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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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文 學 博 士 學 位 論 文 近 代 韓 國 華 僑 社 會 의 形 成 과 展 開 仁 荷 大 學 校 大 學 院 史 學 科 李 玉 蓮

2 近 代 韓 國 華 僑 社 會 의 形 成 과 展 開 指 導 敎 授 李 榮 昊 이 論 文 을 文 學 博 士 學 位 請 求 論 文 으로 提 出 함 2005 年 2 月 日 仁 荷 大 學 校 大 學 院 史 學 科 李 玉 蓮

3 李 玉 蓮 의 文 學 博 士 學 位 請 求 論 文 을 認 准 함 2005 年 2 月 日 審 査 委 員 長 審 査 委 員 審 査 委 員 審 査 委 員 審 査 委 員 仁 荷 大 學 校 大 學 院 - 3 -

4 國 文 要 約 近代 韓國華僑社會의 形成과 展開 李 玉 蓮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화교사회는 중국 山東省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전 체 화교인구의 90%남짓한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또한 한국화교사회만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처음부터 나타난 것이 아니 다.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정되기 전해인 1883년부터 청상은 인천에서 상업 활동 에 종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들 淸商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廣東상인과 浙 江상인을 중심으로 한 南方商人이 약 88%를 점유하고 있었다. 반면 山東상인은 전체 청상의 약 9%를 차지하고 있어 언제, 어떠한 요인으로 廣東 浙江상인의 퇴장과 더불어 山東상인이 등장하였는가. 그리고 이와 같은 화교사회의 구성변화 는 그 뒤, 한국화교사회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가. 이와 같은 궁금증이 1차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점에 주목하면서 초기 한국화교사회의 형성과정에 나타 난 구성변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와 같은 작업은 화교들의 출신지를 중심으로 분석하였으며 중국국내 南方과 北方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원 인은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바 지역에 따라 경제 문화 종교 등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교출신지에 대한 분 석은 지역별 화교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화교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특 히 한국화교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작업이 된다고 판단하였 기 때문이다. 2004년 9월 俄亥俄大學邵友保博士海外華人文獻硏究中心 에서 조사한 통계자 료에 따르면 현재 해외화교 인구는 총 34,072,632명이며 그 중, 아시아 지역에 28,175,75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아시아에서도 인도네시 아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 약 170,000명이 거주하고 있고 한반도에는 북한지역의 1만 명을 포함하여 약 3만 명 좌우로 통계되었다. 한국화교사회는 동남아시아의 화교사회와 비교하면 소수 작은 집단에 불과하 다. 특히 해외 화교경제의 급속한 발전으로 화교사회가 世論의 주목을 받고 있는 - 4 -

5 요즘, 한국화교사회는 해외화교사회 뿐만 아니라 學界의 화교연구자들에게도 소 외된 실정이다. 하지만 한국화교사회는 해외화교사회의 다양한 복합성을 소유하 고 있는 반면 한국화교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바 海外華僑史에서 간과할 수 없 는 요인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한국화교사회는 1883년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4년 인천의 청국조계지 설정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미 120년의 역사를 가지 고 있다. 특히 해외화교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北方人 즉 山東人 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山東人이 90%를 차지하는 한국화교사회만의 특 성으로 각인되었다. 한국화교사회는 시기별 淸國의 정치적 지위변화와 한 중 일 3국간의 외교정책에 따른 지배를 가장 심하게 받으면서 화교사회의 제반 문 제를 그대로 노정시켰다. 따라서 초기 화교사회의 형성은 淸國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출발하는 화교들의 전성시대 로 각인되었으며 그 뒤,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러일전쟁, 그리고 한일합방과정을 겪으면서 敵性국 민의 신분으로 화교사회의 역사를 엮어갔다. 이는 다른 한편 화교사회의 구성에 도 크게 영향 주었는바 초기 유력한 南方 商人집단으로부터 서서히 중국 내 각 지의 상인들도 구성되며 이어서 지정학적 원인으로 인한 산동인의 대폭적인 급 증으로 서서히 영세상인을 중심으로 화교사회가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1920년에 이르러 산동노동이민(苦力)으로, 그리로 1930년대에는 전쟁 피난민으 로 화교사회는 뚜렷한 구성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은 앞에서 언급한 淸國의 조선에 대한 외교정책과 국제사 회에서의 淸國의 정치적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淸은 1882년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진행하였으며 특히 朝 淸商民水陸貿 易章程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서 청상의 영사재판권 내지통상권 세금특혜 등 특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청국은 조선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독점영역을 견 제하기 위하여 상업망 확대에 전력하였으며 商兵一致 정책으로 淸軍의 軍用船舶 을 무역업에 동원하는 등 청정부의 지원이 막강하였다. 특히 吳長慶 陳樹棠 袁世凱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청상의 상업발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 전까지 청상의 경제는 日商과 比肩할 정도로 크게 성장되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의 敗北에 따른 淸의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지위변화와 러일전쟁 에서 일본의 승리,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청상은 敵性國民으로 전 락되었으며 日商과 조선총독부의 노골적인 저지를 받는 등 원인으로 저조기에 접어들었다. 1920년대부터는 중국 山東지역에서 頻發하는 자연재해와 청국의 부패한 정치 로 인한 생활난, 그리고 山東省을 중심으로 한 河北 河南지역의 과잉인구와 열 강의 침략 등 원인으로 이 지역민의 한반도 이주가 급증하였는데, 이는 다른 한 - 5 -

6 편 조선총독부가 진행한 제반 분야의 건설사업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山東苦力의 조선노동시장으로 진출은 조선노동자의 생존권을 크게 위협한 것으로 양자간의 심각한 갈등을 관계를 초래하였으며 결국 1931년의 萬寶山事件을 계기로 전국적 인 화교배척사건으로 확산되었다. 萬寶山事件은 재한화교사회에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등 큰 영향 을 주었으며 따라서 화교들의 귀국행렬과 더불어 재한 화교사회는 겨우 절반정 도의 화교인구를 보류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제가 동북지 역에서 일으킨 9 18 滿洲事變과 1937년의 中日戰爭을 경과하면서 재현되어 재 한화교사회의 인구 大流出과 再流入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는 이 시기 중국 국내의 장기간 전쟁으로 인한 불안한 사회현실에 기인되는바 한반도를 상대적으 로 安定 한 地帶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중일전쟁이후부터 1943년까지 재한화교사회는 뚜렷한 인구증가 추세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한국 화교경제사는 對 중국무역이 꾸준히 주류를 이루던 실정이므 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화교들의 중국 국내와의 제반 분야 에서의 교류는 단절되었으며 아울러 한국정부의 외국인에 대한 각종 규제정책으 로 인한 제한으로 화교들의 경제는 극히 심각한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한국화교들의 미국 캐나다 등지로 再移住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1960~70년대부터 해외로 재 이주한 한국화교들은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한 국화교 幇 조직을 구성하면서 중국인의 정체성외에도 한국화교의 정체성을 유지 하고 있다. 이는 한국화교사회와 한국정부, 그리고 사회단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 다. 특히 광활한 시장을 소유한 중국대륙과 동남아화교경제권, 그리고 해외 한국 화교 幇 과의 밀접하고 활발한 교류와 관련된 한국화교들의 교두보 작용이 무엇 보다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이는 한국화교경제의 實利的인 발전과 한국 경제성장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주제어: 韓國華僑社會. 淸國政府. 仁川華僑社會. 廣東商人. 浙江商人. 山東商人. 山東苦力. 朝鮮勞動者. 萬寶山事件. 在滿韓人. 在韓華僑

7 目 次 第 1 章 序 論...1 第 2 章 壬 午 軍 亂 前 後 淸 의 朝 鮮 政 策 과 華 僑 社 會 의 形 成...13 第 1 節 壬 午 軍 亂 과 軍 役 商 人 의 登 場 淸 國 의 派 兵 과 軍 役 商 人 의 登 場 朝 淸 商 民 水 陸 貿 易 章 程 과 淸 國 의 積 極 的 干 涉 政 策...22 第 2 節 淸 國 專 管 租 界 의 設 定 과 華 僑 社 會 의 形 成 仁 川 口 華 商 地 界 章 程 과 專 管 租 界 의 設 定 袁 世 凱 의 朝 鮮 赴 任 과 在 朝 鮮 活 動...42 第 3 章 淸 日 戰 爭 前 後 仁 川 華 僑 社 會 의 變 化 樣 相 橫 浜 華 僑 社 會 와 比 較 - 第 1 節 仁 川 華 僑 社 會 의 形 成 과 變 化 淸 商 의 仁 川 移 住 와 華 僑 社 會 의 構 成 仁 川 華 僑 社 會 의 構 成 變 化 와 그 實 態 淸 日 戰 爭 後 仁 川 華 僑 社 會 의 變 容...86 第 2 節 橫 浜 華 僑 社 會 의 形 成 과 變 化 歐 美 商 社 의 橫 浜 進 出 과 買 辦 華 商 淸 日 戰 爭 後 橫 浜 華 僑 의 內 地 雜 居 第 4 章 1920 年 代 山 東 苦 力 의 朝 鮮 勞 動 市 場 進 出 第 1 節 1920 年 代 山 東 苦 力 의 韓 半 島 移 住 苦 力 과 山 東 人 의 海 外 移 住 原 因 山 東 苦 力 의 韓 半 島 移 住

8 第 2 節 山 東 苦 力 과 朝 鮮 勞 動 者 의 葛 藤 關 係 苦 力 幇 組 織 과 山 東 苦 力 의 活 動 苦 力 과 朝 鮮 勞 動 者 의 葛 藤 第 5 章 1930~40 年 代 華 僑 社 會 의 變 化 第 1 節 滿 洲 韓 人 社 會 와 在 韓 華 僑 社 會 의 樣 相 比 較 滿 洲 韓 人 의 社 會 的 位 相 年 代 後 半 在 韓 華 僑 社 會 의 危 機 第 2 節 1931 年 萬 寶 山 事 件 과 그 影 響 萬 寶 山 事 件 과 華 僑 排 斥 運 動 華 僑 排 斥 運 動 의 收 拾 過 程 및 結 果 第 3 節 1937 年 中 日 戰 爭 前 後 華 僑 社 會 의 變 化 華 僑 人 口 의 流 出 과 再 流 入 및 分 布 中 日 戰 爭 後 華 僑 經 濟 變 化 第 6 章 結 論 參 考 文 獻 ABSTRACT

9 圖 表 目 次 <표2-1> 淸이 파견한 朝鮮歷代總稅務司 (1883~1893)...27 <표2-2> 仁川 釜山 元山의 淸國租界地 面積 <표2-3> 仁川 釜山 元山 淸國租界地 所屬墓地面積...33 <표2-4> 仁川 淸商人數 및 出身地 比較表 (1883) <표2-5> 仁川 釜山 淸國 商務署員役 姓名 (1883~1884)...35 <표2-6> 元山商務署員役 姓名 및 出身地 (1884) <표2-7> 仁川 淸商數와 出身地別 比較 (1884) <표2-8> 仁川 淸商 出身地別 統計 (1885) <표2-9> 仁川 淸商 出身地別 統計 (1886) <표2-10> 仁川港 淸 日商人의 輸入額 比較表 <표2-11> 三港口 淸 日兩國의 輸入總額 比較表 <표2-12> 三港口 淸 日兩國의 輸出總額 比較表 <표2-13> 三港口 對日貿易 變動狀況 <표2-14> 遞解 資遣한 游勇游商游民 姓名 (1886) <표2-15> 捕獲 遞解 資遣한 游勇游商游民 調査表 (1886)...47 <표3-1> 仁川에 常住 往來한 淸商의 姓名 ( ~12)...54 <표3-2> 仁川 淸商 店鋪數 및 商人數 (1883) <표3-3> 漢城 淸商 店鋪數 및 商人數 (1883) <표3-4> 仁川 淸商 輸出入稅 納付表 (1883) <표3-5> 仁川 淸商姓名 및 出身地 (1884) <표3-6> 仁川으로 往來한 輸入 帆船數 및 積載量 (1884)...63 <표3-7> 月別 仁川 淸商의 輸出入稅 (1884) <표3-8> 仁川淸商 姓名 및 出身地 (1885) <표3-9> 仁川港을 往來한 淸商人數 및 出身 (1885)...67 <표3-10> 仁川 釜山 元山 3港口 輸出入貨物稅 比較 (1885)...68 <표3-11> 서울淸商 人數 및 出身地 別 比率 (1885) <표3-12> 仁川淸商 人數 및 地域 別 比率 比較表 (1883~1885)...71 <표3-13> 仁川淸商 姓名 및 出身地 (1886)

10 <표3-14> 龍山 淸商人數 및 地域別 比率 (1886) <표3-15> 1886年 釜山港 常住淸商 <표3-16> 1883年~1886年 仁川港 淸商 輸出入稅 比較表 <표3-17> 漢城 仁川 釜山 元山 淸商人數 (1891~1893) <표3-18> 港口別 對淸貿易 比較 (1893) 및 往來 淸商姓名 <표3-19> 淸日戰爭 後 仁川港 淸國人數 變化 <표3-20> 淸日戰爭 前後, 仁川港 日本人數 統計表 <표3-21> 淸日戰爭 後 對淸 對日 輸入推移 <표3-22> 淸日戰爭 後 對淸 對日 輸出推移 <표3-23> 港口別 對淸 貿易實績...92 <표3-24> 對淸 輸入商品 (1908)...93 <표3-25> 對淸 輸出商品 (1908)...93 <표3-26> 仁川 對中國 輸出入 貿易 統計表 (1916)...96 <표3-27> 仁川 對中國 輸出貿易 (1911~1915) <표3-28> 仁川 對中國 輸入貿易 (1911~1915) <표3-29> 仁川에서 진행된 對中 對日 輸入 實績 比較表...98 <표3-30> 上海 買辦商人數 (1850~1892) <표3-31> 橫浜中華街의 華僑職業狀況 (1864~1900) <표3-32> 橫浜居留外國人 및 華僑人數比較 (1864~1894) <표3-33> 橫浜居留外國人 및 華僑人數比較 (1895~1938) <표3-34> 橫浜中華總商會 會員 <표4-1> 山東 河北 兩省 天災發生 狀況 (1912~1939) <표4-2> 最近 中國人 勞動者數의 增減狀況 <표4-3> 各府의 勞動者 賃金比較表 <표4-4> 1930年 朝鮮 內 苦力의 業種 <표4-5> 官營事業에 中國人勞動者를 使用한 數 <표4-6> 朝鮮內朝鮮人 日本人 中國人勞動者 賃金 比較表 <표4-7> 在韓華僑社會 女性의 人口比率 <표5-1> 1910年~1930年 在滿韓人 移住民數 <표5-2> 1910年~1925年 韓半島로 移住한 日本人과 農地占有 狀況 <표5-3> 東亞日報 와 滿洲 同胞社會 關聯記事 <표5-4> 每日申報 에 揭載된 韓半島 華僑 排斥事件

11 <표5-5> 仁川의 華僑襲擊事件 裁判記錄 <표5-6> 每日申報 에 揭載된 衝突事件防止를 위한 各界의 努力 <표5-7> 在韓華僑人口推移 <표5-8> 1935年度 滿洲國人 中華民國人의 道別 分布 <표5-9> 1933年度(昭和 8) 中國人 勞動者 使用狀況 <표5-10> 地域別 業種別 中國人 勞動者 人數 <표5-11> 地域別 業種別 中國人 勞動者 人數 <표5-12>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勞動種類別 賃金比較表 <표5-13> 地域別 中國人 勞動者 賃金表 <표5-14> 地域別 中國人 勞動者 賃金表 <표5-15> 平安北道 華僑人口 調査表 (1914~1929) <표5-16> 新義州 華僑人口 調査表 (1910~1923) <표5-17> 平安北道 府郡別 華僑 分布狀況 (1929) <표5-18> 平安北道 外國人(華僑) 業種別 人數 (1934) <표5-19> 在韓華僑의 地域別 人口推移( ) <표5-20> 京畿道 平安道 咸鏡道 華僑職業別 人口分布 (1942) <표5-21> 國別 解放初 輸出入比率 (1946~1960) <표5-22> 仁川 13個所 華僑 貿易商 輸出入 實績 附 錄 目 次 <부록 1> 同順泰號 譚以時 (1) <부록 2> 同順泰號 譚以時 (2) <부록 3> 同順泰號 譚以時 (3) <부록 4> 1885年 正月~12月 釜山商民 및 往來商人 姓名 <부록 5> 1885年 琿春 仁川 元山을 거쳐 釜山港에 도착한 華商 <부록 6> 1885年 元山港에 鋪를 설치한 華商 姓名 및 籍貫 <부록 7> 1885年 元山港을 거점으로 往來販運行商華商 姓名 및 籍貫

12 第1章 序 論 1. 연구대상과 목적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해 외교포 즉 華僑 華人을 소유하고 있다. 아편전쟁 후, 중국에서는 廣東省, 福建 省을 중심으로 중국역사상 未曾有의 해외이민 열풍이 나타났는데, 이와 같은 양 상은 아편전쟁으로부터 태평양전쟁까지 한 세기 동안 유지되어 1,700만 여명이 해외로 渡航하였다.1) 바다에 잇닿은 지역이면 반드시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인이 본격적으로 세계각지에 분포되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 후부터이다. 같은 시기, 중국국내에서도 인구대이동이 이루어졌는바 ⑴ 山東省 直隸省으로부터 東北으로 이주, ⑵ 廣東省 福建省으로부터 臺灣으로 이동이 이루어졌다. 세계적으로도 이 시기에는 인도에서 3,019만 명(1834~1937), 영국에서 1,830 만 명(1840~1938)이 해외로 이민하였다.2) 한마디로 아편전쟁으로부터 태평양전 쟁까지 약 한 세기동안 세계적 범위에서 近代史上 전례 없던 인구 대이동 현상 이 나타났다. 아편전쟁후의 近代華僑는 苦力(Coolie) 즉 중국에서 華工 勞工으로 호칭하는 無資本노동이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아메리카서부, 하와이, 호주, 中南美 및 동남아시아의 식민지개발에 使役되었다. 이는 19세기 중기이후부터 세계 자본주 의 시장의 형성 및 세계 노동력시장의 재편으로 인한 요인에 기인되는바 이와 같은 양상은 우선 동남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근대 해외화교사회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의 화교사회는 1883년에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한 중 양국간의 근대 외교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 한 국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대하여 추적하는 작업은 한국화교사회의 성격 규명과 해외화교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화교 사회를 역사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 대 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해외화교경제의 급성장과 이에 따른 화교경제네트워크 의 중요성이 주목되는 시기와 더불어 2005년 10월, 서울에서 제8차 世界華商大 會가 개최된다는 점을 감안해서도 한국화교사회에 대한 연구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1) 游仲勳, 華僑經濟の硏究, 東京, 1969, 29쪽. 2) 游仲勳, 위의 책, 28~30쪽

13 한국의 화교사회는 이미 1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2002년 법무부 출입 국관리통계연보 에 따르면 22,699명으로 등록되었다. 그 중, 4,699명은 대만을 비롯하여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18,000명이 한국국내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들 화교들의 한국 내 분포지역은 경기도에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 나 전체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서울 인천지역에만 전체 화교 인구의 50%이상이 거주하고 있어 화교들이 가장 많이 집중된 것으로 통계되었 다.3) 나머지 7,200명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각 지역에 분포되 어 있다. 한국화교사회는 해외 각 지역별 화교사회와 비교하면 상당히 矮小한 집단으로 각인되었는바 경제 분야에서도 활발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 원인으로 學界 뿐만 아니라 해외화교사회에서도 소외된 실정이다. 특히 한국화교사회에 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주목받는 연구도 특정 분야에 한정 되어 있으므로 결국 화교사회의 전체상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도 하나의 요인 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화교사회는 淸國의 정치적 세력을 기반으로 治外法權 세금특혜 내지행 상 등 상업상의 제반 유리한 조건과 淸國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中國南方의 유력상인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임오군란 時, 吳長慶提督을 隨行해온 40여명의 軍役商人의 상업 활동은 초기 한국화교사회의 구성과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淸國정부는 1884년 중반부터 중국국내 유력상인의 한반도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는바 따라서 1886년부터 화교사회는 서서히 구성변화를 일 으키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하면 南方 北方을 아우르는 중국 내 각 지역의 상 인들이 한반도에서 무역활동에 종사하는 한국화교사회만의 특성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양상은 청일전쟁 전까지 유지되었는바 초기 화교사회가 형성된 1883 년부터 1894년까지 약 10년간 한국화교사회는 海外華僑史에서도 전례 없는 화 교들의 전성시대 로 각인되었으며 아울러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중 하나로 자리매 김 되었다. 특히 인천화교사회로부터 출발한 초기 한국화교사회는 廣東 浙江省을 중심으 로 한 南方상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뒤 山東省을 중심으로 한 北方人이 주류를 이루는 화교사회로 변화하였는데, 현재 세계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華僑 華人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南方 北方의 두 系統으로 나누고 있다. 즉 山東省을 중심 으로 한 河北 河南을 포함한 北方人系統과 廣東 福建省을 중심으로 한 南方人 系統이다.4) 그 중, 北方人系統은 과잉인구와 生活苦로 해외이민을 선택하였으며 해외이주과정에서 꾸준히 勞動力給源地 역할을 하였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 3) 양필승 이정희 지음,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삼성경제연구소, 2004, 11쪽

14 라서 한국화교사회의 90%이상을 차지하는 山東人에 대한 연구는 北方移住民에 대한 연구영역에 속하며 아울러 지금까지 소외 되어온 勞動移民(山東苦力)에 대 한 연구라는 점에서 한국화교사 뿐 만 아니라 勞動移民史 연구에서 중요한 자리 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의 문제의식은 19세기말 壬午軍亂부터 1937년 中日戰爭을 경과하면서 시기별 한국화교사회가 어떤 요인으로 구성변화를 일으켰는가가 1차적인 관심사 로 되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 국내 南方商人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초기 화교사 회가 北方商人(山東人)이 주류를 이루는 화교사회로 이행하는 계기를 포착함으로 서 山東人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화교사회의 형성과정을 조명해보려고 한다. 이는 다른 한편 근대 한국화교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연구현황과 과제 해외華僑 華人에 대한 연구는 정치 경제 법률 사회 역사 인류학 등 諸 分野의 학문적 축적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특히 화교연구라는 테마 및 문 제 접근방법이 다양하고 또한 연구자가 華僑觀에 대한 시각이 不同하기 때문에 관련된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華 僑 華人에 대한 연구 중, 공통된 관심을 검출한다면 華僑 華人經濟와 아이덴 티티의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華僑 華人경제에 대한 연구는 중국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 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연구5)가 주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구는 주 로 동남아시아지역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 화교사회에 대한 연구는 동남아시아지역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것 으로 나타났는바 그 중에서도 일본화교사회에 대한 연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 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는 주로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한국화교에 대한 연구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국화교에 대한 연구는 주로 한국내의 연구 자들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연구 자들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일정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 중, 한국내의 연구 4) 長野朗, 支那民族の海外發展, 支那問題硏究所, 1928, 4쪽. 5) 福田省三, 華僑經濟論, 東京 : 1939 ; 游仲熏, 華僑經濟の硏究, 東京 : アジア經濟硏究所, 1969 ; 山下昌美, 華僑の商法, 同友館, 1981 ; 白神義, 華僑商法100カ條, 三樹書房, 1984 ; 南康文, 華僑商法の秘密, 經濟界, 1986 ; 松本一南, 華僑商法の秘傳, 三笠書房,

15 는 화교경제와 화교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왔으며 기타 분야 의 연구는 아직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아래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 성과를 분야별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 다. 우선 화교의 정체성, 화교이주과정, 그리고 한국정착과정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주로 사회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6) 특히 高承濟와 박 은경의 연구는 화교상인 뿐만 아니라 화교농민 노동자를 포함하여 전체 화교사 회에 대하여 검토하고 있다. 또한 화교들의 이주과정부터 정착에 이르기 까지 폭 넓게 검토하고 있어 華僑史 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분야 별 역사적 생성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가 결여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 다. 경제학 분야에서 진행된 연구로 청일전쟁 전 단계를 중심으로 초기 淸商의 상 업 활동과 淸商의 사단조직에 대한 연구7)를 들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임오군란 후 청국이 한국에 대하여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실시한 시기를 중심으 로 검토되었는바 초기 청상들의 상업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어 이 시기 화 교상인의 특성에 대하여 상당부분 규명하였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연구의 초점 이 화교상인들의 상업 활동이란 측면에 집중됨으로서 종래 華僑觀 즉 상술이 뛰 어난 상인집단 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화교사회가 가지 는 특성 혹은 인천화교사회의 중요성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게 제시 못하고 있다. 박영석의 萬寶山事件8)에 대한 연구는 萬寶山事件 前後 시기뿐만 아니라 만보 산사건 勃發 時 한국화교사회와 일본화교사회, 그리고 만주지역 韓人사회를 포함 하여 사건발생의 원인 영향 수습과정, 그 외, 본질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 다. 특히 일제의 대륙침략정책과 화교사회와의 관계를 검토하였다는 점에서 연구 사적 이미가 크다. 근년에 최승현9)은 한국화교의 이주과정과 특성을 한국 측 자료와 중국 측 자 료를 이용하여 폭 넓게 검토하고 있다. 기존 화교사연구와 비교하여 중국 측 자 6) 高承濟, 華僑對韓移民의 사회사적 분석 白山學報, 第13號, 박은경, 한국 화교의 種族性 한국연구원, 박은경 이효재, 한국 화교 및 화교이동에 관한 연구 論叢, 제37집, 이화여대 한국문화연 구원, ) 강덕지, 한국 화교의 경제에 대한 고찰, 성균관대학 석사학위논문, 이상준, 화교 자본의 기본 성격에 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申文廉, 在韓華僑의 經濟에 관한 硏究,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담영성, 조선 말기의 淸國商人에 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담건평, 재한 화교의 사단조직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亞細亞文化社, ) 崔承現, 韓國華僑史硏究 從: 上國國民到多層認定, 北京大學博士硏究生學位論文,

16 료를 多數 활용했다는 측면에서 화교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자료를 제시해주어 주 목된다. 그러나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만 언급되 는 등 세부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해 한국화교사회의 전모를 밝히는데 아쉬 움을 남기고 있다. 지역사 측면으로 화교사를 다루고 있는 연구로 문은정의 마산화교에 대한 연 구10)와 이현주의 인천화교사회와 한국인의 하와이 이주라는 상관관계에 대한 연 구11)를 들 수 있다. 특히 지역별 화교사회에 대한 연구는 상이한 지역에 따른 화교사회의 특수성을 조명할 수 있으며 아울러 전체 한국화교사회에 대한 성격 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천화교사회에 대 한 연구는 개항시기 인천지역사에 대한 연구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는 다른 한편 경제적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문화적 네트워크라는 차원에서 동아 시아 개항도시와의 문화교류를 활성화함에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할 것이다. 그 외, 세계화교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화교경제네트워크가 주목되면서 동남아 시아화교경제 및 해외화교경제와 중국국내와의 투자유치와 관련된 저서 연구논 문12)을 들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해외화교사회의 경제성장에 주목하 여 진행된 연구로서 한국화교 경제에 대한 이해를 뒷받침해주는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해외화교경제와 한국화교경제와의 관련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결여되 어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중국에서 진행된 화교연구는 주로 해외화교와 중국국내와의 관계와 관련하여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는 주로 항일전쟁시기 화교와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인데, 화교들이 중국항일전쟁시기에 진행한 모금활동 자금지원과 관 련된 연구이다.13) 그 외, 抗日전쟁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人物傳과 관련된 연구로 陳嘉庚에 관한 저서와 연구논문을 들 수 있다.14) 그리고 辛亥革命시기 孫文과 화교와의 관계에 관한 연구15)도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10) 문은정, 20세기 전반기 馬山地域 華僑의 이주와 정착, 大丘史 68輯, 대구사학회, 2002., 解放以後 馬山 華僑社會의 人口 変化와 그 特, 가야문화 16輯, ) 이현주, 개항기 仁川의 華僑社會와 하와이 移民-근대성에 가려진 식민성, 인천의 두 얼굴-, 2001인천 再 발견 상, 인천발전연구원, ) 이문봉, (2000년대 大中華 경제권의 선도주자)동남의 화교기업, 서울 : 길벗, 이재유 김영태, 동남아 화교자본의 경영특성과 이들과의 제휴를 중국시장 진출방안의 모색, 서울 : 國際貿易經營硏究院, 이덕훈, 화교경제의 생성과 발전, 대전 : 한남대학교출판부, 양필승 이정희,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삼성경제연구소, ) 中國史學會 編, 中國歷史學年鑑, 人民出版社, ) 陳碧笙 陳毅明 編, 陳嘉慶年譜, 福建人民出版社, 楊國貞, 陳嘉慶, 人民出版社,

17 화교의 중국국내투자에 관한 연구16)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 한 중국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제와 연구는 주로 중국 내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재한화교에 대한 중국 내 연구17)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楊昭全의 朝鮮華僑史 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華僑史를 폭 넓게 검토하 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1950년대 북한화교에 대한 연구는 북한화교사회에 대한 인식에 도움을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 북한 화교사회에 대한 연구에서도 중 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한반도 화교사회를 조명하 는 과정에서 史e 文獻 통계자료활용이 결여되어 있어 부분별로 정확하게 제 시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외, 朱慧(과 張泰河의 연구는 한국화교사회 의 형성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검토하면서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을 조명하고 있다. 이 연구는 중국학계에 재한화교사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뒷받침시켜주는 작용을 하여 연구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기존 연구의 틀을 벗어 나 새로운 시각으로 혹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재한 화교에 대한 연구는 대만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성과를 이룬 것으로 알려 졌다.18) 이는 초기 대만정부의 정책과 관련이 있는바 대만정부는 중국대륙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였으므로 해외이민 쟁탈 전으로 정책을 세웠으며 그 일환으로 한국화교에 주목하였다. 특히 1950년대에 출판된 韓國華僑經濟 韓國華僑敎 育 韓國華僑志 에서는 한국화교에 대하여 中國人 으로 호칭하면서 이민집 단 이란 칭호에 강한 부정을 보이는 등 이 시기 대만정부의 해외이민에 대한 정 책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진행된 연구는 정부의 정책차원에서 진행 15) 洪絲絲 等, 辛亥革命與華僑, 人民出版社, ) 林金枝, 近代華僑投者國內企業史硏究, 福建人民出版社, ) 王正廷, 朝鮮華僑槪況, 楊昭全 孫玉梅 共著 朝鮮華僑史, 中國華僑出版公司, 朱慧(, 韓國華僑社會的變遷與特點, 華僑華人歷史硏究, 北京 : 1996年 第2期 張泰河, 韓國華僑的過去, 現在與未來, 華僑華人歷史硏究, 北京 : 1996年 第2期. 李長傅, 南洋史地與華僑華人硏究-李長傅先生論文選集, 曁南大學出版社, ) 華僑志編纂委員會 編, 華僑志-總志, 海天印刷廠有限公司, 盧冠群, 韓國華僑經濟, 臺北: 海外出版社, 張兆理, 韓 華僑 育, 台北: 海外出版社, 華僑志編纂委員會 編, 韓國華僑志, 海天印刷廠有限公司, 華僑志編纂委員會 編, 華僑志-日本-, 海天印刷廠有限公司, 秦裕光, 旅韓六十年見聞 韓 華僑史話, 台北: 中華民 韓 究, 陳烈甫, 華僑學與華人學總論, 臺灣商務印書館, 陳建康, 大韓民國與華僑槪況, 臺灣商務印書館發行, 杜書溥, 仁川華僑敎育百年史, 劉順達, 韓 華僑 育之 究, 台北: 中 文化 院民族与華僑 究所, 碩士論文,

18 된 연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진행된 연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재 한화교에 대한 연구업적이 미미했던 시기에 진행된 연구로서 그 뒤, 한국화교사 회연구 분야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화교 화인연구가 가장 활발히 진행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의 화교 화인 연구는 시기별 목적에 따라 구분되는바 아래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戰前 일본의 화교 화인연구는 정보 수집을 위한 연구로 볼 수 있다. 따 라서 戰前의 연구자는 주로 日本植民擴張機構人員과 조사인원, 外務省官員, 政府 機構情報人員과 일부 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화교경제에 대한 조사연구의 방식 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연구 목적은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인바 따라서 학문 적 가치가 결여된 연구라 할 수 있다. 둘째, 戰後 일본의 화교 화인에 대한 연구는 전면적인 학술연구로 진입하여 화교들의 현황문제 화교사회의 경제연구와 화교교육 문화 등 제 분야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는 일본화교에 대한 연구과 더불어 진행되면서 전문적인 화교연구학술단체가 성립되었다.19) 근래에 진행된 일본의 화교 화인 연구는 주로 화교경제 및 아이덴티티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일본은 특히 화교경제연구에 주목하였는바 이 영역 은 경제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 졌으며 주로 동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화교사회 의 경제현황을 분석하였다. 1918년 臺灣銀行이 간행한 南洋に於ける華僑 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華僑經濟를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20) 그 뒤, 이 와 관련된 연구는 滿鐵經濟調査局 臺灣銀行 臺灣總督府 東亞硏究所 등 部門 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반에 이르러 동남아시아의 국가별 화교사회경제에 관한 시리즈로 南洋華僑叢書가 간행되었다.21) 2차대전 후, 아시아경제연구소를 비롯한 일본의 화교경제연구도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22) 19) 최근에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14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에서 출판, 발행한 華僑 華人과 관련된 서적조사 보고서는 429종에 달하며 각종 간행물, 및 논문집에 발표된 논문은 1931편에 이른다. 특히 1980년부터 전문적인 화교연구단체가 성립되면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는데, 예컨 대 長崎華僑硏究會 (1984) 神戶華僑硏究會 (1987) 九州華僑硏究會 (1988) 등이다. 20) 臺灣銀行 編, 南洋ニ於ケル華僑: 支那移住民, 臺灣 : 臺灣銀行, 大正 3(1914). 土居政次 坂本爲次郞 共著, 佛1印度支那出張調査槪要, 臺北: 臺灣銀行, 大正 7(1918). 21) 滿鐵東亞經濟調査局, 蔅領印度に於ける華僑, 滿鐵東亞經濟調査局, 昭和 15(1940). 滿鐵東亞經濟調査局, 比律賓に於ける華僑, 滿鐵東亞經濟調査局, 昭和 14(1939). 22) 外務省情報部 編, 支那人 日本語及日本事情硏究狀況, 外務省情報部, 昭和 5(1930), 四至本人郞 著, 支那人街, 太陽閣, 昭和 12(1937), 井東憲 著, この支那人を見ろ, 內外社, 昭和 7(1932), - 7 -

19 戰後, 일본의 화교사연구는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 은 연구는 長崎 神戶 大阪 橫浜 函館 등 지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연구는 주로 商業史 貿易史로 나눌 수 있는데, 화교들의 무역활동 사회 조직 거류지문제, 그 외, 정치 문화 사회형태 및 일본의 외국인에 대한 법적 制裁 등 폭 넒은 범위에서 검토되었다. 특히 각 개항장에 대한 연구는 지역별 개 항장과 관련된 화교들의 공통점과 差異점을 분석하고 있어 주목된다.23) 일본에서 진행된 재한화교에 대한 연구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약 50년간 진행되었다. 특히 청일전쟁 후, 한국에서 淸國의 정치적 지위가 완전히 상실되면 서 재한화교들도 큰 타격을 받았는데, 그러나 화교들의 종전과 같은 상세회복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되었는바 이는 다른 한편 日商의 경쟁대상으로 인식되 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분야에 대한 통 치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재한화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구는 조선총독부의 주체로 진행되었는데24) 그 중, 조선총독부의 편찬으로 간 행된 朝鮮總督府統計年鑑 은 화교들의 입국에 따른 화교인구증감 화교상업 공업 농업 등 재한화교사회를 폭넓게 다루고 있어 화교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 료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 綛谷智雄의 在韓華僑の形成と現況 25)은 한국 개항 후, 19세기말부터 식민지시대와 조선광복시기까지 재한화교사회의 형성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화교이미지인 상인 의 틀을 벗어나 화교의 다양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 어 주목된다. 그 외, 千田 稔과 宇野 隆 의 近代朝鮮における山東出身華僑-植 民地時期における朝鮮總督府の對華僑政策と朝鮮人の華僑への反應を中心に- 26) 은 식민지시기 한반도화교사회에 대한 연구로 주로 화교노동자 즉 苦力에 대한 조선총독부와 조선인의 태도를 분석하고 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재한화교연구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점 즉 종래 화교사회에 대한 연구와 다른 화교 노동이민의 실태를 검토하고 있어 연구사적 의미가 크다 鳥山喜一 著, 支那, 支那人 第90卷, 岩波書店, 昭和 13-19( ), ブラネ 著, 津田逸 譯, 支那人の宗敎 第21卷, 岩波書店, 昭和 15-19( ), 石川正義 著, 支那の農業, 東亞新書, 1941, 23) 長崎 大阪 函館는 상업 무역사의 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神戶에서는 貿易史 외 화교의 내셔널연구가 특색이라 할 수 있다. 24) 小田 內通敏, 來住の支那人, 朝鮮部落調査報告, 京城: 朝鮮總督府刊行, 朝鮮總督府官房庶務調査課 編, 朝鮮に於ける支那人, 京城: 朝鮮總督府刊行, ) 綛谷智雄, 在韓華僑の形成と現況, 日本植民地硏究, 日本植民地硏究會事務局, ) 千田 稔 宇野 隆 共著, 近代朝鮮における山東出身華僑-植民地時期における朝鮮總督府の對華 僑政策と朝鮮人の華僑への反應を中心に-, 東アジアと 半島空間, 思文閣出版,

20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교노동이민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대응조취를 분석하는 측면에서 다소 일본 측의 입장에서 대변했다는 등 객관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 다고 생각한다. 특히 화교노동이민의 특성을 정확히 제시 못하여 아쉬움을 남기 로 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한국화교사회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언급한 제 영역에 대 한 폭 넓은 검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비록 최근에 들어와 여러 측면으로 파악하는 성과가 보이고 있고 아울러 화교사회에 대한 관 심이 높아가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아직은 포괄적으로 한국화교 사회에 대하여 접근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화교사회의 시 기별 특성에 주목하면서 화교들의 출신지에 따른 차이점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화교들의 생성과정을 검토하는 작업이 결여되어 있는 원인으로 화교사회의 특성 을 정확히 규명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3. 논문의 구성과 자료의 활용 본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연구 시기는 근대 인천의 개항, 즉 1883년부터 1937년 중일전쟁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연구 지역 은 인천을 중심으로 서울과 부산 원산을 포함하여 검토하였다. 제2장에서는 壬 午軍亂 전후, 淸國의 對 조선정책과 화교사회의 형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3 장에서는 청일전쟁 전후시기 인천화교사회의 구성변화를 橫浜화교사회와 비교하 는 방법으로 살펴보았다. 제4장에서는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인 山東人에 주목하여 1920년대 山東苦力의 조선노동시장에 대한 진출과정과 조선노동자와의 갈등관 계, 그 외, 한반도의 화교배척사건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제5장에서는 1930~1940년대 한국화교사회의 변화를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을 중심으로 고 찰하였으며 특히 이 시기 화교인구의 大流出과 再流入하는 상황에 주목하여 한 국화교사회의 인구변화 구성변화 및 분포상황과 경제변화를 살펴보았다. 제2장 1절에서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淸國이 한국에 대한 정책을 적극적인 간 섭정책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고찰한다. 특히 임오군란 시 淸軍을 수행해온 40여 명의 軍役商人의 출신지와 역할에 대한 분석에 주목하면서 이들 군역상인과 초 기화교사회의 구성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초기 한국화교사회의 구성이 남방 상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원인과 그 뒤 화교경제의 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제2장 2절에서는 인천화교사회의 형성과정을 고찰하기 위하여 仁川口華商地 界章程 의 체결과 인천청국조계지의 설정과정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이 시기 조

21 선에 부임한 陳樹棠과 袁世凱의 활동 역할과 관련지어 화교경제발전과의 관계 를 분석하였다. 제3장 1절에서는 淸商의 인천이주과정과 초기 인천화교사회의 구성을 출신지 에 주목하면서 고찰하였다. 그러므로 남방 상인이 주류를 이루는 초기 인천화교 사회의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이 부분은 종래 연구 성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軍役상인과 남방 상인의 관계를 설정하여 살펴봄으로서 인천화교사회의 특 성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성변화 과정을 통하여 한국화교사 회의 특성과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제3장 2절에서는 橫浜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특히 요코하마라는 근대 개항도시의 특성에 주목하였는바 이와 같은 작업은 인천화교 사회의 특성과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양 도시의 많은 공통성을 전제로 相異점을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北 方人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화교사회와 南方人이 주류를 이루는 요코하마화교사 회의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제4장 1절에서는 1920년대 山東苦力의 한반도 이주원인과 이주과정을 이 시 기 산동지역의 제반요인과 한반도의 실정과 관련하여 분석하였다. 특히 이 부분 에서는 현재 山東人이 90%이상을 차지하는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에 주목하여 山 東人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제4장 2절에서는 海外移民史, 특히 세계적으로도 노동이민으로 각광받았던 山 東苦力의 특성과 苦力幇조직의 성격, 이와 같은 苦力幇조직의 해외이민과정에 나 타난 역할과 중요성을 살펴보면서 조선노동자 조직과 관련지어 고찰하였다. 그 외, 조선노동자와의 갈등관계와 그 뒤, 1920년대 후반에 나타난 화교배척의식과 관련지어 살펴보았다. 산동노동이민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연구에서 소외된 부 분으로, 특히 한 동안 한국화교사회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산동노동이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화교사회와의 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제5장 1절에서는 1910년부터 韓人들의 중국滿洲지역으로 이주하는 상황과 급 증하는 원인을 한반도의 실정과 滿洲지역의 사회현실과 더불어 고찰하였다. 그리 고 이 시기 일제의 대륙침략정책과 만주지역한인들의 사회적 위상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서 그 뒤, 滿洲에서의 韓人驅逐사건과 한반도의 화교배척사건의 상호 관계를 분석하였다. 제5장 2절에서는 1931년 만보산사건의 勃發 원인과 일제 대륙침략정책과의 관계, 그리고 한반도의 화교배척운동과 관련지어 살펴보았으며 한반도에서 일어 난 화교배척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종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조명해 보았다. 특 히 이 시기 화교들의 중국으로의 귀국을 통한 한국화교사회의 인구변화 즉 인구 大流出과 再流入과정을 살펴보면서 1930~40년대 화교사회의 변화를 고찰하였

22 다. 제5장 3절에서는 중일전쟁 후, 화교사회의 변화를 인구 분포 경제 등 분야 에 거쳐 살펴보았다. 특히 평안북도에 화교들이 집중된 상황에 주목하여 평안북 도의 지정학적 원인과 일제의 대륙침략정책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정부의 정책제정과 관련된 화교경제의 변화원인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명하기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하였다. 아래 주제별로 활용한 자료를 요약하여 소개한다. 제2장에서는 淸光緖朝中日交涉史e 淸季中日韓關係史e 李文忠公全 集 와 總理機務衙門日記 를 기본 자료로 하여 舊韓末條約彙纂 袁世凱與 朝鮮 陰晴史 近代日鮮關係の硏究 등 관련 자료와 회고록을 활용하였다. 그 외, 朝鮮貿易史 韓國開港場硏究 韓國開港史 仁川府史 등 자료를 참고하였다. 제3장에서는 舊韓國外交文書 淸季中日韓關係史e 淸議報 를 기본 자 료로 하여 조약관계와 초기 청상들의 성명과 출신지를 확인하였다. 그 외, 京城 府史 仁川府史 朝鮮之三大港 朝鮮に於ける支那人 統監府統計年 報 官報 와 橫浜市史 등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다. 제4장에서는 特殊勞務者の勞務管理 滿洲の苦力 支那民族の海外發展 山東の硏究 山東通史 를 기본 자료로 하여 朝鮮鐵道史 朝鮮遞信事業 沿革史 朝鮮部落調査報告 등 관련된 자료와 이 시기에 발간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독립신분 天津公報 中央日報 등 신문과 실 생활 등 잡지를 참고로 활용하였다. 제5장에서는 韓國流移民史 中國人襲擊事件裁判記錄 平安北道統計年 報 統監府統計年報 와 朝鮮國勢調査報告 를 기본 자료로 하여 帝國議會 說明資e 滿鮮拓植株式會社五年史 朝鮮に於ける支那人 韓國の人口と 經濟 滿洲와朝鮮人 등 관련된 통계자료와 朝鮮日報 每日申報 東亞 日報 中央日報 中外日報 天津大公報 등 이 시기 한국과 중국의 관련 된 신문을 참고로 활용하였다. 본 논문은 아직 많은 미흡한 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1차 자료, 화교 개인기록 등 자료입수를 통한 면밀한 검증이 요구된다. 그리고 橫浜인 경우 직접 현지에서 충분한 자료입수와 개인기록, 인터뷰 등 제반 과정을 통하여 橫浜화교사회에 대 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부분은 금후의 과제로 남긴다. 그 외, 문헌 자료 에 의한 화교사회연구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한 화교가족사에 대한 연 구를 기반으로 화교사회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도 필요하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사례연구를 수행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

23 다.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연구를 위하여 앞으로 지속적인 자료 수집을 필요로 한다

24 第2章 壬午軍亂 前後 淸의 朝鮮政策과 華僑社會의 形成 第1節 壬午軍亂과 軍役商人의 登場 1. 淸國의 派兵과 軍役商人의 登場 阿片戰爭 전, 동아시아 諸國과 주변 국가는 淸國의 朝貢體制에 편입되어 있었 다. 비록 일본은 淸國과 공식적인 조공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동아시아의 일원으 로서 실질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제도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 히 이 시기에는 청국의 절대적인 통제와 감독을 기반으로 廣東무역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廣東무역은 조공무역의 원칙 형태 방식에 따라 조직되었 다. 아편전쟁 전까지 영국을 비롯한 歐美諸國은 광동무역을 통하여 通商을 진행 하였는바 따라서 청국과 歐美諸國과의 通商역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 이 같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청국과 영국간의 아편전쟁을 비롯하여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구미열강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구미열강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은 청국에게 있어서 절대 적인 위협으로 대두하였는바 이는 청국으로 하여금 藩邦問題에 대한 종전과 다 른 인식을 가지게 하였으며 따라서 불안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을 강 구하기에 이르렀다.2) 특히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청국의 隣國으로서 청국의 국가안전을 확보함에 있 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청국과 朝貢關係를 유지하 고 있었다. 이 시기 朝 淸 관계는 事大之5 가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었 지만 청국은 조선의 內政을 간섭 혹은 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75년(고종 12)의 雲揚號事件과 1876년 조 일간에 맺은 江華島條約 은 조 일 관계뿐만 아니라 청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청국은 실지로 일본의 臺灣出兵3)과 琉球4)에 대한 일방적인 주권주장으로 이 1) 梁嘉彬, 廣東十三行考 上海, 1937 ; 彭澤一, 淸代廣東洋行制度的起源, 歷史硏究 1, 1957, 1~24쪽. 2) 權錫奉, 淸 同治 光緖初년대 洋務官僚의 對朝鮮觀, 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 一潮閣, 1986, 47쪽. 3) 臺灣事件은 1871년11월 琉球 八重山漁民 66명이 臺灣남부에 표착하여 54명이 원주민에 살해당 하였던 것이 그 발단이었다. 鹿兒島縣 大參事 大山格之助는 재지의 불만족사족 세력을 대표하여 대만정벌을 건의하였으며 陸軍少佐 樺山資紀(薩摩)는 西鄕隆盛에게 대만정벌을 획책함과 동시에

25 미 동아시아 세계에서 종전의 지위와 위상을 크게 손상 받았으며 아울러 朝貢體 制에도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청국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충격은 무엇보다도 조 일간에 맺은 강화도조약이라 할 수 있다. 청국은 종래 조선정책에 대하여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以夷制夷 의 외교정책으로 조선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조 선에 대한 침투를 견제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아울러 조 청간의 屬邦化를 明文 化시키고 조선에 대한 정책을 종래의 소극적인 放任政策으로부터 적극적인 간섭 정책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청국의 이와 같은 對 조선 정책에 대한 전환은 駐 日公使 何如璋의 建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何如章은 1880년(고종 17) 러 시아軍艦이 黑龍江과 블라디보스톡 일대에 대하여 순찰활동을 강화하는 것을 분 석하고 다음과 같은 대비책을 내 놓았다. 중국과 조선의 국경이 위험한바 조선 에 대한 적극적인 開放정책을 권유하여 各國과의 통상협약을 맺을 것을 건의하 자 라는 것이다.5) 청국은 何如章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 미간의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통하여 미국세력을 조선으로 끌어들임으로써 以夷制夷 의 외교정책을 실현시키고 아울 러 조 청간의 속방화를 명문화시키려하였다. 이 시기 李鴻章의 對 조선 정책은 한마디로 일본의 조선 침투를 견제하고 러시아의 南下를 저지하기 위한 以夷制 夷 의 외교정책이었고 또한 이를 목적으로 聯美論 을 주장하였다.6) 그리고 그 일 환으로 朝美修好通商條約 起案을 작성하고 추진시켰다.7) 李鴻章은 우선 朝美修好條約 체결을 위한 슈펠트와의 회담8)을 앞두고 김윤식 중국과 대만의 현지탐색에 출발하여 1874년 대만침략을 감행하였다. ( 臺灣日記, 樺山資紀 文書 266, 1~4쪽.) 4) 琉球는 明初이래로 중국에 朝貢하여 왔던바 明 萬曆年間에 豊臣秀吉이 來侵하여 藩屬國을 만들 었으므로 그 때부터 中 日 양국에 朝貢하게 되었다. 일본은 明治維新 때, 琉球를 藩封하여 중 국에 대한 入貢을 禁하고 明治年號를 쓰게 하였으며 1879년에는 藩封을 廢하고 置縣하였다. 동 년 5월 琉球 紫巾官 何德宏이 天津에 가서 李鴻章에게 請援하였다. 이홍장은 琉球문제로 일본 측에 數次 항의하였으나 일본은 추호도 양보하지 않고 끝내 倂呑하고 말았다. 5) 淸光緖朝中日交涉史e 1卷, 臺北: 文海出版社, 1970, (31, 32, 33) (光緖 5年 7月 初4日, 附件 1, 總理各國事務衙門奏請照前案行文朝鮮釋放法國敎士摺, 總理各國事務衙門奏擬勸朝鮮交聘各國 片 ), 0016쪽. 6) 金源模, 슈펠트 李鴻章의 朝鮮開港 交涉始末(1882), 韓國史硏究論選 34, 1997, 170쪽. 7) 李瑄根, 한국사 5, 最近世篇, 서울: 乙酉文化社, 1978, 711쪽. 8) 미국정부는 1882년 1월 19일 정식으로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薛斐爾)를 조선파견 미국전권특사 로 임명하였다. 원래 슈펠트는 일본의 仲裁에 의해 조선개항을 성취시켜보려고 1880년 5월 4일 釜山을 방문하고 교섭하였으나, 東萊府使 沈東臣의 단호한 거절로 일단 입약교 섭은 좌절되었다. 그 뒤, 淸國 李鴻章이 초청으로 1880년 8월 26일 天津을 방문하고 정식으로 李鴻章과 朝美間 立約交涉을 진행하게 되었다

26 으로부터 조선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기본방침을 지지한다는 확답과 조선정부가 朝美條約 교섭권을 청정부에 위임한다는 두 가지 다짐을 받아놓았다.9) 그 외에 도 조선은 국내 斥邪派의 조선개항에 대한 반대여론 때문에 立約交涉을 협상할 전권대신을 공공연하게 파견할 수 없으므로 李鴻章에게 조약체결권을 위임한다. 라는 요청을 받아놓았다.10) 결국 李鴻章은 屬邦관계 명문화를 추진하기 위한 첫 단계로 김윤식의 지지와 찬동을 받아놓은 셈이다. 李鴻章과 슈펠트의 회담은 1882년 3월 25일부터 4월 18일까지 5차례에 거쳐 진행되었으며 시종일관 屬邦論의 첨삭여부로 논란을 벌였는데 결국 李鴻章의 屬 邦조항은 실현시킬 수 없었다.11) 슈펠트는 처음부터 李鴻章의 淸 美共同條約 또는 同盟關係수립으로 조선을 보호하자는 政略을 반대하였으며 자신은 청국과 동맹체결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12) 그 원인은 조선이 내정과 외교를 自主하 고 있는 이상 屬邦조항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3) 슈펠트는 또 미국은 조선이 청국의 屬邦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과 朝美修好 通商條約은 조 미 양국간의 평등한 호혜관계를 바탕으로 체결된다는 것을 이유 로 제3국인 청국황제의 명령에 따라 체결된다는 관점에 반대하였다.14) 이 시기 미국의 朝美條約 체결목적은 美國艦艇의 안전운항과 미국상선의 寄港 地로서 조선의 수개 항구의 개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미국의 당면한 과제는 정식 조약체결이 아니라 안전한 항행보장을 위한 조선개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15) 어쨌든 슈펠트는 조선은 비록 청국의 朝貢國이지만 內治外交를 自 主自行하고 있는 自主獨立國이기 때문에 대등한 국가지위를 바탕으로 조선과 立 約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李鴻章과 슈펠트는 조약초안 제1관의 屬邦조항을 공백으로 남겨두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양국대표가 최종 확정한 조약초안 원본과 달리 李應浚이 조 선정부에 전달한 조약초안 제1관에는 분명히 屬邦조항이 명기되어 있었다.16) 다 시 말하면 李鴻章은 슈펠트와의 합의로 확정된 원본과 상관없이 屬邦조항이 명 9) 金允植, 陰晴史, 國史編纂委員會刊行, 1971, 73쪽. 10) 淸季中日韓關係史e 2卷, 台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2, 548~609쪽. 11) 李鴻章(淸) 著 吳汝綸(淸) 編, 李文忠公全集 5卷, 南京, 1908, (光緖 8年 2月 24日, 論美使 議朝約不認中國屬邦 ), 323쪽. 12) 奧平武彦, 朝鮮開國始末論, 刀江書院, 1969, 108쪽. 13) 陰晴史, 55~58쪽. 14) 李文忠公全集, 323쪽. 15) 金源模, 앞의 논문, 133쪽. 16) 陰晴史, 106~111쪽

27 문화되어 있는 문서를 李應浚과 金允植에게 건네주었다. 이는 이 시기 청국의 정 책적 훈령인 조 청간의 屬邦관계를 명문화하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데, 이와 같은 양상은 李鴻章이 조선 領議政 李最應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만약 定約 중에 屬邦條款을 삭제할 경우 貴國은 반드시 별도 照會文에서 속방조항을 明文化함으로써 귀국이 수백 년 동안 중국에 事大하고 있다는 성의를 천하에 昭示해주 기 바란다.17) 한마디로 이 시기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조선의 개항을 포함하여 屬邦化 를 명문화시킨 전제하에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국은 조선의 地政學的 중요성에 착안하여 以夷制夷 의 외교방침으로 聯美論을 주창하 였으며 그러므로 미국의 세력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러시아의 南下와 일본의 征 韓論에 기초한 조선침략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간 섭정책은 실지로 임오군란을 계기로 이루어 졌으며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의 체결을 통하여 屬邦관계를 명문화시켰다. 이 시기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을 결정하였는바 특 히 속방화를 전제로 진행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은 화교들의 치외법권과 세금특혜, 그 외, 내지행상과 같은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청국은 1882년(고종 19) 6월 18일, 駐日公使 黎庶昌의 전보를 통하여 조선의 임오군란 소식을 접하였다. 이는 청국에게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는바 청국은 임오군란의 평정을 목적으로 淸軍 파병건과 관련하여 조선에 대한 정세탐지부터 시작하였다.18) 1882년 6월 26일 丁汝昌 馬建忠은 산동 芝罘에서 군함(威遠 超勇 揚威)3척으로 나누어 출발하였는데, 이들은 6월 27일 오후에 인천 월미도 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魚允中으로부터 임오군란 勃發 원인이 대원군 일파의 재 집권 음모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였다.19) 한편 일본서기관 近藤眞鋤로부터도 대원군이 현재 대권을 잡고 있다는 소식을 접함으로서 魚允中의 보고내용에 대 하여 재확인 하였다.20) 馬建忠은 이와 같이 임오군란에 대한 정세탐지 결과를 17) 李文忠公全集 5卷, (光緖 8年 3月 初5日, 覆朝鮮 總理機務 李興寅君 ) 若於正約中刪去 必順 另行聲明 俾貴國數百年事大之誠 昭示天壤, 328쪽. 18)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479, 光緖 8年 6月 24日, 總署收上諭 ), 765쪽. 19)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511, 光緖 8年 7月 初6日, 附件八: 馬建忠與魚允中筆談 大院 君因失權積憾陰養無_爲亂事主謀 ), 800~806쪽. 20) 위의 책, 800~806쪽

28 張樹聲에게 보고하였는데, 이는 淸軍의 조선파병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특히 金允植과 魚允中의 底意 즉 淸軍을 끌어들여 대원군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淸軍의 파병에 간과할 수 없는 작용을 하였 다.21) 청국은 6월 24일에 파병 제의를 받고 파병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당시 李 鴻章의 대리로 直隸總督職을 맡고 있던 張樹聲이 직접 廣東水師提督 吳長慶22)에 게 密飭하여 淮勇 6營에게 山東省 登州에 주둔시켜 출동준비를 갖추게 하였 다.23) 결국 청국의 파병 결정은 7월 1일 丁汝昌이 인천으로부터 天津에 도착하 여 馬建忠의 정세탐지 보고문을 올림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7월 4일 吳長慶 은 丁汝昌의 출동명령을 받고 군함 泰安 供北과 招商局 商船 鎭東 日新에 선 발대 2천 명과 함께 山東省 登州를 떠나 7월 7일에 경기도 南陽灣에 도착하였 다.24) 임오군란은 조선의 政情이 크게 동요된 가운데 이를 둘러싼 청 일간의 대립을 본격화 시켰는바 일본은 淸軍파병 전에 이미 거류민보호를 이유로 조선 에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시킨 상태였다.25) 한편 군변이 일어나자 高宗은 大院君에게 정권을 위임하였다.26) 대원군은 군 변의 수습과정에서 親淸反日政策 을 근간으로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의 민심이 대원군에 의해 조선의 自主性이 확보되기를 기대하고 있었 다.27) 특히 대원군이 민심 수습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청국은 대원군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대원군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간 청 국에 맹종하여온 민씨 척당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청국의 이와 같은 결정은 薛福成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내란을 먼저 제거한다(先除內亂) 라는 방침으로 대 원군을 拉致하기에 이르렀다.28) 21) 金鐘圓, 근세 동아시아 관계사 연구, 혜안, 1999, 329쪽. 22) 서울 연희동 한성화교중학교 뒷산에는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라 씌어진 사당이 있다. 이 사당 에 모셔진 神主가 바로 吳長慶이다. 한국 화교들은 오래전부터 오장경 제독의 추모제를 지내왔 으며 현재도 재한화교사회에서 초기 화교사회의 기틀을 놓은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 차이나 타운이 없는 나라, 17쪽.) 23)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494, 光緖 8年 6月 29日, 總署收署北洋大臣張樹聲文, 咨調南洋 各船隻撥交吳長慶調遣 ), 777쪽. 24) 위의 책, (510, 光緖 8年 7月 初6日, 總署收上諭), 796쪽. 25) 田保橋潔, 近代日鮮關係の硏究 上卷, 朝鮮總督府中樞院, 1940, 788~789쪽. 26) 日省錄, 高宗 19年 6月 10日條. 27) 金正起, 大院君 납치와 反淸意識의 형성(1882~1894), 韓國史論, 서울대國史學科, 1988, 491쪽. 28)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599, 光緖 8年 9月 初7日, '署北洋大臣李鴻章文'), 995~1002쪽,

29 청국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임오군란의 평정을 이유로 吳長慶提督을 총지휘로 하고 淸軍을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들 淸軍과 함께 40 여명의 淸國상인들이 同乘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40여명의 상인들은 조선에 주 둔하고 있는 淸軍이 필요로 하는 각종 필수품을 공급하는 역할로 조선에 파견되 었다.29) 그리고 이들 軍役상인은 임오군란의 勃發시기부터 1885년의 청 일 양 국군의 철퇴시기까지 약 3년간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淸軍에게 물자공급 외, 조선인을 상대로 무역활동을 진행하였는바 초기 한국화교사회의 모태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다. 軍役상인의 조선에서의 구체적인 활동과 출신지과 관련된 사항은 지금까지 입 수된 자료로 입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필자는 아래 몇 가지 사례 로서 이들 군역상인의 출신지를 중국남방 상인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서의 구체적인 활동을 입증할 수 없지만 軍役상인은 이후 淸商의 조선이주와 청 상의 조선에서의 무역 활동에 개척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초기 한국화교사회에서 廣東지역을 중심으로 한 南方商人의 조선 진출에 적극적인 작 용을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아래 몇 가지 사례에서 살펴본다. 첫째, 1883년(고종 20) 한반도에서 활동한 淸商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서울에서 활동한 청상은 각각 浙江商人 18名, 山東商人 41名으로 전체 59名이 있었고, 麻浦에는 山東商人 18名, 廣東商人 2名, 浙江商人 3名으로 전체 23名이 상업 활동에 종사 하고 있었다. 그 외, 仁川에는 廣東商人 17名과 山東商人 19名, 그리고 浙江商人 18名으로 모두 54名으로 집계되었다.30) 특히 인천인 경구 전체 54명 중, 중국남 방 상인이 35명으로 65%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 1883년을 기준으로 인천에서 영업허가를 받고 무역업에 종사한 청상은 33명인데, 그 중 남방상인이 29명을 차지하여 88%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1883년은 인천청국조계지가 설정되지 않 은 시점이고 또 이미 영업허가를 받고 무역업에 종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장 기적인 안목으로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시기별, 그리고 지역 적으로 분석해 볼 때, 만약 軍役상인의 작용이 없었다면 이 시기 이들 남방상인 의 활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1884년(고종 21)에는 인천에서 활동한 淸商 205명 중, 廣東商人이 37명, 浙江 商人이 50명, 江蘇商人이 13명으로 각각 전체 18.5%, 24.4%, 6.3%를 점하고 있어 南方商人이 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 이어서 1885년(고 종 22)에도 서울에서 활동한 淸商 111名 중, 51名이 南方商人이고 60名이 山東 29) 본고에서는 임오군란시기 등장한 40여명의 상인집단과 그 뒤, 조선으로 건너온 청국의 자유상 인집단과 구분하여 초기에 등장한 이들 상인을 軍役商人으로 칭한다. 30)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826), (光緖 10年 2月 11日, 附件 1), 1337쪽. 31) 위의 책, 4卷, (1208), (光緖 12年 2月 27日, 附件 1), 2209~2220쪽

