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고 새로운 우리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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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랍고 새로운 우리의 세계사 도현신

2 소개글 여태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거나, 혹은 전혀 몰랐던 새롭고 놀라우며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실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넘나들며 엮었습니다.

3 목차 1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7 2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2 5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6 6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1 8 바이킹들의 격언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7

4 26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3

5 51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모택동- 고추 소스 같은 가짜 공산주의자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이자성과 장헌충 등,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인 유구에 대해서 중국 역사를 통틀어 도적들은 왜 발생하는가?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왜 중국은 티벳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가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청나라 군대가 양주에서 저지른 끔찍한 대학살 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모택동은 아편을 팔아 거금을 번 마약왕이었다? 인육을 먹었던 홍위병들의 만행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1)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2)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3) 북유럽 신화의 대략적인 개요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39

6 76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중국 신화> 김용옥 교수의 호인 도올 은 중국 신화의 괴물 이름!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7 01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8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 년 12월 17일,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강화도의 방위 책임을 김경징( 金 慶 徵 )이란 인물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정공신이자 체찰사 김류( 金 )의 아들로서, 아비의 권세를 믿고 평소에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의 상황을 기록한 사서 <병자록>에 따르면 김경징은 강화도에 들어갈 때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는 각각 덮개 있는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은 전모( 剪 帽 )를 씌웠으며, 집에서 싣고 나온 짐 보따리가 50여 개나 되어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도의 인부와 말이 거의 다 동원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피난 행렬을 이끌고 가는 도중에 한 계집종이 말의 발이 겹질리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있자 김경징은 피난 행렬을 수행하던 관리를 노상에서 곤장을 치게 했습니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김경징은 배를 모아서 그의 가속과 절친한 친구들만 먼저 강화도로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함 께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들의 행렬이 수십 리에나 뻗쳐 있었으며, 심지어 세자의 아내인 빈궁 일 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추위에 떨며 굶주릴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참담한 광경을 보다 못한 세자빈이 가마 안에서 김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자, 장 신( 張 紳 )이 듣고 김경징에게 부탁하여 간신히 배로 건너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양반 집 아녀자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구해 달라고 울부짖다가 청군 기병대가 갑자기 들이닥치니 순식간에 말발굽에 차 이고 밟히거나 혹은 끌려가거나 그러기를 두려한 나머지 바닷물에 뛰어들다 빠져 죽는 등, 그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 니다. 청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간신히 강화도에 도착하고 나서도 김경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당시 강화도에는 봉 림대군( 鳳 林 大 君 : 훗날의 효종 임금)과 빈궁 일행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위급 인사들이 피난 와 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김경징은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려 하여 장신이나 김상용 같은 대신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최소한의 전략적 식견도 없었던 김경징은 청군은 결코 강화도를 건너지 못하고 따라서 강화도는 절대 함락되지 않은 요새라 여기 고는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술주정을 일삼았습니다. 마침 인조가 머무는 남한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술독에 빠져 흥청망청 거리며 임금의 신변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봉림대군과 다른 대신들이 간혹 명령이나 건의를 하려고 오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이때를 당하여 대 군이 어찌 감히 나와 말하려 하며, 피난 온 대신이 어찌 감히 나를 지휘하려고 하는가. 하고 건방지게 뻗대었습니다. 아무리 제 아 비가 임금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반정공신이라고 해도, 어떻게 신하가 왕자에게 저렇게 오만무례하게 굴 수 있는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8

9 지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김경징은 김포( 金 浦 )와 통진( 通 津 )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왔으나,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한 친구들 이외에는 한 사람에게도 나눠주지 않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습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잔뜩 퍼마시고 아버지는 체찰사요 아들은 검찰사니 국가의 큰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고 큰 소리 치기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치 자기 집안이 왕가( 王 家 )라도 된 듯 착각에 빠졌던 듯 합니다. 이 때, 충청 감사가 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신들이 임시방편으로 이민구( 李 敏 求 )를 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전 라와 충청 경상 등 삼도의 흩어진 군졸들을 빨리 모아서 싸움을 독려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민구는 강화도는 안전한 곳이고 전라도는 반드시 죽을 곳이라 생각하여 가려고 하지 않고, 김경징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김상용( 金 尙 容 )이 김경징을 불러서 너의 아버지는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는데, 네 가 설령 임금의 욕됨은 걱정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너의 늙은 아버지마저 생각하지 않느냐? 삼남(전라, 충청, 경상도)의 군졸을 독려 하는 것이 대단히 급한 일인데 네가 어찌 차마 저지하는가? 이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이다. 너의 나이 지금 얼마인데 어 찌 감히 이러느냐! 라고 준엄하게 꾸짖자... 꾸중을 들은 김경징은 화가 난 채 밖으로 나와 도장을 내팽개치며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고 씩씩거렸다고 합니다. (-_-;) 이민구가 부득이 출발하려 하자 김경징은 추위를 막으려면 술이 없을 수 없다. 라고 하며 술을 데우는 것을 핑계하여 지연시키 고, 또 큰 배를 구하여 그의 처자를 태우고 가려 하였습니다. 이 한심한 추태를 본 김상용은 천하에 어찌 처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사신이 있는가! 한갓 각 고을에 먹이를 구하는 것뿐이니, 비록 간다 할지라 무익할 것이다. 라고 힐책하였습니다. 김경징은 방비와 수비에는 마음이 없어 초관( 哨 官 )들을 풀어주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섬 외에는 정탐도 하지 않으니, 식자 ( 識 者 )들이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갑곶( 甲 串 ) 이하에서 연미정( 燕 尾 亭 ) 이북까지의 사이에는 일찍이 몽둥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을 정도로 방비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충청 수사( 忠 淸 水 使 ) 강진흔( 姜 晉 昕 )이 밤을 도와서 들어와 원조하니, 김경징이 강진흔이 거느린 배를 연미 ( 燕 尾 )와 여러 곳에 나누어 배치하고 경기도 배는 모두 광진( 廣 津 )에 두었습니다. 이때 적군이 삼강( 三 江 )에 모여 있으면서 가옥을 헐어 재목으로 혹은 작은 배를 만들고 혹은 동거( 童 車 )를 만들고 있으니, 그 의 도가 아마 강화도에 있는 것 같다. 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김경징은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강에 얼음이 아직 단 단한데 어떻게 육지에 배가 다닐 수 있겠는가? 라고 무시할 뿐이었습니다. 정월 21일 밤 초경에 통진 가수( 通 津 假 守 ) 김정( 金 )이 김경징에게 첩보하기를, 적이 혹은 낙타에 배를 싣고 혹은 동거에 배를 실어 갑곶 나루로 향하고 있으니 밤에 물을 건너려는 것이다. 하니, 김경징이 이르기를 군정을 요란하게 한다. 하고 막 베어 죽이려고 하는데 갑곶을 파수하는 장수의 보고가 또 들어왔습니다. 김경징이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 이일상( 李 一 相 )과 박종부( 朴 宗 阜 )로 하여금 파수( 把 守 )할 계책을 분부하고, 화약과 철환( 鐵 丸 )을 나 누어주고 있는, 돈을 계산하여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해숭위( 海 嵩 尉 ) 윤신지( 尹 新 之 )로 대청포( 大 靑 浦 )를 지키게 하고, 전창군( 全 昌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9

10 누어주고 있는, 돈을 계산하여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해숭위( 海 嵩 尉 ) 윤신지( 尹 新 之 )로 대청포( 大 靑 浦 )를 지키게 하고, 전창군( 全 昌 君 ) 유정량( 柳 庭 亮 )으로 불원( 佛 院 )을 지키게 하고, 유성증( 兪 省 曾 )으로 장령( 長 零 )을 지키게 하고, 이경( 李 坰 )으로 가리산( 加 里 山 )을 지키게 하며, 김경징 자신은 진해루( 鎭 海 樓 ) 아래 나가 스스로 갑곶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22일에 해가 세 발( 丈 )이나 올라오자 김경징이 천천히 성을 나가는데 군졸은 2, 3백 명도 되지 않고 모두 맨 주먹으로 가고 있었습 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본부에 군기( 軍 器 )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오늘 쓰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는가. 하니, 김경 징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우리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쓰겠느냐. 하였습니다. 봉림대군이 김경징과 함께 진친 곳에 나가 보고 군사의 수효가 심히 적은 것을 보고 도로 성중으로 들어와서 다시 군병을 수습하 여 방수( 防 守 )의 계책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흩어졌으므로 부득이하여 비로소 성을 지킬 계획을 하였습니다. 한흥일( 韓 興 一 )과 정백형( 鄭 百 亨 )을 시켜 성중에 피난한 사람을 거느리고 성첩( 城 堞 )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 서쪽은 풍덕 군수 ( 豐 德 郡 守 ) 이성연( 李 聖 淵 )이 지키고, 연미 북쪽은 개성 유수( 開 城 留 守 ) 한인( 韓 仁 )과 도사 홍정( 洪 霆 )이 지키고, 갑곶 이하는 첨지 유성증이 지키고, 선원( 仙 源 ) 이하는 유정량이 지키고, 광성( 廣 城 ) 이하는 윤신지가 지키게 하였습니다. 한흥일과 정백형과 임선백( 任 善 伯 )은 각각 아이 종을 데리고 남문 위에 앉고, 회은군( 懷 恩 君 )은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동문 위에 앉고, 민광훈(민 光 勳 )ㆍ여이홍( 呂 爾 弘 ) 등 두 세 명의 조신( 朝 臣 )은 서문 위에 앉았는데, 북문은 사람이 부족하여 지키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였습니다. 일은 대단히 위급한데 게다가 성첩이 무너져 사방에 완전한 곳이 없었는데, 갑자기 천연적으로 만들 어진 장강( 長 江 )의 요새지를 버리고 맨주먹으로 무너진 성안에 돌아와 지켰습니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하여 홍이대포( 紅 夷 大 砲 )를 쏘니 포환이 강을 넘어서 육지 몇 리 밖에 떨어졌습니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 하며 파괴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고 창고 밑으로 피하니 온 군사가 요란하여 항렬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김경징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으로 돌아가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이때 김경징이 도로 부성( 府 城 )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두 대군과 김상용( 金 尙 容 )ㆍ박동선( 朴 東 善 )ㆍ조익( 趙 翼 )도 함께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임선백은 호조 낭관으로서 군사의 요미( 料 米 )를 맡고 있었는데 용기를 분발하여 한번 싸우려고 하였으나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졌으나 뱃사람이 건져내었습니다. 임선백이 나루 창고에 들어가 대군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어찌 천연으로 된 요새지인 장강을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가 지 키려고 합니까. 국가의 존망( 存 亡 )이 이번 한 싸움에 달려 있으니, 대장된 몸으로서 결코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습니다. 대군도 그렇게 여겨 김경징을 굳게 말리자, 경징은 당황하여 넋을 잃어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나서 창고 담장 아래에 앉았습니다. 김선백이 또 대군에게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것 같고, 우리 배는 썰물 때는 움직이기가 어려우므로 수군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으니, 진해루 아래에 진을 펴서 지세가 좁고 험함 곳을 끼고 총과 활을 크게 배치하여 혈전( 血 戰 )을 기약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성을 지키는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성안에 있는 군사를 몰아내어 모두 체찰부의 군기를 사용하여 오로지 나루터에서 힘을 쓰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라고 고하자 봉림대군은 그렇다. 내가 마땅히 말을 달려 성에 들어가서 군정( 軍 丁 )과 군기를 직 접 거느리고 오겠다. 하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10

11 그러나 그 말을 나눈 지 얼마 안 되어 청군의 전선이 날아오듯이 건너왔습니다. 김경징은 배를 빼앗아 달아났는데,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를 전혀 챙기지 않았고 그 바람에 그의 어머니는 청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내와 며느리는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고, 강화도는 청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과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그 가솔들이 포로가 되었고, 이밖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김경징은 대간으로부터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가 원훈( 元 勳 )의 외아들이라고 해 특별히 용서하려 했으나 그의 한심한 추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탄핵 요구가 빗발치는 바람에 결국 김경징은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출처: 연려실기술과 인조실록, 병자록 등.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11

12 02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13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 년 5월 우인열이 정예 기병 5백 명을 보내어 왜적을 사불랑송지( 沙 弗 浪 松 旨 )에서 치니, 적이 무너져서 배를 타려고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고 화살에 맞은 자가 또한 많았다. 순라하는 군사가 또 말하기를, " 적선이 해도 ( 海 島 )에 숨었다가 나타났다 하여 많고 적은 것을 알 수 없읍니다 "하였다. 이 때에 우리 태조(이성계)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 공포에 싸였다. 인열의 급보가 계속하여 이르 니, 태조가 이틀 길을 하루에 행하여 적과 지리산 아래에서 싸웠는데, 상거가 2백여 보쯤 되는 곳에 한 적이 돌아서서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궁둥이를 두드려 두려울 것이 없다는 모양을 보여 모욕하였다.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13

14 태조가 작은 살을 쏘아서 한 화살에 거꾸러뜨리니, 이에 적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을 빼앗겼다. - 고려사절요 제 30권에서 발췌 - 과연 화살은 어디서 맞았을까요? (첨부한 사진은 전 재산 40억 원을 영화 '클레멘타인'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고 원금 회수도 못하자, 똥꼬쇼까지 하면서 생계를 이 어갔던 영화 배우 이동준씨... 왜 40억이란 거금을 몽땅 영화에 투자했던 것인지? 차라리 요새 잘나가는 차이나 펀드에 넣어뒀으면 몇 배로 더 벌 수 있는데... -_-;)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14

15 03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6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34 아래 글은 민속원에서 출판된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에서 발췌했습니다 몽골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바위그림들이 무수히 산재해 있다. 또 이 바위그림에는 무당의 제구용 활이나 사냥용 활들이 수없이 묘사되어 있다. 원래 북방민족들은 부여의 주몽이나 몽골의 메르겐(mergen)이라는 칭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백발백중의 명사 수를 매우 우대하고 칭송하는 관습이 있다. 바위그림에 활이 묘사되어 있고, 유목국가 성립 후 명사수를 중시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는 것은 바로 활이 북방민족의 생존에 매우 필요한 도구이자 무기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유목제국인 흉노에서부터 몽골에 이르는 역대 유라시아 기마민족들의 활은 말 위에서 화살을 발사하는 '파르티안 샷', 즉 기 마사법에 알맞게 길이가 1.5~1.6m 정도의 단궁 계열이며 재료면에서는 모두 합성궁에 속한다. 활은 전투용과 수렵용의 2종류가 있으 며 화살은 사용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역대 북방민족 중 활과 화살의 기술이 가장 정점에 달한 시기는 역시 13세기의 몽골제국 때이다. '파르티안 샷'으로 상징되는 북방 민족의 기마사법은 정확도와 사정거리에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화기의 등장 이전까지 북방 유목제국이 중국, 페르시아, 유럽 등의 주변 제국보다 군사적인 우위를 지니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사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활은 1.8m를 기준으로 장궁과 단궁으로 나뉘며 자료에 따라 단궁( 單 弓 또는 단판궁: 單 板 弓 )과 복합궁( 複 合 弓 또는 합판 궁: 合 板 弓 )으로 크게 분류된다. 단궁은 나무나 대나무의 단일 재로로 만들어진 활이며 복합궁은 두 종류 이상의 재료로 만들어진 활 이다. 1932년 고고학적인 출토물을 근거로 흉노의 활을 복원한 바 있는 Alfoldi와 J.werner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흉노의 전투용 활은 길이가 1.4m~1.6m이고 스키타이나 몽골의 활처럼 이중 꺾임(double curve)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후대 몽골의 활과 같이 심줄 과 뼈를 사용하여 강도를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O.J.Maenchen-Helfen, [The World of Huns- studies in Their History and Culture-] Berkeley and London, 1973, p.222) 몽골의 활은 나무로 틀을 잡고 양면에 동물의 뿔과 심줄을 끓여 압축해 붙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시위를 당기는 쪽에 압축성이 매우 뛰어난 소나 산양의 뿔을 가공해 붙이고 그 반대쪽에 신축성이 강한 심줄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활 전 체를 사슴 가죽으로 말아 감으며 온도의 변화를 예방하기 위해 도료를 칠한다. 흉노의 고분에서는 전투용 활과 함께 부장된 사냥용 활이 출토되었는데, 고대 몽골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사냥용 활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몽골비사] 등의 문헌에 기록된 것을 참조로 할 경우 전투용 활과는 달리 이중 꺾임 구조가 아닌 C-형 구조를 가 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6

17 - 몽골군은 두 개의 활을 보유하였는가? 몽골의 활에 관련되어 자주 나오는 설 중 하나가 몽골군이 두 개의 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예로 G.Vernadsky 등 일부 학자들은 [몽골비사] 195절의 "yeke, taran"이라는 기록이나 마르코 폴로의 기록, 고대 북방민족들의 고분에서 나오는 몇 종의 각기 다른 활의 근거로 토대로 몽골군은 전투시 2종의 다른 활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비사] 195절의 "yeke, taran"은 yeke numun(큰 활)과 baga numun(작은 활)의 생략형이 아니라 동일의 활에서 화 살대에 따라 힘의 완급을 조절하는 표현에 불과하며 페르시아의 삽화 등 현존하는 그림자료를 참조할 경우에도 전투 때 2종류 이상 의 활을 소유한 자를 발견할 수 없다. G.Vernadsky 등의 추론은 전투시 사용하는 활과 사냥시 사용하는 활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막연히 이끌어낸 추상적인 결 론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실려 있는 몽골 기병의 전투 장면 출전하는 타타르(몽골)병사는 각자 60개의 화살을 휴대할 의무가 있다. 그 가운데 30개는 짧은 화살인데 이것은 적을 움직이기 못 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나머지 30개는 긴 화살로 화살촉도 큰데 이것은 근접 거리에서 적병의 얼굴 및 팔을 관통하거나 적병의 활시위를 절단하거나 그 외의 곳에 직접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 60개의 화살을 모두 써버리면 그들은 칼이나 철퇴, 창을 휘둘러 서로 치는 백병전에 돌입한다... 화살을 다 쏴 버리자 병사들은 각자 활을 화살통에 넣고 칼과 철퇴를 들고 적에게 돌격하였 다. 몽골제국은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역대 북방민족 중 활과 화살에 대한 기술이 가장 정점에 달한 제국이다. 몽골제국의 활과 화살에 대해서는 당시 군사정찰의 목적으로 남송이나 유럽에서 몽골로 파견된 사신단의 보고서, 즉 조공의 몽달비록이나 팽대아, 서정의 흑 달사략, 카르피니의 몽골여행기, 루브룩의 루브룩 여행기 등에 아주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당시 몽골의 활은 이중꺾임 구조의 완양각궁이 주류를 이루며 무게는 7.2kg 이상으로 나타난다. 또 화 살대는 주로 사류( 沙 柳 : 여기서는 그냥 버드나무를 뜻함)로 만들며 근거리 사격용의 경우 그 길이는 90cm 정도이다. 화살대의 끝 부 분에는 3매의 깃털을 붙여 날아가는 도중 강한 회전력을 유지케 해 사정거리의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시위는 사슴의 목 가죽으로 만든 것을 주로 사용한다. 활을 쏘는 방식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활을 잡은 뒤 왼손의 엄지 위에 화살을 놓고 오른손 엄지의 제 2 관절로 시위를 당겨 발사하 는 독특한 방식(몽골식 사법)을 사용한다. 몽골의 활은 시위를 잡아당기면 모양이 둥근 형태가 되기 때문에 화살의 속도가 매우 빠르 고 사정거리도 매우 길다. 몽골제국 때 가장 유명한 활쏘기 시합은 1224년 칭기스칸이 호라즘 원정에 돌아와 제국의 서부지역인 보카-소치카이에 머물 때 행 한 사격대회이다. 이 시합의 우승자가 바로 예숭게(칭기스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둘째 아들)로 그는 자기의 유목지인 동몽골의 어를렁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7

18 거에 다음과같은 비석에 이를 새겨넣었다. - 칭기스칸이 사로타울(호라즘) 백성에서부토 돌아와 말에서 내려 모든 몽골의 귀족들을 보카-소치카이에 모았을 때 예숭게는 원 거리 사격으로 335알다의 곳까지 멀리 쏘았다. 예숭게가 원거리 화살을 날려 우승한 335알다는 오늘날의 척도로 약 525~560에 이르는 장거리이다. 그러나 이 비문에는 예숭게가 쏜 거리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즉 이것이 원거리 화살의 최대 사거리인지 혹은 과녁을 맞춘 살상 유효사거 리인지를 좀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몽골비사] 195절에는 고대 몽골인들의 근거리 사격과 원거리 사격의 사정거리를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 카사르가 분노하여 앙구아 화살을 당겨 쏘면 산 너머에 있는 10명 20명의 사람들을 일거에 꿰뚫게 쏜다. 전투가 벌어져 황야를 질주해 달려오고 있는 적들을 향해 케이부르 화살을 당겨쏘면 줄줄이 관통하도록 쏜다. 크게 힘을 주어 쏘면 9백 알다(alda)의 곳까 지 나가고 작게 약간 힘을 주어 쏘면 5백 알다의 곳까지 나간다. 위 기록은 카사르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몽골활의 사정거리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역주: 이 글의 원 저자인 박원길 교수)는 이러한 점에서 예숭게 비문에 나타난 335 알다는 과녁을 맞춘 명중 사거리일 가 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 예숭게 비문을 근거로 할 경우 고대 몽골인들의 최대 명중 사거리는 대략 300 알다(450~525m)전후라고 보여진다. 위의 카사르에 대한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살의 종류에 따라 사정거리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정거리의 차이 는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발사 때의 힘의 차이라기보다는 위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화살촉의 모양과 크기에 따른 화살대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G.Vernadsky는 몽골활의 사정거리가 182~274m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의 학자인 O.남난도르지는 강력한 활일 경 우 사정거리가 900m에 이른다는 실례로 제출하고 있다. O.J.Maenchen-Helfen은 W.E.Mcleod의 연구보고를 근거로 흉노를 포함 한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합성궁 유효 사정거리는 160~170m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루브룩의 몽골여행기에는 몽골활의 시위와 화살촉에 관한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 몽케칸은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시위를 당기기 어려운 강고한 활과 화살 두 개를 만들었는데 화살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은촉이 달려 있었다. 이 은촉화살은 날아갈 때 마치 호루라기 같은 소리를 낸다. 몽케칸은 테오돌루스를 따라 파견될 몽골인에게 다 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이 사람과 같이 프랑크의 왕에게 가게 될 것이다. 가서 나를 대신하여 이 물건들을 바쳐라. 만약 그가 우리와 평화를 원한다 면 우리들은 사라센으로부터 그의 왕국이 이어지는 곳까지만 정벌하고 그 나머지 서쪽 세계는 그에게 통치하게 하겠노라고 말하라. 만약 그가 평화를 원치 않는다면 활과 화살을 다시 갖고 돌아오면서 그에게 전하라. 우리는 이런 활로 화살을 발사하는 데 아주 멀 리 가고 또 강하다는 것을.' (C.Dawson, [The Mongol Mission], p.159)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8

19 참고로 위의 인용문 중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시위를 당기기 어려운 강고한 활"이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몽골인들의 시위를 당기는 완력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원사](목화려전- 칭기스칸의 장수 무칼리)에도 실려 있다.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9

20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20

21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21

22 04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3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3 김진( 金 縝 )은 전라도 원수로 있을 때에 도내의 이름 난 기생을 많이 모아 놓고 휘하 사관들과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놀았다. 김진 은 소주를 즐겼으므로 군대 안에서 그를 소주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사병과 보좌관이 조금만 자기 비위를 거스리면 곧 후려 갈기며 욕설을 하였으므로 모두 울분과 원망을 품었다. 왜적이 합포( 合 浦 ) 병영에 방화하고 약탈하자 군인들이 말하기를 <소주도더러 적을 치게 하라. 우리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물러 서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자 김진은 혼자 말타고 도주하여 마침내 대패하였다. 이에 김진을 서민( 庶 民 )으로 만들어 창녕현( 昌 寧 縣 )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어 가덕도( 嘉 德 島 )로 옮기고 합포 도천호( 都 千 戶 ) 이동부( 李 東 木 + 專 )와 김원곡( 金 元 穀 )을 사형하였다. - 고려사 열전 최영( 崔 瑩 ) 편에서 본래 페르시아(또는 아라비아?)의 증류주였던 소주는 13세기, 몽골의 중동 원정군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몽골과 만주, 고려 등 지에 전해졌습니다. 소주의 원 명은 아라비아어의 '아락'(Arag)으로 역시 소주를 일컫는 만주어의 '아얼키'( 亞 兒 吉 ), 몽고어의 '아라키'( 亞 利 吉 )등은 여기 에서 유래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북 안동에서 '아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원래 이름인 '아락'이 변한 것이죠. 몽골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 시킨 후, 두 차례 일본 원정을 하면서 많은 몽골 병사들이 안동에 주둔했는데, 이 때 소주의 제조법이 고려에 전해진게 아닌가, 하는 이론이 소주의 기원입니다. 현대의 몽골에도 소주가 남아 있는데, 4년 전 몽골로 여행을 갔을 때 '아르히'라 불리는 독한 증류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 라 소주와 마찬가지로 술의 빛깔이 투명해서 한 번 살짝 마셔보았는데, 취기가 빨리 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머리가 너무 아 프더군요. 나중에 몽골인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그 술의 알콜 도수가 무려 49도나 한다는 군요...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낼려고 몽골인은 독한 술을 즐겨마셨고, 원대의 황제들도 소주를 즐겨마시다가 일찍 요절하지 않았을까 요? 실제로 원 세조 쿠빌라이칸 이후의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주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는 전통주가 참 많고 다양했었는데, 제 3공화국 시절에 밀주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전통주의 맥이 거의 단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3

24 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생활 수준이 나아진 요즘에 와서야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4

25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5

26 05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7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19 칭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몽골 제국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정복자 티무르. 이 사람의 최후를 화려하게 빛낸 전투가 바로 오스만 투르크에게 치명타를 가한 앙카라 전투라는 사실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앙카라 전투가 끝나고 나서, 로도스 기사단(요한 기사단)과도 한판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 지 않더군요.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는 오스만의 수도인 부르사를 약탈하고, 진로를 남쪽으로 돌려 당시 로도스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 스미르나(현 지명은 이즈미르)로 향합니다. 스미르나를 포위한 티무르는 총독인 수사 기욤 드 문트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할 것과 항복 을 권유했지만 총독은 분개하며 거절했습니다. 티무르의 정복 활동을 다룬 사서 '승전기'에 따르면, 스미르나의 포위는 1402년 12월 2일에 시작되었고 2주일 후 급습에 의해 함락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븐 아라브사흐(Ibn Arabshah)같은 경우는 12월 28일이라고도 주장하고, 아무튼 사서들마다 약간 씩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스미르나에서 로도스 기사단은 영구히 축출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스미르나가 티무르군에 함락되자, 곧 학살과 약탈이 뒤따랐고 기독교 함대에 의해 구출된 몇몇의 기사들만이 간신히 살아날 수 있 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무슬림 학자인 '자파르 마나'는 "오스만 술탄이 7년 동안이나 포위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스미르나를 티무르는 고작 2주도 채 못 되어 정복해 버렸다. 무슬림들은 신을 찬양하며 시내로 들어가 적의 머리를 감사의 제물로 드렸다."라고 논평했습 니다. 스미르나가 함락된 여파는 에게해 곳곳으로 퍼져갔습니다. 오스만과 이탈리아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던 포케아도 티무르군에 포 위되었지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겨우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맞은편 섬인 키오스를 소유하던 제노아인들의 교역회사인 '마호네'는 티무르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비잔티움의 섭정 요한 7세도 티무르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 티무르의 승리는 오스만의 위협에서 기독교 유럽을 잠시나마 구한 셈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술 탄 바예지드에게 철저하게 봉쇄된 콘스탄티노플은 곧 함락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티무르가 앙카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소아시아 반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면 오스만 왕조는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훗날의 대제국 오스만도 성립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카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티무르는 곧바로 본 거지인 사마르칸트로 돌아갔고, 10년 동안 비틀거리던 오스만 투르크는 곧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 결 국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맙니다.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7

2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참조.)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8

29 06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30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02 헝가리군이 궤멸당하면서 빈으로 통하는 길이 뚫렸고, 몇 주 안 지나 도시 외곽을 배회하는 몽골 척후병들이 지역 주민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의 군대는 이런 전위 한 부대와 작은 전투를 벌인 뒤에 몽골군 장교 한 명을 사로잡았다. 기독교인들은 소 스라치게 놀랐다. 이 장교는 글도 읽을 줄 아는 30세의 잉글랜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지(예루살렘)까지 갔던 사람인데, 그곳에서 자신에게 언어를 배우고 번역하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 같다. 교 육 수준이 높다는 점, 또 잉글랜드에서 탈출했다는 점 때문에 그가 1215년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일에 관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잉글랜드에서 피신한 뒤,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좀더 관대한 몽골군 에 합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럽인, 그것도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이 몽골군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몽골군이 악마가 아니라 인간들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졌 다. 그러나 겁에 질린 기독교인들은 몽골군이 빈 외곽까지 온 이유를 캐묻지도 않고, 이 잉글랜드인 배교자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이 영국인 기사의 정체를 다룬 흥미로운 소설이 옛날에 나왔는데, 가브리엘 로네이(Gabriel Ronay)가 쓴 타타르 칸의 영국인(The Tatar Khan's Englishman )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과연 저 성명미상의 영국인은 무슨 목적으로 유럽을 침공하는 몽골군과 합류했던 것일까요?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30

31 07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2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 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 대군이 러시아를 한참 유린하고 있을 무렵 잉글랜드에 반갑지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다 름아닌 이슬람교의 일파인 아사신 교단의 사절단이었습니다. 아사신 교단의 사절단은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3세에게 머지않아 중동과 지중해 방면에도 들이닥칠 몽골군의 위협을 경 고하였으며, 헨리 3세에게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몽골에 맞서자는 전혀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아사신 교단은 기독교 유럽에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아사신 교단은 모든 이슬람 종파들로부터 이단이 라고 갖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이슬람 종파들을 위협하던 십자군 세력을 적대시 하지 않았습니다. 1149년 봄 안티오크 공작인 레몽 드 푸아티에가 누레딘과 전투를 벌일 때, 레몽의 휘하에 아사신 교단파 지휘관이 있었을 정도였고 그 외에도 프랑스 십자군이 아사신 교단을 찾아왔을 때, 아사신 교단의 교주는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준다면 교단 전원이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충격적인 제안까지 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아사신 교단에 청부를 하여 자신을 적대했던 십 자군 지휘관을 암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았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참조하시길) 기독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손을 잡다니.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만도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국의 몽골연구 전문가인 데이비드 모건에 의하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는 1241년 10페니 무게의 금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그 당시 이런 무게의 금화는 아프가니스탄 가즈나에서 고르 왕조의 술탄이 주조한 것 뿐이었습니다. 페르시아어 사료에 의하면 고르왕조의 사자가 몽골군이 중동에 나타났을 무렵, 아사신 교단의 교주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즉, 고르왕조의 금화가 13세기 전반기 에 어떠한 경위로든 아사신 교단을 거쳐 잉글랜드에 전해진 가능성이 있다는 것지요. 그러나 아사신 교단의 제안은 당시 헨리 3세의 궁정에 있던 윈체스터 주교 페테르 드 로쉐의 단호한 거부로 무산됩니다. 그는 헨리 3세에게 이런 말을 남겼죠. "이 개들(몽골군과 아사신 교단)끼리 서로 뜯어먹도록 하십시오. 이것들끼리 서로 먹어치우다 사라지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적도를 향하여 나아감에 있어, 남은 것들마저 다 죽여 없애야 하고, 지상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온 땅이 하나의 교회 아래 순명하며, 오직 한 목자에 한 무리의 양떼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기독교 서유럽과 아사신 교단과의 협력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238년의 이 기괴한 협정이 무산된지 18년 후인 1256년. 알라무트 산중의 굳건한 요새 속에서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맞서 항전하던 아사신 교단은 전멸되고 맙니다. 그 때, 잔당 중 일부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2

33 가 인도로 탈출하여 오늘날까지 아가 칸을 수장으로 하는 아사신 교단의 명맥은 이어져 온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몽골 세계제국>, <팍스 몽골리카>, <십자군 전쟁- 성지탈환의 시나리오)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3

34 08 바이킹들의 격언.

35 바이킹들의 격언 :10 아래 글은 '주니어김영사'에서 출판된 <바이바이 바이킹>에서 발췌했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을 보고 비웃지 말게나. 노인은 지혜를 말해줄 수 있다네. - 손님이 그대의 집에 찾아오면 몸을 씻게 하고, 따뜻하고 안락한 자리를 권하라. - 맥주와 꿀술에도 나쁜 점은 있다네. 머리를 흙탕물처럼 흐리게 만드니까. - 겁쟁이처럼 자기 집에 꼭꼭 숨는다 해도, 시간은 결국 목숨을 거두어 간다네. - 적을 죽이려는 사나이는 동작이 재빨라야 하고, 굼떠서는 안 되며, 먹이를 덮치려고 하는 늑대는 땅바닥에 등을 대고 편히 잠자지 않나니. - 소나 친구들이나 부모님은 죽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죽는다.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영웅의 위대한 이름뿐. - 누가 그대를 노릴지 그대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항상 주변을 살펴라. -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칼과 창을 가지고 다녀라. 언젠가 적이 눈 앞에 나타나리라. - 팔이 없는 사람은 양을 몰 수 있지만, 시체가 되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네. 바이킹들의 격언. 35

36 09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37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16 월드컵 때문에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 적까지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농담 같다고요? 그러나 엄연히 있었던 사실입니다. 1969년 7월 14일, 월드컵 예선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 있었으니, 중미의 작은 나라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두 나라 간의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1970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 북중미 예선 14조 A지역은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 도르 두 나라가 최종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 6월7일 엘살바도르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 밖에서는 밤새도록 온두라스 응원단이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깡통을 두 드리며 고함을 질러대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잠을 못 자, 다음날 열린 1차전에서 엘살바도르가 그만 1대 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더욱 커져, 엘살바도르에서 이 경기를 TV로 지켜보던 한 소녀가 충격에 못 이겨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는데, 이 소녀의 장례식에 대통령을 비롯해 전각료가 참석하고 대표선수단도 조의를 표했고 이 장면이 TV로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6월 14일 온두라스 팀이 2차전을 위해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왔습니다. 경기 전날 밤 온두라스 팀이 묵고 있는 호텔 밖 에선 엘살바도르 응원단이 보복이라도 하듯 호텔 창문을 깨고 죽은 쥐를 던지며 난동을 피웠습니다. 역시 한숨도 자지 못한 온두라스 선수들은 엘살바도르에 3대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경기장에서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관중석에서는 이미 응원단끼리 패싸움이 벌어져, 온두라스 응원단 차 150여 대가 불 타고 응원단 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같은 시각 온두라스 전역에서도 엘살바도르 인에 대한 폭행이 벌어져 수십명의 엘살바도르 인이 살해되었습니다. 약탈 방화도 일어 나 재산 피해만도 2천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6월 23일 극도로 감정이 악화된 두 나라는 국교를 끊었고 6월 27일 중립지역인 멕시코시티에서 두 나라의 최종전이 열렸습니 다. 이 날은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았으며 경기는 난폭했습니다. 결과는 2대 2무승부라서 연장전으로 이어졌는데. 전반 12분 엘살바 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 한골이 바로 전쟁의 신호탄이 되고 말았으니, 7월 14일 엘살바도르 비행기가 선전포고와 동시에 온두라스 네 개 도시를 폭격했습니다. 탱크를 앞세운 보병부대는 온두라스 국경을 넘어 25 마일이나 진격했고, 이에 온두라스는 즉각 대응해, 낙하산 부대를 엘살바도르 후방에 투입해 교란작전을 펼쳤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37

38 이 전쟁은 사흘 간이나 계속되다가 미주기구(OAS)와 이웃나라들의 중재로 7월 18일 정전에 들어갔습니다. 피해는 온두라스가 더 커 온두라스는 축구에도 지고 전쟁에도 져 더 큰 상처를 입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3000명이 죽고 1만2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15만명이 집을 잃는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1969년의 월드컵 전쟁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두 나라 국민들의 가슴에 씻기 힘든 상처만을 남긴 채 끝났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38

39 10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40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04 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 光 海 君 日 記 )의 원년( 元 年 (1609년) 9월( 九 月 ) 25일( 日 )자 기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 강원 감사 이형욱( 李 馨 郁 )이 치계하였다. 간성군( 杆 城 郡 )에서 8월 25일 사시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태양이 비치었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는데, 우뢰 소리가 나면 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갈 즈음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니, 푸른 하늘에서 연기처럼 생긴 것이 두 곳에서 조금씩 나왔습니다. 형체는 햇무리와 같았고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멈추었으며, 우뢰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났습니다. 원주목( 原 州 牧 )에서는 8월 25일 사시 대낮에 붉은 색으로 베처럼 생긴 것이 길게 흘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갔는데, 천둥 소리가 크 게 나다가 잠시 뒤에 그쳤습니다. 강릉부( 江 陵 府 )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차 커져 3, 4장( 丈 )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 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 天 地 )를 진동했습니다. 춘천부( 春 川 府 )에서는 8월 25일 날씨가 청명하고 단지 동남쪽 하늘 사이에 조그만 구름이 잠시 나왔는데, 오시에 화광( 火 光 )이 있었 습니다. 모양은 큰 동이와 같았는데, 동남쪽에서 생겨나 북쪽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매우 크고 빠르기는 화살 같았는데 한참 뒤에 불처럼 생긴 것이 점차 소멸되고, 청백( 靑 白 )의 연기가 팽창되듯 생겨나 곡선으로 나 부끼며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우뢰와 북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다가 멈추었습니다. 양양부( 襄 陽 府 )에서는 8월 25일 미시( 未 時 )에 품관( 品 官 )인 김문위( 金 文 緯 )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 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듯 하더니 곧 1장 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크기는 한 아름 정도이고 길이는 베 반 필( 匹 ) 정도였는데, 동쪽은 백색이고 중앙은 푸르게 빛났으며 서쪽은 적색이었습니다. 쳐다 보니, 마치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도는데, 모습은 깃발을 만 것 같았습니다. 반쯤 공중에 올라가더니 온통 적색이 되었는데, 위의 머 리는 뾰족하고 아래 뿌리쪽은 짜른 듯하였습니다. 곧바로 하늘 한가운데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흰 구름으로 변하여 선명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40

41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두 조각이 되더니, 한 조각은 동남쪽을 향해 1장 정도 가다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한 조각은 본래의 곳에 떠 있었는데 형체는 마치 베로 만든 방석과 같았습니다. 조금 뒤에 우뢰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끝내는 돌이 구르고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그 속에서 나다가 한참만에 그쳤습니다. 이때 하늘은 청명하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습니다. 원전 31 집 456 면 분류 *과학-천기( 天 氣 ) 얼핏 믿어지시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엄연한 사실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잘 요약해 보면 1609년 9월 25일 강원도 등지에 나타났던 괴물체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갑자기 나타나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흰 연기를 뿜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 하늘을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는,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UFO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 아닙니까? 혹시, 지금으로부터 약 4백년 전에 나타난 UFO를 강원 감사 이형욱이 목격했던 것은 아닐까요?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41

42 11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43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58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조선은 선조부터 정조까지 거의 250년간 조정에서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 과 소북, 노론과 소론 등으로 관리들이 서로 벌인 당파싸움으로 골치를 앓았습니다. 왕비와 세자의 책봉,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 왕위 계승 등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정치적 대결로 몰아가 국력이 크게 낭비되 었습니다.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 역시 당쟁의 피해자였습니다. 무수리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열등감에 시달리던 영조는 소론측이 장희 빈의 아들 경종을 밀자 노론측의 도움을 많이 받아 즉위했습니다. 그런데 1724년 경종이 게장과 생감을 먹고 집권 4년만에 죽자 소론은 이를 영조와 노론측의 독살이라 주장하며 1728년 이인좌 의 난, 1755년 나주 벽서사건 등으로 영조의 정통성에 내내 시비를 걸었습니다. 급기야 영조는 매우 성격이 날카로와져 1762년 소론과 가까이하려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직접 가두어 죽이는 천인공노할 만행까 지 저지르고 맙니다. 영조는 드디어 아들까지 죽인 당쟁을 바로 잡으려고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는데 그 대책으로 요리 한가지를 제의 했으니 그것이 바로 탕평채( 蕩 平 菜 )였습니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 書 經 ) 홍범조( 洪 範 條 )의 왕도탕탕 왕도평평( 王 道 蕩 蕩 王 道 平 平 ) 에서 나온 말로 왕은 자기와 가깝다고 쓰 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평등한 인재 등용 원칙을 가리킵니다. 탕평채를 만드는 법은 이렇습니다. 1. 청포묵은 굵게 채쳐서 끓는 물에 투명해 지도록 데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한다. 2. 쇠고기는 가늘게 채썰어 양념해 국물 없이 볶아 식힌다. 3. 숙주는 머리와 뿌리를 떼어 내고, 미나리는 데쳐 낸다. 4. 김은 바싹 구워 가지런히 체썰고, 달걀은 황백지단으로 부쳐 채썰어 고명으로 준비한다. 5. 황백지단, 미나리, 숙주, 쇠고기를 돌려 담고 가운데 1의 청포묵을 담고 묵위에 김을 얹는다.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43

44 6. 5와 초간장과 함께 내 먹기 직전에 비벼 먹는다. 이렇게 모든 재로들이 하나로 모여 맛을 내듯, 소론과 노론으로 패가 갈려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화합하여 나라를 잘 이끌어 나 가자는 뜻으로 영조가 내린 고육지책이 바로 탕평채였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탕평채는 오늘날까지 그 맥이 쭉 이어져 내려오 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당파 싸움을 없애고 나라를 평안케 하려는 영조의 뜻! 가끔씩 탕평채를 먹으면서 그 뜻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44

45 12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46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55 인도의 고대 경전에서 발췌한 이야기입니다. (뭔지는 잘 생각이 안 납니다.) 고대부터 인도하면, 수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교(브라만교, 힌두교 등등)가 성행하던 나라였죠. 그런데 이 인도에 어느 특이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무신론자였습니다. 이 무신론자는 항상 입버릇처럼 "신은 없다! 신은 없다!"라고 중얼거렸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 무신론자는 계속 자신을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이 무신론자도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자는 평생동안 신을 부정하면서 살았지만, 막상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자 매우 두려워졌습니다. "나는 신을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저승이 있고, 내가 죽어서 그리로 가야한다면 자신을 부정한 신 이 과연 나를 용납하겠는가? 나는 어떻게 될까?" 두려움에 떨던 무신론자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고, 그의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저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저 승에 가서 신을 만나게 되었죠. (무슨 신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브라흐만인가, 비시누인가, 시바인가, 아니면 인드라였던가...) 신을 본 무신론자는 겁을 먹고 자신이 신을 부정하면서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제 신이 자신에게 무슨 벌을 내릴지가 벌써부 터 두려워졌죠. 그런데 뜻밖에도 신은 그 무신론자에게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놀라는 무신론자에게 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평생 신이 없다고 말하며 살았지만,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를 생각했으니 결과적으로 너는 나의 존재를 강하게 믿은 것이다. 따라서 너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강력한 부정은 강력한 긍정의 다른 표현이었던 걸까요? 어찌되었든 그 무신론자는 신에게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46

47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47

48 13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49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25 중국, 인도,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널리 신봉되고 있는 종교는 단연 불교입니다. 이 불교의 핵심 교리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죽어도 다른 생명체로 계속 다시 태어나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끝없는 윤회의 고통에 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도를 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전생( 前 生 )과 환생( 還 生 )론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동양인들의 사고에 큰 믿 음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멀리 반대쪽에 떨어져 있는 서양에서는 과연 이런 전생과 환생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까요? 고대 서양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사고방식에서는 놀랍게도 전생과 환생에 대한 믿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그리스 남부인 크레타 섬과 남부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섬에서 널리 신봉되었던 오르페우스 신앙은 육체는 짧 게 소멸되지만 영혼은 불멸의 존재이며, 인간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은 살아 있다가 다른 인간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교리를 가졌습니다. 이처럼 윤회론을 믿은 오르페우스 신앙에서는 신도들에게 육식을 절대 금지하고, 채식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신도들이 죽여 먹은 짐승의 고기가, 바로 얼마 전 죽은 가족이나 친구일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기원전 5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이 타락하면 새나 동물로 태어나며, 영혼은 계속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기 3세기 경, 이집트에서 태어난 로마 철학자인 플로니토스는 살아있을 때, 선행을 한 사람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지만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가축으로 태어나 고통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은 새가 되고, 포악한 독재자는 독수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변경 지역에 살았던 켈트족도 전생이나 환생 같은 윤회론을 깊이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켈트족의 전설에는 아일랜드에 맨 처음 정착한 반족의 후손인 핀탄은 파도에 휩쓸려 죽었지만 연어나 독수리, 매로 다시 태어나 수 백 년 동안 인간의 의식을 가진 채 살면서 아일랜드의 역사를 남겼다고 합니다. 또한 두 번째로 정착한 파르홀론족의 마지막 생존자 인 투안은 늙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슴이나 멧돼지, 바다독수리, 연어 등으로 환생하여 핀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아를 가지고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여인 이테르는 청년 미다르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부인인 푸암나크의 미움을 사서 생명의 위협을 받 자 연못과 잠자리로 변했다가 이타의 딸인 이테르로 다시 태어났고, 끝내는 미다르와 함께 백조로 변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 해 달아났다고 합니다.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49

50 켈트 신화에서 전쟁의 여신인 '마하'는 무려 네 번이나 환생했다고 하는데, 첫 번째는 네베드 족장의 부인으로 태어나 거인족인 포 모르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며, 두 번째는 신들의 왕인 누아자의 부인으로 태어났다가 죽음의 신인 크로우 크루아흐에게 죽임 을 당했고, 세 번째는 밀레족의 여왕이 되어서 얼스터 지방을 통일하였고, 마지막 네 번째는 부유한 농민인 크룬느의 부인으로 살았 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켈트족의 신앙에서는 인간의 세계인 이승과 다른 세계인 지하세계가 있는데, 이 지하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죽지 않 는 불멸의 존재이며, 자주 이승의 인간이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켈트족의 세계관은 참 아리송하죠. 저승 에서 이승으로 왔다가,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살다가 또 이승으로 올 수 있으니. 도대체 무엇이 삶이고 죽음인지가 무척 헷갈립니다. 켈트족의 이웃이었던 게르만족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최근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신생아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동양과 거리가 먼 고대 서양에서 이처럼 환생에 대한 생각이 널리 퍼진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리안족의 이동에 따 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환생을 주장한 불교는 브라만교에서 파생된 종교인데, 이 브라만교를 창시한 사람들은 인도에 들어온 백인 계 유목민인 아리안족입니다. 아리안족은 인도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유럽에까지 널리 퍼져나가 정착해 살았습니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북방에서 그리스로 침입한 도리안족이나 켈트 및 게르만족 모두 아리안계 민족인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죠. 사족을 덧붙인다면, 불교의 상징인 만( 卍 )자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와 구조상 거의 동일한데 이것 역시 아리안족의 이동에 서 비롯된 일이라고 봅니다. 만자 또는 갈고리 십자가는 고대 아리안족들이 행운과 빛의 상징으로 즐겨 사용했던 도식이라고 합니다. 좀, 비약을 하자면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너무 황당하다고요? 하지만, 이란의 북동부 지방에 살던, 북유럽인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소녀의 사진이 얼마 전에 공 개되었죠? 인도에도 백인들과 거의 같은 외모를 가진 '화이트 인디안(하얀 인도인)'이라는 집단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인과 유럽인의 기원이 같다는 원리는 이미 고고학계에서는 정설로 굳어졌더군요.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영 어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무척 놀라운 일이죠.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뿐 아니라 고대 서양에서도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믿음은 폭넓게 존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기 4세 기 이후, 기독교가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점차 사라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생이나 환생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에게는 오직 한 번의 삶만이 주어진다고 가르치니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호응을 얻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은 어쩌면 서구인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돌아가려 는 귀소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50

51 14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2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1 아직 올림픽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 때에, 이런 글을 올리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 생각을 한 번 적어 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2008년 올림픽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는 존 티토의 예언은 말짱 구라가 되었고, 이번 경기에서 종합 1위를 한 중국은 당장에라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 고 있으며, 7위를 기록한 한국의 정부 인사들도 한국이 세계 7대 강국이 되었다고 자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그런 종류의 호들갑에 대해서 씁쓸한 웃음만 짓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치른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경우를 봅시다. 그 때, 종합 1위는 132개의 메달을 따냈던 구소련이었고, 그 다음을 102개의 메달을 따낸 동독이 차지했으며, 자유 세계의 맹주이자 소련의 라이벌이던 미국은 3위였습니다. 주최국인 한국은 4위였고, 문화와 예 술의 나라라고 자처하던 프랑스는 9위였으며, 일본은 14위였습니다. 그런데 88서울 올림픽에서 종합 1위를 기록한 소련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91년, 경제난에 시달린 끝에 붕괴되어 15개의 나라로 산 산히 찢어지고 무려 10년이 넘게 경제 빈국으로 전락해야 했습니다. 소련에 이어 2위에 오른 동독은 어떻습니까? 2년 후인 1990년, 서독에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8월 2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올림픽 7위를 한 것은 한국이 세계 7대 강국으로 도약한 증거라고 공식 논평 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대로라면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구소련과 동독은 미국보다 훨씬 강한 강대국이었 다는 말입니까? 당시 4위를 차지한 한국은 14위를 기록한 일본을 능가한 선진국이었나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의 정신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올림픽에 못지 않은 국제적 스포츠인 월드컵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제까지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나라는 브라질입 니다. 반면, 미국은 아직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5번을 우승한 브라질은 미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 고 강력한 나라일까요? 2002년,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 월드컵도 그렇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예상을 뒤엎고 4강에 진출하자, 국내외 언론들은 당 장이라도 한국이 세계 4대 강국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고 나자 어떻게 되었나요? 한국 이 선진국의 대열에 오르고, 국내외에 산적한 실업 및 고물가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1달 간의 흥분과 열기에 가 리워졌던 일상 속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열정의 끝에 남은 것은 텅 빈 공허함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스포츠 경기에서 미국이나 일본 및 다른 나라들을 이긴다고 한국이 그들 나라보다 더 잘살고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 은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가요? -_-;) 그런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합니다.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2

53 전 세계에서 올림픽 이상의 지명도를 가진 월드컵에 단골로 우승을 차지하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국가들을 보십시오. 그 나라들 이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군사 독재와 불안한 치안, 극심한 빈부 격차에 시달리며 대부분의 국민들이 불행하게 살고 있는 형편입니다. 멕시코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1986년에 이미 월드컵을 개최했지만, 월드컵을 치르는 데 돈을 너무 많이 쏟아붇는 바람에 월드컵이 끝나자 물가가 치솟고 재정 적자가 발생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번에 올림픽 1위를 차지한 중국은 언론 매체를 동원해 "중국은 군사 분야를 제외한 경제, 문화, 외교 및 모든 분야에서 미국 과 맞먹는 초강대국이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마치 올림픽 1위를 했으니 당장이라도 세계 최강대국이 된 것처럼 굴 고 있지요. (드디어 끝난 2008 베이징 올림픽, 그러나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올림픽으로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시선 에서 가리워진 것 뿐...)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요란한 보도에 가리워져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중국 상하이의 주가 지수는 올림픽 을 치르기 이전보다 더욱 떨어졌습니다. 또한, 중국에 투자된 핫머니들도 속속 빠져나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동안 중국이 주도하고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3

54 있던 저임금 노동집약적 산업들도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면서, 서서히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보도된 뉴스를 보니, 장난감이나 봉제를 만드는 중국의 공장들 중 많은 곳이 폐업을 했고, 중국 부동산의 사정도 악화되어 많은 부동산 회사들이 지점을 폐쇄했다고 합니다. 마치 일본이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불경기에 접어들었듯, 중국도 더 이상 고도의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스포츠 경기는 물론 재미있고 신이 납니다. 일상 생활에서 느꼈던 온갖 스트레스들이 시원한 홈런과 골인 한 방에 깨끗이 날아갑니 다. 하지만 그런 통쾌함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스포츠 경기로 먹고 사는 운동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스포츠 경기가 어떻게 끝나든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 다.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물가나 기름 값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부에서 세금을 깎아주지도 않습니다. 한국이 국제 스포츠 시합에서 1등을 한다고 세계 최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꼴찌를 한다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못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저는 강조합니다. 덧붙여, 한국이 올림픽에서 7위를 했으니 747 공약이 달성되고 세계 7대 강국의 반열에 올라간 것이라고 공식 논평을 했던 홍준표 의원과 그 말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에게 탄식과 절망의 한숨을 보내는 바입니다.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4

55 15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56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21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번역한 것을 모아서 한글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혹시 문제가 된다 면 자삭하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56

57 16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58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09 대장금( 大 長 今 ). 2003년과 2004년에 방송되어 오랜만에 '국민 드라마'라는 칭송까지 얻으며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과 중국, 대만과 이 란까지 수출되어 '드라마 한류'를 불러일으키까지 한 명작이었습니다. 대장금의 중심 인물은 수랏간 숙수이자 의녀인 '장금'인데, 이 장금의 실존 여부를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금이란 인물 자체가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이다.", "제작진에서 전부 허구로 꾸며낸 가짜다. 세상에, 남녀 차별이 제일 심했던 조선 시대에 어떻게 여 자가 왕의 주치의가 될 수 있겠느냐?", "있지도 않은 가짜 인물을 그럴싸하게 꾸며내어 진짜인 것처럼 굴다니", "한의학같은 사이비 가짜 의학을 무슨 신비의 의학으로 포장한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극치"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일변도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대장금(장금)이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 인물인지, 아니면 실존했던 인물인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왕조 실록의 중종실록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58

59 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 正 德 ) 10년) 3월 21일(무인) 1번째기사 헌부에서 선 교 양종의 위전을 추쇄하도록 아뢰다 전교하였다,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 醫 藥 )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 書 吏 )에 속하게 함 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 醫 女 )인 장금( 長 今 )은 호 산( 護 産 )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 大 故 )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 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 杖 刑 )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 兩 端 ) 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 장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처음 실록에 보이는 것은 중종 10년인 1515년 3월 21일 기사에서입니다. 보시다시피 장금은 엄 연한 의녀( 醫 女 )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표기됩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을 의녀로 설정했던 것이 현실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죠. 조선 시대라고 해서 여자가 의원이 될 수 없던 것도 아니고, 왕을 치료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 嘉 靖 ) 1년) 9월 5일(무신) 1번째기사 대비의 병세가 나아지자 약방들에게 상을 주다 대비전( 大 妃 殿 )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 藥 房 )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제조( 提 調 ) 김전( 金 詮 ) 장순손( 張 順 孫 )과 승지 조순( 趙 舜 )에게는 말안장 20부( 部 ) 활 1정( 丁 ) 전죽( 箭 竹 ) 1부( 部 ), 의원 하종해( 河 宗 海 )에게는 말 한 필과 쌀 콩 각 10석, 김순몽 ( 金 順 蒙 )에게는 말 1필, 의녀 신비( 信 非 )와 장금( 長 今 )에게는 각각 쌀 콩 각 10석씩을 주고, 내관( 內 官 ) 반감( 飯 監 ) 별감( 別 監 )에게 도 모두 하사가 있었다. - 여기서 의녀 장금은 쌀과 콩 10석을 상으로 받습니다. 아마,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진 것에 따른 포상이던가, 그렇지 않으면 적어 도 대비의 병세의 호전에 뭔가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중종 52권, 19년(1524 갑신 / 명 가정( 嘉 靖 ) 3년) 12월 15일(을사) 2번째기사 의술에 대한 권과 의녀의 요식 등에 대해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백공( 百 工 )의 기예( 技 藝 )는 다 부족하여서는 안되고 권과 절목( 勸 課 節 目 )이 상세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다만 각사( 各 司 )의 관원 이 힘을 다하여 권과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성효( 成 効 )가 없다. 그 가운데에서도 의술( 醫 術 )은 더욱 큰일인데 각별히 권과하지 않으 니, 지금 그 기술을 조금 아는 자는 다 성종조( 成 宗 朝 )에서 가르쳐 기른 자인데, 이제는 그 권과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 醫 司 )에 물어서 아뢰라. 또 의녀( 醫 女 )의 요식( 料 食 )12682) 에는 전체아( 全 遞 兒 )12683) 가 있고 반체아( 半 遞 兒 )가 있는데, 요즈음 전체아 에 빈 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 大 長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59

60 今 )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 大 內 )에 출입하며 간병( 看 病 )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요식( 料 食 ) : 급료. 전체아( 全 遞 兒 ) : 상시 근무하고 급료의 전부를 받는 체아. 체아는 현직( 現 職 )의 자리에 있지 않은 자에게 급료를 주거나 대우하기 위 하여 두는 직역( 職 役 )인데, 체아직을 두는 경우는 매우 많아서 자세히 논할 수 없으나, 대개 실직( 實 職 )에서 떠나 다음 실직을 받을 때까지 녹을 주기 위한 경우, 실무는 있으나 현직의 자리가 없는 자에게 녹을 주기 위한 경우, 실무도 녹도 없이 대우만을 위한 경 우, 임시로 직함을 지닐 필요가 있을 경우 등이 있다. 여기서부터 장금은 대장금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대( 大 )라는 호칭이 장금의 의술을 높이사서 붙여지게 된 것인지, 어떤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설정되었죠) 그러나 본문의 대장금과 장금은 결코 동명이인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래의 기사들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 嘉 靖 ) 12년) 2월 11일(갑신) 1번째기사 약방 제조와 의원들을 상주다 전교하였다. 내가 여러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의녀( 醫 女 ) 대장금( 大 長 今 )과 계금( 戒 今 )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 官 木 綿 )과 정포( 正 布 )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장금(대장금)은 여전히 의녀로 불리며, 중종의 병이 회복되자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받는 포상을 얻습니다 중종 101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월 29일(무진) 1번째기사 내의원 제조에게 감기약을 의논하라고 이르고 중화의 주물도 멈추라고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내가 접때 감기가 들어 해수증( 咳 嗽 症 )을 얻어서 오래 시사( 視 事 )하지 못하였다. 조금 나아서 경연( 經 筵 )을 열었더니, 그날 마침 추워서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의원( 醫 員 ) 박세거( 朴 世 擧 )와 홍침( 洪 沈 ) 및 내의녀( 內 醫 女 ) 대장금( 大 長 今 )과 은비( 銀 非 ) 등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이미 하유( 下 諭 )하였거니와, 이 뜻을 내의원 제조에게 이르라." - 중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의녀 대장금은 왕명으로 다른 의원과 의녀들과 함께 약을 제조하게 됩니다.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0

61 중종 102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2월 9일(무인) 1번째기사 내의원 제조와 의원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다 전교하였다. 내의원 제조 윤은보( 尹 殷 輔 )와 정순붕( 鄭 順 朋 )에게 각각 숙마( 熟 馬 ) 1필씩을 하사하고 도승지 이해( 李 瀣 ), 의원 박세거( 朴 世 擧 ) 홍침( 洪 沈 )에게는 모두 가자( 加 資 )하고, 유지번( 柳 之 蕃 ) 한순경( 韓 順 敬 )에게는 아마( 兒 馬 ) 각 1필씩, 의녀 대장금( 大 長 今 )에게는 쌀과 콩을 도합 5석( 石 ), 은비( 銀 非 )에게는 쌀과 콩 3석을 하사하고 탕약 사령( 湯 藥 使 令 )들에게는 관고( 官 庫 )의 목면 2필씩을 지급하라. - 의녀 대장금은 왕으로부터 쌀과 콩을 5석 씩 포상으로 받습니다 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0월 25일(경인) 3번째기사 의녀와 의원이 왕의 병세에 대하여 말하다 의정부 중추부 육조 한성부의 당상 및 대사헌 정순붕 등이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날 의녀 장금( 長 今 )이 나와서 말하 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 三 更 )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 고 했다. - 대장금이라고 불리던 것을 여기서는 장금이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기사 내용으로 보건데, 의녀 대장금과 내 의녀 대장금, 혹은 의녀 장금이 다른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기사에서 의녀 장금은 이제 직접 중종의 병세를 진찰하고 그것을 조정 대신들에 말하는 역할까지 맡습니다. 그만큼 장금이 왕의 병세의 진찰에서 맡고 있는 비중이 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0월 26일(신묘) 1번째기사 정원이 문안하자 병세에 대하여 답을 내리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전교하기를,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여의 장금( 女 醫 長 今 )의 말이 지난 밤에 오령산을 달여 들였더니 두 번 복용하시고 삼경에 잠이 드 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깐 통했으나 대변은 전과 같이 통하지 않아 오늘 아침 처음으로 밀정( 蜜 釘 )을 썼습니다. 하였다. - 저번 기사와 마찬가지로 의녀 장금은 계속 왕을 진찰하며 상태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1

62 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0월 29일(갑오) 1번째기사 상의 병환에 하기가 비로소 통하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정원이 문안을 드리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략) 아침에 의녀 장금( 長 今 )이 내전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 를,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 장금이라는 인물이 실록에 보이는 것이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아마 장금은 중종의 진찰을 마친 후, 사망한 듯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사들로 보건데, 조선 중종 무렵에 의녀 장금(혹은 대장금)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녀가 임 금인 중종을 직접 진료하며 병세를 관찰하고 약을 지으며 치료의 역할을 맡았던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물론, 드라마 대장금의 초반부에서 나왔던 수랏간 숙수(요리사)라든지, 장금이 직접 음식을 만들거나 혹은 수랏간의 책임자 자리를 두고 동료들과 경쟁을 벌인다든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든가 하는 설정은 모두 제작진들이 극중 흥미를 위해 꾸며낸 허구입니다. 여하튼, 장금이라는 여의는 분명히 실존인물이니, 괜히 쓸데없는 비하는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2

63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3

64 17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65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59 1. 고유문자 못가진 문화 콤플렉스(일본어 폐지론과 그 후) 자료 : 경향신문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시리즈 22편) 년대 불완전한 국어(일본어-편집자 주)에 반기 - 당시 원로 문인들 "프랑스어 쓰자" 제안 세계에서 관찰되고 기록된 언어만도 2,797종을 헤아리나 문자는 약 50종 뿐이며 현재 통용되고 있는 문자는 10여종에 지나지 않는 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라비아 문자가 두루 쓰이고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로마문자, 희랍정교를 수용한 슬라브문화권에서는 희랍 문자를 손질하여 만든 키릴문자가 널리 쓰이고 있듯 일반적으로 한 문화권에서는 한 문자가 통용된다. 그러기에 고유 문자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은 크다. 한국처럼 한 민족이 한문자(한글)을 쓰고 있는 것은 단일 민족이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구체적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말은 한자와 한자에서 빌려 만든 '가나'문자를 섞어서 표기한다. 콜럼부스의 신대륙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최하고 있는 1992년 만국박람회(4.20~10.12) 일본관의 전시테마 가운데 하나는 '외래문화의 흡수와 일본화'인데, 중국문자인 한자 ( 眞 名 )을 50음도로 정리된 가나( 假 名 ) 문자로 변형시켜 쓰고 잇는 것을 외래문화를 소화하여 일본의 독자적 문화로 가꾼 대표적 예로 다루고 있다. 경제대국으로 세계에 군림하게 된 일본은 이제 한자를 약식화한 가나문자를 '외래문화의 일본화'로 자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 었으나 일본 스스로의 고유문자가 없다는 것은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에게 오래전부터 참을 수 없는 문화적 콤플렉스였다. 18세기 에도 중기 이후 국학이 진흥되면서 한자 도래이전 상고시대 때부터 일본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일었던 것은 그 콤플렉스의 발로일 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히부미( 日 文 )로 일컬어지는 '신대문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면 한자를 애써 가나문자로 둔갑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 훈독 두갈래의 한자와 가타( 片 )가나, 히라( 平 )가나를 섞어서 표기하는 번거로움은 명치유신을 거쳐 유럽의 기계문명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게 되면서 한자폐지론, 로마자 전용론, 일본어 폐지론으로까지 번졌다. 1872년, 주미공사 모리 아리노리( 森 有 禮 : 훗날 문부경=교육부장관)가 "일본은 무역입국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세계 무역을 주름잡 고 있는 영어국민의 말을 국어로 채용하지 않고서는 일본문명의 진보는 불가능하다"며 영어위방어지론( 英 語 爲 邦 語 之 論 )을 편 것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65

66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1890년 중의원 의원으로 첫 당선된 뒤 25회 연속으로 당선됐던 대표적 의회정치인 오자키 이쿠오( 尾 崎 行 雄 )도 전후에 이르러 한자 망국론을 펴면서 영어나 에스페란토어를 제2국어로 채용할 것을 거듭 주장했다. 정치인뿐만이 아니다. 패전 직후인 1946년 일보의 대표적 문호로 추앙 받았던 시가 나오야( 志 賀 直 哉 )는 "일본의 국어처럼 불완전하 고 불편한 것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장래 일본이 진정한 문화국가가 될 수 있는 희망은 없다"면서 프랑스어를 국어로 채용할 것을 월간지 개조( 改 造 ) 4월호에 기고하여 일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엔지니어 분야의 인사가 나름대로 효율론을 들어 자국어 폐지론은 펴더라도 이를 말려야 할 입장인 정치인이나 작가가 오히려 앞 장서서 일본어 폐지론을 폈던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에 관해 언어사회학자 스즈키 다카오( 鈴 木 孝 夫, 65) 게이오 대학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슬람, 인도, 중국 등 오래된 문명은 설혹 영양실조(물질부족)로 육체는 보잘 것 없이 되더라도 넋을 파는 일은 없다. 그런데 독자적인 문명(넋)을 가꾸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그때 그때 앞서가고 있는 외국문명을 마치 자동차의 부품이라도 바꾸듯 들여왔던 일본에서는 극단적으로는 말 을 바꿔 갖자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은 부품교환형 문명, 장기( 臟 器 )이식형 문명이기 때문에 자국어 폐지론도 나오는 반면 정신적으로는 '스스로의 식민지화(Auto Colonization)도 마다하지 않고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한때 일본의 일부지식인들이 폐지를 주장했던 일본어 학습열이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국제교류기금 일본어 국제 센터가 최근 발 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본 밖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은 981,000명(1990년)이며, 1979년 조사이래 10년 사이에 약 8배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강범석 아주 본부장]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66

67 18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68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40 임진왜란 동안에 가장 유명세를 얻은 의병장은 곽재우나 김덕령이지만, 이룩한 전과로 따진다면 나는 단연 함경도 를 일본군의 손에서 되찾아낸 정문부를 꼽고 싶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 2번대와 매국노 국경인의 수작으로 함경도는 한 때 도의 대부분이 일본군의 수 중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북평사 정문부의 탁월한 의병 전쟁으로 인해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국 토와 백성을 지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 중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진 20,800명은 한양에 입성한 후, 진로를 동북 방향으로 돌려 강원도를 순식간에 석권하고 함경도로 북상해 오기 시작했다. 가토는 6월 1일, 함경도와 강원도의 길목인 철령을 거치면서 우리는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너희들을 잘 살게 해 주겠다. 항복하는 주민들은 결코 해치지 않으니, 안심하고 나와 우리를 맞으라. 하고 외치며 통행증을 뿌렸다. 무섭 게만 여겨지던 일본군이 뜻밖에도 난폭 행위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함경도 백성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나라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적군의 앞잡이로 돌변했다. 가뜩이나 함경도 주민들은 추운 날씨와 여진족의 잦은 침입에 중앙 정부로부터 고위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차별 대우를 받아 조선 왕조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던 터였다. 여기에 함경도로 피신을 온 두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이 주민들을 상대로 식량과 옷가지를 빼앗는 등의 행패를 부리자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이 들어와 위민 정책을 펴자 함경도 주민들은 억눌려 왔던 불만을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함경도를 지키고 있던 남병사 이혼과 병마절도사 한극함은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은데다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일패도지했다. 이혼은 달아났다가 일본군과 내통한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 고, 한극함은 여진족의 영토로 넘어 갔으나 도로 그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감사 유영립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도망쳤으나 역시 친일 반역자들에게 생포당해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었다. 외적의 침입을 당한 함경도는 이처럼 자중지란을 맞아 붕괴되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켜줄 군대도 없어지고 주민들이 적개심을 품고 반민 행위를 일삼자 겁에 질린 임해군과 순화군은 국경 의 끝인 회령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회령의 아전 국경인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함경도 백성들의 민심이 조선 왕조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았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68

69 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숙부 국세필과 짜고서 회령의 군사들과 무뢰배들을 선동하여 두 왕자를 붙잡아 일 본군에 넘기는 경천동지할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순변사 이영( 李 瑛 )과 부사 문몽원( 文 夢 轅 )이 이 일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국경인이 그 사실을 미리 입수하고 부하들 을 보내 군관들을 죽이자 겁이 난 그들은 달아나 버렸다. 왕자 일행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대가로 국경인은 가토로부터 판형사제북로( 判 刑 使 制 北 路 )라는 관직을 받았고 그의 숙부인 국세필과 다른 일당들도 허울뿐인 벼슬을 얻어 의기양양했다. 이렇게 해서 여진족과 마주한 함경도 북방 최전선인 회령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여러 진( 鎭 )과 보( 堡 )의 토병( 土 兵 )과 호수( 豪 首 )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일본군은 함경도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부분의 성과 마을을 점령하게 된 셈이었다. 이대로 일본군과 반민들의 손에 계속 지배될 것 만 같았던 함경도의 상황은 그러나 얼마 못가 급변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올 터인데, 그럼 왜군을 도운 함경도는 역적의 소굴로 간주되어 토벌을 당한 다! 라는 소문이 퍼졌으며,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쪽에서도 식량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함경도 백성들을 상대 로 양식과 옷을 빼앗고 반항하는 백성들을 가차 없이 죽이자 일본군에 보여주었던 백성들의 인심이 점차 차갑게 얼 어붙고 있었다. 이 무렵 정문부는 일본군과 반역자들을 피해 자신의 제자인 교생 지달원의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지달원의 집은 경성의 가장 외진 해변 가에 있어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한동안 몸을 피한 채,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던 정문부는 일본군에 대한 주민들의 심기가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조 정에서 명군을 끌어들여 일대 반격을 하려 한다는 조짐을 파악하자 지금이 바로 일어설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제자 지달원과 최배천 등과 함께 은밀히 뜻있는 선비들과 무사들을 규합했다. 수백 명의 함경도 지방 군사들 과 선비, 무사들이 모였고 그들은 정문부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는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를 선봉에 내세우고 즉시 부성( 府 城 )에 이르렀다. 부성은 국 경인의 숙부인 국세필이 다스리고 있었다. 정문부가 강문우를 보내 관북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항 복하면 살려두겠지만, 저항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라고 위협하자 국세필은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였다. 정문부는 크고 작은 병사와 백성들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는 명령을 내렸고 국세필에게 그대로 예 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아마 일단 국세필 일당들을 안심시켜 놓은 뒤에, 부성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들을 더 모으고 그렇게 해서 세력을 탄탄히 다진 다음 국세필 일당들을 제거하려 했던 계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69

70 부성을 제압한 정문부는 각 성읍에 격문을 퍼뜨렸다. 그것을 본 종성( 鍾 城 )의 무사 김사주와 경성인 오박 등이 병사 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종성 부사 정현룡과 경원 부사 오응태, 경흥 부사 나정언과 고령 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 등은 산 속에 숨어 대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와서 모였다. 이렇게 해서 함경도 의병들의 수는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의병 중에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들을 뽑아 선봉대를 조직 했고 이를 유경천이 거느렸다. 길주에 주둔한 일본군이 이 소식을 듣고 1백 명의 군사를 보내 성의 서쪽에 와서 정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강문우 가 선봉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자 남은 왜병들은 달아났다. 일본군 일단의 병력을 격퇴시키자 의병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부성의 백성들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각 지휘관 들은 군사를 출동시킬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과 내통했던 국세필 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 일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애당초 왜적과 내통해 역모를 하 는데 앞장선 자들은 이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성 안 사람들은 안심하라. 하고 말하니, 많은 사람들 이 기뻐하였다. 일본과 내통한 수천 명의 백성들을 전부 처벌하려 했다가는 심한 반발을 사고 폭동이 일어날 우려도 있었다. 최소한의 처벌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문부의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일이라고 봐 야 한다. 국세필 일당을 처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국경인 차례였다. 정문부는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수천의 의병들이 정 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곧 함경도는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 라고 외쳤다. 이 격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글을 읽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은 동료 유생들과 군사들을 모아 국경인이 사는 집 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국경인을 신세준과 다른 유생들이 참살하였 고, 이로써 함경도 제일의 반역자는 숙부와 함께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국경인의 사망으로 많은 성과 요새들을 의병들이 접수했으며 다른 반역자들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달아났다. 하지만 아직 함경도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정문부는 의병을 둘러 나누어 한 쪽은 고참역( 古 站 驛 )으로, 다른 한 쪽은 명천( 明 川 )으로 보내 일본군과 내통했던 정말수를 죽이고 성을 되찾게 하였다. 그러자 부성에 군사를 보냈다 패한 길주의 일본군이 다시 성 밖으로 나왔고, 그 중 하나가 명천의 해창( 海 倉 )으로 향했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0

