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총 론 나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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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총 론 나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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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 차 <머리말> 07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11 제1장 사회의 형성과 사회운동 1. 사회적 행위와 사회관계 2. 사회구조와 사회제도 3. 사회질서와 사회운동 제2장 사회운동의 실제와 이론 1. 몇 가지 사례 2. 사회운동의 개념 3. 혁명과 사회운동 4. 집합행동과 사회운동 5. 사회운동의 이론 제3장 국가와 지역사회운동 1. 국가란 무엇인가? 2. 국가와 지역사회 3. 지역사회운동이론의 모색 제4장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역사쓰기 1. 사회운동론적 역사인식의 특성 2. 지역사회운동의 역사쓰기 3. 19세기 이전 전남 역사에 대한 운동론적 성찰 제2부 20세기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 62 제1장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 1. 동학농민혁명 1) 혁명전야 2) 동학농민혁명-1차 3) 동학농민혁명-2차 2. 광주 전남 의병항쟁 1) 전기의병과 중기의병 2) 후기의병과 전환기의병 제2장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 년대 전남지방과 3 1운동 1) 3 1운동 이전 전남지방 항일운동

6 2) 광주 전남의 3 1운동 3) 토론 년대 전남지방의 민족운동 ) 청년운동 97 2) 농민-노동운동 100 3) 광주 항일학생운동 년대 전남지역 민족운동 1) 식민지에서 사회운동의 변화 2) 사회주의 운동 3) 농민-노동운동 4) 전쟁과 저항 제3장 해방 후 사회운동 전남지역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1) 전남지역 건국준비위원회 2) 인민위원회 2. 사회단체의 분출과 사회적 갈등 1) 다양한 사회단체의 형성과 발전 2) 미군정에 대한 저항과 좌우갈등 제4장 196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진전 1. 4월혁명과 60년대 사회운동 1) 4월혁명-1 2) 4월혁명-2 3) 한일협정반대운동 4) 토론 2. 유신체제와 70년대 사회운동 1) 70년대 사회운동-전국 2) 함성지 제작 배포와 민청학련 3)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의 저항과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 4) 교육지표선언과 양서협동조합운동 5) 노동야학과 송백회 3. 광주항쟁과 80년대 사회운동 1) 민주화 성회와 5 18광주민중항쟁 2) 5월운동 3) 6월민주항쟁 4) 노동자 대투쟁과 전교조 건설운동 5) 농민-여성운동 6) 문화예술운동 7) 80년대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전체적 성격

7 4. 시민사회 발흥과 90년대 사회운동 1) 91년 5월투쟁과 광주 운암전투 2) 5 18특별법 제정운동 3) 노동과 교육운동 4) 농민과 여성운동 5) 문화예술운동 6) 시민운동의 개화: 사회운동의 새 물결 제5장 종합정리 1. 전체적 양상 2. 진전과정 1) 전체적 진전과정 2) 부문운동의 진전과정 3. 운동주체 1) 개별주체 2) 연대 및 연합조직 주체 4. 과제와 전망: 사회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참고문헌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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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머리말 : 문제> 이 책은 20세기 한국의 사회운동을 다룬다. 공간적으로는 한국사회 전체가 아니라 그 중에서 광주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며, 시간적으로는 20세기의 서막인 1894년 동학농민봉기를 기점으로 하여 현 시기에 이르는 약 100년을 대상으로 한다. 지금은 21세기를 시작하는 새벽이다. 이 시점에서 방금 지나 온 20세기를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 지 역의 지나온 날을 조명하고 사회의 건실한 발전을 위해서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다. 우리 앞에 전개 되는 미래는 우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과거의 터전 위에서, 과거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규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20세기는 매우 압축적이고 격동적인 시간의 흐름이었고, 개인과 사회에 큰 충격과 지대한 영향을 준 사건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조선조 말기 세도지배층의 정신적 타락과 부 정부패, 이로 인한 민중의 수난과 피어린 저항, 왕조의 비극적 몰락과 일본의 잔혹한 강제병탄, 일제 의 식민 지배에 대한 줄기찬 민족독립투쟁, 준비되지 않은 해방과 독립, 민족분단과 좌우대립, 한국전 쟁과 정전상태의 지속, 남북 양측의 체제경쟁과 적대적 대치, 남한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진전 등 암 울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키워 왔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장기간 지속되어 온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천 년 동안 이어진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가 해체되고 미국 중심의 자본 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초유의 대전환에 직면한 것이다. 1) 또한, 세계수 준의 냉전체제는 무너졌지만 한반도와 중국 및 일본뿐 만아니라 베트남, 필리핀까지 포함하는 동북아 시아는 다국 수준의 냉전 분단체제가 형성되고 해체되면서 첨예한 긴장상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 는 엄중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2) 이와 같은 세기적 전환점에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1) 임형택,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창작과 비평, 2014), 73쪽. 2) 정근식, 동아시아 냉전 분단체제의 형성과 해체, 임형택 엮음, 한국학의 학슬사적 전망 2 (소명출판, 2014), 51-52쪽. 총 론 7

10 있다. 왜 광주 전남지역인가? 무엇이 이 지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했는가? 국가사회 전체가 아닌 지역사회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지구화와 지방화가 병행하여 진전되는 세계적 추세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두 흐름은 서로 상반되는 목표를 추구하지만, 과도하게 성장된 국 가권력을 제약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국제적으로는 국가사회를 초월하는 국제연 합, 유럽연합, 그린피스 등 여러 가지 국제기구의 활동으로 국가 중심적 사고와 행동이 약화되고 국경 의 규제력이 완화되는 추세이다. 국내적으로는 지방분권과 지방자치가 진전됨으로써 중앙정부의 구 속력이 약화되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도전하듯, 한국적 차원에서는 서울중심주의 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토인비가 말한 바와 같이 지나치게 강화된 국가주의에 대한 전 지구적 대응이다. 3) 이와 같은 세계적 흐름이 바로 구체적인 지역연구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 키는 효과를 수반한다. 다음으로, 한국의 여러 지역들 가운데 전남(호남)에 초점을 맞추는 배경에는 한국사회 내에서 이 지 역이 감내해 온 특유한 고난의 역사 경험과 관련된다. 4) 20세기 후반 이후 우리의 현대 역사에서 국 가의 지배세력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하여 충분한 객관적 근거도 없이 부정적 편견을 강화시키고 일반 화시켜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차별적인 개발정책과 인재등용을 통해 전라도 지역을 철저히 소 외시킴으로써 이 지역을 황폐한 낙후지역으로 전락시켰다. 정서적 차별은 거듭되는 선거정치 과정에 서 더욱 심화되어 왔으며, 악의에 찬 인격모독적인 낙인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 어 왔다. 그 결과 전라도는 한 민족국가 내에서 지배 권력에 의해 배제되고 따돌림 당하는 고립된 섬 이 되었다. 오랜 세월 누적된 이 반민족적이고 잔인한 공격의 화살은 지역민의 영혼을 망가뜨려왔으 며, 그 화살에 찢기고 패인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그로 인한 신음이 산하를 울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힘을 잃고 한을 안은 채 절망의 계곡을 헤맸으며, 어떤 이는 본적을 바꾸기도 했고, 적 지 않은 사람들이 이민을 이야기했었다. 20세기 말에 처음으로 전라도 출신 대통령이 선출됨으로써 전라도사람에게 강요했던 억압과 차별 의 상흔은 일정 정도 치유된 것처럼 보였다. 소외와 무력감에 지쳐 있던 지역민에게는 실로 오래 만에 받은 위로였고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 재임기간이 지나고 난 후에 들어선 보수-반공정권의 최근 현실 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는 편견에 찬 지역감정이 잠복된 채로 남아있음을 부정하기 어 려우며, 일부 권력집단은 이에 근거하여 부당한 지역분할지배전략을 동원하고 있다. 전라도와 전라도 사람에 대한 야만적이고 사악한 험담과 유언비어가 인터넷을 동원하여 더 잔혹한 형태로 지금 이 순 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국가 내에서 특정 지역에 대하여 자행되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반민족적인 이 지역차별은 매우 불 행한 일로서 민족통일과 질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청산되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 3) 노명식, 토인비와 함석헌 (책과함께, 2011), 139쪽. 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사 (한길사, 2011), 462쪽. 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 하여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최근의 이와 같은 왜곡되고 병든 현실에서 전라도 사람 에게 들씌워진 부정적인 정서의 거짓 장막을 벗겨내고, 맑은 진실을 찾으려는데 있다. 지배권력의 저 주에 담긴 불의와 폭력의 야만성을 폭로함으로써 오랜 세월 앓아 왔던 지역민의 아픔을 치유하고 짓 밟혀 더럽혀진 자존감과 명예를 회복하자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회운동인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한 국가 내에서 여타 지역과 차이가 있는 어떤 지 역 특유의 역동성을 주목한 관점을 강조하고 싶다. 5) 사회운동이란 바로 이 역동성의 직접적이고 적극 적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 세기 한국의 역사에서 전라도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치열하고 희생적인 저항의 사회운동을 실천해 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국가가 외세 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독재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와 정의가 짓밟힐 때, 못 배우고 가난한 노 동자 농민이 폭력 앞에 수난당할 때, 희생을 무릅쓰고 앞장서 왔던 빛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약무호 남 시무국가( 若 無 湖 南 是 無 國 家 ), 의향, 민주성지 등의 명예로운 호칭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이 지역의 사회운동은 민주화의 도정에 처한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사회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 다. 홍콩의 아시아인권위원회나 스리랑카 및 태국의 민주화운동단체들은 광주 전남의 사례를 그들이 본받아야 할 교과서로 평가해 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와 같이 명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는가? 누가, 어떻게 그 잘못된 역사에 대하여 저항했는가?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 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연구의 기본 과제이다. 그 답이 전라도 사람의 짓밟힌 자존심에 새 생명 의 힘을 불어넣고, 퍼렇게 멍든 영혼에 선혈이 흘러 더 맑은 빛을 발하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우리 지역사회와 지역민들이 살아온 사회와 역사의 성격을 살펴보고, 이들의 내면 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 사회구조적 특성, 다시 말하자면 우리 지역에 특유한 심층적 역동성을 탐 색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값진 자산을 찾아내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이 연구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진전된 사회운동의 전체적인 양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 려 한다. 현재 우리사회의 사회운동에 관한 연구가 대체로 전국적인 수준에서 민주화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어 왔고, 이 연장선상에서 지역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결과가 다른 지역에서 제출된 바 있다. 이 연구는 그 연구결과들을 참조하여 더 구체적이고 폭넓은 연구를 기획했다. 시기적으로는 동학을 기점으로 하여 일제시기를 포함함으로써 사회운동연구의 시야를 확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연구라는 기존의 포괄적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 민주화, 노동, 농민, 시민, 문화, 여성 등의 부문운동을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사회운동의 구체성을 제고하려 했다. 이 책은 위의 각 부문운동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그 전체적인 틀과 흐름의 양상을 그려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총론의 성격을 갖는다. 이 책은 서론에 이어 제1부에서는 사회와 사회질서 및 사회운 5) 테다 스카치폴, 사회학에서의 역사적 상상력, 테다 스카치폴 엮음, (박영신 외 옮김), 역사사회학의 방법과 전망 (도서출판 민영사, 1991), 7쪽 총 론 9

12 동에 관한 기초적인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또한 연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이전 전남지역사회의 역 사적 성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지역사회 일부에 스며있는 패배사관과 소외사관의 소극적 역사인식을 넘어서서 더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함이다. 그리고 제2부에 서는 각 부문운동에서 보고된 내용을 요약적으로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각 부문운동의 진전과정을 비교 검토하여 전체적 흐름과 그 물결의 높고 낮음과 장단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대한 부문별 비교 등 의 작업을 시도하려 한다. 이 연구의 대상이 사회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사회학적 성격을 갖지만,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근현대 1 세기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역사학적이다. 말하자면 이 지역사회의 역사, 더 구체적으로는 지 역사회운동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시간과 공간에 그냥 널려있는 사건 자체가 역사는 아니 다. 그 사건들의 단순한 나열도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이 사건들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선정하고 체 계적으로 구성하여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때 만들어진다. 6) 그리고 그 작업의 결과가 오랜 세월 앓아 온 아픈 상처에게 위로를 주고, 어둠의 장막에 덮인 사회에 값진 빛을 발할 때 의미 깊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연구는 지배세력에 의해 배제되고 짓밟히면서 역사의 외부에 버려져 있던 전라도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에 주역으로 초대하는 일종의 이정표이다. 7) 불의의 역사에서 소외 되고 차별받던 전라도와 전라도 사람이 사회운동의 역사쓰기에 의해 당당하고 명예롭게 복권됨을 의 미한다. 6) 한병철 (김태환 옮김), 시간의 향기: 머무름의 기술 (문하과 지성사, 2014), 33쪽. 7) E. H. Carr(길현모 역), 역사란 무엇인가 (탐구당, 1999), 230쪽. 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 1부 사회와 사회운동 제1장 사회의 형성과 사회질서 1. 사회적 행위와 사회관계 사회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책의 주 제인 사회운동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지지만, 사회과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함께 논의해야 할 주제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시각에서 인문사회과학적 논의의 첫 머리에 걸맞는 질문이기도 하 다. 사회학은 물론이지만, 역사학이나 윤리학, 정치학이나 경제학 등의 학문도 이러한 물음을 기본으 로 하고 있으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 후에 이에 맞추어 학술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이 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질문에는 더 세부적인 두 개의 질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사 회를 형성하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가? 이며, 다른 하나는 그 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 하 나의 사회를 이루는가? 이다. 물론 요소가 한 가지일 때는 두 번째 질문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말 하는 요소 는 개별 사회가 각각 특유하게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차원에서 발견되는 요소에 관한 설명임을 미리 지적해둔다. 8)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람이다. 말하자면 사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한국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태국사회는 태국 사람으로 구성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사람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것은 사실 이지만, 이러한 응답은 완성도가 낮다. 너무 포괄적이고 애매하여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특성을 알려 주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이려면, 사람의 동물적 특성, 인종적 특성, 인구 특성 등 을 규명하여 그 사회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인구수나 평균수명, 성비나 체중 등 신체적 8)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사회가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거대한 규모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 대하여 답하려 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여러 사회가 각자의 독자적 사회형성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예를 들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형성되고 발전된 역사적 과정이나, 인디안 사회의 진화과정을 소개함으로써 형성과정에 답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학적, 인류학적 응답은 논외로 한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11

14 특성이라도 알려주면 좀 더 진전된 답이 된다. 그러나 이는 의학이나 인구학적 관점에 더 어울리는 것 이다. 실제로 사회과학은 사회구성원의 키나 무게, 뼈와 살에 관해 관심을 갖는 일은 별로 없다. 사회학은 구성원 자체보다도 그들이 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사람의 여러 가지 행동 가 운데 특히 사회적 행위를 주목한다. 사회적 행위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특성이 있다. 그 하나는 자연 발생적이거나 본능적인 반응이 아니라 행위자가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수행한 행위이다. 졸려서 자기도 모르게 하는 하품이나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깜빡거림 등은 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자연적 본 능적인 반응이지만, 어떤 이가 마음에 들어 눈을 깜빡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다. 사회적 행위의 두 번째 특성은 사회적 이라는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 대상에는 자기 자신은 물 론, 현존하는 타인이나 집단뿐만 아니라 상상의 영역에서 가능한 과거와 미래의 대상도 포함한다. 방 금 태어난 아기의 울음은 사회적 행위가 아니지만, 독방에서 시험공부를 하거나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연모하여 편지를 쓰는 것은 사회적 행위이다. 그래서 사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지만, 더 나 아가 사회적 행위로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사회학적이다. 사회의 구성요소로 사람을 제시하는 데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사회적 행위로 보는 설명은 쉽게 납득 하기 어렵다. 사람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행위는 나무나 바위와 같이 외형을 가진 물 체로 남아있지 않고 순간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행위, 편지 쓰는 행위 등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현상으로서의 행위는 없어진다. 그러나 그 행위의 의미나 결과가 전적으로 없어지는 것 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행위는 그 순간 소멸했 지만, 그 행위가 갖는 의미는 여전히 우리민족의 정신세계에 남아 있다. 행위의 결과는 여러 가지 물 질적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한다. 사회적 행위의 내용과 종류는 한계를 지울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먹고 놀고, 일하고 쉬는가 하면 말하고 쓰기도 한다. 기쁨에 웃고 슬픔에 우는가 하면, 여가를 즐기기도 한다. 친구를 사귀고 적대하 는 자와 싸우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헤일 수 없이 많은 이 행위들 가운데, 인 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또는 본질적인 행위는 무엇일까? 매우 막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인간 사 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활동은 이 물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생각하는 행 위 를 강조한 반면, 마르크스는 일하는 행위, 즉 생산 활동을 주목했다. 이런 사회적 행위에 관심을 갖는 기본적인 이유는 그 행위에 담겨진 의미와 행위의 결과가 있음으로 해서 인간사회에 대한 사고와 감정, 그리고 물질적 영역이 그만큼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또는 어떤 다른 사람을 향하는 행위와 그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가 인간사회 본연의 모습을 나타낸다. 거기에 사랑과 미움이 담겨있으며, 희망과 절망, 이기심과 이타심,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의미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회를 인간의 몸으로 한정해서 이해한다면 동물의 삶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되고, 인간사회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잃게 한다. 따라서 사회란 수많은 사회적 행위들로 이 루어져 있다는 것이 더 충실한 설명이 된다. 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 그런데 어떤 사회적 행위가 현존하는 특정 대상을 지향할 때, 그리고 그 행위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어 하나의 정형화된 틀이 될 때 사회학에서는 그것을 사회관계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린 딸아이를 안아 키우는 어머니의 행위가 정형화된 형태를 이룰 때 모녀관계를 형성하고, 형과 동생 간에 서로 돕 고 아끼는 행위가 거듭될 때 형제관계를 형성한다. 이 가족관계 영역을 넘어 사회 일반으로 확장시키 면, 의사와 환자, 제자와 선생, 기업가와 노동자, 고객과 상인, 그리고 수많은 다른 집단들 간의 다양 한 사회관계로 발전한다. 또 이 관계들을 추상화시켜 협동관계, 갈등관계, 지배-복종관계 등으로 재 구성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구성의 세 번째 차원을 확인한다. 사회는 사회적 행위 자체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행위들 간의 유형화된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사회 란 결국 사회관계의 전체 집합인 것이다. 이때 그 행위자는 사회관계 속에서 일정한 역할 수행자로 된 다. 2. 사회구조와 사회제도 수많은 사회관계들은 각각 무차별적으로 제멋대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고 통일 적인 체계를 갖춤으로써 사회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사회관계들의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체계를 형 성한 것을 사회구조라고 한다. 이를 테면, 부부관계, 부자관계, 모녀관계, 형제관계들이 상호 결합되 어 가족구조를 형성한다. 기업구조는 사장, 부사장, 이사, 국장, 과장 등의 위계체계로 형성되며, 학 교의 구조나 군대의 구조도 유사한 체계를 갖는다. 그러나 사회구조는 그 수준에 따라 층위를 달리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가족구조나 기업구조는 비 교적 소규모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하위구조이지만, 전체사회를 나타내는 거대구조가 있다. 예 를 들면, 한 사회의 직업구조는 수만 개의 직업들로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고, 세대구조 나 경제구조, 정치구조 등은 더 확장된 단위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가장 큰 단위는 1차산업, 2차산업, 3차산업 등으로 구성된 산업구조, 자본가계급, 중간계층, 노동자계급으로 구분되는 계급구조 등이 대 표적이다. 이렇게 볼 때 한 사회는 상호 연관된 몇 가지 사회구조들의 체계로 형성되어 있다고 할 것 이다. 그런데 사회구조와 병행하여 사용되는 개념이 사회제도이다. 가족구조와 가족제도, 기업구조와 기 업제도, 경제제도, 정치제도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사회적 행위나 사회관계와 같은 직접 관찰 가능한 미시적 사회현상을 토대로 하여 2차적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사회관계의 틀이 구조적 측면이라면, 그 틀에 담긴 내용이 제도적 측면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 사회현상의 하나로서 부부관계 를 보자. 여기에서 부부관계의 형식 즉, 평등한가 불평등한가, 또는 협동적인가 갈등적인가 등은 구 조적 측면이고, 갈등 행위의 표현 방법과 도구, 갈등의 강도와 지속기간 등은 제도적 측면에 속한다. 앞의 것을 사회라고 한다면, 뒤의 것을 흔히 문화라 표현한다. 따라서 제도란 사회구조의 문화적 측면 이며, 사회적 행위와 사회관계의 과정 및 결과를 규정하는 규범(상벌이 주어지는 행위규칙)과 역할의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13

16 체계이다. 사회의 형성과 관련해 볼 때, 제도적 관점에서는 전체 사회를 여러 제도들의 상호의존적인 체계로 파악한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된 인류학 및 사회학의 기능이론에서 이러한 인식이 두드러진 다. 대표적인 기능주의 이론가인 파슨즈Talcott Parsons는 하나의 사회를 몇 개의 기축제도, 즉 경제 제도, 정치제도, 사법제도, 그리고 교육과 종교제도 등으로 형성된 자기충족적 체제로 파악했다. 말하 자면 사회가 자립성을 갖고 독립하여 존속하기 위해서는 위의 제도들이 최소한의 필수요건이라는 것 이다. 그러므로 제도는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며, 사회구조와 같이 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단위가 되는 것이다. 사회구조와 사회제도에 대한 이해 과정에서 한 가지 인식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동일한 사회현 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차이가 있는 두 가지 시각과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관찰의 초점이 달라지고, 시각의 차이에서 관찰결과에 대한 의미부여와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 다. 두 가지 관점과 시각의 차이는 흔히 거론되는 파라다임의 차이를 의미한다. 학문발전의 역사를 보 면, 이질적 파라다임들이 공존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파라다임들 간의 관계가 협동적이고 평화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이고 갈등적이라는 사실을 주장한 점이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선구 적 통찰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파라다임을 관점과 시각 등의 추상적인 요인으로 설명하지만, 이는 결국 동질적 학자집단의 시각으로 현재화된다. 구조와 제도라는 개념에서도, 좀 과격하게 말하면, 이와 유사한 파라다임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구조 개념은 대체로 유럽 학계에서 발전되었고, 제도라는 개념은 이와 달리 미국에서 주로 발전된 개 념이다. 마르크스의 계급구조나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개념,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프란츠 보아스나 루이스 크로버 등 미국 문화인류학들이 선호하는 제도개념이 그 사례가 된다. 구조가 사회 현실에서 심층의 강고한 측면을 주목한다면, 제도는 그 현실의 표면에 일어나는 행위의 가변성과 유 연성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구조적 시각이 계급갈등이나 세대갈등 지역갈등 등 전체사 회구성에서 내부적 갈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이와 달리 제도적 시각은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각 제 도가 작용하는 기능, 그리고 각 제도 간에 상호의존성의 측면을 주목한다. 예를 들면, 결혼제도가 어 떤 작용을 통해서 그 사회의 유지 발전에 기여하는가를 밝히는 것이 전형적이다. 이상에서는 서두에서 제기했던 질문, 사회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논의했 다. 그 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사회는 여러 겹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마 치 양파가 그러하듯이. 가장 겉에 드러나 있는 층은 직접 관찰이 가능한 사회구성원과 그들의 행위이 다. 그 다음에 위치한 층은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비교적 쉽게 추론이 가능한 사회관계이고, 가장 깊 은 내면에는 사회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표층에는 사회구성의 단위가 비교적 소규모이며 심층에 이를 수록 그 구성단위가 대규모적이다. 이는 바로 사회구성의 다차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 적 행위와 사회관계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접근하는 입장을 미시사회학이라 하고, 심층의 거대단위에 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 주목하는 경향을 거시사회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춘기의 반항행동이나 형제관계에 관한 연구는 전 자의 사례이고 계급혁명이나 지역갈등 또는 세대갈등은 후자의 사례가 된다. 사회형성의 이와 같은 다차원성은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의 다차원성, 사회학적 지식의 다차원성을 암시한다. 이를 테면, 전 국민에게 큰 충격과 절망감을 주었던 세월호 침몰사건이라는 사회현상에 대 하여 여러 수준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구성원의 측면에서는 승객과 피해자 및 관리자의 성별, 연령별, 학력별, 직업별 등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자료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의 수준에서는 승객, 선 장, 승무원, 회사원, 정부관리 등 여러 관계자들이 수행했던 개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할 수 있다. 사회관계의 수준에서는 선장과 승무원, 승무원과 승객, 선장과 회사 경영주, 경영주와 정부관계 자, 승객과 그 가족들 간에 서로 주고받은 행위로 이루어진 광범한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그 현상에 대 한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또한 사회구조의 수준에서는 더 큰 형성단위로서 청해진 기업과 해양수산 부 그리고 유가족 등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추상성이 높은 수준에서 이 사건의 전모를 해 명하게 된다. 사회형성의 이와 같은 다차원성은 사회학적 지식이 부분적이고 완성도가 낮다는 한계의 원인이 되 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회현상은 대체로 각 수준에서의 설명을 서로 보완하여 활용함으로써 전체적 설명의 완성도를 제고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 수준의 설명체계가 동일하지 않고, 수준에 따라 적용 가능한 이론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학적 지식이나 설명이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이론에 근거하는 형성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3. 사회질서와 사회운동 사회형성에 관한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사회질서와 사회운동의 주제를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사회형성의 질문이 가장 기본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사회질서와 사회문제는 형성된 사회체제 의 작동과 그 결과에 관한 측면으로서 사회운동의 영역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라는 용어는 한 사회에서 정상적이라고 인정되어 당연시된 행위의 절차와 규범의 체계를 의미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제도가 규범의 체계를 의미한다고 할 때, 사회질서란 사회제도의 실 천적 측면이다. 행위의 절차와 행위들 간의 관계는 규범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규범은 정당화된 행 위의 규칙이다. 이는 법, 도덕, 종교, 관습 등의 형태로 사회구성원의 행동을 규제한다. 그 규범의 내 용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구체적 행동방식이 정해져 있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 보상과 형벌을 포함 하는 강제적 재제를 수반하게 되어 있다. 강제성을 갖는 법규범은 더 상세한 분배원칙과 시행방법도 규정하고 있음을 본다. 규범이 정당화되고 당연시된 행위규칙이라고 할 때,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기본적인 문제는 누 가 그 규범에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이다. 그 규칙의 정당성이 무엇에 의해 확립되었는가? 라는 질문 이다. 이는 현대 사회이론에서 제기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의 하나로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병존하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15

18 고 있다. 그 하나는 정당성의 근거를 사회구성원의 합의에서 찾는 입장이다. 이는 규범의 강제성이 전 체 사회성원의 뜻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현실적으로 이는 의회정치에서 다수결의 원칙과도 공존한 다. 이러한 논리는 20세기 중반의 사회과학을 풍미했던 미국 기능이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다음 으로, 이와 상반되는 두 번째 입장은 사회구성에서 전체의 합의란 이상적인 기대일 뿐이고, 현실세계 에는 이해의 충돌이 불가피하며, 따라서 규범은 사회구성원의 합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강한 자의 입장을 반영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약한 자의 의 지는 배제되거나 무시되거나 억압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능론과 대비되는 갈등론적 시각이다. 전자가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사회질서의 긍정적이고 조화적인 측면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회질서의 부정적, 억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이론 가운데 어느 한편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편이 틀리다고 단언할 수는 없 다.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의 개인적 특성을 존중하고 개 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의 차별성을 인정한다면, 절대선으로 형성된 사회나 이와 반대로 절대악만이 지배하는 사회란 상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현실은 이 양극의 중간 어느 지점에 위치할 것이며, 그에 따라 두 가지 이론에서 보는 진리의 절충점이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볼 때, 분명 한 사실은 어느 사회에도 부정적 측면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부정적인 측면은 불가피하 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사회에 근원적으로 내재하는 불균형, 착취, 빈곤과 억압 등의 개연성과 그에 따른 갈등이론의 보편적 가능성을 암시하는 바이다. 이와 아울러 사회질서가 갖는 보수성을 강조한다. 이 보수성은 두 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그 하나 는 현재 정립된 질서 자체가 현상유지의 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관성의 근원은 특정의 규칙이 홀로 존 재하며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체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기 때문에, 이미 전체 체계 의 힘이 그 특정 규칙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구조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결과이다. 두 번째는 현 존 질서로부터 이익을 보호받는 기득권 세력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질서의 안정성이 위협받 으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이 손상될 것이다. 따라서 기득권 세력은 그것의 변동을 막아내는 대열에 참 여할 것이다. 질서는 편리한 것, 아름다운 것 이라는 흔히 보았던 구호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한 보편적 진리라기보다는 기존 질서 옹호자들인 보수 세력이 자기에게 유리한 현재의 질서를 정당화하 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 즉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현재의 질서 는 오히려 불편하고 사악한 굴레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질서의 태생적인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는 불가피하게 변동의 압력에 직 면하지 않을 수 없다. 변동을 일으키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우선 중요한 두 가지를 지적한다. 그 하나는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부터 연유한다. 새로운 사상과 과학 기술에 근 거하여 기존 질서가 갖는 문제점과 한계를 인식하므로 그 결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계몽사상 이나 진화론 및 물리학의 발전은 기존질서에 대한 반란의 서막이었으며, 뒤이어 도래할 혁명적 변화 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 를 예고하는 바탕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질서에서 소외된 피해자들의 불만과 저항에서 유래한다. 신분제도 하에서 하층 신분의 불만, 산업사회로의 이행기에서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불만, 농촌사회 의 황폐화와 도시의 과잉인구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 변동의 압력은 거대한 혁명의 물결로 표출 되었 다. 17세기 이후의 시민혁명, 산업혁명, 급격한 도시발전 등은 이러한 혁명적 변화의 대표적 지표들 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사회변동은 기존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미정립으로 특징지어 지는 이 행기에서 심각한 불안정과 무질서를 초래한다. 기존 규범의 행동 규제력이 상실된 상태, 즉 아노미 상 태에 봉착하여 다양한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른 탐욕과 그에 따른 빈곤, 범죄와 폭력, 노동과 자본 간의 분쟁, 그리고 급속한 도시화가 초래한 주택문제, 교통문제, 위생문제 등이 그 것이다. 물론, 기존 제도는 이 사회문제를 자체의 틀 내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부분적 문 제의 해결에 진전이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기존 제도의 자기 개혁은 내재적 보수성으로 인 해 스스로 만든 한계에 머무르기 때문에 사회적 모순과 문제는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제기된 사회문제를 기존제도가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이에 대한 대안적 해결방안으로서 사회운동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사회운동은 사회문제에 대한 비제도적 해결방식이다. 제도가 해결하 지 못하는 사회문제에 도전하는 길을 밝히는 촛불이다. 권력자나 기득권자가 아니라 힘이 약하고 가 진 것이 적은 대중, 그러나 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이 뜨거운 가슴으로 불태우는 횃불이다. 또 한 그것은 억압과 탐욕, 지배와 독점에 대항하는 인간 존엄과 자유, 정의와 균형의 가치를 지향하는 진리의 섬광이다. 다음에서 몇 가지 사례들을 본다. 제2장 사회운동의 실제 1. 몇 가지 사례 1960년대 청계천변 상가의 어떤 풍경이다. 평화시장 건물 위층에는 의류제조 공장들이 있었다. 주 로 10대 여성으로 구성된 3만여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하였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하면 밤 11시에 끝나는 14시간의 장시간 노동,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 거듭되는 야간작업에 잠 안 오는 약을 먹었어도 어쩔 수 없어 눈만 멀뚱거리며 졸고 서있는가 하면, 과로에 지쳐 피를 토해도 방치되는 현실, 손가락의 지문은 재봉작업에 문드러져 없어졌고, 하루 작업 이 끝나면 부은 발이 신에 들어가지 않는 현실이 그 소녀들의 삶이었다. 천장을 낮게 함으로써 바로 설 수 없는 장애인을 더 많이 고용하여 노예같이 혹사했다. 이 처절한 노동현장을 괴로워하며 바로잡 기 위해 앞장서 나선 청년이 전태일(22세)이다. 그는 고용주들을 찾아가 호소했고, 노동청에 진정서 를 제출했으며, 마지막에는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17

20 이 당하는 고난의 삶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았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절실했던 소망 이 물거품이 되자,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자기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고 외치며 불 붙은 몸으로 시장 앞길을 질주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온 몸을 휩싸고 타올랐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 날 밤에 한을 안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행상,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을 전전했던 빈민가정 출신이었다. 평화시장에 들어온 후에는 어린 여공들을 자기 동생처럼 생각했다. 피로에 지친 그들을 위로하고 달랬으며, 배고픈 여공에게 빵을 사주고 자기는 퇴근길을 걸어가는 청년이었다. 못 배웠어 도 그는 일기를 썼고, 주변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 와 같은 조직을 만들 줄 알았다. 노동자를 보호하 기 위해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근로기준법을 읽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자기에 게 법대를 다니는 친구가 없음을 한탄한 젊은이였다. 그의 처절한 분신 자결은 당시 사회, 특히 대학 생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먼저,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들이 학생장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당국의 방해 를 무릅쓰고 11월 20일에 추도식을 거행했다. 서울대 상과대 학생 400명은 16일에 무기한 단식농성 에 돌입했다. 지식인과 학생들의 눈물에 젖은 행렬이 뒤를 이었다. 그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평화시장 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되었다. 1970년대의 서막에 그가 올린 노동의 횃불은 그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다. 다음은 인도의 사례를 소개한다. 1974년 1월, 인도 정부는 히말라야 레니 마을 근처의 삼림 2500그 루를 벌채하기로 공표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 주민들의 반대는 완강했다. 벌채에 맞서 나 무를 지켜내기로 다짐했다. 몇 주 동안 집회와 시위가 반복되었다. 정부의 추진 결정에 맞서 저항은 치열해졌다. 벌목을 강행하기로 된 3월 25일, 트럭을 타고 벌목꾼들이 오는 것을 본 어린 소녀가 뛰 어가 이를 촌장에게 알렸고, 마을에 남아있던 여성들이 나와서 벌목꾼들과 대치했다. 그 때 이 마을 남자들은 멀리 떨어진 일터에 나가고 없었다. 여성들의 저항에 맞서 벌목꾼들은 큰 소리로 희롱하고 총으로 위협했다. 그 와중에서 벌목꾼들이 살벌하고 예리한 기계톱으로 나무를 자르려 하자 여성들 은 여럿이 서로 손을 맞잡고 나무를 껴안아 자르지 못하게 막아냈다. 벌목꾼들이 포기할 때까지 나무 를 껴안은 손을 놓지 않고 밤을 새워 지켜냈다. 마침내 벌목꾼들은 물러갔고, 여성들의 강인한 저항은 탐욕에 찬 자본의 잔혹한 힘을 이겨내었다. 이는 폭력에 대한 평화의 승리, 죽임에 대한 생명의 승리, 남성에 대한 여성의 승리였다. 아침이 되자 이 소식이 전국에 보도되고 이 소식을 들은 이웃 마을 사 람들이 찾아와 함께 동참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나무껴안기운동(칩코 안돌란: Chipco Andolan) 의 시발이다. 9) 이 운동의 뿌리는 희말라야 산맥의 삼림과 지역주민의 삶이 맺고 있는 생존의 진실에서 찾을 수 있 다. 1960년대 이후 가속화된 대규모 벌목은 푸르고 무성했던 삼림을 황폐화시켰다. 비가 오면 산사태 9) Trackback : 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 와 범람을 초래했다. 큰 비 후에 남겨진 피해는, 1970년 7월의 홍수가 대표적인 것인데, 한 개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가옥 600여 채가 빗물에 휩쓸려 떠내려갔으며, 200여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지역주민들에게 삼림보호는 삶 그 자체였다. 이들에게 숲은 물이요, 식량이요, 생명 이었다. 말하자면, 숲을 지키는 단순한 삼림보호운동이라기 보다는 생존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개발을 명분삼아 기업에게 더 많은 벌채를 허가했고, 기업은 더 많은 목재를 확 보하기 위해 주민의 저항을 무릅쓰고 벌채를 강행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의 반대와 저항도 강화되어 갔다. 1971년에는 삼림청의 정책에 반대하는 주민의 시위가 있었고, 다음해에는 집회와 시위가 더 빈 번해졌다. 그 중에서 상징적이고 극적인 사례가 바로 위에서 말한 레니마을 사건이다. 한 가지 첨언하 자면, 이 운동을 선도했던 순데랄 바후구나Sunderlal Bahuguna(1927년생)는 4700킬로미터에 이르 는 희말라야 삼림지역을 도보로 답사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현장체험이 생태환경에 대한 사랑과 헌신 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또한 간디의 불폭력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본과 권 력의 횡포를 이겨냄으로써 사회운동의 역사에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 후 이 운동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리하여 대중의 산림보호의식을 일깨웠으며 마침내 정 부가 공개적으로 벌채 금지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인도 정부는 1976년에 36만 타르 에 이르는 삼림에 앞으로 10년 동안 벌채금지령을 내렸는가 하면, 조림사업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 기도 했다. 또한 산간의 각지에 마련된 환경보호야영장은 수많은 학생, 학자,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교육장과 회합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그 후 이 운동은 생태여성주의운동 및 환경운동의 형태로 인도 는 물론 캐나다를 비롯한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로 확산되었다. 세 번째는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것이다.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500여 하객이 모인 가운데 신랑 차림을 한 홍성엽(민주청년협의회 상임위원)이 입장하자 곳 곳에서 빠르게 유인물이 돌려졌다. 이들은 그 유인물에서 선 대통령 선출, 후 개헌 이라는 기만적 정치일정을 내걸고 유신독재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고... 국민적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다(통대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 고 선언했다. 곧이어 결의문이 낭독되고 통대선출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오자 뒤쪽에서 쥐색 잠바 의 백골단이 난입하여 결혼식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의자가 날고 비명이 들리고 유리창이 깨지고 곤 봉에서 피가 튀었다 (이시영의 시 역사의 눈 에서). 대회장을 빠져나간 일부 인사는 밖에서 대기 중 이던 사람들과 합세했다. 핸드 마이크를 든 양관수가 예수를 믿읍시다 라고 신호음을 외치자 유신 철폐, 통대선거 결사반대 고함이 울렸고, 이들은 을지로 쪽으로 스크럼을 짠 채 200여 미터를 달 려갔다. 같은 시각,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과 청계천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 날의 통대선 출저지국민대회의 대회장은 함석헌, 준비위원장은 김병걸 백기완 임채정 박종태 김승훈 양순 직이었고 그 밖에 교수, 종교인, 문화예술인, 청년활동가 등이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결행되었다. 저항은 성공적이었지만, 아픔은 컸다. 계엄사령부가 140여 명을 잡아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19

22 고문은 잔혹했다. 김병걸은 계엄군의 야수같은 폭력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실려 나왔으며, 백기완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후 수년간 입원해야 했다. 신랑 역을 자임했던 홍성엽 등 여러 사람이 폐인이 되었 다. 계엄사는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등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며, 이듬해인 1980년 1월 25일 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의 중형을 선고했다. 10) 평화적인 집회에 대한 야만적 폭력 진 압과 실형선고는 신군부 전두환 집단의 속성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은 서울의 봄 에 타오를 사회운동의 뜨거운 불길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이 흐름은 국민연합, 민주 헌정동지회 등이 이어 나갔고 마침내 80년 5월의 거대한 저항물결을 이루어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의 샘물이 된 YWCA위장결혼식 사건이다. 이번에는 외국에서 싸우다 할복자살한 한국 농민운동가 이경해(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2003년 9월 11일 멕시코 휴양도시 칸쿤에서 제5차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 었다. 이 회의는 자유무역과 농업개방을 위한 협상이 중심내용이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 세 계에서 5천여 명의 사회운동가들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한국 시각 2003년 9월 11일 새벽, 시위 대가 농업의 죽음을 의미하는 상여를 메고 행진하였다. 대열을 멘 앞에서 이끌던 한국 농민운동가 이 경해는 WTO가 농민을 다 죽인다. WTO 협상에서 농업을 제외하라 고 외치며 비수를 꽂아 자결했 다. 곧바로 이 소식은 전 세계에 긴급 뉴스로 타전됐다. 추석 아침 차례 상을 준비하던 국민들은 멕시 코 칸쿤에서 날아든 비보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먼 이역에서 싸움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버린 이경해 는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2대 회장을 지낸 적이 있으며(1989), 스위스제네바 WTO본부 앞에서 1 인 단식농성을 감행하기도 한 매우 치열한 전사였다. 현지 분향소는 한국 칸쿤 투쟁단의 숙소인 아쿠아 마리나 호텔과 이경해가 자결한 칸쿤 시내 센트로 광장에 마련되었다. 현지시간으로 11일 저녁 7시 분수대가 있는 센트로광장에는 국제농민단체인 비 아 캄페시나를 비롯한 전세계 NGO 활동가 약 1천명이 모였다. 이경해 열사의 추모제는 거센 빗줄기 속에 세계농민장으로 치러졌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천둥까지 쳤지만 모여든 집회 참석자들은 동요하 지 않은 채 노래를 이어 부르며 멕시코 원주민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했다. 한국 투쟁단이 아침이슬 이나 동지가 등을 부르면 멕시코와 남미의 활동가들은 스페인어로 체 게바라에 관한 노래나 사파티 스타 투쟁가 등을 불러 화답했다.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어 지구공동체의 집회 참석자들은 이경해 열 사의 죽음을 함께 추모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과 노동자 농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각료회의는 저항세력의 힘 에 밀려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1999년 11월 제3차 시애틀 각료회의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운동가들 의 강력한 시위로 인해 무산된 것과 같이 비슷하다. 전 세계의 민주시민들이 대자본의 탐욕에 분노하 여 일으킨 저항의 물결이었고, 이 거대한 물결이 자본가의 함대를 표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태일 10) 이 사건에 관한 내용은 우리 강물이 되어 (유시춘 외, 2005, 경향신문사 출판부), 쪽을 요약하여 재구성한 것임. 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 의 분신이 한국 노동운동을 한 단계 도약시켰듯이, 이 열사의 할복은 전 세계 농민운동을 새로운 차원 으로 진전시켰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 사회운동의 폭과 깊이가 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성장했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진전과 인류역사의 발전은 이와 같이 공공선과 정의를 위한 피어 린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프리카 초원의 메뚜기 떼처럼 캄캄하게, 캄캄하게 세계화가 몰려올 때, 누가 앞장서 대지의 운명을 지켰던가? 역사의 모든 길이 어둠 속에 묻힐지라도 님이 꽂은 칼 한 자루 녹슬지 않으리니 세계 농민들의 이정표로 빛나리라. 이제 하늘 아래에서 가장 높은 곳이 된 여기! 밤마다 달빛이 찾아올 것을 우리는 믿노라. 바람도 구름도 지나갈 때마다 울어라. 지상의 모든 농민의 님, 이경해! (정도상 작, 2004)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소개한다. 이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의 국회통과가 발단이 되었다( ). 그 당시 노 대통령은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 두고 공개적으로 집권 여당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대하여 여타 정당들은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의무 를 지키지 않는다고 격렬하게 비판하며 사과를 요청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러한 요구를 납득할 수 없다며 사과를 거부했고, 이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거대 야당은 연대하여 대통령 탄핵을 가 결했다(제적: 271; 찬성 193; 반대 2). 국회가 탄핵을 결정하자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 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전 국민적 반발은 거센 후폭풍으로 몰아 쳤고 그 형태가 탄핵반대 촛불집회로 나타났다. 물론 이 촛불은 탄핵안이 발의되기 전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났었다. 7일 오후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탄핵발의에 반대하는 네티즌 50여 명이 시위를 했고, 9일 저녁 7시 경에 부산 서면 롯데백 화점 앞 광장에는 100여 명의 시민이 모여 반대집회를 가졌다. 찬반 논의가 총력전으로 번지는 가운 데 11일에는 노사모 회원이 집회 도중에 분신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탄핵을 찬성하는 보수단체들 (자유시민연대, 자유총연맹, 바른선택 국민행동, 인터넷 독립신문 등)도 행동에 나섰다. 탄핵안이 가결된 12일에는 전국에서 반대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여의도 국회 앞에는 시민 학생 등 2만여 명이 모여 밤늦게까지 촛불시위를 진행했고, 광화문 한 복판을 가득메운 촛불은 탄핵 무 효, 민주수호 를 외쳤다. 193마리 미친개를 찾습니다, 갑신오적, 국회를 해산하라 등의 분 노한 함성과 펼침막이 출렁거렸고, 여의도 집회의 즉석모금에서는 3천만원을 기록했다. 500여 개의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21

24 시민단체로 구성된 탄핵무효 범 국민행동 이 주최한 3월 20일의 광화문집회에는 22만 명(경찰추산 13만 명)이 운집했고, 광주, 부산, 대전, 대구, 마산, 창원 등지에서도 대략 30만 명이 모인 것으로 추 산했다. 여기에 인터넷으로 참여한 인원은 오마이뉴스 35만, 라이브이즈 10여 만 명 등 총 45만 명으 로 추정되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도 집회가 있었다. 검찰은 핵심지도자들에 대하여 체포영 장을 발부했으나, 운동 지도자들은 자진출석하여 조사를 받고 나왔다. 이와 같은 촛불의 강물은 3월 27일에 공식적으로 마무리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총선 이후에는 파병반대 촛 불로 이어졌다. 분노한 함성과 촛불 행진 속에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거행되었다(4월 15일). 그 결과를 보면, 탄핵 을 주도했던 거대 정당들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소수에 불과했던 여당이 152석을 차지함으로 써 국회의원 정원(271명)의 과반수를 획득했다. 탄핵 결정과 동시에 심의를 시작했던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에 탄핵을 기각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촛불의 정당성을 확인시켰다. 어느 시민은 말했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이 혁명인가!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운동에 담겨있는 거대한 힘을 볼 수 있고, 사회운동이 인간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견인차임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흔히 경험하는 사회운동의 몇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여기에는노동자운 동, 여성운동, 청년 및 지식인운동, 농민운동, 불특정의 다수 시민운동 등이 포함되어 있다. 쟁점에서 는 노동자의 삶과 노동조건, 생명, 환경, 민주주의와 민주화, 국제경제와 자립경제 등의 다양성을 확 인할 수 있고, 노동자 농민운동과 같이 매우 과격한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시민운동과 같이 평화 적이고 온건한 형태도 있다. 또 지속기간에서도 장단기의 다양한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오늘 날 사회운동은 다양한 주제와 주체, 다양한 강도와 실천형태, 다양한 지속기간 등을 보여주고 있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성격과 아울러 좀 더 심층적인 특성을 탐색해볼 수도 있다. 위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공통된 특성의 하나는 운동의 참여자들이 개인이익을 위해서라 기보다는 공공의 이익, 공동의 권익을 지키고 확보하기 위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노동조건을 개선 하고 나무숲을 보전하는 일,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향유하고 농민이 쌀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게 하며 대통령을 탄핵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동인 것이다. 즉, 사회운동의 첫 번째 특성은 공공성에 있다. 물론 특정 이익집단이 자기들 집단의 권익을 회복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공공적 선에 기준에 수렴하는 경우에 운동의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빼앗긴 권리나 부당한 침해 및 독점, 기득권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성격을 갖는다. 노 동자의 인권에 대한 자본가의 야만적 침해, 삼림이나 농촌 주민의 건강한 삶을 파괴하는 자본의 횡포, 적군을 향해 써야할 군사력을 자국민에게 향하는 군부의 잔혹한 폭력, 의회민주주의를 가장한 다수파 의 비합리적 횡포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바로 사회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특성은 부당한 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 권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성에 있다. 이와 연관된 특성으로서 도전의 표적은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권력(자)이다. 평화시장 사업가, 인도의 목재상,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쿠데타세력, 세계무역기구 등의 경제 권력자, 의회의 다수파 등이 그들이다. 세 번째로 강조하려는 점은 사회운동이란 기본적으로 강자에 대한 약자의 도전이기 때문에 그 싸움 에서 대체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위에서 본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지식인 등의 운동주 체들은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편에 비해 여러 면에서 취약하다. 이와 같은 사회운동의 본질적인 특성 은 운동가들이 큰 피해를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는 자기 헌신과 희생성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 이다. 위에서 본 사례에서도 운동가들이 땀에 젖고 피 흘리며 넘어야 하는 헌신과 희생의 운명을 보게 된다. 또 하나의 역설적인 사실은 사회운동이 정의를 위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성공가능성이 높지 않은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중대한 사회문제일수록, 다수의 큰 이해관계가 관련된 쟁점일수록 그 만큼 강력한 대상과 맞서는 싸우게 되어 피해는 크지만 가시적인 성공가능성은 낮다. 노동자 전태일 이나 농민 이경해가 주도한 싸움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약한 자의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 성공가능성이 낮음에도 감행되는 자기희생은 인 간사회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고 인류발전의 길을 밝혀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런 관점에 서 볼 때, 사회운동은 역사발전의 가장 값진 동력이고, 그 자체가 역사의 힘을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11) 2. 사회운동의 개념 위에 소개된 사회운동의 사례들은 각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상이한 주제와 목표를 가지고 상이한 집 단에 의해 일어났다. 각 사건마다 참여자의 연령이나 성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위의 사례를 중심으로 보면 살펴보면 다음 사항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각각의 사건들이 다수인의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첫 사례는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고, 다음은 농민들이 중심에 있으며, 세 번째는 여성들이 앞장섰지만, 그 직업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한 사 람 이상의 다수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참여자의 다수성으로 요약된다. 다수성이라고 할 때 그 수준은 매우 유동적이다. 2인 이상의 참여자 로부터 수십만의 거대한 집회까지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물론 1인 시위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반복적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면 운동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지율 스님은 혼자서 천 성산 생태환경을 지켜내기 위해 5차에 걸쳐 400여일의 단식농성과 부산역 앞에서 천성산까지 3보1배 시위행진을 했었다(8일 소요).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다수인의 참여를 만들어 내는 방법에 있다. 그 리하여 사회운동 연구에서는 참여자를 확장하는 방법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 예를 들 11) H. Zynn(이재원 옮김), 하워드 진, 역사의 힘 (예담, 2009).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23

26 면, 집회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풍물패의 마당굿이나 출연자의 깜짝 연행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끌고 참여를 유도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각각의 사건에는 참여자들이 공유한 목적이 있다. 첫째 사례의 목적은 인간적인 노동환 경 조성이고 두 번째는 인권이며 세 번째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참여자 모두가 지향하는 목적 에 부분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각각의 개인들은 가정형편이나 개인의 가치관이 다양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적어도 일정한 공통된 합일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공 유된 목표를 사회운동의 두 번째 특징적인 요소로 정리한다. 합의된 공동의 목표도 운동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보완되거나 수정되기도 하며, 목표의 세부사항에 따라 운동조직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야 기되기도 한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80년 후반부터 주도해 왔던 5월운동의 목표는 오랜 기간의 수정 보완을 거쳐 1990년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정해졌다. 또한 각각의 사건들은 공통된 연대행동을 감행한다. 연대행동이란 동일한 행동뿐만 아니라 상호간 에 유기적으로 공유되거나 조정된 행동을 포함한다.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 으로서의 연대행동에 참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연대행동을 통해서 비 로소 운동은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목적을 공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감행하였는지 아니면 실제 행동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공감의 정도에 그칠 지를 결정하는 문 제는 별개의 심리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운동에의 참여는 정신적 물질적 사회적 비용과 희생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회운동의 세 번째 특성을 연대행동으로 규정한다. 연 대행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기된 문제의 성격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정된 목표에 대한 공 감이 형성되는 계기, 그리고 이에 따라 행동으로 참여하겠다는 결단의 계기에 대하여 여러 연구자들 의 관심이 주어져왔다. 12) 연대행동에는 온건한 주장이나 저항으로부터 과격한 폭력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네 번째로 위의 사례들이 갖는 공통된 특징은 기존 제도의 절차와 과정을 지키지 않는 행동으로 이 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비제도적 행동uninstitutionalized behavior이라 말한다. 원론적으로 보면, 사회적 행위(행동)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제도적 행위, 즉 제도적 절차와 규정에 따르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나 규범이 규정하고 있는 행동방식을 벗어난 행위, 즉 비제도적 행위이다. 여기에서 사회운동은 비제도적 행위로 이루어진다. 위에서 제시된 사례들은 제도가 규정하고 있는 절차와 과정을 지키지 않거나, 무시하고 위반하는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러나 제도적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그 행위가 범죄행위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범죄행동과 기 본적인 차이는 사회운동의 공적 정당성, 즉 공공성에 있다. 사회운동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이익을 추 12) Klandermans, B. Interorganizational net works. in Bert Klandermans(ed.). International Social Movement Research: Research Annual, 1989, Vol. 2; The Social Construction of Protest and Multi-organizational Fields. in A. D. Morris and C. M. Mueller(eds.), Frontiers in Social Movement Theory (Yale University Press,1989). 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 구하는 개인이나 이익집단의 행동과는 구별되어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운동의 네 번째 특성 은 비제도성, 실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도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제도 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자가 바로 정부이고 국가권력이라는 점이다. 이 비제도성을 제도가 정하는 절차와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라고 볼 때,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 경우 를 포함한다. 첫째는 기존 제도에 규정되지 않은 운동행위이어서 일탈이나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 법이 없이는 범죄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운동행위는 법에 의해 단죄되지 않고 계속 전개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정서를 표현하는 문화예술운동이나 신흥종교운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러한 운동행위가 기존 제도나 지배체제에 위협이 될 경우에는 국가는 이를 법으로 제정하여 규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째는 기존 제도가 규정하고 있는 실정법에 의해 금지된 운동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기존 법 률 체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일탈이나 범죄로 간주되어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 여기에는 권력에 대한 반대와 저항운동, 그리고 권력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운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쌀 수입을 반대하 는 농민들의 저항운동, 기본적 인권을 짓밟는 정권에 대한 투쟁 등이 그것이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또는 독재권력 하에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가 박해받고 단죄된 사례 가 그 얼마인가! 인간의 역사에서 법을 어긴 혐의로 희생되는 운명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그 운동 을 계속하는 사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하는가? 그것은 인간 본성에 근 원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자유와 정의에 대한 사랑, 그 믿음의 힘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생 의 본능(Eros)과 관련하여 상상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사회운동의 개념을 비제도성, 즉 집합적 저 항과 도전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도전적 공격적 성격이 제거된 문화운동이나 종교운동 시민적 생활개 선운동 등의 영역은 이 연구에서 제외된다. 13) 이 밖에도 사회운동의 특성에는 지속성이나 조직성 등이 포함된다. 실제로 하나의 사회운동이 하나 의 단위행위로 끝나는 사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운동은 상호작용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게 운동의 목표와 수용방식을 한 순간에 전파시키고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실현가능성이 낮기 때문이 다. 또한 사회운동이 단발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 지속성을 갖도록 발전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최소한의 운동조직이 형성될 필요가 있다. 조직이 규정하는 역할 분담과 상호간의 유기적 관 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13) Tarrow, S., Power in Movement(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4. 이와 관련하여 볼 때, 운동참여의 배경에 따라서 저항운동[protest(insurrectionary) movement]과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을 구별하는 관점도 있다. 전자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시도하며 폭력적 성격을 갖는다면, 후자는 전체적 변화보다는 제도의 수정과 대안 제시, 공존을 전제로 한 다양한 토론과 경쟁의 관점을 갖는다. 운동은 폴란드의 솔리다리티 및 유럽의 사회주의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으로부터 자기발전의 과정에서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지적되기도 한다. Asef Bayat, Revolution without Movement, Movement without Revolution: Comparing Islamic Activism in Iran and Egypt, in Rosemary H. T. O kane(ed.), Revolution Volume VI: critical concepts in political sciences(london: Routlege, 2000), pp. 277(274~308).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25

28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각각의 운동사례에서 발견된 공통된 특성을 확인했다. 이와 같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공통된 특성을 귀납적으로 추출하여 그 특성을 하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을 우리는 개념화 라고 하고 그 노력의 산물을 개념이라고 한다. 즉, 개념화란 특정 부류의 대상들이 갖는 속성을 인간 의 의식 속에서 이성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말한다. 우리는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사회운동을 개 념화했고, 그리하여 그 개념적 특성을 1다수성, 2공유된 목적, 3연대행동, 4비제도성(변화를 위 한 집합적 도전)으로 설정하고 이에 더하여 5조직성과 지속성을 추가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사회 운동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지배권력에 도전하여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연대행 동, 줄여서 권력에 도전하는 집단적 연대행동 이라고 정의한다. 권력이란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정치 권력, 경제권력, 가족이나 세대집단 등의 제반영역에서 나타나는 일방적 강제력을 의미한다. 3. 혁명과 사회운동 권력에 대한 집단적 도전행동을 사회운동이라고 개념화할 경우에 그 도전행동에는 여러 가지 유형 의 집단행동이 포함된다. 근대에서 신분이나 계급해방을 위한 혁명이나 반란, 현대에 이르러 식민지 독립운동, 인종이나 지역 등 소수집단의 폭동이나 봉기, 신흥국가에서 군부집단이 자행해 온 쿠데타 등을 포함한다. 여기에서는 이들의 개념적 차별성을 비교하여 검토하고 이에 따라 사회운동의 개념체 계를 정립하려 한다. 먼저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혁명과 반란에 관해 살펴본다. 근대 서구의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혁명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 ), 명예혁명(1688), 18세기 미국 의 독립혁명( ), 프랑스 대혁명(1789), 등이 고전적인 사례들이다. 이 혁명들은 절대적 제 왕권의 신분사회로부터 정치적 기본권 쟁취와 사회적 신분 차별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독립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세의 기독교적 정치사회체제가 와 해되기 시작하면서 근대 의회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등장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는 사회주 의적 성향이 강한 2월혁명(1848), 파리콤뮨(1871) 등이 두드러진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중국의 신해 혁명(1911), 러시아 2월혁명(1917)과 10월혁명(1917), 중국혁명(1949), 쿠바혁명(1959), 니콰라과혁 명( ) 등 허다한 사례들이 있다. 한국 역사에서는 4 19혁명(1960)이 포함될 것이다. 이 각 각의 사례들 속에 새겨진 인간의 진한 사랑과 치열한 싸움의 흔적은 우리는 전율하게 만든다. 혁명은 역사의 진전에서 가장 뜨거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는 혁명이 무엇인가를 뚫어볼 수 있다. 첫째로 혁명은 매우 과격한 폭력투 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지배국가에 대항하는 전쟁의 형태로부터, 국가 내에서 신분이나 계급 계층 집단 간의 유혈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드물기는 하지만 명예혁명과 같이 피흘림 없이 의회 의 결정으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 거론되는 평화혁명, 선거혁명 등의 개념은 폭력성을 넘 어서는 전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혁명의 일반적인 기본 특성은 폭력성이다. 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9 두 번째 개념적 특성은 발본적 또는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식민종속국으로부터 자치독립국으 로의 변화, 왕권으로부터 시민권으로, 자본가로부터 노동자로의 변화 등은 변화의 발본성radical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혁명은 그 사회의 심층적 구조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정 치권력의 성격과 그 획득 방법, 정치세력의 개편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구조와 행위주체의 전복 이다. 단순한 정부의 교체는 혁명이라고 할 수 없지만 헌법 개정이나 중요한 사회제도의 변화, 주도 세력의 교체 등은 혁명의 요소가 된다. 성차별에서 남녀평등, 종교적 폐쇄로부터의 개방, 가족법의 기 본구조 변화 등은 혁명적인 것이고 이러한 영역의 변화는 사회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이 변화는 대체로 정치적 변화를 의미한다. 위의 대다수 사례들은 혁명의 결과로서 새로 운 정치체제의 성립을 실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정치사회의 밑바탕이 되는 사회체제의 변화-계 급 등의 사회세력-가 병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 과학혁명, 정보혁명, 문화혁명, 녹 색혁명 등의 비정치적 변화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행됨을 지적해둔다. 네 번째로 혁명은 사회의 전체적 변화를 수반한다. 정치사회적 변화는 사회전체의 체제적 성격을 변 화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전체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영역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 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보통선거제도는 사회에서 남녀 평등사상의 확립과 여권신 장을 수반하며 아울러 가족제도에서의 성적 역할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유념할 점의 하나는 전체적 변화가 특정 주체의 미리 준비된 계획에 의거한 것인가 아니면 사전 계획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초기 폭발로부터 진전되는 과정에서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행태로 발전된 것 인가에 대한 검토이다. 혁명의 이와 같은 특성을 사회운동과 비교해보면, 혁명의 성격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앞 에서 사회운동의 개념적 특성을 다수성, 목표의 공통성, 연대행동, 집단적 도전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혁명의 특성-폭력성, 목표의 발본성, 정치성, 전체성-과 재미있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 다. 전체적으로 혁명의 특성은 사회운동의 특성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혁명 역시 다수인이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연대하여 일으키는 집단적 도전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은 사회운동의 네 가지 특성에서 최고 수준의 형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집단행동의 특성도 확인된다. 목표의 공통성에 관련해 보면, 사회운동의 목표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전체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까지 광범한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혁명은 대체로 전체 사회의 근본 구조의 차원에 관련되어 있다. 연대행동에서도 혁명은 과격한 폭력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사회운동 의 한 극단적인 차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혁명을 여러 수준의 사회운동 가운데 최 고 형태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혁명과 연관성이 높은 집단행동으로 내란(반란), 쿠데타, 폭동, 봉기, 항쟁 등의 용어가 있다. 폭력 성이나 다수의 도전행동과 같이 혁명과 공통된 특성을 가진 반란(내란)이 개념적으로 혁명과 구별되 는 점은 도전행동의 성공여부와 관련하여 규정된다. 혁명은 도전행동이 성공하여 추구한 목표를 현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27

30 적으로 실현한 경우를 의미하는 반면에, 내란이나 반란은 실패한 도전행동을 의미한다. 내란이나 반 란으로 시작된 도전행동이 정치권력과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실현하면 혁명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권력자의 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실현시킴으로써 혁명의 완결성 이 높아진다. 따라서 내란이나 반란이 혁명으로 발전하려면, 도전세력이 기존 체제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동원력뿐만 아니라 목표의 발본성과 그 목표를 실현할 준비태세가 충실해야 한다. 그리 고 반란은 정치권력에 대한 도전행위이고 권력 장악을 통해 권력자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혁명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수준을 포함하여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적 전체적 변화라는 특성에 차이가 있다. 즉, 목표의 발본성과 전체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이에 비하여 쿠데타는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이동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무력적 공격행동으로서 여기에는 발본적 변혁을 위한 목 표설정과 폭넓은 연대행동의 성격은 취약한 형태이다. 다음으로 폭동, 항쟁, 봉기를 비교적으로 살펴보면, 내란이나 반란은 기존 권력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력의 권력장악을 목표로 하는 도전행동이지만, 폭동이나 봉기 및 항쟁은 대안적 권력장악을 지향하 는 측면보다는 특정 문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기존 지배 권력을 부정 하거나 더 나아가 새로운 대안권력이 신중하게 기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전체적 변혁보다는 부분 적인 사회문제에 대하여 불만을 표현하는 저항행동이다. 물론 폭동이나 봉기로부터 혁명으로 발전하 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혁명은 지방관리들의 부패와 착취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지적해둔다. 4. 집합행동과 사회운동 사회운동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 사회학적 연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위에서 살 펴본 혁명 등을 포함하는 거시적, 구조적 관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집합행동 개념을 중심으로 고 려하는 미시적 행동적 관점이다. 구조적 관점이 사회학과 역사학 영역에서 유럽을 근거지로 삼아 발 전되었다면, 행동적 관점은 사회심리학 및 심리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미국에서 널리 수용되었 다. 전자가 계급이나 인종 또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대규모 집단의 저항행동을 주목한다면, 후자는 제한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비교적 한정된 집단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여 기에서는 집합행동 개념이 사회운동과 갖는 연계성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본다. 먼저 집합행동이라는 말은 다수인의 자연발생적, 비제도적인 공동행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교통 사고나 폭력 현장에 모여든 구경꾼들, 집회에 모인 군중들, 매주 토요일 밤에 광주우체국 앞마당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이 이에 포함된다. 건물화재를 당하여 대피하는 사람 들이나 야구장에서 심판의 오심 때문에 흥분한 군중, 선거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도 집합행동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은 자연발생적이기 때문에 미리 계획되고 조직되어 있지 않고, 비 제도적이기 때문에 정해진 절차와 형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상황적인 성격이 강하다. 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1 그러나 이 사람들은 특정 상황에서 밀착된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공감의 폭을 넓히면서 급속히 행동 이 일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다수성과 공동행동은 사회운동의 특성과 일정한 공통 성을 갖지만, 공유된 목적과 도전성은 사전 계획에 따라 선행된 것이 아니라 집합행동 과정에서 생성 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보면 집합행동은 사회운동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사 회운동의 계기 또는 초기적 국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폭력의 비인간적 현 장을 본 사람들이 반폭력운동을 시작하는 경우나, 주택은행의 사례와 같이 의도적으로 부도낸 금융자 본의 탐욕에 분노한 군중이 일시적으로 항의시위를 벌이는 것은 집합행동으로부터 사회운동으로 발 전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또한 집합행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행동방식이라는 점에서 사회운동의 일부 또는 한 국면을 이루기도 한다. 수년 동안 지속된 영광원자력발전소 건설반 대운동의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던 군중행동이 바로 이런 사례이다. 하나의 사회운동에는 허다한 집합행동들이 포함될 수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집합행동은 사회운동의 필수적 구성 요 소이기도 하다. 집합행동 없이 사회운동이 실효성 있게 전개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은 다 수인의 집합적인 힘이 갖는 압력으로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더 나아가서 이를 제압한다. 집합행동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자로는 프랑스 심리학자 르봉(G. Le Bon, )이 있다. 그 는 집합행동의 한 형태인 군중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의 무질서와 불안 상태에 관한 심리학적 설명으로서 군중론을 전개했다. 14) 당시에 프랑스는 기존의 구질서가 해체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 발전되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불안한 상태에 처해 있었고, 그에 따라 범죄와 폭력, 부패와 착취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번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그가 제 시한 군중이론의 기본 시각은 전통에 입각한 보수적, 귀족주의적 관점과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을 견 지함으로서 군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군중은 진화의 수준이 낮은 열 등한 존재이어서 어린이와 여자나 미개인에 비유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군중행동의 특성은 감정의 충동성, 흥분성, 유동성, 피암시성, 과장성, 비관용성 등 비합리적, 병리적, 문명파괴적 성향이 강조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군중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보수적 편견이 작용한 서술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와 달리 20세기 중반 미국의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집합행동의 개념적 특성으로서 자연발생 성과 비제도성을 강조하면서도 르봉과 다른 관점에서 접근했다. 집합행동에 전제된 부정적 인식으로 부터 벗어나 중립적 관점에 입각해 있음을 다른 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즉, 집합행동이 비합리적이고 병리적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들은 감정이나 충동에 휩싸인 즉흥 성과 상황의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아울러 일정한 판단이나 신념에 기초한 측면도 있는 행 14) Le Bon, G., The Mind of Crowd (Unwin, 1987). 임희섭, 집합행동과 사회운동의 이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6쪽에서 재인용.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29

32 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15) 더 나아가서 이들은 집합행동이 새로운 행동방식과 규범을 창출해내는 효 과도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16) 예를 들면, 잔혹한 경찰의 폭력진압은 대학생의 무장을 초래했고, 반 면에 경찰의 온건한 대응은 대학생 측과 극단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비공식 소통방식을 발전시키기 도 했다. 사회운동과 집합행동의 유관성을 종합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로, 앞에서 제시한 혁명 이 사회운동의 고차원적 측면이라면 집합행동은 사회운동의 밑바탕이 되는 기본 요소의 하나라고 정 리할 수 있다. 혁명의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집합행동이 일어날 수 있으며, 앞에서 말한 폭동 및 봉기 도 사실은 집합행동의 한 사례이다. 두 번째는, 집합행동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넘어서 정상적 행위로 인식하여 객관적 과학적 분석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운동 연구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 번째로 집합행동적 접근은 역사적 관점을 자체의 이론 체계 내에 내장하지 못한 한계가 있음도 지적해둔다. 이는 집합행동 설명의 논리가 즉흥적 현장에 근거하여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 회구조와 문화적 성격과 관련된 요인을 적절히 수용하여 발전시키지 못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 운동조직, 운동산업, 운동권 5. 사회운동의 이론 위의 사회운동 개념은 사회운동 이론의 기초 재료가 된다. 개념은 이론구성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 다. 모든 이론은 개념을 기본 재료로 구성된 명제의 체계이다. 그것은 문장의 형태를 갖는다. 다시 말 하면 문장이 갖는 의미를 명제라 하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명제를 가설이라 한다. 가설이 검증되면 그 자체가 하나의 이론 또는 이론적 법칙이 된다. 이론이란 활용의 측면에서는 현상에 대한 설명의 도구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이론은 어떤 대상이나 문제를 설명하는 도구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사실은 하나의 대상을 설명하는 도구는 여러 가지 형 태가 있다는 점이다.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은 과거의 막대저울에서부터 고도의 기술을 적용한 전자저 울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으나 막대저울과 전자저울은 각각의 도구로서 특성과 장단점이 있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에 의해 더 좋은 도구와 덜 좋은 도구로 구별되기도 한다. 좋은 도구는 우선 측정 의 정확성과 적용범위가 넓어야 할 것이다. 측정도구의 이와 같은 다양한 변화와 발전은 사회운동이 론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먼저 지적해 둘 사실은 사회학이론은 수학이나 경제학 이론에서 발전된 이론만큼 측정이 정 밀하고 활용범위가 넓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연구대상 자체의 특성과 관련되 기도 하다. 예를 들면, 사회학에서 노사 간의 협동이나 갈등의 측정을 백두산과 한라산의 거리를 측정 15) Smelser, N., The Theory of Collective Behavior(Routledge & Kegan paul, 1976). (김영정 역, 집합행동론, 서울: 진흥문화사, 1984: ) 16) Tuner, R. and L. Killian. Collective Behavior(Englewood Cliffs: Prentice Hall, 1987).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3 과 비교해볼 만하다. 더 나아가 노사 간의 갈등이 한국에서 의미와 중국에서 의미가 다를 수 있는 측 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학문 발전의 역사적 차이에서도 연유하기도 한다. 다음에서는 기 존 사회운동이론에 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이 연구와의 유관성과 활용가능성을 가늠해본다. 사회운동이론들 중에서 고전적인 사례는 역시 19세기에 제기된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다. 그의 이 론은 철학으로부터 제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전체성을 갖기 때문에 사회이 론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이론의 중요한 일면을 포함하고 있다. 그가 발전시킨 사회운동이론의 핵심은 노동계급혁명론, 더 정확히 말하면 프로레타리아혁명론이다. 이는 사회운동으로서 혁명의 발생원인과 전개과정 및 그 결과에 대한 일관된 체계를 통해서 노동계급 혁명 의 불가피성과 최종적 승리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혁명의 불가피성과 필연적 승리라는 부분은 객관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의 이념적 신념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을 벗 어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계급형성의 구조적 토대와 진전과정, 계급갈등 발생의 기 제와 갈등양상의 변화 등은 사회운동이론으로서 선구적 통찰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계급발생에 있 어서 생산수단 소유여부의 근원적 중요성, 잉여가치 및 집중과 집적에 따른 계급관계의 진전, 그에 따 른 모순과 갈등의 심화, 구조적 차원의 계급과 행위주체로서 계급의 형성, 계급과 국가의 관계, 혁명 의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그의 논리는 전형적으로 사회운동이론의 성격을 갖는다. 다만 그의 이론이 사회운동의 여러 형태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유형, 즉 폭력적 계급혁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지나치 게 단순화된 명제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비판받아 당연하다. 이러한 비판과 수정을 통해서 마 르크스의 이론은 20세기에서도 지배적인 파라다임의 하나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의 운동론이 갖는 한계의 하나는 여러 형태의 사회운동들 중에서 계급운동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인종, 민족, 지역, 성 등이 오늘날에도 사회운동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 이다. 다만 그 시기에는 여타의 사회문제보다도 노동문제, 즉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빈곤이 상대적으 로 첨예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이에 따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적 혁명의 풍조가 더 지배적 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론은 그 후 레닌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모택동, 중남미의 카스트로와 게바라, 차베스 와 룰라, 아랍의 나세르 등 전 세계의 혁명가들에 의해서 실천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혁명가들은 이 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더 정교하고 세련된 운동이론으로 무장하였음을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밖에 안토니오 그람시,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허버트 마르쿠제 등을 위시한 다수의 연구자들은 마르 크스의 논리를 계승하여 더 진전된 운동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이를 테면, 프랑크푸르타학파의 마르 쿠제는 신좌파이론으로, 하버마스는 식민화된 생활세계론으로, 그람시주의자들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시민사회론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의 급진적 운동이론을 선도해 왔다. 이 시기에 역사사회학적 시각에서 사회변혁을 설명한 사례도 본 연구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역사사회학적 시각이라 함은 사회현상의 역사적 특수성과 아울러 사회학적 일반화를 동시에 지향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31

34 하는 입장이다. 배링턴 무어의 <민주주의와 독재의 기원, 1966>, 에릭 울프의 <20세기 농민혁명들, 1969>, 테다 스카치폴의 <국가와 사회혁명, 1979> 등이 대표적인 연구 성과이다. 우선 무어의 문제 의식에 주목한다. 그가 제기한 질문은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대 변동을 어떻 게 이해할 것인가? 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세 가지 이행경로를 규명했다. 그 하나는 부르주아가 토지 귀족과 동맹하여 왕정을 무너뜨리고 의회민주주의로 발전한 경로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여기 에 속한다. 두 번째는 토지귀족이 왕정 및 관료와 결탁하여 강력한 파시스트 독재체제로 이행한 경로 로서, 여기에는 독일과 일본이 해당된다. 세 번째는 농민대중이 변혁의 주체가 되어 왕정과 귀족세력 을 무너뜨린 러시아 등 공산주의의 길이다. 그가 계급개념을 중시한다는 점은 마르크스와 유사하지만 결정론을 거부하고 역사적 상황적 조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사학적이다. 다음으로, 울프는 중국, 러시아, 멕시코, 베트남, 쿠바 등 여러 국가의 농민봉기를 조사하여, 농민봉기는 자본주의 시장에 편 입되는 과정에서 불만이 강한 농민과 주변적 지식인 세력 간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스카치폴은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을 비교분석한 결과, 사회혁명을 심리적 요인 이나 전위당 등의 사회구조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접근을 비판하고, 그것들이 하나의 매개변인으로 작 용하지만 혁명은 결국 정치적 위기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혁명은 사회구조의 측면과 정치구조상의 요인이 상호적으로 고려됨을 강조했다. 한 가지를 추가한다면, 앨런 트림버거의 <위로 부터의 혁명, 1978>이다. 그는 일본, 터기, 이집트, 페루의 사례연구를 통해서 국가관료제의 엘리트 층이 취약해진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탈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대체로 관료 와 군부엘리트가 주도하고 대중의 참여가 배제되며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경향이 있음이 강조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이론과 시각이 다른 사회운동 이론이 20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널리 퍼졌다. 이른 바, 기능주의적, 사회심리학적 이론들이다. 기능주의 사회운동이론이 답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어떠한 사회구조적, 기능적 상태에서 운동은 발생하는가? 이다. 이 시각에서 혁명의 이름으로 전개 된 근대화론은 찰머스 존슨Johnson Chalmers과 사무엘 헌팅턴Huntington Samuel에 의해 주장되 었다. 존슨은 <혁명의 미래, 1966>에서 전근대 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의 혁명적 변화는 사회 각 부분 간의 불균형에서 촉발되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불균형은 전통적 가치-규범과 새로운 근대 의 과학기술 간의 불균형, 근대적 경제체제와 전통적 정치체제 간의 불균형 등으로 표현되며, 이 불균 형을 정치엘리트가 적절히 통제할 수 없을 때 권력디플레(통제력 상실) 현상이 발생하고 이것이 진전 되면 새로운 사회세력에 의해 정치제도의 전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한 헌팅턴(1968)은 사 회경제적 변동으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엘리트 세력이 정치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할 때, 이들이 사회 체제의 불균형을 계기로 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한다. 서구사회가 급격한 왕정체제를 붕괴시키면서 다 수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면, 후발의 근대화 국가들은 군사쿠데타나 민중해방 운동을 통해서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군부독재체제나 사회주의 체제를 성립시켰고 이에 토대하여 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5 토지제도 등을 포함하는 사회경제개혁이 시도되었다. 17) 이 시기에 기능주의와는 다른 시각에서 사회운동의 설명을 시도한 흐름이 사회심리학적 이론인데, 여기에서 제기하는 기본적 질문은 누가, 어떤 심리상태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가? 이다. 그 선구 적인 논의는 데이비스가 혁명의 이론화 작업으로 발표한 논문으로서 흔히 J-곡선이론으로 알려져 있 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혁명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로부터 개선되고 있는 국면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개선되는 상황에서 개인은 발전의 희망 을 가지고 현실에 적응해나가는데, 그가 성취한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우에 불만이 발생한다. 누구에게나 불만이 없을 수는 없지만, 상상했던 기대와 실제 성과에서 격차가 클 경우에, 그래서 현실 과 기대 간의 격차가 참을 수 없을 때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18) 그의 이러한 논리는 불만이 고조된 심리상태를 더 정교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는데, 그 이론적 산 물이 상대적 박탈 이론이다. 이 흐름에서는 상대적 박탈이 발생하는 상태와 그 유형이 더 정교하게 구체화되고 있다. 이를 테면, 객관적 현실의 개선에 따라 개인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으나 그의 성취능 력이 객관적으로 하강할 때, 비록 그의 성취가 상승했다 하더라도 준거집단에 비해 떨어질 때, 객관적 조건 자체가 악화되어 개인 생활상태도 악화될 때, 교육받은 수준과 실제 소득 간에 상응성이 낮을 때 나타난다. 이는 결국 개인의 심리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인지부조화, 즉 내면적 부조화와 그로 인한 갈등상태를 감소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그리하여 현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집합행동을 사회운동 으로 인식한다. 19) 이러한 논의는 그 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체계에서 나타나는 집합적 기대와 현 실 간의 차이로서 체계불만으로 개념화되기도 하였다. 20) 주로 미국에서 발전된 사회심리학적 논의의 기본 성격은 우선 사회적으로나 심리세계에서의 균형모 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능주의적 관점에 토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리 의 배후에는 균형으로부터, 다수의 유형으로부터, 평균적인 것으로부터 어긋나는 현상을 하나의 예외 적, 더 나아가서는 병리적인 것으로 보는 현실인식을 떨쳐버릴 수 없다. 팍스 아메리카의 논리전개와 유사하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는 절대적 박탈현실을 외면하고 상대적 박탈로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인 류사회에 만연된 절대빈곤의 엄중함을 적절히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또한 이는 상 반된 관점에 입각하여, 절대적 박탈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현장의 더 치열한 저항과 도전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희망을 가진 사람보다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인간의 눈을 돌려야 함이다. 17) 임희섭(1999)에서 재인용. 18) Davies, J., 1962, Toward a Theory of Revolution", ASR, Vol. 27, (김 진 균,정 근 식 편 역, 1978, J곡 선 혁명이론, 혁명의 사회이론, 서울: 한길사, ). 19) Geschwender, J. A. 1964, "Social Structure and Negro Revolt: An Examination of Some Hypotheses", Social Forces, 43: Pp ; Gurr, T. R. 1970, Why Men Revel?,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 Feierabend, I. & N. R. Feierabend, 1989, "Social Change and Political Violence: Cross National Patterns", in H. D. Graham and T. R. Gurr, eds., Violence in America: Historical and Comparative Perspective, Washington D. C.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33

36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 이론들은 사회운동 발생의 원인이나 누가 참여하는가에 대한 설명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누가, 어떤 심리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하는 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 회운동이 진전되는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설명은 보여주는 게 별로 없다는 한계를 피할 수 없다. 바 로 이러한 문제인식으로부터 발전된 이론이 바로 자원동원론resource mobilization theory이다. 사회심리학적 연구가 운동의 발생원인과 참여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자원동원론은 운동의 성장, 쇠퇴 및 변동에 대한 역동적 과정과 그들이 택하는 운동방식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사회 구성원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박탈감이 기계적으로 사회운동을 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운동 에 필요한 조직과 자원의 동원이 가능할 때 형성되고 발전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자원이라 함은 운동의 목표와 인원 및 재원과 시설 등이 포함된다. 이 이론에서는 사회운동이 비합리적이고 병리적 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회현상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노동운동 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사회운동이 중앙집권적 폐쇄적 조직모형과 체제변혁의 전체적 목표를 특징으 로 한다면, 자원동원론에서 주목하는 사회운동은 분권적 비공식적 조직모형을 중심으로 하고 전문화 되고 한정적인 목표와 조직의 개방성과 유연성이 특징적이다. 이는 사회해체의 산물이 아니라 운동조 직의 산물이다. 21) 자원동원론은 내부적으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 하나는 경제사회적 관점이 고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적 관점이다. 전자는 사회운동을 보상의 분배체계에 변화를 지향하는 신념 과 행동의 집합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용과 보상이라는 경제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따라 서 이는 이용 가능한 인적 물적 자원의 양과 그것을 동원하는 기제를 분석하여, 사회운동을 합리성과 효율성에 준거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22) 이와는 달리 정치사회학적 관점은 틸리의 동원모형 과 맥아담의 정치과정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동원모델은 운동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강화 하기 위해 가용한 자원을 동원하여 기득권 세력에 도전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분석의 핵심은 도전세 력의 자원동원과 압력행사의 형태, 그리고 기득권세력이 자체의 자원을 동원하여 이에 대응하는 형태 로 귀결된다(Tilly, 1978). 23) 틸리의 동원모델에 뒤 이어 더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한 맥아담의 정치과 정론 24) 은 기존 이론이 정치권력 요인을 적절히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존 정치권력을 옹 호하는 보수적 입장에 서 있음을 비판하면서 정치구조에 대하여 사회운동세력이 도전하는 과정을 분 석한다. 이 모형은 정치적 기회구조와 토착사회의 영향, 그리고 운동세력의 의식전환과 운동의 정당 성 인식을 포함하는 복합적 요인을 고려하고 있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21) Government Printing Office, pp McCarthy, John, D. & M. N. Zald, 1977, "Resource Mobilization and Social Movements, A Partial Theory", A. J. S., Vol. 82, No. 6(May): pp ) Jenkins, J. C., 1983, "Resource Mobilization Theory and The Study of Social Movements", Annual Review of Sociology, Vol. 9: pp ) Tilly, C. From Mobilization to Revolution( Mass.: Addison-Wessley, 1978). 24) McAdam, D., Political Process and the Development of Black Insurgency Chicago: Univercity of Chicago Press,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7 <맥아담의 정치과정 모형> (McAdam, D., 1982, p.51 참조) 자원동원론의 이와 같은 다양한 발전은 그 자체의 현실적합성과 활용가능성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현재도 이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형은 이 연구와 관련해 볼 때 다 음 요인들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지역사회운동의 설명에 있어서 국가권력 과 지역사회 간의 관계에 대한 검토이다. 구미의 이론에서는 제도화된 정치체제, 구체적으로는 정치 적 기회구조가 국가사회 전체에 균등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전제될 수 있으나, 한국의 현실 정치과정 에서는 지역 간 차별적 효과가 크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정치의 배후에 존재하여 작동하는 국가권력의 성격과도 관련있다. 두 번째는 역사적 요인을 적절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 회운동과 관련된 과거의 역사적 전통이 현재의 행위자들에게 작용하는 영향력을 주목함으로써 이해 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이다. 이와 같은 요인들은 본 연구의 이론구성에서 더 구체적으로 검토될 것이다. 자원동원론이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심리학적 운동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의 형태로 발전되었 다면, 이 시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노동계급 혁명론에 대한 대안의 하 나로서 신사회운동론New Social Movement이 발전되었다. 이 이론을 대두시킨 현실적 배경은 기존 의 노동운동과는 다른 사회운동이 광범하게 발전된 현실과 관련된다. 이를 테면 1960년대 이후에 널 리 번졌던 학생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핵-평화운동, 동성연대자운동, 다양한 소수자운동 등에 서 이를 확인한다. 이 운동은 기존의 노동운동과는 달리 다양한 주변화된 집단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생산의 영역보다 는 소비와 문화의 영역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다. 또한 이 운동은 혁명운동과 같이 국가 전체의 변혁이 나 권력 장악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생활에서의 국가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는 자율성과 자기정 체성을 지켜내고 일상생활에서 자치영역을 확보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운동이 발전하게 된 구조 적 성격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급격한 진전에 따라 강화된 국가의 통제력 확장, 강화된 관료권력, 기술관료적 합리성의 증대 등으로 요약된다. 운동방식은 노동운동이 과거에 보여주었던 공격성과 폭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35

38 력성과는 달리, 방어적, 거부적, 비타협적, 자기한정적 급진주의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신사회운동론이 대체로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른 구조적 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점은 일반적이나 여 기에도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정치지향적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지향적 운동 이다. 정치지향적 운동은 후기자본주의사회에 대한 구조적 모순을 거시적 수준에서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는 주도세력으로 신중간제계층 집단을 지목하지만 여기에 노동계급까지도 포함함으로써 다소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전망을 지향한다. 앞에서 말한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의 신좌파운동가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와 달리 문화운동적 경향은 국가의 정보통제나 상징조작 등 미시적 시민사회에서 제기되 는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방어적 저항을 통해 일상의 민주주의와 자아정체성 및 자율성을 보호 하려는 방어적 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멜루치, 카스텔 등을 포함하는 포스트맑시즘으로 대표된다. 25) 한국의 시민운동에서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성격이 강하며, 여기에서도 급진적 민중운동과 개량적 시 민운동의 분화현실을 보게 된다. 위에서 말한 자원동원론과 신사회운동론이 광범하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198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대두되었다. 이 두 이론이 사회심리학적 접근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 로 하여 대두되었다면, 이와 유사하게 구성주의 이론 역시 이 두 이론에 대한 비판적 배경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두 이론은 사회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사회심리학적 관점이 중시했던 행위 및 행위자의 요인을 주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구성주의 이론은 기존이론들이 제기 한 요소들을 선택적으로 종합하여 더 포괄적인 체계로 발전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심리학적 요소로서 행위자의 사회적 불만과 저항의식을 포함하는 행위자 요인, 자원동원론에서 초점을 맞춘 자 원동원과 운동조직의 형성 발전에 관한 요인, 그리고 신사회운동론에서 제기된 국가권력의 과대성장 과 구조적 모순을 포함하는 거시적 사회구조적 요인 등을 종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사회운동의 발생 근거와 운동 초기상태, 운동의 조직과 발전과정, 운동의 목표와 전략까지도 고려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광범하고 적용가능성이 넓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이론에서 발전시킨 중요한 개념은 의미구성 주체로서의 행위자에 대한 재규정, 사회운동에의 참 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의미해석틀Frame, 참여자가 소속감과 행동의지를 공유하고 있는 집합적 정체 성Collective Identity, 운동조직들의 공통공간인 복합조직의 장Multi-organizational Field, 운동문 화Movement culture 등이다. 최근에 널리 수용되는 이론으로서 더 체계적이고 정밀한 분석도구로 발 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개념적 고안물이 시도되고 있음을 이 개념들에서 본다. 이상에서 현재 사회학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이론의 전체적 윤곽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를 토대로 하여 이 연구의 분석과 해석을 위한 도구로서 이론구성을 시도하고, 기존 이론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을 해석하려 한다. 25) 정수복, 1968년 프랑스 5월운동의 전개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탄생,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 (서울: 서울문학과 지성사, 1993); Melucci, A.,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이론적 접근 (앞의 책); Scott, Alen, 새로운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앞의책). 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9 제3장 국가와 지역사회운동 1.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학에서는 국가를 사회의 한 형태로 본다. 인간생활에서 최초에는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점차로 규모가 확장되고 또 내부구성이 복잡하게 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 한다. 이를 테면, 원시공동체, 가족집단, 씨족사회, 부족사회, 지역사회, 국가사회, 국제사회 등이 그 사례이다. 집단의 규모가 크고 내부 구성(지위-역할)이 체계적으로 조직된 상태를 사회라고 할 수 있 다. 이렇게 볼 때, 인간 집단생활의 위와 같은 발전 양상 가운데 국가는 그 규모나 내적 구성 및 잠재력 에 있어서 가장 완결성이 높은 수준에 이른 형태이다. 완결성이 높다는 말은 독자적 자기 존립성, 즉 외부에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외부부터의 방어체제, 자립적 생산 체제, 지속적 전승체제 등을 포함하여 전체사회가 자체적으로 유지 존속하는 조건의 충족 정도를 말 한다. 물론 완결성은 정도의 문제이겠지만, 전체 구성원에 대한 통제력도 그만큼 잘 정비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사회(구성체)를 통일시키는 응집인자이면서 그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모순이 응축되고 조절되는 곳이기도 하다. 26) 오늘의 인간사회에서 국가는 다른 형태의 사회를 강제하고 압도하는 힘, 즉 권력을 행사한다. 거주지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손가락의 지문이나 결혼한 사실까지 의무적으 로, 다시 말하면 강제로 신고하게 만드는 힘의 결정체, 그 실체가 바로 국가이다. 이는 한 사회 내의 인간과 사건과 사물에 대하여 완전하고도 독점적인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독립성과 자율성이 확보된 상태를 말한다. 국가가 강제력의 결정체라고 할 때, 국가형성에 관한 논리적 기반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그 강제력, 즉 국가권력의 형성 근거가 구성원 전체의 보편적인 뜻을 반영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예 를 들면, 16-17세기 홉스나 룻소를 위시한 사회계약론자들이 국가의 형성을 구성원의 합의적 계약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나, 19세기 헤겔이 국가를 공동체의 보편이익을 실현하는 이상적 형태로 언명하 는 것, 그리고 막스 베버나 현대 기능주의 이론적 가정도 이런 논리와 상응하는 것이다. 이른 바 합의 론이다. 이와 달리, 두 번째는 국가권력의 성립이 전체적 합의나 보편성에 근거한다고 보지 않고 강한 자가 갖는 힘의 실현으로 본다. 그 세력의 구체적인 형태는 역사적으로 다양하다. 맑스주의 시각에서 보면, 고대노예제 사회 단계에서는 귀족계급이, 봉건사회에서는 지주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 본가계급이 다른 사회계급 즉, 적대계급을 지배한다. 물론, 이러한 강제력은 계급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그 밖에 인종집단이나 민족 또는 지역 세력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독자적인 국가건설을 위해 싸우고 있는 바스크족, 쿠르드족, 타미르족 등 다수의 소수민족들이 전형적인 예이다. 전자가 합 의모형이라 한다면, 후자는 강제모형이라 할 것이다. 26) 니코스 풀란차스(홍순권 조형제 공역), 정치권력과 사회계급 (도서출판 풀빛, 1986), 52, 58쪽.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37

40 그런데 고대국가나 중세 봉건제 하에서의 국가는 그 자체가 본질로 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행사범위 가 여러 측면에서 제한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 국가는 왕족이나 귀족세력의 힘이 제한된 영토를 대상 으로 하여 허술한 지배방식으로 작동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완전했던 국가형태는 나폴레옹 이후 에 발전한 국민국가에서 비로소 현대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국경이 명료하게 규정되고 국경 내에 거주하는 국민에게 통일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제도, 소유권과 조세제도, 도량형과 교육제도, 사법제도 등을 관철시켜 정비된 국가체제 내에 국민을 통합시킴으로써 지배 권력의 체제를 확고히 정립하게 되 었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 이후 발전과정에서 실현된 국가권력의 강화 현상은 인간 사회에서 국 가론에 대한 관심을 그만큼 고조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국가는 고정된 배타적 영토, 명확한 국경선, 상비군과 경찰을 토대로 한 폭력의 독점을 기반으로 하여 그 구성원에 대한 지 배 통제의 정도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현대국가에 대한 이론적 관점은 매우 다양하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다원주의국가 론의 입장이다. 이는 고전적인 관점인 헤겔의 보편국가론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성격을 갖는 주장이 다. 전자가 국가를 하나의 이상적 사회형태로 규정하는데 대하여 다원주의는 국가를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서 파악한다. 이 관점에서 국가는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대의기구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반영 하는 구성체이고, 따라서 국가권력을 다수의 이익집단들이 분할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분할 소 유된 권력을 통해 국가는 중립적 중재자의 기능을 수행한다(A. Schumpeter, R. Dahl; Pluralism). 이는 국가권력을 의회의 로비수준으로 환원하는 한계를 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의 하 나로서 국가란 다수 이익집단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집단에 의해 구성되고 작 동된다는 입장이 있다(V. Pareto, C. R. Mills, G. Mosca). 밀스가 발전시킨 파워엘리트 개념은 정치 부문과 경제부문, 그리고 군사부문 엘리트들이 긴밀히 결합하여 하나의 폐쇄된 권력체제를 구축하여 영속화시키고 이를 통해 지배를 실현하는 미국의 비민주적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다음에는 더 급진적인 관점에 서 있는 도구주의국가론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마르크스의 국가론을 기본으로, 국가란 본질적으로 사회구성원의 전체적 보편이익이나 공개된 경쟁에서 다수의 이익을 추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익실현을 위한 도구라고 설명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분석과 해명에 있어서 국가란 자본계급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비록 개별 자본가들은 끊임 없이 멸망하고 새로 탄생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본계급은 발전하고 있으며 국가의 자본기능과 그 지 배력은 지속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이다. 우리 현실에서 보아왔던 정경유착과 세금감면 및 특혜적 지원 등의 정책은 국가가 자본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도구주의 국가관은 정치에 대한 경제의 우위성을 전제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치 의 경제종속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제기되는 바, 그것이 구조주의 국가론, 구체적으로는 국가의 상 대적 자율성론이다. 국가(정치)가 일방적이고 결정적으로 계급(경제)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 한된 범위 내에서 자체의 자율성을 갖는다는 입장이다(풀란차스, 183). 이는 국가기구 구성원인 관료 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1 집단의 독자적 특성과 그에 따른 초계급적 정책추진 등의 작용을 통해서 실천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초계급성이 정치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 단계에서는 결국 자본계급의 이익을 보호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는 것이 구조주의 입장이다. 27) 이 관점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로부터 국가의 독자성을 더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이들은 역사적 시각에서 국가 기구와 관료제, 정당, 국제 관계 등이 국가를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들이며, 이들을 통해서 국가는 자체의 논리와 구조를 작동시 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위기란 사회적 긴장이나 계급모순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 려 국가구조 자체 모순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그리하여 계급의 힘으로부 터 국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각시킨다. 28) 국가형성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검토에서 나아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존재양상을 살펴보자. 흔히 국가의 구성요소로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이 거론되고 있다. 이 경우에 국민이나 영 토는 물적인 형태로 감각할 수 있지만, 이와 달리 주권은 물질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 다. 국민이나 영토는 국가를 구성하는 데 요구되는 외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주권은 입법, 사법, 행정 을 포함하는 총체적 의미에서 국가를 구성하는 최고통치권, 즉 국가권력으로서 물질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사회적 실체로 존재한다. 회사가 건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인격으로 존재 하는 것과 같이 국가란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및 정부종합청사의 건물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기구들 간 의 상호관계의 총합적 효과로 존재한다. 직접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국기, 국가, 국호 등의 다양한 상징물로 표현하여 그 실체감을 강화해나간다. 국가는 국가주권, 즉 국가권력의 행사를 통해 현실화된다. 국가권력의 실행과정에서 행위자가 확인 된다. 이것이 국가기구이다. 구조주의 국가론은 국가기구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와 억압적-폭력적 국가기구이다. 교육이나 문화 등의 상징적 요소로 구성된 규범과 제도적 장치 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상비군과 경찰, 교도소 등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기구가 후자이다. 국가는 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공고화해 나간다. 이 두 가지 경로의 밑바탕에는 국가 권력의 강제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폭력을 독점한 기구들에 의한 강제력이 일방적 으로 관철된다. 말하자면, 국가권력의 핵은 물리적 강제력인 것이다. 사회운동론적 관점에서 국가론의 중요한 초점은 국가권력의 형태와 행사방식이다. 이는 국민의 안 전과 생존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의 존재형태 는 부족국가, 고대국가, 중세 봉건제 국가, 근대의 국민국가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정치권력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군주국가, 귀족국가과 민주국가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더 상세한 하 위형태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사회구성체론에 근거한 풀란차스의 다차원적 인 식은 그 논리성과 체계성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 그는 국가의 존재형태를 생산양식에 의 27) 풀란차스, 위의 책, 171쪽. 28) Skocpol, Theda, 한창수, 김현택 역, 국가와 사회혁명 (서울: 도서출판 까치, 1979).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39

42 해 규정되는 국가유형, 각각의 국가유형의 하위단위인 국가형태, 그리고 국가형태의 하위단위인 정부 (레짐)형태로 구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국가유형에는 각각의 생산양식에 상응하는 노예제 국가, 봉건제 국가, 자본주의 국가로 분류한다. 생산양식 개념이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는 개념이 아니라 순 수한 추상적 개념이고 현실은 다양한 생산양식이 일정한 방식으로 연계되고 결합되어 있기 <저항투쟁의 설명도식> (조희연 조현연, 2002, 41-42쪽 내용을 수정) 때문에 국가유형도 그러한 추상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하 위형태인 자유주의적 국가형태, 개입주의적 국가형태 등으로 한 단계 더 구체적 수준에서 구분한다. 더 나아가서 자유주의 국가형태는 대통령중심제(미국), 입헌군주제(영국), 의회민주제(프랑스) 등의 레짐으로 세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에 근거하여 국내의 연구에서도 국가권력의 성 격과 행사방식을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국가의 존재양태를 몇 가지 수준으로 구분한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가장 포괄적인 수준에서 근대국가 및 전근대 국가로 분류하는 국가유형, 두 번째로 근대국가 내에서도 독재적인가 민주적인가에 따라 파시즘이나 군사독재 및 민주국가 등으로 나누는 국가형태(체제), 세 번째로 체제 이하에서 정권 정부 정책 수준으로 구분했다. 29) 이 책에서는 가장 구체적인 수준인 정권이나 정책의 수준을 중심으로 하여 접근한다. 심층 구조의 인식도 결국은 구체 적 사실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이들은 국가와 이에 도전하는 저항운동을 위의 도식으로 제시했 다. 여기에서 저항은 국가의 억압과 상호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또한 사회운동과 국가의 억압은 두 가 지 요인, 즉 경제상태와 시민사회의 동의와 지지라는 변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경제상태에는 국민 29) 조희연 조현연, 국가폭력 민주주의투쟁 희생에 대한 총론적 이해, 조희연 편, 국가폭력 민주주의투쟁 그리고 희생 (함께 읽는 책, 2002), 41-42쪽. 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3 경제의 주요 지표와 국가경제의 안정성 등의 지표가 포함되고, 시민사회 항목에는 시민사회 구성의 성격이나 지지도 등의 지표가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현대 한국사회의 국가와 민주주의 투쟁을 설명하기 위한 분석틀로 구성된 것이지만, 본 연구 에 유의미한 시사를 준다. 이 도식에서 저항은 우리 연구에서의 사회운동 및 항쟁과 연관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구에서는 사회운동을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집합행동으로 규정하고 있 다. 다만 이 연구가 지역사회의 운동을 중심과제로 설정한 만큼 지역사회적 요인에 대한 이론적 검토 가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다음에서 지역사회를 좀 더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2. 국가와 지역사회 전지구화의 추세가 진전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지역사회라는 말의 의미는 이전보다 복합적이다. 국 가를 넘어서는 국제적 수준의 지역사회가 널리 형성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단위로 한 국제 연맹, 국제연합, 유럽연합, 아세안 등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그린피스, 제네바의 국제정의연대, 홍콩의 아시아인권위원회, 등 허다한 국제간의 지역적 연결망을 갖는 사회단체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제의 성격상 국내의 지역사회로 논의를 한정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국가가 가 장 완결성이 높은 사회형태라 한다면 지역사회는 국가체제 내부에 형성된 하위의 공간적 사회단위이 다. 사회의 완결성을 그 자체의 자기충족성에 근거하여 판단할 때, 국방이나 외교 등 국가의 대외관계 와 관련된 사항은 중앙정부가 전체적으로 관장하고 지역사회는 위임된 범위 내에서 자율적 행정과 정 치행위를 수행한다.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는 지리적 공간이 몇 개의 하위 공간, 즉 지역사회로 구분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의 공간적 단위는 완전히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후나 생태환경 및 자원분포 등의 자 연적 차이가 있고, 제한된 수준에서 인종이나 인구, 언어나 풍습 등의 사회문화적 차이가 있는가 하 면, 정치경제적 차원에서의 차별성도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회문화적 공간단위로 설정된 지역사회는 자체의 독자적 정체성 형성을 추구하며,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자체의 독자적 존립가능 성, 즉 자립역량을 강화해 나가려 한다. 그리고 이 정체성과 자립역량은 국내 수준을 넘어서 국제사회 에 까지 확장-발전시키려 한다. 한 국가를 구성하는 공간단위로서의 지역사회는 다양한 기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단순한 방향성 에 따라 동부와 서부, 남부와 북부 등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면, 자연환경이나 사회문화적 특성에 따 라 구분한다. 실제로 지역사회의 정체성이 되는 지역적 특수성은 단순한 자연환경의 소산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성격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 현실적이다. 또한 이는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축적된 사회문화적 자산이 중요한 특성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사회는 고대사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적 과정을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41

