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련(華以戀) hwp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Transcription

1 年 花 下 理 芳 盟 段 流 無 限 情 惜 別 沈 頭 兒 膝 夜 深 雲 約 三 십년을 꽃 아래서 아름다운 맹세 지키니 한 가닥 풍류는 끝없는 정이어라. 그대의 무릎에 누워 애틋하게 이별하니 밤은 깊어 구름과 빗속에서 삼생을 기약하네. * 들어가는 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아이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불 옆에 앉아 있다. 얼음장 같은 날씨에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쏟아진다. 아이는 약탕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또다시 새카매진 하늘이 송이송이 뿌려대는 눈발을 바라본다. 한참 만에야 자리를 턴 아이는 네모난 목판에 뜨거운 탕약 그릇을 담고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 다. 관음전에는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접은 객( 客 ) 하나가 묵고 있다. 그 옆에 좁다란 길을 따라가면 이 절의 본존불상을 모신 대웅전이 나온다. 빈한한 세간에 두 개의 불전을 운영하는 것만도 벅차서 따로 요사( 寮 舍 ) ** 를 내지는 못했다. 동자승과 주지는 평소엔 관음전에서 지낸다. 그러나 낯선 객을 들이는 바람에 별수 없이 대웅전에 서 잠을 청한 것이다. 동자는 대웅전 구석에서 잔기침을 쏟는 주지를 일으켰다. 내일모레면 육십 줄에 들어서는 노승이다. 그는 올겨울에 지독한 풍한에 걸려 며칠째 고열에 시달리던 차였다. 죽어가는 노승을 살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눈밭에 쓰러져 있던 객이었다. 노승의 약을 구하러 마을 로 내려가던 중 동자가 눈 속에 파묻힌 객을 발견해 용케도 데려왔다. 노승은 밤낮으로 객을 살리려 애썼고 그 바람에 병이 더욱 심해졌다. 객은 깨어나서 노승과 동자승 의 은혜에 고마워하며 등에 멨던 봇짐에서 얼마 안 되는 재물을 풀었다. 그걸로 약과 먹을 것, 땔감을 산 후 동자와 함께 노승의 회복을 바랐다. 객은 묵묵히 동자승을 도왔다. 빨래며, 장작 때기, 밥 짓기, 해우소 청소 등 안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을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제법 손끝이 싹싹했다. 노승은 오가는 인연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속에 묻혀 살며 마음을 비우다 보니 혜안이라 는 것이 생겼다. 하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사람 없는 법. 노승의 혜안은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대충 내력과 됨됨이가 보이는 신이한 능력이었다. 그는 맑은 얼굴의 청년이 비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세상의 시름과는 담을 쌓은 듯 보이 는 청아한 분위기에서 모진 풍파가 느껴졌다. 그날 밤. 청년이 대웅전을 찾았다. 어린 스님은 솜이불을 끌어안은 채 곯아떨어졌다. 노승은 여름에 말려둔 계수나무 차를 대접하였다. 불망울이 날리며 화로에서 새빨간 숯불이 타올랐다. 덕분에 살았소. 참으로 고맙구려. 저야말로. 노승은 청년의 진중한 목소리가 부처의 미소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일 떠나신다고? 스님께서도 쾌차하신 듯하니. * 일휴선사, 임종게( 臨 終 偈 ) **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2 아이가 매우 섭섭해 할 거요. 짧은 시간에 정이 듬뿍 들었던데. 금세 잊을 겁니다. 청년은 담담하게 이별을 입에 담았다. 날 때부터 이곳에 버려졌다고요? 청년이 물었다. 느릿하게, 노승이 잠든 아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연이 끊겼지. 한여름이었기 망정이지, 겨울이었으면 꼼짝없이 얼어 죽었을 거 요. 여긴 산짐승도 많이 다녀서 제법 위험하거든. 아이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척였다. 노승의 깡마른 손이 흘러내린 이불을 아이의 목까지 끌어올 렸다. 스님과 인연이 닿았으니 그건 저 아이의 복입니다. 허허. 빈도가 죽으면 쓸쓸한 절간 지키지 말고 하산하라 할 거외다. 속환( 俗 寰 ) * 입니까?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 자의로 온 것이 아닌 만큼 세상 물에 찌들어도 봐야지. 타닥타닥 숯이 이지러지며 다시금 자그마한 불망울이 날렸다. 고요하고 무거운 겨울밤, 들리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세상의 모든 흐름이 멈춘 듯하였다. 밖에 홍매화가 피었더군요. 아아. 사오 년 전에 아이가 몹시 아팠던 적이 있소. 건강하게 자랐으면 해서 심었는데 올해도 어김 이 없군. 설중매는 언제 봐도 아름다워요. 매화를 좋아하시오? 꽃이라면 무엇이든. 하지만 화중군자는 연꽃이지요. 하하하! 맞소. 부처의 꽃이지. 다소 발작적인 웃음소리에 청년은 소름이 끼쳤다.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들었누? 노승은 지나가는 말인 양, 능청스럽게 찻잔을 기울였다. 청년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똑같이 찻잔 을 기울였다. 회한에 젖은 표정을 보니 더욱 궁금해지네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오. 누 구나 사정이 있지. 문풍지가 파르르 떨었다. 불친절한 삭풍이 부나 보다. 청년은 그런 추위 속에 내던져 있었고, 다시 추위를 뚫고 떠나길 원하였다. 노승은 청년을 막을 길 이 없었다. 날고 들었던 많은 인연이 그러했듯이. 백창헌( 柏 蒼 軒 )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입에 걸쇠를 채운 줄 알았던 청년이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삼 년 전, 백창헌만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금지( 禁 地 )가 되었지. 관리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가야 해요. 늦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맺은 인연이 있는 게로군. 청년은 짐짓 망설이듯 식어가는 찻잔을 지분거렸다. 불그림자에 그 눈빛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한 가지 묻고픈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스님께선 사람의 얼굴을 보면 대충 내력이 파악된다고 하셨지요? 오래 산 늙은이들의 특권 아니겠소? 아주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스님의 눈엔 제가 어찌 보이십니까? 무슨 뜻이오? * 속세로 돌아감

3 극락에 갈 수 있겠습니까? 청년의 침착하고 흑진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 같은 죄인도 극락에 들 수 있을까요? 빈도는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하니 그저 참선하여 열반에 오르라고 할 수밖에. 우문현답에 청년은 복숭아꽃을 머금은 듯 나른한 입매를 끌어올렸다. 자. 시름일랑 이 차 한 잔과 흩날리는 눈발에 묻고 가시구려. 해 뜨고 찻잔 식으면 모두 잊게 된다오. 청년은 능구렁이 같은 노승의 속내에 짧게 웃었다. 평생을 연모하고 평생을 미워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승이 화로에 탄을 집어 던졌다. 새빨간 불길이 활활 치솟기 시작했다. 01. 견인지종( 堅 忍 至 終 ) 上 소슬한 바람에 꺾인 가을 단풍처럼 검붉은 토혈. 한가로이 다연( 茶 宴 )을 즐기던 중 갑자기 한 여인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시중들던 궁녀와 상궁들 이 비명을 질렀고 모였던 비빈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쓰러진 여인을 침전으로 옮기고 내의원에 연통을 넣으라 한 것은 황후 장씨였다. 그녀는 서슬이 퍼 런 눈으로 후궁들에게 일갈했다. 폐하께서 궁을 비우신 사이에 감히 이 같은 짓을 벌여? 황후마마! 소인들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닥쳐라! 내, 배후를 낱낱이 밝혀 물고를 낼 것이다. 다들 처소로 돌아가 근신하라! 추상같은 명령에 비빈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궁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내의원 의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황후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의원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황후의 옥 같은 이마는 살며시 구겨졌고 붉은 입매는 불만스레 휘어졌다. 비뚜름한 눈썹 아래로 구 슬 같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후궁들이 달아날 때 단 한 사람만은 황후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녀가 눈짓을 받고는 급히 황 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노쇠한 의관이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황후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옵니다. 신들이 무능하여 의귀비를 살릴 수 없을 듯합니다. 무능하다! 죽여주시옵소서! 원인은? 은침에 반응이 있습니다. 중독이란 말인가? 예, 마마. 태자의 생모인데 어찌! 정녕 살리지 못하는가? 의관은 난처한 듯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알았네. 마지막이라도 편안하게끔 모두 물러가게. 황후의 말 한마디에 의원과 노비들이 우르르 침전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침전에는 황후 장씨, 숙비 ( 肅 妃 ) 손씨, 그리고 음독으로 죽음을 앞둔 의귀비( 宜 貴 妃 ) 이씨만이 남게 되었다. 사위가 고요해지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의귀비가 침전을 둘러보았다. 희부연 시야 끝에 능라금수 차림의 황후와 숙비가 잡혔다. 황후가 한 걸음 다가오자 이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측은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이 무척이 나 가증스러웠다. 한마디 하려는데 소리 대신 쿨럭쿨럭 기침이 터졌다. 토혈이 죽죽 쏟아졌다.

4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허나 누구나 마지막이 아름다울 순 없어. 숙비. 똑똑히 봐두게. 근엄한 어투에 숙비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의귀비를 살폈다. 황제가 총애하던 얼 굴이 검푸르게 변하였다. 빛나던 옷차림은 시뻘건 피가 흘러 흉측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의귀비와 시선이 맞닿자 숙비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하였다. 그때, 갑자기 의귀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황후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쳤다. 황후! 천하의 몹쓸 계집! 내 아들의 털끝 하나라도 손댔다가는, 쿨럭쿨럭! 이씨가 악을 쓰자 황후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 진주알 같은 눈을 크게 떴다. 이씨는 한참이나 기침 을 토하더니 쇠잔해지는 기운으로 말을 이었다. 죽일 것이다.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어서라도, 네년의 사지를 갈가리 찢으러 찾아올 것이 야! 네년은 나보다 더욱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자자손손 손가락질받다가 저승에서도 편히 눈감지 못 하리라! 저런 저주를 퍼부은 계집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황후는 평소처럼 우아하게 의귀비를 쳐다봤다. 의귀비의 서슬이 퍼런 안광은 이제 황후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숙비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의 눈 길이 닿자 숙비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못된 것! 그때 네년을 죽였어야 했다. 네년을 일찍이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마, 말을 삼가시게! 손씨 네 이년!! 황후의 위세를 믿고 끝끝내 뉘우치지 않으니 네년의 끝은 빛도 들지 않는 어둠이겠구나!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이 타들어 가 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 향불을 사르듯 비명횡사할 것이야!!! 숙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의귀비는 핏줄이 불거져 나온 가녀린 손으로 이불을 움켜쥔 채 피눈물을 쏟았다. 오직 황후만이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우욱! 의귀비가 걸쭉한 피를 뱉어내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단말마로 몸부림치고 바르작거리던 미동마저 끊겼다. 황후가 천천히 의귀비에게 다가가더니 코끝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이내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떠는 숙비를 손수 일으켜 세워 의귀비 앞으로 데려갔다. 숙비가 놀라 무 릎을 꿇고는 울먹거렸다. 화, 황후마마. 똑똑히 보아라. 숙비는 겁에 질려 눈시울이 붉어졌다. 천박한 계집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른 끝이 어떤지. 이씨의 마 지막을 가슴 깊이 새기게나. 황후는 돌연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부용꽃처럼 풍만하고 우아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자 물치려는 숙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 겁먹을 것 없네. 자네의 충심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난 자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이제 마지막 산을 넘을 차례지. 따뜻한 손이 숙비의 손 위로 겹쳐졌다. 숙비는 맞잡힌 자신의 손을 빼고 싶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뒤로는 천 길 낭 떠러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시, 신첩은 황후마마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자네 충심은 내가 잘 안다니까. 숙비의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황후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죄를 짓고 어두컴컴한

5 폐허 속에서 번갯불에 번쩍이는 불상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이씨 계집은 뜻밖에 죽은 것이네. 황태자의 생모인 의귀비를 죽였다. 이제는 황태자만 제거하면 된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풀릴 테 니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 어차피 황궁 생활이라는 것이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무법천지 아니던가. 피는 이 어미의 손에 묻힐 테니 너희는 부디 무럭무럭 자라나 이 나라의 강산을 책임져다오. 의귀비의 처소를 나가며 손씨는 다시 눈물을 거두었다.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 이 타들어 가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 향불을 사르듯 비명횡사할 것이야!!! 귓가에 메아리치는 저주와 함께 종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비명이 터지진 않았으나 목구멍에 오니를 뒹군 까마귀를 쑤신 듯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는 우연히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뒤로는 자주 흉몽을 꾸었다. 심해지면 연중행사처럼 몸까지 탈을 잡기 도 했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 그 날 로 돌아간다면 절대 의귀비의 처소로 숨어들지 않으리라. 종인은 성마른 손길로 관자놀이의 땀방울을 닦았다. 밖은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녘. 그러나 더는 잠 을 이룰 수 없었다. 흠흠!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하자 닫혔던 장지문이 열리고 태성전( 泰 省 殿 ) * 수령태감인 하개가 달려왔다. 하개가 금색 휘장을 거두고는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외쳤다. 황제 폐하께 문후 올립니다. 만안하시고 수복강녕하소서! 쩌렁쩌렁한 외침을 신호로 상궁과 궁녀들이 줄을 맞춰 들어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소세할 물이 담 긴 금색 대야, 손숫물, 양칫물, 화장수, 곤룡포, 면류관, 흑화( 黑 靴 ) 등이 들려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궁녀들은 순서에 맞춰 황제의 용모 단장을 도왔다. 팔을 벌리고 서자 궁녀들 이 금룡이 수놓인 용포를 순서에 맞춰 착착 입혔다. 한 겹 한 겹 더해지는 옷자락에 하얗게 드러났던 침의( 寢 衣 )는 자취를 감추어만 갔다. 마지막으로 산호와 유리 장식을 더한 요대와 옥패를 차고 머리에 붉은색 헝겊 띠가 달린 십이류( 十 二 旒 ) 면류관을 씌우자 늠름한 군주의 위용이 뿜어져 나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헌칠민틋한 용모는 붉은색 망룡단을 더한 현색( 玄 色 ) 의상과 어우러져 더욱 빛을 발했다. 의관을 갖춘 후에는 수라간에서 아침 수라를 갖다 바쳤다. 보통 조정대신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조 회가 있기 전에 위장을 달래기 위해 가벼운 죽을 먹었으며 조회나 조강이 파한 후에야 든든한 수라상 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종인은 꽤 오래전부터 아침 수라를 거르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하개는 피가 동날 지경이라 며 매번 옆에서 잔소리를 끓였다. 한 입만 더 젓수시옵소서, 한 번이면 되옵니다. 옆에서 잔소리 해대는 하개에게 종인은 신물이 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는 사지육신은 멀쩡하지만 속병이 자주 나는 것이 흠이었다. 내의원에서도 시시각각 황제의 몸 상태를 확인했고 그가 체증에 걸리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하개는 주군이 속병을 앓는 원인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주군이 영양이 부족해서 쓰러지기라 도 하면 수라간은 물론이거니와 내의원까지 칼을 물 각오를 해야 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폐하.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기침하셨으니 느긋하게 자릿조반을 젓수실 수 있사옵니다. 아침잠이 많은 종인은 조회에 늦는단 핑계로 조반을 자주 건너뛰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개가 그 핑 * 황제의 침전

6 계를 대지 못하게 자릿조반이 마련된 곳으로 안내하며 종알거렸다. 종인이 힐끔 쳐다보자 하개는 민망한 듯 미소를 띠었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차조미음이옵니다. 수라간에서 황제 앞에 자릿조반을 대령했다. 마지못해 뜬 첫술을 시작으로 종인은 자그마한 그릇에 담긴 죽을 힘없이 퍼먹었다. 고작 죽 한 그릇이었지만 식사시간은 제법 길었다. 물로 입을 헹구고 난 종인은 조회에 참여하려고 태성전을 나섰다. 늦겨울의 햇살이 느릿하게 단장을 나서고 있었다. 약 이백여 년 전 태조 김여읍은 주변 국가와 크고 작은 부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연( 沇 )이란 나 라를 세웠다. 수도는 교안( 皎 岸 )이요, 중심에는 상강( 霜 江 )이 흐르고 교안을 둘러싼 낙성산( 洛 城 山 ) 아 래에는 연의 황제와 황족이 사는 관주성( 關 朱 城 )이 자리했다. 관주성은 셀 수 없이 많은 궁과 전각으로 이루어졌는데 사시사철 피고 지는 화초와 늘 사람이 붐벼 떠들썩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짙푸른 휘장이 걸린 관주성은 연의 상징이자 교안의 자랑이었다. 황실 명맥은 태조 김여읍의 뒤를 이어 6대째 이어져 내려왔다. 그 중심에는 올해 스물이 된 황제, 김종인이 있었다. 그는 제5대 황제인 효경제( 孝 敬 帝 )의 셋째 아 들이자 숙비 손씨 소생으로 연호는 윤정( 潤 貞 )이다. 그의 생모인 숙비 손씨는 효경제가 붕어하자 슬퍼하다가 며칠 후 자결하였는데, 종인의 나이 겨우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순사( 殉 死 ) * 한 숙비의 절개를 높이 사 열녀라고 칭송했다. 어린 종인은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보위를 이었다. 그는 친정하기 전까 지, 황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황태후 장씨에게는 장문견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장문견은 국구( 國 舅 ) ** 이자 태위( 太 尉 ) *** 로서 강력 한 군권을 쥐고 있었다. 게다가 무정후( 武 貞 侯 )에 봉해지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였다. 장씨 남매는 어린 황제를 앞세워 구 년이나 정권을 쥐고 흔들었는데 조정에 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신진세력이 없었다면 태후는 여전히 주렴을 드리우고 스스로 조정의 암호랑 이가 되려 했을 것이다. 황제가 친정을 시작하긴 했으나 조정은 여전히 장씨 남매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오늘 아침만 해도 조세 개혁 때문에 살 떨리는 논쟁이 오갔다. 종인은 가장 귀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지만,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살쾡이 같은 신료들의 말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몹시 소극적이었다. 조정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안과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궁( 慈 申 宮 ) **** 으 로 보고되기 때문이다. 종인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조세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의 조세법은 황실 살림보 다는 세도가의 곳간을 불리는 데 유리했다. 연말이 되면 국고는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드러냈는데, 벌 열들의 창고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온갖 재물과 곡식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비정상적인 흐름을 끊으려면 조세 개혁은 반드시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옹립을 도운 권신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 매번 입을 다무는 것이 종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짐이 조금 더 상량해 보겠소. 자신이 내뱉은 말이 공허하게 머릿속을 배회했다. 이제야 아침 수라를 먹을 수 있게 됐는데 조회를 마치고 나면 늘 머리가 아파 입맛이 없었다. 태성전으로 돌아온 종인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보료 위에 앉았다. 거무튀튀한 책상과 의자, 바닥, 기둥, 장롱. 뭐 하나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다. * 남편을 따라 죽음 ** 임금의 장인 *** 정일품. 국가 최고 군사장관 **** 황태후의 처소

7 종인은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폐하. 수라상을 들이라 할까요? 하개가 간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짐이 한가로이 밥숟가락이나 뜨게 생겼느냐? 편전에서의 일은 잊으시옵소서. 저 늙은이들을 이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도 말이 새어나갈까 봐 사리문 잇새로 억누르듯이 겨우 내뱉는다. 선제께서도 매사 마음먹은 대로 처리하지 못하셨지요. 하물며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하셨사옵니다. 저들 눈에 폐하께서 어찌 보이는지부터 파악하셔야 합니다. 하여 참고 있질 않으냐. 예. 아주 잘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폭발할 것만 같은 울화에 종인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시간은 폐하의 편이옵니다. 저들은 남은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지요. 참고 기다리다가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당하면? 필시 폐하께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기회가 오기도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하늘은 명군을 버리지 않는 법이지요. 하개가 살살 달래며 위로하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하개는 어릴 때부터 종인의 비위를 맞춰 온 데다 험난한 궁에서 사십 년 가까이 버틴 지혜가 있었 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꼭두각시처럼 보위에 오른 종인을 지척에서 모셨으므로 그 애틋함이 진하 였다. 그만 역증 내시고 수라를 젓수시지요. 매번 수저를 뜨는 둥 마는 둥 하시니 이러다 덜컥 탈이 날 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밥알은 모래알 같고 고기와 나물에서는 비린내가 나는구나. 종인은 슬프게 중얼거렸다.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까 봐 잘 먹지 못함을 하개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매번 은으로 꼼꼼하게 검사 하고 있긴 하나 참변은 경계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인이 철두철미하게 검사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가 없다. 참으셔야 합니다. 와신상담의 고사를 아시지 않습니까? 하개. 너는 이런 짐이 어리석어 보이겠지?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성군이 될 자질이 충분하시지요. 내 앞가림도 못하는걸. 원석은 풍랑에 휩쓸리고 깎여야만 훌륭한 옥이 됩니다. 종인은 나지막하게 실소를 터트렸다. 옥을 꿰어 불세출의 보물을 만들 장인도 필요하지. 영명하십니다. 수라를 들여라. 예, 폐하. 욱여넣은 아침을 소화하려 화원으로 산책이나 갈까 하는데 급전이 날아들었다. 국경을 침범해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던 예족 토벌이 끝나고 무정후 장문견이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예족은 맹렬하기로 소문난 부족이고 규모도 상당해서 장문견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장 반년에 걸친 노력 끝에 북녘을 평정하고 환도하는 길이었다. 이것은 연나라의 복이었으 나 종인의 숨통을 조이는 새로운 사슬이기도 했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종인은 장문견의 토벌령을

8 허락해야 했는데 막상 그가 돌아온다니 정말 달갑지 않았다. 먹은 것이 도로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종인은 전령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온화한 표정을 유 지했다. 그러나 전령이 사라지자마자 안으로 급하게 들어가더니 기둥을 붙들고 헛구역질을 했다. 폐하! 옥도미령 하시옵니까?! 어의를 부를까요? 수선 떨지 마라. 전공을 세웠으니 이번에는 또 뭘 요구할지 모른다. 그것만 생각하면 벌써부터 목덜미에서 열이 오 르고 머리가 아팠다. 장문견이 돌아왔다니 조세 개혁은 물거품이 되겠군. 원칙대로 폐하의 뜻을 밀고 나가시면 됩니다. 저들이 원칙을 지켜왔느냐? 국정은 폐하의 손에 있습니다. 또 원칙적으로 태위는 정사에 참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들이 원하는 것이 원칙이고, 저들의 논리가 합리다! 고정하시옵소서. 화내시면 옥체에 해롭습니다. 끔찍하구나! 나라에 마땅한 장수가 없어서 또 장씨 일가의 손을 빌리다니! 종인이 치를 떨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땅한 장수가 없다니요? 예족은 규모가 워낙 커서 부득불 무정후를 보내야 했으나 선봉대장은 폐 하의 사람이 아니옵니까? 무정후가 무사귀환 했다는 것은 그자 도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는 뜻입니 다. 파르르 떨던 종인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잊고 있었을까. 토벌을 나가는 장문견에게 일부러 딸려 보냈던 자신의 벗을! 장문견이 스스로 무 덤 파는 줄도 모르고, 데려가게 해 달라 부탁했던 그 를! 그의 공과 경험이 나날이 쌓이고 있나이다. 하지만 그도 태후의 인척이지 않은가. 그보다 폐하께서 아끼시는 벗이지요. 아니옵니까? 도무지 하개를 속일 방도가 없다. 떠보는 질문 하나에도 쉬이 넘어오질 않는다. 승전 연회를 베푸셔야지요. 그전에 논공행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보상해 줘야겠군. 종인이 가까스로 진정된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02. 견인지종( 堅 忍 至 終 ) 下 관주성으로 향하는 주작대로( 朱 雀 大 路 )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있었다. 새해가 지난 후 교안이 이토록 떠들썩했던 적이 없다. 사람들은 꽃가루와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작 약했다.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서 푸른색 국기( 國 旗 )가 당당하게 나부꼈다. 도열하여 행군하는 군사들 은 기치창검을 들고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냈다. 개선장군의 위용은 수도를 떠날 때보다 울발하였다. 갑옷과 투구 위로 하염없이 내리비치는 태양이 장문견의 앞길을 밝게 빛내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환호에 미소로 화답하였는데 하는 모양새가 꼭 능 행을 나서는 황제와도 같았다. 박찬열은 그 뒤를 묵묵하게 따랐다. 붉은색 비단을 깐 안장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턱은 약 간 높게 쳐든 채다. 그가 언뜻 여의주 같은 눈알을 굴려 아래를 살피자 계집이고 사내고 할 것 없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꼬는 희한한 풍경이 벌어졌다. 찬열은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본 후 시선을 거뒀다. 당연히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힐끗힐끗 인파를 살펴도 그 녀석 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9 편장군( 偏 將 軍 ) *. 자네는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앞에서 들린 해괴한 소리에 찬열이 말을 몰고 와 장문견 옆에 섰다. 조금 전 뭐라고 하셨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라니까. 어깨 부상이 낫지 않았잖은가. 폐하를 배알하러 가는 길인데 어찌 소장만 빠지겠습니까? 부상병을 궁에 들이면 모양새가 그렇잖은가. 폐하를 뵈면 바로 퇴청하겠습니다. 어허. 그리 고집을 부리다가 다친 것 아닌가? 퇴각하는 적들을 쫓아 끝까지 주륙하던 중 매복에 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했지 만 그 날은 어쩐지 마지막까지 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그들을 보냈다면 후방에서 대기하던 지원군과 합류해 더 큰 분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어깨를 내주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찬열의 판단은 옳았다. 자네는 내 재종( 再 從 ) ** 이야. 태후마마께서도 눈여겨보시는 마당에 자네에게 탈이 생기면 중간에 나만 곤란해져. 상관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네. 아직 궁에 도착한 것이 아니니 자네는 군령에 따라야 해.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팔을 잘못 움직이면 통증이 밀려오긴 했다. 그렇다고 환도하고 황제를 알현하 는 자리에 자신만 빠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찬열은 태후까지 들먹이며 군령을 운운하는 장문견을 이길 수 없었다. 기나긴 길을 따라 남문을 거쳐 희조전( 凞 照 殿 ) ***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품계석 위에 문무백관이 양옆 으로 늘어서 있고, 붉은 융단이 깔린 드높은 월대에는 젊은 황제가 서 있었다. 승전한 탓인지, 전쟁의 피로에 찌들었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장문견과 휘하 장수들의 표정 은 매우 의기양양해 보였다. 장문견이 월대 밑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폐하께 문후 올립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뒤에 선 장수와 군사들도 모두 부복하며 복창하였다. 소장 장문견, 폐하의 명을 받자와 예족을 토벌하고 조금 전 환도하였나이다. 그러자 황제가 잰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면류관 양옆으로 늘어진 붉은색 헝겊과 유리로 만든 패영이 바람결에 찰랑찰랑 흩날렸다. 황제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장문견을 친히 일으켜 세웠다. 무정후!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소. 무더위 속에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는데 어느덧 매화 피는 계절이 되었구려.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덕분이오. 경이 변방에서 이리 애를 써준 덕에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다오.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은 소장의 직분입니다. 과연 경은 대연의 수호자요! 황제가 장문견의 거친 손을 따스하게 맞잡았다. 황제가 신하에게 이러는 것은 엄청난 특혜인지라 문무백관과 군사들이 감탄하며 그 광경을 쳐다봤다. 태후마마께서는 별고 없으신지요? 물론이오. 경의 승전보를 듣고 매우 기뻐하셨지. 변방에 있는 동안 소장은 오직 두 분의 안위만을 걱정하였습니다. * 정오품 무관( 武 官 ) ** 육촌지간 *** 관주성 정전. 주로 큰 국가 행사가 행해짐

10 암, 그랬을 테지. 경의 충정이 송백처럼 우직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소? 장문견이 뻗대듯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천안( 天 眼 ) * 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 것이 법도였지 만, 장문견은 황제와 눈높이를 맞추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었다. 헌데 편장군이 안 보이는군. 도성에 함께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아. 경미한 부상을 입은지라 소장이 오늘은 돌아가 쉬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표정에 희미하게 실금이 갔다. 천자를 만나기도 전에 먼저 돌아가 쉬라고 하다니 기가 막혔 다. 옆에 있던 하개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황제는 천연덕스럽게 장문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이는 짐의 벗이기도 하니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싶었겠지. 잘하였소. 일시적으로 굳어진 황제의 표정에 약간 긴장했던 장문견은 다시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허나 다음에는 짐에게도 인사하고 가라 해 주시오. 짐은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딱 오해하기 좋 지 않소? 짐은 편장군 박찬열이 방자하다고 오해받는 것이 싫소.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명심하지요. 종인은 빙긋 웃었다. 내달이 태후마마의 탄생일이라 승전 연회는 그때 맞춰 준비하려고 하오. 경의 생각은 어떻소? 마마의 탄신진연에 맞춰 연회를 준비해 주신다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여독으로 심신이 곤고하겠지. 오늘은 간단하게 위로연을 마련했으니 함께 자리를 옮깁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은하수 쏟아지는 밤하늘에 시리디 시린 조각달이 새침하게 걸렸다. 스러져가는 산막 앞에 몇 그루 안 되는 매화나무는 물러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듯 앞다투어 꽃을 토해냈다. 백매와 홍매가 한데 어우 러져 흐드러지게 기지개를 켰다. 산막 앞에 걸어둔 두 개의 상등만이 달빛을 대신하여 어두운 산속을 비추는데, 한 청년이 푹푹 한 숨을 내쉰다. 달처럼 하얀 얼굴이 마치 가마솥에서 갓 삶아 건진 달걀처럼 뽀얗다. 그러나 얼굴에 잘잘 흐르는 애티 너머로 우수에 찬 눈빛에는 시름이 한가득. 도톰한 입술은 잇꽃으로 물들인 듯 붉기만 한데, 고 집스러운 입매는 일그러져 청년의 안색을 더욱 어두워 보이게 했다. 청년은 매화나무 옆 커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희붐하던 새벽녘 하늘이 먹물이 될 때까지 있었음에도 추운 줄 몰랐다. 매화꽃 작다고 싫다 마라. 꽃은 작아도 풍미는 뛰어나네. ** 나지막한 울림에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싼 향유를 태우며 오랜 벗이 걸어오고 있었다. 청년은 조금 전의 시름이 언제였냐는 듯, 얼른 일어나 달려갔다. 언제 왔어? 내가 오는 줄 몰랐나? 저잣거리에 사람이 그리 깔렸는데. 어머니께서 편찮으셨어. 뭐? 약은? 의원은 불렀니?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려가자. 의원을 불러야지. 돌아서는 찬열의 손을 청년은 꼭 붙들었다. 토사곽란이었어. 지금은 괜찮으셔. 저런. 그래도 의원에게 가보는 게, 괜찮아. 정말이야. * 임금의 눈 ** 성윤해, 영매( 詠 梅 ) 중

11 청년, 도경수는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고집을 피웠다. 어째서 더 야위었지? 찬열이 경수의 가느다란 팔목을 가리켰다. 경수는 짧아진 소매를 애써 끌어내리며 낯빛을 붉혔다. 겨울이었잖아. 그게 무슨, 다친 데는 없어? 경수가 뒤늦게 찬열의 상태를 살폈다. 전장에 한 번 나갔다 오면 한두 군데는 꼭 부러져서 돌아오 는지라 산막에는 늘 약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멀쩡해. 찬열은 어깨 부상을 숨겼다. 경수는 조금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달리 첨언하지는 않았다. 찬열아. 나 좀 도와다오. 진지한 투에 찬열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평소에는 제법 장난기가 있는 친구인 데다 자존심 이 세서 누구한테 부탁한다는 소리를 잘 내뱉지 않았다. 나, 무과에 응시하려고. 지금 내 실력으론 불안해서 네게 가르침을 청하고 싶어. 무과라니? 청년이 커다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자존심을 억누르는 투가 역력하다. 더는 학문에 뜻을 둘 수가 없어. 태학관( 太 學 官 ) * 에서 나오는 용전( 用 箋 ) ** 으로는 감당이 안 돼. 대 과는 언제 열릴지 장담할 수 없지만 얼마 안 있으면 무과가 열려. 말단직이라도 받으면 당장 생계는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원정 갔다가 이제 왔는데 다짜고짜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하다. 이리와. 찬열이 바위 쪽으로 경수를 끌었다. 그리고 그를 바위에 앉히고는 자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 히고 자리를 잡았다. 어려운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하란 건 이런 뜻이 아니야. 네 꿈을 접게 하면서까지 널 돕 고 싶지 않아.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래? 날 화나게 할 셈이야? 스스로 깎아내리는 걸 싫어하는 찬열은 청년이 종종 그의 화를 돋우려고 저러는 걸 잘 알고 있었 다. 청년은 외골수지만 정직함이 장점이고, 본인이 옳다고 믿은 건 끝까지 믿는 단순한 성격이다. 그 러나 한편으로는 영악하기도 해서 친우를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다. 넌 도계한 장군의 증손이야. 그분의 핏줄이라고. 경수야. 내 눈 똑바로 봐. 찬열이 짐짓 엄중하게 요구했다. 머루알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찬열의 것과 마주쳤다. 내가 아는 도경수는 한번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하고 마는 성격이지.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 지 않는 나무와도 같아. 사람을 살뜰하게 살피기도 하고,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해. 네가 아니면 장차 누가 폐하를 보필하겠어? 난 그냥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그런 말로 자신을 옭아매면 좋아? 스스로를 속이지 마. * 연나라 최고 교육기관 ** 용돈

12 인사하고 올게. 엄중하게 경고한 후 찬열은 산막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이곳은 늘 그렇듯 변함이 없었다. 단지, 함께 오던 친구 대신 그들의 유 품이 한쪽에 조용히 마련되었을 뿐이다. 두 개의 촛대가 소리 없이 타오르는 자그마한 단상 위에 반 짇고리와 해진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찬열은 그 앞에 서서 합장하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다. 경수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가위로 깊이 탄 촛대의 심지를 잘랐다. 그리고는 반짇고리 위에 방금 꺾은 매화가지 하나를 올렸다. 자당( 慈 堂 ) * 께서는 차도가 없으시니? 울화병인데 쉬이 낫지 않지. 약은? 답하지 않는 경수의 집안 사정을 얘기하자면 대충 이렇다. 날 때부터 부유했던 기억은 없다. 번번이 과거에 낙방한 아버지는 과장( 科 場 )에서 행해진다는 비리 를 접한 후로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머니는 병들었으며 하나 남은 동생은 이제 겨우 아홉 살 이다. 이 년 전에 세 살 아래의 누이를 역병으로 보낸 탓에 어머니의 병환은 더욱 깊어졌다. 경수 혼자서 곤궁한 살림을 책임지기에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나마 찬열이 있을 때는 그가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도움을 주었지만 지난 반년 동안 전장에 가 있느라 도움의 손길은 뚝 끊겼다. 찬열의 어머니는 남에게 늘 퍼주기만 하는 아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의 명성에 들러붙는 거머리가 많다 보니 경계심도, 안목도 매우 높아진 것이다. 찬열과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자란 경수지만, 찬열의 어머니는 그가 염치도 모르고 매번 손을 뻗는 다고 여겼다. 자연스레 찬열이 도성을 비운 사이에는 그의 집에도 갈 수 없었다. 그놈의 염치 때문에. 또 고집을 피웠군. 경수는 울지 않았다. 호오가 명확했으나 속내를 잘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었다. 소년처럼 티 없이 깨 끗한 얼굴은 읽을 수 없는 암호문과 같았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장점이 있으나 자신의 이 야기는 하지 않아 늘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건 다 어머니 때문이다. 빈 쌀독, 남편의 해진 옷자락,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긴 대문, 금 가기 시 작한 담벼락의 벽돌을 볼 때면 어머니는 세상 시름을 전부 끌어안은 듯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경 수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보면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다.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비극임을 모르는 경수는, 그렇게 꺾이지 않는 자존감을 앞세워 더욱 도도해져만 갔다.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다면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거다. 찬열의 커다란 손이 경수의 작은 얼굴에서 슬픔을 지워냈다. 먼저 간 월란에게 미안하고, 어린 연수에게도 면목이 없어. 월란이란 말에 다정하던 찬열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월란이 그렇게 아파하기 전에 의원을 불렀을 텐데.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런 말 하지 마. 월란은 경수의 누이였고 한때 찬열의 정혼자였다. 그러나 찬열이 서북에서 일어난 난을 평정하러 나간 사이, 급작스레 역병에 걸려 유명을 달리했다. 고작 넉 달이었다. 찬열이 교안을 떠난 지 단 넉 달 만에 젊은 연인은 저승문을 사이에 두고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그 일은 찬열과 경수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특히, 경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다. 도경수에게 박찬열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자 한 번도 내색한 적 없는 첫 연정이다. 그래서 경수는 *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13 가문과 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접어야 했다. 항상 한 걸음 뒤에 물러나서 찬열의 뒷모습 을 바라보며 그의 행복을 바랐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날엔 모두 불행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월란이 죽어 버렸다. 약 한 첩 제대로 못 먹고, 가을바람에 소슬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힘없이 꺾이고 말았다. 경수의 나이 열아홉이었고, 월란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그러나 찬열은 오래전부터 경수가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는 경수를 위해 그저 모른 척할 뿐이다. 찬열은 빈곤함에 허덕이는 경수를 도와주고 싶었다. 때마침 조부끼리 서로 사돈을 맺기로 했다는 유서가 발견되었고, 찬열은 적극적으로 월란을 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는 가문의 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심히 반대했지만 그는 경수를 위해 혼사를 밀어붙였다. 애석하게도 월란과는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게 되었으나 찬열은 그 일로 경수가 괴로워할 때면 왠 지 모를 자책감이 들었다. 직접 혼례복을 짓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자수를 잘했었지. 너와 내 향낭은 항상 월란이 만들어줬으니까. 실수를 반복할 순 없어. 이러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 그럴수록 더욱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집안을 일으키겠단 거야?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경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찬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데 사라졌던 든든한 벽이 다시 세워진 기분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돌아왔잖아.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기대. 난 항상 이 자리에 있으니까. 그러다 네가 사라지면 나 혼자 못 일어날까 봐 두려워. 말을 삼키는 경수에게 찬열이 발랄하게 제 안했다. 기분전환이나 해 보련? 매화꽃이 피는 곳이 있어. 색이 어찌나 선명한지 석양을 머금은 것 같다. 어릴 때 몇 번 본 뒤로는 갈 기회가 없었지. 경수의 속눈썹에 어룽진 이슬 같은 눈물방울을 쓱싹 닦아주며 찬열은 부드럽게 웃었다. 매화 좋아하잖아. 꽃의 우아함을 좋아하는 거지, 매화라서 좋은 건 아니야. 그게 그거지. 어차피 그 근처에는 사람도 없어. 음산할 지경이라니까. 본인의 농담에 혼자서 깔깔거리는 찬열을 보며 경수도 허물어지듯이 실소를 머금었다. 모레 신정( 申 正 ) 쯤에 포목점 앞에서 보자. 찬열아. 응?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 새삼스러운 질문에 찬열은 경수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03. 홍류원( 紅 流 園 ) 짐은 개의치 않는다. 하개, 편장군을 일으켜라. 찬열은 아침 일찍 입궁해서 종인에게 죄를 청했다. 그는 종인의 배동( 陪 童 )이었고, 현재는 종인이 벗으로 여기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벗이라는 이 름은 황제의 기분이 좋을 때나 붙어서 신하가 감히 쓸 순 없었다. 찬열은 정도를 지켰고 종인은 찬열 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하지만 종인은 정말로 어제 일을 맘에 담지 않았다. 장문견에게 화가 난 일로 찬열에게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찬열이 태후 일족과 인척지간인 것은 껄끄러우나 그것이 십 년을 넘긴 우 정을 덮을 순 없었다.

14 부상이 심하다 들었는데 어떠냐?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나았습니다. 다친 지 얼마 안 됐다면서 허세는. 내의원에 들러 꼭 치료받고 가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찬열은 그 어느 때보다 공경한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옥안( 玉 案 )에 쌓인 상소문을 지분거리던 종인이 흘리듯 툭 내뱉었다. 장문견이 올린 장계를 보니 네 전공이 상당하더군. 식량 탈취, 족장의 아들들을 비롯해 장수 세 명 의 수급 베기, 퇴로 차단, 지원군 일망타진. 잘하였다. 마른 침을 삼키던 찬열에게 진심 어린 미소와 칭찬이 돌아왔다. 넓게 보면 나라를 위한 일이나 좁 게 보자면 장문견의 치적을 도운 꼴이라 찬열은 내심 종인이 이것을 불편하게 여길까 염려했다. 그러나 종인은 순진하게 웃으며 찬열을 치켜세웠다. 조자룡의 현신 이라 칭할 만하구나. 과찬이십니다. 도성으로 오는 동안 여인들이 네 얼굴을 보려고 안달하였다지? 과연 반악( 潘 岳 )과 송옥( 宋 玉 )이 울 고 갈 남중일색이로다. 그 말에 찬열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제의 칭찬은 과장이 아니었다. 찬열은 관옥으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는 육척 반이 넘는 훤칠한 키와 쭉쭉 뻗은 팔다리,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장수로 이름을 알릴 무렵부터 실력보다는 보기 드문 백석( 白 晳 )이라며 그 명성에 홍역을 치를 정도였다. 찬열은 현재 딸을 가진 세도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사윗감이었다. 그는 외모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무신( 武 神 )이라 불릴 만큼 실력이 좋았다. 십오 세에 처음 전장에 나서 매번 승전보를 울렸다. 대대로 국가에 공을 세운 무관 집안일뿐만 아니라 현재 그의 부친인 박우헌은 사예교위( 司 隸 校 尉 ) * 였다. 찬열의 어머니는 태후 장씨의 당사촌이었으므로 넓게 보면 황제의 외척으로 엮었다. 장문견이 예족 토벌에 찬열을 부장으로 데려간 것도 그가 장씨 가문과 연결된 탓이었다. 태후는 박 찬열이 크게 될 인물이라며 장문견에게 특별히 뒤를 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준수한 용모, 벌열 가문, 천부적인 무술과 예의 바름은 박찬열의 가치를 나날이 치솟게 했다. 이번 에 또 공훈을 쌓고 돌아왔으니 그를 사위로 들이고 싶은 가문들의 기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터였다. 농이다. 하여튼, 저 친구는 농조를 구분하지 못한다니까. 종인이 찬열을 가리키며 하개에게 떠들어댔다. 네 공로를 잊지 않겠다. 황공하옵니다. 헌데 폐하. 소신에게 감히 한 가지 청이 있나이다. 무엇이냐. 내일 홍류원( 紅 流 園 )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는지요? 홍류원? 찬열이 뭘 부탁하는 편이 아니라 종인은 약간 놀랐다. 그것도 자신의 잠저를 열어 달라니. 하긴. 홍매화가 흐무러질 시기지. 봐주지 않으면 꽃이 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소신이 감히 홍류원에 걸음 해도 되겠습니까?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다담상이라도 마련해 줄까? 아닙니다. 폐하의 배려에 깊이 감읍하나이다. 그런 일로 일일이 감사하지 않아도 돼. 넌 짐의 하나뿐인 벗이니까.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관을 정제했다. 산책 좀 하겠나? 상소를 읽었더니 좀 지루하군. * 정이품. 도성의 치안과 군권 담당 및 관리 감찰

15 빙긋 웃은 종인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느란 바람에 종인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에 눈을 흩뿌린 날씨가 다시 끄물거렸다. 한바탕 목화솜이 떨어질 모양이다. 그걸 미리 알았던 듯 하개 뒤에 선 어린 내시의 손에는 접힌 우산 이 들려 있었다. 종인은 회색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궁에 도착하자 정전 앞마당에서 때마침 문안을 올리고 나오는 장문견과 마주쳤다. 장문견은 거 의 예를 갖추는 둥 마는 둥 내뱉었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종인은 그의 오만불손함에 이골이 난 상태라 개의치 않고 대했다. 태후마마를 배알하고 나오는 길이오? 예, 폐하. 오누이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는 푸셨소? 예. 헌데 마마께서 심란해 보이시더군요. 그래요? 경에게는 달리 말씀이 있으셨소?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요. 무례한 발언에 하개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으나 종인은 끝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문현답이군. 길이 미끄럽던데 가마를 내어드릴까요? 폐하의 우악하신 성심만 받겠습니다. 그럼 미끄러지지 않게 살펴가시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견이 사라진 후 종인은 사리문 잇새로 조용히 뇌까렸다. 저런 개자식을 낳고도 무정후의 모친은 부끄럽지도 않았다던가. 폐하. 자신궁에는 부는 바람에도 귀가 있다 합니다. 장문견이 사라진 정문을 노려본 후 종인은 표정과 호흡을 가다듬은 후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녹라( 綠 羅 )와 금박 물린 소사( 素 紗 )를 휘장으로 늘어뜨린 자신궁 실내는 차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탁자와 책상, 장롱, 문갑 등 다양한 가구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방 안을 꾸 몄다. 봄이면 마당에는 아름다운 화초가 가득할 것이다. 태후는 분재를 기르고 꽃꽂이하는 취미가 있었다. 이따금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드물었다. 수더분한 방에서 황태후 장씨는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옥안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종인이 그녀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태후마마께 문후 올립니다. 존체 강녕하십니까? 강녕하다마다. 편히 앉으시오. 오는 길에 무정후를 만났습니다. 담소를 나누셨는지요? 태후가 빙긋,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무정후가 군을 이끌고 출정한 것이 지난여름이었는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 봄이구려. 무정후와 편장군 덕에 오랑캐를 정벌하였으니 이는 연의 복입니다. 종인이 은근슬쩍 찬열의 공적을 입에 담았다. 그 같은 장수들이 모두 주상 대에서 나왔으니 그건 주상의 복이오. 무슨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종인이 말을 돌렸다. 심심파적이나 할까 하여 시경( 詩 經 )을 뒤적이고 있었소. 또 무슨 꿍꿍이인가? 글줄이 얕은 태후가 시경을 끼고 앉아 있다니 놀랄 노자였다. 그러셨군요. 소자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어느 편을 읽고 계셨는지요? 관저( 關 雎 )라오.

16 꾸륵꾸륵 우는 물수리 황하에서 노니,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라네. 종인이 한 구절을 읊자 태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마마께서 잠을 못 이루시나 봅니다. 혹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총명한 주상께서 이 늙은이가 딱딱한 서책을 읽는 까닭을 모르시진 않겠지. 소자가 아둔하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호호. 겸손하기는. 시경 관저 편은 문왕과 그 왕비의 덕을 칭송하며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좋은 여인 을 얻어 군자의 대업을 이루려는 내용을, 그것도 태후가 심심해서 읽을 까닭이 없었다. 현수궁( 賢 壽 宮 ) * 이 오래도록 비었구려. 눈은 언제부터 내리려나. 종인은 바깥 날씨가 궁금했다. 국모의 자리를 오래 비워서는 안 되오. 주상도 장성했으니 하루빨리 후사를 봐야지요. 어진 사람을 지어미로 맞아 내외가 화락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아직 황후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왕이란 사사로운 감정에 매달리는 자리가 아니오. 죄책감이라면 더더욱. 무릎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던 종인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따지고 싶었다. 황후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정말 모르는 거냐고. 그러나 오늘도 종인이 하고 픈 말은 아침이면 사라지는 촛불처럼 하릴없이 사그라질 뿐이다. 일전에도 말씀 올렸듯 황후의 삼년상을 마치기 전까지는 어떠한 비빈도 맞지 않을 겁니다. 살아생 전 잘해 주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깊은 애도를 받아야지요. 그것이 지아비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장보여. 시호는 영회( 英 懷 ). 꽃다운 시절을 영원히 추억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태후 장씨와 부친 장문견의 명으로 십사 세에 한 살 연하인 종인과 혼인하였다. 사 년 동안 남편과 불화했으며 삼 년 전에 물놀이하러 나갔다가 못에 빠져 익사했다. 국모의 마지막치고는 무척 이나 불운했다. 보여가 죽은 원인을 두고 여러 말이 나돌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비빈의 죄악인 자결 로 결론이 났다. 종인은 그녀와 생활하는 동안 한 번도 총애하지 않았고 눈길조차 제대로 준 적이 없었다. 보름마다 의무적으로 현수궁을 찾았으나 잠자리를 가진 적은 손에 꼽았다. 종인은 그녀가 장씨 가문의 여인이 라 싫어했고, 자존심 강한 보여는 남편의 박대를 견디지 못했다. 결국, 지아비의 냉대를 못 이긴 황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왕왕 떠도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황후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다. 그 진실은 오직 종인만이 알고 있었고, 그걸 로 됐다 싶었다. 화목하지 않았어도 끝끝내 낭군을 위했던 여인. 종인이 기억하는 보여의 마지막은 그러했다. 하여 태후가 내뱉은 죄책감 이란 단어에서 종인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상은 국상 기간이 끝나고도 삼 년간 애도하니 아름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구려. 나는 죽기 전에 건강한 황자를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라오. 주상이 후궁조차 들이질 않으니 어미는 참으로 근심 이오. 마마께서는 천세를 누리실 텐데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태후가 지그시 종인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 파르라니 날이 선 초승달이 걸렸다. 그래요. 아직 영회황후의 삼년상을 마치지 않았으니 기다려 보리다. 정무가 바쁠 테니 그만 물러가시구려. 허면 편히 쉬십시오. 그 잠깐 사이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중궁전

17 홍류원은 생각보다 작았다. 황제가 고작 몇 개월 남짓 살았다던 얘기는 들었지만 잠저치고는 지나 치게 검소했다. 마당에는 아주 작은 연못 하나와 계절에 시든 나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안에 숨은 매화 정원은 솟은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어와 붉은 꽃을 피웠다. 잠저의 당호가 붉은 물결 인 것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안심해. 오기 싫다더니 벌써 호기심에 차서 눈을 빛내는 경수. 찬열은 비죽비죽 터지는 웃음을 눌렀다. 눈 온다. 아침부터 날씨가 사납더라니. 흩날리는 눈송이가 찬열의 손바닥에 살며시 앉았다가 사르르 녹아버렸다. 설중매를 볼 적당한 날씨군. 정말 가도 돼? 들키면? 폐하께 윤허를 받았다니까. 나나 되니까 홍류원에 드나들 수 있는 거다. 찬열이 으스대며 농을 던지자 경수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좁다란 홍교를 건너자 작은 쪽문이 나왔다. 담장을 따라 측백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찬열과 경수는 그것을 지나 붉은 물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와아! 눈부신 설경이 끝없이 펼쳐진 곳에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에는 가지마다 풍성하게 붉은 꽃송이가 피 어 있었다. 꽃송이가 어찌나 크고 아름답던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송두리째 떨어진 꽃잎이 붉은 융단으로 보 일 정도였다. 여린 꽃잎 위에는 미처 녹지 못한 채 눈꽃을 피운 하얀 소금이 묻었고, 은은한 향기가 화원 전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바람이 불자 눈가루가 거품처럼 부서졌다. 햇살 하나 없는 흐린 날인데도 금가루를 섞은 듯 곱게 반짝거렸다. 신선이 산다는 곤륜산이 부럽지 않은 풍경. 청지기가 빗자루로 낸 길 외에 발자국 하나 없는 고매하고 청미한 경치에 시야가 탁 트였다. 경수는 황홀한 경치에 완전히 홀려 버렸다. 볼살을 잔뜩 끌어올리며 반달처럼 환하게 웃는데, 예닐 곱 먹은 어린아이 같았다. 청년은 눈 내리는 날 마당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눈밭 위를 뛰 어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은 찬열과 경수, 단둘만이 존재하는 별세계였다. 조심해! 그러다 넘어져! 찬열이 소리쳤다. 그러나 경수는 어마어마한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몹시 기뻐했다. 무명옷을 입고 옷자락 나부끼며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니, 경수가 꼭 설경에 동화된 한 송이의 백 매 같았다. 난만한 붉은 꽃 사이에서 감히 튀지 않아도 청순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하얀 꽃이다. 찬열은 경수가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어어!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경수를 찬열이 재빠르게 달려가 부축하였다. 경수가 배시시 웃 으며 얼굴을 붉혔다. 뒤늦게 너무 어린애처럼 뛰어다닌 건 아닌가 싶었다. 돌아보니 찬열이 걸어온 자리는 커다란 발자국이 일정하게 나 있는데, 자신이 지나온 곳은 엉망진 창이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야. 폐하를 보필한다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어. 꽃에 약한 걸 알고 일부러 데려온 거로군. 마침맞게 열반설( 涅 槃 雪 ) * 이 내리니 더 좋지 않아? 꼭 하늘이 먼저 알고 우릴 인도한 것처럼. 그렇게 말을 잘하면서 왜 칼 휘두르는 장수가 되셨는지 모르겠네. * 음력 이월 보름 전후로 내리는 상서로운 눈

18 핏줄은 속일 수 없지. 찬열의 너스레에 내심 무거웠던 경수의 마음도 완전히 풀렸다. 보기 좋다. 청년은 내리는 눈에 옷자락이 젖는 줄도 모르고 점점이 흩어진 탐스러운 홍화를 보느라 여념이 없 다. 그래서 찬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반응이 느렸다. 응? 아니다. 경수가 조심스레 꽃을 어루만졌다. 떠나기 전에도, 돌아온 후에도 슬픈 표정이었어. 너 웃는 거 몇 개월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그냥 보기 좋아서 그래. 자, 선물. 허락도 없이 꽃가지를 똑 꺾더니 찬열에게 내밀고는 쑥스럽게 웃는다. 이곳의 물건은 풀 한 포기조차 모두 폐하의 것이야. 우리뿐인데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잖아. 들키면 나만 곤란해진다고. 겨우 이거 하나로 널 혼내면 폐하께서 속이 좁으신 거다. 뭐라 해도 굴하지 않는 경수의 태도에 찬열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찬열은 스물한 살이나 먹었 으면서 여전히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은 경수가 마냥 소년 같았다. 그때, 그가 늘 납검하고 다니는 장검을 쓱 뽑았다. 그리고는 경수에게 칼자루를 넘기더니, 꽃을 꺾은 벌. 오랜만에 용연무( 龍 淵 舞 ) 한번 보여줘. 경수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찬열이 쥔 칼자루로 향하였다. 04. 설중우( 雪 中 遇 ) 폐하. 눈발이 제법 굵은데 태성전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개가 우산을 받치며 물었다. 종인은 대답 없이 손으로 날아드는 눈송이만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눈은 내려앉기 무섭게 온기에 녹아 버렸다. 장서각에서 서책을 가져다드리오리까? 찬열은 돌아갔을까?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았으니 아직 있을지 모릅니다. 갔다 해도 모처럼 매화나 감상하시지요. 나쁘지 않군.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시지요. 얼마 후 종인은 시위지신과 내관 몇을 데리고 황궁에서 멀지 않은 홍류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랜 만에 오는 옛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서늘한 풍경이다. 종인은 무심해 보였다. 그 무심한 표정 뒤에 장문견과 태후가 건드린 역린이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궁을 나오던 중에는 휘정궁( 徽 靜 宮 )을 지났다. 그곳을 비껴가던 종인의 심경은 엉킨 실타래였다. 시 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여인의 비명과 피 흘리는 시체가 나오는 악몽.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한탄하 며 그저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이 고작이다. 태후의 명으로 궁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이후, 늘 사람으로 북적이던 화려한 전각은 귀신이 나올 법 한 폐허로 변하였다. 종인이 전각을 수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하라고 명했지만 휘정궁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마다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하고, 핏물을 뒤집어쓴 귀신이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나타난

19 다고도 했다. 종인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휘정궁에 출몰한다는 원혼이 선제의 후궁인 의귀비 를 가리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종인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소름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다. 주변에 시위들을 세울까요? 모처럼 벗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려는데 방해할 셈이냐? 하오면 예서 기다리겠습니다. 날이 추우니 담소가 길어지시거든 얼른 나오셔야 합니다. 잔소리는. 종인은 짐짓 뾰로통하게 핀잔을 준 후 자신의 호위를 책임지는 청신에게서 우산을 받아들고는 홍류 원으로 걸어갔다. 찬열은 돌아가지 않은 듯 눈밭에 나오는 발자국이 없었다. 다만 찬열의 것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도 함께인 점이 약간 의아했다. 누굴 데려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시종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종인은 성큼성큼 쪽문을 지나쳤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서자 풍성하게 쌓인 새하얀 눈밭과 완연하게 피어난 붉은 꽃밭이 펼쳐졌다. 새 해를 맞은 후 늘 바쁘고 마음이 어지러워 편안하게 겨울꽃을 볼 시간도 없었다. 이런 화려한 멋은 오 랜만이다.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서 난 찬열과 그의 시종인 듯한 자의 발자 국이 퍽 괴이할 정도로 어지럽게 나 있었는데 그걸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시종 아이가 천둥벌거 숭이인가 보다. 찬열의 것에 비해 크기도 한참 작은 걸 보니 몇 살 안 먹은 소년이렷다. 종인은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레 걸어갔다. 어쩐지 어린 시절 하던 숨바꼭질이 생각났다. 문득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종인은 찬열이 옛날처럼 홀로 검술 연 습을 하는가 보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퍽 쏠쏠했다. 무더기로 핀 붉은 매화나무가 눈앞을 가렸다가 사라지를 여러 차례. 제법 두꺼운 나무를 지나 시야 가 탁 트이자 종인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서슬이 퍼런 검을 쥐고 나비인 듯, 벌인 듯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춤추는 소년이 있었다. 흩날리 는 눈발 속에서 홀로 춤의 경지에 달한 듯, 무아지경으로 팔을 놀리고 허리를 꺾는 자태는 그야말로 공손대랑( 公 孫 大 娘 ) * 이 환생한 듯했다. 잠시 검을 내리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는 보는 사람을 홀리듯 사뭇 교태 넘치는 눈웃음까지 지어 보 였다. 백옥을 깎아 만든 듯 반질반질한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아이의 풋내가 묻어나고 집중한 눈빛에 서는 번개 같은 날카로움이 엿보였으며 우직하게 다물었다가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는 입술은 연지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홍옥처럼 붉었다.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유연함과 힘이 뿜어져 나온단 말인가! 춤추는 모양새를 살피니, 멀리서 보면 흡사 서리를 맞고 날아오르는 새하얀 기러기 같고 가까이서 살피니 나부끼는 옷자락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배꽃 같았다. 무겁게 내리찍는 발은 천하를 호령하는 검의 울음이요, 다시 사뿐히 떼어놓는 걸음에서는 푸른 물 에 아른거리는 부용화의 은근함이 묻어났다. 흘러내린 소맷자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팔목은 눈처럼 하얗고 나무의 가지처럼 가늘었다. 딱 봐도 영락없는 사내인데 어찌 이런 기묘한 자색을 갖췄는지 모를 일이다. 저 아이 앞이라면 궁중의 수많은 미인과 무희들은 서시를 보고 숨어든 물고기나 다름없다. 그저 감탄하고 경탄하니 가히 천하일색이요, 군계일학이로다! 조식이 <낙신부( 洛 神 賦 )>에서 낙수의 여신을 가리켜 칭송하기를, 엷은 구름에 쌓인 달처럼 아련하 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볍구나 라고 하였는데, 종인은 오늘에서야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저런 재주꾼이 도성 안에 있는데 어째서 소문 한번 나지 않았는지 그것이 희한할 따름이었다. * 당나라 때의 기녀. 검무의 일인자

20 그때, 인기척을 눈치챈 찬열이 뒤를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그가 예를 갖추려 하자 종인 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찬열이 혼이 빠져나간 듯한 종인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 시선 끝에 경수가 걸 려 있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낯선 인기척에 경수가 검을 거두고 동작을 멈추었다. 코와 볼이 추위로 빨갛게 얼었다. 신명 나게 춤사위를 선보이던 그가 낯선 종인을 잔뜩 경계하였다. 찬열이 곤란한 기색으로 서 있는 걸 보 니 황제인 모양이다. 하지만 호안석( 虎 眼 石 )으로 장식한 검은색 상투관과 연꽃 모양으로 투각한 동곳, 황족치고는 검소한 옷차림이 그의 존재를 헷갈리게 했다. 단출한 평복 차림이라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황제의 화원에서 함부로 춤을 추는 불경을 저질렀으니 죄를 청해야 했다. 경수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감히 폐하의 화원을 어지럽혔으니 소인을 벌하여, 조금 전 추었던 춤이 뭐지? 용연무라 합니다. 춤의 내력을 알려줄 수 있느냐. 구야자가 간장( 干 將 )과 더불어 초나라 소왕을 위해 용연( 龍 淵 ), 태아( 泰 阿 ), 공포( 工 布 )의 세 자루 명검을 만들었다지요. 그중 첫째인 용연검에서 유래합니다. 춤사위가 독특하더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네가 만들었느냐? 소인의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외조부께서 우연히 아신 후 가문에 전수하셨다 합니다. 종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수의 말을 곱씹었다. 그토록 희귀한 춤이라면 교본으로 남겨도 좋으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라. 난 폐하가 아니니까. 뜻밖의 말에 경수뿐만 아니라 찬열도 놀랐다. 종인이 무슨 속셈인지 몰라서 찬열은 불안하게 종인 을 지켜보았다. 반면 경수는 눈앞에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니라면 어느 황족일까 궁금했다. 황제가 아니라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 못 볼꼴을 보인 듯하여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경수가 주춤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하오면. 나는 누구라고 둘러댈지 고민하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김종대다. 진왕이라고 불리지. 진왕( 辰 王 ) 김종대는 현 황제의 친형이다. 날 때부터 몸이 약해 황위 싸움에서 밀려난 후로는 왕부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음 률을 아끼는 희대의 풍류가로 유명했으나 사람 붐비는 것을 싫어해 문하생이고 손님이고 일절 받지 않는 은둔 거사이기도 했다. 잔병치레가 많다고 들었는데 소문보다는 체격이 상당했다. 혼자서 요양한다더니 그동안 건강을 많 이 회복한 모양이다. 경수는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진왕이 아예 바깥출입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풍류가가 절경을 찾는 것 또한 이상하지도 않아 잠자코 있기로 했다. 무엇보다 찬열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앞에 선 자 가 진짜 진왕이라는 증거 아니겠나. 왕부의 무희들도 너처럼 아름답게 추지 못하는데 힘과 유연함을 고루 갖추었구나. 과찬이십니다. 내가 보기엔 공손대랑의 서하검기( 西 河 劍 器 )가 유명무실할 지경이다. 그 유명한 진왕에게 지극한 칭찬을 듣자 경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윽고 종인이 경수에게 다가가 쓰고 있던 우산을 씌워주었다. 경수가 눈알을 멀뚱멀뚱 굴리다가 찬열을 바라보았다. 찬열은 말없이 희소를 머금고 있었다. 경수는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종인은 경수에게 억지로 우산을 쥐여 주었다.

21 오래 춤을 춰서 손과 얼굴이 얼었잖으냐. 이러시면 존귀하신 전하의 옷깃이 젖습니다. 괜찮다. 허락 없이 네 춤사위를 본 대가로 치마. 황공하옵니다.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지? 찬열은 종인이 경수에게 지대한 관심을 내비치는 걸 보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왜 본인의 신분 을 속였는지도 모르겠다. 경수가 찬열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쏘았다. 종인이 그 시선을 따라가 찬열 쪽으로 돌아섰다. 저 친구의 이름은 도경수입니다. 대장군을 지낸 도계한의 증손으로 현재 태학관 유생이지요. 이런.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었군. 이번에는 조금 더 노골적인 시선으로 경수의 위아래를 훑는 종인. 전하. 시간이 늦어 소인들은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찬열이 재빠르게 선을 그었다. 경수가 긴장해서 경직된 꼴이 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이제 막 귀환한 편장군을 오래 붙들 순 없겠지. 난 여기서 매화나 조금 더 감상하다 가겠네. 그럼. 눈치껏 자신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찬열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종인은 예를 갖춘 후 서둘러 홍류원을 빠져나가는 찬열과 경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수가 우산을 쓴 채 종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시선이 엉켰다. 예의, 보일락 말락 아슬아슬한 미소를 보인 후 재빨리 사라지는 도경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종인은 그제야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 르르 내뱉는 숨결에서는 난생처음 맛본 짜릿함이 묻어났다. 종인은 그새 많이 쌓인 눈밭 한가운데서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붉은 설중매를 지분거렸다. 꽃이 이토록 평범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홍류원을 나서면서 경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온통 붉은색 천지이던 꽃밭의 풍경이 뇌리 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그곳에서 만난 진왕의 독특한 분위기도. 병약하다더니 진왕의 상태가 소문처럼 심각하진 않나 봐. 종알거리는 경수를 보며 찬열은 가볍게 미소 지을 뿐이다. 그는 종인이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뭔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사저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게 사실이야?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가무잡잡하던데. 날 때부터 피부가 검은 편이셨대. 풍채만 보면 흠잡을 데 없는 헌헌장부더라. 훌륭하신 분이지. 진왕은 풍류가라던데, 용연무를 모르다니 조금 의외였어. 네 외가에만 전수되니 그분은 모를 수도 있어. 나랑 한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거든. 찬열은 경수가 받아온 우산을 대신 들었다. 고작 우산 하나지만 황제의 하사품인 만큼 찬열은 손잡 이 하나까지 예민하게 느껴졌다. 괜찮겠어? 응? 너 말이야. 나 때문에 화원이 더러워졌을 텐데 그대로 나와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폐하께서 아시기 라도 하면. 별일 없을 거야. 어떻게 확신해?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니까. 네 춤에 마음을 빼앗겨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셨을 거야.

22 그럼 다행이다. 어쨌든, 고맙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매번 받기만 하니 그렇지. 넌 이 나라의 재상이 될 테니 투자하는 셈 치지, 뭐. 그때 가서 날 모른 척하면 안 돼.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내가 재상이 될지, 말단관리직에 만족하며 살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무는 평온하길 원하지만 가지는 늘 바람에 흔들리지. 네 능력이라면 평생 말단관리로 살고 싶어 도 그럴 수가 없을 거다. 낭중지추 라는 말 몰라? 경수는 찬열만이 내뿜는 따스한 기운에 끌렸다. 겨울을 사는 소년은 남녘의 쟁글쟁글한 화풍난양에 녹아내렸다. 예전보다는 무덤덤해졌지만 누구에게나 첫정이라는 꼬리표는 떼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정( 情 )의 시작이란, 문턱 없는 방에 봄바람이 드나드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막을 길이 없었다. 배고프다. 객잔에서 따뜻한 것 좀 먹고 가자. 찬열이 화사하게 웃자 경수가 불퉁하게 면박을 주었다. 네가 그러니까 교안의 남녀노소가 밤잠을 못 이루지. 내가 뭘 어쨌다고? 모르면 됐다. 참나! 툭탁툭탁 싸우면서도 찬열은 경수의 옆에 나란히 서서 눈 쌓인 길을 걸었다. 몇 걸음 앞에 있는 주 막의 굴뚝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이튿날, 눈 그친 하늘은 쾌청했고 날씨는 조금 더 추워졌다. 종인은 조회에서 북녘의 이재민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어떻게 도울지 논의했다. 그리고 조회 가 파하자마자 곧장 태성전으로 돌아왔다. 먼저 온 찬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찬열은 이른 아침에 종인의 부름을 받고 입궁했는데, 명목상 이유는 바둑내기였다. 그러나 찬열은 종인이 어제 일과 관련해 자신을 불렀으리라고 짐작했다. 어제는 무사히 잘 들어갔나? 폐하 덕분입니다. 넌 남에게 잘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지. 홍류원을 보여 달라고 한 건 어제 그 아이 때문인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하개가 무슨 뜻인가 싶어 종인과 찬열을 번갈아 봤다. 어제 종인에게 딸려 보냈던 우산이 홍류원을 다녀온 후에는 없어서 그 까닭을 물었는데, 종인은 나 뭇가지에 부딪히는 바람에 살이 부러졌다고 했다. 종인이 그걸 그대로 버려둘 성격이 아닌데도 능글맞게 넘어가서 하개는 일단 잠자코 있던 참이었 다. 종인이 연메꾼과 배행하던 무리마저 물리는 바람에 자세히 몰랐지만 홍류원에는 편장군 외에 다 른 사람도 함께였던 모양이다. 폐하를 속였습니다. 연회 때도 부친과 내외하던 네가 갑자기 홍류원을 열어 달라 해서 의아하긴 했다. 일개 유생을 위해서일 줄은 몰랐지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찬열이 엎드렸다. 종인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로 턱을 괴고는 피식 웃었다. 죽을죄라니. 딱 봐도 대단히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죽마고우쯤 되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이기도 해서요. 증조부가 대장군이었다면 도씨 문중도 대단하다 할 수 있지. 헌데 현 조정에서는 그 문중의 사람 이 없더군. 경수의 조부가 요절하는 바람에 부친 대에서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걸로 압니다.

23 부친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나? 어렵사리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다가 경수가 태학관에 입격한 뒤로는 조용히 자택에서 지냅니다. 그렇군. 옷차림을 보니 명문가의 후손이라기에 지나치게 검소하던데. 찬열이 답하지 않았다. 곤궁한 것이 경수의 탓도 아닌데 그런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 는 것이 싫었다. 하긴. 그것이 어찌 그 아이의 탓이겠느냐. 찬열은 본인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종인을 다소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허면 그 아이는 태학관에서 과거 준비를 하고 있느냐? 예. 실력은 어떻지? 소신이 감히 장담하건대, 홍패( 紅 牌 ) * 는 무사히 받을 것입니다. 특히 시, 역사, 문장에 능하지요. 허언하는 법이 없는 네가 그리 자신만만하다니. 학문이든, 인품이든 흠 잡을 데 없는 친구죠. 종인이 흥미롭다는 듯 안광을 빛냈다. 찬열이 저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도경수가 조정에 진출하 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생각하자 왠지 가슴이 뛰었다. 폐하. 소신이 감히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듣고 있다. 홍류원에서 어찌하여 진왕 전하의 이름을 빌리셨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물처럼 부드럽기만 하던 찬욜이 완고하게 나오는 것도 놀랍지만, 자신이 왜 도경수 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왜 이처럼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신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즉답하지 못하는 종인. 찬열은 종인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눈치챘다. 폐하께서 소신에게 매번 농을 던지시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찬열은 웃었다. 그러나 종인은 찬열이 경수를 보호하려고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꿰뚫었다. 자신은 황제이고, 그 아 이는 태학관 유생에 지나지 않으니 섣부른 접근이 도리어 경수를 망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 틀 림없다. 경수는 아직 유생일 뿐이나 성품이 올곧고 기개도 남다릅니다. 등용하신다면 반드시 나라의 동량 이 될 인재 중의 인재이지요. 해서? 조정에는 노련한 영수들이 즐비하지만 그들이 모두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죠. 고금을 막론하고 보 필하는 자들의 성품이 올발라야 국가가 바로 섭니다. 폐하를 지근에서 모시려면 도경수 정도는 되어 야 합니다. 네가 그리 포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가 진짜 짐의 마음이라면? 도발하듯이 물었다. 무슨 대답을 할까, 박찬열은. 그것은 도경수의 복입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일시의 호기심으로 이러신다면 소신은 감히 폐하를 말릴 것입니다. 일시적인지 아닌지는 어찌 아는가? 네가 짐이더냐? 그러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시라고요. 냉기를 가른 것은 종인의 웃음소리였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시원스레 웃었다. 네가 이리 횡설수설하는 건 처음 본다. 분명히 해라. 짐이 그 아이에게 네가 생각하듯이 다가가도 좋은지, 아니면 네가 몸을 날려 막을 것 * 과거에 붙은 사람들에게 주던 합격증서

24 인지. 끝이 무딘 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소신은 다만 일시적으로 호기심을 품으신 게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대담하군. 두 분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진심 어린 호소였다. 그러나 찬열은 종인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다는 걸 알기에 종인이 단순한 호 기심에서 경수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너는 짐의 형제나 다름없어. 그런 널 곤란하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든든합니다. 하오나 도경수의 복을 소신이 막을 권리는 없지요. 내 의지가 단단한지 아닌지 실험했던 것인가? 발칙한 찬열의 태도에 종인은 화도 못 내고 실소만 흘렸다. 네가 짐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써서 심술이 난 것뿐이다. 싱글싱글 웃은 찬열은 투정 섞인 태도로 말했다. 이제 소신에게는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무엇이냐. 어제 폐하를 진왕 전하라고 속였는데 나중에 경수가 이걸 알고 어찌 받아들일지. 실망할까? 종인도 뒤늦게 걱정스러운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모습에 찬열은 종인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고 확신했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아이라 조금 걱정되지만 사정을 알면 이해할 겁니다. 그럼 당분간 네가 수고해다오. 적당한 때에 짐이 직접 밝힐 테니, 그동안 우리의 시간은 홍류원에 멈춰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봉명하겠나이다. 05. 진왕( 辰 王 ) 화방( 花 房 )에서 분재에 홍매화를 가지런히 꽃꽂이하여 바쳤다. 그런데 눈꽃이 피지 않아서인지 며칠 전의 감흥이 전혀 일지 않았다. 종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종이에 적은 글자 위에 먹물을 부어 버렸다.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조세 개혁으로 권신들과 씨름 중인데, 이리도 마음이 흐트러져서야 제대로 붙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다. 예족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의 논공행상도 해야 하고, 머지않은 태후의 탄신 진연도 준비해 야 했으며, 조세 개혁으로 조정에서 들어온 압박도 견뎌야 하니 종인은 며칠째 피가 마르고 살이 동 나는 중이다. 꼰대들이야 어린 군주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기 드는 것이 일이라 쳐도, 지지 세력이 약하다 보 니 매번 악순환이었다. 그건 종인을 지치게 했다. 때문에 그가 어디 털어놓지도 못하고 속 끓이는 것 은 너무도 당연했다. 밥도 잘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며칠 전에 보았던 도경수란 아이의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리니 방년 에 요절하고 말 것이라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를 만나러 시도 때도 없이 쏘다니지 못함이 한 탄스러울 뿐이다. 종인은 헝클어진 종이 뭉치만큼 어지러운 마음을 내면의 우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폐하. 진왕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종인이 미간을 구겼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정오 무렵에 자신궁에 들러 문안을 올릴 것이란 소리 는 들었는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싶었다. 친형제임에도 평소에 자주 왕래하던 사이가 아니라 종인은 진왕이 설면했다. 더구나 진왕은 태후가 자신의 친아들인 양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다. 태후뿐만 아니라 무례한 장문견 앞에서도 허허실실 웃

25 기만 하니, 종인은 자신의 형이 간과 쓸개를 빼놓고 다닌다고 확신했다. 모셔라. 종대가 모처럼 만에 태성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활기찬 모습이 보는 사람이 다 생글생 글 미소 짓게 한다. 왜소한 체격이 종인의 형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으나 두 형제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다소 각이 진 턱에 진한 눈매는 영락없는 효경제의 것이다. 그러나 종대의 깡마른 체구와 가느다란 뼈대는 숙비를 물려받았다. 폐하를 뵈옵니다. 길상을 누리소서. 종대가 예를 올리기 무섭게 종인이 일어나라고 했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조촐한 다담상이 마련되었다. 종대는 음률뿐만 아니라 미식가이기도 했다. 종 인은 종대를 경계하면서도 그를 위해 항상 최상의 차를 내놓았다. 종대에겐 어떤 꼬투리도 잡히고 싶 지 않았다. 그간 소원했습니다. 어찌 이리 아우를 찾아주지 않으십니까? 소신의 성품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외출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닌지라. 요즘은 때늦은 눈까지 와 서 더욱 집 안에만 있었습니다. 종대 역시 종인이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저 예의로만 대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하나뿐인 아우임을 늘 염두에 두었다. 음. 남부 여름의 욱욱청청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나는 것을 보니 명주( 茗 州 )에서 딴 연꽃으로 우린 차로군요. 역시 잘 아시네요. 같은 차여도 재료와 탕수에 따라 대단한 차이가 있지요. 또한 같은 재료여도 파종 시기, 수확 시 기, 재배 환경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입니다. 종대는 다시금 연꽃차를 음미했다. 녹진하지 않은 은근한 향기가 입을 개운하게 했다. 자신궁에 문안드리는 김에 폐하를 뵈려고 들렀습니다. 아니 오셨다면 서운할 뻔했어요. 지난번에도 그냥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폐하께서 바쁘셔서 방해될까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셨군요. 내달이면 태후마마의 탄생일인데 형님께서 올해는 어떤 선물로 마마를 기쁘게 해드릴 지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종대는 태후의 덕을 칭송하는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전에는 진기한 마하분다리화( 摩 訶 芬 陀 利 華 )를 구해다 바쳐 태후를 매우 흡족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 없는 소신은 그 때문에 고충이 많답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자신궁을 기쁘게 할 멋진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겠지요. 종인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걸 본 종대는 응수하듯이 더욱 환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는데 조금만 미소 지어도 휘어져 올라가는 입꼬리 덕분에 더욱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것을 그대로 훔쳐간 저 입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더 몰염치하게 느껴졌다. 참. 급작스레 날이 추워져 소왕( 昭 王 ) 형님의 지병이 다시 도졌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좋은 약재 를 하사하심이 어떨는지요? 이런, 제가 이렇습니다. 도무지 세심하지 못하죠. 저는 소왕 형님의 상태를 잘 모르니 형님께서 내 의원에 들러 원하는 만큼 챙겨가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제끼리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우는 우둔하여 형님들의 사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형 님께서 자주 들러 소식을 전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종대가 돌아간 후 종인은 하개에게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날 염탐하러 온 걸까? 진왕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26 하개의 비교적 단호한 대답에도 종인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군색한 인간으로 만든 건 모두 태후와 장씨 일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힘을 기르기도 전에 비빈들의 횡 포에 죽어 나간 수많은 황손처럼 비명에 죽을까 봐 두려웠다. 굳이 먼 데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태후는 한때 황태자였던 소왕을 폐위시키고 무려 사 년이 나 감옥에 가두지 않았던가. 건강하던 소왕이 누구 때문에 지병을 얻어 겨울마다 고생하는지는 태후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심산하구나. 쌓인 상소문을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밤에 가벼운 주안상이라도 들일까요? 이 상태로 술을 마셨다가는 술에 먹히고 말 것이다. 무희들을 불러 춤을 추게 하오리까? 아무리 뛰어난 춤이라도 용연무에 비할 순 없지. 처음 들어보는 춤 이름에 하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오면 어찌해야 폐하의 시름을 덜 수 있겠나이까? 밤이면 달에 맡길 터이니 신경 쓰지 마라. 종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상소문을 펼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하늘 아래, 경수는 기름을 먹인 종이로 만든 노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말쑥 한 청년이 맑은 날에 우산을 쓰고 앉아 있는 모양새는 퍽 흥미로웠다. 경수는 유년기의 추억이 가득한 작은 산막을 좋아했다. 짬이 날 때면 항상 이곳을 찾았다. 산에서 들리는 청량한 물소리나 정답게 지저귀는 새소리는 경수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어린 시절, 월란까지 껴 셋이서 이곳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경수와 찬열만의 비밀장소가 되어 버렸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은 왜 쓰고 있어? 찬열이 각등과 서책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비 올 때는 없어서 안달인데, 비가 그치면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니 우산의 신세가 참으로 딱해. 엉뚱한 소리에 찬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경수가 우산을 탁 접었다.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기분이 별로지? 아무것도 아니야. 책 구해 줘서 고마워. 보따리를 가져가는 손에 매가리가 없는 걸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홍류원에 다녀온 후로 너 좀 이상하다. 하릴없이 책을 스륵스륵 넘기던 경수가 동그랗게 눈을 홉떴다. 멍한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감성적이기도 하고. 내가? 우울해 보여서 데려갔더니 왠지 더 심란해진 것 같아. 내 주제에 무슨. 찬열의 시선이 경수의 옆에 놓인 노란 우산으로 향했다. 거짓말도 못 하는 주제에 자기 마음도 모 르다니. 찬열은 경수가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실은 이걸 돌려주고 싶은데.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경수가 실토했다. 네게 하사하신 건데 왜? 그건 그렇다. 진왕은 분명히 용연무를 함부로 본 대가라며 우산을 선물로 내렸다. 그런데 그것을 굳 이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옹색한 핑계에 자신도 민망했던지 경수가 버릇처럼 커다란 눈만 깜박거렸다. 부담스럽잖아. 겨우 둘러댄 변명. 경수는 눈알을 굴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찬열에게 물었다.

27 그런데 진왕은 어떤 사람이야? 네가 아는 그대로. 병약한 황족? 그보다는 고매한 풍류가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 인정한다. 고관대작은커녕 궁에 한 줌의 관심도 없는 경수마저 그 명성을 알고 있지 않은가. 몸이 안 좋아서 부인도 맞지 않는다면서? 그러다 절손( 絶 孫 )할 거라며 태후마마의 심려가 크다더군. 아. 너랑 친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종친과 폐하의 신하, 딱 그 정도. 그렇구나. 경수는 작은 머리통을 끄덕이며 무의식적으로 우산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찬열은 경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 찬열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심심상인( 心 心 相 印 ). 단 한 번 봤을 뿐인데 김종인과 도경수는 월하승의 붉은 실로 엮인 것처럼 서로에게 깊은 호감 을 느끼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운명에 찬열은 혀를 내둘렀다. 닷새 후 미시( 未 時 )에 장유곡 앞에서 보자. 장유곡은 왜?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 난 그만 가봐야겠다. 그래. 먼저 내려가. 난 책 좀 보다가 갈게. 겨울이라 산짐승이 밑으로 내려오기 십상이야. 너무 늦게까지 불을 밝히진 마라. 응. 찬열의 뒷모습마저 수풀에 가려졌을 때, 경수는 책과 우산을 챙겨 들고 산막 안으로 들어갔다. [편장군 박찬열을 무위장군( 武 衛 將 軍 ) * 에 봉하고 법도에 맞춰 녹봉과 노비를 하사한다.] 예족 정벌에 앞장섰던 일의 보상에 찬열은 성지를 받아들고 예를 갖추었다. 찬열을 무위장군에 제수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첫째, 전쟁이 나면 다시 군사를 이끌 고 변방으로 뛰쳐나가야 하지만 당분간은 황제의 옆에 두고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둘째, 젊은 나이에 높은 품계를 내림으로써 태후 쪽 사람들을 견제함과 동시에 신진 관리들에게 동 기를 부여한다는 의도였다. 능력만 있으면 나이와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요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거다. 논공행상에 관심이 없던 찬열은, 그런 자신을 이용해 조정에 강한 의지를 전달한 종인에게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도록 수렴청정을 받아 아직은 유약하나 종인은 총기가 남다른 군주였다. 찬열은 그런 종인과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았다. 찬열은 무관으로서 탁월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바둑 이나 서예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종인이 이따금 찬열에게 바둑이나 글쓰기 내기를 하자고 조를 때가 있는데, 백전백패였다. 지금도 몇 차례나 집을 빼앗긴 상태다. 볼 것도 없이 종인의 승이지만 찬열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 았다. 진지하게 바둑에 임하느라 반듯한 그의 미간에 굵다란 주름이 잡혔다. 공교롭게도 진왕이 다녀갔다. 친형님이 다녀간 것이 공교로운 일입니까? 찬열은 어떻게든 마지막 집을 사수하려 애썼다. 거의 바둑판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돌을 놓 을수록 일말의 희망도 사라져 갔다. 소왕이 아프다며 약재를 내어 달라더군. 하개는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진왕 은. 폐하의 단 하나뿐인 동복형제시죠. * 황궁 수비대장. 종사품

28 종인이 진왕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알지만 서로 의지해야 할 형제가 반목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 긴 찬열은 종인이 진왕을 의심하면 늘 진왕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면 종인은 섭섭하다고 내색도 못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종인의 입에서 겨울잠 같은 긴 한숨이 떨어졌다. 자신궁에 문안 올 때 말고는 따로 짐을 만나러 오지도 않는다. 폐하께서 불편해하시는데 진왕 전하라고 달갑겠습니까? 뭐? 짐의 탓이라는 거냐? 아니면 폐하께서 만기친람으로 바쁘신 걸 아시기 때문이겠지요. 과연 그럴까? 종인이 무릎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며 물었다. 돌들이 무심하게 오갔다. 소신은 무장이라 잘 모릅니다만, 무릇 정치란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심이 지나치면 그것은 오히려 독입니다. 경계와 의심은 군주가 곁에 두어야 할 무기이나 그것이 군 주의 몸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넌 항상 종대 형님을 두둔하는구나. 그저 두 분의 우애가 퇴색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담담한 찬열을 빤히 쳐다보던 종인.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실소를 머금더니 이내 남은 집을 모조리 빼앗아 버린다. 앗! 짐의 승리다. 한 수만 물러주십시오! 허튼소리 마라. 신중하게 두었어야지. 찬열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휴, 번번이 지니 영 재미가 없습니다. 검술로는 널 못 따라가니 이런 거라도 이겨야지. 폐하께서 이기셨으니 소신이 소원을 들어드릴 차례군요. 넌 짐의 눈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이번에도 맞춰보겠느냐? 찬열이 천안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종인의 애교 섞인 눈망울이 퍽 귀여웠다. 황송하옵니다. 천신( 賤 臣 )이 어리석어 신려를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짐이 백아라면 넌 종자기다. 헌데 짐이 원하는 바를 모른다고? 짐짓 장난기 섞인 투로 찬열이 중얼거렸다. 군주가 바른길로 가지 않으면 옆에서 간쟁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지요. 짐의 행보가 바른지 그른지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다. 후세에 소신의 보잘것없는 이름 석 자가 간신으로 낙인찍힌다면 그건 슬픈 일 아닙니까? 중도( 中 道 )를 걷는 것은 짐의 몫이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정히 그러시다면 소신은 폐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둘 다 푸르르 웃어버렸다. 내일 미행을 나서실 수 있으십니까? 왜. 모처럼 저잣거리 구경이라도 시켜줄 셈이냐? 소신이 출정 나간 동안 폐하께서 적적하셨을 테니 그도 나쁘지 않죠. 다른 의도라도 있다는 듯 들리는구나. 소신더러 종자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능글맞은 찬열의 의도가 대충 읽혔다. 벗의 청을 거절할 수야 없지. 06. 장유곡( 莊 柳 谷 )

29 장유곡은 마을 두 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계곡이다. 이곳은 봄여름이면 버들개지가 삼단처럼 흐 드러지고 온갖 기암괴석과 꽃나무가 운치를 더했다. 근처에는 초원과 숲이 있고 바위 사이에서는 풍 부한 물이 쏟아져 일대에서는 청유 나가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도성에는 수많은 계곡과 정자가 있지만 경수는 유독 장유곡의 경치를 좋아했다. 봄이면 산에서 피 는 야생 벚꽃이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보였다. 물론 이곳은 어릴 때 동무들과 함께 탐춘하러 온 추 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경수는 오늘 말이나 타자는 심산인 줄 알고 가볍게 나왔다. 그런데 계곡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찬열 뿐만 아니라 진왕도 함께인 것이 아닌가. 바깥에도 잘 안 나온다던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진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예를 갖추고 찬열을 뾰족하게 노려보자 찬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날은 잘 들어갔느냐? 덕분에요. 날이 덜 풀렸거늘 옷을 얇게 입었구나. 이 정도 추위엔 끄떡없습니다. 경수가 뻗대자 종인이 피식거렸다. 왜 웃으십니까? 귓불이 그리 빨간데 호기롭기는 천하제일이라. 그 말에 경수의 목덜미가 화드득 달아올랐다. 그가 괜스레 찬열의 옆구리를 찌르며 타박했다. 손님을 데려올 거였으면 언질을 줬어야지. 저자에서 만났을 뿐이다. 우연. 정말 우연이야. 찬열이 억울하다는 듯 연기했다. 날 그렇게까지 불편해할 줄은 몰랐군. 전혀요. 소인은 하늘 외에는 두려운 게 없습니다. 하하하! 말본새 좀 보라지. 배포가 남다르군. 종인과 경수의 시선이 바람처럼 헝클어졌다. 한 곳에서 만난 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시선 끝에 서 미풍이 불었다. 온화한 초승달이 두 사람의 입가에 번졌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버드나무 그늘로 유명하지요. 여름이 아니라 휘늘어진 나무는 볼 수 없지만 산 책하기에 나쁘진 않습니다. 오다보니 초원이 있더군. 말을 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찬열의 말에 종인이 대거리를 하는데 경수가 불퉁하게 끼어들었다. 병약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신데 말도 탈 줄 아십니까? 뭐라? 사내로 태어났다면 말타기는 기본 아니더냐? 외출을 삼갈 정도로 편찮으시다기에 말은커녕 가마만 타고 다니시는 줄 알았죠. 아녀자도 아닌데 가마? 종인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말을 탈 줄도 모르는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못 탄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종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차다가 이를 악물었다. 슬슬 화가 났다. 진왕의 소문이 이 정도로 형 편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종친으로서 구설에 오르는 것이 싫어 외출을 삼가는 것이다. 설령 내가 그리 약골이라 하더라도 가마를 타든, 말을 타든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으냐? 누가 뭐라던가요? 낮은 목소리지만 새침하게 발을 빼는 도경수가 그저 기가 막히다. 찬열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종인을 보며 난감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성질머리에 가만히 있을 리 가 없는데. 어쩌다 진왕에 대한 소문이 그 같이 났는지 모르겠다만, 원한다면 똑똑히 보여주마! 초원으로 가

30 자. 가서 일정 지점까지 서로 말을 몰았다가 먼저 돌아오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 아이고, 역시나. 찬열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따라 나왔던 호분중랑장( 虎 賁 中 郞 將 ) * 청신이 황급히 말렸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바람이 찹니다. 무리하게 말에 오르셨다가 풍한이라도 드시면. 사냥에서 사슴은 물론이거니와 호랑이 가죽도 벗겨본 적이 있는 나다. 헌데 승마가 왜 안 된다는 거냐? 그깟 풍한쯤이야 걸리면 그만이지! 종인이 벌컥 화를 내자 찬열이 쩔쩔매는 청신을 대신해 나섰다. 선제께서는 낙마한 후유증으로 붕어하셨지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저 녀석이 먼저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경수가 직설적이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폐하를 진왕이라고 생각하여, 그건 그것대로 참을 수 없다! 제까짓 게 대체 형님을 뭘로 보고. 투덜거리던 종인이 말끝을 흐렸다. 찬열이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는 청신을 보며 더는 말리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아래에 객잔이 있으니 말 두 필만 빌려오게. 그리고 옆의 들판으로 오게. 하지만 찬열이 고압적으로 바라보자 청신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너. 각오해 둬라. 종인이 사뭇 진지하게 나왔다. 소인은 내기에 응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만. 진왕에 대한 소문이 바닥부터 글러 먹었는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란 것이냐? 전하께서 이기셔도 다수는 그렇게 알고 있을 텐데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 사람은 생산적이어야 해. 풍류가인 줄만 알았는데 나름의 통찰도 갖고 계신 모양이네요. 음률에 통달한다는 것은 남보다 뛰어난 혜안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옳은 말씀이군요.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꼬리를 내렸지만 방싯 올라간 두 볼을 보니 놀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찬열 앞에서 더 볼썽사 나운 꼴을 보일 순 없어서 종인은 콧김을 뿜으며 화를 삭였다. 경수가 돌아서서는 키득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나란히 벌판으로 내려가자 청신이 적갈색 수말 두 마리를 데려왔다. 몸매도 날렵하고 갈기에 윤기 가 흘렀다. 관리를 잘한 준마다. 근처에 말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객잔에서 관리를 잘해 두었 다. 종인과 경수는 각자 등걸에 발을 걸고 안장 위에 올랐다. 승리욕에 불타는 종인의 눈에서는 흐린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 불티가 튀고 있었다.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진 사람은 소원을 들어줘야 해. 얼떨결에 내기에 응하게 된 경수는 사뭇 이기고 싶은 생각에 말고삐를 단단히 휘어잡았다. 종인도 오른손에 고삐를 한 번 감아쥐고는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졸지에 심판이 된 찬열은 계획에도 없던 승마 내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똑바로 자세를 잡으십시오. 네, 좋습니다. 청신이 못마땅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는 사이, 찬열이 울림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출발! 구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종인과 경수의 한바탕 대결이 시작되었다. * 어전시위. 정오품

31 두 사람은 바쁜 전령처럼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이고 속도를 높였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누비는 두 마리의 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초반에는 비슷하던 둘의 거리가 중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덩그러니 놓인 느티나 무를 찍는 순간까지도 박빙이었지만 돌아올수록 차이가 났다. 효경제를 닮아 무술에도 소질이 있는 종인은 사냥을 워낙 좋아하여 날랜 짐승을 잡는 데 도가 텄 다. 그에게 말을 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경수는 말에 오를 줄은 알아도 빨리 달리는 법 은 몰 랐으므로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종인은 경수가 얼마만큼 따라왔나 살피려 힐끔 돌아보았다가 문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조그만 몸을 말목에 바짝 붙이고 낑낑거리며 악착같이 따라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악바리였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그것이 지극히 도경수다워서 종인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일에도 사력을 다하는 성격이라면 어디에 있더라도 반드시 쓰임이 있을 터. 볼수록 탐나는 아 이이다. 종인은 결승선에 다다르자 크게 숨을 토해내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말이 속력을 늦추더니 이내 투 레질 몇 번을 하고는 억새 숲 사이에서 멈췄다. 한바탕 신이 나게 뛰었더니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다. 드넓은 벌판을 이처럼 포효하듯이 달려본 적 이 언제던가. 적어도 영회황후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은 아니다. 말을 탄 적도, 마구간을 기웃거린 적도 없었다. 우연찮은 기회지만 이토록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종인에게는 크나큰 위로 였다. 종인이 말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경수가 한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돌아왔다. 경수가 말에서 내리자 종인은 잽싸게 그에게 다가가 종알거렸다. 이제 알겠느냐? 사람을 함부로 깔보면 큰코다치는 법이니라. 진 사람에게 그리 으스대는 것도 썩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 허! 끝까지 말대꾸구나. 홍류원에서 봤을 땐 나비인 줄 알았는데 지독한 말벌이군. 소인을 어떤 식으로 보시든 전하의 맘이지만 예의는 지켜주십시오. 경수가 툴툴거리자 종인은 그것마저 귀여운지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였다. 네가 졌으니 내 소원을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 소인은 전하의 놀이판에 억지로 끌려나갔을 뿐입니다. 싫다면 처음부터 말에 오르지 말았어야지. 순 억지지만 경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반박했다가는 장황한 잔소리가 쏟아질 것 같았다. 두 분이 볼수록 사이가 좋군요. 찬열이 끼어들었다. 속 모르는 소리라며 종인과 경수가 동시에 외쳤다. 오기로 내뱉는 허언이라 찬 열은 둘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 내내 우중충하던 하늘이 기어이 빗물을 흩뿌렸다. 열 반설이 내린 이후 날이 풀린 증거이긴 했으나 우의( 雨 衣 )도 없는 상황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청신이 재빨리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종인의 머리를 가렸지만 굵다란 빗방울을 가리기엔 역부족이 었다.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오두막이 있습니다. 잠시 비를 피하기엔 나쁘지 않을 겁니다. 경수의 안내를 따라 네 사람은 두 필의 말을 끌고 언덕바지에 있는 허름한 초막으로 향했다. 버려 진 지 오래지만 나그네들이 오가며 쓰는 곳이기도 해서 그리 지저분하진 않았다. 안은 하룻밤을 부탁할 만큼 깨끗했고 가운데는 장작을 피울 수 있게 흙으로 구멍을 파 놓았다. 거 기엔 이전에 머물렀던 사람이 태운 장작이 남아 있었는데 전부 새카만 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는 추위를 물릴 수가 없었다. 쉬이 그칠 비로 보이지 않는데 아직 초봄이라 냉기가 돕니다. 근처에 땔감으로 쓸 만한 것이 있는 지 찾아보겠습니다. 경수는 비에 쫄딱 젖어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떠는 종인을 힐끔거렸다. 진왕은 날 때부터 병약했다

32 던데 그가 오늘 일로 득병한다면 찬열도 곤란해질 수 있었다. 넌 여기서 전하를 살펴 드려. 청신과 내가 다녀올게. 찬열이 경수를 만류했다. 자신의 손수건으로 종인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던 청신은 얼떨결 에 오두막 밖으로 끌려나가게 생겼다. 상관이 직접 나서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어차피 산이라 뭘 꺾어도 다 장작이 될 거야. 빙긋 웃은 후 찬열은 청신을 데리고 초막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물안개로 아득하고, 안은 사느란 공기에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다. 종인과 경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밖에 매어둔 말을 타고 미친 사람 처럼 경주를 즐겼는데 정작 단둘이 남으니 할 말도 없고 데면데면하기도 했다. 종인이 머리를 푸르르 털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경수를 조심스레 힐끔거렸다. 경수는 남은 나 무토막으로나마 불씨를 땅기려는 듯 잿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숙인 얼굴선이 물결 위로 부서지는 달빛처럼 유려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아서 어쩐지 요염해 보이기도 했다. 종인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홍류원에서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춤을 추는 신선이요, 꽃의 화신. 아름답고 대차다는 말로는 부족한, 도경수의 용연무 한 사위. 수려 한 명화 한 폭이 며칠 동안 뇌리에 박혀 빠지질 않았으니 아무래도 그를 향한 이 마음이 보통은 아닌 듯하다. 약골인 줄 알았습니다. 살릴 만한 불씨가 없자 다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툭 앉으며 경수가 말을 건넸다. 종인이 퍼뜩 정신을 수습하고는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었다. 무엄하다. 아부가 듣기 좋으신가요? 기가 차서 종인은 실소를 터트렸다. 소문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기골도 장대하고 말도 잘 타시고. 섬약한 풍류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듣 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십니다. 칭찬이냐?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한 눈에는 일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종인의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좋게 봐준다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경수가 나중에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안다면 어떨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겁먹고 실망하 겠지. 순진무구한 저 얼굴도 달처럼 이지러지고 허물어질 거야. 그러자 숨이 턱 막혔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종인을 보며 경수가 어디 아픈 거냐고 물었다. 종인은 매가리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추위를 잘 타는지라 종인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그것을 알아챈 경수가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 외투를 벗어 종인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종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경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로 돌아갔다. 종인이 끝끝내 시선을 거 두지 않자 그제야 시선을 내리깔고 부끄러운 듯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풍한이라도 드시면 모두 곤란해지니까. 종인은 그것이 핑계라고 생각했다. 내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부득부득 말대꾸까지 하던 위인이 갑자 기 눈도 못 맞추니 여간 수상쩍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내게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하지만 이것은 날 황제가 아닌 진 왕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아니다. 자초한 일의 결과를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재를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해 보자.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세상은 조금 전보다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창문 사이로 산간의 깊은 숨결이 새어 들어왔다. 잔기침이 터졌다. 무거운 비가 지붕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느냐? 종인이 적막을 갈랐다. 비 온 뒤 물안개 낀 운치를 좋아합니다.