30 省을 중심으로 한 北方商人으로 집계되었다.32) 이와 같이 청국조계지가 설정되 기 전인 1883년부터 이미 한반도에는 廣東商人과 浙江商人들이 상당수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특히 1884년부터는 전체 淸商의 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들 南方商人의 주요한 활동무대로 알려진 동남 아시아 혹은 일본이 아닌 조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으로 시기적으로 상업정보 전 달이 낙후했던 1880년대라고 감안할 때, 위에서 언급한 軍役商人의 영향이 결정 적으로 컸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중국역사상 淸代 중국인들의 商業貿易史 살펴보면 1842년 이전, 중국의 상업은 차, 소금, 실크, 면화와 아편을 취급하는 廣州를 중심으로 한 남방 상인들 이 절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鹽商과 行商이 독점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창기 중 외 무역에서 유럽인들과 무역을 진행한 중 국 상인 조직을 公行이라고 하였는데, 이들 公行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 일정한 의무를 수행하는 한편 외국 상인들과의 교역에서 독점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 데 이와 같은 公行組織도 실지로 廣州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편 1842년 南京條約의 체결로 전통적인 상인조직은 점점 새로 대두한 買辦 상인에게 양도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초기 買辦상인역시 대부분이 廣州人 혹 은 廣州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들로 이루어졌다. 이들 買辦상인의 활동범위는 그 후, 외국상사의 본점 혹은 지점 설치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는데,33) 특히 1860년대까지도 광동지역 출신인 買辦상인들은 上海 홍콩 외, 기타 개항 항구에서 진행되는 무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 었다.34) 이와 같은 상황은 1880년까지 이어지며 따라서 임오군란 時 청국의 상 업중심은 여전히 남방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유력상인들도 남방에 집중된 것 으로 각인되었다. 따라서 군역상인의 구성은 청정부의 차원에서 모집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아 남방 상인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셋째, 중국인이 소유하고 경영하였던 첫 번째 해운회사인 輪船招商局은 李鴻章 의 요청으로 1873년에 유명한 買辦인 唐景星(1832~1892)과 徐潤(1838~1911) 이 맡아 설립되었는데, 輪船招商局은 唐景星이 總買辦 자리를 수락하면서 본격적 으로 건립되었다. 이 시기 輪船招商局은 유일한 주식회사였는데, 전체 투자액 751,000량(1877년)중, 대부분이 買辦 상인들이 투자한 資本으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이들 買辦상인이 회사설립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35) 그 외, 임오군란 時, 조선으로 파견된 선박 중, 招商局선박이 활용되었다는 점과 이 시기 李鴻章 32) 위의 책, 4卷, (1127), (光緖 12年 2月 27日, 附件 1, 附件 2), 2045~2054쪽. 33) 郝延平 지음 이화승 옮김,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매판, 씨앗을 뿌리는 사 람, 2002, 15~17쪽. 34) 郝延平, 위의 책, 141쪽

31 의 招商局에 대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軍役상인의 선발과정에 南方商人이 우선 권으로 선발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吳長慶의 地位로 분석하면 廣東水師 提督이고 아울러 吳長慶과 함께 파견된 船隻이 南洋 各 地域의 船隻이라는 점도 軍役상인의 출신지를 남방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사례를 통하여 분석하면 軍役商人의 상당수 는 廣東지역을 중심으로 한 南方商人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들 軍役商人은 財力과 商術을 겸비한 유력한 상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초기 廣 東지역과 浙江지역 청상의 조선 진출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한편 임오군란 평정 후에도 淸 日 양국 군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 조선에서 활동한 청국의 총책임자는 吳長慶提督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활동한 청상은 吳長慶의 보호를 받으며 무역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예컨대 吳長 慶은 조선에서 淸商의 신변안전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淸軍에게 서울 일대를 순 찰하게 하였으며 서울, 인천 등 지역에 散在해 있던 淸軍 脫營兵 및 불량 청상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등 청국의 위신을 높이는 방식으로 청상의 활 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36) 특히 이 시기 軍役商人은 淸軍과 함께 조선에 머물러 있으면서 淸軍에게 필요한 물자를 국내로부터 수송해주는 역할을 담당하 는 한편 조선인을 상대로 무역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 청국에 의지하여 정권유지를 꾀하던 민씨정권은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에게 계속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는데, 그러므로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 화적으로 일대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되었다. 이런 와중에 1884년 봄 安南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국과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다른 한 편 개화파에게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 주었다. 1884년 8월에 베트남에서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국은 3,000여명의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淸軍 중, 절반을 철수시켰는데, 이는 다른 한편 조선에서 청국의 세력을 축출하려던 일본에게 절호의 기호를 주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민씨정권과 대립하고 있던 급 진개화파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민씨정권의 친척수 구정책에 대항하여 종래의 평화적 방법에 의하여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袁世凱와 淸軍에게 진압되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 로 막을 내렸다. 35) 위의 책, 144~146쪽. 36)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19쪽

32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뒤, 일본은 일본 측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데 대 한 책임과 관련하여 조선정부와 1885년 1월 9일, 10만 원 배상금을 지불할 데 관한 내용으로 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885년 4월 18일 청국과 淸日天 津조약을 체결하였다.37) 이 조약 제3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將來 조선국에 만약 병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淸 日 양국 혹은 一國이 파병을 要할 때에는 應當 그에 앞서 쌍방이 문서로써 통지하여야 한다. 38)는 것인데, 이로부터 조선 에 대하여 종래 우위를 자처해오던 청국은 일본과 더불어 스스로 대등의 均等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1조에 淸은 조선에 駐紮하는 兵을 撤收하며 일본국 은 公使館의 護衛를 위하여 조선에 주둔한 兵員을 撤收한다. 조약 調印日로부터 起草하여 4개월을 期限으로 정하고 期限內에 全員을 撤收한다 39)고 하여 淸軍을 포함한 軍役상인은 3년간의 조선에서의 무역 활동을 접고 귀국하였다. 總辦朝鮮常務委員 陳樹棠은 1885년(고종 22) 北洋大臣 李鴻章에게 올린 보고 문40)에서 한국에 주둔했던 防軍四營이 전부 馬山浦에서 乘船하여 귀국했다는 것 과 당초 이들 주둔군을 따라온 40여 명의 貿易者들도 전부 귀국선에 올랐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軍役商人은 1882년 임오군란부터 1885년 淸 日天津條約까 지 약 3년간 조선에서 무역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3년이란 짧은 기간이지만 이들 軍役商人은 근대 초기 한반도 화교사회의 모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軍役商人은 이후 청상의 조선이주와 청상의 무 역 활동을 개척해준 개척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 기 한반도화교사회에서 廣東지역을 중심으로 한 南方商人의 조선 진출에 적극적 인 역할을 하였는바 이는 그 뒤, 청상의 경제성장에 간과할 수 없는 작용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37) 淸 日天津條約 은 청국전권대신 李鴻章과 일본전권대신 伊藤博文 사이에 1885년 4월 18일 에 2주간의 6차 회담을 거쳐 조인되었다. 이 조약을 통하여 청국은 한국에 대하여 종래 우위를 자처하던 것과 달리 일본과 대등의 균형을 인정하였다. 한편 일본의 입장에서는 근세 日本의 외 교사상 처음 얻은 큰 성공인바 자타가 공인하게 되었으며 조선에 대한 소위 中立化論 을 대두시 켰다.(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舊韓末條約彙纂 中卷, 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1965, 142쪽). 38) 舊韓末條約彙纂, 146쪽. 39) 舊韓末條約彙纂, 145쪽. 40)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893쪽

33 2.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 淸國의 積極的 干涉政策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청국은 임오군란진압 후, 조선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 으로 淸軍을 조선에 주둔시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제안으로 亂의 재 발과 防止 그리고 비상사태에 대비할 新衛軍의 창설을 계획하였다. 新衛軍의 창 설은 우선 淸將 吳長慶에게 일임되었으며 吳長慶은 다시 종전부터 이 문제에 착 안하고 있던 袁世凱에게 일임시켰다. 이로부터 袁世凱는 新衛軍의 창설을 본격적 으로 진행하였으며 일단 新建親軍榮營 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二營中 左營은 李 祖淵, 右營은 尹泰駿에게 맡기고 아울러 이들에게 監督 이란 직함을 부여하여 軍 을 敎習케 하였다.41) 그 후, 別技軍을 改編하여 前營 後營을 증설하고 監督 을 營使 로 개칭하였다. 袁世凱는 또 親軍前營使 左營使 右營使 後營使에 각각 韓圭稷 李祖淵 閔炳翊 尹泰駿을 임명함으로써 淸兵制를 모방한 新式軍隊 四 軍營의 창설을 완성하였다. 이로서 袁世凱는 조선 新式軍隊 統帥로 임하게 되었 는데, 1883년(고종 20) 11월에 이르러 兵數는 2,000명으로 확장되었다. 한편 1880년대에 이르러 조선의 대외무역관계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즉 1882년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의 체결과 1883년 말, 國境互市貿易의 폐지로 조청무역관계는 1884년부터 개항장을 중심으로 근대적 무역관계로 轉化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朝日修好條規續約 (1883)을 다시 체결함으로써 1876년 개항 직 후부터 일본의 강압으로 朝 日간에 체결된 無關稅通商條約 이 자동 폐지되었으 며 따라서 일본과의 무관세무역이 종식되었다.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은 실지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임오군란 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러므로 조선에서 청국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강화되었다. 이 시기 청국의 對 조선 정책은 조선에서의 상권 확장에 중점 을 두었으므로 청상의 조선 진출은 당연히 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청국의 對 조선 정책은 淸商數의 증가와 더불어 조선에서 이 들 청상의 상권 확장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는바 따라서 청상은 조선무역에 적 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42) 청국은 임오군란에 이어서 1882년 8월에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을 체 결하였다. 그러나 1882년 4월에 이미 閔妃정권은 조선국내 정세에 비추어 謝恩 겸 陳奏使로 使行한 趙寧夏와 문의관 魚允中 및 金宏集 등을 天津에 파견하여 朝 淸 양국간의 商民水陸貿易章程 의 체결을 목적으로 교섭을 진행하게 하였 다. 朝 淸 양국은 이어서 1883년 3월과 동년 6월에 中江貿易章程 및 會寧通 41) 田保橋潔, 近代日鮮關係の硏究, 朝鮮總督府中樞院, 1940, 871~872쪽. 42) 朝鮮貿易協會 編, 朝鮮貿易史, 서울: 國學刊行會, 1992, 103쪽

34 商章程 을43) 체결하여 국경지대의 陸路통상에 대한 제반사항을 규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조청양국의 필요에 의해서 체결되었다는 점이 주목되 는데, 먼저 조선 측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개항 직후부터 일본 의 강압적인 무관세 독점무역으로 인하여 일본의 조선경제에 대한 침투를 극히 우려하였으므로 청국을 비롯한 他 諸國과의 통상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일본세력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조약체결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종래 청국과 진행 해오던 국경지대의 互市무역은 밀무역을 助長하고 開市에 소요되는 경비부담으 로 인하여 변경지역민의 부담이 과중한 등 폐단이 있었다. 그 외, 開市를 奇貨로 豆滿江下流 일대에 러시아세력이 만연하여 조선의 국방에 위협을 가하였는바 청 국과의 국경개시를 폐지함으로써 이를 미연에 防止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조약체 결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朝淸양국간의 海禁令과 상관없이 청국漁 船의 조선연안에 있어서 不法漁業으로 조선어민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으므로 통 상조약 체결을 통하여 청국어선의 不法漁業을 제어할 목적에서 조약체결이 필요 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정부는 조선 내 일본세력을 견제하고 조청양국 국경지대의 互市 무역에서 발생되는 밀무역과 청국 어선이 조선연안에 대한 불법어법, 그리고 러 시아세력의 조선국방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기 위하여 청국과 통상조약의 체결이 필요하였다.44) 한편 청국은 러시아세력의 남하를 방지하고 조선 내 일본세력을 배격하는 목 적에서 조선과의 조약체결이 필요하였다. 다시 말하면 開港以來 일본은 조선무역 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경제에 대한 일본세력의 膨脹을 통하여 조선의 정치 경제적 영역에 대한 세력 확장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국은 조선과의 조약체결을 통하여 종래 朝淸간의 屬邦관계를 명문화시키려 하 였으며 아울러 조선을 정치 경제적으로 隸屬시키려 하였다. 즉 청국은 將次 전 개될 국제경쟁에 대비하여 조 청간의 속방관계를 합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청국세력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전제조건으로도 작용하였 43) 中江무역장정과 회녕통상장정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附屬장정으로서 먼저 中江무역장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陸路무역은 朝淸양국 상인에게만 한정하고 각국은 이에 포함 되지 않음을 규정하였다.(제1조) ② 中江이외의 지역에서 교역함을 금하고 특히 奉省內의 여행 을 금한다고 규정하였다.(제2조) ③ 鴨綠江과 평안도의 隣近河口 등 지역에서 祭品官魚를 采辦 하는 곳에서는 漁船의 왕래 및 민간인 漁:를 금지한다고 규정하였다.(제3조) ④ 携帶品의 수 량을 제한하고(제17조) 夜間互市를 금지한다고 규정하였다.(제21조) ⑤ 양국간의 교섭에 있어 서 조선은 청국을 上國이라고 호칭하고 청국은 조선은 貴國이라고 호칭할 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23조) 한편 회녕통상장정은 奉省근처인 祖宗陵寢地와 러시아변경 등지의 여행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제2조) 庫爾喀과 慶源互市를 폐지하다고 규정한(제3조) 것 외, 기타 사항은 中江무역 장정과 비슷하다. 44) 朝鮮貿易史, 105쪽

35 다. 조청상임수륙무역장정은 전문 8개조로 구성되었는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과 같다.45) (1) 장정은 전문에 조선을 淸의 屬邦으로 규정하고 청국상인의 특혜문제를 규정하였다. (2) 청국의 北洋大臣과 조선의 국왕을 대등한 위치로 규정하고 상무위원의 파견문제를 규정하였다. 청국상무위원의 治外法權 문제를 규정하였다. (3) 조선연안과 청국연안에서 兩國漁民의 相互魚採문제를 규정하였다. (4) 北京과 漢城 및 양화진에서 開棧貿易을 허용하되 양국상인의 內地采辦은 금지한다 고 규정하였다.46) (5) 關稅 및 關稅率와 관련된 問題를 규정하였다. (6) 柵門 會寧에 있어서 개시문제를 규정하였다. (7) 홍삼무역과 관세율 등을 규정하였다. (8) 청국의 招商局輪船 運航과 관련된 문제와 淸國兵船의 조선연해에 대한 왕래와 停泊 등 문제를 규정하였다. 한마디로 이 장정은 國境開市 치외법권 양국어민의 魚採 漢城開棧 및 內 地采辦 홍삼관세율 규정 등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으며 치외법권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청국의 주장을 관철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47) 한편 청국은 위와 같이 장정의 체결을 통하여 조선에서의 치외법권 내지통상 권 조선연해에서의 운항순시 및 어채활동 등 경제 외교적 특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48) 이는 다른 한편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 견제하고 청상의 활동을 獎勵하여 일본의 독점무역을 배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 다.49) 결국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하여 中江貿易章程과 會寧通商章程 등 조 청 양국간의 통상조약을 계기로 양국의 무역관계는 비로소 근대적인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청국은 장정 체결 후, 陳樹棠을 駐朝總辦朝鮮常務委員으로 조선에 주재시켜 조 선의 내정을 총괄적으로 조종하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청국의 본격적인 對 조선 45)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1882년 8월 23일에 조선 측의 대표 趙寧夏 金宏集 魚允中과 청국 측의 대표인 天津海關道 周馥, 候選道 馬建忠사이에 조인하였다. (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編, 舊韓末條約彙纂 下卷, 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1965, 392~398쪽). 46) 內地采辦 금지규정은 1883년에 改定되어 허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47) 朝鮮貿易史, 110쪽. 48) 金鐘圓, 朝 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締結과 그 影響, 國史編纂委員會 編, 한국사 16, 近代 編, 1981, 142~184쪽. 49) 金鐘圓, 中 朝商民水陸貿易章程에 대하여, 歷史學報 32, 歷史學會, 1966, 120~169쪽

36 간섭정책이 시작되었다.50) 청국은 종래 전통적인 重農輕商思想과 상관없이 조선 에 진출한 청상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와 지원을 병행하며 청상의 경제세력 확장 에 전력하였다.51) 물론 淸의 이와 같은 對 朝鮮 정책은 앞에서 언급한 국제정세 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특히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 다. 한편 청국의 對 조선정책은 이 시기 청상들의 무역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으므로 해외화교사회에서 전례 없는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되 었다. 이 시기 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앞에서 언급한 군사 외에도 정치 경제 사 회적 면에서 화교들의 지위를 규정하였는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淸은 1883년 10월에 陳樹棠을 서울에 파견하여 청국의 상업정책을 수행함 과 동시에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외국과의 조약협상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85년 11월에는 陳樹棠의 후임으로 袁世凱를 서울에 常駐시켜 조선의 국정과 정치 외교를 철저히 간섭 통제하도록 하였다. 청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과거 儒敎的 秩序에 입각한 조 청 관계를 새로운 근대적 국제법 개념에 입각한 屬邦 관계로 변모시켰다고 볼 수 있다.52) 즉 청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후, 독일의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穆麟德)와 馬建常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관여하도록 하였다.53) 그리고 각종 儀式에서부 터 청국의 권위를 강조하였는바 각국 사절단이 조선 국왕을 謁見할 때마다 조 청간의 屬邦關係를 이유로 청국에 대한 차별대우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袁 世凱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기에 조선에 주재하는 청국의 관원이 조선의 왕을 謁見하는 儀5는 각 友邦과 차별이 있어야 한다. 54)고 강조하였다. 1887년 5월, 조선정부는 修好諸國에 대한 외교사절을 파견키로 하여 일본 미국 및 유럽 5개국의 주재 전권대신을 임명하고 그들의 부임을 서두르고 있었 다.55) 이는 한편 조선은 나름대로 자주독립국임을 국제사회에 나타낼 필요성과 50) 李陽子, 淸의 對朝鮮經濟政策과 袁世凱, 釜山史學 8, 釜山史學會, 1984, 9~19쪽. 51) 譚永盛, 朝鮮末期의 淸國商人에 關한 硏究-1882年부터 1885年까지-, 檀國大學校 大學院 史學科 碩士學位論文, 1976, 9쪽. 52) 金達中, 中國의 對韓干涉 및 統制政策 : 1880年代를 中心으로, 社會科學論集 12, 延世大 學校 社會科學硏究所, 1981, 42쪽. 53) 穆麟德과 馬建常은 조선의 陳奏使로 청국에 갔던 趙寧夏, 金弘集(趙와 金은 임오군란의 진압에 대한 謝意와 大院君의 早速 回國을 奏請하기 위한 使節)등과 함께 1882년 (高宗 19, 光緖 8) 11월4일(12월1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穆麟德은 海關總稅務司 겸 協辦交涉通商事務를 담당하였고 馬建常은 議政府參議 겸 協辦交涉通商事務를 맡았다. 그러나 李鴻章으로부터 청조 관리로 屬邦의 官號를 받을 수 없다는 지시에 따라 3개월만에 사직하였다. ( 承政院日記 高 宗 20年 4月 4日條.) 54) 林明德, 袁世凱與朝鮮 26,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6, 139쪽

37 변화하는 국제적 환경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당초 袁世凱는 조선사 절 파견에 대해 중시하지 않았지만 국외에서 조선 사절이 청국의 외국 주재 사 신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청국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조선 사절이 해외에서 준수해야 할 규정을 엄격히 지킬 필요 성을 주장하였다. 즉 袁世凱는 屬邦의 관원은 종주국에 종속되어야 함을 주장하 면서 조선에서 외국에 파견한 사절이 청국의 외국주재 사신들과 公使와 교섭할 때는 반드시 呈文(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에 보내는 공문) 의 형식을 취하고 往來 에는 銜帖(관등 성명이 있는 용지) 을 사용하며 청국의 大臣이 조선사절에 공문 을 보낼 때에는 硃筆(붉은 색의 먹으로 씀) 로서 조회한다. 56)는 규정을 제시했 다. 이는 한마디로 외국에 파견된 조선 사절은 청국의 통제 하에 있어야 된다는 논리였다. 袁世凱는 또 당시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을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은 민심이 분열되어 매우 빈궁하다. 내적으로 勢를 따를 수도 없고 외적으로 원조에 의지할 수도 없다. 미국은 단지 자기방어뿐이고 본래 遠略이 없다. 영국, 프랑 스, 독일은 다른 의향이 없다. 일본은 급급하게 계략을 꾀하고 있으나, 결코 평화로운 국면을 황급히 그르치게는 못할 것이다. 러시아는 아직 철도를 건설하지 않았고 서쪽변 경 지역에 대한 우려로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57) 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조선에 대한 강압적인 간섭정책과 그에 따른 실질적인 실행이 필요한 시기임을 말하고 있다. 1890년 (高宗 27, 光緖 16) 4월에는 조선 24代 王 憲宗의 母 趙太妃가 逝去 하였을 때에도 袁世凱는 葬儀節次에 관하여 오로지 조 청 屬邦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청국의 의도대로 처리하도록 강요하였다. 다시 말하면 袁世凱는 조 청간의 屬邦관계를 구현할 수 있는 의식을 요구하였던 것이다.58) 청국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정치적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진행하 는 것 외, 경제적으로도 조선에 대하여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추진하였는바 이는 이 시기 청상의 조선에서의 상세확장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실지로 조 55) 承政院日記 高宗 24年 5月 16日條, 6月 29日條, 7月 29日條, 8月 4日條. (조선정부는 1887 년 5월 都承旨, 閔永駿을 駐日辦理大臣, 6월에 內務協辦 朴定陽을 駐美全權大臣, 同 內務協辦 沈 相學(후에 趙臣熙로 교체)을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의 5개국 駐在 全權大臣으로 임 명하였다.) 56) 淸季韓中日交涉資e 10卷, (549), (光緖13年 7月 24日 '北洋大臣來電'), 0198쪽. 57) 淸季中日韓關係史e 5卷, (2810), 1890年 8月 27日. 58) 淸季韓中日交涉資e 11卷, ( ), (光緖 16年 9月 24日~10月 初1日, 北洋大臣來電 ), 0231~0232쪽

38 선개항 후, 對 조선무역은 일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임오군란 갑신정변과 같 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래의 종주권에 대 한 강화와 더불어 實利的인 상권 확장에 힘썼다. 청국의 이와 같은 경제적 간섭 정책은 우선 국내 유력한 청상들의 조선 진출을 급진적으로 유도하였는바 1883 년(光緖 9) 11월부터 1884년(光緖 10) 12월까지 仁川에 常住하면서 정식으로 영업허가를 받고 상업에 종사한 청상이 235명으로 집계되었다.59)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청상의 상권 확장을 추진하여 청일전쟁 직전에 이르러 청 일 양국의 무역액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60) 특히 청국은 조선해관을 청국해관의 일부로 흡수 통합하는 해관지배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러므로 청일전쟁 전까지 조선의 관세행정권은 청국이 파견한 외 국인 총세무사에 의해서 장악되고 있었다. 조선해관이 창설된 후, 청일전쟁에 이 르기까지의 10년간 역대 총세무사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1) <표2-1> 淸이 파견한 朝鮮 歷代 總稅務司 (1883~1893) 赴 任 日 期 1883년 5월 1885년 9월 1885년10월 1889년11월 1892년11월 1893년10월 穆 薛 墨 史 馬 柏 麟 必 賢 納 根 卓 姓 名 (P. G. von Mollendorff) (A. B. Stripling) (Henry F. Merrill) (J. F. Schoenicke) (F. A. Morgan) 安 (J. Mcleavy Brown) 德 林 理 機 國 籍 독 일 영 국 미 국 독 일 영 국 영 국 次 順 초대 2대(署理) 3대 4대(署理) 5대(署理) 6대 출처: 國史館論叢 90, 2000, 71쪽. 위 표와 같이 외국인 총세무사를 통한 조선해관에 대한 지배는 北洋大臣 李鴻 章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이는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설에 연루된 穆麟德을 해임 ( )62)하고 墨賢理(Henry F. Merrill)를 선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청국 의 이러한 조치는 조선에 대한 청국의 실질적인 경제 간섭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李鴻章이 墨賢理에게 보낸 훈령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59)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983), (光緖 11年 4月 初3日, 附件5: 淸摺, 光緖 10年份仁川華商 姓名籍貫 ), 1796~1803쪽. 60) 일본은 1876~1882년간 對 조선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領事裁判權, 日本貨幣流通權, 無稅關 등 의 不平等特權을 향유하여 조선에서의 경제적 침략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4~1894년 사이 淸의 商權擴張政策 및 이를 지탱하는 淸의 정치력, 외교력에 직면하여 청 일전쟁의 開戰에 이르기까지 朝鮮市場에서 淸 日의 角逐이 두르러지게 나타났다. 61) 全寅永, 中日甲午戰爭 前後 中國의 朝鮮認識 變化, 國史館論叢 90, 2000, 71쪽. 62) 李文忠公全集 17卷, (光緖 11年 6月 初5日, 覆朝鮮王國 ), 33~37쪽

39 바 李鴻章은 墨賢理가 穆麟德의 뒤를 이어 조선총세무사로 부임될 때, 5個條의 훈령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제2조에서 조선해관은 예외 없이 청국해관의 방식에 따라 임무를 처리하여야 함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宜當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 다. 그리고 제3조에서는 청국의 보호 屬藩임을 違背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조선 을 청국의 속국으로 규정하여 조 청간의 屬邦化를 밝히고 있다. 그 외, 제5조에 서는 墨賢理는 조선정부 뿐만 아니라 북양대신의 통제와 관리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훈령은 조 청간의 屬邦관계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바 조선해관은 宜當 청국 해관의 휘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 다.63) 이는 청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선해관에 대한 직접적인 경영이었다. 결과적으로 임오군란은 조선의 內 外 政情이 크게 동요된 상황에서 청국에게 對 조선정책을 가일층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한편 일본에게는 청국의 조선에 대한 屬邦化를 부인하면서 조선에서의 경제적 침투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은 淸日戰爭 勃發 직전까지 진행되었는데, 청일전쟁이 종결된 후, 청국은 일본과 시모노세끼조약(馬關條 約) ( )을 체결하여 제1조에서 조선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라고 승인 하였다. 이로부터 그 동안 조선이 청국에 事大之5 로 稱臣해오던 모든 관행은 완전히 폐지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조 청간의 속방관계는 완전히 종 결되었으며 모든 외교관계도 자동적으로 중단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 청간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64) 馬關條約은 청국의 天朝上國 을 자처 하던 전통적인 中華帝國體制를 반식민지 반봉건 국가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붕 괴를 초래하였다. 아울러 중국에서 일본의 위치를 서구열강과 같은 차원으로 상 승시킴과 동시에 동아시아를 근대 歐美외교체제로 재편시켰다.65) 63) 高秉翊, 朝鮮海關과 淸國海關과의 關係 메일 과 하트 를 中心으로, 東亞文化 1, 서울대동 아문화연구소, 1965, 8쪽. 64) 徐萬民, 中韓關係史 近代卷,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1996, 118쪽. 65) 王明星, 韓國近代外交與中國( ),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8, 159~160쪽

40 第2節 淸國專管租界의 設定과 華僑社會의 形成 1. 仁川口華商地界章程과 專管租界의 設定 동양에서 外國人租界地의 설정은 1845년에 淸國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으 로 日本에 설정되었고 한국은 일본이 자신들의 피동적인 체험을 한국에 모방하 여 강요시킨 결과 설치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맨 처음 외국인조계지를 설정한 나 라는 일본이고 그 根據法規는 丙子修護條約(강화도조약)에 연유하고 있다.66) 그 뒤, 청국에 이어 歐美의 여러 나라들도 한국에 차례로 조계지를 취득하게 되었 다. 한국에서 일본의 개항장 선택은 한국의 要地가 되는 지역이었는바 한국의 전 반적인 상황에서 볼 때, 국가의 機密 國防 戰略上의 주요한 지역이었다. 특히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도 是非의 논의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었으며 수도 서울의 關門이고 咽喉이며 국방 정치 경제적으로도 중요성을 가지는 要地이기 때문에 한 일간의 6차례의 회담에도 불구하고 難航을 거듭하였다.67) 결국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에 근거하여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시켰으며 아울 러 각 개항장에 일본인들의 조계지를 설치하였다. 이 같은 조계지는 한국과의 修 好通商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또한 修好通商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居留民을 허용하면서 조계지설정 지역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68) 특히 청국과 일본은 한국에 專管租界地를 설정했던 것으로 주목되는바 일본에 허용된 지역은 仁川 元山 釜山 馬山의 4個所이며 청국에 허용된 지역은 仁 川 元山 釜山의 3個所였다. 전관조계지의 설정은 청국과 일본이 별도로 한국 정부와 각각 협의하여 설정한 것으로서 조계지를 설정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일 반 외국인조계지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각국 조계지가 數個 國家의 국 민이 공동으로 居留하는데 반하여 전관조계지는 1個 國家의 국민만이 거주하여 商行爲를 하는 지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관조계지는 원칙적으로 타국민이 들어 66) 일본은 丙子修護條約 제4조와 제5조에 의하여 한국에다 외국인조계지를 설정하였는바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第4款, 조선국 부산의 草梁項에는 日本公館이 있고 多年間의 양국인민의 通商 地이다. 금후 종전의 관례와 歲遣船等事를 개혁하고 今般 새로 議決되는 條款을 憑準으로 하여 貿易事務를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 조선국정부는 제5관에 기재하는 二口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 위장소에서 지면을 임차하여 가옥을 造營하며 또는 所在의 조선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을 각기 隨意에 맡긴다. 第5款, 京畿, 忠淸, 全羅, 慶尙, 咸鏡 5道의 연해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個所를 택한 후 지명을 지정 할 것이다. 開港期는 日本曆 明治 9 年 2月 朝鮮曆 丙子 2월부터 起算하여 20個月후로 한다.( 舊韓末條約彙纂 上卷, 10쪽). 67) 李鉉淙, 韓國開港場硏究, 一潮閣, 1975, 129~130쪽. 68) 위의 책, 131쪽

41 가 거류할 수 없었다.69) 인천 청국조계지는 1884년에 맺은 仁川口華商地界章程 에 근거하여 설치되 었으며 이 같은 청국조계지의 설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에 이어 청상의 이 주와 상업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국은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회복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정 치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적 종속관계의 설정과 확장에 전력을 기울였는바 우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을 통하여 조선에서의 치외법권 내지통상권 조선 연해에서의 운항순시 魚採활동 등 특권을 취득하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견제하고 대항하면서 청상의 활동을 獎勵하는 과정을 통하여 일 본의 무역독점을 배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70) 청국은 장정 체결 후, 먼 저 조선의 해관 및 외교를 暗中에서 操縱할 목적으로 馬建常 묄렌도르프 (P. G. VonMollendorff) 王伯恭 吳仲賢 唐紹儀 등을 조선정부에 추천하였다.71) 다음으로 청국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는 總辦朝鮮商務委員의 선발이었다. 특 히 總辦朝鮮商務委員은 조선에 주재하면서 李鴻章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 는 중요한 인물인 만큼, 그 첫 번째로 李鴻章은 駐日公使 何如璋을 주목하였 다.72) 그러나 何如璋이 일본주재공사라는 重責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장기 간 주재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 陳樹棠을 주목하였다. 1883년(고종 20) 6월 24일, 李鴻章은 쌘프란시스코 총영사를 歷任한 바 있는 陳樹棠을 總辦朝鮮常務委員으로 추천하였는데, 실지로 陳樹棠은 일찍 임오군란 직후 1882년(고종 19) 10월에 招商局 總辦 唐廷樞와 함께 招商局의 汽船便으로 인천으로 건너온 적 있다. 그때 陳樹棠과 동승한 사람은 영선사 김윤식이었는데, 김윤식은 후일 陳樹棠에 대하여 쌘프란시스코에서 總領事를 歷任한 바 있으며 미국에서 10년간 거주하였는바 영어구사 능력이 뛰어났으며 商務에도 밝은 사람 이다. 라고 記述하고 있다.73) 李鴻章은 辦理朝鮮商務章程 을 上奏함과 동시에 총판조선상무위원으로 陳樹棠 을 추천하였다.74) 李鴻章은 上奏文에서 조선이 개항을 개시하였으므로 청국상민 69) 李鉉淙, 위의 책, 141쪽. 70) 蔣廷黻, 近代中國外交史資e輯要 中卷, 臺灣: 商務印書館, 1968, 364쪽. 71)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029~1045쪽. 72) 李文忠公全集 秦稿卷 45, 7~9쪽. 73) 金允植, 陰晴史, 219~221쪽, ( 陳茇南 名樹棠 二品道臺廣東人 會游美國十年 會說美話習於商 務 致巨資 亦有招商局人多員隨有 欲觀我國商務也 ). 74)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172~1175쪽, ( 朝鮮國岸初開 中國商民前往經營貿易 自必日之泰繁 盛 時有彼此交涉事件 必須熟悉情形 明達大之員前往經理 始足以聯藩邦 彈壓商庶 玆査有二品 候 選道 陳樹棠 經前出使美國大臣陳蘭彬 秦波金山總領事 再任三年 辦理裕如 商民悅服 上年臣曾波

42 들이 조선으로 진출하여 무역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청국상민들의 무역활 동은 반드시 번창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양국간의 교섭을 위하여 양국 의 정세와 상무에 밝은 인물을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할 필요성과 그 適任者로 陳樹棠을 추천하였다. 李鴻章은 陳樹棠의 능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으며 陳樹 棠을 조선으로 파견하는 주요한 목적이 조선 상무를 개척하는데 있다고 말하였 다. 그리고 李鴻章은 陳樹棠 등 招商局 專門家들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조선 商務 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켰다.75) 陳樹棠은 조선으로 부임한 후, 1883년 9월에 먼저 서울에 常務委員公署(총영 사관)를 설치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인천에 常務委員分署(영사관)를 설립하였 다. 그리고 漢城公書를 건축하는 동시에 인천 부산 원산 등 각 商務分署에도 官署建造를 서둘렀다. 1884년(고종 21) 11월에는 3,882兩(庫平銀)의 공사비용을 들여 인천항 分署公館을 완공시켰다.76) 특히 陳樹棠의 在 조선 활동에서 인천 부산 원산 등 개항장에 청국조계지를 설치하기 위한 노력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기 이미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의 3항구에 조계지를 가지고 있었다.77) 그런 와중에 陳樹棠 부임 직 후, 부산에서 발생한 청상 德興號事件은 陳樹棠으로 하여금 조속한 시일 내에 조 계지를 설정해야할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끼게 하였다.78) 그 외,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경제 정치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청국은 조계지설정이 급선무였 다. 아울러 부산무역은 이미 일본이 독점한 상태이고 원산은 비록 개항되었지만 지리적 원인으로 상업 활동이 미미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陳樹棠은 위와 같은 상황을 감안하여 조계지 설정교섭의 첫 번째 대상지를 인 천으로 결정하였다. 특히 인천은 서울의 문호였는바 조선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청국과 가장 가까운 商港이었다. 그 외, 1880년대 초에 이미 일본 영 국 등 나라들의 海運航路上 중요한 寄着港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 도 중요한 항구로 각인되었다. 1883년 11월, 陳樹棠은 조계설정을 위하여 朝鮮 外署協辦 묄렌도르프와 함께 인천을 답사하였고 동년 12월에 조선총리아문 督辦 閔泳穆에게 인천청국조계지의 설정범위, 조계장정의 訂定, 조계지내에서 청상에 대한 세금특혜 등 제반 문제와 관련하여 상담하였다.79) 往朝鮮游歷 於該國地勢民情亦頗諳悉 該員朴誠端謹明練老成 以之波充總辦朝鮮商務委員洵堪勝 任 ). 75) 譚永盛, 앞의 논문, 25쪽. 76)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666쪽. 77) 金容旭, 韓國開港史 瑞文堂, 1976, 51쪽, 115쪽, 132쪽. 78) 舊韓國外交文書編纂委員會 編, 舊韓國外交文書: 淸案Ⅰ,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1970, 9~10쪽, 13~15쪽, 20~23쪽

43 이 시기 인천주재일본영사를 담당했던 小林端一도 보고서에서 1883년(고종 20) 12월에 이미 인천淸國租界地 설정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李乃榮이 영사 사무를 집행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80) 本月(12월) 7日 當政府穆參判及支那通商總務委員陳樹棠(掌)은 인천에 내려와 當西海 岸別紙圖面 朱劃場所로서 支那居留地라 하며 李乃榮을 當港에 在勤시키고 있다. 더욱이 本國으로부터 委任狀이 到來하여 公然하게 될 때까지는 當分間 陳氏一個人의 計劃대로 通商委員代理라 하며 當港에서 領事事務를 取扱하려는 뜻을 陳氏가 말하고 있다. 또 居 留地가 이미 確定된 이상 來年早春에 在京城支那兵 大略 五百名을 派遣하여 스스로 通 路開鑿과 整地作業을 하여 可能한 限 速히 人民 移住의 目的이 있는 듯하다. 그 외, 위 의 居留地貸借方法에 대해서도 仔細한 것을 아는 대로 報告하겠다. 이어서 支那居留地 實測이 다 되어가는 듯함도 아울러 報告함. 위 보고서에서 알 수 있는바 이 시기 청국은 이미 인천에 조계지를 설정할 地 面을 택정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청국군대 500명 정도를 인천으로 이동시 켜 빠른 시일 내에 조계지를 설정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청국은 1884년(고종 21)에 조 청 양국간에 맺은 仁川口華商地界章程 에 의하여 정식으로 인천청국조계지를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 장정 제1조에 서 청국인의 대거 조선 진출을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朝鮮仁川濟物浦의 海關西北地方 繪圖에 붉은 그림으로 밝힌 地址에 華商居住人이 가 득 차서 마땅히 새로 확충하여 地址를 넓히게 될 때에는 華商들을 適當히 각국조계지내 에서도 亦是 무역 거주하여도 可하다.81) 청국은 위와 같이 淸國專管租界地를 설정하도록 조약을 체결한 다음 專管租界 地를 보다 더 확고히 하기 위하여 附則 제2조에서 현재 청국인 조계지내에 있는 조선의 海關 埠頭 房屋은 응당 속히 이전시켜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국인이 가옥건축을 하려고 하는 基地에 관해서는 조선정부의 비준이 있어야 하며 허가를 전제로 가옥을 建造케 하고 가옥을 건조한 一地區를 선택하여 競賣 후에 해당 지구의 地價를 前後左右의 높은 가격에 비추어 납부하면 쌍방은 土地 契約書를 급여한다고 적고 있다.82) 인천 청국조계지는 이와 같이 일본조계지 다음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청상의 79) 淸案Ⅰ, 22쪽, 36~38쪽, 73쪽, 77쪽, 79~80쪽, 90~91쪽 ; 李鉉淙, 앞의 책, 231쪽. 80) 仁川府 編, 仁川府史, 1933, 128쪽. 81) 仁川口華商地界章程 은 1884년 4월 2일에 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 閔永穆과 淸國總辦朝鮮商務 陳樹棠 사이에 조인되었다. ( 舊韓末條約彙纂 下卷, 422~424쪽)

44 인천이주를 유도하는 작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조선에서 일본의 세 력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정책적 구현으로 보여 진다. 청국은 그 뒤, 袁世凱의 부임기간에 부산과 원산에도 조계지를 설정함으로써 조선에서 3個所의 조계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아래 <표2-2>를 통하여 이 시기 청국의 3個所 借地면적을 비교하면 알 수 있는바 부산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원 산이고 인천은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인천항이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인천항의 중요성 등 원인으로 그 뒤, 청상의 활동은 실 지로 위 3個所 중에서도 인천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83) <표2-2> 仁川 釜山 元山 淸國租界地 面積 租 仁 釜 元 合 界 地 川 山 山 計 借 地 面 積 6, , , , 其 他 面 積 2, , , 計 8, , , , 출처: 政府記錄保存所, 居留地關係書類. 위 표가 보여주는바 부산의 借地면적은 인천의 3배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그 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산은 이미 日商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고 또 지리적 으로도 일본과 가까운 지역이고 청국과는 거리가 먼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淸商 에게는 여러 면에서 인천에 비하여 불리한 것으로 지목된 것 같다. 실지로 청상 의 활동은 인천에서 활동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청국인의 墓地面積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표2-3>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84) <표2-3> 仁川 釜山 元山 淸國租界地 所屬墓地面積 租 仁 釜 元 合 界 地 川 山 山 計 住 所 仁川府內面示洞 釜山支那租界地 元山府赤田面烽燧洞 面 積 ( ) 5, , 출처: 總務處 政府記錄保存所, 仁川 釜山 및 元山淸國居留地規定. 위 <표2-3>에서 알 수 있는바 인천의 청국조계지 소속 묘지면적은 부산의 8 82) 舊韓末條約彙纂 下卷, 425쪽. 83) 韓國開港場硏究, 255쪽. 84) 위의 책, 256쪽

45 배에 이르고 있다. 실지로 인천항은 청국의 對 岸 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한반도 의 다른 지역보다도 청국인의 진출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물론 이와 같은 양상 은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표2-4>의 통계는 인천청국조계지 설정되기 전인 1883년에 33명의 청상이 영업허가를 받고 인천 에 상주하면서 정상적인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는바 필자는 그 원인을 앞에서 언급한 軍 役 상인의 작용으로 판단한다. 85) <표2-4> 仁 川 淸 商 人 數 및 出 身 地 比 較 表 (1883) 年 月 地 域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備 考 南 方 人 廣 東 人 浙 江 人 江 蘇 人 11 名 10 名 4 名 33.3% 30.3% 12.1% 전체 33명 중, 湖 北 人 3 名 9.1% 남방인 29명, 1883년 江 西 人 1 名 3.0% 87.8% 점함. 11월~12월 小 計 29 名 87.8% 북방인 4명, 北 方 人 山 東 人 3 名 9.1% 12.1% 점함. 直 隸 人 1 名 3.0% 小 計 4 名 12.1% 合 計 33 名 99.9%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796~1797쪽. 참고작성. 위 <표2-4>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즉 1883년(고종 20) 11월과 12월에 인천에 常 住 혹은 往 來 무역에 종사한 청상에 대한 출신지 조사표인데, 이들 청상은 전부 인천에서 영업허가를 받은 상인들이다. 11월과 12월의 전체 청상인수는 33명으로 기록되어 비록 적은 人 數 에 불과하지만 전체 33명 중, 4명 을 제외한 29명이 廣 東 商 人 을 중심으로 한 중국남방지역의 상인이라는 점이 주 목된다. 이는 결국 軍 役 商 人 의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 들 군역상인은 1882년에 한반도로 건너와 1885년까지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는 데, 특히 陳 樹 棠 은 1884년 2월 27일, 北 洋 大 臣 이홍장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인천항의 商 務 가 1883년 10월 이후부터 무역선박의 빈번한 왕래에 따라 번거로운 일 이 많아지고 책임이 과중하다....( 中 略 ) 현재 인천항으로 입항하는 모든 수출입선박에 대하여 면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兵 商 ( 軍 役 商 人 )이든 불문하고 華 人 선박에 한하 여 수입업자의 신상증명을 조사하고 아울러 수입허가(영업허가)증서를 발급한다. 수출입 업자에 대해서는 선박등록을 시키고 왕래무역업자도 반드시 통보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 85)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983, 附 件 5), 1796~1797쪽

46 하였다. 라고 보고하면서 兵商 즉 軍役商人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 였다.86) 한편 청국 帆船은 1883년 10월 후부터 인천항으로 빈번하게 출입하였는데 특 히 奉天 山東의 범선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 범선들은 먼저 인천해관을 통관 하여야만 麻浦로 입항할 수 있었으며 귀국하는 선박도 반드시 인천해관에서 통 관절차를 밟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招商局은 1883년 겨울부터 전문으로 輪船 을 파견하여 約定대로 上海와 朝鮮사이를 왕래시켰는데, 그 외, 怡和洋行의 南陞 輪船도 1883년 10월부터 上海 長崎 釜山 仁川을 왕래하였다. 이와 같은 선박 의 빈번한 왕래와 더불어 淸國人들도 항구로 왕래하였는바 그 수는 600여명에 달하였으며 따라서 각 종 불법행위도 잇달아 발생되었다. 그리하여 陳樹棠은 李 乃榮에게 이들 왕래 淸國人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도록 당부하였지만 관리직인의 부족으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87) 이 시기 인천을 중심으로 부산 원산 에서 근무한 淸國商務署員役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88) <표2-5> 仁川 釜山 淸國 商務署員役 姓名 (1883~1884) 地 域 年 度 姓 名 吳仲賢 職 銜 英文飜譯 年 度 姓 名 未長發 職 銜 聽差 李貽湘 書識一員 王喜發 聽差 全成道 朝鮮通事一員 朱勝 聽差 任葆廉 陳寶秋 湯祚和 周定乾 聽差 聽差 釜 山 張燮堯 劉貴 聽差 商務署 金正獜 田有章 聽差 陳鍾瑩 日本通事一名 英文飜譯 書識一員 朝鮮通事一名 日本通事一名 孫雨田 聽差 陳 聽差 仁 川 商務署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478~1480쪽. 참고작성. 86)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837, 光緖10年 3월 3일), 1356쪽. 87) 위의 책, (837, 光緖10年 3월 3일), 1355쪽. 88) 위의 책, (884, 光緖10年 8월 1일), 1478~1480쪽

47 <표2-6> 元 山 商 務 署 員 役 姓 名 및 出 身 地 (1884) 地 域 年 度 姓 名 職 銜 年 2 出 身 地 元 山 商 務 署 9 名 郭 良 材 何 慶 光 徐 嘉 穗 張 孝 天 關 永 淸 王 九 2 程 玉 懷 蔡 明 宋 海 南 英 文 飜 譯 書 識 日 本 通 事 兼 通 譯 朝 鮮 通 事 聽 差 聽 差 聽 差 聽 差 聽 差 35 歲 38 歲 28 歲 35 歲 25 歲 39 歲 32 歲 31 歲 39 歲 廣 東 廣 州 府 番 禺 縣 人 廣 東 廣 州 府 香 山 縣 人 江 蘇 松 江 府 上 海 縣 人 朝 鮮 平 安 道 義 州 人 直 隸 天 津 府 天 津 縣 人 山 東 沂 州 府 沂 州 縣 人 安 徽 安 慶 府 懷 寗 縣 人 湖 北 漢 陽 府 黃 波 縣 尼 江 西 九 江 府 德 化 縣 人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3 卷, 1482~1483쪽. 참고작성. 1884년은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뒤이므로 인천에서 활동한 청국인은 數 的 으로 그 전인 1883년에 비하여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89) <표2-7> 仁 川 淸 商 數 와 出 身 地 別 比 率 (1884) 年 度 地 域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備 考 廣 東 人 浙 江 人 63 名 (31%) 28 名 (14%) 江 蘇 人 10 名 (5%) 111 名 南 方 人 江 西 人 3 名 (55%) 1884 年 202 名 湖 南 人 2 名 湖 北 人 5 名 北 方 人 山 東 人 90 名 (45%) 91 名 直 隸 人 1 名 (45%)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796~1803쪽. 참고작성.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1884년부터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山 東 人 의 진출 이 점점 증가되고 있는바 특히 3월과 5월에 각각 52명과 22명이 인천에서 영업 허가를 받고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요인이 따르겠지만 陳 樹 棠 의 활동과 관련하여 이 시기 청국정부의 정책적 차원에서 진행된 중국국내 청국인의 한반도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89)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983, 附 件 5), 1797~1803쪽

48 <표2-8> 仁 川 淸 商 出 身 別 統 計 (1885) 番 號 籍 貫 人 數 比 率 備 考 1 廣 東 人 29 58% 南 方 商 人 만 활동하고 2 浙 江 人 14 28% 3 江 蘇 人 4 8% 4 湖 北 人 2 4% 5 湖 南 人 1 2% 計 %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127, 附 件 2), 2051~2052쪽. 있다. <표2-9> 仁 川 淸 商 出 身 地 別 統 計 (1886) 番 號 籍 貫 人 數 比 率 備 考 1 廣 東 人 % 山 東, 河 南, 直 隸 天 津 等 2 山 東 人 % 北 方 人 40% 3 浙 江 人 % 4 江 蘇 人 % 5 湖 北 人 % 6 江 西 人 7 3.4% 7 湖 南 人 3 1.5% 8 河 南 人 1 0.5% 9 安 徽 人 2 0.9% 10 直 隸 天 津 人 1 0.5% 計 %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2209~2220쪽. 참고작성. 다음으로 1885년과 1886년에 인천에서 활동한 청국인에 대한 상황은 <표 2-8>과 <표2-9>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數 的 으로 보나 출신지별로 보나 1884년과 큰 차이점이 없는바 이는 이 시기 인천에서 활동한 청국인들의 활동이 안정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1886년까지 인천에서 활동 한 화교사회의 구성은 南 方 商 人 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그 후부터 광동인의 수는 점점 적어지면서 반면 산동인의 수가 급증하는 양상으 로 변해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의 체결과 인천 청국조계지의 설정은 많은 청 상들의 조선이주를 유도하였는바 조선에서 청상들의 상업망을 확장시키는데 결 정적인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천 청국조계지의 설정은 淸 商 數 의 증가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다른 한편 인천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日 商 에게 큰

49 영향을 주었다. 아래 표를 통하여 인천항에서 진행된 淸 日상인들의 淸國과 일 본으로부터 수입액을 비교해 고찰하기로 한다.90) <표2-10> 仁川港 淸 日商人의 輸入額 比較表 단위: $ 年 度 淸國으로부터輸入 日本으로부터輸入 淸日商人輸入合計 淸商의輸入比率 1885年 242, , ,440 25% 1886年 406, ,550 1,348,406 30% 1887年 641, ,113 1,468,453 44% 1888年 636,092 1,049,486 1,685,578 38% 1889年 729,037 1,113,647 1,842,684 40% 1890年 1,312,614 1,259,218 2,571,832 51% 1891年 1,738,044 1,426,463 3,164,507 55% 1892年 1,716,231 1,323,588 3,039,819 56% 출처:工藤三次郞, 朝鮮貿易史, 45쪽. (合計와 比率은 필자의 계산임.) 위 표와 같이 청상의 인천항에서의 활동은 초기 1885년부터 이미 日商에게 일 정한 타격을 준 것으로 나타났는바 이 시기 청으로부터 수입액은 전체 25%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87년에는 전체 44%를 차지하여 종래 日 商의 인천에서의 무역독점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인천에서 청상의 무역 수입 액은 1890년에 이르러 51%의 점유율로 나타나 日商은 종래부터 부산항을 固守 하는데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91) 한마디로 인천화교사회의 형성은 다른 한편 인천에서 청상의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아울러 청국조계지의 설정으로 인하여 청상들의 상 업 활동은 점점 활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양상은 3항 중에 서도 인천이 가장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 인천 부산 원산 세 항구에 있어서 청 일상인의 청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총액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 다.92) 90) 工藤三次郞, 朝鮮貿易史, 朝鮮貿易協會, 1943, 45쪽. 91) 위의 책, 44쪽. 92) 鹽川一太郞, 朝鮮通商事情, 1895, 57~61쪽

50 <표2-11> 三港口 淸 日兩國의 輸入總額 比較表 國 年 別 度 淸國으로부터輸入 日本으로부輸入 313, , , ,328 1,101,585 1,659,542 2,148,294 2,055,555 1,377,392 2,064,353 2,080,787 2,196,115 2,299,118 3,086,897 3,226,468 2,555,675 單位: $ 百 淸 國 18% 17% 26% 28% 32% 32% 40% 45% 分 比 日 本 82% 83% 74% 72% 68% 68% 60% 55% 출처: 鹽川一太郞, 朝鮮通商事情, 1895, 57~61쪽. 위 표는 1885년부터 1892년간 청 일 양국으로부터 인천 부산 원산 3항구 를 통한 수입총액에 대한 비교분석표이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청상들의 수입총액은 점점 증가세를 보이는 반면 日商의 수입총액은 뚜렷한 감소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1884년의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이로부터 청 일양국의 정치적 세력변동은 양국간의 對 조선무역 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시기 청국정부의 對 조선정 책은 주로 상권 확장에 중점을 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러므로 청상들이 상업 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청상의 무역은 주로 청으로부터 수입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 는 것으로 수출상황에 대하여 같은 시기 日商의 수출무역과 비교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93) <표2-12> 三港口 淸 日兩國의 輸出總額 比較表 國 別 年 度 淸國으로 輸出額 日本으로 輸出額 9,479 15,977 18,873 71, ,798 70, , , , , , ,238 1,122,276 3,475,098 3,219,887 2,271,928 93) 工藤三次郞, 앞의 책, 46쪽 單位: $ 總 輸出額 388, , , ,058 1,233,841 3,580,478 3,366,344 2,443,736 淸國 比率 2.4% 3.2% 2.3% 8.3% 8.9% 1.9% 4.1% 6.1%

51 출처:工藤三次郞, 朝鮮貿易史, 46쪽. (청국 무역 比率은 필자의 계산임.) 위 표는 인천 부산 원산 세 항구에 있어서 청 일 양국으로 수출한 무역총 액에 대한 통계표이다. 전체적으로 1885년부터 1892년까지의 무역수출에서 청 상의 수출비율은 극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 시기 조선내의 무역품목과 수입국인 청국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인 경우, 청국과 비교하여 국토가 적은 반면 점차적으로 공업국으로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조선의 주요 수출품목인 農産品 鑛産品 水産品에 대한 일본국내의 수요가 높 아 이를 대량으로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반면 청국은 주로 砂金수출은 진행 하였는바 이는 주로 國際貸借決濟의 필요에 의하여 진행되었다.94) 한마디로 청 일전쟁 전까지 조선에서 청상의 무역은 始終 청으로부터의 수입이 수출을 초월 하는 入超상황을 이루로 있었다. 실지로 1876년 개항초기부터 1882년까지, 일본은 조선의 무역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2-13>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1882년부터 조선에서 일본의 무역은 부산을 제외한 2個所 항구 할 것 없이 크게 격감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 다. 특히 1882년인 경우, 日商의 무역업은 軍役상인의 무역활동으로 인한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왜냐하면 1883년부터는 청상의 조선이주가 자료에서 도 입증되었는바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日商의 무역업에 어느 정도 영 향 줄 수 있었겠지만, 1882년에는 軍役상인의 활동이 청국을 대표하는 무역활동 으로 간주된다. <표2-13> 三港口 對日貿易 變動狀況 港口別 貿易總額 年 度 釜 山 元 山 仁 川 貿易 總額 貿易 總額 貿易 總額 2,258,053 1,856,335 1,221, ,211 1,432,804 1,374, , , ,795, ,337 출처: 通商彙編 1881年~1884年. 결국 청국의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은 壬午軍亂을 계기로 이루어 졌으며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의 체결과 청국조계지의 설정으로 중국 내 유력한 상인의 조선이주를 유도하였다. 이로부터 인천화교사회가 형성되면서 조선에서 청상의 94) 위의 책, 46쪽

52 활발한 상업 활동이 開 始 되었는바 이와 같은 양상은 한편 조선의 개항장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日 商 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결국 1882년부터 日 商 의 무역지수 는 크게 감소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조선에서 청상의 상세는 그 외, 袁 世 凱 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는바 袁 世 凱 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청상의 상세확장에 중요 한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53 2. 袁世凱의 朝鮮赴任과 在 朝鮮活動 袁世凱95)(1859~1916)는 중국 近代史上 반동정치가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에서도 그의 醜穢한 행동으로 유명하다. 袁世凱는 비상한 수완과 능력을 가진 인 물인 동시에 權謀術數에 능하며 이해관계를 중하게 여기는 성격의 소유자로 유 명하다. 袁世凱은 淸의 沒落期에 성장하면서 曾國藩 李鴻章 左宗棠 등 漢人大 官이 軍事力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하였음을 보았는바 특히 그의 父祖가 軍功 으로 得名한 것이 큰 교훈이 되었다. 袁世凱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勃發을 계 기로 功을 세워 조 청 兩國兵의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청국은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강화하기 위하여 袁世凱를 昇進시켜 조선에 부임시켰으며 조선의 내정 외교와 상무관계를 동시에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는 당연히 북양대신 李鴻章의 영향이 컸던바 李鴻章은 光緖帝 에게 袁世凱의 조선 파견사유와 조선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에서 變亂이 계속해서 발생되어, 우리나라가 원조하고 구호함에 전력을 기울려 왔습니다. 조선국왕은 겉으로는 은덕에 감격하는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어 은밀하게 열강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庇護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倭兵이 겨우 철수했는데 바로 러시아 관리가 들어왔습니다. 微臣(이홍장 본인 을 지칭)이 지혜와 능력을 다해 藩屬에 관한 일에 책략을 세우고 있으나 잘 되었다고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힘써 보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간의 보완을 한다면 곧 얼마간의 유익이 발생될 것입니다. 원세개는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뛰어납니다. 朝鮮外署廷臣들과도 홀로 연락이 가능하여 만약 사건이 발생된다면 挽回하고 匡正할 수 있을 것입니다.96) 李鴻章의 주장은 당시 조선을 둘러싼 내 외 정세의 복잡함과 조선국왕의 表 95) 袁世凱는 河南省 項城縣에서 袁保中의 제4자로 태어났으며 숙부 袁保慶의 의 양자로 있을 때, 袁保慶을 통하여 吳長慶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80년(光緖 6)에 浙江提督을 거쳐 廣東水師提 督으로 승진하였으며 아울러 幇辦山東軍務의 職銜으로 山東省 登州에 주둔하고 있다가 壬午軍 亂때 조선에 출정하게 되었다. 그 후, 갑신정변 때 淸軍을 거느리고 단독적인 군사행동을 진행 하여 승리하였다. 袁世凱는 갑신정변에서 功을 세워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립하고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驅使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袁世凱는 청일전쟁 직전 귀국했으며 청일전쟁 후, 新建陸軍을 창설하여 北洋軍閥의 統帥가 되었다. 그 후, 直隸按察使(1897)를 거쳐 戊戌政變 時 山東巡撫로 발탁되었다가 直隸總督(1916)職까지 획득하였다. 辛亥革命時期에는 漁父之利로 大總統의 자리에 올랐고 그 뒤, 皇帝에 즉위하였다가 1916년에 急死하였다. 96) 淸光緖朝中日交涉史e 9卷, (410, 光緖11年 9月 21日), 0177쪽, ( 朝鮮變亂 頻仍國家所以維 持而救護之者不遺餘力 朝王外雖感德 內則趣向不專 陰有擇强自庇之意 倭兵甫撤俄使旋來 微臣借 箸代籌幾於智盡能索然事關藩服 明知其不足與爲善 而不能不力圖補救 但能補救一分卽有一分之益 袁世凱足智多謀 與朝鮮外署廷臣索能連絡 遇事冀可挽回匡正 )

54 裏不同함을 감안할 때, 청국은 조선에 대한 監國政策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로 袁世凱를 파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을 청국의 속국으로 확고히 인식한 위에 조선에 대한 통제와 관리에 중점을 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袁世凱는 이와 같이 李鴻章의 대변인으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따라서 袁世凱 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李鴻章의 조선정책의 具現이라 할 수 있다. 袁世凱는 청국 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대한 강압적인 간섭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조 청간의 속방화 유지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李鴻章과 袁世凱의 내외 호응을 통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은 조선 내 청상의 상업발전에 결정적인 역할 을 하였다.97) 袁世凱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실지로 駐箚朝鮮統理交涉通商事宜로 부임되기 전 인 갑신정변시기부터 시작되었는데, 袁世凱는 甲申년에 이르러 조선 내에 事大 獨立 양파간의 軋轢이 심각하고 국왕의 向背가 일정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吳兆 有98)를 제쳐 놓고 同年 9월에 李鴻章에게 조선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대책을 자 문하였다. 朝鮮君臣은 日人에게 播弄당하여 迷路에 서서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王 또 한 깊이 고혹되어 중국의 藩屬을 벗어나 獨立을 成就하고자 한다. 그 원인을 살피건대 中 佛戰爭으로 中國이 武力을 行事할 수 없으므로 이 機會에 强國을 끌어 들여 중국 의 支配에서 離脫하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가운데 金允植 尹泰駿 閔泳翊 등은 이 計劃에 反對하고 國王의 意思를 바로 잡으려 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3年 以內에 明 白히 드러날 것이니 朝鮮은 實로 中國의 門戶요 關鍵인 바 他族의 逼迫을 당함은 크게 우려되는 일이다. 따라서 미리 방도를 取하여 背反之心을 막는 것이 日後의 患을 없애 는 重大한 일이다.99) 李鴻章은 이 보고를 받고 袁世凱에게 다음과 같이 訓令했다. 吳長慶이 淸軍의 半을 撤回하였고 또 目下 中 法전쟁이 勝敗를 헤아릴 수 없는 때 97) 袁世凱與朝鮮, 84쪽. 98) 吳兆有는 임오군란 때, 吳長慶의 淸軍이 조선에 이주한 후, 記名提督으로 殘留三營을 統率하 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고 決斷力이 없었으므로 그 部下인 統理營務處會辦朝鮮防務 袁世凱 에게 實權을 빼앗기에 되었다. 99) 李文忠公全集譯書函稿 16卷, (光緖 10年 9月 25日, 袁世凱來稟 ), ( 朝鮮君臣爲日人播弄 執 迷不悟 每浸潤於王 王亦深被其惑 欲離中國 更思他圖 探其本源 有法人有事 料中國兵力難分 不惟 不能加兵朝鮮 更不能啓釁俄 乘此時機 引强隣自衛 卽可稱雄自主並駕齊驅 不受制中國 並不俯首他 人此等意見擧國之有權勢者半皆如是 獨金允植尹泰駿閔泳翊意見稍岐 大拂王意 王浸疏遠...(中 略)如不設法杜其騖外之心 異日之患實非淺鮮 )

55 인지라 朝鮮君臣이 日人에 煽惑되어 中國을 背反하려는 것은 甚히 憂慮되는 일이다. 戰 爭이 끝나면 坐視하지 않을 터이지 其間 袁丞과 該營將兵은 不動聲色하고 鎭守를 굳게 지키고 있으라.100) 그러나 袁世凱는 李鴻章의 위 훈령을 받고 단독적인 군사행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袁世凱는 淸軍에게 밀령을 내려 수시로 출동할 수 있도록 단속을 강 화했다. 한편 吳兆有와 陳樹棠은 조선 국왕의 請求가 없을 뿐더러 또 日兵과의 충돌을 예상하여 動兵을 주저하고 있었지만 袁世凱는 강력하게 動兵을 주장하면 서 吳兆有와 陳樹棠 兩人을 설득시켜 政變鎭壓을 결정하였다. 결국 淸軍에게 패 퇴한 日兵과 독립당은 일본공사와 함께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독립 당의 정변은 淸軍의 강력한 무력간섭으로 三日만에 진압되었다.101) 갑신정변에서 淸軍의 승리는 袁世凱에게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립하고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驅使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실지로 1885년 陳樹棠이 身病으로 朝鮮駐在常務委員職을 辭職할 때, 李鴻章은 이미 陳樹棠에 대하여 주견이 없으므로 조선의 국정을 보필하고 主持할 재간이 없다고 판단하였는바 유력한 淸官을 파견함으로써 국정을 보좌하는 것이 필요하 다고 판단했다. 마침 袁世凱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하는데 功이 컸다고 인정되었고 아울러 대원군을 호송할 때에도 국왕이하 諸臣들의 주견을 청국에 偏向케 하는데 공헌했으므로 陳樹棠의 후임으로 袁世凱를 지목했다. 그리고 淸兵 撤還후에도 對 조선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 단하였다. 李鴻章은 袁世凱에게 駐箚朝鮮統理交涉通商事宜 라는 직명과 三品銜 升用道의 賞을 주어 1885년 10월 11일에 조선에 부임케 하였다.102) 袁世凱는 부임하면서 바로 인천 부산 원산의 개항장에 分辦常務委員을 배치 하여 해관수입을 감독케 하는 등 상업을 진흥시키는 일에 전력하였다.103) 이는 청상이 조선에 이주하기 전에 조선의 무역업은 日商이 독점하고 있었는바 袁世 凱의 임무는 淸商의 경제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日商의 경제력을 견제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袁世凱는 갑신정변 후에도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선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정치적 간섭으로서 청국의 조선에서의 상권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원세개의 이와 같은 意圖는 조선해관을 청국해관으로 半隸屬化시키고 電 信局의 개설, 재정 외교문제의 간섭 등 방식으로 나타났다. 100) 李文忠公全集譯書函稿 16卷, (光緖 10年 9月 25日, 論朝鮮 ). 101) 淸光緖朝中日交涉史e 6卷, (267), (附件1, 駐防朝鮮提督吳兆有等來稟及照錄委辦親慶等營會 辦朝鮮防務袁丞世凱來稟 ). 102) 淸案1, (451, 袁世凱의 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關防祗受에 關한 照會 ), 279쪽. 103) 淸案1, (453, 高宗 22年 10月 21日, 仁川, 釜山商務委員更迭에 關한 照會 )