44 거치면서 변형 발전되어 왔다. 현재 한국의 지역사회 구성의 가장 두드러진 기준은 정치행정적 요인 이다. 실제로 행정구역이 지역주민의 삶을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행정구역도 시기에 따라 변형되기 때문에 일의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왕조 때는 조선 팔 도라 했는가 하면, 해방 후에는 한반도가 14개 도로 구분되었고, 분단 이후에 남한 사회는 서울, 경 기, 강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로 나누었다. 근래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다시 남북 으로 양분한 행정체제로 변화되었으며, 뒤이어 대도시를 광역자치단체로 승격시킴으로써 더욱 다양 한 구분이 이루어졌다. 한 지역사회의 이해는 그 자체의 내적 속성에 대한 분석과 규명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더 체계적인 이해는 지역사회가 국가와 갖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국가와 지역사회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상호 적이지만, 지역사회 요인보다도 국가권력의 성격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지역사회란 기본적으로 국 가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구성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와 국가권력의 관계를 지나 치게 국가중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국가구성의 공간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지 역사회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현실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시각을 바꾸어보면 국가란 지역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지역사회를 기본으로 하는, 지역사회의 총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국가권력의 독점적 강제성과 폭력성도 그 구성원에 의해 거부되면 성립하지 못한다, 물론 그 거부의 형태와 강도 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지역사회가 분리하여 독립하려는 운동이 그 극적인 사례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와 지역사회 간의 관계설정 문제가 제기되는 바, 이 양자 관계는 다음 몇 가지 형태 로 나타날 수 있다. 그 하나는 국가권력에 대한 지역사회의 전반적 종속이다. 이 유형은 국가권력이 중앙정부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고, 그 결과 지방정부 또는 지역사회의 자율적 공간이 매우 협애하고 폐쇄적인 국가체제에서 나타난다. 집중형 국가권력과 종속적 지역사회 유형이다. 20세기 전반의 전 체주의 국가나 반동적 군사쿠데타 등을 통해 성립된 군사독재국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형태의 국 가권력은 엄격한 억압정책과 강경한 주민통제정책을 통해 가혹한 착취가 수행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지역사회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따라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형태를 취하며 그 효과로서 지역사회는 수 동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책에 젖어들고, 그 만큼 자생성과 자율성이 낮은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그에 따라 국가와 지역사회 간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지역 주민의 중앙정부에 대한 태도 역시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성격을 갖는다. 물론 가혹한 착취가 가중되면 민중의 봉기가 뒤 따른다. 동학이 전형적으로 그 사례에 속한다. 다음에는 이와 상반된 관계양상을 살펴본다. 이는 국가와 지역사회의 관계가 매우 개방적인 유형이 다. 개방적이라는 말은 상호작용의 폭이 넓고 호혜적 성격이 강하다는 의미이다. 이 경우에 국가권 력의 성격은 주요 정책의 결정권과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물리적 강제력의 중앙집중도가 낮은 편이 다. 물론 국가의 대외정책과 관련된 부분이나 필수적인 물리력에 대한 지배권은 확보하고 있다. 그러 나 지방정부에 대한 인사와 재정의 결정권을 광범하게 분산시킴으로써 지방자치의 정도가 높은 수준 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5 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이는 지역사회가 자생적인 자원개발정책을 수립하고 자율적으로 발전전략을 구상하여 스스로 자신의 미래 비전을 구축해나가는 형태이다. 이 경우에는 국가 내의 지역사회가 국 제사회에서 수준 높은 활약상을 실천하여 국가의 위상을 강화하는 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미국이나 스위스 등의 연방제 국가가 개방형 국가권력과 자치형 지역사회의 좋은 사례가 된다. 세 번째는 이 두 유형이 중간 형태이다. 이 형태는 중앙의 국가권력이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불안정 한 과도기적 양상이다. 이러한 권력분산, 즉 국가권력의 지방이양은 중앙정부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진전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지역사회의 강력한 도전을 통해 성취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이행과정은 국가권력의 강고한 속성을 넘어설 만큼 강력한 힘을 지역사회가 확보했을 때 가능하다. 장기간 지속되었던 반봉건적 시민혁명의 역사 속에서 서구사회의 분권화 이행과정을 보면 알 수 있 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자치의 역사가 매우 복잡한 경로를 거쳐 왔으며 현재까지도 지역사회의 자율 적 발전을 위한 지방자치제도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2000년 벽두에 시작되 었던 국가권력의 지방이양을 핵심으로 하는 지방분권운동이 우리나라에서 광범하게 전개되어 지방분 권특별법과 지역균형발전특별법 등을 제정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기대했던 수준의 지방분권을 성취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그 당시 운동에 직접 참여하면서 가졌던 소감은 중앙정부에 귀속되어 있는 인사권과 재정권에 대한 중앙정부의 집착이 매우 강하고, 이와 아울러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지역의 자기중심성이 기대 이상으로 강고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두 가진 논점을 확인한다. 그 하나는 중앙정부가 각 개별 지역사회와의 관계에서 드러나 는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적 대우, 즉 지역차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사회 간의 관계, 즉 지 역갈등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국가권력이 각각의 지역사회와 갖는 관계를 검토한다. 원론적으로 보 면, 국가권력의 수행자인 중앙정부는 각각의 지역사회와 균형적이고 공정한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상 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균형성과 공정성의 객관적 기준이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일정 정도 의 차별성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이는 권력집단 구성의 지역적 편중성이나 특정 지역이 갖는 공간적 특수성에 근거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우리사회의 군사독재시기에 국가권력의 핵심자리들이 특정 지 역출신을 중심으로 채워진 사실이나 참여정부 때 제주도를 대상으로 한 특별자치법이 이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중앙정부는 여러 지역사회 간에 경쟁을 유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분할지배의 방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 결과 분할지배의 피해자가 다름 아닌 전라도라는 인식이 광주 전남에 비교적 강 하다. 이러한 지역차별은 과거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왕조 때 서북지역과 남부의 변방지역을 대상으 로 하여 과거급제자에 대한 수적 제한과 인재등용에서의 차별 등이 시행된 바 있다. 또한 변방지역에 각종 범죄자나 체제도전자를 유배시키고 격리시킴으로서 그 지역에 유배지라는 낙인이 형성되게 했 으며, 그에 따라 지역민의 정서와 풍토를 왜곡시키고 오염시켰다. 더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를 사회에 유포시킴으로써 지역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에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43

46 대한 반발과 도전이 차별받는 민중들에 의해 광범하게 일어난 사례가 19세기 조선왕조 말기에 도처에 서 발생했던 것이다. 임술민란은 그 사례이다. 현대사에서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같은 맥락이 다. 다음으로, 지역 간의 관계를 살펴본다. 한 국가를 구성하는 지역사회 간의 관계도 복잡한 양상을 보 이는 것은 당연하다. 각각의 특성에 차이가 그 원인으로 되기도 한다. 다양한 형태의 협력관계와 연대 관계, 그리고 갈등관계와 적대관계가 두드러진 양상일 것이다. 특히 현대 한국에서 호남과 영남지역 의 갈등관계는 매우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 갈등관계는 우선 지역의 불균등발전과 인재등용에서의 지 역차별과 소외 문제에서 제기되었고, 더 나아가 이러한 불평등과 차별이 역사적 배경이나 국가권력집 단의 관련성과 얽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도 지역사회의 이와 같은 특성은 지역의 사회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는 정치사회적 문화적 환경조건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크다 3. 지역사회운동이론의 모색 지역사회운동에 대한 이론구성이란 사회운동이론의 경험적 준거를 사회 일반으로부터 지역사회로 특화시키는 작업이다. 사회운동이론이 자기의 이론체계 내부에 지역사회운동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 미 있는 현상을 적절히 포섭하지 못할 때, 그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 변인이나 개념을 개발하여 이론 체계 내부에 일관성있게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운동이론에 대한 비판 적 재구성의 형태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이 이론구성 작업을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째는 기존 사회운동이론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보완이다. 이 평가와 보완은 이론 그 자체의 논리구성뿐만 아니라 그 논리구성이 지역사회와 갖는 유 관적합성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사회운동의 시발에서 종료에 이르는 전 과정 을 포함한다. 둘째는 지역사회론에 관한 이론적 경험적 검토이다. 이 과정에서도 역시 사회운동론의 관점이 견지되어야 한다.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일반에 대한 지역사회의 차별성을 기본으로 하고 그에 기초하여 지역사회의 특수성을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세째는 사회운동이론과 국가 및 지역사회이론 의 종합이다. 두 이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각 이론에 수정과 보완할 명제들을 선택적으로 종합하여 논리적 통일성을 갖는 지역사회운동이론의 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먼저 사회운동이론을 검토한다. 이 이론들의 기본 자료는 이미 앞장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여러 이론이나 연구성과가 제시되고 있은데, 전체적으로 볼 때 주요 논점을 명제 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연구의 기본성격이 결정론에 근거하거나 특정의 이념을 전제하는 사례는 제외한다. 마르크스나 르 봉의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2. 구조역사적 접근에서 인식관심의 초점은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등과 같은 국가 전체 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7 적 변혁이나 전근대에서 근대사회로의 전반적 변동과정에 대한 분석으로서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 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 이론구조의 검토는 지양한다(스카치폴과 배링턴 무어). 다만, 그 설명 논리의 핵심요인이 되는 사회경제적 성격, 계급연합과 적대의 구성 및 진전, 정치체제의 성격 등의 요인은 이 연구에서도 고려 대상이다. 3. 유럽에서 주로 발전된 신사회운동론, 신좌파이론, 그람시주의론 등에서 주목하는 사회경제구조의 특성, 국가권력의 성격, 다양한 주체와 그 연합, 저항운동의 목표와 형태 등의 요인도 중요하게 검토 한다. 특히 체제변혁을 위한 무력혁명과 생활정치의 회복을 위한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과 방어 등의 전략에도 관심이 있다. 운동발생의 구조적 조건과 운동이 지향하는 목표, 그리고 운동전략과 형태 등 을 설명한다. 4. 주로 미국에서 발전된 정체이론, 상대적 박탈이론, J-곡선이론, 자원동원론, 정치과정론, 구성주 의이론 등은 미시적 행위론적 시각에서 개별 사건을 주목하여 다루는 경향이 있다. 각각의 이론들은 사회운동의 생애에서 주목하는 초점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고려한다. * 틸리의 정체이론은 운동주체로서 지배세력권에 포함된 집단과 배제된 상태에서 이에 진입하려는 집단 간의 세력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정체이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비판적 요소는 지배권력 을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점, 다시 말하면 지배권력의 정당성이나 작동방식 등의 성격에 관 련된 부분은 분석의 대상에서 주변화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모형에서 는 국가권력의 성격에 대하여 이론적 관심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 시기의 군주제 국가, 일제시기 식민지 국가로부터 해방 후의 미군정 및 자본주의 국가형태에 이르는 과정을 포함한다. 또한 이 이론에서는 기득권을 가진 집단과 이에 참여하려고 하는 도전집단 간의 경쟁을 설 명의 기본틀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이론적 발전의 여지는 두 집단의 내적 구성, 즉 운동주 체의 내부구성과 연대형태 및 상호작용의 과정을 더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 사회심리학자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상대적 박탈이론의 논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높은 사람이 운동 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운동참여자의 여러 특성 가운데 한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시 적 이론이다. 비교적 특성화 정도가 높은 이 이론은 그에 따른 정교성이 강점이다. 반면, 운동조직이 나 필요한 자원, 운동의 진전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관심은 주변화되어 있다. 더 이론적인 논난의 여 지가 있은 부분은 상대적 박탈자만이 불만이 커지고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박탈자들은 더 필사적으로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운동의 사례에서도 상대적 이 아니라 극단적-절대적인 곤경에 처한 경우(5 18운동)에 운동발생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 론 상대적 박탈의 이론이 광주 전남사회운동이론에서 갖는 적합성은 지역차별이나 소외의 문제에 직 결되지만, 이와 동시에 반증되는 사례도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또 박탈자가 아닌 수혜자도 운동 에 참여한다는 것이 자원동원론이다. 예를 들면, 학생운동, 지식인운동, 종교적 봉사 등의 도덕적 성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45

48 향을 갖는 사례가 적지 않다. * 자원동원론은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요소로 자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일반이론의 수준에 이르렀다 할 만큼 보편적 적합성을 갖는다. 이 이론은 사회심리학의 관점과는 달리 운동참여자의 문제보다도 운동의 시작과 조직발전 및 진전과정에 관심이 많다. 다만, 그 자원의 종류와 성격 등의 차이가 운동 의 진전과 결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진전된 연구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 이 연구에서는 자원동원론의 진전된 형태로 제시된 맥아담의 정치과정론을 주목하고자 한다. 정치 과정론은 앞에서 제시한 이론들에 비하여 더 체계적인 분석틀을 정교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운동자원의 범위를 확장하여 설명력을 높이고 있다. 확장된 자원에는 정치적 기회 구조와 토착사회의 지지 및 지원이 포함된다. 이 이론은 광범한 사회경제적 구조와 정치적 기회구조, 그리고 토착사회의 지지기반 등 운동설명에 중요한 자원들을 적절히 고려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이 론구조가 갖는 강점을 고려하여 우리의 연구는 여기에 적합성이 있는 지역사회적 변인들을 결합시켜 독자적 이론구성을 시도하려 한다. * 다음으로 제시된 구성주의 이론은 비교적 최근의 이론적 관점으로서 매우 폭넓은 영역을 이론 내에 포섭하려는 전망을 갖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사회심리학적 성격이 더 발전되고 강화된 형태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적 관점에서 두드러진 강점은 의미틀, 집합정체성 개념에 집약되어 있 어, 이를 이 연구의 이론체계 내에 결합시키려 한다. * 미국에서 발전된 이론의 전반적 성향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이 작업에서 두 가지로 규정하여 검토 한다. 첫 번째 문제점은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운동 사회학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 적 성격의 이론은 전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 서 널리 제기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국가폭력 등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역사 의식이 운동의 이론 속에 드러나지 않는 점이다. 이는 물론 미국사회 자체가 갖는 일천한 역사성을 반 영하는 것이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는 역사에 대한 학문적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지역의 운동사 에서 역사적 요인과 국가권력의 요인을 중요한 변인으로 고려하는 편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5.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의 분석틀로서 앞에서 제시한 조희연 조현연(2002)의 분석틀을 이 연구의 이론구성에 활용한다. 제시된 이론이 국가사회 일반에 관한 모형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지 역사회론에 대한 집중적 검토와 보완을 통해 이 연구의 이론구성 작업을 진전시킨다. 6. 지역사회론에서 운동이론에 결합시킬 명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지역사회운동연구에서 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은 지역사회가 국가권력과 갖는 기본관계이다. 이는 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9 국가권력에 대한 종속성으로 구체화된다. 지역사회는 사회운영의 전 영역에 걸쳐 국가권력에 종속되 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종속의 형태와 과정을 규정하는 국가(권력)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운동론적 관점에서 지역사회의 이러한 종속성은 일방적인 성격에서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성격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바로 지역사회의 자율성과 자립성을 강화하는 효과로 나타나므로, 이를 위한 사회운동을 검토한다. * 국가사회를 구성하는 지역사회들은 각각 그 자체가 서로 구별되는 특수성이 있다. (변방성-유배자의 삶과 흔적들, 차별과 소외, 도전과 저항의 역사전통) * 이 특수성은 국가와 각 지역사회가 맺는 관계의 특수성으로 현실화된다. 경기나 강원과 같은 다른 지역사회에 비하여 전남지역사회는 더 적극적인 저항활동을 전개해온 역 사적 전통이 있다. 이를테면, 진도를 근거로 하여 대몽항쟁을 전개했던 삼별초의 항쟁, 임진왜란 때 호남출신 의병이 수원, 청주, 진주 등 전국적 수준에서 전개했던 저항의 역사기록 등이 그것이다. 정 조는 이를 기리기 위해 호남절의록을 펴낸 바 있다. 이러한 역사자산을 지역사회운동 이론에 도입하 는 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7. 지역사회론에 대한 이와 같은 검토 결과는 앞서 수행된 사회운동이론에 대한 검토 결과와 논리적 으로 모순없이 결합시킴으로서 이론체계로 정립된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제시된 각각의 명제가 갖는 의미를 재검도하고 선택적으로 선정하여 전체의 논리체계 내에서 적합한 위치에 배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라 이 연구에서 다룰 명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광주 전남의 사회운동 연구와 관련하여 정치과정론은 이론 체계의 근원적인 한계로 인하여는 국가권력 요인을 적절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 연구에서는 국가권력의 성격 요인을 정치적 기회구조와 구별하여 검토한다 조희연 조현연의 모형에서 저항의 주체를 지역사회 운동세력으로 대치하고 이에 대응하는 국 가 형태를 제시한다. 이 연구에서는 국가형태를 국가권력의 성격 및 정부형태(레짐)의 수준에서 분석 지표를 구체화한다 정치과정론이 포함하고 있는 토착사회의 조건과 관련하여 광주 전남의 특수성을 구체화할 수 있게 비중을 강화한다. 특히 지역차별과 소외의 요인을 더 주목하여 다룬다. * 국가권력과 직접 대응하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있는 서울의 운동세력과 광주 전남운동세력 간의 관 계-다른 지역사회 운동세력과의 관계 요인 고려한다. 전남지역사회운동이 다른 지역사회운동에 비해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 그 차별성의 원인인가? 7-4. 지역사회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지역이 갖는 과거의 역사적 전통이 현재의 사회운동에 미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47

50 치는 영향을 반영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는 역사적 요인의 전승기제를 확인하는 구체적 사료, 직접 적 자료의 발굴이나 구술사 등의 방식을 통해 검토한다 정치과정론의 인지적 해방 요인을 확장하여 구조적 모순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요소까지 포함 하도록 개념을 확장한다. 이는 의미틀 개념을 통해 접근가능하다. 이상의 논의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를 제외한 3개 항은 지역사회와 관련된 사항임을 지적해 둔다. <지역운동의 사회적 구성모형> 제4장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역사쓰기 1. 사회운동론적 역사인식의 특성 20세기 전남지역 사회운동사를 정리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선행작업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이 연 구가 취하고 있는 역사인식의 기본 시각, 즉 역사관을 밝혀주는 일이다. 역사는 어떤 형태이든 사실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는 것이고, 그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구자의 가치판단과 세계관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5 16군사정변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것이나, 소작농민의 저항에 대하여 상반된 평가가 나타나는 것은 역사관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여기에서는 이 책이 바탕으로 하 고 있는 사회운동론적 역사인식의 기본 성격을 개략적으로 제시하려 한다. 두 번째는 역사의 연속적 이해를 위해서 20세기 이전 전라도 또는 전남 역사에 대한 시론적 재해석 작업이다. 이는 기존의 역 사해석 방법과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대안적 전망을 모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전의 역사가 발하는 빛이 이후 역사를 더 밝게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1 먼저 사회운동론적 역사인식에 대한 이 연구의 시각을 다음 몇 가지 명제들로 요약한다. 첫째로, 사 회운동은 정상적인 사회현상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운동을 흔히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받 아들이는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기존 제도나 구 조를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 제도나 구조에 대한 저항이나 도전, 즉 사회운동을 비정 상적인 것, 더 나아가서는 병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기존 제도나 구조 가 유지되는 것이 당연하고 최선이라는 보수적 관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능주의 이론과 일치한다. 30) 이와 달리, 이 글에서는 사회운동을 당연하고 정상적이며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운동은 사 회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의 하나이고, 사회문제가 없는 사회구조나 체제란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회운동이란 기존 체제의 한계와 무능을 넘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회문 제를 더 적극적이고 발전적으로 해결하는 적극적인 대안의 하나로 규정한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도 말했듯이, 사회체제는 그 체제의 현실, 즉 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유지하려는 관성과 보수성을 갖기 때문이다. 남성지배의 사회체제에서 성차별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보면 알 수 있다. 현 체제의 기득권층은 태생적으로 그 질서에 변화를 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체제가 일정 기간 안정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는 과정에서 각종 부작용과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누 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 필연성에 근거하여 사회문제와 모순의 발생은 사회체제의 본질적 성격이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기존체제의 기득권층은 가능한 한 그 체제와 제도의 틀 내에서 사회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제도에 규정된 절차와 과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기존 제도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 이유는 기존 제도의 보수적 자기-유지의 관성과 아울러 변화된 환 경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사회문제에서 연유한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 필연적으로 교통문제가 수 반되고 노래방이 번창하면 그 속에서 모순이 움튼다. 그리하여 누적되는 사회문제와 모순은 심화되고 악화되는 경향을 피하기 어렵다. 심화된 사회문제와 모순은 자연스럽게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 전으로 표면화된다. 그러므로 사회운동은 기존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성격을 갖는다 는 점이 두 번째 특징이다. 교통질서 개혁이나 성숙한 여가문화를 위한 대중의 운동에서 이를 확인한 다. 이렇게 볼 때 사회운동이 감행하는 저항과 도전은 예외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인간사회의 자산인 것이다.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에 몸을 맡긴다 는 브 레톨트의 시구가 상징하는 바도 이와 상통한다. 그렇다면 저항과 도전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것은 결국 사회변동, 즉 사회구조와 제도 및 규범의 30) 사회학에서 사회구조, 사회체제(사회체계), 그리고 사회질서나 규범 등의 용어가 모호하게 혼용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 사회구조는 사회의 제 관계를 구성하는 틀을 의미하고 사회체제는 그 틀이 작용하는 측면을 지칭한다. 사회질서나 규범 등은 사회체제의 한 양상이다. 따라서 사회구조론의 관점은 비교적 정태적, 경직적 성격을 갖는 반면에 사회체제의 관점은 더 동태적이고 유연한 양상을 함의한다. 계급구조, 지역구조 등의 용어와 정치체제, 문화체제 등의 용례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49

52 변동을 추구한다. 사회문제와 모순의 해결은 그것의 성격에 따라 여러 수준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범 위가 크고 깊은 사회문제일 경우에는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변동을 통해 해결에 이를 수 있으며, 작고 부분적일 경우에는 그에 관련된 세부적 규범이나 부분구조의 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한 사회 전 체의 빈부격차나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민운동은 앞의 사례에 속하고, 새로운 교통법규 나 신호등 설치 등의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집회나 시위는 후자에 속한다. 이와 같은 변동을 지향 하는 접근은 현상유지의 보수성에 대한 저항이고 도전이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달이 차면 기울며,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 는 옛말처럼 인간사회에도 변동이 없을 수 없다. 부패하지 않은 권력도 드 물고, 망하지 않는 나라도 없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변동에서 그 방향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사회운동이 빚어낸 변동은 획일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변동의 폭과 깊이와 방향은 다양한 양상으로 일어난다. 인간사회에서 불평등 체제의 형성과 변천 과정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다양성에서, 또 좁게 보면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장례방법이 공간적 시대적 변화를 통해서 달라지는 경향에서 이를 본다. 이 변천 과정은 어찌 보면 주어진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이다. 그것이 항상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 만, 먼 역사의 지평에서 볼 때 고대의 인간사회와 삶에 비해 현대사회가 더 발전된 양상을 갖는다는 인식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인간이 추구하는 미래 역사에 대한 꿈 역시 발전사관으로 모아 진다. 예를 들면, 역사는 본질상 변화요 운동이요 진보라는 점을 우리 시대 역사가인 카Carr도 언명 한 바가 있다. 31) 그리하여 이 연구가 갖는 역사인식의 세 번째 특징은 사회를 변동의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희망을 잃지 않는 발전적 전망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네 번째로 제기되는 질문은 무엇이 저항과 도전을 가능케 하는가? 이다. 이 질문에 대하 여 인간이 발견한 답은 힘-에너지 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물리학은 물론 사회학이나 심리 학에서도 유사한 경향으로 나타났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스펜서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확인 되는 바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차원을 바탕으로 더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물 적 차원으로서 인간집단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차원으로서 추상적 관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가치의 힘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민중의 힘이고, 후자는 공공선과 균형, 즉 정의의 힘이다. 왜 민중인가? 사회운동은 왜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가?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민중이 저항과 도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민중이란 강제력(권력)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는 억압자에 대칭되는 말이 다. 이 연구에서는 역사를 민중의 눈으로 본다.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이 아니라 힘없고 억압받는 서 민대중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말이다. 유사 이래 인간 사회에는 권력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남의 재화를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있어왔고, 여기에서 전자는 후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를 지속시키려 해 왔다. 그리고 역사는 대체로 전자의 눈을 통해 기록 되어져 왔다. 이른 바,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다. 일반사의 보수성과 정치사 중심의 역사기록이 대 31) E. H. Carr, 앞의책, 208쪽. 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3 체로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연구는 역사를 지배자나 기득권자 중심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 중심 되는 역사를 쓰려한다. 이 작업 자체가 저항과 도전의 실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사회 운동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통속의 관점을 배격한다. 오히려 기존 권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에 서 패배했을지라도, 패자가 지향했던 가치와 패배 속에 담겨있는 인간사회의 진실에 빛을 비추려 한 다. 더 나아가서, 이 저항과 도전이 승리하는 역사, 사회운동이 승리하는 역사를 생산하려 한다. 아울러 이 연구에서는 역사를 正 義 (정의)라는 가치이념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는 역사인식에 있어 서 사실의 기본적 중요성을 경시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의 정확성은 당연히 기본 요건이지만, 그 자체 가 역사는 아니다. 역사는 여러 사실들 가운데 기록자의 가치에 따라 선택되고 재구성되고 해석됨으 로써 탄생된다. 32) 따라서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역사에 관한 이 연구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가 치는 정의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정의는 자원분배에서의 균형이고 가치지향에서 공공선으로 규정된 다. 실천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시각은 대체로 억압받고 착취당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상례이 다. 말하자면, 이 연구는 권력자와 부자, 즉 기득권자가 누리는 번영과 향락의 세계보다는 힘없고 가 난하며, 억눌리고 짓밟힌 고난의 삶을 주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한 올의 주름살이라도 펴주는데 관심을 갖는다. 정의가 실종된 이 시대문명에 대한 저항이고 도전이다. 2. 지역사회운동의 역사쓰기 구체적인 역사연구에서 제기되는 기본적인 질문은 역사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로부터 시작된 다. 우선 지적해둘 일은 사건 자체가 역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은 기록되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역사로 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할 수 있다. 한 사회에서 역사 기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복되 는 감이 있지만, 사건이 기록됨으로써 역사는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기록자와 사건이 결합되어 역사기록이 구체화되는 데는 여러 요인들이 관련된다. 하나의 사회를 구성 하는 여러 수준의 요인들 가운데 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수준의 요인들이 중요하게 고려되어 왔다. 말하자면, 역사란 이 요인들 간의 상호작용과 그 관계의 효과로서 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역사기록의 실제적 과정과 관련하여 살펴본다. 역사생산에 요구되는 기본 요소 는 역사의 원료(사실 자료)와 그 자료를 가공하여 기록하는 생산자(역사가)이다. 우선, 역사기록의 대 상이 되는 사건이나 자료의 측면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록 대상이 될 수 있는 사건이나 자료는 이 32) 학술적 연구는 크게 보면 문제정립과 자료수집, 그리고 자료해석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막스 베버의 견해에 준거해 볼 때, 연구문제를 선정하고 정립하는 과정은 연구자의 가치에 따라 설정된다. 그러나 정립된 연구문제에 관련된 사실자료의 수집에는 연구자의 감정이나 편견이 개입되지 않고 엄격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수집된 자료에 대한 해석은 연구자의 가치가 관련되는 과정이다. 물론 수집된 자료의 해석과정에서 연구자의 기존 가치가 변화될 수 있다. 막스 베서는 연구의 이 순환과정을 가치관련성Value-relevance와 가치중립성 Value-free로 구분하여 인식한다. 사실의 정확성excatness과 망라성exclusiveness을 추구하는 자료수집의 과정은 가치중립성에 해당하고, 문제의 정립은 연구자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가치관련성이 규정한다. 그렇다면 연구자의 가치는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인간이 갖는 가치나 이념의 원천은 문화이고 문화가 자리하는 집이 역사인 셈이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51

54 론적으로 무한하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기록자도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불가피하게 자료 선택과 제한의 과정이 개입된다. 그에 따라 생산물은 고대사나 현대사가 되기도 하고, 정치사나 경제 사 또는 문화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근현대 사회운동사는 그 한 사례이다. 자료에 대한 접근 가능성 이 모두에게 똑같지 않다. 현실 권력이 자료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통제한다. 신채호의 글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후에 일어난 왕조가 앞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고 불살라 버리기를 위주로 함으로, 신라가 흥하자 고구려 백제 두 나라의 역사가 볼 것 없게 되었으며, 고려가 일어나자 신라의 역사가 언제나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하지 않고 말살하려 고만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재료가 빈약하게 된 것이다. 33) 그러나 자료에 대한 통제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기록자에 대한 지배권력의 차별과 통제이다. 권력은 대체로 그들 자신의 가치를 고려하여 기록자를 선정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역사교과서 개정을 위한 필진 구성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권력에 의해 지정되지 않은 기록자도 있을 수 있으며, 더 나 아가서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기록자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역사가와 권력 간의 긴장관계를 의미 한다. 여기에서 현실 정치권력에 의해 인정되는 공식기록과 그와 같은 공인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공 식 기록이 구별되며, 전자는 정사가 되고 후자는 야사가 된다. 따라서 사회운동론의 역사쓰기는 공식 기록보다는 비공식기록의 성격을 갖게 된다. 삼국시대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접근하여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의 역사적 사실을 배제하거나 비중을 축소하는 편견을 드러냈던 김부식의 역사쓰기에 대한 신 채호의 준열한 비판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다음에는 20세기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를 위한 접근방법의 하나로서 그 前 史 (전사)의 검토 필요성을 몇 가지로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시간적 연속성의 맥락 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시간적 연속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간정신의 통일적 지평을 형성하는 것이며, 역사적 사건이란 이런 지평에서 이해될 때 그 의미와 가치가 충실하게 된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현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사에 관한 이 연구에서 그 전사에 관한 검토는 그 이후 역사에 대한 더 충실한 이해를 위해서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지적해 둘 사실은 역사연구의 방법론에서 강조되는 역사적 사실의 특수성에 관한 것이다. 이를 테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그 자체가 반복될 수 없는 개별특수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다. 말하자면, 1980년 5월의 광주에는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고유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의 이 러한 접근방식은 다른 사회과학이 사회현상의 반복성을 통해서 법칙이나 경향성을 발견하려는 접근 방법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는 흔히 역사학을 일반 사회과학과 구별하는 준 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학의 경우에도 법칙지향적 일반화를 거부하고 특수성만을 취급한 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엄격한 법칙을 역사현상에서 구성해낸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선행의 역 사적 사실로부터 중요한 암시와 시사를 받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혁명은 프랑스혁 33) 신채호, 1931, (박기봉 옮김, 20013),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45쪽. 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5 명을 교훈으로 삼았고 카우츠키 대신에 스탈린을 선택한 것은 나폴레옹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면 안다. 34) 이는 역사현상에 대한 법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연성이고 경향성의 수 준이지만, 역사연구에서도 과거사로부터 의미 깊은 암시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로, 지방사의 관점을 강조한다. 지방이라는 말은 중앙인 서울을 전제하며 그 중앙에 대한 변방 을 의미한다. 하나의 사회구성에서 중앙과 변방, 중심과 주변은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그 관계는 기본적으로 지방이 중앙에 종속되는 정도, 다시 말하면 지방이 중앙으로부터 자율적 인 정도에 따라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 지방의 자율성이라는 것도 중앙의 국가권력이 허용하 는 제한된 자율성임은 당연하다. 지방과 국가사회의 구성에 관한 이와 같은 논리는 지방의 역사쓰기 에서도 일관되게 반영된다. 역사쓰기 역시 국가권력이 작용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우 리나라의 주요 연구기관이나 대학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학문연구 체제의 성격도 서울중심의 경향 이 지배적이다. 한국사 연구에서 국가 주도의 역사쓰기는 중앙 헤게모니와 중앙 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지방의 종속성과 주변화는 더욱 심화되었다는 지적도 이러한 인식의 한 형태이다. 35) 이와 연관된 관 점에서 지역사회운동에 관한 이 연구는 서울중심의 역사쓰기 유산을 극복하고 지방의 독자적 정체성 과 자율성을 구현하는 관점을 유지하려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20세기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사 연구를 위한 선행 작업으로 19세기 이전의 지 역사를 검토함으로써 두 가지 가능한 전망을 가늠해볼 수 있다. 첫째는 역사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 할 수 있다.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을 그 이전의 사실과 갖는 연계성 또는 연속성을 탐색할 수 있을 것 이며, 이를 통해서 근현대 사회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20세기 한말 의병의 역사적 사실을 16세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연계하여 이해함 으로써 더 충실하고 심층적인 해석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역사란 사건들의 산맥과 언덕과 골짜기를 뒤타서 그 밑으로 달리고 있는 광맥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함석헌의 설명이 설득력 있다(1964, 43). 두 번째로, 이와 같은 역사인식의 진전은 현재의 지역사회운동에 중요한 시사를 줄 수 있으며, 이는 향후 사회운동의 발전에 의미 있는 계기가 된다. 현재의 문제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대안을 과거의 역 사적 사실을 통해 암시받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역사연구의 의의가 아니겠는가! 이미 죽어 현실에 는 없지만 역사 속에 살아있는 자의 외침을 듣고 그들의 함성에 귀 기울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그 이전의 전남역사를 사회운동론적 관점에서 재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은 더욱 절실해진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이전의 마한시대로부 터 오늘에 이르는 세월 속에 기록된 이 지역의 역사가 그만큼 통절하기 때문이다. 그 통절함은 우리의 34) E. H. Carr, 앞의책, 쪽. 35) 이상훈, 타자로서의 지방 과 중앙의 헤게모니- 지방 과 중앙의 이분 구도에 기초한 지식 권력에 대한 비판 담론 구축-, 한국사연구회 편, 한국 지방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서울: 경인 문화사, 2000, 367, 387.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53

56 과거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 패배와 차별의 기록으로부터 연원한다. 36) 지배 권력의 영향 아래 기록 된 이 역사에서 주변인으로 살아왔던 이 지역민의 영혼에 여러 겹으로 새겨져 쌓인 아픈 역사의 속살 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왜 아픈가? 그 흔적에 고여 있는 피와 눈물 때문이다. 다음에서 이 고난에 찬 흔적들을 저항과 도전의 관점에서 자기반성적 성찰과 대안적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본다. 37) 3. 19세기 이전 전남 역사에 대한 운동론적 성찰 전남지방은 공간적으로 한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고 평탄하여 평야가 널리 펼쳐져 있고, 산과 계곡에서 연원하는 영산강, 섬진강, 탐진강 등의 물길이 산야를 기름지게 하 고 있다. 서해와 남해에 연접한 해안지역에는 넓은 갯벌이 발전하였고, 근해에는 다도해라고 불릴 만 큼 여러 섬들이 산재되어 있다. 이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며 만물이 생장하기에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 으며, 하늘이 내리고 사람이 만든 산물이 전국에서 제일 풍부하다. 38) 전남 해남이 세계 최대의 공룡 발자국 유적지로 공인되고, 전 세계에 분포된 고인돌 약 6만기 가운데 3만기가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가운데 약 2만기가 전남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이미 고대부터 살 기 좋은 장소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한 사실을 통해서 그것의 건립에 소요되는 대규모 인구집단의 존재와 그 공동체의 유기적 협동체제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전남지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축조 하는 데 소요되는 인구수는 50명에서 3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공동체의 전체인 구는 250명에서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인돌은 족장사회의 성립과 함께 나타났으며, 이 공동체는 고인돌 건립과 같은 큰 행사를 통하여 집단 구성원 상호간의 유대를 강화시 키고 유기적 협조체제를 발전시켰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라나라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인 무덤형태의 하나이고, 기간은 대략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시작하여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 지속되 었던 것으로 본다. 이와 아울러 광주지역에서 발굴된 신창동유적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 즉 마한시기 의 사회상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주요 출토유물은 옹관묘와 武 具 (무구)류, 문방구류, 칠기 등의 祭 儀 具 (제의구)류, 수확, 벌채, 저장용구, 등이 포함된 농공구류, 짐승뼈, 현악기 등을 포함한다. 이 유물은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목재 칼집의 형태를 보면 칼이 무기보다는 신분 상징의 의미를 갖는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술 마시고 비파뜯는 것을 좋아하는 풍습이 있다 고 한 후한서 의 기록은 신창동에서 나온 목제 현악기와 관련하여 상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개인은 36) 이해준, 역사속의 전라도, 서울: 도서출판 다지리, 1999, 260-2; 이희권, 역사로 보는 전라도, 전주: 신아출판사, ) 필자 자신이 역사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원 자료의 검토에 의거한 해석이라기보다는 2차 자료와 정리된 역사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38) 박은식(김승일 옮김), 1915(1999), 한국 痛 (통)사, 범우사,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7 여유롭고 낙천적인 생활을 영위했으며, 공동체는 안정되고 평화로웠음을 가늠할 수 있다. 39) 그런데 선사시대 이후, 국가체제가 정비되어 지배질서가 확립되고 다른 집단을 정복하여 지배영역 을 확장하는 역사가 전개되면서 이 전남지역은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외부 세력의 공 격에 패배하여 복속되고 그에 따라 차별과 피착취의 역사를 겪게 되었다. 40) 그리고 패배와 차별의 역 사적 경험이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되면서, 이 지역민의 정서에는 당당한 주체성과 진취적이고 적극 적인 역사인식 대신에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패배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남의 역 사는 패배의 역사라고 인식하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한다. 41) 자기 자신의 뿌리를, 그리고 더 나아가 자 신을 패배자로 규정하는 이와 같은 병든 역사인식이 오랜 세월 전라도 사람의 영혼을 멍들게 했다. 이 는 지역민의 정신세계에서 미래 발전을 위한 생명의 샘을 메마르게 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지역민의 삶에서 승리와 희망의 빛을 앗아가고 대신에 패배와 절망의 너울을 들 씌워 왔다. 따라서 저항과 도전의 역사에 관한 이 연구는 전남의 이전 역사에 대한 성찰을 지역민의 정신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패배주의적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패배주의 역사인식이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 및 태도로서 패배한 역사적 사실을 자기의 패배로 인식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역사를 승자와 패자, 더 나아가서 승리 아니면 패배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유방식에서 연유한다. 여기에서는 패배주의적 역사인식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문제점을 갖는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전남의 역사가 패배의 역사로 인식된 근거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연원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약 1500년 전에 전남지역의 마한세력이 백제에 패배하여 복속되었고(5세기 말), 또 백제는 당나라와 신라의 동맹군에 의해 패배하여 멸망당했으며(660), 그 후 백제의 후신으로 자처했던 후백제는 왕건의 고려세력에 의해 패배했다는 사실(918)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패배주의 역사인식은 패배한 사 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패배하지 않은 국가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패배주의 역사인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패배주의 역사인식은 특정한 유형의 반복학습에 의해 형성된다. 과거 의 한 시점에서 패배한 그 사실이 지역민에게 반복하여 기억되게 함으로써 단순한 기억의 수준을 넘어 지역민의 정신세계 내에 하나의 유형화된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은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 반복학습 의 과정은 그 역사적 사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전쟁에 참여하 지도 않았고 직접 알 수도 없다. 그들은 기록된 역사를 여러 가지 학습 과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게 되고, 그 간접 경험의 자료가 개인의 기억이나 의식에 각인된다. 말하자면, 패배주의 역사인식은 사실 39) 이 지역의 고대사회에 대한 위의 서술은 다음 자료를 요약하여 정리했음을 밝혀둔다(무등역사연구회, 광주 전남의 역사, 태학사, 2001, 14-20쪽 참조). 40)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기존의 공동체가 크게 번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지도체제를 확립하여 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요망된다. 41) 이해준, 역사속의 전라도, 서울: 도서출판 다지리, 1999, 최근에 필자는 이 지역의 한 역사학도로부터 이 지역의 패배주의 역사에 대한 언술을 들은 바 있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55

58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원료로 해서 2차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전라도 사람은 이와 같은 부정적인 역사의식을 어찌하여 갖게 되었는가? 인간 사회에서 대립하고 있는 두 집단은 상대 집단의 약점은 과장하고 장점은 축소하여 이를 널리 유포시키려 애쓰 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지배자의 의지가 사회의 지배적 의지로 부각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따 라서 국가사회의 역사는 지배 권력의 의지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음을 고려할 때, 패배주의 역사인식 은 국가권력이 그 도전자나 패자의 부정적인 특성을 왜곡 과장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것은 어렵 지 않다. 한국 고대사의 인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삼국사기가 신라에 대하여 우호적이고 백제와 고구려, 발해와 후백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42) 예를 들면, 후백제와 견훤에 대한 왜곡된 역사상은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서도 그 대로 이어지고 있다. 악인의 대명사로서의 견훤과 반역의 땅으로서의 옛 백제 땅에 대한 언급이 조 선왕조실록 에 산견되는 것이 그것이다. 43) 전남의 역사도 패자의 역사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왜곡과 편견으로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왜곡과 편견은 반복되고 강화 되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져 왔다. 전남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왜곡은 국가권력의 지배전략으로서 대 외적으로 부정적 인상을 강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지역민의 심성에는 소극적이고 자학적 정서를 심 어주는 효과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우리는 패배주의 역사인식이 심어지게 되 는 기제와 그것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잔인한가를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패배주의 역사인식이 갖는 문제점과 이를 극복해야 하는 당위성을 확인한다. 우선, 역 사를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적 역사인식 자체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물론 정치적 사건이나 치열한 쟁투가 있던 전환기에 승자와 패자는 엄연히 구별되고 결과의 처리나 평가의 과정에서 승자의 입장이 부각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인간의 삶에서 결과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역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승패에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영원한 승자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44) 인 간이 가치와 목적,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결과에만 치중하게 되면, 그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승리만을 좆는 저열하고 살벌한 쟁투의 장으로 전락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인간사회 의 존엄과 가치, 윤리와 품격의 이상을 저열한 수준으로 추락시킴으로써 야만으로 퇴화하는 길에 다 름 아니다. 백제와 신라 간 쟁패의 역사에서 김유신의 음모적 행적에 대한 신채호의 비판 45) 이나 김춘 추가 동원한 대당나라 외교술책에 대한 함석헌의 혹평 46) 은 이와 연관하여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분 42) 신채호, 2013,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32, 37, 54, 245. 실제로 견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특히 삼국사기의 견훤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안다. 신라의 녹을 먹고 살면서 나라가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기어 도읍을 침략하고 군신을 살육하기를 금수 죽이듯... 천하의 원악이요 대죄이다...하물며 궁예와 견훤같은 흉악한 인간이 어찌 태조에 항거할 수 있으리오. (신호철, 2000, 후백제 견훤 왕의 역사적 평가와 그 의미,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편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15쪽에서 재인용). 4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5쪽. 44) 이해준, 역사속의 전라도, 서울: 도서출판 다지리, ) 신채호, 앞의책, 쪽. 46) 함석헌, 앞의책, 172쪽. 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9 법적 역사인식은 기득권층의 보수적 이익 관심을 대변하는 서구 기능주의 이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 으며, 이에 기초한 현대 문명이 국가권력의 과대성장과 제국화의 길을 가게 만든 것이라는 점도 주목 할 만하다. 그러면 패배주의 역사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방안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답할 수 있다. 그 하 나는 역사인식에서 결과에 못지않게 동기와 목적, 목적 성취를 위한 전략과 방법 등에 관한 사실을 중 요한 요소로 인식하여 평가하여야 한다. 승리에만 집착하고 결과에만 매몰되는 역사는 겉으로는 공허 하고 속으로는 빈곤하다. 그러한 결과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투입된 인간의 값진 자원이 적절히 조명 되지 못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동초의 새싹이 타는 가뭄과 세찬 비바람을 이겨내서 가을에 열 매를 맺었다고 할 때, 그 열매만을 탐하고 고난에 찬 과정을 망각하는 인식이 얼마나 저열한가. 어떤 의미에서는 결과보다도 그 결과를 만들어낸 과정이 더 값지고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과정에 의거 하여 결과를 평가하는 편이 더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승리보다도 더 값진 패배가 있다 는 사실도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운동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설정된 목표를 지향 하는 실천 과정에서 적지 않은 패배를 경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어떠한 패배인가가 사회운 동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열하고 부끄러운 패배는 운동의 미래를 어둡게 하지만, 장렬하고 명예로운 패배는 앞날의 운동을 솟구치게 하는 힘의 샘물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패배 자체를 냉철하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자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객관적인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그 사건으로부터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정서적 동일시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전남의 역사에서 백제와 후백제의 패 배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이 패배들은 엄밀하게 말 하자면, 지배층과 그 집단의 패배이다. 백제 의자왕과 귀족계급, 그리고 후백제 견훤과 이들을 추종 하는 군대의 패배이지 일상에 충실한 백성의 패배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반 백성 의 입장에서 자기의 패배, 즉 백성의 패배라고 기계적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전쟁 과 그 패배는 백성들의 뜻에 의한 것도 아니고 백성들의 자율적인 행동의 결과도 아니다. 특히 전남 지역의 경우에는 당시 백제의 중심부로부터 먼 변방지역으로서 그 당시의 전쟁에 전남 사람의 참여도 와 개입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후백제의 패배도 냉철 히 볼 때, 나주 이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황해도 개성출신 왕건세력과 전라도의 동북부를 거점으로 한 경상도 상주 출신인 견훤의 후백제 세력이 패권을 겨룬 싸움에서 후백제가 패배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패배는 전라도(전체)의 패배가 아니라 전라도 내부에서 서남부지역에 거점을 둔 왕건이 승리하고 동북부지방의 후백제 세력이 패배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서남부의 전라도 사람에게는 패 배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견훤세력이 전라도에서 왕건과 승패를 겨룬 기간이 30여 년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지역사회 역사의 심층에 뿌리내리기도 어려웠다고 본다. 종합해 볼 때, 중요한 사실은 패배주의의 함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객관적인 자세에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57

60 여 긍정적인 요소는 보존하고 부정적인 요소는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사인식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 후 전라도 역사에서 패배주의를 넘어선 더 적극적인 실천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침략군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이 예가 임진왜란( ) 당시에 전라도 출신의 의 병활동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전라도 사람들의 정의를 위한 저항과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대항하여 당당히 싸우지도 못하고 줄곧 도주한 후 한 달 도 채우지 못하고 항복한 데 반하여, 그 후 백제 백성들의 강인한 저항투쟁은 3년 동안( )이나 지속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백제가 패망한 후 600여 년이 지난 시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담양 일대를 기반으로 하여 백제부흥운동( )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백제 도원수 라고 칭한 이연년은 지역의 농민층과 유민들을 규합하여 약 반년 동안에 광주와 나주지역까 지 진출하고 인접한 전라도의 여러 군현에 격문을 보낼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에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던 역사가 있다. 47) 이를 통해서 백제가 패망한 지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전라도 역사의 강을 관통하는 의로운 흐름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48) 이제 호남의병의 항쟁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저항과 도전의 역사이다. 의병이란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 으로 규합하여 조직된 군대이다. 정부가 조직한 관군이 제도적 규율에 의해 운용된다는 점에서 강제 적 의무와 책임의 성격을 갖는다면, 의병은 자발적 의지의 결단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점에서 애국애 족의 헌신성과 희생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의병은 국가의 무능을 사회가 방어한다는 점, 즉 국가가 못하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사회가 인간집단의 가장 밑바탕을 형성하는 뿌리임을 확인하게 한다. 여 기에서 다루는 의병항쟁은 조선 왕조 시기에 정부의 관군이 일본의 침략(임진왜란: )을 막 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전라도 백성들이 정부군 대신에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국가방어전에 나선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1592년에 일본은 약 20만 명으로 구성된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백여 년에 걸친 내전으로 단 련되고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전력은 조선의 군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조선은 건국 이 후 약 200년 동안 평화시대를 거쳐 오면서 국방에 대한 관심이 취약했으며, 당시의 기본 전략은 상비 군을 운용하는 대신, 일단 유사시에는 지방군을 일정한 장소에 집결케 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 47) 이해준, 앞의책, 무등역사연구회, 앞의 책, 태학사, ) 또한 몽고 침략군과 이에 굴종한 정부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삼별초 항쟁( )도 이 지역의 진도를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이 삼별초세력(약 2만명)은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로 70여일을 항해하여 진도에 진을 쳤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도에 용장산성을 건설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전라-경상해안과 제주 등 30여개 섬을 장악하는 한편 나주 전주까지도 공격을 가하여 위세를 떨쳤다. 왜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고려의 대표임을 표명하는 국서를 보내는 등 서남해의 해상왕국을 이룩했었다. 여몽연합군이 수 차례에 걸쳐 공격을 가했지만 삼별초군의 저항에 밀려 실패했다. 삼별초 군의 주된 전투장소가 현재의 울돌목 부근이었다는 점은 300년 후에 다시 이 지역에서 치솟아 타올랐던 이순신의 명량 대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이해준, 앞으책, ; 무등역사연구회, 앞의 책, ) --삼별초와 지역민의 관계? 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1 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어서 일본군에 맞수가 되지 못했다. 4월 13일에 부산진 앞바다에 도 착하여 14일에 부산성을 함락하고 15일에 동래성을 침공하였다. 그 후 양산, 밀양, 대구를 거치고 조 령을 넘어 서울을 점령한 날이 5월 2일 이었다. 반면에 조선 정부는 4월 17일 새벽에 일본 침공 소식 을 접하고 지휘관을 임명하여 북진을 저지하도록 하였으나 징병이 어려워 3일을 지체하다 출발하였 고, 경상도 상주에 도착해보니(23일), 상주목사는 이미 도망치고 군대는 해산된 상태였다. 26일 조선 군 주력부대가 충주에서 결전을 벌렸으나 완패하고 지휘관인 신립 장군은 달천에서 투신하여 자결했 다. 큰 충격을 받은 선조는 백성을 저버리고 4월 30일에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도피했다. 국왕의 비 열한 배신에 백성들은 분노했다. 이들은 경복궁, 창덕궁과 노비문서가 있는 장례원과 형조 등을 불태 웠다. 개성 백성들은 왕이 도주하는 행렬에 돌을 던졌고, 평양 사수를 포기하고 의주로 피난하자 평양 백성들도 정부의 무능과 비열함에 격분했다. 왜군은 조선 8도를 분담하여 경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전라도 경략은 小 (소) 早 (조) 川 (천) 隆 (융) 景 (경)의 지휘로 진입작전을 수행했다. 임진강에서 남하하여(5월 25일), 충주 조령을 거쳐 6월 9 일에 선산에 도착했고, 다시 추풍령을 넘어 6월 24일에 금산에 이르렀다. 금산에서도 관군의 방어전 은 무너졌고, 금산과 무주에 주둔한 왜군은 진안 임실 등지로 진출했다. 전라도 의병이 일어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경명(담양), 유팽로(옥과), 양대박(남원), 양사형(순창), 강염(장성), 박대기(영암) 등 이 봉기하여 고경명을 맹주로 담양에서 회맹할 때 6,000명의 의병이 조직되었다. 최초의 공격전이었 던 전주 인근 운암전투에서 양대박이 지휘한 의병은 왜군 1,000여명을 참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의병은 40여 명이 전사했다(6월 25일).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경명 의병부대는 북상 중에 금삼 수복을 위한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고 장군과 둘째 아들 고인후, 그리고 유팽로와 안영도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7월 10일). 이 밖에도 다수의 의병이 일어났으며, 고경명과 유팽로, 그리고 나주의 김천일을 호남3창의라고 불렀다. 이 당시 의병은 전국에 걸쳐 일어났으나, 전라도 의병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이 고 활발했다. 전라도 의병이 전국 각지에 왜군에 맞서 싸운 행적이 이를 증명한다. 전라도 순찰사 이 광이 지휘한 용인전투(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이끈 수원 독성전투( ), 전라도 관 민 연합군이 화차 300량으로 무장하여 일본군을 패퇴시킨 행주성 전투( ), 남원출신 익산 군수 황진이 일본군을 충주를 지나 상주까지 추격하여 대파한 상주전투( ), 그리고 최후 최대의 의 병전투로서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양산숙, 황진 등이 순절한 진주성 전투( )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진주성 전투에 이어 전라도 의병을 이끈 마지막 의병장은 조정으로 부터 충용장의 시호를 받고 전국 의병의 총수가 되었던 김덕령이었다. 49) 이에 더욱 참담했던 사실은 김덕령 의병장의 애국충절에도 불구하고 그를 시기한 무리들의 음모에 의해 역도로 모함을 당해 비참 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물론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었고, 이를 기리는 뜻으로 광주의 중심가 충장로는 49) 이희권, 앞의 책, ; 무등역사연구회, 앞의 책,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59

62 그의 시호를 상징한다. 50) 호남의병의 이와 같은 놀라운 행적은 전란이 끝난 지 200여 년이 경과한 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 대적으로 칭송하여 재평가되었다. 1798년(정도 22년)에는 정조가 직접 策 問 (책문)을 짓고 光 山 館 (광 산관)에서 과거를 시행하여 호남유림 53인을 합격자로 선정하였는가 하면, 51) 또한 1799년에는 임진 왜란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및 이인좌의 난(1728)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활약한 호남의병의 행적을 정 리하여 1,400여 인이 수록된 <호남절의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팔도 중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란에 나아간 자들 가운데 오직 호남이 가장 성하였고, 왜적을 무찌르고 공을 세운 자들 가운데 호남이 가장 많았으니 어찌 그 산천이 웅혼하고 빼어나며 풍속이 호탕하고 뛰어나며... 라고 한 홍양호의 서 문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52)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호남의병의 이와 같이 드높은 절의정신의 실천이 전라도에 대한 경제적 착 취와 정치적 차별이 국가권력층에 의해 자행되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호남의병이 활동하 기 전후의 전라도는 조선 제일의 곡창으로서 국가재정의 기둥이었는가 하면, 여기에다 봉건관리와 양 반들의 탐학과 수탈이 가장 심하여 백성의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재등용의 정치과정에서 지역차별이 가장 심하게 일어났던 시기라는 점이다. 최명길의 상소에 의하면, 1589년 정여립 사건 이후 호남의 선비들이 조정에서 가장 배척되고 있는 바, 관직에 오른 자는 번번히 탄핵되 고, 과거에 응시하려 해도 대부분이 응시자격을 박탈당해 벼슬길이 막혀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선조 자신이 스스로 호남 인재를 뽑아 쓰지 않았던 과거에 대하여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다고 고백 하는 데서 알 수 있으며, 영조도 조정이 호남인을 등용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 다. 53)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호남정신의 뿌리에 충절과 정의의 용덕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호남절의록>에 기재된 사실을 살펴볼 때, 호남의병의 저항과 도전행동에서 드러나는 가장 두드러 진 특징은 일본군대의 가공한 무력과 잔혹한 만행에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고 앞 장서서 맞서는 행동의 치열성과 자기희생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적 특성은 뜨거운 분노와 드높은 기개, 그리고 절의정신 즉, 민족을 소중히 하고 군왕에 충성하며 정의를 지키는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더욱 우리 영혼을 떨게 하는 것은 부부와 부자간 등 가 족 구성원들이 함께 순절한 사례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묻는다, 무엇인 이와 같은 치열 한 정신성을 실천하게 했는가?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또한 우리는 더 구체적으로 호남의병의 진실된 면모를 밝혀야 할 과제가 있다. 호남의병은 어떤 방 50) 육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연전연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주역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참전했던 전라도병사였다. 경상좌도와 우도 수군이 궤멸되었지만, 전라도 수군은 옥포해전(1592년 5월초),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 ), 한산도 대첩(7. 8), 명량대첩( )에서 대승하여 조선 바다를 지켜냈다(이희권, 앞의 책, 쪽) 51) 이해준, 앞의책, ) 고정헌, 1799, 김동수 역, 2010,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4쪽. 53) 이희권, 앞의책, 쪽; 이해준, 앞의책, 175쪽. 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3 식으로 모집되고 조직되었는가? 위의 기록에서 보면, 주창자는 양반 사대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대부분은 이전에 관직에 참여한 양반이나 아니면 초야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선비들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모집방법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들이 모집되면 최소한의 군대조직과 형태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주목할 사실은 앞장 선 양반이나 선비의 뜻을 받들어 동 참한 백성들, 민중들의 참여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연령과 직업, 출신과 교육정도, 생활 상태 등에 관 한 정리가 필요하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61

64 제2부 20세기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 제1장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 1. 동학농민혁명 1) 혁명전야 조선시대 중기에 일본의 일방적 침략으로 일어난 조일전쟁( ), 그리고 대륙 국가들과 국 제적 외교관계에서 청나라의 공격에 의해 발발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 )은 우리 민 족의 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고난에 찬 역사였다. 수많은 조선의 양민이 비참하게 희생당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린 참상은 차마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국토는 피에 젖어 황폐화되었으 며, 국권은 짓밟혔다. 그 와중에서 국왕은 국민을 속여 뒤에 남기고 평안도로 강화도로 도피하는 비열 한 행렬이 이어졌고, 남아있는 국민들은 분노와 원망에 속에 참화를 맞이해야 했다. 이 저주받은 암흑의 역사에도 희망의 빛은 있었다. 충절과 의기에 찬 국민이 힘을 모아 의병을 일으 켰고 그 민중의 힘으로 국권을 다시 회복했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 시기를 고비로 하여 조선에 도 평온의 시대가 찾아왔다. 17세기 중반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2세기는 조선에 대한 외부 국가들의 침탈은 별로 없는 시기였다. 특히 영조(재위: )와 정조( ) 시대에는 왕권이 안 정되고 탕평책과 실학의 도입 등을 통해 국가의 지배체제가 개혁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였으며, 과학 과 기술 개발이 시도됨으로써 새로운 산업과 문화가 발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어 순조(즉위 및 재위: 11세, ), 헌종(8세: ) 철종(10 세: )이 어린 나이에 즉위함으로써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이에 따라 수렴 청정이 거듭되고 소수의 외척이 국정을 전횡하는 세도정치가 등장했다. 안동김씨, 풍양조시 등이 대 표적인 사례로서, 이 가문에서 정권을 독점하여 정부 각 부분의 역할조정 및 견제와 균형 작용이 원만 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환경의 변화에 대한 국정 적응력이 약화되고 다양한 발전이 저해되는 부 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5 작용이 누적되었다. 또 이와 같은 국정의 경직현상은 사회문제와 모순이 해소되지 못하고 누적되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되었다. 모순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국내적 모순이다. 이는 지배층 의 탐학과 부패 및 그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서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다. 지방특산물을 조정에 바치 는 공납의 폐단, 농민에 부여되는 과중한 세금, 향리와 수령들의 중간 착취, 억지로 빌려준 후에 과도 한 이자를 받는 환곡의 폐해 등이 서민생활의 파탄으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국정의 문란과 서민생활 의 피폐는 당연히 대중의 저항과 사회불안의 근원이 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외국세력의 압력과 침탈 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를 포함하여 구미 세력들도 이에 관심을 갖는다. 이는 전 세계적 수준에서 진전된 자본주의 체제의 대량생산과 그로 인한 해외시장개척 및 식민지 점 령추세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의 유생이나 지배층에서는 개화파와 위정척사 파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나타났다. 첫째 모순인 지배층의 탐학과 부패문제는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현재화되었고, 두 번째 문제인 대 외 문호개방과 정치사회적 개화정책에 대한 정치사회적 효과는 의병항쟁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 모순 의 결과인 농민항쟁은 19세기 초기 이후부터 시작되어 1860년대 이후에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번져나 갔고, 두 번째 문제는 1890년대 개화정책의 도입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보수적 유생들의 상소를 비롯 한 담론투쟁으로 시작되어 190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강제침탈이 노골화되는 과정에서 위정척사와 외세배격, 그리고 일본의 무력강점에 대한 의병전쟁의 형태로 발전했다. 먼저 농민항쟁의 양상을 검 토한다. 조선 왕조에서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 ~ )은 억압받고 착취당해 온 민 중 저항과 도전의 서막이었다. 54) 이 봉기를 주도한 홍경래는 평안도의 지식인 출신이었다. 그는 서북 변방지역인 평안도가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인재등용에서 전통적으로 소외되고 일반 대중들까지도 멸시받아 온 현실에 분노하여 저항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정주가 근거지였다. 지방의 하층민과 소외 층들을 결집하여 세력을 강화한 그는 한 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는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지방의 일반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가산이나 박천에서는 관아의 저항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저항세력은 중앙 정부군을 물리칠 만한 조직과 물리력을 갖지 못했다. 내부적 결속과 강인한 저항 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군의 반격과 민병대가 정주성을 함락한 것은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 반란으로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홍경래의 봉기는 비극적으로 패배했지만, 이반된 민심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농민들의 민란이 이어 졌다. 기근과 가뭄, 전염병의 확산과 거듭되는 자연재해는 이를 더욱 재촉했다. 1862년(철종 12년) 2 54) 이 시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1850~1864)고 비교할 만하다. 주도자 홍수전은 광동성( 廣 東 省 ) 서생출신으로 실패한 지식인이었으며, 기독교적 형태로 전파되었으나 기본적으로 지배권력에 대한 항쟁이었다. 주요 참가자는 광부, 빈농, 막노동자, 몰락유생 등의 하층민이 중심이 되었는 점에서 민중항쟁적 성격을 갖는다. 제1부 사회와 사회운동 63

66 월에 시작된 진주민란은 그 후 전국 70여 군현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임술농민항쟁 또는 임술민란이 라 한다. 이 가운데 전라도는 38개 군현에서 발생함으로써 전국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는 바로 전라도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물산이 풍부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수탈과 착취가 더 욱 가중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라도는 지배층에게 가장 매력적인 착취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다산이 지은 哀 絶 陽 (애절양)이란 시를 보면 그 당시 강진에 사는 한 농민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알 수 있다. 55) 전남지역의 농민항쟁은 그 해 4월에 함평에서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번져갔다. 전체 25개 군현 가 운데 7개 군만 제외하고 나머지 18개 군현에서 봉기했다. 봉기하지 않은 7개 군은 광주 영암 해남 곡 성 보성 광양 담양이었다. 대다수의 군현에서 일어난 항쟁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함평농민 항쟁으로서 진전과정이 주목할 만하다. 이 항쟁은 주체구성과 참여도, 그리고 진전과정과 그 최후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먼저 전체적인 봉기에 앞서 각 면별로 집회를 열어 현안문제를 공개토의하고, 이 결과를 토대로 소 속된 전체 면민이 참가하는 도집회를 다시 개최하여 재차 논의하여 추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 이 자 리에서 수령의 부정과 비리를 폭로하여 규탄하였고, 주동자인 정한순(상인출신)은 이 집회가 보국안 민을 지향하는 면민의 정당한 뜻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여 투쟁의식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리하 여 이 집회에 참가한 대표자들이 합의하여 서명한 소장(문서)를 감영에 보냈으나 감영은 오히려 서명 자를 무고죄로 체포하여 처벌하려 했고, 대표자들은 위협받고 피신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를 맞이하여 농민들이 각 면에 집회에 관한 통문을 보내 마침내 함평농민항쟁의 도화선 이 된 대중집회가 적촌리 장시에 열리게 되었다(4월 16일). 이 항쟁은 초기단계의 진행과정이 체계적 이었고, 농민의 참여규모와 참여강도가 높았다. 수천 명의 농민들이 훈장이나 면임 등 대표자의 인솔 하에 깃발을 앞세우고 대열을 이루어 집결했으며, 죽창과 작대기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농민들 의 투쟁의지가 그만큼 강열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함성과 함께 읍내로 진격하여, 민중을 수탈 한 주범인 토호, 좌수, 호장, 이방, 아전, 기타 지주와 부민을 붙잡아 구타했으며, 그들의 집을 습격하 고 불태웠다. 항쟁의 대열은 더 나아가 동헌을 공격하여 현감과 관속들을 폭력으로 치죄했으며 포교들은 구금하는 대신에 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은 석방시켰으며, 최종적으로 현감을 무안으로 내쫓아 그들의 죄를 물었 다(당시 수령이 경계선 밖으로 추방되면 직권이 상실됨). 이들은 함평 읍정을 장악한 후 향교를 자치소 로 삼아 각 면을 관할하는 순찰활동과 기본행정기능을 수행했다. 곡식을 향교로 운반하여 장기전에 대 비하기도 했다. 함평농민항쟁의 이러한 진전과정은 1980년 5월 26일의 해방광주 당시에 투쟁위원회 가 수행했던 부상자 치료, 양곡배급과 기동타격대 운용, 교통질서 확립 등의 활동을 연상하게 한다. 55) 무등역사연회, 광주 전남의 역사 (태학사, 2001), 191쪽. 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7 사태가 이와 같이 진전되자 조정에서는 조사관(안핵사)을 파견하여 실태파악에 들어갔으며(5월 6 일), 이와 아울러 농민군과 접촉하면서 선무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 천 명의 농민군들은 깃발과 창으로 무장한 채 관청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도자였던 정한순은 자수의사를 밝히면서 함평현 의 비리를 모은 10조 앙진( 仰 陳 ) 56) 을 안핵사에게 제시하고, 그에 대한 시정을 간곡히 부탁함으로써 한 달 가량 지속되었던 항쟁은 막을 내렸다. 그 결과 현관과 관속들의 부정행위는 처벌되었고 착취한 고리대는 되돌려주도록 했다. 그러나 항쟁 지도부 22명은 체포되어 교수형이나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에서 정의를 위한 헌신적 저항이 희생으로 끝나는 역설을 본다. 함평농민항쟁은 이와 같이 끝났으나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죽고 뒤 이어 고종이 어린 나이(12 세)에 즉위하면서, 아버지인 대원권과 여흥민씨의 세도정치 등에 얽혀들어 정국은 불안정해졌다. 특 히 이 시기에는 외세의 침탈까지 겹쳐지면서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생활이 어려운 농민들이 유 랑하고 산간지역에서 도둑떼(명화적: 明 火 賊 )들이 발호하여 민심은 더욱 흉흉해갔다. 이 명화적은 대 개 수 십 명씩, 많게는 수 백 명을 단위로 해서 출몰하여 지주나 객주 또는 운반중인 세금을 약탈하는 일이 횡횡했고, 이에 대한 정부의 제제력도 작동하지 못함으로써 국가 통치체제가 거의 붕괴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고 물산이 풍부한 전남 지역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규제받지 않는 야수적 권력의 탐욕은 약하고 순박한 변방 농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이러한 국면에서 핍밥받고 굶주린 농민의 저항은 필연적이다. 그리하여 강진(1868), 광양(1869, 1889), 완 도 가리포(1883), 나주(1890) 등지에서도 농민항쟁이 뒤를 이었다. 1868년 강진 병영에서 병란이 악 천후로 중단되었으나 이 세력들이 다음 해 광양에서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1869년 3월 23일 밤에 흰 두건을 쓴 70여 명의 무리가 총포를 쏘면서 동헌을 쳐들어갔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주민에게 나누어 주며 성안의 질서를 장악했지만 3일 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광양의 농민들은 20년 후인 1889년에 다시 거병하여 관청을 부수고 현감을 내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의 항쟁은 목표와 조직 및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기획이 결여된 즉흥적 성격을 갖기 때문 에 패배할 운명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진전된 저항의 역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보 게 된다. 주목할 점은 이 시기에 주도했던 항쟁의 주도세력이 중인층 또는 비판적 지식인이었고, 이들 은 여러 지역을 탐방하여 연대를 형성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철종조의 농민항쟁이 전국 70여 군현에 서 일어난 만큼 매우 광범한 저항의 흐름이 형성되었지만, 이를 하나의 통일된 전선으로 연대하거나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그 항쟁의 동력을 극대화시키지 못한 점을 비교할 만하다. 말하자면, 농민이 변 혁의 주체로 정립되었지만, 새로운 정치사회의 체제를 기획하고 실천하지는 못한 한계를 갖는 역사였 다. 56) 그 주요 내용은 과다한 결세, 환곡, 군역세, 저채, 잡세 징수에 대한 시정을 포함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65

68 2) 동학농민혁명-1차 57) 함평과 광양 등지의 농민항쟁에 뒤 이어 더 거대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동학농민혁명이 1894 년에 대규모 농민봉기 형태로 발발했다. 한국 근현대 변혁운동의 역사에서 최고조기를 이룬 것이었 다. 그에 앞서 교조신원운동으로 전개된 수차의 대규모 집회는 동학혁명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었다 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학에 대한 탄압을 해소하고 교조의 억울한 원한을 풀기위한 동학교도들의 집회는 전라도 삼례집회( ), 서울 광화문집회( ), 충청도 보은집회( ), 전라도 원평집회( ) 등이 있었다. 동학교도들은 집회를 통한 다중의 뜻으로 신원문제를 해 결하고자 했으나 이를 통해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 강경한 저항투쟁을 지향하게 되 었다. 보은집회가 또 다시 성과 없이 끝나자 특히 하층민 교도들의 실망과 분노가 팽배하여 난동으로 번져갈 기세였다(이이화, 167-8). 정부는 이 집회에 대한 대비책을 모색하여 병영을 증설하고 주도자 들을 수배하여 체포하려 했으나 실효성있는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고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이 시기에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로 있는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찬 학정과 무자비한 세금 수탈 문제가 제기되었다. 고부 농민들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찾아가 자신들의 처지와 관리들의 부정사례에 관한 문서를 내밀며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거듭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이들을 감옥 에 가두거나 내쫓았다. 이에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조병갑을 처형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격문(결 의문) 58) 을 작성하여 사발통문을 돌렸다( ). 1894년 1월 고부 농민 수십 명이 다시 관아에 몰 려가 호소했는데, 이 때 대표자로 뽑혀 잡혀간 전창혁(전봉준의 아버지)이 곤장을 심하게 맞아 사망했 다. 이 날(1월 11일) 밤 수천 명의 농민과 걸인들이 죽창을 들고 전봉준의 지휘 하에 관아에 처 들어가 동헌을 점령했다. 조병갑은 이미 도주했으나, 감옥을 파괴하여 갇힌 자들을 석방했고, 날이 밝아오자 원한의 표적이었던 만석보를 허물어버리고 조병갑이 거두어들인 보세미( 洑 稅 米 )를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제 농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말목장터에 머물다가 백산으로 옮겨 진을 치고 저항했다. 이것 이 만석보사건의 대강이고 동학농민혁명의 발화점이라 할 것이다. 2월말에 신임 고부군수로 박원명 이 왔고, 실태조사관으로 이용태가 부임하여 위로잔치를 하는 등 유화책을 쓰는 듯했으나 이미 무너 진 통치체제 하에서 포악한 학정은 다시 반복되었다. 만석보사건에 뒤이어 익산, 전주, 순천, 영광 등지에서도 농민들의 공격이 일어났다. 전봉준은 핵심 농민군들과 함께 무장으로 가서 접주로 있는 손화중을 만나 앞으로의 사태진전을 상의했고, 여기에서 더 큰 싸움을 합의했다.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조직과 훈련을 실시하면서 보름 동안에 4천명의 농 민군을 규합하여 실질적인 준비작업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3월 20일, 이들은 제폭구민( 除 暴 救 民 ) 보 57) <동학혁명1, 2>의 서술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연구단>의 동학부분 집필자인 홍영기의 미간행 원고에서 주요 부분은 발췌하여 요약 재구성한 것임. 58) 그 격문의 내용은 1.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사,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사,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리를 쳐 징계할 사, 4.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사.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통문에 서명자에는 전봉준도 포함되어 있다.(이이화, 2003, 177). 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9 국안민( 輔 國 安 民 ) 을 중심 내용으로 한 혁명의 창의문을 발표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을 올렸 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3인의 이름으로 작성하여 전봉준이 발표했다. 이것이 동학혁명의 공식 선 언, 즉 무장기포이며 혁명의 시작이다. 대장은 전봉준, 총관령은 손하중과 김개남, 그리고 총참모는 김덕명과 오시영 등으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광주 전남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과정을 보면 대체로 전라 우도에서 좌도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전라 우도는 현재의 전라남도 서부에 해당되는데,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인 고창과 인접 한 영광으로 혁명의 물결이 먼저 파급되었다. 그 여파는 장성과 함평에 직접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부는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 영광 무안 함평 등 전라우 도를 순회하며 군사력을 강화하여 전주성을 장악함으로써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성공하였다. 무장기포이후 백산대회 59) 에는 광주 전남 17개 군현의 농민군 지도자 약 60명이 참여하였다. 보은집 (취)회에 광주 전남의 8개 군현이 참여한 것과 비교하면 2배로 증가한 것이다. 당시 백산대회에는 광 주 전남의 대부분의 군현이 참여했다. 백산에서 편제를 갖추고 격문을 돌린 농민군은 전라 우도를 우 회하는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농민군은 백산을 출발하여 태 인현을 들이치고 원평에 나가 진을 쳤다. 음력 4월 6일, 농민군은 보부상패 등이 결합한 관군과 벌어 진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정읍으로 진격했고 곧 바로 흥덕을 거쳐 고창성을 점령하여 옥문을 부 수고 갇혀있던 농민군 7명을 풀어주었다(이이화, 196). 다음날에는 무장관아를 점거하고 관리들을 잡 아들였으며, 3일을 이곳에서 머무른 농민군은 파죽지세의 힘으로 영광을 점령했다(4월 12일). 영광 에서 함평으로 나와 황룡강변의 월평장터에서 진을 쳤는데, 여기에서 농민혁명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황룡전투가 벌어졌다. 관군이 먼저 공격했다. 전열이 흐트러져 있다고 판단한 관군이 대포를 쏘며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잠시 후퇴했다. 곧바로 진용을 가다듬고 산봉우리로 올라가 관군을 내려다 위치를 점거한 후에 장태 수십 개를 굴리고 내려오면서 그 뒤에 엎디어 관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감행 했다. 물러서는 관군을 향해 농민군은 강을 건너 진격하여 처결했다. 황룡강은 피로 물들었고 언덕과 들판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관군은 대포를 버리고 장성읍으로 빠지는 신현으로 도망쳤고, 그 고개 밑 에서 농민군은 관군 대관 이학승을 칼로 쳐 죽이고 목을 베어 가져갔다(이이화, 200). 이 과정에서 농 민의 지혜가 돋보이는 이른바 장태전술 60) 이 창안되었고, 그것을 활용하여 장성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 끌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기가 충천한 농민군이 손쉽게 전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4. 27). 전주성 함락에 충격을 받은 조선 정부는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의 뜻을 대부분 수용하여 관민상화 책,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로써 각 군현단위로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 59) 백산은 정읍관내에 위치한 높이 47미터인 작은 산이다. 올라가서 보면, 동진강 오른쪽 끝 부분에 허물어진 만석보 터가 보이고, 동진강 왼편으로는 만경평야 지평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산이다. 사방 경계에 유리하고, 군량미 확보가 용이하여 농민군 진지로 되었다. 약 1만명이 집결했다(광주 전남의 역사, 2010, 212). 60) 장태전술은 농촌 생활에서 닭이 야간에 들어가 잠들게 하는 죽제가구이다. 원통형으로 되어있고, 크기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지름이 1미터 내외, 길이가 2미터 내외이다. 마른 죽제품이기 때문에 방탄효과가 컸을 것이며, 이를 굴려가며 총알을 피해 그 뒤에서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투에 임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67

70 이다. 하지만 광주 전남의 집강소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 기간이 짧기도 했 지만, 농민군 측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집강소의 총본부인 전라좌우도 大 都 所 를 전주 감영에 설치하고 그의 비서 宋 喜 玉 을 전라좌우도 도집강에 임명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 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강소는 치안 질서의 확보가 우선적 임무였으며, 폐정개혁의 추진은 그 다 음 순서였다. 군현마다 수령이 부임하지 않은 곳이 많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 해 전봉준은 집강소의 네가지 임무를 각 군현에 내려 보냈다. 즉, 무기류의 파악과 징발한 마필의 반 환, 군수물자 징발을 빙자한 약탈 금지, 민폐 금지와 처벌 등을 명시하였다. 전봉준의 지시대로 각 군 현에서는 농민군 보유 무기와 장비의 파악, 농민군의 약탈과 토색 금지, 民 訴 등을 해결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러한 활동은 지방관의 임무에 비교될 정도였으며, 여기에 동학의 포교활동도 추가되었 다. 이는, 각 군현의 집강소가 농민자치기관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강 소 활동은 각 군현에서 활동하는 농민군 세력의 강약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예를 들면 농민군 세력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폐정개혁을 활발하게 추진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치안유지 활동조차 버거웠다. 광주 전남의 경우 나주는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아 폐정개혁을 추진하지 못했으나, 대부분 의 다른 지역에서는 상당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들은 평등사회를 지향하였다. 즉, 서로 대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으며 신분 의 귀천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평등한 예로 대했으며, 비록 접주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서 남보다 뒤쳐 지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정성껏 섬겼다 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들이 양반을 미워하고 노비문서를 불 태웠다는 것이나, 서로를 접장 이라 부르며 평민과 양반이 평등하게 대했다는 점에서 평등사회를 지 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황현의 오하기문 에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황현이 거주했 던 구례를 비롯한 광주 전남의 군현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당시 농민군 세력이 강 한 광주 전남의 군현은 영광 광주 담양 장흥 무안 함평 동복 고흥 장성 등이었다. 대체로 전남의 서부 와 내륙 지역이 해당되는데, 흔히 동학의 大 窟 穴 로 불려졌다. 3) 동학농민혁명-2차 농민의 세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이 경복궁을 불법적으로 침범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하자, 전봉준은 일본을 침략자로 간주하여 1894년 9월 하순에 제2차 봉기를 선언했다. 전봉준의 지시에 호 응하여 광주 전남 지역에서도 농민군을 각 군현별로 동원하였다. 즉, 장흥 순천 등 11개 군현에서 약 36,000명이 전봉준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각 읍에 주둔하였다. 동원령에 응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대 부분 백산대회에 참여한 특징을 보인다. 이는, 전봉준과의 연계가 깊은 인물들임을 의미할 것이다. 전봉준의 2차봉기가 분명해지자 개화정부는 일본과 협의하여 순무영을 설치하고 지휘관을 임명하 여 진압에 나섰다. 약 2천 명의 일본군과 관군 3,200명은 수원, 천안, 공주를 거쳐 전라도를 목표로 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1 하는 부대와 청주를 거쳐 보은을 향하는 부대, 그리고 충주, 문경, 원주 대구 방향으로 진출했다. 전봉 준의 농민군은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와 공주지역에서 대 접전이 벌어졌다, 10월 하순에서 11 월 초순에 걸친 수 십차례의 처절한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대적하여 수 만 명의 대군을 형성했던 농민혁명군은 이인전투(10월 23일), 능치전투(10월 25일, 11월 11일), 우금치전투(11월 8 일), 논산전투(11월 15일)에서 거듭 패퇴하였고, 이는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운명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주, 논산전투에서 죽은 자가 1만여 인이었다. 그 후 전봉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남쪽 으로 피신하게 되었다(이이화, 282). 그 후 전남지역에서 수세에 몰리던 농민군은 음력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에 다수가 체포되어 희 생되었다. 일부 체포를 면한 농민군들은 인근 지역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바꾸고 목숨을 이어갔다. 전 남 서부지역 농민군들은 서남해 도서지역으로 탈출한 경우가 많았으리라 믿어진다. 전남 남부와 연해 지역은 최후항쟁지라는 특징이 있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서남해안으로 토끼몰이 를 하듯 포위망을 형성하여 압박했기 때문에 장흥과 해남이 최후항쟁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부산과 서울에서 전라도를 향해 전진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결국 전라남도의 서남해에 위치한 장흥과 해 남, 여수 등지는 자연히 농민군의 최후 승부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전남 동부지역에 웅거 하던 영호도회소는 여수에 위치한 좌수영을 놓고 혈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여기에서 밀린 농민군 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장흥에서 최후항전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장흥 석대들전투이다. 이에 앞서 강진의 서쪽에 자리한 영암의 농민군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영암 은 양반 중심의 강력한 향촌조직이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암 군서면 구림의 會 社 亭, 덕진 면 영보리의 永 保 亭, 영암읍 장암리의 場 岩 亭 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이러한 향 촌질서가 동학의 수용과 농민군 활동을 전개하는데 제약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욱이 바로 인근에 는 나주목이 농민군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며 버틴 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 암 농민군의 활동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장흥의 동쪽에 인접한 보성의 농민군 활동은 매우 강력했다. 황현은, 전라좌도에서는 남원과 보성 지방 적이 가장 흉악하였다. 그런 까닭에 민간에서는 전라좌도의 위쪽은 남원접장이 싹 쓸었고, 전 라좌도의 아래쪽은 보성접장이 싹 쓸었다. 61) 는 말이 있었다 고 전해진다. 아마도 흥양, 지금의 고흥 과 장흥을 포함한 남부-연해 지역 농민군의 강력함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보성지역 활동 을 주도한 인물은 1, 2차 봉기에 모두 참여한 문장형과 박태길이었을 것이다. 특히, 박태길은 유원규 보성군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이들은 웅치를 비롯한 장흥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장흥과 강진의 농민군은 집강소 이후에도 동학교단 조직을 기반삼아 폐정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던 중에 2차 봉기의 동원령에 호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이 부임한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양반세 61) 황현, 번역 오하기문, 178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69

72 력과 대립이 고조되었다. 결국 장흥 농민군 지도부는 기존의 체제를 수호하려던 수성군 세력과 대립 각을 세우다가 장흥읍성을 점령하였다. 곧바로 이들은 일본군 및 관군과 더불어 최후의 회전을 준비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의 마지막 승부처를 석대들녘으로 삼았다. 석대들 전투는 장흥의 농민군뿐만 아니라 전북의 금구접, 강진 광주 능주 등의 농민군 총 3만명이 연 합하여 최후항쟁을 펼쳤다. 하지만 석대들 전투에서 최소한 1천명 이상의 농민군 희생자가 발생함으 로써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이 전적지에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현재 조성 중에 있다. 한편, 해남 우수영 건너 진도에도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진도에서도 농민군 수백명이 희생되었는데, 효수된 농민군의 유골은 목포에 거주하던 목화농장 감독관인 일본인이 채집 하여 1906년에 北 海 島 大 學 으로 보내졌다. 1995년 7월, 이 대학 古 河 講 堂 의 종이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유골 6점이 발견되었 는데, 그 중에 한 유골에서 동학수괴 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골은 원광대 박맹수 교수 등의 주도로 국내로 봉환되었다. 하지만 더욱 부끄러운 사실은 110년 만에 돌아와 화제 가 되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아직도 2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 명기념사업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안장지 를 결정하지 못한 채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야 전주시가 유골을 화장한 후 완산전투지 역사 공원에 안장하기로 했으나, 일부에서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유골을 영구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끝으로 전남 동부지역 농민군의 활동상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순천에서 활동한 영호도회 소는 전남 동부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조직이었다. 전남 동부지역은 군현별 농민군 활동보다는 영호도회소 중심으로 활동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러한 활동은 남원대도소 김개남의 의도와 전략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진다. 영호도회소는 폐정개혁을 추진하다가 2차 봉기의 동원령에 호응하 였다. 이들의 목표는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의 西 進 을 저지하고 나아가 일본세력을 한반 도로부터 쫓아내는 것이었다. 이는, 임진왜란시 전라도 의병들이 진주까지 달려가 왜군과 싸우다 장 렬히 산화한 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경남 서부 진출이 저지되자 이들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여 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좌절되고 말았다. 경남 진출과 퇴로 확보 활동 을 특징으로 한 영호도회소는 이리저리 헤매다 광양에서 해산하였다. 일본군은 방황하는 영호도회소 농민군을 매우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그들은 정예의 육군과 해군, 그리고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무차 별적으로 체포, 처형하였다. 그 결과 순천을 비롯한 광양 여수 고흥에서는 약 2천명 이상의 농민군이 희생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요컨대, 광주 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은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동학의 수용은 1890년 초 반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용되는 공통적 특징을 보여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도도한 물결은 전라 우도에서 좌도로, 북에서 남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전남 서부 지역 농민군은 도서지역으로의 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3 확산에 기여하였고, 중부 지역 농민군은 나주 공방전을 주도하였으며, 북부 지역 농민군은 남원대도 소의 군수물자 지원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남부 지역 농민군은 전라도의 여러 농민군 조직과 연 합하여 최후 격전을 주도하였다. 동부 지역 농민군은 서부 경남 진출을 통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 고 퇴로의 확보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평등한 세상과 농민 중심의 자치를 실현하려고 도모했지만, 일 본군의 정예 무기에 가로막혀 좌절됨으로써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이와 같이 농민군이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화력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당 시 일본군과 관군이 보유한 무기는 대부분 정예의 신식무기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대부분 죽창이나 몽둥이, 칼과 창, 아니면 재래식 무기인 鳥 銃 이 고작이었다. 설령, 신식무기를 노획하였다 하더라도 실탄의 부족과 사용 미숙으로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황현은 다음과 같이 서술 하고 있다. 대개 우리나라 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일본총의 사정거리는 4~500보도 더 되었으며, 불이 총대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따라서 눈이나 비가 내린다고 하여도 계속 쏠 수 있었다. 적과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도 쏘지 못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대패하였다.( 번역 오하기문, 269쪽) 황현은 농민군의 주무기인 화승총과 일본군의 신무기를 비교하고서 그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말 하고 있다. 따라서 농민군은 지리적 잇점을 살려 공격하거나 야간기습이나 숫자상의 우위로써 일본군 과 관군에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농민군이 어느 전투에서나 산봉우리를 점령하고 함성을 질러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62) 이는 곧 농민군이 유리한 지형과 우세한 병력 을 이용한 점을 알려준다. 전라도의 농민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세에서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농민군들은 한겨울의 몹시 추 운 날씨와 적대적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목숨을 잃거나 아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농민군의 가장 많이 희생된 지역은 전남 동부 지역의 광양 순천 여수, 서부지역의 영광 무안, 남부지역의 장흥 보성, 북부지역의 담양, 중부지역의 나주 화순 등이었다. 그만큼 이 지역 농민군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과 비례하여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희생을 남긴 채 붕괴되고 말았다. 격렬한 전쟁의 끄 트머리에서는 잔인한 보복과 응징이 곳곳에서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일본군과 관군의 진압 이 시작된 이래 농민군은 무려 36,0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63) 아마도 이 수치는 전라도 62)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62쪽. 63) 황현, 번역 오하기문, 307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71

74 농민군의 피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수많은 농민들이 동학의 정신과 농민군 지도부에 호응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민군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의로운 군대라고 생각하여 지지하였다는 일본측 보고 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64) 민간에 대한 약탈은 관군이 주도한 반면, 농민군은 오히려 백성들 의 폐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농민군의 진영에는 백성들이 가져다 준 식량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농민층의 농민군 지지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농민군들은 주로 관청의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장부를 불태우거나, 관청의 무기와 재물을 빼 앗았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과 짚신만을 요구할 뿐 부녀자나 재물을 약탈하지 않았다. 이처 럼 농민군은 자신들이 표방한대로 보국안민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민군의 안민활동이 강화되자, 농민군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났다. 농민군에 한 번 들 어오면 마치 별천지에 든 것처럼 여겼으며, 귀가하여 가래와 호미를 드는 일이나 가정을 돌보는 일은 내키지 않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의 깃발을 앞세우고 일으켰던 조선 농민의 혁명은 공주의 우금치 전투를 전환 점으로 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더 발전된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 합작전에 대한 농민군의 공격작전은 무력했고, 처절한 저항은 거듭된 패배로 이어졌다. 특히 최후의 저항전선을 형성했던 전남지역은 더욱 심했다. 각 군현마다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희 생자가 속출했으며, 마을 전체가 불에 탄 경우도 있었다. 이로서 1894년 봄에 타오르기 시작했던 혁 명의 불길은 광주 전남 지역민의 삶에 지우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고 1895년 1월에 막을 내렸다(광 주 전남의 역사, 216). 2. 광주 전남 의병항쟁 65) 1) 전기의병과 중기의병 동학의 농민혁명이 번져가던 바로 그 시기에 광주 전남에서는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다른 주체들에 의해 일어났다. 의병항쟁이다. 전자가 종교적 외피 하에서 하층 농민과 서민대중이 주체가 생존권 투 쟁에서 비롯된 항쟁이었다면, 후자는 전통적 유교윤리 하에서 상층부 지배층과 지식인(유생)들이 중 심이 되어 민비시해사건이나 단발령 등 외세의 침탈과 압력에 반대하는 국권수호 및 문화투쟁의 성격 을 갖는다. 물론 이 두 계급주체들은 항쟁의 후반에서 일제 침략에 대한 국권수호와 보국안민이라는 이념에 공통성에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6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3, 215쪽. 65) 제2절 광주 전남 한말의병에 관한 서술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연구단>의 한말의병 부분 집필자인 홍영기의 미간행 원고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요약하고 재구성한 것임. 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5 여기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이어서 광주 전남의 의병항쟁 양상을 검토한다. 이 지역에서 의병항쟁 의 전개 양상은 네 시기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전기의병( ), 중기의병( ), 후기의병( ), 전환기의병(1910년 이후)이 그것이다. 먼저 전기의병부터 차례로 살펴본다. 전기의병이 발생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민비시해사건(1895년 8월 20일)과 단발령(1895년 11월 15일)을 포함한 개화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전기의병은 일본 의 외세침략과 개화정책에 대한 저항과 비판으로 나타났다. 결국 중국의 유교적 성리학에 바탕을 둔 위정척사학파와 일본과 서구세력에 문호개방과 문물수입을 주장하는 개화사상과의 이념적 차이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전기의병의 이념적 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왕권 수호를 위한 근왕의병이라 할 수 있다. 전기의병활동은 장성과 나주지방에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장성의 의병봉기는 蘆 沙 奇 正 鎭 의 門 人 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奇 宇 萬 奇 三 衍 高 光 洵 金 翼 中 鄭 義 林 등이 그들로서, 이 가운데 기우만이 핵 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노사의 친손자로서 학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많은 문인들이 호남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기우만은 단발령이 내린 직후 국왕에 상소하여 그 부당성을 성토하자는 통문을 각읍에 돌린 바 있었 다. 66) 그후 그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왕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는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1895년 음력 12월부터 거사준비에 들어가서, 음력 2월 초 長 城 鄕 校 를 본거지삼아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호남 각지에도 연락하여 호응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러나 이들의 활동은 근왕이념이라는 한계 내에서 단발령과 개화파의 부당성에 대한 상소운동의 형태 로 그쳤다.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고광순 역시 자신들을 勤 王 義 兵 으로 인식하였다. 67) 요컨대, 이들 은 성리학적 道 를 지키려면 근왕의병을 일으켜 외세를 토벌하고 개화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다시 말해 호남지방의 전기의병은 근왕을 목표로 反 開 化 反 侵 略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나주의병은 장성에서 기우만의 격문이 도착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기우만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 는 한편, 일본과 서구 열강의 구축, 개화파의 처단 및 국왕의 환궁을 요구하는 격문을 나주향교에 보 내어 창의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나주의 유생들과 吏 族 들이 연합하여 의병봉기를 서두른 것이다. 당시 나주는 개화파 관리인 參 書 官 安 宗 洙 의 강압적인 개혁조치에 반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에 편 승하여 유생들과 이족들이 연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68) 나주호장을 역임한 鄭 錫 珍 을 비롯 하여 金 蒼 均 金 晳 鉉 父 子 朴 根 郁 金 錫 均 朴 化 實 등 나주의병의 핵심인물들은 대부분 이족이었다. 나주의 유생들과 이족들이 의병을 일으키려 하자, 그것을 저지하려던 안종수는 끝내 이족들의 손에 66) 송사집, 자료집 3, 1971, 23-24쪽. 67) 丙 申 疏, 鹿 川 遺 稿 卷 上, 1974 참조. 68)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제2부 제1장 제1절 참조.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73

76 피살되었다. 안종수는 단발을 강요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지만, 특히 그가 자행한 탐학이 이 족들의 분노를 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의 가혹한 수탈로 말미암아 살해된 것이라 하겠다. 69) 나주의병은 안종수를 처단한 후에 이웃 군읍에도 의병에 참여를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다. 나주의병에 함평과 능주, 무안 등의 양반 유생들과 각 읍의 이족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의병을 해산하라는 勅 諭 를 발표하고, 宣 諭 使 를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 는 한편, 친위대를 파견하여 군사적 탄압도 병행하였다. 당시 의병장들은 대부분 양반 유생이었던 관 계로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이들이 성리학적 勤 王 理 念 에 충실한 유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해산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국경을 넘어 만주로 이동하기도 했다. 제천과 강릉에서 각각 활동하 던 의병장 柳 麟 錫 과 閔 龍 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해산에 반발하며 선비들과는 일을 도 모하기 어렵다 며 재기를 모색하거나, 활동중인 다른 의병으로 옮겨 활동한 경우도 있었다. 장성의병 의 선봉장을 맡았던 기삼연과 안동의병의 중군장을 맡았던 金 道 鉉 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결 국 나주의병은 음력 2월 26일에서 27일 사이에 해산하였고, 70) 이어 광주에 주둔 중이던 장성의병 역 시 신기선의 권유를 받아들여 음력 2월 28-29일경 해산하였다. 71) 그런데 주목할 부분은 동학농민혁명과 전기의병과의 관계이다. 당시 호남지방의 양반과 유생들은 東 學 農 民 항쟁에 대하여 적대적이었으며, 후유증을 수습하는데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東 學 農 民 軍 의 색출과 五 家 作 統 制 의 정비 등과 아울러 鄕 會 의 조직을 강화함으로써 성리학적 사회체제를 더욱 공 고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72) 기우만 역시 자신의 향리인 長 城 에서 鄕 飮 酒 禮 를 거행하는 한편, 동학농 민군의 진압에 공을 세운 羅 州 牧 使 閔 種 烈 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의 碑 文 을 지어 주었다. 73) 전기의병 은 충주의병 안동의병 관동의병이 비교적 활발했는데 호남의병이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동학 농민혁명의 상흔이 컸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중기의병을 살펴본다. 전기의병이 왕명에 따라서 자진해산하였으나 외세침탈에 대한 분노 와 저항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강압적 방식으로 고 종의 승인과 서명도 거치지 않고 이완용 등 매국노를 조종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제의 만행 과 이완용을 비롯한 賣 國 賊 을 강력하게 성토하는 상소문이 잇달았으며, 항의시위도 그칠 날이 없었 다. 이는 곧 거족적으로 떨쳐 일어나 중기의병투쟁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남지역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호남의 전기의병이 비교적 안동이나 수원 및 관동지역에 비해 뒤늦은 편이었으나 중기의병 이후에는 호남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 69) 위의 책, 쪽. 70)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90쪽. 71) 변상철 외, 봉서 봉남일기, 278쪽. 72) 邊 相 轍 邊 萬 基, 鳳 棲 鳳 南 日 記 (국사편찬위원회, 1979), 쪽 참조. 73) 松 沙 集 ; 자료집 3, 1971, 22-23쪽 참조. 또한 기우만은 동학농민군과 싸우다 죽은 長 興 府 使 朴 憲 陽 을 추모하는 碑 文 을 짓기도 하였다. 그의 反 東 學 的 인 입장을 개진한 글은 松 沙 先 生 文 集 권 25에 실려 있다( 羅 州 平 賊 碑 와 長 興 府 使 朴 公 祭 壇 碑 참조). 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7 기 의병장이었던 기우만, 고광순 외에도 崔 益 鉉 白 樂 九 姜 在 天 梁 漢 奎 梁 會 一 등이 새롭게 의 병대열에 들어섰다. 이 가운데 경기도 출신 최익현이 주도한 泰 仁 義 兵, 화순 양회일이 주도한 雙 山 義 所, 백낙구의 광양의병, 양한규의 남원의병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여기에서는 쌍산의소를 중심으로 살 펴본다. (태인의병) 雙 山 義 所 는 1906년 봄에 전남 화순군 이양면에서 일어난 한말 호남지방 의병이다. 의병장 梁 會 一 을 중심으로 1906년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음력 3월까지 전라남도 화순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양회일은 봉기에 앞서 전답을 팔아 재원을 마련했고 대원을 모집했다. 이들을 규합하여 쌍산의소의 조직체계 를 정립하고 전투조직의 대오를 편성하였다. 창의에 필요한 군영을 구축하고 무기제조를 위해 대장간 을 설립했으며, 대원들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의병장 양회일은 誓 告 軍 中 文 을 발표하여 의병 으로서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시달하고, 항일투쟁을 감행했다. 3월 9일 능주로 나아가 군 청과 헌병분견소 및 세무서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무기를 노획했으며, 외인 집들을 불태웠다. 다음 날에도 화순 관아와 분견소를 습격하여 방화하고 기물을 파괴하며 전선을 단절시키고 무기를 노 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연이어 11일에도 동복군청과 왜군 분파소를 습격했다. 그러나 전과를 올린 후 광주로 오던 중 도마치(산)에서 적들과 조우하여 추격을 받던 중 대장 정세현이 사망하고 양회일 등 6 명이 체포됨으로써 격렬하게 타올랐던 쌍산의소의 의병활동은 막을 내렸다. 74) 쌍산의소에서 활동한 주요 구성원들의 출신지는 능주 화순 정읍 보성 남원 등 대부분 전라도 출신으로, 능주에 거주하는 자들이 특히 많다. 그것은 쌍산의소의 의병장 양회일이 능주를 지역적 기 반으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특히 대원들의 출신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몇 개의 가문에 집중되어 있는 데, 제주양씨 고흥유씨 평택임씨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해당 지역의 유력한 집안이었다. 그리고 지휘부의 핵심적인 인물들은 학문적으로 노사 기정진과 면암 최익현의 계열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여 반개화적 성격과 春 秋 의 義 理 思 想 이 강하였다. 특히 강조할 만한 사 실은 주요 구성원 중에 1590년대 임진왜란이나 1620년대 병자호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던 조상을 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참모 박중일이 해당된다. 또한 호남지방이 충의의 고장이 라는 점을 높이 사서 가담한 경우로는 선봉장 이광선을 들 수 있다. 쌍산의소가 해산된 후 체포를 모면한 일부 의병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호 남지역 후기의병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컨대, 쌍산의소의 선봉장 이광선은 독자적으로 의병활 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군장 임낙균은 안규홍의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도포장 유화국은 奇 參 衍 이 이끄는 湖 南 倡 義 會 盟 所 의 군량관으로, 그리고 호군장 안찬재는 沈 南 一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활동 하였다. 한편, 1908~1909년 사이에 활약한 전라남도의 중동부지방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 안규홍 의 창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쌍산의소의 의병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부 낙심한 인물들은 입산 은거하는 경향을 보였다. 74)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75