71 일본군은 길주성의 동쪽에 있는 장덕산( 長 德 山 ) 밑에 이르렀으나 이미 길주의 남쪽 마을에 함경도 의병들이 매복해 있었다. 의병들이 먼저 산 위를 차지하자 일본군은 조총을 쏘아대며 서둘러 산을 오르려 했다. 이 때 유경천이 기병 대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가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와 동시에 고경민이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대 포를 쏘며 병사들을 돌진시키자 일본군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황급히 퇴각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의병들이 추격하였다. 그들은 계곡을 겹겹이 에워싸고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그날 밤,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심해 일본군 대부분이 동상에 걸리고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의병들도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함경도에서 살아오면서 추위에 익숙해진 형편이었는데 반해, 일본군 대 부분은 따뜻한 남쪽 지방 출신이어서 추위에 더욱 약했다. 아침이 되자 의병들은 포위망을 열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 급습을 감행했다. 이미 일본군 중 적지 않은 병사들이 손 발이 부르트고 쓰러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6백 명의 일본군이 죽임을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 은 자들은 길주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감히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문부가 의병 본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쏘아댔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아군 의 피해도 커질 것 같아 정문부는 일단 물러나고, 그들을 더욱 추위에 떨게 만들어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으로 성의 땔감 공급로를 차단했다. 이 때, 일본군 한 부대가 마천령( 摩 天 嶺 ) 아래 영동관 책성( 嶺 東 館 柵 城 )에 주둔하면서 임명촌( 臨 溟 村 )을 불태우고 노 략질 하자 정문부는 의병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양측 군대는 쌍포( 雙 捕 )에서 전투하였는데 수와 기세에서 밀린 일 본군이 패주하자 의병들이 추격하면서 적병 60명을 참살했다. 패배한 일본군은 책성으로 퇴각해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오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해가 바뀐 1593년 1월 1일, 마침내 길주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이 성을 비워놓고 후퇴했다. 의병들이 포위가 계속되 자 성 안의 일본군은 불을 피울 장작과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어 민가를 뜯어서 땔나무로 쓰는 등 그 형세가 점점 궁 색해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수한 것이다. 길주성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이 두려워 밤중에 도주하였으나 그조차 여의치 않아 조선 의병들이 쫓아오자 정신 없이 패주하여 황급히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가면서 일본군은 단천과 이성( 利 城 ) 등 주변 고을들을 모 두 불태웠고, 약탈하였다. 이로써 1592년 12월, 길주성을 접수한 정문부는 북으로 육진( 六 鎭 )을 순행하면서 반역자들 을 찾아내 처형하고 여진족과 교섭하여 그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요새를 수복하여 장교들을 파견 해 굳게 지키게 한 후, 해가 바뀐 1593년 1월 13일 길주로 돌아왔다. 한편 안변에 머무르던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면서 내가 다시 함경도를 평정 하겠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1

72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 부대가 전진해 오자, 단천 군수( 端 川 郡 守 ) 강찬( 姜 燦 )은 정문부에게 군사를 보내어 함께 싸우자고 요청했다. 정문부는 그의 전언을 듣고 정예 기병 2백 명을 4대로 나누어, 1대장은 훈련 정( 訓 鍊 正 ) 구황, 2 대장은 훈련 첨정( 訓 鍊 僉 正 ) 박은주, 3대장은 훈련 판관( 川 鍊 判 官 ) 정원침, 4대장은 훈련 판관 고경민이 각기 50명씩 을 거느리고 1593년 1월 20일에 산길로 단천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4대의 군사를 단천성 밖 20리쯤 되는 지점에 숨기고 단천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성 밖 4리 가량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여 도전케 하니 성안에 머물던 적들은 2백여 명이 일시에 성을 나와 곧바로 진격해왔다. 단천 군사들이 패하는 체하면서 되돌아 달아날 즈음 피로한 말을 탄 두 병졸이 적에게 살해되자 적은 더욱 기세등 등해 추격해 왔다. 일본군이 조선 의병들이 잠복한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4대의 복병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정면 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면서 화살을 비 오듯이 퍼붓자, 왜적은 갑자기 튀어 나온 기병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총을 마구 쏘아 댔으나 당황한 중에 쏘는 것이라 모두 빗나갔다.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은 도망가기에 겨를이 없어 감히 조선 의병에게 덤비지 못했다. 조선군이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이르자 일본군은 거의 사살되고 겨우 30여 명이 남았는데 그것도 태반은 화살에 맞 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 때 죽인 적의 수효는 적어도 백여 명은 되며, 싸우면서 간 거리는 2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본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가토의 본대에 앞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척후대를 유 경천이 만나 수십 명을 참살하자 가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으므로 유경천은 급히 후퇴했다. 소수의 기병으로 족히 수천이 넘는 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정문부는 3천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동책( 嶺 東 柵 ) 외곽에서 그 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 세 번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적에서 불리한 의병들이 일단 경성으로 후퇴하여 농성전의 태세 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본군 쪽에서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혹독한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 상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밤에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철수했다. 정문부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빠른 경기병 부대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지만 가토가 이미 안변( 安 邊 )으로 들어가 버려 잡을 수 없었다. 안변성에 도착한 가토는 의병들의 공격보다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군량과 보급 물자들이 다 바닥이 났던 것 이다. 남쪽의 후방에서는 의병들의 연이은 봉기로 인해 보급로가 차단당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은 극심한 추위와 굶 주림에 시달리며 겨울을 보내야 했다. 결국 1593년 2월 1일, 가토는 안변에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이로써 함경도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것이 약 8개월에 걸친 북관대첩 의 진상이었다. 백성의 손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항일 의병은 그 후 병자호란과 구한말 일제의 국권 강탈에 맞선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이어진다. 국란을 맞아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외적과 싸워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 한 의병 전쟁은 민중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2

73 들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힘을 깨닫게 한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3

74 19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75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37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의병장으로 홍계남( 洪 季 男 )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수원 출생으로 충의위( 忠 義 衛 )를 지낸 홍자수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임란을 앞둔 3년 전인 1590년, 군관의 자격으로 김성일과 황윤길이 이끄는 통신사에 소속되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때 홍계남은 일본인들 앞에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보였는데 그 솜씨가 출중하여 보는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홍계남은 이일과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두 장수가 탄금대에서 대패하고 신립이 자결하자, 홍계남은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여러 이복형제들과 함께 의병들을 모집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싸웠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의병 부대에 연락을 하기 위해 떠난 사이, 부친인 홍자수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홍계남을 유인해 죽이기 위해 부친인 홍자수의 시신을 성벽에 매달아 놓는 반인륜적인 계략을 꾸 몄다. 부친의 죽음을 안 홍계남이 안성으로 달려가자 일본군들은 홍자수의 시체를 성 밖으로 내던지고 그를 죽이기 위해 성에서 나왔으나, 홍계남은 부친의 시신을 안고 말을 달려 무사히 빠져나갔다. 홍계남은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병 부대를 총괄하게 되었고 이에 다른 이복형들도 반발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 를 따랐다. 서자를 천시하던 조선 시대의 풍습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이색적인 일이다. 그가 이끌던 의병은 약 1백여 명에 불과했으나, 소수의 인원이라는 점을 최대한 살려 날랜 기병 부대로 일본군을 기습하며 적의 후방과 보급로를 노리는 전술로 번번이 큰 공로를 세웠다. <선조실록>에서는 그의 용맹이 군중에서 제 일 뛰어났고 일본군을 많이 살해하여 홍계남의 이름만 들어도 그들이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그의 무훈을 인정하여 1592년 9월 11일, 수원 판관에 제수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홍계남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다른 의병장인 이빈과 선거이, 송대빈과 연합하여 남원과 진주, 경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공을 올렸다. 그 해 6월 6일에는 용인 지방에서 일본군을 만나 58명을 참살하는 전과 를 거두기도 했다.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75

76 6월 29일에 있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홍계남도 참전하여 일본군을 치려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가진 병력 이 너무 작아 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진주성이 이미 함락된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다만, 그는 휘하 의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영( 嶺 )을 내려가다가 일본군의 선봉 부대를 만나 분투하여 구례와 광양에서 그들을 격퇴시켰다고 한 다. 홍계남 의병 부대는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군사를 구해내기도 했다. 11월 2일, 안강( 安 康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 나라 장수 오유충( 吳 惟 忠 )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 복병을 설치하려 가다가 일본군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여 뜻하지 않게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 군사들은 양가죽으로 만든 긴 옷을 입어서 행동이 민첩하지 못해 일본군과 의 육박전에서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 때, 마침 홍계남의 부대가 나타나 일본군 병사들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혀 가던 명나라 군사 70여 명을 구출해냈다. 1594년 이후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홍계남은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이지 못한다. 단지 조정에서 그의 가 족에게 식량을 지급하고 그에게 좋은 말을 내려주거나 포( 布 )를 내려 준다는 간략한 기사만이 보인다. 홍계남의 최후는 확실치 않다. 다만 1597년 1월 24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이 때 홍계남이 권응수, 김태허 같은 다 른 의병장들과 부산 산성( 釜 山 山 城 )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이며, 5월 3일자 기사에 홍계남이 세운 전공에 따 라 죽은 뒤에 내리는 증직( 贈 職 )을 더하게 하고 그의 늙은 어머니에게 매달 요미( 料 米 )를 내리게 하자는 논의가 나타 난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홍계남은 부산 산성을 치는 공방전을 벌이던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과의 전투에 서 전사했다면 으레 기록이 남을 텐데 그런 언급도 없으니, 아마 병으로 죽은 듯하다. 홍계남의 죽음에 대해 실록을 적는 사관은 홍계남은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 고 우뚝이 충청도의 한쪽 보루가 되었다. 그가 과감히 보인 용맹과 적개심에 불타 왜적을 막은 공로가 어찌 저 한 몸 만을 온전히 하고 처자식을 보전시킨 신하들과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겠는가? 라고 그의 용맹과 전공을 극찬 하였다. 선조 임금도 그의 공적을 인정하며 증직을 해야 마땅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76

77 20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78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58 <미션 임파서블>로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 배우 톰 크루즈는 영화사와 마찰을 빚어 한 때, 영화사와의 계약 연장에 실패할 위기까지 초래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사이비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Scientology)의 열렬한 신도이며, 인터뷰나 기자 회견을 할 때마다 사이언톨로지를 반드시 믿으라는 장황설을 늘어 놓아 평판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 벨기에의 법원은 사이언톨로지를 범죄 집단으로 규정해, 톰 크루즈는 잘못하면 범죄자로 몰릴 우려까지 있다 고 합니다. 이밖에도 미국의 연방 법원은 사이언톨로지 신도 9명에게 강도와 위조, 불법침입, 사법 방해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톰 크루즈의 최신작 <발키리>도 촬영에 많은 지장이 있었는데, 사이언톨로지는 독일에서 불법화된 종교 단체라서 독일 정부가 톰 크루즈에게 자국 안에서 촬영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오랫동안 거 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이언톨로지는 어떤 종교이길래 세계 각국의 정부로부터 위험한 단체로 분류를 받고 있을까요? 사이언톨로지는 시작부터가 참 이상한 종교인데, 우선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은 SF 소설가인 L. 론 하버드(Ron. Hubbard)였습니다. 론 하버드는 오컬트 단체인 캘리포니아 아가페 지부의 회원이었는데, 같은 지부의 회원이자 친구 인 로켓 과학자 잭 화이트사이드 파슨스의 돈 5만 달러와 그의 애인을 빼앗아 도망치고 사이언톨로지 교단을 창시했 습니다. 로켓 과학자가 어떻게 오컬트 단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아이작 뉴턴을 비롯하여 암암리에 오컬트와 마법을 신봉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론 하버드가 만든 사이언톨로지는 그의 취향인 SF와 외계인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종교의 핵심 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7천 5백만 년 전, 포악한 우주의 독재자 '제누'에게 쫓겨나 지구로 도 망쳤다가 핵폭탄 공격을 받고 화산 속으로 숨은 테탄(thetan)이라는 외계인의 유전자를 받은 집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교리를 들으려면 교단에 입교해서 12만에서 15만 달러 가량의 돈을 내야 합니다. 최소한 1억 원 이상을 교단에 바쳐야 교리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교리의 핵심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종교들이 많은데, 뭔가 좀 이상하군요. 사이언톨로지에 처음 입교하면 우선 '오디팅'이라는 수업을 거친 후, '정화'의 단계를 거쳐 오퍼레이팅 테탄의 단계 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오디팅을 한 번 더 끝내고 나면 텔레파시 같은 영적인 능력도 얻게 된다는데, 정말로 그 런 능력을 얻은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78

79 수많은 논란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이언톨로지는 전 세계적으로 8백 만이나 되는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으 며, 그 중에는 앞서 언급한 톰 크루즈를 비롯하여 제니퍼 로페즈, 존 트라볼타, 윌 스미스 같은 헐리우드의 유명 스타 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79

80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80

81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81

82 21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3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13 일찍이 공산주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종교를 가리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마약 같은 것. 이라 고 혹평한 바 있다. 비단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이비 종교로 인한 폐해는 어떤 강력 범죄보다 끔 찍하다. 사이비 교주를 신처럼 모시고 살다가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숱한 여성들은 성폭행까지 당한다. 게다가 잘못해서 교주의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렵다. 마르크스가 활동했던 시대보다 2백 년 뒤인 지금의 한국에서도 사이비 종교들은 엄연히 존재하며 사회와 국민들에게 무수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에서 이런 사이비 종교들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 까? 암울한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 한 사이비 종교와 교주의 죽음은 온 한반도를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 다. 교주가 수백 명이 넘는 신도들을 잔혹하게 살해해 암매장하고 여신도들을 겁탈하다 경찰의 수사를 받 게 되자 끝내 자살하고 만 백백교( 白 白 敎 ) 사건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라 할 만 하다. 백백교는 전정운( 全 廷 雲 )에 의해 창시된 사이비 종교 백도교( 白 道 敎 )의 전신이었다. 평안도 출신의 동학 교도였던 전정운은 1900년,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이 전국 각지의 명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신통력을 얻 어 미래를 보았는데, 앞으로 4년 후에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되어 멸망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정운은 다른 사이비 교주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따르면 죽지 않고 새로 다가올 낙원에서 살게 되며 그 때는 돈이 필 요하지 않으니 모두 자신에게 바치면 그걸 좋은 일에 쓰겠다는 언급을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전정운의 궤변에 놀아난 순진한(혹은 멍청한) 사람들은 앞 다투어 재산을 바쳤고, 어서 세상의 종말이 와 선택받은 자신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전정운이 약속한 4년이 지나가도 지구 종말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흥분한 신도들은 전정운이 자 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의했다. 사기술이 들통나자 전정운은 얼른 재산을 챙기고 자신을 맹목적 으로 추종하는 광신도들을 거느리고서 강원도로 도망쳤다. 강원도에 도착해 새로운 터전을 일군 전정운은 챙겨온 재산으로 왕궁 같은 저택을 짓고, 수십 명의 여신 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1919년,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교주에 오른 인물이 바로 아들 전용해( 全 龍 海 )였다.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3

84 1923년, 전용해는 교단의 이름을 백도교에서 백백교( 白 白 敎 )로 바꾼다. 어째서 교단의 이름을 백백교로 바꾸었을까? 글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하얗고 하얗다( 白 白 )는 뜻인데,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는(자기들 나름 대로) 뜻이 담겨 있다. 일설에는 신도 백 명쯤은 눈 깜짝 안하고 때려죽일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아무리 잔혹무도한 사이비 종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살인을 표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전용해는 아버지가 만든 교리를 그대로 재탕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부지런히 교세를 닦아나갔다. 이 제 얼마 후에 온 세상이 불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니, 백백교에 입교하여 마음을 깨끗이 정화받아야지만 살 아남는다. 그리고 종말이 끝나면 동쪽 바다에 아름다운 낙원이 생겨나 아픔과 죽음도 없는 행복한 삶을 영 원히 누릴 것이라는 교리였다. 우리가 보기에는 황당무계한 헛소리지만,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백백교가 선전하는 저런 교리에 혹해서 웬만큼 학식 있고 부유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백백교에 입교하겠다고 몰려왔으니 말이다. 하긴, 현대에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부류가 고급 대학을 나온 엘리트라니, 인간의 나약한 마음은 사회적 신분과는 무관한가 보다. 그러나 백백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구원은 고사하고 생명과 재산의 안전마저 보장받지 못했다. 남자들은 가진 돈을 몽땅 털어 헌납해야 했고, 여자들의 경우는 깨끗한 피를 가지게 해준다는 명목 하에 교주 전용 해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 만일 재산 헌납이나 교주와의 성관계를 거부하면 강제로 돈과 몸을 빼 앗기고 깊은 동굴로 끌려가 몽둥이로 맞아 죽임을 당했다. 전용해가 선호하는 살해 수법은 일단 죽이고자 하는 대상이 된 사람을 기도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산 속 깊은 동굴로 끌고 가서, 미리 준비한 신도로 하여금 몽둥이로 그 자의 뒷통수를 내리쳐 죽인 다음, 시 체를 암매장하는 것이었다. 행여 피살자가 지르는 비명 소리가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살해와 동시에 화약 을 터뜨려 소리를 감추었다고 한다. 순순히 돈과 몸을 내어주더라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돈을 있는 대로 바쳐도 전용해의 눈에 거 슬리면 즉각 살해되어 깊은 산 속에 암매장되었고, 전용해의 첩 노릇을 해도 그가 싫증이 나면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었다. 전용해는 일반 신도들만을 대상으로 포악하게 군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충심으로 섬기는 교단 간부들도 믿지 못했다. 자신이 내리는 지시에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며 복종하지 않거나, 원하는 만큼보다 재산을 적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4

85 게 바치거나, 교단의 정기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거나, 행여 교단에서 저지르는 일들을 외부에 알렸을 경 우에는 즉시 살해되었다. 아무리 교단을 위해 공적을 많이 세우고 충성을 다하는 원로 간부라고 해도 예외 가 없었다. 사이비 종교들이 그렇듯이, 백백교도 교단 내의 비리를 외부에 알리는 신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한 번은 어느 신도가 전용해가 저지르는 잔인한 만행을 낱낱이 편지에 적어 총독부와 경찰서에 보내려다 발 각된 일이 있었다. 내부 고발자에게 전용해가 베푸는 보답(?)은 잔혹하지 그지없었는데, 건장한 청년들로 구성된 신도들을 보내 한밤중에 그 신도가 사는 집에 쳐들어가 신도 본인은 물론이고 일가족 전부를 모두 죽이고 시체를 암매장했다고 한다. 더욱 잔인한 것은, 그 신도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는데 한 간부 가 "아이까지 죽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전용해는 아이는 물론 그 간부까지도 죽 여 암매장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용해 자신과 성관계를 가진 여신도들이 자칫 임신을 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산모와 태아까 지 모두 살해되었다. 비밀이 밖으로 새어나갔을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지만, 어떻게 자신의 핏줄인 갓난 아기들까지 태연하게 죽이라고 명령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잔인한 악인이라도 자신의 가족은 사랑하는 법인데, 전용해는 그렇지도 못했다. 동생들이 자신에 게 복종하지 않자 그들이 자신과 교단이 저질러온 비리를 폭로할까봐 신도들을 시켜 죽여 버리는 천인공 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역사서에 흔히 등장하는 포악한 전제 군주와 스케일의 크기가 다를 뿐, 동일한 자아를 가진 전용해는 이 렇게 무소불위의 악랄한 통치를 하며 향락과 타락에 젖어갔다. 그러나 그가 누리던 영화는 뜻하지 않은 이 변을 당해 무너지게 되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약품 가게를 하던 유곤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청년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 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헌납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중대한 결심을 하고 교주 전용 해와의 면담을 교단에 신청했다. 간부들의 호위를 받으며 유곤용의 집에 찾아온 전용해는 곧장 그에게 재 산을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곤용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전용해와 백백교의 비리를 공박하며 그를 꾸짖자 전용해는 지니고 있던 칼을 뽑아 그를 찌르려 하였다. 유곤용은 칼을 피하며 그를 구타했고 전용해가 지른 비명 소리를 듣고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부와 신도들이 달려와 교주를 업고 달아나는 한편, 유곤용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마침, 유곤용의 집은 동대문경찰서 왕십리주재소 옆이었다. 싸움 소리를 들은 일본인 순사 부장이 순사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신도들을 체포해 주재소로 끌고 갔는데, 그 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백백교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살인과 비리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5

86 백백교의 끔찍한 살인 행각은 연일 신문 지상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고, 경찰은 8개월에 걸쳐 백백교 교 단과 전용해가 은신해 있을 법한 별장들을 모두 수색했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달아난 전용해는 몇달 후, 경기도 용문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 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 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경찰의 수사 결과, 백백교 교단의 주변 산과 동굴에서는 암매장된 시체가 수백구나 나왔고, 1941년 1월에 마무리 된 백백교 사건의 선거 공판에서 백백교 교단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무려 464명이나 되었다고 한 다. 그 중 전용해는 간부 문봉조 등 18명과 함께 신도 314명을 죽였으며, 다른 간부인 김서진은 170명, 이 경득은 167명, 문봉조는 127명의 살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미 죽은 교주 전용해의 머리는 잘려져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 보관되었는데, SBS 백만불 미스테리 취재진이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지하실을 방문했을 때,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랫동안 떠돌아 오던 "국 과수 지하실에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보관되어 있다."라는 유언비어는 결국 사실로 밝혀졌던 것이다. 일제 시대,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이 백백교 살인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었고, 교단은 해체되어 사라 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 교단의 관계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 SBS에서 한참 이 백백 교 사건이 방영될 즈음, 전용해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계속 국과수에 전화를 걸어 자기네 교주의 머 리를 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6

87 22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88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12 한국인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해외에 나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한국 대사관보다는 일본 대사관 을 찾아가 부탁해 보라는 말은 이미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다. 오죽이나 자국민 보호에 무신경하면 남의 나 라 대사관에 찾아가 사정을 해야 할까? 이런 자국민 보호에 무신경한 한국 정부의 처사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나라가 막 들어선 1950 년대 초반에도 그랬으니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이 선제 남침을 시작해 한국 전쟁이 벌어졌다. 말로만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라고 떠들었지만,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한국 정부와 군대는 무기력한 패주만을 거듭했다. 북한군의 노도와 같은 공세에 기겁을 한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정 부 요인들은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리면서 그들은 서울 시민들의 처지를 외면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우 리 국군은 용감히 북괴군을 격퇴시키고 있으니, 전혀 걱정하시지 말고 서울에 남아 계시기 바랍니다. 라 는 내용의 미리 녹음해 놓은 목소리를 라디오 방송으로 틀어놓은 채, 다른 수뇌부들과 함께 대전으로 도망 가 버렸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서울 시민들은 대통령이 아직까지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에 남아 정 말로 방송을 하고 있는 줄로 알고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북한군이 들이 닥치자 그때서야 대 통령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도망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너무나 늦었다. 서울이 점령당한 3개월 동안, 시민들은 북한군에게 끌려 나가 강제로 부역을 했고, 군대에 징집되어 동족들과 싸우는 전장에 투입 되는 등 온갖 고생을 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그들이 내려온 북으로 후퇴했고 서울은 국 군과 유엔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정부 인사들은 북한군에게 시달리며 고초를 당한 서울 시 민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들을 북한군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한 부역자로 몰아 처벌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생포되었다 석방된 자국의 전쟁 포로들을 반역자. 로 규정하여 처형시켜 버린 소련의 우매 한 독재자 스탈린이 저지른 짓과 다를 바 없다.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88

89 일부 양심이 있는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각하, 서울 시민들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 까?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냈지만, 이승만은 되레 역정을 내며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내가 덕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하게 했소, 라고 말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결코 사과 같은 건 못한다. 당신 들이나 해라. 라며 뻔뻔스럽게 굴었다. 1200년 전, 중국의 전제 군주도 변란을 당한 백성들에게 미안하다 는 사과를 했는데 명색이 민주 국가의 수장이 그 정도도 못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대통령부터 이러니 다른 권력자들이 오죽이나 국민들을 업신여겼을까? 결국, 너무나도 부패하고 타락한 정부에 분노하여 1960년 4월 19일 국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지만, 자국민을 멸 시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옛날에만 일어났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지 말기 바란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반 화교 폭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과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은 위험에 처한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특 별기들을 보내 모든 사람들을 안전하게 구해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단 한 대의 특별기만을 보냈고, 그것도 1200달러를 지불해야만 교민을 태워 주었다. 거기에 주 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폭력 사태에 휩쓸린 교민들을 외면 한 채, 자기들끼리만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쳤다. 덕분에 피신하지 못하고 인도네시아에 남은 한국 교민들 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흥분한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폭행당하고 재산마저 약탈당해야 했다. 앞으로 여러분은 정부는 언제나 국민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라는 허울 좋은 너스레를 믿지 말고, 자기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방도를 세우기 바란다. 특히, 해외에 나간 교민 분 들의 경우는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정부의 말만 믿고 있다가 큰 봉변을 당할지 누가 알겠는가?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89

90 23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1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 년, 전 세계는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과 이에 맞선 스파르타의 300용사들을 다룬 영화 <300>에 열광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 도 큰 인기를 끈 이 영화는 개그 패러디에 이용될 정도로 대중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이 <300>을 두고 국내의 보도 매체들은 "서양을 부각시키기 위해 동양을 일부러 비하시킨 영화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 말 속에는 서구 문명의 시조인 그리스와 싸웠던 페르시아(이란)은 동양권에 속한다는 고정관념이 깔려있다. 그러나 과연, 페르시아(이란)을 인도나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동양권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보아야 하나? 물론 민주정을 채택한 도시국가들의 모임인 그리스에 비해서, 중앙집권적인 전제왕정을 실시했던 페르시아는 동양적으로 보일 수 도 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문화와 종교, 인종적인 요소를 고려한다면 꼭 그렇게 분류하기도 무리이다. 우선 페르시아의 문화적인 부분이 과연 동양권 문명인 인도와 중국, 한국과 일본에 비해 얼마나 다른지 간략하게 알아보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문화적인 요소를 한가지 들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용( 龍 )을 택할 것이다. 다신 교 신앙을 숭배하는 전통적인 동양권 문명에서 용은 신성한 존재이다. 인도 신화에서 태초에 신들과 마족들은 불사의 영약인 암리타 를 얻기 위해, 세계의 중심인 만라다 산을 거대한 용인 바수키로 휘감았다고 전해진다. 유지의 신 비슈누는 천개의 머리를 가진 아난 타라는 용 위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세계의 창조신인 브라흐마를 낳았다. 또한 비슈누는 인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9번의 화신 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그 중 하나인 바라라마는 인간의 모습에서 본래의 신성한 모습을 되찾게 되자,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용은 인도보다 더욱 숭배와 찬양을 받는다. 중국의 신화에서 미개한 인류에게 문명을 전파해준 신인 복희와 여와는 사람 의 상반신에 용(또는 뱀)의 하반신을 한 반인반수였다. 오늘날 모든 중국인들의 시조가 되었다는 황제 역시 복희-여와와 마찬가지로 하반신이 뱀의 모습이었다. 황제를 도와 치우와 싸웠다는 성스러운 동물인 응룡 역시 거대한 용이었다. 중국의 북쪽에 있는 종산에 살면서 사계절의 움직임과 밤낮의 운행 등 시간을 관장하는 신인 촉음은 인간의 머리에 용의 몸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재물의 풍 요를 안겨주는 홍예는 무지개의 모습을 한 용이며, 또한 중국의 동서남북 바다에 산다고 일컬어지는 네 마리의 사해용왕은 중국인들 로부터 열렬한 숭배와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은 바로 이 사해용왕들을 주인공으로 다 루고 있다.) 현대의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용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이니, 용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애정을 알만 하다. 중국보다는 다소 약하지만, 한국의 신화와 전설에서도 용은 신성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는 하늘에서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나라를 세웠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당군을 몰아낸 신라의 위대한 문무왕은 바다의 용이 되어 남쪽의 왜구들을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신라의 신성한 피리인 만파식적은 그 일부를 떼어 물에 던지면 용으로 변 할 수 있는 마력을 지녔다고 한다.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1

92 일본에서 용은 비와 물을 지배하는 정령이며, 자연과 풍요를 주관하며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며, 오래 전부터 널리 신봉되었다. 이처럼 동양권에서 용은 신성한 이미지인데 반해, 유일신 신앙인 유대-기독교를 숭상하는 서구에서 용은 사악한 악마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페르시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경전 <자무야즈드 야슈트>에 따르면 사악한 신 앙그라 마이뉴는 인간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강력한 악룡 아디 다 하크를 만들어냈다. 이 아디 다하크는 세 개의 머리와 튼튼한 비늘을 가졌으며, 입에서는 독과 불을 뿜어대며 천 가지의 마법을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다. 거기에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을 지녔고, 종종 왕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선한 사람들의 믿음 을 방해하는 악한 존재였다고 한다. 이슬람교가 전래된 이후에도 아디 다하크는 악한 이미지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11세기에 페르시아의 시인인 페르도우시가 쓴 서 사시 <왕서:샤나메>에 의하면 아디 다하크는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살던 왕자로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 나, 동시에 악마의 저주를 받아 두 어깨에서 뱀이 돋아나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아디 다하크는 페르시아에 쳐들어와 성현왕 자므 시드를 죽이고 천년 동안 페르시아를 공포와 살육으로 통치하다가 영웅왕 팔리둔에게 퇴치되었으나, 그 영혼은 아직도 살아 있어 언 제고 다시 부활하여 지상을 다시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다고 한다. 또한 페르시아의 카샤프 강에 살고 있는 무서운 독룡은 맹렬한 화염과 독을 뿜어대어 사람과 동물과 초목을 말라죽게 했으며, 마침 내 용감한 영웅 사므가 나서서 이 악룡을 격렬한 혈투 끝에 간신히 처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용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카샤프 강 에 스며들어 강은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강이 되었다고 한다. 이 밖의 신화나 전설에서도 용이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신성한 존재라는 내용은 페르시아의 문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용이 인 간을 돕지 않고, 해치려 하는 위험한 존재이며 그래서 영웅에게 퇴치된다는 설화는 중세 유럽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설화와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가 페르시아에도 있다는 사실은 페르시아의 서사 문화가 동양권보다는 서구에 더 가깝다는 반증이다. 종교적인 부분은 어떨까?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에 예언자인 자라투스트라에 의해 조로아스터교가 성립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 서는 세계는 두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아후라 마즈다는 인간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선한 신인데 반해 앙그라 마이뉴는 인간을 증오하고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한 신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인간은 아후라 마즈다의 법을 따라 선행 을 베풀어야 하며, 앙그라 마이뉴가 퍼뜨리는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고 믿었다. 또한 세계의 종말이 오면, 15세의 처녀가 구세주 사오슈안트를 낳고 이 구세주에 의해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세상의 모든 악은 소 멸되고 정의가 승리한다고 한다. 이제까지 세상을 어지럽혀 온 악신 앙그라 마이뉴와 그 일당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악한 인 간들도 지옥으로 추방된다. 일단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은 죄를 속죄한다고 해서 용서를 받지도 못한다. 반면 선행을 하고 아후라 마 즈다를 굳게 믿은 선인들은 천국으로 들어가 끝없는 행복과 안락을 누리게 된다. 절대선과 절대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 세계의 종말과 구세주의 출현, 영원히 계속되는 축복과 형벌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동 양적 신앙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기독교적인 유일신 신앙과 거의 흡사하다. 종교 연구가들의 말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 의 교리는 훗날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에 반해, 동양권에서 널리 신봉되는 종교인 불교나 중국에서 탄생한 도교에서는 윤회-환생론과 음양이론을 주창했다. 그러나 페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2

93 르시아의 전통 신앙인 조로아스터교에 윤회론이나 절대선악을 부정한 음양이론은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종적인 문제를 한 번 들어보자.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인들은 흑인이나 까무잡잡한 아랍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페 르시아인들과 직접 싸웠던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따르면, 그리스군에 붙잡힌 페르시아군 포로들 은 피부가 너무 하얀 색이어서, 그들을 사러 온 노예 상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은 매우 허약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런 <역사>의 서술 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페르시아의 주 민족 구성원인 아리안족은 엄연한 백인종에 속한다. 이란의 북부나 서북부에는 북유럽인들 과 외관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금발 머리와 녹색눈, 또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외모는 몽골 계 황인종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양권 국가들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페르시아(이란)을 동양권 문명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럽의 동쪽에 있다고 해 서 무조건 동양(동아시아)라고 보는 것은 짧은 견해가 아닌지.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3

94 24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95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39 1. 켈트족들은 사람의 머리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과 지혜와 영혼이 담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자신이 죽인 적의 머리를 가져와서는 집의 대문이나 벽에 매달아 놓고는, 자신과 집을 지켜주는 부적으로 삼았다. 만약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면, 잘린 머리 모습을 그려넣거나 순무를 사람 머리처럼 만들어서 매달아 놓았다. 2. 켈트족들은 1년을 4분기로 나누어 각각 삼하인(Samhain), 임볼크(Imbolc), 벨테인(Beltain), 러프나사(Lughnasa)로 이름 붙였 다. 삼하인은 11월 1일, 임볼크는 2월 1일, 벨테인은 5월 1일, 러프나사는 8월 1일부터 시작된다. 3. 이 중에서 겨울인 삼하인 축제가 시작되면 켈트족들은 저승의 문이 열려 죽은 유령들이 이승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집 문과 벽에 걸려있는 사람의 두개골 속에 갈대 촛불을 켜서 유령들이 산 사람들을 저승으로 데려가지 못하도 록 막았다. 이러한 삼하인 축제는 오늘날 미국의 대중적인 문화 축제인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의 기원이 되었다. 할로윈 데이에 등장하 는 호박 조각은 순무를 사람의 머리처럼 조각하여 만들고, 그 속에 촛불을 켜던 켈트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4. 켈트족들의 생사관과 세계관은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죽은 다음에는 저승인 지하세계에서 다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보통 지 하세계는 이름처럼 땅속에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때로는 바다나 호수 밑에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일단 죽어서 저승에 간 사람들도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태어날 수 있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 또 다시 살았다가 죽다니? 그렇다면 결국 켈트족의 내세 관에서 '삶'과 '죽음'은 동전의 한 면처럼 동일한 것이었을까. 5. 켈트족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 부족의 여성들은 원정에 나가 있느라 바쁜 전사들을 대신해서 어린 소년들에게 전투 훈련을 가르쳤다. 켈트족 사회의 사제였던 드루이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여성도 얼마든지 드루이드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여성도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 될 수 있었다. 서기 71년과 83년에는 여족장이 이끄는 켈트족의 일파인 브리간테스 부족들이 로마군을 공격한 일도 있었으며, 브리튼에서 로마군에 맞선 여왕 부디카의 이야기는 익히 유명하다. 남편이 아내보다 재산이 적으면, 그 집안의 주인은 아내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갈리아의 여자들은 포도주 상 인, 가축 도살, 의사, 약사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외에도 켈트족 여성들은 남편과 살다가 싫증이 나면 위자료를 주지 않고 도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었다.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95

96 6. 아일랜드에 살던 켈트족들은 위생과 청결을 중시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손발을 씻고, 저녁마다 목욕을 했다. 목욕을 할 때 도 비누와 리넨 천으로 몸을 박박 문질렀다. 그것도 따뜻한 물로 말이다. 7. 어린 아이들은 7살이 되면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옆집에 가서 살아야 했다. 그 집의 부모들은 이웃집의 아이들을 자신의 친자 식처럼 길렀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전체 부족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17살이 될때까 지 그렇게 살았다. 8. 켈트족들은 천둥과 벼락이 치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들은 뇌우가 심하면 하늘이 무너져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다. 그 래서 다른 부족들과 약속을 할 때면 이런 주문을 외쳤다. "만약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하늘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질 것이며, 바다가 내게 덮칠 것이며, 땅이 솟아올라 나를 삼켜 버리리라!" 9. 13이라는 숫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사고방식도 켈트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켈트족의 족장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자기 앞 과 뒤에 각각 3명의 병사와 양 옆에 각각 2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갔다. 여기에 족장 자신과 전차를 모는 기수까지 합치면 12명이 되고, 그 옆에서 항상 함께 '죽음'이 달리기 때문에 13을 곧 죽음의 수라고 생각했다. 10. 왕이나 족장이 심하게 다쳐 신체부위 중 일부분을 상실하면, 그는 곧 권력을 잃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켈트족들은 지도자 를 부족 전체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지도자는 언제나 완전한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다. 만약 지도자가 불구가 되면 그 부족 전체가 불 구가 되는 것이기에. 11. 켈트족들은 먼 서쪽 바다에 하이 브라실(Hy Brasil)이라는 축복의 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켈트 문화의 저승인 지하세계 와도 동일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남아메리카에 있는 지금의 브라질도 이 '하이 브라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2. 아일랜드의 수도사인 성 브렌던은 서기 6세기 경, 소가죽과 버드나무 가지로 짜서 만든 배 '코라클'을 타고 항해를 시작해, '성 자들의 약속받은 땅'에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말한 '성자들의 약속받은 땅'은 오늘날 서아프리카의 카나리아 제도라고 여겨지 며, 일부 연구가들은 그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왔다 갔다고 본다. 콜롬버스보다 9백년, 바이킹보다 4백년이나 앞서서 아일랜드인이 신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13. 켈트족들은 외부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잘 대접했다. 켈트족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절대로 집의 문을 잠그지 않으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거리낌없이 잔치에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잔치가 끝날 쯤에야 누구인지 물었다.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96

97 25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8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53 극우 성향의 일본인 작가 시노오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나 세부적인 묘사 부분에서 틀리거나 아예 빠뜨린 부분들이 적지 않다. 3권 <승자의 혼미>편에서는 테우토네스(튜튼)족과 킴브리족이 로마군과 싸운 부분에서는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지가 이탈리아라고 적었다. 사실, 테우토네스족과 킴브리족은 갈리아와 스페인으로 먼저 갔다가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고 정착지를 찾지 못하자 부득이하게 이탈리아로 온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이 두 게르만 부족과 싸워 패한 전투의 과정을 그냥 싸울 때마다 졌다. 라고 간략하게 넘어갔지 만, 105년 10월 6일 갈리아 남부 아라우시오(Arausio)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만 로마군은 무려 8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대패했다. 105년 마살리아와 107년 이탈리아 북부의 론 강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사령관이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수만 명의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을 정도로 게르만족들의 격렬한 공세에 밀리며 파국의 직전까지 갔다. 마지막 15권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를 다루면서 지성이나 교양에서 뛰어나지 못했다고 적었지만, 전 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는 사업을 벌였을 정도로 당대 제일의 학자이자 지 식인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은 반한(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라는 작가의 성향이 좌우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책의 말미에 인용한 수많은 자료 목록을 보건대, 결코 몰라서 빠뜨린 것이 아니 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로마인 이야기>를 가리켜 역사서가 아닌 동인녀가 쓴 소설에 가깝 다. 라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로마인 이야기>는 한국에서 약 2백만 부가 팔리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한 국인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 박해 정도로밖에 알려진 것이 없을 정도로 로마사에 대 한 훌륭한 대중 인문 서적이 없었던 한국 사회의 척박한 풍토에서 세부적인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로마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쉽고 폭넓게 보여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로마에 대한 일반적인 대중들의 인식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다가 하루아침에 외침을 받고 몰락한 제 국. 에서 몇 백 년 동안이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인식이 사실에 들어맞을까?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8

99 로마가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전설적인 왕들이 로마에서 추방되고 귀족들이 다스리는 공 화정 체제가 들어선 시점은 기원전 509년이다. 건국왕인 로물루스가 나타난 연대까지 소급한다면 기원전 75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로마는 과연 어느 때 멸망했는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서기 476년을 들 수 있다. 이 연대에서 509년을 더한다면 985년이 나온다. 거의 천년에 가깝다. 로물루스를 비롯한 전설적인 7왕들의 연대까지 더하면 그 수치가 1천 1백 년을 훌쩍 넘어간다. (로마 제국 최전성기인 트라야누스 황제 당시의 영토.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점령했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무너졌다고 로마 제국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인 콘스탄 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 다른 말로 하면 비잔티움(Byzantine,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건재했고, 오스만 투 르크에 멸망당하는 1453년까지 존속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언제나 로마인 이 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 이라고 여겼지 결코 비잔티움이나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비 잔티움이라는 말은 15세기 말의 어느 독일 학자가 만들어낸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라는 도시의 수립에서부터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합산한다면 자그마치 2207년이라는 세월이 나온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9

100 다.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면, 로마 공화정의 종말에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만이라도 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경쟁자인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패망시키 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의 칭호를 받은 기원전 27년이 로마 제국의 시작이라고 본다 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까지의 세월은 얼마나 되나? 503년이다. 중국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한 왕조가 5백년은 고사하고 4백년이나 존속한 적은 없었다. 319년을 버틴 송 ( 宋 )나라가 제일 오래되었다. 더구나 송을 비롯한 역대 중국 왕조들은 존속하는 내내 숱한 외침을 겪었고, 이는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주로 북방과 서방의 유목민족들과 싸웠다면, 로마 제국은 북방의 게르만 부족들과 동방(이란)의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대결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처럼 똑같이 외침을 당하면서 도 로마 제국은 중국의 왕조들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버틴 것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던 것이 아니라, 선 제공격을 벌이는 입장에 선 적도 많았으니 정말 놀라운 결과다. 적게는 503년에서 많게는 985년, 심지어 2천 년이나 존속했던 나라를 가리켜 과연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 에 망했다. 라고 보는 관점이 적합한가? 그래도 로마인들은 사치스럽게 살지 않았느냐?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씀씀이나 사치는 그들의 적국인 페르시아인들과 비교하면 훨씬 소박했다. 제정 초기에는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부터 상당히 검소 한 생활을 영유했다. 제국 말기가 되어도 이때는 대부분의 황족과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여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사치를 벌이며 살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적인 이유로 금욕을 지켜며 산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 시대를 요란하게 묘사하거나 기독교 박해를 선전한 헐리우드 영화로 인한 이미지가 역사적인 진실을 가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왜소하게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100

101 26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2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23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 쯤, 공개된 국제 통계 자료에서 한국 성인 남성의 흡연률이 불가리아에 이어 세계 2위라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죠.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 흡연을 강하게 규제하려는 태세와는 달리, 한국은 아직도 성인 남성들의 흡연률이 상 당히 높은 편입니다. 이런 높은 흡연률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담배가 막 전해진 임진왜란 직후에도 비슷한 양상을 띄었다고 합 니다. 17세기 초,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서는 어른 뿐만 아니라 4 세 밖에 안 된 어린 아이나 여자들도 태연하게 담배를 피웠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린 아이나 여자, 미성년자나 또는 상사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지만, 이런 담배 예절이 생겨난 시점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18세기 말 경이었습니다. 정작 우스운 일 은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식의 담배 예절이 없다는 것이죠. 한국 사회의 높은 흡연율의 이유에 대한 답을 몇 가지 찾아본다면 옛날에는 지금과는 달리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고,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나면 별로 할 일이 없었는데, 담배가 전래되고 나서 그런 심심함을 푸는 데 제격이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19세기 중국에서도 놀이나 유흥문화가 발달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아편을 피워대는 바람에 전 국민의 약 4분의 1 가량이 아편 중독자가 되 기도 했죠.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2

103 (담뱃대를 잡은 기생.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흡연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조선 시대에는 여 자들도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습니다.) 2. 또한 담배는 피우는 데 많은 돈이 들지 않고, 담뱃대 하나만 있으면 담배밭에서 얻어온 담뱃잎을 썰어 담뱃대에 넣고 피우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 도구였기 때문에, 더욱 담배가 편리하게 여겨졌 을 것입니다. 3. 담배가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된 탓도 있었습니다. 지금 의사들이 본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옛날 의사들은 종 종 환자들에게 담뱃잎을 빻아 나온 액을 피부에 바르라는 권유를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담배잎에 포함된 타르 성 분에는 기생충 같은 벌레들을 죽이는 살충 효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담배가 전래된 16세기 말의 영국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군요. 4. 위와 비슷한 일이지만 담배의 해악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담배가 인체에 나쁘다는 사실을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3

104 몰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식사 후에 피우는 담배가 소화에 좋다는 낭설이 진실인 양, 그대로 믿어지는 일도 있었죠. 5. 담배를 피우는 일이 남자다움의 상징이고 멋있는 행위라는 어설픈 권위 의식이 사회 전반에 자리잡은 이유도 한 몫 합니다. (미국의 담배 회사 말보로도 그런 식의 카우보이 광고를 냈다가, 광고 모델이 지나친 흡연으로 인해 폐암 에 걸려 죽으면서 흡연의 위험성이 알려졌죠.) (남성다움의 상징이라고 여겨졌던 말보로 담배. 사실은 생명을 위협하는 주범이었습니다.) 6. 지금은 법이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만해도 대부분의 한국 남성이라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군대에서 담배는 필 수적인 보급품이었습니다. 개인의 일탈 행동이 허락되지 않고 똑같은 단체 행동을 강요받는 군대의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홀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무척 거북한 느낌을 받았겠죠. 담배를 안 피던 사람들도 군 대에 가면 그렇게 해서 담배를 배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7. 마지막으로 담배에 포함된 니코틴 성분이 지독한 중독성을 가져서, 한 번 담배의 맛을 들이게 되면 도무지 끊기 가 무척 어렵습니다. 담배를 끊고자 하는 사람들도 금연한 이후의 금단 현상에 시달리다 다시 담배를 집어 들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뭐, 이러나 저러나 자신과 타인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주는 담배는 아예 피우지 않는게 제일 낫겠죠...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4

105 27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6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54 종종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한국을 비교해 볼 때, 참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옆 나라인 중국 과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유독 기독교가 매우 강렬한 교세를 띄고 활동한다는 것이다. 하긴 3백년 넘게 스페인 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 한국처럼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시점은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제 교세가 쇠퇴하고 있 는 추세가 일반적인데, 어찌해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여전히 왕성한 힘을 과시하는 걸까?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교리와 한국 사회의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은 1945년 8.15의 해방 에서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지옥 같았던 6.25 전쟁의 무수한 시체 더미 위에서 만들어진 나라이다. 북한군의 남침으 로 시작되어 무려 3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이 잔혹한 전쟁은 한국인의 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와 사회 부분에 거 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전쟁은 기독교의 교세 확장에 매우 혁혁한 공헌을 한 계기인데, 기독교에서 외치는 하나님과 사탄의 이분법, 이원론적 세계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전쟁의 공포와 북한 공산당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몸서리를 떨던 한국인들 에게 놀라운 파급 효과를 불러왔다.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북한과 공산주의, 공산당 및 그와 연계된 세력들은 모두 절대악인 사탄이 되 었고, 그에 반비례하여 군사를 보내 멸망의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해낸 미국은 자연스레 절대선인 하나님과 일치되었 다. 결코 지나친 억측이 아니다. 하늘처럼 떠받들던 제국주의 일본을 패망시키고 이어 침략군인 북한마저 격퇴시킨 미국의 위상을 보며 한국의 기성세대들은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인간을 악한 길로 유혹하여 영원한 고통인 지옥으로 이끈다는 사탄의 모습은 전쟁을 일으키고 폐쇄적인 파시즘 통 치로 북한을 경제 파탄으로 몰고 간 김일성과 절묘한 매치가 되었다. 반대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전쟁을 겪으면 서 거지꼴이 된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미국의 모습은 영락없이 착한 사람들이 죽어 서 갈 수 있다는 영원한 행복의 땅인 천국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한국이 고속 경제 발전에 성공한 1970년대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강해졌다. 성경에도 있지 않 던가? 두드려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얻을 것이다., 1달란트를 가지고 노력하여 2~4배로 불린 자는 천국에 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6

107 어가리라. 하고 말이다. 둘째로는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들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국을 해방시키고 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졌던 한 국을 멸망의 나락에서 구해낸 세력은 미국이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미국의 눈에 잘 보이지 못하면 한 자리도 꿰차지 못했다. 1950년 초반 당시 한국 정계와 군부에서는 영어를 잘 하거나 기독교 신자라야 권력을 얻을 수 있다. 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미군정 치하에서 일본 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넘겨받아 장사를 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이 생겨났을까. 그러니 미국인들이 신봉하는 기독교(개신교)를 믿어야 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어느 정도 권력의 핵심부에 조금이 라도 더 접근할 수 있을게 아닌가. 마지막 요인으로는 개인적인 친분과 이를 이용한 사업용 커뮤니티의 역할을 기독교 교회가 잘 제공해 주었기 때문 이라고 추측한다. 유교적인 위계질서와 서열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마음 터놓고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사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로 들어가면 사람과 쉽게 만나 친해질 수 있고, 교회 내부의 활동까 지 하게 된다면 더욱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IMF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고환율 정책으로 국내외로부터 무수한 비판 여론에 휩싸인 강만수 장관을 계속 그 자리에 앉혔던 이유도 서로가 소망교회를 함께 다 닌 30년 지기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쌓여진 인맥은 자신이 벌일 경제적인 사업에 매우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하겠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이모와 이모부는 원래 동양 철학을 믿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분이었지만, 제작년 무렵 갑자기 교 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여 물어보니 기독교의 교리가 좋아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 람들과 잘 사귀어서 사업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라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기독교가 폭넓게 퍼진 이유도 정말로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그 교세를 자신의 이득 챙기기에 잘 이용할 수 있는(정치권력이나 경제적인 이득 등)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원인대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세하며 기세를 떨쳐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렇게 무소불위의 위세를 누린 기독교의 위상에 서서히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얼마 전, 종교인 조사 통계를 보면 기독교 중 개신교 신도들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 나가는 신 도수가 많아지는 것만이 아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이든 돌아다녀 보면, 가장 인기 있는 화제 거리가 단연 기독교와 교회 및 목사들을 비판하는 내용들이다. 해방 이후 약 50년 동안 막강한 권력 집단이었던 교회가 어느새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집단 중 하나가 되어버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7

108 린 것이다. 이유가 뭘까? 우선, 한국 사회가 점차 다원화 되면서 기독교의 이분법, 이원론식 교리가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공산주의=빨갱이=절대악 이라는 냉전적 사고방식은 남북간의 교류가 확대되고 평화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 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냉전적 분위기를 다시 고취시키려는 뉴라이트 등 보수 세력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군사 독재 시절처럼 머리에 뿔난 빨갱이 식의 이미지 선전은 이제 누가 보아도 효용성이 없다. 또한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높아졌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것뿐이고, 다른 종교를 믿 으면 결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는 이제 경외가 아닌 놀림감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다. 기독교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승천하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다가 죽었다 는 소설 <다빈치 코드>와 무신론을 주장하는 인문서적 <만들어진 신>이 한국에서 대히트를 친 현상은 한국 사회 전반 에 만연한 반 기독교적 기류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특히 개신교계에서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완고하고 편협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어느 근본주의 개신교 종파에서 내는 문화 잡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서적에서는 김밥과 비빔밥을 가리켜 서로 다른 것을 섞는 혼돈의 음식이니, 독실한 신도들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 라는 한 목사의 말을 대서특필하여 마치 교회 신도들이 꼭 참조해야 하는 말인 것처럼 다루었다. 아울러 교회에서 미션 스쿨을 맡는 교사들이 옛날에는 외식으로 짜장면을 먹으면 되었는데, 요즘에는 피자가 나와 당혹스럽다는 말도 전했다. 구태의연한 교사들이 피자가 입맛에 맞지 않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짜장면은 하나님 의 음식이고 피자는 악마의 음식이라는 뉘앙스인가? 동서양의 요리법을 혼합시키는 퓨전 푸드에 대해서도 이런 것 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건강에 나쁜 병을 유발시킨다. 라는 근거 없는 소리까지 늘어놓았다. (그 잡지의 이 름을 알고 싶은 분은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면, 가르쳐 드리겠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 신이 서로 다른 것을 섞어서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말라는 것 때문에 그런다는데 그런 식의 논 지라면 구약의 예언자들이 다른 종교의 신상이나 사원을 파괴하고 그 사제들을 마구 죽였으니, 오늘날의 개신교도들 도 그렇게 해야 성경적인 삶 이 아닐까? 아, 이미 어느 교회에서는 불상의 목을 자르고, 모든 사찰들이 무너져야 한다는 기도까지 올린 적이 있었다. 2007년 8월, 한국 사회는 기독교계에서 저지른 문제로 큰 파문을 겪었다. 점령군인 미군에 대한 테러와 보수적인 이 슬람교가 지배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기독교(개신교) 선교를 하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나선 샘물교회 선교단이 탈레 반에 피랍되어 약 한 달 동안 억류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다루는 한국 사회의 시각은 둘로 나누어져 서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앙 일간지나 방송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8

109 사 등 메이저 언론에서는 피랍자들의 신변을 염려하며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논조의 보도 들을 집중적으로 내보냈지만, 정작 일반 국민들 특히 네티즌들의 여론은 매우 싸늘했다. 대체 뭐하러 갔는지 모르겠다., 이슬람이 국교인 나라에서 기독교 선교가 말이나 되나?, 굶주린 아이들 에게 과자를 나눠주고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니, 도대체 그게 제정신인 일인가?, 아프간 사람들의 자존심을 그렇 게 짓밟으면서 어떻게 그들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등의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더욱이 샘물교회 선교단이 2006년에도 아프간 선교에 나서려다 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나가지 못하기 되자 자기네 교회 게시판에 정부를 가리켜 사탄 이라는 욕설을 퍼부었고, 아프간 현지에서 관광객 같은 차림으로 현지 주민들 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등의 사실들이 알려지자 인터넷상의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목사 2명이 살해되고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탈레반과 협상을 한 후에 선교단원들이 풀려남으로 써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로도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을 남겼다. 한국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몸값도 치르지 않 았다고 주장했지만, 탈레반이 약 2백만 달러를 받았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또, 선교단 일행들이 아프간에서 풀려 난 이후에 면세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거나 그들이 청바지에 피랍일기를 적었다는 것들도 사실 여부를 놓고 구설수에 올랐다. 아프간 선교단 일행의 납치 사건은 같은 시점에 벌어진 소말리아 해상에서 조업을 하던 한국인 어부들이 해적들에 게 납치된 사건과도 맞물려 말들이 많았다. 아프간 선교단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납치 세력과 협상을 벌여 인질들을 풀려나게 했지만, 소말리아 해상의 어부들이 피랍된 사건은 정부의 늑장 대응과 언론사들의 외면으로 많은 국민들의 분노와 탄식을 자아냈다. 부유한 종교계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 선교단 사건에는 신속히 대응하면서 생계를 위해 먼 나라의 바다에까지 가서 고기를 잡는 가난한 어부들에 대해서는 저렇게 찬밥 대접을 하느냐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런 교리상의 문제들보다 한국인들의 발걸음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1등 공신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저지르는 엄청난 부정부패와 비리들이다. 교회의 부패 얘기가 나오면 많은 신도들은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 또는 사이비 교회나 해당되는 것이고 절 대 다수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라고 강변하기 일쑤다. 하지만 과연 문제 있는 교회들이 일부에만 그치는 걸까? 그렇다면 왜 부정을 저지르는 교회들이 계속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일부나 사이비에 국 한된다면 기존 교단에서는 어째서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사이비 운운하는 일도 그렇다. 지금 한국 제일의 교회라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도 처음에는 기존 교단들로부터 이단 이라고 매도당하다가 교세가 커지자 그런 비난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정통 교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9

110 한국의 많은 종교 단체들 중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계이 돈에 얽힌 비리와 부패에 제일 많이 연루되는 것은 교회 의 재정을 신도들이 내는 헌금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글에 의하면, 일반 신도가 교회에 내야할 헌금들은 무려 7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 종류들을 알고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아이가 태어나고 백일 맞이 돌 잔치를 하거나 새 자동차를 사거나 취업 및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거나 목사가 가 정을 방문하거나 이사를 가거나, 자동차 면허를 취득하거나, 집을 팔거나 고칠 때도, 생일이나 환갑잔치 때도, 결혼 식이나 장례식을 치를 때도, 큰 병이 들어 수술을 하거나 병이 나아도 치료나 치유의 명목으로, 외국으로 유학을 가 거나 대학 수능이나 입사 시험을 치를 때나 교회를 새로 짓거나 부지를 매입했을 때나 모두 교회에 헌금을 내야 한 다고 한다. 물론 신도들이 기본으로 자기 수입에서 10%를 내야 한다는 십일조는 제외하고서 말이다. 이렇게 신도들에게서 많은 헌금을 걷고 있지만, 그 돈들이 과연 제대로 필요한 곳에 쓰일지 의문이다. 목사나 장로 같은 성직자들도 결국 사람인데, 재물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을까? 실제로 많은 교회들에서 돈 문제가 불거지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더욱이 개척 교회들의 경우, 목사들 중 상당수는 교회를 맡을 새로운 후계자를 선정할 때 자신의 아들에게 양도한 다. 종교 단체인 교회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발상에서 나온 일이 아닐까? 그래서 일부에서는 한국 교 회는 종교의 이름을 내건 개인 사업체다. 라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오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 이외에도 교회의 성직자들은 성( 性 )문제에서도 많은 비리를 안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세계적인 인터 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까지 등록된 일명 장목사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는 대강 이렇다. 2003년 12월 2일 경, 인천의 한 오피스텔을 방문한 장효희 목사는 집에 있던 여신도와 간통을 하다가 그녀의 남편이 들이닥치자 급히 배란다 난간으로 도망쳐 집 밖의 에어컨 실외기에 10분 동안 매달려 있다가 고령에 힘이 다했는지 그만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마치 불륜을 다룬 3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이 기막힌 사건을 접한 국내의 네티즌들은 장효희 목사를 가리켜 에어장, 에이콘장 이라는 별 명을 붙이며 한동안 실컷 비웃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추락사한 장효희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정통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단인 합동정통교단의 총회장으로 활동한 한국 개신교계의 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결코 사이비나 이단 계열의 목사가 아니 었다. 헌데 장목사가 활동하던 평화교회에서는 사망원인을 과로사라고 주장했으며 이 보도 자료가 기독교계 신문인 국민 일보에 그대로 실려 양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욱 실소를 자아냈다. 보수적인 다른 중앙일간지에서조차 여신도와 간통 끝에 추락사 했다고 발표했고, 경찰의 수사 결과도 같았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 것이다. 하긴 고인 이 사망할 당시 나이가 56세인데, 에어컨 실외기에 10분 동안이나 매달려 있는 일도 무척 힘들었을 테니 과로사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10

111 굳이 공정성(?)을 적용해 밝혀둔다면 사이비 종교 단체로 판명된 JMS교단의 교주인 정명석도 여신도를 상대로 한 성폭행 면에서는 기성 교단보다 훨씬 유명세를 떨쳤으니 피장파장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걸까?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성당으로 옮기는 일들이 많 아지고 있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양호하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천주교 교단에서도 산하 기관인 병원이나 다른 보 육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임금 문제로 시비가 자주 일고, 문제를 일으킨 신부들의 처우가 너무 가볍다는 지적 들이 재기되는 걸 보면 결코 안심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한국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계가 뼈를 깎는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지금 이대로 부패의 나락 속에 빠져든 다면, 국민들의 외면을 받고 유럽의 경우처럼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11

112 28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113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45 로마인 이야기에 관한 글이 올라왔기에 한가지 덧붙여 봅니다. 기원전 120년 경부터 시작되어 108년에 끝난 테우토네스(튜턴)족과 킴브리족 등의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공한 사건 이 있었죠. 이 사건을 두고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와 페터 아렌스가 쓴 <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정 반대로 서술했죠. 먼저 게르만족들이 어디를 목표로 했는지를 두고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이탈리아로 갈 생각이었다고 주 장합니다. 그러나 <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는 그들의 목적지 자체가 확실하지 않았고, 갈리아와 스페인으로 갔 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 게르만족과 로마군의 첫 번째 전투인 기원전 113년의 노레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패했고 그 중 2개 군 단, 약 1만 2천 명의 군인들이 킴브리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 전투는 기원전 109년에 론 강 유역에서 벌어졌는데, 이 때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지휘하던 로마군 4개 군단 2만 4천 명의 대부분은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에게 궤멸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을 격파한 게르 만족은 로마로 가지 않고 갈리아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이에 관해서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 다. 이보다 2년 후인 기원전 107년에 게르만족과 함께 왔던 켈트계 티구리니족 역시 로마군을 전멸시켰고, 더 2년 후인 105년에는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론 강 유역에서 전직 집정관 스카우루스가 이끌던 로마군 3개 군단 부대를 격 파하고 스카우루스를 붙잡아 처형시켰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같은 해 10월 6일, 로마의 집정관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지휘하던 로마군 8만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113

114 명은 아라우시오(Arausio) 부근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연합군에게 몰살을 당하는 참패를 겪기도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겁에 질려 칸나에 전투 때 그랬던 것처럼 갈리아인과 그리스인 부부 한 쌍을 로마 광장에 공개적으로 생매장을 하는 인신공양을 했습니다. 로마의 신들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칠테니 제발 게르만족의 침략에서 구해달라는 간절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은 단일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로마군이 전사한 사실이 <로마인 이야기>에는 한 마디도 실려있 지 않다는 겁니다. 아라우시오라는 지명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로마인들이 패전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져 서 인신공양을 했다는 사실도 없습니다. 뭐, 시오노 나나미 본인이 자기가 좋아하는게 아니면 안 쓴다고 했으니,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았다면 할 말이 없지만... 2권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에게 로마군이 연전연패하는 과정은 생생하게 묘사했으면서, 게르만족에게 참 패하는 로마군의 모습은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이 영 아리송하기만 하군요.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114

115 29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6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46 수백 만의 인구와 풍족한 농업 생산력을 가진 아즈텍 제국이 고작 1천 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대에게 힘없이 무너 진 이유 중 하나는 제국 내부의 사정에 능통한 첩자의 도움이 컸다. 놀랍게도 그 첩자는 여자였다. 말린체라는 이름 으로 불린 그녀는 스페인 군대의 사령관 에르난 코르테즈의 정보담당관이자 애인이 되어 아즈텍 제국의 사회 구조와 약점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결국 아즈텍 제국이 멸망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같은 아즈텍인인 그녀가 동족을 배신하고 외부 침략자인 스페인 군대와 결탁한 이유는 어릴 적, 그녀의 아버지가 황제 몬테수마에게 처형되고 그녀는 노예가 되어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니며 학대받은 것에 대한 복수극이었다고 전 해진다. 한국사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물론 존재했다. 수많은 매국노들이 버젓이 활개치던 구한말 시절, 그 중에서는 여 성도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으니 바로 배정자( 裵 貞 子 )였다. 1870년, 김해 밀양부에서 아전으로 일하던 배지홍( 裵 祉 洪 )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3년 후, 뜻하지 않은 변고에 휘 말려 아버지를 잃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역모의 혐의를 쓰고 처형당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 때문에 역모 죄를 받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조선 시대에 역모는 살인이나 강간보다 더 큰 죄였다. 다른 혐의도 아닌 역적이 되어 죽었으니 그 일가족은 생계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배정자의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어린 딸을 데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거지에 가까운 생활 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배정자는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자신과 어머니에게 비참한 궁핍을 강요한 조선이라 는 나라와 세상에 대한 격렬한 원한과 증오를 마음 속 깊이 새겼다. 9년 간의 떠돌이 생활 끝에 배정자는 1882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통도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하지만 답답 한 절간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지, 그녀는 2년 후에 절을 뛰쳐나왔다. 절을 나왔지만, 당장 가진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던 그녀는 절에 들어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기생이 되었다는 말 도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아닌 듯 하다. 그대로 떠돌이 생활로 끝났으면 훗날의 역사에 더러운 오명은 남기지 않았으련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구원의 손길을 붙잡았다. 그녀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던 동래부사 정병화( 鄭 秉 和 )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의 도움을 받 게 된 것이다. 너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구나. 하지만 너는 역적의 딸이라 이 땅에서는 먹고 살기가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마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6

117 침 나한테 자주 왕래하며 친한 일본인이 한 명 있다. 내가 그에게 부탁해서 너를 일본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주마. 일 본에서 너는 역적의 딸이 아닌 자유로운 몸이니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달리 선택할 방도도 없던 터라 배정자는 정병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일본인 마쓰오( 松 尾 )는 그녀를 일본으로 데려가 살게 해 주었다. 이때가 1885년, 그녀 나이 15세 무렵의 일이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은 (민족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녀 개인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일본의 도 움을 받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김옥균 같은 개화 인사들이 많이 체류하고 있었다. 배정자는 일본에서 생활하면 서 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 중 한 명인 전재식( 田 在 植 )과 결혼까지 하였다. 일본에 머무르던 개화 인사들은 친 일 성향이 강했고, 그들과 교류하는 동안 배정자는 자연스럽게 근대화된 일본을 열렬히 추앙하며 동시에 낙후된 조선 을 더없이 멸시하는 신념을 굳혀나갔다. 그녀의 태도를 결코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제 강점기 때, 만주에서 활동하던 어느 독립군 장교는 휘황찬 란한 일본 도쿄 거리를 보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아, 일본이 이렇게나 잘 살고 힘센 나라였다니! 이런 일본을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겠구나! 차라리 일본에 편 입되어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나서 즉시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일화도 있으니까. 좌우지간 그런 그녀에게 결정적인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 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장차 조선를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을 미워하던 배정자. 두 사람 의 만남은 영락없이 다시 태어난 코르테즈와 말린체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고 나서 얼마 후, 배정자는 그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며 살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가 만들어 주는 불고기나 너비아니 같은 조선식 고기 요리를 아주 좋아했고, 자주 그녀와 정을 통했다. 둘은 단순히 주 인과 하녀의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연인에 더 가까웠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는 배정자와의 사이를 양부와 양녀 관계 라고 규정지었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이토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배정자는 오늘날 일본으로 건너가 극우 세력의 앞잡이가 되어 한국을 매도하고 있 는 오선화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강요받거나 속아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배정자의 친일은 어디까지 나 자발적인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핍박받고 살아온 그녀에게 조선은 조국이 아니라 멸망시켜야할 가증스러운 악마의 소굴이었고, 그런 그녀의 증오심에 약간의 정당성만 부여하여 불만 붙여주면 거대한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된 형편이 었다.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7

118 어느 새 배정자는 20세의 나이로 접어든 성인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를 단순한 하녀가 아니라 일본을 위 해 일하는 첩보원으로 교육시키며, 조선으로 건너가 고급 정보를 빼내올 것을 지시했다.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열렬 한 신봉자가 되어 있던 그녀는 기꺼이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4년 간의 양성 끝에 완벽한 첩보원으로 태어난 배정자는 1894년,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녀의 공식 직함은 조선의 일본 공사관에서 일본인들을 위한 조선어 통역관이었다.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그녀는 조선의 왕족들과 교분을 쌓았 고, 그들을 통해 고종 황제와도 만날 수 있었다. 고종은 그녀의 진짜 정체를 까맣게 모른 채,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 와 영리한 재치에 흠뻑 빠져 그녀를 깊이 신임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고종은 그녀와 성관계까지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고종은 러일 전쟁 직전, 일본군 의 손길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려 했는데 그 때 배정자에게 너를 꼭 데리고 가마. 라고 말했고, 배정자는 그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묻자 고종은 천연덕스럽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곳이다. 그 곳에 가면 일본군도 감히 나 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라고 털어놓았다. 나라 밖으로 나갈 때에도 그녀를 데리고 가야 할 정도였다면 고종이 그녀 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종의 말을 들은 배정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즉시, 일본 공사관 측에 이 사실을 전해 일본 측에서 재빨 리 손을 써, 고종의 해외 탈출을 철저히 막았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고종은 자신의 망명이 무산된 원인을 몰라 허 둥대기만 했으니 참으로 딱할 뿐이다. 러일 전쟁이 끝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배정자의 위상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녀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고위 관직에 올랐고, 정부의 고위 관료들도 그녀를 만나면 머리를 조아리며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배정 자는 자신의 본래 임무인 스파이 활동에도 충실했다. 날로 가중되어오는 일제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고종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등 세 명의 밀사를 파견해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의 경 위를 일본 정부에 상세히 알려 결국 고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데에도 그녀의 공로(?)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인생에 충격전인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 로부미를 저격한 일이었다.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인 이토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배정자는 대 성통곡을 하며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고 폐인처럼 지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후,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이 소식을 들은 배정자는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실의와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배정자에게 다시 구세주로 나타난 것은 조선주둔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明 石 元 二 郞 ) 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밀정 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 터지고 일본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배정자도 일본군을 따라 함께 갔다. 이곳에서 배정자는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마적단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도 일본 군의 밀정으로 맹활약했다. 이때 배정자는 중국 마적단의 두목과 상당 기간 동거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8

119 넘겨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 일제의 밀정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 뒤 배정자는 일본 외무부 촉탁으로 자리를 옮겨 펑톈( 奉 天 )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주로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그후 국내로 들어와 얼마동안 활동하다가는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임무를 부여받고 만주로 갔다. 일제가 배정자에게 내려준 임무는 만주에 보민회( 保 民 會 )를 창설하는 것이엇다. 1920년 봄, 일제 총독부는 최정규( 崔 晶 圭 ), 이인수( 李 寅 秀 ) 등을 중심으로 한 옛날의 일진회 잔당들을 끌어모아 만 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 첩보단체로서 보민회를 만들었다. 보민회의 후원자는 조선총독, 조선군사령 관, 총독부 경무국장 등이었다. 보민회의 반민족적 성격은 1920년 4월11일 초대 보민회 회장 최정규 등이 독립군 장 기정을 잡고 무기와 서류를 빼앗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배정자는 밀정이었으므로 제우교 성부인( 濟 愚 敎 誠 夫 人 )이라는 직함으로 발기인에 참여했으며, 보민회 고문이 되었 다. 그녀는 보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기도했다. 배정자는 보민회 활동을 마치고 1922년 국내에 들어와 총독부 경무국촉탁으로 있으면서 밀정노릇을 계속했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丸 山 鶴 吉 )의 주선으로 촉탁이 된 배정자는 그의 지령으로 항일독립투사를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를높이 평가하여 약 600여 평이나 되는 토지를 그녀에게 주기도 했다. 배정 자는 1924년 57세로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총독부는 그 뒤에도 촉탁이라는 이름으로 봉급을 계속 주어 넉넉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7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남양군도로 달려갔다. 당시 배정자는 전선에서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하여 일본군의 후원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 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배정자는 같은 조선인 여성들을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들의 노리개감으로 바치면서까지 일 제의 승리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에 걸맞게 늙은 나이에도 항상 파마머리를 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녔다. 밀정으로 활약하면서 서울과 일본에서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닐 만큼 남성 편력도 화려했다. 그녀는 두번째 남편인 현영운과 1년 살다가 이혼한 뒤, 동생으로 부르던 박영철과 다시 결혼했다가는 또 1년 만에 헤어졌다. 이와 함께 일본인 오하시( 大 橋 ), 은 행원 최씨, 전라도 갑부 조익헌, 대구의 유명한 부호인 정경진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또 57세로 은퇴할 때에 도 25세 된 일본인 순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기보다 훨씬 늙은 이토 히로부미에 고종 임금, 중국인 마적단 두목과도 놀아났고, 나중에는 22세 연하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까지 했다니.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50세 이전까지 남자가 없이는 하루도 잠을 자지 않았다던 데, 배정자도 딱 그 꼴이다.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9

120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광복될 때, 배정자는 지난날의 반민족적인 밀정 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 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 신문사의 기자들이 그녀가 머물고 있는 성북동의 집으로 찾아가 조선이 광복되고 새로 정 부가 세워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기쁜 마음이 가득 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자신이 저질렀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으며, 다 어리석고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이 때 옆에 있던 배정자의 손자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저질렀던 모든 죄를 자백하고 사람들 앞에 용서를 빌라고 다그 쳤다고 전해진다.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감옥에서 나온 배정자는 주위에 돌봐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힘들게 살다가 1951년, 서울 에서 81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하였다. 조선인이면서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하며, 일제를 위해 국제 간첩이자 매춘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한 여인은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20