56 袁世凱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청상의 상세는 전에 비하여 크게 확장되었으며 반대로 日商의 무역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각항 주재 일본영사와 조선 을 여행하고 돌아간 일본인들은 청 일 양국상인의 조선무역에 대한 경쟁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원인을 日商의 자금력의 빈약으로 인한 금융거래의 폐단으로 지 적하고 있다. 支那商人에 比하여 日本人이 實際로 不利한 點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金融上의 不便이다고 할 수 있다...(中略) 在朝鮮 日本商人 중 豊裕한 資金을 가진 者가 極少이 고 그 大部分은 融通에 의해서 商業을 營爲한다. 따라서 金融機關의 整備가 무엇보다도 아쉽게 여겨진다. 仁川은 今日에 이르러 3개의 銀行이 있어서 金融上의 圓滿을 期하고 있으나 釜山과 같은 경우는 幼弱한 2개 銀行뿐이다...(中略) 銀行外에 小商人에게 貸 付하는 것을 業으로 삼는 者 또한 적지 않지만 利子는 俗稱 東京에서 말하는 鳥金과 같 다. 이러한 金融條件下에 있는 日本商人이 低利資金을 쉽게 利用할 수 있고 또 每事에 節約을 爲主로 하는 支那商人과 어찌 競爭할 수 있을 것인가104)... 이와 같이 日商이 부진한 원인을 일본상인 중 대부분이 영세상인이므로 자본 력이 빈약하여 금융상의 혜택을 받지 못한데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 책으로 각항 주재 영사 및 일본 외무 당국자에게 영세상인의 조선 진출을 제한하고 자본이 풍부한 유력상인의 조선 진출을 권장할 것과 업종별 結合商社 혹은 同業組合의 결성을 촉구하였다. 한편 이 시기 청상의 조선 진출은 내지통상을 병행하여 진행하였는데, 특히 袁 世凱의 재임기간인 1890년부터 청상의 내지통상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났 다.105) 1893년에 이르러 내지행상자의 급증은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였는 바 경성주재 일본영사관은 淸商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상인은 겨우 곡물을 買積하는 것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지행상에 대해서는 지금 日商은 淸商의 경쟁자가 못된 다.106) 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원세개가 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로 부 임한 기간, 청국 세력이 조선에 크게 확장되었으므로 내지를 왕래하는 청상들의 위세가 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107) 실지로 원세개부임 후, 청상들 104) 東方協會 編, 朝鮮紀行, 朝鮮彙報 6, 293~294쪽. 105) 淸案1, (281, 惟近來商務漸旺 華商人朝鮮內地各道者 亦日見多 ). 106) 外務省通商局 編, 通商彙纂 8號, 서울: 驪江出版社, 1987, 京畿道及忠淸道地方の商農狀況視 察報告, 1893년 10월 21일

57 은 袁世凱의 威力을 기반으로 서울의 여러 樞要地에 산거하여 상권을 확대시켰 다. 이는 다른 한편 조선인에 대한 횡포로 나타나 이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은 점 점 심해갔다. 따라서 1888년부터 1889년간, 시내도처에서는 청인상점의 被襲이 연발하여 청상의 신변안전 문제가 자주 거론되었다. 결국 袁世凱의 제안에 따라 漢城에 산재해 있던 청상은 南門內와 東門內의 二官一帶로 遷移集居하게 되었는 바 이 두 곳은 자연 중국인 거리로 조성되었다.108) 특히 이 시기 淸人 潛商의 潛貿活動이 빈번한 관계로 일본공사관은 조선지방 관들이 이들 潛商을 묵인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균점원칙에 어긋나는 사항으로 조선정부가 淸人潛商만을 우대하고 있다고 강하게 항의하였다.109)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각지에서 淸商의 潛貿活動이 盛行하고 있으므로 해당지방에서는 이 와 같은 불법 상행위를 금법으로 제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지로 일본은 조선 정부에 대한 항의와 더불어 서북연안에서 淸商의 활동을 배제함으로써 무역권 확대를 기도하였다. 이 시기 청상의 潛貿활동은 서해연안,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연안의 개항되지 않은 항구에서 많이 이뤄졌는데, 예컨대 1884년(고종 21) 8월에 山東省 登州의 帆船 2隻이 洋貨를 滿載하고 恩津縣 江鏡浦에 나타나 潛賣를 기도하였으며110) 1885년 5월에도 登州의 漁船 2隻이 서해연해를 거쳐 대동강포구에 來泊하면서 물화매매를 꾀하다가 해당 지방관의 불허로 퇴거하였다.111) 이들 밀무역선은 대 체적으로 洋布 白木 銀子 甘藷 등으로 조선의 牛皮 大米 魚鰾 등을 換價 載船하여 돌아갔다.112) 이와 같은 밀무역은 흔히 조선의 奸商과 결탁하여 이뤄 졌는바 그 영향은 정상무역업에 종사하는 청상의 상업에 크게 영향 주었다. 그러 므로 袁世凱는 부임초기인 1885년부터 이들 游勇游商游民의 불법행위인 범선에 潛乘渡來하여 조선연해 未개항항구에 드나들며 진행하는 상행위를 엄칙 응징하 는 조치를 강구하였다....(中略) 游勇游商游民이 帆船에 潛乘渡來하여 商行爲를 하고 있는바 通商港口 혹은 沿海 未開港港口에 隨時로 들어와 賭博을 하고, 가짜약품을 판매하여 居民을 107) 通商彙纂 1號, 京畿道及忠淸道地方の商農狀況視察報告, 1893년 10월 ; 通商彙纂 4號, 明治 26年中 京城商況年報, 1894년 4월. 108) 韓㳓劤, 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 一潮閣, 1970, 55쪽. 109) 總理機務衙門日記 第21冊, 高宗 26年 9月 21日條, 28日條. 110) 總理機務衙門日記 第3冊, 高宗 21年 8月 29日條. 111) 總理機務衙門日記 第3冊, 高宗 21年 8月 29日條. 112) 總理機務衙門日記 第8冊, 高宗 22年 11月 20日條 ; 總理機務衙門日記 第15冊, 高宗 25 年 2月 13日條

58 欺騙하고 심지어 官長으로 신분을 속이기도 하면서 居民의 財貨를 借貸하기도 한다. 결 국 칼로 傷人하는 행위까지 일어나고 있다...(中略) 이미 수차례 烟台, 天津, 營口, 上海 등 各關道에 요청하여 가능한 한 엄하게 조치를 취하여 調査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워낙 海面이 넓어 쉽지 않다...(中略) 조선지방관에게도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조선관민 이 華人을 두려하고 있어 강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여...(中略) 藩奉人心 뿐만 아니라 藩奉人의 손해도 크다. 光緖 11년(1885) 초기 한국에 도착했을 때도 관련된 범행에 대 하여 100여명 정도 捕解한적 있지만 잠복입국을 완전해소 할 수 없다. 光緖 12년 (1886)에는 65명을 捕解하여 범행의 輕重에 따라 징벌을 가하고 수시로 兵船에 인도하 고, 遞解하고, 資遣케 한다. 그러나 지금도 帆船으로 潛來하는 游民이 外道(경기도 밖) 에 잠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경성과 거리가 먼 지역은 緝捕가 불가능하고 또 出沒 이 無常한바 韓國外書에 요청하여 각 지방에 嚴飭하여 緝捕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유민(莠民)을 淸理하는 것을 통하여 藩封人心을 안정시키려 한다.113) 袁世凱는 이와 같이 이들 潛商의 불법적인 상행위에 대하여 엄칙하여 緝捕하 고 있었다. 그 외, 1886년(光緖 12)에도 이들 游勇游商游民을 捕獲하여 각 兵船 에 인도하였는바 遞解資遣한 이들 游勇游商游民을 출신지별로 조사한 통계표는 아래와 같다.114) <표2-14> 遞解 資遣한 游勇游商游民 姓名 (1886) 姓 名 身 分 出身地 姓 名 身 分 出身地 姓 名 身 分 出身地 李 周 游民遞解 山東人 彭得勝 游勇遞解 徐州人 陳得榮 游勇遞解 安徽人 孫永興 游商遞解 山東人 李得勝 游勇遞解 河南人 鞏連德 游商遞解 山東人 張錫堂 游商遞解 直隸人 文福先 游勇遞解 安徽人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第4卷, 2205쪽. 참고작성. <표2-15> 捕獲 遞解 資遣한 游勇游商游民 調査表 (1886) 姓 名 曲 魁 鄭士亮 刁乃淸 黃 成 于 三 陳汶蔡 范慶亭 身 分 失事船戶資遣 失事船戶資遣 失事船夥資遣 失事船夥資遣 失事船夥資遣 游商資遣 游商資遣 出身地 山東人 山東人 山東人 山東人 山東人 浙江人 湖北人 姓 名 王 順 王睐䢀 李 升 張萬和 李樹靑 王大用 趙 起 身 分 游民資遣 游商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商資遣 游民資遣 出身地 直隸人 山東人 直隸人 山東人 山東人 山東人 山東人 姓 名 王甫宣 張慶麟 曺 永 丁起鳳 張德榮 王公義 譚乃發 身 分 游商資遣 游商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商資遣 游勇資遣 出身地 山東人 四川人 湖南人 直隸人 江蘇人 山東人 湖南人 113)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207, 光緖13年 2月 19日, 附件1 光緖12年分仁川華商姓名籍 貫 ), 2204쪽. 114) 위의 책, (1207, 光緖13年 2月 19日, 附件1 光緖12年分仁川華商姓名籍貫, ), 2205~2208쪽

59 楊虎臣 黃大西 屠道安 李鳳祥 吳長林 郭西 高福壽 王振昇 游商資遣 游商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民資遣 游商資遣 游勇資遣 湖北人 湖北人 河南人 河南人 山東人 河南人 河南人 湖北人 劉福 劉立源 牟培義 欧陽勝 武東明 王靜波 楊三 張喜謙 張鳳庭 游勇資遣 山東人 劉文長 游勇資遣 甘肅人 高汝違 游勇資遣 四川人 長祿謙 游勇資遣 江蘇人 王金福 游勇資遣 安徽人 徐福 韓秤成 游勇資遣 湖南人 齊福元 游勇資遣 河南人 王景何 游勇資遣 直隸人 李有 游商資遣 直隸人 蘭升 游民資遣 游商資遣 游商資遣 游商資遣 游商資遣 游商資遣 游民資遣 游勇資遣 直隸人 直隸人 山東人 江蘇人 直隸人 直隸人 直隸人 浙江人 胡庭元 許明義 劉智 趙維才 劉志祿 姚同春 岳德增 陳炳盛 游勇資遣 游勇資遣 游商資遣 游勇資遣 游勇資遣 游勇資遣 游勇資遣 游商資遣 四川人 安徽人 山東人 江蘇人 安徽人 安徽人 安徽人 山東人 游商資遣 陝西人 游商資遣 順天人 嚴得順 游勇資遣 湖北人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204~2208쪽. 참고작성. 위 <표2-14>은 1886년 정월부터 12월 사이 潛乘渡來한 游勇游商游民에 대하 여 遞解 資遣하여 兵船에 인도하여 결국 중국국내로 押送한 名單인바 모두 8명 이다. 그 중,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直隸 河南인이 5명으로 반수이상을 점하고 있다. 특히 산동인은 전부 游商인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지리적으로 인접한 조건 을 이용하여 潛來渡船하는 방식으로 조선에서 商行爲를 진행하였다. <표2-15> 도 같은 내용으로서 山東 河南 直隸를 포함한 北方人이 61%를 차지하고 있 다. 전체출신지역에 대하여 분석하면 長江以北 지역민이 90%남짓하여 帆船에 潛 來하여 商行爲를 진행한 불범상인은 대체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민인 것 으로 나타났으며 대개가 영세상인 혹은 海盜와 함께 활동하는 상인이었다. 그리 고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潛來者數가 많으며 이들은 전부 海路를 이용하 고 있었다. 袁世凱의 上書文에서도 이들 游商游民들이 海盜와 동행하여 밀무역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15) 袁世凱는 그 뒤에도 潛商이든 淸商이든 조선 내에서 감행한 청상들의 불법행 위를 엄하게 징벌하고 있는바 1889년(光緖 15)에는 淸商들이 조선내지에 潛入하 여 점포를 개설하는 행위도 금지사항으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조선 내 청상들을 엄하게 단속하는 이유를 일본이 조선정부에 항의하는 균점평등 요구제 출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116) 그 외, 조선내지에서 청상들이 불법무역을 진 행하는 것을 조사하여 逐遣하기도 하였다.117) 1892년 6월에는 이들 犯越 游勇을 115) 위의 책, (1207, 光緖13年 2月 19日, 附件1, 光緖12年分仁川華商姓名籍貫 ), 2204쪽. 116) 위의 책, 5卷, (1447, 光緖 15年 8月 初9日, 仁川港爲游民游勇出沒之所以准添募幹差以資稽 査 ), 2640쪽. 117) 위의 책, (1452, 光緖 15年 8月 26日, 電報袁世凱派員査禁華商在朝鮮內地違章貿易分飭査拿逐

60 검거하기 위한 대응 책략으로 勇兵 18명을 모집하여 조취를 취하였다.118) 袁世 凱는 游勇游民뿐만 아니라 조선으로 건너온 窮民수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 비 추어 資遣조취를 취해 이와 같은 불법행위를 제지하려고 노력하였다.119) 이 시기 부산과 원산 등지에서 청상의 활동은 당연히 인천에 비하여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1886년 인천에 정식으로 영업허가를 받고 상업에 종사 한 청상은 205명으로 기록되는데 반하여 동년 인천해관에서 이들 청상의 상업 활동과 관련하여 徵收한 稅額은 다음과 같다.120) 徵收稅項各貨數目 1. 수출입화물금액: 洋 百76萬32元. 그 중, 華商貨 洋計: 43萬1千 8百18元8角3分. (전체 수출입 화물액의 24%) 2. 수출입세: 洋 8萬4百59元3角6分. 그 중, 華商稅 :洋 2萬9千3百80元5角5分. (전체 수출입 세액의 37%) 稅金免除項各數目 1. 輸出入洋銀: 洋11萬8千5百20元. 2. 輸出金砂: 洋56萬5百92元. 위 통계는 정상적인 상업 활동을 진행한 청상에 한정하여 조사한 자료이므로 위에서 언급한 潛商, 혹은 조선 내 불법상업을 진행한 청상들의 무역지수는 당연 히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지로 이들 潛商들과 같이 불법적인 상업수법으로 창출한 경제적 이익도 상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1890년에 이르면 청국인의 내지행상수도 종전과 다르게 급증하는 추세로 나타나 경성주재 일본영사는 가는 곳마다 청상이 보인다. 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종래 설과 같이 袁世凱의 조선에서의 활동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청국의 세력과 원세개의 비호하에 이 시기 청상들의 불법 상행 위도 급증하였지만, 다른 한편 袁世凱는 앞에서 언급한바 1885년부터 1892년간 수차례에 거쳐 진행한 이들 潛商에 대한 포획 엄벌 응징 강제귀환 등 적극 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일부 청상들의 불법 상행위를 제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는 종래 설과 다른 원세개의 청상의 상업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遣情形 ), 2646쪽. 118) 위의 책, (1677, 光緖18年 5月 20日, 准駐韓袁道 所請添募緝勇18名査拿越界游勇 ), 2980쪽. 119) 위의 책, (1678, 光緖18年 5月 20日, 咨送光緖17年資遣游勇游民及乞資內渡窮民名冊 ), 2981쪽. 120) 위의 책, (1208, 光緖13年 2月 19日, 光緖12年分仁川華商姓名籍貫 ), 2221쪽

61 간주되며 결국 원세개의 앞에서 언급한 上書文에서도 나타나는바 궁극적으로 청 국의 체면과 지위, 특히 조선에서 청상의 상업 활동과 위신을 고려했다는 맥락으 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袁世凱는 그 외에도 본국의 유력상인들을 초래하는 역할과 회관을 개설하여 특별이익을 許與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또 순경을 조직하여 청국商賈들의 신변을 보호하였으며 용산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理事館을 창립하여 청상 의 상업망 확장과 상업 활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 외, 서울의 公署 (총영사관)를 종전에 비해 규모를 확장하였는바 陳樹棠시 기의 公署인원 12명을 22명으로 증원하였고 심지어 청일전쟁 勃發 직전에는 54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 외, 호칭을 개편하여 公署를 商務公署로 칭하였고 총영사관을 公使館 으로 승격시켰다. 袁世凱의 재조선 활동은 차관문제에서도 청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 강화를 위하여 조선의 차관문 제에 간섭하여 조선정부가 유일하게 청국으로부터 차관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청정부의 차관입장을 각국 公使에 밝혀 각국 공사에 성명을 보냈으며 조선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신임을 강조하면서 각국과 조선간의 차 관관련 상담을 극력 반대하였다.121) 袁世凱는 한마디로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속방체제에 장애되는 사항에 대해서 는 온갖 횡포를 감행하였으므로 결국 조선은 청국의 정치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監國大臣 122), 袁大人, 더욱이 朝鮮의 太上王 123)으로 비유 될 만큼 조선에 군림하였는바 조선의 내정 외교 경제 군사 등 제 분야가 모 두 그의 수중에 있듯이 간섭한도가 지나쳤다.124) 이와 같은 越權行爲는 조정의 反淸의식을 초래하였으며 특히 왕권을 무시할 정도의 내정간섭은 국왕의 강한 반감을 자아냈다. 그리고 민비일파를 중심으로 한 조정 내 聯F파에 대한 색출행 동은 오히려 袁世凱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袁世凱는 원래 3년이란 임기기간을 李鴻章에 의하여 세 차례 留任하게 되었으 며 결국 1885년 9월부터 1894년 7월까지 약 9년간 조선에 주재하였다. 그 이전 의 주재기간까지 합치면 12년간 조선에 주재한 청국의 최고 관리책임자라 할 수 121) 李文忠公全集譯書函稿 12卷, (光緖16年 3月 15日, 李鴻章致駐俄英美日各使電 ), 19쪽 ; 淸光緖朝中日交涉史e 12卷, (703), 29~30쪽, ( 朝鮮貧而浪費償款維難 各國紳商不宜與 該國訂立合同 付以鉅款 將來如有借債不償之事,中國不爲擔保 若各國因欠款而抵據朝鮮海關 中國亦決不允 ). 122) 林明德, 앞의 책, 100쪽. 123) 近代中國外交史資e輯要, 366쪽. 124) 李陽子, 앞의 책, 203쪽

62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청상의 활동은 袁 世 凱 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25) 125) 中 日 甲 午 戰 爭 이 勃 發 하자 李 鴻 章 은 袁 世 凱 를 귀국시켰다. 그 후 원세개는 直 隸 按 察 使 (1897), 山 東 巡 撫 (1899), 直 隸 總 督 (1901) 署 理, 北 洋 大 臣 에 까지 올랐다. 1903년에는 北 洋 軍 閥 의 統 帥 로 임명었고 1907년에는 軍 機 大 臣, 外 務 部 尙 書 로 임명되었다. 辛 亥 革 命 時 期 원세개는 북양 군벌의 힘을 빌려 臨 時 大 總 統 孫 中 山 을 압박하여 끝내 大 總 統 으로 추대되었다. 1915년 12월 에는 皇 帝 의 卽 位 를 획책하였으나 전국적인 復 辟 反 對 運 動 과 護 國 戰 爭 으로 帝 制 를 하는 수 없 이 취소하고 1916년6월6일 鬱 火 병으로 急 死 하였다.( 李 定 一, 袁 世 凱 傳, 北 京 : 中 華 書 局, 1980, 참조.)

63 第3章 淸日戰爭 前後 仁川華僑社會의 變化樣相 橫浜 華僑社會와 比較 第1節 仁川華僑社會의 形成과 變化 1. 淸商의 仁川移住와 華僑社會의 構成 19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 산업혁명의 성공은 대량의 생산물과 剩餘物를 낳았 는바 이는 열강의 세계시장에 대한 개척과 해외확장을 추진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제국은 이들 열강의 강력한 외압으로 각각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하 여 相異한 역사과정을 겪어왔다. 특히 淸은 1842년 阿片戰爭의 패배로 南京條約1)을 체결함으로써 오래 동안 실시해오던 鎖國政策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이어서 廣州 厦門 福州 寧 波 上海의 5개 항구를 개항하였다. 1854년에는 미국의 페리2)(Perry, Matthew Calbraith)提督과 일본幕府사이에 日 米和親條約3)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따라 1859년에 일본의 요코하마(橫浜)가 개항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1876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江華島條約4)을 체결하였으며 釜山(1876년)과 元 山(1880년)에 이어 1883년에 仁川을 개항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아시아 각 1) 南京條約은 1842년 8월 29일에 체결되었으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南京條 約은 阿片戰爭의 패배에 따른 敗戰條約으로 敗戰의 懲罰로 ① 香港을 英國에 割讓하고, ② 賠償 金 2,100萬 달러를 지불하고, ③ 廣州, 厦門, 福州, 寧波, 上海 등 5개 沿海港口 都市를 開港하 였다. 2) 幕末期 아메리카 東印度함대 사령관이다. 遣日특사로 임명되어 1853년(嘉永 6)浦賀에 入港하여 開國를 요구하였으며 1854년에 다시 江戶灣에 건너와 日米和親條約 을 체결하였다. (朝尾直弘 宇野俊一 田中 琢 編, 日本史辭典, 角川書店, 1996, 943쪽). 3) 日 美和親條約은 또 神奈川條約이라고도 한다. 1854년(安政 1) 3월 3일(陰曆 3월 31일)에 日 本 側 全權 林煒와 페리사이에 맺은 조약으로서 일본은 이 조약을 계기로 鎖國體制에서 벗어나 게 되었다. 그러므로 神奈川條約은 幕末期 일본이 鎖國體制에서 벗어난 최초의 조약이기도 하다. 그 내용은 전체 12條로 되어 있으며 下田에 領事館을 설치하는 것 외, 伊豆 下田 箱館 등 3 항구를 개항하기로 규정하였다. ( 日本史辭典, 808쪽). 4) 1876년(고종 13) 조선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조 선은 자주의 나라로서 일본과 평등한 관계를 가진다는 내용을 적고 있어 실지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속관계를 부정하였다. 강화도 조약에 의하여 조선은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었으며 점차적 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동시에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게 되어 정치적 군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의 정치,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 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編, 舊韓末條約彙纂 上卷, 國會圖書館 立 法調査局, 1964, 9~12쪽)

64 국은 19세기 중 후기에 맺은 불평등조약에 의하여 開國되었으며 연해항구 도시 가 점차 개항되기 시작하였다. 인천과 요코하마는 이와 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개항된 근대 동아시아 항구도 시이다. 특히 兩 都市는 각각 自國의 중요한 항구 도시일 뿐 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도 주요한 지위에 처해있었다. 兩 都市는 또 조약에 따라 개항과 동시 에 外國人租界地를 형성하였으며 근대초기 화교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지역이다. 따라서 화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화교들의 根據地로 자리매김 되 었다. 인천과 요코하마는 위와 같이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 相異 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兩 도시는 개항시기에 처한 정치 경제적 차이와 청국의 對韓 對日 외교정책의 차이, 그 외, 兩 도시 화교들의 출신지와 이들 화 교들의 신분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화교사회를 구성하였으며 거주국에서 화교들 의 법적 지위 화교들이 종사한 업종 등 면에서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 다. 본 장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공통점을 전제로 양 도시의 근대 화교사회를 청일 전쟁을 중심으로 前 後 단계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이 인천과 요코하마 화교사회의 형성과 변화를 둘러싼 비교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화교사회 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화교사회에 대한 고찰과 동남아시아 화교사 회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역적 특성에 따른 상이한 화교사회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한국과 일본의 화교사회 성격규명 에 도움이 될 것이며 최종적으로 한국화교사회와 인천화교사회의 특성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기초적 작업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항 후, 인천은 한국 해운의 중심지인 동시에 극동해운의 중심지이기도 하였 다. 특히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고 咽喉이며 국방 정치 경제적으로도 중 요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인천의 개항과 더불어 일본과 청국, 그 외, 歐美 각국은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조계지를 설정하여 자국민의 권익 보호 와 통상 확대에 주력하였다. 인천에서 영사관과 조계지를 가장 먼저 설정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인천 개항 전해인 1882년(고종 19)에 이미 영사관을 설치하였고 駐韓日本公使館書記 官 近藤眞鋤를 인천주재 영사로 파견하였다.5) 그리고 일본의 뒤를 이어 淸國도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하였는데, 실지로 청국의 조선 진출은 일본의 조선 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국은 일본의 조선에서의 세력권 확대에 무척 신경을 썼는 바 1882년의 壬午軍亂을 계기로 조선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기에 이르렀 다. 5) 仁川府 編, 仁川府史, 仁川府, 1933年(昭和 8), 119쪽 및 218쪽

65 청국은 1883년(고종 20) 9월에 北洋大臣 李鴻章의 건의에 따라 陳樹棠을 總 辦朝鮮常務委員으로 조선에 파견하였으며 1884년 4월에 閔永穆과 陳樹棠사이에 仁川口華商地界章程 을 체결함으로써 인천에 정식으로 청국조계지를 설정하 기에 이르렀다. 1880년대까지 조선과 청국의 무역은 北道開市制 에 따라 국경지대에서 진행 되었으며 연1~2회의 교역에 지나지 않았다.6) 그러나 인천에 청국조계지가 설정 됨으로써 많은 청상들의 조선 이주를 유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 청간의 무역 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청국인이 정확히 언제부터 인천에 이주하여 상업 활동을 시작하였는지 지금까 지 입수된 자료로 입증이 불가능하다. 仁川府史 의 내용을 참조하면 청국인은 맨 처음 다섯 명이 인천의 舊稅關터의 뒤쪽에 가옥을 짓고 식료품을 경영하 하면서 잡화류의 수입과 해산물류의 수출을 경영하였으며 한편, 영국 미국 러시아의 선박이 출입할 때에 식료품과 식수를 공급하면서 활동하였다.7) 라고 적고 있다. 한편 淸季中日韓關係史e 에서는 1883년 11월부터 淸商 33 명이 인천에서 상업 활동을 진행하였으며 이들은 정식으로 영업허가를 받고 인 천에 常住 및 왕래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8) 이들 33 명 청상에 대한 성명과 출신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표3-1> 仁川에 常住 往來한 淸商의 姓名 ( ~12) 年 月 姓 名 何貞雄 蘇 泰 毆陽球 易仁麗 陳 良 張 維 張 昇 馮汝祺 出 身 地 廣東番禺縣人 廣東番禺縣人 廣東三山縣人 廣東顧山人 廣東順德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南海縣人 姓 名 王興 毛士林 李明初 王增 樂秀華 余 本 余 增 周壽臣 出 身 地 浙江鎭海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鎭海人 浙江吳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慈谿縣人 廣東新安縣人 姓 名 沈維鈞 載金明 許世昌 賀廷山 徐漢山 徐漢臣 石永德 出 身 地 江蘇嘉定縣人 江蘇崇明人 山東沂照縣人 山東盛水縣人 湖北江夏縣人 湖北江夏縣人 直隸天津縣人 6) 高承濟, 韓國移民史硏究, 章文閣, 1973, 335쪽. 7) 仁川府史, 128쪽. 8)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編,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983, 光緖11年 3月 29日, 附件 5, 謹將遵査光緖九年11月分起至10年12月分常住仁川已領執照商 人姓名籍貫列呈 ), 1796~1797쪽

66 胡志榮 張 安 登凝鈞 徐 發 湖北黃皮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新會縣人 江蘇寶山縣人 王廷濟 陳聲甫 鳥統章 浙江鄞縣人 湯鵬祚 江西德化縣人 浙江鎭海縣人 林鎭江 山東蓬萊縣人 浙江鎭海縣人 王友良 江蘇嘉定縣人 合 計 33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796~1797쪽. <표3-1-1> 仁川 淸商數와 出身地 別 比率 (1883) 年 月 1883년 地 域 南方人 11월~12월 北方人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備 考 廣東人 11名 33.3% 浙江人 10名 30.3% 南方人: 江蘇人 4名 12.1% 29名 (87.8%). 湖北人 3名 9.1% 江西人 1名 3.0% 山東人 3名 9.1% 直隸人 1名 33名 3.0% 99.9% 合 計 北方人: 4名 (12.1%).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796~1797쪽.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1883년 11월부터 12월까지 2개월간 인천에 常住 혹은 인천으로 往來하면서 무역활동에 종사한 청국 상인은 총 33명이다. 그리고 이들 을 다시 출신지별로 분류하면 전체 33명 중, 北方系統에 속하는 상인이 4명인데, 山東商人 3명과 直隸商人 1명이다. 이들 北方商人은 전체 청상의 12%를 점유하 고 있으며 나머지 29명은 중국 내 廣東商人과 浙江商人을 중심으로 하는 南方系 統 상인으로 전체 88%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초기 인천에 서 활동한 청국상인 중에서도 廣東상인과 浙江상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다. 그 외, 이들 청상들이 이미 인천에서 영업허가를 받고 무역업에 종 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은 이미 조선시장에 대한 정보와 조선무역의 가능 성을 충분히 판단한 것으로 짐작되며 아울러 상당수가 영세상민이 아닌 財力과 商術을 겸비한 유력한 상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陳樹棠( )은 李鴻章에게 上奏한 보고서에서 1883년 인천에 거 주한 청상은 54명이고 傭工은 9명으로 이 시기 인천에 거주한 전체 청국인수는 63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같은 시기 漢城 麻浦 仁川의 전체 淸商人數는 도 합 136명이며 傭工은 26명이라고 보고하였는바 이 내용을 지역별로 표를 작성 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9) 9)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826, 光緖10年 2月 11日, 附件 1, 光緖九年華商到漢城麻浦仁川

67 <표3-2> 仁 川 淸 商 店 鋪 數 및 商 人 數 (1883) 地 域 別 商 店 名 商 店 數 商 人 數 致 中 和 廣 東 幇 商 店 怡 安 3 家 17 名 廣 威 隆 永 源 棧 山 東 幇 商 店 公 和 棧 2 家 13 名 永 隆 順 船 一 隻 1 家 (선박) 6 名 浙 江 幇 商 店 載 合 順 公 記 2 家 18 名 合 計 7 家 54 名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3 卷, 1339쪽. 참고작성. <표3-2>는 1883년 인천 내 청상 점포수와 商 人 數 에 대한 통계인데 <표3-1> 과 비교하면 청국 상인수가 21명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1883년에 인천에는 영업허가를 받고 무역업에 종사한 33명 외, 영업허가 없이 무역업에 종사한 상인들도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시기 인 천에는 <표3-2>와 같이 7 家 의 청상점포가 있었는데, 그 중, 산동상인이 경영하 는 상가는 2 家 외 선박 1척으로 기록되었고 나머지 5 家 는 廣 東 상인과 浙 江 상인 이 경영하는 상가로 기록되었다. 전체 54명 중, 廣 東 商 人 과 浙 江 商 人 이 35명으 로 약 65%를 차지하고 있어 반수이상을 南 方 상인이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표3-1>을 참조하면 남방상인의 35명 중, 29명은 영업허가를 받고 있어 약 83%를 차지하고 나머지 6명이 영업허가 없이 상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산동상인을 중심으로 한 북방상인은 전체 19명 중, 4명만이 영업 허가를 받은 상황으로 전체 21%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1883년 인천에 서 활동한 청상 중, 대부분은 남방상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전체 65%를 차 지하고 있고 83%가 영업허가를 받고 점포를 경영하고 있어 장기적인 계획으로 인천에 이주한 것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대체적으로 유력한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인천과 가까운 서울의 상황은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바 서울에서 경영한 청상들의 점포 수 및 商 人 數 는 다음과 같다. 10) 三 處 人 數 ), 1338~1340쪽. 10)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1338쪽

68 <표3-3> 漢城 淸商 店鋪數 및 商人數 (1883) 地 域 別 浙 江 幇 商 店 山 東 幇 商 店 商 店 名 通裕祥 天豊, 公記, 肇康, 商 店 祥盛, 永源順, 福有號, 德興 商 人 6家 18名 13家 41名 19家 59名 公平, 協昌茂. 中華興, 和興順, 滙記, 和祥, 恒泰興, 公和順, 仁豊棧, 復 數 數 成, 公盛和, 福興. 合 計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338쪽. 위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서울인 경우 전체 59명 중, 山東商人이 41명으 로 69%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인천과 비교하여 서울인 경우 남방계열에 속하는 浙江상인이 18명으로 전체 31%를 차지하고 있어 서울은 인천에 비하여 북방상 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인 천의 경우와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어 초기 서울의 화교사회는 북방상인을 중심 으로 구성되었음을 설명한다. 이 같은 상황은 전통 중국인의 상업경영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특히 가족 친족 동향인으로 구성원을 형성하는 중국인만의 경영방식을 감안할 때, 이와 같이 지역에 대한 상권독점 현상은 자연적으로 이루 어질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인천과 서울의 청상점포 규모를 비교하면 인천 은 평균 1점포당 5,6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데 반하여 서울은 1점포당 3명으 로 이루어져 점포의 규모(구성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들의 상업 활동은 수출입 세액에 대한 통계표를 통하여 고찰할 수 있는바 1883년(光緖 9) 5월 12일, 인천해관이 신설된 날부터 동년 연말까지 청상들이 완납한 수출입세와 船稅상황은 아래와 같다.11) <표3-4> 仁川 淸商 輸出入稅 納付表 (1883) 單位: 洋元 月分 稅種 5月 輸 入 稅(淸 仁) -- 輸 出 稅 (仁 淸) -- 船 稅 -- 6月 月 月 9月 10月 1,500.00圓 圓 圓 圓 -- 11) 위의 책, 3卷, (826, 光緖10年 2月 11日, 附件 2, 光緖九年華商完納進出口稅及船鈔銀數 ), 1340~1341쪽

69 11月 1,700.07圓 39.53圓 圓 12月 圓 2.25圓 -- 合計 4,543.61圓 圓 圓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3卷, 1340~1341쪽. 注: 原 資e는 輸入稅 총액을 3,828.61圓으로 적고 있음. 위 표는 1883년 8월부터 12월까지 청상이 납부한 수출입 세액과 船稅인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상들이 인천에서 활동을 <표3-1>의 통계에 따르면 1883년 11월부터 진행된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위 <표3-4>를 통하여 1883년 8 월전에 이미 상업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청상에 대 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바 필자는 이 시기 조 청간의 무역상황과 조선국내의 사 정을 분석하여 軍役상인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외, 표와 같이 이 시기 청상이 납부한 수출입 세금 액이 비록 많지 않지만 제2장의 언급한대로 1883년에 이르러 이미 인천에서 활동한 日商의 무역지수가 청상의 활동으로 인하여 크게 감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듯이 초기 인천에서 활 동한 청상의 무역업이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하고 군역 상인의 역할이 가장 유력하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淸은 1884년(고종 21)에 仁川口華商地界章程 을 체결함으로써 정식으로 인천 에 청국조계지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인천에서 淸商人數는 전에 비하여 數的으로 크게 성장하였다.12) <표3-5> 仁川 淸商姓名 및 出身地 (1884) 年 月 姓 名 張詩緖 紀鍾池 楊和甫 劉仁今 梁日永 熊渭川 陳蓮伯 沈鶴揚 姚配豊 李 章 吳福春 出 身 地 山東福山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江西淸江縣人 浙江鳥程縣人 浙江鳥程縣人 浙江鳥程縣人 浙江鳥程縣人 浙江鳥程縣人 姓 名 馬國鳳 馬國官 馬國慶 馬元寶 蕭流仙 出 身 地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蓬萊縣人 姓 名 王 榮 吳禮堂 王厚甫 王伯錬 吳祥林 出 身 地 江蘇陽糊縣人 江蘇陽糊縣人 江蘇江寧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鄞縣人 計 16 趙幼園 楊 桂 盧春生 楊渭泉 陳德濟 浙江山陰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鳥程縣人 浙江慈谿縣人 顧介甫 劉 玉 孫百泉 于化亨 王景州 江蘇吳縣人 直隸金州人 山東寗海州人 山東福山縣人 山東福山縣人 12) 위의 책, 4卷, (983, 光緖11年 4月 初3日, 附件 5, 光緖十年份仁川華商姓名籍貫 ), 1796~1803 쪽

70 閏 5 沈茂發 袁 坊 周玉德 周玉書 宋 玉 盛洪茂 楊可許 苗萬淸 谷萬德 畢建仁 苗興寬 王連生 畢如春 傅學仁 徐德明 李云成 宋 升 李振東 姜 錧 姜延譜 喬振東 麥榮三 鄭雲章 陳如三 朱 勝 梁 耀 馬 才 鄺添盛 徐茂泰 李長穩 黃 釋 鄺兆棠 馮子林 張滻江 吳柏池 王增起 封守昆 王廷官 張學士 杜福臨 王炳奎 浙江鳥程縣人 浙江鄞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長淸縣人 廣東鶴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新會縣人 廣東番禺縣人 廣東新會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新會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開平縣人 廣東南海縣人 廣東順德縣人 廣東香山縣人 山東海陽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潍縣人 山東平度州人 葉臣豪 王俊 馬 景 謝以時 王景林 王新實 畢樹之 戚印堂 谷萬方 黃同言 于明良 呂芳洲 谷萬擧 黃擧仁 宋致和 鄒慶冬 蘇邵吉 包宋卿 梁國楨 張維信 王景文 韓麟生 鍾 琛 雲茂秀 寗漢山 丁雁亨 譚培三 鄺如茂 鄭 欽 李 才 梁 旺 林少波 潘澄波 李振臣 浙江慈谿縣人 浙江慈谿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黃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黃縣人 廣東番禺縣人 廣東東莞縣人 廣東文昌縣人 廣東寗陽縣人 廣東番禺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順德縣人 廣東新會縣人 廣東新會縣人 鄭翼之 袁憲章 董仁沛 鄭和調 曾 欽 初學開 寗漢山 王豊亨 趙 福 王 見 李芳亨 唐瑞元 王 瀛 王庚臣 張聲甫 蘇子卿 李寶士 蘇詠麟 李慶玉 鄺創由 鄭 成 黃蘭輝 黃 提 鄒蘭亨 李錦堂 劉 成 李星垣 李 宣 彭 垣 李先緖 張寶源 楊秀全 劉 麟 高汝通 張永盛 張汝霖 譚占魁 王家椿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潍縣人 山東平度州人 孫有賢 劉福全 王克敏 王顯昭 袁守約 翟 塾 畢金和 湖北麻城縣人 20 廣東香山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廣東順德縣人 廣東香山縣人 山東寗海州人 山東寗陽縣人 山東藍山縣人 山東海陽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黃縣人 57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江西淸江縣人 湖北沂州人 18 廣東新會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香山縣人 湖南古文坪縣人 江蘇上海縣人 江蘇上海縣人 22 山東平都州人 山東黃縣人 山東萊陽縣人 山東掖縣人 山東定陶縣人 山東掖縣人

71 黃守賢 曲從善 周慶雲 張秀朝 楊增華 葉邦彦 兪邦來 梁作和 周衣賢 山東寧海縣人 山東掖縣人 廣東南海縣人 廣東香山縣人 浙江紹興府人 浙江定海縣人 浙江定海縣人 廣東新安縣人 山東膠州人 王玉麟 周 林 鄭渭生 鄭德垣 林瑞珊 陳廣蔭 王東成 山東萊陽縣人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新寧縣人 廣東順德縣人 廣東嘉廡州人 劉 黃 黃 豊 山東潍縣人 錦 廣東順德縣人 林 廣東新寧縣人 29 劉燮亨 廣東歸善縣人 周祺蘭 廣東開平縣人 葉茂春 廣東歸善縣人 10 王淸明 山東福山縣人 史榮山 江蘇吳縣人 張滻階 湖北漢陽縣人 沈少春 浙江嘉興縣人 王有成 山東文登縣人 黃臨山 浙江鄞縣人 厉月亨 沈善伯 董薇星 林瑞林 鄭渭生 張 安 李贊庭 李先緖 鄭和調 合 計 江蘇無錫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廣東新寧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江西德化縣人 湖南永順縣人 廣東順德縣人 5 周孔元 浙江定海縣人 3 尹玉山 江蘇寶山縣人 孫漲生 江蘇寶山縣人 4 王益謙 鄺添盛 鄭翼之 張淮 湖北靳州人 廣東新會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周孔林 廣如茂 周 林 曾 欽 浙江定海縣人 廣東新寧縣人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6 7 施靜齊 浙江平湖縣人 麥榮三 廣東鶴山縣人 萬成美 湖北應城縣人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796~1803쪽. <표3-5-1> 仁川 淸商數에 대한 月別 統計 (1884) 年 月 1月 地 域 出 身 地 人 數 小 計 浙江人 2名 南方人 江蘇人 3名 6名 北方人 江西人 山東人 1名 10名 10名 浙江人 14名 江蘇人 1名 湖北人 1名 山東人 3名 直隸人 1名 廣東人 3名 浙江人 2名 北方人 山東人 52名 52名 4月 南方人 廣東人 16名 18名 16名 2月 南方人 20名 北方人 3月 57名 南方人 年 月 地 域 出 身 地 廣東人 南方人 6月 浙江人 人 數 小 計 7名 10名 3名 10名 16名 北方人 7月 南方人 5名 4名 北方人 5名 8月 南方人 名 浙江人 1名 江蘇人 1名 湖北人 1名 山東人 0名 3名 2名 2名 浙江人 2名 2名 北方人 山東人 1名 2名 9月 南方人 浙江人 1名 4名 3名

72 江 西 人 1 名 18 名 4 名 江 蘇 人 3 名 湖 北 人 1 名 廣 東 人 19 名 廣 東 人 3 名 5 月 10 月 南 方 人 江 蘇 人 2 名 22 名 南 方 人 浙 江 人 2 名 22 名 6 名 湖 南 人 1 名 湖 北 人 1 名 閏 5 月 南 方 人 廣 東 人 7 名 7 名 11 月 廣 東 人 6 名 南 方 人 29 名 北 方 人 山 東 人 22 名 22 名 7 名 江 西 人 1 名 廣 東 人 2 名 12 月 浙 江 人 1 名 南 方 人 5 名 湖 北 人 1 名 湖 南 人 1 名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796~1803쪽. 참고작성. 6 名 7 名 5 名 <표3-5-2> 仁 川 淸 商 數 와 出 身 地 別 比 率 (1884) 年 度 地 域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備 考 廣 東 人 浙 江 人 63 名 (31%) 28 名 (14%) 江 蘇 人 10 名 (5%) 111 名 南 方 人 江 西 人 3 名 (55%) 1884 年 202 名 湖 南 人 2 名 湖 北 人 5 名 北 方 人 山 東 人 90 名 (45%) 91 名 直 隸 人 1 名 (45%)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796~1803쪽. 참고작성. <표3-5>는 1884년 정월부터 12월까지 영업허가를 받고 인천에 상주 혹은 왕 래하면서 활동한 청상에 대한 출신지별 통계이다.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1884년 인천 청국조계지의 설정이 후,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인수는 그 전인 1883년에 비하여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전체 상인수가 202명으로 기록 되어 1883년의 54명보다 148명이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山 東 상인이 90명으로 기록되어 전체 45%를 차지하고 있어 1883년의 19명에서 71명이 증 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廣 東 상인은 63명이고 浙 江 상인은 28명이며 기타 湖 北, 湖 南, 江 蘇, 江 西 상인은 모두 19명이다. 따라서 이들 南 方 상인은 총 110 명으로 전체 55%를 점하고 있어 1883년의 65%보다 10%가 감소된 것으로 나 타났다. 다음으로 月 別 로 이들 청상들의 이주와 출신지를 분석하면 2월에는 주로 浙 江

73 상인, 3월에는 山 東 상인, 4,5월에는 廣 東 상인이 각각 주류를 이루고 있어 시기별 로 같은 地 域 상인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특히 1884년에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청정부가 인천 청국조계지의 활성화와 인천에서 청상들의 상권 확대를 목적으로 중국국내 청상들의 인천이주 를 적극적으로 권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884년 2월 27일, 陳 樹 棠 이 北 洋 大 臣 李 鴻 章 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바 陳 樹 棠 은 보고서에서 아 래와 같이 중국국내 청상들의 대폭적인 이주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1883년 10월 이후부터 인천항에 청상들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로 보이지만 아직 기대 치와는 큰 차이가 있다. 반면 일본상인은 상인수가 많아 특정 분야를 독점하여 이득을 취하려 하므로, 현 시점에서는 청상들의 영업허가 비용을 잠시 면제해 줌으로서 많은 중국 내 청상들의 인천이주를 권장해야 한다. 그리고 청상수가 많아 졌을 때, 이와 같은 비용을 징수하여 상무관련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3) 위와 같이 陳 樹 棠 은 인천지역에 대한 日 商 의 상권독점을 견제하고 청상의 상 권 확대를 도모하기 위하여 청상들의 이주에 대한 정부차원의 우대정책을 통하 여 중국국내 상인들의 인천이주를 권장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결과 <표3-5>에 서 나타나듯이 3월에 57명으로 청상의 인천이주가 대폭적으로 급증하였는바 2월 부터 閏 5월까지의 이주상황을 살펴보면 146명이 이주한 것으로 전체 72%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884년부터는 山 東 상인의 활동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山 東 半 島 와 인천항 간의 淸 國 帆 船 왕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청수 륙통상장정의 체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山 東 半 島 를 출발한 淸 國 정크선이 인천과 麻 浦 를 來 航 한데에 대하여 조선정부는 청국범선의 麻 浦 來 航 을 극력 반대하였다. 14) 이로 인해 양국간에는 많은 交 涉 이 진행되었으 며 결과 1884년 4월에 淸 國 정크 船 이 仁 川 海 關 에서 세금을 납부한 후 麻 浦 로 寄 港 할 수 있다고 허용하였다. 그리고 船 體 에 대한 기준을 200 噸 이하로 규정하였 다. 15) 이로부터 청국범선의 인천과 마포간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 졌는바 이 는 다른 한편 이 시기 청상들의 활발한 상업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표를 통하여 1884년 인천을 왕래한 청국 무역범선의 수량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 다. 16) 13)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3 卷, (837, 光 緖 10 年 3월 3일), 1357쪽. 14) 舊 韓 國 外 交 文 書 編 纂 委 員 會 編, 舊 韓 國 外 交 文 書 淸 案 Ⅰ, 서울: 高 麗 大 學 校 出 版 社, 1970, 42쪽. 15) 淸 案 Ⅰ, 82쪽

74 <표3-6> 仁川으로 往來한 輸入 帆船數 및 積載量 (1884) 年 月 1884年 正月 1884年 2月 1884年 3月 帆 船 名 源順興帆船 源順泰帆船 福順興帆船 協隆泰帆船 趙福昌帆船 苗新春帆船 積載重量 輸 入 地 48,000 烟台 47,000 烟台 10,000 烟台 31,000 烟台 44,000 烟台 49,000 烟台 單位: kg 仁川港入港日 正月 12日 23日 28日 6日 2月 8日 3月12日 梁永興帆船 21,000 烟台 3月24日 1884年 4月 王湧裕帆船 35,000 烟台 4月 8日 1884年 5月 雙源利帆船 42,000 烟台 5月13日 閏 5月 源順興帆船 楊長盛帆船 22,500 6,200 烟台 烟台 閏 5月15日 7月 1日 王長順帆船 6,200 俚島 7月 1日 寶成順帆船 26,000 烟台 7月18日 呂長興帆船 趙福昌帆船 于順興帆船 4,800 4,400 4,800 威海 烟台 烟台 7月24日 8月25日 8月12日 于元利帆船 4,800 俚島 8月13日 王長盛帆船 4,000 俚島 8月16日 楚順興帆船 4,800 俚島 8月16日 陳元興帆船 4,000 俚島 8月27日 孫連興帆船 4,800 威海 8月30日 孫利順帆船 6,400 威海 8月30日 陳福楨帆船 3,500 西島 9月18日 周吉利帆船 4,000 石島 9月23日 王永利帆船 6,400 威海 9月29日 戚二興帆船 4,800 威海 10月 6日 二合順帆船 4,800 俚島 10月 6日 雙合順帆船 陳興順帆船 4,000 48,000 俚島 烟台 10月 6日 11月10日 許增順帆船 48,000 俚島 11月10日 三合順帆船 3,500 俚島 11月29日 1884年 7月 1884年 8月 1884年 9月 1884年 10月 1884年 11月 16)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983, 光緖11年4月初3日, 附件 1, 光緖十年份進出仁川口帆船船號 姓名裝載擔數及進出日期 ), 1770~1775쪽

75 孫 義 順 帆 船 16,000 烟 台 11 月 25 日 王 永 利 帆 船 6,400 俚 島 12 月 20 日 1884 年 12 月 任 福 興 帆 船 4,000 烟 台 12 月 21 日 同 順 興 帆 船 17,500 烟 台 12 月 21 日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770~1775쪽. <표3-6-1> 仁 川 으로 輸 入 한 地 域 別 貨 物 量 및 比 率 (1884) 年 度 總 輸 入 量 輸 入 地 地 域 別 輸 入 量 備 考 烟 台 476,400kg 79.2% 俚 島 90,500kg 15.0% 1884 年 601,600kg 威 海 27,200kg 4.5% 石 島 4,000kg 0.7% 西 島 3,500kg 0.6%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770~1775쪽. 참고작성. <표3-6>은 1884년 정월부터 12월까지 인천으로 왕래한 무역수입 범선수와 적재량에 대한 통계인데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輸 入 地 는 주로 山 東 省 烟 台 로 기록되었으며 전체 35차 중, 18차로 51%를 점하고 있다. 다음으로 俚 島 가 10차이고 威 海 가 5차이며 石 島 와 西 島 는 각각 1차로 나타났다. 그리고 전체 수 입 적재량은 601,600kg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수입품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이 없으므로 이 시기 청상이 중국국내로부터 수입한 품목을 참고로 하면 주로 麻, 綿, 絹 등 직물류와 그 외, 잡화류일 것으로 짐작한다.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 의 상업 활동은 해마다 증가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는바 이는 1884년도 인천해관 에서 징수한 청상의 수출입화물에 대한 세금 액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 <표3-7> 月 別 仁 川 淸 商 의 輸 出 入 稅 (1884) 單 位 : 洋 元 年 月 輸 入 稅 ( 淸 仁 ) 輸 出 稅 ( 仁 淸 ) 備 考 1884 年 正 月 年 2 月 無 1884 年 3 月 1, 一 年 中 輸 入 最 多 1884 年 4 月 年 5 月 年 閏 5 月 年 6 月 年 7 月 ) 위의 책, 4 卷, (983, 光 緖 11 年 4 月 初 3 日, 附 件 7, 光 緖 十 年 正 月 起 至 12 月 底 止 朝 鮮 仁 川 海 關 徵 收 華 商 進 出 口 貨 稅 數 目 列 呈 ), 1810~1812쪽

76 1884年 1884年 1884年 1884年 1884年 合 8月 9月 10月 11月 12月 計 , 無 無 貿易 入超狀況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810~1812쪽. 참고작성. 注: 原 자료는 總 輸入稅가 8,509.93角이고, 總 輸出稅는 角으로 기록되었음. <표3-7>은 1884년 정월부터 12월까지 인천해관에서 징수한 청상의 수출입 해관세에 대한 통계인바 총 수입세는 英洋으로 8,514.93角이다. 이는 <표3-4> 의 1883년 총 수입세(4,543.61角)와 비교하면 약 2배의 成長率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표3-7>의 통계가 1884년 年間 수입세인 점을 감안할 때, 1883년의 4월간의 수입세와 비교하면 대체로 증가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 다. 특히 <표3-6>의 범선 왕래차수나 청으로부터 수입 총적재량으로 볼 때, 1883년에 비하여 크게 증가된 것으로 판단되지만 <표3-7>에서 기록된 총 수입 세가 1883년에 비하여 증가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 원인은 이들 청상의 수출입 품목의 상당부분이 免稅 혹은 減免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록 1884년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았지만, 1886년의 경우를 참고하면 인천해관에서 청상에 대하여 징수한 수출입세액 중, 免稅액이 각각 輸出入洋銀 118,520元(洋), 輸出金砂가격이 560,592元(洋)으로 기록되었다.18) 그리고 같은 시기 元山해관의 기록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바 원산인 경우 수출입화물의 562,498元(洋)에 해당한 부분이 면세되었다.19) 이는 1884년에도 이와 같이 청 상의 인천무역에 있어서 해관면세 부분이 어느 정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885년, 인천에서 활동한 청국 商人 數와 이들 상인들의 출신지에 대한 정보 는 아래 표에서 살펴보기로 한다.20) 18)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208, 光緖12年 2月 19日, 附件 2, 光緖12年朝鮮仁川海關進出口 貨稅項數 ), 2220~2221쪽. 19)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208, 光緖12年 2月 19日, 附件 7, 光緖12年朝鮮元山海關徵收進 出口貨稅項及華商完納貨稅 ), 2236~2237쪽. 20)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127, 光緖12年 2月 27日, 附件 2, 光緖11年份仁川華商姓名籍 貫 ), 2051~2054쪽

77 <표3-8> 仁川淸商 姓名 및 出身地 (1885) 姓 名 董維新 陳子琴 沈如林 王世楠 應友三 周玉芝 出 身 地 浙江鄞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定海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鄞縣人 廣東蕃禺縣人 姓 名 徐雨九 袁經笙 金葱卿 蔡明標 王三全 鄭翼之 出 身 地 浙江鄞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定海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廣東香山縣人 姓 名 周孔林 兪順炳 余再生 張明道 譚傑生 鄭渭生 出 身 地 浙江定海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慈谿縣人 廣東高要縣人 廣東香山縣人 周祺蘭 廣東開平縣人 馮聘西 廣東香山縣人 周材常 廣東開平縣人 陳文錫 陳儀三 廣東新宵縣人 廣東香山縣人 馮瑞鯉 張建5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鄭雲章 張三濰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林瑞珊 廣東新宵縣人 李 才 廣東新宵縣人 鍾 琛 廣東東莞縣人 鄺如茂 廣東新宵縣人 鄺 添 廣東新宵縣人 鄺 泮 廣東新宵縣人 何貞雄 廣東蕃禺縣人 關鴻琚 廣東蕃禺縣人 江 好 廣東高要縣人 梁 旺 廣東新會縣人 馮子林 廣東南海縣人 王 命 廣東新會縣人 鄺兆堂 廣東開平縣人 韓世昌 廣東蕃禺縣人 司徒維 廣東開平縣人 黃紹英 張少田 戴金明 廣東新宵縣人 江蘇上海縣人 江蘇崇明縣人 林竹卿 史榮山 胡德元 江蘇上海縣人 江蘇宜興縣人 湖北江夏縣人 李光緖 王讓三 湖南古文廳人 湖北薪州人 合 計 50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51~2054쪽. <표3-8-1> 仁川淸商數 및 出身地別 比率 (1885) 年 月 ~12 地 域 南方人 合 計 出 身 地 廣東人 浙江人 江蘇人 湖北人 湖南人 人 數 29名 14名 4名 2名 1名 50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51~2054쪽. 참고작성 比 率 58% 28% 備 考

78 <표3-9> 仁川港을 往來한 淸商人數 및 出身 (1885) 年 度 地 域 南 方 人 ~12 北 方 人 合 出 身 地 廣東人 福建人 江蘇人 江西人 人 數 5名 4名 4名 3名 山東人 1名 17名 計 比 率 備 考 16名 (94%) 1名 (6%)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54~2055쪽. 참고작성. <표3-8>을 통하여 알 수 있는바 1885년도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은 전체 50 명이고 그 중, 29명이 廣東상인이고 14명이 浙江상인이며 그 외, 江蘇상인과 湖 北 湖南상인이 각각 4명, 3명이다. 1885년인 경우, 1884년의 202명에 비하여 50명으로 기록되어 상당히 감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래 몇 가지 요인으 로 분석할 수 있는데, 우선 청국과 인천간의 무역에서 왕래무역에 종사한 상인의 상당부분이 <표3-8>에서 기록한 전체 청상의 50명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1884년 청국조계지의 설립과 이에 따른 陳樹棠의 중국국내 상인의 인천으로 유치할 데 관한 건의에 따라 1884년에 청상들의 인천이주가 급 증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1885년인 경우, 전후시기의 제반 요소를 감안 할 때, 오히려 뚜렷한 急增 혹은 急減이 아닌 일반수준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들의 출신지역을 분석 하면 주로 남방상인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으로 남방상인의 상권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당연히 山東상인의 세력을 서울 쪽으로 집중되게 작용하였으며 따라서 <표3-8>과 같이 1885년에는 전체 50명 중, 100%가 전부 남방상인인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인천은 廣 東상인과 浙江상인이 각각 58%와 28%를 차지하고 있어 이 두 지역 상인들의 세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필자가 제2장에서 주장한 軍役상인의 출 신지역을 남방계열로 판단하는 推論을 다시 한번 뒷받침 해 준다고 볼 수 있겠 다. 인천해관은 1885년 8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이전의 모든 수출입내역서와 관련된 문서들을 전부 분실하였는바 袁世凱는 1886년(光緖 12) 2월 27일, 李鴻 章에게 보고서를 보내면서 1885년(光緖 11) 8월 23일부터 12월말까지 인천해관 에서 발생한 수출입화물 세금액과 항목, 그리고 같은 시기 부산과 원산의 상황에 대하여 아래 표와 같이 보고하였다.21) 21)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128, 光緖12年 2월 27일), 2066~2068쪽

79 <표3-10> 仁川 釜山 元山 3港口 輸出入貨物稅 比較 (1885) 地 域 仁川海關 8月~12月 釜 山 1月~12月 輸出入貨物 輸出入稅 782,694元 42,756元 707,127元 35,351.97元 華 商 稅 17,837元 (42%) 輸出入洋銀 免稅 214,868元 1,543.70元 (4.4%) 85,764元 免稅項目 52,945元 金砂輸出 112,357元 韓錢輸出 84,586元 金砂輸出 81,249.60元 元 山 1月~12月 合 計 564,052元 25,276元 1,483元 (5.9%) 15,615元 韓錢輸入 357,145.22元 金砂輸出 2,053,873元 103,383.91元 20,863.7元 316,247元 688,282.82元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66~2068쪽. 참고작성.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1885년 인천 부산 원산 3항구의 수출입화물과 이 들 수출입화물에 대한 세액은 인천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인천해관 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1885년 8월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그 이전에 발생한 수출입화물과 수출입세액에 대한 문서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므로 실지로 동년 8 월 이후부터 발생한 무역량과 이에 해당한 세금 액에 한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과 원산의 년 중 발생한 무역량과 세금 액보다 많은 것 으로 기록되어 이 시기 인천항에서의 무역활동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 청상들의 활동도 위 표와 같이 인천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 어져 세금액도 부산과 원산에 비하여 훨씬 많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부산의 경우, 日商의 상업 활동이 활발한 반면에 청상의 활동은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 다. 1885년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의 출신지를 고찰하면서 종래 韓國華僑史上 전설 적인 인물로 거듭났던 同順泰號 주인이자 巨商인 譚傑生의 활동에 주목되는바 아래 同順泰號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알아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在韓화교사 회에 알려진 巨商 譚傑生에 대한 정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同順泰는 서울 水標橋 부근에 점포를 설치하고 있었으며 1885년 袁世凱 부임 후, 그의 적극적 인 지원을 받으면서 강대한 자본력으로 화교사회에 부각되었다. 따라서 譚傑生의

80 同順泰號는 이 시기 화상들의 總本山과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청상의 상권 확장 에 앞장서는 역할을 하였다.22) 특히 京仁間의 物資輸送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袁世凱는 청정부의 지원을 받는 한편 同順泰號와 같이 자본력이 풍부한 화상들을 동원하여 1893년에 京仁航運會 社를 설립하였는데, 전체 25,000弗 중, 同順泰號의 자본 8,000弗을 비롯하여 유 력한 청상들의 出資로 京仁航運會社가 설립되었다.23) 그런데 필자가 찾아본 자 료에 의하면 위와 같은 사례는 정확하지만, 同順泰號의 실제 主人이 지금까지 알 려진 譚傑生이 아니라 譚以時로 기록되어 있어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발 견하였다. 특히 譚以時가 同順泰號의 주인 즉 법인대표라는 사례는 조 청간의 借款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고 있는바 어떤 요인으로 譚傑生이 同順泰號의 주인인 것으로 전해왔는지가 의문이다. 1892년(光緖 18)에 袁世凱가 李鴻章에게 보낸 보고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朝鮮 外署 閔種墨이 德國 世昌洋行으로부터 구입한 윤선에 대한 지불건과 관련하여 淸으로부터 洋銀 10萬兩을 차관하려고 하는바 淸은 한국 내에 있는 자금이 풍부 한 華商을 선출하여 이를 차관해주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보고문에서 同順泰號의 主人인 譚以時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朝鮮에 거주하고 있는 華商에 대해 조사해 본 결과 유일하게 廣幫董事인 同順泰號의 資本이 가장 豊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同順泰는 한국 내에서도 仁川 元山에 支社를 설치하고 있으며 日本의 長崎와 중국의 上海 廣東 홍콩 등 港口에도 支社를 소유하 고 있다. 同順泰의 主人 譚以是는 勤勉하고 公正하고 謹愼하여 충분히 이번 일을 감당 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24) 위의 보고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同順泰號의 지사가 인천에도 존재했다는 내용 이다. 그러므로 위 보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알려진 同順泰號의 주인으로 인식 된 譚傑生은 同順泰號 仁川지사의 支社長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25) 1885년 서울에서 활동한 청상 수와 출신지에 대한 분석은 같은 시기 인천과 22) 京城府 編, 京城府史 2卷, 1936, 596쪽. (高承濟의 앞의 논문, 華僑對韓移民의 社會史的 分析, 151쪽에서 재인용). 23) 高承濟, 위의 논문, 152쪽. 24) 淸季中日韓關係史e 5卷, (1725, 光緖18年 9月 初5日, 北洋大臣李鴻章文稱 ),...(中略) 遵 査在韓商家惟廣幫董事同順泰號資本殷實 在韓之元山仁川 日本長崎各口及上海廣東香港等埠 均有 聯號 其號主譚以時頗公正謹愼 洵堪責令承辦此事... ), 2045~2051쪽. 25) 同順泰號의 주인이 譚以時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상당히 많은바 본 논문 부록 1에 첨부하 여 증빙자료로 제공한다

81 비교하여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아래 표에서 살펴보기로 한다.26) <표3-11> 서울淸商 人數 및 出身地 別 比率 (1885) 年 度 1885年 地 域 南 方 人 北 方 人 合 出 身 地 廣東人 浙江人 江蘇人 江西人 湖南人 湖北人 山東人 直隸人 北京順天府人 計 人 數 5名 (4.5%) 29名 (26%) 9名 (8.2%) 2名 3名 2名 55名 (50%) 4名 1名 110名 比 率 50名 (45%) 60名 (55%)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45~2051쪽. 참고작성.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1885년 서울에서 활동한 청국상인 수는 110명인데 그 중, 浙江상인 29名(26%), 山東상인 60名(54%), 廣東상인 5名과 江蘇상인 9名, 그리고 湖北과 湖南상인이 6명이고 江西상인이 2명으로 기록되었다.27) 특히 서 울인 경우 같은 시기 인천의 50명에 비하여 110명으로 기록되어 상인 수가 훨 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서울은 山東상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廣 東상인은 극히 적은 수자로 겨우 5명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부산지역에서는 주 로 往來商人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로 있었는데, 전체 17명 중, 廣東商人이 5명이 고 江西상인 3명, 江蘇상인 4명과 福建상인 4명, 그리고 山東상인이 1명으로 기 록되었다.28) 그 외, 琿春 仁川 元山을 거처 釜山港에 도착하여 물품구입 유람하는 淸商 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부산을 거점으로 왕래무역에 종사한 청상 수만 90명으로 통계되었는데 그 중, 廣東상인이 35명(39%)이고 浙江상인 이 25명(28%)이며 山東상인이 19명(21%)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11명은 直隸상 인, 天津상인, 吉林상인과 江西상인으로 구분되었다.29) 26)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45~2051쪽. 27)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127, 光緖12年 2月 27日, 附件 1 光緖11年份漢城華商姓名籍 貫 ), 2045~2051쪽. 28) 위의 책, 4卷, (1127, 光緖12年 2月 27日, 附件 3, 光緖11年份釜山商民及過往商人 ), 2054~ 2055쪽. (이들 청상에 대한 상세한 통계표는 부록1 참조.)