78 의병장 양회일은 자신의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친척의 전답까지 팔아서 쌍산의소의 재정을 충당하였 다. 또한 인근지역의 우국지사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는데, 임노복과 안찬재 등은 자신의 집에서 의병 들의 숙식을 제공했다. 차재문 역시 군수품을 지원해주었고, 중군장 임낙균의 동생인 林 興 均 은 賭 租 1백석을 군량으로 내놓았다. 막사터, 무기제작소, 유황굴 등을 포함하는 쌍산의소의 유적은 한말의병 의 실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아 마침내 국가사적으로 지정받 았다. 2) 후기의병과 전환기의병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타올랐던 중기의병의 거센 물결이 서서히 가라앉는 과정에서 또다시 전 국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07년 제국주의 일본은 이완용 등 조선정부의 친일 매국 노들을 조종하고 위협하여 고종을 강압적으로 퇴위시킨 것이다. 유약한 고종이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7월 19일에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고 발표했다. 총리대신인 이완용과 일제의 수괴 이 등박문은 이를 양위로 바꿔 퇴위를 공식화 했다. 그러나 이 조칙이 발표되자 전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수많은 유생과 시민들이 대한문 앞에서 통곡하는가 하면, 퇴위반대 성토대회, 거리 시위와 아울러 기왓장 등의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결사대가 조직되어 매국각료 처단계획이 추진되다 가 사전에 발각되는가 하면, 그들의 집을 습격하거나 방화하기도 했다. 黃 玹 의 梅 泉 野 錄 에는 이러 한 국민적 분노를 서울의 진고개에서 미친 개가 일본인 7명을 물어 죽였으며, 태평동에서도 삽살개 가 일본 아이를 물어 죽였다 는 소극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후기의병은 바로 이와 같은 일제의 침탈 에 대한 전 국민적 분노와 그에 따른 저항의 분출이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의 종말적 위기가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호남지방에서 는 전기의병이후 의병에 계속 참여한 奇 參 衍 을 중심으로 1907년 10월에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 는데, 이는 호남지방 후기의병의 起 點 이라 할 수 있다. 奇 參 衍 과 高 光 洵 은 전기의병이래 초지일관 의 병을 주도해오면서 호남지방 의병운동계의 상징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후 대일 투쟁 과정에서 순국하였고, 이어 새로운 의병장들이 다양한 계층에서 등장하였다. 이 중에는 학식이 상당한 유생도 있으며, 中 人 계층에 속하는 인물뿐만 아니라 머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이 혼재 되어 있다. 김준과 김율,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등이 전형적인 유생이라면, 김동신과 임창모, 박도 경은 중인에 해당되고, 안규홍은 머슴출신의 전형적인 빈농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의병부대를 보자면, 가장 대표적이고 선도적이었던 장성지역의 호남창의회맹소( 湖 南 倡 義 會 盟 所 )를 비롯하여, 각 지역에 서 전개되었던 다수의 의병부대가 있다. 영광-함평-나주의 전해산, 광주-송정 일원의 김준-김율 형 제, 오성술, 조경환, 김원국-원범 형제, 양진여 양상기 부자, 지리산의 고광순과 김동신, 전남 서남지 방을 축으로 하는 신남일 부대, 보성-순천-광양지역의 안규홍, 강진원, 조규하, 임병찬부대 등이 대 표적이다. 여기에서는 호남창의회맹소와 안규홍부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9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후기의병을 선도하고 확산시킨 대표적인 의병연합부대이다. 이 단체 는 전기의병의 발원지였던 장성에서 기삼연( )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기삼연은 奇 正 鎭 의 재종질로서 명문 유생이었다. 그는 이미 1896년에 기우만이 주도했던 장성의병에 참여한 바 있 으며, 1902년 5월에도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는 의병에 뜻이 있는 동조세력을 모 으기 위해 장성을 비롯한 인근 郡 邑 의 뜻있는 인사들과 빈번히 접촉하였다. 75) 예컨대, 1906년 봄 그 는 영광의 金 容 球 와 자주 만나 거의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하고 동조세력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76) 이 러한 조직활동을 토대로 하여 마침내 기삼연은 장성 隨 緣 山 石 水 菴 에서 의병을 규합했다. 77) 기삼연이 주도한 湖 南 倡 義 會 盟 所 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체로 노사학파 계열의 유생들이었다. 78) 1907년 10월 중 순 일제는 이 의병의 규모를 30여 명으로 파악하였는데, 10월말에는 약 4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79) 갑자기 의병의 규모가 증강된 배경에는 고창의 문수사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와 함께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 나주의 김태원, 장성의 이철형, 함평의 이남규 등이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였기 때문일 것이 다. 80) 그리하여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다. 81) (해체일 08년 1월) 회맹소는 결성 이후 1908년 1월까지 매우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감행했다. 국내외에 일제의 침탈을 선전함과 아울러 무장투쟁도 병행했다. 일반 농민대중에게는 납세거부, 미곡유출 방지, 외래품 판매금 지, 자위단에 불참을 홍보하고 선전했으며, 대한매일신보 에도 편지를 보내 창의 사실을 널리 알려줄 것과 아울러 회맹소의 격문이나 발표문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조 선민족이 이집트나 오키나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신 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일제히 궐기하자고 호소했다. 이들은 일본인의 머리를 베어오는 사람에게 는 상을 주겠다고 공고하기도 했다. 의병들의 납세거부 및 방곡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회맹소는 직접 공격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결성 당일인 10월 30일에는 무장분파소( 茂 長 分 派 所 )를 습격했고, 이어 고창읍성을 점령하여 장기적인 항전을 모색했다. 12월에는 영광 법성포를 공격 75) 義 所 日 記, 자료집 2 ; 義 兵 實 記 -- 統 領 金 容 球 --- (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88), 56쪽. 76) 강길원, 후은 김용구의 항일투쟁, 인문논총 16(전북대), 75쪽. 77) 석수암은 隨 緣 山 에 소재한 것으로 전해질 뿐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되자 일제측이 이 사찰을 放 火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수연산의 본래 명칭은 靈 鷲 山 이었으나 이 산에 소재한 隨 緣 寺 라는 절로 인하여 隨 緣 山 이라 불려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5, 민족문화추진회, 1970 ; 1984, 6쪽). 수연산은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와 동화면 서양리, 그리고 황룡면 관동리 등 3 面 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데, 영광군과 접해 있다. 이 산을 간혹 隨 綠 山 으로 표기한 경우( 姜 在 彦, 反 日 義 兵 運 動 의 歷 史 的 展 開, 朝 鮮 近 代 史 硏 究, 日 本 評 論 社, 1970 ; 韓 國 近 代 史, 한밭출판사, 1982, 286쪽 ; 오길보,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평양, 1988, 240쪽 ; 홍순권, 앞의 책, 101쪽 ; 박성수, 한국사 43, 국사편찬위원회, 1999, 427쪽 등)도 있으나, 이는 隨 緣 山 의 誤 記 이다. 78)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27쪽. 79) 폭도사, 28쪽. 80) 이와 관련하여 호남의병장열전, 자료집 2, 쪽 ; 義 兵 實 記, 22-23쪽 ; 高 光 烈, 三 義 士 行 狀, 자료집 3, 300쪽 ; 金 竹 峰 行 狀 ( 吳 東 洙 撰 ), 竹 峰 靑 峰 事 蹟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40) 그리고 편책, 光 秘 發 제250호 (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31, 1908), 쪽 참조. 81) 홍영기, 앞의 책, 230쪽 각주 31 참조.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77

80 하여 쌓아둔 세곡( 稅 穀 )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민심을 얻어내고, 군량미로 비축하여 후일을 준비 하기도 했다. 또한 장성읍과 영광읍을 점령하여 분파소, 우편소, 관아, 세무서 등을 쳐부수고 일본인 과 일진회원들을 살해하는 적극적 공격작전도 수행했다. 1908년에도 담양-함평-고막원 등지에 있 는 일본 관련 단체나 기관들을 습격하였다. 이들의 활동무대는 대체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 등지였으며, 병력은 명 규모를 유지했다. 회맹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지역민에게 호평과 지지가 강화되어 나중에는 정부가 조 세를 거둘 수도 없게 되자 일본군이 1908년 1월에 대규모 진압작전을 펼침으로써 회맹소는 200여 명 의 희생자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남지역 의병활동에서 회맹소 가 갖는 위상은 막중하다. 우선 1906년 1909년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기삼 연,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은 모두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한 의병장들이었다. 또한 회맹소의 항일투쟁은 통령 김용구를 비롯해 김준 이철형 김기순 박도경 이영화 김공삼( 金 公 三 ) 김율 ( 金 聿 ) 등에 의하여 지속되었다. 따라서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면 서 년 이 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평 가된다. 이 밖에 다수의 의병부대가 활동했고, 각각의 부대가 고유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가 있다. 이 가운 데 다음에는 호남 후기의병부대 가운데 특이한 성격을 갖는 안규홍 의병부대를 주목고자 한다. 의병 장 안규홍은 가난한 농촌의 담살이(머슴살이)였으나,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이를 응징 하기 의병에 투신했다. 1908년에 강성인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던 중, 의병장의 민폐가 심하자 그 를 참형하고 의병부대의 대오를 새로이 정비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염재보가 그를, 비록 나이는 적고 신체는 작지만 담대하기 때문에 가히 대장으로 삼을 만하다 고 평하면서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 했던 것이다. 그 해 2월 일본군이 보성군에서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이들을 괴멸시켰는데 이를 파청 대첩이라 한다. 그 때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일본군 이 복수하기 우해 다시 처들어와 대원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패퇴시키기도 했다. 그 후 병력을 증강 하여 8월에는 진산에서 일본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1909년 3월에도 원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거듭하여 대승을 이루었는데 이를 합하여 보성의진의 3대 첩이라 한다. 그 후에도 보성 병치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장흥 백사정으로 후퇴 했다. 이 때의 패전원인을 분석한 결과 왜인들이 적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실을 알고 복내시장과 호곡 등지에서 토왜섬멸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세가 불리하여 이탈자가 늘어나가 1909년 7월에 의진을 해산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안규홍과 염재보 등은 일본측의 기습으로 패전한 후, 잠시 섬에 들어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서지역은 내륙 의병들의 일시적 활동무대 내지는 은신처로 삼을 수 있었다. 그 사 례로서 해남에서 반일투쟁을 전개하던 심남일 의병부대로부터 고무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때 도서지 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1 역 주민들은 <완도삼림문제>와 어업법의 시행 등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 말미암아 반일감정이 고조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남일 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은 완도 진도 일대에 定 配 된 의병 관련 유 배수들에게도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後 述 하는 바와 같이 유배수들이 정배지를 이탈하여 의병에 다 시 참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이들이 1909년 초에 의병에 재차 투신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전남지역 의병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자, 일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폭압적인 형태의 군사작 전을 실시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른바 南 韓 暴 徒 大 討 伐 作 戰 이 그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의병 대학살작전이라 할 수 있는데,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동안 진행되었다. 이로써 전남의병 의 희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일본측이 밝힌 피해만 하더라도 전사 420명, 피체 1,687명, 총기 피탈 455정이나 되었다. 82) 그러나 후기의병의 전국적 분포를 보면, 호남의병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통계에 따 르면, 1908년 교전회수가 전국의 25%, 의병수가 24.7%에 이르고 1909년에는 교전회수가 전국의 48%-6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홍영기, 56). 이는 일제와 조선정부의 의병진압 작전이 이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이 지역 주민의 항일정신이 특히 투철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말 후기의병의 중심지였던 호남지역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월) 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순국하거나 체포, 투항하였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피해와 희생 속에서 살아남은 의병계열 인사들은 항일투쟁의 기상을 포기하지 않고 지하활동을 지속하며 조국의 독립, 즉 광복운동을 도모하 였다. 1910년 일제 강점이후 살아남은 호남지역 의병계열의 秘 密 結 社 들은 강형호의 비밀결사, 임병 찬이 주도한 獨 立 義 軍 府, 83) 그리고 광복회 전남지부가 활동했다. 이들은 폭력적 방법도 동원하는 지 하활동을 통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였다. 그리하여 깅형호의 비밀결사는 일간신문에 강도단 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또한 광복회 전라도지부는 1916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주로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친일파의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예를 들면, 군자금 지원을 거부하는 벌교의 부호 徐 道 鉉 을 총살 시켰고, 그의 당질인 徐 仁 善 을 납치하여 군자금 5만원을 요구하여 1만원을 강징한 바 있다. 84) 이들은 또한 보성 박곡의 梁 在 誠 을 처단하였으며, 이어서 보성군 조성면의 鳥 城 憲 兵 分 隊 85) 를 습격하여 무기 를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광복회 전라도지부의 활동은 1919~20년경에 종식된 것으로 추정 82) 폭도사, 142쪽. 83) 독립의군부는 흔히 대한독립의군부 로 잘못 알려져 있다. 다음의 논문제목만 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申 圭 秀, 大 韓 獨 立 義 軍 府 에 대하여, 邊 太 燮 博 士 華 甲 紀 念 史 學 論 叢, 삼영사, 1985 ; 李 相 璨, 大 韓 獨 立 義 軍 府 에 대하여, 李 載 龒 博 士 還 曆 紀 念 韓 國 史 學 論 叢, 신서원, 1990 ; 권대웅, 앞의 책,. 하지만 필자는 이 단체의 정식 명칭이 독립의군부임을 밝힌 바 있다(홍영기, 1910년대 전남지역의 항일비밀결사, 전남사학 19, 2002, 400쪽 각주 28).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독립의군부로 표기할 것이다. 광복회의 경우에도 흔히 대한광복회 등으로 잘못 알려진 까닭에 명칭을 바로잡기 위한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이성우, 光 復 會 명칭과 성격에 대한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41, 2007년 여름호).. 84) 동아일보 1922년 11월 12일자. 85) 일부의 글에서는 전북 순창의 鳥 城 憲 兵 分 隊 (또는 오성헌병분대)라고 표기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이명화, 앞의 글, 6쪽 및 국가보훈처 인터넷 사이트 ;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한훈 ),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분대의 誤 記 임이 분명하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79

82 된다. 또한 임병찬의 독립의군부 구상은 전국의 각도와 시군면을 포함하는 강력하고도 광범한 항일투 쟁체로 기획되어 기본 조직은 결성되었으나 실질적 활동에는 이르지 못하고 사전에 발각되어 와해되 었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국내외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말하자면, 이들 은 의병항쟁이 독립투쟁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계기, 즉 전환기 의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전남지방 의병활동에 대한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이 지역 의병활동의 성격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우 선 의병의 주체와 관련된다. 전기의병과 중기의병이 양반 유생과 관리 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후기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이와 사뭇 대조적이다. 우선 다양한 신분들이 주도인물로 부상되었다. 양반 유생들의 경우, 명문가의 후예들은 점차 이탈되어가고, 86) 경제적으로 농민의 처지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농촌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김용구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이 그들인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서당 훈장출신이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중인신분도 참여하고 있는데, 김동신이 해당된 다. 한편 貧 農 과 行 商 출신들도 후기의병의 주도인물로 등장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규 홍(일명 안담살이)과 강무경 등을 들 수 있다. 광주 전남 의병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學 統 을 분류해보면 대체로 蘆 沙 奇 正 鎭 계열과 勉 菴 崔 益 鉉 계열로 대별된다. 노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우만 기삼연 등을 비롯한 장성의병과 호남창의회 맹소 계열이 해당된다. 노사 계열은 전기의병에서 후기의병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광주 전남 의 병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광주 전남 의병의 장기항전을 가능케 한 地 盤 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에 비해 면암 계열은 태인의병을 시작으로 호남지방의 중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임병찬 백낙구 황준성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학파는 초기에는 의병의 주도권 문제 로 갈등도 없지 않았으나, 상호 연관성을 유지하며 광주 전남 의병의 장기화와 활성화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후기의병으로 갈수록 노사나 면암 계열의 활동이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해갔다. 한미한 가문의 유생출신이나 평민 의병장들이 후기의병을 주도해갔기 때문이다. 광주 전남 의병의 연령을 살펴보면 최연소자 14세로부터 최고령자 78세까지 약 1,500명 정도가 파 악된다. 그 가운데 20대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에는 30대, 40대 순이다. 청장년층이 압도적으로 많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기 중기 의병에는 고령자가 비교적 많은 반면, 후기의병의 대부분은 청장 년층으로 구성되었다. 후기의병의 경우 체력이 저하된 고령자들은 귀가를 권유받았으며,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기동성을 요하는 유격전술을 전개함으로써 장기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직업과 신분 면에서 보면, 전기 중기 의병에는 유생층이 많은 반면, 후기의병은 농민과 상인, 수공 자 등 매우 다양하다. 후기의병에는 다양한 계층이 골고루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지역적 특 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雇 農 을 포함한 농민들이 다수를 점한 사실에서 그러하다. 또한 商 人 의 경우에는 주로 酒 幕 業 과 零 細 商 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족들도 적지 않은데, 나주의병의 사례 86) 예컨대, 기우만의 경우에는 1907년경 유인석의 이른바 處 變 三 事 가운데 擧 義 에서 守 義 로 기울어갔다. 이후 그는 의병에 나서지 않고 白 笠 을 쓰고 土 窟 에서 지내면서 의병전 편찬 등에 주력한 점에서 그러하다. 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3 에서 참여자를 많이 확인한데다 그 후에도 상당수의 이족들이 의병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해 산군인이나 포수, 수공업자 등은 그리 많지 않다. 한편, 의병에 가담했다가 전라도에 定 配 된 유배수들 중 상당수가 재투신하여 의병을 이끌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87) 다음으로 의병의 충원과정에서도 의미있는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전기 중기 의병의 지도부는 주 로 鄕 校 와 書 院 에 通 文 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鄕 會 나 講 會 에 참석한 유생, 이 른바 儒 會 軍 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투쟁하기 위한 의병이라기보다 상소운동이나 시위형태의 집단처 럼 인식되었다. 黃 玹 은 장성의병에 대하여 모인 사람들은 모두 深 衣 大 冠 을 착용하고 서열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다. 이들은 군자금과 무기 나아가 紀 律 이 전혀 없어서 보는 자들마다 반드시 패할 것 으로 예측하였다 88) 라고 비판하였다. 물론 일반 병사층에는 砲 軍 과 농민들도 포함되었을 테지만, 그 들은 대체로 용병적 성격이 강하거나 마지못해 가담한 소작인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전 기 중기 의병은 전투력과는 거리가 먼 탓에 단기간의 활동으로 그쳐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하 여 후기의병은 시장 등지에서 의병을 모았다. 대표적인 예로서 안규홍 의병부대는 직접 시장을 순회 하거나 각지를 돌며 신체 건강하고 담력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다. 이는, 양반 유생들이 의병을 모집 하는 방법과는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남지방 후기의병의 일반 병사층은 주로 농어민 들이었을 것이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경우에 가난한 농민이나 머슴들로 구성되었던 점으로 보아 그러 하다. 후기의병의 주된 戰 力 이었던 해산군인이나 포수는 호남지방의 경우에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우에 후기의병의 주된 전력은 해산군인이거나 포수들이었다. 예컨 대, 洪 範 道 와 車 道 善 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주로 砲 手 들로 구성되었으며, 89) 原 州 鎭 衛 隊 의 해산군인들 이 봉기한 閔 肯 鎬 의병부대는 당연히 해산군인들이 주된 전력이었다. 이에 비하여 호남지방 후기의병 은 지역적 특성상 대체로 농민들이 많았다. 한편, 광주 전남 의병은 의병 구성원의 질적인 변화를 도모하였다. 즉, 전기의병은 儒 生 들이 의병부 대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중기의병의 경우에는 防 盜 組 織 을 활용하거나, 노약자 및 미성년자를 귀가시키면서 청장년 중심의 의병부대로 개편하였다. 후기의병에는 상당수의 해산군인들이 합류함으 로써 의병의 戰 力 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정책에 반발하여 의병에 스스로 투신 하는 자가 증가하였으며, 의병장은 투쟁역량을 강화하고자 의병의 구성원을 敢 死 之 卒 로 개편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주 전남 의병은 1907년경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국내에 영구적인 의병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智 異 山 과 島 嶼 지역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이는, 중부이북의 의병들이 이 른바 北 計 策 을 추진한 것과 비교된다. 90) 그런데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 홍영기, 舊 韓 末 全 羅 南 道 島 嶼 地 方 義 兵 에 대한 一 考 察, 東 亞 硏 究 21(1990), 29-30쪽 참조. 88) 황현, 매천야록, 198쪽. 89) 朴 敏 泳, 大 韓 帝 國 期 義 兵 硏 究 (한울아카데미, 1998) 제2부 제1장 참조. 柳 麟 錫, 與 諸 陣 別 紙, 毅 菴 集 上, 592쪽. 한편, 유인석의 북계책과 관련된 주요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姜 在 彦, 朝 鮮 獨 立 運 動 の 根 據 地 問 題, 朝 鮮 民 族 運 動 史 硏 究 1, 1984, 東 京 ; 朝 鮮 の 儒 敎 と 近 代, 姜 在 彦 著 作 選 Ⅰ( 東 京, 明 石 書 店, 1996). 柳 漢 喆, 柳 麟 錫 의 義 兵 根 據 地 論 年 以 後 를 中 心 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994).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81

84 년 중반이후에 추진되었다. 이러한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의병장은 바로 高 光 洵 이었다. 한편, 그 의 지리산근거지론은, 柳 麟 錫 을 비롯한 중부 이북의 의병들이 이른바 北 計 策 을 추진한 것과 비교된다 고 하겠다. 유인석은 1908년 초반 萬 全 之 策 으로서의 이른바 北 計 策 을 구상하였다. 91) 그의 국권회복 전략으로서의 북계책은 국외의 일정 지역에 根 據 地 를 마련하여 장기항전을 모색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장기적인 항일투쟁의 근거지로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험한 산중을 최적지 로 꼽았다. 다시 말해 유인석의 북계책은 백두산근거지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義 兵 規 則 제32항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전라도 의병의 특성들이 갖는 의미를 통해서 한말 전남 의병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첫째, 광주 전남 의병의 정신적 근원은 멀리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라도 의병의 역할에 대한 자긍심 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광주 전남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의 대부분이 왜란에 참여한 의병의 후손 이란 점에서 입증된다. 물론 이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병인양요시 의병을 일으켜 상경한 사실에서도 사상적 영향이 상당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勤 王 的 인 성격과 연고지역을 스스로 지키려는 향토 수호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차원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다만, 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 은 농민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反 東 學 的 성향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후기 의병에 이르러 그러한 갈등이 해소됨으로써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장기항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둘째, 1908~9년 사이에 전개된 광주 전남 의병의 강력한 반일투쟁은 일제의 식민화정책을 지연시 키는데 기여하였다. 일제는 1909년 후반 경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광주 전남 의병의 투쟁이 장 기화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아가 전라도민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크게 고양시켰다. 92) 결국 日 帝 는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광주 전남 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후에야 조선을 식 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셋째, 국내에 항일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하였다. 광주 전남 의병은 장기항전의 기반을 지리산과 같은 산악지대와 島 嶼 지역에 구축하였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민족해방투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이는 광주 전남 의병의 활동목표와 지향성이 그 후의 민족해방 투쟁으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다만, 국내에 기지건설을 추진한 까닭으로 이들은 막대한 피해 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국외의 독립운동으로의 전환이 더디고 미약한 한계가 없지 않았다. 넷째, 광주 전남 의병은 명문 유생에서 가난한 농촌지식인과 貧 農 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김준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의병부대가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할 것이 다. 다만, 광주 전남 의병과 다른 지역 義 陣 간에 유기적인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보다 91) 유한철, 柳 麟 錫 의 義 兵 根 據 地 論,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994), 126~127쪽. 92) 李 東 宇, 全 北 義 兵 의 役 割 과 意 義, 史 學 硏 究 55 56합집(1998), 689쪽. 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5 효과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향토수호와 안민을 목 표로 하는 의병항쟁에 치중함으로써 국외의 독립운동으로의 전환이 상대적으로 더디고 미약한 점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民 族 運 動 上 에서의 광주 전남 의병의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고 하겠다. 전남의병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때 反 侵 略 民 族 運 動 이라 할 수 있다. 민중운동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93) 중기의병 이후만 하더라도 재지 양반 유생층이 주도한 의병항쟁을 민중운 동으로 보기에는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중운동이라면 마땅히 민중의 계급적 이해를 앞세워 그들의 권익을 쟁취하는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저항하는 민중 들의 의병활동을 민중운동으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를 부르조아민족운 동으로 규정하기도 하나, 94) 의병항쟁을 주도한 계층이나 계급적 시각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에 투쟁한 反 帝 鬪 爭 을 강조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광주 전남 의병항쟁의 성격을 반침략 민족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투쟁을 간략히 정리했다. 외세의 침탈이라는 국제적 환경 속에서 조선 왕조 말기에 거의 동시에 일어난 두 항쟁은 여러 측면에서 비교적 검토가 가능하다. 이를 통해 당시 사회구조와 작동의 기제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결과를 석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민혁명은 1년 이내에 종료된 반면에 의병투쟁은 10년을 넘는 장기적 투쟁이었기 때문에 기계적 비교는 무리가 수반될 수 있음을 지적해 둔다. 운동론적 관점에서 두 항쟁의 주체와 이념 및 목표, 그리고 운동방식과 그 결과를 직접적으로 비료 해 볼 수 있다. 첫째, 운동주체는 앞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전자는 농민인 반면에 후자는 신분 에 차이가 있는 양반 유생 즉 지식인과 전직 관리들이 주도한 점이 드러난다. 물론 의병투쟁의 경우에 전기에는 양반과 중인의 지식인들이 다수를 점유했지만, 1907년 이후 후기의병 때는 유생은 물론 몰 락한 양반, 중인 및 빈농을 포함한 이질적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의병투쟁에서 주체의 구성이 초기의 폐쇄적 집단으로부터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구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항쟁의 이념과 목표에서 농민혁명이나 전기의병이 공히 왕정에 대한 지지를 전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이념은 이와 같이 간단히 규정되기보다는 보다 심층적인 자료를 검토하 여 해석되어야 할 문제라 본다. 예를 들면, 집강소 체제와 왕정의 공존가능성은 기존의 왕정과는 다른 성격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추론이다. 사회운동의 의미틀 분석은 이에 관한 유용한 접근방 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두 항쟁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특성의 하나는 외세침략, 특히 일본의 강제침탈 에 대한 강한 저항과 적대성이다. 말하자면, 이는 신분이나 계층집단의 차이와 관계없이 광범하게 공 통된 가치-이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93) 홍순권, 앞의 책, 쪽 참조. 94) 오길보, 19세기말 -20세기초 반일의병투쟁의 성격, 력사과학 1966년 제6호, 16쪽 및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조선근대사연구 (1970) ; 한국근대사연구 (한밭출판사, 1982), 342쪽 참조.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83

86 셋째, 항쟁의 형태와 방법은 두 항쟁에서 공히 내전에 이르는 과격한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의병투쟁의 경우에 전기에는 단발령 비판과 이에 대한 상소 및 집단저항의 담론투쟁이 주를 이루었 고, 왕조정부의 해산명령을 수용한 것은 전혀 다른 저항형태이지만, 일본의 침탈에 대한 저항투쟁은 공통된 성격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농민항쟁은 왕조정부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전기의병 은 정부를 지지한 상반된 성격을 드러냈다. 이 차별성은 두 항쟁이 갖는 신분적 계급적 차이를 반영하 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두 항쟁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점 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국내 문제와 관련된 신분적 차이가 국제적 차원의 민족문제를 당면했을 때 민족 문제가 우선시되고 있다는 추론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회과학에서 고전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인 민족과 계급의 문제에 관한 일련의 해석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항쟁이 공히 맞게 된 패 배와 관련하여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어찌보면 국가수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항쟁 으로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물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이 적절히 준비되지 못한 항쟁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에게서 일제 격퇴를 위한 구체적 기획이나 실천계획과 물적 자원, 서구에서와 유사한 통일전선형성 등의 체계적 준비태세가 미흡하거나 결여된 도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의( 義 )를 위해 목숨을 거는 우리 의병들 의 뜨거운 마음이다. 95) 무기와 전술역량에서 제국주의 일본에 맞설 수 없는 열악한 상태임을 알면서도, 그리하여 그 싸움에서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의를 위해 피하지 않고 맞서는 희생적 실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 마음이 실행된 결과이다. 우리는 이미 이 마음(정신)을 1592년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산하를 적셨던 호남의병의 피어린 싸움에서 보았다. 말하자면, 이 마음의 역사적 뿌리는 16세기 말의 조일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심리적 기원은 민족과 이 웃사랑에 있음을 의병들이 실천한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정신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뜨거운 행 동으로 또다시 치솟음으로써 오늘날에도 역사 속에 살아있는 절의정신의 흐름을 보여 주었다. 제2장 일제하 광주 전남 민족운동 96) 년대 광주 전남 지방과 3 1운동 1) 3 1운동 이전 전남지방 항일운동 일제는 1910년대 한국인들이 정치적 민족적 목적으로 사회단체를 구성하거나 집회를 여는 것을 철 저히 금지했다. 교회 같은 종교단체가 아니라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므로 대규모 의 조직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극히 어려웠다. 따라서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를 통해 수행할 95) 이 부분은 서곤(전남대 석좌교수)의 견해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음. 96) 대한독립의군부에 대해서는 신규수, 1999, 일제하 독립의군부 운동에 관한 연구, 역사와 사회 22 참조 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7 수밖에 없었다. 전남 지역에서 조직한 비밀 결사는 없지만, 전남 지역의 인물들이 임병찬이 주도한 대 한독립의군부에 가담하거나 강석봉 등이 조선국민회 등 비밀 항일 조직에 참여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최익현 의병에 참여하여 쓰시마에 유배당했던 임병찬이 귀국한 다음 1912년에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였다. 고종의 비밀 조칙을 전달받아서 조직했다고 하며, 참여한 인사 대부분이 과거의 의병이나 저명한 유림들이었다. 실재 독립의군부에 관여한 전남 지역 인물로는 순천의 조기섭 ( 趙 基 燮 ), 광주의 박하준( 朴 夏 駿 ), 이희구( 李 喜 九 ) 등이 있다. 97) 조선국민회는 1917년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인데, 광주, 보 성 지역에도 강석봉을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다. 숭실학교를 나온 청년 장일환은 1915년 하와이 를 방문, 이곳에서 국민회를 이끌면서 대조선국민군단 등을 세워 군사독립운동을 추진하던 박용만을 만났다. 박용만에게서 감화를 받은 장일환은 국내에도 여기에 호응할 수 있는 청년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백세빈과 강석봉을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했다. 강석봉( 姜 錫 奉 )은 목포 출신 으로 일찍 하와이로 건너가 국민회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광주에서 교회와 청년 모임을 중심으로 활 동하고 있었다. 장일환은 이후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늘려 나가, 1917 년 3월 평양에서 정식으로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는 장일환이 회장이 되고, 배민수( 裵 敏 洙 )가 서기가 되었다. 외국통신계를 두어 중국과 연락하고, 회장은 본부 격인 평양을 담당하고, 경상 도와 전라도, 황해도에 구역장을 두어 조직을 확대했다. 전남 지역으로 참여한 사람은 구역장 강석봉 외에 목포의 서광조( 徐 光 朝 ), 보성 벌교의 김사현( 金 思 鉉 ), 김영복( 金 永 復 ), 조옥초( 趙 玉 肖 군산영명학 교 학생), 양경수( 楊 敬 洙 ) 등이었다. 조선국민회는 독립을 위한 무력양성과 독립의식 고취 등의 활동 을 벌였는데, 벌교 조옥초, 김사현, 양경수 등은 권총 구입 계획가지 세우기도 했다. 이들은 1918년 2 월 조직이 발각되어 대부분 구속되었다. 98)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강화되면서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소유권을 놓고 분쟁 중 이던 토지들이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 지주에게 일방적으로 넘어가게 되 자 농민들은 땅을 되찾기 위해 격렬히 싸우게 되었다. 흔히 궁방전( 宮 房 田 )이나 아문둔전( 衙 門 屯 田 )이 라고 하는 토지가 이런 분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후기 왕실의 왕자들이 장성하거나 공 주들이 시집을 가게 되면 이들의 생활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농사를 짓지 못해 황폐한 땅이나 이제 개 간해야 하는 토지를 나눠주었다. 이를 절수( 折 受 ) 라고 하는데 원칙적으로는 주인 없는 땅을 대상으 로 해야 했지만 이미 백성들이 개간한 땅을 절수하는 경우도 많아 17세기부터 빈번한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되도록 궁장토의 규모를 줄이려고 하고 절수를 하는 경우도 백성이 소유권을 가 지고 세를 궁방에 내는 것을 제도화했다. 또 순차적으로 일정기간 동안만 궁방에 세를 내도록 하기도 했다. 99) 97) 조선국민회에 대해서는 강영심, 조선국민회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참조 98) 손병규, 2008,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역사비평사, 89쪽 99) 하의도와 나주 지역의 토지회수 투쟁은 멀게는 17세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속된 운동이므로 특정 시기에 배치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각 시기에 분할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아 1910년대 민족운동 부분에서 모두 서술하고자 한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85

88 그러나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궁방의 횡포, 관료들의 농간으로 멀쩡한 토지가 궁방이나 아문전으로 둔갑하는 사례들이 늘면서 토지 분쟁이 격심해졌다. 게다가 1912년 토 지조사사업이 실시되면서 세금만 궁방에 납부하던 토지들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일본인 대농장 주들에게 불하되면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일본인 지주와 총독부 권력을 상대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100) 무안군 하의도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하의도 주민들은 17세기부터 섬을 개간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20세기까지 수백년 동안 경작지를 계속 확대했다. 17세기 초 조정은 하의도 일부 토지를 정 명공주의 부마인 홍두원과 그 자손 4대에 한하여 절수하여 결세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기간이 지난 1700년대에도 홍씨 가문은 결세납부를 강요할 뿐 아니라 하의도 전체 토지를 절수받았다고 주장하여 분쟁이 발생했다. 농민들의 호소에 따라 전라감사가 부당한 결세 수납을 중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홍 씨가는 결세를 계속 받았다. 그런데 일제가 1907년 이후 역둔토조사사업을 실시하면서 하의도의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자, 농민들이 이의를 제기하여 심사가 진행되었다. 이 와중에 홍씨 일가는 하의도 토지가 홍씨 사유지라 주장하여 소유권을 인정받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홍씨가가 목포의 폭력배 수십 명을 동원 하여 소작료를 징수하자 농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경성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909년 재판부는 홍 씨가가 징수한 소작료의 반환을 결정함으로써 농민들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 판결 직전 홍 씨 일가는 전답을 처분해버렸고 토지는 몇 차례의 전매 끝에 1911년 오사카의 해운업 재벌 우콘 곤자 에몬( 右 近 權 左 衛 門 )에게 넘어갔다. 하의도 농민들이 여전히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우콘은 목포경찰서장, 지방법원 지청장 등과 결탁하고 농민 대표 중 한 사람을 회유하여 백지 위 임장을 건네 받았다. 이에 하의도 농민들은 위임의 취소를 진정하려 했으나 1913년 7월 목포경찰에 의해 진정운동이 저 지되었다. 1914년 2월 분노한 농민들은 우콘에 협력한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고 폭행하는 사건이 벌 어지자 목포경찰과 헌병이 출동하여 섬 주민 100 여명을 체포하여 목포로 압송했다. 이런 소란 가운 데 1914년 4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하의도 농민들에게 우콘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영소작 권을 받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화해 조서를 강요했다. 농민들은 이를 거부했으나 화해 조서와 토지조 사사업의 완료로 우콘은 하의도 토지의 실제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의도 농민들은 우콘에게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고 토지소유권 반환소송을 내는 등 법정투쟁을 계속했으나 모두 기각 당했다. 101) 1919년 9월 우콘은 오사카의 토쿠다양행( 德 田 洋 行 )에게 하의도 토지를 팔아치워 버렸다. 토쿠다양 행은 목포에 지점을 두고 예비역 중위와 순사, 헌병 보조원 등을 직원으로 채용하여 하의도 농장을 운 100) 규수, 2001, 일제하 토지회수운동의 전개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70~274쪽 101) 동아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9 영했다. 1921년부터 토쿠다 농장은 경찰과 집달리를 동원하여 그 동안 미납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 고, 소작료를 실질적으로 인상하는 등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다. 농민들은 하의도 소작인회를 조직하여 여기에 저항하는 한편, 토지회수를 위한 수단도 강구했다. 1924년 1월 토쿠다 농장이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팔려고 하자 하의도 농민들은 농장을 화해조서 불이행으로 고발하는 동시에, 농민대 회를 열고 토지를 유상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102) 농민들은 토쿠다 농장이 요구하는 소작료 납부를 전 면 거부하고 토지 소유권 자체를 유상으로라도 넘길 것을 요구했다. 1928년 1월 최용도( 崔 龍 道 ) 등 하의도 농민 300여명은 하의도 농민조합을 결성했다. 농민조합은 조합원 800여명으로까지 성장했으 며, 최용환과 고장명 등을 대표로 농장과 소작 문제를 교섭했다. 그러나 농장은 친일 폭력조직인 상애 회의 박춘금을 동원하여 농민들을 위협했고, 목포 경찰서와 결탁하여 농민조합 해산을 강요했다. 농 민조합과 상애회 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일제 경찰은 즉각 농민조합 간부들을 구속했다. 이후 출 옥한 농민들이 간헐적으로 토지회수를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 하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해방 이 후에도 하의도의 토지가 국유지로 취급되어 분쟁이 계속되었다. 103) 나주 지역의 사례는 관료의 농간에 의해 농민들의 토지가 분쟁의 대상이 된 경우다. 흔히 궁삼면이 라고 하지만, 궁삼면( 宮 三 面 )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나주군 지죽면, 상곡면, 욱곡면 등 세 면의 토지들 이 궁장토로 불법 편입되면서 궁에 편입된 세 면이라는 의미로 이 지역을 지칭하게 된 말이다. 실제로 는 1914년 행정구역 재편으로 영산면, 왕곡면, 세지면, 봉황면, 다시면으로 분리되었다. 104) 19세기말 이 지역에 흉년이 들자 세금을 대납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경저리가 대납의 조건으로 농민 들의 토지문기를 요구하여 이를 몰래 궁방에 넘기면서 궁삼면 지역 농민들의 토지 약탈이 시작되었 다. 농민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여 재판을 진행했고, 1897년 고등재판소는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 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불법으로 토지를 넘겨받은 경선궁측은 지방 관료들을 동원하여 1909 년 다시 이 땅을 경선궁 사유지로 만들었다. 105) 이 무렵 토지 매수에 적극적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궁삼면 지역을 경선궁으로부터 사들여 농장을 조성했다. 동척이 농장을 조성하여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는 한편, 일본 이민을 받아 들였다. 1912년 동척 직원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민들을 위한 땅으로 배당된 농경지에 토지 분할 표목을 박았다. 자기 땅에 말뚝을 박고 있는 것을 본 농민 이회춘의 어머니는 이 표목을 뽑아 버렸는데, 이를 본 일본 군 헌병이 노인의 배를 걷어 찼고 이회춘의 어머니는 논두렁에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106)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면서, 동척 이민을 위해 만든 집들을 파괴하고 농기구를 탈취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총독부 경무국이 동척에 당분간 더 이상의 농업 이민을 받지 말도록 지시할 정도로 102) 이규수, 2001, 앞의 논문, 286쪽 103) 이규수, 2000, 전남 나주군 궁삼면 의 토지소유관계의 변동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4) 박이준, 2007, 한국 근현대 시기 토지탈환운동 연구, 선인 105) 이규수, 2001, 앞의 논문, 240쪽 106) 이규수, 2001, 앞의 논문, 244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87

90 저항은 거셌다. 한편 농민들은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진행했으나 패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1915년 농 민들은 대표를 전남 도장관에 보내 택지와 밭 등의 농민 소유를 인정할 것, 미납 소작료를 면제해 줄 것, 황무지와 새로 개간한 논의 농민 소유를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으나 일제는 헌병을 보내 농민대표 들을 검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07) 3 1운동 이후 궁삼면 지역 농민들의 토지회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 11월 농민 200 여명이 영산포 장에 모여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고 동척 창고에 폭탄을 던지자는 내용의 전단을 배포했다. 또 1925년에는 나주 농민들이 일본인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과 연계하여 토지회수를 시도 하기도 했다. 1925년 나주 궁삼면 지역 농민들은 농민회를 만들어 조직적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5년 10 월 9일 농민 1,200여명이 나주와 영산포역 부근에서 농민대회를 열고 농민회를 조직했으며 자신들의 땅을 원가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이후에도 농민회 지도부는 유상반환의 방침을 고수 했으나 다수의 농민들은 무상반환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궁삼면 토지회수운동동맹을 조직 하였고 토지 회수와 소작료 불납을 결의하는 피의 서약을 하기도 했다.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려는 동척 직원들과 농민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고 동척 영산포 출장소가 습격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26년 2월에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나주경찰서를 농민 수백명이 습격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 다. 108) 동척측은 농민 내부를 분열시키기 위해 소작인 조합장을 동원하여 회유하기도 했고, 이를 응징 하는 사태도 빚어졌다. 결국 총독부 경무국이 직접 나서 동척과 농민을 조정하기로 했다. 총독부는 농 민대표들을 압박하여 위임을 받고 동척과 협의, 유상 반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가혹한 분양조건을 모 두 충족하여 토지를 도로 찾은 농민은 극소수였고, 궁삼면 토지문제는 하의도와 마찬가지로 해방 이 후까지 연속될 수밖에 없었다. 2) 광주 전남의 3 1운동 일제 지배에 대한 본격적인 전민족적 저항인 3 1 운동은 광주 전남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 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시작한 전남의 3 1운동은 모든 지역으로 번져나가 다양한 계층의 수 많은 민중들이 함께 참여했다. 한국의 민중들은 이 운동을 통해 자신들이 능히 독립한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민족임을 확인했고, 이를 다른 민족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일제 또한 한국인 들을 식민지 열등인종으로만 파악했던 무단통치의 시각을 수정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하지 않 을 수 없었다. 3 1운동은 이후 끊임 없이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주체들을 만들어준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흔히 지방의 3 1 운동의 역사를 서술할 때는 각 군별로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지역 사회의 107) 전라남도지 8, 232쪽 108) 박이준, 2001, 128쪽 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1 변화를 본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지역 내에서도 다른 성격의 만세운동이 전개되기도 하고 지나치 게 나열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이를 감안하여 운동 주체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더 일목요연 할 것이다. 최초의 움직임은 학생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1919년 2월 초 메이지 대학에 유학 중이던 정광호( 鄭 光 好 )는 2 8 독립선언을 준비하다 국내로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선언문 초안을 가지고 귀국했다. 정광호는 비밀리에 반입한 선언문을 등사하고 서울을 오가며 청년 학생들을 만나 시위 운동을 본격적 으로 준비했다. 그 중에서도 황상호( 黃 尙 鎬 ), 김복수( 金 福 洙 ), 박팔준( 朴 八 俊 ), 김용규( 金 容 圭 ), 최한 영( 崔 漢 泳 ), 강석봉( 姜 錫 峰 ), 김봉열( 金 奉 烈 ), 강생기( 姜 生 基 ) 등 광주 지역 청년들은 신문잡지종람소 의 회원으로 이전부터 함께 신문 잡지를 읽으며 시사와 세계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의식을 키우고 있었 다.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2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김범 수( 金 範 洙 경성의전 재학, 조선공산당 건준) 등 서울에 유학 중이던 광주 전남 지방 출신 학생들과 긴 밀히 연락하는 한편, 장성에서 선언서를 몰래 등사하여 당시 광주농업학교 학생이던 최한영의 집에 숨겨두었다. 109) 시위 운동을 대규모로 확산시키는 데는 기독교계의 힘이 컸다. 앞의 청년 학생 가운데도 기독교 신 도가 적지 않았고 적지 않았지만, 110) 교회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독교계의 3 1운동 세 력들은 김필수 목사를 대표로 광주로 보냈고, 광주 지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적극 나섰다. 광주 지역의 대표로 최흥종( 崔 興 琮 ) 장로와 김철( 金 鐵 =김복현) 등이 서울로 상경하여 국기열( 鞠 琦 烈 ), 김 범수, 최정두( 崔 正 斗 ) 등 광주 전남 출신 유학생들과 함께 지역에서 투쟁을 준비하는 동안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했는데, 최흥종은 시위 도중 체포되었다. 김철, 최정도 등은 독립선언서, 경고문, 독립가 등을 몰래 지니고 급히 광주로 내려왔다. 3월 6일 이 들과 광주의 청년 학생, 기독교 학교 교직원들이 숭일학교 교사이며 장로였던 남궁혁( 南 宮 赫 )의 집에 서 모였다. 숭일학교 교직원인 김강( 金 剛 ), 최병준( 崔 炳 俊 ), 청년학생 그룹의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 韓 吉 祥 광주농업학교 퇴학), 최한영, 양림교회 청년 신도 최영균( 崔 瑛 均 ), 김용규( 金 容 圭 ), 지역의 민 족운동을 주도하며 북문안교회를 다니던 서정희( 徐 廷 禧 ), 수피아 여학교 여교사 홍승애( 洪 承 愛 ) 등이 모여 3월 8일 광주 큰 장날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임무를 나누어 맡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 정이 너무 촉박하므로 3월 10일 작은 장날 거사를 치르기로 하고 바쁘게 준비에 들어갔다. 111) 우선 최한영, 최정도, 한길상, 김용규, 범윤두( 氾 潤 斗 ), 송흥진(숭일학교 직원) 등 청년학생들이 선 언서의 인쇄와 태극기 제작을 담당했다. 강석봉은 시내 여러 곳의 상점에서 선언서를 인쇄할 종이 1 만 장을 사서 효천면 향사리 최한영의 집으로 왔다. 3월 8일부터 9일까지 젊은이들은 밤을 새가며 최 109) 김용규, 최정두 등 학생들은 모두 광주 양림교회 신도였다. 광주제일교회구십년사, 321쪽 110) 박이준, 2001, 129쪽 ;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사회운동, 70~71쪽 111) 김복현 등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국가기록원 문서 CJA ) 김복현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국가기록원 문서 CJA )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89

92 정도가 가져온 등사판과 송흥진이 빼내온 숭일학교 등사판으로 선언서와 경고문, 독립가를 수 천 장 을 찍어 냈다. 112)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도록 조직하는 것은 큰 일이었다. 숭일학교나 수 피아 여학교 학생 동원은 최병준, 홍승애 등 교사들이 맡았고, 기독교인들의 동원은 김강이 책임졌다.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고 전파하는 일은 서정희가, 일반 학교의 학생 동원은 김봉열( 金 奉 烈, 삼합양조 장구락부 회원), 최영균, 김용균 등이 담당했다. 113) 3월 9일 준비된 선언서와 태극기를 분배하고 10일 오전에는 시위에 나설 학생과 시민들에게까지 나 누어 주었다. 114)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 115) 에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 학생,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양림리쪽에서 광주천을 따라 모여들었고, 광주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북문쪽에서 행진항 합류했다. 지산면에서는 범윤두, 이주상( 李 周 詳 )이 일곡( 日 谷 ), 생룡( 生 龍 ) 등지에 거주하는 이씨, 범씨, 노씨 등 수백명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주도자들은 군중들에게 선언문과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광주 시내를 누비기 시작했다. 곧 만세 시위는 모든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항쟁이자 축제처럼 되었다. 얼 떨결에 됫박을 든 채 행렬에 따라 나와 만세를 부르는 쌀장수도 있었고 평소 친일파라고 지목되던 사 람들도 참가했으며 걸인들까지도 기뻐 날뛰었다 는 최한영의 회고는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다. 116)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시위 행렬은 오늘날의 충장로와 금남로를 거쳐 우편국 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우리도 잡아 가두라 며 경찰서까지 몰 려 갔으나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재향군인과 소방조까지 동원, 구타와 폭행 끝에 이 날만 100여명 이 체포되었다. 117) 수피아 여학교의 경우 전교생이 참가하여 교사 2명과 학생 21명 등 23명이 투옥되 었다. 118) 다음날인 11일에도 오후 5시 숭일학교 학생들과 농업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300여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13일은 광주 큰 장날 모인 1,000여명의 장군들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40여명이 또 다시 체포되었다. 119)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이며 광주 제중원(현재 기독병원) 회계원으로 근무하던 황상호는 서울과 광주 의 만세운동에 모두 참여했다. 서울에서 투쟁 중에 윤익선 명의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 1, 2호를 112) 박이준, 2001, 129쪽 : 전라남도지 8, 104쪽 113) 김복현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국가기록원 문서 CJA ) 114) 오늘날 광주광역시 남구 사직4동과 동구 불로동 충장2가를 연결하는 다리인 부동교 주변에 여린 장이다. 부동방장 이라고도 했다. 광주 큰 장(공수방장)은 음력 2일, 7일 광주 작은 장은 음력 4일 9일을 주기로 하였으며 1928년 광주천 직강공사 이후 광주큰장과 합쳐 현재의 광주공원 옆 사정시장으로 옮겼다. 광주 남구 마을지 115) 광주일보 ) 전라남도지 8, 105쪽 117) 3.1만세 운동에 앞장 선 민족학교 - 광주 수피아 여고, 사학, 28쪽 118) 전라남도지 8, 105쪽 119) 황상호 등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국가기록원 문서 CJA ) 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3 보았던 황상호는, 3월 10일의 투쟁 이후 광주에서도 이와 같이 독립 시위를 위한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심했다. 함께 제중원에 근무하던 홍덕주(홍덕주), 장석조(장석조)와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를 제 작했다. 전국의 만세 시위 소식과 고종 독살설, 파리 강화 회의 등 국제 정세에 관한 소식을 실은 조 선독립 광주신문 은 3월 13일 광주 큰 장날 광주 시장과 시내에 배포되었으며 이날 만세 시위를 촉발 하는 역할을 했다. 신문은 광주에서 만세 운동이 그 만세 소리는 생을 조선에서 향유하는 금수초목 조차 감동시켰다 조선의 봄은 이미 왔다. 우리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한 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목적을 향해 나아갈 뿐 이라고 선언했다. 황상호와 동지들은 14, 15일 이 틀간 다시 조선독립 광주신문 2호를 제작하고 18일 광주 큰 시장 장날 다시 배포했다. 2호는 조선 은 한 사람, 한 단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 며, 남녀노소를 불문한 우리 2천만 동포로 이루어진 것 이라고 했다. 그런데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포를 위해 무형의 쇠사슬을 끊고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백절불요의 결심으로 전진 하다 구속되어 있으니, 우리도 묵시하지 말고 마땅히 결 속하여 함께 용맹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광주 전남 지역 젊은 학생들의 궐기를 호소하 고 있다. 120) 이들은 조선독립 광주신문 을 4호까지 발간, 배포하다 구속되었다. 121) 조선독립 광주신 문 은 영암이나 목포 등 전남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운동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기독교도와 청년학생들이 대규모로 구속되자 보통학교 학생들도 나섰다. 4월 8일에는 광주공립보 통학교의 졸업반인 4학년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4학년 급장인 최영섭이 주도하여 8일 동맹휴교하고 광주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는데, 일제 경찰에 누설되어 강 제 해산되었다. 122) 4월 25일에는 숭일학교 학생들이 다시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23) 목포에서도 기독교인과 청년학생들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2 8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돌아온 유학생 남궁혁( 南 宮 赫 )이 목포에 돌아와서 3 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남궁혁과 오도근( 吳 道 根 ), 김영주( 金 永 周 ), 박상렬( 朴 相 烈 ), 권영례( 權 寧 禮 ), 오재복( 吳 在 福 ), 이금보( 李 今 福 ) 등 지역의 청년학생들이 시위운동을 준비했다. 이들과 별개로 서상봉( 徐 相 鳳 )을 중심으로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상봉은 유진 벨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1898년 목포 양동교회 설립부터 참여한 목포 기독교계의 원로였다. 서화일( 徐 化 一 ), 박여성( 朴 汝 成 ), 곽우영( 郭 宇 英 ), 강석봉( 姜 錫 奉 ) 등 양림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이 서상봉의 집에 모여 시위를 준비했다. 학생과 기독교인들은 협력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제작하고 4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4월 8일 새벽부 터 선언서, 경고문, 태극기를 집집마다 투입하는 한편, 기독교인들이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 을 동원하고 오재복, 이금득, 박상오( 朴 相 五, 17세)는 목포보통학교 학생들을, 박상렬은 목포상업학 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학생들을 설득하는 작업은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어 4월 4일 권영례 120) 위의 판결문. 신문 내용은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다. 121) 전라남도지 8, 107쪽 122) 박이준, 2001, 앞의 논문, 130쪽 123) 대구복심법원, 1919, 권영례 외 판결문, 국가기록원 관리번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91

94 가 상업학교 2학년 반장인 정윤기를 시위에 참가하도록 설득했고, 박상렬은 4월 8일 오전 상업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을 설득하여 15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다. 124) 광주 전남 지역의 3 1 운동 시위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것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서 울의 운동에서도 이미 3월 1일 민족대표들과는 별도로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 고 운동을 전개했지만, 3월 5일 남대문역의 시위는 기왕에 운동을 계획했던 핵심 그룹 외에도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 세력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서는 운동이 확산되는 3월 하순 이후에 학 생 청년 그룹들이 줄어들고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체화하는 데 비해, 전남은 이런 현상이 많지 않고 청년 학생 그룹들이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청년 학생이라고 해도 보통학 교 교사, 학생, 중등학교 학생, 최하위 관료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젊은 이 그룹은 3 1운동을 통해 이후 1920년대 민족 운동의 주체로서 스스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역사적 으로 형성되는 사회계층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전남지역의 영암, 곡성, 영광, 함평, 여수, 담양 등지에서도 청년 학생층이 시위를 주도했다. 보통학 교 교사나 면서기 등 시위 주도자들은 지배기구의 말단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근대 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서 보통학교 학생들과 지역의 청년층을 조직하여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또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기도 했다. 영암에서는 영암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조극환이 주도했다. 3월 11일 영암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관헌이 눈치채고 감시를 강화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3월 20일에도 몇 곳에서 밤에 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는 산호( 山 呼 )투쟁을 벌였 고, 125) 4월 10일 영암읍 장날 학생과 시민들이 집결하여 읍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126) 담양에서도 정기 환( 鄭 基 煥, 당시 24세 농업)이 국한종( 鞠 漢 鍾 지주회 서기), 정경인( 鄭 璟 仁 군청 雇 員 ), 임민호( 林 玟 鎬 면작조합 주사) 등 청년들을 만나 만세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127) 시위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3월 18일 대규모 시위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시장 곳곳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완도에서도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서울에서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던 송내호( 宋 乃 浩 )가 소안면의 정남국( 鄭 南 局 ), 최형천( 崔 亨 天 ), 신준희( 申 俊 熙 ), 김경천( 金 景 天 ), 강정태( 姜 正 泰 ) 완도읍의 나봉균( 羅 鳳 均 ), 최사열 등과 협의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 15일 완도읍에서 수백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128) 영광에서는 서울에서 3 1운동에 참여하고 돌 아온 조철현( 曺 徹 鉉 ), 류일( 柳 一 ) 등과 청년 정인영( 鄭 仁 英 ), 보통학교 교사 이병영( 李 秉 英 ), 박태엽( 朴 泰 燁 ), 그리고 읍내 유지 이좌근( 李 佐 根 ), 조병현( 曺 炳 鉉 ) 등이 만세 시위를 준비하여 3월 10일 시장에 124) 전라남도지 8, 114쪽호 CJA ) 안종철, 김준, 정장우, 최정기, 1995,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 사회운동, 새길 영암군지편찬위원호, 1998, 영암군지, 영암군 126) 이들 중 정경인, 임민호 등은 이후 담양청년운동의 주도자가 된다. 권경안, 일제강점기 담양지역 鞠 씨의 有 志 활동, 지방사와 지방문화 10권 1호, 320~321쪽 127) 이균영, 해방의 땅 소안도, 사회와 사상 1989년 9월호, 1989, 237쪽 128) 전라남도지 8, 112~113쪽 9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5 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철현이 연설을 한 다음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14일에 는 영광보통학교 학생 12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오자 군중이 합류했다. 영광군에서는 두 번 의 시위에서 많은 청년학생들이 검속당하자 보통학교 졸업생 조희태( 曺 喜 兌 ) 등이 3월 27일 다시 만 세 시위를 시도하는 등 전남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지속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129) 이 밖에 해남, 강 진, 광양,무안, 나주 등지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만세운동이 감행되었다. 전남은 의병투쟁의 전통이 강력한 곳으로 3 1운동에서도 유림들이 주도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순 천군 낙안, 광양, 보성, 구례, 장성군 모현리의 만세 시위가 유림들이 나선 대표적 사례들이다. 다만 유림들의 투쟁은 학교나 지역 공동체, 교회 등의 조직이 개입되지 않아 단독으로 시위를 벌이는 사례 들이 많았다. 그러나 순천의 낙안은 유림들이 주도했지만 조직적인 투쟁을 벌인 경우다. 순천군 낙안면은 원래 낙안현으로 죽산 안씨 등 대대로 유림 세력이 강한 곳이었으며 의병장 최익현 의 영향이 크게 미치고 있었다. 낙안면 하송리의 김종주( 金 鍾 胄 )는 최익현 진여에 참가한 바 있었고, 1914년 최익현 휘하에서 활약하던 임병찬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호남유사( 湖 南 有 司 )로 참여 했다. 이병채( 李 秉 埰 ), 안주환( 安 周 煥 ), 안규휴( 安 圭 休 ), 안호영( 安 鎬 瑩 ) 등 이 지역 유림들은 일제 국 권 침탈과 일진회의 친일 행위를 규탄하는 격문을 내기도 했다. 130) 대한제국 내관을 지낸 안호영이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등 문서들을 가지고 내려와 이병 채, 안규휴, 김종주 등 낙안의 유림 지도층과 만났다.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의 변화, 3월 1일 이 후 전국적인 만세 운동의 상황을 논의하면서 이들은 낙안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131) 이들은 먼저 4월 2일 낙안 유림의 지도층 8명을 모아 도란사( 桃 蘭 社 ) 를 만들었다. 다음날인 3일에 는 직접 항쟁을 이끌 젊은이들 33명이 모여 이팔사( 二 八 社 ) 를 꾸려 시위를 위한 조직을 구비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팔사는 상사( 喪 事 )를 서로 돕기 위한 위친계로 가장했다. 낙안의 3 1운동 참여자들이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 것은 이미 4월이었으므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 질 때였다. 이들은 감시와 탄압을 허술하게 하고 항쟁을 효율적으로 지속하며 그 영향을 확대하기 위 해 역량을 셋으로 나누고 세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를 벌였다. 먼저 4월 9일 전평규( 田 平 圭 ), 안덕환 ( 安 德 煥 ), 안응섭( 安 應 燮 ) 등 이팔사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벌교 장좌리 아래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13일에는 낙안읍장에서 도란사 지도층이 직접 나섰다. 읍성 서문 밖 장터에서 김종 주가 국권 회복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를 부르자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했다. 이들이 독립기를 내세우고 서문으로 행진하자 일본 헌병들이 막아섰다. 유림 유흥주( 劉 興 柱 )등은 보초를 밀어 내고 성 내로 진입을 시도했고, 김종주는 총검으로 밀어내는 일본 헌병과 싸우다 손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 다. 132) 다음날인 4월 14일 다시 벌교 장터에서 안규삼, 안용갑, 안상규 등이 독립기와 태극기를 앞세 129) 독립운동사 3, 593~595쪽 130) 박이준, 2001, 앞의 논문, 131쪽 131)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1919, 유흥주 외 판결문,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 )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1919, 정성련 판결문,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93

96 우고 시위를 벌였다. 유림들은 단독으로도 만세 시위를 벌였다. 옥룡면에 거주하던 41세의 유생 정성련( 鄭 星 鍊 )은 1919년 3월 27일 광양 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시장 한 가운데서 대나무에 태극기를 매달아 높이 들고 휘 두르며 독립만세를 먼저 크게 세번 외쳤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으나 곧 순찰 중이던 경찰 에게 연행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133) 이 시위는 돌발적이기는 했으나 4월 초 광양에서 본격적인 시위 의 신호탄이 되었다. 구례에서는 3월초부터 천도교도들이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붙이면서 심상찮은 분위기가 조성되었 다. 3월 24일 구례읍 장에서 노학자 박경 현( 朴 敬 鉉 )이 만세를 선창하여 시위가 시작되었다. 박경현은 일제의 폭정을 비판하고 독립만세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연설까지 했고, 그의 선창에 따라 군중이 만 세 시위를 벌였다. 134) 순천에서는 4월 7일 유생 박항래( 朴 恒 來 )가 순천 남문 위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지켜보던 군중들이 호응하여 남문 아래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135) 화순의 유 생 조국현, 조경환, 노형규 등도 3월 15일 산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136) 다음에는 천도교의 만세운동을 살펴보자. 동학농민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탓도 있었겠지만, 천도 교 교단은 3 1운동 거사계획을 전라도 지방에도 전달했고 이에 따라 전남 지역 천도교인들도 다양 한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했다. 인종익( 印 宗 益 )은 1919년 2월 28일 천도교 중앙총부의 명을 받아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독립선언 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에 대해 전달했다. 전남의 천도교 교구에는 전북 지방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는데, 3월 2일 경 구례, 순천,여수 지역의 천도교인들이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3월 2일 밤 김 공현( 金 工 鉉 ), 허탁( 許 鐸 ), 박흥래( 朴 興 來 ), 강정택( 姜 正 澤 ), 박성래( 朴 誠 來 ) 등 구례의 천도교인들은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각 지역별로 나누어 군청, 면사무소, 나루터 게시판, 주재소 게시판 등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마다 붙였다. 윤자환( 尹 滋 煥 ), 강형무( 姜 螢 武 ) 등 순천의 천도교도들도 3월 2일 밤 순 천의 군청, 면사무소, 헌병대 게시판과 순천읍성의 4대문에 독립선언서를 붙였고 해룡면, 광양군 광 양면 등지에도 독립선언서를 게시했다. 137)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곳은 장흥이었다. 장흥은 이미 1906년 천도교 교구가 설치될 정도로 세력이 큰 곳이었다. 장흥 출신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의 임원이었던 신명희( 申 明 熙 )가 3월 1일 무렵 직접 내려와 독립선언서와 거사 사실을 알렸다. 장흥 교구장 김재계( 金 在 桂 )가 서울에 다녀온 뒤 장흥 의 천도교인들은 면을 나누어 연락책임자를 정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김재계, 김재반( 金 在 班 ), 황생주 ( 黃 生 周 ), 황업주( 黃 業 周 ) 등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5일 장흥 장날 황생 133)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1919, 박경현 판결문,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 ) 전라남도지 115~116쪽 135) 전라남도지 122쪽 136) 조규태, 앞의 논문, 235~236쪽 137) 조규태, 앞의 논문, 238쪽 9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7 주, 황업주 등이 선언서를 배포하고 김재규, 김재반 등이 만세를 부르며 수백 명을 모았고 시위를 전 개하였다. 다음날 주모자들이 대거 체포되었으나 장흥군 일대에서 천도교 주도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3월 20일 대덕면에서도 수백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4월 초에는 용산 등 7개면에서 봉화 시위가 전 개되었다. 137) 고흥군에서는 4월 14일 천도교도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게 도양, 금산, 봉래, 점암 등 지 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진도와 강진에서도 천도교인들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거나 시위를 벌였다. 3) 토론 이상에서 광주 전남의 3 1운동의 항쟁은 목숨을 건 싸움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결속을 과시하며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는 축제이기도 했다. 마을 잔치가 바로 독립 축하의 자리가 되는 것에 대한 거부 는 없었다. 무단의 철권을 휘두르던 식민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시위의 양상이야말로 3 1운동의 민중적 성격을 보여준다. 3 1운동은 그야말로 격렬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실제 어떻게 독립이 될 지에 대해서는 그 야말로 막연하기 그지없는 투쟁이었다. 민중에게 전해진 것은 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다, 만세를 불러야 한다 는 막연한 사실 혹은 당위였을 뿐이다. 138) 이 두 정보가 결합해서 이미 독립이 되었으니 만세를 불러야 한다 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비어 있던 독립의 방법을 채웠던 것은 민 중의 행동이었고, 이것이 농민 봉기, 직접적인 폭력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폭동적 양상은 농민공 동체들이 직접 개입한 시위에서 두드러진다. 경기도의 사례를 보면 시위 계획은 마을 주민들에게 통 문이나 격문으로 배포하거나 마을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놓아 알렸다. 공적이고 집단적으로 전개되 었으며 이런 시위는 대체로 주재소, 면사무소나 그 종사원들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전개되었다. 139) 전 남의 경우에도 광양에서 시위를 준비한 김영호와 박용수 등은 읍내 게시판에 주민들의 참여를 요구하 는 전단을 붙이려 했는데, 그 내용은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려 하니 4월 1일 뜻 있는 사람은 성내로 오라. 오지 않는 자는 집에 불을 지르겠다, 본 군민은 모두 오라 는 것이었다. 140) 그런데 전남지방은 이런 농민의 직접 행동적 성격이 다른 지방처럼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격문을 내걸어도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기는 경우보다는 일부 학생들이나 교인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다 른 지역보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컸던 터라 대규모 시위를 이끌만한 전통적인 사회 주도층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새로운 사회 집단은 아직 형성 중이었다. 또 다른 지방에 비 해 천도교의 세가 약하고 기독교 세력도 지역의 곳곳까지 완전히 뿌리 내리지 못했던 것도 운동 중심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141) 상대적으로 기독교가 일찍 자리 잡은 광주와 목포에서 운동 이 활발했던 것도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반증이 될 것이다. 1910년대 말 전남은 다른 지방에 비해 지 138) 천정환, 2009, 앞의 글, 284쪽 139) 배성준, 2009, 앞의 글, 302쪽 140)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1919, 김영호 등 판결문,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 ) 박이준, 2001, 앞의 논문, 141~142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95

98 주의 숫자가 적고 자소작이 많았다. 특히 일본인 농장, 부재 지주 소유의 대농장이 많았으므로 재촌 지주 의 비중이 더욱 적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기간 동안의 탄압으로 공동체적 저항의 기반 이 약화되었다. 이 때문에 시위의 전개과정에서 마을 공동체가 직접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을 가 능성이 높다. 3 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양상 중 하나는 전국적인 조직망은 고사하고 지역 전체를 아 우르는 통일된 지도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확산되어 간다는 점이다. 조직적인 지시가 아 니라 지역과 지역 사이에 투쟁의 모방 이 일어나는 것이며 이는 비가시적 영역으로 민중적 정체성 을 확산시켰다. 우리 지역(동네)에서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의식은 전남의 3 1운동에서도 두드 러진다. 만세 시위를 하는 것은 좋은 일, 올바른 일이며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세의 참여가 공동의 윤리로 제시되면서 민족 은 더 분명한 정체성의 근거가 되 었다. 1920년대 청년운동이나 농민운동이 대부분 3 1 운동 참여자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민중의 마음 속에 3 1운동을 주도한 사람이나 단체들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온 나라 방방곡곡을 휘몰아친 이 민족운동 의 열풍은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쳤다. 장을 보러 갔다 참여하거나 구경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더라도 젊은이라면 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거나 횃 불을 들고 만세를 부른 경험은 다 겪게 되었다. 어떻게든 민족 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후 민족 과 민족운동에 대한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남 지방의 3 1운동은 농촌공동체를 근거로 하는 봉기의 성격이 약한 반면, 지역 보통학교 졸업 생들이나 학생들이 시위를 조직하고 투쟁을 이끌어갔다. 담양, 영암, 해남, 강진, 곡성, 영광, 나주 등 이 대표적이며 광주, 목포의 경우에도 기독교와 함께 학생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 1 운동 1년 후인 1920년 봄 해남의 우수영이나 완도의 고금도 등에서 보통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비슷 한 양상의 만세 시위가 다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은 전남 지역에서 청년 학생층의 강력한 역할을 보여 준다. 3 1운동은 서당에서 한학 수학과 보통학교에서 신식 교육 이수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고 신식 교육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갖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3 1운동에서 학생 들의 두드러진 역할은 신식 교육에 대한 조선 민중의 신뢰 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42) 전남의 3 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은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미 1917년부터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철( 金 澈 )이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국민대표회의 의정기 초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에는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를 버티는 기둥역할을 했다. 143) 광주의 시위를 주도한 정광호도 임시의정원 의원, 국민대표회의 전라도 대표 등을 맡았고, 장산도 시위를 주도한 장 병준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국내에 잠입하여 조직활동을 수행했다. 142) 오성철, 식민지 보통 교육의 연구, 교육과학사 143) 안종철 외,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 사회운동, 한울아카데미, 52~53쪽 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9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조직도 다수 결성되었다. 광주군 효천면의 유한선( 劉 漢 先 ), 본촌면의 이주상( 李 周 庠 ), 비아면의 허원삼( 許 元 三 ), 나주군 최종열( 崔 鍾 烈 ), 김양숙( 金 良 淑 ) 등이 국민회를 조 직했다. 이들은 수십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를 모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며 비밀 활 동을 수행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광주군 서창면의 김홍두는 1920년 7월 상하이로 건너가 임 시정부 관계자들을 만나고 돌아와 전라도 연락기구를 설치하려 했으며, 광주와 화순, 곡성군의 여러 지사들이 임시정부의 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 검거되기도 했다. 144) 또한 만세운동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시도되었는가 하면, 전남의 진도와 고금도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3 1운동을 재현하려는 시도 자체는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3 1 운동이 한국인들의 마음에 강렬한 민족과 민중의 정치적 이미지를 새겨 놓았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독립할 수 있으며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사실, 무지해 보이는 민중들조차도 민족의 정치 속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운동의 시대가 시작될 터였다 년대 전남의 민족운동 1) 청년운동 1920년대 청년운동은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청년회를 국내 에서 전개된 모든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주체로 설정하고 청년회의 설립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초 반 청년회들은 대지주, 자본가, 그리고 일부의 지식인 청년들이 주도했다. 또 청년회가 포괄하는 공간 적 범위 또한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나주청년회, 광주청년회, 목포청년회 등등 내노라 하는 청년회들 조차도 실제로는 옛 읍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45) 1920년대 전반기에 활동한 청년회 가운데 이르게는 1910년대 창립된 청년회도 있지만, 거의 모든 청년회가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창립되었다. 그만큼 청년회를 만든 주체들은 3 1운동의 영향을 강력히 받았다. 벌교청년회는 3 1 운동으로 해산당했다 재건했다. 1920년대 전남의 가장 대표적인 청년회였던 광주청년회도 기실 3 1운동 주체들의 하나인 1910년대 신문잡지종람소 그룹들이 중심 이 되어 만든 것이었다. 청년주체들은 3 1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다음 1920년대 문화정 치로 형성된 정치 공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청년회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지역사회를 선도할 사회적 영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많은 사례연구에서 이들이 대지주, 자본가와 지역사회의 젊은 지식 인들이라는 사실을 밝혀 놓고 있다. 146) 1920년대 청년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강연, 야학 144) 전라남도지 8, 107쪽 145) 안건호, 1995, 앞의 글, 62쪽. 보성청년회는 가입하려다 외부의 압력에 의해 탈퇴했다 한다. 동아일보 ) 앞의 이애숙, 박찬승의 각 연구 및 김일수, 1920년대 경북지역 청년운동,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1995, 앞의 책 참조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97

100 등의 교육과 계몽활동이다. 청년회가 무엇을 지향했는지는 그 조직구성에서도 드러나는데, 1920년 대 초반 전남지역의 많은 청년회들이 회장단과 서무부에 이어 덕육, 지육, 체육의 3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147) 지, 덕, 체의 조화를 갖춘 인간이야말로 이상적인 청년이라는 문화운동론적 지향이 조직에도 투영된 것이다. 지육, 덕육, 체육을 통해 전인적 인격으로 청년주체를 양성해가는 과정은 개인의 자각 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수양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활동 또한 사회적, 개인적 수양을 목표로 하는 선전과 강연을 중심으로 한다. 순회 강연이나 연설도 이 시기 계몽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더욱 근대적인 대중계몽의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연극과 활동사진이었다. 청년회원들이 공연하는 신 파소인극은 상당한 인기를 거두었고, 각 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48)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회가 등장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약칭 청 총)의 출범은 청년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청년운동 의 근본방침을 청년대중에게 민중적 의식을 고무하고 계급적 의식을 주입하는 것으로 정하고 청년의 계급적 대단결을 목표로 내세우는 등 사회주의적 지향을 명확히 했다. 청년운동에서 사회주의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기존의 청년회를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 청년회의 혁신 은 주로 이런 사회주의적 전환을 가리키는 것이 었다. 혁신은 조직과 이념, 활동의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전남 지방에서 기존의 군단위 청년회가 사회주의적으로 혁신 한 사례에는 광주, 광양, 구례, 나주, 담양, 순천 등 10여 개 사례가 있다. 기존 의 청년단체들을 사회주의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는 강령과 목표에 직접적으로 혁명 을 명시하지는 않더라도 신사회 건설, 대중본위, 운동전선 등 맑스주의적 내용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었다. 두 번째는 청년회 내부의 성격변화를 위해 연령을 제한하는 문제였다. 예를 들어 노장파 의 청년이 모든 권리와 세력을 장악 하고 있으니 18세 이상 30세 이하 표준청년으로 제한하고 노장 청년의 탈퇴 를 요구한 벌교청년회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149) 그 후 영암청년회, 광양일광청년회, 목포무산청년회, 목포청년회, 여수청년회 등 30세로 연령을 제한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기존 청년회의 개조와는 별개로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 계층별 청년회 조직 방침도 청년운동 전 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1926년 2월 전남해방자동맹은 도시에서는 공장을 중심으로 하여 노동청년단 체를 조직하고 농촌에서는 농민청년단체를 조직한 다음, 각각의 노동청년단체와 농민청년단체에 지 식청년과 일반 무산청년이 참여하는 청년회를 조직하는 것을 이상적인 방침으로 삼았다. 150) 청년총동 147) 목포청년회는 서무부, 재무부, 덕육부, 지육부, 체육부를 두었고 (동아 ), 보성청년회는 의사부, 덕육부, 체육부, 지육부를 두었다.(동아 ) 벌교청년회도 서무, 지육, 덕육, 체육의 조직을 운영했고 장흥청년회, 광주청년회도 모두 마찬가지다. 148) 목포청년회 소인극단은 제주와 전남일대를 순회했고 통영 청년회 소인극단이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순천어시장에서 소인극 공연은 관중이 천여명이 운집했고 고흥, 담양, 보성, 벌교, 광주, 무안의 여러 도서 등 거의 모든 청년회가 소인극을 공연했다. 목포청년회는 활동사진 순회상영도 함께 했는데, 스스로 제작한 것이 아니다 보니 계몽적 성격은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동아일보 ; ) 시대일보 ) 全 南 의 解 放 運 動 者 同 盟 定 期 總 會, 동아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1 맹 또한 1926년 3월 각도연맹간부회의에서 노동청년, 농민청년, 그리고 지식청년까지 계급 계층별로 청년단체를 조직하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결의했다. 151)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많은 노농청년회, 무산청년회가 조직되었으며 면이나 동리 단위의 청년회 들도 1920년대 전반에 비해 급격히 늘어났다. 이런 경향이 확장되면서 노동청년회, 무산청년회 등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광양노농청년회(1924), 목포무산청연회(1924), 순천노동청년회(1925), 능주무산 청년당(1925), 능주노농청년회(1925), 담양노동청년회(1925) 등이 그것이다. 이전부터 청년회의 활 동이 활발하던 곳에서 무산청년회가 조직되는 곳이 더 많았다. 목포, 순천, 광양이 모두 그런 지역이 었다. 이 시기 도단위의 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도 시작되었다. 1925년 구례, 광양, 순천, 보성 등에서 화 요회계열이 중심이 되어 전남동부청년연맹을 조직했고, 1926년 서울청년회계가 중심이 되어 전남청 년연맹을 만들었다. 또 군 단위의 조직적 연대를 위해 연맹체의 조직이 시도되었다. 무목청년연맹, 순 천청년연맹, 장성청년연맹, 완도청년연합회, 화순청년연맹, 고흥청년연맹, 광양청년연맹 등이 모두 1925~26년 사이 조직되었다. 152) 앞서 살펴 보았듯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지도부에서는 각 군에서 청 년단체들의 연합체를 만들고 이것이 상승하여 도 청년단체 나아가 청년총동맹을 구성해야 한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 청년단체들의 내부 조직은 회장제도에서 위원제도로 거의 변화되었고 지육, 덕육, 체육이니 교풍이니 하는 조직도 사라졌다. 대신 사회부나 노동부가 등장했고 청년단체의 활동 중에서도 조사의 기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 먼저 대중의 현실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제기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구례청년당은 서무부, 교양부와 함께 사회부와 노동부를 두어 덕육, 지육, 체육의 수양주의적 조직관이나 식산, 사업, 교풍의 조직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다. 153) 또 이렇게 조직 을 변화시키면서 청년단체들의 활동도 달라졌다. 조사활동은 주로 노동자나 농민들의 생활 조사, 소 작쟁의 등의 실태 조사 등이 중심이었고, 사회부나 노동부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대한 지원에 집 중했다. 청년단체들의 연합조직도 노동자 농민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원에 집중했다. 또 청년운동의 구성원들이 실질적으로 노동단체나 농민단체의 핵심 구성원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현실적으로 구분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무안과 목포에 있는 암태청년회, 자은청년회, 비금청년회, 도초청년회, 목포무산청년회 등 5개 청년 단체가 먼저 암태청년회관에서 무목청년연맹회란 이름으로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이후 지도청년수양 회, 해제청년회, 임자청년회가 새로 합류하여 1925년 1월 10일 무목청년연맹을 창설했다. 배치문이 의장이었고, 김상수, 송기화, 박복영, 김해룡, 박승억 등이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미 암태도에서 격 151) 안건호 박혜란, 1995, 앞의 글, 102~103쪽 152) 동아 ; ) 군연맹을 발기, 동아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99

102 렬한 소작쟁의가 아직도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도초도에서는 소작쟁의가 발생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박복영은 암태소작인회의 총대표위원이었고, 송기화는 자은소작인회의 임시의장이었으 며 배치문은 목포노동운동의 핵심이었다. 154) 인적 구성이나 지역 사회의 관심과 요구 모두 청년운동 이 노동과 농민운동 등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회주의가 급속히 청년들 사이에서 확장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확대되었다. 청년운동의 역량이 강화되면서 이 힘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지역에서 청년들의 힘을 전국적인 차원으로까지 상승시켜야 실질적인 정치 역량으로 만 들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비로소 맑스레닌주의적인 조직이론이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투쟁 을 중시하는 방향전환은 신간회와 각지 청년동맹을 결성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1927년에서 28년 사이 전남 여러 군에는 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기존의 청년회는 자진 해산하여 청년동맹으로 흡수되 거나 청년동맹의 면 지부로 전환했다. 1920년대 청년운동은 실제 민족운동의 거의 모든 영역을 지원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민족주의가 주창한 물산장려나 민립대학설립 등도 결국 청년회에서 진행했으며, 급격히 확산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조직들도 실제로는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하거나 그들의 후 원을 받았다. 사회주의 세력이 급격히 세력을 확대했지만 실제 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던 핵심 도 지식인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1928년 이후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제 기되고 계급이 극도로 강조되면서 청년운동이 민족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약화되었다 년대가 청년운동의 시대였다면 1930년대는 계급운동의 시대가 되었다. 2) 농민-노동운동 전남에서는 3 1 운동 직후부터 다양한 소작인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주나 농장 회사들이 소작인들을 조직하고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는데, 조선흥업주식회 사의 소작인들이 조직한 흥농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흥농회는 소작료를 전체 수확의 반 이하로 하고, 마름을 없애는 등 소작인들의 이익 증진도 내세웠지만, 새로운 농산물 종자의 배급이나 물품 공동 구 입, 생산물 품평회 개최 등 생산성의 증대를 더 큰 목표로 삼았다. 155) 언론과 결사, 집회 등 한국인들의 사회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고 농민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커지 면서 1922년 무렵부터 지주측이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소작인 단체들이 급격히 늘어나 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조선소작인 상조회였다. 조선소작인상조회는 대표적인 친일파인 송 병준이 스스로의 정치 기반 확대를 위해 만든 단체였다. 1922년 3월 조선소작인상조회 광주 지회가 154) ; 시대일보 박복영은 1925년 1월 4일 암태소작인회 회의에서 총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일보 ) 김점숙, 1993, 1920년대 전남지방 농민운동, 역사문제연구소, 앞의 책, 31쪽 1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3 만들어졌고 1923년까지 영암, 영광, 함평, 나주, 장성, 구례, 화순, 해남 등에 지회가 조직되었다. 일 부 조선소작인상조회 지회는 군수 등 일제 관료를 고문에 추대하는 등 친일적 성향을 드러냈으나 다 른 지회들은 적극적으로 소작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민족운동에 참여하며 성격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1920년대 전반 소작인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순천, 광양, 여수 등 전남 동부 지방이었다. 1923년 2 월 현재 전남의 23개 부군에 조직된 농민운동단체 26개 중 50%인 13개가 순천, 여수, 광양, 보성 벌 교 지역의 단체였다. 156) 순천에서는 1922년 말부터 여러 마을과 면에서 농민대회 혹은 소작인총회 같 은 소작 농민들의 집회가 자주 열리기 시작했다. 순천이나 광양의 농민대회는 면의 소작농민들이 거 의 참여하여 1,000 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면사무소 앞마당이나 학교 운동장 등에 모인 소작농들은 소작료를 4할 이내로 할 것, 소작권을 함부로 옮기기 말 것, 지세공과금의 지주 부담 등을 결의했고 이 내용을 군청이나 경찰서 등에 진정하는 방식으로 대회를 진행했다. 농민대회가 계속 열리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연합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다. 그리 하여 순천의 각 면 농민대회의 대표자 70여명이 모여 1923년 2월 순천농민대회연합회를 결성했다. 157) 농민대회연합회를 주도한 이영민( 李 榮 珉 ), 이창수( 李 昌 洙 ), 김기수( 金 基 洙 ), 박병두( 朴 炳 斗 ) 등은 동 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지국장이나 기자를 맡고 있던 지역사회의 지식인들이었다. 158) 또 앞 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사회주의자들로 제1차 조선공산당 전남 조직의 핵심들이기도 했다. 1924년 노농운동 조직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화요회계는 광주노동공제회 및 진주노동공제회와 함께 조선노농총동맹회를 조직했으며, 서울청년회계에서 이에 대항하여 조선 노농대회준비회를 조직했다. 두 계열의 경쟁 속에서 1924년 4월 18,19일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 가 개최되었으며 전남지방 사회운동 단체는 이러한 조선노농총동맹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9) 이후 전남지방 전체로 농민운동 조직이 급격히 확대되어 갔으며 대표적인 소작쟁의들도 이때 발생했 다. 160) 1924년 전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가 모두 164건인데, 그 중 59건이 전남에서 일어났다 년에는 204건 가운데 105건이 전남에서 발생했다. 건수가 많을 뿐 아니라 투쟁의 강도도 전남 지역의 소작쟁의가 강했다. 그 중에서도 암태도, 자은도, 도초도 등 섬사람들의 투쟁이 치열했는데, 여기에서는 암태도의 사례 를 중심으로 다룬다. 암태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무렵이었다. 암태도에도 청 156) 全 羅 南 道 內 務 部 編, 1923, 小 作 慣 行 調 査 書, 122~124쪽 157) 동아일보 ; ) 이들은 1925년 12월 순천기자단을 조직하여 농민운동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운동 전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지수걸, 1997, 전남 순천지역의 소작인조합운동과 관료-유지 지배체제, 한국사연구 96, 83쪽 159) 김 점 숙, 1993, 1920년 대 전 남 지 방 농 민 운 동, 역 사 문 제 연 구 소, 앞 의 책, 50~52쪽. 박 병 두(순 천 황 전 면 농민대회), 서병기(벌교농민대회), 서정희(광주소작인회), 서태석(암태소작인회), 신동호, 정인영, 정진무, 이영민, 최형천(완도농농연합대성회) 등이 전남 출신으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전남도지 편찬위원회, 1993, 앞의 책, 240~241쪽 160) 조선총독부 농림국, 1940, 朝 鮮 農 地 年 譜, 8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01

104 년회가 등장하며 개조와 혁신의 사조가 도입되었다. 암태청년회를 주도한 사람은 서태석( 徐 邰 錫 )이 었다. 서태석은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는데, 1920년 같이 투쟁을 벌였던 장병준 이나 소안도의 송내호 등 지역의 운동가들이 서울청년회 계열과 인맥이 있었던 영향도 컸을 것이다. 161) 1923년 귀향한 서태석은 암태청년회를 만들고 청년회원들의 열성적 참여 속에 1923년 12월 소작 인회를 발기했다. 12월 4일 암태보통학교에서 서창석( 徐 倉 錫 )을 회장으로 하여 서태석, 박종남( 朴 宗 南 ), 김연태( 金 淵 泰 ), 김봉균( 金 奉 均 ), 박필선( 朴 弼 善 ), 서민석( 徐 珉 錫 ), 김병운( 金 炳 云 )이 간부가 되었 다. 162) 암태소작인회는 창립총회에서 소작료를 논은 4할, 밭은 3할로 인하하는 등을 결의했다. 그런데 대 표적인 지주인 문재철이 소작인회의 결의를 무시하자, 1924년 3월 21일 암태도소작인회는 정기총회 를 열고, 문재철에 대한 소작료 불납 동맹을 체결했다. 분쟁이 3월 26일까지 끝나지 않을 때는 해당 토지에 대해 소작을 중단하는 파작동맹을 체결하고 분쟁으로 인해 소작권이 이동되는 경우에는 소작 인회에서 공동경작하기로 결의했다. 163) 결국 3월 27일이 되자 암태소작인회는 청년회, 부녀회와 함께 면민대회를 열었다. 400여명이 모인 면민대회에서 농민들은 한번 더 지주측에게 소작료를 내려줄 것 을 요구하고,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1916년 면민들이 세웠던 문태현의 송덕비를 파괴할 것을 결 의했다. 지주는 소작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송덕비는 무너졌다. 문씨 일가와 소작인들은 서로 고발했고, 목포경찰서는 소작인측의 서태석, 서창석, 박필선 등 13명을 구속했다. 소작회 간부 들이 대거 구속당하자 암태소작인회는 5월 11일 임시총회를 열어 더 강력한 투쟁의지를 다졌다. 이전까지 암태도 사람들이 일제의 비호를 받는 지주측과 주로 싸웠다면, 소작회 간부들의 석방을 요 구하면서 총독부 권력과 직접 투쟁하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3일 암태소작회는 면민대회를 열고 회 원들이 직접 목포로 나가 석방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1924년 6월 5일 암태청년회 대표 박복영( 朴 福 永 ), 암태소작회 대표 김용학( 金 龍 學 ), 암태부인회 대표 고백화( 高 白 化 )가 앞장 서서 400여명의 군 중을 이끌었다. 섬사람들은 돛단배 7척에 나누어 타고 목포로 나와 목포경찰서로 직행해 13명 구속자 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날 암태도 소작인들이 추가로 합류하여 농성하는 군중은 500여명으로 늘었고, 6월 6일에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몰려가 농성을 시작했다. 일제 관헌의 해산 명령도 거부하 고 농성하던 군중은 구속자들을 만나보겠다고 목포형무소로 가서 면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암태도 소작인들의 목포 원정 시위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소작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 되는 시 점이었던 터라 언론의 관심도 컸고 각지 노동단체, 농민단체, 청년단체들이 성금을 모아 보냈고 조선 노농총동맹에서는 소작쟁의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를 보냈다. 암태도 소작인들이 목포에서 농성을 풀었던 것은 소작인 대표들이 기소 면제로 석방될 것이라 믿었 161) 이기훈, 2013, 장병준의 생애와 민족운동, 도서문화 ) 박찬승, 2010, 위의 논문, 139쪽 163) 동아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5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작인회는 7월 7일 다시 목포로 나가 이 번에는 단식 농성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7월 8일 500여명의 암태도 섬 사람들이 목포로 건너와 목포 지청 검사국으로 달려갔다. 구속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굶어 죽을 때까지 버티겠다고 아 사동맹 餓 死 同 盟 까지 맹세한 섬 사람 중에는 노인과 여자들까지 2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64) 아사동맹의 소식은 첫번째 농성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신문들은 거의 매일 소작농민들 의 농성 소식을 중계하듯 전달했고, 전국 각지의 수많은 단체들이 암태도 농민들을 위한 성금을 보냈 으며 지주측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1924년 8월 30일 경찰서장, 군수, 경찰과장과 노농 총동맹 상임집행위원 서정희 등이 동석한 가운데 문재철과 소작인 대표 박복영이 화해에 도달했으나, 문재철은 차일피일 미루며 타협안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항조직을 만들려 했다. 암태소작인회는 1925년 1월 정기총회를 열었는데, 1천여명이 참가하여 소작인들의 단결력을 과시 했다. 이날 회의에서 박복영을 총대표위원으로 하고 위원 44인을 선출했다. 지주와 소작인 간 충돌이 다시 벌어졌다. 1925년 9월 문재철은 암태도, 자은도, 도초도 등의 지주들로 구성된 다도농담회는 결 성하였고, 이 단체는 다시 소작료를 5할로 하겠다고 나섰다. 165) 이들이 다도농담회 명의로 보낸 소작 료 납부고지서는 5할이 아니라 6~8할이 넘는 것이었다. 1926년 암태소작인회는 암태농민조합으로 조직을 변경했다. 농민조합은 기존의 마을 농노단을 농 민단으로 바꾸고, 소작권의 영구 보존, 논의 소작료 4할, 마을마다 야학 개설 등을 결의했다. 166) 1926 년에도 암태도에서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은 계속 일어났다. 주로 지주들이 소작권을 함부로 옮 기면서 신구 소작인이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농민조합이 소작권 이동을 반드시 막을 것을 결의하며 싸움은 계속되었으나, 이동된 소작권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다음에야 암태도 소작투쟁은 마침내 진정 되었다. 167) 한편 암태도 소작쟁의의 승리는 다른 지역의 소작쟁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자은도, 도초도 등지에서도 가열찬 투쟁이 전개되었고, 사태가 지나치게 악화되자 총독부가 개입하여 조정하 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소작료 4할이라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농민의 정신과 힘은 그 만큼 성 장했고, 삶의 주체성은 증강되었다. 한편 소작쟁의가 격렬해지는 가운데 농민운동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의 영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이념의 영향이 커지면서 지역적 연대와 노동운동 단체와의 연계 투쟁, 군이나 도 단위의 상 위 조직 건설 등의 목표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개별적인 지주나 지방 권력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전체,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로 농민운동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4년 3월 4일 전라남북도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전라노농연맹회를 결성했 164) 동아일보 ; 조선일보 ) 지주측의 여러 가지로 소작료를 다시 올리고 소작인회에 앙갚음하려 했으나 소작인들은 스스로 감정한 소작료를 내는 것을 관철시켰다. 박찬승, 2010, 앞의 글, 164~166쪽 166) 동아일보 ) 동아일보 ; 매일신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03

106 다. 전라노농연맹회는 전북보다는 전남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농민단체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00개 가맹단체 중 전남의 농민단체가 75개, 노동단체가 14, 노농혼성단체가 2, 청년단체가 4개였다. 168) 전라노농연맹회는 화요회계가 주도하는 단체였으므로 여기에 참여한 단체들은 대부분 3 월 9일 남선노농동맹에도 가담했다. 호남, 영남과 충청 지방까지 포괄하는 단체였으나 여기에도 전남 의 농민단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남선노농동맹 집행위원 49명 가운데 집행위원장 서정희를 비롯하 여 20여명이 전남 출신의 노동 농민운동 지도자들이었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발전해가면서 운동 가들은 농민과 노동운동의 조직을 분리시켜 진행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하나의 결과는 농민조 합 설립운동으로 나타났다. 농민조합의 설립운동은 노동자와 농민이 다른 계급이며 사회적 이익이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따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소작인회 나 소작인 조합처럼 소작인만이 아니라 자작농, 자소작농까지 농민운동에 조직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전남 지역에서 이런 변화는 주로 1926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주노농공영회가 1926년 2월 1 일 농민조합과 5개의 직업별 노동조합으로 분리하되, 농민조합은 면단위로 조직했다. 나주면농민조 합, 나신면농민조합, 금천면농민조합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연합하여 나주농민연맹이 만들어졌다. 169) 함평, 무안, 목포, 담양, 화순 등지에서도 유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농민운동을 종합해 볼 때, 1920년대 중반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격렬한 투쟁이 있었고 일부 지역 에서는 농민들이 승리하기도 했지만, 1920년대 후반 전남 지역의 농민운동은 점점 퇴조하게 된다. 대 규모 소작쟁의도 크게 줄었고 농민운동 단체의 활동도 침체되었다. 우선 대규모 투쟁을 이끈 농민운 동의 지도자와 활발히 활동할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운동을 수행할 만한 역량에 큰 타격을 입었다. 비슷한 현상이지만, 농민운동을 실제로 이끌어 나가는데 지식인 청년 출신의 몇몇 활동가들 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의존해야 했던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많은 농민운동가들은 혹독한 탄압에 도 불구하고 농민들 속에서 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운동을 계속했다. 지식인 청년들이라고 해도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일제 식민 지배를 약화시키는 농민운동의 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어서 전남지방의 노동운동 양상을 살펴보자. 일제하 전남지방은 전형적인 농업지대로 공장의 수 가 적었을 뿐 아니라 규모도 작았다. 당연히 노동자의 수도 많지 않았으며 그조차도 한 작업장에 밀집 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자유노동자들이 많았다. 1923년 광주 전남의 사업체와 노동자 수를 전국과 비교해 보면, 사업체 수는 전국의 8.74%, 노동자의 수는 전국 노동자 수의 4.7% 에 불과하다. 특히 사업체 수에 비해 노동자의 수가 훨씬 적었고, 이는 광주 전남 지역 공장들의 규모 도 매우 영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노동운동마저 침체되었던 것은 아니다. 1920년대 전반 노동공제회, 노동친목회, 노동대회, 168)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勞 動 運 動 槪 況, ( 한국민족해방우농사자료총서 2) 80쪽 169) 동아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7 노동조합 등 노동단체가 전남 지역에서 다양하게 조직되었다. 목포 20개, 광주 17개, 순천 16개로 가 장 많지만 광양, 담양, 장성에도 많이 생겨났다. 1920년대 광주 전남 지방에서는 153개의 노동단체 들이 나타나는데, 그중에서 조직 시기를 알 수 있는 111개 단체 가운데 73.9%인 82개 단체가 1924 년에서 1926년 사이에 조직되었다. 170) 농민운동이나 청년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무렵이 가히 광주 전 남 사회운동이 일종의 사회적 붐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자. 광주에는 1920년 노동공제회 광주지회가 조직된 이래 자동차운전수조 합, 임은노동조합, 전라노농연맹, 우치리 노동청년회, 토목공조합, 인쇄직공조합, 철공조합, 점원청 년회, 정미노동조합 등의 단체들이 속속 조직되었다. 목포에도 1920년 전남노동조합 이래 해륙노동 조합, 해협노농연합회, 노동소년회, 노동청년회, 무목노농연맹, 제유노동조합, 자유노동조합, 선하노 조, 정미노조 외 20개 노동단체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광주와 목포처럼 비교적 도시화가 진전되고 공장이 들어섰던 지역에서도 노동자와 농민의 연합단체를 표방한 단체들이 꽤 많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의 형태도 사업장이나 노동자의 직업에 따라 결성하지 않고 지역별로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규모 공장들이 아직 들어서지 않았던 것도 이런 조직형태가 나타나는 이유일 것이다. 장성노동조합, 고흥 노동회, 보성노동회나 보성노동조합, 곡성노동회, 옥과노동회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단체 들은 주로 표준 임금을 제정하고 노동시간의 준수, 노동상황과 생활형편에 대한 조사, 노동자들에 대 한 강연과 야학 활동, 다른 노동단체나 농민단체들과 연대와 후원 등의 활동을 주로 했다. 171) 그런데 점차 노동운동이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 동운동 단체들의 조직을 나눌 필요가 커졌다.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운동가들은 노동운동과 농 민운동을 분리하여 조직하기 시작했다. 노동단체 내에서도 노동자의 직업에 따라 절실한 목표가 달라 지니 직업별 노동조합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다. 1926년 2월 나주노농공영회는 농민조합과 분리하면 서 동시에 운수노동조합, 기공노동조합, 자유노동조합, 임은노동조합, 정미공노동조합 등 직업별 노 동조합을 따로 만들고 이들이 연대하는 나주노동연맹을 조직했다. 172) 함평노농연맹회도 1926년 4월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분리하면서 자유노동조합, 정미노동조합, 고용인조합을 따로 결성하고 이들 이 연대하는 함평노동조합연합회를 만들었다. 173) 이렇게 직종을 단위로 노동조합을 따로 만들면서 이 노동조합들을 연대한 노동운동조직을 새로 만 들어야 했다. 순천노동연맹회( ), 목포노동총동맹( ), 담양노동연맹회( ), 함평 노동조합연합회( ), 보성노동연맹( ), 구례노동연합회( ) 등이 계속 출범했다. 대 체로 1925년 말부터 1926년 초 사이에 많은 단체들이 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70) 전라남도지 8, 209쪽 171) 전라남도지 8, 210~211쪽 172) 동아일보 ) 동아일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05

108 우선 농촌을 배경으로 한 지역노동조합들의 변천은 담양과 함평 지역에서 잘 나타난다. 담양에는 1923년 창립된 노동회가 1924년 4월 담양노농회로 이름을 바꿨다. 174) 지역 내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가입했던 노농회는 1925년 3월 직종별로 따로 조합을 결성하여 수차( 手 車 손수레)조합, 우마차조합, 운반조합, 정미조합을 따로 결성했다. 또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노동자들이 자유노동조합을 만들어, 모두 5개의 노동조합이 1925년 10월 28일 담양노동조합연맹을 창립했다. 광주에서는 노동공제회가 중심이 되어 점원조합, 신문배달부조합, 임은노동조합, 토목공조합, 자유노조, 이발조합 등 7개 단체 가 1926년 2월 광주노동연맹을 창립했다. 광주노동연맹은 노동단체의 촉성, 노동자 상황 조사, 노동 임금 및 시간 표준화, 지역의 다른 부문운동에 대한 안건들을 다루었다. 175) 그러나 광주노동연맹은 화 요회 계열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이라 조만간 통합 논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남 지역의 대표적인 항구였던 목포는 공장도 많았고, 노동운동도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목포의 노동운동은 1925년에 사상단체 전위동맹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영식 배치문 서 병인 조극환 오도근 박제민 등이 주도하는 전위동맹은 목포의 통일적 노동단체로서 직업별 노조 를 조직하고자 1925년에 노동자 실상조사, 노동자간담회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준비에 들어갔다. 그 결과 직업별로 노동조합을 창립하고(제유부 9/27, 면업부 9/28, 자유부 9/29, 정미부 9/30), 176) 이를 기반으로 10월 13일 제유 면업 정미 방직 자유 선하 하차 도매상 노조 등 8개 단체 1,770 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목포 청년회관에서 목포노동총동맹( 木 浦 勞 總 同 盟 )이 창립되었다. 목포 노총은 일차적으로 비조직 노동자의 결성에 노력하여 1925년 11월 목포인쇄공친목회, 목공조 합, 토공조합 등이 목포노동총동맹에 가입했다. 177) 이후 목포노동총동맹은 자유노조 파업과 제유공 파업을 지원하고 연대 사업을 추진했으며 필요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제유공 파업으로 타 격을 받은데다 1927년 말부터 드러난 목포 사회운동의 분열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목포의 노동 운동은 이후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의해 다시 활성화된 다. 한편 노동조합들이 늘어나고 지역별 노동자 연합조직이 활성화되면서 전남지역 전체를 망라하는 사 회운동 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전남의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전남 해방운동자동맹은 1925년 11월 전라남도의 농민단체와 노동단체들을 전남농민총연맹과 전남노동연 맹으로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서울청년회계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1926년 2월 광주에서 광주 정미노동조합, 철공조합, 인쇄직공조합, 지도노동조합, 나주노동연맹, 담양노동연맹, 영암노동회 등 15개 단체들이 참가하여 전남노동연맹 발기회가 열렸다. 이후 전남노동연맹은 노동자 계급 중심의 대중조직을 건설하는 데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174) 동아일보 ) 조선일보 ) 동아일보 ) 김경일, 1992, 앞의 논문, 76쪽 1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9 1920년대 전남지역의 대규모 파업은 주로 목포에서 발생했다. 목포노동총동맹의 산하 단체 중 낮은 임금으로 가장 고통받던 자유노동조합이 먼저 파업을 시작했다. 임금의 통일과 표준임금의 실현을 요 구하며 파업에 돌입한 자유노조는 1925년 12월 8일, 목포노동총동맹의 간부들의 지원 속에 노조원들 이 모두 출동하여 목포노동총동맹의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했다. 또 조합원들에게는 왼팔에 붉은 휘장 을 두르게 하고, 부두 각 요소에서 고용주의 태도와 비조합원의 행동을 감시하게 했다. 178) 12월 12일 에는 임시총회를 열고 표준임금을 철저히 실행하며 이를 지키지 않는 고용주에 대해서는 노동력을 제 공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총회 이후 자유노조는 시내를 행진하며 표준임금표를 배포했다. 179) 자유 노조의 파업에 선박 화물 노동자들도 동정 파업에 나섰다. 노동 현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도 않고 노동시간도 제 각각인 자유노동자들이지만 놀라운 단결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목포 지역의 임금은 상당한 수준으로 상승했다.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표준임금 제정 이후 목포 지역 자유노동자들의 임금 은 약 50%까지 올랐다 한다. 자유노조가 파업 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하자 목포의 제유공 노조도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광주 전 남 지역에서 1920년대 일어난 가장 대규모 파업이기도 했다. 목포에는 식물성 기름을 제조하는 조선 제유주식회사의 공장이 있었다. 1926년 1월 15일 조선제유 목포공장의 노조원들은 제3회 임시총회 를 개최하고 인격적 대우, 임금인상, 시간단축 등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200여 명의 노조 원들은 1원 이하의 임금은 50%, 1원 이상의 임금은 40% 인상을 요구했고, 이전 12시간의 노동시간 을 10시간으로 줄일 것, 또 공장 감독 중 불량한 자를 교체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파업에는 시작부 터 서병인 등 목포 전위 동맹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80) 회사와 노조는 팽팽히 대립하며 파업은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파업 노조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행 상대를 조직하여 목포제유노조 맹파단 구제행상대 라고 쓴 붉은 띠를 두르고 목포 시내는 물론 나 주 광주 영암 진도 완도 방면으로 순회에 들어갔다. 2월 4일에는 파업 20일 간의 전말을 보고 서로 만들어 목포 시내에 배부했다. 제유공 파업은 목포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2월 16일 다른 지역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발견한 목포 시내의 거지패가 남의 밥을 뺏어 먹는 자라며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81) 파업이 오래 지속되자 제유공 파업은 목포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 관심 이 대상이 되었다. 서울청년회가 전국 전국 각지의 동정금을 모아 전달했으며, 2월 25일 전위동맹은 제유노조 파업을 지원하는 연설회를 목포청년회관에서 열었다. 182) 노동자들이 궁핍을 견디며 2개월 이상 파업을 지속하자 회사는 새로운 노동자를 비밀리에 모집해 작업을 재개하고자 했다. 3월 중순 회사는 인근 농촌 지역에서 농민 150여명을 모집하여 한밤중에 공 178) 동아일보 ) 동아일보 ; ) 동아일보 ) 동아일보 ) 김경일, 1992, 앞의 논문, 91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07