33 상강에 희뿌연 물안개가 끼면 구름 속에 있는 듯하지. 예. 소인은 그 절경이 좋습니다. 그렇군. 난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의외군요. 음률에 통달한 사람들은 대개 비를 좋아하던데. 사람마다 다르지. 너도 비 갠 후의 풍경을 아끼는 것이지 않으냐. 그건 그렇습니다. 소인은 옷깃이 축축해져서 싫어요. 장마철이면 온갖 것에 새카만 좀이 들어 냄새 도 나고 보기에도 좋지 않죠. 경수는 안개가 낮게 드리워진 듯한 종인을 바라봤다. 결례가 아니라면 비 오는 날을 싫어하시는 까닭을 여쭈어도 될는지요? 종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입을 달싹거리는 것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경수는 그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해서 객쩍게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느냐? 소원이십니까? 그래. 원한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물지 않죠. 지금부터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전부 바람이라 여기겠습니다. 다시금 종인의 입에서 가벼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07. 우중밀화( 雨 中 密 話 ) 내 어머니께선 후궁의 몸으로 열녀의 칭호를 얻고 부황의 무덤에 함께 묻히셨다. 황제와 진왕의 생모인 숙비 손씨는 유명했다. 그녀는 후궁임에도 열녀라 불렸기 때문이다. 원칙에 따르면 후궁은 황실 종묘는커녕 남편인 황제와 함께 안장될 수 없다. 그런데 숙비는 황실 법도를 깨고 황제의 무덤에 들어간 여인이다. 백성들은 순사로 알았다. 황궁 사람들은 숙비가 순장됐 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숙비는 황자를 두 명이나 낳은 데다 명문가 출신이었으므로 후궁 내에서 입지가 탄탄했다. 그러나 의귀비와 총애를 다투는 과정에서 효경제의 신임을 잃었고 그것을 계기로 본인뿐만 아니라 두 아들의 장래마저 망칠 위기에 처했다. 숙비는 이를 타파하려고 당시 황후이던 장씨에게 머리를 숙였다. 우여곡절 끝에 의귀비가 죽고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마저 폐위되자 황후 장씨는 효경제에게 건의해 숙비의 차남인 김종인을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얼마 뒤 효경제가 붕어하면서 종인이 부황의 자리를 이었다. 일반적으로 황제를 낳은 후궁은 생모 자격을 인정받아 궁호를 받거나 태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부 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후는 효경제의 부고를 듣자마자 손씨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조 정 대신들 또한 손씨의 죽음을 원하였다. 태후와 조정 모두 구익부인( 鉤 弋 夫 人 ) * 의 고사를 들먹였다. 숙비는 죽기 전날 어린 두 아들과 마지막 밤을 보낸 후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뒤를 따랐다. 내 어머니께서는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빗소리와 함께 종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비를 싫어하는 이유가 어머니와 관련되었 을 줄은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아무 말이나 던진 거였는데 뜻밖의 비화였다. 경수는 최대한 담담해 보이려 애썼다. 슬픈 표정을 하는 것조차 진왕에게는 실례일 것이다. 태후와 조정이 한뜻으로 내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 * 한 무제의 후궁이자 한 소제의 생모. 어린 태자가 등극하면 외척이 발호할 것을 경계해 무제가 역모 죄를 뒤집어 씌워 죽임. 사후 복권

34 그들은 틀렸어. 종인은 이곳이 궁이 아님을 알면서도 공연히 눈알을 굴렸다. 이곳까지 자신궁의 눈과 귀가 있을까 봐 내심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한 번 물꼬를 튼 이야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어머니께 죄가 있다면 가마 타고 관주성의 편문으로 들어와 우리 형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혼인할 때 황실의 정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의 정궁, 즉 황후뿐이다. 숙비는 후궁 이었으므로 법도에 따라 편문으로 들어와야 했다. 쉬이 그칠 소나기가 아닌지 나무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오히려 거세졌다. 세찬 빗줄기에 종인의 목 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지만 경수는 진왕 이 깊은 회한에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묵묵히 진 왕 의 회고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은 지금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나는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해. 벼락이 쳤던가. 한여름을 식히는 억수 같은 장맛비에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모친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천둥 이 무서웠다. 두 살 위인 종대는 의연하게 앉아 있었지만 종인은 숙비의 옷자락을 붙들고 터지려는 울음을 참았다. 부황이 세상을 뜬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종인은 촛불이 다 타도록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머니는 겨우 서른다 섯이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촛불도 다 살라 버렸을 때, 종인은 울던 어머니의 모습을 눈에 담 은 채 이불 위에 잠들어 있었다. 일어났을 무렵에는 등극을 윤허하는 태후의 조서와 함께 옥새가 내려왔다. 어머니는 온데간데없었 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자는 사이에 끔찍한 일이 행해졌음을 알고 종인은 태후를 두고두고 원망했다. 어머니의 목숨과 맞바꾼 지존의 자리.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난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쓸어주시며 계속 우셨지. 눈물이 내 볼 위로 뚝뚝 떨어지는데, 울지 말라며 어머니의 눈가를 닦아드려도 눈물을 그치지 않으셨다. 그 마지막 모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구나. 그런데 나는 적모라는 이유로 원수의 눈치나 보며 산다. 그건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경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시 전하께선 어렸습니다. 태후가 숙비마마를 자결케 한 것은 무제를 본받으려 함이었겠지요. 그 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구익부인을 죽여 외척의 발호를 막았지만 지금의 태후는 장씨 일가 전체가 조정을 농단하 게끔 방관하고 있다. 이럴 거면 내 어머니는 왜 죽였지? 종인이 울컥한 심정을 감추고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반박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전하의 아우이신 폐하께서는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하셨죠. 종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자신은 도경수 앞에서 진왕 김종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저수지가 클수록 썩은 물을 빼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멀리 갈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전하와 친형제시니 분명 총기가 남다른 분일 겁니다. 사람들은 머지않아 폐하께서 장 씨 일가를 축출하고 진정한 선정을 베풀 것이라 기대 중이죠. 그러니 전하께선 사사로운 복수심에 괴 로워 말고 폐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폐하를 지킬 사람은 오직 전하뿐입니다. 너도 아는 그 진리를 내 형님께서는 모르지. 태후 곁에 붙어서 아부 떠는 것이 전부인 위인이니까. 보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은 불변의 법칙이다.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나. 전하께서 폐하의 자리를 탐내기라도 한다는 뜻입니까? 무엄하다.

35 종인이 미간을 구기자 경수는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덧붙이기를, 하오나 전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은 꼭 그렇게 들렸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폐하께 믿음을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형제잖아요. 내 뜻과 달리 폐하의 눈 밖에 나면 곧바로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황실에서 핏줄은 무의미하지. 믿는다면 그분께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믿음이 없는 것은 오히려 전하 이신 듯합니다. 의표를 찔리자 종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종대를 믿지 못하는 데는 그가 자신궁의 눈과 귀라는 의심 에서 기인한다. 하개도, 찬열도 종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했지만 만성이 된 의심은 낙인과도 같았다. 폐하를 지켜주십시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전하께서 폐하의 충실한 종복이 되셔야 합니다. 말재주가 좋군. 그러는 네가 한 번 조정에 출사해 보지 그러느냐? 폐하께서 믿고 의지할 만한 만 고충신이 된다면 연나라의 복일 거다. 소인 같은 것이 무슨. 청운의 꿈이 없어? 소인은 그저 평온하게 사는 것이 꿈입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태학관 유생이라면 누구나 조정의 요직에 진출하길 소원한다. 태학관은 학문의 장이자 차기 위정자 들을 길러내는 교육의 중심지요, 미리 인맥을 형성하고 익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내라면 누구나 가문을 일으키길 원하지. 네게는 그런 포부가 없는 것이냐? 그런 거라면 높은 관직에 오르지 않더라도 충분합니다. 지나치게 원하면 가진 것마저 잃게 되죠. 의외군. 백성들보단 일신의 안위가 중요하다 이것이냐? 평온하게 사는 것이 어찌 일신의 안위와 직결되는지요? 당돌한 물음에 종인은 진지하게 답했다. 조정이란 새카만 밤바다와 같다. 갓 출사한 관리는 자신의 배가 떠 있는 곳이 태풍의 한가운데인 지 아니면 태풍이 지나간 후 고요해진 어느 지점인지 알 길이 없지. 배는 순풍을 만나 잔잔하게 나아가길 원할 뿐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내 배를 흔드는 게 거센 바람인지, 밑에서 빠르게 헤엄쳐 오는 괴 어인지 분간할 수 없다. 가문을 지킨다는 것은 조정에서 살아남아 피를 묻힌 자여야만 가능하다. 괴어와 싸우고 거친 풍랑 을 이겨낸 자만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목숨을 살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가문을 일으키는 것과 그저 평온하게 살고자 하는 네 바람은 충돌할 수밖에 없느니라. 한쪽을 포기해야 해. 비록 가정일 뿐이지만 냉정한 충고였다. 경수는 진왕의 진면을 알게 된 것 같아 묘한 기분이었다. 진왕은 세간의 목소리처럼 가무나 즐기는 병약한 사내가 아니었다. 전하께서 뜻하는 바를 모르진 않습니다. 그래도 소인은 소박하고 조용히 살길 바랄 겁니다. 찬열이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네 재주라면 폐하께 큰 힘이 될 텐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빼앗길 셈이냐? 소인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닙니다. 태학관에서 동문수학하는 유생들만 봐도 알 수 있죠.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지천이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그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백성 들을 위할 테니까요. 백성이 아니라 높은 자리겠지. 뭐라 하셔도 현재 소인이 바라는 것은 그뿐입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야망이 없다는 뜻이다. 야망은 정쟁에 휘말리는 모든 이가 가진 것이지. 그 소용 돌이 속에서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살아서 부귀는 풀 위의 이슬이요, 죽어서 풍류는 길 위의 꽃이라지요? 가진 것을 잃을까 노심초사

36 하는 것보다는 적게 가지더라도 마음이 평온한 것이 낫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문을 일으키겠다니 터무니없군. 전하께서 폐하를 믿지 못하고 전하의 안위만 챙기시는 것과 그저 조용하게 살길 바라는 제 소망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훅 치고 들어오는 얼얼한 주먹에 종인은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동글동글 유순한 생김새에 속을 뻔했다. 도경수는 절대 만만한 성격이 아니다. 말하는 족족 반박하고 있지 않은가. 종인은 생모에 대한 이야기가 급물살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마구잡이로 흘러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 것이 우스웠다. 상대의 말솜씨에 이렇게 휘둘린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위정자가 너와 같다면 오죽 좋겠느냐. 부끄럽습니다. 당당하게 네 의견을 말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 독 오른 생선처럼 가시 세우던 모습은 어디 가고 갑자기 새색시처럼 구는 거냐? 농담을 가려서 하시면 전하의 명성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경수가 다시 발톱을 세우자 종인은 파르르 어깨를 떨며 웃었다. 폐하께 힘이 돼 주세요. 진심입니다. 대화가 갈무리될 즈음, 담백하게 울린 경수의 목소리가 종인의 전신을 훑었다. 도경수는 진심으로 어린 황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강한 신뢰감을 주었다. 종인은 그러겠노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빗속을 헤치고 땔감을 구하러 갔던 찬열과 청신이 돌아왔다. 장작이 몸을 불살랐다. 비는 저녁 무렵이나 돼서 그쳤다. 그때까지 종인, 찬열, 경수는 시와 찬열의 무용담에 열을 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진짜 진왕만큼은 아니지만 종인도 시를 좋아했다. 그 덕에 경수와도 얘기가 통했다. 덕분에 오두 막에서 종인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종인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짧은 일탈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세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종인은 돌아오는 내내 경수가 한 말을 되새김질했다. 도경수가 한 충고는 모두 눈앞의 김종인이 진 왕 김종대라고 여기는 탓이다. 일개 유생도 아는 진리를 똑똑한 형님이 모르진 않겠지. 그럼에도 사그 라지지 않는 불씨처럼 의심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경수와의 대담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점이다. 홍류원에서 처음 만난 날의 강렬함과 설렘보다는 수더분하고 솔직함이 펼쳐져 있어서 좋았다. 이글 거리는 불꽃과 새빨간 불그림자에 얼굴에 그늘이 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시론( 詩 論 )에 대해 종알거 리던 도경수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어깨에 걸쳐주었던 옷자락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어서, 시리도록 푸른 달이 걸린 새벽이지만, 종인 은 여느 때처럼 괴로워하지 않고 충만한 따스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짤깍짤깍. 휘장 밖에서 초 심지를 자르는 가위 소리가 들렸다. 완연해진 봄기운에 산막 지붕 위로 동그란 달이 걸렸다. 새해를 맞고 열반설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어느덧 삼월 하순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살얼음이 꼈던 계곡 물도 녹아 근처에서는 이 제 막 활동이 왕성해진 개구리들이 뛰쳐나왔다. 잔잔한 달빛 아래서 찬열이 등을 밝혔다. 향을 더한 종유( 種 油 )는 불야성처럼 환한 불빛을 만들어냈 다. 전하와 문교( 文 交 )한다며? 소나기가 내렸던 장유곡에서의 일 이후, 종인이 경수의 문식이 상당한 것을 알고 먼저 글로써 서로 의 견해를 주고받자고 제안했다. 경수는 흔쾌히 허락했다.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도성 최고의 풍류가이자 문장가로 알려진 진왕과

37 문교한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병약함을 이유로 문하생을 두거나 문인들과 교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치는 더욱 뛰었다. 둘은 이미 주고받은 글이 꽤 되는 듯했다. 글을 전해 주는 이가 다름 아닌 찬열인지라 내막을 모를 수 없었다. 다만 종인과 경수가 언제부터 이런 사이로 발전했는지, 오가는 서신에는 무슨 내용이 적혔 는지 알 길이 없어 내심 궁금했다. 문교랄 것까지는 아니고. 그 날 이야기가 잘 통하신다며 전하께서 좋아하는 시가 있으면 같이 얘기하자고 하신 것뿐이야. 겉봉만 봐도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고작 시나 주고받는다고? 대답 대신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찬열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절친한 벗이라고는 자기밖에 없는 것처럼 굴더니 달포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종인과 무척 이나 가까워진 경수가 괘씸했다. 자연스레 외골수를 탈피하려는가 싶어 기특하기도 했다. 네 덕분에 나도 진왕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아. 그제야 경수가 자그마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찬열은 수족처럼 착검하고 다니는 검을 날이 벼리게 닦았다. 달빛처럼 푸르스름한 기운이 칼날을 어루만졌다. 근래 본의 아니게 화조사 노릇을 하다 보니 마주치는 일이 적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전 보다 가까워졌지. 화조사라니? 전하 앞에서는 입에 담지도 마. 찬열은 재미있다는 듯 낮게 키드득거렸다. 경수의 볼이 불퉁하게 씰룩거리더니 이내 찬열의 팔을 주먹으로 퍽 쳤다. 헌데 전하께서 요즘은 운신이 자유롭지 않으신 모양이야. 몇 장 되지 않는 서신에는 각자 좋아하는 시나 경서의 구절을 적고 그것에 대한 소회를 밝혀 놓았 다. 별 내용은 아니지만 찬열을 통해 사나흘에 한 번씩 전하던 서신이 끊겨 달리 진왕에 대한 소식을 들을 방도가 없었다. 찬열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자칫 나서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자제하던 중이다. 하지만 열흘 가까 이 서신이 오가지 않아 진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요 며칠 내가 한가롭긴 했지. 무슨 일 있어? 나도 매일 뵐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혹시 그때 맞은 비로 뒤늦게 풍한이라도 드신 건 아닐까? 경수가 다소 시무룩해졌다. 장유곡 다녀온 지가 언젠데? 글피가 태후마마의 탄생일이라 그것 때문에 바쁘시겠지. 전하께서 그런 일까지 돌보신다고? 그럼. 작년에는 대단한 글을 지어 바치셨던데 올해는 어떨지 궁금해. 경수는 문득 오두막에서 종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생모를 죽인 원수에게 아첨하고 기생해야 하는 진왕의 신세가 참으로 딱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그 가 택한 생존법이겠으나 친동생인 황제의 신임을 얻지 못함은 무척 안타까웠다. 잘은 모르지만 전하께서는 폐하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봐. 기름을 발라 검에 광을 내던 찬열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경수는 궐내 사정을 잘 모르는 편이다. 그 런 그가 낌새를 눈치챘을 정도면 종인이 말을 흘렸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 형제 사이의 일까지 들먹였을 정도면 필시 생모인 숙비의 사연도 끄집어냈을 터. 찬열은 종인에게 서 그 내막을 듣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그나마도 전장에 나가 소년장수로서 명성을 떨치고 난 후의 일이다. 배동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가깝게 지냈지만 종인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데 서툰 구석이 있었다. 황자이다 보니 스스로 몸가짐이 무거워야 함을 인지하던 탓이다. 느즈러진 적 없는 종인의 성품은 늘 해사하게 배꽃 같은 미소를 흘리던 종대와는 딴판이었다. 그런 종인이 몇 해 전에 막 토벌에서 돌아온 찬열에게 당부했다.

38 적장의 피를 마신 그 검으로 짐을 지켜다오. 그 밤에 어주( 御 酒 ) 한 병을 내리면서 툭 털었던 비밀은 찬열의 목구멍으로 매우 쓰게 넘어갔다. 줄 곧 느꼈지만 종인은 그날따라 더욱 외롭고 고단해 보였다. 공교롭게도 손씨가 죽은 지 여섯 해째가 되던 날이었다. 모든 형제가 친하진 않지. 하지만 두 분은 같은 아픔을 가졌잖아. 폐하의 의중은 모르겠지만 진왕 전하는 자신이 토사구팽당 할까 봐 두려워하더라. 네 말대로 두 분은 동병상련이지. 오해가 있다면 반드시 풀릴 거야. 그럼 좋겠다. 전하를 많이 걱정하는구나. 그럴 리가. 입매를 끌어올렸으나 경수는 마냥 개운하진 않았다. 내 뜻과 달리 폐하의 눈 밖에 나면 곧바로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황실에서 핏줄은 무의미하 지. 황족으로 태어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서야 하는 운명. 웃는 낯 뒤로 풍랑보다 거칠고 밤하늘보다 새카만 어둠을 감추고 있는 것이냐고, 생모를 죽인 원수 에게 아첨하고 그녀의 탄신을 축하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선물을 준비해야 해서 고통스러우냐고, 하여 글줄 하나 보내기조차 어려운 처지냐고, 경수는 묻고 싶었다. 깨닫지 못한 새 봄빛이 짙어지듯이 경수의 마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08. 수흔( 水 痕 ) [한스럽게도 은밀한 저 난초 고집이 세, 꽃을 피움에 나와는 상의 한마디 없네. 코끝에 그 향기 살 며시 스치기에 부러 찾으니 그 향기 풍기지 않네. * 부끄럽지만 여적( 餘 滴 ) ** 이 아까워 도도한 향기를 보냅니다.] 열흘 전에 받은 서신 끝에는 썩 훌륭한 솜씨로 친 묵란도( 墨 蘭 圖 )가 딸려 있었다. 갈필로 표현한 거친 난화는 도경수의 조그만 손끝에서 탄생했다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앳된 용모와는 달리 도경수는 말투나 성격, 문장 표현력 등 여러 면에서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 모르는 사 람이 도경수의 글을 먼저 접한다면 분명히 기골이 장대한 장정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쨌거나 외향과 성품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괴리감이 그의 매력이라고, 종인은 생각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서신을 접어 너비가 좁고 길이가 긴 화각함에 넣었다. 모레가 태후의 탄일이라 궐내는 몹시 분주했다. 태후는 허례허식은 삼가라고 못을 박았지만 장씨 일가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 다. 벌써 며칠 전부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태후에게 헌상할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상태였다. 종인이 가장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따로 있었다. 하개. 예, 폐하. 이맘때 찾아오는 불청객이 무엇인 줄 아느냐? 상소에 옥새를 꾹꾹 누르던 종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소인이 우둔하여 폐하의 혜안을 청하옵니다. 달갑지 않은 면상들이 궁 안으로 몰려와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꼬락서니니라. 다음 상소를 펼치는 종인의 입가엔 냉소가 가득했다. * 이일화, 난을 그리며( 畵 蘭 ) ** 글이나 그림에 쓰고 난 뒤 남은 먹물

39 그들은 각자의 속내를 감추고 웃는 낯으로 위선을 떨어대지. 정말 추악하지 않느냐? 폐하. 허나 이러는 짐도 위선의 향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니 달리 그들을 비난할 자격 은 없구나. 폐하께서는 천자이신데 어찌 소인배와 같다 하시나이까? 온통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찬 세상이다. 짐은 그곳에 발 디딜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했지. 허나 가 끔은 그런 세상의 정점에 선 짐이 가장 추악하게 느껴지기도 하느니라. 폐하의 옥과 같은 구중에서 그처럼 쓴 말씀을 쏟으시니 소인의 등골이 오싹하나이다. 하개의 안색이 실로 좋지 않았다. 짐이 지나쳤군. 근자에 일이 많아 넋두리나 해 본 것이니 괘념치 마라. 무엇보다 몇 달째 진통을 앓는 조세 개혁 문제가 종인의 숨통을 콱콱 조여 왔다. 장문견이 예족을 정벌하고 돌아온 후로는 장씨에게 편승한 세력이 기세등등하게 뻗대는지라 여간 눈꼴 시린 것이 아니 었다. 종인을 지지하는 신진세력은 아직은 기반이 약하여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질 못했다. 이대로 현재 의 조세 제도를 혁파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작년이 흉작이라 종인은 마음의 짐이 더욱 컸다. 그래서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을 바꿔보려는 것인데, 영악한 노신들은 그 싹마저 자르려 했다. 그나마 종인을 두둔하는 자들이 있어 안건은 오래도록 질질 끌리고 있었다. 여기에 태후가 넌지시 황후 책봉에 관한 일을 입에 담는지라 종인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종인은 못 들은 척, 이해하지 못한 척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침전으로 돌아오면 그는 늘 얼굴이 붉으 락푸르락했다. 그런 나날 속에서 도경수와 나누는 짤막한 일행서마저 없었다면 어린 황제는 돌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매년 같은 날의 반복인데 발목 잡힌 며칠이 종인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견 디기 어려웠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산마루엔 초승달 예쁜 눈웃음, 빈 숲은 모두 한빛으로 눈꽃이 곱네. 괜스레 울고 싶은 그리운 저 녁, 들뜨는 내 마음은 소년 같구나.] * 옥안 앞에 앉아 정갈한 자세로 몇 자 적으니 싹둑 잘린 비단 같았던 마음이 귀신같은 솜씨로 기운 듯 평안해졌다. 마구잡이로 엉킨 실타래가 도경수를 생각하니 사르르 풀어졌다. 폐하. 야찬을 들이오리까? 쌀쌀한 봄밤에 하개가 흠칫 어깨를 떨며 물었다. 종인은 미간을 좁히며 한참을 대답하지 않다가 나 지막하게 물었다. 낮에 먹던 배정과가 달고 시원하던데 남았느냐? 그럼요. 밤바람이 제법 차니 따뜻한 감로차도 같이 올리겠나이다. 네가 올해 몇이지? 쉰둘이옵니다. 벌써 그리됐느냐? 환절기라 그런지 어째 좀 마른 것 같군. 그리 보이십니까?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짐을 돌보느라 정작 네 몸 살필 겨를은 없는 게지. 함께 마시자꾸나. 아이고, 폐하! 소인 같은 천것에게 가당찮은 일이옵니다! 태성전 수령태감인 네가 천것이면 다른 전각의 환관들은 미물이란 말이냐? 폐하. 잔말 말고 나눠준다고 할 때 마셔. 나이도 먹었는데 혼자 몸 돌보는 게 수월치는 않겠지. 폐하의 우악하신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개가 진심으로 감동을 받은 모양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종인은 겸연쩍은 듯 출출하니 얼른 다녀 * 송화, 아월하음( 芽 月 下 吟 )

40 와라. 라며 늙은 내관을 몰아냈다. 하개가 발에 날개가 달린 듯 빠른 걸음으로 침전을 빠져나갔다. 헤든 별무리가 태양 아래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는 듯, 청옥 빛깔로 물든 하늘은 찬란하기 그지 없었다. 한 줄기 미풍에 너나 할 것 없이 탐춘객을 자처하는 명랑한 날씨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경수의 표정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손에는 총백( 蔥 白 )과 계피, 백지( 白 芷 )를 싼 봉지가 들려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손이 한없이 부끄러웠지만 사람의 정성만큼 값진 것은 없다고 믿었다. 제대로 약 한 첩 지을 돈이 없어서 뒷산에서 손수 캔 약초였다. 찬열이 알면 오지랖이라고 나무랄 것이 뻔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또 마냥 편한 대로만 생각 할 수 없었다. 이리로 오는 내내 경수는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나 싶었다. 자기 일이 아니면 대부분 무관심하게 넘겼는데 이번은 아니었다. 그냥 있자니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경수는 대문 꼭대기에 걸린 仁 寶 堂 * 이라는 현판을 바라보았다. 현판에서는 진중한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태후가 친아들처럼 보살핀다는 진왕답게 당호도 멋졌고 다른 데보다 규모가 커 보였다. 늘어선 담 벼락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담장에 얹은 기와는 이끼 한 점 없이 깨끗하여 구운 지 얼마 안 된 티가 났다. 몇 번 이곳을 지나간 적은 있어도 내 발로 찾아올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노란 개나리를 멀거니 바라보던 경수는 단정하게 대문 가까이 다가갔다. 문 에는 흔한 춘접 대신 寄 語 世 上 須 記 憶, 取 歡 無 處 得 平 生 이란 시구 두 장 붙어 있었다. 그것은 김시습 의 시 사청사우( 乍 晴 乍 雨 ) 중 마지막 두 구절이었다. 세상에 고하노니 반드시 기억하라. 어디서나 즐김은 평생 득이 되니라. 유유자적한 진왕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인지라 경수는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조용히 대문을 두드렸다. 꽉 닫힌 대문에서는 한참이나 인기척이 없었 고 경수가 재차 문을 두드렸을 때, 청지기가 심드렁한 얼굴을 들이밀며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시오? 청지기가 재빨리 위아래로 경수를 훑은 후 애매하게 말을 높였다. 얼굴에서는 귀티가 잘잘 흐르는 데 옷차림은 너절해서 몰락한 가문의 식객으로 여긴 것이다. 그 시선이 못내 불쾌했지만 한두 번 당 하는 일도 아닌지라 경수는 의연했다. 이곳이 진왕 전하께서 사시는 곳인가? 그렇소만. 청지기가 다시금 눈썹을 불퉁하게 씰룩거렸다. 나는 태학관 유생 도경수라 하네. 전하께서 편찮으시단 얘기를 듣고 부족하나마 약재를 마련했는 데 전해 줄 수 있는가? 태학관 유생이라 하셨소?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현재든 미래든 정계에 몸담는 자들과는 교류하지 않으시오. 난 그저 약재를 전하고 싶어서 왔을 뿐이네. 다른 뜻은 없으니 전하께 이것만 전해 주게. 당신처럼 약재며, 진귀한 그림이며, 하다못해 비단 한 조각이라도 우리 전하께 바치려고 줄 선 자 들이 한둘인 줄 아시오? 갖은 핑계를 대며 전하를 뵙게 해 달라고, 전하께 자신의 사정을 전해 달라 고 애걸복걸하지. 전하께서는 청탁 넣는 자들을 혐오하시니 경을 치기 전에 썩 꺼지시오! 청지기의 단호한 태도에 경수는 황당함을 금하지 못했다. 종친으로서 뇌물을 바치려는 탐관오리들 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지만 당장은 어이가 없었다. * 인보당

41 딴에는 공부할 시간을 쪼개어 뒷산에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약초를 캤건만, 전하지도 못하고 버릴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했다. 그간 찾아온 자들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전하께 내 이름을 대면 기꺼이 받아주실 터이니 말이라 도 한번 넣어보게. 망신을 당해야 돌아가겠소?! 부탁일세. 내, 정말로 전하의 존체가 걱정되어 그러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경수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자 청지기의 완강한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 다. 그는 여전히 뾰로통하고 쌀쌀맞은 태도였지만 말을 전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 뒤 대문이 다시 쾅 닫혔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경수는 입술을 팍 깨물었다. 황제의 친형이자 태후가 아끼는 황족.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의 신분 격차는 상상 이상이었다. 첫 만남 이후로 한결같이 격식 없이 대해 줘서 진왕을 잠시 평범한 공자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초조한 마음이 속절없이 스러지는데 인보당의 문이 열렸다. 경수가 기대감 에 부풀어 땅으로 처박았던 시선을 팩 끌어올렸다. 그러나 들어와도 좋다는 말 대신 차가운 물벼락이 쏟아졌다. 청지기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아와 그 대로 경수의 몸에 끼얹은 것이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경수는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굳 어 버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청년에게 청지기가 되알지게 욕설을 퍼부었다. 전하께서 태학관 유생 도경수란 자와는 일면식도 없다 하시는구나!! 어디서 막돼먹게 장차 나랏밥 먹을 분들을 사칭하여 전하까지 욕되게 하려느냐?! 썩 꺼져라! 침까지 뱉으며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청지기를 경수는 이렇다 변명도 못 하고 멍하게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청년의 머리와 뺨, 남루한 옷깃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청년을 더욱 초 라하게 했다. 하지만 청년은 그곳에 말뚝처럼 멀거니 서 있을 순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의 앞 뒤를 따질 필요가 있었다. 이내 경수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것도 화가 치미는 데 뒤늦게, 자신을 모른 척하는 진왕의 태도에 크나큰 실망감이 밀려왔다. 용연무에 대한 보답으로 내민 우산은 무엇이며, 내기랍시고 장유곡 근처의 벌판을 달린 것은 무엇 이며, 비 오는 날에 얽힌 숙비와의 비화를 들려준 일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게 의견을 말하는 모습이 신선하다던 칭찬은? 찬열이 스스로를 일컬어 화조사라고 칭할 정도로 자주 서신을 보내오던 그 정성은? 이 모두가 허깨비였단 말인가? 기나긴 칩거에 지친 나머지 골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뿐인가? 경수는 작게 도리질을 쳤지만 솟구치는 당혹감과 배신감에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눈앞에 진왕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갯불처럼 빛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에게 마음을 많이 내주었나 보다. 이까짓 봉욕에 설움이 밀려오는 것을 보니. 못된 또래들이 경수의 몸집이 작고 집안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놀리며 괴롭힐 때도 꿋꿋하게 눈 물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왈칵 슬픔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자신을 모른 척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그것이 그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애초에 신분의 벽이 너무 높았다. 그러나 꺾이지 않은 자존심이 경수를 완전히 부러지게 하지는 않았다. 경수는 대문 앞에 얌전히 약재를 내려놓고 한참이나 仁 寶 堂 이라는 세 글자를 올려다봤다. 목이 뻣 뻣하게 아파올 즈음에서야 빙글 돌아섰다. 내딛는 걸음마다 짙은 수흔이 번졌다. 춘색이 또렷한 봄날이었지만 경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오후에 단골 대장간에 들른 찬열은 골목으로 나오던 중 우연히 경수를 만났다. 경수의 기분이 좋지

42 않아 보여 까닭을 물었더니 청년은 이리저리 답변을 피했다. 몰골도 말이 아닌지라 필시 저자에서 왈패에게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끈질기게 물은 끝에 낮에 있었던 일을 들었는데 사연은 전혀 뜻밖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찬열은 속으로 아연실색했다. 경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애꿎게 원망을 들어야 하는 진왕뿐만 아니라 종인 본인에 게도 좋지 않았다. 종인이 황제라는 사실은 서로에게 불편함만을 더해 줄 뿐이라 종인의 제안대로 모 른 척했지만, 일이 이렇게 틀어진 이상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경수가 직접 인보당까지 찾아갔다는 말에 찬열은 경수의 마음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에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들킬까 봐 조용히 속을 끓이던 청년이 어느새 자신을 지우고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색달랐다. 찬열은 중간에서 입장이 퍽 난처했다. 진실을 말하자니 종인과의 맹약이 걸렸고, 이대로 두자니 경 수의 상처받은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는 고심 끝에 생각을 굳혔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그것은 항상 파멸을 몰고 온다는 사실 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진왕이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거야.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처음부터 내가 착각하고 있었어. 경수야. 괜찮아. 마음 쓰지 마. 빙긋 짓는 미소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거리에서 찬물을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호감을 느 끼던 이에게 거부당하기까지 했으니 강한 자존심이 종잇장처럼 구겨졌을 것이다. 짤막한 추억이나마 함께여서 의미가 있는 건데 그것을 부정당했으니 경수의 성격상 견디기 어려우 리라. 모레는 달리 할 일이 있니? 경수는 턱을 괴고 하릴없이 책장을 넘겼다. 모레가 태후마마의 탄일인데 탄신연을 성대하게 준비하는 모양이야. 같이 구경 가지 않을래? 마음은 고맙지만 너 혼자 가야겠다. 모든 일은 마음에서 비롯되지. 잠시라도 복잡한 생각을 잊는다면 한결 가벼워질 거다. 지금 이 상태로는 어딜 가든 즐겁지 않아. 홍류원에 가기 전에도 비슷한 반응이었지. 하지만 거기서 어땠는지 되짚어 봐. 아이처럼 좋아했다. 붉은 화림( 花 林 )을 누비고 눈밭을 밟으며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그러다 그곳에서 진왕을 만났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정 딴판인, 옥골선풍의 진왕 김종대를. 용연 무를 칭찬하고, 옷깃이 젖었다며 우산을 건네줬던 자상한 모습이 바로 어제 일인 듯했다. 생각하니 울컥 치미는 감정에 경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겐 전공과 황태후의 인척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난 아니야. 명분이야 만들면 되지. 떠들썩한 곳에 있다 보면 기분이 좀 풀릴 거야. 언제까지 네 장신구처럼 딸려 가야 하는데? 날이 선 반문에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신경이 예민해졌다지만 조금 전 발언은 너무도 경솔했다. 경수 자신도 놀라서 입을 다물고 찬열의 눈치를 살폈다. 찬열은 정말로 화가 난 듯했지만 눈빛이 차가워졌을 뿐 달리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실금이 간 분위기를 다독인 것은 오히려 찬열이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불편했다면 사과하마. 아니야, 찬열아! 조금 전 한 말은 진심이 아니야. 찬열에게 대체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모르겠다. 낮에 겪은 일로 머릿속이 말이 아니었다. 금방이라 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못난 사람인 줄은 몰랐다. 머리까지 쥐어박으며 자책하는 경수의 손을 붙든 찬열은 그냥 웃어넘기기로 했다. 자학하지 말라니까. 그거 버릇이다. 미안해.

43 연회든 뭐든 네가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 도 돼. 찬열이 이렇게까지 양보하는데 매번 받기만 하는 자신이 어떻게 거절할 수 있나. 게다가 조금 전 내뱉은 말실수가 너무도 뼈저리게 다가와서 반드시 속죄해야 했다. 찬열은 죽어서라도 보은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이번이 마지막이야. 결국, 백기를 들었다. 09. 연( 宴 ) 희조전에서 태후의 지천명을 축하하는 탄신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봄의 포문이 열린지라 꽃을 피운 나무들은 너도 나도 울긋불긋한 자태를 뽐냈다. 화원에서 정성껏 기른 화초들이 유리와 청낭간으로 장식한 화병에 꽂혀 연회장을 꾸몄다. 태후가 사시사철 꽃 가꾸는 취미가 있는지라 화방 관리들이 몇 날 며칠을 고심하여 고른 꽃병이었 다. 햇볕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투명하고 연푸른 보석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화병을 받친 예스러운 옻빛에 가까운 밤색 탁자마다 정교한 금은단청이 들어가 공장( 工 匠 )들의 섬세 함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새로 칠을 해서 윤기가 흘렀는데 가까이서 코를 벌름거리면 새물내가 났다. 한쪽에는 귀빈들을 위한 연회석이 마련되었고 가운데 붉은색 융단이 깔린 길 위에는 역시 대비가 좋아하는 꽃잎이 알록달록하게 흩뿌려졌다. 하늘 높이 걸린 금휘와 구화장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화신풍에 나부끼고, 양털을 떼어 붙인 듯 포근 하게 떠다니는 구름에서는 고적한 여유마저 느껴졌다. 음악을 연주할 악공들과 춤과 기예를 선보일 무희들도 한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날은 쾌청하고 신선한 공기에 기분마저 상쾌해지니, 태후의 탄신연을 포함해 예족 토벌에 대한 공 을 치하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낮에 벌이는 연회가 예연( 禮 宴 )이라면 저녁에는 무신들을 위한 대대적인 태평연( 太 平 宴 ) * 이 있을 예 정이었다. 종인은 의관을 갖추고는 늦지 않게 희조전으로 나갔다. 희조전의 너른 앞마당에는 손님과 조정 신 료들, 궁인들로 북적거렸다. 꿈결처럼 아득한 화려함에 눈이 멀 지경이다. 그는 한숨을 삼키는 대신 엷은 청록색으로 빛나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복사꽃이 만개하면 홍류원은 기억 속에서 잊힐 터. 종인은 정문 근처에 얼핏 스친 찬열을 보며 경수 를 떠올렸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법도에 따라 하례가 이어지고 무희들의 아름다운 춤사위가 펼쳐졌다. 듣기 좋은 선율이 화기애애한 잔치를 수놓았다. 태후마마의 탄신을 경하드립니다. 부디 만안하시고 천추만세를 누리소서. 종인이 태후에게 술잔을 권했다. 태후가 싱긋 웃으며 잔을 꺾었다. 마마께서 오래 사셔야 소자가 근심을 덜 것입니다. 인명은 재천이라지요. 이 어미도 많이 늙었다오. 주상의 보살핌이 없다면 어찌 천추만세의 광영을 누리겠소? 소자가 부덕하여 마마를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하니 뵐 낯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오. 주상의 효심은 내가 잘 아오. 서로에게 일말의 정도 없는 대화가 웃는 낯으로 포장되었다. 이런 날까지도 내게 어마마마라고 부르지 않는군. 냉소가 터지는데, 종인이 다시금 태후에게 잔을 권하였다. * 전쟁에서 이긴 뒤 베푸는 잔치

44 수렴청정을 끝낸 후 세력이 위축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오늘에서야 그녀의 자리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기분이 날아갈 듯하여 절로 입매가 한껏 올라갔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마마께서 불편하실까 저어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왁자지껄한 것이 좋아지는구려. 참. 올해는 고모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아들을 보냈다던데 길이 멀어 그런지 아직 당도하지 않았습 니다. 고모라면 금선공주를 일컬음이오? 예. 오늘 안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금선공주( 昑 善 公 主 )는 효경제의 막내 누이로서 종인에게는 몇 되지 않는 적통 고모였다. 그녀는 변 씨 문중에 하가하였는데 혼인한 후로는 궁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수년 만에 연통을 넣어 장성한 아들을 대신 보냈다니, 태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들이 부친의 위패를 모셨을 때가 열여섯이었으니 올해 스물두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폐하. 진왕 전하께서 태후마마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있다 합니다.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던 종대가 올해도 대단한 선물을 마련한 모양이다. 태후는 종대를 진심으로 아꼈다. 효경제의 살아남은 세 아들 중 유일하게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갑게 대해 주는 까닭이다. 주상은 잔칫상을 마련하고 진왕은 매번 값진 선물을 바치니, 내가 참으로 복이 많소. 관주성의 웃전이신데 당연히 복이 많으시지요. 태후가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아래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다. 아. 소왕 형님께서는 병이 낫지 않아 입궁하지 못했답니다. 일순, 태후의 표정에 가느다란 실금이 그어졌다. 그래요? 소왕도 지병이 깊어 큰일이구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죠. 소왕에게는 세자가 있어 다행이지만, 진왕은 부인마저 들이지 않으니.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종인을 바라본다. 종인은 황후 책봉과 관련한 무언의 압박임을 알고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연회가 지나치게 화려해서 민망하구려. 종인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태후가 말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에 자리한 아우 장문견에게로 향했다. 개선장군이자 무정후인 그는 태후를 대신 하여 여러 신료들과 왁자그르르 어울리고 있었다. 태후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마마의 탄일인데 어찌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녁에는 태평연도 겸하는 만큼 조금 더 신경 썼을 뿐입니다. 참으로 세심하시오. 이윽고 연회석 아래에서 바쁘게 오가던 이들이 정리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커다란 사자탈을 쓰고 들어왔다. 연주곡이 바뀌고 대보름에나 볼 수 있는 사자놀음이 시작되었다. 사자놀음은 격렬하고 강한 춤사위 가 장점이었는데 호전적인 것을 싫어하는 태후도 좋아했다. 태후와 종인은 이 놀음을 진왕이 준비했 음을 알아차렸다. 술이 달린 기괴한 탈을 쓴 사자들이 독특한 동작으로 온갖 재주를 부렸다. 음악이 빨라지면 동작은 더욱 역동적으로 변했고 느려지면 졸음을 못 이기는 짐승처럼 기이하게 능청을 떨었다. 모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자놀음으로 쏠렸다. 태후는 흥분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춤을 감상했고 종인은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진왕을 찾으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포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자 무리가 양옆으로 흩어졌다. 그 속에서 연꽃 모양 의 커다란 지등이 나타났고 연꽃은 꽃잎대로 겹겹이 갈라지더니 이내 쪼끄만 사내아이 하나를 토했 다. 아이는 이제 겨우 예닐곱이나 되었음 직했다. 그는 서왕모를 따르는 어린 신선처럼 새하얀 옷차림 을 한 채 연꽃 속에서 걸어 나왔다.

45 아이의 손에는 금색 두루마리와 화려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이가 붉은 융단을 꼭꼭 밟아 서서히 태후와 종인이 앉은 상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태후를 올려다보며 멈춰 섰다. 무슨 일인지 몰라 태후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종인이 넌지시 권했다. 마마께 할 말이 있나 봅니다. 친히 내려가 보시지요.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러자 아이가 정중하게 예를 올린 후 금색 두루마 리를 촤르르 펼쳤다. 그리고는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하얀 보름달, 여윈 초승달, 낮에 뜬 반달, 서리 내린 섣달. 가녀린 가지 위에 달 하나 걸리기를 조 물주가 온갖 정성으로 빚느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구나. 가지 끝에 걸린 달, 해를 만나 일월을 이루기 까지 또 오랜 시간이 걸리네. 하늘의 임금께서 그 정성을 아신다면 달이 영영 지지 않게 하리라. 태후를 달에 빗댄 수모시( 壽 母 詩 )였다. 아름다운 시에 연회석에서 일제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태후도 만면에 풍성한 미소를 띠며 기뻐했다. 아이가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서 태후에게 바쳤다. 태후가 그것을 받아들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이는 상자까지 공손하게 내밀었고 태후는 그것을 받아 얼른 열어보았다. 안에는 매우 영롱한 빛을 뿜 어내는 홍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해옥신주( 海 屋 神 珠 )라 합니다. 마마의 장수를 축원하며 어렵게 구했습니다. 한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진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후마마의 탄신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태후는 예를 올리는 종대를 냉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어 이런 호사를 누리 지 못할 것으로 여겼는데 종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 진왕은 항상 나를 눈물짓게 하는구려.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안수( 眼 水 ) * 를 보이십니까? 진귀한 마음을 받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치는구려. 태후마마를 위한 일인데 정성을 다해야지요. 고맙소.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진왕뿐이오. 폐하께서 섭섭해 하시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밤낮으로 마마를 위하시는데 어찌 소자만 편애하십니 까? 태후는 종대의 손을 잡고 상석으로 올라갔다. 종대가 이러면 안 된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태후는 완 강했다. 종대가 난감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종인을 쳐다봤다. 종인은 빙긋 웃기만 했다. 안 그 래도 종인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는데 태후는 속도 모르고 매번 자신을 곤란하게 한다. 과연 진왕 전하의 문장은 천하제일입니다! 조식( 曹 植 ) ** 과 사대가( 四 大 家 ) *** 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아요! 장문견이 외치자 주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정후께서 날 부끄럽게 하십니다. 종대가 종인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무정후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형님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을 두고 금수문장( 錦 繡 文 章 ) **** 이라 하니, 그 글자가 전혀 아깝지 않아요. 몇 마디 글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종인이 찬탄하여 늘어놓았지만 종대는 장문견 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장문견은 턱수염을 매만지 며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날입니다. 형님께서 아우를 대신하여 태후마마를 즐겁게 해드리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주상의 도량이 하해와 같지 않소? 자, 진왕은 어서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종인은 화기애애한 태후와 종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후가 웬만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 * 궁중에서 눈물을 이르는 말 ** 위나라 시인. 조조의 아들로 붓만 들면 문장이 될 만큼 시에 능하였음. 대표작으로는 낙신부( 洛 神 賦 ), 칠보시( 七 歩 詩 ) 등이 있음 *** 중국 당ㆍ송의 이름난 네 사람의 문장가.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 ****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답고 훌륭한 문장이나 그런 글을 짓는 사람

46 는데 얼굴에 연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니 종대의 선물이 무척 맘에 들었나 보다. 이제는 아예 사람 을 시켜 의자를 내오게 하더니 종대를 본인의 옆에 앉히기까지 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종인은 어느새 두 모자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있었 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실소를 터트리며 희조문 쪽을 바라보았다. 찬열이 무장을 한 채 연회장 안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다시금, 도경수가 떠올랐다. 밤이 깊었다. 그러나 부엉이의 해연한 울음소리마저 묻혔다. 낮부터 이어진 잔치에 관주성은 온종일 떠들썩했다. 사람이 무척 붐볐고 음주가무가 어우러져 성 전체가 연말연시 같았다. 해 질 무렵부터 시작된 태평연은 숭화루( 崇 和 樓 )에서 열렸다. 숭화루는 사신을 초대하거나 큰 연회 가 열리는 곳이다. 그것은 자하( 紫 霞 ), 채하( 彩 霞 ), 적하( 赤 霞 ) 세 개의 인공 섬을 품은 조하호( 朝 霞 浩 ) 에 지어진 호화로운 누각이었다. 아침노을을 뜻하는 조하호는 전 왕조 때부터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켰다. 전 왕조의 사치가 극에 달 할 때 조하호의 물은 모두 향기로운 술이었고 인공 섬 안에는 화려한 전각이 있어 미녀들이 넘쳤다고 한다. 지금은 퇴폐적인 구습을 모두 혁파하여 단려한 누각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무위장군이기에 앞서 예족 토벌의 일등공신인 찬열도 연회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직이 아니더 라도 그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예의상 몇 잔만 마시고 나와야 했다. 종일토록 관주성에 붙들린 그를 대신하여 늦은 오후에 그의 부친인 박우헌이 경수를 데리고 들어왔 다. 찬열이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우헌은 도씨 문중의 아이들을 좋아해서 어렵지 않게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저 때문에 어르신께서 늦게까지 퇴청을 못 하신 것 같아 송구합니다. 경수는 그저께 인보당에서 겪은 일로 맘이 편치 않았지만 찬열이 자신을 부득불 궐로 불러들인 데 는 달리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체념했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찬열의 사정을 미리 파악하였기에, 청 년은 한때 사돈이 될 뻔했던 박우헌을 만나고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편히 대해라. 너희 오누이는 내 아들과 형제처럼 자라지 않았느냐? 경수는 우헌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도 예전처럼 허물없이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겁구나. 우리 가문이 어려울 때 네 증조부께서 도와주신 덕에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오래전 일인 걸요. 우리 가문과 네 가문의 인연은 하루 이틀 맺어진 것이 아니지. 찬열이에게는 미안할 뿐이에요. 도움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넌 항상 예를 갖추는구나. 사람이 짐승과 다른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네 말이 옳다. 우헌은 찬열이 있는 숭화루로 경수를 안내했다. 궁인들이 관복을 입은 우헌을 볼 때마다 머리를 조 아렸다. 태후마마의 탄신연은 종친과 국빈 위주로 진행되는 터라 일반인은 참여할 수 없지만 태평연은 다 르다. 올해는 폐하께서 자유롭게 가족들을 데려와도 좋다고 하셨지. 네. 찬열이도 그러더라고요. 네가 요즘 우울해 보인다고 하더구나. 나도 소싯적에 머리가 뜨거울 땐 아무도 모르는 데로 며칠 떠난 적도 있었다. 처자식이 생긴 후로는 그러지 못했지만. 어르신께서요? 의외네요. 다들 그런 반응이더구나. 박우헌은 젊은 시절에 문무를 겸비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동시에 고리타분하고 엄격한 성격으 로도 유명해서 그의 부관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원리원칙주의자의 표본. 어렵게

47 외아들인 찬열을 얻은 후로는 성격이 누그러졌다고 했지만 여전히 인상이 무서웠다. 풍악 울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저 앞에 있는 편문 안쪽이 숭화루인가 보다. 그냥 자리 만 지키다가 조용히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우헌이 물었다. 몇 달 전이 월란의 기일이었다지? 아. 네. 당시 전쟁 중이라 찬열이가 월란의 기일을 챙기지 못했다며 몹시 미안해했다. 인연이 아니었으니 너무 마음 쓸 것 없다고 해 주세요. 어떤 면에서 보면 넌 참 냉정하구나. 스스로 멍에를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월란의 일로 네가 크게 상심한 것 안다. 우애가 좀 깊었느냐? 어떤 기억은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다. 월란의 일이 그랬다. 자신에게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누이를 잃진 않았을 것이란 후회. 하릴없는 가 정. 어쩌면 월란은 경수에게 망령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죄책감이란 이름의 쓸데없는 가면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경수는 여전히 월란에게 미안해하고 있으며 그녀의 죽음은 두 해가 지난 지금에도 크 나큰 상처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따금 가는 절이 있다. 거기서 월란의 이름으로 등을 밝혀 놓고 명복을 빌라고 했지.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삼 년 동안 재판을 받는다더군. 더구나 월란은 우리 박씨 문중의 며느리가 될 뻔한 아이지 않으냐? 도리는 다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너도 얼른 마음을 다잡고 부모님께 효도하렴. 더 노력하겠습니다. 네 총기가 남다름을 잘 안다. 내게 딸아이가 있었다면 너를 사위로 삼았을 게야. 우헌은 그의 아내와는 달리 경수를 친아들처럼 잘 대해 줬다. 그는 경수가 스러져가는 도씨 가문을 일으켜 세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버님! 문 앞에서 서성이던 찬열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냉큼 달려왔다. 찬열은 이미 몇 잔을 걸쳐서 약하 게 술 냄새를 풍겼다. 벌써 잔을 기울인 것이냐? 폐하께서 내온( 內 醞 )을 내리시는 바람에. 찬열이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경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는 듯한 발언은 극도로 삼가 는 편이었다. 정작 경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찬열은 열다섯 살부터 전장을 누빈 불세출의 무장 이고 그동안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므로 지금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 당연했다. 오후에 폐하께서 두통이 있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신 거냐? 네. 내온만 내리시고 술잔은 무정후가 돌렸습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뒤에 납신다고요. 과음하지 마라. 폐하께서 윤허하셨다고 해도 네 직분은 황궁 수비니라. 알겠습니다. 그럼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라. 먼저 돌아가마. 아버님도 잠시 들렀다 가세요. 안 그래도 피곤한데 늦은 저녁까지 무식한이 설치는 꼴을 보라는 거냐? 장문견을 일컬음을 알고 찬열은 괜스레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문관들도 다수 참여했는데요. 도성의 책임자가 궁에 오래 있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아. 몸이 안 좋아 먼저 퇴청했다고 해라. 그럼 밤길이 어두우니 살펴 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시름을 덜길 바란다.

48 우헌이 사라진 후 찬열은 곧장 경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술이 들어가서 찬열은 약간 들떠 보 였다. 네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시선을 덜 받는 곳에 자리를 봐 뒀다. 종일 긴장해서 피곤하겠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맡은 일에 경중이 어디 있어? 똑같이 중요하지. 날 위로하는 거야, 혼내는 거야? 둘 다. 예전에는 자각 없이 자신의 손을 잡는 찬열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설레곤 했다. 그런데 어쩐지 지 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자신이 꼭 강아지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좁다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커다란 호수와 함께 아름다운 인공 누각이 펼쳐졌다. 숭화 루에는 형형색색의 등불이 걸렸고 아래에서는 군사들의 이야기 소리와 음악 소리가 섞여 북새통을 이 루었다. 홍류원에 처음 발을 들이던 날처럼 경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10. 능소화하( 凌 霄 花 下 ) 신시( 辛 時 )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연회에 참석한 군사 대부분이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그들은 보통 음식을 빨리 해치우고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래서 느즈러져도 괜 찮은 연회에서조차 여유 없이 술동이를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흡사 짐승과도 같은 게걸스러움이 묻어났지만 그것은 야생의 본능과 닮아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무희와 가기들이 앞다투어 재주를 뽐냈다. 병졸들은 왁자지껄하게 그것을 감상했 고 그들이 데려온 가족이나 지인들은 궁중 연회를 신기하게 여기며 연신 눈알을 굴려댔다. 저 멀리 보이는 높다란 상석은 황제를 위한 자리일 것이다. 그 아래에서는 장문견이 부하들의 술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경수는 심드렁한 얼굴로 회장 안을 둘러봤다. 찬열은 경수를 즐겁게 해 주려고 연회에 데려왔지만 경수는 전혀 흥그럽지 않았다. 오히려 궁 안에 있다 보니 홍류원이 생각나고 홍류원을 떠올리니 자연 스레 진왕이 딸려왔다. 그저께 물벼락을 맞아 옷자락 사이로 한기가 스몄는데 오늘은 바로 옆에 화로가 있음에도 등골이 서늘하였다. 전하께서 태학관 유생 도경수란 자와는 일면식도 없다 하시는구나!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경수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바르르 떨었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풍경에서 혼자 먹색인 경수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찬열은 장문견이 부른다는 소리에 그쪽으로 불려가서 돌아오 지 않았다. 경수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따분한 연회는 저들의 잔치이지, 도경수를 위한 자리가 아니다. 청년은 문득 홍류원의 붉은 꽃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황제가 홍류원을 아꼈다니 궁 어딘가 비슷한 화원을 숨겨두지 않았을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은 슬그머니 숭화루를 빠져나왔다. 저기, 붉은 꽃이 많이 핀 화원이 어딥니까? 지나가던 궁인을 붙들고 물었다. 궁인은 경수를 수상하게 여겼지만 오늘 태평연에 참전한 병사들의 가족도 함께 온다는 얘기를 들어서 대충 넘어갔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보시구려. 경수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방향을 틀었다. 숭화루와는 정반대 쪽이었다. 길마다 석등이 어두운 밤 길을 밝히고 있어 걷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밝은 석등이 달빛을 받은 등꽃처럼 운치 를 더해 주어 어지러운 심사가 다소 가라앉았다.

49 얼마나 걸었을까. 전각 사이로 난 좁은 길목 끝에서 환한 조족등을 든 내관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곧바로 멋들어지게 장식한 가마 하나가 등장했는데 얼핏 봐도 기세가 대단하고 늘어뜨린 휘장 사이로 정려한 용문( 龍 紋 ) 이 새겨진 게 보였다. 경수는 냉큼 바닥에 엎드렸다. 연나라의 주인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난여였다. 경수는 약간 긴장한 채 조심스레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관주성은 황제가 사는 집이니 그가 어디를 돌아다니든 이상할 게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한 무리의 노비들을 이끌고 황제의 난여는 유유히 경수의 앞을 지나갔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 영 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완전한 경외감이란 이런 것일까. 경수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부낀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 을 무렵에서야 경수는 느릿하게 일어났다. 청년은 황제의 연이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앞뒤로 환한 달을 들고 가는 궁인들의 꽁무니가 멀 리 사라지고 있었다. 대연의 천자. 황제는 친형제인 진왕과 반목하는 사이다. 진왕은 황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경수는 사소한 일에서도 진왕을 떠올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진왕이 걱정되는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그는 차가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주위를 환기했다. 복잡하게 얽힌 궁궐의 수많은 전각을 지나쳤다. 태후의 탄신연과 군사를 위로하는 태평연이 같은 날에 열리다 보니 사방이 어지러울 정도로 북적였다. 경수는 잠시 능소화 넝쿨이 얽힌 곳에서 멈추었다. 그곳은 다소 궁벽해서 떠들썩한 궐내 분위기와 는 동떨어진 듯해 청년의 눈길을 끌었다. 경수는 메마른 담벼락을 쓱 쓸어보았다. 푸석푸석한 줄기와 녹진한 이끼가 만져졌다. 한여름의 타는 듯한 태양을 바라보며 푸른 잎 사이에서 탐스러운 붉은 자태를 뽐내는 꽃. 그 여름 의 열기가 무색하게 봄의 능소화는 조용히 넝쿨에 매달려 숨을 고른다. 얼핏 나설 자리가 아닌 듯하 여 계절을 핑계로 숨어 있는 것도 같았다. 청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높다랗게 솟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 넋 놓고 바라보기엔 꽃이 제법 독하지 않소? 뒤에서 들린 소리에 경수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관복을 입은 웬 사내가 어린 종자 하나를 데리고 서 있었다. 사내는 애티를 벗어가는 과도기인 듯 얼굴에 약간의 젖살이 남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단단한 느낌이 었다. 눈빛은 냉랭하고 서늘한 편이었다. 피부가 약한 사람에게 들러붙어 작은 심술을 부린다오. 남자가 다가왔을 때 경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러자 남자도 얼떨결에 같이 인사했 다. 경수가 다시 꽃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꽃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잘 아는 것은 아니고. 사연이라도 있소? 능소화는 독기만큼 슬픈 꽃이라 알고 있는데. 능소화의 전설을 아십니까? 눈빛과는 달리 사내는 웃음기가 가득하고 친절했다. 한 어여쁜 소녀가 임금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소. 헌데 암투에 밀려 죽을 때까지 임금을 만나지 못했소. 그러다 한여름에 사경을 헤매며 죽기 전에 한마디 하기를, 담가에 묻히더라도 내일 오실 임금 님을 기다리겠다고 하였다오. 사내는 어느 틈엔가 가까이 다가왔다. 경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심술궂은 꽃치고는 사연이 슬픈데, 좀 미련스럽지 않소?

50 순정이죠. 사내가 높다란 곳에 걸린 가지를 툭 건드리다가 경수를 쳐다봤다. 순정이라고? 꽃이 된 소녀의 지고지순함이 청초하지 않습니까? 똑똑하지 못한 방법으로 구질구질한 미련을 끌어안고 죽은 것이지. 죽어서라도 임금님을 기다리겠다면서요. 그것은 미련스러움이 아니라 순정이에요. 분명하게 제 의견을 말하는 경수를 사내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사화에도 쓰이는 꽃인데 독하다느니, 미련스럽다느니 하는 것은 모욕적이라고 생각합니 다. 사내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어쩌다 궁에 흘러들어온 잡인인 줄 알았는데 전설에 대한 뚝심 있는 견해나 꽃의 용도에 대해 알고 있어 조금 놀라웠다. 보통 문식은 넘는 듯했다. 말을 무척 잘하시오. 새로 들어온 환관이오? 아닙니다.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들과 부딪혀서 오해 사고 싶지 않았다. 사내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경수는 부리나케 그 자리를 피해 버렸다. 도련님. 그만 가셔야 합니다. 방금 그 아이 어떠냐? 예? 저리 어린 얼굴에 사연 많아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다. 도련님 사연이야말로 글줄로 풀면 하늘까지 뻗을 것입니다. 이놈아. 네 주인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아이고! 더 늦기 전에 가셔야 한다니까요! 어린 종자는 주인의 주절거림이 듣기 싫은지 얼른 사내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망치듯이 자리를 나온 경수는 이번에는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 그도 조금 전 만났던 사내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이 분주해 보였다. 궁인들이 예 를 갖추기에 경수도 덩달아 어쭙잖게 허리를 숙였는데 시선은 힐끔힐끔 상대를 훔쳐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 매달린 사내는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다부진 생김새였다. 그것이 누군가를 떠 올리게 했다. 병약한 종친이라면 진왕 외에도 소왕이 있다. 하여 경수는 조금 전 지나간 사람이 진왕 의 배다른 형인 소왕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때, 한 내시가 소왕 에게 급히 달려왔다. 전하! 오늘은 댁으로 돌아가지 않으신다더니 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행선지를 일일이 보고해야 하느냐? 그것이 아니오라. 변 공자가 이제 막 들어왔다 하여 폐하의 명으로 마중 나갔다 오는 길이다. 허면 같이 오시지 않고 어찌 혼자십니까?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녀석이 금세 사라져 버렸구나. 찾다가 포기하고 오는 중이다. 왜 호들갑이 냐? 태후마마께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왕 의 눈썹이 다소 짜증스럽게 꿈틀거렸다. 외명부 부인들과 담소를 나누신다더니 갑자기 나는 왜? 마마께서 부인들과 그림을 감상하고 계신데 부끄럽게도 배경지식이 없으시다며 전하의 식견을 청 하셨습니다.

51 급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겨우 그것 때문이었느냐? 시서화의 달인이신 전하께는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태후마마께는 아니지요. 이래 봬도 일국의 종친인데 외명부 여인들이 모인 자리에 끼라는 거냐? 마마께서 내락하신 일입니다. 어차피 자리마다 주렴을 쳐놓아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도 없답니다.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경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소왕도 풍류가로 유명했던가? 효경제의 세 아들 중 시ㆍ서ㆍ화를 비롯해 음률에 통달한 사람은 오직 진왕뿐이다. 황제와 소왕의 실력은 알 길이 없으나 태후가 직접 고견을 청할 정도면 조금 전 내시가 찾은 사람이 진왕이라는 것 이 논리적이다. 태후는 진왕을 아낀다. 진왕은 날 때부터 허약해서 외출도 삼가는 은둔 거사다.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여 얼굴이 하얗거나 깡말라서 피골이 상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동안 나와 문교하던 사람은 대체 누구지? 찬열도 분명히 홍류원에서 만난 그를 가리켜 진왕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조금 전 우연히 만난 종 친과 내시는 경수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정보를 뒤흔들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혼선이 일었다. 경수는 자신이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것인가 하고 관자놀이 부근 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걷다 보니 인적 드문 한 전각에 도달해 있었다. 변 공자가 이각( 二 刻 ) * 전에 서문으로 들어왔습니다. 현재 처소에 짐을 풀고 곧바로 태후마마를 알현하고 있다 합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겠군. 여전히 전국을 유람한다더냐? 그러하옵니다. 역마살 낀 생활은 여전하군. 태후께서 외명부 부인들과 그림을 감상 중이시라 숭화루로 와 폐하를 뵙겠답니다. 여로가 쌓였을 텐데 굳이. 본인도 슬슬 조정에 출사할 뜻이 있으니 연회에서 조정 대신들과 얼굴을 익히려는 심산 아니겠습 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못 본 지 몇 년은 됐군. 공주께서 부군을 잃으신 후로 아예 칩거 중이시니까요. 몇 되지 않는 사촌이라 입궁할 때마다 우리 형제들과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하얗게 걸린 달을 올려다보며 종인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시끄러운 풍경 속에서도 종인이 자 리한 곳만 지독한 적막이 내렸다. 연회의 주인공은 성공적으로 예족을 정벌하고 돌아온 장문견과 휘하 군사들이니 당연했다. 황제의 참석은 군사의 사기를 진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장문견과 몇 번 잔을 교환한 후 종인은 멍하게 자리에 앉아 뱀처럼 길게 이어진 연석을 바라보았 다.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얼근하게 취하여 해롱해롱했다. 무위장군은 어디 있지? 찬열은 종인에게 두어 잔의 술을 받더니 더는 못 마시겠다며 줄행랑을 친 뒤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 았다. 시위들을 단속하러 갔겠지요. 마뜩잖은 자리를 줬나 보군. 토벌의 일등공신인데 맘껏 취하지도 못하다니. 폐하께서 주신 자리인데 그럴 리가요. 당분간 장씨 일파와 거리를 두게 하려 하심이 아닙니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하개 네가 정사를 논할 줄은 몰랐구나. * 30분

52 죽여주시옵소서. 칭찬이다. 짐 곁엔 솔직하게 의견을 나눌 만한 사람이 없지. 문득 씁쓸함에 젖어드는 종인을 하개는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무정후를 봐라. 이번 토벌은 사실상 찬열의 공인데 마치 본인이 모든 일을 해낸 듯 으스대는구나. 종인이 지긋한 시선으로 먼 곳의 장문견을 쳐다봤다. 그는 거나하게 취하여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하 고 있었다. 술이 약한 주제에 술자리는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가 일찌감치 뻗는 바람에 낭패 보는 사 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부하들이 그를 양옆에서 부축하느라 애를 먹었다. 장문견은 커다란 몸뚱이를 제어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쪽에 앉은 문관들과 어울리겠다며 억지를 썼 다. 부하들이 난처한 듯 망설이다가 상관을 부축하여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 몰골을 바라보는 종인의 얼굴에는 아침 이슬처럼 어떠한 먼지도 묻어 있지 않았다. 한 차례 소슬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허공에 높다랗게 걸어놓은 유리 풍경( 風 磬 )이 짤랑짤랑 화음을 맞추었다. 한창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청아한 풍경 소리가 잦아들자 문득 밖에서 어수선한 잡음이 들렸다. 심상치 않은 동태에 한쪽에 물 러나 있던 청신이 냉큼 종인의 앞에 서며 그를 호위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찬열도 달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무릎을 꿇고 외쳤다. 아룁니다! 서궁에 자객이 난입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모여 있던 장수와 신료들이 모두 굳은 표정으로 상석을 올려다봤다. 서궁이라면 황태후의 자신궁이 포함된 내전( 內 殿 )이다. 황궁에 자객이 침입한 것도 황당한데 그 자객이 서궁에 출몰하다니 다소 의아했다. 잡혔느냐? 시위들과 대치하다가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휘정궁 근처에서 수상한 자를 발견했습니다! 태후마마의 탄일에 자객이라. 종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테니 궁의 사문( 四 門 )을 걸어 잠그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모두 있던 자리 에서 움직이지 말라 일러라. 봉명하겠나이다! 무위장군은 자객이 침입한 흔적을 발견치 못하였는가? 종인이 사느란 시선으로 찬열을 바라보며 질책했다. 그는 비번임에도 반 시진 전에 일대를 순찰하 였다. 그때만 해도 수상한 흔적은 없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천신의 불찰이옵니다. 천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같은 상황에 그대를 벌해선 안 되지. 찬열은 당혹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징계라면 각오하고 있다. 한 날에 대연 최고의 장수들이 모이는 것도 어려운데 하필 오늘 자객이 침입했다? 죽고 싶어 환장한 자가 아닌가. 폐하! 서궁이면 태후마마의 처소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게다가 마마의 탄일에 자객이 침입하다니 이는 황실을 능멸하는 것이옵니다! 취한 줄 알았던 장문견이 냉큼 일어나 목청을 드높였다. 넌 말을 똑바로 전하라. 자객의 침입이 확실한가, 아니면 흔적만 있는 것인가? 순찰하던 시위에 따르면 담벼락 기와가 깨지고 어둠 속에서 복면을 한 채 날래게 움직이는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태후께서는? 많이 놀라셨느냐? 마침 진왕 전하와 함께 계신 터라 크게 놀라진 않으셨답니다. 외명부 부인들도 있었으니 일부러 놀라지 않은 척하셨겠지. 마마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호위에 만전을 기하라. 알겠습니다. 휘정궁에서 발견한 자는 어디 있느냐?

53 시위들이 이리로 데려오는 중입니다. 휘정궁은 자신궁에서 꽤 멀다. 태후가 소왕의 생모인 의귀비를 증오해서 둘의 처소는 거의 끝과 끝 이라 봐도 무방했다. 거리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 자객이 벌써 그곳까지 달아났다니 해연했다. 폐하. 어서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맞습니다.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피하십시오. 불현듯 낙뢰하는 생각에 종인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경들은 동요하지 마시오. 이 자리에 이번 토벌의 일등공신들이 있는데 걱정할 게 무엇이오? 그 한마디에 문관들이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장문견과 박찬열 두 사람의 위용만으로도 문관들은 대단한 신뢰를 보냈다. 흥은 깨졌다. 이제 관건은 자객의 정체와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한편 찬열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어 속이 탔다. 연석 끝에 앉아 있어야 할 경수가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빠져나와 근처를 수색 중이었는데 자객이 난입했 다는 소리에 기겁하며 숭화루로 돌아왔다. 설마 집에 가진 않았겠지? 상심한 경수가 오해를 풀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다. 연회가 파하면 반드시 종인 이 단신으로 있을 기회가 생기니 그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쯤에서 신분을 밝혀야 한다고 설득할 작정이었다. 물론 그전에 왁자지껄한 연회 분위기에 동화되어 경수의 맺힌 맘이 조금이라도 풀어진다면 더할 나 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경수는 애초에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고 와서도 내내 따분해 보였다. 직책의 특성상, 태평연이 열려도 상관들에게 매번 불려가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러면 경수 옆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었을 텐데 일은 찬열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계획이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 작했다. 불안함은 찬열을 엄습했다. 캄캄한 파도처럼 철썩철썩 굉음을 내며 밀려오더니 어느샌가 현실의 테 를 갖추어 버렸다. 찬열은 아차 싶었다. 그의 사리문 잇새로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터졌다. 11. 용연무( 龍 淵 舞 ) 종인은 제 눈을 의심했다. 너덧 명의 시위에게 둘러싸여 영문도 모른 채 질질 끌려오는 사람을 보자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상석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주위를 의식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숭화루로 오던 길에 저것과 비슷한 옷차림의 사내가 부복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차림이 남루해 군 인들이 데려온 가족이나 지인인 줄로만 알았다. 도경수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폐하! 신분이 불분명한 자가 내전에서 함부로 서성이기에 붙잡았습니다. 시위 하나가 아뢰며 바닥으로 경수를 세게 밀었다. 경수가 휘청거리며 바닥 위로 넘어졌다. 청년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한 상 태였다. 제멋대로 돌아다닌 것을 탓하는 줄 알고 순순히 따라왔는데 어째 상황이 괴이쩍게 흘러갔다. 정삼품 이상의 고관대작들만 입을 수 있는 관복이 즐비한 것으로 미루어 사실 이 연회는 상당히 무 거운 성격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찬열이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경수는 자신이 너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관주성. 작은 행동 하나가 크나큰 오해와 파문을 일으키는 지엄한 황궁이었다. 경수가 고개를 쳐들었다. 한쪽에 서서 난감한 듯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찬열이 보였다. 경수가 어 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어 하는데, 그를 밀친 시위가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서궁에 들이닥친 자객이 확실합니다. 황당무계한 발언에 경수가 시위를 찌릿 노려보았다. 시위는 그런 경수의 어깨를 발로 누르며 머리

54 를 숙이라고 윽박질렀다. 황제 폐하께서 계시거늘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쳐드느냐! 경수는 뭔가 단단한 오해가 있는 듯하다며 변명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장문견이 나서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잃었다. 저런 극악무도한 놈을 보았나! 감히 태후마마를 시해하려 해?! 일을 사주한 자가 누구냐? 대체 누 가 네놈에게 이따위 패악스러운 짓을 시킨 것이냐! 벼락같은 호통이지만 경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홍류원의 매화가 생각나 비슷한 꽃이라도 있나 싶어 찾으러 갔고, 길을 걸으며 그저께 인보당에서 당한 일을 조각내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위들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자신을 끌고 갔다. 그 까닭이 듣도 보도 못한 자객 때문이라니 너무도 억울했다. 소인은 자객이 아닙니다! 찬열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나서려는데, 풀어줘라. 황제의 옥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저자는 자객이 아니다. 경수는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자신을 믿어주는 황제가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황제의 발언에 장 문견은 펄쩍 뛰었다. 어찌 단언하십니까? 자객이 아니라는 증좌라도 있으십니까? 저자가 자객이라는 증좌는 있소? 외간 남자가 후궁을 서성이고 있었단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하물며 자객이 아직 관 주성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에서 낯선 자가 폐궁에 있었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확증은 아니지 않소? 바람이 한 곳으로 분다면 화살 끝에 있는 자가 범인이지요. 때로는 화살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기도 하지. 하오나 모든 정황이 명명백백합니다! 저자가 자객이 아님은 짐이 보장하오. 뜻밖의 말에 장문견은 물론이거니와 경수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위에게 어깨가 짓눌린 상태인 데다 상석에 앉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법도가 아닌지라 경수는 용안을 들여다볼 순 없다. 그러나 황제가 사리에 맞는 판단을 하고 있어서 자그맣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의 눈이 적지 않으니 시 시비비를 분명히 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이오. 폐하께서는 저자가 자객이 아니라고 단언하셨지요. 허나 정확한 신분이 무엇이기에 그리 말씀하셨 는지 알고 싶습니다. 장문견은 허를 찔렀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턱을 쳐들었다. 경수도 장문견의 말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황제가 날 언제 봤다고 내 신분을 보증한단 말인 가? 한참 전에 좁다란 길에서 난여를 만난 것이 전부인데, 대체 황제는 나의 무엇을 보고 저렇게 확 신하고 있을까? 폐하. 대관절 저 아이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장문견이 나직하게 채근을 놓았다.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종인에게로 쏠렸다. 짐의 명령으로 검무를 추기 위해 들어온 자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찬열도 종인이 단번에 경수를 알아봤음에도 어째서 저런 말을 했는지 의아했다. 솔직하게 찬열의 친구라고 해도 되는데 왜 일을 키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검무라니요? 사내가 어찌 검무를 춘답니까?

55 용연무라는 아주 독특한 춤이 있소.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오늘 태평연에서 선보이면 좋을 듯하여 저 아이를 특별히 초대한 거요. 하오나. 백문이 불여일견. 못 믿겠으면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시오. 용연무라는 말에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단정한 발끝에 머문 시선이 점차 정교한 용포를 타고 올라갔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상 체, 가슴, 목을 지나 얼굴로 향한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진왕? 가슴이 철렁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저 사람은 분명히 진왕인데 어째서 사람들은 황제 폐하라고 일컫는가? 황제의 눈 밖에 나면 죽임을 당할 거라며 불안에 떨던 진왕이, 어떻게 일국의 지존만이 앉을 수 있는 용상에 앉아 용포와 면류관 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 경수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느리게 눈만 깜박거렸다. 하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몇 번 을 다시 봐도 진왕이고, 이 나라의 황제였다. 건방지게 어디 감히 천자의 용안을 마주보느냐? 시위가 경수의 머리통을 짓눌렀다. 그러자 종인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경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시위들을 가만히 노려보자 그들은 쭈뼛거리다가 뒤로 물러났다. 종인이 경수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경수가 얼떨떨하면서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네가 보낸 향기는 잘 받았다. 그윽하던데 그리면서 취하진 않더냐? 종인은 경수가 보낸 묵란도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경수는 입이 바싹바싹 말라서 어떠한 말도 들리 지 않았다. 그가 진주알처럼 커다란 눈알을 굴려 종인을 쳐다봤다. 진왕 이 아닌 황제 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경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그간 종 인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혹여 그가 탓하진 않을까 오금이 저렸다. 온몸이 굳었군. 이런 상태로 용연무를 출 수 없을 텐데. 진왕, 전하라고 하셨잖아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거의 쇳소리에 가까웠다. 사정이 있었다. 편찮으신 줄 알았어요. 나중에 다 설명하마. 당장은 저들의 의심을 피해야 한다. 싫어요. 종인이 잘못 들었다는 듯 살짝 턱을 뺐다. 싫습니다. 소인은 무희가 아닙니다. 헌데 왜 저들 앞에서 춤을 춰야 합니까? 고집 피울 때가 아니다. 폐하께선 소인을 속이셨습니다. 그런데 가문의 춤을 왜 저들에게 보여야 합니까? 경수야. 싫습니다. 소인은 하기 싫습니다.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도경수는 반드시 검을 들고 몸을 움직여 야 한다. 네가 이리 나오면 찬열이 곤란해진다.?! 찬열이 널 데리고 왔겠지. 그건 상관없다. 허나 사내인 네가 함부로 후궁을 들락날락한 것은 큰 문 제다. 그것도 폐궁이라니? 네가 휘정궁 근처에 간 까닭을 파헤치다 보면 반드시 찬열까지 연루된다. 그래도 좋으냐?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56 경수는 정말 미안해 죽을 것 같은 눈빛으로 찬열을 쳐다봤다. 잠시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멋대 로 궁궐을 휘젓고 다닌 대가가 너무도 컸다. 오늘 태후의 처소 근처에서 자객의 흔적이 발견됐다. 네가 혐의를 벗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되잖습니까? 소인이 무위장군의 벗이라고요. 정말 알 수 없는 무리가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여기느냐?! 저들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걸림돌이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잘라내지. 찬열도 예외일 순 없어. 저들이라 하시면. 이곳에 모인 자들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겠지. 종인이 경수에게만 들릴 만큼 나직하게 속삭였다. 경수가 마른 침을 삼켰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지만 대충 파악은 됐다. 장문견 쪽에서 자작극을 꾸 몄음이 틀림없다. 사람들을 동요시키기 위해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더욱 과장되게 행동하며 일의 배 후를 밝히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종인은 이것을 빠르게 간파했다. 장문견과 태후가 한동안 잠잠했던 것은 오늘을 위한 초석이었을 테니까. 몇 달 동안 진통을 겪은 조세 문제가 장문견이 돌아온 이후 의견이 더욱 첨예해졌다. 그러다 종인 이 용기를 내어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장씨를 따르는 대인파가 일순 발을 빼더니 근래 조용했다. 계획적인 후퇴였다. 조정은 무기 없는 전쟁터이다. 전장의 생리를 잘 아는 장문견과 수렴청정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펼 친 태후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을 지켜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아마 태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검은 무리가 있다, 그들은 현재 조세 개혁을 추진 중인 소인 파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역도들의 안건을 철회하고 관습에 따르는 것이 이치에 부합한다고 주장하 려 했을 것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팔 하나쯤은 내어줄 각오를 해야 하지. 너는 불운하게 걸려든 희 생양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네 사정을 밝힐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먹잇감을 문 장문견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려 할 것이다. 그러니 애꿎은 사람 에게 자객 누명을 씌워서라도 자신들의 계획을 밀어붙일 작정이었을 터. 이를 막기 위해 경수는 자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고, 박찬열의 벗이라는 미봉책보 다는 황명 이라는 무기로 보호해야 했다. 또한, 경위야 어찌 되었든 자객의 침입은 궁궐 수비와 황실 호위의 허점을 드러낸 일이므로 금위군 인 찬열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종인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경수와 찬열이 연루되는 걸 막아야 했다. 더구나 장문견은 박찬열의 오촌 당숙이다. 찬열이 경수를 두둔했다가 지금 당장 장문견에게 미운털 이 박힌다면 크나큰 손해다. 종인은 황제로서 찬열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이런 복잡한 배경 때문에 종인은 경수를 곤란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몸으로 남들 앞에서 무희처럼 춤을 춰야 하는 게 달갑진 않겠지만, 찬열과 경수 둘 다 살려 면 어쩔 수 없다. 하오나 소인은. 어명이다. 경수는 핏기가 가시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종인의 맘도 편치 않았다.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겁니다. 경수가 이를 악물었다. 찬열은 오늘 경수를 데려온 것을 몹시 후회했다. 옷을 갈아입고 온 후 사위가 정리되어 연회장 가 운데에 서는 경수를 보면서 몇 번이고 자신을 책망했다. 선의에서 출발한 계획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로잡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 찬

57 열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경수가 노발대발하며 주먹을 날린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 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자객으로 몰려 몹시 놀란 모양이오. 장문견이 불퉁한 시선으로 경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무에 문외한인 짐도 딱 한번 봤는데 넋을 잃었다오. 경들도 함께 즐거워했으면 좋겠구려. 남자가 춤을 추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왜소한 체격에 매가리라고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몸으 로 어떻게 어렵다는 검무를 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목을 빼고 부용화 위에 선 수상쩍은 이를 할퀴듯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실수했 다가는 꼬리를 잡고 물어 늘어질 심산들이었다. 시작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악공들이 알아서 검무에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선율에 맞추어 경수가 짧게 호흡을 들이켰다. 찬열 외에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검무가 기녀의 춤사위로 전락하는 것이 몹시 수치스러웠다. 찬열은 황제가 진왕 행세를 하는 걸 알면서 모른 척했다. 아니, 오히려 도와주었다. 장유곡에서 재 회했을 때 저잣거리에서 만났다면서 거짓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경수는 황제와 찬열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너무도 비참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인보당에 서 황제 를 찾고 있었다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울고 싶지 않은데 억울함에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울분만으로는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 경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수려한 동작으로 용연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뼈를 씹는 심정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昔 有 佳 公 孫 舞 劍 器 動 四 觀 者 如 沮 喪 天 地 為 之 久 低 昂 霍 如 羿 射 九 落 矯 如 群 帝 驂 翔 來 如 雷 霆 收 震 怒 罷 如 江 海 凝 清 光 絳 唇 珠 袖 兩 寂 寞 晚 有 弟 傳 芬 芳 공손씨는 지난날 이름난 미인 검기무 한번 추면 사방이 들썩했네. 수많은 구경꾼들 안색이 변하고 천지도 오랫동안 덩달아 춤췄네. 후예가 아홉의 해를 쏘듯 섬광이 번뜩이고 뭇 신선 용을 탄 듯 시작할 땐 천둥소리 갑자기 잦아지고 마감할 땐 강과 바다에 맑은 빛이 엉기는 듯 미인과 검기 둘 다 함께 사라졌지만 뒤늦게 제자 있어 그윽한 꽃향기를 전하네. * 한 마리의 상처 입은 학처럼 춤을 추던 경수. 그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검을 내려놓았다. 죽고 싶 을 만큼 수치스러웠고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을 만큼 화가 났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도 청년의 한이 서린 용연무는 좌중을 휘어잡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장문견과 대신들도 청년의 춤사위에 혼을 빼앗겼다. 음악이 끝나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때, 한쪽에서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 난 쪽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뜨 겁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웬 놈이냐! 누군가 외치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관복 차림인데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사내가 가운 데로 나오더니 예를 갖추었다. 소신 변백현,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폐하께서는 길상을 누리소서. * 두보, 검기행( 劒 器 行 ) 중

58 종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현이라고? 바람이 불면 픽 쓰러지게 생긴 연약한 꼬마가 못 본 새 훌쩍 자라 헌칠민틋한 장부가 되어 돌아왔 다. 종인을 비롯해 예전에 백현을 알던 이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전국을 유람하는 것이 취미인 그는 궁에 올 일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육 년 전에 부친이 자결한 후로는 금선공주와 더불어 궁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들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매우 성숙해진 모습으 로 등장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닮았다. 부마도위 변석위를 아주 쏙 빼닮았다. 하지만 살짝 쳐진 듯한 차가운 눈매는 금선공주의 것 이었다. 정말 몰라보게 자랐구나. 어엿한 장부가 되었어. 백현과 자주 만나진 않았으나 이따금 그가 모친인 금선공주의 손을 잡고 입궁하면 둘은 퍽 잘 어울 렸다. 백현은 종인보다 몸집이 훨씬 작았고 성격도 구김살이 없는 막내둥이였다. 응석받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키도 훌쩍 크고 어깨도 넓어진 것을 보니 세월이 무상했다. 온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예상보다 늦어져서 걱정했다. 중간에 마차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지체되었습니다. 심려 끼쳐서 송구합니다. 고모님께서는 잘 계시느냐? 예. 건강하십니다. 종인은 상석에서 내려와 백현을 반겨주었다. 태후마마를 뵙고 오는 길인데 뜻하지 않게 진귀한 춤을 감상했습니다. 소신이 운이 좋군요. 백현이 옆에 선 경수를 잠시 쳐다봤다. 그는 아까 능소화나무 아래서 만났던 수상한 사내였다. 하루 이틀 연습해서 될 자태가 아닙니다. 저 정도면 교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재주인데 폐하께 서 저런 실력자를 얻으시다니 경하드립니다. 경하랄 것까지야. 갑자기 궐내가 어수선해서 연유를 알아봤습니다. 무정후와 여러 고관대작이 날을 세우는 것도 무 리는 아니지요. 허나 이 친구는 폐하의 말씀대로 용연무를 춰서 결백을 증명했습니다. 민망한 소식을 빨리도 접하였군. 워낙 소란스러워야죠. 백현은 어깨를 으쓱한 후 말을 이었다. 또한, 소신도 아까 이 친구를 보았습니다. 자신궁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외진 곳에서 길을 잃고 헤 매더군요. 숭화루로 가는 길을 알려줬는데도 초행길이라 다시 길을 잃었나 봅니다. 그 순간, 경수는 백현이 구세주로 보였다. 가벼운 미소에 백현의 사느란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단지 미소를 머금었을 뿐인데 인상이 확 달라졌다. 폐하.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니 이 아이는 여러 대신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겁 니다. 기절하기 전에 얼른 내보내고 소신과 기나긴 회포를 푸셔야지요. 그제야 종인이 비통한 심정으로 경수를 쳐다봤다. 경수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핏기 가 없었다. 아직 밤바람이 찬데 이마에 송골송골 알땀이 맺혀 있기도 했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뜻 이다. 종인은 자신이 무능하여 경수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무척 미안했다. 그만 나가보아라. 돌아서는 경수의 뒷모습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12. 천자( 天 子 ) 천자였어. 천자. 자신을 진왕 김종대라고 소개하던, 눈밭 위에서 다정하게 웃던 사내는 사실 연나라의 주인이었다.

59 차라리 진왕일 때가 나았다. 인보당 앞에서 문전박대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 었을 거라고,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을 놀리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어째서 여태 신분을 속였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황제인 줄도 모르고 건방지게 형제의 정을 운운하고, 황제인 줄도 모르고 진왕에 대해 떠들었으며, 황제인 줄도 모르고 문교하자는 제안에 덜컥 수락해 버렸다. 그에게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그를 걱정 했고 그를 위해 시간을 쪼개어 약초를 캤다. 경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홍류원을 찾았던 한 달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랬다면 찬열에게 용연무도 보여주지 않았을 테고 진왕을 가장한 황제도 만나지 않았으리라. 오늘처럼 수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가문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춤을 선보이는 일도 없었을 터. 경수는 자신의 신세가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울컥 분노가 치솟고 설움이 북받쳤다. 청년은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불야성처럼 환한 석등이 어두운 불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가 경수의 전신을 감쌌다. 강한 한기가 들었다. 경수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세상살이 험난 하기야 형언할 수 없음인데 이까짓 일로 주저앉아 울 순 없었다. 청년의 커다란 눈망울에 전에 없던 노기가 스몄다. 경수야! 서둘러 궁문을 빠져나가려는데 찬열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경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걸 음을 멈추었다. 찬열이 급하게 경수의 앞을 막았다. 너도 공모자였어? 찬열은 마른 입술을 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처받은 경수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대단한 실수 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내가 다 설명할게. 다른 데로 가자. 이거 놔! 경수가 자신의 팔을 붙든 찬열을 뿌리쳤다. 무슨 사정이든, 난 모르는 일이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오늘 다 밝히려고 했어. 네가 인보당에 찾아갔다는 말에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오늘 다 얘기하려 고 했어. 중간에 밝힌다고 처음에 거짓말한 게 없어져? 경수야, 제발. 그동안 너한테 항상 받기만 해서 싫어도 네가 하자는 대로만 했어. 찬열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의 목을 조른다고 생각했다. 울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였다. 멋대로 돌아다닌 내 잘못이 제일 크지. 하지만 오늘 일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너도, 폐하도. 그대로 돌아서는 경수에게 찬열이 외쳤다.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시진 않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너도 알잖아! 도경수란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예전의 경수라면 구겨진 자존심에 곧바로 궁을 뛰 쳐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찬열의 지적대로 그 대단한 사정이 뭔지 어렴풋하게나마 읽히는지라 경수는 찬열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참하고 참담한데 이대로 돌아서면 영영 끝일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 서 오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까다롭게 고르셨습니다. 백현과 단둘이 회포를 풀겠다는 미명으로 숭화루를 빠져나온 종인은 한참 전부터 멍한 상태였다. 백현은 어색함을 풀어보고자 금선공주가 딸려 보낸 동주( 東 州 )의 명물 흑진주를 보여주었다. 하얀 상자에 담긴 커다란 구슬은 무공주( 無 孔 珠 ) * 만의 묵직함과 영롱한 색채를 뽐냈다. 갓난아기의 주먹만

60 한 크기는 몹시 드물었다. 그래서 황실의 보물로 바치면 좋을 것 같다며, 금선공주가 직접 챙긴 물건 이었다. 부끄럽군요. 성심에 차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백현이 민망해하자 종인은 마지못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아니다. 훌륭하다. 수산호는 폐하의 동곳 장식으로 쓰면 좋을 듯해 가져왔습니다. 폐하께서 산호 장신구를 좋아한다 고 하셔서요. 이번에는 검은색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이는데 안에는 가공하지 않은 천연 산호가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현재 종인이 쓴 상투관도 엷은 초록색 해화석 장식이 박힌 것이었다. 고모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군. 폐하께서 친정을 시작하셨는데 금년 탄일에도 찾아뵙지 못했다며 송구스럽다 하셨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는구나. 고모님은 어릴 적에 누구보다 짐을 아껴주셨지.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 은 이어져 있느니라. 숙비가 죽은 후 종인은 금선공주에게 매우 의지했다. 그녀는 종종 서간을 보내 종인의 안부를 물으 며 살뜰히 챙겼다. 육 년 전부터는 발길이 아예 끊겼지만 종인은 여전히 고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 다. 태후께서 달리 말씀은 없으셨느냐? 폐하와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몰라보게 장성했다고요. 정말 깜짝 놀랐다. 기억 속의 너는 뽀얗고 어여쁜 미동이었거든. 어머니께서 세월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맞는 말이다. 고모님을 뵌 지도 오래되었다. 어머니도 종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소신을 보시며 폐하께서도 지금쯤 대장부가 되셨을 거라며 기대가 남다르셨죠. 고모님은 황자들 중 짐이 선제를 가장 빼닮았다고 하셨지. 금향로에서 자사( 紫 麝 )와 등화유를 섞은 향료가 조용하게 피어올랐다. 상쾌하면서도 청량한 향기는 심란함을 달래주는 데 제격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백현은 일부러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종인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진왕 전하는 예전보다 살이 오르셨더군요. 태후마마께 문후 올리러 올 때 외에는 사람들과 왕래를 안 한다. 요양에 각별히 신경 쓴 덕이지. 그랬군요. 소신을 직접 마중하러 나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형님도 많이 놀라셨을 거다. 오랜만에 뵈니 반갑고 좋았습니다. 하여 온 김에 소왕 전하도 뵙고 갈까 합니다. 거침없이 내뱉고 뒤늦게 종인의 눈치를 살폈다. 소왕은 의귀비의 아들이자 폐위된 황태자. 형님을 대신해 보위에 오른 만큼 종인으로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종인은 달리 불쾌한 기색도 없이 그리하라며 허락했다. 소왕이 순금사( 巡 禁 司 ) * 에 갇힌 동안 건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더니, 이제는 견제할 대상으로 도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네가 짐을 대신해 소왕 형님께 약재 좀 전해 줘야겠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만 처소에 돌아가 쉬어라. 오늘 있었던 일로 많이 놀랐을 테니. 하오면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 구멍을 뚫지 않은 진주 * 중죄인을 수사하고 신문하는 기관

61 백현이 돌아간 후 탁자 위에는 알 굵은 흑진주와 화려한 수산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종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에 있느냐. 하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나이까? 장문견과 자신궁의 동태는 어떻다더냐? 태후께서는 손님들을 다 물리신 후 쉬고 계시다 합니다. 숭화루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로 미루어 아직 연회가 이어지는 듯합니다. 태후는 자신궁에 머문다더냐? 예. 자객이 침입한 것은 아니니 피신할 필요 없다고 하셨답니다. 종인이 낮게 코웃음 쳤다. 이번 일은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내일 아침 저들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보면 확실해 지겠지. 소인은 아둔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조세 개혁.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고 하개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오면 폐하께서는 오늘 일을 장씨 일파가 꾸몄다고 보시는지요? 틀림없다. 황궁 수비를 책임지는 무위장군이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박찬열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 리수를 뒀지. 짐은 그 비상한 모략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구나. 그 말에 하개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어명이라면 들고나는 것을 빠짐없이 알고 있는데 종인이 새로운 무용수를 발굴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숭화루에서 춤을 추던 아이는 정말 폐하께서 부르셨나이까? 그는 괴로운 듯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경수만 생각하면 급체한 것처럼 속이 꽉 막혔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경수를 몰아넣고 사람들 앞에 서 기녀처럼 춤을 추게 한 자신의 선택을 두고두고 저주하고 싶을 지경이다. 일전에 스쳐 지나가는 말로 폐하께서 용연무를 언급하신 적이 있었지요. 소인은 오늘 그 춤을 보 고 신선을 보는 듯 감탄하였나이다. 너도 그리 보았느냐? 예. 무태( 舞 態 )가 궁중 무희들과는 사뭇 다르더군요. 눈이 펄펄 내리던 날이었지. 검은 쥔 손에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땅을 박차 오를 때는 비상하는 맹금류처럼 보였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살며시 미소 지을 때는 새하얀 꽃 같았다. 붉은 꽃 사이에서 홀로 청순함을 잃지 않은 자태는 세상 의 모든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 해도 형용할 수 없었다. 감히 다시 보길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동작과 맵시는 똑같은데 감흥만은 다르다. 홍류원에서 보았던 용연무는 천상의 독 무였지만 숭화루에서 억지로 춘 용연무는 고독한 치욕이었다. 좌중이 할 말을 잃게 하는 솜씨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무용수를 만나셨습니까? 무용수가 아니다. 그 아이는 무용수 따위가 아니야. 더는 묻지 말라는 듯 종인은 옥안 위로 길게 엎드렸다. 하개는 종인이 자객 침입으로 놀라서 곤고 한 것이라고 여겼다. 등화유를 더 태우겠습니다. 뚜껑을 열고 옆에 놓인 유리병의 기름을 붓는데, 엎드린 채로 종인이 중얼거렸다. 장문견이 따로 묻거든, 자객 사건에 대해 낱낱이 조사할 것이라고 전하여라.