82 원산의 경우, 청상의 활동이 인천이나 부산에 비하여 상당히 미미한 것으로 나 타났는바 1885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13명 중, 廣東상인이 9명이고 浙江상인 이 1명, 江西상인 1명, 安徽상인 1명과 湖北상인이 1명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들 13명은 이 시기 이미 원산에 점포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원산에서도 廣東人은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0) 그 외, 이 시기 원산을 거점으 로 왕래무역에 종사한 행상들도 상당수 있었는바 78명으로 통계되었다. 이들 78 명 중, 廣東상인이 24명(31%), 浙江상인이 14명(18%), 山東상인이 17명(22%), 江蘇상인이 10명(13%)이고 나머지는 13명은 湖北상인, 直隸상인, 그리고 四川상 인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江蘇상인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수를 점하고 있는 것으 로 기록되었다.31) <표3-12> 仁川淸商 人數 및 地域 別 比率 比較表 (1883~1885) 年 月 1883年 1884年 1885年 合 計 全體人數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南方人 29名 87.8% 北方人 4名 12.1% 南方人 111名 55% 北方人 91名 45% 50名 南方人 50名 100% 285名 南方人 北方人 190名 95名 67% 33% 33名 202名 備 考 廣東人: 11名 浙江人: 10名 山東人: 3名 廣東人: 63名 浙江人: 28名 山東人: 90名 廣東人: 29名 浙江人: 14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796~1803쪽 ; 同書, 2051~2054쪽. 참고작성. 지금까지 淸季中日韓關係史e 를 중심으로 1883년 11월부터 1885년까지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의 성명과 출신지, 그리고 인천으로 왕래한 청국 무역선박 의 차수와 적재량, 그 외, 청상이 인천해관에 납부한 세금 상황을 같은 시기 서 울 부산 원산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초기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들을 출신지별로 분석하면서 인천 화교사회의 구성을 고찰하였다. 한마디로 <표 29) 위의 책, 4卷, (1127, 光緖12年 2月 27日, 附件 4, 往來琿春仁川元山等埠附輪绕道釜山港登岸 遊玩購物到署報名華 ), 2055~2060쪽. (왕래 상인에 대한 구체적인 출신지와 성명은 부록 2의 통계표를 참조.) 30) 위의 책, 4卷, (1127, 光緖12年 2月 27日, 附件 5, 光緖11年分元山港華商曁往來販運行商花名 籍貫 ), 2060~2061쪽. (상세한 사항은 부록3의 통계표를 참조.) 31) 위의 책, 4卷, (1127, 光緖12年 2月 27日, 附件 5, 光緖11年分元山港華商曁往來販運行商花名 籍貫 ), 2061~2065쪽. (상세한 사항은 부록4의 통계표를 참조.)

83 3-11>의 종합 통계표가 설명하듯이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은 주로 廣東商人 浙江商人 山東商人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체 285 명 중, 南方人32)은 190명으로 전체 67%를 점하고 北方人33)은 95名으로 전체 33%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은 주로 南方상인인 것으 로 확인되었다. 해외화교사회의 이주지역에 대한 분포상황을 분석하면 강제징용 외, 대체적으 로 지정학적인 원인이 가장 큰 비중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강제징용 혹은 반 강제성을 띤 계약노동이민을 제외하고 흔히 自國의 原 居住地에서 육로 또는 해로로 가장 가까운 거리, 혹은 교통상 편리한 지역을 택하는 것이 일반상 황이다. 특히 한반도로 이주한 초기 청상인 경우, 완전한 자유상인의 신분이었고 아울러 동남아지역과 같이 중국인의 이주역사가 오래된 것도 아닌 新開拓地와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중국 최남단 의 廣東상인과 浙江상인의 이주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상황은 1882년부터 한반도에서 상업 활동에 종사한 軍役商人의 출신 지를 남방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즉 軍役상인은 한반도에서 3년간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이미 廣東人과 浙江人 들에게 한반도의 상업 정보를 제공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초기 인천화교사회와 같이 중국 남방상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34) 1883년부터 1885년까지를 한반도에서 활동한 청상의 출신지는 초기 1883년 을 제외하면 중국의 南方人으로부터 北方人에 이르기까지 중국 내 각 地域의 상 인들로 초기 화교사회가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국의 조선에 대한 외 교정책과 조선에서 淸의 정치적 지위, 그리고 청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 정책에 기인된다. 그 외, 조선 내 일본세력을 견제하는 일환으로 청정부가 중국 내 유력상인의 조선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한 결과이며 특히 軍役商人의 작용이 상당한 컷을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초기 한국의 화교사회는 본국인 淸정부의 적 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았을 뿐 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商術과 財力을 겸비 32) 본 논문에서는 長江流域 以南 地域人을 南方人으로 규정하였다. 그 중, 근대초기부터 한반도 에서 활동한 南方人을 省別로 구분하여 고찰하면 주로 江蘇省 江西省 浙江省 湖北省 湖 南省 福建省 廣東省 등 지역의 상인들이 한반도에서 무역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33) 본 논문에서는 山東省을 중심으로 하는 黃河流域人을 北方人으로 규정하였다. 근대초기부터 한반도에서 활동한 이들 북방인은 주로 山東省 河北省 直隸人 河南省 安徽省 등 地域人 이다. 34) 해외화교들의 분포 상황을 고찰하면 대체적으로 지정학적인 원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 로 나타났다. 예컨대 廣東人과 福建人은 이 두 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동남아시아 혹은 일본 으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山東人과 滿洲人은 한반도 일본 러시아로 이주한 것으로 나 타났다

84 한 유력한 商 人 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海 外 華 僑 史 에서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화 교사회의 화려한 출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청상들의 이주가 점점 급증 하면서 아울러 山 東 省 과 같은 가까운 지역민의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화 교사회는 서서히 구성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85 2. 仁川華僑社會의 構成變化와 그 實態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들의 상업은 1886년에 이르러 본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동안 한반도 상세에 대한 파악과 상업 경험, 그리고 1885년 10월, 陳樹棠의 離任에 이어 袁世凱의 부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장 2절에 서 언급했듯이 袁世凱는 부임하면서 바로 淸國人 潛商들의 밀무역과 관련하여 제반 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이 시기 조선 내 청상의 상업 활동과 상권 확장에 전력하였다.35) 그러므로 청상의 상업은 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하는 양상으로 나 타났는데. 특히 1886년부터 인천 화교사회의 구성은 전에 비하여 크게 변화하였 는바 우선 이 시기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들의 출신지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살 펴보기로 한다.36) <표3-13> 姓 名 張三維 周祺東 陳如三 譚傑生 關鴻琚 何眞雄 李 才 鄺如茂 韓世昌 鄺如動 周鳳岐 黃 輝 何萬能 陳子琴 陳馨甫 王世楠 謝阿二 張福壽 姚連桂 沈福年 丁阿安 鄔敬廷 仁川淸商 姓名 및 出身地 (1886) 出 身 地 姓 名 出 身 地 廣東香山縣人 張 安 廣東香山縣人 廣東開平縣人 周蒙龍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譚晴湖 廣東高要縣人 廣東高要縣人 羅佩章 廣東鶴山縣人 廣東番禺縣人 邵松芝 廣東番禺縣人 廣東番禺縣人 馮子林 廣東南海縣人 廣東新寗縣人 林瑞芝 廣東新寗縣人 廣東新寗縣人 鄭渭生 廣東香山縣人 廣東番禺縣人 司徒維 廣東開平縣人 廣東新寗縣人 鄺如川 廣東新寗縣人 廣東開平縣人 鄭元輝 廣東香山縣人 廣東新寗縣人 何麗堂 廣東高要縣人 廣東番禺縣人 董維新 浙江鄞縣人 浙江鎭海縣人 丁梅先 浙江鎭海縣人 浙江鎭海縣人 應子穆 浙江慈谿縣人 浙江鎭海縣人 沈阿才 浙江鎭海縣人 浙江海寗縣人 陳毓葆 浙江鎭海縣人 浙江慈谿縣人 王欽珊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吳厚 浙江鄞縣人 浙江定海縣人 山全福 浙江鎭海縣人 浙江定海縣人 葉臣豪 浙江慈谿縣人 浙江奉化縣人 袁連生 浙江鎭海縣人 姓 名 周 林 鄭雲章 譚以莊 周玉芝 陳文錫 鄺 泮 鄭翼之 鄺兆榮 王乾福 鄭 燿 朱文勝 梁 旺 嚴5生 周春華 馮采臣 沈少春 朱田華 蔡明標 楊阿貴 應有生 范獻卿 周阿玉 出 身 地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高要縣人 廣東番禺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新寗縣人 廣東開平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香山縣人 廣東新會縣人 廣東新寗縣人 浙江鄞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平湖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35) 林明德, 袁世凱與朝鮮, 台北: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0, 106~127쪽. 36)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208, 光緖13年 2月 19日, 附件 1, 光緖12年分仁川華商姓名籍 貫 ), 2209~2220쪽

86 余仁丙 顔英甫 呂友笙 董方生 周慶生 馮淸一 陳聿笙 王錫威 張有賢 對克正 張汝霖 劉安民 劉志祿 劉 照 劉延文 劉文起 楊國仁 高汝亨 劉金湯 姜恒已 張學詩 李連開 王是敏 劉超元 隨明遷 解天武 劉德雲 呼德章 紀立東 廷雲淸 張延令 乙 慶 張會甲 李先緖 石金發 黃欣然 楊在上 戴成羣 張丙炎 鄒寬祥 韓雲楚 鄭世元 林順淸 浙江定海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餘姚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鎭海縣人 山東新太縣人 山東平度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招遠縣人 山東黃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膠州人 山東黃縣人 山東萊陽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濰縣人 山東濰縣人 山東長淸縣人 山東蓬萊縣人 湖南文坪廳人 江蘇上海縣人 江西德化縣人 湖南長沙縣人 江蘇崇明縣人 江西德化縣人 江西德化縣人 直隸天津縣人 湖北黃岡縣人 湖北黃岡縣人 陳德濟 葛仰山 蔡雲亭 張和生 吳岡潤 怍星采 徐阿九 于連士 王昌太 舒立仁 劉安邦 趙成先 劉吉松 成延福 徐明聲 劉長茂 高汝通 高汝5 王義增 何景曲 仲延2 封仁香 潘作智 劉吉元 趙朋湖 徐全之 石玉堂 趙如蘭 王樹茂 王學智 王文海 侯德熙 王讓三 林竹卿 王成蔭 齊尊義 余 春 湯程九 吳5堂 畢金和 史榮山 徐光銀 汪春美 浙江慈谿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鄞縣人 浙江定海縣人 浙江定海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莒州人 山東黃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招遠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黃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諸城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齊東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棲霞縣人 湖北蘄州人 江蘇上海縣人 安徽歃縣人 江西餘干縣人 江蘇上海縣人 江西德化縣人 江蘇陽湖縣人 湖北麻城縣人 江蘇宜興縣人 湖北孝感縣人 湖北黃安縣人 王俊 許希榮 周輔臣 鄭函常 李才發 戴仁才 李光明 馬志謙 王克敏 劉吉士 劉安梁 王浩琴 王 鳳 王學恩 趙玉奎 王中九 劉吉桂 高汝發 許世昌 于 方 高汝興 劉文令 王吉先 劉公田 李自倫 姜中心 蕭脉侯 楊雙奎 劉厚田 鞠明魁 張寶山 侯元和 戴金明 張少田 舒正興 張德興 楊秀全 包阿小 周觀庭 徐漢仙 湯天喜 李金寶 唐根芳 浙江慈谿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鎭海縣人 浙江慈谿縣人 浙江鄞縣人 浙江鄞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招遠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招遠縣人 山東黃縣人 山東黃縣人 山東莒縣人 山東文登縣人 山東黃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榮成縣人 山東黃縣人 山東榮成縣人 山東黃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寗海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蓬萊縣人 山東福山縣人 山東棲霞縣人 江蘇崇明縣人 江蘇上海縣人 湖北黃陂縣人 湖北孝感縣人 江蘇上海縣人 江西德化縣人 湖北漢陽縣人 湖北武昌縣人 江西臨川縣人 湖北漢陽縣人 江蘇上海縣人

87 王 榮 江 蘇 陽 湖 縣 人 周 德 威 河 南 項 城 縣 人 呂 文 同 安 徽 鳳 陽 縣 人 王 鼎 三 湖 北 蘄 州 人 陳 文 山 湖 北 黃 岡 縣 人 唐 蘭 亭 江 蘇 上 海 縣 人 曹 榮 江 蘇 上 海 縣 人 戴 元 惠 浙 江 鄞 縣 人 侯 元 順 山 東 棲 霞 縣 人 劉 安 淸 山 東 黃 縣 人 合 計 205 名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2209~2220쪽. <표3-13-1> 出 身 地 別 仁 川 淸 商 人 數 및 比 率 (1886) 年 月 地 域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備 考 廣 東 人 37 名 廣 東 人 18% 廣 東 商 人 數 浙 江 人 50 名 南 方 人 浙 江 人 24% 적어지고 浙 江 蘇 人 13 名 122 名 江 商 人 數 가 江 西 人 7 名 (60%) 其 他 南 方 人 많아짐. 湖 北 人 13 名 1886 年 (17%) 湖 南 人 2 名 기타 타 지 山 東 人 79 名 北 方 人 山 東 人 39% 역 南 方 商 人 直 隸 人 1 名 83 名 其 他 北 方 人 數 도 많아짐. 河 南 人 1 名 (40%) (2%) 安 徽 人 2 名 合 計 205 名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2209~2220쪽. 위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1886년에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 人 數 는 205 名 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1885년의 50명에 비하여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 났다. 특히 1886년부터는 인천에서 활동하는 山 東 상인이 數 的 으로 급증한 것으 로 나타났는바 전체 205 名 중, 山 東 상인은 79명(39%)이고 浙 江 상인은 50명 (24%), 廣 東 상인은 37명(18%)으로 기록되었다. 山 東 人 을 제외한 북방인으로는 直 隸 人 이 1명이고 河 南 人 이 1명이므로 山 東 省 을 중심으로 한 北 方 商 人 은 전체 205 名 중, 81명으로 약 40%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886년부터 산동인을 중심으로 한 북방인의 진출이 급증하고 있으며 따라서 북방인이 점하 는 비율도 점점 증가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하면 인천의 화교사회는 이 미 본격적으로 구성변화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 <표3-14>와 같이 龍 山 의 상황은 이와 반대로 북방상인이 전 체 120명 중, 75명으로 62.5%를 차지하고 있어 남방상인이 45명(37.5%)인데 비하여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7) 특히 산동상인만 65명으로 37)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1208, 附 件 5), 2226~2233쪽

88 전체 54%를 점하고 있어 산동인의 점유율이 점점 증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표3-14> 龍 山 淸 商 人 數 및 出 身 地 別 比 率 (1886) 地 域 出 身 地 人 數 比 率 備 考 廣 東 人 9 名 南 方 人 浙 江 人 14 名 南 方 商 人 江 蘇 人 10 名 45 名 江 西 人 2 名 37.5% 湖 北 人 10 名 山 東 人 65 名 (54%) 北 方 人 安 徽 人 3 名 北 方 商 人 75 名 河 南 人 4 名 62.5% 直 隸 人 3 名 合 計 120 名 100% 출처: 淸 季 中 日 韓 關 係 史 e 4 卷, 2226~2233쪽. 참고작성. 앞에서 살펴본 1883년부터 1886년까지 인천에서 활동한 청상의 출신지 중, 유일하게 福 建 商 人 의 활동이 보이지 않거나 아주 적어 주목된다. 한편 福 建 商 人 은 1886년부터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은 부산에 常 住 혹은 부산을 거점으로 왕래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 1886년 에 부산에 常 住 혹은 부산에서 왕래무역에 종사한 청상들의 출신지를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38) <표3-15> 1886 年 釜 山 港 常 住 淸 商 및 往 來 淸 商 姓 名 月 別 姓 名 往 來 地 名 籍 貫 月 別 姓 名 往 來 地 名 籍 貫 正 月 何 文 德 往 仁 川 俱 廣 東 人 四 月 譚 以 端 來 釜 山 廣 東 人 李 麟 閣 往 元 山 馮 有 林 往 仁 川 浙 江 人 林 小 波 仁 川 來 章 子 生 往 仁 川 廣 東 人 二 月 馮 瑞 廷 俱 元 山 來 往 仁 川 俱 廣 東 人 譚 以 莊 往 仁 川 廣 東 人 郭 杏 林 俱 元 山 來 往 仁 川 羅 章 佩 往 仁 川 廣 東 人 周 昭 廷 俱 元 山 來 往 仁 川 田 應 斗 琿 春 來 山 東 人 梁 爵 和 往 仁 川 孫 永 和 琿 春 來 山 東 人 沈 春 山 往 仁 川 浙 江 人 王 學 春 琿 春 來 山 東 人 38) 위의 책, (1208, 光 緖 12 年 2 月 19 日, 附 件 3, 謹 將 遵 査 光 緖 12 年 分 釜 山 港 常 住 華 商 及 過 往 華 商 姓 名 開 呈 ), 卷 4, 2221쪽

89 三月 五月 六月 七月 馮器之 元山來 廣東人 王元登 琿春來 山東人 李前海 往琿春 湖北人 劉世官 琿春來 直隸人 陳華村 往琿春 湖北人 安汝廣 琿春來 直隸人 羅明著 來釜山 廣東人 周昭廷 來仁川 廣東人 韓子祥 來釜山 江蘇人 葉守美 釜山住 福建人 何少華 來釜山 江蘇人 妻黃氏 福建人 湯成九 來釜山 江西人 子慰亭 福建人 王求道 來釜山 福建人 佳亭 福建人 鍾違聰 仁川來 廣東人 太亭 福建人 王時齊 往琿春 山東人 薛得久 王正山 往琿春 浙江人 妻卓氏 王正福 往琿春 浙江人 鄭時之 東洋來 福建人 陳福明 長崎來 福建人 陳洪琳 東洋來 福建人 王貞 元山來 浙江人 陳業 東洋來 福建人 陳范臣 元山來 浙江人 王禹月 仁川來 山東人 施治中 元山來 浙江人 譚樹堂 元山來 廣東人 譚樹堂 往元山 廣東人 馮器之 元山來 廣東人 羅秉臣 往元山 廣東人 周與福 元山來 浙江人 何雲甫 來釜山 廣東人 周月松 仁川來 廣東人 鄭瑞芬 來釜山 廣東人 陳良 琿春來 廣東人 高殿昭 來釜山 廣東人 李養軒 琿春來 廣東人 謝代維 來釜山 廣東人 張星暉 琿春來 廣東人 謝常茂 黃贈波 來釜山 來釜山 廣東人 廣東人 陳南山 馮禮 琿春來 仁川來 廣東人 廣東人 剛學之 祝擷珊 邱雲卿 陳北 來釜山 來釜山 來釜山 來釜山 廣東人 江蘇人 山東人 廣東人 十一月 鄧貢臣 譚樹堂 馮星垣 鄺春生 琿春來 琿春來 琿春來 琿春來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林渴賢 往琿春 廣東人 聶省三 琿春來 廣東人 馮耕三 回上海 江蘇人 十二月 王樹茂 來釜山 山東人 包詩友 元山來 浙江人 喬振東 來釜山 山東人 毛文淦 姚初寶 張錦福 元山來 來釜山 往長崎 浙江人 浙江人 山東人 江裕啓 往長崎 山東人 九月 釜山住 福建人 福建人

90 邱金標 陶歡甫 金成品 來漢城 在海關 在祥起號 山東人 江蘇人 江西人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221쪽. <표3-15>에서 나타나듯이 일부 상인들은 琿春-元山-釜山-琿春을 왕래하며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산을 거점으로 往來무역에 종사 하는 청상들은 대체적으로 琿春港, 元山港, 釜山港, 長崎港과 仁川港을 오가며 활 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琿春으로부터 많은 무역상들이 부산으로 이주하고 있는 양상도 보이고 있는바 이는 무역활동 중심지를 琿春으로부터 부산으로 이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往來商 중에는 山東人 뿐만 아니라 廣東人도 상당수 차지하고 있다. 한편 위 표를 통하여 확인된 葉守美와 薛得久는 福建人으로 가족과 동반하여 1886년에 이미 부산에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시기 부 산에서는 이와 같이 福建人의 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 바 이와 같은 상황은 福建人이 주류를 이루는 일본 長崎 화교사회와 관련이 있 다고 생각한다.39) 특히 개항초기부터 부산은 일본상인이 집중된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의 두 福建人 가족은 長崎에서 온 부산支店장, 혹은 지점 담 당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청상들의 경영은 대개가 본국, 혹은 일본에 本店을 두고 한국에 支店 을 설립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들은 한국에서도 중국에서 경영하던 상 업방식대로 청상들 간의 신용거래망을 형성하면서 무역활동을 진행하였다.40) 이 러한 상황은 근대 초기 중국 上海租界地에서 歐美商社가 경영하던 방식 즉, 중 외상인 사이의 仲介者로 활동한 買辦商人에 의하여 경영되었다는 점과 큰 차이 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현지인인 한국인과의 융합을 이룰 수 없는 요 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41) 1886년 청상의 활동과 관련하여 이 시기 청상이 인천해관에 납부한 세금관련 사항은 아래 표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바 1883년부터 1886년까지의 납세상황 39) 福建人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 화교사회에서도 廣東人 다음으로 주류 를 이루고 있다. 福建人은 일본의 외국인에 대한 入國 제한정책으로 대체적으로 먼저 대만으 로 건너가 일본국적을 취득하고 다음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40) 예컨대 1883년 부산에서 개업한 德興號는 일본 神戶에 있던 公興號의 부산지점이었고 1890 년 인천에서 개업한 協記號도 山東省 烟臺에 本店을 두고 있는 인천지점이었다. (秦裕光, 華 僑 (10) 華商의 成功秘訣, 中央日報 1972년 9월 28일자.) 41) 郝延平 지음 이화승 옮김,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매판,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 35~57쪽

91 을 일괄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42) <표3-16> 1883年~1886年 仁川 淸商 輸出入稅 比較表 種目 年度 淸 商 輸 入 稅 淸 商 輸 出 稅 淸 商 船 稅 1883年 1884年 8, 年 單位: 洋元 1886年 仁川港輸出入貨物 1,760, 淸商輸出入貨物 仁 川 輸 出 入 稅 431, , 淸商輸出入稅 4, , , 免徵稅項 輸出入洋銀 各數目 合 118, 輸出金砂 計 29, , , , , ,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3권~4卷을 참고작성. <표3-16>을 통하여 알 수 있는바 1886년도 인천에서 청상의 무역활동은 전 체 인천항의 수출입화물이 1,760,032.00元인데 반하여 청상의 화물량은 431,818.83元으로 통계되어 약 2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천항의 총 수입세가 80,459.36元인에 반하여 청상의 수입세는 29,385.55元으로 전체 37%를 차지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1883년부터 1886년까지 청상이 인천해관에 납부 한 수출입세의 변화를 분석하면 해마다 약 2배의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 타났다. 따라서 1886년의 수출입 세는 1883년의 6배 남짓한 수치로 기록되었 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은 인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대체적으로 증가폭 을 보이며 나타났다. 특히 1886년에 이르러 한반도에서 청상의 상업은 전에 비 하여 큰 폭으로 성장하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같은 시기 용상의 상황을 살펴보면 1886년 龍山에서 활동한 淸商數는 120명이며 그 중, 山東人이 65명, 浙江人이 14명, 廣東人이 9명, 江蘇人이 10명, 湖北人이 10명, 江西人이 2명, 安徽人이 3명, 河南人이 4명, 直隸人이 3명인 것 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山東, 河南, 直隸 등 北方인은 전체 120명 중, 72명으 로 60%를 차지하고 있어 용산에서도 산동인은 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말 해준다. 이와 같은 상항은 1886년부터 눈에 띄게 나타나는바 이 시기부터 淸商數의 증 42)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1208, 光緖13年 2月 19日, 附件 2, 光緖12年分仁川海關徵收稅 钞及貨物數目 ), 2221쪽

92 가와 더불어 유력상인의 占有率은 점점 적어지고 있는 반면에 영세상인의 比率 이 서서히 높아가는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1887년부터 1890년까지 4년간 인천 과 기타 개항장에서 활동한 청상에 대한 출신지별 기록은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 므로 1891년(光緖 17)도 서울 인천 부산 원산 등 지역의 淸商數와43) 1892 년(光緖 18)도 각 지역의 淸商數44), 그리고 1893년(光緖 19) 淸商數45)와 점포 수46)를 아래 표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표3-17> 漢城 仁川 釜山 元山 淸商人數 (1891~1893) 番號 年 度 서울淸商人數 仁川淸商人數 釜山淸商人數 元山淸商人數 合 計 1891年 751名 563名 138名 37名 1,489名 1892年 957名 637名 148名 63名 1,805名 1893年 1,254名 142家 711名 117家 142名 21家 75名 10家 2,182名 290家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5卷, 2978쪽, 3138쪽 ; 同書, 6卷, 3276쪽, 3276~3277쪽. <표3-17>은 1891년부터 1893년까지 서울 인천 부산과 원산에서 활동한 淸商數와 淸人 店鋪數에 대한 비교표이다. 특히 표에서 알 수 있는바 1891년부 터 서울의 淸商數는 인천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부 산에서 청상의 활동은 초기부터 꾸준히 적은 人數로 나타났는바 이는 부산의 상 권이 개항 이래 계속 日商에게 독점되었던 점에 기인한다. 특히 1893년도 일본 인에 대한 통계를 참고하면 전체 8,882명 중, 부산은 4,778명이고 서울은 828 명이며 인천은 2,560명이고 원산은 716명으로 부산에서 日商의 상세를 설명하 고 있다.47) 원산의 경우 청상들은 대체적으로 지리적 원인으로 주로 왕래 무역을 진행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1886년 원산항에 점포를 개설한 청상수가 12명인데 반 43) 淸季中日韓關係史e 5卷, (1674, 光緖18年 5月 20日, 咨送光緖十七年份朝鮮各口華商淸冊 ), 2978쪽. 44) 위의 책, (1786, 光緖19年 3月 初5日, 咨送朝鮮漢城等處鋪戶人數淸冊 ), 3138쪽. 45) 위의 책, 6卷, (1873, 光緖20年 3月 11日, 咨送光緖十九年分朝鮮各口華商總數淸冊 ), 3276쪽. 43) 위의 책, (1873, 光緖20年 3月 11日, 附件1, 光緖十九年分漢城華商鋪戶人數及産業數目, 附件 2, 光緖十九年分仁川華商鋪戶人數, 附件3, 光緖十九年分釜山華商鋪戶人數, 附件4, 光緖十九 年分元山華商鋪戶人數 ), 3276~3277쪽. 47) 위의 책, (1874, 光緖20年 3월 11일, 咨送光緖十九年分朝鮮各口駐港西人及日本官商名冊 ), 3277쪽

93 하여 같은 시기 원산을 거점으로 왕래무역에 종사한 청상이 45명으로 통계된 수 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48) 한편 인천 부산 원산 세 항구에서 청상의 商勢는 商人數뿐만 아니라 실질적 인 무역실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바 1893년에 세 항구에서 진행된 청상의 무 역상황을 아래 표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49) <표3-18> 港口別 對淸貿易 比較 (1893) 區 分 港 口 仁 元 釜 合 川 山 山 計 總 輸 入 額 金 額 % 2,421, , , ,854, 단위: $ 淸으로부터 輸入額 金 額 % 1,585, , , ,905, 출처: 韓國史 最近世篇, 871쪽. 위 표는 1893년의 항구별 청상의 무역실적을 비교한 것인데, 표와 같이 1893 년은 청일전쟁 직전이므로 조선에서 청상의 무역지수가 가장 높게 나타난 시기 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청상의 수입액은 전체 17.9%를 점 하여 부산의 對日무역은 종래와 변함없이 우세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외, 인천과 원산에서 청상의 수입액은 각각 전체의 65.5%와 51.8%를 점하고 있 어 이 지역에서 청상의 무역은 상대적으로 우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 천인 경우, 對淸무역이 對日무역을 크게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이 시기 청상의 상세는 크게 성장하였는바 이는 여러 측면으로 분 석할 수 있다. 우선 淸으로부터 수입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는 영국 산 면직물이 중국 上海를 경유하여 구매할 수 있는 등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淸國産인 견직물이 조선인의 각광을 받고 있었고 아울러 청상의 자본이 풍부한 이점과 金利가 저렴했던 점도 청상의 상업발전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한 청국인의 전통적인 商法으로 상인간의 결속과 신용관계 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은 이 시기 청국의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의 伸張과 상권 확장을 위한 청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정책이라 할 수 있다. 청국은 조청통상조약의 체결을 통하여 조 청間의 근대적 무역관계가 확립되자 청상의 조선 진출을 적극적으로 斡旋해 48) 위의 책, 4卷, (1208, 光緖13年 2月 19日, 總署收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 6, 光緖十二年分元 山港華商曁往來販運行商花名籍貫 ), 2233~2236쪽. 49) 朝鮮貿易協會 編, 韓國貿易史, 서울: 國學刊行會, 1992, 116쪽

94 주었고 권장했으며 각 개항장에 常務委員을 파견하는 등 방법으로 청상의 상업 을 지원하였다.50) 조선에서 청상의 무역활동은 초기부터 入超상황을 초래하고 있었는바 1890년 상황을 살펴보면 수입액이 100萬円인데 반해 수출액은 52,913円에 지나지 않아 현저한 入超현상으로 나타났다.51) 이 시기 청상이 한반도로 수입한 품목은 주로 綿布類인데, 그 중에서도 金巾(廣木)의 수입이 가장 많았다. 특히 綿布類는 인천 개항이래 인천항에서 주종을 이루는 수입품으로 수요가 많았는바 1890년(고종 27)에 인천항에서 수입한 綿布類만 1,224,000여圓으로 전체 인천항 수입액의 47%를 차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도 2,358,000여圓으로 전체 수입액의 46%를 차지하였는데, 그 중, 廣木 수입액은 1,8000,000여圓으로 綿布類의 76% 를 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천에서 이루어진 廣木 등 綿布類의 수입판매는 청일전쟁 전까지 는 대체적으로 청상이 독점하였다. 廣木은 英國製品으로 청국상인들이 上海를 경 유하여 수입하였는데, 日商들도 이를 영국에서 直輸入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 였다. 日商은 청일전쟁으로 청상의 대부분이 귀국한 틈을 타서 1895년(고종 32) 년 말부터 廣木 등 綿布類의 수입판매에 가담하였다. 청일전쟁 후, 일부 청상들 이 다시 들어와 상권 회복에 노력하면서 綿布類의 수입판매는 다시 청상의 주요 취급품목으로 간주되었지만, 1900년(光武 4) 北淸事變으로 인하여 上海를 비롯 한 청국의 諸港을 통하여 수입하던 英國制 廣木 綿絲와 印度制 綿絲 수입이 두 절되면서 한국시장은 日本制 廣木과 綿絲가 독점하는 양상으로 변화하였다.52) 한편 청상이 인천으로부터 수출하는 품목은 紅蔘 金 牛皮 活牛 海産物인 데 그 중, 홍삼은 중국인이 진귀하게 여기는 高價品이었으므로 대표적인 수출품 목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홍삼은 인천항을 통한 密輸出이 盛行하여 이를 押牧하 는 海關官吏間에 자주 마찰이 빚어졌다.53) 원래 홍삼은 官制 特産品으로서 水路 수출이 금지되었던 품목이었으며 淸으로 파견되는 使行의 貢獻物로 지정되었는 바 使行의 隨行員과 동행하는 特許商人의 휴대물로 제한되어 있었다. 홍삼밀수출은 일본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의 郵便船이 出港할 때마다 홍 삼 밀수출을 진행하였는데, 1895년부터 조선정부는 홍삼에 대하여 세금54)을 부 50) 韓國貿易史, 116~117쪽. 51) 仁川府史, 998~999쪽. 52) 인천개항100년사, 219쪽. 53) 1886(고종 23) 1월 25일 밤에 淸國水兵과 淸國商人 4~50명이 인천해관에 亂入하여 動亂을 부린 사건이 있었는바 그 원인은 청상 수명이 홍삼 수 백근을 淸國軍艦 淸海號에 적재하려고 운반하는 것을 해관관리가 差押한데서 발단되었다. ( 仁川府史, 久水領事代理 報告書 364쪽)

95 과하고 水 路 수출을 허용하였는바 이때부터 인천항에서 정식으로 홍삼 수출이 이 루어졌다. 55) 홍삼무역에서 알 수 있는바 초기 한반도에서 청상의 상업 활동은 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홍상수출시 淸 國 軍 艦 을 동원 하여 무역운수에 활용하였는데, 이와 같은 상황은 1888( 高 宗 25) 3월 29일부터 芝 罘 仁 川 間 의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청상들의 화물을 독점 취급하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56) 한마디로 한반도에서 청상의 전성시대는 청일전쟁 전까지로 볼 수 있는바 1893년 인천에서 청상의 商 勢 에 대하여 朝 鮮 之 三 大 港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 고 있다. 明 治 16년 개항부터 明 治 26년까지 10년간은 仁 川 의 貿 易 史 에 있어서 가장 複 雜 한 國 際 的 색채를 띠고 있다...( 中 略 ) 그간 歐 美 商 人 의 勢 力 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데 비 해 中 國 商 人 은 1887년( 明 治 20)이후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중국 上 海 를 거점으 로 英 國 의 金 巾 과 自 國 의 絹 織, 麻 布 와 같은 주종을 이루는 품목에 대한 수입을 독점하 므로 수입에서 활약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확실한 信 用 과 국력을 기반으로 기세가 衝 天 하였는바 1893년( 明 治 26)에는 일본의 수입이 84 萬 5 千 圓 인데 반하여 중국은 1 百 58 萬 94 圓 이란 倍 數 를 나타내고 있다....( 中 略 ) 중국은 개항 다음해인 1884년에 수출 18 萬 4 千 餘 圓 수입 37 萬 7 千 餘 圓 합계 56 萬 2 千 餘 圓 에 지나지 않았는데, 청일전쟁 當 時 에 이 르러 수출 1 百 3,40 萬 餘 圓, 수입 1 百 4, 5 百 萬 圓 으로 합계 5,6 百 萬 圓 으로 貿 易 最 高 를 나 타내고 있다. 57) 이는 청일전쟁 전까지 청상의 상업에서의 성장과 상세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인천에 진출한 청국의 商 社 는 合 順 號, 福 源 盛, 護 記 號, 東 興 號, 天 順 號, 吉 盛 號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주로 西 歐 産 면직물과 自 國 産 견직물로 조선산 牛 皮, 米 穀 등과 교환하는 무역업 혹은 都 小 賣 業 을 경영 하였다. 그리고 청일전쟁 전까지 청상이 경영하던 상업 종류는 織 物 輸 入, 舶 來 品 54) 1895년부터 진행된 홍삼수로수출에 대하여 조선정부는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였는바 1 斤 /10 圓 이고 그 외 수수료 및 잡비로 2 圓 을 추가하였다. 55) 1899년( 光 武 3)에는 包 蔘 事 를 설치하여 宮 內 府 의 內 藏 院 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홍삼 專 賣 事 業 이 시작되자 內 藏 院 과 일본 三 井 物 産 會 社 사이에 委 託 販 賣 契 約 이 체결되어 淸 에 대한 홍삼 수출 업무를 三 井 物 産 이 독점하게 되었다. 1908년( 隆 熙 2)에 이르러 統 監 府 는 蔘 政 을 宮 內 府 에서 道 支 府 로 이관시켜 國 庫 收 入 財 源 으로하는 동시에 紅 蔘 專 賣 令 을 제정하여 발포하였다. 그 뒤, 1934년에는 紅 蔘 專 賣 令 을 공포하여 蔘 政 이 專 賣 局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런데 홍삼 수입의 98%가 중국이었는바 1931년 일본이 萬 寶 山 事 件 을 조작하여 일으키자 중국은 이에 대 한 보복으로 紅 蔘 輸 入 을 완전히 중단하였다.( 仁 川 府 史, 久 水 領 事 代 理 報 告 書, 944쪽). 56) 日 本 外 務 省, 日 本 外 交 文 書 16, 292~296쪽. 57) 東 亞 貿 易 商 互 會 編, 朝 鮮 之 三 大 港, 嚴 松 堂 仁 川 店, 1916 年 ( 大 正 5), 70쪽

96 雜貨類, 織物小賣, 雜貨小賣, 皮革, 毛皮, 客棧(旅館, 飮食店), 洋商代理店, 朝鮮土 産物輸出, 정크船行, 行商 등이었다.58) 결국 청상은 청일전쟁 전까지 상업에 유리한 제반 조건과 청정부의 이른바 商 兵政策 을 활용하여 청국군함이 청상들의 수출입 무역에 동원될 정도로 본국정부 의 지원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 일반 상거래에서 조차 조선 상인의 외상지급이 지연되는 경우, 청국영사관의 직인을 찍어 만든 서류로 가옥을 차압 혹은 이전하 는 권리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59)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국의 패배로 인하여 그 후부터 청상은 정치 경제 사회적 면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58) 淸案1, 高宗 20年 1月~22年 10月, 淸商關聯文書, 9~279쪽, 59)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朝鮮印刷株式會社, 1924, 42~43쪽

97 3. 淸日戰爭 後 仁川華僑社會의 變容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조선에서 우위를 빼앗기고 패전국민이 된 청국거류민은 크게 위축되었고 청국조계지도 衰殘해졌다. 전쟁으로 청상들은 인 천을 떠났으며 이들 가옥을 일본인들이 임대하여 거주하게 되면서 청국조계지는 점차 잡거지로 변해 갔다. 또 조선정부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조 청간에 체결 된 通商貿易條約을 모두 폐기한다고 성명하여 청국조계지는 법적 근거가 상실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양국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로 말미암아 전쟁 후에도 사실상 종전과 같은 조계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는바 국제관례에 따라 조 청 통상조약이 새로 체결되는 1899년(광무 3) 9월 11일까지 영국 영사의 관할 하 에 놓이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부터 인천 청상들의 세력은 유력상인들을 포함한 많은 청상들이 귀국하면서 뚜렷하게 쇠퇴해가는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경부철도가 개통됨 에 따라 인천지역의 많은 청상들이 서울로 이주해 갔는데, 따라서 인천화교사회 는 수적으로도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60) <표3-19> 淸日戰爭 後 仁川港 淸國人數 變化 年度 戶數 人口 1,331 1,781 1,736 2,274 1, ,160 年度 戶數 人口 1,063 2,665 1,254 1,373 2,041 2,069 2,806 출처: 仁川府史, 7쪽. 위 표는 1897년부터 1910년간 인천에 거주한 청국인수 변화에 대한 통계표인 데, 1897인 경우, <표3-17>을 참고하면 1893년 인천에서 활동한 淸商數의 711 명보다 620명이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시기 중국국내 불안한 정치 상황과 계속 이어지는 산동지역의 자연재해, 그리고 열강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한 일본의 침략에 따른 이 지역민의 한반도이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청국인 수는 1893년에 비하여 크게 증가되었지만 이 시기 이주민의 대부분은 生活苦로 인한 피난민으로 간주되는바 인천지역의 청국인商勢와는 관련이 없다고 보여 진 60) 仁川府史, 1524~1526쪽

98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은 이미 인천화교사회의 구성변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 으로 영세상민과 피난민으로 구성변화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일전쟁 전까지만 하여도 청국세력에 의한 청상들의 商勢로 인하여 일 본거류민들의 활동은 그 다지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였으나, 1894년 청일전쟁 을 계기로 일본이 승리하면서부터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거류민의 세력은 놀랄 만큼 확대 성장되었다.61) 日商은 청일전쟁으로 인한 청상의 쇠퇴를 절호 의 기회로 삼았으며 아울러 일본정부의 금융기관과 운송회사를 설립하는 등 대 폭적인 지원으로 仁川商界에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62) 일본은 1883년(고종 20)에 이미 인천에 일본제일은행 출장소를 개설한 것을 비롯하여 1890년 10월에는 第18은행 지점을 개설하였고 1892년에는 제58은행 지점을 설립하였다. 그러므로 인천에서 日商이 地金을 買入하고 곡물을 모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貸付해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으며 아울러 日商의 상업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청일전쟁 후에는 인천에 일본의 二大商船會社인 大阪商船株式會社와 日本郵船株式會社 지점을 개설하여 인천항 의 수출입 화물을 독점 운송하기에 이르렀다.63) 아래 1883년부터 1910년간 인 천에 거주한 일본인수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64) <표3-20> 淸日戰爭 前後, 仁川港 日本人數 統計表 年 度 戶 數 人 口 ,359 1,362 1,616 2,331 2,540 年 度 戶 數 ,064 1,221 1,340 1,772 2,853 3,067 人 口 3,949 4,301 4,218 4,215 4,628 5,136 6,433 9,403 12,711 12,937 61) 韓國開港場硏究, 307쪽. 62) 초기 인천에 上陸한 日商은 운수업자 6명, 무역업자 3명, 米穀商 4명, 잡화상 2명, 기타 여관업 자와 조리업자 6명 정도였다. 이들은 한옥을 임대하여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인천에서의 상업 활동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 그러나 1884년(고종 21)에 접어들면서부터 日商의 진출은 점 점 증가하였고 영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 仁川府史, 278쪽). 63) 趙璣濬, 韓國資本主義成立史論,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275쪽. 64) 仁川府史, 7쪽

99 ,504 3,201 4,148 3, ,922 3,830 3,025 3,446 11,467 11,283 10,907 13,315 출처: 仁川府史, 6쪽. 위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인천에 거주한 일본인수는 1884년에 반수이상의 감소를 보여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1884년의 갑신정변에 기인되는 것 으로 갑신정변에서 일본의 패배로 많은 일본인이 귀국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 나 그 뒤, 1885년부터는 꾸준히 증가추세로 기록되어 1897년에 청국인수가 1,331명인데 반하여 일본인수는 3,949명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청국인수의 2.9배 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에는 청국인수가 2,806명인데 반하여 일본 인수는 13,315명으로 통계되어 무려 4.7배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청 일 양국 인의 세력차이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日商은 1891년(고종 28) 9월, 인천에 상호협조를 도모하는 貿易組合을 구성하 였으며 1896년 4월에는 계림장업단이란 행상단체를 조직하여 인천을 중심으로 지방도읍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들 계림장업단은 일본 군복과 비슷한 團服制를 실시하였으며 흉기를 휴대하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결국 1898년(光武 2)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발로 해산되었다.65) 한마디로 청일전쟁 후, 인천에서 日商의 세력 확대는 다른 한편 청상의 세력위 축을 초래하였는바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천화교사회를 비롯한 한반도 화교사회 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1894년 11월 20일 김홍집 내각은 淸商保護規 則 을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66) 제1조. 청상들의 거주지역을 漢城 성내 및 인천 부산 원산의 3개 개항장으로 한정한 다. 제2조. 기존 거주자는 해당 지방관청으로부터 거주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4조. 새로 입국하고자 하는 자는 所有 자본과 사업계획에 대해 사전 심사를 받아야 한다. 제5조. 청상들의 내륙 행상은 일체 불허하며 내륙에 점포나 화물을 가지고 있던 자는 정해진 기한 내에 회수해야 한다. 제8조. 청상의 재판관할권은 조선정부에 귀속된다. 위와 같이 청상은 그 동안 청국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누려왔던 모든 특권을 65) 위의 책, 1047~1048쪽. 66) 法部來案 奎17795, 開國 504년 10월 10일

100 완전히 박탈당했으며 특히 일본상인들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으로 상업 활동을 진행해야 하였다. 청상보호규칙은 淸과의 사대관계가 폐절된 뒤, 조선에 남아 있 는 청상을 관리해야 하는 새로운 법규정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반포된 것으로서 청상을 보호하겠다는 뜻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실지로는 청상에 대한 보 복적 단속의지를 근저에 깔고 있었다.67) 1895년 1월 7일에는 또 保護淸商規則施行細則 을 마련하여 보호라는 이름 아래 청상에게 합법적인 제약을 가하였다.68) 이로 인하여 한국에서 청상의 활동 은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그러나 중국국내 사정과 한반도 사회현실에 따른 청국 인의 한반도입국은 끊이지 않았지만 淸國公使와 領事가 부임하지 않아 청국인들 의 상황은 더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청국인의 한반도입국에 대한 규제 제한조치와 한반도에서 이들 청 상의 영업활동에 대한 조선정부의 조치는 여러 요인에 기인되지만 그 동안 청국 이 추진해온 對 조선 간섭정책에 대한 조야의 반감과 일본 측의 요구가 크게 작 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청일전쟁에서 청국의 패배로 많은 유력상인의 귀 국과 더불어 이들 청상이 독점 경영해오던 업종별 공백을 기민하게 메워 나간 것은 日商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열악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청 상들의 상권회복을 위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었는바 아래 1895년부터 1910년 간 청국과 일본으로부터 무역 수입지수를 전체 한반도의 수입액과 비교하여 살 펴보기로 한다. <표3-21> 淸日戰爭 後 對淸 對日 輸入推移 國別 單位: 千円 淸 國 金 額 % 日 本 金 額 % , , , , , , , , , , , , , , , , , , , , , , , , , , 年度 러 시 아 金 額 % 67) 官報 開國 503년 11월 20일. 68) 官報 開國 504년 1월 9일, 14일, 15일 其 他 金 額 % 1,178 合 計 金 額 % ,

101 1904 5, , , , , , , , , , , , , , , , , , , , , , , , , , , , 출처: 朝鮮總督府 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위 표와 같이 청일전쟁 후부터 러일전쟁직전까지 청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은 상 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평균 30% 좌우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상 권회복을 위한 청상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기인한다. 특히 특수 분야의 수공업제 품 활로에 대한 개척은 이 시기 청상의 상권회복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한편 이 시기 청국과 일본의 국내사정에 따른 수요는 청 일 양국에 대한 수 출무역 추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표3-22>를 참조한다. <표3-22> 淸日戰爭 後 對淸 對日 輸出推移 國別 年度 淸 金 額 國 % 日 金 額 本 % 單位: 千円 러 시 아 金 額 % 其 金 額 他 % 合 金 額 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02 1910 3, , , , 출처: 朝鮮總督府 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對淸수출은 전체 대외수출총액의 15%좌우로 對日수출 이 80%인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낮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여러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 시기 조선에서 청국의 정 치적 세력의 약세에 따른 청상의 상업에서의 위축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특히 같은 시기 청국과 일본을 비교했을 때, 청국은 일본에 비하여 근대공업 건설이 부진한 상태였고 아울러 농업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일본은 공 업원료와 식량을 주로 조선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으므로 개항초기부터 조선에서 對日貿易은 꾸준히 큰 비중을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은 또한 청상의 商術과 商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69) 청상의 상권확대 를 크게 우려하여 여러 가지 규제조치를 취하여 제약하였다.70) 그러므로 1896년 에 이르러 日商은 일본정부의 세력을 기반으로 청상을 制壓하고 대한무역의 주 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71) 이는 다른 한편 청상의 상세를 크게 위축시키는 작 용을 하여 청상들은 행상 雜術 技藝를 판다든지 혹은 아편밀매를 하는 등 원 인으로 연루되기도 하였는바72) 이 시기는 늘 청상들의 불법 商行爲 즉 인삼밀 매73) 貨幣私鑄74)하는 불법행위가 속출되기도 하였다. 1899년(光武 3) 9월 11일에 調印한 韓淸通商條約 을 통하여 재한화교들의 지위는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조약에서 韓 淸 양국은 相互간에 치외 법권을 인정하였으며 상대국 통상항구에서 開棧할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등 互惠原則을 기반으로 규정하였다.75) 이 조약은 청일전쟁 전에 韓 淸間에 체결 된 조약과 성격이 다른바 불평등조약이 아닌 평등조약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인천개항이래 한반도의 對淸무역은 꾸준히 인천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 으며 그러므로 인천은 청국인의 활동중심지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1907년 69) 日韓通商協會會報 第4號, 1896년(明治 28), 82쪽. 70) 1899년 2월 日本公使 加藤增雄은 청상이 부산에서 다시 商店을 개업하자 비조약국민의 부정 상행위라 하여 한국정부에 청상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였다. ( 舊韓國外交文書 4. 日案 4999 號, 光武3年 2月 21日.) 71) 李鉉淙, 開港場內 外國人營業, 史學硏究 第27號, 68쪽. 72) 독립신문 建陽2년 4월 15일자, 同 光武元年 7월 6일자, 同 光武2년 8월 3일자. 73) 漢城府來去案 2, 奎17984, 光武元年 10월 21일. 74) 警務廳來去文 1, 奎17804, 光武元年 10월 7일 ; 漢城府來去案 2, 奎17984, 光武元 年 10월 9일. 75) 舊韓末條約彙纂 下卷, 369쪽

103 과 1908년의 각 개항장별 對 淸 무역 상황을 살펴보면 무역 중심지가 인천으로부 터 다른 지역으로 점점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3-23> 港 口 別 對 淸 貿 易 實 績 年 度 單 位 : 圓 1907 年 1908 年 輸 入 輸 出 輸 入 輸 出 港 口 金 額 % 金 額 % 金 額 % 金 額 % 仁 川 3,770, ,971, ,285, , 釜 山 216, , , , 元 山 130, , , , 鎭 南 浦 131, , , , 서 울 63, , 群 山 2,637-7,203-2, 木 浦 45-53, ,393-36, 城 津 5, , , 新 義 州 144, , , , 淸 津 合 計 4,465, ,179, ,880, ,161, 출처: 統 監 官 廳 文 書 官, 統 監 府 統 計 年 報 제2차, 243쪽 ; 同 書, 제3차, 398~399쪽.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對 淸 무역 중, 수입은 주로 인천항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1908년부터는 인천항에서의 수입이 前 年 의 84.4%로부터 67.3%로 감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1908년부터 신의주로부터의 수입은 前 年 의 3.2%로 부터 15.8%로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났다. 이는 지금까지 海 路 를 중심으로 진행 되어 오던 對 淸 수입이 1908년부터 陸 路 를 통한 수입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수입품목에 대한 消 費 가 대체적으로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이루 어지고 있음으로 인천항의 對 淸 수입물량은 뚜렷한 급감추세로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對 淸 수출무역 상황은 1907년에 인천항이 62%를 차지하였고 신의주가 17.7%를 점하였는데, 1908년에 이르면 인천이 31.5%를 점하고 신의주가 32.9%로 통계되어 한반도로부터 청국으로 수출무역은 신의주가 가장 많은 것으 로 기록되었다. 그 외, 진남포의 對 淸 수출무역도 크게 증가하여 28.2%로 나타 났다. 이는 對 淸 수출무역은 1908년에 이르러 육로운송에 활기를 띠고 있음을 말한다. 다른 한편 신의주와 진남포의 對 淸 수출무역의 활성화는 북한지역 품목 이 對 淸 수출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 1908년도 對 淸 무역 수출품목과 수입품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6)

104 <표3-24> 對淸 輸入商品 (1908) 品 目 小 麥 粉 單位: 圓 金 額 515 品 目 生 金 巾 金 206 晒 金 巾 505 額 食 鹽 醬 油 110 天 竺 布 336 生菜 乾菜 6,076 綿 繻 子 13,907 (0.7%) 268,587 (14%) 蜜 柑 104 絹 紬 149,814 (7.9%) 生 果 8,714 絹 紗 562,254 (30%) 鹹 魚 34,309 絹 子 68,816 (3.6%) 砂 糖 3,145 筆 記 用 紙 732 精 糖 4,803 石 炭 1,289 蠟 燭 219 鐵 鍋 釜 6,036 아니링染e 160 紙 卷 烟 磁 器 繻 176,010 (9.3%) 繰 綿 89,000 陶 打 綿 3,770 木 材 470,357 綿 織 絲 21,559 木 炭 77 시 징 5,406 繩 莚 372-1,902,186 성 냥 797 計 -合 4,201 (25%) 출처: 統監官廳文書官, 統監府統計年報 제3차, 408쪽. <표3-25> 對淸 輸出品目 (1908) 品 米 目 穀 金 1,166,945 大 麥 小 麥 大 豆 小 豆 343 鮮 魚 13,262 乾 魚 1,232 鹹 魚 1,966 蠣 鱶 單位: 圓 額 (62.9%) 品 海 目 蔘 金 63,073 4,538 牛 皮 137, 人 蔘 147 牛 脂 3,388 繰 綿 ,548 (10.4%) 紙 生 鰭 牛 木 12,334 38,362 3,067 材 , ) 統監官廳文書官, 統監府統計年報 제3차, 408쪽 ; 同書, 403~404쪽 (7.4%) 65,484 糠 8,207 額 (7.6%)

105 合 計 1,854,973 출처: 統監官廳文書官, 統監府統計年報 제3차, 403~404쪽. <표3-24>와 <표3-25>는 1908년에 진행한 對淸 수출입 품목과 금액에 대한 통계이다. 먼저 수입품목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수공업제품인 것으로 나타났는 데, 특히 綿繻子 絹紬 絹紗 絹繻子 등 絹織物의 수입액이 많은 비중을 차지 하여 약 80萬圓에 달하였으며 전체 對淸무역 수입액의 40%를 점하고 있는 것으 로 나타났다. 그 외, 수입량이 많은 품목으로 木材 食鹽 紙卷烟 등 단일품목 을 들 수 있다. 한편 對淸 수출품목은 주로 농산물로 기록되었는바 미곡이 전체 63%를 차지하고 그 외, 大豆의 수입량이 약 10%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일본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續出하는것을 우려하 여 병합선언과 동시에 조계지에 대하여 制令 제2호( )로 규정하였다. 즉 在韓淸國專管居留地와 외국인거류지에 대하여 경찰권만 박탈하고 당분간 종 전대로 유지 존속한다고 선포하였다.77) 그리고 거주의 허가여부에 대하여 아래 와 같이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條約에 의하여 居住의 自由를 소유하지 못한 外國人으로 勞動에 從事하는 者는 특히 地方長官의 許可를 받지 않으면 從前의 居留地外에서 留住하거나 或 其 業務를 行함 을 得치 못함. 前項의 勞動種類는 朝鮮總督이 定함. 第1項의 規定에 違反한 者는 百圓 以下의 罰金을 處함.78) 이 규정은 公布日인 1910년 8월 29일부터 실시되었다. 거류지 整理件에 관하 여 일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시점을 선포하였다. 朝鮮 各國居留地에 관한 舊韓國과 사이의 協定은 同國이 帝國日本에 倂合의 결과 당 연히 消滅될 것이나 帝國政府에 있어서나 右倂合할 때에 一時의 便宜上 當分間 右居留 地狀態의 存續을 認定하여 1910년 8월 29일 制令 第2號로서 右各國居留地에 있어서의 行政은 警察에 관한 事務를 除한 외에 當分間 前例에 의할 것을 規定하여 이에 따라 追 後에 이를 整理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倂合 후 各般行政上의 整理도 착착 진척되어 地 方制度의 정리도 곧 完a될 듯하므로 帝國政府에서는 이와 동시에 各國居留地의 整理를 할 필요를 느꼈다.79) 77) 仁川濟物浦와 鎭南浦와 木浦와 群山과 馬山浦 及 城津의 各國居留地와 또 仁川과 釜山 及 元 山의 淸國居留地의 行政은 警察에 관한 事項을 除하는 외에 當時 內는 從前의 3에 依함이 라.( 朝鮮總督府官報 第1號, 1910년(明治 43年8月29日) 制令 第2號.) 78) 朝鮮總督府官報 第1號 1910년(明治 43年 8月 29日) 統監府令 第52號

106 특히 일본이 청국조계지에 대한 整理要1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① 仁川 釜山 및 元山에 있어서 淸國居留地는 1913년(明治 46년) 3월 31일 한하여 이 를 폐지한다. 그 居留地는 朝鮮地方行政區域에 編入되며 그 公共事務는 모두 帝國當 該官廳에서 이를 擔任하는 것으로 한다. ② 종래 帝國當該官廳에서 發給한 永代借地權에 의하여 淸國居留地내의 地所를 占有하 는 淸國人은 右居留地撤廢와 同時에 帝國法令의 規定에 의하여 하등의 代償을 하지 않고 그 地所의 所有權을 取得하는 것으로 한다. ③ 前條에 의하면 淸國이 所有權을 取得한 地所는 帝國臣民에 속한 一般의 所有地와 同一한 취급을 받는 것으로 한다.80) 일본은 이와 같이 청국조계지 정리요령에 대하여 基本方針을 정하고 그 뒤, 한 국에서 청국전관조계지의 철폐에 관하여 청국총영사와의 회담을 진행한 뒤,81) 1913년에 이르러 양국은 在朝鮮淸國租界地廢止協定에 조인하였다.82) 결국 청국조계지는 1884년 인천에서부터 시작되어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 후, 조계지폐지에 대한 覺書內容83)에 따라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각국 조계 지와 함께 폐지되고 府 관할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84)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 국정부의 자국민의 권익보호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다행이 청국거류지는 종 전의 慣3대로 내려오다가 1910년 한일합병을 목전에 두고 인천 부산 원산의 청국조계지를 새로이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물론 일본 측의 필요에 의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는바 비록 청일전쟁으로 한국에서 청국의 권익은 완전히 물러났지 79) 總務處文書 檀紀4246년 記錄 第33號의 2. 各國居留地整理關係書類(在朝鮮各國居留地 및 支那專管居留地整理에 관하여 在京 馬廷亮氏에게 外務省으로부터 送付한 覺書寫. 80) 總務處文書 自 明治 45년 3월 至 大正元年 12월 記錄 第26號, 外國居留地整理에 관한 件 1912년(明治 45년 4월 5일) 官秘 第3號. 81) 大正 2년 8월 26일 支那總領事 士英과 隨習領事 陳乘焜이 일본외사국 小松 綠과 회담하 였다. 支那측의 주장 :...각국거류지는 토지에 관한 兩종류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지나는 專管居留地에 있어서 종래 永代借地權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으로 支那전관거류지에 있어서 도 兩 종류의 권리 倂合을 희망한다는 것이다....각국 거류지와 달리 지나는 단순히 土地所 有權만 존재한다면 支那의 體面에 관한 것이다. 일본측 小松의 주장: 지나전관거류지의 철폐에 있어서 지나인의 永代借地權이 모두 土地所有權으로 改定되어야 함은 1910년(명치 43) 支那거 류지 설정에 즈음하여 교환된 공문에 따라 명백하며... 永代借地權을 끝냈다고 해서 감히 체 면을 깎이게 될 일도 아니다. 고 해결여지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 總務處文書 檀紀 4246년 記錄 第 33號의 2, 外國居留地整理關係書類 ). 82) 總務處文書 檀紀 4246年, 記錄 第33號의 2, 各國居留地整理關係書類. 83) 舊韓末條約彙簒 下卷, 45쪽. 84) 李鉉淙, 앞의 책, 423쪽

107 만 거류민들은 종전과 다름없었으므로 이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規制해 둘 필요 에서였다. 그러나 1913년 청국전관조계지와 각국조계지의 폐지협정이 이루어짐 으로써 청국과 한국정부가 맺었던 조계지협정관계는 완전히 철폐되었고 조선총 독부와의 사이에 새로운 규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계지철폐로 재조선 화교들의 신변은 크게 위협받아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었다. 한편 한일병합 뒤에도 인천에서 對 中國무역은 계속 이루어 졌는바 1911년부 터 1916년까지 인천항에서 진행된 對 中國 무역상황을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 다.85) <표3-26> 仁川 對中國 輸出入 貿易 統計表 (1916) 品名 白米 人蔘 熱皮及紙莨 葉煙草 對中國輸出 762,750圓 493,280圓 130,000圓 54,000圓 品名 麻布 諸絹布 同品小包 食鹽 對中國輸入 1184,906圓 528,000圓 190,000圓 200,000圓 海蔘 32,000圓 석탄 165,000圓 朝鮮紙 25,000圓 胡麻子 5~10萬圓 米, 棗, 支那酒 甘草, 豆油, 繰綿 支那靴, 熟鐵, 萬圓以上 萬圓以上 計 1845,563圓 生皮, 세멘트 ---- 萬圓以上 3104,800圓 출처: 朝鮮之三大港, 1916, 78~79쪽, 참고작성. 위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수출품목은 주로 인삼과 해 삼이다. 반면에 白米 수출은 중국인의 수요보다도 在中 일본인을 상대로 수출하 고 있었으며 수출지는 주로 滿洲와 大連이었다. 특히 이 시기 對 중국 수출무역 은 주로 중국인과 在中 日本人, 그리고 중국 내 歐美人의 수요로 이루어졌다. 1911년~1916년간 인천에서 진행된 對 중국 수출품목은 米 大小豆 乾蟶 蜻 乾蝦 海蔘 淸酒 醬油 人蔘 牛脂 牛皮 熟皮 紙卷煙草 朝鮮紙이며 이들 품목의 중국 내 수출지역은 다음과 같다.86) 85) 東亞貿易相互會 編, 朝鮮之三大港, 巖松堂仁川店, 1916年(大正 5), 78~79쪽. 86) 위의 책, 82~85쪽

108 <표3-27> 仁川 對中國 輸出貿易 (1911~1915) 品 目 輸 出 地 域 滿洲, 芝罘, 靑島, 大連. 滿洲 芝罘 芝罘 중국 내 각 지역. 米 大小豆, 豆 類 乾蟶 및 蜻 乾 蝦 海 蔘 淸酒 및醬油 滿洲, 大連의 일본인. 牛 脂 大連 牛 皮 熟 皮 紙卷煙草 朝鮮紙 芝罘 등 지역. 天津 大連, 靑島, 上海, 芝罘 大連, 芝罘, 牛莊, 天津 출처: 朝鮮之三大港, 82~85쪽. 참고작성. 한편 1911년부터 1915년간 인천으로부터 수입한 중국 수입품목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중국산품과 歐美산품이라 할 수 있으며 주로 麻布 絹布類 食 鹽 米 粟 石炭 紙卷煙草와 세멘트이며 주요 수입지역은 <표3-28>을 참고 한다.87) <표3-28> 仁川 對中國 輸入貿易 (1911~1915) 品 米 食 絹 目 粟 鹽 輸 入 地 石島, 俚島, 大連牛莊 石島, 俚島 布 類 上海 紙 卷 煙 草 石 세 上海 炭 撫順, 大連 멘 트 大連 출처: 朝鮮之三大港, 85~88쪽, 참고작성. 지금까지 살펴본 청 일 양국의 인천에서 진행한 무역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로 나눌 수 있는바 청일전쟁 전까지는 청국의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청상의 활발 한 상업 활동과 더불어 청상들이 진행한 무역은 점점 상승하는 추세로 나타났다. 한편 日商은 청상의 상권 확장에 크게 영향 받았는바 1884년부터 점점 감소하는 87) 위의 책, 85~88쪽

