 일반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소외되고 있었던 것 이다. 그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사례 22 15세기 중엽, 濟 州 島 의 鮑 作 人 이 全 羅 慶 尚 양도의 후미진 해안으로 잠입하여 빈번하게 절도 를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전라도 관찰사 柳 洵 은 그들을 濟 州 島 로 돌려보 내려고 해도 생업에 종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취한 鮑 作 人 에 대한 대책은 1소 재지의 守 令 萬 戸 에게 명하여 鮑 作 人 의 선박에 字 號 를 붙이게 하고 全 羅 慶 尚 양도로 건너갈 때 路 引 ( 通 行 券 )을 발급하며, 만일 路 引 을 소지하지 않았거나 字 號 를 붙이지 않은 배를 타고 멋 대로 全 羅 慶 尚 양도를 출입하면 해적으로 간주하여 엄벌에 처할 것, 2아울러서 鮑 作 人 이 거주 하는 마을에 매년 그 인구를 등록하게 하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고하며, 그 사항을 다시 조정에 轉 報 하도록 할 것, 3 守 令 萬 戸 는 鮑 作 人 을 存 撫 (단속을 완화하다)할 수 없으며, 鮑 作 人 을 流 亡 하게 하면 이 사실을 守 令 萬 戸 등 관리의 업적평가에 참고하기로 하였다(사료23). *사례 년 ( 宣 祖 22), 景 轍 玄 蘇 宗 義 智 일행이 히데요시의 일본 전국통일을 축하하는 通 信 使 파 견을 조선쪽에 요청했을 때, 조선은 全 羅 道 珍 島 의 반란민 沙 火 同 의 縛 送 을 通 信 使 파견의 조건 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沙 火 同 은 지난 해 11월, 일본 해적을 끌어들여서 全 羅 道 高 興 郡 損 竹 島

26 2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를 습격하고 邊將 李太源을 살해한 인물이며, 그 후 五島에 잠적해 있었던 것이다.(사료24). 문제는 沙火同의 출신 내력이다. 朝鮮王朝實錄 에는 沙火同이라는 자가 있다. 그는 우리 나라 珍島 사람이다 (사료24)라고 기록했는데, 李廷馣의 行年日記 에 따르면 寶城 鮑作人 沙 火同 (사료25)의 출신지는 全羅南道 寶城이며, 신분은 鮑作人으로 되어 있다. 沙火同은 鮑作人 이라는 사실이 주목되는 것이다. 바닷가를 왕래하며 사는 鮑作人이었던 만큼 사료에는 그의 거 소가 全羅南道 珍島라거나 寶城이었던 것이다. 沙火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鮑作人은 全羅南道 해안지대의 몇몇 居所를 옮겨 다니면서 본업인 전복 채취 외에 절도행위를 감행하거나 해적행위에도 가담하였다. 이것도 鮑作人이 살아 가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들은 국가와 일반인들로부터 아웃사이더와 유사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3. 格軍 의 도망을 방조하는 鮑作人 亂中日記 에는 格軍(船軍)에 관한 기술이 많이 보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사례 년(宣祖 26) 2월 3일의 亂中日記 에 따르면, ①慶尚道에서 80명 정도의 格軍이 도망했다는 보고가 李舜臣에게 도착했다. ②도망자 중에는 向化人 金浩乞과 羅將(지방 관아의 하급관리) 金水男도 있었다. 이 경우 向 化人이란 倭軍에서 귀순한 자를 말하는데, 그런 이유로 인하여 向化人 金浩乞은 格軍이 되었다 고 생각되며, 또한 羅將 金水男도 어떤 이유 때문에 格軍에 배치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③慶尚右水營의 관리가 도망한 格軍의 捕捉에 나섰지만, 도망한 格軍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임무를 달성하지 않았다. ④이 보고를 받은 李舜臣은 配下의 軍官 李鳳壽 鄭思立 등을 파견하여 도망친 格軍 70명가 량을 붙잡아서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태우고, 이와 동시에 金浩乞과 金水男(이 들 두 명이 格軍 도주사건의 주동자라고 생각된다)을 처형했다(사료26). 이와 같은 格軍(노젓는 병졸) 도주에 鮑作人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례 년(宣祖 27) 5월 13일의 亂中日記 에 따르면,

27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27 1 黔 毛 浦 萬 戸 가, 慶 尚 右 水 使 元 均 의 관할 아래 있는 鮑 作 들이 格 軍 을 태우고 도망했는데, 현지에서 鮑 作 을 체포한 바 鮑 作 들은 元 均 이 주둔하는 곳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司 僕 1들을 보 내어 그들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元 均 이 크게 화를 내며 司 僕 들을 결박했다 고 李 舜 臣 에게 통보 하였다. 2이 때문에 李 舜 臣 은 軍 官 廬 潤 發 을 보내 司 僕 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사료27). ( 注 ) 1 司 僕 ; 司 僕 은 司 僕 寺 의 약칭. 즉 宮 中 의 輿 馬 厩 牧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아이다. 그러 나 여기서는 兼 司 僕 ( 禁 軍 의 하나)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서 다음 사례를 소개해 둔다. *사례 년( 宣 祖 27) 8월 26일의 亂 中 日 記 에 따르면, 1 興 陽 의 鮑 作 人 으로 莫 同 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長 興 의 軍 士 30명을 남몰래 자기 배에 태우고 도주시켰다. 2그 죄로 李 舜 臣 은 鮑 作 人 莫 同 을 처형하고 효수하였다(사료28). *이 사례에서 주목한 것은 鮑 作 人 이 格 軍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의 도주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 格 軍 은 왜 도주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4. 格 軍 이 도주하는 이유 李 舜 臣 은 1592년( 宣 祖 25) 7월 8일의 閑 山 島 海 戰 의 성과를 같은 달 15일자로 보고하였다( 李 舜 臣 壬 辰 状 草 萬 曆 20년 7월 15일). 그때 海 戰 으로 인한 사상자의 숫자도 보고하고 있다. 보 고에 따르면 사상자 전체는 132명이며, 그 내역은 格 軍 이 61명, 射 夫 7명, 기타가 15명이었다. 格 軍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그 이유는 전투상태로 들어가도 格 軍 은 싸움에 참가하 지 않고 오로지 노를 저을 뿐이며 포격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海 戰 은 格 軍 을 피로하게 만 들 뿐만 아니라 극한의 공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도 水 軍 은 格 軍 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李 舜 臣 의 고민이 있다.

28 2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5. 李 舜 臣 의 海 民 기용과 그 의미 지금까지 검토한 것처럼 格 軍 에 편성된 鮑 作 人 들은 스스로 도망을 치거나 다른 格 軍 의 도망 을 방조하는 등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鮑 作 人 을 水 軍 에 기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1592년( 宣 祖 25) 9월 1일의 釜 山 浦 海 戰 전황보고 속에서 전사자이기는 하지만 沙 工 鮑 作 金 叔 連 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壬 辰 狀 草 萬 曆 20년 9월 17일). 沙 工 이란 船 頭 를 말하며, 鮑 作 人 외에 沙 工 土 兵 水 軍 安 元 世 의 이름도 보인다. 土 兵 은 토착 병졸이며, 이들 역시 해안가 거주민이다. 그들은 자 신들의 생활체험에서 조류의 干 滿 이 심한 慶 尚 南 道 全 羅 南 道 해로와 암초의 소재를 잘 알고 있 었던 것이다. 李 舜 臣 으로서는 바다를 잘 알고 있는 이들 鮑 作 人 이 필요했으며, 그런 만큼 李 舜 臣 은 鮑 作 人 格 軍 들의 도주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亂 中 日 記 를 통해서 도적 절도를 감행하는 하층민, 左 水 營 에서 일하는 기술자( 職 人 ), 格 軍 ( 船 軍 )으로 편성된 降 倭, 鮑 作 人 등 해안가 거주민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도적 절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악행 에 속한다. 도주하는 格 軍 역시 水 軍 의 입장에서 보자 면 범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壬 辰 倭 亂 으로 인한 생활난과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명 과 생활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전쟁에서 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민중 모두가 절도 도적 도주 등의 행위를 감행한 것은 아니다. 全 羅 左 水 營 의 船 大 工 을 비롯한 기술자 집단은 그 업무를 통해서 水 軍 을 지탱해 갔다. 아울러서 鮑 作 人 등의 해안가 주민은 도주 등으로 인하여 格 軍 으로 징발되는 것에 거역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노력과 바다를 잘 아는 생활체험은 李 舜 臣 의 水 軍 을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鮑 作 人 등 해안가 주민 들 없이 水 軍 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반발하지만 협력도 한다. 이 양면성을 가진 鮑 作 人 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 여기에 李 舜 臣 의 역량이 있었다. 降 倭 로 눈길을 돌리면, 그들도 역시 민중이다.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군림하려는 야 망을 품고 壬 辰 倭 亂 을 일으켰지만, 降 倭 들은 그런 야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앞에서 시마즈 부대의 병졸 요에몽의 경우에 관하여 언급했지만, 兵 卒 労 役 型 降 倭 가 그와 같은 경우이다. 장기 간에 걸친 전투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축성공사 노역으로부터 벗어나 조선쪽의 厚 待 를 기대했지

29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29 만, 그들 대부분은 格軍으로 편성되어 노 젓기를 강요당하게 되었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노 력은 조선수군에 기여하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전쟁의 역사서에는 반드시 영웅 위인들에 관한 서술이 있다. 壬辰倭亂에 관한 역사서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쪽 인물로는 官人인 柳成龍, 무인인 李舜臣과 權慄, 의병장 郭再 祐 高敬命, 승려 의병장 松雲大師 등이 있으며, 일본 쪽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 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대부분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러나 전 쟁에 휘말린 이름도 없는 사람들, 전투를 그늘에서 지원해 준 사람들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민중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반드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제일로 삼았던 것 은 아니다. 먼저 자신의 생명과 생활을 우선시 한다. 민중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 리하여 그들은 어떤 생활방식을 취했는가? 이번의 이야기는 이러한 시각에 관한 시도이다. 亂中日記 의 世界 와 李舜臣 關係史料 사료 1 八日庚申, 晴, 因南海往來人趙鵬, 聞賊犯光陽, 光陽之人, 已爲焚蕩官舎倉庫云, 不勝怪恠, 順天 光陽, 即欲發送, 路傳不可信, 停之, ( 細字双行 蛇渡軍官金鵬萬, 探知次送之) (李舜臣 亂 中日記 癸巳 7월 8일). 사료 2 九日辛酉, 晴, 南海又來傳云, 光陽 順天已爲焚蕩云, 故光陽 順天及宋希立 金得龍 鄭思 立等, 發送李渫, 昨日先送, 聞來痛入骨髄, 不能措語, 與右令公及慶尚令公論事, (中略) 三更末, 營探候船入來, 傳賊奇, 則非倭賊, 嶺南避亂之人, 假著倭形, 突入光陽, 閭閻焚蕩云, 則不勝喜幸, 晋陽之事亦虛云, 然晋陽事, 萬無是理( 亂中日記 癸巳 7월 9일). 사료 3 十日壬戌, 晴, 晩金鵬萬自豆恥來言, 光陽之事實矣, 而但賊倭百餘名, 自陶灘 越渡, 已犯 光陽云, 然就觀所爲, 則銃筒一無度放之云, 倭而萬無不放炮之理矣, (中略) 昏呉水自巨濟加参島(加助島)來告曰, 賊船内外不見云, 又曰, 被虜人逃還言内, 賊徒無数, 還

30 3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向昌原等地云, 然人言未可信矣 ( 亂中日記 癸巳 7월 11일). 사료 4 十一日癸亥, 晴, 蛇渡僉使(金浣)還來言内, 豆恥渡賊事虛傳, 而光陽之變著倭服, 自相作亂 云, 順天 樂安已盡焚蕩云, 不勝痛憤々, 夕呉壽成, 自光陽還來, 告曰, 光陽賊事, 皆晋州及縣人, 出此兇計, 官庫寂然, 閭里一空, 終日回觀, 無一人云, 順天尤甚, 而樂安次之云 ( 亂中日記 癸巳 7월 11일). 사료 5 廿五日癸酉, 晴, 因駐同處, 朝食時, 唐浦鮑作偸放牛牽去, 而虛警曰, 賊來々々, 餘已知其 誣, 拿虛警者二名, 即令斬梟, 軍中大定 ( 亂中日記 丁酉 8월 25일). 사료 6 全羅道觀察使李廷馣馳啓曰, 下道一帯不逞之徒, 乗時作亂打破官庫, 公然搶掠云 ( 朝鮮王 朝宣祖實錄 宣祖 26년 8월 己丑). 사료 7 六月二十二日乙巳, 晴, 戰船始坐塊, 耳匠二百十四名, 運役内營七十二名, 防踏三十五名, 蛇渡二十五名, 鹿島十五名, 鉢浦十二名, 呂島十五名, 順天十名, 樂安五名, 興陽 寶城各十名, 防 踏則初送十五名, 軍官色吏論罪, (이하, 略) ( 亂中日記 癸巳 6월 22일). 사료 8 二十三日丙午, 晴, 早朝點付耳匠等, 則無一名干云, 新船本板畢造 ( 亂中日記 癸巳 6월 23일). 사료 9 正月二十四日癸卯, 晴且暖, 朝山役事, 耳匠四十一名, 宋德馹領去 ( 亂中日記 甲午 1월 24일). 사료 10

31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31 7일). 十 一 月 二 十 七 日 乙 未, 晴, 金 應 謙 以 二 年 木 斫 來 事, 耳 匠 五 名 率 去 ( 亂 中 日 記 乙 未 11월 2 *사료 11 十 月 三 十 日 丁 亥, 晴 而 東 風, 多 有 雨 態, ( 中 略 ) 早 使 黄 得 中, 率 耳 匠 往 于 島 北 峯 底, 造 家 材 木 斫 來 ( 亂 中 日 記 丁 酉 10월 30일). *사료 12 二 月 初 六 日 癸 卯, 陰, 暁 耳 匠 十 名, 送 于 巨 濟, 造 船 事 教 之 ( 亂 中 日 記 丙 申 2월 6일). *사료 13 正 月 十 六 日 丁 丑, 晴, ( 中 略 ) 城 底 土 兵 朴 夢 世, 以 石 手 往 先 生 院 鎖 石 浮 出 處 ( 亂 中 日 記 壬 辰 1월 16일). *사료 14 二 月 十 五 日 丙 午, 大 風 雨, ( 中 略 ) 石 手 等 以 新 築 浦 坑 多 致 頽 落 決 罪, 使 之 更 築 ( 亂 中 日 記 壬 辰 2월 15일). *사료 15 七 月 七 日 壬 申, 晴, ( 中 略 ) 夕, 弓 匠 智 伊 及 春 卜, 夕 歸 營 ( 亂 中 日 記 丙 申 7월 7일). *사료 16 十 月 二 十 三 日 庚 辰, 晴, ( 中 略 ) 冶 匠 許 莫 同 往 于 羅 州, 初 更 末 使 奴 招 之, 則 腹 痛 云 ( 亂 中 日 記 丁 酉 10월 23일). *사료 17 倭 奴 一 名, 來 到 漆 川 山 麓, 欲 爲 投 降, 故 昆 陽 郡 守 招 降 載 船, 問 之 則 乃 永 登 倭 也 ( 亂 中 日 記 甲 午 10월 6일). *사료 18

32 3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早降倭五名入來, 故問其來由, 則以①其將倭性悪, 役且煩重, 逃來投降云, 収其大小刀, 藏 之楼上, 實非釜山倭也, 乃加德沈安屯(島津殿)所率云 ( 亂中日記 丙申 1월 8일). 사료 19 左兵使, 使其軍官押降倭二名而來, 乃清正所率云 ( 亂中日記 丁酉 7월 3일). 사료 20 嶺南諸屯倭賊, 厭其久戍労役, 多有降附我國者, 金應瑞所招幾至百餘名, 其酋曰金向義, 向 義與其衆多立戰功, 官至通政嘉善, 其後, 二三年間, 降倭等屯居密陽之地, 務農桑長子孫, 名其里 降倭鎭 (趙慶男 亂中雑錄 甲午 6월). 사료 21 備辺司啓 曰, 都元帥權慄, 上送降倭要汝文称名者, 捧招入 啓, 此倭則付諸也汝文, 使之 同在何如, 其招曰, 年三十, 居博多州沈安頓吾軍, 壬辰, 過海出來, 住在釜山, 三年後還歸本土, 今正月間, 又爲出來, 來住釜山浦, 粗知發矢, 且解放砲, 行軍時負旗前導, 去月間, 朝鮮曾有相知人來言, 朝 鮮厚待降倭云, 故來降, 父母皆没, 只有三箇同生, 而一在釜山, 二在日本, 沈安頓吾所率軍兵, 元 是三萬餘名, 軍糧則藏置十倉, 而非俺所管, 不能詳知其数, 朝鮮男女時在釜山者, 各二千餘名, 而 糧食則大概計数摠給, 不知實数, 當初出來時, 大船三十餘隻, 各載軍糧八九十石出來, 其後, 間或 運到, 且於朝鮮地方, 搶得而食之, 朝鮮之人, 皆給腰牌, 出入陣中, 而雖有腰牌者, 若有罪, 即殺之, 釜山両處城子, 時方修築, 軍卒役事則所食, 一日三時, 尚未畢役, 頃日蔚山 天兵接戰時, 沈安頓 吾在釜山, 聞接戰之奇, 簡率精兵三百餘名, 向蔚山, 中路還來, 倭衆發動期則皆云, 當在八九月間, 而迷劣卒倭, 不能詳知, 傳曰, 依啓 ( 朝鮮王朝宣祖實錄 宣祖 31년 5월 己丑). 사료 22 備辺司啓曰, 降倭初欲入送于深僻處, 皆令上送京中, 仍送両界, 其数已多, 非徒道路傳送之 際, 貽弊多端, 両界郡邑, 一様残破, 許多降倭, 盡皆入送, 亦非物力之所堪, 今後來降, 而有其才技, 恭順可使者, 留置陣中, 其餘則収其刀釼, 入送于閑山島舟師所在, 分置諸船, 以爲格軍, 如有情状 可疑者, 令諸將登時善處, 上従之 ( 朝鮮王朝宣祖實錄 宣祖 27년 9월 己丑).

33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33 사료 23 兵曹據全羅道觀察使柳洵啓本啓, 鮑作人等自濟州而來, 散處全羅, 慶尚兩道海曲, 潛行剽 竊, 其漸可慮, 但時無顯然罪状, 治罪爲難, 且雖欲刷還本土, 必不安業, 請令所在官守令 萬戸, 於 船隻字號著標, 入海時, 給路引, 如無路引, 或騎無標船, 而任意出入, 則論以海賊, 置之重典, 令所 居邑, 毎歳抄錄人口, 報觀察使轉啓, 若守令 萬戸, 不能存撫, 致令流移, 請於殿最, 憑考施行, 從 之 ( 朝鮮王朝成宗實錄 成宗 14년 12월 乙丑). 사료 24 全羅道左水營鎭撫金介同 李彦世等, 於去年春損竹島之戰, 爲倭擄去, 轉賣南蕃國, 因逃入 中國地界, 盤問解送北京, 謝恩使柳典(土ヘン, 大漢和5165)等之還也, 順付以來, 介同等之言曰, 有 沙火同者, 我國珍島人也, 被擄而去, 因効忠於倭奴, 謂介同曰, 此地風俗人心甚好, 可居也, 汝可 無懼, 朝鮮則賦役甚苦, 大小全鰒, 無限徴出, 不勝支當, 因留居此, 前年初, 欲犯馬島 加里浦, 風 候不順, 泊于損竹島, 此乃我之所嚮導也云云, 其島名曰五島, 周回數日程, 人居稠密, 若一大州, 我國人被擄者居多, 有船五百餘艘, 全羅右道伏兵船, 全數虜去, 故弓箭 銃筒, 亦皆輸去, 而徒爲積 置, 不知試用, 只兒童爲戲具而已 ( 朝鮮王朝宣祖實錄 宣祖 21년 11월 丙寅). 사료 25 往在丁亥(1587년), 湖南之變, 寶城鮑作人沙火同者, 被擄入倭國, 向導作耗, 辺警不絶, 人心 痛憤, 朝議以爲, 若刷還此人, 則當使通信云 (李廷馣 行年日記 己丑 春, 四留斎集 8 所収). 사료 26 初三日戊子, 晴, 諸將准會, 而寶城(金得光)未及, 東上房出坐, 與順天 樂安 光陽(魚泳潭)論 約有時, 是日, 嶺南來向化金浩乞 羅將金水男等置簿格軍八十餘名, 告以逃去, 多受賂物不捉來, 故潛遣軍官李鳳壽 鄭思立等, 捜捉七十餘名分船, 浩乞 金水男等, 即日行刑, 自戌時, 風雨大作, 諸船艱難救護 ( 亂中日記 癸巳 2월 3일). 사료 27 十三日庚寅, 晴, 是日, 因黔毛浦萬戸報, 慶尚右水使所屬鮑作等格軍逃載, 現捉鮑作則隠在 於元水使所駐處云, 故送司僕等推捉之際, 元水使大怒, 司僕等結縛云, 故送廬潤發解之 ( 亂中日 記 甲午 5월 13일).

34 3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사료 28 廿六日辛未, 晴, 朝各官浦公事題送, 興陽鮑作莫同長興軍三十名潛載其船逃出之罪, 行刑梟 示 ( 亂中日記 甲午 8월 26일).

35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35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기타지마 만지 (北島万次) Ⅰ. 江戶時代 의 조선 인식 및 朝鮮征伐 사관 1. 江戶時代 전기, 17세기 a) 호리 세이이(堀正意)의 朝鮮征伐記 에도시대 전기에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저서를 정리한 것으로 호리 세이이(堀正意)의 朝鮮征伐記 가 있다. 堀正意는 주자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제자였다. 세이카는 정 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연행된 조선 주자학자 姜沆과 학문상 교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호리 세이이는 후지와라 세이카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호리 세이이의 저서 朝鮮征伐記 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朝鮮 征伐 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①히데요시의 조선 류큐 필리핀에 대한 入貢 요구 ②조선침략에 있어서 전쟁 국면의 추이 ③日明 강화교섭이 파탄에 이른 전말 등을 기 록 문서 등의 사료를 사용하여 서술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동아시아 정복 에 눈을 돌린 이유는 1590년 조선 국왕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히데요시가 자신의 이름을 삼국 (天竺 唐 本朝=日本)에 빛내고 싶다 고 기술한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 츠루 미츠(鶴松)의 갑작스런 죽음을 직접적인 계기로 명 정복을 결의했다고 한다.

36 3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b)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本朝通鑑 하야시 라잔도 역시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이다. 라잔은 本朝通鑑 을 저술하고, 호리 세이 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의 征明 결의의 직접적인 원인을 츠루마츠의 갑작스런 죽음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히데요시의 부장 사이의 征明 계획에 대해서 의문이 있던 점을 지적하 고, 히데요시의 해외정복 계획을 비판하고 있다. c) 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의 武家事紀 하야시 라잔은 나중에 에도바쿠후의 儒官이 된 린가(林家)의 시조가 되었으며, 히데요시 비판 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도 나왔다. 武家事紀 를 저술 한 야마가 소코는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고,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武威를 빛낸 것은 神功皇后(Ji nguu kougou) 때부터의 일이다 라고 하며 神功皇后의 三韓征伐 전설과 히데요시의 朝鮮征 伐 을 오버랩 시킨 노골적인 조선멸시관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에도시대 학자 사이에 있어서 조 선멸시관의 원류이다. d) 시마즈가(島津家) 편찬 征韓錄 시마즈가의 征韓録 은 조선침략에 참전했던 다이묘 가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시 마즈 가문과 관계있는 기록과 문서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문헌적인 가치는 있지만, 그 편찬 의도가 우리 선조는 조선 정벌을 수행하고 武威를 빛냈다 는 조선침략에서 시마즈 가문의 공명 성을 과시한 것이었다. e) 카이바라 엣켄(貝原益軒), 柳成龍의 懲毖錄 서문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柳成龍의 懲毖録 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貝原益軒의 소개 서문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친 것은 5가지 용병법(義兵 応兵 貪兵 驕兵 忿兵) 중 貪兵이며 驕兵과 忿 兵도 겸한 것으로서 君子가 이용하는 義兵 応兵은 아니다 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상 17세기에 있어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인식을 열거하였는데, 히데요시를 높 게 평가한 것은 山鹿素行 뿐이었다. 그런데 江戸時代 후기에 이르면 그 인식이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

37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江 戶 時 代 중기, 18세기 a) 아라이 하쿠세키( 新 井 白 石 )의 朝 鮮 聘 使 後 議 조선통신사 접대를 간소화시킨 것으로 알려진 아라이 하쿠세키( 新 井 白 石 )는 조선은 再 造 之 恩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이 조선에서 철병하고, 국교를 맺어 조선을 재생시킨 은혜)을 결코 잊 어서는 안 되며, 또한 오래도록 교린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라는 아니라고 하며 노골적인 조선멸 시관을 드러냈다. b) 나카이 치쿠잔( 中 井 竹 山 ), 소보 키겐( 草 茅 危 言 ) 유학자 나카이 치쿠잔은 조선은 神 功 皇 后 의 신라원정 이후 일본의 속국으로서 조공하고 있 었는데, 히데요시가 조선에 이유 없이 병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후 조선은 일본에 조공하지 않 고 그에 대신하여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만 국가의 재정을 기울여서까지 대접할 나라는 아니다 라고 하며 야마가 소코 및 아라이 하쿠세 키와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c)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 居 宣 長 ), 카라오사메노 우레타미고토( 馭 戎 慨 言 )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皇 國 日 本 중심의 입장에 서서 馭 戎 慨 言 을 저술하였다. 그 속에 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히데요시가 偉 業 중도에 사망한 것은 유감 이 라고 하고, 더욱이 히데요시는 皇 國 日 本 의 광명을 조선 중국에까지 빛냈다 고 칭송하고 있다. d) 하야시 시헤이( 林 子 平 ), 三 國 通 覧 圖 說 海 國 兵 談 18세기 후반, 구미열강이 동아시아 각국으로 몰려 왔다. 여기서 海 防 問 題 가 발생한다. 海 防 과 文 武 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하야시 시헤이는 조선 문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神 功 皇 后 의 삼 한정벌 과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을 神 武 一 統 이래의 武 徳 으로 평가하였다. e) 혼다 도시아키라( 本 多 利 明 ), 經 世 秘 策 혼다 도시아키라는 하야시 시헤이의 뒤를 이어 海 防 문제를 논하였다. 거기서 혼다 도시아키 라는 에조치( 蝦 夷 ) 사할린( 樺 太 ) 캄차카의 영유 통치를 주장하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서 는 중국까지를 시야에 넣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평가하였다.

38 3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f) 야마자키 히사나가( 山 崎 尙 長 ), 兩 國 壬 辰 實 記 야마자키 히사나가는 쓰시마번의 釜 山 鎭 代 官 이었다. 兩 國 壬 辰 實 記 는 조선침략의 발단에 서부터 에도바쿠후 성립기에 있어서 양국의 우호관계 성취까지의 과정을 朝 鮮 征 伐 記 朝 鮮 太 平 記 (일본 측의 기록), 柳 成 龍 著 懲 毖 録 (조선 측의 기록)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 며, 兩 國 壬 辰 實 記 성립 배경에는 쓰시마번의 儒 臣 朝 岡 一 學 ( 新 井 白 石 과 조선통신사 접대를 둘러싸고 논쟁했던 쓰시마번의 儒 臣 雨 森 芳 洲 의 제자)의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사에 관한 박학다 식함이 있다. 3. 江 戶 時 代 후기, 19세기 a) 라이 산요( 賴 山 陽 ), 日 本 外 史 라이 산요는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 공명을 바라는 마음과 전투할 힘이 남아 있었고, 그것을 밖으로 돌려서 다이묘 권력을 꺾은 것이 조선출병이다 라고 도요토미 정권의 본질에서부터 그 원인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 렵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여기는 입장에서 히데요시의 침략을 朝 鮮 征 伐 로 높이 평가하는 학 자가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b) 사토 노부히로( 佐 藤 信 淵 ), 混 同 秘 策 사토 노부히로는 萬 國 은 황국 일본이 根 本 이다 라는 초국가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중국 조선 등 주변 각국을 정복대상으로 하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c)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會 澤 正 志 齋 ), 退 食 間 話 新 論 水 戸 學 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退 食 間 話 중에서 神 功 皇 后 가 三 韓 을 정벌하고 부터 조선이 복종하였고, (중략) 히데요시는 조선을 치고 해외에 武 威 를 떨쳤다 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평 가하였다. 그리고 에도바쿠후가 異 國 船 打 拂 令 (외국배가 접근해 오면 전부 격퇴하라)을 계기로 저 술한 新 論 에서는 조선침략 때 수군이 패배했던 교훈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水 戸 學 에 있어서 히 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관심사가 개국 전야의 국방 및 군사적 요청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d) 요시다 쇼인( 吉 田 松 陰 ), 1855( 安 政 2)년 4월 24일, 兄 梅 太 郞 宛 書 翰 ( 吉 田 松 陰 全 集 第 7 卷 ) 이미 페리가 내항하여 일본이 개국한 이 시기에, 요시다 쇼인은 일본 국내에서 전쟁의 무의미

39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39 를 역설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교역에서 손해를 본 부분을 조선 만주를 손에 넣음으로써 보충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제안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를 돌아보고 히데요시의 동아시아 정복 계획의 좌절을 유감으로 여겼다. 4. 가와구치 쵸쥬( 川口長孺 )의 征韓偉略 征韓偉略 의 내용은 ①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조일관계 ②노부나가(信長)가 지배할 당시에 히데요시는 이미 명 조선정복의 의지가 있었던 점 ③히데요시가 쓰시마의 소오씨(宗氏)에게 조 선복속 교섭을 命한 경위 ④제1차 조선침략의 전말 ⑤일명강화교섭과 그 파탄 ⑥제2차 침략의 전말을 기술하고 있다. 그 특징은 ① 朝鮮征伐記 西征日記 宗氏家記 征韓録 懲毖録 明史 兩朝平攘録 등의 기록류를 기본사료로 하고 적절히 사료비판을 가한 실증적인 밀 도가 높다는 점 ②전체적인 논조는 히데요시의 征韓偉績 을 칭송한 책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 나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기본적인 줄거리를 정리한 책이며, 근대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 략사 연구에 대한 영향이 크고, 근대의 역사학은 가와구치 쵸쥬가 기술했던 줄거리에 토대를 두 고, 여기에 새로운 시각을 추가한 征韓偉略 을 적극적 혹은 비판적으로 섭취한 것이다. Ⅱ. 근대역사학에서 朝鮮征伐 사관과 文祿慶長 の役 연구 1. 朝鮮征伐 사관과 국위선양 a) 木下眞弘著 豊太閤征外新史 (1893년 간행) 이 저서에서 木下真弘은 1592년 조선침략의 발단에서 다음해 1월 평양전투 직전까지를 사료 를 이용하여 서술하였다. b) 松本愛重編 豊太閤征韓秘録 (1894年刊) 松本愛重의 이 작업은 사료집으로 堀正意의 朝鮮征伐記, 松浦鎮信의 家臣 吉野甚五左衛 門의 吉野日記, 立花宗茂의 家臣 天野源右衛門의 南大門合戰記, 花園妙心寺의 승려 天荆 의 西征日記 를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그 편찬 의도이다. 즉 ①지금까 지 일본은 원정 병사를 출병시킨 것이 3회이다. 그것은 神功皇后의 삼한정벌, 斉明天皇 시기의

40 4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百済救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다. ②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조선을 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 니라 조선에게 길을 빌려서 중국을 침공하고, 나아가 유럽도 정복하여 해외에 武威를 빛내려던 것이라고 히데요시의 위업을 평가하였다. ③그리고 때는 마침 청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였고, 히데 요시의 위업을 소개하고 그것을 청일전쟁의 戰意 앙양에 기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2. 官學 아카데미즘과 朝鮮征伐 사관 a) 東京帝國大學史學會編 弘安文祿征戰偉績 (1905년 간행) 이 책은 13세기의 몽골침략과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논문집이다. 편찬 의 의도는 러일 전쟁의 戰意 앙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앞의 松本愛重의 작업은 개인작업이었지만 이것은 대학 역사학회의 작업이다. 史學會 회장 시게노 야스쯔구(重野安繹)의 머리말에 의하면 몽골침 략과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의 위업을 칭송하고, 이 논문집을 러일전쟁에서 싸우는 군대에 위문품 으로 보내며, 아울러서 역사교육의 소재로서도 기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도에 적합한 것일까? 예를 들면 鈴木圓二의 논문 蔚山籠城状況 에서는 울산 농성에 관 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의 문서를 소개한 후 식량부족에 괴로 워하면서 농성전에서 승리했던 사실을 예로 들면서, 오늘날(1905년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군과 싸워 연전연승하고 있다. 기요마사 시대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일본군은 무기의 진보, 작전계획의 치밀함이 있지만 그 무용은 기요마사의 용맹함에 뒤지지 않는다 고 서술하였다. 또한 芝葛盛의 논문 文祿役に於ける占領地収税の一斑 에서는 함경남도에서 나베시마 나오 시게(鍋島直茂)가 조선 농민이 조세징수를 위하여 작성한 朝鮮國租税牒 을 소개하고, 朝鮮國 租税牒 의 작성은 나베시마 등 일본군의 恩威가 철저하고, 백성들이 잘 복종한 것을 말해준다 고 하였다. 아울러서 八代國治의 논문 文祿役に於ける俘虜の待遇 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잡은 조선왕 자의 대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 후 일명강화교섭 때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왕자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때 왕자는 기요마사 및 나오시게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을 감사 하게 여겼다. 이에 대하여 八代는 가토 기요마사도 나베시마 나오시게도 인자한 인물이며, 그것 은 일본 국민의 천성이다. 러일전쟁에서 포로에게도 이러한 동정을 베풀 것 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각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戰意 앙양에 기여하는 서술이 있지만, 각 논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료의 취급방법과 논점 제시이다. 사료의 취급방법에 대하여 서술하자면, 앞에서 예로 든 가와구치 쵸쥬의 征韓偉略 의 사료는 거의가 기록류이다.

41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1 이 기록류에는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따라서 종군했던 天荆의 西征日記, 자신 의 체험을 기초로 정리한 조선 영의정 柳成龍의 懲毖録 등 리얼타임(실시간)으로 작성된 사료 도 있다면, 朝鮮征伐記 宗氏家記 征韓録 明史 兩朝平攘録 등 나중에 편찬된 사료도 많 이 포함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弘安文祿征戰偉績 의 각론에서는, 예를 들어 田中義成 豊太閤が外征の大目 的を示したる文書 에서는 1592년(天正 20)5월 18일 히데요시가 関白 도요토미 히데쯔구(豊臣秀 次)에게 보낸 대륙정복구상 25개조의 覺覚書(前田尊經閣文庫所蔵文書)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岡田正之의 文祿役に於ける我戰闘力 은 毛利家文書 鍋島家文書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조선침입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고문서는 일기와 마찬가지로 리얼타임(실시간)의 사료 이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바로 이 점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보다는 진보된 측면이 보인다. 다음으로 논점 제시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그 첫 번째는 히데요시의 대륙출병의 의도 목적에 관해서이다. 히데요시는 일본 조선 중국의 3국뿐만 아니라 天竺 南蛮까지 정복하려는 의도가 있었고(田中義成 前掲論文 三上参次 文祿役に於ける講和条件 ), 여기에서 히데요시의 대륙출 병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이 나온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의도가 문 서상에 나타난 시기는 1586년(天正 14)이라는 설이 나왔다(岡田正之 전게 논문). 이것은 1960년 대에 岩澤愿彦이 伊予小松一柳文書 를 이용하여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의도가 문서상에 나타났 던 시기는 1585년(天正 13)이라는 설을 주장할 때까지 정설이 되었다. 두 번째는 히데요시의 군사정책과 일본군의 행동에 관한 문제이다. 히데요시는 쓰시마의 소 오씨를 매개로 하여 조선이 복속될지 여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조선의 태도 여하를 불 문하고 조선으로 출병한 경위를 지적하였다(岡田正之前掲論文). 여기에서 豊臣政権 宗氏, 그리 고 조선의 3자 관계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제시되었다. 또한 침략 당초에 일본군이 조선 농민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농경에 힘쓸 것을 명령한 목적은 조세와 병량 징수(三浦周行 豊太閤の軍律 芝葛盛 전게 논문)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 측에 의병을 봉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전쟁 국면 전체와 관련된 문제로 발전해 갔다. 세 번째, 연행된 조선인 포로 문제이다. 조선 陶工의 일본 연행이 일본 도예공업의 발달을 초 래하였다고 하지만(平井鏗二郎 文祿役の我が工芸に及ぼせる影響 ), 그것은 침략에 의한 문화 의 약탈 전파였다. 이 포로에 대한 연구는 나중에 内藤雋輔가 규명하였다. 네 번째, 침략에서 禪僧에 관계된 문제이다. 小早川隆景에 종군한 安國寺 恵瓊은 통역자 육 성을 위하여 조선인에게 일본의 언어와 풍습을 강요하고 조선 명의 서적을 강탈하였다. 더욱이 히데요시의 막부 아래 西笑承兌 玄圃霊三 惟杏永哲 등 京都 五山의 高僧이 비서 겸 참모로 수

42 4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행했던 점을 지적하였다(辻善之助 安國寺恵瓊の書簡の一節 ). 따라서 조선침략에는 武家 뿐만 아니라 禪宗의 禪僧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문제가 나온다. 다섯 번째, 무기 선박 등 군사기술에 관한 문제이다(岡田正之 전게 논문). 이 논점에 관해서 는 나중에 有馬成甫의 朝鮮役水軍史 와 일본참모본부의 日本戰史 朝鮮役 등에서 군사적 관 심으로 계승되어 간다. 여섯 번째, 도요토미 정권의 외교문서에 관한 문제이다. 히데요시가 필리핀 高山國에게 복속 을 강요했던 문서가 있다는 사실은 도요토미 정권의 대외관계를 일본 조선 명의 3국뿐만 아니 라 동아시아 전역을 포착하는 관점으로서 제시하였다(村上直次郎 豊臣秀吉フィリッピン諸島并に 台湾の入貢を促す). 이런 시각은 나중에 池內宏이 더욱 깊이 있는 논점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일곱 번째, 조선침략에 참전했던 여러 다이묘의 戰功 과시에 관한 문제이다. 시마즈 가문이 세운 高野山朝鮮陣の供養碑 는 전사한 시마즈 가문의 가신 및 조선 명의 병사를 공양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지만, 이 비석에서 시마즈 가문의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사천에서 세운 전공 을 과시하고 있다(黒板勝美 高野山朝鮮陣の供養碑 ). 나중에 시마즈 가문은 征韓録 을 편찬 했고 다른 여러 다이묘 가문도 동일한 의도로 戰功記를 편찬하는데, 여기에서 여러 다이묘 가문 에게 있어서 조선침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하는 논점이 제시되었다. b) 辻善之助 海外交通史話 (1917년 간행) 田中義成 豊臣時代史 (1925년 간행) 辻 田中 2명은 이 저서에서 히데요시의 해외파병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히데 요시는 명과의 勘合貿易 활동을 희망하였고, 조선에게 그 알선을 요구하였는데 조선이 이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을 征伐 하였다. 이것이 역사학에서 朝鮮征伐 의 논리를 주장한 것이었 다. 이윽고 이 학설은 池內宏 田保橋潔 中村栄孝 등이 비판하게 되었다. c) 補論, 朝鮮征伐 과 文祿慶長の役 의 호칭에 대해서 石原道博 文祿慶長の役 (1963년 간행)은 朝鮮征伐 에서 文祿慶長の役 까지 호칭의 변화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04~05년의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의 한일합방이 실현되자 (중략) 지금까지 적으로 보았 던 조선인이 일본의 동포가 되었기 때문에 (중략) 조선정벌이라는 표현을 버리고 文祿慶長의 役 이 되었다 (p.21)고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름 아닌 창씨개명의 강요를 비롯한 이른바 内鮮一 体 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이 이후 文祿慶長の役 이라는 호칭이 정착하게 되었다.

43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池內宏 文祿慶長の 役正編 第 1 (1914년 간행) 文祿慶長 の 役別編 第1 (1936년 간행) a) 池內宏의 연구 구상은 ①조선침략 전체의 통론을 正編, ②침략 개시 후 일본군의 상세한 행동을 別編, ③사실 에 대해서 논증을 요하는 사항을 付編 으로 하여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사를 通史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이 작업의 특징은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히데요시의 전체적인 조선침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b) 文祿慶長の役正編 第1 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의식 속에서 동아시아 정복의 스케줄이 어 떻게 구체화되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이케우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1585 년 일본 전국을 평정한 후, 명을 정복할 생각이 있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에게 이야 기했다. ②큐슈의 시마즈씨 토벌을 앞둔 1586년, 히데요시는 安國寺의 에케이(恵瓊)와 구로다 요 시다카(黒田孝高)에게 시마즈씨를 복속시킨 후 명을 정복할 계획이 있다고 하였다. ③큐슈 정복 과 하카다(博多) 부흥으로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각국을 복속시키는 구상을 세우고 있다. ④1589 년,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広)의 領地인 아이즈(會津)를 빼앗은 일에 대하여, 이를 비난했던 히데요시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명까지 히데요시의 승인에 따라 領地 를 주는 견해를 비치고, 일본 통일의 연장선상에서 명 정복을 계획하였다. ⑤1590년,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서한에 명 정복의 의도를 나타내었고, 조선이 앞장설 것을 명령했다. 두 번째, 히데요시의 해외출병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이다. 그 동기에 대해서 이케우치는 지금 까지 ①사랑하는 아들 쯔루마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기분전환을 외국정벌에서 구하고 국 내통일의 여세를 해외로 전가하려던 것이라는 설(堀正意 林羅山), ②쓸데없는 병사를 동원했던 貪兵 驕兵說(貝原益軒), ③조선을 매개로 명에게 勘合貿易 부활을 요구했고, 조선의 거절로 조 선정벌에 이르렀다는 설(辻善之助 田中義成)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케우치는 히데요시의 동기에 대해서 佳名을 삼국(唐 南蛮 天竺)에 드날리고 후세에 남기려는 공명심에 있다고 주장하 였다. 그리고 이케우치는 히데요시의 당면한 목적은 명 정복이며, 조선국왕의 江戶 방문과 복속은 그 첫걸음이었고, 히데요시에게 朝鮮征伐 의 의지는 없었다고 朝鮮征伐 설을 부정하였다. 세 번째, 쓰시마 소오씨(宗氏)를 통한 대조선 복속 교섭과 조선출병 수행에 이르는 사정이다.

44 4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여기서 히데요시와 조선 사이에 끼어 고민하는 쓰시마의 실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 서술한 내용에 대해서 이케우치는 일본 조선 쌍방의 사료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등 南蛮 사료도 이용하여 깊이 있는 논증을 하였다. c) 文祿慶長の役別編 第1 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①1592년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제1군이 부산에 상 륙하여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5월 3일에 동대문을 거쳐 서울로 난입할 때까지의 과 정, ②고니시보다 늦은 4월 17일 김해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5월3 일 남대문을 통해서 서울로 난입할 때까지의 과정, ③이어서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일행이 서울로 난입할 때까지의 과정 등을 그 루트를 밟아가며 명백하게 밝혔다. 이렇게 해서 서울을 점령한 후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은 분담해서 조선 팔도의 지배를 담당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가 평안도 및 황해도를 지배했던 실상이다. 즉 1592년 5월 중순에 평안도 지배를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 소오 요시토시, 황해도 지배를 맡은 구로다 나가마사, 함경도 지배를 맡은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은 임진강 전투 후 개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寶山驛에서 기요마사 등은 함경도로, 고니시 구로다 등은 평안도로 향 했다. 그리고 6월 중순에 조선 국왕은 의주로 피난 갔고, 고니시 구로다 등은 평양을 점령하였 다. 이에 따라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로 돌아갔지만 고니시의 평안도 지배는 쉽게 진전되지 않았다. 그것은 평양 주변의 조선 吏民이 의병을 일으킨 것, 게다가 명의 遼東 副総兵 祖承訓의 평양 습격(이것은 고니시부대가 격퇴하였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군의 신속한 조선 구원 에 대하여 조선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그 대책에 쫓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에서 엄격한 군정을 강행했지만 의병의 반격을 받아 그 지배 는 진척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함경도 지배의 실태이다. 황해도 보산역에서 함경도로 향한 기요마사 등은 6월 중순 함경도 안변에 도착하였다. 그 후 기요마사 등이 취한 행동은 다음의 내용이다. ①7월 후반에 기요마사는 함경도 會寧에서 조선 왕자 두 명을 붙잡았다. 이것은 조선 왕실에 반감을 품은 반란민이 왕자 일행을 잡아서 기요마사에게 인도한 것이라는 점. ②기요마사는 두만강을 넘어 오란카이를 침입하였다. 기요마사의 오란카이정벌 에 대해서는 그가 오란카이에서 명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케우치는 기요마사가

45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5 오란카이의 여진에게 어느 정도 武 威 를 보여주려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함경도 지배를 목적으로 朝 鮮 國 租 税 牒 를 작성한 것에 대하여 앞에 서 예로 든 芝 葛 盛 는 나베시마 등 일본군의 恩 威 가 철저하고, 백성이 잘 복종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케우치는 인정 풍속이 다른 조선 농민을 일본의 軍 政 에 따 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그 한계를 지적하고, 함경도에서 조선 의병의 반격과 일본군의 농 성, 아울러서 함경도에서의 철수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이상 이케우치 히로시의 작업은 일본 조선 양쪽의 사료를 이용하여 언제, 누가, 어디에서, 무 엇을 했는지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 연구의 특징은 실증주의에 철저했다는 점에 있으며, 그 방법과 사료의 취급은 후학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中 村 栄 孝 의 작업 이 있다. 4. 中 村 榮 孝, 慕 夏 堂 金 忠 善 に 關 する 史 料 に 就 いて ( 靑 丘 學 叢 12, 1933년 5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장병이 조선 측에 투항한 것을 降 倭 로 부르고 있다. 降 倭 로 유명 한 인물이 경상북도 友 鹿 洞 의 金 忠 善 이다. 18세기 말, 金 忠 善 의 자손들이 金 忠 善 의 연보와 기록 을 慕 夏 堂 文 集 으로 정리하여 金 忠 善 을 顕 彰 했는데, 이에 따르면 金 忠 善 은 沙 也 可 (Sayka)로 되 어 있고, 沙 也 可 의 일본 이름은 특정할 수 없다. 1592년4월, 沙 也 可 는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조선침략에 종군했는데, 조선의 東 土 禮 意 의 풍속을 보고 中 華 文 物 이 번성한 것을 흠모하여 부하를 이끌고 조선에 투항했으며 임진왜란에 서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조선국왕으로부터 관직과 김해 김씨라는 성을 받았으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종결 후에도 조선을 섬기고 慕 夏 堂 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 후 자손도 번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방 무렵, 幣 原 坦 内 藤 湖 南 青 柳 綱 太 郎 등 제국주의 어용학자들이 우리 황국 일본에서 그러한 배신자가 있을 리 없다. 慕 夏 堂 文 集 은 지어낸 것이며 金 忠 善 은 매국노 라고 단정해 버렸다. 이에 대하여 1933년 당시 조선총독부 朝 鮮 史 편수관이었던 中 村 栄 孝 는 그의 작업과정에서 1597년 11월에 慶 尚 右 兵 使 金 應 瑞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운 沙 也 可 를 朝 鮮 王 朝 實 録 속에서 찾아내고 沙 也 可 의 존재를 증명했던 것이다( 朝 鮮 王 朝 宣 祖 實 録 宣 祖 30년 11월 기유). 降 倭 의 존재를 역사에서 말살한다는,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안 될 幣 原 坦 의 행동에 대하여 확고한 실 증으로 반론을 가했던 中 村 栄 孝 의 연구자세와 용기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46 4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5. 參 謀 本 部 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1923년 간행) 이 戰 史 편찬의 의도는 文 祿 慶 長 의 役 은 神 功 皇 后 이래의 外 征 이며, 국가의 위업을 해외에 서 크게 떨친 것 이라고 평가하고, 그러한 군사적 관심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戰 史 의 특징은 1전쟁의 실태를 일본 조선 명의 사료에 입각하여 정확하게 복원한 것, 2 전쟁 경과(군비계획 군사절충 각 전투의 내용)의 구체적인 서술 3병제 병기 축성 병량 병참 위생 운수 통신 선박 군기 민정 등에 대해서 일본 조선 명 3국의 실태를 조사한 것 4관계문서 를 연대별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Ⅲ. 전후 및 현대 역사학에서 조선침략 연구와 문제의식 1. 鈴 木 良 一, 豊 臣 秀 吉 (1954년 간행) 예전에 東 京 大 學 에서 이케우치 히로시에게 배운 鈴 木 良 一 은 지금까지의 학설사를 회고하고, 文 祿 慶 長 의 役 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 침략과 저항의 역사 연구는 없다 고 하며 학설사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조선 백성의 투쟁을 평가하고 이케우치 학설의 비판적인 섭취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 논점은 다음과 같다. 1유럽 상업자본에 대항하여, 동아시아세계에서 勘 合 貿 易 과 왜구의 무역을 상회하는 무역을 희망했던 일본 상업자본의 요구가 있었던 점. 2농민봉기 이래 농민의 힘을 따돌리고, 영토 확장을 희망하는 여러 다이묘들의 요구가 있었 던 점. 3이 12가 히데요시의 휘하로 통일되고, 히데요시는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리고 도요토미 정권은 유럽 상업자본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기에 대하여 민족적인 대처를 하고, 명의 책봉체재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 기초에는 일본 민중의 에너지가 있었다. 도요토 미 정권은 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권력의 집중 강화를 꾀하여 일본 전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 연장이 조선침략이다. 이것은 민중의 에너지를 기초로 한 민족의 힘을 계급지배의 문제로 바꾼 것으로서 민족적인 의의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鈴 木 의 작업이 지금까지 히데요시의 朝 鮮 征 伐 文 祿 慶 長 의 役 이라고 부르던 것을 히

47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7 데요시의 조선침략 으로 규정지은 최초의 작업이다. 2. 中村榮孝, 日鮮關係史 の 硏究 (上 )(中 )(下 ) (1969년 간행) 일찍이 조선총독부에서 朝鮮史 편수에 관여하고 있던 中村栄孝는 그때 수집했던 일본 조 선 명 관계 사료를 많이 이용하여 13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일본 조선의 대외관계사를 정리 하였다. 그 中卷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서 中村은 明帝國의 출현, 명의 책봉체제와 그 아래에 있는 일 본 조선의 관계와 책봉체제의 전개 실태를 서술하고, 그 후에 전개되는 동아시아 통상권의 변모 와 왜구에 대하여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일본의 체제변혁 전쟁 으로 규정하였다. 더욱이 中村은 명 조선의 외교문서인 事大文軌, 이순신의 乱中日記 壬辰状草, 柳成龍 의 懲毖録 등 조선 측 사료에 대해서 면밀한 고증과 해설을 행하고 있다. 3. 內藤雋輔, 文祿 慶長 の 役 における 被擄人 の 硏究 (1976년 간행)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정치 외교 군사에 관한 것이 주류였다. 그래 서 内藤은 조선침략이 일본 조선 양국의 민중생활을 파괴했던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규명하 는 일에 문제의식을 설정하였다. 内藤의 작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일본에 연행되었던 조선 被虜人의 실태연구이다. 조선 피로인 중에는 주자학자 도 공 농민 등이 있으며, 그들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 점을 극명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豊後 臼杵의 다이묘 太田一吉에게 医僧으로 종군했던 安養寺의 승려 慶念의 朝 鮮日々記 의 소개와 승려 慶念의 戰爭觀에 대한 서술이다. 朝鮮日々記 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침략이 일본 조선 양국 민중에게 준 비참한 실태(예를 들면 蔚山 농성전에서 마치 지옥 같은 모습)를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内藤의 작업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 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4. 岩澤愿彦, 秀吉の 唐入 りに 關 する 文書 ( 日本歷史 년 1월) 히데요시가 関白이 된 1585년(天正 13), 히데요시는 가신 히도츠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 앞으로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로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정복할 예정이다 라고 썼다. 岩

48 4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澤은 이 서신을 토대로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의도가 문서상에 보이는 것은 関白 취임 직후인 15 85년이라고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1586년(天正 14)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岡田正之 전게 논 문). 히데요시가 대륙정복의 의도를 품었던 것이 関白에 취임한 직후라면 도요토미 정권은 성립 당시부터 대륙정복을 노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도요토미 정권의 성격에 관한 문제도 된다. 더군다나 이 서신은 히데요시의 가신들 사이에 영지확장을 바라는 움직임과, 이에 수반하 여 가신들 사이에 일어나려고 하는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서도 대륙정복의 의도를 공표했다는 것 이다. 이 岩澤의 작업에서 히데요시는 왜 대륙정복을 노렸던 것일까 하는 원인론이 새롭게 문제 가 되었다. 5. 佐 々木潤之介, 幕藩制國家 の 成立 (北島正元編, 體系日本史叢書 2 政治史 Ⅱ 수록. 1965년 간행) 岩澤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여서 佐々木는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과정에 있어서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部將 사이의 대립에 주목하였다. 즉 ①이전부터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 에야스(徳川家康)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일파 ②도요토미 정권 의 관료적 입장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일파 ③히데요시 에게 총애를 받았던 다이묘로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일파, 이들의 대립이 있었던 점. 더욱이 히데요시와 결탁했던 특권상인들의 동아시아 무역 진출 제패 요구가 히데요시의 대 외정책 속으로 침투했다고 한다. 6. 山口啓二, 日本 の 鎖國 ( 岩波講座 世界歷史 년 간행) 왜 히데요시는 대륙정복을 노렸던 것일까 하는 원인론에 대하여 山口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에서 설명하였다. 즉 ①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은 산출 조선의 면포 생산 명의 생사산 업이 활발해졌고, 그 교환을 원하는 무역관계의 전개와 요구가 왜구의 밀무역과 그곳에서 접촉 한 포르투갈의 유럽 상업자본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휘하에 두고 각각의 국왕을 책봉하여 조공무역만을 허락하는 국제관계는 크게 후퇴했으며, 동아시아에 군림했던 명의 국제적 지위는 저하되었다. ②도요토미 정권은 극히 짧은 기간에 국가권력을 장 악했는데, 그 수단은 제한 없는 전쟁체제였고, 그것이 해외 제패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권력 과 결탁한 무역상인도 있어서 명 정복 구상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49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9 Ⅳ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의 과제 이상으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하여 일본에 있어서 학설사의 흐름을 개관하였다. 이와 같은 학설사를 토대로 앞으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에서 어떠한 관점을 생각할 수 있는지, 그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원인론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도 시야에 넣고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둘째는 軍 事 萬 端 에 관한 문제이다. 군수물자로서의 무기 장비 兵 糧 연료, 아울러서 선박과 운송. 군사행동으로서는 각 전투의 경과, 축성, 군사조직의 작성 등. 또한 의료의 실태 등. 이것들 을 일본 조선 명 3국의 사례에 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개의 군사적인 상태는 각 사회와 국가의 특질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군정과 민중지배의 문제이다.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농민을 생업에 종사시키 고 군량을 수탈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 민중이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학살을 감행하였고 게다 가 코까지 잘라 갔다. 일본에서도 検 地 의 강행으로 연공 수탈이 엄격해지고 농민은 도망갔다. 이 들의 실례를 더욱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 전쟁과 민중의 문제가 있다. a) 의병. 일본군의 군정에 대하여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연구는 한국에서 상당히 진 전되어 있지만, 일본군의 움직임과 아울러서 다시 한 번 그 경위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함경북도의 경우에 관해서 제언하자면, 鄭 文 孚 의 農 圃 集 을 일본 측 사료인 九 鬼 文 書 등과 함께 검토하면 기요마사의 함경도 지배와 의병전투의 전개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b) 조선군을 지탱했던 민중에 대하여. 임진왜란에서 싸운 名 將 은 의병장 郭 再 祐, 都 元 帥 権 慄, 水 軍 統 制 使 李 舜 臣 등이 유명한데, 이 들을 지탱했던 민중이 있었다. 李 舜 臣 의 乱 中 日 記 을 보면 그 휘하에 船 大 工 石 工 弓 匠 箭 匠 冶 匠 등 많은 職 人 이 있었고, 그들은 수군의 군수물자 제조와 보수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軍 船 의 노를 젓는 格 軍 ( 水 夫 )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1595년 3월의 시점에서 조선 수군 전체의 射 手 ( 弓 手 砲 手 )는 1,228명, 梢 水 軍 ( 船 頭 格 軍 )은 5,881명이며( 萬 曆 23년 3월 4일 朝 鮮

50 5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國王回咨 事大文軌 12), 梢水軍(船頭 格軍)의 인원수가 射手의 4.5배에 상당하였다. 즉 수군의 구성원 중에는 射手를 상회하는 다수의 格軍이 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格軍 인원 수의 다소가 해전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 格軍은 어떠한 계층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 格軍은 鮑作人 노비 土兵 그리고 降倭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에 鮑作人을 주목하고 싶다. 鮑作이라는 것은 원래 바다에서 전복을 잡는 자를 말하지만, 亂中日記 계사3월의 메모에는 鮑作 이라고 기록한 부분에 말 소 도장이 있으며, 그 오른쪽에 沿海人 이라는 注記가 있다. 이 사실에서 연해를 생업의 터전으 로 삼는 해안가 거주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鮑作人은 원래부터 육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조 선정부로부터는 무법자적인 존재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그런 鮑作人이 조선 수군의 格軍으로 편 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鮑作人은 단순한 格軍이 아니며, 1592년(宣祖 25) 9월 1일의 부산포해 전의 전황보고에는 全羅左水営 선박의 사상자에 沙工 鮑作 金叔連 의 이름이 있고(李舜臣 壬 辰状草 11), 鮑作人 중에는 沙工(船頭)을 담당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格軍으로 징발되었던 鮑作人은 전투의 공포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도망을 시도하거나 일반 병사의 도망을 방조하는 등 성가신 존재였지만, 李舜臣은 조선 남해안의 수로를 잘 알고 있는 鮑作人을 기용하지 않고서 는 해전에서 승리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례는 조선 민중이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인데, 다양한 계 층의 조선 민중들이 왜란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c) 被虜人과 降倭에 관하여 被擄人에 관하여는 앞에서 예로 든 内藤雋輔의 작업이 있다. 그에 따르면 기록을 남길 능력 을 가졌던 주자학자의 경우에는 명백히 밝힐 수 있지만 陶工과 농민에 관해서는 사료적으로 한 계가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포로로 잡힌 陶工과 농민의 실태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降倭(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 장병)의 사례로서 1598년 都元帥 権慄이 降倭 要汝文(与右衛門) 을 조사한 供述書가 있기 때문에 그 요점을 소개해 두겠다( 朝鮮王朝宣祖實録 선조 31년 5월 기축) ①要汝文(与右衛門)의 나이는 30세이고 弓矢와 放砲의 기량을 가진 島津씨의 병졸이었다. ②부모는 타계하였고, 형제는 모두 왜란에 연루되었으며, 要汝文(与右衛門)은 천애고아의 몸 이 되어 있었다. ③要汝文(与右衛門)은 혹독한 泗川의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그때 조선 측이 降倭를 후하

51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51 게 대우한다는 말을 듣고 투항했다고 한다. 혹심한 축성공사를 피하여 降 倭 가 된 사례는 그 밖에도 볼 수 있다. 1696년 1월, 加 徳 島 의 시마즈부대에서 병졸 5명이 李 舜 臣 밑으로 투항했는데, 그 이유는 島 津 忠 恒 의 성격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한다( 亂 中 日 記 丙 申 정월 8일). 이때 시마즈씨는 加 徳 島 에서 새롭게 倭 城 을 축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도주하여 투항한 자들은 조선 수군에서 格 軍 등의 노역에 이용하였다. 이 것은 일본 민중이 왜란에 동원되었던 말로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여 金 忠 善 = 沙 也 可 처럼 부하를 인솔하고 적극적으로 집단 투항했던 자는 반란이며, 조선 측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전공을 올리고, 집단부락을 만들어서 정주했으며, 처자를 거느리 고 경지를 보유하여 그곳을 생활의 근거지로 삼았다. 降 倭 에는 이처럼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 러한 관점에서 항왜의 실태를 규명하는 작업도 다음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일본 조선 쌍방의 민중에게 어떠한 것이었을까? 민중은 전란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던 것일까? 이와 같은 관점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 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문화전파의 문제가 있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결과 조선의 도자기 제조기 술 인쇄기술이 일본에 전해졌다. 게다가 조선과 명의 서적이 대량으로 일본에 들어왔다. 예전에 일본 文 部 省 은 교과서 검정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 문화도 전했다는 점을 균형을 맞춰서 교과서를 집필하라고 지도했지만, 문화의 전파라는 것이 반드시 무력에 호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의 전파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섯 번째로 역사인식의 문제이다. 이것은 첫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다시 몇 가지 관점을 추 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의 관점을 연구한 다음에 결론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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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55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明 淸 日 關 係 를 중심으로- 韓 明 基 (명지대 사학과) 머리말 1368년 明 이 건국된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동아시아 세계질서는 朝 貢 - 冊 封 체제 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夷 狄 王 朝 인 元 을 몰아내고 漢 族 王 朝 를 부활시킨 明 은 전통적 中 華 思 想 에 기반을 두고 주변 諸 國 에 朝 貢 할 것을 종용했다. 그것은 자국 내부의 봉건적 신분관계인 君 臣 의 分 을 대외적으로 확대시켜 명 중심의 새로운 역내 질서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그와 관련하여 명은 주변 제국의 주권자 명의로 파견된 조공 사절단의 무역만을 정상적인 무역으로 인정하고 그 밖 의 외국상선의 來 航 과 密 貿 易 을 금지하는 한편, 중국인의 해외도항과 해상무역도 금지하는 海 禁 政 策 을 시행했다. 명은 또한 주변 諸 國 이 자국에 반항하는 자세를 보일 경우, 朝 貢 을 거부하는 것을 보복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 조선은 명이 주도하고 있던 조공-책봉 체제 에 순응했다. 일본 또한 足 利 義 滿 이 1401년 명의 책봉을 통해 勘 合 을 받은 이후-다소의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1547년까지 모두 19차례 의 遣 明 船 을 파견하는 등 명 중심의 국제질서 속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명은 자국의 안보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던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조공-책봉 체제 를 활용하려 시도했다. 명은 몽골의 오이라트도 조공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무역 규모가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의 에센은 1449년 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은 또한 동북 지역 1) 佐 久 間 重 男, 1996, 明 淸 からみた 東 アジアの 華 夷 秩 序 思 想 796 ( 岩 波 書 店 ), 33쪽.

56 5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의 女 眞 을 초무하고 그들을 몽골을 견제하는데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여진족 의 首 長 들에게 벼슬 을 주어 衛 所 制 度 속으로 끌어안고, 勅 書 를 주어 조공을 하도록 조처했다. 2) 이렇게 명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 속에서 조선은 명에 대 해 가장 忠 順 한 藩 國 으로 자임하고 있었다. 3) 나아가 조선은 명 중심의 조공-책봉 체제 속의 우등생 이라는 것을 주변 제국에 대한 우월의식의 근거로써 제시하기도 했다. 한 예로 黃 廷 彧 (1 532~1607)은 조선이 중국의 諸 侯 國 가운데 으뜸이며 중국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 라 며 일본도 조선을 본받으면 중국이 內 附 를 허용할 것 이라고 강조한 바 있었다. 4) 조선의 이 같 은 우월의식은 몽골과 여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華 夷 觀 을 토대로 그들을 오랑캐 로 여기면서 각각 胡 元, 奴 賊 등으로 지칭하면서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국가로 下 視 하고 있 었다. 5)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명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나아가 명 중심의 조 공-책봉 체제 속의 충순한 번국을 자임했던 조선의 대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결과적으 로는 실패했지만 假 道 入 明 을 표방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의 조선 침략은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 전방위적으로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 때 자신들의 朝 貢 國 이었던 일본의 도전에 의해 藩 國 조선은 물론 自 國 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명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 참 전했다. 조선을 돕는다 는 명목으로 대규모 명군의 조선 참전이 이루어지면서 朝 明, 朝 日, 明 日, 明 金 관계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체가 연쇄적으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 었다. 이에 필자는 임진왜란을 통해 야기된 동아시아 국제관계 변화의 추이를-조선을 중심에 놓고-개관해 보고자 한다. 1. 임진왜란과 朝 日 關 係 조선왕조는 일본의 무고한 침략 때문에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인적, 물적, 그리고 정 신적 차원에서 조선왕조의 기반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광범위한 것이었다. 6) 따라서 임진왜란 이 2) 岸 本 美 緖, 1998, 東 アジア 東 南 アジア 傳 統 社 會 の 形 成 岩 波 講 座 世 界 歷 史 13. 3) 당시 일본과 暹 羅, 占 城, 眞 臘 등은 명에 조공하려면 반드시 勘 合 을 소지해야 했지만 조선과 琉 球 는 국왕의 表 文 만 지참하면 가능했다.( 佐 久 間 重 男, 1996, 위의 글). 4) 黃 廷 彧, 芝 川 集 권3, 擬 與 日 本 關 白 書. 弊 邦 以 中 國 外 諸 侯 之 首 萬 邦 朝 會 之 列 無 有 居 弊 邦 之 先 者 以 禮 義 之 所 自 出 也 故 不 敢 卑 夷 之 冠 帶 之 賜 先 及 焉 貴 國 一 從 禮 義 悉 效 弊 邦 之 爲 則 天 朝 亦 必 許 款 塞 內 附 之 誠 矣 5) 한명기, 2009,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365~375쪽.

57 다. 9) 조선은 이 같은 상황에서-명군 철수 이후 單 弱 해진 국세를 고려하여-명의 위세를 빌려 일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57 후 조선이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일본인들을 증오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란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宣 陵 과 靖 陵 을 파헤쳤던 것은 일본인들의 야만성과 무도함을 상징하 는 것이자 조선이 반드시 되갚아야 할 행위로 치부되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生 靈 을 함부로 죽이고 陵 寢 을 파헤친, 영원토록 복수해야 할 怨 讐 가 되었고, 조선 사람들은 그 일본에 복수하 기 위해 臥 薪 嘗 膽 할 것이 강조되고 있었다. 7)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對 馬 島 를 중심으로 일본 측이 국교와 무역 재개를 거듭 요청하는 와중 에 조선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왜란을 통해 생긴 원한이나 민족적 감정을 생각하면 일본 과의 국교 재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일본에 대한 적개심 을 갖게 되었던 한편에서-일본이 군사적으로 매우 강하다는 사실도 절감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7년 동안 朝 明 聯 合 軍 이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내는 바다를 건너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고 비판했던 李 山 海 (1539~1609)는 일본을 가리켜 천하로서도 당 해내기 어려운 존재 라고 평가했다. 8) 일본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품었으되, 무력이 강한 그들의 再 侵 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쉽사리 교류를 끊을 수도 재개할 수도 없는 상황, 바로 거기에 조선의 고민이 존재했 다. 조선은 결국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한편에서 일본의 재침 위협을 늘 염 두에 두고,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대일정책의 요체는 일본 사정을 정밀하게 살피면서 倭 館 에 恒 居 하는 일 본인들을 다독거려 사달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 조선 사정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 는 것,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영남 諸 屯 의 방어 태세와 水 軍 을 정비하는 것 등으로 집약되었 본측의 협박을 차단하려는 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측이 협박을 일삼는 한편에서, 犯 陵 6)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조선의 피해 양상에 대한 최근의 구체적인 분석으로는 閔 德 基, 2005, 임진 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 문숙자, 2005, 임진왜란으로 인한 생활상의 변화 ; 전경목, 2005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문화재 피해 상황 (모두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한일관계사연구논집 5 所 收, 景 仁 文 化 社 )가 대표적이다. 7) 宣 祖 實 錄 권212, 선조 40년 6월 辛 亥. 史 臣 曰 惟 彼 倭 奴 燒 夷 我 原 陵 魚 肉 我 生 靈 乃 九 世 必 報 之 讐 我 國 君 臣 所 當 臥 薪 嘗 膽 未 嘗 食 息 忘 此 讐 8) 李 山 海, 鵝 溪 遺 稿 권5, 陳 弊 箚. 然 以 臣 計 之 則 方 張 之 北 賊 恐 不 如 已 退 之 倭 寇 也 何 者 倭 奴 之 兇 鋒 天 下 之 所 難 當 也 安 有 八 年 屯 據 動 天 下 之 兵 而 猶 不 得 一 番 得 利 終 使 揚 揚 渡 海 者 乎 臣 嘗 中 夜 不 寐 憂 慮 萬 端 9) 浦 廉 一, 1934, 明 末 淸 初 の 滿 鮮 關 係 上 に 於 ける 日 本 の 地 位 ( 一 ) 史 林 제19권 제2호, 260~261쪽.

58 5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賊을 송환하는 등 성의를 표시하자 조선은 결국 覊縻 차원에서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고 通信 使를 파견하기로 하는 등 기존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10) 이에 따라 1607년(선조 40) 回 答兼刷還使의 명목으로 呂祐吉, 慶暹, 丁好寬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했다. 통신사의 파견 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이 원한과 적개심을 억누르고 일본과의 우호 를 택한 것은 대륙 정세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부터 만주에서 崛起했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이끄는 建州女眞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서 조선의 관심은 서북방을 향해 집중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다. 1610년(光海君 2), 大北派의 영수 鄭仁弘이 누르하치와의 通好를 반대하는 箚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일본과의 和議가 불가피했었던 사례를 들어 반박했다. 광해군은, 함께 하늘을 이 고 살 수 없는 원수 인 일본이지만 조선의 역량을 고려하면 통신사를 보내 교통하는 것은 불가피 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11)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면서 被擄人 刷還 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643년까지 조선으로 송환된 피로인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일본의 德川幕府는 江戶時代를 통해 서 來日했던 조선 통신사를 宗主國에 대한 조공사절 로, 조선 국왕의 선물을 貢物로서 선전하면 서 막부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재료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에서는 조선을 朝貢 國 으로 치부하는 인식이 높아져 갔다.12)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품게 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접어야만 했던 상황은 이후에 도 이어졌다. 건주여진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그와 맞물려 명의 쇠퇴가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 서 조선은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의 胡亂을 겪게 되었다. 조선이 두 차례의 호란을 통해 淸에 게 굴복하면서 조선의 대일인식과 정책은 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일 적개심은 상당 부분 수그러들었고, 일본을 友邦 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일본에 請援하여 청을 견제해야 한다는 以倭 制淸論 까지 대두되었다.13) 요컨대 後金의 굴기로 대표되는 임진왜란 이후 북방 정세의 격변을 통해 조선의 대일외교는 유화적인 기조로 흘러갔던 것이다. 10) 孫承喆, 1994, 朝鮮時代韓日關係史硏究 (지성의 샘), 119~145쪽. 11) 鄭仁弘, 來庵先生集 권7, 辭職箚. 答箚字曰 予雖昏病 豈不知大義乎 試以已往之事言之 倭奴掘 拔先陵 是不共戴天之深讐 而相勢量力 不得已遣使通信 至今賊徒恒留邊鎭 多至千餘 而秀吉非犯順 之賊乎 此豈樂爲 勢有不得已也 12) ロナルド トビ, 2008, 鎖國 という外交 (東京, 小學館), 50~51쪽. 13) 한명기, 앞의 책(2009), 352~357쪽.

59 東아시아 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임진왜란과 朝明關係 임진왜란 시기 명군이 조선에 참전했던 것은 15세기 이래 책봉-조공 체제의 전형 으로 불릴 정도로 각별했던 명과 조선의 기존 관계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명이 조선 에 군대를 보내 참전했던 사실은 왜란 당시 위기에 몰린 조선 지배층에 의해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 로서 인식되었다. 華夷論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조선 지배 층은 명군이 남긴 民弊 등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명군의 참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차원의 절대적인 은혜 로 추앙했다. 나아가 조선이 左袵이 되는 것을 막아준 명 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였던 宣祖의 至誠事大에서 비롯된 것 으로서 인식되기도 했다.14)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선조, 광해군, 인조 등은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動力 으로서 再造之 恩 의 실체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에서 미묘한 시각의 차이를 드러냈다. 선조는 李舜臣 등 宣武 功臣들을 제치고, 명에 請援使로 파견되었던 扈從功臣 鄭崑壽를 임진왜란 극복의 元勳으로 지 목했다. 그것은 왜란 초반 義州로 파천하는 등 권위가 심하게 실추되었던 자신의 王權을 제고하 기 위한 의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15) 재조지은 을 숭앙하는 조선 지배층의 태도는 임진왜란 이후 명의 내부 정세와 맞물려 조선에 커다란 부담을 가져다 주었다. 명은 1593년 11월, 神宗이 조선에 보낸 宣諭文에서 처음으로 재 조지은 이란 용어를 사용했던16) 이래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에 대한 施惠者 로서의 자부심을 두 드러지게 드러냈다. 조선에 대해 보답 을 바라는 분위기는 內政의 난맥상과 누르하치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는 것과 맞물려 증폭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부터 財政 위기 때문에 명에서 불 거지기 시작한 鑛稅와 商稅의 폐단은 광범한 민중적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17) 그런데 흥미로 운 것은 광세와 상세의 폐단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도 변형된 형태로 전가되었다는 점이다. 선 조 말년부터 광해군대에 걸쳐 명이 압록강 부근에서 조선의 혁파 요구에도 불구하고 中江開 市를 존속시키라고 강요하고,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의 宦官 출신 勅使들이 수만 냥의 銀貨를 요 14) 鄭琢, 藥圃先生文集 권3, 安東府摹刊御筆屛風後跋. 萬曆壬辰夏四月 倭賊大擧入寇 京師潰而平 壤失守 上幸義州 天子命將討之 明年 復三京 賊退據南徼 上還京師 丁酉秋 賊再入 天子又命將討之 明年戊戌 賊乃去 國運中否 島夷構亂 魚肉生靈 蕩覆宗社 自我東方 有國無之 天威一動 海嶠重新 三韓免左袵 九疇復箕範 寔聖天子再造罔極之恩 而我主上事大至誠通天貫日之致 噫 此四字足以畫天 地之大恩 15) 한명기, 2007, 再造之恩 과 조선후기 정치사 大東文化硏究 59, 195~201쪽. 16) 宣祖實錄 권44, 宣祖 26년 11월 己未. 17) 吳金成 1989, 明末 淸初의 社會變化 明 淸代의 國家權力과 紳士 講座 中國史 Ⅳ.

60 6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구하여 착복했던 사례들은 18) 그 두드러진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명은 이후에도 자신들이 조선에 대한 원조( 東 援 ) 를 베풀었음을 강조하고, 조선을 본격적으 로 후금과의 전쟁 속으로 끌어들여 이용하려 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以 夷 制 夷 정책으로서 명은 예의 재조지은을 내세워 조선의 參 戰 을 통한 報 恩 을 정당화하려 했다. 19) 급기야 1618년 누르 하치가 명에 선전포고하고 撫 順 을 攻 取 하자 명은 조선에 원정군 파견을 강요했다. 그 명분은 예 의 재조지은 이었거니와,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여부를 놓고 조선에서는 격렬한 논란이 빚어 졌다.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던 光 海 君 은 명의 압박과 대다수 신료들의 채근에 떠밀 려 누르하치를 공격하는데 동참하는 병력을 파견했다. 이 같은 와중에 1623년 조선에서 西 人 정 파를 중심으로 광해군의 亂 政 과 재조지은 배신 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仁 祖 反 正 이 일어나면 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과 맞물려 형성된 재조지은 이 이제 조선 내 부에서 정권 교체의 명분으로까지 이용되었다. 나아가 명이 베푼 재조지은에 보답해야 한다 는 조선 집권층의 강박 관념은 임진왜란 이후 가시화 되고 있던 明 淸 交 替 라는 역내 환경의 격변 과 정에서 조선이 외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3. 임진왜란과 朝 淸 關 係 임진왜란의 발생은 명의 여진에 대한 견제력을 분명히 약화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 전까지 사실상 여진을 통제했던 주역은 寧 遠 伯 李 成 梁 이었다. 그런데 그 이성량의 아들들인 李 如 松, 李 如 栢 등이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참전했던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은 누르하치 건주여진의 위력을 절감했다. 1592년 누르하치는, 왜란 때문에 위기에 처한 조선에 원병 파견을 제의한 바 있었다. 당시 후환을 우려했던 柳 成 龍 등의 반대로 누르하치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20) 조선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 집단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이에 일본과의 전쟁 와중에도 누르하치를 회유 하기 위해 부심했다. 함경도 지역의 여진인들에게 물자를 증여했던 것, 採 蔘 을 위해 월경해 오는 여진인들을 살상하지 않으려 했던 것, 1595년 南 部 主 簿 申 忠 一 을 興 京 老 城 에 보내 그들을 정탐 18)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8~223쪽. 19) 明 熹 宗 實 錄 권13, 天 啓 원년 8월 庚 午. 時 經 略 熊 廷 弼 疏 言 三 方 建 置 須 聯 合 朝 鮮 宜 得 一 智 略 臣 前 往 該 國 督 發 江 上 之 師 就 令 權 駐 義 州 招 募 逃 附 則 我 兵 與 麗 兵 聲 勢 相 倚 與 登 萊 音 息 時 通 斯 于 援 助 有 濟 其 糧 餉 則 發 銀 平 賣 于 朝 鮮 東 山 一 帶 諒 該 國 懼 賊 倂 呑 之 禍 感 我 拒 倭 之 恩 必 不 忍 推 託 20) 柳 成 龍, 西 厓 集 西 厓 先 生 年 譜 권1.