110 장으로 들어와 작업을 재개했다. 파업 노동자들도 실력행사에 나섰다. 3월 17일 파업노동자 중 20여 명이 공장을 습격하여 기계를 파괴하여 조업을 못하게 하고 유리창을 깨뜨리고 새로운 노동자들도 폭 행했다. 183) 경찰이 즉각 개입하여 파업단원 20여명과 전위동맹의 핵심 활동가 거의 전부를 연행하였 다. 184) 목포 노총은 경찰의 감시와 지휘부의 부제로 활동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사회운동의 내분까지 겹치면서 공개적인 노동조합 운동은 침체에 접어들었다. 1927년 이후 광주 전남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은 담양 정미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정미업 노동 자들은 정미업소 한 곳에 안정적으로 고용된 것이 아니었고, 임금도 정미양에 따라 지급받았다. 일반 적으로 한 말을 정미하면 30전에서 36전 정도 받았는데, 1927년 정미업자들은 쌀 가격이 떨어졌다고 5전씩 인하하려 했다. 쌀 생산량이 늘어나서 가격이 떨어졌으니 실제 작업량은 더 늘었는데 임금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었다. 1927년 12월 6일 담양정미노조는 정기총회를 열고 일손과 노동량이 증가했 으니 오히려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 담양정미노조의 간사장 정병용은 조선공산당 담양 조직의 책임자였으며 이 파업은 담양지역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정미노동조 합원 250여명은 담양청년회관에서 단식 농성을 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 날인 7일에는 손수레를 모는 담양수차노동조합원도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이 시작되자 정미업자들은 8일 임시휴업에 들 어가게 되었고, 경찰이 양측을 불러 조정이 시작되었다. 결국 노동자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것 으로 이 파업은 종결되었다. 186) 1920년대 전형적인 농업지대였던 전남 지역에서 노동계급은 상대적으로 미약했고, 노동운동의 규 모 또한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목포 지역에서는 농업생산물 가공업이나 일본으로 쌀과 면화 등을 수송하는 산업이 발달했고, 이런 사업장의 자본가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이 시기 식민지에 진출 한 다른 일본 자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저임금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착취 하여 높은 수익을 올렸다. 목포 지역에서 발생한 강력한 노동쟁의는 이런 식민지 수탈구조에 대한 저 항이기도 했다. 일제 경찰 또한 식민지 산업 기반 전체의 안정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파 업 투쟁을 강력히 탄압했으니, 이 시기 노동운동이 민족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3) 광주 항일학생운동 1927년 현재 전남 지역에는 조선인 중등학교로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 광주여자고등 보통학교(광주여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도립사범학교가 있었고, 일본인이 다니는 광주중학교가 있 었다.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인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목포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순천의 매산 183) 동아일보 ) 목포백년회 역사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217쪽 185) 동아일보 , ) 동아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1 학교, 매산여학교 등이 있었으나 초등교육기관에 부수된 각종 학교로 학생 수도 적었다. 187) 목포에 상업학교, 여수에 수산학교 등이 있었지만 인문계 공립 중등학교는 광주고보가 거의 유일했다. 광주 고보도 원래 조선총독부가 설립했던 것이 아니라 1920년 광주 지역 50여명이 출자하여 설립한 사립 고등학교였다. 188) 1922년 조선총독부가 직접 운영하는 관립학교로 전환했고, 189) 1925년에 도지방비 의 보조를 받는 공립학교가 되었다. 한국인들의 교육열에 의해 설립된 학교를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관 공립학교로 바꾼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광주에 집중되자 주변 지역의 학생들도 모두 광주 에 몰려들었다. 비교적 광주에서 가까운 나주, 담양, 장성의 읍내에 사는 학생들은 기차를 타고 광주 로 통학했다. 190) 지적, 정서적 감수성이 가장 민감한 시기에 겪는 차별과 억압은 학생들로 하여금 학생운동에 뛰어들 게 하였다. 192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학교 당국에 부당한 대우의 개선 등을 요구하며 등교와 수업을 거부하거나 농성을 벌이는 동맹휴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광주에서도 1920년대 여러 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광주고보에서는 1923년, 24년, 27년, 28년에 4번의 동맹휴학이 일어났고, 농 업학교에서는 1923년과 28년, 광주여고보에서도 1928년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1923년 광주고보의 동맹휴학은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학생을 구타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년 6월의 광주고보 동맹휴학은 민족적 대결의 성격이 강했다. 광주고보와 광주에 있는 일본인 야구팀 ( 星 俱 樂 部 ) 사이에 야구 경기가 있었는데, 일본인 의사가 광주고보 선수들에게 모욕적 언사를 하다 관 중과 고보 선수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은 고보 선수들을 연행 조사했는데, 문제 는 이 조사를 의뢰한 사람이 고보의 일본인 교장이었다는 것이었다. 분개한 학생들은 매일 강당에 모 여 학생 석방과 교장의 반성을 요구했는데, 오히려 교장이 전교생 400여명에 대한 무기정학을 선언했 다. 이에 학생들은 교장이 사퇴할 때까지 등교 거부를 결의했다. 191) 그런데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조직화, 이론화된 학생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제하의 동맹휴학 은 1927년을 기점으로 요구조건과 성격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전에 교사의 차별적 언동, 무능 교 사 문제, 학교 시설 등의 학교 내 문제가 동맹휴학의 쟁점이었다면, 1927년 이후에는 학우회 자치, 조 선인 본위 교육의 실시 등 교육정책 전반에 관한 쟁점들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 해졌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약칭 고려공청)가 학생 세력의 획득에 주력하면 서 학생자치회 연합을 조직, 학생운동에 대한 조직적 지도를 시도하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2) 서울 187) 숭일학교의 중등과정은 4년이며 54명이 재학 중이었고, 순천매산학교도 중등 4년 과정에 12명이 재학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라남도, 소화이년 전라남도교육급종교 188) 동아일보 ) 동아일보 ) 정세현, 1975,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일지사, 337쪽 191) 동아일보 ; ) 강덕상 편, 現 代 史 資 料 29, 94쪽 ; 김성민, 2013, 앞의 책, 59~60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09

112 에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각 학교에 독서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을 확산하고 대중적 투쟁을 발 전시켰다. 학생운동은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려공산청년회는 1928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상무집행위원회를 장악하고 학교 내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과학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우수한 학생들을 독서회에 가담시켜 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하게 하고자 했다. 193) 광주에서는 1926년 이후 흔히 ML파로 하는 제3차 조선공산당 주도 세력들이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1926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에 참여했던 김재명이 1927년 초 고려공산청년회 전남 책임자가 되었으 며, 그를 비롯한 강영석, 장석천, 강해석, 국채진 등이 광주청년동맹과 전남청년연맹을 조직, 주도했 다. 194) 청년운동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도 아래 광주의 학생운동이 진보했다. 1926년 9월 5학년이 된 왕재 일은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광주고보 동기인 장재성( 張 載 性 ), 광주농업학교 박인생( 朴 仁 生 ) 등과 긴밀 히 교류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에 공감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을 비밀리에 모아 10여명의 회원 들을 구할 수 있었다.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 외에 광주고보 최규창, 광주 농업학교 정남균 등이 여 기에 참여했다. 광주 지역 최초의 비밀 학생조직인 성진회( 醒 進 會 )가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왕재일을 총무로, 박인생을 서기로, 장재성을 회계로 선임하고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마다 만나 사회과학을 함 께 공부하기로 했다. 물론 이 경우 사회과학은 맑스주의 이론과 혁명론을 의미했다. 성진회는 참가자 들이 사회주의와 학생운동에 계속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출발점이었다. 또 성진회가 해산된 뒤에 도 성진회원 출신들은 서로 교류를 했고, 강해석이나 장석천 등 선배 그룹과도 만났다. 각 학교별 연구모임은 1928년 6월 이경채의 퇴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동맹휴학을 계기로 좀 더 조직적인 모임으로 변화했다. 1928년 광주고보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경 채가 자본주의 사회 파괴 등의 내용을 담은 선언서들을 만들어 경찰주재소, 광주고보 앞 전신주에 붙이고 전남의 여러 학교에 보냈다. 1972년 삼엄한 유신체제 하에서 광주의 학생들에 의해 발표되었 던 함성지 제작배포사건 을 연상하게 한다. 이경채는 6월 8일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학교 당국은 형 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권고퇴학시켜 버렸다. 광주고보 4, 5학년 학급 급장 11명은 이경채의 퇴학에 항의하는 한편, 24일 열린 학부형회의에 학교 운영 상의 문제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195) 학교측이 학생대표들에게 근신처분을 내리자 2학년 이상 전체 학생들이 6월 26일 동맹휴학에 들어갔 다. 196) 학교는 동맹휴학 주동자 27명을 퇴학시키고 참여 학생 280명을 무기 정학에 처했다. 197) 학생 들도 동맹휴학 요구조건이 충족되지 않자 교장이 사직할 것을 요구하며 학교와 정면 충돌했다. 동맹휴학은 이후 광주농업학교 등으로 더욱 확대되었고, 옛 성진회나 사회과학 연구 모임 회원들이 193) 윤경로, 1988, 자료 ; 이현상과 1928년 학생공산당 사건, 역사비평 1988년 겨울호, 366쪽 194) 안건호 박혜란, 1995, 앞의 글 195) 동아일보 ) 김성민, 2013, 앞의 책, 182쪽 197)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1929, 허진환 등 판결문,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3 중심이 되어 동맹휴학을 이끌어갈 지도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격문과 경과보고문을 보내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의지를 다졌고, 학부형에게도 동맹휴학의 정당성을 알리고 지원을 호 소하는 서신을 보냈다. 농업학교 학생들도 맹휴지도본부를 결성하여 투쟁을 이끌어갔다. 동맹휴학이 길어지자 지역사회에서도 졸업생 대책위원회나 학부형회 등이 나서기 시작했다. 198) 광주고보 출신으 출신으로 도쿄에 유학 가 있던 유학생 대표로 장재성, 최동문 등이 나서 진상조사와 대책 마련에 나섰 다. 그러나 학부형들이 학교와 타협하여 학생들을 9월 17일 모두 등교시킴으로써 광주고보의 맹휴는 끝났지만, 다음날 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퇴장하는 바람에 경찰이 학교에 난입하여 주동자 들을 체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 앞서도 잠깐 살펴 보았지만 각 학교의 독서 모임 또는 사회과학 연구모임은 선배인 청년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지도, 개입하고 있었다. 고려공산청년회의 광주 지역 조직원이었던 강해석과 지용수가 적 극적이었다. 강해석은 자기 집에 광주농교와 사범학교 학생들을 하숙시키며 교류를 주선하기도 했고, 사범학교 독서모임은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200) 또 앞에서 보았듯 각 학교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모임이 순조롭게 연결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주의 청년들이 학생 독서 그룹에 지도에 나섰던 것은 광주 전남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다음에는 일제 강점기의 학생운동으로 가장 두드러진 사례인 광주학생운동을 간략히 소개한다. 광주학생운동의 계기가 된 사건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어났다. 후쿠다 등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나주역 입구에서 광주여고보의 한국인 여학생들을 밀쳤고, 이를 본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가 후쿠다를 꾸짖었다. 언쟁을 벌이던 중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 라고 하자 격분한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다. 나주역에 있던 일본인 순사가 개입하여 싸움을 중지시켰으나 나주역 밖에서 한국인 학생들이 후쿠다를 따라가 다시 싸웠다. 다음날인 10월 31일 박준채와 광주고보생 3~4명들은 후쿠다가 탄 일본인 학생들의 객차에 탑승하여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후쿠다가 사과를 거부하자 박준채가 다시 싸우기 시작했고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들의 싸움으로 번졌다. 그 때까지는 박준채와 후쿠다 사이의 개인적 충돌이었다면 11월 1일부터는 광주중학생들과 광주고보생들의 한일 간 충돌로 번졌다. 일본인이 한국인 학생한테 두 차례나 얻어맞았던 것을 분히 여긴 일본인 학생 수십명이 한국인 학생들에게 복수하겠다며 광주역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광주고보생들도 뭉쳐 기차 정거장에서 철길을 마주보고 대치했다.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유도 교사는 박준채를 직접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201) 학생들이 점점 몰려들었으나 급히 달려온 두 학교 교사들과 198) 동아일보 ; : 광주고보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동맹휴교 문제를 논의하자 교장의 지시 하에 임석 경관이 해산을 명하기도 했다. 199) 조선일보 ) 김성민, 2013, 163쪽 201) 동아일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11

114 경찰의 개입으로 학생들은 일단 각자의 학교로 돌아갔다. 11월 3일은 일요일이었지만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일본의 국경일 명치절( 明 治 節 )이었다. 또 전남이 누에고치 생산 6만석 돌파 축하식이 예정되어 있어 들뜬 분위기였으며 시내에 인파도 넘쳐났다. 광주고보 학생들 중 몇 명이 기념식이 끝나고 난 후 시내에서 일본인 학생과 시비가 붙었다. 격투가 벌어졌고 일본인 학생들이 휘두른 단도에 고보생 몇 사람이 부상당했다. 주변의 광주고보생들과 광주중학생들이 광주역 앞에서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소식이 알려지자 양쪽 학생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광주고보생들은 나무 몽둥이와 대나무 등을 들고 광주중학교 쪽으로 달려갔고, 죽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광주중학생들도 마주 달려나와 대치했다. 두 학교의 교사들과 경찰, 소방조까지 총출동하여 일단 학생들을 해산시켰으나 광주고보생 200여명은 강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독서회원인 오쾌일, 이형우 등이 적극적인 투쟁을 주장했고 광주농업학교생 최태주도 동참을 선언했다. 농업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한 학생 300여명은 학교 창고를 열고 곤봉, 괭이, 죽도, 배트 등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교외로 진출했다. 독서회원들이 진두 지휘를 했고 5학년생들이 앞장 섰다. 원래 광주중학교로 돌진하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학생들은 방향을 바꿔 시내로 행진했다. 중심가인 본정통을 지나 광주우체국을 거쳐 도립병원으로 진출했고 전남사범학교 학생들과 광주여고보의 학생들도 일부 시위대에 합류했다. 경찰과 소방조가 출동했으나 학생들을 해산시키지 못했고, 시내를 돌아 광주고보로 귀환한 다음 해산했다. 이날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충돌과 시위 과정에서 광주고보생 10명과 광주중학생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광주 시내에서 발생한 한일 학생 충돌과 한국인 학생들의 공공연한 대규모 시가행진은 지역의 일본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인 신문들은 무력 충돌의 양상이나 일본인 학생의 피해를 과장해서 보도하여 이를 더 부추겼다. 광주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경찰서장과 도지사, 학무국장 등에게 주동 학생 처벌은 물론이고 광주고보 폐교까지 요청했으며 일본군사령부에 군대의 출동과 재향군인과 청년단까지 나설 준비를 하는 등 학생들의 시위를 대규모 폭동이나 전시 상황처럼 다루었다. 202) 안정적인 지배와 우월한 위치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고보생만의 시위가 아니라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이었으므로 시위 직후 일본 경찰은 광주중학생 7명, 고보생 14명만 체포했었다. 그러나 광주의 일본인 사회가 광주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격렬한 적대감과 불안을 보이자, 일제 경찰도 초강경한 대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한국인 학생들까지 포함해 시위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한 학생들을 색출, 체포했다. 11월 12일까지 모두 72명의 한국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62명이 검사국에 넘겨졌다. 그러나 일본인 학생들은 처음 체포되었던 7명조차 석방되고 한명도 송국되지 않았던 것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203) 202) 김성민, 위의 책, 201쪽 203) 동아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5 11월 3일의 시위와 대규모 검거사태는 일본인들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만으로도 10년 전 기미운동이 있은 이후 처음 보는 큰 사건 204) 이라고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1월 3일의 시위에 대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보도 기사만이 아니라 사설에서도 다루었다. 205) 언론의 보도로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의 학생단체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1월 7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과 중앙청년동맹 소속의 부건( 夫 建 )이 광주를 방문하여 전남청년연맹 관계자들을 만나 사정을 파악한 후에 전국으로 투쟁을 확대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11월 9일 신간회의 황상규, 김병로 등 집행부가 광주로 와서 실태를 파악한 후 서울에서의 시위 계획을 알리면서 전국적인 운동의 확산을 제의했다. 허헌 등은 전폭적인 지지와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신간회 간부들은 학생 시위를 민중적 투쟁으로 확산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206) 11월 11일 오전 전남청년연맹 관계자들이 다시 한번 모여 시위 계획을 검토하고 작성한 전단지의 원고를 검토했다. 1929년 11월 12일 아침 광주고보와 농업학교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집결 가두로 진출했다. 농업학교 독서회원 김남철, 박종주가 교실에 격문을 뿌리며 학생들을 이끌었다. 고보에서도 김향남이 5학년 학생들을 독려하여 시위에 나서자 전교생이 시위에 참가했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우체국과 형무소를 거쳐 사범학교 앞까지 시위를 벌였다. 농업학교 학생들은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를 지나 사범학교 앞에서 고보생들과 합류했다. 경찰은 대기하고 있다 학생들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특히 사범학교 부근에서 광주고보생 190여명, 농업학교생 60여명 등 250여명이 체포되었다. 대규모 학생 검거로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는 바로 임시 휴교에 들어 갔다. 11월 3일 시위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투쟁이 전개되자 일제 경찰은 더욱 맹렬한 탄압에 나섰다. 12월 17일까지 공주고보 전교생 400명 가운데 247명이 검속되었고, 광주농업학교 학생도 80명이 검속되었다. 1930년 1월 8일 휴교가 끝나고 개학할 때 광주형무소에만 200여명의 학생이 수감되어 있을 정도였다. 광주에서 발원하여 전국의 251개교(5만4000명)가 참가했고, 5개월 동안 지속된 줄기찬 학생투쟁이었다. 1929년 12월 식민지 조선에서 광주는 이미 반제 투쟁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민족운동이 이룬 정점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지만 조선인 본위 교육 실시와 같은 민족적 요구의 실현에 집중했으며, 신간회와 같은 민족통일전선의 지원을 받았다. 또 지역에서 시작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킴으로써 민족 문제를 쟁점화하는 정치적 능력을 보여준 운동이기도 하다. 전남 지역에서도 광주, 나주, 목포, 여수 등 주요 도시들은 물론이고 보성, 강진, 곡성, 함평 등의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민족적 투쟁에 동참했다. 3 1 운동 204) 동아일보 ) 조선일보 ; 동아일보 ) 김성민, 2013, 앞의 책, 283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13

116 이후 10년만에 일어난 이 대규모의 열정적인 투쟁은, 민족의 청년학생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강력한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싸운 경험은 민족운동에 대한 헌신과 유대, 단결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1920년대 말의 이 학생운동 경험은 그 참가자들이 30년대 활발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40년대 전남지방의 민족운동 1) 식민지에서 사회운동의 변화 3 1 운동 이후 1920년대 전남지방에서는 다양한 방면의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물산장려운동이나 민립대학설립운동 등 실력양성계열의 계몽운동이 민족주의 그룹을 중심 으로 전개되었다. 식민지지주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각지에서 격렬한 소작쟁의가 전개되고 농민조 직이 활성화되었으며, 사상단체의 활동과 청년운동의 성장,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도 두드러졌 다.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전남 각지에서 다양한 분파의 사회주의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조 선공산당의 지방 조직도 활성화되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일전선조직인 신간회의 지회들도 속속 조직되었다. 다양한 방면에서 사회운동의 성장은 민족의식, 계급의식의 각성에 따른 측면도 있 지만, 식민지의 왜곡된 자본주의화에 따른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경제공황이 발생했고, 일본에서 쌀가격이 폭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기적인 금융공황에 시달리던 일본경제는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욱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1930년 한 해 동안 일본에서 800여개의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자 300만명이 늘었다. 특히 쌀가격과 누에고치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촌의 불만이 커졌다. 이런 상황은 식민지에도 즉각 영향을 미쳤다. 경기가 침체되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삭감했다. 쌀 가격 폭락으로 농가의 수입은 대폭 줄었으나 지출은 그대로였다. 결국 부채가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33년 남부 지방의 자소작농가 가운데 87.9%가 빚을 지고 있었는데, 평균 125원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자소작농가의 한 해 평균 수입이 245원 정도였으니 한 해 소득의 절반이 빚이었던 셈이다. 또 소작농가의 경우도 89.4%가 빚을 지고 있었고, 그 평균 금액은 72원 정도였다. 소작농가 평균 연수입이 156엔 정도니 역시 절반 정도의 빚이 쌓여 있었다. 207) 더욱 심각했던 것은 이해 자소작농가의 현금수지가 6엔 적자였다는 점이다. 빚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는 불안감이 농촌사회를 뒤덮었다. 소작빈농들은 지주나 그 대리인인 마름들의 경제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관례적으로 인정되었던 농민들의 권리는 급속히 위축되거나 소멸되었다. 이런 상황은 207) 농림국 농촌진흥과, 1940, 農 家 經 濟 槪 況 調 査, 75쪽 1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7 농촌사회의 불안정과 동요를 가져왔으며 조선총독부 당국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208) 위기가 고조되면서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정책도 바뀌었다. 특히 농업과 농촌사회에 대한 통제정책이 1920년대 미곡생산의 증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것에서, 생산관계의 안정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지주 소작 관계를 안정화, 법제화하는 것을 목표로 조선소작조정령(1932), 조선농지령(1934)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관례에 의존하던 지주-소작관계를 법률에 입각한 계약 관계로 정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총독부의 통제 하에 두면서도 소작기간, 소작료 수취율 등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소작료 부담 자체는 감소하지 않았으니 지주의 지배적 지위는 여전히 견고했다. 이와 함께 총독부는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였다. 일종의 관제 농촌 운동인 농촌진흥운동은 농촌의 경제적 갱생 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목표로 내걸었다.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이 될 만한 자들에게 농경지를 가지게 해주겠다는 자작농지 창정운동과 함께 중견인물 의 양성을 추진했다. 농민소득의 전반적 증대, 농가경제의 안정을 현실적으로 추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지역사회의 핵심적 인자들을 중견인물로 선정하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관리, 후원함으로써 농촌사회의 전반적 안정화를 도모하고 정책을 농촌사회의 말단까지 효율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사회적 통제의 강화가 농민생활의 개선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민족운동의 발전에는 큰 장애가 되었다. 일종의 회유정책과 병행하여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세력에 대한 통제와 탄압은 더욱 강화했다. 이 통제체제는 문화적 지배기구와 강압적 지배기구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황국신민 서사, 신사참배, 창씨 개명 등의 제도를 통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후자는 전자의 이러한 통제에 저항하거나 더 적극적인 도전행위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지배권력의 물리력이 작동한다. 경찰과 정보원, 정교화된 고문기구와 억압조직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겹으로 행해진 일제의 통제방식에 의해 1920년대의 뜨거웠던 민족운동의 열기는 가라앉은 양상을 보인 것이 1930년대의 전반적 흐름이었다. 구체적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계몽주의 사회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계몽운동은,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사들이 주도한 브나로드 운동 등 문자 해독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중앙의 언론사가 주도하면서 이념적 성향, 반체제적 경향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운동의 자발성이 크게 위축되었고, 자기 추진력도 상실했다. 또 총독부가 주도하는 농촌진흥운동이나 중견인물양성정책이, 농촌계몽운동의 전략과 겹치기 시작하면서 민족운동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것도 운동 침체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1920년대 민족주의 계열의 청년운동, 농민운동 주도자들 중 다수가 1930년대 들어 사회운동의 현 208)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은 사상계 의 동요, 불온한 사회정세에 대한 우려를 자주 표시한다. 이런 위기 의식은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이 일차적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취약한 일본제국주의가 연이은 경제공황과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15

118 장에서 사라졌다. 이들 중 일부는 식민지 통치 기구에 참여하거나 농촌진흥운동으로 포섭되었다. 고 흥의 부호이면서 고흥청년회 평의원, 위원장, 기독청년회 총무를 역임한 신상휴는 1930년 전남도평 의회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되었다. 209) 순천군 서면 농민운동의 지도급 인사였던 허준, 임태유는 연이 어 면장에 취임했고, 허준이 조직한 마을 진흥회는 농촌진흥운동의 성공사례로 총독부의 표창을 받기 도 했다. 210) 일제의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민족주의 계열의 계몽운동가, 기독교 및 천도교 사회운동가들은 대부분 30년대 중반 이후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천도교의 주 도권을 장악한 신파가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으로 전환하면서 조선농민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 농민 운동도 크게 약화되었다. 기독교 농민운동 또한 농민의 자기 구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일제의 농 촌진흥운동 속으로 흡수되었다. 2) 사회주의 운동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민족운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하는 식민지 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 자본주의 체제의 약한 고리이며 반제 운동에 대한 지원이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식민지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라는 혁명의 과학 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이론으로 보였다. 211) 게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서 민족주의의 이론과 실천은 갈수록 영향력을 잃었다. 계몽운동은 체제 안으로 흡수되었고 일부 민족주의 계열의 이론가들이 일제에 대한 협력의 길에 접어들었다. 반제 운동에서 사회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확대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에게도 1930년대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4차례 조직되었던 조선공산당들은 대체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연이어 붕괴되었고, 사회주의자 간의 파쟁 또한 극렬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은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 를 채택했다. 흔히 12월 테제라고 하는 이 지침은 조선공산당이 종래 소부르주아 중심으로 조직되었음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자들에게 당을 노동자, 빈농을 기반으로 조직할 것, 반제반봉건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중들의 일상적 이익을 옹호하는 투쟁을 전개할 것, 이념적 단결과 운동의 규율을 확립할 것 등을 요구했다. 212)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주도권이 강조되었고, 공개적인 정치 활동이나 전국적 정치 활동보다 대중조직의 건설이 중시되었다. 기존의 당 건설 방식은 모두 부정되었고, 아래로부터 즉 노동자 농민계급으로부터 당을 209) 동아일보 ; 중외일보 ) 이철우, 1997, 순천의 농민운동,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 사회편, 695쪽 조선총독부, 1937, 農 山 漁 村 振 興 功 勞 者 名 鑑, 117~119쪽 211) 지방 청년층 사이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에 대해서는 이기훈, 2009, 1920년대 언론매체와 소통공간 : 동아일보 의 자유종 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06 참조 212) 12월테제 원문은 임영태 편, 1985, 식민지시대 한국사회와 운동, 사계절, 356~366쪽 1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9 건설해야 했다. 사회주의를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이념으로 선택했던 많은 젊은이들은 당 조차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든 당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전남지역에서 이 길을 걸었던 주요 세력은 조선공산당재건설 준비위원회(조공재건준), 전남노농협의회(노농협), 조선공산당재건전남동맹(조공재건동맹), 전남운동협의회, 무안군 지도의 전위동맹, 목포의 공산주의자 동맹 등이었다. 이 가운데 비교적 활동이 활발했던 전남노농협의회, 와 전남운동협의회 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사회주의자들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들이 함께 싸울 당을 만드는 것이다. 서울청년회 일부 세력과 과거의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이 연합한 서울 상해파 그룹은 1929년 3월 북간도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 준비위원회 를 구성했다.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는 국내로 조직을 확산하려 했고 서울, 함경도, 경상남북도의 여러 도시에 세포조직들을 건설했다. 213) 조선공산당재건설 준비위원회의 책임비서였던 김철수( 金 綴 洙 )는 국내로 잠입하여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김철수는 원래부터 서울상해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목포를 찾아왔다. 1920년대말 목포에는 사회주의자 활동가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동안의 대립과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1930년 2월 목포에서 대표적인 활동가 배치문을 만난 김철수는 농민 노동자 사이로 들어가 농민조합 노동조합을 조직 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교양 지도해서 투쟁을 통한 결성을 확고히 하여 후일 열성자 대회에서 조직되어야 하는 공산당의 기본세포 로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운동방침을 전달했다. 214) 배치문과 목포 지역운동가들은 1930년 4월 목포에서 지방열성자 대회를 열고 일단 목포노동연맹을 부활시키는 데 주력하기로 결의하고 조직작업을 진전시켰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고질적인 파벌 대립이 재연하면서 운동의 역량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김철수가 검거된 이후 수사과정에서 목포에서 활동이 드러나자 관련자 15명이 모두 구속됨으로서 215)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영암에서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최기동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헌원(최헌원), 곽명수( 郭 明 秀 ) 등과 함께 1930년 5월부터 사회주의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야학과 순회강연 활동을 벌이는 한편 미암면에서 농민조합을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목포의 조직이 붕괴되는 것과 비슷한 시점에 최기동이 검거되면서 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216) 다음으로, 전국적 차원의 당 재건 전략이 비판받으며, 지역 단위의 전위 조직을 먼저 건설하고 이 조직들의 연계를 통해 당재건 조직을 결성하는 방안이 대두했다. 협의회 니 트로이카니 하는 조직들은 이런 지역 전위 조직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것들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주로 213) 임경석, 2008,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18~19쪽 214) 이들이 12월테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215) 김점숙, 1991, 앞의 논문, 76~77쪽 216) 박이준, 2001, 앞의 글, 184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17

120 협의회 운동들이 이를 대표한다. 217) 또한 이런 조직들은 철저히 지역의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에 기초해야 하고,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은 마을이나 사업장의 반 조직에 기초해야 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다음에 언급할 전남노농협의회는 지역 정치 조직을 구성하려고 했고, 혁명적 농민조합 중심의 조직을 구성하려는 시도였다. 전남노농협의회는 1931년 12월 전남 지역에 존재하던 17개 운동 단체들을 규합하여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권대형( 權 大 衡 ), 이우적 218) ( 李 友 狄, 본명 이응규), 김상혁 등 1920년대 후반 이른바 ML계라고 알려졌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권대형, 김상혁, 이우적(=이응규), 최인식 등은 1931년 7월 25일 대구에서 각 지역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했는데, 이 협의회의 광주 전남 지역 조직이 전남노농협의회였다. 순천 출신인 김상혁은 중앙조직인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 역할을 선전부를 맡고 있으면서 동시에 전남 지역에서도 활동했고, 219) 이우적 역시 경남 사천 출신이지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 당시 전남 대표로 참석했다. 220) 전남 노농협의회는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가 일사불란하게 조직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하면서 만든 조직과, 기존의 조직들을 연대하여 구성한 것이다. 김상혁은 이미 1931년 1월 광주에서 강갑영 등과 함께 광주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이우적도 8월 전남농민조합의 조직을 지도하고 있었다.전남 지역 각지의 노동조합, 농민조합, 반제 조직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을 연계하려 했던 것이다. 8월에 전남노농협의회 임시사무국도 조직되었으며, 10월에는 광주노동조합과 광주반제동맹이 결성되었다. 전남노농협의회는 전남에서 노농운동을 통일시켜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고 노동자 농민 독재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준비조직 을 표방했다. 지역의 대중 조직을 연결, 협의하면서 지역 내에서 노동자 농민의 대중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갈 전위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조직부와 정치부를 두고 조직부 아래 노동부, 농민부, 반제부를 두었으며 정치부 산하에 출판부, 교육부, 조사부를 두었다. 전남노농협의회 반제부는 광주반제동맹을 계승하면서 광주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고 기관지 학생뉴스 도 제작 배포했다. 농민부에 속한 단체 중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옥과노동회는 회원이 1900명에 이르렀고, 1932년 1월에는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했다. 221) 이렇게 전남노농협의회는 실제로 기존 노동자 농민 조직간의 연락 통일업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217) 김점숙, 1990, 1930 年 代 前 半 期 全 南 地 方 朝 鮮 共 産 黨 再 建 運 動 硏 究, 한국사연구 74, 218) 경남 사천 출신으로 일본과 서울을 근거로 활동하던 이우적이 당재건을 위해 전남 지방을 활동무대로 선택한 것은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활동이 사적인 관계망에만 의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219) 김상혁은 순천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중동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전문부를 다니면서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로당 등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인명사전, 81쪽 220) 사회주의 인명사전 356쪽 221) 김점숙, 1992, 앞의 글, 61쪽 : 안종철, 김준, 정장우, 최정기, 앞의 책, 92쪽 1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1 협의체이면서 지역 전위정치 조직으로 발전을 시도하는 조직이었다. 정치적 조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선전활동을 활발히 벌여야 했다. 1930년대 당재건 조직들은 지역 단위의 신문을 발행하여 이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전남노농협의회는 노동자와 농민 대중에 대한 선전 선동과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전남노동자신문 이라는 기관지와 학생뉴스 를 발행했다. 222) 독자적인 선전선동을 강조하고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는 것 또한 이 시기 당재건 운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남노농협의회가 실제 존속했던 기간은 2개월로 극히 짧았다.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의 전남방면 조직책임자 김상혁과 이우적이 1932년 봄 체포되면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났고 대규모로 활동가들이 검거되면서 조직이 무너졌다. 223)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은 26명에 불과하나 취조과정에서 상당수 활동가들이 구금됨으로써 전남지역의 농민운동은 급격히 쇠퇴했다. 224) 이어서 전남운동협의회를 살펴본다. 해남과 완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인 김홍배( 金 洪 培 )와 황동윤( 黃 同 允 )이 이 전남운동협의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기 지역에서 활동하다 1933년초부터 농민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을 지도할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1933년 5월 14일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장흥, 강진, 목포, 영암 지역에도 지역 활동가들과 연계하였다. 225) 전남운동협의회는 농민층 및 어민층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계층 및 그 외 각층을 포괄하는 전위기관 을 표방했다. 이들은 9개월 간 70여개의 반과 10개의 지부, 5개의 혁명적 농민조합, 합법단체를 가장한 26개의 그룹, 28개의 야학을 운영하는 등 대규모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해남의 운동가들은 완도의 대표적인 활동가인 황동윤과 1933년 1월 만나서 완도와 해남 일대의 사회운동을 통합하여 지도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33년 5월 완도가 건너다 보이는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의 대둔산 성도암에서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226) 전남운동협의회는 사무부, 조사부, 조직부, 구원부를 두고 각각 김홍배, 황동윤, 오문현, 이기홍을 책임자로 했다. 227) 전남노농협의회가 전남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17개 단체들을 연합한 조직이었에 비해, 전남운동협의회는 완도와 해남에 확고한 지역 농어민 대중에 기반을 두고 조직을 확대해나간 사례였다. 원래는 전남운동협의회라는 이름에서 보듯 지역 전위 조직으로 출발했으나, 1933년 8월 11일 전체회의에서 운동을 농민운동에 국한시키면서 조직의 명칭도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로 바꿨다. 조선공산당 재건전남동맹은 여러 곳의 대중조직들을 222) 전라남도지 편찬위원회, 1993, 전라남도지 8, 282쪽 223) 조선일보 ) 김점숙, 1991, 앞의 글, 79쪽 225) 전라남도지 편찬위원회, 1993, 전라남도지 8, 284~285쪽 226) 동아일보 ; 조선일보 성도암은 대한제국기 의병들의 주활동무대이기도 했다. 227) 김점숙, 1992, 앞의 논문, 48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19

122 묶어 장차 당을 건설할 기반이 되는 지역전위조직을 건설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아예 지역전위조직을 전제로 하는 발상을 포기하고 대중 조직인 농민조합을 튼튼히 하면서 농민 운동의 계급화, 의식화, 조직화에 집중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228) 전남운동협의회는 완도, 해남, 강진, 영암으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70여개의 다양한 반 조직과 5개의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그룹과 수십 여개의 합법단체 내의 그룹들, 야학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핵심적 활동은 모두 농민조합 등 농민들의 조직화와 계급의식 고취, 농민권익 보호 등에 집중되었으므로 농민운동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조직이 탄로나 대규모로 운동가들이 구속되고 난 다음에도 몇 차례나 재건운동이 일어났다는 점도 특이하다. 재건활동은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통제가 심해지는 1938년까지도 완도, 강진, 장흥 등지에서 전개되었다. 3) 농민-노동운동 1920년대 전남 지역 도처에서 결성되었던 소작인회, 소작인조합, 농민회, 농민조합 등 합법 농민운동단체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해산되거나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229) 예를 들어 1930년대 초 나주 산포농민조합은 간부진이 구금되자 자연 해산된 것으로 보이며, 230) 남평농조도 1931년 11월경 경찰에 의해서 강제 해산되었다. 231) 1920년대 가장 강력했던 순천의 농민운동도 합법적 농민조합은 탄압 속에서 부진을 면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공개적 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늘어나면서 혁명적 농민조합 혹은 적색 농민조합이라고 하는 사회주의 주도의 비합법 농민조합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계급적 성향을 뚜렷이 지닌 노동자 농민의 대중조직을 건설하고, 이 조직을 근거로 하여 지역 정치조직을 결성하는 데까지 나아가고자 했다. 다음에서 전남노농협의회와 전남운동협의회의 활동과 관련한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의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전남노농협의회는 전남을 세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마다 담당자를 정해 혁명적 농민조합 조직을 확산하려 했다. 이들은 곡성, 담양, 보성, 벌교, 광주 등지에서 농민들의 조직화를 시도하고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는데, 특히 옥과노동회와 보성군에서 조직활동이 활발했다. 옥과노동회는 ML계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던 이정윤을 중심으로 1930년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28년 광주고보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정동화, 병인청년회에서 활동했던 한덕명 등이 옥과노동회를 다시 활성화했고 회원을 1900명까지 늘렸다. 이들은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하는 한편, 옥과노동회를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확대하려 했다. 옥과노동회는 실제 지역사회에서 지주까지 228) 김점숙, 1990, 앞의 글, 88쪽 229) 지수걸, 1993, 일제하 농민조합운동연구, 역사비평사, 455~457쪽 230) 동아일보 ; ) 조선일보,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3 압박하는 매우 큰 대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232) 춘궁기에 농민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자 옥과노동회가 나서 곡성군 입면 삼교리에서 아마도 마름일 것으로 추정되는 백 모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지주의 벼 60석을 일반 농민들에게 강제로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준다. 233) 그러나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으로 이정윤, 정동화, 한덕명 등이 체포되자 옥과노동회도 불온단체로 해산명령을 받았다. 234) 보성군은 보성과 벌교 두 중심지에서 농민조합 건설운동이 각각 전개되었다. 벌교에서는 1931년 9월 김영재가 송창식, 박남규 등을 규합하여 벌교면위원회 를 건설했다. 이들은 각 마을에 소작회를 만들어 소작료를 줄이며 지세를 지주가 부담하도록 하게하는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1931년 흉년이 들었는데도 오히려 지주측이 평년작 이상의 소작료를 요구하자 벌교면 24개 마을의 구장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은 소작료의 감액과 소작권 이동 반대를 결의하고 관계 기관에 진정하는 한편, 마을마다 소작료 불납 동맹을 결성했다. 지주가 소작료를 내지 않는 농민들에게 소작계약의 해지를 통보하면서 쟁의가 시작되었고, 40여명의 농민들이 경찰에 구속되는 등 격렬히 전개되었다. 235) 구속자 중 2명이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소작료의 분할납부와 지세의 지주부담이 결정되면서 쟁의는 대체로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김영재, 송창식 등은 1932년 1월 소작쟁의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쟁의를 이끌었으며, 김영재는 전남노농협의회 농민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나 조직이 탄로나면서 구속되었다. 236) 보성에서는 1929년 구오현, 정은찬, 강환진 등이 자외선 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고 구성원들의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보성청년동맹을 결성했지만 237) 일제 경찰의 강력한 감시 속에서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1931년 구례를 중심으로 전남 동부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던 선태섭이 석방되자 보성 지역 운동자들도 그의 지도를 받게 되었고 1932년 보성적색농민부 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시작하려 했다. 238) 그러나 전남노농협의회 조직이 발각되자 선태섭, 구오현 등이 구속되면서 보성적색농민부의 활동도 종결되었다. 그런데 영암에서는 전남노농협의회와 별개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합법적인 농미조합 조직에 실패한 이들은 동창회, 야학, 상조회, 청년회 등 합법적인 조직을 최대한 이용하여 조직망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자 했다. 야학에서 이들의 활동은 당시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농민들에게 어떻게 계급의식을 심어주려 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다. 232) 동아일보 ; ) 김점숙, 1990, 앞의 논문, 94쪽 ; 동아일보 ) 안종철, 김준, 정장우, 최정기, 앞의 책, 119쪽 235) 동아일보 ) 김점숙, 1992, 1930년대 전남지방 혁명적 농민조합 연구,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 전남 사회운동사연구, 한울아카데미, 38쪽 237) 동아일보 ) 선태섭의 행적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최정기, 2013, 분단에 부딪혀 쓰러진 민족주의자 선태섭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선인 참조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21

124 이들은 마을 청년회관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여는 한편, 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했다. 농민들에게 야학에서 글씨 연습을 시키면서 소작단결 이나 지주대항 과 같은 문구를 쓰게 했다. 적기가( 赤 旗 歌 )와 같은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고, 간단한 노래극을 상연하되 계급대립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239) 이들은 농촌 청년회가 농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도록 했다. 전남노농협의회와 달리, 전남운동협의회는 1933년 8월 조직을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로 개칭하면서 운동중심을 농민으로 확고히 했다. 일반적으로 공산당 조직의 기반이 되는 지역정치조직은 노동, 농민, 반제부로 구성되는데, 우선 농민조직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마을 단위에서 농민, 청년, 소년, 부녀반을 건설하고 면단위 농민조합 지부를 조직하며 이를 토대로 군단위 혁명적 농민조합을 완성하며 이를 토대로 사회주의 전위 정치조직을 건설한다는 아래로부터 공산당 재건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전남운동협의회와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는 완도와 해남을 중심으로 하여 강진, 장흥, 영암으로 조직을 확산시켰으며 농민조합과 농민반 53개를 조직했고 마을마다 야학을 만들어 운영했다. 240)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검거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기홍, 최창규, 최규문, 왕재일, 황상남, 문승수, 길양수, 김홍배, 오문현과 같은 젊은이들이 우선 완도와 해남, 장흥, 강진 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운동을 주도했다. 241) 또 제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기 쉬웠던 지역이다보니 일본에서 사회운동에 종사하다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황동윤, 김옥도, 조동선, 김홍배, 차태희 등이다. 이들은 고향에 돌아온 후 소규모 독서회를 만들어 주변 젊은 농민들을 의식화하면서 지역 사회운동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들은 합법적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중 속으로 파고들 것을 결의하였고, 야경단, 농촌진흥회 등 관제 조직 속에서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마을을 단위로 한 소규모 조직을 만드는 데 치중하였다. 야학, 야경단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민과 결합하였고, 아울러 홍보활동에도 적극 대처했다. 이렇게 지역 단위의 조직활동은 준비한 이후 이들은 본격적인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에 나섰다. 1933년 1월 황동윤, 김홍배, 오문현 등 완도와 해남의 운동가들은 상호 연락과 농민운동을 지도할 조직을 만드는데 합의했고, 같은 해 5월 전남운동협의회 를 조직했다. 이들은 8월 농민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의하면서 조직의 이름도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로 바꾸었다. 242) 이들은 먼저 완도, 해남을 출발점으로 삼고 장차 전남의 각 군에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만들고자했다. 완도에서 황동윤, 이기홍, 해남에서 김홍배, 강진에 윤가현, 장흥에 왕재일, 영암에 최규문, 최기섭 등이 대표적인 활동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광주학생운동 참가자로 왕재일, 최규문 239) 조선중앙일보 ) 지수걸, 1993, 앞의 책, 245쪽 241) 이기홍, 최규문, 왕재일은 광주고보, 최창규는 광주사범, 김홍배는 와세다대학 전문부, 오문현은 경성고학당을 다니다 퇴학당하거나 구속되었다. 242) 지수걸, 1993, 앞의 책, 254쪽 1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5 등이 있다. 그러나 1934년 2월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나 와해되었으며 검거된 사람만 558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 243) 이 밖에 1934년 4월, 조규선의 주도하에 결성된 진도의 적색농민조합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자진해산했으나, 해산 이후에도 그 지역에서 농민야학이나 풍자연극은 계속되었다. 1934년 8월 세등리와 둔전리에서 야학 학생들이 곽재술이 대본을 쓴 <지도원의 강연>연극을 공연하여 제목으로 일제가 추진하던 농촌진흥운동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했다. 244) 그러다 1934년 10월 개인적인 시비에서 불거진 일이 계기가 되어 조직원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모두 30여명이 구속되었으며 무려 3년이나 지난 다음에야 조규선, 박종협, 곽재필, 곽재술 등 4명만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245) 곽재술과 곽재필은 해방 이후 진도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참여했고 좌익을 주도하다 1946년 이후 고향을 떠나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246)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회주의 계열의 조직적인 비합법 농민운동 외에도 자연발생적인 농민투쟁도 종종 발생하였다. 해남군 북평면이나 광주군 하남면에서 농민들이 면서기 등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개량농법 들을 무리하게 강요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런 현상은 농촌사회나 농업 전반에 대한 총독부의 통제와 탄입이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또한 혁명적 농민조합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농민투쟁이 발생하지 않았던 사회적 원인은 지역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확산, 지역 엘리트들의 친일화 등의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이른바 중견인물들의 성장, 한국인들의 면협의회, 군협의회 등 지역 자문 기구 합류 등은 1920년대와 같은 지역사회 전체의 대규모 항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이 사회운동에 불리한 환경은 노동운동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일제의 통제와 탄압체제는 농민이나 노동자에게 동일하게 작동할 것이며, 특히 농업중심 지역으로서 산업화의 진전도가 상대적으로 뒤늦은 상황에서 노동의 힘, 즉 노동운동이 힘을 얻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1930년대 조선공업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광주 전남지역에도 道 是 제사공장(1927), 鐘 淵 방적 광주공장(1930), 若 林 제사공장 등 대규모 자본이 경영하는 공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대다수가 여성노동자 중심의 산업으로 되어있다. 1930년대 후반 전남지방의 사회운동은 전반적으로 힘을 잃었다. 일제의 감시망이 더욱 정교해졌고, 활동가들은 모두 노출되었으며 노동 현장에 대한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 노동운동단체가 공개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선전과 조직, 파업 지도 등을 행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목포 제유공 파업 같이 조직적인 노동쟁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노동조건은 더 나빠지기도 했다. 이런 경우 자연발생적인 대규모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1935년 243) 이종범, 1990, 일제하 전남지방에서의 농민운동의 발전과 장흥지역, 역사와 현장 창간호 244) 조선중앙일보, ) 동아일보 ) 박찬승, 한국전쟁과 진도 동족마을 세등리의 비극, 역사와 현실 , 287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23

126 목포 삼화고무 여공파업은 1930년대 중반 보기 드문 대규모 파업의 사례이다. 1920년대 제유공 노동자들의 파업과 달리 지역 사회의 특별한 지원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1935년 무렵의 전남 지역 운동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 광주에서 몇 차례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적색노조준비위원회 가 만들어졌으나 곧 해체되었다. 또한 대규모 공장이 없는 나주(1931), 여수(1932) 등지에서도 이러한 운동이 시도되었다. 예를 들면, 나주에서는 품팔이노동자, 인력거, 손수레꾼, 정미소 노동자들을 적극 끌어들여 200명의 조합원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경찰의 탄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종합해 볼 때, 광주, 목포, 여수 등 전남 지방의 새로 형성된 공업지역에서 노동자 투쟁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아주 활발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식민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는 공업화는 필연적으로 도시 부문에서 사회적 갈등과 투쟁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런 양상은 1934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체계적인 활동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목포에서 삼화고무의 여성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전개한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력한 탄압과 통제가 운동의 잠정적인 침체를 가져올 수는 있었지만 식민지의 사회적 모순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4) 전쟁과 저항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총독부는 경제적 자원과 물자, 인력을 총동원하고 민족 운동에 대한 억압을 최고도로 강화하며, 사회 전반을 극도로 감시, 통제하게 되었다. 이것을 흔히 전 시체제라 하는데,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는 황민화 정책과 물자의 수탈, 강제 동원 등이 실시되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일제는 한국인 청년들을 군인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믿고 전선에 투입 하려면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황국신민의 서사 를 만들 어 모든 학교와 관공서, 회사, 은행, 공장 등에서 반드시 제창하도록 했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까지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전시 총동원 기구를 만들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식민지 전체-도( 道 )- 부군도( 府 郡 島 )-읍면-동리-애국반까지 일관된 체계로 편성했다. 애국반은 10개 호를 하나로 묶어 만든 말단 조직으로 일제의 전쟁이념과 정책을 전파하고 노동력과 물자 동원을 강제하며 주민들을 상호 감시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일본인 의식을 강제하는 황민화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937년 8월 21일 일제 당국은 각급 학교에 시국인식에 철저를 기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애국일을 정하여 행사를 시행했다. 1937년 9월 6일 첫번째 애국일에는 공사립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은 모두 신사를 참배하고 학교 내에서 일본 황궁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절하는 동방요배와 국기게양식 등을 거행하게 했다. 1942년 이후에는 매월 8일을 대조봉대일( 大 詔 奉 戴 日 )로 정해 애국일 행사를 1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7 진행하도록 했고, 애국반원들까지 참가하도록 했다.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상황. 조직적인 운동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숨죽인 비밀 결사만이 간혹 만들어졌다 곧 들통났다. 그러나 저항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사람들은 일제의 전쟁과 식민통치에 불만을 표하는 낙서를 했고, 몰래 일본의 패배를 예언했으며 연합군의 승리를 기원했다. 유언비어가 또 다른 저항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유언비어 중에는 일본의 패망을 예언한 것이 많았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치부되었지만 나름의 논리와 설득력이 없다면 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제 말에 민중들 사이에서 흔히 퍼졌던 유언비어는 정감록과 같은 책들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인쇄나 출판물로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도 없고, 집회를 열 수도 없는 만큼 낙서를 통해 총독부 정치에 대한 불만과 항일 의지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았다. 247) 이런 낙서들은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고, 발견한 날자만 확인할 수 있다.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주로 1937년 무렵에 많이 발견된다. 1937년 7월 광주부 부영공설시장 화장실 벽에 연필로 강도 일본 제국주의 타도. 제국주의 반대, 중국혁명 지지 라고 써놓은 낙서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유언비어와 낙서는 내용의 강도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전시체제 하에서 공공연한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 같은 조직들이 모두 해산되었고 경찰의 감시와 통제는 훨씬 강화되었다. 1923년 2만여명이던 경찰관이 1941년에는 3만 5천여명으로 늘었고, 헌병과 헌병보조원, 비공식적인 첩보원, 경찰보조기구인 경방단 등 감시망이 전국에 걸쳐 촘촘하게 깔렸다. 지금까지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항상 감시받고 툭하면 잡혀갔으며 가족과 친지들의 삶까지 피폐해지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일제는 체포된 민족주의 운동가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향을 강요했다. 사상범보호관찰법이라는 법을 제정해 항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항상 감시하고 특별한 범죄사실이 없어도 미리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견디지 못하고 전향하면 그 사실을 언론을 통해서 만천하에 공개해야 했고,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이라는 조직에 가입해야 했다. 대규모의 민족운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한 비밀결사들만이 소수가 조직되어 일제의 패망을 촉진하거나 독립을 준비하는 활동을 시도했다. 학생들이 모임을 갖는 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으므로 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들이 그나마 존속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 학생비밀결사들이 많이 형성되는데,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광주서중의 무등회가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일제가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발포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육제도를 일치시키자, 광주서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광주고보 이래 학생운동의 전통은 여전히 강력했다. 일제 관헌조차 광주서중에는 광주학생운동 당시 처벌당한 학생을 영웅시하고 찬미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하면서 사상동향이 과격 하고 일본 조선 247) 변은진, 2011,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작서 연구, 한국문화 55, 319~333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25

128 간의 차별문제 에 대해 원망의 소리 가 높다고 했다. 한 마디로 제국의 통치정책을 지목하여 필경 조선 고유의 문화를 파괴, 멸절하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 이라 규정하는 등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이러한 불온 과격한 사상 동향이 동교의 숨겨진 교풍 이라는 것이었다. 248) 그러나 광주서중학교도 전시 체제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학교에 근로보국대가 만들어져 학생들이 강제로 노동력 동원에 나섰다. 한겨울 방과 후에 일본 신사의 보수 공사에 동원되는 등 점차 수업보다 노력동원이 더 늘었다. 249) 수업이 있을 때는 방과 후에 동원되는 정도였지만, 방학 중 근로보국대는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오전 6시 20분부터 5시간 동안 작업에 투입되었다. 오후에는 담당 교사의 훈시, 세탁, 학과 자습이 있었지만, 아침 저녁 점호가 실시되는 집단 노동에 다름 아니었다. 250) 군사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40년대에 들어서는 교복도 국방색으로 바뀌었다. 군사교련 시간이 아니라도 각반을 차고 다녀야 했고, 모자도 군모로 바뀌었다. 1940년대 들어서면서 지원병을 가장한 군 입대도 확대되었다. 광주 서중학교에서도 4학년생 5명이 해군에 지원입대하자마자 학교에서 중퇴시켜 즉시 입영하게 했다. 251) 이런 와중에도 서중학교 내 학생 조직은 명맥을 유지했다. 1941년 3월에는 유몽룡과 주만우의 후원 아래 재학생 기영도( 奇 英 度 )가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 무등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기영도는 동료학생들 사이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신균우( 申 均 雨 ), 박화진( 朴 和 珍 ), 이민수( 李 敏 洙 ) 등 뜻을 같이 하는 학생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무등회 회원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에 저항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조병대는 조선독립이라는 벽보를 써서 전신주나 벽에 붙였다. 1943년에는 신균우가 주도하여 서중학생들은 선배들의 의지를 계승하여 독립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며 광주학생운동 당시의 교풍 재건 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이미 광주서중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던 경찰은 관련자들을 대거 체포하는 한편, 기환도( 奇 桓 度 ), 윤봉현( 尹 琫 鉉 ), 강한수( 姜 漢 秀 ) 등 졸업생들도 구속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 끝에 이 세 사람은 옥사하고 말았다. 1944년까지 진행된 공판에서 유몽룡, 주만우, 남정준, 기영도, 신균우, 기원홍, 배종국 은 징역 1년에서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민수, 박하주, 조병대, 박화진, 이민수, 오복렬 등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기소유예되거나 관련자로 연행된 수많은 학생들도 가혹한 고문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전쟁 말기 일제 지배가 가장 엄혹한 시기의 모습이었다. 252) 광주서중의 무등회는 이전의 학생운동 조직과 달리 사회주의적 성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 248)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1944, 남정준 등 판결문, 국가기록원 CJA 해당 판결문 원문에 기재된 성명은 창씨 개명한 이름들이다. 여기에서는 원래 성명으로 표기한다. 이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판결문 내용을 정리하여 서술한다. 249) 매일신보 ) 경북중학교 학생들의 1938년 여름 근로보국대 일정이다. 다른 학교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251) 매일신보 ) 독립운동사 9, 811~813쪽 1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9 려 우익적 성향이 강한 민족주의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당시 일제의 지배 정책에 대해 강력한 저항감 을 가지고 있었다. 남정준은 일제의 일본어 강제 사용, 한국어와 한글 금지 정책, 창씨 개명, 지원병 제도 등 통치와 전쟁 정책 전반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전시 체제 하에서 강력한 수탈과 통제 에 비해 더 심해지는 차별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반면에 민족의식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기영도는 단일 민족이란 동일 조상의 피를 받은 자 이며, 일본 조선인은 그 선조가 다르니 동일 민족이 아니 다 라고 단언했다. 또 남정준은 동료들에게 만주 여행을 회상하면서 하얼빈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기개를 느꼈노라고 했다. 무등회 그룹은 전시체제 하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민족주의 그룹의 중요한 사례다. 이들 학생 그룹은 외부로부터 특별한 지도나 원조 없이 스스로 비밀 결사를 만들고 장기적으로 독립의 전망과 실천 계획까지 수립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역사 가운데 특이한 변곡점을 이룬다. 제3장 해방 후 사회운동 253) 1. 전남지역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1) 전남지역 건국준비위원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한국은 해방되었다. 미소연합국의 승리와 한민족의 줄기찬 민족운동으 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독립된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기 때문에 815해방은 우리민족에게 환희에 찬 역사적 계기였다. 해방의 소식이 전국 방방곡곡에 알 려졌을 때 우리 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기쁨을 어떻게든 표현하였다. 한 시인은 다음과 같 이 당시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초목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253) 제3장 해방후 사회운동 에 관한 서술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연구단>의 해방 후 사회운동 부분 집필자인 안종철의 미간행 초고에서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요약 재구성한 것임.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27

130 그렇지만 해방의 감격적인 분위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누그러지면서 또 미군의 점령정책이 시작되면서 민족의 발전을 기약하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자 과제인 자주독립의 국가건설이라는 문 제가 제기되었다. 국가건설의 과제는 식민지 상태에서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국가를 되찾고 새로 만 들어내는 작업으로서,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치사회세력들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사회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패망을 앞둔 조선총독부는 나름대로 전후대책을 검토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먼저 8월 10일부터 4차례에 걸쳐 송진우와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그는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일본사람의 손에서 정권을 인수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254)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결국 여운형과의 교섭을 통하여 정권이양 문제를 상의하였다. 엔도는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여운형에게 총독부의 행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제시하였고, 이에 여운형은 5가지의 조건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질 경우에만 행정권을 이양받겠다고 대응했는데, 양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여운형은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기까지 과도 기간의 질서유지와 국가권력의 순조로운 이양을 위한 중대한 책임을 떠맡았다. 여운형은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과의 회담 이후, 신정부 건설의 의지를 표명하고 안재홍의 협력을 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건준은 16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오전 10시부터 전국 각 형무소에서 정치범, 경제범, 사상범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석방되었다.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수감자 석방에 입회하여, 석방자들에게 해방의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민족의 장래를 위해 자중할 것을 당부하면서, 서울에 건준이 조직되어 국가건설을 준비 중이라는 연설을 했는데, 이때 석방된 독립투사들이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건준 지방지부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전국각지에서 석방된 독립투사들이 이 방송을 듣고 각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전국 각 지방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방지부가 발족되기 시작하여 8월말에는 145개에 달하였다. 255) 그러나 건준의 활동이 당초 약속했던 치안유지의 수준을 넘은 준정부 활동으로 발전하자, 총독부에서는 8월 17일 건준의 기능을 치안유지 차원으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고, 다시 18일에는 건준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8월 15일의 여운형과 엔도의 합의는 총독부 자체의 결정이었지 조선군 사령부와의 사전 협의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이 여운형과 엔도의 약속을 무시하고 직접 치안에 나섬으로써 한 때 건준과 군인들 간에 살벌한 대결분위기를 조성되었다. 건준에게 접수된 일부 기관을 군대가 다시 접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건준은 최근우로 하여금 강력하게 항의하게 하고, 건준해체 요구를 일축해버렸다. 한편 건준은 8월 15일 야간까지 위원장(여운형)과 부위원장(안재홍)만을 우선 결정했으나 그 후 254) 김준연, 독립노선(시사신보사,1958),돌베개 재발행, p ) 부르스 커밍스는 145라는 숫자는 유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8월말경의 지방지부는 145보다 훨씬 많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p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1 점차로 주요 부서의 책임자를 선임하고 조직을 확장하여 진용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하여 창설 당시에는 원로정치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 개편 후에는 항일투쟁기의 활동가들이 다수 참여하여 실무부서 책임을 맡게 됨으로서 역량이 증강되었다. 그러나 조직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어 갔다. 결국 안재홍 중심의 신간회 계열과 우익진영이 탈퇴함으로써 3차개편 후의 건준은 민족전선적 성격이 많이 퇴색해버린 일종의 좌파계급 성격이 보다 크게 부각되었다. 사실상 좌익세력에 의해 장악된 건준은 9월 6일 오후 7시 제동의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 인민대표자 대회 를 개최했다. 1천여 명의 전국인민대표가 참석한 이 대회에서 여운형이 임시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시키는 가운데 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했다. 부의장 허헌의 경과보고에 이어 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상정되어 일부 수정을 거친 후 통과된 다음, 중앙인민위원 고문 선거는 전형위원에게 위임하고 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여 발표했다. 이로써 건준은 20여 일간의 활동을 인민공화국에 넘기고 해산을 했다. 그렇다면 전남지역에서 건준활동의 진전은 어떤 상태였는가? 8월 15일 항복방송을 전해들은 광주시내의 양심적인 지방인사들은 국기열의 집에 모여들었다. 국기열의 집은 해방 이전부터 이들이 자주 모였던 장소였다. 당시 국기열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전남지사장이었지만, 그는 그 이전에 동아일보 에서 기자로 활약하다가 필화사건으로 투옥당한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 후 동아일보 가 폐간 당하자 매일신보 의 초대사장이었던 이상협의 도움으로 전남지사장으로 내려와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그의 집은 해방 이전부터 항일운동을 해온 사람들과 국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는 우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었다. 8월 16일에도 국기열의 집에는 최인식 등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국기열을 중심으로 이들은 서울에서 여운형, 안재홍 등이 건준을 결성했다는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지방에서도 건준을 조직하자는 데 쉽게 의견을 통합할 수 있었다. 256) 이에 따라 8월 17일 오전 10시에 국기열의 집 앞에 있던 창평상회에서 건준 결성식을 개최하기로 하고, 위원장 선출문제를 논의한 결과, 최홍종이 적격자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8월 17일 오전 10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결성식은 당초 창평상회에서 있을 예정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소가 비좁아 광주극장(현 무등극장 위치)으로 장소를 바꿔 11시에 개최되었다. 257) 수백 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결성식에서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최홍종이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그 외 김시중, 강해석, 국기열, 이덕우 등의 간부진으로 전남도건준이 조직되었다. 또한 58명의 건준위원이 선출되었는데, 많은 항일투사들이 투옥되어 256) 이러한 사실과 다른 견해도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국기열은 한길상의 집에서 강석봉과 함께 모여 앞으로 할 일을 논의하였고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으로 이루어져 우리의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전남 각지역의 애국인사들을 광주로 모이도록 연락하여 박준규의 집에서 협의한 후 박준규의 주선으로 창평상회의 고광표의 집으로 옭겨 전남건준의 조직작업이 시작되었다고 이기홍은 주장하고 있다. 257) 김석학, 광복 30년 1, 전남일보사, p. 29.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29

132 있었거나 공개적인 정치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참여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도건준은 사무실을 창평상회로 정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건준조직이 완료되자 해방후의 무정부적 상태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본인에 대한 공격저지와 치안유지를 담당하기 위해 이덕우의 감독 아래 김석을 대장으로 한 치안대가 급히 조직되었다. 김석은 함평 출신으로 상해 복단대학을 다녔고,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정신대로 밀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오랫동안 투옥되었던 사람으로서, 상해임시정부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던 김철의 조카였다. 그는 언변이 좋고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미군이 처음 광주에 진주했을 때 미군과 담판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건준위원들 중의 일부가 치안대를 새로 조직할 것이 아니라, 일제 때부터 있어왔던 경찰조직을 복원하여 재가동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치안대조직의 문제로 의견이 분분해지자, 8월 24일에 열린 건준회의에서 치안대 건설에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던 보수인사들이 사퇴하고 새로운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9월 3일에 개최된 도민대회에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간에 첨예한 견해차이와 갈등이 노출되었다. 보수진영은, 곧 미군이 진주해올 것이므로 건준의 간부들을 친미적 인물로 채워야 하며 건준과 미군의 사이를 원만하고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건준의 점진적인 재조직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는 그러한 주장은 이제 막 해방된 조선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것이며 미국은 잠시만 머물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였다. 결국 이 논쟁에서 진보진영이 우세했고 상임위원회를 개편하는 선거에서도 간부의 3/4를 차지함으로써 거의 완전한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도민대회에서 개편된 전남도건준의 조직구성을 보면, 위원장에 박준규, 부위원장에 강석봉, 국기열, 김철 등 간부 12명과 평의원 21명 등 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새로 건준위원장이 된 박준규는 광양 출신으로서, 일제 때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투사 경력 소유자였다. 이처럼 개편된 전남건준의 구성은 명망가적 특성을 나타냈던 보수적 원로들이 대부분 탈락하고 보다 진보적 인물들로 채워짐으로써 초기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점차 실무적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활동가들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전남도 건준에 이어 각 군 지방에서도 지방민에 의한 자발적 정치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건준 군지부 또는 그 명칭을 달리하는 경우(광양지방의 자치위원회)도 있었지만, 그 조직의 목적은 일치된 것이었다. 이 같은 건준조직이 결성된 과정은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다.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지 방의 활동가 또는 명망가들이 한 장소에 모여 해방 후의 상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지방 행정치안을 담당할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고 이에 따라서 조직화에 필요한 각각의 역 할에 분담했다. 조직화과정은 이들 명망가를 중심으로 조직의 골격과 주요 부서담당자를 내정한 다 음, 군민대회 또는 해방축하기념대회와 같은 대중집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보고하여 이들의 동의를 얻 어내는 방법을 취했다. 또 지방에 따라서는 선거를 통해 건준의 위원들을 선출하고 이들이 집행부를 구성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전남지방의 23개 시 군 가운데 조사 가능한 지방의 건준 결성과정 을 분류해보면, 주민들의 선거형식을 거쳐 조직된 경우(광주, 완도), 지방 명망가와 활동가의 호선으 1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3 로 조직된 경우(광양, 보성, 순천, 여수, 구례, 장성, 담양, 곡성, 강진, 함평, 영광, 영암, 장흥, 고흥, 화순), 그리고 군민대회에서 조직된 경우(진도)의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2) 인민위원회 한편 1945년 9월 6일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각 지방에서도 이와 병행하여 각 지방인민위원회 조직이 진행되었다. 9월 12일 서울시 인민위원회를 시작으로 11월 10일 경기도 인민위원회를 마지막으로 하여 남한의 7도 12시 131개 군에 걸친 조직이 완결되었다. 중앙인민위원 회의 활발한 활동은 전국적으로 지방인민위원회의 결성을 촉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 에 대해 미군정은 처음부터,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조직되어 민중의 정치적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 하고 있던 지방인민위원회 등의 정치조직을 매우 좌익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전남인민위원회도 다른 지방위원회와 비슷한 시기에 조직되었는데,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이 일제하의 관료들을 그대로 충원하고 보수세력이 한민당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기존의 건준구성세력과 새로운 인물들이 충원되어 공백을 메웠다. 서울의 인민공화국 탄생 소식이 윤석원, 한종식 등에 의해 9월 7일 경 광주에 전해지자, 전남에서는 좌파세력에 장악되어 있던 건준지부를 인민위원회로 개편했다. 전남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는 작업은 유혁, 김종선, 이익우가 주도하면서 진행시켰다. 개편대회는 각 군 대회에서 선출된 대의원 1백여 명이 참석하여 진행되었다. 유혁이 임시의장으로 진행하면서, 참석한 각 군 대표에 대한 자격심사를 한 후 인민위원회 조직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이익우가 경과보고와 함께, 건준을 해체하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된 취지를 설명했다. 군 대표들은 이를 별다른 이의 없이 통과시켰으며, 조직부서에는 개편된 건준의 간부들이 그대로 재임명되었는데, 다만 총무부를 없애고 인민위원회의 업무를 총괄할 수 있는 서기국을 창설하여 서기국장에 이익우를 임명했다. 각 부서를 담당할 인민위원들과 무임소위원 77명이 개편대회에서 선출되었다. 전남도 인민위원회의 구성원은 온건보수세력이 거의 탈락한 좌익활동가들의 조직이 되었다. 미드(Meade)가 지적했다시피 전남지방의 각 지방인민위원회는 건준과 같은 좌우익세력이 연합한 통일전선적 성격이 현저히 약화된, 좌익세력이 지배적인 정치, 행정조직이었다. 258)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도인민위원회보다 더 기층적 수준인 군인민위원회, 면인민위원회로 내려갈수록 더 현저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군 단위수준으로 낮추어 살펴보기로 하자. 전남의 각 지방인민위원회들의 수립과정은 2가지 유형, 즉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경우와, 건준조직과 상관없이 인민위원회가 새로 조직된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258) 그란트 미드, 안종철 역, 주한미군정연구, 공동체 출판사, p.56.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31

134 개편된 경우는 다시 중앙의 지시에 의한 경우, 외부압력에 의한 경우, 표결을 통한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사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앙의 지시에 의해 건준이 개편된 경우(장성, 담양, 광주, 화순, 보성, 장흥, 영암, 목포, 구례, 광양), 이 경우는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운동세력이 중앙과 연결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직의 선을 따라 내밀히 연결되어 있어 중앙의 결정이 곧바로 지방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2 전남도 인민위원회의 물리력을 동원한 외압에 의해 건준조직이 개편된 경우(강진), 이 경우는 중앙과 도인민위원회 세력과는 다른 정향의 세력이 지방건준을 지배하고 있어 중앙의 지시가 이행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인민위원회의 지원에 의한 물리력을 이용해 개편된 것이다. 3 표결을 통해 개편된 경우(진도), 이 경우는 인민위원회로의 전환을 건준위원들과 지방유지들의 난상토론 후 표결을 통해 건준을 개편한 경우이다. 4 건준과는 독립적으로 인민위원회가 새로 결성된 경우(함평, 곡성, 순천, 여수, 고흥, 완도). 이 경우는 우익세력이 건준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준과는 독립적인 세력들이 별도로 인민위원회를 결성한 경우이다. 광주의 건준결성과 인민위원회로의 전환과정을 살펴보자. 해방 직후 광주지방에는 수많은 정치집회가 개최되었다. 8월 25일에도 전남도건준의 주최로 광주서중학교 운동장에서 광주시민 해방 축하대회가 있었다. 이처럼 광주를 단위로 한 집회가 계속 열리고 이것을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이끌어갈 광주건준의 필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광주시를 대표할 건준위원을 선출하자는 데 의견을 일치를 보았다. 방법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불만이 적은 정치적 절차인 선거를 택하기로 하였다. 8월 30일, 각 동사무소에서 쌀배급권을 단위로 한 투표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양장주, 서우석, 곽근수, 박영종, 이기홍, 김부득, 원창규, 최한영 등 33명이 광주시 건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지주계급은 해방 직후에 은둔생활을 하며 정치 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지주계급과 친일파를 제외한 일반 주민들의 의사에 의해 건준이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시 건준은 1945년 9월 10일 경 동아부인상회에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조직의 선을 따라 개편 지시가 내밀하게 전달되고, 그에 따라 9월 10일 오전 10시 경 광주시 건준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모든 정치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화하는 포고령을 발표한 미군정의 탄압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인민위원회와 같은 적극적인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는 형식으로 건준지부 조직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기로 결의하고 집행부를 새로 구성하여 전남의 미군정에 대한 대항의 각오와 결의를 새롭게 하였다. 건준의 간부들이 그대로 유임되었으나 광주시건준 부위원장이었던 서우석만이 탈락되었고 건준조직의 골격에 적산관리부가 추가되었다. 각 부서에 책임위원 1명과 부책임위원 1명을 두기로 했는데, 따라서 전체 조직은 위원장 1명과 부위원장 2명, 그리고 시 책임위원 22명 등 모두 25명으로 구성되었고, 평의원을 포함한 광주시 인민위원수는 50명 정도가 되었다. 광주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은 전남도 인민위원회와 중복되는 점이 많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광주시의 치안유지, 적산관리 등 광주시위원회의 주요 소관업무를 1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5 전남도 인민위원회의 치안대, 노동부 등에서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원회로서는 사실상 수행할 만한 업무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만한 조직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시 인민위원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더 치중했으며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진도의 경우에 건준조직의 결성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도서지방인 진도에는 소식이 다른 지방보다 늦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지리적인 불리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16일 오후부터 목포 등에서 흘러들어온 해방의 소식이 삽시간에 섬 전체에 알려지자 18일 저녁에 해방환영군민대회가 열렸고, 그 준비는 청년들이 태극기를 제작하고 군민대회 벽보를 붙이는 등 주동적으로 담당했다. 당시 진도 군내에는 2백여 명의 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상당한 병력의 일본군이 군내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민대회의 주최측으로서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경비업무를 담당했다. 5백여 명의 군민이 참석한 군민대회에서 건준지부 결성이 이루어졌고, 거기서 직접 위원장이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에 선출된 김중현은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군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위원장에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진도건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이 밖에 이병영, 박윤규, 허백련, 허혁, 허행보 등이 실무부장을 맡았고 정승환을 비롯한 평의원 11명이 선출되었다. 진도 건준은 산하에 청년부를 두고 있었는데, 군 제대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그리고 중졸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청년들은 교육과 선전업무를 담당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민들에게 건준의 역할을 선전하고 애국가를 가르치는 일 등을 하였다. 청년부에서는 건준 구성에 친일파를 배제해야 한다는 요구까지도 하였다. 진도 건준은 초등학교에 본부를 두었는데, 각 교실 1칸씩을 각 부서에 배정하여 업무를 처리케 하였다. 건준은 군청을 접수하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마지막 군수였던 김영선으로 하여금 건준에 복종토록 하였다. 청년부에서도 자체적으로 치안유지를 담당하였지만,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한 9월초까지는 경찰서를 접수하지 못하다가 9월 중순부터 경찰서를 접수하였다. 도건준이 도인민위원회로 개편되고 다른 지방인민위원회 창설 소식이 진도에 알려지자, 건준의 간부들 중 몇 사람이 진도건준의 개편문제를 제기했는데,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9월 중순 경 정식으로 진도경찰서 사무실에서 건준위원들간에 토의를 가졌다. 총 33명의 건준 간부와 유지들이 참석하여,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시간 토의가 계속되었다. 여기서 건준을 계속 고수하자는 입장과, 정식 정치기관인 인민위원회로 개편하자는 입장으로 나누어졌다. 고수하자는 측에서는 현 단계에서는 아직 전인민이 지지하는 밑으로부터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중앙인민공화국 역시 너무 급히 만들어져 국가라고 하기에는 시기가 빠르다 고 주장했고, 개편을 주장한 측에서는 정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며, 지금 당장은 부족하고 서두르는 점이 없지 않았으나,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33

136 타협에 실패하자, 결국 무기명 비밀투표에 의한 표결로 결정하자는 동의가 채택되어 투표 결과 30:3의 압도적인 다수가 개편에 찬성하였다. 김중현이 위원장을 그대로 맡았고, 다른 부서 간부들도 변경없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반대입장을 계속 고수하였던 이길성만이 청년부 활동을 그만두고 진도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사업에 전념했는데, 인민위원회측에서도 적극 협조하여, 많은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시간을 배당받아 교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인민위원회는 건준의 간부들 대부분 그대로 연결되었으며, 곽재필, 곽병관, 윤여남 등이 추가되었다. 지방인민위원회 조직은 건준에 비해 더 급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지방인민위원회들이 중앙인민위원회의 지시에 의해 건준에서 개편되었다는 사실은 중앙인민위원회의 성격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을 민중정권의 지방조직으로 인식하였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의 계급구성을 볼 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민위원회를 지지했기 때문에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강력한 지방권력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인민위원회가 빠른 기간 내에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지지기반 위에 전국적으로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미군정이 이를 파괴하려고 했을 때 이들이 강력한 저항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개연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지방인민위원회는 대체로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를 갖추었으며, 지역 특성에 따라 보건후생, 귀환동포, 소비문제, 노동관계, 소작료 등의 문제를 다루는 부서를 설치하였다. 많은 지방인민위원회는 기민하게 해당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나 부유한 한국인들로부터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기부금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세입을 증가시켰다. 인민위원회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으로부터 소규모 가옥에서부터 대규모 공장에 이르기까지 재산의 경영권 이전이나 명칭변경을 서약하는 증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한 편, 1945년 9월 8일 오 후 1시 미 24군 단 이 인천 의 월미 도에 상륙 한 다음, 9일 서 울에 입성했는데, 그날 오후 3시 하지 미군사령관이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아베 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음으로써 일제 36년간의 한국통치는 종언을 고했다.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실시를 포고했다. 말하자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되 미군이 다시 일정 기간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점령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9월 14일 아놀드를 군정장관으로 하는 군정청을 설치함으로써 군정통치를 시작했다. 미군정청이 취한 최초의 조치는, 미군의 점령이 늦어지는 동안 발생한 모든 변화를 원상태로 복구하고 일제 통치수단을 사용하여 미군정에 의한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수립되어 활동해오던 인민공화국을 공산당원들이 조종하는 좌익운동단체로 간주하고 이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치구도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인민공화국 부인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101군정대가 1945년 10월 23일 광주에 진주한 이후에 군정관리들과 인민위원회 간부들간에 1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7 협상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의 대표로 나온 스노우 대위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인민위원회 대표들은 위원장 박준규, 부위원장 국기열, 서기국장인 이익우 등이었으며, 통역은 최영욱이 맡았다. 양측은 인민위원회의 권력을 미군정에 이양하고,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에서 추천하는 인사들을 미군정의 고문을 위촉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합의했다. 전남도 초대 군정지사를 맡은 제20보병연대장 펩크(D.R. Pepke)대령은 10월 25일 일본인 지사 야기와 경찰서장 카사키를 파면하고, 10월 27일 오전 10시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군정실시를 선포하고 최영욱을 한국인 지사로 발령했다. 그러나 이 협약은 10월말 경에 인민위원회에 우호적이었던 스노우 대위가 다른 곳으로 전출되고 군정지사가 경질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되고 말았다. 새로 부임해온 군정지사는 전임자와는 달리 인민위원회의 무조건 해산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인민위원회측은 이미 합의된 문서를 제시하며 항의하였다. 하지만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군정의 본격적인 인민위원회 파괴공작이 시작되었다. 전남도 경찰이 미군장교 암살음모를 적발했다고 발표한 10월 28일, 미군은 치안대장 김석을 포고령위반 혐의로 체포했고, 10월 31일 미군과 한일 경찰관 수십 명이 도인민위원회 치안부를 습격하여 여러 명의 치안대원들을 체포하였다. 259) 치안부장 이덕우는 이튿날 경찰서에 출두명령을 받고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다. 이로부터 이틀 후인 11월 2일 인민위원회는 월권행동을 하는 치안대, 정비대, 국군준비대 등은 즉각 해산해야 한다는 군정지사의 요구에 동의했다. 이리하여 11월 6일 도인민위원회는 군정지사에게 정부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할 것을 서명한 문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고, 다음날 그 문서는 신문에 공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기관으로서의 인민위원회는 형식적으로는 일단락되고 일개의 정당, 사회단체로 역할을 축소해야 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그 후로도 1946년 2월경까지는 실질적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지속적으로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적산관리위반이라는 혐의로 검거령을 내려 공개활동을 억압했고 이들은 결국 전남을 떠나든지 아니면 지하로 잠복하여 계속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전남도 인민위원회의 해체과정과는 달리, 미군정은 각 지방의 군단위 인민위원회를 무력을 동원하여 해체시켰다. 미군의 힘으로는 부족할 때는 한인경찰들과 합동작전을 펼쳐 그들을 체포하여 각 경찰서에 감금하였다. 나주군과 보성지방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년 10월 중순께 길버트 미군정 지사가 나주인민위원회를 방문하여, 그 기능을 정지하도록 명령하면서 이를 위반할 때는 포고령위반 혐의로 체포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렇지만 나주인민위원회는 이에 개의치 않고 인민위원회의 본래활동을 계속했고, 이에 따라 미군정은 1946년 2월 1일 무장력을 동원하여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외곽조직 구성원들을 구타-구속함으로써 인민위원회 조직을 파괴했다. 결국 259) 주한미군정사(HUSAMGIK) 3권, p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35

138 나주인민위원회의 활동으로 원만히 수행되던 나주지방의 민족국가수립의 노력은 미군과 전남도 경찰부장 박명제의 무력탄압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명제는 이미 일제 때 일제경찰로서 나주경찰서에서 사법주임으로 있으면서, 나주지방의 타협적 민족운동이었던 협동상회운동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나주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성지방에서는 우익계 인사들이 광주로 가서 도경찰부장 박명제에게 보성에 경찰을 배치해주도록 요청함으로써, 미군과 도경찰의 작전에 의해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해체되었다. 그 결과 일제 하에서 보성경찰서 순사부장이었던 전두환이 서장에 임명되고( ), 경찰이 재구성되어 탄압을 계속함으로써 인민위원회는 지하로 잠적했다. 당시 전남을 포함한 남한 각 지방에는 이미 인민위원회가 자주적으로 수립되어 통치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구조로 볼 때 일종의 2중 권력의 현상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미군정이 인민위원회의 승인을 공식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두 세력 간에 어느 정도의 권력 갈등 양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막강한 무장력을 소유한 미군정의 경쟁대상이 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인민위원회는 기층세력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미군정과 정면으로 대결을 하면서 결국 그 힘에 밀려 지하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2. 사회단체의 분출과 사회적 갈등 1) 다양한 사회단체의 형성과 발전 일제가 패망하여 식민지 지배와 통치가 막을 내림으로써 그 권력에 억눌려 있던 사회가 새로운 생명 의 몸짓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는 국가나 지배권력이 형성되기 전부터 존재해 오던 인간 삶의 원초 적 토대이기 때문에 사회의 활동을 억압했던 일본 제국주의 권력이 소멸되자 곧바로 다양한 사회단체 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출현하는 사회단체는 대체 로 억압권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억압으로부터의 해 방은 인간 삶에서 가장 기본적 요건이기 때문이다. 해방후 전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청년단체는 전남도청 조선인 청년단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 3백여 명은 도청 회의실에서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청취한 후, 즉시 전남도청 조선인 청년단 을 결성했다. 이들은 단장에 김창선, 부단장에 양보승을 선출하고, 미군이 진주하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도청을 조선인들만으로 지키기로 결의했는데, 이는 전남지방 사회조직의 시발이었다. 이들의 활동목적은, 도청의 서류, 집기를 일본인들이 빼돌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인 청년단이 도청에 창설되었다는 소식을 각 군청에 알려 각 군청에서도 자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에 1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9 따라 광주부청에서도 이필화를 중심으로 광주부청 청년단이 결성되었다. 같은 날 오후 5시에 또 하나의 청년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것은 광주서중 강당에서 졸업생 1백여 명이 모여 조직한 화랑단 이라는 청년단체였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정부 수립에 협조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기여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단장에 김창선(전남도청 조선인 청년단장 겸임), 부단장에 이창업, 총무부장에 김병택, 청년부장에 강봉섭을 선출했다. 결성식을 마친 화랑단은 광주서중 정문을 출발하여 대한독립만세 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이고 광주공원으로 달려가 일제식민통치의 상징물이었던 신사를 파괴해버렸다. 화랑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먼저 벌였던 일은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한 한인 경찰에 대한 민족심판이었다. 학생들은 1943년 2차 광주학생사건 때 서중 5학년이었던 기환도를 경양방죽에서 물고문으로 익사시킨 정모 형사등 10여 명의 친일경찰들에 대한 재판으로 열고 태형을 가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인 청년단체를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이념적 성향이 두드러진 좌익과 우익성향의 단체를 정리한다. 청년단체로서 선구를 이루었던 사례는 광주청년단 이었다. 이 단체는 광주시내의 청년들 중 사회활동에 관심이 두드러진 인사들이 결합하여 8월 18일에 광주극장에서 출범했다. 광주청년단의 주요 활동분야는 치안이 마비된 당시의 상황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일본인들의 재산반출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광주청년단은 해방직후의 상황에서 자생적인 것이었지만, 일정한 무장력을 행사했던 치안유지조직이었다. 따라서 청년단의 이러한 성격은 건준 산하의 치안대와 비슷하고 임무도 같은 것이어서 청년단의 김석 단장은 건준의 이덕우 치안부장을 찾아가서 광주청년단의 조직과 취지를 설명하고, 치안대를 자기들이 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덕우 치안부장도 이에 동의하여 김석이 치안대장을 겸임하고, 부대장에 정성태, 김부득, 특무대장에 김이현을 선출하였다. 치안대 본부는 대인동 창평상회에 있던 건준사무실에 두고, 광주청년단 사무실은 도청앞 무덕전으로 정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주청년단은 실질적인 조직력과 행동력을 갖추고 해방정국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면서 치안확보와 적산관리에 주력했다. 45년 9월 초순경 광주청년단과 건준치안대는 민족정서를 고취하기 위하여 광주서중학교 운동장에서 광주청년단 주최로 해방기념 축하운동회를 개최했는데 운동회가 끝난 석양 무렵 교문을 빠져나오던 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은 인근에서 서성거리던 일제 때의 고등계 경사 강모를 발견하고 집단구타해 현장에서 즉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46년초에 접어들면서 청년단 간부들 중 몇 사람이 임정을 지지함과 동시에 우익쪽으로 편중된 태도와 행동을 보이면서 청년단을 그쪽으로 이끌었고, 이에 청년단의 일부 단원들이 탈퇴하고 대신에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였다. 260) 그 후 광주청년단은 조직을 강화하여 단원을 2,510명으로 확대하고 간부를 83명으로 재조직하였으며, 건준치안대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점차 치안대 조직으로 발전해나갔다. 이 밖에도 청년동맹 전남총연맹과 이 단체를 모체로 발전된 260) 광주민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37

140 민주청년동맹, 광주부녀동맹, 변호사협회, 교육자연맹, 기자단, 노동조합 광주평의회 등 1946년에 출범했다. 이와 아울러 이념적 성격이 더 명료하게 드러나는 좌익단체와 우익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261). 먼저 우익성향의 단체들을 보면, 전남도 고문회, 재건된 경찰조직이 대표적이다. 전남도 고문회는 미군정이 해산시킨 인민위원회의 기능을 대체하는 기구로 구성되었다. 1945년 11월부터 46년 3월까지 존속한 지사 고문회의 설치목적은 각 지방의 민의를 파악하고 민주적인 대의정부의 수립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고문회의 직접적인 기능의 하나는, 도내 각급 기관에 충원될 인사를 추천하는 일이었지만 전남 지사 고문회는 대다수를 보수인사들이 차지함으로써 원래 주장했던 바와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미군정은 도고문회의 자문을 얻어 도지사에 최영욱을 임명하고, 도국장급 인사를 단행한 데 이어 시장, 군수급도 인사를 실시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일제 때 관직에 있었던 경력자들로서, 지방민의 여론에 관계없이 능률 위주로 임명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개 한민당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으며, 지주계급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관료조직이 보수인사들로 충원됨과 더불어 보수 우파계열이 한민당, 한독당 조직을 정비하게 됨으로써 미군정의 반공정책을 원활하게 해주었다. 경찰의 재조직은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일본 경찰에서 근무했던 한인들로서 해방이 되자마자 자취를 감추었다가 미군이 진주하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38선 이남에 대한 점령정책을 펴나가자 이에 부응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1945년 9월25일 전남도 경찰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전남경찰관 대회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점령정책이 현실화하자 광주에서도 경찰의 활동이 재개되었고 경찰관대회의 결의에 따라 다시 집결한 경찰들은 치안대 및 청년단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악화된 지방의 치안을 자신들이 바로 잡을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부활된 경찰조직을 미군정에서 수용함으로서 경찰은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건준치안대와 청년단이 중심이 되어 광주에서 치안활동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간에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경찰조직이 다시 부활되고 이를 미군정에서 허용하자, 광주의 청년단체들은 일제의 경찰을 다시 불러들이는 조치는 해방 민족국가 건설에 맞지 않는 것이며 일제 때 독립지사들을 고문했던 경찰들을 다시 유임시킬 수 없다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경찰조직이 부활함으로서 기존의 청년단과 갈등관계가 심해지자 결국은 경찰재건위원장인 노주봉이 청년단에 의해 9월 9일 피살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광주청년단장인 김철과 부단장인 주봉식이 미군정에포고령 위반협의로 구속되었지만 김구 등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결국 이 사건은 청년단이 해산되는데 결정적인 기회로 이용되었으며, 각 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민위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치안대도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 261) 사회단체와 달리 정치단체로서 다양한 정당이 발전했다. 좌익정당으로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조선인민당 전남도당, 남조선신민당 광주본부, 그리고 우익정당으로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의 지역당이 있으나 정치단체는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1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1 나아가 경찰조직은 자신들을 지원했던 고문회의까지도 약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전개하면서 극단적 반공주의를 실천했다. 다음에는 좌익단체를 상징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살펴보자. 우익진영은 통일민족국가를 달성하려는 전체국민의 의제에 배반되는 쪽으로 상황을 몰고 갔다. 표면적인 명분은 모스크바 결정의 절대반대이지만, 속내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기도하고 있음이다. 이에 대응하여 좌익 진영에서도 점점 격렬해져가는 반탁세력에 대항하고 모스크바 결정의 지지를 조직적으로 전개시켜 나가기 위해 조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조신 인민당, 독립동맹, 노동조합 전국평의회, 농민조합 전국총연맹, 총년총연맹, 부녀총동맹, 문학가동맹, 과학기술단체 등 29개 정당, 사회단체와 각 지역의 사회단체가 참석한 가운데 좌익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을 1946년 2월 15일, 16일 이틀간에 걸쳐 결성하였다. 민전은 조직요강에 의거하여 도시군읍면에 민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경상북도 민전을 시작으로 하여 4월 초 서울 민전에 이르기 까지 각 지방의 민전이 연달아 결성되었다. 전남 민전의 공식적 출발은 3월 9일이었고 이에 참여한 집행부 인원은 36명이었다. 그러나 전남 민전이 공식적으로 결성되기 전에 이미 아래로부터 민전과 같은 통일전선조직이 결성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대두된 것은 46년 1월이었다. 조선민족 통일 광주협의회는 1946년 1월 12일 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1월 23일 오전 9시 전라남도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할 것 등을 결의하고 폐회하였다. 262) 이와 더불어 1946년 1월 27일에 중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를 환영하기 위한 광주시민대회에서도 민전결성을 지지하는 결의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남 민전 준비위원회는 각 단체와 지방대표를 엄격히 비례대표에 의거해 대의원수를 결정하여 결성대회를 3월 9일에 가졌던 것이다 263). 도내 각 정당 각 단체, 각 파 무소속을 총 망라하여 무려 186개 단체, 대의원 423명과 천여명의 방청객이 운집하여 성대히 치러졌다. 264) 위원장에 김완근, 부위원장에 유혁, 국기열, 위원에 김범수 외 166명의 중앙위원을 발표하였다. 전남민전이 결성되어 전남지방에 있던 정치사회단체들이 총집결하게 되는 분위기로 이끌어지자 우익 청년조직이었던 광주청년단원의 단장 및 단원들인 신언노, 김희종, 윤재춘, 문준식, 최정식 등이 탈퇴하여 민전에 참가하였다. 전남도민전의 결성식이 있은 2일 후인 3월 11일 도민전의 연계조직으로 광주시 민전이 결성되었고, 연이어 목포, 장성 등지에서 지방 조직의 건설작업이 진전되었다. 광범한 사회단체들이 결합되어 강력한 통일전선체로 정립된 민전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지방 민전의 결성지원과 아울러 우편향적인 경찰의 중립화를 촉구하고 재판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262) 광주민보 ) 264) 광주민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39

142 했다. 1946년 4월 1일에는 도민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조선인연맹 대표 송성철을 초청하여 재일본 조선인 동포의 생활실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1946년 6월 10일에는 광주극장에서 미소공동위재개를 촉구하기 위한 집회를 열기도 했다. 1947년 2월에는 각 지방대의원과 대규모 방청객이 운집한 가운데 정기대회를 가졌다. 3월 15일에는 광주를 방문한 중앙군정청 고문단 두 사람과 전남민전 대표단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민전측은 기본적 자유권 보장, 친일- 민족반역자에 대한 철저한 숙청 등이 요구가 제시되었고, 미군정측에서는 미곡수집 등 정책과 지방 총선거 등에 관해 민전 측의 입장을 질문했다. 상호간의 의견교환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2) 미군정에 대한 저항과 좌우갈등 미군정이 전남지방에 진주하기 전까지 전남지방에는 좌우의 대립현상이 타나나지 않고 있었다. 건 준조직과 같은 경우 해방 이후 새로운 민족국가를 설립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우익세력이나 좌익세 력 할 것 없이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민족국가 수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실시된 이후 강력한 무장력을 갖춘 미국 군사정권이 인민위원회를 부정하고 해체시켜 나감으로써 이전까지 국가건설운동을 선도해왔던 진보세력(좌익)은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에 직면했다. 이들은 이제 정치조직이 아니라 사회단체의 한 형태로 보수세력(우익)과 경쟁해야 했다. 한편,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은 미국 군정의 비호와 지원에 힘입어 진보세력에 대한 기존의 열세를 극복하고 정국을 주도하려 했다. 그 결과 미군정 하에서 이 두 세력 간의 사회적 경쟁과 갈등은 가열되어 갔다. 물론 이 경쟁과 갈등에서 미군정이 좌익을 배격하고 우익을 지원하며 비호하는 한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항일독립투쟁의 역사에서 더 강인한 정통성을 담지해온 좌익세력은 물러설 수 없는 국면이었다. 신탁통치, 국립대학육성, 3 1절기념식, 8.18해방절기념식 등 사안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광주지방에 신탁통치문제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30일 전남신보사를 통해서였다. 광주지방의 여러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여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합의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비공식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인민위원회 측에서는 광주지방의 신문을 통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적극 홍보해나갔다. 모스크바 결정 절대지지라는 입장을 취했던 좌익세력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서회란 조직을 결성하여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었으며 광주서중의 경우 80% 이상의 학생들이 이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 한편 우익진영에서는 1946년 1월 4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반탁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날 아침부터 시내 곳곳에서는 신탁통치반대라는 플레카드와 전단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서중에서 열린 반탁대회가 진행되면서 반탁결의문이 채택될 즈음 갑자기 반탁문구의 플래카드가 찢겨지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림과 함께 모스크바결정절대지지 라는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대회장은 1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3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해서 광주지방의 좌우익간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아울러 증폭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좌익이 압도적이었고 모스크바결정 지지라는 구호가 더욱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이리하여 서중학교 교정에서 실패를 맞본 우익진영은 1월 7일 다시 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우익청년단을 중심으로 반탁궐기대회를 열었다. 광주시 부인회에서도 반탁강연회를 여는 등 반탁운동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46년 1월 27일 미소공동위원회 환영 광주 시민대회가 중앙국민학교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인민위원장이었던 朴 準 圭 의 개회사에 이어 각계로부터 환영사, 그 다음에 결의문이 체택되었다. 그 후 좌우익간의 직접적인 갈등의 기폭제는 광주서중학교에서 개최되었던 3 1절 기념식에서 발생한 충돌이었다. 이미 학생들이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대립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서중교사들은 교무회의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주의주장을 일체 펴지 못하도록 미리 예방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기념식은 처음에는 아무런 정치성을 띠지 않고 진행되다가 시가행진에 들어가자 반탁학련소속 학생이었던 장충식, 이은택 등이 신탁통치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치고 나왔다. 이 때 교사들이 이를 제지하였지만 학생들이 이에 불응하자 몇 차례 뺨을 때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바로 곁에 있던 우익단체의 장홍염 등 대한독립촉성회 청년단원과 차영후 등 반탁학련 학생들이 몰려와 선생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3 1절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반탁진영이었던 우익학생들 200~300여 명이 광주서중 교무실로 몰려가 교사들을 집단으로 구타하는 사건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 당시에 다수의 경찰간부와 무장경관이 임석해 있었음에 불구하고 폭행의 현상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반탁학생 비호하는 편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학교당국에서는 물론 학부형들, 동창회에서 까지도 성명서를 통해 경찰과 군정당국에 항의하였다. 미군정은 이 충돌사건의 주모자로 박준옥 교감을 비롯 김오중, 유창종, 유상열 선생을 미군정에서 지목하고 이들을 구속시켰다. 서중교사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구속된 인사들이 항의를 계속하자 결국 이 사건은 얼마 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한 3 1절 기념식이 좌우의 갈등으로 피비리내 나는 기념식이 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광주지방에 좌우익간에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을 때 1946년 6월 2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게 되자 광주지방의 좌우익 세력간에는 더욱 갈등이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15일 민전구성원들과 민애청 전남지부 조직원들이 광주극장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절대지지 모임을 갖고 이것이 끝난 후 이승만물러가라! 모스크바결정절대지지 라는 플레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벌이자 결찰기동대와 반탁학련은 이들과 대치하다가 공포를 쏘아 해산시키는 등 광주지방에서 좌우익간의 갈등은 첨예한 양상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41

144 각종 폭력사건이 일어나는 가운데 미군정청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을 발표하자 이를 반대하는 광주지방의 좌우익학생들은 다시 한번 폭발하게 되었다. 국대안 반대문제를 싸고 남한 각지를 휩쓸고 있던 맹휴선풍은 드디어 광주에도 파급되어 1947년 2월 21일부터 광주사범과 농업학교에서, 22일에는 光 州 醫 大 와 西 中 에서 맹휴를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남도 군정장관은 어떠한 방법을 불문하고 맹휴 또는 시위운동을 한 학교와 대학에 대하여서는 그 학교를 7일간 폐쇄하며 다음과 같은 조목하에 처리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아울러 머피 군정장관은 당국의 방침에 따라 결국 光 師, 西 中, 光 農 의 맹휴학교에 대하여 각각 일주일간의 휴교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의 맹휴에 대응하면서도 1947년 3 1절을 맞아 광주 전남지방의 치안담당자는 屋 外 集 會 와 街 頭 行 列 을 不 許 하면서 秩 序 維 持 를 要 望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우려스런 담화에도 불구하고 시내 각 학교에서는 3 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결국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순천과 영암지역에서 3 1절기념에 참여한 군중과 이를 해산시키려는 경찰사이에 충돌이 격화되었고, 경찰의 발포로 인해 즉사 1명, 중상 2명, 경상 1명의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충돌은 뒤이어 다가온 8 15해방 기념식에서도 이어졌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을 위한 준비모임이 광주시내의 주요 정당 간부들 사이에 개최되었다. 이들은 해방 1주년 기념식을 연합하여 개최하고 이를 좌우 합작운동으로 연결시켜 성사시키려고 하는 비공식적 모임을 계속해왔다. 처음에는 좌우 양세력이 모두 이 계획에 동의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그 후의 모임에서 우익은 좌익이 집회를 좌지우지 하려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7월 20일 연합회의는 무산되었다. 양 진영은 이제 815기념식을 따로따로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65) 이렇게 국민통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 세력들의 편차가 크게 나타남으로서 815해방 좌우익 세력이 따로 갖게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기념식을 각기 분리해서 따로 개최하겠다는 견해에 대하여 경찰은 집회허가를 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미군정의 우익편향성을 드러냈다. 마침내 8월 15일 해방 1주년의 기념일을 맞이하여 광주부는 기념식을 광주공원에서 가졌고, 좌익 편향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현재의 전남의대 병원 자리에서 따로 기념식을 치루었다. 전남의대 병원 자리에서 치뤄진 민전의 기념식에는 화순탄광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자 경찰과 미군이 이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충돌이 일어났고 폭력 갈등으로 번져 여러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로 끝나게 되어 이미 민족분열의 직접적인 대결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의 점령정책이 전개되어 가면서 즉각적인 독립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기대가 무산되자 이에 대한 저항이 여러부문에 걸쳐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우호적인 정치군력을 창출하려는 의도에 따라 보수적인 우익세력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통일정부를 265) 미군정정보보고서 2권, p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5 수립하려는 한국인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고 이를 조직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사회주의 정당인 조선공산당 세력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이라는 방침하에 미군정과의 직접적인 대결국민의 과정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사건이 10월 대구봉기이다. 이 봉기는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9월 총파업은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파괴공작과 조선공산당 본부의 습격으로 인해 이들 조직들이 와해 위기에 놓이자 대구지방의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한 노동운동 세력이 총파업을 조직적으로 수행하여 대구항쟁과 연결시켰다. 부산에 이어 대구에서도 9월 23일 철도 기관사 노조원 천여명이 노동쟁의단을 구성하여 파업에 돌입하였다.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인 10월 1일 2백~3백 여명의 시위자들이 파업노동자들을 지지하며 대구 시가지를 행진하였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 1천여명도 쌀을 달라고 요구하며 대구 부청으로 몰려들어 현관과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10월 2일 아침에는 1천여명에서 2천여명 사이로 추산되는 군중이 그 전날 피살된 시위자의 시체를 짊어지고 대구 거리를 행진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의 습격에 의해 대구 경찰서가 접수되었고 이러한 소식이 널리 퍼지자 군중들은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경찰을 무장해제시키고 각처에서 경찰을 살해하였으며 그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경찰은 미군의 명령을 받아 무장경찰 150명을 수만 명의 군중이 모인 파업투쟁위원회 본부에 파견하여 선동하던 노동자들을 사살하였고, 이에 분격한 시위군중들과 충돌하여 다수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자 미국 전술군도 투입되어 오후 3시경 전차 4대와 기관총부대가 출동하였고 그날 오후 5시경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266) 이 사건은 그 후 계속 확산되어 10월 상순과 중순에는 경북, 경남지역뿐만 아니라 충남과 충북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10월 10일과 22일 사이에 소규모의 투쟁이 벌어졌고 강원도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항쟁이 발생하였을 뿐이고 좌익세력이 강했던 제주도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1946년 가을 대구봉기의 파급효과가 전국적으로 가장 크게 작용한 곳은 광주 전남지방이었다. 광주 전남에서 항쟁의 주도세력은 중앙당과 조직적으로 연결된 지방당의 주도하에 민전과 노동조합, 농민조합의 조직원이 관계했고 최전선의 선봉대 역할은 민전이 맡았으며 마을의 청장년들이 동원되었다. 광주 전남지방의 10월 항쟁의 여파는 화순, 무안, 목포, 광주, 나주, 보성, 벌교, 장흥, 강진, 장성, 담양, 영암 등으로 널리 확산되었었다. 이 가운데 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화순을 시발로 하여 나주와 해남, 목포 등지였다. 노동자, 농민이 가장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기도 했지만 그만큼 농민들의 계급모순이 심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저항과 도전의 역사적 전통과 관련된 결과로 266) 대구항쟁 당시 사망자가 300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저항이 있었다. 강만길, 고쳐 쓴 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8) 를 참조할 것.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43