109 추세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양상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큰 변화를 일으키 고 있는바 아래 1885년부터 1920년까지 인천항에서 진행된 청 일양국의 對淸 對日 무역 수입실적 표를 통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88) <표3-29> 仁川에서 진행된 對中 對日 輸入 實績 比較表 年 度 中國으로부터 輸入 (A) 242,680 1,312,614 1,668,641 2,034,384 6,085,952 2,379,758 2,851,444 19,541,775 日本으로부터 輸入 (B) 726,760 1,259,218 3,011,131 4,846,408 9,349,255 4,586,304 5,807,011 21,527,048 單位: 円 비 교(A/B) 25/75 51/49 36/64 30/70 39/61 34/66 33/67 48/52 출처: 仁川府史, 992~1000쪽. 위 표에서 1885년 수입상황을 보면 인천항을 통한 전체 수입의 969,440円 중, 청국으로부터 수입은 25%를 점하는 반면에 일본으로부터 수입은 75%를 점 하고 있다. 그러나 1890년에 이르면 淸으로부터의 수입은 전체 수입액의 51%를 차지하는 반면에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49%로 개항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무역 에서 청국수입액이 일본을 초월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청국의 조선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잃으면서 즉 1894 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다시 對日무역이 우세를 차지하는 양상으로 일변하여 1895년에 이르면 對淸 수입이 36%인데 반하여 對日 수입은 다시 64%로 상승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일전쟁 후, 크게 변화된 청상의 지위를 단면으 로 말해준다. 그러나 1920년까지 청상의 수입액은 전체 인천항 수입액의 약 36%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바 종래 청상에 대한 이미지인 상술이 뛰 어난 경제민족 이란 것 외, 한반도의 사정과 밀정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특히 絹 織類와 같은 수공업제품과 광물자원 등 수요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이 시 기 청상의 무역업에 일정한 작용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지금까지 청일전쟁 후, 인천화교사회의 변화를 청일전쟁 전과 비교하여 살펴 보았다. 특히 화교들의 법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고 찰하였다. 그 원인은 첫 번째로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국은 정치적 우세를 일본에 게 빼앗겼다는 점이고, 두 번째로 청국의 패배와 더불어 조선에서 청상의 상세도 88) 仁川府史, 992~1000쪽

110 쇠퇴해 가는 반면, 일본정부의 세력을 기반으로 日商의 상권 확장에 영향 받았다 고 볼 수 있다. 그 외, 1886년부터 인천의 화교사회는 구성변화를 일으키기 시 작하였는바 다시 말하면 중국 남방의 유력상인이 주류를 이루던 화교사회로부터 중국 넓은 지역 혹은 북방상인을 비롯한 영세상민이 다수를 점하는 화교사회로 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이 시기 중국국내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밀접 한 관련이 있는바 특히 청일전쟁 후부터는 적극적인 상인이주가 아니라 복잡한 국내정세로 인한 피난민의 한반도 이주로 간주할 수 있다. 아울러 일본정부의 화 교상인에 대한 각종 규제정책과 화교들의 법적지위 상실, 그 외, 종전과 같은 화 교상업망의 파괴로 화교들의 상업은 위축되는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111 第2節 橫浜 華僑社會의 形成과 變化 1. 歐美商社의 橫浜 進出과 買辦商人 요코하마(橫浜) 화교사회의 형성과정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일본의 開國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최초의 조약은 德川幕府와 페리提督사이에 맺은 日米和親 條約(1854)이다. 일본은 交戰 없이 交涉끝에 이 조약을 체결하였는바 敗戰條約 인 南京條約(1842)과 강화도조약(1876)과 비교하여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89) 일본은 1856년 8월에 체결한 日米和親條約 제11조에 기초하여 미국 총영사 하 리스90)( Harris, Townsend)와 下田에서 日米修好通商條約 ( )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조약 제3조에 따라 요코하마 개항을 1859년 7월 4일로 결 정하였다. 초기 페리제독이 일본을 개항하려는 목적은 일본근해에 있는 捕鯨船員과 漂流 民의 생명안전에 대한 확보와 貯炭場를 획득하는 것이었다.91) 반면 일본의 조선 진출은 征韓論에 기초한 대륙침략이었으며 청국의 조선 진출도 종래 조선에서의 청국의 정치적 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세력을 견제하는 세력쟁탈전이었다. 요코하마는 東京灣內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久良岐郡에 소속된 百戶남짓한 거주민으로 형성된 半農半漁村이었다.92) 1859년 7월 1일 개항되어 외국인조계 지를 설치하면서부터 중국의 香港 廣東 上海 江蘇 등지에서 상업무역을 경 영하던 다수의 歐美商社93)들이 요코하마로 건너가 支社를 설치하는 등 점포를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들 歐美商社와 함께 歐美商人에게 고용된 중국인 買辦 技能 勞動者들도 요코하마 新開港地로 이주하였다.94) 89) 加藤祐三, 東アジアの近代, 講座社, 1985, 2쪽. 90) 아메리카 初代駐日領事館 公使이다. 아시아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다. 1856년(安政 5) 에 下田에 着任하여 玉泉寺에 領事館을 개설하였다. 1858년에 日米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고 1859년에 公使로 임명되었다. 1862년(文久 2)에 歸國하였다. 日記 ハリス日本滯在記. ( 日 本史辭典, 863쪽). 91) 위의 책, 808쪽. 92) 陳昌福, 日本華僑硏究, 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1989, 10쪽. 93)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淸國은 남경조약 을 체결하였으며 이어서 5개 연해항구도시를 개 항하였다. 그 뒤 많은 歐美商社들이 각각 개항도시에 점포를 설치하면서 中國買辦을 고용하여 중국에서 상업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들 歐美商社는 橫浜와 같은 항구도시에도 支社를 설치하 게 되면서 아시아지역에서 무역망을 확장할 수 있었다. 94) 橫浜と上海共同編輯委員會 編,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橫浜開港資e館, 1994,

112 요코하마 개항 후, 초기 형성된 화교사회는 중국인 買辦商人을 중심으로 일부 技能 勞動者와 자유무역업자들로 구성되었는바 앞에서 언급한 초기 조선으로 진 출한 廣東商人 浙江商人 山東商人 등으로 구성된 인천 화교사회와 비교하여 화교상인들의 신분과 출신지에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요코하마로 진출한 買辦商人은 개항초기 중국에서 형성된 새로운 상인계층으로 서 歐美상사에 고용된 신분이므로 이들이 종사한 상업 활동과 업종은 歐美商社 의 지배와 영향을 받았는바 이 부분도 인천 화교사회와 비교하여 선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요코하마 화교사회가 買辦상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인천 화교사회 뿐만 아니라 해외 華僑史에서도 전례 없는 특수성으로 각인되어 요코 하마 화교사회만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우선 買辦商 人의 형성과정과 특성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요코하마 화교사회의 구성특징부터 고찰해 보고자 한다. 중국 근대사상 上海 외국인조계지는 南京條約체결 후 형성된 조계지로서 중국 내 수십 개 조계지 중에서도 가장 먼저 형성되었으며 아울러 가장 크게 발전된 조계지라 할 수 있다. 특히 上海조계지는 구미열강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함 으로써 전형적인 國中國(나라속의 나라) 의 양상으로 자리잡혀가는 과정에 중 국의 전통문화와 서양문화가 함께 어울러져 충돌 알력을 발생하였으며 다른 한 편 양자의 융합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新生事物을 誕生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1853년 太平天國軍의 南京점령과 小刀會의95) 봉기에 의하여 수많은 중 국인들이 戰亂을 피하여 上海조계지로 流入되었는바 이와 같은 상황은 기존 외 국인들로만 이루어졌던 上海조계지를 華洋分居 로부터 華洋雜居 의 양상으 로 변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96) 조계지내로 流入한 중국인중에는 浙江 江蘇 지역의 부유한 紳士뿐만 아니라 戰火를 피하여 온 빈궁한 난민도 포함되어 있었 다. 그러므로 조계당국과 청국정부는 당초부터 華洋雜居 를 엄하게 제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반면, 조계지 내의 외국상인들은 당국의 방침과는 반대로 대량의 木 賃宿을 짓는 등 중국인과의 상거래를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려고 기도하 였다. 결국 上海조계지는 華洋雜居의 형태로 구성변화를 일으켰는바 이로부터 조 계지 내에서는 중국인과 외국인간의 사회 경제적 융합이 급속하게 이루어 졌 402쪽. 95) 1850년 중국남부 廣西省에서 일어난 太平天國운동을 전후하여 중국사회에는 대체로 비밀결사 나 반기독교 운동 反 地主 투쟁과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1854년에는 廣東省에서 청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진개(陳開)를 중심으로 한 천지회집단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반란은 곧 全 省에 있는 천지회의 호응을 얻으며 크게 확산되었다. 태평천국군의 南京점령 후, 上海부근의 천지회계통인 소도회(小刀會)집단도 이에 호응하여 1853년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上海부근의 현성들을 일시 점령하였다. 96)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122~123쪽

113 다. 조계지에서 외국인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계층이 있었는바 이들이 바로 買辦 상인이었다.97) 이들 買辦상인은 南京條約 의 체결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그 원인 은 중국 내 5개 개항항구에서 외국상인들이 상업을 경영하는 과정에 부딪친 장 벽 에 기인한다. 南京條約의 체결로 인한 歐美상사의 중국 내 개항장으로의 진출 은 우선 종래 독점적인 公行制度를98) 서서히 폐지시키고 자유 무역의 진행을 추 진시켰다. 그러나 이들 외국상인들은 언어의 장벽과 복잡한 중국의 화폐제도, 그 리고 전통적인 商業慣3와 사회 풍속으로 인하여 중국인과의 자유롭고 직접적인 교역을 진행할 수 없었으며 이와 같은 障碍物 을 해결할 수 있는 유능한 경영인 이 필요했다. 초기 買辦상인은 廣州의 公行制度 내에서 경험을 축적한 者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비록 외국상사에 고용되었지만 중국인 종업원을 고용 관리하는 업무뿐 만 아니라 경리업무를 담당하고 시장정보를 제공하면서 심지어 전장(錢莊)의 어 음 발행을 보증서는 등 여러 측면에서 외국상인의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주었 다.99) 買辦은 외국인회사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업무를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우 에 따라서는 자신의 명의로 상업을 경영하는 독립상인이 되기도 하였다. 買辦상 인은 한편으로 買辦 직책을 보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여러 분야의 상인들과 유 대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외국상인들은 이와 같이 廣範한 대외 상업망을 소유한 유능한 買辦상인을 선호했으며 반대로 買辦상인들도 이들 외국 97) 買辦은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南京條約 의 체결에 따른 다시 말하면 조약제도 에 의 하여 출현하였다. 買辦은 中 外 교역에서 상업중개인의 역할을 하였으며 1860년의 천진조약 (天津條約) 이후부터 활약하게 되었다. 천진조약에 따라 長江과 북부 沿海의 항구들이 개방되면 서 買辦은 외국상사의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買辦의 활동은 그 뒤, 외국상사가 아 시아 타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항구에까지 영향 을 미쳤다. 20세기를 전후하여 中 外 상인들이 서로의 환경에 익숙해지고 거래 방식에 변화 가 생기면서 중개자인 買辦의 위치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은 더욱 분명해져 買辦의 탄생부터 한 세기가 지난 1943년에 條約制度 가 막을 내리자 이를 상징 하던 買辦도 사라지게 되었다. (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매판, 61쪽.) 98) 淸代(1640~1912) 중국인들의 상업 활동은 광범하고 다양했다. 특히 차 소금 실크 면화와 아편 등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비교적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염상(鹽商)과 행상이 독점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중 외 무역에서 유럽인과 무역거래를 하던 중국 상인들 은 상인조직인 行會를 설치했는데 이 行會를 공행(公行)이라 한다. 公行은 관청의 허가를 받고 일정한 의무를 수행하면서 외국상인과의 교역에서 독점권을 가졌다. 이와 같은 공행의 구성원 을 행상(行商)이라 한다. 公行은 1842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가장 큰 규모의 상인 단체 중 하나 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라 南京條約 을 체결하면서 이들 행상이 대외 무역에서 행 사하던 독점권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였다. (위의 책, 17쪽.) 99) 위의 책, 16쪽

114 회사에 많은 거래와 이륜을 창출해주었다. 중국개항 후, 19세기 50년대부터 각 개항장에서 이들 買 辦 은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였는바 특히 그 중에서도 廣 東 人 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다음으로 浙 江 人 이 었다. 아래 <표3-30>를 통하여 외국은행에 고용된 買 辦 數 와 廣 東 人 의 비율을 고찰하기로 한다. 100) <표3-30> 上 海 買 辦 商 人 數 (1850~1892) 年 代 洋 行 買 辦 人 數 買 辦 出 身 地 1850~1860 瓊 記 2 廣 東 人 100% 1858~1876 旗 昌 10 廣 東 人 40%, 浙 江 人 30% 1840~1870 寶 順 15 廣 東 人 100% 1850~1890 外 國 銀 行 ~1880 外 國 船 會 社 ~1892 其 他 外 國 洋 行 68 合 計 127 출처: 中 國 買 辦 資 産 階 級 的 發 生, 161~178쪽.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1850년부터 1870년간 瓊 記 洋 行 과 旗 昌 洋 行, 그리고 寶 順 洋 行 에 고용된 買 辦 중, 대부분이 廣 東 人 이고 그 다음은 浙 江 人 이다. 특히 이 시기부터 浙 江 人 은 금융 부문에 재능이 있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洋 行 은 19세기 60년대에 이르러 점점 浙 江 人 을 買 辦 으로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寧 波 買 辦 의 명성은 廣 東 買 辦 에 버금갈 정도여서 20세기 초부터 上 海 는 이미 浙 江 買 辦 數 가 廣 東 買 辦 을 초월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101) 외국 상인들은 중국인과의 통상적인 거래에서만 買 辦 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買 辦 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즉 전임 買 辦 과의 밀접한 상업 관계를 유지하였는바 이는 買 辦 이 비록 독립 상인이 되더라도 전직 외국회사의 업무에 익숙한 원인으로 여러 면에서 협조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2) 買 辦 이 비록 외국상사와의 계약에 의해 고용된 신분이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對 중국 업무를 처리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중국 내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는 重 任 을 담당하였다. 買 辦 은 한편으로 중국인 직원들의 보증인인 동시에 다른 한편 중국인과 외국인간의 仲 介 人 이기도 하였다. 103) 이들은 특히 經 濟 金 融 活 動 의 仲 介 人 으로 외국상인의 업무에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104) 동시에 外 國 100) 聶 寶 璋, 中 國 買 辦 資 産 階 級 的 發 生, 中 國 社 會 科 學 出 版 社, 1977, 161~178쪽. 101)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매판, 71쪽. 102) 위의 책, 31~57쪽. 103) 위의 책, 38~44쪽

115 商人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하여 새로운 근대기업에 투자하는 안목까지 키웠다. 통계에 의하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上海의 외국기업 15個所 중에서 이들 買辦을 중심으로 한 약 70여명의 중국 상인들이 외국기업의 株主인 것으로 기록되었다. 장기간 외국상사에서 경험과 자본을 축적한 買辦은 실지로 上海조계 지에서 뿐만 아니라 근대중국의 초기 企業家로 성장되었다.105) 예컨대 李鴻章의 관할 범위에 속해있던 輪船招商局도 유명한 1832~1892)과 서윤(徐潤, 1838~1911)이 도맡고 買辦인 당경성 (唐景星, 있었다.106) 한마디로 초기 개항장 내 외국인 상사에 고용된 買辦은 대체적으로 廣東人들 이었으며 이들은 19세기 중엽까지 각지 개항장 무역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 었다. 그러므로 이들 주변의 외국상사가 타 지역 개항 항구에 새로운 支社를 설 치할 때마다 廣東 買辦들은 외국 상인을 좇아 각 항구로 진출하였다. 한편 외국 상인들도 이미 廣州문화에 익숙 되었는바 음식을 포함하여 모든 생활을 廣東人 과 함께 하였으므로 料理師뿐만 아니라 가정부와 교육자를 포함한 여러 직원들 과 함께 새로운 支社로 이주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107) 따라서 요코하마 개항 후, 외국상사를 따라온 중국인買辦과 技能 勞動者, 그 외, 외국상인의 가정부 요리사와 중국인 技能 職人들의 요코하마 이주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초기 요코하마로 건너온 歐美상사는 대체적으로 중국을 基地로 일본에 支社를 설립하는 형식을 취하였는바 요코하마로 이주한 초기 買辦상인도 이들 외국상인 의 필요에 따라 요코하마로 이주했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買辦을 중심으로 중 국인 직원, 가정부, 요리사와 일부 자유무역업자들을 구성원으로 초기 요코하마 화교사회가 형성되었다. 다행이 중 일의 漢字 문화권이란 유사한 문화적 배경 을 기반으로 買辦상인은 漢字를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일본의 상업계와 교류할 수 있었으며 일본상인과 교섭 교역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 買辦상인의 오랜 상업경험과 경영능력, 그리고 영어구사 능력은 이 미 이 시기 일본의 일반 상인들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 외, 요코하마가 개항된 시점인 1859년까지 중국 내 개항장에서도 歐美상사의 상업경영을 廣東人 으로 구성된 買辦상인들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주로 유능한 廣東買辦 외, 일부 浙江人과 福建人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요코하마에 진출한 이들 외국상사의 무역업도 대체적으로 중국인 買辦상 104)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123쪽. 105) 中國近代工業史資e 第二集(下冊), 科學出版社, 1957, 1065쪽. 106)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매판, 20쪽. 107) 위의 책, 68쪽

116 인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는데, 그러므로 買辦상인들은 요코하마의 상업시장에서도 무시 못 할 정도의 영향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초기 인천 화교사회와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바 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코하마 화교사회가 상업영역에 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는 인천 화교사회와 비교하였을 때 箇箇 청상들의 신분뿐만 아니라 상업 활동을 하는 방식에서도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히 초기 인천 화교사회는 전통적인 중국인 의 상업방식으로 무역업을 진행한 반면에 요코하마에서 이들 買辦상인은 선진적 인 근대 歐美 상업방식과 중국의 전통적인 상업방식의 결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당연히 買辦상인의 작용과 이들 買辦이 주류가 되어 요코하마 화교사 회를 형성한데 기인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인천 화교사회는 대체로 자유무역업자들로 이루어 졌으며 중국에 본사를 두고 인천에 지사를 설치한 경우도 있지만 歐美상사가 인천으로 진출한 경우는 극히 적고 대체로 중국인회사가 인천에 지사를 설치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천에 진출한 청상들은 금융관계와 직원고용 등 면에서 전통 적인 중국인만의 상업방식으로 경영하였다. 양 도시 청상들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초기 인천 화교사회가 주로 廣東人 浙 江人 山東人과 같은 중국 南方과 北方인으로 구성된데 반하여 요코하마 화교사 회는 廣東人을 중심으로 浙江人 福建人 江蘇人으로 구성되어 전형적인 중국 南方系列 상인들로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통적인 중국인의 상업조 직인 會館 과 公所 가 同鄕 同業團體를108)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역별 화교들의 出身地에 대한 고찰과 분석은 이들 화교들의 상업망과 상업 활동, 그 외, 화교경제의 성장여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정확히 廣東人이 약 70% 남짓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외, 福建과 浙江 江西 江蘇인과 같은 南方人으로만 구성되었다. 그리고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위에서 언급한 買辦상인 외, 일본에 거주하는 歐美商人과 그 家族이 필요로 하는 화교 技能職人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들은 주로 建築業 洋裝業 理髮業 洋式家具製造業 피아노修理와 調律 그 외, 製版印刷 등 업종에 종사하 였다.109) 요코하마 개항 후, 30~40년간, 이들 화교들은 요코하마 신흥 항만도시의 개발 108)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상업과 수공업은 이른바 末端 산업으로 간주되어 특권을 소유한 官商을 제외하고 보통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가장 낮았다. 특히 상인들은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 을 수 없었으므로 상인들의 자치조직인 會館 과 公所 로 칭한 同鄕 同業團體에 의존하여 자 신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받을 수밖에 없었다. 109) 日本華僑硏究, 101~102쪽

117 과 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는바 특히 경제구조와 운영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먼저 대외무역에서 對中무역은 항상 入超현상을 유지하였는바 중 국으로부터 수입품은 주로 生絲 藥材 砂糖이고 중국으로 수출품은 대체로 銅 해산물과 같은 1차 산품이었다. 그리고 요코하마 개항초기 이와 같은 수출입 업무는 대체적으로 歐美상사의 중국인 買辦상인이 專擔하고 진행하였다. 이들 買 辦은 무역교섭에서부터 商船賃借, 荷役, 勞動者의 雇用, 貨物船積 등 전체 과정에 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橫浜領事署商務報告 에 따르면 개항초기 歐美商社 에 고용된 신분으로 일본 측과 구미 측의 仲介者로 일한 중국인만 500~600명에 이른다고 한다.110) 이와 같이 買辦은 이미 당시 일본최대의 무역항으로 선정된 요코하마의 수출 입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砂糖의 대량 수입과 해산물 수출은 買 辦을 중심으로 한 화교들이 독점하였다.111) 1893년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대 외수출의 84%와 수입의 95%를 歐美商社가 취급하고 있었으며 이들 歐美상사에 서도 구체적인 업무를 중국인이 전담하고 있었다.112) 한편 일부 근대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수공업도 화교들만의 독점 분야로 전 해졌는바 이는 개항초기 결여되어 있었던 요코하마의 수공업 분야를 보충 보완 해주는 작용을 하였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船舶補修 塗裝 洋式建築 家具 製造 衣服 製版印刷 등이다. 이러한 新技術은 실지로 요코하마가 국제도시로 형성되고 발전되는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였다. 요코하마 화교의 대부분이 歐美商社의 고용인 신분이었지만 이들 화교들의 활 동은 근대 일본의 공업과 무역업에서 인재가 결핍하던 국면을 보완하는 작용을 하였다. 이는 또한 1868년 明治維新 후, 일본의 國策인 國强兵 殖産興業 文明開化 와 일치되었는바 화교들의 경제활동과 영역, 그 외, 이들 화교들이 요 코하마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 못 할 정도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화교들의 업종에 대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화교들은 수출입 무역업에 서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는 외, 遠洋航海에 필요한 歐美商船의 補修 塗裝業種 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개항 초기는 이들 華僑 塗裝工들이 이 업종을 독점하였는 데, 화교들의 작업장은 谷戶橋부터 中華街南門까지 이어졌으며 이 거리가 그 뒤 中華街로 형성되었다.113) 1870년~1890년간 화교들이 종사한 업종은 주로 輸出 入貿易 建築木工 家具製造 衣服 食品製造 海産物 製版印刷 砂糖 中國 110)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412쪽. 111) 伊藤泉美, 橫浜居留地の中國人, 橫浜市史 3卷(下), 1981, 908쪽 112) 日本華僑硏究, 127쪽. 113) 위의 책, 101~103쪽

118 料理 小賣商 骨董工藝品 등 廣範한 영역이었다. 아래 이 시기 요코하마 中華 街의 화교 직업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114) <표3-31> 橫浜中華街의 華僑職業狀況 (1864~1900) 業種 建築 塗裝 家具 衣服 食品 製版 海産 年代 木工 工 81,165 製造 店 製造 印刷 物 106, 砂糖 骨董 中國 輸出入 工藝品 料理 貿易 小賣商 , , , , , , , , , , ,80 81, 大德 81 ~ 堂 , ~ 東同泰 B 協泰源 , 順和 60 廣方泰 棧 永安和 A 福和 출처: 橫浜居留地の諸相, 31~35쪽, 115~118쪽 ; 日本華僑硏究, 118~119쪽. 注: 表內의 수자는 橫浜居留地(山下町) 내의 番地임. 위 표의 내역 중, 衣服店은 譚有發이 1864년에 山下町 147번지에 최초로 개 설하였는데, 그 뒤, 1879년부터 여성복전문점이 97번지와 106번지에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船舶補修塗裝店은 1868년에 최초로 개설되었다. 그 리고 1870년부터 建築木工店이 개설되었는바 이 점포들은 1880년대에 本村으로 이전하였다. 요코하마의 중화요리점은 1900년부터 개업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 터 알 수 있는바 요코하마의 화교들이 종사한 업종도 인천 화교사회와 비교하여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요코하마 화교들은 업종을 선택함에 있어서 주로 歐美상인들이 필요로 하는 품목과 歐美商社에서 취급하는 업종에 한정하고 있음 114) 橫浜居留地硏究會 編, 橫浜居留地の諸相,橫浜開港資e館發行, 1989, 31~35쪽, 115~118쪽 ; 日本華僑硏究, 118~119쪽

119 을 알 수 있다. 船舶補修 塗裝業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64 년에 개설된 衣服店과 1879년에 개업한 여성복전문점, 피아노修理업도 일본에 거주하는 歐美상인을 상대로 개설되었다. 이와 같은 업종은 초기 인천 화교사회 의 화교들이 취급하는 업종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바 그 원인을 양 도시 화교 사회 형성원인, 성격과 화교사회구성의 차이점에 기인한다. 한편 요코하마의 외국인조계에서 歐美상인과 화교들의 활동은 上海 인천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한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요코하마 외국인조계지는 행정적으로 일본정부의 제한을 받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화교경제는 일본당국 의 각종 규제정책으로 인한 제한과 간섭을 받았다. 일본당국은 우선 화교들이 條 約未締結國의 일원이라는 조건으로 籍牌規則 115) 營業制限 內地에서 요양 및 유람금지 등 제반 규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화교들은 일본국의 법률에 따라 경제소송과 형사안건을 審理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歐美 商人의 배척과 차별을 받아 棄民으로 전락되기도 하였는바 이는 청국의 정치적 우세를 기반으로 조계지내에서 치외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인천의 화교사회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116) 더욱이 일본정부는 歐美商人의 의향에 따라 화교들이 요코하마에서 독립적으 로 상공업을 경영하는 것을 금지하여 화교들이 독자적으로 무역업에 종사하고 조계지내에서 제조업을 진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화교들은 비록 歐美 상사의 고용된 신분에서 벗어나더라도 자유롭게 제조업과 같은 업종을 선택할 수 없었다. 화교뿐만 아니라 조계지내의 외국인도 일본정부의 제한조치를 받았는데, 이는 1866년에 일어난 요코하마조계지 화재에 기인된다. 1866년 11월, 요코하마조계 지는 큰 火災에 의하여 건축물의 5분의 1이 소각되는 막심한 재난에 빠졌는바 租界地市參事會117)는 市政管理權을 幕府에게 반환해야 하는 상황이 처해있었다. 1867년 11월 租界地市參事會는 幕府와 橫浜外國人居留地取締規則 을 체결하 고 조계지의 관리를 神奈川奉行의 관할하에 두는 것에 승인하였는데, 그러므로 115) 籍牌規則 은 1867년 11월에 제정되었다. 橫浜居留地外國人取締規則 제4조에 의하여 條 約未締結國人인 中國人은 所在地 奉行所의 管轄을 받게 되었다. 橫浜에 처음으로 조직된 중국 인 團體는 1867년에 설립되었으며 中華會議所라 하였다, 中華會議所는 동년 11월에 제정된 籍牌規則에 기초하여 在留중국인의 籍牌(居住登錄證)수속을 진행하는 등 업무를 수행하였다. 中華會議所는 그 뒤, 中華會館으로 改稱하였다. (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431쪽). 116) 위의 책, 402쪽. 117) 橫浜居留地市參會는 1865년에 橫浜로 건너 온 歐美人들이 설립하였으며 재무 경찰 위생 도로 등 위원회를 설립하여 각종 법규의 제정과 발포, 영업세와 벌금 징수 등 권리를 획득하 였다. 따라서 거류지의 행정 관리권은 실지로 歐美人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120 幕府는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서서히 조계지의 행정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1868년 明治政府의 성립과 維新運動의 전개 속에서 조계지내의 歐美인과 화교를 포함한 외국인들의 활동은 모두 일본정부가 제정한 일련의 규제정책의 제한을 받았는데, 이는 실지로 조계지의 세력 확장, 특히 조계지의 自治에 대한 일본정 부의 제한조치라 할 수 있다. 일본정부는 조계지 외국인에 대한 제한조치를 실시하는 반면, 요코하마 일본상 인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정책을 진행하여 1881년(明治 14) 9월 15일에 聯合生 絲荷預所를 설립하여 外國人이 경영하는 모든 生絲 취급을 統制 指揮하였다. 원래, 요코하마 生絲유통은 화교들의 개입이 많았던 품목이었는데, 이로부터 生 絲는 완전히 일본상인에 의하여 장악 취급되었다. 그 외에도 일본정부는 금융 자본을 행사하여 요코하마 상인들의 상업을 支援하였다. 이와 같이 조계지에서 일본정부의 권리행사와 日商들의 세력 확장은 다른 한편 화교들의 상업 활동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 上海 외국인조계지나 인천 외국인조 계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 고 중 일 국교수립 전인 1870년 요코하마 화교인구는 1,002명으로 기록되었 다. 아래 이 시기 神奈川(주로 요코하마)거류 외국인과 화교인구에 대한 비교표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18) <표3-32> 橫浜居留外國人 및 華僑人數比較 (1864~1894) 年 A B 居留外國人總數 華僑 B/A 年 A B 居留外國人總數 華僑 B/A 출처: 日本華僑硏究, 위 통계표에서 나타나듯이 1871년 중 일 국교수립 후에도 화교인구의 증가 추세는 뚜렷한 변화가 없다가 1878년 청국영사관이 설치되어서야 비로소 증가폭 118) 陳昌福, 앞의 책, 120~121쪽

121 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국은 국교수립 후 7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서야 요코하마 에 청국영사관을 설치하였는데, 실지로 영사관 설치 뒤에도 국내의 정치상황과 국제적 情勢로 인하여 요코하마 화교에 대한 지원과 보호정책을 실시하지 못하 였다. 청국은 1871년(明治 4) 7월에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고 1878년에 요코하마에 정식으로 청국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范錫朋을 初代理事官(領事)으로 임명하였 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요코하마 화교들는 淸日修好條規 119) 제8조에 따라 기타 외국인과 동등한 治外法權을 향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서히 요코하마 화교인 구도 증가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橫浜市史 에 따르면 1877년~1884년 사 이에 요코하마 화교인구는 전체 재일 화교인구의 60%이상을 점하여 요코하마거 류외국인 중에서도 首位를 점하였다. 그리고 이들 출신지역은 주로 중국 廣東 福建 三江(江南 江西 浙江) 지역이었다.120) 한마디로 초기 요코하마 화교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買辦상인은 歐美商社의 雇傭人신분으로 활동하였지만 요코하마의 수출입무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 중국인 技能職人들도 일부 수공업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는바 본국인 청국의 지원과 보호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화교들 의 제 분야에서의 능력과 기술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요코하마 화교들은 또 업종선택에서도 歐美상사가 취급하는 품목과 歐美상인 들이 필요로 하는 품목에 한정하고 있는 특점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외국 인조계지에 대한 규제제도와 요코하마 일본상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정책으로 화교들의 상업 활동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條約未締結國의 국민으로서 일 본정부의 규제정책으로 인하여 製造業에 종사할 수 없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은 청일전쟁 후, 더 심각하여 敵性國民 전락되면서 상업 활동영역에서 밀려나 서서 히 서비스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겪었다.121) 119) 1871년 7월 淸 日사이에 맺은 國交樹立條約으로 諸 外國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兩國의 최초 의 對等條約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조약은 양국이 關稅率을 最低로 정하고 最惠國待 遇條款은 없으며 領事裁判權을 상호 승인했다는 점이 특색이 있다. 이 조약은 1894년 청일전 쟁까지 적용되었다.( 日本史辭典, 812쪽). 120) 陳昌福, 앞의 책, 35~36쪽. 121)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411쪽

122 2. 淸日戰爭 後 橫浜華僑의 內地雜居 청일전쟁 후, 중 일의 국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在韓 在日 화교사회도 큰 변 화를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청국의 패배로 일본정부는 우선 재일화교경제에 대 하여 본격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899년 치외법권의 폐지와 외국 인거류지의 철폐로 橫浜화교들이 집중되어 있던 南京街를 山下町의 行政區分으 로 편입시켰으며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도록 하였다. 특히 이 시기 公布 된 소위 內地雜居令은 중국인의 일본거주에 대하여 제한적으로 거주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는바 이는 실지로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엄하게 금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 요코하마 화교들의 투자환경은 점점 악화되어 상공업으로부터 서비스 업으로 이행하는 국면을 초래하였다. 아울러 청국의 국내 경제와 정치력에 의한 지원이 결여되어 화교경제는 한마디로 크게 위축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122) 한편 1899년 요코하마 외국인조계지가 폐지됨에 따라 歐美人은 치외법권을 상 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內地雜居가 실시되면서 요코하마에 거류하는 외국 인은 급속히 감소되었는데, 특히 1911년 일본이 관세자주권을 회복한 후부터 歐 美人의 요코하마에서의 상업 활동은 더욱 쇠퇴해갔다. 청일전쟁기간 중, 요코하마 화교인구는 대폭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다가 전쟁 후 다시 漸增하여 1920년에 이르러 또다시 재일화교인구의 首位를 점하게 되었 다. 이 시기 요코하마 화교인구의 증감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3-33> 橫浜居留外國人 및 華僑人數比較 (1895~1938) 年 A B 居留外國人總數 華僑 B/A 年 A B 居留外國人總數 華僑 B/A 출처: 日本華僑硏究, 위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1895년부터 1923년의 關東大地震 전까지 요코 122) 위의 책, 414쪽

123 하마 화교인구는 보통 1,000~5,000명 정도로 推移되고 있는데, 이는 전체 居留 外國人의 50~70%를 점유하고 있다. 표에서 나타나듯이 요코하마 화교인구의 증 감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은 그 동안 일본 정부가 진행한 여러 가지 제한정책과 중 일 관계에 있어서 화교들의 지위가 서 서히 저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23년 關東大地震 때, 요코하마 화교 의 3분의 2에 가까운 1,541명이 생명을 잃어 요코하마 中華街의 생존자는 겨우 303명으로 기록되었는바 화교세력이 크게 하락하였음을 설명한다. 이와 같은 양 상은 그 뒤,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 못하여 1938년의 화교인구를 보아도 2,786명 으로 기록되어 종전의 화교인구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3) 한편 일본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 특히 청일전쟁 후, 일본의 국제적 지위의 향상과 화교 治外法權의 취소와 같은 일련의 制限措置와 일본정부의 일본상인에 대한 지원정책으로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孤立無援에 빠져 큰 타격을 받았으며 겨우 서비스업을 경영하여 생계를 유지해가는 정도로 종전의 영향력과 지위와 큰 대조를 이루로 있다.124) 요코하마 화교들은 이와 같은 불행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 을 하였는바 아래 이들 화교사회의 대응 책략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요코하마 화교사회의 특징부터 살펴보면 수많은 노동이민(勞工, 苦力)이 존재하는 동남아 시아 및 아메리카 화교사회와 비교하여 화교노동이민이 극히 적어 화교상인을 중심으로 화교사회가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외, 전통화교사회와 같은 血緣 宗族組織 대신 地緣的성격을 띤 會館 公所 등 行幇組織이 먼저 세 워졌다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125) 다시 말하면 通常 해외화교사회인 경우, 초창기에 먼저 同鄕인으로 조직된 단체를 결성하고 다음으로 동향단체, 그리고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同業團體를 설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단체들을 총괄하 는 上位團體 즉 화교사회전체를 총괄하는 中華會館을 설립한다. 그러나 요코하마 화교사회인 경우 동향단체와 동업단체가 설립되기 전에 요코하마 화교사회를 대 표하는 中華會議所가 설립되었다.126)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1867년 요코하마에 재주한 중국인은 약 660명 정도 였는데,127) 출신지별로 통계한 자료는 없지만 개항초기 요코하마로 진출한 중국 인의 대부분이 홍콩과 上海를 경유한 사람들이었고 또 중화회관의 임원 전체가 123) 위의 책, 402~404쪽. 124) 陳昌福, 앞의 책, 103~105쪽. 125) d赤陽, 長崎華商と東アジア交易網の形成, 汲古書院, 2000, 26쪽. 126)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433쪽. 127) 橫浜市史, 367쪽

124 廣肇幇인 점을 감안할 때,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초기부터 太半이 廣東人, 정확히 廣肇幇으로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통상 해외화교사회와 달리 최초에 중화회관이 설립되었지만 요코하마 재류중국인의 다수가 동향 출신이기 때문에 중화회관 자체를 동향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중화회관의 설립원인에 대하여 官衙機能의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는 관 점도 있는데 그 보다도 위와 같이 재주화교들의 출신지가 同一한 점이 중화회관 설립을 추진한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요코하마에 처음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1867년에 조계지 59번지에 설립되었다.128) 한편 요코하마 화교사회도 인천화교사회와 마찬가지로 본국인 청국과 거주국 간의 관계변화에 따른 영향을 받고 있는바 이 시기 청국에서는 1894년 청일전쟁 의 패배로 인하여 變法自疆운동과 戊戌改革으로 낡은 제도를 개혁하려는 기운이 웃돌고 있었다. 반면 일본정부 내에서는 歐美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改正하는 운 동이 진행되었으며 이어서 재일화교들의 거주지인 조계지가 폐지되었다. 이처럼 본국과 거주국과의 관계변화와 본국 청국의 정치상황, 그리고 일본에서 거주조건 의 변화 속에서 요코하마 화교들은 대책 강구를 위한 논의를 벌였다. 특히 이 시기 요코하마 화교들의 조계지 폐지에 따른 거주조건 강구책은 康有 爲 梁啓超 등 중국국내 보화파의 영향을 받았는데, 마침 戊戌政變에 의한 失脚 으로 商會設立에 실패하자 康有爲는 요코하마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康有爲 梁 啓超 등 保皇派들는 요코하마租界地에서 발행한 機關誌인 淸議報 에 商會 議 129), 論不急設商會之危 130), 論商業會議所 131), 論內地雜居與商務關 係 132)등 논설을 발표하여 요코하마 화교들에게 商會설립의 필요성을 설명하였 으며 한편 상회설립을 촉구하였다. 康有爲 梁啓超 등이 주장한 논점은 네 가지 로 요약할 수 있다. (1) 중국 상인이 租界地 내에서 巨利를 창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2) 內地雜居이후 外國人과 日本人과의 사이에 商業競爭이 激化될 것이며 그 패자로 되지 않으려면 중국 상인은 私利가 아닌 公利(힘을 합쳐)를 추구해 야 한다. (3) 일본의 법률 지배를 받으며 생활하므로 상공업을 확대해 가기 위하여 중국 인도 일본의 상법 민법 및 諸國의 商學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8) 神奈川縣史e 7卷, 122~123쪽. 129) 淸議報 第10冊, 光緖 25年 2月 21日, 第12冊, 光緖 25年 3月 11日. 130) 淸議報 第12冊, 光緖 25年 3月 11日. 131) 淸議報 第21冊, 光緖 25年 6月 11日. 132) 淸議報 第19冊, 光緖 25年 5月 21日

125 (4) 중국인 상인들은 반드시 단결하여 일본인과 협력하며 諸國의 법률 商學 을 연구하기 위하여 商業會議所를 설립하는 것이 急務이다. 康有爲와 梁啓超는 위와 같이 먼저 해외화교사회에서 商會설립을 추진해보려 는 일환으로 요코하마 화교들에게 商會設立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요코하마 화교 사회에서는 변법자강운동의 영향을 받아 商會設立의 조짐이 보였다. 한편, 일본은 1894년 7월 17일, 日英新條約에 조인하게 되면서 그간 계획하여 온 불평등조약에 대한 개정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899년 7월 17일부터 치외법권의 회복과 조계지철폐가 실시되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조계지내에 한정 하여 거주하면서 경제활동을 진행해오던 외국인은 일본국내 각지에서 자유로 거 주하고 경제활동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內地雜居 이 다. 내지잡거를 실시하면서 가장 근본적으로 대두된 문제는 중국인에 대한 내지 잡거 허가與否로 인한 찬반논쟁이었다. 중국인의 내지잡거에 대하여 사회풍속 위생 등을 문제로 삼아 반대하는 排斥 論은(內務省, 農商務省) 阿片吸引과 같은 악영향이 일본사회에 蔓延하여 피해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찬성할 수 없다는 관점이었다. 그 외, 내지잡거를 완전히 허 용하면 저렴한 중국인 노동력의 유입으로 인한 일본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위협한 다는 것이다. 한편, 開放論을 주장한 外務省은 隣國인 중국인에 대해서만 내지 개방을 제한하는 것은 국제 交誼상 외교의 信義로 볼 때, 歐美인과 동등하게 내 지잡거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풍속습관 노동문제 국제관 계 상업문제 등 제 문제점을 감안하여 完全開放 制限的 開放 完全制限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속출되었다. 실지로 新 條約 실시 후, 재일화교들은 거류지내에 거주하면서 경제활동을 제 한받는 것을 우려하여 일년 전인 1898년부터 在日中國公使에 일본정부와 교섭하 여 중국인 내지잡거를 허용할 데 대한 陳情書를 제출하였다.133) 그러나 신조약실 시를 눈앞에 두고 楊公使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6월 하순 橫浜 神戶 長崎 函館 주재 화교대표들은 橫浜중화회관에 모여 대책협의 회 의를 소집하였다. 결과 橫浜화교 吳植垣, 羅偉堂, 孔云生 등을 대표로 선출하여 당국자 및 民間有志들에게 중국인 내지잡거 허용과 관련하여 진정서를 제출하기 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6월 27일, 東京芝의 紅葉館에서 時事新報, 東京日日新聞, 朝日新聞, 每日新聞, 讀賣新聞, 國民新聞, 万朝報 등 各 社의 기자들을 초대하여 일본 언론계를 상대로 중국인 내지잡거 허용과 관련하여 집회를 열었다.134) 梁啓超는 이 집회를 위하여 중국인 내지진출 허용에 대한 利点과 不許에 대한 133) 淸議報 第20冊, 光緖25年 6月 1日, 記中國人請求內地雜居事. 123) 淸議報 第20冊, 光緖25年 6月 1日, 記中國人請求內地雜居事

126 害点을 중심으로 연설문을 준비하였고 柏原文太郞이 代讀하였다. 양계초의 연설 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중국인을 배척하면 일본은 동양에서 商工業의 擴充 기회를 잃게 된다. 2. 중국인을 흡수하면 그 資本力을 利用할 수 있으므로 日本 商工業의 발전에 뒷받침 될 것이다. 3. 중국인을 배척하면 彼此 감정을 해치게 된다. 4. 중국인을 배척하면 황색인종의 존엄에 크게 손상되며 아울러 동양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梁啓超는 이와 같이 연설하면서 중국인 내지잡거를 반대하는 排斥派가 지적한 風俗壞亂 저렴한 노동력의 유입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먼저 풍속괴란에 대하여 설명하면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 중, 하층노동자 는 극히 적고 大半은 상인들이다. 이들은 일본의 법률을 준수하고 있으며 만약 惡弊가 있으면 일본의 법규와 경찰은 이에 대한 엄벌과 조치를 취할 것이다. 저렴한 노동력의 유입문제도 사회문제로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과 중국간의 임금차이는 해외이민을 선택할 정도의 큰 차이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대량의 노동력 유입상황은 초 래되지 않을 것이다.135) 양계초의 이러한 설명은 대다수 참석자의 찬동을 받았으며 언론계를 상대로 한 집회는 결국 성공한 셈이었다. 6월 29일, 재일화교 대표들은 梁啓超 柏原文 太郞과 함께 大隈重信와 犬養毅를 방문하였으며 내지잡거 허용을 희망하는 진정 서를 제출하였다. 그 뒤 內務大臣 西鄕從道 外務大臣 靑木周藏 大藏大臣 松方 正義, 그 외, 기타 유력한 정치가들을 방문하여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며 중국인 내지잡거 문제에 대한 善處를 희망하였다.136) 이 진정서에 橫浜 神戶 長崎 函館 화교 143명이 서명하였는데, 橫浜中華會館 董事 鮑焜이 在橫浜神戶長崎函 館淸國商人總代 로 선임되었다. 서명한 143명중 橫浜화교가 59명이고 神戶華僑 가 59명이며 그 외, 長崎와 函館화교가 각각 19명과 7명이었다. 진정서 내용은 위 記者 招待會에서 梁啓超가 연설한 내용과 비슷하였다.137) 이와 같이 언론계에 대한 공소, 政界에 제출한 진정서 외, 화교들은 戒阿片會(아편금지회) 를 결성하 여 惡弊를 根絶한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일본정부 내에서는 중국인 내지잡거를 둘러싸고 계속 찬반논쟁이 벌어졌 는데, 재일화교들이 이와 같이 스스로 自主的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추진하던 중 135) 淸議報 第20冊, 光緖25年 6月 1日, 記中國人請求內地雜居事. 136) 淸議報 第20冊, 光緖25年 6月 1日, 記中國人請求內地雜居事. 137) 淸議報 第20冊, 光緖25年 6月 1日, 記中國人請求內地雜居事

127 7월 10일, 드디어 臨時閣議에서 중국인에 대하여 制限居住시키기로 통과되었다 는 閣議法制局의 立案이 可決되었다. 이는 내무성의 배척논과 외무성의 개방론의 절충안이었다. 그리고 7월 27일, 勅令 제352호로 內地雜居令 138)이 공포되었는 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외국인은 조약 혹은 慣行에 의하여 거주의 자유를 가지며 종전의 거류지 및 잡거지 이외에 거주, 移轉하여 영업 혹은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다. 단, 노동 자는 특히 行政官廳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종전의 거류지 및 잡거지 이외에서 거주 또는 영업을 행할 수 없다. 노동자의 종류 및 本令施行에 관한 細則은 內 務大臣이 정한다. 제2조. 前條第1項但書에 위반하는 자는 8百円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 付則 제3조. 本令은 明治32年 8月 4日부터 시행한다. 제4조. 明治27年 勅令제137호는 本令施行일부터 폐지한다. 위 칙령 條文에 의하면 조약에 의하여 거주의 자유를 소지한 者는 改正條約에 근거하여 내지잡거가 허용된 歐美제국의 국민이고 慣行에 의하여 내지잡거가 허 용된 者는 한국과 같이 영사재판권이 없는 나라의 국민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조약 혹은 관례에 의하여 거주의 자유를 소지하지 아니한 者는 결국 중국인이었 고 중국인 노동자는 특별히 行政官廳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舊居留地 잡거지 이외에 거주하고 영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制限的 內地雜居로 규정되었다. 이어서 7월 28일, 칙령 제352호의 施行細則으로 內務省令 제42호를 발포하여 미숙련노동자의 內地進出을 不許可한다고 公布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 다.139) 1. 明治32년 칙령 제352호 제1조의 행정관청은 廳府縣長官으로 규정함. 2. 明治32년 칙령 제352호 제1조의 노동자는 農業 漁業 鑛業 土木建築 製造 運 搬 挽車 沖仕業 그 외, 기타의 雜役에 관한 노동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家事에 사용되고 또는 炊事 혹은 給仕에 종사하는 자는 이 규제를 받지 않는다. 3. 노동자에게 주는 허가는 廳府縣長官이 公益上 필요하다고 인정되지 아니할 때는 취 138) 第一條 外國人ハ條約若ハ慣行ニ依リ居住ノ自由ヲ有セサル者ト雖從前ノ居留地及雜居地以外ニ 於テ居住, 移轉, 營業其ノ他ノ行爲ヲ爲スコトヲ得 但シ勞動者ハ特ニ行政官廳ノ許可ヲ受クル ニ非ザレハ, 從前ノ居住地及雜居地以外ニ於テ居住シ又ハ其ノ業務ヲ行フコトヲ得ス. 勞動者ノ 種類及本令施行ニ關スル細則ハ內務大臣之ヲ定ム. 第二條 前條第一項但書ニ違反シタル者ハ百 円以下ノ罰金ニ處ス. 付則 第三條 本令ハ明治32年8月4日ヨリ施行ス. 第四條 明治27年勅令第 百37號ハ本令施行ノ日ヨリ廢止ス. ( 明治年間法令全書 32卷~4, 明治32年7月勅令 ). 139) 明治年間法令全書 32卷, 明治32年7月省令, 6쪽

128 소할 수 있다. 상술한 칙령과 內務省令은 중국인의 일본입국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지만 舊居留地밖에 거주하고 경제 활동하는 것을 엄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실지 로 중국인의 일본 진출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內務省3에 明記된 직업 제한규정에 의하면 재일화교사회는 다른 지역 화교사 회와 비교하여 많은 규제가 따른 것으로 직업선택에서 크게 제약받았다. 우선 거 류지시대 화교들의 업종은 家具 食品 製造業 建築業 印刷業 등 다양한 것 으로 나타났는데, 居留地 철폐이후 내지잡거하면서 업종선택에서 일본정부의 허 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특수한 기술이 없으면 거주 영업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이 시기 많은 재일화교들은 이른바 三把刀(세 자루의 칼) 의 직업 즉 理髮 裁縫 料理업으로 업종을 한정시켜야 했는바 이와 같은 업종은 점점 중국인만의 직업으로 자리 잡혀 가면서 特殊분야로 인식되었다. 이 는 세 종류의 기술을 소유한 일본인이 대체적으로 없었던 원인으로 이들 중국인 기술자를 일본정부에서 허용하여 주었다. 그 뒤, 이발과 재봉분야에 일본인들이 진출하면서 中華料理店만 중국인의 特殊業種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러한 직업 제한 규칙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또한 오늘날 일본에서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사회를 小規模로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바 외국인노동 자들에 대한 일본사회가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140) 결국 칙령 제352호와 내무성령 제42호는 실질적으로 중국인에 한해서만 거주 경제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불평등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재일화교들 은 일본정부의 이러한 조치를 指彈하지 않고 오히려 1900년(明治 33) 2월 11일 紀元節을 맞으며 재일 중국 상인 5백여 명이 모여 일본정부 민간단체 人事 300명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141) 중국인의 내지잡거를 허가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인 셈이다. 이것은 상인의 이익을 지키는 것과 상업상의 불리한 환경 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康有爲 연설문을 정확히 실행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142) 다른 한편 상인중심의 화교사회의 이익에만 충실한 것으로 기존 상인층의 이익 보호와 관련된 행동으로, 노동이민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華商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화교사회의 특징을 설명해 주기 도 한다. 요코하마 화교들은 다음 단계로 재일화교사회의 단합을 위하여 商業會議所를 140) 伊藤泉美, 橫浜における中國人商業會議所の設立をめぐって, 橫浜と上海-近代都市形成史比 較硏究, 橫浜開港資e館, 1995, 442쪽. 141) 淸議報 37冊, 光緖26年 2月 1日, 在留淸國人之招待會. 142) 伊藤泉美, 앞의 논문, 443쪽

129 설립하였다. 1899년 7월 27일, 橫浜中華會館에 商業會議所가 신설되었는데, 그 설립목적은 1. 中國人商人間의 團結, 2. 商法 民法 商學에 대한 연구, 3. 일본 인과의 협력 제휴 등이다. 그 원인은 거류지철폐로 외국상인은 완전히 일본법 규의 관할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아울러 日本內地시장을 개척하는 데에는 필연적 으로 外商간의 경쟁격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橫浜華商會議所는 이와 같은 내지 잡거시대를 맞으면서 기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화교들의 경제를 한층 발 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상업회의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요코하마 華僑總商會 회원구성을 출신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3-34> 橫浜中華總商會 會員構成 出身地 職 海産 省 縣 輸出雜貨 人數 人數 入商 輸 出 入商 香山 (15) 南海 (14) 新會 (12) 臺山 (6) 三水 (5) 廣東 順德 (71) (5) 番禺 (4) 高名 (4) 新安 (2) 鶴山 中 華 西 洋 洋 洋服 兩 酒米 藥 印 料 理 料 理 服 裁縫 替 雜貨 材 刷 店 店 商 業 商 5 籐椅 子業 梱 페인 建 包 트塗 築 業 裝業 業 商 商 業 業 (2) 惠陽 1 (1)

130 東 安 (1) 1 鄞 (8) 浙 江 鎭 海 (10) (1) 1 慈 谿 (1) 1 上 海 江 蘇 (1) 1 (2) 丹 徒 (1) 1 福 建 福 淸 (1) (1) 1 合 計 출처: 橫 浜 華 僑 商 店 調 査. 위 표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橫 浜 中 華 總 商 會 會 員 을 출신지별로 살펴보면 廣 東 省 이 71명으로 85%를 차지하고 浙 江 省 이 10명으로 12%를 차지하며 江 蘇 省 이 2명, 福 建 省 이 1명이다. 즉 廣 肇 幇 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인천화교사회가 山 東 人 이 90%이상인 점을 감안할 때, 요코하마 화교사회구성은 반대로 廣 東 人 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코하마 화 교사회는 실지로 지정학적 요인으로 중국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남연해 지역인이 주류는 화교사회를 형성하였고 아울러 화교상인을 중심으로 한 화교사 회라는 점과 그러므로 동남아화교사회와의 교류도 인천화교사회보다 빈번한 요 소를 가지고 있다. 특히 초기 화교사회 형성시기부터 홍콩을 경유하여 요코하마 로 이주한 중국인이 많았으므로 동남아 화교사회와 밀접한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반 요인은 그 뒤 요코하마 화교사회의 경제성장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요코하마 중화상회는 또 요코하마 주재 화교들의 이익을 위하여 스스로 문제 해결에 임하고 개개인의 화교상인을 대신하여 본국 商 會 와 연락을 취하는 등 상 업상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요코하마 화교상회 는 中 國 商 會 史 상 즉 중국본토 및 해외화교사회를 아울러 早 期 에 설립된 商 會 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 지역화교들 자체로 조직된 민간단체라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각인되었는데, 이는 청일전쟁에서 청국의 패배로 인한 각종 영향, 특히 거류지철폐라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으므로 화교들은 지방주의와

131 幇 派 의 벽을 넘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자는 목적으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노 력을 하였음을 설명한다. 특히 일본의 다른 지역 화교사회와 비교되는 일본인과 의 협력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와 같은 諸 면에서의 노 력으로 橫 浜 화교사회는 오늘날 같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활성화한 요 코하마 차이나타운을 조성할 수 있었다

132 第4章 1920年代 山東苦力의 朝鮮勞動市場 進出 第1節 1920年代 山東苦力의 韓半島 移住 1. 苦力과 山東人의 海外移住 原因 중국노동이민(苦力)의 본격적인 해외이주는 阿片戰爭후부터이다. 아편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한 세기동안 중국노동이민은 약 1,700만여 명이 해외로 渡航하 였다.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남경조약(1842)의 체결로 중국은 廣州 福建 厦門 寧波 上海 등 5개 항구를 개항하였는바 이어서 廣東과 福建 두 성으로 부터 중국 역사상 未曾有의 해외이민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아편전쟁후의 근대 화교는 苦力 즉 중국에서 華工이라 칭하는 무자본 노동이민에서 비롯되었다. 苦力 이란1) 한마디로 雇傭이라는 뜻인데, 아시아 미숙련노동자에 대한 유럽인 의 총칭이다. 19세기이후부터 유럽인들은 苦力 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 범 위를 ⑴ 여비는 본인이 부담하고 고용주인 백인에게 고용된 자, ⑵ 외국에 이주 하는 인도인 및 중국인의 미숙련 노동자, ⑶ 본국에 거주하는 백인에게 고용된 인도인 및 중국인 노동자로 규정하였다.2) 1920~30년대 한국에 거주했던 산동노동이민에 대하여 李鍾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에서 쓰는 苦力 이란 말은 中國人勞動者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 처음나기는 支那 及 印度, 南洋等地에서 외국인 자본가와 청부업자밋헤서 노동하는 土着人의 품 파리군에게 對대서 쓰는 말이다. 3) 1) 苦力은 원래 인도어의 Kuli (날품팔이의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영국인이 동남연해지역에서 중 국인 노동자를 Coolie라 불렀으므로 이를 音譯하여 苦力로 표시하였다.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스 스로 苦力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 논문이 취급한 1920년에 이주한 산동노동이 민에 대하여 한반도에서는 대체적으로 쿨리(苦力) 로 표시하였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쿨리 혹은 중국인 노동자 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특별한 경유는 苦力로 표시하고 대 체적으로 산동노동이민 혹은 중국노동자 로 표시한다. 2) 前田一. 特殊勞務者の勞務管理, 産業能率增進叢書, 山海堂, 1943 ; 靑島守備軍陸軍參謀部 編, 山東苦力參戰事情, 靑島守備軍民政部鐵道部,, 1919 ; 武居鄕一, 滿洲の苦力, 滿鐵經 濟調査會, 1934 ; 靑島軍正署 編, 山東硏究資e, 第壹編, 1917 ; 長野朗, 支那民族の海外 發展, 東京支那問題硏究所, 1928 ; 山東硏究會編纂, 山東の硏究, 山東硏究會, 1916 ; 里 村欣三, 苦力頭の表情, 發行者不明, ) 李鍾玉, 新述語略解 實生活, 3권 6호, 1932년 6월

133 한편 1943년 前 田 一 은 山 東 苦 力 에 대하여 1 미숙련 노동자, 2 타인이 결정 한 노동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 3 주로 옥외에 있고 체력노동에 종사하는 무자 본 노동자로 규정하고 있다. 4) 중국인은 스스로 苦 力 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華 工, 僑 工, 혹은 勞 工 이란 용어로 표시한다. 5) 苦 力 은 아편전쟁 후, 중국의 半 植 民 地 化 와 歐 美 자본주의 사이에서 생겨난 저임 금 노동자이다. 이 시기 外 國 商 會 와 移 民 募 集 機 關 은 중국본토에 와서 직접 苦 力 貿 易 을 진행하였는데, 이와 같은 과정은 구체적으로 외국선박에 위탁하는 방식으 로 이루어 졌는바 따라서 많은 苦 力 들을 募 集 할 수 있었다. 苦 力 貿 易 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거쳐 진행된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해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아프리카 흑인노예 해방은 구미자본주의사회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초래하였는바 구미열강은 그러한 위기에서 탈출하는 일환으로 중 국과 인도에서 苦 力 貿 易 을 진행하였다. 苦 力 貿 易 은 초기단계부터 본격적으로 확 대되었으며 이로부터 근대 중국인의 해외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6) 근대 화교사회는 한마디로 이들 苦 力 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인구지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초기 苦 力 으로 이루어진 해외화교사회는 대체적으로 남성중심사회라는 특색이 있어 남녀인구비율의 현저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화교사회에서 중국인 여성의 人 身 對 價 는 점점 높아졌으며 따라서 廣 東 지역으로 부터 猪 花 7) 의 도입을 유도하는 상황까지 초래하였다. 8) 해외로 이주한 苦 力 은 대체로 자유노동자 9) 들이다. 초기는 일부 契 約 華 工 10) 이 4) 前 田 一, 위의 책, 177~179쪽. 5) 秦 裕 光. 旅 韓 六 十 年 見 聞 錄 韓 國 華 僑 史 話 ( 中 華 民 國 韓 國 硏 究 學 會, 中 華 民 國 72 年 元 月 初 版 ), 37~38쪽. 6) 可 兒 弘 明. 近 代 中 國 の 苦 力 と 猪 花 岩 波 書 店, 1998, 21~22쪽. 7) 중국 廣 東 지방어로 고력의 신분으로 유럽인에게 팔려가는 이 시기 농민과 파산자를 猪 仔 라 칭하였다. 子 豚 의 의미인데 그 어원은 변발이 돼지 꼬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혹은 고력이 子 豚 처럼 매매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그 뒤 이어진 여성노동자의 이민을 猪 花 라고 하였다. 猪 花 의 해외이민은 이 시기 심각한 해외남성화교사회를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행되었다( 可 兒 弘 明, 위의 책, 6쪽.) 8) 可 兒 弘 明. 위의 책, 8쪽. 9) 자유노동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해외에 나가 노동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유로 왕래하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華 工 으로부터 華 商 으로 발전된 경우도 많은데, 특히 南 洋 의 부호중에는 자유 화공출신이 적지 않다( 李 長 傅. 南 洋 史 地 與 華 僑 華 人 硏 究 - 李 長 傅 先 生 論 文 選 集, 曁 南 大 學 出 版 社, 2001, 22~24쪽.) 10) 契 約 華 工 은 타국정부 혹은 어떤 회사와 년한을 계약하고 모집되는데, 기한이 만기되면 고국으

134 란 불법수법에 기만되어 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하였는데, 해외화교역사상 이들 契 約華工이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1) 1920~30년대 조선으로 건너온 苦力은 중국 산동지역의 자유노동자 들이다. 이들은 單身으로 건너왔으며 연말이면 귀국하고 연초에 다시 들어오는 전형적인 계절이민으로 각인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한국화교사회 역시 전형적인 남성화교 사회라는 특색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남녀인구비율의 현저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 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居住國에 대한 이주민의 정착과정을 지연시키는바 산동 노동이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동노동이민은 장기간의 계절이민 과정을 거쳐 점 차 남녀인구비율의 균형을 이루면서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단계로 이행하였다. 인천개항초기 1883년(高宗 22)에 인천에 거주한 淸商의 출신지역을 조사한 통 계표에 따르면 山東商人이 12%이고 廣東商人과 浙江商人이 88%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12) 그리고 1884년부터 淸國조계지의 설정과 淸國領事館의 설 치에 따라, 특히 청국정부의 중국국내 유력한 청상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 는 조치를 기반으로 중국 남방으로부터 북방에 이르는 각 지역 상인들의 한반도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오늘날 한국화교사회 구성 특성인 山東人의 90%점유율로 기록되지 않았다. 실지로 山東人이 주류를 이루는 양상은 1920년대에 이르러 한반도로 산동노동 이민의 이주가 급증하면서부터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 뒤, 꾸준히 이어 지는바 한국화교사회만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산동노동이 민의 한반도이주는 오늘날 화교사회의 기반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이 시기 한반도로 건너온 산동노동이민에 대한 연구는 한국화교사회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화교사회연구에서 山東苦力 즉 이 시기 산동노동이 민에 대한 연구는 공백상태나 다름없다. 물론 전체 華僑史에 대한 연구도 절대적 으로 부족하지만, 그나마 화교의 정체성, 화교의 이주와 정착, 화교자본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 연구13)가 대부분이다. 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들 계약화공은 대체로 업주들에게 팔려 학대받고 도박에 유인되어 빚 지고 따라서 귀국도 무기한으로 연장되는 경우가 많다. 해외 화교 중 契約華工이 제일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李長傅, 위의 책, 23~24쪽). 11) 吳澤 主編, 桂遵義 施子年 選編, 華僑史硏究論集(一), 華東師範大學出版社, 1984, 17~18쪽. 12)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編,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2, 1796~1803쪽. 13) 朴銀瓊, 태국, 인도네시아 및 한국 화교의 Ethnic Identity 문제, 한국문화인류학 11-1, 1979 ; 朴銀瓊, 화교의 종족 정체성과 이동의 관계, 현상과 인식 6-4 ; 高承濟, 華僑對 韓移民의 社會史的 分析, 白山學報 13 ; 譚永盛, 朝鮮末期의 淸國商人에 關한 硏究