61 東아시아 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61 하려고 시도했던 것, 누르하치 집단과의 사이에서 불거질 수 있는 현안들을 명을 통해 해결하려 시도했던 것 등이 그 예이다. 나아가 이 같은 신중한 회유책은 광해군대에도 계속 이어졌다.21) 조선은 비록 1619년 명의 강요에 밀려 후금을 치기 위한 원정에 동참했지만, 광해군을 중심 으로 후금에 대한 신중한 정책은 지속되었다. 후금과 대대로 지은 원수가 없고 釁端도 맺지 않 았으니, 講和해서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이 무방하다 는 것이 광해군과 그 측근들의 기본 입장이 었다.22) 하지만 조선을 중심으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던 임진왜란의 여파는 이후 양국관계에 소용돌이 를 몰고 왔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바로 재조지은 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곧이어 재조지은 보답 을 강조하는 조야의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면서 후금과의 관계는 긴장 국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의 주도자들은 광해군이 취한 對後金 우호정책을 광해군 폐위 의 명분 이자 자신들의 立國의 근본 으로 내세웠다.23)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재조지은 의 굴 레가 양국관계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에서 재조지은 을 내세워 親明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묘호란이 일 어났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 사령관 阿敏은, 자신들이 丁卯胡亂을 일으키게 된 명분의 하나로 조선이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데 동참했던 것(-사르후 戰役 참전)을 제시했다. 조선 조정 이, 조선의 사르후 전역 참전은 재조지은 때문에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응수하자 아민은 그것을 반박했다. 아민은 선조 말년 海西女眞의 울라(烏拉) 부족이 조선의 변방을 공격했을 때, 누르하 치가 울라의 國主 부잔타이(布占泰)를 움직여 조선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키는 은혜 를 베풀었다 고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명의 은혜 再造之恩 에는 보답하려 하면서 왜 자신들의 은혜 에는 보답하려 하지 않느냐고 역공을 취했다.24) 병자호란 당시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637년(인조 15) 1월, 청군은 南漢山城을 포위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은 청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예의 재조지은 을 거론하면서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명의 神宗이 天下의 국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배신할 수 없다 고 강조했다.25) 그러자 청은 다시 보낸 국서에서 명은 21) 한명기, 앞의 책(1999), 225~244쪽. 22) 光海君日記 권147, 광해군 11년 12월 甲戌. 王出御仁政殿 引見贊劃使李時發 時發曰 臣近來 伏見前後聖敎 極爲允當 且倭寇之於我國 有不共一天之讎 而尙有羈縻之計 況與奴賊 旣無世讐 又未 結釁 雖講好 未爲不可 但天朝將官壓境境 上差官絡繹 事機漏洩 難處之端一起 則後日之事可慮 23)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癸亥. 侍講院說書兪棨上疏曰 殿下於癸亥反正之初 歷數光海之 罪 與虜相通 實居其一 此乃今日立國之本也. 24) 淸太宗實錄 권2, 天聰 1년 3월 辛巳. 25) 張存武 葉泉宏 編,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崇德 2년 1월 13일. (2001, 臺北 國

62 6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천하 가운데 단지 하나의 국가일 뿐 이라고 반박하여 명이 곧 천하 라고 여기는 조선의 세계관 에 제동을 걸었다.26) 그것은 당시 명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를 부정하고 帝國 을 지향하고자 했던 청이 명 중심의 질서 를 여전히 고수하려 했던 조선을 명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조청관계에 남긴 여파는 또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은 일본군에게 연전 연패했지만 水軍은 그렇지 않았다. 李舜臣의 활약이 상징하듯이 조선 수군의 분전은 이후에도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았다. 실제 18세기 중반 洪大容( )은 이순신의 활약을 통해 조선 의 안전이 보장되었음은 물론,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지 못함으로써 中原의 안전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27) 임진왜란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은 명이나 후금도 마 찬가지였다. 특히 후금은 1633년 이후 조선 수군을 명 수군보다 강하다고 평가하고, 조선에서 수군과 병선을 빌려 명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28) 명의 강력한 견제와 조선의 거부에 밀려 후금 의 借船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명청교체기 조선 수군을 둘러싼 후금과 명의 대결은 임진왜란이 남긴 여파의 흥미로운 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4. 임진왜란과 中日關係 명은 임진왜란 당시 중화질서에 도전 했던 일본군에게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것은 趙士楨이 일본을 東夷 가운데 으뜸이며 물산이 풍부하고 전투에 익숙하다 고 평가한 데 서도 드러난다.29) 명은 결국 1593년 벽제전투 패전 이후 일본과의 강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 었다. 평양전투 이후 보급과 신병 충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던 것, 전쟁 장기화에 따른 戰費 증가와 재정 압박 때문에 명은 沈惟敬을 내세운 和平工作에 돌입 하게 되었다.30) 史館). 26) 淸太宗實錄 권33, 崇德 2년 1월 丁巳. 勅諭朝鮮國王李倧曰 又云 壬辰之難 旦夕且亡 明國神 宗皇帝動天下之兵 拯救生民于水火之中 夫天下大矣 天下之國多矣 救爾難者 止明朝一國耳 天下諸 國言兵 豈盡至耶 明與李國誕妄過大爲言 何以終不已耶 27) 洪大容, 湛軒書外集 권1, 杭傳尺牘 與秋고書. 此李舜臣也 舜臣以統制使 摠三道舟師 六年禦倭 前後破十餘萬兵 盖倭之不能揚帆靑齊直擣中原 以舜臣之要其路也 28) 한명기, 앞의 책(1999), 403~406쪽 ; 앞의 책(2009), 127~131쪽. 29) (明) 趙士楨, 東事剩言 (奎중 5414). 客曰 日本爲國 甲於東夷 守不設險 自衛以兵 物産之饒 刀劍 之利 民俗輕生 習於戰鬪

63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63 주지하듯이 명과 일본이 강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제시한 조건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명 은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 關 伯 히데요시를 日 本 國 王 으로 封 해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거니 와 그것은 결국 일본을 명 중심의 책봉체제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31) 하지 만 명에 도전하려 했던 히데요시의 일본을 다시 중화질서, 책봉-조공 체제 속으로 끌어들여 긴 박시키려는 명의 의도는 여의치 않았다. 우선 책봉에 수반되는 무역을 허용하는 문제를 놓고 명 조정의 신료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1523년 寧 波 의 亂 을 기억하고 있는 명 신료들은, 일본 과 강화할 경우 그들에게 다시 무역을 허용하게 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들은 이 때문에 宋 應 昌 이 倭 奴 에게 朝 貢 과 무역을 모두 허락하려 하면서도 조정에는 마치 조공만을 허락하는 것처럼 기만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고 비판했다. 32) 송응창의 후임자였던 顧 養 謙 도, 寧 波 에 開 市 하여 일 본의 욕구를 들어주자 고 강조했다가 반대파로부터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33) 결국 封 貢 논의는 결말을 맺지 못했고, 강화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袁 宏 道 같은 이는 명 이 별다른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했다고 임진왜란 참전을 혹평했다. 34) 명은 결국 왜 란 참전을 통해 대국의 위신이 실추되었거니와 그 같은 상황에서 기인한 對 日 불쾌감은 전란 이 후 일본에 대한 무시 정책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등장한 德 川 幕 府 는 1600년 명나라 장수 矛 國 科 를 송환한 이후 조선, 琉 球 등을 통해, 혹은 南 京 商 人 등을 통해 국교 정상화를 통한 감합무역 재개를 타진했지만 명은 끝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5)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명일의 접촉은 후금의 盛 勢, 즉 明 淸 交 替 의 흐름이 가시화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일본이 후금의 동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8월, 함경도 회령까지 북상했던 가또 키요마사( 加 藤 淸 正 )가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 부락 을 공격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가또가 여진을 공격했던 원인으로는 일본군의 武 威 과시, 또 다른 征 明 路 의 탐색 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궁극에는 일본이 16세기 후반 만주 동쪽에서 여진족에 의해 시작된 명청교체의 흐름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왜란 이후 명에 대한 貢 路 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는데, 그 주요 루트인 遼 東 路 가 여진족(-후금-청)에 의해 단절되는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같은 위기의식이 1627년 정묘 호란 당시 뿐 아니라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에 원병 파견 을 제의하는 형태로 나타나 30) 한명기, 앞의 책(1999), 45~48쪽. 31) 小 野 和 子, 1985, 明 日 和 平 交 涉 をめぐる 政 爭 山 根 敎 授 退 休 記 念 明 代 史 論 叢. 32) 明 神 宗 實 錄 권273, 萬 曆 22년 5월 甲 申. 33) 明 神 宗 實 錄 권274, 萬 曆 22년 6월 庚 申. 34) 袁 宏 道, 送 劉 都 諫 左 遷 遼 東 苑 馬 寺 簿. 倭 奴 逼 朝 鮮 虛 費 百 億 萬 竭 盡 中 國 膏 不 聞 蹶 隻 箭. ( 石 原 道 博, 1961, 萬 曆 東 征 論 朝 鮮 學 報 合 輯, 224쪽에서 재인용). 35) 紙 屋 敦 之, 1997, 大 君 外 交 と 東 アジア ( 東 京, 吉 川 弘 文 館 ), 216~217쪽.

64 6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게 되었다. 36) 실제 임진왜란을 계기로 후금과 일본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 고 양자가 서로를 의식하는 과정에는 조선과 명이 개재되어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한 양상이 빚 어졌다. 한 예로 申 忠 一 의 보고에서 드러나듯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의 존재를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1595년 명나라 장수를 따라 건주여진의 수도에 들 어갔던 신충일이 女 眞 人 馬 臣 에게 降 倭 의 존재와 鳥 銃 성능의 우수성을 과장하여 선전하고 있 는 것에서 37) 조선, 명, 후금, 일본이 서로 얽혀 복잡하게 전개될 왜란 이후의 동아시아 정세의 향방을 엿볼 수 있다. 이후 후금의 강력한 도전 앞에서 수세에 몰렸던 명은 왜란 직후 일본의 국교 정상화 요청을 무시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후금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 로서 일본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우 선 명은 1633년 후금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에 대해 일본에 請 援 할 것을 종용한 바 있 다. 38) 나아가 1638년 무렵부터는 명이 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는 풍문 이 조선에서 돌고 있었다. 급기야 청의 入 關 이후인 1645년과 1646년 南 明 의 隆 武 정권과 鄭 芝 龍 은 幕 府 에 원병을 요청했다. 39) 바야흐로 明 淸 交 替, 이른바 華 夷 變 態 가 이루어진 와중에서 명 과 일본의 처지가 서로 역전되는 상황이 빚어졌던 것이다. 맺음말 임진왜란은 1368년 명 건국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도요토 미 히데요시의 망상에서 비롯된 조선 침략과 명에 대한 도전은 조선, 명, 여진, 일본으로 구성된 기존의 국제관계에 연쇄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과 여진 의 군사적 浮 上 이었다. 동시에 兩 國 의 부상과 맞물려 조공-책봉 체제 에 기반 한 中 華 秩 序 의 주재자 로서 명의 위상은 훼손되었고, 전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의 향후 국제적 입지는 매우 고단한 지경으로 내몰렸다. 명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다. 그것은 이후 재정 압박과 그에서 비롯된 增 稅 조처, 나아가 농민반란이 일어나는데 한 원인이 되었다. 명이 일본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와 36) 紙 屋 敦 之, 1987, 幕 藩 制 國 家 の 成 立 と 東 アジア 歷 史 學 硏 究 573( 東 京, 靑 木 書 店 ), 83~87쪽. 37) 宣 祖 實 錄 권71, 선조 29년 1월 丁 酉. 38) 淸 太 宗 實 錄 권14, 天 聰 7년 6월 戊 寅. 39) 石 原 道 博, 1945, 明 末 淸 初 日 本 乞 師 の 硏 究 ( 東 京, 富 山 房 ), 31~32쪽.

65 東아시아 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65 중에 만주에서 굴기하고 있던 누르하치에 대한 견제력은 약화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안팎으로 손해를 본 명에게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재조지은 을 통해 조선에 대한 장악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명 중심의 중화질서를 기준으로 보면 조선보다 열등생 이자 夷狄 으로 치부 되었던 일본과 여진의 위상은 왜란 이후 달라졌다. 일본은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가운데, 왜란 이 후 명과 조선이 여진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골몰하는 와중에 명과 조선의 보복 위협에서 벗어 나 내부의 안정을 다지는데 몰두할 수 있었다. 德川幕府는 집권 초기에는 명이 주도하는 중화 질서 의 권위를 빌리려 했으나 이내 명의 무반응과 쇠퇴에 편승하여 이른바 武威 를 바탕으로 日本型華夷秩序를 구축하려고 시도할 수 있었다. 建州女眞은 임진왜란 시기 명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성취한 주변 제부족에 대한 공략을 바탕으로 전란 이후에는 명에게 도전할 수 있는 역량 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 복합적인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에 의한 직접적인 인적, 물적 피해는 물론 명군이 자행하는 민폐도 감내해야 했다. 나아가 宣祖 등 집권층이 재조지은 을 전란 극복 의 절대적인 원동력으로 강조하는 와중에 尊明意識은 심화되었고, 궁극에는 명이 추구하는 以夷 制夷 정책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 이 강조되고 존명 의식이 내면화되면서 왜란 이후 明淸交替가 진행되는 와중에 조선이 외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좁아져갔다. 왜란 시기 後金의 강성함을 인지하고, 광해군대까지 그들을 羈縻하기 위한 노 력을 기울였지만 존명의식이 내면화 되는 와중에 仁祖反正이 일어나고,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을 겪게 되었다. 나아가 명과 후금(淸)의 압력에 대처하는 데 전념해야 하는 처지에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의식은 필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결국 내키지 않는 가운데 일본 과 通交를 재개하고, 通信使를 파견하며, 倭館을 다시 허용했다. 요컨대 동아시아의 전략 요충 인 조선에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별개의 사건이 결코 아니 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과 후금이라는 두 夷狄 국가가 떠오르고, 중화질서의 주재자 인 명 의 위상이 실추하는 와중에 조선은 재조지은 의 굴레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왜란이후 진행 되고 있던 明淸交替의 흐름이 매듭지어 될 때까지 明淸日 삼국으로부터 밀려오는 외압에 맞서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여야만 했다.

66 6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토론문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본 임진왜란 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明 淸 日 관계를 중심으로 민 덕 기 (청주대학교) 1. 본 발표의 의의 (1) 발표자의 왕성한 연구활동 주목 토론자가 가지고 있는 저서만도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2) <임진왜란과 朝日관계>에서의 평가 a) 조선이 두 차례의 호란을 통해 淸에게 굴복하면서 조선의 대일인식과 정책은 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일 적개심은 상당 부분 수그러들었고, 일본을 友邦 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일 본에 請援하여 청을 견제해야 한다는 以倭制淸論 까지 대두되었다. b)임진왜란 이후의 朝日관계의 평화 지속의 배경에, 조선이 후금 淸에 대한 견제로서 對日관 계를 중시했다는 논리로 매우 수긍됨. 한편, 에도막부의 경우엔 조선을 침략한 豊臣정권을 멸망 시킨 입장에 서 있었다는 점이 작용한 듯.

67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67 (3) <임진왜란과 朝 明 관계>에서의 평가 a) 명이 베푼 재조지은에 보답해야 한다 는 조선 집권층의 강박 관념은 임진왜란 이후 가시 화 되고 있던 明 淸 交 替 라는 역내 환경의 격변 과정에서 조선이 외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b)'재조지은 은 도덕적 제약으로 작용되어 對 日 강화과정에도 작용한 듯. (4) <임진왜란과 朝 淸 관계>에서의 평가 a) 조선 수군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은 명이나 후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후금은 1633 년 이후 조선 수군을 명 수군보다 강하다고 평가하고, 조선에서 수군과 병선을 빌려 명을 공격하 려고 시도했다. 1633년 이후 淸 朝 가 조선의 수군과 병선을 빌려 명을 공격하려 하였다는 사실 규명. b)조선 수군에 대한 명 청의 평가에 대한 究 明, 새로운 사실의 발굴로 느껴짐. 火 器 로만이 여 진 騎 兵 을 제압할 수 있다는 왜란기 조선의 인식이 조총부대 확충에 나섰고, 淸 朝 는 나선정벌에 조선의 조총부대를 주목하여 동원한 사실과도 연관될 듯. (5) <임진왜란과 中 日 관계>에서의 평가 a) 명은 결국 왜란 참전을 통해 대국의 위신이 실추되었거니와 그 같은 상황에서 기인한 對 日 불쾌감은 전란 이후 일본에 대한 무시 정책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b)17세기초 明 의 對 日 정책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각 제공 (6) <맺음말>에서의 평가 a) 왜란 이후 명과 조선이 여진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골몰하는 와중에-명과 조선의 보복 위 협에서 벗어나-내부의 안정을 다지는데 몰두할 수 있었다. 德 川 幕 府 는 집권 초기에는 명이 주 도하는 중화질서 의 권위를 빌리려 했으나 이내 명의 무반응과 쇠퇴에 편승하여 이른바 武 威 를 바탕으로 日 本 型 華 夷 秩 序 를 구축하려고 시도할 수 있었다. b)후금 청의 대두가 없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朝 明 연합의 對 日 응징이 따랐을 것이라는 당연 론이 기존의 일본학자들에게선 별로 제기 되지 않았던 논리로 주목.

68 6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2. 발표내용에 대한 토론자의 공감적 보충 (1) 조선의 일본관의 변화; 일본은 武力에 관한 한 당해낼 수 없다는 인식 a)이산해를 통한 설명, 註 8) b)중국측의 왜란 인식 ; 明史 卷 320 朝鮮列傳 第 208, 倭가 朝鮮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는데도 中國과 朝鮮이 이길 가망 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關白이 죽고서야 禍亂이 비로소 종식되었다. (自倭亂朝鮮七 載, 喪師數十萬, 糜餉數百萬, 中朝與屬國迄無勝算, 至關白死而禍始息.) (2) 以倭制淸論 은 임진왜란기 이미 시작되었다 a)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의 존재를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움직임 을 보이고 있다. 신충일이 女眞人 馬臣에게 降倭의 존재와 鳥銃 성능의 우수성을 과장하여 선전하고 있는 것 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b)발표자가 09년 9월 12일 한일관계사학회 월례회 발표( 임진왜란은 對日 총력전이었나? 南倭北胡 란 측면에서 )에서 신충일과 마신의 대화를 다음처럼 정리해 보았다. 마신; 당신네 나라 연해 지방에 降倭를 머물러 두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충일; 사실이다. 마신;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충일; 약 오륙천명이다. 마신; 무엇 때문에 沿江 지방에 머물게 하느냐? 충일; 倭奴가 德義를 사모하여 항복해 오므로 우리나라가 이들에게 모두 衣食을 주어 안정시 켰다. 그들이 이 은혜에 감복하여 邊上에 머물면서 나라를 위해 外侵을 방어하므로( 禦 侮 ) 우리나라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어 연강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마신; 왜인들의 체격이 장대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충일; 형체가 몹시 작아서 풀숲 사이를 잠행할 수 있고, 총을 쏘면 반드시 명중시킨다. 마신;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잘 맞히는가? 충일; 왜인의 총은 능히 나는 새도 맞힐 수 있기 때문에 鳥銃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마신; (쇠로 만든 투구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길) 이 투구도 뚫을 수 있는가? 충일; 조총의 탄환은 능히 薄鐵로 씌운 이중으로 된 참나무 방패도 뚫는데 이 투구 정도야

69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69 어찌 이를 필요가 있겠는가? 마신;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좌우에 서서 듣던 胡 人 들도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운 기색을 지었다) 3. 발표내용에 대한 토론자의 의견 (1 ) 勘 合 의 지급 유무가 갖는 의미 a)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 속에서 조선은 명에 대해 가장 忠 順 한 藩 國 으로 자임하고 있 었다. 고 하며, 註 1)에서는 당시 일본과 暹 羅, 占 城, 眞 臘 등은 명에 조공하려면 반드시 勘 合 을 소지해야 했지만 조선과 琉 球 는 국왕의 表 文 만 지참하면 가능했다. 로 설명. b)그러나 註 1)은 조선은~가장 충순한 번국으로 자임 에 대한 설명으론 미흡한 듯. 明 은 조 선과 유구에게 감합 지참을 제외시킨 이유에 대해, 皇 明 外 夷 朝 貢 考 卷 下 에 있는 明 에의 朝 貢 상황을 기록한 外 國 四 夷 符 勅 勘 合 沿 革 事 例 에서, 조선과 琉 球 로부터는 禮 에 근거한 사절이 왕 래하고 있고 중국과 상호 文 意 가 통하므로 감합부를 이용하지 않아도 信 義 를 가질 수 있기 때문 ( 凡 各 國 四 夷 來 貢 者, 惟 朝 鮮 素 號 秉 禮, 與 琉 球 國 入 賀 謝 恩, 使 者 往 來, 一 以 文 移 相 通, 不 待 符 勅 勘 合 爲 信. )이라 기록. (2) '재조지은' ; 광해군 인조의 차이 有 無, 對 淸 정책에의 작용 여하 a) 재조지은 이란 對 明 부채 의식이 明 淸 교체 상황에의 대응을 소극화 시켰다, 라는 논리에 수긍, b)다만, 발표자는 貴 著 인 광해군 277쪽에서, 反 正 한 仁 祖 가 애초 외쳤던 親 明 排 金 에서 배금 을 실현하지 못하고 광해군 노선을 계승했다고 설명 그렇다면 재조지은 은 淸 朝 에 대한 親 淸 주저용 멘트 로서의 대외적 트릭 정도일 수는 없을까? 재조지은 등의 明 朝 에 대한 송시 열 的 崇 敬 은 夷 狄 淸 朝 에 굴종해야 하는 17세기 후반 이후의 현상에 대한 대내적 자위용은 아니 었는지? c)조선의 후금 淸 朝 에의 소극책의 배경엔 明 朝 의 조선 世 祖 때의 건주여진과의 私 通 금지 가 일종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3) 누루하치와 임진왜란기 함경도 지역 a)조선은 일본과의 전쟁 와중에도 누르하치를 회유하기 위해 부심했다 고 하고, 그 實 例 의

70 7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하나로 함경도 지역의 여진인들에게 물자를 증여했던 것 을 들고 있다. b)과연 임진왜란기 함경도 지역의 여진인에의 물자를 통한 회유가 누루하치와 관계 있을까? 당시 함경도 여진인= 藩 胡 에겐 아직 누루하치의 영향력은 미미하지 않았는지? 실록에 그 근거 있는지 궁금. (4) 明 淸 교체에 대한 일본의 대응 a) 일본은 왜란 이후 명에 대한 貢 路 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는데, 그 주요 루트인 遼 東 路 가 여 진족(-후금-청)에 의해 단절되는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같은 위기의식이 1627년 정묘호 란 당시 뿐 아니라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에 원병 파견 을 제의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b)일본이 요동을 貢 路 로 확보하려 했고, 그래서 호란을 당한 조선에 援 兵 파견을 제의했다는 논리는 1쇼군 德 川 家 光 가 요동을 조선 땅으로 알고 있었다 요동에 대한 無 知. 2막부의 貢 路 와 관련한 대마도를 통한 조선에의 요청은 1609년에 종식 년 조선에 上 京 한 玄 方 이 막부 의 借 路 平 遼, 通 貢 大 明 平 遼 通 貢 의 뜻을 전달했지만, 그가 체류기간 내내 대마도 宗 氏 의 이 익을 위해 활동했음을 보아, 선언적 修 飾 이상의 의미 없을 듯. 4임진왜란이 일본의 假 道 進 貢 명분에 대한 朝 明 의 거부였음을 에도막부가 의식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측면 등등에서, 적극 평 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5) 明 朝 의 對 日 입장의 변화 a) 明 朝 가 후금 淸 朝 에 대한 견제 카드 로서 일본을 주목했다는 측면. b)또 하나의 변수로서, 1609년에 있었던 일본의 琉 球 침략과 복속이 책봉국 明 朝 에 미친 영 향의 유무가 궁금. 明 은 일본에 복속된 유구를 통제하여 2 年 1 貢 에서 10 年 1 貢 으로 통제하고 책봉 을 불허하는 움직임 견지. 1633년에 가서야 책봉과 2년1공이 회복. (6) 以 倭 制 淸 論 과 다른 以 淸 制 倭 論 은 근대 일본의 입김이 거세어지면서 부각되는 듯. 그 러나 혹 근세에도 後 者 와 같은 논리가 없었는지의 여부가 궁금.

71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71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호리 신 ( 堀 新, 公 立 女 子 大 學 ) 머리말 임진 정유왜란(1592~93, 1597~98)은 16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최대 사건이었다고 말해도 좋 을 것이다. 임진 정유왜란은 명 조선 일본의 외교 관계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국내 정세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본 발표에서는 주로 일본 측의 사료에 의거해 근년 일본 사 연구의 성과를 통해서 임진 정유왜란이 일본 국내의 어떠한 역사적 경위를 배경으로 발생했 는지, 그리고 이후 일본 사회와 동아시아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보고 싶다. 그 러면서 당시 사람들의 의식에 주의하여 가능한 한 충실히 반영하고자 한다. 따라서 종래에 황당 무계하다고 하여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사료나 에피소드를 활용하고 싶다. 또한, 임진 정유왜 란은 히데요시( 秀 吉 )의 천하통일 사업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천하통 일 과정도 개관해 보겠다. 그 때문에 본 발표의 내용은 직접적으로 임진 정유왜란에 관한 내용 만이 아니라, 그 전제가 되는 史 實 의 검토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 두겠다. 1. 戰 國 動 亂 과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통일 1467년( 應 仁 元 )의 應 仁 文 明 의 난 이후, 일본 전국은 1세기 이상에 걸친 戰 國 時 代 가 되었다. 戰 國 時 代 는 하극상의 시대 라고 불린 실력주의의 시대였다. 1562년( 永 祿 5)에 포교를 위해 來 日 한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1585년( 天 正 13)에 저술한 日 歐 文 化 比 較 에서 다음과 같

72 7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이 적고 있다. 우리의 사이에서 반역은 많은 비난을 받는다. 일본에서는 매우 흔히 있었던 일이므로 거의 비난 을 받지 않는다. 프로이스는 일본에서 謀 叛 은 비난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예 를 들면, 1565년( 永 祿 8)에 무로마치( 室 町 ) 막부 제13대 將 軍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 利 義 輝 )가 암 살되었을 때 배반자였던 미요시 요시츠구( 三 好 義 繼 ) 마츠나가 히사미치( 松 永 久 通 )는 정말로 제 멋대로의 행동으로 前 代 未 聞 의 일이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한 것이다. ( 誠 恣 之 仕 立, 前 代 未 聞, 無 是 非 次 第, 限 沙 汰 ニ 候 )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戰 國 時 代 는 결코 무질서하고 실력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던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극상을 성공시키려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 (그것이 표면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가 필요했다. 그 논리가 수용 되지 않으면, 아케치 미치히데 ( 明 智 光 秀 )와 같이 일단 획득한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으로서의 지위(= 天 下 人 )를 눈 깜짝할 사이 에 잃는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織 田 信 長 )이든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이든 그들의 천하통일 추진은 하극 상을 중첩해 쌓아 올려간 것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주군을 실력으로 압도하는 것만으로는 불충 분하였고, 그들의 하극상을 정당화 하는 논리가 필요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노부나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天 下 를 위해 ( 信 長 非 爲 一 人, 倂 爲 天 下 )라고 하여, 누차에 걸쳐 스스로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天 下 란 한 개인의 사적인 것은 아니라, 공적인 것과 존재를 의미하 며 쿄토( 京 都 )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일본 전국,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 다. 이 말을 이용하여 자신 한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이다. 라고 주장한 것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단순하게 실력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정당화의 논리도 실력을 수반하지 않으면 단순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으며 실력, 특히 武 威 (= 武 力 )가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점은 禮 에 최대의 가치를 두어, 武 보다 文 을 중시한 明 이나 조선과는 크게 다른 일본 무사 계급의 독자적인 가치관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8년( 永 祿 11)에 상경한 후, 副 将 軍 이나 管 領 이라고 하는 무로마치 막부 ( 室 町 幕 府 ) 고관으로의 취임을 사퇴하고, 그 대신에 이즈미노쿠니( 和 泉 国 )의 사카이( 堺 )를 직할지 로 삼기를 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카이는 일찍이 日 明 貿 易 의 출발 도착항구이며, 그 당시 남 만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를 겨루는 부유한 도시였다. 노 부나가는 직접적으로 철포 생산과 화약 수입을 위해 사카이의 영유를 원했던 것이지만, 사카이 상인을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의 정보를 얻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73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73 오다 노부나가가 1575년( 天 正 3)의 나가시노( 長 篠 ) 전투에서 철포부대를 활용해 다케다 카츠 요리( 武 田 勝 頼 ) 군을 무찌른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1582년( 天 正 10) 마침내 타케다씨( 武 田 氏 )를 멸망시켰다. 그 당시 일본 제일의 군대 ( 天 下 一 之 軍 士 )라고 인식되고 있던 타케다씨를 멸망시켰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을 확신시키는 사건이었다. 여기서 하 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해보겠다. 法 隆 寺 의 승려 仙 學 房 榮 甚 은 타케다씨 멸망의 뉴스를 듣고, 약 10년 전의 꿈 이야기( 夢 譚 )을 생각해 내고 興 福 寺 의 승려 多 聞 院 英 俊 에게 그것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 다. 10년 전쯤에 미카와노쿠니( 三 河 国 ) 明 眼 寺 의 승려 可 心 이 정월 2일 밤에 꿈을 꾸었다. 꿈속 에서 쇼토쿠 태자( 聖 徳 太 子 )가 천하를 다스리는 인물은 세 명이 있다. 그 중의 아사쿠라 요시카 게( 朝 倉 義 景 )에게는 재능이 없고, 다케다 신겐( 武 田 信 玄 )에게는 자비의 마음이 없다. 남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 밖에 없다. 내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 頼 朝 )에게 보낸 큰 칼( 太 刀 )이 아츠타 신 궁( 熱 田 神 宮 )에 있다. 그것을 노부나가에 보내라. 고 可 心 에게 말했다. 可 心 은 아츠타 신궁을 방 문해 중치을 노부나가가 있는 곳에 지참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노부나가는 나도 확실히 그 꿈 을 꾸었다. 매우 큰 경사이다. 라고 매우 기분이 좋아져 明 眼 寺 재흥을 약속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비슷한 꿈 이야기가 平 家 物 語 에도 있다. 쇼토쿠 태 자가 可 心 에게 명한 큰 칼 은 군사권의 상징인 節 刀 ( 賊 徒 정벌에 나가는 將 軍 에게 천황이 하사 는 것), 그리고 요리토모는 將 軍 직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즉, 可 心 이 본 꿈은 노부나가가 朝 家 의 수호( 御 まもり) = 將 軍 으로서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平 家 物 語 등의 군기소 설에서는 역적은 반드시 멸망하고 將 軍 이 그것을 정벌하는 존재로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러한 將 軍 史 觀 은 어디까지나 군기소설에서 말해지는 허구이다. 물론, 노부나가가 將 軍 에 임관 하지도 않았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노부나가는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 또 平 家 物 語 에서는 요 리토모가 將 軍 에 임관해 역적 타이라씨( 平 氏 )를 멸망시켰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의 將 軍 임관이 이루어진 것은 타이라씨를 명망한 후의 일이다. 즉, 平 家 物 語 는 천황과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 ( 天 下 人 )의 관계를 사실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바람직한 관계로서 묘사하고 있 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천황이 武 家 의 棟 梁 을 將 軍 에게 임명하고, 將 軍 은 천황과 조정의 수 호( 御 守 り) 로서 역적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公 武 관계 본연의 자세라고 주장하고 있 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조정 측이 원하던 바에 지나지 않는다. 平 家 物 語 는 그 후,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수용되어 可 心 榮 甚 英 俊 은 거기에 나타난 平 家 物 語 史 觀 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역사관에 의거해 현실의 역사를 해석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천황으로부터의 권한 委 讓 이나 征 夷 大 將 軍 임관이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 멸망과 타케다

74 7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씨 멸망이라고 하는 노부나가의 실적과 실력에 의해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으로서 인지했던 것이 다. 즉, 將 軍 사관은 허구라고 해도 武 家 가 천황 조정의 수호 로서의 입장을 유지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정은 武 家 정권의 수호 이기도 했다. 多 聞 院 英 俊 의 일기에는 이 꿈 이야기의 바로 전에 조정이 노부나가의 敵 國 이었던 타케다씨의 수호신들을 모두 없애버렸 다. ( 內 裏 ヨリ 信 長 ノ 敵 國 ノ 神 達 ヲ 悉 被 流 了 )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公 武 서로 모두가 수호 로 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천황을 넘어선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에 황위 찬탈을 의도하여 천황 조정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이 자주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 러한 공무대립 사관은 실태에 입각한 것이 아니며,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도 천황이라고 하는 존 재를 말살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公 武 모두 상호 간의 수호 라고 하는 것은 중세~근세를 통해서 일관된 공무결합 왕 권의 논리이다. 공무결합 왕권이란, 公 武 가 양자의 상대를 배제하고 권력의 일원화를 꾀하는 일 없이, 상호 간에 필요 불가결의 존재로서 상호 보완적으로 왕권을 구성하고 있다는 견해이다(물 론 公 武 는 권력 권위 모두 대등한 관계는 아니며, 왕권에서의 주도권이 武 家 에 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平 家 物 語 史 觀 은 많은 사람에게 읽혀 구전되고 있어 당시의 사람들의 역사의 식과 동시대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노부나가 자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노부나가 히데요시라고 하는 天 下 人 이 공무결합의 왕권 구조에 의거한 국가를 구상한 배경에는 이러한 平 家 物 語 史 觀 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만년에 대륙 침략의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알려져 있지만, 그 진위를 둘러싸고 논의는 나뉘어 있다.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1625년( 寬 永 2) 성립된 오제 호안( 小 瀨 甫 庵 )의 太 閤 記 권2가 최초일 것이다. 그것은 1581년( 天 正 9) 歳 暮 御 禮 때에 히데요시가 노 부나가 부자에게 보낸 헌상물이 아즈치성( 安 土 城 )의 산 밑에서 산 위까지 엄청나게 늘어서 있었 는데, 그 모습을 천수각에서 보고 있던 노부나가가 저 大 物 (히데요시)은 중국( 明 ) 인도를 정복하 라고 명령하더라도 거절하는 일은 없을 気 性 이다. (あの 大 気 者 には 支 竺 を 対 治 せよと 被 仰 付 たり 共, いなみはすまじき 気 象 なり)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40년 이상이나 뒤에 정리된 이 야기일 뿐만 아니라, 히데요시는 다음 해의 모리( 毛 利 ) 공격 준비를 위해 서서히 하리마노쿠니 ( 播 磨 国 ) 히메지( 姫 路 )에 귀국하도록 노부나가로부터 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1582년( 天 正 10) 11월 5일 자로 루이스 프로이스가 예수회 總 長 앞으로 제출한 보고서에 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문이지만 중요한 사료이므로, 일부 생략하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오다 노부나가)는 싸움에서 점점 더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에 의해 아직도

75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75 정복되고 있지 않았던 반도우( 坂 東, 關 東 ) 지방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이 단지 그의 명성과 부 권력을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使 者 를 보내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는 이 일체를 만물 창조주의 강대한 손으로부터 내려 받은 깊은 은혜라고 겸손해하기는커녕, 결국에는 오만하게 되어 자신 힘을 자랑한 나머지 스스로 일본 전 국토의 절대자로 칭하였고, 또 일본의 노인들이 諸 國 의 어떠한 國 主 (영주)나 世 子 에게서도 일찍이 본 적이 없으며, 책에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깊은 존경을 50여국으로 부터 받아들이고 있었음에도 부족하게 느껴, 마침내 갑자기 나브코드노조르 1) 와 같은 오만한 모습을 나타내, 죽어야만 하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불멸의 사람, 즉 신이라도 된 것과 같이 여러 사람으로부 터 숭상받기를 원했다. 일본에서는 보통, 신의 殿 堂 에 神 體 라고 칭하는 돌이 있다. 神 體 는 수호자 인 신의 마음 및 본체를 의미하지만, 아즈찌성( 安 土 城 )의 사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이 전에 말했던 것은 그 자신이 틀림없이 그 神 體 로서 살아있는 神 佛 이며, 자신 이외에는 세계의 지배 자도 만물의 창조자도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의 가신들이 노부나가 이외에 달리 숭배해야할 자는 없 다고 명언한 바와 같이 현세에서 숭배 받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主 인 데우스는 사람들 이 이렇게 모여드는 것을 보고 얻은 만족이 길게 계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즉, 한 아즈치산( 安 土 山 )의 축제로부터 19일이 지났을 때,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의 身 體 는 재가 되어 땅으로 돌아갔고, 그 영혼은 지옥에 묻혔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지난번의 싸움(타케다씨 공격)이 극히 순조롭게 끝 난 것을 보고, 4 5년 전부터 시작된 모리씨( 毛 利 )와의 싸움도 빨리 종결시킬 것을 원하여 이것을 정 복시키기 위해 이미 하시바도노( 羽 柴 殿, 豊 臣 秀 吉 )를 파견하고 있었다. 하시바도노는 2만 5,000의 군사가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서장을 보내 원군을 요구했는데, 거기서 3만의 군사를 얻으면 즉시 모리씨의 領 國 을 점령하여, 그의 목을 노부나가가 있는 곳에 헌상할 것이므로 노부나가 자신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실제로 수도(교토)에 온 것처럼 스스 로 출진하기로 마음먹고, 그곳에서 사카이( 堺 )까지 갈 것을 결정하여 모리씨에 대한 정복을 끝내고, 일본 66 國 전부의 절대 영주가 된다면, 중국에 건너가 무력으로 이것을 빼앗기 위해서 一 大 艦 隊 의 준비,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諸 國 을 나누어 주겠다는 마음을 결정하고 있었다. 이 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은 일본 내의 동시대 사료에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리고 전반 부분의 노부나가의 신격화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들며, 그러한 이유도 있기 대문에 후반 부분에 기술된 노부나가의 대륙침공 계획에 대해서도 의문시 되는 점이 많다. 또,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본인의 출진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히데요시가 이전부터 노부나가 자신의 출진 을 선전하여 모리씨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진행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1) 역자주: 나부코도노조르(Nabucodonosor)는 베르디가 작곡한 전 4막의 오페라로서 1842년에 밀라노 스카라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베르디에게는 3번재의 오페라로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출세작 이며, 특히 3막에서의 합창 가자, 우리의 이상이여, 황금 날개를 타고 는 오늘 날 이탈리아에서 國 歌 와 견줄만한, 또는 그 이상의 유명한 선율이다. 나부코라는 것은 보통 일본에서 네부카도네자르 로서 알려진 바빌로니아 왕의 이름이다.

76 7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이 점은 확실히 프로이스의 증언에 오류가 있다. 또, 아무리 당시 최강이라는 타케다씨를 멸망시 켰다고는 하지만, 아직 西國에서는 모리씨나 초소카베씨(長宗我部氏), 시마즈씨(島津氏) 등도 남 아 있어 대륙침공을 계획하기에는 너무 빠르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本 能寺의 變 전날에 노부나가 자신이 모리씨 공격에 대해서 그다지 시간은 걸리지 않는다. (手た てさうさあるましき事)라고 하는 예측을 언급하고 있었다. 또,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노부나 가를 우에사마 (上樣)라고 부르고 있어 이미 가신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 로부터 객관적인 情勢는 차치하고라도 노부나가 자신의 의식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서일본도 거 의 정복하고 있었다는 인식이었다. 노부나가가 대륙침공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해도, 큰 모순은 없을 것이다. 또, 만년의 노부나가는 새로운 정복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시코쿠(四國) 지방을 3남 노부타카(信孝)에게 주려고 하는 등, 아들들과 오다 일족을 우대하고 있 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 점도 프로이스의 증언은 정확하다. 그리고 프로이스가 아무 근거도 없이 대륙침공 계획을 꾸며낼 필요성은 없으며,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구상을 처음으로 공표한(이른 바 카라이리[唐入り] 선언) 것이 1585년(天正13) 9월 3일이며, 프로이스의 증언은 이것보다 약 3 년이나 빠른 것이다. 따라서 이 프로이스의 증언이 세부적인 면에서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만년 의 노부나가에게 대륙침공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대략적으로 사실이라고 봐도 좋을 것으로 생각 된다. 다만, 그 구체적인 계획으로서 중국에 건너가서 라는 기술만 보이고 있어 조선이나 명과 그 어떠한 교섭을 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계획에서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급해주고, 자신은 그 위에 설 생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후에 말하는 히데요시인 三國國割 구상에도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부나가는 왜 이와 같이 무모하고 일방적인 계획을 구상하고 있던 것일까. 그 배 경에는 전국 사회를 무력으로 천하통일했다고 하는 武威 의 의식이 관련되고 있다고 생각되지 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료도 부정하는 사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은 히데요시의 임진 정유 왜란을 거론할 때에 아울러 검토하도록 하겠다. 2. 토요토미 히데요시 摠無事令 의 논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이 무사가 아니라 백성이었다는 것은 당시부터 유명했다. 예를 들 면, 시마즈씨의 가신 우와이 가쿠켄(上井覚兼)은 그의 일기에 히데요시는 실로 집안이 비천한 인물이라는 것이 世間의 평판이다. (羽柴事ハ, 寔々無由来仁と世上沙汰候)라고 적고 있다.

77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77 이렇게 출신이 천함에서 오는 콤플렉스로부터 히데요시는 자기의 由緖를 치장하는 것에 열심 이었다. 그것은 1584년(天正12)의 고마키 나가쿠테(小牧 長久手) 전투 이후에 현저해졌다. 고마 키 나가쿠테(小牧 長久手) 전투는 히데요시의 主家인 오다 노부오(織田信雄)를 지지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싸움인데, 종래는 이 싸움에서 히데요시가 졌다고 여겨지고 있 다. 그러나 강화 조건으로부터 본다면, 히데요시군의 승리라고 생각되지만, 主家인 노부오(信雄) 와 그를 받들고 있는 이에야스를 압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력 이외의 요소로서 천황과 조정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율령 관위의 서열 기능을 이용하여 관위로서 노부오의 상위에 서서 그것에 의해 오다(織田)家로부터의 하극상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시도는 히데요시가 關白에 임관한 1585년(天正13)에는 더 한층 집중되고 있다. 히데요시 의 어용학자인 오무라 유코(大村由己)가 동년 8월에 저술한 關白任官記 에는 히데요시의 조부 는 萩中納言이라고 하여 어떤 인물의 중상모략에 의해 먼 곳으로 流刑에 처해졌고, 히데요시의 어머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이윽고 상경해 천황의 측근에서 2 3년 시중을 들다가 지방으로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아 히데요시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확실히 명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히 데요시가 천황의 서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필적이다. 동년에는 오오기마치(正親町) 천황의 황 태자와 하치죠노미야 토시히토신노우(八条宮 智仁親王)를 조카로 삼은 것 외에 교토의 御所에서 茶會와 노우(能)를 개최하였는데, 이후에도 자주 개최하고 있다. 또한 다음 해인 1586년(天正14) 에는 오오기마치 천황과 和歌를 교환한 것 이외에 동년에 즉위 한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이 있는 곳에 양녀 사키코(前子)를 후궁으로 입궁시키고 있다. 천황가와 인척관계를 거듭하여 연결해 천 황과의 친밀한 교제를 인상지우고 있는 것이다. 천황가와 정략결혼을 한 사람은 고대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무사에서도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나 도 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등 그 예는 적지 않지만, 이 정도로 천황과의 친밀함을 어필한 것은 히데요시뿐일 것이다. 그리고 천황과의 친밀함은 1585년(天正13) 10월 2일에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앞으로 큐 슈(九州) 停戰令을 발령했을 때에도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속에서 히데요시는 천황의 명령에 의해 지시한다. 칸토우(關東) 오슈(奧州) 지방까지 전쟁도 없이 조용한데, 아직도 큐슈(九 州)에서는 전쟁상태에 있는데, 이것은 무례한 것이다[=좋지 않은 것이다]. 國郡의 경계 논쟁에 관해 서로 주장하는 바를 듣고 그에 따라 裁定을 내릴 터이니, 먼저 전쟁을 멈추라고 하는 것이 천황의 생각이다. (就勅定染筆候, 仍關東不殘奧州果迄被任倫[綸]命, 天下静謐處, 九州事于今鉾 楯儀, 不可然候条, 國郡境目相論互存分之儀被聞召屆, 追而可被仰出候, 先敵味方共雙方可相止 弓箭旨, 叡慮候 )라고 말하고 있다. 關東에서 奧州까지 히데요시가 정복한 것도, 시마즈씨에게

78 7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정전을 요구하는 것도, 모두 히데요시 스스로의 의사에 의거한 것으로 이것은 천황의 意思가 아 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 이것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시마즈씨 측은 시마즈(島津)家는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래의 명문이라는 자긍심에 의해 신분이 천한 히데요시로부터의 정전 명령을 거절했다. 그리고 1587년(天正15) 4월에 시마즈씨 공격이 시작되어 5월 8일에 시마즈씨는 항복했다. 다음 9일에 시마즈 요시히사 앞으로 보낸 서장에서도 일본 전국 60여州를 재차 지배하도록 천황이 지시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남김없이 지배한다. 금후에는 천황의 명령을 지켜 忠功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日本六十余州之儀, 改可進止之 旨, 被仰出之條, 不殘申付候, 自今以後, 相守叡慮, 可抽忠功事専一候也)라고 말하고 있다. 천 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를 명받을 수 있었던 것이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전국 지배에 대 한 정당성의 근거이며(물론 그런 명령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히데요시의 명령은 즉, 천황의 명 령이므로 거기에 따를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항상 천황이나 關白의 지위를 이용했던 것은 아니다. 1585년(天正13) 10 월의 큐슈 停戰令으로부터 약간 뒤늦어서 히데요시는 1586년(天正14) 5월에 關東 東北 지방에 도 停戰令을 발령하였고, 동년 11월에는 摠無事令을 발령하지만, 이러한 명령 속에서는 천황이 나 關白의 지위를 일부러 강조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1589년(天正17) 7월 22일에 야쿠인 젠소 (施薬院 全宗)가 히데요시는 천황에게 일본 전국의 지배를 명받아 關白 직위에 임명되었기 때 문에 종래와는 달리 히데요시의 승인을 얻지 않은 전쟁은 허락하지 않는다. (以天氣, 一天下之儀 被仰付, 被任關白職之上者, 相替前々, 不被經京儀候者, 可爲御越度候)라고 말하고 있듯이, 교섭 과정에서 천황이나 關白의 지위를 과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큐슈 평정 뒤인 1588년(天正16) 4월 6일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토미타 토모노부(富田知信)가 中國 평정도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 에 關東 東北 지방에 摠無事令이 발령되었다. (唐國迄も平均眼前候, 此上關東 奧兩國摠無事之 儀, 被仰出候)고 말하고 있듯이, 대륙침공을 내다보고 摠無事令이 발령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1589년(天正17) 11월 11일에 토미타 토모노부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吉=淺野長政)는 일본의 천하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평정도 히데요시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日本儀者不及 申, 唐國迄も被得上意候者共之爲候)라고 말하고 있어 대륙침공이 천하통일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대륙침공 구상을 공표한 것은 1585년(天正13) 9월 3일이며, 關白 임관 직후부터 존재하고 있는데, 당초에는 천하통일의 달성이 주된 목적이었으며, 막연한 추상적인 내용이었다. 1586년(天正14) 3월에는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에료(Gaspar Coelho) 등에게도 대륙침공 구상을 전하였고, 동년 4월 10일에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에게 큐슈 공격

79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79 준비의 일환으로서 高麗御渡海事 (히데요시가 한반도에 渡海하는 것), 동년 6월 16일에는 소 요 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국에 가능한 한의 군세를 파견한다. (高麗國へ被遣御人數成次第), 또 동년 8월 5일에 안코쿠지(安国寺) 에케이(恵瓊) 등에게 히데요시는 중국까지도 침공하려고 생각 하고 있다. (唐国まて成とも可被仰付と被思召)고 말하고는 있지만, 모두 큐슈 공격 준비를 지시하 면서 부언과 같은 형태로 대륙침공 구상을 언급한 것이다. 그것이 구체성을 띠게 되는 것은 158 7년(天正15) 5월의 큐슈 평정이었다. 1588년(天正16) 8월 12일,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시마즈 요시히사가 류큐 국왕에게 복속 입공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미 조선국은 히데요시에게 복속하 였고, 중국과 남만국도 가까운 시일 안에 복속될 것이다. (既従高麗者, 御朱印拝領, 唐土 南 蠻兩州者, 音使舟涉之巷說半候)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국이 히데요시에 복속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이 단계에서는 천하통일을 위한 치장 도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겠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복속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즉시 兵船을 준비하겠다. (直被催武船)고 위협하고 있다. 약간 뒤의 일이지만, 1595년 (文祿4) 1월 16일에 히데요시는 조선에 주둔한 여러 장수들 앞으로 조선은 큐슈와 마찬가지라 고 생각하고 있다. (朝鮮之儀九州同前ニ思召候)고 말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여 큐슈 평정에 따른 대륙침공 구상이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関東 東北 지방에서 최대의 강적은 오다와라(小田原)城의 호조씨(北條氏)이다. 히데요시는 15 90년(天正18)에 호조씨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달성하였다. 그 전년인 1589년(天正17) 11월 2 4일에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나오(北條氏直)에게 5개 항의 선전포고장을 보내고 있다. 그 안에서 히데요시는 호조씨가 히데요시의 領土裁定에 거역한 것을 질책하고 있는 한편,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은 相叶天命, 즉 천명이라고 하고 있다. 또, (關白 太政大臣으로 임관하여 진국지배를 행 한다. (成塩梅則闕之臣, 關万機政)고 했다든지, 이 세상에서 천황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무리들 은 급속하게 멸망한다. (所詮普天下逆勅命輩, 早不可不加誅伐)고 하는 속담을 인용하는 등, 천황 이나 關白의 지위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자기 정당화 논리의 중심은 天 命 이었다. 또한, 戰國時代에 일본 전국에서 전개된 제 대명들 간의 전쟁의 원인은 국경 분쟁을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 히데요시는 停戰令과 摠無事令에 의해 대명 사이의 전쟁을 私戰 으로 금지하고, 히데요시가 公儀 (공적인 존재나 기관)로서 領土裁定을 실시하는 것으로 평화를 가져오려고 했 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입장은 공평한 제3자가 아니었으며, 한쪽의 당사자로서 한쪽에 현저하게 불리한 裁定을 내렸기 때문에 실제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위협과 도발과 마찬가지였 다. 즉, 전쟁을 행하기 위한 평화령이었던 것이다.

80 8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그럼, 여기까지의 히데요시의 자기 정당화 논리를 정리해보겠다. 모두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 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점은 정리의 대상으로부터 제외하겠다. 우선 시마즈씨에 대해서는 천황 이나 關 白 의 지위를 과시하고 있다. 시마즈씨가 攝 關 家 인 近 衛 家 로서의 관계가 가깝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려고 한 것일 것이다. 關 東 東 北 지방의 諸 大 名 에 대해서는 천황이나 關 白 의 지위 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큐슈 평정 후에는 대륙침공 구상을 말하면서 복속을 요구하고 있다. 이 점은 류큐( 琉 球 ) 국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천하통일의 최종 단계 인 호조씨 공격에 즈음하여 天 命 의 논리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의 과정에서 사용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는 상대에 따라 강조 하는 내용에 차이가 났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천하통일의 총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호조 씨를 공격한 단계에서 나타난 天 命 의 논리가 이 후에 동아시아 제국 등에 보낸 복속을 요구하 는 문서에서도 강조되어 갔다. 대륙침공이 천하통일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3.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天 命 日 輪 神 話 키타지마 만지( 北 島 万 次 )씨의 연구에 의하면, 히데요시의 天 下 統 一 과 異 域 統 一 이 天 命 이라는 자기 정당화의 논리는 1590년( 天 正 18) 2월 28일자 류큐국왕 앞, 11월부로 조선국왕 앞, 1591년 ( 天 正 19) 9월 15일자 필리핀 제도 장관 앞, 1592년( 天 正 20) 7월 21일자 필리핀 제도 장관 앞, 15 93년( 文 祿 2) 6월 28일자 大 明 日 本 和 平 條 件, 동년 11월 5일자 高 山 國 앞으로 보낸 6통의 외교 문서 속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의 외교문서 11통의 약 반수에 해당된다. 天 命 이외의 정당화 논리를 사용한 외교문서도 거의 반수이지만, 天 命 의 논리를 주장한 6통 의 외교문서에 대해도 天 命 이외의 논리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그 논리도 아울러 검토하기 위해서 전술한 1590년( 天 正 18) 11월부로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를 살펴보겠다. 하지만 그 전에 츠시마( 對 馬 ) 소씨( 宗 氏 )를 통한 히데요시와 조선국과의 교섭을 개략해 두고 싶다. 전술한 바와 같이 1586년( 天 正 14) 6월 16일에 히데요시는 소 요시시게( 宗 義 調 )에게 조선국 에 가능한 한의 군세를 파견한다. ( 高 麗 國 へ 被 遣 御 人 數 成 次 第 )라고 말해 그에 대한 협력을 요구 했다. 1587년( 天 正 15)의 큐슈 공격 때에 소씨는 야나가와 시게노부( 柳 川 調 信 ) 등을 사자로 보냈 다.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사가 항복하기 직전의 5월 4일자로 소 요시시게( 宗 義 調 ) 앞으로 보 낸 주인장에서 큐슈 평정을 명령하여 빨리 그것을 달성했기 때문에 조선국에 軍 勢 를 파병한 다. ( 九 州 儀 悉 平 均 被 仰 付, 早 被 御 隙 明 候 間, 至 高 麗 國 御 人 數 可 被 差 渡 候 )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

81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81 나 야나가와 시게노부 등의 설득에 의해 우선 사자를 파견하여 戰火를 서로 겪는 일 없이 복속 을 요구하기로 했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동년 5월 29일자의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조선국으로부터 천황에게 出任하도록 빠른 선박(早船)으로 사자를 보내게 했다. 만약 조선국이 出任하지 않는다면, 내년에 출진한다. 히데요시의 일생 안에 중국까지도 손에 넣도록 하겠다. (こうらいのほうまで, にほんの大りゑしゆし可申よし, はやふねをしたて申つかわせ候, しゆし不 申候はゞ, らいねんせいばい可申よし申つかはせ候, からこくまでてにいれ, 我等一ごのうちに申つく 可候)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복속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대륙으로 침공할 생각이었다. 동년 6월 7일, 소 요시시게(宗義調)는 치쿠젠노쿠니(筑前國) 하코자키(筥崎)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했다. 6월 15일자 소 요시시게 요시토시(義智) 부자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요시시게의 변 명에 의해 조선국 침공을 단념했기 때문에 대신에 조선국왕을 參洛시키도록 명하고 있다. 소씨 측은 이 히데요시의 요구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국으로 부터의 공물이나 인질의 제출에 의해 히데요시의 요구를 벗어나려고 했다. 소씨는 9월에 가신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로 위장해 조선국에 보냈다. 소씨 측은 일본의 천하통일 과 신왕의 출현을 언급하였고, 그것을 경축하는 사자의 파견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측은 국왕 을 폐하고, 신왕을 세운 일본은 簒弑의 나라이며, 化外의 나라라고 판단하여 바닷길에 어둡다(水 路迷昧)는 것을 이유로 사절 파견을 거절했다. 귀국한 타치바나 야스히로의 보고를 들은 히데요 시는 격노하였고, 야스히로를 죽인 뒤에 그 일족을 멸했다. 1588년(天正16) 12월에 소 요시시게가 사망한 후, 다음 해인 1589년(天正17) 3월 28일자로 요시시게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카토 키요마사(加藤淸 正) 두 사람에게 치쿠센노쿠니(筑紫國)의 군세를 추가하여 출진시켜야 하지만, 요시토시(義智)가 朝鮮國으로 건너가 당해 여름 중에 조선국왕을 설득하여 上洛시켜라. 군세를 파병해서는 국왕과 의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터이니, 지금 파병을 약간 연기한다. (小西攝津守 加藤主計頭兩 人江, 筑紫御人數共被差副, 為御先勢被差遣候處ニ, 其方高麗江渡海仕, 當夏中に國王令同心, 可 罷上候, 御人數被遣候而者, 迷惑仕由候條, 今少可相延旨被遣候)고 말해 재차 조선 국왕의 참낙 을 요구하고, 그 기한을 당해의 여름까지로 정해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출진하겠다고 위협하 고 있다. 이상에서의 조선국과의 교섭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시마즈씨에게 천황이나 關白의 지위를 과 시해 복속을 강요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히데요시는 조선국에 대해서 오로지 출진 을 위협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국왕을 일본천황에게 出仕시킨다고 하는 점에서는 천황을 이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국왕의 參洛을 강제하는 수단이 아니다.

82 8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어디까지나 參 洛 의 형식이기 때문에 천황의 지위를 이용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원래 諸 外 國 에 대해서 천황이나 關 白 이라고 하는 지위에 의미가 있을 리도 없다. 다만, 여기까지의 교섭은 히데요시의 외교문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씨를 통한 사전 교섭적인 것이므로, 히데요시의 자 기 정당화 논리가 나타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씨 측은 6월에 하카타( 博 多 ) 聖 福 寺 의 승려 케이테츠 겐소( 景 轍 玄 蘇 )를 正 使, 소 요시토시 ( 宗 義 智 )를 副 使 로 삼아 거기에 소케( 宗 家 ) 가신인 야나가와 시게노부( 柳 川 調 信 )와 하카타 상인 인 시마이 소시츠( 島 井 宗 室 ) 등을 참가시켜 조선국으로 도해했다. 소 요시토시( 宗 義 智 ) 일행은 조선국왕을 알현하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水 路 迷 昧 라면 요시토시( 義 智 ) 스스로가 일본 으로 안내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기서 조선국 측은 몇 년 전에 왜구의 길잡이를 한 沙 乙 背 同 을 붙잡아 조선에 연행해 오면, 일본으로의 통신사 파견을 검토해보겠다고 회답했다. 그에 따라 소씨 측은 곧바로 야나가와 시게노부에게 沙 乙 背 同 을 붙잡아오도록 했기에 9월에 조선국 측은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을 경축하는 통신사 파견을 결정했던 것이다. 正 使 황윤길, 副 使 김성일의 통신사 일행은 다음 해인 1590년( 天 正 18, 선조23) 3월에 서울을 출발해, 7월 21일에 上 洛 했다. 히데요시는 3월 1일에 호조씨 공격 때문에 출진하여 부재였기 때 문에 통신사 일행은 大 德 寺 에서 히데요시의 귀경을 기다렸다. 히데요시는 9월 1일에 쿄토에 개 선하고 들어왔는데, 11월 7일에 聚 樂 第 에서 통신사를 접견하여 국서를 받았다. 그 내용은 히데 요시를 일본국왕 이라고 불러 일본 60여주의 통일을 경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 것을 복속문에 로 믿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알현시의 태도가 극히 傍 若 無 人 이었다. 자주 지적 되고 있는 바와 같이 히데요시는 조선국과 츠시마의 관닄. 오해하고 있었다. 오오무라 유코( 大 村 由 己 )의 九 州 御 動 座 記 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츠시마( 對 馬 ) 소시( 宗 氏 )에 복속되어 있다. ( 對 馬 の 屋 形 ニしたかハれ 候 )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로 조선국 측에서 본다면, 생산력이 낮은 츠시마에 도움의 손길을 뻗 쳐, 그 생활이 가능하도록 처리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조선국왕으로부터 츠시마에 歲 賜 米 와 大 豆 가 하사되었고, 또 츠시마로부터의 세견선에 교역을 허락하여 이익을 확보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츠시마 소씨를 통한 토요토미 정권과 조선국과의 외교 교섭은 그 전제 부분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교섭이 정리되어지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그럼, 1590년( 天 正 18, 선조23) 11월부로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를 살펴보겠다. 히데 요시는 日 本 國 關 白 秀 吉 라고 칭하였는데, 이 속에서 히데요시가 주장하고 있는 점은 이하의 4 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1일본에서 천하통일의 실적을 과시한 것, 2탄생에 관련된 日 輪 의 奇 瑞 를 언급한 것, 3일본의 풍속을 넓히기 위해 征 明 을 구상했다는 것, 4조선국에 대해서는

83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83 일본의 첨병(원문: 先 驅 け)으로서 명에 入 朝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2로서 그 내용을 보다 상세히 보도록 하겠다. 히데요시가 어머 니의 태내에 있었을 때, 어머니가 日 輪 (태양)이 태내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점쟁이는 日 光 이 미치는 곳에서 비춰지지 않는 곳은 없다. 이 아이(히데요시)는 성장해서 반드시 인덕을 넓히고, 일본 전국에 위대한 명성을 떨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奇 瑞 에 의하면, 히데요시에게 적대하는 사람은 자연히 멸망하고, 싸워서 질일이 없으며, 공격해서 정 복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 국내는 잘 다스려져서 백성을 撫 育 하고 孤 獨 者 를 憐 憫 한 다. 그 때문에 백성은 풍요롭고 재산은 충분하며, 年 貢 은 먼 옛날의 1만 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의 후반 부분에는 히데요시의 성공 모습을 강조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반 부분의 어머니와 日 輪 에 관한 奇 瑞 이다. 이것을 日 輪 神 話 라고 부른다. 일찍이 日 輪 神 話 는 히데요시가 천황의 서자라고 하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의 미천한 출신을 미봉하기 위한 픽션이며, 검토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키타지마 만지( 北 島 万 次 )씨의 연 구에 의하면, 이러한 탄생에 관한 奇 瑞 는 동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걸쳐서 전승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奇 瑞 는 한민족의 경우를 포함해, 주변 제민족이 중국에 수립한 정복왕조 시조의 탄생에 는 반드시 이러한 奇 瑞 가 있다. 이 奇 瑞 에는 몇 개의 패턴이 있지만, 日 輪 神 話 와 같은 모습으로 모친의 잉태와 日 光 에 관한 내용의 것은 한민족의 왕조로는 송(960~1279년)의 태조 조광윤, 명 (1368~1644년)의 태조 洪 武 帝 (주원장)가 있으며, 주변 민족에는 북위(386~534년)의 道 武 皇 帝 ( 拓 跋 珪 ), 요(916~1125년)의 태조 耶 律 阿 保 機, 원(1271~1368년)의 태조 칭기즈칸(테무친)의 경 우가 있다. 이러한 키타지마( 北 島 )씨의 지적에 의해, 이 奇 瑞 의 의미가 처음으로 밝혀졌던 것이 다. 즉, 대륙침공에 의해 중국에 신왕조를 수립한다고 하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日 輪 神 話 는 조 선국왕 앞으로 보낸 이 국서에서 처음으로 주장되어져 이후는 1591년( 天 正 19) 9월 15일자 필리 핀 제도 장관, 1593년( 文 祿 2) 6월 28일자 大 明 日 本 和 平 條 件, 동년 11월 5일자 高 山 國, 동년(월일 불명) 필리핀 제도 장관 앞으로 보낸 4통의 외교문서에서도 반복되어 주장되고 있다. 외교문서로 히데요시의 자기 정당화 논리를 정리하면, 일본의 천하통일에 대해서는 天 命 을 근거로 하고 있 으며, 대륙침공에 대해서는 탄생의 길조에 의한 日 輪 神 話 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히데요시의 외교문서는 쿄토 오대산의 승려들이 작성했다. 그들은 무로마치( 室 町 ) 막부 이래, 외교문서의 작성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복왕조의 시조의 탄생에 관한 奇 瑞 에 대해서는 당연 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명의 태조 홍무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 식을 히데요시에 바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유감스럽지만, 조선 통신사들은 귀국 후의 복

84 8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명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정사 황윤길은 대륙침공의 가능성이 높다고 복명하였 고, 부사 김성일은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 의견의 차이는 조선국 관리가 동인파와 서인 파로 나뉜 파벌 당쟁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국서 4에서 히데요시가 조선국왕에 대해서 征 明 先 導 를 주장하고 있지만, 소씨는 이것을 假 道 入 明 으로 살짝 바꾸어 조선국과 교섭했다. 한편, 히데요시의 대륙침 공 구상의 정보를 입수한 명은 조선국에 일본 정세의 보고를 요구했다. 조선국은 히데요시의 대 륙침공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明 황제는 요동의 정병 파견과 은 2만 냥을 조선 국에 보낼 것을 약속했다. 그 한편, 明 은 연안 방비를 굳히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임진왜 란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4.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三 國 國 割 구상 1592년( 天 正 20, 선조25) 3월 13일, 히데요시는 약 16만의 군세를 9군으로 편성하여 대륙침공 을 명했다. 동년 4월 13일(일본력 12일), 코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 소 요시토모( 宗 義 智 )의 제1 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다음 14일 아침 일찍, 일본군은 부산진을 포위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 다. 카토 키요마사( 加 藤 淸 正 )의 제2군은 4월 18일에 부산포에 상륙했고, 경상도를 북상해 경주로 진군했다. 이때의 일로 생각되는데, 沙 也 可 라고 하는 武 將 이 3,000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경상병 사 朴 晋 에게 투항했다. 이1군이카토에게 모반이었지만, 이러한 문제를 끌어안으면서도 진군했다. 쿠로다 나가마사( 黑 田 長 政 )의 제3군, 모리 요시나리( 毛 利 吉 成 )의 제4군 등도 차례차례로 상륙해 왔다. 갑작스런 공격에 허를 찔린 조선국에서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김과 동시에 明 에 구원을 부 탁하게 되었다. 4월 30일의 아침 일찍 조선국왕군이수도 한성을 탈출하였고, 코니시( 小 西 ) 소( 宗 ) 씨의 제1군과 카토( 加 藤 )의 제2군은 5월 3일에 한성에 입성했다. 카토는 곧바로 히젠노쿠니( 肥 前 國 ) 나고야( 名 護 屋 ) 城 의 히데요시에 이것을 보고하였는데, 카 토의 서신은 5월 16일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곧바로 카토에게 답장을 보내, 조선국왕 의 탐색, 일본군의 점령에 대한 기본적 자세, 병량의 점검, 도로의 정비 등을 명령했다. 諸 大 名 에 게는 한성의 성 밖에 진을 치게 하고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거실을 만들도록 명하고 있어 히데요 시는 곧 바로 도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히데요시는 關 白 토요토미 히데츠구( 豊 臣 秀 次 ) 앞으로 전 25조의 각서를 보 냈다. 이것은 에도시대의 大 名 마에다 츠나노리( 前 田 綱 紀 )에 의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三 國 國 割 계획은 매우 성급한 생각이었다. ( 豊 太 閤 三 國 處 置 太 早 計 )고 평가되고 있듯이 실현될 가능성

85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85 이 극히 낮았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거의 진지하게 검토되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현될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히데요시가 자기선전을 위해서 될 성싶지도 않은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 자신은 소박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으 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국가 구상이나 동아시아 구상을 생각하기 위한 소재로서는 중요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에서 히데요시 스스로가 도해하여 대륙을 침공하고, 히데츠구( 秀 次 )에게 大 唐 의 關 白 職 을 내릴 생각이었다는 것, 그 때문에 히데츠구에게 다음 해 정월~2월에 출진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그 때 군세의 인원수나 장비, 진군 경로, 병량준비 등 실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지시를 내리 고 있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국가 구상과 동아시아 지배 구상에 대해 25개조의 각 곳에 걸쳐 말하고 있는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明 정복 후에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後 陽 成 ) 천황과 히데츠구를 북경에 이동시켜 각각 명국의 천황과 關 白 으로 한다. 히데츠구에게는 북경 주변의 100국을 내려주고, 천황에게는 북경 주변 10국, 公 家 衆 속에는 10배 이상의 영지를 받는 사람도 나온다고 한다. 고요제이 천황의 북경 이동은 행차의 형식으로 하며, 그것은 2년 후를 예정했다. 일본의 국가체제로서 천황에는 儲 君 ( 皇 太 子 ) 나가히토신노우( 良 仁 親 王 )나 皇 弟 인 하치조노미야 토시히토신노우( 智 仁 親 王 ), 일본의 關 白 에는 토요토 히데야스( 豊 臣 秀 保 )나 우키타 히데이에( 宇 喜 多 秀 家 )의 한 쪽을 앉힌다. 조선에는 토요토미 히데카츠( 豊 臣 秀 勝 )나 우키타 히데이에( 宇 喜 多 秀 家 )를 두고, 큐슈에는 하시바 히데토시( 羽 柴 秀 俊, 후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 早 川 秀 秋 ])를 둔 다. 이들과는 별도로 쿄토 御 所 와 聚 樂 亭 에 留 守 居 를 두고, 미야베 케이준( 宮 部 繼 潤 )을 조선 留 守 居 로 삼는다. 조선의 지배 체제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국왕에 대한 탐색을 명령하 고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해본다면, 그를 국왕으로 삼을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시바 히데카츠( 豊 臣 秀 勝 )나 우키타 히데이에( 宇 喜 多 秀 家 )는 조선의 關 白 으로서 예정되어 있었던 것 일까. 쿄토 御 所 와 聚 樂 亭 및 조선의 留 守 居 는 국가 지배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천황가 토요토 미 家 에 관련되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큐슈에 두어질 예정의 하시바 히데토시( 羽 柴 秀 俊 )는 아 마도 나고야( 名 護 屋 ) 城 의 留 守 居 일 것이다. 이러한 국가 체제에 공통되는 것은 천황(국왕)과 關 白 이 세트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國 王 = 公 家, 關 白 = 武 家 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무결합 왕권의 구조이기도 하다. 히데요시 는 당시의 일본 내의 지배 체제나 왕권 구조를 그대로 명과 조선에 들여올 생각이었던 것이다. 천황가나 公 家 衆 의 존재는 부정되는 일 없이, 明 에까지 확대시켜 가지고 들어간다는 구상이었다. 히데요시에게 국가라는 것은 국왕과 關 白 의 세트 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 고 히데요시는 일본과의 무역항인 寧 波 에 거주하면서, 나아가 인도 침공도 구상하고 있었다.

86 8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이 구상 속에서 히데요시 자신의 지위나 관직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삼국의 국가 체제를 구 상하는 히데요시에게 그 어떤 공적인 지위 등은 원래 필요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각국의 국 왕과 關 白 을 임명하고, 각각 지행을 내려 동아시아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여 각국의 지배 체 제를 스스로의 혼자의 생각으로 결정한다. 그 근거는 지위와 신분이 아니라, 武 威 에 뒷받침된 히 데요시의 카리스마성에 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 이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책봉체제에 적용시키면, 중화 황제 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 까. 明 황제가 중화 황제로서 군림하고, 주변 제국은 明 에 조공 하며, 明 황제가 제국의 국왕을 임명한다. 이 明 황제의 위치에 三 國 國 割 구상에서 히데요시의 자리매김이 가능한 것은 아닌가. 다만,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지위나 칭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것이므로 따옴표를 붙여 중화 황제 라고 부르고 싶다. 일본을 포함한 주변 제민족이 중국에 정복왕조를 수립하는 화이변태 (중화와 미개인의 역전 현상)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다. 한민족이 형성한 화이사상은 중국 역대의 왕조뿐만이 아니라, 주 변 제국 제민족도 규제하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제질서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주변 제국이 각각 의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국내 지배를 관철하고 더 한층 영역 확대를 구상하는 가운데, 중국 과 대등하게 자기를 평가하면서도 한정된 지역의 小 世 界 속에서 스스로를 중화 라고 하는 경향 이 태어났다. 히데요시의 삼국국할 구상도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의 전체적인 경향과 관계없는 것 은 아니다. 그리고 1644년( 寬 永 21, 仁 祖 22)에 명은 청에 멸망당해 화이변태가 현실화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대등하지 않았고, 당초부터 이것을 침공 정복 하려고 하는 점은 다른 주변 제 국과는 역시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를 가져온 배경이 戰 國 社 會 를 통일한 武 威 (무력)일 것이 다. 히데요시는 1592년( 天 正 20) 6월 3일에 일본을 활과 화살이 엄격한 나라 ( 弓 箭 きひしき 國. 그 만큼 武 가 중시되는 나라)로서 자랑하는 한편, 大 明 은 長 袖 의 나라 ( 大 明 之 長 袖 國 ) 2) 라고 하여 明 을 일단 낮게 보고 있다. 文 을 중시하고 武 를 일단 낮게 보는 다른 동아시아 제국의 인식과 는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중화 의 근거는 禮 에 있다는 것이 동아시아 세계의 화이사상이기 때문에 武, 武 威 를 근거로 스스로를 중화 라고 하는 히데요시의 국가 구상 동아시아 세계 구상은 특이한 것이다. 누차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비뚤어진, 굴 절된 의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1세기에 걸친 戰 國 쟁란과 천하통일 과정에서 초래된 것이었다. 2) 역자주: 나가소데( 長 袖 )는 무사가 귀족을 멸시하는 용어임.

87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87 결말을 대신하여 전장의 최전선에서는 히데요시의 三 國 國 割 구상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 다. 한성 함락의 직후인 5월 14일, 코니시 유키나가( 小 西 行 長 )나 소 요시토시( 宗 義 智 ) 등을 중심 三 國 조선국에 화해를 권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 측의 거갈이다의해 성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德 川 家 康 )와 마에다 토시이에( 前 田 利 家 )의 諫 止 이다 의해 히데요시의 조선 도해가 다음 해 3월 三 國 연기되었다. 결국, 히데요시의 도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인솔한 이순신의 활약이다의해 보급로가 끊어졌고, 각지에서 의병 이 궐기했으( 前 田 8월부터는 본격적 三 國 明 의 원군도 출동해 전황은 크게 전환되었다. 9월에는 50일간의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그리고 1593년( 文 祿 2 前 田 宣 祖 26) 4 월초에는 조선 측이 한성 철 수와 조선의 두 왕자 송환을 조이 三 國 화해를 권고해왔다. 6월말에는 코니시 유키나가하는 신 나이토 조안( 內 藤 如 安 )을 히데요시의 강화 사괈을 위장해 前 田 利 이다파견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히데요시가 항복을 신청한 關 白 降 表 가 위작되어 1594년( 文 祿 3 前 田 宣 祖 27) 12월 중엽, 나이토 조안 도해가 다를 알현하고 있다. 조선 三 부터 일본군의 철수와 히데요시있었던 등의 강화 조이 D도해가 다는 허락했다. 그리고 1596년( 慶 長 元 前 田 宣 祖 29) 9월 1일, 히데요시는 오사카( 大 坂 ) 城 에서 해가사괈D도알현했다. 다음 2일 사이쇼 죠타이( 西 笑 承 兌 )가도해가 다음 誥 命 D도읽어 내려 갔고, 日 해가강화교섭은 파탄되었다. 거기에 결국, 히가도요구었던 헱 조이은 무시되고 있었고, 히데요시는 격노했다. 무엇보다도 국, 히가도원하고 있던 조이은 코니시( 小 西 ) 등이다의해 묵살 되어져도해가측에는 전해지지 않았기에 해가 다음 誥 命 에 반영되어 있을 리도 없었다. 속설에는 국, 히가도 너를 봉해 日 本 國 王 三 國 삼않았 ( 爾 を 封 じて 日 本 國 王 と 爲 す)라고 하는 표현에 격노 했다고 여겨지고 있조선국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강화 교섭이 파탄되어 대륙침공이 재개되었고(정유왜란), 1598년( 慶 長 3, 宣 祖 31) 8월 히데요 시의 죽음까지 전황은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카라이리 ( 唐 入 り)라고 한 바와 같이 明 정복을 목 표로 한 것이지만, 실제의 전쟁터는 조선(한반도)이었다. 전황의 정체와 장기화는 대명이나 병사 들에게 전쟁을 기피하게 만들었고(발표원문: 厭 戰 氣 分 ), 국내외의 피폐와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감을 낳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토요토미 정권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 川 家 康 )는 1600년( 慶 長 5)의 세키가하라( 關 が 原 ) 전투, 1614년( 慶 長 19)~1615년( 慶 長 20)의 오사카( 大 坂 ) 겨울의 전투( 冬 の 陣 ) 여름의 전투( 夏 の 陣 )를 거쳐, 토쿠가 와씨( 德 川 氏 )의 권력을 확립했다. 에도막부( 江 戶 幕 府 )는 武 威 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여러 나라 에 대해 武 威 를 봉인하였다. 유럽 제국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 금교정책과의 관련으로 포르투

88 8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갈과 단교하여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와만 통교를 유지하였다. 아시아제국에 대해서 조선국과는 강화로서 정리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마침내 중국과는 정식적 국교를 맺을 수 없었다. 시행착오 의 결과, 1635년( 寬 永 12)에 야나가와잇켄( 柳 川 一 件 )이 3대 將 軍 이에미츠( 家 光 )의 親 裁 에 의해 해결되어 다음 해인 1636년( 寬 永 13)에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1641년( 寬 永 18)에 네 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 長 崎 )의 데지마( 出 島 )로 옮겨 鎖 國 이 완성되는 것이다. 번역: 신동규( 申 東 珪, 한림대)

89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89 토론문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신 동 규 (한림대학교) 호리 신( 堀 新 ) 선생님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정말 재미 있고,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특히, 공무결합 왕권, 즉 공가와 무가가 필요 불가결의 존재로서 상 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平 家 物 語 史 觀,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 략 때에 대륙침략 구상과 동아시아 제국 침략 후의 지배체제 속에서 天 皇 과 關 白, 그리고 가신들 의 이용(권력의 재배치?)에 대한 내용은 공무결합 왕권 으로서 12세기 이후 武 家 社 會 로 전환 된 일본의 정치적 특색, 특히 쇼쿠호( 織 豊 ) 시대라는 통일시대로의 전환기의 성격을 잘 보여준 매우 유익하고 뜻 깊은 발표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히데요시의 대륙침략 구상으로서 계획된 내용을 검토해 지배체제로서 천황(국왕)과 關 白 이 세트가 되어 공무결합 왕권의 구조로서 히데 요시가 당시의 일본 내의 지배 체제나 왕권 구조를 그대로 명과 조선에 들여갈 생각이었다는 발 표는 이전에도 일본의 지배논리를 적용한 구도로서 언급되었기도 하지만, 본 발표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그러한 학설에 대한 검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간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에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전국통일에 대한 구상과 조 선침략 및 대륙침략에 대한 구상이 일본 측에서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가 되어 왔지만, 한국 에서는 일부의 연구에서만 언급되어 왔기 때문에 일본 연구에 대한 폭 넓은 수용과 비판, 그리고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본 발표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호리 신 선생님의 발표 는 저에게도 또한 많은 한국의 관련 연구자들에게도 공부가 되리라 생각되고 나아가서는 반성의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몇 가지 점에서 확인해보고 싶은 점이 있고, 또 몇 가지 점에서는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

90 9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질문은 아닙니다만, 내용적인 면에 앞서 선생님의 발표문에는 각주 등의 서지사항이 전 혀 붙어있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발표를 통해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만, 이러 한 서지사항이 있어야만 발표 논지의 근거와 타당성이 더욱더 보강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또 한, 토론자에게도 또 여기 계신 관련 연구자 선생님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으리라는 배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 내용과 관련된 사항입니다만, 선생님은 法 隆 寺 의 승려 仙 學 房 榮 甚 의 꿈 이야기를 사례 로 들어 노부나가 권력의 상징으로서 큰 칼 을 설명하시면서, 군사권의 상징인 節 刀 ( 賊 徒 정벌 에 나가는 장군에게 천황이 하사는 것), 그리고 요리토모는 장군직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쇼군직은 미나모토 가문만이 승계할 수 있는 것으로 오다 노부나가 는 원래 받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이점과 관련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족보를 위조해 쇼군직을 받고 있다는 점을 또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본 발표와 관 련성은 떨어집니다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셋째, 선생님은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침공 구상을 말씀하시면서, 2가지의 사료를 인용하셨습 니다. 하나는 오제 호안( 小 瀨 甫 庵 )의 太 閤 記 이고, 다른 하나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太 閤 記 의 기록에 보이는 저 大 物 (히데요시)은 중국( 明 ) 인도를 정복하라고 명령하더라 도 거절하는 일은 없을 氣 性 이다. 라는 내용은 당시 노부나가를 비롯한 중세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른바 삼국세계관, 즉 세계가 天 竺 (=인도) 震 旦 (=중국) 本 朝 (=일본)로 구성되어 있다는 세계관으로부터의 발현이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물론, 사실적인 측면에서도 오류가 있다는 점은 지적하셨지만, 오다가 히데요시에 대해서 말한 중국( 明 ) 인도를 정복하라고 명령하더라도 라고 한 말은 진짜 중국과 인도를 정복하라고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본보다는 더 넓은 세계 로의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信 長 公 記 에 의하면, 노부나가 스 스로가 삼국세계관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또한, 프로이스의 기록, 즉 모리씨에 대한 정복을 끝내고, 일본 66 國 전부의 절대 영주가 된 다면, 중국에 건너가 무력으로 이것을 빼앗기 위해서 一 大 艦 隊 의 준비,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3) 奧 野 高 廣 校 注, 信 長 公 記 ( 角 川 文 庫, 1996), 315쪽. (오다 노부나가[ 織 田 信 長 ]가) 어느 나라사람인 가 라고 묻자, 너무 먼 곳이다. 라고 답하였다. 또, 唐 人 인가, 그렇지 않으면 天 竺 人 인가. 라고 묻 자, 단지 수행하는 사람이다. 라고 답하였다. 인간이 태어나는 곳은 3나라 이외에는 의심스럽다. 그 러면 귀신인가. ( 客 僧 の 生 國 は 何 くぞと, 御 尋 ねあり. 無 邊 と 答 ふ. 亦, 唐 人 か 天 竺 人 かと, 御 意 侯. 唯, 修 行 の 者 と 申 す. 人 間 の 生 所 三 國 の 外 には 不 審 なり. さては, 術 物 にてあるか).