62 달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궁벽한 곳에서 찬열과 경수는 마주 섰다. 평소 둘은 합이 착착 맞는 죽마 고우였지만 지금만큼은 사연 많은 원수처럼 보였다. 일단 사과할게.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널 상처 입혔어. 그러나 경수는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이대로 연을 끊을 태세였 다. 나도 처음엔 폐하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어. 그분께서는 잘 모르는 사람을 속일 만큼 교활하지 못해. 오히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시지. 폐하께서 당신을 진왕이라고 소개한 이유가 무엇일지 나 도 많이 고민했어. 결론은 한 가지더군. 황제는 누구도 곁에 두어서는 안 되는 자리니까. 제대로 된 벗을 사귄 적도 없어. 너도 알 거다.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시기까지 궁에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그리고 동서고금으로 일인자의 자리란 누구보다 지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찬열은 진심으로 호소했다. 종인이 경수에게 색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며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 저 도 모르게 신분을 속여야 했던 점을, 그는 열과 성을 다해, 그러나 담담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경수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보다 누그러진 기색이지만 아직 맘이 완전히 풀리진 않아 보였다. 뾰로통하게 튀 어나온 입과 불만스럽게 구겨진 미간이 그러했다. 폐하께서는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신 적이 없어. 어릴 때부터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배 동도 여럿 두셨으나 그들 다수가 폐하의 배경과 권력에 기대려 했지. 그런데 넌 폐하께서 먼저 다가 가셨어. 이런 폐하의 사정을, 한 번만 헤아려주면 안 되겠니? 찬열의 얘기를 듣고 나니 외로움 끝에서 겨우 건진 인연이 자신의 신분으로 퇴색할까 봐 일부러 기 만해야 했던 황제의 사정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회장에서 벌어진 일로 속이 쓰렸다. 양가감정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화마는 경수를 집어삼켰다. 물론, 이것도 내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 어땠다는 거지? 한참 만에 경수가 관심을 보였다. 종인이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단편적으로 보면 매우 수월했다. 의귀비가 죽자마자 당시 태자였 던 소왕이 폐위되고, 부황인 효경제도 두 해를 넘겨 사망했다. 종인은 소왕의 뒤를 이어 동궁에 책봉 되었다가 효경제가 죽은 후에는 태후의 교지를 받아 연의 주인이 되었다. 겉보기엔 황실에 비극의 그림자가 덮친 끝에 종인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엔 태후와 장문견의 정치 공작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경수는 인간 김종인 대해 알고 싶었다. 열한 살의 나이로 일국의 군주가 되어 뜬눈으로 지새웠을 숱한 밤들이 궁금했다. 너도 알다시피 폐하께선 소왕의 뒤를 이어 동궁이 되셨어. 책봉식을 올린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선제께서 붕어하셨고 그 자리는 고스란히 폐하의 몫이 되었지. 허나 연치가 지극히 어리시어 태후께 서 수렴청정을 하셨어. 유생들의 주장대로 그동안 정사는 농락당하고 황실의 권위는 추락했어. 모두 태후와 장문견에게 순종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 속에서 폐하는 혼자셨어. 다들 제 밥그릇을 챙길 때 어린 폐하께서는 입을 다물고 두 눈을 감 았으며 귀를 닫으셨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말이야. 장유곡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황제에겐 천진난만함과 무거운 비통함이 공존했다. 말타기 시합을 했

63 을 때 황제는 누구보다 장난기 가득한 소년이었으나 비를 피하던 오두막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월란을 잃었을 때도 창자가 끊어지는 듯 슬펐는데, 생모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일전에 네가 폐하와 진왕은 친형제인데도 사이가 안 좋아 보인다고 했지? 두 분을 가까이서 지켜 보지 않고서야 알아채기 어려운데 네가 그 얘기를 꺼내서 의아했다. 단번에 폐하께서 네게 생모의 일 을 알렸구나 싶더군. 난 폐하와 오래 알고 지냈지만 숙비마마의 얘기를 들은 것은 삼 년 전이었어. 그만큼 폐하께선 마 음의 벽이 높으셔. 하지만 너와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럼없으시더군. 숙비가 황제의 역린일 줄은 몰랐다. 비 오는 날이 싫다며 비교적 담담하게 얘기하기에, 당연히 찬열 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불과 삼 년 전이라니 몹시 의외였다. 폐하께서 친정을 시작하신 지 몇 달 되지 않아 조정에서조차 폐하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 이런 상 황에서 폐하는 어딘가 쉴 곳이 필요하셨을 거야. 네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친 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휴식하는 법이지. 경수는 소낙비 내리던 장유곡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모친의 일을 토로하던 왕의 섬약한 모습이 뇌 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눈물짓진 않았으나 경수는 그때 종인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 죄가 있다면 가마 타고 관주성 정문이 아닌 편문으로 들어와 우리 형제를 낳았다는 것 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은 지금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나는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해. 보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은 불변의 법칙이다.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나. 내 뜻과 달리 폐하의 눈 밖에 나면 곧바로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황실에서 핏줄은 무의미하 지. 그건 황제로서 본인에게 하는 다짐이자 경고였으리라. 한 배를 빌려 태어났음에도 형제를 믿지 못 하고 끝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 어디 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있나. 그것은 지옥이다. 윤회가 불가능한 무간지옥. 황제는 그렇게 계획적으로 원수에게 맡겨져 가시방석에 앉은 듯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 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 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슬픔이 마르다 못해 오감이 먹먹해져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그런 자리. 종인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던져져 있었다. 너에 대한 폐하의 관심은 보통이 아니야. 무슨 뜻이지? 네게 품은 마음, 가볍지 않다고.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야.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면? 짐짓 날카롭게 물었다. 찬열은 경수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꼭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으냐고 하는 듯했 다. 매번 향기로운 정을 주고받아 말하지 않아도 능히 서로의 마음을 안다네. * 너도 그분과 같은 마음 아니냐?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종이 울렸다. 찬열은 항상 곁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어떤 법칙, 내지는 습관과도 같았다. 그래서 경수도 당연히 * 설도, 모란( 牧 丹 ) 중

64 찬열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월란과의 혼담이 오갈 때 자신의 마음은 전하지도 못한 채 이지러지는 달처럼 서산으로 진다는 사 실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차츰 시간이 흐르고 누이에 대한 미안함에 억지로 차곡차곡 마음을 접어 나갔고, 마침맞게 찬열이 변경으로 출정하는 일이 잦아져 자연히 정리할 시간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찬열은 첫정 이라는 이름표를 단 뺄 수 없는 가시와도 같아서 늘 가슴 한구석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의심한 적조차 없다. 찬열은 언제나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어쩌면 불로 지진 문신처럼 영원히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침에는 쪽빛으로 물들었다가 저녁이면 붉은색으로 너울거리는 하늘처럼 서서히 변 하고 있었음을, 경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럴 리 없어. 나는! 하마터면 찬열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뻔했다. 찬열은 경수가 자신을 특별한 감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경수를 위해 모른 척했다. 그 러나 경수는 찬열이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고 여겨 어설프게 입을 틀어막을 뿐이다. 찬열은 자신의 마음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수가 가여웠다. 환경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살 아야 해서 뼛속까지 새겨진 그 버릇이 경수를 무지로 몰아넣었다. 듣기 싫어. 더는,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뒷걸음질 치듯이 도망쳤다. 13. 부정( 浮 情 ) 上 夜 光 照 陰 嘆 戀 所 思 誰 謂 我 無 憂 積 念 發 狂 癡 달빛이 어둠을 비추면 긴 한숨으로 그대를 그리네. 누가 내겐 근심 없다 했던가? 그리움 쌓여 미칠 듯한데. * 썼다 지웠다, 구겨버린 종이로 옥안 근처가 너저분했다. 잠도 오지 않아 같은 구절을 반복했다가 다 시 쓰레기로 만들기를 수십 차례. 종인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안 그래도 잘 못 자는 양반이 불면으로 근심하자 하개는 오늘 일정에 큰 차질을 빚겠다 싶었다. 자객 침입으로 인심이 뒤숭숭했고 그 원인을 두고 종인은 나름대로 벼르던 참이다. 그런데 어떤 이 유에서인지 황제 본인이 시름에 잠겨 낭패였다. 오늘 폐하께서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니 너희 모두 책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 하 공공. 하개는 종인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종인이 편전으로 향했다. 장씨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대인파는 황실의 안위를 들먹이며 조세 개혁은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인을 보호하는 소인파는 자객의 난입과 조세 개혁은 별개의 문제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두 집단이 잡아당긴 실처럼 팽팽하게 맞붙었다. 종인은 구역질이 밀려왔다. 예상했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아 신물이 났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뜯어보았다. 사건에 수상한 점이 많고 사안이 무거운 만큼 순금사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오. 순금사의 수장은 대인파라 만일 사건을 맡긴다면 장문견의 의도대로 흐지부지 종결될 것이 뻔했다. 그래도 종인은 결단코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의지가 없음을 표명하고 싶었다. * 작자미상, 향초에서 나온 봄볕( 蘭 若 生 春 陽 ) 중

65 자객이 장씨 일문의 자작극임이 드러나면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질 것이 분명하므로 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꼬리를 밟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압력을 가하다 보면 뜻밖의 좋은 결과를 얻 을 수 있다는 것이 종인의 계산이었다. 조회가 파한 후에도 종인은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는 내내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폐하. 이러다 정말로 옥체에 탈이 날까 봐 저어되나이다. 수라간을 움직여야 소속 나인들도 밥을 먹을 것이 아니옵니까? 수라를 차려라. 허나 짐은 먹지 않는다. 어찌 폐하의 입을 거치지 않은 음식이 아랫것들에게 내려진답니까? 정말 생각이 없다. 상을 차려 상궁과 나인들이 굶지 않게 그대가 잘 처리하라. 하개가 무릎까지 꿇었지만 주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신궁에 문후를 올리러 갈 시각이 되어서야 몽롱했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았다. 하개는 그것을 집 념이라고 읽었다. 아니면 강한 전투력일까. 경사스러운 날에 불미스러운 일로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태후는 자신궁 앞마당에 핀 자목련나무 아래서 산책 중이었다. 사방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지저귀 고 청목한 봄바람이 불었다. 버들솜도 표표히 흩날렸다. 춘색이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소자가 불민하여 미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간밤에 제대로 안숙하지 못하셨을 텐데 미령한 곳은 없으십니까? 나는 괜찮소. 내 걱정으로 주상께서 되레 밤잠을 못 이루셨겠지. 소자가 금위군과 무위장군 박찬열을 엄중하게 문책하겠습니다. 그것이 어찌 무위장군의 실책이겠소? 사특한 자들이 하늘의 눈을 가리고 스미기야 누워서 떡 먹기 지. 어제는 비번이었고 또 직책을 맡은 지 얼마 안 됐으니 훈계로 끝내시구려. 이해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태후는 온유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 자객은 잡지 못하였소?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성전이 아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오. 태후마마께 화가 미쳤을 걸 생각하면 소자는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호호. 괜찮대도 그러시오. 자객을 단번에 잡지 못한 것은 그동안 소자가 아랫것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짙은 자홍색의 목련이 가느다란 바람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하여 내전의 호위를 강화하고 마마를 더욱 안전하게 모시고자 자신궁 내관 일부와 시위들을 교체 할까 합니다. 낮은 가지에 소담하게 피어난 꽃송이를 어루만지던 태후의 손이 멈칫했다. 귀도 늙어버려 순간 잘 못 들은 줄 알았지만 단호한 종인의 표정을 보니 착각은 아니다. 현재 자신궁을 지키는 내관과 시위는 최소 삼사 년은 함께한 자들로 모두 장문견이 직접 발탁해서 배치했다. 그들 모두 태후와 장문견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을 교체한다는 것은 태후의 수족 중 일부를 잘라낸다는 뜻이었다. 일부러 박찬열의 책임을 강조한 후에 나로 하여금 그를 두둔하게 하고, 정작 내 손발을 자른다? 기회가 쉬이 오는 것이 아니니 과단 있게 일을 추진하려는 수작이다. 허나 갑자기 그들을 바꾸면 마마께서 도리어 불안해하실 수 있고 방비에도 혼선이 있을 수 있어 당분간은 지켜보려 합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잔재주를 부리기까지. 겁에 질려 비 맞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던 어린애가 언제 이렇게 컸던가. 태후는 다시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러나 모란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마마께서는 어찌하였으면 좋겠습니까? 난 아무래도 좋소. 주상이 늙은 어미의 걱정으로 잠을 설치는 것보단 낫지.

66 하오나 마마의 안위와 관련된지라 이대로 덮는 것이 좋을지 망설여집니다. 이미 결정하신 듯하니 내 의견은 묻지 않아도 되오. 어미는 무사하지 않소? 그러니 작은 일에 더 는 마음 쓰지 마시오.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 사이에 이해 못할 일이 무엇이오. 그럼 당분간 지켜보다가 자그마한 실수라도 범하거든 그때 처결하겠습니다. 옛날, 마마께서 어떤 허물은 덮고 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신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으시니 어미는 기쁘구려. 태후가 걸음을 옮기자 뒤에 있던 종인이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나란히 걷는 태후와 황제는 누가 보더라도 이상적인 모자 사이였다. 어젯밤에 금선공주의 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오. 어느새 그리 장성했는지. 성장이 더뎠던 것으로 아는데 목소리도 변하고 생김새도 날카로워졌더군요. 눈매가 공주와 똑같더이다. 예. 백현과 얘기는 나누셨습니까? 외명부 부인들과 그림을 보던 중이라 간단히 인사만 받았소. 여독으로 피곤할 듯하여 주상께 바로 보냈다오. 그러셨군요. 백현은 아침에 수월당( 水 月 堂 ) * 으로 갔다 합니다. 주상이 허락하셨소? 어릴 때 자주 어울리지 않았습니까? 유독 준면 형님을 잘 따르기도 했고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었지만 태후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참. 백현이 동주에서 흑진주를 가져왔더군요. 알이 갓난아기 주먹만 합니다. 동주의 흑진주라면 일 년에 서너 개밖에 생산되지 않을 만큼 희귀하지 않소? 고모님이 소자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마마께 바치오니 원하는 곳에 쓰소서. 그런 것을 내게 줘도 되시겠소? 물건은 적재적소에서 쓰일 때야말로 가장 가치가 빛나지 않습니까? 이따가 자신궁으로 보내겠습니 다. 고맙소. 마침 떨잠의 장신구가 식상하던 차였는데 주상 덕분에 진기한 걸 얻겠구려. 앞으로 얼마든지 수족을 자를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고는 본인에게는 쓸모없는 보석 따위를 내주겠 단다. 눈물겨운 친절에 태후는 기꺼운 듯 입매를 끌어올렸다. 매번 향기로운 정을 주고받아 말하지 않아도 능히 서로의 마음을 안다네. 너도 그분과 같은 마음 아니냐? 복잡한 머릿속에 자꾸만 같은 말이 맴돌았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아무리 절친한 벗이라고 해 도 어찌 함부로 예단하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경수 스스로도 본인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공연히 쾌청한 하늘만 쏘아보았다. 집안일을 걱정하던 때보다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더 화 가 나는 것은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는데 계속 죄책감이 든다는 사실이다. 찬열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가 무척 가여웠다. 형제를 잃고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려 아등 바등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 신산한데도 경수는 종인에게 연민을 느꼈다. 만인지상이라는 권력의 정점 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만 허물없이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그 처지가 딱했다. 비 오는 날이 싫다며, 비명에 간 어머니를 애달파하던 모습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늘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스스로 철옹성으로 들어가 겹겹이 빗장을 걸고 안폐하게 몸을 웅크렸을 것이다. 그 * 소왕의 집

67 렇게 해야만 주변 사람이 다치지 않을 테니까. 자의가 아니었음에도 종인은 이미 일국의 지존이 된 대가로 사랑하는 어미를 잃었다. 그의 과거에 깔린 짙은 안개는 성인이 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본의 아니게 신분을 감추도록 종용했으리 라.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던 종인의 정직한 눈동자를 생각하면 짓지도 않은 죄의식이 목을 조였다. 근자에 종인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늘었고 그가 무얼 하는지 궁금해진 것은 사실이다. 열흘 가까이 서찰이 오지 않았을 때는 득병이라도 한 줄 알고 걱정하지 않았나. 하지만 찬열의 말대로 그에게 마음을 열었을 리 없다. 종인을 걱정한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다는 측은지심에 불과하다. 인지상정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품을 수 있는지 경수로서는 이해되질 않 았다. 더구나 글월 몇 자로 문교했을 뿐,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시와 어설픈 소 회 몇 구절로 마음이 통했다고 한다면 세상에 상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 경수는 찬열을 떠올렸다. 긴 세월 가슴에 품었던 첫정의 대상. 찬열은 경수가 사내로서, 벗으로서 동경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출중한 무술 실력과 영상한 얼굴, 어 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명랑하고 따뜻한 성정은 만인의 사랑을 받을 만했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 고 몰래 훔쳐보기를 몇 해째. 예전보다 그 마음이 식었다고 할지라도 찬열은 언제까지나 그의 첫 연정이다. 무르익지 않아 풋내 가 풍겨도 처음이라는 것은 항상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여 찬열이 자신을 속였든 말든, 여전히 그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다. 담담함 속에 물비 늘처럼 반짝이는 투명한 가시가 있다. 그것을 온전히 빼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몇 번 보지도 않은 자 를 마음에 품는단 말인가. 어제 일은 두고두고 곱씹을 모욕이었으나 찬열이 악의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니다. 자신 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그 얼굴을 떠올리면 그렇게 야멸치게 돌아선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번엔 네가 틀렸다. 중얼거리며 다시금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엷은 감청색 바다가 너울거렸다. 하늘 속으로 투신하고 싶었다. 황제가 순금사에 자객 사건을 철저히 조사라고 명한 후 수일이 지났다. 떠들썩했던 잔칫날 이후 궁 은 다시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아갔다. 그런데 궁인들은 요즘 어느 때보다 숨이 막혔다. 눈칫밥 먹고 사는 그들은 태성전과 자신궁의 미묘 한 알력 싸움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대인파는 더욱 적극적으로 조세는 현상유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인파의 반대가 거세어 쉬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제는 사안을 오래 끌수록 나라에 좋지 않다며 각지의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순차적으로 제도를 시행하라고 단언했다. 황제의 강행에 소인파는 쾌재를 부르며 어깨춤을 췄다. 대인파는 당혹감을 감추 지 못했다. 그것은 편전에서 벌어지는 일을 빠짐없이 보고받는 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굴었다. 주상은 항상 공손하지. 내게 예의를 갖추지 않은 적은 없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겁니다! 보세요. 자신궁의 시위들을 건드리려고 하더니 이번엔 조세 개혁을 단 행하고 있습니다! 장문견이 붉으락푸르락 언성을 높였다. 태후는 태평하게 가위로 구문초의 잔가지를 싹둑 잘랐다. 금상이 친정을 시작하고 대단히 오만불손해졌습니다. 하루아침에 변했어요. 본인이 누구 덕에 보위 에 올랐는지 잊은 것이 분명합니다. 누님이 반응이 없자 장문견은 노기를 누그러뜨리며 앙알댔다. 태후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신중하게 구문초의 가지를 솎았다.

68 이대로 가다가는 호랑이 새끼한테 모가지가 물어뜯길 겁니다. 주상이 금년에 약관이 되었네. 끓어오를 나이이니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겠지. 허허, 나 참! 그리 속 편하게 하실 말씀이 아니라니까요? 어허. 이 나라의 주인은 주상일세. 당연히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셔야지. 장문견은 답답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쳐가며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그러니까 그 자리를 누가 만들어줬느냐 이 말입니다! 갈아치우는 거야 여반장처럼 쉽지 않습니 까? 그제야 태후가 사느란 시선으로 아우를 쏘아봤다. 입은 재앙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임을 모르는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어디 황제 앞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떠들어 보시게. 태후의 질책에 장문견은 억울한 듯 숱 많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하소연했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딸이 금상 때문에 죽었습니다! 금상이 박대하지만 않았어도 황후마마께서 요 절하진 않으셨지요. 아직도 마마의 미온이 이 손바닥에 남아 있다고요! 소중히 기른 맏딸이 비명횡사한 원인이 황제에게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불렀다. 아직도 그해 여름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택군( 擇 君 ) * 은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네. 명분이야 갖다 붙이면 그만입니다. 버릇을 잘못 들였군. 지존의 자리가 장사치 물건 바꾸듯이 쉬이 바뀌는 줄 아는가? 냉정한 한마디에 장문견이 잠시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제 누님이라지만 저리 높낮이 없는 투로 일 갈하면 오금이 저렸다.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눈 깜짝할 새에 바뀌는 것이 정세 아닙니까? 대비책을 세워야지요. 태후가 가위를 내려놓고 소담한 푸른 잎사귀를 손끝으로 가볍게 만져주었다. 그리 할 일이 없거든 연무장에서 군사들 훈련 상태나 점검하게나. 유비무환이라지 않습니까? 태평하게 있다가 눈 뜨고 코 베이십니다! 어허. 종친 중에 딱히 세울 황자도 없으니 헛소리 그만하게. 없다니요? 진왕을 앉히면 될 것 아닙니까? 태제( 太 弟 )로 삼고 은밀하게 일을 도모하면 됩니다. 황제의 친형을 태제로 삼는 경우가 어디 있나? 또 진왕은 날 때부터 허약해서 지금 부인도 들이지 않는데 진왕을 보위에 앉히면 사람들이 우리를 더욱 고깝게 볼 것이 자명해. 여론도 의식할 줄 알아 야지. 장문견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퍽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허면 소왕은 어떻습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후가 들고 있던 가위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곤 두박질쳤다. 장문견이 화들짝 놀라 소매로 제 얼굴을 가렸다. 퉁방울 같은 눈알이 거의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옥사에서 내 목을 칠 날만 기다린 놈에게 날 벼린 칼을 쥐여 주려느냐?! 지, 진정하십시오! 소왕이 아니면 그 아들이라도, 뭐라?! 마마! 고정하십시오! 어처구니가 없군. 고작 세 살밖에 안 된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 꼭두각시로 삼으면 대신들이 참으 로 좋아하겠구나! 여후와 측천무후를 보십시오. 마마께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대소신료들이 우리 장씨 일문이 전횡을 일삼는 걸 모를 것 같으냐?! 장문견이 오금이 찔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 신하가 멋대로 임금을 골라 세움

69 그들이 입 다물고 있는 것은 내가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어린 군주를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수렴청정을 했고 이젠 그 권한을 내려놓았어. 내가 욕심을 부렸다면 주상의 편에 선 대신들이 날 가 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야! 고목을 치는 칼벼락에 장문견은 아차 싶었다. 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민간에는 내가 의귀비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지? 십 년도 더 된 일인데 이제 와 민심이 동요 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릴 경계하는 눈이 많다는 뜻일세. 주상이라고 귀가 없겠나? 설령 증좌가 있다 해도 어린 금상이 뭘 어쩌겠습니까? 또 중궁이 방자한 후궁을 치죄하는 것이 무 슨 잘못이랍니까? 태후가 구문초 화분을 들고 일어나 창가에 가져다 놓았다. 지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푸른 잎이 더욱 화사해 보였다. 이건 구문초라 하네. 얇은 기둥에 푸른 솜처럼 자란 잎사귀들이 제법 무성했다. 장문견의 눈에는 볼품없는 풀떼기에 지 나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모기 같은 해충들의 천적이지. 자네처럼 전장에 자주 나서는 장수들이 한두 개씩 지니고 있으면 해충으로 고생할 일을 없을 걸세. 사내가 계집처럼 그런 걸 차고 다닙니까? 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해충을 쫓아내는 데는 구문초 하나면 되는데,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지. 사람의 일도 이와 같 아. 더욱이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쓸데없는 언행을 삼가고 아랫것들을 잘 다스려야 해. 향기를 맡으려 가볍게 숨을 내뱉자 가녀린 바람에도 이파리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은 여죄를 만들 때가 아니야. 그럼. 주상은 마음이 여려. 지금이야 친정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결기가 서 있지만 길어야 몇 달일세. 금상은 너무 빠릅니다. 지켜보다가 우리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저 자신만만함이 일개 여인을 당당한 여걸로 만들지 않았나. 장문견의 입매가 히죽 올라갔다. 14. 부정( 浮 情 ) 下 어째서 소신에게 죄를 묻지 않으십니까? 평소처럼 내기 바둑을 청한 종인은 신중하게 백돌을 놓았다. 찬열의 차례였지만 그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돌을 놓지 않을 듯 완강하게 버텼다. 태후마마의 탄일에 벌어진 일은 소신이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날은 네가 당직 서는 날도 아니었고 짐이 술을 허락하였지. 태후께서도 널 문책하지 말라고 하 셨다. 더는 신경 쓰지 마라. 손짓으로 얼른 다음 수를 두라고 종용하자 찬열은 별수 없이 아무 데나 돌을 놓았다. 바둑이라면 원래 젬병인 데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열어놓은 창가에서는 사월의 솔바람이 불어왔다. 격자창 너머에서는 진달래와 하얀 살구꽃이 앙증 맞은 자태를 뽐내었다. 하얀 목화솜 밭에 점점이 붉은 안료를 뿌려놓은 듯하였다. 밖에서 삐익-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이 들렸다. 살구꽃이 핀 걸 보니 화원에 복사꽃도 만발했겠군. 먼저 바둑을 청한 종인도 영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못 본 새 살이 내려 있었는데 찬열은 그 원인 을 알 것도 같았다.

70 그간은 바빠서 도무지 짬이 안 났건만, 막상 한가해지니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 하여 널 불렀 는데 공연히 시간을 뺏은 건 아니겠지. 마침 무료하던 참이었습니다. 다행이군. 그 아이는 잘 지내느냐? 탁, 백돌이 흑돌을 에워쌌다. 소신도 그날 이후로는 거의 만나질 못했습니다. 몇 번 집에 찾아간 적이 있지만 태학관에서 돌아 오지 않았다고만 하여 번번이 허탕 쳤습니다. 단단히 뿔이 난 게지.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찬열은 침묵했다. 짐도 그날 일을 떠올리면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남들 앞에서 기녀처럼 춤을 췄으니, 그 성격에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을 거다. 경수가 화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흑돌이 갈피를 못 잡다가 이번에도 아무렇게나 둥지를 튼다. 호구( 虎 口 ) * 에 둘러싸였다. 자살이다. 짐이 황제라서? 찬열이 부정하지 않자 종인은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더군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소신은 말재주가 없는지라. 그럼 그날 일부러 그 아이를 데려온 것이냐? 폐하께서 며칠째 서찰을 주시지 않자 장유곡의 일로 뒤늦게 탈이 난 줄 알았답니다. 하여 약재를 가지고 인보당으로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도 모자라 청지기에게 물벼락까지 맞았답니다. 종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터졌다. 진왕 전하는 인사 청탁을 싫어하시니 생판 모르는 남이 약재를 들고 찾아왔다는 말에 그런 결정을 내리신 듯합니다. 종인은 순간의 선택이 경수에게 어떤 결과를 몰고 왔는지 곱씹었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처음부 터 솔직하게 나갔어야 했는데, 남에게 오해받고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나 되고.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 얘길 듣고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더 큰 오해를 빚기 전에 태평연에 경 수를 데려온 것입니다. 폐하께서 연회에 오래 계실 것 같지 않아 폐하께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경수 의 오해를 풀고 싶었죠. 까드득까드득, 바둑돌을 움켜쥔 종인의 지분거림이 급해졌다. 종인의 차례였지만 돌은 놓일 기미가 안 보였다. 험한 꼴을 당했는데 풍한에 들진 않았더냐? 그보다 무서운 병을 얻었지요. 상심( 傷 心 )이요. 종인이 제 얼굴을 감쌌다. 그날 그대로 돌려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사과의 편지라도 빨리 전해야 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 라서 유야무야 보낸 시간이 보름에 가까웠다. 어리석었다. 생채기가 곪기 전에 약이라도 줬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상처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정은 들고나는 문이 없다지요? 본인은 모르는 눈치지만 곁에서 오래 지켜본 소신은 알 수 있습니 다. 폐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요. 얼키설키 꼬인 실타래가 가지런히 실패에 감기기 시작했다. 오색실이 엉킨 실타래는 돌돌 말리더니 * 바둑에서 범이 아가리를 벌린 듯 한쪽만 트인 형세

71 어느덧 연정( 戀 情 )이라는 두 글자가 되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물레는 느긋하게 돌아갔다. 중간에서 처신을 잘못한 소신의 죄가 큽니다. 짐이 자초한 일이거늘 어찌 네 탓이라 하느냐. 소신이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안 그래도 어수선한데 너마저 시름을 얹어줄 셈이냐? 종인은 다소 갑갑한 표정으로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태양은 완연한 봄볕을 뿜어내고 부드러운 바 람은 궁녀들의 치맛자락을 희롱하였다. 사방이 꽃인데 꽃을 봐도 즐겁지 않았다. 방에서 콜록거리는 것이 예사인 윤씨 부인이 부엌에서 물 한 사발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푼돈을 벌려고 세책점에서 일감을 얻어온 경수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윤씨는 손님이 왔다며, 아들에게 방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다. 경수는 영문도 모른 채 윤씨에게서 목판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버지 도명정과 고 관대작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 아이가 제 맏아들입니다. 경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이분은 사도( 司 徒 ) * 황세용 나리시다. 얼굴을 확인한 경수와 황세용은 동시에 놀랐다. 서로 태평연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황세용에게 경수도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객으로 잡혀 와 용연무라는 희한한 춤을 추더니 황제의 무희 신분으로 풀려난 것은 독특한 사건이었다. 더구나 사내의 몸으로 이슬을 머금고 막 망울 을 터트리려는 꽃송이와 같아서 더욱 뇌리에 남았다. 넌 그때 분명히. 제 아들을 아십니까? 도명정이 끼어들자 황세용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닮은 아이가 있는데 내가 착각한 것 같소. 경수는 그가 입을 다물어 줘서 고마웠다. 그나저나 거의 손님이 드나들지 않는 집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인파의 수장이 어쩐 일인가 싶었다. 더더욱 아버지와는 일면식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 예까지 왜 왔는지 궁금했다. 박우헌 공의 추천으로 만나러 왔다. 황세용은 도명정을 의식하며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굴었다. 경수는 박우헌의 추천이 정확히 무얼 의 미하는지 몰라 아버지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글재주 있는 영민한 아이를 찾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박 공이 널 천거한 모양이다. 네? 하지만 소생은 태학관 유생이고 문리가 단천하여. 경수가 거절하려 하자 황세용은 손을 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너에 대한 조사는 해 두었다. 경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너에 대한 평판이 대체로 좋더구나. 부끄럽습니다. 성적이 상당히 우수하던데 과거에 응시할 셈이더냐? 예. 하지만 과거가 언제 다시 열릴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라 속상하겠구나. 황실이 영회황후의 서거를 줄곧 애도하고 있음은 소생도 잘 압니다. * 정일품. 국가 최고 관직

72 영특하군. 황세용은 경수가 썩 맘에 들었다. 실은 종학에서 공주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남녀가 유별한지라 유난히 남자 스승들에게는 배우기 싫 다며 수업을 거부하는 분들이 계시다. 상궁을 들이자니 실력이 미진하고, 상전들도 부리던 자에게 글 을 배우는 것이 뜨악한지 난색을 보이셨다. 처지가 아주 난감하던 차에 마침맞게 우헌 공이 네 이야기를 해서 짬을 낸 것이다. 그 말씀은, 소생더러 여 종친들에게 글을 가르치란 뜻입니까? 소생도 사내입니다만. 종학 스승들이 대개 나이 든 자들이라 수업이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어서 시위하시는 것이다. 태 후께서는 여 종친들도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지. 그런데 별의별 핑계로 수업을 거 부하시니 여간 난처하지 않다. 하여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은 자들 중 젊고 영민한 사람을 뽑아 여 종친들의 스승으로 뽑으려는 것이다. 신선하고 색다른 시각으로 그분들을 교육할 수 있을 테니 말이 다. 조금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했지만 경수는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오나 소생은 누굴 가르칠 만한 깜냥이 되질 않습니다. 겁먹을 필요 없다. 언문이나 여사서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따로 녹봉도 나오고 종학 스승으로서의 지위도 보장해 주마. 태학관의 용전과 세책점에서 책을 필사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종 학은 황실의 교육기관이니 우연히 황제와 마주칠 수도 있다. 그는 아직 표류하는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 중이었다. 소생에게 그런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종학 스승들은 종육품 이상의 문관들이 담 당하는 것으로 아는데 홍패조차 못 받은 소생이 종학을 들락날락한다면 모두 불쾌해 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다 얘기가 되었으니. 부족한 실력으로 공주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 그리 겸손 떨 것 없다. 잠깐 보았는데도 네가 신중한 사람인 게 느껴진다. 잠깐 본 것으로 어찌 소생의 전부를 판단하십니까? 허허허! 그래, 네 말대로 단번에 사람의 전부를 판단할 수 없지. 허나 네 나이의 몇 곱절은 살다 보면 옷깃만 스쳐도 사람의 됨됨이가 보이기도 한다. 경수가 명정을 쳐다봤다. 명정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문득 밖에서 윤씨가 잔기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체 높으신 황 사도께서 누추한 곳까지 납신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한 까닭이겠지요. 소생, 사도 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이틀 뒤에 사람을 보낼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따라왔다. 여사( 女 史 ) * 를 들이라? 사도 황세용을 위시하여 상참에 든 대신들이 한 목소리를 냈다. 생각지도 못한 건의에 종인은 당황 했다. 예로부터 대국은 황실에 여사를 들여 대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기록하게 했습니 다. 그 덕에 전해지는 역사 기록이 많고 이로써 후세에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황 사도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구중심처에서 일어나는 언행을 기록하고 이를 후손의 거 울로 삼는다면 사직이 더욱 바로 설 것입니다. 대사농( 大 司 農 ) ** 최진수까지 황세용을 두둔했다. 그러자 참석한 대신들이 마치 짠 것처럼 입을 모 * 황후의 예를 맡고 규문 안의 일을 기록하는 사람

73 아 여사를 들이라고 주장했다. 여사라면 예문관 사관들처럼 마땅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궁중에 그런 사람이 있소? 겨우 언문을 깨우친 걸로 번거롭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여인이 사내들처럼 글을 익히는 것은 드문 일이나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종인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게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사를 들이소서. 안팎에 사관을 두어 행실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게 한다면 만고의 성군으로 빛나 실 것이며 후세에서 이를 본받아 나라를 더욱 현명하게 다스릴 것입니다. 사관은 실록을 편찬하는 자들인데 어찌 여사가 그들과 같다 하겠소? 예. 사관은 공적인 언행을 기록하지만 여사는 내전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일을 기록하는 것이 직무 입니다. 둘이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예 다르다고 볼 수도 없지요. 지금 경들의 말은 짐이 지극히 사적인 침전의 일까지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리는구 려. 대연의 태양이시고 유일무이한 지존이시니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신들의 생각입 니다. 물론 폐하께서는 성군의 자질을 갖추셨으나 조금 더 신중을 기한다면 아름다운 전례를 남길 것 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황세용의 주장을 최진수가 되풀이했다. 폐하께서 친정을 시작하신 지 오래지 않으니 여사를 두고 더욱 경계하시며 국사를 살피시어 숭고 한 모범으로 남으소서. 마땅한 인물이 없는데 당장 여사를 들이라는 것은 적절하지 않소. 종인이 마지막 저항을 해 보았지만 황세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찾지 못하면 밖에서라도 뽑으면 됩니다. 어찌 여염집 아녀자를 대전으로 들인단 말이오? 나이를 제한하고 손색없는 사람을 골라 황실의 법도와 사관으로서의 윤리를 교육하면 됩니다. 종인이 약간 씨근거리며 황세용을 쳐다보자 최진수가 나섰다. 궐내에 여관( 女 官 )들이 수없이 많은데 하나같이 천자문을 겨우 읽고 쓰는 수준이니 이는 참으로 폐 단입니다. 폐단이라니? 모름지기 궁인들이 웃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행해야 하는데 글을 몰라 종종 시비가 붙고 웃 전을 노하게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오니 외부에서라도 여사를 들여 내전의 일상을 기록 하게 하고 남는 시간엔 여관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한다면 일거양득입니다. 그러니까 곧 죽어도 미리 점찍어둔 계집을 입궁시켜 대놓고 천자를 감시하겠다는 뜻이다. 조세 개혁을 강행하겠다고 천명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바로 이런 수를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자신을 황제 로 경외하길 바랐건만, 저들에게는 일말의 양심조차 없었다. 무릇 정치란 하나를 빼앗으면 하나를 내주어야 한다고 했던가. 자신궁 시위를 갈아치우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멋대로 조세 개혁을 시행한 것으로 이러는 모양인데, 종인은 이렇게 노골적이라면 오히려 자신을 제대로 누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차라리 태성전에 은밀 히 세작을 심어두는 것이 효율적으로 보였다. 경들이 입을 모으는 걸 보니 그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사관을 들이되 재능을 겸비한 자여야 하오. 다만 열성조를 통틀어 전례가 없으니 짐도 태성전에 여인은 들이지 않을 것이오. 여사는 중궁의 처소에 배치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굳이 짐의 침전에도 사관을 들이고자 한다면 예문관의 기존 사관 중 유능한 자를 뽑는 것이 어떻겠소? 자리가 마침 비는데 대과가 열리지 않아 인력이 달리는 것으로 아옵니다. 차라리 참신한 인물을 뽑아 신선한 시각으로 규문의 일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정일품. 국가 재정 담당

74 그리하시오. 그에게는 한정된 시간 동안 사초를 쓰라 하는 것이 좋겠소. 또한,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다 해도 천자가 마음 놓고 쉴 틈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폐단 이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사도도 사가에서는 편히 쉬는데 어찌 황제라 하여 차별이 있겠소? 허니 태성전에 들 사관은 한 명만 두는 것 으로 합시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아니면 별안간 강력한 황권을 되찾겠노라고 다짐한 것인지, 대신들은 예 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종인이 설면하였다. 일기는 좌사( 左 史 )와 우사( 右 史 )가 동시에 쓰는 것이 원칙인데 사관 혼자서 기록하면 필시 놓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또 훗날 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는 무기명 제출이 관례이옵니다. 허나 사관을 한 명만 두면 규문의 일을 기록한 이가 그자뿐인지라 금세 신분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초는 대소신료뿐만 아니라 천자도 열람할 수 없음이거늘. 실록은 춘추관에서 사초와 시정기를 취합하여 편찬하는 것이니 내사든 외사든 누가 기록한 것이 무엇이 중요하오? 하오나 만일 사초가 잘못 쓰이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규중은 경연이나 나랏일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 짐의 언행을 기록하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거 요. 만일 어려움이 있다면 뒤에 다시 논하면 될 일 아니오? 황세용이 장문견의 눈치를 살폈다. 종인이 완강히 거부할 줄 알았던 장문견은 태성전에 사관을 밀 어 넣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지라 황세용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면 태학관 유생 중 사관의 자질을 갖춘 자를 뽑아 예문관에 자리를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세용이 보낸 승명패를 가지고 경수는 궁에 도착했다. 태후의 탄일에 맛보았던 끔찍한 수모가 다 시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청년은 가는 한숨을 몰아냈다. 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려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침이 더욱 심해지지 않 았던가. 그러니 황제에 대한 생각일랑 일절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조차 화사하 게 웃던 종인이 생각나 경수는 괴로웠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궁녀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안으로 계속 향하던 그는 문득 이 상한 느낌을 받았다. 궁녀가 종학관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내전으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궁녀가 다 왔다며 고개를 숙였다. 현판을 본 경수는 모골이 송연했다. 자신궁? 그는 종학 스승이 되는데도 태후의 윤허가 필요한지 잠시 의구심을 품었다.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들어가시오. 판단할 틈도 없이 경수는 떠밀리듯이 전각 안으로 향했다. 손바닥에 괜히 땀이 뱄다. 십 년 가까이 나라를 쥐락펴락한 여중호걸이다 보니 몹시 긴장되었다. 태후마마. 도 아무개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경수는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정면으로 태후 장씨가 보였다. 그녀는 상석에 마련된 고급 보료 위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커다란 모란이었다. 소인 도경수, 태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만안하시고 강녕하시옵소서. 정중하게 절을 올리자 태후가 아래에 놓인 방석을 권했다. 경수는 조용히 그 위에 앉았다. 그림을 좋아하느냐? 뜬금없는 물음에 경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긴장하지 말고 편히 얘기해라. 실제 풍경을 좋아합니다. 그림엔 흥미가 없어?

75 그림은 아무리 잘 그려도 자연과 사물을 흉내 낸 가짜일 뿐이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정취 는 그 무엇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제야 태후가 붓을 내려놓고 경수를 마주했다. 눈가와 입가에 진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으나 쉰 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운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여장부로 보이지 않았다. 기품 있고 우아했다. 대답을 잘하는군. 황공하옵니다. 오늘 이곳에 온 까닭을 아느냐? 공주들께서 배움에 흥미를 잃으시어 소인더러 글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호호호. 그래? 태후가 입가를 가리며 깔깔거렸다. 머리에 꽂은 흑진주 떨잠이 파르르 떨렸다. 황 사도가 구실을 대느라 고생했군. 미안하지만 널 원한 것은 공주가 아니라 나다. 사도 말로는 네가 의젓하고 글속도 상당히 깊다던 데. 비로소 뜨악한 생각이 들었다. 황세용이 자신을 속인 게 틀림없다. 혹여 숭화루에서 있었던 일까지 까발린 것은 아닌가 싶어 경수는 속으로 종주먹을 쥐고 황세용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온지 잘 모르겠습니다. 넌 사관이 될 것이다. 뜬금없는 소리에 경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식으로 예문관 사관이 되어 태성전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것이 네 일이다. 그것이 내가 널 필요로 하는 이유니라. 소인은 종학 스승이 되라는 부름에 응하였습니다만. 이미 궁에 들어왔으니 어쩌겠느냐? 태후는 놀리듯이 가볍게 웃었다. 싫으냐? 태성전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라 하심은. 혹 소인더러 태성전을 감시하란 뜻입니까? 호호호! 눈치도 빠르구나. 맞다. 이미 한 배를 탔으니 숨기지 않으마. 외람되오나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인은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예? 네 누이가 역병으로 죽었다지? 부친은 번번이 낙방하여 실의에 빠졌고 모친은 병이 깊은 데다 아 래로는 아주 어린 동생이 있지. 실질적인 살림은 네가 책임지고 있으나 변변찮은 용전으로는 네 식구 의 군입도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자존심을 닥닥 긁어대는 소리에 경수는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 일을 잘 해낸다면 네 살림에 차고 넘치는 보탬이 될 텐데. 그래도 거절하려느냐? 얼마를 주신다 해도 폐하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상의 일상을 기록하면 되는데 해가 될 게 무엇이냐? 누군가의 간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른 사람을 구할 수밖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따박따박 할 말을 토하는 경수가 태후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냥 돌아가겠느냐? 그러고 싶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여라. 하오면 소인은 이만, 허나 넌 이곳을 나가는 즉시 이승을 하직할 것이다.

76 경수의 흰 얼굴에 검은 두려움이 스쳤다. 말하지 않았느냐? 우린 벌써 한 배를 탔다고. 노 젓기를 포기하는 사공이라면 배에 남길 이유가 없다. 바다에 떠밀어 고기밥으로 줘야지. 협박하면서도 어투가 다정하다는 것이 오싹했다. 경수는 완강히 거부했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후는 의귀비를 죽인 것도 모자라 황제의 생모까지 제거한 여인이다. 그녀에 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 죽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한 가지 알려주자면, 침전에 사관을 들이라는 것은 황제의 명이니라. 뜻밖의 말에 경수는 그것이 진짠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황제를 만나 직접 묻지 않는 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순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15. 신입사관( 新 入 史 官 ) [너를 일부러 속이려던 것은 아니.] [짐이 천자이거늘, 숙이지는 못할망정 솟은 장승처럼 그리 뻣뻣하게.]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 달리 무슨 얘길 하겠느냐.] [보고 싶다. 보고 싶구나.] 편전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 뭉치를 보며 종인은 미간을 구겼다. 먹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하개가 얼른 벼루를 들어 먹물 냄새를 맡아보았다. 어제도 멀쩡하게 잘 쓰던 먹에서 이상한 냄새가 날 리 없었지만, 종인은 공연한 심술을 부렸다. 그 짜증과 심술이 근래 들어 더 심해지는 통에 하개는 원인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종인은 도 통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 오늘부터 태성전에 배치될 어린 사관 때문에 뿔이 난 건 아닐까 싶었다. 궁은 이미 과거를 보지 않은 채 뽑힌 사관에 대한 이야기로 수런거렸다. 국조가 열린 이래 황제의 침전에 사관을 들인 일이 처음이라 당연히 입심거리였다. 어쨌든 소문의 사관은 예문관의 정구품 검열이 되어 이제 곧 태성전에 도착할 예정이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지필묵을 지그시 노려보던 종인은, 산책이나 해야겠다. 조금 있으면 사관이 들 것입니다. 얼굴은 보셔야, 짐이 일개 사관의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하느냐? 그래도 앞으로 계속 보실 텐데. 종인은 하개에게 내린 사느란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사초란 무기명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며 사관을 둘이나 들이라고 한 것은 저들이다! 무기명을 운 운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얼굴을 익히라고 떠밀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괜히 태후가 심어놓은 눈과 귀가 신경 쓰여 안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 이다. 하개는 그런 종인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종인은 단단히 뿔이 서 있었다. 네가 언제부터 저들의 끄나풀이었더냐? 소인이 어찌 감히! 차라리 바닥에 머리를 찧고 죽겠사옵니다! 하개가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일어나라. 저들 때문에 괜히 너까지 피해를 보는구나. 하개가 다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소비원에 등이 몇 개 꺼졌던데 그것은 손질했느냐? 예. 새로 등을 달았으니 꽃을 감상하실 수 있으십니다.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마라. 하오면 사관은.

77 거 참! 정히 보내야겠거든 그놈더러 소비원으로 오라면 될 것 아니냐! 하개에게 짜증을 쏟은 종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가다듬은 후 문을 나섰다. 지난 일주일간, 황세용이 보낸 예문관 관리들에게 사관이 하는 일을 교육받은 경수는 지금 몹시 초 조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부모님과 어린 동생을 대신해 가세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동기였으나 태후의 위협에 굴복 한 자신이 몰염치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황제를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었다. 황제가 자신을 속이는 바람에 수치스러운 일까지 겪었지만, 그렇다고 태후전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계획은 없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흐르게 되어 경수는 심경이 복잡했다. 어제는 예부에서 관복을 보내왔다. 오늘 황제를 배알한 후 예문관에서 면신례를 하고 본격적으로 사관으로서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세용은 상의부에서 급하게 만드느라 마무리가 별로라고 호들갑 을 떨었지만 흉배에 수놓인 구름과 암순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옷을 갖춰 입은 아들을 보며 윤씨 부인은 신선 같다고 좋아했다. 조정에서 몇 년째 대과를 열 기미 가 안 보여 노심초사했는데, 뜻밖에 관직을 얻게 됐다며 그녀는 몹시 들떠 있었다. 반면 도명정은 몇 번이나 언행을 삼가라고 강조했다. 그도 아들이 종학 스승이 아닌 사관으로서 태 성전에 드나드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것도 태후전의 명으로 그리됐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 이 아니었다. 긴장되느냐? 예문관 대교( 待 敎 ) * 이자 지난 일주일간 경수를 가르친 홍만립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경수에게 대놓고 네가 싫다고 못을 박았다. 황세용이 인척인지라 그의 부탁 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흑백으로 나뉘는 시대에 홍만립은 드물게도 당파에 관심이 없는 중립적인 사람이 었다. 그는 원리원칙주의자였고 청요직 중 가장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사관이란 직책에 누구보다 자 부심이 있었다. 사관은 전임자의 천거를 통해 신임을 뽑을 수 있는데 이는 자천제( 自 薦 制 )라 하여 사관의 고유 권한 이기도 했다. 아무리 태후가 들이미는 사람이라 하여도 전임 사관의 추천이 있어야만 예문관 문턱을 넘을 수 있어서 황세용은 홍만립에게 힘을 보태라며 압력을 넣었다. 이렇다 보니 홍만립이 만나보지 도 못한 경수에게 앙심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홍만립이 걱정한 것은 어린놈이 사리 분별을 못 하고 사관 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이었다. 더구나 사관은 삼장지재( 三 長 之 才 ) ** 를 기본으로 하는데 겨우 스물하나 먹은 아이가 그런 조 건을 갖추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검증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머리카락에 피도 안 마른 놈을 데려다 놓고 구 년이나 주무른 황제를 견제하겠다니, 홍만립으로서는 개탄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런 의심은 첫날에 박살이 났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기에 그저 그런 아이라고 여겼지만 가르치다 보니 천지 분간 못 하는 아이는 아니라 안심이었다. 오히려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신중했다. 또 태학관 유생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하다더니 역사에 대한 지식은 기존 사관들을 능가할 만큼 해박 했고 어떤 면에서는 지독할 만큼 냉정하기도 했다. 안색이 파리하구나. 누가 보면 백랍으로 칠한 줄 알겠다. 홍만립의 놀림에도 경수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동호직필의 고사를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동호직필( 董 狐 直 筆 )이란 진나라 사관 동호가 폭군 영공의 시해를 막지도, 영공을 죽인 범인을 벌하 * 정팔품 ** 역사를 서술하는 문장력ㆍ역사 지식ㆍ공정하게 비판할 수 있는 능력

78 지도 않은 상경 조순을 죄인이라 칭한 일을 가리켰다. 사관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으며 직필 은 그들의 직업관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하는 경수에게 홍만립이 대나무로 만든 필묵통( 筆 墨 筒 ) * 을 건넸다. 사관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경수는 필묵통이 보물이라도 되는 듯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태성전에 다다르 자 홍만립은 건투를 빌고는 돌아갔다. 경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호기심에 찬 궁인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새로 온 예문관 검열 도경수라 합니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수령태감에게 자기소개를 하자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지 않소. 검푸른 하늘에 새하얀 하현달이 배죽이 얼굴을 드러냈다. 봄을 끌어안은 화원은 풍요의 계절을 만 끽했다. 도처에 핀 알록달록한 꽃과 다보록한 풀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흩날리는 야생 벚꽃은 철철 흐르는 물을 따라 정처 없이 표류했다. 애쑥과 강아지풀이 솟은 근처에 는 커다란 기암괴석이 여럿 놓여 있었다. 수목은 일찌감치 여름을 준비하려는 듯 신록의 기운을 뿜었 다. 어디서 날아드는지 알 수 없는 꽃향기가 가득하고 일렁이는 바람에 마음마저 싱숭생숭하다. 말간 하현달이 물속에 처박혔다. 달을 만지려 물에 손을 담가보지만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린 물조차 손바닥에서 스르르 흩어져 버렸다. 손끝을 휘감는 냉기가 종인의 심장을 더욱 얼 어붙게 했다. 종인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도경수를 생각했다. 조정에서는 대소신료들과 씨름하며 그들을 상처 입히면 통쾌하기만 했다. 그런데 도경수가 상처받 은 모습, 나아가 그것을 자신이 줬다는 생각만 하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폐하께서는 길상을 누리소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종인은 냉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움이 이성을 갉아먹더니 환시까지 보이는 것인 가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신기루나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종인의 목구멍에서 약한 탄 성이 터졌다. 오늘부로 태성전에서 일기를 쓸 사관 도경수라 합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예를 갖춘다. 떨어진 거리만큼 그의 상흔이 깊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자신만큼 이나 얼굴에 살이 내려 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일까. 경수를 만나면 당장 사과할 것이라던 다짐과는 달리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장씨 일 파의 끄나풀이 도경수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찬열조차 만나주지 않아서 단단히 화가 났다고 짐작했 는데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이야! 종인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나 싶어 현실을 부정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지만 아무것도 변 하지 않았다. 황제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비밀의 공간. 하개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것 이 뻔하였으나 적어도 지금은 그가 황제의 허락 없이 사관을 들인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렇듯 몽중인 듯 도경수와 마주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도경수가 대인파의 수족이 된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너는 하필이면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이냐. 종인이 노기를 누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 붓과 먹물을 휴대하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용기

79 황 사도께서 소인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종학 스승이 되어 달라기에 응하였더니 자신궁으로 데려 갔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소인더러 마마의 눈과 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너무도 솔직하게 나오자 종인은 오히려 당황했다. 태후가 너더러 눈과 귀가 되라 하였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넌 자신궁의 세작인데 어찌 짐에게 네 정체를 실토하는 거냐. 장황한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자신궁을 경계하시는 걸 알면서도 자신궁의 명을 받들고 폐하를 곤란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허나 소인은 폐하를 속일 생각이 없습니다. 태후도 네가 짐과 인연이 있는 것을 아느냐? 경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인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씰룩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오래도록 침 묵하기도 했다. 경수는 종인이 입을 다문 동안 착잡한 심정으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종인이 자신을 어떻게 받 아들이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물러날 곳도 없다. 절벽으로 떨어지든 가까스로 지푸라 기라도 잡고 올라오든, 그것은 오직 황제 하기 나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그와의 첫 만남, 그가 준 우산, 장유곡에서의 내기와 진실 어린 이야기, 주고받 았던 수많은 서신만이 종인을 이루었다. 원망하는 마음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먼지처럼 남아 있었으 나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다. 자존심은 때에 따라 굽힐 수 있었다. 짐을 속일 생각이 없다고 하였느냐? 한참 만에야 종인이 무겁게 침묵을 갈랐다. 예. 만백성의 어버이를 소인이 무슨 재주로 속이겠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느냐. 심해처럼 고요하고 무거운 질문에 이번엔 경수가 침묵했다. 단지 짐이 황제라 속이지 않겠다는 것이냐? 소인이 무어라 답해야 성심에 차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솔직해지면 된다! 종인은, 결국엔 경수가 태후의 세작이 되어 나타났다는 당혹감보다는 돌아서던 청년을 붙잡지 못한 후회와 자책감에 굴복했다. 아무래도 좋다. 도경수가 자신궁의 부름을 받았든 말든,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짐을 화나게 할 셈인가? 내게 쌓아둔 말이 있지 않으냐! 소슬한 바람이 둘 사이를 훑었고 냉기류는 경수에게서 깨졌다. 어찌하여 소인을 속이셨습니까? 짐이 무엇을 속였다는 뜻이냐? 폐하께서는 소인을 속이셨습니다. 홍류원에서 처음 뵀을 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그날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겁니다. 종인은 당찬 청년 도경수와 마주하게 되어 정말 기뻤다. 하지만 낯빛은 변화가 없었다. 용연무는 소인의 어머니께 물려받았습니다. 지금껏 찬열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죠. 다른 사람에겐 한번 보면 그만인 시시한 춤일지 몰라도 소인에겐 귀한 보배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 춤을 췄던 순간, 소인의 가슴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원망의 화살이 종인의 심장을 찔렀다. 변명은 필요 없겠지. 본의 아니게 널 상처 입혔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정말 미안하다. 지존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쏟아졌다. 언어는 휘돌아나가는 강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네게 용연무를 추게 한 데도 내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만, 결과적으론 네게 모욕감만 줬다. 그것도 미안하구나.

80 꽃이 떨어졌다. 한 잎 한 잎 흐르는 물 위로 표표히 흩날렸다. 꽃잎은 저렇게 흐르다가 어느새 머나 먼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부표하는 마음이 하릴없는 저 낙화와 무엇이 다를까. 낙화는 경수의 오래된 마음. 찬열에게 다 주었다고 믿었던 그것이다. 꽃이 지고 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새로운 정이 시작하고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다. 찬열과도 만나지 않고 오롯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종인을 만나는 것이 싫으면서도 설렜고 돌아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의 앞에 다시 서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찬열이 언질을 주었듯 황제와 자신이 같은 마음이라니 어떤 성취 감마저 들었으나 이것이 일시적인 관심이면 어쩌나 싶었다. 사람의 마음은 구름처럼 아침과 저녁의 모습이 다른 법. 종인이 어째서 자신에게 끌렸는지 모르겠 지만 이것이 한순간에 끓어오른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면 경수는 자신이 더욱 초라해질 것만 같았 다. 널 속였다 여겼겠지. 허나 진심이 아니었다. 속이려 한 것이 아니었어. 찬열도 그리 말하더군요. 폐하께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요. 허나 소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 다. 네가 짐을 싫어할까 봐 그랬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을 뒤늦게나마 수습하려고 며칠을 고민했다. 종인은 고민 끝에 내린 졸 렬한 비겁함을 남기지 않고 드러내 보이기로 했다. 경수를 상처 입혔는데 자신의 옹색한 체면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천자이나 허수아비라. 찌르는 대로 칼끝에 위엄은커녕 지푸라기만 묻어 나오는 인형 따위가 네게 흥미로울 리 없다고 여겼다. 잔물결 위로 반질반질한 조약돌 하나가 툭 던져졌다. 네게 곤욕을 치르게 한 신분의 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목적이 있든 없든, 사람들은 알아서 다가왔지. 하여 다가가는 방법을 몰랐다. 수면에 동심원이 그려지면서 물결이 파도쳤다. 변명을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겠으나 적어도 그때의 짐은 그러했어. 당장 네게 어찌 보일지만 신경 썼고 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헛된 마음을 품고 접근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동심원은 점점 넓게 퍼지더니 조약돌을 삼킨 수면과 함께 깊게 가라앉았다. 내 생각만 했구나. 호수가 고요해지자 맑은 달이 오롯하게 수면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생각만 한 것이었어. 종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존심을 내던진 그 모습은 나라의 어버이가 아닌 사랑에 쩔쩔매는 사춘기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혼자 속을 끓였습니다. 그런데 감히 폐하의 사과를 받으니 몸 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소인이 주제넘게 굴었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탐낸 적이 없어 난생처음 느낀 정이라는 욕망. 너울거리는 물결처럼 끝도 없이 밀려오는 너. 하오나 소인은 폐하의 벗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너를. 처연하게 선 경수를 보며 종인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벗 이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규정하고 일 찌감치 선을 긋는 경수가 당혹스러웠다. 잠시나마 폐하를 가까이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지금 나눈 대화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바람 이 차니 이만 태성전으로 드시지요. 정중하게 옆으로 비켜서는 그 모습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딱딱하지만 정갈한 옷차림마저 투명해 보였다. 쏟아지는 은색 달빛과 바람결에 흩어지는 새하얀 꽃비를 걷는 도경수가 세상을 초월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종인은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경수가 놀랄 새도 없이 그대로 끌어안 았다. 인고의 지난날이 무색할 만큼 충동적이었다. 그것은 종인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기

81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풍경에 동화되었다. 은월의 기운은 사람을 홀리는 요기( 妖 氣 )이리라. 군색한 차 림을 벗어던진 청년의 목덜미에서 가벼운 담향( 淡 香 )이 풍겼다. 감각을 깨우는 이향( 異 香 )이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놀랄 법도 한데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침착한 척한다. 그것이 더욱 종인을 안달하게 했다. 모르겠다. 예? 반문하는 경수를 더욱 끌어안으며 종인은 부서질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저 홍류원에서 네 모습을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저릿했다. 그날 이후 자나 깨나 네 생각으로 일이 손에 안 잡히더구나. 뜻밖의 고백에 경수의 얼굴이 점차 달아올랐다. 찬열 덕분에 종인의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 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 마음은 색달랐다. 거대하고 벅차서 지금의 감정이 경외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 도였다. 그러나 아슴아슴한 상태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들을 방법이 없어 슬펐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땐 글로나마 네 목소 리를 상상하고 싶었다. 하여 문교를 청한 것이다. 김종인에게 도경수는 처음 본 순간부터 막을 새도 없이 방으로 날아든 청조( 靑 鳥 )였다. 고갯짓 한 번에 세상을 얻은 듯 기쁘고 맑은 소리로 노래하면 시름을 잊은 듯 행복했다. 횃대에 앉은 파랑새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고, 행여 누가 훔쳐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널 그런 상황에 둬서 어쩔 줄 몰랐다. 나의 무능함을, 껍데기뿐인 황제라는 자리를 다시금 절감해 서 화가 났다! 금칠한 조롱에 가둘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해도 서서히 길들여 곁에 두고 싶었다. 파랗게 빛 나는, 향긋한 복사꽃과 맑은 이슬을 먹고 사는 새를. 네게 사과하려고 몇 번이나 서신을 적으려 했다. 허나 붓을 들면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이대로 돌아서면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이겠지. 그저 황제와 사관에 지나지 않겠지! 짐은 그것이 너무도 두렵구나. 어떤 인연을 말씀하시는지. 똑똑한 네가 모를 리 없다. 애타는 종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수는 미동도 없이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종인은 그 순간이 영겁 처럼 느껴졌다. 경수는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했다. 흘러가는 대로 둬도 좋은 마음, 그러나 흐르는 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신분이기에 자꾸만 망설이게 된다. 이젠 간지러운 온풍이 부는 시절이나 경수는 겨울처럼 한기 가 느껴졌다. 그가 가볍게 몸을 떨자 종인은 어깨를 감싸 주었다. 숨이 멎을 듯했다. 뻐꾸기와 부엉이가 스산하게 울고 졸졸졸 흐르는 홍교 아래의 물마저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 경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애제( 哀 帝 ) * 가 아니시고 소인 또한 동현( 董 賢 ) ** 이 아니죠. 뭔가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제약이 너무도 많아서 무얼 기대해야 좋을지 갈피조차 못 잡았다 는 것이 옳다. 그래도 종인은 못내 섭섭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맥이 탁 풀리고 기운이 빠졌지만 그는 경수의 마른 등에 가지런히 손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가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대답을 아껴야 한다. 소인은 가문을 일으켜야 하고 폐하께서는 만년지계의 대업을 이으셔야 합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사내의 몸으로 소인이 폐하의 애첩이 될 순 없지 않습니까? 애제와 동현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소 * 전한의 13대 황제 ** 애제가 사랑한 미청년

82 인은 욕심내지 않을 겁니다. 경수야. 황송합니다. 기뻤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인이 잠시나마 이 나라의 지존을 가깝다고 여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만으로도 감당이 안 됩니다. 진심이 아니어도 후련하다. 며칠 끙끙 앓던 문제를 종인이 먼저 꺼내줘서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체증이 밀려오는 것은, 간사하게도 정말로 관계 를 끊고 싶지 않은 욕심 탓이다. 찬열에게 멈춰 있다고 믿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16. 해어화( 解 語 花 ) 황송합니다. 기뻤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인이 잠시나마 이 나라의 지존을 가깝다고 여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만으로도 감당이 안 됩니다. 종인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는지 더듬었다. 숭화루에서의 일을 사과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 는 것은 그뿐이라고. 그런데 선을 긋는 와중에 드러나는 경수의 마음이 탐이 났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햇살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평온함과 안락함처럼 그 온기가 자꾸만 갖고 싶었다. 불을 가진 사람 곁에 있으면 겨울이 잉태한 나란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종인이 끌어안았던 경수를 놓아주며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로 나왔다. 그것이 전부더냐. 다른 까닭이 있어야 합니까? 네 앞에선 나도 모르게 솔직해져.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게 된다. 진중한 눈빛이 청년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하였다. 짐은 어차피 무능한 꼭두각시다. 개혁은 쉽지 않고 썩은 물을 빼내는 데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전에 장씨 일파의 계략 으로 비명횡사한다면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싸움에서 패하는 꼴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구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던 눈칫밥을 끊고 바닥으로 곤두박 질친 황실의 존엄도 되찾아야 한다.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상황은 여전히 수렁에 빠 진 바퀴처럼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조급했다. 태후와 장문견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하나라도 더 이루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종인을 채근했다. 이대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날 대체할 사람은 많지. 진왕 형님도 있고 뭣 하면 소왕 형님께서 뒤 를 이으시면 된다.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하기에는, 관주성은 자신궁을 중심 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매 순간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종인의 심정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극렬한 패배감이 청년을 뒤흔들었다. 나는, 이 자리가 싫다! 억눌렀던 것을 폭발하듯이 사리문 잇새로 내뱉는다. 경수는 종인이 안타까웠다. 높은 담벼락, 구중궁궐 가장 깊은 곳에 살면서 만민의 어버이로 군림하 는 자가 스스로 그 자리가 싫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괴로움에 시달렸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당신의 삶은 다른 의미로 지옥이었군요. 차마 건네지 못한 위로가 거품처럼 하얗게 부서졌다. 그러나 동정과 연민으로 이성을 잃을 순 없었 다. 군왕은 하늘이 내리는 자립니다. 폐하를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 소인의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 인을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동생은 너무 어리고 부모님은 늙고 병들었죠.

83 짐이 줄 수 있는 게 따로 있을 거다. 소인은 속물이라 욕심이 많습니다. 욕심? 평온하게 사는 것만이 원이라지 않았더냐? 전제조건은 부귀공명이죠. 귀하게 되고 싶고 보란 듯이 가문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행색으로 차별 받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병든 부모님께 제대로 약 한 첩 지어드리지 못하는 자신도 싫습니다. 종인은 자신의 지위가 이토록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하나 제대 로 얻지 못하는데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소인의 힘으로 할 겁니다. 가문이든 뭐든 소인의 능력으로요! 이렇게라도 종인을, 아니, 자신을 밀어내야 할 것 같다. 각자의 삶이 있다. 하나가 될 수 없는 평행선. 상처는 종인보단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이기에 일부러 제 살을 갉아먹으려 하는 것이다. 찬열에 대한 마음을 잘라냈던 몇 년 전처럼. 소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신다고요? 무엇을 주려 하십니까? 내명부 첩지입니까? 소인 더러 답답한 궁궐에 갇혀 폐하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능소화라도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엄하다! 널 고작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는 줄 아느냐?! 종인이 대성일갈했다. 장난기가 있지만 늘 온화하게 얘기해서 우레 같은 발함에 화들짝 놀랐다. 짐의 진심을 하찮은 물질로 바꿀 수 있다 여기느냐? 이 마음이 가벼운 줄 아느냐? 시간이 문제더냐?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연정을 운운하는 것이 우스워 보여? 겨우 글 몇 줄이나 그것으로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한다고 여겼다. 내 착각이더냐? 정녕 너마저 날 믿지 못하는 것이냐?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관계로 지내는 것이 싫습니다! 끝끝내 감추려 했던 덧정이 빗장 사이로 흘러나와 버렸다. 남에게 감춰야만 하는 사랑이 당사자를 얼마나 지치고 병들게 하는지 아느냐며 묻고 싶었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종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당당해지고 싶습니다. 그늘진 곳에서 몰래 하는 것은 싫습니다. 허나 소인에겐 어떠한 명분도 없습 니다. 폐하 곁에 있을 만한 그 어떠한 것도요! 소인은 이미 폐하를 감시하는 사관이 되었는데 폐하께 마음을 드린다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니라. 어째서 그들의 잣대에 너를 맞추려 하느냐? 폐하께선 천하의 주인이시니 그런 생각이 가능하지만 소인은 아닙니다. 원한다면 주마.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줄 것이다. 소인은 잃을 것이 없으나 소인 때문에 폐하께서 지탄받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미리 피하고 숨어들겠다는 것이냐? 분수를 알고 물러나려 함입니다. 폐하께선 머지않아 봉황을 구하실 테고 여러 꽃과 어울리시겠죠. 그것이 순리입니다. 현숙한 중궁을 들이시어 바람결 같은 만남은 잊어 주소서. 소인을 동현으로 만들 지 말아주십시오. 짐이 싫다면? 가랑비인 줄 알고 눈치채지 못하다가 흠뻑 젖은 후에야 세차게 내린 소나기였음을 깨달았다. 소나 기의 시원하고 진한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하였다. 종인은 그 해갈에 취하여 안타깝고도 처연하게 말했다. 갈수록 네가 내렸다. 홍류원의 눈처럼, 우리가 주고받은 서찰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종인. 그리움이 내리기까지 나 역시 쉬웠던 적이 없느니라. 너처럼 나도 수없이 고쳐 생각하고 고민했다. 이 마음, 서툴지라도 절대 가볍지 않아.

84 눈물이 메마른 경수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떳떳하다면 남들 시선 따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널 곤란하게 하는 일 따위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다. 또한, 네가 진심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항상 속으로 신세 한탄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자신의 삶은 다른 의미로 너무 불행하다고 여겼다. 그 래서 기적처럼 다가온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도 숱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행복해도 될까? 나 같은 것이 정말로 행복해도 될까? 날 믿어다오. 하지만 든든한 저 눈빛을 보면 저절로 기대고 싶어진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내면과 깊은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다. 당신한테 가고 싶어. 훗날 오늘 일을 후회하실 겁니다. 짐의 몫으로 남겨라. 그때 소인의 목을 자르려고 하시면 소인은 별도리가 없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후회한다고 해도 그건 다 내가 책임지겠다. 아끼 는 사람을 죽일 리가 없지 않으냐. 각서라도 써 주시겠습니까? 마음에 새긴 맹세에 비하면 그깟 종이에 적는 글자 따위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에 새긴 맹세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소인이 확인할 방법이 없죠. 그리 신소리를 내뱉는 걸 보니 한시름 덜었다. 기분이 나아진 듯 농을 던지자 종인도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왜 하필 소인입니까? 같은 질문에 너는 제대로 답할 수 있느냐? 경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종인의 진심에 감동했다. 잘 울지 않는데 아까부터 감격의 눈물이 쏟아질 듯 코끝이 시큰거렸다. 소인에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머뭇거리다가 경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폐하의 그림자가 되고 싶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것이 싫다더니 그림자를 청하느냐? 태양 아래선 모든 것이 떳떳하지 못하죠. 그림자는 태양이 만드니까요. 그러자 종인은 세상을 다 얻은 듯 만면에 함박꽃을 피웠다. 가슴이 벅찼다. 진심을 실은 감정의 교환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진귀한 보석보다 값졌다. 종인 의 얼굴에 퍼진 웃음이 요요로운 달빛보다 청아하고 밝았다. 그가 경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소매에서 뭔가 꺼내더니 경수에게 내밀었다. 붉은색과 푸 른색의 산호 장식이 달린 요패였다. 어찌나 호화로운지 딱 봐도 궁에서나 쓰는 고급 장신구였다. 무엇입니까?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다. 어릴 때 자주 긴장하는 버릇이 있었지. 산호는 긴장과 두려움을 완화해 줌과 동시에 어린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숙비는 벼락과 천둥이 힘겨루기를 하는 밤이면 늘 몸이 굳은 채로 소리 죽여 울던 아들을 위해 요 패를 선물했다. 신기하게도 그것을 쥐고 자면 제아무리 요란한 밤이라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그리 귀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절하는 것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동글동글한 산호와 작고 네모난 유리구슬이 떼도 묻지 않은 연 녹색 술과 잘 어우러졌다. 금원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무색하건만, 너만이 궁중의 해어화에 맞서는구나. * * 이규보, 목작약( 木 芍 藥 ) 중

85 다. 경수가 삶은 달걀처럼 반지르르한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종인은 경수의 뺨을 어루만지며 맹세했 이것이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우린 한마음이다. 폐하, 기침하셨나이까? 하개의 나지막한 물음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가 초조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릿조 반은커녕 조회에도 늦을 것이다. 폐하. 이제 그만 기침하셔야 하나이다. 다시금, 꽉 닫힌 장지문 안에서는 대꾸조차 없다. 옥체 미령하시나이까?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며칠 심하게 고심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몸져누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안 그래도 허우대만 멀 쩡하고 속은 골골한 양반이라. 미간만 찌푸려도 근심이 천근만근인데 정말로 탈이 났는지 모골이 송 연했다. 아침잠이 많으시긴 해도 늦잠을 주무신 적은 없는데 참. 하개가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금색 휘장을 거두었다. 그러나 침상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어야 할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단정한 이불과 베개만이 빈자리 를 지키고 있었다. 아,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여봐라!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태성전이 발칵 뒤집혔다. 하개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비번이었던 날에 이 같은 일이 벌어져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늘 자 리를 지키는 태성전 궁인들조차 황제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다니 기가 찼다. 하개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듯, 초조하고 급한 걸음으로 각전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꼬리에 불붙 은 쥐처럼 수십 개에 달하는 방을 뒤져도 주군의 옷자락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다급한 걸음이 여러 개의 쪽문을 지나 침전 가장 안쪽에 있는 소비원( 小 秘 苑 )으로 향했다. 황 제와 그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정식 이름은 없지만 다들 작은 비밀 정원이라 는 뜻에서 소비원이라고 불렀다. 혹시나 싶었는데, 황제는 그곳에서 침의 차림으로 보랏빛의 엷은 여명을 휘감고 서 있었다. 희붐한 빛에 휩싸인 그는 신선처럼 느른하면서도 속세를 초월한 듯한 인상이었다. 폐하! 주군을 보자마자 하개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가 우당탕탕 쓰러지자 붉은 복사꽃을 감상 중 이던 종인이 뒤늦게 소란스러운 곳을 돌아보았다. 하개가 진땀을 흘리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침부터 이리 호들갑이냐. 대체 언제부터 여기 계셨사옵니까? 짐이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사라지신 줄 알고 한참을 찾았나이다! 새벽에 꽃잎 지는 소리에 잠이 깼을 뿐이다. 봐라. 작년엔 죽어 있던 것이 기특하게도 꽃을 피웠구 나. 종인이 뿌듯하게 삼색도( 三 色 桃 ) * 를 가리켰다. 살랑살랑 바람이 일자 좁다란 물길 위로 복사꽃이 떨어졌다. 꽃잎이 제법 크고 싱싱했다. 어휴, 그럼 다른 사람에게 언질이라도 주시지요! 묘시( 卯 時 )가 다 되도록 기침하지 않으셔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사옵니다. 시간이 그리됐단 말이냐? 파루 치는 소리도 못 들으셨나이까? 자릿조반 젓수시기가 아슬아슬하나이다. * 한 나무에서 세 가지 빛깔의 꽃이 피는 복사나무

86 끼니 거르는 일이 하루 이틀이더냐. 폐하! 드물게도 종인이 엷게 미소 지었다. 작위성이라고는 없는 천연의 싱그러움이 뿜어졌다. 어찌 그리 웃으시옵니까?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래 보이느냐? 용안이 맑아지셨습니다. 종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간밤의 떨림이 아침까지 이어졌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음에도 피로감은 없었다. 꿈자리까지 포근하게 한 설렘이 그를 배부르게 했다. 가자. 조회에 늦어선 안 되지. 시름에 겨워 끙끙대던 게 불과 하루 전인데 몇 시진 만에 분위기가 이리 달라지나. 온화하다 못해 유쾌하기까지 한 종인을 보며 하개는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늘이다. 신록으로 달려가느라 푸르고 청아하다. 나비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느릿 느릿 길을 떠났다. 분명히 어제 본 하늘도 이와 같았는데 오늘따라 높고 쾌활해 보이는 것은 귀신의 조화인가 싶다. 연푸른 하늘에 던졌던 시선을 내렸다. 한껏 따스해진 공기가 폐부로 스몄다. 경수는 어젯밤 일을 곱씹었다. 꿈만 같았다. 볼을 꼬집어보고, 종인이 건네준 요패를 만지작거린 후 에야 겨우 현실임을 자각했다. 거짓말처럼 태후의 탄일에 겪은 일은 아무렇지 않아졌다. 당시엔 너무 상심해서 미칠 것만 같았는 데 천금보다 종인의 값진 진심을 얻으니 천고만난쯤은 우스웠다. 거뜬히 이겨낼 용기가 생겼다. 자존심은 도경수란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영혼이었다. 그것이 짓밟혔음에도 빛나는 마음 한 조각에 행복했다. 청년은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아등바등 삶에 치이는 것이 전부였고, 끝없는 괄시 속에서 이를 악물고 악 바리가 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감정은 오랜 지기인 찬열과 교류하는 것이 다였다. 그것으로 만족했고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흔든 것은 이 나라의 황제, 김종인이다. 찌뿌드드한 몸을 이완시키며 경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설 같은 흰 비단에 잉어 두 마리를 묶어 놓았네. 속마음을 알고 싶기에 배 속의 편지를 꺼내 읽 었다네. * 게으른 구름이 쌍쌍이 얽힌 잉어 두 마리 같았다. 저절로 아름다운 정시( 情 詩 ) 한 소절이 읊어졌다. 하지만 한가롭게 시나 읊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신은 태후에게 특명을 받았고 그것을 수행할 의 무가 있었다. 경수는 종인에게 절대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감히 탐할 수 없으나 어디 내놓아도 손 색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예전에는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려는 탐욕만 있었다면 지금은 종인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지친 그가 날아들어 편히 쉴 수 있는 나뭇가지이고 싶었다. 경수는 종인이 준 숙비의 유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종인의 유년기가 담긴 듯하여 고작 노리 개일 뿐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산막 안에는 홍류원에서 종인이 주었던 노란 우산도 있었다. 벌써 그에 게 두 개의 보물을 받아 버렸다. 경수는 샐쭉하게 미소 지으며 옥패를 민무늬 초록색 염낭에 조심히 넣었다. 그는 찬열에게 서신 한 통을 적었다. 화내서 미안하다는 사과문이었다. 조강을 마친 후 전갈이 날아들었다. 자객이 잡혔다는 희소식이었다. * 이야, 흰 물고기를 엮어 벗에게 주다( 結 素 魚 貽 友 人 )

87 종인은 그동안 청신을 은밀히 움직여 순금사가 은폐하려던 서궁 침입 사건을 낱낱이 파헤쳤다. 황제가 대인파를 크게 압박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인파 일부가 자객 사건에 대해 단서를 흘 렸음이 틀림없었다. 장문견이 예족 토벌에서 돌아온 후 자기 사람만 챙겨 대인파 내부에서 어느 정도 불만이 쌓인 결과이기도 했다. 더구나 황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 태후마저 뜨뜻미지근하게 나오니 장문견에게 불만을 품은 무리가 저들끼리 살길을 모색하려고 발버둥 침은 당연했다. 그날 시위들이 보았던 자객은 총 넷이었는데 다른 셋은 도주에 능수능란했으나 한 명은 발이 미끄 러져 자신궁 담벼락에서 떨어졌다 합니다. 살펴보니 과연 기왓장 하나가 깨져 있었고 벽에는 급히 흙 을 바른 흔적이 있었습니다. 깨진 기왓장에 대해 자신궁에서는 뭐라더냐? 별다른 변명은 없었습니다. 자신궁에서 자객이 빠져나왔다는 것은 어찌 알았느냐? 그날, 폐하의 명으로 궁 사문을 걸어 잠근 후 소신이 믿을 만한 금위군과 몇 날을 새워 물 샐 틈 도 없이 방비했습니다. 범인이 닷새 후 비밀 통로를 이용해 자신궁을 빠져나갔는데 그 끝이 바로 현 무문이었습니다. 네가 지키고 있었겠군. 청신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궐내 비밀 통로는 폐하와 봉군도위( 奉 軍 都 尉 ) *, 그리고 소인만이 아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어 찌 자신궁에 숨은 자객이 그곳을 활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안 위에 가득히 쌓인 상소문을 하나 펼쳤다. 호부에서 올라온 것으로, 남녘에 가뭄이 들 징조가 있으므로 치수 공사를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원칙이란 마땅히 따라야 할 근본 규칙이나 이것이 도구로 쓰이면 합법적인 흉기가 되지. 종인이 상소에 비답을 내렸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조금도 소홀할 수 없었다. 범인은 어디 있느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데려올 수 있습니다. 장문견의 동태는? 아주 조용합니다. 대인파에 내분이 있었다던데. 폐하의 추측이 딱 맞았습니다. 장문견의 차별로 소인배끼리 소란을 피운 것뿐이랍니다. 논공행상을 할 때는 원래 이리저리 말이 나오기 마련이지. 아시다시피 무정후가 전쟁으로 수도를 오래 비우는 동안 대인파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습 니다. 구심점이 되는 무정후가 장수들을 이끌고 나가는 바람에 분란이 일어도 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 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상소문을 펼쳤다. 동주 한서현 국경에 오랑캐가 빈번하게 염탐을 오니 이를 다스릴 목민관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동주는 예로부터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동북쪽이고 해안에 자리해 어느 정도 한계 점이 있었다. 그래서 북녘에서는 오랑캐가, 해로를 따라서는 해적이 출몰해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 었다. 근자에 한서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아 민심이 흉흉했다. 종인은 그 지역에 쓸 만한 사람 을 보내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대인파의 수장은 황세용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부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분산된 모양입니다. 사도가 문관들의 수장이 라 무신들을 배척하는 기미가 은연중에 나타난 것으로 압니다. 저런. * 근위대장. 종이품

88 태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저들 나름대로 불안했던 게 아닐까요? 소인배들이란 이익이 사라지면 저들끼리 물어뜯기 마련이지. 내일 당장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종인은 조금 전 보았던 상소를 맨 위에 올려두었다. 때마침 그 곳에 파견할 적임자가 떠올랐다. 달아난 세 명도 추적 중입니다만 붙잡은 놈의 입이 제법 무겁습니다. 함부로 혀를 놀리진 않겠지. 못해도 장문견 휘하에 있었을 것 아니냐. 어떻게든 알아내겠습니다. 수틀리면 고문이라도.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은 효력이 없느니라. 하오면 어찌 처결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놈에게서 장문견의 군사들이 쓰는 표창이 나왔다고? 예. 해초와 가시나무는 해안가에서 나고 자란 장문견의 상징이죠. 일이 아주 흥미롭게 됐어. 실내가 건조했다. 너는 당장 그자에게서 얻은 물증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내일이 지나거든 두 번 다시는 뜨는 해를 볼 수 없게 하라. 청신이 군기 잡힌 자세로 고개를 숙인 후 곧장 편전을 빠져나갔다. 밖에 있느냐! 당장 무정후를 들라 하라! 촛불은 무심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17. 추화불능비( 秋 花 不 能 比 ) 만상전( 萬 商 殿 ) * 에서 황제와 독대하는 것은 퍽 오랜만이다. 장문견은 멀거니 현판을 올려다봤다. 웅 혼하게 휘갈긴 필체가 이곳은 황제의 업무 공간임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어느 여름, 이 앞에 서서 지아비의 부름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린 딸을 떠올렸다. 가냘픈 목 이 부러질 듯 머리에 온갖 비녀와 보석으로 치장했으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옷자락이 다 젖도록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빌고 있었다. 그해 여름, 장문견이 전장에서 군주의 의전용 검을 함부로 휘두른 탓에 열일곱의 황제는 단단히 뿔 이 나 있었다. 의전용 검은 군사의 사기를 드높이려고 내린 것이지, 적들의 목을 치고 장수들에게 으스대라며 준 것이 아니었다. 이 일로 군부가 술렁거렸고 조정에서도 말이 많았다. 당시 대인파에서도 장문견의 방 자함을 두둔하지 못하였고 종인도 드물게 노발대발하였으니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장문견은 태후의 압력으로 종인에게 직접 사죄하러 갔는데 그 길목에서 아비의 죄 로 발을 동동 구르던 딸을 보았다. 장보여는 너무도 섬약해서 강풍이 불면 하릴없이 흩날리는 버들솜처럼 허공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 다. 그런 딸아이가 더운 날에 태성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얘기를 들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걸 본 아비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고, 장문견은 그 길로 황제에게 머리를 숙여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태후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었으므로 종인은 장문견이 직접 찾아온 것으로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현수궁을 찾지 않았다. 안 그래도 탐탁지 않은 장씨 가문의 여식인데 제대로 핑계거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문 견은 그런 종인의 태도에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얼마 뒤 연못에서 한가로이 노닐던 보여가 물에 빠져 죽었다.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던 딸의 시신이 여전히 눈에 선하였다. * 편전

89 이 문턱을 넘어보려 그리 애걸복걸하던 딸. 지아비의 사랑도 못 받고 허무하게 자결해 버린 가여운 딸! 무정후. 안으로 드시지요. 친절한 미소로 자신을 맞는 하개를 지그시 노려본다. 종인에 대한 원망을 노골적으로 비칠 수 없어 서다. 이윽고 화사한 봄날과는 달리 차분하고 고요한 실내가 그를 맞았다. 지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이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안에는 다담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얘기가 조금 길어질 모양이다. 장문견이 인사하자마자 종인은 서글서글한 미소로 자리를 권하였다.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바들 바들 떨던 꼬마가 어느덧 훌쩍 자라 장문견 본인의 키를 넘긴 채였다. 근자에 허리 통증으로 밤잠을 설친다고요? 만년 청춘인 줄 알았는데 신도 서서히 나이가 드나 봅니다. 세월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오. 그렇지 않아도 내의원에 일러 쌍보환( 雙 補 丸 )과 보음탕( 補 陰 湯 )을 챙겨두라 했으니 돌아가는 길에 필히 챙겨가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무정후의 안위가 곧 연의 안위인데 어찌 소홀함이 있겠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오죽 불편했으면 조회에 나오지도 못했겠소? 지금은 괜찮으니 더는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가볍게 차를 들이켜며 궁금하지도 않은 서로의 안부를 시시콜콜하게 주고받았다. 장문견은 종인이 하루가 다르게 속을 알 수 없어진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태성전으로 사관을 밀어 넣은 데다 태후가 당분간 내버려 두라고 해서 잠자코 있긴 하나 끓어오르는 분기가 누구를 잡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전에 한서현에 목민관을 급파하라고 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떻소? 대충 들었사옵니다. 오랑캐들이 호시탐탐 한서현을 노리지만 그동안 마땅한 관리가 없어 지역을 다스리는 데 폐단이 많았지요. 누구를 천거하셨는지는 모르겠사오나 이참에 오랑캐를 뿌리 뽑으면 더 할 나위 없을 겁니다. 장문견은 한발 물러났다. 태후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어떻게든 종인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 야 했다. 그럼 다행이오. 관리를 보내는 족족 이런저런 말이 나와 한서현령이라는 자리가 저주받았다는 헛 소문까지 돌았지. 백성들이란 본디 말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법이지요. 나지막하게 터트리는 웃음소리에 서늘한 기운이 섞였다. 역시 경의 발언은 시원시원하구려. 짐은 그 거침없는 입담이 좋소. 부끄럽습니다. 경이 아픈데도 오늘 이렇게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요. 찻잔을 탁 내려놓는 소리가 퍽 무거웠다. 쨍하는 유리그릇의 공명이 장문견의 신경을 긁었다. 평소 와 같은 미소인데 묘하게 뒤틀린 듯한 느낌. 사관을 들이라 논하던 자리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처럼 희미한 냄새가 나더니 이제는 울발하듯이 날뛰고 있다. 김종인이 저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나. 윤음을 기다립니다. 태후마마의 탄일에 자객이 들었던 것은 경도 잘 알 거요. 순금사에 조사를 명하였는데 범인이 워 낙 용의주도하여 이제야 결과가 나왔소. 장문견은 다소 긴장했다. 순금사는 순금사령를 비롯한 관리 대부분이 대인파이고 장문견과도 오래도록 결탁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태후의 교지도 있고 하니 분명히 어영부영 사건을 덮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자신만만한 황제의 눈빛이 거슬린다. 마치 뭔가 대단한 단서라도 잡은 듯 반짝인다.

90 그것참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수사 결과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여유를 부려도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그저 어린 황제의 저 나긋한 입매가 아니꼬워 보이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날 서궁에 들이닥친 자객은 모두 넷이었소. 그중 셋은 비호처럼 도망쳤는데 한 명은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해 궁 안에 숨어 있다가 현무문 밖에서 잡혔다오. 기묘하게 위화감을 일으키던 원인이 이것이었나. 장문견은 자신궁을 탈출했다던 자객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서 나름대로 수색 중이었다. 그런데 황제 의 수중에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만일을 대비해 일부러 자신궁 지하에 피신해 있으라고 한 거였는데 그 통로를 황제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자신궁이 아무리 태후의 처소라 해도 황궁은 천자의 집.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꿰고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짐도 이 일을 어찌 처결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더군. 장문견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종인의 눈빛은 온화하기만 한데 희한하게도 강렬한 태양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자객의 몸에서 이것이 나왔소. 종인이 비단 주머니를 던졌다. 장문견이 일어나 그것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해초와 가시나무 무늬 가 새겨진 표창 두 자루가 들어 있었다. 장가( 張 家 )의 표식이다. 장문견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누군가 뒷덜미를 낚아채 얼음물 속으로 던진 기분이었다. 그려진 그림은 장씨 문중의 표식으로 알고 있소. 폐하. 이것은. 자객이 경이 부리는 장수들의 휘하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뜬금없는 소리에 장문견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표창이 이미 장씨 문중의 것임을 입증하는데 장문견이 아닌 장수들의 농간이라니? 장문견이 빠르 게 머리를 굴렸다. 종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잇속에 밝은 사람이니 조금 전 내뱉은 말을 허투루 들을 리 없다. 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신은 모르겠사옵니다! 경은 오래도록 이 나라를 위해 충성해 왔지. 더구나 사사로이는 태후께서 경의 누님이 되시니 굳 이 마마의 탄일에 자객을 들일 까닭이 없지 않소? 신은 억울하옵니다. 누군가 신을 음해하려 이 같은 일을 꾸몄음이 틀림없사옵니다! 아직 배후를 밝히진 않았으니 안심하시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허나 자객이 짐의 손에 있으니 배후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요. 장문견은 자신을 쥐락펴락하는 황제 때문에 진땀이 쏟아졌다. 짐이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조사를 명할 수 있지. 신은 결백하나이다. 믿어주십시오! 당연하오. 경이 이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짐도 잘 아니까. 영명하신 폐하께서 진상을 밝혀주시리라 믿사옵니다. 헌데 짐의 입장도 퍽 곤란하오. 경이 아무리 이번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해도 세간의 눈은 그렇지 않거든. 또, 누가 진범이든 장가의 표식이 새겨진 증좌가 나온 만큼 짐은 장씨 일가와 이 일의 연관성을 따지고 경계해야만 하오. 누군지는 모르겠사오나 참으로 악독하군요. 신은 오직 대연을 위해 평생 전장을 누볐는데 시기와 모함으로 궁지에 몰리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찔할 뿐입니다. 장문견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우짖었다. 종인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짐은 태후께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소. 마마께서는 무릇 정치란, 하나를 빼앗으면 하나를 내어주는 장사와 같다고 하셨지. 뻑뻑하게 마른침이 꼴깍, 장문견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91 짐은 이 사건을 덮으려하오. 뜻밖의 결정에 장문견은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능구렁이 한 마리가 어린 황제의 몸 안에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경이 세운 공이 적지 않고 태후께서도 탄일에 벌어진 일로 더는 시끄러워지길 원치 않으시오. 어 떤 일은 덮고 가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소. 영명하십니다. 경도 알겠지만, 몇몇 대신들이 짐이 제기한 조세 개혁에 생떼를 쓰며 반발하고 있소. 지방 관아에 서조차 시도 때도 없이 상소문을 올려대니 호부에서는 이를 처리하느라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지. 어 쨌든 나라를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군주의 과업 아니겠소? 헌데 아직도 짐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는 자들이 있어 퍽 난처하다오. 하여, 짐은 무정후가 혜안을 주면 좋겠소만. 일순, 당했다 는 석 자만 장문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질적인 공기는 확신에 찬 자신감에서 뿜어져 나왔다. 다른 때였다면 세 치 혀로 위기를 모면했겠 으나 자객이 황제의 손에 있는 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장문견은 속으로 한탄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활기차 보이시오. 오는 길에 목련 나무에서 꾀꼬리 한 쌍을 보았습니다. 노랫소리가 듣기 좋아 소자도 모르게 웃음 을 흘렸습니다. 주상이 자주 웃으면 좋은 일이지. 따스한 햇볕 아래, 화초는 흐무러지게 피어나 행인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벚꽃, 해당화, 파초, 목련, 개나리, 철쭉, 살구꽃을 중심으로 봄꽃이 만개해 화원을 장식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긋한 꽃 냄새 가 퍼졌다. 여름이면 자귀꽃과 배롱나무, 등꽃이 만발하여 또 다른 절경을 자아낼 것이다. 화원에는 몇 채에 달하는 정자가 있었다. 그중 대나무와 눈향나무, 협죽도를 감상하기에 좋은 상려 정( 常 勵 停 )에서 황제와 태후가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하얀 용각석 탁자 위에는 모과편과 잣강정, 작 설차가 은근히 향을 냈다. 태후가 젓가락으로 잣강정 하나를 집어 종인의 청옥 접시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주상이 좋아하는 간식이라 특별히 준비했다오. 내가 중궁일 때 진왕과 주상이 현수궁에 놀러 오면 자주 만들어줬는데 기억하시오? 그럼요. 현수궁의 모든 음식은 태후마마께서 직접 관리하셨고 덕분에 맛이 일품이었으니까요. 아바 마마께서도 마마의 솜씨는 수라간과 견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왕은 단 것을 좋아해 계초정을 잘 먹었지. 두 황자의 입맛을 맞추려고 나도 노력했다오. 태후마마의 세심함 덕분에 형님과 소자가 강건히 장성할 수 있었습니다. 호호. 농으로 한 말인데 그리 진지하게 나올 것까지야. 웃어넘기는 태후와는 달리 종인은 사뭇 진지했다. 마마께선 소자를 위해 평생 애쓰셨는데 불초자식은 효를 다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말이라도 들으셨소? 아닙니다. 헌데 어찌 그러시오? 마마께서 내전에 난입한 자객 사건을 덮으라 하신 덕에 조정은 분란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소 자는 그저 분기탱천하여 범인을 찾아 주륙할 생각만 했지, 마마처럼 조정의 이해관계는 깊게 따지지 못했습니다. 장문견과 독대한 후 대인파가 갑자기 모든 반발을 거둬들이고 원만하게 조세 개혁에 합의했다는 사

92 실은 태후도 잘 알고 있었다. 각지에서 빗발치던 상소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태후는 종인이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려 함을 진즉부터 간파했다. 그런데도 잠자코 있는 것은 아직은 어린 호랑이가 본인의 지위에 완전히 도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기, 치기, 혈기. 낮잡아서 이를 수 있는 모든 단어를 갖다 붙인다 해도 구 년간 감췄던 발톱을 드러내기엔 모자랄 것이다. 김종인은 과연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구도 그녀를 이긴 적이 없었기에, 태후는 이제 막 여 의주를 탐하기 시작한 교룡이 진짜 황룡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태후가 종인을 인자하게 바라보았다. 영상한 얼굴에서 한때 지독하게 사모하였던 남편, 효경제의 이 목구비가 드러났다. 무정후와 관련한 물증이 나오는 바람에 소자가 상당히 곤란했습니다. 하온데 마마의 가르침대로 행하였더니 그럭저럭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녀자가 정사에 대해 뭘 알겠소. 총명한 주상께서 잘 처리하셨겠지. 마마께 심려 끼친 점이 적지 않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심려라니? 만기친람으로 바쁜 와중에도 자주 문안 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항상 자신을 낮추니 참으로 겸손하시오. 자신궁과 장문견을 압박하더니 대인파를 누르고 조세안을 혁파하기까지! 길지 않은 기간에 해낸 많은 일은 종인의 과감함을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 태후는 종인의 수고로움 이 가상했다.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씩 되찾아 가는 노력이 어여쁘기까지 했다. 주상이 어리고 무능하다며 깔보더니 아우님께서 아주 호되게 당하셨소. 그녀가 후후, 낮게 웃었다. 대신들이 소자더러 친정을 시작한 기념으로 과거를 준비하라 성화입니다. 일리 있는 소리지만, 아 직 궁내가 어수선하니 우선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입격한 자들을 대상으로 대과를 치를까 합니다. 하 지만 소용되는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은지라. 마마께선 어찌 보십니까? 영회황후가 서거한 후 황실의 상심이 커 과거를 치르지 않았지. 인재는 나라의 기둥이니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럼 길일을 잡아 과거를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난 이미 정사에서 손을 뗐으니 늙은이의 의견을 물을 필요는 없소. 소자는 마마의 조언 한마디가 더 친근하고 가슴에 와 닿습니다. 조정엔 능수능란한 대신들이 즐비하니 그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시오. 매사 아녀자와 정사 를 논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소. 알겠습니다. 호랑이 새끼인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빨리 두각을 나타낼 줄이야. 누군가 그에게 촉발제가 되지는 않았을까 곰곰이 되짚어 보게 한다. 태후는 당분간 몸을 최대한 낮추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다가는 하룻강아지 날뛰는 꼴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책장을 파르르 넘기자 지난가을에 끼워 두었던 책갈피가 나왔다. 연한 홍자색의 꽃은 얼핏 백합이 나 나리꽃과 비슷했다. 우연히 산에 핀 것을 발견하고 찬열이 경수에게 꺾어준 것이다. 선물했을 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벗이 준 거라고 책갈피로 만들어 책장 사이에 끼워둔 것을 보니 뿌듯했다. 찬열은 수분이 날아가 뻣뻣해진 책갈피를 조심스레 집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퍼석하고 자잘 한 가루가 떨어졌다. 때마침 물을 가지러 갔던 경수가 평상으로 걸어왔다. 청년의 머리 위로 휘영청 높은 달이 걸렸다. 이 꽃 이름이 뭐였지? 찬열이 물었다. 상사화( 相 思 花 ). 그게 거기 있었어?