135 1920년대 山東苦力의 이주 및 한반도에서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우선 산동 노동이민과 이 시기 조선노동자와의 갈등관계,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산동노동이 민에 대한 대응정책 등 제반과정을 통하여 한국화교사회의 역사적 생성과정을 조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 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산동지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自然災害는 이 지역민의 해외이 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본 절에서는 우선 이 부분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산 동인의 한반도이주 원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산동은 中國華北의 동부, 북위 34도에서 39도 사이, 동경 115도에서 123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黃淮平原에 접하고 동쪽은 黃海, 渤海와 접하고 있는 半島形 지형이다. 산동경내로는 黃河, 運河14)와 같은 하류가 흘러 지나고 있어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자원이 풍부하다. 그 외, 산동연해는 해안선 길이가 긴 원인으로 膠州灣 龍口灣과 같은 항만이 많다.15) 그러나 다른 한편 산동성은 지리적 원인으로 역사적으로 黃河의 범람을 비롯 한 澇災 蟲害와 같은 자연재해가 해마다 발생하였는바 재해지역으로도 유명하 다. 예컨대 1840년 아편전쟁 전부터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는 끊임없 이 각종 자연재해의 침해를 받았는데, 통계자료에 따르면 1670년부터 1836년까 지 166년 동안 모두 13차례 규모가 큰 한재가 발생하여 847개에 이르는 州縣이 피해지역으로 전락되었다.16) 그 외, 1703년(康熙 42), 1730년(雍正 8), 1747년 (乾 47)에 거쳐 세 차례의 이름난 澇災가 있었다. 이와 같은 旱災와 澇災의 발 생은 특히 피해범위가 넓고 오랜 기간 지속된 원인으로 산동인은 집과 땅을 잃 고 유랑하기 시작하였다.17) 1898년에는 백년만의 자연재해 로 꼽을 수 있는 규모가 큰 황하의 범람이 있 年부터 1885年까지-, 檀國大석사학위논문, 1976 ; 강덕지, 한국 화교의 경제에 관한 고찰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73 ; 이상준, 화교 자본의 기본성격에 관한 연구, 고려대 석사학 위의 논문, 1973, 등. 14) 運河는 山東에서 중국의 南北을 이어주는 중요한 수륙교통이며 산동의 경제를 반영시켜 運河 일대의 상업, 수공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15) 山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고대문화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산동성의 면적은 이며 1995년 말 인구조사에 의하면 만 명이 살고 있다. 산동성은 여러 민족이 雜居하는 省으로서 漢族외에 回族, 滿族, 蒙古族 등 38개 소수민족이 생활하고 있는데, 이 들의 인구는 41만 명 전후이다. 山東省에는 濟南, 靑島, 淄博, 棗庄, 東營, 烟台, 濰坊, 濟寧, 泰安, 威海, 日照, 萊蕪, 德州, 臨沂 등 14개 市와 濱州, 菏澤 등 3개 지구에 139개현이 있 다(安作璋 主編, 山東通史 (近代卷)上冊, 山東人民出版社, 1994, 3쪽). 16) 安作璋, 위의 책, 30쪽. 17) 위의 책, 12쪽

136 었는데 이 시기 피해지역만 歷城, 章丘, 東阿, 肥城, 陽谷 등 29개 주현이다. 설 상가상으로 1899년과 1900년에는 연속 2년간 旱災가 발생하여 76개 州縣이 재 해지구로 기록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쌀값의 폭등을 초래하여 1899년의 쌀값 은 최고치에 달하였다.18) 산동지역의 자연재해는 1910~30년대까지도 계속 이어지는바 아래 1912년부 터 1939년까지 河北省과 山東省에서 일어난 天災를 지역별 종류별로 구분하여 표로 살펴보기로 한다.19) <표4-1> 山東 河北 兩省 天災發生 狀況 (1912~1939) 年 度 省 別 -----河北省 山東省 河北省 被 害 種 類 -----永定河堤防決潰 黃河氾濫 八津地震 山東省 ---河北省 黃河堤防決潰 ---水害 山東省 山東省 ---河北省 河北省 水害 水害 ---旱魃 水害 山東省 ---河北省, 山東省 河北省, 山東省 河北省 ---不明 水害 蟲害 山東省 山東省 山東省 河北省, 山東省 河北省 黃河決潰 黃河決潰 旱魃及蟲害 旱魃 蟲害 山東省 ---山東省 河北省 水害及蟲害 ---洪水 水害 其 他 被害縣 103個縣 山西를포함한罹災民數: 9,814,232人 損害: 2,500萬元 侵水面積:800方里 耀炎者: 900萬人 18) 安作璋, 위의 책, 203쪽 19) 前田一, 特殊勞動者の勞動管理 産業能率增進叢書, 山海堂刊, 1943년(昭和 18), 186~187쪽

137 山東省 河北省 旱魃, 水害, 蝗害 水害 山東省 河北省, 山東省 河北省, 山東省 河北省 河北省 旱魃. 水害, 蝗害 水害 水害, 旱魃 旱魃, 風害 惡疫 山東省 河北省 旱魃 水害 山東省 河北省 旱魃, 蟲害 水害, 旱魃 山東省 水害, 旱魃, 風害 被害者:100萬人 출처: 前田一, 特殊勞動者の勞動管理, 186~187쪽.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山東省과 河北省은 1912년부터 1939년까지 해마다 끊임없이 자연재해의 피해를 받고 있는바 피해자만 무려 100만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당연이 쌀값의 騰貴를 초래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이 지역민의 해외이주를 유도한 중요한 원인으로 각인되었다. 다름으로 산동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도 산동인의 해외이민을 유도하였다. 19 세기말 산동에서 급격히 확대된 義和團運動은 산동의 사회 경제의 변화에 기인 하는데, 直隸에 근접한 산동성은 원래 봉건적 구세력의 거점이었으나 1894년 淸 日戰爭으로 인하여 일본군에게 유린되었으며 이어서 독일과 영국에게 膠州와 威 海衛를 강점당하였다. 특히 1899년 膠濟線 철도의 건설20)은 부근 운송노동자들 의 실업을 초래하였으며 아울러 외국물자의 대량수입으로 농민과 수공업노동자 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21) 산동지역은 아편전쟁 후부터 아편의 수입과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아편재배가 확대되면서 주곡의 흉작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정부의 지세면제나 구휼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 외, 흉작으로 곡물가격이 상승한 데다 歐美 각 국이 金銀複本位制를 폐지함으로서 은값 하락과 물가를 앙등시키는 결과를 초래 20) 1897년 11월, 독일의 전도사 두 명이 산동에서 피살된 사건을 이유로 독일은 군함을 파견하 여 膠州灣을 점령하였다. 1898년 3월에는 청 정부를 강요하여 膠澳租界條約 을 체결하고, 독일이 99년간 교주만을 임대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임대기간 내 교주만은 완전히 독일 의 관할범위로 전락되었으며, 독일은 산동경내 膠濟철도를 부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독 일은 산동경내에서 광산 채굴권리를 갖는 등 산동은 완전히 독일의 세력범위로 전락되었다(龔 書鐸 方攸翰, 中國近代史綱, 北京大學出版社, 1992, 216~217쪽). 21) 孔令仁, 十九世紀末山東的社會經濟與義和團運動, 義和團運動史討論文集, 齊G書社 1982, 410~414쪽

138 하였다. 산동인은 청정부의 부패한 정치로 인한 열강의 수탈과 아편의 대량수입 외, 지주 관료층의 토지약탈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았다.2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동인의 해외이주는 아래 몇 가지 원인으로 귀납 할 수 있다. 첫째 山東省과 河北省을 포함한 華北農村지역이 받은 黃河諸川의 범람과 旱害 蝗害 風害 雹害 등 해마다 華北 지역을 휩쓴 天災가 주요한 원 인이다.23) 둘째, 軍閥政治의 苛斂誅求, 즉 엄청난 세금징수라 할 수 있다. 셋째, 열강의 침략에 따른 약탈과 실업 등 각종 피해는 이 지역민의 해외이주를 추진 하는 작용을 하였다. 결국 해외이주 혹은 국내이주를 막론하고 산동 농민과 파산 된 수공업노동자들은 대체적으로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해가는 무자본 노동력 즉 苦力으로 전락되었다.24) 산동인의 해외이주는 阿片戰爭후부터 본격화되었다.25) 초기 해외이주는 주로 산동 연해지역인 煙台 威海 濰坊 日照 靑島 등지의 농민과 노동자들로 이 루어졌다. 이들은 單身으로 이주하였으며 매년 2월에 떠났다가 연말이면 귀국하 는 전형적인 계절이민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계절이민은 居住國과의 遠近거리에 따라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3년~5년에 한번씩 귀국하 는 경우도 있었다. 22) 1858년 아편무역이 합법화되면서 대량의 아편이 중국시장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와 같은 아편 의 대량수입으로 자연히 銀의 유출현상이 나타났다. 地主 官僚층은 더욱더 토지를 약탈하 기 시작하였다. 산동의 토지 점유형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주로 (1) 旗地, 皇帝가 滿洲 皇族과 軍人들에게 분배한 토지, (2) 寺廟 및 종교단체 소유의 토지, (3) 學田, 각지 孔廟를 維 持하기 위한 것인데, 후에는 학교운영을 維持하는데 사용하였다. (4) 屯田 駐防軍의 소유에 속 하는 토지, (5) 族田, 同族人의 公有에 속하는데, 祭5 등을 진행하기 위해 유지한다. (6) 私 有地이다. 이 시기 지주 관료층만 80%의 토지를 차지하였다(安作璋, 앞의 책, 7쪽). 23) 德宗實錄 482卷, 光緖27年 4月 28日( ) 諭軍機大臣等: 有人奏, 山東靑島地方, 聚匪徒二, 三千人, 立有頭目, 各屬 戶多被勒索銀錢, 甚至有捉人勒贖情事 等語 라 하여 匪禍가 심하므로 조사하고 응징처벌을 취하여 지방 민심의 안정책에 대한 내용을 상주하고 있다. : 德宗實錄 485卷, 光緖27年 7月 30日( )에 또 沿海匪徒猖獗, 屢有戈 獲, 現已漸就平靖. 이라 하여 匪徒로 인한 사회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中國 近代史硏究室, 山東師範大學歷史系選 編, 淸實錄山東史e選 下, 齐G書社, 1984, 1972~ 1973쪽). 24) 실제로 1926년에 있었던 큰 災禍로 華北지역에서 만주로 이동한 인구는 무려 백만을 돌파하 였다고 한다. 그 외 南開大學에서 산동농민의 離村에 대한 원인 분석조사표에 의하면 경제적 원인이 69%이고, 天災人禍가 27.3%이고 기타 원인이 3.7%라고 발표하고 있다. 또 滿洲勞工 協會의 조사에 의하면 滿洲勞動者의 이촌 원인은 旱魃에 의한 이촌이 25.4%, 水害에 의한 원 인이 15.2%, 蝗害가 3.7%라고 말하고 있어 이주민의 반수가 天災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 다(前田一, 앞의 책, 187~188쪽.) 25) 아편전쟁 뒤부터 외국침략자들은 華工(고력)을 모집하여 팔아넘기는 苦力貿易 업을 진행하였 다. 이들 華工은 해외로 가는 도중 많은 시달림을 받아 14~45 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 中 國近代史綱, 29~30쪽)

139 산동인의 해외이주는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종전과 다른 양상으 로 급증하였다. 특히 1911년을 전후하여 산동성에서는 해마다 35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그 중 약 10만 명은 동북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는 연평균 100만 명이 이주하였는데, 25~30%가 육로로 러시아 조선 몽고로, 또 일부는 膠東반도에서 출발하여 해로로 러시아 조선 일본 등지로 이주하였다. 산동화교는 華工(고력)과 商人(華商)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苦力 이 다수의 비중을 점하고 있다.26) 중국국내 타 지역의 화교와 마찬가지로 산동 성의 화교들도 거주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업종변화를 일으키는데, 다시 말하면 초기 工人 농민 雜工 傭工 車 등 苦力 신분의 이주자로부터 잡화상 음식 점 무역상 금융업 등을 경영하는 華商으로 전환한다.27) 산동성은 중국 북방지역의 주요한 화교고향이다. 현재 산동성에는 대만, 홍콩, 마카오를 제외한 화교 화인이 40만 명 있는데, 이들 화교 화인 중 90%이상은 이미 거주국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法的槪念으로 해석하면 華人28)으로 분류된 다. 그리고 대만동포가 80만 명이고 홍콩, 마카오동포가 15만 명이다. 산동화교 는 주로 일본 북한 한국 인도네시아 인도 러시아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 나라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들 화교 화인은 공업 상업 교육 과학기 술 등 여러 분야에 종사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29) 26) 한 일본인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세계 첫 번째 철도 시베리아철도의 완성은 완전히 산동고력 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다(李長傅, 앞의 책, 49~51쪽). 27) 各省僑情, 山東僑情, 呂志孟. 28) 華僑 華人을 법적의미로 槪念을 정리하면 華僑는 외국에 있으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소유한 자연인을 가리키고, 華人은 중국혈통을 소유한 외국국적자이다(白曉東, 略論華僑華人 問題的法學角度硏究, 華僑華人歷史硏究 1995, 第1期, 11쪽). 29) 各省僑情, 山東僑情, 呂志孟

140 2. 山東苦力의 韓半島 移住 산동고력의 조선 도래는 1920년대 초부터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바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요인에 따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앞에서 언급한 산동지역의 해외이주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그 외 1910년 한일합 방으로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건설을 위하여 한반도에서 진행한 제 분야의 건설 사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에는 근대적인 교통 통신수단의 도입이 급선 무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 각종 유통기구의 확대에 따른 토목 건축과 각종 서비스산업 분야가 필요로 하는 임금노동자의 증대이다 실제로 한일합방 전인 1899년에 이미 경인철도가 부설되었고 이어서 1905년 에 경부철도, 1910년에 평양탄광철도, 평남철도, 그리고 1914년에는 호남철도와 경인철도가 부설되었다. 이와 같은 철도부설사업은 당연히 많은 임금노동자를 필 요로 하였는데, 1919년 말 철도의 총연장은 2,197km에 달하였다.30) 일본은 또 1905년 이후 조선의 전체 통신 기구를 장악하기에 이르면서 전신 전화망을 확장하였는바 1919년경에는 전국적인 전신 전화망 설치를 완료하였 다. 1921년의 통계를 살펴보면 전신망이 8,030km, 전화망이 7,056km에 달하였 다.31) 이와 같이 철도가 부설되고, 전신 전화의 설치사업은 다른 한편 이와 같은 근대적 교통 통신시설이 확장되는 과정과 이와 관련하여 진행된 각종 토목건설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임금노동자가 상당수 필요하였음을 설명한다. 그 외, 1920년대부터 진행된 조선총독부의 대규모 공공투자에 의한 시설 도로 항만 등 설비와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리시설에 대한 건설사업도 임금 노동자를 필 요로 하였다.32) 이러한 내적 외적 요인으로 산동인은 보다 가깝고 안전한 한반도로 몰려왔으 며 조선총독부의 입국제한규제가 무방비 상태라 이 시기 언론매체의 표현대로 밀물처럼 몰려왔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한일병합선언과 동시에 1910년 8월 29일, 조약에 의하여 거주자유를 가지지 못한 외국인에 관한 건 에 대한 통감부령을 조약에 의하여 거주자유를 가지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의 指定 ( )으로 補强하여 외국 인노동자가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 거주지를 이전하고 거주지 밖에서 노동하는 30) 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史 1卷, ) 朝鮮總督府, 朝鮮遞信事業沿革史 1938, 151~152쪽, 223~224쪽. 32) 秦裕光, 앞의 책, 39~42쩍

141 것을 금지 한다33)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규제는 實效를 거두지 못하 였는바 有名無實해 졌다. 그 이유는 아래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1) 한국과 중국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으므로 노동자가 大量流入할 수 있다는 점, (2)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지 경제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노동력수요가 높아졌다는 점, (3) 화교노동자가 조선인 노동자보다 作業效率이 높고 임금은 일본인노동자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34)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이 실지로 이 시기 화교노동자들의 勞動能率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화교노동자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통감부령은 아무런 작용을 일 으키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총독부는 또 이들 화교노동자에 대하여 일단 어떤 일에 종사하면 감독자가 없어도 규정된 시간을 정확히 지키며 일하는 장점 이 있다. 근년에 支那人의 石工이 京城附近에 눈에 띄게 증가한 사실도 이를 증명 한 다35) 고 분석하고 있다. 산동고력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루트를 거쳐 조선으로 건너왔다. 1) 山東 芝罘에서 출발하여 인천항 혹은 진남포에서 下船하는데, 주로 산동반도 先端部地 域의 주민들이 이용하였다. 2) 膠濟鐵道를 이용하여 靑島에 도착하고 다시 靑島 에서 배편으로 인천항 또는 진남포에 도착하였는데, 주로 산동반도 內陸部의 주 민들이 이용하였다. 3) 龍口를 출발점으로 海路 陸路로 大連 安東에 도착하고 다시 安東에서 對岸에 위치한 조선 신의주로 건너갔다. 이 루트는 주로 萊州灣 연안지역의 주민들이 이용하였다. 4) 淸朝末期이래 대규모의 이민정책과 해마다 일어나는 華北지역의 天災 戰禍 人禍로 滿洲로 자유이민한 산동인들 중, 압록 강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다.36) 이와 같이 산동인은 육로 해로로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1920년 말에 이르면 북쪽 신의주에서부터 남쪽 부산에 이르기까지 靑衣입은 苦力群이 구석구석 없 는 곳이 없을 정도로 산동인의 이주가 많았다. 33) 朝鮮總督府 編, 朝鮮法令輯覽, 朝鮮總督府, 1922, 82쪽. 34) 小田内通敏, 来住の支那人, 朝鮮部落調査報告, 朝鮮総督府, 1924, 60쪽. 35) 위의 책, 57쪽. 36) 千田稔 宇野隆 共編, 東アジアと 半島空間 -山東半島と遼東半島, 思文閣出版, 1995, 316~318쪽

142 그러나 산동고력이 실지로 언제부터 한반도에 건너오기 시작했는지. 지금까지 입수한 자료로 입증할 수 없다. 다만 한일병합 전에 이미 일부지역에서 화교노동 자들이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예컨대 1905년에 平北 雲山 金鑛에서 중국노동자들이 노동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 金鑛에 종사한 전 체 4백여 명의 노동자는 각각 서양인 20여명, 일본인 10여명, 支那雜役者(苦力) 가 50여명, 조선 갱부 300여명이었다.37) 1912년에는 경원선 공사현장에서도 중 국노동자 170명으로 기록되었는바 기타 일본인 154명, 조선인 863명이었다.38) 실지로 1914년경에 이미 중국노동자가 상당수 한반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바 1914년의 통계에 따르면 京城에 거주한 중국인 2,500여 명 중, 노동자가 반수이 상 차지하여 商賈로 일정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支那사람 사이에 세력 있는 자는 100인에 지나지 못할 39)정도라고 설명하여 이 시기 청국상인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과 반면에 노동이민이 늘어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 내 광산노동자에 대한 통계 조사표에 따르 면 이 시기 조선노동자는 29,358명, 일본노동자는 157명, 중국인노동자는(고력) 5,135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15%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 고력은 대체적으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지구의 광산에서 노동하였으며 대개가 산동 혹은 滿洲지역에서 건너온 산동인이었다.40) 1920년대 조선으로 도항한 고력은 대체로 인천항을 이용하여 入港하였다. 특 히 1920년대부터 인천항으로 산동고력의 입국이 급증하였는바 이 시기 인천에서 조사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23년 1월부터 3월까지 인천항에 중국노동자가 만 여 명이 이주해 생활하고 있다고 통계하고 있다.41) 1924년에도 인천항으로 이주 한 중국노동자가 6개월에 2만여 명으로 집산되어 예년보다도 크게 증가된 것으 로 나타났다.42) 1925년에는 3월 중에만 중국노동자가 5천여 명이 입국(인천항)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들 중국노동자들은 인천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확산 되어 갔지만, 勞資爭議가 많았던 인천노동계를 크게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였 다.43) 37) 德永勳美, 韓國總覽, 東京博文館, 1907, 970쪽. 38) 京元線工事近況, 每日申報, 1912년 6월 25일자. 39) 京城에 支那人, 每日申報, 1914년 6월 24일자. 40) 高承濟, 韓國移民史硏究 章文閣, 1973, 366쪽. 41) 東亞日報 1923년 4월 4일자. 조선인은 일본으로, 중국인은 조선으로 노동계의 큰 문제, 생 활난으로 쫓기고 있는 조선으로 중국인들이 3월말까지만 만여 명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는데 4 월에는 더욱 증가추세이다. 42) 朝鮮日報 1924년 7월 7일자. 仁川에 온 中國勞動者가 6개월간에 2만여 명으로 집산되어 예 년보다도 많아 조선노동자의 타격

143 1920년대에 이르러 한반도의 화교사회는 종전의 상인으로부터 완전히 노동자 중심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이들 중국인 노동자들은 임금이 싸고, 노 동효율이 높다는 평판44)을 받았으며 따라서 청부업자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1927년 3월에는 중국의 은값 폭락과 중국 내 동란으로 인하여 산동고력 의 來航수는 더 급증하였는바 山東 芝罘港으로부터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선박에 매일 1,000여명의 고력이 입국45)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7년 1월부터 4 월까지만 인천에 상륙한 중국노동자는 무려 2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이어서 5월 에도 苦力群 6천명이 이주하였다.46) 이와 같은 양상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났는바 1928년에 이르러 고력 이주의 급증양상에 대비하여 당국에서는 거주제한 혹은 노임문제 등에 대한 대 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인천세관통계자료에 따르면 1928년 1월부터 10월 중순까지 28,906명이 이주하였다고 통계하고 있다 그 중, 2월부터 3월까지의 통 계만 17,000여 명이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였다고 적고 있다. 특히 연초 2 3월 에 산동고력의 이주가 급증하는 양상은 계절이민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 다. 1927년까지는 보통 배 한편에 8백 명 내외에 불과하였는데, 1928년부터는 1,000명이상을 웃돌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47) 실제로 1910년에 조선에 在住한 중국인은 11,800여 명 이었는데, 1927년의 통계에 따르면 6만 명 노동자를 포함하여 전체 중국인 수는 10만 명으로 급증하 였다.48) 물론 이는 언론을 통한 통계이므로 실제와 일정한 차이가 있겠지만 어 쨌든 이 시기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가 급증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인천뿐만 아니라 조선의 전 지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바 雄基埠頭에도 중국 고력이 배편마다 사오십 명씩 이주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이미 조선노동자들도 失職으로 生活苦를 겪고 있는 상황이므로 웅기 노동계에서도 여 43) 朝鮮日報 1925년 4월 2일자. 三月中 仁川에 온 中國勞動者 5천여 명으로 조선노동자는 차 차 구축을 당하여 간다. 44) 朝鮮의 工業, 每日申報, 1916년 6월 2일자. 45) 中國人勞動者 매일 1000여명씩 渡來, 每日申報, 1927년 3월 3일자. 46) 朝鮮日報 1927년 5월 12일자. 47) 東亞日報 1928년 3월19일; 東亞日報 1927년 3월1일. 中國人勞動者 2만여명 渡來하는 데 當局者는 視而不見 ; 東亞日報 1927년 4월10일, 侵入하는 中國人 3월에만 만여명으로 朝鮮勞動界 큰 威脅 ; 東亞日報 1928년 4월3일, 昨年中에만 勿驚! 6千人 ; 朝鮮日報 1927년 5월6일, 中國動亂의 影響 七千苦力 越境殺到로 조선노동계의 絶對威脅 ; 朝鮮日 報 1927년 5월12일자에 京畿道 保安課에서 인천항에 하륙하는 중국고력의 수를 조사한바 4 월 중 인천항에 하륙한 中國勞動者는 六千名이고 1월이래로 2만명을 돌파 하였다고 보도하 였다. 48) 朝鮮日報 1928년 12월 6일자, 時評-中國人勞動者問題

144 론이 분분하였다. 49) 그 외, 웅기항은 1926년부터 축항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를 목표로 들어오는 중국인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웅기 노동친목회는 사 태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50) 1928년에는 평안남도 平 原 郡 平 安 水 利 組 合 工 事 와 平 原 線 철도공사, 그리고 평 안경찰서 신축현장에서도 대체적으로 고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점점 노 동현장에서 구축되어가는 조선노동자와 중국노동자 사이에 혈투전 까지 발생하 였다. 원래 道 당국의 방침은 어떤 請 負 業 이든지 중국노동자를 조선노동자의 1/3 이상을 고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청부업자들은 경제적 이익을 노리 고 중국노동자만 사용하였으므로 조선노동자들은 자연히 노동시장에서 구축되었 으며 드디어 중국 고력은 조선노동시장을 위협하는 문제집단 으로 대두하기 시 작하였다. 51) 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 중국고력의 급증현상은 조선노동시장을 위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노동자와의 갈등관계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는바 1926년부터 1933년간 한반도로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52) <표4-2> 最 近 中 國 人 勞 動 者 數 의 增 減 狀 況 年 度 人 數 增 減 備 考 1926 年 末 26,829 人 1927 年 末 27,766 人 增 937 人 1928 年 末 30,106 人 增 2,340 人 1929 年 末 33,427 人 增 3,321 人 原 資 e, 年 末 35,362 人 增 1,935 人 1931 年 末 19,658 人 減 15,704 人 1932 年 末 22,737 人 增 3,079 人 1933 年 末 22,294 人 減 443 人 출처: 帝 國 議 會 說 明 資 e, 300~301쪽. 위 표가 나타나듯이 1928년부터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는 평균 2,500명을 유 지하고 있는바 이와 같은 상황은 조선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각인되 49) 鳩 山 농장은 사업주가 직업 중국에서 가서 고력을 모집하였다. ( 朝 鮮 日 報 1926년 4월 25일 자, 朝 鮮 勞 動 者 를 威 脅 하는 苦 力 群 이 웅기까지 몰려들어 ) 50) 朝 鮮 日 報 1926년 5월 16일자. 雄 基 築 港 工 事 와 中 國 勞 動 者 激 增, 동포 노동자에게 큰 타격을 주어 勞 動 親 睦 會 는 對 策 講 究 51) 東 亞 日 報 1928년 11월 16일자. 中 國 勞 動 者 平 南 에 激 增, 威 脅 밧는 朝 鮮 勞 動 者 52) 帝 國 議 會 說 明 資 e, 300~301쪽

145 었다. 그리하여 노동기회를 침탈당한 노동계에서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중국 인을 배척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53) 경기도에서는 道內만이라도 중국고력의 入道를 금지하려고 1927년 10월 25일 道內警察署長會議 에 附議로 입도금지를 명령할 방침을 세웠다.54) 그리고 東京電의 내용을 빌어 일본에서도 중국인 노동 자의 입국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일본노동시장의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조선총독부의 중국고력의 입국에 대한 방임정책을 크게 질책하였 다.55) 朝鮮土工組合에서는 총독부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중국인 노동자문제를 감 독 지휘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1) 中華民勞動者組合을 조직하여 조합원에게 組 合章을 급여하고 임금 및 노동시간을 협정하여 노동자를 수요할 때에는 조선인 조합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2) 조선인을 위하여 徒弟學校를 설립하는 동시 에 노동조사위원회를 신설하여 노동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56) 여론에서도 이미 年年커가는 苦力의 勢力에 대한 朝鮮勞動者의 反省이 緊 要 57)하고 勞動界를 侵蝕하는 苦力에 對抗 58)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 었다. 또 苦力에게 蠶食되는 仁川의 勞動界 59)의 심각한 사태를 호소하면서 산 동고력의 渡鮮에 따른 악영향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連續殺到하는 苦力群에 대 하여 정부에서 그들의 입국을 제한해야 한다. 든지 선금 받고 苦力群들이 乘夜 逃走 60)했다는 기사들이 언론에 자주 게재되어 고력문제는 한반도의 大事 로 거 론되었다. 다시 말하면 華僑 또는 중국인은 문제 집단 으로 인식되었으며 화교 배척 감정이 점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3 1운동 이후, 조선노동운동이 고 조되면서 중국인노동자문제는 조선노동계의 당면 해결책 중 하나로 자리매김 되 었다.61) 53) 朝鮮日報 1925년 4월 3일자. 時評 54) 朝鮮日報 1927년 10월 25일자. 55) 朝鮮日報 1925년 4월 10일자. 56) 朝鮮日報 1928년 12월 6일자. 57) 每日申報 1926년 10월 28일자. 58) 每日申報 1925년 5월 17일자. 59) 每日申報 1925년 5월 6일자. 60) 每日申報 1927년 8월 9일자 ; 每日申報 1931년 4월3일자, 激增되는 苦力 一個月萬名 ; 每日申報 1921년 6월 6일자, 苦力 八千餘名. 61) 전우용, 한국 근대의 華僑 문제, 韓國史學報 제15호, 2003, 393쪽

146 第2節 山東苦力과 朝鮮勞動者의 葛藤關係 1. 苦力幇組織과 山東苦力의 活動 산동고력은 체격이 건장하고 열악한 기후조건에 잘 적응하며 작업효율이 다른 노동이민 보다 훨씬 우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화폐경제에 익숙하여 노동 의욕이 왕성하였는바 따라서 청부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 고력은 해외노동 이민과정에서 대체적으로 조합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단체 활동을 진행하였다. 오래 전부터 중국에는 匠人과 노동자들 사이에 동업조합(길드)과 지역조합이 존재하여 왔다. 동업조합은 행 (行)이라고 불렀으며 지역조합은 방 (幇)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조합은 하나의 계급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 외, 기술 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동자에게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조합 내 고용주와 피 고용자 모두가 조합의 구성원이었지만 고용주가 조합의 활동을 지배하였다. 이들 조합은 보다 유리한 계약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압력수단으로 가끔 단체 파업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신해혁명 후, 구제도의 붕괴과정에서 노동자조합도 차츰 와해되어 갔 다. 조합은 더 이상 구성원 노동자이건 고용주이건 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 다.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경우도 조합이 근대적인 대규모 공장 이나 산업에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실질적인 노동조직으로 전환하여 발전을 이루 지 못하였다.62) 조합은 원래 중국 廣東 福建지역의 농촌지대에서 발전한 경제조직이었다. 이 들 조합은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상호부조조직이었다. 조 합의 산생은 대체적으로 현지에서 부당한 압박에 대항하고 자신의 생명 재산을 스스로 방어할 필요에서 조직되었다. 각 조합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결 집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세력범위를 획정하고 다른 집단과의 교섭과 방어기능을 수행하였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분쟁을 해결하고 조정하며 각종 편익을 도모하 는 한편 노동 임금을 중심으로 고력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경우도 있었다.63) 62) 신해혁명이후 새로운 형태의 길드(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결사(結社)와 고용주들의 결사가 별도로 결성되었다. 또 어떤 경우 에는 이러한 시도들이 고용주가 지배하는 구(舊)길드의 형태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노동자들 의 힘이 강했던 곳에서는 진정한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었으나, 노동자들이 약했던 곳에서 는 노동조합 이 예전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종의 御用조합이 되었다. 오래된 도시나 내 륙지방에서는 자연히 길드가 더 오래 존속하였다(님 웨일스 著 靑史編輯部 譯, 中國勞動運動 史, 靑史, 1981, 18쪽). 63) 可兒弘明, 앞의 책, 20쪽

147 고력은 비상한 단결력과 조직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고력이 억눌려 살았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들 내부에서는 거의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해외 노동이민 중, 다수 노 동자들이 문맹이었던 관계로64) 중심세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중심세력 없이는 작 업 시 능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 원인으로 이들 해외 노동자들이 구 성한 단체 즉 조합은 중국국내보다 더 조직으로 활성화하고 발전하였다. 조선으로 건너온 산동고력의 조합인 幇 도 상술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20~30년대 조선 내 산동고력의 이주생활은 이들 고력의 자치조직인 苦力幇 을 형성하여 단체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지되었다. 苦力幇은 보통 특정인물인 把 頭(파두) 를 선출하고 그 휘하에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수백 명의 회원을 두고 있었다.65) 이와 같은 노동자조직은 이 시기 조선노동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契의 형식으로 노동자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들 노동자조직은 처음에는 의형제 또는 萬同生 등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었으나 점 차 상호부조의 목적으로 일정금액의 회비를 납부하면서 勞契 또는 조합을 조직 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1898년 성진에서 李奎順는 47명의 부두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조직하였는데, 이와 같은 조직은 다른 개항장에서도 부두노동자들 속 에서 우선 조직되었다. 이 시기 한국의 노동자조직은 유형의 조직은 아니지만 弁 頭 接長 什長의 통솔 하에 무형의 조직으로 단결되어 있었다.66) 한편 조선 내 산동고력은 주로 동향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 선출된 파두 는 一村의 유력자였다. 파두는 고력의 대외노동체결을 결정하였으며 고력의 취 직, 숙식 등 모든 생활을 책임졌다. 여기에 지출되는 비용은 고력들의 매달 임금 에서 일정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파두는 직접 노동현장에서 일하지 않고 고력들을 위한 대외업무만 수행하였다. 그리고 파두의 능력에 따라 고력방 이 커질 수 있고 고력의 취업범위도 넓어질 수 있었다. 고력방 내에서 고력과 파 두의 관계도 상호부조의 관계였다.67) 파두라는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苦力頭 혹은 包工頭, 工頭, 大工頭 로 호칭하였다. 소속된 고력인수의 다소에 따라 그 명칭 을 달리 쓰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300명~500명의 고력을 다스리는 자를 大把 頭라 하고 15, 6명~30명의 고력을 거느리고 있는 자를 小把頭라 하며, ) 中國勞動運動史, 23쪽. 65) 王正廷, 朝鮮華僑槪況, 1930, 24~25쪽. 66) 細井肇, 鮮滿의 經營 中篇, 1921, 38쪽. 67) 秦裕光, 앞의 책, 42쪽

148 명~140, 50명의 고력을 거느리는 자를 中把頭라 하였다.68) 고력은 고력방에 가입하면 반드시 幇 의 제반규칙과 제도를 지켜야 했으며 위 반 시에는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만약 고력이 현재의 幇 조직에 불만 이 있거나 혹은 파두에게 불만이 있을 때에는 수시로 고력방을 이탈할 수 있었 으며 다른 幇 에 가입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이 동시에 두개 혹은 두개 이상 의 幇 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幇 과 幇 은 엄연한 규칙이 있어 서로 상 대방의 활동지역을 침범할 수 없었다. 幇 조직은 봉건중국의 전통적인 조합체계이므로 여러 가지 문제점도 포함하고 있었지만, 조선으로 건너온 산동고력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조직이었다. 고력의 특성이 미숙련노동자이므로 쉽게 취직이 어려웠고, 또 타국에서 언어장애와 문화 풍속습관에 대한 이해부족 등 원인으로 개별생활보다 幇 조합에 가입하여 단체 활동을 하는 것이 해외생활을 적응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조선 내 고력방이 동향인으로 조직되었으므로 고력들은 조선으로 건너오면서 바로 소속 동향조합에 가입하였으며 혹은 파두가 직접 산동현지에 가서 고력을 모집하기도 하였다.69) 특히 신의주는 산동고력이 일찍부터 활동한 지역인데, 1920년대 초반에 이미 천여 명의 고력이 이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시기 규모가 큰 고력방은 수백 명의 회원을 소유하기도 하였다.70) 능력 있는 파두는 더 많은 노동시장을 점령함으로서 幇조직의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력들의 정서도 정 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청부업자의 입장에서는 능력 있는 파두를 유용하 게 활용하는 것이 노무관리상의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71) 1920년대 이와 같 은 고력조직은 조선 내 많은 지역에 확산되고 있었는바, 그 분포특징은 육로 68) 前田一, 앞의 책, 237쪽. 69) 王慶仁(王重陽). 1932년 9월 9일 남대문 서소문구 32번지 출생. 1946년에 부친 王樹唐을 따 라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갔으며 1997년 중국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줄곧 평안북도 박천군병원 에서 中醫로 근무함. 현재 중국 길림성 연길시 평안3대에 거주. 내용 王慶仁의 조부 王殿 盛(산동성 龍口현. 목공)은 1905년 봄, 산동반도로부터 마을 주민(12戶 장정들)들과 남양 으로 건너가는 도중, 해풍을 만나 인천항으로 떠 밀려옴. 처음엔 인천에서 목공일로 돈벌이 하다가 1906년 봄 서울로 옮겨감. 서울에 도착하여 바로 남대문구 서소문 32번지(대한문 바로 옆 공원근처 임)를 거처로 정함. 서울에서 王殿盛은 더 많은 일거리를 찾게 되었으며 경 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됨. 그 후 王殿盛은 3차에 거쳐 중국 산동성에 가 마을 주민과 인 근 마을 주민을 모집하여 한국으로 옴. 조부는 이때부터 把頭 가 되어 고향에서 데려온 사 람들과 같이 숙식을 하면서 대외업무에만 전념함. 이들은 대부분은 목공 석공 등 苦力으로 조 선의 수리건설, 건축업계에 들어가 일함.(상술한 내용은 2004년 1월 30일 왕경인의 집에서 인 터뷰한 내용임. 시간 2004년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참가인원: 王慶仁, 李玉蓮, 南恩惠 3人) 70) 秦裕光, 앞의 책, 42쪽. 71) 前田一, 앞의 책, 236쪽

149 해로로 입국한 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분포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육 로로 이주한 경우 신의주를 중심으로 분포되었고 해로로는 진남포를 중심으로 평양까지, 그 외, 인천을 중심으로 서울지역에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 이 중국인 노동자가 급증하는 원인은 다른 한편 임금비가 저렴하다는 조건 때문 에 노동현장에서 청부업자들이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인데, 아래 이 시기 조선 각 지의 한 중 일 노동자들 間의 임금비교표를 통하여 1923년 업종별, 지역별 임금 차이를 살펴보기로 한다.72) <표4-3> 各府의 勞動者 賃金比較表 業種別 國 別 韓國人 單位: 円 京 城 仁 川 釜 山 馬 山 平 壤 鎭南浦 新義州 元 山 家作大工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石 工 煉瓦積 左 官 平人足 土 方 출처: 善生永助, 朝鮮の人口硏究, 1925, 154쪽. 참고작성.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한 중 일 3국 노동자들의 임금차이는 家作大工인 경우, 서울에서는 일본인이 3.62전이고 중국인은 2.22전이며 조선인은 2.17전이 다. 石工은 일본인이 4.45전이고 중국인은 2.72전이며 조선인은 2.52전이다. 平 人足은 일본인이 2.45전이고 조선인이 1.02전이며 중국인은 1.00원이다. 이로부 터 알 수 있는바 일본인의 임금은 업종을 불문하고 조선인과 중국인에 비하여 72) 善生永助, 朝鮮の人口硏究, 朝鮮印刷株式會社出版部, 1925, 154쪽

150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중국인은 대체적으로 石工 土方과 같은 업 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예컨대 사울남산 朝鮮神宮의 大工事는 鳥居부터 石坦에 이르기 까지 石工은 대체적으로 중국인을 사용하여 완성시킨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 외, 조선인과 중국인의 업종별 임금을 비교하면 큰 차이 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력의 노동시간이 대체적으로 10~15시간이 란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비교는 정확히 노동시간과 관련지어 고찰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들의 분포상황은 지역별 임금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소속 고력조직의 활동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들 고력의 해외생 활은 주로 고력방이란 조직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으로 고력은 절대로 단독행동 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고력방조직도 여러 가지 폐단을 동반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력 에게 임금을 적게 혹은 전혀 지불하지 않고 숙식만 제공하면서 고력의 노동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6년 11월 12일자 每日申報 의 보도는 중국고력 이 苦力頭를 殺害遺棄 했다는 내용으로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였다. 한마디로 산동고력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부터 대폭적으로 한반도 로 건너와 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자체조직인 苦力幇에 가입 하여 각종 노동현장에 투입되었으며 청부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도시 의 모든 건축공사로부터 지방 수리조합의 토목공사에 이르기 까지 中國人이 占 1하고 있다. 73)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한편 조선노동계 를 크게 위협하였으며 조선노동자와의 갈등관계를 초래하여 중국인노동자의 입 국과 공사장에서 중국인노동자의 사용과 관련하여 제한조치를 요구하는 등 결국 중국인노동자에 대한 배척움직임으로 대두하면서 이 시기 한반도의 사회 문제집 단 으로 각인되었다. 73) 朝鮮日報 1930年 3月 25日자

151 2. 苦力과 朝鮮勞動者의 葛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래 부산 원산 인천 등 항구가 개항됨에 따 라 조선의 사회경제에는 새로운 변화들이 발생하였다. 그 중 하나가 농촌에서 토 지를 잃은 농민들까지 포함한 임금노동자의 증가이다. 특히, 이 시기 각 개항장들을 통한 무역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물동량이 증대 되었는데, 이는 다른 한편 부두노동자수를 증대시켰다. 이어서 인근 농촌에 잠재 돼 있던 과잉인구가 개항장으로 유입하였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을 통하여 일본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장악하면서부터 공업노동자의 수를 증대시켰다. 그 외, 한일병합이후, 근대적인 교통 통신수단의 도입 및 각종 유통기구의 확대 에 따른 토목 수리건설 등 분야도 결국 임금노동자의 증대를 초래하였다.74) 인천항의 경우를 예로 보면 1883년 개항 당시의 소위 조선인街는 인가가 희소 한 일개 소부락의 점철(點綴)에 불과했다.75) 같은 시기 일본인가에는 348명, 支 那人街 및 외국인거류지에는 각각 약간씩의 支那人 및 歐美人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 10여년 후인 1897년에는 조선인이 2,360호로 8,943명으로 불었으 며, 일본인이 3,949명, 중국인 1,331명, 기타 외국인이 57명76)으로 증가하였 다 한편 일본자본주의의 침투에 따른 자본제적 상품유입은 한국의 자급자족적 소 규모의 가내수공업을 파탄시키고 상대적 과잉인구를 증대시켰다. 더욱이 1910년 한국토지조사국을 개설하고, 1912년 토지조사령을 반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 한 토지조사사업 추진과정을 통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강압적으로 토지에서 분리 되어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다. 토지에서 분리된 무진장에 가까운 과잉노동력이 농촌으로부터 공급되고 있었으므로 임금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보다 유 리한 조건으로 판매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질 수 없었다.77) 한마디로 이 시기 조선에는 이미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완전히 상실한 무산 대중, 다시 말하면 임금에 의해서만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노동자들이 많은 비중 을 점하고 있었는데, 특히 농민들도 유랑민으로 전락하면서 임금노동자로 전락하 였다. 한편 조선노동시장은 임금노동자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므로 산동고력의 조 74) 金潤煥, 韓國勞動運動史,靑史, 1982, 31쪽. 75) 仁川府 編, 仁川府史,1933, 146쪽. 76) 위의 책, 6~7쪽. 77) 韓國勞動運動史, 135쪽

152 선노동시장에 대한 진출은 청부업자 측에서는 필요했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 동시장에 대한 점령 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또 이들 고력은 조선노동자들이 업주에 대하여 노동조건 임금인하 등 제반 조건에 대한 불만으로 파업을 단행 할 時, 조선노동자의 대리노동력으로도 使役 되었으므로 여러 측면에서 조선노동자에게는 불리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특히 이 들 산동고력이 종사하는 업종이 다양하므로 조선노동자의 취직에 크게 영향 주 었는데, 구체적으로 토목 건축 항만하역 화물운반 車 菜農 그리고 광 산업이었다. 1930年의 조사 자료에 근거하여 이 시기 산동노동이민의 업종에 따른 인구분 포 상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78) <표4-4> 1930年 朝鮮 內 苦力의 業種 業 種 勞動者人數 業 種 勞動者人數 築路工人 4500人左右 運搬物件工 800人左右 石工 3500人左右 製造門戶工 800人左右 平常8工 3000人左右 泥水匠 800人左右 工造屋木工 2500人左右 煉瓦職工 600人左右 礦工 1000人左右 鐵屬鑄造工 700人左右 砌造瓦屋工人 750人左右 鍛冶工 700人左右 彫刻工 800人左右 출처: 朝鮮華僑, 23쪽. 위 표에서 통하여 알 수 있는바 이 시기 산동노동자는 주로 도로건설장 石工 木工, 그 외 일반노동에 가장 많이 使役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彫刻工 鍛 冶工 鑄造工과 같이 일정을 기술을 요하는 업종일수록 使役者數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력이 가장 많이 분포된 것으로 나타난 평남지역을 예로 살펴보면 고력은 대 체로 수리공사 혹은 토목공사현장에 사역된 것으로 통계되었다. 이들은 저렴한 임금으로 청부업자들에게 발탁되었으며 따라서 조선노동자는 점점 노동현장에서 구축당하고 곤궁한 처지에 빠지는 양상으로 변하였다.79) 78) 王正廷, 앞의 책, p

153 일부 청부업자들은 중국인노동자만 사용하기도 하였는데80) 심지어 국경철도공 사장에서도 외국인노동자 사용에 관한 규정을 위반해가며 전체 5, 6천명의 노동 자중 80 를 고력으로 사용하였다.81) 이와 같은 상황은 官營事業에도 나타난 것 으로 실지로 중국인노동자 사용에 대한 규제정책은 有名無實한 것임을 알 수 있 다. 아래 1925년부터 1933년간 관영사업에 사용된 중국인 노동자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4-5> 官營事業에 中國人勞動者를 使用한 數 年 度 1925年中 1926年中 1927年中 1928年中 1929年中 1930年中 1931年中 實 際 使 用 延 人 員 276,510人 382,196人 899,745人 386,334人 907,425人 678,447人 502,476人 1932年中 642,429人 1933年中 502,993人 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01~302쪽.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관영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또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제한적 사용정책을 제정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중국인 노 동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해마다 늘어가는 양상으로 나타났는바 이는 다른 한편 조선인노동자의 생존에 큰 위협적인 존재 로 각인되었다. 실지로 황해도수리조합의 各區內 노동자수를 조사해 보아도 조선 인 노동자가 5백 명 정도이고 중국인 노동자가 1천여 명에 달하여 조선인 노동 자들이 조합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갔다.82) 1929년 南朝鮮鐵道光麗 線과 麗水護岸工事에서도 축항 방파제 등 공사에 중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사용 하고 있어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연히 구축당하는 신세가 되었다.83) 79) 朝鮮日報 1928년 11월 15일자. 中國勞動者의 入鮮 今年平南에만約三千 / 금년정월부터지난 십삼일까지에 들어온 중국노동자약 삼천작년보다 천명이 만타 勞動同胞의 大打擊 80) 滿鮮日報 1940년 5월 25일자. 偉大한 建設力 苦力 쿨리 81) 朝鮮日報 1929년 6월 23일자 82) 東亞日報 1928년 4월 5일자 83) 朝鮮日報 1929년 5월 10일자. 南鐵工事에 苦力群襲來說

154 그 외에도 1929년의 旱 害 救 濟 로 지역주민을 본위로 하여 노동자를 사용하겠다 던 충남 부여군 鴻 山 水 利 組 合 의 공사에도 중국인 노동자를 사용하고자 청부업자 가 道 當 局 에 허가를 제출하였다. 84) 특히 관청공사에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 인노동자만 사용하여 외국인 입국제한은 빈말임이 드러났다. 이처럼 조선인 노동 자가 실업되는 것은 이미 중대한 사회문제로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주들 은 고력모집 일력을 고용하여 일인당 5~6원씩 여비를 주면서 중국에 가서 고력 을 모집해오는 상황이었다. 85) 가는 곳마다 사업주가 중국인만 사용하여 1928년 雄 基 鐵 道 工 事 場 과 86) 水 電 工 場 에서도 800명의 중국노동자가 공장을 독점 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산동고 력으로 인하여 조선 노동자들은 실업되었으며 실업한 노동자들은 경찰서에 사정 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87) 이미 1926년부터 각 단체들은 중국인 노동자의 격증으 로 노동임금이 국외로 유출 88) 되는 현상을 초래하므로 외국노동자 제한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 89) 한바 있다. 특히 인천지역 노동자들이 전개한 노동쟁의의 쟁점은 첫째로 賃 金 引 上 문제였 고, 둘째는 노동시간의 감소 문제였으며, 셋째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축출하는 문 제였다. 이밖에도 감독자에 대한 문제와 노동조건 등 많은 불만이 존재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은 날이 갈수록 빈번하게 나타났는바 파업 일수를 延 算 하면 수 천일에 이르렀다. 90) 인천 정미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파업도 빈번하였는데, 중에서도 특히 加 藤 정미소의 파업이 가장 많았고 규모가 큰 것으로 기록되었다. 1923년 8월 26일 에 약 2백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진행하였다. 이 정미소는 신생동(당시 宮 町 ) 에 위치하였는데, 한국인 남녀 오백 명의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미소의 일본인 주인 加 藤 은 적은 임금을 들여 높은 능률을 올리는 중국인 노 동자 18명을 중국 대련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있었는데, 加 藤 은 한국인 노 동자들에게 중국인보다 일을 못하고도 임금은 그들보다 높기 때문에 10전씩 인 84) 朝 鮮 日 報 1929년 11월 9일자. 中 國 勞 動 者 使 用 하여 재민구제공사라던 것은 말정한 거짓말 되고 말어 85) 東 亞 日 報 1928년 3월 18일자. 한 배편에 오천여 명씩 重 大 한 中 國 苦 力 問 題 86) 朝 鮮 日 報 1928년 4월 18일자. 87) 朝 鮮 日 報 1929년 7월 23일자. 88) 東 亞 日 報 1926년 2월 4일자. 해마다 늘어가는 조선의 중국노동자들 勞 賃 流 出 을 방지하려고 대책강구 89) 東 亞 日 報 1928년 12월 15일자. 중국인 노동자 작년 말 현재 7만 이상-조선노동계에 일대 위협 90) 東 亞 日 報 1924 年 5월 2일자

155 하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은 큰 불만을 가 지고 파업을 일으켰다.91) 이 시기 인천의 노동자들이 전개한 노동쟁의의 쟁점이 賃金引上문제와 노동시 간 감소인데, 중국 산동고력의 대폭적인 仁川渡來로 일본인 加藤은 임금을 적게 받고 노동시간을 충분히 연장할 수 있는 중국인을 고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 천의 조선노동자들은 정당한 노동권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천노동자들 이 전개한 노동쟁의의 쟁점 중 하나가 중국인 노동자들을 축출하는 문제로 거론 되었다. 이와 같이 산동고력의 도래는 조선노동자들의 취직뿐만 아니라 노동권리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중국인 노동자들을 축출하 면 자연히 조선노동자들도 노동권리를 찾기 위하여 파업을 단행하고 따라서 파 업에서의 승리로 노동권리보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인 노동자를 사용하면 노동권리보장과 관련된 파업이 없었던 관계로 청부업자 혹은 고용주들은 중국인노동자를 선호했다는 것이다. 아래 이와 관련하 여 산동고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산동고력은 실지로 놀라운 忍耐力과 장시간 쉬 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未熟熟練勞動者이므로 單調 簡單 粗笨한 노동에 적응하였다. 예를 들면 鑛物 精製製鹽 造酒 食e精製 그리고 土木工事이다.92) 중국고력이 해외사회에서 성공한 주요한 원인은 適應性 이 강하고 체질상 어떤 기후에도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외, 중국고력 의 해외이주는 정치적 성향이 없거나 혹은 적고 오로지 經濟的, 實利的이라는 것 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고력들은 대부분 노동권리 주장과 같은 진보된 성향을 가 질 수 없었으며 다행히 타고난 체질을 가지고 있어 돈을 벌수 있는 일이면 勞動 强度 勞動時間 賃金多少를 불문하고 일할 수 있었다.93) 이들 고력은 業種별 단체를 만들어 생활하기도 하였는데, 대체적으로 업종별 경쟁을 피하는 것을 원 칙으로 하고 있었는바 위반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가하기도 하였다.94) 이 와 같이 고력스스로 경쟁의식을 가지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지 않았지만, 고력 조직을 관리하기 위하여 또 고력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하여 苦力頭 들은 경쟁의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처벌을 가하는 등 규제초치를 강구하고 있었 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파업을 단행하지 않았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아래 <표4-6>의 조선 내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비교 91) 東亞日報 1923年 8월 30일자 92) 長野朗 著, 支那民族の海外發展, 東京: 支那問題硏究所, 1928년(昭和 3), 21~22쪽. 93) 위의 책, 2~3쪽. 94) 위의 책, 23쪽

156 표95)에서도 나타나듯이 고력들의 저렴한 임금은 상대적으로 조선노동자들의 임 금저하를 초래하여 조선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중국인노동자의 임 금에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조선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을 포함한 전체 사회적으로 중국인 즉 화교에 대한 반발의식을 가지게 되었 다. 이미 일제의 식민지 건설로 농촌에서도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임금노동자 로 전락된 상황이라 화교배척의식은 전체 조선인들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로 거 론되었다. <표4-6> 朝鮮內朝鮮人 日本人 中國人勞動者 賃金 比較表 職名 日本人 家作 3.34 大工 指物 3.26 左官 3.58 石工 3.64 木挽 3.35 家根茸 3.31 瓦茸 3.47 煉瓦積 3.74 페인트 3.32 塗職 3.09 表具師 3.15 桶工 3.28 朝鮮人 中國人 職名 1.77 建具 大工 1.70 船造 1.89 車制造職 2.09 染物職 1.64 洋服裁縫職 1.81 靴職 1.80 活版植字工 1.96 鳶人 日本人 朝鮮人 中國人 平人 土方 漁 伸仕 출처: 武居鄕一 著, 滿洲の苦力, 66~67쪽. 위 통계는 조선총독부가 昭和 5년(1930)말에 조선 내 주요지역인 京城 木浦 大邱 釜山 平壤 新義州 元山 및 淸津에 대하여 조사한 업종별 평균임금 비교표이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는바 조선에서 중국인과 조선인간의 賃金差는 크 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平人 는 조선인이 77錢인데 반하여 중국 인은 72錢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조선노동자의 임금이 일본인 임금에 접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 임금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력을 팔고 있는 중국인노동자들의 영향 을 받아 생존을 위하여 조선노동자들도 노동력을 저렴하게 팔수밖에 없었던 것 으로 분석된다. 한편 고력의 작업상황은 시간별 능률은 낮다고 하지만, 시간적 구애 없이 장시 간 노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노동량의 성과로 보면 조선노동자에 비하여 상당히 95) 武居鄕一 著, 滿洲の苦力,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34년(昭和 9), 66~67쪽

157 많은 일을 완성한다고 볼 수 있다.96) 산동노동이민이 소유한 이러한 장점은 일 제시기 식민지건설에 제일 적합한 적임자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같은 시기 山東省 농가에선 중 장년층이 보이지 않고 연로한 부녀자 들만이 농사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97) 1901년 의화단진압 이후, 열강의 침 략이 가속화되면서 이사건의 震源地인 산동성에 대한 警戒가 강화되었다. 그러므 로 산동성의 남성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이주한 자도 적지 않았는바 지리적으 로 가장 가까운 한반도로 선택하였다. 비록 한반도도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있었 지만, 중국의 불안한 정치 경제상황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안전 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 <표4-7>을 통하여 재한화교사회의 性比를 살펴보면 계절이민으로 인식 되어온 화교사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4-7> 在韓華僑社會 女性의 人口比率 年度 全體 3,661 11,818 15,968 23,989 46,196 67,794 人口 (人) 南 3,534 10,729 14,714 21,382 40,527 55,973 單位: 人 女 127 1,089 1,254 2,607 5,669 11,821 女性比率 3.5% 9.2% 7.9% 10.9% 12.3% 17.4% 출처: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0~1930 ; 統監府統計年報, 1906, 38~40쪽.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1906년 재한화교여성은 겨우 3.5%에 지나지 않는데, 1930년에 이르러 17.4%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앞에서 언급한 중국의 장기간의 불안한 정치상황에 대비하여 1930년경에 이르러 한반도를 상대 적으로 중국보다 안전 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본국에서 가족을 불러들이든지 혹은 결혼상대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한국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 된다. 이와 같이 산동고력이 조선으로 이주해오는 한편 조선인은 만주로 대량 건너 가는 외, 시베리아개척모집에 8천 명씩 모여들었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금지조치 가 해마다 심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6~1927년에는 12만 명이나 일본으 로 건너갔다.98) 특히 조선 노동시장이 이처럼 위협받고 노동자들이 점점 구축되 96) 위의 책, 3쪽. 97) 秦裕光, 앞의 책, 40쪽

158 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이 민 권장정책을 제정하여 일본인이 조선으로 이민하는 것을 장려하였다.99)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매체들은 이주노동자 때문에 일자리 잃고 살길 을 찾아 간도와 러시아로 이주하는 窮民들의 모습을 보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北間島로 가도 못살고 돌아왔다는 기사100)도 자주 게재되어 외국인 이주노동자 즉 중국인과 조선노동자 사이의 갈등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특히 중국인 점포에 疑問屍가 발견되고 중국인노동자 50명과 一洞民이 대격투 사건이 벌어졌으며 아편밀매로 중국인이 연루되었다는 등 중국인으로 인한 사회 문제도 신문지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101) 이와 같이 조선노동자들로부터 시작 된 중국인 배척움직임은 전체 사회적인 문제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러한 조 짐은 萬寶山事件102) 勃發 時, 크게 확산되어 전국적인 화교배척운동으로 전환되 었다. 한마디로 산동인의 渡來는 오늘날 한국화교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중요한 작 용을 하였다. 한편 조선의 노동시장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노동자와의 갈등 관계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특히 산동인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제 분야의 원인 으로 해외화교사회에서 巨 巨商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부지런하고 검소하 고 의지가 강한 특성으로 각인되었다. 1920~30년대 산동고력의 조선 이주는 한 국화교역사의 한 폐이지를 적어놓았다. 우선 한국화교사회의 구성특징인 산동인 의 90% 점유율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산동고 력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점차 고력의 신분으로부터 소규모 상업을 경영하는 상인으로, 일부는 규모가 큰 무역업을 경영하면서 華商으로 한국사회에 정착하기 에 이르렀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만큼 지역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98) 東亞日報 1927년 4월 20일자 ; 東亞日報 1926년 1월 30일자. 十三萬一千餘名이 日本 으로 가고오고 99) 東亞일보 1927년 3월 17일자. 100) 東亞日報 1927년 3월 25일자 ; 東亞日報 1928년 4월 3일자 ; 東亞日報 1928년 3월 12일자. 101) 朝鮮日報 1926년 5월 7일자 ; 東亞日報 1927년 3월 30일자 ; 東亞日報 1927년 4월 2일자 ; 東亞日報 1927년 4월 9일자 ; 東亞日報 1927년 4월 26일자. 102) 1931년 7월2일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간에 벌어진 유혈사태이다. 장춘 근교의 만보산 삼성보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 이에 수로 개설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분규인데, 몇 차례 충돌 끝에 7월1일 중국농민 200여명 이 조선인들이 만든 수로를 파괴하자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중국농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로 인하여 조선에서 화교배척운동이 일어나 많은 화교들이 재산피해, 인명 피 해를 입고 귀국하였다(朴永錫, 萬寶山事件硏究, 亞細亞文化社, 1978, 참고)

159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산동지역의 특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오늘날 화교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지역특성이란 차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맥 락에서 오늘날 한국화교사회의 교육 풍속 문화 종교 등 분야에 대한 연구는 출신지에 대한 연구부터 착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160 第5章 1930~40年代 華僑社會의 變化 第1節 滿洲 韓人社會와 在韓 華僑社會의 樣相比較 1. 滿洲韓人의 社會的 位相 韓人의 만주이주는 1860년대부터 이루어 졌는데, 특히 1910년 한일합방이후 부터 韓人들의 북간도이주는 대폭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1910년에 10만 9천여 명의 한인들이 이주하였고 10년 후인, 1920년에는 28만 9천여 명, 그리고 1930년에는 38만 8천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와 같은 양상은 필연적으로 현지인인 漢人을 포함한 중국관헌과 이주자인 韓人사이에 여러 갈래 분쟁과 갈등관계를 초래하였는데, 이는 한편 일본의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1915년 滿蒙條約 1)체결 후, 북간도지역 韓人에 대한 土地상조권 적용 을 주장하면서 거액의 식민자본을 투자하여 한인들이 典地制2)형식으로 소유한 토지를 대량 약탈하고자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관헌은 일본의 이와 같은 토 지약탈과 이에 따른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을 제지하기 위하여 1920년대에 이르 러 韓人들의 田地制度를 주요한 取締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으며 아울러 각종 규제조치로 한인에 대한 관리를 강화 가속화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은 또 만주지역으로 한인이주를 獎勵 하고 保 護 하는 방식을 취하여 만주지역에 있어서 한인들의 토지구입을 貸與해주었다. 일본은 위와 같이 만주지역에 대한 침략을 목적으로 韓人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1) 일본은 1915년 중국국내의 혼잡한 정세를 이용하여 袁世凱에게 21個條 를 강요하여 이른바 南 滿洲와 東部內蒙古에 관한 條約 을 체결함으로써 南滿洲 및 동부 內蒙古 지역에서의 토지상조권 을 획득하였다. 만몽조약 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2조, 日本國臣民은 南滿洲에서 각 종 商工業을 위한 建物 建設과 농업경영에 필요한 토지를 商租할 수 있다. 제3조, 日本國臣民 은 南滿洲에서 자유로이 거주 왕래하며 각종 商工業 및 기타 업종에 종사할 수 있다. 제4조, 日本國臣民은 東部 內蒙古에서 중국국민과 合作하여 농업과 공업을 경영 時, 중국정부는 이를 승인한다. (日本外務省 編, 日本外務年表竝主要文書: 南滿洲及東部內蒙古に關する條約 上, 原書 房, 1965, 406~407쪽). 2) 典地制度는 북간도지역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토지소유 방식으로 비귀화 한인들이 귀화한인들 의 명의로 토지를 구입하는 토지구입 및 토지소유 방식이다. 이 제도를 통하여 몇 명 혹은 수입 명의 비귀화 한인들이 자금을 모아 귀화인의 명의로 토지를 구입한 후, 금액에 따라 地權을 나 누어 가질 수 있었다. 典地制度는 韓人들이 淸의 민족동화 정책에 대응한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金春善, 北間島 地域의 韓人社會 形成 硏究,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史學科 博士學位論 文, 1998, 214~215쪽)

161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한편 韓人들의 해외이주 생활을 극히 어려운 처지에 몰 리게 하였으며 결국 韓人들은 중국관헌으로부터 일본의 동북침략을 위한 先鋒 으로 의심받게 되었다. 중국관헌은 일본의 동북침략에 대하여 강한 반발에 이어 제지방법을 모색하였는바 그 일환으로 우선 만주지역 韓人에 대한 규제와 관리 를 강화하기로 하여 1925년부터 韓人驅逐 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在滿韓人社會는 1925년 雙方商定取締韓人變法綱要 3)체결 이후부터 중국관헌 의 노골적인 압박과 구축을 받았는바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일본의 동북3성에 대 한 침략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韓人을 일본의 동북침략의 先鋒 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韓人들의 만주지역으로 대폭적인 이주양상은 중국관 헌의 韓人에 대한 관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먼저 이 시기 韓人들 의 이주상황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 연말부터 1930년 연말 사이 3년 간에 韓人 이주민수는 558,280명에서 607,119명으로 48,839명이 증가된 것으 로 기록되었다.4) 이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한 것으로 분석되는데, 하나는 일본이 한반도로 일본인지주들을 이주시킨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고, 다 른 하나는 한반도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일본이 비호한 토착지주들의 수탈로 인하여 이 시기 韓人들의 만주이주가 급증한 것으로 보여 진다. 특히 排日運動의 성격을 띤 정치 경제적 불만으로 韓人들의 만주이주가 급증 하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양상은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시기부터 뚜렷하게 나타나 종전과 다른 큰 폭으로 급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래 1910년부터 1930년 사이 만주지역으로 韓人들의 이주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5) <표5-1> 1910年~1930年 在滿韓人 移住民數 연 도 인 수 202, , , , , , ,288 연 도 인 수 337, , , , , , ,027 연 도 인 수 531, , , , , , ,119 출처: 韓國人の人口と經濟, 岩波書店, 1965, 28쪽. 3) 雙方商定取締韓人方法 은 三矢協定 이라고도 하는데, 1925년 6월 奉天경부국장 于珍,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三矢宮松 사이에 체결되었다. 4) 高見成 編, 滿鮮拓植株式會社五年史, 滿鮮拓植株式會社, 1941, 3쪽. 5) 金哲, 韓國の人口と經濟, 岩波書店, 1965, 28쪽