91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91 諸 國 을 나누어 주겠다는 마음을 결정하고 있었다. 는 부분을 근거로 선생님은 노부나가가 대륙 침공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해도, 큰 모순은 없을 것이다., 또 프로이스의 증언이 세부 적인 면에서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만년의 노부나가에게 대륙침공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대략적 으로 사실이라고 봐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나,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노부나가의 대륙침공에 대한 명확한 사료는 없으며, 더욱이 이러한 노부나가의 인식은 앞에서 말씀드린 삼국세계관 으로서의 인식, 즉 일본을 통일한 후 삼국세계관 속의 세계를 향한 더욱 큰 자신의 포부를 표명한 야망이었던 것이지, 과연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것을 史 實 의 역사로서, 객관의 역사로서 인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또한, 계획 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 어느 구체성을 띠고 실질적으로 실현성이 존재하는 것 이 계획이지, 단순한 생각만으로 계획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어떻게 실현 시키려고 했는가라는 계획을 구성하는 단계가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의 발표문에 보이는 노부나 가의 대륙침공 계획 이라는 것은 실체도 없고, 다만, 일본인이 아닌 프로이스의 추측으로 노부 나가의 계획을 언급하고 계신데, 이것을 역사적 史 實 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저로서도 의문 입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신의 편의에 따라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 또한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노부나가가 서일본을 정복한 후에, 나아가서는 일본을 정복한 후에 중국(대륙) 침공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왜 이런 발상이 노부나가를 비롯해 히데요시에게 나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즉, 일본 국내 정복 후에 대륙정복이라는 공식은 과연 어디 서 나오는 것인지? 노부나가가 천명한 그 밖의 사료가 있는지? 노부나가에 대해서는 너무 과도 한 추측이 아닌지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넷째, 노부나가의 계획에서는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급해주고, 자신은 그 위에 설 생각이 있었 다는 것, 그리고 대륙침공계획이 있었다는 점 등 이러한 점들은 히데요시 역시 추진하려 했었다 는 점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이와 같은 구상의 측면에서 상호연관성은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다섯째, 선생님께서는 戰 國 時 代 에 일본 전국에서 전개된 제 대명들 간의 전쟁의 원인은 국 경 분쟁을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 히데요시는 停 戰 令 과 摠 無 事 令 에 의해 대명 사이의 전쟁을 私 戰 으로 금지하고, 히데요시가 公 儀 (공적인 존재나 기관)로서 領 土 裁 定 을 실시하는 것으로 평 화를 가져오려고 했다. 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일본의 저명한 학자인 후지키 히 사시( 藤 木 久 志 ) 선생에 의해서 이른바 풍신평화령 으로 제기된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히데요시의 停 戰 令 과 摠 無 事 令 에서 평화적인 논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만(물론

92 9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후반부에서 히데요시의 왜곡성을 언급하고 계십니다만), 결국, 평화성의 논리라는 것은 일본 국 내에 한정된 것이며, 이러한 평화성이 결국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궁 금합니다. 히데요시의 이른바 천하통일 과 그에 수반하는 모든 정책의 도달점이 조선침략이라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는데, 이것을 과연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 정책이었다고 평화성의 논리를 강 조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대륙침공을 내다보고 摠 無 事 令 이 발령되 고 있었던 것이다., 또 즉, 전쟁을 행하기 위한 평화령이었던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 는데, 이것이 국내에 한정된 결론인지, 국내 국제를 통합한 견해인지, 또 풍신의 이러한 정책들에 서 진정한 평화성의 논리가 있는지 국제관계사적인 입장에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천하통일 을 위한 기본적인 정책으로 일본에서 평가하고 있는(물론 선생님 도 그렇게 평가하고 계십니다만) 히데요시의 停 戰 令 과 摠 無 事 令 이 임진 정유왜란과 대륙침공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렇게 본다면, 停 戰 令 과 摠 無 事 令 이 결국은 평화성 의 논리보다는 침략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가 더 강한 것이 아닐까라는 것입니다. 즉, 최근 일본에서 히데요시의 평화성의 논리에 의한 천하통일 로 평가하고 있는 연구경향에 모순이 있 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히데요시의 자기 정당화를 말씀하시면서 모두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점 은 정리의 대상으로부터 제외하겠다. 고 하셨지만, 역시 히데요시 정권 자체가 무력과 호전성에 가장 큰 주안점이 있었다는 것은 지워버리기 힘듭니다. 여섯째, 황윤길과 김성일의 통신사 일행에 대해서 히데요시는 이것을 복속 사절로 믿어 버리 고 있었기 때문에 알현시의 태도가 극히 방약무인이었고, 자주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히데요 시는 조선국과 대마도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었다. 고 하시며, 오무라 유코( 大 村 由 己 )의 九 州 御 動 座 記 를 예로 들어 히데요시는 츠시마( 對 馬 ) 소시( 宗 氏 )에 복속되어 있다. 고 인식하고 있었 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히데요시가 츠시마의 소씨가 조선을 복속하고 있다고 오해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당시 일본의 국내를 통일할 정도의 권위와 재력, 그리고 전술 전략에 뛰어난 히데요시가 이러한 사소한 해외정보에 오류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다른 측면이 있었기에 해외의 통신 사절에 대해 방약무인이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미 대륙 정복의 야망에 들떠 있어 조선을 멸시하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선생님도 히데요시의 주 변에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오대산의 승려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본 발표에서 확언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주변 동아시아 제국의 시조탄생에까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계신 데, 겨우 일개 츠시마의 소씨( 宗 氏 )가 조선을 복속하고 있었다. 고 히데요시가 그렇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93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93 일곱째, 조선의 지배 체제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국왕에 대한 탐색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해본다면, 그를(즉, 선조를) 국왕으로 삼을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말 씀하고 계십니다. 이것과 관련된 사료가 있는지, 또한 각국의 국왕과 關 白 을 임명하고, 각각 지 행을 내려 동아시아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여 각국의 지배 체제를 스스로의 혼자의 생각으로 결정한다. 고 주장하고 계시는데, 관백의 임명에 대해서는 사료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각국의 국 왕을 임명한다는 것은 어느 사료에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앞에서 말씀드 린 이른바 天 竺 (=인도) 震 旦 (=중국) 本 朝 (=일본)라는 삼국세계관의 붕괴라고 보아도 좋은 것인 지, 인도 공격 구상과 아울러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여덟째, 저는 히데요시의 호언장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실체 없는 인도침공의 언사를 과연 아시아 지배체제의 구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도 지배는 과연 누구에 게 일임할 것인지 왜 언급이 없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 더욱이 히데요시의 동아시아 지 배 구상과 관련하여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다만,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지위나 칭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것이므로 따옴표를 붙여 중화 황제 라고 부르고 싶다. 라는 문장에서 중 화 황제 는 히데요시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일본사회의 특징으로서 공무결합 왕권 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이 될까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서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드 리겠습니다. 아홉째, 화이변태를 설명하시면서,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 대등하지 않았고, 당초부터 이것 을 침공 정복하려고 하는 점은 다른 주변 제국과는 역시 차이가 난다. 고 하였습니다만, 실제적 1644년 화이변태 의 주인공인 淸 역시 중국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만의 특색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약간의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상, 선생님의 발표로 흥미진진하게 공부가 된 저로서는 부족하기에 두서없고 길기만한 의 문점을 말씀드려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선생님께 간단한 답변을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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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95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朴 晢 晄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1. 머리말 선조 25년(1592) 4월 14일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 명 일 삼국이 각국의 주요 무기를 이용하여 벌였던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조선 은 일본의 침입에 전혀 대항하지 못한 채 방위체제가 붕괴되면서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맞았다. 초기 전투에서 조선군은 체계적인 방어전략이 구사되지 못하고, 일본군에 비해 부대 규모 및 무 기체계, 전술 등 현저한 열세로 인해 연패를 거듭했다. 이로써 채 한 달이 안되는 상황에서 일본 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서울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평안도, 함경도 지역까지 유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측의 관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승군의 활약, 수군의 해상권 장악, 명의 원병에 따른 합동 반격작전은 전세를 반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이끄 는 조선 수군의 활약은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무기체계, 특히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대형 화포 덕분이라고 하겠다. 조선시대 군선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최영희의 연구로부터 시작되어 비교적 많은 성과가 축 적되어 있다.1) 이후 김재근에 의해 조선시대 군선에 대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였 으나, 가장 두드러지게 연구된 것은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에 가장 일찍 주목한 사람은 이마무라 도모(今村鞆)로 그의 책에서 거북선을 극찬하고 1) 최영희, 1958, 귀선고 사총 3, 고려대 사학회.

96 9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있다.2) 그러나 그는 거북선을 단지 소개하는 정도였다. 거북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언더우드 (Underwood, H.H)가 발표한 1934년의 영문 논문에서였다.3) 이 논문은 영국 왕립아시아학회지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의 한국판에 실려 서구 사회에 거북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거북선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서술이었던 언더우드의 논문은 이후 거북선 연 구의 기초와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 조성도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에 의해 거북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4) 그러 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기록을 확보하지 못하여, 규모와 내부구조, 철갑선 여부, 전투력 등과 관련하여 논란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거북선의 구조와 관련한 논쟁은 1976년 6월, 한국과학사학회 주도의 학술토론회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논점의 중심은 거북선의 내부 구조와 櫓의 형태와 위치 문제였다. 내 부 구조에 대해 김재근은 2층 구조설을 주장하였고, 3층 구조설은 남천우가 제기하였다. 그리고 櫓가 언더우드가 설계한 서양식인가 아니면 한국식인가 하는 점, 노의 위치가 갑판의 아래에 위 치해 있었는가, 갑판 위인 상부에 있었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들어서 김재근은 우 리 배의 歷史 라는 제목의 연재를 통하여 고려 초기의 배부터 조선 후기의 군선까지 거북선을 포함하여 조금 생소한 鎗船, 海鶻船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선박사를 정리하였다.5) 1990년대 이후에는 이원식이 1952년 당시 거북선의 설계와 구조를 추정하며 거북선 복원을 2) 今村鞆, 1930, 船の朝鮮 : 李朝海事法釋義, 螺炎書屋(京城) 3) Underwood, Horace H., 1934 "Korean Boats and Ships",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Vol.23(최재수 역, 1992,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해전 해양전략 75집, 해군대학, 쪽) 4) 有馬成甫, 1942, 朝鮮役水軍史, 海と空社(東京) 조성도, 1965, 귀선고 연구보고 2, 해군사관학교 김재근, 1977, 조선왕조 군선연구, 일조각 김재근, 1991, 귀선 크기와 척수의 변천 국제해양력심포지움발표논문집, 한국해양연구소 김용국, 1971, 거북선의 기원과 발달-몇가지 문제점의 보완을 겸하여 국방사학회보 1977년 논문 집, 국방사학회 남천우, 1976, 귀선구조에 대한 재검토 역사학보 71, 역사학회 박혜일, 1979, 이순신 군선의 철장갑과 이조철갑의 현존원형과의 대비 한국과학사학회지 1-1, 한국과학사학회 ; 1982, 이순신 군선의 철장갑에 대한 유보적 주석 한국과학사학회지 4-1, 한국 과학사학회 ; 1985, 이순신 귀선(1592)의 철장갑과 경상좌수사의 鱗甲 기록 경희사학 16 17합, 경희대 박병주, 1982, 귀선의 건조장소에 대하여-쌍봉선소를 중심으로- 군사 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방상현, 1991, 조선 귀선의 접목성 연구(검선과 판옥선 접목) 경희사학 16 17합 5) 김재근, 1983~85, 우리 배의 역사 1 20 해양한국 121~140, 한국해사문제연구소

97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97 위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6) 김재근은 임진왜란 때의 조선 일본 명의 군선의 특성에 대해 서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하기도 하였고, 7) 장학근은 기존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거북선의 2층 구 조, 한국 전통식 櫓 에 대해 문헌자료의 고증을 통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즉, 장학근의 주장에 따 르면 거북선은 3층 구조에 곧은 노였다는 것이다. 8) 이외에도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복원과 관 련한 논문을 비롯하여 선박 공학적인 측면에서 거북선의 선형 저항과 조종 성능에 대한 분석, 무기체계 발전과정 속에서의 거북선의 역할을 분석한 논문 등이 있다. 9) 아울러 판옥선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김재근의 연구를 토대로 정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10) 김 재근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이었던 판옥선이 일본 전선에 비해 그 성능이 월등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자세히 규명하였다. 최근 정진술은 기존 연구 결과만으로 판옥선을 복원하 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각선도본 을 토대로 판옥선의 세부 구조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였다. 11) 조선의 군선의 우수성과 더불어 수군의 화력에 있어서도 일본측에 비해 조선측이 월등하였음 을 밝힌 연구들이 거듭 발표되었다. 12) 일찍이 이 분야의 연구에 천착한 허선도의 연구를 포함하 6) 이원식, 1994, 임란시 전함의 특성과 귀선의 구조 분석, 해군사관학교, 해군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 ; 1998, 거북배( 龜 船 )에 대한 소고, 대한조선학회지 35-2 ; 2003, 이순신 창제 귀선의 설계 구조 와 복원에 대한 고찰, 대한조선학회지 40-1 ; 2004, 1592년식 이순신 창제 귀선의 설계 복원 연구, 대한조선학회지 41-3 ; 2006, 1592년 이순신 창제 귀선의 주요치수 추정에 관한 연구, 공학박사학위논문, 한국해양대학교대학원 7) 김재근, 1993, 임진왜란중 조 일 명 군선의 특성 임란수군활동연구논총 (해군군사연구실) 8) 장학근, 1995, 군선으로서의 원형귀선 ; 귀선개조론을 中 心 으로 창원사학 2, 창원사학회 ; 2004, 전장환경과 거북선 선형변화 군사 5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9) 최두환, 1999, 임란시 원형 거북선에 관한 연구 해양연구논총 22, 해군해양연구소 박원미, 2003, 거북선 선형의 저항 및 조종성능에 관한 연구,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김철환, 2004, 무기체계 발전과정에서 거북선의 위상 이순신연구논총 3, 이순신연구소 이민웅, 2004, 임진왜란 수군사, 청아람미디어 정광수, 2005, 거북선과 학익진 대형의 진법도'에 담겨있는 승첩과 리더십의 비결 이순신연구논총 4, 순 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제장명, 2006, 거북선 복원에 관한 소고 이순신연구논총 6,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김주식, 2007, 거북선의 철갑론에 대한 검토 STRATEGY 21 19,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0) 김재근, 1976, 판옥선고 한국사론 3, 서울대 국사학과 ; 1984, 우리 배의 역사 9 10-판옥선 해양한국 129~130, 한국해사문제연구소 ; 1993, 임진왜란중 조 일 명 군선의 특성 임란수군 활동연구논총 (해군군사연구실) 11) 정진술, 2007, 판옥선 복원을 위한 구조탐색 STRATEGY 21 19,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2) 박준병, 1983, 임란중 화약병기 기술의 개발, 국민대 석사학위논문 정하명, 1991, 조선시대의 완구와 진천뢰 육사논문집 40, 육군사관학교 허선도, 1994, 조선시대 화약병기사연구, 일조각

98 9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여 최근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조선 수군이 보유한 대형 화기들은 일 본 수군이 사용한 조총과 비교하여 위력적인 성능을 지녔다고 평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운용하던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각종 대형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조선군은 이 화포를 활용하여 해전에서 일본군에 연승을 거두며 전력상의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체계 특히 화약병기에 서 드러난 여러 특성을 재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군선과 무기 운용의 전술적 효과를 재정리해보 고자 한다. 2. 군선의 과학적 특성 가. 군선의 종류 임진왜란 군선의 종류 규모 편성 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충무공전서 인데, 그 중 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올린 전승보고인 여러 장계에 그런 자료가 풍부하다. 여기서 군선의 종류 를 보면 대형선으로는 板 屋 船 板 屋 戰 船 戰 船 등 명칭이 나오고, 소형선으로는 挾 船 鮑 作 船 伺 挾 船 伺 挾 小 船 伺 候 船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 밖에 난중일기 에는 探 候 船 探 船 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실록에서는 板 屋 大 船 이라 한 대목도 있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의 제2차 출동 때의 전승보고인 唐 浦 破 倭 兵 狀 에는 1척의 거북선이 기록되어 있고, 다음 見 乃 梁 破 倭 兵 狀 과 釜 山 破 倭 兵 狀 에는 각각 2척의 거북선이 등장하며, 난중일기 에도 거북선의 건조와 관 련된 대목이 있다. 판옥전선 전선 판옥대선은 모두 판옥선을 지칭하고, 협선, 포작선, 사후소선, 사협선, 사후선 등이 차례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포작선은 이순신 장군이 제1차 출동 때에 징발해 가지고 나간 소형 어선으로서 그 후에는 자취를 감추고, 또 사협선은 사후선과 협선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활용한 군선은 주력함인 판옥선, 돌격함인 거북선, 그 리고 소형 보조정인 사후선 또는 협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두환, 1995, 임진왜란 해전시의 함포운용술 연구 학예집 4, 육군박물관 박재광, 1995, 임진왜란기 화약병기의 도입과 전술의 변화 학예지 4, 육군박물관 ; 1996, 임진 왜란기 조일 양국의 무기체계에 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6, 한일관계사학회 ; 2004, 임진 왜란기 조명일 삼국의 무기체계와 교류 군사 51, 군사편찬연구소

99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99 나. 판옥선 1) 판옥선의 건조 동기 판옥선은 중종 명종 연간에 실전 배치된 조선군의 주력 군선이다. 원래 조선 초기에 해양방 위에 투입되었던 군선은 猛 船 인데, 이 맹선은 조운과 해전을 병행하기 위해 제작된 군선 13) 으로 속력이 느려 빠른 왜선을 추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조선군은 왜선을 추격하기 위해 鼻 居 刀 船 과 같은 소형 輕 快 船 을 개발했다. 14) 그러나 경쾌선도 소수의 병력으로 운용하는 소형 군선 이고, 탑재 무기가 약해 왜구를 상대하기에 적절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는 대형 군선을 건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중종때 徐 厚 가 대표적인데, 왜구와의 전투에서 무기력한 소형 군선을 대형 군선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 다. 15) 이후 다양한 군선 개선론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판중추부사 宋 欽 의 군선 개선론은 판옥선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16) 송흠은 명의 군선이 사면을 판으로 옥을 만들어 승조원의 안 전을 도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구들이 타고 온 배 중에도 옥선이 있다 17) 는 사실에 기초하 여 우리도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군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듯 판옥선은 왜구의 침탈이라는 전장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명과 일본이 운용 하는 屋 船 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개량한 최정예 군선이었다. 18)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인원과 화포를 많이 적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 며 화력을 구사하기 때문에 여타의 군선보다 화력이 강하고 명중률이 우수한 장점을 갖고 있는 군선이었다. 다만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2) 판옥선의 구조적 특징 판옥선의 구조를 과학적인 측면에서 정리해보면 먼저, 판옥선은 3층 구조로 되어 있어 전투 력을 발휘하는데 유용한 구조이다. 판옥선에 대한 기초 자료는 各 船 圖 本 19) 에 나오는데, 우선 13) 증보문헌비고 주사, 조선. 14) 중종실록 18년 6월 을축. 15) 위의 책, 16년 5월 무오. 16) 명종실록 21년 3월 갑진. 17) 위와 같음 18) 당시 명의 樓 船 은 선체가 너무 커 櫓 로써는 운행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으며, 일본의 樓 閣 船 은 선체 가 좁고 판자가 얇아 대포를 적재할 수 없는 전술상의 약점을 갖고 있었다.(장학근, 1995, 앞의 논문)

100 10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굵은 각재 12~15개를 가쇠라고 불리는 긴 나무창으로 꿰뚫어 이어 본판을 만들고 본판 좌우에 삼판이라고 불리는 긴 판자 7쪽을 본판위에 이어 붙여 만드는데 배의 본판에서 부터 맨 위쪽 7 번째 삼판까지의 높이( 元 高 )는 11척 3촌이다. 7번째 삼판에는 마치 우마의 멍에를 메우듯 멍에 (가목)가 얹어지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깐다. 이 공간이 1층으로 본체 또는 하체라 고 불린다. 이 부분은 일반적인 한선과 같은 형태와 구조라 할 수 있다. 이 하체의 멍에 위에 신방 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뒤 패란을 만든다. 아래층의 신방에서 패란 사이에 방패 판을 설치하여 2층을 만드는데 그 높이가 5자라는 뜻이다. 이 부분이 2층인데, 배의 이물로부터 고물까지 배 전체에 船 樓 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판옥상장이라고도 하는데 판옥선의 가장 특징적 인 부분이다. 그리고 상장 위에는 兩 舷 과 이물에 여장을 설치하고, 상장의 패란 위에 뱃집멍에를 걸고 여기에도 포판을 깔았다[ 廳 板 ]. 청판에는 두개의 돛대(이물돛대, 한판돛대)와 깃대가 설치되 어 있고, 장대가 설치되어 장수가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판옥선은 1층과 선실과 두 개의 갑판으로 이루어진 다층 군선인데, 전투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하는 전함으로서는 최적의 구조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조선 군선들은 선형 상으로 갑판이 하나인 평선 구조이기 때문에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격군이 하나의 갑판에서 활동 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판옥선은 1층 선실 외에 격군은 2층(1층 갑판)에서, 전투원은 3층(2층 갑판)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구분되어 있어 전투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또 선체의 크기가 크고 높이가 높아 많은 전투원과 탑재 무기를 장착하기에 유리하였던 것이다. 임란 당시의 한 기록을 보면 당시 일반 판옥선은 저판 길이가 10~11 把 이고, 대형 판옥선은 14파까지 있었다고 한다. 20) 정진술은 이들 자료를 토대로 판옥선의 주요 치수를 전체길이 138자, 선체 폭 39.7자, 3층까지의 선체높이 21.2자로 추정하기도 했다. 21) 따라서 판옥선의 전투원은 상장 위 높은 위치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이 가능하여 공격력을 높일 수 있었고, 적은 판옥선의 선체가 높아 접근하여 登 船 하기에 어려운 구조였다. 19) 규장각 소장. 戰 船 本 板 長 九 十 尺 廣 十 八 尺 四 寸 元 高 十 一 尺 三 寸 下 層 信 防 牌 高 五 尺 船 頭 廣 十 五 尺 船 尾 廣 十 二 尺 七 寸 上 粧 長 一 百 五 尺 廣 三 十 九 尺 七 寸 右 統 營 上 船 尺 量 本 板 長 六 十 五 尺 元 高 八 尺 中 廣 十 五 尺 船 頭 廣 十 二 尺 五 寸 船 尾 廣 七 尺 五 寸 右 各 邑 鎭 戰 船 尺 量 統 營 座 副 船 駕 木 十 六 本 板 十 五 立 各 邑 鎭 戰 船 駕 木 十 五 本 板 十 二 三 立 飛 荷 直 板 十 五 立. 船 尾 虛 欄 本 板 十 五 立 在 水 面 不 見 20) 비변사등록 41책, 숙종 13년 1월 1일 21) 정진술, 2007, 앞의 논문 참조

101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01 판옥선이 군선으로서 전투력 발휘에 용이한 또 하나의 구조적 특징은 平 底 船 의 선형이다. 판 옥선은 바닥에 龍 骨 이 있고, 용골에 외판을 붙여 나가는 서양의 尖 底 船 선형과 달리 용골과 늑골 이 없는 대신 용골의 기능을 하는 본판 이라고 부르는 구조와 늑골 대신 배의 횡강력을 유지하는 가룡목(또는 장쇠)이 있다. 이러한 선형은 판옥선에게 있어서 단점이자 곧 장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속도면에서는 이물이 뾰족하지 않아 물의 저항이 크기 때문에 낮았으나, 바닥이 평평하 기 때문에 흘수선은 낮아 좌우 선회능력이 뛰어나고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배가 좌초되거나 전복될 위험성이 적었다. 판옥선의 이러한 특징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과 암초가 많은 우 리나라의 해상 환경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투시 필요한 화포의 하중이 나 발사시의 반동의 흡수가 가능하기 때문에 전투력 발휘에 유리하였다. 마지막으로 판옥선은 갑판 전체에 걸쳐 船 樓 가 설치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선수로 부터 선미 까지 배 전체에 선루가 설치되어 있는데, 선체 폭 보다 훨씬 넓어 노를 선체와 선루 사이에 설치 할 수 있고, 전투 시에는 노역에 종사하는 비전투원(격군)을 보호할 수 있었다. 특히 상장 위에 넓고 평평한 공간을 조성하여 대포를 설치함으로써 군선의 전투력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선체보 다 넓고 평평한 선수부 상장은 군선의 선수 쪽 화력을 강화시켜 적을 추격하면서 공격할 수 있다 는 강점이 있다. 이는 판옥선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독창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일부 군선에 설치되어 있기도 하고, 일본 군선에도 總 矢 倉 이라는 구조가 있으나 모두 판옥선과 는 다르다고 하겠다. 22) 다. 거북선 1) 건조 동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먼저 예하의 5진을 순시하 며 기강을 바로잡아 사소한 민폐라도 끼친 자는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였다. 그리고 전비를 갖추어 항구에는 鐵 鎖 를 가설하여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전선을 새로 건조하는 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후 수차례의 해상 훈련을 통해서 판옥선만으로는 해전에서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다. 판옥선은 선체는 크고 견고하며, 전함으로 최적의 구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선체가 무겁고, 평저선의 단점으로 인해 노만으로 운용하기에 한계가 있었고,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단점이 있다. 따라서 빠른 왜선의 접근을 통한 登 船 肉 薄 戰 術 (boarding tactics)에 적절히 대응할 22) 김재근, 1993, 앞의 논문, 232쪽

102 10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 점은 선조에게 판옥선은 속도가 느리고 선체가 무거워 왜놈들이 모방하지 않고 있다 고 한 이항복의 보고 23)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왜선은 작고 날렵하여 근접백병전에 유리한 선형을 갖추고 있는데, 판옥선은 다층 구조의 군선이지만 2층 상갑판의 경 우에 덮개가 없기 때문에 전투가 본격화되어 일본군이 빠르게 접근, 등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면 일본군의 長 技 에 조선 수군이 희생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자신의 해양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판옥선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여 왜군이 장기로 이용하는 근접백병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군선을 개발 해야 했다. 그 군선이 바로 거북선이다. 2)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 먼저 거북선은 덮개가 있어 내부 전투원이 보호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판옥선 이 1층 갑판에 격군을 2층 상갑판에 전투원을 배치하여 전투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음에 비해 거북선은 격군과 전투원 모두를 개판 밑에 수용하여 전투원마저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도록 한 군선이다. 따라서 거북선은 군선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적의 대형 속으로 돌진해서 전투를 벌 일 수 있는 구조이다. 거북선에 덮개를 씌운 이유는 적선과의 접근전에서 승무원 전원을 개판으 로 뒤덮어서 보호하고, 또 개판에 쇠꼬챙이를 박아 놓음으로써 거북선에 오르는 적을 차단하는 효과를 주었다. 또 다른 특징은 적투력 발휘에 용이한 구조와 선체의 강력한 방호력, 그리고 막강한 화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거북선은 적 함선 대열에 뛰어들어 돌격전을 펼침과 동시에 대포를 쏘아서 적 의 전열을 무너뜨렸다.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판옥선과 같은 크기이며, 외형은 전면에 용두가 있 고, 거북선 좌우측에 각각 6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어 적선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적선에 대한 공 격이 가능하였다. 특히 龍 頭 에 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전면 화포 공격까지도 가능 했던 것이다. 아울러 내부 구조는 2층(3층)으로 되어있는데, 배 밑과 갑판 위 부분으로 나눠져 있어서, 판옥선과 같이 아래층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선실과 창고이고 갑판 위, 윗층에는 선장실 을 비롯하여 노군과 전투원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개판은 적의 침입을 무력 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특히 판옥선과 같은 튼튼한 선체와 평저선 구조는 거북선의 전투력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을 전투에 적극 활용하여 당파전 술과 화공전술 등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거북선은 종래 조선의 군선인 판옥선에다 덮개를 씌우고 용머리를 붙인 발명보다는 혁 23) 선조실록 권121, 33년 1월 갑술.

103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03 신을 통해 이루어진 군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태종때부터 존재하였 던 거북선을 개량하여 본영과 방답진, 순천부의 선소에서 3척을 제작하였다. 이후 한산도로 진영 을 옮긴 후 2척을 더 건조하여 조선 수군은 총 5척의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북선이 대체 로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배라는 점, 거북선도 다른 많은 한국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한국식 노 를 사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으나,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에 대 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라. 군선의 전술적 운용 육전에서 조선군이 무기체계와 전술적 열세로 일본군에 연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 해상에 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게 된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대해 연전연승 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연승요인으로는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군선에 장착된 대형화포의 성능의 우수성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무겁고 튼튼한 군선이었다. 선체가 커 많은 전투원과 대형 화포,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적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기 어려운 반면에 조선 수군은 높은 상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반면 일본 수군은 판옥선의 舷 側 이 높아 선상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의 전통적인 전법이었던 등선육박전술을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세키부네( 關 船 )는 선형이 가늘고 길 뿐만 아니라 선체가 얇게 건조되어 매우 약한 선박이었고, 돛 역시 매우 단순 하여 逆 走 성능이 좋이 못한 四 角 帆 船 으로서 조선군의 러그세일형 雙 帆 의 기능에 미치지 못하였 다. 24) 특히 일본의 세키부네는 선상에 대포를 장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력 면에서 열세였다. 25) 또 판옥선의 강인하고 견고한 구조의 선체는 일본 군선을 상대로 한 전술 구사가 용이하였다. 판옥선의 구조 특성상 좌우 선회능력이 뛰어나고, 대형 화포를 운용하는데에도 유리하였다. 판옥 선의 평저선형은 화포 발사에 따른 반동 흡수에 유리하였고, 상장갑판의 구조는 화포의 장착과 포격에 아주 유리하였다. 당시의 화포는 사거리가 오늘날과 같이 길지 않아 상갑판에 화포를 장착 함으로써 사거리와 명중률이 높아졌다. 26) 이런 점은 일본측 연구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24) 김재근, 1994, 앞의 책 144쪽 25) 왜선의 船 制 는 그 선체가 堅 厚 하고 장대하지 못하여 선상에 대포를 안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판옥선에 제압당하고 만다.( 선조실록 권61, 28년 3월 신묘) 26) 김재근, 1993, 앞의 논문, 274쪽

104 10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조선 수군의 전투력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것은 거북선인데, 高麗船戰記 에 언 급되어 있듯이27) 거북선은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제작된 군선이었다. 거북선이 돌격 선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여겨진다. 사천해전 때에는 거북선이 적선이 있는 곳 으로 돌진했으며, 당포해전 때에는 적의 층루선 밑으로 直衝했고, 적의 철환이 빗발치던 당항포 해전 때에도 먼저 거북선이 적진으로 돌입했다.28) 거북선이 이처럼 실전에서 돌격작전을 전개했 다는 기록은 거북선의 주 역할이나 임무가 돌격이었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라 할 수 있다.29) 거북선이 돌격선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동성이 좋아야 한다.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거북선은 한 채 천 지 현 황의 각종 화포를 쏘아대며 적 선단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속에 서도 종횡무진으로 활약하였다. 전진 후진이 자유롭고 旋回와 發停이 뜻대로 되었으며, 이렇게 기동성능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판의 구조가 평저형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帆과 櫓를 동시에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거북선의 추진력은 노와 돛을 통해 얻어진다. 전투시 거북선은 돛을 접기 때문에 거북선의 추진력은 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의 속도에 있어서는 조성도는 1~3차 출전때 항해한 거리와 시간을 계산한 후 가변 요소 를 첨삭하여 시속 6노트로 계산했고,30) 남천우는 10.8노트,31) 정진술 최두환은 3노트32), 즉 시 속 약 6 로 추정했다. 거북선의 뛰어난 전투력은 외형보다 내부구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잘 훈련된 병사라 할지라도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내구조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모체로 일본군의 突入戰術과 白兵戰術로부터 피해를 최소 화하기 위해 창안된 군선이기 때문에 개판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거북선은 격군과 전투원 모 두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행위가 가능한 군선이다. 27) 대선 가운데 3척은 장님배(거북선)로 철로 要害하고, 石火矢, 棒火矢, 大狗俣 등을 쏘아가며 오후 6시 경까지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망루와 갑판, 要害까지 모두 부숴놓고 말았다. 鬼宿船(거북 선)은 左馬의 대선 앞을 가로막았고 소선들을 그 뒤에 쫓게 하였다. 그들 배에서 철포를 쏘아댔으며 귀숙선과 좌마의 대선은 서로 쏘아댔으나 좌마의 배가 난사당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高麗船 戰記 ) 28) 조성도 역주, 1973, 임진장초, 동원사, 51~57쪽 29) 조성도 역주, 앞의 책, 145쪽 ; 이분, 行錄 ; 이항복, 忠愍祠記 등에 의하면 거북선의 돌격행 위가 이순신의 일반적 해전 전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30) 조성도, 위의 논문 22~26쪽 31) 남천우, 유물의 재발견, 54~59쪽 32) 정진술, 1993, 한산도해전 연구 임란수군활동연구논총, 해군군사연구실, 168~170쪽 ; 최두환, 앞의 논문, 139쪽.

105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05 다만 거북선의 내부구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과연 거 북선의 선체 내부가 몇 개 층인가, 각층에 선실, 노와 격군, 전투원 등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 가 등이다. 앞서 기술했듯이 거북선이 기본적으로 판옥선을 토대로 건조되었다는 점에서 판옥선 과 같은 구조였을 것이고, 또 2층 구조와 같은 상황에서는 격군과 전투원이 전투행위를 원활히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북선의 전술적 운용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점에서 3층 구조설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33) 또 거북선은 판옥선과 같이 막강한 화력과 선체의 방호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초전에 적의 기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조선 재료의 견고함과 角 材 의 사용, 큰 치수, 개판과 쇠송곳 등으로 인하여 일본의 군선보다 강인하였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 여 빠른 속력으로 충돌하여 적선을 부수어 버리는 돌격전을 수행하였다. 전투 개시 직후 거북선 은 적선 대열에 뛰어들어 돌격하여 선제공격함으로써 적의 전열을 무너뜨렸다. 이를 위해서 거 북선은 선체의 두께를 두껍게 제작되었으며, 개판을 씌우고 송곳을 꽂아 방호력을 높여 적의 침 입을 막았다. 또 전후좌우에 각종 화포가 장착하여 적선에 의해 포위된 상황 하에서도 화포 공격 33) 거북선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2층 구조설은 언더우드가 처음 제기하 고 그 뒤 김재근, 이원식 등이 주장하는 구조이다. 언더우드의 경우 한국식 노에 대한 지식이 부족 하였기에, 1층에서 노를 젖는 격군들이 서양식 노를 젓고 2층에서 전투원들이 전투에 임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김재근, 이원식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였지만, 훗날 판옥선과 거 북선에 사용된 노가 한국식 노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층에 선실, 2층에 격군과 전투원을 함께 배치한 새로운 2층 구조설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 경우 거북선의 방패에 뚫려 있는 포 구멍의 위치 를 설명할 수 있지만, 격군과 전투원을 2층에 함께 배치한 것은 사실상 판옥선 이전 시대로의 퇴보 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불편한 구조였기에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3~5척 정도밖에 제작되지 않았다고 김재근은 주장하였다. 2 3층 구조설은 거북선이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여 개발 된 배이기에, 거북선이 판옥선보다 퇴보한 내부 구조를 가졌을 리 없다고 전제하고 상부구조가 2개 층으로 구성되어 밑층에서 격군이 노를 젓고, 상층에서 전투원이 활동한다는 것이다. 남천우가 한국 식 노의 사용과 함께 처음 주장했고, 이후 최두환, 장학근 등에 의해 보완되었다. 세부 부분에서 남 천우는 2층에 선실과 격군, 3층에 전투원이 배치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최두환 장학근은 1층에 선실, 2층에 격군, 3층에 전투원이 배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3층 구조설은 한국식 노의 사용을 입증하고 판옥선과 거북선의 연속성을 찾으려고 했다는 점과 전투원과 격군의 활동공간이 구분되어 거북선의 전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이 논리는 미국에서 공개된 거북선 그림의 공개로 더욱 탄력을 받았다. 3 반 3층 구조설은 2층설과 3층설을 절충한 주 장으로, 2층과 3층을 구분하는 제2 갑판이란 선체 위를 완전히 덮었던 것이 아니라 전투원들이 딛 고 서 있을 수 있는 발판 정도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광수의 주장으로, 1층에서 격군들이 서양식 노를 젓고, 2층과 반 3층에서 전투원들이 전투에 임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거북선에서 의 한국식 노의 사용을 무시하고 선실의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다고 하겠다.

106 10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거북선은 적선과의 접근전에서도 유리하였던 것이다. 3. 화약병기의 과학적 특성 가. 조선군의 화기와 특징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은 선발대가 부산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승승장구하며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연패를 거듭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이 전쟁 초기에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무기체계 상의 우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화기의 성능과 전술의 차이가 중요한 부분이다. 당시 조선군이 장비한 화기와 관련하여 フロイス 日本史 의 기록을 살펴보면, 전쟁 초기 부 산진성에는 천 개의 이상의 소형 포34)가, 동래성에도 6문의 대포가 있음을 알 수 있다.35) 또 서 애문집 에 의하면 중앙의 군기시에 天字 地字 玄字 黃字銃筒과 각종 소형 포, 金墀가 개발한 勝字銃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36) 따라서 조선의 군영에 상당수의 화기가 비치되어 있었음을 추 정할 수 있으나 이들 화기는 제대로 사용될 수 없었다.37) 현존 유물과 문헌상에서 나타난 조선군의 화기 종류는 다음과 같다. 당시 조선군은 勝字銃 筒 次勝字銃筒 大勝字銃筒 中勝字銃筒 小勝字銃筒 別勝字銃筒 小銃筒 雙字銃筒 등의 소형 화기와 天字銃筒 地字銃筒 玄字銃筒 黃字銃筒 別黃字銃筒 등의 대형 화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화기의 제원과 성능은 <표 1>과 같다. <표 3>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화기 제원과 성능 화기명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대승자총통 길이(cm) 55 ~ 구경(mm) 18 ~ 발사물( 화포식언해 ) 철환 15개, 중탄환 8, 소탄환 10(명문) 철환 5개 철환 3~4개( 신기비결 ) 사거리 600보 34) 松田毅一 川崎桃太 역, 1977, フロイス 日本史 2, 中央公論社, 221쪽 35) 松田毅一 川崎桃太, 앞의 책 223~224쪽 36) 軍器寺 元有天 地 玄 黃字大砲 又以次漸殺 至盈 축小砲 又有金土犀所製勝字大中小三樣銃 又有震 天雷等砲 而亂後散失殆盡( 서애문집 16, 잡저 記鳥銃製造事 ) 37) 박재광, 1996, 앞의 논문, 참조

107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07 중승자총통 소승자총통 55 ~ ~ 20 철환 3개 별승자총통 73.5 ~ ~ 19 철환 4개(유물 명문) 쌍자총통 52.2 ~ ~ 17 철환 2개( 신기비결 ) 천자총통 130 ~ ~ 130 大 將 軍 箭 1발, 鳥 卵 彈 100발 900 지자총통 89 ~ 將 軍 箭 1발, 조란탄100발 800 현자총통 79 ~ ~ 75 次 大 箭 1발, 조란탄100발 800, 1500 황자총통 皮 翎 次 中 箭 1발, 조란탄 40발 1100 별황자총통 88.8 ~ ~ 59 皮 翎 木 箭 1발, 조란탄 40발 1000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소형 화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먼저 화약과 발사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 여 발사하는 방식의 指 火 式 火 器 라는 점이다. 이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鳥 銃 [ 鐵 砲 ]에 비해 기술적 인 측면에서 성능이 한 단계 낮은 화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준 사격보다는 일단의 밀집 대형 을 이룬 적에게 지향사격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번째는 형태상 구경은 작아지고 총신은 상대적으로 길어졌으며, 竹 節 (마디)이 많고, 기존의 화기와는 달리 隔 木 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土 隔 型 형태의 화기라는 점이다. 특히 발사물이 화살보다는 철환(3~15개)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 의 화기였기 때문에 기존의 화기에 비해 효율성이 증가하였다. 세 번째는 일부 총통의 경우 조총 과 같은 신식 총과 유사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승자총통의 경우 기존의 화 기를 개량하여 총신의 앞뒤에 가늠자와 가늠쇠를 부착하고, 銃 架 (개머리판)를 장착하였다. 따라 서 소승자총통은 총가를 잡고 가늠쇠와 가늠자를 이용하여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또 쌍자총 통과 같은 화기는 총통 두 개를 병렬로 붙여 놓아 한번 장전을 통해서 여섯 번까지 사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화기이기 때문에 재장전 시간의 지연에 따른 사격의 비효율성을 다소나마 보완한 화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소형화기는 여전히 지화식 화기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 었고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성능의 차이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군이 장비한 대형 화포는 달랐다. 고려말 이후 지속적으로 개량 발전해온 대형 화포는 명종때에 더욱 발달하였다. 이들 대형 화포는 규모가 더욱 대형화되어 사거리가 증가되 었다. 이들 대형화포는 조선 초기의 화포에 비해 규격이 매우 커졌으며, 포신 내부의 약실이 구 별되지 않고, 약실 둘레에도 죽절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화포의 성능이 더욱 높아져 사거리가 길어져 효용성이 높아졌다. 또 이들 대형화포는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등과 같은 대형 화살 ( 箭 )과 다수의 조란탄도 발사할 수 있어 타격 목표에 따라 발사물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화포의 효용성을 극대화하였다. 38)

108 10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나. 화약무기의 전술적 운용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장비했던 화약무기의 우열은 소형과 대형으로 분명하게 난다. 당시 조선군이 장비하고 있던 소형화기는 화기의 초기단계인 지화식 화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 로써 사격도 불편했고, 명중률도 낮았다. 또 화기 유형이 다양하여 제작 및 운용에 있어서 많은 혼동을 초래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점은 화기를 전술적으로 운용하는데 큰 제약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군의 소형 화기는 일본의 조총에 비해 열세를 보였고, 대형 화포는 우위를 점하였다고 할 수 있다. 39) 그러나 전투에서의 승패는 단순히 무기체계상의 우열 못지않게 전술적인 운용 문제도 작용하 였다. 당시 조선군은 육전에서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보병전술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없었다. 이는 유성룡이 후에 조선군 장수들이 일본군의 전술을 정확하게 인식치 못하고 있고, 이에 대응 할 만한 전술( 陣 法 )을 익히지 못하였다고 지적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40) 당시 조선은 화기가 비 교적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전술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군은 육전에서 일본군에게 연패를 거듭했다. 반면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군선과 대형화포를 활용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우위를 점 하였고, 연승을 거두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대형 군선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포를 바 탕으로 艦 砲 戰 術 을 구사하였고, 거북선을 이용한 撞 破 戰 術, 火 攻 戰 術 을 구사했다. 이는 조선군 이 지닌 무기체계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軍 船 의 크기 및 구조 차이와 화기 사용 등 전술상의 차이로 인해 특기인 등선육박전술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41) 당시 판옥선과 거북선에 장착된 대형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적선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적선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루이스 프 로이스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남자의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 모양의 나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서 집어넣는데,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42) 는 표현으 38) 대형 화포는 포신 안쪽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흙 - 큰 탄환을 차례로 넣어 발사체를 가득 채운 후 한꺼번에 날려 보낼 수 있다.( 신기비결 ) 39) 박재광, 1996, 앞의 논문, 43쪽 40) 서애문집 잡저, 戰 守 機 宜 十 條 41) 이민웅, 2004, 임진왜란 해전을 통해본 朝 明 日 삼국의 전략전술 비교 군사 51, 군사편찬연구 소, 101~102쪽. 42) 화약솥과 화기들을 사용하며, 쇠로 만든 사석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구형 탄환을 사용하지 않 고 그 대신에 거의 남자의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 모양의 나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

109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09 로 당시 대형화포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 장군전과 같은 대형 화살의 위력을 설명했다. 또 다른 기록인 高 麗 船 戰 記 에도 거북선이 돌격선으로서 石 火 矢, 棒 火 矢 등을 쏘며 상당히 효과적이고 위협적인 공격을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43) 이렇듯 대형화포에 발사되는 대형화살은 적선에 도달 하여 선체를 파괴함으로써 적선의 전투력을 무력화하였고, 이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 수군은 소형화기와 질려포통, 비격진천뢰 등도 사용하였는데, 1593년 4월 웅천해전에서 조선군은 완구에 비격진천뢰를 장전하여 발사한 예가 있다. 44) 이들 화포는 거북선 과 판옥선에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의 군선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4. 맺음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기의 선진국이라 자처했던 조선은 일본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수군의 연승과 의병들의 활약, 명군의 지원 등을 바탕으로 전란을 극복할 수 있다. 조선이 전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조 선의 우수한 무기체계도 한 몫을 하였는데, 한민족의 대표적인 장기인 활을 비롯하여 쇠뇌, 대형 화포, 화차, 비격진천뢰, 신기전, 거북선 판옥선으로 대변되는 군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글에 서는 조선군의 대표적인 군선인 판옥선과 거북선, 그리고 대형화포의 구조적 특성을 정리하고, 그 특성을 통한 군선과 무기체계의 전술적 운용의 효과를 살펴보았다. 먼저 판옥선은 전장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건조된 군선으로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을 제 외하면 선체가 크고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인원과 화포를 많이 적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며 화력을 구사하기 때문에 여타의 군선보다 화력이 강하고 명중 률이 우수한 장점을 갖고 있는 조선군의 대표적인 군선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이 군선으 로서 활약을 한 것은 한선의 기본적인 평저선 구조를 비롯하여 판옥선만의 독특한 상장구조나 다층 구조, 선체의 규모, 대형화포의 탑재 등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아울러 거북선은 종래 조선의 군선인 판옥선에다 덮개를 씌우고 용머리를 붙인 발명보다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 돌격선으로서 적 선단에 뛰어들어 각종 화포를 쏘아대며 좌충우돌 활약하 였다. 거북선도 기본적으로 판옥선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개판이 설치되었다는 점이 다 서 집어넣는데,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松 田 毅 一 川 崎 桃 太, 앞의 책, 254 쪽) 43) 高 麗 船 戰 記 44) 정진술, 1995, 앞의 논문, 368쪽.

110 11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르다. 따라서 거북선은 주력군선이었던 판옥선과는 달리 돌격함으로서 전 후진이 자유롭고 旋 回 가 뜻대로 되었으며, 뛰어난 기동성능을 보이며 조선 수군이 연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 던 것이다. 이러한 거북선의 전투능력은 외형보다 내부구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판옥선 위에 개판을 설치하여 격군과 전투원 모두가 개판 밑에 수용되어 적에게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적의 대형 속으로 침투하여 한껏 휘저어 놓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 판옥선과 거북선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포를 바탕으로 함포전술을 구사하였고, 전함을 이용한 당파전술, 화공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군의 화 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 할 수 있었으므로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1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11 토론문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이 민 웅 (해군사관학교) 한 일 양국의 훌륭하신 선생님들과 함께 임진왜란 시기의 주요 주제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 게 된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임진왜란 해전사와 조선시대 해양사를 공부하 고 있는 이민웅입니다. 오늘 박재광 선생님의 발표문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 는 것으로 토론에 대할까 합니다. 1. 우선 제목에서 밝히고 있는 과학적 검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발표자께 질문 하고 싶습니다. 발표자의 발표문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거나 기존의 연구 업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등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 때문 에 이 토론문은 작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 다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박재광 선생님께서 연구사 정리를 급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만, 머리말 주 9)에서 토론자의 책 제목을 바꾸셨고, 제 기억으로는 그 책 에 거북선에 대해서는 해전에 참전했으며 돌격선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을 뿐인데 거북선 관련 저서로 꼽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주 12)에서는 조인복의 한국고화기도감 (1974, 문화 재 관리국)과 채연석의 조선초기 화기연구 (1981, 일지사) 등을 제외하고 계신데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2. 판옥선을 설명한 부분에서 다만 속도가 느린 것이 단점이라고 언급하셨는데, 임진왜란 첫 해의 제 1, 2차 출전에 포함된 해전에서, 예를 들어 합포해전이나 율포해전의 경우에는 일본 군

112 11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선을 추격해서 분멸( 焚 滅 )에 성공한 기록들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거북선의 경우 빠르기에 대해 대략 3노트(knot)에서 최대 10노트까지 다양한 설을 소 개하고 계신데 발표자의 의견은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신지, 또한 속도 면에서 판옥선과 어떤 차이 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3. 거북선과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하나는 돌격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거북선이 적선에 직접 충돌하는 충각전법을 사용했다고 하셨는데, 이를 당파전술( 撞 破 戰 術 )로 보 시는 것인지? 당파전술의 정의에 대해 질문 드립니다. 둘째 발표문에 거북선은 종래 조선의 군선인 판옥선에다 덮개를 씌우고 용머리를 붙인 발명 보다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 군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태종 때부터 존재하였던 거북선을 개량하여 본영과 방답진, 순천부의 선소에서 3척을 제작하였다. 라고 서술 하고 계신데 저는 발표자께서 임란 당시 거북선이 태종 시기의 그것과 연결된다고 본 것인지 아 닌 것인지에 대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4. 화기 부분에서는 제가 잘 알지 못해서 별달리 질문할 것이 없지만, 발표문에서 조총의 성 능에 대해 조선의 소형화기에 비교해 우세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과 관련된 질문을 두 가지만 드리겠습니다. 당시 일본 조총의 성능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유효 사거 리와 분당 발사 속도 등 실제 성능을 알 수 있는 수준으로... 다른 한 가지는 일본 내에서 조총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된 것으로 전해 듣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아시는 대로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113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13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Kuba Takashi(久芳 崇) (西南學院大學) 머리말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萬曆朝鮮役, 文綠 慶長의 役)에서는 일본군의 병기, 그 중에서 도 16세기의 최첨단이라는 鐵砲(火縄銃. 그 당시의 朝鮮과 明에서는 鳥銃 鳥嘴銃 鳥鎗 등으로 불렀다)나 일본도가 일본군의 주요 병기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무기사용 은 그 당시 明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의 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이 글에 서는 주로 지금까지 공개된 拙論에서의 고찰을 기초로1) 이러한 점에 대하여 약간의 卑見을 제시 하고 싶다. 1.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선박과 鐵砲 1592년 4월, 일본은 조선으로 군대를 파병하고 단 보름 만에 한성(서울)을 함락시켰으며, 한 양 함락의 보고를 받은 明 조정에서 일본과 조선의 밀통을 의심할 만큼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 다. 이러한 일본군의 緖戰의 우세는 일본군과 조선군의 군사병기의 격차에 의한 점이 크다. 그 중에서도 일본군이 대량으로 갖추고 있던 鐵砲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군사기술의 균형을 깰 1) 拙稿, 16世紀末, 日本式鉄砲の明朝への傳播 ( 東洋学報 84-1, 2002年) ; 朝鮮の役における日本 兵捕虜 ( 東方学 105, 2003년) ; 明末における武官統制と火器技術受容 ( 歷史学研究 823, 2007년) ; 明代中國における鉄砲の傳来と導入 ( 七隈史学 9, 2008년) ; 明末における新式火器の導入と京營 ( 九州大学東洋史論集 36, 2008年) 등 참조.

114 11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활과 화살이 주요병기였던 조선군을 압도하였다.2) 한편, 병기와는 대조적으로 일본군의 선박은 조선군의 선박에 비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시기의 일본군 선박에는 安宅船, 關船, 小早船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형선박이 安宅船 이며, 해전 때 주력이 되는 함선이었다. 關船은 安宅船보다 작은 선박으로서 기동력을 활용한 정찰 전투가 주요 용도였다. 小早船은 더 작은 선박이며, 安宅船 關船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 일본 측은 해전을 중시하지 않았고, 선박은 수송이 주된 목적 이었다. 또한 수송선을 軍船으로 전용하는 사례도 많았던 것 같다. 더욱이 기간선박인 安宅船은 龍骨을 사용하지 않는 구조였기 때문에 조선군의 선박에 비하여 대단히 취약했다고 한다.3) 이러 한 상황과 선박의 구조상의 결점이 緖戰에서 해상에서의 열세 패배의 주요 요인이 되었고, 이후 전략 결정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임진왜란에서는 군사기술이 전쟁 국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군사공격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鐵砲였다. 16세기 중엽, 포루투칼인으로부터 타네가 시마(種子島)에 전해진 鐵砲([그림1])는 전국시대의 일본 각지로 급속하게 전파 보급되었다. 임 진왜란에서는 이 鐵砲가 日本刀와 함께 일본군의 주요병기로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림1] 타네가시마(種子島)에 전래된 것과 같은 형태의 鐵砲 2)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鐵砲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의 축적이 있는데, 주요한 것으로서 矢野仁一, 支 那に於ける近世火器の傳来に就て ( 史林 2-3 4, 1917년) : 長沼賢海, 元明に於ける火器と我が鉄砲 ( 日本文化史の研究 教育研究会, 1937년) : 有馬成甫, 火砲の起源とその傳流 (吉川弘文館, 1962 년) : 所荘吉, 火縄銃(改訂版) (雄山閣出版, 1969년) : 吉岡新一, 文禄 慶長の役における火器につ いての研究 ( 朝鮮学報 108, 1983년) : 洞富雄, 鉄砲 (思文閣出版, 1991년) : 宇田川武久, 東アジ ア兵器交流史の研究 (吉川弘文館, 1993년) 등 참조. 3)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선박에 대해서는 参謀本部, 日本戰史 朝鮮の役 (偕行社, 1924년) : 渡辺世 祐, 朝鮮役と我が造船の発達 ( 史学雑誌 46-5, 1935년) : 有馬成甫, 朝鮮役水軍史 (空と海社, 19 42년) : 三鬼清一郎, 朝鮮役における軍役体系について ( 史学雑誌 75-2, 1966년) 등 참조.

115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15 그러면 일본군의 鐵砲에 대해서 임진왜란 초기의 兵部侍郎 겸 經略防海禦倭軍務로서 明의 지원군을 통솔했던 宋應昌은 처음에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宋應昌이 經略으로 재임하던 당 시에 기록했던 奏疏 咨檄 등을 날짜순으로 수록한 經略復國要編 권3 檄大小將領 (萬曆 20 년 월 16일)에는, 議攻戰之勢, 説者謂, 倭之鳥銃, 我難障蔽, 倭之利刀, 我難架隔. 然我之快鎗, 三眼鎗及諸神器, 豈 不能當鳥銃. 倭純熟故稱利, 我生熟相半, 故称鈍. 原非火器之不相敵也. 倭刀雖利能死人, 我刀雖稍不 如, 豈不能死倭哉. 倭之所以能敢戰者, 非緣一刀之故, 其実殊死戰也. 라고 되어 있다. 즉 일본군의 鳥銃 과 칼은 방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명군의 여러 火器의 위력도 이것에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군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병기의 우열 이 아니라 병사가 火器의 조작에 숙련되어 있으며, 또한 사력을 다 하여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經略에 부임하고 얼마 안 되어 아직 일본군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宋應昌은 당시 緖戰 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이유를 일본식 鐵砲의 우수한 성능보다 일본병사가 鐵砲나 칼의 조작에 숙련되어 있었고, 또한 용맹했다는 점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萬曆 21년(1593) 1월, 평양에서부터 碧蹄館에 걸친 실전을 겪고 난 뒤에 그는 일본군 鐵砲의 위력을 인식하게 되었다. 같은 책 권5, 與參軍鄭文彬趙如梅書 (萬曆 21년 1월 14일)에는 倭奴鳥銃甚利. 我先以大將軍砲挑撃之, 彼必以鳥銃抵. 我俟其放尽, 方以大兵進之, 必獲全勝矣. 라고 했으며, 같은 책 권6 與參軍鄭同知趙知縣書 (萬曆 21년 2월 1일)에도 我之火器固利, 而彼之鳥銃亦足相當. 如初角之時, 當先施我火器, 徉欲進兵, 実且未進, 誘其放尽鳥 銃, 然後一鼓下之, 無難也. 라고 되어 있다. 즉 일본군의 鐵砲는 대단히 성능이 좋고,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형 火器로 도발한 鐵砲를 쏘게 하고, 상대의 탄약이 소진되면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탄약이 소진되기까지 기다린다는 소극적인 전술은 명군이 갖추고 있던 鐵砲의 성능이 일본군의 신식 鐵砲에 비하여 성능이 떨어지고, 명군의 정면 대항이 곤란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일본군의 鐵砲는 野戰, 守城 등 모든 전투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전자의 대표라고

116 11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도 할 수 있는 萬曆 21년(1593)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는 바로 전 해, 중국 서북부 寧夏에서 哱拜 의 난을 진압한 후 명군제독으로서 實戰의 총지휘를 맡았던 總兵 李如松의 주력부대를 거의 괴 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명군에는 火器 사용 전술을 특기로 하는 浙江 병사가 가담하지 않았고, 李如松이 어릴 적부터 기른 기마군이 주력이었던 점, 직전의 평양전투에서 전승에 의하여 李如 松이 방심했던 점 등이 패인이었다고도 하지만,4) 명군은 그 전투를 계기로 일본군의 병기, 특히 鐵砲에 대하여 진지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 임진왜란 중 명군의 鐵砲 그러면 명군은 임진왜란 때 어떠한 火器, 특히 鐵砲를 갖추고 있었던 것일까. 經略復國要編 에 의하면 萬曆 20년(1592) 9월에서 11월에 걸쳐서 宋應昌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檄文 上疏 軍 令을 기록하고 있다. ①中國長技惟製火器爲先. 倭奴入犯, 以不容登岸爲上. 各該地方原設有車載大將軍, 虎蹲, 滅虜, 湧珠, 馬腿, 鳥嘴, 佛郞機, 三眼等項. 銃砲俱稱神器. (卷1 檄天津永平山東遼東各兵巡分守等十二道 萬 曆 20년 9월 28일) ②火器如大將軍, 虎蹲, 馬腿, 滅虜, 湧珠, 鳥嘴, 佛郞機, 三眼等銃砲, 俱係常用器物, 不難造集. 見今 舊有若干, 新造若干, 分發防守. 如不足用, 動支馬價銀, 速行製造. (卷2 經略海防事宜疏 萬曆 20 년 10월 12일) ③各樣火器, 如虎蹲, 湧珠, 馬腿, 鳥嘴, 佛郞機, 三眼銃及車載大將軍等砲, 見在各若干又新製及舊造 堪用, 可稱神器. (卷2 檄遼東張總兵 萬曆 20년 10월 14일) ④破敵, 必資利器. 而勁弓, 銃矢, 火薬, 火箭, 三眼鎗, 快鎗, 鳥銃, 長鎗, 飛鎌, 標鎗, 鉤刀, 佛郞機等 物, 即所以攻也. (卷3 議題水戰陸戰疏 萬曆 20년 11월 15일) ⑤銅鐵大將軍, 佛郞機, 滅虜砲, 虎蹲砲, 百子銃, 三眼銃, 快鎗, 鳥鎗, 俱要將官, 督同中軍千把百總, 4) 임진왜란 중 상세한 전투에 대해서는 徳富猪一郎, 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丁編) (戊編) (己編) (民友社, 년) : 石原道博, 文禄 慶長の役 (塙書房, 1963년) : 中村栄孝, 日鮮関係史の研 究(中) (吉川弘文館, 1969년) : 李光濤, 朝鮮 壬辰倭禍 研究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 1972년) : 李烱錫, 壬辰戰乱史(上) (中) (下) (東洋圖書出版, 1977년) : 鄭樑生, 明 日関係史の研究 (雄山閣 出版, 1985년) : 北島万次, 豊臣政権の対外認識と朝鮮侵略 (校倉書房, 1990년) : 同, 豊臣秀吉の 朝鮮侵略 (吉川弘文館, 1995년) : 金文子, 豊臣政権期の日 明和議交渉と朝鮮 ( お茶の水史学 37, 1993년) 등 참조.

117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17 逐一細加試驗. (卷3 軍令三十条 萬曆 20년 11월 30일) 이러한 사료로 보건대 임진왜란 당시 준비했던 명군의 화기는 大將軍砲(명초의 火器 형식의 흐름을 잇는 前裝式 대형포), 虎蹲砲(同 소형포), 佛郞機砲(16세기에 포루투칼인에 의하여 전래 된 카트리지식 後裝砲) 등의 각종 대포, 鳥銃(鐵砲), 三眼銃, 火箭 등의 종류였음을 확인할 수 있 다. 요컨대 ①~⑤의 사료에서 명군이 전통적인 대형화기와 佛郞機砲 외에 鐵砲 등의 소형화기 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經略復國要編 에서는 사료⑤를 마지막으로 명군이 鐵砲를 갖추고 실전에서 활용했 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이와는 반대로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일본식 鐵砲의 위력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명군의 鐵砲가 일본군의 鐵砲 앞에 서는 거의 무력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에서 명군의 鐵砲가 일본군 의 신식 鐵砲의 우수한 성능에 대항할 수 없었고, 그 존재의의가 상실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 이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그의 저서 日本史 속에서 명군의 鐵砲에 대하여 그들(명군) 의 鐵砲는 어떻게 발사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무수히 발포한 뒤에도 그로 인한 사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하여 명군의 鐵砲 성능을 시사하고 있다. 애초 중국에서 총포는 16세기 중엽에 전래되었다. 다만 첫 전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명확하지 않다. 명대의 사료에 이미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첫 전래는 이와 같은 학설에 기인하 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러 가지 학설을 정리하면, 원래 중국에 기원이 있다는 주장, 南夷 西 番 (유럽)에 기원이 있고, 그들을 매개로 明朝에 전래되었다는 주장, 일본을 경유하여 명에 전래 되었다는 주장으로 대별된다. 鄭若曾 籌海圖編 (嘉靖 41년 [1562] 성립) 권13 經略 에, 予按鳥銃之製, 自西番流入中國. 其來遠矣. 然造者多未尽其妙. 嘉靖二十七年都御史朱紈, 遣都指 揮使盧堂, 破双嶼港賊巣, 獲番酋善銃者. 命義士馬憲製器, 李槐製薬. 因得其傳而造作, 比西番尤爲精 絶云. 라고 했고, 당초 포르투갈에서 제조법이 전래되었지만 정교하게 복사할 수 없었고, 이어서 嘉靖 27년(1548)에 밀무역의 거점이었던 寧波 부근의 雙嶼港을 명군 總兵 盧鏜(盧堂) 등의 명군이 공 격했을 때 왜구 측으로부터 획득한 鐵砲 및 포로가 된 일본인을 통하여 鐵砲가 전래되었다는 것 이 유력한 설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5) 嘉靖 定海県志 권7, 海防 에도 5) 명대 중국의 鐵砲 전래에 대해서는 矢野前掲, 支那に於ける近世火器の傳来に就て : 吉田光邦, 明 代の兵器 (藪内清編 天工開物の研究 恒星社厚生閣, 1953년) : 和田博徳, 明代の鉄砲傳来とオス

118 11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總兵盧鏜, 攻破雙嶼, 得寇鳥嘴銃與火薬, 方其傳遂廣. 라고 되어 있고, 雙嶼 공격 때 鐵砲를 노획했던 盧鏜에 의하여 鐵砲가 명에 퍼졌다고 한다. 이후 명에서는 鐵砲가 왜구로부터 전래되었다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隆慶~萬曆 초기에 만들어진 戚 繼光(왜구 토벌과 북방 방위에 혁혁한 공적을 세운 무장)의 練兵實紀雜集 권5 軍器解 鳥銃 解 에는 此器中國原無傳, 自倭夷初得之. 此與各色火器不同, 利能洞甲, 射能命中, 弓矢弗及也. 라고 되어 있고, 倭夷 로부터 총포가 전래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侯継高 全浙兵制考 卷1 에도 嘉靖三十五年 八月, 總督胡侍郎搗沈家庄 總兵盧鏜擒賊酋辛五郎等. 五郎善造鳥銃, 今之鳥 銃自伊傳始. 라고 되어 있고, 嘉靖 35년(1556) 8월 盧鏜에게 붙잡힌 일본인 辛五郎이 鐵砲의 조작에 정통했 기 때문에 그를 매개로 鐵砲 제작기술이 명에 전래되었다는 보다 구체적인 鐵砲 전래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 게다가 이 辛五郎에 대해서는 明史 권205 胡宗憲傳 에, 會盧鏜亦擒辛五郎至. 五郎者, 大隅島主弟也. 라고 되어 있다. 다만 辛五郎이 명에서 鐵砲 제조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밖에도 곤잘레스 데 멘도사의 지나大王國誌 제2부 1권 25장에는 萬曆 3년(1575) 福建에 서의 상황으로 マン帝國 ( 史学 , 1958년) : 有馬前掲, 火砲の起源とその傳流, Joseph Needham, Science a nd civilisation in China, Vol.5: Chemistry andchemicaltechnology, Pt.7: Military technology; The gunp owder ep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 同, 前掲 鉄砲 : 王兆春, 中國火器史 (軍事科学出 版社, 1991년) : 春名徹, アジアにおける銃と砲 (石井正敏等編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Ⅵ, 東京大学 出版会, 1993년) : 李洵, 明代火器的発展与封建軍事制度的関係 ( 下学集 中國社会科学出版社, 1 995년) : 閻素娥, 関于明代鳥銃的来源問題 ( 史学月刊 , 1997년) : 岸本美緒 東アジアの 近 世 (山川出版社, 1998년) 등 참조.

119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19 비레이(巡撫)는 일행에게 사람을 보내서 에스파냐 군인이 차고 있던 칼 한 자루와 화승총 1정, 그리고 화약통 한 개를 빌리고 싶다, 그것들을 비슷하게 제작해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군인들은 요청한 물건을 보내주었다. 별로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模造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라고 적어서 福建에서 스페인을 매개로 한 鐵砲의 전래와 模造를 전하고 있다. 16세기 중엽에 주로 왜구 등 해외의 여러 세력과 교류가 활발했던 연안 각 지역에서 共時的 多元的으로 전해진 鐵砲는 신속하게 왕조 치하에서 다량으로 제조되었다. 萬曆 大明会典 권1 93 軍器軍装二 火器 에는 嘉靖 37년(1558)에 명의 화기 제작기관인 兵仗局에서 10,000정의 鐵 砲를 제조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鐵砲는 戚継光 등이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佛郞機砲 등 다른 화기와 함께 왜구 몽골 방위에 활용했던 듯하다. 紀效新書 와 練兵實紀 등 그의 일련의 저술에서는 전술 속에서 鐵 砲가 중요시되는 16세기 후반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16세기 중엽 이후 명에서는 鐵砲가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 명의 鐵砲는 임진왜란에서도 명나라 장수들이 갖추고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면 임진왜란에서 명 군이 사용했던 총포는 어떠한 것이었으며, 일본군의 鐵砲와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에서 뒤떨어진 것이었을까. 이러한 점에 관해서 洞富雄씨는 명의 鐵砲 연구가였던 趙士楨(자세한 것 은 후술)의 神器譜或問 (萬曆 27년[1599] 序)에서 近日大小神器, 易銅爲銕, 舍鑄務鍛. 라고 했고, 또 명군의 京營(在京의 禁軍組織) 무장이었던 何良臣의 陣紀 (萬曆 19년[1591] 序) 권2, 技用条에, 鳥銃出外夷, 今作中華長技. 但不敢連放五七, 銃恐内熱火起, 且慮其破. 惟倭銃不妨. 라고 한 점에서 명의 鐵砲 제조법이 16세기 말에 구리의 鑄造에서 철의 鍛造로 이행했다는 것, 임진왜란 때 명군이 사용했던 鐵砲는 구리를 鑄造해서 만든 대포였고 5, 6발 쯤 발사하면 열이 생겨서 파열의 위험성이 있는 것에 비하여, 鍛鐵製인 일본의 鐵砲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6) 陣紀 가 서술한 것처럼 명의 鐵砲는 연발 내구성이 뒤떨어졌으며, 이것은 명 6) 前揭, 鉄砲 276~282쪽.

120 12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중 정확도와 사정거리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발내구성은 물론 명중정확도 사정거리 등의 성능에서도 鍛鐵製인 일본 鐵砲는 鑄銅製인 명군의 鐵砲보다 우수했다는 것이다. 다만 洞富雄씨는 왜 16세기말에 鐵砲의 제조법이 구리의 鑄造에서 철의 鍛造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에서 일본식 鐵砲의 도입이 진 행된 것과 마찬가지로, 명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획득했던 鐵砲를 통하여 신식 鍛鐵 製 鐵砲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鐵砲의 낙후된 성능에 직면하여 명군 무장들은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鐵砲를 일본 도 및 포로와 함께 적극적으로 획득해 갔다. 宣祖実録 권48, 宣祖 27년(1594) 2월 己巳条에 조선 備邊司의 狀啓로, 前日各陣所得鳥銃, 皆送於元帥處, 太半爲應索天兵之資. 今後戰陣所得鳥銃, 無得濫費, 一一收拾, 各陣軍士逐日學習, 漸次成才. 라고 하였다. 즉 종래 조선군이 획득한 일본군의 鐵砲는 모두 명군의 요구에 응하여 元帥 (李 如松)에게 보냈는데, 이후 획득한 鐵砲는 가능한 한 자기 진영에서 보전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훈련시켜서 숙달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이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鐵砲는 조선 군이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명군의 요구에 따라 상당수가 명군 무장들에게 보내졌다고 생각된 다. 經略復國要編 권7 敍恢復平壌開城戰功疏 (萬曆 21년[1593] 3월 4일)에는 평양에서 개성 에 이르는 緖戰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물품에 관한 기술로서, 斬獲倭級一千九百七十級夥, 生擒酋首五名, 奪獲倭馬三千三十二匹, 倭刀, 鳥銃, 盔甲等器六百三 十件. 라고 하여 명군이 전쟁 당초부터 다수의 鐵砲와 일본도를 획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명군 무장들이 적극적으로 획득한 일본군의 鐵砲 중 일부는 임진왜란 종결 후인 萬曆 27년(1599) 4월, 북경에서 거행된 献俘式 (皇帝에게 올리는 포로헌납 의례)7)에 앞서서 거 행된 獻獲式 때 長安 거리에 전리품으로서 진열되었다. 이 獻獲式 모습을 기록한 張大復의 7) 임진왜란 종결 후인 1599년 4월, 北京 紫禁城 午門에서 개최된 献俘式 및 그곳에서 명 황제 萬曆帝 에게 헌납된 平秀政, 平正成, 要時羅 등 61명의 일본군 포로의 상세에 대해서는 拙稿 前揭 朝鮮の 役における日本兵捕虜 : 동, 明朝皇帝に献納された降倭 (追悼論叢編集委員会編 山根幸夫教授追 悼記念論叢 明代中國の歷史的位相(下卷) 汲古書院, 2007년) 참조.

121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21 東征獻獲記 (黄宗羲編 明文海 권352, 記, 수록) 중 일부에는 麻將軍以俘獲獻天子. 天子命金吾, 繋鹵人, 而陳所獲鎧甲, 兜鍪, 旌幟, 器械之属, 長安街上, 令吏 民縱觀之. 旗之左右車, 各五七輛. 所載皆銅銃, 鳥銃, 鉛錫銃. 라고 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종결 후 명군 제독 麻貴는 일본군 포로와 함께 노획품을 명 황제인 萬曆帝에게 헌상하였다. 萬曆帝는 그 노획품들을 長安 거리에 진열시켰는데, 그 중에는 일본군 으로부터 획득한 鐵砲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료에서도 명군에 의한 일본식 鐵砲 획 득 상황을 알 수 있다. 3. 임진왜란 이후 일본식 鐵砲 의 전파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降倭를 매개로 한 일본식 鐵砲의 도입이 급속하게 진행되었 다.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이미 풍부한 선행연구에 의하여 지금까지 상세하게 검토 해명되고 있 다.8) 한편, 명에서는 어떠했을까. 이하에서 검토해 보겠다. 萬曆 26년(1598) 8월 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이 최종적으로 종결되기까지 명군무장들이 노획한 일본군의 鐵砲는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명군 무장들에 의한 적극적인 일 본식 鐵砲의 획득 수집은 그들의 군사력 강화의 일환이었다. 노획한 수많은 일본식 鐵砲는 포로가 된 다수의 일본병사와 함께 명군 각 무장들 휘하에서 戰力이 되어 임진왜란 종결 후 중국 각지의 군사활동에서 이용되었다. 예를 들면 平播日録 (저자 미상, 萬曆 28년[1600] 10월 후)에는 劉總兵衣短衣, 率親兵真倭數人, 各挾鳥銃, 雜戎行立城下. 城上賊欲發弩, 纔越女墻見半面, 而矢已 先及之矣. 賊始不知. 已一賊大呼曰, 劉總爺至矣. 衆賊轟然奔散. 8)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포로(降倭)에 대해서는 徳富猪一郎, 近世日本國民 朝史 豊臣氏時代庚編桃山 時代概観 (民友社, 1922년) : 中村前掲, 日鮮関係史の研究(中) : 内藤雋輔, 文禄 慶長役における 被擄人の研究 (東京大学出版会, 1976년) : 北島万次, 朝鮮日々記 高麗日記 (そしえて, 1982년) : 同, 壬辰倭乱と秀吉 島津 李舜臣 (校倉書房, 2002년) : 同, 壬辰倭乱における降倭の存在形態 ( 歷 史評論 651, 2004년) : 宇田川前掲, 東アジア兵器交流史の研究 : 貫井正之, 豊臣政権の海外侵 略と朝鮮義兵研究 (青木書店, 1996년) : 丸山雍成, 朝鮮降倭部將 沙也可 とはだれか (廣瀬正俊編 大藏姓原田氏編年史料 文献出版, 2000년) : 村井章介, 慶長の役開戰前後の加藤清正包囲網 ( 韓 國朝鮮文化研究 10, 2007년) 등 참조.