93 버린 줄 알았다. 경수는 찬열에게 수통을 건넸다. 찬열이 물을 마시는 사이 경수는 책상 앞에 자리를 잡은 후 찬열 의 손에 있던 상사화를 가져갔다. 향기는 날아가고 케케묵은 책 냄새만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상사화는 꽃이 피려면 반드시 잎이 먼저 져야 해.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늘 그리워하지. 그 래서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래. 지금 네게는 어울리지 않으니 이건 내가 도로 가져가야겠다. 다시, 경수의 손바닥에 놓인 책갈피를 가져간다. 바싹 마른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어울리지 않는다니? 도경수 인생에 다시없을 봄날인데 가을에 피는 꽃이 무슨 소용이겠어. 나 참! 꽃말이 불길한 줄 알았다면 꺾지 않았을 거야. 놀리지 말랬지. 경수가 낮게 으르렁거렸고 찬열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경수가 상심했다는 생각에 한동안 괴로웠다. 하지만 경수가 종인에게 요패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름을 덜었다. 어떤 날은 무위장군이 하찮은 화조사로 전락했다며 투덜거렸더니 경수의 귀가 새빨개져서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다른 것은 따질 필요 없겠지. 네가 그렇게 행복해 하니까. 경수는 요즘 부쩍 밝은 얼굴이었다. 월란이 죽은 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찬열은 그런 경수의 소 소한 변화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쩐지 야릇하기도 했다. 이제 청년의 마음에 박찬열이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묘한 박탈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랬듯, 고요한 산처럼 침묵할 뿐이다. 찬열은 어제 종인이 건넨 서찰을 경수에게 내밀었다. 경수는 담담하게 서찰을 받았지만 매번 찬열 을 통하다 보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이제는 밤마다 황제 곁에 있을 수 있게 됐으니 찬열에게 화조사 노릇은 그만 시켜야겠다. 경수가 서찰을 받고 멋쩍어하면 찬열은 알아서 온갖 핑계를 대며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난번 에는 손을 씻으러 가겠다더니 오늘은 근처에 애쑥이 남았는지 보러 간단다. 찬열이 자리를 비우자 경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살핀 후 신중하게 봉함을 열고 서신을 꺼 냈다. 두 장의 천련지( 川 連 紙 ) * 가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시, 다른 한 장은 짧게 적은 소회나 전하고 싶은 말이다. [옅고 깊으며 붉고 흰빛 난만히 뒤섞였나니 그 누가 하늘 베틀을 빌려와 수고로이 짜냈는가. 그것 은 봄바람도 세태가 없지 못하여 귀한 집의 지관에다 도화를 비단처럼 꾸며 놓았네.] ** [일전에 얘기하려다 못했는데 정원에 삼색도가 탐스럽게 피었다. 나무 하나에 세 가지 색깔을 가진 복숭아꽃이라니 신기하지 않으냐? 선제께서 살아계실 적에 남녘에서 바쳤다는데 한동안 꽃을 피우지 않더니 올해 개화했다. 아무래도 궁에 좋은 일이 있을 모양이다.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더군. 언제쯤이면 내 곁에 오려느냐? 귀한 꽃을 봐도 감동이 없고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구 나.] 종인의 노골적인 채근에 경수는 실소가 터졌다. 이제부터는 지긋지긋하게 마주할 텐데 하루라도 빨 리 자신에게 오라고 성화다. 종인은 보기보다 성마른 성격이었다. 경수는 말갛게 미소를 머금고는 얼른 종이를 펴고 문진으로 고정했다. 문교라지만 사실상 은밀한 염정( 艶 情 )으로 충만한지라 누가 볼세라 공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퍽 오랜만에 주고받는 서찰이라 하고 싶은 말이 무척 쌓였는데 막상 붓을 드니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 중국에서 나는 종이로 주로 편지지로 씀 ** 이개, 삼색도( 三 色 桃 )

94 [봄볕은 느릿느릿 어디로 돌아가는가. 다시 꽃 앞에서 술잔 들었네. 종일토록 물어도 꽃은 말이 없 구나. 그대, 누구를 위하여 시들고 누구를 위해 피는가. * 꽃이 피었을 때 아껴주세요. 지고 나면 다시 보기 어렵답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쓰려다가 붓을 내려놓았다. 그건 지나치게 헤퍼 보였다. 겨우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짧은 만남은 타는 듯한 갈증을 남겼다. 그리워도 감히 그립다 말할 수 없는 처지다. 짬 날 때마다 자신을 위해 정성껏 서신을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경수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테니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빙그레 피어오른 미소는 팍 터지려는 꽃망울 같아서, 멀리서 경수를 지켜보던 찬열은 덩달아 씩 웃 고 마는 것이다. 하늘에 걸린 맑은 구슬처럼 환하게. 18. 면신례( 免 新 禮 ) 으레 관직에 새로 오르거나 새 부서에 발령을 받으면 신래들은 허참례와 중일연, 면신례를 행하였 다. 허참례란 관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의미의 신고식이고, 면신례는 선진들을 초대해 성대 하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중일연은 허참례와 면신례 중간에 행해졌는데 이때도 상다리가 휘도 록 음식을 차려 선진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러나 음서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오직 태후와 사도가 뒷배를 봐주다 보니 누구도 감히 경수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를 기록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사관들은 일에 대한 자존감만큼이나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유명 했다. 실록에 사견을 붙일 순 있어도 보통 정치적 외압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그들이었으므 로 당연했다. 그런 그들이 어떠한 자격도 갖추지 않은 출신 불분명한 이를 환영할 까닭이 없었다. 그나마 일주일간 훈육자로서 안면을 튼 홍만립만이 경수가 기댈 언덕이었다. 그래서 경수는 홍만립 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오늘 면신례를 행하니 반드시 선진들을 이끌고 교안 최고의 기방인 명월관에 나와 달라고 했다. 관리들에게 신래 불리기는 재미있는 행사이자 통과 의례였다. 그래서 경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진들을 대접하고자 했다. 하지만 중일연은커녕 하나같이 허참례에 불참 의사를 밝혀서 그는 퍽 난 처한 상황이었다. 어둑시니가 찾아온 저녁 무렵, 명월관은 최고의 기루답게 손님들로 북적였다. 요란스러운 차림의 기 생들이 어사대만큼이나 도도하기로 자자한 예문관 관원들을 모시고자 큰 방을 차지하고 술상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찬열은 오늘 궁에서 번을 서느라 경수의 면신례에 자금을 대주고도 돌보지 못함을 미 안해했다. 약속한 시각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선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홍만립이 이 자리에 동료들을 모으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그의 뿔이 난 눈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경수는 빠짐없이 와준 것에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선진들을 안으로 모셨다. 안에는 진수 성찬이 마련되어 있었고 평소에 보기 어렵다는 기녀들도 대기 중이었다. 교안에서 내로라하는 그녀들이었지만 지나간 자리에서 계집들이 향기라도 맡으려고 서성이게 한다 는 박찬열의 부탁에 기꺼이 자리를 빛내기로 했다. 상석에 품계대로 관원들이 둘러앉았다. 사이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미소를 흘리는 기녀들이 끼어 앉 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발걸음 해 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마뜩잖고 부족하겠지만 선진들이 닦아놓으신 길에 먼 지 한 톨 흩날리지 않게끔 맡은 임무에 충실하겠습니다. * 엄운, 석화( 惜 花 )

95 태성전에 인사 올리러 가는 경수를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았을 뿐, 홍만립을 제외한 누구도 도경수 를 가까이서 접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도경수는 홍만립이 밑밥을 깐 것처럼 관옥이었고, 목소리는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낮 아 진중했으며 책만 파는 서생이라기엔 눈빛에 장수와 같은 결기가 서 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 다. 말씨도 공손했고 예의범절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소인이 무지하여 자세히는 모르나 원래 면신례에서는 호종례( 呼 鐘 禮 ) * 를 행해야 한다지요? 하온데 소인은 기생 손목을 잡아도 별 감흥이 없으니 선진들께 인사 올리며 잔을 돌리고 싶습니다. 물러섬 없는 당당한 태도에 관원들이 동요했다. 홍만립만이 나직이 실소를 흘렸다. 사내가 계집 손을 잡는 데 감흥이 없다니 어디 극락에서 온 돌부처쯤 되시나? 같은 검열 중 하나가 야들야들한 기녀의 손목을 잡고는 빈정거렸다. 앳된 기녀는 화초기생을 면한 지 얼마 안 된 듯 낯을 붉히며 몸을 배꼬았다. 그럼 소인이 한 잔씩 잔을 올리겠습니다. 소인, 하늘 같은 선진이신 노공선 나리께 관직에 임하며 큰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자신의 성명을 대는 경수에게 노공선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노공선을 시작으로 막내 송인직에 이르기까지 아홉 명이나 되는 선임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도 틀 리지 않고 맞추었다. 그의 벗바리라는 태후와 사도조차 예문관 관원들을 일일이 알지 못하는데 어떤 경로로 선진들의 신 상을 파악했는지 입을 쩍쩍 벌리고 경악할 뿐이었다. 잠시 홍만립이 의심을 샀으나 그는 자신과 관계 없는 일이라며 극구 부인했다. 이 역시 미리 예문관 관원들의 용모파기와 명단을 손에 넣은 찬열의 도움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좋은 밤엔 마땅히 고상한 이야기를 나눌지니, 밝은 달빛에 잠을 이룰 수 없네. ** 모자란 후임의 정 성을 어여삐 봐주시고 오늘은 마음껏 취하시길 바랍니다. 이후로 관리들은 숨 쉴 틈도 없이 부어라, 마셔라 술판을 벌였다. 모처럼 맞은 후임이 그것도 교안 에서 난다 긴다 하는 꽃만 모아놓은 명월관에서, 이름값 높은 아이들을 옆에 앉혀놓고 황홀경을 선사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선임들은 예상하지 못한 환대에 조금씩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경수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고 사 관의 역할에 대해 홍만립이 그랬듯 일장연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더러는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선 진과 기녀의 낯 뜨거운 입맞춤에 경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후임이 온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뽑혀 실망했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젓가락을 두드 리고 가락에 몸을 맡기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 얘기 들었나? 사역원에서 몇 달에 걸쳐 작업한 번역본을 교서관에 새로 온 정자( 正 字 ) *** 가 잃어 버렸다고 하네. 뭐라고?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다니. 양 관청에서 난리가 났겠군. 땡! 아쉽게도 아닐세! 다음 날에 그 번역본은 신래의 집에서 발견됐다는데 술에 취해서 마무리 작 업하다가 저도 모르게 집에 가져갔다더군. 얼씨구? 어쨌거나 덕석말이는 면치 못하겠군그래. 이봐, 신참! 자네는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길 바라네. 잘못하다가는 태형이 아니라 자손 들의 출사가 막힐 수도 있음이니. 잔인한 얘기는 그쯤 하게. 그래도 저 뽀얀 얼굴이 한 달 뒤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긴 하군.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골골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하하하! 짓궂은 농담이 오가는 난장판에 가까운 자리에서 술에 먹히지 않은 사람은 오직 경수와 홍만립, 그 리고 대교 임제관뿐이었다. 홍만립은 술이 약하다며 몇 잔 하지도 않았는데 벽에 기대어 잠든 척했다. * 새로 온 관원이 한 손에는 기생 손목을,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선임들의 이름을 부르는 놀이 ** 이백, 우인회숙( 友 人 會 宿 ) 중 *** 종구품

96 그가 그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닌지라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임제관은 한참 전부터 경수를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손가락을 퉁기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만! 그 바람에 해롱해롱 몸을 가누지 못하던 예문관 관리들이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래, 그래.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 경수가 영문을 몰라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는 동안 임제관은 안광을 빛내며 젓가락으로 그를 가 리켰다. 자네, 태후마마의 탄일에 자객으로 잡혔다가 용연무인지 뭔지 희한한 춤을 추고 누명을 벗었던 그 친구로군!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그 말에 귓불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경수의 주위를 둘러싼 선진 중 다수가 태평연에 참석하지 않은 관리들이다. 하지만 내전에 자객이 침입한 일로 오해받은 무용수 하나가 대단한 춤을 선보인 후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궁에 제 법 퍼져 있었다. 얼마나 춤사위가 멋졌으면 황제가 장수들에게 보여주려고 초빙하기까지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 일의 주인공이 도경수라는 소리에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자네 원래 무희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광대? 경수는 치욕스러웠던 그때 일을 떠올리며 허벅지 근처에 늘어뜨린 손에 힘을 주었다. 광대라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벽에 기대어 잠든 줄 알았던 홍만립이 슬그머니 일어나 게슴츠레한 눈으로 임제관에게 물었다. 내, 형님의 초대로 태평연에 참석했다가 별꼴을 다 보았지. 임제관은 장문견의 수족인 임제환의 아우였으므로 그날 지인을 초대해도 좋다는 어명에 따라 장수 들의 연회에 참석했었다. 다녀와서 어찌나 자랑질했는지, 참석하지도 않은 연회가 눈앞에 생생할 지경 이었다. 이 친구가 선보인 춤은 며칠 만에 완성할 수 없는 놀라운 수준이었어. 하여 대단한 솜씨라고 생각 했네만, 정말 예상치 못한 인연이로군. 임제관은 겉으로는 칭찬하는 것처럼 보여도 굉장히 조롱하고 있었다. 경수는 오늘 처음 만난 선진 이 나와 무슨 원수를 져서 이러는가 싶었다. 용연무라고? 처음 들어보는 춤인데. 도경수가 태후마마의 탄일에 춤을 췄던 그 사람이라고? 그래서 도경수가 사대부라는 거야, 천한 광대라는 거야? 사람들이 술렁거렸고 홍만립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짧게라도 그 춤 한 번 보여줄 수 없나? 검을 쥐고 벼락처럼 꽃잎처럼 휘몰아치 는데 며칠 동안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말이야. 태평연에서 황제가 두둔한 무용수가 뒤늦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으로 둔갑했다는 사실은 호사가들 의 먹잇감으로 충분했다. 여기 모인 이들 중 그날 일을 풍문으로나마 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네. 면신례를 행하는 겸 멋진 춤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경수는 자신을 채근하는 임제관에게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소인의 증조고( 曾 祖 考 ) * 께선 대장군을 역임하셨지요. 조고( 祖 考 ) ** 를 일찍 여의시는 바람에 부친께 서는 변변찮은 사정으로 빈한하게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모두 대나무처럼 올곧은 분들이라 하늘을 우 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셨습니다. 오직 소인만이 천지 분간을 못 하고 외가에서 전해지는 춤 한 자락을 배웠을 뿐입니다. *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 돌아가신 할아버지

97 어투는 다소 딱딱했지만 정중함은 유지했다. 혹여 선진께서 소인이 사내의 몸으로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춤춘 것이 고까우셨다면 마땅히 사죄 드리겠습니다. 허나 폐하의 부탁으로 딱 한 번 선보인 용연무를 다시 추라 하시면 소인은 감히 아니 된다 말씀 올릴 것입니다. 어느샌가 청년의 이야기에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소인은 광대가 아니며 염치도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날은 폐하께서 소인의 잔재주를 높이 사시어 여러 장수들의 흥을 돋우고자 간곡히 부탁하시어 응하였을 뿐입니다. 선진께서 소인의 춤을 귀하게 여기신 점은 감사하지만 용연무는 엄연히 소인 가문의 유산입니다. 함부로 남 앞에서 보이지 말라는 가자( 家 慈 ) * 의 당부도 있었지요. 물론 선진께서 하라면 할 수도 있 겠으나 대연 최고의 해어화가 핀 이곳에서 멋대로 춤사위를 놀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하여 선진 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함을 섭섭하다 여기지 마십시오. 공손한 거절에 잠시 임제관의 말문이 막혔다. 수상하군! 폐하와는 대체 언제부터 알고 지냈기에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궁을 들락날락한단 말인 가? 당시 소인은 절친한 벗의 초대로 궁에 들어왔다가 우연히 폐하께서 소인의 춤을 보시고는 훌륭하 다며 칭찬해 주셨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태평연까지 참석했을 뿐입니다. 절친한 벗이라고? 무위장군 박찬열이라고 아시는지요? 그제야 임제관은 재차 말문이 막혀 앓는 소리를 쏟았다. 찬열의 품계는 그보다 한참이나 높았다. 더 구나 박찬열은 태후와 장문견의 인척이고 그의 부친인 박우헌 역시 사예교위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어 실로 위세가 대단했다. 황제가 끌어주고 태후가 밀어주다 보니 찬열은 본의 아니게 궁에서 감히 손댈 수 없는 존재로 인식 되었다. 가문끼리 오래 왕래하여 친형제처럼 자란 분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장군에게 직접 확인해 보십 시오. 폐하께서는 분명히 그날 자네를 친히 데려온 무용수라고 하셨네! 소인이 불행히 자객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리된 것입니다. 인정 많으신 폐하께서는 소인이 애꿎은 일에 휘말리는 것을 막으려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누가 믿지? 황제 폐하께 직접 여쭤보시면 될 일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선진들 앞에서 해명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경수에게 집중했다. 당시 소인은 퍽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사실을 밝히면 태학관 유생이 연회장에서 춤이나 판 다고 유언비어가 퍼질 수도 있었으니까요. 선진께서도 내심 폐하와 소인이 내밀한 관계임을 경계하시 어 그리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늘에 맹세컨대, 폐하와 소인은 결백합니다. 시원하게 한 방 먹은 임제관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더는 물고 늘어질 만한 꼬투리가 없었다. 공연히 선진께서 오해하게 만든 것 같아 송구합니다. 경수는 진심과는 다른 표현으로 임제관을 궁지로 몰았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람 들이 수군거리자 그제야 꽁지 빠지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지만 경수는 상관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고 차라리 잘됐다. 이렇게 밝힘으로써 전화위복이 된 셈이니까. 저자는 원래 심술궂기로 유명해. * 남에게 자기 어머니를 이르는 말

98 술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마시지도 않더니만, 별. 증조부께서 대장군을 지내셨다고? 함자가 어찌 되시는가? 무위장군과 친형제처럼 자랐다니 가문끼리 아주 막역한가 보군.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경수는 달걀 같은 두 볼을 끌어올리며 객쩍게 웃기만 했다. 홍만립이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라며 혀를 내둘렀다. 간밤에 찬열에게 경수가 예문관 선진들을 모아놓고 면신례를 행할 것이라고 들었던 종인은 종일 무 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조용히 하개를 시켜 알아보았다가 명월관에서의 일을 듣고는 픽 실소를 터트렸다. 말대꾸하기로는 도가 텄다고는 여겼지만 이 정도로 능청스러울 줄은 몰랐다. 과연 도경수는 태학관 우수생답게 총명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우수했다. 태평연에서의 일로 경수가 궁내에서 생활하는 동안 여러 불편함을 겪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본인이 그걸 해결해 버렸으니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와 면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인파의 견제를 받는데 찬열과의 관계마저 드러났으니 이래저래 경수는 신래들 중 가장 주목을 받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것만은 피하 고 싶었는데 일이 다소 어그러지게 됐다. 어쨌든, 태성전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경수를 밀어 넣은 사람은 태후였으니 당분간은 군소리 없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나눈 사이라는 것만 들키지 않는다면 경수는 이중간자로서 종인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영원이란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그림자가 되겠다고 했던가. 그럼 나는 그 림자가 온전할 수 있도록 이전보다 또렷하고 확고한 태양이 되어야겠지. 담벼락과 꽃잎 한 장에도 핏 방울이 맺힌 이 궁에서 너만은 온전할 수 있게. 종인은, 경수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더욱 강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수가 우러르 고 흠모할 수 있는 완전한 하늘이 되고 싶었다. 폐하. 금선공주의 아드님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편전에 든 백현은 예를 갖춘 후 상석 아래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태후의 탄일 이후 한 번도 입 궁한 적이 없는데, 오늘 궁에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고 어쩐 일인가 싶었다. 집에 머물더니 안색이 환해졌구나. 고모님은 잘 계시느냐? 예. 요즘은 미리 하절을 준비하신다고 모시옷을 짓느라 바쁘십니다. 이제 겨우 사월 하순이거늘. 본디 이맘때쯤부터 천천히 여름을 준비하십니다. 부지런한 성격다우시군. 옷감을 내어주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어머니께서 부군이 죄인이고 사직에 공도 없는데 번번이 받기만 하는 것은 몰염치하다고 하셨습니다. 부군이 죄인 이라는 대목에서 금선공주의 드러내지 않은 분노가 엿보였다. 사람들의 평판이 나쁘지 않다고 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 원독이 오죽할까 싶 다. 몰염치라니 당치도 않다. 그렇지 않아도 상의부에서 다섯 가지 염료로 물들인 세모시를 만들었다 더구나. 한 필씩 내릴 테니 사양치 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백현은 머리를 조아렸다. 얼마 전에 형님의 스승인 박태흥이 연로하다며 사직서를 냈다. 근데 쓸 만한 사람이라 짐이 좀 더 곁에 두고 싶더군.

99 이만한 인물은 찾기 어렵다. 하여 관직을 낮추고 한서현령으로 제수시켰다. 거기가 고향이라던데? 고향이라기보다는 외조모께서 사셨다 합니다. 그래? 헌데 걱정이다. 너도 알다시피 한서현령은 저주받은 자리라고 소문이 났지. 목민관을 보내면 다들 일 년도 못 버틴다. 종인은 크나큰 근심인 듯 살풋 미간을 좁혔다. 뜻밖의 일이 공교롭게 겹쳤을 뿐이겠지요. 실은 한서현에서 얼마 전에도 살인사건이 났다. 백성들이 납세와 부역에 불만을 품고 현령을 죽였 다는구나. 무지한 백성들이 뭘 알겠습니까? 조정의 관리를 죽인 것은 그릇된 일이나 애초에 아궁이에 장작을 던지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종인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하냐? 뭔가 안다는 듯 들리는구나. 소신도 예전에 한서현을 한 번 둘러본 적이 있사온데 말씨나 인상이 험악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들 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삶이 궁핍하여 지쳐 있었지요. 목민관이 자주 바뀜은 수령이 제 역할을 못 하고 고혈을 빼먹은 탓이 아닐는지요? 듣고 보니 그렇군. 도독을 보낸 보람이 없어. 그들의 기질이 온후하지 못한 것은 땅이 척박하고 기후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나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심할 뿐, 친해지면 정이 넘쳤습니다. 네가 전국에 발자국을 찍고 다니시는 줄은 알았지만 한서현까지 가보셨을 줄은 미처 몰랐다. 대단 하다. 짐은 바다도 못 봤는데. 종인이 약간 시무룩해지자 백현이 얼른 둘러댔다. 폐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가실 수 있습니다. 강산의 주인이시잖습니까? 그래,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아무튼 짐은 그곳에 박태흥을 보낼 것이다. 헌데 민심이 흉흉해서 성 난 백성들이 박태흥까지 죽일까 봐 걱정이로다. 스승이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지만 백현은 종인이 왜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내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백현은 어렴풋하게 짚이는 까닭에 난감했으나 굳이 티내지는 않았다. 백현아. 예. 너도 슬슬 고모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천방지축 같은 소신 때문에 어머니께서 고생이 많으셔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고모님께 아들이라고는 너뿐인데 대체 언제까지 세상을 유람하며 살 작정이냐? 견문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미거한 소신을 방랑자로 만들었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머지않아 과거가 열리니 잔소리 말고 응시하라. 합격하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종인의 으름장에 백현은 진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외람되오나 소신은 그동안 세상 구경만 했지, 공부와는 일절 담을 쌓고 살았나이다. 짐 앞에서 허언을 늘어놓으면 어찌 되는지 모르느냐? 박태흥이 입이 마르도록 네 칭찬을 늘어놨으 니 어리눅게 굴어봐야 소용없다. 하오나 소신은 연치가 어리고 실력이 미진하여 조정에 출사한들 한직에 그칠 것입니다. 처음부터 당상에 오르려 하였느냐? 그것이 아니오라. 짐은 네가 중앙에 진출하길 바란다. 소신은 욕심이 없습니다. 지방 아전이라도 만족할 것입니다. 짐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마라. 외직으로 나가면 지방을 호령할 순 있어도 사대부와 조정을 아우를 순 없느니라. 백현의 표정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100 짐이 볼 땐 지금 조정엔 박태흥만한 사람이 없다. 관직을 오래 쉬긴 했지만 중망도 두텁고 치국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지. 원래 너의 스승이었으니 당분간 그 밑에서 더 공부하라. 하오나 소신은 도성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쯧. 한서현이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민심이 들끓은 이때에 연로한 네 스승만 보냈다가 백성들이 또 날뛰면 어쩌란 것이냐? 완강한 종인의 태도에 백현은 별수 없이 흰 수건을 던졌다. 폐하의 뜻이 그러신데 소신이 무슨 자격으로 거절하겠나이까. 좋다. 고모님은 짐이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넌 거기서 과거 공부나 좀 하다가 때 되면 교안에서 시험을 치고 짐 옆에 있으면 된다. 알겠느 냐? 소신더러 폐하 곁의 붙박이 귀신이 되라는 말씀이군요. 백현이 망연자실하자 종인이 파안대소하였다. 19. 춘소( 春 宵 ) 해가 졌다. 주강을 건너뛴 대신 석강에 참여했던 종인은 태성전으로 오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수를 보았다. 경수는 사관의 짐을 들어주는 잡색꾼 한 명과 함께였다. 일찍도 와 있었군. 종인은 짐짓 사람들을 의식하며 퉁명스레 내뱉은 후 휘적휘적 안으로 들어갔다. 경수는 잡색꾼에게 서 문방구가 든 짐을 넘겨받은 후 종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에는 사람 앉은키만 한 칸막이가 처져 있었는데 반투명한 면사 위에 용과 봉황, 채운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었다. 칸막이는 연침이 황제의 사적인 곳인 만큼 외부인을 그나마 덜 의식하게 하고자 하 개가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종인은 하개가 쓸데없는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앉으니 오히려 경 수가 더 신비로워 보였다. 짐은 개의치 말고 자유롭게 일하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종인의 행동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웠다. 엉덩이에 가시라도 박혔는지 앉은 자세 도 어정쩡했고 경수 쪽을 수시로 힐끔거리느라 한참 전부터 책장은 넘어가지도 않았다. 경수는 그런 종인을 흘끗 바라본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갈하게 늘어놓은 문방사우로 그가 적 은 것은 상께서 짐은 개의치 말고 자유롭게 일하라고 하시다 는 달랑 한 줄 뿐이었다. 서로를 의식하는 사이 하릴없는 시간은 꾸역꾸역 흘렀다. 저녁은 들었느냐? 저녁은 들었는지 묻질 않느냐. 소인은 없는 사람 취급하소서. 그리 눈앞에 있는데 어찌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느냐? 이곳에서 소인은 사관일 뿐이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주십시오. 밥은 챙겨 먹었는지 물었을 뿐인데 열 마디는 더하는구나. 경수는 홍만립이 동호직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음에도 조금 전 나눈 대화는 생략했다. 대신 상께 서 오래도록 을람하시다 라는 말만 적었다. 본디 일기를 쓸 땐 좌사와 우사가 각기 황제의 행동과 발언을 나누어 적는다. 그런데 넌 혼자서 두 가지 일을 해야 하는구나. 어렵지 않으냐? 한참 혼자 책을 읽는 척하더니 또 말을 건다. 경수는 대답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안 했다가는 저 성미 고약한 양반이 무슨 수작을 걸어올지 몰라 바로 대꾸했다.

101 긴박한 논쟁이 없으니 아직은 할 만합니다. 그럼 다행이다. 이번에는 상께서 좌사와 우사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으시다 고 적었다. 어제 예문관 관원들과 한바탕 질탕하게 놀았다며? 질탕한 것은 아니고. 발끈하여 대거리하자 종인이 턱을 괴고 경수 쪽을 쳐다봤다. 멋진 그림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나 른하면서도 묘하게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분내 나는 계집들을 끼고 앉아 호종례를 했으면서 그게 질탕하지 않았단 거냐? 문란했다는 듯 표현하시면 억울. 헌데 폐하께서 어찌 아십니까? 하잘것없는 천자여도 나름의 소식통이 있지. 거기서도 네 성질머리가 대단했다던데? 종인이 놀리는 투로 나오자 경수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면사 사이로 아릿하게 비치는 경수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서 종인은 벌떡 일어나 경수가 앉은 곳 으로 가더니 털썩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경수가 움찔하자 종인은 낮게 웃었다. 얘기 좀 해 봐라. 해서, 임제관이란 자한테 한 방 먹인 거냐?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안되긴 뭐가 안 돼? 여긴 엄연히 짐의 영역이다. 네가 아무리 사관이라 하여도 나한테 이래라저래 라 할 권리는 없어. 잊으셨습니까? 소인은 태후 쪽에서 뽑은 사람입니다. 품안( 品 案 ) * 에 이름을 올렸으니 소인보다는 소신( 小 臣 )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겠구나. 경수는 심각한데 장난하듯 빙글거린다. 경수는 속으로 종인이 친동생이었다면 이마에 꿀밤을 놓았 을 것이라며 가만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소인 신은 본의 아니게 폐하를 감시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태후는 우리 사이를 모르기에 소신 이 폐하 곁에 있을 수 있지요. 하오니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오냐. 짐도 삼 년간 정비( 正 妃 )의 자리를 비우기로 했으니 당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째서 폐하께서는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으십니까? 경수가 투덜거리자 종인은 아예 책상 위에 떡하니 턱을 괴고 경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장난기가 심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느물거리다니 의외였다. 경수는 태후의 간자가 된 것보다 종인과 같이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보는데도 체통을 챙겨야 하느냐? 소신은 폐하의 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소신은 사내입니다. 널 계집으로 여긴 적은 없다. 허나 짐이 너와 정을 나누겠다면 누가 맞서겠느냐?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의 농담은 즐겁지 않습니다. 소신은 그림자로서 폐하를 연 모하고 싶은 것이지,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폐하를 연모하고 싶다는 부분에서 거의 기어들어갈 듯이 속삭인 경수는 얼굴이 화로에 구운 고구마 처럼 빨개졌다. 종인은 가만히 있다가 공격당한 것처럼 잠시 상황 파악을 못 하다가 경수의 거침없는 고백이 맘에 들어서 입매를 가늘게 찢으며 웃었다. 영특하지만 미끼를 던지는 족족 물어주는 경수의 순진함이 무 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역시, 단둘이 있을 때는 이런저런 애칭이 좋겠군. 무엇으로 불러주랴? 폐하! 경수가 당황하여 눈을 흘겼지만 종인은 염염하게 웃을 뿐이다. 넌 배포가 남다르다. 그러니 예문관에 가두는 것은 네게 실례겠지. 그리 띄우실 정도는 아닙니다만. * 벼슬아치의 명단을 품계대로 적은 책

102 너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네 실력이라면 지금 당장 요직을 꿰찬다 해도 모자람이 없지. 과거 를 치렀다면 종육품은 받았을 터인데 뜻하지 않게 구품 한직이니 도리어 이것이 아깝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종인은 예문관이 조정의 요직으로 나아가는 발판임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승상이라도 되면 대신들 얼굴이 가관일 거다.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마세요. 하하하! 그리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니 너도 어리긴 어리구나! 그러면서 노을처럼 타오르는 경수의 뺨을, 종인은 가볍게 어루만졌다. 농담이 아니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교지를 내려 승상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도경수 성격에 수가 틀리면 단번에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 그때 주신 서신에 대한 답입니다. 불현듯 생각나서 경수는 소매 속에 고이 접어둔 서찰을 꺼냈다. 직접 주려니 영 쑥스러운데 종인은 싱글벙글하며 그것을 받아들고는 바로 펴 보았다. [봄볕은 느릿느릿 어디로 돌아가는가. 다시 꽃 앞에서 술잔 들었네. 종일토록 물어도 꽃은 말이 없 구나. 그대, 누구를 위하여 시들고 누구를 위해 피는가. 꽃이 피었을 때 아껴주세요. 지고 나면 다시 보기 어렵답니다.]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 마음이 소중하고 어여뻐서 종인은 경수를 보니 왠지 뭉클했다. 꽃은 해마다 다시 피는데 지는 걸 두려워해서야. 올해 핀 꽃은 작년의 그 꽃이 아니니까요. 정을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종인은 평생 모를 뻔한 이 소중함을 알게 해 준 경수 가 마냥 고마웠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일방적으로 내뱉으며 경수의 손을 잡아끈다. 경수는 하마터면 붓을 놓칠 뻔하여서 종인을 살짝 쏘 아보았다. 종인은 쟁글쟁글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경수를 위해서 금방 손을 놓고는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먼저 나섰다. 경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냉큼 필묵통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경수를 데려간 곳은 태성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러나 종인과 그가 허락한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소비원이었다. 삼색도와 온갖 화초가 핀 그곳에서는 나뭇가지에 걸린 환한 달과 함께 사그라지 는 봄밤의 나른함이 느껴졌다. 홍류원 못지않게 아름답고 정갈하게 꾸며진 화원을 보고 경수는 탄성을 내질렀다. 자그마한 인공 연못과 좁은 다리 아래로 졸졸 흐르는 물길도 맘에 들었다. 며칠 전에는 바닥만 보느라 미처 알지 못 했는데 둘러보니 곳곳에서 단정함이 묻어났다. 현판조차 없지만 은밀하고도 소박한 멋이 있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경수가 커다란 복숭아나무 아래에 멈춰선 종인에게 물었다. 태후든, 중궁이든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오로지 짐과 짐이 허락한 자만이 발을 디딜 수 있지. 그런 곳에 소인을 데려오셔도 됩니까? 아무리 사관이라 할지라도 보는 눈이 많은데요. 저들은 네 능력이라 여기겠지. 황제가 아끼는 곳까지 들어갔으니 네가 목숨을 걸고 직분을 다하는 줄 알 것이다. 경수는 종인의 치밀함에 탄복했다. 지난번에 네게 보낸 서찰에서 말한 삼색도가 바로 이것이다. 종인이 이제는 거의 지려고 하는 복숭아나무를 가리켰다. 흰색과 진분홍색, 그것이 반반 섞인 꽃잎 이 다보록하게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마지막을 달리는 듯 꽃잎은 하늘하늘 떨어 졌다. 그것은 이윽고 종인의 어깨에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종인은 그것을 털어서 경수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 하얀 손 위에 흩어진 꽃잎이 앙증맞았다. 한 잎 또 한 잎 내려 공연히 이끼마저 붉어지네. 며칠을 지체할 수 없어 피운 것 또한 봄바람이 네. * 꽃이 지는 모습은 처연하면서도 우아하죠. 내년에 또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내년뿐이냐? 평생 함께 볼 수 있다.

103 종인은 꽃잎을 쥔 경수의 손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그것을 가볍게 끌어당기자 바로 턱밑에 경수 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닿았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서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경수를 떼어놓을 순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필묵통처럼 작게 만들어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었다.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하늘과 땅밖에 모르는 일이다. 소신은 하늘이 두렵습니다. 둘이 있을 땐 네 자신을 낮춰 지칭하지 마라. 소신이 어찌 감히. 어명이다. 나직한 목소리에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묻어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아직도 하늘이 두려우냐? 두렵습니다. 우리가 음탕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두려워할 이유가 있느냐? 종인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달콤하지만 묵직한 향은 경수의 심장을 간질였다. 짐이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구나. 어찌 네가 스민 것이냐? 어찌하여 내게 스몄느 냐? 경수는 차마 종인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의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저에게 잘해 주지 마세요. 왜. 폐하께서 변심하시기라도 하면 전 버려진 헌신짝처럼 나동그라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러워서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정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고민에 종인의 입 끝에 말간 초승달이 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약조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널 아껴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보다 빨리 변한다고 하던데 어찌 그리 호언장담이십니까? 남아일언 중천금. 짐은 식언하지 않는다. 예, 남아일언 중천금. 저도 죽는 날까지 폐하의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영원이란 시간을 부여하고 싶다더니 죽는 날까지만 그림자가 되면 어떡하느냐? 종인의 짓궂은 놀림에도 경수는 어쩐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머니 때문에 잃은 눈물이 종인 덕분 에 조금씩 배어 나왔다. 이것이 좋은 변화인지 아닌지, 경수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감정이 풍부해진다는 방증. 경수는 자신을 조금씩 변하게 하는 종 인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어린 연인은 수흔이 번진 풍경처럼 그렇게 봄밤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다음 달에 과거가 치러진다는 말에 행사를 주관하는 예부는 물론이거니와 이날만을 벼른 태학관 및 전국에 뿌리내린 유생들은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참신한 인재를 뽑아 곁에 두고 소 인파에 힘을 보태는 것이 목적이라 종인은 이번 과거에 거는 기대가 컸다. 특히 그는 금선공주에게 보낸 안부 서찰에 이번 과거에 백현이 붙으면 모자람 없이 쓰겠다고 해 놓 았다. 그래서 백현의 합격 여부가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종인은 늦은 오후 무렵에 만상전에서 어제 미처 읽지 못한 상소를 들여다봤다. 앞에는 목마를 때마 * 수목, 낙화( 落 花 ) 중

104 다 들이켤 녹차가 놓여 있었다. 찬열이 오늘 밤의 군호( 軍 號 ) * 를 듣기 위해 편전에 들어 있었다. 경성현령이 또 장계를 올렸더군. 지난겨울에 예족을 소탕하고 분명히 더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확 증을 받았는데 놈들이 슬슬 노략질을 시작한 모양이야. 소신이 가야 합니까? 찻잔을 기울이는 종인의 미간은 좁아질 대로 좁아져 있었다. 뭔가 심히 맘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그러나 찬열의 물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장이 죽은 후 그 아들이 새로운 칸이 됐다. 헌데 그놈이 부친과 맺은 협약은 무효라면서 안팎 으로 거칠게 몰아붙이는 중이라는군. 소신의 무능입니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아직 어려 살려두었더니. 어린애의 목숨을 앗는 사람을 장수라 여기진 않는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누군들 장래를 알고 행동하겠느냐. 어린놈이 패기가 남다르구나. 훗날 큰 화근이 되겠지. 찬열은 커다란 눈알을 침통하게 떨어뜨리며 지난 초겨울의 일을 떠올렸다. 치열한 전투 끝에 사로잡은 적장은 칸의 장자였다. 그 뒤를 따르던 열다섯 먹은 사내아이는 족장의 막내아들이었다. 아이는 자신을 죽이고 형을 살려 달라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장문견은 콧방귀를 뀌 며 그 자리에서 찬열더러 둘의 목을 베라고 했다. 찬열은 맏아들을 죽인 후 장문견을 설득해 막내아들은 살려 보냈다. 돌아가 연을 경외하고 더는 이 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형들이 줄줄이 죽어 막내아들이 새로운 칸이 되더 니 이젠 그 새파란 것이 부친과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려 칼을 갈았다. 역시, 전장에서는 일말의 동정조차 쓸데없는 일일까. 자그마한 일에도 의미가 있거늘 하물며 사람의 목숨을 살림에서랴. 하지만 검에 사람의 살점과 붉은 피를 묻히는데 그것이 의미를 가진들 무슨 소용 이란 말인가. 필시 코흘리개를 충동질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저들 명줄을 재촉하는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하 게 날뛰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경성현에서 처결하게 둬야지. 그쪽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칙명을 내리리라. 소신이 가게 해 주십시오. 찬열은 악연의 고리는 자신이 끊고 싶었다. 어린애를 얕잡아 봤다가 오늘날 이 사달이 나고 있으니 조국의 백성이 더 고통받기 전에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부디 소신이 나서는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무장들이 전공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애초에 그들이 산천을 피로 물들이는 일이 없는 것이 최선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음 상소를 펴며 종인은 나직이 읊조렸다. 괴통은 서공에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항복하는 법을 알려줬고, 서공을 치려는 무신군에게 는 쉽게 성을 빼앗는 법을 알려주었다. 괴통 덕분에 성을 빼앗긴 서공이나 성을 빼앗는 무신군이나 서로 피해 없이 일을 성사했지. 쇠로 만든 성과 끓는 연못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금성탕지( 金 城 湯 池 )로군요. 국방이 그와 같다면 바랄 게 없으리라. 오늘 군호는 그것으로 하자. 봉명하겠나이다. * 군사 암호

105 용안에 삿된 먹구름이 끼셨습니다. 야독을 하던 종인에게 칸막이 너머에서 경수가 말을 던졌다. 없는 사람 취급하라던 것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종인이 배죽이 웃자 경수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김종인은 하루 중 반나절 이상은 어떻게 하면 도경수를 골려 먹을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아요. 정히 그러시다면 앞으로 폐하께 무슨 일이 생겨도 관심 두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팩 토라지면 짐이 못된 사람 같잖으냐? 매번 절 골탕 먹이기만 하시잖아요. 오늘도 어김없이 상께서 오래도록 야독을 하시다 는 문구를 쓱쓱 적는데, 문득 서안 위로 그림자가 져서 고개를 쳐드니 종인이 거의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경수 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 종인의 커다란 손이 경수의 자그마한 입을 잽싸게 틀어막았 다. 종인은 자신의 눈동자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들어차는 경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배꽃처럼 하얀 얼굴 위로 아른아른 피어오른 발그레한 홍조가 갓 수확한 복숭아 같았다. 누가 네 얼굴에 과꽃을 그려 넣었더냐. 군위( 君 威 ) * 에 데인 불꽃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아느냐? 경수가 말갛게 그리는 호선에 종인은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놓았다. 그는 또 그 앞에 털썩 엉덩이 를 붙이고 앉아 턱을 괸 채 빤히 경수를 바라보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합니다.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까닭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나랏일 외에 무엇이겠느냐? 사관은 정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물겠습니다. 짐짓 보란 듯이 도톰한 입술을 꾹 붙여 보인다. 종인에게는 그것마저 귀여웠다. 실은 내달에 있을 문과 시험 때문에 그런다. 육도에 이르기를, 낚시와 인재 등용은 비슷하다 하였습니다. 크고 좋은 물고기는 깊고 맑은 강에서 자라는 법이니 인재를 품으려는 군주는 마땅히 큰 강물과 같아야 한다지요. 폐하께서는 이미 청천이 신데 무엇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기분을 맞춰주려는 말인 줄 알면서도 종인은 경수의 능청스런 아부가 싫지 않았다. 짐의 평판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그런 말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잘도 하는구나. 폐하께서는 올해 약관이시고 친정을 시작하신 지는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으셨습니다. 당장의 평판 보다는 훗날 역사의 비판을 경계하소서.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라. ** 영명하십니다. 오냐. 네가 바라는 대로 좋은 천자로 남으려면 부지런히 노력해야겠지. 종인이 경수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먹이 묻지 않은 깨끗한 붓으로 괜히 경수의 볼을 간질였다. 경수가 낮게 웃었는데 자못 소리가 커서 얼른 제 입을 틀어막고는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맹수를 경 계하는 작은 짐승 같아서 종인은 쿡쿡 웃었다. 이번 대과에 거는 기대가 큰데 지난 구 년간 장씨 일문에 아첨하는 자들이 득시글거려서 그 폐단 이 이어질까 걱정이다. 매관매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다. 그동안 실권이 없어 눈 감고 있었다만 이제는 두고 보지 않을 작정이다. * 임금의 위엄 ** 논어, 학이 편

106 골똘히 뭔가 생각하던 경수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가친께서도 여러 번 과거에 응하였다가 모두 낙방하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태학관에 들어가고 나서야 포기하셨지만 그전까지는 줄곧 실의에 빠져 계셨죠. 언젠가 찬열에게 들은 터라 대충 사정은 알고 있었다. 종인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그러나 담담 하게 귀를 기울였다. 태학관에 입교하고 알았는데, 시험관이 뇌물을 받아 미리 급제자를 낙점하고 무분별하게 시권을 가로챘었답니다. 이 같은 사실을 관청에 고발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되레 몰매를 맞은 사람도 있었다고요. 그것이 사실이냐? 네. 이 사실을 안 가친께선 두 번 다시는 탁류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친처럼 시험 관에게 줄 뇌물이 없던 자들은 줄줄이 탈락했지요. 그런 일이 성행하였더냐? 예. 당시 유생들 사이에서도 제법 떠들썩한 사안이었지요. 종인이 짧게 혀를 찼다. 자신이 허수아비로 앉아 있던 지난 구 년간 대체 조정 곳곳에 멀쩡한 곳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매관이 행해짐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파렴치한 실상을 듣자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이 런 일은 상소로도 올라오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언론을 장악하고 어린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있었음 이 틀림없다. 발칙한 것들. 고정하시옵소서. 짐이 유충함을 먹이 삼아 횡포를 부렸음이렷다! 정당하게 급제한 사람도 있으니 조금 전 드린 말씀은 한 귀로 흘리소서. 신성한 등용문마저 더럽혔으니 이 일은 예사로 넘길 수 없다. 경수가 불안한 기색으로 종인을 쳐다봤다.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지만 자신의 경솔한 발언으로 종인이 도리어 역풍을 맞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이날까지는 주렴 뒤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으니 이번만큼은 저들 뜻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탐관오리들을 뿌리 뽑으실 작정이십니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솎아내려면 짐에게 힘이 되어줄 참신한 인재들이 필요하지. 뭔가 기발한 생각이 난 듯 종인이 안광을 빛냈다. 20. 심심장지( 深 深 藏 之 ) 이번 대과는 짐이 복시부터 친시하겠소. 증광시 이후 한 번도 앞에 나선 적이 없으니 친정을 기념 하여 특별히 과장을 둘러보고 응시자들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오. 황제의 천명에 관련자들이 아연실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품 한직 하나를 내주는 데만 해도 뒷주머니로 들어오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자는 십 년 가까이 낙방했다며 달구지에 황금을 싣고 와 관리의 집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그들은 먼저 황제의 친족들을 두루 방문했다. 진왕의 인보당은 교안에 갓 발을 들인 외지인들의 필 수 방문지였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진왕의 명성을 이용하려 했다. 하나같이 식객이나 문하객으로 받 아달라고 접근해 본인이나 자식의 관직을 부탁할 심산들이었다. 진왕은 종인과의 관계가 비틀어진 마당에 쉬파리마저 떼로 꼬이자 신경질이 났다. 그래서 그는 과 거가 열릴 즈음이면 더욱 대문에 걸쇠를 걸어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들은 슬그머니 꼬 리를 감추고 직접 시험관들을 찾아다니며 재물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것이 구 년간 이어지다 보니 인사 담당인 이부를 비롯해 매해 바뀌는 시험관 자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낚아채려고 난리들이었다. 항간엔 저들끼리 청탁과 매관으로 불린 곳간이 황실의 내탕고를 위협

107 할 정도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 소중한 곳간을 황제가 직접 기름과 불을 들고 태워버리겠다며 으름장이니 여간 속이 타 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갖은 유세로 일가친척은 물론이요, 사돈의 팔촌까지 이번 대과에서 한 자리 꿰어 주겠노라고 장담을 해 놓은 직후다. 아뿔싸! 공든 탑이 무너져도 유분수지, 황제 때문에 재물은커녕 체면만 구기게 생겼구나. 떳떳하게 그러지 마십사 하지도 못하는 처지인지라 그야말로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은 것이다.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황제가 쐐기를 놓기를, 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한 관리는 있기 마련이지. 허나 짐의 조정에선 있을 수 없소. 지난 일은 불문 에 부치겠으나 불미스러운 투고가 또 날아든다면 칠문( 漆 門 ) * 과 종루결장( 鐘 樓 決 杖 ) ** 에 그치지 않고 일가를 주살하리라. 대과는 초시ㆍ복시ㆍ전시 순으로 진행됐다. 대과의 초시는 소과에 합격한 생원이나 진사들을 상대 로 치러졌는데 문장 시험인 초시에서 이백사십 명을 뽑고 구두시험인 복시에서 서른세 명을 뽑았다. 전시는 통상적으로 황제가 참석하였다. 응시생들은 어전에서 시험을 치렀으며 성적에 따라 갑과 셋, 을과 일곱, 병과 스물셋으로 분류해 관직을 나눠주었다. 사실상 복시의 합격 인원인 삼십삼인 안에만 들어가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황제는 전시에 참여하여 응시생들의 순위가 결정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복시에서부터 본인이 직접 참여하겠다고 하니 신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입때껏 입맛 에 맞게 권자( 卷 子 ) *** 를 채택하던 이들은 우수수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황제의 전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덕분에 예부는 더욱 안전과 절차에 신경 써야 했고 그동안 관직 사고팔기에 박차를 가했던 시험관들은 우거지 죽상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곧 자신궁에도 알려졌다. 태후는 종인의 거침없는 행보가 흥미로웠다. 아우인 장문견과 대인파에서는 급작스러운 황제의 변 화에 우려를 표했으나 장씨는 생각이 달랐다. 실질적으로 자신을 위협할 만한 행위가 없는 한, 종인의 파격적인 행보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것은 풍파를 겪으며 생긴 아량 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혈기 왕성한 스무 살짜리 사내. 그것도 천하에서 가장 지엄한 권좌에 앉은 사람인데 권력에 도취할 시간은 줘야지 않겠나. 태후마마. 예문관 검열 도경수 입시이옵니다. 들여라. 은밀히 태후전으로 불려 온 경수는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갔다. 태후의 처소에서는 항상 싱그러운 풀과 꽃 냄새가 가득했다. 향기만 보면 기분 좋은 곳이나 미혹하는 향에 취해 있을 순 없었다. 경수는 희조전 서편에 조그맣게 딸린 예문관 관청에서 며칠간의 기사를 재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런 데 태후전의 궁녀가 경수에게 웃전의 부름이 있다고 했다. 그때 곁에 선진들도 있어서 꽤 눈치가 보 였다. 아무리 태후 덕분에 관직을 얻었다지만,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태후가, 그것도 사관을 사사로 이 오라 마라 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였다. 예문관을 나서는 경수에게 쏟아진 선진들의 따가운 시선은 마치 권력에 굴종한 망종 이라는 외침과도 같았다. 뜰 앞에 자목련이 다 져서 서운하던 차에 화방에서 새로운 화초를 가지고 왔더구나. 태후는 자그마한 화분 하나를 보여줬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앵두처럼 생긴 붉은 열매가 소복소 복 달린 자금우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침을 멎게 하려고 산에서 여러 번 캔 적이 있어 경수에게도 낯설지 않은 식물이었다. 이것은 한번 열매가 맺히면 이듬해 새잎이 나기 전까지 열매를 매달고 있단다. 경수는 태후가 마른걸레로 자금우의 잎사귀를 닦아주는 모습을 오도카니 쳐다봤다. 사람도 이와 같아야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미덕 * 벼슬아치의 징계를 위해 종이에 죄상을 적어 대문에 붙이던 일 ** 사람 많은 곳에서 탐관오리에게 내리던 태형 *** 과거시험 답안지

108 아니겠느냐? 태후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태후는 자금우를 이리저리 바라본 후 쪽가위로 빼죽 튀어나온 가지 하나를 뚝 잘랐다. 그래, 일은 할 만한가? 마마의 은혜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 중입니다. 사도에게 네 집에 미곡과 패물을 보내라 하였는데 보았느냐? 감히 받을 수 없어 사도께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호호호. 과연 청직에 앉은 사관 답군. 태후는 경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볼수록 흠잡을 데 없는 용모와 어리지만 과단성 있는 성미가 상 당히 맘에 들었다. 네가 태성전에 든 후로는 황제의 운신 폭이 매우 좁아졌다더구나. 아무래도 일일이 기록으로 남으니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아녀자 된 몸으로 사초를 볼 수 없어 이리 너를 불렀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더냐? 아녀자 된 몸으로 사관을 멋대로 불러내는 것은 가당키나 한 것이냐고 반문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 다. 경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했다. 이따금 석강이나 야대를 마치고 오시면 침전에서 오래도록 을람하시거나 바둑을 두십니다. 그것 외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으십니다. 그 또한 너를 신경 쓰고 있음이겠지. 야대의 내용도 기록하고 있느냐? 중추원의 관리 외에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호오? 중추원 계의관( 計 議 官 )은 예문관 검열과 더불어 잠필지신( 簪 筆 之 臣 ) * 으로 불리며 중추원일기 작성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추원과 예문관은 둘 다 실록의 사초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경쟁의식이 있었다. 특히, 황제의 명령 을 출납하는 중추원은 예문관에 대한 경계가 심하였다. 황제의 일상과 정무를 기록한다는 공통분모가 중추원 관리들로 하여금 하급 관리인 사관에 대한 열등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밥그릇 싸움 이기도 해서 두 관청의 신경전은 꽤 날카로웠다. 역대 황제들도 중추원은 가까이 두되 사관은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여 종인이 야대에 사관을 내 치고 중추원 관리만 들이라고 한 것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태성전에 사관 들이는 일을 윤허하셨으나 자못 경계하고 계십니다. 태후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낭창한 허리하며 아담한 키며, 네 용모가 과연 방원( 邦 媛 ) ** 이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거늘. 혈기 왕 성하신 황제는 너를 보고도 감흥이 없으시더냐? 하 공공이 소인과 폐하 사이에 칸막이를 쳐두었고 폐하께서는 침수에 드시기 전까지도 소인에게는 일절 눈길을 주지 않으십니다. 남색을 부추기는 노골적인 발언에도 경수는 흔들림 없이 거짓을 고했다. 살해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일이다. 처음부터 하기 싫었던 일인 만큼 태후에게는 터럭만큼도 도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네게 건 기대가 제법 컸다만. 소인이 무능한 탓입니다. 종인의 경계심은 도경수가 태후 쪽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아니, 황세용과 최진수 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니 적어도 대인파를 견제하려고 일부러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도경수가 태성전에 들락날락한 지 달포가 다 되어 가는데 이렇다 할 진척은 없었다. 오히려 김종인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힘을 기르려 애쓰고 있다. 도경수가 쓸 만한 소식통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태후는 김종인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 **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

109 사는지, 어떤 계획으로 움직이려는지, 다음은 무엇을 노리는지 등등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기껏 해야 어릴 때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이따금 밤에 산책한다는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도경수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정원까지 드나든다는 점이다. 그곳 은 선제인 효경제가 총애하던 의귀비를 불러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다. 당시 황후였던 장씨도 두어 번 인가 발을 들인 적이 있을 뿐, 거기서 낭군이 후궁과 시시덕거리는 꼴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 다. 네가 내가 뽑은 사람이라는 것은 모르시더냐. 소인을 정원에 들이시는 걸 보면 그런 듯합니다. 하긴. 안다면 널 그곳까지 들이려 하지 않겠지. 태후는 쓸 만한 정보가 없는 것은 아직 종인과 경수가 친해질 만한 계기가 없고 방에 낯선 이를 들 인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라 결론지었다. 무엇이든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인데 요즘 종인의 행보가 워낙 거침이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됐던 것 같다. 사람이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되던 일도 망치는 법. 태후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자신의 성급함을 반성했다. 내, 따로 부르지 않아도 사완을 통해 소식을 전했으면 좋겠구나.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면 남의 눈 에 띄기 십상이지. 사완은 경수가 종학 스승으로 초빙된 줄 알고 입궁했을 때 그녀를 자신궁으로 데려간 궁녀였다. 또 오늘 예문관으로 찾아와 경수에게 태후의 명을 전하기도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경수는 정중하게 인사한 후 자신궁을 나왔다. 거기에 두면 네가 진다. 종인은 인심을 썼다. 양자충 상태에 빠진 상대를 위해 수를 물리고 다시 두라고 했다. 무릎을 꿇고 맞은편에 앉은 아이는 연신 고민하다가 방금 놓았던 돌 바로 옆에 흑돌을 두었다. 옳지, 그리하는 것이다. 감히 황제와 마주앉아 바둑을 두는 이는 얼마 전 태성전으로 새롭게 배치된 상경( 尙 更 ) * 이었다. 올 해 열여덟이 된 그의 이름은 우장이었고 황제의 시중을 들며 밤에 시각을 알리는 것이 주 업무였다. 우연히 태성전 행각에서 달빛을 불 삼아 혼자 바둑 두고 있는 것을 보고 종인이 침전에까지 들여 심심할 때마다 상대해 주었다. 덜렁거려서 미더운 맛은 없지만 싹싹한 편이라 가벼운 말상대로는 제 격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사연이 또 기가 막힌지라. 너는 어쩌다 환관이 되었느냐? 아뢰옵니다. 어려서 어미를 잃은 소인을 거두고 입때까지 먹여 살린 친형에게 보답하려 스스로 거세하였나이다. 저런. 그때 몇 살이었느냐? 그해 겨울에 열 살이 되었고 아는 분의 도움으로 궁에 들어와 오로지 형의 뒷바라지만을 하며 살 았나이다. 기가 막힌 사연에 종인은 어린 날 우장의 결심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거의 아픔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우장은 유쾌한 성격이었다. 양물이 잘려 나가 정상적인 사내가 될 수 없어서 수염 자국은커녕 여전히 뽀얀 피부에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열여덟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오늘은 경수가 비번인지라 궐에 숙직하지 않았다. 이날은 경수를 직접 가르친 홍만립이 규중 사관 으로 들었는데 역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 내시부 정구품

110 홍만립은 붓을 들고 황제와 어린 내시가 다정하게 바둑 두는 모습을 적어 내려갔다. 특별히 중요하 다 싶은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칠 순 없었다. 폐하. 수라간에서 야찬을 들였나이다. 가져오라. 내관이 야찬이 담긴 작은 합을 가지고 왔다. 갓 데운 따뜻한 대추차와 고소한 빙자병, 바삭바삭한 차산병이었다. 기미상궁이 검식한 후 이상이 없자 종인은 그것을 사관에게도 주라고 했다. 홍만립은 간식을 받아 들고도 머쓱해서 군침만 흘렸다. 직필하는 동안 한눈을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개가 쉬는 날이라 옆에서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 마음껏 먹어라. 종인은 빙자병을 우장에게 내밀었다. 우장은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접시 위에 올려진 그것을 받아 먹었다. 지엄한 군주 앞인지라 녹두로 빚은 맛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서 종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홍만립은 황제가 허물없이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놀랐다. 그가 사관으로 지낸 지 수년째지만 어린 황제는 허투루 웃음을 흘린 적이 없었다. 늘 작위적인 미소를 머금거나 편전에서 심 각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는 것이 다였다. 폐하께서 저런 표정까지 지으실 수 있다니. 허허! 안 그래도 최근 황제가 무척 부드러워졌다며 궁인들이 심심찮게 떠들어댔다. 조정에서 개혁의 깃발 을 휘둘러 대인파를 압박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저러한 변화에는 어떤 기폭제가 작용했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결기를 다졌다고 하 여 금세 태도나 성질이 바뀌진 않는다. 그리고 저런 미소와 온화한 태도는 결기와는 달랐다. 홍만립은 황제를 제 나잇대의 청춘으로 돌려놓은 기폭제 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종인과 우 장이 농담 따먹는 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홍만립은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며 자신의 뺨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그때, 우장이 마치 홍만립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말을 꺼냈다. 요즘 폐하의 용안에 꽃이 피었다고 궁인들이 어깨춤을 추나이다. 짐을 교란하려고 아부하는 것이더냐? 허튼수작 마라. 참입니다. 자주 웃어주시니 궁에도 신록이 내린 것 같다며 속닥거린답니다. 종인이 손가락 사이에서 백돌을 굴리다가 툭 내뱉었다. 아무래도 지기가 한 명 더 생긴 탓이겠지. 소인 같은 천것을 두고 일컬으심입니까? 우장이 놀라 반문하자 종인은 야릇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얼른 놓아라. 꼭 네 차례만 되면 수다스러워지는구나. 폐하께 배우는 처지인데 이기고 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옵니까? 바들바들 떨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것이 꼭 경수를 떠올리게 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밤. 종인은 모처럼 사가에서 밤을 보내는 경수는 지금쯤 무얼 하며 지낼까 상상 했다. 어린 동생이 하나 있다던데, 그 불같은 성격에 동생을 따끔하게 가르치고 있으려나. 어쩌면 회 초리를 들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비죽비죽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 보십시오! 까닭 없이 웃으시니 궁인들이 숙덕거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사옵니까? 시끄럽다. 얼른 수를 두래도.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보지만, 홍만립은 종인의 기분이 아주 좋음을 알 수 있었다. 아팠다면서? 찬열에게 탕약을 내미는 경수의 손길은 여느 때처럼 다정했다. 가벼운 몸살.

111 몸 관리를 어찌 했기에 그래? 지난번에 토벌이 너무 힘들었던 거야? 그 정도는 아니야. 며칠째 궁에 들지 않았다고 폐하께서 심려가 크셨어. 최근 산막의 밤은 텅 비어버린 듯 고요하게 흘러갔다. 그곳을 지키는 것은 도월란의 유품뿐이다. 경 수와 찬열 모두 바빠져서 예전처럼 산막에서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죽은 자는 서운하다 표현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오는 철새들을 보듯 그저 담담하게 기다렸다. 뭐 하러 나왔어? 집에서 쉬지 않고.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땀을 빼느라 계속 군불 위에 누워 있었더니 되레 삭신이 쑤시더라. 그렇게 말하니 꼭 내 어머니 같다. 찬열은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경수는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사근사근했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니 곁에서 챙겨줄 수가 없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아프기 전에 조심 해. 찬열이 깨끗하게 비운 약그릇을 받아들며 경수는 잔소리를 끓였다. 여름 무렵에는 항상 입맛을 잃으니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넌 입이 짧잖아. 아무리 입이 쓰다고 해도 끼니는 거르지 마. 반빗아치들에게 좋아하는 찬을 만들어 달라고 해. 용천댁이 오미자배숙을 잘 하니 그걸 먹고 풍한도 떨치라고. 용천댁의 손맛이라면 죽은 사람의 입맛까지 살릴 거야. 찬열은 다다다 쏟아내는 경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의 눈동자에 경수의 반듯한 옆모습 이 꽉 들어찼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약탕기를 정리하던 경수가 겸연쩍게 쳐다봤다. 왜?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은 무심하게 흘려보낸 것들을 아쉬워하며 지낸다. 뜻 모를 소리에 경수는 찬열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고상한 얼굴에는 그에 걸맞은 멋진 미소가 걸 려 있었으나 눈빛은 명랑하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꼼꼼한 네가 무엇을 흘려보냈기에 그러는데? 찬열은 은근하게 웃을 뿐 경수의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지. 당시엔 소중한 줄 모르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추억하거나 후 회하는 거. 그러지 않으려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최선을 다해도 지나간 순간에 대한 아쉬움은 늘 남기 마련이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경수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찬열은 재차 침묵을 고집했다. 난 여전히 네 좋은 벗이지? 당연한 소리를. 그럼 언제가 되었든 나한테 흉금을 털어주시면 고맙겠어.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이제는 한층 후텁지근해진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와 찬열의 가지런한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신록의 계절은 느릿하게 흘러갔고 시간은 누구도 붙잡을 수 없었다. 새하얀 옷을 입었던 산막이 어 느덧 눈부실 만큼 새파란 초록 비단에 둘러싸였듯이. 경수는 자못 심각하게 찬열을 살폈다. 늘 밝기만 한 찬열이 까닭 없이 어두워진 것이 불안했다. 건 강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장담하던 그가 갑자기 몸살을 앓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이것저것 캐 묻고 싶지만 본인이 입 열기를 거부하니 경수는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왜? 생각해 보니 올해는 내가 전쟁에 나서느라 챙겨주지 못했더라고. 늦었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 더라. 뭘 그런 걸 일일이 챙기냐. 그래도. 사내들은 대개 무뚝뚝해서 주변인의 생일쯤은 사소하게 여겨 그냥 넘어가기 일쑤지. 근데 넌 아니 야. 나와 월란뿐만 아니라 연수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장차 너와 혼인할 여자는 정말 복 받

112 은 거야.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정한 지아비를 원하잖아. 무릎을 모으고 꿈꾸듯이 얘기하는 경수. 그것은 꼭 종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찬열 은 그런 경수가 지극히 행복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지난 며칠간 그를 괴롭게 했던 문제에 직면했다. 사람은 누구나 무심히 흘려보낸 것을 아쉬워하고 후회한다. 박찬열은, 경수가 처음 본 순간부터 태 양처럼 밝고 상냥하다고 느낀 그는, 정말이지 흘려보낸 것 에 관해 속을 끓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좋은 걸 선물하고 싶어. 그러나 종인이 아닌 자신이 주는 선물은 더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지러지는 가을의 상사화는 난 만한 봄꽃에 비할 수 없음을, 찬열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너도 매해 내 생일을 챙겨주잖아. 궁색한 물건일 뿐이야. 정성이 중요하지. 내가 언제 그런 걸 따져? 그건 그렇다며, 경수는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빵싯빵싯 웃는 모양새가 덜 여문 과실이었다. 폐하께서 잘해 주시니? 찬열의 뜬금없는 물음에 경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는 자홍색의 빛깔 고운 연정이 어 려 있었다. 폐하께서 네게 푹 빠지셨던데 왜 용양군 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냐? 그게 뭐야. 난 싫어. 거추장스러운 권력과 감투는 모두 싫다. 그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서로 은애하는 것이 경수가 바 라는 전부였다. 모순적이지만 실로 그러했다. 도경수는 황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김종인을 맘에 두고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너의 행복이 최우선이다. 찬열은 버릇처럼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네가 대인파의 힘을 얻어 태성전에 든 것이라고 소인파에서는 이를 갈더구나. 혹여 그들이 해코지 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난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사관이야. 소인파에서 무슨 짓을 하겠어? 나도 정치는 잘 모른다만, 당파 싸움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하지 않아. 그들은 이익을 위해 서라면 무고한 사람에게 얼마든지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지. 선진들께서도 잘해 주시고 나도 각별히 조심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알려라. 물론 네 곁에는 폐하가 계시지만 폐하께 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조정에선 제아무리 청렴결백한 사람이라도 상대의 눈 밖에 나면 단번에 타락한 죄인이 될 수 있었 다. 피로 얼룩진 역사가 그 모든 것을 증명했다. 본의 아니게 정계에 발을 들인 청년이라 하여 예외일 순 없었다. 찬열은 그것을 몹시 걱정했다. 어쨌든, 뭐가 갖고 싶은지 천천히 생각해 둬. 네가 평안하시길 바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그거다. 하하! 예전엔 직언만 하더니 다 컸다고 입에 꿀도 바를 줄 아는구나. 다 큰 지 오래거든? 결국, 참지 못하고 경수의 작달막한 뒤통수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21. 낭패( 狼 狽 ) 사관들은 사초 작성을 위해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먼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간밤에 올라온

113 장계를 한데 모아 아침에 육부나 중추원으로 다시 올렸다. 오늘은 예문관 숙직실에서 밤을 새우는 번이라 경수는 종인이 잠자리에 들자마자 태성전을 나왔다. 며칠 전부터 몇 개월 동안 모아둔 사책( 史 冊 ) * 을 일별로, 다시 월별로 나누는 일이 경수의 몫이었 다. 양이 상당했다. 책꽂이에 두서없이 꽂혀 있던 것을 다시 순서에 맞게 정리해야 해서 경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일에 몰두했다. 정당한 방법으로 사관이 된 것이 아닌 데다 며칠 전에 태후전 궁녀인 사완이 왔다 간 일로 선진들 의 반응이 사뭇 냉담해졌다. 이러나저러나 경수가 태후가 발탁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소문에 불과했는 데 사완의 등장으로 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속사정은 어디에도 발설할 수 없는지라 경수는 조금 억울했다. 그래서 맡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해내고 싶었다. 삼경이 지난 건가? 인정이 친 줄도 몰랐는데 한층 기울어진 달을 보아하니 그러했다. 여름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계절은 달마저 지쳐 보이게 했다. 아직 초여름인데 벌써 이 지경이니 올 칠팔월은 꼼짝없이 더위 먹은 소처럼 늘어지고 말 것이다. 경수는 며칠간 이 일에 매달리느라 잠이 매우 부족했다. 덕분에 어깨가 뻐근해서 잠시 고개를 들었 을 때는 난생처음 콧속에서 뜨뜻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료들은 이미 늘어진 고기처럼 아무렇게나 뻗어 있었다. 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상당히 고단한 것이다. 그나마 송인직이 한쪽에서 팔을 괴고 꾸벅꾸벅 졸았는데 고개가 툭 떨어질 때마다 스스로 놀 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병 든 닭처럼 졸았다. 경수는 머리가 띵한 것을 느끼고는 가볍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 막은 후 근처에서 가볍게 세수를 마치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헤든 별들이 너울거리는 검은 공단 안 에서 쉴 새 없이 반짝였다. 별이 산재한 모양새가 꼭 사방팔방에 핀 꽃송이, 홍류원에서 처음 보았던 흐무러진 매화 밭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김종대다. 진왕이라고 불리지. 그리고는 내리는 눈 속에서 우산을 씌워줬었다. 오래 춤을 춰서 손과 얼굴이 얼었잖으냐. 이러시면 존귀하신 전하의 옷깃이 젖습니다. 허락 없이 네 춤사위를 본 대가로 치마. 경수는 잠자코 종인을 떠올렸다. 얼핏 북녘에 다시 전운이 돌 조짐이 있어 종인이 약간 예민한 상 태라고 들었는데 심각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지존이란 자리가 막중한 것은 알지만 종인이 시름에 겨워 괴로워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을 때 병든 닭처럼 졸던 송인직이 막 방에서 나오던 차였다. 그는 데면데 면하게 인사한 후 피로와 씨름하며 빽빽한 글자에 집중했다.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다. 희멀건 얼굴을 들이밀었던 달이 한참 기울었을 무렵, 희끄무레하면서도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 고 있었다.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음을 깨닫고 아차 싶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깨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깜짝이야. 숙직하던 중 누군가 얇은 모포라도 덮어줬나 싶어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을 주워들었다. 이내 경수 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황제가 침의 위에 덧입는 붉은색 외투였다. 뚜렷한 운룡무늬를 보자 경수는 경악했다. 잠든 사이에 왔다 간 모양이었다. 늦은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데 몰래 자신을 보러 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갔을 종인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했다. 그는 공연한 오해를 피하고자 얼른 외투를 개켰다. 감히 군주의 옷을 걸치고 있을 순 없었다. 다행 * 사관이 쓴 기록물. 실록의 토대가 됨

114 히 동료들은 졸다 지쳐 숙직실로 흩어졌는지 청사에는 경수뿐이었다. 희붐한 새벽 무렵에 경수는 의관을 바로 한 뒤 곧장 태성전으로 향했다. 천만다행으로 워낙 이른 시각이라 외투를 들고 가는 그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폐하께서는 기침하셨는지요? 곧 있으면 기침하실 거외다. 무슨 일이오? 경수는 내관에게 외투를 건네줄까 하다가 이왕 온 김에 직접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기침하시거든 일러주십시오. 해가 많이 짧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파루가 울리기 전이라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얼마 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 없이 드나든 곳인데도 경수는 괜스레 긴장되었다. 저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매일 밤, 잠자리가 바뀌는지라 여기저기 쏘다닐 것을 각오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정전에서 침수를 든 모양이었다. 일전에 숭화루에서 도 검열을 본 적이 있네. 경수를 안내하며 하개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아주 훌륭해 보였지. 폐하께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네.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별말을. 폐하께서 좋아하시니 다행이지. 자, 안으로 드시게. 문이 열리고 좁다란 복도를 지나자 커다란 방이 나왔다. 암막을 쳐두어 촛불이 없었다면 영락없는 밤이었으리라. 경수는 맞은편에 바로 보이는 침상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는 종인을 보고는 무릎을 꿇었 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백색 침의 차림이었고 눈두덩은 약간 부어 있었다. 지금 은 파루가 치기 전이고, 간밤에는 삼경이 지난 후에 경수를 보러 왔음이 틀림없으므로 종인이 침수에 든 시각은 불과 한 시진 남짓했다. 다소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종인은 경수를 보고는 짓궂은 웃음을 띠었다. 기침하셨나이까. 이제는 궁녀 흉내까지 내느냐. 종인이 하품을 찍 흘렸다. 경수는 납죽 엎드리며 간밤에 자신의 등을 따뜻하게 해 준 황제의 외투 를 건넸다. 자의( 紫 衣 ) * 를 돌려드립니다. 또 하해와 같은 은총에 보답할 길이 없나이다. 고작 외투 한 벌인데 하해는 무슨. 주신 것은 외투이나 폐하의 마음을 걸쳤으니 어찌 하해와 같은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종인이 다정히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수가 건넨 외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친히 경수 를 일으켰다. 피로감에 젖은 기색이었으나 언제 봐도 도경수는 물에서 막 씻은 천도를 생각나게 했다. 자신의 앞 에서 수줍음에 물들어 상기된 두 뺨은 꼭 그것이었다. 한숨도 못 잤느냐? 그랬다면 폐하께서 오셨을 때 뵈었겠지요. 짐도 선잠이 들었다가 깼다. 다시 자려는데 도무지 잠이 와야 말이지. 뒤척이다가 가볍게 산책이나 할까 하여 하개와 방황하다가 네가 당번인 것이 생각났다. 경수는 그제야 여태 자신을 못 미더워하던 하개가 갑자기 부드럽게 변한 까닭을 깨달았다. 종인이 예문관까지 와서 직접 외투를 덮어주는 것을 보고 그간의 사정을 들었을 터였다. 곤히 자고 있기에 깨울 수 없었지. 사책을 정리 중인 듯 보여서 얼른 나왔다. 황제가 예문관에, 그것도 사책을 늘어놓았을 때 찾아온 것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그래 * 임금의 옷

115 서 더욱 조심했을 것이다. 보는 눈이 많은데 어찌 옥보를 놓으셨습니까? 천자가 숙직하는 관리들을 둘러보는 것은 예사이니 그리 예민할 필요 없다. 혹시 몰라 철저히 주 변을 살폈으니 너무 그러지 마라. 궁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습니다. 이걸 돌려주는 구실로 밤이 아니라 아침에도 널 볼 수 있지 않으냐. 종인이 운룡무늬의 붉은색 외투를 가리켰다. 공연한 구설로 폐하께서 오해를 사실까 저어됩니다. 오해할 테면 하라지. 그것이 두려워서야 어찌 너를 곁에 두겠느냐?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잠은 안 오고 너는 보고 싶고. 고작 반나절을 보지 못할 뿐인데도 일각이 여삼추인 듯 네가 그리웠다. 짐도 모든 것이 생경하여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종인의 직설적인 화법은 번번이 경수의 낯빛을 노을로 물들였다. 경수는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 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에 대한 종인의 총애가 날이 갈수록 굳건해지니, 두려움보다는 달콤 한 연정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파루 치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지고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르는 시각이었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물러나겠습니다. 몸조심하여라. 곧 있으면 장마철이라 자칫 네 몸이 상할까 걱정된다. 전 그리 허약하지 않습니다. 또, 또. 걱정하면 하는 대로 그냥 받아들여라. 어찌 한마디를 그냥 지나치질 않아? 종인의 타박에도 경수는 해득해득하였다. 여명보다 우아하고 밝은 웃음에 종인은 조용히 경수의 뺨 을 어루만졌다. 밤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란 말인가.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지요. 항상 같이 있어도 그리우니 이는 필시 죽을병이리라.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 하지만 내 그리움엔 절반도 못 미치네. 바닷물엔 끝이 있어도 내 그 리움은 아득하여 가없다네. * 짐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경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미소만 지었다. 더 붙잡았다가는 오늘 하루를 망치겠다. 얼른 나가보아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경수의 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종인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환했던 침전에 역설 적이게도 다시 어둠이 내린 것만 같았다. 예문관에 돌아오니 함께 번을 섰던 선진들이 모두 깨어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각해서 경수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당직이던 임제관이 잽싸게 다가와 경수를 몰아세웠다.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다 오는 것인가! 몸이 뻐근하여 잠시 바람을 쐬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매섭게 달려드려는 임제관을 가로막으며 봉교( 奉 敎 ) ** 유은석이 나섰다. 호부와 병부에 올릴 장계가 사라졌다. 청천벽력이었다. 사관은 누구보다 장계를 먼저 볼 권리가 있지만 그 관리를 소홀히 하면 응당 중죄 였다. 그런데 그것이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육부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으니 이는 엄청난 사건 이 * 이야, 상사원( 相 思 怨 ) ** 정칠품

116 었다. 하지만 경수는 장계 관리는 모두의 책임인데 자신만 몰아세우는 임제관이 못마땅했다. 아무래도 한 달 전 면신례 때의 일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것 같다. 다행히 유은석은 대인파에 속하면서도 홍만립 못지않게 중립적인 편이라 임제관이 멋대로 구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장계를 보지 못했느냐? 소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 하여 없어진 장계가 돌아오느냐! 임제관이 빽 소리를 질렀다. 큰일이군. 가뭄에 대비하여 치수 공사를 시행한 과정을 담은 장계인데. 그뿐입니까? 병부에 올릴 장계는 경성현에 다시 들이닥친 예족의 횡포를 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근심하는 유은석에게 송인직이 보탰다. 내용을 들으니 사태가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다. 새벽녘에 어 사대의 계와 더불어 육부에 보내졌어야 할 장계가 사라졌으니 이는 치도곤을 당해도 모자랄 일이었 다. 장계는 늘 저쪽에 두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어제 당직을 선 사람들은 우리 넷뿐이고 내가 숙직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책상 위에 두루마리가 있었다. 그럼 내부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임제관의 추측에 유은석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곤란한 듯 혀를 끌끌 찼다. 도경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애초에 자리만 제대로 지켰어도 장계가 사라지는 황당무계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임제관은 끝까지 경수를 물고 늘어졌다. 경수도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혼 자 뒤집어쓸 것만 같아서 반박했다. 어째서 소인의 잘못입니까? 그럼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운 것이 잘했다는 건가? 숙직은 소인만 서는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하루 이틀 당직을 서나? 이날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헌데 자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일이 터졌으니 당연히 자네의 잘못이지! 곤히 주무시는 선진들을 차마 깨울 수 없어 잠시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을 뿐입니다. 허락도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 잘못되었다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마치 소인이 장계를 감추기라도 했다는 듯 몰아세우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잘못해 놓고 끝까지 말대꾸군! 네 뒤를 봐주는 이가 대단하여 이리 기고만장한 것이냐! 일갈하는 소리가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경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씩씩거리는 임제관 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방금 하신 말씀의 저의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저의라니?! 과거로 예문관의 문을 밟지 않았다 하여 이런 모욕을 주시는 것입니까? 자네의 잘못을 논하는데 갑자기 자격 타령이 나오다니 황당하군. 명월관에서의 일은 나리께서 소인에게 오해가 있으시어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소인은 그때 분명 히 해명했고요. 헌데 소인의 뒤를 봐주는 이라니요? 다 아는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는 건가? 그 날, 자신궁 궁녀가 다녀간 것은 태후마마께서 소인을 따로 불러 사관이되 폐하의 신하임을 훈 계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경수는 태후전에 불려갔던 것에 대해 예문관 선진들에게 그렇게 둘러두었다. 그 변명은 홍만립 외 에는 그다지 믿어주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도 황세용이 그를 발탁했다. 대인파의 수장인 황세용은 자신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 어서 아무도 면전에서 흉을 보진 않았다. 넓게 보면 같은 대인파인데도 임제관은 경수가 면신례 때 자신을 면박 준 일로 그를 탐탁지 않아 했다. 경수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117 헌데 뒤를 봐준다느니, 소인이 그것을 믿고 기고만장하다느니 억지를 부리시면 당연히 모욕적이라 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허! 끝까지 제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건가? 보십시오, 봉교 나리. 얘가 이렇습니다.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쏟고 꼭 피해자인 척한답니다. 소인에게 벌을 주시려거든 소인이 자리를 비운 것으로만 하시는 것이 온당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 다. 헌데 어찌하여 명확하지도 않은 인과로 소인을 범인으로 모십니까? 임제관이 또 쏘아붙이려 하자 유은석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만들 하게! 상참 시각이 머지않았거늘. 당장 사라진 장계를 찾지는 못할망정 면피하려고 서로 언 성을 높이다니 창피하지도 않나! 이것은 임제관이 일부러 장계를 감추고 경수에게 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인데도 증거가 없고 태성전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다고도 할 수 없어서 억울함을 그대로 당해 야 했다. 그래서 울화가 차올라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내부에 드나드는 이가 없었음은 확실하다. 일이 공교롭게 되었으나 모든 정황이 널 가리키고 있으니 어쩌겠느냐. 유은석은 피곤한 듯 노기를 누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믿어주십시오. 소인은 결백합니다. 나가기 전, 책상 위에 장계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허면 네가 자리를 비우기도 전에 장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더냐? 모르겠습니다. 송 검열. 자네가 마지막으로 숙직실에 들어오기 전에는 장계가 있었는가? 송인직은 그렇다고 답했다. 임제관은 여봐란 듯이 비소를 흘렸다. 후. 알았다. 일단 장계는 수습한 내용만 올려야겠군. 오늘 상참에서 논할 어사대의 계는 제대로 전 하였다고 했지? 예, 나리. 불행 중 다행이다. 그리 말하는 유은석의 목소리는 매가리가 없었다. 임제관과 더불어 상번이었으나 임제관보다는 한 품계가 높았으므로 실질적으로 오늘 당직에 대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었다. 또, 장계는 중간에 조작할 공산이 있어 계를 올린 수장의 직인이 반드시 찍혀 있어야 유효했다. 그 러므로 아무리 내용만 전한다 해도 이미 원본을 분실했다는 점에서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 런 모든 책임을 유은석이 져야 했으니 범인이 누구든지 그는 당장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고 있군. 임 대교는 나를 따라오게. 유은석이 어두운 낯빛으로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임제관은 경수에게 두어 마디 더 쏘아대고 싶은 듯 보였으나 유은석의 걸음이 워낙 빨랐던지라 그를 놓치기 전에 황급히 뒤를 따랐다. 임제관 나리께 단단히 찍혔군그래. 송인직이 냉담하게 쏘아붙였다. 그는 소인파 노선을 타서 그런지 예문관에 사완이 다녀간 후로는 전과 같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대단한 신래가 들어왔다며, 막내 노릇에 질린 자신은 더는 할 일이 없다며 어깨춤을 추던 그가 아니었다. 경수는 그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예문관 전체에 징계가 내려지겠어. 하다못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예문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될 텐데. 송인직의 중얼거림에 경수는 어안이 막혔으나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기로 했다. 경수는 간밤에 사책을 정리하느라 꼼짝없이 책상 앞을 지켜야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은 딱 두 번뿐이다. 하나는 코피가 터져 우물을 찾았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종인의 외투를 돌려주려고 태성전 에 갔을 때다. 둘 다 그리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나쁜 마음을 먹은 자가 장계만 쏙 훔쳐가

118 기엔 충분한 시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예문관에 함부로 드나들 사람은 없었다. 오가는 사람이라고는 끽해야 중추원 관리들이나 관청의 주인인 예문관 사람들뿐이다. 그나마도 새벽녘이라 중추원에서는 올 일이 없었고 예문관에서 숙직을 서는 당번들뿐이었다. 그렇 다면 이것은 임제관의 주장대로 내부인의 소행이 확실하다. 넷 중에 이처럼 비열하고 엄청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임제관밖에는 없었다. 경수에게 앙심을 품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제관은 아프다는 핑계로 유은석 나리보다 먼저 숙직실에 들어가 버렸어. 내가 깜빡 잠들 었다가 선진들의 숙직실을 확인했을 때도 한심하게 코를 골았다고.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목화도 처음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임제관과 무관할 것이다. 유은석은 당색이 대인파로 기울긴 했어도 홍만립과 버금가는 중립적인 사관으로서 이것은 매우 당 연한데도 사람이고 성격이 물러서 흉계를 꾸밀 담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단서 하나가 있었다. 22. 춘불주( 春 不 駐 ) 장계를 계속 찾아봐야겠어. 자넨 여길 뒤지게. 내가 안을 살펴볼 테니. 송인직이 숙직실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 경수가 나직하게 물었다. 검열 나리. 새벽에 어디 계셨습니까? 그러자 송인직이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우고는 경수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소리인가? 경수는 송인직을 쳐다봤다. 송인직은 기가 찬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설마 날 의심하는 건가?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이 없게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경수는 혀에 기름을 바른 듯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임 대교 나리는 제게 큰 오해가 있으시죠. 면신례 때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절 탐탁지 않게 보십니다. 전 임 대교 나리께 억하심정이 없지만 대교 나리는 그렇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사안이 무거운데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임 나리께서 이번 일을 꾸미고 자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경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송인직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경수를 뜯어보았다. 경수가 예문관에 오기 전에 홍만립이 내부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꽤 칭찬을 늘어놔서 도경수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 래도 그의 말에 조금도 부당함이 없어서 송인직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새벽녘에 졸다가 너무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였네. 자네는 갑자기 코피가 나서 우물 가에 다녀오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때 나리께선 깨어 있었죠. 그래. 자네와 난 둘 다 하번이라 상번들을 대신해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임 대교 나리는 편찮으시다며 자정이 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가셨고 그 뒤로 한 번도 방 밖으로 안 나오셨습니다. 유 봉교 나리도 나중엔 들어가 주무셨는데 그때가 축정( 丑 正 ) 쯤 됐을 겁니다. 저는 바로 뒤에 코피가 터져 우물에 다녀왔고요. 나리께선 제가 돌아왔을 때 막 숙직실에서 나오던 차였습 니다. 그렇지요? 송인직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새벽녘에 잠깐 졸긴 했는데 일다경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그나마도 제가 깼을 때는 파루가 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밤을 새우느라 머리도 멍하고 몸도

119 뻐근해서 잠깐 근처에서 산책하기로 했고요. 그리고 제가 일어났을 때 주위엔 아무도 없었지요. 잠자코 듣던 송인직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내가 자러 들어간 것은 분명하네. 그럼 자네가 깜빡 졸던 사이에 누가 들어와서 훔쳐갔겠지! 그건 누구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볼 때 장계는 분명히 그전에 없어졌습니다. 제가 다시 일어났을 때 장계는 이미 책상에서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아까 유은석 나리께 한 말과 다르지 않나? 장계를 보지 못했다면서 이제는 그때 이미 없어졌다고 쐐기를 박나?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그랬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자 하늘 같은 선진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다니! 송인직은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왕 무례를 범했으니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제가 우물에 다녀왔을 때 어째서 제 방에서 나오 셨습니까? 잠깐 눈 붙이러 방에 자리가 있나 확인하러 간 것일세. 선진들의 방은 네 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걸로 압니다만. 임제관 나리가 워낙 잠을 험하게 자서 유은석 나리도 그 옆에서는 쭈그리고 주무시네. 근데 말단 인 내가 거기서 쪽잠밖에 더 자겠는가? 하여 자네가 방을 쓰지 않으면 내가 자도 되나 싶어서 보러 간 것뿐일세! 정말로 날 의심하는 게로군! 억울함을 풀자는 거죠. 누가 되었든 범인은 임 대교 나리의 말대로 내부인의 소행이 확실하니까 요. 그러니까 자넨 잘못한 게 없다는 거잖나! 그럼 내가 범인이란 소리 아닌가? 경수의 되바라진 눈빛에 송인직은 벌게진 얼굴로 핏대까지 세웠다. 살다 보니 별 황당한 일을 다 겪는군. 이보게, 도 검열! 자네가 무슨 저의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 만 난 무고하네. 억울함을 풀자면서 날 범인으로 모는 것은 언어도단이지! 서로 혐의가 있으니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게 일의 매듭을 짓자는 것입니다. 이미 날 범인으로 생각하면서 일의 매듭이라니! 그럼 숙직실을 뒤져보면 공평하겠군요. 조금 전에 나리께서는 제게 이곳을 맡기고 당신은 숙직실 에 들어가서 장계를 찾아보시겠다고 하셨죠? 일순, 송인직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경수는 순간적으로 송인직의 얼굴에 스친 당혹감을 읽었 다. 그것은 따로 찾아보면 더 쉽게, 아니요. 같이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제 방에서 장계가 나오면 임 대교 나리의 소행이든 다 른 누군가 의 소행이든, 저만 억울한 일이 될 테니까요. 그러더니 송인직이 말릴 새도 없이 경수가 신래들에게 배정된 숙직실로 들어갔다. 송인직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손바닥만 한 작은 방에는 이부자리 한 채를 깔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이 있었다. 경수는 벽으로 바짝 붙인 문갑과 책상 서랍, 개켜놓은 모시 이불, 장판 밑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문갑 밑의 좁은 공간에서 두루마리 두 개를 발견했다. 호부와 병부에 올릴 장계였다. 경수는 설마 했는데 정말로 자신의 방에서 장계가 나오자 오싹했다.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하려고 했다는 데서 충격을 받았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두루마리를 송인직에게 보여주었다. 보셨습니까? 자, 자네가 훔쳤으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인가?! 대체로 제가 태성전에 있는 시각에 장계가 넘어옵니다. 이것 역시 겉봉조차 보지도 못했는데 제가 수많은 두루마리 중 무엇이 오늘의 장계인 줄 알고 훔치겠습니까?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자네가 모를 리가 있나! 새벽에 각사에 보낼 대나무 통이랑 같이 뒀는데 못 봤다는 게 더 이상하네!

120 저 혼자 사책을 정리하느라 며칠 동안 제정신 아닌 거 모르십니까? 그래서 유은석 나리가 당분간 계 전달하는 건 나리더러 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절 물고 늘어지십니까? 예문관의 하번들은 매일 실록의 최종 원고가 되는 정초( 正 草 )와 시정기를 수정해 상번 사관에게 올 렸다. 또 경연이나 늦은 밤에 이루어지는 야대가 있은 후에는 다음 날에 상참 등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어사대에서 올린 계를 작은 글씨로 적어 대나무 통에 봉한 후 새벽녘에 각사 관원 들에게 전달하였다. 근래에 사책 정리 작업에 매달린 경수를 배려해 홍만립과 유은석 등 봉교들이 당분간 각사에 계를 전하는 일은 다른 검열들더러 하라고 했다. 송인직은 나이순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간 예문관의 막내 역할을 담당해 와서 계 전달 임무는 자연히 그에게 맡겨졌다. 경수는 송인직이 이번 일의 주범이라고 확신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뭘 말하라는 것인가? 난 결백하다지 않았나! 나리께서 소인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빼도 박도 못하는 정황에 송인직의 낯빛이 흙처럼 변했다. 나리뿐만 아니라 면신례 이후 친절하던 선진들께서 자신궁 궁녀가 다녀간 뒤부터 다시 냉랭해진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의심하시겠지요. 제가 자신궁의 끄나풀이라고. 자신궁의 끄나풀인 제가 소인파가 강력히 지지하는 황제 폐하를 감시한다고요. 경수는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본심과는 다르게 남들의 시선은 딱 바깥에 보이는 수준이 었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지만, 이것은 각오한 일이니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해코지하고자 예문관 전체에 화를 부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전 나리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공연한 분란은 일으키지 마십시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자네야말로 허튼짓 하지 말게. 밤마다 폐하 옆에 붙어서 무슨 짓을 벌 일지 내가 어찌 아나?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은연중에 자신의 소행임을 시인하는 송인직. 경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 것도 다 종인을 생각하여 벌인 일이라 좋게 여기고 싶었다. 그래도 억울함은 풀어야 했다. 또 송인직 은 종인에 대한 충심이 깊은 사람이라 어쩌면 이번 일이 전화위복이 될지도 몰랐다. 저는 상관없지만 폐하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자네가 태학관에서도 이름깨나 날렸다는 것은 알고 있어. 세 치 혀로 폐하를 구워삶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나? 그 영민한 머리로 태후마마의 사주를 받아 시시각각 폐하를 옭아매고 있음은 천하 가 다 아는 일이야!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반드시 사과하셔야 할 겁니다. 흥! 정곡을 찌르니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지? 제가 쓴 사초를 읽어 보신 적이나 있으십니까? 경수는 곧바로 밖으로 나가 예문관에 보관 중인 사초 일부를 가져왔다. 그는 자신이 쓴 것을 송인 직에게 들이밀었고 송인직은 못마땅한 얼굴로 사초를 받아들었다. 천천히 그것을 읽던 송인직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다. 내용들이 어찌 한결같이 이 모양인가? 송인직은 재차 내용을 읽었지만 더 볼 가치도 없었다. 저는 홍만립 나리께 사관은 반드시 직필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자신궁의 끄나풀이라면 그 가르침을 어기고 이따위로 썼겠습니까? 폐하께서 벙어리도 아니고, 정말 입 꾹 다물고 주야장천 책만 읽고 어린 내시를 불러다 바둑만 두셨겠습니까? 사초에는 시종일관 종인이 했던 말 대신 실록에 싣기에도 민망한 시시콜콜한 취미 활동만이 적혀 있었다. 이대로라면 대인파에서 굳이 태성전에 사관을 들이는 파격적인 일을 감행하여 황제를 감시할 필요가 없었다. 이럴 수가!