162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1910년 재만 韓 人 이주민 수는 20여만 명 이었으나 1920년에는 45만 9천명, 1930년에는 무려 60만 7천여 명으로 대폭 증가하였음 을 알 수 있다. 특히 1910년대 韓 人 들이 북간도지역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으로의 대량 이주는 조선국내 사정과 북간도 지역의 사회경제적 여건이란 두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조선국내 사정을 살펴보면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 후, 1912년부터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대량의 토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였 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 은 1918년 12월에 완료되었는바 통계에 따르면 조선 총독부가 그 동안 國 有 地 토지를 독점한 것만 13만 7천여 町 步 였다. 6) 그 외, 1907년 拓 地 植 民 회사로 출범한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는 1910년에 이미 1만 1천여 町 步 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후, 토지조사사업 의 혜택을 입 어 토지 점유율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예컨대 1924년에는 9만 6천여 町 步 의 토지를 확보하였고 1930년에는 무려 123만 5천여 町 步 의 토지를 점유하게 되었 다. 7) 이와 같이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등 일본인에 의한 토지 수탈은 조선인의 만주이 주를 가속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東 洋 拓 植 株 式 會 社 의 주요사 업이 토지 수탈과 일본인의 移 植 이었던 만큼 이들은 토지 수탈 뿐 만 아니라 일 본인의 조선이주를 병행하여 진행하였다. 아래 1910년부터 1925년 사이 동양척 식회사가 移 植 한 일본이민과 토지점유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8) <표5-2>1910 年 ~1925 年 韓 半 島 로 移 住 한 日 本 人 과 農 地 占 有 狀 況 回 期 年 度 ( 年 ) 戶 數 ( 戶 ) 人 口 ( 名 ) 割 當 地 面 積 ( 町 步 ) 제1회 제2회 , 제3회 ,838 1,072 제4회 , 제5회 , 제6회 , 제7회 제8회 , 제9회 , 제10회 ,063 1,111 제11회 ) 愼 鏞 廈, 朝 鮮 土 地 調 査 事 業 硏 究 知 識 産 業 社, 1982, 96~98쪽. 7) 日 本 農 業 硏 究 編, 日 本 農 業 年 報, 東 京, 1932, 425~426쪽. 8) 玄 圭 煥, 韓 國 流 移 民 史 上, 三 和 印 刷 出 版 部, 1976, 151쪽

163 제12회 제13회 제14회 제15회 제16호 合 計 ,042(戶) ,990(名) ,912(町步) 출처: 朝鮮總督府 編, 朝鮮要覽, 위 표에서 나타나는바 東洋拓植株式會社는 16년 동안 4,042호에 해당하는 18,990人을 이주시켰으며 약 9,000町步의 토지를 점유하였다. 이들 일본인들의 분포지역은 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는바 이는 다른 한편 한반도 남부지역 韓人의 만주이주를 유도하였다. 이와 같이 이 시기 일본인의 한 반도 이주와 토지약탈은 韓人의 만주이주를 유도하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韓人의 만주 이주는 그 외,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한 심각한 정치적 변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인하여 많은 의병 계몽운 동가,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이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정치적 원인에 의한 이민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1919년의 3 1운동 을 계기로 고조되었다.9) 그리하여 일제의 조선강점 직후인 1912년에 32,000여 명이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3 1운 동 이 일어난 1919년에는 무려 70,000여 명이 이주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한 이주가 급증하였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韓人의 만주이주는 조선 국내 여러 가지 내적요인 외에도 만주 및 북간 도지역의 사회경제적 여건이란 외적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이 시기 만주 지역 사회경제적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만주지역은 韓人들이 정착 할 수 있는 지역적 공간이 확보되었다는 점이다. 1931년의 조사에 따르면 만주 지역의 인구밀도는 1方里當 평균 643명으로 기록되었고 길림성은 평균 530명이 었는데, 같은 시기 한반도의 인구밀도는 1,363명으로 기록되어 만주 및 북간도 지역이 상대적으로 이들 韓人이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지역공간이 마련 되었다고 보여 진다.10) 그 외, 한인이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이민이라는 점을 감안 할 때, 이주지역의 농경지상황은 이주민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주 및 북간도 지역은 이 시기 미개간지 혹은 개간할 수 있는 농경지가 상당히 많았는데, 1931년 奉天省 吉林省 黑龍江省에 대한 토지조사에 따르면 개간이 가능한 토지면적은 총 29,655,563町步이었고 미개간지가 16,453,755町 步였으므로 미개간지가 전체 55.5%로 기록되었다.11)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충 9) 金正明, 朝鮮獨立運動 第5卷, 東京: 原書房, 1976, 478쪽. 10) 石林久彌, 對滿朝鮮移民の堅實性, 朝鮮公論社, 1933, 6~12쪽

164 분한 농경지 보유량은 한인들의 만주지역으로 이주를 충분히 유도할 수 있었다 고 분석된다. 마지막으로 만주 및 북간도지역의 지정학적 원인으로 함경북도, 평 안북도와 인접해 있다는 점도 이 시기 韓人의 이주를 추진하는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韓人들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에 의한 토지수탈과 같은 경제적 원 인과 의병 계몽운동가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무대를 만주지역으로 옮기면서 이 루어진 정치적 원인으로 만주지역으로 이주가 급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 편 만주지역이 소유한 지역적 공간과 충분한 농토, 그 외,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 다는 등 내적 외적 요인에 따라 1910년부터 1930년 사이 韓人들의 만주이주 가 급증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럼 중국관헌은 무엇 때문에 韓人에게 구축을 실시하였는가. 아래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국관헌이 在滿韓人을 구축한 원인에 대하여 아래 몇 가지로 나 누어 고찰해보기로 한다. 우선 중국당국은 위에서 언급한바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韓人들을 일제의 동북침략에 있어서의 先鋒 으로 간주하였다는 점이다.12) 그러 므로 이들 韓人에 대하여 반드시 제한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지만 실지 로 일본의 간섭이 우려되어 감히 강경책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25년 6월에 중 일 양국이 三矢協定 13)을 체결함으로써 중국관헌은 이 협 정을 통하여 韓人을 제한하고 배척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동 북군벌은 이 협정을 통하여 韓人을 철저히 배척함으로써 일제의 동북침략 先鋒 을 제거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일제의 동북침략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 었다. 한편 일본은 三矢協定의 체결을 통하여 중국관헌의 힘으로 만주지역에서 진행되는 韓人 독립운동을 제거하려고 기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李勳求는 滿洲와 朝鮮人 에서 이 시기 중국관헌이 韓人들을 구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4) ⑴ 중국관헌은 韓人을 일제의 走狗 라고 판단하고 있다. 11) 위의 책, 12쪽. 12) 李勳求, 滿洲와 朝鮮人, 成進文化社, 1979, 241쪽. 13) 三矢協定 은 원래 雙方商定取締韓人方法 이라고 하는데, 1925년 6월 奉天경부국장 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三矢宮松 사이에 체결되었다. 三矢協定 은 중국당국이 韓人들을 구축 하는 주요한 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三矢協定 의 내용을 요약하면 中國居住 韓人에 대하 여 중국관헌이 戶口를 嚴査하고(제1조), 중국관헌은 한인이 武器를 携帶하는 것을 嚴禁하고(제 2조), 不-團體를 해산시켜 소유한 銃器를 搜査하여 몰수하고 무기를 해산한다(제3조)는 것과 中 日 양국관헌은 不-韓人 取締의 상황을 수시로 서로 통보한다(제6)는 등 8개조로 작성되었 다. ( 日本外交年表と主要文書 下, 原書房, 1966년(昭和 41), 75쪽). 14) 滿洲와 朝鮮人, 240~243쪽

165 ⑵ 일제는 韓人 이주민을 이용하여 장차 만주지역에 대한 적극정책을 실시할 것이다. ⑶ 韓人의 대폭적인 만주지역으로 이주는 중국인의 동북이주 계획에 妨害가 되었다. ⑷ 불평등조약과 치외법권을 폐지하기 위하여 중국관헌이 韓人을 구축하였다. ⑸ 在滿韓人은 중국정부의 外交上의 諸 問題를 초래하였다. ⑹ 만주지역의 오지마을까지 韓人이 이주하는 것은 자칫 일본의 만주침략을 뒷받침 할 수 있다. ⑺ 중국인이 韓人을 賤하고 低級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李勳求는 위와 같이 이 시기 중국관헌이 在滿韓人을 驅逐하는 근본적인 원인 을 일제의 先鋒 走狗 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그 외, 한인의 대폭적인 만주지역 으로 이주는 중국관내인의 동북이주 계획을 妨害한 것으로, 따라서 중국당국은 在滿韓人을 害를 끼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관헌이 만주韓人에 대한 위와 같은 판단은 실지로 일본의 滿蒙積極政策 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1927년 6월 27일부터 7월 7일에 거쳐 大連에 서 일본 군정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東方會議 를 개최하고 이른바 滿蒙積極政 策 을 수립하였다.15) 일본은 滿蒙積極政策 을 통하여 在滿韓人들의 이주와 이들 韓人 이주자에 대한 獎勵 와 保護 정책을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국 방과 경제상의 이익과도 관련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이 시기 귀화한인들의 토지소유권을 이용하여 滿蒙의 토지를 구입하려 하였으며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일본 식민경제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려고 기도하였다. 따라서 중국관헌은 일제의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을 제지하는 일환으로 우선 韓人에 대한 구축정책을 노골 적으로 실시하였다. 1932년 10월 15일자 北京 外交月報 는 중국정부는 최초에 조선인이 만주 에 와서 懇殖하는 것을 환영하였으나 最近에 와서는 태도를 개변하였는바, 그것 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이용하여 다른 목적(만주침략)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 다 16)고 지적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排日운동의 일환으로 在滿韓 人에 대한 구축정책을 실시하고 있다고 분석하여 이 시기 사회적으로 在滿韓人 에 대한 인식을 밝히고 있다. 이 시기 북간도 지역에서 진행된 韓人에 대한 구축은 주로 두 가지 조치에 따 라 진행되었는바 하나는 귀화조건을 강화하여 韓人들을 中國民으로 동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關內人의 이주를 통하여 韓人의 생활환경을 악화시키 고 아울러 韓人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1928년 2월 길림성에 15) 歷史硏究所 編, 太平洋戰爭史 1, 東洋經濟新報社, 1953, 250~251쪽. (金春善, 앞의 논문, 238~239쪽에서 재인용). 16) 外交月報 1932년 10월 15일자

166 서는 道尹會議를 개최하여 6개월 이내에 모든 한인을 귀화입적 시킬 것을 결의 하였으며 비 귀화인에 대해서는 토지와 가옥을 貸與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 다.17) 그리고 귀화입적 기한을 1928년 7월 1일부터 12월까지로 설정하였으며 남경국민당 정부의 특별우대 정책으로 북간도지역 韓人의 귀화입적 비용을 면제 해 주기로 하였다.18) 그러나 실지로 한인들의 귀화입적 실적은 24%에 지나지 않아 중국정부의 기 대에 미치지 못하였는바 1928년 5월 1일, 외교부는 吉林省長에게 근래 각국 거 류민 중, 동북3성에 거주하는 자의 다수가 중국인의 권리를 받고자 귀화입적을 청구하나 입적 후에도 여전히 원유국적을 이탈치 않고 있으므로 교섭사건이 발 생할 경우에는 번잡함을 면할 수 없고 곤란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번거로움을 제거하려면 한인들의 귀화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금후 귀화입적 하려는 자 에 대해서는 원유국적을 이탈케 하고 단일국적을 취득하도록 노력할 것 19)을 지 시하였다. 1929년 2월 5일에는 길림성장 張作相의 주도로 奉天에 墾民旅行社를 설치하 였고 天津 靑島 烟台 龍口 大連 營口 長春 哈爾濱 등지에 分所를 설치 하여 중국인의 만주이주를 지원하였다. 아울러 중국인 이주자들에 한하여 철도운 임을 할인해 준다든지 혹은 무료승차의 연령범위를 넓히는 등 우대조치를 취하 여 이들 漢人들의 만주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20) 그리고 지방관원들에게 훈령을 내려 동북3성에 있는 韓人농민의 驅逐策을 확립하는 동시에 河北 陝西 山東 등 3省에 있는 漢人농민을 이주시킬 것을 권장하면서 이는 自國 貧民救濟 정책과 일치된다고 강조하였다.21) 한편 길림성정부는 1929년 8월에 韓人들의 歸化入籍費를 면제 혹은 적게 받 기로 했던 우대정책을 취소했다.22) 그 외에도 만주 韓人에 대한 구축과 관련하 여 토지와 농업관계, 그리고 귀화관계와 같은 훈령과 取締를 반포하여 韓人들의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귀화입적을 강화하여 일제의 통치권내에서 이탈시키려고 하였다. 한마디로 만주지역에서 진행한 韓人에 대한 배척과 구축은 1925년에 시작되어 1927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되었는바 따라서 이 시기 韓人들의 국내 귀환이 빈번 17)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在滿朝鮮人壓迫事情, 1928, 201쪽. 18) 위의 책, 149쪽. 19) 玄圭煥, 앞의 책, 239~240쪽. 20) 在滿鮮人ト支那官憲, 132쪽. 21) 東亞日報 1930년 11월 15일자. 22) 在滿鮮人ト支那官憲, 220쪽

167 하게 이어졌다. 그 원인은 한 중 일 3국간의 利害와 갈등으로 인하여 초래되 었는바 특히 일본의 동북침략이라는 국책에 의하여 좌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 선 이 시기 韓人들의 만주이주는 위에서 언급한 조선 국내정세에 의하여 이루어 졌는데, 단순한 경제사정 외에도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한반도 통치와 토지약탈로 인한 농민들의 만주이주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재만 韓人사회에 대 한 일본의 獎勵 와 保護, 그 외, 韓人들의 토지소유권과 관련된 주장은 시종 일 본의 동북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중국관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 켜 결국 만주 韓人들을 일본의 동북침략을 위한 先鋒 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이 는 1928년부터 韓人에 대한 제반 훈령과 취체조치를 취하여 韓人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면서 결국 韓人을 배척하고 구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국관헌의 입장 으로서는 일제의 동북침략을 제지하고 일제의 통치권에서 韓人을 이탈시키기 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 한반도내의 언론보도를 통하여 在滿韓人의 구축과 관련하여 강한 반항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在韓화교에 대한 배척의식을 확산시키면서 화교 배척사건을 추진하였다

168 年代 後半 在韓華僑社會의 危機 1920년대 초반부터 山東노동이민(苦力)의 조선노동시장에 대한 진출로 인하여 조선노동계로부터 재한 화교에 대한 배척의식이 확산되었으며 결국 총독부에 진 정서를 제출하여 山東인의 입국제한과 노동현장에서 중국인 노동자의 사용을 금 지할 데 관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미 북쪽 신의 주로부터 남쪽 여수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인 노동자의 진출로 인한 피해 외에도 재한화교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내용을 독립신문 매일신 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해 자주 거론되어 화교배척 의식은 조선노동계로부터 사회전반에 거쳐 확산되면서 이 시기 주목되는 문제집단 노 출되었다. 예컨대 중국인의 來住로 한국사회에는 중국인에게 賣身하는 사건 이 자 주 일어났으며 媤父의 威脅으로 중국인에게 賣身했다 23)는 내용과 胡餠값 三錢 때 문에 中國人과 論爭하다 刺人 24)되었고 심지어 생활난이 낳은 비극으로 중국인 호 떡장사에게 11살짜리 愛女를 돈 40원에 팔아넘겼다 25)는 내용, 그 외에도 아편밀 매에 중국인 連類가 多數 적발 26)되어 이 시기 화교들은 한국인에게 악영향을 주는 사회 문제집단 으로 각인되었다. 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는 華僑에 대하여 蔑視하는 의식이 크게 확산되었는데, 이 는 서구인, 일본인, 조선인, 청국인의 순으로 민족 서열의식 을 내포한 일본의 민 족분열 정책에 기인되며 이와 같은 양상은 일본의 민족이간 책동과 더불어 한층 심화되고 확산되어 갔다. 예컨대 1925년 金東仁의 대표작 감자 27)를 비롯하여 1930년 4월 18일자 每日申報 에는 中國人 惡地主의 蠻行- 女를 凌辱後 打 殺 라는 기사내용과 같은 이 시기 화교에 대한 시각은 한마디로 비위생적이고, 탐욕스럽고, 好色的이고, 아편에 찌든 야만인 으로 인식되었다. 반면 화교에 대 한 장점으로 勤勉性, 愼重性, 謙讓性, 節約性 을 부각시키는 기사내용도 있었지 만 이미 한국인에게 화교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화교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시각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일제의 민족이간 정책에 기인되는데, 특히 중일전쟁 후, 일본은 中國人의 民族 性 에 대한 서적을 대량으로 출간하였다.28) 이들 일본학자들이 출간한 서적은 한 23) 東亞日報 1926년 2월 2일자. 24) 東亞日報 1927년 4월 26일자. 25) 東亞日報 1927년 3월 30일자. 26) 東亞日報 1927년 4월 9일자. 27) 金東仁 著, 金東仁全集 1, 朝鮮日報社出版,

169 마디로 중국인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未開人 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중국인에 대한 이와 같은 汚名은 일본국내에서는 중국침략을 강화하고 확 대시키는 작용을 하였으며 한반도에서는 민족이간 정책을 통하여 동북침략을 위 한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부터 언론을 통한 在滿 韓人사회와 관련된 보도는 전체 한 반도에 전파되어 在滿동포들을 옹호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27년부터 중국관헌이 실시한 在滿韓人에 대한 규제조치와 배척, 그리고 驅逐사건은 한국사 회에 큰 영향을 주면서 빠른 시일에 在滿韓人을 돕기 위한 사회적 운동으로 전 개되었다. 이는 다른 한편 在韓華僑에 대한 배척의식을 확대시켜 화교배척사건으 로 전환되었는바 이와 관련된 이 시기 언론의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29) <표5-3> 東亞日報 와 滿洲 同胞社會 關聯記事 新 聞 年 月 日 記 事 內 容 동아일보 *在滿同胞에게 戰爭費를 强徵, 最近奉天張作霖下令. 동아일보 *間島로 모이는 流離同胞 農場과 住宅에 大困難. 동아일보 *南北滿洲 一帶에 同胞移住 防止說 壓迫益甚한 奉天當局. 동아일보 *在滿同胞 逐出 事件과 移住同胞 危險. 동아일보 *山東貧民의 北滿洲移住激增, 年內에 百萬突破 동아일보 * 在滿韓人取締照3 北京外交部도동의,在滿同胞對策講究. 동아일보 *吉林省長密令으로 同胞移住를 嚴禁 國際問題의 頻發로. *歸化안한 朝鮮人에年末限退去命令,馬車에실어强制驅逐. 동아일보 *朝鮮服着用도 禁止. *凶暴無雙한中國馬賊 同胞十人을 拉去慘害, 不安恐怖中의移住民. 동아일보 *滿洲中人의 排韓 問題와 對策, 中國入籍者의 朝鮮脫籍. *各團體主要人物網羅, 在滿同胞擁護同盟. 동아일보 *朝鮮人村襲擊 同胞九人射殺. *調査委員派遣하여 中國官憲과 交涉, 全朝鮮的一致行動. 동아일보 * 商埠地外居住赤化에加擔 재만동포 방축이유, 길림성정부의 返電. *同胞擁護의 大運動 坊坊曲曲의 聲援消息. 동아일보 *同胞取締十二條 張作林이 보낸 在滿同胞 驅逐에 대한 정보. *同胞擁護의 大運動 방방곡곡의 聲援消食. 28) 原怱兵衛, 支那心理の解剖, 東京書房, 1932 ; 川合貞吉, 支那の民族性と社會, 第二國民 會出版部, 1937 ; 杉山平助, 支那と支那人と日本, 改造社, 1938 ; 松岡壽八, 支那民族性の 硏究, 日本評論社, 1940 ; 高山峰三郞, 支那國民性と其の由來, 古今書院, ) 東亞日報 1927년 1월 5일, 11월 16일, 11월 29일, 12월 5일, 12월 11일, 12월 12일, 12월 22일자

170 동아일보 *滿洲로 오는 山東 避難民 四百萬突破 在住同胞의 威脅. 출처: 동아일보 1927년 1월~ 1928년 4월까지. 위와 같이 만주 韓人사회에 대한 기사는 종전의 화교배척 의식을 화교배척 운 동으로 전환시켜 결국 전라북도부터 中國商品 不買를 호소하는 시위30)로 강경하 게 표출되었는바 드디어 1927년 12월에 裡里에서 화교상점에 대한 대규모 습격 약탈사건이31)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여주었다. 1928년 12월 15 일에는 조선의 각종 노동조합과 토목업자들이 조선총독부에 중국인노동자를 제한하 여 조선인이나 일본인의 생활을 안정시켜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32)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인천에서부터 중국인 노동자의 거주를 제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28년 12월에 인천경찰서는 인천에 허가 없이 중국인 苦力이 거주하는 것을 제한한다는 총독부의 명령을 집행하였는바 이에 대하여 中國領事館은 인천경찰 서와 총독부에 항의를 제출하였다.33) 한마디로 한반도의 화교사회는 1910년의 일제강점시기부터 조선총독부의 노골 적인 제지와 각종 규제정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민족이간 정책에 따른 각종 汚名으로 인하여 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재한화교사회는 다른 한편 滿洲韓人의 사회적 위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만주에서 韓人들의 구축사건의 영향을 받아 화교들도 배척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이와 같이 韓人과 華僑를 대상으로 한 중간의 외교문제로 거론될 만큼 양국간의 긴장된 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는 국내외에 큰 영향을 주어 일본의 大阪 東京과 중국의 南京 上海, 그리고 중국동북지역인 吉林 間島 등지에서 일본정부와 東北政權 에 항의하였다. 한편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사회와 중국영사관에서도 本國政府와 東北政權에 在滿韓人에 대한 배척과 구축 등 문제를 중지해 줄 것을 진정하였고 在滿韓人들도 自衛策을 강구하면서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보복을 가하지 못하도록 국내에 전했다. 한반도에서는 민족지도자들이 중국인 배척을 중지할 것 을 호소하였으며 在韓화교들도 조선총독부에 한국에서 화교배척운동을 사전에 방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7년 12월 9일, 한국민족지도자들과 각 사회단체인사 100여명이 조선교육 연합회에 집합하여 在滿同胞擁護同盟 이란 상설기구를 창설하였는데, 이들은 한 30) 東亞日報 1927년 12월 8일자. 31) 中外日報 1927년 12월 9일자. 在滿同胞 壓迫 報復으로 中國人 습격 및 中國人 商店을 재 차로 습격 32) 東亞日報 월 15자. 中國勞動者 制限을 各團體 陳情書로 提出 33) 東亞日報 1928년 12월 24일자

171 국민족이 적극적으로 이 동맹에 호응해 줄 것과 한 중 양 민족은 이번 분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우선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생명과 재산을 가 해하는 행동을 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외, 중국영사관과 화교총회를 방 문하여 同盟의 취지를 전달하였으며 아울러 정확한 태도를 촉구하였다.34) 이 활 동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으며 지부마다 성명서와 방침을 결정하였는데,35) 조선 총독부는 지부 결성과 在滿韓人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하였 다.36) 특히 충남 당진에서는 新幹會 당진지회 幹事會를 소집하여 만주동포 문 제를 논의하는 중, 조선총독부의 치안유지라는 이유로 동맹의 활동을 방해받고 탄압 당하였다.37) 그러나 중앙본부는 12월 11일에 서울에서 新幹會제2차 정기 총회를 소집하여 만주동포를 위한 옹호동맹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것과 민족감정 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을 가해하는 일은 삼가 해 줄 것을 결의하였다.38) 한편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도 이번 분규로 인하여 한 중 양국간의 민족문 제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北京政府와 東三省當局에 만주한인에 대한 구축사건 이 없도록 진정하였으며39)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화교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40) 1927년 12월 12에는 화교총회 馬秀壓이 서울의 화교대 표 30여명과 지방 대표 10명으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東三省當局의 張作林에게 대표를 보내어 교섭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재만동포옹호동맹 을 방문하여 한 중 양국간의 민족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언론기관을 방 문하여 敬告朝鮮各界同仁書 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게재함으로써 사건의 확대 를 제지하고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41) 결과적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 의 거족적인 노력과 중국과 일본각지 인사들의 노력, 그 외, 만주지역 한인들의 노력과 재한화교들이 노력한 결과 만주에서 한 인구축은 일단 완화되었다. 조선총독부도 동삼성당국과의 정치적인 일면과 여론 을 고려하여 한국에서의 화교배척운동을 정책적으로 사전에 방지하였다. 결국 한 중 양 민족간에 교섭된 요건은 吉林省에서 入籍條件(歸化)으로 하여 재만한인 의 驅逐令을 철회하겠다는 취지를 받아냈다. 34) 東亞日報 1927년 12월 9일자. 35) 東亞日報 朝鮮日報 1927년 12월 10일~30일자. 36) 東亞日報 1927년 12월 21일자. 37) 東亞日報 1927년 12월 21일자. 38) 東亞日報 1927년 12월 11일자. 39) 東亞日報 1927년 12월 11일자. 中國總商會도 東三省當局에 抗議하여 暴壓에 反對 40) 東亞日報 1927년 12월 11일자. 京城駐在中國領事 중국인 배척운동 문제로 總督府를訪問 41) 東亞日報 1927년 12월 12일자

172 在韓화교에 대한 배척과 在滿韓人에 대한 구축은 근본적인 해결은 보지 못했 지만 일제의 침략정책이 서서히 노정되면서 한 중 두 민족은 友誼를 통하여 일 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양 민족간에 일제의 민족이간 정책으로 인한 분규가 없도 록 노력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험은 후일 萬寶山事件으로 인한 조선에서의 화교배척사건의 수습과정에서도 일제의 책략정책에 대한 진상을 규 명함으로써 빠른 시일 내에 사건 수습을 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73 第2節 1931年 萬寶山事件과 그 影響 1. 萬寶山事件과 華僑排斥運動 종래 萬寶山事件에 대하여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 졌다.42) 만보산사건은 앞 에서 언급한 滿洲韓人에 대한 구축사건의 영향으로 한반도에서 진행된 화교배척 사건이 겨우 일단락 짓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시 재발한 셈이다. 만보산사건 의 勃發로 인하여 한 중 양 민족은 불과 5,6년 사이에 두 차례의 큰 충돌과 갈 등을 겪었는바 특히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반도의 화교배척 운동은 일주일 남 짓한 사이에 엄청난 人命被害 財産被害를 초래하여 재한화교역사상 전례 없는 인구 大 流出상황을 초래하였으며 재한화교역사의 한 폐이지를 남겨놓았다는 점 에서 주목된다. 1931년 만주에서 일어난 萬寶山事件은 중국농민과 韓人농민사이에 일어난 일 상적인 충돌에 불과하였지만,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확대된 거짓정보로 한국에 서는 反華僑테러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만보산사건의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우선 사건이 발생한 만보산의 지리적 위치는 중국 길림성 長春縣鄕 三 區 萬寶山이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長春에 거주하는 郝永德이 일본측과 결탁하여 개인적으로 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1931년 4월 16일, 伊通河 동쪽 三姓堡 官荒屯 일대를 임대하는 것과 관련하여 中國地主 蕭翰林 등 12戶와 地 主蕭翰林張鴻賓等十二人與郝永德所訂租地契約 을 10년 기간으로 체결하면서부 터 시작되었다.43) 왜냐하면 위 토지임대 계약서의 맨 마지막 조항인 제13조에 此契約於縣政府批准日發生效力如縣政府不准仍作無效 라 하여 반드시 縣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효력을 발생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무효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 나 郝永德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임대계약서를 체결한 토지를 다시 한인 농민 李昇薰 등 9인과 郝永德與鮮人李昇薰等九人所訂轉租契約 을 체결함으로서 한 인농민 188명을 이 지역으로 불러들였다. 韓人은 이 지역에 도착하여 바로 水路를 파기 시작하였으며 伊通河를 절단하 여 水路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중국인의 항의와 더불어 중국결찰의 여러 차례 통 고를 받는 등 사건이 확대되어가는 조짐을 보였다. 특히 공사장 중간 지대는 중 국인 또 다른 地主 孫永淸 등 41戶의 소유지였는데, 郝永德과 韓人 농민은 이를 무시하고 20餘里의 水路와 중국인 토지 40餘晌을 파헤쳤으며 여기서 사건은 크 42) 萬寶山事件에 대한 부분은 朴永錫의 ( 萬寶山事件硏究, 서울: 亞細亞文化社, 1978.)연구를 참고하였다. 43) 萬寶山事件硏究, p

174 게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의 분쟁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郝永德과 蕭翰林 등 12명과 租地 계약을 체결하고 長春縣政府의 허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는 점이다. 둘째, 水路를 불법적으로 파헤치고 伊通河의 물을 막는 것, 그리고 조약이외의 중국농 민의 權利를 침범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韓人농민은 이 지역의 耕種에 크게 介 在된다는 점이다. 넷째, 일본영사관경찰이 중국 내 깊숙이 들어와서 간섭함으로 써 사건이 더욱 확대되어 갔다는 점이다.44) 이 사건은 그 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현지조사가 이루어짐에도 불 구하고 사건이 해결을 보지 못했으며 중국농민과 관헌의 계속적인 항의에서도 長春일본영사관 경찰의 보호하에 한인농민은 工事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는 양 측의 관헌과 농민 사이에 사건의 격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1931년 7월 1일 만보산지역의 중국농민 3,4백명이 韓人농민이 약 2里정 도 이룩한 水路工事와 柳條로서 막은 제방을 파괴하여 토지를 원상대로 회복시 켰다. 그런데 동년 6월 12일부터 韓人 工事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현지에 주둔 하고 있던 일본경찰이 중국농민에게 사격을 가하여 중국농민은 일단 철수하였다. 그리고 7월 2일 새벽 중국농민은 다시 모여 水路를 매몰하려고 하자 일본측은 50여명으로 증가된 경찰과 무장 시위를 벌리고 다시 便衣隊(刑事) 10명을 馬家 哨口에 주둔시켰다. 그날 오후 일본영사관 경찰서 警部 中川義治는 비둘기를 날 려서 關東廳에 연락 보고하고 계속 兵力의 증원을 요청하였다.45) 다행이 7월1일과 7월 2일 이틀간 韓 中농민의 충돌과 양측의 항의문서가 왕 래되었지만 人命被害는 없었으며 큰 문제로 확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보산사건 은 실상과는 달리 한반도에 잘못 전해져 화교배척사건을 초래하였는바 그 경위 는 다음과 같다. 일본 關東軍은 우선 중국동북지방에 대한 침략을 목적으로 長春 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많은 韓人농민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보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영사관에서 朝鮮日報 長春支局長인 金利三에게 허위정보 를 제공하였다. 金利三은 일본영사관측의 정보를 그대로 믿고 만보산현지에서 확 인하지 않고 本社로 만보산사건을 電送하였다는 것이다.46) 한편 조선일보사는 그 동안 金利三이 전송한 내용들이 정확하고 신속했다는 점과 중국현지에서 韓 中농민간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여 金利 三의 내용을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號外로 발표하였다.47) 이와 같이 중국동북지 방에서 중국인에 의하여 한인농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으며 상황이 상당 44) 顧維鈞, 中國現代史e叢書 第3輯, 台北 : 文星書店, 1962, 16쪽. (박영석, 萬寶山事件硏究, 92쪽에서 재인용.) 45) 萬寶山事件硏究, 97쪽. 46) 天津大公報 1931년 7월 4일자. 朝鮮記者金利三在吉被殺經過及其謝罪聲明書

175 히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보도되자 한반도의 한인들은 크게 분개하였 으며 이어서 한국내의 화교를 박해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滿洲韓人에 대한 驅逐도 결과적으로 일제의 동북침략에 대 한 목적에 기인되었는바 만보산사건의 勃發때에도 일본은 사건경과부터 과장 오보함으로써 한국인의 민심을 격발시켰다. 그리고 한반도의 화교배척운동의 확 산과 더불어 피해 받은 화교들의 중국귀국을 통하여 중국인의 민심까지 뒤흔들 어 놓으려 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이 뒤흔들린 중국민심이 다시 만주한인에게 인 명피해와 재산피해를 가하기를 바랐으며 그러므로 韓人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 주에 대량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동북지역을 침략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보산사건은 실지로 일본의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 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거쳐 淸의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냈으며 이어서 러일전 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의 이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어서 러일전쟁 으로 인하여 러시아가 중국동북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南滿洲鐵道와 附屬線의 부설, 撫順炭鑛의 개발 등 이권을 차지함으로써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 기지 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에서는 마침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遼寧國民外交協 會는 이 운동을 중국동북지역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전개 확대해갔다. 따라서 旅順 大連의 租借地 및 南滿洲鐵道의 회수와 영사재판권의 철회, 그리고 철도 부설권과 撫順炭坑區의 확장에 대한 반대가 급증하였다. 아울러 일본인 한국인 에 대한 가옥임대료와 소작료 인상을 요구하였으며 契約更新을 거부하는 등 중 일간의 충돌도 심하게 격화되었다. 張學良은 일본에 대한 도전으로 대규모의 철도부설 광업 林業, 製粉業 紡績業 등을 포함한 적극적인 妨害운동을 일으켰다. 또 1907년부터 1930년 사 이 중국 동북지역과 중국 關內와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어 사회 경제적인 결 합의 기초가 마련되었는바 이는 동북지역에서 일본의 지위를 크게 위협하였다. 한편 일본은 1929년에 일어난 세계공황의 여파로 인하여 동북지역에서 일본의 권익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는데,48) 이 시기 중국동북지역에는 일본 關東軍이 주둔하고 있어 기회가 될 때마다 동북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기도하였다. 마침 만보산사건이 勃發하였으므로 日本은 한국에 허위 보도하는 방식으로 한 중 양국인의 충돌을 격화시켜 결국 在滿韓人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지역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만보산사건은 한마디로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시키려 47) 朝鮮日報 1931년 7월 4일자. 中國官民八百名과 二百同胞衝突負傷 48) 李勳求, 滿洲와 朝鮮人, 평양: 文信堂書店, 1932, 423~451쪽

176 는 일본의 심리적 작전이었다.49) 일본은 우선 가장 유력한 언론을 통하여 만보산사건 경위를 허위보도 하였는 데, 1931년 7월 4일 每日申報 에 게재된 내용은 中國暴民 5백여 명 萬寶山 朝鮮人村落 掩襲, 背後에는 官憲援助도 있어 事態는 重大하며 日本警官도 急 派 50)했다는 것이다. 또 中國官憲의 發砲로 同胞 若干名 負傷되어 領事館警察만 으로는 解決不能 51)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실지로 조선총독부도 피해 받은 재한 화교들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중국국내에서 在韓화교배척사건에 대한 報復행동을 일으킬 것을 바랐다. 한반도의 화교배척사건은 1931년 7월 2일, 仁川에서부터 시작하여 7월 10일 까지를 고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52) 이는 일본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으로 우선 동아일보 조선일보 외에도 每日申報 독립신문 과 통하여 빠르게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53) 같은 언론을 며칠간 이어진 화교배척사건의 내용은 화교살해 화교가옥파산과 재산탈취였으며 박해를 받은 화교들은 중국으로 귀환 혹은 집단으로 피난 대피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인천의 시민들부터 만보산사건 의 소식을 접하고 격앙하여 시위하였으므로 이 지역 화교들은 전부 撤市하였 다.54) 이 시기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은 仁川 서울 平壤인데, 그 중에서 平壤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시민들은 평양시내의 모든 中國街를 일제히 습격하여 소동을 벌였으며 유 혈의 참극이 도처에서 勃發해 도로에 파괴된 집물들이 산재해 있고 교통이 두절 될 정도였다.55) 그리고 인천에서는 7월 4일에 이미 만보산사건의 反響으로 중국 인 습격시위가 일어났다.56) 1931년 7월 2일부터 7월 10일경까지는 언론을 통하 여 전국각지에서 일어나는 화교배척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바 아래 每日申報 기사내용을 통해 이 시기 화교배척사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49) 박영석, 앞의 책, 98쪽. 50) 每日申報 1931년 7월 4일자. 51) 每日申報 1931년 7월 4일자. 52) 1931년 7월2일부터 7월30일까지 東亞日報 와 朝鮮日報 에 나타난 화교습격사건과 관련 된 地名을 抽出하면 : 公州, 安州, 載寧, 義州, 安邊, 海州, 江西, 雲山, 金城, 元山, 鳥山, 咸興, 會寧, 洪城, 全州, 大邱, 蔚山, 楊州, 順安, 馬山, 利原 水原, 春川, 群山, 裡里, 淸州, 鎭南浦 등 지역이다. (朴永錫, 만보산사건硏究, 亞細亞文化社, 1978, p. 99.) 53) 每日申報 1931년 7월 4일자. ( 中國暴民五百餘名 萬寶山朝鮮人村落掩襲 背後에는 官憲援助 도 있어 事態重大 日本警官急派, 中國官憲의 發砲 同胞若干名負傷 ). 54) 每日申報 1931년 7월 4일자. 55) 每日申報 1931년 7월 7일자. 56) 每日申報 1931년 7월 5일자

177 <표5-4> 每日申報 에 揭載된 韓半島 華僑 排斥事件 일 자 기 사 내 용 *萬寶山事件에 激昻 仁川群衆의 示威 中國人襲擊할 形勢 *應援警官隊出動 中國人은 全部 撤市 *拳銃發射,放火逐 등 仁川群衆 逐暴動化 *千餘戶 全部 撤市하여 죽은 듯이 고요한 中國人市街 *事態益益險惡 武裝警官 急遽出動 中國街엔 殺氣漲天 *群衆心理에 支配되어 襲擊暴行을 恣行 形勢는 刻刻 危險! *本町署管內만 三十餘處 衝突 警官出動 群衆鎭壓 *潮水와 같은 群衆 警官負傷者 續出 *陸續避難 中國領事館 大混雜 *中人襲擊의 示威 漸次各地에 飛火 東大門管內 檢束者 二百名突破 *平壤도 騷亂 *開城에 波及 *處處에 騷動 負傷者 多數 *危險千萬! 仁川騷動 *全市의 有數中國街를 一齊襲擊코騷動 平壤群衆 畢竟 暴動 *激昻한 群衆의 暴動은 畢竟未曾有의 慘變惹起 *驚怯해 騷動 元山中國人 唐慌 *一千數百名의 居住 中國人이 襲擊頻發로 領館에 避身 출처: 每日申報 1931년 7월. 위 표를 통해 알 수 있는바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여파는 상당하여 한반도 각 지역은 화교배척운동으로 시민들이 격양되어 있었다. 피해 받은 화교들은 우선 撤市 귀국 혹은 피난하는 상태이므로 실지로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반도의 경 제적 타격도 상당하였다. 특히 화교들이 취급하던 모든 거래가 두절되었는데, 麻 布는 마침 성수기여서 麻布商들의 손해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하였다.57) 그 외, 인천지역의 야채시장은 종래 화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것으로 화교들이 철시한 원인으로 이 기간 야채시세가 갑자기 騰貴하는58) 양상을 초래하였다. 그 리고 평안북도 신의주는 원래 화교노동인구가 많아 시내에만 화교인구 7,000여 명이 있었는데 그 중, 6,000여 명 피난하여 對岸으로 건너갔으므로 이 지역 공 장은 휴업해야 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59) 이와 같이 화교들의 상업 활동이 일 체 정지되어 있어 은행거래에도 큰 타격을 주었으므로 상공회의소에서는 대책을 57) 每日申報 1931년 7월 7일자. 58) 每日申報 1931년 7월 5일자. 59) 每日申報 1931년 7월 9일자

178 협의할 정도였다. 60) 결국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반도의 화교배척운동은 화교사 회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초래하였다. 특히 인천은 화교배척사건이 심각하였는바 인천경찰청은 화교배척사건과 관련 하여 7월 10일경에 이미 190명을 검거하였으므로 유치장이 滿 員 을 이루는 상황 을 초래하였다. 61) 아래 이 시기 인천지역에서 화교배척사건에 가담한 원인으로 검거된 주모자와 공모자에 대한 재판기록을 통해 인천지역의 화교배척사건을 살 펴보기로 한다. 62) <표5-5> 仁 川 의 華 僑 襲 擊 事 件 裁 判 記 錄 1931년 7월. 姓 名 日 期 內 容 備 考 鄭 伯 萬,23 歲 7.4 기타 10명과 공모하여 府 內 里, 內 里 佛 町 방명의 중국 공모자 10명 인 이발소, 상점을 파괴 20대. 金 泰 俊,32 歲 7.4 기타 40명과 川 郡 多 朱 面 道 禾 里 長 意 里 (독가다리)에 공모자 전부 사는 중국인 가옥에 방화, 중국인은 도주. 20대. 金 泰 俊,32 歲 7.5 기타 100여명과 敷 島 面 의 중국인 집에 방화. 공모자 20대. 朴 大 興,21 歲 7.4 기타 약 40명과 松 林 里 에서 농사짓는 중국인을 구타, 공모자 20~ 순사도착하여 도망. 30대. 金 興 起,20 歲 7.4 기타 8,9명이 중국인 董 聚 有 를 구타. 공모자 20대. 洪 雲 龍,31 歲 7.4 기타 40명과 川 郡 多 朱 面 道 禾 里 중국인의 집을 습 공모자 격. 20대. 尹 承 儀,23 歲 7.4 기타 3,40명과 川 郡 多 朱 面 道 禾 里 岩 本 우유집 부근 공모자 의 중국인에게 폭행, 상해를 가함. 20대. 池 山 峯,26 歲 7.5 토목공영소의 인부3,40명과 桃 山 町 사람 3,40이 花 町 공모자 20~ 三 丁 目 뒤에 있는 중국인 가옥 방화. 30대. 府 內 龍 里 평양관 앞길, 內 里, 外 里 의 중국인 가옥습 梁 奎 星,21 歲 7.4 격, 포목을 들고나와 도로 가로수에 매놓음. 공모자 20~ 또 중국인 양말공장을 부수고, 花 町 三 丁 目 12번지 밭 30대. 가운데 중국인의 집에 방화, 출처: 中 國 人 襲 擊 事 件 裁 判 記 錄, 2003, 3~41쪽, 참고작성.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한국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의 원인은 대체적으로 만보산사건의 勃 發 시 滿 洲 에서 韓 人 들이 중국인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인천주변에 있는 화교를 대상으로 이와 같은 복수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인천에서 일어난 화 60)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8일자. 61)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0일자. 62) 國 史 編 纂 委 員 會 編, 韓 民 族 獨 立 運 動 史 資 e 集 56, 中 國 人 襲 擊 事 件 裁 判 記 錄, 2003, 3~41쪽

179 교배척사건은 대체적으로 7월 4일~7일 사이에 일어났으며 그 뒤, 만보산사건과 관련하여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면서 더 크게 확대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그 리고 이 사건에 참가한 공모자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이며 일부 30대도 포함되어 있어 가장 쉽게 충동하고 또한 신중과 자중을 잃을 수 있는 연령대로 보여 진다. 화교배척사건에 가담한 이들 젊은 연령층은 대개가 임금노동자이고 일급은 약 0.60錢~1.00元으로 기록되어 대체적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빈곤한 서민 층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특히 조사과정에 진술한데 따르면 일시적인 충동으로 가담하였는바 계획적인 피살 파괴가 아닌 극히 단순한 행동으로 보여 졌다. 다 행이 화교배척사건은 각계의 끊임없는 노력과 적극적인 수습과정을 통하여 더 크게 확산되는 것을 미연에 막을 수 있었으며 따라서 화교들의 한반도로의 再流 入하는 결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

180 2. 華僑排斥運動의 收拾過程 및 結果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반도의 화교배척운동은 한 중 各界人士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31년 7월 10일 이후부터는 대체적으로 수습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안 정을 찾아갔다. 특히 사건 勃發시 한 중 각계인사들은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 반도의 화교배척사건의 확대로 인하여 만주에서 韓人에 대한 압박과 구축이 다 시 재연되는 등 양 민족간의 충돌사건을 저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우선 중국 언론은 동북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과 일본의 동북침략이 점점 심 해지고 있으므로 중국민중은 속히 自救하여 위기로부터 벗어나자고 호소하였 다.63) 그리고 한국에서의 화교배척운동은 일본의 계획대로 조작된 것으로 참혹 한 결과를 초래한 일본 측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64) 한편 중국 내 各 省지 도부는 중앙정부에 만보산사건과 관련하여 일본에 강력히 항의 할 것을 요구하 였다.65) 특히 아시아문화협회는 各國에 전보를 보내 일본이 동북침략 일환으로 한국인을 이용하여 만보산사건을 일으킨 점을 적발하였다.66) 국내외에서도 만보 산사건의 진상규명 결과에 대해 분개하면서 재한화교의 배척사건과 관련하여 중 앙정부가 일본과 심중히 교섭할 것을 요구하였다.67) 中央日報 1931년 7월 12 일자 社說에서는 누가 朝鮮事件의 主謀者인가 라는 제목으로 장편으로 일본의 동북침략 목적과 만보산사건의 발생원인 수습과정과 그 외, 한국에 확산된 화 교배척사건의 원인을 규명하였다.68) 南京한국화교 협회에서도 만보산사건과 관 련하여 일본의 음모를 폭로하였다.69) 길림성 중국관헌은 재한화교사회의 손해를 막는 차원에서 일단 재만한인에 대 한 구축사건부터 금지할 것을 各 地方官憲에 嚴命하였다.70) 중국 奉天당국에서 는 한반도 화교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在鮮동포를 생각해서라도 신중히 처리하 자 는 내용으로 한국에 전보문을 보내어 사태의 확대를 극력 제지하려 하였다.71) 63) 中央日報 1931년 7월 4일자, 東北危機 日人侵略愈迫愈緊...愿國人速起自救 調査鮮農 64) 中央日報 1931년 7월 7일자, 萬寶山事件后 韓人慘屠在韓華僑 被殺三十名重傷百卅餘名 日人 從容敎敎唆演空前慘劇 65) 中央日報 1931년 7월 9일자, 嚴重抗議萬寶山案 晉省(太原)黨部呈請中央 ; 中央日報 7월 11일자, 敵愾同仇 日人嗾使韓民 慘殺朝鮮華僑 各級黨部一致奮起呈請中央嚴重交涉 66) 中央日報 1931년 7월 9일자, 亞州文化協會昨日通電各國 萬寶山韓人受日人利用... 67) 中央日報 1931년 7월 12일자, 海內外國級黨部 對朝鮮慘案極憤慨 一致呈請中央嚴重交涉 68) 中央日報 1931년 7월 12일자, 社論: 谁爲朝鮮事件的主動者? 69) 中央日報 1931년 7월 11일자, 南京韓僑協會爲萬寶山事件發表宣言揭破日人陰謀 70) 每日申報 1931년 7월 8일자

181 특히 만보산사건 時, 遼寧國民外交協會는 많은 활동을 벌여 만보산사건에 대한 진상에 대하여 규명함으로서 한국의 화교배척운동을 제지시키는 노력과 더불어 排日운동을 指導하였다. 이 협회에서는 우선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적극 보 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에서의 화교배척사건에 대한 보복행동을 단속하 였다.72) 협회는 또 결의문을 채택하고 南京政府에 발송하여 강경한 對日外交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朝鮮事件의 責任者를 嚴罰에 처할 것. (2) 損害된 一體를 辨償시킬 것. (3) 다시는 이 같은 事件이 일어나지 않겠다는 것을 보장 받을 것. (4) 中國軍隊를 朝鮮에 駐屯시킬 것. (5) 日本政府로 하여금 正式으로 謝罪시킬 것.73) 遼寧國民外交協會는 또 만보산사건과 조선에서의 중국인배척사건에 대한 한 중 양 민족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朝鮮에서의 中國人排斥事件은 韓 中 양 民族에게 크게 遺憾되는 사건이다. (2) 萬寶山事件은 日帝의 不法的인 행위로 軍事的 行動을 취하려는 計劃이다. (3) 韓農移民은 늘어가고 있지만 이들은 中國에서 待遇를 받고 일부만 法秩序를 紊亂하 게 하고 있다. (4) 在韓華僑에 대한 殺傷과 破壞를 행한 것은 日本의 現行 國際公法에 어긋나는 行動 이다. (5) 이번 兩大事件을 契機로 아시아 平和를 위하여 兩國 民族은 努力하자.74) 협회는 위와 같이 중국국내에서의 在滿韓人에 대한 報復사태를 막기 위해 노 력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이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줌으로써 한국과 일본에 서의 화교배척사건의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한국국내에서는 1931년 7월 5일부터 일부 언론을 통하여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민들에게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사건의 확산을 저지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특히 평양은 전국적으로 화교피해가 가장 많았으며 또 중국동북 과도 가까운 지역이어서 사건진상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외 인천과 서울 71) 每日申報 1931년 7월 5일자. 72) 朝鮮日報 1931년 7월 17일자. 朝鮮人積極保護 遼寧外交協會方針 73) 東亞日報 1931년 8월 6일자. 朝鮮事件과 奉天外交協會團體決議 74) 東亞日報 1931년 7월 10일자. 北伐紀念日 排日을 煽動 (遼寧省國民外交協會 外, 遼寧省 敎育會 遼寧省農會 遼寧省商會聯合會 遼寧省律師公會 遼寧省國民常識促進會도 동참.)

182 에서도 各界協議會를 구성하여 사태수습을 위한 宣傳文을 배포하고 尹致昊 등 각계인사들에 의하여 同情金品을 모았으며 화교들이 안심하고 生業에 종사할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였다. 1931년 7월 8일자 每日申報 는 在留中國人을 박해함은 二重三重의 妄計이 므로 在滿同胞를 위하여 또 人道上見地로도 자중해야 한다 라고 사설을 발표하 여 사건의 확대를 저지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 외, 동포를 진정으로 생각하거 든 冷靜히하라, 중국인 피난민에 동정 등 기사도 보도되었다.75) 특히 평양의 화교 배척운동은 큰 피해를 초래하였으므로 평양사건에 대하여 중국인 희생자에 게 救恤金을 지급하는 운동도 벌였다.76) 또 조선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같은 각 종교단체 대표자들도 중국인을 위한 위문금을 모집함과 동시에 화교배척사건 을 금지할 데 관한 경고문을 배부할 것을 결의하였다.77) 이 시기 한반도 각지에서는 이과 같이 사건의 제지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는바 아래 <표5-6>를 통해 기사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78) <표5-6> 每日申報 에 揭載된 衝突事件防止를 위한 各界의 努力 일 자 기 사 내 용 *咸興商業會에서 中國人을 慰問 *신의주 12個 단체 蹶起, 府民에게 流言에迷惑하여 망동하지 말것 *海州署管내에서 7백 中國人을 收容하여 保護. *嚴重한 警戒로 釜山은 安靜 *在滿同胞의 呼訴深切, 우리를 생각하면 中國人 迫害를 停止하라. *各町區長이 모여 진압방법을 講究, 釜山有志 등 活動 *朝鮮團體 中國人 避難民에 慰問金 還至 *仁川商工會議所는 義捐金을 모집하여 遭難화교를 救濟키로 決議. *咸南 萬寶山事件에 俗厚面의 未然防止策으로 聲明書를 配付 *光州市內光州商業會에서 一般市民들에게 警告文을 配付하여 安靜. *金全北知事가 在留中國人慰問하여 全州市內는 極溫情. *仁川各團體대표 中國領事館訪問 慰問品도 贈呈하고 陳謝. *仁川府를 비롯하여 府內각단체에서 中國避難民에 同情金을 還至. *咸南道參與官 中國人避難民慰問 식량품도 기정. *海州각단체 警告文配布 市內人心도平靜. *歸國中國人에 慰問金給與, 各團體 誠意에 감사의 뜻도 表示. *鎭南浦有志 中國避難民에게 千七十三圓募集 75) 每日申報 1931년 7월 7일자. 76) 每日申報 1931년 7월 9일자. 77) 每日申報 1931년 7월 10일자. 78) 每日申報 1931년 7월 10일자, 7월 30일자

183 출처: 每日申報 1931년 7월.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1931년 7월 10일부터 한반도는 이미 각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보산사건의 실태를 파악하고 안정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지로 일부지역은 이 시기 이미 화교들이 다시 귀환하여 복귀하는 것도 있었다. 특히 安東縣은 평안북도와 인접해 있고 신의주의 대안에 위치한바 중국영사는 安東縣 에 피난중인 화교 5,000여명을 위하여 신의주로 안전하게 귀환하도록 평안북도 와 교섭하기도 하였다.79) 이들 중국영사들은 사건의 재 발생을 우려하여 우선 안전여부부터 확인하였는데, 부산주재 중국영사도 마산경찰청에 馬山在留중국인 을 보호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80) 재한화교들도 스스로 사태수습에 나서 1931년 7월 8일 華商總會 宮鶴汀이 동아일보 에 敬告我朝鮮親愛的人民 81)이란 글을 실어 한 중 양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과 해결방안 그리고 이번 사건은 한국인 의 意思가 아닌 일본의 陰謀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이 언론보도에 의 하여 크게 확산되었던 관계로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도 사태수습에 노력하 였다. 한마디로 만보산사건은 일본의 동북침략을 위한 허위 과장된 오보로 인하여 일어났으며 일본은 가장 유력한 언론을 통해 만보산사건을 허위 과장하여 공개 하였다. 일본의 이와 같은 심리작전은 그 뒤 조선총독부의 사건처리 과정에 여실 히 나타났는바 화교피해자들의 귀국하는 행렬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서 이들 화교들의 귀국에 이어 중국국내에서 또 다시 在滿韓人 배척사건이 일어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한 중 각계 인사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보산사건의 진 상은 규명되면서 일본의 동북침략정책은 그대로 노정되었다. 그 동안 한 중 양국 각계인사와 사회단체의 노력은 사건의 확대를 저지하였 으며 따라서 사건은 수습상태로 호전되었다. 특히 재한화교에 대한 가해행동을 중지시키고 사건의 진상규명을 호소하고 피난민을 구제하는 등 화교들의 안전과 생활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외, 재만동포를 擁護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 였다.82) 이와 같은 노력으로 만보산사건 후, 한 중 양 민족은 공동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았으며 결국 만보산사건의 여파로 각지에 서는 排日 데모 를 劃策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83) 79) 每日申報 1931년 7월 11일자. 80) 每日申報 1931년 7월 11일자. 81) 朝鮮日報 1931년 7월 9일자. 敬告我朝鮮親愛的人民 82) 每日申報 1931년 7월 15일자. 7월 15일 평양 중국인들도 안전하게 취업하는 상황

184 第3節 1937年 中日戰爭 前後 華僑社會의 變化 1. 華僑人口의 流出과 再流入 및 分布 근대 초기 한반도로 화교의 이주는 위에서 살펴본바 1883년부터 이루어졌으 며 이들 화교사회의 본격적인 형성은 1884년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정됨에 따라 형성되었다. 따라서 한반도 화교사회 형성 이래, 즉 1884년부터 1945년 간 화교 인구의 大流出과 再流入 현상은 3차례에 거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청일전쟁과 만보산사건, 그리고 중일전쟁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으로 인한 화교인구의 유출은 그 뒤, 다시 뚜렷하게 再流入하는 양상으 로 나타났는바 본 절에서는 이 시기 화교들의 再流入에 따른 분포상황, 그리고 화교사회 경제변화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한국 화교사회가 1937년 중일전쟁을 마감으로 화교들이 再流入하는 과정을 거쳐 재한 화교사회가 대체적으로 완성되어 갔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시기 화교사회의 구성은 오늘날 재한 화교사회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만보산사건의 영향으로 인한 한반도 화교배척운동으로 1931년도 재한화교 인 구는 큰 폭으로 유출되는 양상으로 나타나 1930년의 67,794명으로부터 36,778 명으로 감소하여 결국 31,016명이 유출된 것으로 기록되었는바 이는 그 전해 화 교인구의 45.8%를 점한다. 이 시기 화교들의 중국으로 귀국은 주로 해로와 육로 를 이용하였으며 해로로는 인천과 진남포 당지를 거쳐 山東 芝罘로 귀국하였고 육로로는 신의주를 거쳐 對岸인 安東縣으로 건너간 것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평 안북도에 많은 화교들이 거주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신의주가 가장 많았던 점 을 감안할 때, 신의주를 거쳐 安東縣으로 건너간 화교인구가 상당한 것으로 짐작 된다. 같은 맥락으로 인천도 경성과 그 주변의 화교피난민들이 몰려와 支那町은 한동안 혼잡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1931년 7월 9일, 평양의 피난민 5,000여명은 남포 중국영사의 알선으로 화물 차로 安東縣으로 이송되었다.84) 7월 10일과 7월 11일에는 이 지역 화교들이 진 남포를 경유하여 芝罘로 귀국하였는데, 7월 10일에 利通丸과 共同丸편으로 800 명 정도가 귀국하였고 7월 11일에도 長山丸과 慶安丸편으로 각각 1,200명 정도 가 귀국하였다.85) 인천인 경우, 전국 각지에서 많은 화교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배 편마다 귀국하는 화교들로 넘치는 상황을 초래하였는데,86) 7월 6일에 이미 격앙 83) 每日申報 1931년 7월 10일자. 84) 每日申報 1931년 7월 9일자. 85) 每日申報 1931년 7월 12일자

185 한 시민들의 폭동으로 인하여 참변을 당하여 이 지역에 피난했던 화교 2,000여 명이 귀국하였다. 그리고 7월 8일에도 利 通 丸 편으로 1,000여명이 중국으로 돌아 갔다. 87) 7월 11일에는 제36번 共 同 丸 으로 1,700여명이 芝 罘 行 으로 귀국하였는 바 7월 11일 정오까지 인천에서만 약 6,000여명이 귀국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 외에도 경성으로부터 온 화교 800여명과 기타 5~600여명이 인천으로 몰려 支 那 町 일대는 혼잡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당시 귀국행렬이 많았음 을 설명하고 있다. 88) 심지어 화교배척사건이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도 화교들 의 귀국 행렬은 끊이지 않았는데, 7월 13일에는 當 地 發 芝 罘 行 에 共 同 丸 편으로 1,681명, 평양 등지에서 1,319명, 鎭 南 浦 에서 362명이 철귀하였는바 기타 귀국 하려는 화교까지 포함하여 전부 5,721명이 당지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89) 이 시기는 많은 화교들이 위와 같이 귀국하였으므로 각지 中 國 人 街 는 종전의 혼잡 한 양상과 달리 조용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한편 한반도의 화교배척운동이 혼잡한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성을 되찾자 중국 으로 귀국하는 행렬과 병행하여 일부 화교들은 다시 한반도로 귀환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1931년 7월 11일자 每 日 申 報 는 다시 돌아온 화교들은 한국인과 의 친목도 더 돈독해졌으며 점차 원상 회복 중 이라고 보도하고 있어 화교 인구 의 流 出 에 이어 再 流 入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특히 평안북도는 중 국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원인으로 화교인구의 流 出 과 再 流 入 이 다른 지역에 비 하여 빠르게 움직였는바, 특히 신의주는 7월 8일 오후부터 이미 안정을 찾았으 며 따라서 9일부터는 화교들의 행적이 점차 늘어나면서 화교들이 일하는 모습도 보였다. 90) 신의주 府 內 공장들은 화교들의 귀국으로 공장이 휴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초래하였는데, 安 東 縣 으로 화교피난민들이 속속 歸 來 하면서 각 공장에 서도 작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91)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7월 18일경에 이르러 신의주는 완전 復 舊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中 國 人 街 에는 이미 6,500여명이 다시 府 內 로 돌아왔다고 보도하고 있다. 92) 한마디로 1931년의 화교배척운동으로 한반도화교사회는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31,000여명이 귀국하여 45.8%의 인구 대 유출상황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 뒤, 86)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0일자. 87) 東 亞 日 報 1931년 7월 8일자. 88)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2일자. 89)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6일자. 90)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1일자. 91)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2일자. 92) 每 日 申 報 1931년 7월 18일자

186 사태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다시 한반도로 귀환하는 양상으로 나타나 화교인구는 再 流 入 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아래 표를 통하여 이 시기 화교인구의 유출과 재 유입상황 및 이 시기 남여성비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표5-7> 在 韓 華 僑 人 口 推 移 單 位 : 人 年 度 別 人 口 全 體 男 女 女 性 比 率 (%) ,794 55,973 11, ,778 30,571 6, ,981 49,974 14, ,909 31,600 10, ,976 47,161 16, ,661 57,426 25, ,776 50,903 24, 출처: 朝 鮮 總 督 府 統 計 年 報 ( 各 年 度 版 ) ; 朝 鮮 統 計 年 報, 1948, 37쪽. 위 표가 설명하듯이 1930년 전체 화교인구의 남여성비는 17.4%로 기록되었으 며 1931년의 인구 大 流 出 후, 한반도에 남은 전체 화교인구는 36,778명이었다. 그러나 동년 남여성비는 여전히 16.9%로 기록되어 전에 비하여 큰 차이를 보이 지 않고 있다. 1906년에 조사한 朝 鮮 總 督 府 統 計 年 報 에 따르면 이 시기 남여 성비는 3.5%로 기록되었으며 93) 1920년에 10.9%, 1930년에 17.4%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한반도 화교들의 정착 시기를 남여성비로 분석하면 1920 년대 후반 혹은 1930년부터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 라서 1931년 화교사회 전체 인구의 남여성비가 전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은 원인은 이 시기 화교들의 중국으로 귀국은 가정을 이룬 화교에 한해서 살펴볼 때, 대체적으로 가족단위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이 시기 화교인구의 증감상황을 살펴보면 朝 鮮 總 督 府 의 朝 鮮 國 勢 調 査 報 告 에 따르면 1925년도 한반도 화교인구를 58,057명으로, 1930년에는 91,783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5년간 33,726명이(58.1%) 증가한 것으로 기록 하였다. 94) 그러나 1935년도의 화교인구는 58,563명으로 1930년에 비하여 33,220명이(36.2%) 감소되었다. 95) 이는 1931년 7월 2일의 만보산사건과 동년 9월 18일, 일본의 동북침략을 목적으로 일으킨 滿 洲 事 變 으로 많은 화교들이 귀 국한 것에 기인된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화교배척사건으로 인한 재한화교들의 93) 統 監 府 編, 統 監 府 統 計 年 報, 서울 : 高 麗 書 林 영인본, 1987, 39~40쪽. 94) 朝 鮮 總 督 府 編, 朝 鮮 國 勢 調 査 報 告, 朝 鮮 總 督 府, 1939, 57쪽. 95) 朝 鮮 國 勢 調 査 報 告, 57쪽

187 귀국이 가정단위로 이루어 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귀국인 수가 많았으며 따라서 재한화교인구도 큰 폭으로 증감하는 상황으로 나타났다. 조선총독부는 또 1935년도 화교인구를 통계함에 있어서 중화민국인(화교)과 滿洲人(東三省人)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어 동년 滿洲人(東三省人)은 11,585명 으로 기록되었다.96) 실지로 1935년의 통계에 기록된 이들 滿洲人(東三省人)이 종래 한반도 화교인구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는지 정확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 만, 중요한 것은 이 시기 滿洲人(東三省人)이 전과 다른 양상으로 한반도로 이주 자가 급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이 시기 화교분포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1935년도에 통계된 한반도 화교 분포상황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97) <표5-8> 1935年度 滿洲國人 中華民國人의 道別 分布 道 名 京 畿 道 忠淸北道 忠淸南道 全羅北道 全羅南道 慶尙北道 慶尙南道 黃 海 道 平安南道 平安北道 江 原 道 咸鏡南道 咸鏡北道 合 計 滿洲國人 中華民國人 (東北人) (A) (旣存華僑) (B) , , , , , , , ,152 9,017 17, , ,786 11,585 58,563 韓 半 島 華僑人口 12, ,832 2,138 1,113 1,346 1,096 3,483 5,624 26, ,846 6,559 70,148 比 3(%) A/B 2/98 3/97 0.5/99.5 1/99 2/98 1/99 5/95 2/98 8/92 35/65 6/94 12/88 12/88 17/83 출처: 朝鮮國勢調査報告, 1939, 62쪽. 注: 韓半島 華僑人口와 比3는 필자계산. 위 표는 滿洲國人(東三省人)과 中華民國人(華僑)98)을 1935년를 기준으로 처음 으로 구분하여 조사한 것이며 이들이 한반도 내 道別 분포상황에 대한 통계이다. 표에서 나타나듯이 東三省人은 주로 평안북도에 집중되었으며 전체 11,585명 중, 9,017명으로 약 7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 시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추 96) 朝鮮國勢調査報告, p ) 朝鮮國勢調査報告, p ) 滿洲國人은 중국 동북지역 인을 가리키는바 현재 호칭에 따라 東北人으로 改稱하고 중화민국인 은 실지로 우리들이 통상 말하는 화교를 가리키므로 화교로 改稱한다