122 12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라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종결 후인 萬曆 28년(1600) 3~4월에 걸쳐 조선에서 중국 서남부 四川 播州에서 일어난 土司 楊應龍의 난 진압에 轉戰했던 명군 總兵 劉綎이 휘하의 真倭 (劉綎이 임진왜란 때 포로로서 휘하에 편입했던 일본병사) 다수와 함께 鐵砲를 휴대하고 楊應龍軍의 城 塞에 돌입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또 趙士楨의 神器譜 권1 防虜車銃議 에는 임진왜란 종 결 후의 遼東 상황에 대해서 近日退虜, 亦不過日本鳥銃. 라고 하여 여진 및 몽골과의 전투에서 日本鳥銃 이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同書 권4 說銃六十九条 에 西洋幷倭鳥, 必須歳月學習, 方能到家. 諸銃不須一月専心, 便能打放. 向敎家人西洋及倭鳥銃, 一歳 不成. 라고 한 것처럼 일본식 鐵砲의 조작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1년 이상의 훈련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에서 명군의 포로가 되었던 일본병사는 숙달된 鐵砲의 사용자로서 명 내부에 서의 군사 활동에도 이용했던 것이다. 일본군 포로는 鐵砲의 조작뿐만 아니라 鐵砲를 이용한 전술의 전파와 보급에도 공헌하였다. 神器譜 권1 防虜車銃議 에는 임진왜란 종결 후 遼東과 義州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朝鮮撤回之兵, 留防義州者, 不満千人. 斨斧破欠, 身無片甲. 適虜万余, 倅薄城下, 以火器更番撃打. 醜類被傷者, 以千計, 不敢深入而走延綏. 報讐之虜, 苟非降倭鳥銃打傷酋首, 其流毒又不知何若. 임진왜란 후 遼東의 義州에는 조선에서 철수한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천명 남짓 했고, 휴대한 무기는 파손되었으며 갑옷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만명 이상의 오랑캐(몽골 인)가 義州를 침략했을 때, 명군은 화기의 更番撃打 로 그들의 습격을 막았다. 몽골 쪽의 부상 자는 천명 이상에 달하였고 延綏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만약 투항 일본군의 鳥銃 (鐵砲)이 몽골의 수령을 부상시키지 않았다면 그 위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라는 이야기이 다. 여기서 말하는 更番撃打 란 전국시대 이후 일본에서 발달 보급하였고, 일본군의 장기인 여 러 명이 1조가 되어 鐵砲 등의 화기를 교대로 연속해서 일제히 사격하는 전술이다. 장전에서 발

123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23 포까지 시간이 걸리는 鐵砲의 약점을 보완하도록 고안하여 교대로 鐵砲를 일제히 사격하는 전술 은 織田信長이 1575년 長篠전투에서 사상 처음으로 선을 보였으며, 3천명의 鐵砲隊가 武田의 기마군을 격파한 것으로 일찍부터 알려졌다(유럽에서 이 전술이 채용된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한다). 그 진위는 어찌되었든 임진왜란 당시 명군은 일본군의 이 신기한 전술에 매우 고심했고, 이러한 화기의 사용법은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였다. 예를 들면 經略復國要編 권6 議乞増兵 益餉進取王京疏 (萬曆 21년[1593] 2월 16일)에 倘倭奴用分番休迭之法, 時出遊騎以擾我師, 我師進不可退, 不可糧餉. 라고 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分番休迭之法 도 사수가 교대로 鐵砲를 연속 사격하는 전술을 가 리키며, 명군은 일본군의 이런 전술에 고심했던 것이다. 또한 1638년 명에서 간행된 畢懋康의 軍器圖説 에는 鐵砲의 輪流操作圖 가 수록되어 있다.([그림 2]) 17세기 명에서 이러한 鐵砲의 윤번사격전술이 전파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李植의 言事紀略 권5 奏爲群奸結党謀害孤忠謹陳踪跡顛末等事 에 의하면, 萬曆 27 년(1599) 무렵 요동 巡撫 李植은 遼河 동서의 城堡 방비 강화를 꾀하고 다음과 같이 上奏하였다. 臣慮城堡單弱難守. 河東留南兵一千, 分散遼瀋開鐵等城堡. 貼防有不足, 檄各路將領, 選弱馬騎兵 並歩兵益之. 又査給大砲火箭, 使城守有資, 各給降倭一二名, 敎以射打. 河西調發土兵營各數百, 分散 錦義正安等城堡. 貼防有不足, 査選各營歩兵益之. 火器鎗手, 亦如河東. 즉 요동의 각 城堡는 수비가 취약하기 때문에 遼河 동쪽에 는 임진왜란 이후 요동에 주둔하는 南兵 (浙江兵) 1천명을 遼陽 등 각 城堡에 배치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주변 각 장군 으로부터 병마를 제공받아 충당한다. 또 대포와 火箭이라고 부르는 화기를 지급하여 방비 강화를 꾀하고, 동시에 일본군 포로 1, 2명을 각각 배치하여 사격법 등 화기 조작을 지도하 도록 한다. 遼河 서쪽의 화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화기조 작을 가르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병사를 매개로 화기를 조작하는 기술이 이전되었던 것이다. 일본병사를 매개로 군사기술이 이전된 예는 鐵砲 화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楊東明의 青瑣藎言 卷之 [그림 2] 軍器圖說

124 12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下 救降夷山査疏 에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명군에게 포로가 되어 명에서 검술 보급에 활용되었 던 山査이라는 일본병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爲降夷向化敎芸頗優, 懇乞聖明電察, 發回營伍, 以廣招携事. 臣等竊惟, 克敵之方, 在於精敵之技. 而募兵之要, 貴能用敵之人. 精敵之技, 則彼不得恃所長以乗吾之短. 用敵之人, 則吾可得結其心, 而悉 彼之精. 故兵法不殺降卒, 而因間用其鄕人. 古名將類多如是矣. 臣等往聞, 倭刀最利, 倭人運刀最銳. 常恨不得其人而悉其術. 頃者東征諸將帶回降倭, 業已分布各邊收用. 謝用梓往取王子陪臣, 帶回一倭, 名曰山査. 本兵發付營中, 令其敎演刀法. 標下坐營官何良臣, 具申總協及臣等衙門, 俱蒙批允, 立爲敎 師, 收入軍冊月給倉糧両月, 以來軍士習學倭刀, 精熟可用者百餘人. 臣等私自喜幸, 以爲得以用倭人而 悉倭技矣. 乃東厰緝事, 人役誤以爲奸細擒之. 夫京營十餘萬衆勿論也. 즉 일본도는 매우 날카로우며, 일본병사에 의한 그 조작도 매우 빼어나다. 최근 임진왜란에 출정했던 무장들은 降倭를 휘하에 거느리고 각 방면에 수용하였다. 謝用梓가 조선왕자 및 陪臣 을 탈환했을 때 山査라는 일본인 1명을 데려왔다. 그는 日本刀를 능숙하게 다루었으므로 진영에 서 日本刀 교련에 종사하도록 했다. 明의 京營坐營官 何良臣이 具申하여 그를 일본도 조작 교사 로 채용하고 통상보다 갑절의 급료를 주고 채용하였다. 이후 일본도 운용을 학습하여 숙달된 병 졸이 백 명 이상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 山査는 간첩 혐의로 東厰에 의하여 구속되었다는 것 이다. 일본도의 검술이 일본군 포로를 매개로 명에 전파된 것을 전하는 구체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王在晋의 都督劉將軍傳 에는 萬曆 46년(1618) 무렵 당시 江西布政使로서 南昌에 머물고 있던 王在晋이 마찬가지로 革職되어 南昌에 칩거 중이던 무장 劉綎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기록 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入中堂, 閱倭刀, 盔甲, 及虜中器仗, 靡不精利. 畢具蒼頭, 各自能鑄造, 匠工不及也. 其家丁則合 南北倭苗夷虜, 靡所不有. 즉 劉綎 휘하에는 남북의 倭 苗 등 다양한 사람들이 家丁 (무장이 기르는 私兵)으로서 존재하였고, 그들이 倭刀 (일본도) 등 많은 병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家丁 들이 제조한 병기는 매우 정교했다는 것이다. 劉綎 휘하의 병기가 모두 고도의 제조기술을 지닌 이민족 家丁 자신 에 의하여 제조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된다. 전술한 것처럼 劉綎은 임진왜란 때 명군 쪽의 주요 무장이 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병사를 포로로 하고 家丁 으로서 적극적으로

125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25 자신의 부대 휘하에 편입시켰는데, 주된 이유는 일본병사의 고도의 전투능력에 더하여 그들이 가진 고도의 군사기술을 수용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일본군 포로가 임진왜란 후 명에서 신식병기 제조에도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조 된 병기에는 鐵砲를 비롯한 화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는 동아시아의 병기기술 도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 란 후 고성능의 鍛鐵製 일본식 鐵砲는 일본도와 함께 그 조작 운용에 숙달된 일본군 포로를 통 하여 여러 형태로 명에 전파되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입에는 임진왜 란에서 포로가 된 일본병사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4. 임진왜란 이후 신식 鐵砲 의 보급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식 鐵砲는 일본군 포로를 매개로 명과 조선왕조에 수용되어 간다. 동 시에 명에서는 일본식 鐵砲를 대항 능가할 수 있는 각종 고성능 鐵砲에 대한 관심도 급속히 높 아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內閣文華殿中書였던 趙士楨은 인맥을 이용하여 여러 외국의 鐵砲를 수 집했으며, 다시 이것들을 기초로 새로운 鐵砲를 개발 제작하고 신식 화기의 도입을 자주 왕조에 건의하였다. 그가 제출한 화기관련 상주문이나 각종 鐵砲의 해설은 神器譜 로 정리되어 명대 중국에서 鐵砲 연구서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9) 神器譜 에는 鐵砲에 관한 흥미 있는 기사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같은 浙江 출신 으로 왜구토벌에 공적이 있는 명군 무장 陳寅로부터는 서양 番鳥銃(유럽식 鐵砲)을 입수하여 소 개하고 있다. 그밖에도 게재된 鐵砲는 다종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趙士楨이 높이 평가했고, 나중 에 명에서 도입을 검토하기에 이른 것이 16세기 중엽인 嘉靖 연간에 전래되었다는 嚕蜜銃이라 는 鐵砲이다. 嚕蜜銃이 전래된 내력 및 趙士楨에 의한 입수과정에 관해서는 神器譜 권1 恭進神器疏 및 같은 책 권2 原銃上 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또한 和田博徳의 자세한 연구 성과도 있 다.10) 이들에 의하면 嚕蜜銃은 嚕蜜國(오스만제국) 사절단이 명에 왔을 때 (아마도 嘉靖 33년[15 54]),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朶思麻라는 인물이 가져온 것이었다. 朶思麻는 그대로 명에 머물렀 고, 嚕蜜銃도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그의 곁에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서 수십 9) 神器譜 에 대해서는 藤井宏, 神器譜の成立 ( 岩井博士古稀記念典籍論集 1963년) 참조. 10) 和田 前揭, 明代の鉄砲傳来とオスマン帝國.

126 12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년 후 趙士楨은 이 총의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하여 제 조방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神器譜 에 기록된 嚕蜜銃의 구체적인 특징으로서 대략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銃身은 무 게 6~8근, 길이 6~7척의 鍛鐵製( 神器譜 에서는 雙層 交錯法 으로 기록되어 있다) 鐵砲였다. 이것은 동일한 神器譜 기록의 서양 番鳥銃(무게 4~5근, 길이 6척)과 일본식 鐵砲와 비교할 때 좀 더 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격할 때는 銃架를 필요로 한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큰 일본식 총포와 비교하여 몇 배의 위력 이 있다고 한다. 구조상의 특징으로는 견착식 개머리판, 緩發式 발화장치 등을 들 수 있다(일본식 鐵砲는 뺨에 대는 개머리판, 용수철을 이용한 순발식 발화장치). 趙士 [그림3] 嚕蜜銃 楨은 嚕蜜銃이 파괴력 사정거리 조작법 품질 등 모든 측면에서 가장 우수한 鐵砲라고 평가하고 있다([그림3]). 神器譜 에 기록된 다수의 화기에 대한 朝廷의 평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명에서 채용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嚕蜜銃만은 높은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神器譜 권1에 수록된 兵部署掌 部事太子太保刑部尙書 蕭大亨의 題奏( 謹題爲恭進防邊奇器以張國威以省國用事 )에는 前所進嚕蜜等銃, 命中方寸, 直透重甲, 尤爲奇異. 라고 했으며, 同書 同卷에 수록된 趙士楨의 恭進神器疏 (萬曆 30년[1602])에서도 近見巡按揚宏科極口, 退虜全賴嚕蜜等銃. 라고 하여 嚕蜜銃이 명나라 조정 내부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7세기 초엽의 명에서 嚕蜜銃은 일본식 鐵砲와 함께 鐵砲의 주요모델로 알려지게 되었 고, 어느 정도 보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대형으로 파괴력이 있고 사정거리가 긴 守城戰 때 효과적이었던 점, 불발이 적고 조작성이 우수하며 비교적 쉬운 구조의 완발식 발화장치였던 점, 鍛鐵製로서 견고한 銃身이었던 점, 종래의 전통적인 화기와 비교하여 명중 정확도가 높았던 점 등이 그 보급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萬曆 37년(1609)에 만들어진

127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27 王圻의 三才圖会 器用 7권 兵器類条에는 嚕蜜鳥銃(嚕蜜銃)을 싣고 鳥銃惟嚕蜜最遠最毒. 又機昂起, 倭銃雖伏筒旁, 又在床下外, 不便収拾. 此中書趙士楨得之朶 思麻. 라고 기록했다. 또한 명 말을 대표하는 병서로서 天啓 원년(1621)에 만들어진 茅元儀의 武備志 권124 軍資乗 火6 火器圖説3 銃1 에도 鐵砲의 모델로서 鳥嘴銃과 함께 嚕蜜鳥銃을 예로 들 면서 三才圖会 와 거의 같은 기사를 수록하고 있다. 17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서적들 에 嚕蜜銃이 게재된 것은 趙士楨의 건의 이후 嚕蜜銃이 대형 鐵砲의 한 형식으로 명 조정 내부 에서 인식되어 가고 있었던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朶思麻로부터 趙士楨에게 제조 기술이 전해 진 嚕蜜銃은 명 산하의 京營을 중심으로 하는 화기제조 공정을 거쳐서 상당량이 제조됨과 동시 에 茅元儀 등 명 말의 군사전문가에 의하여 소개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 후 嚕蜜銃은 파괴력과 높은 정확도를 겸비한 대형 鐵砲로서 실제로 對女眞戰線에서 활용 되었던 듯하다. 天啓 원년(1621) 2월 27일 徐光啓의 상소문( 謹陳任内事理疏 )에는 臣添請得戊字庫存貯鳥銃二千門, 止是機牀, 不堪咨取. 工部料價改換嚕密式, 数月練習, 小有炸損 不過数門, 亦不至傷人, 其餘俱試験堪用.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戊字庫 (화기저장고)에 저장되어 있는 鐵砲 2000정은 사용하기가 어려 워서 嚕密式 으로 개조했더니 작렬 폭발하는 것이 적고 사용하기가 쉬워졌다는 것이다. 嚕密 式 이란 緩發式 鍛鐵製의 대형 鐵砲인 嚕蜜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형 鐵砲는 그 밖의 大鳥銃 혹은 일반 소형 鐵砲와 마찬가지로 鳥銃 등으로 總稱되었고, 17세기 전반 명의 여진 방위에 활용되었으며 요동의 요충지에 배치되었다. 熹宗実録 권20, 天啓 2년(1622) 3월 庚戌条에는 工部將發過援遼軍需, 自萬曆四十六年起至天啓元年止總数開具以聞, 天威大將軍十位, 神武二將軍 十位, 轟雷三將軍三百三十位, 飛電四將軍三百八十四位, 捷勝五將軍四百位, 滅虜砲一千五百三十位, 虎蹲砲六百位, 旋風砲五百位, 神砲二百位, 神鎗一万四千四十位, 威遠砲十九位, 湧珠砲三千二百八位, 連珠砲三千七百九十三位, 翼虎砲一百一十位, 鐵銃五百四十位, 鳥銃六千四百二十五門, 五龍鎗七百 五十二杆, 夾靶鎗七千二百杆, 双頭鎗三百杆, 鐵鞭鎗六千杆, 鈎鎗六千五百杆, 旗鎗一千杆, 大小銅鐵 佛郞機四千九十架.

128 12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萬曆 46년(1618)부터 天啓 원년(1621)에 걸쳐서 6,425정이나 되는 鳥銃 이 工部에서 遼東으로 보내진 사실을 전하고 있다. 満洲実録 권7에는 天命 6년(1621) 후금군 의 공격에 대항하여 遼陽을 수비하는 명나라 병사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자루의 鐵砲 그림도 묘사되어 있다. 鐵砲 그림에는 모두 銃架와 같은 것이 보인다. 대형 鐵砲였을까? 이러한 守城用 鐵砲는 嚕蜜銃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崇禎 4년(1631)에 벌어진 大凌河攻城戰에서 여진족은 명군의 화기를 대량으로 노획했는데, 그 중에는 嚕蜜銃으로 생각되 는 화기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11) 趙士楨이 제조기술을 습득한 신식 화기가 京營을 매 개로 그 도입이 검토되었고, 그 후 명 조정에서 정식으로 채용하고 여진전선에서 배치 활용되었 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세기 동아시아의 군사혁명 萬曆 47년(1619) 샤르허 전투에서의 패배나 天啓 원년(1621)의 瀋陽 遼陽에서 함락을 당한 명에서는 여진족에 대한 군사적인 위협이 급속하게 높아진다. 이러한 위협을 포르투갈의 신식 화기로 타파하려고 했던 것이 徐光啓를 중심으로 하는 크리스천 관료들이었다. 이전보다 화기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있던 徐光啓는 당시 포르투갈의 거점이 되어 있던 마카오에서 제조된 고성능 의 유럽식 화기 도입을 기획하고 적극적으로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명은 당시 최신식 대포 였던 紅夷砲를 마카오의 포르투갈 당국으로부터 조금씩 사들이고 北京이나 遼東 등 각 지역의 군사거점에 배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寧遠에 배치된 紅夷砲가 天啓 6년(1626)의 대여진 전투에 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은 이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徐光啓가 주도했던 마카오의 포르 투갈 당국을 매개로 한 紅夷砲의 도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12) 11) 楠木賢道, 天聰5年の大凌河攻城戰とアイシン國軍の火砲 自然 人間 文化 破壊の諸相 (筑波大学, 2002년). 12) 17세기에 紅夷砲의 동아시아 전파에 대해서는 有馬前掲, 火砲の起源とその傳流 : 張小青, 明清 之際西洋火炮的輸入及其影響 (中國人民大学清史研究所編 清史研究集 4, 四川人民出版社, 1986 년) : 王兆春 前掲, 中國火器史 : 馬楚堅, 西洋大砲対明金態勢的改変 (羅炳錦 劉健明主編 明末 清初華南地区歷史人物功業検討会論文集 香港中文大学歷史学系, 1993년) : 張顕清, 徐光啓引進 和仿製西洋火器述論 (呉志良主編 東西方文化交流 澳門基金会, 1994년) : 黄一農, 紅夷砲與明清 戰争 ( 精華学報 新26-1, 1996년) : 同, 天主教徒孫元化與明末傳華的西洋火砲 ( 中央研究院歷史 語言研究所集刊 67-4, 1996년) : 岸本前掲, 東アジアの 近世 : 申東珪, オランダ人漂流民と朝鮮 の西洋式兵器の開発 ( 史苑 61-1, 2000년) : 劉鴻亮, 明清時期紅夷大砲的興衰与両朝西洋火器発 展比較 ( 明清史 , 2006년) 등 참조.

129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29 한편, 紅夷砲와 함께 鐵砲도 역시 대여진 전쟁에서 명군의 가장 유력한 병기가 되었다. 崇禎 2년(1629)에 올린 徐光啓의 상소문 破虜之策甚近甚易疏 에서는 여진 대책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虜之畏我者二. 丙寅以後始畏大銃, 丙寅以前獨畏鳥銃. 所獨畏於二物, 謂其及遠命中故也. 라고 하였다. 丙寅 이란 天啓 6년(1626) 누루하치가 거느린 여진군과 寧遠城을 지키는 명군 무 장 袁崇煥과의 攻城戰을 뜻하며, 大銃 이란 紅夷砲를 가리킨다. 즉 寧遠전쟁 이전의 대여진 작 전에서 가장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鐵砲였으며, 그 이후 紅夷砲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鐵砲가 17세기 명의 주요 병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상소문에서 虜多明光重鎧, 而鳥銃之短小者, 未能洞貫, 故今之練習, 宜畫敵爲的, 専撃其手與目. 又宜糾工急造 大号鳥銃, 至少亦須千門, 可以洞透鐵甲. 라고 하여 徐光啓에 의한 鐵砲, 특히 대형 鐵砲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徐光啓의 計開目前至急事宜 (崇禎 2년[1629] 무렵)에도 凡守城除城威大砲外, 必再造中等神威砲, 及一號二號大鳥銃, 方能及遠命中. 大鳥銃一時未得 應手. 見今城樣二廠所儲鳥銃, 可作速整頓試驗, 敎練營軍, 以助城守. 라고 하여, 守城 때에는 대포 등과 함께 높은 명중도와 사정거리를 겸비한 大鳥銃 (대형 鐵砲) 이 효과를 발휘한다고 전하고 있다. 泰昌 원년(1620) 이후 天啓~崇禎 연간에 걸쳐 포르투갈 당국으로부터 많은 紅夷砲가 명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紅夷砲에 한하지 않고 동시에 鐵砲를 비롯한 중소형 화기도 다수 도 입되었다. 崇禎 3년(1630) 徐光啓의 상소문( 聞風憤激直献芻蕘疏 )에는 計開, 拠原呈, 除銃師自備外, 應於廣中置買物件. 一, 鷹銃二百門, 幷合用事件. 一, 鳥嘴護銃一千 門, 幷合用事件. 一, 西式籐牌五千面. 라고 하여 명이 포르투갈 당국으로부터 鷹銃 과 西式籐牌 라고 하는 지금까지 없던 신식 병 기와 함께 鐵砲 1000挺을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崇禎 3년(1630) 徐光啓의 상소( 欽奉明旨謹陳愚見疏 )에는

130 13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先 造 成 鷹 嘴 銃 四 十 一 門, 鳥 銃 六 十 五 門, 共 一 百 零 六 門. 除 先 解 三 十 門 貯 庫 外, 其 七 十 六 門 見 共 營 軍, 日 逐 操 演. 続 造 鳥 銃 三 百 余 門 未 完. 라고 하여 徐 光 啓 가 鐵 砲 를 模 造 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鷹 嘴 銃 ( 應 銃 ) 과 함께 제조했던 鳥 銃 이라는 것은 예전의 鐵 砲 가 아니라 마카오에서 새롭게 전해진 유럽식 鐵 砲 를 모델로 제조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이후 발달한 명의 鐵 砲 제조기술이 신식 鐵 砲 도입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덧붙여서 17세기 전반 마카오에서 전해진 유럽식 鐵 砲 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또한 일본식 鐵 砲 와 성능의 우열이나 차이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러한 점에 대해서는 後 考 를 기약하고 싶다. 그러나 일본식 鐵 砲 는 16세기 중엽 타네가시마에 전 래된 것이 모델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17세기에 마카오에서 제조된 鐵 砲 는 비교적 높은 성능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을 계기로 한 일본식 鐵 砲 의 전파가 17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화기 기술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맺는 말 이상으로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의 鐵 砲 가 뒷날 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 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이나 조선 등 동아시 아 세계에서는 일본식 鐵 砲 가 전파 보급된다. 임진왜란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일본식 鐵 砲 에 고 전했던 명군의 각 무장들은 鐵 砲 와 그 조작 제조 등에 능통했던 일본군 포로를 휘하에 수용 편 입하고 일본식 鐵 砲 를 노획 수용하였다. 또한 趙 士 楨 에 의한 적극적인 건의 등으로 명 왕조 내 부에서도 일본식 鐵 砲 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왕조 치하에서도 鍛 鐵 製 의 크고 작은 鐵 砲 가 도입 제조되면서 鐵 砲 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더욱이 戰 場 이 되었던 조선에도 일본군 포로를 매개로 일본식 鐵 砲 가 전해졌다. 그때까지 활과 화살이 주요 병기였던 조선에 정 예의 화기 기술이 이전되면서 17세기의 조선은 동아시아 유수의 鐵 砲 제조 보유국이 되었다. 풍 부한 수량과 종류를 자랑하는 화기를 보유한 명군과 정예의 鐵 砲 를 대량으로 보유한 일본군과의 대규모 전쟁이 동아시아의 화기 기술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어서 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 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의 鐵 砲 사용은 17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변혁 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131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31 그림의 出典 [그림 1] : 洞富雄 鉄砲 (思文閣出版, 1991년) [그림 2] : 四庫禁燬書叢刊 子部 29(北京出版社, 2000년) [그림 3] : 玄覧堂叢書 初集 18(正中書局, 1981년)

132 13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토론문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변 동 명 (전남대학교) 임진왜란을 통해 전파된 일본의 新 式 鐵 砲 가 동아시아 특히 명나라의 火 器 제조 및 그것을 이용하는 전술 능력의 향상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살핀 논문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국제 전이 명과 조선에 일본식 철포를 전파 보급시킴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화기 기술교류를 촉진하 였으며, 그리하여 두 나라 특히 明 에서 화기 제조기술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더욱이 화 기를 조작하는 능력 및 그것을 이용하는 전술이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피력하였다. 鐵 製 鍛 造 鐵 砲 제작기술의 선진성 내지는 그처럼 제작된 일본의 신식 鍛 鐵 製 鐵 砲 가 지니는 우월한 성능 가령 連 發 耐 久 性 이나 혹은 命 中 正 確 度 및 射 程 距 離 등에서의 우수성을 지적하며, 또한 철포를 조작 운용하는 능력 특히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실전에 적용한 輪 番 사격전술의 중 요성을 강조하는 등, 화기제조 및 그 조작운용의 역사에 대한 필자의 깊은 식견이 잘 드러난 논 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것들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보급 전파되어 17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변혁 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에서의 문물교류와 그 역사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쿠바 선생의 높은 안목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의해 일본식 철포가 조선과 명에 전파 보급되어 이후 두 나라의 화기발달에 영향 을 끼쳤다는 논지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일본식 철포나 혹은 이 논문에서 주로 다룬 명나라 의 화기발달사를 모르는 문외한으로서, 무언가 논평을 가할 만한 처지는 더욱 아니다. 다만 적임 은 아니로되 논평자로 지정된 의무감에서, 나아가 이 글을 통해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학은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두 가지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자 한다. 우선, 제목에서 주는 인상과 실제 서술된 내용에서 차이가 나는 듯하여 다소 당황스럽다. 아

133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133 마도 요청 받은 주제를 필자의 주요 관심사에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인 듯싶 거니와, 주요 내용은 임진왜란을 통한 일본식 鍛 鐵 製 철포의 明 으로의 전파 보급 및 그 영향 정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조선의 경우는 본문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결론에 서 조선에도 일본군 포로를 매개로 일본식 철포가 전해졌다. 그때까지 활과 화살이 주요 병기였 던 조선에 정예의 화기 기술이 이전되면서 17세기의 조선은 동아시아 유수의 철포 제조 보유국 이 되었다 고 언급하여 어리둥절하다. 사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본문에서 논의되지 않은 사실이 불쑥 제시되어 돌출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둘째, 일본군의 선박에 관해서는 한 단락의 간략한 언급에 그치고 말아 아쉽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의 승패가 海 戰 에서 갈린 셈이며, 따라서 수군의 戰 艦 이나 艦 載 武 器 의 과학적인 검토도 또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차후에 따로 검토할 예정인지 여부를 문의 드리고 싶다. 아울러 당시 일본측에서 해전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임진왜란 시기 일본 수군의 戰 力 을 조선 수군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어떠했던 것으로 판단하는지 궁금하다. 셋째, 이 글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철포가 新 式 高 性 能 임은 鍛 造 鐵 製 라는 점에 기인 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한 철포 제조기술은 일본에서 개발한 것인지 아니면 서양에서 유 래한 것인지, 만약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중국에서도 단조 철제 의 제조방식을 알았을 법한 데 明 의 철포는 鑄 造 銅 製 의 것 외에는 없었는지 궁금하다. 아울러 鍛 鐵 製 日 本 式 鐵 砲 가 이후 지속적으로 개량 발전되어갔는지, 발전되어갔다면 그것을 서양에서의 개인화기 발달과 비교해 볼 필요는 없는지, 반대로 개량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德 川 幕 府 의 단속 내지 전쟁 없는 평화의 지속 때문이라는 것 말고 혹시 철포 조작상의 불편 예컨대 신속한 재장전이나 연속발사에 서의 어려움과 같은 이유에서 더 이상의 개량 발전이 중단된 것은 아닌지 문의 드린다. 넷째, 논의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단철제 일본식 철포의 고성능이 라는 측면에 너무 집중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가령 벽제관 전투 이후 명에서 일본 군의 철포에 대해 진지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마치 이여송의 벽제관 패배 의 주원인이 일본군의 철포에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당시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한 주된 이유는 일본군의 매복전술에 대비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게 아닌가 싶거니 와, 임진왜란에서 철포의 중요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을 그것과만 연관시키는 데에도 못지않게 주의를 할 필요가 있을 듯 여겨지는 것이다. 또한 그와 관련하여 일본군이 철포를 대량으로 갖추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몇 퍼센트나 철포로 무장하였는가도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강조 어법의 결과인 듯싶거니와 다소 과한 표현도 때로 눈에 띈다. 벽제관 전투

134 13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에서 이여송의 주력부대를 거의 괴멸시켰다 든지, 혹은 數 人 의 포로 출신 왜군과 함께 나타난 劉 綎 을 두고 휘하의 眞 倭 다수와 함께 라 서술하였던 것 등이 그러하다. 질문이 아니고, 사족 하나를 덧붙이겠다. 전쟁을 문물교류의 장이나 혹은 과학발전의 계기로 받아들이다가 무의식중에 빠질지도 모를 함정이 그것이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국제적인 교류 나 과학의 발전 혹은 정치사회적 변혁과 같은 것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전쟁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강제적 접촉의 결과에 지나지 않은 교류의 성과 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전쟁의 파멸적 위험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환기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135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35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米谷 均 (日本 中央大) 머리말 (1) 秀吉 의 日本國王 책봉을 둘러싼 선행연구 ① 日本史 ② 明史 ③ 美術史 의 입장에서 검토 ① 日本國王 에서 中華皇帝 로 [堀 ] 信長 秀吉 이후에 있어서 明으로부터 자립했던 日本國王 지향의 존재를 지적. :한편, 秀吉은 그 陪臣마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冊封을 받았다는 사실이 있음. 日本型華夷意識論 과 整合 불능한 사실. 이 때문인지 文祿 慶長의 役의 幕間劇 으로 취 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② 冊封 과 通貢 의 허가 불가를 둘러싼 明 官人의 격렬한 논쟁 [中島2007] 封貢幷絶 許封不許貢 封貢幷許 를 둘러싸고 明 官人들 간에 격렬하게 (封貢得失論) 이 전개되었다. 明 후기의 貢市體制 로 일본이 복귀할 가능성을 지적 실현되면 마카오의 포르투갈인 은 대타격을 입는다.

136 13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2) 秀吉 의 陪臣 에 대한 冊封 의 의미 :역대 중국왕조의 冊封 사례 [ 굵은 글자는 冊封使 내지 仲介者로서의 使者가 일본에 왔던 사례] 奴國王 卑弥呼 倭五王(讃 珍 済 興 武) 懐良親王 足利義満 足利義持 足利義教 足利義 政 足利義澄 足利義晴 豊臣秀吉 이상 15例. :왕의 陪臣을 冊封했던 사례는 아래의 사례 뿐이다. 難升米(卑弥呼의 使臣) 率善中郎將. 銀印青綬도 하사(239년). 牛 利(卑弥呼의 使臣) 率善校尉. 銀印青綬도 하사(239년). 倭隋 등 13명(倭王珍의 陪臣) 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438년). 龍室道淵(遣明使 正使) 僧録司右覺義(1433년). 단 龍室道淵은 中國人 渡來僧. 徳川家康 등 17명(秀吉陪臣) 右都督 都督同知 都督僉事 등(1596년) (3) 秀吉 의 陪臣 에 대한 冊封 의 先例 :明과 몽골 간의 隆慶和議(1571년) 秀吉冊封의 선례로서 小西行長이 沈惟敬에게시사함 [中島2007]. 1571년 알탄汗 [ 俺答]을 順義王으로 冊封하고, 휘하 두목을 授職함. 1591년 츄르게汗 [ 제3대 順義王], 明을 침범하고 明軍을 潰走시킴 [?河의 変]. (4) 이 글의 목적 :冊封하는 쪽과 받는 쪽의 인식 및 세계관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 오히려 괴리되어 있 는 것이 보통이다]. :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은 명예롭게 전쟁을 종결하려고 행해졌던 명과 일본의 同床異夢에서 비롯된 거대한 공작이다. 그러나 그 결과 당사자가 의도했던 평화 는 커녕 거듭해서 전쟁을 초 래하게 되었다. :히데요시 멸망 후 도쿠가와의 對明 접근을 明은 왜 계속해서 거부했는가를 검토하는데 있어 서 중요하다.

137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冊封使 가 일본으로 건너오기까지의 경위(槪略 ) (1) 가짜 항복사절단의 北京 파견 :萬曆 21년(1593) 6/후반 ; 小西行長과 沈惟敬이 획책하여 가짜 항복사절 파견. :동 9/중순 ; 항복사절 内藤如安 일행 30명, 遼東 도착. 宋應昌과 대면. 關白降表 제출. :萬曆 22년(1594) 12/7 항복사절 北京 도착. 冊封을 희망하는 일본측 무장의 리스트 제출. :동 12/13 ; 항복사절, ①전면 철수 ②許封不許貢 ③日朝修好의 3개 조항 준수를 서약함. :동 12/20 ; 항복사절, 義満에게 하사한 金印의 存否 등 20개조의 심문을 받음. (2) 冊封使 파견과 正使 의 도망 :萬曆 22년(1594) 12/30 萬曆帝, 秀吉을 冊封하기 위한 문서[ 誥命 詔書 勅諭] 金印[ 日 本國王之印 ] 물품[ 冠服 1벌]의 작성을 하명. 李宗城을 正使로, 楊方亨을 副使로 임명. :冊封使 출발 萬曆 23년(1595) 1/30 北京 4/6 조선 입국 4/27 한양 도착 11/ 말 부산 도착. :萬曆 24년(1596) 4/3 冊封使 正使(李宗城) 도망함. :萬曆 24년(1596) 5/ 明, 楊方亨을 正使로, 沈惟敬을 副使로 다시 임명함. 冊封文書를 다시 고쳐씀 誥命 詔書 勅諭[ 使者의 이름을 바꾸기 위하여] 沈惟敬은 앞서서 일본으로 건너감 6/12에 大坂 도착 후 6/27에 伏見城에서 秀吉 배알. (3) 冊封使 來日 과 秀吉 의 격노 :文祿 5년(1596) 윤7/(明歷 8/10) 朝鮮通信使[黄慎 일행] 明 冊封使와 對馬에서 합류. : 동 9/1(明暦 9/2) 冊封使, 大坂城에서 秀吉 알현. 誥命 金印 冠服 등 進呈. : 동 9/2(明暦 9/3) 秀吉 격노. 日明 간 화의 파탄. : 동 9/7(明暦 9/8) 秀吉, 島津義弘에게 和議 파탄과 내년의 재출병을 통고함. : 동 10/10 冊封使 名護屋 도착. 이후에 秀吉의 謝恩表 가 도착했는가?

138 13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2. 秀吉陪臣 책봉 대상자 변동 内藤如安 (1) 小西飛 稟帖 (萬曆 22년<1594> 12/제출?)에 보이는 책봉 희망 순위 [ 經略復國要編 後附 ] :日本國王 豊臣秀吉. 日本國王妃 北政所. 神童世子 拾丸[ 秀頼] :大都督 小西行長[ 西海道大都督] 石田三成 増田長盛 大谷吉継 宇喜多秀家 日明講和 교섭 때 창구역할인 유키나가와 朝鮮 3奉行 朝鮮総大將 그룹. 유키나가에게는 西日本 방면의 軍事指揮権의 대대 세습과 對明 朝鮮交渉役의 수여를 희망. 기타 大都督의 空名剳付 15張 급부를 요청. :都 督 豊臣秀政(秀次)[ 겸 關白 ] :亜都督 徳川家康 前田利家 羽柴秀保 羽柴秀秋 蒲生氏郷 毛利輝元 平國保[ 미상] 小早 川隆景 有馬晴信 宗義智 家康 利家 輝元 隆景など,後のいわゆる 五大老 グループ. 기타 亜都督의 空名剳付 20張 급부를 요청. :都督指揮 前田玄以 毛利吉成 長束正家 寺沢正成 施薬院全宗 柳川調信 木下吉隆 石田正 澄 源家次[ 미상] 平行親[ 미상] 小西如清 秀吉의 측근 그룹과 三成 유키나가의 친척 등. 기타 都督指揮의 空名剳付 30張 급부를 요청. :亜都督指揮 島津義弘 松浦鎮信 山中長俊 宇久純玄 岡本重政 平信[ 미상] :(상당한 封爵) 平山五右衛門 安宅甚蔵 早田四郎兵衛 西山九助 吉下申蔵 吉田善右衛門 西川七郎 古田九次 十瀬少吉 松井九太夫 内藤如安과 함께 北京으로 갔던 가짜 항복사절 일행. 주로 對馬 관계자? :日本禅師 : 景轍玄蘇 日本 국내의 禅僧을 統轄하는 僧録 처럼 僧官 수여를 희망했는가? :日本一道禅師 竹渓宗逸 日本의 한 지역[ 西海道 등]의 禅僧을 統轄할 수 있는 僧官 수여를 희망했는가?

139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39 留意点 :小西行長 및 3奉行과 동급의 인물이 우선하여 授職 희망 대상에 올라 있는 점. 특히 전쟁개시 당시의 제1군 관계자 [ 小西行長 宗義智 松浦鎮信 有馬晴信 宇久純玄 柳 川調信 [景轍玄蘇] 제4군 관계자[ 毛利吉成 島津義弘]가 많다. :行長과 적대 내지 소원한 파벌 관계자는 전부 배제되어 있는 점. 加藤清正 鍋島直茂 黒田長政 福島正則 등. :拾丸을 國王世子로 하고, 秀次의 授職 순위가 行長 그룹보다 낮다는 점. :行長 그룹 쪽이 家康 그룹의 授職 순위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는 점. :大都督 亜都督 都督指揮의 空名剳付 65張을 要請하고 있는 점. :明쪽은 이 요청 직후 小西行長에게 都督指揮使, 内藤如安에게 都督指揮의 관직 수여를 결정. (2) 石星題奏 (萬曆 23년<1595> 1/12)에 보이는 책봉 순위[ 明神宗實錄 萬曆 23/1/을유] :日本國王 豊臣秀吉. :都督僉事 (정2품) 小西行長 宇喜多秀家 増田長盛 石田三成 大谷吉継 徳川家康 毛利輝 元 羽柴秀保 :日本禅師 景轍玄蘇[ 衣帽 하사] :褒賞 하사 内藤如安[ 최종적으로는 都指揮使 (정2품) 수여 國? 에 의함] 留意点 :行長 3奉行 그룹과 家康 輝元에게 동일 순위의 軍官職을 수여. : 小西飛稟帖 에 올려진 授職 희망자의 대다수가 대폭 삭제된다. :明의 職制에서 都督僉事는 황제 직속의 중앙군관직[ 제3위]. 都指揮使는 都督 휘하의 지방 군관직. (3) 萬曆帝詔書 (萬曆 23년(1595) 1/21)에 보이는 책봉 순위[ 江雲隨筆 ] :日本國王 豊臣秀吉.

140 14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右 都 督 (정1품) 徳川家康 :都督同知 (종1품) 前田利家 宇喜多秀家 毛利輝元 羽柴秀保 小早川隆景 上杉景勝 増田長盛 :都督僉事 (정2품) 石田三成 大谷吉継 前田玄以 長束正家 施薬院全宗 小西如清 石田正 澄 小西行長 日本本光禅師 : 景轍玄蘇[ 萬曆帝詔書에는 이름이 없지만 兵部剳付의 模本이 日本에 전 래하고 있다] 留意点 :家康 그룹이 行長 3奉行 그룹보다 상위 군관직을 수여받고 있는 점. :특히 徳川家康이 秀吉 陪臣의 筆頭의 군관직을 수여받은 점. :반면에 小西行長은 예전의 授職 筆頭者에서 수직 末尾者로 전락한 점. : 石星題奏 (1/12)에서 萬曆帝詔書 (1/21) 사이에 어째서 이와 같이 授職의 상하가 뒤바뀌 는 일대 반전이 일어났을까? 明 쪽 사료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어서 알 수 없다. 아울러서 詔書 는 正使가 李宗城으로 되어 있으므로 1/21 발급 당시의 旧版임이 확실하 다[ 冊封文書를 萬曆 24년 5월에 다시 개정한 新版은 아니다]. :상기 授職者 중에서 굵은 글씨는 兵部剳付의 原本 模本이 현존한다. 관직은 詔書와 거의 일 치한다. 輝元 景勝에게 보낸 兵部剳付 중의 관직 부분이 별지에 첨부된 것이라는 점에서 沈惟敬 일행에 의한 改竄工作의 존재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大庭 1971]. 최종적인 授職 순위는 일본 국내의 다이묘 사이에서 현실적인 정치력의 순위를 반영한 것 이며, 단연 센스가 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이름이 오르지 않았던 上杉景勝이 授職 대상이 되 었다. 3. 秀吉 책봉의 실태 (1) 상이한 책봉 모습 :景轍玄蘇 秀吉, 金印을 받고 明服을 입고 만세를 삼창함[ 柳川調信画像賛 仙巣稿 하권]. 완스에 :沈惟敬 秀吉, 여러 다이묘들과 함께 5拝 3叩頭를 행하고, 중국어로 만세 를 부르고 北京

141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41 을 향하여 宮中遙拝함. :楊方亨 秀吉, 明服을 입고 北京을 향하여 5拝 3叩頭를 행함[ 宣祖実録 宣祖 29/12/기사]. :프로이스 秀吉과 冊封使는 다다미 위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 酒宴 후 秀吉 은 金印을 머리 위로 推戴하고, 별실에서 明服으로 갈아입었다[프로이스年報補遺 1596/12/28]. 留意点 :沈惟敬과 楊方亨의 증언은 책봉 성공을 明 정부에 강조하기 위하여 기술에 潤色이 가미되었 을 가능성이 있다. :伝聞情報이기는 하지만, 프로이스의 증언이 가장 実態에 가까운 것인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 여러 다이묘들이 列座한 가운데 金印을 머리 위로 推戴 明服 착용. 北京遙拝의 5拝 3叩頭는 의심스럽다고 해도 만세삼창은 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여러 다이묘들에 대한 책봉 :黄慎 秀吉, 책봉을 받았고, 諸大名 40명도 冠帶를 착용하고 授職함[ 日本往還日記 萬曆 24/9/3]. :프로이스 明服 20重 두 벌이 諸大名 20명에게 하사되었다. 筆頭는 行長[프로이스年報補 遺 1596/12/28]. 留意点 :프로이스의 증언이 현실에 가깝다. 다만 小西行長이 陪臣冊封의 筆頭라는 것은 行長을 편드 는 프로이스의 曲筆일까? 실제의 授職 筆頭는 右都督 徳川家康이다. (3) 冊封 다음날 秀吉 의 격노 俗説 明帝의 日本國王 책봉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誥命을 발기발기 찢었다. 에도시대 이후에 유포되었던 소문[ 日本外史 ]. 冊封文書는 현존한다[ 다만 이전 버전 의 것] :프로이스의 증언이 가장 현실에 가깝다. 秀吉冊封 의 정보는 오히려 국내에 선전하고 있다[山室 1992] [프로이스 下記史料].

142 14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조선 남부의 倭城 파괴를 요구하는 冊封使의 서한을 읽고 격노하다[프로이스年報補遺 159 6/12/28]. :동시대의 사료[ 島津家文書 등]에는 秀吉이 격노한 원인을 朝鮮의 왕자가 來朝하지 않았 다 고 설명한다. 국내용 설명. 좌우간 잘못은 조선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한 것에 불과하다. 明의 倭城 파괴 요구와 조선에서의 완전 철수 요구가 최대 원인이다[中野 2006]. (4) 秀吉 의 謝恩表文 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 :冊封使와 朝鮮通信使가 사카이(堺)에서 추방된 뒤에도 각종 공작이 행해졌던 듯하다. :冊封을 감사하는 秀吉의 謝恩表文 등장[ 宣祖実録 宣祖 29/12/기사]. 日本國王臣豊臣秀吉 이라고 称臣 書式을 답습하고, 誥命 金印 하사를 감사함. 당당한 四六駢儷體를 구사한 아름다운 문장이며, 작성자는 五山禅僧? 한편, 萬曆 연호를 쓰지 않고 年紀에 干支[ 丙申 ]를 사용했다[ 明神宗実録 萬曆 25/3/ 기유]. 당초에 表文은 前田玄以 등이 가져왔는데, 아마도 文面이 공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접수되 지 않았고, 寺沢正成이 表文을 가져왔지만 印章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봉사가 수령을 거부 했으며, 인장을 찍은 表文을 正成이 다시 나고야(名護屋)로 가져왔다. 그 인장은 日本國王 印이 아니라 豊臣 印인가? [ 皇明従信録 ] 謝恩表에 첨부한 萬曆帝에게 보내는 증정품은 沈惟敬이 양을 늘렸다 [ 明神宗実録 萬曆 25/3/기유]. :謝恩表文의 사본을 본 조선의 관리는 중국인이 작성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四六駢儷體 를 구사한 文面은 五山禅僧의 작품으로 보아도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아마도 원문은 西笑承兌 쯤이 작성한 것일까?[ 傍証으로서는 明 연호를 기피한 점 등]. 그리고 두 세 번 고쳐쓰는 과정 에서 沈惟敬 등의 공작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 謝恩表는 전부 위조된 것이 아 니라 改竄된 것일까?]. (5) 秀吉 의 謝恩表文 이 초래한 영향 :釜山에서 보낸 冊封使의 보고에 접한 萬曆帝는 日本受封, 恭順可嘉 라고 크게 기뻐하였다

143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43 [ 萬曆 25년 1/5]. 조선국왕이 보낸 사태급변 정보를 받고서도 不得専恃天朝救援 修備修睦, 以保疆土, 毋得偸安起釁 라고 주의를 주는 형편이었다[ 萬曆 25년(1597) 1/25]. 冊封으로 평화를 획득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加藤清正의 釜山 상륙[ 萬曆 25년(1597) 1/14]을 재인식한 것은 뒤늦은 동년 2월 5일의 일 이었다. 明 쪽의 초기 대응을 지체시켰다는 점에서 秀吉의 謝恩表文 은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하 였다. 秀吉이 재차 출병을 여러 다이묘들에게 명하는 한편, 이러한 謝恩表 를 명쪽에 제시한 것 은 秀吉 나름의 和戦 양면책 이었을까? 가령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면 매우 악질적인 陽動策이다. 맺는 말 (1) 秀吉 과 여러 다이묘들에 대한 明 의 일괄 책봉의 의미 : 이렇게 해서 日本人(諸臣)은 마치 중국의 封建家臣과 같은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라고 프 로이스가 정확하게 총괄해서 평가하였다[프로이스年報補遺 1596/12/28]. :이같은 冊封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 秀吉을 비롯해서 당시 일본측 武將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가? 대체로 이해하지 못했다. :명나라 冠服의 일부는 被冊封者 이외의 다이묘에게도 秀吉에 의해서 반포되었다. 吉川広家의 사례 가문의 명예라고 크게 기뻐하며 出雲大社에 奉納하였다[ 吉川家文書 2-909]. (2) 明 에게 있어서 秀吉 의 冊封 : 冊封 受封 謝恩 이라는 형식적인 측면 만을 말하자면, 明에 의한 秀吉의 冊封은 冊 封 완수의 조건을 거의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설사 謝恩表文이 의심스럽다고 해도]. :하지만 이 冊封은 그들이 先例에 準했던 몽골의 首長에 대한 冊封과 마찬가지로 변경의 전 란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의 경우 冊封 직후에 慶長의 役이 발발했으므로 가장, 더군다나, 그

144 14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리고 여전히 나쁘다]. :그러한 의미에서 秀吉과 陪臣에 대한 冊封은 明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도 완 전한 실패이며,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상처, 쇼크)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楊方亨(冊封使)은 영구 파면, 石星(兵部尚書)과 沈惟敬(冊封副使)은 獄死하는 등관계자들은 줄줄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明實錄 과 후세에 편찬된 明史 에서는 秀吉을 義満 등과는 달리 日本國王 으로 취급 하지 않고 있다. 어디까지나 倭酋 이다. :萬曆 27년(1599) 4월, 明의 조선원정군이 北京으로 귀환하자 일본군 포로를 萬曆帝에게 헌 상하는 의식이 대대적으로 거행되었고, 平秀政 平正成 등 61명을 北京 西市에서 공개적으로 처 형했다[久芳 2007]. 平秀政은 島津義弘의 조카로서 秀吉의 養子이고, 明에서 都督 剳付를 받았던 인물이라고 하며, 豊臣秀次에게 仮託된 사람이다. 平正成은 寺沢正成에게 仮託된 인물인가? 여기서는 義弘의 首級 까지 등장한다. 上記의 가짜 포로를 처형하는 것으로 明軍의 빛나는 대승 리를 연출하고 겨우 체면 을 유지하였다. :상기 포로헌납식을 마침으로써 꺼림직한 대일관계를 封印 했던 것이 아닐까? :秀吉이 죽은 후 徳川家康은 1600년에 島津義弘 寺沢正成의 서한을 매개로 하는 대명교섭 [ 金印 勘合으로 官船 商舶의 日明 왕래를 희망]과, 1610년에 本多正純의 서한을 매개로 대명 교섭[ 勘合의 하사를 희망]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명측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 배경에 는 秀吉 시대의 日明講和가 실패했던 트라우마가 강하게 작용했던 탓이 아닐까? (3) 외교적 수단으로서 冊封 의 효력 :중국측의 세계질서관과 피책봉국측의 그것이 일치했던 경우는 크게 효력을 발휘했겠지만 그 러한 피책봉국은 거의 없다. 超律儀者인 조선, 일단 律儀的인 류큐, 오만한 베트남, 그림자가 엷 은 타이, 왕의 위업이 미치지 않는 극한의 땅인 몽골,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본 등 나라마다 격차 가 심하다. :중국이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에게 손쉽게 책봉을 행하면, 그 공손함을 얻기는커녕 혹심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다.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이 그 전형적 인 예라고 할 수 있을까? 덧붙여서 이때 明이 日本에 대하여 冊封과 通貢을 모두 허락했다 해도 慶長의 役은 피하지

145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45 못했을 것이다. 秀吉이 명쪽에 원했던 진정한 요구는 조선 남부의 일본 점거를 明이 승인하 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五十音順 :Arcadio Schuwade.S.J. 朝鮮の役における日明和平交渉について ( キリシタン研究 년) :大庭脩 豊臣秀吉を日本國王に封ずる誥命について 我が國に現存する明代の誥勅 ( 關西大学東西学 術研究所紀要 4.1971년 3월) :小野和子 明 日和平交渉をめぐる政争 ( 山根幸夫教授退休記念 明代史論叢 上巻. 吸古書院. 1990년) :紙屋敦之 大君外交と東アジア 大君外交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1997年) :河上繁樹 爾を封じて日本國王と為す 明皇帝より豊臣秀吉へ頒賜された冠服 ( 特別展覧会 妙法院と三 十三間堂 京都國立博物館. 1999년)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 1995년) :久芳崇 明朝皇帝に献納された降倭 - 経略御倭奏議 を主要史料として- (山根幸夫教授追悼記念論叢 明 代中國の歷史的位相 下. 汲古書院. 2007년) :佐島顕子 壬辰倭亂講和の破綻をめぐって ( 年報朝鮮学 4. 1994년 5월) :佐島顕子 謎の海將 小西行長 の実像に迫る (学研 歷史群像 년 2월) :徳富蘇峰 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 朝鮮役 中巻 下巻(明治書院. 1935년) :中島楽章 封倭と通貢 -1594年の寧波開貢問題をめぐって- ( 東洋史研究 년 9월) :中野等 秀吉の軍令と大陸侵攻 (吉川弘文館. 2006年) :中村栄孝 豊臣秀吉の外征 ( 日鮮關係史の研究 中巻. 吉川弘文館. 1969年) :中村栄孝 豊臣秀吉の日本國王冊封に關する誥命 勅諭と金印について ( 日本歷史 年 5月) :橋本雄 室町幕府外交は王権論といかに關わるのか ( 人民の歷史学 年 9月) :夫馬進 明清中國 冊封體制論 と 朝鮮を視ること内服と同じ (朝鮮史研究会大会 2007年 10/20) :邊土名朝有 明の冊封體制と文祿 慶長の役 ( 琉球の朝貢貿易 校倉書房. 1998年) :堀新 織豊期王権論- 日本國王 から 中華皇帝 へ- ( 人民の歷史学 年 9月) :堀新 信長 秀吉の國家構想と天皇 (池享編 日本の時代史 13. 吉川弘文館. 2003年) :三木聡 萬曆封倭考(その一) -萬曆二十二年五月の 封貢 中止をめぐって- ( 北海道大学文学研究科紀要 年) 萬曆封倭考(その二) -萬曆二十四年五月の九卿 科道会議をめぐって- ( 北海道 大学文学研究科紀要 年 7月) :山室恭子 海を渡った悲劇 黄金關白 (中公新書. 1992年) :李光濤 萬曆二三年封日本國王秀吉考 (歷史語言研究所(台北) 1967年)

146 14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みやこ ながさき ねんぽう ほ い 史料1 1596年(9/18付, 都 發信) 12/28付, 長崎 發信, フロイス年報 補遺. かんかく せいし ずいいん ①それからあまり間隔をおかずに正使の随員たちが二列になって進み始めた. また, 彼らの前方に しんく せんこうしょく は, 十本の真紅と鮮黄色の旗が進んだ. それらの後部には文字板, あるいは板に丸みをおびた文字で なんじ ほう にほんこくおう たいしょ じょうこう ほこ (汝を封じて日本國王になすと)大書された条項が運んで行かれた. こくしゅ さつしょ おうごん いた はこ ②(シナ)國主の冊書は非常に大きくて重い黄金の板に書いて黄金の函に納めてあったが, その中 たいこう いふく おうかん はこ おくがた きたの まんどころざま にはまた太閤のための衣服と王冠が納めてあった. 同様に別の函には, 彼の奥方の(北)政所様のた おうひ おうひ かんむり いかん めに王妃の称号を入れた王妃の冠が納めてあった. シナ國王はこれ以外に, シナの称号と位官のつ くげ ふく おく こくしゅ いた公家の服二十がさ重ね二組を贈ったが, ひっとう それはシナ國王から明らかに指名された二十名の國主 こにし ゆきなが こくしゅ たちのためのもので, その筆頭は(小西)アゴスチイノ(行長)であった. それから同様に他の(國主)たち たいこう いかん にん 太閤自身が同じ位官をもって任ずべきだと考えた者たちを指名した. こうして日本人 のためには, しょしん ほうけん かしん (諸臣)は, あたかもシナの封建家臣のような身分に留まったのであった. えっけん たたみ ま たいこう ③このすべて(の謁見)は日本の儀式で, すなわち畳の間で座って行われた. 開会中は太閤と正使 ようほうきょう とくがわ いえやす まえ だ ちくぜん としいえ うえすぎ えちご かげかつ う き た (楊方亨)とは對等であった. 出席者は(徳川)家康, (前田)筑前(利家), (上杉)越後(景勝), (宇喜多) ちゅうなごん ひでいえ こばやかわ こくしゅ 中納言(秀家), (小早川)金吾(秀秋)殿, 毛利(輝元)であったが, 彼らは日本國全土で最大の國主たち さかずき く か かんぱく えいよ しょさつ であった. 盃の後, すなわち酒を少量酌み交わして後, やおら關白は栄誉ある書冊, すなわちかの大い おうごん しょばん きんいん すいたい かんべん なる黄金の書板(金印) を受理し, それを頭上に推戴し, その時に冠冕をも受領したので, それらを着用 べっしつ しりぞ するために別室に退いた. さくほうし さかい ひでよし しそう ごと ④( 冊封使, 堺へ帰還. 接待役の秀吉の使僧に對して以下の如く要望) こわ (朝鮮の)全陣営を取り毀し, また朝鮮にいる日本の駐留軍を撤退させること. 次にシナ國王が何 じひ かしつ かんじょ あたい 年も前に慈悲によって許したように, 朝鮮國民の過失を寛恕すること. 彼らはたしかに破滅に値したかも わか ばつ 判らぬが, ぶっそう たとえ破滅の罰をもって処罰したところで, おおさか たいこう そこからは何の利益ももたらさぬであろう と. さ たいこう こわ 仏僧たちは大坂へ帰ると, ただちに書状を太閤に差し出した. 太閤はそれを読み, 諸陣営を取り毀 ふんぬ げきじょう も あ すことに關するかの要請の箇所に及んだ時, 非常な憤怒と激情に燃え上がり, あたかも悪魔の軍団が ののし ゆけむり 彼を占拠したかのようであった. 彼は大声で罵り汗を出したので, 頭上からは湯煙が生じたほどであっ た. 彼がかくも激怒したのは, 日本人がシナ人にひどく恐れられており, 朝鮮人にはなおいっそう恐れら

147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47 おの れていることを承知していたし, また講和を結ぶためには, 朝鮮國のわずか半分でも入手するという己 が最初の考えを忘れては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 (松田毅一監訳 十六 十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第Ⅰ期 第2巻) 1596 史料2 冊封使의 報告書(萬曆二十四年 十月 九月)에 보이는 冊封의 모양 및 秀吉의 謝恩表. ファンシン パクホンチャン もっ 敦寧都正黄慎 上護軍朴弘長等, 冊使等の兵部稟帖三道 秀吉謝表を將て謄書上送す. ①沈遊撃[ 沈惟敬]兵部稟帖に 曰く 東封を完うする 事の為にす. 閏八月十八日, 卑職[ 沈惟 ひでよし 敬]等, 欽鋪せる龍節 璽書等の件の到るを奉ず. 秀吉, 択ぶに九月初二日を以てし, 大坂に於いて 迎え受封す. 卑職, 先に往きて礼を教えり. 奉行こ惟れ謹なり. 期に至りて冊使を迎請すれば, 直ちに中 堂に至る. わか頒つに誥 印 冠 帯 服等の項を以てす. 衆を率いて五拝三叩頭の礼を行い, 件件頭 おわ 頂し, 華音を習いて万歳を呼し, 闕を望み謝恩す. 一一儀の如し. 禮畢んぬ. 宴を使臣及び随行せる いた あさ よう おく 各官に開く. 是の晩, 秀吉親しく卑職の寓所に詣り, 称謝す. 次の早, 楊正使に謁謝し, 饋るに衣 刀 おく 甲 馬を以てす. 各馬官も亦た刀 幣を饋らる. 言を極めて天恩を感戴すること尽きず. 再三に慰労す. 卑職, 速やかに釜兵を撤せよと特諭すれば, 彼言く 今皇帝の賜を受け王爵に封ぜらるれば, 兵当に た と かさ 即ちに撤し, 以て隣好を修むべし. 但だ朝鮮前怨釈けざるを恐る. 仍ねて皇帝の処分を聴き, 再び命下 ま まの な げんこう を候たん と. 卑職, 色を正して開諭す. 面あたり首肯すると雖も, 尚お未だ見行せず. 卑職, 初四日に いずみ まさなり 至り, 回りて和泉に至る. 一面船隻を調集し, 一面催諭を?行す. 初九日, 船に登る. 卑職, 正成[ 寺沢 ゆきなが 正成] 行長[ 小西行長]を遣わし日本に行かしむ. 中途に回りて言えらく 即ち当に命の如くすべし と. 行きて名護屋に至る. 卑職, 復た正成を遣わし往促せしむ. 回る日を俟ち, 中情を備悉し, 騎を飛ばし馳 報せん. 此れが為に先行具稟せん. 萬曆二十四年十月日 よう ②天使[ 楊方亨]兵部掲帖に 曰く 冊封日本正使等官 五軍営等衙門 署都督僉事楊[ 楊方亨] ぷさん 等, 東封を完報する事の為にす. 職[ 楊方亨], 本年六月十五日に於いて, 釜山より舟に登りて渡海 す で す. 已経に本題を具して知り訖ぬ. 一路の倹阻, 風波の難危, 常に異なるも, 皇上の威霊を仰仗すれ いずみ いた とよとみひでよし ば, 幸い躯命を保全するを得たり. 八月初四日に至り, 始めて和泉州に抵る. 乃ち豊臣秀吉, 使臣を接 しばし ながもり 待するを預備するの所にて, 日本國新都を距つこと一百三十余里なり. 秀吉,?ば倭將長盛[ 増田長 みつなり つかわ すこぶ 盛] 三成[ 石田三成]等を差し, 書を持ちて迎慰す. 頗る竭誠を知れり. 欽命補給せる龍節 誥命 いた ついで 詔 勅等の件は, 八月十八日に於いて方に到れり. 職等, 即時に随行員役を率領し, 舟に詣るの次, 叩

148 14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ゆきなが 頭迎捧し, 職の寓に安定す. 倭將行長, 秀吉に馳報すれば, 択ぶに九月初二日に於いてし, 冊命を大 いた 坂地方に奉迎して受封す. 職等, 初一日, 節を持して前往す. 是の日, 即ち大坂に抵る. 次日, 欽賜の ただち 圭印 官服を領受す. 旋即に佩執して頂被し, 闕を望んで五拝三叩頭の礼を行い, 誥命を承奉して受 の 封し訖ぬ. 嗣いで職等の寓所に至る. 天恩を感激し, 及び職等を慰労して渉歷労頓等の語を再び申 げんこん ぶ. 職等, 敢えて久留せず. 即ちに辞するに初四日を以てす. 節を捧げて回り, 和泉州に至る. 見今 唯だ船隻を調集するを待つ. 即ち?程西還して闕下に復命せん. 此れが為に, 具題を除くの外, 理として まさ 合に具題すべし. 萬曆二十四年九月初五日 とよとみひでよし おも ③關白謝恩の 表文に 曰く 日本國王臣豊臣秀吉, 誠惶誠恐稽首稽首す. 伏し惟んみるに, 日月照 だいみん たか あまね すく 臨して大明を万國に仰ぐ. 江海浸潤して聖化を無疆に措く. 皇運高く承け, 天恩普く済う. 恭しく惟んみる あき うる に, 祖宗の徳を昭らかにし, 人心の心を安んず. 遠近の巨細は, 恩に霑おいて堯舜の聖世を減ぜず, ゆる 威儀の進止は, 禮に合いて周夏の隆風を蕩やかにす. 何ぞ計らん, 東海の小臣, 直に中華の盛典を こうむ 蒙り, 誥命 金印 礼楽 衣冠, 咸な恩寵を?る. 臣, 一一遵崇感戴の至りなり. 日を択びて必ず方物を つつし ぐこん さき 具し, 九重に申謝せん. 虔みて丹誠を尽くさん. 願わくば愚悃を察せられんことを. 天使先に回る. 謹ん で表に附して以聞せり ( 朝鮮宣祖実録 宣祖 二十九年(1596) 十二月己巳(七日) 条) 史料3 朝鮮의 구원요청에 대하여 自衛하라. 日本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라 고 권유하는 明 朝廷 すな 朝鮮國王李昖[ 宣祖], 倭情緊急を以て救を請う. 兵部い言わく 此の奏, 乃わち去年十一月以前 さくし かえ いや うす の事にて, 是の時冊使未だ回らず. 日本, 朝鮮遣使の官卑しく禮薄きを以て納めず. 其の使の帰報に, な あ ようほうきょう すで おわ た 仍お王子を索要するを欲する等の語有り. 今, 楊方亨の奏報に 封事已に竣れり. 止だ是れ朝鮮の禮 す で しんいけい 文を責備するのみ. 已経に覆議せり. 沈惟敬をして調?せしむ と. 其の兵を請うの一節, 宜しく朝鮮に勅 みずか ていび な もっは たの し こう して自ら?備を為し, 専ら天朝の救援を恃むを得ざらしむべし と. 旨を得たるに 朝鮮國王に行し, 備を ぬす きん なか 修め睦を修め, 以て疆土を保ち, 安を偸みて釁を起こすを得ること毋らしめよ と. ( 明神宗実録 萬曆二十五年(1597) 一月丙辰条)

149 豊 臣 秀 吉 의 日 本 國 王 冊 封 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149 토론문 豊 臣 秀 吉 의 日 本 國 王 冊 封 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김 문 자 (상명대) 1. 지금까지 豊 臣 秀 吉 의 日 本 國 王 책봉을 둘러싼 선행연구는, 秀 吉 이 明 帝 의 日 本 國 王 책봉을 모욕으로 받아들여 誥 命 을 찢고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해 秀 吉 이 조선을 재침략하였다는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秀 吉 의 책봉 거부설이 에도시대 이후에 유포되었던 사실 이며, 이에 대한 증거를 뒷받침해주는 연구 성과도 적지 않다. 본 발표는 지금까지의 연구동향과는 달리 (1) 秀 吉 과 여러 다이묘들에 대한 明 의 일괄 책봉의 의미와 (2) 明 에게 있어서 秀 吉 의 冊 封 이 갖는 의미 (3) 외교적 수단으로서 冊 封 의 효력 이라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흥미롭고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당시 동아시아 외교의 핵심이었던 책봉을 둘러싼 朝 明 日 삼국의 인식 차이를 전쟁 발발의 배경 및 에도막부의 대명교 섭문제와 새롭게 연계시킨 점은 시사해 주는 바가 많았습니다. 2. 발표문에서 秀 吉 의 日 本 國 王 冊 封 은 명예롭게 전쟁을 종결하려고 행해졌던 명과 일본의 同 床 異 夢 에서 비롯된 거대한 공작이다. 그러나 그 결과 당사자가 의도했던 평화 는 커녕 거듭 해서 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책봉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일본측이며, 또한 秀 吉 이 이를 처음부터 제시한 것이 아닌 小 西 行 長 의 자구책이었으므로 <명과 일본의 同 床 異 夢 에서 비롯된 거대한 공작>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 秀 吉 의 陪 臣 에 대한 책봉 대상자의 변동>과 관련해서 발표자는 石 星 題 奏 (1/12)에서 萬 曆 帝 詔 書 (1/21) 사이에 어째서 이와 같이 授 職 의 상하가 뒤바뀌는 일대 반전이 일어났을까?

150 15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明 쪽 사료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어서 알 수 없다 고 언급하였는데 経略復國要編後附 宗実録 明神 江雲随筆 에 대한 편찬시기와 자료 성격과 관련해서 이 문제를 생각할 수는 없는지요. 특히 일본 국내의 다이묘 사이에서 지금까지 이름이 오르지 않았던 上杉景勝이 授職 대상이 되 었다고 적힌 사료는 일본측의 江雲随筆 에만 보이고 있고, 石星題奏 도 石星의 정치적인 행 적과 관련되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해서 <秀吉의 陪臣 책봉 대상자>에 대한 자료는 본 논문에서 언급한 자료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동시에 <秀吉의 陪臣 책봉 대상자에 대한>를 강조하는 배경은 信長 秀吉 이후에 있어서 明 으로부터 자립했던 日本國王 지향의 존재를 지적한 日本型華夷意識論 에 대한 異見으로 파악 해도 괜찮은지요. 4. 발표자는 秀吉이 재차 출병을 여러 다이묘들에게 명하는 한편, 謝恩表 를 명쪽에 제시 한 것은 秀吉 나름의 和戦 양면책 이었을까? 라고 지적하였는데, 이 문장대로라면 謝恩表文 이 秀吉의 인정하에 작성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는데, 謝恩表가 전부 위조된 것이 아니라 改竄된 것이라 해도 謝恩表 작성을 통해서 秀吉이 나름의 和戦 양면책 을 구사하였다고 보는 관점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5. <明에게 있어서 秀吉의 冊封>과 관련해서 <萬曆 27년(1599) 4월, 明의 조선원정군이 北 京으로 귀환하자 일본군 포로를 萬曆帝에게 헌상하는 의식이 대대적으로 거행되었고, 平秀政 平 正成 등 61명을 北京 西市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했다>는, 즉 가짜 포로를 처형하는 것으로 明軍 의 빛나는 대승리를 연출하고 겨우 체면 을 유지하였다고 한 점은 흥미로웠다. 즉, 이러한 사실 은 조선이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강화를 하기 위해서 제시하였던 <범릉적 >범인의 압송을 주 장하면서 이들을 처벌한 후에 대일교섭의 한 획을 긋고서 일본과의 교섭에 나섰던 점과 흡사하 다고 생각되었다. 명과 조선이 <포로헌납식>이라는 연출을 통해서 대일관계를 정리하려 했던 공통점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6. 발표내용에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결국 발표자께서는 秀吉이 冊封 다음날 격노한 배 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본문에 <秀吉이 명쪽에 원했던 진정한 요구는 조선 남부의 일 본 점거를 明이 승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이라고 지적하였지만, 이는 정유재란의 발발 배경 을 알 수 있는 키워드이므로 발표자의 견해를 들고 싶다.

151 豊 臣 秀 吉 의 日 本 國 王 冊 封 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발표자는 史 料 1 123을 통해서 秀 吉 이 이미 자신을 일본국왕으로 임명되었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고, 4에서는 秀 吉 이 書 冊 을 통해서 격조하였던 이유에 대해 < 十 六 ㆍ 十 七 世 紀 イエズス 会 日 本 報 告 集 >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또한 <상이한 책봉 모 습>에서도 프로이스와 관련된 자료가 다수 인용되고 있는데 오히려 당시 통신사의 기록이었던 黃 愼 의 日 本 往 還 日 記 도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秀 吉 의 日 本 國 王 책봉 문제와 관련지어서 이 자료가 보완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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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53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孫 承 喆 ( 江 原 大 學 校 ) 1. 머리말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왕조는 건국직후부터 유교윤리의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삼강오륜은 유교사회의 최고 가치로 그 가운데 충 효 열은 사회기강을 세우는 기본 지침이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충 효 열의 모범적인 사례들을 수록하여 行 實 圖 를 편찬 보급했고, 이를 통해 일반백성들을 교화해 나갔다. 조선시대에는 총 5회에 걸쳐, 행실도가 편찬되었다. 1413년(세종 13) 三 綱 行 實 圖 가 최초 로 간행된 후, 1514년(중종 9) 續 三 綱 行 實 圖, 1518년(중종 13) 二 倫 行 實 圖 가 간행되었 다. 임진왜란 직후에도 간행이 추진되어, 1617년(광해군 9)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가 간행되었 고, 1797년(정조 21)에 五 倫 行 實 圖 가 간행되었으며, 그 사이에도 기존의 三 綱 行 實 圖 와 二 倫 行 實 圖 가 여러 차례 중간 반포되었다. 이러한 삼강과 오륜의 행실에 관한 서적의 편찬과 간행, 그리고 그에 수반된 충신 효자 열녀 들에 대한 포상과 대우는 일반 백성들의 의식과 행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반적으로 삶의 모범적인 사례로 추앙되어 인식되었으며 기억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행실도 가운데에는 일본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三 綱 行 實 圖 에는 총 330건 가운데 왜구들의 침탈과 관련된 사례가 8건, 그리고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에는 1587건 가운데 일본군의 만행과 관련된 사례 576건이 삽화와 글(한문과 언문)로 수 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행실도 에 관련된 연구는 미술사나 서지학적인 접근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1)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에 수록된 임

154 15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진왜란 관련 삽화와 글을 분석하여, 동 시대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고 있 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의 편찬과 구성 1592년 4월 14일, 시작된 임진왜란은 국가기강과 사회질서를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은 대전란 이었다. 전쟁 발발후 채 20일도 되지 않아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 피난길에 올라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임금을 위해, 자식으로서 부모를 위 해, 여자와 아내로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이들의 節 義 가 오랜 전란으로 인멸되지 않도록 하면서, 이들에 대한 旌 門 이나 復 戶 등의 포상을 시행하는 것은 국가와 유교질서의 회복 그리고 국왕의 권위 신장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한 기록과 포상에 대한 논의는 국왕의 환도이후인 1593년 9월부터 시작 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595년 7월, 승정원에 선조의 교시가 내려 지면서 본격화된다. 선조는 전란 중에 死 絶 한 사람들에 대하여 旌 表 한 내용을 책으로 인출하여 전국에 반포할 것을 지시했다. 2) 그러나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또 丁 酉 再 亂 의 발발로 충신 효 자 열녀에 대한 實 行 을 조사하거나 정표하는 일이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더구나 전쟁이 종 결된 이후에도 1601년부터는 공신책봉의 녹훈작업이 시작되어, 난중의 사절인에 대한 정문과 책 의 간행은 자연히 뒤로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선조대와 마찬가지로 旌 門 대상자에 대한 자료수집과 내용검 증 작업은 계속되다가, 1612년(광해군 4) 4월, 정문조치가 일괄적으로 처리되면서 책의 간행이 본격화 되었다.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撰 集 廳 儀 軌 에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임진년 이후로 각도 각부에서 實 行 을 보고하여 본조에 내려진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기록이 그동안 쭉 쌓여 卷 軸 을 이루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보고된 것은 비변사 낭청에서 선발하여 위의 재가를 받아 이미 旌 門 하고 포상했고, 그 후 계속 보고된 숫자 또한 많아 보고 되는대로 선발하 여 종류별로 나누고 등급을 정해 계속 의정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간혹 의정부의 자리이동이 빈 1)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에 관한 기존연구로는, 李 光 烈, 光 海 君 代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편찬의 의 의 (서울대대학원, 2004) : 鄭 夏 美,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 나타난 일본왜군의 회화이미지 ( 省 谷 論 叢 34, 2003) : 권정아,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의 烈 女 분석 (부산대, 2006) : 吳 允 禎, 17세기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연구 (홍익대, 2008)등 참조. 2) 선조실록, 28년 7월 계미.

155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55 번함으로 인하여 즉시 마감하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의정부에 유치되었던 것을, 금년(1612년) 2월 24일에 의정부가 입계하여 지난달 28일 전후로 보고된 것이 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지금 각도 각부 에 나누어 안배하여 旌門 賞職 復戶 등의 일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3) 이어 태평관에 찬집청이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운영되면서, 1617년(광해군 9) 3월에 東國新 續三綱行實圖 18권 총 50질을 간행하였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은 삼국시대부터 조선(본조)까지 우리나라의 인물만을 대상으로 했는 데, 효자 8권, 충신 1권, 열녀 8권, 속부 1권 등 1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587건이 수록되 어 있다.4)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의 수록건수와 성비를 보면, 다음과 같다. <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의 수록건수와 성비> 남 여 총계 충신도 96 (51) 3 (3) 99 (54) 효자도 670 (80) 72 (9) 742 (89) 열녀도 746 (433) 746 (433) 합계 766 (131) 821 (445) 1587 (576) ( )는 임란관련기사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는 수록인물이 여성이 남성보다 휠씬 많 다. 男尊女卑의 유교사회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항이며, 또 열녀도의 수가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그리고 열녀도는 시기적으로 거의가 임진왜란 관련 사례이기도 하다. 그만큼 임진왜란때 부녀자 들의 희생이 컷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 수록된 1,587건의 사례가운데 임진왜란때에 왜군으로부터 피해사례 는 576건에 달하며 종류별로는, 충신 54건, 효자 89건, 열녀 433건이다. 3) 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壬子 5월 23일조. 4) 수록인물에 대해서는 연구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송일기 이태호는 1,179명, 김혁 1,618명, 박 주 1,679명로 파악했다. 한편 김항수는 1,587건, 이광열은 1587건, 1670명, 정일영은 1586건 등으로 파악했는데, 몇몇 사례에서 1명 이상의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므로 건 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156 15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3.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의 日本像 1) 忠臣圖 충신도에는 총 99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임란관련기사가 54건이다. 충신도에는 임란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統制使 李舜臣을 비롯하여 宋象賢, 高敬命, 金千鎰 등 잘 알려진 장수들을 비롯하여 주로 현직 관리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에 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측상단에 <純臣力戰>이라고 제목을 붙였고, 화면의 절반에 해전의 모습을 삽화로 그려 넣었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삽화의 내용을 한 문과 언문으로 설명했다. 원문내용을 보면, <원문>5) 純臣力戰 統制使李舜臣牙山縣人智勇遇人壬辰倭亂爲統制使作龜船擊倭累捷戌冬率舟師與賊大戰子南海津 中乘勝遂此舜臣爲飛丸所中臨絶謂左右曰愼勿發喪揚旗鳴鼓猶我之生如其言竟大捷而還 昭敬大王錄功 贈職今 上朝旌門 5) 新續忠信圖 卷一 - 九十

157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57 <번역문> 통제사 이순신은 아산현 사람이다. 지용이 사람을 넘더라. 임진왜란 통제사 되어 구선을 만들어 이를 쳐 여러 번 이기다. 무술년 겨울에 주선을 거느리고 도적으로 더불어 남해 섬 바다 가운데로가 크게 싸워 이기고, 이 틈을 타서 무리를 쫓아가는데, 순신이 나는 탈환을 맞아 배에서 죽기에 이르러 좌우에서 달려들자, 가로되 삼가 발상치 마오, 채를 들고 북을 울려 내가 살아 있을 적 같이하라 하여, 그 말대로 하여 마침내 크게 이기어 돌아오다. 소경대왕이 녹공 증직하시고 상조의 정문 하시니라 이 내용으로 보아, 통제사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전투였던, 1598년 11월 19일, 島津義弘, 宗義 智, 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과의 결전에서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는 장면 을 기록한 것이다. 배의 오른쪽 끝부분에 李純臣의 쓰려져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충신도에는 장군이외에도 일반 백성인 양인의 기사도 있다. 예를 들면, 幼學 朴選의 경 우이다. <원문>6) 朴選買賊 6) 新續忠信圖 卷一 - 五二

158 15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幼學朴選咸陽郡人有操行壬辰倭亂以病不能避賊賊至迫令擔負選固拒罵賊曰我朝鮮士也義不爲賊 奴投賊大怒寸斬之今 上朝㫌門 <번역문> 유학 박선은 함양군 사람이니 잡은 행실이 있더니 임진왜란에 병으로써 능히 도적을 피하지 못 하였더니, 도적이 이르러 핍박하여 짐을 지라고 했는데, 박선이 굳게 버티고 도적을 꾸짖어 말하길 나는 조선의 선비이다. 의에 도적의 부림이 되지 아니하니라. 도적이 대노하여 촌촌이 베었다. 이에 상조에 정문 하시니라. 이 삽화를 보면, 박선이 두 번 그려져 있는데, 위의 그림은 박선이 산에 웅크리고 있고, 아래 그림은 박선의 옆에 있는 짐을 지라고 하는 모습과 이를 거부하자, 칼로 내려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 삽화에 사건의 진행 상황을 함께 그려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충신도에는 관리, 양인뿐만 아니라 私奴와 私婢도 5건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여자 노비인 사비도 3건이나 된다. 私婢 莫介의 기사를 소개하면, <원문>7) 莫介把刃

159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59 私婢莫介京都人縣監李汝機妻尹氏婢也壬辰倭亂尹氏遇賊將被害莫介大呼曰賊奴殺吾主耶突入賊 前手把自刃賊殺之時年十八今 上朝旌門 <번역문> 사비 막개는 서울사람이다. 현감 이여기의 처 윤씨의 종이다. 임진왜란에 윤씨가 도적을 만나 장차 해를 입게 되어 막개가 크게 불러 가로되 도적놈이 내 주인을 죽인다 하고 도적 앞에 달려들어 손으로 흰칼을 잡으니 도적이 죽이니라. 이제나이 열여덟이었다. 상조에 정문 하시니라. 이 내용을 보면, 막개가 주인인 윤씨의 죽임에 항변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함께 죽임을 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충신이란, 일반적으로 국가나 국왕을 위해 충성을 다바친 경우를 말하는데, 막개의 행위가 충신에 해당되는지, 충신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하다. 충신도에 수록된 임란관련삽화는 54건인데, 수록자의 신분은 현직관리에 있던 양반이 36건, 양인 8건, 중인 5건, 천민 5건이었으며, 지역별로는 전라 14건, 서울 11건, 경상 10건, 강원 5건, 충청 4건, 황해 4건, 경기 3건, 함경 3건으로 전라도 지역이 가장 많았다. 포상관계는 참의 고경 명이 旌閭되고, 나머지는 모두 旌門하였다. 2) 孝子圖 효자도에는 총 742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임란관계는 89건이다. 효자의 유형은 부모 및 시부 모가 일본군에 의해 위해를 당하는 경우, 같이 죽거나, 대신해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전가족 이 몰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아비를 따라 일본군에게 대항하며 따라 죽은 경우, 시묘를 하 던 중 전란을 당했으나, 피난치 않고 시묘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는 경우의 예를 보자. <원문> 8) 二子活母 幼學金時愓時省京都人兄弟同居事親至孝壬辰倭亂負母避賊于坡州賊猝至兄弟同執母手爭請殺我 而活母賊殺其兄弟不害其母 昭敬大王朝旋門 7) 新續忠信圖 卷一 - 八四. 8) 新續孝子圖 卷六 - 七.