146 본다. 화순에서의 항쟁양상을 살펴보자. 1946년 10월 30일 화순탄광의 파업노동자 2-3천명이 광주를 향해 식량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46년 8월 15일 미군들의 저지를 무릅쓰고 전남의대 앞에서 해방 1주년 기념식을 감행한 바 있던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대구사건의 파장으로 10월 30일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에는 미군 고위 장교들의 설득으로 해산되었고, 그 다음날의 시위에서도 3천명이 집결했으나 이를 막는 미군 방첩부대 및 전술부대 간에 폭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저항은 미군과 경찰이 시위의 주모자를 체포하러 갔던 11월 4일에 발생했다. 이 저항에서는 지금까지 삼가왔던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이 감행되었다. 미군의 체포단이 시위주동자들을 검거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화순탄광노동자들은 미군 차량을 전복시키는 등 과격한 공격적 저항을 보여주었다. 6일과 8일에도 군정당국은 광산촌을 습격하여 시위자를 체포하고 기물을 파괴하였으며 서류를 압수해갔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미군정에 대한 항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전남의 각 지방에서도 농민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항쟁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되었다. 그날 바로 목포의 전화 교환원들이 파업에 돌입하여 모든 통신을 두절시켰다. 광주에서는 이미 대구의 10월항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미군정과 마찰이 있은 후 파상적으로 경찰서나 미군정기관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10월의 대구사건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주지방에서는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기념식을 기화로 해서 조직적인 저항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날 낮 철도 종점 인근에서 학생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송정리와 서창에서는 급진 시위대들이 경찰서와 교도소를 습격했으며, 화정리에서는 신한공사 창고에 침입하여 방화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5명이 사망했고 7명이 부상당했다. 제4장 196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진전 267) 1. 4월혁명과 60년대 사회운동 1) 4월혁명-1 국가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고 유능하고 젊은 정치적 경쟁자를 사형으로 처단하는 등 극단적인 폭력과 독재를 이어오던 이 정권에게 다시 정부통령 선거 때가 돌아왔다. 정부 와 집권 자유당은 그 동안 저질러 온 탈법과 비인도적 악행 때문에 민심이 이반하여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계속 집권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267) 제4장 광주 전남의 현대 사회운동 에 관한 서술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연구단>의 각 부분운동 집필자인 오승용(민주화), 윤수중(농민), 정호기(노동), 이영재(교육), 오미란(여성), 정유하, 배종민, 김도일(문화예술), 김희송(시민), 최정기, 유경남(5 18항쟁)의 미간행 원고에서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요약 재구성한 것임. 1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7 기획하게 했고 그 하수인들은 현장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실행했다. 한 경찰 공무원은 득표율 목표가 9할5푼임을 폭로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7쪽). 이를 위한 가능한 수단들이 검토되었다. 우선, 대통령 선거일을 합당한 사유도 없이 변경했다. 관례에 따르면 5월이었지만, 경쟁자인 민주당 조병옥 후보 268) 의 건강이 좋지 않아 선거운동이 어렵게 된 현실을 악용하여 선거일을 3월 15일로 두 달 가량 앞당겼다. 이 밖에도 공무원과 경찰 및 정치 깡패(일종의 폭력배)를 동원하여 유권자를 위협하고 회유 하는 한편,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사전투표, 공개투표, 대리투표, 3인조 5인 조의 조별 투표, 가짜 투표용지 활용, 투효함 바꿔치기, 민주당 참관인에 대한 폭행 및 수면제 투입 등 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참으로 비열하고 추악한 선거대책이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부정선거는 잔인한 폭력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269) 3월 9일 저녁에 여수에서 민주당 여수시당 간부들이 괴한들에 의해 습격을 받았다. 괴한 7-8명이 맥주병과 곤봉, 청봉, 등 흉기를 휘둘러 당원들이 구타당했다. 그 가운데 김용호가 현장에서 뇌진탕으로 졸도하여 병원에 옮겨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다음날 새벽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동아일보 ; ). 3월 11에는 송정읍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하여 자유당과 민주당은 서로 자기 당원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조선일보, ).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불어오는 부정선거의 광풍에 다름 아니다. 선거일이 되었다. 전남지방에서는 투표개시 시간이 아침 7시인데, 한 시간 전인 6시부터 공무원들이 3명 또는 5명씩 조를 지어서 서로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있게 조별로 투표를 했다. 이 때 민주당 참관인들이 투표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투표시간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저지당했다. 공개투표는 투표자가 기표한 내용을 선거사무 종사원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민주당 참관인들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괴한들에게 폭행당한 후 축출되거나 잡혀갔다. 전남 광산군 송정읍 제8투표소의 민주당 참관인은 투표소 내부 광경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괴한 20여 명에게 폭행을 당했다. 광주에서도 투표하기 위해 번호표를 달라는 유권자를 폭행하거나 위협하여 번호표를 주지 않는 사례가 많았으며, 양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한 여성이 번호표를 달라고 요구하다가 괴한에게 멱살을 잡혀 쫓겨났다. 광주에 있는 육군 상무대의 한 병사(정형수 상병)는 오전 9시 40분 경에 문서반 완장을 달고 민주당 광주시당 선거관리사무소를 찾아와 군부대 내의 집단대리투표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야수적 폭력과 탈법으로 짓밟히고 있는 이 참담한 부정선거에 직면하여 더 이상 268) 미국 유학시절에 독립운동에 열성이었고, 귀국 후에는 신간회( 新 幹 會 ), 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관련해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1960년 2월 15일에 사망하였다. 269) 광주 전남지역의 4 19에 관한 서술내용은 광주 전남사회운동연구단의 민주화운동 집필자인 오승용의 원고와 자료를 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부분적으로 필자가 수집한 자료와 해석을 추가한 것이다. 물론 이 글의 내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음을 밝힌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45

148 선거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민주당 지구당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민주당 전남도당에서는 상오 10시 20분을 기해 각 투표장에서 철수하고 있음을 발표했다. 민주당 광주시당은 12시 50분경에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시위에 돌입했다. 참관인 70여 명과 민주당원 100여 명이 함께하여 시작했고 이에 청년학생과 시민 1천여 명이 뒤를 이어 동참했다. 곡( 哭 ) 민주주의 장송 이라고 쓴 만장을 앞세우고 광주시당 본부인 금남로 4가에서 출발하여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시위대는 민주주의는 절명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찾자 고 외쳤다. 분노한 시위대의 행진은 YMCA 앞에서 막아서고 있던 무장경관 200여 명과 출동한 소방차부대와 충돌했다. 이 때 광주시당 선전부장 김녹영을 비롯해 염성웅, 조계현, 이정근, 양계식 등이 전치 2주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의 일부는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도청 앞까지 전진했으나 소방차가 쏘아대는 물줄기로 인해 물러나면서 해산했다. 경찰은 이필호(민주당 전남 선거사무장)를 비롯하여 김석주, 염성웅, 오영수, 등 4명을 현행했다가 2시경에 모두 석방했다. 이는 부정선거를 규탄한 전국 최초의 시위였다. 선거 당일 낮에 광주에서 분출했던 저항시위가 비교적 소규모적이고 단시간 내에 종료되었는데 반해, 뒤이어 이날 오후에 폭발했던 마산시위는 훨씬 대규모였고 심야까지 지속되었으며, 저항강도에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만큼 치열했다 270). 그러나 3 15선거 이후 전국적인 저항의 흐름에 비교해 볼 때, 전남지역에서 저항의 파고는 소강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비교적 완만하고 뒤늦게 찾아왔다. 271) 격렬했던 마산시위를 비롯하여 3월 하순 이후에도 서울, 부산 등의 도시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학생들의 시위가 지속되었고, 4월 11일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부두에 떠오른 후 폭발한 제2차 마산시위 후에 시위는 더 널리 확산되었지만, 광주에서의 본격적인 저항시위는 4월 19일에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4월 초부터 갖가지 풍문과 소규모 저항의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기획은 4월 18일 밤에 이루어졌다. 이날 밤, 광주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이홍길과 김신담, 김병욱, 홍갑기 등은 19일을 기해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그 구호는 3 15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서울 등지의 구속 학생을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의 4가지로 정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12). 19일 1교시가 시작되는 대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신호로 하여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타종수는 몸집이 큰 신강식과 조병수가 맡았다. 이 모임에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학생이던 전만길이 참여하여 자기 학교 학생들도 동원하겠다고 다짐했다. 270) 마산 시위가 이와 같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타오른 사정은 더 진지한 연구가 요구되는 문제이다. 271) 물론 3월 19일 오후에 목포 민주당원과 시민들의 항의시위가 있었다. 남교동 공설운동장 정문 앞에서 3 15선거는 강탈선거다 고 외치며 3 15정부통령 선거는 불법이며 무효 라는 구호가 적힌 유인물을 살포했다. 경찰의 저지로 시위는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민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등 11명이 연행되었다. 뒤이어 전남도의회 민주당 소속의원은 이하영 도지사 파면 건의안을 제출했다. 민주당 목포시당위원장은 선거에서의 위법사항을 적시하여 목포시 선거위원장을 포함한 25명의 선거관계종사원을 선거법 위반혐의로 고소했다(조선일보, ). 1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49 19일 아침이 왔다. 1교시에 맞춰 난타하는 종소리가 울렸고, 학생들은 속속 운동장에 집결했다. 교장실에 불려간 주동 학생들은 창문을 뛰어 넘어 학생들과 합류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집결했으나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정문이 막히자 후문으로 진출했다. 후문을 통해서 계림동 광고 앞길로 나오자 경찰은 이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했고, 이 때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시위대의 주력이 되는 한 대열은 계림동 파출소 쪽으로, 다른 한 대열은 경양방죽 쪽으로 향했다. 계림파출소 앞에 이른 시위대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 백차에 저지당하면서 수십 명이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경찰이 시위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자 학생들은 소집단으로 나뉘어 흩어졌는데 이들은 인근 학교를 돌며 시위 참가를 호소했다.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광주농고, 광주상고 등지로 소리치며 휘몰아 다녔다. 여학생 중에서는 광주여고가 특히 거셌다. 광주고등학생을 추적하는 경찰 백차가 광주여고 후문 쪽에 나타나자 여고생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교사들이 제지하자 여고생들은 후문 판자울타리를 밀어 넘어뜨리고 시내로 진출했다. 전만길에 의해 주도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서 발생했던 4 19시위의 전 과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272), 조대부고생들이 거리에 나설 때 숭일고생들도 이에 동참하여 금남로로 향했다. 오후 2시가 되자 규모가 커진 고교생 시위대열은 금남로에 운집했다.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이 합세한 고교생 중심의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와 행진으로 시위의 열기는 고조되어 갔다. 뒤 이어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고, 분노한 시민학생들의 시위는 점점 격렬해졌다. 이 무렵부터 경찰의 최루탄 발포가 시작되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4). 고교생들이 주축이 되고 시민들도 다수 참석한 가운데 시위대는 도청 앞에 집결했다. 충장로 파출소를 투석으로 공격한 시위대의 주력은 충장로를 타고 내려가 광주서중 교정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앞에 멈춰 자세를 갖추고 광주학생만세를 3창했다. 곧 이어 광주소방서를 공격했고 소방서 대원 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최루탄이 발사됐다. 시위대의 투석과 경찰의 최루탄이 더 격렬하게 충돌했다. 자유당사와 서울신문사 전남지사를 파괴한 시위대는 충장로를 타고 내려가 금남로 3가의 시위대와 합류했다. 충장로, 금남로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시민, 대학생들이 고교생 중심의 시위대에 속속 합류함으로써 시위는 광주시민이 나선 시민투쟁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때가 오후 5시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된 시간이었다(김효중 1960).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시민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5시 20분경, 경찰이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도청으로 전진해 나갔고, 도청 쪽에서는 소방차 2대가 이에 맞서 진격해왔다. 소방차는 붉은 소화수를 뿌리면서 시위대의 전진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시위대와 소방차는 경찰국장 관사 앞에서 맞붙었다. 시위대와 경찰 간에 투석전이 전개되었고, 인근의 경찰국장 관사, 호남신문사의 유리창이 깨져나가고 쏟아지는 돌멩이에 경찰바리케이트가 파손되기 시작했다(김효중 272) 당시 전남일보 김효중기자의 광주학생 4 19의 발자취 연재기사( 어느 부고생 )에는 조대부고생들이 4월 19일 시위 내내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김효중 1960).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47

150 1960). 밤이 되자 시위군중은 더 많이 모여들었고, 더욱 격렬하게 투석전을 전개했다. 이 무렵 남광주역 주변에 있었던 시위대가 학동파출소를 습격했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의 강정섭이 총탄에 맞고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8시 30분경 학동파출소를 습격한 시위대는 양림동 파출소로 향했다. 폭력 경찰 때려죽여라, 민주 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쳐부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주경찰서를 향해 돌진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주변에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 발사로 저지하고 있었다. 후퇴와 진격을 되풀이하던 와중에 경찰의 실탄사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시위대는 광주 학생의 피는 끓고 있다. 몽둥이 경찰 죽여라. 선량한 민주의 사도, 연행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19일 밤 9시 25분, 40명으로 구성된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실탄사격이었다. 광주발포사건 재판기록(1960년 광주지검 형제2031호)에 따르면, 사격은 밤 9시 40분에 이뤄졌다. 4월 19일 밤,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8명이 사망했다. 시위대가 7명, 경찰이 1명 이었다 273). 총탄사격에 의해 붉은 피가 거리를 적시자, 군중은 흩어졌고 밤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아침 광주는 계엄군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학교 문은 닫혔고 부상자는 치료받아야 했으며 활동가들은 몸을 숨겨야 했다.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입구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형성됐다. 전대생들이 모이자 농고생들이 여기에 합세했다. 이들은 계엄령 속에서도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협잡선거 다시 하여 민주 대한 이룩하자 라고 혈서를 썼다.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광주역(지금의 구역 사거리)으로 갔다. 이 시위에는 4월 19일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많은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274) 시위대는 구역 사거리에서 충장로 4가 입구로 갔다. 이때 최초로 장갑차(GMC)10대가 등장했다. 시위대원 중 몇 명이 벽돌과 기와를 군인에게 던졌으나 무장 군인의 위력에 의해 시위대는 흩어졌고, 시내는 무장군인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상황이 아주 다르게 진전되었다. 19일 오후에는 10만 명 이상의 대군중이 서울 중심가를 점거했다. 1시 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경무대 앞에 진을 쳤던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었고, 청 년학생들이 꽃잎처럼 길바닥에 떨어졌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공격하자 경찰은 무차별 사격으로 막아 냈다. 경무대, 중앙청, 자유당사, 이기붕의 집 등 권력의 핵심공간이 시위대의 집중표적이 되었고, 경 찰의 사격으로 곳곳에서 희생가가 늘어갔다. 계엄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4월 20일, 송요 찬 계엄사령관은 군사력에 의한 시위대 공격을 거부하고, 치안국장에게 학생들을 석방하고 고문을 금 지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당시 국군은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국민의 273) 8명을 직업별로 분류해보면 공원(노동자) 2명(김준호, 김순희), 취업준비 중인 속성학원생 2명(이귀봉, 장기수), 경찰관 1명(최금동), 3명 무직이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 시위는 광주만이 아니라 목포, 여수, 순천, 나주, 영산포 등지에서도 있었다. 특히 전남 무안군 흑산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에 시위에서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김부련 군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시민이 운집해 시위에 돌입했다. 274) 당시 대학생 시위는 전남대에서 김시현, 정환담, 김충룡, 김규룡, 송성우, 윤재차, 임세택 등이었고, 조선대에서는 김수용, 김주호 등이 참여했다(호남 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2). 1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1 생명을 보호하는 진정 국민의 군대임을 보여주는 자세를 지켜냈다. 계엄사령부는 피해자 현황을 발 표했다. 민간인 사망자 111명, 경찰 4명, 민간인 부상자 558명, 경찰 169명이었다. 김병로 등의 재야 인사들도 이날 계엄 해제와 구속자 석방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 건의안을 결의했다. 전국 주요 도시에 서 연이어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뉴욕 일본 등지에서도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4월 25일 오후 6시 경에는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는 펼침막을 앞세우고 시위에 나 서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적으로 상징성 높은 교수들 258명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하자 이 대열에 수많은 시민학생이 동참하여 큰 물결을 이루 기도 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서울(3만)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는 물론 김천, 안동, 목포 등의 중도시 에서 10만여 군중이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렸다. 수송초등학교 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했 다. 이 어린 학생들의 참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이 항쟁의 폭과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이들은 투쟁의 힘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다. 연약하지만 맑고 치열한 정신, 정인보 선생이 말한 민족의 얼이 자연적으로 드러난 것이라 상상해 본다. 이승만 동상은 끌려내려 길바닥에 쓰러졌 고 이기붕 집은 부숴 졌으며 부정선거의 주역이었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집은 불태워졌다. 민주당, 대 학교수회의, 국회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가운데, 4월 26일 대통령은 시위대 대표 5인과 면담하고 하야를 발표했다.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퇴임함으로써 제1공화국 독재체제는 막을 내렸다. 2) 4월혁명-2 그러나 이승만의 퇴진은 혁명의 끝이 아니라 4월혁명 제2막의 시작임은 우리는 알게 된다. 분노한 시 그러나 이승만의 퇴진은 혁명의 끝이 아니라 4월혁명 제2막의 시작임은 우리는 알게 된다. 분노 한 시민들의 시위는 독재자가 물러난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27일 12시 30분경 다수의 시민학생이 참여한 시위대는 전남 도청 앞에서 3 15 부정선거 앞잡이 이하영 도지사는 물러나라. 살인경찰의 책 임자 경찰국장을 처단하라. 살인경찰의 지휘자 광주시장을 즉각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광주 상고생이 주축이 된 시위대에 50여명의 전남대 시위대가 합세했다. 이들은 광주경찰서로 가서 경찰 서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광주경찰서장은 이미 4월 20일 사표를 제출했다면서 시위대에게 사과했다. 국가권력의 중심공간인 서울에서는 더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독재와 폭력으로 유지되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그 대신 민주당의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했다(4. 28.). 뒤이어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에 민주당의 윤보선이 선출되었다(8. 12). 새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이승만 정권과 같이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며 북한에 대하여 공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정 정도 개방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 역시 미국에 종속적이라는 점은 이승만 정권과 큰 차이가 없었다.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반공 냉전체제 내에 포섭되어 그 최전선에 위치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49

152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당 정권이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혁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승만 체제의 종식은 그 동안 구축해온 반민주적 억압체제의 종언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10여 년의 장기독재체제가 구축해 놓았던 각종 금지와 통제의 사슬이 부서지고 검은 장벽으로 폐쇄되었던 사회운동의 공간이 한꺼번에 열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 상황의 사회적 결과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동안 독재와 부정부패의 과정에서 쌓여왔던 온갖 모순과 부조리, 각종 요구와 항의가 소용돌이쳤다. 부정선거 관련자 처단, 어용노동단체 축출, 각 사업장에서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의 파업, 학도호국단 해체 및 어용교수 축출 등의 교육민주화, 6.25당시 거창 함평 남원 등지의 양민학살문제, 각 지역의 악질 세리 처단 요구 등이 이를 대변한다. 민주당 정권은 이러한 사회혁명의 파도를 감당할 능력도 부족했고, 의지도 취약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저항을 통해 확보된 운동공간에서 다양한 사회집단과 조직이 형성되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는 4월혁명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제1단계의 진전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결과이다. 운동주체가 새롭게 형성, 재구성되고 변혁의 과제가 확장되고 재정립되는 현실의 반영이다. 변혁의 과제는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문제들과 아울러 민주당 집권 이후에 새롭게 제기된 전국교원노동조합 결성투쟁(전교조투쟁: ), 2.8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경협반대투쟁: )과 2대악법반대투쟁 (악법반대투쟁: ), 남북학생회담 등이 광범한 사회운동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들이다. 전국교원노동조합 결성 투쟁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바로 다음 날 시작된 사회운동이다. 이는 정부수립 이후 이 승만 정권이 정치적 중립성과 학문-사상의 자유를 짓밟고 교육을 정치권력의 도구로 삼아 온 모순된 현실을 바로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운동이 시작된 날을 보아도 이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 사회문제였는가를 알 수 있다. 4월 29일, 대구경북지역의 교사들이 처음으로 대구지구교원노동조합결성준비위원회 를 조직하여 추진한 데 이어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결성운동이 진전되었다. 5월과 6월에 걸쳐 각 시도와 군별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밑바탕에서부터 운동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하는 상향식 방식을 시행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6월 16일 현재 결성된 전국의 교원노조 수는 26개 였고, 이를 토대로 하여 각 도별 연합체가 결성되었으며, 그 결과 7월 17일에 교원노조 제1차 전국대의원 대회를 개최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목포지구 교원노조(5. 28), 광주지구 교원노조(6. 10)가 결성되었으며, 전남지구연합회(위원장 라철주)는 6월 26일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병도 문교부장관이 교원노조 불허방침을 밝힌 이후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교원노조 해체지시가 내려졌고, 탈퇴하지 않은 교원에 대한 파면조치가 공표되었다. 정부의 이와 같은 탄압에 대하여 교원노조는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조합법, 교육법 개정을 반대하는 단식투쟁이 조합원 1만 명에 의해 감행되었고(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3 26), 교원노조 불법화를 반대하는 전국 대표자 대회(9. 28)를 개최하여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단식농성과 수업강행 투쟁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천여 명이 넘는 조합원이 실신하고, 수 십 명이 입원했으며 이중석 조합원이 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와 같은 강력한 투쟁은 정부의 노동조합법 개정음모를 물리치고 교원노조를 지켜낼 수 있었으나, 민주당 정권은 5.16군사정변을 맞는 그 날까지 신고필증을 내주지 않았다. 경협반대투쟁은 1961년 2월 8일에 조인된 한미경제협정이 양국 간에 불평등 관계를 포함하는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 협정에는 미국의 경제 및 기술원조에 있어서 미국의 감시감독 및 정보요구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혁신세력을 포함하는 16개 정당 및 사회단체는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민족의 자주성이 침해된 식민주의적 원조를 결사 반대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2. 18). 또 각 대학 학생단체들이 연대하여 전국 학생투쟁위원회 를 조직하여 성토대회, 가두시위, 공청회 등을 통해 광범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다음은 악법반대투쟁이다. 민주당 정부가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데모규제법) 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반공법) 제정을 시도하는 것으로 밝혀지자 이에 대한 광범한 비판과 저항운동이 형성되었다. 특히 혁신계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권을 제약하는 이 법이 4월혁명에 대한 배반이며 반동적 폭거, 공산당이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들어내는 법률 이라고 규탄했다. 대학생 단체는 2대 악법 반대 전국대학생 공동투쟁위원회 와 아울러 각 지역별 대학생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행동했다. 청년단체들은 통일민주청년동맹을 포함한 11개 단체들이 악법반대 전국청년단체공동투쟁위원회 를 결성하였고, 그 밖에 혁신정당, 통일운동단체를 포함하는 주요 사회단체들과 원로들이 참여하여 반민주 악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 를 결성했다. 이와 같이 광범한 조직을 기반으로 운동이 강렬하게 추진되자 민주당 정권은 물리적 탄압을 가했으나 결국은 국회통과를 보류하고 뒤로 물러섰다(연표, 101, 104). 위에서 본 2단계 4월혁명은 기존의 민주세력과 아울러 새롭게 형성된 운동조직에 의해 전개되었다. 1단계 혁명이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 진전되었다면, 2단계에서는 조직된 운동주체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4월혁명유족회를 포함하는 4월혁명 관련 5개단체, 6.25피학살자유족협의회,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민족통일연맹, 민주통일청년동맹, 조국통일민족전선, 민주학생총연맹 등의 학생단체, 그리고 혁신구국연맹, 사회혁신당,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의 혁신정치세력 등이 그것이다. 이는 4월봉기의 결과로서 운동의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고 과제가 확장-재정립되는 현실의 반영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각종 노동단체를 포함하는 혁신세력과 통일운동세력이 주류를 형성했다. 여기에서는 정당관련 운동은 제외하고, 특히 광주 전남에서 비교적 활발했던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과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을 주목하고자 한다. 민자통이 한국전쟁 이전부터 활동해온 인사들을 포함하는 대중조직이라면, 통민청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조직이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51

154 민자통은 1960년 9월 초에 민족건양회 계열의 인사(문한영, 이종률, 임창순 등)와 천도교 인사(박래원, 주홍모 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족자주통일 준비위원회에서 비롯되었다. 통일문제 토론회 등의 준비모임을 통해 참여폭을 확장하여, 1961년 2월 25일에 대의원 1천여 명이 모인가운데 결성대회를 가졌다. 독립운동 원로와 혁신계 정치인, 통일운동단체 및 각종 대중단체가 광범하게 참여했다 275). 4 19봉기의 결과로 성취한 민주당 정권이 보여주는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산물이다. 결성한 후에는 한국사회변혁에 관한 심도있는 토론을 전개했고, 그 결과로서 독재정권의 교체만으로 역사가 전진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병존하는 한국사회에서 통일운동과 노동계급운동이 병행하여 통일전선운동으로 진전되어야 하지만, 민족모순이 전략적 우선과제라는 논리를 정립했다. 말하자면, 민족해방론의 근거가 되었으며, 이 논리에 기초하여 한국의 대중운동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 2대악법반대투쟁, 그리고 남북학생회담지지 등이 그 실천이다. 결성대회 결의문에는 완충지대에 우편국 설치, 남북간의 경제교류 촉진, 등의 실천강령이 이를 잘 보여준다(년표, 85). 민자통은 각 지방에 지역협의회를 발전시켜 광범한 전국조직을 구축했다. 조직에 가입한 회원의 수가 경북 2만여 명, 경남 2만여 명, 전북 5백여 명, 전남 1천여 명, 경기 2백여 명, 서울 5백여 명, 충북 5백여 명, 충남 5백여 명 등이며, 여기에 정당관계자 1만여 명, 사회단체관계자 4만여 명을 합산하여 전체 회원이 약 10만 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민족일보 ). 영남지방에 회원 수가 현저히 많고 여타지역에는 소수인 것은 한국전쟁의 효과가 아닐까 추정된다. 즉 전쟁 동안에 점령과 피점령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피아가 동시에 피해를 당함으로써 혁신세력의 사회적 토대가 그 만큼 취약해졌다는 가설이다. 특히 여순사건의 결과 전남의 동부지역 진보세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자통의 전남지역 조직을 보자. 전남협의회는 전국 조직보다 며칠 앞선 2월 19일에 광주 YMCA 회관에서 200여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결성식을 열었다. 사회대중당, 사회당, 통민청 등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조직구성을 보면, 상임의장 김창선, 의장 오지호, 조직부장 길문, 재정부장 박석진, 학생부장 김시현 등이었다. 전남협의회는 3월 28일에 광산군 송정읍 공회당에서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회했고, 4월 1일에 광주공원에서 2대악법반대시민궐기대회를 열었고, 대회 후에는 반민주공구 상여를 메고 남광주역광장에 이르기까지 구회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며, 역광장에서 조국통일만세를 삼창하고 상여를 불태우며 끝냈다. 4월 19일에는 4월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통민청 주최로 열린 4월혁명완수촉진성토대회 겸 2대악법반대성토대회 에 연사를 파견하여 참여하기도 했다. 275) 민자통 결성 당시 참여한 정당 사회단체로는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일부, 동학당 일부, 삼민당, 광복동지회 일부, 구국동지회, 민족건양회, 민민청, 통민청 준비위, 천도교 일부, 천도교 부녀회, 유도회 일부, 4월학생혁신연맹, 피학살자유족회, 교원노조 일부, 출판노조 일부, 교수협의회 일부, 사회문제연구회, 학사회, 사회과학연구회 등이다(민족일보, ). 1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5 다음으로,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의 조직과 활동을 정리한다. 민자통과 긴밀한 연계를 가진 통민청도 4 19봉기 이후 민주당 정권 하에서 새롭게 조성된 정치사회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진보혁신세력들이 결합한 청년운동조직이다. 1960년 12월에 결성대회를 가졌고, 중앙위원장에 우홍선이 선임되었다. 여기에는 부산지역에 토대를 둔 성민학회(김배영, 김한덕 등)와 통일청년회(우홍선), 신진회(양춘우) 등이 합류하였다. 민자통과 유사한 민족통일-자주-민주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민자통의 중간 간부층으로 활동했다(연보, 94). 지역조직으로서 전남도 맹부는 1961년 2월 14일에 전남대 재학생 김시현의 주도에 의해 결성되었다. 이 밖에 박익수, 이문교, 김수영 등이 참여했는데 다수가 4 19봉기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이었으며, 회원 수는 150명을 넘어섰다. 이들 역시 민주당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주요 동인이 되었다. 조직구성을 보면, 위원장 서리 겸 동원국장에 김시현, 사무국장에 김수영, 선전국장에 이문교, 교양국장 박복규, 투쟁국장에 박명서 등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운영에 중추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완도 해남 등 군 단위 하부조직 구축에도 관심을 가졌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중앙연맹의 과제와 일관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연계조직인 민자통과의 협력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정치사회적 과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대 악법 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 추진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후자는 민자통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여 실행하는 일이다. 276) 후자의 예를 들면, 전남도맹의 위원장 서리인 김시현이 민자통 결성대회에 참가하고, 더 나아가 민자통 조직의 학생부장으로 활동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전남 통민청은 3월 12에 광주공원 광장에서 6000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했으며, 28일에는 전남 민자통이 주관하여 송정읍 공회당에서 열린 조국통일촉진강연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전남 통민청은 4월 1일에 광주공원에서 2대악법반대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고, 민자통과 연대하여 남광주역에 이르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4월 19일에는 4월혁명 1주년인 4월 19일에는 다시 광주공원광장에서 4월혁명완수촉진성토대회와 2대악법반대성토대회를 개최했고, 뒤이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했다. 주목할 만한 일은 전남 통민청의 구성원들은 이 시기에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함과 아울러 지역운동을 이어갈 후진들에 대한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사회 를 조직해서 다음 세대 학생운동의 주역인 이홍길, 박석무, 홍갑기로 이어지는 1960년대 중후반 전남대 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이 되었으며(김시현의 구술, ), 이들이 성장하여 1970년대 전남대는 물론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을 육성하게 된다. 따라서 통민청 전남도맹의 결성은 전남지역에서 사회운동 주체역량의 선순환적 재생산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통민청 전남도맹은 전남대학에 전국 대학생 운동조직인 민족통일연맹도 조직했다. 이는 4 19 이후 전남지역 청년운동에 있어 통민청이 얼마나 독자적이고 중요한 조직이었는가를 276)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내용은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1992b, )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53

156 입증해준다(전남대학교 1982; 오승용 2008). 민주당 정권은 집권 후 1년 동안 혹독한 시련에 직면해왔다. 혁명이 지향했던 사회 민주화와 분단체제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민주당 정권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들은 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니라 보수반공적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이 제기한 과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진전시킬 의지와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민족분단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요구에 대하여 민주당은 적적히 대응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전 세계적 냉전체제가 갖는 모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거세지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은 정치체제의 무력함과 무능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러한 불안정 국면을 틈타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것이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5.16정변이다. 민주당 집권 이후 진전되어 온 4월혁명은 이 정변에 의해 중단되었다.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민족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평화통일운동의 행진은 잔혹한 물리력 즉, 군사적 폭력에 의해 난파하게 되었고, 열성적 운동가들은 소급 적용 효과를 갖도록 만들어진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의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은 이 운명적 국면에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하나는 변혁의 뜻을 버리고 제도권에 편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화하여 제도가 허용하지 않는 비밀운동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자통, 통민청 등에서 활동했던 다수의 인사들이 두 번째 길을 택했었고, 이 흐름은 제1차 인민혁명당사건(1964), 제2차인민혁명당사건(인혁당재건위 사건: 1975),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1977)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형태로로 이어졌다. 277) 따라서 4월혁명은 그 진행과정에서 군사쿠데타에 의해 중단된 미완의 혁명 또는 유산된 혁명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4월혁명의 기간을 2.28시위로부터 시작하여 5.16군사정변 직전까지로 확장시켜 볼 때 더 타당성을 가진다. 278) 이렇게 함으로써 혁명을 하나의 과정 또는 생애사적으로 보는 시각을 정립하고, 그 생애의 진전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변화 발전과 재구성의 양상을 적절히 규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4월혁명의 경우에 전반부의 단기적 비조직적 자연발생적 단순목적적 봉기와 후반부의 장기적, 조직적, 계획적, 복합목적적 저항운동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통해서 사회운동의 흐름에 대하여 더 깊고 넓은 통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4월혁명의 과정과 결과를 종합해 볼 때, 광주 전남의 4월혁명은 주체역량 자체가 대구나 마산 등의 다른 지역에 비해 취약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월봉기가 반독재 민주화투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와 같은 결과에는 정치사회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시위는 공휴일 등교라는 매우 비정상적 상황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고, 마산의 277) 이에 관한 구체적이 내용은 오승용의 글을 참고할 것. 278) 이는 마치 5 18항쟁을 1980년 5월 18부터 5월 27일까지로 한정하는 단기적 인식을 넘어서 1997년의 전두환 노태우 단죄 및 항쟁의 복권시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더 충실한 역사해석을 시도하는 것과 관련된다. 1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7 경우에는 그 지역 국회의원의 배신행위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증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전남의 소극적 참여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역사적 요인, 즉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이 아닌가 추정한다. 당시에 전남은 인민군과 국방군의 점령과 피점령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활동가가 피해 받고 소실됨으로써 변혁운동의 인적, 사회적 토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철저히 망가진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 혁명이 이와 같이 거대한 힘과 정치사회적 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구조적 요인과 관련하여 설명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3) 한일협정 반대운동 군사독재정권은 계엄령 발포로 사회구성원의 손발을 묶고 사회를 얼어붙은 동토로 만들었다. 수천 명의 선량한 국민이 잡혀가 감옥살이를 해야 한 사실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계엄령 선포와 같은 비상사태는 문자 그대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사회의 자연스러운 삶이 갖는 일상의 압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비상이 일상으로 바뀜으로서 비상의 효과가 소멸되거나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비상사태의 운명이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선포한 계엄령도 1962년 12월 6일에 해제되었다. 물론 계엄이 해제되었다고 해서 억압과 통제의 사슬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다. 느슨해진 억압의 사슬을 헤치고 저항과 도전의 흐름이 일기 시작했다. 정지되었던 언론-표현- 결사의 자유가 회복되었고, 발이 묶였던 정치인들(2,322명)이 해방되자 사회에 생명의 활기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가 계엄해제에 따라 쟁의권 부활을 선언하자( ), 뒤 이어 탄광, 철광, 전력, 철도, 해운노동조합 등과 수 만 명의 노동자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군정을 4년 연장할 것을 제안하자( ), 각계의 항의가 연이어 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과 정치인 및 대학생의 항의가 일어났다. 1963년 하반기에는 전국적으로 노동쟁의가 활발하게 이어졌다(연표, ). 이러한 저항의 흐름에서 1960년대를 상징하는 사회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떠오른 과제가 한일협정문제, 삼선개헌문제였다. 특히 한일협정 279) 과 관련된 반대운동은 협정 자체에 대한 반대운동( ), 협정조인반대운동( ), 조인된 협정에 대한 국회비준반대투쟁( ), 비준된 협정에 대한 비준무효화투쟁( )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연속투쟁이었다. 279) 한일협정의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해 양국 간에 식민지 역사 등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해결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한 한일회담은 전쟁 중인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1965년 6월 22일에 종결되었다. 이 회담은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 반공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추진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1. 한일 국교정상화의 의의와 기본방향을 담은 기본관계조약, 2. 대일 재산 청구권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3.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4. 한일 어업협정 등을 포함한다. 이 협정은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회담을 졸속으로 밀어붙이는데 급급한 나머지 일본의 식민통치와 수탈을 합법화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청구금액도 미얀마나 필리핀, 월남 등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일 뿐만 아니라 재일 동포의 지위를 일본 정부의 처분에 위임하는 반역사적이고 불공정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의 고통과 치욕을 잊지 못하는 전 국민과 청년학생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55

158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사건( ), 불꽃회 사건( ) 등은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억누르고 좌절시키기 위한 탄압이었고 탄압의 과정에서 발견된 사건이었다. 이 투쟁은 4 19혁명 이후에 가장 많은 대중이 참여한 운동이었으며, 대학생이 주도했고 고등학생과 지식인 및 민주적 정치세력 등이 결합한 운동이었다. 또한 서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전국적이었다. 여기에서는 전국적인 전개양상도 고려하지만, 전남지역의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주목하여 살펴본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 초에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가운데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겠다고 언명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 를 결성하여(3월 9일), 이를 바탕으로 하여 부산, 목포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대일굴욕외교반대 시국강연회를 열어 반대 여론을 확산시켰다. 반대 여론이 번지는 가운데 김종필 총리가 한일협정이 5월 초순에 타결될 것이라고 발표하자(3. 23), 대학생의 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되면서 반대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3월 24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한일협정을 반대하여 모의 화형식을 거행했고, 주요 대학 5천여 학생들이 대일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에서 일본 제국주의 부활과 미국의 압력을 비판하는 성명서와 결의문이 발표되었다(이로 인해 학생 283명이 퇴학이나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날인 25일에는 서울에서 주요 대학 및 고교생 4만여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는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음 날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6만여 시민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한일회담을 계획대로 밀고 가겠다 정부의 확고한 방침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국민의 의사를 외면하는 독재의 전형을 본다. 아마도 미국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의 독재에 대한 반응으로 27일에는 전국의 16개 도시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3월 30일에 대통령과 서울 시내 대학생 대표 11명 간에 면담이 이루어져 일단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연보, 124). 그 후 학생시위는 4월 17일의 굴욕외교 반대, 학원사찰 중지, 김중태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여 6월 3일에 절정으로 치솟았다. 서울시내 9개 대학생 2천여 명이 참여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5. 20)와 뒤이은 시위분위기가 매우 격렬했다. 특히 다음날에 있었던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 과 학원프락치 사건, 그리고 학원프락치 사건을 폭로한 학생을 괴한들이 폭행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학생들의 분노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서울시내 대학들과 전국의 대학들이 연합체( 난국타개 전국학생대책위원회 )를 결성하여 궐기대회와 시위를 전개했다(25일).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군인 법원 난입사건 과 관련하여 시국수습결의문 을 채택하고 이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전달했고, 전남대 학생들은 박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27일). 이날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나온 대통령 하야 요구 는 4월혁명 1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9 이후 처음으로 제기된 구호였다. 전국학생대책위원회는 5월 30일까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 실력행사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대정부 포고문 을 공표했다(29일). 다음 날에는 서울대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6월 2일에는 서울시내 대학생 약 6천명이 박정희 하야, 박정희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6월 3일에는 5만여 명의 대군중이 박정권 타도 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할 만큼 가열되었다. 이에 정부는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계엄에 의해 집회와 시위금지, 대학 휴교, 언론과 출판의 사전검열, 영장없는 압수 수색 체로 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이 조치가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지난 3월 이후 이 시점까지의 저항투쟁을 6 3항쟁이라 한다(연보, 125,128). 전남지역에서 학생시위 전개 양상을 보면, 3월 26일 전남대학생 700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한다, 사수하자 평화선 등의 펼침막을 들고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이 때 광주농고 학생들도 참여했다. 27일에는 목포에서 목포고, 문태고, 목포농고, 목포상고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주도했으며, 31일에는 전남대 총학생회 주관 하에 1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매국외교 결사반대를 위한 성토대횔를 열고 이어서 진압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전남대 총학생회장 등 7명이 제적되었다. 서울에서의 소강상태와 유사하게 광주에서도 비교적 조용하게 4월이 왔으나 19일에는 4월혁명 기념시위를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병합하여 진행했다. 5월이 되자 광주고(6일), 숭일고(7일) 학생들이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결행했고, 8일에는 광주공원에서 3만여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한일굴욕외교반대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잠시 동안 소강상태가 지난 후 5월 27일 아침부터 전남대 학생 약 200여 명은 계림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서 신망잃은 박정권 하야를 권고한다, 애국충정 있거든 하야로 보답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충장로-전남의대-광주경찰서- 전남 도청에 이르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광주학생구국투쟁위원회의 결의문은 군사정권의 부정부패와 매판자본, 그리고 난동군인사건 등을 규탄하고 여하한 압력에도 굽힘없이 극한 실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6월에도 첫날부터 전남대학생의 시위가 있었고, 특히 6월 3일 시위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맞서 도청건물과 민주공화당 본부에서 투석전을 벌였다. 서울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광주에서는 6월 4일에도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학생과 고등학생 5천여 명이 계엄령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고, 이로 인해 대학과 고등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5일에도 대학생들이 시위에 돌입하고 경찰서를 항의방문하자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대 병력을 시위진압에 투입하여 강제해산시켰다. 6월 4-5일 시위로 338명이 경찰에 잡혀갔는데, 이들 가운데 8명이 구속되었고, 47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시위주동자였던 이홍길, 홍갑기는 시위 직후에 도피하여 검거를 모면하였고, 박종희 등 6명이 구속되었다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다. 그 후 검찰수사 과정에서 기소된 학생은 이홍길, 김창호, 박종희, 민경수, 안청수 등이었다(오승용, 53, 58-64쪽). 이상이 전남에서 일어났던 6 3항쟁의 대강이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57

160 그런데 6 3항쟁으로 제동이 걸렸던 한일회담은 다음 해 초부터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다. 회담은 속도감있게 추진되어 2월 15일에는 한일기본조약 전문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음 날부터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던 6월 22일까지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 이 전개되었다. 4개월에 걸쳐 진행된 조인반대투쟁은 6 3항쟁을 능가할 정도로 치열했다. 동국대학생 김중배가 시위 도중에 두개골 골절상으로 사망했고(4. 12), 서울 시내 대다수 대학들이 임시휴교에 들어갔으며, 일부 시위 학생들에게는 현역 입영영장을 발부하여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된 시위행렬을 경찰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수도경비사령부 병력 2대 대대가 투입되어 시위진압에 나섰고 헬리콥터가 동원되기도 했다. 5월에 접어들어 부산, 광주 등 지방에서도 수 만 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민 궐기대회 가 열렸고, 미국의 압력에 대항하여 반미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6월 14일에 서울대 법대학생들에 의해 선도된 집단 단식투쟁은 각 대학으로 번졌다. 그러나 경찰이 갑호 비상경계령을 내린 가운데(6. 21), 한일협정은 결국 조인되고 말았다(연보, ). 바로 다음 날부터 전개된 비준반대투쟁( ) 은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는 시기라는 특수성 때문에 대학생 시위보다는 민주시민들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대학 교수들이 앞장섰다. 이화여대와 연세대학 교수들 300여 명이 경찰의 폭력진압을 규탄하는 내용으로 대정부 항의문을 전달했고(6. 26),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이 서울의대 강당에서 회담을 반대하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7. 12). 종교계에서도 100여 명의 목사들이 영락교회에서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성명을 발표했으며(7. 1), 서울 군산 대전 등지의 기독교계는 구국기도회를 통해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했다. 아울러 대한 변호사협회는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자행된 인권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7.3), 예술원장을 비롯한 재경 문화예술인 82인은 한일회담 즉각 파기를 주장했으며(7. 9), 역사학회 등 3개 역사학 단체들도 같은 날 비준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7월 14일에 비준안이 기습적으로 발의되자 전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김홍일 등 예비역 장성 11인이 회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유교와 불교신도 집단도 국회의장에게 비준반대 탄원서를 제출함과 아울러 연합기도회, 서명운동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했다(7. 17). 그러나 8월 14일에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 단독으로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국민적 저항운동은 한일협정비준무효화투쟁( ) 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법대학생회가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선언식 을 가졌고, 뒤 이어 경희대, 경기대 등 여러 대학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의 불길은 더 거세게 타올라 8월 23일에는 전국에서 대학 및 고교생 1만여 명이 참여하는 저항으로 확산되었다. 24일의 시위에서 500여 명이 연행되었다는 사실이 저항의 치열성을 입증한다. 이러한 국면에서 무장군인 500여 명이 25일 낮에 고려대학에 침입하여 강의실, 도서관, 식당 등의 기물을 부수고,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한 후에 연행해 갔다. 26일에는 서울 인근부대의 병력뿐만 아니라 야전군 소속 1개 사단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섬으로서 저항의 물결은 가라앉았다. 이러한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이미 국민의 지지가 아니라 군사력에 의해 1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1 존속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6 3항쟁 이후 전남지역에서 한일협정반대운동이 전개된 양상을 살펴본다. 한일 회담이 비준단계에 들어가면서 개학과 함께 학원가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때 학생시위에 첫 불을 댕긴 것은 광주에서 일어난 전남대학 시위였다. 1965년 3월 31일 전남대 학생 800여 명은 학교 대운동장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매국외교 결사규탄 성토대회를 열고 성명서를 낭독한 다음, 매국외교 결사규탄, 김 오히라 비밀흥정 이완용을 웃긴다 는 펼침막을 앞세우고 시위를 감행했다. 시위 도중 경찰과의 충돌에서 32명이 연행되었고, 그 가운데 심우철(임학과 1학년)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구속되고 김광일(법학과 1학년) 외 1명은 2일간의 구류처분을 당했다. 또한 전남대는 문교부의 주동학생 징계지시에 따라 주동학생 7명을 4월 2일자로 제적 처분했다. 당시 제적된 학생은 김재홍(철학과 2년), 김영우(정치학과 1년), 전홍준(정치학과 1년), 안일근(정치학과 2년), 송종호(정치학과 2년), 정동년(화학과 4년, 총학생회장), 서병수(법학과 1년) 등 이었다. 그 후 5월 6-7일에는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8일에는 대규모 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궐기대회는 재야 민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범국민투쟁위원회 가 주최하였는데 3만여 시민이 함께 한 대규모 집회로 발전했으며, 대회 후에는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광주고와 숭일고에 이어 5월 12일에는 목포고에서도 1천여 명의 학생이 굴욕외교 반대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오승용, 65-66). 그리고 비준무효화투쟁 시기인 8월 23일에 전남대 학생 200여 명은 전남대 본관 앞에서 비준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에는 비준무효와 아울러 국회해산, 야당의원 탈당, 미국간섭 배제 등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날 집회의 주동자는 박석무(법학과 3년), 전홍준(정치학과 2년), 김동근(정치학과 1년)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경찰에 연행되었다. 4) 토론 이상에서 살펴본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진전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종합적 논의를 통해 운동의 성격 과 결과에 대한 평가를 간략히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을 검토한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는 한일협정을 개방된 체제에서 공론장의 토론을 거쳐 국민의 공감을 바탕으 로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비밀리에 그리고 지나치게 급속히 진행한 데서 비롯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협상의 결과가 공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협상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 어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협상의 주제 자체가 국민 대다수에게 깊은 상흔으로 남아있는 일제 식민지 통치문제임을 고려할 때, 국민적 관심이 매우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협상을 적절히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급속히 추진하려 하기 때문에 국민적 반발이 거세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 등 한일 양국관계의 먼 역사적 유산에 더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민족 적 저항의식과 반일감정을 고려할 때 국민과 민족의식이 강한 집단의 반발은 더욱 증폭될 수 있는 과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59

162 제였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요인은 미국의 다그침이라고 본다. 협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미 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속한 타결을 주문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쿠데타를 통해 새로 출범한 군사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더욱 취약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운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가치와 지향하는 목표를 검토한다. 표제가 확인해 주는 바와 같이 이 운동의 기본 목표는 가장 보편적인 구호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굴욕외교 반대 이다. 말하자면, 그 상황에서 한일협정이 한국에 굴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 굴욕적인가? 두 가지 차원에서 굴욕적이라는 명제가 도출될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이 조급히 원하지도 않는데 미국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수행하는 협상이라는 차원이다. 실제로 미국은 세계적 냉전체제에서 한국을 일본과 연계하여 동북아 반공전선의 최전방으로 설정하는 전략적 구상을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에 대하여 쌓여있는 적대적 감정이나 피해의식의 수준이 협상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즉, 이 운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가치는 민족적 자존과 독립성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그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보여주는 과거사 정리의 방법과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당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일제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일본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철도를 건설하는 등 많은 이익을 주었다 는 등의 주장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보면, 한국 국민의 정서와 매우 큰 격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운동의 기본 성격에 역사적 가치 또는 과거사 정리의 난제가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협장도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진전될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세 번째로 운동의 진전과정을 살펴본다. 해방 후 한일회담의 역사는 1951년 10월 이후 14년에 이르고 있지만, 이 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된 시점은 1964년 3월이고 종료된 시점은 1965년 8월이다. 1년 5개월 동안 지속된 이 운동의 흐름은 협정 자체에 대한 반대운동( ), 협정조인반대운동( ), 조인된 협정에 대한 국회비준반대투쟁( ), 비준된 협정에 대한 비준무효화투쟁( )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연속투쟁이었다. 이 흐름에서 각각의 쟁점에 따라 네 번의 고조기가 있었으며, 각 시기 마다 저항의 파고는 매우 치열했다. 다만, 세 번째 파도인 비준반대투쟁은 초기의 학생주도 형태로부터 나중에는 지식인 주도 형태로 바뀜으로서 학생운동과 같은 격렬한 시위보다는 성명발표 등의 담론투쟁 형태라는 특징이 드러난다. 시점이 여름방학이었다. 다음으로, 운동형태와 통제방식을 검토한다. 운동의 형태는 성토대회를 통한 성명서 및 결의문 발표와 펼침막을 앞세운 가두시위가 전형적이었고, 단식농성투쟁이 수행되기도 했다. 특징적인 사실은 비준반대 운동에서 교수, 문화예술인, 변호사, 언론인 등 각계 지식인들이 광범하게 참여하여 담론투쟁이 활성화된 흐름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운동의 열기는 젊은 대학생들의 저항운동에서 특히 고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번 운동사례는 국가권력이 전투병으로 구성된 1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3 군사력을 동원한 통제방식에 의해 일정하게 제한받은 것처럼 보인다. 국내 시위에 대한 군대 동원은 이 정권이 본질적으로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저항운동이 짆행되는 과정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통제가 중점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불꽃회사건, 민비연사건, 인혁당사건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운동의 주체를 보면, 이 운동은 먼저 야당의 문제제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운동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운동을 주도한 주체는 대학생이고, 여기에 참여한 세력은 민주적인 지식인과 고등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이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주체구성에서 참여세력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내는 조직적 발전이 효율적으로 진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야권인사를 중심으로 한 범국민투쟁위원회 나 난국타개 전국학생대책위원회 가 결성되어 활동했고 기본적인 차원에서는 각 대학의 총학생회가 주도했다고 하지만, 이는 운동권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만아니라 운동권 전체를 이끌면서 각 부문이나 집단 간의 유기적 관계와 조정작업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종합하면, 굴욕외교반대를 공식 목표로 설정하고 싸웠던 한일협정반대운동은 결과적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패한 운동이다. 또한 대통령 하야 구호가 등장했으나 이는 상징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던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과정에서 확인된 의미 있는 성과도 없지 않다. 특히 민주화운동의 질적 성장을 주목할 만하다. 집단 단식농성, 대학 연합 시위, 화형식-장례식과 같은 연희적 표현양식의 진전과 아울러 투쟁가 등의 노래부르기 등은 운동문화의 발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광주 전남의 한일협정반대운동은 4 19 당시에 미성숙했던 운동주체의 형성과 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던 활동가들이 4년 후에는 대학생이나 청년으로 성장할 시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4 19 당시에 고교생이었던 사람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 발생한 이 운동을 통해 하나의 운동세력으로 형성-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운동주체의 형성과 아울러 운동세력의 시기적 단절을 극복하고 연속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조직형성이 의미 깊은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광주 전남이 이 운동에서 수행한 역할과 그 효과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볼 때 다소 주변적이었고 취약했던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음에는 60년대 한국 사회운동 일반 및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에 관한 해석에 대하여 몇 마디를 첨언한다. 우선 민주당 정권 하에서 폭발한 4월혁명과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일어난 한일협정반대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운동주체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4월혁명이 고등학생이 주도한 운동이었다면, 후자는 대학생 주도의 운동이었다. 4월혁명 후 4년간의 시차를 두고 한일협정반대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4월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이 대학 재학생으로 성장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6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1967년의 부정선거 반대운동이나 3선개헌반대투쟁( )은 서울을 비롯하여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61

164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전개되었으나 전남지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전개된 양상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제외했다. 운동의 형태에서 두 운동사례가 공히 매우 격렬한 성격을 띠도 있으나 전자는 혁명으로 타올랐고, 후자는 실패한 운동으로 좌절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관련되는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중요한 요인으로 국가권력의 통제방식을 지적한다. 4 19에서 군대는 국가권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전쟁행위에 돌입하지 않았다. 권력의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군대의 길을 지켰다. 그러나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반대운동의 경우에 운동의 불길이 고조될 때마다 예외 없이 무장한 군대병력을 동원함으로써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국민을 적대시하는 정권이었고, 이와 같은 군부의 정치화가 정의로운 사회운동을 억압하고 질식시키는 장벽이 되었다. 말하자면, 운동의 폭발이 권력의 잔혹성에 의해 불발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장한 군사력을 동원한다고 해서 민중의 저항과 도전이 항상 무너지고 좌절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에 내적으로 축적된 저항의 에너지가 충만할 경우에는 군대가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의 경우에는 아직 그 힘이 충실하게 축적되지 않은 상태라고 추정한다. 군사쿠데타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히고 망가진 사회적 동력이 아직 온전히 소생하여 회복되지 못한 것으로 본다. 5.16쿠데타로 인해 잡혀가고 감옥살이한 활동가들이 그 얼마인가를 추정하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은 무너진 운동의 힘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아직 그 힘이 숙성하지 않은 상태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운동의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힘의 회복과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박정희 정권 이후의 저항운동은 매우 혹독한 폭력과 탄압 아래서 진전되어 왔지만, 그 동력이 부단히 성장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 힘의 성장과정을 70년대의 사회운동에서, 더 나아가 폭력적 군사독재의 장벽이 광주 5 18에서 무너졌음을 나중에 확인하게 된다. 1960년대의 광주 전남에서 정치사회운동을 제외한 다른 영역의 사회운동은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 되었다. 교원노조운동은 조직적으로 광범하게 전개되었으나 노동, 농민, 여성, 문화예술, 등의 부문에 서는 주목할 만한 사례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러한 시기적 양상은 1890년대의 동학혁명, 1920년대의 반일 독립운동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취약한 세대로 평가될 수 있다. 1950년대의 한국전쟁 과정에서, 거듭되는 점령과 피점령의 과정에서 망가진 사회의 건강한 동력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 간을 기다려야 했던가? 1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5 2. 유신체제와 70년대 사회운동 1) 70년대 사회운동-전국 1970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사회운동은 60년대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60년대 말에 있었던 3선개헌 반대운동 은 5년 전에 터졌던 한일협정반대운동 과 비교할 만한 전 국민적 운동이 었다. 이 운동의 진전과정에서 가혹한 폭력진압에 의해 적지 않은 희생이 뒤따랐지만, 다른 한편으로 억압권력의 장벽을 뛰어넘는 운동력은 더욱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그 힘으로 목표에 이를 수 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1969년 한 해 동안 민주시민의 열화와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반민주적 장기집 권을 위한 3선개헌을 비정상적인 술수까지 동원하여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민중의 저항과 도 전의 힘은 박정권의 지지기반을 위축시키고 민주세력의 힘을 성장하게 하는 역사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진실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대통령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직후부터 우리 역 사에 초유의 반민주적 유신독재체제를 기획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민주화 역사가 퇴행을 거듭하는 암울했던 60년대의 군사독재시기를 지나 1970년에 접어들어서 큰 파도가 밀려왔다. 평화시장의 봉재공장 재단사 전태일(1948년 생)이 노동조건과 환경개선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절망적인 현실에 비관하여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하여 자결한 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반경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고 구호를 외치면서 평화시장 앞길을 내달렸다. 이 책의 1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는 매우 건실하고 유능한 청년이었다. 특히 어린 여공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했으며, 주위의 동료들을 규합하여 바보회 와 삼동친목회 를 구성할 정도의 조직적 활동가였다. 문제투성이인 노동조건과 작업환경에 대하여 스스로 실태조사를 하여 구청과 노동청 및 대통령에게까지도 관심과 지원을 요청할 만큼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청년을 자결의 길로 이끈 요소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정부기구인 감독청의 무관심과 경멸, 그리고 냉대였을 것이다. 부모와 같은 보호자로 생각해 온 국가기구들로부터 외면당한 충격과 실망이 견디기 어려웠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음에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작업환경에 대하여 사용자에게 건의해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망이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14시간 노동, 1.5미터 높이의 작업장, 폐쇄된 공간에서 발생한 안질, 신경통, 결핵, 아울러 이러한 노력에도 보이지 않는 성과에 대한 무력감이 아닌가 한다. 그의 죽음이 사회에, 그리고 사회운동에 준 충격은 컸고 파장은 널리 퍼졌다. 먼저 대학생의 반향이 즉각적이었다. 서울대 법대생 1백여 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나섰고(11월 16일), 상대 학생 400여 명은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였다. 연세대, 숙명여대, 외국어대 등 여러 대학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근로조건 개선과 노조결성 보장을 위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종교계의 반향도 컸다. 새문안교회 신도는 금식기도회를 열었고(22일), 23일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63

166 공동 집전으로 추모의례를 거행했다. 노동계에 미친 영향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운동의 효과로 나타났다. 가장 직접적인 효과의 하나는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 한국회관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월) 등 유사한 저항투쟁 사례가 뒤따랐다. 구체적인 효과는 조합원 560명으로 구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 그의 분신은 당시의 노동운동 전반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1971년의 노동자 단결투쟁이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의 165건에 비해 10배가 증가한 사실이 이를 증명 한다 280). 이는 몸을 태우며 타올랐던 그 영혼의 횃불이 꺼지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비추는 것이다. 1971년 전반기에는 노동조합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교련반대운동과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전자는 대학의 정규교과목으로 채택하게 된 군사교육훈련에 저항하여 서울 지역 대학은 물론 지방대학을 포함하는 전국 대학생들이 참여한 반대운동이고, 후자는 외부압력에 위협받고 있는 언론의 현실을 바르게 지켜내기 위하여 전국의 신문, 방송 관계자들이 언론자유수호를 선언하고 대학생과 종교계 등의 민주세력이 이에 합류한 형태로 진전되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경찰과 정보기관의 부단한 압력과 사찰 속에서, 그리고 연이어 발표되는 간첩단 수사에 관한 정보기관의 대응여론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281).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회운동의 조직화 및 조직적 발전양상이다. 대학생, 재야지식인 그리고 청년단체가 선거국면을 앞두고 이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출범했다. 대학생 단체인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은 교련철폐운동과 공명선거 홍보를 목적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전국 13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이 고려대 학생식당에서 공동시국선언문 을 발표하는 가운데 출범했다( ). 이들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냉각기를 갖기로 했고, 희망학생을 대상으로 선거참관인단 1250명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선거 후에 이 조직은 부정선거규탄, 다가오는 총선거부, 구속학생석방 등을 쟁점으로 점거농성 등 적극적인 운동을 펼쳤다. 또한 이 연맹은 변화된 정세에서 학생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킬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차원에서 참여범위를 확장하고 활동방향을 교련반대와 중앙정보부 철폐 등으로 설정하여 전국학생연맹 으로 재출범했다(연보, 207, 214). 새로 결성된 재야조직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이다. 이는 1970년대 최초의 지식인 연합체로서 공명선거를 통한 장기집권 저지를 목적으로 1971년 4월 19일에 결성되었으며(대표위원: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강연회 좌담회 성명발표 사례조사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재야조직의 출범에 뒤 이어 280) 이상의 내용은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2006, 도서출판 선인, 197쪽)와 위키백과 전태일 을 참조하였음. 281) 4월 27일에 거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득표율 51.2%로 당선되었으나,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43.6%를 득표함으로서 야당에 대한 지지도가 의외로 높게 나타난 사실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뒤 이어 부정선거 규탄운동이 전개되었고 5월 25일에 예정된 국회의원선거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7 청년운동조직으로서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가 4 19세대와 6 3세대의 김지하, 김정남, 정수일 등을 중심으로 하여 4월 21일에 결성되었다(회장 백기완). 이들은 결성대회 결의문에서 공명선거 시행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 보장, 부정선거 저지, 선거참여 등을 위한 활동에 앞장 설 것을 천명했다. 71년 후반기에는 우리 사회운동에서 보기 드문 민중봉기가 출현했다. 8월 10일에 경기도 광주의 성남출장소 앞에서 폭발했던 광주대단지 주민봉기( 이다. 이 봉기는 서울시 도시개발 정책에 따라 무허가 판자집에 거주하는 빈민들이 새로 개발될 주택단지인 경기도 광주로 집단이주 되었으나, 서울시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이주민이 집단적으로 저항한 사건이다.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여러 가지 활동으로 노력했으나 서울시 당국의 반응이 별로 없자, 분노한 시민 5만여 명이 성남출장소 앞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더욱 격화되어 경찰차량에 방화하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6시간 동안 사실상 광주대단지를 장악했다. 이에 당황한 서울시가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여 이 봉기는 종료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건은 서울대학에서 시작된 대학 교수들의 집단적 저항이다. 8월 18일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이 학원의 불안정, 대학에 대한 관료적 억압과 빈약한 처우를 포함하여 대학의 제반 문제가 근본적인 결함으로부터 초래된다고 보고 대학의 자율성과 처우개선 등을 포함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21일에는 상과대학 교수들이 비슷한 관점에서 대학자치선언 을 발표했으며, 공과대학 등 단과대학들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지방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등 10개의 지방국립대학들 전체가 빠짐없이 성명을 발표해 서울대 교수들의 저항에 합류했다. 이에 연 이어 사립대학들도 사학의 자주화 선언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교수들의 이러한 전국적 집단행동에 대하여 정부의 대응은 냉담했지만,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교수들의 항의에 뒤 이어 10월 5일 새벽에는 무장군인 30여 명이 고려대학에 쳐들어가 학생회관에 있던 학생 5명을 납치하여 헌병대로 연행하는 무법천지의 폭거가 일어났다. 며칠 전에 있었던 고대생의 시위에서 부정부패분자로 군 출신 세력가들을 거명하여 게시판에 부착한 데 대한 보복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무장 군인들의 불법 폭력만행에 대하여 고려대학생은 물론 전국학생연맹 및 전국의 여타 대학생들도 격렬한 대 정부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 저항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기독교 및 천주교 단체 등으로 급속히 확산하자 박 대통령은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주요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키는 강경 진압을 자행했다. 억압의 사슬은 잔인했다. 10개 대학이 수업을 중지 당했고, 1,889명이 연행되었으며 주동학생 174명이 제적당했다. 학생동아리는 해체되었고 간행물은 폐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에 침묵하지 않고 맞선 저항의 대열이 전국학생연맹을 비롯하여 청년-학생과 종교계와 재야인사들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군사독재의 폭압과 이에 대한 자유의 저항 간에 거듭되는 대결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7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흐름을 보면, 사회의 각 부문에서 권력의 잔혹한 폭압에도 불구하고 그에 저항하는 물결이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실하고 마음씨 고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65

168 한 노동자의 자결은 온 국민의 영혼에 지우기 어려운 아픈 흔적을 남겼다. 그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가난 속에 걸인처럼 살아왔으면서도 더 어린 여공들의 건강을 걱정하여 병원에 데려다 주곤 했다. 그는 이들의 참담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독학으로 공부하는 도중에 너무 어려워서 나에게 법대생 친구 하나만 있었다면 좋으련만... 이라고 토로했다는 사실이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말해주었겠는가? 이 순결한 영혼의 외침은 모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주는 아픈 고백이고 경고였다. 그 후 노동자는 물론 대학생, 언론인, 재야 지식인, 대학교수, 도시빈민 등이 잔혹한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물결을 이루었고, 그 저항의 에너지가 광범하게 고조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70년대 초반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높아지는 저항의 물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통해 국가권력구조를 전체주의 체제로 바꾼 10월유신 의 얼굴로 나타났다( ).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1인 지배하에 두고, 연임제한 규정을 삭제하여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며, 그 권력자인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한 유신헌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헌법에 의거해서 12월 16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 대의원선거에서 2,359명이 선출되었고, 다시 이들이 12월 23일에 제1회 대의원 총회에서 8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했다. 이 유신정권은 헌정의 탈을 쓴 폭력국가의 결정체였다. 겨울공화국 의 사회는 굳게 얼어붙었고, 많은 시민들은 숨 막히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 결빙사회에서 침묵의 얼음장을 깨뜨린 저항의 시작이 전남대 함성 지 제작 배포 사건이다 ( ). 뒤 이어 서울 남산의 부활절연합예배사건( )은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저항행동이었다. 5월 20일에는 10월유신과 박정희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8월 8일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 과 10월의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은 유신정권이 보여준 가장 악마적 얼굴이었다. 10월 2일에는 서울대 문리대학생들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최초의 시위를 감행하고 반유신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도서관에 불이 났다 는 외침을 신호로 하여 모여들었고, 이들은 교내에 있는 4 19기념탑으로 가서 비상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 후 500여 명 학생 시위대열은 선언문을 손에 든 채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교정을 내달렸다. 이 시위는 곧이어 법대와 상대로 번졌다 282). 10월 말과 11월 초에는 경북대 학생들이 정보-파쇼통치 즉각 중지와 정앙정보부 해체 및 학원 자유와 언론 자유 보장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를 뒤 이은 반유신 저항운동은 전국의 대다수 대학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맹휴학 형태로 전개되었고, 이는 11월 말 이후에 다시 단식농성과 교내시위 및 가두시위로 282)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는 이번에는 교수도 마땅히 학생들 편에 서야 하며, 학생들을 처벌할 수 없다 고 주장했는데, 10월 16일에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고, 4일 후에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다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당국은 가족들에게 시신도 보여주지 않은 채 처리했다). 그 후 이 사건은 고문에 의한 살해일 것이라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다가 2002년 5월 24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사망 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연보, 246, 247). 1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69 전환되었다. 이와 같이 고조되는 저항의 물결은 년 말에 시작된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 으로 더 한층 거세졌다. 이 운동은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를 포함한 각계 인사 30여 인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함으로써 진전되었고, 이에 대한 지식인의 결합과 일반 국민들의 호응이 광범하게 탄력을 받아 확산되어 갔다. 이에 긴장한 당국은 긴급조치 1호, 2호 선포로 대응했다. 이 긴급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헌법 개정 폐지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연보 255). 그리고 이 조치로 인해 장준하 백기완 등 다수의 재야인사들이 연행되고 구속되었다. 민주세력의 저항과 도전이 더욱 강성해감에 따라 이를 진압할 억압장치도 그만큼 잔혹했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타락한 체제가 자행한 긴급조치 역사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유신정권 종말의 시작이었다. 1974년 1월 4일, 개헌청원운동본부는 서명자가 3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고, 뒤 이어 대학교수와 문인들, 그리고 종교인들의 공개적 지지선언이 계속되었다. 봄이 오자 경북대, 서강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생들의 선언과 시위가 다시 행렬을 이루었다. 물론 억압권력은 이에 맞서 지속적으로 활동가들을 잡아가고 구속하고 감옥살이를 시켰다. 안병무, 문동환, 장준하, 백기완, 인명진, 대학생 김영선 김구상 이근후 작가 이호철 등이 이들이다. 아울러 당국은 사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최종길 의문사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고려대 야생화사건( ), 문인간첩단 사건( ), 민청학련사건( ), 장준하 의문사 사건( ) 등은 우리 역사에서 추악한 권력집단이 조작하고 연출한 아프고 부끄러운 흉터들이다. 이 가운데 민청학련 사건은 조작의 폭과 깊이를 볼 때, 특별히 주목해서 지적해 둘 만하다. 이 사건이 악명 높은 긴급조치 4호와 쌍생아이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은 공산계열의 불법단체 및 국내 좌파 인사들과 결합하여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고 북한의 노선에 따라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날을 기해 긴급조치 4호 283) 를 발포하고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180여 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는 사형선고 7명(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이현배, 김지하, 여정남), 무기징역 7명, 20년 징역 12명 등 상상하기 어려운 가혹한 형벌이 선고되었다. 실제로 학생들이 수행한 구체적인 행동은 유인물 작성 및 시위준비 모임에 그쳤으며, 대규모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283)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과 이것에 관련한 제 단체의 조직에 가입하거나, 그 활동을 찬동,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에게 장소, 물건, 금품 그 외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그 활동에 관한 문서, 도서, 음반, 그 외의 표현물을 출판, 제작, 소지, 배포, 전시, 판매하는 것을 일제히 금지한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그 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 군의 지구사령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에게 학생탄압을 위한 병력출동 요청을 받을 때는 이에 응하고 지원해야 한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67

170 어처구니없는 판결이었다. 또한 이 사건과 연계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도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내란선동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을 취재하다가 체포된 일본인 기자(다치카와 마사키)도 내란선동 등으로 징역 20년의 중형에 처해졌다. 특히, 이 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를 받은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 전원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들은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바로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와 같이 화급한 사형집행을 두고 국제법학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 로 선포했고 국제사면위원회는 강력한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사법살인 의 오명을 얻게 되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국가폭력이 아닐 수 없다 284). 그러나 권력의 이와 같은 만행은 더 거센 저항의 파도를 맞게 되었다. 재판이 진행된 9월 이후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이에 대한 결의문 발표와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종교인 언론인 문인 지식인들의 비판선언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이 발족하는 계기가 되었고( ), 비등하는 저항의 열기 속에서 한국 사회 민주화 세력이 전체적으로 결합한 민주회복 국민회의 창립으로 발전하였다( ). 이 단체들은 현장의 사회운동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표가 되어, 대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전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의 사회운동은 국민투표 거부운동(1975), 유신철폐운동, 3 1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 1976) 등을 거쳐 함평고구마 피해보상운동(1977), YH사건( ),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 ),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 부마항쟁( ) 으로 이어졌다. 2) 함성지 제작 배포와 민청학련 1960년대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은 전국적 수준에서 볼 때 두드러진 특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년의 4 19봉기와 연 이은 4월혁명,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지속된 한일협정반대운 동( ), 그리고 60년대 말에 있었던 3선개헌 반대운동에서도 전남지역 사회운동은 어떤 특성 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국적 흐름에서 비추어 보면, 운동의 규모와 강도 및 치열성에 있어서 대체로 주변적이었고 후속적이었으며 소규모였다. 물론 이 지역의 사회운동에 특별한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실,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인구학적 성격에서 사회운동의 특징적 발전이 가능한 단서 를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공업화 진전도가 뒤늦은 탓에 노동운동 발전의 기반도 상대적으로 취약 했고, 다른 부문의 운동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285). 284) 이와 같은 만행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광범한 저항운동이 격렬하게 번지고, 국제적으로는 미국 의회에서 원조삭감이 논의되는 등 외교문제로 비화하자, 1975년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해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 후 이 사건 관련자들은 법원의 재심을 통해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285) 그렇다고 해서 사회운동을 객관적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주관적이고, 문화-이념적 요인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1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어 다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유신의 악령이 한국사회를 검은 장막으로 짓누르며 공포에 떨게 할 때,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그 너울을 찢어내고 저항의 깃발을 치켜세운 사건이 광주에서 일어났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함성지 제작 배포사건( )이다. 1976년에 이 지역에서 있었던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 은 해방 후 한국의 농민운동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기록되고 있으며, 1978년의 교육지표 선언 투쟁 역시 권력의 심장을 직접 겨누는 무서운 공격력을 실천했던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저항운동에서 드러나는 운동력의 강고함과 치열한 공격성은 이 지역 사회운동의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계기가 되게 한다. 다음에서 이 사례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려 한다. 먼저 함성지( 喊 聲 紙 ) 제작 배포 사건을 소개한다. 유신체제의 문제점을 격렬히 규탄하고 강력한 저항투쟁의 당위성을 주창한 유인물(표제: 함성)이 전남대학교를 비롯하여 시내 여러 학교에 배포된 것은 1972년 12월 9일이었다. 그 유인물은 유신집단의 종신집권 야욕과 국민에 대한 폭력적 수탈을 비판하고,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하여 4 19정신으로 총궐기하자 는 분노 가득한 함성 이었다. 검찰은 함성지의 제작과 배포에 관련된 사람들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했다.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를 구성할 것을 선동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도발이었다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함성지 제작과 배포를 주도한 이는 당시 전남대에 재학 중이던 이강(공법학과 1학년)과 김남주(영문과 3년)였다. 원고작성은 시를 쓰던 김남주가 중심이 되었고, 이강은 인쇄용품 구입 및 인쇄 작업을 주도하였다.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인쇄용품을 장소를 옮겨가며 구입했고 인쇄는 이강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졌다. 밤늦도록 등사기를 밀어 500여 매를 만들었다. 대학이 12월 10일에 개교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개교 당일에 읽을 수 있도록 12월 9일에 배포되었다. 전남대 이외에도 광주고등학교,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일고 등에도 뿌려졌다. 이 두 사람은 1973년 3월 초에 함성 에 이어 또 다른 반유신 유인물 고발 을 만들었다. 500여 매의 유인물을 서울로 우송하고 연락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포착되고 말았다. 73년 3월 20일 오전에 이강은 등교 길에 붙잡혔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사건은 부풀려졌다. 두 사람에게는 국가보안법 제1조의 반국가단체구성 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 조직의 수괴로 박석무가 정해졌다. 박석무는 4 19봉기 이후부터 이 지역 학생운동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사당국은 이 사건을 전남대 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와 연계시켜 사전 봉쇄하려 했다. 이와 같이 해서 두 사람이 중심이었던 함성지 사건은 반국가단체구성 예비음모라는 큰 사건으로 부풀려 조작되었다. 이강, 김남주, 박석무 등 9명이 구속되고 다른 6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수사 받는 동안 모진 고문과 폭행이 거듭되었다. 박석무는 당시 대학원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사건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에서 수괴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인간성이 상실된 유신정권의 야만과 잔혹함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69

172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 관련 재판에서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다. 검찰은 위 세 사람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 판결에서 박석무는 무죄,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했다. 수괴가 무죄를 받았는데 종범은 유죄로 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재판이었다. 정상적인 국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하여 함석헌 등 전국의 재야인사들이 큰 관심을 보였고, 공판 때는 서울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방청을 와서 재판정은 뜨거운 토론장이 되곤 했으며, 이로 인해 광주의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함성지 사건이 종결된 지 불과 4개월 후에 전국을 뒤흔든 일이 일어났다. 앞에서 소개한 민청학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관련되어 있지만, 전남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살펴본다. 전남지역 민청학련 사건에서 드러난 특이성은, 이미 앞에서도 지적되었지만, 구체적인 거리시위나 과격한 투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위를 위한 준비와 착수단계에서 수사기관에 포착되어 다수의 활동가들이 검거되어 심한 고문수사 끝에 감옥살이를 했었다는 점이다. 전남지역 민청학련 사건은 전국적인 흐름과 연계하여 진전되었다. 서울의 주동적 활동가들은 이철, 나병식, 유인태, 황인성, 서중석, 정문화 등이었고, 이 가운데 황인성이 지방연락 책임을 맡았던 것 같다. 광주고등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광주의 활동가들과 접촉한 사람은 황인성과 이 지역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인 나병식이었다.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학생은 김정길, 이강, 윤한봉, 김상윤, 윤강옥, 심재삼, 박형선, 문덕희, 최철, 안상선 등이었다. 김정길과 이강은 초기에 서울의 나병식과 황인성을 이 지역의 윤한봉 등에게 연계시키는 일을 주로 수행했고, 김정길은 재야 인사들과의 창구역할도 맡아했다. 그 후 윤한봉이 호남지역 조직책임을 맡아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서울지역 주동자들이나 타 지역 주도자들과 회합과 협의를 진행해왔고, 광주지역 각 대학이나 단과대학 담당자를 조직하는가 하면 선언문 작성과 인쇄 및 배포 계획, 화염병 제작, 고등학생 동원계획도 역할 분담에 따라 주동자들과 협의 하에 진행했다. 이들은 광주지역 시위일자를 4월 9일 오전 10시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고등법원 판결문 ).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강행한 것을 보면, 이들의 투쟁의지가 단호하고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윤한봉은 시위예정일 하루 전날인 4월 8일에 김상윤, 박형선, 윤강옥, 하태수, 유선규, 정환춘, 이훈우, 최철 등과 모임을 갖고 선언문 발표 및 학생동원, 유인물 살포, 가두행진, 화염병 제작, 등을 체계적으로 점검했다. 이들은 4월 9일 9시 경에 등교하여 선언문을 살포하는 등 행동에 들어갔으나 곧이어 체포되었다. 수사 결과, 윤한봉, 이강, 김정길은 내란음모와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으로, 나머지 관련자들은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등의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1차재판에서 선고된 형량을 보면( ), 윤한봉(축산학과 4학년,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이강(공법학과 2학년, 징역 15년), 김정길(경영학과 2학년, 징역 10년)이었고, 다음 재판에서 김상윤(국문학과 3학년, 징역 1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3 12년), 최철(농학과 1학년, 징역 12년), 박형선(농학과 3학년, 징역 12년), 윤강옥(사학과 4학년, 징역 12년), 하태수(국문학과 2, 징역 12년), 이훈우(경제학과 2, 징역 12년), 정환춘(건축학과 2학년, 징역 1년), 유선국(수학교육학과 3학년, 징역 12년), 문덕희(수의학과 4학년, 징역 10년), 이학영(국문학과 3, 징역 10년) 등이었다. 한편,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나병식(서울대 사학과 4학년, 사형), 나상기(숭실대 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징역 20년)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 지역출신 학생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이들은 1975년 2월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286). 열정의 대학생들이 감옥살이하는 도중에 석방되는 일은 민주의 광주공동체에 뜻밖의 반가움이고 기쁨이었다. 2월 15일에 전남도 출신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 환영회 및 광주 YWCA 구국기도회 가 열렸다. 이 모임에서 양성우 시인(중앙여고 교사)은 유신체제를 비판한 자작 저항시 겨울공화국 을 낭독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양 시인은 결국 근무처인 광주중앙여고로부터 파면 당했다(4월 12일). 양 시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더 광범한 저항운동을 촉발시켰다. 광주중앙여고학생들은 가라! 껍데기는 가라!, 혹시 선생님은 노예교사가 아니신지요(?) 이라는 규탄광고를 동아일보에 게재했다. 서울의 자유실천문인협회는 대표단을 광주에 파견하여 진상조사를 진행했고, 문인협회 전남지부도 임시총회를 열고 양 교사 문제에 대하여 진상을 조사하기로 했다. 한편 양성우 시인은 학교측의 파면에 굴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맞섰다. 그는 4월 12일 광주YMCA강당에서 민주회복 국민회의 주최로 열린 시국강연회에 참석하여 다시 겨울공화국 을 낭독했다. 또한 그는 장편시 노예수첩 을 일본 세카이 1976년 6월호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 후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 는 작품이 문제가 되어 그는 다시 구속되었다(1977년 6월 13일).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그의 동료인 고은과 조태일이 양시인의 시작집 겨울공화국 을 출판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들도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었다. 겨울공화국 은 1970년대 후반 교육현장의 소모임에서 필수교재로 삼을 만큼 교육운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287). 민청학련 사건의 시작과 끝을 보면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그 하나는 이를 통해서 국가권력이 타락할 수 있는 끝을 보았다. 이 보다 더 잔인한 권력의 술수와 음모를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한 역사의 우위를 확인했다. 인간의 역사에는 희망과 절망이 끊임없이 교차되지만, 그리하여 때로는 아타까운 희생에 대한 아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길을 찾는 힘이 역사에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획했던 혁명에 이르기는커녕 실천행동으로 분출하기도 전에 제압되는 운명을 맞이하여 결국 실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운동의 추진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성과는 이후 사회운동의 진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예를 들면, 운동주체 구성에 있어서 학생과 재야 민주세력의 286) 이들은 유신체제가 붕괴된 10 26이후 1980년에 복학이 되었고, 2009년 9월 법원은 민청학련 사건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287) 더 상세한 내용은 이 연구총서의 교육운동 편(이 영재 집필)을 참고할 것.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71

174 광범한 연대형성, 전국적 조직화 시도, 다수의 직업운동가 배출, 등 사회운동의 폭과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정부의 대응자세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일인 장기독재에 대한 위협요인을 근본 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것처럼 보인다. 우선 긴급조치 9호를 발포하여 통제체제를 일상화 하고 더욱 강화했다( ). 그리고 대학에 있던 기존의 학생회를 폐지하고 대신에 학도호국단 을 설치하여 학생들의 자치공간을 폐쇄했으며, 일반 학생들에게도 군부대에 들어가 일정기간 훈련을 받는 병영집체교육이 시행되었다. 3)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의 저항과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 그러나 이와 같이 강화된 통제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70년대 후반에 들어 서 전남지역 종교계의 저항이 두드러졌다. 다음은 투쟁사례의 하나이다. 서울에서 있었던 3 1민주 구국선언사건 의 연장선에서 거행되었던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저항운동( )은 노회가 작성한 결의문을 각 교회가 돌아가면서 발표하고 기도하는 행사로 장기간 지속되었다. 한빛교회(4. 22), 양림교회(5. 18), 함평읍 교회(7. 8) 등에서 낭독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기도회가 거 듭되었다. 그 후 양림교회에서 열린 기장 전남노회 임시노회에서도 기도 및 설교와 아울러 결의문이 낭독되었는데, 이 날 임기준, 조홍래, 윤기석 목사와 이성학 장로가 경찰에 의해 연행당하는 일이 벌 어졌다(8. 10). 이에 원로의 경지에 이른 은명기, 서용주, 윤재현 목사 등이 광주경찰서를 방문하여 항의하자 은명기 목사를 서부경찰서로 연행해버렸고, 그 후에는 이한철, 고민영, 장광섭 목사 등도 연 행되었다. 사태가 이와 같이 악화되자 강신석 목사가 서용주, 윤재현 목사와 함께 자진출두 했고(8. 11), 다음 날에는 목포에서 유기준 목사가 연행되었다. 연행사태가 번져나가자 박종철, 김현식 목사 등이 대책을 협의한 끝에 임명흠 목사를 서울의 기장 총회에 파견하여 실태를 보고하게 하고, 8월 14 일에 비상임시노회를 소집했다. 목사 40여 명을 포함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이 한빛교회에 모였다. 노회의 결과,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응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8개항의 결의사항을 공표하고 곧이 어 농성기도에 돌입했다. 주요 내용은 신앙의 자유보장과 구속자 석방이었다. 경찰은 이날 오후 구속 자들 가운데 일부를 석방했다. 이 날 서울의 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인 가족들이 연행된 목회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광주에 도착했는데, 광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길을 막고 저지하는 기관원 100여 명과 대치하다가 결국 서울로 강제 송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3차 대책위원회를 갖고 8.10사건을 각 노회에 알리고, 8월 16일에 철야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기도회가 예정된 날, 무안 강진 해남 등 각 지역에서 당국의 온갖 위협과 방해를 뚫고 광주 한빛교회에 집결하여 비상노회의 철야기도회를 가 졌다. 그러나 당국은 이 날 강신석, 임기준, 조홍래, 윤기석 목사를 구속하여 송치했다. 도처에서 석방 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당국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11월 31일 첫 공판이 열렸고, 12월 31일 1심 선고공판에서 4인 목사들에게 중형이 선고되었다. 피의자가 된 목사들은 상고했으나 대법 1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5 원 기각했다( ). 그러나 대법원의 최종 판결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8월 15일에 대법원 판 사들의 판결은 효력을 상실했다. 이 4인 목사들이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하에서 대법원 판 결도 하나의 우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석방을 맞아 전남 노회는 출옥 환영예배를 보았고(8월 23 일), 임기준 목사는 학생들을 먼저 석방하라 며 금식에 들어갔다. 기독교인들의 강력한 저항운동에 뒤 이어 더 인상적 사건이 전남 함평에서 일어났다. 함평고구마 피 해 보 상 투 쟁( ) 이 다. 위 의 기 독 교 인 탄 압 사 건 과 같 은 시 기 에 이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고려할 때 유신의 폭압이 가장 자심할 때였다. 사건의 발단은 농업협동조합이 고구마 경작 농민들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1976년 9월에 농협 전라남도 지부는 그 해 수확한 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겠다고 발표했다. 농협의 발표에 따르면 생고구마를 더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겠다니 기대가 컸고, 농협 직원들이 농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농협이 제작한 포대까지 나눠 주니 희망이 더욱 부풀었다. 농민들은 이를 믿고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를 도로변에 쌓아놓고 수매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매시기가 지나도 수매해 가지 않고, 그 상태에서 겨울이 다가오자 고구마가 얼고 부패해가기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과 걱정이 비등해졌다. 농협을 찾아가 항의했다. 이에 대하여 농협은 수매되지 않은 고구마는 없다느니, 추후에 수매하겠다고 둘러대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경찰이 탄압하기 시작했고, 긴급조치로 집어넣겠다고 협박까지도 해댔다. 이에 가톨릭농민회 288) 회원으로 함평에서 활동해 온 서경원을 비롯하여 노금노, 임정택, 임재상, 김양혁 등은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해 농민대표자 모임을 알렸고, 1976년 11월 23일에 17인이 모인 대표자 회의를 함평극장 앞 청하식당에서 가졌다. 이 모임이 개인적 불만을 집단화하고 조직화한 보상투쟁의 시작이었다. 그 회의에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위원장 임정택), 이 대책위가 각 농가별 피해상황 등을 조사하고, 함평군 농업협동조합을 상대로 보상투쟁을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77년 1월 11일, 함평천주교회 마당에서 피해농가대표와 농민회 임원들이 모임을 갖고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전액보상할 것을 포함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경찰은 이 집회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규정하고 농민들을 연행해 갔다. 농협은 이에 편승하여 이장들과 폭력배를 앞세워 농민들을 위협하고 회유했다. 1977년 4월 22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원 500여 명은 이 사건 해결을 위해 광주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기도회를 마친 후 오후 4시 경에 어깨동무를 하고 머리띠를 동여맨 채 농협 도 지회로 행진하던 중 경찰의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다음 날 가톨릭 지도신부의 주선으로 고건 도지사를 면담하고 대책을 약속했으며, 이를 위해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가 현지 실태조사에 288) 가톨릭농민회는 한국 가톨릭교회 산하에 있는 사회단체의 하나이다. 산업노동문제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1958년 발족)에서 농업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농촌청년부가 만들어졌고(1964), 여기에서 1966년에 농촌청년운동조직의 성격이 강한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로 발전하였으며, 이 단체가 1972년 4월에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편하였고 회장 이길재는 호남지역 조직책임자를 맡아 활동했다. 전남지역 현장 활동은 함평군 대동면 금산리의 향진회(분회)가 1970년 12월에 처음 조직됨으로써 시작되었고 뒤이어 나주 계량분회, 곡성 원달분회, 함평 가덕분회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뒤 이어 전남지부가 1973년 8월에 결성되었다(윤수종, 40).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73

176 나섰다. 가농 회원들은 전국 여러 지역에 이 사실을 폭로했고, 그에 따라 서울 동대문천주교회 기도회(6월), 전국 기독교청년 부산대회(8월), 전국농민대회 대전집회(11월) 등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동조해주었다. 양측의 갈등과 불신 속에 해가 또 바뀌었다. 당국의 책임회피와 변명이 계속되었다. 이에 가농은 1978년 전국 대의원 총회에서 함평 고구마사건을 특별의제로 채택하여 전국 차원에서 피해보상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전국 대책위원회는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 검토한 끝에 북동 성당의 항의 기도회를 계획했다. 19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성당에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700여 회원과 천주교 사제들이 주관하는 농민을 위한 기도회 가 열렸다. 농협 지부장과의 면담이 경찰의 저지로 막히자 성당 뜰에서 연좌농성을 결행했고, 철야기도로 밤을 샌 가농 회원 60여 명이 25일 점심부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지도신부인 장홍빈(전남), 이총창(전주), 신현봉(원주), 정규완(광주)을 비롯하여 함평의 서경원 노금노 임정택, 해남의 정광훈 윤기현, 강진의 김현장, 광주의 이강 윤한봉 정태성 황광우 등 전남출신 40여 명과 아울러 경북의 권종대, 충남의 이길재등 타지에서도 20여 명이 참여했다. 단식 3일째인 27일엔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가 단식현장을 방문하여 위로기도를 올렸고, 광주대교구산하 60여명의 신부도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지도신부단은 전 회원과 국민에 보내는 호소문을 발송했다. 저항과 도전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단식 5일째인 4월 29일 농성자 중 5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단식 소식은 전국에 급속히 알려져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서울 재야인사들의 방문행렬이 이어졌다. 바로 그날 전남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해보상금 309만 원이 현금으로 준비되었으니 전달 방법을 알려 달라 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은 마침내 농민들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단식 농성 중에 연행된 이상국, 조봉훈이 석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식투쟁은 계속되었다. 5월 1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민주인사 500여 명이 기도회를 열어 전국농민인권위원회를 결성하였고, 2일에는 나머지 두 사람이 석방됨으로써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투쟁 은 종료되었다 289). 이 투쟁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하나는 당시 한국의 사회운동이 대부분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진전되는 국면에서 농민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공업화 정책이 주도되면서 주변화되었던 농촌문제, 농민문제가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이후 우리사회에서 다양한 농민운동의 전개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에는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전남의 한 시골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전국 각 지역에서도 지원과 참여가 이루어짐으로써 지역운동의 폭과 깊이를 289) ; history-70-5.asp 사건 이후 감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남북, 경남북 지역 일부 단위농협이 주정회사나 중간상인들과 결탁하여 1976~77년까지 2년 동안 고구마를 농민에게 수매한 것처럼 위장 또는 조작하여 농협자금 80억 원을 유용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감사결과로 인해 농협 임직원 659명이 징계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이 투쟁을 주도했던 이강 등은 다른 지역에 강사로 초빙되어 사례발표를 하기도 했다(이강 증언, ). 1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7 확장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의 진전에 관련된 공간이 서울이 아니라 주변 지역이고 주도한 활동가들도 대부분 서울보다는 전국 각지에서 참여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열악한 운동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목적을 일정 수준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성공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해방 이후 농민운동이 이루어낸 최초의 승리로서 이후 농민운동의 새 장을 열었음을 강조한다. 아울러 농민들이 주도한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어낸 가톨릭농민회의 조직과 실천능력, 그리고 농민들의 강인한 투쟁의지가 인상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농민교육 프로그람의 생산적 효과를 확인하게 된다. 끝으로, 이 운동은 그 후속효과가 매우 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농협의 뿌리깊은 부정과 부패실태가 밝혀지고 다수의 책임자들에게 광범한 문책이 있음으로 해서 농업협동조합의 발전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4) 교육지표선언과 양서협동조합운동 다음에는 전남대학 교수들이 주도하여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킨 교육지표선언 사건( )을 서술한다. 이 사건은 전남대 교수 11인의 명의로 된 우리의 교육지표 라는 선언문이 AP통신이나 아사히 등 외국 언론사를 통해 배포되자, 관련 교수들이 당국에 의해 탄압받은 사실을 말한다. 직접 관련된 전남대 교수는 송기숙, 김정수, 명노근, 김현곤, 배영남, 안진오, 이석연, 이홍길(이상 문리대), 김두진, 홍승기(이상 사범대), 이방기(법대)였고, 이들은 곧바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이 선언문을 직접 배포한 성래운 교수(연세대 해직교수)가 잡혀갔고, 이효재 교수(이화여대)가 이와 관련하여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전남대 교수들은 이로 인해 모두 해직되었으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송기숙과 성래운은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송 교수는 징역 및 자격정지 4년, 성 교수는 각각 2년을 선고받았다. 그 당시의 정치사회적 국면은 긴급조치 9호를 발포한 이후 사회전반에 대하여 더 강경하고 잔혹한 탄압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우선 학생에 대해서는 학도호국단을 설치하고 일반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정보요원과 사복형사들이 교정에 들어와서 교수와 학생을 밀착 감시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체포하는 상황이었다. 교수에게는 재임용제도를 신설하여 유신에 비판적인 교수를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하는가 하면, 학사관리와 학원사찰을 더 한층 강화함으로써 교수와 학생을 제도 속에 규제하려 하고 있었다.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그 당시 주요 국가 행사에서 낭독되고 전 국민이 암송하게 할 정도로 비중 있게 취급되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내용과 우리 교육이 진정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교수들은 국민교육헌장의 내용 중에 민족중흥이나 애국애족 및 능률과 실질 숭상의 기조가 자칫 민주주의와 정의의 원칙을 벗어나 국가주의 또는 복고주의로 미화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함과 아울러 제정경위 및 선포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일제 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이 지향해야 할 길은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75

178 인간존중, 진실, 양심과 민주주의, 그리고 외부의 간섭이 배제된 자율적 교육을 강조했다(선언문 참조). 국가권력의 핵심 철학과 논리를 정면에서 겨누어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이 선언문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곧바로 나선 것이다. 원래 이 선언문은 전남대 교수와 서울지역 교수들이 공동으로 발표하도록 추진되었다. 이를 주도했던 송기숙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광주에서 주요 교수들의 뜻을 모은 후, 서울에 가서 백락청 교수 등과 협의하여 그곳 교수들을 규합해나갔다. 작업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송교수는 서울지역 교수들이 약간의 이견이 있음을 확인했고, 그에 따라 이 선언문 발표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뜻을 전남대 교수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6월 27일에 이 선언문이 외신을 타고 발표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는 성래운 교수가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선언문을 언론사에 보냈다고 했다. 전남대 교수들과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이유는 만일에 이 상태에서 발표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정보기관이 나중에 알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주도한 교수가 비밀리에 희생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감행했다는 것이다. 교수들이 전격 연행되고 해직된 사태를 맞이한 전남대 학생들은 반응은 뜨거웠다. 바로 다음날인 28일 오후에는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연행된 교수를 위한 기도회 를 열었다. 저녁에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YWCA강당에서도 기도회가 열렸다. 교수들이 연행된 후 이튼 날인 6월 29일 낮에 전남대 학생 약 500여 명은 노준현(화공2)의 주도로 중앙도서관 앞에서 집회를 갖고 양심교수 연행에 대한 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 을 통해 스승들의 쾌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천명함과 아울러 연행교수 석방, 교수재임용제 폐지, 상담지도관실 폐지 등을 주창하면서 시위에 돌입했다. 경찰은 페퍼포그를 쏘아대며 잔혹한 진압에 나섰다. 학생들은 시위와 투석전으로 대응했고 그 과정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이 잡혀갔다. 이들 중 구속 기소된 학생은 노준현(화공2, 징역 5년), 정용화(인문1, 징역3년), 박현옥(영문4,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비롯한 14명이었다. 6월 30일이었다. 전남대 교문에 7월 5일까지 휴교한다 는 공고가 붙었고, 경찰이 학교출입을 금지했다. 그 날 아침 9시경 학생들은 교문 앞에 집결하여 출입을 막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중경상을 입었고 경찰도 다수 부상했다. 강제 해산된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하여 도심에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진압에 진력했다. 특히 조선대학교 앞에서는 전남대 학생과 합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그로 인해 다수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7월 1일에도 분노의 시위는 치열했다. 연사흘의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사람이 무려 5백명에 달했다. 시위는 곧이어 조선대로 번졌다. 7월 3일 아침 조선대 학생들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대학 본관 4층과 5층 강당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조선대학교 민주학생선언문 과 조선대학교 당국에 보내는 글 을 낭독하고 배포했다. 선언문은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언론, 병영화된 대학 등을 비판하고 더 이상 양심적인 민주인사 및 학생들을 긴급조치에 희생시키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와 1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9 아울러 양심교수와 구속학생 석방, 학원사찰 중지, 교수 재임용제 폐지, 저임금 저곡가 정책 폐지, 등을 주창했다. 전남대학교 6.27 민주교육선언과 6.29전남대 학생시위에 적극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시위로 조선대학생 양희승(정외2), 박형중(전기공학1), 김용철(법학2), 유재도(금속공학1) 등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제적되었다. 유신체제의 폭력 억압이 강화되고 그로 인해 교수와 학생들의 피해가 심화되자 이 지역의 법조인인 홍남순, 이기홍, 지익표 변호사 등으로 대대적인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변론에 나섰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와 자유실천문인협회 등 전국적 단체들도 광주지역 교수와 학생들의 투쟁을 성원했다. 공판이 열린 날에는 서울과 전국에서 민주인사들이 광주로 몰려와 법정을 가득 메웠다. 교육지표 사건은 이미 해외 언론에 공표된 사건이어서 정부로서도 방청을 제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전남대 교수들의 교육선언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6. 28),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주는 선물로서 온몸으로 환호를 보낸다"고 지지했다. 뿐만 아니라 인권운동협의회는 당장 실직된 전남대 교수들을 위해 8월 한달 동안 모금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6 30)과 전국교구사제단(7.10)도 성명을 통하여 "6.27 교육지표 선언은 용기 있는 교육자의 양심의 발로로서 이 교육지표 달성을 위하여 온 국민들과 함께 적극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NCC인권위원회는 민주교육의 실현, 해직교수의 복직, 구속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광주 전남 사회운동 단체들도 교육지표 사건 구속자들을 위한 활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특히 교육지표사건을 계기로 해서 1978년 11월 YWCA에서 구속자 부인과 단체 활동가 등 20여명의 여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송백회 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송백회 회원들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털양말 170켤레를 짜고, 영치금과 책을 모아 수감된 교수 학생들에게 전달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방청객을 안내하여 법정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교육지표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송백회는 나중에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도청 지도부를 위한 끼니를 제공하는 역할을 주도하는 등 광주 전남 사회운동에서 핵심활동단체로 성장했다. 1970년대 후반 소위 긴급조치 시대를 균열시킨 교육지표 사건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군부정권 하에서 신성시 되어 온 국민교육헌장을 처음으로 문제 삼고,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켰다. 둘째,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이후 침체된 학생운동에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셋째, 교육지표 사건은 광주 전남 민주화운동 세력을 한층 더 성장시키고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90)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와 전남지역에서는 민청학련 관련 청년 사회운동가, 학생운동권, 해직교수를 290) 전남대학교 5 18연구소, 우리의교육지표기념사업회, 정용화, 긴급조치9호 시대( )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34주년 기념식 자료집 ( ), 33쪽. 김병인은 교육지표사건이 5 18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병인, 2008, 교육지표사건 과 5 18, 민주주의와 인권 제8권 제2호, 47-73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77

180 중심으로 한 학계, 기독교와 천주교 등 종교단체, 인권변호사, 정당인 등 사회재야, 농민과 노동운동단체 등 각계의 연대가 진전되었고, 민주 민중운동의 부문별 분화가 가속화되면서 5 18 광주민중항쟁 의 기틀과 저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291) 교육부문의 연장선에서 이 지역 사회운동으로 두 가지 사례를 주목할 만하다. 그 하나는 광주양서협동조합(광주양협)운동이고 두 번째는 노동운동과 연계된 야학운동이다. 양서협동조합은 일정한 사람들이 좋은 책을 서로 공유하여 읽고 토론하는 사회적 모임을 말한다. 인간사회에서 좋은 책을 읽는 일이 값진 삶을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특히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폭력과 반민주적 권력의 횡포가 미만한 현실에서 좋은 길을 인도하는 것은 고전이고 선현들이 쓴 양서라는 진리는 더욱 자명해진다. 따라서 양협운동의 기본 목적은 양서를 공유하고 읽고 토론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바른 역사를 위한 삶의 길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광주양협은 1978년 11월에 발족했다 292). 한국전쟁 당시에 보통학교 학생으로 입산하기도 했던 장두석은 박현채와의 만남을 통해서 양협운동에 관한 구상을 구체화했고, 그 후 1978년 3월에 서경원, 최성호 등과 협의하여 양서조합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장두석은 그의 자택을 양협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YWCA 1층 휴게실에 책을 진열할 공간을 마련한 후에 안진오(당시 전남대 해직교수)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진을 구성하면서 공식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안진오 이사장 외에 주요 구성원은 장두석(집행위원장), 이일행법률사무소 운영), 정규완(신부), 한모길(목사), 문병란(시인), 윤영규, 박행삼, 박석무, 임추섭(이상 교사) 등으로 되어 있으며, 감사에 이성학(장로), 총무 황일봉, 간사 김현주 등이었다. 임원진은 아니었지만 이방기, 김정수, 송기숙 등 20명의 전남대 교수들, 권광식, 김제안 등 25명의 조선대 교수들이 참여하였고, 윤광장, 정해직, 김준태, 송문재, 오정우, 정규철 등 삼봉조합 교사들, 위인백(변호사사무실 재직), 최병인(전남매일기자) 등 많은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293) 그러나 양협의 운명은 1980년 291) 정용화, 나의 채권자 노준현!, 노준현추모문집발간위원회 엮음, 2006, 남녁의 노둣돌 노준현 (도서출판: 미디어민), 55쪽. 292) 양협은 1978년 4월 5일 부산에서 결성된 이후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사이에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양협이 있었던 지역은 부산을 중심으로 마산, 대구, 울산 등 영남의 4개 도시 그리고 서울, 수원 등 수도권의 2개 도시와 광주 등이다. 차성환, 2004,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2, 기억과 전망 겨울호. 165쪽. 광주 양서협동조합의 자료들이 5 18민중항쟁 당시 인멸되어 광주양협의 창립시기와 관련하여 다소 혼선이 있다. 차성환이 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윤광장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것은 1979년 봄이고, 고정석은 3-4월 경으로 기억하였다. 조사결과 이 시기는 광주YWCA 2층에 사무실을 내고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된 때다. 광주양협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은 1978년 3월 경 장두석의 집에서였다. 그 후 YWCA 1층으로 자리를 잡았고, 1978년 11월에는 11명의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광주양협의 창립은 1978년 11월이라고 하겠다. 293) 장두석 황일봉 김현주 2012, 광주양서협동조합 발표자료와 <민주장정 100년 교육민주화 자문인터뷰> 김현주(2014년 9월 19일) 자료 참조. 광주양협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인사들은 관광호텔에서 집기를 얻게 해 준 황석영(작가), 심상우(전남매일 사장), 정구선(삼부증권 사장), 박상구(삼양타이어), 대인시장 상인들, 조명제(신협도지부 회장), 전계량(계림신협 상무), 박남훈(북동신협 전무), 김춘동(북동신협 이사장), 김홍용(방림신협 상무), 서경자(남광신협 이사장), 정은수(광천신협 이사장), 김재균(흥민신협 이사), 양경자, 고정희, 정유아, 이윤정 등(YWCA 간사), 양현숙 등이 있다. 1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1 5월 17일 박현채의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 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이날 서울에서는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다음 날이 5 18의 그날이었다. 광주양협의 활동은 매우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이 운동은 긴급조치 9호의 장막에 덮힌 암흑 사회에서 양서는 희망의 빛이었다. 그래 양협을 찾는 발걸음이 점차 많아졌고, 그 과정에서 사회운동세력을 결집하고, 재건하는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다. YWCA 2층 양협 사무실에는 고교생, 대학생, 교사, 회사원,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조합원이 1,4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광주 양협은 다른 지역 양협들과 달리 일반인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처음부터 청소년, 학생들의 독서지도와 의식화에 중점을 둔 점이 특징이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294) 양협 활동에 적극적인 교사들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참여가 활발했고, 이 학생들이 이후 광주지역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광주양협은 유신말기 합법적 공간이 지극히 좁아진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교두보였다. 광주양협은 각종 시국강연회 를 개최하였고,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대학생들의 시국토론 을 여는 등 군부정권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출판기념회를 열고, 문병란의 시집 벼들의 속삭임, 호롱불의 역사 등을 발간, 배포하기도 하였다. 295) 이 운동은 형태상으로 볼 때, 매우 온건하고 부드러운 운동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이고 중요한 영역을 개발한 운동으로서, 광주 전남 교육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사회운동진영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5) 노동야학과 송백회 다음은 이 지역 노동부문 운동의 양상을 살펴본다. 노동운동은 근대 산업사회가 발전한 이후 사회운동 영역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부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은 수준에서 보면 그 만큼 노동운동이 사회운동 전 영역에서 갖는 비중이 크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국가사회를 구성하는 각 지역에 따라 노동부문의 비중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남지역은 국가의 산업구성에서 농업이 중심산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노동운동의 비중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물론 그러한 노동환경에서도 노사갈등과 노동자의 저항운동이 섬유, 부두, 철도 등의 주요 산업체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규모와 강도에서 국가사회의 관심사가 되거나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발견하기 어렵다. 1970년대에도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실태는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신체제의 가혹한 노동탄압은 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작은 싹들은 자라 오르고 있었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임금인상이 주요 쟁점이었던 294) 차성환,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 2, 167쪽. 295) 장두석 황일봉 김현주, 광주양서협동조합 4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79