121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송인직의 낯빛이 창피함에 붉게 물들었다. 경수는 사초들을 정리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때까지 도 송인직은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장계를 훔치신 것은 폐하 때문에 그러신 것이죠? 나, 난 정말 몰랐으이. 송인직은 당황해서 인중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일세. 충심에서 비롯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그럼 자네는 대인파가 아닌 것인가? 다시 사초를 보여드릴까요? 하지만 황 사도가 자넬 직접 뽑아서 홍만립 나리한테 교육하라 하고 태후전에도 불려가지 않았었 나? 저는 대인파도 아니고 소인파도 아닙니다. 그저 폐하를 보필할 뿐이죠. 맹세컨대, 폐하께 해될 일 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아 주십시오. 특히 대인 파에 이 사실이 새나가면 안 됩니다. 송인직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사죄했다. 경수는 얼른 송인직을 일으켰다. 헌데 어찌 장계를 훔칠 생각을 하셨습니까? 장계가 분실되면 자넬 쫓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그리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셨다고요? 전대미문의 사건이니 선진들이 응당 그런 처분을 내리실 줄 알았지. 저만 쫓겨나면 다행이죠. 예문관 전체가 오명을 뒤집어쓰고 고초를 겪을 텐데 저 하나 잡자고 다 른 선진들까지 엮이게 할 셈이셨습니까? 또, 제가 쫓겨난들 태후마마께서 다른 사관을 구하지 않는다 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미안하네. 부끄러워서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으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송인직에게 경수는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임제관 나리는 절 의심하고 있으니 이번 일은 제가 죄를 청하겠습니다. 그, 그럼 자네는 정말 쫓겨날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사책이 너무 많아 잠깐 다른 쪽에 치워둔 것을 잊어버렸다고 하면 됩니다. 설마 치도곤을 내리고 내쫓으실까요? 대신 나리께선 오늘부터 저와 같은 배를 타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연하다마다. 지은 죄가 있고 자네가 폐하께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는데 두말해서 무엇하 겠나? 좋습니다. 그럼 오늘 여기서 나눈 대화는 서로 깨끗하게 잊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하면 비 루한 제 목숨이 아니라 폐하께서 위험해지심을 명심하십시오. 뼈에 새기겠네. 두 번, 아니, 수백 번이라도 새기겠네! 낮부터 가랑비가 쏟아지더니 밤이 되자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장장하일을 알리는 장마의 시작이었다. 먼 산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가 밤의 적막을 갈랐다. 그와 함께 진땀을 흘리며 뒤척이던 종인은 뭔가 잡아끈 듯이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관자 놀이에서 주르륵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때마침 여린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 불벼락이 내리쳤다. 시퍼런 번갯불이 번쩍하며 어둠을 매질했 다. 그 소리가 야차의 고함과도 같아서 종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비 오는 밤, 부산스러운 천둥과 번개, 홀로 지키는 커다란 침전. 어느 하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종인은 무릎을 감싸며 얼굴을 묻었다. 선혈이 낭자한 여인의 시신을 또 보았다. 그녀는 의귀비였고 어머니인 숙비의 연적이기도 했다. 피 를 토한 여인은 저주를 쏟은 후 눈깔을 뒤집으며 죽었다. 영화로운 동궁의 생모였으나 나찰녀처럼 혐

122 오스러운 마지막을 맞았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매번 종인을 괴롭히는 망령이었다. 숙비가 죽기 전이야말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어린 마음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줄 알았다. 어머니는 비 오는 밤이면 두려움에 달달 떨던 아들을 꼭 끌어안고 연신 괜찮다고 위로했다. 예쁜 산 호로 만든 요패를 주고 그것이 널 지켜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종인이 바란 것은 산호가 가진 미신 따위가 아니었다. 어린 종인이 원한 것은 그저 밖에 있느냐! 갈라진 목소리로 외치자 하개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주군의 흐릿한 윤곽을 보고는 냉큼 촛대를 밝혔다. 폐하! 폐하, 오한이 드시나이까? 종인이 달달 떨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치르는 일이다. 근래에는 유독 밝아져서 나은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나가려는 하개의 팔을 급히 잡았다. 이불을 바싹 끌어안은 종인은 다소 힘겨워 보였다. 하개는 안절 부절못하다가 방 안에 촛불을 더 밝혔다. 빗소리는 여전했고 천둥도 먹이를 노리며 숨죽인 짐승처럼 낮게 울부짖었다. 이리 계시면 아니 되옵니다. 어의를 부르셔야 하옵니다. 하개가 가슴이 미어져 슬픈 목소리로 애원했으나 종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이 어찌하오리까? 그 아이 예, 폐하. 도경수를 불러오라. 지난 새벽에 예문관을 들른 황제로부터 도경수와의 관계를 들은 하개는 경악하다 못해 심장이 발로 떨어진 줄 알았다. 황제가 황후를 멀리할 때부터 내심 혹시나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사실로 드러 난 것은 둘째 쳐도 어떻게 자신까지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지 내내 서운했다. 하여 종인을 사뭇 원망했는데 종인이 최근 보기 드물게 자신감도 생기고 생글생글 웃어서 긍정적으 로 여기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도경수는 여러모로 훌륭해서 적이 아니라면 종인의 든든한 조력자 로 손색없었다. 외람되오나 오늘은 번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새벽에 예문관에서 장계가 없어져 한바탕 소동이 일었고 경수가 범인으로 몰렸었다. 결국엔 경수가 다시 그것을 찾아내 사건은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경수는 선진들에게 호되게 혼쭐이 났다며, 하마터면 한 달간 녹봉이 깎일 뻔해서 눈물이 찔 끔 날 지경이었다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면서 오늘은 숙직 서는 날이 아니니 어젯밤처럼 중간 에 깨지 말고 푹 침수에 들라며, 잔소리까지 덧붙이고 나갔다. 그것이 불과 몇 시진 전인데 새카맣게 잊었다. 종인은 자신이 조금 한심했다. 그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쳤다. 백비탕을 올리오리까? 하개에게서 새하얀 수건을 건네받으며 종인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최근 국정에 매진하시느라 옥체에 다소 무리가 가신 것은 아닐는지요? 한동안 괜찮았다고 방심한 것이 잘못이지. 어의와 심도 있게 상의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꿈자리가 사나워 제대로 안숙하지 못하시니 속이 더 욱 불편하신 것입니다. 아침마다 자릿조반만 젓수시고 수라를 거르시는 것도 다 그러한 연결고리 탓 이 아니겠나이까? 내의원 의관이 다 되었구나. 우스갯소리로 넘기지 마소서. 끔찍한 꿈이어도 십 년 가까이 꾸다 보니 친근하기까지 하다. 적들이 날 찢어 죽이려고 칼을 가는

123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부디 두려운 말씀은 거두어 주소서. 종인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혀끝이 온통 삽삽했다. 내리는 빗물이라도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었으나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빗물에 발을 내 딛는 순간 심해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장마가 지는구나. 빗소리는 무거웠다. 그것을 음률 삼아 제법 진정된 종인이 어지러운 듯 눈을 감았다가 홉떴다. 하개 가 걱정할까 봐 그는 공연히 말을 돌렸다. 얼핏 보니 휘정궁을 수리 중이던데? 손볼 수 있는 곳은 미리 손보는 중입니다. 자문감이 바쁘겠구나. 황궁은 수많은 궁인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니 누구의 불편도 없어야 할 것이 다. 빗물이 새거나 얽은 곳이 없게 잘 보수하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허하게 지창의 그림자로 시선을 던지는 종인. 침의로도 감출 수 없는 실팍한 등에서 치열한 번뇌 와 지독한 고독이 묻어났다. 날이 밝으면 조회에 나가셔야 하니 그만 침수에 드소서. 빗소리가 저리 새살거리는데 다시 잠들 수 있을까. 마음이 헛헛하여 양기가 부족해지고 그것이 악몽으로 이어져 폐하의 옥체를 갉아먹음이 아니겠나 이까? 자고로 음양이 조화로워야 내실이 튼튼해지는 법이옵니다. 봐라. 이제는 관상감 노릇까지 하는구나. 특유의 청량한 웃음소리조차 차가운 빗소리에 폐허의 공명으로 들렸다. 도 검열을 총애하시거든 곁에 두시면 될 텐데 어찌 매번 일정한 거리를 두십니까? 이번엔 중매쟁이가 되려느냐? 폐하! 아무리 좋은 감투도 저 싫으면 그만인 것을. 하개는 깜짝 놀랐다. 종인의 승은을 입으려고 하루가 멀다고 꽃단장한 채 기다리는 궁녀들이 지천 인데 도경수는 간이 커도 한참 큰 것 같았다. 당돌하지? 그렇다고 하기에도 모호하고, 아니라기에는 예문관에서 들리는 그에 대한 소식이 만만치 않은지라 하개는 퍽 난처했다. 그는 차라리 어색하게 웃으며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짐도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허나 도경수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 지 않구나. 그 아이를 상처 입힌다면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거든. 이런 기분, 너는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래도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있진 않으실 것 아닙니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약이 된다. 우리에게 상처가 없는 이상, 건강하게 보듬겠지. 영명하십니다. 종인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자객 사건 이후 장문견은 병을 핑계로 몸을 사렸고 대인파도 그로 인해 불씨가 사그라진 상태다. 그나마 경수를 통해 불꽃을 살리려고 애쓰는 중이나 그마저도 종인에게 농락당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 고 있다. 그래서 종인은 그간 해 보지 못한 것을 마음껏 시도하는 중이었는데, 하개의 지적대로 그 과정에서 다소 무리했던 것 같다. 이렇게 거침없이 달려나가면서도 내심 마음에서 거두지 못한 저주 의 두려움 은 항상 종인을 괴롭혔다. 그것은 뇌리에서 파내고 싶은 편린이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잔상. 비가 오면 심 해지고 어떤 때는 까닭도 없이 발작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야차 같은 놈이다. 이것이 날뛰지 않으려 면 뭔가에 몰두해야 했다.

124 한동안 거르셨으니 내일 어의에게 다시 익기안신탕( 益 氣 安 神 湯 )을 올리라 하겠습니다. 내의원이 또 호들갑을 떨겠구나. 그들의 일이옵니다. 이번 비로 봄꽃은 다 졌겠군. 바야흐로 여름이옵니다. 한 계절이 물러가면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지요. 붙잡아도 봄은 머무르지 않고, 봄이 돌아가니 세상은 적막하구나. * 하개. 머리가 아프구나. 소인이 곁을 지키겠습니다. 하개가 종인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주고 나서 밝힌 촛불 두어 개를 껐다. 외로이 타는 촛불 하나가 빗소리 가득한 방 안을 조용히 비추었다. 23. 연연( 戀 戀 ) 상참이 열렸다.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 편전 양옆으로 도열했다. 용상이 놓인 중앙에는 간밤에 잠을 설친 종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가무잡잡한 편이라 눈 밑의 그늘은 별로 티 나지 않았지만 이틀 연 속 여윈잠을 자서 낯빛은 조금 어두웠다. 종인이 시작하라는 손짓을 하자 간단한 정무 보고가 이어졌다. 대과가 코앞이었으므로 예부에 각별 한 당부와 주의를 시킨 후 곧장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병부상서가 읍을 하고 나아와 어제 받은 장계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폐하. 경성현령이 또 장계를 올리기를, 예족의 칸이 그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침노하여 오만방자하 게 군다고 하옵니다. 지난번에 무정후가 군을 이끌고 나가 토벌하였는데 새 칸이 등극하면서 우리와 의 약조를 어기고 자발없이 군다 하니 그 작태가 심히 참람하기 그지없나이다. 찬열과도 얘기한 부분이지만 예족이 제대로 복수의 칼을 갈아서 종인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 다. 웬만하면 전쟁을 피하고 싶으나 북의 백성들이 고통받으니 도리가 없었다. 결국 경성현에서도 힘에 부치는 모양이구려. 경들은 이 문제를 어찌 보시오? 모처럼 등청한 장문견이 물었다. 현재 칸이 누구입니까? 전대 칸의 막내아들이오. 지난번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라 하오. 그렇군요. 사실 신이 그 아이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만 당시 편장군이던 박찬열이 말려서 내버려 둔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그때 죽였더라면 예족의 씨가 말라서 오늘날의 일은 없었을 것인즉, 모두 신의 불찰입니다. 무정후의 잘못이 아니오. 또 아무리 전장이라 해도 어린애를 죽이는 건 떨떠름하오. 그렇긴 해도 족장의 후계자입니다. 갓난아기라도 죽여야 후환이 없지요. 그리고 새 칸이 올해 열여 섯 정도 된 것으로 아는데 그만하면 어엿한 장정입니다. 전장에서 인정은 쓸모없음을 알지만 이왕 벌어진 거 어쩌겠소? 대책을 세우는 것이 현명하오. 사도 황세용이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나섰다. 북녘은 산이 많고 땅이 토박해 백성들이 살기 어려운데 겨우 안정시켜 놓은 경성현에 이 같은 일 이 또 벌어지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그러니 대책을 생각해 보라는 것 아니오? 종인은 그 가증스러움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 다시 병부상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오? 현재 무고한 백성들이 무자비하게 죽어 나갔고 어렵게 일군 가축이나 곡식도 모조리 빼앗기는 상 황이라 합니다. 문을 잠그고 집에 숨으면 담을 넘고 걸쇠까지 부수고 쳐들어와 일가를 도륙한다 하니 야차와 다르지 않사옵니다. * 백거이, 낙화부( 落 花 賦 ) 중

125 감히 짐의 백성들을 짐승 다루듯이 하다니 귀축이 따로 없군! 종인이 팔걸이를 쾅 내려치자 신료들이 입을 모아 고정하시옵소서! 라고 외쳤다. 이때, 대인파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김종인은 짐의 백성 이라고 칭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분노에 겨워 팔걸이를 내려친다거나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일 따위는 엄두도 못 냈었 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거나 곤란한 듯 입매를 늘어뜨리거나 휘몰아치는 조정 안건에 시달려 풀죽은 채 편전을 빠져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단 몇 달 만에 저리 위풍당당해지다니, 상전벽해도 유분 수였다. 북녘에서 전운이 감도는 것은, 자객 사건 이후로 죽은 듯이 살던 장문견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작 년 토벌에서 세운 공로를 스스로 걷어찼으니 이번 전쟁은 하늘이 내린 동아줄이었다. 신이 가겠나이다. 씨근거리던 종인이 나볏하게 자세를 고치고 장문견을 응시했다. 신에게 군을 내어주소서. 어차피 예족은 신에게 여러 번 진 적이 있고 지난번 정벌도 신이 진두지 휘했으니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장문견은 종인이 당연히 그러라고 대답하리라 기대하였다. 경이 허리가 아파 계속 두문불출한 것을 아는데 짐이 어찌 아픈 무정후를 호굴로 보내겠소? 뜻밖의 대답에 장문견과 모였던 신료들이 모두 놀라 종인을 쳐다봤다. 예전 같으면 토벌은 묻기도 전에 장문견의 몫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북녘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번 일도 당연히 그의 수중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한 이가 다수였다. 호국을 위해서라면 없는 허리라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신이 가게 해 주십시오. 장문견은 의례적인 겸양인 줄 알고 재차 청하였다. 피차 허리 때문에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님을 알 지 않는가. 아니오. 요양 중인 경을 전장으로 보낼 순 없소. 자칫 경에게 큰 문제라도 생기면 이는 국가의 손 실이오. 폐하! 지금 신이 늙어 전장에서 무용지물이라 보시는 것입니까? 백성들이 신음하는데 이깟 허리가 문제겠습니까? 경의 충심은 잘 알지만 짐은 경이 무리하지 않았으면 하오. 장문견이 서운한 표정으로 덧붙이려 하자 소인파인 이부상서가 곧바로 쏘아붙였다. 여태 몸이 안 좋다고 조정에 들쭉날쭉 나온 것이 누굽니까? 아프면 사직서를 내고 낙향하면 될 일 입니다. 이부상서! 방금 뭐라 하였소?! 무정후가 아프다고 해서 태후마마의 근심도 크시다 알고 있거늘. 아프면 요양으로 빨리 나아서 다 시 조정에 봉사할 생각을 하셔야지, 본인 내킬 때만 등청해서야 되겠습니까? 뭐, 뭐라? 뚫린 입이라고 뱉으면 다인 줄 아는가! 장문견이 외치자 독 오른 이부상서가 다시금 핀잔을 주려는데 종인이 황급히 가로막았다. 이부상서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무정후가 병으로 제대로 등청하지 못한 지 오래됐소. 짐이 걱정하 고 있음을 모르시오? 하오나 신은, 경은 대연의 대들보인데 그대에게 행여 문제가 생기면 짐과 태후마마는 어찌 살라는 거요? 자신의 귀를 녹이려고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종인의 농간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연 쇄적인 모든 것이 자충수였다. 장문견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폐하께서 신을 그리 생각해 주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다소 진정한 장문견이 다시 무리 사이로 섞이자 종인은 만족한 듯, 그러나 표정에 일절 변화 없이 병부상서에게 시선을 던졌다. 전쟁은 불가피하겠소? 그러하옵니다.

126 경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러하옵니다. 그럼 적을 소탕해야지. 헌데 여름이고 지난번 토벌로 비축해 둔 군량이 많지 않으니 가능한 속전 속결로 끝내야 할 거요.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이제 궁지에 몰린 장문견이 황세용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황세용이 급히 나섰다. 과연 영명하십니다. 침노한 적에겐 본때를 보여야 마땅하지요. 헌데 무정후가 지병으로 출전하지 못하니 이번 토벌을 누구에게 맡겨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짐이 보기엔 무위장군 박찬열이 괜찮은 듯하오. 태후 장씨의 인척이자 장문견이 어여쁘게 여기는 박찬열을 보내겠다니 대인파로서는 천만다행이었 다. 박찬열은 지난번 토벌에서 칸의 아들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수급도 여럿 베고 식량도 탈취하였지. 활약이 대단하여 무정후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오. 그리고 열다섯 때부터 이미 이름을 날린 대연 의 명장 중 하나이니 이번 전쟁을 책임질 유일한 사람으로 보이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니 이번 토벌에 적임자인 듯합니다. 대인파로서는 불씨가 아예 사그라지기 직전이었으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박찬열 구슬리기야 장문견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그가 이번 전쟁에서 제대로 성공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좋소. 그럼 박찬열에게 이 일을 맡기겠소. 무위장군이 승전하고 바로 돌아오면 불한당 같은 예족이 또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 이것은 어찌합 니까? 동주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병부상서의 질문에 종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흠. 그럼 박찬열을 도독으로 보내시오. 이 년 동안 외직에 나가 근방을 정리하면 적들이 감히 연의 국경을 넘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이번엔 소인파에서 들불처럼 반대하고 나섰다. 아니 되옵니다! 어사대 장령( 掌 令 ) * 인 한민생은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했다. 그는 종인을 지지하면서도 불쾌할 만큼 직언을 쏘는 자였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도독은 종이품 당상관인데 이제 겨우 스물 둘인 박찬열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고 하심은 불가하옵 니다! 벼슬을 지나치게 초자하면 오히려 반감을 살 뿐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박찬열은 전장에서 활약한 지 칠 년째요. 그 실력이 절륜한데 대체 뭐가 문제란 것이오? 허나 실무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자를 도독으로 임명했다가 지방 수령들과 마찰을 빚으면 오히려 더 큰 혼란만 올 것입니다. 한민생의 반박에 어사대부도 은근슬쩍 말을 보탰다. 한 장령의 말대로 박찬열은 올해 고작 스물 둘이옵니다. 지나치게 어리지요. 또, 본디 도독이란 문 관 출신으로 채용하는 것이 국법이온데데 이를 무시하시면 지엄한 국기가 어찌 바로 서겠습니까? 능력 있는 자한테 일을 준다는데도 문제가 되오? 예외가 생기면 국법이 가벼이 여겨질 터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엔 이부상서가 말했다. 폐하. 사기에 기록된 가의( 賈 誼 )의 일을 생각해 보시옵소서. 그 말에 종인의 얼굴이 굳었다. 가의는 한 무제 때의 문신으로 스무 살에 관직에 올라 일 년도 안 되어 태중대부가 되었다. 그가 문치주의를 내세워 과감하게 조정 개혁에 앞장서자 이를 시기한 주발과 관영 등 여러 대신들이 나서 서 그를 조정에서 내쳤다. 중앙에서 쫓겨난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는데, 모시던 주군이 말에 떨어 * 종사품

127 져 죽자 이를 슬퍼하다 이듬해 요절하고 말았다. 박찬열은 무장일 뿐이오! 고정하시옵소서. 박찬열이 대단한 것은 인정하나 높은 관직을 그리 쉽게 주면 권위도 없고 본인에 게도 실례입니다. 승전하고 돌아오면 할아버지뻘 되는 조정 영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텐데 그 겸손한 성격에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겠습니까? 이부상서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박찬열의 부친이 현재 사예교위인데, 부자가 겨우 한 품계밖 에 차이 나지 않으면 박우헌의 체면도 구겨지고 박찬열도 곤란해 할 것입니다. 구세주를 만난 듯 한민생은 냉큼 쐐기를 박았다. 그제야 종인이 주저하며 꼬리를 내렸다. 허면 어찌해야 하오? 그에게 군권을 확실히 내줘야 지방군이며 토착민들이 그의 작은 명령도 추상 같이 따를 것 아니오? 가만히 지켜보던 장문견이 비루먹은 관직을 받을까 봐 얼른 선수 쳤다. 우장군에 제수하면 정사품 당하관입니다. 박찬열은 현재 종사품으로 승차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 습니다. 그런데 다시 품계를 올려주면 사기 증진도 되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전시에 지방의 모 든 군사와 실무를 활용할 실질적인 권한을 그에게 주면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군대에 잔뼈 굵은 무정후라 견해가 다르군. 여기에 이견이 있소? 무정후의 말대로 행하소서. 다만 행수법( 行 守 法 ) * 에 따라 수( 守 ) ** 우장군이라 하시고 이는 경성현 으로 파견된 동안만 내리는 임시직이어야 합니다. 이부상서가 나서자 한민생이 얼른 덧붙였다. 그러하옵니다. 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품계를 올리지 마시고 무위장군으로서 직무 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박찬열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여러 모 로 고려해야 합니다. 짐도 그자가 지나치게 유충하여 지방 수령들이 얕잡아 볼까 염려되어 제안한 것뿐이었소. 그럼 무 정후의 제안대로 박찬열을 우장군에 제수하고 군을 내어 주리다. 열흘 안에 도성을 떠나라 하시오. 병부상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물었다. 폐하. 아까 하다 만 얘깁니다만, 예족을 몰아낸다고 해도 박 장군이 곧바로 돌아오면 그 후안무치 한 자들이 또 쳐들어오지 말라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한서현과 경성현은 가깝지. 동주자사와 한서현령에게 서신을 보내 합심하여 경성현을 돕게 하겠소. 거기서 몇 달간 주둔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사실 지난번엔 장기전이었음에도 뭘 수습할 틈도 없이 급 하게 온 감이 없지 않았소. 백 번 천 번 타당하시옵니다. 병부상서가 머리를 조아렸다. 첨원사( 僉 院 事 ) *** 는 보고 들은 대로 교지를 작성하라. 옆에 있던 첨원사가 찬열에게 내릴 교지를 써 내려갔다. 문을 넘자 태성전 석계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하개가 경수에게 다가왔다. 경수는 하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하개는 그런 경수를 다소 궁벽한 곳으로 불렀다. 경수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개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경수는 종인이 편히 잠들지 못하고 밤새워 뒤척였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다. 내의원에서는 뭐라 하더이까? 실면증( 失 眠 症 ) **** 이라는데 항상 발병하는 것이 아닌지라 그때그때 탕약만 들고 계시네.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것입니까? * 품계와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을 때의 구분법 ** 품계보다 실제 관직이 높을 때 쓰는 말 *** 중추원 소속 정삼품 관리 **** 불면증

128 그저 흉몽을 꾼다고만 하시고 도통 입을 열지 않으시니 나로서도 알 길이 없네. 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 잠저 시절부터셨네. 헌데 보위에 오르신 후로는 더욱 심해지셨지. 수렴을 받는 동안 용상이 가시방석이셨을 테니 오죽하셨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 년도 넘은 병이란다. 경수는 기가 막혔다. 연나라 최고의 의원들만 모였다는 내의원에서도 제대로 병을 고치지 못한다니 눈앞이 캄캄하기까지 했다. 폐하께서는 별일 아니라며 마치 계절마다 앓는 풍한처럼 가벼이 여기시네. 허나 일 년에 꼭 한두 번은 열병처럼 앓으시는데 며칠 뒤에 혼절하는 일도 적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혼절까지 하신다고요? 그런데도 어의들은 별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던가요? 탕약과 침, 뜸까지 놓고 있네만 아무래도 마음의 병이 깊어 저러신 듯하네. 근 삼 년에는 더욱 심 해지셨지. 최근 삼 년이라면? 영회황후께서 서거하신 것이 당신 탓이라며 자책하곤 하셨다네. 경수는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듯 일순 정신이 요연해졌다. 종인의 상태가 심각한 줄도 몰랐거니와 최근 심해진 것이 황후의 죽음으로 인한 자책감 때문이라니 가슴 미어졌다. 더구나 어제는 그토록 싫어하는 비도 모자라 날카로운 천둥과 벼락이 내리쳤지. 종인은 다소 제멋대로지만 웃는 낯 뒤로 감춘 슬픔이 살을 엘 정도였다. 한때 세상의 모든 불행은 자신이 끌어안은 줄 알았던 경수로서는 그런 종인을 떠올리면 가슴이 갈가리 찢기다 못해 터질 것 같 았다. 가늠조차 안 되는 숱한 밤. 어린 소년 홀로 삭였을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과거를 들이대는 것 자체 가 교만이었다. 새벽에 깨셔서는 도 검열을 찾으시었네. 저를요? 도 검열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가능한 폐하 곁에 오래 있어주시게. 지 금 당장 폐하를 기쁘게 할 사람은 도 검열밖에 없으니. 하개는 얼른 들어가 보라며 경수의 등을 떠밀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때마침 바둑을 두고 나오는 모양인지 얼마 전부터 자주 얼굴을 비치는 상경 우장 과 마주쳤다. 우장이 허리를 숙이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경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종인은 우장과 조금 전까지 두었던 바둑알을 스스 로 치우고 있었다. 경수는 종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늘은 조금 늦었구나. 송구합니다. 사정이 있었겠지. 짐은 상소를 마저 봐야 한다. 편히 일 봐라. 경수는 칸막이 옆으로 가 앉았다. 평소처럼 필기구와 종이를 정리하고 단정한 자세로 허리를 폈다. 그런데 별안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하도 메말라서 월란이 죽었을 때조차 제대로 울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 이 빠삭 마른 고목 같다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집안 사정으로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대신해 눈물을 삼켰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슬픔에 복받쳐 이슬이 줄줄 흐르니 자신도 당황하고 말았다. 경수가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예민한 종인이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는 얼굴을 들 어 올렸다. 소매로 급히 눈가를 닦는 경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종인이 얼른 그에게로 자리를 옮겼다. 어찌 눈물을 보이느냐? 누가 널 괴롭히기라도 했느냐? 경수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라. 누가 널 눈물짓게 하였느냐? 경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찬열이 우장군에 제수되어 열흘 안에 경성현으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몇 달

129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그 먼 길을 나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사내 녀석이 그만한 일로 울음을 터트렸느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고 늘 친형제처럼 챙겨주었습니다. 그런 벗이 또 사지로 향한다 하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너도 참. 찬열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장인데 그리도 걱정되느냐? 제 성격이 원래 속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속이 좁은 것이 아니라 정이 많은 거다. 종인은 상냥하게 경수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미온마저 경수의 심장을 푸르게 적셔 서 다시금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찬열이라면 무사히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운 것을 알면 찬열 성격에 오히려 마음 만 무거워질 텐데 그걸 원하진 않겠지. 경수가 작달막한 머리통을 끄덕이자 종인은 그 손을 잡고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실은 당신이 너무 가여워서 오장에서 슬픔이 치솟는다고 털어놓고 싶다. 경수는 바라만 봐도 눈물 이 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런 사람을 자신이 사모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폐하의 그림자가 되기로 한 이상, 감춘 가시마저 품을 테니까요. 습윤하게 아롱진 이슬을 모두 닦아내니 슬픔이 조금 진정되어 보였다. 다시 상소를 봐도 되겠느냐? 면구합니다. 면구하기는. 슬프면 울어야지. 옥안 앞으로 돌아가 재차 상소문을 움켜쥔다. 아스라이 보이는 종인의 모습에 주책없이 또 눈물이 흐르는 것을 꾹 참으며 경수는 조용히 물었다. 밤사이 장대비가 세차게 내렸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새삼스러운 문안에 종인은 이상하게 여기며 경수 쪽을 쳐다봤다. 반듯한 자세로 붓을 든 경수는 겉 보기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강녕했다. 너는 별일 없었느냐? 모처럼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습니다. 음. 넌 비 갠 뒤 물안개 낀 경치를 좋아한다고 하였지.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네가 한 얘긴데 잊어선 안 되지. 비 오는 날을 싫어하시는데 정말 괜찮으셨습니까? 괜찮다마다. 왜 그러느냐? 이제 여름입니다. 한동안 장맛비가 그치지 않을 텐데 심기가 불편하실 듯하여 그럽니다. 그런 일로 화내지 않는다. 폐하의 옥체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어의들이 보살피고 있다. 짐은 오히려 네가 걱정이다. 안 그래도 업무가 많은데 숙직을 서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아닌가. 다음 상소를 집어 들며 종인은 다시 경수 쪽을 힐끔거렸다. 경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 였다. 아른거리는 면사 사이로 서로의 희부연 윤곽만이 비쳤다. 어찌 그러느냐. 경수야. 폐하가 그리워서 그렇습니다. 경수가 급작스레 저러는 까닭을 몰라서 종인은 자못 미간이 구겨졌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없습니다. 그런데 너답지 않게 갑자기 왜 이러느냐?

130 바닷물의 그리움은 끝이 있지만 사람의 그리움은 그렇지 않죠.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십시 오. 그저 이렇게 폐하를 그리워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꿈속에 새파란 하늘과 빛나는 햇살을 넣어드리고 싶습니다. 붙이지 못한 말은 조각처럼 흩어졌다. 24. 추문( 醜 聞 ) 군자향( 君 子 鄕 ) * 은 투박하니. 고야정( 姑 射 庭 )이라 하면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입궁한 진왕은 대뜸 소비원의 이름을 지어 달라는 아우의 부탁에 조심히 답을 내놓았다. 소비원은 황제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 종대 본인도 태어나 단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소문으로는 신비로운 꽃나무와 물길, 연못, 수석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마치 무릉 도원을 연상케 한다고 하였다. 소신이 소비원에 든 적이 없는지라 풍취를 알지 못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종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지 않자 종대는 냉큼 둘러댔다. 고야정이라. 장자의 소요유 편을 보면 막고야산( 藐 姑 射 山 )이란 곳에 고야선이란 선인이 사는데 살갗은 빙설이 요, 나긋나긋하기는 어린 여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으레 눈부신 미인을 집 안 깊숙이 숨기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데 소신에게는 폐하의 소비원이 그런 미인으로 보입니다. 하하하.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은 아닙니다. 저도 그 부분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그 선인이란 것이 꼭 매화를 비유한 것 같더군요. 폐하께서도 그리 느끼셨습니까? 소신도 매화의 순결하고 깨끗한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소비원에 매화나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매화는 사군자 중 하나이니 응당 심으셨겠지요? 색다르게 백매를 심고 싶어 구석에 갖다 놓았죠. 그러셨군요. 백매의 청아함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순결하지요. 그럼 고야정이라 하고 현판을 달겠습니다. 형님께서 글씨를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요? 명필이시잖습니까. 다른 나라에서도 형님의 글을 구하려고 안달이라더군요. 종인은 친형제인 종대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경수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다. 그러나 십 년 가까이 체증처럼 쌓인 오해와 원독은 하루아침에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웃는 낯 위로 울컥 치고 올라오는 의심이 그러했다. 내일이 대과라 객잔마다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과 응시생으로 북적이더군요. 헌데 요즘 겨울도 아 닌데 낙성산과 인백산 기슭에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합니다. 그래요?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까? 아직은 아닙니다만 미리 대비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신의 아랫것들이 호환( 虎 患 )으로 산자 락의 민초들이 벌벌 떤다고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종인은 근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종대는 그것을 종친인 자신이 현황을 논하여 종인이 불쾌해한 것으로 오인했다. 실은 입궁할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태후마마께서 부르시는 바람에. 종대는 매번 종인에게 변명하는 자신의 처지가 씁쓰름했다. 원래 과거가 열릴 때면 대문을 걸어 잠 그고 운신을 피하는데 오늘은 자신궁에서 진왕을 본 지 오래라며 꼭 들어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 다. 태후에게 문안을 올릴 때마다 종인의 눈치를 살펴야 해서 종대 나름대로 속이 쓰렸다. 최근 제가 정무에 바빠 사람을 보내 문안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적적하실 텐데 형님께서 효를 다하시어 다행입니다. 또 형님이 아니면 제가 도성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찌 * 군자가 사는 곳

131 접하겠습니까? 종대는 태후가 오늘 그를 불러 황제에게 황후를 맞으라고 넌지시 말을 꺼내라 한 것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종인이 아무리 배알 없고 소심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해도 종대는 평생 봐온 아우의 진면을 모르지 않았다. 종인은 장보여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으며 장씨 가문의 여식을 또 들이기 싫어서 삼년상을 핑계로 현수궁을 비우는 것이다. 요즘 종인이 조정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고 드물게 자신에게도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많아 관계 가 회복되려는데 갑자기 국혼을 거론하면 분위기가 깨질 것이다. 일부러 나랏일과 관련한 모든 언급 은 피하는데 국혼을 꺼냈다가 오해를 사면 종대만 손해였다. 날이 덥습니다. 오미자가 갈증 해갈에 좋으니 자주 젓수시옵소서. 예. 형님도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날이 끄물거리더니 다시 비가 쏟아졌다. 대과가 치러지던 날에는 날이 화창하다 못해 볕이 뜨거웠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신해서 실려 나 간 유생이 여덟이나 되었다. 그 열기를 식히듯 방방례를 하루 앞둔 금일의 밤은 시원한 비가 내렸다. 다시 기분이 꿀꿀해진 종인은 서책을 뒤적이다가 경수를 데리고 소비원, 아니 고야정으로 향했다. 서너 명 남짓이 들어갈 수 있는 자그마한 정자가 있어서 비를 맞을 염려는 없었다. 그곳에는 소박한 다담상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현판을 새로 다셨더군요. 고야정이라니 참으로 운치 있습니다. 종대 형님의 작품이다. 경수는 종인이 진왕에게 소비원의 이름을 청하고 현판까지 직접 쓰게 한 사실을 알고 흐뭇했다. 복시부터 친시하셨다 들었습니다. 곤고하지 않으신지요? 수백 장의 시권을 빠르게 채점하는 것이 만만치 않더구나. 기다리던 응시생이 있었는데 아무리 과 장을 둘러봐도 얼굴이 보이지 않더군. 이번 과거를 보기 전에 스승 밑에서 공부나 더 하다 오라 하였 더니 아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백현은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나마 동주에서 떠나지 않고 박태흥과 같이 있다는 소식이 간 간이 들려 다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전국 어느 오지에 처박혀 있는지 소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쓸 만한 자들이 뽑혀서 기쁘다. 다행입니다. 인재는 치국의 근본 중 하나이니 폐하의 전정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너도 이번 과거에 응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응시하겠습니다. 네 좋을 대로 하여라. 종인은 경수를 앞에 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천둥과 벼락이 치지 않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경수는 그런 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달그락거리는 다기 소리만이 빗소리와 어울려 퇴연한 가락이 되어 갔다. 패향( 佩 香 ) * 을 바꾸었느냐? 작약이었던 것 같은데 수선화 향기가 나는구나. 여름이라 작약은 부담스럽습니다. 수선화가 청량하고 우아하죠. 향집을 내려주랴? 자그맣게 노리개로 차고 다니면 예쁠 거다. 전 괜찮습니다. 뭘 차고 다닌 적이 없기도 하고요. 그러자 종인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향낭은 지니고 다니잖느냐? 선비들이 누리는 작은 사치이죠. 나직이 웃는다. 곧 죽어도 빈한한 세간 탓으로 돌리진 않는다. 그 의젓함에 종인은 경수를 더욱 어 * 몸에 지니거나 차고 다니는 향

132 여삐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왜 그런 것이냐? 경수답지 않게 그립다느니 어쩌니 해서 종인은 그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폐하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리움을 얘기하시는데 전 아니 되는 것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지 않으냐. 문득 그럴 때가 있습니다. 물을 마셔도 한없이 갈증이 나고 아무리 자도 피로를 떨칠 수 없는 때 요. 그리움이 한번 발병하면 길게 이어지는 풍한과도 같죠. 어제가 그런 날이었습니다. 어제 넌 연민의 빛을 띠고 있었다. 찬열의 얘기를 꺼낸 것은 핑계일 뿐이야. 그렇지? 귀신같은 눈치에 경수는 뜨끔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그런 낯빛을 할 정도면 심각한 일이겠다 싶었느니라. 말하기 싫다 면 굳이 묻지 않으마. 비가 이리 오는데 밖에 계셔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경수는 말을 돌렸다. 서늘하니 좋다. 하늘의 조화를 짐이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네가 있는데 기분 나쁠 것은 무엇이냐. 숙비마마께서 서거하신 이후 비 오는 날을 싫어하게 되셨다고 하셨죠? 괴화차를 호르르 들이켜던 종인이 경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개가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더냐? 하 공공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헌데. 문득 장유곡에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거리낌 없이 치부를 내보이 셨고 전 그날부터 폐하를 절실히 흠모하게 되었지요.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아진 것이더냐? 지엄한 황족도 우리와 다를 바 없구나, 만난 지 얼마 안 된 내게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 외로우시 구나, 나와 닮았구나. 감히 그리 생각했습니다. 무릎을 모으고 중얼거리는 경수는 내리는 비와 더불어 투명한 그림처럼 느껴졌다. 첫눈에 반한 자 신과는 달리 장유곡에서의 일 이후 온전히 맘을 열었다는 사실에 종인은 슬쩍 미소 지었다. 정이 시 작하는 시점은 누구나 다르다지만, 결국엔 한 곳에서 만나니 신비로웠다. 지금도 외로우십니까?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고독함을 간직한다. 헌데 짐은 너를 만났으니 천만다행이지. 저도 폐하를 만나 다행입니다. 아니, 크나큰 복입니다. 인연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 떠난 길은 달라도 돌아오는 길은 같을 테니 아무리 작은 인연이라 해도 소홀할 수 없는 까닭 아니겠느냐. 폐하. 쉬고 싶으실 땐 언제든 저에게 기대십시오. 지친 새가 몸을 뉘일 나뭇가지가 있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빙빙 도는 말뿐이지만 경수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는 확실히 전해졌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더욱 소중히 하고 싶었다. 누구도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 주지 않았고 그를 이용하려고만 했는데 도경수는 아니었다. 첫정이 도경수라서, 본인이야말로 얼마나 복이라고 여기는지 모르리라. 종인은 빙긋 웃은 후 경수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경수의 어깨에 기대었다. 며칠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하구나. 잠시 이렇게 있어도 되겠느냐. 얼마든지요. 그날, 경수는 어슷한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태성전을 나왔다. 검열 도경수가 뛰어난 용모와 세 치 혀로 스스로 동현이 되어 혈기 왕성한 황제를 꼬인 후 함께 밤 을 보냈다는 얘기가 궁에 퍼졌다.

133 경수는 황당무계한 소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소문에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았 으나 당장은 예문관에까지 누를 끼친 듯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워낙 경수의 조심성 있는 성격을 알아서 선진들은 헛소문에 맘 상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송 인직은 어떤 놈이 그딴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몰라도 단정한 사관에게 치명적인 추문이 붙었다며 경수 를 대신해 화를 토했다. 단 며칠 사이에 그 같은 추문이 번졌는데 누가 처음 그 말을 흘렸는지 알 길은 없었다. 얼마 전에 고야정에서 새벽까지 머물다가 나온 것 외에는 딱히 짚이는 일도 없었다. 그날은 하개와 우장, 그리고 밤을 지키는 궁녀들 외에는 없었고 태성전에 종사하는 자들은 입이 무 거운 편이었다. 오가는 동안에 별감을 만났거나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끈 적도 없는데 참으로 희한했다. 누군가 내부 에서 말을 흘렸다고밖에 짐작되지 않지만 그 또한 물증은 없었다. 이것은 곧장 종인과 태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종인은 경수와 무슨 짓이라도 했으면 덜 억울했을 것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반면에 태후는 자신에게 눈길도 안 준다던 황제와 추문이 붙은 경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완에게 이따금 황제의 동정을 알려주긴 해도 다 쓸데없는 내용뿐인 것도 서서히 이상하게 느껴졌 다. 사초를 볼 수 없어 그가 황제의 행적에 대해 뭐라고 적었는지 모르는 것이 통탄할 노릇이었다. 태후는 이것이 만일 사실이 아니더라도 행실을 어떻게 했기에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한 구실을 줬는지 문초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장씨 가문의 여식 외에 누구도 종인의 곁에 둘 생각이 없었 다. 설령 종인이 정말로 남색을 한다 하더라도. 박 상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태성전에 심어둔 간자에게 들은 내용을 태후에게 고해 올렸다. 태후가 풍문이 돌기 시작한 연유를 알아 오라고 지시한 뒤였다. 서로 조심하고는 있어도 이전부터 알고 지낸 기색이 있다? 그러하옵니다. 게다가 황제가 상의부에다 향집을 만들라 하였다고? 예. 호박과 홍류석으로 장식하고 노리개로 찰 수 있게 술도 달라고 하셨답니다. 너무 크면 무거울 테니 은은 얇게 입히되 잘 부서지지 않게 하라며 꼼꼼히 주문하셨답니다. 태후는 기가 차서 코웃음을 흘렸다. 종인이 신료들에게 몇 번 선물을 내린 적은 있지만 향집은 처 음이었다. 더구나 누군가에게 주려고 향집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황후였던 보여에게조차 사사로이 선물한 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상의부에 지시를 내리니 대번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단편적이긴 하나 종인의 행동은 예전에 의귀비에게 푹 빠져 있던 효경제을 떠올리게 했다. 태평연에서 용연무라는 희한한 춤을 춘 무희가 도경수고 그때 황제는 자객으로 몰린 그 아이를 직 접 구명하기까지 했다 하였느냐? 대교 임제관에게 확인하였고 무정후께도 넌지시 여쭈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사로 흘릴 일이 아니었구나. 당시 황 사도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내게 그런 말 은 쏙 빼놓고 전했단 말인가. 마마께서 가능한 빨리 적당한 아이를 물색하라고 명하시어 급한 마음에 그리한 것 아닐는지요? 그제야 모든 그림이 착착 맞아 들어갔다. 갑자기 득의양양해진 김종인이라던가, 그의 일거수일투족 을 고하라고 하였더니 시답잖은 취미 생활만 읊어대던 도경수. 게다가 도경수는 박찬열의 부친인 박우헌이 천거했고 박찬열은 김종인의 배동이었으니 이는 필시 셋이서 작당한 일이 분명하다. 예족 토벌에 장문견을 배제하고 새파랗게 어린 박찬열을 우장군으로 삼아 출정시키겠다는 것만 봐 도 그렇다. 누구의 뜻이었든, 조정에서 우리 장씨 일파를 찍어내겠다는 심산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유가 도경 수를 알게 된 그 즈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군. 태후는 눈 뜨고 당한다는 말이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저 정황 일 뿐. 심

134 증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궁궐에서 모진 풍파를 겪으며 터득한 지혜 아닌가. 그렇다면 아주 작은 시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주상이 한참 출출할 테니 좋아하는 간식을 가져다 드려야겠구나. 내가 직접 갈 테니 정성껏 만들 어라. 태후마마께서? 수렴을 거둔 뒤 태성전으로는 걸음도 안 하던 장씨가 웬일인가 싶었다.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관을 들이지 못하는 모호한 시각에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모셔라. 이윽고 태후가 찬합을 든 박 상궁과 들어왔다.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며 자 리를 권하였다. 마마께서 태성전엔 어인 일이십니까? 입이 심심해서 간식을 만들라 하였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졌다오. 오랜만에 주상의 용안이나 뵐 까 하여 왔는데 잘못 온 것이오? 그럴 리가요. 밖에 이슬비가 내려 길이 미끄러워 그렇지요. 태후가 찬합 뚜껑을 열어 보였다. 안에는 얼음엿, 귤병단자, 생청을 곁들인 화병( 火 餠 ), 율란이 들어 있었다. 군입이나 달래려고 만들었다고 보기엔 가지 수와 양이 지나쳤다. 역시 자신궁 소주방 나인들의 솜씨가 일품입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군요. 요즘 을람하시느라 늦은 밤까지 태성전의 불의 꺼지지 않는다던데 작은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 소. 감사합니다, 마마. 한 입 드셔 보시겠소? 소자만 먹기 민망하니 마마도 같이 드시지요. 그럽시다. 두 모자는 사이좋게 율란 하나씩을 집어 먹었다. 밤과 잣가루가 입안에서 부서졌다. 용안에 살이 내리셨구려. 그렇습니까?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무를 돌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쉬엄쉬엄 하는 것도 요령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북녘이 시끄러운 것만 빼면 요즘 같은 태평성대가 없는 듯하오. 마마께서 소자를 위해 길을 잘 닦아놓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 무슨 소리요? 주상이 밤낮으로 나라 걱정을 하신 덕분이지. 주상은 아직 젊으니 머지않아 요순 시대를 여실 것이오. 더욱 정진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노력하겠습니다. 종인은 쪼개놓은 율란을 내려놓으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저 칸막이는 무엇이오? 태후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경수가 올 시간이 다 되어 하개가 미리 들여 놓은 것이었다. 사관을 들여서 설치했습니다. 아무리 신하라 해도 소자가 침수 들기 전까지 있어야 하는데 낯선 사람이 있으면 소자가 불편할 것이라며 하개가 좀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하개가 일을 제대로 했군. 충신이란 무릇 그래야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개와 같다면 오죽 좋겠 소? 충신을 얻기란 어려운 법이지요. 모두 고충이 있지. 헌데도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니. 아무렇게나 떠들어댄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상은 아직 모르시는 게요?

135 소자가 무얼 알아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소서. 태후는 망설이는 척 고매한 미간을 찌푸렸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태성전에 드나드는 사관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돌고 있는데 정녕 모르시었소? 모르는 일입니다. 일전에 그 아이를 자신궁으로 불러 사관이기 이전에 황제의 신하이고 백성이니 몸가짐을 조심하라 고 훈계한 적이 있소.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침전에서 황제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나 확인하 려고 불렀을 테고 그것을 포장한 얘기에 불과할 것이 뻔하니까. 총명해서 말귀를 알아들었으리라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오. 도 검열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아이와 밤을 나신 적이 있소? 역시 지난번에 고야정에서 새벽녘까지 있었던 일을 두고 궁에 떠도는 소문이다. 태후는 평소 풍속 에 엄격한 편이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근심하는 것으로 뭐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종인은 경수와 마찬가지로 그날의 일이 대체 누구의 입을 통해 새어나갔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밤을 나다니요? 소자가 영회황후의 삼년상을 치르는 중임을 마마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야 주상의 애틋한 마음을 잘 알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제멋대로 입방아를 찧는다오. 궁에 소문이 나돌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감히 주상을 둘러싼 추문이다 보니 예민할 수밖에 없소. 물론 주상도 혈기 왕성 하고 교안에서 고관대작들조차 남색을 하는 것이 공공연한 일이나 상대가 상대지 않소? 도 검열에게 이따금 말을 건네는 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밤을 함께 보냈다는 문장으로 변할 수 있 답니까? 그나마도 다른 신료들에게 하듯 의례적인 안부일 뿐입니다. 그럼 주상은 결백하다는 것이구려. 도 검열도 마찬가지입니다. 태후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태성전의 세작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결정적인 것은 종인이 상 의부에 향집을 만들라고 지시한 정황이었다. 아무래도 며칠 전에 소자가 새벽녘까지 소비원에 있었던 일을 두고 그런 얘기가 나도는 모양이군 요. 짐작하는 바가 있었구려. 단순히 늦은 밤까지 함께했다는 것을 이유로 이런 추문이 나돌다니 황당합니다. 그리고 사관을 들 인 조건은 소자가 침수에 들기 전까지 직필하는 것이라 도 검열은 어쩔 수 없이 소자가 잠들기 전까 지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저런. 그것이 사실이라면 크나큰 오해가 있는 거 아니오? 별로 안타까운 표정이 아님은 종인도 잘 알고 있다. 태후가 무엇 때문에 본인이 직접 들이민 도경 수를 물고 늘어지는지 알 수 없으나 종인은 경수를 보호해야 했다. 황제가 결백하다니 다행이오. 사실이 아닌 것은 금방 수그러들기 마련이지. 소자가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의도치 않은 일로 큰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소. 마마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겠나이다. 바쁠 텐데 너무 오래 있었구려. 이만 가보리다. 태후가 나간 후 종인은 그녀가 가져온 찬합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억지로 욱여넣 은 율란 때문에 구역질이 밀려왔다. 25. 우중대죄( 雨 中 待 罪 ) 같잖은 소문이 나돌긴 했어도 직분을 저버릴 순 없었다. 경수는 평소대로 잡색꾼을 뒤에 달고 태성

136 전으로 향하였다. 때마침 태후가 태성전의 전폐를 내려오고 있었다. 경수는 태후에게 나볏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태후는 가증스럽다는 듯 경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른 시각인데도 부지런하군. 맡은 일을 참으로 열심히 해. 과찬이십니다.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야 네게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렷다. 그들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노력이 가상하구나. 은혜를 모른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지요. 그동안 자신을 속이며 종인과 희희낙락 웃었을 걸 생각하면 당장 저 홍안 위에 뜨거운 물을 쏟아버 리고 싶었다. 그래. 사람은 은혜를 입었으면 죽어서라도 갚아야 한다. 헌데 넌 네 말과는 다른 행동으로 주상을 욕보였으니 내 너를 어찌 믿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전에 너를 내 처소로 불러 신하로서의 언행과 몸가짐에 대해 신신당부하였지. 네 곱상한 용모를 믿고 분수에 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물론 경수는 그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태후가 거짓을 쏟는구나 하고 넘 어갔다. 그녀가 궐에 떠도는 추문 때문에 이리 강짜를 놓는 것쯤은 경수도 알고 있었다. 소인은 분수에 넘게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허언을 일삼는 것이 버릇이더냐. 그런 저속한 버릇은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그럼 가르침을 잊고 음탕하게 구는 것은 저속하지 않은 것이더냐! 태후가 일갈했다. 태성전을 지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태후를 배행하는 궁인들까지 모인 자리라 이 목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 앞에서 관리의 신분으로 대놓고 문책을 당하고 있었으니 경수의 자존심에 쩍쩍 금이 갔다. 집안의 풍조가 어떻기에 언행을 삼가지 않고 스스로 경박하게 구는 것이냐? 부모님을 욕보이자 경수는 목덜미에 인두를 올려놓은 듯 순간적으로 열이 확 올랐다. 소인은 도학을 숭상하는 선비이며 집안의 가르침을 따라 몸가짐을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마마 께서 무엇 때문에 진노하셨는지 짐작은 됩니다만 소인은 음남( 淫 男 )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고 있다니 얘기가 쉽겠구나. 주상의 전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각 별히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네 행실이 올발랐다면 그런 소문이 나돌았겠느냐? 세 명만 모여도 없는 호랑이가 만들어진다는데 수백 명이 사는 궁은 오죽하겠습니까? 허면 죄다 궁중부명이라는 소리냐?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더냐? 굴뚝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되받아치는 경수를 보며 태후는 아연실색했다. 말을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시건방질 줄 은 몰랐다. 참으로 맹랑하구나! 너로 인해 하늘 같은 주상의 명예가 더럽혀졌음에도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 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뉘우쳐야 합니까? 태후는 도경수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추잡한 이야기에 천자를 오르내리게 한 것만으로도 대죄임을 모르느냐? 소인이 그런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소인에게 죄를 물으십니까? 오히려 무고한 폐하와 나라의 관리를 입심거리로 만든 자를 찾아내어 벌을 내림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뭐라? 이제 보니 사욕을 위해서라면 군주도 버릴 놈이로다. 박 상궁! 예, 마마. 당장 이놈을 끌어내 자신궁으로 끌고 가라! 내가 직접 치죄하리라!

137 태후마마! 구세주처럼 종인이 나타났다. 하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주인에게 보고한 것이다. 종인은 한달음에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진노해서 씨근거리는 태후와 자존심 때문에 이를 악문 경 수를 번갈아 봤다. 마마, 노염을 거두소서. 존체에 해롭습니다. 종인의 만류에도 태후는 노기를 지우지 못했다. 종인은 박 상궁을 쳐다보며 물었다. 마마께서 어찌 이리 대로하셨느냐? 박 상궁이 움찔하여 슬쩍 답하려던 찰나, 대관절 이자의 바탕이 무엇이오? 무얼 믿고 이리 방자한 것이오? 바탕이라니요? 사도가 뽑아서 올린 아이를 소자가 어찌 알겠습니까?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태후는 말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궁을 더럽힌 소문으로 몇 마디 훈계했더니 발톱을 세우고 바락바락 대들더이다. 청요직에 있 다 하여 행실이 올곧은 줄 알았건만 패악한 자가 따로 없소! 고정하시옵소서. 본인도 억울한 추문에 시달려 치태를 부린 모양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마마의 심 기를 거슬렀으니 소자가 엄히 문책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상궤를 벗어난 자가 주상이라고 공경하겠소? 그것은 오해십니다. 오늘 일은 소자도 당혹스럽지만 평소 예의에 어긋난 적은 없었습니다. 말을 섞을수록 반성하는 기미는 없고 오히려 저가 잘났다고 고개를 쳐드는 꼴을 보니 이대로 넘어 가서는 아니 되오. 퇴침에 올려 회초리를 치는 한이 있더라도 버릇을 고쳐야 하오! 태후는 도무지 물러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녀는 되레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종인을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 종인은 안절부절못했으나 기어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태후를 달래자니 경수가 겪을 고초가 걱정됐고 경수를 달래자니 태후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표면적으로 자신과 도경수는 아무 관계도 아니니 그의 편을 들었다 가는 일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었다. 종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서 마마께 사죄하여라. 경수가 억울하여 종인을 쳐다봤다. 순간, 종인의 숨통이 콱 막혔다. 그것은 마치 태평연에서 억지로 용연무를 춰야 했던 그 표정과 흡사했다. 태후마마의 노염이 풀리지 않는다면 너 또한 태성전에 들 수 없다. 그리 말한다고 들을 아이가 아니오. 처소에서 엄히 꾸짖을 터이니 황제는 이 일에 관여치 마시오. 마마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저 아이니 마마의 뜻대로 하소서. 태후는 여봐란 듯 경수를 흘기고는 앞장서서 문을 나섰다. 종인은 자신궁 태감들에게 붙들려 끌려가는 경수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설마 이만한 일로 고문 을 할까 싶다가도 자칫 곤장이라도 내릴까 봐 걱정됐다. 아닌 게 아니라 찬합에 간식을 들고 왔을 때부터 아예 경수를 잡으려고 작정하고 온 것 같다. 그렇 다면 태후가 수렴을 거두고 한 번도 오지 않던 태성전을 찾은 이유가 설명된다. 저대로 뒀다가는 큰일이 날 것입니다. 태후께서 현수궁에 계실 적에 당신께 대들었던 후궁을 끔찍 하게 혼낸 일을 모르시옵니까? 어찌나 장을 세게 쳤는지 후궁의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두 번 다 시는 걷지 못하였지요. 사내라고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개가 허둥지둥 달려와 걱정스레 내뱉었다. 종인은 경수가 사라진 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도경수는 국록을 먹는 조정의 관리다. 사관에게는 죄가 있어도 직접 추국할 수 없음이 국법이니라. 이미 경수를 넘겨준 것만으로도 짐이 많이 양보했음을 알고 있으니 감히 선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오나 작정하고 죄를 뒤집어씌운다면 누가 태후마마께 반기를 들겠나이까? 골똘히 생각하던 종인이 하개에게 나직이 밀명을 내렸다. 지금으로써는 그 밖에 종인을 도울 사람 이 없었다.

138 어둠이 내린 새카만 하늘은 장마철의 심술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비를 뿌렸다. 며칠째 계속 비가 내려 농사꾼들에게는 호사였으나 기온이 뚝 떨어져 밤이면 춥기까지 했다. 내일이 경성현으로 떠나는 날이라 찬열은 미리 하직 인사를 올리러 입궁했다. 그는 궁내가 어수선 한 것을 해연히 여기다가 뒤늦게 경수가 처한 상황을 전해 들었다. 찬열은 매우 놀라며 종인을 만날 생각도 못하고 곧바로 자신궁으로 향하였다. 인척이라는 명분이 없었다면 감히 내전에 발을 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태후의 재종이라 감사한 적이 없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누구도 찬열이 내전으로 향하는 데 길을 막지 않았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진 빗길을 더듬어 찬열은 자신궁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싸늘하게 쏟아지는 빗속 에서 처참하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경수를 보았다. 일순 누군가 그의 심장을 꽉 잡고 조인 듯한 통 증이 밀려왔다. 찬열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경수는 삿자리 위에서 석고대죄를 올리고 있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죄를 청하는 몰골을 자신궁 사람들이 꼿꼿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찬열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경수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나타나자 밖에 있던 사완이 놀라며 잽싸 게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지 못한 찬열은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경수에게 씌워주었다. 옆에 인영이 드리우자 꼼짝도 안 하던 경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을 꿇 어앉아 있었는지 몸에서 올라와야 할 하얀 김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서 입술은 새파랬 고 단정하게 빗었던 머리카락은 볼품없이 흘러내려 빗물과 함께 들러붙었다. 찬열? 네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고 있어? 이러면 안 돼. 얼른 우산을 거두고 나가. 경수는 입술을 달달 떨면서도 찬열을 밀어냈다. 몸이 이리 얼음장 같은데 나더러 그냥 가라는 것이냐! 태후마마께서 너마저 책잡으실 거야. 얼른 가. 싫다. 네가 억울하게 고초를 겪는데 친구 된 자로 어찌 그냥 넘겨? 경수는 찬열에게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찬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산을 내려놓고 본인까지 비를 맞으며 경수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박찬열!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뜻 모를 모호한 말을 남기더니 찬열은 경수가 말릴 새도 없이 외쳤다. 태후마마! 소신 박찬열이옵니다! 울림 좋은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혔다. 빗줄기는 세상을 삼킬 듯 세차게 퍼부었다. 뺨에 닿는 빗방울은 식은 돌바닥만큼이나 싸늘했다. 도경수를 사도께 처음 천거한 사람은 소신의 부친입니다! 부친을 대신하여 소신이 죄를 청하겠습 니다! 태후마마,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내전을 넘은 것만으로도 남들의 흉을 살 일이야. 제발 이러지 마! 경수는 거의 빌다시피 했으나 찬열은 꼭 무쇠 바위와도 같았다. 평소 침착하던 네가 오늘은 왜 이렇게 무모해? 경수가 다시금 찬열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찬열은 그 손길을 뿌리쳤다. 마마! 도경수를 천거한 사람은 소신의 부친입니다! 소신이 부친의 죄를 대신 받겠사옵니다! 찬열은 태후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빌면 조금이라도 빨리 노기를 거둘지 모른다고 생각해 무작정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뭐라? 무위장군이 석고대죄를 올리고 있다? 사완에게 바깥 동태를 전해 들은 태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셋이 한통속이라고 여 겼던 추측은 박찬열의 등장으로 완전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박찬열이 종인의 배동으로 군신이면서도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도경수까지 알

139 고 지낸 사이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것은 뜻밖의 수확이면서 또 다른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일은 박찬열과는 무관하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조카이고 장문견이 토벌 작전에서 배 제된 현재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다. 박찬열에게 벌을 줄 순 없었다. 가서 박찬열에게 전하라. 이 일은 너와는 무관하니 당장 석고대죄를 거두고 물러나라고. 만일 일어 나지 않으면 나를 능멸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이다. 사완이 그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찬열에게 읊었다. 경수는 점점 사색이 되어 갔지만 찬열은 아 랑곳하지 않았다. 온몸을 내리찍는 빗물도 경수를 구하겠다는 그의 집념을 꺾지 못했다. 이러면 내가 더 곤란해져. 찬열아. 그만해. 네가 고통받는데 나는 대체 무얼 해야 한단 말이냐. 찬열은 비참하게 뇌까렸고 경수는 그런 찬열에게 미안했다. 이날까지 자신에게 베푼 것을 갚는 데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게 하니 찬열의 낯을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일은 머나먼 북녘으로 출정을 나가는 사람이다. 태후와의 마찰은 개인적인 일이므로 찬열 을 더는 곤란하게 할 순 없었다. 여긴 여염집이 아니라 황궁이야. 그래서 더욱 물러날 수 없어. 여염집에서는 웃전을 노하게 했다 하여 죽이진 않는다. 허나 궁은 달 라. 그것도 태후의 눈 밖에 났으니 네가 죽을 수도 있음을 왜 몰라? 벌을 받아도 내 일이고 상을 받아도 내 일이야. 그만 일어나지 않으면 바닥에 머리를 찧을 거다. 과격한 발언에 찬열이 커다란 눈을 홉떴다. 비에 젖은 파초처럼 바들바들 떨었으나 경수의 눈빛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때, 내시 하나가 등불을 밝히며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내시의 뒤에는 화려한 무늬의 우산을 쓴 한 사내와 시종 하나가 따라오고 있었다. 시종의 손에는 보물처럼 소중하게 싸인 커다란 통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내는 마당에서 대죄를 올리는 경수와 찬열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전각 안 으로 사라져 버렸다. 진왕이 이 시각엔 어인 일이오? 태후가 화색하며 종대를 반겼다. 종대는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좌정했다. 소자가 언제 들고나는 시각이 일정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비도 오는데 마마께서 또 홀로 적적하게 그림이나 그리고 계시겠거니 하여 입궁했습니다. 때마침 소자에게 좋은 그림이 하나 있기에. 좋은 그림이라니? 안견의 적벽도입니다. 예전에 마마께서 적벽전 이야기를 재미있어하시기에 그와 관련한 그림이 있 어 보여드리겠다고 하였지요.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오. 얘기가 워낙 흥미로워 내심 기대 중이었소. 하온데 소자가 때를 잘못 맞춘 듯싶습니다. 종대가 시무룩하게 웅얼거리자 태후는 딱딱한 낯빛을 거두며 손사래를 쳤다. 궁 안의 풍기가 문란해져 본을 세우고 있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오. 풍기가 문란해지다니요? 혹 마당에 꿇어앉은 저들이 사통이라도 하였습니까? 폐하께서 아끼시는 박찬열도 보이던데 그자가 설마. 종대가 제법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히 물었다. 태후는 비릿한 냉소를 머금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꿇어앉은 아이는 예문관의 사관인데 교만하기 짝이 없어 벌을 내리는 것이오. 황실의 지엄함을 내 보여야 황제가 감히 흠집조차 낼 수 없는 하늘이라는 것을 알겠지. 박찬열까지 꿇어앉아 있을 정도면 일이 상당히 심각한 모양입니다. 박찬열은 이 일과 관계없거늘 어째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소. 저자를 천거한 사람이 자신의 아비

140 라서 그저 아비의 죄를 대신 받겠다고는 하는데 도리어 먹칠하고 있음은 왜 모르는지. 효심이 깊은 자라고 들었습니다.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라의 장수가 자신궁 앞에서 무릎을 꿇 음은 부친의 명예 때문이겠지요. 태후가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종대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본시 방자한 자였다면 거리 행렬에서 백성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아 교안의 여인들이 차가운 공자 라고 난리법석을 떨진 않을 겁니다. 평소 경거망동하지 않는 성격으로 압니다. 또 하나같이 그의 용모 와 품성, 실력을 칭송하잖습니까? 아주 부러워 죽겠습니다. 태후도 박찬열의 인기와 호평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이번 일이 더욱 괘씸했다. 마마께서는 궐내 습속에 엄격하시니 저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허나 밖에 있는 자는 예문관의 사관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일국의 장수가 내전 마당에 무릎을 꿇은 것만으로도 구설에 오르기 십상인데, 하물며 죄를 짓더라도 어사대에서조차 직접 추국할 수 없 는 사관을 저리 두시면 조정이 아닌 태학관에서 먼저 들끓을 것입니다. 아차 싶었다. 태후는 종인의 예상과는 달리 경수가 사관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뒤늦게 태후 의 얼굴에 실금이 가며 눈빛이 흔들렸다. 주처는 육기를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났는데 마마께서는 저 어린 것에게 일말의 관용조차 베풀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허나 이리 쉽게 용서한다면 저 방자한 자가 주상과 나를 더욱 업신여길 것이오. 한번 용서했다가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때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닙니까? 종대가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순진하게 깜박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어쨌거나 심증만으로는 도경수와 김종인, 박찬열의 관계를 캘 수도 없고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저들을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경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 역시 단순히 어린놈이 맹랑해서 버릇을 고쳐주고자 한 것뿐이다. 한 시진 반이나 차가운 빗속에 내던져져 있었으니 이만하면 저도 깨달은 점이 있을 것이다. 좋소. 진왕이 그리 애원하는데 못 이긴 척 넘어가리다. 역시 도량이 하해와 같으십니다. 이처럼 웃전에서 용서의 미덕을 보이시니 차차 백성들도 교화될 것입니다.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종대에게 제 몸집만 한 커다란 지통을 건넸다. 종대가 얼른 뚜껑을 열고 그림 을 꺼냈다. 어렵게 구한 만큼 소자도 몇 번 꺼내 보지 않은 것이지요. 이 녀석이 오늘 마마께 선보일 천운을 타고났나 봅니다. 능글능글한 종대의 아부에 태후는 마지못해 박 상궁을 불렀다. 태후마마께서 그만 삿자리를 거두고 물러가라 하십니다! 뜻밖의 하교였다. 밤새 꿇어앉아 있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태후의 화는 빨리 풀렸다. 앞으로는 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 하셨습니다! 만에 하나 이와 같 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는 반드시 물고를 내리겠다고 하셨으니 명심하십시오. 정말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 찬열이 물었다. 죄를 짓고 뉘우치지 않는 자는 벌을 줘야 마땅하나 아녀자가 일국의 관리를 오래 벌주는 것도 법 도에 어긋난다고 하셨습니다. 박 상궁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경수가 옆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럼 정말 돌아가도 되겠는가? 예. 지금은 진왕 전하와 담소 중이시니 더는 시끄럽게 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찬열은 진왕이 일부러 자신궁에 들어 태후의 화를 풀어주었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진왕은 종인이

141 불렀을 것이다. 이렇게 날이 궂은데 굳이 문안을 올리겠다고 아픈 몸을 끌고 나올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 상궁이 안으로 들어간 후 찬열은 폭풍과도 같았던 시간을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경 수를 부축하자 경수는 매가리 없이 일어났다. 순간, 오래도록 꿇어 있느라 다리에 힘이 풀린 경수가 크게 허청거렸다. 경수야! 경수가 작게 도리질을 치며 찬열의 팔을 밀어냈다. 나 때문에 고초를 당했는데 괜찮아? 이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하는 것이냐. 너마저 죄를 물을까 겁이 났다. 경수는 핏기와 온기가 모두 가신 얼굴로 찬열을 살폈다. 걸을 수 없겠구나. 내게 업혀. 내 곁에 머문 것만으로 궁인들이 수군거릴 거야. 내가 네 벗이다. 헌데 어째서 난 네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건데. 찬열은 너무도 슬퍼 보였다. 경수는 그런 찬열에게서 벗어나며 억척스럽게 자신의 힘으로 섰다. 이미 내게 준 것이 많은데 무엇을 더 주려고? 파리하게 띠는 미소에 찬열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이대로 예문관에 들러 의관을 정제할게. 공연한 오해를 사기 싫으니 너는 이만 돌아가. 경수야. 내일이 출정인데 제대로 인사도 못 하겠다. 난 괜찮아. 그러니 너도 무사히 다녀와. 해쓱한 미소를 보인 후 절뚝절뚝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다. 찬열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비는 어느샌가 그의 심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고 개를 들어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가운 비만 흩뿌리는 하늘은 무력감에 흠뻑 젖은 찬열을 무심 하게 지켜보았다. 찬열은 푹 젖은 채 발길을 돌렸다. 그가 자신궁을 나서자 한쪽에서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내시 하나가 나타났다. 종인이 찾는다는 전언이었다. 26. 일구월심( 日 久 月 深 )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전에 없이 차가운 종인의 목소리가 태성전 안에 나직이 울렸다. 생글생글하던 눈가에서는 일말의 온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찬열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급히 하개에게서 수건을 받아 물기를 닦긴 했으나 볼품없이 젖은 몰골은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소이가 있어 자신궁 앞에서 석고대죄를 올렸느냐. 찬열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짐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한 나라의 장수된 자가 아녀자의 처소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네놈의 주군이 태후더냐! 종인이 옥안을 쾅 내려치며 호통했다. 찬열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종인은 찬열이 침묵을 지킬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 는 금방이라도 찬열을 잡아먹을 것처럼 보였다. 불티가 날리는 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찬열을 쪼

142 아댔다. 발명만이 대책이라 하였다. 살고 싶지 않은 것이냐. 네가 오늘 한 일에 대해 가타부타 변명이라도 늘어놓으란 말이다! 천신, 폐하의 용안에 오니를 끼얹은 죄인인데 무슨 자격으로 목숨을 구하겠나이까. 한참 만에 쏟아진 소리는 물과 같았다. 종인은 그런 찬열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했고 익숙하면 서도 낯설었다. 그는 장수답게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이러쿵저러쿵 변명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답하라. 어찌하여 자신궁으로 뛰어들어 그 같은 짓을 벌였는지. 답하라지 않느냐! 경수를 구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짐작은 했지만 본인에게 확인받으니 입가가 뒤틀리고 냉소가 서렸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너와 도경수는 죽마고우니까. 뼈가 시릴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가 다시금 찬열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여 네가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느냐? 태후의 인척이니 한번 무릎 꿇는 것으 로 그 아이를 곤경에서 빼낼 수 있으리라고 여겼느냐? 네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어?! 찬열은 고집스레 침묵을 지켰고 종인은 점점 화가 났다. 그러나 찬열 역시 종인에게는 둘도 없는 벗이다. 종인은 이 상황이 자신의 용렬한 질투심인 것 같 았다. 그는 찬열이 아닌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찬열처럼 아끼는 사람을 위해 무모한 용기조차 내지 못한 자신이 한심한 거였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찬열처럼 담담해지고 싶었다. 어떤 일에도 동요가 없는, 죽은 사람처럼 납 죽 엎드리고 살던 예전의 자신처럼. 짐이 오죽 용군으로 보였으면 함부로 그 같은 짓을 벌였겠느냐? 천부당만부당하시옵니다! 소신은 그저, 너는, 오늘 돌이킬 수 없는 두 가지의 죄를 지었다. 선선한 목소리는 새벽의 육중함처럼 내려앉았다. 첫째. 이 나라의 장수 된 자로서 주군이 아닌 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서리 낀 냉기는 끔찍할 정도였고 찬열은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단언컨대, 종인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둘째. 끝까지 감추었어야 할 너의 치부를 짐에게 들킨 것이다. 종인은 찬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빛처럼 밝으나 물처럼 담백한 박찬열. 진의를 숨기는 것을 그에 게 배웠으니 찬열에게서 자신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리라. 중죄를 저질렀는데 끝끝내 발명은 아니 하려느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니 그저 폐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장수의 무릎이 모두 너와 같다면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겠구나. 그저 꿇어서 머리를 조아리면 적장이 알아서 목을 칠 테니! 갈고리로 후벼 파는 독설은 전혀 종인답지 않은 것이었으나 찬열은 그것마저 감내했다. 오늘 자신 궁에 뛰어든 일로 종인의 체면에 먹칠하고 그의 신임을 저버린 것은 뼈아픈 선택이었으니까. 그때, 종인이 옥안 위에 말아두었던 두루마리 하나를 아래로 던졌다. 거칠게 날아간 그것은 정확히 찬열의 무릎을 맞고 떨어졌다. 펼쳐라. 지엄한 어명에 찬열은 조심스레 매듭을 풀고 내용을 읽었다.

143 폐하, 이것은. 희미한 한숨이 찬열에게 죄책감을 갖게 했다. 네가 약관을 넘긴 지 고작 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하여 그간의 공적과는 상관없이 너를 깔보고 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놈들이 있을 터. 너는 다소 무른 구석이 있으니 그들이 자발없이 날뛰더라도 아군의 목숨을 아깝게 여겨 함부로 벌하려 들지 않겠지. 허나 이번 정벌의 책임자는 너다. 군의 사기가 떨어지든 적을 섬멸하든 모두 너로 인한 것이다. 교지에는 찬열의 명이나 군율을 어긴 자는 직급에 상관없이 참수해도 좋다고 적혀 있었다. 군율을 바로 세워라. 종인이 단호한 어조로 힘을 주었다. 장문견이 군영에 집권하는 동안 암묵적으로 행했던 모든 악습을 폐하고 오직 네 명령에 따르게 바 꾸어라. 시간은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어. 허니 넌 장문견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군사들을 모조리 짐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토벌에 너를 일임한 진짜 이유니라. 알겠느냐? 추상같은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찬열은 교지를 두 손으로 받들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종인이 그것을 뾰족하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괘씸하다. 곱씹을수록 괘씸해서 울화가 치밀 정도야! 착잡함에 찬열은 낯이 다 화끈거렸다. 그래도 어쩌겠느냐. 넌 짐의 유일한 지기이고, 경수가 의지하는 벗인 것을. 폐하.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너다. 잠저 시절부터 시시콜콜하게 그리 잔소리를 해댔지. 정작 너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스스로 화를 당하려 했으면서. 종인은 다소 지친 표정이었다. 먹물처럼 짙은 구름이 종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이번 일로 태후가 널 의심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예? 아니.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더 이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네 명성과 가문이 대단하니 내버려 뒀을 거다. 종인의 확언에 찬열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부분은, 어리석게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넌 태후의 재종이라는 그늘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장문견이 지난해 예족 정벌에 너를 데 려간 것도 그러한 소치 아니겠느냐. 헌데 이제는 그 의심을 피할 길이 없으니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소신이 아둔하여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나와 태후 사이를 오가며 간자 노릇을 한다고 오해를 사면 그건 네 손해다. 큰 벼락이 치기 전에 서둘러 몸을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밀었다. 찬열은 자신의 그릇된 판단이 자신뿐만 아니라 종인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달 았다. 경수만을 생각하기엔, 그는 종인과 금석지약을 맺은 사이였다. 어느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소중 한 인연이었다. 경수가 널 몹시 걱정하더구나. 그건 짐도 마찬가지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솜털 하나 다치지 마라. 어명에 얽매여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는 일 또한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나가 봐라. 새벽길을 떠나는 자를 오래 붙잡을 수 없구나.

144 소장, 폐하의 우악하신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자신을 용서하는 종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찬열은 이번 전쟁을 꼭 승리로 이끌겠다고 결심했다. 찬열이 군사들을 이끌고 경성현으로 떠난 사이, 종인은 간밤에 경수가 어떠했는지 걱정하느라 또 잠을 설쳤다. 어제는 다른 검열이 들어와 경수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식이라면 사관을 아예 태성전에 상주시 키는 게 나을 것이라며, 종인은 쓰디쓴 농을 던졌다. 그렇게 피곤한 몸으로 조회에 참여한 종인은 아침부터 귀 거친 소리에 짜증이 밀려왔다. 요즘 궁에 흉흉한 소문 돌고 있사옵니다. 외람되오나 아무래도 태성전에 들인 사관을 폐지해야 할 듯하옵니다. 어사대에서 올라온 내용이었다. 관리의 비리와 풍속을 감찰하는 어사대는 며칠 전 입수한 황제와 사관의 추문을 가지고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어사대는 현재 어사대부와 장령 한민생, 감찰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인파였다. 그나마도 이 추문 을 접했을 때 계로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내부에서 다투던 것을 한민생이 필사적으로 올리라 했다. 한민생은 감히 황제의 은밀한 침전에까지 사관을 들이는 것에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한민생의 주장에 종인이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문이기에 갑자기 태성전의 사관을 폐하라는 거요?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폐하께서 정사를 멀리하시고 사관을 사사로이 대하신다는 소문이 있었사옵니 다. 대사농 최진수는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침울하게 고하였다. 어제 일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 태후에게선 도경수에 관한 어떤 답도 듣지 못했지만 그가 그 리 방자하게 굴었다면 폐지는 당연한 수순 아닌가 싶었다. 누가 그런 소릴 했다는 거요? 소문은 원래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법입니다. 허나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겠습니까? 추문이 나돈 것만으로도 검열 도경수의 행실이 음탕함을 방증하니 관직을 삭탈하고 태성전의 사관도 폐하는 것이 가할 줄로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종인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소에 가까운 그것은 다소 괴기스러워 보였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 때문에 벌처럼 독이 오른 것이오? 한민생을 비롯한 신료들이 불편한 시선으로 종인을 쳐다봤다. 종인이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짐이 사관을 들이라고 했소? 대인파가 서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숙였다. 경들의 성화로 전례 없이 침전에 사관을 들였소. 헌데 이제는 유언비어로 생사람 잡는 것이오? 누 가 그따위 추문에 천자의 이름을 올리라고 한 것이오? 대체 어느 나라에서 이처럼 황당무계한 발언을 조회에 올린단 말이오! 도 검열이 무고하다면 간밤에 자신궁 앞에서 석고대죄를 올렸겠습니까? 한민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황제를 위한 일이라 생각해 이번 안건을 덥석 물었건만, 정작 황제 가 화를 내자 몹시 의아했다. 도경수가 유죄라면 짐도 자신궁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겠지. 그대는 짐에게도 죄를 물을 참이오? 허면 태후마마께서는 어찌하여 사관을 사사로이 처소 앞마당에 무릎을 꿇리셨단 말씀입니까? 제아 무리 역도라 하여도 사관은 오로지 문건으로서 죄의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법도입니다. 헌데 태후마 마께선 추상같은 국법을 어기셨습니다. 이는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태후께서도 유언비어를 접하셨던 모양이오. 그리고 우연히 태성전 앞에서 도경수를 만나 몇 마디 훈계하셨소. 그런데 도경수가 본인도 억울했는지 치태를 부렸고 태후께서는 그것이 도를 넘었다고 보 셔서 본의 아니게 그리된 거요. 한민생은 자신들이 너무 성급하게 나섰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경수는

145 무죄이고 태후 또한 오해로 죄를 저질렀으므로 이번 사건은 더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묻는 것이 나았 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눈치 없이 말을 던졌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검열 도경수가 방자하여 소문의 빌미를 제공했다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태 성전에 들인 사관은 옛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시행하고 있음인데 이처럼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는 어찌 처결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라지 않았소? 애초에 그런 소문이 떠돈 것 자체가 문제요. 대체 누구요? 그따위 추잡 한 소문을 퍼뜨린 것이! 짐이 직접 추국해야겠소. 추국이라는 소리에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종인이 그들의 면면을 살피더니 호통했다. 천자가 나랏일은 제쳐놓고 색에 빠져 있다 말하고 싶은 것 아니오? 황궁의 민심이 어찌 이리도 각 박하단 말이오? 그런 소문을 들었으면 응당 입을 놀린 자를 꾸짖어야지, 그걸 가만히 듣고 있었소? 경들은 대체 무얼 하는 사람들이오! 편전에 쩌렁쩌렁 울리는 노기에 대신들이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소인파는 벌집을 건드렸나 싶 었고 대인파는 입에 밀랍을 발라 봉하였다. 그들로서는 사관도 그대로 두고 소인파를 경계할 수도 있 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짐이 비빈 없이 늦은 밤까지 사관과 있다 하여 망발을 지껄여도 되는 것이오? 그리하면 내관들과 의 추문은 어째서 나지 않는 거요?!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그저 소문이 그렇다는, 소문이 그렇긴 뭘 그렇다는 거요? 그저 소문일 뿐인데 경들의 입에서 함부로 폐하라는 소리가 쏟 아지는 거요? 일의 진위는 가리지 않고 부화뇌동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송구하옵니다. 아무래도 폐하와 관련한 일이다 보니 경중을 따지지 않았나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퍼지는 유언비어를 막지 못한 신 등의 잘못이니 부디 노염을 거두시옵소서. 결국, 잠자코 있던 어사대부가 나섰다. 한민생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짐은 경들의 의견을 존중해 시행한 것이오. 몇 달도 안 되어 악의 짙은 낭설로 짐을 욕보일 거였 으면 처음부터 사관을 들이라고 하지 말았어야지! 옥체에 해로우시니 고정하시옵소서. 고정하시옵소서! 우르르 숙이는 대신들의 머리 위에다 종인이 나직이 말했다. 한 번만 더 귀중한 시간에 이따위 낭설을 올린다면 모두 관복을 벗어야 할 것이오! 겨우 하루 만에 다시 보는데도 마치 일 년은 못 본 듯 반갑고 아팠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는 경수를 시선으로 좇으며 종인은 그렇게 느꼈다. 고작 하루인데 그만큼 수척해 보였다. 강직한 성격에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구겨 졌을까. 혹 태후의 편을 들었다고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어제 비가 내렸는데 풍한이라도 걸렸다 면. 어제 진왕 전하를 보내 절 구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칸막이 너머에서 경수의 나지막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명주바람과도 같은 그 목소리는 자 책으로 물들어 있던 종인의 탁류를 단숨에 백수( 白 水 )로 바꾸었다. 짐이 형님을 보냈음을 어찌 알았느냐? 외출도 삼가시는 분이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밤에 입궁하셨다는 게 이상했습니다. 더구나 종친 은 궁에서 부름이 없으면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지 않습니까? 형님은 태후가 자유로이 입궁해도 좋다고 내락해서 상관없다. 어쨌든 덕분에 태후마마의 화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몸은 어떠냐? 괜찮으냐? 짐 때문에 네가 고초를 겪었구나. 고초라니요. 저는 늘 강건하니 심려 마십시오.

146 느린 시간처럼 고요히 흐르는 대화였다. 널 혼자 둬서 달리 방도가 없었는데 때마침 찬열이 네게 달려가 주었더구나. 너와 찬열은 친형제 처럼 자랐으니 찬열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경수는 상께서 전과 다름없이 가벼운 인사를 하시고 상소를 보시다 고 적었다. 찬열의 얘기가 나와 서 조금 움찔했으나 종인은 어제 일을 크게 마음 쓰지 않는 듯했다. 어제처럼 박찬열이 부러웠던 적이 없다. 그는 널 위해서라면 어떤 식으로 발 벗고 뛰어갈 수 있는 데 짐은 정을 품은 사람조차 이 손으로 지키지 못해.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진왕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두 분의 관계가 그런 사사로 운 부탁까지 할 정도는 아니란 것을 압니다. 헌데 저를 위해 진왕께 부탁하는 서찰을 넣으셨지요. 그 것이 폐하께는 큰 용기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너를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이리 나의 면면을 꿰뚫고 있는데 어찌 네 곁을 잠시라도 떠나겠느냐? 덩어리처럼 마구잡이로 뭉쳐진 말은 늘 그렇듯 실체를 갖추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러 나 말하지 않아도, 굳이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유영하는 하늘의 달과 구름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흐르는 사모의 정이 있었다. 제가 더욱 몸가짐에 유의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또 이번과 같은 추문에 휩싸이시면 그것은 온전히 저의 잘못이니 그땐 반드시 저를 벌하셔야 합니다. 짐은 지금껏 그랬듯이 나만의 방식으로 널 지킬 것이다. 허나 이번처럼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 아. 어사대에서 저에 대한 일로 상소가 빗발치고 차대에서도 거론되었다 들었습니다. 전 폐하의 전정 에 먹물을 끼얹은 사직의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두둔하려 하십니까? 소인파에서 짐을 위해 올린 계인데 그걸 모르겠느냐. 하오면. 그것은 오히려 네가 겉으론 적들의 바람대로 보인다는 뜻이니 잘된 일이다. 넌 그저 네 일을 열심 히 하면 되느니라. 불안해 보이던 어린 황제는 없다. 너른 품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강인한 사내가 눈앞에 있다. 경수 는 이런 사내라면 누구나 탐내는 이상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 보름 후에 강무( 講 武 ) * 를 나가기로 했다. 조금 더 일찍 움직였어야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졌지. 이번에 새로 입격한 신래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와 필부가 되어 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장 춘몽일 뿐임을, 경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행재소에서 나흘간 묵을 예정이니라. 당연히 너도 함께 간다. 꿈은 꿈으로 두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김종인은 연의 황제이고 도경수는 관복을 벗으면 초라한 행 색이 익숙한 일개 백성이니까. 물론 그전에 네게 좋은 걸 하나 선물하고 싶구나. 무엇인지는 묻지 마라. 당분간은 무조건 비밀이 다. 그럼에도 곁에 있는 한, 치열하게 사모하고 열정적으로 종인을 지켜주고 싶다. 비를 싫어하는, 하나뿐인 나의 정인을 위하여. 27. 증부시( 贈 婦 詩 ) 맹렬한 태양은 훅훅 끼치는 더위를 몰고 왔다. 장마가 물러나고는 며칠째 볕 좋은 날이 계속되었다. 그 바람에 마당에 심어놓은 화초 몇 포기가 하릴없이 타 죽었다. 태후는 손수 그것을 뽑아 땅을 다졌다. * 사냥

147 올여름은 꼼짝없이 쪄 죽을 것입니다. 모처럼 자신궁에 문안을 온 장문견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태후는 평온한 표정으로 수틀 앞에 앉 아 있었다. 소담한 연꽃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장문견은 불퉁한 시선으로 제 혈육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전에 소신이 먼저 죽겠지요! 새하얀 백련 꽃잎에 보일 듯 말 듯한 연분홍 색깔을 입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태후는 미간에 주름 을 잡으며 바느질에 집중했다. 그걸 본 장문견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작정이십니까? 주상이 땀을 많이 흘려 손수건을 만드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집중력이 흐트러지니 그 입 좀 다무 시게. 금상이 땀 흘리는 것은 그리 눈에 밟히시면서 아우가 복장 터져 죽는 꼴은 아니 보이십니까? 아프다고 두문불출하더니만, 그 입은 안 아픈 것인가? 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꽃잎 부분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소신 좀 살려주십시오, 태후마마. 이러다가 꼼짝없이 조정에서 찍혀 나가게 생겼습니다! 진득이 참으면 앉은 자리에 가시라도 돋치시나? 애처럼 징징거릴 요량이면 앞으론 자신궁에 발길 놓지 않아도 되네. 태후의 냉소에 장문견은 큰 충격을 받았다. 피붙이에게까지 버림을 받으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었 다. 장문견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일전에 내가 뭐라 일렀는가? 주상은 혈기 왕성하니 이것저것 시도하고 싶어 할 것이라지 않았나? 이건 시작일 뿐인데 어찌 이리 안달하는가? 그 시작이 우리의 끝일 수도 있음입니다. 내 밑에서 구 년을 숨죽인 아이라네. 끝을 볼 작정이면 일에 시동을 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그게 무에 문제라고 툭하면 사신( 私 信 )을 보내고 자신궁 앞에서 만나 달라고 떼를 쓰나? 자 네, 올해 나이가 몇인 줄이나 아는가? 평소 같았으면 대성일갈에 찔끔하여 잔뜩 주눅이 들었을 텐데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인지 오늘만큼 은 장문견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형형하게 핏발을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예! 마마께서는 반드시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헌데 금상이 하는 짓을 좀 보십시오. 이날까지 공을 세운 소신을 이번 정벌에서 배제하였습니다! 박찬열에게는 아예 도독 자리까지 주려고 했지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신을 아주 찍어내겠다는 뜻 아닙니까? 박찬열은 우리 문중과 밀접한 사이이고 재주도 쓸 만하지. 배동으로 십 년 넘게 신의를 다졌으니 주상이 그를 가까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허면 마마께서는 박찬열이 이대로 신의 자리를 빼앗아도 된다고 보십니까? 박우헌이 내심 신을 탐 탁지 않아 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십니까? 장문견은 놀랍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투로 되물었다. 태후는 어이가 없었다. 결국엔 수틀에 바늘 을 꽂고 되똑하게 자신의 아우를 쳐다봤다. 어리석은 둔치가 어디 있나 했더니 멀리서 찾을 것도 없겠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그리 가르 쳤거늘. 원색적으로 비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내일 당장 신이 변방 한직으로 물러나도 별수 없는 상황이 니까요. 허니 제발 마마께서 굽어살펴 주십시오. 자네가 이러니 대인파의 수장 자리를 황세용에게 빼앗긴 것 아닌가? 칼만 잘 휘두르면 무얼 하나.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데. 예, 예. 신이 어리석어 문신들을 휘어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병권은 꽉 틀어쥐고 있지 않습니 까? 그러니 마마께서 더욱 신을 구명해 주셔야지요. 금상이 차츰 모든 것을 앗아갈 텐데 이대로 있다 가는 마마께서도 위태로우실 것입니다. 곧 죽어도 나불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신이 조정에 뛰어든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 태후마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148 자네가 없는 동안 대인파 내부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온 모양이더군. 황세용마저 그들의 구심점 이 되지 못한다는 증거일세. 황세용은 사도입니다. 문신들의 수장이에요. 사람이 줏대가 없긴 해도 머리에 먹물을 묻힌 세월이 수십 년이니 우리 무신들보다는 사정이 낫지요. 자고로 국가란 문무가 고루 발달해야 부국강병이라 일컬을 수 있네. 비교해 봐야 무의미함을 언제 쯤이면 깨달을꼬. 태후는 끌끌 혀를 찼다. 방에 깔아둔 이불은 그만 접고 슬슬 등청하시게. 신에게는 낯짝도 없는 줄 아십니까? 황제가 대놓고 신을 우롱했는데 무슨 낯이 있어 가슴을 펴고 월화문을 넘으란 말씀이십니까? 이번 기회에 황세용이 차지한 당파의 수장 자리를 자네가 한번 빼앗아 보란 말일세. 경악할 만한, 그러나 구미가 확 당기는 명령에 장문견의 눈에서 빛이 돌기 시작했다. 도경수의 일로 자신에게 진실을 고하지 않은 황세용이 내심 불쾌했던 태후는 이참에 자신의 아우를 대인파의 수장으로 세울 계획이었다. 정녕, 정녕 신이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못할 게 무언가. 허나 행동하기에 앞서 충분히 상량하는 버릇을 들이시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마께서 하신 충고는 뼛속까지 새겨 시시각각 되새김질할 것입니다! 장문견은 싱글벙글했다. 권세가 주춤했다고 하여 요즘 문신들이 그를 업신여기는 듯했는데 대인파 의 실질적인 수장이 된다면 꼴 보기 싫은 샌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주상의 날개는 이제 막 볕에 말랐을 뿐일세. 오래도록 접고 있던 날개였으니 오죽 펼치고 싶겠는 가? 우린 그저 그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면 되네. 기다린 후에는요? 그 기다림은 대체 언제까지입니까? 바위가 물살에 깎여 조약돌이 될 만큼. 그렇게 오래요?! 혹시 아는가? 한껏 도취해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누군가 그것을 새로 착각하여 독 바른 화살을 날 릴지. 비릿하지만 아름다운 미소가 태후의 입가에 걸렸다. 장문견은 자신의 누님이 한 말을 곱씹어 보더 니 이제 안심했다는 듯 호탕하게 대소하였다. 태후는 다시 바늘을 잡고 연꽃을 수놓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어가가 행궁으로 나서야 해서 조정이 몹시 바빠요. 허면 너도 가는 것이냐? 사관이니까요. 그렇구나.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 지위가 특수하니 매사 몸조심해야 한다. 예, 어머니. 비번이라 경수는 모친인 윤씨를 도와 마당에서 빨래를 널었다. 며칠간 볕이 좋아서 너는 족족 빳빳 하게 말랐다. 연수는 햇볕 냄새가 좋다며 빨래 더미에서 헤엄치는 시늉까지 했다. 경수는 어린 연수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요즘 경수의 집은 무척 평화로웠다. 경수가 황세용과 태후의 도움으로 예문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덕에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던 것이다. 물론 화관무직이 아닌지라 녹봉은 적었지만 월란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윤씨는 지금처럼 좋은 시절 이 없다고 했다. 도명정은 큰아들이 유례없이 태성전에 들어 직필하는 것이 조금 맘에 걸린 눈치였으 나 내색하진 않았다. 그런 윤씨와 도명정이 놀랄 일이 일어났다. 경수가 여느 때처럼 살림을 돕고 늦은 오후에 마당에 나와 평상에서 연수의 글공부를 봐주던 중이

149 었다. 사립문 밖으로 한 사내가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연수가 경수에게 슬쩍 얘기하자 경수가 고개 를 들었다. 청신이었다. 경수는 얼른 일어나 청신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는 평복 차림이었다. 황제를 지근에 서 모시는 어전시위가 자신의 집은 어찌 알았으며, 또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나 싶었다. 나리께서 저희 집엔 어쩐 일이십니까? 청신이 빙긋 웃으며 뒤에 달고 온 한 사내에게 말하였다. 들여라. 그러자 사내가 수레를 끌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수레에는 커다란 보자기가 덮여 있었는데 윤곽을 보니 궤짝인 듯했다. 사내는 묵묵히 궤짝을 들어 평상 위에 올려놓았고 연수는 냉큼 형 뒤에 숨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청신을 올려다봤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가져다주라고 하셨으니 나는 그저 어명을 수행할 뿐이네. 폐하께서요? 헌데 어째서 나리께서 직접 움직이십니까? 이런 거라면 소인에게 시키셔도 될 텐데. 다른 사람이 알면 곤란하시다며 내게 신신당부하셨네. 청신은 이미 장유곡에서부터 종인이 경수를 맘에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공연한 일로 나리를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폐하께서 기뻐하시니 나도 기꺼이 일을 돕는 것뿐일세. 그리고 이것은 저 상자를 확인하고 열어보 라고 하셨네. 청신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건넸다. 함 같았는데 안에는 뭐가 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소인이 감사히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이를 말인가. 청신은 곧 사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도명정과 윤씨 부인이 나왔다. 그들은 밖에 놓인 궤짝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경수 는 자신도 모르겠다며 일단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자고 했다. 명정과 경수가 그것을 나눠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네 식구가 궤짝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방금 왔다 간 사내는 누구냐. 저 그게. 호분중랑장입니다. 호분중랑장이라면 폐하의 시위가 아니냐? 그자가 어찌하여 네게 이런 걸 전해 주고 간단 말이냐? 뇌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애가 태성전 사관 노릇을 하다 보니 혹여 있을 콩고물을 바라고요. 윤씨가 거들자 경수가 얼른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저분은 폐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군관 나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폐하께서 내리 신 것이고요. 영문을 몰라 명정과 윤씨가 의아해 했다. 경수는 그때까지 집에다 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절 얘기 하지 않았고, 명정도 딱히 물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경계해야 할 대인파의 사관에게 친히 시 위를 보내면서까지 상을 내린 것이 수상했다. 내막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우선 폐하께서 내리신 것을 열어보아라. 경수가 다소 의기소침하게 궤짝을 열어보았다. 이내 네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에는 빛깔이 몹시도 고운 비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 필만 해도 값이 족히 나갈 텐데 열 필은 넘어 보였다. 감아놓은 비단 뭉치의 맨 위에는 서찰이 놓여 있었다. 경수는 조심스레 그것을 열어보았다. [전에 네게 줄 선물이 있다고 했지? 언젠가 찬열에게 네 생일이 언제냐고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몇 개월이나 지났더구나. 돌아오는 생일까지 차마 기다릴 수가 없었다.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 라 여겨다오. 보낸 것은 맨 위에 있는 것부터 차례대로 살펴야 한다.] 무엇이라 적혀 있느냐? 윤씨가 물었다.