160 16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번역> 유학 김시적과 시성은 서울사람이니 형제가 같이 살며 어버이를 섬기며 지극히 효도하였다. 임 진왜란에 어미를 업고 도적을 피해서 파주로 갔는데 도적이 문득 이르거늘 형제가 한가지로 어미의 손을 잡고 다투어 청하기를 나를 죽이고 어미는 살려다오 하니 도적이 형제를 죽이고 그 어미는 해하지 않았다. 소경대왕조에 정문하시니라. 위의 삽화는 두 아들이 어미와 함께 전란을 피하던 중, 일본군을 만나 위협을 당하는 장면과 어미를 대신하여 두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경우이다. 또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국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원문>9) 終伊負姑 良女終伊利川府人鄭彦忠之孽女忠贊衛徐壽之妻也平居事嫡姑盡誠壬辰倭亂姑病不能運步終伊常 負而行賊迫之僮僕告曰負行則難免願先少避姑老賊必不害庶得兩全終伊曰寧死何忍棄姑終不去爲賊所 逼罵不終口賊殺之今 上朝施門 9) 新續孝子圖 卷六 - 十九.

161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61 <번역> 양녀 종이는 이천부 사람이니 정언충의 첩딸이며 충찬 위서수의 아내다. 평상시에 시어미섬기기 를 정성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에 시어미가 병이 들어 움직여 걷지 못하니, 종이가 항상 업고 다녔다. 도적이 핍박하자 어린 종이 고하여 말하기를 업고 가면 면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먼저 피하고 나면 시어미는 늙어서 도적이 반드시 해하지 않을 것이니, 둘 다 온전할 것입니다 하니 종이가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시어미를 버리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으니 도적의 핍박한 바가 되어 꾸짖음을 입에서 그치지 않으니 도적이 죽였다. 상조에 정문하시니라. 삽화에는 모두 4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평소에 시어미를 섬기는 모습, 시어미를 업고 피신하 는 모습, 업고 가다가 지쳐있는 모습, 그리고 일본군을 만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 순으로 묘사되 어 있다. 다음은 전장터에서 아비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아비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죽는 경우 이다. 아비는 충신도에 아들은 효자도에 수록되었다. <원문>10) 象乾 10) 新續孝子圖 卷六 - 四五.

162 16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別坐金象乾羅州人忠臣金千鎰之子也有學行壬辰倭亂隨父從軍二年不離側入晉州城禦賊城陷賊揮 劍先及其父象乾奮刃斬賊父子同死今 上朝施門 <번역문> 별좌 김상건은 나주사람이니 충신 김천일의 아들이다.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임진왜란에 아비 를 좇아 종군하여 2년을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주성에 들어가서 도적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함 에 도적이 칼을 휘둘러 먼서 그 아비에게 미치거늘 상건이 칼을 빼앗아 도적을 베다가 부자가 함께 죽었다. 상조에 정문하시니라. 충신도에 수록된 김천일 아들의 기록인데, 아비를 쫓아서 2년간 종군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아비와 함께 죽은 경우이다. 일본군의 손에 목이 들려있다. 효자도에 수록된 임란관련 89건의 신분은 현직관리에 있던 양반이 24건, 양인 50건, 중인 9 건, 천민 6건이었으며, 지역별로는 경상 31건, 전라 19, 서울 18, 충청 9, 경기 8, 강원 2, 함경 1건으로 경상도 지역이 가장 많았다. 포상관계는 89건 모두 旌門하였다.

163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63 3) 烈女圖 열녀도에는 총 746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임란관계는 433건이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 수록된 열녀도의 유형은 守節 廬墓 自殺 奉養 危難등으로 분류되는데, 임란 관계는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위난을 당하여 훼절당할 것을 우려하여 자살하거나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의 만행에 죽기를 결심한 여성들은 강 바다 연못 우물 절벽 언덕 바위 성 등에 서 뛰어 내리거나 패도를 사용하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서 자결하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비참 하게 살해되었다. 물에 뛰어 드는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한 예를 보자. <원문> 孝還投井11) 良女孝還京都人保人張應京之妻也倭賊縛其夫欲汚孝還固拒不從投井而死年十九 門 11) 열 3-29 昭敬大王朝㫌

164 16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번역문> 양녀 효환은 서울사람이니 보인 장응경의 아내이다. 왜적이 남편을 묶고 효환을 더럽히려하니 강하게 거부하며 쫓지 아니하고 우물에 빠져죽으니 나이 열아홉이다. 소경대왕조에 정문하시니라. 양녀 효환이 남편이 보는 앞에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우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음 절벽에서 뛰어 내려 죽음을 택한 사례이다. <원문>12) 二婦墜崖 朴氏京都人主簿權紘妻也紘有妹權氏參奉韓永立之妻也朴氏與權氏避倭賊于伊川山谷中相約曰萬 一遇賊不可偸生一日賊猝至俱墜崖而死 昭敬大王朝㫌門 <번역문> 박씨는 서울사람이니 주부 권굉의 아내이다. 굉의 누이는 권씨이니 참봉 한영립의 아내이다. 박 씨 권씨 더불어 이천 산곡 중에 가서 왜적을 피했더니 서로 언약하여 이르되 만일에 도적을 만나면 12) 열 3-10

165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65 같이 살기를 도모하지 못하리라 하더니 어느날 도적이 졸지에 이르렀는데 모두 벼랑에서 떨어져 죽 으니라. 소경대왕조에 정문하시니라. 두자매가 일본군에게 위난을 당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택 했다. 이와같이 일본군들은 여성들에게 특히 잔인한 방법으로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행태는 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원문>13) 金氏斷頭 金氏永興府人幼學金允洽妻也壬辰倭亂賊徒猝至其家欲汚之金氏抱兒拒而不從賊斷頭而去屍體如 生抱兒而坐今 上朝㫌門 13) 열 4-31

166 16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번역> 김씨는 영흥부 사람이니 유학 김윤흡의 아내이다. 임진왜란의 도적의 무리가 갑자기 그 집에 이 르러 데리고 가고가 하거늘 김씨가 아이를 안고 버그러뜨리고 쫓지 아니하니 도적이 머리를 베고 가 니 죽은 얼굴이 산듯하여 아이를 품에 안고 앉아있었다. 이에 상조에 정문하시니라.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김씨의 목을 쳤고, 그 목이 마당에 뒹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신을 몇 번씩 자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문>14) 裴氏三斬 裴氏務安縣人判事尹趪妻也有孝行丁酉倭亂携兩兒避賊賊執而欲汚之罵拒不從賊大怒腰斬三處掛 肝於林木十二歲子忠元十歲子孝元悲號抱母賊携而去後皆逃還尋母屍葬於先瑩之側今 上朝㫌門 <번역> 배씨는 무안현 사람이니 판사 윤황의 아내이다. 효행이 있다. 정유왜란에 두 아이를 데리고 도적 14) 열 8-46

167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67 을 피하였으나 도적에게 붙잡혀 더럽히고자 하거늘 꾸짖어 거절하고 굽히지 않자 도적은 크게 노하 며 허리를 세 번이나 베어 간을 임목에 걸었다. 12살 아들 충원, 10살 아들 효원은 슬퍼서 부르짖으 며 어머니를 안자 도적은 데리고 간 후 모두 도망쳐 돌아와 어미주검을 찾아 조상님의 옆에 장사지 냈다. 지금 임금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일본군은 겁탈을 저항하는 배씨부인을 세 번이나 베고, 간을 꺼내어 나무에 걸었다는 내용이다. 뿐만아니라 사지를 자르는 만행도 저질렀다. <원문>15) 李氏斬肢 李氏京都人奉事李鍵之女幼學金以益妻也壬辰倭亂避賊于麻田地賊至欲殺姑李氏曰願殺我勿殺姑 賊刦李氏將汚之李氏罵不絶口賊怒先斷兩手指不屈又斷兩賊足指亦不屈賊知不可奪寸斬而死 昭敬大王 朝㫌門 15) 열 3-16

168 16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번역> 이씨는 서울사람이니 봉사 이건의 딸이고 유학 김이익의 아내이다. 임진왜란에 마전땅에 가 도적 을 피했는데 도적이 이르러 시어머니를 죽이고자 하거늘 이씨 가로되 원컨대 나를 죽이고 시어머니 를 죽이지 말라 했는데 도적이 이씨를 겁탈하여 장차 더럽히려 하거늘 이씨가 꾸짖기를 입에서 그치 지 아니하니 도적이 노하여 먼저 두 손가락을 베어도 굴하지 아니하거늘 또 두 발가락을 베어도 굴 하지 아니하자 도적이 빼앗지 못함을 알고 촌참하고 가다. 소경대왕조에 정문하시니라. 저항하는 이씨부인을 두손과 발을 자르고, 그래도 굴하지 않자, 寸斬 즉 난도질을 하여 살해 했다는 것이다. 이상 열녀도에 수록된 임란관련 433건의 신분은, 양반의 아내나 딸이 173건, 양인 183건, 중 인 49, 천민 28건이었으며, 지역별로는 경상 123건, 전라 92건, 서울 65건, 충청 43건, 강원 39 건, 경기 28, 황해 22건, 함경 19건, 미상 2건으로 경상도 지역이 가장 많았다. 포상관계는 旌門 430건, 旌門復戶 2건, 미상 1건이었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임진왜란 직후인 1617년 광해군대에 편찬 보급된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 수록 된 임진왜란 관련 충신 효자 열녀도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 책에 수록된 1,587건 가운데, 약 3 6%를 점하는 576건이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었고, 희생자 가운데, 433건(7 5%)가 여성이었다. 신분별로 보면, 충신 효자 열녀 계 양반 양인 또한 이들을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중인 천민 계

169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69 충신 효자 열녀 계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황해 함경 미상 2 2 계 이 도표를 참고해 볼 때, 조선후기 사회의 일반적인 추세이지만, 양반 중심사회에서 양인 내 지는 중인, 심지어는 천민 까지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증대되어감을 볼 수 있으며, 임란 피해가 역시 전라 경상 지역이 더 심했음을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 등재된 포상형태는 旌門, 旌閭, 旌門復戶, 旌閭復戶, 復戶, 賜米復戶, 賜米旌閭, 立碑, 立石 등이 있다. 포상 대상자가 사는 마을 입구나 집앞에 세우던 묽은 문을 旌門이라고 하며,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旌閭라고 한다. 復戶란 국가에서 호에 부과하던 徭役을 면해주는 제도이다. 임란 관련 수록자의 포상은 충신의 경우, 旌門 53건, 旌閭 1건, 효자는 전원 旌門, 열녀는 旌門 430건, 旌門復戶 2건, 미상 1건으로 576건중 572건이 旌門의 포상을 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란이후에 편찬 간행된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는 전란 후 흩어 진 민심을 규합하고, 유교사회의 교화와 기강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면 일본군의 만행 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의 감정을 증폭시켜 갔으며, 조선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 매김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과 인식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조선에 대한 외세의 침략이 시 작되면서 倭洋一體로 취급되어 조선사회의 근대화에 큰 장애의 한 원인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170 17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토론문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노 영 구 (국방대학교) 이 글은 광해군대 편찬된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에 나타난 임진왜란 관련 삽화를 통해 당시 인들의 임진왜란 인식과 기억의 양상에 대해 정리한 글로서, 임진왜란 기억에 대한 연구가 그다 지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진왜란 직후의 전쟁 기억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 지 않습니다. 특히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를 통하여 임진왜란 기억에 대해 정리한 논문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발표문의 향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몇 가지 추가적인 보완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임진왜란 기간 및 전쟁 이후 이루어진 공신, 충신 및 열녀 등에 대한 자료 정리와 포상 논의를 보다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 편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뿐 아니라 임진왜란에 대한 조선의 정리 방향과 향후 임진왜란 기억의 형 성에서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공신도감의 논의를 정리한 儀 軌 등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 편찬 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편찬 과정에서 다수의 효자, 열녀 등의 자료가 수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리의 과정도 당시 임진 왜란 기억의 방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책의 편찬 당시 정치 상황을 통해 집권 정파의 정치적 입장 등을 고려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세번째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 각 인물별 사례에 대한 설명과 삽화의 내용의 경우 특정한 사실을 적시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실제 그 인물의 여러 행적 중에서 일부를 강조한 것으 로 그 강조점이 조선에서 이후 임진왜란 기억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따라

171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171 서 실제 특정 인물,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이순신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실과 동국신속삼강 행실도 의 내용을 비교하여 이 책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의 삽화 자체에 대한 분석이 추가될 필요가 있습니다. 삽화 를 통해 우리는 16세기 말의 여러 상황, 예를 들어 당시의 가옥 구조, 무기 등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15세기의 삼강행실도 등의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복식, 가옥 등의 변화 양상을 살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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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발표문 일본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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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75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北 島 万 次 ( 日 本 公 立 女 大 ) はじめに 私 は これまでの 壬 辰 倭 亂 の 研 究 において 日 本 朝 鮮 明 それぞれの 史 料 を 扱 ってき た 朝 鮮 側 史 料 としては 朝 鮮 王 朝 實 録 懲 毖 録 亂 中 雑 録 壬 辰 録 そして 亂 中 日 記 な どの 史 料 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 これらの 中 で 朝 鮮 王 朝 實 録 懲 毖 録 などは 朝 鮮 王 朝 トップの 動 向 を 中 心 とした 編 纂 物 または 覺 書 である また 亂 中 雑 録 壬 辰 録 などは 中 間 層 から 一 般 庶 民 にいたるまでの 幅 廣 い 階 層 の 動 きも 記 述 した 覺 書 である これに 對 して 亂 中 日 記 はリアルタイムの 史 料 である この 日 記 は 壬 辰 倭 亂 が 勃 發 した 歳 の1592 年 正 月 から 李 舜 臣 が1598 年 11 月 19 日 に 露 梁 の 海 戰 で 戰 死 する 前 々 日 すなわち11 月 17 日 までの 日 記 である 亂 中 日 記 は 朝 鮮 水 軍 全 體 を 指 揮 する 立 場 にあった 李 舜 臣 がその 職 務 を 遂 行 するための 備 忘 記 であり 水 軍 にかかわる 人 物 の 動 向 軍 事 上 の 情 報 海 戰 の 準 備 や 陣 立 海 戰 の 經 緯 など 水 軍 を 指 揮 するうえで 必 要 なことがらをメモしたものである さらに 亂 中 日 記 には 水 軍 を 指 揮 する 現 場 からみた 中 央 の 官 人 などへの 意 見 や 不 滿 苦 労 しながら 明 の 水 軍 と 協 調 したいきさつ 日 本 と 和 議 をすすめようとする 明 側 およびそれを 是 認 しよ うとする 朝 鮮 内 部 の 特 定 人 物 への 怒 り 明 册 封 使 に 随 行 して 日 本 に 向 かう 黄 愼 に 通 信 使 への 船 舶 調 達 の 様 子 水 軍 の 兵 士 や 格 軍 = 船 漕 ぎの 様 子 水 營 にいて 水 軍 を 陰 から 支 えた 船 大 工 などの 職 人 の 様 子 倭 亂 のあおりを 受 けて 逃 げまどったり 李 舜 臣 の 戰 果 に 小 躍 りする 民 衆 戰 亂 による 生 活 難 により 倭 賊 に 變 装 して 略 奪 行 爲 に 走 った 民 衆 降 倭 となった 日 本 人 の 扱 いとその 様 子 自 分 の 家 族 についての 心 配 事 など さまざまな 人 々の 動 きを 生 き 生 きと 語 っているのである 本 日 のお 話 は 以 上 のことがらを 考 慮 しながら 亂 中 日 記 をつうじて 戰 亂 において 民 衆

176 17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はどのような 生 き 方 をしたのかについて 述 べたいと 思 う Ⅰ 盜 賊 竊 盜 をおこなった 下 層 民 1 倭 人 に 變 裝 して 盜 賊 となった 下 層 民 1593( 宣 祖 26) 年 7 月 忠 清 慶 尚 全 羅 の 三 道 の 下 層 民 が 壬 辰 倭 亂 の 混 亂 に 乗 じて 倭 人 に 變 装 して 略 奪 行 爲 を 働 いた 事 件 がある それはつぎの 事 例 である * 事 例 年 7 月 8 日 李 舜 臣 は 倭 賊 が 光 陽 県 を 侵 犯 し 倭 賊 はすでに 官 舎 や 倉 庫 を 焼 きつくし たした という 噂 を 聞 いた 李 舜 臣 はすぐに 兵 を 出 そうとしたが その 噂 をそのまま 信 ずることが 出 來 ず 蛇 渡 鎮 の 軍 官 金 鵬 萬 を 探 索 のため 光 陽 に 派 遣 した( 史 料 1) * 事 例 年 7 月 9 日 南 海 県 令 奇 孝 謹 が 李 舜 臣 のもとへ 來 て 光 陽 と 順 天 はすでに 焼 きつくされ たと 傳 えた このため 光 陽 県 監 魚 泳 潭 順 天 府 使 權 俊 および 軍 官 宋 希 立 金 得 龍 鄭 思 立 らを 現 地 へ 出 發 させた そのあと 李 舜 臣 は 全 羅 右 水 使 李 億 祺 慶 尚 右 水 使 元 均 と 事 の 經 緯 について 論 議 した ところが 眞 夜 中 になって 全 羅 左 水 營 の 探 候 船 が 戻 って 來 て 光 陽 県 を 侵 犯 した 賊 は 倭 賊 でなく 慶 尚 道 の 避 難 民 が 倭 賊 に 變 装 して 光 陽 に 突 入 し 村 里 を 焼 きつくしたと 云 う( 史 料 2) * 事 例 年 7 月 10 日 蛇 渡 鎮 の 軍 官 金 鵬 萬 が 戻 ってきて 光 陽 の 事 件 は 本 當 であり 倭 賊 百 餘 名 が 陶 灘 ( 現 全 羅 南 道 求 禮 郡 土 旨 面 把 道 里 )から 侵 入 して 光 陽 を 侵 犯 したと 李 舜 臣 に 報 告 し た しかし 李 舜 臣 がその 倭 賊 なるものの 行 爲 を 詳 しく 尋 ねたところ 鐵 炮 を 一 發 も 擊 たなかった と 云 う 李 舜 臣 は 倭 賊 でありながら 鐵 炮 を 放 たないはずは 絶 對 にないと 思 った( 史 料 3) * 事 例 年 7 月 10 日 蛇 渡 僉 使 金 浣 が 李 舜 臣 のもとへ 戻 ってきて 光 陽 の 事 件 は 光 陽 の 住 人

177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77 が 倭 服 に 變 装 して 起 した 事 件 であり 光 陽 だけでなく 順 天 樂 安 もすでに 焼 きつくされた と 報 告 した また 光 陽 から 戻 ってきた 呉 寿 成 は 光 陽 の 賊 は 皆 な 晋 州 および 光 陽 県 の 人 で あり 彼 らがこの 兇 計 を 企 てた 官 庫 は 空 っぽとなり 村 里 もすべて 空 となった 被 害 は 順 天 がもっともひ どく 樂 安 はこれについでひどかった と 報 告 した( 史 料 4) 2 倭 賊 襲 來 の 虛 報 を 流 して 牛 を 盜 んだ 鮑 作 人 1597( 宣 祖 30) 年 8 月 全 羅 道 於 蘭 浦 で 慶 尚 道 唐 浦 の 鮑 作 人 が 倭 賊 が 來 たと 虚 報 を 流 し 牛 を 盗 んだ 事 件 があった * 事 例 年 8 月 25 日 李 舜 臣 が 全 羅 南 道 於 蘭 浦 に 駐 屯 していた 時 唐 浦 の 鮑 作 人 が 放 牛 を 盗 ん で 行 くさい 倭 賊 が 來 たと 虚 報 を 流 した 李 舜 臣 はその 悪 巧 みを 知 り 虚 報 者 2 名 を 拿 らえて 斬 梟 した( 史 料 5) 事 例 1~5から 問 題 點 はつぎのようである 1 倭 亂 により 生 活 難 に 陥 った 全 羅 道 光 陽 慶 尚 道 晋 州 の 下 層 民 が 倭 人 に 變 装 して 掠 奪 行 爲 を 行 った 2しかし この 頃 光 陽 晋 州 地 域 だけでなく 忠 清 慶 尚 全 羅 の 三 道 の 廣 い 範 囲 で 下 層 民 が 混 亂 に 乗 じて 略 奪 行 爲 に 及 ぶ 状 況 が 廣 まっていた( 史 料 6) 3また ( 事 例 5)は 丁 酉 倭 亂 の 時 期 であるが ここでも 鮑 作 人 が 食 糧 難 により 虚 報 を 流 して 牛 を 盗 む * 鮑 作 人 については のちに 説 明 *それではつぎに 生 活 に 困 って 略 奪 行 爲 を 行 った 下 層 民 の 問 題 から 離 れて 全 羅 左 水 營 の 職 人 に 目 を 移 そう

178 17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Ⅱ 水 營 を 支 えた 職 人 集 團 1 船 大 工 a 造 船 と 船 材 運 搬 * 事 例 ( 宣 祖 26) 年 6 月 22 日 全 羅 左 水 營 では 戰 船 を 建 造 するため 坐 塊 1を 始 めた 耳 匠 2240 名 運 搬 役 3として 全 羅 左 水 營 より72 名 防 踏 鎮 より35 五 名 蛇 渡 鎮 より25 名 鹿 島 鎮 より15 名 鉢 浦 鎮 より12 名 呂 島 鎮 より15 名 順 天 府 より10 名 樂 安 郡 より5 名 興 陽 県 と 寶 城 郡 は 各 々10 名 であった( 史 料 7) ( 注 ) 1 坐 塊 造 船 のさい 船 底 の 板 の 下 にコロとして 置 く 丸 太 を 設 置 すること 2 耳 匠 = 木 手 大 工 仕 事 や 土 木 工 事 をやる 人 ここでは 船 大 工 3 運 搬 役 雑 役 夫 * 事 例 7 *1593( 宣 祖 26) 年 6 月 23 日 新 船 の 底 板 の 作 業 が 終 了 した( 史 料 8) 事 例 6~7をつうじて つぎのことを 指 摘 しておこう 亂 中 日 記 には 船 大 工 のことを 耳 匠 と 記 している 耳 匠 とは 木 手 とも 呼 ばれ 船 の 建 造 をはじめ 大 工 仕 事 にたずさわる 職 人 である 日 記 のこの 箇 所 によれば この 時 點 で 全 羅 左 水 營 ( 麗 水 )に 240 名 にもおよぶ 多 くの 耳 匠 ( 船 大 工 )がいたということが 分 かる この 船 大 工 が 造 船 の 最 初 の 仕 事 である 坐 塊 にとりかかった そのさい 船 大 工 の 仕 事 を 補 助 するため その 船 材 を 運 搬 する 多 くの 雑 役 夫 ( 運 役 )が 左 水 營 および 左 水 營 管 轄 下 の 防 踏 鎮 蛇 渡 鎮 鹿 島 鎮 鉢 浦 鎮 呂 島 鎮 の 各 鎮 營 および 順 天 府 樂 安 郡 寶 城 郡 興 陽 県 から 動 員 されたのであ る ここに 船 大 工 の 職 人 集 団 が 左 水 營 にいて その 専 業 作 業 以 外 の 仕 事 を 雑 役 夫 が 担 當 する 仕 組 みのあることが 分 かる

179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79 それでは これらの 船 大 工 はどのように 組 織 されていたのか それについて さらに 事 例 を あげよう b 船 大 工 の 掌 握 統 制 * 事 例 ( 宣 祖 27) 年 1 月 24 日 軍 船 の 材 木 伐 採 のため 宋 德 馹 1が 耳 匠 41 名 を 率 いて 出 かけ た( 史 料 9) ( 注 ) 1 宋 德 馹 壬 辰 倭 亂 勃 發 の 時 國 王 を 護 衛 して 平 安 道 に 扈 従 する 1594( 宣 祖 27) 年 李 舜 臣 の 配 下 に 加 わり 耳 匠 = 木 手 を 率 いて 山 役 を 行 う 丁 酉 倭 亂 のさい 珍 島 郡 守 となり 鳴 梁 の 海 戰 で 活 躍 する( 朝 鮮 人 名 辞 書 ) * 事 例 ( 宣 祖 28) 年 11 月 27 日 軍 官 金 應 謙 が 二 年 木 を 伐 採 するため 耳 匠 5 名 を 率 いて 山 へ 行 った( 史 料 10) * 事 例 ( 宣 祖 30) 年 10 月 30 日 李 舜 臣 は 軍 官 黄 得 中 に 命 じて 耳 匠 を 率 いて 島 北 の 山 麓 で 建 設 用 の 材 木 を 伐 らせた( 史 料 11) 事 例 8~10から つぎのことが 分 かる ( 事 例 8)からは 船 大 工 が 軍 船 の 材 木 伐 採 を 行 い それを 統 率 するのが 李 舜 臣 の 部 將 宋 德 馹 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り ( 事 例 9)も 船 大 工 が 材 木 伐 採 を 行 い それを 李 舜 臣 の 軍 官 が 統 率 していたことが 分 かる ここで 船 大 工 が 造 船 用 の 材 木 を 伐 採 するということは 何 を 意 味 するのであろうか 先 に 船 材 を 運 搬 する 雑 役 夫 の 存 在 をあげた 造 船 用 の 材 木 もこれら 雑 役 夫 にまかせても 良 さそうなものであ るが 船 大 工 がみずから 材 木 伐 採 を 行 うのはなぜであろうかという 問 題 がある 考 えられるのは 造 船 用 材 木 の 選 定 である 船 材 に 適 しているかどうか それは 船 大 工 が 見 分 けるのである し

180 18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たがって 大 工 みずからが 船 材 を 探 すのものと 思 われる また( 事 例 10)は1597 年 9 月 17 日 の 鳴 梁 海 戰 あとの 事 例 であり この 時 點 李 舜 臣 は 據 點 を 全 羅 右 水 營 に 置 いていた その 廳 舎 建 設 のためであろうか 船 大 工 も 建 設 用 の 材 木 伐 採 に 動 員 された そして この( 事 例 10)からもうひとつ 指 摘 することは 李 舜 臣 の 軍 官 黄 得 中 が 船 大 工 を 率 いて 作 業 にあた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亂 中 日 記 の 他 の 箇 所 をみると 黄 得 中 は 船 舶 や 銃 筒 用 の 鐵 材 の 運 搬 なども 担 當 しており( 亂 中 日 記 丙 申 2 月 18 日 19 日 ) おそらく 鐵 材 材 木 を 調 達 する 任 務 についていたものと 考 えられる その 配 下 に 耳 匠 などの 職 人 が 編 成 されていたの ではなかろうか これら 三 つの 事 例 から 李 舜 臣 の 軍 官 がこれらの 船 大 工 を 統 制 していることが 分 かる 船 大 工 編 成 の 仕 組 みは 李 舜 臣 軍 官 船 大 工 集 団 であり その 外 延 に 大 工 の 専 業 作 業 を 補 助 する 雑 役 夫 が 配 置 されていたといえよう c 船 大 工 の 出 向 作 業 つぎに 船 大 工 の 出 向 作 業 について つぎの 事 例 をあげておこう * 事 例 ( 宣 祖 29) 年 2 月 6 日 李 舜 臣 は 耳 匠 ( 船 大 工 )10 名 を 巨 濟 島 に 送 って 造 船 にあたるよ う 指 示 した( 史 料 12) *この 事 例 からつぎのことが 言 える すなわち この 時 期 李 舜 臣 は 閑 山 島 に 本 據 を 移 して いた 日 記 によれば 船 大 工 も 李 舜 臣 に 従 って 閑 山 島 で 業 務 にたずさわっていたのであろ う この 船 大 工 のうち 10 名 が 造 船 作 業 のため 巨 濟 島 に 出 向 いたのである このことは 李 舜 臣 配 下 の 船 大 工 は 巨 濟 島 以 外 の 各 鎮 營 の 船 倉 にもその 作 業 に 出 向 くことがあったものと 考 えられ る 2 石 工 亂 中 日 記 には 石 工 ( 石 手 )について つぎの 記 述 がある * 事 例 ( 宣 祖 25) 年 1 月 16 日 城 底 ( 城 付 近 )の 土 兵 ( 土 着 の 兵 卒 ) 朴 夢 世 が 石 手 ( 石 工 )

181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81 を 率 いて 先 生 院 1の 鎖 石 の 採 石 場 に 行 った( 史 料 13) ( 注 ) 1 先 生 院 省 生 院 または 成 生 院 ともいう 駅 院 のひとつ 現 全 羅 南 道 麗 川 郡 栗 村 面 新 豐 里 * 事 例 ( 宣 祖 25) 年 2 月 15 日 石 手 らが 新 しく 築 いた 浦 の 塹 壕 が 多 く 崩 れ 落 ちたので 處 罰 する こことし ふたたび 築 かせた( 史 料 14) *( 事 例 12)は 石 工 が 全 羅 左 水 營 周 辺 の 土 兵 ( 土 着 の 兵 卒 )に 率 いられて 採 石 に 出 かけ たということである この 場 合 土 兵 と 石 工 の 關 係 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のか 1 石 工 も 李 舜 臣 のもとに 編 成 されていて それを 李 舜 臣 の 命 令 によって 土 兵 が 率 いたのか?そうだとすれ ば 船 大 工 を 率 いたのは 李 舜 臣 の 軍 官 であったが この 場 合 なぜ 土 兵 かという 疑 問 が 残 る あるいは 2 石 工 はその 地 域 の 土 兵 の 配 下 にまとめられていたものなのか?これは 今 後 の 検 討 課 題 である ( 事 例 13)から 指 摘 することは 石 工 は 本 來 の 仕 事 としての 塹 壕 工 事 ( 石 積 み)にあたって いる したがって ( 事 例 12)でみたように 石 工 は 採 石 から 石 積 みまで 行 ったものと 言 える 3 弓 匠 と 冶 匠 弓 匠 も 冶 匠 ( 鍛 冶 職 人 )も 船 大 工 の 場 合 と 同 じように 出 向 作 業 している その 事 例 をつぎ にあげよう a 弓 匠 の 出 向 作 業 * 事 例 ( 宣 祖 29) 年 7 月 7 日 弓 匠 の 智 伊 と 春 卜 が 本 營 ( 全 羅 左 水 營 )に 歸 った( 史 料 15) この 事 例 からつぎのことを 指 摘 しておこう すなわち この 時 期 李 舜 臣 は 閑 山 島 に 本 據 を 置 いていた 弓 匠 が 本 營 ( 全 羅 左 水 營 )に 歸 ったというのは かれら 弓 匠 は 弓 造 りの 仕 事 のた め 全 羅 左 水 營 から 閑 山 島 に 出 向 いていたのであり 作 業 が 終 了 したので 全 羅 左 水 營 に 歸 った のである このことは 船 大 工 が 巨 濟 島 へ 出 向 いたのと 同 じ 問 題 であり 左 水 營 の 弓 匠 職 人 は 李

182 18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舜 臣 管 轄 下 の 鎮 營 に 出 向 作 業 をもするのである b 冶 匠 の 出 向 作 業 冶 匠 ( 鍛 冶 職 )の 出 向 作 業 については つぎの 事 例 がある * 事 例 ( 宣 祖 30) 年 10 月 23 日 李 舜 臣 は 冶 匠 の 許 莫 同 を 羅 州 に 行 かせようとして 初 更 ( 午 後 8 時 )の 末 に 下 男 に 呼 びに 行 かせたところ 腹 痛 で 來 られないとのことであった( 史 料 16) *この 事 例 の 最 後 に 腹 痛 で 李 舜 臣 のところへ 來 られないと 云 っているものの 鍛 冶 職 人 も 全 羅 左 水 營 にいて 船 大 工 弓 匠 の 場 合 と 同 じように 李 舜 臣 管 轄 の 各 地 域 へ 仕 事 に 出 ることも あったということを 物 語 っている 4 湖 左 水 營 誌 にみられる 職 人 集 團 亂 中 日 記 をつうじて 船 大 工 ( 耳 匠 ) 石 工 ( 石 手 ) 弓 匠 冶 匠 の 事 例 をあげたにすぎな いが 1631( 仁 祖 9) 年 にまとめられた 湖 左 水 營 誌 によると 左 水 營 にはつぎのような 職 人 が 編 成 されていたことが 分 かる * 耳 匠 46 名 * 沙 工 ( 船 頭 48 名 * 漆 匠 8 名 * 扇 子 匠 26 名 * 驄 匠 ( 葬 送 具 祭 器 製 造 ) 3 名 * 筒 箇 匠 ( 竹 筒 細 工 24 名 * 鍮 器 匠 ( 眞 鍮 器 具 製 造 ) 1 名 * 竹 席 匠 ( 竹 皮 の 敷 物 細 工 ) 10 名 * 官 木 手 3 名 * 沙 鐵 吹 錬 匠 10 名 * 磨 造 匠 ( 研 ぎ 師?) 3 名 * 蓋 匠 ( 屋 根 葺 き 職 人 ) 2 名 * 火 砲 匠 45 名 * 弓 矢 人 ( 造 弓 匠 37 名 * 銀 匠 ( 金 銀 銅 細 工 製 造 2 名 * 木 手 ( 木 工 30 名 * 環 刀 匠 4 名 * 刀 子 匠 ( 小 刀 製 造 3 名 * 朱 錫 匠 ( 朱 錫 は 眞 鍮 の 一 種 ) 1 名 * 笠 子 匠 6 名 * 水 鐵 匠 ( 銑 鐵 匠?) 37 名 * 皮 鐵 匠 ( 皮 細 工 職 人?) 3 名 * 螺 鈿 匠 2 名 * 瓦 匠 ( 瓦 職 人 ) 6 名

183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83 この 湖 左 水 營 誌 がまとめられた 時 點 の 左 水 營 の 様 子 は 李 舜 臣 が 水 使 となっていた 當 時 と はいくらか 異 なっていることを 念 頭 に 置 く 必 要 があるものの 壬 辰 倭 亂 の 時 期 において 船 大 工 ( 耳 匠 ) 石 工 ( 石 手 ) 弓 匠 冶 匠 をはじめとするさまざまな 職 人 が 水 軍 に 必 要 とする 軍 需 物 資 を 中 心 とした 品 々の 製 造 にたずさわっていたのである そして かれらは 水 使 直 屬 の 軍 官 のも とに 編 成 され 水 軍 の 需 要 に 應 ずる 態 勢 をとっていたものといえよう Ⅲ 船 漕 ぎとなった 降 倭 1 投 降 する 倭 卒 とその 理 由 ここでは 投 降 した 倭 卒 の 事 例 から 見 てゆこう * 事 例 ( 宣 祖 27) 年 10 月 6 日 場 門 浦 永 登 浦 海 戰 のあと 李 舜 臣 のもとへ 投 降 した 倭 卒 あり 尋 問 したところ 永 登 浦 に 陣 を 構 える 島 津 勢 の 兵 卒 であった( 史 料 17) * 事 例 ( 宣 祖 29) 年 1 月 8 日 慶 尚 道 加 德 島 島 津 陣 の 兵 卒 城 普 請 など 役 儀 の 嚴 しさに 耐 えか ねて 閑 山 島 李 舜 臣 のもとへ 投 降 李 舜 臣 が 逃 亡 の 理 由 を 問 いただしたところ 彼 らの 大 將 で ある 島 津 氏 の 性 格 が 悪 いと 云 う( 史 料 18) * 事 例 ( 宣 祖 30) 年 7 月 3 日 慶 尚 左 兵 使 成 允 文 配 下 の 軍 官 が 降 倭 2 名 を 連 れてきた これ は 加 藤 清 正 に 率 いられた 兵 であると 云 う( 史 料 19) これらの 事 例 の 降 倭 について その 投 降 の 理 由 を 仔 細 にみるならば 島 津 勢 の 場 合 ( 事 例 16 17) 1594 年 10 月 の 場 門 浦 永 登 浦 海 戰 のころは 巨 濟 島 永 登 浦 に 倭 城 を 構 えてい た ところが 秀 吉 を 日 本 國 王 に 封 ずる 明 冊 封 使 が 慶 尚 道 へ 來 た 時 倭 軍 が 慶 尚 道 一 帯 の 倭 城 を 破 却 し 朝 鮮 から 撤 退 しなければ 日 本 へ 渡 海 しないと 強 硬 な 態 度 をとった このため 島 津

184 18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勢 の 永 登 浦 倭 城 も 破 却 することとなり 島 津 勢 は 加 德 島 へ 移 動 したが ここで 再 び 城 普 請 をはじ めた そればかりか 島 津 勢 の 大 將 である 島 津 忠 恒 (Shimazu Tadatsune)は 永 登 浦 倭 城 の 中 に 蹴 鞠 の 庭 や 茶 室 を 造 り 諸 大 名 との 付 き 合 いに 明 け 暮 れていた さらに 加 德 島 へ 移 動 した 後 も 島 津 忠 恒 はそこでも 城 普 請 を 始 め さらに 蹴 鞠 の 庭 と 茶 室 を 造 った 降 倭 が 大 將 の 性 格 が 悪 い というのはこのあたりにあろう また 加 藤 清 正 の 兵 卒 が 投 降 した 事 例 ( 事 例 18)について 述 べれば 清 正 勢 が 在 番 してい た 西 生 浦 倭 城 も 島 津 勢 の 永 登 浦 倭 城 の 場 合 と 同 様 に 破 却 したのであった しかし 日 明 講 和 交 渉 の 破 綻 により 丁 酉 倭 亂 が 始 まると 清 正 はふたたび 西 生 浦 倭 城 の 修 築 にかかった この 果 てし なく 続 く 城 普 請 に 酷 使 された 兵 卒 が 慶 尚 左 兵 使 成 允 文 のもとへ 投 降 したのである これらの 事 例 にみられる 降 倭 の 特 質 は 逃 亡 であり 慶 尚 道 友 鹿 洞 の 投 降 將 沙 也 可 (= 金 忠 善 )が 投 降 した 場 合 とは 異 なっている 前 者 は 個 々に 投 降 に 投 降 したものであり 沙 也 可 の 場 合 は 集 団 投 降 である つぎに その 相 違 について 指 摘 しておこう 2 二 つのタイプの 降 倭 a 降 倭 將 定 住 型 周 知 のように 沙 也 可 は 加 藤 清 正 軍 の 先 鋒 將 であり 1592( 宣 祖 25) 年 4 月 朝 鮮 侵 入 直 後 に 配 下 の 兵 を 率 いて 朝 鮮 側 に 寝 返 った 人 物 である 沙 也 可 は 朝 鮮 の 禮 義 と 中 華 文 物 の 盛 んな 様 子 を 慕 い その 配 下 を 率 いて 朝 鮮 側 に 投 降 した そして 朝 鮮 軍 につき 倭 軍 と 戰 い 功 績 をあげ 金 忠 善 と 名 乗 って 朝 鮮 に 骨 を 埋 め 子 孫 は 友 鹿 洞 で 繁 榮 したのである この 沙 也 可 の 場 合 と 同 じような 事 例 が 亂 中 雑 録 にもみられる * 事 例 19 慶 尚 道 に 在 陣 していた 金 向 義 という 名 の 倭 將 は 度 重 なる 戰 いと 労 役 を 嫌 い 慶 尚 右 兵 使 金 應 瑞 のもとに 部 下 を 率 いて 投 降 した その 後 朝 鮮 側 に 付 き 戰 功 を 立 て 通 政 大 夫 ( 正 三 品 の 宗 親 文 武 官 儀 賓 などの 堂 上 官 の 階 ) 嘉 善 大 夫 ( 従 二 品 の 宗 親 儀 儐 文 武 官 などの 堂 上 官 の 階 )の 位 につき 密 陽 に 居 住 して 農 桑 に 務 め 子 孫 は 繁 榮 したのである( 史 料 20) 沙 也 可 の 場 合 も 金 向 義 も 部 下 を 率 いて 投 降 し 相 手 方 のまとまった 戰 力 となり 安 住 の 地 を 得 たのである これは 日 本 の 戰 國 争 亂 にもみられる 叛 亂 である 日 本 側 の 立 場 からみれば 裏 切 りである したがって 朝 鮮 側 もそれに 相 當 する 待 遇 を 與 えたのである このタイプの 降 倭 を 降 倭

185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85 將 定 住 型 と 呼 んでおこう ところが 降 倭 はすべて 降 倭 將 定 住 型 ではない もうひとつのタイプの 降 倭 がいた b 兵 卒 勞 役 型 このタイプの 降 倭 は 先 にみた 島 津 忠 恒 や 加 藤 清 正 のもとから 逃 亡 したものであり 彼 らは 部 將 に 率 いられて 投 降 したのではなく 個 々に 逃 亡 したのである その 事 例 として 島 津 勢 から 投 降 し た 兵 卒 の 場 合 をあげておこう * 事 例 ( 宣 祖 31) 年 5 月 與 右 衛 門 (Yoemon)( 要 汝 文 )という 名 の 島 津 勢 の 兵 卒 が 朝 鮮 側 に 投 降 した 都 元 帥 權 慄 が 取 調 べた 結 果 その 供 述 によると 1 與 右 衛 門 は 年 齢 30 才 であり 弓 矢 と 放 砲 の 技 量 を 持 つ 兵 卒 であること 2 両 親 はすでに 他 界 し 兄 弟 はすべて 倭 亂 の 巻 添 え をくらい 與 右 衛 門 は 天 涯 孤 独 の 身 であること 3そして 與 右 衛 門 は 果 てしなく 続 く 城 普 請 に 使 役 された 4そのような 時 朝 鮮 側 が 降 倭 を 厚 遇 すると 聞 いて 島 津 勢 の 陣 から 逃 亡 したのである ( 史 料 21) この 與 右 衛 門 の 投 降 は あきらかに 沙 也 可 や 金 向 義 の 場 合 のような 叛 亂 裏 切 りでなく 単 純 な 個 々の 逃 亡 である これらの 降 倭 は 朝 鮮 側 からどのような 扱 いをうけるのだろうか それ について 朝 鮮 王 朝 實 録 につぎの 事 例 がある * 事 例 ( 宣 祖 27) 年 9 月 朝 鮮 政 府 首 脳 は 降 倭 の 扱 いにつき つぎのような 方 針 をうち 出 し た すなわち 降 倭 のうち 才 技 があり かつ 恭 順 であって 國 用 に 役 立 つものは 陣 中 に 留 め その 他 の 降 倭 は 閑 山 島 の 水 軍 のもとに 送 って 船 漕 ぎ( 格 軍 )として 使 役 するものとするという のである( 史 料 22) *これこそ まさに 兵 卒 労 役 型 の 降 倭 である それではつぎに この 船 漕 ぎ( 格 軍 )に 目 を 轉 じよう

186 18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Ⅳ 海 を知 る鮑作人 1 朝鮮水軍 の 戰力 と 梢水軍 水軍の兵力は射手 弓手と砲手 と梢水軍 船頭と格軍 船漕ぎ によって構成される ここ で1595 宣祖28 年 朝鮮國王から明へ回答した朝鮮水軍の實態を示しておこう 朝鮮水軍の戰力ー1595 宣祖28 年3月ー 射手 弓手 砲手 梢水軍 船頭 格軍 亀甲船 戰船 哨探船 717名 3072名 5隻 26隻 31隻 55名 398名 0隻 10隻 10隻 全羅右水使李億祺配下 425名 2171名 0隻 24隻 24隻 慶尚左水使李守一配下 31名 240名 0隻 3隻 3隻 計 1228名 統制使李舜臣配下 含 全羅左水營 慶尚右水使裴楔配下 5881名 5隻 63隻 68隻 出典 萬暦23年3月4日 朝鮮國王回咨 事大文軌 12 この表からつぎのことがらを指摘しておこう 第一に 指摘することは 射手に 比べて 梢水軍 とりわけ 格軍 船漕ぎの人数の 多さであ る 射手1228名に對し 梢水軍は5881名であり 梢水軍は射手の4.5倍に相當する これは動力 で動く現代の船と違って 格軍 船漕ぎの人力に頼る船の場合 格軍 船漕ぎの多さが海戰勝敗 の鍵を握っていることを物語っている 第二の 問題は 船1隻に對して どれほどの格軍 船漕ぎを 必要としたか ということであ る この表にあげた軍船全體の数は136隻であり 格軍 船漕ぎは5881名である したがって平 均すれば 軍船136隻 A 船漕ぎ5881名 B B A 43名となるが 軍船には亀甲船から哨探船ま で 船の大小がある 以前に私が海軍士官學校博物館の鄭鎮述氏からうけた説明によれば 亀

187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87 甲 船 の 場 合 櫓 は 左 右 に8 本 計 16 本 櫓 1 本 につき 4 名 の 格 軍 が 配 置 (その 内 2 人 は 交 代 要 員 )される したがって 亀 甲 船 1 隻 の 格 軍 は64 名 とのことであった この 表 にあげられている 亀 甲 船 は5 隻 戰 船 は63 隻 合 計 68 隻 となる したがって これに 配 置 される 格 軍 = 船 漕 ぎは 68 隻 64 名 =4352 名 ということになる そして 5881 名 ( 格 軍 = 船 漕 ぎ 全 體 数 )-4352 名 ( 亀 甲 船 戰 船 に 配 置 される 格 軍 = 船 漕 ぎ)=1529 名 が 哨 探 船 などの 小 型 船 に 配 置 されるものと 考 えられる それでは これら 格 軍 = 船 漕 ぎはどのような 人 々によって 構 成 されているのであろうか そ れは 先 に 述 べた 降 倭 のほかに 奴 婢 土 兵 鮑 作 人 によって 構 成 されていた そこで つぎに 鮑 作 人 について 述 べておこう 2 鮑 作 人 とは 何 か 鮑 作 人 とは 鮑 尺 人 ともいう かつて 朝 鮮 総 督 府 が 作 成 した 朝 鮮 語 辞 典 によれば 鮑 尺 とは 水 中 に 入 って 鮑 を 漁 る 者 とある 亂 中 日 記 癸 巳 3 月 のメモにも 鮑 作 と 記 した 箇 所 に 沿 海 の 人 と 注 記 がある このことから 鮑 作 人 とは 沿 海 を 生 業 の 場 とする 海 民 であるといえよう しかし 彼 らは 朝 鮮 國 家 のみならず 陸 地 の 一 般 の 人 々から 嫌 われ 疎 外 されていたので ある その 事 例 をあげておこう * 事 例 世 紀 なかば 濟 州 島 の 鮑 作 人 が 全 羅 慶 尚 両 道 の 入 江 に 紛 れこみ 頻 繁 に 竊 盗 を 行 うよう になっていた しかし 確 たる 証 據 がない そこで 全 羅 道 觀 察 使 柳 洵 は 彼 らを 濟 州 島 に 刷 還 しよ うとしても 生 業 につこうともしない ここで 中 央 政 府 のとった 鮑 作 人 への 對 處 は 1 所 在 官 の 守 令 萬 戸 に 命 じ 鮑 作 人 の 船 隻 に 字 號 を 付 けさせ 全 羅 慶 尚 両 道 に 渡 る 時 の 路 引 ( 通 行 券 )を 給 付 して もし 路 引 を 所 持 しなかったり あるいは 字 號 を 付 けていない 船 に 乗 って 勝 手 に 全 羅 慶 尚 両 道 に 出 入 すれば 海 賊 とみなし 嚴 罰 に 處 すこと 2さらに 鮑 作 人 の 居 住 する 集 落 に 毎 歳 その 人 口 を 登 録 させて 全 羅 道 觀 察 使 に 報 告 し それを 朝 廷 に 轉 報 させること 3もし 守 令 萬 戸 が 鮑 作 人 を 存 撫 (やわらげ 安 んずる)ことができず 鮑 作 人 を 流 亡 させたならば そ れを 守 令 萬 戸 ら 官 吏 の 業 績 評 価 の 参 考 とすることとした( 史 料 23)

188 18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 事 例 ( 宣 祖 22) 年 景 轍 玄 蘇 宗 義 智 らが 秀 吉 の 日 本 全 國 統 一 を 祝 賀 する 通 信 使 派 遣 を 朝 鮮 側 に 要 請 したさい 朝 鮮 側 は 全 羅 道 珍 島 の 叛 民 沙 火 同 の 縛 送 を 通 信 使 派 遣 の 条 件 としたことが あった この 沙 火 同 は 前 年 11 月 日 本 の 海 賊 を 手 引 きして 全 羅 道 高 興 郡 損 竹 島 を 襲 擊 し 辺 將 李 太 源 を 殺 した 人 物 であり その 後 五 島 にかくまわれていたのであった( 史 料 24) * 問 題 はこの 沙 火 同 の 素 性 である 朝 鮮 王 朝 實 録 には 沙 火 同 なる 者 有 り は 我 が 國 珍 島 の 人 也 ( 史 料 24) とあるが 李 廷 馣 の 行 年 日 記 によれば 寶 城 鮑 作 人 沙 火 同 ( 史 料 25) の 出 身 地 は 全 羅 南 道 寶 城 であって その 身 分 は 鮑 作 人 であったとあり 沙 火 同 は 鮑 作 人 であること が 注 目 されるのである 海 辺 をわたり 住 む 鮑 作 人 であるだけに 史 料 によっては その 居 所 が 全 羅 南 道 の 珍 島 であったり 寶 城 であったりするのである この 沙 火 同 の 事 例 にみられるように 鮑 作 人 は 全 羅 南 道 の 海 辺 地 帯 にいくつかの 居 所 を 移 し 本 業 の 鮑 採 り 以 外 に 竊 盗 行 爲 を 行 ったり 海 賊 行 爲 にも 荷 担 する これも 鮑 作 人 の 生 き 方 だった のである それだけに 彼 らは 朝 鮮 國 家 や 一 般 の 人 々からアウトロー 的 存 在 とみなされていたの である 3 格 軍 の 逃 亡 を 幇 助 する 鮑 作 人 亂 中 日 記 には 格 軍 = 船 漕 ぎに 關 する 記 述 が 数 多 くみられる 一 例 をあげれば * 事 例 ( 宣 祖 26) 年 2 月 3 日 の 亂 中 日 記 によれば 1 慶 尚 道 から80 名 ほどの 格 軍 逃 亡 の 知 らせが 李 舜 臣 のもとに 届 いた 2その 逃 亡 者 の 中 には 向 化 人 金 浩 乞 と 羅 將 ( 地 方 郡 衙 の 下 級 役 人 ) 金 水 男 もいた この 場 合 向 化 人 とは 倭 軍 に 歸 順 したものをいうが そのことにより 向 化 人 金 浩 乞 は 格 軍 とされたも のと 思 われ また 羅 將 金 水 男 も 何 らかの 理 由 で 格 軍 に 配 置 されたものと 思 われる 3 慶 尚 右 水 營 の 官 吏 が 逃 亡 した 格 軍 の 捕 捉 に 赴 いたが 逃 亡 した 格 軍 から 賄 賂 をもらって 任 務 を 達 成 しなかった 4この 知 らせをうけた 李 舜 臣 は 配 下 の 軍 官 李 鳳 寿 鄭 思 立 らを 派 遣 して 逃 亡 した 格 軍 70 名 ほ どを 捕 らえて 何 隻 かの 船 に 分 置 するとともに 金 浩 乞 と 金 水 男 (この 二 人 が 格 軍 逃 亡 の 首 謀 者 と 思 われる)を 處 刑 した( 史 料 26)

189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89 このような 格 軍 = 船 漕 ぎの 逃 亡 に 鮑 作 人 が 積 極 的 に 關 わっていたのである * 事 例 ( 宣 祖 27) 年 5 月 13 日 の 亂 中 日 記 によれば 1 黔 毛 浦 萬 戸 が 慶 尚 右 水 使 元 均 の 管 轄 下 にある 鮑 作 らが 格 軍 を 載 せて 逃 亡 したが 現 地 で 鮑 作 を 捕 らえたところ 鮑 作 らは 元 均 の 駐 屯 する 處 に 隠 れていた そこで 司 僕 1らを 送 って 彼 らを 捕 らえようとしたところ 元 均 が 大 いに 怒 り 司 僕 らを 結 縛 した と 李 舜 臣 に 通 報 した 2そのため 李 舜 臣 は 軍 官 廬 潤 發 を 送 って 司 僕 らを 解 き 放 たせた ( 史 料 27) ( 注 ) 1 司 僕 司 僕 は 司 僕 寺 の 略 称 すなわち 宮 中 の 輿 馬 厩 牧 などの 事 務 を 掌 る 官 衙 である しかし ここでは 兼 司 僕 ( 禁 軍 のひとつ)のことかと 思 われる さらにつぎの 事 例 をあげておこう * 事 例 ( 宣 祖 27) 年 8 月 26 日 の 亂 中 日 記 によれば 1 興 陽 の 鮑 作 人 で 莫 同 という 名 のものが 長 興 の 軍 士 30 名 をひそかに 自 分 の 船 に 載 せて 逃 亡 さ せた 2その 罪 により 李 舜 臣 は 鮑 作 人 莫 同 を 處 刑 して 梟 示 した( 史 料 28) *この 事 例 で 注 目 したことは 鮑 作 人 は 格 軍 のみならず 一 般 の 兵 士 の 逃 亡 にも 手 助 けして いることである それでは 格 軍 はなぜ 逃 亡 するのか?つぎにこの 問 題 について 考 えてみよう 4 格 軍 逃 亡 の 理 由 李 舜 臣 は1592( 宣 祖 25) 年 7 月 8 日 の 閑 山 島 海 戰 の 成 果 を 同 月 15 日 付 で 報 告 している ( 李 舜 臣 壬 辰 状 草 萬 暦 20 年 7 月 15 日 ) そのさい 海 戰 による 死 傷 者 の 数 も 報 告 している そ れによると 死 傷 者 全 體 は132 名 であり その 内 訳 は 格 軍 が61 名 射 夫 が7 名 その 他 が15 名 であって 格 軍 の 死 傷 者 が 圧 倒 的 に 多 いのである これは 戰 鬪 状 態 に 入 っても 格 軍 は 戰 うこ

190 19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とはなく ただひたすらに 船 を 漕 ぎ 砲 擊 を 避 けることもできないからである 海 戰 は 格 軍 を 疲 労 のみか 恐 怖 の 極 限 以 外 の 何 ものでもない それでも 水 軍 は 格 軍 がいなければ 戰 えないの である ここに 李 舜 臣 の 悩 みがある 5 李 舜 臣 の 海 民 起 用 とその 意 味 これまでみたように 格 軍 に 編 成 された 鮑 作 人 らは みずから 逃 亡 したり 他 の 格 軍 の 逃 亡 を 幇 助 するなど まことにやっかいな 存 在 でもあったのである それにもかかわらず 鮑 作 人 を 水 軍 に 起 用 したのは それなりの 理 由 があったと 考 えられる すなわち 1592 年 ( 宣 祖 25)9 月 1 日 の 釜 山 浦 海 戰 の 戰 況 報 告 の 中 で 戰 死 者 ではあるが 沙 工 鮑 作 金 叔 連 の 名 のあることが 注 目 に 値 する( 壬 辰 状 草 萬 暦 20 年 9 月 17 日 ) 沙 工 とは 船 頭 であり これは 鮑 作 人 のほか 沙 工 土 兵 水 軍 安 元 世 の 名 もみられる 土 兵 は 土 着 の 兵 卒 であり これまた 海 辺 の 民 である 彼 ら はその 生 活 體 験 から 潮 流 の 干 滿 の 激 しい 慶 尚 南 道 全 羅 南 道 の 海 路 や 暗 礁 の 所 在 を 熟 知 してい るのである 李 舜 臣 とすれば これら 海 を 知 った 鮑 作 人 らの 民 海 を 必 要 しとたのであり それだ けに 李 舜 臣 は 鮑 作 人 ら 格 軍 の 逃 亡 を 必 死 になってくい 止 めようとしたのである おわりに これまで 亂 中 日 記 をつうじて 盗 賊 竊 盗 を 行 う 下 層 民 左 水 營 で 働 く 職 人 格 軍 = 船 漕 ぎ に 編 成 された 降 倭 同 じく 鮑 作 人 などの 海 辺 の 民 の 實 態 をみてきた 盗 賊 竊 盗 は 言 うまでもなく 悪 にほかならない また 逃 亡 する 格 軍 は 水 軍 の 立 場 からみれ ば 罪 にあたる しかし 彼 らは 壬 辰 倭 亂 による 生 活 難 や 恐 怖 から 逃 れ 自 分 自 信 の 生 命 と 生 活 を 守 ろうとしたのである これが 戰 争 における 民 衆 の 生 き 様 なのである しかし 民 衆 すべてが 竊 盗 盗 賊 逃 亡 などの 行 爲 に 及 んだわけではない 全 羅 左 水 營 の 船 大 工 をはじめとする 職 人 集 団 は その 業 務 をつうじて 水 軍 を 支 えてきた また 鮑 作 人 らの 海 辺 の 民 は 逃 亡 などにより 格 軍 への 徴 發 に 逆 らうものの その 労 力 と 海 を 熟 知 する 生 活 體 験 は 李 舜 臣 の 水 軍 を 支 える 役 割 を 果 たしたのである 鮑 作 人 らの 海 辺 の 民 なくして 水 軍 は 成 り 立 たない のである 反 發 するが 協 力 もする この 二 面 性 をもつ 鮑 作 人 をどのように 編 成 するか ここに 李 舜 臣 の 力 量 があった

191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91 さらに 降 倭 に 目 を 轉 ずれば 彼 らもまた 民 衆 である 秀 吉 は 東 アジア 世 界 に 君 臨 する 野 望 を 抱 き 壬 辰 倭 亂 をひき 起 こしたが 降 倭 たちはその 野 望 とは 關 係 ないのである 先 に 島 津 勢 の 兵 卒 與 右 衛 門 の 境 遇 について 述 べたが 兵 卒 労 役 型 の 降 倭 の 境 遇 はそのようなものである 長 期 に わたる 戰 いと 果 てしなく 続 く 城 普 請 の 労 役 から 逃 れ 朝 鮮 側 に 厚 遇 を 期 待 したものの 彼 らの 多 くは 格 軍 に 編 成 され 船 漕 ぎを 強 いられることとなり 皮 肉 にも その 労 力 は 朝 鮮 水 軍 に 寄 與 する 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これまでの 戰 争 の 歴 史 書 には 必 ず 英 雄 偉 人 などについての 叙 述 がある 壬 辰 倭 亂 の 歴 史 書 もその 例 外 ではない 朝 鮮 側 の 人 物 としては 官 人 の 柳 成 龍 武 人 の 李 舜 臣 や 權 慄 義 兵 將 の 郭 再 祐 高 敬 命 義 僧 兵 の 松 雲 大 師 など 日 本 側 では 豐 臣 秀 吉 加 藤 清 正 小 西 行 長 などがほ とんどの 歴 史 書 に 登 場 する しかし 戰 争 に 巻 き 込 まれた 名 もない 人 々 戰 鬪 を 陰 から 支 えた 人 々についての 言 及 は 乏 しい 民 衆 にとって 戰 争 とは 何 であったのか 彼 らは 必 ずしも 國 家 へ の 忠 誠 を 第 一 とするわけではない まず 自 分 の 生 命 と 生 活 を 優 先 する それが 民 衆 にとっての 戰 争 なのである そこで 彼 らはどのような 生 き 方 をとったのか 今 回 のお 話 しはこの 視 點 について の 試 みである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關 係 史 料 * 史 料 1 八 日 庚 申 晴 因 南 海 往 來 人 趙 鵬 聞 賊 犯 光 陽 光 陽 之 人 已 爲 焚 蕩 官 舎 倉 庫 云 不 勝 怪 恠 順 天 光 陽 即 欲 發 送 路 傳 不 可 信 停 之 ( 細 字 双 行 蛇 渡 軍 官 金 鵬 萬 探 知 次 送 之 ) ( 李 舜 臣 亂 中 日 記 癸 巳 7 月 8 日 ) * 史 料 2 九 日 辛 酉 晴 南 海 又 來 傳 云 光 陽 順 天 已 爲 焚 蕩 云 故 光 陽 順 天 及 宋 希 立 金 得 龍 鄭 思 立 等 發 送 李 渫 昨 日 先 送 聞 來 痛 入 骨 髄 不 能 措 語 與 右 令 公 及 慶 尚 令 公 論 事 ( 中 略 ) 三 更 末 營 探 候 船 入 來 傳 賊 奇 則 非 倭 賊 嶺 南 避 亂 之 人 假 著 倭 形 突 入 光 陽 閭 閻 焚 蕩 云 則 不 勝 喜 幸 晋 陽 之 事 亦 虚 云 然 晋 陽 事 萬 無 是 理 ( 亂 中 日 記 癸 巳 7 月 9 日 )

192 19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 史 料 3 十 日 壬 戌 晴 晩 金 鵬 萬 自 豆 恥 來 言 光 陽 之 事 實 矣 而 但 賊 倭 百 餘 名 自 陶 灘 越 渡 已 犯 光 陽 云 然 就 觀 所 爲 則 銃 筒 一 無 度 放 之 云 倭 而 萬 無 不 放 炮 之 理 矣 ( 中 略 ) 昏 呉 水 自 巨 濟 加 参 島 ( 加 助 島 ) 來 告 曰 賊 船 内 外 不 見 云 又 曰 被 虜 人 逃 還 言 内 賊 徒 無 数 還 向 昌 原 等 地 云 然 人 言 未 可 信 矣 ( 亂 中 日 記 癸 巳 7 月 11 日 ) * 史 料 4 十 一 日 癸 亥 晴 蛇 渡 僉 使 ( 金 浣 ) 還 來 言 内 豆 恥 渡 賊 事 虚 傳 而 光 陽 之 變 著 倭 服 自 相 作 亂 云 順 天 樂 安 已 盡 焚 蕩 云 不 勝 痛 憤 々 夕 呉 寿 成 自 光 陽 還 來 告 曰 光 陽 賊 事 皆 晋 州 及 県 人 出 此 兇 計 官 庫 寂 然 閭 里 一 空 終 日 回 觀 無 一 人 云 順 天 尤 甚 而 樂 安 次 之 云 ( 亂 中 日 記 癸 巳 7 月 11 日 ) * 史 料 5 廿 五 日 癸 酉 晴 因 駐 同 處 朝 食 時 唐 浦 鮑 作 偸 放 牛 牽 去 而 虚 警 曰 賊 來 々々 餘 已 知 其 誣 拿 虚 警 者 二 名 即 令 斬 梟 軍 中 大 定 ( 亂 中 日 記 丁 酉 8 月 25 日 ) * 史 料 6 全 羅 道 觀 察 使 李 廷 馣 馳 啓 曰 下 道 一 帯 不 逞 之 徒 乗 時 作 亂 打 破 官 庫 公 然 搶 掠 云 ( 朝 鮮 王 朝 宣 祖 實 録 宣 祖 26 年 8 月 己 丑 ) * 史 料 7 六 月 二 十 二 日 乙 巳 晴 戰 船 始 坐 塊 耳 匠 二 百 十 四 名 運 役 内 營 七 十 二 名 防 踏 三 十 五 名 蛇 渡 二 十 五 名 鹿 島 十 五 名 鉢 浦 十 二 名 呂 島 十 五 名 順 天 十 名 樂 安 五 名 興 陽 寶 城 各 十 名 防 踏 則 初 送 十 五 名 軍 官 色 吏 論 罪 ( 以 下 略 ) ( 亂 中 日 記 癸 巳 6 月 22 日 ) * 史 料 8 二 十 三 日 丙 午 晴 早 朝 點 付 耳 匠 等 則 無 一 名 干 云 新 船 本 板 畢 造 ( 亂 中 日 記 癸 巳 6 月 23 日 )

193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93 * 史 料 9 正 月 二 十 四 日 癸 卯 晴 且 暖 朝 山 役 事 耳 匠 四 十 一 名 宋 德 馹 領 去 ( 亂 中 日 記 甲 午 1 月 24 日 ) * 史 料 10 十 一 月 二 十 七 日 乙 未 晴 金 應 謙 以 二 年 木 斫 來 事 耳 匠 五 名 率 去 ( 亂 中 日 記 乙 未 11 月 27 日 ) * 史 料 11 十 月 三 十 日 丁 亥 晴 而 東 風 多 有 雨 態 ( 中 略 ) 早 使 黄 得 中 率 耳 匠 往 于 島 北 峯 底 造 家 材 木 斫 來 ( 亂 中 日 記 丁 酉 10 月 30 日 ) * 史 料 12 二 月 初 六 日 癸 卯 陰 暁 耳 匠 十 名 送 于 巨 濟 造 船 事 教 之 ( 亂 中 日 記 丙 申 2 月 6 日 ) * 史 料 13 正 月 十 六 日 丁 丑 晴 ( 中 略 ) 城 底 土 兵 朴 夢 世 以 石 手 往 先 生 院 鎖 石 浮 出 處 ( 亂 中 日 記 壬 辰 1 月 16 日 ) * 史 料 14 二 月 十 五 日 丙 午 大 風 雨 ( 中 略 ) 石 手 等 以 新 築 浦 坑 多 致 頽 落 決 罪 使 之 更 築 ( 亂 中 日 記 壬 辰 2 月 15 日 ) * 史 料 15 七 月 七 日 壬 申 晴 ( 中 略 ) 夕 弓 匠 智 伊 及 春 卜 夕 歸 營 ( 亂 中 日 記 丙 申 7 月 7 日 ) * 史 料 16 十 月 廿 三 日 庚 辰 晴 ( 中 略 ) 冶 匠 許 莫 同 往 于 羅 州 初 更 末 使 奴 招 之 則 腹 痛 云 ( 亂

194 19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中 日 記 丁 酉 10 月 23 日 ) * 史 料 17 倭 奴 一 名 來 到 漆 川 山 麓 欲 爲 投 降 故 昆 陽 郡 守 招 降 載 船 問 之 則 乃 永 登 倭 也 ( 亂 中 日 記 甲 午 10 月 6 日 ) * 史 料 18 早 降 倭 五 名 入 來 故 問 其 來 由 則 以 1 其 將 倭 性 悪 役 且 煩 重 逃 來 投 降 云 収 其 大 小 刀 藏 之 楼 上 實 非 釜 山 倭 也 乃 加 德 沈 安 屯 ( 島 津 殿 ) 所 率 云 ( 亂 中 日 記 丙 申 1 月 8 日 ) * 史 料 19 左 兵 使 使 其 軍 官 押 降 倭 二 名 而 來 乃 清 正 所 率 云 ( 亂 中 日 記 丁 酉 7 月 3 日 ) * 史 料 20 嶺 南 諸 屯 倭 賊 厭 其 久 戍 労 役 多 有 降 附 我 國 者 金 應 瑞 所 招 幾 至 百 餘 名 其 酋 曰 金 向 義 向 義 與 其 衆 多 立 戰 功 官 至 通 政 嘉 善 其 後 二 三 年 間 降 倭 等 屯 居 密 陽 之 地 務 農 桑 長 子 孫 名 其 里 降 倭 鎮 ( 趙 慶 男 亂 中 雑 録 甲 午 6 月 ) * 史 料 21 備 辺 司 啓 曰 都 元 帥 權 慄 上 送 降 倭 要 汝 文 称 名 者 捧 招 入 啓 此 倭 則 付 諸 也 汝 文 使 之 同 在 何 如 其 招 曰 年 三 十 居 博 多 州 沈 安 頓 吾 軍 壬 辰 過 海 出 來 住 在 釜 山 三 年 後 還 歸 本 土 今 正 月 間 又 爲 出 來 來 住 釜 山 浦 粗 知 發 矢 且 解 放 砲 行 軍 時 負 旗 前 導 去 月 間 朝 鮮 曾 有 相 知 人 來 言 朝 鮮 厚 待 降 倭 云 故 來 降 父 母 皆 没 只 有 三 箇 同 生 而 一 在 釜 山 二 在 日 本 沈 安 頓 吾 所 率 軍 兵 元 是 三 萬 餘 名 軍 糧 則 藏 置 十 倉 而 非 俺 所 管 不 能 詳 知 其 数 朝 鮮 男 女 時 在 釜 山 者 各 二 千 餘 名 而 糧 食 則 大 概 計 数 摠 給 不 知 實 数 當 初 出 來 時 大 船 三 十 餘 隻 各 載 軍 糧 八 九 十 石 出 來 其 後 間 或 運 到 且 於 朝 鮮 地 方 搶 得 而 食 之 朝 鮮 之 人 皆 給 腰 牌 出 入 陣 中 而 雖 有 腰 牌 者 若 有 罪 即 殺 之 釜 山 両 處 城 子 時 方 修 築 軍 卒 役 事 則 所 食 一 日 三 時 尚 未 畢 役 頃 日 蔚 山 天 兵 接 戰 時 沈 安 頓 吾 在 釜 山 聞 接 戰 之 奇 簡 率 精 兵 三 百 餘 名 向 蔚 山 中 路 還 來 倭 衆 發 動 期 則 皆 云 當 在 八 九 月 間 而 迷 劣 卒 倭 不 能 詳 知 傳 曰 依 啓 ( 朝 鮮 王

195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195 朝 宣 祖 實 録 宣 祖 31 年 5 月 己 丑 ) * 史 料 22 備 辺 司 啓 曰 降 倭 初 欲 入 送 于 深 僻 處 皆 令 上 送 京 中 仍 送 両 界 其 数 已 多 非 徒 道 路 傳 送 之 際 貽 弊 多 端 両 界 郡 邑 一 様 残 破 許 多 降 倭 盡 皆 入 送 亦 非 物 力 之 所 堪 今 後 來 降 而 有 其 才 技 恭 順 可 使 者 留 置 陣 中 其 餘 則 収 其 刀 釼 入 送 于 閑 山 島 舟 師 所 在 分 置 諸 船 以 爲 格 軍 如 有 情 状 可 疑 者 令 諸 將 登 時 善 處 上 従 之 ( 朝 鮮 王 朝 宣 祖 實 録 宣 祖 27 年 9 月 己 丑 ) * 史 料 23 兵 曹 據 全 羅 道 觀 察 使 柳 洵 啓 本 啓 鮑 作 人 等 自 濟 州 而 來 散 處 全 羅 慶 尚 兩 道 海 曲 潛 行 剽 竊 其 漸 可 慮 但 時 無 顯 然 罪 状 治 罪 爲 難 且 雖 欲 刷 還 本 土 必 不 安 業 請 令 所 在 官 守 令 萬 戸 於 船 隻 字 號 著 標 入 海 時 給 路 引 如 無 路 引 或 騎 無 標 船 而 任 意 出 入 則 論 以 海 賊 置 之 重 典 令 所 居 邑 毎 歳 抄 録 人 口 報 觀 察 使 轉 啓 若 守 令 萬 戸 不 能 存 撫 致 令 流 移 請 於 殿 最 憑 考 施 行 從 之 ( 朝 鮮 王 朝 成 宗 實 録 成 宗 14 年 12 月 乙 丑 ) * 史 料 24 全 羅 道 左 水 營 鎭 撫 金 介 同 李 彦 世 等 於 去 年 春 損 竹 島 之 戰 爲 倭 擄 去 轉 賣 南 蕃 國 因 逃 入 中 國 地 界 盤 問 解 送 北 京 謝 恩 使 柳 典 ( 土 ヘン 大 漢 和 5165) 等 之 還 也 順 付 以 來 介 同 等 之 言 曰 有 沙 火 同 者 我 國 珍 島 人 也 被 擄 而 去 因 効 忠 於 倭 奴 謂 介 同 曰 此 地 風 俗 人 心 甚 好 可 居 也 汝 可 無 懼 朝 鮮 則 賦 役 甚 苦 大 小 全 鰒 無 限 徴 出 不 勝 支 當 因 留 居 此 前 年 初 欲 犯 馬 島 加 里 浦 風 候 不 順 泊 于 損 竹 島 此 乃 我 之 所 嚮 導 也 云 云 其 島 名 曰 五 島 周 回 數 日 程 人 居 稠 密 若 一 大 州 我 國 人 被 擄 者 居 多 有 船 五 百 餘 艘 全 羅 右 道 伏 兵 船 全 數 虜 去 故 弓 箭 銃 筒, 亦 皆 輸 去, 而 徒 爲 積 置 不 知 試 用 只 兒 童 爲 戲 具 而 已 ( 朝 鮮 王 朝 宣 祖 實 録 宣 祖 二 十 一 年 十 一 月 丙 寅 ) * 史 料 25 往 在 丁 亥 (1587 年 ) 湖 南 之 變 寶 城 鮑 作 人 沙 火 同 者 被 擄 入 倭 國 向 導 作 耗 辺 警 不 絶 人 心 痛 憤 朝 議 以 爲 若 刷 還 此 人 則 當 使 通 信 云 ( 李 廷 馣 行 年 日 記 己 丑 春 四 留 斎 集 8 所 収 )

196 19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 史 料 26 初 三 日 戊 子 晴 諸 將 准 會 而 寶 城 ( 金 得 光 ) 未 及 東 上 房 出 坐 與 順 天 樂 安 光 陽 ( 魚 泳 潭 ) 論 約 有 時 是 日 嶺 南 來 向 化 金 浩 乞 羅 將 金 水 男 等 置 簿 格 軍 八 十 餘 名 告 以 逃 去 多 受 賂 物 不 捉 來 故 潛 遣 軍 官 李 鳳 寿 鄭 思 立 等 捜 捉 七 十 餘 名 分 船 浩 乞 金 水 男 等 即 日 行 刑 自 戌 時 風 雨 大 作 諸 船 艱 難 救 護 ( 亂 中 日 記 癸 巳 2 月 3 日 ) * 史 料 27 十 三 日 庚 寅 晴 是 日 因 黔 毛 浦 萬 戸 報 慶 尚 右 水 使 所 屬 鮑 作 等 格 軍 逃 載 現 捉 鮑 作 則 隠 在 於 元 水 使 所 駐 處 云 故 送 司 僕 等 推 捉 之 際 元 水 使 大 怒 司 僕 等 結 縛 云 故 送 廬 潤 發 解 之 ( 亂 中 日 記 甲 午 5 月 13 日 ) * 史 料 28 廿 六 日 辛 未 晴 朝 各 官 浦 公 事 題 送 興 陽 鮑 作 莫 同 長 興 軍 三 十 名 潛 載 其 船 逃 出 之 罪 行 刑 梟 示 ( 亂 中 日 記 甲 午 8 月 26 日 )

197 秀吉の 朝鮮侵略についての 學說史と 硏究課題 197 秀吉の朝鮮侵略についての學說史と硏究課題 北島万次 (日本 公立女大) Ⅰ. 江戶時代 の朝鮮認識 および 朝鮮征伐 史觀 1. 江戶時代前期 17世紀 a) 堀正意(Hori Seii) 朝鮮征伐記 江戸時代前期において 秀吉の朝鮮侵略に関する著書をまとめたものとして 堀正意の 朝 鮮征伐記 がある 堀正意は朱子学者藤原惺窩 Fujiwara Seika の門弟であった その 惺窩は丁酉倭乱の時 捕虜として日本に連行された朝鮮朱子学者姜沆と学問上の交流があった それ故 堀正意は惺窩の影響下にあった人物である 正意の著書の 朝鮮征伐記 という表現は 当時の日本において 秀吉の朝鮮侵略を 朝鮮 征伐 と呼称していたことによるものであった ところで その内容は ①秀吉の朝鮮 琉球 フィ リピンへの入貢要求 ②朝鮮侵略における戦局の推移 ③日明講和交渉の破綻に至る顛末 こ れらを記録 文書などの史料を駆使して叙述したところに意味があった そして秀吉が東アジア征 服に目を向けた理由は 1590年 朝鮮国王宛の書翰で秀吉が 自分の名を三国 天竺 唐 本朝 日本に輝かせたい と述べた功名心によるものであり 愛児鶴松 Tsurumstsu の急逝を直 接的契機に明征服を決意したという