121 30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2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52 전쟁으로 잡힌 적군 포로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닌 선량한 시민들을 강제로 끌고 다니면서 무려 10만 명 이 굶어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게 만든 사건이 있다. 국민들의 인권이 철저히 억압당했던 제정 러시아나 고대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도 채 되지 않은, 그것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대 한민국 정부의 명령으로 실행되었던 일이었다. 이름하여 국민방위군 사건 이라 불리는 이 끔찍한 만행은 그 경과가 너무나 수치스러워 한국 현대사 에서 철저히 은폐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950년대 말인 12월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는 수도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긴 상태였다. 잠시 전세가 역전되어 북진을 하기는 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불리해져 서울로 쉽게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의 남진에 한국군이 그토록 믿었던 미군과 유엔군도 속수무책으로 패주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의 수뇌부들은 불의의 사태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이후, 북한군의 파죽지세 같은 남침에 청장년들 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 징용 당했던 전례가 다시 되풀이 될 우려에서였다. 아울러 인해전술 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이쪽도 인해전술 로 맞서겠다는 취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12월 16일, 부산의 국회에서는 일사천리로 국민방위군 설치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의 내용인즉 슨, 전국의 만 17살 이상에서 40살 이하의 모든 청장년들을 징집하여 각 지역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여 1만 명씩 맡아 훈련시킨 뒤, 총집결지인 부산으로 보내 다시 북쪽의 전선으로 올려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 국민방위군을 총괄할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물이 바로 김윤근이었다. 그는 출생 연도조차 확실치 않은 데,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윤근은 일제 치하였던 1928년, 제2회 전국 씨름 대회에 서 전 회의 우승자 이도남을 물리치고 우승한 경력이 있는 씨름꾼이기도 했다. 그 뒤로 7번 정도 우승을 한 후, 일본군에 입대했다고 전해진다. 해방이 되자 그는 1948년, 우익 성향의 어용 단체인 대한청년단에 들어갔다. 청년단에서 일하는 그는 뜻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2

123 하지 않은 행운을 얻었는데, 이승만이 청년단을 방문하던 날, 우렁찬 목소리로 그의 눈에 들게 된 것이었 다. 이 일을 계기로 김윤근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고작 목소리가 좋다고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어 출세를 하게 되었다니, 무슨 전제 왕조 시대의 일화 같 지만 이승만이란 인물 자체가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봉건 왕조의 국왕에 더 가까운 성격이어 서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조선의 왕족인 양녕대군의 후손이었고 미국 유학 시절, 이를 미국인들에게 자랑하고 다 녔다고 한다. 그리고 귀국 후에 정권을 잡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은 세종의 후손들이 나라를 망쳤으니, 이제 양녕대군의 후손인 대통령 각하께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혹세무민을 일삼았다. 이런 풍문을 보고도 이승만은 아무런 제지나 단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 전쟁은 김윤근에게 고속 출세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이 터지자 대 한청년단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청년방위대로 증설되었고, 후방에서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역할까지 맡 았다. 이로 인해 대한청년단의 간부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며 열심히 사복 을 채워나갔다. 대한청년단의 일원이었던 김윤근은 이승만의 오른팔인 국방장관 신성모와도 끈끈한 인맥을 맺어 그의 소개로 결혼까지 했으며, 1950년 말 무렵에는 대한청년단의 최고 권력자인 단장에 취임했다. 청년단의 단장이 된 그에게 이승만은 더욱 큰 감투를 내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 창설된 국민방위 군의 방위군 사령관 직위였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공식적으로 한국 육군의 준장 대우를 받는 자리에 해 당되었다. 일제 말기에 일본군 사병 노릇을 잠깐 했다는 것이 군 경력의 전부인 엄연한 민간인 신분이었던 김윤근은 이렇게 해서 졸지에 준장이라는 장성 직에 올랐던 것이다. 국민방위군은 자원입대도 가능했지만, 그보다는 징집의 경우가 더 많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의 도입 부분에서 두 주인공이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장면이나, 소설 태 백산맥 의 국민방위군 사건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1950년 12월 21일, 서울 지역에서 1만 여명이 징집되어 부산을 향해 남하하는 것을 처음으로 약 50만 명 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이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엄연한 군인인 이들에게 군복이나 군화 등의 생필품이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는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3

124 사실이었다. 때마침 12월의 한겨울이어서 무척 추운 날씨였음에도 정부는 추위를 막을 방한복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다. 막연히 정부에서 군복이나 방한복을 지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국민방위군 장병들은 뼛속까 지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를 온 몸으로 실감하며 눈물을 흘려야했다. 그나마 할당된 식량 관련 예산(209억 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것조차 사령관인 김윤근과 부사령관인 윤 익헌 등 고위 간부들이 대부분 횡령해 먹어 실제로 장병들에게 돌아간 액수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전체 예산의 3분의 1인 약 60억 원이 횡령되었다고 전해진다. 방위군 계획이 시작된 초기에는 양곡권이 배급되어 마을에 가면 식량을 얻었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 나자 그조차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전쟁 중이던 나라 상황에서 50만 명이나 되는 굶주린 배를 한꺼번에 채워줄만한 식량은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방위군 병사들이나 하급 장교들이 마을 이장과 동장들에게 양곡권을 내보이며 식량을 달라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아무리 그들을 다그쳐봐야 없는 식량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내 식량이 바닥나자 양곡권은 쓸모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와중에도 병사들의 훈련을 맡은 전국 각지의 교육대 장교들은 막상 자기가 맡고 있는 교육대에 병 사들이 몰려오면 다른 교육대로 가라고 쫓아보냈고, 그러면서 마치 자신의 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은 것처 럼 서류를 조작하여 정부로부터 또 예산을 타내 그것으로 사복을 채우기 일쑤였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자,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장병들은 소지한 금반지나 각종 패물들을 장교에게 주 고 징병을 면제받거나 아예 감시가 느슨한 밤을 틈타 도망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럴 재산도 기운 도 없는 사람들은 열악한 처우에 대해 불평을 털어 놓았다가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하고 동물적인 생존 본능만 남은 상태였다.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들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구걸을 하거나 식량을 얻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들 켜 싸움을 벌이는 일은 이미 일상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휘하 병사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거기에 이와 전염병으로 인해 무수히 죽어가고 있음에도 방위군의 총사령관인 김윤근과 부사령관인 윤익헌 등은 이런 병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횡령해 먹은 수십억의 예산액을 어떤 용도로 썼을까? 놀랍게도 부산 시내에 서 영업 중이던 기생집들을 돌면서, 밤이면 밤마다 돈을 트럭에 싣고 와서 기생들을 향해 선심 쓰듯 뿌리 며 질펀하게 놀아났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참상이 탈출한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입을 통해 사실로 들어나자,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4

125 성토하는 민심이 끓어올랐다. 야당인 민주당도 이 문제를 국회에 정식 거론하여 이승만 정권이 저지르는 엄청난 비리를 공격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자인 김윤근은 1951년 1월 8일 발표한 성명에서 국민 방위군 50만 병사들에게는 먹을 식량과 군수품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늘 어놓았다. 다음날인 1월 9일, 이승만도 국민방위군과 청년단 수십만 명을 앞세우고 다 같이 일어나서 (중공군의) 인해전을 인해전으로 막아야 할 것 이라고 거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이렇게 진실을 은폐, 축소하려는 권력자들의 사탕발림은 통하지 않았다. 다시 12일 후인 1951년 1월 20일의 기자회견에서 김윤근은 현재까지 한국 보수 세력들이 단골로 써먹는 메뉴를 내놓았다. 국민방위군 백만 명은 정상적으로 훈련을 받고 있으며, 방위군 병사들이 열악한 처우 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일부 불순세력들이 퍼뜨린 낭설이다. 이라는 식으로 색깔론을 펼친 것이다. 김윤근 의 뒤를 봐주던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제 5열(스파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라. 며 그를 응원했다. 하지만 권력층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궁핍한 민생과 방위군에 징집된 병사들의 참상을 목도한 사람들의 기억까지 조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수록 여론은 악화되고 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여당 측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이 사건의 비리를 다룬 정보들을 수집해 나갔다. 마침내 국민 여론과 야당의 공세에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하는데 한계를 느낀 정권의 수뇌부들은 그러나 여전히 꼼수를 부렸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룬 재판을 총괄하게 된 신성모는 자신의 심복인 김윤근을 보 호하기 위해 자신과 절친한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이선근은 재판을 한 지 불과 3일 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형만을 선고했고 그 외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무죄 처리하여 사건을 서둘러 축소시키려 했다. 정말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이 정도로 했으면 적당히 알아서 잠잠해졌어야할 여론이 더욱 악화되어 도대 체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야당의 공세도 거세기지만 했다는 사실이었다. 민중들의 격렬한 분노 앞 에서 이승만 정권의 수뇌부들은 무척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흥분한 여론을 방치했다가는 언제 정권을 타도하자는 목소리로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생살을 깎는 아픔을 무릅쓰고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심복인 신성모와 김윤근을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5

126 쳐내기로 한 것이었다. 아무리 충실한 부하라고 해도 자신의 권력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지막 날을 앞두고 신성모와 김윤근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상상력을 동원해 가상으로 그들 간의 대화를 복원해 보기로 한다. 김윤근: 각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오직 각하와 대통령 각하에 대한 충성으로 그런 것뿐입니다. 신성모: 이 사람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한 일이 뭔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김윤근: 각하께는 정말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저만 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각하와 대통령 각 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발 대통령 각하께 잘 말씀드려 저를 꼭 살려주십시 오. 신성모: 이미 늦었네. 김윤근: 각하! 신성모: 그러기에 적당히 해먹었어야지. 누가 그렇게까지 하랬나? 김윤근: 이렇게 엎드려 빕니다. 이 못난 놈을 살려주실 분은 각하 밖에 안 계십니다. 저를 살려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각하, 각하 신성모: 정말 이렇게 나올텐가? 나도 더 이상 자네를 어쩌지 못해. 대통령 각하께서 나도 해임하신단 말 일세! 나나 자네나 이제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라 이 말이야! 김윤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왜 충신이신 국방부 장관 각하를 신성모: 그게 다 자네가 저지른 짓거리 때문이 아닌가! 그것 때문에 나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이 말일세! 김윤근: 모든 건 제 잘못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각하, 각하 신성모: (김윤근을 밀치고 나가면서) 에잇, 어쩌다 저런 무식한 씨름꾼 놈한테 별을 달아줘서 이 지경까 지 만들었는지 원!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6

127 이승만의 지시로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되었고 대신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절친한 사 이였던 박마리아의 남편인 이기붕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의향을 간파하고 재판 을 다시 열었다. 원래 군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워낙 여론이 들끓다보니 정부에서도 재판을 공개 진행으로 처리하였고, 그 바람에 재판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51년 7월 5일,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장에서 검찰관인 중령 김태청은 증 인인 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에게 엄연한 민간인인 김윤근이 하루아침에 준장 자리까지 올랐는가? 라 고 물었다. 그에 대한 정일권의 답변은 모두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김윤근이 군인이 되어 한국 전쟁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운 것 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산이 많아 가난한 국고에 거액을 헌납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가 국민방위군의 사 령관에 임명된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의 입김에 의해서였다. 결국 김윤근과 김윤근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최고 간부 5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구 교외의 야 산에서 모두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다. 굳이 사형을 공개한 이유는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이 권력층 의 비호로 외국으로 빼돌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어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 아침에 육군 장성이 되었다가 자신이 저지른 천문학적인 공금횡령으로 인해 처형된 김윤근의 경우는 1공화국 당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원칙을 잃고 무분별하게 운영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7

128 31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29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48 제테크를 통한 신분 상승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할 인물을 한 명 소개하 고자 한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여성운동가와 국회의원을 거쳐 마침내 부통령의 부인이 되어 인생 역전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 박마리아가 그 주인공이 되겠다. 박마리아는 구한말 무렵인 1906년 3월 26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 나는 바람에 홀어머니인 고대의( 高 大 義 )의 밑에서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고대의는 목사 인 정춘수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딸을 키웠는데, 정춘수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 다. 박마리아 역시, 어머니처럼 열성적인 신앙을 가진 개신교도로 자랐다. 그녀는 다른 집들의 어린 아이를 봐주는 보모 생활과 틈틈이 밭일을 하며 받는 품삯으로 힘들게 연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에게는 두 가지의 굳은 신념이 자랐으니, 하나는 독실하다 못해 거의 광신적일 정도의 뜨거운 신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 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박마리아는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19년 개성의 호수돈( 好 壽 敦 ) 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 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녀는 생활비의 대부분을 친일파인 윤치호의 딸 윤봉희에게 얻어서 썼다. 이런 성 장 과정을 거친 그녀가 친일파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마리아는 얼마동안 강릉에서 어머니와 함께 교회 일을 하다가 같은 학교를 나온 조 현경의 도움을 받아 1924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영문과에 들어간 박마리아는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 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학업에 몰두했고 그 결과 4년 후, 수석으로 영문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를 나온 박마리아는 학교에서 같이 일했던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레(Hernry Gerhard Appenzeller)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국 테네시주의 스카릿 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 귀국한 박마 리아는 유학시절 만난 이기붕과 약혼을 하고 3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29

130 이기붕과 결혼한 이후, 그녀는 기독교 여성 단체인 YW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되었다. YWCA에서 두각 을 나타낸 박마리아는 민족의식을 지닌 일부 회원들과는 달리, 일제 및 총독부에 철저한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30년대 말, 일본이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서 조선의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은 전국적인 동원 체제를 가동하여 조선의 지식인 계층을 철저히 복속시키려 하였고, 이에 많은 지식인 계층과 종교 단 체들은 자발적으로 굴복하여 적극적인 친일의 대열에 앞장섰다. 식민지 치하의 조선이 전시 체제에 들어가자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일부 회원들은 YWCA에서 떠나 기도 했지만 박마리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세계 YWCA에서 탈퇴하고 일본 YWCA의 산 하 기관으로 흡수될 것을 결정했다. (1938년 7월 15일) 통합에 앞서 박마리아를 비롯한 조선의 YWCA는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에서 황국신민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미 박마리아가 활동하던 YWCA는 1938년, 일본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위문금을 모금해 총독부에 바치는 등의 친일 행 각을 벌인 터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박마리아의 친일 행각은 일제로부터 무슨 혹독한 압력이나 강요에 못 이겨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한 번 선택한 길이니 이제 거칠 것이 없다. 박마리아는 노천명, 모윤숙 같은 친일 여성 인사들과 손잡고 일본군에 지원하여 달려가라는 찬조 연설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고, 그런 와중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 대( 朝 鮮 臨 戰 報 國 團 婦 人 隊 )라는 단체의 지도 위원이 되는 허울 좋은 감투를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친일 언론이었던 조광( 朝 光 )이 주최한 1942년 5월 23일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용기백배한 발언을 남겼다. <우리들은 가정에서 죽음을 너무 무서워한다는 점을 타파시켜야겠어요. 어차피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데 죽음을 뭐 그리 무서워합니까? 나라를 위해 한번 몸을 바친다는 것이 어떻게 떳떳한 일인가를 깊이 인식시켜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사나이로 나서 총검을 들고 전선에 나가는 것이 곧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는 일이 아닙니까?> 마치 나도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자원입대를 해 전쟁터로 갔을 것. 이라는 말을 했던 친일 여류 시인 의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전쟁터가 좋으면 종군 위안부에 자원이라도 해서 갔어야 하지 않을까?)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0

131 많은 친일파와 조선인들이 절대 망하지 않고, 망하더라도 최소한 2백년 후에야 망할 것이다. 라고 철 썩 같이 믿고 있던 대일본제국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지 고작 4년 만에 힘없이 패망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박마리아는 다소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민족정기가 되살아나 친일파 척결을 당해서가 아니라 남편인 이기붕의 사업이 침체기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기붕은 종로의 국일관 지배인을 지내거나 다방,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수익을 거두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박마리아 일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바로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였다. 이화여대 동문들의 소개로 만나게 된 프란체스카는 박마리아와 그야말로 환상의 커플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고 영어만 구사하던 프란체스카로서는 능숙한 영어 실력에 권력자의 비위를 살살 맞추는 재주를 가진 박마리아가 마치 입안의 혀처럼 느껴졌으리라.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얻은 박마리아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52년, 박마리아 는 한국 YWCA의 회장에 취임했으며 그녀의 남편인 이기붕도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집권당인 자유당 중 앙 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부부가 나란히 최고 권력자의 빽 을 쓰고 있으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출세 의 탄탄대로를 달리는 일 뿐이었다. YWCA의 회장이 된 지 4년 후, 박마리아는 한국 여성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모임인 대한부인회의 회장 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3년 후인 1959년에도 재선에 성공해, 한국 부유층 여성계의 명실상부한 대모의 위 치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의 행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물색하는데 고민 중이던 이승만을 위해 박마리아는 자신과 이기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들이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박마리아와 절친했던 프란체스카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로서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는 아들이 최고 권력자의 후계자로 공식 임명되었으니 사실상 대한민국 을 좌지우지할 위치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집착했고, 그 권력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얻고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던 박마리아는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같은 시대, 박마리아를 직접 만나본 이승만의 비서 박용만은 그녀에 대해 이런 증언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1

132 을 남겼다. 박마리아 여사는 내가 오랫동안 겪어 보았지만,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으며 자존심이 지나 칠 정도로 높았다. 특히 물욕이 너무 많은 굉장한 이기주의자였으며 자기 것은 쌀 한 톨도 남에게 주지 않 으면서 남의 것은 주는 대로 받았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몰라도 퍽 인색했으며 그러면서도 콧대는 대단히 높았다. 박용만의 발언에서 언급된 자기 것은 쌀 한 톨도 남에게 주지 않으면서 남의 것은 주는 대로 받았 다. 란 부분을 주목하라. 저 한 문장이 바로 박마리아라는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압축해 보여주는 내용이 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 상류층들의 행태일 수도 있다. 수십, 수백억의 재산을 가지고도 세금을 내기 싫어 자신을 빈곤층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금까지 타먹는 얄팍한 부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박마리아가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포악성, 그리고 극에 달한 부정부패를 견디지 못한 국민들이 서서히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3인조, 5인조 부정 선거를 벌이면서까지 장기 집권의 야욕을 부렸던 이승만 정권의 행태에 분노한 국민 들이 일으킨 첫 번째 봉기는 1960년 3월 15일,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였다. 그런데 이 시위 소식을 들은 박마리아는 <이대학보> 1960년 4월 1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악의적 으로 비난하였다. 학생들이 군중들의 앞장에 서서 시위를 선동하고 떠들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신의 섭리에 순종하 고 신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민이라야 위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역사의 섭리이다. 어떻게 하면 신을 두려워하는 국민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박마리아의 논지대로라면 전쟁이 터지자 국민들을 내팽긴 채 자기들끼리만 도망을 쳤고, 죄 없는 국민들 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고, 심지어 전쟁터로 나선 병사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지급하지 않아 10만 명을 굶 겨 죽였으며, 미국이 지원해준 물자마저 횡령하여 자기들의 배를 불릴 정도로 부정부패를 일삼던 이승만 정권에 맞서 봉기를 한 일은 신에게 거역을 한 범죄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파쇼 정치의 극치를 달린 이승 만 정권이 신의 대변자라는 것일까. 하긴, 오늘날에도 시위하러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모두 빨갱이 라 고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보면 박마리아만 욕하기란 부적절해 보인다. 한 번 불붙은 국민들의 저항은 정부가 경찰과 정치 깡패까지 동원하며 탄압을 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2

133 3.15 시위가 벌어진 지 한 달 후인 4월 19일에는 전국적으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으며, 6일 후인 25 일에는 대학 교수들까지 거리로 나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외쳤다.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이를 보고 있던 미국도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현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3억 달러의 경제 지원도 다시 생각해 보겠다. 라고 이승만에게 엄포를 놓게 되 었다. 국물이 흘러넘치는 냄비처럼 정국이 심하게 요동을 치는 상황임에도, 박마리아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 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권력의 더러운 힘을 이용해 민중들의 분노를 막아보려고만 했다. 4월 19일 전국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기 직전, 박마리아는 반공청년단을 향해 당신들을 3백만 단원들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까짓 학생들 시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가! 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반공청년단 본부에서 는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시위에 참석한 고려대 대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집단 폭행 했는데, 이 사건이 학생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마침내 4월 19일의 국민 항쟁으로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의 단맛에 취해 이성을 잃고 있던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는 학생 시위대로부터 분노의 표적으로 인 식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기붕의 아들마저 시위대에 가담해 아버지인 이기붕에게 꾸중을 들었는데 제 가 데모를 안 하면 나라가 망하고, 데모를 하면 집안이 망합니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박마리아 부부가 사는 저택은 4월 25일의 교수단 데모 이후로 학생 시위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이기붕 일가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집을 떠나 경기도 포천에 있는 육군 제 6군단으로 피신했다. 나중에 시위대가 이기붕 일가가 살던 저택을 습격해 집안을 수색해 보니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고가품이 던 냉장고와 TV, 전축 등의 호화로운 물건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긴, 권력의 실세였던 그들이 청렴결백 하게 살았다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국민들의 대규모 저항과 든든한 빽이었던 미국도 이제 뒷손을 거두는 조짐을 보이자, 이승만은 더 이상 권좌에 오래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의 충신(?)을 버릴 수 없었던지 이승 만은 차를 보내 이기붕 일가를 경무대 별관 옆에 있던 관사로 피신케 하였다. 관사로 피신한 이기붕 일가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낸 하루 였다. 아침이 되기 전,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장남인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인 이기붕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3

134 과 어머니인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옥을 쏘고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나중에 국회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먼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했으 며, 그 뒤에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이 살아날까봐 총을 쐈다고 한다. 마치 옛날 조선 명종 무렵, 온갖 탐학 과 횡포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윤원형과 정난정이 권세를 잃고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자 그 고통 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빈곤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친일파와 독재 정권과 결탁하며 신분 상승을 달성했던 여걸(?) 박마리아는 결국 이렇게 해서 오욕으로 얼룩진 인생을 마감했다.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4

135 32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6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45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함대의 눈부신 승전에 버금가는 전승의 주역들은 단연 의병들이다. 빈약한 장비와 부족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강대한 일본군에 맞서 과감히 분투를 벌였던 의병들은 적을 맞아 달아났던 왕실과 조정 대신들에 비하면 살아있는 영웅이라 할만하다. 최초의 항일의병을 일으킨 장본인은 경상도 의령 출신의 곽재우였다. 그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인 남명 조식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곽재우는 젊어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조정의 부패를 꼬집는 내용 을 적어 낙방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오랫동안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한 량 생활을 하고 다녔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 1군 1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그는 집안에 있던 재산을 모두 털어 평소에 친분이 있던 용감한 장사들과 친구들을 설득하여 약 1천 명 규모의 의병을 조 직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1일 후인 4월 24일의 일이었다. 곽재우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지만 재산을 모두 털어도 의병들을 먹이고 입히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의 병을 일으키자마자 가장 먼저 초계( 草 溪 )의 빈 성으로 들어가 무기와 군량을 가져왔다. 이런 그의 행동이 합천 군수 전현룡에게 도적으로 의심을 받아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도사 김영남과 초유사 김성일이 그를 직접 만나보고 의심을 풀어 큰 탈 없이 끝났다. 곽재우를 만난 김성일은 그에 대해서 성정이 매우 급하고 과격하여 돌격 대장으로 적합하다. 라고 평가했는데, 그에 걸맞는 일이 발생했다. 경상감사 김수는 전쟁이 터지자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는데, 이에 곽재우는 매우 분개 하여 김수의 10가지 죄를 적은 격문을 경상도 내의 여러 장령들에게 보내어 김수의 머리를 베어 선조가 피난해 있는 행재소에 보내야 한다고 선동을 했을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곽재우가 지은 격문에는 네(김수)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실제로는 머 리가 없는 시체와 같다. 네가 조금이라도 신하된 자로서의 의리를 안다면 너의 군관으로 하여금 너의 머리를 베게 하 여 천하 후세에 사죄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하늘과 사람의 분노를 씻 겠다. 너는 그것을 알라. 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격문을 읽은 김수는 크게 노하여 휘하의 수령들을 시켜 곽재우가 일개 백성의 신분으로 감히 감사를 죽이라는 협박을 했으니 역적이나 다름없다는 격문을 지어 돌리게 했으며, 초유사 김성일에게 이 사실을 알려 곽재우를 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6

137 그러나 김성일은 김수의 부탁을 거부하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곽재우가 자발적인 충성심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 정황을 보고했다. 그는 장계에서 곽재우가 일개 백성의 신분으로 감사의 죄를 성토하여 그를 죽이라는 격문을 돌린 일은, 아무리 스스로 국가를 위하여 했다고 해도 질서를 어지럽힌 백성의 행위에 해당되니 즉시 처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때를 당하여 홀로 외로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무찔렀으므로 도내의 쇠약한 백 성들이 그를 방패나 성처럼 든든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실수를 하였다는 이유로 즉시 처형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여 적을 막을 계책이 없을 뿐더러 군사와 백성들도 필시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미봉책( 彌 縫 策 )으로 재삼 경계시키고 타일러 이미 순종하였는데, 이 일 때문에 순찰사에게 죄를 얻게 된다면 서 로 용납하기 어려울 듯 하므로 신이 또 김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잘 대우하게 하였으니 염려할 만한 변 고는 없을 듯합니다. 라고 곽재우를 변호했다. 마침 선조도 김수가 곽재우를 역적이라고 욕한 장계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김성일의 장계를 보고는 미심쩍은 의심이 풀려 즉시 김수를 소환하니, 이에 경상도의 인심이 크게 감동하였다 고 한다. 곽재우와 김수의 악연(?)은 계속 이어져, 훗날 김수는 산음현( 山 陰 縣 )에 있다가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을 거꾸로 타고 정신없이 함양으로 달아났을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 이에 경상도의 사람들 중에서 김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곽재우에게 겁을 먹었구나! 라고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말이 잠시 빗나갔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곽재우는 의병 조직을 이용한 게릴라전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아버지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 帖 裏 )을 입고서, 자신과 얼굴과 체격이 비슷 한 의병 10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도 역시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 말에 태워 싸우게 했다. 그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누비면서 일본군을 보면 재빨리 돌격하여, 번번이 그들을 패주시켰다. 곽재 우는 자신과 닮은 복장과 얼굴을 가진 기병 10명을 함께 내보내어 일본군으로 하여금 어느 누가 장수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왜적들이 이 지 방에는 홍의 장군( 紅 衣 將 軍 )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곽재우가 거둔 전공 중 가장 빛나는 승리는 승려 출신의 일본 장수, 안고쿠지 에케이( 安 國 司 )의 경상우도 진출을 막 아낸 것이었다. 안고쿠지 에케이는 스스로 전라감사라고 칭하면서 창원과 함양을 거쳐 의령에 들어와 남강을 건너려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입수한 곽재우는 중요한 지역마다 척후병과 복병을 숨겨놓아 일본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폈으 며, 산 위에서 일본군의 병력 규모에 따라 횃불로 신호를 보내게 했다. 안고쿠지가 거느린 일본군이 강을 건너는 순간 산마루에 숨었던 곽재우의 척후병이 호각을 불어 알렸고, 곽재우가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7

138 미리 숨겨둔 복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예기치 못한 조선 의병의 공격에 일본군이 당황해하면서도 조총을 쏘았 지만 조선 의병들은 적이 총을 당기기도 전에 몸을 숨겨 총탄에 맞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곽재우는 미리 조총의 장 전 속도와 발사 시간까지 면밀히 조사해 의병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조선 의병들은 일본군에게 기습적인 돌격을 감행 해 최소한 1백 명을 참살했으며, 놀란 일본군은 서둘러 달아났다. 곽재우는 정인홍 및 김면 같은 다른 의병장들과 연합 작전을 벌여 일본군이 점령한 현풍성을 탈환하는 데도 앞장섰 다. 그는 연합 의병 4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말, 낙동강을 건너 현풍으로 진격했다. 곽재우는 군사들을 시켜 성 주변의 비파산에 배치해 한밤중에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횃불을 올리는 식으로 여러 차례 무력시위를 벌이며 홍의 장군이 여기 왔다. 내일 성을 함락시키고 너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라고 고함을 지르게 했다. 곽재우가 벌인 이 심리극에 동요했는지 일본군은 다음날 성을 버리고 창녕 쪽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곽재우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현풍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밖에도 곽재우는 특이한 공적을 몇 가지 더 세웠다. 임진왜란 동안 조선 땅에는 일본군과 내통하여 매국 행위를 하던 반역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중 공휘겸( 孔 撝 謙 )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 자는 일본군에게 자발적으로 붙어 적 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고 그 대가로 경주 부윤이라는 허울뿐인 벼슬을 받기도 했다. 출세(?)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공 휘겸은 자신의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그만 곽재우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파렴치한 매국노의 행태에 분 노한 곽재우는 미리 공휘겸의 집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그가 오자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또한, 곽재우는 낙동강에서 일본 배 한 척을 나포하기도 했는데 그 배를 조사해 보니 조선 왕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고 한다. 아마, 조선 왕릉을 도굴한 한양의 일본군과 같은 패거리였던 것 같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임란 동안 의병에 앞장섰던 곽재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곽재우가 의령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鼎 津 江 )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 下 道 )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왜병을 현풍과 창녕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왜적 들이 감히 정암진( 鼎 巖 津 )을 건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곽재우의 공이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8

139 33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0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33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무적의 군대라고 자칭하던 일본군, 임팔에서 최악의 추태를 보이다. 1998년 무렵, 인터넷 통신 매체인 <나우누리>에서는 박상욱 씨가 쓴 구타교실 이라는 소설이 큰 인기 를 끌었다. M고( 高 ) 라는 한 사립 고등학교를 통하여 한국 사회의 후진적이고 낙후된 모습을 풍자하는 소설이었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M고의 이사장은 입만 열면 옛날 일본군은 세계를 재패한 무적의 군대였 다. 라며 일제를 찬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M고의 늙은 이사장이 유독 특별한 인물이어서 그런 말을 하고 다녔을까? 그렇지는 않다. 당장 내 아버지 만 해도 술이 들어가면 일본은 미국 말고는 어느 나라와 싸워서도 져 본 일이 없다. 2차 대전 때 미국이 원자탄만 만들지 않았으면 일본이 이겼을 것이다. 라면서 열변을 토하니까. (그런데 일본이 이겨서 우리 한테 좋은 거 있어요?) 사실 이런 식의 일본군에 대한 이미지는 비단 몇몇 인사만이 아닌 50~60세 이상의 대부분의 기성세대들 이 간직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 다수의 한국인이 존경하는 박정희와 김종필 등의 권력자들만 해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였지 않은가? 그렇다면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정말 무적의 군대 였던 것일까? 그 무적의 일본군이 고작 원 자탄 두 방을 맞고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면 너무 허탈해서 맥이 빠지는 일이다. 과장이나 신화가 아닌, 진짜 일본군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임팔 작전을 참고하면 된다. 이 임팔 작전 의 개요를 알게 된다면 구 일본군이 무적 이었다는 환상이 철저하게 부서질 것이다. 1943년 3월, 도쿄의 일본군 수뇌부는 인도 북동부의 작은 도시인 임팔을 점령하는 이른바 임팔 작 전 을 기획한다. 당시,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임팔을 비롯한 인도의 동부 지역을 일본군 이 점령하게 되면, 일본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국에 영국이 지원을 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인 도의 영국 지배 체제를 뒤흔들어 인도에 친일 정권을 수립할 가능성도 컸다. 실제로 인도의 반영( 反 英 ) 운 동가 찬드라 보즈는 일본의 수상인 도조 히데키( 東 條 英 樹 )와 만나 일본군이 임팔을 거쳐 인도로 진격해 오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0

141 면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내응하여 인도에서 영국군을 몰아낸다는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작전의 실행 여부를 두고 일본군 내부에서도 의문을 품거나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전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일본군의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실제로 이 무렵,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의 맹렬한 공세를 맞아 크게 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서 저 먼 인도에까지 군대를 보낸다면, 태평양 방면의 전력이 분산되어 크게 약화되고 자연히 전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군인 출신 수상 도조 히데키의 심복인 육군 중장 무다구치 렌야( 牟 田 口 廉 也 )는 이런 임팔 작전의 실행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에게 끈덕지게 졸라대 결국 작전의 재가를 얻어내는데 성공 했다. 그러나 임팔 작전을 승인해준 도조 히데키 본인은 정작 이 계획이 성공하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 았다고 한다. (무다구치 렌야의 사진. 한국의 네티즌들은 그가 임팔 작전을 무모하게 고집하다 일본군의 전력을 붕괴 시킨 점을 가리켜 일본인 출신 독립 운동가이니, 한국 정부에서 독립 유공자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 라 고 조롱했다.) 임팔 작전이 통과되자 가장 신이 난 쪽은 작전의 구상자인 무다구치 렌야였다. 물론 일본군 수뇌부 안에 서도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대해 심각한 반론들이 무수히 제기되었다. 미얀마에서 인도까지라면 전선 이 더욱 길어지고 그만큼 보급선도 길어질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라는 반론도 나왔지만 이에 대해 무다구치는 다음과 같이 태연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우리 황군( 皇 軍 )이 가는 지형은 산과 정글로 우거져 있다. 눈에 보이고 널린 게 풀과 나무인데, 무슨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1

142 보급이 어렵다는 것이냐? 배고프면 그대로 뜯어서 먹으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 일본인들은 옛날부 터 고기를 먹지 않고 풀만 먹어도 건강하게 잘 살아왔다. 고기와 빵을 먹어야하는 서양인들과는 다르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 스스로도 못내 불안했던지 보급품을 실어 나를 방안을 내놓았다. 이름 하 여 칭기스칸 작전 인데 옛날 몽골의 칭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했을 때, 별도의 치중대를 두지 않고 소나 말 같은 가축 떼를 끌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그대로 잡아먹었던 것처럼 일본군도 임팔로 진격할 때, 물소 떼들에게 보급품을 지우고 가는 것과 동시에 물소들도 식량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도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가축 떼를 끌고 가는 방법을 썼다. 이리하여 1944년 3월, 마침내 임팔 작전이 실행되었고 미얀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약 10만 명이 임팔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팔 작전은 그 출발부터 삐걱대는 조짐을 보였다. 무다구치가 자신만만하게 준비했던 물소 떼들 은 정작 험준한 계곡으로 이동하자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강과 호수에서 살던 물소들은 건조한 고지대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칭기스칸 작전 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부스러져 버 렸다. 또한, 무다구치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달리, 임팔로 가는 밀림 지대에서 나는 풀들은 사람이 먹지 못하 는 종류들뿐이었다. 나중에 굶주림에 못 이겨 아무 풀이나 닥치는 대로 뜯어 먹었다가 심한 배탈이 나 설 사를 하다 죽어가는 병사들이 속출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무다구치는 일본군이 싸워야 할 영국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 전에 참모들 을 상대로 영국군들은 모두 겁쟁이라 하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놈들은 우리 대일본 황군이 공중 에 대고 총 몇 발만 쏘면 벌벌 떨면서 항복해오는 얼간이들에 불과하다.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수시로 했 다고 한다. 이런 인식은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군 장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 중국 과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일본군이 손쉽게 점령하면서 영국군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임팔 주변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군 수뇌부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영국군들은 각지에 튼튼한 보루와 기관총에 탱크와 박격포까지 갖춘 상태였고, 여기에 비행기를 통한 공중 보급과 연합군인 미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일본군의 공세에 전혀 압도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영국군을 얕보고 무작 정 반자이!(만세라는 뜻의 일본어)를 외치며 돌격했던 일본군 병사들은 안전한 보루에서 보호받으며, 영국 군이 쏘아대는 기관총 세례에 벌집이 되어 번번이 패주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영국군에 소속된 네팔인들로 구성된 구르카(Gurkha) 부대는 산악전과 정글 전투에 탁월한 기량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2

143 을 보여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때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들에 따르면, 한 구르카 병사가 그들이 가 진 검인 구크리(Khukuri)로 철모를 쓴 일본군 병사의 머리를 내리치자 그 병사는 철모와 함께 머리까지 쪼 개져 즉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군과의 정글 전투에 대해 일본군과 숲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상어를 잡으러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라고 망설였던 영국군 장군들도, 구 르카 용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는 이내 일본군과의 정글 전투에 자신감 을 가졌다. 전황이 이렇게 악화되어 가는데도 무다구치는 초기의 작전을 개선하거나 아니면 서둘러 철수하여 남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는 일은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후방의 사령부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요정을 차 려놓고 게이샤(기생)들을 불러 매일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터에까지 여자를 데리고 와 놀아나는 일은 일본군 내에서도 흔한 일이었으니 무다구치 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전방에서 말단 사병 들이 영국군의 포화와 싸워가며 죽어가고 있는 동안, 총사령관은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는 모습이 일반 병 사와 양식 있는 장교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자신을 둘러싼 여론이 악화되자 무다구치는 나름대로 개선책을 내놓았는데, 그것도 가관이었다. 기지 안 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신불( 神 佛 : 일본의 전통 신들과 부처가 합쳐진 것)에 승리의 기원을 올리는 축문 을 읆어 대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무다구치의 축문을 들은 일본군 장병들은 사령관 이 귀신이 들렸나? 아니면 머리가 돌아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전 쟁터에서 기도를 한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7월로 접어들면서 임팔을 중심으로 한 인도 동부 전선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다름 아닌 우기가 시작 되면서 연일 비가 쏟아졌고, 그와 동시에 습기가 높아짐에 따라 각종 전염병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던 것이 다.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굶주린 상태의 일본군 병사들에게 전염병은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 다. 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약간의 기력이라도 남 은 병사들은 정글로 들어가 뱀이나 개구리, 심지어 벌레와 풀까지 먹으며 버티려 했지만 그런 것들로 배고 픔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더구나 그것들은 소화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먹은 병사들은 굶주림보 다 더한 배탈과 설사, 장염으로 인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었다. 물론 무다구치는 병사들이 전염병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동안, 안전한 후방의 사령부에서 최고급 식사를 즐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을 보다 못한 장교들은 차라리 영국군을 공격해 그들이 가진 식량이라도 빼앗아 먹자! 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했고, 그대로 실행하기도 했지만 영국군이 순순히 식량을 내줄리 만무했 다. 영국군 진지에 돌격한 일본군 병사들은 영국군이 맹렬하게 퍼붓는 대포와 기관총 사격에 피떡이 되어 무참히 살육을 당했다.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3

144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전투에 무의미한 개죽음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다구치를 제외한 온 일본군 장성과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급기야 육군 31사단을 이끌던 사토 중장은 총사령관인 무다구치의 승인 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철수하는 사태까지 강행했다. 임팔 작전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거 기에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한 영국군과 미군 연합군은 일본군에 대한 역공세를 취하고 나왔다. 사태가 이쯤까지 치닫자, 무다구치도 더 이상의 전투 수행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사토 처럼 철수하기로 했는데, 그러나 명색이 총사령관인 처지에서 차마 철수 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쑥 스러웠는지, 북쪽 전선을 둘러보고 온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퇴각해 버렸다. 총사령관 본인이 포기한 전투이니, 다른 장병들로서야 더 이상 수행할 의지도 사라졌다. 먼저 퇴각한 사 토 중장의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무질서하게 패주를 거듭하면서 질병과 배고픔에 지쳐 죽어간 동 료들의 시체를 그대로 정글과 산악 지대에 방치하며 돌아왔다. 임팔에서 미얀마로 통하는 도로 곳곳마다 하얗게 변한 일본군 병사들의 유골이 가득 널려 있었다고 해서, 이 도로는 백골( 白 骨 ) 가도 라는 섬뜩 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나마 도망갈 수 있었던 병사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지 않은 부대 병력 들이 철수하지도 못한 채,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고 죽어갔다. 임팔 작전은 이렇게 해서 끝났지만, 그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애초 작전에 동원된 10만 명의 인원들 중, 영국군과의 전투로 죽은 사상자는 3만에 달했고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죽거나 전염병에 시달 리다 죽거나 그밖에도 미처 도망치는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행방불명된 병사들도 2만 5천 명이나 되었 다고 한다.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이 임팔 작전에서 죽어간 셈이다. 그러나 임팔 작전이 이렇게 파멸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무모한 전투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유족들이 정부 청사 앞으로 몰려가 반전 시위를 벌이거나, 전쟁을 고집한 책임 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를 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정글과 물 속에 널린 우리 병사들의 시체,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나도 그렇게 님(천황)을 위하여 죽고 싶구나. 라는 노래까지 만들어져 임팔에서 개 죽음을 당한 병사들을 찬양하며 오히려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선동을 하는 정신병적인 분위기까지 연 출될 정도였다. 위정자들의 무지와 무능으로 인해 수만 명의 국민이 애꿎은 죽임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나서 서 항의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는 사회, 공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마구 유린해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세상,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알면 본받아야 할 이상향으로 삼자고 할 만 하다. 제국주의 일본은 이렇듯 멸망해야 마땅한 막장 국가였던 것이다.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주동했던 무다구치는 그 후로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수상인 도조 히데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4

145 키의 심복이던 그는 자신의 인맥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그가 받은 처분은 육군 군사학교의 교장에 임명된 다는 조치였다. 군사 재판이나 강등이나 지휘권 박탈도 근신도 아닌 전직에서 그친 것이다. 일을 맡아 실 패했을 경우, 스스로 배를 갈라 책임을 진다는 사무라이 정신은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일까? 2차 대전이 일본군의 패배로 끝난 이후에 무다구치 렌야는 다른 동료들처럼 연합군에 의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를 감싸주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다른 장성들은 대부분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 졌지만, 그는 살아남았는데 영국 측 판사가 그에게 내린 판결은 참으로 황당하고도 우스꽝스러웠다. 다름 아닌 임팔 작전에서 그가 벌인 무책임한 작전이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그를 전쟁 범죄자로 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했을 법도 하건만, 그에 게서는 전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무다구치 렌야는 자신이 쌓은 부로 인해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며, 임팔 작전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그건 내 부하들이 전부 멍청해서 그렇게 실패한 것이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 다! 라는 주장을 계속해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1966년 8월 2일, 그는 78세의 나이로 사망했 는데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의 아들이 뿌린 전단지를 받아들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임팔 작전은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모든 책임은 당시 참여했던 부하들이 져야 한다는 글귀였던 것이다. 사실, 임팔 작전의 책임을 모두 무다구치에게만 묻는 것은 어쩌면 부당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다구치가 그것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해도, 최종 결정권자인 도조 히데키나 주위의 참모진들이 끝까지 거부했다면 승인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과 동아시아 재패라는 망상에 빠져 있던 일본 군부는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무다구치가 펴놓은 피비린내나는 군국주의적 몽상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1905년, 기적과도 같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자신의 힘 만으로 세계 최강대국 러시아를 이겼다는 착각에 빠졌고(러시아는 시대착오적인 전제 군주 국가였고, 발 틱 함대는 낡은 구식 폐기물에 불과했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전쟁 자금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영국과 미 국이 제공했다.), 이것은 전쟁을 담당한 일본 군부의 발언권을 크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1차 대전 이후 일본 사회는 군부가 정계와 재계를 제압하고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군국주의적 체재로 변질되었다. 일본군의 수뇌부들은 자신들만이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광신적인 이념 을 가졌고,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제거를 일삼았다. 심지어 천황을 대신한 최고 실 권자인 수상조차 예외가 없었다. 일본 군부는 두 차례의 쿠데타를 일으켜 전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수상 이누카이와 문부 대신들을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5

146 살해했고, 급기야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되었을 정도로 사이코 같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 들이 일본을 번영과 발전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일본을 이끌고 간 길의 끝에는 원폭과 패망 이라는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성찰과 반성이 전혀 없이 무작정 돌진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광신도 같은 일본 군부를 영웅시하 며, 그들의 미친 짓거리마저 본받자고 주장하는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한심함을 넘어 절망 마저 느낀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보급을 경시하고 단기 결전에만 치중했던 일본군의 전략 사상이 일본군 및 그들의 괴뢰 국가인 만주군에서 복무했던 한국군에게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뒤에 가서 설명할 국민방위 군 사건 도 그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6

147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48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부패한 왕실 치하에서 인권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미국의 친구 가 된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떤 사건을 분기점으로 시작되었을까? 나는 주저 없이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이 비행기 테러로 무너진 사건을 꼽고 싶다. 평화롭던 가을의 어느 날, 갑자 기 뉴욕 상공에 나타난 2대의 비행기가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 방송으로 중계되어 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나도 그 장면을 TV로 보았는데, 헐리우 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도무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미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쌍둥이 무역센터는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자그마치 3천 명의 미국인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갔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구를 지킨다는 미국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 다 테러 직후, 미국 정부는 테러의 주범을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로 들었고, 그들의 배후로 아프 간과 이라크를 지목했다. 그리고 2001년,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003년에는 국제적인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라크를 공격해 후세인 정부를 타도하고 이라크 전 국토를 점령하고 말 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9.11 테러와 관련하여 미국이 내세웠던 테러를 도운 아프간과 이라크를 응징 해야 한다. 라는 명분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탈레반이 과연 알 카에다를 도왔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후 세인 정부에 대해서는 전쟁을 추진한 부시 행정부도 이라크 점령 이후 후세인 정부와 알 카에다 사이에 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라고 실토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테러의 주범인 18명의 미국 여객기 납치범들 중 단 한 명만이 아프 간인이고, 나머지 17명은 모두 사우디아라비아 인들이었다. 더욱이 이슬람 테러 집단인 알 카에다의 총수 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인 오사마 가문 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부시 가문과 매우 밀접한 사이였으며, 9.11 테러 당일 미국에 오사마 가문의 일 가 친척이 머물고 있다가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가 특별히 마련해준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빠져나갔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48

149 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관련된 이슬람 테러는 비단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헤즈 볼라 같은 과격한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세력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왕 가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을 신봉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에게 25년 동안 약 700억 달러 가량의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여 와하비즘을 전파하고 있다. 애당초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 자체가 19세기에 발생한 와하비즘을 토대로 만들어 졌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수출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가장 세속적이고 자유분방한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조차 사우디가 퍼뜨리는 와하 비즘 때문에 점차 원리적인 이슬람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사우디를 비롯한 많은 무슬림 교도들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현실을 마 치 이슬람이 이교도인 미국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굴욕으로 여겨 내심 분노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런 무슬림들의 반미 감정을 적절히 이용하여 그들에게 돈을 대줄테니 반미, 반 이스라엘 테러 단체를 결 성하라고 은밀히 꼬드기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을 증오하는 전 세계 무슬림들의 맹주 역할을 톡톡히 맡고 있다. 와하비즘을 국시로 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워 자국민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범죄자는 공공장소에서 손목이 잘리거나 참수를 당한다. 범죄자를 엄하게 응징 하는 것이 질서에 좋은 방법이라고 박수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만큼 사우디에서 개개인의 인권 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현실이다. 저런 식의 잔혹한 압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니까! 사우디아라비아는 2005년에야 최초로 민주적인 국민투표가 도입되었을 정도로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국 가이다. 그나마 남성들은 투표를 할 수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더욱 가혹하다. 여성에게는 아예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은 남자 가족이 없이는 혼자서 차를 운전할 수도 없고, 남자 가족이 동행하지 않으면 공공장소를 돌아다니거나 외국에 여행을 갈 수도 없다. 여기에 사우디 여성들은 집 밖으로 나갈 때, 온 몸을 가리는 검은색 부르카를 반드시 입어야 한다. 나름대로 엄격 한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도 여성은 부르카를 입으면 남성들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지만, 사우디 에서는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여성들을 철저히 억압해 놓는 방침이 이슬람 교리에 따른 것이며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한다고 긍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49

150 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국민들의 성은 저렇게 짓눌러 놓고서, 사우디의 지배층들은 방탕한 성생 활을 실컷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거느리고 있는 후궁들만 공식적으로 무려 2백 명에 달한다. 옛날, 한국의 군사 정권에서 남녀 간의 키스신이 나오는 영화들은 풍기 문란 을 이유로 상영 금지를 시켜놓고, 정작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아내가 있으면서도 기생들과 놀아나는 난잡한 성생활을 했던 이율배반적인 모습과 똑같다. 들리는 바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권력자들도 애정 표현이 나오는 영화들은 이슬람 율법으로 빌미로 영화관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거나 그런 장면들을 삭제하라고 압력을 넣는다고 한 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문란한 성생활에 푹 빠져 살고 있으니, 세계 어디를 가나 독재자들이 하는 짓이란 똑같은 것 같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미국 정부는 9.11 테러의 배후나 주범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목하거나 그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이라크를 공격했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 이었을까? 20세기에 들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긴밀한 밀착 관계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중동에서 영국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그 빈자리는 미국이 대신 들어섰고, 미국의 대 중동 정책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중동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우방으로 붙들어 두게 되면, 자연스 레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력은 견고히 성립될 수 있고, 더 나아가 현재 중동에서 유일한 반미 국가인 이란 을 견제할 수 있다. 여기에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임과 동시에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의 리더이 기도 하다.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서 사우디아라 비아는 결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동맹국이다. 미국의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무어는 그의 영화 <화씨 911>에서 미국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유착 관계를 폭로한 바 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미국에 투자한 자금은 밝혀 진 것만 자그마치 2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금융 공황과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고민하고 있는 미국으로 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돈이 절실히 소중한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하면서 애초에 내걸었던 알 카에다와의 연계점이나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를 찾을 수 없자, 뜬금없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러 왔다. 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 명분 자체가 전혀 진실되지 않은 공허한 선전에 불과하다. 정말로 미국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러 왔다면, 사우디아라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50

151 비아의 부패한 왕실부터 없애고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는 민주 정부를 수립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51

152 35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53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1 루마니아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라." 현실에서 이런 경우를 찾자면 중국 명나라의 학자, 방효유가 있겠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자신의 손자인 건문제에게 제위를 물려 주었지만, 그의 네 번째 아들인 연왕 주 체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큰 인물이어서 끝내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건문제가 거느린 병사들은 60만에 달했지만, 주원장이 벌인 숙청으로 유능한 장군들이 모두 제거되어 버 린 바람에 제대로 군대를 통솔할 사람이 없었고... 반면 연왕 주체는 휘하에 용맹스러운 몽골 기병들을 거느렸고, 그 자신부터가 원래 교활하고 병법에 능 숙한 인물이어서 건문제가 보낸 진압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마침내 수도인 남경까지 쳐들어 왔죠. 결국, 건문제는 황후와 함께 불 속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고, 황위는 연왕 주체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켜 찬탈한 주체, 영락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가 바로 대학사인 방효유였습니다. 영락제는 방효유에게 자신이 일으킨 반란은 정당하니, 자신의 등극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축하하라는 글 을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방효유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나중에 네 글자를 쓰고 붓을 던져 버렸는데, 영락제가 보니 "연적찬 위"였습니다. 연나라 도적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뜻이죠. 자신을 모독하는 글귀에 격분한 영락제는 "당장 그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쓰지 않으면 너의 삼족을 멸하겠 다."라고 윽박질렀지만, 방효유는 "내 9족이 모두 죽더라도 결코 지울 수 없소이다."라고 맞섰습니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53

154 미친듯이 화가 난 영락제는 방효유의 가족과 친척 및 그의 제자들을 모두 잡아와 그가 보는 앞에서 한 명씩 한 명씩 모두 죽였지만, 방효유는 끝내 영락제를 찬양하는 조서를 쓰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이 때, 방효유의 눈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8백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방효유는 영락제의 명령에 의해 입이 찢어지고 사지가 토막나 죽는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선비의 굳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하여 사후에 칭송받게 되었죠. 영락제처럼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세조)을 따르지 않다가 죽임을 당한 우리나라의 사육신과 비 슷한 인물이라고나 할까요?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54

155 36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156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53 조선군에 투항한 항왜들은 백병전 같은 전투에도 뛰어났지만 모략과 암살에도 능숙했다. 1595년 2월 29일 <선조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항왜인 주질지( 酒 叱 只 ), 학사이( 鶴 沙 伊 ) 등이 경상 좌병사 고언백에게 우리들은 이미 조선 사람이 되었으니 마땅히 적의 괴수를 베어야 한다. 우리들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거느리는 군사가 10여 인에 불과하였고, 홀로 와서 술을 마시 며 즐기다가 해가 저물면 돌아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또 군졸과 더불어 사냥할 때에도 단기로 뒤를 따라 가 혼자 높은 봉우리에 서 있기를 자주 했다. 이때에 내응하는 사람과 도모한다면 그를 죽이는 것도 손바 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라며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을 제의하기도 했다. 항왜들은 조선의 무관인 고언백에게 일본군의 대표적인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를 자기들이 암살하겠다는 대담한 제안을 해온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자를 태연하게 죽이겠다는 태도를 이상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 나 항왜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자신들은 이제 일본군이 아닌 조선군 소속이다. 게다가 순수한 조선인 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 조선군과 싸우던 적이었다. 그런 입장이니 만큼 조선인보다 더 조선의 입장에 충실 해야 의심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조선인들이 가장 두려워하여 미워하는 왜장 가토를 죽여 그 목을 갔다 바치겠다는 제안은 얼마든지 해볼 만하다. 만약 성공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고, 실패하거나 조선쪽에서 제안을 거부해도 그만큼 자신 들이 조선에 충성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례이니 어떻게 되든 항왜들로서는 결코 손해 볼 일이 아니다. 항왜들과 같은 입장에 놓였던 자들은 비단 임진왜란 뿐 만이 아니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미군에 항복 한 일본군들은 미군들이 모르는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으며, 개중에는 자원해서 폭격기를 몰고 옛 동료 들이 있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는 자들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살던 일본인 이민자들은 미군에 입 대하여 일본계 미국인들만으로 구성된 사단을 만들어 미 국무성에 일본 상륙전에 자신들을 선봉으로 세워 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일본에) 가서 죽자! 라는 것이었다나. 하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정예 부대인 예니체리(Janissary) 병사들도, 원래는 오스만 투르크의 적인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156

157 기독교도들을 납치하거나 생포하여 만든 군대였다. 순수한 투르크인이 아니니, 그만큼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157

158 37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59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50 병자호란은 매우 안타까운 전쟁이다.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던 임진왜란과는 달 리, 청군의 노도 같은 진격에 일방적으로 밀리다 끝내는 국왕이 나와 항복하는 완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아쉬운 부분들도 눈에 띈다. 조금만 준비를 더 갖추고, 침착했더라면 전세를 뒤바꿔놓았을 수도 있는 흐름들이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군 체제를 대폭 개편하였다. 기병 전력을 대폭 축소하고, 창과 칼을 쓰는 근접전 담당 병과인 살수( 殺 手 )와 일본을 통해 들여온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 砲 手 )를 집중 양성하고 활을 쓰는 사 수( 射 手 )를 곁들인 삼수병 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임란 전까지 조선의 주력 부대였던 기병은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조선군의 장기인 기사( 騎 射 : 마상 사격)는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상대가 되지 못했고, 육박전에서도 일본군 보병 부대의 장 창 전술에 밀리기가 일쑤였다. 일례로 조선 제일의 맹장이라 칭송받던 신립은 그가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 퇴할 때 선보였던 기병 돌격을 탄금대 전투에서 4차례나 반복했으나, 일본군의 조총과 밀집 창병진형에 막혀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병과 관련되어 조선군은 지나치리만큼 활과 화살에 의존했다. 무관을 뽑는 무과시험에서 기마술과 궁 술은 필수였지만 검술이나 창술은 선택 과목이거나 아예 보지 않았다. 이러한 편향적인 성향에 대해 임진 왜란의 전란을 한참 겪고 있던 1592년 12월 9일, 사헌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장기( 長 技 )는 활만 믿는 처지 인데 적과 싸운 지 이미 오래이므로 계속 지탱할 방책이 없어 각도에서 패배했다는 보고가 날마다 이르고 있으니 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조선시대의 무기들이 활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활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위험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활에 치우친 결과, 조선군은 길고 큰 창과 날카로운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일본군 의 돌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해보지 못한 채, 겁을 먹고 패주하는 일이 속출했다. 평소에 활쏘기만 하고 백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59

160 병전에 필요한 창검술은 전혀 연마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근접전에 약한 조선군의 단점은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논의가 되었다. <중종실록>에는 왜구( 倭 寇 )가 검 을 빼어들고 수군의 배에 올라타면, 용감한 병사가 10명이 있어도 당해내지 못한다. 는 언급이 있으며, < 선조실록>에도 우리나라의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오직 고함을 지르며 활을 쏘다가 적이 다가오면 달아나고 맙니다. 라는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인 정조 시대 편찬된 병법서 <무예도보통지>에서 검이나 창, 곤봉, 편곤 같은 백병전 기술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이유도 임진왜란 때 지나치게 활에만 의 존하다가 참패한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이후, 조정에서는 기마와 궁술에 치우쳤던 종래의 군제를 탈피하여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전해 준 보병 전술인 절강 병법 을 토대로 한 삼수병 체제를 새로이 만들어 채택한 것이다. 삼수병 체제에서는 종래에 도외시되었던 창과 검술을 다루는 근접 전문 보병인 살수와 임란 때 맹위를 떨친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를 중요 병과로 채택하였다. 창검술은 명나라 장수들이나 조선에 투항한 항왜 들이 주로 도맡아 가르쳤다. 조총의 경우는 전쟁 중에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것을 쓰다가 점차 기술을 습득 하여 자체적으로 제작하였다. 조총의 사격 방법은 항왜들로부터 전수받았다. 반면 여태까지 조선 전력의 핵심이던 활을 쓰는 사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고, 시간이 갈수록 그 비중이 점차 줄어들기에 이른다. 이렇게 편성된 삼수병 체제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세 부대 간의 원활한 조율과 합동이 반드시 필요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혼란이 발생하여 전체 부대에 악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 예로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 쌍령( 雙 嶺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 4만여 명은 약 3백 명의 청 군 기병대에게 대패를 당했다. 당시 지휘를 맡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은 아군 병사들이 청 군을 보면 겁을 먹고 조총을 마구 쏘아댈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화약을 적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군이 쓰 던 조총은 총에 강선(라이플)이 없어 유효 사정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아 먼 거리에서 쏘면 대부분 맞지 않았다. 따라서 최소한 적이 5~60미터 안에 들어온 후, 일제히 밀집 사격을 퍼붓는 것이 기본적인 전술이 었다. 이것은 조선군뿐 아니라 그 당시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 그러했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화약을 많이 분배해 주었다가 아군 병사들이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마구 사격을 하여 화약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60

161 하지만 화약을 조금씩만 나누어 준 결과, 그만큼 포수들의 화약이 빨리 떨어져 조총을 더 이상 쏠 수 없 게 되고 말았다. 화약이 떨어진 병사들이 어서 화약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병사들이 화약을 분배받는 동 안, 청군 기병대가 돌격을 감행하자 조선군은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만 갖춘 포수 였고, 창과 칼을 들고 근접전을 수행할 살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총을 가진 포수가 기병의 돌격을 막 아내기 위해서는 총구에 총검을 달고 보병들의 밀집 대형인 방진( 方 陣 )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군에 게 총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총검은 1600년대 후반에야 프랑스에서 개발되었으니 말이다. 청군 기병대의 급습을 받은 조선군은 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 조 선군의 대열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청군은 그런 조선군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기막힌 전투 에서 조선군은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지휘를 맡았던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도 전사 하고 말았다. 쌍령 전투의 패인은 삼수병 체제의 핵심 중 하나인 살수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 에서 원거리 병과인 포수에만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유능한 지휘관과 엄정한 군기와 각 부대 간의 효율적인 운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삼수병 체제는 탁월한 효과를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광교산 전투와 금화 전투가 그 예이다.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61

162 38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3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47 요즘 KBS TV 드라마 추노가 한창 인기 폭발이죠? 그 드라마가 병자호란 직후, 혼란한 조선 시대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데요... 흔히 병자호란 하면 조선이 힘도 못쓰고 일방적으로 패하기만 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3

164 1637년 1월 5일, 광교산과 1월 28일의 금화 전투에서는 청나라 태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전사시키는 승리 를 거두기도 했으니까요.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병자호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 5일, 전라병사 김준룡( 金 俊 龍 )은 약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光 敎 山 )에 도착했다. 김준룡은 광교산에 진을 치고 산과 골짜기의 곳곳에 복병을 설치했으며, 정찰병을 여러 군데에 보내 청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수천 명의 청군이 광 교산으로 진군하는 것을 정찰병이 발견하고 알리자, 김준룡은 전군에게 명을 내려 제 1선에는 포수를, 제 2선과 3선에는 각각 사수와 살수를 배치하도록 했다. 이윽고 산기슭에 수천 명의 청군이 당도했다. 광교산으로 진군한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는 청 태종 홍타 이지의 사위인 양구리( 楊 古 利 )였다. 그는 청 태종으로부터 초품공( 超 品 公 )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며, 6천 명 의 기병을 휘하 병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청군은 산에 진을 친 조선군을 보고는 단숨에 짓밟을 기세로 말을 몰아 올라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준룡은 북을 울리고 기를 흔들게 하여 1선의 포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수들이 일제히 조총 을 쏘는 것과 동시에 사수들이 활을 쏘아대자 청군은 당황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상대해온 조선군은 자기 들이 돌격을 하면 지레 알아서 겁을 먹고 도망을 가던데, 이 군대들은 사뭇 달랐다. 조선군의 총탄과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자, 말들이 쓰러지고 기수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청군이 돌격을 계속 하지 못하고 주춤거 리자, 이 틈을 타 제 3선의 살수들이 앞으로 나와서 청군을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조선군의 맹렬한 공세에 놀란 청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산 아래로 퇴각했다. <(인조실록), (연려실기 술)> 조선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준룡은 아군들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진형을 굳게 갖추라고 엄중히 명을 내렸다. 아직 청군의 주력 부대는 손상을 입지 않았고, 조선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방비를 허술히 하 다가 청군이 기습을 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월 6일, 청군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총사령관인 양구리 본인이 직접 남은 병력 을 모두 이끌고 공격해왔다. 산의 곳곳에서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한창 전개될 무렵, 조선군의 동남부 진영이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 기병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청군을 통솔하던 양구리가 매복해 있던 조선군 포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통솔자를 잃은 청군은 당황하여 물러났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청군 병사 들은 조선군의 손에 의해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틀간에 걸쳐 진행된 광교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청군의 총지휘관이자 청 태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4

165 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비롯하여 약 2명의 청군 장수가 전사했으며, 수천 명이 넘는 청군 병사들이 죽었다. 훗날 영의정 체제공은 1794년, 광교산에 기념비를 세워 김준룡의 공적을 찬양했다. 광교산 전투로부터 22일 후인 1월 28일에는 금화( 金 化 )에서 다시 조선군과 청군 간에 두 번에 걸쳐 큰 전 투가 벌어진다. 근왕병을 이끌고 오던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 洪 命 耉 )는 포수 3천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 위당하고 있는 인조를 구원하러 오고 있었다. 평안병사 유림( 柳 琳 )은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와 함께 오고 있었는데, 홍명구와 전술에서 의견이 달라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1월 26일, 홍명구는 금화( 金 化 )에 이르러 그곳에서 약탈을 벌이던 수백여 명의 청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조선인 백성들을 구출해냈다. 홍명구의 부대와 싸운 청군 패잔병들은 그들의 본대로 달려가 조선군 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음날인 1월 27일, 1만 명의 청군 기병이 금화의 외곽에 도착했다. 청군의 본대를 본 홍명구와 유림은 급히 회의를 벌였으나, 두 사람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각자 부대를 나누어 진을 쳤다. 홍명구는 평지 에 진을 쳐서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한데 반해, 유림은 기병이 대부분인 청군을 상대하는 데는 평지보다 산 이 더 유리하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홍명구는 목책을 설치하고 포수와 사수와 살수를 순서대로 배치하여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것을 본 청군은 우선 평지에 진을 친 홍명구 부대를 먼저 공격해 쳐 없애고 다음에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청군은 대포를 동원하여 조선군의 목책을 부수고 병사들을 돌격시켰다. 홍명 구는 삼수병 체제의 기본적인 전술대로 포수와 사수의 원거리 사격을 퍼붓고 살수들을 내보내 청군의 초 반 공세를 막아냈다. 순식간에 청군은 두 명의 장수를 잃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서전에 불리 해진 청군은 별동대를 산의 뒤편으로 보내 홍명구 부대의 후방을 공격토록 했다. 별동대는 말에서 내려 보 병이 되어 털옷으로 몸을 감싸고 한꺼번에 홍명구 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선군은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청군의 기세를 끝내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명구는 급히 연락병을 보내 유림을 불렀지만 유림은 불리한 정황이니 가보아야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가 지 않았다. 구원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홍명구는 최후를 실감했다. 그는 병부( 兵 符 )와 인감( 印 鑑 )을 가져 다 아전에게 넘겨주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 하고 외치며 손수 활을 당겨 청군을 쏴 죽이다, 청군이 쏜 화살을 세 대 맞자 화살을 뽑고 칼을 들어 청군과 싸우다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홍명구 부대를 전멸시킨 청군은 이제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향해 몰려왔다. 유림은 청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삼수병 체제의 기본을 바꾸어 제 1선에 살수를 배치하고 2선과 3선에 사수와 포 수를 넣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 별동대를 매복시켜 놓은 후, 청군을 기다렸다. 청군이 산에 올라오자 유림은 살수들을 돌격시켰다. 살수들은 청군이 탄 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기 수들을 낙마시키고 떨어진 기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살수보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사수와 포수들은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5

166 산 아래에 있는 청군들을 향해 교대로 화살과 총탄을 쏘아댔다. 조선군의 유기적인 삼수병 전술에 청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 못했다. 청군은 일단 군사들을 물린 후, 3번에 걸쳐 다시 공격해 왔으나 조선군의 전열을 뚫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려갈 뿐이었다. 청군이 4번째 공세를 진행하자 유림은 산 중턱에 매복시킨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들을 타 격했다. 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조선군 포수가 쏜 총탄에 저격당하자 청군 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상이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삼수병 체제가 청군을 상대로 위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전투 이다. 금화 전투가 안타까운 것은 유림이 승리를 거둔 때와 동시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 게 항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적을 맞아 방비를 좀 더 확실히 갖추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일 도 없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청군은 결코 무적이 아니었고, 그들도 얼마든지 패배를 겪었으니 말이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6

167 39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68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26 요즘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마케팅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대중들의 감수성을 이용하는 것 입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란 말은 이제 우리 생활 속에서 익숙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우리는 기술이 아닌 인간을 지향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빛이 있어 행복한 세상" 등등...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광고 문구들은 TV 광고에서 각 기업들의 홍보를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광고 문구들의 내용처럼, 정말로 기업들은 사람 본위의 세상을 지향하고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저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고 있는 것처럼, 모든 기업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하나, "돈"입니다. 정치가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쥐는 것이 목표이듯, 기업가. 장사 꾼들이 원하는 것은 돈입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기업들이 외치는 각종 광고 문구들은 그저 돈을 벌어들 이기 위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싸구려 속임수(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여기 한 기업의 경우를 그 예로 들겠습니다. 김&장이라는 로펌(법률사무소)이 있습니다. 이 로펌은 김영무, 장수길 두 변호사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 졌는데, 정부의 전직 관료들을 끌어들여 고문으로 삼고, 전관 출신 변호사와 검사, 판사들까지 영입하여 국내 변호사 수만 228명에 이르는 거대 로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김&장을 가리켜 검사 출신의 한 변 호사는 "김&장은 법조계의 삼성이다"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였습니다. 이 김&장은 "토종 로펌"을 운운하며 소비자들에게 외국의 거대 로펌과 맞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법률 사무소, 라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 전략을 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김&장이 내세운 구호인 '토종 로펌'의 진실성이 의심받는 사건들이 속속 벌어지고 있 습니다. 지난 2005년 2월 28일,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귀국한 사람들의 모임인 '태평양전쟁 피해자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69 보상추진협의회" 소속 회원인 여운택(85)씨 등 5명이 "지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돼 일본제철(신 일본제철의 전신) 소유의 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나 당시 임금과 강제저축금을 받지 못했다"며 신일 본제철을 상대로 "미지불 임금과 돌려받지 못한 강제 저축금 및 위자료 등을 지급하라"며 총 5억 원을 요 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헌데, 원고인 신일본제철측은 한국의 최대 로펌인 김&장을 법률대리인으로 내세웠으며, 김&장 측은 이 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김&장 측이 공짜로 변호를 할리는 없고, 필시 신일본제철측으로부터 거 액의 수임료를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즉, 한국 기업이 과거 일본 제국주의 수탈의 주역이었던 원고를 돈을 받고 변호한다는 말이지요. 이에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회원인 장양익 씨 등이 지난 3월 15일, 김&장의 사무실에 찾아가 '22만 강 제징용 피해자들의 운명이 달린 일인데, 제발 도와 달라.'라고 호소했지만 김&장 측은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론의 빗발치는 항의에 대해서도 김&장 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오히려 익명의 변호사들 을 내세워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가 있는데, 김&장 측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까지 흘려보내고 있 습니다. 뭐, 좋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입니다. 살인자든 사기꾼이든 강간범이든 수임료만 내면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는 있습니다. 그 말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평소에 '토종 로펌'을 운운하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을 해왔던 김&장 측이 일제의 강제징용을 (돈을 받고) 변호하는 입장에 서다니, 이것은 결국 김&장 측이 그동안 줄기차게 외쳐왔던 '애 국심 마케팅'이 허구였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실이 아닐런지요? 김&장 측의 이중적인 행동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환 은행을 인수한 지 3년 만에 이를 다시 매각하여 4 조 5천억 원의 이득을 챙긴 뒤,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고 해외로 달아나버린 악덕 투기 자본인 론스타를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바로 김&장 측은 론스타가 건네주는 수임료 2백만 달러를 받고 법률자문을 맡아 재정경제부를 상대로 로비를 전담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토종 로펌임을 설파하던 김&장은 그러나 말과는 정반대로 22만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의 피땀 을 착취한 일제 치하 기업과, 4조 5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국부를 챙긴 해외 투기 자본을 변호해 주는 비애 국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전직 고위 관료들과 법조계 인사들을 끌어들여 정, 재, 법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70 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요즘 한창 시끄러운 야동 저작권 시비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도 국내의 법무법인인 "한 서"라고 합니다. 지금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던 신기남 의원이 대표로 있는 곳인데, 이 한서 측에서 미국과 일본의 성인 영화사들에게 자기들한테 일정한 수임료를 주면, 그 대가로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한 저작권 고소를 하겠다고 부추겼답니다. 참고로 법무법인 한서는 수 천 명의 여신도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6년 형을 받고 수감된 JMS 교단의 교주인 정명석을 변호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변태 파렴치 교주와 일제 강제 징용 변호에 이번에는 불특정 다수의 네티즌들을 상대로 합의금 130만원 씩을 뜯어내려는 법무법인 여러분,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꼭 부자 되세요~~~~~~~~~~~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71 40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2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55 먼나라 이웃나라. 1980년대, 아직 한국인들에게 생소했던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만화의 형식을 빌어서 쓴 인문 교양 서적. 집계된 판매 부수만 1백 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이원복 교수가 쓴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무척 감동있게 읽으며 자랐습니다. 이런 이 교수가 얼마 전에 세계사를 주제로 한 인문 교양 도서를 새로 시작했더군요. 이름은 <가로세로 세계사>... 그런데 그 중 세 번째 시리즈인 중동편을 읽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닌데."하고 고개가 갸우뚱거리는 부분을 발 견했습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3 먼저 125페이지에서 "셀주크 왕조의 전설적인 군주였던 바이바르스는"이란 부분이 나오더군요.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우선, 바이바르스는 1223년(또는 1228년)에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투르크계 유목민인 킵차크족 출신입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4 (바이바르스가 소속되어 싸웠던 맘루크 부대) 더욱이 그는 1242년,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팔려가 노예가 되었다 1260년에 이집트를 통치하는 맘루크 왕 조의 술탄이 되었고, 1277년에 사망한 인물입니다. 결코, <가로세로 세계사 3권>에서 서술된 것처럼 셀주크 왕조의 군 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본문은 차라리 "셀주크 왕조의 전설적인 군주였던 알프 아르슬란(1030~1072)은" 이라고 수정 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실제로 셀주크 왕조의 군주였던 알프 아르슬란은 1071년에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 스 4세를 포로로 잡고 비잔틴 군대를 무찌른 대승리를 거둔 인물이니 말이죠. 또, 126페이지에서 셀주크 제국의 본거지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티무르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쳐들어가 셀주크 제국 에 큰 피해를 주었다고 나오지만, 이것 역시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5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6 (티무르의 동상) 셀주크 제국은 1037년에 건국되었다가 1092년에 왕위 다툼으로 붕괴되었던 나라입니다. 더욱이 바이바르스가 태어날 1223년 무렵이면 셀주크 투르크는 몇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그 중 하 나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던 룸 셀주크 왕조였습니다. 이 룸 셀주크 왕조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준 장본인이 몽골군은 맞습니다만, 책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티무르는 아 닙니다. 룸 셀주크 왕조가 몽골군의 공격을 받은 시점은 1241년, 쾨세다크 전투인데 이 당시 몽골군을 지휘하던 인물은 티 무르가 아닌 바이주 노얀이었습니다. 티무르는 1336년에 태어나 1405년에 사망한 인물이며, 룸 셀주크 왕조가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시기와는 95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1241년 무렵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티무르가 어떻게 룸 셀주크 왕조를 공격할 수 있었겠 습니까? 그리고 3페이지 뒤인 129페이지에서는 다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술탄 바예지드를 생포했다고 나오는 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쳐부순 앙카라 전투는 1402년에 벌어진 일이며, 앞에서 언급한 셀주크 왕조의 침공 과는 시차가 서로 모순됩니다. 다. 그러니 126페이지에서 셀주크 제국을 공격한 몽골군의 지휘자는 티무르가 아닌 바이주 노얀이었다고 해야 옳습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보는 국민 도서인 <먼나라 이웃나라>의 자매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가로세로 세계사>에서 이런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어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7 제가 언급한 이런 내용들이 어려운 전문 학술지나 논문에 실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출판 된 대중적인 인문 교양 도서인 <중동사>나 <터키사>만 대충 훍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이원복 교수가 어느 자료를 보았길래, 저렇게 중대한 오류를 저지른 건지 모를 일입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8 41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79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32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성욕의 갈등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려 했던 필사의 노력. 어떤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비하 내지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허기에 시달릴 때와 배설을 할 때라고. 나는 거기에 덧붙여 성욕을 느낄 때도 추가하고 싶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 이라 부르며 동물과 구분된다고 하지만, 과학 기술과 도덕적 관념을 제거하고 생체 본능만 남는다면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 죽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바로 종교 인데, 간혹 어 떤 사람들은 이 종교에 깊숙이 심취한 나머지 아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카톨릭의 신부와 수사, 수녀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신앙 생활에만 몰두하는 것이 규칙이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성이 개입된 불미스러운 사고를 심심치 않게 저지른다. 그러자 어느 종교인들은 아 예 섹스를 할 수 없게 성기를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 는 극단적인 발상까지 했는데, 그들이 바로 근대 러 시아의 정교회 수도사들이었다. 1770년, 탈영한 군인인 이반 셀리바노프(Ivan Selivanov)가 창시한 종파인 스코프쯔이, 일명 거세파는 수 도자들이 스스로 성기를 거세하고 성욕에서 벗어난 청정한 정신 수련을 주장했다. 그들은 인간이 성욕에 휩싸여 있는 한, 결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거세파의 이런 주장은 결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신약 성경의 마태 복음 22장 30절 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부활의 날에는 사람들이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으며 다만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한 인간이 성욕의 갈등에서 벗어나면 좀 더 초인적인 존재로 진화한다는 믿음은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 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원래 인간들은 남녀가 한 몸이었고 팔과 다리 도 네 개고 눈도 네 개여서 지금보다 힘과 지혜가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너무 강력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79