188 진한 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1928년 북간도 지역에 서 진행된 韓人구축 조치 중, 하나가 중국 關內漢人의 북간도 이주를 통하여 韓 人의 생활환경을 악화시키는 방법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9년 2월 5일, 길림성장 張作相은 奉天에 墾民旅行社를 설치하였고 天津 靑島 烟台 龍 口 大連 營口 長春 哈爾濱 등지에 分所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만주이주를 支援하였으며 여러 가지 우대조치를 취하여 이들 漢人들의 만주이주를 권장하였 다.99) 또 지방관원들에게 훈련을 내려 동북3성에 있는 韓人농민의 驅逐策을 확 립하는 동시에 河北 陝西 山東 등 3省에 있는 漢人농민을 이주시킬 것을 권 장하였다.100)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 초반까지 중국 정부의 차원에서 이뤄진 河北 陝西 山東 지역의 漢人들의 만주이주가 대폭적 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에서도 만주한인사 회의 열악한 상황을 보도하면서 山東人의 만주이주가 급증하여 한인경제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므로 1935년 전후시기에는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東三省人의 평안북도 이주가 급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함경남도에는 東三省人이 844명(7.3%), 함경북도는 733명(6.7%), 평 안남도는 472명(4.1%), 경기도는 210명(1.8%)이다. 반면 화교(中華民國人)인 경 우, 평안북도에 17,118명으로 전체(東三省人 제외) 화교인구의 29%를 점하고 있 으며 경기도는 12,363명(21%), 함경남도는 6,002명(10.2%), 함경북도는 5,786 명(9.9%), 평안남도는 5,152명(8.8%), 황해도는 3,397명(5.8%), 전라북도는 2,119명(3.6%)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전체적으로 이 시기 화교(中華民國 人+滿洲人)인구는 평안북도에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으며 다음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그리고 평안도인 것으로 기록되어 대체적으로 오늘날 북한에 집중되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3년 중국인 노동자 사용상황을 살펴보아도 평안북 도 사용상황이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되었다.101) <표5-9> 1933年度(昭和 8) 中國人 勞動者 使用狀況 道 名 京畿道 忠淸北道 實際使用 사용된 事業 勞 動 種 類 鐵路工事, 石材採取 大工 石工 延人數 10,311人 學校建築, 橋梁工事 -- 大工 備 99) 在滿鮮人ト支那官憲, 132쪽. 100) 東亞日報 1930년 11월 15일자. 101) 民族問題硏究所 編, 帝國議會 說明資e, 한국학술정보(주), 2000, 302~303쪽 考

189 忠淸南道 全羅北道 全羅南道 慶尙北道 慶尙南道 黃海道 平安南道 ----鐵道敷設工事 水利工事, 干拓工事 漁港改築工事 鐵道工事, 水利工事 道路工事, 飛行場工事 水道工事, 道路工事 ----土工 ,320人 石工 土工 18,034人 土工, 石工, 大工 左官, 煉瓦工 木工, 大工 平安北道 埋立工事, 學校建築 江原道 水利工事, -道路工事, 鐵道工事 -坑, 大工, 水利工事, 鐵道工事, 土工, 石工, 土工, 大工, 木材作業工事 飛行場爆擊觀測所新設 台車押 咸鏡南道 咸鏡北道 朝鮮軍 土工, 左官 工事, 兵器本廠平壤 84,189人 262,101人 -12,465人 92,447人 1,090人 出張所新設工事 計 502,995人 1932年使用 數642,429人 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02~303쪽. 위 표를 살펴보면 1933년도 한반도에서 중국인 노동자사용수가 전체 502,995 人 중, 평안북도에서 사용한 수만 262,101人으로 52%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중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木工 大工 土工과 같은 업종에서 일하였으며 이와 관 련된 사업은 水道工事 道路工事 埋立工事 水利工事 등이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화교들의 분포가 위와 같이 주로 평안북 도에 집중되어 있는 원인을 지리적 요인에 기인하고 있다.102) 다시 말하면 화교 들은 대체적으로 지리적 요인으로 인하여 동북지역과 인접한 국경지대에 집중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화교들의 분포는 거주지역이 가지는 특징과 관련이 있는바 이 시기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진행된 각종 건설사업과 밀접한 관 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932과 1933년도 지역별 업종별 중국인 노동자 인구의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평안북도에 화교 노동자들이 집중된 원인은 지리적 요인 외에도 평안북도지역이 실지로 화교 노동자들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었음 102) 朝鮮國勢調査報告, 62쪽

190 을 설명하고 있다.103) <표5-10> 地域別 業種別 中國人 勞動者 人數 1932年(昭和 7)末 警務局調 人 道別 農業 漁 業 鑛業 製造 理髮 業 業 木工 石工 左 官 土工 力 運搬 伸 車 業 仕 其他 計 京畿 忠北 忠南 全北 全南 慶北 慶南 黃海 平南 平北 江原 82 咸南 731 咸北 計 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1쪽. <표5-11> 地域別 業種別 中國人 勞動者 人數 1933年(昭和 8)末 警務局調 人 道別 農業 京畿 忠北 忠南 全北 全南 慶北 漁 業 鑛業 2 製造 理髮 業 業 木工 石工 左 官 ) 帝國議會 說明資e, 31쪽 ; 같은 책, 302~303쪽 土工 力 運搬 伸 車 業 仕 其他 計

191 慶南 黃海 平南 平北 江原 咸南 咸北 計 ,294 출처: 자료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02~303쪽. 注: 1) 원자료는 平南 중국인 노동 자수는 2291임. 2) 원자료는 조선내 伸仕 노동자는 88임. 3) 원자료는 平北 중국 인 노동자수는 7428임. 4) 원자료는 江原 중국인 노동자수는 184임. 위 표서 알 수 있는바 이 시기 평안북도지역은 화교노동자들의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農業과 其他로 표기된 업종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화교노 동자 인수가 상당히 많다. 그 외, 製造業과 木工業에도 화교노동자들이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농업과 제조업 그 외, 건설업이 수적으로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럼 화교노동자들 의 분포상황은 이들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아래 京城 木 浦 大邱 釜山 平壤 新義州 元山 淸津 등 지역에 대한 한국인 노동자와 중국노동자, 그리고 일본인노동자와의 임금비교를 통하여 이를 살펴보기로 한 다.104) <표5-12>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勞動種類別 賃金比較表 勞動種類 國籍別 1930年平均 1931年平均 1932年平均 家 作 指 物 建 具 造 船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日本人 韓國人 中國人 234 (錢) (錢) (錢) ) 帝國議會 說明資e, 310~314쪽 文書課調査 年9 月 1934年10 平 均 283 (錢) 月 平 均 293 (錢)

192 日 本 人 左 官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石 工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屋 根 葺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建 具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瓦 葺 韓 國 人 中 國 人 煉 瓦 職 日 本 人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染 物 職 韓 國 人 中 國 人 洋 服 日 本 人 韓 國 人 裁 縫 職 中 國 人 日 本 人 靴 職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理 髮 師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平 人 足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土 方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農 作 韓 國 人 中 國 人 日 本 人 21,44 圓 19,09 圓 22,17 圓 20,00 圓 22,00 圓 下 男 韓 國 人 12,46 11,86 11,29 10,13 10,63 中 國 人 12,00 12,50 13,50 13,50 16,00 下 女 日 本 人 18,19 15,12 15,09 14,38 14,

193 韓國人 9,96 中國人 -- 8,73 10,00 7, , 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10~314쪽.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한 중 일 3국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교하면 일본 인 노동자의 임금이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다음으로 한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업종에 따라 다른데, 특히 기술을 要하는 업종인 경우, 중국인 노동자의 임금이 한국인 노동자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전체 적으로 한국인노동자와 중국인노동자의 임금을 비교하면 대체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인노동자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日給을 지급 했다는 사실과 중국인노동자를 사용했을 때, 노동쟁의로 인한 우려가 없다는 점 을 감안했을 때, 이와 같이 임금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노동자를 사용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지역별 중국인 노동자들의 임금통계표를 통하여 실지로 임금과 화교 들의 거주지 분포관계를 알아보기로 한다.105) <표5-13> 地域別 中國人 勞動者 賃金表 道別 農業 漁業 京畿 忠北 忠南 全北 全南 慶北 慶南 黃海 平南 平北 江原 咸南 咸北 鑛 製造 理髮 業 業 年(昭和 7)末 警務局調 木工 石工 左官 土工 業 人力 運搬 伸 車 業 58 仕 其他 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2쪽. 注: 짙은 부분은 임금이 높음을 표함, 필자표시. 105) 帝國議會 說明資e, 309쪽 비 고

194 <표5-14> 地域別 中國人 勞動者 賃金表 道別 農業 京畿 忠北 忠南 全北 全南 慶北 慶南 黃海 平南 平北 江原 咸南 咸北 平均 漁 業 鑛業 製造 理髮 業 年(昭和 8)末 警務局調 木工 石工 左官 土工 業 人力 運搬 伸 車 80 業 62 仕 其他 비 고 출처: 帝國議會 說明資e, 309쪽. 注: 짙은 부분은 임금이 높은 지역, 필자표시. 위 표는 1932년과 1933년도의 지역별 업종별 중국인 노동자의 임금통계이 다. 필자는 표에서 업종별로 임금이 많은 부분을 진하게 표시하였는데, 전체적으 로 보았을 때, 평안북도에는 진한 표시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없는 것으로 나타 났다. 다시 말하면 평안북도의 임금은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한편 임금의 높고 낮음은 화교들의 분포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그럼 왜 이와 같이 평안북도에 화교들이 집 중되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제4장에서 언급한 苦力과 苦力幇조직의 특성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해외에서 苦力의 특성은 단독적인 활동이 아닌 同鄕인으로 구성된 집단생활에 강하게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평안북도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苦力과 苦力幇조직 의 활동이 가장 오래된 지역이고 아울러 이 지역에 유력한 苦力幇조직이 존재했 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화교노동자들은 임금과 상관없이 同鄕인으로 구성된 苦力 幇조직을 찾아 평안북도로 이동했을 것이고 또 평안북도의 노동시장도 이들 화 교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음으로 이와 같은 분포를 초래하였다고 보여 진 다. 평안북도의 상황에 대하여 좀더 상세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1914년부터 1929 년까지 이 지역의 화교인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95 <표5-15> 平安北道 華僑人口 調査表 (1914~1929) 年 度 居 住 ,811 2,313 2,670 2,503 2,528 2,800 2,820 3,215 2,990 世 帶 , ,868 2,080 2,361 2,975 3,124 3,108 3,246 3,808 4,024 4,163 3,563 南 4,706 3,887 3,972 4,211 4,209 3,917 4,493 4,577 5,438 6,417 7,596 9,268 8,430 9,554 10,465 10,716 12,770 女 295 (5.9%) 350 (8.3%) 342 (7.9%) 496 (10%) 647 (13%) 671 (15%) 819 (15%) 863 (16%) 904 (14%) 1,093 (15%) 1,660 (18%) 1,984 (18%) 1,715 (17%) 2,459 (20%) 2,983 (22%) 3,224 (23%) 4,001 (24%) 合 計 5,001 4,237 4,314 4,707 4,856 4,588 5,312 5,440 6,342 7,510 9,256 11,252 10,145 12,013 13,448 13,940 16,771 출처: 平安北道統計年報, 1927年~1934年.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평안북도의 화교인구는 1914년부터 꾸준히 증가하 는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남여성비가 다른 지역과 대조적으로 큰 차이가 있 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도 재한화교사회의 지역별 평균 남여성비가 10.9%인데 반하여 평안북도는 1921년에 16%로 기록되었다. 이는 1930년에 조사된 17.4% 에 접근하는 수치이다. 반면 1930년의 평안북도 화교인구 남여성비는 24%로 나 타나 평안북도가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화교들의 정착이 일찍 시작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안북도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업도시인 신의주의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식료품 가공공장과 정밀가공공장이 상당히 많았던 점을 감안할 때, 이들 공장에서 화교여성노동자들을 많이 필요로 했던 것으로 판 단된다. 결국 평안북도에 화교노동자가 가장 많이 집중된 것은 화교여성노동자의 역할도 일정한 작용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아래 평안북도 중에서도 화교노동자들이 가장 집중된 신의주의 상황을 살펴보 기로 한다. 우선 러일전쟁과 京義鐵道 起工시기부터 신의주에는 일본인들이 건너 와 停車場 郵便局 海關 營林場과 같은 건설을 진행하였는데 신의주가 지리 적으로 압록강을 사이 두고 중국安東縣(現 丹東)과 대치하고 있어 이 시기부터 화교들의 이주가 점차 이어졌다. 1910년 이후부터는 신의주로 화교들의 이주가

196 본격적으로 이어지는바 이 시기 화교들의 이주상황을 <표5-16>을 참조하여 살 펴보기로 한다.106) <표5-16> 新義州 華僑人口 調査表 (1910~1923) 年度 戶口 戶數 (戶) ,129 1,158 1, 男 (名) --1,218 1,187 1,157 1,216 1,374 1,713 2,075 2,100 2,464 1,494 2,502 3,182 女 (名) 合計 (名) 備 考 ,241 增 498 1,158 2,376 增1, ,284 減1, ,180(1,269) 減 ,352 增 ,512 增 ,943 增 ,392 增 ,430 增 ,916 增 ,950(2,950) 減 ,958 增1, (13%) 3,641 增 683 (40%) (91%) (46%) ( 8%) (15%) (12%) (29%) (23%) (1.6%) (17%) (33%) (52%) (23%) 출처: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74쪽.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 이 시기 신의주에 거주하는 화교인구는 1914년 이후 부터 꾸준히 증가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특히 1923년에는 전에 비하여 683명 이 증가하여 23%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戶數는 크게 감소되어 802호로 기록되었다. 이는 1922년까지의 통계는 世帶數를 戶數로 계산하였고 1923년부 터 거주를 戶數로 계산한데 기인된다. 특히 신의주와 같이 화교노동자들이 집중 하여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1호 내에 많은 세대가 있는 원인으로 거주수와 세대 수가 큰 차이로 나타난다.107) 1923년에 조사된 신의주에 거주한 화교여성은 459명으로 13%를 차지하고 있 어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화교여성노동자의 이주가 早期에 시작되었음을 설명한 다.108) 그러나 신의주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것으로 같은 시기 인천이나 서울과 같이 규모가 큰 貿易商은 없었으며 상업에 종사한 華商들은 대체적으로 小賣業者로서 日用雜貨商이었다. 신의주 화교노동자들의 업종은 대체적으로 職工勞動者 工場勞動者 雜役人 106)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74쪽. 107) 위의 책, 174쪽. 108) 위의 책, 177쪽

197 車 로 나눌 수 있는데, 1923년도를 기준으로 이들 화교노동자들이 받은 임금 을 살펴보면 大工이 0.90~1.50錢, 左官이 1.00~1.50錢, 煉瓦工이 0.90~1.50錢, 雜役人 이 0.60~0.80錢으로 화교노동자의 임금은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 비하 여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도 이들 화교 노동자들의 하루 생활비는 주로 食 費에 지출되는데, 1일 三食에 0.15~0.20錢을 지출하고 있었다.109) 다음으로 화교들의 지역별 분포상황을 府와 郡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 다.110) <표5-17> 平安北道 府郡別 華僑 分布狀況 (1929) 府郡名 新義州府 居 住 男 女 總人口 府郡名 居 住 1,843 4,831 1,497 6,328 鐵山郡 ,166 龍川郡 男 ,023 女 總人口 義州郡 ,369 龜城郡 朔州郡 泰川郡 昌城郡 雲山郡 碧潼郡 熙川郡 楚山郡 寧邊郡 渭原郡 博川郡 定州郡 宣川郡 江界郡 290 慈城郡 218 原昌郡 출처: 平安北道統計年報, (1933年度), 28쪽. 注: 전체 인구 13,940명 중, 남자는 10,716명이고 여자는 3,224명(23%)이다. 위 표는 1929년도 평안북도 내 화교들의 분포상황인데, 이를 다시 府와 郡으 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전체 13,940명 중, 新義州府의 6,328명을 제외하면 각 郡에 도합 7,612명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시기 화교들의 분포 상황은 주로 건설업이 집중된 市 府외에도 각 郡에도 평균적으로 분포되어 있 음을 설명하며 다른 한편 화교들이 한반도 각 지역이란 넓은 공간에 분포되었음 을 말해 준다. 마지막으로 1934년도 평안북도의 화교 업종별 인구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111) 109)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80쪽. 110) 平安北道統計年報, 1933, 28쪽. 111) 平安北道統計年報, 1936, 3쪽

198 <표5-18> 平 安 北 道 外 國 人 ( 華 僑 ) 業 種 別 人 數 (1934) 農 林 漁 業 商 業 公 務 其 他 無 職 및 業 戶 數 總 數 男 女 牧 畜 및 製 工 業 交 通 및 自 有 業 無 申 告 種 業 鹽 業 業 由 業 者 者 人 2,980 14,115 10,316 3,799 3, ,259 3,955 1,050 2, 數 출처: 平 安 北 道 統 計 年 報, 1936, 3쪽. 위 표는 1934년 평안북도의 업종별 화교분포상황이다. 즉 전체 외국인(화교) 戶 數 는 2,980이고, 인구는 14,115명이며 그 중, 남자는 10,316명이고 여자는 3,799명이다. 여자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27%이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상업 및 교통업에 종사하는 자가 가장 많아 3,955명이고 다음으로 農 林 牧 畜 業 에 3,515명이고, 공업에 3,259명으로 통계되었다. 그리고 기타 有 業 者 자에 2,115명 으로 나타났고 농업호수가 681호로 기록되어 평안북도인 경우 화교의 대부분이 상업이민보다 노동이민인 것으로 나타났다. 112) 112) 朝 鮮 總 督 府 編, 平 安 北 道 統 計 年 報, 1936, 3쪽

199 2. 中日戰爭 後 華僑經濟의 變化 1937년 中日戰爭의 勃發은 화교배척운동에 의한 충격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재 한화교들에게 또 다시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해에도 대폭적인 인구 유출 현상이 타나났는데, 이는 敵性國民 이란 신분 때문에 일본의 탄압을 크게 우려하 여 많은 화교들이 귀국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아래 <표5-19>와 같이 1942 년의 조사에 따르면 재한화교인구는 다시 큰 폭으로 증가되는 양상으로 나타났 다. 이는 중국국내의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피난으로 보여 지는바 한반도의 정 치상황이 상대적으로 중국국내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이 시기 화교들의 한반도 이주 혹은 再流入은 가족단위로 이루어졌는바 종래 계절 적 이민과 다르게 정착을 목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화교들의 분포상황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여전히 평안북도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나 1937년에 평안도와 함경도에 33,899명이 거주하고 있어 전체 화 교인구(41,909명)의 80.9%를 점하고 있으며113) 1942년에는 64,900명으로 전체 화교인구(82,661명)의 78.5%를 점하고 있다.114) 또 1942년을 기준으로 경기도 평안도 함경도 세 지역 화교들의 업종별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평안도와 함경 도의 화교노동자는 28,278명으로 전체 82,661명의 34%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전체 화교노동자수가 31,461명인데 반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에 28,278 명으로 89.9%를 점하고 있어 이 두 지역에 화교노동자들이 집중되었음을 말해 준다. <표5-19> 在韓華僑의 地域別 人口推移 ( ) 道 京 忠 忠 全 全 慶 慶 南 黃 平 別 畿 淸 北 淸 南 羅 北 羅 南 尙 北 尙 南 朝 鮮 海 安 南 道 道 道 道 道 道 道 計 道 道 人 1937年 3, % % % % % % % 6, % 1, % 2, % 口 1942年 8, % % 1, % 1, % % % % 12, % 3, % 7, % 113) 朝鮮總督府 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7, 9~19쪽. 114) 朝鮮總督府 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42, 15~25쪽 單位: 人 增 加 4, ,416 2,457 5,104 數 12.0% 0.3% 0.5% 1.3% 0.6% 0.6% 0.3% 15.7% 6.0% 12.5%

200 平 安 北 道 江 原 道 咸 鏡 南 道 咸 鏡 北 道 北 朝 鮮 計 合 計 19, % % 5, % 6, % 35, % 41, % 37, % 1, % 8, % 11, % 69, % 82, % 18, % % 2, % 5, % 34, % 40, % 출처: 朝鮮總督府 編, 朝鮮總督府年報, 1937, 9~19쪽 ; 同書, 1942, 15~25쪽. 다른 한편 위의 표를 통하여 京畿道 平安道 咸鏡道의 세 지역에 대한 화교 인구추이를 1937년과 1942년의 화교인구 增減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전체적으로 한국과 북한을 비교하면 1937년 중일전쟁 후, 다시 한반도로 再流入한 화교, 혹은 새로 이주한 화교를 포함하여 북한지역의 증가수가 전체 증 가수의 약 84%를 점하는데 반하여 한국인 경우 15%남짓한 증가율을 보이고 있 다. 이를 다시 지역별로 살펴보면 평안북도가 44%의 증가율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양상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평안북도가 중국의 隣接地帶라는 지리적조건 외, 이 지역의 산업구조 정책적 요소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전반기에 거쳐 일본은 조선을 중국침략의 병참지기로 만들기 위하여 북부지방의 개발에 주력하였는바 예컨대 평안북도의 水豊땜건설은 1937 년부터 1944년까지 8년간에 거쳐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북부지역에 대한 개발 은 필연적으로 노동력의 수요를 증대시켰을 것이며 滿洲로부터 다수의 노동력이 유입하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만보산사건 전후, 재한 화교사회는 앞에서 언급한바 인구 화교사회구성 에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히 경제면에서 뚜렷하게 나타 나고 있는데, 우선 1930년의 白米豊作으로 白米가격폭락과 함께 구매력의 저하 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세계경제의 불경기와 더불어 한반도에는 실업자 가 급증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면서 한국인의 일본 혹은 滿洲이주도 증가하였다. 반면 1931년 봄부터 山東烟台로부터 인천으로 3일에 한번씩 왕래하는 윤선에 山東노동이민이 1,500여 명씩 입국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 봄부터 6월까지 무 려 3,4만명의 중국인노동이민이 인천으로 입국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함흥 진남 포와 신의주로 이동하여 자유노동업종 혹은 야채재배에 종사하였다. 이는 또다시 조선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한 요소로 작용하여 언론과 사회 각 단체는 중국인 노 동이민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마디로 이 시 기는 중국인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문제로 크게 우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한반도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단면으로 말해주고 있다.115) 115) 中央日報 1931년 7월 7일자, 朝鮮華僑的商工業之現狀

201 재한화교들의 어려운 처지는 중국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되었는바 중국 언 론은 이 시기 화교들의 상업에 주목하여 설명하면서 특히 조선의 인삼수출입 상 황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朝鮮專賣局의 발표에 따르면 1930년 12월 仁川海關에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紅蔘은 42,989(斤)인데 이를 円으로 환산하면 1,696,800円이다. 白蔘은 근근히 200(斤)으로 그 가격은 800円 정도이다. 조선에서 다년간 인삼무역에 종사 해온 華商이 전하는 소식 에 따르면 조선의 홍삼은 특별히 중국 南方人들이 선호하여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 다. 그러므로 조선과 일본의 官商들은 중국과의 홍삼무역에서 數百萬円의 이익을 창출 하고 있다. 현재 한국화교들의 상업은 주로 중국의 夏布 약재를 취급하는 정도이며 음 식업과 이발업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외, 다른 품목은 日商 판매상을 위 한 絲布와 잡화류이다. 중국의 비단은 해관세가 加重하여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116) 라고 보도하면서 이 시기 화교들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시기 인천항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천항의 한 중 무역은 1930년에 수출입실적이 1,294萬円이었는데, 1932년에는 306萬円으로 격감하였다.117) 이 에 대하여 조선총독부는 그 원인을 조선과 중국인 사이의 충돌사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조선 내 華商의 閉店 혹은 商業網이 축소되었다고 지적하고 있 다.118) 특히 중국으로부터 麻布수입이 감소되는 상황에 비추어 이 시기를 계기로 중국의 麻布수입을 제지하고 조선에서 自給自足할 방법을 강구하자119)고 말하여 견직물수입 뿐만 아니라 綿布類에 대해서도 關稅를 높여 재한화교경제를 철저히 봉쇄하려는 조선총독부당국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42년에 이르면 한반도의 화교인구는 대체적으로 안정추세로 전개되는 데, 이 시기 화교들의 집중지역인 경기도 평안도 함경도를 대상으로 화교들의 직업별 분포상황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20) <표5-20> 京畿道 平安道 咸鏡道 華僑職業別 人口分布 (1942) 職 種 農林水産業 鑛工業 京 畿 道 平 安 道 % 11, % 1, % 13, % 咸 鏡 道 全朝鮮地域 7, % 21, % 2, % 18, % 116) 中央日報 1931년 7월 7일자, 朝鮮華僑 商工業之現狀 117) 仁川府史, 1000쪽. 118) 위의 책, 996쪽. 119) 위의 책, 964쪽. 120) 朝鮮總督府 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42, 16~35쪽

202 商業 交通業 5, % 10, % 6, % 27, % 公務自由業 % % % 1, % 其他 % 8, % 3, % 13, % 無職業 % % % % 合計 8, % 45, % 19, % 83, % 華僑人口 8,548 45,082 19,818 82,661 출처: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42, 16~35쪽. 위 표는 1942년도 한반도 외국인에 대한 통계인데, 전체 한반도 외국인 중, 화교가 99.4%를 차지하고 있어 위 통계를 참고로 이 시기 화교들의 지역별 업 종별 인구분포를 대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바 평안도 에 경기도 보다 약 5배, 함경도 보다 약 2배의 화교인구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鑛工業과 其他(炭鑛 鑛山 工場勞動者 土木建築)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이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전체 화교의 70%를 차지하고 있어 鑛工業과 其他 두 업종은 평안도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상업과 교통업은 개항 초기부터 인천과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1942년도 경기도는 상업중심지로 나타났는바 그러므로 전체 화교인구의 66%가 상업에 종사한 것으 로 기록되었다. 중일전쟁이후 화교경제는 二重三重으로 사실상 저조기에 접어들었다. 대부분 무역상은 閉店되고 음식점 몇 곳만 지탱해 가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945년의 해방으로 화교경제는 다시 활성화될 기회를 맞았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정치 적으로 독립하였지만 이 시기 경제는 자체의 취약성은 물론 남북분단과 6.25 전 쟁으로 무질서와 황폐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자본 기술 등의 부족과 천연자 원과 공업시설이 북한에 偏在한 요인으로 한국의 경제는 성장할 조건을 상실하 였으며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인구급증으로 더욱 어려워져 미국의 경제원조에 의거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경제구조는 계속 낙후하여 갔으며 따라서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輸入爲主의 무역이 진행되었다. 이는 다른 한편 화교들의 무역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美 軍政이 아직 조직적 통치와 외국인에 대한 규제정책을 진행하지 못한 상황이라 이 시기 한국시장은 화교들에게 억압자도, 경쟁자도 없는 독무대라 할 수 있었 다. 1948년에 이르러서도 경제기반의 취약성과 소비재부족 등 기초적 불균형 때문 에 무역은 계속 赤子를 면하지 못하여 심지어 수입이 수출의 10배를 초과하는 상황까지 초래하였다.121) 아래 표를 통하여 이 시기 수출입무역 상황을 고찰하기 121) 朴炳鎬, 韓國貿易論, 經文社, 1980, 23쪽

203 로 한다. <표5-21> 國別 解放初 輸出入比率 (1946~1960) 種 類 年 度 輸 美國 中國 日本 出 香港 其他 단위: % 輸 入 美國 中國 日本 香港 其他 출처: 韓國銀行, 經濟統計年報, 1955, 위 표와 같이 해방 후, 1946년부터 1960년까지 무역특징은 한마디로 무역정 책이 不在한 상황이므로 수입정책이 있었다 해도 피동적인 입장에서 수행되는 부득이한 통제정책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화교의 무역은 일제의 통제가 없고 아울러 한국의 무역기반이 취약하고 무역질서가 결핍한 등 점을 감안할 때,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위 표와 같이 1946년의 수출입무역에서 중국무역은 수출이 전체 81.4%를 점하 고 수입이 94.53%를 점하는 기록을 초래하였다. 1947년에도 對 중국 수출입무 역은 수출이 22.96%, 수입이 32.23%를 기록하고 있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8년 8월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산업의 건설과 경제 질서의 확립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의 對韓 원조를 활용한 자립경제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전력하였다. 이는 화교들의 상업에 크게 영향 주었을 것으로 분석되지만 1948년까지 재한화 교경제는 그 나마 유지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나타났다.122) <표5-22> 仁川 13個所 華僑 貿易商 輸出入 實績 (1948) 總額 輸出 輸入 輸 入 輸 出 總輸出入總額 華商輸出入總額 8,857,000,000 7,195,000,000 1,876,290,000 1,163,609,000 단위: 圓 比 率 21% 16% 출처: 韓國銀行調査部 編, 經濟年鑑, 1949, 60쪽. 위 표는 1948년도 인천 화교무역 실적에 대한 설명으로서 13개 화교業所의 122) 韓國銀行調査部 編, 經濟年鑑, 1949, 60쪽

204 위 표는 인천 13個所 貿易商이 진행한 실적인데 수입이 전체 수입 총액의 21%, 수출 총액의 16%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해방 전인 1944년과 비교하여 크게 확대된 것으로 해방 전의 4개 무역업소에 비하여 약 3배 남짓한 15개 업소로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교경제는 해방 후, 무역외에도 雜貨 飮食業 服裝店과 같은 업종을 취급하 면서 商家가 상당수 증가되었다. 이는 화교들의 상업 활동분야가 일시적이나마 확장되었음을 설명해 준다. 이 시기 화교경제의 활성화는 廣東 홍콩 등지 華商 들의 對韓무역 참여를 유발하였다.123) 한국은행의 조사통계에 따르면 對中무역에 있어서 화교자본과 한국 상인자본의 비율을 7:3이라고 기록하여 화교경제의 성 장을 설명해주고 있다.124)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직전까지 이어졌다. 화교경제는 對外貿易規程 125)의 발표와 過渡政府의 朝鮮換金銀行 126)의 창설, 그리고 무역업자의 免許와 수출입허가에 대한 商工部의 관리 등 제반 요인에 의 하여 무역업에 크게 영향 받았다. 또 한국정부는 1949년 11월에 新關稅法을 제 정하여 과거의 무계획적이었던 무역금융정책을 정비하였는데, 아울러 중국국내와 의 일체 활동의 단절 등 요인으로 화교무역은 완전히 무너지는 양상으로 변화하 였다. 특히 6.25 전쟁으로 화교경제는 약 30억원의 손해를 보았다. 1950년의 화 교무역은 수입액이 전체 수입액의 0.2%를 점하고 수출이 전체의 8.7%를 점하고 1946년 47년에 비하여 큰 대조를 이루며 나타났다.127) 이 시기 한국경제는 무역관련 법규나 행정제도가 정립되지 않아 혼란을 되풀 이 하는 상황이었고 외국 원조에 의해 지탱해온 국민경제의 운용은 수입에만 치 중하여 수출은 일부 민간인이 제한적으로 一次産品의 對外판매만을 유지하였는 바 그 실정은 극히 미미하였다. 한국의 가장 큰 수출품은 重石으로 전체 수출의 123) 華僑志編纂委員會 編, 華僑志-韓國, 海天印刷廠有限公司, 1958, 79쪽. 124) 위의 책, 77쪽. 125) 1946년 1월에 對外貿易規程 을 발표하였는데, 이 법령은 전문이 4개항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주로 南韓과 기타 지역간의 화물과 재산 등의 移動은 軍政長官 또는 그 指定機關의 허 가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했고 또 허가를 받지 않은 對外去來行爲는 금한다는 것이었 다. 이로 인하여 모든 대외무역은 軍政貿易과 官營貿易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朴弼秀, 朝鮮貿易論, 法文社, 1988, 14쪽). 126) 1947년에 朝鮮換金銀行 을 창설하여 환금경제를 간단히 함으로써 物物交換制에서 信託船積 制로 바뀌었고 1848년 8월에는 거래방식을 다시 L/A와 L/C 결제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년 한국정부는 조선환금은행이 실시하던 무역업자의 免許와 수출입허가에 관한 사항을 商工 部가 관정하도록 하였으며 1949년 11월에 신관세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950년에 과거의 무계획적이었던 무역금융정책을 정비하였다. ( 朴炳鎬, 앞의 책, 23쪽) 127) 華僑志, 83쪽

205 44%를 점하였다. 그리고 김, 生絲, 寒天, 鮮魚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128) 재한화교사회는 그 뒤, 시기별 한국정부의 외국인에 대한 규제정책과 중국국내 와의 장기간의 단절, 그리고 재한화교들의 미국 캐다나 등 지역으로 再 移住를 통하여 점점 쇠퇴해져갔다. 이와 같이 내적 외적 요인으로 화교들은 극히 어려 운 생활을 엮어가면서 오늘날 2만여 명 남짓한 矮小한 화교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재한화교들은 해외 타 지역이민과 마찬가지로 이국땅에서 생존 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강인한 민족혼으로 화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 중 양국민의 교류와 융화를 위해 공헌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금후 과제도 남긴다. 128) 朴弼秀, 앞의 책, 14쪽

206 第6章 結 論 한국 화교사회는 19세기말 壬午軍亂부터 1937년 中日戰爭을 전후하여 시기별 淸國의 對 조선정책과 조선에서 청국의 정치적 지위, 그리고 한 중 일의 외교 관계에 따라 구성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본 논문은 이를 전제로 중국 국내 南方 商人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초기 화교사회가 서서히 北方商人이 주류를 이루는 화교사회로 이행하는 계기를 포착하였다. 이에 따라 근대 한국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고찰하였으며 아울러 오늘날 한국화교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 였다. 한국화교사회는 山東人이 90%이상을 점유하는 특성으로 해외화교사회에 각인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근대 초기부터 형성된 것은 아니다. 淸國은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실시하 기 시작하였으며 임오군란을 평정하는 목적으로 廣東水師提督 吳長慶을 統帥로 하는 淸軍 3,000여 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있어서 이들 淸軍의 駐屯에 필요한 물자공급 담당역할로 40여 명의 軍役商人을 隨行시켰다. 軍役상인의 등장은 근대 한반도에 나타난 최초의 청국 상인집단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며 이들은 1885년 淸 日天津條約에 따른 양국 군의 철퇴와 더불어 약 3 년간의 무역활동을 접고 귀국하였다. 그 동안 軍役상인은 淸軍에게 물품을 공급 하는 외, 조선인을 상대로 무역 활동을 진행하였는바 이로부터 종래 淸國과 진행 되었던 국경지대에 있어서 互市무역 외,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근대 조 청 무역 이 시작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종래 연구 성과에서 거론되지 않은 軍役상인의 출신지를 이 시 기 李鴻章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는 招商局의 설립배경 招商局 구성요인에 대한 검토와 吳長慶제독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 외, 임오군란 시 淸軍 의 파병과 관련하여 동원된 선박회사와 이 시기 중국국내의 상업중심지역과 관 련하여 고찰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들 40여명의 軍役상인의 출신지 를 중국 廣東省과 浙江省을 중심으로 하는 南方人으로 추정하였다. 이 같은 작업은 인천개항초기 화교사회의 형성과 구성에 대한 설명을 뒷받침 하였는바 특히 1883년 인천청국조계지가 설정되기 전에 인천에서 활동한 33명 의 淸商 중, 29명(88%)이 廣東商人과 浙江商人을 중심으로 하는 南方商人으로 집계된 원인을 이들 軍役상인의 역할로 분석하였다. 실지로 해외이민의 거주지에 대한 분포상황을 검토해보면 강제이주와 계약노동이민의 이주를 제외하면 대체 적으로 지정학적 지배를 가장 크게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883년 인천

207 으로 중국 南方商人의 이주는 전자에도, 후자에도 속하지 않는바 다시 말하면 특 수한 사례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아울러 1883년과 1884년이 한반도에서 무역 업에 종사한 軍役상인에게 있어서 가장 활발한 활동시기라고 판단하였을 때, 인 천화교사회의 구성은 이들 軍役상인의 활동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 다. 초기 인천화교사회가 형성된 시기부터 청일전쟁 전까지 중국 남방상인의 상 업 활동은 그 뒤 청상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는 이들 軍役상인을 한국화교사회의 모태로 설정하였다. 1882년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 1884년 仁川口華商地界章程의 체결, 그리고 인천 淸國조계지의 설정은 이 시기 淸商의 한반도이주를 유도하는 직접적인 계 기가 되었다. 아울러 吳長慶과 陳樹棠의 초기 활동과 그 뒤, 袁世凱의 부임은 결 과적으로 淸商의 상세와 상업망의 확장을 도모하였으며 그러므로 청상의 경제성 장은 청일전쟁 직전에 이미 日商을 견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청국은 인천에서 청국조계지의 설정과 더불어 1884년 중반부터 청상의 영업허 가 비용을 면제하는 등 우대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중국 국내 유력한 상인의 인천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이는 다른 한편 인천화교사회의 변화를 추진 하였는바 南方상인을 중심으로 하던 화교사회로부터 서서히 廣東상인과 浙江상 인의 퇴장과 더불어 江蘇 江西 湖南 湖北 등 각 지역의 상인과 山東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北方상인이 동시에 등장하는 화교사회로 이행하였다. 이와 같은 양상은 1880년대 중반부터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따라서 종전과 달리 한반도 내 에서 중국 남방으로부터 북방에 이르는 각 지역 상인들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이 시기 淸商들은 청국의 정치적 우세와 청국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활발한 상업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는바 한마디로 淸商의 전성시대 라 할 수 있 다. 청상은 이와 같이 내적 외적 유리한 조건을 기반으로 일부 무역 업종을 독점 할 수 있었는데, 특히 綿布類는 청상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주된 수입품목으 로서 인천개항이래 꾸준히 주종을 이루며 각광을 받았다. 이와 같은 양상은 청일 전쟁 전까지 유지되어 청상에게 많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 주었다. 綿布類 중에 서도 金巾(廣木)수입이 가장 많았는데, 청상은 廣木을 비롯한 영국제품을 上海를 경유하여 인천으로 수입하였다. 특히 이 루트는 上海 외, 長崎를 한번 더 경유하 여 인천으로 수입하는 日商의 중계무역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우세하였다. 청 상은 또 인천으로부터 紅蔘 金 牛皮 海産物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는데, 한반 도의 홍삼은 중국 南方人이 선호하는 高價品이었다. 이는 다른 한편 인천항에서 홍삼 密輸出의 盛行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청상은 대체로 織物輸入, 舶來品雜貨類, 織物小賣, 雜貨小賣, 皮革, 毛皮, 客棧(旅館, 飮食店), 洋 商代理店, 朝鮮土産物輸出 등 업종을 취급하면서 상업 활동을 진행하였다

208 한마디로 초기 인천화교사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화교사회는 청일전쟁 전까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바 이는 淸國정부의 對 조선정책과 이에 따른 청 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기인된다. 그 외, 초기 軍役상인의 한반도 무역시장 에 대한 개척과 청상의 전통적인 상업경영방식 및 금융거래로 상업분야에서 독 점영역을 고수하면서 우위의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국의 패배로 조선에서 청국의 정치적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대부분의 유력상인은 귀국하였다. 청일전쟁후의 재한 화교사 회는 종전과 다른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우선 화교들은 법적보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敵性國民으로 전락되어 사회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었 다. 그 뒤, 1905년의 러일전쟁과 1910년의 한일합병 시기를 경과하면서 日商과 조선총독부의 노골적인 제한 정책을 받아야 했으며 따라서 청상의 경제는 商勢 회복을 위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미한 정도에 이르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국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청국조계지의 철폐로 재한화교사회는 완전히 저조기에 접어들었다. 이와 같이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한 전후 인천화교사회의 대조적인 변화는 다 른 한편 요코하마 화교사회와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인천과 요코하마는 서구열강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더불어 불평등조약 을 체결하면서 개항된 근대 개항도시이다. 양 도시는 국내 중요한 항구도시이며 정치 경제적으로 주요한 지위에 처해있었다. 양 도시는 개항과 동시에 외국인 조계지를 형성하였으며 근대초기 화교들이 최초로 도착한 지역이었고 화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바 화교들의 根據地 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양 도시는 다른 한편 중국의 對 조선 對日의 외교정책에 따라, 그리고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한 화교들의 출신지와 신분차이에 따라 화교사회 구성뿐만 아니라 화교들의 법적지위 취급업종 등 면에서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청일전쟁을 전후한 양 도시의 화교사회변화는 상호 공통점을 전제로 차이점을 보이면서 독특한 특 성을 구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인천화교사회의 형성과정을 요코하마 화교사회와 비교하는 방 법으로 고찰하였다. 이와 같은 작업은 다른 한편 요코하마 화교사회에 대한 이해 와 아울러 일본화교사회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 각한다. 특히 인천과 요코하마의 근대 개항도시의 공통성을 전제로 相異한 화교 사회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화교사회 뿐만 아니라 근대 개항도시 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따라서 필요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 겠다.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근대 條約制度에 의하여 나타난 買辦상인을 중심으로 화 교사회를 구성하였다. 이 시기 買辦상인은 歐美商社의 仲介人으로서 歐美商社에

209 고용된 신분이지만 이미 홍콩과 중국각지 개항장에서 歐美商人과의 장기간 접촉 왕래를 통하여 무역경업을 쌓았으며 폭 넓은 상업망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요 코하마개항초기 이 지역의 수출입무역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 코하나 화교들은 未條約締結國의 국민으로 영사재판권을 향유하지 못했으며 그 러므로 인천화교사회와 비교하여 법적인 면에서 상반되는 위치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일본당국의 籍牌規則에 따른 영업제한 內地療養 및 유람금지 등 제한을 받고 있었다.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다른 한편 廣東商人과 福建商人, 그리고 浙江商人과 江蘇 江西상인들로 구성되었는바 한마디로 중국 동남연해 및 남방지역의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지정학적 요인에 기인된 것으로 해외화교사회의 보편적인 범주 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특히 요코하마 화교들은 歐美商社와 歐美商人을 상대로 상업을 진행하였으므로 이와 관련된 업종을 선택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 는바 1860~70년대에 이미 여성전문 洋裝店과 피아노수리와 같은 특수업종에 종 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 후, 요코하마 화교사회는 큰 변화를 일으켰는바 우선 외국인조계지의 폐지와 더불어 內地雜居 제도에 대한 실행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하였다. 그 외, 일본인에 의하여 상업 영역에서 밀려나 서비스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겪는 등 인천화교사회와 비교하여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코하마 화교사회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정부의 해외노동이민에 대한 입국 제한정책으로 대체적으로 상인중심의 화교사회를 형성하였다는 점인데. 이는 다 른 한편 1920년대 중반부터 山東노동이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화교사회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국화교사회에서 1920~30년대는 산동노동이민(山東苦力)의 이주가 급증하는 시기로 자리매김 되는바 이는 중국국내실정과 한반도의 상황에 의한 내적 외적 요인에 기인한다. 특히 1920년대에 들어와 山東지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자 연재해와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한반도의 식민지건설은 山東人의 한반도이주를 가속화하였는바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산동노동이민이 長蛇陣을 이루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특별히 이 시기 山東移民의 이주원인과 이주과정, 그 리고 한반도에 정착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작업은 종래 한국화교사회 뿐 만 아니라 해외화교사에서 소외되어온 노동이민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에서 중요 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인 山東人의 90% 점유율 은 실지로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는바 우선 산동노동이민의 이주에 대한 연구로부터 착수하여 산동인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작업은 다른 한편 오늘날 한국화교사회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

210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산동노동이민의 이주는 다른 한편 조선노동시장을 위협하고 조선노동 자와의 갈등관계를 초래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관계를 고찰하기 위하 여 산동노동조직(苦力幇)의 성격을 고찰하였다. 우선 산동노동이민의 특성과 더 불어 조선노동시장에 위협 줄 수 있었던 원인을 이 시기 지역별 한 중 일 노 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시간 등 몇 가지 측면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시기 형 성된 화교배척심리와 1931년의 만보산사건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1930~40년대부터 한국화교사회는 종전과 다른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 부 분에서는 萬寶山事件과 중일전쟁 후, 재한화교사회의 인구변화 즉 인구 大流出과 再流入하는 양상을 고찰하면서 이 시기 화교인구의 분포지역과 더불어 살펴보았 다. 특히 화교인구가 가장 많이 집중된 평안북도지역의 인구분포와 지역특성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서 조선총독부의 화교노동이민에 대한 대응조치를 고찰하였다. 다시 말하면 조선총독부의 대륙침략정책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병참 기지로 건설하는 정책과 이에 따른 화교노동이민의 유치사업, 그리고 화교인구의 집중현상간의 상관관계를 고찰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화교경제는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46년과 1947년에 이르러 한반도의 전체 수출입무역의 80%를 점하는 好景氣로 맞이하 였다. 그러나 그 뒤, 한국정부의 외국인에 대한 일련의 규제정책과 1949년 중화 인민공화국 성립이후, 중국 국내와의 교류가 단절되면서 화교경제는 다시 불황을 맞으며 저조기로 접어들었다. 한마디로 한국화교사회는 1883년 인천화교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초기 남방상인을 중심으로 하던 화교사회로부터 서서히 북방인이 주류를 이루는 화교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은 청일전쟁전의 화교들 의 전성시대 로부터 청일전쟁후의 敵性國民으로 전락되면서 또 러일전쟁과 한일 합병,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을 경과하면서 대체적으로 종전과 같은 상세회복을 이루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 동안 한국화교사회의 형성과정에 나타난 華僑經濟史는 對中國무역을 근간 으로, 즉 화교경제네트워크를 통한 경제 성장이었다. 이는 인적인 화교네트워크 를 중심으로 화교권 국가와의 경제 교류가 절실히 필요함을 설명한다. 한편 화교 경제네트워크의 구성은 반드시 한국화교들의 교량역할을 필요로 하고 있다. 2005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世界華商대회는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근대 초기와 더불어 재한화교사의 살아있는 역사로 각인되었으며 그런 차원에서 해외화교사회, 특히 동아시아화교사회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요코하마화교사회와의 교류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아울

211 러 오늘날 한 중 일 문화교류와 무역활성화는 인천항과 인천지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검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한 중 일 3국간의 국제교류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작용으로 자리매김 된다. 근 대 개항도시로서 인천은 세계화시대와 더불어 경제교류 뿐만 아니라 문화교류를 위한 上海 요코하마 등 근대개항도시와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교류가 절실히 필 요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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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박은경, 한국 화교의 種族性, 한국연구원, 姜在彦, 朝鮮近代史, 東京平凡社, 陳碧笙 陳毅明 編, 陳嘉慶年譜, 福建人民出版社, 金東仁, 金東仁全集 1, 朝鮮日報社出版, 松本一南, 華僑商法の秘傳, 三笠書房, 楊國貞, 陳嘉慶, 人民出版社, 郝延平, 19世紀的中國買辦, 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陳昌福, 日本華僑硏究, 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橫浜居留地硏究會 編, 橫浜居留地の諸相, 橫浜開港資e館發行, 唐振常 主編, 上海史, 上海人民出版社, 周軍 楊雨潤 主編, 李鴻章與中國近代化, 合肥 : 安徽人民出版社, 滨下武志, 山西票号资e,东京大学东洋文化研究所, 尹炳奭, 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一潮閣, 沈殿忠, 中日交流史中的華僑, 遼寧人民出版社, 鄧蜀生, 美國與移民, 重慶出版社, 苑書義, 李鴻章傳, 北京 : 人民出版社, 游仲勳, 東南アジアの華僑, 東京 : アジア經濟硏究所, 蔣豊 譯, 東亞的近代, 中國社會科學出版社, 龔書鐸 方攸翰, 中國近代史綱, 北京大學出版社, 原不二, 東南アジア華僑と中國: 中國歸屬意識から華人意識へ, 東京 : アジ ア經濟硏究所, 橫浜と上海 共同編輯委員會編, 近代都市形成史比較硏究, 橫浜開港資e館, 이문봉, (2000년대 大中華 경제권의 선도주자)동남의 화교기업, 서울 : 길벗, 馬汝珩 馬大正 編, 淸代的邊疆政策, 中國社會科學出版社, 千田稔 宇野隆 共編, 東アジアと 半島空間 -山東半島と遼東半島, 思文閣出版, 斯波義信, 華僑, 東京 : 岩波書店, 朴文一, 中國 朝鮮族史 硏究, 연대학출판사 서울대학출판부, 이재유 김영태, 동남아 화교자본의 경영특성과 이들과의 제휴를 중국시장 진 출방안의 모색, 서울 : 國際貿易經營硏究院, 王如繪, 近代中日關係與朝鮮問題, 人民出版社, 강만길, 한국 상업의 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박병석, 중국 상인 문화, 敎文社,

218 李長 傅, 南洋 史地與 華僑 華人 硏究-李 長傅 先生 論文選 集,曁南 大學 出版 社, 杜書溥 編, 仁川華僑敎育百年史, 臺灣, 이덕훈, 화교경제의 생성과 발전, 대전 : 한남대학교출판부, 金衡鍾, 淸末 新政期의 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하오엔핑 지음 이화승 옮김,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 매판, 씨앗을 뿌리는 사람, 왕건우 저, 윤필주 역, 화교, 다락원, 조재곤, 보부상-근대 격변기의 상인, 서울대학교출판부, 論 文 權錫奉, 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對하여 歷史學報 第21輯, 金鐘圓,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에 대하여 歷史學報 第32輯, 歷史學會, 高承濟, 間島移民史의 社會經濟的 分析 白山學報 5, 白山學會, 朴永錫, 萬寶山事件의 歷史的 背景 白山學報 6, 白山學會, , 萬寶山事件의 經緯 白山學報 7, 白山學會, 金鐘圓, 淸의 對朝鮮 積極策의 機緣 李海南기념사학논총, 高承濟, 화교 대만이민의 사회사적 연구 백산학보, 白山學會, 權錫奉, 壬午軍亂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盧英澤, 開港地 仁川의 淸國人 跋扈 畿甸文化硏究 6, 仁川敎育大學校 畿甸 文化硏究所, 金正起, 朝鮮政府의 淸借款導入 韓國史學 3, 金鐘圓, 初朝朝淸關係에 대한 -考察 歷史學報 71, 金鐘圓, 朝鮮後期對淸貿易에 대한 -考察 震檀學報 43, 박은경, 이효재, 한국 화교 및 화교이동에 관한 연구 논총 제37집, 梨花女 大 韓國文化硏究院, 孔令仁, 十九世紀末山東的社會經濟與義和團運動 齊G書社編輯部編, 義和團 運動史討論文集, 齊G書社, 李炳天, 朝鮮後期商品流通과 旅客主人 經濟史學 6, 1983., 居留地貿易機構와 開港場客主 經濟史學 7, 1984., 開港期 外國商人의 內地浸透 經濟史學 9,

219 李陽子, 淸의 對朝鮮經濟政策과 袁世凱 釜山史學 第8輯, 釜山史學會, 李榮昊, 19世紀 浦口收稅의 類型과 浦口流通의 性格 韓國學報 41, 伊藤泉美, 橫浜居留地華僑の職業 橫浜居留地の諸相, 橫浜開港資e館發行, 1989., 橫浜居留地の中國人商館 橫浜居留地の諸相, 橫浜開港資e館發行, 羅愛子, 開港期流通構造硏究의 現況 歷史와 現實 3, 김재순, 노일전쟁 직후 일제의 화폐금융정채과 조선상인층의 대응 한국사연 구 69, 陳昌福(李二敏譯), 中國における華僑問題硏究の歷史と現狀 中國硏究月報 羅愛子, 開港後期外國商人의 浸透와 朝鮮商人의 對應 農民戰爭硏究 1, 伊藤泉美, 橫浜華僑社會形成 橫浜開港資e館紀要, 第9號, 白曉東, 略論華僑華人問題的法學角度硏究 華僑華人歷史硏究 1, 金基赫, 江華島條約의 歷史的 背景과 國際的 環境 韓國史硏究論選 34, 金源模, 슈펠트 李鴻章의 朝鮮開港 交涉始末(1882) 韓國史硏究論選 34, 金衡鍾, 淸末 地方自治의 實行과 紳士層의 動向-江蘇省에서의 自治準備過程 - 東洋史學硏究 第63輯, 全寅永, 中日甲午戰爭 前後 中國의 朝鮮認識 變化 國史館論叢, 國史編纂 委員會, 90, 孙玉梅, 朝鲜华侨在抗美援朝战争中的贡献 华侨华人历史研究, 2000年4期. 全遇容, 종로와 본정 : 식민도시 경성의 두 얼굴 역사와 현실 40, 曲晓范 刘树真, 当代朝鲜华侨的归国定居及其安置史略 华侨华人历史研究, 2000年4期. 이현주, 개항기 仁川의 華僑社會와 하와이 移民-근대성에 가려진 식민성, 인 천의 두 얼굴- 2001인천 再 발견 상, 인천발전연구원, 時遠主 編, 海外華人硏究論集, 中國社會科學出版社, 문은정 20세기 전반기 馬山地域 華僑의 이주와 정착 大丘史学 68輯, 대구사학회, 2002., 解放以後 馬山 華僑社會의 人口 変化와 그 特徴 가라문화 제16집

220 濱下武志 著, 艾菊紅 譯, 20世紀初上海 神戶 仁川的海外華人金融网絡 海 外華人硏究論集, 中國社會科學出版社, 전우용, 한국 근대의 華僑 문제 韓國史學報 15, 松田利彦, 近代朝鮮における山東出身華僑-植民地期における朝鮮總督府の對政 策と朝鮮人の華僑への反応を中心にー 東あじあと 半島空間 -山 東半島と遼東半島-, 思文閣出版, 學位論文 강덕지, 韓國 華僑의 經濟에 대한 考察, 成均館大學 碩士學位論文, 이상준, 華僑 資本의 基本 性格에 대한 硏究, 高麗대학교 碩士學位論文, 담영성, 朝鮮 末期의 淸國商人에 대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劉順達, 韓国華僑教育之研究, 中国文化学院民族与華僑研究所, 碩士論文, 台北, 오두환, 한국개항기의 화폐제도 및 유통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담건평, 재한 화교의 사단조직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李炳天, 開港期 外國商人의 侵入과 韓國商人의 對應,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 학과 박사학위논문, 金龍河, 東あじあにおける近代港灣都市の成立と展開に關する比較的硏究 京都 대학 박사학위논문, 李日杰, 間島協定에 關한 硏究, 成均館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朴永西, 1910~20년대 間島韓人에 대한 中國의 政策과 民會, 서울대학교대학 원 碩士學位論文, 黃敏湖, 1920年代 在滿 韓人社會의 民族運動 硏究, 崇實大學校 大學院 博士 學位論文, 永井美由紀, 화교정체성 형성에 관한 연구: 한국과 일본의 화교사회 비교를 중 심으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21 ABSTRACT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Chinese Communities in Modern Korea Li Yu Lian There are more than 90% of Shandong( 山 東 ) people in International Chinese Society in Korea. However, this kind of construction did not form from early Chinese Society. In 1882 during the insurrection of the army Imogunlan( 壬 午 軍 亂 ), military merchants went to Korea with Guangdong( 廣 東 ) admiral detective wuchangqing( 吳 長 慶 ) are considered to have formed the southern merchant in local. Also they originated Korean Chinese Society and transmitted information of commercial situation into Korea and leaded Chinese trading activities. Especially, in 1883 Incheon Chinese Society was organized of Guangdong( 廣 東 ) and zhejiang( 浙 江 ) and this kind of situation changed a lot during Treaty of commerce between Korea and China in 1882 and renchuankouhuashangdijiezhangcheng( 仁 川 口 華 商 地 界 章 程 ) and the creation of Chinese Settlement in Incheon, when Chinese immigration to Korea had been increased so fast. Especially, in Chosun Chinese political situation and the positive attitude toward the support policy for Chinese merchants' led many merchants in China to move into Korea. Thus, at the main harbors Incheon( 仁 川 ), Pusan( 釜 山 ), Wonsan( 元 山 ) there were active commercial activities continuously by those Chinese. In result, the sudden increase of merchants in Korean Chinese society Northern merchants become the main formation of it. In 1894, the cause of China's lost of China-Japan war( 淸 日 戰 爭 ) most of the powerful Chinese merchants had to go home. Also, as Russia Japan war in 1905 and Korea Japan's joint in 1910 passed, Chinese society started form by moving refugees who were getting away from hard life style. Sandongsheng( 山 東 省 ) in China had been non-stop nature disaster in

222 1920. That's why farmer of Sandong moved themselves into Korea and it increased a lot. This time they called themselves as 'Coolie'. Coolie entered mainly through Incheon harbor but Chosun labor market also had hard time so their move into Korea wasn't so welcome either. It caused the conflicts between Chosun laborers and Chinese laborers. Truly, Chinese Society in Korea from this period became mainly laboring immigration society. In 1927, the event of quzhu to Korean laborers in manzhou( 滿 州 ) caused the anger of Korean through the Press. This came out as the boycott of Chinese in Korea again. As a result, this situation caused so many people to die and lose their properties with the start of wanbaoshan's( 萬 寶 山 ) event in 1931 Korean Chinese society after china Japan war in 1937 appeared once again the situation in population's out flow. However, this long period of war made Chinese to re-immigrate into Korea. During this period they were related to wars of their home country. Also these Chinese in Korea experienced their immigrate life in Korea as the hostile nation people. Thus, those Chinese tried so hard but they could not accomplish of economics to grow. However, Korean Chinese did not lose their Chinese culture and their identity. Especially, they passed the Northern Culture into Korea, even though they lived as minority race. They leaded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n and Chinese

223 <부록 1> 同 順 泰 號 主 人 譚 以 時 (1)

224 <부록 2> 同 順 泰 號 主 人 譚 以 時 (2)

225 <부록 3> 同 順 泰 號 主 人 譚 以 時 (3)

226 <부록 4> 釜山商民 및 往來商人 姓名 ( ~12) 姓 名 周壽臣 鄭 明 能裕廷 沈友棠 張少仁 郭慶祥 合 計 出 身 地 廣東人 廣東人 江西人 江蘇人 福建人 山東人 姓 名 鄭瑞芬 李志仁 余成品 屈成申 葉頌林 韓芝生 出 身 地 廣東人 廣東人 江西人 江蘇人 福建人 江蘇人 姓 名 鄭 耀 方學賢 韓子祥 張九泉 王道求 出 身 地 廣東人 江西人 江蘇人 福建人 福建人 17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54~2055쪽. <부록 5> 琿春 仁川 元山을 거쳐 釜山港에 도착한 華商 (1885) 姓 名 章瑞卿 童祥雲 劉鑑民 葉 保 郭日輝 李及生 冷殿臣 聶 基 樂元瑞 吳 九 郭金才 鄧柏山 出 身 地 浙江人 浙江人 廣東人 浙江人 廣東人 直隸人 山東人 廣東人 山東人 南京人 廣東人 廣東人 姓 名 陳日升 陳 任 歐陽照 陳 生 關鴻琚 朱福臣 陳冠騰 楊 福 關 福 張瑞建 林小波 鄭汝庚 出 身 地 浙江人 廣東人 福建人 浙江人 廣東人 山東人 廣東人 廣東人 山東人 天津人 廣東人 廣東人 姓 名 馮祥和 何允超 葉鴻麟 陳保發 蘇孟增 高雲王 聶省三 梁燿坦 張子祥 楊釗章 吳 福 王瑞堂 出 身 地 浙江人 廣東人 江蘇人 浙江人 直隸人 山東人 廣東人 廣東人 山東人 廣東人 浙江人 廣東人 陳碧山 廣東人 溫子輝 廣東人 張崧山 浙江人 李聚豊 直隸人 王俊 浙江人 葉臣豪 浙江人 陳德濟 浙江人 周春裕 浙江人 梁和尙 浙江人 周照廷 廣東人 李春山 湖南人 凌釣鰲 江西人 簡藻族 黃鑑波 黃 潮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關善甫 崔連陞 遲竹林 廣東人 山東人 山東人 關植生 郞學堯 孫福係 廣東人 山東人 山東人

227 張 治 吉林人 李顯初 廣東人 簡子江 廣東人 費玉林 山東人 柴惟鰲 山東人 藍 僯 山東人 王福生 鎭江人 李鏡泉 廣東人 黃光華 廣東人 陳 添 梁 金 王乃鑄 王梅記 李金水 泰和久 徐光明 郭景昌 合 計 廣東人 廣東人 浙江人 浙江人 浙江人 浙江人 山東人 山東人 黃 四 陳 良 張昌遠 張彩記 蔡和生 朱仁卿 王作甘 王 湖 廣東人 廣東人 浙江人 浙江人 浙江人 浙江人 山東人 山東人 譚鏡山 保渭臣 湯酉生 姜廷譜 麥 盤 張成玉 于顯義 李 燿 廣東人 廣東人 浙江人 浙江人 浙江人 山東人 山東人 廣東人 90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55~2060쪽. 注: 浙江人 25名, 廣東人 35名, 山東人 19名. <부록 6> 元山港에 鋪를 설치한 華商 姓名 및 出身地 (1885) 姓 名 黃鑑波 周成福 陳子甫 程玉懷 謝植卿 合 計 出 身 地 廣東人 浙江人 廣東人 安徽人 廣東人 姓 名 蕭萬勝 馮器之 李顯初 蔡 明 出 身 地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湖北人 姓 名 趙杰 馮署廷 郭杏村 李麟閣 出 身 地 江西人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13名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60~2061쪽

228 <부록 7> 元山港을 거점으로 往來販運行商 華商姓名 및 出身地 (1885) 姓 名 周慶源 曹瑞元 王啓庚 何宗漢 王瑞橋 蘇孟增 高凌旺 聶省三 鄧柏山 岑碧山 劉德仁 孟光法 李其閣 梁苑圃 鄭 祿 孫雲璈 孫顯廷 劉林海 馮拔元 陳理卿 蔡祥林 陳南舟 葛根楊 鳥人華 泰哲明 葉 晟 合 計 出 身 地 江蘇人 浙江人 江蘇人 江蘇人 江蘇人 山東人 山東人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湖北人 山東人 廣東人 福建人 廣東人 山東人 山東人 江蘇人 廣東人 廣東人 山東人 廣東人 四川人 浙江人 浙江人 山東人 姓 名 邵大生 吳永生 陳嵩山 張昌全 費來順 冷殿臣 李集生 聶 基 鄭汝庚 溫樟煇 王文啓 邱鎭雨 凌稼石 關子光 王福生 姚玉山 陳樹楠 周蘭亭 程子靑 林咸獻 徐慧泉 顧志耕 范金元 周敬和 楊啓祥 錢秋棠 出 身 地 浙江人 山東人 江蘇人 浙江人 山東人 山東人 山東人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山東人 山東人 江西人 廣東人 江蘇人 廣東人 浙江人 浙江人 湖北人 廣東人 江蘇泉 浙江人 江蘇人 江蘇人 廣東人 山東人 출처: 淸季中日韓關係史e 4卷, 2061~2065쪽 姓 名 梁玉亭 顧連生 凌蔭宗 李海山 張西堂 朱福臣 梁燿垣 陳冠廷 陳瑞堂 陳蕖善 何永安 關植生 張 翊 陳鳳儀 吳崐山 楊艾卿 方雨生 方子言 李茂林 胡菖全 王亞三 雲福元 顧全生 林潁齊 張小卿 趙 淦 出 身 地 廣東人 浙江人 廣東人 浙江人 直隸人 山東人 廣東人 廣東人 廣東人 湖北人 湖北人 廣東人 山東人 廣東人 山東人 廣東人 浙江人 江蘇人 湖北人 浙江人 廣東人 四川人 浙江人 浙江人 江蘇人 直隸人 78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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