198 19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b) 林 羅 山 (Hayashi Razan) 本 朝 通 鑑 林 羅 山 もまた 藤 原 惺 窩 の 門 弟 であった 羅 山 は 本 朝 通 鑑 を 著 わし 堀 正 意 の 場 合 と 同 様 秀 吉 の 征 明 決 意 の 直 接 的 原 因 を 鶴 松 の 急 逝 にあるとした それとともに 秀 吉 の 部 将 間 に 征 明 計 画 について 疑 問 のあったことを 指 摘 し 秀 吉 の 海 外 征 服 計 画 を 批 判 している c) 山 鹿 素 行 (Yamaga Sokou) 武 家 事 紀 林 羅 山 は のち 江 戸 幕 府 の 儒 官 となる 林 (Rin) 家 の 始 祖 となっており 秀 吉 批 判 は 当 然 の ことであったが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を 高 く 評 価 する 学 者 も 出 てきた 武 家 事 紀 を 著 わした 山 鹿 素 行 は 朝 鮮 は 日 本 の 属 国 であり 秀 吉 は 武 威 を 朝 鮮 に 輝 かせたことは 神 功 皇 后 (Jinguukoug ou) 以 来 である と 神 功 皇 后 の 三 韓 征 伐 伝 説 と 秀 吉 の 朝 鮮 征 伐 をオーバラップさせた 露 骨 な 朝 鮮 蔑 視 観 を 唱 えた これが 江 戸 時 代 の 学 者 の 間 における 朝 鮮 蔑 視 観 の 源 流 である d) 島 津 家 編 纂 征 韓 錄 島 津 家 の 征 韓 録 は 朝 鮮 侵 略 に 参 戦 した 大 名 家 の 代 表 的 なものである これは 島 津 家 関 係 の 記 録 文 書 を 素 材 としたところに 文 献 的 な 価 値 はあるが その 編 纂 の 意 図 は 我 が 祖 先 は 朝 鮮 征 伐 に 従 い 武 威 を 顕 した と 朝 鮮 侵 略 における 島 津 家 の 功 名 誇 示 したものであった e) 貝 原 益 軒 (Kaibara Etsuken), 柳 成 龍 懲 毖 錄 の 序 文 17 世 紀 後 半 に 至 って 柳 成 龍 の 懲 毖 録 が 日 本 に 紹 介 された 貝 原 益 軒 その 紹 介 の 序 文 で 秀 吉 が 朝 鮮 を 伐 ったのは 五 つの 兵 の 用 い 方 ( 義 兵 応 兵 貪 兵 驕 兵 忿 兵 )のうち 貪 兵 で 驕 兵 と 忿 兵 をも 兼 ねたものであり 君 子 の 用 いる 義 兵 応 兵 ではない と 批 判 している * 以 上 17 世 紀 における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認 識 を 列 挙 したが 秀 吉 を 高 く 評 価 した のは 山 鹿 素 行 のみであった ところが 江 戸 時 代 後 期 に 至 ると その 認 識 が 大 きく 変 わるのであ る 2. 江 戶 時 代 中 期, 18 世 紀 a) 新 井 白 石 (Arai Hakuseki) 朝 鮮 聘 使 後 議 朝 鮮 通 信 使 の 待 遇 を 簡 素 化 したことで 知 られる 新 井 白 石 は 朝 鮮 は 再 造 の 恩 ( 秀 吉 死 去 のあと 日 本 が 朝 鮮 から 撤 兵 し 国 交 を 結 んで 朝 鮮 を 再 生 させた 恩 )を 長 く 忘 れてはいけない

199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199 とし また 永 く 隣 交 を 結 ぶべき 国 ではないと 露 骨 な 朝 鮮 蔑 視 観 を 示 した b) 中 井 竹 山 (Nakai Chikuzan), 草 茅 危 言 (souboukigen) 儒 学 者 中 井 竹 山 は 朝 鮮 は 神 功 皇 后 の 新 羅 遠 征 以 来 日 本 の 属 国 として 朝 貢 していたが 秀 吉 が 朝 鮮 に 故 なき 兵 端 を 起 したため 以 後 朝 鮮 は 日 本 に 朝 貢 しなくなり それにかわって 通 信 使 派 遣 するようになった それ 故 朝 鮮 は 日 本 の 属 国 とは 言 えないが 国 家 の 財 政 を 傾 けてま で 応 接 する 国 ではない と 山 鹿 素 行 および 新 井 白 石 と 同 じような 認 識 を 持 っていた c) 本 居 宣 長 (Motoori Norinaga), 馭 戎 慨 言 (karaosamenouretamigoto) 国 学 者 本 居 宣 長 は 皇 国 日 本 中 心 の 立 場 に 立 って 馭 戎 慨 言 を 著 わした その 中 で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も 述 べ 秀 吉 が 偉 業 なかばで 死 去 したことを 残 念 とし さらに 秀 吉 は 皇 国 日 本 の 光 を 朝 鮮 中 国 まて 輝 かした と 讃 えている d) 林 子 平 (Hayashi Shihei), 三 國 通 覽 圖 說 海 國 兵 談 18 世 紀 後 半 欧 米 列 強 が 東 アジアの 国 々に 迫 ってきた ここで 海 防 問 題 が 起 きる 海 防 と 文 武 の 必 要 を 説 く 林 子 平 は 朝 鮮 問 題 についても 言 及 し 神 功 皇 后 の 三 韓 征 伐 と 秀 吉 の 朝 鮮 征 伐 を 神 武 一 統 以 来 の 武 徳 と 評 価 した e) 本 多 利 明 (Honda Toshiakira), 經 世 秘 策 本 多 利 明 は 林 子 平 についで 海 防 問 題 を 論 じた そこで 本 多 利 明 は 蝦 夷 樺 太 カムチャツカ の 領 有 経 略 を 主 張 し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は 中 国 までを 視 野 に 入 れ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を 評 価 したのである f) 山 崎 尙 長 (Yamazaki Hisanaga), 兩 國 壬 辰 實 記 山 崎 尚 長 は 対 馬 藩 の 釜 山 鎮 代 官 であった 両 国 壬 辰 実 記 は 朝 鮮 侵 略 の 発 端 から 江 戸 幕 府 成 立 期 における 両 国 の 和 好 成 就 までの 過 程 を 朝 鮮 征 伐 記 朝 鮮 太 平 記 ( 日 本 側 の 記 録 ) 柳 成 龍 著 懲 毖 録 ( 朝 鮮 側 の 記 録 )を 用 い 客 観 的 に 叙 述 したものであり この 両 国 壬 辰 実 記 成 立 の 背 景 には 対 馬 藩 の 儒 臣 朝 岡 一 学 ( 新 井 白 石 と 朝 鮮 通 信 使 待 遇 をめぐって 論 争 した 対 馬 藩 の 儒 臣 雨 森 芳 洲 の 門 弟 )の 秀 吉 の 朝 鮮 侵 略 史 についての 博 識 があった

200 20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3. 江 戶 時 代 後 期, 19 世 紀 a) 賴 山 陽 (Rai Sanyou), 日 本 外 史 頼 山 陽 は 秀 吉 は 全 国 統 一 したものの 諸 大 名 の 間 に 功 名 を 好 む 心 と 戦 闘 する 力 が 残 って おり それを 外 に 転 じて 大 名 権 力 をそいだのが 朝 鮮 出 兵 である と 豊 臣 政 権 の 本 質 からその 原 因 について 批 判 的 な 叙 述 をしている しかし この 頃 朝 鮮 を 侵 略 の 対 象 とする 立 場 から 秀 吉 の 侵 略 を 朝 鮮 征 伐 として 高 く 評 価 する 学 者 が 大 勢 を 占 めるようになってきた b) 佐 藤 信 淵 (Satou Nobuhiro), 混 同 秘 策 佐 藤 信 淵 は 万 国 は 皇 国 日 本 を 以 て 根 本 とする と 超 国 家 主 義 的 な 考 えを 持 ち 中 国 朝 鮮 など 近 隣 諸 国 を 征 服 の 対 象 とする 論 旨 を 展 開 した c) 會 澤 正 志 齋 (AAizawa Seishisai), 退 食 間 話 新 論 水 戸 学 の 会 沢 正 志 斎 は 退 食 間 話 の 中 で 神 功 皇 后 が 三 韓 を 征 伐 してから 朝 鮮 は 服 従 し ( 中 略 ) 秀 吉 は 朝 鮮 を 伐 って 威 を 海 外 に 奮 った と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を 評 価 する そし て 江 戸 幕 府 が 異 国 船 打 払 令 ( 外 国 船 が 接 近 したらことごとく 打 払 え)を 契 機 として 著 わした 新 論 では 朝 鮮 侵 略 において 水 軍 が 利 を 失 ったことの 教 訓 を 重 視 する これは 水 戸 学 に おける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への 関 心 事 が 開 国 前 夜 の 国 防 および 軍 事 的 要 請 に 由 来 するものである d) 吉 田 松 陰 (Yoshida Shouin), 1855 年 ( 安 政 2) 年 4 月 24 日, 兄 梅 太 郞 宛 書 翰 ( 吉 田 松 陰 全 集 第 7 卷 ) すでにペリーが 来 航 し 日 本 は 開 国 していたこの 時 期 吉 田 松 陰 は 日 本 国 内 における 争 いの 無 意 味 を 力 説 するとともに ロシアとの 交 易 で 損 失 した 分 を 朝 鮮 満 州 を 手 にいれることによって 補 う べしと 提 案 した それとの 関 連 で 歴 史 を 振 り 返 り 秀 吉 の 東 アジア 征 服 計 画 の 頓 座 を 無 念 とする 4 川 口 長 孺 (Kawaguchi Choujyu) 征 韓 偉 略 征 韓 偉 略 の 内 容 は 1 室 町 時 代 の 日 朝 関 係 2 信 長 配 下 の 時 秀 吉 はすでに 明 朝 鮮 征 服 の 意 志 があったこと 3 秀 吉 が 対 馬 の 宗 氏 に 朝 鮮 服 属 交 渉 を 命 じた 経 緯 4 第 一 次 朝 鮮 侵 略 の 顛 末 5 日 明 講 和 交 渉 とその 破 綻 6 第 二 次 侵 略 の 顛 末 を 述 べたものである その 特 徴 は 1 朝 鮮 征 伐 記 西 征 日 記 宗 氏 家 記 征 韓 録 懲 毖 録 明 史 両 朝 平 攘

201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01 録 などの 記 録 類 を 基 本 史 料 として 適 宜 史 料 批 判 を 加 えた 実 証 的 密 度 の 高 いものであるこ と 2 全 体 の 論 調 は 秀 吉 の 征 韓 偉 績 を 讃 えたものである 点 にある しかし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 基 本 的 な 筋 書 きをまとめたものであり 近 代 における 秀 吉 の 朝 鮮 侵 略 史 研 究 にへの 影 響 は 大 きく 近 代 の 歴 史 学 は 川 口 長 孺 の 叙 述 した 筋 書 きをふまえ それにあらたな 視 点 を 加 え 征 韓 偉 略 を 積 極 的 あるいは 批 判 的 に 摂 取 したのである Ⅱ 近 代 歷 史 學 における 朝 鮮 征 伐 史 觀 と 文 錄 慶 長 の 役 硏 究 1 朝 鮮 征 伐 史 觀 と 國 威 の 昻 揚 a) 木 下 眞 弘 著 豊 太 閤 征 外 新 史 (1893 年 刊 ) この 著 書 で 木 下 真 弘 は1592 年 の 朝 鮮 侵 略 の 発 端 から 翌 年 1 月 の 平 壌 の 戦 いの 直 前 まで を 史 料 を 駆 使 して 叙 述 した b) 松 本 愛 重 編 豊 太 閤 征 韓 秘 錄 (1894 年 刊 ) 松 本 愛 重 のこの 仕 事 は 史 料 集 であり 堀 正 意 の 朝 鮮 征 伐 記 松 浦 鎮 信 の 家 臣 吉 野 甚 五 左 衛 門 の 吉 野 日 記 立 花 宗 茂 の 家 臣 天 野 源 右 衛 門 の 南 大 門 合 戦 記 花 園 妙 心 寺 の 僧 天 荆 の 西 征 日 記 を 紹 介 したものである ここで 指 摘 しておきたいことは その 編 集 の 意 図 であ る すなわち 1これまで 日 本 は 遠 征 の 兵 を 出 したことは 3 回 ある それは 神 功 皇 后 の 三 韓 征 伐 斉 明 天 皇 の 時 の 百 済 救 援 秀 吉 の 征 韓 の 役 である 2 秀 吉 の 征 韓 の 役 は 朝 鮮 を 征 伐 する ことが 目 的 でなく 道 を 朝 鮮 に 借 りて 中 国 を 攻 めとり ついて ヨーロッパも 征 服 して 武 威 を 海 外 に 輝 かそうとしたものであると 秀 吉 の 偉 業 を 評 価 する 3そして 時 あたかも 日 清 戦 争 勃 発 の 直 後 であり 秀 吉 の 偉 業 を 紹 介 して それを 日 清 戦 争 の 戦 意 昂 揚 に 寄 与 しよう というもので あった 2 官 學 アカデミズムと 朝 鮮 征 伐 史 觀 a) 東 京 帝 國 大 學 史 學 會 編 弘 安 文 祿 征 戰 偉 績 (1905 年 刊 ) これは13 世 紀 のモンゴル 襲 来 と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 論 文 集 である その 編 修 の 意 図 は

202 20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日 露 戦 争 の 戦 意 昂 揚 を 目 的 としたものであった さきの 松 本 愛 重 の 仕 事 は 個 人 の 仕 事 であった が これは 大 学 の 歴 史 学 会 の 仕 事 である 史 学 会 会 長 重 野 安 繹 (Shigeno Yasutsugu)の 緒 言 によれば モンゴル 襲 来 と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の 偉 業 を 讃 え この 論 文 集 を 日 露 戦 争 で 戦 う 軍 隊 への 慰 問 品 とし さらに 歴 史 教 育 の 素 材 としても 寄 与 させる というものであった この 意 図 に 即 してか 例 えば 鈴 木 圓 二 の 論 文 蔚 山 籠 城 状 況 では 蔚 山 籠 城 に 関 する 加 藤 清 正 (Katou Kiyomasa)と 浅 野 幸 長 (Asano Yoshinaga)の 文 書 を 紹 介 したあと 兵 糧 不 足 に 悩 ませわれながら 籠 城 戦 に 勝 利 したことをあげ そして 今 日 (1905 年 当 時 ) 日 本 軍 はロシア 軍 と 戦 い 連 戦 連 勝 している 清 正 の 時 代 と 比 べれば 今 日 の 日 本 軍 は 武 器 の 進 歩 作 戦 計 画 の 緻 密 さをみるが その 武 勇 は 清 正 の 武 勇 に 見 劣 りすることはない と 述 べてい る また 芝 葛 盛 の 論 文 文 禄 役 に 於 ける 占 領 地 収 税 の 一 斑 では 咸 鏡 南 道 において 鍋 島 直 茂 (Nabeshima Naoshige)が 朝 鮮 農 民 が 租 税 徴 収 のために 作 成 した 朝 鮮 国 租 税 牒 を 紹 介 し 朝 鮮 国 租 税 牒 の 作 成 は 鍋 島 ら 日 本 軍 の 恩 威 が 徹 底 し 民 がよく 服 属 したことを 物 語 っている という さらに 八 代 國 治 の 論 文 文 禄 役 に 於 ける 俘 虜 の 待 遇 では 加 藤 清 正 が 捕 らえた 朝 鮮 王 子 の 待 遇 について 述 べている その 後 の 日 明 講 和 交 渉 のさい 清 正 は 秀 吉 の 命 令 によって 王 子 をソウルに 還 したが そのさい 王 子 は 清 正 および 鍋 島 直 茂 から 厚 い 待 遇 を 受 けたことを 感 謝 し た これにつき 八 代 は 加 藤 清 正 も 鍋 島 直 茂 も 博 愛 仁 慈 な 人 物 であり それは 日 本 国 民 の 天 性 でるある 日 露 戦 争 における 俘 虜 にも このような 哀 隣 を 加 えるべし という このように 各 論 文 の 結 論 的 部 分 で 戦 意 昂 揚 に 寄 与 する 叙 述 があるが 各 論 を 細 かく 読 んで みると あらたな 特 徴 が 見 えてくる それは 史 料 の 扱 い 方 と 論 点 提 示 である 史 料 の 扱 い 方 について 述 べるならば 先 にあげた 川 口 長 孺 征 韓 偉 略 の 史 料 はほとんど 記 録 類 である この 記 録 類 には 対 馬 の 島 主 宗 義 智 (Sou Yoshitoshi)に 従 って 従 軍 した 天 荆 の 西 征 日 記 自 分 の 体 験 をもとづいてまとめた 朝 鮮 領 議 政 柳 成 龍 の 懲 毖 録 などのリア ルタイムの 史 料 もあれば 朝 鮮 征 伐 記 宗 氏 家 記 征 韓 録 明 史 両 朝 平 攘 録 な ど 後 から 編 纂 された 史 料 も 多 く 含 まれている これに 対 し 弘 安 文 禄 征 戦 偉 績 の 各 論 では 例 えば 田 中 義 成 豊 太 閤 が 外 征 の 大 目 的 を 示 したる 文 書 では 1592( 天 正 20) 年 5 月 18 日 秀 吉 が 関 白 豊 臣 秀 次 に 宛 てた 大 陸 征 服 構 想 25ヵ 条 の 覚 書 ( 前 田 尊 経 閣 文 庫 所 蔵 文 書 )を 用 いている また 岡 田 正 之 文 禄 役 に 於 ける 我 戦 闘 力 は 毛 利 家 文 書 鍋 島 家 文 書 などを 用 いて 日 本 軍 の 朝 鮮 侵 入 のいきさつなど

203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03 説 明 している これら 古 文 書 は 日 記 と 同 じくリアルタイムの 史 料 であり 史 料 の 価 値 が 高 いので ある ここにこれまでの 研 究 よりは 進 んだ 側 面 が 見 られる つぎに 論 点 提 示 について 述 べるならば その 第 一 は 秀 吉 の 大 陸 出 兵 の 意 図 目 的 に 関 して である 秀 吉 は 日 本 朝 鮮 中 国 の 三 国 のみならず 天 竺 南 蛮 まで 征 服 する 意 図 があり( 田 中 義 成 前 掲 論 文 三 上 参 次 文 禄 役 に 於 ける 講 和 条 件 ) ここから 秀 吉 の 大 陸 出 兵 の 目 的 を 具 体 的 にとらえる 視 点 が 出 てきた そして 秀 吉 の 大 陸 征 服 の 意 図 が 文 書 のうえに 現 れた 時 期 は1586 ( 天 正 14) 年 であるという 説 が 出 てきた( 岡 田 正 之 前 掲 論 文 ) これは 1960 年 代 に 岩 沢 愿 彦 が 伊 予 小 松 一 柳 文 書 を 用 いて 秀 吉 の 大 陸 征 服 の 意 図 が 文 書 のうえに 現 れた 時 期 は1585 ( 天 正 13) 年 であるという 説 をとなえるまでの 定 説 となっていた 第 二 は 秀 吉 の 軍 事 政 策 日 本 軍 の 行 動 に 関 する 問 題 についてである 秀 吉 は 対 馬 の 宗 氏 を 介 して 朝 鮮 が 服 属 するか 否 かを 待 たとうとしたが やがて 朝 鮮 の 態 度 如 何 にかかわらず 朝 鮮 に 兵 を 発 したという 経 緯 を 指 摘 する( 岡 田 正 之 前 掲 論 文 ) ここから 豊 臣 政 権 宗 氏 そして 朝 鮮 の 三 者 の 関 係 を 解 いていく 糸 口 が 提 示 された また 侵 略 の 当 初 日 本 軍 が 朝 鮮 農 民 に 対 し 家 に 還 って 農 耕 に 励 めと 命 令 した 目 的 は 租 税 兵 糧 徴 収 ( 三 浦 周 行 豊 太 閤 の 軍 律 芝 葛 盛 前 掲 論 文 )にあったという これは 朝 鮮 側 に 義 兵 決 起 させるきっかけとなり やがて 戦 局 全 体 にかかわる 問 題 にも 発 展 してゆく 第 三 は 連 行 された 朝 鮮 人 捕 虜 の 問 題 である 朝 鮮 陶 工 の 日 本 連 行 が 日 本 陶 工 業 の 発 達 をも たらしたというが( 平 井 鏗 二 郎 文 禄 役 の 我 が 工 芸 に 及 ぼせる 影 響 ) それは 侵 略 による 文 化 の 掠 奪 伝 播 であった この 捕 虜 についての 研 究 は のちに 内 藤 雋 輔 が 究 明 することとなる 第 四 は 侵 略 における 禅 僧 のかかわりの 問 題 である 小 早 川 隆 景 に 従 軍 した 安 国 寺 恵 瓊 は 通 事 育 成 のため 朝 鮮 人 に 日 本 の 言 語 風 習 を 強 要 し 朝 鮮 明 の 書 籍 を 収 奪 した さらに 秀 吉 幕 下 に 西 笑 承 兌 玄 圃 霊 三 惟 杏 永 哲 ら 京 都 五 山 高 僧 が 秘 書 兼 参 謀 として 随 行 したことを 指 摘 する( 辻 善 之 助 安 国 寺 恵 瓊 の 書 簡 の 一 節 ) ここに 朝 鮮 侵 略 には 武 家 のみならず 禅 宗 の 僧 侶 も 一 定 の 役 割 を 担 って 加 わった 問 題 が 出 てくる 第 五 は 武 器 船 舶 など 軍 事 技 術 に 関 することがらである( 岡 田 正 之 前 掲 論 文 ) この 論 点 に 関 しては 後 に 有 馬 成 甫 の 朝 鮮 役 水 軍 史 や 日 本 参 謀 本 部 の 日 本 戦 史 朝 鮮 役 などに おいて 軍 事 的 関 心 から 継 承 されてゆく 第 六 に 豊 臣 政 権 の 外 交 文 書 に 関 する 問 題 である 秀 吉 がフィリピン 高 山 国 に 服 属 を 強 要 し た 文 書 があることは 豊 臣 政 権 の 対 外 関 係 を 日 本 朝 鮮 明 三 国 間 のみならず 東 アジア 全 域 を 捉 える 視 点 として 提 示 した( 村 上 直 次 郎 豊 臣 秀 吉 フィリッピン 諸 島 并 に 台 湾 の 入 貢 を 促 す )

204 20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この 視 点 は のち 池 内 宏 がさらに 論 点 を 深 めてゆくこととなる 第 七 は 朝 鮮 侵 略 に 参 戦 した 諸 大 名 の 戦 功 誇 示 にかかわる 問 題 である 島 津 家 が 建 てた 高 野 山 朝 鮮 陣 の 供 養 碑 は 戦 死 した 島 津 家 家 臣 および 朝 鮮 明 の 兵 士 を 供 養 を 目 的 としたもの であるが そこでは 島 津 家 の 全 羅 道 南 原 と 慶 尚 道 泗 川 の 戦 捷 を 誇 示 している( 黒 板 勝 美 高 野 山 朝 鮮 陣 の 供 養 碑 ) のち 島 津 家 は 征 韓 録 を 編 纂 し 他 の 諸 大 名 家 も 同 様 の 意 図 で 戦 功 記 を 編 纂 するが ここから 諸 大 名 家 にとって 朝 鮮 侵 略 とはどのような 意 味 を 持 つものである かの 論 点 が 提 示 される b) 辻 善 之 助 海 外 交 通 史 話 (1917 年 刊 ) 田 中 義 成 豊 臣 時 代 史 (1925 年 刊 ) 辻 田 中 の 二 人 は この 著 書 において 秀 吉 の 海 外 派 兵 の 原 因 をつぎのようにとなえる すな わち 秀 吉 は 明 との 勘 合 貿 易 復 活 を 望 み 朝 鮮 にその 斡 旋 を 求 めたが 朝 鮮 がこれを 拒 否 した ため 朝 鮮 を 征 伐 したと これが 歴 史 学 の 上 で 朝 鮮 征 伐 の 論 理 を 主 張 したものであっ た やがて この 学 説 は 池 内 宏 田 保 橋 潔 中 村 栄 孝 らの 批 判 するところとなる c) 補 論, 朝 鮮 征 伐 と 文 祿 慶 長 の 役 の 呼 稱 について 石 原 道 博 文 禄 慶 長 の 役 (1963 年 刊 )は 朝 鮮 征 伐 から 文 禄 慶 長 の 役 への 呼 称 の 変 化 について つぎのようのに 述 べている 1904~05 年 の 日 露 戦 争 を 経 て 1910 年 の 日 韓 合 併 が 実 現 されると( 中 略 ) これまで 敵 視 していた 朝 鮮 人 が 日 本 の 同 胞 という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から ( 中 略 ) 朝 鮮 征 伐 という 表 現 も やめて 文 禄 慶 長 の 役 ということになった (P21)と この 考 え 方 は 創 氏 改 名 の 強 要 をはじめ とする いわゆる 内 鮮 一 体 と 軌 を 一 にするものにほかならないが これ 以 降 文 禄 慶 長 の 役 の 呼 称 が 定 着 するようになった 3 池 內 宏 文 祿 慶 長 の 役 正 編 第 一 (1914 年 刊 ) 文 祿 慶 長 の 役 別 編 第 一 (1936 年 刊 ) a) 池 內 宏 の 硏 究 構 想 は 1 朝 鮮 侵 略 全 体 の 通 論 を 正 編 2 侵 略 開 始 後 の 日 本 軍 の 詳 細 な 行 動 を 別 編 3 史 実 について 論 証 を 要 する 事 項 を 付 編 として 秀 吉 の 朝 鮮 侵 略 史 を 通 史 として 把 握 しようとする ものであった この 仕 事 の 特 徴 は 未 完 成 に 終 ったものの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の 全 体 像 をとらえる 視

205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05 点 にあった b) 文 祿 慶 長 の 役 正 編 第 一 の 要 点 はつぎのようである 第 一 は 日 本 全 国 を 統 一 する 過 程 で 秀 吉 の 意 識 の 中 で 東 アジア 征 服 のスケジュールがど のように 具 体 化 されたか という 問 題 である それについて 池 内 はつぎのように 整 理 する 年 日 本 全 国 平 定 後 明 征 服 の 考 えのあることを 秀 吉 はイエズス 会 宣 教 師 に 述 べてい る 2 九 州 の 島 津 氏 討 伐 を 目 前 にした1586 年 秀 吉 は 安 国 寺 恵 瓊 (Ankokuji Ekei) 黒 田 孝 高 (Kuroda Yoshitaka)らに 島 津 氏 を 服 属 させたあと 明 征 服 計 画 があるという 3 九 州 征 服 と 博 多 の 復 興 により 秀 吉 は 東 アジア 諸 国 を 服 属 させる 構 想 を 立 てている 年 伊 達 政 宗 (Date Masamune)が 蘆 名 義 広 (Ashina Yoshihiro)の 領 地 である 會 津 を 奪 ったことに ついて これを 咎 めた 秀 吉 は 日 本 国 内 ばかりでなく 明 まで 秀 吉 の 承 認 によって 領 地 を 与 える 考 えを 示 し 日 本 統 一 の 延 長 線 上 に 明 征 服 を 計 画 していた 年 朝 鮮 国 王 宛 の 書 翰 に 明 征 服 の 意 図 を 示 し 朝 鮮 はこの 先 導 にあたることを 命 令 した 第 二 は 秀 吉 の 海 外 出 兵 の 動 機 と 目 的 についてである その 動 機 について 池 内 はこれま で 1 愛 児 鶴 松 の 急 逝 による 憂 さ 晴 らしを 外 征 に 求 め 国 内 統 一 の 余 勢 を 海 外 に 転 嫁 しようとした ものとする 説 ( 堀 正 意 林 羅 山 ) 2 無 用 の 兵 を 動 かした 貪 兵 驕 兵 説 ( 貝 原 益 軒 ) 3 朝 鮮 を 介 して 明 に 勘 合 貿 易 復 活 を 要 求 し 朝 鮮 の 拒 絶 にあって 朝 鮮 征 伐 に 及 んだとする 説 ( 辻 善 之 助 田 中 義 成 )を 批 判 する これに 対 し 池 内 は 秀 吉 の 動 機 について 佳 名 を 三 国 ( 唐 南 蛮 天 竺 )に 顕 して 後 世 に 残 そうとする 功 名 心 にあると 主 張 する そして 池 内 は 秀 吉 の 当 面 の 目 的 は 明 征 服 であり 朝 鮮 国 王 の 参 洛 服 属 はその 第 一 歩 であ り 秀 吉 に 朝 鮮 征 伐 の 意 志 はないと 朝 鮮 征 伐 説 を 否 定 したのである 第 三 は 対 馬 宗 氏 をつうじた 対 朝 鮮 服 属 交 渉 と 朝 鮮 出 兵 遂 行 に 至 る 事 情 である ここに 秀 吉 と 朝 鮮 の 板 挟 みにあって 苦 悩 する 対 馬 の 実 情 を 述 べている 以 上 の 内 容 の 叙 述 について 池 内 は 日 本 朝 鮮 双 方 の 史 料 のみならず スペイン ポルトガ ルの 南 蛮 史 料 をも 駆 使 して 論 証 を 深 めている c) 文 祿 慶 長 の 役 別 編 第 一 の 要 点 はつぎのようである 第 一 は 朝 鮮 に 渡 海 した 日 本 軍 がソウルを 占 領 するまでの 過 程 についてである 年 4 月 14 日 小 西 行 長 (Konishi Yukinaga) 宗 義 智 の 第 一 軍 が 釜 山 に 上 陸 し 釜 山 鎮 と 東 萊 城 を 陥 し 5 月 3 日 東 大 門 からソウルに 乱 入 するまでの 過 程 2 小 西 より 遅 れ

206 20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て 4 月 17 日 金 海 に 上 陸 した 加 藤 清 正 鍋 島 直 茂 らが 5 月 3 日 南 大 門 からソウルに 乱 入 するまでの 過 程 3つづいて 黒 田 長 政 (Kuroda Nagamasa)らがソウルに 乱 入 するまでの 過 程 などを そのルートをふまえて 明 らかにした かくして ソウル 占 領 後 日 本 の 諸 大 名 は 分 担 して 朝 鮮 八 道 の 支 配 にあたったという 第 二 は 小 西 行 長 黒 田 長 政 の 平 安 道 および 黄 海 道 の 支 配 の 実 態 である すなわち 1592 年 5 月 半 ば 平 安 道 支 配 にあたる 小 西 行 長 宗 義 智 黄 海 道 支 配 にあたる 黒 田 長 政 咸 鏡 道 支 配 に あたる 加 藤 清 正 鍋 島 直 茂 らは 臨 津 江 の 戦 いのあと 開 城 を 占 領 し 黄 海 道 宝 山 駅 から 清 正 らは 咸 鏡 道 へ 小 西 黒 田 らは 平 安 道 へ 向 かった そして6 月 半 ば 朝 鮮 国 王 は 義 州 へ 逃 れ 小 西 黒 田 らは 平 壌 を 占 領 した これにより 黒 田 長 政 は 黄 海 道 へ 戻 ったが 小 西 の 平 安 道 支 配 は 容 易 に 進 まなかった それは 平 壌 周 辺 の 朝 鮮 吏 民 が 義 兵 決 起 したこと そのうえ 明 遼 東 の 副 総 兵 祖 承 訓 の 平 壌 襲 撃 (これは 小 西 勢 によって 撃 退 された)があったことによる なお 明 軍 のい ち 早 い 朝 鮮 救 援 について 朝 鮮 在 陣 の 日 本 軍 はその 対 策 を 迫 られることとなる という 一 方 黒 田 長 政 は 黄 海 道 において 厳 しい 軍 政 を 強 行 したが 義 兵 の 反 撃 を 受 け その 支 配 は 進 まなかった という 第 三 は 加 藤 清 正 鍋 島 直 茂 の 咸 鏡 道 支 配 の 実 態 である 黄 海 道 宝 山 駅 から 咸 鏡 道 へ 向 かっ た 清 正 らは 6 月 半 ば 咸 鏡 道 安 辺 に 到 った その 後 清 正 らのとった 行 動 はつぎのことがらで ある 17 月 後 半 清 正 は 咸 鏡 道 会 寧 で 二 人 の 朝 鮮 王 子 を 捕 らえた これは 朝 鮮 国 家 に 反 感 を 懐 く 叛 民 が 王 子 一 行 を 捕 らえ 清 正 に 引 き 渡 したことによるものであること 2 清 正 は 豆 満 江 を 越 えてオランカイに 侵 入 した この オランカイ 征 伐 こついては 清 正 が オランカイから 明 へ 入 る 道 を 探 ろうとしたという 説 があるが 池 内 は 清 正 が 武 威 のほどをオランカ イの 女 真 に 示 そうとするものと 主 張 する 3 鍋 島 直 茂 が 咸 鏡 道 支 配 のために 朝 鮮 国 租 税 牒 を 作 成 したことについて 先 にあげた 芝 葛 盛 は 鍋 島 ら 日 本 軍 の 恩 威 が 徹 底 し 民 がよく 服 属 したことを 物 語 っている という これに 対 し 池 内 は 人 情 風 俗 の 異 なる 朝 鮮 農 民 を 日 本 の 軍 政 に 従 わせることは 不 可 能 であると その 限 界 を 指 摘 し 咸 鏡 道 における 朝 鮮 義 兵 の 反 撃 と 日 本 軍 の 籠 城 さらに 咸 鏡 道 からの 撤 退 について 叙 述 する 以 上 池 内 宏 の 仕 事 は 日 本 朝 鮮 双 方 の 史 料 を 用 い いつ 誰 が どこで 何 をしたか 詳 細 に 叙 述 したものである この 研 究 の 特 徴 は 実 証 主 義 に 徹 底 したことにあり その 方 法 と 史 料 の 扱 い は 後 学 に 大 きな 影 響 を 与 えた その 影 響 を 受 けたものとして 中 村 栄 孝 のひとつの 仕 事 がある

207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中 村 學 孝 慕 夏 堂 金 忠 善 に 觀 する 史 料 に 就 いて ( 靑 丘 學 叢 12, 1933 年 5 月 ) 周 知 のように 日 本 軍 の 将 兵 が 朝 鮮 側 に 投 降 したものは 降 倭 と 呼 ばれている 降 倭 として 有 名 なものに 慶 尚 北 道 友 鹿 洞 の 金 忠 善 の 場 合 がある 18 世 紀 末 金 忠 善 の 子 孫 たちが 金 忠 善 の 年 譜 とその 記 録 を 慕 夏 堂 文 集 としてまとめ 金 忠 善 を 顕 彰 したが それによると 金 忠 善 は 沙 也 可 (Sayka)とあり 沙 也 可 の 日 本 名 は 特 定 できない 1592 年 4 月 沙 也 可 は 加 藤 清 正 の 先 鋒 將 として 朝 鮮 侵 略 に 従 軍 したが 朝 鮮 の 東 土 礼 義 の 俗 を 見 中 華 文 物 の 盛 んなるを 慕 い その 配 下 を 率 いて 朝 鮮 側 に 投 降 し 壬 辰 倭 乱 に 功 労 を 立 て た このため 朝 鮮 国 王 から 官 職 を 受 け 金 海 金 氏 の 姓 を 賜 り 秀 吉 の 朝 鮮 侵 略 終 結 後 も 朝 鮮 に 仕 え 慕 夏 堂 の 号 を 受 けた その 後 子 孫 は 繁 栄 したのである ところが1910 年 の 日 韓 併 合 のころ 幣 原 坦 内 藤 湖 南 青 柳 綱 太 郎 らの 帝 国 主 義 の 御 用 学 者 が 我 が 皇 国 日 本 にあってそのような 裏 切 者 がいるはずはない 慕 夏 堂 文 集 は 偽 作 であ り 金 忠 善 は 売 国 奴 である と 決 めつけた これに 対 し 1933 年 当 時 朝 鮮 総 督 府 朝 鮮 史 編 修 官 であった 中 村 栄 孝 は その 仕 事 の 過 程 で 1597 年 11 月 に 慶 尚 右 兵 使 金 応 瑞 のもとで 日 本 軍 と 戦 う 沙 也 可 を 朝 鮮 王 朝 実 録 の 中 から 見 つけ 沙 也 可 の 存 在 を 証 明 したのである( 朝 鮮 王 朝 宣 祖 実 録 宣 祖 30 年 11 月 己 酉 ) 降 倭 の 存 在 を 歴 史 から 抹 殺 するという 幣 原 坦 らの 歴 史 家 にあるまじき 行 為 に 対 し ゆ るぎなき 実 証 をもって 反 論 を 加 えた 中 村 栄 孝 の 研 究 姿 勢 と 勇 気 は 高 く 評 価 されるものである 5 參 謀 本 部 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1923 年 刊 ) この 戦 史 編 纂 の 意 図 は 文 禄 慶 長 の 役 は 神 功 皇 后 以 来 の 外 征 であり 大 いに 国 威 を 海 外 に 輝 かしたもの と 評 価 し その 軍 事 的 関 心 からまとめたものである この 戦 史 の 特 徴 は 1 戦 争 の 実 態 を 日 本 朝 鮮 明 の 史 料 に 即 し 正 確 に 復 元 したこと 2 戦 争 の 経 緯 ( 軍 備 計 画 軍 事 折 衝 個 々の 戦 いの 内 容 )の 具 体 的 叙 述 3 兵 制 兵 器 築 城 兵 糧 兵 站 衛 生 運 輸 通 信 船 舶 軍 紀 民 政 などについて 日 本 朝 鮮 明 三 国 の 実 態 を 調 査 したこと 4 関 係 文 書 を 年 代 的 にまとめたことにある

208 20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Ⅲ 戰 後 および 現 代 歷 史 學 における 朝 鮮 侵 略 硏 究 とその 問 題 意 識 1 鈴 木 良 一 豊 臣 秀 吉 (1954 年 刊 ) かつて 東 京 大 学 で 池 内 宏 から 学 んだ 鈴 木 良 一 は これまでの 学 説 史 をふりかえり 文 禄 慶 長 の 役 研 究 はあるものの 侵 略 と 抵 抗 の 歴 史 研 究 はない と 学 説 史 を 批 判 した そし て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 対 する 朝 鮮 人 民 の 闘 いを 評 価 し 池 内 学 説 の 批 判 的 摂 取 を 試 みたので あった その 論 点 はつぎのようであった 1ヨーロッパ 商 業 資 本 に 対 抗 し 東 アジア 世 界 における 勘 合 貿 易 や 倭 寇 の 貿 易 をうわまわる 貿 易 を 望 んだ 日 本 の 商 業 資 本 の 要 求 があったこと 2 土 一 揆 以 来 の 農 民 の 力 をはぐらかし 領 土 拡 張 を 望 んだ 諸 大 名 の 要 求 があったこと 3この12が 秀 吉 のもとに 統 一 され 秀 吉 は 専 制 君 主 的 な 性 格 を 帯 びるようになった そして 豊 臣 政 権 はヨーロッパ 商 業 資 本 による 植 民 地 化 の 危 機 に 対 し 民 族 的 な 対 処 をし 明 の 册 封 体 制 に 対 して 独 立 を 宣 言 した その 基 礎 には 日 本 民 衆 のエネルギーがあり 豊 臣 政 権 はこのエネル ギーを 吸 収 し 権 力 の 集 中 強 化 をはかって 日 本 全 国 統 一 するようになった その 延 長 が 朝 鮮 侵 略 である これは 民 衆 のエネルギーを 基 礎 にした 民 族 の 力 を 階 級 支 配 の 問 題 にすりかえたも のであって 民 族 的 意 義 をもつものでない という この 鈴 木 の 仕 事 が これまで 秀 吉 の 朝 鮮 征 伐 文 禄 慶 長 の 役 と 呼 んでいたものを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 規 定 づけた 最 初 の 仕 事 である 2 中 村 學 孝 日 鮮 觀 係 史 の 硏 究 ( 上 )( 中 )( 下 ) (1969 年 刊 ) かつて 朝 鮮 総 督 府 において 朝 鮮 史 編 修 に 関 わっていた 中 村 栄 孝 は その 時 に 蒐 集 した 日 本 朝 鮮 明 関 係 史 料 の 多 くの 駆 使 し 13 世 紀 から18 世 紀 にわたる 日 本 朝 鮮 の 対 外 関 係 史 をまと めた その 中 巻 が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ものである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 中 村 は 明 帝 国 の 出 現 明 の 册 封 体 制 とそのもとでの 日 本 朝 鮮 の 関 係 とその 展 開 の 実 態 を 述 べ その 後 に 展 開 する 東 アジア 通 商 圏 の 変 貌 と 倭 寇 にふれ 秀 吉 の

209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09 朝 鮮 侵 略 を 日 本 の 体 制 変 革 戦 争 と 規 定 した さらに 中 村 は 明 朝 鮮 の 外 交 文 書 である 事 大 文 軌 李 舜 臣 の 乱 中 日 記 壬 辰 状 草 柳 成 龍 の 懲 毖 録 など 朝 鮮 側 史 料 について 綿 密 な 考 証 と 解 説 を 行 っている 3 內 藤 雋 輔 文 祿 慶 長 の 役 における 被 擄 人 の 硏 究 (1976 年 刊 )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これまでの 研 究 は 政 治 外 交 軍 事 に 関 するものが 主 流 であった そこで 内 藤 は 朝 鮮 侵 略 が 日 本 朝 鮮 両 国 の 民 衆 生 活 を 破 壊 した 史 実 の 体 系 的 究 明 にすることに 問 題 意 識 を 設 定 した この 内 藤 の 仕 事 は 大 きく 二 つの 部 分 によって 構 成 されている 第 一 は 日 本 に 連 行 された 朝 鮮 被 擄 人 の 実 態 研 究 である この 朝 鮮 被 擄 人 には 朱 子 学 者 陶 工 農 民 などがあり それぞれ 彼 らがどのような 生 き 方 をたどったのか それを 克 明 に 追 究 し たのである 第 二 は 豊 後 臼 杵 の 大 名 太 田 一 吉 に 医 僧 として 従 軍 した 安 養 寺 の 僧 慶 念 の 朝 鮮 日 々 記 の 紹 介 と 僧 慶 念 の 戦 争 観 についての 叙 述 である この 朝 鮮 日 々 記 は これまで 知 られていな かったこの 朝 鮮 侵 略 が 日 本 朝 鮮 両 国 民 衆 に 与 えた 悲 惨 な 実 態 ( 例 えば 蔚 山 の 籠 城 における 地 獄 さながらの 様 子 )をリアルに 物 語 っているものである この 内 藤 の 仕 事 は 秀 吉 の 朝 鮮 侵 略 研 究 にあらたな 視 点 を 示 したものである 4 岩 澤 愿 彦 秀 吉 の 唐 入 りに 關 する 文 書 ( 日 本 歷 史 年 1 月 ) 秀 吉 が 関 白 となった1585( 天 正 13) 年 秀 吉 は 家 臣 一 柳 末 安 (Hitotsuyanagi Sueyas u)に 宛 て 秀 吉 としては 日 本 のみならず 中 国 まで 征 服 するつもりでいる と 述 べている 岩 沢 はこの 書 状 をもとに 秀 吉 が 大 陸 征 服 の 意 図 が 文 書 のうえに 見 られるのは 関 白 就 任 直 後 の 1585 年 であるという この 点 につき それは1586( 天 正 14) 年 であるというのが 定 説 であった ( 岡 田 正 之 前 掲 論 文 ) 秀 吉 が 大 陸 征 服 の 意 図 を 抱 いたのは 関 白 就 任 直 後 ということになると 豊 臣 政 権 は 成 立 の 当 初 から 大 陸 征 服 を 狙 っ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 これは 豊 臣 政 権 の 性 格 に 関 わる 問 題 ともなる さらにこの 書 状 は 秀 吉 の 家 臣 の 間 に 領 地 拡 張 を 望 む 動 きと それにともなって 家 臣 の 間 に 起 こるであろう 対 立 を 回 避 するためにも 大 陸 征 服 の 意 図 を 公 表 した というのである この 岩

210 21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沢 の 仕 事 から なぜ 秀 吉 は 大 陸 征 服 を 狙 ったのか という 原 因 論 があらたに 問 題 とされるように なった 5 佐 々 木 潤 之 介 幕 藩 制 國 家 の 成 立 ( 北 島 正 元 編 體 系 日 本 史 叢 書 2 政 治 史 Ⅱ 所 收 1965 年 刊 ) 岩 沢 の 問 題 提 起 を 受 けて 佐 々 木 は 秀 吉 の 全 国 統 一 過 程 における 豊 臣 政 権 内 部 の 部 将 間 の 対 立 に 注 目 した すなわち 1 従 来 から 自 分 の 領 地 をもっていた 徳 川 家 康 (Tokugawa Ieya su) 伊 達 政 宗 上 杉 景 勝 (Uesugi Kagekatsu)ら 2 豊 臣 政 権 の 官 僚 的 立 場 にあった 石 田 三 成 (Ishida Mitsunari) 小 西 行 長 ら 3 秀 吉 にとり 立 てられた 大 名 である 加 藤 清 正 鍋 島 直 茂 ら これらの 対 立 があったこと さらに 秀 吉 と 結 びついた 特 権 商 人 らの 東 アジア 貿 易 への 進 出 制 覇 の 要 求 が 秀 吉 の 対 外 政 策 の 中 に 浸 透 したという 6 山 口 啓 二 日 本 の 鎖 國 ( 岩 波 講 座 世 界 歷 史 年 刊 ) なぜ 秀 吉 は 大 陸 征 服 を 狙 ったのかという 原 因 論 について 山 口 は 東 アジア 国 際 関 係 の 変 動 か ら 説 明 する すなわち 116 世 紀 に 入 ってから 日 本 の 銀 産 出 朝 鮮 の 綿 布 生 産 明 の 生 糸 生 産 が 高 まり その 交 換 を 求 める 貿 易 関 係 の 展 開 と 要 求 が 倭 寇 の 密 貿 易 と そこで 接 触 したポルトガ ルのヨーロッパ 商 業 資 本 によって 促 進 された これにより 東 アジアの 国 々をその 傘 下 におき それぞれの 国 王 を 冊 封 し 朝 貢 貿 易 のみを 許 すという 国 際 関 係 は 大 きく 後 退 し 東 アジアに 君 臨 した 明 の 明 の 国 際 的 地 位 は 低 下 した 2 豊 臣 政 権 はきわめて 短 い 期 間 に 国 家 権 力 を 握 ったが その 手 段 は 際 限 のない 戦 争 体 制 であり それが 海 外 制 覇 に 駆 られる そして 権 力 と 結 びつい て 貿 易 商 人 もあり 明 征 服 構 想 をうち 出 した という Ⅳ 秀 吉 の 朝 鮮 侵 略 硏 究 の 課 題 以 上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 日 本 における 学 説 史 の 流 れを 概 観 した この 学 説 史 をふま えて 今 後 の 秀 吉 の 朝 鮮 侵 略 研 究 において どのような 視 点 が 考 えられるのか それを 指 摘 し ておこう

211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11 第 一 は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原 因 論 である これについては 未 だ 定 説 がない 東 アジア 国 際 関 係 の 変 動 をも 視 野 に 入 れて 検 討 する 必 要 があろう 第 二 は 軍 事 万 端 に 関 わる 問 題 である 軍 需 物 資 としての 武 器 装 備 兵 糧 燃 料 さらに 船 舶 と 運 輸 軍 事 行 動 としては それぞれの 戦 いの 経 緯 築 城 軍 事 組 織 と 作 戦 など また 医 療 の 実 態 など これらを 日 本 朝 鮮 明 三 国 の 事 例 について その 研 究 を 深 める 必 要 があろう 個 々 の 軍 事 のあり 方 は それぞれの 社 会 国 家 の 特 質 の 反 映 でもあるからである 第 三 に 軍 政 と 民 衆 支 配 の 問 題 である 朝 鮮 においては 日 本 軍 が 朝 鮮 農 民 を 生 業 に 就 か せ 兵 糧 収 奪 を 行 った これに 対 し 朝 鮮 民 衆 は 抵 抗 するが 日 本 軍 は 虐 殺 を 行 い さらに 鼻 切 りを 強 行 する 日 本 においても 検 地 の 強 行 により 年 貢 収 奪 が 厳 しくなり 農 民 は 逃 亡 した これ らの 実 例 をさらに 検 証 する 必 要 があろう 第 四 に 戦 争 と 民 衆 の 問 題 がある a) 義 兵 日 本 軍 の 軍 政 に 対 して 朝 鮮 各 地 で 義 兵 が 決 起 した この 義 兵 研 究 は 韓 国 において かなり 進 んでいるが 日 本 軍 の 動 きとあわせて 今 一 度 その 経 緯 を 整 理 する 必 要 があろう 咸 鏡 北 道 の 場 合 について 提 言 すれば 鄭 文 孚 の 農 圃 集 を 日 本 側 史 料 の 九 鬼 文 書 などとつき 合 わせれば 清 正 の 咸 鏡 道 支 配 と 義 兵 闘 争 の 展 開 について より 豊 かな 史 実 が 確 定 できよう b) 朝 鮮 軍 を 支 えた 民 衆 について 壬 辰 倭 乱 で 戦 った 名 将 としては 義 兵 将 郭 再 祐 都 元 帥 権 慄 水 軍 統 制 使 李 舜 臣 が 有 名 であ るが それを 支 えた 民 衆 がいた 李 舜 臣 の 乱 中 日 記 をみると その 配 下 に 船 大 工 石 工 弓 匠 箭 匠 冶 匠 など 多 くの 職 人 があり 彼 らは 水 軍 の 軍 需 物 資 の 製 造 補 修 に 携 わっていたのであ る また 軍 船 を 漕 ぐ 格 軍 ( 水 夫 )について 述 べれば 1595 年 3 月 の 時 点 において 朝 鮮 水 軍 全 体 の 射 手 ( 弓 手 砲 手 )は1,228 名 梢 水 軍 ( 船 頭 格 軍 )は5,881 名 であり( 万 暦 23 年 3 月 4 日 朝 鮮 国 王 回 咨 事 大 文 軌 12) 梢 水 軍 ( 船 頭 格 軍 )の 人 数 が 射 手 の 人 数 の4.5 倍 に 相 当 している すなわち 水 軍 の 構 成 員 には 射 手 をうわまわる 多 くの 格 軍 が その 割 合 を 占 めて いるのであり このことは 格 軍 の 員 数 の 多 さが 海 戦 成 否 の 鍵 を 握 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それでは この 格 軍 はどのような 階 層 身 分 の 人 々によって 構 成 されているのだろうか それ は 鮑 作 人 奴 婢 土 兵 それに 降 倭 である この 場 合 鮑 作 人 に 注 目 したい この 鮑 作 とは 本

212 21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来 海 中 で 鮑 を 漁 るものをいうのであるが 乱 中 日 記 癸 巳 3 月 のメモには 鮑 作 と 記 した 箇 所 に 抹 消 の 印 があり その 右 に 沿 海 の 人 と 注 記 がある このことから 沿 海 を 生 業 の 場 と する 海 民 であるといえよう この 鮑 作 人 は もともと 陸 地 の 人 々からは 蔑 視 され 朝 鮮 国 家 からは アウトロー 的 存 在 とみなされていたのである その 鮑 作 人 が 朝 鮮 水 軍 の 格 軍 に 編 成 されていた のである その 場 合 鮑 作 人 は 単 なる 格 軍 でなく 1592( 宣 祖 25) 年 9 月 1 日 の 釜 山 浦 海 戦 の 戦 況 報 告 には 全 羅 左 水 営 の 船 の 死 傷 者 に 沙 工 鮑 作 金 叔 連 の 名 があり( 李 舜 臣 壬 辰 状 草 11) 鮑 作 人 には 沙 工 ( 船 頭 )の 役 を 果 すものもいたのである 格 軍 に 徴 発 された 鮑 作 人 は 戦 闘 の 恐 怖 と 飢 えと 寒 さのため 逃 亡 を 試 みたり 一 般 兵 士 の 逃 亡 を 幇 助 するなど 厄 介 な 存 在 であったが 李 舜 臣 とすれば 朝 鮮 南 海 域 の 水 路 に 熟 知 した 鮑 作 人 を 起 用 しなくては 海 戦 に 勝 利 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 以 上 の 事 例 は 朝 鮮 民 衆 の 壬 辰 倭 乱 との 関 わりを 示 す 一 例 であるが 朝 鮮 民 衆 のさまざまな 階 層 の 人 々が 倭 乱 にどのように 関 わったのかを 検 証 する 必 要 があろう c) 被 擄 人 と 降 倭 について 被 擄 人 については さきにあげた 内 藤 雋 輔 の 仕 事 がある それによると 記 録 を 残 す 術 をも つ 朱 子 学 者 の 場 合 は 明 らかになるものの 陶 工 と 農 民 については 史 料 的 に 限 界 がある その ような 状 況 のもとで 被 擄 人 の 陶 工 と 農 民 の 実 態 をどのように 究 明 するかは 今 後 の 課 題 であ る 降 倭 ( 朝 鮮 側 に 投 降 した 日 本 の 将 兵 )の 事 例 として 1598 年 都 元 帥 権 慄 が 降 倭 要 汝 文 ( 与 右 衛 門 )を 取 調 べた 供 述 書 があるので その 要 点 を 紹 介 しておこう( 朝 鮮 王 朝 宣 祖 実 録 宣 祖 31 年 5 月 己 丑 ) 1 要 汝 文 ( 与 右 衛 門 )は 年 齢 三 十 才 であり 弓 矢 と 放 砲 の 技 量 を 持 つ 島 津 氏 の 兵 卒 であっ た 2 両 親 は 他 界 し 兄 弟 はすべて 倭 乱 の 巻 添 えとなり 要 汝 文 ( 与 右 衛 門 )は 天 涯 孤 独 の 身 と なっていた 3 要 汝 文 ( 与 右 衛 門 )は 厳 しい 泗 川 の 城 普 請 に 動 員 されたが そのような 時 朝 鮮 側 が 降 倭 を 厚 遇 すると 聞 き 投 降 した という 城 普 請 の 厳 しさから 逃 れ 降 倭 となった 事 例 は 他 にもみられる 1696 年 1 月 加 徳 島 島 津 の 陣 よ り 兵 卒 5 名 が 李 舜 臣 のもとへ 投 降 したが その 理 由 は 島 津 忠 恒 の 性 格 の 悪 さであるという( 乱 中 日 記 丙 申 正 月 8 日 ) この 時 島 津 氏 は 加 徳 島 にあらたに 倭 城 を 築 いていたのである

213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13 これら 個 々ばらばらに 逃 亡 して 投 降 したものは 朝 鮮 水 軍 の 格 軍 などの 労 役 に 利 用 された これは 日 本 の 民 衆 が 倭 乱 に 動 員 されたひとつの 末 路 でもある これに 対 し 金 忠 善 = 沙 也 可 のように 配 下 を 率 いて 積 極 的 に 集 団 投 降 したものは 叛 乱 であ り 朝 鮮 側 に 積 極 的 に 協 力 して 戦 功 をあげ 集 落 を 作 って 定 住 し 妻 子 をかかえ 耕 地 を 保 有 し て そこを 生 活 の 本 拠 とした 降 倭 にはこの 二 つのタイプがある このような 視 点 から 降 倭 の 実 態 を 究 明 することも 今 後 の 課 題 のひとつであろう このように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は 日 本 朝 鮮 双 方 の 民 衆 にとって 何 であったのか 民 衆 はそ の 中 でどのような 対 処 をとったのか この 視 点 から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を 検 討 する 必 要 があろう 第 五 に 文 化 伝 播 の 問 題 がある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の 結 果 朝 鮮 の 製 陶 業 技 術 印 刷 技 術 は 日 本 に 伝 わった さらに 朝 鮮 明 の 書 籍 が 大 量 に 日 本 にもたらされた かつて 日 本 の 文 部 省 は 教 科 書 検 定 において 秀 吉 は 朝 鮮 を 攻 めたが その 結 果 文 化 も 伝 わったことをバランスをとって 教 科 書 に 書 けと 指 導 したが 文 化 の 伝 播 は 必 ずしも 干 戈 に 訴 えなければ 獲 得 できぬものではな い この 視 点 から 文 化 の 伝 播 について 検 討 する 必 要 があろう 第 六 に 歴 史 認 識 の 問 題 である これは 第 一 から 第 六 まで(さらにいくつかの 視 点 が 加 わる と 思 われるが)の 視 点 の 研 究 を 進 めたうえで 結 論 的 にまとめるべきことがらであると 考 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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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15 東 アジア 國 際 關 係 に 見 る 壬 辰 倭 亂 堀 新 (HORI Shin, 共 立 女 子 大 学 ) はじめに 壬 辰 丁 酉 倭 乱 (1592~ ~98)は 16 世 紀 の 東 アジア 世 界 における 最 大 の 事 件 だったと 言 って 良 いであろう 壬 辰 丁 酉 倭 乱 は 明 朝 鮮 日 本 の 外 交 関 係 だけでなく それぞ れの 国 内 情 勢 にも 大 きな 影 響 を 残 したことは 周 知 の 事 実 である 本 報 告 は 主 に 日 本 側 の 史 料 にも とづき 近 年 の 日 本 史 研 究 の 成 果 に 学 びながら 壬 辰 丁 酉 倭 乱 が 日 本 国 内 のどのような 歴 史 的 経 緯 を 背 景 にして 起 こったのか そしてその 後 の 日 本 社 会 や 東 アジア 世 界 にどのような 影 響 をあ たえていったのかを 考 えてみたい そのさい 当 時 の 人 々の 意 識 をなるべく 忠 実 に 取 り 出 すことに 心 がけたい そのため 従 来 は 荒 唐 無 稽 としてあまり 顧 みられなかった 史 料 やエピソードを 活 用 したい また 壬 辰 丁 酉 倭 乱 は 秀 吉 の 天 下 統 一 事 業 の 延 長 線 上 に 位 置 するものであるから 秀 吉 の 天 下 統 一 過 程 をも 概 観 す る そのため 本 報 告 の 内 容 は 直 接 的 に 壬 辰 丁 酉 倭 乱 に 関 わる 内 容 ばかりではなく その 前 提 となる 史 実 の 検 討 を 含 むことをお 断 りしておきたい 1. 全 國 動 亂 と 織 田 信 長 の 天 下 統 一 1467 年 ( 応 仁 元 )の 応 仁 文 明 の 乱 以 降 日 本 全 国 は1 世 紀 以 上 におよぶ 戦 国 時 代 となった 戦 国 時 代 は 下 剋 上 の 時 代 と 呼 ばれ 実 力 主 義 の 時 代 とされている 1562 年 ( 永 禄 5)に 布

216 21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教 のために 来 日 したイエズス 会 宣 教 師 ルイス フロイスは 1585 年 ( 天 正 13)に 著 した 日 欧 文 化 比 較 に 次 のように 記 している われわれの 間 で 叛 逆 は 大 いに 非 難 される 日 本 ではごくありふれたことなので ほとんど 非 難 を 受 けることはない フロイスは 日 本 では 謀 叛 は 非 難 されない と 述 べているが 実 際 はそうではない 例 え ば1565 年 ( 永 禄 8)に 室 町 幕 府 第 13 代 将 軍 足 利 義 輝 が 暗 殺 されたさい 謀 叛 人 である 三 好 義 継 松 永 久 通 は 誠 恣 之 仕 立 前 代 未 聞 無 是 非 次 第 限 沙 汰 ニ 候 ( 本 当 に 勝 手 な 振 舞 で 前 代 未 聞 のことである 全 くとんでもないことをやったものだ)と 批 判 されている 戦 国 時 代 は 決 して 無 秩 序 な 実 力 さえあれば 何 でも 出 来 る 時 代 だったわけではない 下 剋 上 を 成 功 させるに は それ 正 当 化 する 論 理 (それが 表 向 きのものであったにせよ)が 必 要 であった その 論 理 が 受 容 されなければ 明 智 光 秀 のようにいったん 獲 得 した 天 下 人 としての 地 位 を あっという 間 に 失 うのである 織 田 信 長 にせよ 豊 臣 秀 吉 にせよ 彼 らが 天 下 統 一 を 進 めることは 下 剋 上 を 積 み 重 ねていくこと でもあった そのためには 主 君 を 実 力 で 圧 倒 するだけでは 不 十 分 であり 彼 らの 下 剋 上 を 正 当 化 する 論 理 が 必 要 であった 織 田 信 長 の 場 合 信 長 非 為 一 人 併 為 天 下 ( 信 長 一 人 のため ではなく 天 下 のため)と しばしば 自 らの 軍 事 行 動 を 正 当 化 していた 天 下 とは 一 個 人 の 私 的 なものではなく 公 的 なものや 存 在 を 意 味 し 京 都 を 指 す 場 合 から 日 本 全 国 さらには 全 世 界 をも 示 す 言 葉 である この 言 葉 を 利 用 して 自 分 一 人 のためではなく 世 のため 人 のためであ る と 主 張 するのは 建 前 に 過 ぎないが 単 純 に 実 力 さえあれば 何 でも 出 来 た 訳 ではないのであ る しかし 正 当 化 の 論 理 も 実 力 を 伴 わなければただの 言 葉 遊 びに 過 ぎず 実 力 なかんずく 武 威 ( 武 力 )が 大 きな 意 味 を 持 つようになっていった この 点 は 礼 に 最 大 の 価 値 を 置 き 武 よりも 文 を 重 視 した 明 や 朝 鮮 とは 大 きく 異 なる 日 本 武 士 階 級 独 自 の 価 値 観 であっ た 織 田 信 長 は1568 年 ( 永 禄 11)に 上 洛 した 後 副 将 軍 や 管 領 といった 室 町 幕 府 の 高 官 への 就 任 を 辞 退 し 代 わりに 和 泉 国 堺 を 直 轄 地 とすることを 望 んだと 言 われている 堺 はかつて 日 明 貿 易 の 発 着 港 であり その 当 時 は 南 蛮 貿 易 の 中 心 地 でもあったので 日 本 では1 2を 争 う 富 裕 な 都 市 であった 信 長 は 直 接 的 には 鉄 炮 生 産 と 火 薬 輸 入 のために 堺 の 領 有 を 望 んだのである が 堺 商 人 を 通 じてアジアやヨーロッパの 情 報 を 得 ていたと 思 われる 織 田 信 長 が1575 年 ( 天 正 3)の 長 篠 の 戦 いで 鉄 砲 隊 を 活 用 して 武 田 勝 頼 軍 を 打 ち 破 ったの

217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17 は 有 名 である そして1582 年 ( 天 正 10) ついに 武 田 氏 を 滅 ぼした その 当 時 天 下 一 之 軍 士 ( 日 本 一 の 軍 隊 )と 認 識 されていた 武 田 氏 を 滅 亡 させたことは すべての 人 々に 信 長 の 天 下 統 一 を 確 信 させる 出 来 事 だった ここで 一 つのエピソードを 紹 介 しよう 法 隆 寺 の 僧 侶 仙 学 房 栄 甚 は 武 田 氏 滅 亡 のニュースを 聞 き 10 年 程 前 に 聞 いた 夢 譚 を 思 い 出 し 興 福 寺 の 僧 侶 多 聞 院 英 俊 にそれを 話 した それは 次 のような 内 容 であった 10 年 程 前 に 三 河 国 明 眼 寺 の 僧 侶 可 心 が 正 月 2 日 の 夜 に 夢 を 見 た 夢 の 中 で 聖 徳 太 子 が 天 下 を 治 める 人 物 は 三 人 いる そのうちの 朝 倉 義 景 には 才 能 がなく 武 田 信 玄 には 慈 悲 の 心 がない 残 るは 織 田 信 長 しかいない 私 が 源 頼 朝 に 遣 わした 太 刀 が 熱 田 神 宮 にある それを 信 長 に 遣 わすよう に と 可 心 に 言 った 可 心 は 熱 田 神 宮 を 訪 れ 例 の 太 刀 を 信 長 の 許 に 持 参 し 事 情 を 説 明 した 信 長 は 自 分 も 確 かにその 夢 を 見 た たいへん 大 慶 である と 上 機 嫌 で 明 眼 寺 再 興 を 約 束 し た これは 文 字 通 りの 夢 物 語 だが 似 た 夢 譚 が 平 家 物 語 にもある 聖 徳 太 子 が 可 心 に 命 じた 太 刀 は 軍 事 権 の 象 徴 である 節 刀 ( 賊 徒 征 討 に 向 かう 将 軍 へ 天 皇 から 下 賜 されるもの) そし て 頼 朝 は 将 軍 職 を 象 徴 すると 思 われる つまり 可 心 の 見 た 夢 は 信 長 が 朝 家 の 御 まもり = 将 軍 として 天 下 統 一 することの 予 言 なのである 平 家 物 語 等 の 軍 記 物 語 では 朝 敵 は 必 ず 滅 ぼされ 将 軍 がそれを 征 伐 する 存 在 として 描 かれる しかし このような 将 軍 史 観 はあくまで も 軍 記 物 語 で 語 られる 虚 構 である もちろん 信 長 が 将 軍 に 任 官 することはなかったし 前 述 した ように 信 長 はそれを 断 っている また 平 家 物 語 では 頼 朝 が 将 軍 に 任 官 して 朝 敵 平 氏 を 滅 ぼ したとしているが 実 際 の 将 軍 任 官 は 平 氏 を 滅 ぼした 後 である つまり 平 家 物 語 は 天 皇 と 天 下 人 の 関 係 を 事 実 をありのままに 描 いているのではなく あるべき 関 係 として 描 いている そ れはすなわち 天 皇 が 武 家 の 棟 梁 を 将 軍 に 任 命 し 将 軍 は 天 皇 朝 廷 の 御 守 り として 朝 敵 を 滅 ぼして 天 下 を 平 定 するのが 公 武 関 係 の 本 来 のあり 方 であると 主 張 しているのである た だしこれは 朝 廷 側 の 願 望 に 過 ぎない 平 家 物 語 はその 後 幅 広 い 階 層 の 人 々に 受 容 され 可 心 栄 甚 英 俊 はそこに 示 された 平 家 物 語 史 観 とでもいうべき 歴 史 観 にもとづいて 現 実 の 歴 史 を 解 釈 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 ただし 天 皇 からの 権 限 委 譲 や 征 夷 大 将 軍 任 官 ではなく 室 町 幕 府 滅 亡 武 田 氏 滅 亡 といった 信 長 の 実 績 と 実 力 によって 天 下 人 として 認 知 したのである ただし 将 軍 史 観 は 虚 構 としても 武 家 が 天 皇 朝 廷 の 御 守 り としての 立 場 を 維 持 してきたことは 事 実 である そして 朝 廷 は 武 家 政 権 の 御 守 り でもあった 多 聞 院 英 俊 の 日 記 には この 夢 譚 の 直 前 には 内 裏 ヨリ 信 長 ノ 敵 国 ノ 神 達 ヲ 悉 被 流 了 ( 朝 廷 が 信 長 の 敵 国 である 武 田 氏 の 守 り 神 たちを 悉 く 流 したでしまっ

218 21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た)とある このように 公 武 ともにお 互 いの 御 守 り として 存 在 していたのである 信 長 や 秀 吉 は 天 皇 を 超 える 実 力 を 持 っていたことから 皇 位 簒 奪 を 意 図 して 天 皇 朝 廷 と 対 立 していたとし ばしば 主 張 されている しかし このような 公 武 対 立 史 観 は 実 態 に 即 しておらず 信 長 も 秀 吉 も 天 皇 という 存 在 を 抹 殺 することなど 考 えていなかったとすべきであろう そして 公 武 ともにお 互 いの 御 守 り というのが 中 世 ~ 近 世 を 通 じて 一 貫 した 公 武 結 合 王 権 の 論 理 である 公 武 結 合 王 権 とは 公 武 がお 互 いに 相 手 を 排 除 して 権 力 の 一 元 化 を 図 ることな く お 互 いに 必 要 不 可 欠 の 存 在 として 相 互 補 完 的 に 王 権 を 構 成 しているという 見 解 である(もちろ ん 公 武 は 権 力 権 威 ともに 対 等 な 関 係 ではなく 王 権 における 主 導 権 が 武 家 にあることは 言 うまで もない) 平 家 物 語 史 観 は 多 くの 人 に 読 み 継 がれ 語 り 継 がれており 当 時 の 人 々の 歴 史 意 識 や 同 時 代 認 識 に 大 きな 影 響 をあたえていた 信 長 自 身 もその 例 外 ではなかろう 信 長 秀 吉 といった 天 下 人 が 公 武 結 合 の 王 権 構 造 にもとづく 国 家 を 構 想 した 背 景 には このような 平 家 物 語 史 観 があったのである ところで 織 田 信 長 が 晩 年 に 大 陸 侵 略 の 構 想 を 持 っていたことは 知 られているが その 真 偽 をめぐって 議 論 は 分 かれている 日 本 側 の 記 録 では 1625 年 ( 寛 永 2) 成 立 の 小 瀬 甫 庵 太 閤 記 巻 2が 最 初 のものであろう それは1581 年 ( 天 正 9)の 歳 暮 御 礼 時 のこととして 秀 吉 から 信 長 父 子 への 献 上 物 が 安 土 城 の 山 下 から 山 上 までおびただしく 並 び その 様 子 を 天 守 閣 から 見 た 信 長 が あの 大 気 者 には 支 竺 を 対 治 せよと 被 仰 付 たり 共 いなみはすまじき 気 象 なり (あの 大 物 ( 秀 吉 )は 中 国 ( 明 ) インドを 征 服 せよと 申 し 付 けられても 断 ることはなさそうな 気 性 であ る)と 言 ったという しかし これは40 年 以 上 も 後 にまとめられた 物 語 の 中 の 話 であるうえ 秀 吉 は 翌 年 の 毛 利 攻 め 準 備 のために 早 々に 播 磨 国 姫 路 へ 帰 国 するように 信 長 から 命 じられており 事 実 とは 見 なしがたい しかし 1582 年 ( 天 正 10)11 月 5 日 付 でルイス フロイスがイエズス 会 総 長 宛 に 提 出 した 報 告 書 には 次 のように 記 されている 長 文 であるが 重 要 な 史 料 なので 一 部 を 省 略 しつつ 掲 げた い 彼 ( 織 田 信 長 )は 戦 さにおいてますます 良 い 成 果 を 収 めていったので 武 力 によって 未 だ 征 服 し ていない 坂 東 ( 関 東 ) 地 方 の 遠 隔 の 国 々が 彼 の 名 声 や 富 権 力 をただ 伝 え 聞 いただけで 使 者 を 立 て 彼 の 支 配 下 に 入 った 彼 はこのいっさいを 万 物 の 創 造 主 の 強 大 なる 御 手 より 授 かった 深 い 恩 恵 であると 認 めて 謙 遜 するどころか いよいよ 傲 慢 となって 己 れの 力 を 誇 るあまり 自 ら 日 本 全 土 の 絶 対 者 と 称 することにも また 日 本 の 老 人 たちが 諸 国 のいかなる 国 主 ( 大 名 )や 世 子 にもかつて 見 たこと がなく 書 物 にも 無 いと 言 うほど 甚 深 なる 尊 敬 を50 余 ヵ 国 から 集 めていることにも 飽 き 足 らなくなり つ

219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19 いには 突 如 としてナブコドノゾールのような 驕 慢 振 りを 現 し 死 すべき 人 間 としてではなく あたかも 不 滅 のもの すなわち 神 でもあるかのように 諸 人 から 崇 められることを 望 んだ 日 本 では 普 通 神 の 殿 堂 に 神 体 と 称 する 石 がある 神 体 は 守 護 者 である 神 の 心 および 本 体 を 意 味 するが かの 安 土 山 の 寺 院 には 存 在 しなかった 信 長 がかつて 述 べたところでは 彼 自 身 が 正 しくその 神 体 にして 生 き た 神 仏 であり 己 れ 以 外 に 世 界 の 支 配 者 も 万 物 の 創 造 者 もないとのことであったが 彼 の 家 臣 たちは 信 長 よりほかに 崇 拝 すべきものはないと 明 言 するように 現 世 において 崇 められることを 望 みにしてい た 我 らの 主 なるデウスは 人 々のこのような 参 集 を 眺 めて 得 た 満 足 が 長 く 続 くことを 許 し 給 わな かった すなわち 右 の 参 詣 を 行 なった 安 土 山 の 祝 祭 から19 日 を 経 た 時 後 に 述 べる 通 り 彼 の 身 体 は 灰 塵 となって 地 に 帰 し その 霊 魂 は 地 獄 に 葬 られたのである 信 長 は 先 般 の 戦 さ( 武 田 氏 攻 め)がきわめて 順 調 に 終 わったのを 見 て 4 5 年 前 から 始 まった 毛 利 氏 との 戦 さをも 早 く 終 結 させるこ とを 望 み これを 征 服 させるためすでに 羽 柴 殿 ( 豊 臣 秀 吉 )を 派 遣 していた 羽 柴 殿 は2 万 5000 の 兵 を 擁 しているのみであったので 信 長 に 書 状 を 認 めて 援 軍 を 求 めたが さらに3 万 の 兵 を 得 れ ば 即 座 に 毛 利 氏 の 領 国 を 占 領 し その 首 を 彼 の 許 に 献 上 するであろうから 信 長 自 身 は 来 ぬようにと 伝 えた ところが 信 長 は 現 に 都 へ 来 たように 自 ら 出 陣 することに 決 め 同 所 から 堺 まで 行 くことと し 毛 利 氏 を 征 服 し 終 えて 日 本 の 全 66ヵ 国 の 絶 対 領 主 となったならば 中 国 に 渡 って 武 力 でこれを 奪 うため 一 大 艦 隊 を 準 備 させること および 彼 の 息 子 たちに 諸 国 を 分 け 与 えることに 意 を 決 していた このルイス フロイスの 証 言 は 日 本 国 内 の 同 時 代 史 料 では 裏 づけられない そして 前 半 部 分 の 信 長 の 神 格 化 に 対 する 疑 問 が 強 く そのせいもあって 後 半 部 分 の 信 長 の 大 陸 侵 攻 計 画 につ いても 疑 問 とされることが 多 い また 秀 吉 が 信 長 本 人 の 出 陣 を 望 んでいなかったという 点 につ いては 秀 吉 が 早 くから 信 長 自 身 の 出 陣 を 宣 伝 して 毛 利 氏 との 戦 いを 有 利 に 進 めようとしている ことが 確 認 できるから この 点 は 確 かにフロイスの 証 言 に 誤 りがある また いくら 当 時 最 強 と 言 われた 武 田 氏 を 滅 ぼしたとしても まだ 西 国 には 毛 利 氏 や 長 宗 我 部 氏 島 津 氏 なども 残 ってお り 大 陸 侵 攻 を 計 画 するには 早 すぎるという 意 見 もある ただしこの 点 については 本 能 寺 の 変 前 日 に 信 長 自 身 は 毛 利 氏 攻 めの 手 たてさうさあるましき 事 ( 大 して 時 間 はかからない)という 予 測 を 述 べている また 島 津 義 久 は 信 長 を 上 様 と 呼 んでおり 既 に 家 臣 同 様 であったと 言 える これらの 事 柄 からすれば 客 観 的 な 情 勢 は 別 としても 信 長 自 身 の 意 識 においては 既 に 西 日 本 もほぼ 征 服 しつつあるという 認 識 だったのである 信 長 が 大 陸 侵 攻 を 意 識 し 始 めていたと しても 大 きな 矛 盾 はないであろう また 晩 年 の 信 長 は 新 たな 征 服 地 を 家 臣 たちに 分 かち 与 えるだけでなく 例 えば 四 国 地 方 を 三 男 信 孝 に 与 えようとするなど 息 子 たちや 織 田 一 族 を 優 遇 しつつあったことは 事 実 であり この 点 もフロイスの 証 言 は 正 しい そして フロイスが 何 の 根 拠 もなく 大 陸 侵 攻 計 画 をでっち 上 げる 必

220 22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要 性 はなく 秀 吉 が 大 陸 侵 攻 の 構 想 を 初 めて 公 表 する(いわゆる 唐 入 り 宣 言 )のが1585 年 ( 天 正 13)9 月 3 日 であり フロイスの 証 言 はこれよりも 約 3 年 も 早 いのである 従 って このフロ イスの 証 言 の 細 部 には 誤 りがあったとしても 晩 年 の 信 長 には 大 陸 侵 攻 計 画 があったことを お およそ 事 実 と 見 なして 良 いように 思 われる ただし その 具 体 的 な 計 画 は 中 国 ( 明 )に 渡 っ て とあるだけで 朝 鮮 や 明 とどのような 交 渉 を 経 るつもりだったのかはわからない しかし 信 長 の 計 画 では 息 子 達 に 諸 国 を 分 けあたえ 自 らはその 上 位 に 立 つつもりであったことに 注 目 し たい このことは 後 に 述 べる 秀 吉 の 三 国 国 割 構 想 にも 共 通 するからである では 信 長 は なぜこのように 無 謀 で 一 方 的 な 計 画 を 構 想 していたのであろうか その 背 景 に は 戦 国 社 会 を 武 力 で 天 下 統 一 したという 武 威 の 意 識 が 関 わっていると 思 われるが それを 裏 づける 史 料 も 否 定 する 史 料 も 存 在 しない この 点 は 秀 吉 の 壬 辰 丁 酉 倭 乱 を 取 り 上 げる 時 に 併 せて 検 討 したい 2. 豊 臣 秀 吉 の 惣 無 事 令 の 論 理 豊 臣 秀 吉 の 出 自 が 武 士 ではなく 百 姓 であったことは 当 時 から 有 名 であった 例 えば 島 津 氏 の 家 臣 上 井 覚 兼 は その 日 記 に 羽 柴 事 ハ 寔 々 無 由 来 仁 と 世 上 沙 汰 候 ( 秀 吉 は 実 に 家 柄 の 卑 しい 人 物 であると 世 間 の 評 判 である)と 記 している このような 出 自 の 卑 しさから 来 るコンプレックスから 秀 吉 は 自 己 の 由 緒 を 飾 り 立 てることに 熱 心 であった それは1584 年 ( 天 正 12)の 小 牧 長 久 手 の 戦 い 以 降 に 顕 著 となる 小 牧 長 久 手 の 戦 いとは 秀 吉 の 主 家 である 織 田 信 雄 を 担 いだ 徳 川 家 康 と 戦 い 従 来 はこれに 敗 れたとされてい る しかし 講 和 条 件 からすると 秀 吉 軍 の 勝 利 と 思 われるが 主 家 である 信 雄 とそれを 担 ぐ 家 康 を 圧 倒 できなかったために 実 力 以 外 の 要 素 として 天 皇 朝 廷 の 利 用 が 始 まるのである 具 体 的 に は 律 令 官 位 の 序 列 機 能 を 利 用 し 官 位 のうえで 信 雄 の 上 位 に 立 ち それによって 織 田 家 からの 下 剋 上 を 正 当 化 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 その 試 みは 秀 吉 が 関 白 に 任 官 する1585 年 ( 天 正 13)にはいっそう 集 中 している 秀 吉 の 御 用 学 者 である 大 村 由 己 が 同 年 8 月 に 著 した 関 白 任 官 記 には 秀 吉 の 祖 父 は 萩 中 納 言 といい ある 人 物 の 讒 言 によって 遠 流 に 処 せられ 秀 吉 の 母 大 政 所 がやがて 上 洛 して 天 皇 に2 3 年 側 近 く 仕 え 下 国 して 程 なく 秀 吉 を 産 んだと 記 されている 明 言 はしていないものの 秀 吉 は 天 皇 の 御 落 胤 であることを 匂 わせた 書 き 振 りである 同 年 には 正 親 町 天 皇 の 皇 子 八 条 宮 智 仁 親 王 を 猶 子 と したほか 京 都 御 所 で 茶 会 や 能 を 開 催 し その 後 も 度 々 催 している また 翌 1586 年 ( 天 正 14)