180 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신 제우스가 마법으로 인간들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켜 버리자 모든 면에서 인 간은 약해져 버렸고, 평생을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매는 바람에 그만큼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나 영웅, 위인들은 자신들이 성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 기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널리 선전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한니발을 자마에서 격파하여 공화정 로마를 구한 명장 스키피오만 해도 포로로 잡힌 아름다운 소녀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풀어 주었으며, 훗날 로마 제정 말기의 황제 율리아누스도 이런 스키피오를 본받아 사산조 페르시아 황실의 여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로마인 뿐 아니라 그들에게 야만인이라고 경멸받던 게르만족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 르가 남긴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게르만족들은 가급적 동정을 오래 지키는 자가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다는 믿음을 지녔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중세 아랍 사회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거세한 환관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실제로 환관들로 구성된 부대는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였는데, 거세를 한 덕분에 성욕의 시달림에서 벗어 난 덕분이라고 한다. 5대 10국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송태조 조광윤의 수하이자 용맹한 장수 였던 진한이나 서하를 격파하고 방랍의 난을 진압한 명장인 동관도 모두 환관이었다. 이들과는 좀 다르지 만, 명나라 영락제의 지시로 7차례에 걸친 대항해를 단행한 제독 정화도 환관의 신분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거세파의 창시자인 이반 셀리바노프가 주창한 교리는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환 영을 받아 널리 퍼졌다. 거세파에 가담하거나 그 교리를 따른 대표적인 유명 인사로는 프랑스 군대를 격퇴 시킨 18세기 말의 명장인 수보로프 장군이나 심지어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도 포함되었다. 셀리바노프는 알렉산드르 1세의 총애를 받아 궁전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이밖에도 거세파를 따른 사람들은 많았는데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신도들과 사제들은 물론 이고 일상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도 섞여 있었다. 성적인 욕망은 생명체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성욕은 인간도 동물의 하나임을 증명해주는 굴욕적인 표식이기도 하다. 자신의 성기 를 잘라내는 아픔을 무릅쓰면서까지 거세를 했던 사람들의 심정에는 생로병사의 굴레에 억매일 수밖에 없 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피나는 노력이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닐까?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80

181 링크한 동영상은 본문의 내용과 상관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 ^ ~ 내가,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어흑흑...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81

182 42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183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01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해서 링크를 겁니다. 기사에 따르면 고종 임금은 면 종류나 만두를 좋아했고, 특이하게도 술은 전혀 못 마시고 대신 식혜나 사이다? 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따뜻한 설렁탕이나 온면을 즐겨 먹었고,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만 국수도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서양 선교사들이 선물해준 커피도 무척 좋아해 거의 매일 같이 마실 정도였다죠. 섬세한 미식처럼 정치도 잘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183

184 43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5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7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가 즐겨보는 TV 드라마와 영화, 만화 같은 대중 문화 작품들을 두고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는 시 비가 바로 표절 문제다. 어느 드라마나 영화가 좀 잘나간다 싶으면 무슨 작품을 베꼈다는 식으로 표절이 거론된다. 얼마 전까지 MBC의 인기 드라마였던 선덕여왕은 무궁화의 여왕 이라는 연극의 내용과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 문제가 불거졌고,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도 일본 만화인 원령공주나 바람의 나우시카와 비슷하다고 하여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등이 자주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은 어 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만 받고 자라서 창의력이 없고, 그러다보니 남의 걸 베낄 수밖에 없다. 라고 자학 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자기비하와 편견으로 가득 찬 푸념에 불과하다. 사실 모방이냐 표절이냐 하는 문제는 명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비슷한 내용이 들어간 오마쥬 나 패러디의 경우도 엄격히 따지면 표절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100% 순수한 창작으로 이루어진 산물은 없었다. 비 단 우리만이 아니라 서구나 일본의 예술 작품들도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자면 표절이나 모방의 범주에 들 어가지 않는 경우가 없다. 여러분은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가? 동화나 만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를 재미있게 본 사 람들은 매우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 문화의 토대가 된 그리스 신화가 그리스인들만의 독창적인 작품일 까?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청년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저승의 여신인 페르세포네도 아도니스를 좋아하는 바람에 두 여신은 아도니스의 소유권을 두고 다툰다. 결국 둘은 합의 끝에 1년을 둘로 나눠 각각 여섯 달 씩 아도니스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러나 아도니스 는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에 받혀 죽게 되고, 아프로디테와 그녀의 숭배자들은 이를 매우 슬퍼하여 매년 봄마다 아도니스를 기리는 축제를 열고 그의 상여를 만들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5

186 봄마다 아도니스를 기리는 축제를 열고 그의 상여를 만들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보다 더 일찍 만들어진 수메르 신화에도 이와 꼭 닮은 내용이 나온다. 아프로디테처 럼 사랑의 여신인 이난나는 남편인 풍요의 신 두무지가 죽자 직접 저승에 내려가 그곳의 통치자인 여신 에레쉬키갈과 만나 두무지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미남인 두무지에 반한 에레 쉬키갈은 그를 저승의 왕으로 삼고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이난나는 에레쉬키갈과 싸우다 마침내 합의를 하는데, 1년 중 절반은 두무지가 에레쉬키갈과 함 께 있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무지가 저승에서 돌아오는 계절로 알 려진 매년 봄마다 이난나와 그녀를 섬기는 여사제들은 두무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축제를 만들었 다. 여신과 애인(또는 남편)의 이름만 제외하고 보면 거의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와 수메르라 는 두 지역에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신화 구조가 비슷할까? 답은 간단하다. 후발 주자인 그리스인들이 이 미 만들어진 수메르 신화의 구조를 가져다 조금만 바꿔서 사용한 것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무단 도용과 전재인 셈이다. 또,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전설인 노아의 홍수는 아카드 신화에 언급된 우트나피쉬팀 (Utnapishtim)의 홍수와 그 전개 구조가 완전히 일치한다. 늙은 현자인 우트나피쉬팀은 아득한 옛날, 슈르파크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인류의 죄악이 너무나 커서 신들은 대홍수를 일으켜 지상을 정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들을 정성스럽게 섬기며 산 우트 나피쉬팀과 그의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어 가족과 동물들을 태우라고 명령했다. 방주를 만든 우트나피쉬팀은 가족과 동물들을 태우고, 6일 동안 지구를 뒤덮는 대홍수를 견디며 니시르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둘기와 제비, 까마귀를 보내서 물이 빠지고 마른 땅이 들어난 것을 안 우트 나피쉬팀은 가족들을 이끌고 방주를 나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냈다. 우트나피쉬팀을 노아로, 신들을 기독교의 유일신으로 대체하고 6일이란 숫자를 40일로 고친다면 두 신화 는 너무나 흡사하여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연대상으로는 아카드 신화가 구약성경보다 오래되었으 니, 유대인들이 아카드 신화를 베껴서 자기 식으로 조금 고쳐 성경에 넣었으리라.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신과 악마가 싸워 결국에는 신이 승리하고 악마와 그를 숭배한 인간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 받게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다분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에서 영 향을 받았다. 조로아스터 교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예언자였던 조로아스터가 만든 종교로,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6

187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신 아흐리만이 우주를 둘로 나눠 지배하며 서로 인간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싸우다 최후에는 선한 신이 악신을 물리쳐 지옥으로 추방한다고 가르쳤다. 사도 요한이 신약 성경의 요한 묵시록을 쓴 때보다 5백 년이나 더 앞선 것이다. 즉, 기원전이라 불리는 최소한 2천 년 전에도 이런 식의 짜깁기와 베끼기는 곳곳에서 성행했었다. 그것 도 별 볼일 없는 삼류 역사서가 아닌 오늘날 인류 문명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 즘의 대표적인 문헌에서 버젓이 저지른 것이다. 케케묵은 옛날 일만 들춰내기는 뭐하니, 현대의 모방 사례들을 들어보기로 할까? 헐리우드에서 3편의 시 리즈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킨 <반지의 제왕>은 원작 자체가 북유럽과 켈트 신화의 주요 내용과 장면의 상당 부분을 짜깁기하고 베껴 넣어서 만들어졌다. 몇 가지 예로 <반지의 제왕> 이전의 시대를 다룬 소설 실마릴리온(Silmarillion)에서 등장하는 악의 화신 모르고스는 공포의 철퇴 그론드(Grond)를 사용한다. 그론드는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땅이 움푹 패이고 산 이 흔들리는 가공할 무기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게르만 신화에서 천둥신 토르가 휘두르는 천둥 망치 묠 니르(Mjolnir)가 변형된 것이다. 또한, 모르고스를 따르는 무시무시한 불의 괴물 발로그(Balrog)들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거인 들인 무스펠(Muspell)이다. 무스펠은 불의 세계인 무스펠헤임에 살면서 세상의 종말인 라그나뢰크 때, 선 한 신들을 상대로 싸우고 세상을 불태워 없앨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발로그들도 불이 타오르는 지하 세계 에 숨어 있다가 그들의 주인인 모르고스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나타나 중간계의 인간과 엘프들을 상대 로 불의 검과 채찍을 휘두르며 싸운다. 너무나 유명해서 이제는 판타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 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신비의 종족 엘프 (Elf)는 바나헤임(Vanaheim)에서 온 풍요의 신 프레이르가 다스리는 세계인 알프헤임(Alfheim)의 주민 알 브족(Alf)의 영어식 발음이다. 알브족들은 금발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선량한 종족 이라고 <에다>에 묘사되는 데, <반지의 제왕>은 이 설정을 그대로 따왔다. 엘프에 못지않게 유명한 종족 드워프(Dwarf) 역시, 지하에 살면서 각종 무기나 도구 개발에 능숙한 요정 인 드베르그족(Dvergr)에서 따온 것이다. 판타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요괴인 트롤(Troll)도 게르만 신화에서 태양을 쫓는 하늘의 늑대인 스콜(Skoll)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작품의 핵심 주제인 절대 반지를 빼놓을 수 없다. 절대 반지는 게르만 신화를 바탕 으로 한 중세 독일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따왔다. 악신 로키에게 반지를 빼앗긴 드베르그족인 안드바리가 가지는 사람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리라고 저주를 퍼부은 반지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인 사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7

188 안드바리가 가지는 사람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리라고 저주를 퍼부은 반지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인 사 우론 이외에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고 사악한 유혹으로 소유자를 망하게 만드는 절대 반지로 다시 태어났 다. <니벨룽겐의 반지>의 영향은 더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족들이 아라곤의 조상인 엘렌딜이 가지고 있던 보검 나르실의 부러진 파편을 모아 안두릴이라는 명검으로 재탄생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니벨 룽겐의 반지>에서 드워프족 대장장이 레긴(Regin)이 주인공 지그프리드의 아버지 지크문트가 쓰던 검인 발뭉의 부서진 조각을 모아서 그보다 더욱 훌륭한 명검인 그람(Gram)으로 만들어낸 광경을 패러디한 것 이다. 물론 <반지의 제왕>에는 게르만 신화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켈트 신화의 흔적도 보인다. 작품의 끝 부분에서 주인공 프로도와 샘은 현자 간달프를 따라 머나먼 서쪽 바다 너머의 땅으로 떠난다. 이것은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축복 받은 섬인 하이 브라실(Hy Brasil)의 다른 모습이다. 켈트족 들은 먼 서쪽 바다에 영원불멸의 선한 자들이 살고 있는 낙원이 있다고 믿었고, 그 이름을 하이 브라실이 나 아발론이라고 불렀다. 이밖에도 반지의 제왕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톨킨의 취향이 반영된 기독교적인 시각도 나타난다. 태초에 세계를 창조한 절대신 엘루는 기독교의 절대 유일신 엘로힘(Elohim)에서 유래했으며, 그가 만든 존 재인 발라(천사)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고, 자신이 모든 세계의 권력을 차지하려 반란을 일으킨 멜코르(모르고스)는 타락 천사 루시퍼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반지의 제왕>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유대-기독교 문화와 게르만-켈트 신 화를 저자의 입맛대로 짜깁기하고 모방해서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서양이 아닌 동양 쪽은 어떨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다. 일본인들은 11세기에 쓰여진 겐지모노가타리 ( 源 氏 物 語 )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 소설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겐지모노가타리는 어떤 글자로 쓰 여졌는가? 가나( 仮 名 )다. 가나는 어느 천재가 골방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다가 만들어낸 순수한 창작물인 가? 아니다. 중국의 한자에서 50개의 문자를 가져다가 변형시켜서 나온 글자이다. 현대 일본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만화들 중 명작으로 인정받는 <드래곤볼>과 <베르세르크 >, <슬램덩크>들도 다른 문학 작품들을 상당 부분 모방한 것들이다. <드래곤볼>의 주인공은 누구나 알다시피 손오공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작가인 도리야마 아키라의 독창 적인 발상이 아니다. 16세기 중국에서 나온 환상소설 서유기( 西 遊 記 )의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8

189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을 비롯한 사이어인들은 보름달을 보면 거대한 원숭이로 변신해 폭주하는데, 이는 서유기에서 벌거벗은 채로 날뛰며 천상계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던 손오공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 다. 후기로 갈수록 드래곤볼은 SF화 되지만, 초기의 손오공은 근두운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르는 서유기의 손오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드래곤볼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서유기는 독창적인 작품일까? 물론 아니다. 많은 연구가들의 이 론에 따르면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기원전 3세기에 쓰여진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하는 원숭이왕 하누만(Hanuma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교와 함께 인도 문화가 중국으로 전래되 어 하누만이 손오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라마야나에서 하누만은 최고신 비뉴수의 화신인 라마와 함께 마왕 라바나를 무찌르기 위해 모험에 나서 서 마침내 승리한다. 그리고 그의 공적이 인정받아 신으로 숭배 받게 된다. 불경을 구하려 삼장법사를 모 시고 천축으로 떠나 득도하여, 부처가 되는 손오공의 모습과 겹치지 않는가? 어둡고 음울한 중세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는 다분히 영국의 클라이브 바커(Clive Barker) 감독이 만든 공포 영화 헬레이저(Hellraiser)와 1974년 브라이언 드 팔마 (Brian Russell De Palma) 감독이 제작한 낙원의 유령(Phantom of the Paradise)을 모방한 작품이다. 베르세르크에서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면서 이 세상과 지옥을 연결시키는 소품인 베헤리트는 헬레 이저에서 선보인 악마의 퍼즐의 복제판이며, 소환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왕 고드핸드(God Hand)들은 헬레이저의 지옥의 승려(Monk)들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다. 베르세르크의 주인공이자 악역인 그리피스는 동료들을 고드핸드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자신도 페무토라 는 이름을 가진 고드핸드가 되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이 낙원의 유령 에서 나온 주인공과 똑같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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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결정적으로 베르세르크라는 제목 자체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오딘을 숭배하는 포악한 전사 (Berserk)를 그대로 따온 이름이다. 1990년대,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농구 열풍을 불러일으킨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슬램덩크>는 강백호와 채치수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다른 고교팀과 농구 시합을 벌일 때 보인 포즈들 중 상당수가 미국 NBA 선 수들의 시합 장면을 찍은 화보집에서 나온 장면들과 거의 판박이였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2

193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3

194 NBA 선수들의 화보집을 찍은 사진 기자가 슬램덩크의 내용을 크게 문제삼지 않겠다고 한 덕분에 무사히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4

195 넘어갔지만, 엄밀히 말해서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행동은 저작권 침해에 해당된다. 그래서 일본 2CH의 네 티즌들은 이노우에를 가리켜 "미농지 대고 그대로 배꼈다!"라고 조롱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작품이나 자료를 보고 모방한 문화 예술 작품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방을 단순히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후발주자가 선두주자를 단기간 내에 따라잡 으려면 모방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포에니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일화다. 초기의 해전에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오랫동안 육지에서 농사만 짓고 살아온 농경민족인 로마인들로 서는 뛰어난 뱃사람들이자 해상 무역의 제왕이었던 카르타고와 해전에서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 다. 어떻게 하면 카르타고를 해전에서 이길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하던 로마인들은 전투에서 노획한 카르타 고 함선들을 일일이 분해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부품들을 다시 조립하여 전함을 완성시켰고, 뱃머리에 코르부스(까마귀)라는 이름의 사다리를 장착해서 전선에 투입했다. 로마군 함대를 본 카르타고 인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었다. 저게 대체 뭐냐? 우리 배를 그대로 가져다 베껴 만들다니! 게다가 뱃머리에 요상하게 단 건 뭐에 쓰는 물건이냐?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카르타고는 로마군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참패하고 말았다. 카르타고 인들이 사용하던 군함과 똑같은 성능을 발휘하는 배와 카르타고 인들의 함선에 사다리를 걸친 다음, 육전 에서 단련된 로마군 병사들이 몰려가 육박전을 벌이는 전술에 카르타고 인들은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짝퉁-모방 이 원조 를 이긴 셈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창 경제 발전에 골몰하던 일본은 해외 여행을 나가는 국민들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린다. 미국이나 유럽의 공장들에 견학을 가면, 카메라로 공장 기계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오라는 지침 이었다. 정부의 말에 잘 순종하는 일본 국민들은 그대로 시행했고,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공장들의 도면은 그대로 일본 기업들이 짓는 공장의 샘플이 되었다. 그러자 서구 언론들은 이런 일본의 모습을 심하게 비아냥거렸다. 일본 기업들이 독창적인 개발은 하지 않고 미국이나 유럽의 제품들을 흉내만 내는 짝퉁이나 만든다는 어조였다. 특히, 일본의 자동차 업체들이 GM이나 포드 및 크라이슬러 같은 미국 자동차들의 디자인과 내부 구조를 그대로 베껴 만들자, 일본인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5

196 은 원숭이처럼 남을 따라 하기만 하고 창의력은 없는 민족이냐! 라고 야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대와 80년대에 이르자, 그런 식의 폄하는 쑥 들어갔다. 수많은 모방 끝에 도요타와 닛산 같 은 일본의 자동차 업체들은 자신들이 보고 배웠던 미국의 자동차들보다 더욱 뛰어난 성능과 저렴한 가격 까지 갖춘 자동차들을 연이어 출시하여 세계 자동차 시장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인터넷상에서 자주 거론되는 화제가 중국 제품들이 한국 제품들의 디자인과 상호 등을 무단으로 베껴서 짝퉁이나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한국도 그다지 다를 것 없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일본 제 품들을 열심히 보고 베낀 나라가 한국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일본 역시 미국과 유럽 제품들을 부지런히 배우고 모방하여 오늘날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피장파장이지만. 모방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 신화나 성경, 반지의 제왕, 겐지모노가타리, 드래곤 볼, 베르세르크, 슬램덩크 등이 다른 문화권과 문학 작품들을 모방했다고 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 기다! 라고 일축하며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올바른 태도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자신보다 훌륭한 장점을 가진 외부 문물을 배우고 익혀서 그보다 더 좋게 다시 만든다면 모방이야말로 창조의 아버지가 아닐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는 고대 그리스의 속담도 있다. 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이 글은 창작자들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표절을 두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밝혀둔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6

197 44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198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 년 8월 18일, 대구에 있던 정부는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헌병과 경찰, 청년방위대원들, 민간극우단체들은 임시 수도로 지정된 부산의 안전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부산시의 전체 가구들을 세 차례나 훑 으며 좌익 활동은 할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해 특무대로 넘겨 죽였다. 1960년 제 35회 국회에서 부산진 을구 의원 박찬현은 "특무대가 수천 명씩을 긴급 구속해서 매일 저녁 수십 대의 트럭에다가 가득 사람을 실어가지고, 철사로 모두 묶어서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해운대, 김해, 양산 등지에서 기관총 으로 학살하였다."고 고발했다. - 허만호 <6.25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병천과 조현연 <20세기 한국의 야만: 평화와 인권의 21세기를 위하여> 부산에 결집한 상당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 전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피난간 상태였다. 일본으로의 밀항은 이른바 '돼지몰이'로 불렸다. 밀항 주선 비 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00~150만원까지 올라갔다. 밀항을 위한 배를 빌리는 돈은 500만원에서 1천만 원까지 이르렀다. 서울, 대전, 부산에서의 도망 행렬을 볼 때 이들의 국가수호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 렵지 않다. 법무부 장관 태윤기에 따르면 임시 수도 부산의 혹심한 상류사회의 비리와 부패는 아예 이곳에 들리고 싶 지도 않도록 만들었다.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부산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먼저 내려온 정부 고위층 가족들은 전쟁에 아랑곳없이 환락에 잠겨 있었고 부산 유흥가 는 전쟁을 모르는 채 화려한 네온사인에 뒤덮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부산 앞바다 20리 전방에 수백 쌍의 기동선이 전세를 관망하면서 일본 도피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대부분 정부 고위층과 사회 유력 인사 들의 가족이라고 했다. 100리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아랑곳없이 보화를 싣고 자식들만 데리고 일본으로 피난가려는 가증한 반민족 모리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출전 자금을 뜯어내려고 결심한 나는 이른 새벽에 발동선 한 척을 강제로 징발했다. 기관총 1정을 싣고 특공대원에게 권총을 휴대시킨 후 내가 선두에 서서 부산 앞바다 20리 지점에 정박하고 있는 그들의 배에 올라타 금 품을 강제로 희사받았다. 당시 그들의 선실을 뒤졌을 때 나는 그들의 화려함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뻔 했다. 군대에 가야할 적령기에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199 있는 젊은이가 여인들과 춤을 추고 있었고, 외래품으로 몸을 감싼 그들은 양주병을 앞에 놓고 엔조이에 한창들이었 다. 쌍권총으로 무장하고 광복동에 있는 '늘봄'이라는 댄스홀로 갔다. 댄스홀 앞에는 고급 세단과 군대의 고급장교들이 타는 지프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댄스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손에 권총을 들고 16발을 공중에 발사했다. 쌍쌍이 춤을 추던 남녀가 한꺼번에 땅에 엎드렸다. 불과 100여 리 전방에서는 전투가 치열해 젊은 청년들 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특권층들은 여자들과 함께 일대 육체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 다. 이러한 반민족분자들을 나는 치고 때리고 했다. '너희들이 가진 금품을 이 광주리에 담아라. 나는 단순한 금품강도가 아니다. 포항 작전에 의용군으로 참여했다 부 상당해 돌아온 500명 학도병 치료비로 쓸 것이다. 또다시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춤을 추러 다니는 년놈은 부산 앞 바다에 수장시켜 버릴테니 알아서 해라.' -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2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육군 본부에서는 김익렬 대령에게 헌병 1개 소대를 주어 부산항만 일대의 선박에 대해 수색토록 했다. 유명 정치인과 고위 장성까지 붙들려 왔는데 이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채로 염탐을 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령급 이상 8명도 포함되어 있어서 체포되었다. - 안용현 <한국전쟁비사 2: 낙동강에서 38선> 당시 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군기도 매우 문란해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은 9월 8일 일부 후방 근무 장병들이 군 의 사명을 망각하고 탈선행위, 풍기문란, 민중에 끼치는 폐해 등으로 군에 대한 비난이 자자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명 령을 내렸다. "1. 장병들의 요정, 식당 출입을 엄금한다. 2. 입원환자의 외출을 엄금한다. 3. 군인의 개인 입장에서의 가옥 차용을 금지한다. 4. 본부 장교는 일체 병영 내에 거주하라. 5. 헌병은 특히 야간순찰을 이행하며 사전 적발에 철저하라. 6. 공용 이외 차량 사용을 금한다."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일선에서는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총을 들고 나간 학도병들이 쓰러져 가고 있을 무렵 부산에서는 이렇게 상 류층들의 주지육림이 한창이고 있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200 45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1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 년 9월 24일, 남부 지방에 주둔해 있던 가토 미쓰야사( 加 藤 光 泰 ), 하세가와 히데카즈( 長 谷 川 秀 一 ), 나가오카 다 다오키( 長 岡 忠 興 ) 등의 일본군 장수들은 약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해에 집결했다. 그들은 창원을 거쳐 진주성으 로 진격하려 했다. 물론 조선군도 이런 일본군의 움직임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이보다 한 달 앞서 8월에 진주목사로 부임한 김시민은 성곽을 수축하고 성 안에 화포와 화약을 충분히 비축했으며, 휘하 군사들을 잘 조련하여 곧 닥칠 전 투에 대비했다. 또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활약하던 곽재우와 최경희 등의 의병장들과 일본군이 성을 공격하면 성 밖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함께 호응하기로 미리 합의를 해 놓은 상태였다. 진주로 진격하던 도중, 창원에 다다른 일본군은 전라우병사 유숭인이 지휘하는 2천 명의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시키고 창원과 함안을 함락시켰다. 10월 3일, 일본군은 진주성의 인근에 도착했는데 창원에서 패배한 잔여병력들을 지휘하던 유숭인이 성의 외곽에 먼 저 도착해 진을 쳐 놓고 있었다. 원래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 김시민과 함께 싸우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김시 민이 성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유숭인은 2만의 일본군에 맞서 최후까지 분전하다 휘하 병력과 함께 전 사하고 말았다. 김시민이 왜 유숭인의 병력을 거부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전투를 앞두고 패잔병들을 성 안에 들어오게 했을 때, 그 들을 통해 패배감이 아군 병사들 사이에 확산되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유숭인이 입성하면 군사 지휘권을 양도해야 한다거나 명령 계통에 차질이 생길 문제를 감안해서 그랬을 까? 어찌되었든 유숭인 부대의 전멸과 동시에 진주성 전투는 시작되었다. 김시민은 자신과 함께 성 안에 있던 판관( 判 官 ) 성수경과 곤양 군수 이광악 및 전 만호( 前 萬 戶 ) 최덕량 등과 함께 각자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나누어 지켰다. 이 때, 성 안에 있던 조선군은 약 3,800여 명에 불과했다. 10월 5일, 일본군은 대나무로 엮은 방패를 줄지어 앞세우고 진형을 만들었다. 여러 개의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방패 는 일본의 전국 시대에 흔히 쓰였으며, 주로 적의 화살이나 총탄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대나무 방패의 사이사이에는 나무판자로 만든 다락들을 세워 놓았는데, 이는 성벽을 기어올라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며 공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1

202 공성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성 아래로 몰려와 크게 함성을 지르며 조총을 어지럽게 쏘아댔다. 조선군보다 훨씬 많 은 병력을 가진 일본군은 이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순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군은 병력을 나누어 신시( 申 時 )에 물러갔다가 초경( 初 更 )에 다시 진격해 왔으며, 삼경에 다시 병력을 철수시켰 다. 연이은 공격으로 조선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본격적인 총공세는 이틀 후인 7일에 있었다. 일본군은 한밤중에 진주성의 동문과 북문, 그리고 서문에 병력을 투입 해 공격했다. 이때 그들은 다양한 공성 방법을 동원했는데 긴 사다리를 성벽에 걸쳐 놓기도 했고, 성 밑에 땅굴을 파 기도 했으며, 장작과 짚단에 불을 놓아 성 안으로 던지는 화공 전술까지 구사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총사령관인 김시민은 자신이 직접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는 일본군이 사다 리를 타고 성벽에 오르면 뜨거운 물을 퍼붓도록 했으며, 많은 일본군이 3층의 다락에 탑승해 성벽을 향해 다가오자 화포를 쏘아 부숴버렸으며, 땅굴을 파고 기어 올라오는 적들에게는 불을 밝혀서 그 위치를 알아낸 다음, 끓는 물을 쏟거나 혹은 진천뢰( 震 天 雷 : 부분적으로 폭발하는 화약탄)를 던지기도 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전투가 한창이던 8일 경, 일본군의 거센 파상 공세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김시민이 아마도 성을 온전하게 하기 는 어려울 듯 하니 몰래 수문( 水 門 )을 열어서 노약자들을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라고 제안하자, 이광악은 그렇게 하면 군사들의 마음이 약해지고 사기가 떨어져 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말렸다. 이광악의 태 도에 김시민도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전투에 전념했다. 이 무렵, 뜻하지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 전투를 독전하던 김시민이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이마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목사의 절명을 안 병사들은 당황했고, 성 안은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조선군의 혼란을 안 일본군이 북문을 5 6척이나 뚫고 들어오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임전태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침착한 지휘로 조선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으며, 성 내로 난입하려는 일본군에게 화 살과 돌을 퍼붓고 끓는 물을 쏟으며 화포를 쏘아대 적의 공세를 저지했다. 이 때, 비단옷을 입은 한 일본군 장수가 말을 타고 와 군사들을 지휘하며 돌진해 오자 이광악이 직접 활을 쏘아 사 살했다. 화살에 맞아 쓰러진 일본 장수의 시체를 일본군 병사들이 메고 구슬프게 통곡을 하며 도망쳤는데, 그것을 본 조선군 병사들은 모두 기뻐하며 사기가 충천했다. 서문을 공격한 일본군 수천 명이 맹렬한 공세를 퍼붓자 성가퀴를 지키던 조선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 러자 서문의 방어 책임자인 최덕량은 영장( 領 將 ) 이눌과 함께 도망가는 군졸 몇 사람을 베어 죽이며 끝까지 싸울 것 을 명령하자, 군사들이 그제야 다시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떨치며 힘껏 싸웠다. 조선군의 결사적인 저지에 일 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로 철수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2

203 동문을 지키던 성수경은 5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을 넘어오는 적들을 무수히 베어 죽인 끝에 결국 적의 공 격을 막아내고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성의 외곽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시민과 미리 협력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의병장 곽재우는 일본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던 10월 6일 밤, 선봉장 심대승( 沈 大 昇 )으로 하여금 2백 명의 의병과 함께 북산( 北 山 )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아대고 성을 향해 전라도의 원병 1만여 명과 의령의 홍의 장군 곽재우가 합세하 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하였다. 라고 크게 외치게 했다. 이 말을 듣고 성 안에 있던 조선군 병사들과 백성들 역시 크게 외치면서 기뻐하였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 윤탁과 정언충 등은 성의 동쪽 방면에서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했으며, 합천 가장( 陜 川 假 將 ) 김준민은 용맹한 육군 장수 정기룡( 鄭 起 龍 )과 조경형( 曺 慶 亨 )등과 함께 성의 북쪽 방면으로 들어갔으며, 최경회는 임계영과 더불어 2천의 군사로 서쪽에서, 고성 가장( 固 城 假 將 ) 조응도와 복병장( 伏 兵 將 ) 정유경은 5백 명의 군사로 남 쪽으로 각각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 안팎의 조선군에 의해 역포위를 당한 꼴이 되고 말 았다. 성의 북쪽 방면을 공략한 김준민이 결사대 80여 명을 거느리고 단계현( 丹 溪 縣 )에 도착해, 관사( 官 舍 )를 불태우던 일 본군을 발견하고 곧바로 돌격하여 20여 리를 뒤쫓자 일본군은 흩어져 퇴각했다. 다른 의병장 조응도는 남강( 南 江 ) 10 리 밖에 이르러 멀리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서 남은 일본군을 나누어 소탕했다. 결국, 조선군의 굳건한 방어와 의병들의 파상 공세에 더 이상의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한 지 약 닷새 가 되는 10월 10일, 성 밖에 있는 1천여 채의 집을 불사르고 신시( 申 時 )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 함양으로 철수했다. 일 본군의 공세가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던 동문과 북문 앞에는 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조선군은 목사 김시민이 전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가 없었다. 진주성 전투에서 분전하며 일본군을 격퇴시킨 김시민은 그의 직함인 목사 를 따서 일본군에게 모쿠소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모쿠소는 일본군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지, 임란이 끝나고 한참 후인 에도 막부 시대 일 본에서 상영된 가부키에서 일본을 멸망시키려는 사악한 괴수인 모쿠소 라는 캐릭터로 남게 된다. 어느 정도의 일본군이 전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족히 수천이 되는 병력을 잃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장악은 무산되었으며, 동시에 전세도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넘어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김시민과 다른 조선 장수들이 진주성에서 거둔 승전을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에 필적 하는 진주대첩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3

204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4

205 46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6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58 하지만 진주성 전투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1차 전투가 끝난 지 5개월 후인 1593년 3월과 4월에 도 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나가 있는 장수들에게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일본군은 1월에 조 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을 빼앗기고 한양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철수해 전황이 매우 불리했다. 거기에 명나라와 휴 전 협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런 즈음에 돌연 5~6개월 전에 있었던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라는 비상식적인 명령을 왜 히데요시는 내렸 던 것일까? 우선, 행주와 진주성 등지에서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다시 추스르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신감을 회 복하기 위한 동기를 들 수 있겠다. 특히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당한 패배를 히데요시는 무척이나 분하게 여 겨, 반드시 진주성을 쳐 치욕을 씻으라고 세 번이나 직접 지시를 했다고 한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전투를 벌인다 는 것이 얼핏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군사들은 그런 것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전라도로 진출하여 군량을 확보 하려는 의도도 포함될 것이다. 작은 진주성을 치기 위해 일본군 수뇌부는 사전에 미리 철저한 준비를 했다. 우선, 한양에서 철수해 부산에 집결한 일본군 병력의 대다수를 진주성 공격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부대를 총 6개로 나누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 조선 침략을 담당한 중요 장수들에게 지휘토록 했다. 또한 수군을 동원하여 진주 연해로 나아가 마치 조선 수군과 일전을 벌이려는 것처럼 위장해 만에 하나, 조선 수군 이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을 돕지 못하도록 전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일본군이 대군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군의 부총병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진주성은 작은 지역인데 무엇 때문에 명나라에 신의를 잃으려 하는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 라고 엄포를 놓았고, 일본과 외교 교섭을 하던 명의 심유경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항의했으나 가토는 유정의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고니시도 내가 아니라 가토가 주장했으니, 성을 비워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무시했다. 유정의 엄포는 아무런 힘도 근거도 없는 말이었음이 나중에 입증 된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6

207 일본군이 명의 교섭을 거부하자 명군과 조선군은 다급해졌다. 명의 제독 이여송은 유정에게 진주성으로 내려가 조 선군을 지원하라고 말했지만, 유정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따르지 않았다. 조선군 수뇌부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일전을 준비했다. 순변사 이빈과 전라병사 선거이와 충청병사 황진, 그리고 전라방어사 이복남이 권율의 지휘 아래 창녕 등지에 분산 주둔했다. 그러나 이빈과 권율의 군대는 양식 이 떨어져 제대로 싸울 처지가 못 되었다.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은 의병장 곽재우는 무모한 전쟁에 아 까운 병사를 잃을 수 없다. 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총 8만 3천의 일본 육군은 1593년 6월 15일, 예전의 침공 루트였던 김해와 창원을 거쳐 함안으로 진격했다. 함안에 주둔해 있던 이빈과 권율, 선거이가 거느린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며 곽재우도 승산이 없다고 여겨 철수했 다. 다음날인 6월 16일에는 일본 수군 함대 8백 척이 웅천과 제포, 안골포에 나타났으며 그 선봉대가 영등포와 견내량 사이의 해협에 이르렀다. 이를 본 이순신은 통영 앞 한산도에 조선 수군의 주력을 이끌고 나가 대치했으며, 만에 하 나 있을지 모르는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 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견제하고 진주성의 조선군을 돕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끝내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6월 19일,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이 때 진주성 안에는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목사 서예원,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호남의 의병장 고종후와 임회진 등이 각기 군사 3,500명을 거느리고 주둔 해 있었다. 장수들 대부분이 이미 지난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이긴 경험이 있어 사기가 충천해 있었 지만, 문제는 진주목사 서예원이었다. 그는 어리석고 겁이 많아서 무장으로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평소 에도 겁이 많아 다른 장수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 성 안에는 화포와 화약 무기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고 양곡도 10여만 섬이나 있어 장기전도 문제없어 보였다. 거 기에 지난 진주성 전투의 승전보를 기억하고 있던 인근 주민들도 끝없이 몰려들어 그 수가 6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 중 4분의 1 가량은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이었으며 그들도 병사들을 도와 전투에 참가하였다. 장수들은 상주와 구례에 주둔한 명군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끝내 모습 을 보이지 않았다. 6월 21일, 일본군의 선발대인 기병 2백여 명이 동북산 위에 나타났고 다음 날인 22일 진시( 辰 時 )에 일본군의 기병 5 백여 명이 북산에 올라 진형을 갖추고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진주성의 조선군 수뇌부는 섣불리 군사를 내보내 응전하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이제 중요한 싸움이 벌 어질 텐데, 자칫 적의 도발에 넘어가 한 명이라도 귀한 병력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7

208 드디어 일본군 본대가 성 아래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병력을 나누어 1대는 북문, 2대는 서문, 3대는 동문을 향해 공 격을 감행했으며, 나머지 4대와 5대는 각각 동쪽과 서쪽 길 외곽에 주둔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조선군의 지원 병력 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본군이 진주성에 도착하기 앞서, 성을 지키던 조선군 수뇌부는 성의 남쪽은 험한 촉석( 矗 石 )루와 남강이 흐르고 있으니 성의 서쪽과 북쪽에 깊은 해자를 만들면 적이 동쪽으로만 공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자 일 본군은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해 날라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조선군은 일본군 의 기발한 작전에 의표를 찔리고 만 셈이었다. 일본군 병사들이 새로 만든 길을 이용해 성벽 밑으로 다가와 성벽의 밑돌을 파내기 시작하자, 성벽 위에 있던 조선 군이 화살과 총통을 퍼부어 30여 명을 쏘아 맞히자 일본군은 급히 철수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단 물러난 일본군은 초저녁에 다시 진격해 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6월 23일, 한낮에 일본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세 번이나 감행했다. 그러나 조선군도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모두 격퇴 시켰으며, 밤에 일본군이 다시 네 번을 공격해오자 화포와 화살을 어지럽게 날리며 악전고투 끝에 네 번 모두 물리쳤 다. 이 때 수만 명의 일본군이 외치는 고함 소리가 밤중에 천지를 진동하여 조선군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 다. 다음 날인 6월 24일에 적의 증원군( 增 援 軍 ) 5 6천 명이 와서 마현( 馬 峴 )에 진을 치고 또 5 6백 명의 증원군이 와 서 동편에 진을 쳤다. 갈수록 늘어나는 적의 군세와 그에 반비례하여 지원군의 소식이 전혀 없는 조선군 장수와 병사 들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8

209 47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0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59 6월 25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 土 屋 )을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조총을 비처럼 퍼부었다. 잠깐 사이에 수많은 조선군 병사들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자 충청 병사 황진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도록 지시했다. 그는 갑옷과 투구를 벗고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날랐으며, 이를 본 성 안의 백성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해 축 조를 도왔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언덕은 완성되었다. 황진은 언덕 위에서 현자총통을 쏘아 일본군의 토옥을 모조리 부 숴버렸으나 일본군은 즉시 다시 만들었다. 이날 일곱 번에 걸친 일본군의 파상 공세를 조선군은 힘겹게 막아낼 수 있 었다. 토옥에서의 조총 공격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다음 날인 6월 26일에는 동문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판옥 ( 板 屋 )을 만들어 놓고는 그 위에서 많은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대니 성 안의 초가집이 일시에 연달아 불에 타서 연 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뻗쳐올랐다. 이에 서예원은 겁을 먹고서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김천일은 서예원이 목사의 자격이 못 된다고 판단하여 급히 의병 부장( 義 兵 副 將 )인 장윤을 임시 목사로 삼았다. 진주성을 지키는 조선군에게 악재는 계속 이어졌다. 때마침 날씨가 습기 차서 조선군의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려 버 렸다. 시위가 풀리면 화살을 쏠 수 없어 이는 활을 주력 무기로 하는 조선군에게 매우 나쁜 일이었다. 더구나 닷새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밤에도 계속 전투를 벌여 조선군 병사들은 모두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명나라의 군대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어찌 감히 항거하는가? 라는 내용의 편지를 성 안으로 쏘 아 보냈다. 조선군 수뇌부는 즉각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며, 더구나 명나라 군사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 여 남김없이 섬멸하고 말 것이다.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그 편지를 읽은 일본군 병사들이 바지를 걷고 엉덩이 를 두드리며 명나라 장수들은 이미 다 물러갔다! 라고 조롱하였다. 사실, 명나라 장수들이 물러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조선군을 전혀 돕지 않고 방관만 했으니, 일본군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일본군이 공세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이날 낮과 밤에 각각 3~4회의 공격을 감행했 다. 조선군은 모두 막아내었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0

211 6월 27일, 일본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언덕을 축조하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고 조망대( 眺 望 臺 )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조망대에 많은 병사들을 올려 보내 성 안을 내려다보고 조총을 쏘아대게 하자 순식간에 성 안의 조선 군 병사 중 3백여 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바퀴가 네 개 달린 큰 나무 궤짝을 만들어 군사들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궤를 옹위( 擁 衛 )하여 나 아가며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게 했다. 이 때 일본군이 사용한 나무 궤짝을 귀갑거( 龜 甲 車 )라고 부른다. 성 안의 조선 병사와 백성들은 급히 성 아래로 기름을 붓고 횃불을 계속 던져 귀갑거와 그것을 끌고 온 일본군 대 부분을 불에 태워 죽였다. 요행히 타죽지 않은 일본군들은 도망쳤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신북문( 新 北 門 )으로 침 범해 오자, 이종인이 휘하 병력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많은 적을 죽여 격퇴시켰다. 모든 장수들이 이렇게 분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예원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야간 경비를 맡고 있음에도 임무를 소홀히 하였고, 그 바람에 일본군 병사들이 몰래 와서 성벽을 허물어 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28일 새벽 무렵에 성을 점검하다 이를 안 이종인이 분노하여 서예원을 크게 꾸짖었다. 일본군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오자, 성 안의 병사와 백성들은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한참 싸움이 치열해 질 무렵, 일본군 장수 한 명이 조선군이 쏜 조총에 맞아 죽자 일본군 병사들은 그 시체를 끌고 황급히 후퇴했다. 전투가 끝난 성 안을 황진이 둘러보며 오늘 싸움에서 죽은 적이 천 명은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을 때, 성 밑 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위로 대고 조총을 쏘았다. 그 총탄이 나무판자에 비껴 맞고 튕겨 나와서 황진 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저격을 당한 황진은 급히 의원 막사로 옮겨졌으나 상처가 깊어 그만 숨지고 말았다. 진주성 전투 내내 황진의 용맹과 전공은 최고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접한 조선 장병들은 매우 흉흉해하고 두려워하였다. 황진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 활동한 조선 육군의 장수들 중, 매우 용감한 장수로 알려졌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김성일 일행과 함께 일본에 통신사로 갔는데 여비를 모두 털어 일본도( 日 本 刀 ) 두 자루를 사왔다. 이상하게 여 긴 주위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왜적이 언젠가 쳐들어 올 테니 그 때 이 칼로 무찌를 것이오. 라고 자신만만하 게 대답했다. 2차 진주성 전투를 다룬 일본 측의 기록들에서도 붉은 갑옷을 입은 조선 장수가 쌍칼을 휘두르며 우 리 병사들을 보는 족족 베어 죽이니 매우 두려웠다. 라고 전해진다. 다음날인 6월 29일, 황진의 죽음으로 서예원이 그를 대신해서 순성장( 巡 城 將 )이 되었다. 그러나 서예원은 영 장수의 재목이 못 되었다. 그는 겁을 먹고 투구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 한심한 모습에 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하여 죽이려다가 그만두고서 장윤으로 대신 순성장을 삼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장윤도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날 미시( 未 時 )에 갑자기 비가 내려 동문 쪽의 성 일부가 무너졌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일본군 병 사들이 성에 달라붙어 성 밑의 기초석을 빼내는 일을 열심히 해왔고, 그런 노력의 결실로 인해 성이 드디어 무너진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1

212 것이었다. 뜻밖의 기회를 포착한 일본군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오자 이종인은 휘하 병사들에게 활과 화살을 놓아두고 창과 칼을 들고서 육박전을 하도록 지시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일단 일본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철수했다. 그러나 곧 이어 서문과 북문 쪽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뚫리고 말았다. 일본군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 며 돌진해 오자 잇따른 전투에 지친 병사들이 무너지고 흩어져 모두 촉석루( 矗 石 樓 )로 집결했다. 일본군이 본성으로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날뛰자 겁에 질린 서예원이 제일 먼저 달아났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조선군이 사기를 잃고 뿔 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싸우던 이종인은 결국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나머지 장수들인 김천일과 그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와 고종후, 양산숙 등은 촉석루 밑 남강 바위 위에 모였다. 그 들은 선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하고 모두 강으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 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우왕좌왕 하며 도망치는 조선 병사와 백성들에게 창고 안으로 들어가면 살려주마! 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믿고 많은 사람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이고 말았다. 창고 안으로 들어 가지 않고 도망치거나 곳곳에서 저항하던 사람들 역시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자 소나 말, 개나 닭 같은 동물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리 일본군 수뇌부들에게 진주성 안에 있는 사 람과 동물을 사그리 도륙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일본군이 이토록 잔혹한 살육을 벌인 저의는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포 전술 의 일환이 라고 본다. 일본군에게 저항했다가는 이렇게 무자비한 죽임을 당한다는 메시지를 조선과 명에 알린 것이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일본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을 심어주고 그로 인해 조선의 통치를 더욱 쉽게 하 며, 나아가 이 승리를 계기로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조선의 영토 중 일부를 할양받기 위한 일석삼조의 계책도 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히데요시가 직접 기획하고 일본군 수뇌부가 실행한 이 진주성 전투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만을 심어주었을 뿐, 그들이 기대하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여러 주장들이 분분하다. 최소 3만에서 최대 8만이라고도 한다. 다만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전투가 끝난 후, 감사 김늑이 사근 찰방( 沙 斤 察 訪 ) 이정을 시켜 조사하게 하였는데 성 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 軀 )이고, 촉석루에서 남강의 북안( 北 岸 )까지 쌓인 시체들이 서로 겹 쳤으며, 청천강( 菁 川 江 )에서부터 옥봉리( 玉 峯 里 ), 천오리( 遷 五 里 )까지 죽은 시체가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고 한다. 이로써 열흘 간에 걸친 처절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는 끝났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한 성을 치는 데 8만이 넘는 대 병력이 동원되어 이렇게 처절했던 싸움을 치른 적은 없었다. 비록 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이 거두었지만, 절대적으로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2

213 부족한 병력과 지원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이나 치열하게 맞서 싸운 조선군 장졸들은 대단한 저력과 투혼 을 보여주었다. 만약, 성 안의 병사들이 더 많이 있었고 1차 진주성 전투에서처럼 성 밖에서 일본군을 견제할 지원 병력들이 있었 다면 2차 진주성 전투의 양상이 바뀌지는 않았을까? 지나간 역사의 현장과 비극을 상기해 보면 무척이나 안타깝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3

214 48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5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36 사우디아라비아의 여권에는 여권 소지자가 "왕족의 소유물('belongs' to the royal family)"라고 쓰여져 있다. 사우 디의 평민은 가재도구, 즉 알 사우드 왕가의 제대 왕궁이나 롤스로이스 실버 클라우드 모델과 다를 바 없는 재산에 불과하다. 사우디 왕국 안에는 의회나 헌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리라는 것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한 현명하고 관대한 왕과 왕족이 통치하는 낭만적인 왕국이라면 좀 나 을 것이다. 그러나 사우디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최고위층부터 말하자면 1995년 파드 국왕이 뇌졸증으로 쓰려진 이 래, 뇌사 상태에 빠져 있고 그 틈을 타 다른 왕족들은 저마다 국고의 돈을 빼먹으며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사우디 왕족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상당한 수당을 받는다. 왕족들 중 윗세대들은 1만 2천 명은 한 달에 최고 27만 달러를 받으며, 3세대 왕족들은 1만 9천 달러를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받아도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왕족은 없다.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에서 웬만한 보트라도 한 대 장만해서 파티를 벌일려면 적어도 한 해에 1백만 달러는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거의 대다수의 왕족들은 건설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뇌물이나 무기 거래, 마약 밀수, 시민 재산의 탈취 와 민간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방식으로 돈을 챙긴다. 그 중에서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왕족들의 횡포는 바로 시민들의 재산을 노골적으로 빼앗는 일이다. 이러한 왕족의 재산 갈취 행위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진 탓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적인 상인 계층과 신흥 중산층들로부터 완전히 민심을 잃고 있다. 만약 어떤 사우디 왕족이 한 레스토랑에 갔다가, 장사가 잘되는 모습을 보 면 보통의 시가보다 훨씬 싼값에 레스토랑을 사겠다고 수표를 긋는다. 레스토랑 주인은 아무런 군말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헐값에 자신의 재산인 식당을 팔아야 한다. 거부했다가는 감옥에 갇히게 되니까. 나이든 왕자들은 한술 더 뜬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정부 내의 직위를 이용하여 더 큰 규모의 부정을 저지 른다. 예컨대 쇼핑몰이 들어서는 목 좋은 땅을 고른 뒤, 법원에 명령을 내려 국가의 이름으로 그 땅을 수용하도록 하 고, 국왕의 명령을 빌려서 그 땅을 자기가 차지한다. 여기에 연루된 돈은 어마어마하며 이런 관행은 갈수록 심해졌 다. 고참 왕자들은 이런 관행에 의존해 비대해진 개인 비용을 충당하기 시작했다. 왕족들의 무분별한 토지 강탈에 지방장관인 알 샤이크는 "왕족이 손을 뻗어서 쥐지 못한 유일한 땅은 달 뿐이 다."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우디 왕족들은 술과 마약도 판다. 2002년 7월 미국 플로리다 주 대배심은 사우디의 내무부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5

216 장관인 나이프 빈 술탄이 1999년 개인 비행기를 이용해 2톤의 코카인을 카라카스에서 파리로 실어 날랐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 왕족들은 은밀하게 테러를 지원하기도 한다. 미국 주재 사우디 대사의 부인은 9.11테러의 주범 중 2명에게 돈을 전달했으며,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9.11납치범의 용의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사우디 외교관의 명함 이 나왔다. LA를 방문했던 납치범 2명은 사우디 국방부와 계약을 맺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우디인의 마중을 받았다. 다른 사우디인들은 자동현금출납기를 납치범들이 이용하도록 도왔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조사단이 사우디의 살만 왕자가 설립한 보스니아 지원 사우디 고등판무관 사무실을 조사하 자,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의 폭파 사진과 세계무역센터, 미군 전함 USS 콜호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2002년 11월 워싱턴 주재 사우디 대사관은 알 카에다에 연루된 용의자의 부인에게 새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미국 연방 대배심에서 그녀를 소환하라는 통보장을 보내자, 그녀는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사우디 정부가 발행해준 여권을 가지고 미국을 빠져 나갔다. 1995년, 미국 올란도를 방문하면서 사우디의 내무부장관 나이프의 부인인 마하는 남자 하인을 구타했다. 그가 20만 달러 어치의 현금과 보석을 훔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6년 뒤, 역시 올란도에서 사우디 공주 한 명이 하녀를 때 리고 계단 밑으로 밀어 떨어지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국 경찰은 공주를 가중폭행죄로 기소했는데, 조사 과정에 서 그녀가 전직 운전기사한테서 6천 달러어치의 전자 제품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우디 왕족들이 벌이는 가장 막장스러운 행태는 바로 섹스에 관련된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 사우디아라비 아는 세계에서 가장 성적으로 억압받는 나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왕족들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 지 않는다. 1970년대 초, 오일달러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사우디 왕족들은 매춘부 찾기에 골몰했다. 그 때를 맞추어 레바논의 매춘업자들은 해외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미들 이스트 항공사의 승무원으로 가장시키고 사우디로 들여왔다. 사우디 왕 족들을 상대로 한 매춘업에서 엄청난 이윤을 얻은 레바논인들 중 10여 명은 고국으로 돌아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정 치 권력을 거머쥐기까지했다. 왕족용 매춘에 낄 수 없는 다른 사우디인들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부인을 여러 명 두는데, 가급적 어린 여자일수 록 좋다. 70살 먹은 사우디 남자가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와 결혼하는 건 사우디에서 이야기거리도 안 될 만큼 흔한 일이다. 다른 부자 사우디인들은 아예 외국으로 나가 창녀를 찾는다. 프랑스의 코트다쥐르 지역이나 몬테카를로에 잇 는 인기 클럽에서 하룻밤만 지새도 사우디의 젊은 남자들이 밤을 세며 여자들과 질탕하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런던의 홍등가와 콜걸 서비스는 사우디인들이 최대 고객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내 총생산에서 놀랄 만큼 큰 부분을 섹스에 지출한다. 우리가 사우디 원유에서 뽑은 휘발유를 차에 채울 때마다 사우디 왕족의 경호원들에게 1달러를 헌납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사우디인들이 옷을 벗고 드러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6

217 눕는데 추가로 50센트 씩을 헌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는 사우디 왕족들이 매춘부와 놀아나기 위해서 지은 왕궁들이 즐비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사우디의 파드 국왕은 프랑스 앙티베(Antibes) 근처에 왕궁 같은 호화 별장을 지었는데, 이 별장 을 관리하는 국왕의 집사가 프랑스 정부에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파리와 니스를 오가는 기차 선로를 옮겨 달라고 요 청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프랑스 안에서 회자된다. 기존 선로가 별장에서 그렇게 가깝지도 않고, 선로를 옮기는데 수백 만 달러가 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사는 그 이유를 말하기를 파드 국왕의 별장의 정원을 거닐다가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짜증을 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프랑스 관리들이 알기로 파드 국왕은 10년 넘게 별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1970년대 초, 파드 국왕이 니스의 한 카지노에서 한 번에 6백만 달러를 잃고, 여러 명의 젊은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사진에 찍히면서 사우디 왕가의 환락은 갑자기 끝났다. 사우디 왕가는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야 했다. 그러자 빈털터리 신세였던 모로코의 하산 국왕은 파드 국왕에게 전화를 걸어 모로코 탕헤르 근처의 땅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파드 국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모로코 탕헤르의 험한 산 속에 여러 채의 별장을 짓고 그곳을 왕족들이 즐기는 새로운 휴양지로 삼았다. 탕헤르는 황량한 무법 지대로, 사우디 내의 완고한 성직자들과 서방 언론의 귀찮은 눈을 피 하면서 사우디 왕족들이 마음껏 주지육림의 환락을 만끽하는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내가 모로코에 있을 때마다 CIA는 워싱턴 고위층을 친구로 둔 사우디 왕자 한 명이 난잡한 술파티를 벌이다가 젊 은 모로코 여자의 가슴을 물어뜯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하산 국왕은 즉시 이 사건을 쉬쉬하며 덮었다. 여자의 가족에게는 돈이 지불되었고, 대신 그 여자가 입을 다물지 않으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는 협박까지 들 려왔다. 이 같은 강압 전술은 제대로 먹혀 들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밖에도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린 사우디 왕자들은 섹스가 가능한 일생 동안 한 사람당 40~70명의 자식들을 낳는 다. 해가 갈수록 사우디 왕족들은 높은 출산율 때문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미 사우디 왕가에 등록된 왕족만 3만 명에 달한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이 숫자는 2배나 3배, 혹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2025년 경이 면 사우디의 원유 생산량도 지금보다 줄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어난 사우디 왕족들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제 상황은 어떻게 될까? 파드 국왕을 대신해서 사우디의 섭정을 맡고 있는 압달라 왕자는 사우디 왕족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패하고 사 치스러운 생활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았으며, 가능하면 사막에서 낙타젖 을 마시고 대추야자 열매를 먹으며, 자식들도 모두 엄격한 평등과 청빈에 기초하여 키웠다. 압달라 왕자는 두둑한 돈 다발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다른 사우디 왕족들의 수많은 자식들과는 달리,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를 엄격하 게 금지하고 있다.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7

218 압달라 왕자는 자기가 왕위에 오를 경우, 왕족들의 도둑질을 끝장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사우디 왕족들은 압달라가 자신들이 누리는 부패와 이권을 축소하려 한다며 분노하고 있으며,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고 그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중심출판사에서 번역된 <악마와의 동침>에서 참조했습니다.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8

219 49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20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 년대 말, 한국의 정부 예산에서 국방비의 비율은 33% 가량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실업률도 그와 비 슷했다. 더구나 국민들의 절반은 절대 빈곤에 놓인 극빈층이었고, 도무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상황 이었다. - 김흥수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연구>에서 발췌 국가 산업의 대외의존도는 90%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도 안 되었다. 심지어 1960년까지도 수도 서울의 집들 중 39%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농촌은 더 심각해서 무려 82%의 가구들이 전기의 공급도 못 받았다. -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 제 3권에서 발췌 1955년, 한국의 대외 무역 중 총수출의 50%와 총수입의 30~50%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에서 나왔다. 또,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주는 조건으로 일본 상품을 사라고 요구했다. 1958년 경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총 수 입액의 0.35%, 수출액은 0.53%였으나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21%, 수출 비중은 57.3%에 이를 정도로 경제 분야의 대일 종속이 심했다. - 이원덕의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에서 발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막연한 반일 정서에 매달려 지지율을 올려 보려는 포퓰리점적인 외교를 일삼았다. 1955년 한국 정부는 갑작스럽게 한국인의 일본 왕래와 일본을 상대로 한 모든 무역을 전면 중지한다고 선언했고, 1959년에도 일본이 재일교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을 이유로 다시 대일 경 제 단교 및 왕래 금지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경제 분야 대부분이 일본을 상대로 하고 있던 현실에서 이는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자칫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파탄으로 치닫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1955년의 대일 단교 선 언을 불과 열흘 만에 취소했고,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이 끝나자마자 한일회담을 재개한다고 제의를 해왔다. 이승만 정권은 대일 정책은 뚜렷한 원칙도 없이 오직 이승만 본인의 즉흥적인 감정에 맞춰 나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1959년 6월 16일,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 거류민단은 "이제와서는 자유당이나 한국의 현 정부를 믿거 나 지지할 수 없다."라고 발표하기까지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이승만 정부의 외교 정책 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20

221 -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에서 발췌 1956년, 한국 농가들이 안고 있던 부채의 80%는 사채였으며, 대부분의 농민들이 연간 60% 이상의 높은 이자에 고 통스러워하고 있었다. 1957년의 조사에 의하면, 농민들의 절반이 하루 세 끼의 식사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궁핍했 다. 이런 현실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로 떠나 손에 잡히는 대로 막일이나 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운이 좋은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농민들을 기다 리는 것은 불안한 일용직 노동자나 그것도 잡지 못해서 가난한 실업자로 사는 길 뿐이었다. - 박진도의 <근대화 물결에 떠내려간 농촌>과 한국사연구회의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2권에 서 발췌 1950년대, 한국의 경제적 궁핍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하나 있다. 1956년 6월 16일, 황태 영에 의해 정식으로 문을 연 HLKZ-TV 방송국은 1년도 안 된 1957년 5월 6일,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은 1만 8천환이었는데, TV 한 대의 가격은 무려 34만 환이었다. 이러니 TV를 살 사람이 몇 이나 되겠는가? 황부영은 1년 간의 월부제 판매방식을 도입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TV를 사가는 소비자들은 나타나 지 않았다. 광고수입도 거의 없었고 광고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던 HLKZ는 결국, 매달 5백만 환의 재정 적자를 이 기지 못한 채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을 참하라!>를 쓴 백지원 선생께 이 자리를 빌어 부탁드립니다. 조선을 가리켜 "백성들의 피눈물로 버텨 온 인간 지옥이었다."라고 책에 적으셨던데, 제가 보기에는 1950년대의 한 국이야말로 그런 수식어가 잘 어울립니다. 혹시, 앞으로 내실 역사 서적에서 1950년대의 한국사를 다루실 때, 저 문구를 넣어주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앞으로 누가 "1950년대가 살기 좋았다."느니 "이승만이 정치를 잘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1. 거짓말쟁이거나 2. 사 기꾼이거나 3. 이승만 정권 시절에 정부 기관과 결탁해서 부정부패로 살았음에 틀림없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21

222 50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3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39 명나라의 군 편성은 다섯 개의 대관구로 이루어진다. 세분화하면 전군도독부의 예하에 광동, 호광, 강서의 도독부가 배속된다. 다시 호광, 복건의 행도사에는 홍도유수부가 배속된다. 이것은 다시 77개 위와 124개의 소로 편성되어 있으 니, 총 병력은 57만 8천 명에 이른다. 위는 5600명이 정원이며 지휘사가 배치된다. 소는 1120명의 천호소와 120명의 백호소로 구분된다. 병력단위의 가장 적은 분류는 오라고 하는데, 오가 둘이면 12명의 대가 되며, 지휘관은 대총이다. 대가 셋이면 36명의 기가 되고 지휘 관이 기총이다. 기가 셋이면 110명을 초과하는 초가 되며 지휘관은 백총이다.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3

224 초가 셋이면 450명에 이르는 사가 되며 지휘관은 파총이다. 사가 둘이면 900명에 이르는 부가 되고 지휘관은 천총 이다. 부가 셋이면 2700명에 달하는 영이 되고 지휘관은 장관이 된다. 중군 도독부는 중도 유수부와 하남도사가 배속되며, 50개 위와 26개 소로 편성되니, 총 병력에 40만에 약간 못 미친 다. 후군 도독부는 산서, 대령, 만전의 삼개 도사와 산서행도사가 배속되며, 109위와 32개 소로 편성되니 총 병력은 64만을 넘는다. 다음 우군 도독부는 섬서, 사천, 광동, 운남, 귀주의 다섯 도독부와 협서와 사천 두 군데의 행도사가 배속되며, 111 개 위와 94개 소로 편성되니 총 병력은 72만에 이른다.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4

225 좌군 도독부는 절강과 요동, 산동의 도독부가 배속되며 66개 위와 71개 소, 총 병력은 45만 가량이다. 여기에 수도인 북경과 제 2의 수도인 남경에는 각각 친군들이 배속되어 있으며, 그것만 합해도 20만이 훨씬 넘는다. 게다가 황제가 거주하는 북경의 황궁인 자금성을 경호하는 금군과 우림군을 포함하면 총 병력은 350만은 가볍게 뛰 어 넘는다. 반란으로 황제가 된 영락제는 1409년 대장군 구복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북방으로 후퇴한 몽골을 치게 했으나, 역습을 받아 구복과 그의 군대가 전멸당하자 자신이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다섯 번이나 북방 원정에 나섰다.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5

226 명나라는 청과 농민 반란군에 시달리는 후기까지도 북방 지역에 청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50만의 병력을 주둔시킬 정도로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배상열 님이 쓰신 대하소설 <풍운>의 3권에서 명의 군사 제도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어 발췌했습니다. 자료 조사는 저보다 더 철저하시더군요. ^ ^ ~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6

227 51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28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09 남명이 19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장헌충이 거느렸던 반란군인 대서군이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중 에서도 장헌충의 부하 장수인 이정국은 매우 공이 컸다. 이정국은 열 살 때, 농민 반란에 가담했다. 그는 용감하고 싸움을 잘해 주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만인적이라고 불렀다. 그는 17세에 벌써 2만 명의 병사들을 지휘했다. 장헌충이 청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후에는 남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명 정권과 협력해서 영력 황제를 추대하는 공을 세웠다. 이정국은 삼국지연의를 좋아했는데, "내가 감히 제갈공명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관우나 장비만 되어도 좋다."라고 말했다. 또, 남송의 충신인 문천상과 육수부, 장세걸처럼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남겠다는이야기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했다. 1652년, 이정국은 보병과 기병 8만 명을 이끌고 계림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 면서 그는 군대의 규율을 엄격하게 정했다. 모든 군사들에게 백성을 죽이지 말고 민가에 불을 지르지 말며, 여인을 간음하지 말고 가축을 함부로 훔쳐서 먹지 말고,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정국의 부대는 이런 규율을 철 저히 지킨 덕분에 백성들의 옹호를 받았다. 계림으로 통하는 길목인 전주 부근의 엄관을 지키고 있던 청군은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이정국은 운남에서 가져온 2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해 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엄관을 넘었다. 청군의 지휘관인 공유덕이 다시 용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이정국은 코끼리들을 방어선으로 내몰았다. 청군 병사들은 코끼리가 울부짖는 소리 를 듣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이정국은 그 기세를 타고 청군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공유덕은 간 신히 살아서 도주했다. 승리한 이정국의 군대는 계림을 포위했다. 사흘 후, 코끼리들이 성문을 돌파하자 공유덕은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이정국은 계속 북상해 형양과 장사, 악주 등지를 점령하고 3천리의 영토를 세력권 하에 두었다. 그의 병사 절반은 서로 다른 민족이었지만, 서로 허물없이 지냈다. 그들이 장사에 반년 동안 주둔해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런 군대가 옆 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이정국의 승리로 청나라 조정이 떠들썩했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방 7개 성을 포기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 도였으나, 경근친왕 니칸을 정원대장군으로 파견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남방을 정벌하기로 했다. 니칸이 출정하던 날,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청나라 순치 황제는 몸소 남원에 나와서 전송을 해주었다.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28

229 그해 11월, 호남에 들어선 니칸은 첫 싸움에서 남명군을 크게 이기고 상담을 점령했다. 이정국은 청군을 유인하기 위해서 장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그러자 빨리 적을 토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려던 니칸은 급한 마음에 직접 경무장을 한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이정국은 형양으로 퇴각하는 길에 일부러 투구와 갑옷들을 버리고 밀림 속에 매복했 다. 그들을 추격하던 니칸은 승리를 확신하고 북경에 승전 소식을 알렸다. 승전보에는 "날이 밝으면 형양성을 점령할 것이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다음 날 아침, 니칸이 형양성에 접근했을 때 돌연 숲속에서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이정국의 군사 가 뛰쳐나와 공격을 했다.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큰 코끼리들이 앞에서 돌격했다. 이 격전에서 니칸은 전사하고 지휘 관을 잃은 청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순치 황제가 형양을 공격하기 전에 보낸 니칸의 첩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후였다. 이정국의 두 차례 대승은 남명군이 청군을 상대로 거둔 전례 없는 승리였다. 후에 명나라의 유신인 황종희는 이렇 게 칭송했다. "계림과 형양에서 이정국의 싸움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이 두 차례 승리는 만력 무오년(1618년) 이래 천하에서 유례 가 없었던 일이었다." 신원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을 말한다> 14권에서 참조했습니다.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29

230 52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231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17 선조실록에 삼국지연의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길래, 한 번 올려봅니다 선조 3권, 2년(1569 기사 / 명 융경( 隆 慶 ) 3년) 6월 20일(임진) 1번째기사 석강에서 근사록 을 강하고 기대승 윤근수 등이 역사를 공부하는 법을 논하다 상이 문정전 석강에 나아갔다. 근사록( 近 思 錄 ) 제2권을 진강하였다. 기대승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장필무( 張 弼 武 )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 張 飛 )의 고함에 만군( 萬 軍 )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 사( 正 史 )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 三 國 志 衍 義 ) 에 있다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 래 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천문( 天 文 ) 지리( 地 理 )에 관한 책은 이전에는 숨겨졌다가 나중에 드러나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사기( 史 記 )의 경우는 본래 실전되어서 뒤에 억측( 臆 測 )하기 어려운 것인데 부연( 敷 衍 )하고 증익( 增 益 )하여 매우 괴상하고 허 탄하였습니다. 신이 뒤에 그 책을 보니 단연코 이는 무뢰( 無 賴 )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 古 談 )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잡 박( 雜 駁 )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칩니다. 위에서 우연히 한번 보셨으나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중의 내용을 들어 말씀드린다면 동승( 董 承 )의 의대( 衣 帶 ) 속의 조서( 詔 書 )라든가 적벽( 赤 壁 ) 싸움에서 이긴 것 등 은 각각 괴상하고 허탄한 일과 근거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 위에서 혹시 이 책의 근본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하여 감히 아룁니다. 이 책은 초한연의( 楚 漢 衍 義 ) 등과 같은 책일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종류가 하나뿐이 아닌데 모두가 의리를 심히 해치는 것들입니다. (중략) 위에서 무망( 誣 罔 )함을 아시고 경계하시면 학문의 공부에 절실 ( 切 實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삼국지연의 는 괴상하고 탄망( 誕 妄 )함이 이와 같은데도 인출( 印 出 )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찌 무 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문자를 보면 모두가 평범한 이야기이고 괴벽( 怪 癖 )한 것뿐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231

232 53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3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01 서구의 세계 지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2008년 무렵, 인터넷 정치토론 사이트 <서프라이즈>에 개굴이네 집 이라는 필명으로 현실 정치와 국제 정세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된 시인은 자신의 글에 서 서구는 천년 전부터 다른 문명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아마 그렇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환상일 뿐, 사실이 아니다. 서구의 대다수 석학들은 서양이 세계를 주도하기 시작한 때는 중 국과의 아편 전쟁을 승리로 이끈 1840년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그 이전까지 서구는 다른 문명권과의 경쟁에서 압도적 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백중세였으며, 오히려 때때로 밀리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아도 그렇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구는 줄곧 무섭게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비해 크게 불리한 위 치에 놓였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스페인 등지가 이슬람의 손에 떨어졌으며, 로마 제국의 후계 자인 비잔티움 제국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두 차례나 이슬람 군대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713년, 스페인을 정복한 이슬람은 무려 780년 동안이나 스페인을 지배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칠리아를 정복 한 이슬람 세력도 11세기 초, 노르만인들에게 쫓겨날 때까지 3백년 동안 존속했다. 물론 서구도 나름대로 반격을 가하여 대 이슬람 연합군인 십자군을 결성하여 1097년,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탈 환하고 그 주변 영토를 지배하는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옥 공국 등을 세웠다. 하지만 서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 세운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옥 공국은 1296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게 멸망당했다. 서구인들이 2백년 걸려 중동에 구 축한 세력이 완전히 축출된 것이다. 십자군의 중동 진출은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한 이슬람의 역습을 불러 일으켰다. 1237년, 멀리 동방에서 쳐들어온 몽 골군은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의 지휘 아래 라잔과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키예프 등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삽시 간에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가 그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만약 1241년, 몽 골제국의 대칸인 오고타이가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몽골군의 진격은 어디까지 계속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오고타이칸의 죽음으로 몽골군의 유럽 원정은 중지되었지만, 몽골인들은 아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우크라이나 지방 에 정착하여 킵차크 칸국을 세운다. 그리고 킵차크 칸국의 초대 칸인 바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베르케는 이 슬람교로 개종하여, 이슬람 세계에 편입된다. 정착을 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해서 몽골인들의 침탈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몽골인들은 수시로 러시아와 리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3