182 일신(전남)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집단성토대회( )와 임일섬뉴 노조원의 작업거부( ) 및 광주고속버스 안내양들의 승차거부( ), 그리고 노조건설투쟁이 전개되었던 호남고무(주) 노동쟁의( ), 남양어망의 노동자투쟁( ), 호남매일신문 사원들의 퇴직금 지급투쟁( ) 등이었다. 그런데, 노동운동 발전의 사회적 기반이 되는 야학운동이 주목할 만하다. 광주에서 이 시기에 활동했던 야학으로 들불야학과 백제야학이 대표적이다. 들불야학은 1978년 광천동 시민아파트와 광천동 천주교 공간을 근거지로 출범하여 1981년 7월 제4기 졸업식까지 지속되었다.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김영철, 박기순, 박관현, 윤상원, 신영일, 박용준, 임낙평, 나상진 등이었다. 학생은 노동현장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었으며 교과목은 중고등학교 과목 및 교양, 그리고 노동법 등 노동운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이 야학은 공안당국의 탄압, 시설과 경비 등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게 되었으나, 그 후에 무등야학, 샛별야학 의 모체가 되었다. 특이한 사실은 들불야학에 참여했던 강학과 학생들이 1980년 5 18광주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항쟁 과정에서 투사회보 를 제작 배포함으로써 항쟁의 진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강학이었던 윤상원(5 18항쟁 당시 투쟁위원회 대변인), 박용준(YWCA 신협 근무)은 5월 27일 최후의 전투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박관현은 피신 후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투쟁 중에 사망했다. 백제야학은 임동성당을 주요 거점으로 하여 전남대 학생이었던 김남승, 김문수, 김홍건 등이 주도했다. 들불야학의 윤상원은 들불야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백제야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교과목 구성은 학과공부를 기본으로 하고 이와 더불어 노동법이나 노동조합 등에 관한 강의도 수행되었다. 이 야학에는 서울의 청계피복노동조합 에서 활동하다가 광주로 온 이양현과 소모임을 갖고 학습하기도 했다. 이양현은 로케트전기에서 해고된 김성애, 빛고을 학생교회 출신 이윤정, 정유아, 이정희, 임미령, 정향자 등과 학습모임을 하면서 노동운동가를 키우고 그 자신이 노동운동에 함께 했으며, 5 18때 도청 지도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정희는 로케트전기 노동조합의 최초 여성 지부장이 되었다. 여성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노동자가 집중되어 있는 대규모 사업장은 일신방직, 전남방직, 호남전기 296), 남해어망 등 이었다. 이곳의 여성노동자들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YWCA 등을 통해서 소모임 학습활동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서 민주노조 결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JOC 활동을 매개로 하여 섬유업계 산별노조에는 17개의 단위노조 가운데 12개 사업체에 소모임이 결성되어 있었고, 그 대부분이 여성 중심 사업장인 섬유노조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0년 여성노동자 운동은 조직적 투쟁의 준비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기에 여성노동운동과는 달리 여성운동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단체로 선구적인 단체로 광주YWCA와 송백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주YWCA는 1922년 11월에 창설된 이 지역의 296) 로케트건전지로 회사명이 바뀜. 1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3 유서깊은 여성단체로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초대회장 양응도, 총무 김필례). 1970년대에는 고도성장과 유신 폭압으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하여 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장운동 장동마을 주민교육, 계절탁아소 운영, 야학운영, 미혼여성 근로자, 시내버스 안내양 등을 초청하여 위로하고 건강이나 성문제에 관한 교양교육, 소비자보호운동, 수감자를 위한 목요기도회, 악덕업체 상품 불매운동, 해고자 돕기, 민중논단, 탈춤강습회 등을 시행하기도 했다. 또한 광주YWCA는 민주화운동 단체들에게 사무실 공간을 제공해줌으로써 민주화운동의 공간적 중심이 되었고, 광주 문화운동의 선도자인 극단 광대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송백회는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 가족을 비롯해 교사, 노동자, 간호사, 주부, 청년학생 등 각 분야의 여성들이 1978년 12월에 창립한 여성조직이다. 나혜영, 홍희윤 등 20여 명의 창립회원으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50-80명으로 회원이 증가했다. 송백회 초기활동은 구속자 가족이나 구속자들에 대한 지원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나중에는 지원활동을 넘어서 분과모임에 따라 여성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가족의 생계 및 가족원의 구속에 따른 생활, 심리적 불안 등)뿐만 아니라 환경- 공해문제, 기생관광 문제 등 사회문제 전반에 관한 적극적 관심가 활동을 전개했다. 이상에서 1970년대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을 개략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전국적 운동지형에서 살펴볼 때 1960년대에 볼 수 없었던 전남지역운동의 독자성과 선도성이 드러났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60년대에 한국 사회운동의 큰 흐름은 4월혁명( )에서 한일협정반대운동( )으로, 다시 1969년의 3선개헌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흐름에서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위상은 중심이었기 보다는 주변적이었고 선도적이었기 보다는 추수적이었다. 4월혁명은 대구, 마산을 거쳐 서울에서 대단원에 이르렀으며, 뒤 이는 두 가지 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이 함께 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유신반대운동의 큰 흐름에서 서울지역이 여전히 전국의 사회운동을 주도해왔다. 전태일 자결의 파장으로 출렁였던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대학생의 교련반대 및 민주화운동(민청학련 등), 재야 민주세력의 조직적 발전(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청년협의회, 민주수호 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개헌청원100만인 서명운동, YH사건, 등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가운데 79년의 부마항쟁은 지역에서 자생한 봉기였다. 전남 지역사회운동의 경우에서 노동운동의 파장은 비교적 높지 않았고, 재야세력의 민주화운동은 중심인 서울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동참해나갔다. 그러나 70년대 한국 사회운동에서 전남지역운동이 갖는 위상은 현저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전남지역운동에서 드러나는 특징적인 현상은 지역운동의 독자적 선도성에 있다. 예를 들면, 함성지 제작 배포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저항운동으로서 그 후 이어진 문인, 언론인 등 각계 선언사건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농민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켜 전 국민의 관심을 유발시켰고,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81

184 유신의 억압을 뚫고 마침내 정부당국을 굴복시킨 결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운동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교육지표 선언은 권력자의 국정철학을 상징하고 그에 따라 정책의 핵심기조가 되어있는 국민교육헌장을 표적으로 하여 정면에서 비판한다는 것은 권력의 심장을 겨누는 것으로서 발상 자체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모험적인 것이었음에 불구하고 이 역시 전남지역운동의 터전에서 솟아오른 횃불이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 전남지역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운동(민청학련, 민주회복 국민회의, 100만인 서명운동, 명동 구국선언사건 등)에 충실히 연대하면서 동시에 지역자체의 독자적 운동성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 이와 같은 독자적 선도성을 가능하게 했는가에 대한 연구의 과제가 제기된다.-주관적 문화이념과 객관적 사회경제적 요인 둘째, 이 시기 전남지역 사회운동에서 드러난 두드러진 특성은 부문운동의 분화발전현상이다. 60년대의 운동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70년대 지역운동은 기존의 전통적 운동과 아울러 농민부문에서의 함평고구마 피해보상운동, 여성운동에서의 송백회 활동, 양서협동조합과 교육지표 선언의 교육운동, 그리고 탈춤강습회나 극단 광대의 출범 등은 문화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운동영역의 이와 같은 확장은 사회운동의 공간과 아울러 참여세력의 잠재적 기반을 강화하게 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운동권의 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셋째, 60년대의 지역운동이 협소한 운동권역에서 시민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조직 군중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면, 70년대의 전남지역 운동은 조직화의 진전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함평고구마 피해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가톨릭농민회는 비교적 일찍 조직화의 틀을 갖추었지만, 양서조합운동이나 송백회 활동도 조직적 토대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운동조직의 이와 같은 발전은 운동의 내적 과정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며, 그에 따라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 운동조직의 발전양상은 초기 단계에 그치는 수준임을 지적해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와 같은 운동조직의 형성 발전에 영향을 주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녹두서점과 현대문화연구소의 역할을 강조할 만하다. 녹두서점( ?)은 독서를 통해 학생운동가를 생산하고 연계하는 터전이면서 전남민주청년협의회의 모임터 역할을 했다. 현대문화연구소( )는 운동가들의 독립된 공간으로서 상호간의 만남과 토론, 정보생산과 교류의 창구역할을 했다. 광주 최초의 여성운동체인 송백회를 탄생시킨 곳도 여기다. 따라서 녹두서점과 현대문화연구소가 지역사회 운동권의 중심으로서 그 당시 전남지역운동의 산실 기능을 했던 것이다. 넷째, 이 시기 전남지역 사회운동은 서울중심의 하부조직이나 지류가 아니라 전국적 중심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함평고구마 사건은 이 지역에서 제기된 후에 가농 전국회의에서 중심의제로 채택하여 전국적 수준에서 운동이 전개되었고, 교육지표 선언운동도 송기숙 전남대 교수의 주도하에 전국적 수준에서 진전되었던 사실을 보면 안다. 또한 이 운동의 진전과정에서 전국의 주요 활동가와 지도자들이 전남의 운동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동참한 사실은 이 지역운동의 중심성을 1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5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이 지역의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사실도 지적할 만하다. 함평고구마 사건은 1년 후에 일어났던 안동 농민회사건( ; 일명 오원춘 사건)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양서조합운동은 부산지역 활동가들과의 연대활동에서 발전했고, 교육지표 선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자유실천문인협회 등 전국적 지지성명과 후원을 유발시킴으로서 운동의 효과를 극대화 했다. 종합해 볼 때, 70년대 전남지역 사회운동은 수난 받던 한국 사회운동을 앞장서서 그 암흑의 장막을 찢어내어 선도하고 견인하는 위상을 정립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3. 광주항쟁과 80년대 사회운동 1) 민주화 성회와 5 18광주민중항쟁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독재 권력자가 돌연 살해되자, 비록 새로 계승한 권한대행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권력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할 힘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기존 지배세 력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이고, 두 번째는 유신독재에 저항해왔던 재야 정치권 및 사회운동세력의 강력 한 민주화 요구였다. 지배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정점으로 하는 군부 내의 기존 세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 간에 일어났다. 신군부 집단은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비공식적 사조직 형태로 세력을 확장시켜 왔었다. 이 두 세력 간의 충돌은 10.26사건의 수사과정에서 합동수사본부 297) (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혐의를 조사하려는 과정에서 현실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12.12군사 쿠데타이다. 대통령의 재가없이 하급 장교(합동수사본부장)가 상관(계엄사령관)에게 무력으로 도전한 이 하극상의 쿠데타에서 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총격전 끝에 체포되어 패배했고, 이후 지배권력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에게로 집중되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면서 중장으로 진급한 뒤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독점하여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1980년 4월 14일). 마침내 신군부는 5월 17일 밤 국무회의에서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찬반토론 없이 가결하게 했고, 그에 따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발표되었다 298). 그리하여 전국의 주요 기관과 대학은 공수부대에 의해 점거되었고, 국권은 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말하자면, ) 이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하에서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검찰, 경찰, 군 검찰 등 국내의 모든 정보- 수사기관을 조정-통제-감독하는 기구로 실질적 권력의 중심이었다. 이전에는 이 권한이 중앙정보부에 귀속되어 있었다. 298) 그는 5월 31일 국보위상임위원장,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10월 27일 간선제 헌법개정을 통해, 81년 2월 25일 12대 대통령 당선되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83

186 12쿠데타에 이은 5.17쿠데타였다. 이는 유신체제에 이은 또 다른 군사정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의 흐름에 실망하고 분노한 민주세력은 초기부터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주요 동력은 재야 정치인과 지식인 및 청년운동가, 그리고 대학생 및 노동자를 포함하는 광범한 민주세력에게서 나왔다. 이들의 구체적인 쟁점이 어느 정도 차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정치권과 대학 및 노동의 민주화, 즉 사회 전반의 민주화라는 점에서 공통된 지향을 갖는다. 그리고 이 저항운동은 1980년 봄에 서울을 중심으로 타올랐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 이라 부른다. 그 서막은 서울 YWCA에서 있었던 결혼식을 가장한 집회( )로 열렸다. 이와 아울러 사북항쟁(4. 14), 그리고 전국민주노동연합(전민노련 창립: 5. 3) 등이 80년 봄에 전개되었다. 사북항쟁은 경찰의 노조탄압과 폭력에 분노한 광부들이 가족까지 합세하여 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들을 시내에서 몰아냄으로써 공권력으로부터 해방된 구역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전민노련은 70년대의 조합주의와 경제주의적 노동운동을 비판하면서 이를 변혁운동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매우 치밀한 조직체계를 전국 수준에서 정립했다. 이태복, 김철수, 도시산업선교회 간사였던 신철영, 청계피복노조의 양승조, YH의 박태연, 대구-경북지역의 김병구, 광주의 윤상원, 울산의 하동삼등이 핵심활동가이었다 299). 광주의 윤상원은 뒤 이은 5 18항쟁에서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5월 27일 최후의 총격전에서 사망하게 되었다(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사전편찬기초조사연구보고서2). 위에서 정치권과 노동부문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대표적인 운동사례를 소개했지만, 서울의 봄 에 타올랐던 열기는 젊음의 광장인 대학 캠퍼스에서 가장 뜨거웠다. 특히 5월에 접어들면서, 학생들의 시위에 교수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5월 2일 낮 서울대 1만여 학생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가득 채운 비상학생총회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후배들이 병영집체에서 돌아오는 13일까지를 민주화 대투쟁기간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13일까지 안개정국이 걷히지 않으면 전면적 대정부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울대 학생회장의 이 발언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3일에는 연세대 학생들이 야간에 광화문으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연이어 14일엔 서울 시내 21개 대학에서 거리로 뛰쳐나온 7만여 대학생들은 비와 최루탄 속에서도 심야까지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다음날 5월 15일 시위는 지난 1월 이후 점차로 가열되어 왔던 서울의 봄 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전국에서 60여 대학 수십 만 명이, 그리고 서울지역 35개 대학 15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가 광장을 가득채운 가운데 광화문 진출을 시도했다. 오후에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이어진 시위는 수 백 명이 연행되고 부상자가 속출할 만큼 치열했다. 이 때 별안간 운동지도부의 해산 지시가 내려졌다. 군부가 등장할 빌미를 줄 299) 월 관련자 30여 명 구속되었고, 일 이태복에게 무기징역, 관련자 전원에게 실형이 선고됨 으로써 조직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1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7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서울역 회군 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의 봄 에 치솟은 횃불은 갑자기 꺼져버렸다. 5월 16일 전국 27개 총학생회장단은 일단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정상수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이 서울역 회군 결정에 대한 평가는 그 후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서울에서의 돌연한 철수와 달리 광주에서 민주화 대 성회 로 타올랐던 저항의 횃불은 꺼지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광주의 민주화 대 성회 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가두시위를 통해 신군부에 맞선 저항운동이었다. 14일 오후 3시 쯤 도청 앞 광장의 분수대 주위에 5천여 학생들이 집결하여 신군부의 안개정국을 규탄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분수대 위에 올라 개헌 일정을 밝히라, 신군부 세력 물러가라 고 외친 함성은 많은 시민의 가슴을 울렸다. 이튿날 1시경 학생들은 다시 그 자리에 집결했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학생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계엄령 철폐 유신 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 등의 구호를 제창했다. 이 날은 전남대를 비롯하여 조선대 등 시내 여러 대학과 대학교수들도 참여하여 3만여 대 군중을 이루었다. 16일 금요일, 오후에는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저녁 7시 30분 경 이들은 횃불을 들고 도청 앞에서 전남대까지 4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행진하며 횃불 시위 를 벌였다. 민주화 성회를 끝내면서 학생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휴교령이 내리더라도 학교에 나오자고 다짐하면서 헤어졌다. 그러나 5월 17일은 새로운 운명의 날이었다. 경찰은 오후 6시쯤 전국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연석회의를 하고 있는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신군부는 이날 오전 11시 국방부 회의실에서 국방부 장관 주재 하에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지역계엄의 전국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해산, 정치활동 금지 등을 결의했고, 뒤이어 야간에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확대선포안이 가결되었다.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거세게 타올랐던 저항의 함성은 군부의 폭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 날 밤 전국의 주요 대학은 공수부대에 의해 점거되었고, 교문은 닫혔다. 이른 바 5.17쿠데타 였다 300). 170명의 구속자를 낸 서울의 봄 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그러나 군부의 폭력적 정권탈취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횃불은 다음 날인 5월 18일 전라도 광주에서 시민-학생봉기의 형태로 다시 타올랐다. 이른 바, 5 18광주민중항쟁(다음부터 광주항쟁 으로 약칭함)이다.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은 일요일임에도 민주화 대 성회 때의 다짐에 따라 학교에 나왔다. 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정문을 막아선 중무장 공수부대원들과 충돌로부터 광주항쟁은 시작되었다.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지속된 이 항쟁은 다음과 같은 매우 놀라운 수직적 폭발의 과정을 보여준다. 첫째, 초기단계는 대학생 중심의 시가지 저항시위이다(18일 아침-19일 오전). 이 시기는 계엄 철폐와 계엄군의 살인적 폭력에 대한 대학생들의 규탄과 저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학생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공수부대의 야수적 폭력 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300) 이 행위에 대하여 대법원은 헌정질서를 파괴한 내란행위로 규정하고 이 주도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85

188 시위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길을 가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계엄군이 자행한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를 지켜 본 시민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두 번째 단계는 시민의 적극 참여와 기층민중 주도의 공세적 대응이다(19일 오후-21일 오전). 계엄군의 만행에 경악했고 분노했던 시민들이 마침내 스스로 저항의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이 항쟁의 주도세력이 학생으로부터 시민으로 전화되었다. 싸움은 학생들의 방어적 저항 수준을 넘어서 기층민중이 주도하는 공세적 성격으로 진화되었다. 지탄받던 공공기관이 방화되고 관공서가 점거되었으며, 운전기사들이 주도한 차량시위가 감행되었다. 도시 전체인구 70여 만 명 가운데 20만 이상이 참여한 시민저항의 거대한 물결 앞에 중무장 계엄군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없었다. 어느 학자는 이를 절대공동체라고 표현했다. 세 번째 단계는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이에 대응한 시민들의 무장, 그리고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간의 시가전과 뒤 이은 계엄군 철수(21일 13: 00-21일 17: 00)이다. 시민의 압력에 밀리던 계엄군이 마침내 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자행함에 따라 시민들이 자위적으로 무장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시가전의 결과 계엄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거대한 시민의 힘이 군부의 폭력을 물리친 의미 깊은 국면이었다. 네 번째 단계는 계엄군의 철수로 권력이 소멸된 해방광주와 시민자치(21일 밤-26일 밤)의 시기이다. 억압권력이 사라진 6일 동안 광주는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해방의 자치공동체를 실현했다. 주민 스스로 대규모 집회의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시민행동강령 등 주요 사항을 결정하고 공유했으며, 자체 방어와 물자수급도 자치적으로 이루어졌다. 파리콤뮨이나 동학혁명에서의 집강소 등과 비교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다섯 번째 단계는 계엄군의 재공격과 시민군의 결사항전(27일 새벽-아침), 그리고 항쟁의 최후 국면이다. 6일 동안 지속된 해방의 자치공동체는 결국 탱크를 앞세운 중무장 계엄군의 공격에 의해 재점령됨으로서 그 운명을 다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계엄군의 공격을 알리고 참여를 호소하던 가두방송은 메아리 속에 사라졌지만, 결사항전으로 민주주의 제단에 몸을 바친 시민군의 장렬한 희생은 광주항쟁의 역사에 꺼지지 않는 빛으로 남게 되었다. 이 항쟁이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 밖에도 순천, 화순, 해남, 송정리, 나주-목포, 전주 등 광주로부터 각 지방을 향하는 곳에서 수많은 충돌과 총격전이 일어났다. 특기할 사실은 목포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계엄사의 작전일지에 따르면, 22일 오후 7시 반 경 목포역에는 2만여 시위대가 운집했다고 적고 있다. 광주-목포 간 호남선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고, 방송은 중단되었으며, 경찰서와 헌병대는 파괴되었다. 밤 11시 경에도 목포역 광장에 2만여 명이 집결하여 김대중 석방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시민 죽이듯이 목포시민 죽여라 등의 구호가 울렸다. 목포에서 일어난 시위는 해남, 완도 등지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항쟁의 결과에서 드러난 피해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 기록을 남겼다. 5월 31일에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항쟁기간(5월 18일-27일) 동안의 전체적인 인명피해 현황을 보면, 사망자는 18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9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2명이고, 연행자는 1,740명이며 이 가운데 1,010명을 훈방하고 730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301) 그런데 7월 3일에 계엄사령관이 외신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사망자 현황에 따르면, 민간인 162명, 군인 23명, 그리고 경찰 4명으로 수정되었다. 302) 희생자 수는 그 이후에도 행방불명자 및 암매장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하여 한국 현대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역사에서 인상 깊은 자치공동체를 건설했던 광주는 이 계엄군의 공격작전에 의해 다시 점령당하는 비극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 패배로 인해 광주공동체에 남겨진 흔적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비무장 시민의 시위에 대하여 자행한 군부의 야만적 잔혹성이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군대의 만행에 의해 수백 명의 비무장 시민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중에는 여학생과 어린이뿐만 아 니라 임산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계엄군의 극단적인 잔혹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잔혹성을 통 해 군부 지배권력의 폭력적 본질을 극명하게 알 수 있게 했다는 점, 그리하여 다시는 군부지배의 이와 같은 폭력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둘째는 이 군대의 폭력과 만행에 대한 전 시민의 총체적 참여와 저항의 치열성을 주목할 만하다. 그 당시 총인구 70여만 명의 광주시에서 20만~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어린이와 노약자 등 활동이 어려운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전 시민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24 이는 이 도시가 갖는 강력한 공동체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는 물론 사적인 것이나 개 인적 소유관념이 소멸되었고 너와 나, 너의 것과 나의 것이라는 구별이 사라진 사회였다. 최정운은 이 상태를 절대공동체 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25 이와 같은 고도의 공동체성은 중무장한 계엄군에 맞 서 시가전을 전개할 만큼 강고하고 치열했으며, 마침내 시민의 강인하고도 거대한 힘은 중무장한 정 예 진압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철수하게 만들었다. 더 인상적인 사실은, 진압군이 철수하고 난 후 억 압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자치공동체에서 범죄와 폭력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고도의 도덕질서와 시 민윤리의 확립이었으며, 이와 같은 수준 높은 공동체성은 마침내 생명까지도 공동체의 제단에 바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셋째는 이 항쟁에서 마지막 순간에 시민군이 보여준 용기 있는 저항과 장렬한 희생이다. 그 전사들은 중무장 계엄군의 무자비한 공격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불의의 폭력에 타협하거나 투항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저항했다. 먼저 떠난 동지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하 고 그들의 꿈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의지, 우리 공동체의 후손에게 정의로운 역사를 남기겠다는 현실 을 뛰어넘은 결단이다.26 말하자면 불의의 폭력이나 부당한 억압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굴종하지 않 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역사의식, 즉 동학혁명이나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자기희생으로 저항했 던 의병의 역사의식 및 그 이후에 계속되었던 민주화를 위한 저항의 역사의식이 현대의 이 항쟁에서 301) 전남대학교 5 18연구소 홈페이지, 5 18광주민중항쟁총일지, 302) 윤재걸, 화려한 휴가 (서울: 도서출판 실천문학사, 1988) 311, 322, 351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87

190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살아남은 자들의 원한과 부채의식이다. 잔인한 폭력에 의해 희생 당한 자녀의 부모, 순간에 남편을 잃은 부녀자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정신을 잃고 한에 휩싸였다. 친구와 이웃을 잃은 사람들 의 분노와 살아 있음에 대한 영혼의 빚은 세월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업보가 되었다. 특히 마지막 날 도청에서 밖으로 나와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더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분노와 부채의 식은 광주시민, 또는 전국의 양심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했음을 필자는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날 새벽에 계엄군의 공격을 알리면서 도청으로 모여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던 여 학생의 피어린 절규를 깨어 있는 시민들은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소는 현장에 나가지 못한 시민 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메아리로 살아남아 무시로 그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었을 것이다. 시민들 은 그날 새벽에 자기가 도청으로 나가서 싸웠다면, 도청 앞 광장으로 출동했었더라면어찌 되었을 것 인가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먼저 죽어간 열사들의 그림자에 휩싸였고 그 영혼의 부름 앞에 죄책감으로 전율했다. 그들의 장렬한 희생과 그에 대한 부채의식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금단의 구 역이 된 망월동 묘지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리저리 맴돌며 서성이던 젊은이들이 바로 그들이었고, 그들이 그날 이후 오늘까지 계속되어온 5월운동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80년 5월 27일 스 스로 생명을 바쳐 싸웠던 위대한 패배가 이후의 저항운동에 온몸을 바쳐 싸우게 한 힘의 원천이었고, 투쟁의지를 일깨우는 효소였음을 우리는 다음에서 소개하는 5월운동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싸움에 서 지더라도 어떻게 지느냐, 즉 패배의 방식을 강조했던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통찰을 5월운동 에서 다시 발견할 것이다. 303) 2) 5월운동 광주항쟁이 계엄군의 재공격에 의해 장렬하게 좌절되었지만, 이 항쟁을 계승한 저항운동은 그 이후 에도 계속되었다. 실제로 5월 27일 새벽에 기습한 계엄군이 시민군 본부였던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 지만, 광주교도소를 비롯한 주요 거점이나 시 외곽에서 항쟁은 계속되었다. 죽은 전사들은 말없이 잠 들어 있었지만, 잡혀가서 살아있는 투사들은 보안대와 헌병대 영창에서 항의와 단식 등으로 투쟁을 계속했다. 더 나아가, 광주항쟁에 참여한 후 서울로 간 김의기(서강대 재학생)는 5월 30일에 종로 5가 기독교회관 5층에서 광주항쟁을 애도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결로 저항을 실천했고, 노동자 김종 태는 6월 9일 이화여대 앞 거리에서 광주를 애도하며 분신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에도 광주항쟁 303) 나간채,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만들기 (도서출판 한울, 2013), 30-31쪽. 1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1 을 애도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자는 저항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304). 우리는 광주항쟁을 계 승하는 이러한 저항을 5월운동 이라는 단어로 개념화 했다. 따라서 5월운동은 광주항쟁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정서를 포함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며 더 나아가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포함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4가지 요소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5 18 이후 국내외에서 광주항쟁 또는 5 18의 이름으로 전개된 정치 사회적 민주화운동을 포 함한다. 5 18을 외치며 자결한 대학생이나 그들의 집회 및 시위, 재야활동가의 5월투쟁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사실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5월운동은 그 근간을 이루면서 다른 부 문의 운동영역과 중첩적 병행적으로 진전되었다. 광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민주화 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과거청산의 과제이다. 항쟁과정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만행과 부당하게 행사된 국가폭력에 의 해 지역사회에 파생된 인적 물적 제도적 피해에 대한 복원과 배상 및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위한 활동을 포함한다. 그 폭력의 잔혹성은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사격과 사망자들의 훼손된 시신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은 총탄의 흔적으로 일그러졌고, 활기 넘쳤던 거리는 시가전의 상흔으로 황 폐화되었으며, 평화로웠던 광주공동체는 눈물과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셋째, 항쟁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각종의 의례와 행사를 포함한다. 전야제, 기념식, 추모제 등 항쟁을 재현하는 각종 의례와 공연이 해당된다. 이와 같은 문화예술적 표현을 통해서 항쟁에 대한 기억과 재 생의 계기 및 5월운동의 에너지가 생산될 뿐만 아니라, 국면에 따라 의례의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저 항적 집합행위가 감행되기 때문이다. 넷째, 항쟁이 추구했던 가치와 이념을 5 18 또는 광주항쟁의 상징하에 변화된 환경에서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재생산하는 활동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항쟁의 이름으로 전개된 노동, 농민, 청년, 학생, 환경, 여성운동 등을 포함하여 민주기사동지회 의 불우노인돕기, 부상자회 의 영호남지역 교류활 동, 스리랑카 실종자 유족 지원활동 등이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에서 5월운동은 인권운동, 평화운동, 반미운동과 민족통일운동 등으로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재생산해왔다. 이렇게 볼 때, 5월운동의 개념적 특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305) 첫째, 지속 기간의 장기성이 다. 이 운동은 항쟁의 그 날인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규정되고 항쟁의 과정에서 죽었던 전사들이 민주화유공자가 됨으로써 항쟁의 명예가 다시 살아난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그 지속기간은 적어도 20여 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사회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둘째, 이 운동이 갖는 주기성과 집중성 복합성(문화예술창작)이다. 5월운동은 개념 자체가 상징하는 304) 광주항쟁이 5월 27일에 종료되었다는 것은 계엄군과 정부의 관점이었다. 나는 이러한 인식에서 항쟁의 지속기간을 확장하는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나간채 A New Perspective on the Gwangju Uprising: 1980~1997. 전남대학교5 18연구소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305) 나간채, 한국의 5월운동 (도서출판 한울, 2012), 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89

192 바와 같이 매년 5월에 주기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1980년대 초기에는 매년 5월에 망월동 추모제를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운동의 규모와 형태가 더욱 발전함에 따라 추모제를 포함하여 매우 다양한 행사가 거의 5월 한 달 내내 거행되었다. 그러나 5월 에 일어난 모든 사회운동이 5월운동인 것은 아니듯이, 5월이 아닌 시기에도 5 18과 관련된 5월운동 은 일어났다. 기본 요소는 5 18과의 직접적 유관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즉 5월운동은 5월에 주기적이고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5월이 아닌 때에 일어난 5 18 관련 운동은 당연 히 포함된다. 1980년 12월에 일어났던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나 1994년 7월에 움직이기 시작 했던 5 18특별법 제정운동은 당연히 5월운동에 포함되어야 한다. 셋째는 운동공간의 광역성이다. 광주항쟁은 광주와 그 인근지역에 한정된 국지적 운동이었지만, 5월 운동은 서울을 비롯한 국내의 타지역은 물론 미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적인 공간적 광역성을 실현 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적극적 상호협력활동을 전개해왔고, 2000년대 이후에는 광주가 인권도시로서의 상징성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 다양한 국제활동에 주력하는 추 세이다. 5월운동의 속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로 구별되는 요소가 2중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전 것을 알 수 있 다. 그 하나는 추모제, 전야제, 기념행사 등의 의례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생활에서 제기되는 진상 규명문제,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기념사업 등의 쟁점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활동으로 구성되어 있 다. 여기에서는 앞의 것을 의례투쟁으로 뒤의 것을 일상의 쟁점투쟁이라고 규정했다. 5월운동을 구성 하는 이 두 요소들은 서로 결합하여 통일적으로 진전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독립적 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의미한 상 생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진상규명 투쟁에 지친 활동가들이 추모제를 통해서 항쟁 희생 자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그 영령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성찰함으로써 다시 싸울 수 있는 동력을 다시 살려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광주항쟁이 좌절된 이후 약 20년 동안 진전되었던 5월운동의 흐름을 살펴본다. 이 20년의 흐름은 그 성격에 따라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시기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특성을 의 례투쟁과 쟁점투쟁의 두 가지 차원에서 차례로 정리하려 한다. 첫째는 항쟁 직후부터 1983년 말경에 이르는 '금지된 추모제' 시기이다. 계엄상태 아래에서 신군부 정권이 가장 가혹하게 탄압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에 광주항쟁은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은 폭동으 로, 항쟁의 참여자들은 폭도로 규정되며, 더 나아가 항쟁에 대한 언급자체가 금기시 되던 때였다. 항 쟁의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묘역은 금단의 구역으로서 정보기관원들이 진입로를 막고 엄격히 감시 하고 통제했다. 1981년 5월의 1주기 때는 유족회가 망월동에서 추모제를 집단적으로 가지려 하자 이 를 방해하고 연기시키려 했었다. 당국의 연기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유족들은 삼엄한 감시 속에 추모 제를 강행했다. 극히 제한된 인원만 입장을 허용했지만, 다수의 청년학생들은 반대편 산비탈을 타고 1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3 숨어들어와 추모제에 참석하기도 했다. 참여인원은 기 백 명에 불과했지만, 추모제 주도자는 반미발 언이 문제가 되어 잡혀가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추모제를 끝내고 도청을 향해 집단적으로 시위도 하 려했었지만, 당국의 저지로 인해 개별적으로 시내에 진출했다. 시내에서는 경찰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단체와 교회에서 추모행사가 거행되었다. 민주시민들의 불굴의 강인한 투쟁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1983년 5월행사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의 주요 쟁점투쟁 사례는 대학생들의 파쇼정권타도, 반파쇼민주화투쟁 이 광범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광주 미국문화원방화(1980), 구속자석방운동(1981-2), 그리고 망월동 묘지이장 반대투쟁(1983-4) 등이 있다. 중요한 전환점은 1982년 말의 계엄해제, 그리고 1983년 말에 있었던 정부의 구속자 석방(172명) 및 제적되었던 대학생 복학 허용조치(1,363명)를 포함하는 유화국면이었다. 그에 따라 1984년의 5월행 사는 망월동 묘지에 출입통제도 해제되어 자유롭게 추모제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 은 1987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는 두 번째 전환기로서 묵인된 추모제 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4주기 추모제에 처음으로 백기완, 김근태 등 서울의 민주화운동가들이 참여했으며, 이 때 추모제 참 석인원이 수 천 명에 이르렀다. 이 국면에서 감행되었던 주요 쟁점투쟁 사례는 광주 시민의 진상규명 과 책임자처벌운동을 비롯하여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1985), 망월동 7주기 추모행사에서 발원 된 6월항쟁(1987), 전국 46개 대학에서 있었던 5 18투쟁 계승선포식 과 추모제 거행(1987) 등이 포함된다. 미문화원 점거농성에서 대학생들의 첫 번째 구호가 광주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이었음은 그 당시 대학생 운동의 중심 흐름이 5월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더 결정적인 전환점은 1988년 5월행사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는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전두환 정 권이 끝나고 신군부 2기의 노태우 정권의 지속기간과 겹친다. 노태우 정권은 광주항쟁이 폭동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바꿔 민주화운동으로 재규정함으로써 항쟁의 법적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만들었 다. 이에 따라 5월행사는 추모제의 의미를 넘어서 축제적 성격을 가미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행사의 내용도 전야제와 국민대회 및 공식 기념식을 거행하도록 확충되었다. 이전과 같은 비공식 행사가 아 니라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행사로 되었고 이에 따라 민관합동행사로 치러졌다. 이 때 망월동 추모제 와 기념식에는 1만 여 인파가 운집하였고, 오후에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국민대회에는 10만이 넘는 대군중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거대한 열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열기는 1991년 5월행사에 까 지 이어졌다. 우리는 이 시기 5월의 의례운동을 혁명축제 로 명명했다(김종협, 나간채, 2013, ). 이 시기의 쟁점투쟁 사례를 보면, 전국 대학생 1만 5천명의 망월동 성지순례참배(1988)와 광주학살 및 5 공청산 투쟁(1988), 전국에 생방송 된 국회의 5 18청문회(1988-9), 전두환 체포결사대 투쟁(1988), 5 18피해자에 대한 1차보상(1990) 시행 등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대단원의 흐름은 1992년 이후의 5월행사를 지칭한다. 이 시기에는 이전처럼 과 격하고 폭력적인 시위와 저항운동보다는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형태가 중심을 이루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91

194 었다.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법적 정치적 정당성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피해자 보상이 이 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정부의 지원 하에 기념사업이 구상되는 국면을 반영한다. 우리는 이 시기를 5 월운동의 대단원으로 설정하고 이때의 의례운동을 문화축제 로 규정했다. 주요 쟁점투쟁 사례는 기 념사업 추진운동의 결과로 발표된 김영삼 정권의 5 18 기념사업 계획(1993), 5 18특별법 제정운동 (1994-5), 특별법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 등을 내란범인으로 단죄한 5 18재판 투쟁(1995-7), 그리고 국가기념일 제정(1997), 민주화유공자예우(2002)에 관한 운동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도표. 5월운동 주체의 전체적 발전과정 (자료: 나간채, 한국의 사회운동, 410쪽 참조) 쟁점투쟁의 형태변화를 종합해 보면, 80년대 초반의 5월운동은 소규모 분산투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19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5 (1980~1983). 운동의 규모와 참여인원이 제한되어 있고, 이 운동이 일정한 조직적 기반에서 기획되 고 실천되기 보다는 인간관계에 기초한 소집단의 임기응변적 단기적 투쟁의 형태를 갖는다. 또한 연 대운동보다는 개별 분산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는 제적생 복학과 구속자 석방의 유 화조치가 단행됨으로써 운동공간 확장과 운동세력이 증강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 결과 대 학과 사회운동권에 광범한 조직적 발전이 이루어 졌고, 이를 토대로 더 체계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 ). 뒤 이어 1990년을 전후한 시기는 노태우 정권 하에서 광주항쟁에 대한 정치적 정당성 이 확보되고, 운동세력의 조직화가 진전됨으로써 그 공세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를 우리는 공세강화 기로 규정한다( ). 그 후 강화된 5월운동은 마침내 김영삼 정부로 하여금 특별법을 제정하 게 했으며, 이에 따른 5 18재판을 통해 학살자들을 단죄하였고 아울러 국가주도의 기념사업이 진전 되는 대단원( )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장기 지속된 5월운동의 이와 같은 변화와 발전양상은 더 구체적으로 운동의 주체와 목표 및 운동형태에서도 상응하여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운동주체의 내적구성은 주도세력, 참여세력, 지원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들의 사회적 성격은 항쟁의 피해자, 대학생, 청년, 지식인, 노동자- 농민-시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주도세력에 초점을 맞추어 주체 발전양상을 살펴본다. 1980년대 초반의 싸움은 유가족과 구속자 가족, 그리고 대학생들이 주도세력을 형성했고, 이들은 조 직성이 낮은 소모임 형태로 진전되었다. 유가족의 경우에는 현실적 요청에 따라 항쟁 직후인 6월 초 에 유가족회가 결성되었으나, 대학생이나 구속자 및 부상자는 공식조직이라기 보다는 비공식적 소모 임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1983년의 유화조치 이후에 각 대학의 총학생회와 아울러 이들의 연대조직인 전국학생연합(1985),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1988: 전대협) 등이 결성되었고, 시민사회에서는 전국민주화운동청년연 합(민청련: 1983), 민주통일전국연합(1985: 민통련),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1989: 전민련) 등이 결 성되어 5월운동에 참여했다. 한편 광주항쟁 피해자도 유족회에 뒤이어 부상자회(1982), 구속자회 (1984), 그리고 이들의 연대조직인 5월운동협희회(1987), 5월 민중운동연합(1992) 등이 결성되었 다. 따라서 이 시기 5월운동은 개별단체와 연합조직의 병행-발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러한 추세는 1990년대에 이르러 더 강화된 형태로 발전했다. 대학생 조직은 전대협이 해체되고 이에 대신하여 한국대학생회총연합(1992)이 출범했으며, 재야운동권에서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1991: 전국연합)이 전국농민회, 전대협, 광주 5월단체 등 21개 부문단체의 결합으로 결성되었다. 여 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전국연합에 대학생조직과 5월피해자 조직이 결합됨으로써 5월운동의 주도력이 이전의 피해자단체와 대학생으로부터 전국연합으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특별법 제정운동 ( )은 전국적 단일조직으로 통일된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국민운동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5월운동의 생애에서 주체의 성장과 아울러 운동목표의 진화와 운동형태의 변화도 발견할 수 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93

196 항쟁이 좌절된 직후 상황에서 운동의 지향은 국가폭력의 학살만행에 대한 충격과 분노, 그리고 이에 저항과 규탄의 격정적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전두환 물러나라 등의 구호는 바로 이러한 정서의 표현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도출된 목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 격정에 가까 운 감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80년대를 경과하면서 운동의 목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현 실적 요구의 반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유족과 부상자들은 우선 가정이 파괴된 상태에서 생계와 치료 및 최소한의 생존권 문제가 절박했다.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등의 새로운 과제들도 일상화된 투 쟁과정에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과제들을 중심으로 거듭된 토론을 거쳐 정립되었다(1992). 이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배상 및 보상, 기념사업의 5개 항목이다. 그리고 이 5대 목표 는 일정한 수준에서 성취되었다. 수사와 재판, 증언과 기록을 통해서 항쟁의 진상이 어느 정도 밝혀졌 으며, 특별법에 의거한 재판에서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학살채임자들은 내란 및 반란의 죄인으로 단 죄되었다. 반면에, 항쟁의 직접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음과 아울러 민주화유공자로 예우됨으 로써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으며, 국가기념일 제정, 국립묘지 및 사적 건립 등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운동지형을 주도적으로 형성해왔던 5월운동은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적극적 평가에 대한 이론도 있을 수 있 다. 아직도 미해결의 과제가 남아있고, 또 앞으로 그러한 과제들이 나타날 수 있기도 하다. 여전히 의 문의 포장으로 덮여있는 암매장문제와 정확한 희생자 수, 군부 내의 지휘계통과 학살책임자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여전이 문제로 되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와 복지대책, 기념사업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종합해 볼 때, 스스로 정립한 목표를 일정한 정도로 이뤄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성공한 운동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5월운동의 평가와 관련하여 역사적 인식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 문제제기는 1980년 5월의 광 주항쟁과 그 항쟁이 좌절된 후 그 항쟁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년 동안 계속된 5월운동을 하나의 역사적 흐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통합하여 인식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나간채, 2001; 정근식, 2001) 306). 이는 마치 4월혁명을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한 시점으로 설정했던 논의로부터 최근에는 그 시기를 확장하여 1961년 5.16쿠데타 이전까지로 확장하여 인식하는 관점과 유사하다(김동춘). 또한 한 역사학자는 1937년 중일전쟁 이래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 국민이 겪어왔던 전쟁과 죽음의 고통을 17년 전쟁 으로 인식하기도 했다(박명림, 2003, 148)는 사 실은 이와 같은 역사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06)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 과 그 이후 1997년까지 지속된 5월운동 을 하나의 역사적 흐름, 하나의 역사적 사건단위로,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은 정근식과 필자의 글에서 공히 제출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정근식은 이 두 시기를 통합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으로 개념화할 것을 제안하였고, 필자는 광주항쟁을 전반부항쟁으로, 그리고 후반부 항쟁을 5월운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합하여 5 18항쟁 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Na Kahn-Chae, New Political Science, Vol. 23(4), 2001, Philadelphia: Carfax Publishing; 정근식, 5 18민중항쟁사, 2001, 653쪽; "A New Perspective on the Gwangju Uprising: 1980~1997", G. Katsiaficas & Na Kahn- Chae eds, South Korean Democracy: Legacy of the Gwangju Uprising, London: Routledge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7 5 18항쟁에 대한 이와 같은 확장된 해석과 관련하여 내가 갖는 문제의식은 사회운동의 역사, 또는 항쟁의 역사에 대한 아픈 성찰로부터 기인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항쟁의 역사 서술을 패배한 역사가 아니라 승리한 역사로 정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저항과 도전이 부 당한 폭력에 의해 짓밟히는 역사를 흔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대구항쟁(1946), 제 주4 3항쟁(1948), 부마항쟁(1979) 등이 그것이며, 이러한 사례는 인근의 아시아지역에서 필리핀 인 민항쟁(1986), 버마 민주항쟁(1988), 중국 천안문 항쟁(1989), 태국 5월항쟁(1992)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항쟁들은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정당한 집단행동이었지만, 대다수가 국가권력의 잔혹한 진압에 의해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진압당한 슬픈 기록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정의로운 저항과 도전이 부당한 폭력에 의해 패배하는 아픈 역사를 겪어온 것이다. 그런데 5 18항쟁을 시기적으로 확장함으로써 80년 5월의 패배한 항쟁이 아니라 20년의 투쟁을 통 해서 승리한 항쟁으로 해석되고 인식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회운동의 역사적 완결성을 높이는 효과 를 기대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기록이 패배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 로 되게 하자는 것이다. 이는 사회운동이 지향하는 가치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셋째, 실제로 80년 광주항쟁을 패배라고 하는 해석은 억압권력의 견해이지 5월운동 세력의 관점은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 후 계속된 불굴의 5월운동을 통해서 전반의 패배를 후반부에서 승리로 만들 어 낸 것이다. 넷째, 이와 같이 확장된 인식은 5 18항쟁의 국지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사회운동으로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광주항쟁이 광주와 그 인근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면, 후반부의 5월운동은 서울의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 및 일본 등지에서도 계속되 었다. 다섯째, 이와 같은 확장된 인식은 80년 5월의 희생자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 들의 부채의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80년 5월의 싸움 못지않게 5월운동의 싸움과 그로 인 한 희생도 동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5월운동은 80년 5월의 봉기 못지않게 치열한 저항투쟁의 과정이었다. 다만, 80년 5월의 광주항쟁이 매우 압축된 사회적 힘이 단기간에 폭발하는 과정이었다면, 광주항쟁은 그 압축의 시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폭발의 강도와 깊이가 완화되어 장기간 지속된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더 광범한 사 회적 힘을 동원하여 더 체계적이고 대규모적 저항전선을 형성함으로써 패배한 항쟁을 승리한 항쟁으 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과정이었다. 또한 지역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이 운동은 주변의 지역운동이 마침내 전국적 운동으로 확장 발전하 여 국가사회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역사적 계기로서의 의미가 큰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사 회체제 구성에서 주변이 중심과 중앙에 종속되고 추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변인 지역사회가 선도한 저항의 역사를 중심이 참여하고 지원하여 이루어낸 성과라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5 18은 80년대 한국에서 사회운동의 길을 밝혀준 횃불이었다. 서울의 봄이 한가닥 돌풍에 휘말려 암 흑의 바다에 침몰했다면, 5 18은 이 어두운 바다에 빛을 밝힌 횃불의 치솟음이었다, 비록 횃불도 더 잔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95

198 혹한 쓰나미에 휩쓸려 좌초했지만, 뒤 이은 5월운동은 향후 20년에 이르는 그 횃불의 행진이었다. 3) 6월 민주 대항쟁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이후 80년대 한국 사회운동에서 가장 높이 치솟았던 저항 물결은 1987년 6 월항쟁과 7,8,9월에 전국을 휩쓸었던 노동자 대투쟁이다. 먼저 6월항쟁을 서술하고 뒤 이어 노동자 대투쟁 을 약술한다. 6월항쟁은 헌법개정을 요구하는 전 국민적 운동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헌법의 대통령 선거 방식을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바꿨던 것을 직접선거 방식을 골자로 하는 내용으로 다시 개정하자는 것이다.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는 국민의 직접적인 선거참여가 봉쇄될 뿐만 아니라 집권자가 선거인단에게 압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당시의 헌법개정운동은 국민주권 행사를 강화하고 장기집권의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앞의 5월운동에서 보았듯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은 이 정권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학살만행의 원죄에서 연유하는 것이어서 출범 이후에도 정당성 시비와 아울러 민주화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지만, 7년 임기의 대통령 선거 시기가 가까워 옴에 따라 개헌문제가 정국의 핵심쟁점으로 떠올랐다. 1985년 11월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민주헌법쟁취위원회 를 구성하여 개헌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86년 1월 16일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헌법개정 유보 방침을 밝히자 야당 측에서는 즉각 반발하여 대통령 직 선 제 개 헌 1,000만 명 서 명 운 동 에 돌 입 했는가 하면(2월 12일), 서울지역 15대학생들도 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 를 구성하기도 했다( ).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성공회 소속 신부들, 대한 조계종 승려들, 여성계, 등에서 시국선언이 이어졌고, 대학교수 265인의 연합시국선언도 발표되었다(6월 2일; 연보451). 5월에 있었던 인천5.3항쟁에는 5만여 노동자와 시민학생이 집결하여 대규모 저항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때 129명이 구속되고 37명이 수배되었다 307). 1986년 하반기의 대대적인 탄압 속에서도 광범하게 진전되고 있는 개헌문제에 대하여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에 특별선언을 통해 현행헌법 개정하지 않은 채 선거를 치러 정부를 이양한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그 와중에서 1월에 일어났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하여 경찰 당국이 자행한 은폐조작의 진상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광주항쟁 추모미사에서 폭로했다(5월 18일). 정권의 야만적 살인폭력과 호헌조치를 통해 민주화의 염원을 짓밟고자 하는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광주항쟁 7주기 추모행사들과 맞물려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날 광주항쟁 307) 이후 사회운동에 대한 강경탄압이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운동진영의 저항도 격화되었다. 노동자 박영진 분신자결( ), 서울대학생 이재호, 김세진 분신자결( ), 서울대학생 이동수의 분신자결,( ), 서울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 광주 호남대학생 표정두 분신자결(3월 6일), 1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9 희생자 묘역에서 거행된 추모제에서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 국민조직 건설의 필요성에 대하여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 대표자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이는 며칠 후에 출범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으로 현실화되었고, 이를 통해 4.13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를 선언했다(5. 27). 말하자면, 6월항쟁의 총괄 추진주체가 광주 망월동의 5월행사, 즉 5월운동의 과정에서 태동했음을 강조하는 바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국민적 분노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를 열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하여 간선제인 현행 헌법으로 선거를 치르려는 기존 입장을 강행했다. 그러자 국본은 이에 맞서 같은 날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를 결행했다. 국민대회 전날 연세대학생들이 주도한 '6 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피흘리는 사진이 국내외 주요 일간지에 머리기사로 게재됨으로써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308) 6월 10일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지역에서 40만여 명이 참가하는 동시다발적 시위투쟁으로 전개되었다(기사연, 1987, 8). 이 국민대회는 6월항쟁에서 타오르던 국민적 열망의 첫 번째 분출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일부가 경찰 진압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계속함으로써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도록 6월항쟁의 불씨를 이어나갔다. 6월 15일까지 농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국본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를 열었다. 여기에는 전국 16개 지역에서 150여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박종철 군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30-4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경찰이 진압을 포기할 정도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1,487명이 연행되었고, 경찰 차량 13대가 불타거나 파손되었다. 이후 3일간은 6월항쟁의 고조기였다. 21일까지 고조기가 지나고 난 후에 잠시의 소강기가 이어졌는데, 이 때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협상이 시도되었고, 운동권 내부에서는 차후 대응방안을 검토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 도 정 치 권 에 서 는 전 두 환-김 영 삼 회 동(24일), 김 영 삼-김 대 중 회 동(25일) 등 이 있 었 고, 사회운동권에서는 국본 주도하에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을 결행을 공표했다. 전-김회동은 상호간에 일방적 통고에 그친 수준에서 성과 없이 결렬되었고, 양김 회동에서는 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규정하고 결국 저항연합에 함께 하여 국민평화대행진에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그 결과,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은 국본의 주도하에 전국 33개 시-군-읍에서 180만여 명이 참여하는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타올랐다. 특히 넥타이 부대 로 불려졌던 사무직 종사자들의 대거 참여는 이전에 보기 어려운 인상적인 변화였다.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 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하여 308) 이한열 학생은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에 사망했다. 당시 이한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동료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은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리기사에 실려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장례식은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장례행렬은 연세대학교 본관 신촌로터리 서울시청 앞 광주 5 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어 망월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을 기록했다. 이한열 군 피격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97

200 진압작전에 돌입했으나 이미 경찰은 시위진압에 대한 치열한 의지도 강력한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이들은 정당한 국민의 저항과 도전 앞에서 무력화되었고 시위대에게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경찰집계에 따르면, 이 날 시위과정에서 3,467명의 학생과 시민이 연행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경찰서 등 관공서, 민정당사, 그리고 다수의 경찰차량이 불타거나 파손되었다(연보 ). 다음은 전국 수준에서의 이와 같은 진전양상을 광주 전남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이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을 선도한 집단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학생이었고, 특히 전남대 학생들이 주도했고, 조선대학 등의 여타 대학에서 뒤이어 참여하는 양상으로 진전되었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이 지역의 학생운동은 일제 강점기에는 물론 해방 후에도 강력한 저항의 전통을 갖고 있다. 70년대의 선도적인 반 유신 저항투쟁 이후, 6월항쟁에서도 매우 치열한 투쟁력을 보여주었다. 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 군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하자, 전남대 학생들은 고 박종철 학우 추모제 및 애국민주세력 탄압 폭로대회 (1. 26), 박종철 추도회 (2. 7), 2.7추도회 보고대회 및 고 박종철 학우 49제 준비위원회 발족식 (2. 19), 고 박종철 학우 49제 및 용봉학우 평화대행진 (3. 3) 등의 저항집회를 연이어 가졌다. 뒤 이어 전남대에서는 반외세반독재구국학생투쟁위원회(구학투) 가 출범하였고(3. 17), 구학투는 반정부투쟁, 민중생존권투쟁, 반미투쟁 등의 영역에 관한 저항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개헌문제에도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자기를 광주사람이고 소개했던 대학생-노동자 표정두는 내각제 개헌반대, 장기집권음모 분쇄 등을 외치면서 분신자결함으로써(3월6일), 국민적 저항운동의 파고를 더욱 높아지게 했다. 전두환 정권이 4월 13일에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전남대 총학생회와 구학투는 그 날 오후 장기집권음모 호헌분쇄를 위한 학생총회 를 개최하여 정부를 강력히 규탄하고 연 이어 시위를 감행했다. 14일에도 2차 학생비상총회를 갖고 난 후에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결행했다. 이 단식은 17일까지 계속되었고 이어서 4 19혁명 계승투쟁으로 연결되었다. 학생총회와 단식농성 등의 저항행동을 통해 이 기간 동안 진행되었던 학생운동의 치열성을 알 수 있다. 5월에 접어들자 광주 전남은 1980년 이후 계속되어 온 5월투쟁의 흐름과 병행하여 호헌분쇄투쟁은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특히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집회 및 시위 관련 혐의로 연행된 사람이 120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5월투쟁 후에 다가온 6월은 광주 전남에서도 항쟁의 계절이 되었다. 광주 5월투쟁의 동력을 이어받은 항쟁인지라 전국의 어느 도시에 못지않게 치열한 저항의 나날의 보냈다.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예정된 시간이 오후 6시이었지만, 오후 2시 무렵부터 금남로 2가 중앙교회 사거리 등지에서 부분적인 집회들이 시작되었다. 국본 전남본부의 배종열 상임대표와 김영진 장로 등이 앞장서서 주도했다. 6시가 되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범 국민대회 가 시작되었다. 국본 전남본부의 지침에 따라 가톨릭센터와 중앙교회 옥외방송에서 애국가가 울려 19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1 퍼지자 5천여 군중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가톨릭 센터에서 몰려나온 1백여 신부와 수녀 및 신자들이 금남로 길바닥에서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시위대는 수 백 명씩 무리지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광주우체국, 원각사, 충장파출소, 미국문화원 등지에서 경찰의 1차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황금동 4거리 인근 충장교회 옥상에서 김병균 목사가 토로한 즉흥연설에 1500여 현장 시민들이 열렬히 호응했다. 김목사는 6월항쟁 기간 내내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다니며 시위를 독려했다. 7시를 경과하면서 YMCA, 문화방송, 등 광주시내 거의 모든 구역에서 수 백 명 씩 무리지은 군중들의 파도가 최루탄 연기 자욱한 거리에 출렁거렸다. 퇴근시간이 지난 8시 경에는 5만여 대군중이 중앙대교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며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공용터미널, 시청, 산수오거리, 월산동 등 전 시내에 널리 확산되어 거리를 행진했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시위대는 투석과 화염병으로 대응했고, 경찰서, 파출소, 민정당사 등이 파손되기도 했다. 자정 무렵에도 2만여 시민들이 도처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새벽 5시 반 경에야 이날의 시위는 막을 내렸다. 이 거대한 저항의 파고는 잠시의 하강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운림동 문빈정사의 불교승려- 신도들이 민주쟁취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결의대회 가 있었고(6. 14), 6월 15-16일에는 두 차례의 전남대 학생 비상총회를 개최하여 기말고사를 연기하는 결의 등을 통해 투쟁의지를 다졌다. 특히 2차 비상총회(6. 16)에서는 총학생회장과 여학생회장 등 23명이 자진 삭발로 호헌철폐와 직선제 쟁취을 위한 투쟁의지를 다졌고, 삭발식 후에는 2-30명의 학생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민족민주만세 독재타도, 이한열 열사 살려내라, 직선제 개헌, 호헌철폐 등의 혈서를 썼다. 이 삭발-혈서시위는 가라앉은 투쟁의 열기를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광범위한 학생대중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이 효과를 20-21일의 대규모 시위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일 시위는 전남대 의과대학생 300여 명이 흰 진료복을 입고 거리를 행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행렬에 시민대중이 급속히 가세하여 밤 8시 30분경에는 3만 명으로 늘어나 충장파출소 앞 중앙로를 완전히 장약했고, 9시 경에는 저항의 열기가 더욱 치솟아 원호청으로부터 광주은행 사이에 20만 명에 이르는 대군중이 시내 중심가를 가득 채웠다. 일요일인 21일에도 고조된 저항의 대열은 심야까지 계속되었다. 국본 전남본부를 자정 무렵에 차후 투쟁계획을 발표했다. 26일 오후 6시에 국민평화대행진을 결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6일 이전에도 호헌철폐와 직선제 쟁취를 위한 시민투쟁의 열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22일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수 만 명의 시민대중이 자정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싸움을 계속했다. 마침내 26일이 왔다. 오후가 되자 전남 각지에서 농민들이 광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5시 30분경에는 이미 금남로 4가 중앙교회 앞에서 유동삼거리까지 폭 30미터 길이 1킬로미터의 도로에 시민들이 운집했다. 7시 경에는 10만 군중이 중심가에 모여들었고 절정의 순간에는 20만 명 이상의 대군중이 집결했다. 화염병과 돌멩이, 그리고 경찰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투쟁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199

202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00여명의 목사들이 가두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시간, 중앙로와 서현교회 및 광주천 인근에도 5만여 군중이 도청 진출을 위해 공방전을 벌였다. 고등학생들이 자체의 깃발을 만들어 앞세우고 학생들을 규합했다. 광주지역 고등학생 민민투 라는 이름으로 시위에 참가한 학교는 동신여고, 중앙여고, 광주상고 등 19개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훗날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을 조직하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과 교사들의 참교육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진행된 6.26평화대행진은 밤이 되면서 수만 명의 시민이 전 시가지에서 동참하는 대규모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투쟁의 대열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해산했다(오승용, ). 6월민주항쟁은 광주에서 뿐만 아니라 전남의 주요 지역에서도 매우 강렬하게 일어났다. 목포, 순천, 여수의 도시는 물론 무안, 완도, 광양, 담양, 장성, 화순, 함평, 장흥, 해남 등이 현지에서 저항시위가 다양한 주체와 형태로 일어났다. 이 가운데 도시지역이라 할 수 있는 목포, 순처, 여수 등지에서는 시민참여도와 투쟁의 강도가 광주를 넘어서는 정도로 실천되었다. 전체 인구가 1/3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수 만 명의 군중이 연일 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를 지켜보던 다방 아가씨들이 음료와 삶은 달걀 등을 시위대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 경찰이 길을 열어준 거리를 송홍철 신부의 선도 하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노래 부르며 나아간 저항행진, 전경버스와 경찰서 및 파출소에 대한 방화와 파괴, 축구 골대를 뽑아 학교담장을 부수고 경찰저지선도 돌파한 순천대 학생들의 치열한 공세, 방송국과 순천시청 점거, 전경들을 사로잡아 집단폭행을 가한 순천의 고등학생들의 투쟁의지 등이 그러한 사례에 포함된다. 그 밖에 무안 완도 등 군 단위 지역의 저항도 참여인원은 제한되어 있지만, 투쟁의 강도는 도시항쟁에 못지않았다. 운동의 주체가 대학생이 아닌 농민이라는 사실은 투쟁강도가 대학생을 능가할 만큼 강한 공격력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정치투쟁이나 상징적 가치에 관련된 투쟁이 아니라 생존권투쟁이라는 절박한 현실적 과제에 익숙해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요약된 광주 전남 6월항쟁의 진전과정을 보면, 전국의 어느 도시에서보다도 시민들의 광범한 호응과 참여의 열기가 높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참여주체, 규모, 강도, 지속성, 6월 10일의 국민대회를 비롯하여 그 후 지속적으로 대규모 저항시위가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다. 무엇이 이와 같은 강한 투쟁력을 실현하게 했는가? 첫째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주목할 만하다. 1908년 5월의 경험은 개인의 사고와 행동에 깊이 스며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매년 5월에 거듭해 온 5월투쟁의 효과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상황적 요인이다. 6월항쟁이 광주 전남의 5월행사에 곧이어 진행됨으로써 운동의 동력이 지속적으로 연장되고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국본 결성의 계기가 광주의 망월동 추모행사였다는 사실, 서울에서 분신한 표정두 열사의 효과도 작용했을 것이다. 거센 항쟁의 폭풍이 지난 3일 후인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마침내 민주세력의 직선제 개헌 등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내용을 공표했다. 이는 민주세력이 비민주적 간선제를 강행하려 했던 정부 여당의 2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3 의지를 제압한 저항운동의 승리였다. 흔히 이를 6.29선언 이라고 명명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부의 항복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운동은 민주세력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정부의 반민주적 처사에 대항하는 광범한 국민의 저항을 동원하는데 성공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엇이 이 항쟁을 성공한 항쟁으로 만들었는가? 먼저 운동의 목표가 호헌철페, 즉 개헌이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높은 쟁점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흔히, 추상적인 민주화나 평화 등의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것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구체적 대안제시에도 용이한 측면이 있다. 다음에는 운동주체의 요인도 강조될만하다. 이 항쟁을 주도한 국본의 조직적 성격이 매우 체계적이고 광범하며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역단위 하위조직, 기능단위 하위조직, 문화예술 등의 부문단위 하위조직이 체계적으로 통합되어 유기적 결합을 이루어냈다. 또한 이 조직이 기획하고 추진한 실천행동의 프로그람도 주목할 만하다. 시민들을 동원하는 프로그람이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실천이 용이한 방안들을 적절히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루탄추방의 날, 평화대행진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6월항쟁을 성공한 항쟁으로 평가할 경우에, 그 성공이 갖는 의미는 제한적이라는 점을 강조 한다. 이 항쟁이 준비단계에서부터 운동주체의 확고한 정립과 이 주체가 독자적으로 전략적 대안에 대한 구체적 검토를 통해 체제변혁의 청사진을 수립하지 못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항쟁 주체의 취약성이 정치권의 야당세력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치엘리트 간의 협상에 의해 체제전환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결국 지배연합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체제전 환이었고 경제민주화와 생존권 문제에 대한 변혁은 실종되는 한계를 안게 되었다.(오승용, 115) 4) 노동자 대투쟁과 전교조 건설운동 6월항쟁에서 폭발한 대중의 투쟁 열기는 정부의 직선제 수용으로 급격히 수그러드는듯하였으나 그 거대한 힘은 곧이어 노동계로 전이되는 양상을 보였다. 국민의 요구에 대한 독재정권의 항복선언이었 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재벌비호와 정경유착 등 권력의 부정부패에 대한 개선의지나 노동자 생존권과 노동조합활동에 대한 개선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6월민주항쟁에 참여 한 다수의 대중 가운데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이 주류를 이루는 현실에서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그 저항행동은 노동조합 결성추진 및 파업투쟁으로 나타났다. 성남지역 택시기사 200여 명 가두시 위(6. 29), 부평 금영산업, 서울 동신운수, 대구 한일자동차 노동자의 파업투쟁(7. 1), 인천 세진화인 케미칼, 대구 수정유리공업 노동자의 점거농성, 광주 66개 택시회사 기사 200여 명 가두시위(7. 4) 등 이 이어졌다. 7월 5일에는 대기업인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이 성공했다. 다음 날일에는 더 넓은 토대에서 체계적 조직행동에 돌입했다. 7월 6일 전국 17개 노동단체 대표가 한국교회사회선교 협의회 사무실(종로 5가 YMCA 소재)에 모여 6.29이후 상황변화에 통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조직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01

204 기반으로 민주헌법쟁취 전국노동자공동위원회(약칭 노동공동위) 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노동자의 입장 이란 제목의 성명발표에서 광주학살의 주범들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고,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은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의 열망을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수용할 것 을 제창했다. 또한 새로운 헌법은 노동자 농민과 시민 학생 등 각계각층의 요구가 충분히 반영되어야 하며, 구속 노동자 및 모든 민주투사 석방, 해고자 복직, 노동3권 보장 등 10개 항의 요구사항을 제기 했다. 노동공동위는 이상의 입장에서 당면 활동으로 우선 각 단체의 홍보물을 가능한 한 현 국면에 통 일적으로 대응할 것과 아울러 기자회견이나 공청회 등 다양한 운동방식을 검토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노동공동위는 7월 19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노동기본권 쟁취대회 를 개최하고 가두투쟁을 했다(연보, 481). 노동자 대투쟁의 이와 같은 서막은 7월 하순에 영남권의 마산-창원의 대공장으로 확산되었고, 8월 17일-18일에 3만여 노동자가 참여한 울산 현대그룹 노동조합연합의 가두시위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 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 가족들까지 합세하여 울산 시가지를 휩쓸어 한국의 파업투쟁에서 인상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 후 이 투쟁의 물결은 부산과 거제 등지로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옥포 대 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가두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석규 열사 국민장 은 파업투쟁의 물결이 수도권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던 바, 이후 투쟁은 주로 수도권의 중 소기업과 비제조업 부문으로 번져갔다. 노동자의 이와 같은 거대한 저항은 자본계급의 대표 조직인 전국경제인엽합회가 파업에 대한 비난과 아울러 국가 공권력 개입을 요청하고, 정부가 이에 호응하여 물리적 개입과 이념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투쟁의 파고는 9월부터 점차 가라앉는 경향을 보였다. 물 론 8월말부터 운수, 광산, 사무, 판매, 서비스, 기술직 등의 부문에서 9월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점 차 일상의 수준으로 회귀하였다(연보 481-2). 7, 8월의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사회에 노동운동세력이 획기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역사적 과정 이었다. 1986년에 2,675개 였던 노동조합의 수가 1987년에는 4,103개로 1년 사이에 1,428개 증가 하게 되었고 노동자의 수도 같은 기간에 1,035,890명에서 1,267,457명으로 23여 명이 증가하게 되 었다. 그리고 1987년의 노동쟁의 3,749건 가운데 3341건(%)가 7월-9월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 대 투쟁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연보, 482). 이 투쟁은 노동자에 대한 가부 장적 지배와 기업주의 잔인한 병영적 통제가 무너지는 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상급자의 폭력과 인격모독, 거친 말투, 저임금, 참담한 작업환경을 이 저항의 과정을 통해 각성하게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기업주에게 순종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사장을 포크레인의 삽 에 태워 조종사가 임의로 조종하면서 노래를 시키기도 한 공격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전국적 흐름에 비추어 광주 전남지역 노동자 투쟁의 전개양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1987년 7월말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되었고, 8월 중순에 이르면 일단락되는 추이 를 보여준다. 노동자 대투쟁의 범주로 분류되는 첫 노동쟁의는 7월 4일 광주시내 택시기사들이 임금 20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5 재 협정을 주장하며 전개했던 가두시위였다. 대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7월 20일 경이었다. 금호타이 어 하청업체인 주식회사 트라이센(노동자 70명)과 대하섬유(여성노동자 150여 명)에서 발생했다. 7월 21일에는 광우라디에타(150여 명), 7월 22일에 그랜드호텔(조합원 30여 명), 7월 24 25일 삼양버 스 정비공(52명), 7월 28일 대하전자(130여 명), 7월 29 30일은 최초 폐업신고로 보도된 일성섬유 (180여 명)와 삼면스텐레스(350여 명) 등에서 분규가 계속되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 8월에 들어서는 대기업으로 노동쟁의가 확산되었다. 임금인상, 하기 유급휴가 등을 요구하는 광주 지역 노동쟁의는 호남탄좌(화순) 광부 100여 명의 농성(8월 4일)을 거치면서 중소제조업 중심에서 대 기업 및 운수업계로 노동운동의 중심이 옮겨갔다. 1987년 8월 6 14일 금호타이어(송정)의 노동자 1,200여 명이 어용노조 퇴진 및 30%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여 5%인상 타결이 되었다. 매일유업(송정) 의 경우는 휴가비 지급,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하였는데, 하루 만에 타결되었다. 아세아자동차(광천공 단)는 1,000여 명의 노동자가 임금인상 25% 등 14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하였다. 8월 일에는 대우전자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 기본급 5만원 가산 지급, 상여금 600% 지급 등을 요구하 며 농성했다. 8월 14일 금성알프스에서는 휴업했고, 8월 19일에 타결되었다. 그런데 광주지역 대기 업 노동쟁의는 가두시위보다는 회사 내 시위농성으로 일관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노동운동의 민주적 역량이 극히 미약하여 어용노조를 퇴진시키지 못한 채 잠정적 합의 또는 조업 및 협상병행의 경우가 일반적이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 이들 업체들의 노동쟁의는 1987년 8월 22일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의한 노동자 이석규의 사망사건과 시신의 광주 망월묘역에 안장되는 문제가 거론되면서 재연될 조짐 을 보였다. 즉 대우전자에서는 8월 22 23일 양일간 다시 휴무에 들어갔으며, 아세아 자동차에서는 관련 부품업체의 쟁의로 인한 부품수급 차질을 이유로 8월 22 27일간 휴무에 들어갔다. 그 동안 금 호타이어에서도 동일계 기업인 광주고속에서의 임금인상 여파가 회사 내에 번질 조짐이 보이자 8월 27일(이석규 장례일)에 또 다시 휴업에 들어갔다. 한편 광주시의 운수업 쟁의는 6 29선언 직후인 7 월 1 4일에 거쳐 요구조건을 관철시키지 못한 일부 택시운전자들의 가두시위를 벌었다(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1987: 156~157).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광주 전남 지역 노동자 대투쟁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 째, 가두시위, 방화, 폭행 및 구타, 간부 및 관리직 사원 감금, 각목부대 동원과 같은 파격적인 양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조운동의 영향력이 커가고 있는 대기업(특히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노동 자들에 대한 회사 측의 무성의와 회유와 이간책 등으로,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격렬한 노동쟁의 양 상이 나타나는 것일 일반적이다. 그러나 광주지역의 대기업에서는 어용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큰 반 면, 일반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하고 대변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싹은 유아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며 노사 간 마찰은 격렬한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광주지역 대기업의 노동쟁의 가두시위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03

206 다는 회사 내의 시위농성으로 일관되었다. 민주노동운동의 역량이 매우 미약하여 어용노조를 퇴진시 키지 못하고 잠정 합의를 하거나 조업 및 협상을 병행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 구원, 1987: 156). 둘째, 중소기업에서의 쟁의는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많다. 임금인상 요구가 주요 이슈 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근로시간 준수(대하섬유), 월차 생리휴가 제도화(광우라디에타), 근로 기준법 준수(트라이센), 국공휴일 휴무(삼면스텐레스), 인권존중 및 예비군 훈련일 유급제도화(삼양버 스), 정기휴가의 유급휴가 처리(호남탄좌) 등의 기본권인 근로기준법의 준수가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 다. 임금 차별화, 노조활성화 등을 통한 합법적인 노동통제보다는 폭력행사, 가부장적 노동통제, 근로 기준법의 준수사항의 불이행 등을 통한 노동통제가 중소기업에서 일반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경찰력의 투입을 되도록 자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정책에 의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의 지역적 소외(지역감정) 등의 문제 때문에 국가권력의 개입에 대해서는 민감한 대응을 하는 것이 광 주지역 대중들의 특성이다. 이에 반해 기업 차원의 노동통제에 대해서는 지역 내 노동운동의 취약성, 노동자 대중의식의 미성숙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타 지역(특히 경인 지역)에 비해서 노동대중들의 결집력이 약한 상태이다. 넷째, 단위 기업의 문제에 대한 지역 내 연대투쟁의 방안이 낮은 차원에서나마 모색되고 있다. 노동 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에 대해 폐업신고로 대응한 일성섬유 사장이 화니백화점 사장의 큰사위라는 사 실, 대창버스에서 삼면스텐레스 및 무등양말(1986년 노동쟁의), 창평중고등학교를 소유 운영하고 있 다는 점, 삼양버스와 화니백화점이 동일인 소유라는 점 등을 선전함으로써 단위사업장 노동자들의 싸 움에 대응해서 타 사업장에서의 지역 내 연대투쟁(농성, 불매운동 등)을 모색하는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7: ). 그러나 노동자투쟁의 이와 같은 취약성을 확대해석하는데 신중해야 한다. 광주 전남에서 노동운동 의 사회적 기반인 노동기지가 그만큼 취약한데서 기인하는 면이 크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앞에서 본 광주항쟁이나 5월운동 및 6월민주항쟁에 참여한 광주 전남 지역 시민들의 다수가 노동자 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하루 13시간의 과중한 노동시간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가장 뜨거 운 싸움의 현장을 지켜왔다는 것은 부인할 없다. 1980년대 한국사회운동에서 대부분의 연대투쟁, 전 선투쟁의 선봉에서 가장 강렬한 투쟁력을 실천해온 주역도 이들이고, 가장 많은 피와 땀과 생명을 바 쳐온 주역들이 바로 이들이다. 다음에는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건설운동으로 꽃을 피웠던 1980년대 교육운동의 진전 양상을 살펴본다. 전교조는 1989년 5월 28일 결성되었다. 같은 해 5월 14 일에 105,00여 명의 발기인으로 발기인대회를 열고 준비작업에 착수한 후 5월 28일 전교조결성준비 위원회 주최로 출범했다. 원래 한양대학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급히 장소를 변경하여 연세대학에서 200여 명의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깃밟을 올렸다(위 20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7 원장 윤영규: 전남체육고등학교). 그 후 전교조는 정권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많은 피해를 이겨내며 합법화 투쟁을 꾸준히 전개한 결과 1999년 7월에 교원노조 활동이 전면 합법화되었다(연보, 540). 돌 이켜 보면, 이 운동은 1960년 4월혁명 직후에 추진되다가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좌절된 지 30년 동 안 진전된 교육운동의 성과로 평가된다. 전교조 건설운동은 매우 험난했으나 체계적인 진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운동은 1981년 2월에 출범한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를 뿌리로 하여 출발했다. 이 협의회는 뒤이어 각 지역 조직을 건 설해나갔고, 그에 따라 대구에 이어( ), 광주YMCA중등교육자협의회(약칭 광주Y교협)이 결 성되었다( ). 그 후 Y교협은 목포(1984), 해남(1985), 순천(1985) 등에서 조직 확장을 지속했 고, 이에 더하여 다수의 비공개 소모임을 양성해 광주 전남 교육운동은 전국에서 단연 손꼽힐 정도로 발전해왔다. Y교협의 지향은 그 창립선언문에서 명기하고 있듯이 교육의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자각 하고 교사들의 확고한 책임의식과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1986년 이후 교육민주화 를 연차 주제로 설정하고 이에 관한 연구와 실천방안을 모색하기 에 이르렀다.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부패한 학교는 학생의 체육복 구입이나 영화 관람에도 이권이 개 입하는가 하면, 가난한 학생에 대한 비인간적 차별, 각종 행사에 학생동원, 군부대입소, 땅굴견학 등 교사와 학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라 할 것이다.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 는 사회분위기에 맞춰 서울, 광주, 춘천, 부산Y교협은 1986년 5월 10일 교육민주화 선언 대회를 결행했다. 당국은 불참을 종용했고, 관련 교사들은 학교에 연금되거나 행사장 입구에서 끌려가기도 했다. 광주의 경우, 행사장 입구에는 도교육위원회 장학사 부대, 교장, 교감 등이 진을 치고 입장을 저 지했고, 신사복 들도 들락거렸다. 오후 5시 반경에 참석자들은 선구자 를 제창하고 이오덕 선생의 기념강연에 뒤이어 낭독된 선언문에 대하여 억눌려 숨죽이던 250여 교사들의 함성이 솟구쳤다. 상 록수 와 아침이슬 이 나직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명이 이어졌고, 교육민주화 만세 삼창이 금남 로에 울려 퍼졌다. 다음은 교사들의 마음을 울린 선언문의 일부이다.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다운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을 뜯 었다. 영원한 민족사 앞에 그 책임의 일단을 회피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우리 교사들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올곧은 시선은 도도 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있는 우리를 더 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맹랑한 꼭 두각시의 허무한 몸짓을 그만 그쳐야 한다. 우리 앞의 저 대상화된 학생들이야 말로 이 민족의 미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성세대의 탐욕과 허위, 좌절과 패배주의가 저들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특정세력의 허욕과 독선에 바탕한 비민주적 사회와 이에 종속되어 학생들에게 비판적 안목과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는 비민주적 교육에서 비롯됨을 직시한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05

208 교육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사들의 역할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우리는 교 육의 주체로서 국민의 교육적 요구를 올바르게 실천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교육민주화는 민주사 회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바탕이라는 자각에서 새로운 교육건설의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모든 장애와 고난을 이기며 민주교육을 실천해 나갈 것을 오늘 엄숙히 선언한다. 지치고 황폐화된 교사들의 영혼에 강한 충격을 준 이 선언이 발표된 후 각 지역에서 교육민주화 선 언은 이어졌다. 강릉(5. 29), 충청(6. 14), 전북(7. 12)에서 연이어 결행되었고, 이 흐름은 냉담했던 교 사들의 투쟁의지를 일깨우고 기존 활동가들의 의지를 강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광주 전남지 역 Y교협 회원들에 대한 탄압은 인신공격과 부모를 이용한 압력과 위협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야 만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이들은 5월 10일에 이어 6월 21일과 6월 28일에 교육민주 화 결의대회 를 결행하는 강한 의지를 실천했고 이 결의문에 서명한 교사는 62개 중고교에 197명을 기록했다. 지도부에 가혹한 징계조치가 내려지자, 지역Y교협회원들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함으로 써 투쟁의지를 실천했다. 이 선언을 주도했던 윤영규 교사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교육민주화 선언의 당위성과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호소했다. 그 결과 이에 대한 연대와 지원운동이 5월단체, 종교단체, 인권단체, 문화운동단체 등 20여개 재야단체에 의해 실현됨으로써 광주 전남 지역사회의 전체적인 운동으로 확대되는 효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또한 교육민주화 선언은 Y교협의 뒤를 이어 민주교육실천협의회(민교협) 이 조직되고 발전하는 전 기가 되었다. 심화되는 교육현장의 모순과 전문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결과였다. 1986년 5월 15일 민 교협이 흥사단 강당에서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중고교 일선 교사뿐만아니라 대학교수와 해직교사 등 이 결합한 단체로 교육민주화 운동의 기반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민교협은 서울 과 충청, 호남에 결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호남민교협이 투쟁력과 문제해결능력에서 가장 두드러졌 다. 호남민교협은 6월 25일에 4.13호선철회서명운동을 주도했고 7월 11일에는 Y교협과 공동으로 호남교사대토론회 를 개최했으며 그 후에도 연이어 토론회를 주도함으로써 교육운동의 지평을 사회 민주화 투쟁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이 교사들은 6월항쟁 당시에 국본에도 적극 참여했고,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도 교육운동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 성과는 민주교육추 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결성으로 현실화 되었다. 전교협은 시도교협을 먼저 결성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전국조직을 건설하기로 함에 따라 지역교협 조직화 작업에 착수했고 전남교협이 그 선봉에 섰다. 전남교협은 1987년 9월 5일에 광주YMCA무진 관에서 천여 명의 교사들이 집결하여 창립했다(회장 윤광장, 담양 한계중). 중점사업은 전국적 연대 강화와 각 학교 및 지역조직의 건설, 교련탈퇴와 교육법 서명운동 전개, 교육자치제 시안마련 등으로 설정했다. 그 후 각 지역조직 창립이 급속히 확장되어 1988년 11월에는 전국에 121개 시군구에 교사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전교협은 1988년 12월에 민주교육법 쟁취대회 를 전국적으로 열었고, 학교 2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9 현장에서는 교육악법 개폐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이 교육법 개정투쟁의 열기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 을 목표로 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건설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광주 전 남의 교육운동은 전국이 교육운동을 선도해왔으며, 이를 주도해온 윤영규 교사의 지도력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험난한 과정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결성된 전교조는 그 이후에 더 광폭한 탄압을 헤쳐 나 가야만 했다. 결성대회를 마친 지도부 24명은 서울 민주당 중앙당사에 진입하여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면서 기자회견을 통해 지부 지회 등 하위조직 건설 투쟁의지를 결연히 천명하고, 연행교사 석 방, 교직원의 노동3권 보장, 정원식 문교장관 퇴진 등을 요구했다. 지도부의 단식농성에 호응하여 전 국 15개 지부, 160개 지회 준비위가 일제히 동조 단식농성을 결행했다. 전교조는 6월 1일에 조합설립 신고서를 노동부에 제출했으나 노동부는 이를 실정법 위반이라며 6월 3일 우편으로 반려했다. 그 후 공안정국의 불온한 기류 속에서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진행되었다. 정부는 이를 교육문제를 넘어 안보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안기부가 직접 개입했고,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감사원, 내무부, 법무 부, 문공부 등 전 행정기관을 동원하여 전교조 와해공작과 탄압을 자행했다. 문교부는 갖은 수단으로 전교조 탈퇴공작을 전개했고, 그 결과 12,610명 가운데 11,145명이 탈퇴각서를 제출하게 만들었고, 이를 거부한 교사 1,465명에게 파면 또는 해임의 중형을 내렸다. 전교조는 정부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에 맞서기 위해 1989년 8월 5일부터 명동성당에서 단식투쟁을 결행하고 아울러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전국의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 언론노련 민교협 전민련 전농련 천사협 민변 등 각계의 재야운동세력과 대중조직들이 결합하여 전교조공동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예를 들면, 위의 이 농성투쟁은 전교 조 조합원뿐만 아니라 재야 민주인사들도 참여하여 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투쟁이었다. 광주 전남에서의 전교조를 위한 대정부 투쟁은 교육운동의 선봉지역답게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뜨겁 고 강력하게 진전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전남여성회, 흥사단, 민교협 등 17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교직원노조탄압 광주 전남대책위원회 를 결성하여 전교조 결성 이틀 전인 1989년 5월 26 일부터 이미 시작된 교사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광주 전남대책위원회 는 5 월 26일 성명서를 통해 우리의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뜨거운 함성에서 나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 라, 노동의 창조성과 소중함을, 진정한 민주시민의식을, 민족자주와 통일의 뜨거운 염원을 배우고 익 힐 것이다 라고 밝히고, 문교부장관과 광주 전남 교육감은 탄압에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날 것과 모 든 학부모 학생 교사들은 힘을 모아 교직원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데 동참하자는 주장을 발표했다. 또한 학부모들도 학교별로 전교조 교사 징계와 탄압 저지활동을 벌였다. 광주지역에서는 전교조 교사 에 대한 징계가 철회될 때까지 납부금 거부를 결의하기도 했다. 광주 전남지역 참교육 학부모회는 7 월 22일 결성대회를 갖고 전교조 지지를 결의하였다. 권력의 각개격파에 의한 탈퇴공작을 막아내기 위해 이 지역 전교조 교사들은 집단으로 지리산 계곡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07

210 에 들어가 5박 6일 합숙하면서 조직사수를 위해 비장하고도 치열한 싸움을 계속했다. 400여 교사들 이 파면해임 당한 광주에서는 지부 소속 교사 51명이 가톨릭센터 6층에서 8월 12일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광주 서석고를 비롯한 시내 중고교학생들은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혈서를 써서 교실 벽에 걸고 밤샘공부로 철야 농성투쟁을 벌렸다. 광주지역 고등학생 대표자협의회(광고협) 309) 산하 18 개 고고생 4,000여명은 9월 5일 전남대 5 18광장에서 참교육 실현 및 전교조 지지와 학생탄압분쇄 결의대회 를 갖고 전교조 사수를 다짐했다. 뒤 이어 광고협은 8월 29일 시내 10여 개 고등학교 학생 15,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열고 해직교사 출근투쟁 지원, 전교조 탈퇴교사 수업거부 등을 결의하는 한편, 구교대(어용교사)퇴진투쟁 전개, 학생 징계시 각 학교별 연대투쟁 등을 포함하는 유 인물 3만장을 배포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학생들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투쟁은 전국 수준에서 광주 전남 교육운동의 주도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5) 농민-여성운동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전국수준의 검토에서 전남지역의 노동자 대투쟁이 다른 지역에 비해 취약했 다는 사실은 앞에서 지적된 바 있다. 공업화의 진전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고, 그에 따라 제조업종 사자의 비율도 저조한 편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운동주체의 성격에서 건강 한 노동조합조직의 발전 정도가 낮고, 운동형태에서 적극적 공격성도 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부문과는 달리 농민운동 부문에서 전남지역은 전국을 선도하는 위상을 갖고 있음을 본 다. 이 또한 지역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여전히 가장 농업부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농촌사회적 성 격이 가장 두드러진 현실을 고려한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1970년대 전국 수준의 농민운 동에 큰 기록을 남겼던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 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70년대의 이러한 전통은 1980년에서 더욱 진전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 몇 가지 사례에서 이를 확인한다. 1980년대 전남지역 농민운동의 전개양상에서 우선 주목할 부분은 조직기반의 강화추세이다. 함 평고구마투쟁에서 주도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던 가톨릭농민회는 이 운동의 성과에 탄력을 얻어 가속 적 발전을 이루었다. 투쟁 당시에 극소수에 불과했던 전남지역 가농분회가 1982년에는 32개 분회에 199명의 회원, 1984년에는 69개 분회에 652명의 회원으로 증강되었다. 이 가운데 세 곳에 여성분회 가 만들어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가농의 조직체계가 가농본부-도연합회-군협의회-마을 분회 의 틀로 정형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78년에 창립된 전남기독교농민회(회장: 배종열; 총무: 정광훈)는 교육을 통해 마 309) 광고협은 광주지역 고등학교 학생조직이다. 1989년 7월 15일 이 지역 고등학교 대표자들이 처음 회합을 가진 후 7월 26일 전남대학교 학생회관에서 광주지역 24개 고등학교 학생대표 30여 명이 참석한 회의를 통해 결성되었다. (초대 의장 강위원, 서석고 3학년). 이 과정에서 7월 20일에는 광주북부지역 고등학생 1만여 명이 전남대학에서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원노조지지 및 징계철회와 민주교육쟁취를 위한 고교생 결의대회 를 갖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거듭해서 연합집회와 개별 학교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문교부 집계에 따르면, 1989년 5월 28일 전교조 결성 이후 7월 말까지 전국 130개 중고교에서 12만 명이 208회의 시위 농성을 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0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1 을과 군 단위 조직활동을 전개했다. 주요 교육내용은 농민문제의 본질, 마을 활동의 방법과 사례 등을 포함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회학습회운영지침서 를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다. 교육활동과 병행하여 조직사업도 전개했는데, 무안지역협의회(1978), 해남지역협의회(1979)을 비롯해 16개 지회를 조직하 는 성과를 이루었다. 전남기농의 조직체계도 가농과 유사하게, 전남기독교농민회-군단위 지역협의 회-지회-회원 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전남기농은 전국기농 조직결성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 여했다. 그 결과 전국기독교농민회가 1982년 3월 18일 영등포 산업선교회관에서 창립되었다. 전남기 농회장인 배종열이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사무국장은 나상기가 맡았다. 이와 같은 조직적 발전과 병행하여 전남지역 농민들은 매우 적극적인 투쟁을 일상화했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그들의 삶 자체가 공업화에 집중하고 농업을 차별적으로 소외시키는 정부 하에서 모순과 착 취의 응축물이기 때문이었다. 농민의 상대적 빈곤과 박탈, 열악한 생활환경과 문화 및 복지시설, 농민 활동에 대한 정부와 관계기관의 탄압, 농가부채, 국내 농업을 파멸시키는 외국산 농산물 수입의 확대, 등이 농민들이 싸워내야 할 과제들 이라고 할 만큼 모순 속의 삶이었다. 전남 농민들의 농산물 생산비 보장운동(1982), 구례농민협의회가 주도한 수세현물납부투쟁(1982), 가농 전남연합회의 외국농축산 물수입반대운동(9184), 소값피해보상운동(1985), 등은 그 사례의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1980년 초 부터 시작되었던 농협민주화운동은 단위조합의 민주적 운영, 조합원의 의사반영, 조합장 임명제 철폐 및 선거제 실현 등 다양한 쟁점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더 나아가 이 운동은 강제출자거부, 대출문제 시정, 영농자재 가격조정, 부당이자 부과 시정 등의 과제로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초에는 전 국단위에서 농협조합장 직선제 백만인 서명운동 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가농의 주도하에 각 지역 별로 추진결의대회와 아울러 서명작업에 돌입했다. 각 지역협의회와 분회에서는 서명운동에 대한 대 책회의, 학습, 홍보, 현장교육 등을 실시하고 서명을 받아냄으로써 그 파급효과가 매우 컸다. 행정기 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가농 회원의 조직적 대응은 큰 힘을 발휘하였다(윤수종, 50). 다음으로 1984년 9월에 있었던 함평-무안농민대회 는 농민운동의 형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남 함평 무안 지역 농민들은 1984년 9월 2일 오후 2시에 함평 장터에서 이 지역 농민들의 심각한 문제인 양파에 부과된 과중한 세금 문제, 생고구마 수매 문제, 외국소 도입으로 인한 소사육 농가의 피해 문제, 등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가난과 소외로 몰아가는 현안들에 대하여 농민들의 입 장을 밝히고, 농민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 회, 함평 무안 지역 현장문제 대책위원회 등의 공동주최하였고 700여 농민이 참가했다. 정부는 공 무원, 농지개량조합과 농협 임직원, 전투경찰, 사복 경찰 등을 동원하여 농민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자주적 집회를 폭력적으로 방해했다. 당국은 전투경찰 500여 명을 동원하여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모 든 길목을 차단하고 차량을 검문검색하며 모여드는 농민들을 강제로 귀가시켰다. 농민들이 "우리들의 자주적인 모임을 방해하지 말라"고 항의하자, 전투경찰들이 폭행하는 가운데 60여 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의 저지를 뚫고 장터에 온 농민들 중 500여 명을 검문검색에서 붙잡아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서 귀가시켰다. 농민 200여 명은 오후 3시에 함평천주교회에 다시 모였다. 교회에 모인 농민들은 부당한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09

212 탄압에 분개하면서 폭행 경찰을 규탄하고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후 4시 경 다시 대열을 정비했다. 농민들은 '양파에 부과된 을류농지세 납부거부', '농가부채 탕감', '외국농축 산물수입 반대', '추곡수매가 보장', '전두환 방일 반대' 등의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함평천주교회를 출발하여 평화적 가두시위를 하며 150여 미터 앞까지 나아갔다. 이때 "차로 밀어 버려!", "무조건 두들 겨 패!" 하는 명령과 함께 400여 명의 정 사복 경찰들이 달려들어 농민들을 곤봉과 군화발로 무차별 적으로 구타했다. 농민들은 온몸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경찰은 방해하지 말라", "경찰은 누구의 경찰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300미터까지 나아갔다. 경찰 은 차량으로 길을 막고 계속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수많은 농민들이 상처를 입었다. 경찰의 폭 력과 연행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가까이 가두시위를 벌인 농민들은 거의 모두 잡혀서 40여 명은 연행 되고 나머지는 버스터미널에서 강제로 귀가 조치되었다. 오후 6시 30분경 연행된 40여 명 중 7명은 불법 구금되고 나머지는 훈방조치로 풀려났다. 함평 무안 농민대회 는 요구 내용과 투쟁 방법에서 농민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것 으로 평가할 만하다. 소극적인 옥내 집회 방식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가두투쟁을 전개 한 사실은 중요한 진전이다. 정보 유출로 지도부가 사전 검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여 명의 농민들 이 지역 농민들의 경제적 요구와 전 농민의 일반적 요구, 그리고 정치적 요구를 주장했다. 그 결과 지 역 농민들의 경제적 요구를 거의 관철시켰고 광범위한 농민대중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등 대중적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함평무안농민대회는 농민대회 라는 형식을 운동방식으로 새롭게 제시 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윤수종, 52). 1986년 3월 10일 전남 가농연합, 기농연합 및 함평농우회는 전남지역 농민생존권확보 및 민주헌 법쟁취 투쟁위원회(약칭: 농민투위) 를 결성하여 농업부문운동과 사회일반의 시국문제를 동시에 안 아내는 투쟁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기반으로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농민서명운동을 주창했다. 그 후 농민투위는 각 군단위로 조직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무안농민투위의 마늘생산비 쟁취 및 살인농정 철폐 실천대회 (7.4), 해남농민투위의 김피해보상 시위(9. 12), 함평가농의 미국농산물 수입저지 실 천대회 (9.1) 등은 그 일부 사례이다. 여기에서 제기된 생산비 보장문제(추곡수매투쟁 등)나 농산물 수입저지 등의 문제는 여러 품종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단기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기 때 문에 농민들은 철따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시기 농민의 현실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시기에도 국본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여(농민위원회) 남도의 황 토바람 을 불러일으켰으며, 1988년에는 면단위 농민회 결성이 활성화되어 농민운동의 역량이 크게 신장되었다. 80년대 농민운동을 종합하면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하나는 탈종교적 자주농민조직이 전국적 수준에서 출범한 것이다. 1987년 8월 26일 전남 광주에서 군 단위 조직대표와 각 지역에서 농 민조직을 준비하는 활동가 28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농민협회가 창립되었다(회장: 장영근 강진농문 2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3 회장 310) ). 물론 그 동안 가농과 기농의 인상적인 발전이 갖는 운동사적 의미는 당연히 정당하게 평가 되어야 하겠지만, 이와 아울러 농민운동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탈종교적 운동조직의 형성도 중요한 성 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전남지역 농민운동의 전국적 위상을 강조하고자 한다. 80년대 한국의 농민운동에서 전남 농민운동의 선도성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이미 보았듯이, 함평무안농대회에서 보여준 치열한 운 동역량, 전남지역 농민생존권확보 및 민주헌법쟁취 투쟁위원회(약칭: 농민투위) 결성과 그에 기반 한 각 군별 자주농민투쟁들 및 정치투쟁, 그리고 조직활동에 있어서 전국기농 및 전국농민협회 등 전 국 수준의 농민운동조직 건설을 전남지역 활동가들이 주도하여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사실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동학혁명이후 일제강점기에 피흘리며 전개했던 소작쟁의투쟁, 그리고 1970 년대 이후 전국의 농민운동을 선도해온 역사적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동학농민-일제소작투 쟁-의 역사; 조직력, 투쟁력, 세 번째는 여성의 농민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부문에서 도 이 지역에서 발전된 산업이 섬유 방직 음료 등의 업종이었고, 그에 따라 여성노동자가 지배적인 현 실에서 여성 활동가와 여성노동운동이 주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농민운 동의 경우, 농촌여성의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에 여성노동운동이 적극적으로 진전되었다 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80년대 중반부터 가농에 여성분회가 조직되기 시작했고(함평: 동백, 장미; 나주: 알뜰 등), 이를 바탕으로 가농 전남연합회에서는 여성농민단합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1984, 1987). 또한 이들은 현장투쟁에도 적극적이었다. 무안 여성농민활동가들이 벌린 마늘생산비보장투 쟁, 수입개방저지투쟁, 무안지역의보투쟁(1988) 등이 그 사례에 속한다. 여성농민들의 중첩된 착취와 억압구조를 고려할 때 이들의 투쟁은 더욱 값진 운동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여성농민운동에 이어 다음에는 80년대 여성운동 전반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본다. 여성운동이라고 할 경우에 두 가지 측면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그 하나는 운동주체로서의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운 동쟁점으로서의 여성과 관련된다. 물론 쟁점으로서의 여성이라고 할 경우에 그 한계설정이 명료하지 않은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출산이나 육아 등과 관련된 쟁점은 여성성에만 관련되는 배타 적 쟁점이라 할 수 있지만, 여성들이 주도해 온 고추생산비 보장운동이나 왜래식품거부운동 등과 쟁 점은 여성에만 국한되는 쟁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여성성과 관련된 쟁점과 아울 러 운동주체로서의 여성도 포함하여 서술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80년대 전남지역 여성운동의 흐름은 당연히 광주항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에서 여성의 참여규모와 형태는 남성에 비해 소규모였고 보조적인 역할에 머 무른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의 분화라는 것 자체가 거시적 사회구조의 효과인 것이 고, 남성과 여성의 상호의존성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범주를 경합적이거나 대칭적으로 보는 것은 적절 310) 강진농문회란 명칭은 다소 생소하지만, 그 당시 강진에서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약사 등 다양한 자영업자를 포함하는 농민운동 지원단체로 형성되었다는 증언이 있다(나상기 증언, ).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11

214 하지 않다. 남성들이 주도하는 싸움 자체가 배후에서 드러나지 않은 차원에서 여성들의 힘을 바탕으 로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쟁의 진전과정에서 여성성이 더 절실히 요구되고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영역과 역할에 스스로 헌신함으로써 운동의 성과를 극대화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광주항쟁 당시 시위군중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공동체 정신을 실천했던 이웃의 아주머니들, 계엄군의 살벌한 폭력 앞에 맞서서 확성기로 시민참여를 호소하던 여성활동가들, 그리고 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 하여 아들 딸과 남편이 희생당하거나 잡혀간 여성들의 진상규명투쟁, 구속자 석방투쟁, 피해보상투쟁 등은 여성운동의 폭과 깊이를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항쟁 이후 이들이 5월운동의 과정에서 실 천해 온 싸움의 강도와 치열성은 남성의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다. 또한 1987년 6월민주항쟁 당시에 지역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하며 전개했던 항쟁의 흔적은 노동, 농민, 대학생 등의 제 영역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항쟁의 추진체였던 국본조직에서 원로의 역할로 참여한 조아라 고문, 지도 부의 일원으로 선임된 안성례 공동의장 등은 그 당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여성운동 지도자였다. 이와 아울러 80년대 전남지역 여성운동의 전개에서 확인되는 중요한 사실은 남성 주도의 전체 사회 운동 일반으로부터 여성운동이 자율성을 획득하고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는 독자적 운동조직의 형성과 발전 추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전반의 가농 여성회 및 기농 여성위원회를 비롯하여 각 군단위 여성농민조직과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광주지부(1986), 광주 전남여교사회(1987), 광주 전남여성회(1988) 등이 조직들은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실천할 수 있 는 조직적 기반이 된다. 이와 같이 진전된 여성운동 조직은 1990년대에 접어 들어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오미란, 113). 특히 광주 전남여성회는 창립취지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권익실현 및 투쟁을 지원하고 여성억압의 현실을 여성들의 단결된 힘으로 극복하고 자주적 민주사회의 실현 을 추구한다고 밝혀 진보적인 민 중여성운동으로서 운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80년 5월 항쟁 전에 조직된 송백회가 있었 지만 송백회는 민주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면서도 여성운동의 이념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또,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도 여성단체들은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관주도로 조직 된 것들로 정부시책에 동원되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활동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여유 있는 중산층 여성들의 사회봉사활동의 성격을 갖는 것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광주 전남여성회>는 자주적 민주 사회 실현 이라는 변혁지향성을 분명히 가질 뿐만 아니라, 일하는 여성의 권익실현 과 여성억압 의 극복 이라는 여성운동의 정체성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는 여성운동의 정체성과 독자성 을 실천을 통해 입증했다. 그 사례로 양동시장 노점상 철거싸움 지원활동이 두드러진다. 정부가 88서 울 올림픽을 앞두고 거리정화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으로 노점상을 단속하자 당시 광주의 600여명의 노점상 가운데 90%를 점하고 있는 여성노점상들은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소라 회장을 비롯하 여 회원들은 당시 광주의 600여명의 노점상 가운데 90%를 점하고 있는 여성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 2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5 해 단속현장에서 주야로 좌판을 지키며 노점상들과 함께 싸웠다 311). 그 결과 양동시장, 대인시장 노점 상 조직화에 주력하여 노점상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전국노점상 연합회 양동지부 로 발전하게 되었 다. 이렇게 하여 광주지역 재래시장의 노점상 여성들이 삶의 터전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광주 전남여성회>는 출범 초기부터 전국적으로도 다른 여성운동단체들과 연대사업을 펼쳐나갔 다. <광주 전남여성회>(초대 회장: 이소라)는 창립 첫해인 1988년 5월 15일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공동으로 5월 여성대회 및 5 18묘역참배 행사를 개최하였다. 광주항쟁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평가 하고 여성운동의 진로를 모색하는 취지로 열린 5월 여성대회 는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고 5월 정신 을 전국화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여성들을 초청하여 전국적인 행사로 치러졌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광주항쟁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의 정신을 기리는 전국적인 행사로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여성회>는 5월여성의 날 을 제정하고 5월여성상 을 만들어 수상하기도 하였다. 1990년에는 광주항쟁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새롭게 정리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이춘희(광주 전남여성회 사무 국장), 이경순(전남대 영문과 교수), 이수애(목포대 교수), 서선희(광주대 교수), 안진(전남대 강사) 등 으로 <5월여성연구회>를 결성하여 광주민중항쟁과 여성(민중사 간행) 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 은 젠더 관점에서 광주항쟁을 학술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서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6) 문화예술운동 다음에는 1980년대에 이 지역에서 진전된 문화예술의 양상을 검토한다. 문화예술은 시와 소설, 음 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 등 다양한 분야가 발전되어 왔고, 이 밖에도 각종 영상물이나 사진 그리고 만 담이나 체육까지도 포함하는 실로 광범한 영역이다. 그리고 각 영역에 따라 오랜 역사와 방대한 생산 물이 축적되어 인간 삶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 왔다. 모든 영역이 인간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면, 사회운동과의 관련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사회운동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양한 문화예술의 영역들이 사회운동과 갖는 관련성이 동일하지는 않다. 특히 광주 전남의 현대 사회운동을 정리하는 이 연구에 관련하여 볼 때, 그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화예술운동은 사회운동과 관련된 문화예술적 실천이다. 즉, 문화예술의 생산과 유통 및 소비가 집합적으로 이루어지거나 그 사회적 효 과가 운동적 성격을 가지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여기에서는 이 지역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연극(마당극)분야를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노래와 그림의 사회운동을 정리하려 한다. 광주 전남지역의 마당극과의 첫 인연은 해남 YMCA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해남농어민회의 가을농 민잔치(1977년 12월)이다. 이 지역 문화패인 민족작가 황석영, 해남 토박이 농민운동가 윤기현, 혁 명시인 김남주, 꽹과리 김선출 등이 주도하여 서울의 놀이패 한두레 가 초청되었고 봉산탈춤의 먹중 춤, <진오귀굿>의 도깨비장면 이 공연되었다. 그 후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은 민속문화연구회(탈춤 311) 이 싸움은 이후 전국노점상연합의 지부로 등록할 때까지 지속됨.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13