221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21 には 正 親 町 天 皇 と 和 歌 を 交 換 したほか 同 年 に 即 位 した 後 陽 成 天 皇 の 許 へ 養 女 前 子 を 女 御 と して 入 内 させている 天 皇 家 と 縁 戚 関 係 を 重 ねて 結 び 天 皇 との 親 密 な 交 際 を 印 象 づけている のである 天 皇 家 と 政 略 結 婚 をした 者 は 古 代 の 蘇 我 馬 子 藤 原 道 長 武 士 でも 平 清 盛 や 徳 川 秀 忠 など その 例 は 少 なくないが これほど 天 皇 との 親 密 さをアピールしたのは 秀 吉 だけであろう そして 天 皇 との 親 密 さは 1585 年 ( 天 正 13)10 月 2 日 に 島 津 義 久 宛 に 九 州 停 戦 令 を 発 令 したさ いにも 別 の 形 で 示 されている このなかで 秀 吉 は 就 勅 定 染 筆 候 仍 関 東 不 残 奥 州 果 迄 被 任 倫 ( 綸 ) 命 天 下 静 謐 処 九 州 事 于 今 鉾 楯 儀 不 可 然 候 条 国 郡 境 目 相 論 互 存 分 之 儀 被 聞 召 届 追 而 可 被 仰 出 候 先 敵 味 方 共 双 方 可 相 止 弓 箭 旨 叡 慮 候 ( 天 皇 の 命 令 によって 申 し 渡 す 関 東 奥 州 地 方 まで 戦 争 もなく 静 謐 であるのに いまだに 九 州 では 戦 争 状 態 にあるのはけし からん 国 郡 境 目 争 論 に 関 する 互 いの 言 い 分 を 聞 き 追 って 裁 定 を 下 すので まず 戦 争 を 止 めよ というのが 天 皇 のお 考 えである )と 述 べている 関 東 から 奥 州 まで 秀 吉 が 征 服 したことも 島 津 氏 に 停 戦 を 求 めるのも いずれも 秀 吉 自 らの 意 思 にもとづくもので これは 天 皇 の 意 思 ではな い しかし 秀 吉 は 天 皇 の 名 前 を 借 りて これを 正 当 化 しているのである そのことを 見 破 った 島 津 氏 側 は 島 津 家 は 鎌 倉 時 代 以 来 の 名 門 であるという 誇 りにかけて 身 分 の 卑 しい 秀 吉 からの 停 戦 命 令 を 拒 絶 したのである そして1587 年 ( 天 正 15)4 月 に 島 津 氏 攻 めが 始 まり 5 月 8 日 に 島 津 氏 は 降 伏 した 翌 9 日 に 島 津 義 久 に 宛 てた 書 状 も 日 本 六 十 余 州 之 儀 改 可 進 止 之 旨 被 仰 出 之 条 不 残 申 付 候 自 今 以 後 相 守 叡 慮 可 抽 忠 功 事 専 一 候 也 ( 日 本 全 国 60 余 州 を 改 め て 支 配 するよう 天 皇 が 仰 せ 出 されたので 秀 吉 が 残 らず 支 配 する 今 後 は 天 皇 の 命 令 を 守 り 忠 功 に 励 むことが 大 事 である)と 述 べている 天 皇 から 日 本 全 国 の 支 配 を 命 じられたことが 秀 吉 の 天 下 統 一 全 国 支 配 の 正 当 性 の 根 拠 であり(もちろんそんな 命 令 は 存 在 しないのだが) その 秀 吉 の 命 令 はすなわち 天 皇 の 命 令 であるので それに 従 うことを 強 要 しているのである しかし 秀 吉 が 常 に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を 利 用 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 1585 年 ( 天 正 13)10 月 の 九 州 停 戦 令 からやや 遅 れて 秀 吉 は1586 年 ( 天 正 14)5 月 に 関 東 東 北 地 方 にも 停 戦 令 を 発 令 し 同 年 11 月 には 惣 無 事 令 を 発 令 するが これらの 命 令 のなかでは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をこと さらに 強 調 してはいない もちろん1589 年 ( 天 正 17)7 月 22 日 に 施 薬 院 全 宗 が 以 天 気 一 天 下 之 儀 被 仰 付 被 任 関 白 職 之 上 者 相 替 前 々 不 被 経 京 儀 候 者 可 為 御 越 度 候 ( 秀 吉 は 天 皇 に 日 本 全 国 の 支 配 を 命 じられて 関 白 職 に 任 官 したので 従 来 とは 異 なり 秀 吉 の 承 認 を 得 ない 戦 争 は 許 されない)と 述 べているように 交 渉 の 過 程 で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を 誇 示 することはあった しかし 九 州 平 定 の 後 は1588 年 ( 天 正 16)4 月 6 日 に 秀 吉 の 側 近 である 富 田 知 信 が 唐 国 迄 も 平 均 眼 前 候 此 上 関 東 奥 両 国 惣 無 事 之 儀 被 仰 出 候 ( 中 国 平 定 も 間 近 であるので 関 東 東 北

222 22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地 方 に 惣 無 事 令 が 発 令 された)と 言 っているように 大 陸 侵 攻 への 展 望 の 上 に 立 って 惣 無 事 令 が 発 令 されていたのである また1589 年 ( 天 正 17)11 月 11 日 に 富 田 知 信 浅 野 長 吉 ( 長 政 )は 日 本 儀 者 不 及 申 唐 国 迄 も 被 得 上 意 候 者 共 之 為 候 ( 日 本 の 天 下 統 一 は 言 うに 及 ばず 中 国 平 定 も 秀 吉 に 従 う 者 たちのためである)と 述 べており 大 陸 侵 攻 が 天 下 統 一 の 延 長 線 上 にあるこ とを 示 している もっとも 秀 吉 が 初 めて 大 陸 侵 攻 構 想 を 公 表 したのは1585 年 ( 天 正 13)9 月 3 日 であり 関 白 任 官 の 直 後 から 存 在 しており 当 初 は 天 下 統 一 の 達 成 に 主 眼 があり 漠 然 とした 抽 象 的 な 内 容 だった 1586 年 ( 天 正 14)3 月 にはイエズス 会 宣 教 師 ガスパール クェリョらにも 大 陸 侵 攻 構 想 を 伝 え 同 年 4 月 10 日 には 毛 利 輝 元 に 九 州 攻 め 準 備 の 一 環 として 高 麗 御 渡 海 事 ( 秀 吉 は 朝 鮮 半 島 へ 渡 海 する) 同 年 6 月 16 日 には 宗 義 調 に 高 麗 国 へ 被 遣 御 人 数 成 次 第 ( 朝 鮮 国 へできる 限 りの 軍 勢 を 派 兵 する) さらには 同 年 8 月 5 日 に 安 国 寺 恵 瓊 らに 唐 国 まて 成 とも 可 被 仰 付 と 被 思 召 ( 秀 吉 は 中 国 までも 侵 攻 しようと 考 えている)と 述 べてはいるが いずれも 九 州 攻 め 準 備 を 指 示 したついでのような 形 で 大 陸 侵 攻 構 想 に 言 及 したものである それが 具 体 性 を 帯 びてくるの は 1587 年 ( 天 正 15)5 月 の 九 州 平 定 であった 1588 年 ( 天 正 16)8 月 12 日 秀 吉 の 命 令 によっ て 島 津 義 久 は 琉 球 国 王 に 服 属 入 貢 を 要 求 するなかで 既 従 高 麗 者 御 朱 印 拝 領 唐 土 南 蛮 両 州 者 音 使 舟 渉 之 巷 説 半 候 ( 既 に 朝 鮮 国 は 秀 吉 に 服 属 し 中 国 と 南 蛮 国 も 近 々 服 属 しそう である)と 述 べている 朝 鮮 国 が 秀 吉 に 服 属 したというのは 誤 りであるが この 点 については 後 述 する この 段 階 では 天 下 統 一 のための 飾 り 道 具 ではなく 現 実 に 諸 外 国 を 服 属 させることを 目 的 としている そして 服 属 要 求 に 従 わなければ 直 被 催 武 船 (すぐに 兵 船 を 準 備 する)と 威 嚇 している 少 し 後 になるが 1595 年 ( 文 禄 4)1 月 16 日 に 秀 吉 は 朝 鮮 在 陣 諸 将 宛 に 朝 鮮 之 儀 九 州 同 前 ニ 思 召 候 ( 朝 鮮 は 九 州 と 同 じだと 考 えている)と 述 べている 地 理 的 な 近 さもあっ て 九 州 平 定 によって 大 陸 侵 攻 構 想 が 現 実 化 したのである 関 東 東 北 地 方 における 最 大 の 強 敵 は 小 田 原 城 の 北 条 氏 である 秀 吉 は1590 年 ( 天 正 18)に 北 条 氏 を 滅 ぼし 天 下 統 一 を 達 成 する その 前 年 1589 年 ( 天 正 17)11 月 24 日 に 秀 吉 は 北 条 氏 直 に5ヶ 条 の 宣 戦 布 告 状 を 送 っている そのなかで 秀 吉 は 北 条 氏 が 秀 吉 の 領 土 裁 定 に 背 いたこ とを 責 めるいっぽうで 秀 吉 の 天 下 統 一 は 相 叶 天 命 もの すなわち 天 命 であるとしている また 成 塩 梅 則 闕 之 臣 関 万 機 政 ( 関 白 太 政 大 臣 に 任 官 して 全 国 支 配 をおこなう)であると か 所 詮 普 天 下 逆 勅 命 輩 早 不 可 不 加 誅 伐 (この 世 で 天 皇 の 命 令 に 従 わない 者 は 速 や かに 滅 ぼされる)という 諺 を 引 用 するなど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に 言 及 もしている しかし 秀 吉 の 自 己 正 当 化 論 理 の 中 心 は 天 命 である

223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23 なお 戦 国 時 代 に 日 本 全 国 で 展 開 された 諸 大 名 間 の 戦 争 の 原 因 は 国 境 紛 争 を 原 因 とするもの であり 秀 吉 は 停 戦 令 や 惣 無 事 令 によって 大 名 間 の 戦 争 を 私 戦 として 禁 止 し 秀 吉 が 公 儀 ( 公 的 な 存 在 や 機 関 )として 領 土 裁 定 を 行 うことで 平 和 をもたらそうとした しかし 秀 吉 の 立 場 は 公 平 な 第 三 者 ではなく 一 方 の 当 事 者 として 他 方 に 著 しく 不 利 な 裁 定 を 下 したので 実 際 は 圧 倒 的 な 軍 事 力 を 背 景 とした 威 嚇 や 挑 発 に 等 しかった つまり 戦 争 を 行 うための 平 和 令 だったのである では ここまでの 秀 吉 の 自 己 正 当 化 論 理 を 整 理 しておこう いずれも 圧 倒 的 な 軍 事 力 を 背 景 にしているが この 点 は 整 理 の 対 象 から 除 くこととする まず 島 津 氏 に 対 しては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を 誇 示 している 島 津 氏 が 摂 関 家 である 近 衛 家 との 関 係 が 近 いので これを 利 用 しようとし たのであろう 関 東 東 北 地 方 の 諸 大 名 に 対 しては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にほとんど 言 及 していな い むしろ 九 州 平 定 後 は 大 陸 侵 攻 構 想 を 述 べながら 服 属 を 要 求 している この 点 は 琉 球 国 王 に 対 しても 同 じである しかし 天 下 統 一 の 最 終 段 階 である 北 条 氏 攻 めに 際 して 天 命 の 論 理 が 生 み 出 された このように 秀 吉 が 天 下 統 一 の 過 程 で 使 用 した 自 己 正 当 化 の 論 理 は 相 手 によって 強 調 する 内 容 が 異 なっていた このことは 当 然 のことではあるが 天 下 統 一 の 総 仕 上 げである 北 条 氏 攻 めの 段 階 で 現 れた 天 命 の 論 理 が この 後 に 東 アジア 諸 国 などに 宛 てて 服 属 を 要 求 する 文 書 においても 強 調 されていく 大 陸 侵 攻 が 天 下 統 一 の 延 長 線 上 に 位 置 していたことが 改 めて 確 認 できよう 3. 豊 臣 秀 吉 と 天 命 日 輪 神 話 北 島 万 次 氏 の 研 究 によれば 秀 吉 の 天 下 統 一 異 域 統 一 は 天 命 であるという 自 己 正 当 化 の 論 理 は 1590 年 ( 天 正 18)2 月 28 日 付 琉 球 国 王 宛 同 年 11 月 付 朝 鮮 国 王 宛 1591 年 ( 天 正 19)9 月 15 日 付 フィリピン 諸 島 長 官 宛 1592 年 ( 天 正 20)7 月 21 日 付 フィリピン 諸 島 長 官 宛 1593 年 ( 文 禄 2)6 月 28 日 付 大 明 日 本 和 平 条 件 同 年 11 月 5 日 付 高 山 国 宛 以 上 6 通 の 外 交 文 書 のなかで 述 べられている これは 豊 臣 政 権 の 外 交 文 書 11 通 の 約 半 数 である 天 命 以 外 の 正 当 化 論 理 を 使 用 した 外 交 文 書 も 約 半 数 あるが 天 命 の 論 理 を 主 張 した6 通 の 外 交 文 書 においても 天 命 以 外 の 論 理 が 同 時 に 使 用 されている その 論 理 も 併 せて 検 討 するため 前 述 した1590 年 ( 天 正 18)11 月 付 朝 鮮 国 王 宛 外 交 文 書 を 取 り 上 げよう だがその 前 に 対 馬 宗 氏 を 通 じた 秀 吉 と 朝 鮮 国 との 交 渉 を 概 略 しておきたい

224 22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前 述 したように 1586 年 ( 天 正 14)6 月 16 日 に 秀 吉 は 宗 義 調 に 高 麗 国 へ 被 遣 御 人 数 成 次 第 ( 朝 鮮 国 へできる 限 りの 軍 勢 を 派 兵 する)と 述 べ それへの 協 力 を 要 求 した 1587 年 ( 天 正 15)の 九 州 攻 めのさい 宗 氏 は 柳 川 調 信 らを 使 者 として 送 った 秀 吉 は 島 津 義 久 が 降 伏 する 直 前 の5 月 4 日 付 宗 義 調 宛 朱 印 状 で 九 州 儀 悉 平 均 被 仰 付 早 被 御 隙 明 候 間 至 高 麗 国 御 人 数 可 被 差 渡 候 ( 九 州 平 定 を 命 令 して 早 くもそれを 達 成 したので 朝 鮮 国 に 軍 勢 を 派 兵 する)と 述 べ ている しかし 柳 川 調 信 らの 説 得 により まず 使 者 を 派 遣 して 戦 火 を 交 えることなく 服 属 を 求 めるこ ととした 秀 吉 の 意 図 は 同 年 5 月 29 日 付 北 政 所 宛 消 息 で こうらいのほうまで にほんの 大 りゑ しゆし 可 申 よし はやふねをしたて 申 つかわせ 候 しゆし 不 申 候 はゞ らいねんせいばい 可 申 よし 申 つかはせ 候 からこくまでてにいれ 我 等 一 ごのうちに 申 つく 可 候 ( 朝 鮮 国 から 天 皇 へ 出 仕 するように 早 船 で 使 者 を 送 らせた もしも 朝 鮮 国 が 出 仕 しなければ 来 年 出 陣 する 秀 吉 の 一 生 の 間 に 中 国 までも 手 に 入 れるようにする)と 述 べているように 服 属 要 求 に 従 わなけれ ば 大 陸 へ 侵 攻 するつもりであった 同 年 6 月 7 日 宗 義 調 は 筑 前 国 筥 崎 で 秀 吉 に 謁 見 した 6 月 1 5 日 付 宗 義 調 義 智 父 子 宛 書 状 で 秀 吉 は 義 調 の 弁 明 によって 朝 鮮 国 侵 攻 を 思 いとどまったので 代 わりに 朝 鮮 国 王 を 参 洛 させるよう 命 じている 宗 氏 側 は この 秀 吉 の 要 求 が 実 現 不 可 能 であることをよく 理 解 していた そこで 朝 鮮 国 からの 貢 物 や 人 質 の 提 出 によって 秀 吉 の 要 求 を 切 り 抜 けようとしたのである 宗 氏 は9 月 に 家 臣 橘 康 広 を 日 本 国 王 使 に 偽 装 して 朝 鮮 国 へ 送 った 宗 氏 側 は 日 本 の 天 下 統 一 と 新 王 の 出 現 を 述 べ それ を 慶 賀 する 使 者 の 派 遣 を 求 めた しかし 朝 鮮 側 は 国 王 を 廃 して 新 王 を 立 てた 日 本 は 簒 弑 の 国 であり 化 外 の 国 であると 判 断 し 水 路 迷 昧 を 理 由 に 使 節 派 遣 を 断 ったのである 帰 国 した 橘 康 広 の 報 告 を 聞 いて 秀 吉 は 激 怒 し 康 広 を 殺 したうえでその 一 族 を 滅 ぼした 1588 年 ( 天 正 16)12 月 に 宗 義 調 が 死 去 した 後 翌 1589 年 ( 天 正 17)3 月 28 日 付 宗 義 智 宛 書 状 で 秀 吉 は 小 西 摂 津 守 加 藤 主 計 頭 両 人 江 筑 紫 御 人 数 共 被 差 副 為 御 先 勢 被 差 遣 候 処 ニ 其 方 高 麗 江 渡 海 仕 当 夏 中 に 国 王 令 同 心 可 罷 上 候 御 人 数 被 遣 候 而 者 迷 惑 仕 由 候 條 今 少 可 相 延 旨 被 遣 候 ( 小 西 行 長 加 藤 清 正 両 人 に 筑 紫 国 の 軍 勢 を 加 えて 出 陣 させるべきである が 義 智 が 朝 鮮 国 へ 渡 って 当 夏 中 に 朝 鮮 国 王 を 説 得 して 上 洛 せよ 軍 勢 を 派 兵 しては 国 王 との 交 渉 がうまくいかないであろうから 今 少 し 派 兵 を 延 期 する)と 述 べ 改 めて 朝 鮮 国 王 の 参 洛 を 要 求 してその 期 限 を 当 夏 中 とし それが 実 現 しなければ 出 陣 すると 威 嚇 している ここまでの 朝 鮮 国 との 交 渉 に 明 らかなように 島 津 氏 に 対 して 天 皇 や 関 白 の 地 位 を 誇 示 して 服 属 を 強 要 したのとは 大 きく 異 なっている 秀 吉 は 朝 鮮 国 に 対 しては ひたすら 出 陣 を 威 嚇 手 段 とす るばかりである 朝 鮮 国 王 を 日 本 天 皇 へ 出 仕 させるという 点 では 天 皇 を 利 用 しているようにも 見

225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25 える しかし これは 朝 鮮 国 王 の 参 洛 を 強 制 する 手 段 ではなく あくまでも 参 洛 の 形 式 であるか ら 天 皇 の 地 位 を 利 用 しているとは 言 えない そもそも 諸 外 国 に 対 して 天 皇 や 関 白 という 地 位 に 意 味 があるはずもない ただし ここまでの 交 渉 は 秀 吉 の 外 交 文 書 によるものではなく 宗 氏 を 通 じた 下 交 渉 的 なものなので 秀 吉 の 自 己 正 当 化 論 理 が 表 れにくいのかも 知 れない 宗 氏 側 は 6 月 に 博 多 聖 福 寺 の 僧 侶 景 轍 玄 蘇 を 正 使 宗 義 智 を 副 使 とし これに 宗 家 家 臣 の 柳 川 調 信 や 博 多 商 人 の 島 井 宗 室 らを 加 えて 朝 鮮 国 へ 渡 った 宗 義 智 一 行 は 朝 鮮 国 王 に 拝 謁 して 通 信 使 派 遣 を 要 請 し 水 路 迷 昧 ならば 義 智 みずから 日 本 へ 案 内 すると 主 張 している そこで 朝 鮮 国 側 は 数 年 前 に 倭 寇 の 手 引 きをした 沙 乙 背 同 を 捕 らえて 朝 鮮 へ 連 行 すれば 日 本 への 通 信 使 派 遣 を 検 討 すると 回 答 した そこで 宗 氏 側 はすぐさま 柳 川 調 信 に 沙 乙 背 同 の 捕 縛 に 向 かわせた ので 9 月 に 朝 鮮 国 側 は 秀 吉 の 天 下 統 一 を 慶 賀 する 通 信 使 派 遣 を 決 定 したのである 正 使 黄 允 吉 副 使 金 誠 一 の 通 信 使 一 行 は 翌 1590 年 ( 天 正 18 宣 祖 23)3 月 にソウルを 出 発 し 7 月 21 日 に 上 洛 した 秀 吉 は3 月 1 日 に 北 条 氏 攻 めのために 出 陣 して 不 在 だったので 通 信 使 一 行 は 大 徳 寺 で 秀 吉 の 帰 京 を 待 った 秀 吉 は9 月 1 日 に 京 都 へ 凱 旋 し 11 月 7 日 に 聚 楽 第 で 通 信 使 と 引 見 し 国 書 を 受 け 取 った その 内 容 は 秀 吉 を 日 本 国 王 と 呼 び 日 本 60 余 州 の 統 一 を 慶 賀 するものであった しかし 秀 吉 はこれを 服 属 使 節 と 思 い 込 んでいたから 謁 見 時 の 態 度 はきわめて 傍 若 無 人 であった しばしば 指 摘 されるように 秀 吉 は 朝 鮮 国 と 対 馬 の 関 係 を 誤 解 し ていた 大 村 由 己 九 州 御 動 座 記 によれば 秀 吉 は 朝 鮮 国 を 対 馬 の 屋 形 ニしたかハれ 候 ( 対 馬 宗 氏 に 従 属 している)と 認 識 していた ところが 事 実 はその 逆 で 朝 鮮 国 側 からすれば 生 産 力 の 低 い 対 馬 に 救 いの 手 を 差 し 伸 べて その 生 活 が 成 り 立 つよう 取 り 計 らっているのであ る 具 体 的 には 朝 鮮 国 王 から 対 馬 へ 歳 賜 米 と 大 豆 が 下 賜 され さらには 対 馬 からの 歳 遣 船 に 交 易 を 許 し 利 益 を 確 保 していたのである 対 馬 宗 氏 を 通 じた 豊 臣 政 権 と 朝 鮮 国 との 外 交 交 渉 は その 前 提 部 分 に 食 い 違 いがあり 交 渉 がまとまることを 難 しくしていた では 1590 年 ( 天 正 18 宣 祖 23)11 月 付 朝 鮮 国 王 宛 外 交 文 書 を 取 り 上 げよう 秀 吉 は 日 本 国 関 白 秀 吉 と 名 乗 り このなかで 秀 吉 が 主 張 している 点 は 以 下 4 点 にまとめられる それ は 1 日 本 における 天 下 統 一 の 実 績 を 誇 示 し 2 生 誕 に 関 する 日 輪 の 奇 瑞 を 述 べ 3 日 本 の 風 俗 を 広 めるために 征 明 を 構 想 し 4 朝 鮮 国 には 日 本 の 先 駆 けとして 明 に 入 朝 することを 求 めてい る である この 中 でも 特 に 重 要 なのは2である そこで2の 内 容 をより 詳 しく 見 てみよう 秀 吉 が 母 の 胎 内 にある 時 に 母 が 日 輪 ( 太 陽 )が 胎 内 に 入 る 夢 を 見 た 占 い 師 は 日 光 の 及 ぶ 所 で 照 らさな い 所 はない この 子 ( 秀 吉 )は 成 長 して 必 ず 仁 徳 を 広 め 日 本 全 国 に 威 名 を 轟 かせることは 疑

226 22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いない と 言 ったという この 奇 瑞 により 秀 吉 に 敵 対 する 者 は 自 然 と 滅 び 戦 って 負 けることは なく 攻 撃 して 攻 め 取 れないことはない 日 本 国 中 はよく 治 まり 百 姓 を 撫 育 し 孤 独 者 を 憐 憫 す る そのため 民 は 豊 かに 財 産 は 足 り 貢 租 は 遠 い 昔 の1 万 倍 となったと 主 張 しているのである 2の 後 半 部 分 は 秀 吉 の 成 功 ぶりを 強 調 する 内 容 であるから より 重 要 なのは 前 半 部 分 の 母 と 日 輪 に 関 する 奇 瑞 である これを 日 輪 神 話 と 呼 ぶ かつて 日 輪 神 話 は 秀 吉 が 天 皇 の 御 落 胤 で あるという 主 張 と 同 様 に 秀 吉 の 低 い 出 自 を 糊 塗 するための 作 り 話 であり 検 討 に 値 しないとされ ていた しかし 北 島 万 次 氏 の 研 究 によれば このような 生 誕 に 関 する 奇 瑞 は 東 アジアの 広 い 地 域 に 渡 って 伝 承 されている そして このような 奇 瑞 は 漢 民 族 の 場 合 も 含 めて 周 辺 諸 民 族 が 中 国 に 樹 立 した 征 服 王 朝 の 始 祖 の 生 誕 には 必 ずこのような 奇 瑞 がある この 奇 瑞 にはいくつかのパ ターンがあるが 日 輪 神 話 と 同 様 に 母 親 の 懐 胎 と 日 光 に 関 する 内 容 のものは 漢 民 族 の 王 朝 で は 宋 (960~1279 年 )の 太 祖 趙 匡 胤 明 (1368~1644 年 )の 太 祖 洪 武 帝 ( 朱 元 璋 )があり 周 辺 民 族 では 北 魏 (386~534 年 )の 道 武 皇 帝 ( 拓 跋 珪 ) 遼 (916~1125 年 )の 太 祖 耶 律 阿 保 機 元 (1271~1368 年 )の 太 祖 成 吉 思 汗 (テムジン)の 場 合 がある この 北 島 氏 の 指 摘 によっ て この 奇 瑞 の 意 味 が 初 めて 明 らかになったのである すなわち 大 陸 侵 攻 によって 中 国 に 新 王 朝 を 樹 立 するという 意 思 表 示 だったのである 日 輪 神 話 はこの 朝 鮮 国 王 宛 国 書 で 初 めて 主 張 さ れ この 後 は1591 年 ( 天 正 19)9 月 15 日 付 フィリピン 諸 島 長 官 宛 1593 年 ( 文 禄 2)6 月 28 日 付 大 明 日 本 和 平 条 件 同 年 11 月 5 日 付 高 山 国 宛 同 年 ( 月 日 不 明 )フィリピン 諸 島 長 官 宛 以 上 4 通 の 外 交 文 書 でも 繰 り 返 し 主 張 されるのである 外 交 文 書 における 秀 吉 の 自 己 正 当 化 論 理 を 整 理 すれ ば 日 本 の 天 下 統 一 については 天 命 を 根 拠 とし 大 陸 侵 攻 については 生 誕 の 奇 瑞 による 日 輪 神 話 を 根 拠 としているのである 秀 吉 の 外 交 文 書 は 京 都 五 山 の 僧 侶 たちが 作 成 していた 彼 らは 室 町 幕 府 以 来 外 交 文 書 の 作 成 にあたっていたので 征 服 王 朝 の 始 祖 の 生 誕 に 関 する 奇 瑞 について 当 然 知 っていたであ ろう 少 なくとも 明 の 太 祖 洪 武 帝 については 知 っていたはずである そして この 知 識 を 秀 吉 に 授 けたと 思 われる ただ 残 念 ながら 朝 鮮 通 信 使 たちは 帰 国 後 の 復 命 で このことに 言 及 して いない 正 使 黄 允 吉 は 大 陸 侵 攻 の 可 能 性 が 高 いと 復 命 し 副 使 金 誠 一 はその 可 能 性 を 否 定 して いる この 意 見 の 相 違 は 朝 鮮 国 官 人 の 東 人 派 西 人 派 の 派 閥 党 争 によるものであった なお 朝 鮮 国 王 宛 国 書 4で 秀 吉 が 朝 鮮 国 王 に 対 して 征 明 先 導 を 主 張 しているが 宗 氏 はこれ を 仮 途 入 明 にすり 替 えて 朝 鮮 国 と 交 渉 した いっぽう 秀 吉 の 大 陸 侵 攻 構 想 の 情 報 を 入 手 した 明 は 朝 鮮 国 に 日 本 情 勢 の 報 告 を 求 めた 朝 鮮 国 は 秀 吉 の 大 陸 侵 攻 に 荷 担 しないことを 説 明 し 明 皇 帝 は 遼 東 の 精 兵 派 遣 と 銀 2 万 両 を 朝 鮮 国 へ 送 ることを 約 束 した その 一 方 で 明 は 沿 岸 防 備 を

227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27 固 めていた このような 情 勢 の 中 壬 辰 倭 乱 を 迎 え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 4. 豊 臣 秀 吉 の 三 國 國 割 構 想 1592 年 ( 天 正 20 宣 祖 25)3 月 13 日 秀 吉 は 約 16 万 の 軍 勢 を9 軍 に 編 成 して 大 陸 侵 攻 を 命 じ た 同 年 4 月 13 日 ( 日 本 暦 12 日 ) 小 西 行 長 宗 義 智 の 第 1 軍 が 釜 山 浦 に 上 陸 した 翌 14 日 早 朝 日 本 軍 は 釜 山 鎮 を 包 囲 した 壬 辰 倭 乱 の 始 まりである 加 藤 清 正 の 第 2 軍 は 4 月 18 日 に 釜 山 浦 へ 上 陸 した 加 藤 清 正 の 第 2 軍 は 慶 尚 道 を 北 上 して 慶 州 へ 進 軍 した この 時 のことと 思 われる が 沙 也 可 という 武 将 が3000 人 の 兵 を 率 いて 慶 尚 兵 使 臣 朴 晋 に 降 った これは 加 藤 にとって 謀 叛 であったが このような 問 題 を 内 側 に 抱 えながらも 進 軍 した 黒 田 長 政 の 第 3 軍 毛 利 吉 成 の 第 4 軍 なども 次 々と 上 陸 していった 突 然 の 攻 撃 に 不 意 をつかれた 朝 鮮 国 では 首 都 を 平 壌 に 移 すと ともに 明 に 救 援 を 頼 むこととなった 4 月 30 日 の 早 朝 朝 鮮 国 王 は 首 都 漢 城 を 脱 出 し 小 西 宗 の 第 1 軍 と 加 藤 の 第 2 軍 は5 月 3 日 に 漢 城 に 入 城 した 加 藤 はすぐに 肥 前 国 名 護 屋 城 の 秀 吉 にこれを 報 告 し 加 藤 の 書 状 は5 月 16 日 に 名 護 屋 へ 到 着 した 秀 吉 はすぐに 加 藤 へ 返 書 を 送 り 朝 鮮 国 王 の 探 索 日 本 軍 の 占 領 のあり 方 兵 粮 の 点 検 道 路 整 備 などを 命 令 した 諸 大 名 には 漢 城 の 城 外 に 陣 を 構 えさせ 城 内 には 秀 吉 の 御 座 所 を 作 る よう 命 じており 秀 吉 はすぐさま 渡 海 するつもりだった そして5 月 18 日 秀 吉 は 関 白 豊 臣 秀 次 宛 に 全 25ヶ 条 の 覚 書 を 出 した これは 江 戸 時 代 の 大 名 前 田 綱 紀 によって 豊 太 閤 三 国 処 置 太 早 計 ( 豊 臣 秀 吉 の 三 国 国 割 計 画 は はなはだ 早 計 だっ た)と 評 価 されているように 実 現 する 可 能 性 のきわめて 低 いものであった そのため これま での 研 究 ではほとんどまともに 検 討 されてこなかった しかし 実 現 する 可 能 性 の 低 いことは 明 白 な 事 実 であったとしても 秀 吉 が 自 己 宣 伝 のために 大 風 呂 敷 を 広 げているのではなく 秀 吉 自 身 は 素 朴 に 実 現 できるつもりでいたのであるから 彼 の 国 家 構 想 や 東 アジア 構 想 を 考 える 素 材 と しては 重 要 であろう このなかで 秀 吉 は 自 ら 渡 海 して 大 陸 侵 攻 し 秀 次 に 大 唐 の 関 白 職 をあたえるつもりである こと そのため 秀 次 に 翌 年 正 月 ~2 月 に 出 陣 することを 命 じている そのさいの 軍 勢 の 人 数 や 装 備 進 軍 経 路 兵 粮 準 備 など 実 に 細 々とした 指 示 をあたえている そして 秀 吉 の 国 家 構 想 東 アジア 支 配 構 想 について 25ヶ 条 のあちこちで 述 べていることをまとめると 以 下 のようになる 明 征 服 後 秀 吉 は 後 陽 成 天 皇 と 秀 次 を 北 京 へ 移 し それぞれ 明 国 の 天 皇 と 関 白 とする 秀 次 には 北 京 周 辺 の100ヶ 国 をあたえ 天 皇 には 北 京 周 辺 10ヶ 国 公 家 衆 のなかには10 倍 以 上 の 所 領 をあ

228 22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たえられる 者 も 出 てくるという 後 陽 成 の 北 京 への 移 動 は 行 幸 の 形 式 とし それは2 年 後 を 予 定 し た 日 本 の 国 家 体 制 は 天 皇 には 儲 君 ( 皇 太 子 )の 良 仁 親 王 か 皇 弟 の 智 仁 親 王 日 本 の 関 白 に は 豊 臣 秀 保 か 宇 喜 多 秀 家 のどちらかをすえる 朝 鮮 には 豊 臣 秀 勝 か 宇 喜 多 秀 家 をおき 九 州 には 羽 柴 秀 俊 ( 後 の 小 早 川 秀 秋 )をおく これらとは 別 に 京 都 御 所 と 聚 楽 亭 に 留 守 居 を 置 き 宮 部 継 潤 を 朝 鮮 留 守 居 とする 朝 鮮 の 支 配 体 制 については 明 かではないが 朝 鮮 国 王 の 探 索 を 命 令 していることからすれば これを 国 王 とするつもりだったのであろう そうすると 羽 柴 秀 勝 か 宇 喜 多 秀 家 は 朝 鮮 の 関 白 を 予 定 されていたのであろうか 京 都 御 所 聚 楽 亭 や 朝 鮮 の 留 守 居 は 国 家 支 配 に 関 わるものではなく 天 皇 家 豊 臣 家 に 関 わる 存 在 であろう そして 九 州 に 置 かれる 予 定 の 羽 柴 秀 俊 も 恐 らくは 名 護 屋 城 の 留 守 居 であろう このような 国 家 体 制 に 共 通 するのは 天 皇 ( 国 王 )と 関 白 がセットとなっていることである そ してこれは 国 王 = 公 家 関 白 = 武 家 でもあるから 公 武 結 合 王 権 の 構 造 でもある 秀 吉 は 当 時 の 日 本 国 内 の 支 配 体 制 や 王 権 構 造 を そのまま 明 と 朝 鮮 にも 持 ち 込 むつもりだったのである 天 皇 家 や 公 家 衆 の 存 在 は 否 定 されることなく 明 にまで 拡 大 されて 持 ち 込 まれる 構 想 だった 秀 吉 にとって 国 家 とは 国 王 と 関 白 のセット 抜 きには 考 えられなかったのである そして 秀 吉 は 日 本 との 貿 易 港 である 寧 波 に 居 住 し さらにはインド 侵 攻 をも 構 想 していた この 構 想 のなかで 秀 吉 自 身 の 地 位 や 官 職 は 明 示 されていない 三 国 の 国 家 体 制 を 構 想 す る 秀 吉 に 何 か 公 的 な 地 位 などそもそも 必 要 なかったといえよう 各 国 の 国 王 と 関 白 を 任 命 し そ れぞれに 知 行 をあたえ 東 アジア 世 界 を 実 質 的 に 支 配 し 各 国 の 支 配 体 制 を 自 らの 一 存 で 決 定 する その 根 拠 は 地 位 や 身 分 ではなく 武 威 に 裏 づけられた 秀 吉 のカリスマ 性 にある そのよう な 秀 吉 の 存 在 をどのように 規 定 するかは 難 しいが 東 アジアの 伝 統 的 な 冊 封 体 制 にあてはめれ ば < 中 華 皇 帝 >に 目 されるのではないか 明 皇 帝 が 中 華 皇 帝 として 君 臨 し 周 辺 諸 国 は 明 に 朝 貢 し 明 皇 帝 が 諸 国 の 国 王 を 任 命 する この 明 皇 帝 の 位 置 に 三 国 国 割 構 想 における 秀 吉 が 位 置 づけられるのではないか ただし これは 実 際 に 存 在 する 地 位 や 称 号 ではなく あくまでも 概 念 上 のものなので カッコ 付 きで< 中 華 皇 帝 >と 呼 びたい 日 本 を 含 む 周 辺 諸 民 族 が 中 国 に 征 服 王 朝 を 樹 立 する 華 夷 変 態 ( 中 華 と 夷 狄 の 逆 転 現 象 ) について 述 べておこう 漢 民 族 の 形 成 した 華 夷 思 想 は 中 国 歴 代 の 王 朝 だけでなく 周 辺 諸 国 諸 民 族 をも 規 制 する 東 アジア 世 界 における 国 際 秩 序 の 根 幹 であった しかし 周 辺 諸 国 がそれ ぞれの 国 家 を 形 成 する 過 程 において 国 内 支 配 を 貫 徹 し さらに 領 域 拡 大 を 構 想 する 中 で 中 国 と 対 等 に 自 己 を 位 置 づけながらも 限 定 した 地 域 という 小 世 界 のなかで 自 らを 中 華 とする 傾 向 が うまれた 秀 吉 の 三 国 国 割 構 想 も このような 東 アジア 世 界 の 全 体 的 な 傾 向 と 無 縁 ではない そ

229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いて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229 して1644 年 ( 寛 永 21 仁 祖 22)に 明 は 清 に 滅 ぼされ 華 夷 変 態 が 現 実 のものとなる しかし 中 国 と 対 等 ではなく 当 初 からこれを 侵 攻 征 服 しようとする 点 は 他 の 周 辺 諸 国 とは やはり 異 なっている このような 違 いをもたらした 背 景 が 戦 国 社 会 を 統 一 した 武 威 ( 武 力 ) であろう 秀 吉 は1592 年 ( 天 正 20)6 月 3 日 に 日 本 を 弓 箭 きひしき 国 として 誇 る 一 方 で 大 明 之 長 袖 国 として 明 を 一 段 低 く 見 ている 文 を 重 視 し 武 を 一 段 低 く 見 る 他 の 東 ア ジア 諸 国 の 認 識 とは 大 きく 異 なっていると 言 わざるを 得 ない そもそも 中 華 である 根 拠 は 礼 にあるというのが 東 アジア 世 界 の 華 夷 思 想 であるから 武 武 威 を 根 拠 に 自 らを 中 華 とする 秀 吉 の 国 家 構 想 東 アジア 世 界 構 想 は 異 様 である しばしば 指 摘 されるように こ れは 歪 んだ 屈 折 した 意 識 であることは 間 違 いない しかしこれは 1 世 紀 に 及 ぶ 戦 国 争 乱 と 天 下 統 一 過 程 からもたらされたものであった むすびにかえて 戦 場 の 最 前 線 では 秀 吉 の 三 国 国 割 構 想 とは 全 く 正 反 対 の 動 きを 見 せていた 漢 城 陥 落 の 直 後 の5 月 14 日 小 西 行 長 や 宗 義 智 らを 中 心 にして 朝 鮮 国 に 和 議 を 勧 告 していたのである これ は 朝 鮮 側 の 拒 絶 によって 成 立 しなかった そして 日 本 国 内 では 徳 川 家 康 と 前 田 利 家 の 諫 止 に よって 秀 吉 の 朝 鮮 渡 海 が 翌 年 3 月 に 延 期 された 結 局 秀 吉 が 渡 海 することはなかった 日 本 軍 は 朝 鮮 水 軍 を 率 いた 李 舜 臣 の 活 躍 によって 補 給 路 を 断 たれ 各 地 に 義 兵 が 決 起 し 8 月 から は 本 格 的 に 明 からの 救 援 軍 も 出 動 して 戦 況 は 大 きく 転 換 した 9 月 には50 日 間 の 停 戦 協 定 が 結 ば れる そして1593 年 ( 文 禄 2 宣 祖 26)4 月 初 めには 朝 鮮 国 側 が 漢 城 撤 退 と 朝 鮮 2 王 子 返 還 を 条 件 とした 和 議 を 勧 告 した 6 月 末 には 小 西 行 長 の 家 臣 内 藤 如 安 を 秀 吉 の 講 和 使 節 に 偽 装 して 明 へ 派 遣 しようとする さらに 秀 吉 が 降 伏 を 申 し 入 れる 関 白 降 表 が 偽 作 され 1594 年 ( 文 禄 3 宣 祖 27)12 月 なかば 内 藤 如 安 が 明 皇 帝 に 謁 見 した 日 本 軍 の 朝 鮮 からの 撤 退 と 秀 吉 の 冊 封 などの 講 和 条 件 を 明 皇 帝 は 許 した そして1596 年 ( 慶 長 元 宣 祖 29)9 月 1 日 秀 吉 は 大 坂 城 で 明 使 節 を 謁 見 した 翌 2 日 西 笑 承 兌 が 明 皇 帝 の 誥 命 を 読 み 上 げ 日 明 和 議 交 渉 は 破 綻 した そこでは 秀 吉 の 要 求 する 和 議 条 件 は 無 視 されており 秀 吉 は 激 怒 した もっとも 秀 吉 の 望 む 条 件 は 小 西 らに 握 りつぶされて 明 側 には 伝 えられておらず 明 皇 帝 の 誥 命 に 反 映 されて いるはずもなかった 俗 説 では 秀 吉 は 爾 を 封 じて 日 本 国 王 と 為 す という 表 現 に 激 怒 したとさ れているが それは 誤 りである 講 和 交 渉 が 破 綻 して 大 陸 侵 攻 は 再 開 し( 丁 酉 倭 乱 ) 1598 年 ( 慶 長 3 宣 祖 31)8 月 の 秀 吉

230 23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の 死 まで 続 く この 戦 争 は 唐 入 り というように 明 征 服 を 目 指 したものであるが 実 際 の 戦 場 は 朝 鮮 半 島 だった 戦 況 の 停 滞 と 長 期 化 は 大 名 や 兵 士 たちの 厭 戦 気 分 を 生 み 国 内 外 の 疲 弊 と 豊 臣 政 権 への 反 感 を 生 み 秀 吉 の 死 とともに 豊 臣 政 権 は 事 実 上 崩 壊 するのである この 後 徳 川 家 康 は1600 年 ( 慶 長 5)の 関 ヶ 原 の 戦 い 1614 年 ( 慶 長 19)~1615 年 ( 慶 長 20) の 大 坂 冬 の 陣 夏 の 陣 を 経 て 徳 川 氏 の 権 力 を 確 立 した 江 戸 幕 府 は 武 威 を 強 調 する 一 方 で 諸 外 国 に 対 して 武 威 を 封 印 する ヨーロッパ 諸 国 に 対 しては キリスト 教 禁 教 政 策 との 関 連 でポルトガルと 断 交 し 結 果 的 にオランダとのみ 通 交 を 維 持 する アジア 諸 国 に 対 しては 朝 鮮 国 とは 講 和 をまとめることに 成 功 したものの ついに 中 国 とは 正 式 な 国 交 を 結 ぶことはできな かった 試 行 錯 誤 の 末 1635 年 ( 寛 永 12)に 柳 川 一 件 が3 代 将 軍 家 光 の 親 裁 によって 解 決 し 翌 1636 年 ( 寛 永 13)に 朝 鮮 通 信 使 が 来 日 する そして1641 年 ( 寛 永 18)にオランダ 商 館 を 長 崎 出 島 に 移 し 鎖 国 が 完 成 するのである

231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31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久 芳 崇 (KUBA Takashi, 西 南 学 院 大 学 ) 緖 言 1592 年 よりはじまる 壬 辰 倭 乱 ( 万 暦 朝 鮮 役 文 禄 慶 長 の 役 )では 日 本 軍 の 兵 器 なかでも1 6 世 紀 において 最 新 鋭 とされる 鉄 砲 ( 火 縄 銃 当 該 時 期 の 朝 鮮 明 朝 では 鳥 銃 鳥 嘴 銃 鳥 鎗 等 と 呼 称 される)や 日 本 刀 が 日 本 軍 の 主 要 兵 器 として 威 力 を 発 揮 した こうした 日 本 軍 の 武 器 使 用 は 当 該 時 期 の 明 朝 を 中 心 とする 東 アジア 世 界 の 情 勢 に 如 何 なる 影 響 を 及 ぼしたのであ ろうか 本 報 告 では 主 としてこれまで 公 にしてきた 拙 論 での 考 察 に 基 づいて(*1) かかる 点 について 若 干 の 卑 見 を 示 してみたい 1 壬 辰 倭 亂 における 日 本 軍 の 船 舶 と 鐵 砲 1592 年 4 月 日 本 軍 は 朝 鮮 へ 軍 を 派 兵 すると 半 月 程 で 漢 城 (ソウル)を 陥 落 させた それ は 陥 落 の 報 を 受 けた 明 朝 廷 に 日 本 と 朝 鮮 との 密 通 を 疑 わせる 程 の 異 例 の 早 さであった こうし た 日 本 軍 の 緒 戦 における 優 勢 は 日 本 軍 と 朝 鮮 軍 との 軍 事 兵 器 の 格 差 によるところが 大 きい な かでも 日 本 軍 が 大 量 に 装 備 していた 鉄 砲 は 当 該 時 期 の 東 アジア 世 界 における 軍 事 技 術 の 均 衡 を 破 る 程 の 突 出 した 性 能 を 有 しており 弓 矢 が 主 要 兵 器 であった 朝 鮮 軍 を 圧 倒 した(*2) 一 方 それとは 対 照 的 に 日 本 軍 の 船 舶 は 朝 鮮 軍 のそれに 対 して 苦 戦 を 強 いられた 当 該 時 期 の 日 本 軍 の 船 舶 には 安 宅 船 関 船 小 早 船 などがあった そのうち 最 も 大 型 のものが 安 宅 船 で 海 戦 の 際 の 主 力 となるものであった また 関 船 は 安 宅 船 よりも 小 型 も 船 舶 で その 機

232 23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動力を生かした偵察 戦闘が主な使用用途であった 小早船はさらに小型のもので 安宅 関船 の補助的な役割を果たしていた 壬辰倭乱開戦当初 日本側は海戦を重視せず 船舶は輸送を 主な目的としていた また 輸送船を軍船として転用する事例も多かったようである さらに 基 幹船舶である安宅船は 竜骨を用いぬ構造であったため 朝鮮軍の船舶に対して非常に脆弱で あったという 3 かかる状況や船舶の 構造上の欠点が 緒戦における海上での劣勢 敗 北の要因となり 以降の戦略決定などに少なからざる影響を及ぼした このように 壬辰倭乱では軍事技術が戦局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といってよい そして 日本 軍の軍事進攻の原動力となったのが鉄砲である 16世紀中葉 ポルトガル人により種子島に伝え られた鉄砲 図1 は 戦国時代の日本各地に 急速に伝播 普及した 壬辰倭乱では こ の鉄砲が日本刀とともに日本軍の主要兵器として威力を発揮した 図1 種子島伝来と同型とされる鉄砲 では 日本軍の鉄砲について 壬辰倭乱初期において兵部侍郎兼経略防海禦倭軍務として明 朝救援軍を統率した宋応昌は 当初どのように認識していたのだろうか 宋応昌が経略在任期に おいて記した奏疏 咨檄等を年月順に収録した 経略復国要編 巻3 檄大小将領 万暦20年 月16日 には 議攻戦之勢 説者謂 倭之鳥銃 我難障蔽 倭之利刀 我難架隔 然我之快鎗 三眼鎗 及諸神器 豈不能当鳥銃 倭純熟故称利 我生熟相半 故称鈍 原非火器之不相敵也 倭刀雖利能死人 我刀雖稍不如 豈不能死倭哉 倭之所以能敢戦者 非縁一刀之故 其 実殊死戦也 とある すなわち 日本軍の 鳥銃 や刀は防ぎ難いと説く者があるが 明軍の諸火器の威 力もこれに劣るものではない 日本軍が手強いのは 兵器の優劣ではなく兵士が火器の操作に 熟練しており また死力を尽くして戦うが故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 経略に着任して間もなく 未だ

233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33 日 本 軍 の 状 況 を 把 握 していなかった 宋 応 昌 は 当 初 緒 戦 における 日 本 軍 の 勝 利 の 理 由 を 日 本 式 鉄 砲 の 性 能 の 高 さよりも 日 本 兵 が 鉄 砲 や 刀 の 操 作 に 熟 練 し 且 つ 勇 猛 であったことに 求 めていた のである しかし 翌 万 暦 21 年 (1593)1 月 平 壌 から 碧 蹄 館 にかけての 実 戦 を 経 て 彼 は 日 本 軍 の 鉄 砲 の 威 力 を 認 識 するようになる 同 書 巻 5 與 参 軍 鄭 文 彬 趙 如 梅 書 ( 万 暦 21 年 1 月 14 日 )には 倭 奴 鳥 銃 甚 利 我 先 以 大 将 軍 砲 挑 撃 之 彼 必 以 鳥 銃 抵 我 俟 其 放 尽 方 以 大 兵 進 之 必 獲 全 勝 矣 とあり また 同 書 巻 6 與 参 軍 鄭 同 知 趙 知 縣 書 ( 万 暦 21 年 2 月 1 日 )にも 我 之 火 器 固 利 而 彼 之 鳥 銃 亦 足 相 当 如 初 角 之 時 当 先 施 我 火 器 徉 欲 進 兵 実 且 未 進 誘 其 放 尽 鳥 銃 然 後 一 鼓 下 之 無 難 也 とある すなわち 日 本 軍 の 鉄 砲 は 極 めて 性 能 が 高 く これに 対 抗 するためにはまず 大 型 火 器 で 挑 発 して 鉄 砲 を 打 たせ 相 手 の 弾 が 尽 きれば 攻 撃 を 加 えるべきであると 指 示 している 弾 が 尽 きるまで 待 つという 消 極 的 な 戦 術 は 明 軍 が 装 備 する 鉄 砲 の 性 能 が 日 本 軍 の 新 式 鉄 砲 に 対 して 遜 色 があり 明 軍 が 正 面 から 対 することが 困 難 であったことを 示 すことになろう 日 本 軍 の 鉄 砲 は 野 戦 守 城 などのあらゆる 戦 闘 状 況 においてその 威 力 を 発 揮 した 特 に 前 者 の 代 表 ともいえる 万 暦 21 年 (1593)1 月 の 碧 蹄 館 での 戦 闘 では その 前 年 中 国 西 北 部 寧 夏 における 哱 拝 の 乱 を 鎮 圧 した 後 明 軍 提 督 として 実 戦 の 総 指 揮 にあたった 総 兵 李 如 松 の 主 力 部 隊 をほぼ 壊 滅 させた この 戦 闘 について 明 軍 には 火 器 を 用 いた 戦 術 を 得 意 とする 浙 江 の 兵 が 加 わらず 李 如 松 子 飼 いの 騎 馬 軍 がその 主 体 であったこと 直 前 の 平 壌 での 戦 勝 によって 李 如 松 に 油 断 があったことなどがその 敗 因 であるともいわれるが(*4) 明 軍 はこの 戦 いを 契 機 に 日 本 軍 の 兵 器 特 に 鉄 砲 に 対 し 真 剣 な 対 応 に 迫 られたのである 2 壬 辰 倭 亂 における 明 軍 の 鐵 砲 それでは 明 軍 は 壬 辰 倭 乱 に 際 しどのような 火 器 特 に 鉄 砲 を 装 備 していたのであろうか 経 略 復 国 要 編 によれば 万 暦 20 年 (1592)9 月 から11 月 にかけて 宋 応 昌 は 次 のような 一 連 の 檄 文 上 疏 軍 令 を 記 している 1 中 国 長 技 惟 製 火 器 為 先 倭 奴 入 犯 以 不 容 登 岸 為 上 各 該 地 方 原 設 有 車 載 大 将 軍 虎 蹲 滅 虜 湧 珠 馬 腿 鳥 嘴 仏 郎 機 三 眼 等 項 銃 砲 倶 称 神 器 ( 巻 1 檄 天 津 永 平 山 東 遼 東 各 兵 巡 分 守 等 十 二 道 万 暦 20 年 9 月 28 日 )

234 23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2 火 器 如 大 将 軍 虎 蹲 馬 腿 滅 虜 湧 珠 鳥 嘴 仏 郎 機 三 眼 等 銃 砲 倶 係 常 用 器 物 不 難 造 集 見 今 旧 有 若 干 新 造 若 干 分 発 防 守 如 不 足 用 動 支 馬 價 銀 速 行 製 造 ( 巻 2 経 略 海 防 事 宜 疏 万 暦 20 年 10 月 12 日 ) 3 各 様 火 器 如 虎 蹲 湧 珠 馬 腿 鳥 嘴 仏 郎 機 三 眼 銃 及 車 載 大 将 軍 等 砲 見 在 各 若 干 又 新 製 及 旧 造 堪 用 可 称 神 器 ( 巻 2 檄 遼 東 張 総 兵 万 暦 20 年 10 月 14 日 ) 4 破 敵 必 資 利 器 而 勁 弓 銃 矢 火 薬 火 箭 三 眼 鎗 快 鎗 鳥 銃 長 鎗 飛 鎌 標 鎗 鉤 刀 仏 郎 機 等 物 即 所 以 攻 也 ( 巻 3 議 題 水 戦 陸 戦 疏 万 暦 20 年 11 月 15 日 ) 5 銅 鉄 大 将 軍 仏 郎 機 滅 虜 砲 虎 蹲 砲 百 子 銃 三 眼 銃 快 鎗 鳥 鎗 倶 要 将 官 督 同 中 軍 千 把 百 総 逐 一 細 加 試 験 ( 巻 3 軍 令 三 十 条 万 暦 20 年 11 月 30 日 ) こうした 史 料 からみて 壬 辰 倭 乱 当 初 において 準 備 された 明 軍 の 火 器 は 大 将 軍 砲 ( 明 初 の 火 器 の 形 式 の 流 れを 汲 む 先 込 め 式 の 大 型 砲 ) 虎 蹲 砲 ( 同 小 型 砲 ) 仏 郎 機 砲 (16 世 紀 にポルト ガル 人 により 伝 えられたカートリッジ 式 後 装 砲 )といった 各 種 大 砲 鳥 銃 ( 鉄 砲 ) 三 眼 銃 火 箭 等 の 類 であったことが 確 認 できる つまり1~5の 史 料 から 明 軍 が 伝 統 的 な 大 型 火 器 や 仏 郎 機 砲 の 他 鉄 砲 などの 小 型 火 器 も 装 備 していたことがわかる ところが 経 略 復 国 要 編 においては 史 料 5を 最 後 に 明 軍 が 鉄 砲 を 装 備 し 実 戦 で 活 用 したことを 示 す 記 事 が 一 切 あらわれなくなり それと 相 反 して 前 述 の 如 き 日 本 式 の 鉄 砲 の 威 力 に 関 する 記 事 があらわれるようになるのである このことは 明 軍 の 鉄 砲 が 日 本 軍 の 鉄 砲 の 前 には 殆 ど 無 力 であったことと 関 連 するであろう 壬 辰 倭 乱 において 明 軍 の 装 備 した 鉄 砲 が 日 本 軍 の 新 式 鉄 砲 の 優 れた 性 能 に 対 抗 しえず その 存 在 意 義 を 失 っていったことを 窺 わせるのである 宣 教 師 ルイス フロイスも その 著 書 日 本 史 のなかで 明 軍 の 鉄 砲 について 彼 ら( 明 軍 )の 鉄 砲 は どのように 発 射 されるのか 不 可 解 である というのは 無 数 に 発 砲 した 後 も そのため の 死 傷 者 が 一 人 も 出 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と 述 べており 明 軍 の 鉄 砲 の 性 能 を 示 唆 している そもそも 中 国 において 鉄 砲 は 16 世 紀 中 葉 に 伝 来 していた ただし その 初 伝 は 諸 説 あり 明 確 ではない これは 明 代 の 史 料 において 既 に 諸 説 が 存 在 することに 起 因 している その 諸 説 を 整 理 すれば もともと 中 国 に 起 源 があるとする 説 南 夷 西 番 (ヨーロッパ)に 起 源 が あり 彼 らを 介 して 明 朝 に 伝 来 したとする 説 日 本 経 由 で 明 朝 に 伝 来 したとする 説 に 大 別 される 鄭 若 曾 籌 海 図 編 ( 嘉 靖 41 年 [1562] 成 立 ) 巻 13 経 略 に 予 按 鳥 銃 之 製 自 西 番 流 入 中 国 其 来 遠 矣 然 造 者 多 未 尽 其 妙 嘉 靖 二 十 七 年 都 御 史 朱 紈 遣 都 指 揮 使 盧 堂 破 双 嶼 港 賊 巣 獲 番 酋 善 銃 者 命 義 士 馬 憲 製 器 李 槐 製 薬 因 得 其 伝 而 造 作 比 西 番 尤 為 精 絶 云

235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35 とあり 当 初 ポルトガルからその 製 法 が 伝 来 したが 精 妙 に 模 造 できず 次 に 嘉 靖 27 年 (1548) 密 貿 易 の 拠 点 となっていた 寧 波 付 近 の 双 嶼 港 を 明 軍 総 兵 盧 鏜 ( 盧 堂 )ら 明 軍 が 攻 撃 した 際 倭 寇 側 より 獲 得 した 鉄 砲 及 び 捕 虜 となった 日 本 人 を 通 して 鉄 砲 が 伝 来 したというのが 有 力 な 説 となっているようである(*5) 嘉 靖 定 海 県 志 巻 7 海 防 にも 総 兵 盧 鏜 攻 破 雙 嶼 得 寇 鳥 嘴 銃 與 火 薬 方 其 伝 遂 広 とあり 雙 嶼 攻 撃 の 際 鉄 砲 を 鹵 獲 した 盧 鏜 により 鉄 砲 が 明 朝 に 広 まったという 以 降 明 朝 では 鉄 砲 は 倭 寇 より 伝 来 したとする 見 方 が 有 力 となってゆく 隆 慶 ~ 万 暦 初 期 に 成 立 した 戚 継 光 ( 倭 寇 討 伐 や 北 方 防 衛 に 赫 々たる 功 績 をあげた 武 将 )の 練 兵 実 紀 雑 集 巻 5 軍 器 解 鳥 銃 解 には 此 器 中 国 原 無 伝 自 倭 夷 初 得 之 此 與 各 色 火 器 不 同 利 能 洞 甲 射 能 命 中 弓 矢 弗 及 也 とあり 倭 夷 からの 鉄 砲 の 伝 来 を 伝 えている また 侯 継 高 全 浙 兵 制 考 巻 1にも 嘉 靖 三 十 五 年 八 月 総 督 胡 侍 郎 搗 沈 家 庄 総 兵 盧 鏜 擒 賊 酋 辛 五 郎 等 五 郎 善 造 鳥 銃 今 之 鳥 銃 自 伊 伝 始 とあり 嘉 靖 35 年 (1556)8 月 盧 鏜 によって 擒 獲 された 日 本 人 辛 五 郎 が 鉄 砲 の 造 作 に 通 じて いたため 彼 を 介 して 鉄 砲 の 製 造 技 術 が 明 朝 へ 伝 来 したとする より 具 体 的 な 鉄 砲 伝 来 像 が 提 示 されている なお この 辛 五 郎 については 明 史 巻 205 胡 宗 憲 伝 に 會 盧 鏜 亦 擒 辛 五 郎 至 五 郎 者 大 隅 島 主 弟 也 とある ただし この 辛 五 郎 が 明 朝 における 鉄 砲 の 製 造 にどの 程 度 関 与 したのかについて は 未 詳 である その 他 ゴンサーレス デ メンドーサ シナ 大 王 国 誌 第 2 部 1 巻 25 章 には 万 暦 3 年 (1575) 福 建 における 状 況 として ビレイ( 巡 撫 )は 一 行 のもとにひとをつかわして エスパニャの 軍 人 が 帯 びていた 剣 を 一 振 りと 火 縄 銃 を 一 挺 それに 火 薬 壺 一 個 を 借 用 したい それらをまねて 制 作 してみたい からと 要 請 した そこで 軍 人 たちはこれを 送 ってやった あまり 精 巧 ではないが それを 模 造 したということをあとで 聞 いた とあり 福 建 でのスペインを 介 した 鉄 砲 の 伝 来 と 模 造 とを 伝 えている 16 世 紀 中 葉 主 として 倭 寇 など 海 外 諸 勢 力 との 交 流 が 活 発 であった 沿 岸 諸 地 域 において 共 時 的 多 元 的 に 伝 えられた 鉄 砲 は 早 くも 王 朝 傘 下 において 大 量 に 製 造 された 万 暦 大 明 会 典 巻 193 軍 器 軍 装 二 火 器 には 嘉 靖 37 年 (1558) 明 朝 の 火 器 製 造 機 関 である 兵 仗 局

236 23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で 一 万 挺 の 鉄 砲 が 製 造 されたことが 記 されている 以 降 鉄 砲 は 戚 継 光 らによって 積 極 的 に 導 入 され 仏 郎 機 砲 など 他 の 火 器 とともに 対 倭 寇 モンゴル 防 衛 に 活 用 されたようである 紀 效 新 書 や 練 兵 実 紀 など 彼 の 一 連 の 著 作 の 記 述 からは 戦 術 のなかで 鉄 砲 が 重 要 視 される16 世 紀 後 半 の 状 況 が 看 取 される 以 上 みてきたように 16 世 紀 中 葉 以 降 明 朝 では 鉄 砲 が 大 量 に 製 造 された そしてこれら 明 朝 の 鉄 砲 は 壬 辰 倭 乱 においても 明 軍 武 将 らによって 装 備 活 用 されたのである では 壬 辰 倭 乱 で 明 軍 が 使 用 した 鉄 砲 は 如 何 なるものであり 日 本 軍 の 鉄 砲 と 比 較 して 具 体 的 に 如 何 なる 点 において 劣 っていたのであろうか かかる 点 について 洞 富 雄 氏 は 明 朝 の 鉄 砲 研 究 家 であっ た 趙 士 楨 ( 詳 細 は 後 述 )の 神 器 譜 或 問 ( 万 暦 27 年 [1599] 序 )に 近 日 大 小 神 器 易 銅 為 銕 舎 鋳 務 鍛 とあり また 明 軍 の 京 営 ( 在 京 の 禁 軍 組 織 )の 武 将 であった 何 良 臣 陣 紀 ( 万 暦 19 年 [1591] 序 ) 巻 2 技 用 の 条 に 鳥 銃 出 外 夷 今 作 中 華 長 技 但 不 敢 連 放 五 七 銃 恐 内 熱 火 起 且 慮 其 破 惟 倭 銃 不 妨 とあることから 明 朝 の 鉄 砲 製 造 法 が16 世 紀 末 に 銅 の 鋳 造 から 鉄 の 鍛 造 へと 移 行 したこと 壬 辰 倭 乱 において 明 軍 が 使 用 した 鉄 砲 は 鋳 銅 製 であり 5 6 発 も 放 てば 熱 を 帯 び 破 裂 の 危 険 性 が あるのに 対 し 鍛 鉄 製 の 日 本 の 鉄 砲 はその 心 配 がなかったことを 指 摘 している(*6) 陣 紀 が 述 べるように 明 朝 の 鉄 砲 は 連 発 耐 久 性 に 劣 っていたが このことは 命 中 精 度 や 射 程 距 離 にも 影 響 を 及 ぼしたであろう すなわち 連 発 耐 久 性 はもとより 命 中 精 度 射 程 距 離 などの 性 能 においても 鍛 鉄 製 の 日 本 の 鉄 砲 は 鋳 銅 製 の 明 軍 の 鉄 砲 に 勝 っていたであろう ただし 洞 氏 は なぜ16 世 紀 末 に 鉄 砲 の 製 造 法 が 銅 の 鋳 造 から 鉄 の 鍛 造 へと 変 わったのかについては 触 れ ていないが おそらく 壬 辰 倭 乱 以 後 朝 鮮 王 朝 において 日 本 式 鉄 砲 の 導 入 が 進 んだのと 同 様 に 明 朝 においても 壬 辰 倭 乱 において 日 本 軍 から 獲 得 した 鉄 砲 を 通 じて 新 式 の 鍛 鉄 製 鉄 砲 が 導 入 されていったためと 想 定 される こうした 鉄 砲 の 性 能 の 立 ち 遅 れに 直 面 して 明 軍 武 将 らは 戦 闘 の 過 程 で 日 本 軍 の 鉄 砲 を 日 本 刀 や 捕 虜 と 共 に 積 極 的 に 獲 得 していった 宣 祖 実 録 巻 48 宣 祖 27 年 (1594)2 月 己 巳 の 条 に 朝 鮮 備 辺 司 の 啓 として 前 日 各 陣 所 得 鳥 銃 皆 送 於 元 帥 処 太 半 為 応 索 天 兵 之 資 今 後 戦 陣 所 得 鳥 銃 無 得 濫 費 一 一 収 拾 各 陣 軍 士 逐 日 学 習 漸 次 成 才 とある すなわち 従 来 朝 鮮 軍 が 獲 得 した 日 本 軍 の 鉄 砲 は みな 明 軍 の 要 求 に 応 じて 元

237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37 帥 ( 李 如 松 )のもとに 送 られていたが 以 後 獲 得 した 鉄 砲 は つとめて 自 陣 に 保 全 し 兵 士 に 給 付 して 訓 練 させ 熟 達 をはかれというのである このように 朝 鮮 が 日 本 軍 から 獲 得 した 鉄 砲 は 朝 鮮 軍 によって 活 用 されただけではなく 明 軍 側 の 要 求 によって 相 当 数 が 明 軍 武 将 らのもとに 送 ら れていたと 考 えられる また 経 略 復 国 要 編 巻 7 叙 恢 復 平 壌 開 城 戦 功 疏 ( 万 暦 21 年 [15 93]3 月 4 日 )には 平 壌 から 開 城 にかけての 緒 戦 における 日 本 軍 からの 鹵 獲 品 の 記 述 として 斬 獲 倭 級 一 千 九 百 七 十 級 夥 生 擒 酋 首 五 名 奪 獲 倭 馬 三 千 三 十 二 匹 倭 刀 鳥 銃 盔 甲 等 器 六 百 三 十 件 とあり 明 軍 が 戦 役 当 初 から 多 数 の 鉄 砲 や 日 本 刀 を 獲 得 していたことが 確 認 できる このようにして 明 軍 武 将 らが 積 極 的 に 獲 得 した 日 本 軍 の 鉄 砲 のうち その 一 部 は 壬 辰 倭 乱 終 結 後 の 万 暦 27 年 (1599)4 月 北 京 で 挙 行 された 献 俘 式 ( 皇 帝 への 捕 虜 献 納 儀 礼 )(* 7)に 先 駆 けて 行 われた 献 獲 式 の 際 長 安 街 に 戦 利 品 として 陳 列 された この 献 獲 式 の 模 様 を 記 した 張 大 復 東 征 献 獲 記 ( 黄 宗 羲 編 明 文 海 巻 352 記 所 収 )の 一 部 には 麻 将 軍 以 俘 獲 献 天 子 天 子 命 金 吾 繋 鹵 人 而 陳 所 獲 鎧 甲 兜 鍪 旌 幟 器 械 之 属 長 安 街 上 令 吏 民 縦 観 之 旗 之 左 右 車 各 五 七 輛 所 載 皆 銅 銃 鳥 銃 鉛 錫 銃 とある すなわち 倭 乱 終 結 後 明 軍 提 督 麻 貴 は 日 本 兵 捕 虜 とともに 鹵 獲 品 を 明 朝 皇 帝 万 暦 帝 に 献 上 した 万 暦 帝 はそれら 鹵 獲 品 を 長 安 街 上 に 陳 列 させたが そのなかには 日 本 軍 から 獲 得 した 鉄 砲 が 含 まれていたというのである この 史 料 からも 明 軍 による 日 本 式 鉄 砲 獲 得 の 状 況 を 看 取 することができる 3 壬 辰 倭 亂 後 の 日 本 式 鐵 砲 の 傳 播 壬 辰 倭 乱 以 降 朝 鮮 王 朝 では 降 倭 を 介 した 日 本 式 鉄 砲 の 導 入 が 急 速 に 進 んだ かかる 点 に ついては 既 に 豊 富 な 先 行 研 究 によりこれまでに 詳 細 に 検 討 解 明 されている(*8) 一 方 明 朝 においてはどうであっただろうか 以 下 検 討 しみてたい 万 暦 26 年 (1598)8 月 の 豊 臣 秀 吉 の 死 によって 壬 辰 倭 乱 が 最 終 的 に 終 結 するまで 明 軍 武 将 らによって 鹵 獲 された 日 本 軍 の 鉄 砲 は 相 当 数 に 上 ったと 考 えられる こうした 明 軍 武 将 らによる 積 極 的 な 日 本 式 鉄 砲 の 獲 得 収 集 は 彼 らの 軍 事 力 強 化 の 一 環 であった 鹵 獲 された 多 くの 日 本 式 鉄 砲 は 同 じく 捕 虜 とされた 多 くの 日 本 兵 とともに 明 軍 各 武 将 らのもとで 戦 力 とされ 壬 辰 倭 乱 終 結 後 における 中 国 各 地 の 軍 事 活 動 で 利 用 された 例 えば 平 播 日 録 ( 著 者 不 詳 万 暦 28 年 [1600]10 月 後 付 )には

238 23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劉 総 兵 衣 短 衣 率 親 兵 真 倭 数 人 各 挾 鳥 銃 雑 戎 行 立 城 下 城 上 賊 欲 発 弩 纔 越 女 墻 見 半 面 而 矢 已 先 及 之 矣 賊 始 不 知 已 一 賊 大 呼 曰 劉 総 爺 至 矣 衆 賊 轟 然 奔 散 とある 壬 辰 倭 乱 終 結 後 の 万 暦 28 年 (1600)3~4 月 にかけて 朝 鮮 から 中 国 西 南 部 四 川 播 州 での 土 司 楊 応 龍 の 乱 鎮 圧 に 転 戦 した 明 軍 総 兵 の 劉 綎 が 麾 下 の 真 倭 ( 劉 綎 が 壬 辰 倭 乱 に おいて 捕 虜 として 麾 下 に 編 入 した 日 本 兵 ) 数 人 とともに 鉄 砲 を 携 えて 楊 応 龍 軍 の 城 塞 に 突 入 したこ とを 伝 えている また 趙 士 楨 神 器 譜 巻 1 防 虜 車 銃 議 には 壬 辰 倭 乱 終 結 後 の 遼 東 の 状 況 について 近 日 退 虜 亦 不 過 日 本 鳥 銃 とあり 女 真 やモンゴルとの 対 戦 においては 日 本 鳥 銃 が 大 きな 威 力 を 発 揮 すると 述 べて いる 同 書 巻 4 説 銃 六 十 九 条 に 西 洋 并 倭 鳥 必 須 歳 月 学 習 方 能 到 家 諸 銃 不 須 一 月 専 心 便 能 打 放 向 教 家 人 西 洋 及 倭 鳥 銃 一 歳 不 成 とあるように 日 本 式 鉄 砲 の 操 作 に 熟 達 するためには 一 年 以 上 の 修 練 が 必 要 であったとされ る ゆえに 壬 辰 倭 乱 で 明 軍 の 捕 虜 となった 日 本 兵 は 熟 達 した 鉄 砲 の 使 い 手 として 明 朝 内 での 軍 事 活 動 において 活 用 されたのである 日 本 兵 捕 虜 は 鉄 砲 の 操 作 のみならず 鉄 砲 を 利 用 した 戦 術 の 伝 播 の 普 及 にも 貢 献 した 神 器 譜 巻 1 防 虜 車 銃 議 には 壬 辰 倭 乱 終 結 後 の 遼 東 義 州 の 状 況 について 以 下 のように 記 している 朝 鮮 撤 回 之 兵 留 防 義 州 者 不 満 千 人 斨 斧 破 欠 身 無 片 甲 適 虜 万 余 倅 薄 城 下 以 火 器 更 番 撃 打 醜 類 被 傷 者 以 千 計 不 敢 深 入 而 走 延 綏 報 讐 之 虜 苟 非 降 倭 鳥 銃 打 傷 酋 首 其 流 毒 又 不 知 何 若 壬 辰 倭 乱 後 遼 東 の 義 州 には 朝 鮮 から 撤 回 してきた 明 軍 の 部 隊 が 駐 屯 していたが その 数 は 千 名 に 満 たず 装 備 する 武 器 は 破 損 し 鎧 甲 もない 状 態 であった ところが 一 万 名 以 上 の 虜 (モンゴル 人 )が 義 州 に 来 寇 した 際 彼 らは 火 器 の 更 番 撃 打 によってその 襲 撃 を 退 けた モンゴル 側 の 負 傷 者 は 千 名 以 上 に 上 り 延 綏 方 面 に 退 却 した この 際 もし 投 降 日 本 兵 の 鳥 銃 ( 鉄 砲 )が 蒙 古 側 の 首 領 を 負 傷 させなかったならば その 危 害 ははかり 知 れないものになった であろうというのである ここにある 更 番 撃 打 とは 戦 国 時 代 以 降 日 本 で 発 達 普 及 し 日 本 軍 が 得 意 とした 数 人 一 組 となり 鉄 砲 などの 火 器 を 交 替 に 連 続 して 一 斉 射 撃 する 戦 術 である 装 填 から 発 砲 までに 時 間 のかかる 鉄 砲 の 弱 点 を 補 うべく 編 み 出 されたこの 輪 番 による 鉄 砲 の 一 斉 射 撃 戦 術 は 織 田 信 長 が1575 年 の 長 篠 の 戦 いで 史 上 初 めて 披 瀝 し 三 千 名 の 鉄 砲 隊 が 武 田 騎

239 日本軍の 船舶と 武器の 科學的檢討 239 馬軍を 撃破したことで夙に知られる ヨーロッパでこの戦術 が採用されるのは17世紀以降といわれる その真偽はとも かく 壬辰倭乱の際において 明軍は日本軍のこの新奇な戦 術に大いに悩まされており こうした火器の使用法は大きな効 果を発揮していた 例えば 経略復国要編 巻6 議乞増兵 益餉進取王京疏 万暦 年2月16日 に 倘倭奴用分番休迭之法 時出遊騎以擾我師 我師進不可 退 不可糧餉 とある ここに記される 分番休迭之法 も射手の交替によ る鉄砲の 連続射撃の戦術を指し 明軍は日本軍によるこの 戦 術に苦慮したのである また 1638年に明朝で刊行された畢 懋康 軍器図説 には 鉄砲の 輪流操作図 が 所収され 図2 軍器図説 ている 図2 17世紀明朝において こうした鉄砲の輪番射撃戦術が伝播したことが確認できる また 李植 言事紀略 巻5 奏為群奸結党謀害孤忠謹陳踪跡顛末等事 によれば 万暦27 年 1599 頃 遼東巡撫の李植は遼河東西の城堡防備の強化を図り 次のように上奏している 臣慮城堡単弱難守 河東留南兵一千 分散遼瀋開鉄等城堡 貼防有不足 檄各路将領 選弱馬騎兵並歩兵益之 又査給大砲火箭 使城守有資 各給降倭一二名 教以射打 河 西調発土兵営各数百 分散錦義正安等城堡 貼防有不足 査選各営歩兵益之 火器鎗 手 亦如河東 すなわち 遼東の各城堡は守備が脆弱であるため 遼河以東においては 壬辰倭乱後に遼 東に駐留する 南兵 浙江の兵 千名を遼陽など各城堡に配備し それでもなお不足があれ ば周辺各将から兵馬を供出させて充当する また大砲や火箭といった火器を支給して防備強化を 図り 同時に日本兵捕虜一 二名を各々配備して射撃法など火器操作を指導させる 遼河以西の 火器に関しても同様に火器操作を教授させよというのである このように 日本兵を媒介に火器操 作の技術移転が行われたのである 日本兵を介した軍事技術移転の例は 鉄砲 火器に限定されるものではなかった 例えば 楊 東明 青瑣藎言 巻之下 救降夷山査疏 には 壬辰倭乱の過程で明軍の捕虜となり 明朝に おける剣術の普及に活用された山査という日本兵に関する以下のような記述がある 為降夷向化教芸頗優 懇乞聖明電察 発回営伍 以広招携事 臣等竊惟 克敵之方 在