234 투아니아, 폴란드 등지를 침략해 주민들을 살육했다. 그로 인해 이슬람 세력은 남부 유럽만이 아니라 동부 유럽까지 파고들게 된 셈이다. 특히나 몽골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러시아는 제일 피해를 심하게 입었다. 몽골의 멍에를 쓰게 된 러시 아는 자그마치 3백년이 넘게 그들의 수탈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가혹한 양의 세금을 내지 못하면 아이 들을 노예로 바치거나, 그것조차 없으면 본인의 목을 내놓아야 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들은 킵차크 칸국의 군대로 징병되어 부림을 당했고, 여자들은 끌려가 성적 노리개가 되었다. 이렇게 몽골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살던 러시아인들은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 가 주동이 되어 마마이 칸이 이끌던 몽골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382 년, 마마이를 이어 칸이 된 톡타미시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1480년, 모스크바의 이반 3세가 킵차크 칸국에게 공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1502년 킵차크 칸국이 내분으로 붕괴됨 으로써 형식상으로는 몽골 지배가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1571년, 킵차크 칸국을 계승한 크림 칸국은 모스크바를 기 습하여 무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크렘린 궁을 제외한 시내의 모든 건물을 불태워버리는 참변 을 일으켰다. 이후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대대적인 국가 개혁을 단행하는 18세기 초까지 크림 칸국에 쳐들어오지 말아달라며 공물을 바쳤다. 크림 칸국은 1783년이 되어서야 예카테리나 대제의 원정군에 의해 소멸되었다.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 이 러시아에 쳐들어 온지 약 540년 동안, 몽골의 존재는 그렇게 러시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몽골의 침략은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 일대에만 국한되었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하고 거대 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세력이 있었다.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등장했던 것이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4

235 1354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넘어온 오스만 투르크는 1371년 마리차 강의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속국으로 삼았으며,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는 헝가리와 세르비아 연합군과 싸워 이기고 세르비아를 복속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세력 팽창을 두려워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 각국들은 투르크에 저항하는 십자군을 결성 했으나,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처참히 궤멸당하고 말았다. 1402년, 갑자기 쳐들어온 티무르 군대에게 앙카라에 서 참패하고 술탄(이슬람 국가의 국왕) 바예지드가 포로로 잡혀가 한동안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1413년 메흐메드 1세가 등장하여 국정을 쇄신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다시 부흥기를 맞이했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5

236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오스만 제국은 다시 영토 확장을 시작했다. 이를 우려한 동유럽 국가들 중 비교적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폴란드는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을 저지하는 가톨릭 국가로서의 사명을 내세우고 1444년 바르나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국왕인 부아디수아프 3세가 전사하고 전군이 궤멸당하는 대패를 겪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10만 대군으로 54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끝에, 마침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무려 1063년이나 존속해 오던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이제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 동부의 내륙 깊숙이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 었다. 1455년과 1456년에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손에 들어갔다. 1470년에는 베네치아의 식민지인 네그로폰투스도 점령되었고, 1479년에는 알바니아마저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마침내 1480년에는 이탈 리아 남부 오틀란토에 투르크 군대가 상륙하여 이탈리아 본토를 노리는 대담한 모습마저 보여주었다. 1481년, 메메드 2세가 사망함으로써 오스만 군의 서진은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1504년 술탄 바예지든 2세는 다시 유럽 원정을 재개하여 루마니아를 정복했으며, 1520년 즉위한 술레이만 1 세는 1526년에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국왕 라요시 2세가 지휘하는 헝가리군을 왕과 함께 전멸시키고 헝가리 남 부를 장악했다. 또한 152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포위하여 한 달 동안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연이어 장마가 퍼붓는 악천후로 인해 오스만 대군은 끝내 비엔나에서 철수했지만, 서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비엔나에까지 오스만 군대가 몰려온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1559년에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며 1566년 9월, 술레이만 1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 헝가리 의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시게트바르 요새를 포위하고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함락시켰다. 9월 5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오스만 군대를 철수했지만,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1621년 술탄 오스만 2세는 10만의 병력과 66문의 대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코침(Chocim)을 침공했으며, 1682 년 술탄 메메드(Mehmet) 4세의 명령을 받은 오스만 제국의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는 15만 의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비엔나를 공격했다. 유럽을 향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은 약 3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압도적인 대병력과 물량 공세에 번번이 참패한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거대한 공포심을 느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침 략을 받은 적이 없는 잉글랜드에서조차 16세기 말, 역사가 리처드 놀스가 투르크 제국은 오늘날 지구상 전체를 두 렵게 한다. 라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내세운 이슬람권의 위협에 서구는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는 19세기 중엽까지 시달려야 했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6

237 시인 개굴이네 집 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한 서구의 이미지는 다분히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7

238 54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39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48 크림 칸국(crimean khanate)은 1430년, 킵차크 칸국의 시조인 바투의 동생의 후손인 하지 기레이가 세웠다 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보낸 러시아 군대가 정복할 때까지 하지 기레이의 가문이 통치했다. 크림 칸국은 지 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남부와 크림 반도 인근을 지배했다. 크림 칸국의 주민들 일부는 크림 반도에 세워진 도시에 정착해 살았으나, 칸국의 구성원인 타타르(몽골-투르크계 주민)족들 대부분은 여전히 선조들처럼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지 기레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하지 기레이의 여섯 째 아들 인 멩글리 기레이는 제노바 인들과 손을 잡았다가 크림의 도시인 카파로 쳐들어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 군대에게 포 로로 잡혔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는 속국이 될 것을 맹세했고 그 덕분에 잡힌 지 2년 후에 풀려났다.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글리 기레이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39

240 켜 주었다. 그 이유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이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 들이 그들을 상대할 때,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 의존한 결과, 크림 칸국은 다른 형제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각각 러시아에게 멸망당할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1571년, 크림 칸국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기습하여 크렘린 요새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건물을 불 태우고 약 10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크림 칸국의 주민들인 타타르족들은 평상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오면, 급히 소집되었다. 그들은 옛날 몽골 제국의 군사들처럼 십진법에 따라 조직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각자 코스(kos)라고 불 리는 열 명의 분대에 속했고, 각각의 코스에 타타르인들은 소집이 되면 자신의 말과 호루라기, 해시계, 송곳, 부싯돌, 바늘을 포함한 장비들을 스스로 장만해서 갖추고 나타나야 했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0

241 이 코스들은 모여서 백 명, 천 명, 혹은 만 명까지의 부대가 되었다. 종군할 때, 타타르 병사들은 오로지 기장이나 분말 상태가 된 고기와 마늘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은 또한 행군하다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말의 고기를 작게 잘라서 자신이 타는 안장 밑에 넣어두었다가, 따뜻해지면 날로 먹기도 했다. (이것이 타르타르 스테이크의 원조가 됨) 자신들의 조상처럼 그들도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내는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크림 칸국의 칸들은 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거느렸고, 궁정의 대신들과 하급 귀족들은 그보다 적은 수의 수행원들 을 보유했다. 이 수행원들은 직업적인 군인과 비슷한 것으로, 출정을 위해 전 백성들에게 징집된 국민을 보강했 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칸에게 직접 충성한느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족을 통치하는 부족장이나 귀족 에게 충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림 칸국의 칸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귀족과 부족장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 다. 크림 칸들은 몽골제국의 대칸들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칸이 이끌 때의 병력은 8만이나 그 이상에 달했다. 칸의 형제인 칼가들은 5만 명을 거느리고, 칼가의 부 장인 누르 알 딘은 4만 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의 공격은 영토를 얻기 위한 정복이 아니라, 대부분 약 탈을 위한 것으로서 그들의 병력은 그보다 더 적었다. 대부분의 타타르 군대는 활과 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으로 이루어졌지만, 화승총을 가진 병사들도 있었다. 칸은 6 백 명의 화승총병을 20개 중대로 나누었고, 출정한 경우에는 그만큼을 다시 모집했다. 화승총병은 두 발로 걸어다니 며 싸웠지만, 이동시에는 대부분 말에 타서 기동성을 높였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1

242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2

243 타타르인은 출정할 때, 개인당 최소한 말 세 필은 가져와야 했다. 프랑스인 여행가인 기욤 보플랑은 그가 직접 크 림 칸국을 방문하여 목격한 1630년대, 자신의 책에 크림 타타르인들의 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3

244 - 그들(타타르족)이 바크마테스라고 부르는 말은 몸체가 길고 추하게 생겼으며, 야윈 데다 갈기는 무성하고 꼬리는 길게 땅까지 늘어졌다. 그 대신, 속도가 빠르고 이동 중에는 지치지 않아서 자신을 태우고 있는 기수를 온종일 속도 를 늦추지 않고 나를 수 있었다. 또, 겨울에 눈으로 덮인 땅에서도 나뭇가지나 식물의 싹, 짚 등 먹을 수 있는 먹이들 을 발굽으로 눈을 헤쳐 찾아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타타르인들이 작고 야윈 바크마테스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플랑에 따르면 부유한 타타르인 족장들 은 투르크와 아라비아에서 들여 온 좋은 말들과 경주용 말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별다른 갑옷이나 투구를 걸치지 않았지만, 부유한 타타르인들은 투구를 쓰고 사슬 갑옷을 입었다. 라멜라 아머나 브리건딘(사슬 갑옷) 같은 갑옷 대신에 사슬 갑옷을 사용한 것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이었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4

245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5

246 타타르인들의 주요 무기는 합성궁이었고, 보플랑에 따르면 각자의 타타르 병사들은 18개에서 20개까지의 화살이 들 어간 화살통을 휴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의 몽골인들이 최소한 40개에서 60개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가지 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6

247 합성궁 이외에도 타타르인들은 굽은 기병도와 허리에 찬 단도, 또는 굽은 단도와 창과 방패를 휴대했다. 드물었지 만 권총이나 화승총 같은 화약 무기도 소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화약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생산된 화약들은 오스만 제국에 수출했다. 그들은 총기의 느린 장전과 연사 속도 때문에 총보다는 활을 더 선호했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7

248 귀족들은 자기 말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죽으로 만든 긴 양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 크림 칸국의 말들 은 발굽에 편자를 박지 않았다. 그래서 타타르족은 눈으로 말발굽을 보호할 수 있는 겨울에 원정을 떠나기 좋아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눈이 없는 건조한 겨울에는 원정을 하지 않았다. 타타르족은 강의 폭이 아무리 넓어도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병사들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장비들을 놓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8

249 타타르족은 강의 폭이 아무리 넓어도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병사들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장비들을 놓 고, 말꼬리에 묶어서 말들을 주인들의 인도하에 강 건너편으로 헤엄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칸과 귀족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타타르족은 전원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느린 병참로가 없어서 진격 속도가 굉장히 빨랐는데, 1689년 카플란 기 레이가 거느린 타타르 군대는 늪이 많은 지형에서 엿새 동안 190킬로미터를 진군했다. 타타르의 말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기수가 말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소변을 보지 않았다. 군대의 정지 신호와 행군 신호는 모두 호루라기로 내려졌다. 타타르 병사들은 밤새 엄밀하게 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기습하기란 대 단히 어려웠고, 장소가 좁은 곳이나 강어귀의 수로가 아니라면 그들을 패배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약탈이 끝나면 타타르 병사들은 약탈한 물건을 수레나 말에 싣고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다. 크림 칸국은 약 340년 동안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남부에 존속했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9

250 55 모택동- 고추 소스 같은 가짜 공산주의자

251 모택동- 고추 소스 같은 가짜 공산주의자 :01 모택동은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의 저작인 자본론이나 기타 공산주의 관계 서적들은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기껏 해야 중국인이 쓴 <마르크스 빨리 익히기>등과 같은 팜플릿을 잠깐 들춰본 정도였다. <모택동선집>을 읽어보면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사용한 학술 논문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로 그의 비서인 진백달 같은 사람들이 대신 써준 것이다. 모택동은 그들이 쓴 것을 회의석상 등에서 읽었을 뿐인데, 마치 모택동이 직접 쓴 저작인 것처럼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대통령이 비서가 써준 원고로 연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진리는 다양하지만 요약한다면 '조반유리( 造 反 有 理 )'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반유리'라고 하 는 것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해치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뜻이다. '조반'이라는 말은 적당히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대충 자식 이 부모를 내찬다거나, 학생이 선생을 때리거나, 직원이 사장에게 집단 폭행을 가하는 것 따위를 말한다. 단,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의 통념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요약되어서는 지하에 있는 마르크스가 승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택동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진수는 그렇다 고 것이고, 그가 실제로 저질렀던 일들도 그랬다. 단, 모택동은 자신의 아랫사람이 자신에게 거역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_-;...)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마르크스로부터 빌려 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로부터 중국의 대도적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스탈린은 모택동을 가리켜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했다고 한다. 버터인 것 같지만 버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스탈린 이 버터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모택동의 경우는 마가린조차도 못 되었던 것 같다. 고추를 갈아 만든 소스쯤이라고나 할까, 물론 중국식 찐빵에는 그 정도가 어울린다. 모택동을 가리켜 난폭하고 야만적인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모택동은 난폭하기는 했 지만, 결코 교양없는 무식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세련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심각한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을 매우 싫어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로부터 중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제멋대로이면서 콧대만 높고 말이 많으며 고분고분하지 않는 참으로 다루기 힘든 존재였다. 그 러나 나라를 운영하는데는 이런 무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역대의 지배자들은 모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지식인을 쓸 수밖에 없었다. 또 치켜세워주기만 하면 도적 왕조건 오랑캐 왕조건 간에 충성을 다 바치는 것이 중국의 지식인들이었다. 모택동의 지식인탄압은 1957년의 반우파 투쟁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그보다 한참 이전인 1942년, 연안에 있을 무렵에 한 차례 모택동- 고추 소스 같은 가짜 공산주의자 251

252 있었다. 이른바 '정풍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순진하고 착한 젊은이들은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의 지배 기구, 이른바 해방구가 마치 인류의 이 상이 실현되는 유토피아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속속 해방구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와서 보니 당 간부를 정점으로 하는 계급제가 빈틈없이 갖추어져 있고, 당 간부는 호의호식하는 반면, 일반 당원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팽개쳐져 항일 구국의 의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또 일반 민중은 갑자기 대세를 이룬 공산당에게 먹을 것 을 모두 빼앗긴 채 전혀 생기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기저기서 모여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공산당은 무자비한 철퇴를 내리쳤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정풍 운동'인데 이 정풍운동에서 2만 명의 젊은 지식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감금되고 또 자살을 했다. 모택동은 <문예강화>란 연설에서 "공산당을 칭찬하는 말 외에는 어떠한 말도 하지 마라!"하고 엄포를 놓았다. 무시무시한 언론 탄압 인 셈이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이 정풍 운동이 예행연습이었고, 그로부터 15년 뒤의 반우파 투쟁과 문화혁명이 본무대였다. 이번에는 전 중국 을 무대로 하여 공산당이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불평을 가질 만한 지식인을 닥치는 대로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나라에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나라의 원기를 맡고 있는 것은 지식인 계층이다. 그런 지식인들의 생기를 빼앗 고 이반시킴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 자체의 원기가 없어져 버렸다. 그 뒤는 공포와 타성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모택동이 야심차게 기획하고 실행한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대약진 운동은 수억의 사람들을 그들이 갖고 있는 체력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오직 일만 하게 했던 것으로, 나라의 경제력을 일거에 끌어 올리려는 것이었다. 하루의 열흘 분의 노동을 하게 함으로써 일년에 십년치 경제 성장을 달성한다는 계산이었다. (-_-;...) 그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만들어진 철이나 완공된 댐들은 거의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나빴고, 산의 나무들을 마 구 베어내는 바람에 산사태를 일으키거나 산림이 황폐해지는 등 부정적인 효과가 훨씬 컸다. 인민공사는 나라 안의 토지를 모두 국가 소유로 하여 수확물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는 공산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다는 것은 그들을 공산당의 농노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았고, 효율도 낮아졌다. 20년 동안 계속된 인민공사 기간은 수억의 농민들이 어떤 조직을 만들거나 서로 연락을 취할 필요 도 없이 일제히 반항에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가 진행되는 3년 동안 수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굶어 죽어갔다. 물론 공산당은 '굶어죽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라고 얼버무리고 있지만, 그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어쨌든 공산당이 수억의 국민들을 먹여 살렸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모택동- 고추 소스 같은 가짜 공산주의자 252

253 56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4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08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일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 사람 본인이 성취했던 것이 별로 없거나 혹은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 반대로 평가되는 모습들이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은 독자적으로 세운 공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칠천량 전투에서 무능력한 지휘로 인해 조선 수군을 몽땅 말아먹은 최악의 패배를 자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순신에 필적하는 용 맹한 장수라고 인식되고 있다. 이순신 띄우기에 열중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반작용 때문 이다.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살았고 자신을 욕한 주민이 살던 마을에 군대를 보내 초토화시켰던 명성황후 민씨는 오늘날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고 외치며 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행복을 걱정한 여왕으로 칭송받고 있 다. 90년대 이후, 페미니즘과 민족주의라는 두 기류가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면서 그런 시류로 인한 혜택을 맛본 경우다. 얼마 전, 나는 한 신문 칼럼을 읽었다. 죽은 모택동과 등소평이 등장해 대화를 나눈다는 가상의 설정인 데, 둘은 서로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고 특히 등소평은 모택동을 가리켜 중국 경제 발전의 아버 지. 라고 칭송을 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 칼럼을 읽고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살아 있을 때, 서로를 못 잡아먹 어 안달했던 사이였지 그 칼럼에서처럼 화기애애한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모택동이 중국 경제 발 전의 초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닌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모택동의 집권 기간 동안, 중국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낙후되어 있었다. 그가 1958년에 경 제 개발 계획으로 내세워 시작한 대약진 운동은 최소 2천만에서 최대 7천만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비참하 게 굶어 죽게 만들었다. 나와 토론을 했던 어느 중국인은 기후가 나빠 어쩔 수 없이 흉년이 들어 그랬다. 결코 모택동이 잘못 한 일이 아니다. 라고 항변했지만, 당시 중국의 기후는 가뭄은커녕 오히려 풍년이 들어 곡식이 썩어날 지 경이었다. 하지만 왜 수천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을까? 그 이유는 모택동의 현명한(?) 지도로 인한 것이었다.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면서 모택동은 국민들에게 이른바 뒤뜰 용광로 라는 장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각 집마다 철을 생산하는 용광로를 하나씩 만들 어서 철강 생산량에서 중국이 세계 제일이 되게 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뒤뜰 용광로 를 만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5 들기 위해 중국의 모든 가정들은 주전자와 냄비와 식기 및 생활 공구들을 모두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들은 크나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쇠가 붙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용광 로에 집어넣다 보니, 생활에 꼭 필요한 용구들이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주전자와 냄비가 없으니 물을 끓 일 도구가 없어졌고, 음식을 만들 수도 없었다. 공동 식당에서 애써 음식을 만들어도 숟가락과 젓가락이 없으니 음식을 집어먹기도 불편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였다. 농사짓는데 필요한 농기구들도 죄다 용광로에 넣은 후라 곡식이 여물어도 추수를 하기가 매우 난감했다. 더구나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뒤뜰 용광로 일에 매달려 있어, 일손이 부족 했다. 노인이나 여자나 어린 아이들이 나서서 농사일을 해야 했지만 장정들도 하기 힘든 농사일을 허약한 그들이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당시 정황을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들판 가득 곡식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 었지만, 정작 그것을 추수할 사람이 없어 결국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 정부가 비축하고 있던 수천만 톤의 곡식과 육류(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를 소련에 보내 식량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당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제조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는데, 그 대가로 곡식과 육류를 보냈던 것이다. 그 무렵 중국의 제조업 기술은 지금과는 달리, 매우 미미한 수준에 그쳐 다 른 나라에 수출할만한 제품을 만들어낼 형편이 못 되었다. 따라서 해외에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품이 라고는 식량 자원 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중공업에만 몰두한 나머지, 경공업을 소홀히 하여 식량이나 생필품이 부족했던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 잘 맞물려 중국은 기회가 날 때마다 그들에게 자국의 식량을 제공해야했다. 이밖에도 모택동은 농민들에게 참새들을 박멸시키도록 지시했다. 참새가 곡식의 낱알을 먹는 해로운 새 라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는데, 바로 참새는 곡식뿐만이 아닌 곡식을 먹는 해 충들도 먹는 생태계의 균형자라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지시대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참새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한동안 중국의 농촌에서는 참새의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결과, 천적이 없어진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곡식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버리고 말았 다. 해충들이 곡식을 먹어버리자, 자연히 중국인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중 국인들이 겪었던 기근은 결코 날씨가 좋지 않거나 가뭄이 들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우스운 일은 모택동이 그렇게 열심히 매달렸던 뒤뜰 용광로에서 나온 쇠들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연철들뿐이었다. 결국, 뒤뜰 용광로는 전국적인 열정으로 추진되었던 시작과는 달리 쓸쓸히 폐기 처분되는 운명을 맞았다. 결국, 이런 원인들로 인해 대약진 운동이 전개되었던 1958년에 1961년 사이에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전대미문의 참극을 맞이한 것이다.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6 물론 모택동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그런 사실도 모른다면 그는 통치자로서 의 자격도 없지만). 하지만 그는 농민들이 굶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듣고도 태연했다. 지방의 비참한 실태 를 보고 온 부하 관리들이 농민들은 지금 흙이나 풀을 먹고, 그조차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매우 많으 며 심지어는 사람의 고기를 먹을 정도입니다. 라는 보고서를 올리자 다음과 같이 화를 내며 반문했다. 먹을 것이 모자라면 하루 끼니를 줄이면 되고, 그것도 없으면 아무 거나 구해다 먹으면 될 게 아닌가! 굶주림이나 기근은 옛날 봉건 왕조에서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을 떠 나? 고금을 통틀어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독재자는 없는 법. 모택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흔히 모택동 은 검소하게 살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농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도 요리사들이 만든 최고급 음 식을 즐겼고, 호화판 연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진수성찬을 먹었다. 그리고 행여 자신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퍼져 나갈까봐 노심초사했다. 심지어 먹다 남은 음식들을 밖에 싸가지고 가려 던 요리사를 변방으로 추방시키기까지했다. 그러나 유소기와 팽덕희를 비롯한 양심 있는 공산당 간부들이 뒤늦게 이 사실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당내 에서 모택동에 대한 비판 운동을 벌여, 결국 모택동은 최고 권력인 주석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허나 모택동은 수십 년 동안 잡고 있던 권력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겉으로는 유소 기 등 당 간부 인사들의 비판을 받아들여 물러나는 척하면서, 내심으로는 자신을 몰아낸 그들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마침내 1966년, 모택동은 오랫동안 기획했던 카드를 꺼내들었으니 바로 문화대혁명이었다. 그는 아직 순 진한 10대 청소년들을 상대로 지금 국가와 사회 및 학교의 요직에 앉아있는 자들은 모두 사회주의가 아 닌 자본주의의 앞잡이들이며, 그 중에는 외국과 내통한 스파이들도 많이 있다. 너희들같이 애국심이 넘치 는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 그들을 타도하고 위기에 빠진 조국을 지켜야 한다! 라는 내용의 선동을 했다. 혈기는 넘치지만, 어린 나이에 사리분별을 제대로 못했던 청소년들은 모택동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전 국에서 폭동을 일으켜 중국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마비시켰으니, 그들이 곧 홍위병( 紅 衛 兵 )들이다. 홍위병들은 20세기 중엽의 멋진 혁명가 가 아닌 독재자의 놀음에 놀아난 불쌍한 도구들이었다. 그들 은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이나 교사들마저 모택동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납치하고 구타하 며 온갖 모욕을 주었다. 심지어 국가 원수인 유소기의 집에 몰려가 욕설과 야유를 퍼붓고 급기야는 그와 그의 아내를 붙잡아 거리를 돌며 폭행하고 구타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오래된 문화재나 문화유산 등도 그들의 손에 파괴되었다. 전통 무술로 유명한 소림 사와 중국 정신 문화의 상징인 공자의 고향인 곡부도 이들의 손에 무참히 훼손되고, 오늘날 북경의 상징인 자금성과 만리장성도 하마터면 이 때 파괴되어 영영 사라질 뻔 했다. 각종 문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7 이들에게 붙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한 예로 소설 <수호별전>의 작가인 왕중문은 단지 문학 창작을 했 다는 이유만으로 반 혁명 분자 라는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쓰고 홍위병들에게 붙잡혀가 몇 시간 동안 심한 구타를 당했다. 결국 그는 오른팔이 심하게 다쳐, 평생토록 팔을 제대로 펴기 힘든 지경에 놓였다고 한다. 등소평도 바로 이 때, 홍위병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그의 큰 아들은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건물에서 던 져졌는데, 한 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 자신도 홍위병들에게 붙잡혀가 감옥에 넣어졌다. 이런 등소평이 모 택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칼럼에서처럼 서로 웃고 떠들며 추켜세우는 생각은 전혀 하 지 않았으리라. 이렇게 사회 전반에 끔찍한 피해를 주면서도 홍위병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무자비한 폭거가 마치 세상 을 좋게 바꾸는 위대한 작업인양 착각하며 살았다. 더욱 끔찍한 일이다. 모택동은 그런 홍위병들의 만행을 말리거나 제지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부추기며 그들의 난동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오히려 일반 국민들에게도 그런 홍위병들의 영웅적인 과업을 본받으라는 암시까지 주었다. 홍위병들은 기존의 모든 문화를 거부했지만, 딱 한 가지 존중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모택동의 가르침 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오랜 고서들을 빼앗아 불태우는 일에 열중했지만, 그러면서도 모택동의 어록을 담 은 책 소홍서( 小 紅 書 )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비단 홍위병들뿐만이 아니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국민들을 상대로 책을 읽으면 읽을수 록 바보가 된다. 책은 읽지 않는 게 좋다! 라는 설교를 하며 독서무용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이런 말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일단, 모택동 자신부터가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중국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손에 잡 히는 대로 읽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잠이나 식사마저 책을 모아둔 서재에서 해결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침대의 한 쪽 구석에 책을 수북이 쌓아놓고 잠을 자는 일도 자주 했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정작 공산주 의 서적은 거의 읽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 그가 정작 국민들을 대상으로는 책을 많이 읽으면 바보가 된다니, 도대체 무슨 이율배반적인 말일까? 그렇다면 모택동 그 자신은 책을 많이 읽었으니 엄청 난 바보요 멍청이란 뜻이 된다. 더구나 국민들에게 책을 읽으면 바보가 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담은 소홍서는 꼭 읽도록 지시한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담은 책은 절대로 읽지 말고, 그저 자신의 지시에만 따르 라는 뜻이었을까? 아마 그것이 모택동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바였으리라. 어느 독재자이든지, 국민들이 자 신의 뜻대로만 따르기를 바라니까 말이다.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8 1966년부터 약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대혁명, 그러나 전혀 문화다운 면이 없이 오직 폭력의 광기와 독재 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만이 지배했던 야만의 시간은 현대 중국 사회에 씻기 힘든 피해와 상처만을 남기 고 끝났다. 무수한 중국의 전통 문화와 예술이 파괴되고, 그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 혔으며, 국민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감이 자리 잡았다. 우습게도 문화대혁명 동안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던 홍위병들은 그들의 지나친 광란이 권력 유지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한 모택동에 의해 하루아침에 모두 지방으로 쫓겨나 숙청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 택동의 권력 회복에 이용당한 처지였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비통한 눈물을 삼킨 채 산간 오지에서 인생 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잊혀졌다. 만약, 모택동 사후 벌어진 권력 승계 다툼에서 등소평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중국 은 개혁 개방 정책을 펴지 못하고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훨씬 낙후된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련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두고 스탈린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있었어도 승리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중국의 경제 발전은 모 택동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 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있었어도 이루었던 것이다.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9 57 이자성과 장헌충 등,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인 유구에 대해서...

260 이자성과 장헌충 등,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인 유구에 대해서 :44 중국 역사의 법칙 중 하나가 바로 대규모의 농민 봉기(내지는 반란)입니다. 진시황 사후, 진나라를 혼돈의 늪으로 빠뜨렸던 진승과 오광의 봉기 이래, 후한 말기의 황건적과 수 말기의 두건덕, 당 말기의 황소, 북송 말엽의 방랍, 원 말기의 주원장, 명 말기의 이자성 등 중국의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원동력은 농민들의 봉기였죠. 그 중에서도 특히, 최근 들어 <강산풍우정> 같은 중국의 TV 드라마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자주 부각되는 것이 이 자성과 장헌충으로 대표되는 명나라 말기의 농민 봉기와 도적 집단에 대해서입니다.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은 학자들에 의해 유구( 流 寇 ), 즉 떠돌아다니는 이동형 도적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관군 의 토벌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근거지를 갖지 않고 어느 한 고을을 습격해 식량과 재물을 얻으면 바로 다른 고을로 떠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들 유구들은 수만 명 가량인데, 그 중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인원은 전체의 10% 가량입니다. 그 러면 나머지 90%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전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잡역부들입니다. 무기나 식량, 옷감, 말, 수레 및 일상에서 쓰이는 생활용품들을 맡아서 운송하거나 관리하는 일이 이들의 업무였습니다. 또, 잡역부 이외에도 유구 집단에는 여자들도 포함됩니다. 유구 등 도적들의 목적은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과 재물에 이어 성욕을 해결할 여자들을 얻는 것입니다. 마을을 덮쳐서 한 번 빼앗은 여자들은 풀어주지 않고 고위 간부나 하급 병사들이 차지하여 첩으로 삼습니다. 고위 간부들은 보통 3명에서 5명 가량의 여자들을 가지고, 일반 병사들도 최소 한 1명의 여자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유구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며 무리에 포함시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거나, 아니 면 가정이 너무 가난해서 부모들이 버린 아이들을 자신들이 데려와 기릅니다. 그럼 이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도적들 을 위한 길잡이나 척후병 노릇을 하고, 나이가 좀 더 들어 어른이 되면 바로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가 됩니다. 그 중 에서 영리하고 민첩한 아이들은 고위 간부들이 양자로 들여서 친위대를 조직하고, 다음 세대의 후계자로 양성하는 교 육을 시킵니다. 명나라 말기의 유구들은 이들 모두를 포함한 하나의 큰 생활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구들의 활동상을 담은 기록이 몇 가지 있는데, 숭정제 14년인 1641년, 하남성 개봉의 관리인 이광전은 이자 성이 이끄는 유구들의 공격을 받고 그 과정에 대한 저서인 수변일지를 남겼습니다. 이자성과 장헌충 등,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인 유구에 대해서

261 수변일지에 의하면 1641년, 처음 이자성 무리의 습격 당시에는 "도적의 정예병이 약 3천, 협종( 脅 從 : 도적에게 위협 당하여 복종하는 잡역부와 여자 및 아이들)이 약 3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해 12월 이자성 무리가 두 번째로 개봉을 공격했을 당시에는 "도적의 정예병이 약 3만, 협종이 약 40만"에 달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해인 1642년 4 월의 제 3차 공격 당시에는 "도적 중 보병들이 약 10만, 말을 탄 기병들이 3만, 협종이 약 1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나 타납니다. 이처럼 전란이 길어질수록 유구 집단에 포함되는 인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전 투를 맡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비율이 대략 10:90이라는 기준점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면 이자성이나 그보다 앞선 황소의 경우, 병사가 60만이나 2백만에 달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실 제로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들은 10% 가량인 6만이나 20만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잡일을 맡는 노역자나 여 자 및 아이들이라고 보면 사실에 부합할 듯 합니다. 이자성과 장헌충 등,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인 유구에 대해서

262 58 중국 역사를 통틀어 도적들은 왜 발생하는가?

263 중국 역사를 통틀어 도적들은 왜 발생하는가? :37 중국의 역사를 보면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는 듯 합니다. 왕조의 말엽에는 항상 대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그 로 인해 왕조가 무너지거나 혹은 농민군 출신에서 아예 새로운 왕조가 출현하기도 하니까요. 이런 농민 봉기군의 출현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부패한 관리들의 농민 학대?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것 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근과 가뭄으로 인한 농민들의 분노?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중국의 정치학자 룽멍우는 대규모의 농민 봉기, 혹은 도적들의 발생 원인을 잘못된 농업 문제로 인한 폐혜라고 지 적합니다. "확실히 중국의 영토는 넓고 인구는 많다. 하지만 중국은 넓은 국토 면적에 비해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그리 많지 가 않다. 전체 국토 면적의 약 10%만이 경작 가능한 농토이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좁은 경작지를 빠듯하게 나누어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농업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다. 같은 땅에서 같은 규모의 생산을 계속 되풀이하게 되고, 그 결 과 땅의 지력이 해가 갈수록 약해지고 생산은 감소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하기 어려운데다 정부의 세금 독촉에 시달리게 된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되다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약탈을 일삼는 도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룽멍우의 지적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청나라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건륭제 시기에 중국의 인구는 1억 4천만에서 약 4억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런 인구 폭발에 비해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넓어지지 않아서 많 은 농민들이 농사지을 새로운 땅을 찾아 멀리 요동과 만주, 내몽골로 떠났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만주를 조상의 발원지로 여겨 한족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이주해오는 한 족들을 끝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농민들의 토지 이탈 현상이 급속도로 번지고, 그 와중에 정부 관리들의 부 패 사실이 전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다 급기야 백련교나 천리교 같은 종교 단체가 토지를 잃고 떠도는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건륭제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중국인 소설가 이월하가 쓴 '건륭 황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미 언급한 대로 중국의 농촌 지역에는 농사지을 땅은 적은데 반해 사람들은 많습니다. 과거, 농경 사회 시 절에는 가족이 많다는 것 자체가 일손이 많아진다고 생각해 축복으로 여겼고, 따라서 사람들은 아이를 줄이려는 피임 같은 방법을 금기시했죠. 예전에 개봉된 한국 영화 '잘 살아보세'에서도 정부의 가족 계획에 농촌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도적들은 왜 발생하는가? 263

264 물론, 그렇게 해서 가족들이 많아졌지만 반대로 농사지을 땅은 그대로 있으니 자연히 중국의 농촌에서는 사람은 많 고, 농사 이외에는 마땅히 별로 할 일이 없어서 항상 사람들이 남아 돌았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일자리가 한정 되어 있는데 반해, 실업자가 지나치게 많으면 사회 분위기가 나빠져, 큰 문제로 비화되는 것은 중국도 같았습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대규모의 토목공사나 군대 징집을 실시해 농촌에 서 놀고 먹는 사람들을 흡수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부려먹고 일을 시키려 했습니다. 실업으로 인한 사회 불만도 줄 이고 아울러 노동력도 확보할 수 있으니, 왕조들로서야 일석이조인 셈이었죠. 송나라의 경우는 홍수나 가뭄 같은 자 연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빈민들을 군대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군사의 수가 한 때는 100만을 넘어선 일도 있었습니 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군대에 들어온 사람들이 잘 싸울리가 만무했죠. 입대가 빈민구제책이 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중국에는 예로부터 "좋은 쇠는 못이 되지 않고, 좋은 인재는 군인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결코 이상 한 말이 아닙니다. 근대 이전, 중국 사회의 현실이 그랬으니까요. 현대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인 주더는 자신이 군 인이 되겠다고 말하자,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주더는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 죠. 명나라의 경우는 전국에 걸쳐 일종의 통신, 교통, 운수 체계인 역참제를 설치하고 운영했는데, 이 역참에서 일하는 역졸들도 대부분은 농촌에서 할일없이 빈둥거리던 무뢰배나 실업자들이었습니다. 유명한 반란군 지도자인 이자성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명나라가 역참을 실시하고 역졸들을 고용한 이유는 원활한 물자 수송을 운용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 로는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불안 요소인 대규모의 실업자와 무뢰배들에게 매일같이 장시간에 걸쳐 무거운 화물을 나르게 하여 지치게 만들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기로 들어서 황실의 지나친 사치와 임진왜란 및 새로 일어선 후금(청나라)과의 전쟁으로 인해 조정의 재 정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자, 비용 절감을 목표로 숭정제는 이 역참의 인원을 60%나 축소시켰습니다.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부에서 운영하는 모든 공공기관의 인턴 및 임시직원들을 대량 해고시킨 것과 똑같죠. 이 결과, 조정의 비용은 상당히 절약되었을지 몰라도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생계마저 위협당하게 된 역졸들은 조정 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의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이자성의 난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도적들은 왜 발생하는가? 264

265 59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266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42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은 다분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봉기를 일으키면서 모 세의 10계명을 기본으로 한 규율을 만들었고, 이를 참가자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267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남녀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천국 안에는 남자들 만 편성된 남군( 男 軍 )과 여자들로만 편성된 여군( 女 軍 )을 따로 두었고, 이들이 서로 만나거나 가깝게 지내 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부부로 참가한 사람들도 서로 남군과 여군에 따로 두고, 대화도 하지 못하 게 할 정도였죠. 하지만 우두머리인 천왕( 天 王 ) 홍수전을 비롯하여 동왕( 東 王 ) 양수청, 서왕( 西 王 ) 소조귀, 남왕( 南 王 ) 풍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268 운산, 북왕( 北 王 ) 위창휘, 익왕( 翼 王 ) 석달개 등의 지도자들은 이런 방침에 구애받지 않고, 아내와 첩들을 여럿 거느렸습니다. 기본적으로 홍수전은 가장 높은 천왕이니 100명의 첩들을 두었고, 양수청은 36명, 위창휘는 14명, 석달개 는 7명의 첩을 끼고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특이하게 양수청은 어린 소녀들을 좋아해서 스무살 이하의 소 녀들로만 첩들을 두고 그녀들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면서 전쟁터에 나갔다고 합니다. 하급 병사들에게는 색( 色 )에 빠지지 말고 엄격한 군율을 유지해야 한다며, 부부 관계조차 갈라놓을 정도 로 혹독하게 굴던 지도층들이 정작 자기 자신들은 이렇게 색탐에 절어 있는 모습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이런 방침은 계속 되지 못했습니다.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면서 문제가 생겼는데, 남군들만 모아놓은 남관 안에서는 성욕을 견디다 못해 같은 남자 병사들끼리 동성애를 하는 광경이 속출했으며, 또한 이미 부부로 들어온 사람들도 몰래 만나서 성관계를 자주 가지는 바람에 여 군들의 거주지인 여관에서는 임신한 병사들이 수없이 생겼습니다. 결국, 태평천국의 남녀 분리 정책은 남경을 손에 넣고 나서 지도부들 스스로의 생각에도 무리라고 여겼 던지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색탐을 하지 말라면서 지도층 본인들은 색에 빠져 살았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서 이미 태평천국의 패망 은 예고되어 있었다고 본다면, 지나친 추측일까요?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269 60 왜 중국은 티벳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가...

270 왜 중국은 티벳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가 : 년과 1959년, 약 15만의 대군을 동원한 두 번의 침략 끝에 중국은 티벳을 점령했고 지금까지 통치하 고 있습니다. 티벳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해서 티벳 임시 정부를 세우고, 전 세계에 티벳의 독립을 호소하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중국 측은 달라이 라마를 가리켜 "조국인 중국을 배신한 미국 의 스파이."라고 매도하며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가 중국인이었 던가요?) 수십년 동안 전 세계적인 비판 여론에 시달리면서도 중국이 티벳을 끝끝내 놓아주지 않고 강점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티벳에 매장된 어마어마한 양의 지하자원들 때문입니다. 흔히, 티벳은 높은 산과 고원 투성이인 황량한 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티 베트 각지에는 코발트와 구리, 철, 마그네슘, 납, 크롬, 티타늄, 텅스텐, 우라늄, 아연 같은 지하자원들이 어마어마하게 매장되어 있습니다. 일례로 티벳의 우라늄 광산 규모는 세계 최대입니다. 얼마 전, 중국이 전 세계로 수출하는 희토류의 가격을 올리겠다고 밝히자, 세계 각국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죠? 왜 그런고 하니, 티베트에서 생산되는 희토류가 세계 전체의 희토류 중 무려 80%나 차지하기 때문 입니다. 또한 티베트의 고산 지대에 울창하게 분포된 삼림 자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이후, 지금까지 티베트에서 벌채한 목재를 팔아 얻은 수익은 약 54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울러 티베트의 고원 지대에서 발원하는 양자강의 상류가 중국에 막대한 수자원을 공급하고 있으니, 중 국의 입장에서 볼 때 티베트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보물창고인 셈이죠. 자기들 발밑에 보물을 깔아놓고 있으면서도 그걸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적국인 중국한테 송두리째 넘 겨주고 자기 땅 안에서 노예 신세가 되어 핍박받고 있는 티벳인들의 처지는 생각하면 할수록 안습일 뿐입 왜 중국은 티벳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가

271 니다. 왜 중국은 티벳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가

272 61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273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10 당나라가 무너지고 각지에서 절도사들이 봉기하여 나라를 세우고 서로 항쟁하던 혼란스러운 5대 10국 시절, 가장 처음에 나라를 열고 잘 나가던 사람이 바로 주전충(주온)이었습니다. 주전충의 본래 이름은 주온인데, 한 때는 유명한 반란군인 황소의 부하였다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완전한 충성 이란 뜻의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주전충은 전혀 충성스럽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소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제 위를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끝내는 그를 비롯한 당나라 황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으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해서 황제가 된 주전충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양( 梁 )이라고 했는데, 후대의 학자들이 말 하는 후량입니다. 황제가 되었으나, 본 바탕은 도적이었던 주전충은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자신의 양아들인 주우문의 아내 그러니까 며느리가 되는 여인인 왕씨를 총애하여 그녀로 하여금 늘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고, 건강이 악화되자 그녀 를 항상 잠자리 시중 상대로 들게 했습니다. 물론 단순히 왕씨를 간호 상대로만 여겼던 것은 아니고, 다분히 불륜적 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주전충은 무척이나 변태적인 호색가였다고 합니다... 왕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주전충은 마침내 다음 제위의 후계자로 주우문을 선택하고 그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전충의 친 아들인 주우규의 아내 장씨도 왕씨와 함께 주전충의 침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습 니다. (그럼 며느리 두 명을 불륜 상대로 삼은 셈인가? -_-;) 주전충의 의중을 파악한 장씨는 급히 사람을 보내 남편 에게 이 사실을 밀고 했습니다. 아내로부터 연락을 받은 주우규는 무척이나 분노했습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일이죠. 엄연한 친 아들인 자신을 놔두고 남의 핏줄인 양아들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때, 그의 곁에 있던 측근들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거사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을 놓치면 전하는 물론이고 저희 들도 주우문의 패거리에게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부추겼습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273

274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주우문이 만약 정말로 황제가 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도 무사하 지 못하리라고 여긴 주우규는 5백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직접 황궁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주우규와 그를 따르는 군사 5백 명은 한밤중의 황궁에 도착하여 병든 주전충이 잠들어 있던 침실로 몰려 갔습니다. 곤하게 자고 있던 주전충은 평소와는 달리, 침소가 갑옷이 서로 덜그럭거리는 소리로 가득차고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 로 시끄러워지자 난세를 살아온 자의 본능으로 정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놀랐습니다. "감히 누가 반역을 하는 것이냐?" 그나마 황제랍시고 남은 기력을 모아 주전충이 소리치자, 주우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올시다." 모반의 장본인이 친아들이라는 사실에 당황한 주전충은 한동안 멍해있다가, 외마디 비명 같이 외쳤습니다. "네가 이렇게 도에 어긋난 짓을 하다니, 하늘과 땅이 용납할 듯 싶으냐?" 주우규도 지지않고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질렀죠. "늙은 도적은 죽어 마땅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우규의 뒤에 서있던 풍연악이라는 병사가 검을 뽑고 달려들어 주전충의 심장을 향해 칼을 내 리꽂았습니다. 후량을 세운 주전충은 그렇게 해서 아들이 일으킨 반란에 죽고 맙니다. (서기 912년)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주우규는 친동생인 주우정에게 밀명을 내려 주우문을 죽이게 한 뒤, 주우문이 반란을 일으켰 으나 자신이 진압했고, 부황인 주전충은 병이 악화되어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 주었다고 거짓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주우규는 아버지에 못지 않을 만큼 음탕하고 타락한 생활을 일삼으며 내외의 비난을 샀습니다. 그러자 돌아가는 사태를 보고 있던 주우정은 "나보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 형이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는데, 나라고 어찌 안 된다는 법이 있으랴?"하는 생각을 품었고, 처남인 조암과 함께 역모를 꾸미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형 인 주우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서기 913년 2월) 하지만 주우정 역시 죽은 아비나 형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저질렀던 대로 자신도 똑같은 황음무도한 짓에 열중했으니까요.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274

275 이렇게 후량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 무렵, 북쪽에서는 사타돌궐족 출신 절도사인 이존욱이 착실하게 힘을 기르고 후량의 영토를 착실하게 공략하여 70여 주 가운데 50여 주를 차지했습니다. 마침내 923년, 이존욱이 이끄는 후당군은 후량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주우정을 비롯한 주씨 황족들을 모조리 살육하였습니다. 그리고 후량을 세운 주전충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유골을 빻아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버렸습니 다. 자신들끼리 음란한 짓을 일삼고 골육상쟁에 골몰하던 후량의 로열 패밀리들은 결국 그렇게 해서 역사에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지요.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275

276 62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77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50 아래 본문은 지금은 절판된 고려원에서 나온 책인 <모택동의 사생활>과 까치글방에서 2007년 번역된 <마오: 알려지 지 않은 이야기들>에서 발췌했습니다. 특히, <모택동의 사생활>을 쓴 저자 이지수(리즈수이)는 22년 동안 모택동의 주 치의로 생활하다가 그의 사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자신이 곁에서 직접 지켜보았던 모택동의 어두운 과거를 자신이 쓴 책을 통해 밝혔습니다 (해맑게 웃어보이는 모택동, 그러나 저 미소의 이면에는 끔찍한 흑역사가...) 현대 중국의 태조 황제라고 할 수 있는 모택동. 그만큼 그에 얽힌 이야기도 무궁무진하지만, 본인이 모택동의 인생 역정을 모두 파헤치는 전기 작가도 아니고, 카페의 게시판에 전부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오늘은 그와 여자에 관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77

278 계된 부분만 말하겠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모택동이 중국 여성들의 인권을 향상시켰다고 말합니다. 그가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하늘의 절반 을 떠받치고 있다."라고 한 발언과 공장을 비롯한 노동 현장에 많은 여자들을 동원한 점을 들어서 말이죠. 그러나, 살아 생전에 모택동이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에게 한 말과 행동을 보면 별로 신빙성이 없어보입니다 모택동은 공산주의 활동 초기 시절부터 여자를 무척 밝혔습니다. 그는 국민당의 공격을 뚫고 연안으로 이동한 대 장정이 끝나자, 이미 아내 허쯔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외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동료 난봉 꾼에게 자신은 "기껏해야 40일" 정도만 섹스를 참을 수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연안에 근거지를 튼 마오는 그곳으로 몰려오는 여자들과 방탕하게 놀아났는데, 26세의 젊은 여배우 릴리 우와 여성 작가인 딩링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안 허쯔전은 남편에게 화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이 돼지 자식아, 거북이 알아, 쓸모없는 호색한아! 하찮은 부르주아 계집과 동침하기 위해서 감히 여기에 기어들어 올 수 있느냐?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어떤 남편이며 공산주의자인가요?] 그러나 모택동은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그녀에게 어떠한 애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허쯔전은 극심한 우을증 을 앓아 불면증에 시달린 끝에 1937년 어린 딸인 자오자오가 살고 있는 소련으로 떠났습니다. 골치아픈 아내가 사라지자 모택동은 금방 새 아내를 골랐는데 그녀는 강청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교사의 얼굴에 침을 뱉는 등 난폭한 행동을 일삼아 급우들로부터 '여학생 깡패'라는 악명을 얻은 장청은 14살 때 가출하여 상해의 유랑극단에 들어가 여배우로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외모는 매우 아름다웠지만, 성격은 오만방자하고 거칠어 배우로서 는 그다지 명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모택동이 있는 연안으로 가 경극 공연을 한 것을 계기로 모택동의 눈에 띈 장청은 뛰어난 미모로 금새 모택동의 마 음을 사로잡았고, 1937년 결혼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행사에 공산당 내부의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한 학생들 대부분 은 그가 아내인 허쯔전을 버리고 행실이 방탕하다고 소문난 강청과 결혼하는 일에 분노했으며, 몇 명은 아예 강청과 결혼하지 말라는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택동은 그들의 충고를 전부 무시하고, 그녀와의 결혼식을 강행했습니다. 허쯔전과는 1939년 무렵에 이혼을 선언했지요.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260쪽~265쪽>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78

279 그러나 새 아내를 얻었다고 해서 모택동의 바람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강청의 미모 뒤에 가려진 거 칠고 사나운 성질을 알게 된 모택동은 이내 그녀에게서 애정을 끊었고, 대신 다른 대상에게 성욕을 투사했는데 그것 은 바로 순진하고 어리면서 귀여운 미소녀들이었습니다. 1949년,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 모택동은 그와 동시에 자신의 성욕을 무한정으로 충 족시킬 수 있게 됩니다 모택동은 1959년의 상하이 회의 기간 동안, 자신을 위해 준비된 특별 열차에 머물면서 그 안에서 근무하던 여성 간 호사 리에게 몰두해 있었다. 그의 대담함은 계속되었다. 모택동은 간호사 리를 데리고 고위급 지도자들을 위한 상류 클럽인 진쟝 클럽으로 매일 밤 놀러갔다. 여자에게 집착하는 모택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상하이 보안 당국은 모택동이 상하이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들과 가수들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모택동을 흥미롭게 하지 못했다. 그 여자들은 너무 늙은데다 순진한 맛이 없었을 뿐만 아니 라 세상 물정에 굉장히 밝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어리고 경험이 적은 여성을 더 좋아했다. 그런 여자들은 다루기가 쉬웠다. 그래서 그후부터 상하이 당국은 좀 더 순진한 소녀들로 구성된 문화 공작대의 공연을 매일 밤 준비했다. -<모택동의 사생활 2권 143쪽> 고금을 통틀어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폭군에게는 반드시 그의 곁에 바싹 붙어있는 간신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모 택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란하고 난잡한 엽색 행각을 적극적으로 거들어주는 채홍사 역할은 공산 당에서 가장 부패한 관리였던 왕둥싱과 예쯔롱이 맡았습니다. 1950년 경, 북경으로 와서 모택동의 주치의가 된 리즈수이는 왕둥싱과 예쯔롱에게 자신들이 모택동에게 여자를 소 개시켜주는 일종의 뚜쟁이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왕둥싱과 예쯔롱 자신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예쯔롱)는 모택동의 뚜쟁이 역할도 담당했다고 한다. 여성 들은 여러 곳에서 보충되었는데, 특히 당 중앙 판공청의 기밀 사항국과 당 중앙 경위단(제8341 부대) 소속의 문화 공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79

280 작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젊고 순진하며, 학력이 낮지만 정치적으로는 노선이 바르고 모택동에게 전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여성들이 선발되었다. 예쯔롱의 집은 보좌관과 기밀 비서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모택동의 저택 단지 내에 있었다. 그리고 모택동의 여자들은 예쯔롱의 집에 먼저 와 머물며 숨어 있다가 모택동의 아내인 장청이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 아무도 몰래 식당을 지나서 모택동의 침실로 인도되었다. 그리고는 새벽 무렵에 다시 밖으로 빠져 나왔다. -<모택동의 사생활 1권 242~243쪽> 그러나 아무리 모르게 한다고 했지만 강청은 남편이 자신을 놓아두고 수많은 여자들과 방탕하게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됩니다 강청은 물과 수면제 한 알을 더 먹기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 간호사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보이지 않자, 진작부 터 모택동을 의심하던 강청은 바람같이 남편의 침실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간호사가 모택동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 다. 리 인챠오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기가 강청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모택동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 았다고. 강청은 일단 분노가 폭발하자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다른 의심들도 모두 쏟아 놓았다. 최근에 모택동의 옛 심복의 딸이 그를 찾아왔는데, 모택동은 그 어린 소녀에게 학교 입학금으로 300위안을 주었으며, 1958년에는 겨울 방학중에 모택동을 찾아와 침실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1~12월 모택동이 우한에 머물 때도 비슷한 방문을 했었다. 강청은 그 사실을 알고는 남편이 자기 간호사와 어린 소녀뿐만 아니라 소녀의 어머니와도 관계를 가졌을 거라고 의 심했다. 이 모든 일이 그들 부부가 늦은 밤까지 싸우는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모택동은 아내의 분노에 조용히 방을 나가 한 밤중에 베이징으로 떠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강청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던 것을 후회하고, 사과 편지를 보냈다. -<모택동의 사생활 2권 131쪽~132쪽> 강청이 결국 모택동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그가 중국의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입니다. 아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0

281 울러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도 전적으로 모택동의 아내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만일 그를 분노하게 만들어 이혼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더 이상 그런 특권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죠. 여하튼, 이로 인해 귀찮은 아내의 방해도 떨쳐버린 모택동은 더욱 더 미소녀를 중심으로 한 엽색 행각에 탐닉해 갑 니다 모택동에 의해 선택받은 젊은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녀들은 출세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고 여겼다. 모택동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젊은 여성들은 엄격한 선별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모택동에 대한 충성심과 숭배심을 가지고 있음이 보증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모택동과 성관계를 가지는 여성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공산당에 은혜를 입고 모택동을 구세주라고 믿는 가난한 농민 출신들이었다. 모택동의 잠자리에 불려가는 것은 그녀들의 일생에 최고의 영광이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천안문 광장에 서있 는 모택동은 신성한 존재이자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런 모택동과 성관계를 갖는 일은 매우 영예롭게 느껴졌다. 그래 서 모택동과 동침했던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성적 경험담을 나에게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숨기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떤 여성은 내게 <그분(모택동)은 모든 면에서 위대해서 나를 거의 중독시킬 정도>라고 모택동의 성 기교를 칭찬 하기도 했다. 중난하이의 무도회에서 모택동과 만난 한 여성은 자신과 그와의 관계가 주위에 알려지자 무척 기뻐했 다. [모르는 게 반, 아는 게 반, 아무튼 이것이 인생 아닌가요?] 그녀는 모택동이 자신과 잠자리를 하고 친숙해지자 그가 자신을 존중해주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꼈고, 이것이 발전하여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택동의 여자로 자신이 선택된 것은 자기가 남들보다 더 우월하고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모택동의 여자들은 처음 그에게 불려왔을 때는 대개 매우 순진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똑같 은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았다. 어리고 순진한 여자들이 일단 모택동의 침대에 불려가기만 하면, 차츰차츰 타 락해 갔다. 모택동의 성적 욕망과 그녀들 자신의 성격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모택동의 권력이 그녀들을 그렇 게 만드는 것이었다. 겸손했던 여자들이 모택동 때문에 점점 더 거만하게 변했다. 아무리 배우지 못했고, 기술이 없고, 용모가 못생겨도 일단 모택동과 사귀기 시작하면 그녀들은 변했다. 모택동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했으며, 날이 갈수록 모택동에게 버림받았던 젊은 여자들까지 나서서 모택동과의 인연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으려고 했다. -<모택동의 사생활 2권 234쪽~246쪽>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1

282 -<모택동의 사생활 2권 234쪽~246쪽>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의 여자들이 모택동과의 성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가 중국의 최고 권력자이 며, 그와 관계를 가지면 자신들도 행여 그의 권력을 나눠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거기에 만일 운이 좋으면 모택동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의 후계자를 낳아 자신이 모택동 사후에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택동에게는 크나큰 결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생식 불능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_-;) (마오의) 전립선 진찰 결과가 나왔다. 전립선은 정상이었으나 생식력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마오는 세 부인들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을 얻었고 당시에는 강청이 낳은 딸 리나가 15세로 막내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중년 이후 생식 력이 없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치료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내가 내시가 되었단 말인가?] 모택동은 내가 불임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응했다. 걱정이 많이되는 눈치였다.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2

283 (내가, 내가 고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된다구~~ 사진 속의 인물은 본문의 내용과 상관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략) [정자에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생식 불능의 원인이죠. 하지만 정자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성욕과 성기능에 장애 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후 나는 마오가 생식 불능을 걱정하는게 아니라 성 불구자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 <모택동의 사생활 1권 177쪽> 덧붙여, 그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_-;...)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3

284 여러 여자들과 잦은 성관계를 맺다 보면 성병의 감염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트리코모나스에 걸린 한 여자가 성병의 연결 고리의 시작이었다. 그 병에 감염된 여성이 남성과 성적 접촉을 하게 되면, 남성에게도 전염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남 성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지면 차례로 다른 여성들도 이 병에 감염되는 것이다. 대게 이 병은 여성에게만 심각한 타격을 주고, 남성에게는 눈에 두드러지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모택동의 (섹스) 파트너 중 한 사람이 감염되어 모택동도 그 병에 걸렸다. 그리고 그와 관계를 가진 모든 여성들에게 병이 퍼져 나갔다. 모택동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여자들을 나에게 보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이 그 병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모택동에게 병이 전염되었다는 사실을 마치 훈장이라도 받은 양 여겼는데, 그 것은 곧 모택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들은 모택동의 주치의여던 나에게서 직접 치료를 받는 일을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모택동과 접촉한 여자들을 치료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택동 자신이 전염자였기 때 문에 그가 치료를 받지 않는 한 그 병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약물 치료를 끝내고 완쾌될 때까 지만 성생활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의사들은 늘 사물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내 요구를 무시 했다. 나는 그가 그 병의 전염자이며, 아무런 병적 증세를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전염된다고 설 명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괴롭지 않으면 문제 될 게 없어. 그런데 자네는 왜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최소한 목욕과 세수는 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따뜻한 타월로 문지르기만 할 뿐이 지, 실제로 목욕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기도 물로 깨끗이 씻을 리 없었다. 그는 목욕마저도 거부했다. [나는 여자의 체내에서 씻고 있다구.] 그는 태연히 그렇게 말했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모택동의 성적인 탐닉과 그의 타락, 여리고 순진한 여자들을 점점 타락으로 내모는 행태 등은 나를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병이 확산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그래서 모택동을 보좌하는 제 1조의 참모들에게 모택동의 병 명을 말해 준 후, 각자의 수건만을 쓰도록 은밀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택동의 침실과 수건을 소독하도록 가 르쳐 주었다. 모택동은 죽는 순간까지 그 병을 가지고 갔다. -<모택동의 사생활 2권 246쪽~248쪽>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4

285 모택동의 엽색 행각은 그가 노환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산당 내부에 서 그의 문란한 사생활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들 알면서도 정권의 체면을 생각해서 쉬쉬하는 판국이 었죠. 이런 걸 두고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하던가요? 하지만 모택동에게 여자를 조달해주는 부하들이라고 해서, 그의 난잡한 성생활에 대해 불만이나 반감이 전혀 없었 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덧붙여, 모택동이라고 해서 항상 미소녀만 찾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유부녀와 성관계를 갖기도 했는데, 아마 색다 른 재미를 위해서...였다고 추측됩니다 년 12월, 모택동은 우시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 육군 장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언니를 자신이 묵고 있 던 저택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했다. 모택동은 만찬이 끝나자, 육군 장교의 아내와 언니는 남게 하고 장교 혼자만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3일 동안 두 여자와 침대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로 인해 상하이 시장인 커 칭스와 안후이 시장인 쩡 시성을 만나기로 한 약속도 취소되었다. 육군 장교는 아내와 처형의 부정을 알고도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택동에게 아내를 바치는 일 이 더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진습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해 모택동에게 여자를 물색해주는 일에 적극적이던 왕둥싱조차도 분노를 터뜨렸다. [만약에 그 여자의 어머니가 여지껏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주석님은 그 여자와도 잠자리를 같이 하려고 들었을 거 야.] 왕둥싱은 이처럼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의 불만은 모택동에 대해서 보다도 아내의 부정을 방조한 육군 장교에게 더 컸다. [그는 마누라를 팔아먹었어.] 왕둥싱은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혀를 찼다. -<모택동의 사생활 2권 244쪽~245쪽>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5

286 그 소식을 접한 왕둥싱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더러운 일만 처리해야 하나? 이 따위 문제를 놓고 회의를 어떻게 소집할 수 있겠소. 주석님의 여자 관 계가 너무나 복잡해서 생긴 일인데, 회의를 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소?] -<모택동의 사생활 2권 335쪽> 모택동의 타락한 사생활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그는 장위훵이란 간호사와 내연의 관계를 가졌고, 그녀를 주치의인 리즈수이보다 더 총애했습니다. 모택동이 죽는 순간, 장위훵은 모택동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총애를 믿고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결국은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택동의 공식 아내였던 강청도 비 슷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모택동의 여인들 중에서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셈입니다. 그의 문란한 사생활이 불러온 결과 라고 보면 어떨까요?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86

287 63 청나라 군대가 양주에서 저지른 끔찍한 대학살

288 청나라 군대가 양주에서 저지른 끔찍한 대학살 :57 아래 글은 신원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을 말한다> 14권에서 발췌했습니다 년, 청나라의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청군은 남명 정권의 잔당 토벌에 나섰다. 회하를 건넌 청군이 남명 정권에 종속된 후방암의 군대를 궤멸시키자, 우이와 사주를 지키던 남명 군대는 모두 청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남명의 홍광제는 전 병부상서 사가법을 양주로 보내 반드시 지켜내라고 명령했다. 사가법이 양주에 도착했을 때, 수비 부대는 이미 달아난 뒤였고 관리와 부자들도 피난 준비를 하는 등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사가법은 얼마 남지 않은 수비 병력과 백성들을 동원한 민병대를 짜서 도시를 지키기로 했다. 도도의 청군 10만 명은 양주로 진격하여 철저하게 포위한 다음, 사주에서 투항한 이우춘을 보내 사가법에게 항복하 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사가법은 이우춘을 변절자라고 욕하며 듣지 않았다. 그러자 도도는 두 명의 사신에게 자신이 친필로 쓴 항복하라는 편지를 주어서 사가법에게 보냈으나, 사가법은 그들을 강물에 빠뜨려 죽여 버렸다. 도도는 매우 분노했다. 마침 그에게 청나라 장수 육합과 의정이 이끄는 5만 명의 지원군과 홍의대포가 도착했다. 15 만으로 증강된 청군은 양주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청군의 기세에 수비군 장수 이서봉과 고기봉은 사가법을 찾아가 항복하자고 권유했으나, 사가법은 강하게 거절했다. "그대들이 항복하겠다면 그리하라. 나는 막지 않겠다. 그러나 나에게 항복하라고 하지 마라! 나는 명나라의 대신이 니, 여기서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사가법이 거부하자, 이서봉과 고기봉은 자신들이 거느린 군사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청군에 항복해버렸다. 둘 의 변절은 양주를 지키는 병사들을 동요시켰다. 비분강개한 사가법이 핏자국으로 얼룩진 갑옷을 입고 통곡하자, 장병 들은 한 목소리로 높여 외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양주를 결사적으로 지키겠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사가법은 양주 백성들을 모두 모아 성벽와 성안에 배치했다. 양주의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일심동 체가 되어 사가법의 명령에 따랐다. 사가법은 양주성과 생사를 같이하리라고 결심했다. 그의 전술은 적을 치지 못하 면 성곽을 지키고, 성곽을 지키지 못하면 자결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군대가 양주에서 저지른 끔찍한 대학살 288

289 4월 24일, 청군이 홍의대포를 쏘고 그 다음날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가법은 반격 명령을 내렸으나 그 역량은 청군의 맹렬한 포화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곽의 바깥벽이 허물어지고 쌍방 군사는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체가 갈수록 높이 쌓여 청군은 사다리를 사용하지 않고도 시체를 밟으면서 성곽에 올라 어느새 성을 점령해 버렸다. 대세가 기울자 사가법은 총병 장자고와 부장 사덕위에게 자기를 죽여달라고 했으나 둘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 다. 그러자 사가법은 칼을 빼들고 자결하려 했지만, 부하들이 간신히 그를 말리고는 그를 데리고 피신하려 할 때, 도 도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격해 들어왔다. 그러자 사가법이 "나 사가법이 여기 있다!"고 스스로 소리쳤다. 청군의 장령 장웅이 사가법을 압송해 신성 남문 성루에 오르자 도도는 사가법의 동료였던 양우춘에게 확인을 명령 했다. 그러자 사가법은 "내가 스스로 나섰는데 거짓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도도는 그를 투항시키기 위해서 귀순하기만 하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사가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도도가 칼을 빼들고 위협했지만, 사가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기의 목을 들이대어 어서 베라고 재 촉했다. 그의 의연한 모습을 본 도도는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충신의 지조를 지키도록 하시오." 사가법이 청군에게 처형된 뒤에도 양주성 내에서는 여전히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조기, 마응괴 등은 청군과 벌인 시가전에서 전사했고, 하강과 오이손 등은 싸움에서 패하자 우물에 빠져 자결했다. 양주지부 임민욱은 명나라 관복을 입고 손에 관인을 쥐고서 정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청군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양주 군민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청군도 수천명의 병사들을 잃었다. 이에 분노한 도도는 양주를 점령한 후, 남녀 노소를 가리지 말고 성 안의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열흘 동안 양주의 백성 30여만 명이 청군 의 칼날에 끔찍하게 도륙당했다. 그 때 시체에서 나온 피가 어찌나 많았는지, 양주성의 현판이 핏물에 둥둥 떠다녔다 고 한다. 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을 두고 후대의 중국 역사에서는 양주 10일도라고 부른다. 청나라 군대가 양주에서 저지른 끔찍한 대학살 289

290 64 17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291 17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06 아래와 마찬가지로 출처는 신원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을 말한다> 14권입니다 중국 청나라를 연 만주족들은 변발을 하고 살았다. 변발은 만주족들이 하던 머리카락의 양식인데, 정수리에 약간의 머리털만 남겨 길게 땋은 다음 나머지 부위의 머리카락은 모두 깨끗이 삭발해버리는 풍습이었다. 이 때, 머리카락은 동전의 구 멍을 통과할 정도로 가늘고 얇아야 했다. 그래서 청나라 시대의 변발은 흔히 금전서미( 金 錢 鼠 尾 )라고 불리었다. 동전 구멍을 통과하는 쥐꼬리라는 뜻이었다. 1644년, 북경으로 입성한 청나라의 실권자 도르곤은 곧바로 천하에 변발령을 내렸다. 전국 각지에서 이 명령을 받 은 후, 열흘 안에 남녀노소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변발을 해야 하며, 만약 변발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죽임 을 당한다는 살벌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어떤 관원이라도 이 일로 상소나 간언을 올린다면 그도 죽을 것이라는 엄포 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부모가 물려준 유산이라고 여겨 결코 자르지 않고, 머리 위로 틀어올리고 그 위에 관을 써서 가 리는 이른바 옥잠 양식을 수천년 동안 지켜온 한족들로서는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는 만주족들의 변발 차림을 하라는 명령은 크나큰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 각지에서 변발령에 반발하는 한족들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그 중 가장 거센 곳이 강남의 강음( 江 陰 )현이었다. 강음의 모든 주민들은 변발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변발령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상인들은 점포를 철거하 고, 10만 명의 백성들이 강음의 명륜당 광장에 모여 변발령을 규탄하는 대회를 가졌다. 수재 허용이라는 사람은 "목이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는 않겠다!"라고 외쳤다. 주민들은 현의 주부인 진명우를 이 번 저항 운동의 수장으로 삼고, 또 변발을 감독하러 왔던 청나라 병사를 죽여버렸다. 강음의 봉기 소식을 들은 청나라 조정은 즉시 군사를 파견해 탄압했다. 진명우는 전임 전사였던 염응원을 불러 도 움을 요청했다. 당시 무과 수재 출신이었던 염응원은 진명우가 자신과 함께 힘을 합쳐 청나라에 대항할 것을 부탁해 오자, 모시고 있던 늙은 어머니와 작별하고 왕진충 등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마흔 명을 거느리고 강음성으로 찾아왔 다. 1645년 7월, 강음으로 들어온 염응원은 진명우와 함께 성을 사수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군사를 정비하고 성곽을 단 단히 보수하고 배들을 모으는 한편, 부유한 상인들에게 군사비를 달라고 부탁했다. 17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291

292 이튿날 강음 바깥의 네 개 마을의 백성들로 구성된 향병( 鄕 兵 : 민병대)도 그들을 지원하러 왔다. 그들은 강음성 성 문을 쇠로 단단히 막아 놓고, 장정들이 번갈아 가며 성곽에 올라가 지켰다. 부녀자와 노인들은 음식과 옷가지들을 가 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진서지와 그의 아들은 함께 목총( 木 銃 )과 화관( 火 罐 )을 만들고, 또 황명강은 가볍 고 다루기 편리한 작은 화살과 독즙을 바른 화살을 많이 만들어 청나라의 공격에 대비했다. 마침내 강음현 외곽에 당도한 청나라 군대는 대포를 동원해 성의 북문을 포격한 다음, 정예병을 뽑아 사다리를 타 고 성곽에 오르기 시작했다. 성 위에서는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성곽을 오르던 청나라 군대를 격퇴했다. 그 후 청나 라 군대는 한 달 동안이나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만,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강음성의 백성들은 또 심리전도 이용했다. 그들은 관우와 수양왕, 동평왕, 성황 등의 신상을 모두 성루에 가져다 놓 은 다음, 그 신상들을 들고 다니면서 순찰을 했다. 그리고 신상들의 수염을 자석으로 고쳐 쇠붙이를 만나면 수염이 움직이게 했다. 또 기계를 이용해 그 신상의 손이 성 밖의 청나라군 병영을 가리키도록 했다. 이 방법은 청나라 군사 들을 한동안 혼란에 빠뜨렸다. 진명우와 염응원은 병사들을 잘 돌보고 전략적 결정이 필요할 때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 그래서 성의 군사 와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여 사기가 높았다. 강음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고민하던 청군의 사령관인 도도는 회유책을 쓰기로 했다. 그는 청군에 투항한 명나라 장령 유량좌를 보내 염응원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그러나 염응원은 "나는 명나라의 보잘것없는 전사이지만 나라를 위 해 충성을 다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명나라의 총병이지만 적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줄을 아 시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회유책마저 거부당하자, 이제 남은 방법은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것 밖에 없었다. 도도는 강음성의 단단한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방법을 짜냈는데, 홍의대포 수백문을 동원해 각각 성의 동남쪽과 동북쪽을 집중적으로 포격하는 한편, 화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 화약을 넣고 폭파시켜 성벽에 큰 구멍을 낸 다음 병사들을 투 입시켜 성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성공을 거두었고, 강음성의 무너진 성벽 사이로 청군이 일제히 쇄도해 들어갔다. 방어를 책임진 염응원 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청군에 저항했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음의 백성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나라를 보위하는 책임을 완수했소이다!" 말을 마친 그는 연못 속에 몸을 던졌으나 물이 얕아 죽지 못하고 그날 밤 청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진명우도 시가전에서 청군에게 중상을 입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17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292

293 청나라군이 강음을 공격할 때, 모두 24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런데 강음성을 공격할 때 그 중 6만 8천 명이 전 사했고, 시가전에서 또 7천 명이나 전사했다. 예상보다 아군의 피해가 막대한 것을 보고 분노한 도도는 성을 함락시 킨 후, 이를 갈면서 "온 성을 짓밟은 다음 칼을 거두어라!"라고 전군에 명했다. 이리하여 강음성에 살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17만 2천 명이나 되었 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관탑 내에 있던 스님 인월화상과 50명의 백성들 뿐이었다. 강음 백성들의 불굴 저항 정신은 줄곧 후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청군이 강음을 점령한 후, 어느 날 아침 시 한 수가 발견되었다. 그중 두 구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여, 코를 막지 마라. 살아 있는 사람이 죽어 있는 사람보다 더 더럽거늘." 17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293

294 65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295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31 아래 글은 창해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고( 故 ) 백양 선생의 저서 <맨 얼굴의 중국사> 5권에서 참조했습니다 중국 역사상 '문자옥' 혹은 '문자의 옥' 이라고 불린 언론의 탄압은 종종 있어왔지만, 14세기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문자옥은 일종의 합법적인 탄압 수단으로 바뀌었다. 명나라의 개국자인 주원장은 자신에게 올라오는 상소문의 글자 하나를 꼬투리잡아서 신하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해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문자옥은 명나라 이후 들어선 청나라에서도 더욱 강화되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은 자신들보다 인구면에서 수십배나 많은 한족들이 언제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 을지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족들을 선동하여 반청 감정을 부추길 우려가 있는 지식인들을 상대로 철저 하 언론 검열과 감시를 기울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는 사형이나 유배 같은 중벌로 다스렸다. 아래는 청나라 세조 순치제 때부터 고종 건륭제까지 일어난 문자옥을 정리해 본 것이다 세조 순치제 1660년: 시인 유정종이 시집을 내자 장진언이 서문을 지었는데, 그 서문의 장명지재( 將 明 之 材 )란 구절의 뜻이 애매 모호하다고 여겨(아마 장명이란 글귀가 명나라 장수로 해석되었던 듯) 청나라 조정은 유정종에게 교수형, 장진언에게 는 참수형을 내렸다. 성조 강희제 1663년: 장정롱이 지은 명사( 明 史 )에 만주족을 나무라고 공경하지 않은 구절이 있었다. 장정롱은 이미 죽은 후였지 만, 관에서 그의 시체를 꺼내 참수하고, 그의 동생과 자손, 명사의 서문을 쓴 사람과 책을 판 사람과 글자를 새긴 인 쇄공 등이 모두 처형되었다. 1711년: 대명세가 남산집을 저술하면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연호를 쓰고 아울러 남명의 세 황제들을 명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295

296 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방효유의 전검기문을 인용하여 청나라에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의 사적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칭찬했다. 대명세는 가족이 모두 처형되었다. 방효유는 부관참시에 아들과 손자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흑룡강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옹정제 1725년: 왕경기가 지은 서정수필( 西 征 隨 筆 )에 청해를 정복할 때 들은 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강희제에게 불 만을 드러내는 암시라고 하여 왕경기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흑룡강으로 보내 노비가 되게 했다. 1726년: 사사정은 예부시랑(오늘날의 교육부 차관)으로 강서에서 과거를 주관하고 있을 때, 시험 제목으로 유민소지 ( 維 民 所 止 )라는 구절이 있었다. 옹정제는 그가 고의로 자신의 연호인 옹정( 雍 正 )의 머리를 잘랐다고 생각했다. (유 維 와 지 止 두 글자의 모습을 잘 보라) 사사정은 자살을 명령받아 자살했으나, 시체를 다시 토막내고 아들도 함께 처형 당했다. 그의 남은 가족들은 모두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1727년: 추여노는 태상시경(제사부 차관)으로 옹정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청송( 河 淸 頌 )을 바쳤는데, 옹정제는 그가 고의로 조종제도를 변경했다고 여겼다. 신하가 조종제도를 바꾸는 것은 대역무도한 반역죄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추여노는 파직되어 양자강에 제방을 쌓는 공사에 노동자로 투입되었다. 1729년: 저명한 학자 여유량은 벌써 죽었으나 그의 저서 유지집에서는 한족을 숭상하고 만주족을 오랑캐로 몰아 폄 하하는 관점을 취했다. 그런데 호남성의 학자인 증정이 이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증정은 자신의 제자 장희를 남 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인 청나라 장수 악종기에게 보내 은밀히 반청 봉기를 일으키도록 꼬드겼으나, 악종기는 곧바로 조정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 옹정제는 명을 내려 이미 죽은 여유량을 부관참시하고 자손도 처형했으며 남은 가족은 흑룡강으로 유배보냈다. 뜻밖에도 증정은 사면을 받았고, 옹정제가 증정과 나눈 대화와 진술 내용은 대의각미록이라 는 책으로 만들어 전국에 내려보냈다. 그러나 6년 후인 1735년, 증정과 장희는 건륭제에 의해 처형당하고 대의각미록 은 금서로 지정된다. 1730년: 어사(감찰부위원)인 사제세는 하남성장 전문경을 탄핵했다가 알타이 산 군영으로 유배되어 노동에 종사했 다. 그는 군영에서 사서의 하나인 <대학>을 주석하면서 성리학의 대가 주자의 견해를 채용하지 않고 고서 <예기>의 견해를 인용했다. 옹정제는 그가 성인을 비방했다고 여겨 참수형을 내렸다가 사면령을 내려 노역에 종사하게 했다. 공부 주사(건설부 중관 관리)였던 육남생이 사제세와 마찬가지로 군영에서 <통감론> 17편을 지었는데, 옹정제는 그 가 제왕을 비방했다고 여겨 즉시 처형케 했다. 북경 백운관의 도사인 가사분은 명을 받고 황궁에 들어와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천지가 내 말을 듣고 세상을 주관하며, 귀신이 내 말에 따라 움직인다"라는 주술을 읆었다. 옹정제는 그가 일개 도사인 주제에 세상을 자기 마음 대로 한다고 우쭐대는 모습이 건방지게 여겨, 당장 처형시켜 버렸다.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296

297 고종 건륭제 1753년: 건륭제는 여러 차례 강남으로 순행을 했는데, 그때마다 지나치게 많은 인력과 돈을 낭비했다. 강서 무주 교 관 노노생이 대학사 손가금의 이름을 빌려 건륭제의 강남 순행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자제할 것을 부탁하는 글을 올 렸다. 그 내용이 무척 비통하여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건륭제는 신하가 제왕을 비방했다고 무척 분노하 여, 노노생에게 사지를 찢는 극형을 내렸고 그의 두 아들들도 처형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에 연류되어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옥당했다. 1754년: 예부시랑인 만주족 대신 세신이 지은 시 중에 추색초인나상조( 秋 色 招 人 懶 上 朝 )라는 글귀가 현실에 불만을 품은 한족 같다고 하여 파면시켜 흑룡강으로 유배보냈다. 1755년: 내각학사 호중조는 견마생시초( 堅 磨 生 詩 鈔 )를 저술했는데, 그 중에 일파심장논탁정( 一 把 心 腸 論 濁 淸 )이란 구 절이 문제가 되었다. 건륭제는 이 글귀가 탁( 濁 )자를 고의로 청( 淸 )자 앞에 놓은 것을 두고, '더러운( 濁 ) 청( 淸 )나라'라 는 모욕적인 뜻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고 트집을 잡아 처형했다. (그러나 시의 운율상 탁자가 청자 앞에 올 수밖에 없 었다.) 양황기 출신 만주족 대신인 악창은 호중조의 시에 화답하여 새상음( 塞 上 吟 )이란 시에서 몽고인을 호아( 胡 兒 )로 표현했는데, 건륭제는 호중조가 자신을 몽고의 아이로 여김으로써 같은 동족을 비하한 미친놈이라고 여겨 자살을 명 령했다. 1757년: 절강성 포정사(민정청장) 팽가병은 집에서 쉬면서 자기 집의 족보를 간행하여 이름을 대팽통기( 大 彭 統 記 )라 고 지었는데, 얼핏 보기에 마치 제왕 가문의 족보 같았다. 게다가 홍력(건륭제의 이름)이란 글자에 결필( 缺 筆 : 제왕의 이름을 쓸 때는 마지막 붓놀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권력자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장치였다)을 하지 않았는데, 건륭제 는 이 처사가 자신을 우습게 본 것이라고 여겨 자살을 명령했다. 하남성의 유생 단창서는 집에다 반란군 수령 오삼계가 쓴 반청 격문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격문에다 단창서 자신이 칭찬의 뜻으로 찍어놓은 권점이 있었다. 이 격문이 발견되자 단창서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1767년: 여유량의 제자였던 제주화는 당시 변방으로 추방되었다가 기한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와서 문집을 출간했 다. 그러나 문집의 내용에 청나라를 비방한 부분이 들어갔다고 해서 건륭제는 제주화를 사지를 찢어죽이는 극형에 처 하도록 했다. 1777년: 강서성의 학자인 왕석후는 자관이란 책을 냈는데, 건륭제는 그가 강희제가 쓴 강희자전을 모방했으며 특히 현엽(강희제의 이름), 윤진(옹정제의 이름), 홍력(건륭제 자신의 이름) 같은 글자들이 결필 없이 등장한 것은 대역무도 죄라고 하여 처형시켰다. 그리고 그가 낸 저서 10여 종을 모두 수거해 태워버렸다. 1778년: 죽은 학자 서술기가 지은 차파호아일각변( 且 把 壺 兒 擱 一 邊 )이라는 시구에서 호아( 壺 兒 )는 오랑캐의 아이를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297

298 뜻하는 호아( 胡 兒 )가 분명하며 조정을 오랑캐로 여겨 비방했다고 여겨 부관참시하고, 서술기의 아들과 손자를 모두 처형시켰다. 건륭제를 수행하며 그를 대신해 시를 지어주던 전직 예부상서 심덕잠이 죽었는데, 건륭제는 그의 가족에게 명령하 여 그가 살아있을 때 지었던 모든 시들을 모아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심덕잠이 지었던 시 중에서 이종야칭왕( 異 種 也 稱 王 )이란 구절이 있었는데, 건륭제는 이 글귀가 다른 종족인 이민족 청나라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한다는 모욕적으 로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 구절이 문제가 되어 건륭제는 죽은 심덕잠의 관을 부수고 시체를 끄집어내어 참수형에 처 하게 했다. 1781년: 대리시경을 지낸 윤가전이 은퇴하여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윤가전이 저서에서 자신을 고희노인( 古 稀 老 人 )이 라고 부른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건륭제는 "내가 이미 스스로를 고희노인이라고 천하에 선포했는데, 어찌 신하가 감 히 또다시 고희노인이라고 자처한단 말인가?"라고 격노하여,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그러나 윤가전이 쓴 고희노인은 오래된 성어를 그냥 써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298

299 66 모택동은 아편을 팔아 거금을 번 마약왕이었다?