150 폐하께서 제게 하례물을 보내셨습니다. 하례물? 네가 공이라도 세운 것이냐? 제 생일을 축하하신다며. 그 말에 명정과 윤씨가 깜짝 놀랐다. 경수에게 어떠한 언질도 듣지 못해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 다. 명정이 자못 심각하게 물었다. 폐하께서 네 생일을 축하하신다고? 네 생일은 지난 지가 한참인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요. 허면 폐하께서 널 마음에 두기라도 하셨다는 뜻이냐? 경수가 선뜻 답하지 못하자 명정이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이 아비와 어미가 널 그리 가르쳤더냐? 네가 직분을 잊고 폐하께 추파라도 날린 것이더냐?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허면 폐하께서 일개 구품 관리에게 사사로이 하례하신 까닭이 무엇이냐? 실은. 경수는 머뭇거리다가 그간의 일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종인 도 일부러 청신을 보냈을 정도면 집안사람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경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명정과 윤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이 예전부터 알던 사이 인 것도 그렇고, 경수가 대인파의 번견이 되어 태성전에 앉았으면서도 대담하게 황제와 마음을 나눴 다는 것이 그러했다. 연나라에서 남색을 탐하는 것은 전혀 흠잡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 뜻밖인지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정말 황제 폐하께서 널 괴이신다는 것이냐? 경수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자 윤씨가 기뻐했다. 세상에, 이런 경사가 있나! 어머니. 전 용양군( 龍 陽 君 )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경수가 선을 긋자 윤씨가 당황하였다. 용양군이란 위나라 왕이 총애하던 신하로 남색의 다른 말이었다. 연뿐만 아니라 이전의 왕조에서도 황제와 고관대작들의 남색은 빈번했다. 그래서 용양군을 아예 관직으로 만들어 내명부 여인들처럼 황 제를 밤낮으로 모시는 사람으로 삼았다. 이것은 명예도, 치욕도 아니다. 사내로 태어나 백성들의 선구자가 되지는 못할망정 일생의 영욕이 오직 황제의 총애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정을 샀다. 종인은 은근히 경수를 용양군으로 삼고 싶은 눈치였으나 경수는 그 자리를 싫어했다. 아니, 폐하께서 널 그리 괴이시는데 곁에 있어드리지 않고? 폐하께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궁에서 생활하고 싶지 않아요. 허면 지금 폐하와 주고받는 감정은 한낱 풋정이란 말이냐?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그분을, 소자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품은 것과 소자가 궁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바람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널 굳이 용양군으로 들이시겠다고 하면? 그래도 거절할 것이냐? 아들의 고집스러운 침묵에 윤씨는 그 좋은 기회를 날리느냐는 듯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잘 생각했다. 도명정이 입을 열었다. 너는 나라의 관리이니 관리로서 폐하를 보필해 드리면 된다. 네 직분이 있는데 굳이 암굴 같은 내 전에 들어 암투를 벌일 필요는 없느니라. 폐하께서 네게 진심이고 너 또한 폐하께 진심이라면 지위는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니더냐? 경수는 부친의 말에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종인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며 덧붙이려 했지만 연수 가 비단을 만지작거리며 형님. 이거 구경해도 되오? 하는 바람에 관뒀다. 그래. 구경 좀 시켜다오.

151 윤씨가 아쉬운 기색을 숨기며 비단으로 눈을 돌렸다. 경수는 서찰에 적힌 대로 오색빛깔의 고운 비단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아놓은 비단 마다 말린 붉은색 꽃잎이 가득했다. 모두 열두 필의 비단이 좁은 방 안에 가득한데 꽃잎을 모두 모으 자 방 안이 몹시 향기로웠다. 마지막 비단에는 종이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寶 花 顚 倒 髻 邊 紗 草 草 相 携 著 處 家 三 雲 留 古 驛 軒 同 看 牧 丹 芽 머리의 꽃은 낭자 곁의 깁으로 넘어졌는데 초초히 서로 더불고 붙이는 곳이 집이로세. 한 구름이 삼일을 계속 고역에 머무는지라 작은 난간에서 함께 모란의 싹을 구경하네. * 명정과 경수는 단번에 누가 쓴 시인지,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지만 글을 잘 모르는 윤씨는 누구의 시냐고 물었다. 명정이 답했다. 점필재 김종직이 쓴 증부시( 贈 婦 詩 )라오. 증부시라면. 아내에게 바치는 시지. 윤씨가 활짝 웃으며 경수를 쳐다봤다. 경수는 공연히 부모님 앞에서 비단을 풀었다고 생각했다. 그 노골적이고 짓궂은 성격을 왜 간과했을까! 폐하께서 너를 이토록 진지하게 여기시는 줄은 몰랐구나. 원래 농을 자주 하십니다. 농으로 한참도 지난 네 생일에 이런 시를 보내셨겠느냐? 죄송해요.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정을 주고받는 것은 자연스럽지. 허나 넌 관직을 받은 조정 의 관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 늘 염두에 두겠습니다. 도명정은 행여 경수가 분수를 모르고 황제와 어울리다가 화를 입을까 봐 걱정되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아버지의 눈엔 마냥 어린애다. 생각이 깊다 한들, 몰려오는 피바람을 무슨 수로 막 을 것이며 각다귀처럼 달려드는 정적들을 어떻게 피할지 안심할 수 없다. 게다가 아직 조정은 장씨 일가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고 황제의 이러한 마음이 영원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널 응원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소리를 한다고 아비를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소자를 걱정하시어 이르시는 말씀인데 그럴 리가요. 알면 됐다. 부인도 이번 일에 대해 절대 밖에 말이 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연수 너도 마찬가 지니라. 들고나는 사람이 없는데 밖에 새어나갈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윤씨가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였으나 도명정은 단호했다. 오히려 부인이 서운한 듯 보이는구려. 왜, 황실과 연이 닿을 기회를 날려 아쉬운 거요?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소첩에게도 염치가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소. 경수는 민망한 듯 제 부모를 바라보았다. 옷감이 이리 좋은데 이참에 새로 옷 한 벌 지어 입지 그러니? 아닙니다. 소자는 그런 데 관심이 없으니 이것은 살림에 쓰도록 하세요. 폐하께서 제 사정을 아시 고 일부러 이것을 보내신 듯합니다. * 김종직, 담장 아래에 모란이 싹 텄네( 墻 下 牧 丹 新 茁 )

152 누추한 집안 사정까지 다 아신단 말이니? 아유, 면구해서 어쩌니. 윤씨가 보드라운 비단을 만지작거리며 다시금 감탄했다. 일대에서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소. 만일 옷을 짓거나 시전에다 팔려거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하시오. 그럼요. 안 그래도 미전과 청과점에 왼빚이 조금 있었는데 그것부터 해결할 수 있겠어요. 마침 저녁때이니 전 이만 부엌으로 가볼게요. 어머니는 오늘 나오지 마세요. 경수가 얼른 자리를 피했다. 시와 하례물만으로도 아버지의 걱정이 대단한데 청신이 따로 건넨 작 은 함까지 열었다가는 아예 한숨을 들을 것만 같았다. 경수는 부엌으로 들어와 조심히 매듭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호박과 홍류석으로 섬세하게 장식한 향집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종인이 고야정에서 지나가는 말로 향집을 주랴 하던 것이 생각났 다. 경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선물을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종인의 따스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 이다. 네모난 각 안에 방을 향기로 뒤덮었던 모란을 넣고 다니면 좋을 것이다. 청년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술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촉감이 그만이었다. 28. 변백현( 邊 伯 賢 ) 여름의 아침은 싱그러웠다. 말갛게 씻은 해가 온 산을 밝히자 호수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아 침을 준비하는 산새들은 청명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봄꽃이 지기 무섭게 꽃망울을 맺은 여름의 주인들이 투명한 이슬을 머금고 피어났다. 짙푸른 버드 나무는 휘늘어진 초록 천을 물가에 드리웠으며 슬슬 후텁지근한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왔다. 이처럼 날이 좋은 때 행궁으로 떠나는 의장행렬이 꽤 대단했다. 육부대신과 각사의 당상관 등 수많 은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느라 길목을 차지한 행렬은 장관이었다. 기치창검을 높게 든 병사들 사이 로 종인이 탄 어가가 유유히 길을 나섰다. 행렬의 끝에는 경수가 예문관 사관들과 함께였다. 황제가 사냥터로 떠나는 것은 단순히 짐승을 잡아 여흥을 즐기는 일이 아니었다. 보통 무예 훈련과 군사들의 면면을 점검하는 성격이 강했다. 역대 사냥을 좋아했던 황제들은 소용되는 자금과 인력이 많다는 이유로 대신들이 사냥을 반대하면 무예 훈련을 핑계 삼아 사냥을 떠나기도 했다. 효경제는 호방한 성격이라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대신 들이 상소를 올리면 무술을 방패삼았다. 덕분에 종인은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사냥터에 나서곤 했는데 오늘은 재미를 위한 사냥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일전에 종대가 문안 왔을 때 낙성산과 인백산 인근에 호랑이가 출몰해 백성들이 벌벌 떤다고 상달한 것이 신경 쓰였다. 영회황후가 죽은 후 삼 년 동안 사냥에 나선 적이 없었으니 겸사겸사 일을 추진했다. 행궁에 도착한 종인은 궁인들이 짐을 푸는 동안 각 처소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간 보수와 관리를 잘해서 딱히 흠잡을 곳은 없었다. 부황의 뒤를 졸졸 따라다 니던 어린 날의 잔득잔득한 기억도 그대로였다. 보이느냐? 청량산과 벽운산의 청산녹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짐은 성인이 되었는데 산은 변함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폐하께서 동궁이 되시고 처음 찾으셨습니다. 당시의 풍광을 아직도 기억하시옵니까? 기억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이곳은 그대로야. 효경제는 황자들이 나약한 신체를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태자였던 소왕은 부황을 그대 로 빼다 박아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거의 매일 강무에 나섰고 그런 태자를 종대와 종인은 강아 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가끔은 찬열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마당에서 시도 때도 없이 칼싸움을 하고, 술래잡기를 하다가 부황의 편전에 들어 호되게 꾸중을 듣 고, 더러는 천방지축으로 놀다가 태자의 몸에 상처를 내 경을 칠 뻔하기도 했다.

153 그때는 어째서 모든 것이 쉽게만 보였는지 모른다. 결국, 용상 앞에서 물거품이 될 시간인데. 흐릿하구나.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폐하. 그리 볼 필요 없다. 누구도 과거로는 회귀할 수 없으니까. 종인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내일 일정은 어찌 되느냐? 오전에 상참과 삼사의 조계( 朝 啓 ) * 가 있고 미시부터 연무관에서 무관들이 무예를 선보인다 합니 다. 그 후 차대와 경연이 잡혀 있사오며 저녁에는 낭관들과의 조촐한 다연이 열릴 것이옵니다. 흠. 빠듯하구나. 다연을 모레로 옮기시겠습니까? 아니면 경연이라도 하루 쉬시는 것이. 강무를 나왔다 하여 해이해질 순 없지. 또 육부의 정랑들을 위로할 때가 되었구나. 오늘 오후엔 별 다른 일정은 없느냐? 지련당에서 당상관들과 낚시를 하기로 되어 있사온데 준비를 마치는 대로 소인이 모시겠나이다. 알겠다. 모레부터 이틀간 강무를 행해야 하니 차질 없이 준비하라고 하여라. 예, 폐하. 하개가 정중히 답하고 행궁을 살피러 나가려는데, 참. 경수는 무얼 하고 있더냐? 왜 그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하개가 웃으며 아뢰었다. 예문관 선진들과 숙소에서 짐을 풀고 있다 합니다. 으레 강무에서는 사관들도 한결 편안해지는 법이지. 지난번에 겪은 고초로 몸과 맘이 상했을 텐데 이참에 털어냈으면 좋겠구나. 심지가 굳어 보였습니다. 심려치 않으셔도 알아서 잘할 것이옵니다. 그래. 그런 아이지. 어서 해가 기울길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길어지는 낮을 재촉하였다. 북녘은 한여름인데도 서늘하구나. 밤이면 가끔 귀신 울음도 들립니다. 내가 이곳이 초행길인 줄 아느냐? 부관의 농에 찬열은 쿡쿡 웃었다. 내가 청한 객은 언제쯤 당도한다더냐?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되었습니다. 헌데 그분은 왜 만나려 하시는 것입니까? 어명이네. 실은 오자마자 그를 불렀어야 했는데 병영을 정비하느라 짬을 내지 못했어. 최전선에 진을 친 찬열은 초소의 병사들을 일일이 둘러본 후 자정이 가까워서야 겨우 잠들곤 했다. 이따금 일각도 안 되게 낮잠을 청하였는데 그나마도 없었다면 하루에 두 시진도 채 못 자는 그로서는 체력이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금선공주의 아들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지요. 그 부친이 자결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한을 품었을 거라고 세인들이 심심찮게 떠들어댔으니까요. 입조심하게. 그 속내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모르는 것 아닌가? 공주께서도 부군의 죽음을 의연히 견디셨거늘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떠들어서야 되겠는가. 송구합니다. 마지막으로 무기고를 점검하고 막사로 돌아오니, 잘 차려입은 웬 사내가 종자 하나를 거느리고 앞 을 서성이고 있었다. 얼굴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오래전, 태평연에서 경수가 곤경에 처했을 때 느물거리듯이 나타났 * 중신들의 업무 보고

154 던 위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 변가 백현이라 합니다. 어서 오게.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소생이야말로 우장군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지학이 되자마자 전장을 누비고 다닌 최고의 장수시죠. 약관을 넘긴 지 두어 해밖에 안 된 것으로 아는데 벌써 당상관을 목전에 두셨으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기름을 바른 듯 술술 나오는 칭찬에 찬열은 되레 열없었다. 박태흥 영감과 함께 지낸다고 들었네. 낙향하시겠다는 것을 폐하께서 억지로 현령 자리를 맡기셨 다지? 이러다 죽기 직전에야 사직서가 수결될 것이라고 툴툴거리십니다. 뭐, 그러시는 것치곤 고을 부민 들의 일에 열정적이시죠. 고향이니 어련하실까. 자,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지. 낭관들과의 다연을 마치고 나니 먹물을 풀어놓은 듯 새카만 하늘에 은하수처럼 물결치는 별무리가 떠올랐다. 후텁지근한 열기를 식혀주는 산의 푸른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경수는 그 바람을 가만히 느껴 보았다. 새살거리는 바람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풍부했다. 귀를 기울 이면 속삭이듯 울리는 숲의 노래도 아름다웠다. 처음 나선 행궁은 청년에게는 온통 설렘뿐이다. 별천 지가 있다면 이런 곳일까. 어린애 같구나. 두 팔을 벌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던 경수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수가 급히 팔 을 내리며 불만스레 눈을 치떴다. 청신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왜? 어디 아프냐? 삼림욕이라도 해야 낫는 병이냐? 폐하께선 온종일 저를 어떻게 괴롭힐지 구상하시는 모양입니다. 방법이 나날이 발전하시니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경수는 다보록하게 올라온 새파란 풀밭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넌 가끔 네가 선비라는 것을 잊는 것 같구나. 그처럼 아무 데나 풀썩풀썩 앉아 옷자락에 풀물이 들어도 짐은 모르는 일이다. 제 여동생은 예전에 찬열을 놀리려고 두꺼비를 잡으려 진흙탕도 뒹군 적이 있는데요? 그 아이는 워낙 천방지축이라 연꽃을 따려고 못에 들어갔다가 옷을 더럽힌 적도 많답니다. 자랑처럼 늘어놓는 얘기에 종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놓았다. 네 부모가 네 오누이를 키우느라 고생깨나 했겠군. 해서, 폐하께서는 이런 제가 싫으십니까? 이리 오너라. 월대에 걸터앉은 종인이 손짓했다. 경수는 다시 일어나 종인에게로 걸어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과 하늘하늘 나부끼는 경수의 머리카락. 실록의 청량한 향기에 요요로운 달 빛까지 받으니 꼭 몽환의 세계인 듯하였다. 종인은 앞에 선 경수의 하얀 손을 턱 잡고는 제 곁으로 잡아당겼다. 경수가 맥없이 딸려가 종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 매사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어찌 용양군이 될 생각은 아니 하느냐. 또 저를 놀리시는군요. 하하. 알았다. 하개에게 일대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였다. 종인은 봄날의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경수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경수의 허리춤 에 지난번에 주었던 향집노리개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종인이 턱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급하게 만드느라 매듭이며 장식이 세밀하지 못했을 텐데.

155 경수는 자신의 노리개를 지분거렸다. 어쩐지 두 볼이 빨간 것이 다소 달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주신 것인데 무엇인들 맘에 들지 않겠습니까.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제가 언제 거짓을 고하는 걸 보신 적 있으십니까? 쑥스러워서 그런다. 비단도 맘에 들더냐? 비단도 좋았지만 집 안을 채워주신 모란 향기가 더 좋았습니다. 그보다 좋았던 것은 폐하께서 보 여주신 성심이고요. 세상에 없는 유일한 것을 감히 제가 가졌다고 생각하니 기쁘지 한량없었지요. 네가 원하는 것은 모든 줄 것이다. 넌 그저 원하고 말만 하면 되느니라. 소중한 마음 한 조각이면 됩니다. 그것으로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경수가 종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내려다보다가 자연스레 하얀 볼에 입을 맞추었다. 경수가 놀라 일순 눈이 구슬처럼 커졌지만 종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하게 웃었다. 내일부터는 양일간 사냥이다. 오늘 연무관에서 보았겠지만 무장들의 실력이 꽤 쓸 만하더구나. 이 번 사냥은 아주 재미있을 거다. 특히 기도위와 중랑장들의 실력이 월등하더군요. 선진들께서 훈련도감에서 정해진 훈련을 받는 것 외에도 독특한 무예를 터득했다고 신기하게 보시더라고요. 봉군도위와 청신의 합작이다. 찬열이 기본기에 충실하다면 청신은 강호 출신이라 자신만의 무예가 출중하지. 둘 다 나라의 복이다. 폐하의 수족이니 더욱 아끼고 장려해 주십시오. 오냐. 그리고 내일은 산에 사관들이 따라가지 않으니 너도 모처럼 푹 쉬도록 해라. 못해도 세 시진 이상 걸릴 테니 오랜만에 나들이 온 셈 치려무나. 그랬다가는 나태해졌다며 잔소리를 하실 걸요? 누가? 있습니다. 그런 분. 그는 종인도 잘 아는 홍만립이었지만 경수는 비밀로 봉하였다. 종인은 평소 무뚝뚝한 경수가 자신과 있을 때면 은연중에 보여주는 새치름한 모습이 좋았다. 타인 에게는 당당해도 자신에게만큼은 각양각색으로 색깔을 펼쳐놓는 것이 좋았다. 종인은 경수와 함께 있을수록 그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허한 어좌에 앉 은 그에게 아슬아슬하게 생긴 숨구멍이었다. 작게 뚫린 그것을 통해 폐부 깊숙이 호흡하면 이전까지 맡을 수 없던 신선한 공기가 스몄다. 어느샌가 종인에게 경수는 가느다란 호흡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밤이라 제법 바람이 차다. 그만 들어가겠느냐? 불예하십니까? 네가 풍한이라도 들까 그런다. 그럼 조금만 더 바람을 느껴도 될는지요? 풀 냄새가 무척 싱그럽습니다. 종인의 무릎에 기대어 사르르 눈을 감는 경수. 종인은 그런 경수의 머리통 위에 자신의 얼굴을 조 심스레 갖다 대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춘다면 영겁을 고통에서 산다 해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 변백현은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찬열은 본인의 성격이 상당히 긍정적이고 발랄하다고 생각했 는데, 찬열이 뛰는 놈이라면 백현은 나는 놈이었다. 그는 말솜씨도 좋았고 어린 나이에 전국을 누비며 여행하느라 견문도 대단했다. 다만 학구열 높은 금선공주 덕분에 어릴 때부터 서책을 벗 삼은 것치고는 학문에 흥미가 없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하지만 찬열은 백현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박태흥의 제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변백현은 세간에서 멋대로 읊어대는 비극의 핏줄로 보이진 않았다.

156 폐하께서 이번 대과에 응하라고 하셨는데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소생을 요절내시려고 작두날을 갈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박태흥 나리 밑에 오래 있었다면 견식이 남다를 터. 어째서 과거를 치르지 않았나? 아이고~ 소생은 애초에 글러 먹었습니다. 먹물을 사발로 들이켜도 입격할 수 없을 걸요? 무슨. 조정에 흥미가 없어요. 백현은 술잔을 툭 꺾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올랐지만 정신은 멀쩡한 것이 주량이 상당한 듯했다. 찬열은 한참 전부터 술병을 아예 백현 쪽으로 밀어놓았다. 공주께서 가만히 계시던가? 어머니께선 아무 말씀 안 하십니다. 속내는 어떠신지 모르지만요. 아직 젊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될 일이네. 세상 떠돌며 배우는 재미도 쏠쏠할 테니 쉬이 탁류에 뛰 어들고 싶진 않겠지. 이야 장군께선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오셨습니까? 돗자리 까셔도 되겠는데요? 능글거리는 태도는 도무지 그 도도한 금선공주의 슬하에서 자랐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면 눈매 외에는 공주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 눈 빼고 모든 것이 부친인 변석위를 빼다 박았다던데 과 연 그랬다. 폐하께서 과거를 보라고 하셨는데도 안 간 배짱이면 날 돕지 않아도 될 텐데. 흔쾌히 도움을 주겠 다고 해서 고맙네. 제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대부들의 고매한 정치론부터 파락호들의 개똥같은 철학까지 안 익힌 게 없답니다. 헌데 천만다행인지 불행인지 군에서 일할 기회는 없었거든요. 무정후가 나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도 깊으시네. 헌데 어찌하여 그분 밑에서 배울 생각은 하지 않았나? 순수한 질문에 백현이 정말 모르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찬열을 쳐다봤다. 백현은 멀뚱멀뚱한 찬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빈 잔에 술을 부었다. 장문견의 수하가 제 부친을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그제야 찬열은 아차 싶었다. 장문견은 신이 나서 부친을 죽이라고 주청을 올렸죠. 아무리 배알이 없기로서니 제가 그 사람 밑 에서 가르침을 청해서야 되겠습니까? 술잔을 다시 꺾는다. 찬열이 반응이 없자 백현은 곧바로 둘러댔다. 아, 물론 소생 같은 햇내기들은 복수 같은 것은 꿈도 못 꿉니다. 부끄럽지만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새가슴이거든요. 그래도 불효자는 되고 싶지 않더군요. 장씨 일문과 엮이는 날엔 저승 가신 부친께서 감으셨던 두 눈을 번쩍! 뜨실 겁니다. 거침이 없군. 탑전에서도 이러한가? 하아. 나리께서도 소생이 일찌감치 북망산으로 가고 싶어 하진 않는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어깨를 으쓱한 백현은 맛대가리 없다고 불평한 고사리 무침을 입으로 가져갔다. 자네가 어떻게 자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 없네. 허나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그러니 자네 같은 황실 종친의 힘이 필요하지. 예, 예. 오자마자 숨도 못 쉬고 산악전을 치르셨으니 마음이 급하시겠죠. 적들은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고 국경의 치안은 엉망이고. 전쟁을 길게 끌수록 죽어나는 것은 군이 아니라 백성이니 가능 한 빨리 일을 끝내고 싶으실 겁니다. 모종의 이유도 장군을 독촉하고 있죠?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야만, 폐하께서 내리신 밀명을 수행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백현이 싱긋 웃었다. 통찰하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학식이 단천하다고 스스로 낮추는 것은 남에게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고 싶지 않을 때 써먹는 흔해

157 빠진 속임수 중 하나다. 아무래도 변백현은 이것에 속하는 듯했다. 어째서 폐하께서 내게 밀명을 내렸다고 보는가? 불문가지 아닙니까? 장군께 도독에 준하는 권한을 일임하셨는데 폐하께서 단순히 어린 장수를 보 호하려고 그러셨을까요? 폐하께서 그리 평면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란 건 오히려 장군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럼 자네가 내 부름에 곧바로 응한 것은 그저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이 아니겠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지 않습니까? 군은 자네의 유희거리가 아니야. 소생은 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백현이 반짝, 얼음 같은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나직하게, 장군께서 군에 녹아내린 장문견의 얼룩을 어찌 지우실지, 그게 궁금한 겁니다. 찬열이 파안대소했다. 백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자네 아주 재미있는 친구일세. 면전에서 그리 삿대질까지 할 필욘 없잖습니까? 백현의 볼멘소리에 찬열은 겨우 웃음기를 거두었다. 복수는 꿈도 못 꾸는 새가슴이라서 그리 자신을 감추는 건가? 소생이요? 그렇지 않고서야 피를 원하는 짐승의 눈을 할 리 없거든. 넘겨짚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리. 아니. 어릴 때부터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다 보면 알 수 있네. 백현이 느물거리는 태도를 바로 하고 찬열을 응시했다. 그를 아는 모두가 박찬열은 이름처럼 밝고 빛나는, 한 줌의 어둠조차 끼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백현은 알 수 있었다. 지나치게 밝아서 남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할 뿐, 고개를 조금만 기울 여도 이면에 깊은 그림자를 품고 있음을 말이다. 자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을 걸세. 허나 원한 다면 조금 더 허리끈을 졸라맬 필요가 있겠어. 만만치 않은 상대에게 도전하기엔, 백현 자네는 지나치 게 순수하군. 소생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것까지 보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냉소와 순수한 경탄 그 어디에 걸친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소생은 그리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러한가? 예. 연에서 소생만큼 춘화집을 두루 섭렵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진지한 얘길 할 것처럼 바람을 잡더니 다시 농으로 빠진다. 찬열은 이것이 백현의 성격이라면 그냥 존중하는 편이 속 편하리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장군께서 지나치게 다정하고 온화하셔서 조금 피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나 름대로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군요. 혀에 독과 설당을 고루 묻혔군. 여태 봐온 사람 중 가장 말을 잘해. 정이 지나치면 도리어 무정함과 같다지 않습니까? 그것이 닮았다는 것인가. 글쎄요. 어쨌든, 장군께서 적공하실 수 있도록 모자란 힘을 보태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29. 만하( 晩 夏 )

158 온갖 나무와 기암괴석이 빽빽하게 늘어선 숲은 풍요의 고장이었다. 강무 첫날에는 평범한 사냥이 이루어졌다. 몰이꾼들은 산의 곳곳으로 흩어져 짐승들을 몰았고 황제 와 무예 좀 익혔다 싶은 대신들은 문관과 무관을 가리지 않고 신이 나서 사냥을 즐겼다. 사슴 두 마리와 토끼 세 마리, 수여우 한 마리와 담비 넷이 그날의 수확이었다. 짐승들이 먹이를 구 해 짝짓는 시절이기도 해서 황제는 짐승마다 잡을 수 있는 수를 제한했고 어미나 갓 태어난 새끼는 포획한 즉시 풀어주라고 명했다. 오늘은 이번 강무의 진짜 목적인 호랑이 사냥이었다. 맹수를 사냥하는 것은 숙련된 사냥꾼도 쉽지 않은 일이라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길을 미리 봐두었다가 일대를 차단하고 호랑이를 궁지로 몰아 죽이는 형식이었다. 시각이 다 되었다며 종인을 청하는 알림이 들어왔다. 종인은 용과 봉황을 수놓은 감청색 융복을 갖춰 입었다. 은백색 상투관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올리 고 채운이 그려진 흰 띠로 허리와 팔목을 꽉 조였다. 워낙 옷맵시가 좋아서 영상한 생김새와 어울려 늠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백옥을 박은 등채를 들고 마당으로 나서려는데, 하개가 다가와 넌지시 읊조렸다. 폐하. 폐하께서 미신을 싫어하시는 줄은 아옵니다만, 소인이 어제 꿈자리가 워낙 사나워 그러하니 부디 오늘은 친히 활을 들지 마시옵소서. 꿈이라니? 승하하신 선제를 호종하였을 때의 일이옵니다. 그러자 종인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틀어졌다. 효경제가 죽기 두어 달 전, 답답하다며 사냥을 나갔던 그는 말에서 낙상하여 크게 다쳤다. 그리고 그 일로 지병이 심해져 얼마 안 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당시 궁에서는 황후이던 장씨의 지시로 관련 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황제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대가였다. 하개는 그때 동궁전 내관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종인도 부황을 따라갔지만 낙상한 직후의 모 습은 보지 못하였다. 참혹한 몰골을 보고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까 봐 하개가 막았던 것이다. 꿈은 사람의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흉몽을 꾸고 꿈이 맞다 싶은 것은 꿈을 꾼 뒤 극도로 불안해하 다가 스스로 일을 망치기 때문이지. 좋은 날 공연히 초지지 마라.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불감청고소원, 늙은이의 간곡한 부탁을 허투루 듣지는 마시옵소서. 소인이 언 제 흉몽을 꾸었다 하여 폐하께 말씀 올린 적이 있었나이까? 골똘히 생각하던 종인이 선뜻 대답을 못 하자 하개는 얼른 말을 보탰다. 물론 폐하께서 사냥을 좋아하시고 이번 사냥이 백성을 괴롭히는 호환을 다스리기 위함임은 잘 아 옵니다. 허나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폐하의 옥체이오니 부디 자중하고 또 자중하소서. 출중한 무관들을 앞세울 테니 걱정하지 마라. 무뚝뚝하게 사라지는 종인을 하개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무척 산뜻하였다. 주군이 돌아오는 모습도 저 날씨만큼 산뜻했으면 좋겠다고, 하개는 간절히 바랐다. 화창한 날씨에 경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송인직과 더불어 예문관의 막내인 둘은 임제관을 비롯 한 몇몇 선진들의 일을 떠맡아야 했지만 그마저도 불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만립과 다른 사관들은 우거지 죽상이거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사관의 임무는 직필인데 황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유로 실제 사냥터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 게 해서 단단히 골이 난 것이다. 그래서 경수와 송인직은 선진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행궁에 온 이후 의 일기들을 꼼꼼히 정리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송인직과 손에 묻은 먹물과 먼지를 씻으 러 우물로 향하던 경수는 문득 한 무리의 의관과 의녀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159 송인직은 고개를 갸웃했다. 점잖은 양반이 왜 저리 허둥대시지? 그가 가리킨 점잖은 양반 은 어의였다. 황제의 주치의인 그가 허둥대는 것이라면 이유는 단 한 가 지뿐. 순간, 경수의 등줄기에 형용할 수 없는 소름이 끼쳤다. 이보게, 도 검열! 어딜 가는 것인가! 별안간 의관들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가는 경수를 송인직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뒤쫓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한쪽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송인직은 곧바로 경수를 따라잡았 고 냉큼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경수가 놀라 돌아보자 송인직이 고개를 내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냥 나갔던 이들에게 일이 생긴 모양일세. 자초지종을 알기 전에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네. 아무 리 사관이라 해도 제멋대로 기록하는 걸 들켰다가는 시비에 휘말릴 수 있어. 경수가 두려운 기색으로 목울대를 삼켰다. 송인직은 경수를 위해 모퉁이에 함께 몸을 숨기고 사태 를 주시했다. 이윽고 정문을 넘어 사냥에 나섰던 이들이 돌아왔다. 줄줄이 들어오는 그들은 험한 곳에서 뒹굴었 는지 풀과 이끼,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었지만 상태는 멀쩡했다. 그러나 몇몇 군관들이 황급히 들것에 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경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 저앉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융복을 입고 종인이 실려 오고 있었다. 혼절한 모양인지 눈도 뜨지 못 한 채 황급히 안으로 모셔지는 종인을 보자 경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세상에나. 폐하께서 저리 다치시다니! 대체 사냥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보게, 도 검열. 괜찮은가? 안색이 파리하네. 나리! 소인은 지금 태성전에 들 수 없으니 나리께서 선진들과 행전에 가보십시오. 폐하의 환후가 어떠신지 살펴주십시오! 아, 알겠네. 어차피 해도 저물어 가니 자네도 입시할 준비를 해야지. 함께 처소로 돌아가세. 송인직은 경수를 데리고 예문관 관원들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들이 본 것을 설명했다. 마침 상번인 홍만립이 송인직을 대동하여 급히 행전으로 향하였다. 행전에 도착하니 대기 중이던 대소신료들이 급전을 받고 모두 나와 있었다. 모두 긴장한 표정이 역 력한데 개중 새로 입격한 신래들은 처음 겪는 일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다들 경거망동하지 말고 여기서 대기토록. 황세용은 백관에게 지시를 내린 후 밖에 나와 있던 태성전의 김 상궁에게 물었다. 폐하의 용태는 어떠하시던가? 심각하신가? 어의는 들었는가? 상처가 깊으신 듯 보였사오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의가 급히 환부를 살피고 있습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던가? 얼핏 듣기로는 폐하께서 맹호를 발견하시고 친히 사냥하시던 중 낙마하시어 벼랑으로 떨어지셨다 합니다. 보지 않아도 펼쳐지는 가혹한 참상에 황세용의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무관들이 호랑이를 두 마리나 잡았다더니 혈기지용을 누르지 못하셨단 말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황세용은 급히 육부 당상관들을 데리고 행전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도착한 홍만립이 지밀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송인직과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안이 지나 치게 복잡하다며 하개가 황세용과 의관 및 의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렸다. 어의 고지산은 구슬땀을 흘리며 황제를 치료하다가 사도의 등장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하였다. 황세용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부러진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머리에 부상이 심한 모양으로 왼쪽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는데 의녀 하나가 지혈하느라 정 신이 없었다. 용태는 좀 어떠신가? 벼랑에서 떨어지시면서 어디에 부딪히신 듯한데 하늘이 보우하사 생각보단 심하진 않습니다. 용안 과 팔에 난 찰과상은 약을 바르면 자연적으로 치유되지만 문제는 다리입니다. 다리라니?

160 벼랑으로 떨어지시기 전 낙마하셨다는데 아무래도 옥골이 상한 것 같습니다. 심각하신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이라니? 목숨을 걸고 폐하의 옥체를 바로 잡아야 하네! 황세용이 다그치자 고지산이 찔끔하여 알겠다고 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다시 오십시오. 방 안 공기가 지나치게 탁합니다. 의녀 하나가 고하자 황세용이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월대를 내려오자 신료들이 우르르 몰려와 황제의 상태를 물었다. 황세용이 고지산에게 들은 그대로 얘기하자 모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자칫 황제가 찟뚝거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나같이 두 려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오늘 폐하를 호종한 무관들을 모두 집결시키십시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말의 의혹도 없 이 들어야 합니다. 어사대부가 건의하자 황세용이 그대로 따랐다. 대신들로부터 하개와 내의원 외에는 그 누구도 들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황제의 안정을 위해 서였다. 때문에 경수는 발만 동동 구르며 예문관 밖을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안색이 푸르죽죽하고 입술에 핏기가 가셨다. 행궁 전체가 급작스러운 변고에 모두 침통한 분위기였다. 해가 뚝 떨어진 싸늘한 저녁. 동태를 살피러 나갔던 송인직이 예문관으로 돌아왔다. 각자 할 일에 몰두하며 이 사태에 대한 걱정을 떨치려던 관원들이 일제히 문 쪽을 쳐다봤다. 송인직이 선진들에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범이 깊숙한 골짜기로 달아나자 폐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향하셨답니다. 기도위와 병부에서 각각 한 마리씩 잡아들여 폐하께서도 가만 계실 수 없다며 신하들의 만류에도 가셨다고요. 호분중랑장과 시위들이 뒤따라갔지만 어마( 御 馬 )가 워낙 빨라 시차가 벌어졌답니다. 나중에 호분중랑장이 폐하를 발 견하셨을 땐 야트막한 벼랑에 떨어져 신음하고 계셨고 벼랑 위에는 목에 단도를 꽂은 호랑이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답니다. 그나마 절벽이 그리 가파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는 말을 끝으로 송인직은 괜스레 선진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 폐하께서는 지금 어떠신가? 잠시 깨어나셨다가 탕약을 드시고 다시 침수에 드셨답니다. 환후는? 옥골이 상하여 다리에 문제가 있는 것 말고는 그리 심각하지 않답니다. 사도께서 내의원에서 전심 전력으로 시료 중이니 다들 수선 떨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이건 정말 열성조에서 폐하께 명호를 내리신 거예요. 임제관이 말라붙은 입술을 가까스로 훑으며 내뱉었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경솔하셨다고밖에 볼 수 없군. 홍만립이 냉정하게 평하였다. 오늘 호랑이를 몰았던 지역은 일대에서도 가파르고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했다. 황제는 신하들이 미 리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화를 입은 거였다. 하지만 폐하를 제대로 뜯어말리지 못한 신료들의 죄가 제일 크다. 선제께서도 낙마하신 후로 득병 하여 붕어하셨거늘, 선례가 있음에도 어찌 끝까지 말리지 못했는지. 부전자전입니다. 호방한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으셨다는데 뉘라서 말리겠습니까? 보십시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결국 호랑이 모가지에 칼을 꽂으셨다지 않습니까? 임제관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처럼 강무를 나오셨는데 봉변을 당하셨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원체 조용하셔서 그렇지, 영회

161 황후께서 승하하시고 내심 사냥 나오고 싶은 것을 꾹 참으셨을 겁니다. 송인직이 공연히 경수를 의식하며 중얼거렸다. 경수는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백랍을 그대로 말려 붙인 것만 같았다. 도 검열은 이 같은 일이 처음일 테니 많이 놀랐을 거네.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일찌감치 쉬도록 하게. 내의원에서 시정기를 쓰고 있으니 행전의 일은 걱정하지 말게. 유은석의 말에 다들 그러라며 예문관의 막내를 쳐다봤다. 그러나 경수는 선진들도 강잉히 견디는데 자신만 빠질 수 없다며 사양했다. 그는 다만 가슴이 진정되지 않으니 잠시 찬물로 소세라도 하고 오 겠다고 했다. 내락을 얻은 후 경수는 곧장 우물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오래도록 초점 잃은 눈으로 앉아 있 었다. 종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끔찍하게 한심했다. 이런 주제에 정을 논하고 영원히 그의 그림자가 되겠다고 했나. 경수는 비참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찬열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한없이 열정적이고 다정하다가도 자기 일에서는 냉 정하기 짝이 없는 박찬열. 그였다면 필시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달이 반쯤 기울었을 때, 경수는 찬물로 얼굴을 씻은 후 다시 예문관으로 돌아갔다. 지금 종인이 원 하는 것은 경수도 변방의 찬열처럼 그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리라. 그러나 문득 차오르는 슬픔과 경악에 경수는 몇 번이나 시큰거리는 눈가를 문질러야 했다. 이튿날 환궁이 결정되었다. 행궁에서 더 머물며 요양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의원에 물자가 부족하다 는 이유로 묵살되었다. 그나마 종인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왼쪽 다리가 부러져서 운신에 제약이 따랐지만 어차피 어가와 내시들의 등을 이용하면 되므로 이동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행궁과 교안은 지척이라 하루면 오갈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었다. 짐을 꾸린 대로 강무에 나섰던 문무백관과 궁인들이 일제히 행궁을 떠났다. 왔던 날처럼 돌아가는 날에도 경수는 무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그러나 왔던 날과는 달리 돌아가는 날에는 그의 얼굴엔 수 심이 가득했다. 황제가 범을 잡다가 크게 다쳤다는 얘기는 궁에 빠르게 퍼졌다. 도성에 남아 있던 내의원 의관들은 긴장한 채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늦은 밤에 어가가 궁으로 돌아왔고 종인은 건장한 내관들의 등에 업혀 태성전으로 향하였다. 그가 자리에 눕자마자 자신궁에서 소식을 접한 태후가 대경실색하여 달려왔다. 주상의 옥체를 상하게 한 자들을 모조리 치죄하겠다! 태후가 싸늘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방 안에 모인 의원과 궁인들이 벌벌 떨었다. 태후마마. 소자가 만용을 부려 자초한 일입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주상의 옥체는 나라의 대들보요. 이리 옥체가 상하셨는데. 괜찮습니다. 잘 요양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 대에 걸쳐 낙마라니 참으로 두렵구려. 태후가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라도 강무에 나서지 말라고 말릴 것을 그랬소. 우연한 사고이자 소자가 고집 부린 결과이니 더는 민망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는소리를 내뱉던 태후가 돌연 어의를 쏘아보았다. 좋은 약재는 다 갖다 써야 할 것이다. 반드시 주상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해. 목숨을 걸고 시료하겠나이다. 한바탕 전쟁 같았던 며칠이 지나는 동안 종인은 움직임을 삼갔다. 상참과 차대, 윤대를 제외한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무조건 쉬어야 한다며 소인파에서 당분간 침전에 사관을 들이지 말라고 극구 주청하였다. 덕분에 종인은 거의 한 달 동안 경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소인파에게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162 하기엔, 경수의 대외적 지위가 소인파의 노림 대상이었다. 그는 종종 하개를 통해 경수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크나큰 그리움이었다. 예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여름밤은 지나치게 길었다. 불볕더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은 어느 날. 종인은 부목을 떼기 무섭게 의관들에게서 완 치했다는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황제가 워낙 활동적이라 일부러 부목을 더 오래 하게 했다는 첨 언도 함께였다. 종인은 이번 일로 노심초사했을 경수에게 가장 먼저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의원에 포상 을 내리고 자신궁을 찾는 것이 우선임을 알고 있었다. 태후에게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들은 후 종인은 경연에서 신료들과의 마찰로 다소 불쾌해졌다. 이번 사고는 내전에 안주인이 없어 종인이 더욱 제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늘어 놓았기 때문이다. 호환을 다스리는 데도 음조가 필요하오? 종인은 대신들을 몰아세웠다. 아니면 영회황후의 삼년상이 끝나니 이런 소릴 하는 것이오? 신 등은 그저 폐하의 옥체가 걱정되어 말씀드린 것뿐이옵니다. 사직의 내외가 굳건하길 바란다면 영회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의문부터 풀어야 할 것이오. 종인이 던진 아리송한 여지에 대신들은 상당히 놀랐다. 궁 안팎으로 황후가 연못에 몸을 던진 이유는 지아비의 지독한 박대 탓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 다. 그동안 황제도 굳이 해명한 적이 없어서 그 사연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종인이 그것을 전면 부정하는 발언을 하였으니 대신들이 머리 위로 의문부호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딸의 죽음이 전적으로 황제 때문이라고 믿었던 장문견은 김종인이 자신을 둘러싼 나쁜 소문 을 잠재우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누님이 직접 움직이기 전까지는 참아주겠지만, 끔찍 이 괴이던 보여와 관련해서 단 한마디라도 개소리를 늘어놓는다면 황제는 죽은 목숨이다. 어쨌든, 종인은 근 한 달 만에 다시 보는 경수를 생각하며 만면에 보드라운 미소를 걸었다. 그는 쉬 고 싶다며 모처럼 고야정으로 경수를 오게 하였다. 팔월로 기울어 가는 날은 공기만 들이켜도 찝찝함이 붙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은월은 높고 밝아서 밤까지 이어지는 더위 따위는 스러지는 버들잎이나 다름없었다. 시선을 빼앗는 녹음과 졸졸졸 흐르는 물이 있으니 고야정은 말 그대로 막고야산의 신비로운 정원이었다. 폐하께서는 길상을 누리소서.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 헌데 얼굴이 왜 그러느냐? 많이 상했다. 날이 더워 그렇습니다. 옥체는 어떠십니까? 사나흘도 전에 완쾌하였는데 고 어의가 일부러 부목을 오래 대게 하였더구나. 어혈도 다 풀렸고 찢어진 곳도 괜찮다. 상처가 손톱만 하게 나긴 했지만 이건 별수 없다더군. 봐라. 아주 멀쩡하다. 종인은 경수의 손을 잡으며 보란 듯이 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경수는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굳었 던 표정을 풀었다. 십년감수 했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날, 피를 많이 흘리셨다 들었습니다. 이마에 생채기가 난 것으로 누군가 말을 부풀렸나 보다. 경수는 자신의 눈으로 종인의 참혹한 몰골을 봤다고는 고할 수 없었다. 그러면 종인이 자책할 것이 분명했고 경수는 종인이 그러길 원치 않았다. 그깟 피 조금 흘린다고 저승차사를 만나진 않는다. 종인의 농조에 경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에 서린 근심은 차마 지우지 못했다. 종인이 경 수의 하얀 손을 잡아끌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어찌 저에게 사죄하십니까.

163 그 날 아침에 하개가 흉몽을 꾸었다며 직접 사냥하지 말라고 했다. 헌데 짐은 하개의 당부를 무시 하고 범의 꽁무니를 쫓다가 온 나라를 근심하게 했지. 게다가 너마저 달포 가까이 보지 못하였다. 그 것이 제일 가혹하더구나. 무사히 제 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과욕의 대가가 너무 커서 내내 후회했다. 네게 토끼를 잡아다 주겠다고 약조했는데 그것도 지키지 못했어. 전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폐하의 평안을 바랄 뿐이니 다음부터는 폐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십시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싱그러운 여름 햇살처럼 종인은 넉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찬연하고 아름다워서 경수는 그 만 저도 모르게 종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종인이 크게 당황한 것도 모르고 경수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의 자그마한 손이 용포를 꽉 움켜쥐었다. 다시는 못 뵙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는 폐하 곁에 머물 수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믿지 못해 송 구합니다. 폐하께서는 강잉히 견디고 계셨는데 못난 생각으로 괴롭게 지내서 면목없습니다. 경수야. 그럼에도 이리 제 앞에서 옥음을 들려주시고 농을 던져주시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감사합 니다. 살아주셔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합니다. 울먹이는 그 소리는 뜨거운 모래를 식히는 사막의 소낙비와 닮아 있었다. 그깟 다리 좀 부러졌다고 사람이 죽으면 연의 무장들은 과반수가 산송장이겠구나. 흐느끼는 경수를 끌어안으며 종인은 가느다랗게 숨을 토했다. 이토록 따스하고 향기로운 숨결이 있 으니 예전처럼 되는 대로 살 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지내다가 적들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김종인은 도경수를 통해 삶의 태동을 느꼈다. 이제는 굳이 복수가 아니더라도 그 힘찬 움직 임을 이어나가기 위해 종인은 함부로 죽을 수 없었다. 종인은 경수를 달래 정자로 향하였다. 비가 쏟아지던 어떤 밤처럼 두 사람은 그곳에 나란히 엉덩이 를 붙였다. 경수는 종인이 정말 괜찮은지 보려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종인도 한 달 만에 보는 경수 를 두 눈에 채우려고 빤히 바라보았다. 붉은 시선은 허공에서 화려한 불꽃을 튀기더니 산화하였다. 불꽃은 이내 웃음꽃이 되었다. 나례 때 나 볼 법한 화포희처럼 묘려한 오색이었다. 오색찬란한 불꽃 속에서 연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름답게 입을 맞추었다. 느즈러진 마음에 한 송이씩 피는 꽃이 천지를 뒤덮을 기세였다. 종인은 촉촉하게 젖은 경수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경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감추며 조금 떨어졌다. 종인이 못내 아쉬운 듯 그의 손을 잡았다. 하 공공께서 오늘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실은 조금 겁을 먹었는데 환히 웃으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하개가 늙어서인지 쓸데없는 걱정이 많이 늘었다. 짐에 관한 일이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앞장서지. 네가 이해해라. 하 공공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폐하 곁에 하 공공 같은 분이 계셔서 참으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니까요. 어떤 이들은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내시란 그저 양물이 없어 사내구실을 못한다고 폄하하지. 헌데 넌 편집( 偏 執 ) 없이 공정하게 바라보는군. 삼인행필유아사( 三 人 行 必 有 我 師 )라. 세 명이 길을 가면 그중엔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하였습니다. 태생의 귀천과는 상관없이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귀하게 여길 것은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찬열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어릴 때 그 친구가 자주 하던 소리였다. 찬열과 제가 늘 지키고자 애쓰던 신조였습니다. 종인은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찬열과 경수의 시간이 부러웠다. 이미 지나버려 손에서 빠져나간 시

164 간만큼 더욱 경수를 아끼겠다고, 종인은 다짐했다. 폐하. 내의원에서 탕약을 올렸나이다. 하개가 입구에서 목판을 들고서 아뢰었다. 종인이 가져오라고 하자 하개가 정자 쪽으로 다가왔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인사를 건넸다. 불볕더위에 폐하께서 기력이 쇠하셨다며 대보원전을 올렸사옵니다. 거, 다리 좀 부러졌다고 한 달 내내 호들갑이구나. 폐하의 옥체는 사직의 젖줄이온데 어찌 소홀함이 있겠사옵니까? 저것 좀 봐라. 저 나이가 되면 다들 저리 혀에 기름칠하게 되는 거냐? 투덜거리면서도 종인은 얌전히 약을 받아 마셨다. 다른 때였으면 필요 없으니 하개 너나 마셔라! 라고 했을 텐데 경수가 본다고 짐짓 허세를 부리는 것이 여간했다. 앞으로 폐하의 탕약은 이 시각에 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왜? 도 검열이 있어야 폐하께서 별다른 말씀 없이 조용히 음하실 것 아니옵니까? 네가 정녕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종인이 꽥 소리쳤다. 그 바람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종인은 주인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 굴리는 하인은 하개밖에 없을 것이라며 경수에게 동조해 달라 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종인의 말에 동의할 순 없었다. 경수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짧지만 무더웠던 여름이 눈 깜짝할 새에 물러가고 있었다. 시절은 유수처럼 흘러갔지만 종인은, 그리고 경수는 오늘처럼만 서로를 바라보면서 늘 웃을 수 있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0. 단도야( 但 悼 也 )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공사장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털장갑과 모자가 지급되었다. 사대부들도 잘 쓰지 못하는 털 달린 의류가 보급되자 아전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찬열은 이것을 어명으로 무마시켰 다. 그는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성벽을 수리하고 목책을 쌓는 중이었다. 반년이 지 나는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찬열의 군대는 날이 갈수록 강해져 갔다. 여기에 박태흥과 경성현령의 조언으로 행정적으로도 선정을 베풀고, 군율을 어기고 백성들을 괴롭 힌 자는 엄하게 질책하였다. 이에 민심이 그를 진정한 장수라고 칭송하였고 그의 중망은 나날이 두터 워졌다. 역에 동원된 부민들조차 가혹한 채찍질이 아닌 부드러운 한마디로 자신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찬열 에게 충성을 바쳤다. 덕분에 일의 효율이 늘어 예상보다 작업 속도가 빨랐다. 하얗게 눈이 내린 설원의 밤은 모두에게 외롭고 혹독하였다. 찬열은 여느 때처럼 군영을 둘러보며 군사들을 위로하였고 한결 시들해진 오랑캐의 침입에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런 뒤 그 는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막사에 돌아왔다. 안에는 화로가 탁탁 불보라를 일으키며 새빨갛게 타올랐고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변백현이 또 술병을 찰랑찰랑 흔들었다. 찬열은 저런 술고래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또 자신의 견문을 아낌없이 꺼내 찬열이 이 정도로 명망을 얻는 데 크게 일조했다. 또 저녁을 거르셨다지요? 백현이 불길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물었다. 툭하면 소나기밥을 드시니 밖에만 나오면 속이 뒤틀리고 체하는 것입니다. 삼시세끼란 말이 왜 있 겠습니까? 자고로 끼니는 제때제때 챙기라는 뜻 아닙니까? 오늘따라 말이 많군. 안주도 없이 술을 다 찾고 말일세. 슬쩍 했습니다.

165 능청스레 소맷부리에서 종이에 싸인 걸 꺼내 펼친다. 말라비틀어진 육포 쪼가리였다. 쯧쯧. 공주께서 아신다면 경악하실 걸세. 무덤까지 비밀입니다? 찬열은 기가 찬다는 듯 재차 혀를 끌었다. 백현은 눈매를 접으며 웃어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가 뿜어져 나와 감탄을 자아내기까지 하였다. 또 눈이 올 모양입니다. 하늘이 끄물거리고 바람이 더욱 차가워졌습니다. 백현이 언뜻 막사의 입구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지도 않았다. 다시 함박눈이라도 오면 길바닥은 더욱 지독해질 것이다. 스승님께선 해천( 咳 喘 ) * 을 앓고 계신데 겨울만 되면 증세가 더 심해지십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침 하시다가 숨이 많이 차셨는지 약을 드시고도 괴로워하시더군요. 이러다가 탈을 잡을까 봐 마음이 좋 지 않습니다. 연로하시니 그럴 만도 하지. 자네가 곁에서 더욱 정성으로 모시게. 제가 노력한다고 되겠습니까? 조정에서 개싸움 하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으시다며 일부러 사직서를 내셨는데 폐하께서는 수리하지 않으셨죠. 어찌어찌 고향에 오셨으나 원래 스승님께선 영처의 고향인 남녘으로 가길 원하셨습니다. 저런. 폐하께서 눈치가 없으셨군. 찬열이 낮게 웃었다. 백현이 데운 술잔을 찬열에게 건넸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며 알딸딸한 향기 를 뿜었다. 겨울이 빨리 물러가야 할 텐데. 모두에게 시리고 건조한 시절이지. 둘은 쨍그랑 잔을 부딪쳤다. 곧이어 목울대를 타고 더운술이 배 속으로 흘러내려 갔다. 백현이 품위 없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읊조리기 시작했다. 슬픈 노래는 곡소리 같고 멀리 보노라면 돌아갈 듯한데 고향을 떠올리면 답답하고 울적하구나. 집 으로 돌아가자니 사람은 없고, 강을 건너려 해도 배가 없구나. 심사는 이루 말할 수 없건만 배 속에서 는 수레바퀴만 맴도네. ** 딱 우리 신세 같지 않습니까? 신소리는. 우리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인가? 찬열의 핀잔에 백현은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일이 끝나면 장군께서는 도성에 돌아가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계획을 세우며 살지 않습니까? 소생의 스승님은 남녘으로 가려던 꿈을 접으셔야 했지만 어쨌든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사시는 분이죠. 소생도 그분을 본받고 싶고요. 폐하께서 날 원하는 곳에 쓰실 테니 그것이 곧 나의 계획일세. 주군의 대의가 곧 나의 대의라 그것입니까? 답 대신 더운술을 한잔 더 들이키는 찬열. 역시, 장군은 낯설지 않은 분입니다. 무슨 소린가 싶은데, 화로에서 잉걸불이 스러지며 세차게 불티가 날렸다. 백현이 얼른 자리에서 일 어나 한쪽에 두었던 불어리를 씌웠다. 또 내가 자네와 닮았다는 얘기인가? 소생의 아버지요. 뜬금없군. 실은, 육 년 전 오늘 소생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부마도위 변석위는 금선공주의 남편이자 효경제의 매제였다. 종인에게는 고모부였으며 백현에게는 * 천식 ** 작자미상, 비가행( 悲 歌 行 )

166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그는 괄괄한 구석이 있었으나 애처가로 유명했다. 고집이 쇠심줄만큼이나 센 그는 대의에 어긋나면 설령 그것이 황제라 할지라도 바른말을 쏟아냈다. 그 덕분에 효경제와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금선공주가 워낙 남편과 오라비 사이에서 중재를 잘하 여 여러 번의 크고 작은 갈등도 그냥 넘어간 편이었다. 변석위는 맏아들인 백현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는 매번 아들을 앉혀놓고 네가 황제 폐하의 번 쾌요, 장양이 되어야 한다. 라고 가르쳤다. 백현은 엄격한 부친에게 자연스레 세뇌되었고 공주는 비린내 나는 황실 일에 어린애를 나서게 하지 말라며 말렸다. 변석위는 충심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으므로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해야 하는 것이 아비 된 자의 도리라고 맞섰다. 백현은 자신의 부친을 존경했다. 농담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는 유쾌함은 변석위의 영향이 컸다. 그 의 정치적 사상 또한 부친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변석위는 자신의 영특한 아들이 장성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가 육 년 전, 장문견 일 파와 마찰을 빚어 팽형( 烹 刑 ) * 에 처해진 탓이다. 물론, 팽형이라는 것은 시늉에 불과했다. 그러나 팽형에 처해지면 죄인은 사회적으로 거세당하거나 자결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변석위는 옥중에서 자결했다. 자신으로 인해 아내와 자식마저 손가락질받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팽형이 결정되기 며칠 전, 금선공주는 태후로부터 부마와 의절( 義 絕 ) ** 하게 되리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공주는 그리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혀에 칼을 물고 죽는 꼴을 보게 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서슬이 퍼런 반발에 태후가 한발 물러났지만 공주는 그 뒤로 아예 황실과 연락을 끊고 살았 다. 종인은 숙비가 죽은 후 고모인 금선에게 매우 의지했다. 덕분에 공주는 낭군은 잃었어도 지위는 예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태후로서는 만일을 준비해야만 했다. 변석위가 죽은 건 장문견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나 그 부하의 일이고, 부마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칠 때 장문견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탰으므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하여 태후는 공주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모든 지위를 보장하고 그녀의 어린 아들을 종친으로 인정하 였다. 중앙 정계에서의 활동도 보장해 주었다. 부마가 죽었다는 것 외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자존심 강한 공주는 그것들을 모조리 거부한 채 칩거에 들어갔다. 그 세월은 자그마치 육 년이었다. 부마의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네. 오늘이 기일인 줄은 몰랐군. 잊힌다는 게 참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당시엔 신이 나서 떠들어대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때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죠. 상처와 진실은 오직 당사자와 주변인의 몫으로 남을 뿐이니까요. 상처와 진실이라니? 내탕고를 탐냈으니 그 처분은 당연한 것 아니겠나. 장군께서는 당시 민란을 진압하러 멀리 나가 계셨던 걸로 아는데, 그때 일을 어찌 아십니까? 백현이 약간 날을 세웠다. 그러나 찬열은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라 하여 곧장 머리를 숙이진 않았다. 억울한 부분이 있는 모양이군. 망자의 이야기를 되씹는 것은 좋아하지 않네만, 내가 자네에게 사과 해야 한다면 그전에 날 설득시켜 보게. 백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선제의 윤허를 얻어 부친께서는 옥선산 장안사에 제 어머니의 불공을 드리러 가셨습니다. 당시 어 머니는 유산한 직후라 몸이 지극히 좋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선 어머니를 위해 정성을 보이러 떠나셨 죠. 그 후 변석위는 돌아오는 길에 당시 하양현의 수장으로 갓 부임한 임제환을 만났다. 그런데 그가 행차하는 모양새가 고혈을 족히 빨았겠구나 싶어 몇 마디 보탠 것이 화근이었다. * 죄인을 삶아 죽이는 형벌 ** 강제 이혼

167 변석위는 혀에 가시를 두른 후 임제환에게 독설을 내뿜었고 사람들은 변석위에게 동조하듯이 임제 환의 오만불손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변석위에게 된통 당한 임제환은 장문견이 가장 신임하는 수하로 서 그런 치욕은 못 견디겠다며 이를 갈았다. 얼마 뒤 그를 위시하여 핵장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부마 변석위가 공주 앞으로 나오는 내탕고의 재 물을 사사로이 융통하여 시전상인들과 유착해 비리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변석위의 괄괄한 성격을 아니꼽게 여기던 이들이 대대적으로 손을 잡았고 임제환이 장문견을 구슬려 결정적인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로써 변석위는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팽형을 선고받고 다음 날 자결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임제환은 현재 예문관 대교인 임제관의 형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 진심으로 미안하네. 나리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저 문득, 원래 이러지 않는데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부마께서 그리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어째서 조정에 출사해 부친의 누명을 벗길 생각은 안 하는 가? 분하지도 않나? 어머니께서는 비분강개하셨지만 소생을 위해 참고 계시죠. 소생은 어머니께서 황실의 안정을 먼저 생각하시는 걸 깨달은 후 복수심 같은 하찮은 마음은 버렸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한 번 시작된 고리를 영원히 끊을 수 없는 법. 찬열은 그 생리를 잘 알아서 백현과 금선공주가 과감하게 대의를 선택한 것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장씨 일족과 휘하 장수들의 오만함은 하늘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벌을 받을 것 입니다. 하늘에 뜻이 있다면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슬퍼할 뿐인가? 장군께선 필히 돗자리를 까셔야 할 것입니다. 백현은 농을 풀었으나 찬열은 그의 의연한 기개에 감탄했다. 설렁설렁한 한량처럼 보여도 변백현은 넓은 도량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룩처럼 들러붙는 아픔을 지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공주와 백현의 선 택은 찬열을 숙연하게 했다. 그나저나 내가 평성위와 닮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군. 아버지께서도 맹목적으로 폐하께 충성하셨거든요. 소생의 귀에 딱지를 앉을 정도로 얘기하셨고요. 나리께서 도성으로 가신 후 폐하의 대의에 따르겠다고 하시니 마침맞게 아버지와 나리가 겹쳐 보였습 니다. 내게도 자네와 비슷한 구석을 지닌 벗이 하나 있다네. 본인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 찬열이라 백현은 그의 굵직한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 친구도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네. 자존심은 강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 덕분에 고달픈 유년기를 보냈지만 지금은 관리가 되어 폐하께서 신임하고 계시 네. 그렇습니까? 소생과 닮은 사람이 나리의 벗입니까? 찬열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네와 그 친구는 외유내강이라는 점이 닮았네. 겉보기엔 부러질 듯 약하지 만 속은 강한 고집과 신념으로 꽉 차 있지. 소생을 그리 높게 평가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거, 영광인데요? 난 사람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지 않네. 있는 그대로 볼 뿐이지. 그러셔서 의외라는 겁니다. 어쨌든 자네를 보니 그 녀석이 생각나는군. 찬열의 말쑥한 두 눈이 짙은 그리움으로 물들어 갔다. 예민한 백현은 그것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찬 열이 말한 사람이 그에게는 단순한 위치를 지닌 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한번 떴다 하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향기라도 맡으려고 계집들이 온통 싸움질을 해댄다는 천하의 박찬열. 목석같은 그가 이처럼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그리움을 품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그리고 무채색

168 의 박찬열을 채색으로 물들인 그 사람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장군께서 다른 사람 얘기하실 때 눈이 빛나는 것은 처음 봅니다. 그랬나? 찬열이 당황하며 찬 손으로 상기된 볼을 매만졌다. 도성으로 돌아가면 한번 소개해 주십시오. 불망나니 같은 소생과 닮았다니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 금합니다.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아아~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겨울이 하루빨리 물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깁니 다. 그렇지 않습니까? 북녘의 백성들은 늘 이런 겨울을 마주하고 살 테니 겨울이라 하여 감히 불평할 수 있겠는가. 이것 보라니까요. 잔소리하시는 것도 아버지랑 똑같습니다! 찬열이 술을 따라 백현에게 넘겼다. 그가 먼저 잔을 들고는 나직이 고했다. 부친의 영면을 빌겠네. 종인은 궁벽한 곳으로 경수를 불러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끔 최대한 은밀히 부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눈동자를 마주할 시간과 공간이 지나치게 제약적이었다. 오늘은 희조전에서 한 달에 네 번씩 행하는 조참이 있는 날이었다. 예문관은 희조전 서편에 있었다.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어 도무지 얼굴을 보지 않고는 못 배겼다. 종인은 자신이 충동적이라는 사실을 매번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단정하게 관복을 차려입은 경수는 갓 검열이 되었던 일 년여 전보다 성숙해졌다. 얼굴에서는 여전 히 애티가 흘렀지만 눈빛에는 신인만의 설렘과 긴장감이 흐려졌다. 한결 여유가 있었다. 경수가 인사를 올리자마자 종인이 조금 더 안쪽으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하개를 비롯한 수 행인들을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대기시켰지만 혹시라도 경수에게 책잡힐 일이 생길까 봐 경계하 는 거였다. 말랐구나. 계절이 바뀌어 입맛을 조금 잃었습니다. 일이 고되지는 않고? 햇내기도 아닌 걸요. 폐하야말로 해쓱해지신 것 같습니다. 나도 계절이 바뀌어 입맛을 잃었을 뿐이다. 수라를 거르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강건하셔야 이 나라의 강산이 튼튼합니다. 보자마자 잔소리냐? 쑥스러운 듯 담백하게 웃는 모습이 물 위를 걷는 신선 같았다. 종인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온기 가 흘러 밀물처럼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처음 석 달이 가장 바쁘지만 일이 손에 익으면 한결 수월해지는 법이다. 헌데 너는 그 짧은 밤이 아니면 얼굴 보기가 어렵구나. 일 년 넘게 예문관에 있었는데 네 품계를 올리자며 선뜻 나서는 사람 도 없고. 승계는 보통 삼 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이지 않습니까? 또 다들 포쇄를 마치고 정신이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네 선진들이 지나치게 무심한 거다. 월봉이라도 올려주고 싶은데 그럴 만한 명분이 있어야지. 아닙니다. 정말 잘해 주십니다. 제가 실수해도 따뜻하게 훈계하시는데요. 실수라고? 네가 어디 그럴 성격이냐? 저를 잘 아시네요? 파스스 웃는 것이 꼭 아이 같았다. 켜켜이 쌓인 서신이 너란 사람이었느니라. 예전에 주고받은 서찰. 낭만적인 얘기에 경수는 배시시 웃었다.

169 경수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종인은 경수의 두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키 차이 가 났지만 숨결이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보고 싶었다. 경수의 귀 끝이 단풍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매일 밤 보는데도 네가 그립구나. 너는 짐이 그립지 않았느냐? 직설적이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채근에 경수의 낯빛은 거의 홍당무나 다름없었다. 경수는 기어 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다. 말로 전하는 것만이 진심은 아니죠. 종인은 아이처럼 보챘다. 그는 경수에게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했다. 끝끝내 말하지 않으면 진심을 알기 어려운 법이지. 늘 그립습니다. 짐도 그렇구나. 둘은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만이 비쳤다. 세상이 김종인과 도경수 둘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실은 네게 상의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모레가 진왕의 생일인데 매번 차만 보내서 식상하더군. 색다른 걸 하사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 어째서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지난 일 년간 경수의 조언대로 김종대와 잘 지내보려 노력했지만, 왕래가 잦지 않다 보니 둘의 관 계는 자그마한 금을 밟고 들어갈 듯 말 듯 감질나게 약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경수가 태후에게 된통 당할 때 종대는 종인의 부름에 기꺼이 응하였지만, 정작 종인은 그런 형님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아 경수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유일한 동복형제이고, 예전에 네가 잘 지내라고 하기도 해서.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입니다. 폐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면 진왕 전하도 분명 폐하 께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넌 형제들과 우애가 깊다 하였지. 그러니 네 조언대로 따르려는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 종인은 공연히 아이처럼 툴툴거렸다. 평소 진왕 전하께서 갖고 싶어 하거나 필요해 보이는 걸 드리십시오. 선물은 정성이 기본이지만 받는 사람이 즐거워야 더 가치 있죠. 그럼 뭐가 좋을지 고민해 봐야겠군. 전하도 폐하께서 내리는 물건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달게 받으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참, 내일 찬열이 도성으로 당도한다고 하는구나. 큰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니 폐하의 홍복입니다. 너와 찬열을 얻었으니 짐은 참으로 복이 많다. 강산의 주인이고 대연의 지존이시니 누구보다 복이 많으신 것은 당연합니다. 의도한 것이 아니어도 경수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경우에 어긋남이 없었다. 종인은 그런 경 수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찬열이 오면 우리가 할 일이 아주 많아질 것이다. 예. 저도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너무 오래 붙잡았구나. 그만 가보아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단정하게 멀어져가는 경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잡고, 뺨을 어루만졌을 때의 감촉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다. 종인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느낌이 또 며칠을 살게 할 것이다.

170 31. 소왕( 昭 王 ) 한가로이 비를 감상하던 중, 청지기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종대는 거의 버선발로 대문까 지 뛰어 나갔다. 한때는 위풍당당한 황태자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가는 인생. 소왕 김준면이 찾 아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종대는 몹시 기뻐하며 준면을 안으로 들였다. 준면은 오랜만에 찾는 아우의 집을 두리번거렸다. 예 나 지금이나 인보당의 살림은 태후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 것치고는 검소한 편이었다. 태후나 종인이 철마다 이것저것 하사하는 물품이 많을 텐데 그런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름난 풍류가답게 몇몇 실내 장식이 황홀할 정도로 눈에 띄었는데 대개가 당대의 무명 화가 나 도공에게서 사들인 그림과 자기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신인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진왕이 그들과 접촉했다는 소문이 나 면 화가나 도공들의 물건이 불티나게 팔렸다. 준면의 집에도 종대가 보내준 그림이나 자기들이 몇 점 있었다. 어서 차를 내와라. 어떤 잎을 우릴까요? 바람이 바뀌었으니 여름에 딴 함박꽃나무가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조란과 초염병을 가져와. 아, 송기떡도 빼놓지 마라! 종대가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준면이 좋 아하는 간식부터 챙겼다. 종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준면을 보며 객쩍게 웃었다. 자신이 너무 부산스럽게 군 듯해서 민망했다. 종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준면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널찍하지만 휑뎅그렁하지 않고 아늑한 느 낌을 풍기는 실내가 꼭 종대를 닮아 있었다. 항상 살뜰하구나. 별말씀을. 형님은 어찌 지내셨습니까? 지난달에 뵈었을 때보다 안색이 창백하신 듯합니다. 환절기라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화석( 花 席 )을 깔기 무섭게 가을이 왔네요. 눈 깜짝할 새에 다시 겨울이 될 텐데. 그러면서 종대가 준면의 투박하면서도 가지런한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겨울마다 동상에 걸 려 고생하는지라 종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준면은 부황보다는 생모인 의귀비를 닮아 백설처럼 하얗고 단정한 용모였다. 그러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맑았다. 의귀비는 종대의 생모인 숙비에 비하면 차라리 수더분한 용모였지만 출신이 귀하지 않 은데도 특유의 기품이 있었다. 준면은 제 어머니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머리도 좋아서 폐위되지 않았다면 준 면 역시 강건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가정은 쓸모없는 일임을 알지만, 종대는 화목했던 지난날과 살얼음판 같은 현재를 비 교하며 종종 회한에 잠기고는 했다. 준면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형수님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덕분에.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회임 중이라. 두 달째라고 하셨던가요? 각별히 신경 써야 할 시기죠.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명하는요? 건강하다.

171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저자에 나갔다가 명하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몇 개 사놨답니다. 돌아가 실 때 꼭 챙겨 가셔야 합니다. 아셨죠? 준면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하인이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부인이 네게 무척 고마워하면서 손수 자수를 놓았다. 뚜껑을 열자 구름과 소나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수놓인 외투가 들어 있었다. 형수님께서 직접 수를 놓으셨다고요? 네 생일이라며 여름부터 천천히 만들었지. 솜씨가 변변치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부끄러워하 더구나. 노력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실력도 많이 느셨는데요? 형수님께 제가 몹시 감동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종대는 외투를 몸에 대보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거의 귀에 걸릴 지경이 었다. 너도 이제 장가들어야지 않느냐? 별로 생각 없습니다. 대를 끊을 셈이냐? 현숙한 부인을 얻어 다음 생일에는 부인한테 외투를 받으면 좋지 않으냐. 형수님께서 회임하신 후 형님께서 매일 밤잠을 설치신다지요? 그런 걸 보면 장가가고픈 마음이 싹 가십니다. 이 아우는 자유로운 게 좋아요. 종대의 너스레를 보니 이번에도 그를 설득하기는 글렀다. 지난번에 네가 보내준 약재는 잘 받았다. 번번이 신세 져서 면목이 없구나. 그건 폐하께서 보내라고 하신 겁니다. 제가 챙긴 게 아니에요. 금상의 성격을 잘 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 왜 날 챙기겠느냐? 금상을 위해 네 공까지 없애 지 마라. 거침없는 발언에 종대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마침 시녀들이 차와 간식을 내왔다. 그것을 탁자에 놓 기 무섭게 종대는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종대는 준면의 직설에 식은땀이 날 지경인데 정작 본인은 구름 위에서 노니는 백학처럼 고결하기만 했다. 누가 들을까 봐 겁납니다. 밑바닥까지 경험한 내가 무엇이 두렵겠느냐? 형님! 넌 금상의 전정을 위해 구역질이 밀려오는 걸 참아가며 태후 곁에서 애쓰고 있지. 그런데 금상의 꼴을 봐라. 그가 네 공을 알아주느냐? 오히려 널 멀리하고 겉으로만 위한다. 그 녀석은 무정해. 제게 피붙이라고는 형님과 폐하 두 분뿐인데 무정함을 탓해 무엇하겠습니까? 종대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는 제가 자신궁에 자주 드나드는 걸 탐탁지 않아 하죠. 하지만 무능한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 런 것뿐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폐하, 아니, 아우를 위해서요. 숙비의 유언이라 했던가. 오늘처럼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천둥이 무섭다며 울던 동생을 재우고 어머니는 맏아들을 데리고 조용한 전각에 들어갔다. 그리고 빗소리가 삼켜질 만큼 꺽꺽 울었다. 이 새벽이 지나면 네 아우가 대연의 황제가 된다. 황제요? 그래. 어미가 없더라도 아우를 잘 보살펴야 해. 응? 어머니는 마치 사라질 것만 같았다. 부황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 종대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어 려운데 어머니마저 무너져 그 새벽이 너무도 두려웠다. 모두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는 듯하여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의 떨리는 어깨를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172 빗줄기가 가늘어지던 새벽 무렵, 숙비는 어린 아들을 뒤로한 채 궁녀들의 손에 끌려갔다. 안 돼! 어머니를 놔 줘! 어머니를 놓아 달란 말이야! 어린애의 발버둥은 이내 잠잠해졌다. 힘 좋은 상궁 하나가 감히 황자의 뒤통수를 뭔가로 세게 후려 친 것이다. 기절한 사이 자신은 사저인 인보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명이 오기도 전에 싸늘한 주 검이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두 살 아래의 어린 동생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종대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황제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동생이 어머니의 목숨과 맞바꾸어 보위에 오른 것만 같아 증오심이 일었다. 철이 들어서야 숙비의 유언을 되새기며 종인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두 형제 사이가 한참이나 소원해진 뒤였다. 아무래도 좋다. 태후는 어머니를 죽이고 준면을 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린 장본인이다. 그녀에게서 종 인을 지킬 수 있다면, 동생에게 실컷 오해와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다. 준면은 종대의 이런 희생이 안타까웠다. 구역질 나는 아첨에 대한 대가는 친동생의 가식적인 대우 뿐인데 언제까지 위악을 떨어야 하느냐고 몇 번 다그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종대는 숙비의 유언을 들 먹이며 자신은 아우를 지켜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저마저 등을 돌린다면 뉘라서 폐하 곁에 남겠습니까? 권력이란 똥통엔 아첨하려는 쉬파리들이 득시글거리는 법이다. 최근 금상의 행보가 파격적이라 태 후 쪽도 잠잠하다던데 황권이 강해지면 누가 그에게 도전하겠느냐?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장씨 일파가 지금은 엎드리고 있어도 언제 다시 득세할지 모 르죠. 장문견의 욕심이 아귀 목구멍처럼 열려 있는 한, 절대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하긴. 자신의 편도 과감하게 내치는 자들이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종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당시 황후이던 장씨를 보러 현수궁에 자주 놀러 갔던 일을 떠올렸다. 부용화처럼 풍만한 미소로 자신을 맞던 태도가 생생했다. 그것이 속에 감춘 비수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음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비수로 황후를 수족처 럼 따르던 생모의 목을 잘랐고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으며 김종대라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온전하지 못 하게 만들었다. 네 말대로 금상이 친정을 시작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장씨 일파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 황실에 관한 한 냉소적이다 못해 염세적인 준면은 장씨의 이야기만 나오면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 렸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려면 숱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해. 형님. 동궁에서 오라를 받고 쫓겨나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 덕분에 귀한 교훈을 얻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느냐.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후, 준면은 흩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는 깊은 상념에 빠진 듯 보였다. 순금사에서 참혹한 시간을 보낸 후 준면은 이따금 멍해질 때가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 생각 없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깨부술 수 없는 강한 집념, 내지는 형 언할 수 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땐 너무 어려서 형님의 사정을 잘 헤아리지 못했죠. 궁에서도 형님의 일은 금기였으니까요. 누가 죄인의 일을 입에 담아 화를 자초하려 하겠느냐. 이 아우에게 그때 일을 알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준면은 다소 망설이는 듯하더니 가볍게 차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조용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나간 일은 돌아볼수록 괴로울 뿐이다. 저는 형님을 믿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짜 맞춘 듯이 진행되 었습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라고요. 됐다. 그때 죽었어야 할 사람을 여태 살려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큰 관용을 베푸는 것이니 라.

173 형님은 대연의 당당한 친왕이십니다! 관용은 형님께서 베풀어야지 어찌 형님을 사지로 몰았던 적 들이 관용이란 말을 갖다 쓴답니까? 종대는 파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준면이 동궁전에서 쫓겨나던 때는 워낙 어려 자세히 기억할 수 없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수상 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만약 당시 준면이 누군가의 계략에 걸려든 것이라면 재조사를 명하여 관련 자들을 소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광증이 난 태자를 옹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아바마마조차 날 믿지 못하셨는데 인제 와 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부질없고 덧없을 뿐이다. 재조사를 한다면요? 찻잔을 그러쥔 준면의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만분지일이라도 폐하께서 당시의 일을 재조사하라고 명령하신다면요? 황실이 이제 겨우 평온해졌는데 나로 인해 피바람이 분다면 괴로움만 더하겠지. 김종인이 민감한 사안을 재조사할 리도 없거니와 그랬다가는 줄줄이 끌려 나올 사람들이 산더미를 이루리라. 더구나 왕비가 회임한 지금은 어떠한 살생도 원하지 않았다. 전하. 궁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마침맞게 밖에서 청지기가 알려 왔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무슨 일이냐? 전하의 생신을 축하하는 뜻으로 폐하께서 하사품을 보내셨습니다. 황제가 내린 물건은 그 자리에서 열어보는 것이 법도인지라 종대는 곧바로 궁에서 나온 내관을 안 으로 들였다. 어린 내관이 살갑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소왕 전하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진왕 전하의 생신을 진심으로 경하드리며 친히 고르신 선물이옵니다. 뒤에 있던 하인들이 기다란 상자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상자의 크기로 보아 그림인 듯했는데 다른 하나는 폭이 제법 있어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高 士 觀 水 圖 ) 한 점과 숙비께서 황실로 시집오기 전 타셨다던 칠현금 을 하사하셨습니다. 고사관수도와 금을? 예. 칠현금은 줄이 끊어지고 끝이 마모되었는데 새로 줄을 달고 매화 장식으로 귀퉁이를 상감하였 으니 정성을 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친히 적으신 어찰이니 열어보십시오. 귀한 그림도 모자라 종대가 예전에 흘리듯이 갖고 싶다고 했던 어머니의 유품까지 내릴 줄은 꿈에 도 몰랐다. 종대는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싶어 얼떨떨했다. [어릴 때 형님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청아한 꾀꼬리가 우짖는 듯했습니다. 요즘은 도통 들을 기회가 없군요. 칠현금에 고야정의 백매를 함께 보내니 인보당에 봄의 향기가 가득하길 바랍니다.] 종대는 종인이 하나뿐인 동모형제라고 신경 쓴 티를 내자 무척 좋아했다. 가식이든 뭐든, 종인이 자 신을 이렇게까지 배려한 적은 처음이라 굉장히 들떴다. 준면은 종대의 이런 구석을 좋아했다. 정치를 싫어해서인지 그에게는 어디에도 때 묻지 않은 순수 함이 있었다. 형님. 괜찮으시면 오늘 제 집에서 묵고 가십시오. 어머니께서 연주하시던 금까지 받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곤란하겠구나. 명하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우를 시샘하는지 근래 부쩍 떼가 늘었다. 형수님 때문에 일찍 돌아가시려는 걸 모를까 봐요? 그 사람에게는 늘 미안해서.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제가 형님 댁으로 가겠습니다. 형수님께서 부끄러운 제 가락을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종대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금을 어루만지며 활짝 미소 지었다.

174 한 차례 소슬한 가을바람의 찬열의 귀밑머리를 희롱하며 지나갔다. 일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교안. 가을의 청명한 하늘과 서늘한 바람은 거리를 꽉 메운 사람들의 마음 을 놀리듯 훑었다. 빼곡하게 들어선 상점과 왁자지껄한 인파. 그 거리에서 풍기는 달금한 사람 냄새에 찬열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올해는 유난스러웠다. 군영을 지키는 동안 찬열의 얼굴선은 더욱 날렵해져 있었고 젖살이 모두 빠져 더욱 사내다운 모습 을 풍겼다. 쌍꺼풀진 그의 커다란 눈매는 암갈색 눈동자와 더불어 성숙미를 뽐냈다. 말 위에서 무심하게 앞만 보고 달리던 그가 해쓱하게 살이 내린 채 거리를 지나가자 여느 때처럼 계집들이 몸을 배꼬며 우러러보았다. 찬열이 미리 청하지 않아 희조전에서 따로 환영식을 갖지 않았다. 그는 떠났을 때처럼 조용히 돌아 오길 원했다. 유양전( 留 陽 殿 ) * 에 든 찬열은 정중하게 사배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길상을 누리소서. 그동안 옥체 강녕하시고 무사태평하셨습니까? 종인은 반색하며 얼른 자리를 권하였다. 다담상 외에 사관과 궁인들을 모두 물린 독대였다. 네 덕분에 편히 잘 지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살이 내린 것을 보니 외직에 나가 고생이 심하였나 보구나. 아닙니다. 폐하께서 소신의 능력을 믿고 맡겨주셔서 노력하였을 뿐입니다. 그간 올린 장계를 보니 네 실력이 더욱 일취월장하였음을 알겠더구나. 네가 짐의 면을 세우고 사 직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그것이 어찌 소신 혼자만의 힘이라 하겠나이까. 폐하께서 일을 맡겨주지 않으셨다면 기대에 부응 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또 경성현령과 한서현령의 도움이 컸습니다. 변 공자도 기꺼이 도와주 었고요. 폐하께서 보신 대로 여러 모로 쓸모 있는 친구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오랑캐의 씨를 말리고, 부족한 살림으로 목책과 해자까지 설치하고 성벽을 보수하기 가 쉽지 않았을 터. 잘하였다. 참으로 잘하였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종인은 찬열을 애틋하고 고마운 눈으로 응시했다. 떠나기 직전에 박찬열이 자신궁 앞에서 벌였던 짓은 지금 생각해도 시건방지다. 하지만 찬열은 그 런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게 하는 실력과 인품을 가졌다. 종인은 찬열을 존중했고 그와 쌓은 굳건한 우정도 소중히 여겼다. 짐이 내린 밀명은 어떻게 되었느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군의 뿌리를 갈아엎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허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였습니다. 새로 추가해야 할 부분은 변 공자가 정리해 줬고 쓸 만한 자들은 서로 천거하게 해서 실력을 검증한 뒤 새로 뽑았습니다. 신인들이 많아 품안은 따로 올렸으니 확인하신 후 폐하께서 적절히 배치하시면 됩니다. 장하다! 종인이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실은 네 장계를 받을 때마다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제 더는 미룰 시간이 없는 듯하구나. 찬열이 피곤함에 절어 움푹 꺼진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쇠뿔은 단김에 빼란 말이 있지. 종인은 상기되다 못해 흥분한 것 같았다. 짐은 조정을 개혁할 것이다. 조정, 개혁이요? * 가을과 겨울에 쓰는 편전

175 태후와 장문견의 목을 칠 것이다. 담담하지만 충격적인 선포에 찬열은 하마터면 숨을 잘못 들이켜 사레가 걸릴 뻔하였다. 어찌 그렇게 놀라? 짐이 대과와 별시를 괜히 열었겠느냐? 찬열이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신진 인사들을 청요직을 비롯한 조정 안팎에 대거 등탁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오나 태후와 장문견을 치는 것은 대인파 전체를 상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치밀한 계획 없이는 오히려 저들에게 당할 수도 있습니다. 태후는 내 어머니의 원수이자 사직의 수치이며 장문견은 뼈와 살을 발라도 시원찮은 역적이다. 그 들은 대연의 종묘와 사직을 능멸하였으니 응당 처결을 받아 마땅해. 생각 같아서는 역도의 목을 쳐 구족을 멸하고 싶으나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그들의 실권을 빼앗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더군. 일단 조정에 녹은 대인파의 수를 확인하고 경중에 따라 일망타진할 작정 이다. 그러려면 옥석을 가릴 간성지재가 있어야 하지. 그래서 과거를 열어 신래들을 계속 등용했던 것이구나! 찬열은 새삼 종인이 발걸음 하나조차 계산 없이 움직이지 않는 치밀한 군주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만으로는 노련한 영수들을 상대할 수 없다. 자칫 역공으로 화를 입을 수도 있었 다. 군은 너와 청신에게 맡길 것이다. 하오면 살생부라도 작성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종인은 지그시 찬열을 쳐다봤다. 찬열은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정에 폭풍 같은 피바람이 몰아칠 것입니다. 짐은 이 나라가 장씨의 나라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야 한다. 썩은 상처를 도려내는 데는 그에 걸맞은 진통이 필요한 법이니라. 문신들을 솎아내는 게 가장 어려울 것입니다. 헌데 조정에 출사한 지 얼마 안 된 자들에게 그리 중차대한 일을 믿고 맡겨도 되겠습니까? 변 공자가 쓸 만하던데 그 친구를 음서로 등용하시면 어떠실 는지요? 작년에 대과에 급제한 사람 중에 우지환이란 자가 있느니라. 지금 어사대 감찰인데 영특하고 강직 하니 좋더군. 그 대쪽 같은 한민생도 우지환이 맘에 드는지 직접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치는 모양이다. 그럼 다행이오나 소신은 어쩐지 불안합니다. 지나치게 급진적이면 반감을 사고 만약 일이 발각되 면 저들에게 빌미만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여지를 남기고 차근차근 움직여야 합니다. 찬열은 종인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십 년 동안 고통을 받은 종인은 어쩐지 확신에 차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장기적으로 일 년 정도 보고 있는데 그 안에 옥석을 가려 회유할 놈들은 회유하고 갱생할 여지조차 없는 놈들은 모조리 뽑아낼 것이다. 짐은 신래들의 탁하지 않은 현안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조정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된 자들입니다. 노련한 중신들을 상대하기에 벅찰 것입니다. 일단 뽑았으니 의심하지 않는 게 군주의 역할 아니겠느냐? 영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에는 도경수도 함께한다.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경수의 이름을 거론해서 찬열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 엄청난 일에, 어쩌면 무모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일에 경수까지 끼게 한다니 종인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폐하! 그것만은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째서? 경수는 일개 사관인데 어찌 그 같은 중임을 맡기려 하십니까? 사관이라 맡기려는 것이다. 예?

176 사초를 쓰며 그간 선진들과 알게 모르게 공유한 내용도 있을 거고 예문관에 있는 동안 조정의 흐 름도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 똑똑한 아이가 일 년 동안 가만히 있었겠느냐? 하오나 본디 사관은 어떠한 당색이나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직필하는 것이 소임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직분을 다하는 자가 몇이나 된다고 보느냐? 그렇다고 폐하마저 올곧지 않은 방편을 쓰시는 것은. 술술 얘기하던 찬열은 종인의 뾰족한 시선을 깨달았다. 천신이 실언하였나이다. 아니다. 너라도 그런 얘기를 해 줘서 고맙구나. 허나 경수도 흔쾌히 받아들였느니라. 찬열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어안이 막혀 버렸다. 신중한 종인이 과감하게 일을 밀어붙이는 데는 그만한 확신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도 찬열은 불쑥 손을 내미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거대한 싸움에서 우리가 무사하리라 는 보장도 없었다. 어쩌면 불행은 그런 불안감에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평연을 열어주마. 피곤할 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소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32. 이면공작( 裏 面 工 作 ) 종인은 박찬열과 청신에게 군을 단속할 권한을 줬다. 조정에 발을 담근 지 채 일이 년이 안 되는 신래들과 평소 종인에게도 가감 없이 직언을 올리던 한민생에게는 조정 개혁의 뿌리가 될 살생부 작 성의 임무가 떨어졌다. 야음의 쥐와 한낮의 새조차 모를 만큼 매우 조심스럽게 일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임을 맡은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어명을 따랐다. 경수는 사초의 내용을 발설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을 따르면서도 태성전에서 있느라 모든 것을 꿰뚫 을 수 없는 종인을 위해 그가 아는 모든 정보를 총동원하였다. 종인은 자신들의 수족에게 시일은 얼 마가 걸려도 상관없으니 적들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명백한 증좌를 캐내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먹구름이 드리우고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화방에서 장식으로 가져다 놓은 국화마저 시들해 보였다. 종인은 심드렁하게 국화를 바라보았다. 그때, 김 상궁이 밖에서 알렸다. 폐하. 내의원에서 탕약을 올렸사옵니다. 들여라. 문이 열리고 우장이 종종걸음으로 목판을 들고 왔다. 먹기 싫었지만 일전에 경수에게 된통 혼난 후 에는 고분고분하게 약을 마시는 편이었다. 오늘은 어디에 효험이 있는 약이냐? 먹는 약도 가지가지라 종인은 다소 싫증이 났다. 어디에 좋은 약이냐고 묻는 것도 귀찮았지만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꼭 물어보고 음하라는 하개의 잔소리에 매번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장이 내의원에서 일러준 내용을 잊은 듯 잠시 머뭇거리자 종인이 미간을 구겼다. 무슨 약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시, 실면증에 좋은 약이라고 하였나이다. 그 한마디 하는 것이 그리 어렵더냐? 소인이 아둔하여 어의께서 일러주신 내용을 고새. 덤벙대는 성격 좀 고치라고 누차 이르지 않았느냐. 변명이 아니오라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사옵니다. 이젠 상설( 尙 設 ) * 로 승계하였는데도 이런 일을 하느냐? * 내시부 종칠품

177 오늘은 하 공공이 아니 계셔서 대신하는 것입니다. 벼슬이 올랐는데도 여전히 바들바들 떠는 우장을 보며 종인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는 곧 쓰디쓴 탕약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이 매우 쓰구나. 며칠 전부터 맛이 좀 다른 듯한데? 아! 약재 두어 가지를 바꾸었다고 하셨는데. 죽여주시옵소서. 쯧쯧.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기에 그런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나이다. 우장이 엎드려 우는소릴 했다. 종인은 시끄럽다고 일어나라고 했다. 우장이 냉큼 탕약 그릇 옆에 있 던 인삼과를 갖다 바쳤다. 달곰하니 입가심에 좋을 것이옵니다. 약효는 좀 어떠시옵니까? 흠. 약이 바뀐 지 얼마나 됐지? 이레 정도 된 것 같습니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 여전히 침수 들기에 불편하시옵니까? 그러고 보니 잠은 전보다 잘 오는 것 같긴 하구나. 적어도 중간에 깨는 일은 줄었다. 천만다행이옵니다. 내의원에서 물심양면으로 개발한 약이라고 자신만만해 하더니 드디어 약효가 드나 보옵니다. 우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좋겠구나. 그래야 너랑 밤새도록 바둑을 둘 게 아니냐? 말씀만 그렇게 하시지, 밤새도록 소인과 놀아주지도 않으시면서. 말본새를 보라지. 양물은 없어도 본시 사내이거늘. 짐을 애제로 만들고 스스로 동현이 되려 함이더 냐? 어디, 짐의 소맷자락이라도 잘라주랴? 우장의 앙알거림에 종인이 시답잖은 농을 던졌으나 우장은 애제와 동현의 고사를 모르는 눈치였다. 뭔 말이 통해야 농담도 하는 건데 그런 면에서 참 답답했다. 종인은 괜한 소릴 했다며 인삼과가 담긴 접시를 물렸다. 일전에 바둑 두는 것을 보니 솜씨가 많이 늘었더구나. 폐하의 지엄하신 가르침 덕분이옵니다. 바둑 실력만큼이나 정신머리 챙기는 것도 일취월장하면 오죽 좋겠느냐?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사옵니다. 너와 바둑을 둔 지도 한참 되었구나. 그때 하다 만 네 형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는데 좀처럼 시간 이 나질 않는군. 만기친람으로 바쁘신 폐하께 어찌 소인 따위의 사정을 들어주십사 청하겠나이까. 너는 짐의 백성이 아니라 하더냐? 가까운 이의 사정조차 살피지 못하는 자를 어찌 군주라 하겠느 냐. 그 말에 크게 감동받은 모양으로 우장이 눈시울을 붉혔다. 종인은 다 큰 사내 녀석이 잘도 운다며 괜스레 핀잔을 주었다. 피곤하구나. 불 끄고 그만 나가 보아라. 예, 폐하. 안숙하소서. 침전에 불이 꺼졌다. 궐 일각. 경수와 찬열은 일 년 만에 마주하였다. 그간 각자 바빠 사가에 잘 들어가지 못했고 간다 해도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찬열은 찬열대로, 경수는 경수대로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매우 오랜만에 보는데도 분위기는 작년과는 달랐다. 너는 이런 일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하였다.