240 24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於 精 敵 之 技 而 募 兵 之 要 貴 能 用 敵 之 人 精 敵 之 技 則 彼 不 得 恃 所 長 以 乗 吾 之 短 用 敵 之 人 則 吾 可 得 結 其 心 而 悉 彼 之 精 故 兵 法 不 殺 降 卒 而 因 間 用 其 郷 人 古 名 将 類 多 如 是 矣 臣 等 往 聞 倭 刀 最 利 倭 人 運 刀 最 鋭 常 恨 不 得 其 人 而 悉 其 術 頃 者 東 征 諸 将 帯 回 降 倭 業 已 分 布 各 辺 収 用 謝 用 梓 往 取 王 子 陪 臣 帯 回 一 倭 名 曰 山 査 本 兵 発 付 営 中 令 其 教 演 刀 法 標 下 坐 営 官 何 良 臣 具 申 総 協 及 臣 等 衙 門 倶 蒙 批 允 立 為 教 師 収 入 軍 冊 月 給 倉 糧 両 月 以 来 軍 士 習 学 倭 刀 精 熟 可 用 者 百 餘 人 臣 等 私 自 喜 幸 以 為 得 以 用 倭 人 而 悉 倭 技 矣 乃 東 厰 緝 事 人 役 誤 以 為 奸 細 擒 之 夫 京 営 十 餘 萬 衆 勿 論 也 すなわち 日 本 刀 は 非 常 に 精 鋭 であり 日 本 兵 によるその 操 作 も 秀 逸 である 近 年 壬 辰 倭 乱 に 出 征 した 武 将 たちは 降 倭 を 麾 下 に 帯 領 して 各 辺 に 収 用 した 謝 用 梓 が 朝 鮮 王 子 及 び 陪 臣 を 奪 還 した 際 山 査 という 一 人 の 日 本 人 を 帯 同 してきた 彼 は 日 本 刀 の 運 用 に 熟 達 していたた め 営 中 においてその 教 練 に 従 事 させた 明 の 京 営 坐 営 官 何 良 臣 は 具 申 して 彼 を 日 本 刀 操 作 の 教 師 として 採 用 し 通 常 の 倍 の 月 餉 を 以 て 採 用 した 以 降 日 本 刀 の 運 用 を 学 習 し 熟 達 した 兵 卒 は 百 名 以 上 にのぼった しかしその 後 山 査 は 東 厰 により 奸 細 との 嫌 疑 から 拘 束 されたという のである 日 本 刀 の 剣 術 が 日 本 兵 捕 虜 を 媒 介 に 明 朝 に 伝 播 することを 伝 える 具 体 的 史 料 であると いえるだろう また 王 在 晋 都 督 劉 将 軍 伝 には 万 暦 46 年 (1618) 頃 当 時 江 西 布 政 使 として 南 昌 に 駐 在 していた 王 在 晋 が 同 じく 革 職 され 南 昌 に 蟄 居 していた 武 将 劉 綎 のもとを 訪 問 した 際 のことを 記 した 以 下 のような 記 述 がある 入 中 堂 閲 倭 刀 盔 甲 及 虜 中 器 仗 靡 不 精 利 畢 具 蒼 頭 各 自 能 鋳 造 匠 工 不 及 也 其 家 丁 則 合 南 北 倭 苗 夷 虜 靡 所 不 有 すなわち 劉 綎 麾 下 には 南 北 の 倭 苗 など 多 様 な 人 々が 家 丁 ( 武 将 子 飼 いの 私 兵 )として 存 在 しており 彼 らが 倭 刀 ( 日 本 刀 )など 多 くの 兵 器 を 製 造 していた 家 丁 らが 製 造 する 兵 器 は 極 めて 精 妙 であったというのである 劉 綎 麾 下 の 兵 器 のすべてが 高 度 な 製 造 技 術 を 擁 する 異 民 族 の 家 丁 自 身 によって 製 造 されていたという 点 は 注 目 される 前 述 の ように 劉 綎 は 壬 辰 倭 乱 の 際 明 軍 側 の 主 要 武 将 となった 人 物 である 彼 は 壬 辰 倭 乱 の 過 程 で 日 本 兵 を 捕 虜 とし 家 丁 として 積 極 的 に 自 軍 の 傘 下 に 編 入 していたが その 主 因 は 日 本 兵 の 高 度 な 戦 闘 能 力 に 加 え 彼 らの 持 つ 高 度 な 軍 事 技 術 の 受 容 にあったものと 考 えられるのである こうした 点 から 鑑 みて 日 本 兵 捕 虜 が 壬 辰 倭 乱 後 の 明 朝 における 新 式 兵 器 の 製 造 にも 深 く 関 与 し ていたことが 看 取 される そして 製 造 されたそれら 兵 器 には 鉄 砲 をはじめとする 火 器 も 含 ま れていたと 想 定 することができよう

241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41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日 本 軍 との 戦 闘 は 東 アジアの 兵 器 技 術 の 導 入 に 大 きな 影 響 を 及 ぼした 壬 辰 倭 乱 後 高 性 能 の 鍛 鉄 製 日 本 式 鉄 砲 は 日 本 刀 とともにその 操 作 運 用 に 熟 達 した 日 本 兵 捕 虜 を 通 じて 様 々な 形 で 明 朝 に 伝 播 し 活 用 されたものと 想 定 される そして その 導 入 には 壬 辰 倭 乱 で 捕 虜 となった 日 本 兵 が 中 心 的 役 割 を 果 たしたものといえる 4 壬 辰 倭 亂 後 の 新 式 鐵 砲 の 普 及 壬 辰 倭 乱 を 契 機 として 日 本 式 鉄 砲 は 日 本 兵 捕 虜 を 媒 介 に 明 朝 朝 鮮 王 朝 において 受 容 さ れてゆく 同 時 に 明 朝 では 日 本 式 鉄 砲 に 対 抗 凌 駕 しうる 各 種 高 性 能 鉄 砲 に 対 する 関 心 も 急 速 に 高 まりをみせるようになる 壬 辰 倭 乱 当 時 明 朝 の 内 閣 文 華 殿 中 書 の 職 銜 にあった 趙 士 楨 は 人 脈 を 駆 使 して 諸 外 国 の 鉄 砲 を 収 集 し またこれらをもとに 新 たな 鉄 砲 を 開 発 試 作 し それらの 導 入 をしばしば 王 朝 に 上 奏 建 議 した 彼 が 提 出 した 火 器 関 連 の 上 奏 文 や 各 種 鉄 砲 の 解 説 は 神 器 譜 として 纏 められ 明 代 中 国 における 鉄 砲 研 究 書 として 広 く 知 られるようになる(*9) 神 器 譜 には 鉄 砲 に 関 する 興 味 深 い 記 事 が 多 く 収 録 されている 例 えば 同 じ 浙 江 出 身 で 倭 寇 討 伐 に 功 績 のあった 明 軍 武 将 陳 寅 からは 西 洋 番 鳥 銃 (ヨーロッパ 式 鉄 砲 )を 入 手 し 紹 介 し ている その 他 掲 載 される 鉄 砲 は 多 種 多 様 であるが なかでも 趙 士 楨 により 高 く 評 価 され のちの 明 朝 で 導 入 が 検 討 されるようになるのが 16 世 紀 中 葉 の 嘉 靖 年 間 に 伝 来 したという 嚕 蜜 銃 と 呼 ばれる 鉄 砲 である 嚕 蜜 銃 の 伝 来 事 情 及 び 趙 士 楨 による 入 手 の 過 程 については 神 器 譜 巻 1 恭 進 神 器 疏 及 び 同 書 巻 2 原 銃 上 にその 記 述 があり また 和 田 博 徳 氏 による 詳 細 な 研 究 成 果 があ る(*10) それらによれば 嚕 蜜 銃 は 嚕 蜜 国 (オスマン 帝 国 )の 使 節 が 明 朝 へ 来 朝 した 際 (おそらくは 嘉 靖 33 年 [1554]) 使 節 の 一 員 であった 朶 思 麻 という 人 物 によりもたらされたも のであった 朶 思 麻 はそのまま 明 朝 内 に 留 まり 嚕 蜜 銃 も 殆 ど 人 に 知 られぬまま 彼 のもとに 蔵 され ていた それから 数 十 年 後 趙 士 楨 はこの 銃 の 噂 を 耳 にして 彼 のもとを 訪 ね その 製 造 方 法 を 伝 授 されたという 神 器 譜 に 記 される 嚕 蜜 銃 の 具 体 的 特 徴 として おおよそ 以 下 の 諸 点 を 挙 げることができ る 銃 身 は 重 さ6~8 斤 長 さ6~7 尺 の 鍛 鉄 製 ( 神 器 譜 では 双 層 交 錯 法 と 記 される) これは 同 じく 神 器 譜 記 載 の 西 洋 番 鳥 銃 ( 重 さ4~5 斤 長 さ6 尺 )や 日 本 式 鉄 砲 と 比 較 して 一 回 り 大 型 のものといえる そのため 射 撃 の 際 には 銃 架 を 必 要 とする 射 程 距 離 が 長 く 破 壊

242 24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力 が 大 きく 日 本 式 鉄 砲 と 比 較 して 数 倍 の 威 力 があると いう 構 造 上 の 特 徴 としては 肩 つけ 床 尾 緩 発 式 発 火 装 置 などの 点 が 挙 げられる( 日 本 式 鉄 砲 は 頬 付 け 床 尾 バネを 用 いた 瞬 発 式 発 火 装 置 ) 趙 士 楨 は 嚕 蜜 銃 を 破 壊 力 射 程 距 離 操 作 性 品 質 など あらゆる 側 面 において 最 も 優 秀 な 鉄 砲 であると 評 価 している([ 図 3]) 神 器 譜 に 記 載 される 多 くの 火 器 に 対 する 朝 廷 の 評 価 は 不 詳 であり 明 朝 に 採 用 されることもなかった しかし 嚕 蜜 銃 だけは 高 い 評 価 を 受 けたようである 神 器 譜 巻 1に 所 収 される 兵 部 署 掌 部 事 太 子 太 保 刑 部 尚 書 蕭 大 亨 の 題 奏 ( 謹 題 為 恭 進 防 辺 奇 器 以 張 国 威 以 省 国 用 事 )には [ 図 3] 嚕 蜜 銃 前 所 進 嚕 蜜 等 銃 命 中 方 寸 直 透 重 甲 尤 為 奇 異 とあり また 同 書 同 巻 所 収 の 趙 士 楨 の 恭 進 神 器 疏 ( 万 暦 30 年 [1602])にも 近 見 巡 按 揚 宏 科 極 口 退 虜 全 頼 嚕 蜜 等 銃 とあり 嚕 蜜 銃 が 王 朝 内 で 高 く 評 価 されていたことが 知 られる 以 降 17 世 紀 初 期 の 明 朝 において 嚕 蜜 銃 は 日 本 式 鉄 砲 と 並 ぶ 鉄 砲 の 主 要 モデルとして 知 ら れるようになり ある 程 度 普 及 していったものと 思 われる 特 に 大 型 で 破 壊 力 があり 射 程 距 離 が 長 く 守 城 戦 などの 際 に 効 果 的 であったこと 不 発 が 少 なく 操 作 性 に 優 れた 比 較 的 簡 易 な 構 造 の 緩 発 式 発 火 装 置 であったこと 鍛 鉄 製 で 堅 強 な 銃 身 であったこと 従 来 の 伝 統 的 火 器 と 比 べ 命 中 精 度 が 高 かったことなどが その 普 及 を 促 す 要 因 となったものと 考 えられる 万 暦 37 年 (1609) 成 立 の 王 圻 三 才 図 会 器 用 七 巻 兵 器 類 の 条 には 嚕 蜜 鳥 銃 ( 嚕 蜜 銃 )を 載 せて 鳥 銃 惟 嚕 蜜 最 遠 最 毒 又 機 昂 起 倭 銃 雖 伏 筒 旁 又 在 床 下 外 不 便 収 拾 此 中 書 趙 士 楨 得 之 朶 思 麻 とある また 明 末 を 代 表 する 兵 書 である 天 啓 元 年 (1621) 成 立 の 茅 元 儀 武 備 志 巻 124 軍 資 乗 火 六 火 器 図 説 三 銃 一 にも 鉄 砲 のモデルとして 鳥 嘴 銃 とともに 嚕 蜜 鳥 銃 を 取 り 上 げ 三 才 図 会 とほぼ 同 文 の 記 事 を 収 録 している 17 世 紀 前 半 に 成 立 したこれら 書 物 への 嚕 蜜 銃 の 掲 載 は 趙 士 楨 の 建 議 以 降 嚕 蜜 銃 が 大 型 鉄 砲 の 一 型 式 として 明 朝 内 で 認 知 されつつ あったことを 示 唆 していよう 朶 思 麻 から 趙 士 楨 へと 製 造 技 術 が 伝 えられた 嚕 蜜 銃 は 明 朝 傘 下

243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43 の 京 営 を 中 心 とする 火 器 製 造 工 程 を 経 て 相 当 量 が 製 造 されるとともに 茅 元 儀 ら 明 末 の 軍 事 専 門 家 により 紹 介 されるに 至 ったものと 想 定 される その 後 嚕 蜜 銃 は 破 壊 力 と 高 い 命 中 精 度 とを 兼 ね 備 えた 大 型 鉄 砲 として 実 際 に 対 女 真 戦 線 で 活 用 されたようである 天 啓 元 年 (1621)2 月 27 日 の 徐 光 啓 の 上 疏 ( 謹 陳 任 内 事 理 疏 ) には 臣 添 請 得 戊 字 庫 存 貯 鳥 銃 二 千 門 止 是 機 牀 不 堪 咨 取 工 部 料 價 改 換 嚕 密 式 数 月 練 習 小 有 炸 損 不 過 数 門 亦 不 至 傷 人 其 餘 倶 試 験 堪 用 とある すなわち 戊 字 庫 ( 火 器 貯 蔵 庫 )に 貯 蔵 している 鉄 砲 2000 挺 は 使 用 に 堪 えな いので 嚕 密 式 に 改 造 したところ 炸 裂 暴 発 するものが 少 なく 使 用 に 堪 えうるものになっ たというのである この 嚕 密 式 とは 緩 発 式 鍛 鉄 製 の 大 型 鉄 砲 たる 嚕 蜜 銃 を 指 すものであ ろう こうした 大 型 の 鉄 砲 は 他 に 大 鳥 銃 或 いは 一 般 の 小 型 の 鉄 砲 と 同 様 に 鳥 銃 など と 総 称 され 17 世 紀 前 半 明 朝 の 対 女 真 防 衛 に 活 用 され 遼 東 の 要 衝 へと 配 備 された 熹 宗 実 録 巻 20 天 啓 2 年 (1622)3 月 庚 戌 の 条 には 工 部 将 発 過 援 遼 軍 需 自 万 暦 四 十 六 年 起 至 天 啓 元 年 止 総 数 開 具 以 聞 天 威 大 将 軍 十 位 神 武 二 将 軍 十 位 轟 雷 三 将 軍 三 百 三 十 位 飛 電 四 将 軍 三 百 八 十 四 位 捷 勝 五 将 軍 四 百 位 滅 虜 砲 一 千 五 百 三 十 位 虎 蹲 砲 六 百 位 旋 風 砲 五 百 位 神 砲 二 百 位 神 鎗 一 万 四 千 四 十 位 威 遠 砲 十 九 位 湧 珠 砲 三 千 二 百 八 位 連 珠 砲 三 千 七 百 九 十 三 位 翼 虎 砲 一 百 一 十 位 鉄 銃 五 百 四 十 位 鳥 銃 六 千 四 百 二 十 五 門 五 龍 鎗 七 百 五 十 二 杆 夾 靶 鎗 七 千 二 百 杆 双 頭 鎗 三 百 杆 鉄 鞭 鎗 六 千 杆 鈎 鎗 六 千 五 百 杆 旗 鎗 一 千 杆 大 小 銅 鉄 仏 郎 機 四 千 九 十 架 とあり 万 暦 46 年 (1618)から 天 啓 元 年 (1621)にかけて 6425 挺 もの 鳥 銃 が 工 部 から 遼 東 へ 送 られたことを 伝 えている また 満 洲 実 録 巻 7には 天 命 6 年 (1621) 後 金 軍 の 攻 撃 に 対 し 遼 陽 を 守 備 する 明 兵 の 図 が 掲 載 されるが そこには 数 挺 の 鉄 砲 の 図 も 描 写 されてい る その 鉄 砲 の 図 には いずれも 銃 架 のようなものがみえる 大 型 のそれであろうか こうした 守 城 用 の 鉄 砲 は 嚕 蜜 銃 が 利 用 された 可 能 性 がある さらに 崇 禎 4 年 (1631)の 大 凌 河 攻 城 戦 において 女 真 族 勢 力 は 明 朝 側 の 火 器 を 大 量 に 鹵 獲 したが そのなかには 嚕 蜜 銃 と 思 われる 火 器 も 大 量 に 含 まれていたという(*11) 趙 士 楨 により 製 造 技 術 が 習 得 された 新 式 火 器 が 京 営 を 媒 介 にその 導 入 が 検 討 され その 後 明 朝 により 正 式 に 採 用 されて 対 女 真 戦 線 で 配 備 活 用 されたことが 窺 えるのである

244 24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5 17 世 紀 東 アジアの 軍 事 革 命 万 暦 47 年 (1619)のサルフの 戦 いでの 敗 退 や 天 啓 元 年 (1621)の 瀋 陽 遼 陽 の 陥 落 を 承 け 明 朝 では 女 真 族 に 対 する 軍 事 的 脅 威 が 急 速 に 高 まりをみせる かかる 脅 威 をポルトガルの 新 式 火 器 で 打 破 しようとしたのが 徐 光 啓 を 中 心 とするキリスト 教 徒 の 官 僚 らであった かねてよ り 火 器 の 有 効 性 を 認 識 していた 徐 光 啓 は 当 時 ポルトガルの 拠 点 となっていたマカオで 製 造 され る 高 性 能 のヨーロッパ 式 火 器 導 入 を 企 図 し 積 極 的 に 王 朝 に 働 きかけた その 結 果 明 朝 は 当 時 最 精 鋭 の 大 砲 であった 紅 夷 砲 をマカオのポルトガル 当 局 から 漸 次 買 い 付 け 北 京 や 遼 東 諸 地 域 の 軍 事 拠 点 に 配 備 した なかでも 寧 遠 に 配 備 された 紅 夷 砲 が 天 啓 6 年 (1626)の 対 女 真 戦 で 大 きな 戦 果 をあげたことは 夙 に 知 られている こうした 徐 光 啓 らによるマカオのポルトガル 当 局 を 介 した 紅 夷 砲 の 導 入 については これまでに 多 くの 研 究 の 蓄 積 がある(*12) 一 方 この 紅 夷 砲 とともに 鉄 砲 もまた 対 女 真 戦 争 において 明 軍 の 最 も 有 力 な 兵 器 となった 崇 禎 2 年 (1629)の 徐 光 啓 破 虜 之 策 甚 近 甚 易 疏 には 対 女 真 対 策 について 述 べて 虜 之 畏 我 者 二 丙 寅 以 後 始 畏 大 銃 丙 寅 以 前 独 畏 鳥 銃 所 独 畏 於 二 物 謂 其 及 遠 命 中 故 也 とある 丙 寅 とは 天 啓 6 年 (1626) ヌルハチ 率 いる 女 真 軍 と 寧 遠 城 を 守 る 明 軍 武 将 の 袁 崇 煥 との 攻 城 戦 を 指 し 大 銃 とは 紅 夷 砲 を 指 す すなわち 寧 遠 の 戦 い 以 前 に 対 女 真 作 戦 で 最 も 大 きな 威 力 を 発 揮 したのは 鉄 砲 であり それ 以 後 紅 夷 砲 が 加 わったというのである 壬 辰 倭 乱 以 降 における 鉄 砲 が 17 世 紀 明 朝 の 主 要 兵 器 となったことが 知 られる 認 識 していることが 知 られる また 同 疏 文 に 虜 多 明 光 重 鎧 而 鳥 銃 之 短 小 者 未 能 洞 貫 故 今 之 練 習 宜 畫 敵 為 的 専 撃 其 手 與 目 又 宜 糾 工 急 造 大 号 鳥 銃 至 少 亦 須 千 門 可 以 洞 透 鉄 甲 とあり 徐 光 啓 による 鉄 砲 なかでも 大 型 のそれの 高 い 評 価 を 看 取 することができる さら に 徐 光 啓 計 開 目 前 至 急 事 宜 ( 崇 禎 2 年 [1629] 頃 )にも 凡 守 城 除 城 威 大 砲 外 必 再 造 中 等 神 威 砲 及 一 号 二 号 大 鳥 銃 方 能 及 遠 命 中 大 鳥 銃 一 時 未 得 応 手 見 今 城 楼 二 廠 所 儲 鳥 銃 可 作 速 整 頓 試 験 教 練 営 軍 以 助 城 守 とあり 守 城 の 際 には 大 砲 などとともに 高 い 命 中 精 度 と 射 程 距 離 とを 兼 ね 備 える 大 鳥 銃 ( 大 型 鉄 砲 )が 効 果 を 発 揮 すると 伝 えている 泰 昌 元 年 (1620) 以 降 天 啓 ~ 崇 禎 年 間 にかけて ポルトガル 当 局 から 多 くの 紅 夷 砲 が 明 朝 に 導 入 された しかし それは 紅 夷 砲 に 限 らず 同 時 に 鉄 砲 をはじめとする 中 小 型 火 器 も 数

245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45 多 く 導 入 された 崇 禎 3 年 (1630)の 徐 光 啓 の 上 疏 ( 聞 風 憤 激 直 献 芻 蕘 疏 )には 計 開 拠 原 呈 除 銃 師 自 備 外 応 於 広 中 置 買 物 件 一 鷹 銃 二 百 門 并 合 用 事 件 一 鳥 嘴 護 銃 一 千 門 并 合 用 事 件 一 西 式 籐 牌 五 千 面 とあり 明 朝 がポルトガル 当 局 から 鷹 銃 や 西 式 籐 牌 といったこれまでにない 新 式 兵 器 とともに 鉄 砲 千 挺 を 購 入 したことが 知 られる また 同 じく 崇 禎 3 年 (1630)の 徐 光 啓 の 上 疏 ( 欽 奉 明 旨 謹 陳 愚 見 疏 )には 先 造 成 鷹 嘴 銃 四 十 一 門 鳥 銃 六 十 五 門 共 一 百 零 六 門 除 先 解 三 十 門 貯 庫 外 其 七 十 六 門 見 共 営 軍 日 逐 操 演 続 造 鳥 銃 三 百 余 門 未 完 とあり 徐 光 啓 による 鉄 砲 模 造 の 状 況 が 看 取 される 鷹 嘴 銃 ( 鷹 銃 ) とともに 製 造 される この 鳥 銃 とは 旧 来 の 鉄 砲 ではなく マカオから 新 たに 将 来 されたヨーロッパ 式 の 鉄 砲 をモ デルに 製 造 されたそれを 指 すものであるといえよう 16 世 紀 末 以 降 発 達 した 明 朝 の 鉄 砲 製 造 技 術 が 新 式 鉄 砲 導 入 に 活 用 されたものと 想 定 される ちなみに 17 世 紀 前 半 マカオから 将 来 され たヨーロッパ 式 の 鉄 砲 が 如 何 なるものであったか また 日 本 式 鉄 砲 との 性 能 の 優 劣 や 相 違 は 如 何 なるものであったか かかる 点 については 後 考 に 期 したい しかし 日 本 式 鉄 砲 が16 世 紀 中 葉 に 種 子 島 に 伝 来 したものをモデルの 一 としていることを 鑑 みれば 17 世 紀 のマカオで 製 造 されたそれは 比 較 的 高 い 性 能 を 擁 するものであると 考 えられよう 16 世 紀 末 の 壬 辰 倭 乱 を 契 機 とした 日 本 式 鉄 砲 の 伝 播 が 17 世 紀 東 アジア 世 界 の 火 器 技 術 発 達 の 原 動 力 となったのであ る 結 語 以 上 16 世 紀 末 の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日 本 軍 の 鉄 砲 が 後 の 明 朝 を 中 心 とする 東 アジア 世 界 に 如 何 なる 影 響 を 及 ぼしたのかについてみてきた 壬 辰 倭 乱 を 契 機 に 明 朝 や 朝 鮮 など 東 アジア 世 界 では 日 本 式 鉄 砲 が 伝 播 普 及 する 壬 辰 倭 乱 において 威 力 を 発 揮 した 日 本 式 鉄 砲 に 苦 慮 した 明 軍 の 各 武 将 らは 鉄 砲 やその 操 作 製 造 などに 通 じた 日 本 兵 捕 虜 を 麾 下 に 収 容 編 入 し 日 本 式 鉄 砲 を 鹵 獲 受 容 した また 趙 士 楨 による 積 極 的 な 建 議 などにより 王 朝 内 でも 日 本 式 鉄 砲 に 対 する 関 心 が 高 まった その 結 果 王 朝 傘 下 においても 鍛 鉄 製 の 大 小 鉄 砲 が 導 入 製 造 され 鉄 砲 の 性 能 は 飛 躍 的 に 向 上 した さらに 戦 場 となった 朝 鮮 にも 日 本 兵 捕 虜 を 介 して 日 本 式 鉄 砲 が 伝 えられた それまで 弓 矢 が 主 要 兵 器 であった 朝 鮮 に 精 鋭 の 火 器 技 術 が 移 転 され 17 世 紀 にお いて 朝 鮮 は 東 アジア 有 数 の 鉄 砲 製 造 保 有 国 となった 豊 富 な 数 量 と 種 類 とを 誇 る 火 器 を 装 備 す

246 24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る 明 軍 と 精 鋭 な 鉄 砲 を 大 量 に 装 備 した 日 本 軍 との 大 規 模 な 戦 争 が 東 アジアの 火 器 技 術 交 流 を 活 発 化 させ 技 術 水 準 を 飛 躍 的 に 向 上 させる 契 機 となったのである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日 本 軍 の 鉄 砲 使 用 は 17 世 紀 東 アジア 世 界 の 変 革 に 少 なからぬ 影 響 を 及 ぼしたものと 考 えられる 註 (*1) 拙 稿 16 世 紀 末 日 本 式 鉄 砲 の 明 朝 への 伝 播 ( 東 洋 学 報 年 ) 同 朝 鮮 の 役 における 日 本 兵 捕 虜 ( 東 方 学 年 ) 同 明 末 における 武 官 統 制 と 火 器 技 術 受 容 ( 歴 史 学 研 究 年 ) 同 明 代 中 国 における 鉄 砲 の 伝 来 と 導 入 ( 七 隈 史 学 年 ) 同 明 末 における 新 式 火 器 の 導 入 と 京 営 ( 九 州 大 学 東 洋 史 論 集 年 ) 等 参 照 (*2)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日 本 軍 の 鉄 砲 については 多 くの 研 究 の 蓄 積 があるが 主 な ものとして 矢 野 仁 一 支 那 に 於 ける 近 世 火 器 の 伝 来 に 就 て ( 史 林 年 ) 長 沼 賢 海 元 明 に 於 ける 火 器 と 我 が 鉄 砲 ( 日 本 文 化 史 の 研 究 教 育 研 究 会 1937 年 ) 有 馬 成 甫 火 砲 の 起 源 とその 伝 流 ( 吉 川 弘 文 館 1962 年 ) 所 荘 吉 火 縄 銃 ( 改 訂 版 ) ( 雄 山 閣 出 版 1969 年 ) 吉 岡 新 一 文 禄 慶 長 の 役 における 火 器 についての 研 究 ( 朝 鮮 学 報 年 ) 洞 富 雄 鉄 砲 ( 思 文 閣 出 版 1991 年 ) 宇 田 川 武 久 東 アジア 兵 器 交 流 史 の 研 究 ( 吉 川 弘 文 館 1993 年 ) 等 参 照 (*3)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日 本 軍 の 船 舶 については 参 謀 本 部 日 本 戦 史 朝 鮮 の 役 偕 行 社 1924 年 ) 渡 辺 世 祐 朝 鮮 役 と 我 が 造 船 の 発 達 ( 史 学 雑 誌 年 ) 有 馬 成 甫 朝 鮮 役 水 軍 史 ( 空 と 海 社 1942 年 ) 三 鬼 清 一 郎 朝 鮮 役 における 軍 役 体 系 につい て ( 史 学 雑 誌 年 ) 等 参 照 (*4)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戦 闘 の 詳 細 については 徳 富 猪 一 郎 近 世 日 本 国 民 史 豊 臣 氏 時 代 ( 丁 編 ) ( 戊 編 ) ( 己 編 ) ( 民 友 社 年 ) 石 原 道 博 文 禄 慶 長 の 役 ( 塙 書 房 1963 年 )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中 ) ( 吉 川 弘 文 館 1969 年 ) 李 光 濤 朝 鮮 壬 辰 倭 禍 研 究 ( 中 央 研 究 院 歴 史 語 言 研 究 所 1972 年 ) 李 烱 錫 壬 辰 戦 乱 史 ( 上 ) ( 中 ) ( 下 ) ( 東 洋 図 書 出 版 1977 年 ) 鄭 樑 生 明 日 関 係 史 の 研 究 ( 雄 山 閣 出 版 1985 年 ) 北 島 万 次 豊 臣 政 権 の 対 外 認 識 と 朝 鮮 侵 略 ( 校 倉 書 房 1990 年 ) 同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吉 川 弘 文 館 1995 年 ) 金 文 子 豊 臣 政 権 期 の 日 明 和 議 交 渉 と 朝 鮮 ( お 茶 の 水 史 学 年 ) 等 参 照 (*5) 明 代 中 国 における 鉄 砲 の 伝 来 については 矢 野 前 掲 支 那 に 於 ける 近 世 火 器 の 伝 来 に 就 て 吉 田 光 邦 明 代 の 兵 器 ( 藪 内 清 編 天 工 開 物 の 研 究 恒 星 社 厚 生 閣 1953 年 ) 和 田 博 徳 明 代 の 鉄 砲 伝 来 とオスマン 帝 国 ( 史 学 年 ) 有 馬 前 掲 火 砲 の 起 源 とその 伝

247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247 流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5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t.7 : Military technology ; The gunpowder ep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洞 前 掲 鉄 砲 王 兆 春 中 国 火 器 史 ( 軍 事 科 学 出 版 社 1991 年 ) 春 名 徹 アジアにおける 銃 と 砲 ( 石 井 正 敏 等 編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Ⅵ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93 年 ) 李 洵 明 代 火 器 的 発 展 与 封 建 軍 事 制 度 的 関 係 ( 下 学 集 中 国 社 会 科 学 出 版 社 1995 年 ) 閻 素 娥 関 于 明 代 鳥 銃 的 来 源 問 題 ( 史 学 月 刊 年 ) 岸 本 美 緒 東 アジアの 近 世 ( 山 川 出 版 社 1998 年 ) 等 参 照 (*6) 洞 前 掲 鉄 砲 276~282 頁 (*7) 壬 辰 倭 乱 終 結 後 の1599 年 4 月 北 京 紫 禁 城 午 門 において 開 催 された 献 俘 式 及 びそこで 明 朝 皇 帝 万 暦 帝 に 献 納 された 平 秀 政 平 正 成 要 時 羅 ら61 名 の 日 本 兵 捕 虜 の 詳 細 については 拙 稿 前 掲 朝 鮮 の 役 における 日 本 兵 捕 虜 同 明 朝 皇 帝 に 献 納 された 降 倭 ( 追 悼 論 叢 編 集 委 員 会 編 山 根 幸 夫 教 授 追 悼 記 念 論 叢 明 代 中 国 の 歴 史 的 位 相 ( 下 巻 ) 汲 古 書 院 2007 年 ) 参 照 (*8)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日 本 兵 捕 虜 ( 降 倭 )については 徳 富 猪 一 郎 近 世 日 本 国 民 朝 史 豊 臣 氏 時 代 庚 編 桃 山 時 代 概 観 ( 民 友 社 1922 年 ) 中 村 前 掲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中 ) 内 藤 雋 輔 文 禄 慶 長 役 における 被 擄 人 の 研 究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76 年 ) 北 島 万 次 朝 鮮 日 々 記 高 麗 日 記 (そしえて 1982 年 ) 同 壬 辰 倭 乱 と 秀 吉 島 津 李 舜 臣 ( 校 倉 書 房 2002 年 ) 同 壬 辰 倭 乱 における 降 倭 の 存 在 形 態 ( 歴 史 評 論 年 ) 宇 田 川 前 掲 東 アジア 兵 器 交 流 史 の 研 究 貫 井 正 之 豊 臣 政 権 の 海 外 侵 略 と 朝 鮮 義 兵 研 究 ( 青 木 書 店 1996 年 ) 丸 山 雍 成 朝 鮮 降 倭 部 将 沙 也 可 とはだれか ( 廣 瀬 正 俊 編 大 藏 姓 原 田 氏 編 年 史 料 文 献 出 版 年 ) 村 井 章 介 慶 長 の 役 開 戦 前 後 の 加 藤 清 正 包 囲 網 ( 韓 国 朝 鮮 文 化 研 究 年 ) 等 参 照 (*9) 神 器 譜 については 藤 井 宏 神 器 譜 の 成 立 ( 岩 井 博 士 古 稀 記 念 典 籍 論 集 1963 年 ) 参 照 (*10) 和 田 前 掲 明 代 の 鉄 砲 伝 来 とオスマン 帝 国 (*11) 楠 木 賢 道 天 聰 5 年 の 大 凌 河 攻 城 戦 とアイシン 国 軍 の 火 砲 自 然 人 間 文 化 破 壊 の 諸 相 ( 筑 波 大 学 2002 年 ) (*12) 17 世 紀 における 紅 夷 砲 の 東 アジアへの 伝 播 については 有 馬 前 掲 火 砲 の 起 源 とその 伝 流 張 小 青 明 清 之 際 西 洋 火 炮 的 輸 入 及 其 影 響 ( 中 国 人 民 大 学 清 史 研 究 所 編 清 史 研 究 集 4 四 川 人 民 出 版 社 1986 年 ) 王 兆 春 前 掲 中 国 火 器 史 馬 楚 堅 西 洋 大 砲 対 明 金 態 勢 的 改 変 ( 羅 炳 錦 劉 健 明 主 編 明 末 清 初 華 南 地 区 歴 史 人 物 功 業 検 討 会 論 文 集 香 港 中 文 大 学 歴 史 学 系 1993 年 ) 張 顕 清 徐 光 啓 引 進 和 仿 製 西 洋 火 器 述 論 ( 呉 志 良 主 編 東 西 方 文 化 交 流 澳 門 基 金 会 年 ) 黄 一 農 紅 夷 砲 與 明 清 戦 争 ( 精 華 学 報 新 年 ) 同 天 主 教 徒 孫 元 化 與 明 末 傳 華 的 西 洋 火 砲 ( 中 央 研 究 院 歴 史 語 言 研 究 所 集 刊 年 ) 岸 本 前 掲 東 ア ジアの 近 世 申 東 珪 オランダ 人 漂 流 民 と 朝 鮮 の 西 洋 式 兵 器 の 開 発 ( 史 苑

248 24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00 年 ) 劉 鴻 亮 明 清 時 期 紅 夷 大 砲 的 興 衰 与 両 朝 西 洋 火 器 発 展 比 較 ( 明 清 史 年 ) 等 参 照 圖 の 出 典 [ 図 1]: 洞 富 雄 鉄 砲 ( 思 文 閣 出 版 1991 年 )より [ 図 2]: 四 庫 禁 燬 書 叢 刊 子 部 29( 北 京 出 版 社 2000 年 )より [ 図 3]: 玄 覧 堂 叢 書 初 集 18( 正 中 書 局 1981 年 )より

249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249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요네타니 히토시( 米 谷 均 ) ( 日 本 中 央 大 ) はじめに (1)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をめぐる 先 行 研 究 1 日 本 史 /2 明 史 /3 美 術 史 の 立 場 から 検 討 1 日 本 国 王 から 中 華 皇 帝 へ 堀 * 信 長 秀 吉 以 降 における 明 から 自 立 した 日 本 国 王 志 向 の 存 在 を 指 摘 : 一 方 で 秀 吉 は その 陪 臣 ごと 明 皇 帝 から 冊 封 されてしまったという 事 実 あり * 日 本 型 華 夷 意 識 論 と 整 合 不 能 な 史 実 そのためか 文 禄 慶 長 の 役 の 幕 間 劇 扱 い される 傾 向 が 強 い 2 冊 封 と 通 貢 の 許 可 不 可 をめぐる 明 官 人 の 激 しい 議 論 中 島 2007 * 封 貢 并 絶 許 封 不 許 貢 封 貢 并 許 をめぐり 明 の 官 人 たちの 間 で 熱 い 封 貢 得 失 論 が 展 開 * 明 後 期 の 貢 市 体 制 に 日 本 が 復 帰 する 可 能 性 を 指 摘 実 現 すればマカオのポルト ガル 人 は 大 打 撃 を 蒙 る (2) 秀 吉 陪 臣 への 冊 封 の 意 味 : 歴 代 中 国 王 朝 の 冊 封 事 例 * 太 字 は 冊 封 使 ないしは 仲 介 者 の 使 者 が 来 日 した 事 例 * 奴 国 王 卑 弥 呼 倭 五 王 ( 讃 珍 済 興 武 ) 懐 良 親 王 足 利 義 満 足 利 義 持 足 利 義 教 足 利 義 政 足 利 義 澄 足 利 義 晴 豊 臣 秀 吉 以 上 15 例 : 王 の 陪 臣 にも 冊 封 した 事 例 は 下 記 事 例 のみ

250 250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 難 升 米 ( 卑 弥 呼 使 臣 ); 率 善 中 郎 将 銀 印 青 綬 も 下 賜 (239 年 ) * 牛 利 ( 卑 弥 呼 使 臣 ); 率 善 校 尉 銀 印 青 綬 も 下 賜 (239 年 ) * 倭 隋 ら13 名 ( 倭 王 珍 の 陪 臣 ); 平 西 征 虜 冠 軍 輔 国 将 軍 (438 年 ) * 龍 室 道 淵 ( 遣 明 使 の 正 使 ); 僧 録 司 右 覚 義 (1433 年 ) 但 し 龍 室 道 淵 は 中 国 人 渡 来 僧 * 徳 川 家 康 ら17 名 ( 秀 吉 陪 臣 ); 右 都 督 都 督 同 知 都 督 僉 事 など(1596 年 ) (3) 秀 吉 陪 臣 への 冊 封 の 先 例 : 明 とモンゴル 間 の 隆 慶 和 議 (1571 年 ) 秀 吉 冊 封 の 先 例 として 小 西 行 長 が 沈 惟 敬 に 示 唆 中 島 2007 *1571 年 ;アルタンハン 汗 * 俺 答 を 順 義 王 に 冊 封 し 配 下 の 頭 目 を 授 職 す *1591 年 ;チュルゲハン 汗 * 第 三 代 順 義 王 明 を 侵 犯 して 明 軍 を 潰 走 せしむ? 河 の 変 (4) 本 報 告 の 目 的 : 冊 封 する 側 される 側 の 認 識 や 世 界 観 は 必 ずしも 一 致 しない *むしろ 乖 離 しているの が 普 通 :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は 名 誉 ある 戦 争 終 結 を 企 てるため 行 われた 日 明 同 床 異 夢 の 一 大 工 作 である しかしその 結 果 当 事 者 が 目 論 んでいた 和 平 どころか 更 なる 戦 争 を 招 くことと なった : 豊 臣 氏 滅 亡 後 徳 川 氏 による 対 明 接 近 を なぜ 明 は 拒 み 続 けたのか? を 検 討 する 上 で 重 要 1. 冊 封 使 の 來 日 に 至 るまでの 經 緯 ( 槪 略 ) (1) 僞 降 伏 使 節 の 北 京 派 遣 : 万 暦 21 年 / 後 半 ; 小 西 行 長 沈 惟 敬 と 画 策 して 偽 降 伏 使 節 を 派 遣 : 同 9/ 中 旬 ; 降 伏 使 節 内 藤 如 安 ら30 名 遼 東 に 到 着 宋 応 昌 と 対 面 関 白 降 表 を 提 出 : 万 暦 22 年 /7; 降 伏 使 節 北 京 へ 到 着 冊 封 を 希 望 する 日 本 側 武 将 のリ ストを 提 出 : 同 12/13; 降 伏 使 節 1 全 面 撤 兵 2 許 封 不 許 貢 3 日 朝 修 好 の 三 ヵ 条 遵 守 を 誓 約

251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251 : 同 12/20; 降 伏 使 節 義 満 へ 下 賜 した 金 印 の 存 否 など20ヵ 条 の 審 問 を 受 ける (2) 冊 封 使 の 派 遣 と 正 使 の 逃 亡 : 万 暦 22 年 /30; 万 暦 帝 秀 吉 を 冊 封 するための 文 書 * 誥 命 詔 書 勅 諭 金 印 * 日 本 国 王 之 印 物 品 * 冠 服 一 式 の 作 成 を 下 命 李 宗 城 を 正 使 に 楊 方 亨 を 副 使 に 任 命 : 冊 封 使 の 出 発 ; 万 暦 23 年 /30 北 京 4/6 朝 鮮 入 国 4/27 漢 城 到 着 11/ 末 釜 山 到 着 : 万 暦 24 年 /3; 冊 封 使 正 使 * 李 宗 城 逃 亡 す : 万 暦 24 年 /; 明 楊 方 亨 を 正 使 に 沈 惟 敬 を 副 使 に 任 命 し 直 す * 冊 封 文 書 の 書 き 直 し; 誥 命 詔 書 勅 諭 * 使 者 の 名 前 を 書 き 替 えるため * 沈 惟 敬 は 先 行 して 日 本 渡 海 ;6/12に 大 坂 到 着 後 6/27に 伏 見 城 にて 秀 吉 に 拝 謁 (3) 冊 封 使 の 來 日 と 秀 吉 の 激 怒 : 文 禄 5 年 1596 閏 7/( 明 暦 8/10); 朝 鮮 通 信 使 黄 慎 ら 明 冊 封 使 と 対 馬 で 合 流 : 同 9/1( 明 暦 9/2); 冊 封 使 大 坂 城 にて 秀 吉 に 謁 見 誥 命 金 印 冠 服 などを 進 呈 : 同 9/2( 明 暦 9/3); 秀 吉 激 怒 日 明 の 和 議 が 破 綻 : 同 9/7( 明 暦 9/8); 秀 吉 島 津 義 弘 に 対 し 和 議 破 綻 と 来 年 の 再 出 兵 を 通 告 : 同 10/10; 冊 封 使 名 護 屋 に 到 着 この 後 に 秀 吉 謝 恩 表 が 到 着 するか 2. 秀 吉 陪 臣 冊 封 の 對 象 者 變 動 (1) ( 內 藤 如 安 ) 小 西 飛 稟 帖 ( 万 暦 22 年 / 提 出 か) にみる 冊 封 希 望 順 位 經 略 復 國 要 編 後 附 : 日 本 国 王 ; 豊 臣 秀 吉 日 本 国 王 妃 ; 北 政 所 神 童 世 子 ; 拾 丸 * 秀 頼 : 大 都 督 ; 小 西 行 長 * 西 海 道 大 都 督 石 田 三 成 増 田 長 盛 大 谷 吉 継 宇 喜 多 秀 家 * 日 明 講 和 交 渉 時 の 窓 口 役 である 行 長 と 朝 鮮 三 奉 行 朝 鮮 総 大 将 のグループ * 行 長 には 西 日 本 方 面 の 軍 事 指 揮 権 の 代 々 世 襲 と 対 明 朝 鮮 交 渉 役 の 授 与 を 希 望 *ほか 大 都 督 の 空 名 剳 付 15 張 の 給 付 を 要 請

252 252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 都 督 ; 豊 臣 秀 政 ( 秀 次 ) * 兼 関 白 : 亜 都 督 ; 徳 川 家 康 前 田 利 家 羽 柴 秀 保 羽 柴 秀 秋 蒲 生 氏 郷 毛 利 輝 元 平 国 保 * 未 詳 小 早 川 隆 景 有 馬 晴 信 宗 義 智 * 家 康 利 家 輝 元 隆 景 など 後 のいわゆる 五 大 老 グループ *ほか 亜 都 督 の 空 名 剳 付 20 張 の 給 付 を 要 請 : 都 督 指 揮 ; 前 田 玄 以 毛 利 吉 成 長 束 正 家 寺 沢 正 成 施 薬 院 全 宗 柳 川 調 信 木 下 吉 隆 石 田 正 澄 源 家 次 * 未 詳 平 行 親 * 未 詳 小 西 如 清 * 秀 吉 側 近 グループならびに 三 成 行 長 の 縁 者 など *ほか 都 督 指 揮 の 空 名 剳 付 30 張 の 給 付 を 要 請 : 亜 都 督 指 揮 ; 島 津 義 弘 松 浦 鎮 信 山 中 長 俊 宇 久 純 玄 岡 本 重 政 平 信 * 未 詳 :( 相 当 の 封 爵 ); 平 山 五 右 衛 門 安 宅 甚 蔵 早 田 四 郎 兵 衛 西 山 九 助 吉 下 申 蔵 吉 田 善 右 衛 門 西 川 七 郎 古 田 九 次 十 瀬 少 吉 松 井 九 太 夫 * 内 藤 如 安 とともに 北 京 に 赴 いた 偽 降 伏 使 節 グループ 主 に 対 馬 関 係 者 か : 日 本 禅 師 : 景 轍 玄 蘇 * 日 本 国 内 の 禅 僧 を 統 轄 する 僧 録 のごとき 僧 官 授 与 を 希 望 するか? : 日 本 一 道 禅 師 ; 竹 渓 宗 逸 * 日 本 の 一 地 域 * 西 海 道 など の 禅 僧 を 統 轄 すべき 僧 官 授 与 を 希 望 するか? 留 意 点 : 小 西 行 長 や 三 奉 行 に 近 しい 人 物 が 優 先 して 授 職 希 望 対 象 にあげられていること * 特 に 戦 争 開 始 当 時 の 第 一 軍 関 係 者 * 小 西 行 長 宗 義 智 松 浦 鎮 信 有 馬 晴 信 宇 久 純 玄 柳 川 調 信 景 轍 玄 蘇 第 四 軍 関 係 者 * 毛 利 吉 成 島 津 義 弘 が 多 い : 行 長 と 敵 対 ないしは 疎 遠 な 派 閥 関 係 者 は 全 く 除 外 されていること * 加 藤 清 正 鍋 島 直 茂 黒 田 長 政 福 島 正 則 など : 拾 丸 を 国 王 世 子 とし 秀 次 の 授 職 ランクが 行 長 グループより 低 位 であること : 行 長 グループの 方 が 家 康 グループの 授 職 ランクより 高 く 設 定 されていること : 大 都 督 亜 都 督 都 督 指 揮 の 空 名 剳 付 65 張 を 要 請 していること : 明 側 はこの 要 請 の 直 後 小 西 行 長 に 都 督 指 揮 使 内 藤 如 安 に 都 督 指 揮 の 官 職 授 与 を 決 定

253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253 (2) 石 星 題 奏 ( 万 暦 23 年 /12)にみる 冊 封 順 位 明 神 宗 實 錄 万 歷 23/1/ 乙 酉 : 日 本 国 王 ; 豊 臣 秀 吉 : 都 督 僉 事 正 二 品 ; 小 西 行 長 宇 喜 多 秀 家 増 田 長 盛 石 田 三 成 大 谷 吉 継 徳 川 家 康 毛 利 輝 元 羽 柴 秀 保 : 日 本 禅 師 ; 景 轍 玄 蘇 * 衣 帽 下 賜 : 褒 賞 下 賜 ; 内 藤 如 安 * 最 終 的 には 都 指 揮 使 正 二 品 授 与 国? による 留 意 点 : 行 長 三 奉 行 グループと 家 康 輝 元 に 同 一 ランクの 軍 官 職 を 授 与 : 小 西 飛 稟 帖 で 挙 げられた 授 職 希 望 者 の 大 多 数 が 大 幅 に 削 除 される : 明 の 職 制 では 都 督 僉 事 は 皇 帝 直 属 の 中 央 軍 官 職 * 第 三 位 都 指 揮 使 は 都 督 配 下 の 地 方 軍 官 職 (3) 万 歷 帝 詔 書 ( 万 暦 23 年 /21)にみる 冊 封 順 位 江 雲 隨 筆 : 日 本 国 王 ; 豊 臣 秀 吉 : 右 都 督 正 一 品 ; 徳 川 家 康 : 都 督 同 知 従 一 品 ; 前 田 利 家 宇 喜 多 秀 家 毛 利 輝 元 羽 柴 秀 保 小 早 川 隆 景 上 杉 景 勝 増 田 長 盛 : 都 督 僉 事 正 二 品 ; 石 田 三 成 大 谷 吉 継 前 田 玄 以 長 束 正 家 施 薬 院 全 宗 小 西 如 清 石 田 正 澄 小 西 行 長 * 日 本 本 光 禅 師 : 景 轍 玄 蘇 * 万 暦 帝 詔 書 には 名 前 が 無 いが 兵 部 剳 付 の 模 本 が 日 本 に 伝 来 している 留 意 点 : 家 康 グループが 行 長 三 奉 行 グループより 上 位 軍 官 職 を 授 与 されていること :とりわけ 徳 川 家 康 が 秀 吉 陪 臣 の 筆 頭 の 軍 官 職 に 授 与 されていること : 反 面 小 西 行 長 は かつての 授 職 筆 頭 者 から 授 職 末 尾 者 に 転 落 していること : 石 星 題 奏 (1/12)から 万 暦 帝 詔 書 (1/21)の 間 に どうしてこのような 授 職 上 下 の 大 転 回 が 起 きたのか 明 側 史 料 には 何 も 銘 記 されておらず 不 明 である *なお 当 詔 書 は 正 使 が 李 宗 城 となっているので 1/21 発 給 当 時 の 旧 版 であることが 確 実 である * 冊 封 文

254 25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書 を 万 暦 24 年 5 月 に 再 度 改 定 した 新 版 ではない : 上 記 の 授 職 者 の 内 太 字 のものは 兵 部 剳 付 の 原 本 模 本 が 現 存 官 職 は 詔 書 とほぼ 一 致 * 輝 元 景 勝 あて 兵 部 剳 付 中 の 官 職 部 分 が 別 紙 添 付 されたものである 点 から 沈 惟 敬 などによる 改 竄 工 作 の 存 在 を 疑 う 意 見 もある 大 庭 1971 * 最 終 的 な 授 職 順 位 は 日 本 国 内 の 大 名 間 における 現 実 的 な 政 治 力 の 順 位 を 反 映 したもので 断 然 センスが 良 い 例 えばこれまで 名 前 の 上 がらなかった 上 杉 景 勝 が 授 職 対 象 となっている 3. 秀 吉 冊 封 の 實 態 (1) 相 異 なる 冊 封 の 模 樣 : 景 轍 玄 蘇 秀 吉 金 印 を 頂 き 明 服 を 着 し 万 歳 三 呼 す 柳 川 調 信 画 像 賛 仙 巣 稿 下 巻 : 沈 惟 敬 秀 吉 諸 大 名 とともに 五 拝 三 叩 頭 し 中 国 音 でワンスエ 万 歳 と 呼 し 北 京 に 向 かって 宮 中 遙 拝 す : 楊 方 亨 秀 吉 明 服 を 着 し 北 京 に 向 かって 五 拝 三 叩 頭 す 宣 祖 実 録 宣 祖 29/12 / 己 巳 :フロイス 秀 吉 と 冊 封 使 は 畳 の 間 に 座 して 両 者 対 等 の 形 で 謁 見 酒 宴 後 秀 吉 は 金 印 を 頭 上 に 推 戴 別 室 にて 明 服 に 着 替 える フロイス 年 報 補 遺 1596/12/28 留 意 点 : 沈 惟 敬 と 楊 方 亨 の 証 言 は 冊 封 成 功 を 明 政 府 に 強 調 するために 記 述 に 潤 色 が 施 された 可 能 性 がある : 伝 聞 情 報 ではあるが フロイスの 証 言 が 一 番 実 態 に 近 いものか * 対 等 の 形 で 謁 見 / 諸 大 名 列 座 の 中 で 金 印 を 頭 上 に 推 戴 / 明 服 を 着 衣 * 北 京 遙 拝 の 五 拝 三 叩 頭 は 疑 わしいとしても 万 歳 三 呼 は 行 った 可 能 性 あり (2) 諸 大 名 への 冊 封 : 黄 慎 秀 吉 冊 封 を 受 け 諸 大 名 40 人 も 冠 帯 を 着 して 授 職 日 本 往 還 日 記 万 暦 24/9/3 :フロイス 明 服 20 重 二 組 が 諸 大 名 20 人 に 贈 られる 筆 頭 は 行 長 フロイス 年 報 補 遺 1596/12/28 留 意 点 :フロイスの 証 言 が 現 実 に 近 い ただし 小 西 行 長 が 陪 臣 冊 封 の 筆 頭 というのは 行 長 贔 屓 の

255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255 フロイスの 曲 筆 か 実 際 の 授 職 筆 頭 は 右 都 督 の 徳 川 家 康 である (3) 冊 封 翌 日 の 秀 吉 激 怒 俗 説 ; 明 帝 による 日 本 国 王 冊 封 を 侮 辱 と 受 け 取 り 誥 命 をビリビリ 破 る * 江 戸 時 代 以 降 に 流 布 した 風 説 * 日 本 外 史 冊 封 文 書 は 現 存 *ただし 前 バージョンのもの :フロイスの 証 言 が 最 も 現 実 に 近 い * 秀 吉 冊 封 の 情 報 はむしろ 国 内 に 喧 伝 されている 山 室 1992 フロイス 下 記 史 料 * 朝 鮮 南 部 の 倭 城 破 壊 を 要 求 する 冊 封 使 の 書 簡 を 読 み 激 怒 す フロイス 年 報 補 遺 1596/12/28 : 同 時 代 史 料 * 島 津 家 文 書 など では 秀 吉 激 怒 の 原 因 を 朝 鮮 王 子 が 不 来 朝 と 説 明 * 国 内 向 けの 説 明 とにかく 非 は 朝 鮮 にあり と 責 任 転 嫁 したに 過 ぎない * 明 による 倭 城 破 壊 要 求 と 朝 鮮 からの 完 全 撤 退 要 求 が 最 大 原 因 中 野 2006 (4) 秀 吉 謝 恩 の 表 文 をめぐる 諸 問 題 : 冊 封 使 や 朝 鮮 通 信 使 が 堺 から 追 い 返 された 後 も 様 々な 工 作 がなされたようである : 冊 封 を 感 謝 する 秀 吉 謝 恩 の 表 文 が 登 場 宣 祖 実 録 宣 祖 29/12/ 己 巳 * 日 本 国 王 臣 豊 臣 秀 吉 と 称 臣 の 書 式 を 踏 み 誥 命 金 印 下 賜 を 感 謝 * 堂 々たる 四 六 駢 儷 体 を 駆 使 した 美 文 作 成 者 は 五 山 禅 僧? * 一 方 で 万 暦 年 号 を 用 いず 年 紀 に 干 支 * 丙 申 を 使 用 明 神 宗 実 録 万 暦 25/3/ 己 酉 * 当 初 表 文 は 前 田 玄 以 らによってもたらされ 恐 らく 文 面 不 恭 を 理 由 に 衝 き 返 され 寺 沢 正 成 が 表 文 をもたらすも 印 章 の 未 押 捺 を 理 由 に 冊 封 使 の 受 領 を 拒 否 され 印 を 押 した 表 文 を 再 び 正 成 が 名 護 屋 にもたらす *その 印 章 は 日 本 国 王 印 ではなく 豊 臣 印 か 皇 明 従 信 録 * 謝 恩 表 に 附 した 万 暦 帝 への 贈 呈 品 は 沈 惟 敬 によって 水 増 しさる 明 神 宗 実 録 万 暦 25/3/ 己 酉 : 謝 恩 の 表 文 の 写 を 見 た 朝 鮮 官 人 は 中 国 人 の 作 かと 疑 っているが 四 六 駢 儷 体 を 駆 使 した 文 面 は 五 山 禅 僧 の 作 と 考 えても 不 自 然 ではない 恐 らく 原 文 は 西 笑 承 兌 あたりが 作 成 したか * 傍 証 としては 明 年 号 を 忌 避 した 点 など そして 二 度 三 度 書 き 替 えがなされる 過 程 において 沈 惟 敬 な どの 工 作 が 働 いた 可 能 性 は 否 定 できない * 謝 恩 表 は 全 くの 偽 造 ではなく 改 竄 されたもの?

256 25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5) 秀 吉 謝 恩 の 表 文 がもたらした 影 響 : 釜 山 からの 冊 封 使 の 報 告 に 接 した 万 暦 帝 は 日 本 受 封 恭 順 可 嘉 と 大 喜 び * 万 暦 25 年 1/5 朝 鮮 国 王 からの 事 態 急 変 情 報 を 受 けても 不 得 専 恃 天 朝 救 援 修 備 修 睦 以 保 疆 土 毋 得 偸 安 起 釁 とたしなめる 有 様 * 万 暦 25 年 /25 冊 封 で 和 平 を 獲 得 したと 信 じ 込 んで いる : 加 藤 清 正 の 釜 山 上 陸 * 万 暦 25 年 /14 を 再 認 識 したのは 同 年 2 月 5 日 まで 遅 れた 明 側 の 初 動 態 勢 を 遅 滞 させた 上 で 秀 吉 謝 恩 の 表 文 は 最 大 限 の 効 果 を 発 揮 した 秀 吉 が 再 度 出 兵 を 諸 大 名 に 命 じる 一 方 かかる 謝 恩 表 を 明 側 に 提 示 したのは 彼 一 流 の 和 戦 両 様 策 だったのか? 仮 に 意 図 的 にやったのだとすれば かなり 悪 質 な 陽 動 策 である おわりに (1) 秀 吉 と 諸 大 名 に 對 する 明 の 一 括 冊 封 の 意 味 : こうして 日 本 人 ( 諸 臣 )は あたかもシナの 封 建 家 臣 のような 身 分 にとどまったのであっ た というフロイスの 的 確 な 総 括 に 尽 きる フロイス 年 報 補 遺 1596/12/28 :かかる 冊 封 が 東 アジア 世 界 にていかなる 政 治 的 意 味 を 持 っていたのか 秀 吉 を 始 め 当 時 の 日 本 側 武 将 はどれだけ 理 解 していたのか 多 分 理 解 していない :なお 明 の 冠 服 の 一 部 は 被 冊 封 者 以 外 の 大 名 へも 秀 吉 によって 頒 布 された * 吉 川 広 家 の 事 例 家 門 の 誉 れと 大 喜 びして 出 雲 大 社 に 奉 納 する 吉 川 家 文 書 (2) 明 にとっての 秀 吉 冊 封 : 冊 封 受 封 謝 恩 という 形 式 面 だけを 言 えば 明 による 秀 吉 冊 封 は 冊 封 完 遂 の 条 件 をほぼ 満 たしていると 言 える *たとい 謝 恩 表 文 が 疑 わしくても :しかしこの 冊 封 は 彼 らが 先 例 に 準 えたモンゴルの 首 長 に 対 する 冊 封 と 同 様 辺 境 の 戦 乱 を 防 ぐことができなかった * 日 本 の 場 合 冊 封 直 後 に 慶 長 の 役 が 勃 発 しているので もっと さらに なお 悪 い :そういう 意 味 においては 秀 吉 ならびに 陪 臣 への 冊 封 は 明 にとって 政 治 的 にも 外 交 的 にも 完 全 な 失 敗 であり 一 種 のトラウマと 化 したのではないか * 楊 方 亨 ( 冊 封 使 )は 永 久 罷 免 石 星 ( 兵 部 尚 書 )と 沈 惟 敬 ( 冊 封 副 使 )は 獄 死 など 関 係 者 は 死 屍 累 々

257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257 * 明 実 録 や 後 世 編 纂 された 明 史 では 秀 吉 は 義 満 らと 異 なり 日 本 国 王 扱 いされていない あくまで 倭 酋 である : 万 暦 27 年 月 明 の 朝 鮮 遠 征 軍 が 北 京 に 帰 還 すると 日 本 軍 捕 虜 を 万 暦 帝 に 献 上 する 儀 式 が 大 々 的 に 執 り 行 われ 平 秀 政 平 正 成 ら61 名 を 北 京 西 市 で 公 開 処 刑 した 久 芳 * 平 秀 政 は 島 津 義 弘 の 族 姪 で 秀 吉 の 養 子 であり 明 から 都 督 剳 付 を 受 けた 人 物 とされ 豊 臣 秀 次 に 仮 託 された 人 物 同 じく 平 正 成 は 寺 沢 正 成 に 仮 託 された 人 物 か ここでは 義 弘 の 首 級 まで 登 場 * 上 記 の 偽 者 の 捕 虜 を 処 刑 することで 明 軍 の 輝 かしい 大 勝 利 を 演 出 し 辛 うじてメンツを 保 つ : 上 記 の 献 俘 式 の 終 了 をもって 忌 まわしき 対 日 関 係 を 封 印 したのではないか : 秀 吉 死 後 徳 川 家 康 は 1600 年 に 島 津 義 弘 寺 沢 正 成 書 簡 を 介 しての 対 明 交 渉 * 金 印 勘 合 をもって 官 船 商 舶 の 日 明 往 来 を 希 望 や 1610 年 に 本 多 正 純 書 簡 を 介 しての 対 明 交 渉 * 勘 合 の 下 賜 を 希 望 を 模 索 した しかし 明 側 は これを 頑 なに 拒 否 した その 背 景 には 秀 吉 時 代 の 日 明 講 和 の 失 敗 のトラウマが 強 く 働 いたためではなかろうか (3) 外 交 的 手 段 としての 冊 封 の 効 力 : 中 国 側 の 世 界 秩 序 観 と 被 冊 封 国 側 のそれが 一 致 した 場 合 は 大 いに 効 力 を 発 揮 するであろ うが そういう 被 冊 封 国 は 極 めて 少 ない 超 律 儀 者 の 朝 鮮 とりあえず 律 儀 な 琉 球 傲 慢 なベト ナム 影 の 薄 いシャム 化 外 の 極 みのモンゴル 常 識 が 通 用 しない 日 本 と 国 ごとに 格 差 が 甚 だしい : 中 国 が 当 座 の 問 題 解 決 のため 得 体 の 知 れない 相 手 に 安 易 に 冊 封 を 行 うと その 恭 順 を 得 るどころか 手 ひどい 仕 打 ちを 蒙 る 場 合 もあり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は その 典 型 とは 言 え まいか *ちなみにこの 時 明 が 日 本 に 対 して 冊 封 と 通 貢 を 両 方 許 したとしても 慶 長 の 役 は 免 れなかったであろう 秀 吉 が 明 側 に 求 めたの 真 の 要 求 は 朝 鮮 南 部 の 日 本 占 拠 を 明 が 承 認 することだったからである

258 25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參 考 文 獻 五 十 音 順 :Arcadio Schuwade.S.J. 朝 鮮 の 役 における 日 明 和 平 交 渉 について ( キリシタン 研 究 年 ) : 大 庭 脩 豊 臣 秀 吉 を 日 本 国 王 に 封 ずる 誥 命 について 我 が 国 に 現 存 する 明 代 の 誥 勅 ( 関 西 大 学 東 西 学 術 研 究 所 紀 要 年 3 月 ) : 小 野 和 子 明 日 和 平 交 渉 をめぐる 政 争 ( 山 根 幸 夫 教 授 退 休 記 念 明 代 史 論 叢 上 巻 吸 古 書 院 1990 年 ) : 紙 屋 敦 之 大 君 外 交 と 東 アジア 大 君 外 交 と 東 アジア ( 吉 川 弘 文 館 1997 年 ) : 河 上 繁 樹 爾 を 封 じ て 日 本 国 王 と 為 す 明 皇 帝 よ り 豊 臣 秀 吉 へ 頒 賜 さ れ た 冠 服 ( 特 別 展 覧 会 妙 法 院 と 三 十 三 間 堂 京 都 国 立 博 物 館 1999 年 ) : 北 島 万 次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吉 川 弘 文 館 1995 年 ) : 久 芳 崇 明 朝 皇 帝 に 献 納 された 降 倭 経 略 御 倭 奏 議 を 主 要 史 料 として ( 山 根 幸 夫 教 授 追 悼 記 念 論 叢 明 代 中 国 の 歴 史 的 位 相 下 汲 古 書 院 2007 年 ) : 佐 島 顕 子 壬 辰 倭 乱 講 和 の 破 綻 をめぐって ( 年 報 朝 鮮 学 年 5 月 ) : 佐 島 顕 子 謎 の 海 将 小 西 行 長 の 実 像 に 迫 る! ( 学 研 歴 史 群 像 年 2 月 ) : 徳 富 蘇 峰 近 世 日 本 国 民 史 豊 臣 氏 時 代 朝 鮮 役 中 巻 下 巻 ( 明 治 書 院 1935 年 ) : 中 島 楽 章 封 倭 と 通 貢 一 五 九 四 年 の 寧 波 開 貢 問 題 をめぐって ( 東 洋 史 研 究 年 9 月 ) : 中 野 等 秀 吉 の 軍 令 と 大 陸 侵 攻 ( 吉 川 弘 文 館 2006 年 ) : 中 村 栄 孝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中 巻 吉 川 弘 文 館 1969 年 ) : 中 村 栄 孝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に 関 する 誥 命 勅 諭 と 金 印 について ( 日 本 歴 史 年 5 月 ) : 橋 本 雄 室 町 幕 府 外 交 は 王 権 論 といかに 関 わるのか? ( 人 民 の 歴 史 学 年 9 月 ) : 夫 馬 進 明 清 中 国 冊 封 体 制 論 と 朝 鮮 を 視 ること 内 服 と 同 じ ( 朝 鮮 史 研 究 会 大 会 2007 年 10/20) : 邊 土 名 朝 有 明 の 冊 封 体 制 と 文 禄 慶 長 の 役 ( 琉 球 の 朝 貢 貿 易 校 倉 書 房 1998 年 ) : 堀 新 織 豊 期 王 権 論 日 本 国 王 から 中 華 皇 帝 へ ( 人 民 の 歴 史 学 年 9 月 ) : 堀 新 信 長 秀 吉 の 国 家 構 想 と 天 皇 ( 池 享 編 日 本 の 時 代 史 13 吉 川 弘 文 館 2003 年 ) : 三 木 聡 万 暦 封 倭 考 (その 一 ) 万 暦 二 十 二 年 五 月 の 封 貢 中 止 をめぐって ( 北 海 道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年 )/ 万 暦 封 倭 考 (その 二 ) 万 暦 二 十 四 年 五 月 の 九 卿 科 道 会 議 をめぐって ( 北 海 道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年 7 月 ) : 山 室 恭 子 海 を 渡 った 悲 劇 黄 金 関 白 ( 中 公 新 書 1992 年 ) : 李 光 濤 万 暦 二 三 年 封 日 本 国 王 秀 吉 考 ( 歴 史 語 言 研 究 所 台 北 1967 年 )

259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めぐる 認 識 の 格 差 259 みやこ ながさき ねんぽう 史 料 年 (9/18 付, 都 發 信 ) 12/28 付, 長 崎 發 信, フロイス 年 報 かんかく せいし ずいいん 1それからあまり 間 隔 をおかずに 正 使 の 随 員 たちが 二 列 になって 進 み 始 めた. また, 彼 らの 前 方 に しんく せんこうしょく は, 十 本 の 真 紅 と 鮮 黄 色 の 旗 が 進 んだ. それらの 後 部 には 文 字 板, あるいは 板 に 丸 みをおびた 文 字 で なんじ ほう にほんこくおう たいしょ じょうこう ( 汝 を 封 じて 日 本 國 王 になすと) 大 書 された 条 項 が 運 んで 行 かれた. こくしゅ さつしょ おうごん 2(シナ) 國 主 の 冊 書 は 非 常 に 大 きくて 重 い 黄 金 の 板 に 書 いて 黄 金 の 函 に 納 めてあったが, たいこう いふく おうかん ほこ いた はこ ほ 補 い 遺. その 中 にはまた 太 閤 のための 衣 服 と 王 冠 が 納 めてあった. 同 様 に 別 の 函 には, 彼 の 奥 方 の( 北 ) 政 所 様 のた おうひ おうひ かんむり はこ おくがた きたの まんどころざま めに 王 妃 の 称 号 を 入 れた 王 妃 の 冠 が 納 めてあった. シナ 國 王 はこれ 以 外 に, シナの 称 号 と 位 官 のつ くげ ふく いた 公 家 の 服 二 十 がさ 重 ね 二 組 を 贈 ったが, ひっとう おく こにし いかん こくしゅ それはシナ 國 王 から 明 らかに 指 名 された 二 十 名 の 國 主 たちのためのもので, その 筆 頭 は( 小 西 )アゴスチイノ( 行 長 )であった. それから 同 様 に 他 の( 國 主 )たち のためには, しょしん たいこう いかん にん ゆきなが 太 閤 自 身 が 同 じ 位 官 をもって 任 ずべきだと 考 えた 者 たちを 指 名 した. こうして 日 本 人 ほうけん かしん ( 諸 臣 )は, あたかもシナの 封 建 家 臣 のような 身 分 に 留 まったのであった. えっけん 3このすべて(の 謁 見 )は 日 本 の 儀 式 で, すなわち 畳 の 間 で 座 って 行 われた. 開 会 中 は 太 閤 と 正 使 ようほうきょう とくがわ いえやす ( 楊 方 亨 )とは 對 等 であった. 出 席 者 は( 徳 川 ) 家 康, ( 前 田 ) 筑 前 ( 利 家 ), ( 上 杉 ) 越 後 ( 景 勝 ), ( 宇 喜 多 ) ちゅうなごん ひでいえ こばやかわ 中 納 言 ( 秀 家 ), ( 小 早 川 ) 金 吾 ( 秀 秋 ) 殿, 毛 利 ( 輝 元 )であったが, 彼 らは 日 本 國 全 土 で 最 大 の 國 主 たち さかずき く か であった. 盃 の 後, すなわち 酒 を 少 量 酌 み 交 わして 後, やおら 關 白 は 栄 誉 ある 書 冊, すなわちかの 大 い おうごん しょばん きんいん すいたい なる 黄 金 の 書 板 ( 金 印 ) を 受 理 し, それを 頭 上 に 推 戴 し, その 時 に 冠 冕 をも 受 領 したので, それらを 着 用 べっしつ しりぞ たたみ まえ だ ま ちくぜん かんぱく としいえ かんべん するために 別 室 に 退 いた. さくほうし さかい ひでよし しそう ごと 4(* 冊 封 使, 堺 へ 帰 還. 接 待 役 の 秀 吉 の 使 僧 に 對 して 以 下 の 如 く 要 望 ) こわ ( 朝 鮮 の) 全 陣 営 を 取 り 毀 し, また 朝 鮮 にいる 日 本 の 駐 留 軍 を 撤 退 させること. 次 にシナ 國 王 が 何 年 じひ かしつ も 前 に 慈 悲 によって 許 したように, 朝 鮮 國 民 の 過 失 を 寛 恕 すること. 彼 らはたしかに 破 滅 に 値 したかも 判 らぬが, たとえ 破 滅 の 罰 をもって 処 罰 したところで, そこからは 何 の 利 益 ももたらさぬであろう と. ぶっそう おおさか ばつ たいこう さ 仏 僧 たちは 大 坂 へ 帰 ると, ただちに 書 状 を 太 閤 に 差 し 出 した. 太 閤 はそれを 読 み, 諸 陣 営 を 取 り 毀 すこ とに 關 するかの 要 請 の 箇 所 に 及 んだ 時, 非 常 な 憤 怒 と 激 情 に 燃 え 上 がり, あたかも 悪 魔 の 軍 団 が 彼 を ののし ふんぬ 占 拠 したかのようであった. 彼 は 大 声 で 罵 り 汗 を 出 したので, 頭 上 からは 湯 煙 が 生 じたほどであった. 彼 がかくも 激 怒 したのは, 日 本 人 がシナ 人 にひどく 恐 れられており, 朝 鮮 人 にはなおいっそう 恐 れられて かんじょ げきじょう たいこう も あ えいよ うえすぎ ゆけむり えちご しょさつ かげかつ あたい こくしゅ たいこう う こくしゅ き こわ た わか

260 26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おの いることを承知していたし, また講和を結ぶためには, 朝鮮國のわずか半分でも入手するという己が最 初の考えを忘れては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 (松田毅一監訳 十六 十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第Ⅰ期 第2巻) 1596 史料2 冊封使의 報告書(萬曆二十四年 十月 九月)에 보이는 冊封의 모양 및 秀吉의 謝恩表. ファンシン パクホンチャン もっ 敦寧都正黄慎 上護軍朴弘長等, 冊使等の兵部稟帖三道 秀吉謝表を將て謄書上送す. ①沈遊撃[ 沈惟敬]兵部稟帖に 曰く 東封を完うする 事の為にす. 閏八月十八日, 卑職[ 沈惟 ひでよし 敬]等, 欽鋪せる龍節 璽書等の件の到るを奉ず. 秀吉, 択ぶに九月初二日を以てし, 大坂に於いて 迎え受封す. 卑職, 先に往きて礼を教えり. 奉行こ惟れ謹なり. 期に至りて冊使を迎請すれば, 直ちに中 堂に至る. わか頒つに誥 印 冠 帯 服等の項を以てす. 衆を率いて五拝三叩頭の礼を行い, 件件頭 おわ 頂し, 華音を習いて万歳を呼し, 闕を望み謝恩す. 一一儀の如し. 禮畢んぬ. 宴を使臣及び随行せる いた あさ よう おく 各官に開く. 是の晩, 秀吉親しく卑職の寓所に詣り, 称謝す. 次の早, 楊正使に謁謝し, 饋るに衣 刀 おく 甲 馬を以てす. 各馬官も亦た刀 幣を饋らる. 言を極めて天恩を感戴すること尽きず. 再三に慰労す. 卑職, 速やかに釜兵を撤せよと特諭 すれば, 彼言 く 今皇帝の賜を 受け王爵に封ぜらるれば, 兵当に た と かさ 即ちに撤し, 以て隣好を修むべし. 但だ朝鮮前怨釈けざるを恐る. 仍ねて皇帝の処分を聴き, 再び命下 ま まの な げんこう を候たん と. 卑職, 色を正して開諭す. 面あたり首肯すると雖も, 尚お未だ見行せず. 卑職, 初四日に いずみ まさなり 至り, 回りて和泉に至る. 一面船隻を調集し, 一面催諭を?行す. 初九日, 船に登る. 卑職, 正成[ 寺沢 ゆきなが 正成] 行長[ 小西行長]を遣わし日本に行かしむ. 中途に回りて言えらく 即ち当に命の如くすべし と. 行きて名護屋に至る. 卑職, 復た正成を遣わし往促せしむ. 回る日を俟ち, 中情を備悉し, 騎を飛ばし馳 報せん. 此れが為に先行具稟せん. 萬曆二十四年十月日 よう ②天使[ 楊方亨]兵部掲帖に 曰く 冊封日本正使等官 五軍営等衙門 署都督僉事楊[ 楊方亨] ぷさん 等, 東封を完報する事の為にす. 職[ 楊方亨], 本年六月十五日に於いて, 釜山より舟に登りて渡海 す で す. 已経に本題を具して知り訖ぬ. 一路の倹阻, 風波の難危, 常に異なるも, 皇上の威霊を仰仗すれ いずみ いた とよとみひでよし ば, 幸い躯命を保全するを得たり. 八月初四日に至り, 始めて和泉州に抵る. 乃ち豊臣秀吉, 使臣を接 しばし ながもり 待するを預備するの所にて, 日本國新都を距つこと一百三十余里なり. 秀吉,?ば倭將長盛[ 増田長 みつなり つかわ すこぶ 盛] 三成[ 石田三成]等を差し, 書を持ちて迎慰す. 頗る竭誠を知れり. 欽命補給せる龍節 誥命

261 豊臣秀吉の 日本國王 冊封をめぐる 認識の 格差 261 いた ついで 詔 勅等の件は, 八月十八日に於いて方に到れり. 職等, 即時に随行員役を率領し, 舟に詣るの次, 叩 ゆきなが 頭迎捧し, 職の寓に安定す. 倭將行長, 秀吉に馳報すれば, 択ぶに九月初二日に於いてし, 冊命を大 いた 坂地方に奉迎して受封す. 職等, 初一日, 節を持して前往す. 是の日, 即ち大坂に抵る. 次日, 欽賜の ただち 圭印 官服を領受す. 旋即に佩執して頂被し, 闕を望んで五拝三叩頭の礼を行い, 誥命を承奉して受 の 封し訖ぬ. 嗣いで職等の寓所に至る. 天恩を感激し, 及び職等を慰労して渉歷労頓等の語を再び申 げんこん ぶ. 職等, 敢えて久留せず. 即ちに辞するに初四日を以てす. 節を捧げて回り, 和泉州に至る. 見今 唯だ船隻を調集するを待つ. 即ち?程西還して闕下に復命せん. 此れが為に, 具題を除くの外, 理として まさ 合に具題すべし. 萬曆二十四年九月初五日 とよとみひでよし おも ③關白謝恩の 表文に 曰く 日本國王臣豊臣秀吉, 誠惶誠恐稽首稽首す. 伏し惟んみるに, 日月照 だいみん たか あまね すく 臨して大明を万國に仰ぐ. 江海浸潤して聖化を無疆に措く. 皇運高く承け, 天恩普く済う. 恭しく惟んみる あき うる に, 祖宗の徳を昭らかにし, 人心の心を安んず. 遠近の巨細は, 恩に霑おいて堯舜の聖世を減ぜず, ゆる 威儀の進止は, 禮に合いて周夏の隆風を蕩やかにす. 何ぞ計らん, 東海の小臣, 直に中華の盛典を こうむ 蒙り, 誥命 金印 礼楽 衣冠, 咸な恩寵を?る. 臣, 一一遵崇感戴の至りなり. 日を択びて必ず方物を つつし ぐこん さき 具し, 九重に申謝せん. 虔みて丹誠を尽くさん. 願わくば愚悃を察せられんことを. 天使先に回る. 謹ん で表に附して以聞せり ( 朝鮮宣祖実録 宣祖 二十九年(1596) 十二月己巳(七日) 条) 史料3 朝鮮의 구원요청에 대하여 自衛하라. 日本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라 고 권유하는 明 朝廷 すな 朝鮮國王李昖[ 宣祖], 倭情緊急を以て救を請う. 兵部い言わく 此の奏, 乃わち去年十一月以前 さくし かえ いや うす の事にて, 是の時冊使未だ回らず. 日本, 朝鮮遣使の官卑しく禮薄きを以て納めず. 其の使の帰報に, な あ ようほうきょう すで おわ た 仍お王子を索要するを欲する等の語有り. 今, 楊方亨の奏報に 封事已に竣れり. 止だ是れ朝鮮の禮 す で しんいけい 文を責備するのみ. 已経に覆議せり. 沈惟敬をして調?せしむ と. 其の兵を請うの一節, 宜しく朝鮮に勅 みずか ていび な もっは たの し こう して自ら?備を為し, 専ら天朝の救援を恃むを得ざらしむべし と. 旨を得たるに 朝鮮國王に行し, 備を ぬす きん なか 修め睦を修め, 以て疆土を保ち, 安を偸みて釁を起こすを得ること毋らしめよ と. ( 明神宗実録 萬曆二十五年(1597) 一月丙辰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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