300 모택동은 아편을 팔아 거금을 번 마약왕이었다? :25 아래 글은 까치출판사에서 번역된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上 ) 편에서 발췌했습니다 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모택동은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지원을 할 여력이 없어질 지 모른다고 걱정을 했 다. 그래서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대체 자금 공급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해답은 아편이었다. 연안의 공산당 정권 은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 종자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1942년에는 대대적으로 양귀비를 재배하여 생산한 아편을 팔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최측근들에게 자신의 작전에 "혁명적인 아편전쟁"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말했다. 연안에서는 아편이 "특 수 상품"을 의미하는 "특화( 特 貨 : 특별한 재화)"라는 완곡한 어휘로 불렸다. 모택동의 오랜 보좌관이었던 스저는 아편 재배에 대해서 "실제로 아편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우리 공산당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 이다."라고 아편 재배 사실을 시인했다. 모택동은 아편을 팔아 거금을 번 마약왕이었다? 300

301 스저는 또한, 당시에는 양귀비 재배 사실을 숨기지 위해서 밭 둘레에 사탕수수를 심어서 위장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중에 소련인 연락관 한 사람이 1942년 8월, 모택동에게 "공산당이 어떻게 아편을 만들어 팔 수 있는가?"라고 묻 자, 모택동 대신 그의 옆에 있던 부하인 덩파가 대답했다. "아편으로 거액의 돈을 벌어들여서, 그 돈으로 우리는 국민당을 쓸어버릴 것이다." 당시, 연안 지역의 3만 에이커에서 아편이 공산당의 손에 의해 재배되었다. 또한,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국민당 장군인 덩파오산은 모택동과 결탁하여 아편 밀매 편의를 적극 봐주었다. 이로 인해 덩파오산은 "아편왕"이라고 불리었으며, 모택동은 1945년 제 7차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덩파오산의 이름을 두 번이나 언급하여 그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1943년 2월, 공산당은 2억 5천만 법폐( 法 弊 : 국민당 지역에서 사용된 통화) 상당의 자금을 얻었으며 전적으로 아편 재배로 인한 수익이었다. 1943년, 소련인들은 모택동이 4만 4,760킬로그램의 아편을 판매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를 돈 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숫자인 24억 법폐였다. 당시 환율로 대략 6천만 달러이고, 오늘날 화폐가치로는 대략 6억 4천만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아편으로 쌓은 부는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들의 생활 은 그 지역을 점령한 공산당원들에 비해서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공산당원 중에서 가장 낮은 꼐급의 연간 육류 배급 량은 12킬로그램이었는데 반해, 지역 주민들은 평균 2.5킬로그램에 불과했다. 1943년 6월, 공산당은 장개석이 연안을 공격해 온다는 핑계를 대고(실제로는 공격해 오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땔나무와 채소, 돼지, 양 및 주민들의 최후의 구명 수단이었든 금을 있는대로 바치라고 강요했다. 1944년 3월 무렵, 양귀비 재배와 아편 생산은 중단되었다. 생산량이 너무 많아서 과잉공급된 아편 때문에 아편의 가 격이 폭락했기 때문이었다. 공산당 내의 일부 강경파는 연안 지역 주민들에게 싼값에 아편을 공급하자고 주장했으나 모택동이 거부했다. 양귀비를 재배하는 과정에서 농부들은 중독이 되었다. 공산정권은 "중독자들에게 약품을 지원한다."고 약속하고 엄 격한 마감 시한을 정한 뒤, 지역 주민들에게 마약 습관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은 치료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사실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모택동은 아편을 팔아 거금을 번 마약왕이었다? 301

302 67 인육을 먹었던 홍위병들의 만행

303 인육을 먹었던 홍위병들의 만행 :21 아래 글은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하( 下 )편에서 참조했습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정부는 인민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살해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범적인 살해 방법의 실연"까지 벌였으며, 몇몇 경우에는 경찰이 직접 나서서 살해를 감독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잔인한 살해를 조장하 는 분위기 속에서 광시 성의 여러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는 만행까지 발생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지역이 우쉬안 현이었으며, 이곳은 모택동 사망 후 실시된 공식적인 조사(그러나 1993년에 즉각 중단되었으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제지당했다) 결과 76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인육을 먹는 관행은 일반적으로 마오주의자들이 벌이는 "규탄대회"의 단골 행사로 시작되었다. 규탄대회가 끝나자마자 희생자들을 살해해 서는 그들의 시신을 부위별- 심장, 간, 때로는 성기-로 잘라냈다. 그러나 희생자들이 미처 숨을 거두기 전에 잘라내 는 경우도 흔했다. 이렇게 잘라낸 부위를 현장에서 먹을 수 있도록 조리했으며, 이런 행사를 당시에는 "인육 잔치"라고 불렀다. 광시 성은 중국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서 끔찍한 인육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86세의 한 농부는 밝은 대낮에 어떤 소년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 그 소년의 유일한 죄목은 과거 지주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농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모택동의 어록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훗 날 부정 폭로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 아이를 죽였소. 내가 죽인 사람은 적이란 말이오. 하,하,하! 나는 혁명을 수행한 것이고 내 가슴 속은 붉단 말이오! 마오쩌둥 주석이 이렇게 말했소.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죽이느냐,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죽으면 내가 사는 것이 바로 계급투쟁이다!'" 1968년에는 중국의 모든 지역에서 국가가 후원하는 살육이 극에 달했다. 그해에는 "계급분류"라고 부르는 대규모 운동이 극성을 부렸다. 이 운동의 목적은 인민들 속에 섞여있는 "계급의 적들"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여 그들을 처형 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화혁명 전부터 낙인찍혔던 사람들과 혁명 과정에서 색출 된 모든 희생자들을 끌어내어 다시 박해를 가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는 모든 성인들의 경력과 행적을 면밀히 조 사하고 모든 미심쩍은 부분들을 수사하여 새로운 적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추방될 사람들에 대한 낙인 의 종류가 23가지에 달했으며, 박해를 받은 사람들의 수는 수천만 명에 달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았다. 인육을 먹었던 홍위병들의 만행 303

304 한 목격자는 안휘성의 신임 성장으로 부임한 육군 장성이 희생자들에 대한 처형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설명해주었 다. 경찰이 자신에게 제출한 "반혁명분자들"의 명단을 흥미없다는 식으로 툭툭 치다가 때로는 멈추기도 하더니 전형 적인 관리의 억양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귀에 거슬리는 비음조의 톤이 한 문장의 끝까지 이어 져 듣기가 지루했다) "이 사람은 아직도 구금하고 있나? 죽이는 것이 좋겠군.", "이 사람은 어떤가? 음, 이 여자도 없애." 그런 다음 그는 인근 성들이 처형하기로 계획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감숙성에서는 이달에 몇 명이나 죽였는가? 절강성은?" 부하들로부터 숫자를 보고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두 성의 평균치로 한다." 인민들은 이런 식 으로 처형당했다. 최악의 살육이 벌어졌던 성들 중의 하나는 내몽골 자치구였다. 모택동은 이곳 주민들이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외 몽골과 소련에 붙으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곳의 새 성장인 텅하이칭 장군은 모택동의 이런 의심의 내막을 대대적인 고문 수법을 동원하여 열성적으로 수사했다. 모택동의 사망 후에 폭로된 내용에 따르면, 한 회교도 여인의 이빨들을 집게로 억지로 뽑아낸 다음, 도끼로 난도질해서 죽이기 전에 코와 귀를 비틀어 떼어내는 따위의 사 건들이 흔했다. 다른 여인에 대해서는 막대기로 성기를 쑤시는 방법으로 성폭행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당한 후, 자 살했다.) 한 남자의 두개골에 대못을 때려박기도 했다. 다른 남자는 혀를 잘라내고 두 눈을 후벼 파내기도 했다. 또 다른 남자는 성기를 곤봉으로 뭇매질을 한 다음, 그의 콧구멍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였다. 모택동 사후의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모택동의 의심을 파헤치기 위한 수사로 인해서 34만 6천 명의 사람들이 규 탄을 받았고, 그 결과 1만 6천 222명이 사망했다. 내몽골 자치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받은" 사람의 수는 훗 날 공식적으로 1백만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 중 75%가 몽골족이었다.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또다른 성은 남서쪽의 운남성이었다. 이곳에서는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신임 성장으로 부임한 탄푸런 장군이 날조한 사건만으로도 거의 1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들 중 1만 7천 명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매를 맞아 죽거나 자살로 내몰렸다. 인육을 먹었던 홍위병들의 만행 304

305 68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1)

306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1) :09 일본 소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 들어 보았을 이름 중 하나가 바로 다나카 요시키( 田 中 芳 樹 )이다. 그가 쓴 <은하영웅전설>은 해적판만 1백만부가 넘게 팔렸고, 이후 발표하는 <아루스란 전기>나 <창룡전> 같은 작품들 도 대히트를 기록했다. 워낙 다작을 하는 그의 성격상, 쉽게 마무리가 나지 않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1997년 무렵, 한국에서 정식 번역되어 발매된 <창룡전>은 약 30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지금도 일본에서 13권 <열도분화>까지 나왔다. (아직 한국에는 12권인 용왕풍운록까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창룡전>을 보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한 부분이 있었다. 작가인 다나카 요시키는 <창룡전>의 주인공으로 고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사해용왕을 필두로 하는 용 종족을 내세웠고, 그와 대비되는 악역으로 치우를 섬기는 소 머리 괴물인 우 종족을 부각시켰다. <창룡전>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수천년 전부터 이 포악한 우 종족은 지구와 천계 (작품에서는 달이라고 설정했다)를 지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그 일환으로 자기들만을 신으로 섬기게 하는 유일 신 신앙을 만들어 지구인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 종족이 만든 유일신 신앙이 바로 구약성경에 토대를 두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다. 다 나카 요시키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수십억에 달하는 세 종교의 신도들은 고대 중국 신화에 나오는 흉악한 소 머리 괴 물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뜻이 된다! 다나카 요시키는 자신의 이런 주장을 설득력있게 묘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증거들을 언급했는데, 고대 파르티아나 크레타 및 페니키아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믿어진 종교들이 소를 신성시했다고 주장한다. (이들 이외에도 소를 지 극히 신성하게 섬기는 지역인 인도나 이집트는 왜 빼먹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나카 요시키의 주장을 잘 살펴 본다면 과연 정말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 회의가 든다. 우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치우를 섬기는" 서구 문명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지 않다. 유대교에서 비롯된 기독교가 소 머리 괴물 치우를 섬기는 문화라면, 그가 말한 "포악하고 호전적인 서구 문 명"의 기원은 기독교가 역사에 나타나 세력을 얻은 서기 4세기 부터인가? 아니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제국이 활동하 던 기원전 시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집트나 파르티아, 페니키아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서구 문명의 분류에 들 어가는 것일까?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서구 문명이 포악하고 잔인하다면, 그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 제국은 관용적이고 평화로 운 나라였나? 결코 그렇지 않다. 로마 제국의 역사 자체가 전쟁의 역사였고, 로마는 초창기부터 멸망하기 직전까지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1) 306

307 주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침략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한 것은 뭐라고 봐야 하나? 또, 로마 제국 이외의 지역인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도 기독교는 극렬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야즈데게르드 황제 시 절에는 자그마치 15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했다. 그런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를 계승 한 나라였고, 파르티아에서처럼 소를 신성하게 여겼다. 다나카 요시키의 주장대로라면 같은 "소 머리" 괴물인 치우를 섬긴 페르시아와 기독교가 서로 싸운 셈이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소를 성스럽게 섬긴 풍토는 파르티아 이전인 아 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시절부터 있었으니(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상징이 날개 달린 황소였다.), 이 나라도 치우를 섬긴 무리였던 것일까? 덧붙여 말한다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소"만을 성스럽게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소인 우종족과 적대한다는 "용"이나 "뱀"도 아주 극진하게 섬겼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를 지키는 독사 우라에우스와 파라오들의 왕관에 박힌 코브라가 그 증거다.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에서는 두 마리 뱀을 쥔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그 지 역 주민들이 소뿐만 아니라 뱀도 신성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창룡전> 4권과 10권에서 미노타우르 스를 보여주며 고대 크레타와 그리스에서 "치우"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그렇다면 소와 뱀을 똑같이 성스럽게 여긴 크 레타는 뭐란 말일까? 참고로 크레타뿐만 아닌 그리스에서도 뱀을 성스럽게 생각했다. 그리스의 주민들은 민가에 나타나는 뱀을 최고신 제우스가 보낸 사자로 여겨 재단 주위에 넣어두고 섬겼다. 그런데 그리스의 제우스는 페니키아나 팔레스타인 인들이 섬기는 최고신 바알(성경에서 나오는 이방신의 대명사)이 그리스에 들어와 변형된 것이다. <창룡전>의 12권인 용왕풍 운록에서 바알은 소머리가 달린 우 종족의 일부로 묘사되는데, 그렇다면 우 종족인 바알=제우스는 자신의 적대자인 용 종족에 속하는 뱀을 사자로 삼았던 것일까? 모순에 모순이 겹쳐진다.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1) 307

308 69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2)

309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2) :53 <창룡전>의 기본 설정을 이루고 있는 토대는 바로 악역 "치우"가 소머리 괴물인 우종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신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그의 주장에 심각한 결점이 발견된다. 고대 중국 신화를 설명하는데, 가장 좋은 교본이 되는 책이 <산해경>이다. 이 <산해경>의 [대황동경] 부분에 보면 기( )라는 뿔이 없는 외다리 괴물이 나온다. 이 기는 다른 이름으로 기룡( 龍 )이라고도 불리는데, 치우와 동일시된 다고 한다. 즉, 치우는 원래 소가 아니라 용( 龍 )이었던 것이다! 중국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치우는 원래 묘족( 苗 族 )들이 숭배하는 용 모습의 신이었는데, 한족 ( 漢 族 )이 묘족들을 정복하면서 묘족의 신화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본래의 용이 아닌 소로 모습이 바뀌었 다고 한다. 용을 신성시하는 한족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적이었던 치우가 계속 용이라고 하면 매우 입장이 난처할테니 말이다. (참고로 중국 신화에서 태초에 태어나 혼돈의 세계를 개벽했다고 하는 거인 반고도 원래는 한족의 신화가 아 닌, 묘족의 신화에서 있었다고 한다.) 치우가 소가 아닌 용이라면, 그를 필두로 한 우 종족과 용 종족이 대립하며 태초부터 싸웠다는 다나카 요시키가 세 운 토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용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용의 모습이 출토된 지역은 황하나 양자강이 아닌, 저 북방 내몽골 지방이었다. 주둥이가 돼지와 흡사한 모습의 저룡( 猪 龍 )이 옥에 새겨진 모습이었는데, 이는 내몽골 지 방에 살던 유목민 계열의 주민들도 용을 잘 알고, 숭배했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창룡전> 의 9권에서 유목민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우 종족이 지원했다고 설정하여, 요나라도 우 종족의 지시를 받은 하수인 인 것인양 뉘앙스를 풍겼지만, 거란족들은 한족 문화에 익숙해 불교를 열렬히 믿었고 용을 섬기는 문화도 아무런 거 리낌없이 받아들였다. 아울러 다나카 요시키는 12권 <용왕풍운록>에서 "중국에는 뱀파이어가 활개치는 서양과는 달리, 사람을 죽여 그 살 을 먹는 괴물들은 있어도 피를 빨아먹는 괴물들에 관한 신화는 없다. 중국의 괴물이나 신선들은 기( 氣 )를 흡수하는 높은 정신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도덕적인 정당성을 더해 주려는지, "7세기 중엽 사산 조 페르시아가 멸망할 때, 탈출한 페르시아 유민들이 중국에 식인( 食 人 ) 문화와 잔혹한 마신( 魔 神 ) 숭배를 가져왔고, 그 이전까지 중국에는 그런 야만적인 문화가 없었다."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도 엄연히 피를 빨아먹는 괴물인 강시( 僵 屍 )가 전해 내려 온다. 강시는 홍콩 영화로도 몇 번 만들어져, 그 이름에 익숙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심평산이라는 사람이 쓴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2) 309

310 <중국신명개론>이나 다른 사람이 쓴 열미초당필기( 閲 微 草 堂 筆 記 )란 책 등에 의하면 강시는 사람의 목을 떼어낸 다음, 그 부분에 입을 대고 피를 남김없이 빨아 먹으며, 강시의 몸을 잘라보면 희생자의 피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살점을 먹는다는 것과 피를 빨아먹는 다는 것에서 무슨 우열을 가리고 논할 수 있을까? 사람의 살점 을 먹는 것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것보다 더 우수하고 훌륭한 일일까? 이건 마치,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천박하고, 칼을 써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은 고귀하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과 다를바 없다. 총을 쓰나 칼을 쓰 나 다 똑같은 살인이요, 범죄인데 말이다. 중국의 식인 문화를 사산조 페르시아 인들이 가져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전국책>이나 <사기> 등의 문헌을 보면 고대 중국인들이 형벌로 사형당한 죄수의 살을 고기 젓갈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먹게 했다는 내용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한고조 유방을 도왔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해된 명장 팽월도 그런 식으로 시체가 소 금에 절여져 여러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그보다 앞서 공자의 제자도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해 고기 절임인 해가 되었 다. 끝으로 한고조 유방은 진나라에 맞서 봉기할 때, 바로 치우와 그에 맞서 싸웠던 황제( 黃 帝 )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 사를 올렸다. 다나카 요시키의 주장처럼 중국인들은 정말 치우를 사악한 악마로 생각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한 고조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악한 소 머리 괴물 치우에게 승리를 빌었을까? 한고조 유방도 마신 치우를 섬기는 무슨 사교 집단의 일원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이 또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2) 310

311 70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3)

312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3) :20 다나카 요시키가 내세운 치우 이론에 대한 정리는 이 쯤 했지만, 사실 저것과 비슷한 주장은 우리나라에도 있었 다. 1994년, 농초 박문기라는 사람이 쓴 "맥이"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아예 대놓고 서양인들이 개의 자손이 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주장들은 지금 보면 좀 웃긴데, 서양인들의 눈동자색이 파랗거나 노랗고, 신체에 털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외모들을 근거로 해서 그는 서양인들이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반호라는 개가 주나라 공주와 결혼했다는 전설에서 힌트를 얻어 서양인들이 반호의 후손이라고 단언했다. (과학적인 부분에서 본다면, 개와 사람의 유전자 구 조는 전혀 달라 아예 결합이 되지 않으니 고대 중국에 지금 수준보다 더 뛰어난 유전자 조작 기술이 있지 않는 한, 사람과 개의 후손이 태어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지만...) 이밖에도 그는 서양인들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인 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영어 발음의 신( 神 )이 갓(God)이니, 이것을 거꾸로 하면 개(Dog)가 되어 곧 개를 섬겼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구인들이 개를 전혀 안 먹었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고대 로마에서 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 던 제물이었다. 당연히 제사가 끝나고 나서 개는 도살되었고, 그 고기는 사제들이 먹었다. 켈트족의 사제인 드루이드 도 지혜를 얻기 위해 종종 개를 죽여 그 고기를 먹는 의식을 치렀다. 아울러 프랑스의 파리에는 1910년까지 개고기를 파는 정육점이 있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벌어지던 1870년 경에는 일상적으로 개고기를 먹었고. 프랑스 뿐만 아니 라 스위스에서도 근대까지 개고기를 자주 먹었다. 덧붙여 박문기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영어 발음 갓(God)은 개(Dog)에게서 비롯된 말이 아니라, 고 대 게르만어에서 제사장을 가리키는 고타(Gota)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어는 게르만족인 앵글로, 색슨족이 썼던 말이 니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에서는 저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신을 가리키는 라틴어의 데우스(deus)나 스페인어의 디오스(dios)는 그리스어의 테오스(teos)에서 유래했다. 테오스의 스팰링을 거꾸로 해봐 도 개라는 뜻은 전혀 없다. 박문기가 한 주장대로라면 단군 신화에서 분명하게 언급되는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태어난 우리 한국인들은 곰의 후손이라는 말인가? 글쎄, 곰의 후손이 되면 개의 자손보다는 나은가? 이런 주장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한국이 강대국의 반열에 들지 못한 일이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편견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3) 312

313 71 북유럽 신화의 대략적인 개요

314 북유럽 신화의 대략적인 개요 :12 춥고 어두운 북쪽의 세상을 지배하던 무시무시한 바이킹들의 신화 일반적으로 북유럽 신화, 또는 게르만 신화라고 하면 서기 793년 영국 린디스판의 수도원을 약탈한 사건을 시작으 로 하여 11세기 중엽까지 전 유럽과 지중해를 휩쓸며 전쟁에 광분하던 덴마크나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이 믿던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뜻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로마군과 싸운 테우토네스나 케루스키족 및 영국을 침공한 앵글로 색슨족 같은 게르만계 부족들이 숭배하던 신앙이나 전설도 북유럽-게르만 신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서양 신화에 관한 책들은 절대 다수가 그리스-로마 신화에만 한정되었다. 특히나 토마스 불핀치가 편집한 그리스-로마 신화는 같은 종류의 원본을 가지고 수많은 출판사에서 계속 초판과 중판 번역 본을 내놓아 불필요한 노력의 낭비라는 인상마저 준다. 최근 들어, 몇몇 작가들에 의해 북유럽 신화가 한글로 번역되어 국내 독자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점은 그나 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이든지 단조로운 것보다는 다양한 문화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테 니 말이다. 북유럽 신화에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간략하게 이 신화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다신교에 속하면서도 창조론과 종말론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켈트 신화는 종말론 은 있지만 창조론은 빠져 있으며, 칼레발라로 대표되는 핀란드 신화나 동유럽의 슬라브 신화의 경우는 창조론은 있지 만 종말론이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리스-로마 신화나 이집트 신화에서도 창조론은 전해져 오지만 종말론은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둘째, 살인으로 시작해서 살인으로 끝나는 살벌한 내용이다. (!) 세계의 창조부터가 거인 이미르를 주신 오딘이 형 제들과 함께 죽이고 그 시체를 토대로 우주를 만들었다는 설정이 무척 잔혹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런 살육에 대한 인과응보인지, 세계의 종말도 오딘을 비롯한 신들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 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셋째, 엄연한 종교적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이 부정된다. 보통, 다른 종교에서 신은 불멸의 존재로 등장하지 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신들마저 인간과 똑같이 늙고 죽는다. 오딘이나 토르 같은 최고신의 경우는 더욱 비참한데, 최후의 전쟁터에서 괴물 늑대에게 잡아먹히거나 뱀의 독에 중독되어 죽고 만다. 비단 신들 뿐만이 아니다. 이미 죽어 서 신들의 세계로 간 사람들도 죽게 된다. 세계의 최후인 라그나뢰크에서 오딘의 곁으로 간 죽은 자들의 영혼도 그와 북유럽 신화의 대략적인 개요 314

315 함께 죽는다고 알려졌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언젠가는 소멸하고 만다는 믿음은 게르만족에게 무척이나 강력한 힘을 지녔던 것이 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생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죽지 않는 사람 은 없다.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이나 동물도 마찬가지다. 생명체보다 더 오래 존재하는 별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지금으로부터 1억 5천만 년 후면 파괴되어 사라지고, 태양조차 약 10억 년 후에는 내부의 가스가 소 모되어 소멸된다고 한다. 수조 개의 별을 품고 있는 저 우주도 그 팽창이 끝에 달하게 되면 서서히 축소되어 언젠가 는 없어진다고 하니, 만물의 사멸을 믿었던 게르만족들이 어리석었다고 비웃을 수는 없다. 넷째, 숙명론과 허무주의가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다. 앞일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미래는 고정불변이며 어떠한 것으로도 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설파하는 북유럽 신화 는 다소 낮설게 다가올 지도 모르지만, 익숙해지게 되면 그 안에서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를 만든 시인들이 인생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누 구나 삶의 끝에 잔혹한 최후가 기다리지만, 그것에 굴복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야 한다는 교훈이 신화마다 담겨 있다. 바이킹을 비롯한 게르만족들이 목숨처럼 집착했던 가치는 바로 명예였다. 앞서 말한 대로 그들은 영생을 믿지 않았 다. (죽은 다음에도 죽을 수 있으니) 대신 그들은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종 의 거짓 영생 을 누리려 했다. <에다>에서는 사람도 가축도 모두 죽지만,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영웅의 위대한 이름뿐. 이라는 말로 이런 게르만족들의 이상적인 생사관을 표현했다. 다섯째, 전쟁으로 날을 보낸 게르만족들이 믿던 신화라서 그런지, 신화 전반이 온통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져 있다. 신족인 에시르(Aesir)와 거인족인 요툰(Jotun)은 신화의 시작부터 싸우고, 종말에 이르는 날까지 서로 간의 전투를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신들은 거인족을 상대로 한 도둑질이나 사기도 서 슴지 않는다. 일반적인 신화에서 항상 고결하게만 그려지는 신들은 게르만 신화에서는 온갖 거짓말과 술수로 거인들 이 가진 보물들을 빼앗거나, 지혜를 훔쳐낸 다음 그것을 제공한 거인을 죽이는 비열함을 보이기까지 한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그리스 신화나 신비로운 마법의 힘이 지배하는 켈트 신화와는 달리, 게르만 신화는 잔인하고 음 울한 전쟁의 신들이 활개치는 무시무시한 세계였다. 북유럽 신화의 대략적인 개요 315

316 72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17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14 토르(Thor) 신과 인간을 지키는 괴력의 천둥신, 모든 게르만족들의 사랑을 받았던 슈퍼스타. 이름과 유래 <에다>를 비롯한 게르만 신화에서 최고신 오딘에 이어 2위의 신격을 가진 신이 바로 토르(Thor)이다. (두 마리의 염소가 끄는 전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둥신, 토르.) 그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으나, 가장 신빙성 있는 의견은 천둥(thunder)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독일어로 토르는 도나르(Donar)라고 불리는데, 이는 천둥소리를 뜻하는 의성어에서 비롯했다. 실 제로 신화 속에서 토르는 나타날 때마다 항상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있으니,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천둥신 토르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에 살던 켈트족들은 타라니스(Taranis)라는 신을 믿었다. 타라니스는 테우타테스(Teutates) 및 에수스(Esus)와 함께 갈리아의 세 주신( 主 神 ) 중 한 명이었는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를 내리치며 한 손에 바퀴 를 쥐고 농사의 풍요를 지배하는 신으로 믿어졌다. 그의 이름인 타라니스라는 단어 자체가 고대 켈트어로 천둥을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17

318 일으키는 자 란 뜻을 담고 있다. 이름과 뜻, 그리고 성격을 본다면 토르와 매우 흡사하다. 켈트족과 게르만족은 가 까이에 살았던 이웃이니, 서로가 가진 종교에 밀접한 영향을 받았으리라.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초기 게르만 족들은 토르를 투나라즈(Thunaraz)라고도 불렀는데, 단어와 의미에서 타라니스와 일치한다. 본래 토르는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공동으로 숭배하던 하늘의 천둥신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두 민족이 분화되면서 타라니스와 투나라즈(토르)로 나눠진 것이다. 동방에서 들어온 오딘과는 달리, 토르는 순수한 북방 민족의 신이었기 에 게르만족들에게 더욱 친숙했고 열렬한 인기를 누렸다. 가족 구성 <에다>를 통틀어 그는 최고신 오딘과 대지의 여신인 표르긴(Fjorgyn)의 아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오딘 의 아들이 발데르 한 명 밖에 없다는 <에다>의 다른 주장과 사뭇 상충된다. 원래 평범한 신이었던 오딘이 후대에 가 면서 최고신으로 그 위치가 격상되면서, 모든 신들을 억지로 그의 자식으로 만들려는 시인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일이 다. 오딘과 표르긴을 제외하고 문헌에 묘사된 토르의 가족들은 모두 그를 닮아 하나 같이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구 에다>에 실린 하르바르드의 노래 편을 보면 그에게는 메일리(Meili)라는 동생도 있다고 하지만, 이름만 전해질 뿐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단어의 어순으로 미루어 보건대, 메일리는 토르가 애용하는 무기인 망치 묠니 르(Mjolnir)를 인격화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외에 토르의 가족 중에 가장 유명한 자는 그가 여자 서리 거인인 야른삭사(Jarnsaxa: 쇠 단검)와의 사이에서 낳 은 두 아들인 마그니(Magni)와 모디(Modi)이다. 먼저 그의 장남인 마그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이름은 힘을 뜻하는 단어 메긴(Megin)과 거대함을 가리키는 단어 마그누스(Magn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토르의 상징이기도 하다. 마그니와 관련된 활약상은 토르가 최강의 거인인 흐룽그니르를 격퇴했을 당시, 그의 다리에 깔린 토르를 마그니가 구해낸 이야기이다. 다른 신들과 심지어 오딘마저 들지 못했던 흐룽그니르의 다리를 태어난 지 사흘 밖에 안 되었던 아기인 마그니가 거뜬히 들어 던져 버린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광경을 본 다른 신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 고, 토르는 아들의 힘에 감격하여 흐룽그니르가 가지고 있던 명마 황금갈기(Gullfaxi)를 선물로 주었다. 내심 황금갈기를 원하던 오딘은 토르가 자신이 아닌 마그니에게 주자, 질투하여 저렇게 훌륭한 말을 왜 나에게 주지 않았느냐! 라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명마를 빼앗긴 불평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18

319 들지 못한 거인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버린 마그니의 괴력과, 그런 아들을 가진 토르에 대한 경계심도 작용했 으리라. 마그니는 아버지인 토르가 요르문간드와 싸워 죽임을 당한 라그나뢰크에도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는다고 전해졌다. 그 과정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지만, 어머니인 야른삭사의 보살핌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란 없으니 말이다. 두 형제를 낳은 야른삭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대해서는 자료가 없지만, 이름으로 미루어보 아 매우 강한 힘을 가진 거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추측컨대, 마그니와 모디 역시 그런 모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 을까? (야른삭사) 대재앙을 이겨내고 생존한 마그니는 토르의 유산인 묠니르를 물려받고, 형제인 모디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다스린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19

320 다고 한다. 모디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름 이외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토르는 친아들인 마그니와 모디 형제 이외에도 양아들을 한 명 거느리고 있는데, 그는 스키를 타고 산과 들을 누비 는 겨울의 신인 울(Ull)이다. 울은 토르의 정부인인 시프(Sif)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 프와 결혼한 토르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양아들인 셈이다. 게르만족의 사회에서 울은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먼저, 사람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쟁이 벌어졌을 때, 게르만 사회에서는 오늘날처럼 피고, 원고와 변호사가 나와 활동하는 재판이 아닌 결투를 통한 결투 재판 이 벌어졌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결투를 통해 이긴 자가 정당하고 죄가 없는 자 라고 인정받았다. 이 결투가 벌어질 때, 울은 사람들이 부디 올바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맹세를 하는 신이었 다. 또한 울은 스키를 타고 눈이 덮인 산과 들을 빠르게 달리며 활을 쏘아 사냥을 하는 신이기도 했다. 긴 겨울과 잦은 폭설 때문에 농사가 쉽지 않았던 스칸디나비아 북부 지방에서는 생존에 필수적인 영양분 섭취를 사냥을 통해 해결했 다. 사냥을 하러 집을 나가 숲과 산을 뒤지며 사냥감을 찾는 사람들에게 울은 사냥의 성공을 비는 신이었다. <에다>와 상반된 자료인 덴마크인 주교 삭소 그람마티쿠스가 쓴 <덴마크인의 행적(Gesta Danorum)>에 의하면 울 은 오딘이 10년 동안 아스가르드의 옥좌를 비운 사이, 그 옥좌에 앉아 세계를 통치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울은 한 때 최고신의 위치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신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울에게는 아내도 있는데, 그처럼 스키의 여신인 스카디(Skadi)이다. 스카디는 본래 신이 아닌 요툰헤임에 살던 서리 거인족이었는데, 아버지인 트림의 복수를 하러 아스가드르에 왔다가 신들의 중재를 받고 바다의 신 뇨르드와 결혼하 여 신들과 화해를 했다. 그러나 바다와 눈덮인 산악 지대라는 서로 상반된 거주 환경 때문에 둘은 헤어지고, 홀몸이 된 스카디는 자신과 잘맞는 환경에서 살던 울과 사랑하여 재혼을 했다고 한다. 토르의 남계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얼핏 마무리되니, 그의 여계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의 정부인인 시프(Sif)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한 명의 자식만을 두었는데, 아름다운 딸인 트루드(Thrd)이다. 정실에게서 아들을 보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이미 토르에게는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셋이나 있으니 더 이상 낳을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프는 하얀 피부에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신으로 풍요를 주관했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인 프레이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미모를 지녔다. 그런 이유로 흐룽그니르가 아스가르드에 와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프레이 야와 시프를 보고는 그대들만큼은 죽이지 않고 내 애인으로 삼아 데려 가겠소. 라고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그녀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금발 머리는 종종 그녀에게 수난을 가져 주기도 했다. 불행과 사악의 신인 로키가 어느 날, 그녀가 잠든 사이 몰래 침실로 들어가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을 몽땅 잘라 버려 대머리로 만든 일이 있었다. 여성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20

321 에게 생명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잠자고 나서 졸지에 잃어버린 시프는 충격에 빠져 식음을 전폐했고, 진상을 안 토르 는 로키를 찾아가 그가 저지른 범죄를 책임지고 배상하라며 윽박질렀다. 토르의 불같은 기세에 겁을 먹은 로키는 그 대가로 드워프들을 찾아가 황금으로 짠 실로 시프의 머리카락을 다시 돌려주었으며, 토르에게도 천둥 망치인 묠니르 를 전해 주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시프의 황금 머리칼이 두 부부에게 예기치 않은 선물을 가져다 준 셈이다. 이런 내용에서 볼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풍요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토르와 시프의 딸인 스루드는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미모를 탐낸 드워프족 알비스(Alvis)는 토 르를 찾아가 자신이 신들을 위해 많은 보물을 만들어 바쳤으니, 이제 신들이 자신을 위한 보상으로 스루드를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아버지인 토르는 딸을 알비스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어두침침한 땅속에서 쇠와 불을 다루며 사는 작고 못생 긴 난쟁이 드워프에게 자신의 외동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훌륭한 공예품에는 찬사를 퍼부으면서도, 막상 그 공예품을 만든 장인은 왠지 모르게 천시하는 풍토는 다른 나라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딸의 혼사 일에 폭력을 쓰자니 자신의 체면이 문제가 되었다. 고민 끝에 토르는 그답지 않게 말로 알비스의 도전을 무마시키기로 했다. 알비스는 모든 것을 아는 자라는 뜻인데, 이럼처럼 그는 매우 박식했다. 토르는 그 점에 착안해 자네가 내가 말하는 모든 수수께끼를 푼다면, 내 딸을 보내겠네. 라고 짐짓 쉬운 조건을 내걸었 다. 토르의 말을 믿은 알비스는 신이 나서 토르가 묻는 세상의 모든 자연 현상을 자신 있게 대답했다. 토르: 낮 동안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저 태양을 모든 세계에서는 어떻게 말하나? 알비스: 인간들은 해, 신들은 둥근 공, 드워프들은 드발린의 즐거움(드발린이란 드워프가 햇빛을 받아 돌이 된 이후 부터 드워프들은 태양을 그렇게 불렀다.), 거인들은 불멸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토르: 밤의 어둠을 밝히는 달을 모든 세계에서는 어떻게 부르나? 알비스: 인간들은 달, 신들은 거짓 태양, 니플헤임에서는 끝없이 도는 수레바퀴, 거인들은 재빠른 여행자, 드워프들 은 빛이라고 하죠. 토르: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넓고 푸른 바다를 모든 세계에서는 어떻게 부르나? 알비스: 인간들은 바다, 신들은 매끄럽게 치는 물결, 거인들은 물고기의 집, 드워프들은 깊은 연못이라고 하죠.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21

322 토르: 세상을 위에서 감싸고 있는 하늘을 모든 세계에서는 어떻게 부르나? 알비스: 인간들은 하늘, 신들은 지붕, 거인들은 높은 집, 드워프들은 비의 저장소라고 하죠. 이 밖에도 토르는 알비스를 상대로 계속 구름, 바람, 대지, 정적, 불, 나무, 술, 밤, 곡식 등에 대해서 물었고 그럴 때마다 알비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계속 대답하는 알비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는지, 토르의 질문은 끝났다. 토르가 침묵을 지키자 알비스는 내심 신이 났다. 당장에라도 그의 입에서 자네와 스루드의 결혼을 허락하네. 라는 말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윽고 토르의 입은 열렸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저기 하늘을 보게! 토르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쳐든 알비스의 두 눈에는 이제 막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두 눈은 충격과 공포로 가득 찼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그의 입은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의 입과 눈은 딱딱한 돌로 변했다. 어두컴컴한 땅속에서만 사 는 드워프들은 햇빛을 받으면 돌이 되어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태고적, 이미르의 시체 속에서 꿈틀대 던 구더기에 불과했던 드워프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신들은 그런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토르는 그것을 노렸던 것이 다. 밤새도록, 토르와 수수께끼를 풀며 지혜 겨루기를 하던 알비스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잊었다 돌이 되어 생명을 잃 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던 그는 자신의 처지만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세상 일을 떠벌리는 어리석음의 본보기였다. 스루드에 관련된 신화는 알비스의 구혼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 밖의 일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형제인 마그 니나 모디와 다르게, 스루드나 그녀의 어머니 시프는 라그나뢰크의 재난에 희생되고 만 모양이다. 이처럼 토르는 그의 위상에 걸맞게 다양한 부속신들을 가족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토르의 특징을 여러 가지 로 나누어서 의인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22

323 73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4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15 무기와 장비 북유럽 신화의 중요한 신들은 신비한 능력을 지닌 보물들을 소유하고 있는데, 토르도 예외가 아니다. <에다>에 따 르면 그는 세 가지의 신물( 神 物 )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그의 상징이기도 한 천둥 망치 묠니르(Mjolnir)다. 로키가 시프의 금발 머리를 잘라버린 장난에 대한 보 상으로 드워프 형제 브로크와 에이트리에게 찾아가 만들도록 한 무기이다. <에다>에서는 손잡이가 다소 짧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토르가 마음대로 어느 곳에나 던져도 곧바로 그에게 돌아오 며 아무리 강력한 거인이나 괴물이라고 해도 묠니르의 일격을 맞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한다.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쌓아주는 대가로 여신 프레이야에 태양과 달까지 요구하며 난동을 피우던 거인 석공은 토르가 내던진 묠니르에 바로 머리가 깨어져 즉사했다. 거인 중 최강의 전사인 흐룽그니르조차 묠니르의 타격 한 방에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세계 를 자기 몸으로 감쌀 정도로 거대한 우주 뱀 요르문간드조차 결국은 묠니르를 이기지 못하고 도살당했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4

325 (토르가 애용하는 천둥 망치, 묠니르의 부조) 이밖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거인들이 토르가 휘두르는 천둥 망치에 생명을 잃었다. 그래서 요툰헤임의 거 인들은 모두 토르를 두려워했다. 그가 내리치는 묠니르에 자신들의 가족과 친척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힘의 띠라는 뜻의 메긴 교르드(Megin gjord)인데, 이것은 허리에 차는 허리띠이다. 글자 그대로 이 띠를 허리에 차고 있으면 토르의 힘이 저절로 두 배로 강해진다고 한다. 묠니르에 못지않게 토르에게는 유용한 무기였고, 그만큼 거인들의 경계 대상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철로 만든 장갑인데, 묠니르를 사용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아마도 묠니르는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무기이기 때문에, 맨손으로 만질 수 없어서 이런 장치가 필수적이었나 보다. 토르가 철 장갑을 끼고 있으면, 큰 산도 부술 수 있고, 거대한 바위도 들어서 던질 수 있다고 한다. 토르의 세 가지 신물들 중에서 묠니르는 보르크와 에이트리가 만들었다고 분명히 나오지만, 나머지 두 가지인 메긴 교르드와 철 장갑은 누가 제작했는지 확실치 않다. 드워프나 거인족 같은 외부인이라면 간단하게나마 언급될 법도 한 데, 그렇지 않은 점을 보면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서 사용한 듯싶다. 늑대 펜리르를 묶을 때, 신들이 자체적으로 레딩 과 드로미라는 쇠사슬을 만들었으니 그들이라고 해서 드워프에게만 의지했던 것은 아니다. 이런 무기들 이외에도 토르에게는 탈 것이 있었는데, 탕뇨스트(Tanngnjostr)와 탕그리스니르(Tanngrisnir)라는 두 마리 염소가 이끄는 전차였다. 전쟁의 신이 멋진 말이나 사나운 맹수가 아닌 염소가 끄는 전차를 탄다니 좀 우습지 만, 토르는 전쟁뿐만이 아니라 농업과 풍요를 담당하는 신격도 있었기에 염소를 그의 상징 동물로 삼았다. 게르만 신 화에서 염소는 풍요를 나타내는 동물로 인식되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자주 희생 제물로 바쳐치곤 했다. 토르가 두 마리 염소가 끄는 전차를 타고 하늘을 달릴 때면, 전차의 바퀴에서는 불꽃이 튀고 하늘에서 큰 소리가 울린다고 한다. <에다>에서는 이를 가리켜 천둥소리와 번개라고 표현했다. 토르의 적수인 거인들은 그가 전차를 타고 나타나면,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5

326 (두 마리 염소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세상을 누비며 포악한 거인족을 박살내는 토르.) 활약상 <에다>에서 토르에 관한 내용은 주신 오딘 다음으로 가장 많다. 오딘에 관련된 서술들이 대부분 그가 어떻게 교활 한 방법으로 거인들의 보물을 훔쳐오거나 지혜를 겨루는 묘사라면, 토르는 직접 육체적인 완력을 써서 거인들을 타도 한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통쾌한 느낌을 주기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으리라. 오딘을 필두로 한 아스가르드(Asgard)의 에시르(Aesir) 신족 중에서 토르는 단연 최강의 힘을 지닌 용사이자, 아스 가드르를 지키는 수호자이기도 하다. 비록, 신들의 왕은 오딘이고 토르도 그에 복종하지만, 순수한 힘으로만 따지면 오딘보다 더욱 강력했다. 에시르 신족이 원초거인 이미르를 죽이고 그 시체로 세계를 만들어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황금시대 무렵, 뜻하지 않은 전쟁이 발생했다. 에시르와는 전혀 상반된 신들인 바니르(Vanir) 신족이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다. 원인은 에시르 신족이 아스가르드를 찾아온 황금의 마녀 굴베이그(Gullveig)에게 현혹된 것에 바니르 신족이 분개하였다고 한다. 좀 석연치 않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신비한 마법을 사용하는 바니르 신족이 우세하였지만, 이윽고 이미르를 죽인 힘과 야성을 지니고 있던 에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6

327 시르 신족이 점차 바니르 신족을 압도해 나갔다. 이 전쟁에서 토르도 참여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바니르 신족이 사는 세계인 바나헤임(Vanaheim)의 성벽이 토르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두 신족끼리의 싸움은 휴전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 후 신화에서 바니르 신 족의 모습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고 에시르 신족들이 곧 신들을 대표하게 되었으니, 사실상 에시르 신족의 승리로 끝 난 셈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토르의 위력이 한 몫 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아스가르드는 바니르 신족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한 가지 상흔을 간직하게 되었는데, 부서진 성벽이었다. 바니르 신 족들이 부린 마법에 의해 성벽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성벽을 다시 쌓으려도 해도 부서진 규모가 워낙 크고, 힘들 어서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 때, 에시르 신들의 고민을 풀어줄 해결사가 나타났다. 한 필의 말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석공이었다. 그는 바 니르 신족에서 종전의 증거로 보낸 여신 프레이야와 하늘의 태양과 달을 자신이 갖는 대가로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모두 쌓아주겠다고 제안했다. 신들이 6개월 안에 끝내야 한다는 제한을 걸고 그 조건을 받아들이자, 석공은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여 무거운 돌들을 날라 순식간에 성벽을 쌓았고, 이내 성벽은 성문을 다는 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 성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신들은 성벽이 수리되는 것은 좋아했지만, 자신들의 동료가 된 프레이야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석공의 차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하늘에 박혀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는 저 태양과 달을 내준다면, 지상뿐 아 니라 천상까지 모두 암흑천지로 변하지 않겠는가! 최고신인 오딘은 고민 끝에, 간계와 음모의 신인 로키를 협박하여 석공의 성벽 완공을 막으라고 윽박질렀고 로키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된 날짜를 하루 남긴 날, 석공은 흐뭇한 심정으로 일터로 향했다. 그러나 수레를 끌며 무거운 돌들을 실어 나 를 말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석공이 데리고 온 말은 예쁜 암말로 변한 로키의 유혹에 정신을 잃고 그녀를 따라 정신없이 도망친 후였다. 성벽을 완성할 석재가 없고, 그것을 실을 말도 없자 이제 성벽을 쌓기란 불가능한 일이었 다. 신들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런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자, 석공은 분노가 폭발하여 정체를 드러냈다. 그는 어마어마한 덩치를 한 산악 거인(bergrisi)이었던 것이다. 거인 석공은 아스가르드의 궁전 앞으로 달려가 나를 실컷 고생시키고 속여먹은 너희들을 모두 죽이고 말겠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신들은 공포에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로 그 때, 멀리 동쪽 철의 숲(Iron Wood)로 거인과 괴물들을 퇴치하러 떠났던 토르가 돌아와 묠니르를 던져 그 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머리가 박살난 석공은 시체가 되어 토르의 손에 의해 저승인 니플헤임으로 던져졌다. 하마 터면 아스가르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뻔 했던 석공 사건은 토르의 힘에 의해 평화롭게 종결된 것이다. 토르의 강대한 힘은 그가 교활한 거인왕 우트가르트 로키가 다스리고 있는 거인국 요툰헤임(Jotunheim)의 수도, 우 트가르트를 찾아갔을 때, 더욱 돋보였다. 우트가르트 로키는 자신을 찾아온 토르와 로키, 티알피, 로스크바 일행에게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7

328 당신들이 가진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손님으로 대우해 줄 수 없소. 라고 말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나그네가 한 가지라도 훌륭한 재주를 보여야 비로소 손님으로 대접받는다는 이야기는 게르만 신화뿐 만이 아니라 켈트 신화에서도 보인다.) 토르가 우트가르트 로키에게 받게 된 시험 중 첫 번째는 길쭉한 술잔(게르만족들은 황소의 뿔을 파내 술잔을 만들 었고, 술잔의 밑바닥을 평평하게 만드는 법을 몰랐다.)에 담긴 술을 모두 마시는 일이었다. 잔에 담긴 술은 사실 술이 아니었다. 잔의 밑바닥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고, 토르는 술이 아닌 세계의 바닷물을 마실 판국이었다. 난관에 부딪친 토르는 자신만만하게 도전했고, 술을 계속 마시다 하마터면 세상의 바닷물을 몽땅 마셔버릴 뻔했다. 우트가르트 로키는 나중에 토르가 바닷물을 하도 많이 들이키는 바람에 세상의 바닷물이 상당히 줄 어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에다>에 따르면, 이 때 토르가 마시려 하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토해낸 바닷물이 오늘날 해변에서 일어나는 밀 물과 썰물 현상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과학 이론에서는 지구의 모든 육지를 합쳐도 바다 속에 넣으면 다 들어간 다고 하는데, 그런 바닷물을 하마터면 몽땅 마셔버릴 만한 토르의 주량은 굉장했던 모양이다. 술잔을 내려놓은 토르는 두 번째 시험에 직면했는데, 세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우트가르트 로키는 마법을 써서 고양이로 보이게 했다.)를 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최강의 신인 자신에게 겨우 고양이를 들어보라는 요구 를 받은 토르는 술기운과 분노로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고양이, 아니 요르문간드를 힘껏 들어 올렸다. 어두운 심해 의 밑바닥에 살면서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문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요르문간드는 토르의 억센 힘에 의해 꼬리를 놓아 버릴 뻔 했다. 그것도 모자라 요르문간드의 몸은 바다에서 끌어 올려져, 하늘 높이 올라가기까지 했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8

329 (토르와 요르문간드) 게르만 신화에서 요르문간드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인 미드가르드를 한바퀴 감싸고도 남아 자신의 꼬리를 물고 바다 밑에 도사리고 있는 실로 거대한 뱀이다. 달리 해석하자면 요르문간드는 인간 세계, 곧 대지를 모두 자신의 몸 으로 에워싸고 있으니 대지의 무게와 맞먹는 셈이다. 그런 괴물 뱀을 토르가 들어 올려 그 몸이 하늘까지 닿을 뻔 했 다는 묘사는 곧 토르가 지상, 더 나아가 세상 전체를 들어 올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토르의 무시무시한 괴력에 경악한 우트가르트 로키는 마지막 관문으로 그에게 마법을 걸어 엘리라는 노파의 모습을 한 시간과 씨름을 하게 했다. 즉, 엘리는 노화 작용의 의인화였다. 시간은 이전의 바닷물이나 요르문간드보다 더욱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다. 엘리와 씨름을 하면서 토르는 자기도 모르게 나이를 먹고 있었던 셈이다. 토르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넘어뜨리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막판에 이르러 거의 죽기 직전까지 늙어갔지만, 그러면서도 한쪽 무릎 밖에 꿇지 않은 강인함과 불굴의 정신을 나타 낸 것이다. 나중에 우트가르트 로키는 토르를 우트가르트 성 밖으로 나가 배웅하면서 그가 보인 괴력에 매우 놀랐으며, 다시는 자신들을 찾아오지 말라는 부탁까지 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는 말처럼 토르도 결국 노화에는 지고 말 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그토록 오랫동안 저항했으니 우트가르트 로키가 놀랄 만하다. 이밖에도 토르의 활약은 신화 내내 이어진다. 바다의 늙은 거인, 히미르(Hymir)를 찾아가 낚시로 요르문간드를 들어 올렸다 겁을 먹은 히미르의 방해로 아쉽게 놓쳤고, 최강의 거인 용사인 흐룽그니르와 단판 승부에서 멋지게 승리를 거두었는가 하면, 묠니르를 훔쳐간 서리 거인의 왕인 트림을 찾아가 그와 그의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묠니르를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9

330 (요르문간드를 낚아 올리는 토르. 늙은 거인 히미르가 그의 뒤에서 겁을 먹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또한, 거인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인간들을 위해서 거인 티아지를 죽이고 역시 거인 알발디의 눈을 뽑아 하늘로 던 져 별이 되게 했으며, 바다의 신인 에기르가 통치하는 흐레세이 섬에 살던 사납고 흉폭한 거인 여자들을 모두 죽이고 괴물들을 낳던 요툰헤임의 거인 여자들을 멸족시키는 전과를 세우는 등, 그의 무용담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 도다. 최후의 날인 라그나뢰크에서 토르는 자신의 숙적인 요르문간드와 세 번째로 만났다. 요르문간드는 심해의 밑바닥에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30

331 서 나와 전 세계에 독을 뿜어대며 인간과 동물들을 죽이고 있었다. 토르는 숱한 접전을 벌인 끝에, 혼신의 힘을 다 해 묠니르를 내리쳐 요르문간드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악한 요르문간드는 죽기 직전, 토르의 얼굴을 향해 독을 토해냈고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한 토르는 온 몸 에 독이 스며들고 말아, 아홉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쓰러져 끝내 숨을 거두었다. 세계의 수호자인 토르는 세계를 위협하던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적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 셈이다. 편안히 죽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전쟁에서 죽는 것을 갈망하던 게르만 전사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토르의 사후, 묠니르는 그의 아들들인 마그니와 모디가 물려받는다고 한다. 구 세계에서 숱한 피를 뿌리며 거인들 을 제압한 가공할 전쟁 무기는 망각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서도 계속 존재하며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 하려는 안배인 것일까.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31

332 74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333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05 신격과 영향력 만약, 킴브리족이나 튜턴족 및 스베아(스웨덴)족을 비롯한 게르만계 부족들에게 어느 신을 가장 좋아하냐고 여론 조사를 한다면, 단연 1위를 차지할 신은 바로 토르일 것이다. 게르만족에 속하는 바이킹 부족들도 토르를 열렬히 숭 배했다. 게르만족 사회에서 토르의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남자들의 인명만 해도 토르발 드(Thorvald)이나 토르핀(Torfinn), 토르베르크(Thorberk), 토르레이프(Torleif), 토르켈(Torkel), 토르길스(Torgils), 토 르스테인(Torstein), 토랄프(Toralf), 토르모드(Tormod), 토로드(Torodd), 토르라크(Torlak), 토롤브(Torolv) 등 족히 수십 가지가 넘었을 정도였다.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토르의 이름을 앞다투어 모방했다. 토르게르드(Torgerd), 토르프리드(Torfrid), 투리드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333

334 (Turid), 토르군느(Torgunn), 토르디스(Tordis), 토르힐드(Torhild)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토르의 이름을 딴 사람이 역사 속에서 활동을 한 경우도 있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군대를 이끌었던 토르 켈로나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의 동생 토르길스 등이다. 이렇게 그의 이름을 따서 작명을 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고신인 오딘의 이름을 딴 사 람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모사꾼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오딘과는 달리, 토르는 매우 친근한 성격을 가진 존재였다. <에다>에서는 그를 가리켜 자주 대지( 大 地 )의 아들 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게르만 신화에서 대지 의 여신인 표르긴(Fjorgyn)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거인족인 기간테스들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로 설정되는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토르는 하늘의 천둥신 이외에도 농사와 풍요를 다스리는 대지의 신으로서의 신격도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타는 전차를 이끄는 동물이 전쟁을 상징하는 말이나 멧돼지 또는 늑대가 아닌, 농가에 서 흔히 키우고 농부들이 많이 사육하는 염소라는 부분을 떠올리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에다>에 묘사된 토르에게서 풍요로운 농경신의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는 강력한 투사의 모 습을 하고 있다. <에다>에 채록된 자료들 중 대부분은 이미 바이킹 사회가 전쟁과 약탈에 한창 바빴던 시기에 만들어 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바다를 지배하는 역할까지 맡기도 했다. 10세기, 신대륙인 빈란드(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 도착한 바이 킹들은 식량 부족에 처하자, 토르에게 물고기를 보내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러자 사흘 후에 죽은 고래들이 연이어 해 안에 떠밀려와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한다. 오딘이 왕족이나 귀족, 시인 같은 지배 계급들이 주로 믿었던 신인데 반해, 토르는 피지배 계급인 농부들이 믿던 신이었다. <구 에다>에서 뱃사공 하르바르드(Harbard)로 변장한 오딘은 토르를 가리켜 용맹한 전사들은 죽어서 오 딘의 곁으로 가지만, 너 토르가 맡는 것은 죽은 농부나 노예들 뿐이다. 하고 조롱했다.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을 영 광으로 여기고 죽어서 발할라에 가서도 싸움을 원했던 귀족들과는 달리, 농부들은 죽어서 싸울 일이 없고 무사히 지 낼 수 있는 토르의 세계를 더 선호했으리라. 이처럼 게르만 신화의 세계관에서는 사후관도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를 받았는데,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귀족 전사들은 오딘이 다스리는 발할라에 가지만, 그 외의 농민들은 토르의 저택인 빌스킬닐로 불려 가고 병이나 노 쇠로 죽은 사람들은 저승의 여신 헬이 다스리는 니플헤임으로 불려갔다. 바다에 빠져 죽은 어부들은 바다의 신 아에 기르의 집으로 불려갔다. 풍요를 주관하던 대지의 신이었던 토르는 시대가 지나면서 하늘에 살며 망치 묠니르를 휘둘러 천둥과 번개를 일으 키는 천신( 天 神 )으로서의 신격이 부여되었다. 신화 연구 학자들마다 각기 주장하는 바가 달라,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334

335 실히 알 수 없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 주민들이 드라카를 타고 지중해를 약탈하는 서기 8세기 후반 무렵이라 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이른 게르만족들의 대이동 시기일 가능성도 높다. 로마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서기 410년, 로마를 공격해 함락시킨 서고트족들은 그들의 신인 유피테르에게 승리를 빌 었다고 한다. 여기서 유피테르라 함은 로마인들이 믿었던 신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믿었던 하늘과 천둥의 신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믿는 신을 자기들이 믿는 신의 성격과 비교해 비슷한 신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당시, 서고트족들 중 상당수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승리를 기원한 유피테르는 천신( 天 神 )인 동시에 뇌신( 雷 神 )이니 이 는 곧 게르만 신화의 토르가 아닌가? 로마의 세력이 물러간 영국을 정복한 앵글로, 색슨족들도 토르를 믿었다. 또한 8세기 말, 영국을 침공한 바이킹들은 서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과 평화 협정을 맺을 때, 토르의 상징인 은팔찌를 팔에 차고 맹세를 했다. 스웨덴의 웁 살라에 세워진 신전에는 오딘과 토르, 프레이르의 목상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바로 토르의 목상 이었다. 신전을 세운 사람들은 신들 가운데 오딘과 프레이르를 제쳐 놓고 토르를 최고의 신으로 섬긴 것이다. 11세 기,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아담(Adam)도 토르가 북방 민족의 신들 중에서 가장 높고 강력했다고 주장했다. 9세기에 아이슬란드로 이주한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은 토르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들은 토르의 목상을 선단의 앞 머리에 띄워 길잡이로 삼아서 항해했으며, 목상의 움직임이 멈춘 해안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하고 나서는 토르의 목상을 설치한 곳에 의회를 개설했으며, 회의가 열리는 날은 토르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인 목요일이었 다. 아이슬란드는 북극에 가까운 곳이어서 해가 뜨는 날이 적고, 심한 바람이 자주 불어 농사와 목축에 굉장히 좋지 않 은 입지조건을 가진 섬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이슬란드의 농부와 목동들은 자주 토르에게 태양이 자주 뜨고 바람이 잠잠한 날씨를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원래 게르만 신화에서 하늘의 날씨를 담당하는 신은 주신인 오딘인데, 아이슬 란드 주민들은 오딘을 제쳐놓고 토르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한 것이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335

336 (묠니르를 든 토르의 금속 조각상) 11세기 초, 아이슬란드의 주민들은 의회에서 심각한 논쟁을 벌인 끝에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토르를 섬기던 옛 신앙 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토르의 상징인 망치의 중심에 십자가를 파내어 만든 공예품이 계속 사용되었으니까. 현대에도 토르의 영향은 소멸되지 않고 남아있다. 비록 옛날처럼 숭배나 신앙으로서의 뇌신 토르는 죽었지만, 대신 문화 예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탄생시킨 미국의 대표적인 만화 회사인 마블 코믹스는 1962년부터 토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 화 위대한 토르(Mighty Thor) 를 제작해 발표했다. 이 만화는 지금까지 502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출판되었으 며, 현재 2010년 개봉을 목표로 헐리우드에서 한창 영화 제작에 착수한 중이다. 그런가 하면 스웨덴의 메탈 밴드인 아몬 아마스(Amon Amarth)는 2008년, 천둥신의 황혼(Twilight of the Thunder God)이라는 음반을 발표했다. 여기서 천둥신은 당연히 게르만 신화의 뇌신인 토르인데, 가사마다 천둥 망치 묠니르 를 휘두르며 괴물들을 무찌르는 토르의 모습을 열렬히 찬양하며 노래하고 있다. 만화나 헤비메탈 음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토르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주일 중에서 목요 일은 영어로 투즈데이(Thursday)라고 하는데, 게르만 부족들이 토르에게 제사를 지내던 날이었다. 즉, 목요일은 토르 에게 바쳐진 날이니, 목요일을 보낼 때마다 우리는 고대 게르만의 천둥신의 이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336

337 75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38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21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북유럽 신화의 살벌한 개벽 설화 아득한 옛날, 이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태양이나 달은 물론이고 하늘과 땅도 바다나 강 이나 호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 끝을 알 수없는 암흑만이 우주를 가득 차지한 상태였 다. 그러던 중, 갑자기 우주의 양끝인 남쪽과 북쪽에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북쪽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 인 공간이 되었고, 남쪽에는 뜨거운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세계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두 극단적 인 기후의 중간 지대에는 서서히 북쪽에서 실려 온 얼음들이 잔뜩 있었다. 훗날, 시인들은 북쪽을 극한의 세계인 니플헤임이라고 불렀고, 남쪽은 극열의 세계인 무스펠헤임이며 중간 부분은 긴눙가가프라고 말했 다. 무스펠헤임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니플헤임에 닿으면서 차갑기만 하던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얼음이 녹아 생겨난 물방울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던 긴눙가가프에 떨어졌다. 이윽고 물방울에서 한 생명 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모든 서리 거인과 산악 거인들의 조상인 이미르(Ymir)였다. 이미르는 한 몸에 남자와 여자가 모두 있는 자웅동체였다. 그(혹은 그녀)는 스스로 결합하여 겨드랑이와 허벅지에서 아이들을 만들어 냈고, 긴눙가가프는 새로 태어난 거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털이 있어야 할 곳에는 털이 없이 빳빳했고, 털이 없어야 할 곳에는 털이 수북했다. 태초의 거인이 한창 후손들을 낳고 있을 무렵,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아우둠라라고 하는 암소가 깨어났 다. 아우둠라는 네 개의 젖꼭지에서 우유를 흘렸고, 이미르는 그 젖을 마시며 기운을 얻어 생산에 몰입했 다. 아우둠라는 이미르에게 젖을 주기 위해 소금기가 들어간 얼음덩어리를 핥았다. 그런데 얼음덩어리를 핥 자, 그 안에 웬 사람 모습의 생명체가 갇혀 있는 것이 보였다. 사흘 동안을 열심히 핥아대니 얼음 속에 잠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38

339 들어 있던 그 것이 완전히 형체를 드러내어 얼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가 바로 최초의 신인 부리(Buri) 였다. 부리 역시 이미르처럼 양성을 한 몸에 가졌다. 그도 자식을 낳았는데, 남성만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였다. 부리의 아들은 보르(Bor)라고 불리었다. 부모와는 달리, 남성성만을 지닌 보르는 자신의 처지가 외롭게 생각되었는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문득 어느 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빙산 위에 앉아서 어두컴컴한 허공을 쳐다보는 한 서리 거인이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보르가 보아오던 다른 거인들과는 달리, 외모가 그리 흉측하거나 보기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도 모르게 계속 쳐다보게 될 정도로 호감이 갔다. 보르의 집요한 눈길을 느꼈는지, 그도 고개를 돌려 보르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가 아닌 그녀였다. 그녀 의 이름은 이미르가 낳은 서리 거인 볼토르의 딸, 베스틀라(Bestla)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둘의 시선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잠시 후, 보르는 빙산을 기어올라 베스틀라에 게 다가갔다. 자신보다 약간 덩치가 작은 사내를 보면서도 베스틀라는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 에 호감을 느꼈는지, 그녀는 보르를 반갑게 맞았다. 두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차가운 빙산 위에서 실컷 밀회를 즐겼다. 이윽고 베스틀라는 보르의 아이를 임신했다. 부푼 배를 안고 즐거워하던 그녀는 마침내 세 명의 아들들 을 낳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장남은 오딘(Odin), 차남은 빌리(Vili), 막내아들은 베(Ve) 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와 아이들이 누리던 행복은 곧 얇은 얼음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래전부터 딸의 모습이 통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볼토르는 뒤늦게 그녀를 찾아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딸 의 곁에서 노는 저 아이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볼토르는 딸을 다그쳐 도대체 누구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추궁을 견디다 못 한 베스틀라는 끝내 털어놓았다. 딸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종족들의 피를 받았다 는 사실에 볼토르는 격분했다. 그녀가 낮선 이방인과 정을 통해 아이를 낳은 것은 자신과 전체 거인 종족 의 명예를 모독했다고 여긴 볼토르는 분노하여 다른 서리 거인들을 소리쳐 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모 여든 서리 거인들은 베스틀라와 관계를 가진 이상한 놈을 찾아내 죽이고, 내친 김에 그 더러운 피를 가진 저 세 사생아들도 죽여야 한다고 고함을 질렀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39