216 반: 회장 김선출)를 창립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전남대 연극반과의 상호교류활동뿐만 아 니라 들불야학의 강학 등 학생운동권과 연대도 강화해 나갔다. 민속문화연구회가 전남대 연극반과 함 께 만든 마당극 <함평고구마>는 이 광주 전남지역 마당극의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농민운동에서 이미 다룬 함평고구마 사건 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열린 전국 쌀 생산자 대 회 및 추수감사제 에서 공연( )되었다. <함평고구마> 공연이 갖는 의의는 전라도 지 역 최초의 마당극이 현장성을 강하게 담보함으로써 마당굿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과, 이후 극회 광대 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광주 전남 마당굿운동이 본격화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 312) 가 있다. 극회 광대 는 광주 전남지역의 최초 마당극운동 단체이자 사회운동을 표방한 문화운동단체이다. 민주화의 봄이 다가오는 1980년 1월에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와 전남대극회 가 중심이 되었고, 여기에 조선대 탈춤반 과 전남대 국악반 의 일부 화원들이 참여하여 극회 광대 를 결성 313) 하였다. 창립 작품 <돼지풀이>는 <함평 고구마>와 마찬가지로 농촌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으며 정부가 진 행한 농업축산 정책의 모순에 의해 발생한 돼지값 폭락 때문에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은 사회문제를 극화하고 있다. 1980년 3월 광주 YWCA 무진관에서 공연하였다. 매년 되풀이되는 가격파동을 두고 볼 때 이 마당극은 지금의 경제구조가 지속되는 한 하나의 전형적인 사회문제의 표현통로 314) 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호랑이놀이1, 2> 등 공연활동을 계속했다. 광주의 5월 문화투쟁은 극회 광대, 들불야학, YWCA를 중심으로 활동한 송백회 여성들의 활 동을 꼽는다. 315) 시민군 홍보부장이었던 박효선에 따르면 316), 극회 광대 는 당시 상황에서 자연스럽 게 항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투사회보의 제작과 배포, 도청 앞 분수대 집회 주도, 그리고 마지막 날의 투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윤상원 등이 주도하였던 들불야학의 민주시민회보 는 당국과 언론의 기만 보도에 분노하며 광주항쟁의 진상과 진실을 알리기 위한 민중언론의 전범이 되었는데, 제4호(5월 21 일)부터 명칭을 <투사회보>로 변경하였다. 특히 박효선이 제작한 연극 모란꽃 은 국내는 물론 미주 지역에서도 순회 공연에 성공하여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선양하는 효과를 실현했다. 광대의 뒤를 이어 창단된 극단 신명 (대표 윤만식)은 <단독강화(1983)>와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85)> 등 을 무대극으로 제작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 광주에는 전남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 의 학내공 연 317) 만이 마당극을 유지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1980년대 초기부터 중반까지는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타고 문화운동의 분위기가 성숙되던 시기였 다. 각 지역에서는 상업적이고 획일적인 대중문화와 관제문화에 맞서 건강한 민족문화와 민속문화를 312) 박영정, 광주 전남지역의 마당굿 운동에 대하여, 전라도마당굿 대본집,(광주)들불, ) 윤만식, 박효선, 김태종, 김선출, 김윤기, 김정희, 전용호, 최인선, 김영중, 김영희. 나병진 등이 주도했다. 314) 채희완 임진택 편, <한국의 민중극>, 창작과비평사, ) 박효선, 광주를 통해본 지역문화운동, 오월광대,극단 토박이, 2003, 32쪽 316) 전대 신문 ) 5월극 <마당쇠 놀이>(1981), 전두환의 방일반대를 다룬 <난무하는 사꾸라>(1984) 등 2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7 뿌리 내리자는 문화운동론과 함께 문화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는 민중문화운동협 의회 (1984)가 창립되었고, 광주지역은 장르별로 각개 분산된 활동을 해 왔던 문학, 미술, 마당극, 노 래운동 단체와 현장의 문화 활동단체들이 민중문화운동연구회 ( )를 조직하였다. 민중문화 운동연구회 창립 318) 은 광주문화운동의 역량을 조직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극단 신명 은 회원단체로 가입하였다. 민중문화운동연구회 가 주최했던 <제1회 광주문화큰잔치>(1985.4) 319) 는 미술패의 걸 개그림, 문학패의 시낭송과 노래패의 노래공연, 그리고 극단 신명 은 사회고발 마당극 <신가리 성주 풀이>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극단에서 놀이패로 개칭하고 공연한 정기공연 <당제>(1985)는 <안담살 이 이야기> 이후의 마당극 공백을 깨고 정상적인 창작활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 회 민족극한마당>(1988)에 참가한 <일어서는 사람들>(1988)은 <함평고구마>(1978)공연 이후 10여 년간 축적된 문화 예술적 역량이 결집된 마당극으로, 한층 신명 의 위상을 올려놓는 계기가 된다. 광주 5월을 전면적으로 다루었으며, 60여 회의 순회공연과 약 3만여 명의 관객이 관람하는 기록을 세 운다. 또한 신명은 전국의 마당극을 한 눈에 볼 수 있는<제3회 전국 민족극 한미당>(1990)을 광주에 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음에는 음악과 미술분야의 운동양상을 살펴본다. 노래와 그림이 문자나 논리보다 더 원초적이고 강도와 밀도가 높은 표현양식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회운동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일상적인 생 활영역과의 관계보다 더 직접적이고 절실한 성격을 갖는다. 대체로 사회운동에 투입되는 심리-신체 적psycho-somatic 힘의 폭과 깊이는 제도화된 일상의 삶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운동과 관 련된 문화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배경요인이 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운동과 관련된 예술 작품은 그 운동의 밀도만큼 맛과 냄새가 진하고 강렬할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서 사회운동과 관련된 예술작품 가운데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례로 가장 쉽 게 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여러 종류의 노래(파랑새요, 녹두새요, 가 보세요, 상옥요, 봉준요, 개남요 등)가 아직도 살아서 구전되어 지고 있는 이유는 그 사건이 인간 삶에 남긴 진한 흔적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 빨지산들의 애창곡이 되었던 부용산 이나, 김성태가 작곡한 해방가 그리고 김성훈이 작사한 농민가 나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은 사회운동적 의미가 큰 노래들이다. 또한 최근에 새로 작곡된 파랑새요 도 있다. 이는 2002년 11월 13일에 서울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린 우리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 를 위해 윤민석이 작곡한 노래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운동은 사회의 새로운 힘과 생명의 실천인 문화예술이 창조되는 터전이고 원료가 되기도 한다. 우리사회에서 노래가 사회운동의 중요한 자원이나 수단으로 인식되고 창작된 시기는 1980년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노래가 사회운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또 이미 창작되 318) 대표실행위원 : 문병란, 원동석, 박석무, 황석영, 서경원, 조비오, 김준태, 배종렬, 지선 분과대표위원 : 문학(임철우, 나종영), 미술(홍성담, 김경주), 연행(윤만식, 박효선), 출판(최열, 고규태), 사진 영화(김선출), 사무국(전용호, 박영정), 운영위원 지명(김태종, 김윤기), 사무국장 전용호, 간사 박영정 등이 주도했다. 319) 광주민중문화큰잔치 는 제3회( )까지 개최됨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15

218 었던 노래가 새롭게 재해석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사회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있는 가 하면, 그런 의도가 없이 작곡된 노래가 훗날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애창되는 운동가요로 되기도 했 다는 것이다. 선구자, 보리밭, 아침이슬, 진달래, 훌라송, 상록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후자의 사례이다. 또 80년대에 접어들어서, 음악인들이 사회운동의 현장에 투입되었고, 노래들이 목적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노래운동을 위해 수많은 노래패들이 조직되었고, 음악으로 사회운동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대는 음악운동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5월의 광 주항쟁 이후, 광주에서는 5월을 소재로 한 노래와 민주화를 주제로 한 노래들이 생산되고 불려 졌으 며,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음악장르인 민중가요가 탄생되었다. 1980년 겨울,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이 공연되었고, 1981년 11월에는 김종률 작곡 발표회 가 열렸다. 이 공연은 광주항쟁 이후 5 월을 직접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항음악회로 기록되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5월노래가 님 을 위한 행진곡 이다. 이 노래는 창작의 배경과 과정 및 정치사회적 효과에서 매우 인상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1982년 3월 어느 날,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작가인 전용호와 김종률(당시 전남대 재학 생) 등이 모여 노래극 넋풀이 제작에 관해 논의한 것이 이 노래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노랫말은 황 석영이 백기완, 문병란, 김준태의 시에서 부분적으로 골라 만들었고, 김종률은 그 가사에 작곡을 했으 며, 전용호는 노래부를 가수 물색과 작업진행의 일을 맡았다. 노래극의 주제는 광주항쟁 최후의 도청 전투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중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윤상원과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전제로 한 넋풀이였다. 이 노래극 넋풀이 는 7곡의 노래 와 무녀의 초혼굿 사설, 영혼결혼식 당시에 주례사 대신 낭송되었던 문병란의 시 부활의 노래 로 구 성되었다. 김선출의 괭과리 장단에 오창규의 목소리로 녹음되었다고 하는 이 노래는 이 굿의 마지막 을 장식하고 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노래극 넋풀이 가 전국의 대학과 노동운동의 현장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님을 위한 행진곡 은 더 널리 불려졌다. 이 노래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조사한 1982년 대학인의 노래순위에서 김민기의 < 아침이슬>을 누르고 정상을 차지했으며 1983년 전국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이 노래를 그해 가장 많이 부른 저항가요로 선정했다. 320) 특히 이 노래는 오월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 추모제를 비롯한 각종 의 320) 오창규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 1988년 12월 15일 YMCA 무진관, 빛고을 기획실 제작 기획. 2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9 례에서 애창곡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5월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 노동, 농민, 교육운동 등 각종 투쟁 의 현장에서 지친 영혼을 일깨우고 투쟁의지를 살려내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이 노래는 국내에 서 뿐만 아니라 홍콩, 중국, 대만,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일본 등지에서 불리고 있음이 많이 보고되고 있다. 2012년 1월 1일, 중국 베이징 외곽의 농민공 마을 피촌에서 새해맞이 행사 무대 에 농민공 밴드 신노동자예술단 이 올라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피촌의 노동운 동을 이끌고 있는 음악교사출신의 노동운동가 쑨헝(39)이 열창했다는 것이다 321). 이 밖에 5월운동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처럼 널리 불려졌던 노래로 오월의 노래2 가 있다. 이는 원래 프랑스 샹송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를 광주항쟁의 죽음과 비유하여 노래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이다. 번안한 노래가사가 광주항쟁에서의 죽음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죽음에 대한 고도 의 분노와 투쟁의지를 포함하는 정서적 자극을 유발함으로써 운동현장에서 매우 애창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오월의 노래 2> 가사 1.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후럼:오월 그 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2.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 천의 핏발 서려있네 3.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후렴 4. 대머리야 쪽발이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 날이 다 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위에서 소개한 국내 음악과 달리 국외에서 5 18을 노래하여 운동성을 발휘한 사례도 주목할 만하 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베르린음대를 졸업하고 유럽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세계적인 작곡가로 알려진 윤이상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그는 1980년 광주항쟁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조국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만행에 경악했다고 한다. 이 때 서독 쾰른의 라디오방송교향악단(WDR-Sinfonie Ochester) 으로부터 위촉받고 5 18을 대상으로 한 작품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 를 작곡했다. 이는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민중들의 봉기와 독재정권의 잔인한 대량학 살을 그리고 있으며, 제2부는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와 민중들의 공포를, 그리고 제3부는 작곡자가 염원하는 승리의 행렬로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해 달라는 호소와 함께 그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윤이상은 광주를 전 세계의 자유, 민주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시대의 모델 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81년 쾰른 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고, 1982년에는 북한 321) 한겨레, 깨어나는 중국농민공들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17

220 에서, 1989년에는 동경에서, 그리고 1994년에야 서울과 광주에서 연주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광주 와 관련된 두 작품을 만들었는데,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Kantate Mein Land, mein folk, 1987) 와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Engel in Flammen & Epilog, 1994) 이다. 앞의 것은 한 반도 우리 민족 전체에게 바치는 간절한 충정을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를 작사내용으로 하여 형상화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광주항쟁과 민주화에 몸바친 영혼들의 위대한 희생을 노래한 작 품이다. 이 작품들은 세계의 저명한 악단들에 의해 연주됨으로써 5월운동의 세계화에 큰 흔적을 남겼 다는 사실은 의미 깊은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미술부문에서 80년대의 문화운동은 광주항쟁에 대한 형상화작업과 시민미술학교 운영을 중심으로 진전되었다. 먼저 시민미술학교에 관해 살펴본다. 1983년에 개설하여 1992년까지 지속된 시민미술 학교는 광주 가톨릭센터 공간을 교육장소로 활용하여 예술이론과 삶과 예술, 새로운 미술과 민중미 술 판화와 민화 등의 내용을 학습했다.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의 홍성담, 최열, 백은일 등이 주도해왔 고, 원동석(목포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문병란(시인), 김준태(시인), 김봉준(화가), 홍선웅(판화가), 최열(화가) 등이 강의를 맡았다. 나중에는 현장답사와 토론이 대폭 강화되었다. 답사현장은 불구폐질 환자수용소, 음성나환자촌, 양로원, 탄광, 시장, 농촌 및 노동현장을 대상으로 했고, 답사 후에 토론 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현실감각과 실천적 인식능력을 배양했다. 시민인 학생들이 교육과정을 마친 후에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관객이 전시장 밖까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이 전시회 가 갖는 의미는 침묵하는 익명의 개인 으로부터 작품으로 말하는 시민 으로의 재탄생이라 할 것이 다. 광주에서 시작한 시민미술학교운동은 목포, 전주, 이리를 거쳐 서울명동성당 청년미술학교, 연세 대 시민판화교실, 성남 시민학교 등 종교계, 대학가,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노동투쟁의 현장에 까지 확 산되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이 지역 미술운동이 전국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며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 다는 점을 강조해둔다. 이 시기에 5월운동을 고양시키는 작품들이 활발하게 생산되었고 그 정치사회적 효과도 매우 크게 증폭되는 양상을 보였다. 1980년대 중반에 발전되었던 집단창작 활동이 더욱 진전되어 그 작품의 규 모와 질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광주항쟁 8주년 기념 5월미술제 기간에 만들어진 5월에서 통일로 는 높이 11미터, 너비 37미터에 달하는 걸개그림이었다(1988). 이 그림은 아래쪽에는 광주항쟁을 압 축해서 표현했고 위에는 남녀가 성조기를 찢는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써 광주항쟁과 통일운동을 접목 시킨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남대학교 도서관 정면 벽에 걸린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었으며, 그 당시 미국의 타임(Time)지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른 패션잡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걸개그림 가운데 더 주목받는 작품은 1989년 5월 12일부터 17일까지 금남로에 전시되었 던 민족해방운동사 일 것이다. 이 그림은 규모와 내용 및 제작과정에서 매우 놀라운 특성을 보여 주 었다. 그림의 크기가 가로 77미터 세로 2.6미터에 이르는 상상을 뛰어넘는 대형 걸개작품이다. 여기 2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1 에 담긴 내용은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분단조국의 통일운동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1세기 근현대사를 민중사적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에 속해 있는 6개지역 의 미술단체와 학생미술패연합 산하의 30여 개 대학생 동아리들이 결합하여 약 200여 명의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 해 1월에 시작하여 3월에 완성되었다. 작업방식은 각 미술패가 거주하는 지역 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관계가 깊은 역사적 내용을 분담하여 그려내서 결합시킨 것이다. 예를 들면, 갑오농민전쟁 은 전주 겨레미술연구소가, 3 1민족해방운동 과 항일무장투쟁 은 서울청년미술공 동체가, 해방, 대구 10월 과 4 3항쟁, 여순, 거창, 한국전쟁 은 대구민중문화운동연합 미술분과 와 대구지역 미술대 학생모임이, 반공정권, 4월혁명, 군사독재 와 민주화운동-부마항쟁 은 부산미 술연구소와 부산미술대학생연합 준비연합이, 조국통일운동 은 미술집단 가는 패 맡아 그리는 형 식이었다. 그 가운데 5 18은 자연스럽게 광주지역 미술패가 맡게 되었다. 광주시각매체연구소가 제 작한 이 부분은 계엄군의 잔혹한 학살만행, 죽어가는 임산부, 분노하는 시민들, 횃불시위, 시민들의 항거 및 무장투쟁, 해방광주의 공동체적 삶, 최후의 결사항전, 등 5 18의 주요 국면을 밀도있게 표현 했다. 이 작품은 그 규모와 내용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이 작업의 통일성과 연계성에 한계가 없지 않았고, 정부의 탄압 등 악조건에서 순회전시를 하다보니 첫 전시로부터 한 달 뒤인 광주전시 때는 작품훼손 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운동사 는 장대한 규모와 내용 및 창작방식에서 1980 년대 미술운동사의 쾌거였다. 이를 본 시민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걸개그림은 그 해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제에 보내졌고, 그 때문에 걸개그림을 그린 대표작가 홍성담, 차일환, 백은일, 전승일 등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광주의 홍성담은 1989년 부터 1992년까지 감옥살이를 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림은 훼손되고 압수당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그림의 슬라이드는 평양의 화가들에 의해 원래 크기대로 다시 제작되어 북한 주민들이 감 상했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운동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문화예술의 종합적 생산주체가 이 시기에 발전되 었다는 것이다. 이 문화패 운동을 선도했던 단체는 1983년에 조직된 일과 놀이 다. 일과 놀이는 전 용호, 김선출, 이춘희가 실무활동가로 참여했으며, 이들은 일과 놀이 즉 노동과 문화가 변증법적으 로 상생하는 세계를 추구했다. 주요 활동가는 김형수(문학), 박효선(연극), 홍성담(미술), 윤만식(마당 극), 최열(출판) 등이 참여했고, 이들은 풍물연수, 탈춤전수, 시민민술학교 운영, 독립영화상영 등 문 화보급센터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과 놀이 는 그 후 5월시동인 과 결합하여 민중문화연구회로 확 장하여 문예지 광주문화 를 발간했고(1984/1985), 1970년대 이후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운 동가요를 묶어 동트는 산하 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종합적 예술단체는 각각의 장르에 따라 다양한 분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밖 에 노래패로 정세현의 횃소리 와 친구, 우리소리연구회 등이 있으며, 노동문화패 일꾼마당,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19

222 농민문화패 황토바람, 놀이패 신명, 극단 토박이 사진패 사실, 미술패 시각매체연구회, 문 학패 청년문학회 등이 활동했다. 이를 보면 문화운동은 사회운동의 제 부문에 관련된 독자적 조직 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 부문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7) 80년대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전체적 성격 1970년대 한국사회를 운동이 탄압받던 고난의 시대 라고 한다면, 80년대는 운동의 시대 라고 할 만큼 여러 부문의 사회운동이 뜨겁게 타올랐던 시기이다. 이러한 열기는 80년대 초반의 잔혹한 억압 체제 하에서 잠복된 상태로 내연하다가 유신의 검은 장막이 찢어져 서광이 스며들던 70년대 말엽부터 분출하기 시작했다. 전남 함평과 경북 안동에서 일어났던 농산물피해보상투쟁(1978), 광주의 교육지 표선언(1978), 광주와 부산 등지의 양서협동조합운동(1978), YH사건(1978), 부마항쟁(1979) 등이 그 것이다. 이 시기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드러나는 사실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80년대 전 기간에 걸친 민주화운동의 지속적 강화발전이다. 80년대 초반의 계엄상태와 전두환 정권 초기 국면 에서 운동권의 실태는 저항의 생명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을 실현했던 광주가 폐허화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미약한 상황이었다. 다만 전두환 정권이 안고 있는 태생적 원죄인 광주학살과 그로 인한 정당성의 문제는 이들이 벗어나기 어려운 멍 에가 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82년의 구속자 전원석방, 1983년 말의 유화조치는, 비록 그것이 신군부 권력집단의 자신감을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원죄에 대한 속죄의 측면이 없지 않다. 이 유화조치는 수면 하에 잠복된 운동세력에게 대지로 나와 창공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는 전기가 되었 다. 그 후 80년대 중반은 복학된 대학의 제적생, 석방된 민주화 운동가들이 새롭게 힘을 추스르는 일 종의 준비기였다. 각 대학에서는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대학간에 연대조직 및 전국적 조직이 출현했 다. 시내에서는 민주화운동 활동가, 청년, 언론, 문화예술인, 지식인들 여러 연결망을 통해 다양한 수 준의 운동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토대확립을 기반으로 해서 80년대 말경에는 강력한 변혁적 저 항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위의 내용에 연계하여 특히 전국적 운동조직이 다양한 부문에서 건설되고 이 조직들이 전국 적 전선조직으로 결성됨으로써 사회운동의 통일적 대오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이미 80년대 초반 에 출범했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을 비롯하여 민중문화운동협의회(1984), 민주통일국민회의 (1984), 전국학생총연맹(1984),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1985, 민통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986),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1987, 전대협), 한국여성민우회(1987), 전국농민협회(1987), 민족 문학작가회의(1987), 한국여성단체연합(1987),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1988), 전국노점상연합회 (1988),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1989, 전민련), 전국교직원노동조합결성(1989), 전국빈민연합결성 (1989) 등이 그 사례에 속한다. 물론 이 단체들 중에는 여러 부문단체들을 아우르는 연합체뿐만 아니 라 특정 부문의 전국조직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민통련 및 전민련은 통일전선조직이라 할 2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3 만하다. 이러한 조직적 발전은 자연스럽게 운동집단의 규모와 그 동력을 급격히 증대하는 효과를 수 반함으로써 운동의 폭발력과 공격력을 강화한다. 셋째, 위의 연장선에서 80년대 사회운동에 드러나는 특성은 과격한 공격성에 있다. 70년대의 저항 운동은 비교적 온건하고 방어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를 들면, 함성이나 고발지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 건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면, 80년대에 들어서면 매우 과격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차이가 있다. 사북사태( )과 광주항쟁( )은 이러한 흐름에서 격류를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6월항쟁이나 노동자 대투쟁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80년대를 운동의 시대 또 는 저항과 도전의 시대 로 규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80년대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진전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성은 전국적 수준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사회운동의 흐름을 광주 전남지역이 선도하고 주도해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모든 부문의 운동에서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노동부문의 경우에는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비하여 질과 양적인 면에서 공히 취약한 양상을 보였다. 이는 사회운동의 객관적 환경이 되는 공업화 의 진전도가 뒤늦고, 지역인구 구성에서 제조업 부문 종사자의 비중이 낮은 현실과 관련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운동의 발생과 진전을 객관적 환경조건에 의해서만 설명하는 것은 주 관적 요인이 고려되지 못한 한계를 갖는다. 사회운동이란 구체적으로 인간의 행동으로 구성되며, 그 행동이 발생하려면 적어도 행위자가 그 행동을 수행하게 만든 동기나 가치관 및 정서적 요인 등의 주 관적, 정신-심리적 과정이 필수적으로 개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부문을 제외한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에서 전남지역은 주도적인 위상을 실천했다. 우선, 1980년대 벽두에 폭발했던 5월의 봉기, 즉 5 18광주민중항쟁은 전국 각지에서 끓어오르던 민주화의 열기가 서울에서 돌연히 침몰해버린 직후에 전남지역민이 다시 점화한 민주화운동의 횃불이었다. 그 래서 왜 광주인가? 라는 질문이 거듭 제기되었던 것이다. 광주항쟁이 장렬하게 좌절된 후에는 해마 다 5월 그날이 오면, 전국의 민주세력은 광주를 향한 추모와 기념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이는 광 주가 한국 민주화운동의 요람이고 본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폭도의 남편으로 서, 구속자의 가족으로서, 여성활동가들이 실천한 투쟁의 기록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1985년 창립)의 모체가 되었다. 교육운동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건설(1989), 농민운동에서 전국기 농(1982)과 전국농민운동연합(1989) 322) 출범의 주력이 전남지역 활동가들이었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 다. 또한 전국의 많은 운동의 현장에서 지친 영혼을 일깨워 투쟁의 힘을 되살렸던 님을 위한 행진곡 과 민중미술작품 민족해방운동사(가로 77미터, 세로 2.6미터) 는 전남지역 음악운동과 미술운동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저항의 시기 였던 19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중심은 전남 지역이었음을 강조해둔다. 322) 농민운동 전국조직의 발전과정은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1982), 전국농민협회(1987), 전국농민운동연합(1989), 전국농민회총연맹(1990)의 경로를 보여준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21

224 4. 시민사회 발흥과 90년대 사회운동 1) 91년 5월투쟁과 광주 운암전투 1980년대에 거세게 타올랐던 저항과 도전의 물결은 90년대에 접어들어 중요한 변화과정을 보여준 다. 물론 90년대 초반에는 80년대 투쟁의 연장이었다. 이는 87년체제 의 성립 이후 노태우 정권이 갖는 정치적 정당성의 한계와 의회 등의 현실정치에서 드러난 정치력의 취약성이 80년대에 강성한 운 동세력의 힘에 밀리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정권의 대응은 야당세력까지 포함한 보수대연합의 3당합당( )과 공안통치의 물리적 폭압이었고, 이 물리적 폭압은 더 과격한 저항투쟁을 유발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는 30여 년 지속된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김영삼 정권)의 수 립( )과 그에 따른 민주개혁의 일정한 진전이 가시화됨으로써 운동권 내부에도 중요한 변 화가 진행되었다. 기존 운동군의 내적 분화와 시민운동의 개화이다. 사회운동의 이와 같은 흐름은 그 후에 들어선 국민정부(김대중 정권, )에서도 지속되었다. 90년대 사회운동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전노협; ), 그리고 전노협과 전교조 등 14 개 재야단체가 참여하여 결성한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 기본권 쟁취를 위한 국민연합 (국민연 합; 4. 21)출범으로 조직 기반을 더욱 강화했다. 그 후 전노협은 노동절을 맞이하여 전국 292개 조동 조합의 노동자 34만명이 참여한 노동절 총파업을 감행했고, 국민연합은 3당합당 규탄 및 노태우정권 퇴진운동을 전국적으로 진전시킴으로써 90년대 사회운동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9일에 결행된 민자당 해체 노태우 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 에 20여만 명이 참여했고 그 때 연행자가 1,194명이었던 사실은 당시 사회운동의 열기와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노태우 정권의 무자비한 탄 압의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연보 ). 이와 같이 거센 흐름에서 노태우 정부를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 1991년 5월에 일어났다(1991년 5월투쟁). 이는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경찰과 백골단의 쇠진압봉에 의해 집단구타 로 사망한 4월 26일부터 투쟁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약 60일간 지속되었다. 이 투쟁기간의 흐름은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는데, 투쟁의 개시 및 확산기( ), 고 양기( ), 그리고 퇴조기( )이다(오승용, 148). 첫 번째 시기인 확산기에는 강경대 학생이 경찰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권에 대 한 분노와 이에 바탕한 투쟁이 전 국민적으로 확산된 시기이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4월 27일 시신 이 안치된 연세대에 경찰의 폭력살인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으며, 전국 20개 대학에서도 경찰폭력 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이 날 국민연합 전대협 신민당 등 44개 단체와 정당으로 구 성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 가 출범하 여 활동을 개시했다. 이틀 후 29일 서울에서는 3만여 시민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폭력살인정권 규탄 범국민결의대회 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 60여개 대학에서 규탄집회가 거행되었다. 집회에서는 2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5 노태우 사과, 내각 총사퇴, 관련자 처벌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고, 집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경찰의 저 지를 뚫고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일부 군중은 밤늦게까지 정권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 다. 이 날 광주에서는 전남대 박승희 학생이 집회 도중에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면서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투쟁의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사과했지만, 국민의 분노 는 진정되지 않았다. 5월 4일는 오후에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백골단 전경해체와 공 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 가 열렸으며, 6일에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옥중에서 변사 체로 발견되어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 기설이 분신사망했고, 전교조가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으며, 전대협은 전국 145개 대학이 공동으로 동맹휴업에 돌입했다. 여성단체연합도 명동성당에서 백골단 전투경찰 해체 및 폭 력정권 규탄 여성대회 를 개최하는 등 분노와 규탄의 물결이 거세게 번져갔다. 고조기( )는 전국적으로 확산된 투쟁의 열기가 더욱 높아가는 시기이다. 5월 9일에는 전 국에서 50여 만 명이 참여하여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 을 외쳤다. 분노의 거센 물결은 대학 생과 교수, 노동자와 농민, 여성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졌으며, 5월 10일 전남대에서 노동자 윤용하가 분신책임 전가말라 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분신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연이은 분신 정국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불안감이 깊어졌고 투쟁의 열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어서 5월 14일 대 책회의는 애국학생 고 강경대 열사 민주국민장 이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50만여 시 민이 격렬하게 시위를 했고 이 때 민교협 교수들은 사랑하는 제자 죽인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를 펼 침막을 들고 참가했다. 광주항쟁 기념일인 5월 18일에는 강경대 열사의 2차 장례식투쟁(2차국민대 회)이 명동성당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전국 34개 시군에서 광주항쟁 계승과 노 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국민대회 를 열고 뒤 이어 시위를 벌였다. 이 때 유해를 광주의 망월동 묘지에 안장하기로 하여 운구행렬이 광주로 출발했으며, 이 행렬이 전남 도청 앞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광 주를 진입할 때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일어났던 운암전투 는 지역운동사에서 인상적인 기록으로 남 아있다. 다음에서 이를 좀 더 상세하게 다룬다. 또한 이날 김철수(전남 보성고등학생), 정상순(노동 자), 이정순(주부)이 분신으로 자결투쟁을 결행함으로써 노태우 정권에 대한 민심은 더욱 이반되는 추 세를 보였다. 퇴조기( )는 투쟁의 열기가 점차 약화되고 반면에 노태우 정부가 수세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본격화하던 시기이다. 노태우 정부는 투쟁지도부인 대책회의에 대한 공개수사와 강기 훈 유서대필 사건 을 쟁점화하여 운동권에 대한 윤리성 문제를 제기하여 비난하는 한편 정치권을 광 역회의 선거국면으로 유도하는데 주력했다. 반면에 대책회의는 농성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제3차 국민대회(5. 25)와 4차 국민대회(6.2)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가 더욱 강화되어 전국적으로 참 여도가 현저하게 축소되었다(연보 577). 이러한 국면에서 새로 임명된 정원식 국무총리가 한국외국어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던 중 학생들이 그에게 달걀과 밀가루를 던져서 뒤범벅이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23

226 되게 했고 주먹과 발길질로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그가 문교부장관 시절에 자행한 탄압, 즉 전교조 교사 1500명에 대한 해직과 파면, 세종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전원 유급 및 퇴학조치 등에 대 한 한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국무총리와 그의 수행원이 이에 맞서자 학생들은 더욱 분노하여 멱살을 잡아 구타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고, 교문 밖으로 나왔을 때도 숨어있던 학생들이 다시 잡아들이려 했으나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탈출했다는 것이다(오승용, 153). 그런데 투쟁정국은 그날 저녁부터 일 순간에 반전되었다. 학생이 스승을 폭행한 패륜행위 로 규정된 이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 었고, 이 역풍이 먹혀들어 5월투쟁은 급격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 후 6월 20일에 거행된 지방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5월투쟁의 위기국면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경대 학생의 안타까운 희생을 계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1991년 5월투쟁은 6월에 들어 서 급속히 소진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종료되고 말았다. 이한열 학생의 희생으로 촉발 되었던 1987년 6월민주항쟁이 일정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불과 4년 전에 있었던 6월항쟁과 비교할 때 무엇이 이 실패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운동의 주체와 목표 및 실행이라는 세 가지 수준에서 가설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다. 첫째, 운 동주체 요인에서 두 항쟁의 차이점은 6월항쟁이 체계적인 집행체제를 확고히 정립한 데 반해, 91년 5 월투쟁은 회의체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전자는 국민운동본부라는 실행주체 를 구성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광범한 상부지원조직과 현장의 실천단위를 전국의 각 군단위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부문별로는 노동위원회, 농민위원회 등의 수준까지 조직화했는데 반해 후자는 대책회의 라는 회의체의 수준에 머무름으로써 실천역량이 그만큼 취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운동의 목표와 관련하여 두 항쟁을 비교해 본다. 이 경우에 6월항쟁은 헌법개정 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단순 하며 곧바로 실현가능성이 있는 목표를 설정했는데 반해, 91년 5월투쟁은 폭력살인정권 규탄, 공 안통치 종식 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정권퇴진과 민주정부수립 으로 발전되었는데, 이는 복합적이 고 포괄적이며 실현가능성이 다소 추상적인 성격을 갖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정권규탄이나 공안통 치종식 및 정권퇴진이라는 목표는 가시적으로 확인될 구체적인 대안이라기보다는 일반성이 높은 원 칙의 수준이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실천적 행동계획에서도 두 항쟁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6월 항쟁의 경우에는 거듭된 국민대회도 각각을 특화시켜 최루탄추방의 날, 평화대행진 등의 지향점 을 설정하여 공표함으로써 시민대중의 관심을 집약하고 동원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 에는 5차까지 거듭된 국민대회가 특화된 실천목표와 지향점이 애매함으로써 국민적 동력을 동원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5월투쟁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거듭된 자 결투쟁과 그에 대한 여론의 역풍, 정원식 사건에 대하여 정부가 국민의 도덕감정을 자극하는 역공세 에 대하여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무책에 대해서도 성찰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5월투쟁의 운동사적 의미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 항쟁은 1987년 대통 령 선거에서 노정된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 그로 인한 패배와 그 후의 참담한 현실을 극 2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7 복하고 대동단결하여 단일 대오를 형성하는 전기가 되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앞으로 재 야 민주세력이 갈 길을 닦는 당연하고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고 작업인 것이다. 두 번째는 이번 5월투 쟁의 과정에서 경험한 운동의 새로운 요인들, 예를 들면 거듭된 자결투쟁 및 국민의 도덕감정을 이용 하는 정권의 공세 등에 관한 새로운 경험은 미래의 사회운동에 의미있는 자원이 될 것이다. 진지한 성 찰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세 번째는 재야 민주세력이 노태우 정부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지배권력을 막다른 골목에 까지 몰아 부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국에 인식시킨 점도 주 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실은 노태우 정부의 후반기 정국운영 및 정권 재창출 계획에 일정한 타격을 주 었을 뿐만 아니라 집권세력 내부의 역학관계를 변화시켜 김영삼의 입지 강화를 수반하기도 했다는 해 석이 가능하다. 전국 수준의 5월투쟁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에 이어서 다음에는 전남지역에서 진전된 5월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지역운동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고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91년 5월투쟁은 이 지역에서 1981년 이후 지속되어 온 5월운동의 기간과 중첩되어 있어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87년 6월항쟁은 이 지역의 5월운동에 뒤이어 전개된 사례라면, 이번 5월투쟁은 5월 운동과 동시적으로 진전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그리하여 91년 5월투쟁은 전남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5월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면, 이와 달리 5월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전남광주의 5월 투쟁을 서울지방의 5월투쟁과 비교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전남광주에서 5월투쟁의 전개양상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서울에서의 흐름과 함께 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광주에서만 특수하게 일어난 투쟁사례이다. 전자는 서울의 대책회의 주도 하에 진행되는 각종 집회와 시위 계획에 결합하거나 이에 연계된 자율적 저항운동을 포함한다. 5회에 걸쳐 감행된 국민대회 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며, 여기에 광주 전남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판단된다. 그 당시 광주는 5월운동의 맥락에서 이전부터 축적된 5월운동의 동력과 1991년 5월투쟁의 동력이 융합된 상태로 분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광주에서만 특수하게 진전된 5월투쟁의 양상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결투쟁이고 두 번째는 강경대 열사의 장례행렬과 관련된 운암전투 이다. 전자와 관련해서 보면, 이번 5월투쟁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던 거듭된 자살투쟁이 광주 전남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발생 함으로써 투쟁의 수위를 극적으로 고조시켰다. 그 첫 번째 사례는 전남대 재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 망사건 발생 3일 후에 강경대를 살려내라, 2만학우 단결하여 노태우정부 타도하자 는 구호를 외 치고 전남대 학생회관 앞 잔디밭에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했다. 박승희의 분신은 5월투쟁의 초 기 단계에서 투쟁의 열기를 극적으로 증폭시켰고, 5월 25일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 때까지 광주의 5월 투쟁은 박승희 분신의 파장으로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되었다. 박승희의 분신에 뒤이어 노동자 윤용 하(5. 12; 전남대 대강당), 고등학생 김철수(5. 18; 전남 보성고등학교), 노동자 정상순(5. 22;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상)이 연이어 분신자결의 대열을 이룸으로써 한국 운동사에서 매우 특이한 투쟁사례가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25

228 되었다. 두 번째 사례로 5월투쟁의 진전과정에서 강경대 학생 운구행렬의 광주진입 시에 있었던 운암투쟁 를 소개한다. 5월 14일에 계획되었던 범국민대책회의의 애국 학생 고 강경대 열사 민주국민장 은 경 찰이 원천봉쇄하는 가운데 격렬한 시위로 치러졌고, 2차장례식이 5월 18일에 명동성당에서 결행되었 다. 이어서 장지로 예정된 전남 광주 망월동 묘지를 향해 출발한 운구행렬이 호남고속도로 광주진입 로에 도착한 시간은 18일 오후 2시경이었다. 진입로의 시내 쪽에는 이미 수 만 명의 시민학생이 운집 해 장례행렬을 맞이하여 도청 앞 노제로 인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고속도로 쪽에는 전투경찰 부 대가 팽팽한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경찰은 이 운구행렬이 시내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망월동으 로 직행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양측의 실랑이 끝에 밀고 밀리는 접전이 일어났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 라 치열한 공방전이 밤을 새워 계속되었다. 밤새도록 싸움은 계속되었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집에 가서 잠시라도 쉬도록 권유하는 대신, 경찰에게 더욱 거센 공격을 가하여 지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 시민세력의 작전이었음을 당시에 현장 책임자였던 김정길은 증언하고 있다( ). 다음 날인 5월 19일 10시에 박승희가 병원에서 사망함으로써 광주시민들의 참담한 분노는 더욱 거 세졌고, 그 결과로 폭발된 투쟁의 열기는 경찰차를 전복하는 등 격렬하게 타올랐다. 오후에도 시내 노 제를 주장하는 시민 측과 이를 막아서는 경찰 사이에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오후 2시가 되어도 해결 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운구행렬을 인도하고 왔던 문익환 목사와 강민조(강경대의 부친) 씨가 나서서 시내 노제를 포기하고 망월동으로 직행하겠다고 시민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들의 설득에 대하여 분 노하고 실망한 시민들은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라, 망월동에 묻힐 자격도 없다 고 격렬히 성토함으 로써 노제투쟁은 계속되었다. 하루 밤을 철야하면서 계속된 투쟁이었지만 시민들의 분노에 찬 함성과 노래 그리고 투석전은 지칠 줄 몰랐다. 수백 명의 전투경찰을 무장해제 시킬 만큼 시민의 투쟁의지는 강렬했다. 늦은 오후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여 경찰의 공격과 감시가 풀린 순간에 일단의 시민들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그 순간을 이용하여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뜯어낸 후, 고속도로에 멈춰있는 운구차를 그 옆의 국도로 밀고 끌어 이동시키고 있었다. 고속도로와 국도 사이에는 배수로 개울이 있었으나 다수의 시민들은 순식간에 그 개울을 흙과 나뭇가지 등으로 메움으로써 건널 수 있 었던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경찰이 막고 있기 때문에 시내 진입이 불가했던 운구차가 시민의 힘으로 국도로 옮겨짐으로써 진입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이 돌발 상황을 맞이하여 경찰은 더 이상 저지하려 하지 않고 시내진입로를 열어주었다.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국면에서 경찰이 만일 다시 저지작전을 펼친다면 제2의 광주항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마침내 밤 10시 경에 도청 앞 금남로에 도 착하여 노제를 거행했다. 5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문익환 목사와 오종열 광주 전남민주연합 대표 의 추도사, 그리고 분향이 이어졌다. 노제 후에 망월동으로 이동해 안장을 마친 시간은 20일 새벽이 었다. 말하자면, 3일간에 걸친 철야투쟁은 이렇게 끝났고, 5월투쟁의 이 싸움에서 광주는 시민의 힘 으로 경찰의 저지작전을 제압하는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말하자면 서울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광주 2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29 의 5월투쟁은 승리였다는 것이다. 그 날 아침 문익환 목사는 이 승전보를 어서 빨리 전국에 알려야 한 다고 쉬어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상경했다(김정길 증언, ). 2) 5 18특별법 제정운동 5 18특별법 제정운동은 앞에서 다룬 5월운동의 한 사례에 해당하지만, 이 운동이 전개된 시공간적 범위와 그 효과가 매우 광범하고 한국 사회운동사의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갖기 때문에 따 로 취급하여 다룬다. 5월운동을 구성하는 수많은 저항투쟁의 사례들 가운데 이 특별법제정운동은 그 정점에 위치한다. 이 법을 통해 비로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학살책임자들이 재판정에서 내란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반면에 항쟁의 희생자와 유가족 및 구속부상자들이 민주화유공자로 명 예를 회복했으며, 다양한 기념사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5월운동이 시작되던 1980년대 초반에는 이와 같은 특별법에 대한 발상 자체가 아직 없었다. 당시의 사고와 정서는 분노와 공포, 그리고 아픔과 한으로 채워져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고는 냉정을 되 찾게 되고 분노와 공포의 정서는 많이 가라앉았다. 상처의 피는 마르고 고통은 스스로 받아들여졌으 며 치유의 길을 찾았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은 5월운동의 지평을 극적으로 전환시켰다. 국민의 거대 한 뜻을 본 신군부 집권세력은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광주항쟁에 정 당성이 부여되는 순간, 그 항쟁을 진압했던 신군부세력의 학살만행은 정당화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학살책임자에 대한 처벌운동은 더욱 공격적인 새 국면으로 진전되었다. 민청련, 민통련 등의 재 야 민주세력은 광주학살 12 12반란 원흉처단 결의대회 ( ),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책 임자처단을 위한 공청회 ( ), 광주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처단 범국민결의대회 ( ) 를 개최했으며,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 )과 아울러, 전두환 이순자 구속처벌을 위한 투쟁본부 ( )를 결성하는 등 매우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전두환의 사과성명( )과 연말에 있었던 국회 증언이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회피로 일관되자 이에 대 한 비판이 더 격렬하게 일어났고, 광주의 피해자들은 그가 살고 있는 연희동으로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책임자 처벌의 문제가 이와 같이 격렬하게 고조되면서 더 실천적인 접근방안이 제기되었다. 그 하나 는 체포결사대를 조직하여 직접 응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법적 절차에 따라 고소하거나 고발 하는 방식이다. 앞의 것이 제도를 초월하는(부정하는) 과격한 운동방식이라면, 후자는 법 절차에 따 라 학살자를 단죄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정리한다. 특별법 제정운 동은 학살자들에 대한 고소 고발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은 항쟁 당시에 구속자들이 결합한 단체인 5 18광주민중항쟁동지회(5항동)가 선도했다. 국회의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인 1988 년 10월 18일에 이 단체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등 9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 로 광주지방검찰청에 정식 고소한 것이다. 그 당시는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27

230 문에 수사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웠다. 그 후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여 국면이 반전됨에 따라 신군부세력은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우선 12 12쿠데타 당시에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등 22인이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이자 쿠데타 의 주모자)을 비롯하여 신군부에 가담했던 38명을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 ).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동년(5민연 상임의장)과 5 18피해 자 320명은 전두환 등 5 18사건 관련자 35명(당시 대대장 이상) 323) 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고, 이와 아울러 5 18진상규명국민위원회(집행위원장 김상근)의 위원 294 명도 전두환 등 5 18사건 관련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 ). 또한 한완상(전 국무총리) 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22명은 전두환, 노태우 등 10 명을 내란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고( ), 여성단체연합에서도 그들을 내란혐의로 고발했 다. 이와 같이 빗발치는 고소 고발의 파도에 밀려 검찰은 마지못해 수사에 착수했다( ). 이에 앞서 진행된 12 12쿠데타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가 기소유예 처분으로 발표된 정황을 미루어볼 때, 5 18사건에 대해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 흐름이 감지되는 분위기였다. 또한 김영삼 대통 령이 5 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자는 입장을 이미 공개적으로 밝힌바 있다는 사 실을 감안한다면, 검찰의 결론은 이전부터 한계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에서 대학생과 민주세력, 5 18 관련 단체들의 기소촉구 시위와 결의대회가 잇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형식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였다.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이 대한변호사협회(대한 변협) 등에서 발표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핵심 피의자는 검찰청에 출두하지 않고 자신들의 답변서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했고, 중요한 증언이 기대되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끝까지 검찰의 출석조사에 불응함으로써 검찰수사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와 같은 정황에서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 그 결론은 이미 예상되었던 대로 공소권 없음 이었으며, 그 기본 논리는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결과가 공소권 없음 으로 발 표되자 그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즉각적이었고, 그 파장은 의외로 컸다. 우선 광주지역의 피해자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은 언론의 예측기사가 보도되자 공식발표 이전인 7월 14일에 5 18학살자 재판회부 를 위한 광주 전남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24를 결성하고, 그날 바로 750여 명이 상경하여 청와대 와 검찰청에 항의방문을 결행했다. 검찰발표 다음 날인 7월 19일에 5 18항쟁 피해자들과 이에 동조 323) 피고발인 35인 명단: 전두환(보안사령관: 당시 직책, 이하 같음), 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특전 사령관), 이희성(계엄사령관), 진종채(2군사령관), 소준열(전투병과교육사령관), 박준병(20사단장), 신우식(7공수여단장), 최웅(1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정수화(20사단 60연대장), 김동진(61연대장), 이병년(62연대장), 권승만(7공수여단 33대대장), 김일옥(35대 대장), 안부웅(11공수 61대대장), 이제원(62대대장), 조창구(63대대장), 임 수 원(3공 수 11대 대 장), 김 완 배(12대 대 장), 변 길 남(13대 대 장), 박 종 규(15대 대 장), 김 길 수(16대 대 장), 이병우(20사단 60연대 1대대장), 윤재만(2대대장), 길영철(3대대장), 차달숙(4대대장), 정연진(61연대 1대대장), 김형곤(2대대장), 박제철(3대대장), 강영욱(4대대장), 오성윤(62연대 1대대장), 이종규(2대대장), 유효일(3대대장), 김인환(4대대장). 2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1 하는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돌입했고, 이 농성은 특별법이 제정된 그해 12월 21일까지 150 여 일간 지속되었다. 농성자들은 이 기간 동안에 5 18사진 전시,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 등을 지속적 으로 전개했고, 거의 매일 명동집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청와대, 검찰 청 등에 대한 항의방문을, 전두환 노태우 자택 주변에서의 시위와 삭발투쟁을 감행했고, 각 지역 사회단체들에 대한 방문과 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광주 현지에서도 이날 검찰발표규탄 및 학살자처 벌을 위한 범시민결의대회 가 열렸다. 그 이후에는 서울의 국민위원회와 상호협력하면서 국회의원에 게 5 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한 보내기,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막농성(금남로 일대 6곳), 토요 집회,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서명운동과 서명자 대회, 국회방문과 입법청원 등 여러 가지 활동 을 전개했다. 서울에서는 5 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국민위원회) 324) 가 주도했다. 국민위 원회는 검찰의 수사결과가 공소권 없음 으로 발표되자 바로 5 18광주학살책임자 불기소에 대한 항의농성 기자회견 을 갖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7월 22일에는 5 18학살자 불기소처분규탄 및 기소촉구대회 를 종묘공원에서 거행하고 전두환, 노태우, 정치검찰 화형식 을 가졌으며, 25일에는 광주의 5민연과 공동으로 2차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2차 국민대회 때 한총련 대학생들은 연희동 진격 투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3차 국민대회도 두 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했는데(8.16), 이때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여 수십 명이 부상당했고 18명이 구속되었다. 기소관철투쟁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국회의원이자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인 정상용이 중심이 되어 결행 한 5 18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국토종단 ( ), 그리고 국회의 광주특위 진상조사소위원 장인 김영진 의원의 5 18학살자 불기소처분 항의 및 기소촉구를 위한 국회단식농성 (7.24~8.6)이 다. 이와 병행하여 법률적 대응도 계속되었다.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했으며(7.24), 뒤이어 5 민연과 공동으로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했고(7.25), 이 항고가 기각되자 재정신청과 재항고(8.28)를 제기했다. 7월 말부터 일반 시민사회단체의 참여가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대한변호사협회 공청회 개최(7.28), 고려대 교수 131명 성명서 발표(7.31, 그 후 현재 100개 대학 6,678명의 교수 참여), 광주향 교 유림의 성명서 발표(8.8),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교수 농성(8.14~16), 김수환 추기경 메 시지발표(8.15), 서울시의회 특별법 제정 결의문 채택(8.23), 민교협의 서명교수 결의대회 및 입법청 원(8.24), 조계종 스님들의 성명서 발표(8.26), 예수교장로회 목회자 기자회견(9.4), 기독교 장로회 총 회의 결의문 채택과 서명운동(9.5),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 한국기자협회 PD연합회 공동 주최 토론회 개최(9.6), 정기국회 개원에 즈음한 여러 사회단체의 성명서 발표와 국회 앞 집회(9.11), 가두서명(9.13), 전국 6개 지역에서의 제4차 국민대회(9.16), 고려대 학생 40여 명 5일간 단식농성 돌 324) 이 단체는 광주봉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타 지역 인사들이 주도하여 1994년 3월 서울에 위치한 기독교 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준비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은 김상근 목사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상임대표 이창복)에 의해 수행되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29

232 입(9.18), 연세대 학생 특별법청원서 제출(9.20) 등이 이어졌다. 저항운동이 이와 같이 광범하게 확 산되자 정치권에서도 반응이 나타났다. 새정치국민회의가 5 18 관련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9.22), 뒤이어 민주당도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9.23). 그 후 운동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어 각종 직업집단에까지 확산되었다. 거의 매일 전국 각지에서 동 시다발적으로 대학생, 교사, 일반시민, 농민, 의사, 변호사, 약사, 법학교수, 신림동 사법고시준비생, 사법연수생 등이 대규모로 특별법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에 의해 폭로된 노태 우 비자금사건은 특별법 제정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신한은행의 서소문지점에 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 원의 예금계좌조회표를 제시하면서 노태우 의 비자금 4,000억 원이 여러 시중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 후 검찰의 수사결과 노 씨는 대기업 총수 등 40여 명으로부터 4,6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포괄 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11월 16일 구속 수감 되었다(이정미, 민중의 소리, 2011년 8월 14일자).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싸우고 있는 각 단체들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범국민적 연 대기구로 5 18학살자처벌 특별법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범국민비대위) 325) 를 결성하기로 했 다. 그 당시에는 거의 매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의 항의집회와 성명전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 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 합(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준비위원회[민노총(준)],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등 8개 단체가 준비작업을 맡아 추진한 결과, 1995년 10월 26일 흥사단 3층 강당에서 5 18학살자 처벌 특별법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결성식을 가졌다. 결성선언문에서는 우리의 최근 역사에서 이루어내지 못했던 과거청산을 실현하기 위해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국민적 힘을 결집하여 특별법 제정을 쟁취하자고 제안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11월 4일을 국민행동의 날 로 선포함과 동시에 노 태우 비자금문제로 드러난 신군부집단의 부정비리를 청산할 것을 강조했다. 새로 출범한 범국민비대위는 국민행동의 날 로 정한 11월 4일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오전 에는 전국 각지에서 국민행동강령과 국민대회를 알리는 유인물 및 스티커를 배포했고, 정오에는 각 지역의 주요 거점에서 약식 집회와 문화패 공연, 흰색 손수건 배포활동을 전개했다. 3시까지 흰색 손 수건과 깃발 흔들기, 가면을 착용한 채 손뼉치기, 구호 제창 등을 하며 거리행진을 벌인 후, 한곳으로 집결하여 제6차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3시에는 거리의 차량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전국 각지의 각종 시민사회단체, 직능단체에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적 의지가 충만한 가운데 시행된 국 민행동의 날 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11월 7일에는 금융권과 공공부문 노동조합 ) 이 위원회는 시민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는 위의 국민위원회, 전국연합, 종교, 의료, 청년, 여성, 시민운동 등의 서울지역 시민단체와 광주지역 132개 단체, 부산지역 18개 단체, 충북지역 16개 단체 등 298개였다. 2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3 여 개가 연대성명을 발표했으며, 며칠 후 제7차 국민대회가 개최되었고(11. 7), 16일에는 광주 5월단 체 관련자들이 장기농성 중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기도회가 열렸다. 뒤 이어, 21일에는 5 18광주민중항쟁동지회가 주최하여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국회 앞 집회가 시작되었 다. 이러한 국민적 압력은 마침내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으로 하여금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 는 기 존의 입장을 바꾸어 특별법 제정을 민자당에 지시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도 범국민비대위는 11월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5 18문제의 국민적 해결을 위해 특별 법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공청회 를 개최했다. 이어서 특별법에 관한 국민단일안을 발표했고(12.5), 제9차 국민대회를 전국 10개 지역에서 동시에 개최했으며, 12월 16일과 18일에는 국회 앞에서 특 별법의 올바른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촉구 를 위한 대중집회를 가졌다. 이와 같은 전 국민의 거대한 힘으로 마침내 5 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이 제정되었다(12.19). 그 후 21일에는 범국민비 대위가 주최하여 특별법 제정운동에 관한 성과보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활동을 종결했으며, 명동성 당 농성단도 1996년 1월 9일에 175일 동안의 장기간 천막농성을 끝내는 해단식을 갖고 광주로 돌아 왔다 년 5월의 패배 이후 지난 15년간의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특별법 제정을 이루어냄으로 써 승리한 운동의 길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 운동은 광주의 문제를 광주가 제기하여 전 국민이 함께 함으로써 성취해냈다는 점에서 이 지역운동사에 중요한 기록이 된다. 326) 3) 노동과 교육운동 위에서 정리한 91년 5월투쟁과 94년에 시작되었던 5 18특별법 제정운동은 각각 노태우 군사정권과 김영삼 문민정부 시기의 사회운동을 대변하는 측면도 있다. 5월투쟁이 강경억압정책에 대한 극단적 저항투쟁 형태로 진전되었다면, 특별법 제정운동은 제한된 민주화 정책에 대응하여 비교적 온건하고 평화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자가 정권퇴진이라는 총체적이고 극단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진행하 다가 결국에는 실패한 항쟁으로 종료되었다면, 후자는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실천이 가능한 법제정 운동으로 추진됨으로써 성공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 두 운동사례는 광주항쟁과 관련된다는 측면에서 5월운동의 연장이며, 이와 아울러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민주화운동이다. 또한 이 두 사례는 각각의 단일 사안에 대 하여 전 국민적 연합전선이 구성되어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국민적 참여를 동원한 대규모 운동이었 다. 그러나 90년대에는 이와 같은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한 거대규모의 사회운동과 아울러 더 구체적이고 부문특수적인 소규모 형태의 사회운동이 각각의 부문 영역에서 진전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은 사회 구조가 복합적으로 분화되고 그에 따라 특수하고 구체적인 사회문제들이 다양하게 발생하는 현실의 326) 특별법제정운동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은 필자의 다음 자료를 전제하였음. 나간채, 한국의 5월운동 (한울, 2012), 쪽을 참고할 것.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31

234 반영이다. 특히 1980년대 사회운동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각 부문에서 다양한 운동조직의 광범하게 발전한 사실은 90년대 사회운동의 전개양상을 전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변화 요인을 배경 으로 하여 여기에서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진전된 부문운동의 양상을 요약한다. 먼저, 이 지역 노동운동의 실태를 살펴본다. 1980년대 이 지역의 부문운동에서 민주화우농과 농민, 교육부문과 여성 및 문화예술부문에서 전국의 운동을 선도했다고 평가될 수 있지만 노동운동의 경우 에는 타 지역에 비해 투쟁의 규모와 열기 및 과격성에서 비교적 낮은 수준이었다는 점은 지적된 바 있 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이 지역 노동운동의 사회경제적 토대 자체가 열악한 상태로부터 연유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도 해명되었다. 그렇다면 90년대 이 지역의 노동운동은 어떤 양상으로 진전되었는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전국적 인 흐름에 보조를 맞추면서도 산업화의 정도가 낮은 현실을 반영하는 수준에서 진전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90년대 이 지역의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추세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운동조직의 계속된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 건설 및 전국 총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활동이다. 노동운동조직의 발전과 관련하여 먼저 확인되는 사실은 광주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가 창립 당시 ( )에 비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출범 당시에 참여한 업체가 15개이고 조 합원 수가 2,300명이었지만, 1990년 3월에는 22개 업체에서 5,600명의 조합원으로 확장되었다. 이 러한 성장은 노동법 개정투쟁, 분규업체와의 연대투쟁 등 노사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뿐만 아니라 임단협 협상이나 노동자 교육, 그리고 소속 노동조합들 간의 원만하고 협력적인 관계형성에 주도적으 로 활동한 결과로 이해된다. 1990년 5월 노동절에는 광노협이 노동단체와 연합하여 메이데이 총파업 을 단행하기도 했다. 또한 광주여성노동자회가 결성되어 창립대회를 가졌다( ). 이 지역에는 방직, 전자 등 여 성노동자가 다수를 점유하는 사업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여성노동자의 활동이 이전부터 비교적 활발했지만, 여성노동자들이 당하는 특수한 억압과 고통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은 별 로 없었다. 예를 들면, 광노협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이 지역의 민 주노조운동을 주도했던 여성활동가와 전남방직 해고자 등이 결합하여 준비작업을 수행하여 결실을 보게 되었다(창립 회장 최경희, 전남방직 해고자). 여성노동자회는 모성보호나 평생노동권 확보를 독 자적인 영역으로 다룰 것을 선언하고 여성문제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노동조합 결성, 임금, 해고, 육 아 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 밖에 전남지역의 노동운동단체가 발전했다. 목포에 소재한 민주노동조합협의회를 비롯하여 여 수-여천의 민주노동자연합 등이 그것이다. 목포의 민노협은 노동자 대투쟁 후에 결성되어 노동절 행 사를 적극적으로 개최하는 한편, 노동현장의 주요 활동가들과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조합원들이 모여 집단학습, 성명서 발표, 현장에 대한 지원투쟁 등을 전개했다. 그리고 여수-여천민노련은 이전부터 2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5 지역에서 활동해오던 노동문제상담소, 임투대책위원회, 여민청 노동반 등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기구 들이 현장투쟁을 더 조직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따라서 이 단체는 활동을 내용을 상담, 노 조지원, 교육, 선전, 조사연구, 연대 등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전개했으며, 필요에 따라 정치투쟁이나 통일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밖에도 광주노동연구소가 설립되어( ) 노동문제에 대한 조사와 연구, 노동자를 위한 상담과 지도, 각종 교육활동을 통해 노동현실을 개선하는 노력에 기여했고, 청년 노동자회가 결성되어 산악반, 풍물반, 노래반, 역사기행반, 독서토론반 등의 문화와 여가생활의 발전 을 추구했다. 그러나 더 획기적인 조직적 발전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건설운동에서 볼 수 있다. 김 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 노동절에는 1958년 이후 35년 만에 처음으로 노동절 집회를 공식 허용했 으며, 25,000명의 노동자가 연세대에서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거리를 행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출범 초기의 이와 같은 개방적 노동정책은 1993년 후반기부터 변화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군사정부 시대 의 노동정책을 닮아갔다. 심지어 더 극단적으로 위협하고 탄압하는 경우도 나타났는데, 이러한 배경 에는 노동세력의 힘이 그만큼 강화된 결과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바로 민주노총 건 설운동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민주노총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1990; 600여 노 동조합, 조합원 수 20만, 전노협)를 모체로 하고 있다. 전노협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유사한 연합단체 로서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586개 노동조합, 조합원 수 200,197명; 업종회의), 그리고 현대 및 대우 그룹 산하의 노동조합들이 결합하여 1993년에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1993; 전노대; 1048개 노동 조합, 조합원수 420,409명)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 전노대가 민주노총준비위를 발족하여 약 1년 동 안 준비작업 끝에 1995년 11월 11일에 창립 대의원대회를 개최했고, 12일에 여의도에서 5만여 노동 자가 집결한 가운데 출범을 선언했다. 그 당시에 866개 노동조합과 41만여 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했 으나 2006년 말 현재 629개 노동조합 조합원수 752, 363명으로 성장했다. 정부수립 후 친 정부의 길 을 걸어왔던 한국노총에 맞서 한국 노동계를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투쟁성 현장성을 기본 정신 으로 한 단체이다. 이와 같은 기본정신은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에 비하여 더 강력한 투쟁력을 내장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지역에서 민주노동 건설운동은 서울지역 준비상황과의 연계 하에 1995년 2월에 광주지역 노 동조합 대표자 모임(광노대) 을 구성하여 추진되었으며, 그 당시 광노대는 지역의 단위 노동조합들에 게 민주노총 건설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광노대는 4월 28일 에 민주노총 광주지역본부(준)으로 재편되어 건설사업에 참여했다. 광노협은 해산되었고, 각 노동조 합은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를 해산하고 산업연맹, 그룹연맹으로 재편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민주노총 광주지역본부(준)을 광주 전남지역본부(준)으로 변경했고, 출범 초기에는 지부로 명명되다 가 이후에 광주 전남지역본부로 개칭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광주 전남지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33

236 역 노동단체는 전국 수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지역수준에서 중앙의 전체적 흐름에 협 조하는 방식으로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투쟁력은 출범 후 1년 후인 1996년 말에 여당 단독으로 기습 통과시킨 노동법 재개정투 쟁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탈법적 절차로 통과시킨 노동법 내용은 복수노조 상급단체 적용을 3년간 유 예하고,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각급 노동조합과 시민사 회단체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이는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한국노총까지 참여하는 전국 노동자 총 파업으로 표출되었다. 이 총파업은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3월 10일까지 두 달 반 동안 지속 되었다. 파업은 지도부의 동원계획에 따라 단계적으로 강화되었으며, 고조기에 이른 1월 25일의 전국 노동자 대회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10개 지역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대 군중이 참여하여 정부와 사 용자를 압박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개정된 노동법을 노동계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재개정하 기로 합의함으로써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 총파업에 광주 전남 노동계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파업개시 당일인 26일 오후에 아시아 자동차, 한라중공업, 대우캐리어 등의 노동조합들은 회사별로 출정식을 갖고 광주역 광장에서 날치 기 규탄과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회 를 개최하였고, 27일에는 한국노총 광주 전남지역본 부 산하 40여개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이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연일 계속되는 파업의 행진 속에 12 월 31일에는 조합원과 시민 5,000여 명이 광주역 광장에서 노동법 개악철회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 등 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뒤이어 거리시위를 벌렸다. 민주노총 간부 50여 명은 신정 연휴 기간 동 안에 광주임동 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며 경찰의 검거에 대비하기도 했다. 1월 3일에는 대기업 노조별 로 파업전진대회 를 가졌으며, 70여개 택시노조의 노조위원장 50여 명은 삭발투쟁을 감행했다. 3단 계 총파업의 개시일인 1월 15일에는 조합원과 시민학생 1만여 명이 광주역 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거 리시위에 돌입했다. 특히, 16일에는 광주시민연대를 비롯하여 138개 사찰이 결합된 광주불교사암연 합회와 11개 기독교 단체로 구성된 광주기독교연합회도 파업을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리 고 파업의 막바지에 이른 2월 25일에는 양대 노총 연합으로 광주역에서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 동법 안기부법 백지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는 근래에 보기 드문 대규모 집회였다고 한다. 광주지역에 있었던 이 총파업 투쟁은 민주노총 출범 이후 노조의 동원력과 체계적 추진역량을 과시 한 성공적인 투쟁사례에 속한다고 본다. 80년대 이전의 소극적이고 취약했던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 동 실태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90년대 이 지역노동운동의 이와 같은 성장은 이 지역 노동 운동세력이 그 만큼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 동안에 진전된 이 지역 산업화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1990년대에 이르러 이 지역 사회운동의 세력구성에서 노동운동이 자립성과 자 생력을 확보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광주 전남 노동운동의 이와 같은 성장은 다음에서 보는 전에 없던 과격한 대규모 파업투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광주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금호타이어에서 1200명의 노동자가 1994년 6월 25일 2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7 에 시작하여 약 1달 간 지속된 파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전에는 보기 어려운 과격한 전투성을 보 여주었다. 이는 1987년 이후 직권조인 규정을 악용한 회사 측이 노동조합에 안겨준 거듭된 패배에 대 한 노동세력의 새로운 도전이었고, 그 도전은 격렬했다. 한편, 이에 대한 진압작전 역시 무자비한 폭 력을 동원했다. 전경 35개 중대 4500명, 중장비 20여 대, 헬기 3대가 동원된 대규모 충돌이었다. 강 경진압에 대비해 설치된 강고한 바리케이트, 불붙은 타이어에서 치솟는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가 인 근 하늘을 뒤덮었다. 1시간 동안 계속된 진압작전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결과 417명이 연행되 었고, 25명이 구속되었으며, 46명이 고소 고발되었다. 조합원 74명과 이들의 신원보증인 78명에게 32억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되었다. 경찰의 광폭한 해산작전에 의해 공장 밖으로 밀려난 노동자들은 전남대학으로 피난하여 집결함으로써 더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파업을 해결하기 위해 광주 시장, 시의회, 광산구의회 등이 중재에 나서기도 했고, 30여개의 종교인 단체들이 노사간 대화를 요 구했고, 전남대학교 총장은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동자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광주 전남 노동조합운동사에서 초유의 사태였다. 노동조합 집행부는 더 이상 파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고, 지역사회에서 점점 고립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7월 22 일에 현장 복귀를 결정했다. 그 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계속된 무쟁의 시기는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밖에 광주지역 주요 제조업체로는 아시아자동차, 대우캐리어가 손꼽히고 있지만, 이들 업체에서 의 노사갈등은 비교적 온건한 상태로 진전되었다. 다만, 대우캐리어 노동조합은 위원장이 광노협 의 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주노총 출범 이후에는 광주 전남 지부장을 겸해왔기 때문에 민주노총 중앙의 지침에 따라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버스, 택시회사 등을 포함하는 운수업이나 보건의료, 철도, 통신, 사무, 금융 등으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운동 역시 비 교적 온건하게 진전된 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는 1990년대 교육운동의 진전양상을 살펴본다. 80년대 교육운동의 중핵을 이루었던 전교조 는 출범한 후 90년대에 접어들어 권력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도 고등학생들을 비롯하여 전 민주세력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자체의 조직사수투쟁과 아울러 사회운동 전반의 다양한 싸움에 참여해 왔다. 1990년 1월에 있었던 보수대연합의 3당합당 정국을 맞이하여 전교조는 민자당 장기집권음모 분쇄 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우루과이라운드 저지투쟁, 강경대 분신 이후의 1991년 5월투쟁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연대의 폭을 확장시켰다. 전교조는 1992년 5월 11일 전국에서 일제히 교육대개혁과 해직교사 복직 국회청원 을 위한 서명 운동에 들어갔다. 전교조 전남지부와 광주지부도 10일 전남대 강당에서 해직 현직교사 6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청원서명 선포대회 를 갖고 11일부터 서명작업에 들어갔다. 5월 대대적인 교사청원서 명운동으로 전국적으로 3만 4천 명의 서명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교육당국은 다시 서명방해와 관련 자 징계절차에 들어갔고, 다른 한편으로 전교조 측은 각 시도 교육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교육당국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35

238 의 집요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는 전국적으로 시민사회단체의 동참으로 범국민서명추진본부 도 구성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열성적인 활동의 결과로, 교육대개혁 과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한 범국민서명 은 전교조 사상 가장 많은 102만 3,426명의 국민 서명을 받아 10월 14일 국회에 청원 접수했다. 그 엄혹한 시절에 백만 서명운동을 성공시킨 것이다. 비록 정 권교체에는 실패하였지만 1992년 교육대개혁 투쟁은 상당한 정도의 국민 지지도를 확보함으로써 김 영삼 정부로 하여금 1995년 5 31 교육개혁조치에서 부분적이나마 교육대개혁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 힘이 되었다. 327) 전교조는 문민정부의 등장 이후 교육개혁운동을 더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1995년 4월 26일 서울 프 레스 센터에서는 참교육시민모임, 전교조, 전국연합, 민주노총(준), 한국노총, 여성단 체,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17개 단체가 참여하는 올바른 교육개혁을 위한 범국민연대회의 (범국 민연대회의)를 결성하고, 교육개혁의 명확한 방향과 근본적인 철학 수립, 획기적인 교육투자를 통한 교육환경 개선, 비민주적인 교육제도와 관료적 교육행정의 개선을 통한 학교 현장의 개혁 등 이 필요하다고 촉구했으며, 자체의 개혁안을 교육부 장관김숙희)에게 전달했다. 이에 문민정부는 교 육개혁안을 서둘렀고, 그 결과가 5.31 교육개혁안 으로 발표되었다. 교육운동에서 또 하나의 과제는 각급 사립학교의 부패와 비리이다. 이 문제는 교육이 갖는 공익적 성 격을 외면하고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재산증식 수단으로 활용하고 기업적 사용자의 입장에서 교 사와 학생을 억압하는 지배구조로부터 연원한다. 그리하여 양식있는 교사와 의기발랄한 학생은 재단 의 이와 같은 탐욕과 전횡에 굴하지 않고 저항해 왔다. 이 저항투쟁의 과정에서 수많은 교사와 학생이 고통과 수난의 삶을 걸어왔다. 이른 바 사학정상화 투쟁이다. 전국 각급 학교에서 자행된 재단의 횡포 와 탄압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 그 가운데 광주 전남지역의 사학 부패와 비 리는 전국적으로 두드러질 정도로 심각했고 그에 맞선 정상화 투쟁의 과정 또한 치열했다. 이러한 심 각한 상황을 반영하여 광주 전남 지역에는 사학정상화추진특위 가 구성되어 활동했다. 광주 전남 사학정상화 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교로는 목포여자상업학교, 나주세지중학교, 무안해제중 학교, 영암여자중학교, 함평나산중고등학교, 목포신명여자상업학교 등을 들 수 있다. 대학으 로는 조선대학교, 호남대학교, 서남대학, 남도예술대학, 성화대학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제기된 교육운동의 과제로 해직 교원들의 원상복직운동과 국가권력에 의해 피해받은 교원들에 대한 피해보상운동, 그리고 전교조 합법화 운동이 진전되었다. 원상복직운동은 1992년 3월에 전국해직교사원상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결의대회를 갖고, 뒤 이어 범국민서명운 동본부를 발족시켜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전교조 해직교사에 대한 조건 부 복직방침을 발표했고( ), 1994년 3월에 해직교사 1,294명을 특별채용 형식으로 복직 시켰다. 그리고 피해보상문제는 유죄판결 받았던 원심이 파기되고 무죄판결이 이루어지는 절차에 따 327) 전교조, <참교육 한길로>, 905쪽. 2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9 라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5 18 민주화운동 관련 유죄판결 해직 교원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11명(교수 6명, 교사 5명)이 1998년 12월 말에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국가배상을 청구하여 소정 의 배상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아울러 1996년 9월에는 전교조 합법화를 촉구하는 각계인사 서명 기 자회견을 비롯하여 합법화 운동이 추진되었고, 그 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1999년 1월에 교원노 동조합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마침내 합법화를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90년대 교육운동 은 80년대 말에 출범한 전국교원노동조합의 힘을 바탕으로 진전되었고, 10만 조합원의 거대한 힘이 중요한 과제들에 대하여, 비록 한계는 없지 않지만, 가시적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하겠다. 4) 농민과 여성운동 80년대 농민운동이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등 종교조직의 확장 발전으로 활성화되면서, 다 른 한편으로는 종교의 틀로부터 벗어난 자주적 농민조직의 광범한 발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전국 조직으로서의 전국농민협회, 그리고 자주농민들의 자율적 조직으로 함평농우회 등 각 군 단위 농민조 직이 그 사례이다. 또한 이와 같은 조직적 발전에 토대한 투쟁력의 급속한 신장으로 인해 각종 농민집 회와 시위 및 농성투쟁 등 농민운동은 광범한 발전을 이루었다. 90년대 농민운동은 이와 같은 조직적, 행동적 발전을 토대하여 더 진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조직적 측면에서 보면, 우선 전국조직의 계기적 발전이 집중적으로 실현되었다. 1987년에 전국농민협회 가 발족한데 이어, 1988년에는 전국의 14개 농업농민단체들이 공동주최한 농축산물수입개방저지 농 민대회가 계기가 되어 전국농민단체협의회(전농협) 가 출범했다. 그 후 가농, 기농, 전농협 등이 전 국적 단일조직 설립을 논의하였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1989년 3월 가농과 기농 및 이에 동조 하는 일부의 군단위 농민회가 참여하는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연) 이 결성되었다. 전농연 과 전 농협 이 공동으로 쌀값보장과 전량수매 대책위원회 를 결성한 뒤 전국대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전 국적 단일조직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그 성과로 마침내 독자농(자주농)까지 결합한 전국농민회총 연맹 (전농)이 1990년 4월 24일에 탄생하게 되었다. 전농은 74개의 군단위 농민회 조직을 기반으로 출발하였다. 328) 지역적으로는 전남이 18개, 경북이 14개, 전북이 11개 순이었다. 이는 가농과 기농의 종교적 농민운동의 틀을 극복한 자주적 농민의 결합체이며 상향식 조직화를 통해 전국적 통일체를 형 성했다는 점에서 80년대 농민운동으로부터 도약을 실현했다고 평가된다. 농민조직의 분열을 조장하 고 이를 통해 분할지배를 획책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주체로서의 전농 결성이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결합력이 강한 전국 통일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에 광주 전남 지역운동은 전농이 전국적 운동과 결합 된 연대활동과 지역의 독자적 운동으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주도한 농민운동을 보면, 90년대 전반기에는 농축산물수입을 자유화하 고 저관세 정책의 확대실시에 대응하는 UR협상저지 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고, 후반기에는 수 328) 창립 당일까지 자격(회원 50명 이상, 회비납부 완료)을 갖추어 가입한 군농민회는 74개 군이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37

240 입개방을 전면화하는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한데 대응하여 현장의 농민대중과 결합력을 강화하는 한 편 그에 반대투쟁이 각 지역에서 격렬하게 진전되었다. 말하자면, 농어촌종합발전대책이라는 이름하 에 구조조정을 통해서 국내 농업을 축소키기고 해외에 의존도를 높이려는 농업축소정책에 대한 저항 투쟁이었다. 전농의 대표적인 UR협상저지 투쟁은 1990년 9월 7일에 위의 농업정책을 반대하는 제1차 전국농민 대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대회는 농산물수입저지, 농어촌종합발전책분쇄, 농산물 제값받기 를 표 제로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 9개 도에서 3만 5천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계속 된 이 저항투쟁은 그 후에 시군 단위 조직에서도 지속적으로전개되었다. 나아가 전농은 농업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1991년 6전(전노협, 전농, 전대협, 전빈연, 전교조, 전민련)을 중심으로 한 민자당 일 당독재 분쇄투쟁에 연대하면서 연대연합조직의 단초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전국연합)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연대투쟁의 형태로 1993년부터 1994년까지는 300여개 시민사회 단체들로 구성된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 를 중심으로 정부의 개방정책을 저지하고 우리 농 업을 지키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94년 들어 UR저지 투쟁은 국회비준저지투쟁으로 전환되었다. UR협상의 국회비준저지를 위한 농민들은 국회의원사무실 농성, 야3당 장기점거농성, 민정당 당사 타격투쟁, 천만인 서명운동 등 다 양한 투쟁방법을 동원했다. 1994년 2.1전국농민대회 는 9개 농민단체가 공동으로 대회를 준비하여 치러졌는데, 4만여 농민들이 대학로에 모여 본대회를 치루었다. 2.1농민대회는 건국 이래 가장 큰 전 국대회였다. 농민들의 이와 같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UR반대투쟁은 비록 WTO국회비준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WTO이행특별법 제정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농민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를 형성하게 했고, 농민대중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농민운동이 더욱 더 전지구적인 상황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제시해 주었다. 농업개방을 전면화 하는 비준안이 1994년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농민운동진영은 한동안 침체에 빠 져들었으나, 견고한 조직기반을 토대로 하고 있는 농민운동은 변화된 환경에서 새롭게 내실을 기하 는 방향으로 나서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국집중투쟁보다는 군, 도 단위의 자생적이고 주체 적인 실천활동을 전개 해나갔다. 만냥고추, 청운무종자 피해보상투쟁, 사과제값받기 투쟁, 골프장반 대, 쓰레기장 반대 등 지역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역투쟁을 활발히 전개해갔다. 한편 지자체 선 거대응, 농촌청년조직건설, 민원상담소 개설, 농업신기술 연구 등 생활운동영역의 확대를 통해 농민 조직을 지역대중 중심의 일상활동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전농의 사업도 경제사업 활성화, 제도 정치권 진출, 협동조합 참여, 지역운동영역 개척 등으로 다원화, 다양화 되었다. 1996년에 들어서면 서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요구, 신농정 폐기, 농업회생대책 요구를 하면서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97년에는 소값 파동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고 대선후보들을 압박하 기도 하였다. 11월 18일에는 2만 5천여명의 농민들이 여의도 고수부지에 모여 대선후보들을 초청하 2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1 여 농업발전공약을 제시할 것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199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 전농은 연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진전시켰다. 이전부터 함께 해왔던 농촌 봉사활동을 통한 대학생과의 연대를 넘어서 현장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성사되었다. 그 사례로서 전농 은 농민대회를 노동자대회와 결합하여 개최해 나갔다. 한번은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한번은 농민이 중심이 되어 함께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상설적인 공동투쟁체 건설의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전국민중연대 를 결성하게 되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농민운동은 전농과 결합된 활동 외에도 자체의 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 5월에 결성된 광주 전남도연맹과 이에 결 합된 22개 군 농민회가 꾸려짐으로써 도 연맹-각 군 농민회-면 지회-마을 분회의 체계가 정립되었 으며, 운동의 중심축은 군농민회에 두었다. 8월 들어서 분회 및 지회(면농민회)의 결성, 군 단위 수련 회 및 단합대회, 군농민회 창립대회 등을 통해 전남도연맹의 지역적 토대가 마련되어 갔다. 이와 같은 조직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이 지역 농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 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농민운동의 다양성은 지역 현안 투쟁현실에서 극 적으로 드러난다. 90년에만 하더라도 곡성군 옥과면에서 부당경지정리 시정 요구 투쟁(6.20.), 광양 군농민회의 민자당 규탄대회(7. 20), 해남군농민회(8.3.)와 나주군농민회(8.5.)는 의료보험료 인상 및 차압에 항의집회와 시위를 벌렸다. 이 밖에도 무안군 마늘 양파 가격보장 요구 공청회와 양파투척 투쟁, 과천 청사 상경투쟁 (140명), 쌀수입 저지 단식투쟁, 난시청지역 TV수신료 납부거부투쟁(강 진, 구례, 장흥, 해남), 특정산업폐기물처리장 설치반대투쟁(보성), 마늘 양파불량종자 피해보상투 쟁(무안), 만냥고추 불량종자 피해보상투쟁(영광) 등이 그 사례이다. 이에 대한 당국의 탄압도 강경했다. 광주에서 열린 전남농민대회(9. 7)는 전국 9개도에서 3만5천여 명이 참석하여 치른 제1차 전국농민대회 의 일환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경찰은 9월 5일 부터 전남 지역 전체에서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원천봉쇄가 자행되고 급기야 9월 6일에는 도지사, 광주시장, 도 경국장, 검찰지검장이 대회불허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전농 전남도연맹은 대회 강행과 사수를 결의하고 9월 6일 700여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전야제를 개최하였으며, 마침내 전국농민대회를 성사 시켰다. 농민운동의 치열성이 드러나는 사례들이다. 이어서 9월 22일에는 전국 45개 군농민회 주최 로 농민 7천여 명이 참여하여 유알협상거부 농발대 분쇄 및 제값받기 제2차 전국농민대회 를 개최 하였다. 9월과 10월의 농번기를 지나 수확기에 접어든 11월에는 전국 52개 군농민회 주최로 농민 1 만2천여 명이 참여하여 쌀값보장 및 전량수매챙취대회 를 각 군별로 개최하였다. 전남지역에서도 11일 광양군농민회가 전량수매를 요구하며 벼가마를 불태웠다. 이후 벼가마 불태우기, 이장단의 수 매거부 및 사표제출 등의 투쟁이 확산되었다. 이 쌀값투쟁은 해마다 각 지회와 분회에서 거듭되는 농 민의 생존투쟁이다. 도 연맹은 각 부문운동단체와의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예를 들면, 광주 전남 민주연합 의 사무처장에 농민운동 경력 인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노동, 농민, 청년, 학생, 전교조 등이 참여하는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39

242 민중연대회의 에 정책실장이 참여하였고, 민중대회에 농민들이 결합하였다. UR공대위 에는 도연 맹 사무국장이 공대위 사무국장에, 부의장이 UR공대위 공동의장을 맡으면서 UR공동사업을 추진하 였다. 그 외에도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투쟁이나 사업, 농활, 축제, 대회 등에 농민들이 개별적 으로 참여하거나 집단적으로 결합하였다. 특히, 농학연대 사업으로서는 농활이 가장 활발히 진행되었다. 18개군 250개 마을에서 4천여 명의 학생들 이 농활에 참여하였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례는 1998년 9월 15일에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전국농 민대회인데, 이 대회에 전남지역에서는 120대의 버스에 4,716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농민운동에서 농민들이 실천한 투쟁의 진실은 다음 표를 보면 안다. <표-7> 1999년 전남농민의 상경투쟁 일시 장소 대회명 참가자수 3월 3일 농협중앙회 본부 농협사태의 올바른 해결과 진정 개혁을 위한 비상농민대표자 대회 3월 18일 농협중앙회 본부 진정한 협동조합 개혁을 위한 전국농민조합원대회 명 4월 24일 대학로 7월 16일 국민회의당사 앞 12월 10일 서울역 광장 12월 17일 정부종합청사 전농 창립 9주년 기념 및 협동조합개혁, 농정공약 이행촉구 전국농민결의대회 농가부채해결 협동조합개혁과 의료보험 완전통한 농정공약 이행촉구 전국농민결의대회 농가부채 완전해결, WTO수입개방 반대, 국가보안법 철폐 99 전국농민대회 농가부채완전해결 농민탄압규탄 4대 농민개혁입법안 쟁취 2차 전국농민대표자대회 , 광주 전남지역 농민운동의 중요한 축이 되었던 한국 가톨릭농민회 광주대교구 연합회의 1990년대 활동도 주목할만하다. 80년대 이전의 치열한 투쟁을 넘어서 90년대에는 우리밀살리기운동, 우리농촌 살리기운동, 생명공동체운동 등을 향해 다양한 대안적인 활동을 전개해 왔다. 전농이 투쟁활동에 집 중하였다면 가농은 농민들의 일상에 접근하면서 도농직거래운동, 생명운동 등 다양한 대안적인 실험 들을 해 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귀농운동까지 벌이면서 가농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전농의 운동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과제와 영역을 개발하고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전농 이 경직될 때 가농이 오히려 유연하고 활성화된 자세로 국면을 전개시켰으며, 전농과 다른 농민단(예 를 들어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사이를 중재하면서 농민단체협의회 활동을 활성화해 왔다. 1980년대와 비교해 볼 때, 1990년대의 농민운동에서는 반독점 및 반독재라는 거대담론은 약화된 반면, 농민들의 실질적인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욕구들을 반영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운동의 필요성 2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3 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져 왔다. 329) 또한 국내농업문제가 국제적인 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국내농업을 방기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농민보호요구가 커지 게 되었다. 전과는 달리 단순한 거부 및 반대라기보다는 지배권력의 방향설정과 정책운영을 비판하고 대안도 제출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음에는 90년대 광주 전남지역의 여성운동을 살펴볼 차례다. <광주 전남여성회>의 결성과 활동 으로 대변되는 80년대 여성운동은 일하는 여성의 권익실현 과 여성억압의 극복 이라는 여성운동 의 정체성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을 통해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입 증했다. 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된 양동시장 노점상들의 철거저항싸움에 대한 지원활동이 이를 입증한 다. 이에 이어서 1990년대 이 지역의 여성운동은 1988년에 결성된 <광주 전남여성회>의 활동을 가 교로 하여 소수 인텔리여성 중심의 여성운동에서 전업주부,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사무직 여성노동 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되어갔으며 각 영역별로 자생적인 여성운동조직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광 주여성노동자회(1990), 광주여성의 전화(1990), 전남여성농민회(1991), 광주 전남여성문제특별위원 회(1991)가 90년대 초반의 대표적인 조직적 성과이다. 1988년 고흥에서 발생한 경찰의 임산부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광주 전남여성 계는 다수 단체들이 공동대책위를 만들어 철야농성을 전개하는 증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순 경 사건은 성폭력 문제가 곧 여성의 인권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그후 1991년 김부남 사건, 1992년 김보은. 김진관 사건과 함께 성폭력특별법 등 법제정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또한 이 운 동의 과정에서 여성연대의 필요성을 제기되었고, 그 성과로 1991년 광주 전남여성문제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이전에는 민주화운동의 일환이었던 여성운동으로부터 여성의 정체성 회복운동으로 본격적인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1990년 초반 순천과 목표, 여수에서도 여성들이 소극적 삶에서 탈피하여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 는 모임이 속속 결성되었다. 진보적인 여성단체를 표방하는 순천우리여성회(1992년 5월)가 결성되었 으나 30여명의 회원이 주부모임, 모둠사랑 등 소모임 활동을 가지면서 활동했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활동이 쇠퇴되었다. 목포의 경우 1994년 목포참여성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여 여성의 권익실현 과 사회전반에 관한 인식확대를 위해 모임을 결성하여 여성학과 시사문제, 문화활동 등으로 조직활동 을 전개하다가 1996년 해체되었다. 여수지역에서는 1994년 함께하는 여성회를 조직하였으나 1998 년 해체되었다. 1990년대 광주 전남여성운동에서 특징적인 것은 여성농민운동의 성장이다. 1990년대는 전남지역 에서 각 군단위에 여성농민운동 조직이 광범위하게 결성되었다. 전남여성농민회는 이 땅의 자주,민 주, 통일과 여성농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여성민 대중조직을 건설하고 함께 싸워나가는 것 을 조 직의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마을조직은 기존의 부녀회를 여성농민회로 전환시키거나 각 시군농민 329) 김철규, 한국농민운동의 전개과정과 운동담론의 변화, 경제와 사회 34 (한울, 1997), 78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41

244 회 산하 부녀부나 여성위원회 조직을 시군여성농민회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름농활 기간동안 총여학생나 농촌봉사활동 부녀반을 통한 여성농민농활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연대사업의 독자성을 확보하였다. 전남여성농민회는 일반적인 농산물 가격투쟁만이 아니라 학교급식문제, 어린이날 문제, 농촌지역 돌봄서비스,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 등 농업정책 10대 개혁 안을 마련하여 다양한 집회를 주도해 나갔다. 1990년대 조직된 군단위 조직은 해남군, 영광군, 화순 군, 무안군, 구례군, 순천시, 진도군, 보성군, 강진군, 나주시 등 9개 영역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규모 나 활동면에서 전국 최대 여성조직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여성노동자계급의 구성 변화(고졸 단순 사무직 여성노동자의 급증, 기혼 여성노동자의 증가)를 반영 하여 한국여성민우회는 사무직 여성노동운동분과와 생활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사무직 여성노동자들 과 전업주부들의 조직화를 주요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도 미조직 영세 사업장에 취업하게 되는 기혼여성노동자들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탁아소 운영, 직업훈련, 취업 알선, 상담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과제를 함께 아우르는 여성노동자 외곽지원단체의 성격으로 전환하 였다. 광주 전남에서도 노동자와 주부들이 참여한 일사랑자주여성회(1993년)가 결성되었고 추후 일 사랑자주여성회의 주부조직인 새누리주부회는 광주 전남여성회와 통합하여 광주여성민우회(2000 년) 를 결성하였다. 여성노동자회는 여성노동조합 광주 전남지부(2000년)를 결성하여 특수 사업장 여성노동자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여성의 전화 역시 전남 영광군(2000년), 목포시(0000년) 등에 지부를 결성하였다. 1990년대는 여성관련 법과 제도가 급격히 변화한 시기이다. 법 제도 개선운동은 여성들의 삶 속에 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1991년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 1993년 성 폭력특별법 제정운동, 1994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운동, 1996년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운동 등이 가 시적 성과이다. 이와 같이 여성관련 법 제도 개선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진보적 여성운동 이 구축해 온 여러 부문과 지역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한 현장의 상담활동을 통해 법 제도화가 필요한 과제를 발굴했고, 주요시기 정치적 입장이 상이했던 여성단체들 간의 연대를 통해 여성운동의 요구를 단일화시켰기 때문이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74개 범 여성 사회단체가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 고,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 시 22개 여성 시민단체가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추진 범국민운동본 부 를 결성하여 운동을 전개하는 등 여성연대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90년대 광주 전남여성운동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90년대 초 반에 강조되었던 여성운동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 추진능력이 발전했다는 사실 이다. 이는 이전의 남녀통합조직에서 남성주도성으로 인해 주변화되었던 여성의 존재성을 강화하는 의미가 있다. 다음에는 각 부문운동의 분화발전 양상을 강조할 만하다. 여성노동자에서 사무직 여성 조직이 발전했고 여성농민조직에서 각 군단위 및 그 하위의 소모임들이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확산 2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5 되었다. 세 번째는 여성운동의 법적 제도적 발전을 지적한다. 영유아보육법, 성폭력특별법, 남녀고용 평등법, 가정폭력방지법 등이 그 가시적 성과이다. 이는 80년대 이전의 운동이 폭력적 저항투쟁 형태 였다면, 90년대 이후에는 비교적 온건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법제정을 통한 제도화의 길을 추구했다 는 점이다. 그러나 90년대 여성운동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과제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운동의 미래발전을 위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80년대 이전의 민중운동과 90년대에 발흥한 시민운동 간에 입장차이 와 시각차이가 두드러짐으로써 양 진영 간에 균열이 확대되는 경향이다. 이는 거시적 사회구조의 효 과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저항과 도전세력에 대한 지배권력의 분할지배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로 인한 운동세력의 약화는 권력의 억압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현실화됨을 오늘의 현 실에서 확인한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운동세력의 광범한 연대와 결합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는 여성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독자성 이후의 고립화 문제이다. 광주 전남 여성운동이 민중운동이나 시민운동과의 연대를 통한 민주화투쟁과 연계성이 약화되면서 점점 여성들 만의 투쟁영역으로 고립되는 현상이 초래되는 현상이다. 이는 분화와 통합의 유기적 결합 즉, 독자적 영역의 집중 개발화 함께 연대영역의 활동을 보강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5) 문화예술운동 90년대 광주 전남의 음악운동은 거리음악제가 서막을 장식했다. 이는 오월거리굿 이라는 이름으 로 5 18의 중심 현장이었던 금남로 가톨릭센터 로비와 대로변에서 시작되었다(1990). 5월 19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진행된 첫 번째 오월거리굿은 민중가수 김원중, 노래그룹 소리모아 의 박문옥, 가톨 릭 정의평화위원회 간사 김양래와 홍세연, 우리소리연구회의 정세현 등이 주도하여 굿마당을 열었는 데, 이 행사는 금남로를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무대가 되었다. 1992년부터 이 음악제는 광 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민중가수들과 노래패들을 초청하여 참여의 폭을 넓혔다. 1993년에는 타지역 문화팀들의 출연요청이 쇄도하여 대구의 소리타래, 제주의 섬하나 산하나, 마산의 소리새벽, 성남의 노래마을 등이 참가하였으며, 불려진 노래는 들어라 양키야, 반전 반핵가, 내사랑 한 반도, 님을 위한 행진곡, 5월의 노래 2, 죽창가, 광주출정가 등의 반전, 반미, 자주통일에 관 한 노래와 아울러 타는 목마름으로, 오월의 노래 1, 솔아 솔아 푸른 솔아 등의 서정적인 곡들도 포함되었다. 1994년에는 필리핀의 민중가수(Jesu Manuel Santiago)를 초청해 자유, 민주, 정의와 평 화를 위한 노래로 무대를 장식했다. 이 음악제는 2002년 5월에 14번째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접었다. 거리음악제는 5월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실내공연이 중심이었을 때 열린 공간에 서 개최된 최초의 문화공연이었다. 둘째, 타지역 가수들이 참여함으로써 5월운동에 대한 음악사회학 적 폭과 깊이를 확장시켰다. 즉 광주항쟁과 그 사회적 실체를 음악적 형상화를 통해서 지역 내부에는 위로와 격려의 힘을 창출하고 밖으로는 광주와 광주항쟁을 널리 공유하게 만들어서 전국화와 세계화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43

246 를 실현하는데 기여했다. 셋째, 민중가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문화행사였다. 열린 공간에 대중들 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타지역 민중가수들이 이 공연을 통해 힘을 얻고 자신의 지역과 중앙 무대에 진출함으로써 민중가요의 확산과 대중화의 계기가 되었다. 넷째, 민중가요가 창작되고 공연되 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중가요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측면이 있다. 끝으로 이 행사의 명칭 이 오월음악제이지만, 오월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통일, 교육, 노동, 민족음악 등의 광범한 영역에 걸 친 운동의 장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도 노태우 정권 치하에서는 강렬한 저항투쟁이 계속되었고 그에 따라 문화예술부 문에서도 그 흐름을 함께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광주출정가>, <남대협 진군가>, <농민가>, 등을 부르며 열기를 상승시켰다. 그런데 이 시기 노래운동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양상은 다양한 노래패들의 형성발전이다. 남총련의 한반도 노래단(1996), 서총련의 조국과 청춘, 부경총련의 좋은 친구 등이 있었고, 특히 남총련의 한반도 노래단은 공연과 함께 창작도 병행했다. 한반도 노래단은 1년에 100회를 넘는 현장 초청공연에 참여했으며,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음반도 제작하는 활동을 펼치고 2009년에 막을 내렸다. 전남의 목포대학에서는 1988년 2월에 노래패 울림소리 가 창단되었고, 순천대학에서는 노래패 황토마루 가, 목포전문대학에서는 노래패? 이 조직되어 활동했다. 이 가운데 목포의 대규모 노래 운동은 1989년 전교조 탄압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일어났다. 앞에서 보았듯이 수많은 교사들이 파면 해직되는 상황에서 목포의 문화단체인 갯돌의 노래모임인 아침, 목포대학교 노래패 울림소리, 목 포전문대학 노래패 한, 그리고 간호전문대학 문화패 선소리 등은 9월 2일 목포전문대학 강당에 서 해직교사들을 위한 모금노래공연 선생님 힘내세요 를 개최했다. 또한 목포민족문화운동연합(목 문연)은 극패 갯돌, 노래패 어울림, 미술패 대반동이 소속된 연합단체로서 지역의 문화운동을 주도했 다. 이 가운데 목문연과 노래패 어울림은 5월항쟁 10주년 노래극 <다시 오월에>와 전교조을 위한 공 연 <이 작은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1990)>를, 그리고 1991년에는 <다시 오월에(1991)>를 공연했다. 이후에도 1993년에는 통일을 기원하며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를 공연하여 비전향 장기수를 주제로 다루었으며, 1994년에는 <뮤지컬 KIM>을 갯돌마당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노래패 어울림의 경우에 1993년 이전에는 큰 행사의 한 프로그램으로 배치되어 실연하는 큰 무대중 심으로 활동했다면, 1994년 이후에는 소규모 공연의 노래운동으로 좁은 공간에서 관객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노래의 선곡도 투쟁가요보다는 서정적인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는 변화 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각 부문운동의 독자적 분화와 새로운 흐름으로 다양하게 분출하는 시민운동의 개화와 병행하여 하나의 추세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의 노래패와 아울러 노동자 노래패도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다. 1988년에 구로지역의 노동자들 만으로 구성된 노동자노래단 과 삶의 노래 예울림 이 만들어 졌고, 이들이 1992년에 노래패 꽃다 지 로 창립되어 노동가요를 창작하고 보급하는 문화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광주 전남지 2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7 역에서는 노동자 노래패가 사업체별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학생운동권에서 독자적으로 노래운 동을 전개하던 박종화가 노래에 관심있는 노동자들을 모아 집체극 다시서는 노동자 를 1990년 11 월에 공연했다. 그런데 이 공연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 사업장별로 노래패를 만들었다. 아시아자동차 (새벽빛), 로케트전기, 대우전자, 금성알프스 노래패가 그들이다. 이들은 1991년에 <광주노동자노래 패연대회의>를 결성하여 활동공간을 확장했고 년말 송년회에는 130여명의 노래패들이 모일 정도로 성장했다. 그 후 서울차체, 대우캐리어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1993년에 광주노동자노래패협의회로 발전했다. 이 협의회는 해마다 각 대학 대동제에 초대되어 노학연대형태로 공연했다. 이들은 매년 정 기적인 노동행사들, 예를 들면 각 수준별 정기대의원대회, 춘투, 파업현장에 참여하여 투쟁의 힘을 증 강시켜왔다. 1996년 12월에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시도했 고 이 때 노래패협의회는 투쟁의 문화선전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우리들의 사랑법 을 무대에 올렸고, 1997년에는 집체극 아빠 힘내세요 를 공연했으며, 매년 대학, 산업체, 전 남도내 각 투쟁현장을 방문하거나 초청받아 수많은 공연을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공연으로 세월초 촛불집회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 또한 공무원노동조합의 노래패들은 2002년에 닻을 올리기 시작했으나, 노동조합의 토대가 넓은 만큼 활동범위도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이들이 많이 부른 노 래는 파업가, 단결투쟁가, 또 다시 앞으로, 철의 노동자 외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 5월의 노 래2, 광주출정가, 광주여 무등산이여, 꽃아 꽃아, 끝내 살리라, 국가보안법철폐가, 들어라 양키야, 반 미반전가, 투쟁의 한길로, 동지여 내가있다, 여성전사, 민주청년가 등이다. 종합예술단체인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광주시지회는 1998년에 광주문화예술큰잔치를 열었다. 3부로 구성하여 제1부는 얼쑤, 택견, 경당이 공연했고 제2부는 놀이패 신명 이 천년의 꿈 을 무대 에 올렸다. 제3부가 노래공연으로 희망을 위하여 라는 주제아래 박문옥이 리더인 소리모아팀과 박 종화, 김원중이 출연하였다. 그리고 광주민예총 음악위원회는 2006년 12월 18일에 삶의 노래는 어 딨나요? 를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기획 공연했다. 주로 광주에서 활동하는 민중가수들로 김원중, 류영대, 박문옥, 박종화, 임형선, 정용주, 주하주, 청춘의 도시, 프롤로그가 출연했고 초대손 님(우정출연)으로 1980년대 광주의 민중가요계의 중심이었던 범능스님(정세현) 330) 과 사람과 사람, 안 치환, 허브앙상블, 한반도 등이 함께했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음악제를 소개하면서 음악운동에 대한 정리를 마무리하려 한다. 광 주항쟁기념음악제의 출발은 윤이상이 작곡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Examplum, memoriam Kwangju)'이 1981년 5월 8일 독일 쾰른 WDR 라디오방송 교양악단에 의해 초연됨으로써 비롯되었 다. 그 후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1989년 제1회 5월문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5 18 희생자 진 혼음악제, 1995년 5월 21일 개최된 5월 음악회, 1997년 제17주년 기념공연으로 열린 전월선 정태춘 통일음악회, 1998년 주년 기념행사였던 록페스티벌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330) 정세현은 출가하였고 이 후로는 주로 불교관련 노래를 창작, 공연하고 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45