178 어쩌자고 폐하께서 하라는 대로 넙죽 대답한 것이냐. 네가 더 잘 알잖아. 경수의 대답에 찬열은 언뜻 쓸쓸해졌다. 해가 바뀐 후에야 보는 얼굴인데 반가움보다는 우려가 앞 섰다. 지나간 것,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찬열로서는 그래서 더욱 경수가 아팠다. 수많은 목숨이 스러질 수 있어. 이처럼 위험한 일에 네가 끼어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네가 국경을 지키는 동안 나는 계속 폐하 곁에 있었어. 한 번은 강무에 나가셨다가 크게 다치셨는 데 난 늘 곁에 있다고 자신했으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폐하께 어떠한 힘도 되어드리지 못했지. 한 달 이라는 시간이 그처럼 지옥 같을 줄은 미처 몰랐어. 그래서. 그래서 폐하께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겠다고 했어. 가질 수 없는 찬란한 것에 마음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때는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인 줄 모르고 눌러두었다가 다시 꺼내 보려니 더는 상자 안에 있지 않은 보석. 찬열은 짙은 한숨을 감싸 안았다. 폐하께서는 친정을 시작하시자마자 조세를 혁정하고 장문견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셨어. 이것만 으로도 대인파의 반발을 샀을 텐데 난 저들이 입때껏 조용히 있는 것이 오히려 걱정이다. 응. 폐하께서는 그래서 더욱 적당한 때라고 판단하셨어. 저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미리 손을 써야 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척하고 있는 거다. 너도 잘 알잖아? 더구나 지난번 추문 사건 이후로 네가 폐하와 접촉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을 텐데 여태 널 이용하는 것도 수상해. 그럴까 봐서 그때부터 줄곧 저들의 수족이 되어 지냈어. 최대한 조심했으니 설령 의심한다 해도 심증만으로는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거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만 난 네가 자칫 자그마한 일로 화를 입을 듯하여. 폐하께서 원하시고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이야.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냐는 듯, 유리알처럼 크고 말간 눈동자는 순수한 열정을 태웠다. 그래서 찬 열은 경수가 종인을 위해서라면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 수도 있음을 알아차렸다. 서로 깊은 정을 나누고 있으니 오죽할까만, 찬열은 어쩐지 불쾌하게 꾸물거리는 불안 때문에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경수가 그런 찬열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네가 더 걱정이다. 봐. 그 밝은 월면( 月 面 )이 이리 해쓱해 졌잖아. 하늘을 지붕 삼고 들판을 이불 삼는 장수가 살집은 불려서 무얼 하겠어? 난 네가 평온하길 바라. 어떠한 근심도 없이 안온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야. 미안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서늘한 바람만이 목구멍 안에서 맴돌 았다. 네게 무얼 더 바라겠니. 네가 행복하고 즐거우면 그것으로 되었다. 찬열은 어설프게 입시울을 허물어뜨리며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들어가라. 난 그만 가야겠다. 먼저 돌아서는 걸음에는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를 전하지 못한 회한이 떨어져 나왔다. 멍울처럼 시 퍼렇게 번지는 그 자국을 경수만은 보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경수는 담백한 찬열이 북녘에 다녀온 후 부쩍 성숙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보석을 놓치고 뒤늦게 후회로 속을 끓이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따뜻한 물을 따르자 찻잔 속에 옹송그리고 있던 국화꽃이 활짝 피어났다. 연노란 찻물이 빠지면서 독특한 향기가 번졌다. 태후는 진주처럼 고운 빛깔을 머금은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앞에 앉은 황세용에게 이르기를,

179 그 아이, 우리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이시오. 한 모금 호르르 들이켜고는 달그락거리며 잔을 내려놓는다. 군더더기 없는 행동이었으나 묘하게 신 경질적이었다. 어째서 대답이 없으시오? 채근에 황세용은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장문견이 예족 정벌에서 배제된 후 대인파는 완전히 자신의 수중으로 떨어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난 일 년 동안 장문견이 내부 단결을 운운하며 흩어진 대인파를 한데 모으는 바람에 그간 실질적 수장 노릇을 해왔던 황세용은 본의 아니게 끈 떨어진 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문견 같은 무식쟁이가 조정 곳곳에 뿌리내린 대인파를 재집결시키는 데는 태후의 힘이 컸다. 황 세용은 수렴에서 물러났으면서도 여전히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태후를 아니꼽게 여겼다. 더구나 자 신의 자리를 장문견 같은 놈에게 줘버렸으니 여간 속이 뒤집히는 것이 아니었다. 박찬열은 폐하께서 신임하는 장수입니다. 쉬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겠습니까? 우리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소. 그 아이의 모친이 내 사촌이라오. 그것은 아옵니다만, 박찬열 그자는 폐하와 금석맹약을 나눈 사이라 어려울 것이라 말씀 올리는 것 입니다. 천하의 황 사도에게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오? 황세용은 곤란한 듯 주먹만 말아 쥐었다. 그런데 태후가 마치 그 속내를 읽은 것처럼 말했다. 물론 내가 직접 나설 수도 있소. 헌데 인척이라서 보는 눈도 많고 되레 망설여지더이다. 마마께서 그 친구를 각별히 여기고 계심은 압니다만, 마음이 동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박찬열 그 친구,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고 다녀도 은근히 이퉁이 세더군요. 해서 주상과 단짝패로 지내는 것 아니겠소? 호호호. 어려운 일을 맡기면서 본인은 뭐가 흥그러워 저리 새살새살 웃음꽃을 피우는지 모르겠다. 사도 댁 여식 중에 참한 아이들이 몇 있다고 들었소만. 황세용이 뜨끔했다. 그에겐 세 명의 아들 외에도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된 늦둥이 막내딸과 혼기 꽉 찬 여식이 둘이나 되었다. 박우헌과 동문수학한 사이인지라 그 집에 찬열을 사위로 맞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치기를 여러 번. 매파를 보내는 족족 퇴짜를 놓으니 체면이 땅에 떨어져 흙먼지에 구르다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 을 지경이다. 박우헌은 아들을 일찌감치 장가보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당사자가 계속 싫다고 하니 황세용뿐만 아니라 그를 사위로 들이고 싶은 모든 가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소신의 딸아이들은 각기 혼처가 정해진지라. 이번 전쟁으로 박찬열의 중망이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을 찌르는 마당에 다른 가문에 그만한 인재를 내어주고 싶으시오? 당연히 아깝습니다. 헌데? 실은 그 댁에 몇 번 얘기를 꺼냈다가 거절당하여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래요? 이유가 뭐라 하더이까? 한 번은 본인은 외지로 도는 일이 잦아 아직 안사람을 들일 수 없다 하였고 또 한 번은 마음의 준 비가 안 되어 있다더군요. 두 번 다 정중히 친서를 보내는 통에 매달릴 의욕조차 꺾였습니다. 태후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싶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은근히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뭔가 머릿 속에 빠르게 스치는 것이 있었다. 허면 그 일은 차차 생각해 봐야겠소. 다시 부를 테니 오늘은 그만 나가보시구려. 황세용이 뭔가 꺼림칙해서 마뜩잖은 표정으로 물러갔다. 곧바로 장문견이 급히 알현을 청하였다. 태후는 좀 쉬려나 싶었는데 한동안 잠잠하던 아우가 찾아 왔다는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으로 들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문견이 발바닥에 불붙은 사 람처럼 헐레벌떡 뛰어오며 예도 갖추지 못한 채 소리쳤다.

180 큰일 났습니다, 마마! 아직 식지 않은 국화차를 후르르 들이켜는 태후의 미간이 말라비틀어진 잎사귀처럼 구겨졌다. 숨부터 돌리시게. 장문견은 진정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는 태후의 건조한 시선을 받은 후에야 찔끔하며 겨우 숨을 골랐다. 보는 눈이 많은데 어찌 이리 호들갑인가?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그, 금상이 우리의 자금줄을 태워 먹으려고 내수소 관리들을 싹 갈아치우고 육주비전을 비롯한 시 전 전체를 탐문하라는 밀명을 내렸답니다. 이뿐만 아니라, 조정 개혁을 위해 살생부를 작성하라 하였다고? 태연히 경악할 소식을 내뱉는 태후를 보며 장문견은 말문이 막혀 꺽꺽 소리를 냈다. 그의 퉁방울 같은 눈알은 쏟아질 것만 같았고 금세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누님! 아니, 마마! 알고 계시었사옵니까? 이제는 제 손위 누이의 정보력이 무서울 지경이다. 궐 안 곳곳에 사람을 심어놓았음은 알고 있었으 나 항상 자신보다 먼저 소식을 접하고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도저히 내전 깊숙한 곳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는 양반으로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라 그런지 차 맛이 참 좋네. 아우에게 주려고 빈 찻잔에 마른 국화 꽃잎을 옮긴다. 손길은 단정했고 움직임은 고상했다. 이 상황에 차 타령이 나오십니까! 그럼 곡이라도 할까? 금상이 미친 게 분명합니다. 낭관 이하의 새파란 놈들만 앞세워 이 같은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머 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대체 무얼 안다고 저리 까불게 하는지 원! 하늘을 나는 기분이 어떤지 즐기게끔 내버려두시게. 금상이 나는 걸 구경만 하다가 목이 부러져도 모를 겁니다. 또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할 셈인가? 한 모금, 온화하게 퍼지는 국화 향은 천하일색이 입안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살생부를 적으라 한 것은 우리를 조정에서 아예 지워버리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실 테지. 기가 막힙니다. 기가 막혀요! 제깟 놈이 언감생심 그 자리를 오를 수나 있었답디까? 다 마마 덕분 이 아닙니까?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우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네. 주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 몫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인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나? 그것이 개혁이란 빛 좋은 개살구로 저희를 찍어내는 것입니까? 틀렸네.?!!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 가득히 탕수를 부으니 새하얀 김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솟았다. 태후는 그것 을 아우의 앞으로 슬쩍 밀었다. 주상의 방법은 한참 틀렸어. 암요! 우리를 몰아내면 오히려 조정이 마비될 것입니다. 그 뜻이 아닐세. 하오면 무엇입니까? 물론 조정에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많네만 그들을 다 쫓아낼 정도로 주상은 어리석지 않 아. 오히려 자네가 그리 두려워서 벌벌 떨 만큼 총명하고 영특하시지. 장문견은 그렇지 않다며 속으로 극구부인 했다. 내가 주상이라면 이런 소식을 접한 우리가 벌벌 떨다가 자충수를 두는 꼴을 기다릴 걸세. 당연히

181 주상은 그걸 노리고 은근히 자신이 하는 일을 우리 쪽으로 흘리고 있지. 살생부까지 알아낼 줄은 예 상치 못했겠지만.! 허나 주상은 모르네. 아직 어려서 적을 어떤 식으로 잡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 하여 이것 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며 최선의 방도를 찾으려 발버둥 치는 것이라네. 모르겠습니다. 신은 마마와 같은 혜안이 없어 금상이 하는 행동을 곧이곧대로 믿을 뿐입니다. 호호호.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네. 내 일전에 이르지 않았나? 우린 그저 조용히 기다리면 된 다고. 소신이 참을성 없는 성격임은 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낚싯대는 던져졌고 그 끝에 무엇이 걸릴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일일세. 그 말씀만 믿고 죽는 시늉까지 해가며 엎드린 지 수개월입니다. 주상은 십 년을 기다렸네. 헌데 고작 몇 달 움직이지 못했다고 앙살이라도 떨려는 건가? 태후는 속을 가라앉히라며 식기 전에 차나 맛보라고 했다. 펄펄 끓는 속에 뜨거운 국화차마저 들이 부으면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데, 위압적인 누님의 눈빛에 장문견은 별수 없이 마시는 시늉을 했다. 주상이 여러모로 예의주시하고 있을 때니 책잡히지 않게 몸을 사리게. 내게도 다 생각해둔 바가 있네. 하오나 마마! 지난번 자객 사건처럼 자네의 어설픈 언행으로 일이 어그러졌다가는 뒷일을 책임질 수 없음이야. 태후가 지그시 노려보며 경고했다. 드리워진 낚싯바늘에 우리 일족이 걸려들지만 않길 바랄 뿐입니다. 퉁명스레 던지는 어투에는 원망이 가득했으나 태후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헌데 오다 보니 사도가 자신궁에서 나오더군요. 마마께서 부르셨습니까? 용무가 있었네.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가? 물론 아닙니다만, 그치가 지난번에 수장 자리를 빼앗기더니 영 신통치 않습니다. 겉보기엔 변함이 없는 듯한데 은근히 불만으로 가득 찬 것이 눈에 훤합디다. 자신의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걸 알았으니 인지상정이지. 아무튼 당분간 중책은 맡기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금상 때문에 뒤숭숭한데 황세용처럼 꽁한 인사 데리고 일을 부렸다가는 도리어 화를 입을 겁니다. 자네야말로 내가 시킨 일이나 잘하시게. 그래야 두 번 다시 황세용 같은 치한테 자네 자릴 빼앗기 지 않을 것 아닌가? 마마를 지키려고 눈에 켠 쌍심지가 아직도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 보이십니까? 우락부락한 얼굴을 들이밀며 눈깔을 부라리는 아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권신 중의 권신이라며 경외하지 않던가. 태후는 나이를 먹을수록 애가 되어 가는 아우를 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33. 수월( 水 月 ) 여기서 너울거리는 석양을 바라보면 쓸쓸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난다. 자, 이리 와서 한번 보아 라. 종인이 이제 막 지려는 해를 가리키며 경수를 잡아끌었다. 경연이 파한 후 곧바로 태성전에 들기 싫어서 짐짓 버텼더니 경수가 알아서 필묵통을 챙겨 들고 종인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과연 노을은 아름다웠다. 붉은색, 주홍색, 노란색이 종이에 흡수된 것처럼 차례로 색을 발하며 구름 을 끼고 넘실거렸다. 맑은 물과 샛별을 총총 띄우며 스르르 이지러지는 해를 보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해걷이바람에 궁 곳곳에 심어놓은 가을꽃이 울긋불긋 자태를 뽐냈다. 숭화루의 웅장한 위용은 석양을 삼킨 녹수 위에서 찰랑찰랑 아른거렸다.

182 궁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두 군데다. 숭화루와 휘정궁이지. 휘정궁은 돌아가신 의귀비의 처소였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예전에 네가 서성이다가 자객으로 몰려 잡힌 곳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나는 경수다. 의귀비에 대한 총애가 각별하여 선제께서 전각을 내리셨다고요. 화려했다. 어릴 때 당시 동궁이었던 소왕을 만나러 종종 휘정궁에 간 적이 있었지. 온갖 보석과 비 단 휘장, 사시사철 핀 꽃과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초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지금은 폐궁일 뿐이죠. 실수로 들어갔지만 을씨년스러워서 그곳이 전각인 줄도 몰랐습니다.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누가 그곳을 쓰려 하겠느냐? 의귀비께서 독살당하신 것이 사실입니까? 경수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물었으나 종인은 말없이 경수의 손만 잡을 뿐이었다. 동궁의 모후였던 의귀비가 당시 황후이던 장씨의 질투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민간에까지 퍼졌 다. 더구나 의귀비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까지 쫓겨나 그 소문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죄인 인 동궁의 무죄와 황후가 후궁을 독살했다는 물증이 없어 모두 뜬소문으로 치부되었다. 하 공공께서 요즘 폐하께서 안숙하신다며 좋아하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용색이 전보다 나아지신 것도 같습니다. 얼마 전에 내의원에서 몇 가지 약재를 바꿔 탕약을 올렸는데 그게 서서히 몸에 받는 모양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이깟 일로 경하는 무슨. 그래도 중간에 번뜩 깨지 않아서 좋긴 하더구나. 헌데 왜 저에게는 그런 사정을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 공공께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 다. 네가 걱정하는 것이 싫어 그랬다. 그리 대단한 병도 아닌데 공연히 널 걱정시키면 서로 불편하지 않으냐. 경수는 종인의 불면증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종인을 위해서 마치 안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굴었다. 종인이 경수 자신을 위해 내색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수행하는 무리를 모두 뒤로하고, 종인은 경수의 손을 잡고 숭화루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경수가 손 을 빼려 하자 종인은 되레 손가락 사이사이를 맞잡았다. 아주 어릴 때 역병이 창궐해 잠시 행궁으로 이어한 적이 있다. 그때 후원에서 아바마마께서 어머 니와 손잡고 나란히 걸으시던 게 생각났다. 짐도 너와 손잡고 어디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으면 좋겠 구나. 사람들에게서 한참 멀어졌을 무렵, 저무는 태양이 두 사람의 눈동자에 스미었다. 경수는 큰 눈을 들 어 종인을 올려다봤고 종인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모든 상처를 감싸 안는 듯한 따스한 눈길이 두 사람 사이의 어지러운 공간을 메워나갔다. 경수의 향집노리개에서 새어나오는 그윽한 솔체꽃 향기도 젊은 연인을 보듬었다. 제가 욕심을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음? 갑자기 무슨 뜻이냐? 지난 일 년 동안 많이 생각했습니다. 특히 폐하께서 다치시고 아무 힘도 못 되었을 때는 자괴감까 지 들었지요. 뜬금없는 소리에 종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경수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저에게 명분이 없어 폐하께서 불예하신데도 곁에 있을 수 없으니 몹시 착잡했습니다. 애초에 제가 주제넘게 욕심내지 않았으면 적어도 폐하 곁에서 작은 힘은 됐을 테니까요. 종인이 재빠르게 뜻을 알아차리고는 경수의 두 손을 세게 맞잡았다. 너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안위이고 평온함이었습니다. 그다음이 사내가 지닐 자존심이었는데 폐하 곁에 있을수록 자꾸 흔들리고 욕심이 나더군요. 새장에 갇힌 새 신세는 싫지만, 폐하께서 계신

183 곳을 새장이라고 생각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복숭아처럼 앙증맞은 두 볼에 물든 것이 석양의 조각인지 단순한 홍조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짐에게 답을 주는 것이냐? 종인이 놀랍고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진정 짐의 용양군이 되겠다는 것이지? 경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역사가 폐하를 아름답게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종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맑은 이슬을 머금은 꽃망울이 햇볕에 녹아 막 꽃잎을 틔운 듯한 미소였다. 보는 눈이 있어 참는 것이니라. 짐은 지금 널 안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겠느냐? 예. 허나 전 예문관 관리이고 맡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만은 완수하고 싶습니다. 알겠다. 네가 그러겠다는데 무슨 말인들 못 들어주겠느냐? 대신 너무 늦으면 안 되느니라. 이 말을 기다리는 것도 괴로웠다! 늦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맡은 일이란 게 폐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도와드리는 것밖에 더 있나요? 종인은 전혀 기대도 안 한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황홀경이라는 말은 이럴 때 두고 쓰라고 생겼나 보다. 몽중인 듯 아득하고 요연하였다. 그래서 그는 재차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정녕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짐에게 오는 것이지? 이제 짐과 함께 아침을 맞는 것이냐? 불경스럽게도 폐하를 오래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면구하고 그저 송구합니다. 종인은 누군가 건드리면 눈물이라도 툭 쏟을 것처럼 보였다. 몹시 감격해서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종인 본인도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 몰랐지만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도경수 때문에 기존에 유지하던 것들이 파삭파삭 깨지고 무너졌다.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한쪽에서 하개가 잰걸음으로 달려오더니 반쯤 몸을 돌리고는 흠흠! 헛기침을 쏟았 다. 종인이 무슨 일인가 하여 돌아보니 반대쪽에서 태후가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얼른 떨어졌다. 종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숭화루에 시선을 던지다가 뒤늦게 태후를 발견한 척했다. 경수는 하개와 더불어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태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태후마마께서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산책하며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주상이야말로 여기서 무얼 하시었소? 아. 경연이 파하고 태성전으로 가려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 노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넋 놓고 구 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호호. 숭화루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예쁘긴 하지. 잘 됐구려. 안 그래도 주상에게 할 말이 있어 주 상이 한가할 때 한번 들를까 하였소. 그러셨습니까? 괜찮으면 나와 잠깐 걸으시겠소? 소자가 모시겠습니다. 종인이 태후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그녀를 부축했다. 황제가 움직이자 하개는 경수에게 눈짓하여 그 와 함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르기 시작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태후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저 아이는 날이 갈수록 용모가 피는구려. 그런가요? 종인은 경수에게는 부러 눈도 맞추지 않고 얼버무렸다. 태후는 그런 종인을 보며 픽 실소를 흘렸다. 오는 길에 보니 저 아이와 있는 것 같던데 이 늙은이가 보기엔 잘 어울리더이다. 듣기에 낯 뜨거운 소리는 어찌하시는지요? 지난번 사건으로 가벼운 농 하나 건네기도 신중한 마당 입니다. 종인이 자못 불퉁하게 대꾸하자 태후는 풍만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건 오해였잖소. 설마 아직도 그 일로 성이 나신 거요?

184 그때 소자가 화낸 것은 근거 없는 추문에 천자의 이름을 함부로 올렸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소. 황제의 존엄은 하늘에 견주고 무릇 백성이란 하늘을 경외해야 하지. 어쨌든 주상과 저 아이가 함께 보낸 시간이 일천하지 않다 보니 잘 어울리는 거 같구려. 성심에 차시거든 용양군으로 들이는 것은 어떻소? 종인이 깜짝 놀라 멈춰 섰다. 태후는 반걸음 앞선 채 몸을 돌려 일말의 정도 없는 법적 아들을 쳐 다보았다. 부드럽던 황제의 용안에 찌푸린 먹구름이 드리웠다. 도 검열은 조정의 관리입니다. 헌데 어찌 그 같은 말씀을 구중에 올리십니까? 태후는 여기서 종인과 말장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가냘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소? 영회황후의 탈상을 마쳤는데 언제까지 내전의 지존을 공석으로 둘 참이 시오? 그것은. 쉬쉬하고는 있지만 조정에서도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니라오. 주상이 고집을 조금만 꺾으면 되 는데 왜 계속 국혼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오? 결국은 또 이 이야기인가. 지겨운 반복이었으나 종인은 착한 아이처럼 얌전히 있었다. 조금 전 경수 에게 받은 행복한 감정을 쓸데없는 일로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무릇 군주의 선정은 내치에서 시작하는 법이오. 생각해 보시오, 주상. 작년에 주상이 행궁에서 다 쳤을 때 의원들 말고 누가 주상의 곁을 지켰소이까? 안사람이 있어야 하다못해 주상의 이마에 물수건 이라도 갈아줄 것 아니오? 일리 있는 말씀이오나, 어미의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시오. 정중한 부탁에 종인은 두 입술을 꼭 붙였다. 생각하니 참 그렇소. 탈상 끝난 지가 여러 달인데 조정에서는 중궁을 세우라는 주청도 올리지 아 니하더니 결국 내가 입을 열게 하잖소? 내가 수렴을 거둔 것은 주상이 장성해서이기도 하지만 조용히 쉬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오. 헌데 이런 내가 내명부 일까지 신경 써야겠소? 그것은 중궁의 소관 아니오? 마마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허나 국모의 자리를 며칠 더 비워둔다고 하여 나라에 변고가 생기진 않습니다. 종인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중궁은 내전의 중심이 될 사람이지요. 어차피 마마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소자는 조금 더 느긋하 게 기다리고 싶습니다. 보여에게 잘 못 해 준 것이 내내 맘에 걸려 늘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듯합니 다. 하오니 소자,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조급해하지 마소서. 삼 년을 기다렸는데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일. 선제의 세 아드님 중에서 소왕 외에는 모두 장가를 안 가서 내가 피가 마른다오. 심지어 주상은 사직의 주인 이고 곤전은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소이가 있소이다. 예. 허나 소자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태후는 종인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니오. 말 나온 김에 오늘 담판을 지읍시다. 태후마마. 금혼령을 내리면 전국의 어여쁘고 현숙한 여인들이 주상의 아내가 되려고 줄을 설 거요. 영회황후 에 대한 애도는 지난 삼년상으로 충분했소. 세상에 어느 황제가 지어미가 죽었다고 그리 오래 중궁전 을 비워둔단 말이오? 종인은 더욱 공손하게, 그러면서도 왠지 쓸쓸한 눈으로 대답했다. 군주의 의무 중 하나가 종사를 이어가는 것임은 잘 압니다. 하오나 소자, 아직 처리해야 할 나라의 일이 산더미라 국혼을 치를 엄두가 안 나는 것입니다.

185 국혼을 치른다고 나랏일이 안 돌아가는 것은 아니오. 그뿐이 아닙니다. 소자가 혼례를 올렸다가 아내를 독수공방시키면 영회황후의 전철을 밟을 텐데 그럼 소자는 또다시 못난 지아비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화합하면 되지요. 또 보여의 일이 어찌 황제의 탓이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듣지 말 라지 않았소? 아내에게 잘해 주지 못했으니 소자가 지은 죄가 큽니다. 하여 속죄 중인데 삼 년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마마, 외람되오나 이 얘기는 나중에 소자가 다시 꺼낼 때까지 참아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종인의 진지한 태도에 태후는 짐짓 원망하는 눈으로 손사래를 쳤다. 됐소. 손자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죽겠소. 어찌 그리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소자가 태후마마의 가르침으로 국풍을 바로 세우고 강산을 이 어나가는 모습을 보셔야지요. 보여 때문에 주상의 가슴에 너무도 큰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구려. 이리 효자신데 매번 혼사 얘기 만 나오면 소극적으로 변하니 참으로 안타깝소. 마마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심이시오? 그럼요. 그토록 바라던 경수의 대답을 얻었는데 망설일 것이 무엇이겠는가. 종인은 곱스럽게 눈매를 접어 보였다. 하얀 달이 휘영청 밤하늘에 떠올랐다. 수월당의 가을은 여느 집처럼 고요하고 느릿하게 흘러갔다. 별채 뒤에 마련된 작은 뜰에서 준면은 무릎을 모으고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고 하얀 달을 올 려다봤다. 바람에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흔들거렸다. 실낱같은 바람은 준면의 입에서 잔기침이 터지게 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탕약을 올리라 할까요? 소왕의 비( 妃 ), 설초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눈 속에 핀 홍매화처럼 탐스러운 용모를 지닌 그녀는 낭 군의 어깨에 가지고 온 모포를 둘러주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증거니 신경 쓰지 마시오. 홀몸도 아닌데 왜 나왔소? 전하께서 들어오지 아니 하시니까요. 새침한 대답에 준면은 머쓱해졌다. 명하는 또 울다 잠들었소? 예. 강샘을 어찌나 부리는지 아직 불룩하지도 않은 배를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칭 얼거리기도 하고요. 아주 우스워 죽겠습니다. 예민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여덟 달만 지나면 아우가 태어난다는 소식에 올해 네 살이 된 명하는 싫다며 빽 울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 달래도 보고 꾸짖어도 봤지만 심술이 잔뜩 늘어 제 어미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른다. 그래도 힘겹게 얻은 아이라 초영은 제 아들의 투정을 다 받아주려 했다. 준면도 선을 넘지 않는 한, 명하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명하는 준면과 초영을 단단히 묶어주는 크나큰 계기였다. 초영에게 관심이 없던 준면은 그녀가 난산으로 아이를 출산하자 마음을 다잡고 아내에게 정성을 다하였다. 그렇게 삼칠일이 지난 후 직접 아이에게 이름을 내렸으니, 이숭인의 시 추야감회( 秋 夜 感 懷 )의 첫 문 장인 밝은 은하수는 중천에 걸려 있고, 별과 달은 선명한 빛을 흘려보내는 밤( 明 河 橫 中 天 星 月 流 鮮 輝 ) 에서 따온 것이었다. 바깥바람이 찹니다. 그만 안으로 드시지요. 달이 밝아서 조금 더 구경하고 싶소. 그러다 탈을 잡으면 어쩌시려고요.

186 그 정도로 약하진 않소.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부인이야말로 밤바람이 쌀쌀하니 먼저 들어가시오. 찬바람을 오래 쐬면 배태한 아이에게도 좋지 않소. 전하께서 달구경을 하시는데 옆에서 술 한 잔이라도 따라 드려야지요. 술은 아니 드시니 대신 차 를 올리겠습니다. 부엌에 갔던 초영이 쟁반에 따뜻한 차와 다과를 가지고 왔다. 준면이 청학이 그려진 도자기 찻잔을 들고 나볏이 차를 음미하였다. 향이 좋구려. 인보당에서 보낸 것입니다. 매번 신세를 지네요. 못난 형을 둬서 이래저래 고생이 많은 사람이지. 준면의 사저인 수월당은 태후의 총애를 얻는 진왕의 인보당에 비하면 규모나 행색 차원에서 여러모 로 모자랐다. 종대는 준면에게 그런 점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 부족한 것이 있나 매일 살피고 모자란 것은 미안 할 정도로 채워 주었다. 수월당은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기야 이미 태후가 내린 당호에서도 차별이 역력하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수월( 水 月 ). 물에 비친 달처럼 허망하고 형체 없는 폐태자 의 신세를 조롱함이 아니고서야. 반면에 인보당은 부황인 효경제가 직접 당호를 하사하였는데 인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보배로 삼는 다 * 는 의미였다. 또 인보당이 권신들이 모여 사는 부촌에 있는 데 반해 수월당은 한산한 동네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 끝에 사저를 지어서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왕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려웠 다. 요양해야 하는 자신으로서는 다행스럽지만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초영에게는 고역일 것 같다 고, 준면은 생각했다. 아버님께서 사나흘 뒤 이곳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인어른께서? 연로하신데 괜찮으시겠소? 신첩의 회임 소식에 열 일 제치고 달려오신답니다. 내, 장인어른께는 면목이 없소. 못난 사위 때문에 하루아침에 백발이 되신 것도 모자라 남들에게 떳떳하게 자랑도 못 하실 테니 말이오. 계속 그리 미운 소릴 하시면 신첩, 당분간 처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턱도 없는 으름장에 준면이 놀리듯 물었다. 나야 괜찮지만 부인께서 참으실 수 있겠소? 그러자 초영은 혼자 맹세하듯이, 그, 그것은 한번 해 보겠습니다. 라고 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열여섯, 준면을 처음 만났을 때의 소녀였다. 준면은 피식 웃으며 초영의 손을 잡았다. 내, 부인에게도 미안하오. 권문세가의 훌륭한 도령들도 많은데 하필 나 같은 사람을 만나 부귀영화 도 못 누리는군. 어디서 무슨 소리라도 들으셨습니까? 왜 신첩이 싫어하는 말씀을 하시죠? 신첩이 언제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있던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소. 불쾌했다면 사과하리다. 전하께선 혹 신첩과의 혼인을 후회하시는지요? 아니오. 하오면 신첩을 미워하십니까? 더더욱 아니라오. * 仁 親 以 爲 寶, 예기 단궁하 편

187 바로 부정했지만 초영은 그 이상의 변명을 원하는 듯 다소 고압적인 표정이었다. 명색에 친왕의 아내인데 고생만 시켜 미안하오. 무뚝뚝한 내게 살갑게 대해 주고 병치레로 고생할 때마다 몇 배는 더 수고해 주니 나는 내세에서도 부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오. 은혜라니요. 아내가 낭군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데요. 신첩은 전하께서 미안하다고 하실 때마다 심 장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아요. 부부 사이에 미안한 일은 없답니다. 그러나 준면은 초영만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에서 지울 수 없는 미안함과 자책감에 시달렸다. 자신 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순수한 여인은 좋은 낭군을 만나 더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 날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 따지자면 신첩이야말로 전하께 사죄해야 하죠. 하지만 신첩은 그때 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고맙소. 못난 지아비라도 마다않고 늘 곁에 있어 주는구려. 꽃이 나비 곁에 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어요? 초영이 발랄하게 미소 지으며 준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34. 운주유악( 運 籌 帷 幄 ) 이것이 최근 삼 개월간 무정후의 사저로 흘러들어 간 자금 유통 현황입니다. 청신이 내민 두툼한 장부를 넘겨보니 금액과 용처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속독하는 종인의 눈살은 점점 찌푸려졌다. 은 삼십만 냥이라. 대체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쓴단 말이냐? 그에 대한 확실한 용처는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헌데 며칠 전, 저들이 도성 인근에 몰래 사병을 기 르고 있다는 발고가 있었습니다. 사병? 국법으로 금한 것을 일개 장수 따위가 암양한단 말인가? 이 정도 돈이 꾸준히 통용되고 있으니 그만한 소이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뿐입니다. 또한, 대 인파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간 매관매직으로 치부한 흔적도 있는 듯합니다. 이런 발칙한. 종인은 장부를 씹어 먹을 듯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서운 것은 소신들이 찾아낸 것이 극히 일부라는 점입니다. 장씨 일문이 십 년 넘게 군림했고 대인파로 따지자면 삼십 년 가까이 이 나라 조정을 장악해왔으 니 무리도 아니리라. 국가 예산의 절반 내지는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액수를 떡 주무르듯이 융통하는 배포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지경이다. 종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저들은 시전을 손아귀에 쥐고 담합하였습니다. 필요에 따라 물량으로 농락해 가격이 폭등하고 그 에 따른 차익이 생기면 배를 불리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리대 때문에 백성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군. 조세 개혁만으로는 아니 될 것 이다. 시장과 토지 또한 손보지 않으면 뿌리부터 썩은 이 나라를 구명할 수 없으리라. 외람되오나 장문견과 대인파가 모은 자금은 그들에게 소용하고 남은 일부가 자신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미 내수소를 장악한 저들이 아닙니까? 하여 하개더러 내수소의 내시들을 모조리 갈아치우라고 하였다. 내탕고를 야금야금 빼돌리고 있음 을 모를 줄 알았나 본데 더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보위가 싫었다. 어머니를 죽이고 억지로 앉은 자리라 더욱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이 나타 나 자신을 대신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경수를 지키고자 마음을 고쳐먹었고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스 스로 칼을 빼어 물었다. 그런데 놀이판은 규모가 달랐다. 이쯤 되면 저들의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봐야 한다. 이것도 모

188 르고 황제랍시고 십 년 동안 용상에 앉아 있었으니 자신의 안일함에 진저리가 났다. 기가 막히는군. 고작 얼마간의 시간으로 알아낸 것이 이 정도라니. 준비한 기간을 합치면 일 년 가까이 되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요. 이것 말고도 마주해야 할 저들의 방약무인한 짓이 또 있단다. 종인은 정수리부터 지끈지끈한 두통 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대인파의 실체는 어찌 되었느냐? 도 검열과 우 감찰 * 이 보낸 자료와 그간 한 장령 ** 이 모은 것을 토대로 파악 중입니다. 헌데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아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부상서조차 혀를 내두르셨습니다. 그럴 테지. 소인파의 힘이 강해졌다고는 해도 다수가 참찬관 이하이고 끽해야 낭관일 뿐이지. 요직 은 대인파에서 대물림하여 차지하고 있으니 그들을 하루아침에 걸러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수고가 많구나. 소신만의 공이 아닙니다, 폐하. 특히 도 검열이 예문관과 중추원에서 취급하는 소식들을 발 빠르게 알려준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하였습니다. 경수만 생각하면 종인은 죄를 지은 기분이다. 아름다운 재주를 덕 있는 곳에 쓰지는 못할망정 태후 의 간자로 발탁되어 이제는 사관의 본분을 잊게 하였으니 그에게는 유구무언이다. 본의 아니게 그 아이에게 내키지 않을 일을 시켜서 미안할 뿐이다.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국기를 바로 하는 일입니다. 네가 옳구나. 허나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경수는 비번인 날이 있으니 네가 오가는 길에 멀리서나마 비호해 주면 고맙겠구나. 어명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만, 도 검열은 무위장군과 막역한데 차라리 그에게 맡기시는 것이 어 떻습니까? 실력은 소인보다 무위장군이 더 낫습니다만. 아니. 그럴 순 없다. 찬열이 경수에게 사심을 드러낸 이상, 종인은 그에게 경수에 관한 어떤 일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종인의 고압적인 표정에 청신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각 아문에 배치된 신래들이 폐하의 개혁 의지에 크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일이 빠르게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신중해야 하지만 길게 끌어서 좋을 것도 없지. 너희들의 노고가 크다. 이것은 이 나라의 강산을 위한 일이니 조금만 더 힘써다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반드시 이기실 것입니다. 주상은 그리 생각할지도 모르지. 지금으로써는 자신에게 확실히 승산이 있다고 여겨야 우리에게 더 유리하기도 하고. 태후는 커다란 화선지 위에 포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줄기와 넓죽한 잎사귀 사이사 이로 알알이 맺힌 포도송이가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폭풍의 한가운데 들어온 것처럼 온몸이 떨리나이다. 박 상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요즘 궐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풍 전야라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러웠다. 피 냄새는 아래에서 먼저 퍼지는 법이었다. 호호. 폭풍은 자연히 소멸하기도 하지. 그저 납죽 엎드려 있으면 모든 것이 잠잠해질 걸세. 무정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헌데 이리 느긋하셔도 되는지요? 그녀는 천하태평인 자신의 주인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기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나서 서 싹을 자르던 양반이 이번엔 뭐에 씌었는지 무사안일이었다. 자네는 날 언제부터 모셨는가? * 우지환 ** 한민생

189 뜬금없는 물음에 박 상궁이 되똑하게 고개를 젖히고 셈을 해 보았다. 선제께서 친영례로 마마를 모셔갔던 때부터입니다. 삼십육 년 정도 되었을까요?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군. 그땐 자네나 나나 꽃다운 청춘이었는데 어느새 흰머리가 내려앉았어.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 합니다. 그리 오래 내 곁에 있었다면 내가 승산 없는 일에는 뛰어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군. 그럼 불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 태후마마. 소인이 실언하였습니다. 내가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여 종이호랑이로 아는 사람이 어디 자네뿐이겠나? 마마! 천부당만부당하시옵니다. 호호호! 농일세. 자네의 충정은 내가 잘 알지. 완성된 묵포도를 한쪽으로 치우자 박 상궁이 아래로 내려와 근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가 끝 난 후 박 상궁은 여느 때처럼 태후가 보는 책들을 서안 위에 주르르 늘어놓았다. 태후는 비취가락지 를 낀 손으로 하릴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 아이 는 다녀갔는가? 예. 반 시진 전에 왔었습니다. 뭐라던가? 호분중랑장이 오전에 폐하를 오래 배알하였다 합니다. 유양전 앞을 하 공공이 지키고 있어 동태를 살필 순 없었으나 자못 심각한 내용이 오갔는지, 다시 마당으로 나오셨을 때 폐하의 용안이 어두우셨 답니다. 화첩을 뒤적이며 태후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마주한 진실이 두려운 게지. 해서? 중랑장이 다녀간 후 폐하께서 진왕 전하께 입시를 청하셨다고. 진왕을? 예. 모처럼 두 분이 담소를 나누시려는 거겠지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둘 다 숙비의 배를 빌려 나왔으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닮은 구석이라고 는 없는, 되레 견제하느라 바쁜 사이다. 그런 황제가 진왕을 왜 불렀는지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마께서 그 아이 를 거두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형제가 나란히 마마 께 충성하니 아직 하늘은 마마께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빙긋 웃는 태후에게 박 상궁이 소맷부리에서 네모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이것은 그 아이 가 전해드리라 한 서찰입니다. 태후가 반듯하게 접힌 봉투를 열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악필에 가까운 조악한 글이었으나 그럭 저럭 알아볼 만은 했다. [시간이 없어 용건만 전하는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우선 예문관에 있는 소인파 사관들도 이번 일에 참여했습니다. 도경수, 송인직 같은 검열들은 성상 에게 지대한 충성을 바치는 듯합니다. 특히, 마마께서 지시한 대로 도경수를 눈여겨봤는데 일전에도 말씀 올렸듯 성상과 내통한 사이가 맞았습니다. 하 공공도 둘의 사이를 알고 묵인하는 게 분명합니다. 소인이 몇 차례나 둘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하 공공이 입막음하려는 기색도 있었고 말투나 눈빛도 보통 군신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인의 형님이 전하길, 도경수가 박찬열과 너나들 이 하는 사이이고 박찬열은 성상과 죽마고우이므로 필시 박찬열이 도경수와 성상의 화조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서찰을 움켜쥔 태후의 손에 슬며시 악력이 가해졌다. 그러고 보니 수상한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경수가 석고대죄를 올리던 날, 진왕이 갑자기 처 소에 그림을 가지고 온 것부터 해연했다. 도경수에게 마음을 빼앗긴 김종인이 제 형님을 움직였으리라. 허면 도경수는 주상과 면식이 있었으면서 사도의 눈과 귀를 가리고 내 밑에 들어와 나까지 속이려 든 것인가? 허! 참으로 맹랑한 아이로군.

190 이거야말로 죽 쑤어서 개 준 꼴이다. 황제의 머리꼭대기에 앉으려 태성전에 사관을 들이라 한 것인 데 이제 보니 내 손으로 둘이서 희희낙락할 자리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헌데 이상하군. 박찬열이 두 사람의 화조사 노릇을 했다면서 어째서 그 날 도경수를 구하러 박찬열 이 뛰어들었을까? 그는 신중한 성격이고 도경수가 주상의 총애를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몸 을 사렸을 터. 더구나 진왕이 찾아와서 나를 설득했으니 주상이 일부러 박찬열의 등을 떠밀었다고 보 기에도 무리가 있지. 막역한 사이라기엔 평소 그 아이답지 않군. 손톱을 잘근 씹던 태후의 머리에 불현듯 벼락이 쳤다. 혹 박찬열이 도경수를? 느닷없이 깔깔거리는 태후를 박 상궁은 유심히 보았다. 심기가 뒤틀릴 때마다 웃음을 터트리는 버 릇이 있어서 그녀를 잘 살펴야 했다. 어쨌든, 도경수를 비롯해 입 무겁기로 유명한 사관들마저 움직였다니 예삿일이 아니로다. 앞으로 보기 드문 구경을 하겠구먼. 어찌 그러십니까? 아닐세. 박 상궁, 황 사도와 무정후에게 연통을 넣게. 내가 아주 급히 보잔다고 말일세. 예, 태후마마. 박 상궁이 쏜살같이 처소를 나섰다. 송인직과 얘기를 나누며 지나던 중, 경수야. 익숙한 저음에 경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희조문을 넘어 찬열이 걸어오고 있었다. 경수가 반 갑게 화답했다. 송인직은 말로만 듣던 박찬열이 도경수와 다정하게 미소를 주고받자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얼굴 보기가 어렵구나. 맡은 일이 있으니 별수 없지. 어디 가는 길이야? 찬열이 송인직을 의식하자 송인직이 멋쩍어하며 멀찌감치 떨어졌다. 등청하는 거야? 태후께서 부르셨다. 태후마마께서? 그간 안부나 물으시려는 건지, 아니면 예전 일로 갑자기 골이 나서 꾸중이라도 놓으시려는지 알 수 없구나. 찬열은 시답잖은 농을 던졌지만 경수는 웃지 않았다. 자신궁이 손님을 잘 청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별일이네. 이러나저러나 그분은 내 어머니의 사촌이시다. 오늘처럼 사적으로 부르면 가야 하지. 조심해. 별일이야 있겠니. 바빠 보이는구나. 얼른 가봐. 찬열은 턱짓으로 송인직 쪽을 가리켰다. 찬열아. 이번 일이 끝나면 오랜만에 산막에 같이 들르자. 월란을 만난 지 오래됐어. 그래. 그러자. 찬열은 버릇처럼 경수의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손을 급히 거두었다. 그는 곧 희조전을 돌아 모습을 감추었다. 찬열이 꽁무니를 감출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송인직이 호들갑을 떨며 경수에게로 달려왔다. 와! 면신례 때 자네가 무위장군과 친하다고 하긴 했지만 호형호제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이. 부럽구 먼. 다들 무위장군을 사위로 맞거나 지기로 삼고 싶어 안달들이니까. 집안끼리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대단하군. 대단해!

191 송인직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이는 찬열보다 많으면서 하는 짓은 철딱서니 없는 애 같았다. 경수가 짐짓 놀리듯 툭 내뱉었다. 장군은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죠. 어떻게, 나리께도 연줄을 놔 드릴까요? 송인직은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종알거렸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도성 일대의 기방은 내가 꽉 잡고 있네. 장군의 취향에 맞는 계집이 누군지 만 알려준다면 내가 아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네! 장군은 기방에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그리 취향이 안 맞다니 안타깝네요. 그, 그런가? 그럼 무얼 좋아하시나? 무관이니 당연히 무예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송인직이 시무룩해졌다. 난 무예라면 딱 질색인데. 경수가 키드득 웃으며 앞서 나갔다. 가을 햇볕은 무르익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화원에 핀 꽃과 바람결에 일렁이는 커다란 호수는 한적한 정취를 자아냈다. 새색시의 볼처럼 붉은색으로 물든 단풍과 색색이 부서지는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이 고요한 궁을 휘돌아나갔다. 한쪽에서는 궁녀들이 산에서 딴 대추와 밤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고 있 었다. 찬열은 그들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갔다.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다. 자신궁에 온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맨 처음은 열다섯에 첫 전투에서 돌아온 직후 태후가 자신의 재종이라는 걸 알고 초대했을 때다. 두 번째는 장문견과 남해 해적을 토벌하고 돌아온 후이며 세 번 째는 석고대죄를 올리는 경수를 구하러 마당으로 뛰어들었을 때, 마지막이 오늘이다. 넓게 봐서 집안사람이긴 해도 태후나 찬열이나 서로에게 살가운 정이 있진 않았다. 그나마 태후는 박찬열의 높은 인기를 이용할 목적이 있었지만 찬열은 아니었다. 다과가 입에 맞는지 모르겠구나. 다소 경직된 찬열에게 태후는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찬열의 앞에는 달콤한 귤강차와 행포, 유밀과 가 놓여 있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부엌에 들어간 지 오래라 예전만 못하지. 마마의 음식 솜씨는 익히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자랑을 자주 하셨지요. 호호. 그랬느냐? 마음껏 들어라. 감사합니다. 찬열은 젓가락으로 행포를 집어 먹는 시늉을 했다. 태후가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규방에서 한가하게 지내다 보니 오히려 귀가 열려 듣는 소식이 많구나. 네 명성이야 원래 자자했 다만, 이번에 예족의 새 칸과 완전히 담판을 지은 일로 백성들의 칭송이 더욱 높아졌다더군. 부끄럽습니다. 무정후가 몸이 좋지 않아 어린 네가 사지에서 고생이 많았겠구나. 참으로 잘하였다. 조국과 폐하를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하기까지. 네 부모님이 아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 태후의 눈빛은 한없이 상냥하고 화사했다. 오늘 갑작스레 불러서 당황했느냐? 예전에도 몇 번 들른 적이 있어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몇 번 너를 불러 담소를 나누고 싶었지만 넌 나라의 관리다 보니 쉽지 않았지. 네 가 주상의 배동으로 종학에서부터 상서원( 上 書 院 ) * 까지 함께 공부하는 걸 보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 * 황태자 교육 기관

192 른다. 가문을 내세우고 싶진 않지만 어쨌거나 넌 나의 조카가 아니더냐. 예. 어머니께서도 늘 마마의 보살핌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탕발림에도 태후는 인자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볼수록 탐나는 아이임엔 틀림없었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지? 스물셋이옵니다. 혼기가 꽉 찼구나. 허면 집안에서 오가는 혼담은 있느냐? 비릿한 예감이 찬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공을 쌓아 올릴 때마다 세도가들이 자신의 여식을 아내로 삼으라며 들들 볶는 마당이다. 일면식밖에 없는 태후까지 자신의 혼사에 이리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다. 없습니다. 호오. 옥골선풍이요, 조자룡의 현신이라 불리는 귀재인데 사방에서 가만히 둔단 말이냐? 태후는 구태여 호기심이 인다는 듯 목소리를 꾸몄다. 찬열은 담담하게 읊조렸다. 정혼자가 있었습니다. 헌데 삼 년 전, 남해에 침노한 해적을 소탕하러 갔을 적에 역병에 걸려 병사 하였지요. 소인이 환도하면 혼례를 올리기로 하였는데 하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박찬열에게 정혼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렇다고 박찬열이 자신의 속내를 꿰뚫고 거짓을 고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태후는 혼선이 일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저런. 어린 나이에. 허면 네가 줄곧 혼자인 이유가 죽은 정혼자 때문이더냐? 아직 그 시신이 풍토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주상과 함께 자란 사람 아니랄까 봐 첫정을 잊지 못하는 것도 똑같구나. 종인이나 찬열은 각각 보여와 월란을 애도했지만 그들을 첫정이라고 정의하진 않았다. 어쨌든 찬열 은 예의 바르면서도 쓸쓸한 눈빛을 유지했다. 사내의 순정은 하루 피었다가 하루 지는 들꽃과 같지. 여인은 사내에게 정을 바랄 순 있어도 믿음 을 원할 순 없느니라. 평생을 궁에 갇혀 오직 효경제만 바라보고 산 태후. 한때는 남녀 사이의 애틋한 연정에 큰 기대와 환상을 품었던 소녀였다. 후궁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백년해로하며 많은 자손을 낳아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순진하다 못해 바보 같았던 소녀. 문득 태후의 눈동자에 쓸쓸한 회한이 비쳤다. 그녀는 자신이 감성적이었다고 생각하며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그래도 너라면 가능할 것 같구나. 과찬이십니다. 주상의 곁에는 흉금을 터놓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군주란 일고편운의 지위인지라 사람을 사귐 에 있어서 늘 정치의 이해관계가 수반되지. 헌데 넌 주상과 십 년 넘게 어울렸으니 두 사람의 단금지 교는 참으로 미문이다. 앞으로도 주상을 잘 보필해다오. 그리할 수 있겠느냐? 하찮은 목숨이나 폐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맘 편히 들어라. 오늘은 집안 어른으로서 널 부른 것이니. 전쟁터는 인간 살육장. 그곳에 오래 서다 보면 육감이 짐승에 버금갈 만큼 발달한다. 육감은 경험을 토대로 한다. 어떤 것은 목숨과 직결되어 강력한 경고음을 울려댄다. 찬열은 타들어 가는 듯한 이 꺼림칙함을 눌러 내리려고 애썼다. 까닭 없이 오싹한 기운이 들었다. 음습한 기운이 안개를 만들어내고 새카만 저승의 물결을 몰고 왔다. 이 모든 것이 폭풍을 앞둔 까닭 없는 기우이기를, 찬열은 바라고 또 바랐다.

193 35. 수경신( 守 庚 申 ) 청신이 물러가고 한 시진 후에 진왕이 입시를 청하였다. 종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형님의 방문 을 허락하였다. 하개가 여느 때처럼 달콤한 과자와 최고급 차를 우려 두 사람 앞에 마련해 주었다. 진왕은 입맛이 까다로우니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종인의 명령을 한사코 지켰다. 종대는 자신을 따로 청한 적이 극히 드물던 종인이 어쩐 일로 유양전까지 들어오라고 하였는지 몹 시 궁금했다. 그보다 얼굴을 마주한 김에 생일 선물에 대한 인사치레는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청 색 다기를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생일 때 보내주신 선물은 정말 잘 받았습니다. 고사관수도와 칠현금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매우 감 동했습니다. 형님께서 무얼 좋아하실까 고민하다가 조언을 얻었지요. 맘에 드셨다니 기쁩니다. 조언을 얻으셨다고요? 하개였습니까? 아니면 다른 궁인이었습니까? 어찌 그리 소신의 마음을 사로 잡는 하례물을 주셨는지 당시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경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종인은 미소만 지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만큼 침묵도 길어졌다. 종대는 종인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헌데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지난해, 태후가 애꿎은 사관을 잡아들여 문초하고 있다며 태후의 노염을 풀어달라고 한 이후 종대 는 내심 아우와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여전히 아우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그 같은 부탁을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은 그때처럼 비슷한 사정이 생긴 탓이 아니겠는가. 바쁘십니까? 고요한 반문에 종대는 다소 경쾌하게 답했다. 산과 바람을 벗 삼아 사는 한가한 인생입니다. 흐르는 것이 시간이니 그에 연연하진 않습니다. 다 만 폐하께서 만기친람으로 곤고하시니 오래 있을 수 없겠다 싶은 것이지요. 그러셨습니까. 봄날의 한가로운 버들솜처럼 표표히 흩날리던 방 안 분위기가 돌연 실을 팽팽히 잡아당긴 것처럼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민감한 종대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실은, 형님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드시라 청하였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윤음을 내리소서. 다소의 사이를 두고 종인이 담담하게 명령했다. 제가 청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입궁하지 마십시오. 입궁하지 말라, 하셨습니까? 예. 인보당의 대문을 걸어 잠그고 죽은 사람처럼 계셔야 합니다. 숨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지내 십시오. 자신궁에서 부르거든,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피하세요.! 아우의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종대는 황실 종친의 직감으로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차분하게 답했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아무리 평소 건강을 핑계로 외출도 삼간다고는 해도 직접적인 금족령이 달갑진 않으리라. 하여 자 신이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볼 줄 알았건만 의문 없이 받아들이자 종인은 되레 당황해서 반문하였다. 연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십 년이 되셨죠. 언행 하나하나에 신중함이 깃들어 계시니 그와 같은 명령에는 응당 마땅한 까닭이 있으시겠지요. 소신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194 설령 불리한 어명이라도 따르시겠단 뜻입니까? 하나뿐인 아우십니다. 그리고 한 분뿐인 주군이시죠.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꾸밈없는 태도에 종인은 처음으로 종대가 형제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로 그가 하개나 찬열의 말대로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자신궁에 아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군위신강이라.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그 말씀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살며시 머금는 미소는 어린 날, 자신이 그토록 따르던 김종대 의 것이었다. 태성전이 인보당의 주인과 긴밀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 자신궁도 박찬열을 내보낸 후 사도와 무정 후를 불러들여 비밀스러운 회동을 가졌다. 황세용이 뒷덜미가 찔끔하여 공연히 소리를 낮추며 지껄였다. 소신들이 한꺼번에 자신궁에 든 것을 알면 소인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리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이에 장문견이 낄낄 웃더니 공연히 황 세용의 옆구리를 쳤다. 그리 세간의 눈을 무서워하면서 어찌 정국을 움직이시는지 모르겠구려. 농이 서린 어투였으나 황세용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두 분을 한꺼번에 청했겠소? 그 말에 황세용은 두려운 빛을 내비쳤고 장문견은 반색하였다. 태후가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하오이다. 황세용은 얼마 전 서신으로 태후에게 받은 밀명도 있고 해서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이 자신이 생각 하는 그것과 일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정쟁에 발을 담갔으면서도 더러운 꼴은 안 보고 싶어 하는 인사였다. 그러나 태후는 그런 황 세용의 자그마한 바람을 이뤄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듯 부드럽게 물었다. 사도. 일전에 내가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소? 그것은. 아직도 망설이는 것이오? 하오나 마마. 사예교위는 소신과 동문수학한 사이로 집안끼리도 나름 왕래가 잦았사옵니다. 그자에 게 받은 은덕이 적지 않거늘, 소신더러 어찌 그 집안을 치라 하십니까? 장문견이 화들짝 놀라며 제 누님에게 서운하단 어투로 외쳤다. 마마! 사도에게 따로 내리신 명이 있었습니까?! 내, 사도에게 박찬열을 이용해 재미난 일을 꾸며 보라고 부탁하였네. 재미난 일이라니요? 아무리 개혁이 좋아도 일에는 순서가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지. 헌데 주상의 혈기 왕성함 을 앞세워 간악한 무리가 저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니 칼을 빼 들지 않을 수 없었네. 나는 다만 이 나 라의 강산과 사직을 올바르게 이어가길 바랄 뿐. 헌데 주상의 최측근에 감히 눈과 귀를 가린 난신적자들이 있으니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음일세. 황세용이 태후의 섬뜩하고도 스산한 알맹이를 들여다보고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반박했다. 박찬열은 청렴한 장수로 소문이 났는데 어찌 그자를 간신이라 하십니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구름이 해를 가린다면, 또 자신을 드러내어 군주 의 총기를 흐리면 간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박찬열이 자신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까? 저자에 나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면면히 살펴보시오. 사도는 어찌 규방에 앉은

195 아녀자보다 세간의 흐름에 둔감하시오? 마마! 그때, 장문견이 혀를 끌끌 차며 끼어들었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 우리 모가지가 깡그리 날아가게 생겼는데 한 사람쯤 없어진다고 천지가 뒤집 히기라도 하는 거요? 모르는 소리 마시오! 사예교위와 알고 지낸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하루아침에 등 뒤에 비수를 꽂 을 만큼 나는 인면수심한 자가 아니오! 박찬열은 태후마마와는 육촌지간이오. 그런 얘기가 아니잖소! 어디 금상에게 뒤통수를 맞고 눈알이 쏟아진 뒤에도 그 소리가 나오나 봅시다. 장문견의 비아냥거림에 황세용은 반박할 가치도 못 느꼈다. 저리 뻗대고 오만불손하게 구니 사방이 적이요, 문신들의 눈엣가시로 전락한 것 아니겠나. 그만. 그만들 하시오. 황세용과 장문견의 신경전을 뜯어말린 태후가 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같은 배를 탄 지 어느덧 십 년이 넘었구려. 그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끈끈하게 신뢰를 다 졌다고 여겼는데 인제 와 발을 뺀다 하니 못내 섭섭하오. 발을 빼려는 것이 아니오라, 누구나 신의를 따라 살고자 하지. 삶을 갈망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오. 음험한 고동이 황세용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헌데 그거 아시오? 태후가 서랍에서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황세용에게 던지며 덧붙였다. 풍랑에 휩쓸리기 직전인 위태로운 배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내빼는 사공은 반드시 동료들에게 죽 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황세용이 자신의 무릎 아래에 빙그르르 굴러온 단도를 보며 기함했다. 그것은 뇌물 수수로 유배를 갔던 황세용이 당시 동궁이던 준면을 찍어내는 작전에 합류케 해 달라고 빌면서 태후에게 바친 충성 의 상징이었다. 소인을 귀하게 써주신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마마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만분지일이라도 훗날에 소인의 충심이 변심했다고 느끼실 땐 망설이지 말고 이 단도로 소인의 심장을 찌르소서! 파랗게 질린 황세용은 덜덜 떨면서 단도를 집어 들었다. 그는 사느란 태후의 면면과 비아냥거리듯 코를 씰룩거리는 장문견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는 비참한 심정으로 단도를 자신의 가슴으로 꽂아 넣 으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음이라. 이십 년 지기인 박우헌과의 우정도 소중하고 사람의 도리를 익힌 유학자이나 황세용에겐 자신의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황세용은 바르르 어깨를 떨고는 두 손으로 칼을 바치며 태후에게 머리를 숙였다. 개똥밭에 서 굴러도 저승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고 태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경은 이 나라의 사도시오. 나라를 위한 일엔 사사로운 감정이 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소? 예, 태후마마. 소신이 어리석었나이다. 태후는 비로소 만족한 듯 도로 칼을 거두어 갔으나 황세용을 향한 불신과 차가운 눈빛은 못내 거두 지 않았다. 황세용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자리가 불편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죽은 듯 입을 다 물었다. 무정후는 풍현의 군사들을 내줘야겠소. 뼈가 빠지게 고생했는데 화급을 다투니 이런 식으로 쓰이는군요. 장문견이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자 태후가 서슬이 퍼런 눈으로 아우를 쏘아 보았다. 어리신 주상의 곁에 혹세무민한 발언을 일삼는 이들이 득시글거리니 황실의 웃전으로서 나서지 않

196 을 수 없구려. 두 분께서 이 나라의 사직과 주상의 안위를 위해 한 번 더 의기투합하셔야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즉각 대답하는 장문견과는 달리 황세용은 착잡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어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 다. 태후는 끝까지 황세용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방점을 찍었다. 내, 두 분만 믿으리다. 깊은 밤의 달님조차 모르게 태성전과 자신궁의 은밀한 계획들이 시행되어 갔다. 그렇게 하루 또 하 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서로 격식을 차리고 웃는 낯으로 예를 다하였 으니 겉보기에는 삼촌가절이요, 요순시대가 따로 없었다. 종인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이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경수를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삼 을 수 있으며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쪽잠조차 사치라고 여길 만큼 정사에 매진하였고 시시각각 날아드는 적들의 정보를 조금씩 섬 세하게 맞추어 나갔다. 추악한 큰 그림이 완성될 무렵엔 야차의 칼날로 사갈 같은 저들을 일망타진하 리라. 어느덧 섣달을 앞둔 십일월 중반이었다. 청쾌하던 날씨가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올해의 첫눈을 흩 뿌리기 시작했다. 제법 눈발이 굵었다. 오리털 같은 함박눈이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오늘은 때마침 경신일이라 궁에서는 입직하는 신료들에게 음식과 술을 내려 가벼운 잔치를 열었다. 경신일은 인간이 평소 지은 죄를 반성하는 날로 도교에서는 삼시충이, 불교에서는 원숭이가 각각 하늘에 올라가 사람들의 잘잘못을 고한다는 풍속이었다. 그래서 이날은 모두 몸가짐을 삼가고 경신일 밤부터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이를 수경신( 守 庚 申 )이라 하였는데 종인은 몸이 좋지 않음을 핑계로 신료들에게 잔치판만 벌여주고 본인은 쏙 빠져나갔다. 그는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청신과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선 종인은 자신의 잠저인 홍류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마침맞게 비 번이었던 경수와 찬열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첫눈이 내릴 때는 셋이 함께할 수 없었으나 올해는 아니었다. 긴박한 와중에도 망중한은 즐기고 싶어서 종인이 억지로 청한 거였는데 낯빛을 보니 다들 설레고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경수와 찬열이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날도 추운데 방한모조차 쓰지 않은 경수를 보며 종인은 슬며 시 미간을 구겼다. 예나 지금이나 경수의 옷차림은 늘 간소했다. 이제는 녹봉이 제법 쌓이고 종인이 따로 내려준 패물이 적지 않을 텐데도 경수는 한사코 검소한 차 림이다. 그는 화려한 것을 어색해 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추운 날에는 털옷으로 작은 사치를 부릴 법도 한데. 종인은 잔소리를 끓이기 싫어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필시 꽃이 피었으리라. 들어가자. 매화가 피기엔 한참이나 이른 시기였지만 종인은 확언하며 씩 웃었다. 그는 자연스레 경수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찬열은 머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신이 괜스레 누가 보는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곳을 관리하는 자들을 직전에 모두 내몰아 서 주변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청신이 대문을 걸어 잠갔다. 펄펄 내리는 함박눈 사이로 꽃이 만개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얀 설원 위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꽃은 탄성을 자아내는 천하 절경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자 가지에 핀 것은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에 초를 넣은 자그마한 종이 등불 이었다. 가느다란 실과 가지마다 드문드문 자리한 등불은 색다른 정취를 뿜어내며 밤을 밝혔다. 경수가 가까이 다가가자 흰 얼굴에 불그림자가 지며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조심스레 건드려 보고는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꽃이 피었다고 하시기에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이런 것이었군요.

197 찬열이 뒤에서 걸어오며 말했다. 종인은 자랑스레 가슴을 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머리 에서 이런 생각이 나온 것이 뿌듯했다. 경신일에 첫눈이 내린 것을 기념해 우리 세 사람이 처음 만난 이곳에 오고 싶었다. 아쉽게도 홍매 화가 만발할 시기가 아니라서 종야등으로 대신하였지. 종인은 밖이 지나치게 추우니 뜰이 잘 보이는 내당으로 가자고 했다. 청신은 곁방에서 대기하였고 종인, 찬열, 경수는 노비들이 미리 만들고 나간 주안상을 각자 앞에 두고 한가롭게 설경을 감상했다. 하얀 눈밭 위에 환한 등화( 燈 花 )가 피어 있으니 감상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우리 셋이 맞는 겨울은 처음이더구나. 작년엔 찬열 홀로 북녘에 있느라 고생이 심하였지. 올해는 이처럼 너희와 함께 있으니 한기가 다 가시는구나. 종인이 먼저 술잔을 들자 마주앉은 찬열과 경수도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셋은 동시에 건배하였고 말끔하게 잔을 비웠다. 시국이 불안한데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핀잔하지 마라. 오늘은 경신일이니까. 종인이 짐짓 경수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경수는 애초에 그런 잔소리를 퍼부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빠듯하게 긴장상태를 유지하느라 피곤하였고 때마침 첫눈이 내려 홍류원이 생각나던 참 이었다. 그런데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종인이 서신을 보내 홍류원에서 함께 즐기자고 해서 단번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아무리 큰일을 앞두고 있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땐 좋아하는 사람들 과 시간을 보내며 숨을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폐하. 수경신을 행하시면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깁니다. 오늘은 소신들이 밤을 지새울 테니 인경이 치면 침수에 드시지요. 오늘, 종인이 스스로 잔을 채우며 말했다. 짐은 황제가 아니다. 허니 넌 내게 오늘 하루만큼은 너절하게 취해도 좋다고 말하여라. 찬열이 곤란하다는 듯 경수를 쳐다봤다. 오늘이 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자정이 넘으면 폐하께서도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 실 거다. 경수의 말에 종인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자정까지만 술을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자신은 황제이므로 아무 때나 부어라 마셔라 한들 상관없었으나 종인에게 경수의 언어는 황금이요, 법령이라. 그의 지엄한 한마디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하오면 소신도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찬열이 백기를 들었다. 셋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홍류원에서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수는 종인과 찬열에 비하면 함께한 시간이 일천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자신들만의 추억에 경수를 끼워 주었다. 담소가 길어지자 경수는 곁방에서 꼼짝없이 기다리던 청신을 생각하여 그에게 따뜻한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청신은 그의 배려에 고마워했다. 잠저에 아무도 없자 종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뜨고 커서 곁방에 있는데도 명랑한 그 소 리가 다 들렸다. 그래서 청신은 본의 아니게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는데 같이 있진 않아도 그 들의 그림에 자신도 끼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스름달이 구름을 휘감고 천공 높이 떴을 무렵. 눈도 그쳐 검은 하늘엔 별이 총총 빛났고 희끗희 끗한 눈이 울긋불긋한 종이 등불 위에 내려앉아 희부연 몽중의 풍경을 자아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매화나무가 심어진 뜰로 나왔다. 그리고 어린애들처럼 종인을 가 운데에 두고 나란히 섰다. 어쩌다보니 키 순서였다. 제법 얼근하게 술기운이 올라 기분도 몹시 좋았고 더운 뺨을 시린 북풍이 식혀 주니 상쾌하기까지 했다. 경수가 한껏 찬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런 경수를 종인이 바라보았다. 찬열은 경수와 종인을 번갈아 보았다.

198 문득 경수에게 향한 찬열의 시선을 의식한 종인이 부러 입을 열었다. 찬열. 네 친우에게 축하할 일이 있다. 찬열과 경수가 동시에 종인에게 집중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짐은 도경수를 용양군으로 삼을 것이다.! 넌 우리가 맺어지는 데 일등공신이다. 가장 먼저 네게 알려주고 싶었느니라. 두 분은 천생배필이시죠. 감축드립니다. 경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찬열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뒤늦은 깨달음으로 후회해야 아무 소용없음을 알지만, 미련퉁이 같은 조각들은 빼앗을 수도 없는 상자 속 보석을 갖고 싶다 날뛰었다. 조각에 찔려 피가 줄줄 새는데도 찬열은 그저 말없이 웃을 뿐. 그는 이제 한쪽에 덩그러니 홀로 떨어진 마음 조각을 주워 반공( 半 空 )으로 던졌다. 내 것이 아니다. 마음아, 더는 내게 머물지 말아다오. 종인은 그런 찬열의 어깨를 고맙다는 듯 꽉 움켜쥐었다. 두 사람에게서 묘한 불꽃이 튀는 것 같아 서 경수는 숨을 숙이고 지켜보았다. 종인이 자신과는 상의도 없이 용양군을 입에 담아 당황스러웠지만 찬열이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종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용양군이란 칭호를 얻더라도 종인을 돕고 백성들의 민 정을 살필 수 있으므로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었다. 민간에는 첫눈이 올 때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지? 언제 다시 이런 청명한 밤을 함께할지 알 수 없으니 소원이나 빌어보자. 종인의 제안에 머쓱해져 있던 경수가 좋아요. 라고 대꾸했다. 찬열도 동의하는 듯 이내 하늘을 향 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맑은 두 눈을 감았다. 세 명은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달에 대고 각자 염원하는 바를 속으로 풀어보았다. 감히 세 가지를 원합니다. 내 주군의 평안이 첫째요, 가족의 안위가 둘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찬열의 행복입니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여 곁에 있는 인연을 평생 배필로 맞아 한날한시에 같은 무덤에 묻히기를. 더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군주가 되기를. 폐하와 경수의 앞날에 그 어떤 빛보다 밝은 서운이 깃들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이지러지는 달에 비는 소원은 그저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스러지는 저 달 처럼 무참히 기울어진다는 것을. 훅, 찬바람이 불어 등불 하나를 앗아갔다. 36. 계망( 計 網 ) 종인은 아침부터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첫눈이 내린 지 수일이 지난 오늘은 새벽 일찍 몸단장을 하고 좋아하는 차조미음으로 속을 데웠으 며 상참에서도 평범한 사안들을 논하며 무난하게 지나갔다. 문제는 아침 수라를 들고 잠시 소화하려고 우장과 바둑을 두던 중 터졌다. 우장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서 궁중 탐방을 즐겨하였다. 덕분에 각사에서 들리는 재미난 소식 을 많이 알고 있었는데 수라를 물린 직후 그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종인의 역린을 건드렸다. 무위장군께서 두 얼굴을 가졌다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명문세족의 든든한 배경과 훤칠한 용모에 자자손손 영광스러운 전공까지. 그러니 콧대가 높은 것이 당연하다며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렇게 시작한 내용은 찬열이 앞에서는 황제에게 충성하고 뒤에서는 딴생각을 품고 몰래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으로 이어졌다. 박찬열뿐만 아니라 그 부친인 박우헌이 오래도록 교안을 장악하면서 시전의 비리를 눈감아 주고 뒤

199 로는 뇌물을 받아 챙겨 민심이 아주 뿔이 났다는 것이다. 종인이 잠자코 자신이 떠벌리는 얘기를 듣 자 우장은 자발없이 입을 놀렸다. 그러나 잠시 뒤, 종인이 바둑판을 뒤엎으며 난생처음 아랫것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당장 이 참망한 내관 놈을 파직하라! 우장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종인은 씩씩거리며 우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개가 이런저런 말로 한참이나 종인의 기분을 달래려고 애썼지만 무용지물이 었다. 건방진 놈! 바둑 좀 잘한다고 오냐오냐하였더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감히 그 천박한 입 으로 누구를 입에 올리고 모함한단 말인가! 기분이 너무도 더러워서 종인은 비명을 지를 듯 가슴을 쥐어뜯다가 그만 격하게 기침을 뿜었다. 상 체를 크게 들썩이던 그는 어의가 출동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이처럼 화가 날 수 없었다. 십 년도 넘은 유일한 벗을 함부로 헐뜯은 것도 그렇거니와 혹여 찬열에 대한 자신의 총애가 지나쳐 도리어 악영향을 끼치고 있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찬열에게 많이 해 주진 않았으나 섭섭하게 대한 적은 없다고 여겼다. 허나 작은 정조차 그에게는 오물을 뒤집어쓸 빌미였을 수도 있단 말인가.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주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이를 해할 수 있다니. 폐하. 어찌하여 노기가 나셨나이까? 두 번 다시 입에 담기도 싫은 말이니 그대는 묻지 말라. 밖에 있을 때 얼핏 우장 녀석이 박찬열을 입에 올리며 나불거린다 싶었는데 제대로 황제의 비위를 거스른 게 틀림없었다. 밤이 되자 태성전에 든 경수가 하개로부터 아침나절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경수는 종인이 전 에 없이 심사가 꼬였다는 소리에 긴장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종인은 경수가 연유를 묻자 순순히 털어놓았다. 경수는 깜짝 놀랐다. 찬열과 관련해 안 좋은 소문이 도는 줄도 몰랐는데 일개 내관이 그것을 알고 있어 사태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순간에 폐하의 눈 밖에 나긴 했어도 그는 궁중의 환관이죠. 만에 하나 그런 소문이 나도는 것이 사실이라면 백성들의 입에선 어떤 날조된 사실들이 떠도는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어쩌면 찬열을 시기하는 무리가 일부러 두 분 사이를 뒤흔들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짐도 그리 여긴다. 헌데 어찌 이리 노염이 나셨습니까? 경수가 걱정스레 묻자 종인이 한낮의 분노로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짐이 그 친구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소인배들이 아니꼽게 보는 것은 아닌가 싶구나.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능력 있는 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소용하고 계시죠. 그건 성군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도리어 찬열을 험담하는 자들의 도량이 적은 겁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구나. 훅 끼치는 불쾌감이 종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찐득찐득한 뭔가가 들러붙어 서서히 늪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저들이 먼저 움직였을 수도 있겠구나. 단순히 찬열에 대한 소문을 흘린다 하여 저들이 얻을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소문은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활시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짐은 내내 저들의 보이지 않는 수가 신경 쓰였는데 어쩌면 이것이 시작일 수도 있다. 심기를 굳건히 하소서.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정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데 근거 없는 이야기에 흔들려선 안 되겠지. 경수가 단정하게 종인은 바라보았다. 찬열을 향한 종인의 믿음이 바위처럼 든든해서 다행이었다. 그 것은 찬열이 그간 사력을 다하여 쌓아놓은 신뢰의 대가였다. 하개에게도 쉬이 털어놓을 수 없었거늘. 네가 있어 천만다행이다.

200 언제든 저에게 흉금을 내려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자는 태양의 안식처이기도 하니까요. 경수의 위로에 종인은 선웃음을 지었으나 한편으로는 심사가 몹시 어지러웠다. 마음이 조급했다. 이튿날 차대에서 중신들이 산더미 같은 상소문을 들고 편전에 들어왔다. 근래에 저런 양은 보기 드 물어서 종인은 차곡차곡 쌓아올린 두루마리가 뜨악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유달리 상소가 많구려. 종인이 농담인 듯 진담처럼 얘기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황세용이 나섰다. 폐하. 이것은 지난 보름간 태학관과 각사에서 올라온 상소문입니다. 내용이 참담하였으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돌려보냈는데 하루 이틀이 멀다고 밀고가 들어와 더는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밀고라? 무슨 내용이기에 사도의 표정이 그런지 궁금하오. 황세용이 진지하게 답했다. 무위장군 박찬열에 대한 일이옵니다. 경성현에서 환도한 후 찬열은 군사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조약돌 무덤처럼 높다 랗게 쌓인 상소문을 받을 까닭은 없었다. 그는 매사에 충실했으며 차후 무관들을 이끌 사람으로서 종 인이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박찬열이라니? 어디 짐이 한번 봅시다. 종인은 부러 나른하게 눈동자를 굴린 후 책상 위에 놓인 상소문 중 맨 위에 있는 것을 촤르륵 펼쳤 다. 그의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가 글자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무자비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박찬열이 사사로이 뇌물을 받아 챙기고 있었단 말이오?! 청천벽력이었다. 장씨 일문과 대인파를 쓸어버리려 전력을 쏟는 상황에서, 사실 여부를 떠나 찬열의 이런 혐의는 치명타였다. 어사대부! 이것이 사실이오? 밀고가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만 워낙 믿기 어려운지라. 믿기 어렵다고 하여 일말의 여지가 있음에도 보름이나 사태를 방관했단 말이오? 폐하! 어사대에서 미적지근하게 움직이다가 박찬열 그자가 증좌를 모두 숨기고 발뺌하면 그땐 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대인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어사대에 재직 중인 다른 대인파는 자신들은 마땅히 박찬열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생각 중이라고 동조했다. 최근 민심이 몹시 흉흉해졌는데 이것이 사예교위 박우헌과 무위장군 박찬열 때문이라는 투서가 여 러 번 날아들었습니다. 두 부자가 폐하의 은총을 믿고 발호하여 백성을 핍박하고, 죄를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수차례에 걸 쳐 온갖 현물과 은자를 받아 챙겼다 하니 필히 조사해야 합니다. 듣기로는 시전에서 어음을 받아 융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심심찮게 복물을 받아 곳간에 쌓은 재물만 하더라도 탕폐가 부럽지 않을 정도라 합니다. 청빈해야 할 관리가 부당하게 쇳가루를 챙긴 것도 기가 막힌데 폐하께서 평소 자신들을 미쁘게 여 긴다며 감히 저들의 치부에 천자의 이름을 오르내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황실을 능멸함이니 혹독한 벌을 내려 지엄한 본을 세워야 하옵니다. 폐하! 박우헌과 박찬열의 행태가 장오죄에 해당하오니 속히 잡아들이시어 종루결장과 태형에 처하 셔야 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민감한 사안에 대신들이 한 목소리를 냈다. 종인은 며칠 전에 우장이 멋대로 지껄인 말로써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심각하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201 솔직히 현 조정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 자가 지극히 드물었다. 또 장오죄를 저지른 관리를 처단하 라는 상소가 올라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면 조정은 청백리 만 남아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에도 뇌물을 받아 챙긴 관리 하나가 파직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신료들은 관 례에 따라 처리하라며 조용히 넘어갔다. 오늘처럼 독 오른 복어처럼 잔뜩 날을 세우진 않았다. 저들은 자신들도 처음엔 밀고한 내용을 믿지 않았음을 강조함으로써 저들 행위의 당위성을 주장하 는 것이 틀림없다. 조정에서 아예 공론화를 하였으니 나로서도 묵살할 능력이 없군. 종인이 상념에 빠지느라 대답하지 않자 신료들이 다시금 배에 힘을 주어 찬열의 치죄를 주장했다. 종인은 심경이 복잡한 것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매가리 없이 명령하였다. 어사대는 박찬열 부자를 포박하고 그 자택을 수색하여 한 치의 의혹도 없게 하라. 찬열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에 경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차대에 들었던 송인직이 황급히 달려와 경수에게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경수가 충격을 받아 안색이 질렸다. 왜 그러나? 내가 잘못 말했는가? 괜한 말을 한 건가? 아닙니다, 나리.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위장군의 일이니 자네의 안색이 그런 것도 이해가 가네. 경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며칠 전에 종인과 나누었던 이야기라 시일 내로 저들이 어떤 사건을 터트릴지도 모른다고 내심 예상해 왔다. 현실이 되자 입술이 바싹 마르고 현기증이 일었지만 경수는 종인을 믿었다. 종인은 찬열을 몹시 아 꼈고 찬열을 누구보다 믿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여느 때처럼 경수는 잡색꾼에게서 짐을 받아들고는 단정한 자세로 태성전에 들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방 안의 공기는 평소와는 달랐다. 무겁고 찝찝하면서도 불쾌한 습기가 가득해 보였다. 경수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칸막이 옆 서안 앞에 앉아 지필묵을 꺼내 들었다. 종인은 어두운 안색으로 다른 상소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저들이 이 산을 넘은 자신에게 어떤 비수를 내리꽂을 것인가만 생각했다. 그것은 거의 잡념이었고 종인의 복잡한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 두루뭉술한 뭉치로 만들어 버렸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단단히 꼬인 실몽당이였다. 촛불이 구슬프게 촛농을 떨어뜨렸다.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경수가 태성전에 든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평소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일에 집중하자 도리어 종인이 무심한 듯 말을 건넸다. 어찌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 제가 무엇을 여쭈어야 합니까?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에 종인은 흥미를 느낀 듯 자세를 고쳐 경수 쪽을 쳐다봤다. 네게도 귀가 있을 테니 오늘 차대에서의 일을 들었을 테지. 그 때문에 궁이 어수선한데 아무것도 모른단 말은 하지 않겠지. 저는 사관입니다. 폐하의 윤음을 기록할 뿐 다른 것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어째서 소중한 벗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느냐고 징징거리지 않는다. 그럴 성격 도 아니지만 새삼 경수의 저런 점이 다행스러웠다. 저들이 짐을 칠 수 없으니 과감하게도 박우헌과 찬열을 엮어 짐을 겁박함이렷다. 경수는 묵묵히 붓을 놀렸다. 태후가 자신의 조카까지 옭아맬 줄은 몰랐다. 장문견도 심심찮게 태후가 찬열을 아낀다고 떠들어 댔는데 짐을 저지하려고 이런 악수를 둘 줄이야. 일이 매우 수상쩍게 돌아가니 더욱 경계해야겠구나.

202 걱정하지 마라. 찬열은 무혐의로 방면될 터이니. 오히려 옥사에 며칠 있으면서 태후의 눈을 피하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르겠구나. 일 년여 전, 경수를 구하겠답시고 찬열이 자신궁에 쳐들어간 이후 태후는 찬열이 자신의 노선을 타 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장문견을 배제하고 군에 관한 중임은 찬열에게 맡겨 왔 으니 태후가 이를 갈아도 보통 간 것이 아닐 터. 종인은 자신 때문에 애꿎은 찬열까지 고초를 겪는 것이 못내 속상하고 미안하였다. 찬열이 봉욕을 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저에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너와 찬열만큼은 짐의 손으로 지켜낼 것이다. 그러니 믿어다오. 저는 이미 폐하와 한마음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탕처럼 훈훈한 대답에 종인은 긴장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기분이었다. 오래 끌지 않으마. 저들이 저리 나온 이상, 짐도 더는 좌시할 수가 없겠구나. 폐하께서 계획하신 대로 밀고 나가십시오. 그래. 그럴 것이다. 종인은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어금니를 악다물며 허공을 찌르듯 응시하였다. 곧 섣달입니다. 다만 박우헌 부자가 누명으로 혹독한 겨울을 애꿎은 옥사에서 보내지 않았으면 좋 겠습니다. 약조하마. 믿고 기다리면 찬열의 무고함을 짐이 밝혀낼 것이다. 경수는 면사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종인을 향해 곱게 미소 지었다. 찬열은 손바닥만 한 들창 너머로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를 바라보았다. 솜털 같은 눈이 오길 바 랐건만, 평평한 땅을 온통 질척거리는 진흙탕으로 만들 진눈깨비다. 그는 날숨을 내뱉었고 공중에서는 산등성이의 구름 같은 연기가 스르르 흩어졌다. 옥중이라 백의를 입고 말쑥하게 상투만 틀고 앉은 찬열은 되레 어둠을 걷는 신선 같았다. 이따금 하늘을 바라보며 처연한 눈빛을 머금는 것 외에는 차디찬 바닥에 앉아 그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친인 박우헌과는 옥사가 달랐고 종종 옥졸들이 왔다 갔다 하며 감옥 내부를 철저하게 감시할 뿐이 었다. 어사대가 들이닥쳤을 때, 찬열은 새벽녘까지 군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피로에 지쳐 거의 쓰러 지다시피 잠들었다가 막 일어난 참이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부친과 어사대 감옥으로 끌려왔다. 그 러다 뒤늦게 감찰들에게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 듣게 되었다. 찬열은 단정한 자세로 부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옷을 갈아입고 얌전히 옥사에 들어왔다. 적장의 목 을 풀 베듯이 베고 다닌 그여서 자못 긴장한 자들이 많았는데 고분고분하게 굴자 고개를 갸웃한 이가 적지 않았다. 그는 무죄인 자신을 끌어들여 종인의 숨통을 조이려는 적들의 수작을 간파했다. 겁먹을 이유가 전 혀 없었다. 증거가 없으니 사태는 금방 진정될 것이고 여기서 며칠 고생하다가 나가면 오히려 소인파 를 집결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찬열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반면 찬열의 모친인 엄씨는 갑자기 남편과 아들이 어사대로 끌려가자 혼비백산하여 기절하고 말았 다. 그 꼬장꼬장한 양반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인들을 핍박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짰다니 기가 막 히고 코가 막혔다. 더구나 찬열이 앞뒤가 다른 인물로 황제의 신임을 믿고 방자하게 날뛰었으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지 위를 이용해 뇌물을 적잖이 받아 챙겼다니! 뇌물은커녕 남한테 퍼주기만 해서 못마땅한 아들이라 엄 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청지기가 날이 몹시 추우니 주인과 나리의 옥바라지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우헌은

203 쉰이 넘었고 찬열은 기골은 장대해도 삭풍을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엄씨는 놓아 버렸던 정신 줄을 간신히 붙들었다. 그녀는 울면서 남편과 아들의 옷가지와 먹 을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옥졸들에게 건넬 돈도 챙겼는데 이것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어머니가 눈물로 밥을 짓는 줄도 모르고 찬열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허공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 다. 눈발은 점점 가늘어졌고 귀신 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헐벗은 나뭇가지가 사시나 무 떨듯이 몸을 흔들었다. 자그마한 들창 너머의 풍경은 여태 전장을 누비며 그가 보았던 겨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한 으로 치자면 여기서 바라보는 겨울은 차라리 낫다.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국경과 남해의 백성들 은 몸과 마음이 모두 억압되어 있고 끝나지 않는 겨울을 살았다. 찬열은 문득 지난해 타지에서 지샜던 국경의 밤을 떠올렸다. 오늘처럼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반갑 지 않은 눈발이 휘날리는데, 막사에서는 빨갛게 숯이 타올랐고 갓 데운 더운술 한 잔이 있었다. 변백 현과 기울였던 술잔은 여전히 입 끝에 남아 쌉싸래한 향을 풍겼다. 그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외로움의 끝자락에서 백현을 보며 경수를 떠올 렸기 때문일까.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때 느꼈던 추위는 어쩐지 야릇한 추억으로 다가왔다. 비슷한 것이라고는 잎사귀 한 장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와 하늘이 토하는 차가운 눈뿐. 그런데도 북 녘에서의 고단했던 나날이 스쳐 지나가고, 어리눅게 자신을 포장하던 변백현을 떠올림은 환도한 후 그와 단 한 번도 소식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탓이리라. 환도가 결정된 날, 백현은 그의 스승인 박태흥을 잠시 떠나 옥선산이든 어디든 쏘다닐 것이라고 했 다. 바람 따라 걷다가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이다. 찬열은 옥선산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내심 백현이 부러웠다.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 도는 나그네 인생이 표류하는 마음으로 번뇌하는 자신보다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고쳤다. 백현이 허허실실 웃고 있다 하여 그의 심경이 번잡하지 않다는 뜻 은 아니었다. 그도 그 나름의 고된 삶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겉보기가 가볍다 하여 예단할 순 없었다.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으로 잠조차 잊은 새벽녘. 귀곡새가 구슬프게 울어 젖히는데, 옥졸 하나가 다 가오더니 손님 왔소. 라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눅눅한 볏짚 위에 초라하게 앉아 있던 찬열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37. 고변( 告 變 ) 찬열아! 경수가 옥문으로 가까이 갔다. 찬열이 놀라 냉큼 일어났다. 그는 공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장 깊숙한 감옥을 차지하고 있던 터라 다행스레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 염려는 없었다. 험한 곳에 네가 어쩐 일이냐? 찬열아. 경수는 안타깝게 찬열을 바라보았다.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찬열의 몰골은 처참해 보였다. 북녘에 다녀온 후로 턱과 광대 근처에 그나마 붙어 있던 젖살마저 모두 내려 얼굴은 지독하게 앙상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고초까지 겪 으니 어수선하여 더욱 피골이 상접해 보였다. 움푹 꺼진 눈 밑은 경수가 느낀 밝고 눈부시던 그의 첫 인상을 무색하게 했다. 가만히 있어도 턱이 떨리는데 옷자락이 이리 얇아서야. 경수가 울컥 치미는 슬픔에 말끝을 잇지 못했다. 찬열은 선웃음을 지었다. 그는 창살에 가녀리게 붙 은 경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에 시리던 등골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왜 온 것이냐? 어사대에서 알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폐하께서 내락하셨어. 네가 걱정되신다며.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204 네가 있는 곳이라면 불길도 마다치 않을 거다. 네게는 험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았어. 네 잘못이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분기를 억누르는 듯, 혹은 눈물 대신 목이 메는 듯 착잡한 목소리였다. 어르신도 나이가 지긋하셔 이런 한파에 견디기 어려우실 거다. 혹시 몰라 오기 전에 몰래 온기를 더하는 탕약을 드리고 왔어. 고마워. 네가 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오래 있을 수 없어. 부디 보중하고 저들이 어떤 소릴 하더라도 폐하만 믿고 있어. 폐하께서는 어떠시냐? 너나 걱정해! 잠시 침묵한 후 경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강잉히 견디라고 하셨어. 태후가 너까지 옭아맨 것을 아시고 조금 당황하신 것 같은데 잘 버티고 계셔. 그러실 테지. 강한 분이시니까. 너도 견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심하지 말고 폐하 곁에서 네 자리를 지켜야 해. 알겠어? 이 와중에도 날 걱정하는 거냐? 그럼. 너는, 나도 모르는 새에 빠져나간 손안의 모래.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금. 하나뿐인 내 벗이니까. 나직한 그 말에 경수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끝끝내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자신이 울면 찬열이 슬 퍼하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오래 있으면 안 된다지 않았니. 얼른 가. 찬열이 등을 떠밀었다. 경수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도 찬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찬열 도 마찬가지였다. 끈끈하게 이어진 시선이 뚝 끊겼을 때, 찬열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허탈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상하게도 다시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어사대에서 박우헌 부자에 관한 조사가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그날은 며칠 전 내렸던 진눈깨 비며 흐린 구름이 말끔하게 걷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짙푸른 옥빛 하늘은 나부끼는 바람결에 동장 군의 입김을 뿜어냈다. 예년과 별다를 것 없는 섣달 무렵의 아침이었다. 찬열과 그의 부친이 하옥되어 엄씨가 옥바라지를 하느라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는 소식에 종인은 신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일이 자신의 과욕이 부른 참사는 아닐까, 아직 피의 향연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시로 가슴을 졸이니 과연 거사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별의별 잡념이 끼어들어 종인의 머릿속은 얽히고 설킨 꽈배기 같았다. 시작도 전에 온갖 일을 겪다 보니 몸살이라도 나려는 모양이다.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조회를 생략한 그는 수라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태성전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찬열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섰고 저들의 노림수가 단순히 찬열을 하옥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사 뭇 두려웠다. 전투태세는 갖추고 있되, 아직은 저들을 일망타진할 단계가 아니라서 종인은 그저 찬열 을 빼낼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찾고자 하면 반드시 방법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정오를 조금 넘겼을 무렵, 주강에라도 나서야 할 것 같아서 유양전으로 가려는데 밖에서 황

205 세용을 위시하여 어사대부 등이 급히 배알을 청하였다. 종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신들에게 기다리게 한 후 편전으로 향하였다. 급히 짐을 청한 이유가 무엇이오? 종인이 다소 노곤한 기색으로 묻자 중신들이 쭈뼛거리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 모습에 슬그머니 짜증이 난 종인이 눈썹을 비뚤게 치켜 올렸다. 무슨 일인데 그리 뜸을 들이는 거요? 황세용이 눈치를 주자 어사대부가 비통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 급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듣고 있소. 사예교위 박우헌의 집에서 투서에 적힌 어음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장물이 나왔습니다. 이미 예상한지라 종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조금 전보다 미간에 더욱 굵은 주름을 잡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면 박우헌과 찬열은 수취한 방법과 액수에 따라 최소 태형에서 최고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 종인은 이 순간에도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찬열을 두호할 방법을 모색 했다. 외람되오나 폐하. 조사 중에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어 대신들과 상의한 후 걸음을 하였습니다. 의뭉스러운 구석이라니. 박우헌과 박찬열이 받은 장물의 액수가 상당한데 이것의 용처를 밝히던 중 오늘 새벽녘에 관청 기 둥 아래에 이것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사대부가 접힌 종이 한 장을 종인에게 건넸다. 종인이 그것을 펼쳐서 읽었다. 그가 점점 사색이 되더니 이내 어사대부를 죽일 듯 쏘아 보았다. 어사대부만은 믿었건만. 그대만은 우직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정녕 그대도 저들과 한 배를 타 려함인가! 역모라니!! 종인이 옥안을 내리치며 발함하자 신료들이 움찔하였다. 황제가 평소 온화하고 고분고분한 편이라 이토록 노발대발한 것은 신료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익명서는 가장 예민한 반역 을 기술하고 있었다. 그것도 황제가 지난 십여 년간 자 신의 수족처럼 괴이던 신하의 배신이었으므로 눈알이 뒤집히고 게거품을 무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짐의 충신이오. 이 나라와 짐을 위해 이날까지 자신들의 수고를 마다치 않았는데 그런 그 들이 어찌 역모를 꾀한단 말이오? 종인이 가까스로 이성을 붙들며 반문했다. 그러자 황세용이 나섰다. 실은 이런 소문이 꽤 오래전부터 나돌았사옵니다.! 처음엔 신들도 워낙 황당무계한 고변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요. 헌데 이번에 두 사람의 뇌물 착취 현황이 잡혔고 그 자금의 용처를 수사하던 중 마침맞게 다시 고변이 들어온 것입니다. 허면 이 얼토당토않은 얘기가 사실이란 말이오? 외람되오나,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어떤 이가 자수하였는데 본인이 박찬열의 지시로 훈련받은 군 사라고 하였습니다. 어사대부가 다시 말을 보태자 종인은 기함하였다. 일순 말문이 꽉 막혀서 그는 멍청하게 눈만 깜박 거렸다. 그자는, 석 달 전 박찬열이 경성현에 있을 적에 병사를 모집한 적이 있는데 그때 미곡을 준다는 말에 혹하여 지원했다가 그의 명을 받고 풍현으로 내려왔답니다. 일러준 대로 산속 깊이 있는 모처에 가보니 과연 군사들이 있는지라 그간 아무런 의심 없이 훈련을 받아 왔다 합니다. 종인은 담담하게 내뱉는 어사대부의 말이 가시와 칼날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을 세워 그의 전신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헌데 날이 갈수록 의구심이 들었고, 알고 보니 그곳에서 기르는 군사는 중앙군이 아닌 박찬열 개

206 인이 쓸 사병이었답니다. 그 수가 족히 천 명에 가깝고 온갖 무기와 식량이 준비되어 있어 처음엔 자 신도 감쪽같이 속았답니다. 설마! 장문견의 군사들을 짐의 것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사사로이 이용한 것은 아니겠지? 망설이다가 그냥 도망쳐 나왔는데 그들이 추쇄꾼처럼 따라붙는 바람에 어찌어찌 교안에 당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종인이 어사대부가 건네는 노란색 무제 책을 받아들었다. 무엇이오? 박찬열의 방에서 발견한 명부이온데 태후마마를 비롯하여 조정 영수들의 이름이 다수 기록된 것으 로 보아 아무래도 살생부 같다 판단되옵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손이 바들바들 표지를 넘기었다. 태후 장씨와 장문견을 시작으로 다수의 대신들이 검은색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신래들을 중심으로 작성하라고 한 살생부다. 경수와 우지헌 등이 보고한 대인파 인물 다수가 적힌. 하지만 이 명부는 종인이 찬열에게 준 것이다. 저들의 동태를 살피라는 차원에서였다. 종인에게는 문제 될 것 없는 명부였으나 내막을 모르는 대신들은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종인이 착잡하게 명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황세용이 소맷부리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며칠 전 소신은 모처럼 박우헌의 초대로 그 집에 갔었습니다. 집에 돌아갈 즈음에 그 댁 하인 하 나가 박찬열이 제게 주라고 했다며 이 서찰을 내밀었지요. 폐하께서 한번 보십시오. 종인은 긴장한 채 서신을 펼쳤다. 다시금 그가 충격의 도가니로 빠졌다. 빼도 박도 못하는 박찬열의 필체로 자신의 수중에 황제의 밀명으로 작성한 살생부가 있으니 사도 는 반드시 몸을 보중하고 언행을 삼가라 는 내용이었다. 종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이 떨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정조 차 불가한 일이 가능성을 품고 슬그머니 발을 들이밀자 머릿속은 회반죽을 뭉갠 듯 온통 혼란의 연속 이었다. 박찬열이 배반했을 리 없다. 그 아이가 날 능멸했을 리 없어! 절규에 가까운 마음속 외침과는 달리 종인은 제멋대로 발톱을 세운 일말의 가능성 이라는 의심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좋든 싫든 사직의 주인인 그에게 반역과 기군망상의 죄는 씻을 수 없 는 상처이자 역린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생사고락을 함께 넘겼다 여긴 찬열의 짓이라 하니 종인은 치열하게 싸우는 양가감정 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서찰을 펼쳐보고는 온몸이 떨렸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박찬열이 대체 무 슨 저의로 소신에게 이런 서찰을 보냈는지 의심스럽더군요. 폐하. 혹 이것은 박찬열이 조정 중신들을 농락하고 폐하의 혜안을 흐리려는 극악무도한 고의가 아 니겠습니까? 폐하! 정녕 폐하께서 박찬열에게 일러 중신들을 찍어낼 살생부를 파라 명하셨습니까? 황세용의 압박에 종인은 아침나절에 이어 또다시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더니 속이 몹시 메스꺼웠다. 그러나 애써 누른 종인은 시끄럽게 왕왕거리는 황세용에게 사느랗게 내뱉었다. 아니. 이 모두가 거짓이오. 폐하! 박찬열은 짐의 충직한 장수이고 전공을 세웠다 하여 권세에 기대 함부로 날뛴 적도 없소. 오랜 시 간 그와 도타운 정을 나누었으니 짐은 그를 믿소.