340 아버지와 친척들의 노여움에 겁을 먹은 베스틀라는 얼른 세 아들들을 높이 쳐들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멀리 내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높이 날아간 삼형제는 거인들의 눈에서 사라졌고, 그들을 손에 잡지 못해 아우성을 치던 거인들은 다른 목표물을 골랐다. 사방을 헤맨 끝에 보르와 그 부모인 부리를 찾아내 베스틀 라가 무릎을 꿇고 있는 앞으로 끌고 온 것이다. 볼토르와 서리 거인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른 베스틀라 와 그녀를 임신시킨 보르와 그를 세상에 내보낸 부리를 처벌할 것을 소리쳤다. 보르는 자신이 한 일은 어디까지나 베스틀라와 합의하에 이루어졌으며, 결코 폭행이나 강요가 아님을 강 조했다. 부리 역시 젊은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은 지극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단죄하려 하느냐고 반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항변은 열화처럼 터져 나온 거인들의 질타에 묻혀 버렸다. 닥쳐라! 저 죄인들에게 죽음을! 딸을 망신당한 볼토르가 최종 판결을 내렸다. 치욕을 당한 베스틀라와 그것을 저지른 부리와 보르 일가 를 모두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볼토르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서리 거인들이 달려들어 베 스틀라와 부리, 보르의 팔 다리를 붙잡고 갈기갈기 찢어 발겨 버렸다. 그러고도 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그 들은 피투성이 고깃덩이가 된 세 명의 몸뚱아리를 짓이겨서 사방에 멀리 던져 버렸다. 한편, 죽기 직전에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난 오딘과 빌리, 베의 세 형제들은 빙하 계곡의 구석에 숨어 웅크리고 있었다. 몸을 깊이 묻고 귀만을 살짝 내놓은 채, 바깥소식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그들에게 어머니 와 아버지가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는 생생하게 들려 왔다. 부모의 죽음을 깨달은 세 형제는 소리 죽 여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서리 거인들은 왜 우리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인 걸까? 엄밀히 따지면 그들도 우리의 친척 이 아닌가? 같은 가족이 되었는데, 왜 받아들이지 않고 저렇게 죽여버린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세 형제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리 없었다. 의 문을 풀기 포기한 형제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다른 감정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모를 참혹하게 죽인 원 수이자 일가족인 서리 거인들에 대한 증오였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0

341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느낀 고통을 가슴 깊이 새긴 형제들은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면 힘이 필요했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신과 거인의 피를 모두 받은 혼혈아였고 두 종족이 가진 장점을 모두 한 몸에 갖춘 존재들이었다. 세 형제는 서리 거인들의 눈을 피해 아우둠라의 젖을 마시며, 할아버지인 부리가 나왔던 소금덩이 얼음 을 핥으면서 힘을 길렀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어느새 강건한 신체를 가진 어른이 되었다. 이제 웬만한 서 리 거인 대 여섯명 쯤은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붙었다고 해도, 그들 셋이서 아무도 도와주는 세력이 없이 수많은 서리 거인들 전체 와 싸우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복수를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던 세 형제 중 장남인 오딘이 기발한 제안을 했다. 모든 서리 거인들의 근원이자 그들을 낳은 이 미르를 죽이자. 이미르는 긴눙가가프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몸집을 가졌고, 따라서 그 몸 안에 담긴 피의 양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미르를 죽이면 자연히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올 것이고, 그 피의 홍수 에 모든 거인들은 빠져 죽게 된다. 이미르 단 한 명을 죽여 서리 거인 전체를 없애버리는 일이니 얼마나 효과적인 복수인가? 큰 형의 말을 들은 다른 두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자신들의 힘이 모자랄까봐, 빙산에서 얼음덩이를 떼어 내 날카롭게 갈아 무기로 삼았다. 이윽고 셋은 긴눙가가프의 중심에서 드러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이미르에게로 다가갔다. 이미르에게 접 근한 세 형제는 폭풍 소리처럼 숨을 몰아쉬고 천둥같이 코를 고는 초대형 거인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한동 안 기가 질렸다. 이미르를 보고 있는 오딘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낳은 외할아버지인 볼토르 의 아버지이니, 이미르는 자신들의 외증조부다. 서리 거인들이 부모와 할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들이 도망 가 숨어 있을 때도, 이미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대로 눈감아 주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지금 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르의 간접적인 보살핌 때문이었다. 그런 이미르를 끝내 죽여야 하는 가? 오딘은 고개를 젓고 감상을 털어버렸다. 이미르를 살려두면 복수는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이미르를 죽 이지 않고 돌아선다고 해도, 자신들은 서리 거인들의 눈을 피해 영원히 숨어 살아야 한다. 어차피 이미르 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미래는 없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1

342 결심을 굳힌 오딘은 동생들에게 눈짓을 했다. 먼저 날카롭게 갈아둔 얼음송곳으로 이미르의 두 눈을 찔 러 장님을 만든다. 아무리 우람한 거인이라고 해도 앞을 볼 수 없다면 힘을 쓸 수 없다. 그런 다음, 버둥대 는 이미르의 급소를 찾아내 공격한다면 손쉽게 일이 끝난다. 먼저 오딘이 얼음송곳으로 이미르의 오른쪽 눈을 힘차게 내리 찔렀다. 눈꺼풀로 뒤덮여 감겨진 눈이었지 만, 얼음송곳이 눈 속으로 파고들자 퍼억!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피가 흘러 나왔다. 파 란, 너무나 시퍼런 색깔의 피였다. 한참 곤하게 자고 있던 이미르는 갑자기 오른쪽 눈에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것은 통 증으로 바뀌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에 이미르는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당황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형의 모습을 본 빌리와 베는 용기를 얻어 자신들도 얼음송곳으로 이미르의 남은 왼쪽 눈을 찔렀다. 오딘 은 그런 동생들에게 소리쳤다. 더 세게 찔러! 그래야 앞이 안 보인다! 날이 선 목소리를 들은 이미르는 두 눈을 찌른 장본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경악했다. 자기의 먼 핏줄 인 갓난아이들이 아닌가? 어미와 아비가 죽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숨겨 주었는데, 이제 이것들이 나한테 해코지를 하려 들다니?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분노한 이미르는 허공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쳤다. 서리 거인과 산악 거인들에게 빨리 와서 구해 달라고 몇 번이고 외쳤다. 그 목소리는 긴눙가가프에 살고 있던 모든 거인들이 분명하게 들었다. 이미르의 외침을 들은 오딘 삼형제는 놀라면서도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중단하면 그들은 부 모처럼 거인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게 된다. 오딘은 이만하면 이미르의 두 눈을 먹통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이미르의 숨통을 끊기 위해 그의 머리와 심장을 가격하라고 동생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그 일도 쉽지 않았다. 비록 두 눈이 멀었지만, 이미르는 두 팔을 휘두르며 괘씸한 어린 것들을 붙 잡아 요절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빙하보다 더 거대한 이미르의 팔이 허공을 휘저으며 굉음을 내 는 모습을 본 빌리와 베는 겁을 먹고 멈칫거렸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2

343 동생들이 뒤로 물러서자 본 오딘은 분노하여 이미르의 머리를 향해 얼음송곳을 내리쳤다. 이미르의 팔이 그를 잡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때마다 오딘은 절묘하게 몸을 이리저리 피하며 이미르의 머리를 몇 번이고 찍었다. 그러나 뇌를 보호하고 있는 그의 머리는 다른 신체부위보다 훨씬 단단했다. 만년설을 떼어 내 만든 얼음 송곳도 몇 번 부딪치더니 끝내는 부러지고 말았다. 형! 빌리와 베가 비명을 질렀다. 낭패를 맛본 오딘은 쓸모없게 된 얼음송곳을 내팽개치고 온 힘을 다해 이미르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에 비하면 오딘의 몸은 먼지보다 작았지만, 오딘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주먹을 내리치고 때릴 때마다 그 의 몸 안에서는 기이한 힘이 흘러넘치면서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어머니인 베스틀라를 통해 받은 서리 거인의 피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산물인 신의 피와 만나 합치면서 새로운 힘을 부여해 준 것이었다. 큰 형의 용전분투를 본 두 형제들도 용기를 내어 이미르 때리기에 동참했다. 빌리와 베는 이미르의 심장 을 감싼 가슴 부위를 손톱으로 할퀴고 이로 물어뜯으면서 찢어 내었다. 오딘처럼 그들도 이미르를 공격할 때마다 몸속에서 힘이 솟구쳐 오르면서 더욱 열을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거대하던 이미르의 몸도 차츰 움직임이 둔해지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오딘은 안심하지 않았다.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바삐 달려오고 있는 수많은 거인 무리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르가 죽지 않는다면 복수는 고사하고 그들의 목숨마저 무사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이 일을 완성시켜 야 한다. 됐다! 심장이야! 이미르의 심장을 마침내 우리 손에 넣었어! 빌리와 베가 탄성을 질렀다. 두 형제의 악전고투 끝에 이미르의 가슴 부위가 파헤쳐져 커다란 심장이 모 습을 드러냈다. 폭포처럼 웅장한 소리를 내며 원초 거인의 몸 구석구석에 피를 공급하는 기관을 터뜨리면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나게 된다. 빨리 터뜨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3

344 오딘이 명령하고 곧 실행에 옮겼다. 빌리와 베도 형을 따라 이미르의 심장을 내리쳤다. 그러나 몇 번이고 공격을 해도 심장은 좀처럼 망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하지? 울상이 된 동생들이 큰 형을 바라보자, 오딘은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생각해. 그리고 떠올려. 서리 거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고 통을 그들이 느낀 분노와 증오가 우리의 혈관 속에 흐른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결코 약해지지 않아. 형의 말을 들은 두 형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분노가 그들의 몸속에 끓어올랐고, 이 내 그들은 새로운 힘을 받았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미르가 간간히 비명을 질렀지만, 어느새 오딘 삼형제가 외치는 복수와 증오의 외침이 그것을 압도해버렸다. 미친 듯이 심장을 공격하는 그들의 모습은 베스틀라와 보르를 찢어죽이던 거인들보다 더 잔인하고 포악했다. 저기 놈들이 있다! 죄인인 주제에 조상마저 죽이려 드는 저 극악무도한 놈들을 반드시 죽여라! 거인들의 선두에 선 볼토르가 오딘 형제들을 발견하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모습을 본 오딘 형제 들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맞상대를 하는 대신 더욱 힘을 내어 이미르의 심장을 찢어 나갔다. - 퍼어억! 마치 폭포수 같은 힘찬 핏줄기가 이미르의 찢겨진 심장의 틈새에서 터져 나왔다. 오딘 형제들은 황급히 이미르의 심장에서 물러나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미르의 주변에 몰려온 수 많은 거인들이었다. 오딘 삼형제를 본 거인들은 제각기 목청 높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천륜을 거스른 패륜 아, 더러운 사생아, 살인자 등등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오딘과 두 형제들의 귀에 와닿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파멸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이미르의 심장에서는 맹렬한 기세로 피가 분출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심장 뿐 아니라 몸 전체에 서 피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나왔다. 기세좋게 달려온 거인들은 그 광경을 보자 오딘 형제들을 질타 하던 목소리를 거두고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4

345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 쏴아악! 영문을 몰라 허둥대던 거인 무리들의 머리 위로 이미르의 피가 쏟아 부어졌다. 당황한 거인들은 피가 쏟 아지는 것을 피해 자리를 옮겼지만, 어느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발 아래가 푸른 색의 물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놀랄 사이도 없이, 파란 수면은 순식간에 그 수위를 높였다. 처음에는 발목 아래인 물결은 무릎과 장딴지에 이어 허리까지 오르더니, 마침내 가슴과 목까지 차올랐다. 어어, 하는 사이에 거인들의 머리 위마저 선명한 파란 물결이 차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모든 거인들을 낳은 시조인 이미르가 흘린 피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이미 르의 몸에서 터져 나온 핏물은 대홍수가 되어 긴눙가가프 전체를 삽시간에 뒤덮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서른을 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꽉 잡아! 절대 손을 놓아선 안 돼! 오딘은 양 손에 동생인 빌리와 베를 꽉 붙잡으며 그렇게 다짐시켰다. 이미르가 죽어가면서 흘린 피의 바 다를 떠다니며 그들은 서로를 굳게 의지하며 살아나기만을 바랬다. 아무리 이미르가 거대하고 그가 남긴 피의 양이 많다고는 해도 대홍수가 계속되지는 않고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그럴 때면 저 가증스러운 서리 거인들은 모두 피바다에 빠져 죽고 자신들만 살아남으리라. 새로 도래할 신세계의 주인들은 바로 자신들 세 형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에 오딘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오딘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얘야 오딘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죽었어야 할 이미르가 아직 살아있었나? 아니다. 이건 이미 르의 망령이 남긴 공허한 메시지일 뿐이다. 당신의 자손들이 벌인 죄악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렇다 해도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느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끝내 우리 자신마저 죽게 되었을테니까요. 어리석구나.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네가 지금 한 짓이 언젠가 너와 네 후손들에게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5

346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요. 어찌되었든 이제 당신은 죽은 몸입니다. 죽은 자는 산 자들의 일에 관여 할 수 없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외증조부님. 건방진 녀석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피바다의 표면을 떠다니는 세 형제들의 표류는 멈추었다. 수면이 더 이상 차오르 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오딘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빙산을 발견하고 그 위에 올라갔 다. 빙산에 오른 오딘과 형제들은 남쪽으로 행선지를 옮겼고, 무스펠헤임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를 접했다. 그러자 그들은 신비한 힘이 몸속에서 생성되는 것을 느꼈다. 최초의 생명체인 이미르를 탄생시킨 열기와 냉기의 결합이 이제 오딘과 세 형제들에게도 갖추어진 것이 다. 그들의 마음속에 파괴 대신 창조의 욕망이 차올랐다. 지금까지 지겹게 보아오던 끝없는 어둠과 얼음만 이 가득 찬 불모의 세계가 아니라, 좀 더 따뜻하고 생명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었다. 오딘과 세 형제는 피의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르가 흘린 피가 그들의 코와 입속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다른 거인들처럼 익사하지 않았다. 이윽고 바다의 맨 밑에 누워있는 이미르의 거대한 사체가 그들 의 눈에 들어왔다. 오딘 삼형제는 온 힘을 다해 이미르의 시체를 들어 올렸고, 미처 피바다에 잠기지 않은 긴눙가가프의 공간으로 끌고 갔다. 이미르의 시체를 내려놓은 오딘과 삼형제는 무스펠헤임의 열기를 접하고 손에 넣은 힘을 사용했다. 그러 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미르의 몸은 거대한 땅이 되었고, 그의 두개골은 푸른 하늘과 구름으로 변했 으며, 뼈는 산과 돌이 되었고 이빨은 모래가 되었다. 털은 나무가 되었으며, 그가 흘린 피는 그대로 푸른 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오딘과 두 형제들은 땅 위에 살 수많은 생명체들을 만들었고, 그들과 짝을 지어 새로운 신들과 생명들을 낳았다. 이제 그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고, 기적을 일으키는 진정한 신이 된 것이다. 북유럽 신화 의 창조 설화는 이렇게 처음부터 살벌한 살인으로 시작되었다.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46

347 76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48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22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힘과 마법의 대결 심심하면 거인들의 왕국인 요툰헤임과 철의 숲으로 원정을 나가 힘센 거인들과 온갖 괴물들을 때려잡는 모험을 즐기던 천둥신 토르는 어느 날, 놀라운 선언을 했다. 요툰헤임의 수도인 우트가르드로 직접 가서 그곳의 거인들과 힘을 겨루겠다는 내용이었다. 토르,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 다른 신들은 놀라 토르를 말렸지만, 토르는 자신의 힘이면 충분히 그들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동료인 지혜의 신 로키와 두 명의 하인 티알피와 로스크바를 데리고 요툰헤임으로 떠났다. 두 마리의 염소가 모는 전차를 타고 우트가르드로 향한 토르는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한 나무들이 자란 숲에 발을 디뎠다. 낮에도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은 밤이 되자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 는 암흑으로 변했다. 토르 일행들은 어느 쪽이 우트가르드로 향하는 길인지 알 수가 없어 헤매기만 했다. 궁리 끝에 토르는 발이 빠른 티알피에게 주위에 식량을 구하고 하룻밤을 머물 곳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토르의 명령을 받은 티알피는 부리나케 달려 나가 숲속 여기저기를 정찰한 결과, 가까운 곳에 아주 커다란 저택이 있다고 알려왔다. 그 말을 들은 토르 일행이 달려가 보니, 티알피의 말대로 매우 큰 집이었다. 심지어 아스가르드의 궁전 보다 더욱 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집에는 문이 없고 다섯 개의 깊은 방들 만이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몹시 피로했던 토르 일행은 잠들려 했지만, 뜻하지 않게도 갑자기 주위에서 지진 같은 굉 음이 들려오는 바람에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집 밖으로 나간 토르는 깜짝 놀랐다. 도저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48

349 인이 그들이 자고 있던 집 옆에서 드러누운 채, 코를 골고 있었던 것이다. 토르 일행을 고통스럽게 만들었 던 소리의 정체는 바로 거인이 코를 고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이 머문 집은 거인이 벗어둔 장갑이었다. 당신들은 내 장갑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군. 나는 스크리미르(Skrymir)라고 하오. 어디로 가는 길이 오? 나는 아스가르드의 수호자인 천둥의 신 토르요. 우리는 거인국의 수도인 우트가르드로 가려는 길이었 소. 당신이 그곳을 안다면 길 안내를 해주겠소? 그건 간단하오. 나만 따라오시오. 스크리미르는 토르 일행들을 인도하다가 잠시 쉬었다 가자면서 땅바닥에 드러눕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그를 따라다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토르 일행은 그가 짊어지고 있던 자루 속에 음식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여겨, 자루의 입구를 묶은 끈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자루를 묶은 끈은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토르는 스크리미르에게 당신이 이 자루를 열어 주시오! 라고 몇 번이나 소리를 쳤지만, 그는 끝내 코를 요란하게 굴며 잠만 잘 뿐이었다. 화가 치민 토르는 묠니르를 꺼내 들고 그의 이마를 힘차게 내리쳤다. 공중을 번뜩이는 섬광과 엄청난 굉음 이 울려 퍼지며 스크리미르를 강타했다. 그러자 스크리미르는 잠시 눈을 뜨더니 내 머리 위에 나뭇잎이 떨어졌나 보군. 하며 다시 잠에 빠졌 다. 토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어떤 거인도 자신이 휘두른 묠니르의 일격에 맞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저렇게 멀쩡하단 말인가? 스크리미르가 자는 틈을 타서 토르는 두 번이나 더 묠니르를 내리쳤지만 그때마다 스크리미르는 내 이 마에 도토리가 떨어졌나? 아니면 새들이 똥을 싼 건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토르는 기가 질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잠에서 깨어난 스크리미르는 토르 일행을 우트가르드가 보이는 곳까지 안내하고는 숲속으로 걸 어가 사라졌다. 스크리미르의 안내를 받아 우트가르드에 도착한 토르 일행은 굳게 잠긴 대문의 틈새로 들어가 왕궁의 열 려진 문 안에 다다랐다. 그들을 본 거인들은 비웃음과 조롱을 던졌다. 왕궁의 한쪽 끝에 설치된 옥좌에 앉아 있는 거인왕 우트가르드 로키는 토르 일행을 보고는 히죽 웃으며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49

350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토르로군. 옆에 있는 쪽은 간사한 사기꾼 로키고. 어쩐 일로 우트가르드를 찾아 왔 나? 우리는 당신들을 상대로 힘과 능력을 겨루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소. 오늘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니 라 손님으로 찾아온 것이오. 토르의 말을 들은 우트가르드 로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손님이라, 말은 그럴싸하군. 하지만 이곳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으려면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네. 당신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나? 그러자 거인왕과 이름이 같은 로키가 나서서 말했다. 무엇이든 먹게 해 주시오. 우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어 죽을 지경이오. 고기든 죽이든 술이든 다 내오시오! 배가 고프다는 건가? 좋아, 여기 로기라는 친구와 한 번 먹기 시합을 벌여 보게나. 거인왕의 지명을 받은 로기라는 이름의 거인이 나오자, 우트가르드 로키는 하인들을 시켜 삶고 구운 고 기 요리가 가득 담긴 접시 두 개를 가져와 탁자 위에 놓도록 했다. 로기와 로키와 마주본 채로, 고기를 먹 어대기 시작했다. 한창 굶주렸던 로키는 서른을 셀 동안에 접시에 담긴 고기들을 몽땅 먹어치우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동 료들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내가 이겼지? 라는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짓던 로키는 그러나 로기를 보자 마자 그 웃음을 멈춰버렸다. 로기는 고기들의 살점만이 아니라 그릇(목제)과 뼈다귀에 식탁까지 남김없이 먹어버렸던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로키를 비웃으며 우트가르드 로키는 로기의 승리를 선언했다. 거인들은 박수를 치며 환 호했다. 일행 중 가장 지혜롭던 로키가 뜻하지 않게 패배의 일격을 당하자, 안되겠다 싶었는지 티알피가 나서서 대결을 신청했다.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0

351 나는 누구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소. 나와 달리기 시합을 할 상대를 불러오시오. 신도 거인도 아닌 인간인 주제에 큰소리는 잘 치는군. 그래, 후기(Hugi)! 와서 이 친구와 뜀박질을 겨루 어 보게나! 우트가르드 로키의 명령을 받은 거인 후기는 티알피와 함께 왕궁의 중심 홀에서 경주 시합을 벌였다. 시 합은 삼판제로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티알피가 근소한 차이로 후기에게 뒤졌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 합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후기가 훨씬 빨리 달렸다. 세 번이나 전력을 다해 달리고도 태연한 후기 를 기진맥진한 티알피는 허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자네도 꽤 빨리 달렸어. 인간들뿐 아니라 웬만한 신이나 거인도 자네처럼 달리기 는 어려울 거야. 자, 이번에 나와서 겨루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인가? 일행들이 차례로 망신을 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보고 있던 토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술이나 주시오! 이곳에 있는 모든 술들을 다 내온다고 해도 내가 다 마셔버리리다. 좋아. 내가 쓰는 술잔을 가져오너라. 우트가르드 로키의 시종은 왕의 전용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토르에게 가져다주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토르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거인들 중에서는 두 모금이나 세 모금 안에 그 잔을 비우지 못하는 자가 없다네. 그러니 자 네가 한 모금에 잔을 다 비운다면 대단한 주량이라고 인정해주지. 거인왕의 조롱을 못마땅하게 듣던 토르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냅다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을 실컷 마 시던 토르는 문득 마시기를 잠시 멈추고 잔을 보았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렇 게 술을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잔이 조금도 비지 않았던 것이다. 마시기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는 수위였 다. 어떻게 된 건가? 자네의 목마름은 벌써 끝이 난 건가? 우트가르드 로키의 비웃음을 무시한 채, 토르는 다시 술을 마셨다. 숨도 쉬지 않고 계속 들이켰지만, 잔 을 입에서 때고 볼 때마다 술잔은 그대로였다. 짜증이 난 토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으로 술을 들이켰지만, 계속 마시다가는 배가 터질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술잔을 내려다보다 술은 처 음보다 아주 조금만 줄어든 상태였다.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1

352 영문을 알 수 없어 망연자실한 토르를 거인들이 낄낄거리며 놀려댔다. 우트가르드 로키도 실실 웃으며 토르에게 말을 건냈다. 아, 자네는 술잔을 세 번이나 기울였어도 겨우 한 잔도 비우지 못할 정도로 주량도 약했나 보군. 보기 보다는 허약한 모양이야. 자네의 체력을 고려해서 좀 더 쉬운 과제를 내주겠소. 여기 있는 고양이나 한 번 들어보게나. 우트가르드 로키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옥좌 밑에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뛰쳐나왔다. 검은 색의 고양 이가 토르의 발 앞에 멈추어 서자, 우트가르드 로키는 한 마디 덧붙였다. 여기 있는 거인들 중 가장 어리고 약한 자들도 그런 고양이 쯤은 나뭇개비처럼 들어 올릴 수 있지. 나한테 지금 저 고양이를 상대하라는 건가? 토르는 자신을 무시하는 우트가르드 로키의 처사에 분노하여 단숨에 고양이를 들어 그에게 던지려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토르가 아무리 힘을 써서 고양이를 들어 올리려고 해도, 도무지 고양이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의 네 발이 땅에 붙어 있기라도 한 건지, 전혀 요지부동 이었다. 결국 토르는 용을 쓰다 못해 몸 안에 잠재된 신성한 권능까지 발동했지만, 고작 고양이의 발 한 쪽을 들어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안 됐군, 토르여. 그대는 저 작은 고양이조차 이기지 못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자랑하는 무적의 용 사 토르도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나? 우트가르드 로키의 빈정거림에 다른 거인들도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비웃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 힌 토르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비아냥거리지만 말고 나와라! 나와 싸우고 싶은 자가 있거든 누구와도 상대해 주겠다! 그럴 줄 알았네. 기다렸다는 듯이 우트가르드 로키가 손뼉을 치자, 두 거인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 저편에서 웬 노 파 한 명이 걸어왔다. 노파가 우트가르드 로키의 옥좌 옆에 발걸음을 멈추자 거인왕은 그녀를 토르에게 소 개했다. 내 유모인 엘리라네. 늙었지만 웬만한 장정 쯤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지. 참고로 여기 있는 거인 용사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2

353 들도 무술 연습을 할 때면 이 엘리와 씨름을 하곤 한다네. 당신을 위해서 불렀으니, 한 번 힘을 써서 그녀 를 넘어뜨려 보게나. 거인들은 또다시 킬킬거렸다. 토르는 미친듯이 분노하여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붙잡고 번쩍 들어 던지 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양이를 상대할 때처럼 엘리는 토르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토르는 자신이 정말 노파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몇 번 이고 그녀를 살폈지만, 영락없이 늙은 할머니였다. 헌데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힘을 써도 그녀는 바윗돌처럼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하고 고양이를 들어 올렸을 때처럼 신성한 권능까지 발휘했지 만, 어떻게 된 것이 고양이보다 더 힘이 들기만 했다. 토르의 몸부림이 안쓰러웠는지, 급기야 엘리는 토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밀어붙였다. 당황한 토르는 발에 힘을 주고 버티려 했지만, 노파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거센지 결국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천상 과 지상을 종횡무진 누비며 수많은 거인과 괴물들을 때려눕힌 자신이 고작 늙은 노파한테 굴복하고 말다 니. 토르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죽고만 싶었다. 승부는 끝났다! 엘리는 그만 물러가라. 토르와 그 일행들의 능력은 볼만큼 보았으니 이제 쉬고 저녁을 들게나. 뜻밖에도 거인들은 시합에서 진 토르 일행들을 더는 놀리거나 비웃지 않고, 그들에게 풍성한 저녁 식사 를 대접해 주었다. 음료는 맥주와 벌꿀술이 올라왔고 소시지와 돼지고기, 쇠고기와 연어가 음식으로 차려 졌다. 하지만 토르와 그 일행들은 아무리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셔도 전혀 맛을 느끼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뜬 눈으로 밤을 지세다 아침을 맞은 토르는 로키와 티알피, 로스크바를 깨우고 서둘려 우 트가르드를 떠나려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실컷 망신을 당한 이 치욕스러운 곳을 하루빨리 벗어날 생각뿐 이었다. 그러나 우트가르드 로키의 목소리가 그들을 붙잡았다. 갈 땐 가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야지. 손님을 굶겨서 보내는 건, 주인된 도리가 아니네. 토르는 그다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우트가르드 로키가 하도 붙잡는 바람에 다시 자리에 앉아 식 사를 들었다. 저녁 때와 마찬가지로 푸짐한 식탁이 차려졌고, 토르를 제외한 모든 이가 맛있게 음식을 먹 고 마셨다.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3

354 아침 식사를 끝낸 토르 일행은 거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트가르드의 성문을 나섰고, 그 뒤를 우트가르 드 로키가 따랐다. 토르는 어제 자신을 비웃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그들의 태도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 다. 토르 일행이 성문 밖에 나오자 우트가르드 로키는 토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우트가르드에 직접 와서 일을 겪어본 소감이 어떤가? 기다린 말을 들은 토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소. 당신들이 내가 당한 굴욕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 걸 생각하 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수 없을 거요. 허허,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우트가르드 로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토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어제 당신들의 능력을 보고 매우 놀랐네. 당신들의 상상을 초월한 힘을 보고 는 우리 모두 진심으로 감탄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어리둥절한 토르에게 우트가르드 로키가 그 동안의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당신이 처음 만난 거인 스크리미르는 바로 마법의 힘을 써서 변신한 나였네. 내 몸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정도는 아니네. 당신은 내가 묶어 놓은 보따리의 끈을 풀려고 했지만 끝내 풀지는 못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끈에 마법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당신은 내 머리를 향해 그 무시무시한 천둥 망치 묠니르를 세 번이나 내리쳤지만 나는 무사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자네에게 마법을 걸어서 산을 나로 보이게 해서, 산을 나 대신 내리치도록 했지. 자네들 일행이 머물렀던 산에 가보면 세 개의 큰 골짜기가 새로 생겼을 텐데, 그건 자네가 묠니르로 내리친 흔적 이라네. 그제서야 토르는 자신이 스크리미르를 상대하면서 겪었던 난처함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4

355 당신 일행이 우트가르드에 처음 와서 벌인 시합 중, 로키는 로기와의 먹기 시합에서 졌지. 하지만 로 기는 내가 마법을 써서 변화시킨 불이었다네. 불은 나무 그릇이든 뼈든 모조리 불태우니 아무리 먹성 좋은 로키라도 이길 수가 없지. 또, 티알피가 달리기에서 경쟁한 후기는 내 생각에 거인의 모습을 씌워서 만든 것이었다네. 티알피는 정 말 빨랐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보다 더 빠를 수는 없지 않겠나? 이 모든 것들을 차지하고라도 토르, 자네는 정말 굉장했네. 어제 우리가 자네를 비웃은 것 같았지? 하지 만 아니네. 우리는 자네의 엄청난 권능에 정말 감탄했다네. 자네가 처음 술잔을 받아들고 마신 건 술이 아니라 바닷물이었어. 그 술잔의 끝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 고, 자네는 멋도 모르고 바닷물을 술처럼 들이킨 거지. 지금 바닷가에 사는 인간들은 갑자기 바닷물이 줄 어든 모습을 보고 놀라서 난리가 났는데, 세상에서는 그걸 가리켜 썰물이라고 하더군. 그 다음, 자네는 고양이와 씨름을 하다 그 녀석의 다리 한 쪽을 들어 올렸지. 그건 고양이가 아니었어. 해저 밑에서 대지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였다네. 자네는 그 뱀을 들어 올렸지. 그것도 어찌 나 세게 들었던지 요르문간드는 하마터면 자신의 꼬리를 문 입을 놓치고 그 몸이 하늘인 아스가르드까지 닿을 뻔 했네. 요르문간드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인 미드가르드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뱀인데, 그 녀석을 자네가 들어 올린 거라네. 자네 혼자서 땅 전체를 들어 올린 거나 다름없는 일이지. 정말 놀랍지 않나? 마지막으로 자네는 엘리와 씨름을 하다 한 쪽 무릎을 꿇었지. 그 엘리는 이름 그대로 늙은 나이였어. 자 네는 내가 건 마법에 걸려 자기도 모르게 늙어가고 있었던 거네. 하지만 그렇게 나이를 먹고 죽기 직전까 지 간 상황에서도 한 쪽 무릎 밖에 꿇지 않은 자는 여태까지 자네 혼자 밖에 없었네. 이 우트가르드는 물 론이고 요툰헤임 전체를 뒤져도 늙은 것에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버티는 용사는 보지를 못했네. 자, 이만하면 자네가 겪은 일들의 결과가 이해되나? 그럼 난 이만 돌아가겠네. 참고로, 자네가 말했던 것 처럼 나도 두 번 다시 자네가 이곳으로 오지 않기를 바라네. 자네가 온다면 나는 나 자신과 백성들을 지키 기 위해서 마법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 말일세.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트가르드 로키가 자신들을 가지고 우롱했다는 말인가? 토르는 자신들이 농락당했 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분노가 폭발하여 묠니르를 꺼내 우트가르드 로키를 힘껏 내리쳤다. 묠니르에서 푸 른 번개와 천둥이 터져 나와 우트가르드 로키를 덮쳤지만,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마법을 써서 토르 의 눈을 피한 것이다. 미처 화가 가라앉지 않은 토르는 묠니르를 든 채, 우트가르드 성으로 달려갔지만 그렇게 거대했던 성채 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뿐 이었다. 토르는 묠니르를 도로 꽂아두고는 일행들을 데리고 아스가르드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맛본 허탈감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요툰헤임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토르는 자신의 귀에 우트가르 드 로키의 비웃음이 계속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5

356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6

357 77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58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42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고대 제왕들의 포악한 후손인 사흉( 四 凶 ) 요임금과 더불어 중국의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칭송받은 순임금 시절. 하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깊어진다는 말처럼, 아무리 황금시대라고 해도 나름대로의 문제점은 있는 법이니까. 특히 순임금의 치세 말기로 접어들자, 황하가 범람해 대홍수가 발생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 는 참변까지 일어났다. 놀란 순임금은 대신인 곤을 기용해 황하에 제방을 쌓고 홍수를 막도록 했지만, 10 년에 걸쳐 보수 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성난 황하의 물결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중원 땅의 대부분이 홍수로 피해를 입어 황폐해지고 농경지가 침수되자, 고심하던 순임금은 살아남은 이 재민들을 멀리 변방으로 보내 살게 하는 정책을 폈다. 당장 중원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그나마 홍수 의 피해가 덜 미친 변방으로 가면 먹고 살만 하겠다고 여겨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태어난 고향에서 떠나 먼 곳으로 선뜻 가려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순임금은 변방에 정 착한 백성들에게는 10년 동안 세금을 걷지 않고, 병역이나 각종 부역도 면제해주겠다는 파격적인 특혜까 지 베풀며 이주정책을 적극 추진해나갔다. 그런 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한 무리의 백성들이 중원의 도읍인 낙양으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서역 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과 황량한 황무지로 둘러싸인 서역의 기후는 따뜻한 중원에서 살던 백성들에게 적응하기 어려운 장애물이었다. 새로운 터전에 대한 꿈을 안고 온 백성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중원과는 달리, 나무가 부족하자 대신 사방에 널린 풍부한 흙을 이용했다.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집과 벽을 쌓고, 담을 둘러 마을을 꾸몄다. 날씨가 건조하고 비가 적게 내려 물을 이용한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자, 추위와 가뭄 에 강한 보리와 무를 재배했다. 그리고 흉년에 대비하여 집집마다 마굿간을 짓고 말들을 길러 사슴이나 토 끼 같은 동물들을 사냥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다. 라는 격언처럼, 중원의 이주민들은 그렇 게 낮선 서역에서 꿋꿋하게 살아갔다.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58

359 게 낮선 서역에서 꿋꿋하게 살아갔다. 서역의 생활을 보낸 지 어언 1년이 되던 날, 백성들은 가을을 맞아 추수를 마치고 겨울을 날 식량을 비 축하는데 성공했다. 곡물과 각종 동물 고기들을 비롯한 먹거리를 저장할 식량 창고를 짓던 날, 마을 전체 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이주하고 나서 얼마 동안 겪었던 고난을 이겨내고 굶주림에 시달릴 걱정을 떨쳐 버렸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곡식 창고가 완성된 지 다음 날,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창고에 보관된 그 많던 곡 식과 채소 및 고기들이 전혀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텅 빈 창고 안을 들여다 본 마을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지난 1년 동 안 건조한 공기와 모래바람에 시달리며 고생고생하며 이룩한 성과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그 허탈한 기 분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게다가 식량이 없어져 버렸으니 어떻게 겨울을 나겠는가?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주민들은 식량이 없어진 것이 누구의 짓인지,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두고 한참 입방아를 찧었다. 대체 누가 한 짓일까? 몰라, 사막의 도적단이 와서 훔쳐갔나? 말도 안 돼! 창고에 쌓아 놓은 식량들을 가져가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실어가야 하고 시끄러 운 소음이 나야 하는데, 어젯밤에는 말발굽 소리나 사람 발소리라고는 전혀 안 들렸어. 쥐 죽은 듯이 조용 했단 말이야. 훔친 건 둘째치고라도 대체 어떤 방법을 썼기에 그 많던 식량을 말끔히 가져간 거지?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 겨울을 무사히 보낼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던 촌장과 마을 원로들은 결국, 관아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백리나 떨어진 동쪽의 관청까지 달려가서 관장에게 일의 자초지정을 고백하고, 다음 해에 추수하여 갚을 테니 곡식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중원에 홍수가 발생해 경작지가 대부분 물에 잠긴 상황이라 곡식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래도 국고에 비축해 놓은 것으로 대략은 충당이 가능할거요. 일단 빌려주도록 하겠소. 관장의 말에 촌장과 원로들은 연신 허리가 굽어질 정도로 절을 하며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저희가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서 내년에는 반드시 이자까지 쳐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곡식 창고가 하룻밤 만에 몽땅 털린 거요? 당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 근처에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59

360 는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대규모 도적단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저희들도 궁금할 따름입니다. 관청으로부터 수레를 받고 거기에 식량을 실어 마을로 돌아온 촌장 일행은 곡물 창고에 다시 짐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젊은 장정들 열 명을 창고 주변에 배치해 놓아, 경비를 서게 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창고를 지키는 젊은이들은 횃불을 들고 사방에 선 채로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폈다. 하늘에는 보름달과 별들이 빛나고 쌀쌀한 공기가 그들의 폐부를 파고 들어왔다. 하지만 밤이 깊어 가도록 아무도 창고 주변에 얼씬하지 않았다. 따분한 경계 업무에 싫증을 느낀 장정들은 서로 모여서 불평 을 늘어놓았다. 젠장,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거야? 너무 조용한 게 더 불안한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푹 자고 오는 건데. 괜히 밤새워 경비나 서고 있자니 졸려.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특성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약탈자나 도둑의 모습이 보이지 않 자, 경비를 서던 젊은이들은 긴장감이 풀려 횃불을 창고 주변에 세워 놓고는 건물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 은 채, 잠을 청했다. 그들 중에서 이정이라는 청년은 계속 창고 건물 주위를 순찰하다가 다른 동료들이 모두 잠에 빠지는 모 습을 보자, 잠깐 눈 좀 붙인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하는 심정이 들어 자신도 창고의 뒤편에 가서는 등을 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스갯소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들어올리기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수수께끼가 있다. 답은 눈꺼풀이 다.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해도 졸음을 부르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고 한 번 잠 에 빠지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졸음의 기운이 쇠약해질 때까지 계속 자버리고 만다. 코까지 골며 정신없이 자던 청년들 중, 깊이 잠들지 않았던 이정은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듣고는 잠을 깼 다. 식량을 넣어 둔 창고 안에서 무슨 버석거리는 소리들이 계속 들려왔던 것이다. 도대체 뭘까? 건물 벽에 기대고 있던 이정은 살짝 열려진 창문의 틈에 조심스럽게 눈을 대고 안을 살폈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건물 안이 눈에 들어오기 시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60

361 작했다. 그러자, 이정의 눈에는 곡식과 고기들을 놓아둔 가마니와 가죽 자루들을 쌓아놓은 사이에서 하얀색의 물 체가 보였다.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얀 털을 가진 한 마리의 양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양을 키우는 사람이 있었나? 이정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을 살폈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양이 가죽 자루를 물어 뜯더니, 그 안에 들어있던 말린 돼지고기를 꺼내 씹어 먹지 않는가! 엄연한 초식동물인 양이 어떻게 고기를 먹는 것인지? 이정은 도무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 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양의 얼굴이 사람 같았다. 그것은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양의 입가에는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도대체 저게 양이 맞나? 이정이 혼란한 정신을 끌어안고 고민하는 사이, 사람의 얼굴을 한 괴상한 양은 순식간에 자루 안에 든 돼지고기들을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이정은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 계속 보고만 있었 다. 사람의 얼굴을 한 양이라는 괴이한 생물의 존재에 놀라 몸이 움츠러든 탓도 있지만, 곡식 창고를 지켜 야 한다는 사명감보다 저 양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앞섰던 것이다. 큰 개 정도 밖에 안 되는 몸집의 하얀 양이지만, 그 식욕은 실로 대단했다. 사람이 한 끼 식사를 마칠 무 렵에 양은 벌써 창고 안에 든 곡물과 돼지고기들을 몽땅 먹어버렸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는 지, 곡물과 고기를 넣어 둔 가마니와 가죽 자루까지 전부 탐욕스럽게 씹어 먹었다. 양이 긴 혓바닥으로 입 가를 핡아 대자, 창고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들 일어나! 저기 곡식 도둑이 있다! 뒤늦게 이정이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다른 청년들은 대답 대신 요란하게 코를 골 뿐이었다. 이정은 계속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소용없어 그 녀석들은 모두 내가 건 요술로 잠들었거든 히히히 그 목소리를 듣자, 이정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서역으로 이주하기 전, 낙양 부근의 살던 마을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이 실성한 끝에 황하로 뛰어들어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외치던 목소리와 너무나 닮 았다.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61

362 뭐야? 지금 누가 말한 거야? 여기 나 말고 누가 있냐? 응? 히히히 기괴한 음성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이정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창고 안에서 곡식을 먹 어치우던 양이었다. 그럼, 설마 저 양이 말을 걸었단 것인가? 사람의 얼굴을 한 양은 누런 빛깔이 감도는 기분 나쁜 눈동자로 이정을 노려보면서 음메, 거리는 울음소 리 대신 정확히 사람의 언어로 말을 했다. 다른 녀석들은 전부 곯아 떨어졌는데, 넌 이상하게 버티는구나. 기력이 더 왕성한가 보지? 하지만 소 용없어. 너희들이 아무리 경비를 세우고 횃불을 켜도 내가 창고 안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건 막지 못하 니까. 히히히 양의 목소리는 보통 인간의 음성과 차이점이 없었고, 듣고 있는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강한 혐오감과 공 포가 밀려왔다. 너, 너 뭐야? 양이 어떻게 말을 하는 거야? 간신히 용기를 내어 이정이 묻자, 양은 미칠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히히히히히! 내가 양? 내가 양이냐고? 네 눈엔 내가 양으로 보이냐? 응? 히히히히히히! 한참 동안 웃어대던 양은 혐오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정을 응시했다. 미리 말해두건대, 나는 다른 세 녀석보다 점잖은 성격이다. 너희들이 창고에 먹을 것만 제대로 갖다 놓으면 해치지는 않을게. 공연히 쓸데없는 반항 같은 건 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너희가 곡식 대신 먹히게 될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이만 간다. 창고에 먹을 거나 잘 준비해 놔라. 응? 히히히히히 말을 마친 양은 등을 돌리더니 바람처럼 빠른 뜀박질을 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 던 이정은 영락없이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아침이 되자, 마을은 또 다시 발칵 뒤집혔다.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소동의 중심 에 이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정은 간밤에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누구 하나 그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62

363 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자네 미쳤나? 아니면 악몽을 꾸고서 그걸 현실과 혼동하는 건가? 아, 글쎄 정말이라니까요! 이제까지 곡식 창고의 식량이 몽땅 없어진 것도 다 그 놈이 저지른 짓이었어 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 양이 와서 죄다 먹어치우고 도망갔다니까요! 이봐, 이 친구 대체 왜 이러나? 서역 땅에 와서 고생을 하더니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이야.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늘에 맹세코 제가 보고 들은 건 모두 진실입니다! 제발 믿어주세요! 아무래도 수상한데, 자네 혹시 외지인들과 미리 짜고서 곡식들을 마을 밖으로 빼돌린 건 아니야? 그렇 지 않고서야 어떻게 창고에 보관된 식량들이 하룻밤만에 전부 없어져? 처음 창고가 도난당했을 때의 일도 자네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정말 왜 이러십니까?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중원에서 살다가 이곳 서역으로 이주한 사인데, 아무도 아 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누구와 미리 짭니까? 그러면 우리더러 자네 말을 믿으라는 거야? 세상에,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얼굴을 가진 양이 창고 로 들어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식량을 몽땅 먹어치웠다고? 도대체 그런 거짓말은 누구한테서 배웠나? 이정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분명히 보고 들은 일이지만 증거가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게 쉽게 믿을 수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자두는 건데, 하는 후회가 그의 가슴 속에 밀려왔다.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63

364 78 <중국 신화> 김용옥 교수의 호인 도올 은 중국 신화의 괴물 이름!

365 <중국 신화> 김용옥 교수의 호인 도올 은 중국 신화의 괴물 이름! :30 논어와 맹자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하여 동양 철학의 대중화를 이루고 있는 도올 김용옥 교수, 이 사람의 호인 도올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요? 일설에는 그냥 돌을 길게 늘인 말이라고 하지만, 위키백과에서 보 니 도올은 이렇게( 檮 ) 쓰더군요. 그런데 이 도올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고 하니, 바로 고대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사악한 괴 물의 이름이랍니다. 순임금과 더불어 요순시대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만든 고대 중국의 성군인 요임금이 다스리던 시절, 중국 에는 네 마리의 극악무도한 괴물들이 살면서 사람들을 잡아먹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 공포의 대상이 되었 습니다. 그들 넷을 가리켜 사람들은 사흉( 四 凶 )이라고 불렀는데, 갈수록 흉폭해지는 사악함을 참지 못해 요임금은 그들을 먼 서쪽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고 합니다. 이 사흉은 혼돈( 渾 沌 ), 도올( 檮 ), 궁기( 窮 奇 ), 도철( 饕 餮 )인데 먼저 혼돈에 대해 알아보죠. 혼돈은 개와 비슷한 짐승인데, 몸이 털투성이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상 한 생물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남을 해치는 못된 꾀를 생각할 때만 신이 나 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어대고, 선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한편 악한 자들을 잘 따랐다고 합니다. 도올은 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몸을 가진 반인반수인데, 고대 중국에서는 이렇게 사람과 짐승이 결합된 신이나 괴물들이 많았습니다. 입에는 멧돼지의 이빨 같은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고, 혼돈처럼 온 몸이 털에 뒤덮여 있으며, 꼬리가 매우 길어 약 3미터나 되었다고 합니다. 도올에게는 몇 가지 재미있는 특징이 있는데, 우선 남에게 배우는 것을 모릅니다. 남이 아무리 좋은 것 을 가르쳐 줘도 도무지 따르지 않고, 무조건 자기 고집만 박박 우기는 녀석인 셈이죠. 그래서 가르치기 어 렵다는 뜻인 난훈( 難 訓 )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김용옥 교수가 이 점에 착안해서 자기 별명을 지었던 걸까요? 또, 성격이 매우 고집불통이고 오만해서 한 번 싸우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고 합니 다. 요임금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계속 싸움을 일삼고 세상을 어지럽혔다고 전해집니다. <중국 신화> 김용옥 교수의 호인 도올 은 중국 신화의 괴물 이름! 365

366 도올의 친척 비슷한 괴물로 도수가 있는데, 이 짐승도 도올과 비슷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도올처럼 싸움 이 벌어지면 결코 물러서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사람들이 덫이나 함정을 놓아 잡으려고 해도 금 방 알아차리고 도망갈 정도로 영리하기도 했지요. 세 번째 괴물인 궁기는 두 개의 날개가 달린 호랑이입니다. 날개를 펴서 하늘을 날아 다녔는데, 예리한 발톱과 송곳니로 사람을 습격해서 잡아먹었습니다. 다소 식성이 특이했는지, 악한 자는 결코 먹지 않고 선 한 사람만 골라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그 중 가해자인 악인은 건드리지 않고 피해자인 선인을 노려 잡아먹는 셈이죠. 마지막으로 도철은 양과 비슷한데, 얼굴은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양처럼 온순한 동물은 아 니었습니다. 호랑이 같은 송곳니가 입 안에 잔뜩 나 있었으니까요.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풀이 든 나무든 고기든 뭐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식성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도철을 탐욕 의 대명사로 여겨, 청동기에 그 모습을 새기고 경계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도철은 사흉이란 명성에 걸맞게 악습도 지녔는데, 남을 공격하거나 잡아먹을 때는 늙거나 약한 상대만을 골라서 덮쳤고,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가만히 숨어 있다가 한 사람만 남게 될 때를 골라 습격했습니다. 참 으로 비열한 성품인데, 그래서 도철에게는 강제로 빼앗는다는 뜻의 강탈( 彊 奪 ), 약한 자를 괴롭힌다는 뜻 의 능약( 凌 弱 )이라는 악명이 붙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이들 흉악한 네 괴물들은 하나같이 고대의 성스러운 제왕들의 후손이라는 것입 니다. 혼돈은 제홍씨의 자손이고, 도올은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며, 궁기는 소호씨의 후예이며, 도철은 진 운씨의 자손이죠. 성군들의 가계에서 어쩌다가 이런 괴물들이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중국 신화> 김용옥 교수의 호인 도올 은 중국 신화의 괴물 이름! 366

367 79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68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47 흔히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원래 그는 대지와 지하 세계의 신이었다. 그의 호칭 중 하나가 "땅을 흔드는 신"인데, 그리스 인들은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을 포세이돈이 분노하여 대지를 뒤흔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68

369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나 강의 신들, 수많은 괴물과 인간 영웅들은 포세이돈을 아버지로 삼고 있는데, 이는 포 세이돈이 그리스 전역에 걸쳐 널리 숭배되었고 많은 도시 국가들이 그를 자신들의 선조로 삼아 자신들의 위상을 돋 보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에 제우스를 섬기는 신앙이 도래하기 전, 포세이돈은 바다 뿐 아니라 대지와 지하까 지 지배하며 제우스보다 더욱 강력한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가 지닌 무기인 삼지창 '트리아이나'는 제우스의 무기인 번개에 맞먹는 권능의 상징이었다.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69

370 그러나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대부분 거칠고 사나워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시시각각으로 파도가 일 고 거칠어지는 바다의 현상이 의인화된 것이었다. 그 중에서 다소 특이한 경우가 있는데, 포세이돈과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두 거인 형제인 오토스(Otus)와 에 피알테스(Ephialtes)를 들 수 있다. 테살리아의 왕인 트리오파스(Triopas)에게는 이피메데이아(Iphimedeia)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포세이돈을 사랑 하여 날마다 바닷가에 나와 그가 모습이라도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매일같이 차갑고 축축한 바닷바람이 부는데도 불 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에 감동한 포세이돈은 강의 신 에피네우스(Epineus)의 모습을 하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둘은 몸을 섞어 사랑을 나누었고, 정확히 열달 후 이피메데이아는 쌍둥이 거인 형제를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오토 스와 에피알테스였다.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70

371 제우스에 맞먹는 힘을 지닌 강력한 신의 아들이라 그런지, 오토스와 에피알테스는 불과 아홉 살이 되자 그 키가 무 려 산 아홉 개 만큼의 높이로 자랐다. 더욱이 두 형제는 특별한 축복을 부여 받았는데, 어떤 신이나 인간 및 괴물도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고 죽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버지인 포세이돈의 선물이었을까? 타고난 힘과 아버지의 도움을 믿고 우쭐해진 이들은 자신들이 제우스를 필두로 한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훨씬 강력 하다고 우쭐했다. 그리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신들을 몰아내고 둘이서 세계를 지배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토스와 에피알테스는 올림포스 산을 점령한 후, 각자 여신 아르테미스와 헤라를 아내로 삼겠다고 저승의 강인 스 틱스에 걸고 맹세했다. 스틱스 강에 걸고 맹세하는 일은 올림포스의 신들만이 하는 일인데, 두 형제는 자신들이 신이 라도 되는 것처럼 군 것이다. 하긴, 그들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신의 것이니까. 두 형제는 올림포스 산 위에 오사 산을, 또 그 위에 펠리오스 산을 쌓으며 한 발짜국 씩 하늘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고 전쟁의 신 아레스가 나서서 싸웠으나, 두 형제는 아레스를 붙잡아 단단한 청동 항아리에 가둬버렸다.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71

372 전투의 여신인 아테나와 바람의 신 헤르메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태양의 신 아폴로, 사냥 의 여신 아르테미스 등 다른 신들이 나가서 싸워도 두 거인 형제의 괴력을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쳐 오는 등 속수무책인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예언의 신이기도 한 아폴로가 그들의 약점을 파악해 냈다. 오토스와 에피알테스가 서로 싸워서 죽이면 그들의 운명은 깨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폴론은 누이인 아르테미스에게 이를 알려주었고, 아르테미스는 에피알테스 에게 낙소스 섬에서 그를 만나겠다고 연락을 보냈다. 신이 난 에피알테스는 곧장 낙소스 섬으로 갔고, 항상 붙어 다니는 형제들인지라 오토스도 따라왔다. 그러나 자신이 원했던 헤라가 없음을 안 에피알테스는 형인 오토스에게 자신도 아르테미스를 사랑할 수 있게 양보해 달라고 졸랐 다. 오토스가 이를 거절하자 형제 간에 격렬한 싸움이 붙었고, 이를 보고 있던 아르테미스는 사슴으로 변해 이들 사이 에 끼어들었다가 달아났다. 두 형제는 사슴을 겨냥해 서로 반대 편에서 창을 던졌는데, 순간 아르테미스는 잽싸게 피 해 모습을 감추었고 솜씨 좋은 사냥꾼인 이들 형제의 창은 정확하게 서로의 가슴팍에 명중했다. 그리고 두 형제는 동 시에 죽음을 맞았다. 자신들의 힘만 믿고 신들에게 도전했던 무모한 거인 형제는 이렇게 해서 자멸하고 말았다.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72

373 80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4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2 1. 신( 神 ) 프로테우스(Proteus): 바다의 늙은 현자, 온갖 바다 동물로 변신할 수 있으며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지녔다. 트로 이를 함락시키고 돌아가던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가 그에게 들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아냈다. 트리톤(Triton): 하반신이 물고기인 바다의 신, 나팔을 들고 다니며 포세이돈이 행차할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다. 역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4

375 시 하반신이 물고기이고 상반신은 인간인 인어들은 그의 후손들이다. 아소포스(Asopos): 테살리아 지방에 흐르는 강의 신, 딸 아이기나가 제우스에게 빼앗기자 덤벼들다 혼이 났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5

376 글라우코스(Glancus): 하반신이 물고기인 또다른 바다의 신, 본래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어부였지만, 어느 날 죽어 가는 물고기가 어떤 약초를 먹자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자신도 그 약초를 먹었다가 하반신이 물고기 처럼 변해 인어가 되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6

377 2. 거인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포세이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던 형제. 포세이돈과 인간 여인 이피메데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 형제들이다. 9살 때, 벌써 키가 산 아홉 개보다 더 높이 자랐으며, 어떤 신 이나 인간의 손에 의해서도 죽지 않으며, 서로가 아니면 결코 죽지 않는 불사의 특성을 지녔다. 이 사실을 알아챈 아 폴론과 아르테미스의 꾀에 속아 서로가 싸우다 자멸하고 말았다. 안타이오스(Antaios): 포세이돈과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 어머니로부터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 면 결코 힘이 줄어들지 않는 능력을 받았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싸움에서 공중에 들려진채 목이 졸려져 죽는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7

378 티티우스(Tityus): 포세이돈과 보이오티아의 왕 오르코메노스의 딸 엘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 델포이에서 여신 레토를 보고 겁탈하려 덤벼들다 그녀의 아들과 딸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폴리페모스(Polyphemos): 포세이돈과 요정 토오사 사이에서 태어난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 시칠리아 섬에서 양 을 치고 살다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상륙하자 그들을 잡아먹다 오디세우스에게 눈을 잃고 불구가 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8

379 오리온(Orion): 포세이돈이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인 에우리알레를 사랑하여 낳은 아들, 아버지로부터 물 위를 젖 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여신 아르테미스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를 미워한 아폴로의 꾀에 속아 아르테 미스가 잘못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3. 영웅 테세우스(Theseus): 포세이돈과 트로이젠의 공주 아이트라가 낳은 아들이며 아테네의 왕. 소머리 괴물 미노타우르 스를 죽이고 아테네에 최초로 민주정치를 설립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사후에 유골이 사당에 모셔져 제사를 받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9

380 에우리토스(Eurytus)와 크테아토스(Cteatus): 포세이돈과 엘리스의 왕 악토르의 아내 몰리오네 사이에서 태어난 쌍 둥이 형제. 은으로 된 알에서 태어났으며, 몸이 서로 붙어 한 몸을 이루었고 둘이 하나가 되면 헤라클레스도 쫓아보 낼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러나 코린토스로 가는 길목에서 헤라클레스의 습격을 받고 죽는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80

381 피네우스(Pineus): 트라케의 해변에 사는 장님 예언자. 장님이 되는 조건으로 신들로부터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 력과 불사의 생명을 받았으나, 신들의 일을 인간들에게 떠벌리는 바람에 식사를 할 때마다 괴물새 하피들이 날아와 식탁에 배설물을 뿌리는 바람에 굶주리는 벌을 받았다. 에우페모스(Euphemos)와 앙카이오스(Ankaios): 포세이돈과 에우로페, 아스티팔라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에 우페모스는 포세이돈으로부터 물 위를 걷을 수 있는 능력을, 앙카이오스는 배의 조타를 볼 줄 아는 능력을 받았다. 다른 영웅들과 함께 황금 양털을 되찾아오기 위한 아르고스 원정대에 참가한다. 아틀라스(Atlas): 포세이돈과 요정 클라이토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아들 중 장남.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전설의 대 륙 아틀란티스를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4. 괴물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81

382 아리온(Arion): 포세이돈과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 사이에서 태어난 말,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었다. 크리사오라스(Chrysaoras)와 페가수스: 포세이돈과 메두사에게서 태어난 명마. 5. 인간 부시리스(Bousiris): 포세이돈이 리시아나사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이집트의 왕. 자신의 땅을 방문하는 외국인들 을 잡아다가 신들에게 바치는 악행을 일삼다 헤라클레스가 이집트를 방문하자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시니스(Sinis): 코린토스 지방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두 소나무 사이에 매달아 튕겨 나가는 힘을 이용하여 찢어죽이던 악당.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프로크루스테스(Prokroustes):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서 침대를 하나 놓고 나그네들을 붙잡아 침대보다 키 가 크면 팔과 다리를 잘라 죽이고, 작으면 늘여서 죽였다. 역시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스키론과 케르키온: 아테네 교외에서 나그네들을 죽이고 돈을 빼앗던 악당, 테세우스에게 죽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82

383 81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4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15 브리아레오스(Briareos)는 양 어깨에 50개씩의 팔을 달고 50개의 머리를 가진 고대의 폭풍 거인인 헤카톤케이레스 (Hekantonkheries)의 일원이었다. 특히 브리아레오스는 바다의 폭풍을 지배하는 신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4

385 브리아레오스란 이름은 용감한 또는 힘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브리아로스(briaros)'에서 파생되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브리아레오스는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입을 통해 소개된다. 그는 거인 아 이가이오스(AIGAIOS, Aegaeus)의 아들로 등장한다. 아이가이오스는 바다 폭풍의 신이며, 올림포스 신족의 부모이자 그들보다 먼저 탄생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티탄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5

386 아이가이오스는 바다 폭풍의 신이며, 올림포스 신족의 부모이자 그들보다 먼저 탄생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티탄 (Titanes) 신족의 동맹이었다. 그리스 동부의 바다, 에게 해(Aegean Sea)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는 가끔 씩 그의 아들인 브리아레오스, 혹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지하 세계 어둠의 신인 타르타로스의 아들이자 한 때 제우 스와 싸워 이기고 그를 동굴에 가둬 버렸던 무시무시한 괴물 티포에우스(Typhoeus, 티폰Typhon)과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일리아드에 보면 브리아레오스와 아이가이오스는 별개의 존재이며, 브리아레오스가 그의 부친인 아이가이오 스보다 더 강력하다고 언급된다. 브리아레오스는 두 명의 형제인 코토스(Kottos)와 기에스(Gyes)가 있는데, 헤시오도스가 정리한 그리스 신화의 계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6

387 보인 신통기에서 그들은 태초에 등장한 신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의 자식들로 나온다. 신통기에 의하면 세 형제가 태어나자, 아버지 우라노스는 1백 개의 팔과 50개의 머리를 단 그들의 흉측한 모습과 강력한 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어머니인 가이아의 뱃속 깊숙히 처넣어 버렸다. 아들들의 몸무게로 괴로워하던 가이 아는 막내 아들이자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에게,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세 형제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크로노스는 어머니의 말대로 우라노스를 공격하여 추방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아버지처럼 끔찍하고 거대한 모습을 한 브리아레오스 삼형제들을 두려워하여, 역시 대지의 깊숙한 어둠 속에 가둬버렸다. 이에 분노한 가이아는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자, 그에게 전쟁에서 이기려면 지구의 나 락에 갇혀 있는 브리아레오스 삼형제를 해방시켜 그들과 손을 잡으라고 가르쳐주었다. 제우스는 가이아의 말을 따라서 브리아레오스와 그의 형제들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브리아레오스는 코토스, 기에스 와 함께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족들을 도와 그들의 부모이자 적인 티탄족과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올림포스 신족과 티탄 신족 간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는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브리아 레오스와 코토스와 기에스는 티탄족을 향해 3백 개의 큰 바위를 던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7

388 티타노마키아가 끝나자 브리아레오스 삼형제는 패배한 티탄 신족들을 지구의 밑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놓고,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하에 머무르느라 그리스 신화 속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헤카톤케이르의 맏형인 브리아레오스는 몇 번 신화 속에 등장한다. 일리아드의 초반부, 아킬레우스의 말에 의하면 한 번은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 그리고 제우스의 자녀인 아폴론과 아테네가 제우스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잠든 제우스를 질긴 가죽끈으로 묶어버리자,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처럼 폐위되고 추방 될 위기에 놓였다.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8

389 그러자 제우스의 양녀였던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는 제우스를 지키기 위해서 깊은 바다 밑에 있던 브리아레오스를 소환했다. 그가 올림포스의 산 위로 올라가 제우스를 묶은 끈을 풀어주고 그의 옆에 서서 무력 시위를 하자, 모든 신 들은 그의 괴력을 두려워하여 제우스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9

390 반란이 진압되자 제우스는 자신에게 반역한 벌로 포세이돈과 아폴론을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Laomedon)에게 보내 1년 동안 그를 위해 봉사하는 노예로 살도록 했다. 그러나 헤라와 아테네에게는 아무런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 제우스를 구해 준 공로로 브리아레오스는 신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포세이돈이 태 양신 헬리오스와 코린토스 시를 두고 소유권을 다투자, 브리아레오스가 나서서 코린토스의 산은 헬리오스가 차지하 고 해협은 포세이돈이 갖도록 중재를 섰다. 올림포스 신족에서 제우스 다음가는 2인자였던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중재를 받아들였다.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90

391 82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2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13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악( 惡 )과 악이 만나 더욱 큰 악이 태어나다. 젠장! 이놈의 상처는 아직도 쑤시네. 혼돈과 속임수의 신인 로키는 입술에 난 송곳 자국을 건드리다 비명을 질렀다. 저번에 드워프 형제인 브 로크, 에이트리와 목을 걸고 내기를 하다가 그만 그들에게 송곳으로 입술이 뚫리고 끈으로 꿰이는 봉변만 당했던 것이다. 집에 틀어박혀, 상처에 약을 바르던 로키는 자신이 입은 고통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자 신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드워프들도 증오스러웠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 고 오히려 자신을 비웃은 신들도 미웠다. 도대체 그놈들은 나한테 고마워 할 줄을 모른단 말이야. 나 덕분에 얼마나 좋은 걸 많이 챙겼어? 세상 에서 제일 좋은 명마인 슬레이프니르, 천둥 망치 묠니르와 황금 팔찌 드라우프니르, 항상 명중하는 창 궁 니르 같이 훌륭한 보물들을 가져다주었는데도 여전히 나를 업신여기고 홀대한단 말이야. 이게 다 나를 우습게보기 때문이야. 내가 거인족 출신인데다 힘도 별로 없으니 나를 깔보는 거라고. 그렇 다면 내가 토르나 티르 같은 녀석들에 뒤지지 않을만큼 강한 힘을 얻으면 앞으로 나를 만만하게 여기지 못하겠지? 다소 논리가 비약된 이상한 결론을 내린 로키는 신들의 눈을 피해 고향인 요툰헤임으로 갔다. 그가 찾아 간 곳은 거인족 중에서도 무서운 마법의 힘을 가진 마녀 앙그르보다가 사는 철의 숲 이었다. 거대한 물 푸레나무의 아래에 집을 만들고 살던 그녀는 로키를 보자 쌀쌀맞게 대했다. 아스가르드의 고귀한 신께서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을 몸소 찾아오셨는지요? 거인족이면서 원수인 신들과 함께 행동하고 그들을 돕는 로키는 동족들로부터 배신자 로 인식되어 있었다.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2

393 하하, 그게 무슨 말인가. 비록 지금은 아스가르드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지만, 나야 엄연한 서리 거인족 출신일세.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너무 홀대하지 말게나. 능글맞게 웃는 로키를 앙그르보다는 마치 바퀴벌레를 만지는 것처럼 혐오감이 담긴 눈길로 노려보았다. 당신이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죠. 당신과 오랫동안 지내게 되면 반드시 재앙을 받는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날 찾아온 목적이 뭔가요? 어렵게 말하지 않겠네. 난, 지금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싶네. 그래서 마법을 부리는 마녀인 자네를 찾 아온 거라네. 나를 도와줄 수 없겠나? 싫습니다. 뭐라고? 로키의 부탁을 단칼에 뚝 잘라 거절한 앙그르보다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이 유를 설명했다.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또한 위험하기도 하죠.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무자비하고 포악 한 괴물이 숨어 있어요. 나는 당신에게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재앙, 그 자체이니까요. 다. 마녀의 말에 로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는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 이봐, 지금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당신이 얼마나 비열한 존재인지 내 입으로 말해줘야 하나요? 남에게 고통을 주고 그것을 보면서 즐거 워하는 존재가 당신이죠. 요툰헤임에 사는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당신을 미워할 겁 니다. 내 말이 틀린가요? 이 세상에 누가 당신을 좋아하던가요? 허허 로키의 얼굴에는 미소와 증오가 뒤섞인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광기였다. 어느새 그는 광 기의 충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더 이상 당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보세요. 난 마법 연구에 몰두해야 하니까요. 앙그르보다는 등을 획 돌리고 지하실로 내려가려 했다. 그 때, 뒤에서 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네. 자네가 마법을 공부하는데 도와주지.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3

394 그 말을 들은 앙그르보다는 로키가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그녀가 느낀 것은 자신의 입을 틀 어막는 로키의 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그녀의 목은 로키가 쥔 단검으로 찔 리고 말았다. 아악! 제대로 비명도 나오지 않았지만, 앙그르보다는 로키가 찌르는 단검에 온 몸이 난자당해 순식간에 피투성 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수십 번을 내리치고 피에 젖은 칼을 털어내면서 로키는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게 진작 나를 도와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당신의 어리석음이 죽음을 자초한 거야. 킥킥 킥 으으 다 죽어가면서 앙그르보다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 상처를 치료하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 다. 그녀를 보며 로키는 잔인하게 조롱했다. 숨쉬는 것도 힘들 테니 그만두지 그래? 참고로 이 칼은 내가 직접 만든 마법의 단검인 레바테인이야. 어떤 마법도 이 칼 앞에서는 소용없지. 그건 그렇고 이제 내 할 일을 해야겠어. 당신한테 많은 걸 바랬던 건 아니야. 단지, 나를 조금 도와달라는 거였지. 책이나 주문 같은 건 필요 없어. 난 그저 말 끝을 흐린 로키는 갑자기 레바테인의 날을 세우더니, 쓰러져 있던 앙그르보다의 심장을 찌르고 살점 을 도려냈다. 그리고 직접 손을 뻗어 붉은 색의 심장을 끄집어 들어올렸다. 듣자하니 시구르드라는 녀석은 용 파프니르를 죽이고 그 심장을 먹어치워서 어떤 무기로도 상처입지 않는 강철 같은 피부와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초능력을 얻었다지? 나도 한 번 그러려던 참이었어. 그런 데 당신이 내게 심장을 제공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그럼 이제 저승인 니플헤임으로 가서 하고 싶던 마법 연구나 실컷 하라고. 나는 당신이 주고 간 심장을 먹고 마법의 힘을 얻을 테니까. 흐흐흐흐! 비열한 웃음을 터뜨린 로키는 아직 뜨거운 피가 식지 않은 채, 꿈틀거리고 있던 앙그르보다의 심장을 통 째로 입 속에 넣고 우적우적 씹더니, 그대로 삼켜 버렸다. 입가에 묻은 피마저 깨끗이 핥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 앙그르보다가 흘린 피까지 마시던 로키는 갑자기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아랫배에서부터 가슴까지 격렬한 고통이 올라오더니, 급기야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4

395 왜 이러지? 젠장! 뭐가 잘못 되었나? 대체 왜? 기겁을 한 로키는 입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서둘러 심장을 토해내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머릿 속을 강타하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을 잔뜩 벌린 로키는 뱃속에 든 걸 모두 쏟아버릴 정도로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리 고 믿을 수 없게도 그는 토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앙그르보다의 심장이 아니었다. 살아서 꾸물거리는 검 은 색의 살덩어리였다. 검은 색에 이어 시퍼런 색의 긴 살덩어리와 반이 썩은 고깃덩어리도 입 안에서 튀 어나왔다. 으으 이제야 통증과 구역질이 가신 로키는 자신이 토해낸 물체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것들은 대체 무엇일 까? 점액에 둘러싸인 세 개의 살덩어리들은 계속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서서히 형체를 갖추었다. 검은 살덩 어리는 온 몸에 털이 솟고 발톱과 이빨이 돋아나더니, 불타는 눈과 뾰족한 주둥이를 가진 늑대가 되었다. 푸른 살덩어리는 매끄러운 비늘과 장대한 몸을 가진 뱀으로 변했다. 그리고 썩은 고깃덩어리는 어린 소녀 의 모습을 띠었다. 그녀는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고, 절반은 온전하면서도 남은 쪽은 악취를 풍기는 기이한 몸을 가졌다. 앙그르보다의 심장을 먹어서 나한테 이런 녀석들이 태어난 걸까? 스스로 묻던 로키는 먼저 늑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녀석이 로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악! 이놈이 누구한테 이러는 거야? 로키는 비명을 질렀지만, 늑대는 자신을 낳은 아버지(?)에게 이빨을 들이대며 으르릉거렸다. 푸른 뱀도 혀를 날름거리며 끔찍한 독을 뿜었고, 소녀는 그 둘의 사이에 앉아 시체 같이 으스스한 눈초리로 로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몸은 보고 있기만 해도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안 되겠어. 이대로 있다가는 나마저 해치려 들겠는걸. 겁에 질린 로키는 황급히 앙그르보다의 집을 떠나 아스가르드로 줄행랑을 쳤다. 앙그르보다의 집인 철의 숲에서 기이한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 로키는 최고신 오딘으로부터 소환령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5

396 을 받았다. 명령에 따라 아스가르드의 중대사가 논의되는 회의소인 글라드스헤임으로 간 로키는 운명을 주관하는 세 여신과 마주쳤다. 로키, 당신은 끝내 세상의 종말을 부를 재앙을 낳았군요. 여신들 중 맏이인 울드가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악과 악이 만나 더 큰 악을 낳았어요. 당신의 마음 속에 숨어있던 괴물이 튀어나온 거죠. 둘째인 베르단디와 막내인 스쿨드가 연이어 불길한 예언을 하자, 로키는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요? 로키. 위엄 있는 목소리로 오딘이 한 손을 들며 말했다. 나는 이 옥좌,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네가 저지른 일들을 모두 보았다. 너는 마녀인 앙그르보다를 죽이 고 그녀의 심장을 먹었지. 그녀가 가진 마법의 힘을 너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군.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위험한 요소가 세상에 탄생했다. 봐라. 오딘의 말이 끝나자, 세 신인 티르와 토르 및 헤르모드가 각자 쇠로 된 철장을 수레위에 실어서 끌고 왔 다. 그 철장 안에는 로키가 토해낸 세 괴물인 늑대와 뱀, 썩은 몸의 소녀가 갇혀 있었다. 늑대와 뱀은 철장 을 씹거나 몸을 뒤틀며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고, 소녀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건? 너와 앙그르보다의 마음이 만들어낸 사악한 창조물들이다. 어찌나 포악한지, 네가 떠나고 나자 어미인 앙그르보다의 시체마저 먹어 치웠더군. 저들이 태어날 때, 운명의 여신들은 예언했다. 저것들이 세상의 멸 망인 라그나뢰크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이다. 말을 마친 오딘은 먼저 뱀이 갇힌 철장을 열어 뱀을 끄집어냈다. 오딘의 억센 손에 잡힌 뱀은 꿈틀거리 며 입을 벌리고 독을 뿜어냈다. 이것은 대지를 감싸는 뱀, 요르문간드가 될 것이다.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리 라.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6