248 1999년 빛소리 오페라단, 광주광역시, KBS광주방송국, 광주일보사의 공동주최로 5 18민중항쟁 19 주년 기념 창작오페라 무등둥둥, 그리고 5 18항쟁 20돌을 맞이하여 임진각에서 개최된 통일음악 제 등이다. 이와 같이 적지 않은 음악제들이 공연되어 온 과정을 보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그 하나는 음악제라는 형식자체가 투쟁성보다는 예술성을 지향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 로 노동음악이나 민중음악과 같은 투쟁성보다는 온건하고 추상화된 성격을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술적 행사이지만 이에 형상화된 5월정신은 점차 희미해져가고 5월음악을 독자적으로 정립하려는 예술운동적 지향은 공연주체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출범 한 5월창작가요제 가 5월정신을 예술화하는 주체로서의 존재값을 갖는다고 본다. 이어서 미술운동부문을 정리한다. 80년대가 경과하면서 광주항쟁의 에너지가 문화영역에 분출되 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각종 문화패의 대대적인 출현과 이들이 주축이 된 다양한 창조적 작품활동에서 본다. 조선대학을 비롯하여 전남대, 호남대, 광주교대, 목포대, 순천대, 광주대, 동신전 문대, 서강전문대 등에는 다양한 대학생미술운동모임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학 미술 운동이 대중과 함께 하는 그림, 민족적 감성에 맞는 그림,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는 그림을 추구했다. 또한 이 시기는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오월미술을 비롯하여 오월음악, 5월연극 등 5월문화운동이라 는 시대적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 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점이야 말로 5 18이 이전의 여러 항쟁 과는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요체인 것이다. 특히 5월미술은 광주라는 지역을 벗어난 한국민중미술의 대명사가 되었고, 제3세계 미술운동사에서도 광주미술이 차지하는 위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배종민, 115). 이 시기에 지역의 대표적인 미술운동단체는 광주 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 )였다. 광 미공은 창립선언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역민의 예술적 잠재력을 고양시키며 민족미술의 새로운 지평 을 지향하면서 광주 YWCA에서 출범했다. 공동대표는 조진호와 홍성담이었고, 창립회원은 34 명이었다. 광미공은 출범과 아울러 초기에 주력한 사업이 교육활동으로서 문화유산답사를 1990년부터 1997 년까지 실시했다. 우리 문화유산을 바로 알고 민족의 삶을 재조명하여 역사와 사회인식을 심화하기 위해 관련된 전문가의 해설을 듣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더 체계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한 성과가 겨울 미술학교이다. 이 학교는 년 동안 6회를 지속되었는데, 그림, 조각, 문학, 학술, 평론, 문 화기획, 재야운동가 등을 포함하여 당대의 저명한 강사로부터 다양한 내용의 수준 높은 강의를 미술 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 듣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교육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80년 5월을 상징화하는 전시회를 계속 열어왔다. 5월전( ), 일하는 사람들전(1990, 1991, 1993), 삶의 현장전(1992-3), <전국청년미술제(1991-2), 광주통일미술제(안티 비엔날레, 1995, 1997)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90년 두 번째 5월전은 첫 해보 다 조직과 내용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10일간의 항쟁, 10년간의 역사 라는 표제로 구성된 이 2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49 행사는 보수대연합으로 흐르는 정치구도 하에서 광주항쟁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다 시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80년 이후 지난 10년간에 한국 사회에 주요 쟁점이 되었던 사건들을 주제로 선정하여 그림을 그리고 이를 전시하기로 했다. 그 내용 구성은 12 12쿠데타로 시작하여 보수대야합과 1990년대의 전망 으로 끝나는 25개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을 참여하는 작가들이 분담하여 각각 200호 크기로 제작하고 이를 시대 순서로 진열하였다. 미술인집단의 이와 같은 활동은 운동참여자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 우리의 역사의식을 강렬하게 일 깨우는 역할을 함으로써 5월운동의 한 축을 예술이 감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미공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참여활동은 공권력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96년에는 망월묘역에서 전시중인 작품 학살과 35인의 얼굴 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다음해에는 금남로에서 연 만인의 얼굴 전 에 전시된 작품 700여 점이 대부분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5 18에 대한 그 간의 탄압이 노태우 정권 이후부터 정당성을 잃게 되자 공권력의 탄압방식도 비열한 수법으로 변 화된 양상을 읽을 수 있다. 그 밖에도 <5월전사: 8미터*4미터), <5월부조연작> 등은 거대한 집단작품 으로 개인중심의 미술작업을 넘어선 새로운 지평을 열게된 작품들이었다. 걸개그림 형태에서 벽화로 변화된 양상도 주목할 만하다. 광주민중항쟁도 라고 명명된 이 벽화는 가로 10미터, 세로 16미터 크기인데, 전남대 도서관 옆 사범대 건물 동쪽 측면 벽에 그려졌다(1990년 6월). 제작은 전남대 그림패 마당, 예술대 그림패 신바람, 사범대 미술교육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벽그림추진위원회 가 맡았다. 그림의 내용은 광주항쟁 당시 총을 든 시민군의 패기에 찬 앞 모습을 배치하고 그 아래로는 항쟁의 주요 장면들을, 그 위로는 백두산과 조국통일운동의 의미를 담 고 있다. 민족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 학도들의 생활공간에 젊음의 열정과 조국애를 상시적으로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경찰과 정보기관에서는 이 벽화를 제거하려는 계 획을 수차에 걸쳐 시행하려 했으나 번번히 학생들의 저항에 막혀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오랜 생명력을 갖고 유지되었다. 이어서 안티-비엔날레라고 표현되기도 한 광주통일미술제도 소개할 만하다. 이는 1994년에 출범한 광주비엔날레가 광주의 역사성과 운동성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예술제 로 나아가는 경향에 대한 비판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미술의 관점을 가진 작가들이 결 합하여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안티비엔날레를 열었는데, 이를 통일미술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행 사는 망월동 묘역에 이르는 4킬로미터의 도로변에 설치한 장승, 솟대와 상여, 그리고 1,200여 개의 만장이 바람에 휘날리는 현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각각의 만장에는 민주와 통일, 반전 평화, 인권 과 생존권, 광주학살고발 등의 의미를 담은 구호가 매우 생동감있는 문장으로 새겨진 채 바람에 휘날 리는 모습은 그 전체가 매우 인상적인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이와 아울러 300여 점에 이르는 전국 민 중미술작가의 작품이 전시됨으로써 광주비엔날레 기간에 가장 관심을 끈 행사가 되었다. 광주미술인 공동체가 주도하여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제는 광주의 눈 을 표제로 하였다. 6개국 200여 명의 작가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47

250 가 참여한 대규모 전시회였고, 그에 따라 다양한 부문전시회로 구성되었었다. 특히, 통일미술창작단 솔빛 이 주관한 통일의 길 이라는 전시회는 분단 반세기, 그 푸르른 역사 라는 부제를 단 연작 역 사화로서 광주항쟁과 통일운동을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 광미공의 이와 같이 다 양한 역사적 활동은 2002년에 막을 내렸다. 6) 시민운동의 개화: 사회운동의 새 물결 90년대의 사회운동은 매우 이질적인 물결이 서로 겹치고 부딪치면서 흐르는 강물이었다. 91년 5월 투쟁에서 보았듯이 경찰의 폭력은 강경대와 이한열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잔혹했고, 이에 대 항하는 민주청년과 학생들의 저항은 스스로 생명을 바치는 분신자결의 대열을 이룰 만큼 극단적으로 격렬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의 거센 물결과 외국농산물 수입저지와 우리 농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물결이 전국 산하를 소용돌이쳤다. 그런데 이 격랑의 흐름 속에 유속과 색깔이 다른 새로운 물줄기가 조용히 합류하며 흘렀다. 이른 바 시민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말한다. 이 흐름은 이전의 사회운동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새 로운 사회운동 유형이다. 첫째는 운동주체가 다르다. 이전의 고전적 운동이 노동자, 농민, 그리고 청 년-학생과 선진적인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이와 아울러 먹고 살만한 중 간계급의 자율적 시민대중이 주류를 이루고, 이 밖에도 다양한 소수자 집단(장애인, 노숙자, 동성연애 자, 외국인, 등)과 다양한 직업집단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운동이었다. 말하자면 운동주체의 다양화 이다. 둘째, 운동이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가 전자의 경우에는 국민의 기본권과 먹고 사는 문제, 즉 생 존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후자는 생존권 이후의 문제, 즉 개인 삶의 의미가 되는 정체성이나 생 활상의 독립과 자율성 등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는 다양화되고 이질화된 욕구와 가치의 표현이다. 세 번째로 운동의 형태도 이전의 사회운동이 일정한 이념적 토대에서 체제도전적, 전투적 운동방식을 취 했다면, 시민운동은 대체로 脫 이념적이고 현 체제를 인정하는 토대에서 점진적 부분적 개혁을 온건한 방식으로 추구한다. 거대구조를 표적으로 삼는 혁명보다는 미시적 생활상에서 마주하는 구체적 사회 문제에 대한 개혁활동인 것이다. 한국에서 시민운동의 발전은 1989년에 창립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선도했다. 물론 현 대적 맥락에서 시민운동의 뿌리는 1982년에 설립된 공해문제연구소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본격적 인 운동단체로서 경실련은 이들에 비하여 매우 인상적인 성공을 이루어냈다. 경실련은 창립후 5년 동 안에 회원이 1만 2천명에 달하게 되었고, 상근 실무자가 중앙에 70명, 지방에 50명에 이르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했다(서경석, 1995). 또한 그 후 창립된 환경운동연합(1993년)이나 참여연대(1994년)에 서도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참여연대의 경우, 회원수는 1994년에 227명에서 1999년 5월 현재 3,624명으로 급증했으며, 창립 초기 상근간사는 1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1999년에는 무급 상근간사 및 반상근간사를 포함하여 49명이 직접 종사하고 있다. 자원봉사자의 실태를 보면, 출범 당 2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1 시 1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1999년 6월 현재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24명, 국제인권센타 22명, 아파트 공동체연구소 14명, 사회복지위원회 11명 등 약 140여명이 자원봉사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희연, 2000). 물론 이는 극히 성공적인 시민단체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우 리는 90년대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된 객관적인 지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시민운동의 발전양상은 구체적인 운동사례에서 더욱 현실감있게 확인된다. 그 하나는 한국 시 민운동을 선도했던 경실련이 1989년 창립하면서 추진했던 금융실명제 실시 촉구운동이었다. 이는 정경유착과 재벌의 부패로 특징지워지는 천민 자본주의에서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 안의 하나로 제기되어 국민과 여론의 열띤 성원을 받았던 운동이다. 이전의 민중운동이 폭력적 지배 권력에 대항하여 피흘리고 생명을 바쳐 싸웠다면, 이 새로운 운동방식은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이 며 담론투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이 곧 바로 금융실명제를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1993 에 실시하게 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밖에도 경실련은 土 地 公 개념, 호화사치품수입반대, 골프장의 환경파괴, 쌀시장개방반대, 재벌의 증여상속문제, 성폭력추방, 공명선거, 부정 부패추방, 정보공개법, 지방자치법 개정, 행정구조개혁, 등 경제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광범한 영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출하였다(박형준, 2001). 다음으로 1994년에 창립된 참여연대는 재벌과 금융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少 額 株 主 권익찾기 운동을 통해 대주주의 횡포를 막아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다. 또한 이 단체는 내부비리고발자지원센터, 사법감시센터, 의정감시센터, 맑은사회만들기본부, 작 은권리찾기운동본부, 경제민주화위원회, 사회복지위원회 등을 상시적으로 운영하여 구체적인 성과를 실천하고 있다(조희연, 2000). 이와같은 사례가 개별단체의 운동이라면, 연대운동으로써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00년도 국회 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전개한 낙천 낙선운동 이었다. 이 운동은 전국 각지의 970개 시민단체가 연 대하여 총선시민연대 를 결성하고, 이를 주체로 하여 전국적인 낙천, 낙선운동을 벌렸다. 기존 정치 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워낙 컸기 때문에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은 전국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공천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낙선대상자로 선정된 후 보의 70%를 낙선시켰고, 특히 집중낙선대상자 22명 가운데 16명을 떨어뜨렸는데, 이 중에는 여당 과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포함됨으로써 정치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렇다면 광주 전남 지역에서 시민운동은 어떤 양상으로 진전되었는가? 시민운동의 주체를 시민 단체라고 할 때, 광주 전남지역 시민단체의 실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가 현재 상태에서 희소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 광주광역시가 간행한 광주지역시민사회단체편람 (1999, 2006)은 비 교적 광범한 자료를 담고 있다. 이 자료집에는 1999년 현재 282개의 시민사회단체(종교단체와 직능 단체 포함)에 관한 개괄적인 사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단체들 가운데 158개 단체에 대해서는 구체 적인 詳 細 자료를 추가하고 있다. 물론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시민운동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49

252 익성을 갖는 시민운동을 수행할 집합적 단위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시민운동의 가능한 주체로 규정할 수는 있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하여 시민운동단체 실태의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본다. 우선 이 단체의 발전 역사 라고 할 수 있는 결성시기를 보면, 광주YMCA(1920), 광주YWCA(1922), 국제엠네스티 광주지부 (1961), 광주흥사단(1965), 광복회(1965) 등과 같이 오래 전에 창립된 단체들이 있지만, 1990년대 이 후에 결성된 단체가 51.3%, 1980년대 이후에 결성된 단체가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80년대 말에 널리 피어나기 시작한 시민운동의 흐름과 일정한 관련성을 보이는 것이다(예를 들면, 광주지역 수질오염 범 시민대책위 출범, ). 이 단체들의 설립목적과 규모, 조직형태와 운영방식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이질적이고 다양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시민단체의 분포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는 분류 기준으 로 두 가지를 주목한다. 그 하나는 단체의 뿌리, 즉 본부의 소재지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단체인가 연 합단체인가 이다. 전자와 관련해서, 광주 전남에 현존하는 단체들 가운데 지배적인 위상을 점유하고 있는 단체들은 이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자생적으로 발전한 단체라기보다는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 본거 지를 둔 단체들이라는 사실이다. 위에서 지적한 YMCA, YWCA, 흥사단 등은 물론이고, 1990년대 이 후에 발족한 경실련, 환경련,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광주여성의 전화, 여성민우회 등이 그 사 례에 속한다. 한편 전국조직과 관계없이 광주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사례는 우선 5 18항쟁과 관련 된 유가족회-부상자회-오월어머니회를 비롯하여 광주시민연대, 참여자치21, 광주국제교류센터, 무 등산보호단체협의회, 민주주의민족통일광주 전남연합 등이다. 물론 전국조직의 지역단위조직으로서 중앙의 지침에 함께 하면서도 고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독자적 활동을 전개해 온 단체가 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지역에서 자생적-독립적으로 활동해 온 단체들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행동력은 상대 적으로 강조될 만하다. 두 번째 기준인 연합단체와 개별단체의 구분도 시민운동과 시민사회의 구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측면이다. 연합단체는 여러 개별단체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합된 단체를 의미하고, 개별단체는 연합 단체의 구성단위가 되는 독자적 체계를 갖는 단일조직의 단체이다. 예를 들면, 개별단체는 앞에서 언 급된 바 있는 YMCA, YWCA, 흥사단, 경실련, 환경련,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광주여성의 전 화, 참여자치21 등이 있다. 이 밖에도 200여 개가 넘는 다양한 단체들이 노동, 농민, 환경, 교육, 여 성, 청소년, 국제교류, 통일, 종교, 문화예술, 사회복지, 등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 조사에 의 하면(2001), 이 가운데 활동성이 비교적 높은 단체는 광주YMCA, 광주환경운동연합, 광주경제정의실 천시민연대,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광주YWCA, 참여자치21,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광주 전남진보 연대 등이 포함되며, 영향력 평가의 결과에서는 광주YMCA, 광주환경운동연합, 광주경제정의실천시 민연대, 광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광주YWCA, 광주시민사회단체총연합 331), 참여자치21, 광주여성단 331) 광주시민사회단체총연합은 이 연구에서 규정하고 있는 사회운동의 범주에서 가장 주변에 위치한다. 사회운동을 기존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 정의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단체는 제도권에 근접하여 저항과 도전보다는 온건한 비판과 협력의 길을 걷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2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3 체연합 등의 순서를 보였다. 연합단체는 위의 단체들이나 그 밖의 단체들이 결합하여 구성된 단체들은 민주주의민족통일광전전 남연합(1991), 광주 전남여성단체연합(1991), 광주광역시생활체육협의회(1991), 5월성역화를 위한 광주시민연대모임(1994), 광전남시민단체협의회(1996), 광주시민단체협의회(1998), 푸른광주21협의 회(1999),광주 전남여성단체연합(1999),광주광역시여성단체협의회(1999),광주 전남우리민족서로돕 기운동(2000),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광주 전남통일연대(2001), 광주시민사회단체총연합(2005) 등이다. 개별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하는 시민운동이 대체로 단체특수적 사안에 대한 소규모운동의 성격을 갖 는다면, 연합단체가 주도하는 운동은 이와 달리 더 일반적이고 광범한 영향을 주는 사안에 대한 대규 모적 장기적 성격을 갖는 경향이 있다. 특히 연합단체의 발전양상과 그 활동은 시민운동에서 전반적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다. 운동의 주제가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파급효과가 큰 문제는 비록 개별단체 의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관련된 여러 단체들이 연대하고 결합한 힘으로 추진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 이다. 예를 들면, 무등산생태보전문제는 기본적으로 환경단체와 관련이 깊은 사안이지만 이 지역의 여러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추진한 사실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개별단체의 운동사례보다 도 연합단체의 활동이나 연대활동에 주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연합단체의 활동이나 연대활동이라고 하더라도 광주 전남지역에서 진전된 시민운동의 사례 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여기에서는 연합단체의 활동들 가운데 주민의 참여도 와 그 효과가 컸던 몇 가지 사례로 한정하여 살펴본다. 첫 번째 사례로 5월성역화사업 에 관한 시민운동을 거론할 만하다. 이 운동은 문민정부로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이 5 18항쟁에 대하여 광범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는 특별담화( )를 배경 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광주시가 5 18항쟁기념사업 추진을 주도했지만, 추진과정에서 지방정부 가 보여준 관료적 권위주의와 경직성, 그리고 일방적, 졸속적 접근은 기념사업의 원만한 추진과 소기 의 성과에 중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인식한 시민사회로부터 광범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 한 상황에서 이 기념사업의 추진과정을 감시 감독하고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여 대안을 제시하기 위 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오월 성역화를 위한 시민연대모임(1994) 이 결성되었다 332). 이 모임 은 사회운동가들이나 5 18피해자들이 중심이 된 이전의 5월운동단체와 달리 대다수가 교수, 조경, 건 축, 미술을 포함하는 문화예술인,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전문가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이 특징적이 다. 이들은 기념사업의 역사성과 예술성 및 현장성 등을 적절히 판단할 수 있는 지적자원을 가진 인사 들로서 광범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대안을 마련하여 제출했다. 이전의 민중운동이 지배권력 과 기득권층의 일방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피흘리는 저항투쟁이었다면, 시민연대모임의 운동방식은 332) 참여단체는 광주YMCA, 사회정의실천시민운동협의회, 광주YWCA, 아름다운광주사랑모임, 광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천주교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 광주 전남민주교수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광주연합, 광주 전남민주언론운동협의회, 광주기자협회광주 전남지부, 광주 전남언론사노조협의회, 흥사단광주지부, 광주 전남환경운동연합를 포함하고 있다(시민연대모임, 진실은 발자국에 고여 있다,1994).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51

254 전문적 검토와 연구를 통한 공청회, 토론회, 성명서 발표 등 담론적 실천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 의 운동이었다. 시민연대모임의 활동은 한편으로는 시민여론수렴에 충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 문가의 자문을 받아 정부와 시민사회에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언론과 시민사회 일반대중 의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었고, 정부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시민연대모 임은 성역화계획수립에 관한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난 후에도 광주항쟁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1994년 5월에 열린 해외에서 바라본 5 18광주민중항쟁 을 주제로 한 국제심포지엄, 1995년의 반인륜행위와 청산 에 관한 심포지엄 333), 1996년의 5 18 정신계승 제 1회 국제청년캠프 334), 1998년에 있었던 아시아 인권헌장 선언대회 335) 등이 그 사례이다.특히 아시 아 인권헌장 선언대회에서는 광주에서 아시아 지역 16개국 36명의 인권전문가와 운동가들이 국내의 활동가와 결합하여 아시아 지역의 인권현실, 인권에 대한 다양한 침해형태, 인권기구의 필요성 등에 관한 발표와 토론을 거쳐 아시아 인권헌장 을 선포하고 광주선언 을 채택했다. 또한 이 단체는 국 제연대의 맥락에서 항쟁에 관한 출판활동도 전개했다. 항쟁 당시에 국내외에서 보도진으로 참여했던 17인의 언론인을 규합하여 그들의 취재경험을 서술한 5 18특파원리포트 (1997)를 간행했고, 그 가운데 외신기자 8인의 경험을 영문으로 간행했으며 그 필진을 초청하여 행사를 갖기도 했다. 말하자 면,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목표 및 운동형태와 운동영역을 확장시킨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할 만 하다(김희송, 36-47). 광주지역의 연대모임은 서울에서 출범하여 큰 물결을 이룬 참여연대 보다 더 먼저 결성되었다. 이 운동이 갖는 의의는 민중주체와는 다른 시민주체의 등장, 5 18문제에 대하여 당 사자가 아닌 전문가들의 주도성, 폭력적 투쟁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이라는 새로운 운동의 선구가 되 었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1994년 이 때는 5 18특별법제정운동이 전국적 수준에서 거세게 타오르면서, 다른 한편 으로는 5월성역화 사업에 대한 광주시 주도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추진을 비판하는 시민연대모임 을 결성하여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5 18기념재단 창립작업이 진행되는 국면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5월운동의 기존 운동형태를 지속되는 가운데, 물론 80년대 초중반에 있었던 폭력투쟁의 성격은 아니었지만, 전문가 중심의 새로운 운동형태 가 병존한 상황이었다. 그 당시 특별법 제정 공동대책위원회는 5 18기념재단 창립준비작업에 대하여 운동의 초점이 희석됨과 아울러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333) 이 심포지엄의 주요 발표자는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의 대표인 셀리나(Celina dekofman),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했던 유엔인권회 위원인 독일 쾰른대학의 음바야(EtienneMbaya) 교수, 독일 출신의 헬가 피히트(Helga Picht) 훔볼트대학 교수, 인류학자 린다 루이스(Linda Lewis) 교수, 이토 나리히고( 伊 藤 成 彦 ) 일본 주오대학 교수, 한국의 박원순 변호사등이다. 334) 이 캠프에서는 독일의 홀거 하이데(Holger Heide)와 얀 슈미트(Jan Schmit), 일본의 곽진웅,동티모르의 체사리나 로차(Cesarina Rocha) 등이 발제했다. 335) 아시아 인권헌장 선언대회 자료집(1998). 이 대회에는 인도, 부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네팔, 파키스탄,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홍콩, 중국, 대만, 일본,동티모르 등지의 인권전문가가 참여했다. 2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5 이러한 국면은 과격한 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운동과 온건하고 평화적인 담론적 실천을 통한 시 민운동의 경합현상이라는 해석이 있다(김희송). 운동형태의 이러한 변화는 흔히 말하는 사회운동 해 석틀social movement frame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 해석틀은 운동에 부여하는 의미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하는 것으로서 이로부터 운동의 목표와 그 목표성취의 방법 즉 운동형태와 전략 등이 도출되 는 근거로 작용한다. 198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이 잔혹한 억압정책에 대항하는 전투적 투쟁을 벌려 왔다. 1986년 학생운동 사상 최대의 구속자(1,288명 구속, 그러나 대다수 석방)를 낸 건국사태, 1991 년 5월투쟁과 정원식 사건을 경과하면서 과격한 저항투쟁의 힘이 현저히 약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측 면이 있다. 그 이후 5월운동에서도 혁명축제의 밤을 지나 평화와 문화축제라는 담론이 우세한 추세를 보였다. 시민운동은 바로 이러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저항과 도전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 후 평화적 담론투쟁의 흐름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시민운동은 쟁점이 구체적이고 권력의 의지만 있다면 목표실현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민 대중의 참여도 높은 경향이었다. 또한 투쟁방 식도 평화적이고 온건한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참여대중의 피해도 그 만큼 감소되기 때문에 비용도 절감되는 운동이었다. 거대한 국가적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 관련되는 없어서는 안 될 중 요한 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강한 요구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90년대 중반 이후에 이러한 시민운동의 흐름이 큰 물결을 이루며 진전되었다. 시민연대 모임 과 균형사회를 여는 모임 은 21세기 광주 전남의 미래-활로개척시민대토론회 를 각 부문별 로 6차에 걸쳐 개최하여 지역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발전방안을 모색했다(1995). 광주YMCA는 시 정지기단을 운영하여 광주시와 시의회의 살림살이를 꼼꼼히 살펴서 건강한 지역정치가 발전될 수 있 도록 견제와 감시활동을 계속해왔고( ), 이는 광산 구정지기단(1996), 서구 구정지기단 (2000)으로 확장되었으며, 1999년에는 행정사무감사모니터연대 로 발전했다. 광주사람들에게 몸 의 건강과 정신적 안식의 장소로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무등산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이 협력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펴온 것도 시민운동이다. 1989에 창립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는 환경보 고를 위해 음주가무 취사안하기 등 각종 홍보활동뿐만아니라 운림온천개발반대운동 및 무등산사랑 심포지움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오기도 했다( ). 이 밖에도 푸른광주21협의회의 지속가능 한 도시만들기(1995-), 광주경실련이 주도한 지역경제와 아시아자동차 및 협력업체 살리기 운동 (1997) 등이 있다. 광주지역 시민운동결집체 역할을 수행해 온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이 지역 대표 적인 재벌기업인 금호그룹개혁운동(1999)과 아울러 선거 때가 되면 지방선거개혁운동(1998: 재2회 지방선거에서 1000인 위원회 활동; 2000: 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4.13총선낙천낙선운동; 2002: 지 방선거 및 대통령선거에서 공정선거 감시운동; 2004년 17개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천낙선운동; 2005: 주민소환입법운동; 2006: 지방선거 광주 전남연대 출범) 등 지역사회의 주요 현안들에 대한 시민적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왔다. 특히 이 가운데 금호건설의 월드컵경기장건설저지운동 과 5 18사 적지인 도청별관 보존운동 은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전자는 이 건설회사가 입찰과정에서 서류를 조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53

256 작하여 부당하게 낙찰받은 사실을 발견한 후에, 이 회사가 건설공사를 계속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시 민단체협의회가 제기한 운동이다. 중요한 것은 이 회사가 광주지역에서 최대의 재벌그룹이라는 사실 이다. 그리하여 광주지역 시민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 를 구성하여 지역의 大 資 本 을 상대로 저지운 동에 돌입하였다. 약 4개월간 언론, 시민, 정부의 관련기관 및 건설회사를 상대로 대화와 홍보 및 여론 작업을 통해서 마침내 그 건설회사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시공권을 반납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 다. 그리고 도청별관 보존운동(2008.6~2009.9)은 문광부의 철거 방침에 대항하여 5 18당시 시민군 의 거점이었던 도청별관을 보존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국가 권력기관이 각종 압력을 행사하여 강행하 려 했던 정부의 5 18말살기도를 광주시민의 힘으로 막아낸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강조할 만한 사실 은 정부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여론조사 결과 별관 보존에 찬성한 비율이 현저히 높게 나타남으로써 권력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물리쳤던 사실로서 이는 1980년 5월 새벽 농성동 고개에서 탱크부대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냈던 광주시민의 힘을 다시 보여주었다는 점을 강조할 만하다. 앞의 두 사례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운동이었다면, 이와는 달리 제도적 개선을 지향하 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사례로서 좋은 동네 만들기운동 과 5 18기록물 유네스코 세계유산등 재운동 을 소개한다. 좋은 동네 만들기 운동은 광주YMCA가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학습공동체로 좋 은 동네 시민대학 을 개설하여 좋은 동네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을 제고시키고( ), 이를 실 천하는 활동이었다. 그 결과 지산유원지 걷고 싶은 거리 푸른 두암3동 만들기, 쓰레기없는 용봉 동만들기, 역사마을 만들기 등의 성과를 기록했다. 그 후 이 계획을 지방정부 및 유사한 시민단체 들이 협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작은동네 큰 이웃만들기, 아름다운 광주공원만들기, 민들레 주 민운동, 저탄소 녹색마을 만들기 등을 포함하여 주민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5 18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에 대한 유네스코 기록유산등재운동 을 소개한다 336). 이 운동은 1980 년 5월의 광주항쟁에 관한 기록물이 인간사회 민주주의 발전역사에서 소중한 유산이라는 인식을 배 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광주의 주요 인사들이 유엔 및 유네스코 관계자들과 접촉하여 광주항쟁 336) 유엔 산하기관인 유네스코는 이러한 역사유산을 정리 보존하여 전 인류의 보편적 문화자산으로 향유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를 등록하여 관리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인권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2011)) [email protected]. 이 기록유산은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군 수사기관과 재판기록 및 보상관련서류를 포함한 정부행정기관문서이고, 두 번째는 항쟁 당시에 기록된 시민의 성명서와 선언서, 손으로 직접 쓴 포스터와 기자들의 취재수첩, 사진을 포함하고, 세 번째는 5 18 민주화 항쟁 이후 군사정부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하여 진실을 규명하고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국회와 대법원에서 만든 기록문서를 포함한다. 이 기록물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역사가 전 세계 인류의 문화자산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리하여 5 18항쟁은 아시아민주화운동의 교과서로서(F. Basil, 아시아인권위원회 위원장), 아시아 인권운동의 모범(인도네시아Urban Poor Consortium 사무총장 와르다 하피즈(Wardah Hafidz), 아시아 인권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스리랑카 실종자 기념사업회 회장 Dandeniya Gamage Jayanthi)으로, 더 나아가서 한국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의 원천(사회학자, G. Katsiaficas)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5 18항쟁 이후 광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5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발전된 5대목표, 즉 진상 조사, 가해자 처벌, 명예 회복, 보상, 기념사업 이라는 5가지 주요 원칙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 규칙을 결정하는 데 모범이자 기준이 되었다(1992년, 테오 판 보번(Theo van Boven)의 특별 보고). 2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7 의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군부 학살 자집단과 이를 지지하는 일부 세력들이 이를 방해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중요한 장애에 당 면하기도 했다. 심지어 반대자들은 집단을 형성하여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를 방문하여 현지에서 반대시위를 전개한 것도 한 사례이다. 이에 광주에서는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영진 당시 국회의원)를 비롯하여 광주시장 및 뜻있는 시민사회인사들이 다방면으로 활동하여 마침내 최종 등록작업을 성사 시켰다. 광주항쟁의 기록이 세계인의 문화자산으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의가 한 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자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내에서 광주항쟁 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반민주세력의 존재근거와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점에서도 큰 의 미가 있다. 그리하여 광주시는 전 시민적 차원에서 이 등재사실을 역사적인 일로 평가하여 도청 광장 에서 금남로 1가에 이르는 거리를 유네스코거리 로 명명하고, 그 인근에 있는 건물을 유네스코 기록 물을 관리 보존하는 기록물 관리센터를 건립하여 이 정신을 기리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운동 은 앞에서 본 1991년 5월투쟁과 1995년 특별법제정운동 과 연관된 맥락에서 기본적으로 1980년 광주학살을 규탄하고 단죄하는 5월운동의 지속이라는 차원 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별법제정운동은 광주학살자 처벌을 위한 법제정운동이기 때문에 직접 관련되 는 것이고, 1991년의 5월투쟁은 4월 말경에 일어났던 강경대 학생 사망사건으로 촉발되었지만, 5월 에 접어 들어서 자연스럽게 5 18항쟁 추모 및 기념행사와 결합되어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 경대 운구행렬의 광주 도청 앞 노제를 위한 운암전투와 망월동 안장은 5월행사의 일부였다. 5월운동과의 연관성을 여기에서 거론하는 이유는 특별법에 의해 항쟁 발발일인 5월 18일이 국가기 념일로 제정되고, 항쟁의 희생자들이 안장된 장소가 국립묘지로 규정되어 있으며, 항쟁의 피해자들이 국가의 민주화유공자로 예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일부에서는 여전히 5 18항쟁을 왜 곡하고 폄훼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는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 당 시에 이 세력은 우리 사회의 일부 정치세력과 결합하여 역사교과서에서 5 18항쟁 관련 부분을 축소 하거나 삭제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터넷을 통해 허위사실을 조작하고 과장 하여 유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배권력의 이와 같은 반인륜적 만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반민주적 억압을 본질로 하는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서의 5월운동은 마찬가 지로 끝나지 않은 열린 미래의 운동이며, 이를 위한 시민정신은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제5장 종합정리 1. 전체적 양상 이상에서 1890년대로부터 199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에 일어났던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주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55

258 요 사례를 서술했다.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사회운동 사건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13인 의 각론 집필자가 분담하여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나는 총론에서 더 주의깊게 다룰 필요가 있다 고 판단되는 사례를 선정했다. 선정의 주요 기준은 그 사건이 갖는 한국 사회운동 및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사의 맥락에 갖는 유의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여기에 선정된 사례는 전국적 운동양상 을 준거로 하여 선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구항쟁(1946), 부마항쟁(1979) 등은 이 지역 사회 운동과의 관련성이 미약하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약 30개 내외의 사례가 검토되었다. 사건 수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시공간적 규모와 사회적 효과가 광범하고도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사건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활동가들이 감 행한 일회성의 사건도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이나 5 18항쟁은 전자의 사례이고 함성지배포사 건이나 님을 위한 행진곡 은 후자의 사례이다. 뒤의 두 사례는 비록 단순한 사건이지만, 함성지배포 사건(1972)은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저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이라는 노래는 한국 사회운동에서 가장 널리 불리어져서 인상적인 기록을 남긴 가요로서 사회적 효과가 큰 점을 유 의했다. 다음에서는 이 사례들의 분포상태를 통해서 지역사회운동의 전체적 양상과 진전과정 및 구성 주체 등에 관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먼저, 전체적 양상은 운동의 형태분석을 통해서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 형태가 양상의 중요한 요소 이기 때문이다. 운동의 형태는 여러 측면에서 규명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운동의 강도를 기본 요인 으로 하고 규모를 보조요인으로 하여 분류한다. 이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저항과 도전의 형태는 무장 투쟁이고, 그 다음 수준이 대규모 대중봉기, 그리고 조직적 저항과 소집단 저항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용하다. 다음에서 그 사례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지난 1세기 한국의 사회운동사에서 무장투쟁으로 분류될 만한 사례는 동학농민혁명과 한말 의병전쟁, 그리고 제주 4 3항쟁과 1980년 광주5 18항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표00참조). 그런데 주 목할 만한 사실은 이 가운데 세 사례가 광주 전남지역을 주요 현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4 3항쟁 은 제주에서 일어났고, 다른 지역에서도 한말의 의병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후기 의병전쟁의 경우에 는 이 지역 의병투쟁이 강도와 빈도에서 현저히 높았음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광주 전남의 사회운동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갖는 강력한 투쟁력을 내장하고 있다는 증거 가 된다. 무장투쟁은 사회운동의 강도와 밀도에서 최고의 수준에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광주 전남 지역민이 한국의 근현대 사회운동사에서 민족국가를 지켜내고, 억압과 착취에 맞선 싸움 의 최선봉에 위치해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2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9 <표1. 무장투쟁 사례> 순위 년도 사건명 지도부의 성격 일반참여자 조직명 동학농민혁명 ~ 1909 전기의병 중기의병 후기의병 항쟁 농민+지식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양반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김익중, 양반 기우만, 고광순, 崔 益 鉉 白 樂 九 姜 在 天 梁 漢 奎 梁 會 一 양반+빈농+중인 김용구, 심남일,김동신, 임창모, 박도경, 안규홍, 강무경 학생+기층민중: 박관현, 윤상원, 박남선, 윤석루, 농민 농민-유생 농민-유생 농민다수 농민군 의병부대 의병부대 의병부대 학생+시민 비조직+조직화 비고 (지속기간) 이 무장투쟁들은 핵심집단의 선도적 결단과 아울러 비조직적 대중의 즉흥적 동원이라는 특징을 보 인다. 동학농민혁명이나 한말의병에서 활동한 핵심집단은 정치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뿌리없는 지식 인 이었다는데 일종의 공통된 특성을 보였다. 337) 전봉준과 그 핵심추종자들, 그리고 의병에서 고경명 과 같은 낙향한 선비들이 그 사례에 속한다. 당연히 여기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다수 대중은 중농과 빈 농을 포함한다. 동학농민혁명과 의병 참여자의 내적 구성과 그 차별성은 더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에릭 울프의 자료에 따르면, 농민혁명은 중국 남부, 멕시코 북부, 베트 남의 루앙프라방, 알제리의 카빌리아, 쿠바의 오리엔테지방 등, 종종 중앙의 권력에 반발하는 주변지 역에서 발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경우에도 합당한 결과로 보인다. 338) 두 번째로 대규모 대중봉기의 사례를 본다. 여기에는 3 1만세운동, 광주항일학생운동, 4 19혁명, 한일협정반대운동(1964), 5월운동( ), 6월항쟁(1987), 노동자대투쟁(1987), 5 18특별법제 정운동(1994-5) 등이 포함된다(표00참조). 이 가운데 광주항일학생운동과 5월운동, 그리고 5 18특 별법제정운동은 광주가 중심이었고 주도적이었던 사례이다. 6월항쟁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인 대중 봉기였지만, 이 항쟁의 계기가 광주 망월동의 5 18기념식에서 주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형태의 사회운동에서도 광주 전남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3/8 정도로 비교적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대투쟁 등을 포함하는 노동운동은 이 지역에서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 다. 337) 에릭 R. 울프 (곽은수 역), 20세기 농민전쟁 (형성사, 1984), 282쪽. 338) 위의 책, 286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57

260 <표2. 대규모 대중봉기 주요사례> 순위 년도 사건명 지도부의 성격 일반참여자 조직명 비고 만세운동 광주항일학생운동 혁명 한일협정반대운동 항쟁 월운동 월항쟁 노동자대투쟁 지식인: 최흥종, 김철, 국기열, 학생: 최한영, 강석봉, 김봉열, 청년+학생+유학생 박준채, 장재성, 오쾌일, 이형후 학생: 이홍길, 김신담, 김병욱, 홍갑기, 전만길 학생: 이홍길, 홍갑기 학생+기층민중: 박관현, 윤상원, 박남선, 윤석루, 기층민중: 정수만, 김후식, 이명자, 안성례, 정현애, 민주화운동가: 배종열, 나상기, 김정길, 조봉훈 노동자 대중투쟁 노동조합 간부, 비조직 노동자 일반대중 비조직 학생 시민 성진회 학생+시민 비조직 학생+시민 비조직 학생+시민 비조직+조직화 기층민중 조직 시민 조직 노동자 비조직+노조 특별법 제정운동 5.18피해자 및 민주화운동가 정수만, 허연식, 김상근, 시민 조직 위에서 제시된 대중봉기들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비조직 대중들의 자연발생적 폭 발이나 연결망으로부터 발전한 유형이 있고, 다른 하나는 기존이 일정한 조직으로부터 발원하여 대규 모 대중봉기로 확장된 사례가 있다. 3 1만세운동, 광주항일학생운동, 4 19혁명, 한일협정반대운 동, 5 18항쟁이 비조직 대중봉기의 형태에 속한다면, 5월운동,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 특별법제정 운동, 민주노총총파업 사례는 조직적 봉기형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중봉기는 권력과 자본의 억압 및 착취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는 공통된 요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암시되는 현상은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학생운동세력의 비중이 감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형태인 조직적 저항형태의 사례에는 암태도소작인회와 암태농민조합이 주도한 소작투 쟁( ), 민청학련사건(1974), 민주구국선언(제2명동사건, 1978),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 ), 전국교직원노동조합건설운동(1988), 민주노총 총파업(1996) 등이 포함된다(표00 참 조). 이 가운데 민청학련사건과 민주노총 총파업 사건은 서울의 중앙조직에서 주도함으로써 광주 전 남지역의 대응이 비교적 취약했던 사례인 반면에 암태도소작투쟁,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전교조 건설운동은 이 지역을 바탕으로 해서 이 지역 운동가들이 주도한 운동이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2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1 <표3. 조직적 저항운동 주요사례> 순위 년도 사건명 지도부의 성격 일반참여자 조직명 비고 암태소작쟁의 지식인+농민: 서창석, 서태석, 박종남, 김연태 순수농민 암태소작인회 국가건설운동 지식인+청년: 최홍종, 김시중, 강해석, 국기열, 이덕우, 유혁, 김종선 국민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등 민청학련 학생: 김정길, 이강, 윤한봉, 김상윤, 최철 학생 네트워크 민주구국선언 (제2명동사건) 지식인-목사: 강신석, 임기준, 조홍래, 윤기석 종교인 기독교전남노회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 농민+지식인: 서경원 노금노 임정택 농민+시민 가톨릭농민회 등 전국교직원 노동조합건설 교사: 윤영규, 고영진, 홍광석 교사 전교조 민주노총 총파업 노동자: 노조간부 노동자 민주노총 조직적 저항운동의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암태도 소작인회, 광주 전남 기독교 장로회, 함평가톨릭농민회, 교사집단 등은 이 지역 조직들이다. 이 조직들이 전국의 사회운동에 영향을 줄 만큼 큰 동력을 발휘한 사실은 어디에 서 가능한 것인가? 이 힘의 원천을 우리는 이 지역이 갖는 강고한 공동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설 적 설명을 시도해본다. 왜냐하면, 60년대 이후에도 이 지역은 전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결집력이 강 한 행동성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강한 공동체성은 이 토착사회가 갖는 역사적 뿌리 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339) 넷째, 소집단적 저항형태로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사회주의 지식청년들의 청년회조직과 노동조 합 및 농민조합 조직운동,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국가건설운동, 함성지제작배포사 건(1972), 교육지표선언(1978), 양서협동조합운동(1978) 등을 꼽을 수 있다(표 참조). 이 가운데 광 주 전남지역에서 주도된 운동은 함성지사건과 교육지표선언사건이 포함된다. 그 밖의 사례들은 대 체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며, 특히 양서협동조합운동은 부산지역이 선도했음을 주장하 고 있다. 그런데 함성지배포사건과 교육지표선언 사건이 갖는 사회운동에서의 상징성은 당시의 절대 339) McAdam, D., Political Process and the Development of Black Insurgency ( Chicago: Univercity of Chicago Press, 1982), p. 51.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59

262 권력에 대한 과감한 저항정신에 있음을 강조할 만하다.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잔혹한 폭력정권이었던 유신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표4. 소집단적 저항운동 주요사례> 순위 년도 사건명 지도부의 성격 일반참여자 조직명 비고 년대 사회주의운동 지식인: 배치문, 박복영, 송기화 청년학생 각지역 청년회 중심 년대 노동조합- 농민조합운동 지식인+청년 권대형, 이우적, 김상혁 노동자 농민 전남노농협의회 전남운동협의회 함성 학생: 이강 김남주 박석무 비조직 교육지표선언 지식인: 송기숙, 김정수, 명노근, 학생: 노준현, 정용화, 박현옥 교수+학생 비조직 양서조합운동 지식인: 장두석, 안진오, 박석무 교수 조직 들불야학 학생: 김영철, 박기순, 박관현, 윤상원, 신영일, 박용준, 임낙평, 나상진 학생+노동자 조직 이상의 사례검토에서 유의할 점은 1960년대 이후의 운동사례선별작업에서 특히 노동운동 부문이 매우 다양하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으나, 이 자료에서는 이 부문에 관한 운동사례가 철저히 반영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광주 전남지역이 갖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노 동운동부분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점을 밝혀둔다. 이는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이나, 1996년의 민주 노총 총파업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위의 사례를 통해서 지난 1세기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 동이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다음으로, 지속기간도 운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 된다. 10년 이상 장기간 지속된사례는 5월 운동과 한말의병투쟁이 해당하며, 가장 단기간의 순간적인 집단행동의 형태를 가진 사례는 함성지 배 포사건과 교육지표선언이라 할 것이다. 특히 5월운동은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상 참여범위와 투쟁강 도 및 지속기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이 장기간의 저항력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그리고 1년 이상 수년 동안 지속된 운동은 동학농민혁명과 3 1만세운동, 광주항일학생운동, 암태소작투쟁, 기독교장로회 노회의 민주구국선언, 함평고구마피해 보상투쟁, 양서조합운동과 들불야학운동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발원하고 주도하여 타 지역 및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된 사례에는 동학농민혁 2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3 명, 광주항일학생운동, 5월운동, 5 18특별법제정운동이 포함되고, 이 지역에서 발생하고 진전되었지 만 전국적 관심과 참여를 수반한 운동에는 암태소작투쟁,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함성지배포사건 과 교육지표선언 등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이 지역 사회운동이 갖는 광범한 사회적 파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의 다른 지역 어떤 지역도 이와 같은 집중적인 저항의 힘을 발견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2. 진전과정 1) 전체적 진전과정 전체적 진전과정을 접근하려 할 때, 우선 확인해 둘 사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지역사회가 겪어왔 던 역사적 격변이다. 봉건왕조국가의 멸망, 뒤 이은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 일제의 패망과 식민지로부 터의 해방, 이어진 미국 군사정권의 지배, 남북분단과 반공정부수립, 한국전쟁, 군사정변과 군부독재 체제, 그리고 뒤이은 민주민간정부수립 등의 정치적 행로를 걸어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동은 각각 그와 관련된 사회운동의 과제로 주어졌다. 예를 들면, 봉건왕조국가의 멸망은 반봉건과 외세침략으로 부터 민족국가와 사회를 지켜내야 하는 사회운동의 과제가 제기되었고, 그에 따라 동학농민봉기와 대 일본 전쟁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우리사회에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했다. 이러한 역사 적 격변을 배경으로 해서 여기에서는 지역운동사 흐름의 전체적 성격, 그 흐름 내에서 고조기와 저조 기 분석, 그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위상과 운동내용의 변화발전 등을 검토 한다. 지난 1세기 동안 진전된 여러 가지 운동사례의 전개과정을 10년 단위로 정리한 결과를 보면, 운동의 집중도와 강도에 따라 시기별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사회운동이 현저히 빈번했고 대규모적이었고 치열했던 시기는 , 1920년대, 해방 직후인 1940년대 후반, 년대이다. 그리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비교적 다른 지역에 비해 사회운동이 취약했던 시기는 1910년대, 1930년대, 그 리고 19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1910년대의 침체기는 동학농민전쟁과 한말 후기의병전쟁 시기에 광 주 전남 사람들의 투쟁역량이 일본군에 의해 입은 피해와 그 후유증에 의해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추 론이 있다. 340) 1960년대의 저조기는 여순사건(1948)과 한국전쟁( ) 과정에서 미군과 정부 군의 진압작전에 의해 광주 전남 지역주민이 당한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의 사회적 효과임을 추정하 게 한다. 이를 테면, 1980년 5 18광주항쟁 당시에 여수-순천 지역민들이 참여도가 두드러지게 약했 다는 사실을 1948년 여수-순천사건이 지역민에게 준 역사적 경험에서 찾는 경우와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사회운동의 설명에서 역사적 경험이 의미있는 요인으로 고려될 가능 성에 대한 이론적 검토이다. 흔히 현대 사회학에서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이론들을 일별하면, 주요 변 340) 노태돈, 서중석 외, 2008,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338쪽.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61

264 인으로서 사회경제적 배경요인이나 심리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와 아울러 그 행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 경험 자체도 고려의 여지가 있음을 이 자료는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개별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과거 역사가 현재에 갖는 의미와 암시를 주목하는 것은 역사연구의 중요 한 덕목이다 341).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선조숭배사상이나 족보의 중요성, 그리고 문중이나 동계 등이 행위결정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전통문화의 중요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이 모든 사회적 행동결정에 동일한 정도와 방식으로 영향을 미 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다만, 일정한 사회적 행동, 특히 매우 신중하고도 심각한 행동 결정의 상황에서는 조상의 행적이 갖는 교훈적 영향력을 고려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침체기 대신에 사회운동이 활성화된 고조기를 검토한다.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고조 기는 매우 보편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난 1세기 동안 이 지역사회의 저항과 도전은 특수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고조된 상태로 지속해 왔다는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에 거세게 불어왔던 동학 농민혁명(1894)과 한말의병( )은 지역사회를 전체적으로 뒤흔들 만큼 커다란 사회적 사건 이었다. 그리고 1920년대의 고조기는 3 1만세운동의 사회적 효과가 반영된 것이다. 한민족의 전체 사회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강한 저항과 도전의 정신을 실천한 시기이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애 국계몽운동, 물산장려운동, 조선민립대학세우기운동을 전개했고, 한국 역사에서 새롭게 출현한 사회 주의 계열에서는 전국 각 지역에 청년회를 건설하고 더 나아가 고려공산당 등의 정치조직을 확산시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좌익과 우익을 통합한 단체로 신간회를 결성하여 전국적 수준에서 민족운동 을 일으켰다. 또한 암태도 소작투쟁(1924) 342), 광주항일학생운동(1929) 등은 그 시기에 타올랐던 식 민지 민중의 치열한 투쟁성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으로 함성지배포사건(1972),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 교육지표선언(1978), 5 18항쟁 (1980)과 5월운동( ) 등이 집중됨으로써 고조기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지난 1세기 광주 전남지역사회의 역사가 억압과 착취에 맞선 저항과 도전의 사회 운동으로 충만해있음을 말해준다. 운동으로 충만된 역사 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역 민의 삶이 착취와 억압세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연속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봉건지배층의 부패 와 착취, 일본 제국주의 등의 외세침탈, 반민주 국가권력과 그 폭력에 굴종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면 으로 맞서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 싸움은 항상 강한 권력자를 상대로 맞서는 힘겨운 투쟁의 삶이다. 그래서 운동가에게 더 많은 눈물과 땀과 피를 요구하며, 더 많은 희생을 수반한다. 그 삶의 길이 그 만 큼 가파르고 험난함을 암시한다. 운동의 삶은 일상의 삶보다도 더 높은 밀도와 강도로 이루어져 있으 며, 그에 따라 더 큰 압력과 더 무거운 짐을 안고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길에서 지치고 상처 입었 더라도, 이 고난의 길이 바른 역사를 만들기 위한 값진 싸움이라는 자각과 사명감이 운동가의 삶을 만 341) Carr, E. H., 길현모 역, 역사란 무엇인가? 342) 전국 각지의 수많은 단체들이 암태도 농민들을 위한 성금을 보냈으며 지주측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2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5 들어낸다. 인류역사발전을 위한 삶의 역설이다. 지난 1세기 운동의 역사에서 고조기를 이루는 이 사례들은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이 전국의 운 동권을 선도하고 전국의 쟁점으로 발전된 경향을 보였다. 동학농민혁명이나 한말 후기 의병은 지배권 력의 부패를 청산하고 외세침탈에 맞선 구국항쟁이었다. 암태도소작분쟁은 전국 언론의 관심사가 되 었고, 전국 각지의 수많은 단체들이 성금을 보내기도 했으며, 서울지방에서는 지원과 현장조사를 위 한 방문도 있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은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위에서 제시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주요 운동사례들은 광주 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이 전국의 사회운동을 선도하고 전국의 운 동을 주도한 것들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광주 전남이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정의의 행 진에서 선봉에 위치해있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광주 전남은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수준 높은 헌신성 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의깊은 인식을 통해서 이 지역에 번져있는 패배주의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과 그에 기초한 지역민의 당당한 자긍심, 그리고 국민적 주체성을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전체적 진전과정을 검토하면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내용의 순차 적 변화발전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가장 앞선 운동은 농민항쟁이나 소작투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 난 민중 생존권 투쟁이다. 이 운동의 목표는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의 확보를 통해 건강한 삶을 지향한 다. 그러므로 생존조건의 결핍상태에 있는 일반 대중, 즉 하층 농민이나 빈곤층이 주류를 이루는 운 동이다. 두 번째는 민족운동이다. 이는 민족의 자주 독립과 자율적 발전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식민 지 시기에는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여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지향하고 억압적인 외국세력의 압력으로부터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민족분단 상태에서는 분단의 극복, 즉 통일운동으로 현재화된다. 세 번째는 민간독재 또는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이다. 1960년대 이후 군사독재 시기의 운동이 전형적이다. 네 번째는 시민운동이다. 이는 민주화운동의 한 영역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으나 정치민주화운동과의 차별성을 유의하여 생활민주화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했다. 과도하게 성장한 국가권력으로부터 식민화된 생활세계 를 복원하며, 위협받는 자 기정체성과 주체성 회복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이를 통해서 자율성과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한다. 물론 현재의 시기에도 민중생존권운동이나 민족운동 및 민주화운동이 여전히 전개되고 있는 것은 사 실이지만, 운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는 이와 같은 순차적 차별성이 확인된다. 이 내용적 변화발전 을 현 시기에 초점을 맞춰 검토하면 다양한 부문운동의 발전양상을 포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문운 동의 양상을 다음에서 검토한다. 2) 부문운동의 진전과정 이 연구는 1950년대 이전의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의 시기에 대해서는 전체적 일반 사의 관점에서 접근했고, 1960년대 이후는 부문운동으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부문운동의 내부구성은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63

266 지역연구의 현재적 상태를 고려하여 1. 민주화, 2. 노동, 3. 농민, 4. 여성, 5. 교육, 6. 문화예술, 7. 시민, 그리고 특수과제로서 항쟁을 포함했다. 부문운동으로 구분한 접근은 운동의 분화와 발전이라는 현실을 반영한다. 남한 정부수립 이전에 있었던 1890년대의 생존권운동과 년대 식민지 상태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운동, 그리고 해방 후의 국가건설운동과 196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부문운동이라기 보다는 각각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주제와 목표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결합하여 수행한 사회운동이었다. 이는 종합운동 또는 연합운동의 형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예를 들면, 1920년대의 민족운동은 지식인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 여성 등이 혼연일체로 결합하여 모든 주체들에게 공통된 주제와 목표인 민족독립의 이념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운동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1960년대 이후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이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여 전개되는 가운데 교육, 문화예술, 여성 등의 각 부문이 자체의 고유한 과제를 가지고 독자적 조직과 운동체제를 구축하여 전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해방 후 미국 군사정권의 지배하에 남북분단이 고착되고 남한에 자본주의국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부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화운동이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했다. 물론 이 때도 농민-노동자의 생존권운동은 지속되고 있었고 민족운동은 통일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다음에서 부문운동의 분화-발전양상을 살펴본다. 196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4 19혁명에 뒤이어 교육운동 즉, 교원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넓게 보면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즉 교육계에서의 민주화운동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운동은 정치민주화의 영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영역과 목표, 그리고 직접 관련된 운동주체가 설정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광주 전남지역에서 부문운동의 분화는 1960년대 초반의 교육운동에서 이루어졌다. 60년대 초반에 시도되었던 교원노동조합운동이 5 16군사정변으로 좌절된 후, 종교적 외피를 활용한 Y교사협의회를 거쳐 19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과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 후 여성운동과 문화예술운동, 그리고 시민운동의 분화현상이 차례로 나타났다. 여성 운 동 의 경 우 에 그 원 초 적 형 태 는 1970년 대 카 톨 릭 농 민 회 여 성 분 회(1977), 송 백 회(1978), 기독교농민회 여성위원회(1984)등이 출범하여 자체의 의제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동력을 구비했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독자성은 광주 전남여성회(1988), 광 주 전남 여 학 생 대 표 자 협 의 회(1988), 광 주 여 성 노 동 자 회(1990), 광 주 여 성 의 전 화(1990), 전남여성농민회(1991) 등의 주체형성과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광주 전남지역 문화예술운동은 1980년대에 급속히 발전했다. 물론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가 1979년 말에 창립되어 조직적 기반은 형성되었지만,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 광주시민미술 학교(1983), 광주 전남미술인공동체(1988) 등을 통해 독자적 주체형성과 운동성이 진전되었다. 그 후 문화예술운동은 학생, 노동, 여성 등 사회운동의 다양한 영역으로 자기확장을 거듭하면서 2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7 발전했다. 이는 음악, 마당극 등의 경우에도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343) 사회운동의 분화발전 현상은 1980년대 말에 출현하여 1990년대에 활짝 피어난 시민운동에서 대단원을 이룬다. 시민운동은 이전의 사회운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운동영역을 새롭게 확장한다. 환경, 장애인, 평화, 생태, 주민, 소비자 등 일상적 삶의 제 문제를 대상으로 하여 사회운동의 분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광주 전남에서 시민운동의 선구는 환경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공해추방이나 환경조사연구 등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 후에는 경제정의실천운동, 낙천낙선운동, 무등산보호운동 등 매우 광범한 영역에서 시민운동이 전개되었다. 부문운동이 이와 같이 분화발전하면서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은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위상을 가질 만큼 활발히 전개되었다. 다음에는 이 지역의 사회운동에서 두드러진 활동과 주목할 만한 성과를 기록한 사례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 20세기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진전과정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부문은 농민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생존권 영역이었다. 농민운동은 앞에서 보았듯이 1890년대의 농민항쟁으로부터 1990년대의 UR, FTA, 광우병파동 등 농산물 수입을 저지하는 운동으로 이어져왔다. 344) 특히 이 지역의 농민운동은 동학농민혁명, 1920년대 암태도 소작쟁의, 1970년대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등을 거치면서 한국 농민운동을 선도해왔다. 광주 전남지역은 조선시대 이후부터 국가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으로 기능해왔으며,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 과정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산업시설투자가 미약하여 여전히 농업의 비중이 크며,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농민운동의 상대적 발전 추이를 설명하는 요인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명은 농업비중이 높은 다른 지역, 즉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적 요인, 지역사회가 경험한 역사적 전통이 하나의 변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지역운동사에서 부문운동으로서 주목할 만한 사례는 5월운동이다 345). 광주 전남을 터전으로 하여 발전된 5월운동은 다른 부문운동과 달리 연합운동적 성격을 갖는다. 5 18항쟁을 추모하고 기념하며 정신계승을 지향하는 5월운동은 기본적으로 항쟁 피해자들이 직접적인 담당 주체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동시에 광주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달리 보면, 피해자가 광주시민 전체라는 관점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독특한 특징과 위상을 갖는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그 특징의 하나는 5월운동의 장기지속성이다. 이 운동은 1981년에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적어도 17년 동안 매년 5월을 전후하여 전개되었다. 두 번째 특징은 이 343) 문학의 경우에는 더 일찍부터 사회적 실천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사회운동의 형태라기보다는 개별화된 활동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344) 물론 노동운동의 경우에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의 소규모 저항이 있어왔지만, 그 이후에도 이 지역의 노동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취약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345) 나간채, 2012, 한국의 5월운동, 도서출판 한울; 2013,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도서출판 한울.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65

268 운동은 광주항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전국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광주가 그 운동의 중핵을 이루고 있지만,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베르린이나 뉴욕, 동경 등 전 세계적 관계망을 이루어 거행되었다. 세 번째 특징은 참여주체의 다양성에 있다. 광주항쟁의 피해자가 다양한 시민이었듯이 이 운동에 참여하는 단체들도 청년-학생, 노동자-농민, 지식인, 예술인, 여성-청소년 등 세대와 직업에 관계없이 개방된 성격을 갖고 있다. 초기에는 엄격한 통제체제 하에서 소규모로 전개되었지만, 1988년 이후에는 수십만 명의 거대 군중이 참여했고, 1995년에는 전 국민적 참여를 실현시킨 운동이었다. 네 번째 특징은 성공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목표 자체가 포괄적이었고 애매했지만, 운동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5대원칙으로 정립되었고, 5월운동의 성과로서 5 18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그 법에 따라 이 목표가 일정한 수준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항쟁사에서 허다한 항쟁이 비록 정의를 위한 선의의 도전이었지만, 악한 권력에 패배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되었지만, 광주항쟁만은 드물게 성공한 5월운동을 통해서 승리한 항쟁이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만하다. 그러나 5월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1980년 이후의 지역사회운동의 전체적 양상은 5월운동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개의 부문운동이 5월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결합되고 연계되어 활동했다. 청년-학생, 노동, 교육, 여성, 문화예술, 종교, 언론 등 제 부문의 운동이 특히 5월이 오면 광주항쟁에 관련된 주제와 쟁점을 운동으로 변환시켜 실천했다. 광주항쟁의 이와 같은 지배성은 그 자체가 운동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다른 부문운동의 자율적 발전 공간을 제한하는 효과를 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5월운동에 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문화예술운동의 진전과정이 인상적이다. 광주 전남에서의 문화예술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서 급속히 떠올랐다. 비록 1970년대 말에 탈춤이나 마당극 등의 분야에서 사회문제를 소재로 하여 작품활동과 공연이 시도되긴 했지만, 그 이전에는 예술부문이 독자적 운동영역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1980년 이후 광주항쟁은 예술적 상상력의 값진 창고가 되었다.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 문화예술의 각 영역에서 광주항쟁은 공통된 소재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활발한 창작활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창작품의 사회운동적 효과가 국내외적으로 극대화됨으로써 문화운동의 절정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은 국내에서 가장 애창된 운동가요가 되었으며, 홍성담의 그림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전 세계적인 전시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화운동은 사회운동 전반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5월의 노래, 광주출정가 등의 운동가요는 지친 활동가의 몸에 새로운 힘을 불러 일으켰으며, 거리에 휘날리는 걸개그림은 잠든 영혼을 일깨웠던 것이다. 그 후 문화운동은 그 외면을 확장하여 각 부문운동과 관련을 갖고 더욱 광범한 발전을 이루었다.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및 여성운동에도 각각의 노래패를 조직하고 활동을 2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69 강화하여 창작과 공연을 적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운동의 문화화 를 진전시켰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에서는 주요 사업장이나 지역단위 노래패를 조성하여 운동의 정서적 영역을 이끌어내고, 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발전되었다. 학생운동의 경우에는 각 대학 및 대학연합체가 이와 같은 문화공동체를 형성 발전시킴으로써 운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 3. 운동주체 1) 개별주체 사회운동은 다수인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다수인이란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을 의미한다. 1인시위 형태의 사회운동도 있지만, 이는 시위자가 1인이지만 이 행동을 결정하고 수행할 때, 함께 한 집단 전체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사회운동에 포함된다고 할 것 이다. 사회운동을 다수인의 집합행동이라고 할 경우에,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운동참여자 모두가 주체 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참여의 방식과 형태에도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운 동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균질적인 존재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능동적 참여자가 있는 가 하면 수동적인 참여자도 있다.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때로는 위장된 참여자도 있을 수 있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참여한 반대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능동적 참여자가 진정한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능동적 참여자도 그 들의 참여방식과 정도에 따라 차이가 없지 않다. 운동의 계획을 수립하고 자원을 동원하며 전체적 방 향을 설정하는 핵심참여자가 있는가 하면, 이 계획에 따라 실천활동을 전개하는 사람이 있다. 기획하 는 일이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따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오히려 후자 가 결정적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운동은 비록 그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더 라도, 진전의 과정에서 소수의 지도적 핵심집단이 선도하고 이에 따라 다수의 대중이 동참하는 형태 를 갖는다. 말하자면, 운동의 주체는 핵심집단과 일반 참여자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핵심집단 즉 지도 부는 대체로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지적 분석력 및 강력한 실천의지를 구비한 인사로 구성된다. 이러 한 인적자원으로 지도부가 형성되었을 때 운동은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성공가능성도 높아진 다. 일반 참여자는 운동의 성격에 따라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운동의 분화가 진전되기 전에는 매우 포괄적인 수준에서 일반 참여자가 규정된다. 예를 들면, 르봉Le Bon의 군중론 또는 콘하우저 Kornhauser의 대중운동론 등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최근에 발전하고 있는 민중운동론이나 시민운동론 및 다중운동론 등의 관점에서도 사회 구성원 일반을 지칭한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러나 더 분화된 관점에서는 청년-학생, 농민-노동자, 노년, 여성, 장애인 등의 계급-계층적 관점에 입각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67

270 하여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을 참고로 하여 지난 1세기 광주 전남 사회운동의 주체를 살펴본다. 기본적 관점은 권 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는 비판성과 진보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같 은 경직된 계급론에 묶여있는 것은 아니다.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시각이 오늘의 진보세력에서도 널 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참여자들의 내적구성을 지도부인 핵심참여자와 일반참여자로 구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러 한 관점이 현실에 더 구체적으로 다가서는 접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도부에 포함되는 인자는 발 기인, 이론가, 기획자, 현장지도자 등이며, 일반 참여자는 현장의 실천행동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다루는 개별주체는 운동에 참여하는 개인이나 개별조직을 포함한다. 운동은 대체 로 조직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지만 초기에는 조직화를 추진하는 개별 활동가들의 모임에서 시작되기 도 한다.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지난 1세기 동안에 광주 전남에서 일어났던 저항적 사회운동사 례들의 참여주체는 1 기존 조직이나 계획 없이 일어난 운동, 2 조직기반이 없이 발생하여 운동조직 이 형성되면서 주도한 사례, 3 기존 조직이 기획하여 전개된 운동으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기존 조직이나 조직의 계획이 없다는 의미에서 우발적운동의 사례는 광주항일학생운동, 4 19혁명, 함성, 민청학련, 교육지표사건, 등이 포함된다. 이 운동은 광주학생운동, 4 19혁명과 같이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형태를 갖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함성지 사건이나 교육지표선언과 같이 매우 제한된 소수의 행동가들이 결행한 형태도 있다. 공통된 점은 비계획적이어서 1회의 폭발을 특징으로 한다. 둘째, 조직기반이 없이 발생하여 운동의 과정에서 조직이 형성되어 주도한 사례는 암태소작투쟁,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이 광범하게 추진했던 청년회조직운동,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설립운동, 양서 조합운동, 5 18항쟁, 5월운동, 전교조운동, 5 18특별법제정운동 등이다. 이 형태의 특징은 집합행동 의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조직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암태소작쟁의는 그 투쟁과정에서 소작인회와 농 민조합이 탄생되었고, 5 18항쟁의 경우에는 항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수습대책위원회, 투쟁 위원회 등이 형성되었다. 전교조운동은 조직건설을 목표로 한 운동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기존 조직이 기획하여 전개된 운동에는 3 1만세운동,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나 인 민위원회가 주도했던 국가건설운동,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 가톨릭농 민회가 시작했고 뒤 이어 천주교 교구신도와 전국의 농민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결합했던 함평고 구마투쟁, 강학팀이 주도한 들불야학, 송백회, 농민단체가 주관한 대규모 농민대회, 노조파업,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추진해 온 각종 시민운동 등이 포함된다. 개별주체에 대한 분석에서 좀 더 진전된 이해를 위해서 핵심주체의 사회문화적 계층적 성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를 운동의 시기별 변화양상과 관련하여 보면 유의미한 결과를 확인하게 된다. 앞의 자료에서 보듯이, 동학농민혁명기에는 지적소양을 갖춘 농민층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2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1 핵심주체로 활동했다면, 뒤 이은 한말 의병투쟁에서는 이와는 다른 양반유생들이 주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농민혁명과 초기 의병 간에는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후기 의병에 서는 중인이나 머슴출신 의병장(안달삼 등)이 출현하여 지도부를 형성함으로써 민족운동적 성격을 공 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층민 출신의 운동지도자가 출현한 사실은 사회운동에서 민중의 잠재력과 민 중운동의 발전가능성 확인할 수 있는 의미 깊은 사례이다. 그리고 1920년대와 30년대의 사회주의 운 동에서는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널리 전개됨으로써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부 상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940년대의 국가건설운동에도 참여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역사적 연계성, 연속성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국기열, 이덕우, 장재성 등의 활동가들이 이에 해 당한다. 60년대 이전의 이와 같은 운동의 흐름에서 일관되게 그 토대를 형성하는 일반 참여자 집단의 대다수는 농민-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은 쉽게 추정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의 국면은 현저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 중간에 미국 군사정권과 반공독재, 그리고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고비를 겪은 후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 과정에서 미군정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남한 정부는 진보 세력에 대하여 잔인한 폭력과 탄압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미군정 이전에는 국민적 지지기반이 확고했던 진보세력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궤멸상태에 빠지는 결과가 되었다. 이 야만적 극우반공체제 하에서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공적인 사회운동의 공 간을 그들에게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질식하게 만들었고 불구화되었다. 여운형, 조봉암, 장준하의 운 명은 그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20세기 전반 폭압적 일제 통제하의 식민지 상태에서도 우리 민족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운 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던 활동가들은 이 과정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4 19혁명 이후 남한정치 사회를 민주화하기 위한 운동은 진보적 활동가들 대신에 그 후 세대인 청년-학생과 종교계를 비롯한 양심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진전되었다. 그러나 1961년 군사정변 이후 계속된 친미-반공-군사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투쟁의 역사는 처절하리만큼 치열했다. 다수의 청년-학생들이 자결의 길을 택했고, 다른 한편으로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착취와 반인간적 핍박에 저항하다가 삶을 버렸다. 그 저항 의 꼭대기에 1980년 5 18광주항쟁이 있다. 그 때 10일 동안 지속된 봉기는 비록 장렬하게 패배했지 만, 그 후에 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5월운동은 마침내 1980년 5월에 죽었던 광주항쟁을 부활하게 만들 었다. 그 운동의 과정에서 미국의 탐욕에 찬 추한 얼굴이 드러났고, 학살자들은 내란죄로 단죄됨으로 써, 민주화운동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성과 속에서 1990년대 시민운동의 새로운 주체 가 탄생하였다. 이른 바, 시민이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길을 개척하는 새로운 주체인 것이다. 그 리하여 20세기 광주 전남 사회운동의 주체는 농민-청년학생과 지식인을 거쳐 시민에 이르게 되었다 고 할 수 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69

272 2) 연대 및 연합조직 주체 위의 사례들이 비조직 대중이나 단일조직이 주도하여 전개된 운동이라면, 이와 달리 여러 조직들이 연대하거나 연합운동체를 구성하여 추진된 운동이 있다. 한말 의병투쟁, 1920년대 사회주의 청년운 동, 1930년대 노동조합조직운동 및 농민조합조직운동, 1945년 국가건설운동, 한일협정반대운동, 함 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 5월운동, 6월항쟁, 5 18특별법제정운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한말 의병의 주체는 다수의 의병부대로 구성되었다. 여러 의병부대가 하나의 통합된 체제로 구축되 기 보다는 상호연계하고 협력하는 형태로 진전되었다. 기우만(장성의병), 이상학(나주의병), 최익현 (태인의병), 양회일(화순, 쌍산의소), 백락구(순천광양의병구), 기삼연(호남창의회맹소), 신남일(함평, 해남 등지), 안규홍(머슴출신, 보성, 여수 등), 황준성(완도, 유배수 출신) 등의 의병부대가 활동했었 다. 이 가운데 호남창의회맹소는 장성, 영광, 함평, 나주 등 서부지역 의병부대의 느슨한 연합체로 활 동했다. 3 1만세운동 역시 공식화된 조직형태로 발전되었다기보다는 연결망이 중심이 되었다. 이 연결망에 서 주요 활동가는 최흥종, 김철, 국기열, 김범수, 최정두, 정광호, 광주의 황상호( 黃 尙 鎬 ), 김복수( 金 福 洙 ), 박팔준( 朴 八 俊 ), 김용규( 金 容 圭 ), 최한영( 崔 漢 泳 ), 강석봉( 姜 錫 峰 ), 김봉열( 金 奉 烈 ), 강생기( 姜 生 基 ) 등이었다. 이 가운데 최한영, 강석봉 등은 해방 이후의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왔다. 1920년 이 지역 청년운동은 두 갈래에서 진전되었다. 그 하나는 민족주의 운동계열이고 다른 하나 는 사회주의 계열이다. 전자는 대지주, 자본가, 그리고 지식인 청년들이 주도하여 나주, 광주, 목포, 순천 등 군단위 청년회를 조직했다. 그 핵심활동가는 김양수, 이창규, 서병수 등이었다. 사회주의 계 열 청년운동은 이영민, 강석봉, 김재명, 최한영, 지영수, 전도 등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존에 있던 각 군단위 청년회를 사회주의적으로 혁신하거나 새로운 청년회 조직작업을 진행했다. 아 울러 노동청년단체, 농민청년단체, 전남청년연맹 등의 연합조직도 결성해 나갔다. 말하자면, 개별단 위단체들의 광범한 발전과 연합주체의 초기 발전이 병행하여 진전되었다. 연합주체는 개별단체의 결 합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여기에는 연합의 폭과 그 범위가 요점이라고 볼 때, 지역사회 청년단체 연합 이나 노동조합연맹 등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의 초기적 연합주체이다. 다음으로 광주항일학생운동을 보면, 1929년 11월 3일의 1차 저항운동은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발 생했으나, 11월 12일에 발생했던 2차 시위는 전남청년연맹의 장재성, 장석천, 박오봉, 강석원, 국채 진 등이 선도했고, 이들과 연계된 광주고보의 오쾌일, 이영범, 사범학교의 이신형, 황상남, 농업학교 의 조길룡, 김남철, 정욱 등이 앞장섰다. 이 운동 역시 조직운동이라기 보다는 연결망에 토대하여 전 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30년대 광주 전남 사회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했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이나 교육운동 등에 주력하 는 민족주의 운동계열은 일제의 회유정책에 의해 체제 내로 흡수되어 약화되었다. 반면에 강경투쟁을 지향했던 사회주의 민족운동의 주도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기간조직이 노농협의회와 전 2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3 남운동협의회이다. 이 협의회는 각 군단위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 건설을 주력하고 더 나아가 군별, 직 종별 연맹체로 발전시키려 했다. 전남노농협의회는 권대형( 權 大 衡 ), 이우적( 李 友 狄, 본명 이응규), 김 상혁 등 1920년대 후반 이른바 ML계라고 알려졌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고, 전남운동협의회는 해 남과 완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인 김홍배( 金 洪 培 )와 황동윤( 黃 同 允 )이 중심인물이었다. 그리 고 청년운동단체인 전남청년연맹은 김재명, 강영석, 장석천, 강해석, 국채진 등이 주도했다. 연합주체의 발전에서 중요한 전기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결성이다. 이는 1945년 해방과 함 께 미군정이 좌익탄압과 우익편향적 노선에 입각하여 일제 식민지 시기의 친일 경찰을 부활시키고 인 민위원회 해체작업을 진행하여, 좌익의 인민위원회가 더 이상 공개적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 자 이를 대체할 운동조직으로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좌익 민족주의를 포함하여 광범한 운동단체들이 결합한 통일전선체였다. 1946년 12월에 출범한 민전의 구성단체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 맹, 노동조합, 농민조합, 청년동맹, 부녀총동맹, 문학가동맹, 과학기술단체 등 29개 정당 및 사회단체 와 각 지역 사회단체를 포함하는 광범한 연합주체였다. 전남도 민전의 주요 활동가는 김완근(위원장), 유혁, 국기열(부위원장), 양장주(조직부장), 최한영(재정부장) 등이었다. 이 시기에 독립촉성회, 반탁 학생연합, 도지사 고문회의 등 우편향적 사회세력은 시민의 지지도에서 좌익세력보다 약했고 운동주 체의 발전에서도 통일전선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이들은 미군정의 비호 하에 친일세력과 영합하는 양상을 보였으며, 그 결과 민족독립과 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저항과 도전의 운동성은 사실상 찾아보 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특히 한국전 쟁과 정부군의 토벌작전을 거치면서 좌익운동세력은 자원과 동력이 소진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 진전된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에서 연합주체의 발전양상은 함평고구마피해보상 투쟁, 6월항쟁과 5 18특별법제정운동에서 적절히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함평고구마투쟁에서는 가톨 릭농민회가 초기 주체로 활동했지만, 여기에 천주교 성직자 집단이 결합했고, 뒤이어 광주 전남지역 과 전국의 농민운동단체 와 사회단체 등이 연대하는 확장과정을 보였다. 6월항쟁은 더 발전된 연합주체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여 운동을 진전시켰다. 국본은 1987년 5월 18일 망월동 추모식에서 전두환 정권의 호헌과 장기집권 책략을 돌파할 저항운동 의 필요성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어 1987년 5월 27일에 결성되었다. 민통련과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 이 주축이 되어 각 사회운동 세력과 종교계, 학생운동 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결성한 정치- 사회단체이다. 각 군단위 조직까지 체계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196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축하였고, 이 조직의 힘이 체계적으로 작동하여 6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그 후 1995년의 5 18특별법제정운동에서도 체계적으로 조직된 연합주체의 실현을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5 18학살만행에 대한 수사결과가 공소권 없음 으로 발표되자, 그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전개되었다. 광주 전남에서는 5 18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 전남공동대책위원회 를 결성하 고, 그날 바로 750여 명이 상경하여 청와대와 검찰청에 항의방문을 결행했다. 이를 시발로 한 이 운동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71

274 은 1995년 7월에 시작하여 특별법이 제정된 그해 12월 21일까지 150여 일간 지속되었다. 전국 각지 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학생, 교사, 일반시민, 농민, 의사, 변호사, 약사, 법학교수, 신림동 사법고시 준비생, 사법연수생 등이 저항운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1995년 10월 26일 5 18학살자처벌 특별법 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가 결성되었다. 이 연합주체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준비위원회[민노 총(준)],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등 한국에서 대표적인 8개 연합단체가 결합하였고, 전국에서 298개 개별단체가 참여했다. 연합주체의 성공적인 결성과 그에 기반한 체계적인 저항운동은 마침내 김영삼 대통령의 기존 입장을 변화시켜 특별법제정을 지시하게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논의는 운동주체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역사적 과정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좀 더 일반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대학생운동의 연합주체 발전과정과 재야 사회단체의 연합주체 형성과 정을 살펴봄으로써 운동주체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자 한다. 이에 관한 논의는 연합주체가 본격적으 로 발전된 1980년대 이후로 한정하여 검토한다. 먼저 대학생 연합주체의 발전은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1985) 에서 비롯하여, 1987년에 출범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그리고 1993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으로 이어지는 궤적을 보인다. 전학련은 전국 23개 대학이 결합한 주체이고, 전대협은 95개 대학이 참여했으며, 한총련은 전대협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참여범위를 더욱 확대했다. 각 대학교 총학생회장단의 협의체 수준이었던 전대협을 확대하여 전국 모든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까지를 대의원으로 하는 학생회 연합체로 확대 개편하였던 것이다. 재야의 사회운동단체는 좀 더 복잡한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1980년대 초반에 재야인사들 의 대표적인 결집체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 이었다. 1979년에 발족한 이 단체는 기존에 활동 중이었던 민주주의국민연합이 김대중 석방을 계기로 조직과 목표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공동의장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국민연합에 뒤 이어 발전한 재야의 연합주체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이다. 민통련은 민청련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 재야, 종교계 등 각계 민주세력이 결합한 민중민주운동협의회 (1984.6)와 재야 명망가의 결합체인 민주통일국민회의 ( )가 통합하여 결성한 광범한 단체이다(의장 문익환). 1985년 3월에 창립되었고, 9월에 열린 통합대회에서 민청련, 서노련 등 11개 단체를 새롭게 결합시켜 재야운동권의 강력한 중심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민통련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을 주도하여 6월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뒤 이은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의 분열로 실패한 후 동력이 약화되었고, 뒤 이어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이 창립되면서 발전적인 해체를 단행했다. 전민련은 1989년 1월에 노동자, 농민 등 8개 부문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되었다(공동대표: 이부영, 오충일, 이창복, 배종렬, 이영순, 윤정석). 27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5 전민련은 반외세 자주화 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 자주적 조국통일 운동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여 활동했으나, 참여세력들의 주도력과 결합력이 약화되고 그 일부가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면서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은 전국적 연합조직이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민자당 일당 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광주 전남민주연합 이 출범했다. 여기에는 이 지역의 40여 개 민족 민주단체들이 결합했고, 이 조직은 뒤이어 전국조직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에 참여했다. 1991년 10월에 창립된 전국연합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농민회총연맹, 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14개 운동단체와 13개 지역운동단체 등을 포함함으로써 가장 폭넓은 결합력을 실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공동의장: 고광석, 권종대, 지선). 한국의 사회운동사에 전국연합은 가장 폭넓은 연합주체로서의 통일전선체를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사회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이어받은 전국연합과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이 광범하게 발전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른 바 시민운동의 부상이다. 그리하여 90년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내적 구성은 기존의 전통적 사회운동과 새롭게 부상한 시민운동으로 대별된다. 연합주체의 차원에서 볼 때, 전자는 1991년 이후 전국연합의 지역조직인 광주 전남연합 346) 으로 이어왔으며, 시민운동은 1996년에 출범한 광주 전남시민단체협의회, 그리고 1998년에는 광주와 전남이 분립한 시민단체협의회가 주도해왔다 347). 1990년대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권을 분할하고 있는 이 두 연합주체는 주제와 실천방식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광주 전남연합이 국가권력의 억압과 자본의 착취에 대항하여 체제도전적인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다면, 시민단체협의회는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도전보다는 온건한 방식에 의거한 부분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일부 시민운동은 국가기구의 지원에 의존한 결과 권력이나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을 기대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두 주체의 이와 같은 차이는 사회운동세력의 분화 또는 분열, 그리고 두 주체 간에 경쟁과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결국 사회운동의 약화로 귀결되는 우려를 안고 있는 것이 현 국면의 실정이다. 따라서 현 시기는 지난 1세기 운동사에서 1910년대, 1930년대, 1960년대에 뒤 이은 사회운동의 정체기이며 일종의 위기라고 본다. 346) 이 단체는 1990년대 말에 동력이 급속히 약회되었고, 이 세력은 2007년에 광주 전남진보연대(의장 허연)로 재결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47) 광주 전남시민단체협의회에는 광주경실련 등 15단체가 가입했으며, 광주시민단체협의회에는 17개 단체가 결합했다. 17개 단체로 참여단체 광주YMCA, 광주YWCA, 광주기독교윤리실천운동, 광주 전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광주환경운동연합, 광주흥사단, 누리문화재단,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시민생활환경회의, 우리밀살리기운동광주 전남본부, 한국노총광주광역시지역본부, 우리농촌살리기천주교광주대교구본부, 광주경실련, 시민연대모임, 한국청년연합회광주 전남본부, 광주여성의전화, 한국외래종생태환경연구회로 구성되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73

276 4. 과제와 전망: 사회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이상의 종합적 논의를 통해서 20세기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전체적 양상과 진전과정 및 운동주 체를 분석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확인된 사회운동의 전체적인 양상은 무장투쟁과 대규모 대 중봉기, 그리고 조직적 저항과 소집단적 저항으로 구분하여 정리되었다. 이 경우에 무장투쟁은 지배 체제의 안정성과 정당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말기 의 불안정성, 일제강점기, 그리고 1980년 신군부 쿠데타가 보여준 지배 정당성의 결여가 그와 같은 극단적 폭력투쟁이 발생하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현 시기 지배체제의 제도적 안 정성은 더 이상 그와 같은 무장투쟁의 출현이 허용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 로 국가권력의 안정적 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은 지배의 안정성 수준을 넘어 과대성장을 우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21세기 오늘의 국가 권력은 더욱 과대하게 성장하여, 마음만 먹으면 사회구성원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군 대와 경찰 등 국가가 통제하는 물리적 인적 강제기구가 날로 비대해지고 있다. 또한 첨단의 전자통신 기술을 활용한 감시기구는 정교하게 발전하여 국민이 누구를 만나 어떤 식사를 하고 어디를 가서 무 엇을 했는지를 훤히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식민화된 생활세계 의 슬픈 현실을 목 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관료기구와 학교교육을 통해서 현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홍보한다. 동시에 저항과 도전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무력화하고 운동주체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선전한다. 국가는 민영화 된 대중매체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더 효율적으로 자기지배를 정당화하고 강화해 나 간다. 특히 자본과 동일체가 된 국가는 그 힘으로 국민과 국민의 삶을 상품화하며 자본의 이익에 봉사 한다. 더 나아가 자본을 활용하여 운동주체들을 유혹하고 매수함으로써 저항과 도전의지를 매장한다. 다음으로, 운동주체의 변화발전 양상을 검토한 결과에서는 비조직적 연결망으로부터 개별 운동조직 의 발전, 그리고 이 개별조직의 연대와 협의체 수준을 거쳐 통일전선체로서의 연합주체 수준으로 진 화-발전되어 왔음을 확인했다. 물론 최근에 발전된 시민운동의 흐름은 연합적 성격보다는 연대와 협 의체적 성격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사회운동의 동력이 형성되고 결합되는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바, 이와 같이 느슨한 형태의 결합력은 과대성장된 국가권력의 강고한 물리적 억압이나 착 취에 대하여 치열하게 저항하거나 도전하는데 한계를 맞게 되기 쉽다. 시민운동은 은연중에 체제도전 의 의지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운동주체에 대한 권력의 분할지배전략과 체제 내 흡수전략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각종 매체와 국 가기구를 통해서 집요하고 위압적으로 관철된다. 권력의 분할지배 전략은 지역이나 계급계층의 내부 에 침투하여 상호간의 차이를 증폭시키고 갈등을 심화시킨다. 한국사회에서 전라도를 표적으로 한 고 립화와 약화책동의 흔적을 우리는 지난 세월에 수 없이 목격해 왔고 그 상처에 괴로워했었다. 특히 개 발정책과 인재등용에서의 차별과 소외는 지역민의 영혼을 멍들게 했다. 운동세력에 대한 분할지배전 2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7 략은 진보적 민중운동과 개혁적 시민운동 간의 균열로 귀착되기도 했다. 이는 특히 시민운동단체인 NGO에 대한 자금지원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21세기의 아침에 이른 우리의 사회운동은 1980년대 저항의 시대를 경과하면서 하강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국제금융자본의 침탈과 수구보수정권의 탐학에 맞섰던 촛불의 행렬은 1987년 6월항쟁의 대열과 비교할 만한 거대한 민중의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촛불의 행렬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공허한 마음을 달래야 하는 오늘의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바로 오늘의 사회운동이 위기의 현실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다. 운동주체의 이와 같은 약화현상과 운동대상인 국가권력의 과대성장이라는 엇갈린 현실이 현재 우리 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상황의 구조적 바탕이다. 과대성장된 국가권력이 인간사회에 식민화된 생활 세계 를 초래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서구사회에 대한 진단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사회의 저 항과 도전으로 서구에서 출현한 것이 이른 바 새로운 사회운동 이었다. 그렇다면 이 국면에서 우리 의 사회운동이 당면한 과제는 무엇이며, 우리의 사회운동이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회운동이 당면한 과제의 핵심은 운동 주체의 새로운 건설에 있다고 본다. 지난 1세기의 지역운동사에서 사회운동의 부단한 분화발전과정 을 이미 보아 왔다. 그러한 분화현상은 기본적으로 어쩌면 자연적인 추세일 수 있다. 문제는 매우 광 범하게 분화된 사회운동, 그리고 분화된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다시 통합되지 못함으로써 과부하에 걸 린 형국처럼 보인다. 사회분화가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더라고 일단 분화된 운동은, 필요할 때는, 다 시 통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흩어지고 소멸을 맞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금 다양 하게 분화되어 있는 사회운동도 통합의 체제가 준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잔인하고 교활한 권 력에 의해 자멸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최근에 한국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운동의 난맥상에서 더 참담한 현실은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된 반동적 사회운동세력의 준동이다. 이와 같은 현실진단이 제안하는 처방은 운동주체의 재건으로 집약된다. 오늘날 운동주체들이 경험 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광화문 광장을 밝혔던 그 많은 촛불의 함성에도 권력은 귀를 막고 외면했으며, 더 잔인한 엠비는 촛불 출렁이던 민중의 광장을 닭장차로 벽을 쌓아 봉쇄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군 중을 바라보며, 힘을 잃고 돌아서는 활동가의 뒷모습에서 하워드 진의 고백을 생각한다. 그의 고백은 1960년대 미국의 잔인한 세월에 대한 회고였다. 2차대전 후, 미국 군대가 전 세계를 점령하고, 그 자 본이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시대, 즉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를 재패한 시대, 기능주의 사회이론이 학계 를 풍미하던 시대에 이에 대항하는 진보이론과 사회운동이 마주해야 했던 우울한 현실에 대한 고백이 었다. 현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이론 앞에서 비판과 도전을 주로 하는 사회운동이론은 침묵을 강요 당해야 했고, 지배권력의 횡포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 앞에서 무력해진 저항의 대열에 대한 슬픔이 베 어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그 우울한 현실에서도 정의와 진보를 위한 저항의 움직임이 새로 태어남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75

278 을 보고 역사의 힘에 대한 믿음을 썼던 것이다. 348) 한국사회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시대 를 경과하면서 민주화의 길을 닦아왔지만, 2000년대에 접 어들면서 휘몰아친 수구반공세력의 공세 앞에 휘청거리는 순간을 보내고 있다. 노무현의 죽음과 그 후에 이어진 친미-반공-자본주의정권은 분배정의와 진보운동에 대한 족쇄를 더욱 조여 오고 있다. 지금 사회운동은 반동세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신을 잃고 지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운동세력은 거 듭되는 패배에 나약해졌고, 뜨거웠던 열정은 식어가고 있다. 이것이 내가 광화문 광장에서, 그리고 광 주 금남로에서 보고 느낀 소회이다. 따라서 위축된 세력은 보강될 수 있어야 하고, 식은 열정은 다시 가열되어야 하며, 이를 토대로 하여 권력에 대한 공격력을 재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길 은 역사이고 그 길의 이정표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과 정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운동주체의 재 건을 주창하는 배경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병든 운동주체를 건강한 몸으로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병에 하나의 약 만 있는 것은 아니다. 허다한 처방이 제시될 수 있다. 운동의 객관적 환경을 구성하는 구조와 문화, 정 치와 경제 등의 다양한 요인으로 처방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운동주체 자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초점을 맞추려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활동가의 실천행동과 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그 의 정신을 주목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요인인 활동가의 실천행동과 관련해서는 실천행동의 터전이 되는 운동조직 및 그 조직들로 이루어진 연합주체를 주목한다. 이 연합주체의 역량에 따라 운동의 운명은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 다. 그런데 현재의 연합주체는 지쳐있고 약화되어 있다. 왜 그리 되었는가? 과도하게 분화되어 있고, 분화된 그들 간의 경쟁에 힘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 경쟁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권력이고, 권력 은 자금과 이권으로 유혹한다. 지금 다양하게 분화된 엔지오들에게 지원금을 배정하고 그들끼리 경쟁 하게 만드는 지배 권력의 공작은 사회운동의 터전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과도하게 분화된 운동주체들 의 불행한 운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들이 다시 함께 통합하는 체제를 구축할 때 가능하리라 생각 한다. 더구나 사회운동의 두 가지 흐름으로 된 진보의 민중운동과 개혁의 시민운동 간에 균열의 폭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시민운동의 주요 인자들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주 역들이었고 이들은 자기의 민중운동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의 공 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2010년대에 이르면 시민운동 활동가들의 경험과 운동문화가 전 세대들과 차이가 확대됨으로써 상호이해의 영역과 그 깊이가 줄어들게 되어 있고 이는 결국 상호 간의 균열확대로 이어진다. 또한 운동권의 과도한 분화는 그 자체로 동력의 축소를 초래하게 된다. 통 합은 저절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통합에도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주체를 건강하게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현재의 운동권을 재구조화하는데서 시작되어야 348) 하워드 진, 이재원 옮김, 하워드 진,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 역사의 힘 (위즈덤하우스, 2009), 31-33쪽. 2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9 한다. 그리고 이 재구조화 작업의 지향점은 분화된 개별 운동주체들의 효율적인 통합이어야 할 것이 다. 통합을 강화하는 기본 방법은 원만한 소통과 상호이해의 증진에 있다. 따라서 광주 전남의 운동 권에서도 진보연대와 시단협, 그리고 세대별 연합체 및 개별단체들이 상호소통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운동권의 중심구조가 확고하게 정립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중심구조의 활동에 따라서 연합주체의 구성체제 뿐만 아니라 그 하위수준에 해당하는 연대체제 및 협조체제의 차 별적 구조를 수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주체의 재정립은 광범하게 분산된 개별운동주체 들을 협의체-연대체-연합적 통일전선체 등의 차별적 구조화를 통해서 운동역량의 극대화를 이루어 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세기 광주 전남 운동사에서 드물게 얻어낸 성공사례로서 광주의 5월운 동과 1987년 6월민주항쟁, 그리고 1995년 5 18특별법 제정운동을 기억한다. 그들이 성공을 얻어낼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바로 운동주체의 굳건한 정립에 있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5월운 동에서 활동했던 주체들은 대단히 강한 투쟁력을 실천했으며 이 투쟁력의 바탕에 굳센 결합력이 작용 했고, 6월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체계적 연합주체 구성, 그리고 5 18특별법제정 운동 당시 연합주체인 범국민위원회를 보면 안다. 두 번째는 운동주체의 주관적 요인, 즉 정신적 요인을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현재 광주 전남 지역 사회의 운동주체 건설에서 이 요인이 중요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정신적 요인에는 두 가지 측면이 관련된다. 그 하나는 전라도 지역에 깊숙이 스며있는 불온한 패배주의 역사인식을 극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역사가 갖고 있는 명예로운 전통과 그 위대성에 대하여 투철한 자각과 자 긍심을 강화하는 일이다. 전자와 관련된 패배주의 역사인식은 마한과 백제 및 후백제의 역사에서 나 타나는 패배의 기록에서 연원하는 것이지만, 패배 없는 역사는 없다 는 상식적인 진리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역사를 결과에만 집착하는 기능주의적 해석을 넘어서는 것이 패배주의 함정에서 해방 되는 길이다. 자기 역사에 대한 결과와 아울러 그 결과를 가져온 과정과 원래의 목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자학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은 정신세계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고 적극적인 사회활동 에 장애로 작용한다. 따라서 강한 자기의식과 적극적 사회활동을 실천하는 사회운동의 주체는 이와 같은 소극적인 정신자세로부터 해방되어 적극적 자세정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전라도 역사의 명예와 위대성에 관한 사실적 근거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서 싸웠던 호남의병 1,463인의 행적을 기록한 호남절의록 349) 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보았듯이 동학농민 혁명과 한말의병,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광주항일학생운동과 최근의 5 18항쟁에 이르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지역의 이와 같은 명예로운 역사를 우리들 운동주체 자 신의 정신적 자산으로 내장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인류의 행진을 더 힘차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349) 이 책은 정조이 명에 따라 고정헌이 1800년에 편찬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정묘호란 (1627), 이괄의 난(1624), 이인좌의 난(1728)에서 활동한 호남의병 1463인의 의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77

280 이제 이 연구의 종점에 이르니 시작할 때의 문제의식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 는 중앙중심주의 또는 서울중심주의를 넘어서 변방의 주체성 확립을 지향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지역에 부당하게 들씌워진 패배주의 역사인식을 청산하고 더 적극적이고 자긍심있는 지역사 정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문제의식은 변방이 갖기 쉬운 패배주의라는 점에서 서로 밀접히 관련되 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다른 사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매천의 천향론( 賤 鄕 論 ) 이나 이 희권의 天 刑 (천형)의 땅 에 관한 논의도 유사한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프란츠 파농이 정신 과 의사를 그만두고 알제리 독립운동에 투신한 배경에도 알제리 주민들의 정신적 패배주의 즉, 식민 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광주 전남지역에 스며있는 이 허황된 패배주의 담론의 배후에 지배권력의 저주가 숨어있다고 생각했다. 허황된 담론이지만, 권력은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퍼뜨 려 왔다. 그것은 망령이 되어 그 지역민의 영혼을 짓밟았고, 그 상처는 지역민의 삶과 정신을 망가뜨 렸다.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일부러 외면할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 지역사의 심층에 깔려있는 사 실이라고 본다. 따라서 지역사회가 이와 같은 악령의 최면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깨어나 대지의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 연구는 그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 지역이 지난 100년 사회운동의 역사를 통해 서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싸움의 선봉에 서온 행적을 드러내고자 했 다. 그 행적을 역사의 무대에 올림으로써 권력의 추한 가면을 벗겨내고, 지역의 선열들의 진실을 보여 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지역 운동사의 주역들을 만났고, 그들의 강인한 기백과 장렬한 희생을 보았 다. 1894년 갑오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흰 두건의 동학농민군, 소작투쟁 때 배를 타고 목포까지 가서 경찰서를 점거했던 암태도 아주머니들, 한반도에 울려 퍼졌던 광주고보 학생들의 함성, 유신의 심장을 겨눈 교수들의 선언, 신군부의 광란도 이겨낸 이 지역의 5 18민중들, 이 밖에 이름 없는 수많 은 전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외침을 들었고, 그 울림에서 힘을 얻었다. 사회운동의 위대한 역사를 다 시 느꼈다. 지난 1세기 사회운동의 역사는 앞으로 맞이할 21세기 사회운동을 가늠케 한다. 지금, 21세기는 미국 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한국도 이 지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는 어렵 다. 현재의 이 체제는 자본의 타락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물적 생산이 없이 허구의 파생상품을 날조하여 서민경제를 파괴하는 금융자본의 탐욕은 인간성을 동물성으로 추락시킨다. 그 자본은 자본 가를 인간 이하의 야수같이 잔인하게 만든다. 월가를 점령하라(2011) 는 외침에서, 그리고 튜니지아 의 민중봉기(2010)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권력은 이러한 자본의 탐욕에 봉사하고 공존한다. 거짓으로 위장된 시장경제를 내세워 전 세계적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고 있다. 부단히 전쟁을 만들어 내야 하는 군수산업과 무기장사, 그리고 자유무역체제가 이를 입증한다. 시장의 위선과 탐욕은 현대 2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81 문명의 천박함을 상징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 체제의 본질은 반지성적 천박함에 있으며, 그 천박성 은 그들의 사회가 갖는 역사의 빈곤에서 기원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역사성 은 오늘의 시대정신을 시장논리로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사회운동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체제에 내재된 문제들로부터 연원한다. 자본의 타락 과 탐욕, 시장경제의 기만성과 위선, 과대성장한 국가권력의 억압, 시대정신의 반역사성과 천박성 등 이 바로 21세기 사회운동의 중심과제가 되고 있다. 비록 사회운동의 과제가 고도로 분화되어 매우 부 분적이고 지엽적인 일상의 문제로 제기된다고 하더라도, 그 눈길은 이 체제와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 는 먼 지점을 주목하여 더 인간적인 공동체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 한국 의 사회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지만, 지난 1세기 광주전남지역에서 울렸던 사회운동의 함성과 선언은 앞으로도 울려올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 역사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이 대지를 적 시도록 흘린 땀과 피가 엉긴 부름이 오늘 우리들의 지치고 허약해진 영혼에 새로운 운동을 위한 열정 을 일깨우리라 믿는다. 제2부 20세기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 279

282 참고문헌 <저서, 논문> 강만길, 1998, 고쳐쓴 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고정헌, 1799(김동수 역, 2010),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광주광역시, 1999, 광주지역시민사회단체편람. 김병인, 2008, 교육지표사건 과 5 18, 민주주의와 인권 제8권 제2호, 47-73쪽. 나간채 A New Perspective on the Gwangju Uprising: 1980~1997, G. Katsiaficas & Na Kahn-Chae eds, South Korean Democracy: Legacy of the Gwangju Uprising, London: Routledge. 나간채, 2012, 한국의 5월운동, 도서출판 한울. 나간채, 2013,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만들기, 도서출판 한울. 노명식, 2011, 토인비와 함석헌, 책과함께. 노태돈, 노명호, 한영우, 권태억, 서중석 지음,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서울: 창비, 무등역사연구회, 2001, 광주 전남의 역사, 태학사. 박은식(김승일 옮김), 1915(1999), 한국 痛 (통)사, 범우사. 박현채 엮음, 1992(2003),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 고난과 희망의 민족사, 소나무. 신채호, 1931, (박기봉 옮김, 2013),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안종철, 김준, 정장우, 최정기, 1995,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 사회운동, 새길. 유시춘 외, 2005, 우리 강물이 되어, 경향신문사 출판부. 이상훈, 2000, 타자로서의 지방 과 중앙의 헤게모니 - 지방 과 중앙의 이분 구도에 기초한 지식 권력 에 대한 비판 담론 구축-, 한국사연구회 편, 한국 지방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서울: 경인 문 화사. 이이화, 2003, 민중의함성 동학농민전쟁-한국사이야기18, 도서출판 한길사. 이해준, 1999, 역사속의 전라도, 서울: 도서출판 다지리. 2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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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김정길( ) 나상기( ) 나일성( ) 박동환( ) 이강( ) 이경률( ) 이철우( ) 이홍길( ) 임추섭( ) 조봉훈( , 5) 최 철(2014, ) <인터넷자료> Trackback : ;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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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5FC0CCB5BFC1D65FC7D1B1B9BCBAB8C5B8C52E687770> 사회연구 통권15호(2008년 1호), pp. 9~39 제7회 사회연구 학술상 우수상 수상논문 한국 성매매 반대운동의 프레임 형성과 변화에 관한 연구 - 1970 2005년 기간을 중심으로 1)이동주 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성매매 반대 운동에서 나타난 프레임 변화 과정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1970년대에서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성매매 반대운동에서 네 단계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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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C8ABB5E6C7A52E687770> 3 한국 주요정당의 연속과 변화 홍 득 표(인하대) I. 머리말 1. 문제의 제기 정치발전을 논하려면 정당, 의회, 선거, 정치문화 등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정치발전과 상호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개별적 논의보다는 종합적으로 접근해 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발전하려면 우선적으로 정당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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