397 뱀의 이름과 운명을 그렇게 선언하며 오딘은 요르문간드를 들어 글라드스헤임의 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다음은 늑대의 차례였다. 너는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탐식자, 펜리르라 불리리라. 너의 탐욕은 끝이 없어 세상 전체를 삼키고도 모자랄 것이다. 주어진 운명이 오기 전까지 링비 섬의 동굴에 들어가 있으라. 신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전쟁의 신 티르는 펜리르를 마법의 끈인 글레이프니르로 단단히 묶어 섬으로 끌고 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소녀였다. 삶과 죽음이 뒤섞여 태어난 아이여. 너에게 어울리는 곳은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인 헬이다. 너의 이름 도 헬이라 부를 것이며, 그곳을 다스리며 죽은 자들을 돌보거라. 오딘의 말이 떨어지자 헤르모드는 소녀를 천마 슬레이프니르에 태워 헬로 데려갔다. 이로써 세 괴물들의 처분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로키여, 너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잠깐, 잠깐!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단지, 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야! 혹시 자신에게 무슨 불이익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기겁을 한 로키는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 딘은 작게 한숨을 쉬며 손짓했다. 그만 됐다. 재앙이 재앙을 낳는 것은 당연한 이치. 너의 거처로 돌아가라. 로키가 서둘러 글라드스헤임을 뜨자, 오딘은 다른 신들에게도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오딘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운명의 여신들이 예언한 미래가 과연 그대로 찾아오는 걸까? 로키가 끝내 우리의 적이 되고, 그가 낳 은 세 마리 괴물들이 이 아스가르드를 침공하여 라그나뢰크를 초래할까? 그리고 내가 저 늑대 펜리르 에게 잡아먹힌다고? 결코 끊을 수 없는 마법의 끈인 글레이프니르로 묶여진 펜리르가 어떻게 그럴 수 있 다는 것인지? 그러나 오딘조차 모르는 것이 있었다. 세 마리 괴물, 펜리르와 요르문간드와 헬이 자신들을 쫓아낸 신들 에게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펜리르는 랑비 섬으로 가기 전에 티르의 한 쪽 팔을 물어뜯었 고, 요르문간드는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며 심해에서 더욱 덩치를 불려 마침내 바다와 대지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뱀이 되었다. 지옥의 여신이 된 헬은 죽은 자들이 가진 지혜와 힘을 흡수하며 신들에 필적할 정도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7

398 로 강력해졌다. 오딘은 그들을 어두운 변방에 가둬버려 안전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해진 운명은 신조차 피할 수 없 다. 라는 예언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8

399 83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0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09 - 태양의 신 다지보그와 여신 사울레는 매일 아침마다 백마들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들의 일은 세상에 햇빛을 비추어 죽었어도 죽지 못하고 지상을 헤매는 뱀파이어 같은 인간들의 영혼을 편안히 저승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헉! 헉! 달조차 뜨지 않는 암흑천지로 변한 밤중에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진 어두운 숲 속을 한 여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뾰족이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옷이 긁히고 찢겨 여기저기 붉은 상처 자국이 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뜀박질만 하고 있다. 마치, 무언가로부 터 필사적으로 멀어지려는 것처럼. 그녀가 달려온 곳에서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는 바람처럼 움직이며 그녀를 쫓아간다. 도대체 뭘까? 그것 은 일단 팔과 다리가 두 개씩 달리고 머리가 하나인 걸 보면 사람 같기는 한데, 자세히 보니 사 람은 아닌 것 같다. 눈이 피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입에서는 두 개의 송곳니가 뾰족하게 튀어나왔으며, 보 통 사람보다 3배는 더 길어 보이는 혀를 내밀고 날름거린다. 손톱과 발톱은 제멋대로 자라 갈고리처럼 날 카롭다. 무엇보다 온 몸이 지독한 털투성이다. 거기다 귀가 칼처럼 길쭉하고 끝이 날카롭다. 입에서 연신 침을 흘리며 그것은 나뭇가지들을 짓뭉개고 여인을 향해 달려간다. 아니, 뛰어서 날아간다 고 해야 옳다. 한 번 뛸 때마다 족히 2~3미터는 넘어가니까. 땀을 비처럼 쏟아내며 앞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죽기 살기로 달리던 여인은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 추었다. 그녀의 바로 눈 앞에서 또 하나의 검은 물체가 나타났던 것이다! 먼저 쫓아오던 그것과 같은 종류일까? 아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것보다 온 몸이 털이 훨씬 많다. 좀 더 자세히 보니 아예 살이 드러나지 않아 털투성이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앞으로 튀어나왔는데, 윗입과 코가 바싹 붙어 있고, 벌어진 입 안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어지럽게 돋아나 있다. 손과 발은 도저히 사람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0

401 의 형상이 아니다. 마치 개나 늑대의 수족과 같다. 늑대, 그러고 보니 그것의 모습은 늑대가 사람처럼 두 발로 일어선 것처럼 보인다. 아아 앞 뒤로 정체불명의 추격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은 더 이상 도망갈 용기도 기력도 잃었는지, 그만 땅바 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녀를 보고 있던 두 개의 물체들은 서서히 다가온다. 그들은 입을 벌리며 으르렁거 린다. 겉모습만 사람과 비슷할 뿐,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 저 사냥감에 지나지 않는다. 맛있는 먹이를 둔 것처럼, 그들은 입을 벌리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괴성을 질러댔다. 늑대나 들개들 이 사냥을 할 때, 먹잇감의 혼을 빼놓기 위해 울부짖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우우우! 크으으으! 공포에 눌려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수그리며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녀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치고 또 외쳤다. 기도를 받는 대상이 신이든 악마든 상관없었다. 살려주세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 때였다. 어디에서인가 나타난 한 줄기 빛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놀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죽일듯이 위협하던 두 마리 괴물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 몸이 마비된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몸에서 웬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어느새 몸뚱이 전체가 하얀 먼지를 내뿜 으며 흔적도 없이 부스러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궁금해 하는 사이, 숲 속은 물론이고 허공과 하늘 전체가 환하게 밝아 왔다. 그녀는 곧 깨달았다. 정신없이 도망다니던 사이, 어느새 밤은 가고 아침이 된 것이다. 살았다! 숲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나무들의 사이로 파란 하늘과 그 가운데를 달리며 세상을 비추는 눈부신 태양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1

402 이 보였다. 해를 본 그녀는 땅에 엎드려 계속 절을 하며 감사의 말을 외쳤다. 고맙습니다, 해님이시여. 저의 목숨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매일 새벽마다 예배를 올리겠 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지금까지 달려온 방향과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 지만 고맙다는 말을 전할 때, 하늘에 걸린 태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지자, 하늘에 서 아름답고도 위엄이 넘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 태양이 닿는 지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공간, 죽은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비록 해가 사라진 밤이 되 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죽어서 다른 곳으로 갔어야 할 자들을 억지로 붙잡고 그들에게 왜곡된 생명을 준 이유는 무엇인가?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한 듯, 숲 속의 땅 한 군데가 꿈틀거리더니 곧이어 그 안에서 뭔가가 튀어 올라왔다. 검은 외투를 걸친 차림에 다 쭈그러든 피부와 심하게 튀어나온 매부리코, 붉게 충혈된 눈과 손톱이 갈고랑 이처럼 길고 날카로운 험상궂은 노파. 러시아인들이 지옥과 어둠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바바 야가였다. 바 바 야가는 나오자마자 환한 하늘을 보고는 버럭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 그 망할 놈의 햇빛 좀 끄지 못하겠어! 내가 햇빛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러자 태양 안에서 하나의 형체가 나오더니, 곧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눈과 코와 입에서 불을 뿜 는 일곱 마리의 백마들이 나오더니 이윽고 그들은 한 대의 마차를 끌고 왔다. 백마들이 끄는 마차의 위에 는 한 쌍의 남녀가 타고 있었다. 황금으로 장식된 하얀 예복을 입고 각각의 머리 위에 수많은 보석들이 박 힌 황금 왕관을 쓴 젊은 태양의 신 다지보그와 그의 배우자인 여신 사울레였다. 그들이 걸친 옷은 불로 만 들어진 것처럼, 계속해서 빛을 뿜었고, 그들의 얼굴 뒤로 태양이 빛나면서 세상은 더욱 더 밝아졌지만, 바 바 야가가 서 있는 자리만큼은 빛이 닿지 않고 어둠이 계속 자리 잡았다. 바바 야가를 내려다 본 다지보그는 인간들처럼 화를 내거나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가 벌인 일 에 대해 책망하기 시작했다. - 당신이 만들어낸 흡혈귀, 뱀파이어들이 요즘 들어 계속 눈에 띄는군. 저것들은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 는 잘못된 존재들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당신은 아는가? 태양신의 말을 들은 바바 야가는 얼굴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2

403 -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다시 살 기회를 준 거야, 나는! 오히려 칭찬을 받으면 받았지, 비난 받을 일 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 썩어 문드러지는 시체 덩어리로 간신히 버티는 상태를 두고 과연 온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 - 흥! 살덩이가 모두 붙어 있어야 살아있다는 관점은 당신들 빛의 신들 의 독단적인 잣대일 뿐이지. - 당신이 만들어준 모습으로 저들이 과연 만족할지 의문이군. 저들은 이제 평생 동안 가족이나 친구, 친 척들의 눈을 피해서 어두운 밤 속에서만 활동해야 한다. 살아있을 때 먹던 음식은 입에 댈 수도 없고 짐승 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야 살고 있는데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쐬면 곧바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지. 그 렇다면 죽은 뒤에도 계속 살 수 있다고 선동한 것 자체가 거짓말이 아닌가? - 난 강요한 적 없어. 저들 스스로 그런 모습이 되어서라도 살아가길 원했고, 난 그런 그들의 소원을 들 어준 것 뿐이야.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야? - 모든 악은 애초에 작은 선의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너는 애당초 저들을 정말로 도울 생각이 없었어. 네가 속한 암흑세계의 일원으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세력을 넓히기 위한 속셈이 아니었던가? - 그럼 그 정도의 대가는 받아야지. 내가 무슨 오지랖이 넓어서 남을 돕지 않으면 못 배기는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자 다지보그 대신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울레가 나서서 일침을 가했다. - 추악한 이기심끼리 만나 거짓된 생명체와 뒤틀린 세계를 만들었군요. 태초부터 당신들, 어둠의 신 들 은 항상 그랬죠. 빛을 미워하면서도 동경했지만, 그걸 따라잡을 능력이 없어서 빛을 흉내낸 열악한 존 재들을 만들어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던 주체가 당신들이 아니었던가요? - 우리를 보고 무능력하다고 비웃는 거냐?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이야말로 여태까지 우리를 가 리켜 어리석다 느니 무지하다 느니 하며 조롱하고 멸시만 했지, 대체 뭘 도와줬지? 지금은 너희들 이 잘난 척 그렇게 유세를 떨 수 있겠지만, 두고 보라고! 앞으로는 우리의 시대가 올 테니까 말이야! - 당신은 지금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는 추종자들을 앞세워서 지상에 세력을 확대해 나가려는 계획인 가요? 하지만 과연 인간들이 빛을 버리고 어둠을 따를까요? 바바 야가는 사울레의 말을 비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 고매하신 빛의 나리들께서는 그렇게 말하시겠지. 하지만 현실을 보라고. 인간들은 죽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저승으로 가느니 차라리 반쪽짜리 생명인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지금까지 살던 이승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래. 생명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나 강하단 말야, 인간들은. 그리고 머지않아 당신들이 쏘아대는 불쾌한 빛 대신에 우리들이 주는 어둠에 더 익숙해지겠지. 우리는 그들에게 불확실한 내세 대신 확실한 현 세를 보장해 주니까 말이야. 벌써 잊어버렸나? 인간이 만들어질 때, 우리도 그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을?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3

404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당신들이 준 빛과 함께 우리가 준 어둠과 같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사울레가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그 전에 다지보그가 나서서 그녀 대신 말했다. - 너희들이 계속 그렇게 인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빛과 어둠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부디 어리석은 판단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태양신의 선언을 들은 바바 야가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정색을 했다. - 미리 말해두건대,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들이 우리를 건드린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아.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는 않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니까. 서로가 맡은 영역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살아온 것이 우리의 생활 태도가 아니었나? - 그 묵계는 너희들 어둠의 신들 스스로가 슬며시 깨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죽으면 곧장 저승 으로 가야 하는 인간들을 뱀파이어로 만들며 억지로 이승에 붙잡아두려는 이유야말로 너희가 우리와 맞서 대등하게 되겠다는 음모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더 이상 오래 못 있겠군. 햇빛을 너무 많이 쬐어서 내 피부가 타 버릴 지경이야. 그럼 이만 난 내 집으로 들어가야지. 세상을 뜨겁게 달구면서 마차나 잘 몰아 봐! 높은 곳에 앉아서 고매 한 척, 잘난채하기 좋아하는 이 노출증 환자들아 마지막을 저속한 비아냥으로 끝내며, 바바 야가는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옥의 여신이 사라지자, 태 양의 여신은 안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태초의 순간이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군요. 저들을 계속 내버려 두었다가는 지상은 물론이고 천상까지도 나쁜 영향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울레의 걱정에 다지보그도 동의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 그것은 그들의 본성이니 특별히 걱정할 필요는 없네. 다만, 저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나와 다른 자들 에게도 자신들의 뒤틀린 본성을 강요한다면 - 재앙이 되겠죠. 이 세상 자체가 지옥으로 변하고 말 거예요. - 맞아.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 - 그러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더 많은 빛을 보내야겠죠? - 그 말이 옳네. 대화를 마친 태양의 신들은 불을 뿜는 일곱 마리의 백마가 모는 태양 수레를 몰고 서쪽 하늘로 향했다.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4

405 그들이 비추는 따뜻한 햇살을 받은 대지와 나무, 들판은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났다.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5

406 84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07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06 색슨족의 침략으로부터 영국을 지킨 갈리아의 신 아르타이우스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 아더왕은 신 의 이름이었다. 이봐, 이봐! 들었어? 로마군이 철수한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로마가 떠나는 거야? 훗날, 런던이라고 불리게 될 도시인 론도니움의 주민들은 하루가 다 지나가도록 온통 똑같은 주제에 관 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서기 407년,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 황제는 브리튼(영국)을 지키던 로마군을 모두 로마 본토로 불러 들일 테니, 이제 브리튼 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고향을 지키라고 선언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갈수록 격화되는 게르만족들의 침략을 감당해 내기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멀리 식민지에 있는 병력까지 모두 끌 어 모아 나라를 지켜야 할 정도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로마가 브리튼에서 물러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로서는 좋은 거 아냐? 지금까지 거의 4백 년 동안 로마를 지배를 받고 살았잖아? 이제 독립할 날 이 오는 거지. 글쎄,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어. 이제 우리 스스로 무기를 들고 자신을 지켜야 하니 말이야. 수십 년 전부터 북쪽의 픽트족과 서쪽의 스코트인(아일랜드)들, 동쪽의 색슨족들이 계속 쳐들어오던 데, 이제 우리가 그놈들과 직접 싸워야 하는 건가? 마지막 말에 사람들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한이 몰아닥치는 북방의 고원에서 자주 내려와 약탈과 살육을 일삼는 픽트족의 잔인함은 브리튼인 모두가 치를 떨며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거기에 서부 와 동부의 해안 지대를 휩쓸며 해적질을 하는 스코트와 색슨족들까지 가세해, 이 무렵의 브리튼은 치안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로마군이 본국으로 철수한 이후, 남부 브리튼의 최고 통치자는 보티건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동안 방어를 책임지던 로마군이 없으니, 이제 브리튼인들은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외침을 막아야 했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07

408 하지만 4백 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브리튼인들은 전투 기술과 무기 사용법을 대부분 잊어버렸 고,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아 전투력이 약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 을지, 고민하던 보티건은 대담하면서도 위험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동쪽의 색슨족 중 일부를 용병으로 고용해 그들로 하여금 픽트과 스코트 및 색슨족 약탈자들을 막게 한다는 발상이었다. 보티건의 이 같은 결정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심하게 반 발했다. 너무나 위험합니다. 이건 도둑으로 하여금 도둑을 막게 한다는 생각과 뭐가 다릅니까? 우리의 경비병 도 색슨족이고 침략자도 색슨족이라면 과연 그들이 제대로 싸우려 들겠습니까? 로마가 저렇게 망해가고 있는 것도 침략군인 게르만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가 저들이 반란을 일으 켰기 때문입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색슨족 용병을 고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성들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는 편이 낫습니다. 용병 은 돈을 보고 싸우는데, 그들에게 돈이 지불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백성 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는 것이니 훨씬 투지가 왕성해 잘 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티건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헹기스트와 호사라는 두 명의 족장이 지휘하는 색슨족 용 병들을 불러 들였다. 그들은 보티건으로부터 타네트 섬을 영토로 받았고, 급료를 지급받는 대가로 브리튼 을 픽트족과 스코트족 및 동족인 색슨족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다. 명망 높은 드루이드(사제 계급)인 멀린이 보티건을 찾아와서 용병을 고용하기로 한 그의 결정을 질책했 내게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것이오, 멀린. 우리 백성들은 농사와 가축을 치면서 사는데, 저들을 군 대에 동원한다면 어찌 되겠소? 건장한 남자들이 전부 군대로 가서 군인이 된다면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 축을 기르겠소? 노인과 부녀자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오. 그에 반해 용병들은 살 땅과 약간의 돈만 주면 되니, 그 편이 우리를 위해서 더 이득이 되는 길이오. 전하,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식량과 국방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백성의 생 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남의 손에 맡겼다가 어떻게 되는지 전하께서는 정녕 모르십니까? 옛날 그리스의 아테네는 식량을 해외에서 모두 수입하다가 스파르타에게 바닷길이 막히자 더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08

409 이상 견딜 수 없어 무릎을 꿇었고, 로마는 게르만족에게 국경 방위를 맡겼다가 지금 그 뒷감당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브리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대의 노파심은 너무 지나치오, 멀린. 색슨족 용병들은 그 수가 고작 수천에 불과하고 우리 브리튼 백성들은 수십만이나 되는데, 설령 저들이 딴 마음을 품는다고 해도 어쩌겠소? 그리고 전쟁이 나면 이기 든 지든 사람들이 죽기 마련인데, 색슨족 용병들이 있는 한 죽는 건 저들 뿐이고 브리튼 백성들은 전혀 다 치지 않으니 무엇이 나쁘단 말이오? 언젠가 전하께서 후회하실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멀린은 보티건의 궁에서 물러나오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이 땅의 운명이 어찌 될 런 지 보티건의 호언장담대로 색슨족 용병들은 그들의 용맹함을 발휘하여 브리튼을 쳐들어오던 픽트족과 스코 트족 및 자신들의 동족인 색슨족 침략자들도 모두 무찔렀다. 처음에 용병들을 보고 불안하게 여기던 브리 튼 백성들은 이내 그들을 브리튼의 수호자라 부르며 열렬히 칭송했다. 그것 보게! 내 말이 맞았지? 하하하! 색슨족 용병들의 활약상에 무척이나 통쾌해진 보티건은 흐뭇해하며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하고 다녔다. 멀린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입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병들의 우두머리인 헹기스트와 호사는 그런 보티건과 브리튼 백성들을 보면서 굶주린 늑대처 럼 예리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렇게 따뜻하고 풍요로운 땅이 저 멍청하고 나약한 놈들의 손에 있다니, 이건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 않나, 호사? 맞습니다, 형님. 우리가 살던 고향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나 다름없어요. 진즉에 이렇게 좋은 곳에 정착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먼저 브리튼의 왕인 보티건이라는 얼간이부터 없애야겠어. 그리되면 지도자를 잃은 브리튼 놈들은 우 왕좌왕할테고, 그 틈을 타서 이 땅을 차지하는 일은 아주 쉬울게야. 형제는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계략을 꾸몄다. 그리고 날이 밝자, 헹기스트는 보티건을 찾아가 용건을 전했다. 자신에게 젊고 아름다운 딸이 한 명 있는데, 혹시 그녀를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09

410 마침 보티건은 아내를 잃고 외로운 처지였는데, 헹기스트의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겨 만나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딸을 보게 된 보티건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헹기스트는 매우 흡족해하며 딸에게 보티건의 술시중을 들게 했고, 보티건은 그녀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보티건은 신하들을 왕궁에 불러 모으고 놀라운 선언을 발표했다. 헹기스트의 딸을 정식 왕비로 맞아들이며, 장인이 되는 헹기스트에게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의 절반을 선물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모 든 신하들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전하? 일개 용병 대장의 딸과 결혼을 하시겠다니요? 게다가 타네트 섬도 모자라 아예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하셨습니까? 이 무슨 황당무계한 발언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늑대를 정원으로 끌고 오신 것도 모자라서 아예 방 안으로 불러들이신 것과 다름없습 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보티건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신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티건은 결혼식 을 강행하였고, 모든 시종과 추종자들에게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통보까지 보냈다. 왕의 명령에 신하들 은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이 열리는 궁으로 모여들었고, 찌푸려진 그들의 얼굴을 숨어서 지켜보는 헹기스트 와 호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왕궁의 넓은 야외 홀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결혼식에 참석한 터라 보티건과 그의 신하들은 무기를 가져 오지 않은 빈 몸이었다. 그것은 신부 측 하객인 헹기스트 일행도 마찬가지였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자자, 어서 식탁에 앉으시오. 그리고 이렇게 화창한 날, 아름다운 신부를 얻은 나를 위해 하느님께 기 도드리시오. 아 참, 색슨족 분들은 보탄(Wotan) 신을 믿으니 그에게 기도해 주시오. 웃음을 띈 보티건이 그렇게 말하며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앙앙불락하던 신하들도 마지못 해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색슨족들은 브리튼인들이 눈을 감는 것을 보자, 신발 속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모두 죽여라!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헹기스트의 명령에 맞춰 색슨족 용병들은 기도를 올리고 있던 브리튼인들을 덮쳐 잔혹한 난도질을 퍼부 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한 브리튼인들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 색슨족들의 단도에 찔려 끔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0

411 찍하게 죽임을 당했다. 평화롭던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피와 비명이 들끓는 지옥으로 변했다. 새 신랑인 보 티건도 그 죽음의 대열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신부와의 달콤한 허니문을 꿈꾸던 브리튼의 왕은 장인이 선 물로 주는 단도에 온 몸이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죽어나갔다. 왕과 귀족들이 한꺼번에 죽어 버리자, 브리튼 전체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헹기스트 는 고향인 서북부 게르마니아(독일)에 살고 있던 동족 색슨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여기 브리튼은 매우 따뜻하고 풍요로운 땅이오. 하지만 주민들은 나약하고 겁이 많으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이미 우리가 그들의 왕을 죽였으니, 나머지 잔챙이들은 문제도 아니오. 어서 이곳으로 와서 우리와 함께 새로운 나라에서 삽시다! 헹기스트의 말을 전해들은 색슨족들은 환호하며 앞다투어 배를 타고 브리튼으로 향했다. 수만 명이나 되 는 색슨족들이 브리튼에 도착하자 헹기스트는 그들을 선동하며 브리튼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마을들 을 파괴하는데 미친듯이 열을 올렸다. 이 땅의 주인은 이제 우리 색슨족이다! 너희 브리튼인들이 목숨을 건지려면 순순히 우리의 노예가 되 어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이제까지 든든한 경비병이었던 색슨족들이 돌연히 배신한 것을 본 브리튼인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 은 미처 저항할 수가 없었다. 국방의 대부분을 색슨족에게 의존하고 있다가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어떻게 막겠는가? 색슨족이 배신했다! 저놈들이 보티건 왕을 죽이고 우리까지 죽이고 있다! 대부분의 브리튼인들은 멀리 서쪽 산악 지역인 웨일즈로 달아나거나 북쪽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색슨족 의 추격은 집요했다. 그들은 보이는 대로 브리튼인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마을들을 불태 우고 물자를 약탈했다. 브리튼인들의 존경을 받던 드루이드나 기독교 사제들조차 잔인한 색슨족의 칼과 도끼 앞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나갔다. 일찍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브리튼 왕국은 이제 사방에 핏물이 눌 러 붙은 잔혹한 땅이 되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브리튼인들은 색슨족의 침탈에 기가 죽어, 이제는 브리튼이 자신들의 땅이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보티건을 만난 드루이드인 멀린은 고향의 참상을 슬퍼하며 산과 들을 방황했 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1

412 그러던 어느 날, 색슨족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던 브리튼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원 탁의 기사단 이라는 비밀 조직이 브리튼 곳곳에서 색슨족들을 쳐부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 은 수많은 브리튼인들은 용기를 얻고 서로를 격려했다. 원탁의 기사단?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하게 여긴 멀린은 은밀히 수소문하여 원탁의 기사단 의 근거지인 카멜롯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아직 색슨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원탁의 기사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자신의 이 름을 아르타이우스(Artaius)라고 밝히며 멀린을 반갑게 맞았다. 이미 그 곳에는 원탁의 기사단과 함께 색 슨족에 맞서 싸우고 싶어하는 많은 브리튼인들이 모여 있었다. 멀린과 함께 군중 앞에 선 아르타이우스는 기백이 넘치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여러분, 우리 브리튼인의 조상인 켈트족들은 그 옛날, 이 브리튼섬은 물론이고 저 유럽 대륙까지 정복 했던 위대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용기를 잃고 나약해져 오늘날 이런 굴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원래부터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켈트족들은 전쟁의 신 벨레누스(브렌누스)의 지휘 아래 로마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마케도니아 왕국까지 무찔렀습니다. 세계 를 지배하던 두 제국도 우리 조상들의 용맹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단결할 수만 있 다면, 그 어떤 적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이 땅, 정든 고향인 브리튼을 침략자 색슨족 들로부터 지킵시다! 아르타이우스의 연설을 들은 브리튼인들은 주먹을 치켜들며 환호했고, 모두 원탁의 기사단과 함께 색슨 족과 싸울 것을 결심했다. 사람들의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아르타이우스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이름인 아르타이우스는 켈트족의 나라인 갈리아(프랑스)에서 믿었던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들 중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조상들이 믿었던 신 앙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저는 이제부터 전쟁의 신인 아르타이우스가 되어 저 색 슨족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아르타이우스 만세! 자유 브리튼에 영광이 있으라! 마치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것처럼 수많은 함성소리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2

413 그날부터 아르타이우스는 원탁의 기사단을 재정비했다. 기사들에게는 모두 말을 한 필씩 갖게 하여 기병 으로 복무토록 했고, 말을 가질 경제적인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창과 방패와 던지는 짧은 화살인 다트를 지닌 보병이 되게 했다. 군대의 주력은 기사들로 구성된 경무장 기병들이 맡고, 보조 전력은 보병들이 담 당하게 되었다. 저 색슨족들은 말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걸어 다니며 싸우는 미개한 부족들이다. 우리가 기동력을 살 려 유린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아르타이우스가 이끄는 원탁의 기사단은 재빠른 기동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색슨족들을 상대로 게릴라전 을 벌여 그들의 물자를 약탈하고 군사 요새들을 불태우며 주요 인물들을 기습하고 달아나는 식으로 싸웠 다. 갑자기 나타난 기사단의 공격에 색슨족들은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안 되겠다. 브리튼을 정복하려면 아르타이우스가 이끄는 원탁의 기사단부터 쳐부숴야 한다. 모든 전력 을 모아 아르타이우스의 근거지를 찾아내 초토화시켜라! 헹기스트와 호사는 색슨족 병사들을 이끌고 브리튼 저항군의 근거지인 카멜롯 성으로 진격했다. 아르타 이우스 역시, 원탁의 기사단과 자원한 브리튼인들로 이루어진 민병대를 이끌고 색슨족에 맞설 준비를 끝 냈다. 두 세력의 결전장은 바돈 산이 되었다. 먼저 달려와 진을 친 아르타이우스는 보병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앞에 내세우고, 비장의 무기인 기사단은 보병 부대의 뒤에 배치했다. 브리튼 군대의 대열을 본 헹기스트는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타이우스가 누군가 했더니, 영 형편없는 얼간이였구나. 고작 내세운다는 것이 저렇게 빈약한 민병 대라니! 우리 색슨족 병사들의 칼과 도끼만 봐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던 겁쟁이들이 무슨 수로 우리를 막 겠다고 서 있는 거지? 그러나 호사는 침착한 표정으로 헹기스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형님, 아무래도 아르타이우스란 녀석이 술수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섣불리 공격하면 우리가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니 군대를 세 방향으로 분산시켜서 중앙은 전진하고, 나머지 양쪽은 적의 측면을 노리도록 하지요. 무슨 소리냐! 갑옷과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민병대 따위를 상대로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3

414 다. 하지만 게다가 군대를 여러 방향으로 나누면 그만큼 전력이 분산되어 약해지고 만다. 여태까지 우리가 해왔던 대로 삼각 대열로 일거에 적의 중앙부를 돌격하여 박살내고 나머지 놈들은 각개격파를 하면 된다. 이건 보 탄 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필승의 방법이야. 형님! 더는 말하지 말거라! 어서 저놈들을 끝장내고 이 섬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들자. 동생의 이의를 제압한 헹기스트는 나팔수에게 뿔나팔을 불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그들의 신인 보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도록 했다. 보탄! 그러자 다른 병사들도 일제히 보탄의 이름을 불렀다. 보탄! 보탄! 보탄! 보탄! 동쪽 바다 건너 게르마니아와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부족들이 믿는 전쟁의 신 보탄(Wotan)은 훗날, 바이 킹들의 최고신인 오딘(Odin)이기도 했다. 게르만 계열에 속하는 색슨족들도 보탄을 열렬하게 숭배했고, 언 제나 그들은 보탄의 이름을 부르며 싸웠고 승리를 얻었다. 색슨족들은 자주 삼각형 대열로 적진을 돌격하 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그들은 이런 전술이 보탄이 전수해 주었다고 믿었다. 아르타이우스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소서! 보탄이여! 당신의 눈길로 저들을 공포에 떨게 하소서! 분노와 전쟁의 신인 당신을 위해 싸우나이다! 서로가 숭배하는 전쟁신의 이름을 외치며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바돈 산의 언덕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 가 시작된 처음에는 헹기스트가 이끄는 삼각형 대열의 색슨족 병사들이 브리튼족의 부실한 보병부대를 짓 부수어 큰 피해를 입혔다. 브리튼의 민병대는 방패를 모아 벽을 쌓고 창과 다트를 던지며 색슨족의 기세를 저지하려 했지만, 색슨족의 저돌적인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깐 사이, 땅바닥은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쓰러진 브리튼 병사들로 가득 찼고 발을 디딜 때마다 사람의 몸을 밟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아르타이우스! 안되겠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군의 중추부가 완전히 돌파당하겠습니다. 빨리 피 신하셔야 합니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4

415 다급한 목소리로 도망갈 것을 권유하는 멀린의 목소리에 아르타이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이 전투는 도저히 이길 수 없고, 브리튼은 멸망하고 맙니다. 어떻게든 색슨족의 돌격을 버텨내야 합니다. 멀린이여, 당신은 켈트족의 사제인 드루이드니,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르타이우스의 지시를 받은 멀린은 자신과 함께 종군한 드루이드들을 데리고 병사들의 뒤에 서서 노래 를 부르고 나팔을 불어 음악을 연주했다. 아득한 옛날, 고대 켈트족들이 전장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 해 불렀던 노래였다. 조상들의 음률을 들은 브리튼 병사들은 다시 힘을 내어 색슨족의 돌격에 저항했다. 물러서지 마라! 여기에서 물러선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가족들은 색슨족의 노예가 되고 집과 농장 은 불태워지고 만다.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가증스러운 원수 색슨족을 몰아내자! 브리튼 병사들의 완강한 저지에 색슨족의 공세가 차츰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언덕 위를 올라 오던 색슨족들은 어느덧 서서히 주춤거리며 활력을 잃어갔다. 이 때다! 원탁의 기사들은 아군 대열을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쳐라! 돌격! 여태까지 전황을 살피고 있던 아르타이우스가 보검인 엑스칼리버를 뽑아들고 기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 다. 주군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기사단은 일제히 민병대의 후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양 측면으로 원을 그리며 색슨족 병사들의 측면을 강타했다. 짓밟아라! 놈들을 없애버려라! 기습이다! 놈들이 우리의 옆을 덮쳤다! 전방에만 온 힘을 쏟고 있던 색슨족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기사단의 공격에 당황했다. 헹기스트와 호 사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병사들에게 전열을 유지할 것을 명령했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 새로 운 적인 기사단까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사단이 휘두르는 칼과 도끼에 색슨족 병사들은 허수아 비처럼 목이 잘려 나뒹굴었고, 어느새 그들은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했다. 거기에 이제까지 방어만 해오던 브리튼 보병 부대가 색슨족이 밀리는 모습을 보자, 힘을 내어 공세로 전 환해왔다. 앞과 양 측면에서 한꺼번에 공격을 받게 된 색슨족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가 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명씩이던 것이, 나중에는 대열을 이탈하고 전체가 달아나 버렸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5

416 색슨족이 도망친다! 기사단은 추격해서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패주하는 색슨족들을 원탁의 기사들은 맹렬히 쫓아가 칼을 휘둘렀다. 한 때, 모든 브리튼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잔혹한 살육자 색슨족들은 이제 자신들이 분노한 브리튼인들에게 거꾸로 죽임을 당하고 있었 다. 명령만 내리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아르타이우스는 호위 기병대를 거느리고 자신도 추격전에 가담했 다. 달아나는 색슨족 병사들을 보이는 대로 목을 치고 또 쳤다. 그의 온 몸은 피로 물들었고, 숨은 거칠어 졌지만 그는 지칠 때까지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달아나던 헹기스트마저 기사단에게 생포되어 목이 잘렸다. 호사는 수십 명의 병사들과 함께 간신 히 몸을 피해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색슨족 부대는 대부분이 죽거나 다쳐 브리튼 군대의 포로가 되었 다. 색슨족 군대는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전투를 끝낸 아르타이우스는 바돈 산의 꼭대기에서 브리튼 병사들을 사열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우리의 승리는 우리 조상들이 믿었던 전쟁의 신인 아르타이우스의 가호 덕분이다! 아르타이우스 의 이름을 크게 외쳐라!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브리튼 병사들은 우렁찬 환호성을 터뜨리며 열광했다. 색슨족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 다니던 나약한 그들은 압제자를 무찌른 승리자가 되어 당당히 캐멀롯으로 개선했다. 색슨족 대군을 격퇴한 아르타이우스는 전 브리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브리튼인들은 그를 보티건을 대신할 왕으로 추대했고, 아르타이우스는 약 40년 동안 브리튼을 통치했다. 불행히도 아르타이우스의 사후, 브리튼 왕국은 내분에 휩싸이다 다시 세력을 만회한 색슨족의 침공을 받 고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살아남은 브리튼인들은 언젠가 그들의 수호자인 아르타이우스가 다시 돌아와 색슨족을 몰아내고 자유를 찾아줄 것을 간절히 고대했다. 세월이 흐르고 후세의 영국인들은 신비한 마법의 힘으로 브리튼을 통치했던 아더(Arthur)왕을 추앙했다. 아더는 바로 아르타이우스를 영어 발음으로 옮긴 이름이었다. 갈리아의 전쟁 신인 아르타이우스는 이렇게 해서 브리튼을 지킨 전설적인 영웅이 된 것이다.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16

417 85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18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34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 브란 죽어서도 조국을 지킨 축복받은 왕 - 쏴아아 하얀 거품을 남기며 파도가 계속 해안가에 밀려온다. 그리고 해안의 모래사장을 조금만 벗어나면 우뚝 솟은 절벽과 고원 지대가 약간의 길만을 남긴 채, 바다의 침입으로부터 육지를 보호하고 있다. 브리튼(영국)의 서부 웨일즈. 높은 산과 계곡 및 골짜기로 이루어진 다소 척박한 지역이다. 하지만 이곳 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대해 무척이나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브리튼 전체에서 가 장 용감하고 자유로운 백성들의 땅이라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다스리는 왕은 브리튼을 통틀어 하 늘처럼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매일같이 절벽 위에 서서, 해안가를 둘러보며 혹시나 웨일즈와 브리튼을 침략하려는 적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감시하고 있다. 등대를 세우거나 횃불을 밝히는 방법이 아니라 그냥 눈으로 보고 파악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웨 일즈의 군주는 1천 미터나 되는 스노드 산에 기대어 잠을 잘만큼 어마어마한 거구의 소유자다. 그의 이름 은 브란, 브리튼인들은 그를 가리켜 축복받은 브란이란 뜻의 벤디게이드프란(Bendigeidfran)이라고 부른 다. 브란에게는 많은 가족이 딸려 있는데, 마나위단과 니쓰엔, 에버니쓰엔이라는 세 명의 남동생과 브란웬이 라는 아름다운 여동생 및 카라다우크라는 아들이 있다. 보통의 인간들보다 머리가 하나 쯤 크기는 하지만 브란처럼 유난히 장대하지는 않다. 브란의 어머니인 페나르둔은 바다를 지배하는 위대한 신인 리르와 처음 결혼하여 브란과 브란웬을 낳은 다음, 인간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마나위단과 니쓰엔 및 에버니쓰엔을 출산했다. 브란은 신의 피를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 유난히 거대했던 것이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18

419 오늘도 어김없이 브란은 10명의 파수병들을 거느리고, 웨일즈의 절벽 위에서 해안을 지켜보며 파수를 서 는 중이다. 때는 가을, 제법 쌀쌀한 찬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와 다른 병사들은 몸을 움츠리며 연신 하얀 입 김을 뱉어내지만 브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몸을 가진 그에게 바닷바람 은 시원한 산들바람처럼 느껴질 뿐이다. 병사들 중 한 명이 왕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하,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더구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몸에 좋지도 않습니다. 전 하께서는 그만 쉬시고 다른 병사들에게 해안 경계를 하라고 하심이 어떨런지요? 보초병이 그렇게 말했지만, 브란은 거대한 머리를 저으며 거부했다. 이보게, 내 몸이 들어갈 곳은 웨일즈 전체를 둘러봐도 없네.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우고 나면 수천 마 일 바깥의 해안선은 누가 살피나? 웨일즈와 브리튼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는 일은 내가 줄곧 해왔으 니, 염려할 것 없네. 그러나 브란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자네가 추워서 그런 게 아닌가? 이제 그만 됐으니, 자네는 막사에 들어가 따뜻한 화로에 손을 얹고 몸을 녹이게.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하게. 지금부터는 나 혼자 파수 를 볼테니. 그렇지 않아도 찬바람에 부들부들 떨던 병사들에게 브란의 말은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왕의 허락이 떨어 지자, 10명의 파수병들은 모두 브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막사로 들어가 눈 좀 붙이려는 달콤 한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그 때. 멈춰라! 모두 각자 위치로 돌아가라! 해안선에 수상한 물체가 나타났다! 마치 천둥처럼 울리는 브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반쯤은 당황하면서도 왕의 명령에 복 종했다. 허겁지겁 등을 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파수병들의 눈에 보인 것은 서북쪽 방향에서 나타난 13 척의 함대였다. 저것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다. 브란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파수병이 불안한 눈초리로 함대를 응시하자, 거인왕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19

420 서북쪽 바다에서 출현한 걸로 보아서 아일랜드나 픽트족(스코틀랜드의 원주민)의 함대일걸세. 혹시 전쟁을 선포하러 온 사절단은 아니겠지요? 그건 두고 봐야지. 하지만 이 브란이 지키기 있는 브리튼에서는 어떠한 자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수 없네. 자신만만한 왕의 말에 다른 병사들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브란을 신뢰하는 그들의 마음은 신앙심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제까지 그들이 맞서 싸운 어떤 상대도 브란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브리튼 전체와 아일랜드, 더 나아가 유럽 대륙 전체에서도 브란과 싸워 이긴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도대체 누가 태양을 두 손으로 가릴 만큼 거대한 거인을 이길 수 있겠는가? 13척의 배들은 웨일즈 병사들이 파수를 서고 있는 해안가로 접근해 왔다. 그리고 돛을 접은 상태로 노를 저어 뱃머리를 해안의 백사장에 바싹 가까이 대고는 닻을 던져 배를 바다 밑바닥에 고정시켰다. 곧이어 배 에 탄 사람들이 하나둘씩 배에서 내려 상륙했다. 그들은 양털로 짠 모직물 옷을 입었고,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었으며, 모두 남자들이었지만 머리카락과 콧수염을 길게 길렀다. 단, 턱부분의 수염은 깨끗이 밀 어버려 나지 않았는데, 그런 외모는 웨일즈인들과 거의 비슷했다. 낯선 방문객들이 백사장에 모두 상륙하자, 브란은 그들을 향해 위엄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양( 大 洋 )을 다스리는 신, 리르의 아들이자 웨일즈의 왕이며 브리튼의 수호자인 축복받은 브란 이오. 그대들은 누구인데, 바다를 건너서 브리튼을 찾아왔소? 허공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브란의 말을 들은 선원들은 놀라 당황해하면서도 모래벌판 위에 한 쪽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했다. 그들 중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이면서 금실로 수놓은 녹색의 모직 망토를 걸치고 황금 목걸이를 두른 사나이는 브란에게 다가가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힘써 올려다보며 자 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아일랜드의 왕인 마솔루흐요. 그대가 말로만 듣던 브리튼의 수호자, 거인왕 브란이오? 그렇소. 브리튼에는 무슨 일로 왔소? 마솔루흐는 일부러 얼굴에 웃음을 띄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과 브리튼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동안 위대한 왕인 브란의 명성을 오랫동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다스리고 있는 웨일즈와 우리 아일랜드 두 나라 간에 동맹을 맺기 위해 바다를 건너 온 것입니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0

421 당신들이 우리와 동맹을 구한단 말이오? 반가운 소식이군. 하지만 그러려면 그냥 사신 몇 명만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직접 찾아올 것까지는 없는데 단지 외교적인 동맹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두 나라를 합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을 위한 단계로 나, 아일랜드의 왕 마솔루흐는 당신 브란의 여동생이자 브리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브란웬과의 결 혼을 원합니다. 마솔루흐의 말이 나오자 브란뿐 아니라 웨일즈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이 벌어졌다. 뭐요? 지금 뭐라고 했소? 놀라시겠지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저와 브란웬이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이는 장차 아 일랜드와 웨일즈 두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렇다면 두 나라는 앞으로 자연히 하나로 합쳐지지 않 겠습니까? 무수한 피를 뿌리는 전쟁 없이 영원히 한 나라로 통합되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아일랜드 왕의 당돌한 요구에 잠시 고민하던 브란은 대답했다. 당신의 말은 구미가 당기는구려. 하지만 여기서 얘기할 사항은 아니니, 일단 웨일즈의 성역인 앵글시 섬으로 가서 상의합시다. 아일랜드에서 오신 손님들은 모두 나를 보고 따라오시오. 브란과 파수병들은 육로를 통해 앵글시 섬으로 향했고, 그런 브란을 길잡이로 삼아 아일랜드 선단은 바 다를 항해한 끝에 앵글시 섬에 도착했다. 앵글시 섬은 역대 웨일즈의 왕들이 묻힌 성스러운 땅이었고, 웨 일즈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앵글시 섬의 궁전인 아베르프라우(Aberffraw)에서 머물고 있던 브란의 동생인 마나위단과 니쓰엔, 그리 고 아름다운 여동생인 브란웬은 형이자 오빠인 브란이 낮선 아일랜드 인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곧 그의 설명을 듣고는 기뻐했다. 하얀 피부와 파란 눈,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자랑하며 브리튼 최고의 미녀라는 칭송을 듣던 브란 웬은 아일랜드의 왕이라는 훌륭한 신랑감이 제 발로 걸어와 나타난 것을 보고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오빠인 마나위단과 니쓰엔도 마솔루흐의 청혼을 열렬히 찬성했고, 다른 형제들의 반응을 본 브란 도 흔쾌히 누이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혼담은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로 인해 큰 위기에 부딪치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브란에게는 니쓰엔과 더불어 에버니쓰엔이란 동생이 있었다. 니쓰엔은 원만하고 평화로운 성품이어서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에버니쓰엔은 그와는 정반대에 선 인물이었다. 북유럽 신화의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1

422 로키처럼 그는 심사가 뒤틀려 매사를 삐딱하게 보고,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의 갈등을 부추기는 악취미를 가졌다. 그런 이유로 에버니쓰엔은 브란 일가로부터 일종의 이단자 취급을 받고, 브리튼 백성들로부터도 전혀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마솔루흐 일행이 웨일즈를 방문하던 그 날, 마침 말을 타고 숲과 들판을 달리러 아베르프라우를 떠나있 던 에버니쓰엔은 밤늦게 돌아오던 중, 낮선 사람들이 궁전에 들어와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고 궁금하게 여 겨 궁전에서 일하는 시종에게 자초지정을 물어보았다.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에버니쓰엔은 크게 분노했다. 아무리 자신이 왕따 신세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가족인데 여동생을 외국에 시집보내는 중대사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전혀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멋대로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속에서 질투와 증오심이 끓어오른 에버니쓰엔은 궁전 밖에 머무르고 있는 아일랜드인들의 막사로 몰래 향했다. 그리고 우선, 보초를 서던 아일랜드인 병사를 죽였으며, 마솔루흐를 비롯해 아일랜드인들이 배에 싣고 와서 신부인 브란웬에게 결혼의 선물로 바칠 예정이었던 말들의 입술과 꼬리와 귀와 눈썹을 모 두 칼로 잘라 버렸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말들은 칼날에 베인 곳에서 피를 쏟으며 대부분 죽거나, 불구가 되고 말았다. 고통 속에 죽어가던 말과 병사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일랜드와 웨일즈 병사들은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사건 현장에 도착한 브란 일행과 마솔루흐 역시 충격을 받았다. 병사와 귀중한 말들을 잃은 마솔루흐의 마음도 갈갈이 찢어졌지만, 여동생의 결혼이라는 중요한 일을 이렇게나 망쳐버린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는 동생을 본 브란의 심정도 괴로웠다. 너,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하느냐! 격노한 브란이 추상같은 어조로 꾸짖었지만, 에버니쓰엔은 오히려 퉁명스레 콧방귀를 뀌며 맞섰다. 형님과 다른 식구들이야말로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요? 여동생을 출가시키는 집안의 중대사를 놓고 왜 나만 쏙 빼놓고 한 거냔 말이오? 나도 엄연한 가족인데, 이렇게 무시하고 푸대접을 해도 되느냔 말이오! 그리고 여동생의 남편감으로 아일랜드 왕 따위가 뭐요? 고작 사마귀 발톱만한 쪼그만 땅 덩어리에 왕이나 백성이나 죄다 허구헌날 술에 찌들어 사는 주정뱅이들의 집합소 따위가 나라인가? 하도 가난해서 썩은 지 푸라기를 지붕으로 삼고 사는 가난뱅이 동네의 얼간이가 우리 누이의 배필이란 말이오? 에버니쓰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충격적인 폭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 다. 모욕을 받은 당사자인 마솔루흐와 아일랜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접대하던 웨일즈 측 인사들 도 너무나 놀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2

423 얼어붙은 좌중을 깨뜨린 것은 브란의 일갈이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을 당장 왕궁 지하실로 데려가 감금하라! 왕의 명령을 들은 웨일즈 병사들이 에버니쓰엔을 포박해 끌고 갔다. 그러나 끌려가면서도 에버니쓰엔은 비릿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여전히 마솔루흐와 그 신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골치 아픈 동생을 처리하고 난 브란은 아일랜드 왕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소.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저 녀석은 원래가 저렇게 못된 심보를 부려서 가족들과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던 놈이었소. 그대가 올 줄 알았다면 내가 미리 왕궁에는 얼씬도 못하게 멀리 보내버렸을 텐데, 참으로 면목이 없소. 그러나 에버니쓰엔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마솔루흐는 굳어진 얼굴로 아무런 말이 없다. 브란은 그를 연 신 달래며 좋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신부에게 주기 위해 선물로 가져온 예물들이 몽땅 망가지고, 고향의 병사들을 잃은 그대의 심정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오. 내 왕궁의 마굿간에 더 좋은 말 14필을 그대에게 주겠소. 그리고 그대의 얼굴 넓이만 큼의 황금과 키와 몸무게만큼 크고 무거운 은도 선물하리다. 또, 내 아버지 리르에게서 물려받은 신비한 보물도 드리겠소. 그것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마법을 지닌 황금 가마솥이오. 일단 죽은 사람도 그 안에 들어가기만 살아난다오. 단, 말은 하지 못하지만 살아 있을 때처럼 용감하게 싸울 수 있으니 나라를 지키는 데 이만한 보물도 없을 것이오. 부디 그대의 노여움을 풀 기 바라오. 브란의 간곡한 부탁과 그가 제시한 보상들을 접한 마솔루흐는 고심 끝에 받아들이기로 하고, 브란 일가 와 화해를 했다. 아베르프라우의 왕궁에서는 아일랜드 왕과 브리튼 공주 간의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고, 지 하실에 갇혀 두문불출하고 있던 사고뭉치 에버니쓰엔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술잔을 높이 들며 신혼부부 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물론 동료들이 죽임을 당한 아일랜드 병사들은 여전히 불평을 터뜨렸다. 전하, 우리 형제들이 졸지에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계실 겁니까? 이건 단순한 돌발행동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 아일랜드를 깔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브리튼과의 동맹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이나 대륙의 갈리아와 연합 해서 브리튼을 압박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3

424 하지만 마솔루흐는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들을 달랬다. 본래 우리 아일랜드와 브리튼은 다 같은 켈트족이었다. 비록 지금은 나라가 갈라져 오랫동안 반목해 왔지만 저들과 우리는 한 조상에서 나온 동족이다. 나와 브란웬의 결혼을 통해 두 섬이 한 몸이 된다면 지 금보다 더욱 강력하고 위대한 나라가 된다. 아일랜드의 천년대계를 위해 사소한 원한은 잊는 것이 옳다. 부디 내 뜻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아울러 마솔루흐는 그들에게 이번 사건을 고국에 돌아가서도 결코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당부했다. 왕의 간절한 설득에 병사들도 차츰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온을 되찾았다. 아베르프라우 왕궁에서 브란웬과 함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낸 마솔루흐는 브란이 준 선물들과 함께 신부 와 병사들을 데리고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수도인 타라의 왕궁으로 귀환한 왕을 본 아일랜드 백성들은 기쁨에 넘쳐 브리튼 출신 왕비를 열렬히 환 영했다. 그리고 브란웬을 위해 그녀가 살 새로운 궁전도 지어 주었다. 백성들의 성대한 대접을 받은 브란 웬은 그 보답으로 웨일즈를 떠날 때, 가져온 보석이나 금으로 된 장신구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두 둑한 인심도 얻었다. 여기에 마솔루흐와 결혼한 지 10달 만에 그녀가 그웬이라는 아들을 낳자, 아일랜드 전역은 축제 분위기 에 들떴다. 아버지가 된 마솔루흐도 아내 못지않게 신이 났다. 이제 아일랜드와 브리튼, 두 나라가 통합되 는 원대한 꿈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에버니쓰엔의 사고처럼, 뜻하지 않은 악재가 발생해 허니문의 분위기는 참혹한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술 때문이었다. 마솔루흐와 함께 웨일즈에 갔던 병사들이 술에 취한 채로, 결혼식 날 밤 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 털어 놓았던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아일랜드 병사가 브리튼 왕비의 오빠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져간 말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조국 이 술주정뱅이와 거지들의 섬이라는 모욕까지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브란웬을 환영하던 아일랜드의 민 심은 싸늘하게 식었다.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기 좋아하는 아일랜드 인들의 기질은 금새 브리튼과의 통합을 반기는 분위기에서 자신들을 모독한 오만한 브리튼을 증오하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귀족이고 평민이고를 막론하고 아일랜드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4

425 에서는 온통 브란웬을 비롯한 브리튼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브란웬보다 당황한 쪽은 마솔루흐였다. 그는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이미 지난 일이고 브란왕이 충분히 사과했으며, 보상까지 해 주었다. 라는 말로 백성들을 달래려 했지만, 아일랜드 인들의 분노는 도저히 가 라앉을 줄을 몰랐다. 심지어 귀족들로부터는 엄연한 모독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브리튼 여자와 결혼을 하시다니, 전하께서는 그들에게 구걸이라도 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브리튼의 노예이자 속국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 까? 만약 전하께서 브리튼으로부터 이런 치욕을 받고도 가만히 계신다면 우리는 전하를 형편없는 겁쟁이 로 알고, 더 이상 왕으로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라는 반발까지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백성들의 민심에 따르자니 아내를 버려야 하고, 아내를 버리자니 개인적인 사랑과 브리튼과의 통합이라는 정치적인 꿈마저 포기해야 하니, 마솔루흐는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던 마솔루흐는 결국 타결책을 찾아냈다. 일단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 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브란웬에게 왕비로서의 대우를 박탈하고 그녀를 왕궁의 부엌으로 보내 푸줏간과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시킨다. 다만, 그녀와 이혼을 하거나 브리튼으로 돌려보내지도 않는다. 아직까지 브란웬은 공식적으로 아일랜드 의 왕비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과 브란웬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그웬은 계속 직책을 유지하며 아일랜드 에서 가장 훌륭한 귀족 가문에서 양육하도록 했다. 백성들의 불만과 아내와의 사랑, 브리튼과의 관계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해답인 셈이었다. 왕의 결정이 떨어지자, 브란웬은 한 나라의 왕비에서 순식간에 미천한 부엌데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녀는 여태껏 한 번도 하지 않은 부엌 밑바닥 청소나 고기와 채소를 자르는 주방 일부터 사람들이 먹다 버 린,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는 음식물 찌꺼기 통을 비우거나 그릇을 설거지하는 통 바닥의 수챗구멍을 치 우는 역겨운 일까지 모두 도맡아해야 했다. 처음에 그녀가 아일랜드에 왔을 때, 감히 얼굴조차 쳐다볼 수 없던 부엌의 일꾼들은 이제 그녀를 자기들 보다 더 비천한 노예로 취급하며 걸핏하면 손찌검을 하거나 궂은일을 떠넘기며 괴롭혔다. 물론 그러면서 자신들은 일손을 놓고 빈둥거렸다. 이 모든 굴욕을 3년 동안이나 묵묵히 참고 견디던 브란웬은 어느 날, 부엌의 창문으로 날아 든 찌르레기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5

426 새를 보았다. 그녀는 새에게 먹다 남은 음식물 중에서 깨끗한 것을 골라 먹이며 길들였다. 그리고 옷자락 을 찢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담은 편지를 만들어 새의 다리에 매달고, 웨일즈가 보이는 동쪽으로 날려 보냈다. 브란웬이 쓴 편지를 매단 찌르레기 새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곧장 웨일즈로 날아가 여전히 해안 경비를 서고 있는 브란의 어깨에 앉았다. 자신에게 다가온 새와 그 다리에 달린 옷조각을 본 브란은 신기하게 생 각해, 그것을 떼어 펼쳐 보았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머나먼 외국인 아일랜드에서 그곳 사람들로부터 온갖 학대를 당하고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브란은 말 그대로 격노했다. 동생인 에버니쓰엔의 횡포를 사과하고 금과 은에 신기한 마법 가마솥까지 선물하며 아일랜드를 달랬건 만, 돌아온 보답이 고작 이거란 말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브란웬이 어째서 아일랜드 인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가?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브란은 웨일즈 뿐만 아니라 그가 지배하고 있는 브리튼과 아버지인 리 르의 영역이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해저 세계에도 전령을 보내, 아일랜드 인들의 횡포로부터 브란웬을 구하고 그들의 무례함을 응징하자는 뜻을 전달했다. 거인왕의 명령을 받은 144개의 나라들은 모두 그의 제 의에 동참하여 군사를 보냈다. 웨일즈 앵글시 섬의 아베르프라우 왕궁에는 연일 수많은 군사들이 모여 북적거렸다. 두 마리 말이 모는 전차( 戰 車 ) 부대와 바람처럼 빠른 기마 부대, 사슬 갑옷을 입고 철제 투구를 쓴 채로 장대한 양손검을 휘 두르는 전사들, 방패를 들고 적의 화살을 막으며 한 덩어리가 되어 전진하는 보병 부대, 흥분제를 마신 상 태에서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돌격 부대, 적의 머리에서 뽑아낸 뇌수 에 석회를 뭉친 공(타홀름)을 던지는 난폭한 사냥꾼들이 브란의 궁정 앞으로 집결했다. 여기에 해저 세계 에서 온 보통 사람보다 덩치가 30배나 더 큰 거인들과 불을 뿜어대는 붉은 용들까지 가세했다. 브리튼 전역에서 모인 군사들은 수천 척의 함대에 탑승해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산처럼 육중한 브란이 바다를 선 채로 걸으며 대군을 인도했다. 어떠한 배도 브란을 실을 만큼 크지는 못했기 때 문이었다. 분노와 전의로 불타는 브란은 보통 때보다 더욱 거대해졌고, 그의 두 눈은 원수의 땅인 아일랜 드를 노려보는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나팔을 부는 병사가 올라서서, 음악을 연주하 며 브리튼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한편, 아일랜드의 해안을 지키던 병사들은 저 멀리 동남쪽 바다의 수평선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혼란에 빠졌다. 갑자기 바다 위로 수많은 숲들이 나타났고, 그 앞에는 불쑥 솟아난 큰 산봉우리와 두 개의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6

427 호수를 붙인 어마어마한 산이 걸어온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으로 퍼졌고, 놀란 마솔루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직까지 부엌에서 고초를 겪고 있던 브란웬에게 사람을 보내 바다에 나타난 괴이한 징조들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남 편의 질문에 브란웬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바다 위의 숲은 브리튼에서 출정한 군사들이 탄 배의 돛대입니다. 그리고 그 앞의 거대한 산은 저의 오빠이자 브리튼의 왕인 브란이며, 산봉우리는 그의 코이고 두 개의 호수는 눈입니다. 아일랜드의 왕비에 서 부엌데기로 전락해 학대받고 있는 저를 구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아울러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게 합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검은 때와 먼지로 더럽혀진 얼굴이지만 브란웬에게는 여전히 왕비로서의 기품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 은 마솔루흐는 겁에 질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어 보았 다. 전하께서 나라와 백성을 무사히 지키고 싶으시다면, 결코 브리튼 군사와 맞서지 마시고 제 오빠가 원 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십시오. 알았소. 허탈한 심정으로 부엌을 나온 마솔루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제까지 브란웬을 처벌해야 한다며 여론 을 선동하던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브란이 이끄는 브리튼 군사들의 대규모 공격이라는 사태에 부딪치자,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허둥대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하 마솔루흐는 왕좌에 앉은 채로 비굴하게 애걸하는 귀족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오? 이대로 브리튼 군사들의 침공을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럼 그대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서 싸우면 될 게 아니오. 허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들의 군사들은 저들보다 적습니다. 병력 부족을 호소하는 귀족들의 말에 왕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7

428 그걸 아는 사람들이 왕비를 부엌치기로 만들자고 그 난리를 쳤소? 그 때문에 왕비의 친정인 브리튼에 서 복수를 하러 온다고 저렇게 몰려오는 게 아니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멍청이들 같으니라 고 흥! 귀족들은 민망한 심정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텄다. 저희들의 책임은 십분 통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솔루흐는 쏘아붙였다. 브리튼 군대의 횡포에 대항해 맞서 싸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도인 이 곳 타라 로 통하는 길목인 섀넌 강의 다리를 끊는 것입니다. 아무리 브리튼 군사들의 수가 많아도 강의 다리가 없 는데, 선뜻 건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든다면 무슨 소용이오? 물론 그 점은 저희들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마련한 두 번째 방법은 귀족들이 내놓은 남은 두 가지 방안을 들은 마솔루흐는 브리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보다 더 놀랐으나, 사태가 워낙 심각하여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아일랜드 해안에 무사히 상륙한 브란은 섀넌 강의 다리가 끊긴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고작 이걸 해결책이라고 내놓다니, 아일랜드 인들의 머리도 한심하구나. 아니면 이 브란이 브리튼 군 대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건가? 브란은 섀넌 강의 양 너머에 드러누웠고, 그의 몸을 타고 브리튼 군사들은 무사히 강을 건너 타라가 보 이는 강 기슭에 진을 쳤다. 그나마 짜낸 방어책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광경을 본 마솔루흐와 아일랜 드 인들은 경악했다. 도저히 어쩔 수 없구나. 브란 왕에게 사신을 보내야겠다. 마솔루흐는 급히 브란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본의가 아니었지만, 신하들의 말만 믿고 브란웬을 학대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사과의 뜻으로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겠다. 그리고 자신은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아일랜드의 왕위에서 물러나며, 브란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그웬에게 왕위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8

429 를 넘긴다. 단, 그웬은 아직 어리니 그가 어른이 될 때까지 브란이 아일랜드의 섭정이 되어 주고, 자신과 아일랜드의 귀족들은 브란을 군주로 섬기겠다.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아일랜드의 모든 나무를 베어 와 서라도 섀넌 강 기슭에 브란이 들어갈 만한 거대한 성을 쌓겠다, 라는 내용이었다. 분노한 와중에도 브란은 마솔루흐가 제시한 협상안을 검토하고는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받아들였다. 마 솔루흐를 비롯한 아일랜드의 지배자들이 여전히 괘씸했지만, 그들과 브란웬을 잇는 다리인 어린 조카 그 웬을 생각해 볼 때, 협상에 명시된 내용들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브란이 협상안에 동의하자, 마솔루흐는 거듭 감사를 표하며 나라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 브란을 수용할만 한 성을 짓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이 완성되었는데, 그 높이는 하늘에 걸린 구름에 닿을 정도였다. 건물을 받치는 기둥들은 1백 개가 넘었고, 모두 황금으로 칠해 햇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번쩍였다. 성이 다 지어지자, 마솔루흐는 브란 일행을 성 안으로 초대해 평화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브란은 기 꺼이 수용했지만, 이번에도 결혼식 사건 때처럼 에버니쓰엔이 나서서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마솔루흐와 브란웬 간의 결혼식이 다 끝날 때까지 에버니쓰엔은 왕궁의 지하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러 다 두 신혼 부부가 아일랜드로 가자, 그제서야 풀려났다. 저지른 짓으로 본다면 그는 죽어야 마땅했지만 그래도 혈육인지라 살아난 것이다. 감금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에버니쓰엔은 한동안 조용 히 지냈다. 그런데 여동생이 아일랜드에서 학대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해 군대가 출정 하자, 에버니쓰엔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고집을 피워 원정군에 참여했다. 애초에 파국의 불씨를 초래한 장본인이 자신이니, 그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데 브란이나 마나위단이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가족들처럼 배를 타고 아일랜드로 건너 온 에버니쓰엔은 자신의 특기인 관찰 능력을 긍정적인 부분 에 쓰기로 했다. 그는 아일랜드 인들이 새로 지은 왕궁에 형제들보다 먼저, 그리고 몰래 들어가 세심하게 살폈다. 확인 결과, 성 안의 기둥 1백 개에는 각각 두 개씩의 큼직한 가죽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성을 지 을 때, 마솔루흐는 브란 일행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담았다고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었다. 에버니쓰엔은 가죽 주머니를 이리저리 더듬어 보고는 숨겨진 비밀을 간파했다. 주머니 안에는 음식이 아 니라 창과 방패 같은 무기를 숨긴 병사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을 숨겨 놓고, 브란 일행이 들어오면 2백 명 의 병사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기습할 계획이었던 것일까? 에버니쓰엔은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 안에 숨은 병사들의 목을 있는 힘껏 졸라 모두 죽여 버렸다. 암살자들을 처치한 그는 병영이 설치된 강 기슭으로 돌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9

430 아갔다. 숨겨놓은 병사들마저 모두 죽어 두 번째 계획마저 실패하자 마솔루흐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신하들은 아직 마지막 남은 한 가지 계획이 남아있다고 위로했다. 다음 날, 날이 밝고 브란을 위해 지은 성에서는 브리튼과 아일랜드 군사들이 모여 평화를 기념하는 축하 연회를 벌였다. 아일랜드 군사들은 브리튼 군사들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마솔루흐와 대신들도 브란을 보 고 고개를 숙였다. 지저분한 부엌데기의 옷을 벗고 시집왔을 때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브란웬은 오빠 들을 보고는 지난 일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 브란웬은 친정 식구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이어 마솔루흐는 아일랜드의 왕위에서 공식적으로 퇴위했음을 선언했다. 그러자 왕자인 그웬이 대관식을 치르며 아일랜드 의 왕좌에 올랐다. 그웬은 외숙부인 브란 일행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브란은 조카를 귀여워하며 머리를 쓰다듬 었고, 마나위단과 니쓰엔도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나 에버니쓰엔은 달랐다. 그는 조카를 번쩍 들더니 성 의 벽에 힘껏 내던졌다. 누가 나서서 말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아일랜드의 소년 왕은 잔인한 외삼촌의 손에 의해 벽에 머리가 깨어져 죽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브란웬은 자신도 성의 중앙에 피운 모닥불 안으로 뛰어들어 죽으려 했으나, 브란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아 죽지 못하게 말리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사악한 동생을 꾸짖 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저 아이는 브란웬의 아들이고, 우리의 핏줄이다! 너의 손으로 혈육을 죽이다 니! 에버니쓰엔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웬은 우리의 핏줄이기도 하지만, 마솔루흐와 아일랜드 인들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놔두었다 가는 아일랜드 인과 한편이 되어 우리한테 맞설 것이기에 내 손으로 없앨 수밖에 없었소! 그래도 그렇지 형제 간의 말다툼은 거기서 끝났다. 어린 왕이 죽는 것을 본 아일랜드 군사들은 이성을 잃고 브리튼 군 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브리튼 군사들도 무기를 들고 대항했고, 성 안은 순식간에 피가 홍수처럼 흘러넘 치고 살육이 난무하는 끔찍한 전쟁터로 변했다. 처음에는 수적인 우세와 용기 및 무기에서 브리튼 군사들이 우세했다. 대부분의 군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30

431 처음에는 수적인 우세와 용기 및 무기에서 브리튼 군사들이 우세했다. 대부분의 군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브리튼에 비해, 아일랜드 군사들은 얇은 모직물 한 장만을 걸친 것이 전부였다. 잠깐 동안에 아일 랜드 군사들은 칼과 창에 베이고 찔려 건물 바닥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대로 브리튼 군사들이 쉽게 승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일랜드 측에는 이런 위기를 뒤집을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바로 브란이 선물한 황금 가마솥이 었다. 아일랜드 군사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를 끌고 와 가마솥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물이 펄펄 끓더 니, 전사한 아일랜드 군사가 다시 일어나 창과 칼을 잡고 브리튼 군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전세는 점점 브리튼 쪽에 불리해져갔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가마솥에 시체를 넣기만 하 면 다시 살아나니, 아일랜드 측은 도저히 병사가 바닥나지 않았다. 반면, 브리튼 군사는 시간이 갈수록 병 력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용맹한 브리튼 군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 다. 한참 피를 뒤집어쓰며 싸우고 있던 에버니쓰엔은 그 광경을 보았다. 그는 죽지 않는 상대와 싸워서는 승 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고심 끝에 그는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죽은 아일랜드 군사들 사이에 누워 마치 자 신이 아일랜드 인인 것처럼 위장했다. 곧이어 시체를 가마솥에 넣는 아일랜드 병사가 다가와 그를 동포라 고 착각하고는 번쩍 들어 가마솥에 던졌다. 가마솥 안에 던져진 에버니쓰엔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두 팔과 다리를 힘껏 벌려 가마솥을 부숴버렸다. 그러나 한 순간에 너무나 많은 힘을 낸 바람에 심장이 터져 그 역시 죽고 말았다. 평생을 죄악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가족과 조국을 위해서 죽은 것이다. 마법의 가마솥이 없으니 이제 아일랜드 측은 더 이상 죽은 군사들을 살릴 수가 없었다. 수세에 몰렸지 만, 여전히 용기를 잃지 않고 있던 브리튼 군사들은 에버니쓰엔의 희생에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싸웠다. 아일랜드 군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일랜드 측은 마솔루흐와 그를 따르는 대신들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아일랜드 인들은 사제인 드루이드들을 내세워 브리튼 군사들에게 마법을 걸었다. 하얀 옷을 입은 드루이 드들이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브리튼 군사들은 손과 발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용기 대신 피로와 두려움이 마음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 있던 브란은 자신에게 내재된 신성한 권능을 드러내어 맞섰다. 그의 몸은 더욱 거대해 져 성의 천장을 뚫고 하늘까지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브란이 쓴 황금 투구와 착용한 황금 갑옷, 그리고 들고 있던 황금 방패와 장검은 눈부시게 빛을 뿜었고 성스러운 힘을 발휘하여 드루이드들의 마법을 모두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31

432 깨뜨려 버렸다. 최후로 믿었던 마법마저 패배하자, 이제 더 이상 마솔루흐를 비롯한 아일랜드 인들은 저항할 의지를 잃 어버렸다. 그들은 겁을 먹고 바닥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브란의 발에 짓밟혀 모두 죽임을 당했 다. 마지막은 마솔루흐의 차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고 브란의 칼을 받았다. 마솔루흐의 목은 순식간에 피를 쏟으며 땅에 뒹굴었다. 아일랜드 왕과 귀족들을 죽인 브란과 브리튼 군사들은 성 밖으로 나가, 다른 아일랜드 인들을 상대로 파 괴와 살육을 자행했다. 어리석은 감정에 휩쓸린 아일랜드 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곳곳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흘러넘치며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분노와 피의 열정에 도취한 브리튼 군사들은 남자는 물론 여자나 아이들 및 노인들에게까지 칼과 창을 휘둘러댔다. 해저의 거인과 용들도 물과 불을 뿜어대며 아일랜드 인들을 익사시키거나 불에 태워 죽였다. 브리튼 군사들이 지쳐 살육을 멈추고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 산 속 깊은 동굴 속으로 숨은 5명의 임산부 를 제외한 모든 아일랜드 인들은 죽임을 당한 후였다. 물론, 집이나 농장을 비롯한 건물들도 전부 불태워 지고 파괴되어 아일랜드는 시체들로 가득 찬 황폐한 땅으로 변했다. 이로써 브란웬이 당한 수치를 씻기 위한 보복전은 끝났다. 하지만 승자인 브리튼 군사들도 결코 의기양 양한 입장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군사들은 마나위단과 음유시인 탈리에신을 비롯한 7명에 불과했고, 브란 웬은 자신 때문에 이렇게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다며 자책하다가 슬픔을 못 이겨 죽고 말았다. 더욱이 왕인 브란마저도 전투 중에 아일랜드 군사가 쏜 독 묻은 화살에 발을 찔려 온 몸에 독이 올라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직감한 브란은 형제인 마나위단과 다른 군사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내 검으로 목을 베어서 브리튼의 런던으로 가져가 다오. 그리고 대륙의 갈리아를 보는 쪽 으로 묻어다오.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죽어서도 조국을 지킬 것이다. 왕의 부탁을 받은 마나위단과 브리튼 군사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배를 타고 브리튼으로 돌아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브란의 머리를 가지고 런던까지 가는 도중,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왕의 죽 음을 슬퍼하며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따라가며 애도했다. 런던의 하얀 산에 묻힌 브란의 머리는 80년 동안이나 브리튼 백성들에게 미래를 예언하며 그들을 보살폈 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브리튼은 어느 나라로부터도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를 누렸다. 나라와 백성을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32

433 지극히 사랑한 왕의 마음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33

434 86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435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16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436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이 간식으로 즐겨 먹는 유조는 일종의 튀김 빵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길게 만들어서 튀긴 다음, 콩국을 곁들여 먹는다고 합니다. 이 유조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좀 비극적인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에 맞서 영웅적인 항전을 했지만, 간신 진회의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죽은 명장 악비의 혼을 달래기 위해, 당시 남송 백성들이 진회와 그 아내(악비를 죽이 라고 진회에게 부추겼답니다)의 모습을 흉내낸 밀가루 반죽을 튀겨서 유조라고 이름붙이고 먹었던 것이 오늘날 유조 의 시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성계의 고려 찬탈을 미워한 개성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고 부르고 씹어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437 먹었던 설화와 비슷하군요.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438 놀랍고 새로운 우리의 세계사 블로그 저자 꿈의 궁전 도현신 발행일 :29:31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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