207 하오면 박우헌과 박찬열이 착복한 장물로써 사병을 기르고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고변은 무엇입 니까? 종인이 선뜻 답하지 못하자 황세용은 기회를 잡은 듯 밀어붙였다. 폐하! 이 나라가 열린 지 수백 년이 지났사온데 불측한 역괴에게 강산을 빼앗긴다면 사직이 더럽 혀지고 선조들의 숭고한 얼 또한 심히 훼손될 것이옵니다! 본디 반역은 티끌만큼의 의혹이라도 만천 하에 밝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개구리처럼 떼로 울부짖는 신료들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본 종인은 옥안을 쾅 내려치며 일갈하였다. 그만! 그만들 하고 물러나시오! 고야정으로 경수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종인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이미 궁에 찬열의 소식이 빠르게 번진 터라 경수도 심란하고 착잡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짐이 어찌해야 하느냐. 폐하. 답하라! 짐이 어찌해야 하느냐? 찬열의 무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은 폐하십니다. 짐의 허황된 욕심으로 그에게 고초를 겪게 하는구나.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희생은 당연하지요. 장오죄로 그를 끌어들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것이 시작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찬열의 무고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압니다. 심려치 마소서. 경수는 종인의 고뇌하는 등을 다정하게 도닥였다. 박찬열을 살릴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찬열을 보살필 것이야. 동이 트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어둠이 너무 길어지면 어떡하느냐? 짐은 이 어둠을 어찌 헤쳐나가야 해? 저와 찬열은 폐하만 믿고 따를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어심을 굳게 잡수시고 묵묵히 길을 가소서. 길 끝에 태양이 비추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은 바람에 춤추는 갈대와 다를 바 없다. 경수 역시 불안하고 무서웠으나 지금 이 순 간 가장 고심할 사람은 종인이기에 애써 담담한 척했다.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자신의 평소 성격이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해 다행이었다. 종인에게 또 다른 시름을 보태고 싶진 않았다. 다음 날, 각사를 비롯하여 태학관에서까지 박찬열의 일로 들불처럼 궐기하였다. 태학관에서는 학장 을 위시하여 다수의 유생이 관주성 앞에 삿자리를 깔고 곡을 하였다. 한시바삐 철퇴를 내려 역적을 추국하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태학관에서 권당( 捲 堂 ) * 까지 해가며 날뛴다면 지방의 유생이나 재야의 학자들도 금세 사태 의 심각성을 논하며 발을 구를 것이 뻔하였다. 그런데 대신들마저 희조전 앞마당에 모여 읍소하고 있었으니, 태성전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종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모든 의혹이 박찬열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는 대인파의 함정이다. 그것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경수에게 약조하지 않았던가. 박찬열을 살리겠다고. * 단식이나 수업 거부를 통해 벌이는 집단시위

208 폐하. 태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핑하고 쇠를 긁은 듯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종인은 불쾌감에 공연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안에서 대답이 없자 하개가 재차 태후의 입시를 알렸다. 종인은 태후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별수 없이 안으로 모셔라. 라고 허락하였다. 찬열의 일이 터진 후에도 여태 잠자코 있던 그녀였기에 내심 이번 일에 대한 속내를 떠보고 방책을 찾고 싶었다. 태후는 늘 그렇듯이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종인 앞에 나아왔다. 종인이 일어나 그녀를 공손하게 맞 았고 두 사람은 이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종인의 흐린 낯빛을 본 태후가 안타깝게 말했다. 요즘 황궁이 뒤숭숭하여 주상의 용안을 뵙지 못한 지 여러 날이 지났구려. 어찌 이리 수척하시오? 창백하지 않소? 종인은 대꾸하지 않고 침착한 미소만 흘렸다. 내, 수렴을 거두겠다고 선언한 후 처소에 앉아 평온한 여생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기어이 오늘날에 이런 일이 터지는구려. 태후가 사뭇 매섭게 말을 이었다. 웬만해서는 정사를 논하고 싶지 않지만 사안이 워낙 화급을 다투는지라 이리 태성전에 든 것을 용 서하시오. 소자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태후마마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주상의 탓이 아니오. 바른길을 가고자 하는 주상을 간사한 세 치 혀로 현혹하고 뒤에서는 흉계를 꾸민 저들의 잘못이지. 주상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소이다. 듣자니 태학관 유생들이 권당을 행하고 대신들도 등청을 거부하며 희조전 앞에서 읍소하고 있다 하더이다. 이는 큰일이오. 주야로 애써도 시시각각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처리하기 모자람인데 조정이 마비 되어서야 하겠소? 종인은 고개를 숙였다. 일의 진위를 떠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 하게 느껴졌다. 무릇 고변이 들어오거든 순금사로 하여금 죄인을 잡아들이고 추국을 열어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상규요. 헌데 주상께서는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여 망설이니 이는 옳지 않소. 종인은 태후가 가증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태후의 소행인 것 같은데 물증이 없어 그 녀에게 정확한 내막을 물어볼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 각사에서 핵장이 빗발치고 태학관에서조차 저리 나오는데 계속 버티실 셈이오? 내가 잘 아오. 주상이 그 아이를 유달리 아끼고 친형제처럼 괴이셨음을요. 헌데 그는 역모의 혐의 를 받고 있소. 이미 민간에서는 예전부터 박찬열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하더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표리부동한 소인배이니 반드시 일벌백계해야 하오. 찬열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잠자코 있던 종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소자의 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준 자입니다. 어떤 반역자가 반평생을 주군 곁에 머물며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까? 그러자 태후가 얼굴을 굳혔다. 주상! 총명하신 분이 어찌 이리 어리석게 구시오? 그 어떤 흉악무도한 자도 얼굴에 대역 죄인이라 고 써 붙이고 다니진 않소. 아니요. 소자는 믿습니다. 설령 찬열이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라 해도 소자에겐 진실하였으니 이번 고변은 선뜻 사실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찬열을 시기한 패역한 무리가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면

209 소자는 더더욱 이를 경계하고 찬열을 보호해야 합니다. 주상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소만 이번 사건은 단순히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오. 고금을 통틀 어 수많은 왕조가 있었으나 역적 대부분이 군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던 사람이었소. 그녀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겉모습에 속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믿지 마시오. 구름처럼 빠르게 뭉치고 빠르게 흩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니. 그 강한 어조가 혼란스럽던 종인의 마음에 뱀처럼 기어들어 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직언을 용서하시오. 가르침을 청합니다. 박찬열은 주상보다 중망이 두터운 자요. 종인의 얼굴에 희미한 실금이 갔다. 북녘에서는 그의 이름만 대면 백성들이 환호작약하고 교안에서는 온갖 세인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 안달한다 하오. 비참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태성전에 들어앉아 있다고 해서 민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니 종인 도 열린 귀로 찬열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을 접하고 있었다. 그것을 시기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이 순 간만큼은 찬열을 향한 백성들의 칭찬을 예사로 볼 일은 아닌 듯했다. 또 그의 휘하엔 일당백의 군사가 있소. 이런 자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소? 극혈신( 隙 穴 臣 ) * 이 날 때부터 그런 마음을 품더이까? 하오나 태후마마께서도 찬열의 올곧은 성품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마께서도 찬열이 그럴 사 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박찬열은 나의 당조카요. 허나 국가 존망 앞에서는 친형제도 살육을 피할 수 없는 법. 준엄한 국법 이 하늘 아래 떳떳하거늘, 혐의를 받은 자를 인척이라 하여 봐줄 순 없지. 건조한 태후의 말에 종인은 소왕의 일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상의 말씀처럼 나도 박찬열의 반듯한 성품을 흠모했고 따로 불러 그 충심을 간직하여 주상의 곁 에 오래 머물라는 당부까지 하였소. 하지만 슬프게도 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행하는 사람이 너무 많구려. 주상. 모든 황궁은 피로 지어졌고 황실의 역사도 피로 얼룩져 있소. 주상께서 당하기 전에 역적을 척살하셔야 하오. 어설픈 옛정에 휩쓸리면 주상의 목이 달아날 텐데 그러면 이 나라의 명운은 누가 책임지겠소? 연의 강산을 지키시오. 주상께서 열성조의 종묘를 받들고 사직을 굳건히 이끄셔야 하오! 쥐 죽은 듯 고요하던 태후가 간절히 호소하였다. 종인은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성전을 나 오며 태후는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때마침 찬열의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한낮인데도 도경수가 찬바람에 얼굴을 붉힌 채로 편문을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경수가 태후를 발견하고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황급히 인사를 올렸 는데 태후가 박 상궁을 뒤에 달고 가더니 우뚝 멈춰 서서는 다시 경수 쪽으로 다가왔다. 태후는 경수를 되똑하게 쳐다봤다. 주상을 뵈러 가는 길이냐? 경수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누가 보더라도 박찬열의 일로 사색이 된 모습이다. 어설픈 거짓을 늘 어놓아 봤자 촘촘한 태후의 그물을 빠져나긴 어려웠다. 주상도 몹시 혼란스러워하더구나. 헌데 네가 분수를 모르고 이런저런 말을 흘리면 도리어 총기가 흐려지고 방해만 될 것이다. 태후의 말에 경수는 그녀가 자신과 종인의 관계를 눈치챘나 싶었다. 일순 모골이 송연하여 경수는 * 반역의 뜻을 품고 임금의 자리를 엿보는 신하

210 바짝 긴장한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태후가 후후 웃더니 한 발자국 다가와 경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박찬열의 일로 주상의 심기가 신산한데 너마저 반역자와 같은 짓을 하는 우를 범하진 않겠지.! 똑똑한 너라면 내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태후는 그와 말도 섞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하고 우아하게 연에 올랐다. 태후의 연이 태성전을 빠져 나간 후에도 경수는 안에 들 수 없었다. 박찬열과 똑같은 짓을 하면 안 된다 는 태후의 경고가 청년의 두 어깨를 거세게 짓눌렀다. 38. 읍참마속( 泣 斬 馬 謖 ) [설원( 說 苑 ) * 에 이르기를, 경대어고자 난이보( 脛 大 於 股 者 難 以 步 ) 라 하였습니다. 이는 곧 종아리가 허벅지보다 큰 자는 제대로 걷기 어렵다는 뜻으로 신하가 군왕보다 세력이 크면 그 발호로 나라가 어 지럽고 폐단이 많다는 소리입니다. 무위장군 박찬열은 그 아비와 더불어 폐하의 성총을 입고도 칼을 빼어 들고 수많은 부정부패와 비 리를 저지르더니 종내에는 참람한 반역을 꾀하여 종사를 어지럽히려 하였습니다. 박찬열이 폐하의 배동으로 자라 군총을 얻으니 실로 헛된 마음을 품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총애 가 깊은 것에 감읍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저의 사욕을 채우고 끝끝내 엉큼하고 음습한 계획을 획책 하여 함부로 군을 모으고 장물로써 반역 자금을 대고 있었으니 그 죄가 구족을 멸해도 모자람입니다. 폐하께서는 사사로운 정을 끊으시고 역적을 일망타진하시어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소서.] 각처에서 올라온 상소의 내용은 어조의 강도만 다를 뿐 대동소이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와중에 옥사에 갇힌 찬열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일정한 시각이 되면 해바라기를 했다가 다시 들어가 추운 공간에 갇혀 있었다. 종인은 찬열과 태후가 했던 충고를 동시에 떠올렸다. 소신은 무장이라 잘 모릅니다만, 무릇 정치란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심이 지나치면 그것은 오히려 독입니다. 경계와 의심은 군주가 곁에 두어야 할 무기이나 그것이 군 주의 몸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겉모습에 속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믿지 마시구려. 구름처럼 빠르게 뭉치고 빠르게 흩어 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니. 욕심이라고는 모르는 그 친구가 자신의 등 뒤에 칼을 꽂으려 했을 리는 없다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태후의 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의와 의심이 극심하게 소용돌이쳤다. 반평생에 가깝게 찬열과 붙어 지냈고 그의 면면을 다 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반역 이라는 단어는 함께 보낸 시간마저 잘라버리는 무시무시한 가위와도 같았다. 경수를 보는 것도 어쩐지 불편해서 며칠째 그 대신 다른 사관을 태성전으로 들이라고 한 종인은 혼 자서 몇 날 며칠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태후는 박찬열을 죽이고자 함이다. 자신의 재종을 이용해 나를 압박하고 조정의 권신들을 다시 집 결시켜 자신에게 더욱 충성하게 할 셈이야. 생각하던 종인은 마침내 첨원사를 불러들였다. 순금사에 일러 추국청을 차리라 하라. 짐이 입회할 것이다. 이튿날, 관주성과 가까운 의경궁( 宜 敬 宮 )에 추국청이 설치되었다. 의경궁은 말만 궁이지, 사실상 역모와 같은 끔찍한 일을 심리하는 데 사용되는 장소였다. 이는 고신 * 중국 전한 시대 때 유향이 편찬한 일화집

211 을 행하면 역도들의 구역질 나는 비명이 내전까지 퍼지는 것을 막고 관주성에는 그 어떠한 피도 흘리 게 할 수 없다는 선조들의 결정이었다. 황제를 위시하여 순금사 당상관, 수명대신( 受 命 大 臣 ) * 을 맡은 황세용, 무정후 장문견, 육부의 수장 및 관리들, 좌우 포도대장, 문랑( 問 郎 ) ** 등 수십 명의 사람이 마당을 에워쌌다. 한쪽에는 죄인을 묶을 형틀과 낙형 도구인 새빨갛게 열이 오른 인두, 철퇴, 소금물로 불린 밧줄, 압 슬형에 쓰일 사금파리와 무거운 돌, 형문에 쓰는 굵은 몽둥이, 살얼음 낀 물 등이 골고루 마련되어 있 었다. 어사대 옥사에 갇혀 있던 찬열과 박우헌이 포박당하여 추국청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옥사를 옮기려나 보다 하였는데 막상 와 보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싹한 기분이 들 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옥바라지를 하러 오던 모친 엄씨가 며칠 전부터 찾아오지 않았다. 찬열은 엄씨에게 아버님만 뵙는 것도 어려운데 소자까지 보실 필요 없습니다. 더는 오지 마세요. 라고 하였다. 그것이 제 어머니를 본 마지막이었고 이튿날부터 엄씨는 옥사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 지 옥사에서 보내는 며칠 밤이 찬열에게는 더할 나위 길었다. 별처럼 산재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각 난 기억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꿈을 꾸듯 찬열의 내면에서 유영하였다. 찬열은 이렇게 멀거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이 언제인가 싶었다.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던 그.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음침한 감옥에서 한 자락의 여유가 주어지자 백현처럼 훌쩍 떠나고 싶다는 충동 이 일었다. 경신일 밤에 종인은 조정을 갈아엎는 일이 끝나면 도경수를 용양군으로 삼겠노라고 했다. 두 사람 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다는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찬열은 어둡고 네모난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고 부쩍 변백현의 소식이 궁금한 것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나를 속이는구나. 그러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백현처럼 전국을 유람하며 미지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는 욕망도, 경 수를 향한 연심도, 종인에게 바치던 충정도. 훌훌 벗어버리고 그저 이대로, 겨울잠을 청하는 짐승처럼 웅크린 채 편안히 쉬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하늘은 제 마음을 알지도 모르겠다. 의경궁 마당으로 들어선 순간, 찬열은 그렇게 단념했다. 박우헌이 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봐도 훌륭하고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 식인지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아들을 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단에 앉은 황제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비웃듯 서 있는 장문견을 보니 그러했다. 어사대의 탄핵을 받은 그때부터 그 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군사들이 형틀에 두 사람을 단단히 묶었다. 어찌나 야멸치게 구는지 이미 찬열의 손목은 가슬가슬 한 밧줄 때문에 살이 까지고 부르텄다.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지자 찬열의 눈동자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종인이 들어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찬열은 도자기 같은 용안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기묘하게 찌푸린 눈썹과 희미하게 깨문 아랫입술, 눈물 대신 차오르는 분노 또는 실망. 폐하. 보잘것없는 천신 때문에 상심하지 마소서. 황세용이 눈짓을 하자 도사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펼치고는 박우헌과 박찬열의 신상명세 를 읊기 시작했다. 추국의 시작이었다. * 어명으로 왕 대신 추국을 지휘하는 신하 ** 추국하면서 문답한 내용을 기록하는 사람. 보통 여덟 명이 담당

212 경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그가 박찬열과 친한 사이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사람들의 눈총도 점점 따가워졌다. 그나마 예문관 선진 다수가 경수의 성실함을 알아주어 그를 위로했는데 경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 았다. 그는 며칠째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종인 때문에 몹시 불안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이목도 있고 태후가 경고한 바도 있어 서로 몸을 사리는 것이 옳음은 알지만 싹을 튼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저 예문관 숙직실에서 머물며 가시방석인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종인을 믿는다. 그는 황제이고 찬열을 무척 아끼니 현재로써는 종인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 다. 한편, 추국청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박우헌이 두 번이나 혼절하고 말았다. 찬열은 심신이 젊어 부 친에 비하면 견딜 만했지만 박우헌은 외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고 나이가 쉰이 넘어 고문은 치명적이 었다. 그러나 찬열과 박우헌의 입에서는 끝끝내 어떠한 자백도 쏟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저지른 죄가 없 었으니 저들이 읊어대는 죄목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 찬열 부자는 대역 죄인을 구금하는 순금사 남간에 들어갔다. 피떡이 된 처참한 몰골로 군사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 나가던 모습에선 종인도 마침내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말았다. 종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추국청을 빠져나갔다. 금위군들이 고변한 자가 이른 대로 사병들을 소탕하러 풍현으로 떠났다. 내일은 반역 가담자들을 소환하여 추국할 예정이다. 그래서 종인은 당분간 의경궁에서 머물기로 했다. 이미 어둑시니가 한참 전에 찾아와 깊은 밤의 장막을 드리웠다. 온종일 비명을 들으며 진을 뺐지만 종인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저 두통이 심했다. 이대로라 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탕약을 가져오라. 스스로 약을 찾은 일은 지극히 드물어서 하개는 안타깝게 주군을 바라본 후 약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하개가 따뜻하게 데운 탕약을 올리자 종인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약을 들이켰다. 약재를 바꾸었다더니 과연 효험이 있어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디쓴 약을 들이켠 후 하개가 약과 하나를 종인의 입에 물려주었다. 종인은 그것을 우물거리다가 차마 삼키지는 못하고 그릇에 도로 뱉어버렸다. 압슬형을 받던 중 찬열의 정강이에서 작은 살점이 떨 어져 나온 게 생각난 것이다. 우욱! 종인이 토악질을 하자 하개가 놀라서 급히 빈 그릇을 대령하였다. 종인은 수선 떨지 말라는 듯 손 을 들어 제지하였다. 하개가 몹시 안쓰럽고 불안한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이냐. 폐하. 속이 안 좋을 뿐이다. 속 끓이는 것이 한두 번인가? 소인이 아둔하나 작금의 조정이 매우 소용돌이치고 있음은 잘 아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 붙인 자를 가까이 두시어 무거운 시름을 덜고 옥체를 보중하셔야 하옵니다. 종인은 왼고개를 치더니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제 뼈가 깎이는 줄도 모르는 파렴치한에게 옥체 보중이 무슨 소용인가. 심기를 굳건히 하소서. 풍랑이 가라앉으면 어느 때보다 밝은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밝은 태양? 짧게 코웃음을 치며, 더 큰 폭풍이 휘몰아칠지 누가 알겠느냐. 아닙니다. 반드시 하늘이 맑게 개어 눈이 부실 것이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구나.

213 적들이 노리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나이까? 폐하께서 두려워하셔야 할 것은 오직 하늘뿐이옵니 다. 그렇다면 오죽 좋을까만, 주변은 온통 이빨을 드러낸 짐승들뿐.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혈육을 물어뜯 는 이곳이야말로 복마전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개. 넌 짐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늘 짐 곁을 지키겠지? 소인은 죽어서까지 폐하를 모실 것입니다. 종인은 한숨을 쉬며 도리질을 쳤다. 반박할 수 없는 정황이 나왔어. 모두 짐 대신 찬열더러 죽으라 하는구나. 어찌해야 하는가. 짐은 이 폭풍을 무엇으로 뚫어야 한단 말인가. 폐하. 스산하구나. 옷깃을 풀 듯 탁 내려놓은 목소리에 무거운 한숨과 어지러운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찬열의 집에서 발견된 어음과 치부책, 역모에 가담한 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명단에는 어사대 장령 한민생도 끼어 있었다. 그를 포함한 다수가 소인파에서 황제의 개혁 정치를 강하게 지지 하던 이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찬열과 역도로 몰린 자들은 하나같이 모르는 일이라고 울부짖었다. 분수처럼 피가 터지 고 살점이 떨어졌으며 뼈가 으깨졌다. 이렇게 추국청에서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는 와중, 종인이 첫날에만 추국청에 모습을 드러낸 후 역 도에 대한 처결을 차일피일 미루자 태후는 종인의 무른 성심을 지탄했다. 박우헌의 집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다량의 증좌가 나왔음에도 한때 벗이었다는 이유로 우물쭈물하는 종인이 심히 맘에 들지 않았 다. 태후는 추국청이 차려진 지 꼬박 사흘 만에 곡기를 끊고 자신궁 처소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가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고 버티자 자신궁 상궁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튿날, 의경궁에 머물던 종인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종인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지금껏 이번 일 이 태후와 관련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못했으므로 종인으로서는 슬슬 심증조차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벼랑으로 모는 태후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지독하게 난 처했다. 태후 장씨는 비록 생모는 아니나 엄연히 효경제의 정궁이요, 종인의 법적인 모후인지라 핍박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태후가 저러는 꼴을 무시했다가는 택군의 명분을 줄 수도 있었다. 폐하! 태후마마께서 곡기를 끊으시고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아니하신다니 이처럼 참담한 일이 또 있겠사옵니까! 폐하! 역도 하나 때문에 만백성의 어머니인 태후마마를 잃으시려 하십니까?! 이 나라는 삼강오륜을 근본으로 삼고 있사옵니다! 역도의 수괴를 치죄하시어 태후마마의 근심을 더셔야 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자신들의 사정을 살펴 달라 울부짖는 소리가 대숲에서 오열하는 각다귀들의 울음으로 들렸다. 밤늦 게까지 전각 앞에서 한목소리를 내는 저들을 보니 명치에 울화가 쌓여 참을 수가 없었다. 종인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다 이내 하개를 불러 급하게 미복으로 갈아입더니 처소를 박차고 나 갔다. 회랑을 지나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데 한쪽에 경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니. 환영이리라. 경수는 현재 관주성에 있고 그의 역할은 다른 사관들이 대신하고 있었으니. 종인은 정신을 대잡으며 머리를 푸르르 흔들었다. 일각에서 청아하게 얼굴을 내밀던 경수는 사라지

214 고 홀연한 그리움만 풍겼다. 단 한 놈도 따라오지 마라! 종인이 소리쳤다. 하개가 대경실색하여 급히 청신을 찾았고 청신이 종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야음에 기대어 은밀히 주군의 뒤를 따랐다. 종인이 말을 재촉해 당도한 곳은 순금사였다. 황제가 당도한 것을 알고는 나장들이 우왕좌왕하였다. 종인은 그들에게 남간으로 자신을 안내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장들이 섣불리 길을 비켜주려 하지 않자 종인이 죄인과 담판 지을 일이 있다! 고 우격다짐하였다. 이에 때마침 관사에 머물던 순금사령 이 황급히 밖으로 나와 종인을 맞았다. 종인은 나장들에게 한 말을 똑같이 읊었고 순금사령은 담판 지을 일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명 을 거역하기도 뭐 해서 옥문을 열어 주라고 하였다. 이쪽으로 모시겠나이다. 순금사령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앞장섰다.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자 두꺼운 철통 자물쇠가 걸린 옥사 여러 개가 나타났다. 개중 가장 끝에 있는 남간에서 희미하게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낮고 걸걸한 쇳소리는 누가 들 어도 찬열의 것이었다. 소리만으로도 종인은 심히 고통스러워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혐의가 벗어지지 않은 죄인이니 남간의 문을 열어드릴 순 없사옵니다. 저자 가 혹여 폐하의 옥체에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종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 계시면 아니 되옵니다. 순금사령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후 횃불을 밝혀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종인이 남간 창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어둠에 기댄 찬열을 바라보았다. 시린 발에 오물과 핏물이 섞여 있었다. 말끔한 성격인데 더러움 속에 내던져져 있으니 얼마나 괴로울 까. 종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찬열아. 박찬열. 고통에 겨워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찬열이 칼을 찬 몸뚱이를 천천히 일으켰다. 짐이다. 나직한 옥음에 찬열이 정신을 수습했다. 그가 칼을 쓴 채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끌며 창살 쪽으 로 다가갔다. 환청이 들린 것으로 여겼는데 앞에는 진정 김종인이 와 있었다. 이리 더러운 곳에 어찌 폐하께서. 짐이 오지 못할 곳이 있다더냐. 불 곁에서 보니 찬열의 몰골은 더욱 처참했다. 몽둥이찜질을 버티느라 이를 악물어 입속 살이 터져 피가 흐른 자국이 역력했고, 그 단정하던 용모는 온데간데없이 봉두난발에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부르튼 살에는 고름이 내렸다. 볼품없이 찢어진 옷깃은 거적때기에 가까웠다. 도무지 위풍당당하던 무위장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종인은 억장이 무너졌다. 폐하께 이런 몰골로 인사 올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찬열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에도 예를 갖추는 그가 우직하다 못해 미련해서 종인은 애꿎은 창살만 더욱 움켜쥐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어떤 구설에 오르시려고 위험을 자초하십니까? 폐하. 소신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종인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찬열이 감히 더러운 손을 용안에 댈 수 없어 짧은 옷소매를 억지로 끌어당겨 종인에게 가져가려 했 다. 그러자 종인은 찬열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지 말라며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찬열이 말갛게 미소를 띠었으나 종인은 그것이 공허한 선웃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용루를 거두십시오. 소신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215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짐에게 내렸어야 할 벼락이 어찌 너를 향하였던가. 하늘이 계획한 소신의 운명이 이러하다면 달게 받을 밖에요. 네가 운명을 입에 담는 성격이 아님을 안다. 그런 미신, 너는 믿지 않아. 소신을 알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짐이 백아면 너는 종자기라 하였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종인은 차마 찬열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찬열이 그것 을 보고는 짐짓 엄하게, 폐하. 폐하께서는 강산의 주인이시고 일국의 어버이십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시 고 태양 같은 용안을 보여주셔야 하지요. 천안을 아래로 내리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굽어 살피실 것은 오직 마음. 성심으로 백성의 마음을 살피셔야 합니다. 슬픔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와 종인은 대답도 못 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잔소리를 해대는 그가 지극히 박찬열다웠다. 어째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짐이 원한 것은 틀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뿐이었는 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한숨처럼,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입김 사이로 찬열이 희부옇게 번졌다. 거짓이리라. 저들이 주장하는 것에는 눈곱만큼의 진실도 담겨 있지 않으리라. 단호하게 못을 박고는 찬열의 손을 굳세게 잡았다. 허나 모두가 너를 죽이라 한다. 다들 너와 네 부친이 역모를 꾀했다며 목을 치고 삼족을 멸하라 한다. 하나같이 너를 내치고 연의 만년대계를 이으라 하는구나. 짐은 어찌해야 하느냐? 또 너는 어째서 짐을 보고도 네가 무고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냐? 왜 살 려 달라고 빌지 않느냐? 조용히 듣기만 하던 찬열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이처럼 소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다는 뜻 아닙니까? 과연 그대는 짐의 종자기로다. 종인의 입에서 재차 흐느끼는 소리가 터졌다. 종인은 찬열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꼭 붙든 채 어깨 를 들썩였다. 찬열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공연히 허공을 응시했다. 가슴이 먹먹해서 저 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폐하. 소신에게 간곡한 청이 있습니다. 말하라. 네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마. 종인은 찬열의 입에서 살려 달라 는 말이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살려줄 것이다. 이곳에 오 기 전에 마음먹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이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박찬열을 구할 것이다. 앞으로 소신이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천자로서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셔야 합니다. 약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종인이 대답하지 않자 찬열은 상관없는지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욕망이 타오르는 한, 이 궁은 영원히 피를 원할 것입니다. 폐하. 폐하께서 보위에 앉으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전에 소왕 전하께서 갑자기 미치게 된 까닭을 되짚어 보십시오. 의귀비는 명문가 출신은 아니나 선제의 대단한 총애를 얻으셨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는 크나큰 위협이었지요. 하여 소왕은 동궁에서 쫓겨났고 폐서인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 년이나 이곳 순금사에 갇혀 무수한 고빗사위를 넘기셨습니다.

216 황실은 이런 곳입니다. 찬열의 씁쓸한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소왕이 폐위되고 황실은 빈 태자의 자리를 두고 고심했을 겁니다. 마땅하게 폐하께서 대통을 잇게 되셨으나 그 뒤에는 태후의 공작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용상엔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을요. 금전옥루가 즐비하지만 문을 열어 실체를 보면 그저 골육끼리 잡아먹는 비린내 나는 사육장. 그곳 의 주인인 종인은 비참하면서도 자조적인 생각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부디 이 상황을 직시하십시오. 저들이 어떤 의도로 소신을 이 지경으로 몰았는지는 관심 없 으나 결국 소신의 운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여 이 거세고 지독한 풍랑을 피할 길도 없는 것이지요. 하오나 폐하께선 다르십니다. 폐하께선 대연의 지존이십니다. 지존으로서 역적을 처단해야 함은 마 땅합니다. 너는 자신을 일컬어 역적이라 하는 것이냐! 그러나 찬열은 흔들림 없이 단호한 의견을 표했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 풍랑은 온전히 소신을 바닷속으로 수장시키려고 부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 하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뜻하신 바를 이루는 데 잠시 먼 곳에서 뇌성이 비친 것뿐입니다. 박찬열. 망설이지 마십시오. 옛정에 휘둘려 황제로서의 전정을 망치지 마십시오. 소신은 폐하를 위해서라 면, 그리고 이 죽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살고 싶지 않은 것이냐? 기꺼이 죽겠다고 하지 마라! 소신이 무죄라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라도 반드시 결백함이 밝혀질 테니 지금 당장은 죽는 것 이 두렵지 않습니다. 소신은 오직 폐하의 앞날이 걱정될 뿐입니다. 박찬열! 폐하. 바라옵건대, 부디 옥체 강녕하시고 태평성대를 이루소서. 아니다. 아니야! 짐이 원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경수를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살려 달라고 말하라. 짐더러 너와 네 가문을 살려 달라고 말하라! 어째서 그대가 등신불이 되려는가. 종인이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다. 39. 낙홍( 落 紅 ) 김종인은 여덟 살에 종학에 들어가 당시 열 살이던 찬열을 만났다. 제 형님인 진왕의 뒤에 꼭 붙어 서 옆구리엔 서책을 끼고 즐겁게 학교를 오갔다. 왈가닥이라 쏘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고 어린 나이에 도 때와 장소를 가려 의젓함을 내보이기도 했다. 모든 관심이 황태자 김준면과 병약한 김종대에게 머물러 있을 때, 건강하고 총명하던 김종인은 상 대적으로 어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찬열은 처음 종인을 만났을 적에 다른 황자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외로움을 발견했다. 종인과 찬열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찬열이 두 살 위였으나 그는 지극정성으로 종인을 보살폈고 종인은 황자라 하여 찬열을 깔보지 않았다. 그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나눠 먹고 좋은 옷감이 생기면 찬열에게 보냈으며 기쁜 소식이 들리면 찬 열에게 먼저 알렸다. 두 사람은 닮은 듯 달랐고, 다른 듯 같았다. 궁인들은 둘을 일컬어 짝패라고 불 렀다.

217 어느 날, 황태자 김준면이 폐위되더니 종인이 동궁이 되었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효경제가 붕어하 고 열한 살의 나이로 황실의 대통을 이었다. 찬열은 구장복에 면류관을 쓰고 희조전에 나아가 즉위식을 올리던 어린 종인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 었다. 위엄이 넘치면서도 얼떨떨하고, 한편으로는 부모가 한꺼번에 저승으로 가버린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언뜻 스치는 물기가 처연하기까지 했다. 열다섯에 찬열은 남해를 침범한 해적을 토벌하러 전장에 나섰다. 육지로 노략질을 온 적을 섬멸하 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그곳에서 첫 전공을 세웠고, 그해는 종인이 연의 황제가 된 지 세 해째 였다. 그 뒤로 찬열은 크고 작은 전투와 민란을 진압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갔다. 종인은 자연스레 찬열 에게 의지했다. 어느 날은 토벌에서 막 돌아온 찬열에게 종인은, 적장의 피를 마신 그 검으로 짐을 지켜다오. 라며 눈물을 보였다. 숙비가 죽은 지 여섯 해째요, 장문견이 황제의 의장검을 함부로 휘둘러 종인이 처음으 로 그를 꾸짖은 날이기도 했다. 그 밤에 종인은 찬열을 앉혀놓고 사온을 내리면서 내내 꺼낸 적 없던 숙비의 관한 얘기를 털어놓았 다. 짐의 어머니는 열녀가 아니다. 의리도, 정도 모르시거든. 그래도 짐은 어머니가 그리워. 한 번만 더 이 손을 잡아주신다면 좋겠는데 지금은 백골이나 만져지겠지. 뜻 모를 자조적인 말은 꼬부라진 혀를 타고 찬열의 귀로 흘러들었다. 이튿날 종인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사실조차 잊었지만 찬열은 종인이 진솔한 대화에 자신을 초대 해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얼마 안 가 불의의 사고로 영회황후가 못에 빠져 익사했을 땐 묵 묵히 곁을 지키며 종인이 마음을 추스르길 바랐다. 찬열은 월란을 생각하면 늘 자라지 않는 누이와도 같아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누 구나 지독하게 사모하는 사람을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이와 혼인할 수 있는 무모함을 가진지라. 찬열은 그때까지만 해도 경수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월란 이 적극적이라서 집안끼리 혼담이 오갔을 때도 그저 경수가 월란이 너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있어. 하는 바람에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월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찬열은 오래전부터 경수를 눈여겨봤다. 경수가 월란을 잘 부탁한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고, 그래서 경수가 행복하다면 자신도 웃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인연은 틀어져 두 사람을 홍류원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경수는 찬열이 그토록 충성하는 종 인의 사람이 되었다. 찬열은 절대 경수에게 감정을 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군에 대한 배반이요, 경 수에 대한 모욕이다. 과거의 실타래를 끊자 현실로 돌아왔다. 어사대 옥사는 들창을 막지 않아 밖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순금사는 나무판자로 못질해놔서 밤하 늘이 가려졌다. 그래도 찬열은 하늘이 있을 자리를 향해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살고자 하면 살 수도 있는 목숨이다. 버틴다면 폐하께서는 능히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경수가 아닌 김종인을 택하기로 했다. 종인의 손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 찬열은 종인을 만난 순간부터 그를 위해서라면 기쁘게 목숨을 내놓기로 다짐했다. 저들이 자신을 지목한 것은 종인을 압박하여 조정에 분탕질을 놓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은 저들의 그물망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그물을 찢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뒤늦게 그물을 찢었을 땐 보잘것없는 자신 대신 종인의 모든 것, 나아가 나라의 발전이 백 년은 퇴 보할 위험이 따랐다. 나 하나를 살리고자 폐하께서 그런 가치 있는 것들을 포기해선 안 되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자신으로 인해 멸문의 화를 입을 부모님과 역시 자신 때문에 상심할 경 수다.

218 하지만 찬열은 종인이 자신의 부모님만큼은 살려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그가 빈 소원은 그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종인이 자신의 부모를 살림으로써 벗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방법이기도 했다. 찬열은 경수를 원하였고 그의 행복을 바랐다. 그러나 모두 때를 놓쳐 후회할 일들이다. 이제는 종인이 아니면 경수 또한 즐겁지 않음을 안다. 경수를 위해서라도 종인을 살게 하고 종인이 살아야 경수가 꽃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밖에 있는가? 뭐요? 미안하네만 부탁 좀 들어줄 수 있겠는가? 부탁이라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머지않아 스러질 목숨, 지필묵 좀 빌리는 게 어렵겠나? 잠시만 기다리시오. 찬열은 어둠에 기대었다. 옥졸이 오는 동안은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경수는 의경궁에 나와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기도 했고 종인과 찬열의 상태 가 걱정되어 더는 관주성에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홍만립 등을 따라 의경궁에 딸린 예문관으로 향하였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밖에선 차가운 눈발이 흩날렸다. 경수는 제발 눈이 오지 않길 바랐다. 눈이 오면 기온이 내려가고 강산이 언다. 그러면 남간에 갇힌 박우헌과 찬열은 더욱 버티기 어려워질 것이다. 따뜻한 이불이라도 한 채 가져다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경을 칠 수 있다. 마음에 무거운 추가 매달린 듯 한없이 가라앉았다. 점심을 먹고 나자 추국청에서 마지막 추국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종인은 처소에서 며칠째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후도 근래 곡기를 끊고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았다. 궁이 뒤숭숭하고 일 촉즉발인 듯 매우 위태로운 분위기를 이어 나갔다. 신시 무렵에 문랑들이 기록한 추안( 推 案 ) * 이 종인의 처소로 전달되었다. 그때까지도 눈송이가 휘날 렸는데 그새 궁궐 곳곳에 도탑게 쌓였다. 경수는 깨끗한 흰 눈에 시선을 던지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어 깨가 몹시 시렸으나 둥글게 몸을 말지는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황제의 처소로 몰래 염탐을 갔던 송인직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사색이 되어 안으로 들어왔다. 초 조하게 기다리던 경수가 그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안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임제관이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송인직이 눈알을 굴리며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임제관이 인상을 팍 쓰며 무슨 일이냐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 그것이. 말끝을 흐리던 송인직이 눈을 질끈 감고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무위장군의 자백을 받은 추안이 폐하께 상달되었고 폐하께서 그것을 보시더니 노발대발하셨답니 다. 대신들에게 오늘 안으로 어떤 형이 합당할지 의논하여 올리라고. 아아. 경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신음이 터졌다. 그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예문관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곧장 황제가 머무는 처소로 향하였다.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선진들에게 궁 안의 위치를 들은 적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아무렇게나 달렸다. 꼭 미친 사람 같았다. * 죄인을 심문한 기록

219 하지만 그는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찬열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대역죄는 무조건 사형이다. 교수형, 참형, 거열형, 사사 등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죽음을 면할 순 없다. 어떤 것도 경수는 원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찬열이 저지른 죄가 아니다. 누구보다 종인을 믿었 기에 당연히 찬열이 웃는 낯으로 경수를 다시 보러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각에 도착한 경수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시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네. 한 번만 뵙게 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시끄럽다! 경수는 별수 없이 눈 쌓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옷자락이 젖는 줄도 모르고 종인을 향하 여 외쳤다. 폐하! 박찬열을 살려 주십시오! 찬열의 누명을 벗겨 주십시오! 경수가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습윤하게 젖은 속눈썹과 아롱진 눈물로 시야가 흐렸지만 목울대에서 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찬열을 살려 달라 애원하는 말이 쏟아졌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찬열이는 죄가 없습니다! 소리를 빽빽 지르니 지나가던 궁인들이 경수를 보며 속닥거렸고 뒤따라왔던 송인직이 경악하여 오 도 가도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만 봤다. 제게 약조하셨잖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찬열을 살려 주시겠다고. 흐흑. 눈밭에 엎드려 읍소하는 경수의 이야기가 하개를 통해 종인에게 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개가 다시 마당으로 나오더니 몹시 곤란한 듯, 그러나 짐짓 엄하게 말했다. 도 검열. 예서 이러지 말고 그만 돌아가시게. 폐하께서 계신 곳에서 이 무슨 누태인가? 하 공공! 폐하께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찬열이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요. 누군가 그 친구를 참소 한 것입니다. 누구보다 폐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허니 폐하께 죄 없는 찬열이를 살려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흐린 하늘과 흩날리는 눈. 잿빛 풍경 속에서 경수는 하개의 관복 자락을 붙들고 오열하였다. 국법이 지엄하고 물증이 확연하네. 폐하께서 감정에 휩쓸려 일을 처리하는 분도 아니신데 도 검열 은 어찌 폐하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을 하라 하는가? 목숨 바쳐 나라와 폐하께 충성한 사람입니다. 그런 찬열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죄인의 입에서 모든 정황이 실토되었는데 인제 와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인가? 공연히 주청을 올리 다가 경치지 말고 얼른 돌아가시게. 소신 도경수, 폐하께 간곡히 비나이다! 부디 찬열의 무죄와 음모의 배후를 밝혀 주십시오! 도 검열! 차라리 소신의 목숨을 거두시고 찬열이를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경수가 요지부동이자 하개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경수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소용이 있을까 봐 늘 가지고 다니는 단도였다. 그것을 손에 쥔 경수는 그대로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께에 닿았 다. 소신이 이리 간절히 부탁하오니 박찬열을 살려 주십시오! 찬열의 무죄를 증명하라시면 소신의 머 리카락을 자르겠습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 身 體 髮 膚 受 之 父 母 )라. 그러나 경수는 과감하게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눈물 어린 표정에 결기를 싣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단도로 한 움큼 잘라냈다. 순식간에 검은색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쥐가 파먹은 듯 제멋대로 잘린 그것은, 반은 허리께에 그대로 있었고 반은 어깨 근처에서 살랑거렸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송인직이 경악하여 예문관으로 달려갔다.

220 폐하! 처분을 거두시고 찬열의 사정을 살펴 주십시오! 누가 이 같은 흉계를 꾸몄는지 밝히셔야 합 니다! 경수는 다시 울면서 돌바닥에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단 두 번 만에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살려 주십시오! 찬열이를 살려 주십시오! 경수에게 찬열은 내세에서라도 은혜를 갚아야 할 은인이요, 소중한 지기이자 변할 수 없는 첫정이 다. 친혈육과도 같은 그가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게 생겼으니 무엇이든 못 내어줄까. 그러나 비참하고 을씨년스러운 마음에 하릴없이 말라붙은 줄 알았던 눈물만 쏟아지니 이를 어이하랴. 폐하, 부디 소신의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한 번만 소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쿵쿵 내리찍는 이마는 계속 살이 터졌고 피가 멈추지 않았다. 날은 추워 그의 귀와 코끝은 새빨갛 게 변한 지 오래. 게다가 이마에서는 붉은 선혈이 비쳤으니 기괴한 홍안( 紅 顔 ) 이 따로 없었다. 끝끝내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경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목이 쉬도록 찬열의 무죄를 외쳤지 만 종인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얼어가는 경수를 외면했다. 그가 눈밭에 머리를 박은 자리가 움푹 팼다.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내린 손은 눈 속에 파묻혀 붉게 얼어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부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찬열이를 살리셔야 합니다. 제게, 소신과의 약조를. 도 검열! 혼절한 경수의 주위로 마침맞게 당도한 송인직과 예문관 선진들이 모여들었다. 찬열아! 무엇을 그리 끌어안고 있느냐? 천상의 꽃입니다. 난생처음 보는 검보라색 꽃을 더미로 끌어안은 아들에게 엄씨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아들에게 가까워지지 않아 엄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나뿐인 금지옥엽은 환히 웃으며 꽃다발을 끌어안고 즐거워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의 별천지다. 풍성한 흰 구름이 안개처럼 자욱하고 도처에 사계의 꽃이 중구난방인 듯, 질서정연한 듯 만발하였다. 앞에는 검은색 현판이 걸린 커다란 누각이 하나 있었는데 현판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었다. 얘. 걸음이 너무 빠르구나. 어미는 아무리 해도 네 걸음을 따라잡기 어려우니 조금만 쉬었다 가지 않으련? 그럼 여기서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소자가 먼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얼른 다녀오너라. 그렇게 떠난 아들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해진 엄씨가 뒤늦게 수상한 기색에 자리를 박 차고 일어섰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붕괴하듯 사라지고 말았 다. 엄씨는 놀라 누각이 서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찬열이가 나오지 않았는데. 우리 아들이 아직 저 안에 있는데! 찬열아! 찬열아!! 목청이 터지도록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엄씨는 이부자리를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소슬한 기운이 방 안에 자욱했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엄씨의 거친 숨소리만이 적막한 방 안을 메웠다.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엄씨는 후루루 가슴을 쓸어내렸다. 꿈이다. 천만다행이로다. 그러나 문득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긴 듯 아스스 소름이 끼쳤다. 엄씨가 잔기침을 토하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소복 차림으로 내당 밖을 나오니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라 사위가 어둑어둑하였다. 희붐

221 한 빛조차 없었으나 걸어놓은 상등은 고요히 마당을 비추었다. 엄씨는 순금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꿈자리가 뒤숭숭했으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옥바라지를 하러 가야겠다. 찬열이 싫어해도 별수 없었다. 하지만 엄씨는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잊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남편과 아들이 고변으로 하옥 되어 순금사로 압송된 것을. 어사대 감옥을 떠나 차디찬 냉골 금부의 남간에 갇혀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덕분에 주변은 금위군이 둘러싸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었다. 이내 엄씨가 기둥에 기대며 흐느끼 기 시작했다. 도경수는? 내의원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나이다. 짐의 어명도 전하였느냐? 예. 몸이 좋지 않을 테니 당분간 입궁할 필요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잘하였다. 무뚝뚝하게 대꾸한 것과는 달리 종인은 자괴감에 사로잡혀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경수가 자해하고 상심한 것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제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개가 속이 상하여 종인을 바라보았다. 주군은 바로 이 심란하고 번잡한 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 을 터. 하여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처소 안을 왔다 갔다 한 것이리라. 새벽이 깊사옵니다. 삼경을 넘겼사오니 이만 침수에 드소서. 벌써 여러 날 제대로 눕지도 못하셨나이다. 이러시면 탈을 잡습니다. 허니 어서 침수에, 하개. 예, 폐하.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구나. 종인이 거의 묵음으로 중얼거렸다. 음성에 울먹이는 기색이 있어 하개가 무릎을 꿇으며 폐하! 하 고 울부짖었다. 그때, 김 상궁이 밖에서 아뢰었다. 폐하. 첨원사께서 입시를 청하시옵니다. 들여라. 종종걸음으로 첨원사가 안에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종인이 급히 눈물을 거두고 무슨 일이냐고 물 었다.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여기서 더 놀라야 할 일이 또 있소? 그것이. 조금 전 순금사에서 급전이 당도했사온데. 답답하니 시원히 말하시오. 죄인 박찬열이, 옥중에서 자결하였사옵니다. 폐하. 시신을 수습하라 이르고 첨원사는 아침에 다시 들도록 하시오. 허, 허면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첨원사가 나가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처소 안에 싸늘한 적막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온돌을 켜고 화로에 숯을 던져 넣었지만 방 안의 한기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침침하게 밝힌 촛불만이 미친 듯이 날뛰며 타올랐다.

222 끔찍한 정적을 가르며 종인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하개. 예. 찬열이 죽었다는구나. 폐하. 찬열이 죽었구나. 하개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 아이가 등신불이 되길 바란 것은 아니다. 헌데 짐이 못나서 하나뿐인 벗을 잡아먹고 말았다.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폐하. 짐의 것을 넘본다고 여겨 잠시 미워한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마저 그 아이가 준 것인데. 끝내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하는군. 종인은 얼빠진 사람 같았다. 침전에 불을 더 데워 주겠느냐? 뼈가 시려 견딜 수가 없구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하개가 명을 전하러 나간 직후 종인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근래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갑자기 극심한 졸음이 쏟아졌다. 피곤한 듯 눈꺼풀을 닫자 눈처럼 하얀 침의 위로 경수가 흘린 것만큼이나 붉은 코피가 뚝뚝 떨어졌 다. 종인은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 했다. 아니, 피가 쏟아지는 줄도 몰랐다. 그는 다시 눈꺼풀을 열었다. 그리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너를 죽였구나. 짐이 너를 죽인 것이야. 대답 없는 찬열을 향한 넋두리. 절명하는 순간 너는 무슨 생각을 했느냐? 짐을 원망했느냐? 흐릿한 연기가 이내 어떤 형태를 갖추어 갔다. 두고 가는 것이 이리 많은데 네가 어찌 스스로 세상을 등졌느냐. 말쑥한 차림의 찬열이 언제나처럼 착검한 채로 당당하게 제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찬열. 어리석은 백아는 평생을 함께한 종자기에게 제문 한 글자조차 지어줄 수 없구 나.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여식을 가진 뭇 세도가들이 사위로 삼고 싶어 안달하는 박찬열. 밝은 성격 으로 주위 사람을 따뜻하게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엄격하던 사람. 내 욕심으로 네게 북망산을 건너게 했으니 앞으로 나는 무간지옥에서 살아가리. 황금색 햇살처럼 환하게 웃던 찬열. 이내 잔상이 사라지고 종인은 그대로 보료 위로 쓰러졌다. 박찬열이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는 삽시간에 세간으로 퍼져 나갔다. 박우헌이 칼을 쓴 채, 실려 나가는 아들의 시신을 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 소식은 사가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엄씨에게도 곧 전해졌다. 엄씨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고 집안은 졸지에 초상집이 되 었다. 대인파를 중심으로 모인 신료들은 조회에서 이번 일에 대한 처결을 내려줄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안색이 파리한 종인은 가까스로 조회만 소화하고 모든 일정을 파한 후 다시 태성전으로 몸을 숨겼다. 신료들이 일제히 상소를 올리자 하개가 황제의 용태를 알려 일단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사건은 오래 끌수록 좋지 않았다. 종인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소문을 전부 읽은 후 밤중에 첨원사를 불러들였다.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전교가 내려왔다. [무위장군 박찬열은 그 아비인 사예교위 박우헌과 더불어 시전 상인들의 비리를 눈감아주고, 수상 한 어음을 융통하고, 불법으로 장물을 받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였다. 또 군사들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암양하여 풍현에 주둔한 그의 사병 수가 천여 명에 이르

223 니, 이는 오직 짐의 성총을 믿고 앞에서는 아첨하고 뒤에서는 불측한 역모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박찬열은 사직을 훼손하고 은덕을 베푼 주군을 배반하려 하였으니 실로 가증스럽고 죄가 크다. 안 율하여 그 무거운 죄를 다스려야 마땅하나 죄인이 스스로 옥중에서 목숨을 끊었으니 합당한 벌을 내 리기 어렵다. 죄인이 자백한 대로 박우헌은 뇌물을 받은 죄밖에 없으므로 태형 스무 대에 처하고 관직을 삭탈할 것이나 슬하에 역괴를 길러낸 죄마저 덮을 순 없으므로 절도( 絶 島 )에 안치한다. 대저 박찬열 가문에 가해지는 형벌이 지극히 가볍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실로 합당하지 않다. 박찬 열이 짐의 잠저 때부터 배움과 희로애락을 함께하였고 군권을 넘겨주기 전까지는 오직 충성하였으며 전장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다. 따라서 부관참시하라는 말은 상궤를 벗어나므로 절대 허할 수 없다.] 40. 각비( 覺 非 ) 박우헌은 파직당하여 머나먼 섬으로 유배를 떠났고 엄씨는 사대부의 콧대 높은 마나님에서 자신의 남편이 일하던 관청의 노비로 전락하였다.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찬열은 무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길가에 던져졌다. 세도가 부럽지 않던 위풍당당한 박씨 가문은 머지않아 역사의 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으리으리하던 사가를 저택( 瀦 宅 ) * 하라는 명령도 함께 떨어진 탓이다. 일을 다스리고 나니 어느덧 섣달그믐이었다. 으레 이때는 궁궐에서 나례 의식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의 복을 빌며 귀신을 쫓았다. 다들 떠들썩하고 흥겨워야 마땅한 밤이었다. 하지만 경수는 제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도명정과 윤씨 부인 이 몹시 걱정하며 아들을 달래려 애썼지만 걸쇠를 채운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방 안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김질 하며 머릿 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리고 엎드려 울었다. 이마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아 아주 희미한 자국만이 남았다. 그러나 마음에 난 상처는 팔수록 피가 흘러 어느덧 상강을 뒤덮을 정도였다. 면경도 들여다보지 않아 자신이 얼마나 초췌하고 볼품없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잘려나간 머리카 락은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고 윤씨의 성화로 때 되면 갈아입는 옷은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더는 흘릴 눈물이 없으리라고 여길 때면 찬열을 떠올리며 다시금 슬픔에 잠겼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그의 첫인상은 미소로 바뀌어 경수의 머릿속을 배회하였다. 유쾌하다 못해 꺽꺽 울듯이 웃던 웃음소리도 그리웠다. 돌아보면 경수야. 어딜 가는 거냐? 내가 도와주련? 할 것만 같았다. 낮고 진중하던 목소리와 검과 말고삐를 쥐느라 굳은살이 박인 두툼한 손도 생각났다. 찬열의 모든 것이 편린이 되어 흩어졌다가 눈물을 접착제 삼아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그러나 완성 된 멋진 모습은 이내 먼지를 뿜어내며 부서지고 말았다. 찬열은 더는 이곳에 없었다. 경수는 찬열이 자결했다던 그날 밤, 자신을 찾아온 순금사 관비에게서 받은 서신 한 장을 펼쳤다. 얼마나 펼쳐보았는지 깨끗하던 종이는 며칠 안 되어 너덜너덜했고 눈물이 번져 여기저기 얽었다. 찬열의 필체가 고통스럽게 외쳤다. [둥둥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누나. 저승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어야 하나.] ** 아아. 비( 悲 )에 젖은 낮은 탄성이 터졌다. * 대역 죄인의 집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듦 ** 성삼문, 절명시( 絶 命 詩 )

224 피로 쓴 비탄의 시가 경수의 가슴에 커다란 수파를 만들었다. 그 차디찬 남간에서 마지막을 장식해 야 했던 고통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찬열에 대한 미안함과 절절한 그리움은 이내 얼굴을 바꾸어 김종인에 대한 분노로 번졌다. 경수는 찬열을 살리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약조를 지키지 않은, 아니 자신을 외면하기까지 한 김종인을 용 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잔혹한 황제 였다. 경수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고 연모를 논하던 사내가 아니었다. 본디 사내의 정이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꽃과 다를 바 없지 않던가. 그런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그가 하는 말을 다 진실이라 믿으며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니 자신 의 꼴이 어찌나 우스운지 모른다. 그는 그저 권력에 눈이 멀어 친형제처럼 자란 벗을 사지로 몰아넣은 야차다. 끔찍하구나. 그 앞에서 잠시나마 계집처럼 낭만과 봄을 꿈꾸다니. 남에게 기대지도 않던 내가 어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까? 경수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즈막 허리춤에 차고 있던 향집노리개를 풀 어 함에 넣은 후 장롱 깊숙한 곳에 처박아 버렸다. 그 함에는 종인이 고야정에서 마음을 전하던 날 주었던 숙비의 산호 요패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경수는 두 번 다신 함을 꺼내보지 않을 작정으로 이불과 옷감으로 꼭꼭 덮은 후 농문을 쾅 닫았다. 도처에 종인이 시도 때도 없이 내렸던 패물과 옷감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 내다 버리고 싶었 으나 황제가 내린 물건을 함부로 했다가 공연히 책잡히고 싶진 않았다. 오냐, 간직해 주마. 다만 거기서 곰팡이가 피든 녹이 슬든, 더는 내 알 바 아니다. 밖으로 나갔다. 타는 듯한 갈증이 났고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박찬열이 그리 허망하게 찍혀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준면은 탐스러운 동백꽃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살살 털었다. 그는 그릇에 눈을 담아 보글보글 탕수가 끓는 별채로 가져왔다. 수월당 별채엔 모처럼 종대가 와 있었다. 종친도 아닌 자를 그 나이에 당상관까지 앉히려 했을 정도면 굄이 보통이 아니었을 터. 유년기를 같이 보내 폐하께서 벗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형님. 저는 이것이 시작일까 봐 무섭고 두렵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고졸한 멋이 돋보이는 다구( 茶 具 )가 늘어서 있었다. 준면은 도금한 철병에 꽃 위에 앉았던 눈을 탈탈 털어 넣었다. 눈이 사르르 녹더니 반쯤 끓인 물과 융합되었다. 금상이 큰 실수를 했어. 적을 얕잡아 본 대가를 자신의 수족으로 치르다니. 대통에 담은 말차를 차칙으로 움푹 퍼서 질감 있는 다기에 살살 넣는다. 곧게 뻗은 콧날 때문인지 준면은 다소 무심해 보이기도 했다. 종대는 그런 형님을 힐끗 한 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준면은 희미한 미소로 종대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잔에도 말차를 넣었다. 무엇이? 태후가 이토록 치밀할 줄은 몰랐습니다. 곁에 있으면서도 여태 몰랐더냐? 온화한 미소 뒤에 날카로운 비수를 감춘 사람이다. 박찬열이 역심을 품었다는 사실에 민심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반은 보이는 것을 믿고 반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믿는 눈치죠. 일이 있은 후 폐하께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셔서 뭇 사람들의 추측을 낳는 것 같습니다. 바글바글 끓은 탕수를 백자 숙우에 한 김 식힌 후, 준면은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찻잔에 조르륵 물 을 따랐다. 그윽한 다향이 꽃향기처럼 번졌다. 종대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준면은 무서울 정도로 깨끗한

225 표정이라 새삼 그의 심장이 강철이다 싶었다. 어린 나이에 저승 문턱을 오가는 끔찍한 일을 겪은 탓 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일이 터지기 전에 폐하께서 절 따로 불러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습니다. 금상이? 몹시 의외라는 듯 반문한 어조에는 희미한 날이 서 있었다. 예. 뭔가 계획 중이라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말에 따랐는데 일이 이렇게 틀어져서 저 도 당황스럽습니다. 그 아이가 은연중에 널 챙겼구나. 아무래도 제가 태후에게 화를 입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네 생일에 숙비의 칠현금을 보낼 때부터 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최근 폐하께서 저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긴 하셨죠. 어쨌거나 누구보다 상심하셨을 텐데 곁 에서 위로조차 해드릴 수 없어서 착잡합니다. 하개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천자 곁에 흉금을 털어놓을 자가 태감뿐이라니요. 폐하께서 지독하게 고적하실 것입니다. 차를 들겠느냐? 준면이 찻잔을 내밀었다. 종대는 다기를 받았다. 준면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주동자인 박찬열 일가가 풍비박산이 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살생부에 이름이 적혔던 자들이 제대로 역공을 펼쳤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평소 박우헌 부자와 교 분이 있거나 박찬열을 칭송했던 자들을 당파와 관계없이 모조리 역도로 몰아넣었다. 특히 살생부를 작성한 일에 지난 대과와 별시에서 입격한 신래들, 각 문하의 낭청, 예문관 사관들까 지 끼어 있다는 것을 알고 대대적인 표적 수사까지 감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살생부는 미완성 상태였고 누가 작성했는지 알 만한 단초가 없어 수사는 흐지부지 마무리되 었다. 다만 한동안 얌전히 굴던 대인파가 혹독한 위엄을 내보였으므로 개혁에 대한 의지나 황제를 향 한 믿음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훅 꺼지고 말았다. 종인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종인을 지지하는 소인파가 온전히 조정에서 쓸려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 은 종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종인은 꺼져가는 불씨를 보호하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는 이번 일로 뼈아픈 교훈을 얻었고 찬열의 죽음을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려면 생각한 것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성급한 결정과 오만한 판단이 박찬열을 죽음으로 몰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고 적들의 면면을 신랄하게 파악했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보안에 안이했고 주변인을 단속하지 못한 자신의 죄가 컸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못난 면만 드러나는지라 종인은 한없이 괴롭고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비통한 심정에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찬열은 주군의 안녕과 경수의 행복을 당부하였다. 사기는 한풀 꺾였으나 계획을 아예 철회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진 불덩이가 있고 찬열을 먹이 삼아 저들의 잇속을 채운 것에 대한 분노가 타오르고 있다. 종인은 찬열과 경수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연의 역사가 자신 때문에 한없이 퇴보하는 것도 두고 볼 순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찬열의 죽음을 애도해도 모자란 지금은 조급해하며 스스로 일을 그 르치고 싶진 않았다. 천천히 하자.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수습해야 하니까. 밖에 있느냐? 문이 열리고 하개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226 찾으셨나이까? 오늘이 며칠인가? 섣달그믐이옵니다. 짐이 칩거한 지는 며칠이나 되었더냐? 상참 외에 모든 일정을 파하신 지 꼬박 보름째이십니다. 조정은 어찌 돌아가더냐? 사도와 무정후를 필두로 대인파의 모든 권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나이다. 볼 만하겠구나. 짧게 코웃음을 덧붙였다. 짐의 실책으로 친정을 시작하기 전보다 더 못한 상태가 되다니. 어리석었다. 짐이 어리석었어. 그런 말씀 마소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아니겠나이까? 종인은 자조적으로 실소를 흘렸다. 내일부터 국정을 돌볼 것이다. 조회를 비롯하여 차대, 윤대, 경연은 물론이거니와 주강과 석강까지 빠짐없이 참석하겠다. 폐하의 옥체가 아직 미령하시온데 그리 무리하시면. 종인이 사느랗게 쏘아보자 하개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에 격정적으로 몰두하여 자신을 지치게 하려 는 작정임이 분명하다. 박찬열이 자결하였던 밤에는 며칠째 숙면을 이루지 못해 옥체에서 피가 쏟아지지 않았던가. 그 이 후로 섭생에 특히 조심하며 안정을 취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주군의 심사에 지옥길이 열려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경수의 몸이 나았는지 확인하고 완쾌하였거든 다시 입궁하라 전하라. 산막은 늘 그렇듯 평화롭고 고요하다. 겨울의 산새가 이따금 짝을 찾는 듯 낮게 우짖을 뿐, 눈 내린 산은 온통 적막을 휘감고 있었다. 가라앉은 구름과 시린 공기가 한데 어우러져 다시 눈을 뿌릴 것처 럼 보였다. 산막을 제대로 찾지 않은 지 일 년 반. 어린 시절부터 늘 봐왔던 풍경과 산막의 정취는 모두 그대 로인데 그 시절 이곳을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던 아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재가 되었다. 자신들만의 비밀 장소가 생겼다며 좋아하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정작 이곳을 만들었던 사람 중 남 은 이는 도경수뿐이다. 쓸쓸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청년을 삼켰다. 경수는 눈밭에 작은 발자국을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산막 안에 비치한 싸리 빗자루를 들고 나와 묵묵히 앞마당을 쓸었다. 양옆으로 눈으로 된 둔덕이 만들어지고 가운데에 좁다란 길이 났다. 야생매화와 벚꽃이 있던 자리에는 못 온 사이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병꽃나무와 꺾인 초목 몇 그루 만이 자리했다. 경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화로를 살핀 후 낫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젠 매화를 함께 볼 사람도 없고 벚꽃의 아름다움 을 논할 가족도 없다. 더는 이곳에 있어 봐야 쓸모없는 것. 무참하게 꺾인 나무를 베어 화로 안에 툭툭 던져 불쏘시개로 삼았다. 이내 불망울이 흩날리며 장작 이 타기 시작했다. 곁에서 불을 쬘 겨를도 없이 경수는 먼지 쌓인 산막 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책상도 걸 레로 닦고 헝클어진 책도 한쪽에 잘 세웠다. 그러다 망가진 문갑 안에서 낡은 종이 상자를 발견했는 데 얼룩덜룩 붙여 두었던 색지가 빛깔이 다 바래 거무튀튀했다. 경수는 걸레를 내려놓고 엉덩이를 붙인 후 상자를 열어 보았다. 어린 시절 셋이서 가지고 놀던 장 난감이 들어 있었다. 딱총나무로 만든 새총, 참나무 팽이, 줄 끊어진 방패연, 구슬, 용도를 알 수 없는 괴상한 모양의 나 무토막, 강가에서 주웠던 조약돌, 헝겊으로 꿰맨 인형 등등.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추억이 잔뜩 쌓여

227 고스란히 세월을 먹었다. 자라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인제 와 보니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은 것이다. 경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손끝에 닿는 감촉마다 천진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한동안 미동도 안 하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흐려지며 닭 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한참 뒤 경수는 상자를 수습하고 청소를 마저 끝냈다. 그는 찬열이 좋아했던 장난감 칼 한 자루를 월란의 유품이 놓인 단상에 올렸다. 양옆의 촛대는 다시금 검은 연기를 토하며 타올랐다. 작년에도 올해도 넌 내게 생일 선물을 주지 않았어. 출정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걸 선물하고 싶다 고 했었지? 이토록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데, 다오. 난 너의 안녕을 염원하니 내게 그걸 다오. 그럼에도 삶이 살아지는 것이 끔찍하다. 주겠다고 했잖아. 내게 주겠다고! 경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감히 행복을 꿈꿔서 이렇게 됐어.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해서 이 지경이 된 거 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만 욕심에 눈이 멀었어. 청년은 가녀린 손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쥐며 흐느꼈다. 월란을 그리 보낸 것도 모자라 너마저. 이런 내가 무슨 낯이 있어서 저승에 들겠어? 나 같은 것이 살아갈 가치나 있을까? 대답해.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내게 제발 답을 내려다오! 자신을 지독하게 혐오하고 꾸짖어도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황량한 바람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뿐이다. 경수는 슬픔에 겨워 몸조차 가눌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찬열이 제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덤에 절도 올릴 수 없다. 그의 백골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다면 염치가 있으련만. 가산을 적몰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일가에 무슨 낯이 있어 찾아가겠는가. 자신 때문에 소중한 두 사람이 절명했다고 믿으며 경수는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신궁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허. 어찌 그리 경박한 웃음을 내는가. 요즘처럼 궁중이 두루두루 안녕한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능글능글 웃으면서 장문견이 다시 말을 보탰다. 하여튼 마마께선 아둔한 신의 머리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술책가이십니다! 사마의나 제갈량이 보 았다면 틀림없이 여중호걸이라며 경탄하였을 것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시게. 진심입니다. 어찌 그리 감쪽같은 계획을 세우셨는지 곱씹을수록 신통방통해요. 장문견은 만면에 흥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우매한 이 아우에게도 비결 좀 알려 주십시오. 책을 많이 읽으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충직한 사람 을 곁에 두어야 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높은 곳에 섰다고 느꼈을 때 희망이 꺾이면 재기하기 어렵다네. 뜻 모를 말에 장문견은 어깨를 으쓱했다. 인제 와 하는 말이지마는, 왜 하필 박찬열이었습니까? 신은 그 친구가 영 아깝더군요. 그 아비가 거슬리긴 했어도 재주도 재주거니와 일단 우리 문중의 사람이지 않았습니까? 나무가 지나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으면 가장 먼저 벼락을 맞는 법일세. 예? 그 재주만 생각하면 나도 여전히 아까우이. 허나 그런 재주를 지닌 자가 어디 박찬열 하나뿐이겠

228 는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귀재였던지라. 주상의 독주를 막으려면 주상이 가장 아끼는 것을 쳐내 본을 보여야 했네. 하나를 희생하여 주상 을 막고 조정에 평화가 깃들었으니 다행이지. 태후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요즘 금상이 몹시 괴로워 보이더군요. 사람이 초췌하고 시르죽은 것이 불과 몇 달 전만 해 도 우릴 때려잡겠다고 씩씩대던 잘난 황제가 아니더이다. 그것이 어디 박찬열 때문만이겠나? 예?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신지. 태후는 우아하게 웃었다. 짐작하겠는가? 활공하던 새에게 독 바른 화살을 날릴 때, 사냥꾼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누님이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조금만 더 얘기를 직설적으로 해 준다면 좋겠다고, 장문견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반드시 저 새를 잡아야만 한다고 이를 갈았을 것이네. 굶주린 사냥꾼의 눈에는 오직 그 새만 보이는 법. 사냥꾼은 동개에 남은 단 한 대의 화살로 새를 떨어뜨려 다시 미끼로 삼은 후 살진 짐승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던진다네. 그러면 짐승이 피 냄새를 맡고 내려와 독을 먹은 새를 배 속에 넣지. 그렇게, 사냥꾼은 죽을 힘을 다해 새를 사냥하고 마지막에 는 새 따위에 비할 수 없는 더 큰 짐승을 얻는 걸세. 태후의 치밀한 책략에 장문견은 감탄했다. 그는 존경의 뜻을 가득 담아 제 누님을 바라보았다. 과연 태후마마십니다. 경외감이 절로 드옵니다! 두고 보시게. 박찬열은 고작 신호탄일 뿐이니. 허면 또 다른 뭔가를 준비하셨단 말씀이십니까? 태후가 왼고개를 치며 답했다. 이미 박찬열을 쳐냈는데 다른 데 손을 쓸 겨를이 있겠나? 모든 것은 연결된 것처럼 느긋하게 굴러 갈 뿐이네. 주상의 앞에 놓인 지옥이 이제 막 입구를 열었으니, 앞으로 어린 주상께서 그 가시밭길을 어찌 걸 으실지 참으로 궁금하군. 41. 잔흔( 殘 痕 ) 아들이 다시 방에 처박혀 있자 도명정은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오후에 궁 에서 사람이 나와 경수의 몸이 다 나았으면 다시 등청하라는 말을 하고 간 후였다. 윤씨가 단호한 남 편을 보고 집안에 사달이 나겠구나 싶어 얼른 연수를 데리고 안방의 불을 껐다. 도명정이 문을 열라고 세 번을 청했다. 경수가 매가리 없는 몰골을 드러냈다. 파리한 안색에는 핏기 조차 찾아볼 수 없는데 눈매가 시원하게 트여 더욱 아파 보였다. 명정을 아랫목에 앉힌 후 경수는 멍하게 앉았다. 명정이 그런 아들을 쳐다보며 따끔하게 호통했다. 비록 못난 아비이나 내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경수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부친의 얼굴에 불그림자가 졌다. 언제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을 셈이냐? 네가 아직 조정의 관리임을 잊었더냐! 슬픔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네가 어찌 군왕의 곁에서 정사를 돌본다는 것이냐? 아무리 온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들어갔다고는 하나 너는 역사를 직필하는 사관이다. 백성들의 혈세를 녹으로 삼는 관 리가 수신에 소홀하여 소임을 다하지 못함은 도리어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임을 모르느냐!

229 너만 슬프더냐? 세상에 아끼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비단 너뿐이더냐? 세상이 너를 마구잡이로 짓칠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주저앉아 허송세월만 보낼 참이냐? 정녕 네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냐?! 잔혹한 세상에 너무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었어요! 경수가 울부짖었다. 소자라고 왜 다시 일어서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라고 이것이 능사가 아님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경수야. 하지만 아버님도 아시잖아요. 세상은 소자가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요. 꿈꾸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소자는 어떡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소자, 아무리 슬픔을 이기려 해도 밀려오는 파도에 먹히는 것입니다. 일어설 방 법도, 의지도 없는데 여기서 제가 더 무엇을 해야 하죠? 아들의 아픔에 지극히 공감하기에 더욱 내버려둘 수 없다. 명정은 착잡했다. 한때 사위가 될 뻔했던 아이이고 집안과는 선대부터 왕래하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가세가 기운 후로는 찬열에게 신세 진 일이 적지 않아 내심 고맙고도 미안한 아이였다. 좋은 지기였던 우헌이 절도에 유배를 가고, 속물이긴 했어도 호방한 성격이던 그 부인은 관노로 전 락했다. 그 집 사정이야 곱씹을수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아이들이다. 그는 경수마저 잃을까 두려웠다. 월란을 앞세운 마당에 찬열 때문에 경수마저 요절하게 하지는 않 을 것이다. 아들아. 네게는 네 가슴에 박힌 가시만 보이고 아비와 어미의 가슴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은 아 니 보이느냐. 명정이 눈시울을 붉혔다. 항상 과묵해서 월란이 스러졌을 때조차 눈물 한 방울 아니 흘리던 분이다. 그런 아버지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갈쌍거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경수는 도리질을 치며 제 부친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울지 마세요, 아버님. 소자가 잘못하였습니다. 눈물을 거두세요. 세상천지에 기막힌 일이 벌어지지 않는 곳이 있다더냐.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다 사람 사는 곳인 데 이보다 더한 비극을 견디는 자가 없겠느냐? 경수는 부친에게 면목없고 죄송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네게 뭔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아비가 못나 네 누이를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보냈다. 너마저 저승으로 든다면 견딜 수 없을 거다. 하여 네가 슬픔을 털고 일어나길 바라는 것뿐이다. 자식을 둘이 나 가슴에 묻을 순 없지 않으냐? 죄송합니다. 소자가 잘못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아들아. 자식 눈에 눈물이 어리면 부모 가슴엔 장대비가 내리는 법이니라. 부자는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었다. 그날 밤, 경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눈물이 서러웠고 자신의 처지가 고달팠다. 시간을 돌린다면 절대 홍류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진왕이라고 속인 김종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 았을 것이다. 자신궁의 끄나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인이 개혁을 하겠다고 할 때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늘에 있는 초월적 존재뿐. 인세( 人 世 )의 중생 들은 선택하는 것이 고작이다. 해가 바뀌어 달도 한 뼘 더 기울었다. 반점이 박힌 은색 달은 휘영청 떠올라 누리를 비추었다. 경수

230 는 그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밖에 한참이나 서 있었지만 추운 줄도 몰랐다. 단 한 가지 생각이 뇌를 꽉 채웠다. 박찬열을 죽인 것은 이 나라의 황제다. 박찬열을 죽게 내버려 둔 사람은, 바로 김종인이다. 김종인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찬열을 살릴 수도 있었다. 처소 앞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바 닥에 이마까지 짓이겼지만, 그는 끝내 읍소하는 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미를 죽인 태후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 마음은 황폐하고 어떤 꽃도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 어리석게도 그곳에 꽃이 필 것이라고, 한때 였지만 진심으로 그를 마음에 담고 기대했던 자신이 사무치게 역겹다. 그로 인해 찬열에게 알게 모르 게 상처 주었을 것만 생각하면 흐르는 강물에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다. 당신에게 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도 같은 달을 보고 있다면 듣고 있으리라. 찬열처럼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바둑알이었습니까? 장기판의 말이었습니까? 대답 없는 달을 경수는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제게 진심이었던 적이 있기나 했습니까? 눈을 맞추었을 때만큼은 진심이셨습니 까? 어차피 전부 복수를 위한 큰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지난날 자신에게 잘해 준 것도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저도 찬열과 같은 신세가 되겠지요. 달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기적이고 신의도 모르는 분에게 일생을 의지하려 했던 제가 어리석었어요. 이리 빨리 꿈에서 깨 게 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해야 하나요? 문득 자신의 해쓱한 볼을 만져보았다. 어사대 옥사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찬열처럼 살이 잔뜩 내 려 뼈가 도드라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 경수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저녁에 가족이 먹다 남은 찬밥이 가마솥에 들어 있었다. 그는 아궁이 위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손으로 왁왁 입안에 쑤셔 넣는다. 목구멍에서 모래알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경수는 묵묵히 입으로 밥을 퍼 날랐다. 딸꾹 질이 터졌다. 그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다시 억척스럽게 밥을 욱여넣었다. 희붐한 새벽녘이 되자 동네의 닭들이 울어 젖혔다. 경수는 옷깃을 추스르며 부엌에서 나왔다. 때마 침 이른 아침을 준비하러 윤씨가 방에서 나왔다. 윤씨가 경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뛰어왔다. 경수야! 네 몰골이 이게 무어냐? 밥알이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은 것을 보고 윤씨가 아연실색했다. 어머니. 경수가 얼굴에 붙은 밥알을 떼어내는 윤씨에게 나직이 말했다. 제 관복을 준비해 주십시오. 희조전에서 조참이 열렸다. 황제가 열하고도 엿새 만에 외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품계석에 좌우로 도열한 문무백관이 머리를 조아리며 옥체의 강녕함을 물었다. 황제는 서서히 나아 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윤음을 내렸다. 시립한 군관들 너머 빼곡하게 들어찬 백관이 황제에게 이런저런 안건을 아뢰었다. 황제는 역당을 잡아들이느라 궁에 빈자리가 많으니 참신한 자들을 공석에 채우라고 명하였다. 새해가 밝아진 지 이틀이나 지났지만 종인은 신년의 떠들썩함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저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쉴 틈도 없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졌다. 저녁 수라를 물리고 그간 밀린 상소에 몰두하는데 밖에서 하개가 알려왔다.

231 폐하. 예문관 사관 입시이옵니다. 오늘도 다른 검열이 들어오나 싶어 심드렁하게 들라 하라. 라며 윤허하였다. 하지만 멀리 있어도 그리움의 향기는 지울 수 없는 법. 종인은 특유의 청량한 향에 문득 고개를 들 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도경수를 본 순간, 종인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빠져 손에 쥔 상소를 떨어뜨릴 뻔하였다. 경수가 여윈 몰골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칸막이가 쳐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말없이 보따리 를 풀어 지필묵을 펼쳤다. 종인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찬열이 역모로 옥사에 갇 힌 후 꼬박 한 달여 만에 다시 보는 거였다. 보고 싶었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그러나 머릿속이 하얘져서 입조차 벙긋하기 어렵다. 종인은 역당으로 찍혀 나간 어사대 장령 한민생의 공석을 누구로 채울지 고심 중이었다. 그러다가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 짐짓 혼잣말을 던졌다. 주변에 쓸 만한 인재가 없으니 낭패로다. 백관의 풍속을 규찰하는 막중한 자리는 한시도 비울 수 없건만, 전부 그 나물에 그 밥인지라 누굴 쓸지 애매하군. 경수야. 네가 보기엔 누가 좋을 것 같으냐? 어사대에 마땅한 자가 있는지 살펴보겠느냐? 미거한 소신은 정사를 모르고 또한 사사로이 논할 수도 없으니 하문을 거두소서. 전과 똑같이 예의 바른 어조였으나 전과 달리 냉랭한 기운이 역력했다. 종인이 일순 당황하였다. 몸을 추스르는 김에 마음도 다진 줄 알았는데 못 본 새 도경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근래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네가 사관이라는 것을 잊었구나. 종인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몄다. 그간 몸이 안 좋았다고 들었다. 이젠 괜찮은 것이냐? 아팠던 적은 없다. 하물며 그 추운 날에 의경궁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도 멀쩡했다. 이마를 하도 세 게 찧어서 충격으로 혼절하긴 했으나 몸은 괜찮았다. 오히려 도경수는 몸이 안 좋으니 당분간 태성전에 들지 말라고 한 것은 황제가 아니던가?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고, 만나고자 했을 때는 매몰차게 문을 닫은 사람이 그다. 그런 황제가 뒤늦게 적 선하듯이 괜찮으냐고 묻는 것은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속마음과는 달리 경수는 건조하지만 품위 있게 대답했다. 폐하의 우로지택을 입어 소신은 아픈 곳이 없습니다. 미묘하게 거슬렸지만 종인은 그럭저럭 넘어가기로 했다. 다른 것은 모르겠다. 그냥 이리 멀쩡하게 다시 제 앞에 선 것만 해도 감사했다. 지난달 나례 연회를 보지 못해 아쉽진 않더냐? 몸이 안 좋아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재작년엔 네가 화포희를 보고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는데.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너는 희열에 찬 것 같았다. 회한과 쓸쓸함이 묻은 그림자가 종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웃어주겠느냐? 짐을 보며 웃어주지 않으련? 가족처럼 지내던 분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 아직 심기를 추스르지 못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소신의 처지를 헤아려주소서.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생기발랄하던 청년의 목소리는 윤기 없이 굳어 있었다. 봄의 풍경을 닮았던 청년의 분위기는 겨울

232 처럼 시렸다. 종인은 경수가 찬열의 죽음으로 생긴 응어리를 쉬이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반드시 살려 주겠노라고 약조했던 자는 그릇을 깨듯 약조를 저버렸고 청년이 지극 히 따르던 사람의 숨통을 끊어 놓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벌컥벌컥 치솟는 이 분노는 무엇인가. 형체를 갖추지 않은 괴물 같은 노염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찬열의 죽음은 음모였다. 또 삐걱거리는 조정에서 배후를 찾으려면 곱절의 시간이 걸린다. 청년 역 시 이것을 모르지 않을진대, 어찌하여 저리 서슬이 퍼런 냉기를 뿜는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맛보았으나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의 사정을 알아주리라고 믿었다. 남의 사정 을 잘 헤아릴 줄 아는 똑똑한 도경수라면 능히 나, 김종인의 고통을 알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폐하. 야대를 여실 시각이옵니다. 경연청으로 드시겠나이까? 하개가 알려왔다. 종인은 경수 쪽을 쳐다봤다. 폐하. 경연청으로 드시겠사옵니까?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경수는 음전하고도 깨끗한 자세로 먹을 갈았다. 종인은 울컥 치밀어 오르 는 서운함에 가만히 입술만 깨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도 따라 일어났다. 종인이 경수 앞을 지나자 경수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낭창하던 미소는 사라지고 무심하고 싸늘 한 가면이 그의 얼굴에 씌워져 있었다. 기다릴 필요 없다. 돌아오는 즉시 침수에 들 것이니 너는 이만 예문관으로 돌아가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종인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태성전을 빠져나갔다. 경수가 그가 사라진 쪽을 쳐다봤다. 표정은 담담했으나 눈빛에 전에 없던 원독이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경수의 태도는 똑같았다.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그를 오래 지켜본 사람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경수는 평온한 수면 아래서 파란을 일으켰다. 종인은 점점 그에게 질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그가 사뭇 야속하고 미웠다. 그래도 돌 아서면 그리워서 똑같이 사무적으로 응수할 순 없었다. 오랜만에 고야정에 온 종인은 설경을 감상하며 시를 필사하였다. 며칠 무리하느라 갑자기 체하는 바람에 잠깐 짬이 난 덕분이었다. 하개는 추운 날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종인은 고집스레 이곳을 찾았다. [나의 소원은 봄 강물을 맑은 봄 술로 변화시켜 만고에 우뚝한 시름의 성을 깨끗이 씻어버림일세. 시름은 절로 시름이요, 취함은 절로 취함이니 시름에 살고 취해 죽는 둘 중에 택할 수밖에.] * 글자마다 정성을 쏟았다. 삼십이 자를 천천히 쓰면서 몇 번이고 시를 음미하고 곱씹었다. 현재 종인 의 심정을 딱 나타낸 시였다. 조정에서 검열 도경수가 박찬열과 친했던 사이임을 들먹이며 조사해야 한다는 공론이 인 직후다. 친하다고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퇴짜를 놓았지만 저들이 원하면 경수에게도 파 급이 미칠 수 있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종인은 애써 웃어 보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날이 풀렸다고는 해도 어지간히 싸늘하구나. 이리 화로를 옆에 끼고 있는데도 밤이라 그런지 꽤 춥다. 숯을 더 넣겠습니다. 짐이 하마. * 서거정, 춘수( 春 愁 ) 중

233 옆에 앉아 있던 경수에게서 집게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일순 두 사람의 손이 스쳤다. 그런데 경 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빼 움츠렸다.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귀여워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표 정에선 어떤 원망과 한이 서린, 그러나 지독할 만큼 무심한 기운이 느껴졌다. 종인은 문득 불쾌했다. 그러나 화를 삼켰다. 경수가 갑자기 냉정해진 것은 의경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경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만큼 한번 목소리를 내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환 한 미소를 보였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홍류원에 네가 좋아하던 홍매화가 가득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낼 테니 함께 보러 가자꾸나. 경수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것마저 우울함이 깃들어 종인은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예문관은 요즘 조용하더냐? 임제관이란 자가 널 제법 괴롭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 모양인 것이야? 괴롭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너처럼 단정하고 영특한 아이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화는 뚝뚝 끊겼다. 마주쳐야 할 손뼉이 한쪽밖에 없어서 종인은 자신이 꼭 벽이나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언제까지 저럴 작정인지 모르겠다. 시원하게 대화로 풀어보고 싶지만 경수가 저러는 까닭은 박찬열의 일뿐이라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찬열의 죽음은 경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종인에게 충격과 상처였다. 종인은 애꿎게 덮어놓은 상처를 다시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겨우 추슬렀던 마음이 다시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올봄에는 옥명합( 玉 明 閤 ) * 으로 피접을 나가자꾸나. 내의원에서 짐의 옥체를 두고 시끄럽게 왕왕거 리니 조정에서도 행재소로 나가 심신을 다독이라 하더구나. 경수는 담백하게 앞에 놓인 서책과 종이들을 정리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경수와 그를 바라보는 종인 사이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맴돌았다. 화로에 아무리 장작을 던 져 넣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옥명합은 온천물이 좋아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어떤 피로도 금방 가시지. 다른 행궁보다 규모는 작 지만 정원이 아름답고 조용하여 번잡한 생각을 떨치기에 안성맞춤이다. 너도 그간의 일로 피곤했을 테니 그곳에서 심신을 다지는 것이 좋겠구나. 폐하의 은총을 받는데 아플 리가 있겠습니까. 근래에 네 안색이 좋지 않아서 그런다. 그 어느 때보다 강건합니다. 소신에 대한 걱정은 거두소서. 그렇구나. 그래, 네가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짐 주변에 아픈 사람이 많아 조금 예민 해졌던 모양이다. 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시니 오직 폐하의 옥체만 염려하시면 됩니다. 조롱과 걱정이 뒤섞인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참. 능주( 陵 州 )에 백창헌이라는 곳이 있는데 봄철이면 새하얀 백매화가 만발하여 절경이라는구나. 청신이 그곳 출신이라 어릴 적에 본 적이 있다던데 그 무뚝뚝한 인사가 넋을 빼고 감상할 정도였다 지.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 꽃잎에 파묻혀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라 하는 구나. 나중에 우리 둘이 한번 가보자. 백창헌이라니, 이름조차 훌륭하지 않으냐? 경수는 대답을 회피한 채 아주 기묘한 미소만 머금었다. 종인은 저것이 당신과는 가고 싶지 않다 * 행궁 중 하나

234 는 뜻임을 모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치가 빨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더는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군왕의 지위를 내세우고 싶진 않았으나 도경수의 행동이 너무 괘씸해 서 화가 치솟았다. 일개 구품 검열 주제에 황제 앞에서 저리 방약무인한 태도라니 해도 너무 하지 않 은가. 그러나 그에게 벌컥 노기를 비출 순 없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바람이 매섭구나. 짐은 하나만 더 필사하고 갈 테니 먼저 나가도록 해라. 태성전에 다시 들 필요는 없다. 피로하니 침전에 돌아가면 바로 이불에 들 것이다. 경수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숙하소서. 자신의 짐을 챙겨 쌀쌀맞게 돌아서는 경수. 그가 고야정을 나서자마자 종인은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종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앞에 놓인 용지연( 龍 池 硯 )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와장창, 거친 파열음 을 내며 벽옥색의 고급 벼루가 산산조각이 났다. 노기로 머리가 뜨거웠다. 종인은 서안의 양쪽 귀퉁이를 붙들고 씩씩거렸다. 그러다 다시금 냉철히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찬열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날 바라보던 따스하고 다정한 눈빛은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것과 같아졌다. 아니, 벌레가 아니라 관심 둘 가치조차 못 느끼는 그저 그런 돌멩이나 길가에 널린 풀 을 보는 것과 같다. 저 눈빛을 견디기 어렵다. 예전처럼 달려가 안고 싶다. 뭐든지 해 주고 싶지만 그럴 명분이 없다. 나는 너를 위해 강한 군주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여전히 누구보다 약해빠졌다.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 는 게 아무것도 없다. 손안의 모래처럼 너마저 빠져나가는구나. 종인은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 세상에 남은 자신의 편이라고는 도경수가 유일한데 정 작 하나뿐인 그가 저렇게 나오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자신의 숨결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가 도리어 숨통을 조이자 언짢고 무심했다. 종인의 복수와 경수의 행복을 위해 등신불이 된 박찬열. 그러나 그의 마지막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은하수를 사이에 둔 머나먼 별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42. 낙화난상지( 落 花 難 上 枝 ) 종인은 하개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자신궁에 문안을 오게 됐다. 찬열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태후 와 장문견의 목에 칼날을 쑤셔 박고 싶었으나 아직은 상상에 불과하다. 처절하게 깨달았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딱딱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조심했다고 여겼지 만 황태후에 비하면 자신은 한낱 하룻강아지일 뿐이었다. 종인은 태후를 향한 독기에 스스로 망가질 것만 같았다. 어서 드시지요. 종인이 자신궁 현판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멀거니 있자 하개가 채근을 놓았다. 태후를 오래도록 만나지 않았다. 문안을 올릴 때도 내관을 시켰지,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예전 에는 못해도 일곱 날에 한 번은 꼬박꼬박 자신궁에 들른 편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 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별안간 내재한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폐하. 자신궁에 이미 기별이 들어갔을 것이옵니다. 저승에는 명부시왕들이 다스리는 열 개의 지옥이 있다지? 예? 짐의 눈에는 이 앞이 시왕들의 지옥으로 보이는구나. 가슴이 철렁하여 하개의 낯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235 폐하. 자신궁에는 부는 바람에도, 귀가 있다고? 폐하. 바람이 무슨 말을 전하든 이제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 쌓아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거리 낄 것이 없다. 건조하게 웃음을 흘리고는 종인이 발길을 옮겼다. 처소는 지창마다 빼곡하게 화분이 놓여 있었다. 올 때마다 싱그러운 풀과 꽃 냄새가 가득했지만 기 쁘지는 않았다. 오늘도 태후는 분재를 앞에 두고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종인이 인사를 올리고 마련된 자리에 앉자 태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주상의 옥체가 심히 불예하다고는 들었소만 정말 용안에 핏기가 하나도 없구려. 어찌 이리 야위시 었소? 태감과 상궁은 대체 주상을 어찌 보필하였기에 살이 내려도 신경 쓰지 않았단 말이오? 모두 소자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내의원에서는요? 내의원에서도 주상이 이 지경인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게요? 그들 또한 밤낮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다만 소자가 작년에 너무도 큰일을 겪어 아직 마음이 온전 치 못합니다. 내 몸처럼 아끼던 사람이 역적이었으니 오죽하셨을꼬. 태후가 슬픈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옥체가 그러한데 예까지 걸음 해도 되시겠소? 태후마마를 뵌 지 오래되어서요. 아프다는 핑계로 효를 저버릴 순 없었습니다. 내관을 보내 매일 문후를 올리면서도 그러시는구려. 그나저나 진왕은 어찌 몇 달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는지 모르겠소. 종대는 종인의 부탁으로 여태 궁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태후는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 고 노심초사했다. 몰래 서신을 보내도 답이 없어 초조하던 차였다. 겨울이라 형님께서 몸을 사리시는 모양이지요. 마마께서 부르셨는데도 입궁하지 않았다면 필시 그 런 뜻 아니겠습니까? 마마께서 염려하실까 봐 부러 연통을 넣지 않는 것이고요. 그래서 더욱 걱정이라오. 사람을 보내 안부를 살피기도 뭐하여 잠자코 있소만 워낙 병약하니 걱정 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소자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소? 고맙구려. 감추고 있지만 은연중에 매가리가 없고 지친 듯한 꼴을 보니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웃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태후는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무겁게 입을 열 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의할 것이 있었는데 마침 잘 오셨소. 말씀하십시오. 태성전에 도 검열을 그대로 둬도 되는지 모르겠구려. 뇌리를 강타하는 기묘한 파열음에 종인의 눈썹이 슬며시 비뚤어졌다. 조정에서 별다른 말이 없었소이까? 무슨 말씀이신지 소자는 모르겠습니다. 듣자니 도경수는 역적 박찬열의 죽마고우였다고 하더이다. 그 아이가 면신례 때 선진들에게 그리 주장했고 박찬열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사람도 있다 하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경수 역시 사상이 의심스럽지 않소? 예전에 도경수가 벌을 받을 때 박찬열이 뛰어든 일도 있으니 여간 수상한 것이 아니라오. 혹 둘이 사사로이 통정하는 사이였다면, 아닙니다.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서 종인이 단칼에 선을 그었다. 박찬열이 역적이기는 하나 그는 사생활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둘이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자

236 란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경계해야 하지 않겠소? 무엇을요? 그리 가까운 사이였다면 필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을 것이고 도경수도 역심을 품고 있을지 모르니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오. 마마! 도 검열은, 박찬열은 주상의 오랜 지기이자 충신이었으나 국청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자백하고 자결을 택하였 지. 그는 배 속에 칼을 감추고 앞에서는 달콤한 말로 주상의 총기를 흐린 자요. 그런 자와 오래도록 어울리고 주상의 명성에 누를 끼치며 추문에까지 시달린 사람을 두둔하지는 않으시겠지. 태후는 고압적으로 덧붙였다. 설마, 주상께서는 다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싶으신 거요? 그만하십시오! 종인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매일 웃는 얼굴로 대하던 종인이 고함을 치자 태후는 정말 깜짝 놀라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정작 종인은 본인이 화를 냈다는 것도 몰랐다. 고인을 모욕하고 경수까지 싸잡아 찍어내려는 태후 의 행태가 심히 구역질 나는지라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주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일 듯 쳐다보는 종인. 예.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박찬열은 소자의 유일한 벗이자 충신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역심 을 품은 것은 유감이나 죄를 다스려야 한다면 소자의 잘못이 제일입니다. 그 아이를 그리 만든 것은 소 자예요. 주상. 대체 무슨, 소자가 황제이기 때문에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혈육보다 아끼던 아이를 역 적으로 만든 것은 소자라고요! 어,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구중에 담으시오?! 종인이 벌떡 일어났다. 더는 이곳에 앉아 멍청하게 태후의 세 치 혀에 농락당하고 싶지 않았다. 도경수는 건들지 마십시오. 그가 나직하고도 싸늘하게 내뱉었다. 태후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종인을 쳐다봤다. 종인이 도경수를 연모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렇게까지 보호하려 들 줄은 몰랐다. 난생처음 제 앞에서 언성을 높이면서까지 말이다. 그자가 무슨 짓을 했기에 주상께서 이러시는 거요? 마마야말로 그 아이에게 이러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뭐요? 마마께서 뽑으셨습니다. 헌데도 그리 눈엣가시처럼 느껴지십니까? 허! 주상, 내가 그 아이를 뽑다니? 대체 무슨 저의가 있으시어 그런 말씀을 하시오? 지난번에도 그 아이를 자신궁 앞마당에 꿇어 앉히셨습니다. 사관을 여염집 종자 다루듯이 하셨지 요!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박찬열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도륙하려 하십니까? 마음을 추스르지 못 했다고 말씀 올렸거늘, 다시 소자더러 애꿎은 목숨을 거두라 하시는 것입니까! 종인이 돌아서며 외쳤다. 그리 거슬리시거든! 쨍하는 괴팍한 정적. 이내 차갑게 내려앉은 한기처럼, 눈앞에서 치워드리면 될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종인이 걸음을 뗄 때마다 분노의 화염이 떨어져 나왔다.

237 그는 전에 없이 난폭한 발걸음으로 예문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관청으로 쳐 들어갔다. 안에서 일을 보던 관원들이 대경실색하여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안에 경수는 없었다. 종인은 다시 밖으로 나와 경수를 찾아다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인적 드문 일각에서 경수가 서성이 는 것이 보였다. 종인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다가 뭔가 섬뜩한 기분에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 다. 경수는 담장 너머를 바라보며 홀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종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슬픔과 분노가 이렇게까지 들끓다니,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고 자신했는데 모두 허사였다. 종인은 경수가 훌쩍이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성난 발걸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종자기를 죽이고 사모하는 사람조차 지킬 수 없는데 천자의 지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극심한 자책과 자괴감이 종인의 목을 조르고 가슴을 난도질하였다. 그러면서도 가마솥의 뚜껑처럼 들썩들썩 날뛰는 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태성전의 정문을 넘자 먼저 가라고 했던 하개가 발을 동동 구르다 화색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곧 주군의 용색이 매우 좋지 않자 놀라서 물었다. 폐하! 어디 편찮으시옵니까? 어찌 이리 하얗게 질리셨사옵니까? 혹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글쎄요. 소인은 잘. 눈알을 굴리던 하개가 생각났다는 듯 주위를 살핀 후 조심스레 아뢰었다. 박찬열의 사십구재이옵니다. 어렴풋한 사실에 쐐기를 박자 종인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가 크게 허청이자 하개가 놀라 냉큼 부축하였다. 어의를 부르겠사옵니다. 소란 피우지 마라. 하오나 폐하의 용안이 심히 좋지 않으시옵니다. 너는 당장 오후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무명 오십 필과 가죽신, 은자 열 냥을 준비토록 하라. 예? 갑자기 그것은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종인이 그것에 일일이 답해야 하느냐는 듯 쏘아보자 하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휘정궁에 머물 것이니 준비하라. 휘, 휘정궁이라 하셨나이까?! 하개가 숨을 못 넘기고 꺽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의귀비가 죽은 후 태후의 명으로 폐쇄한 곳이 휘정궁이다. 사람이 안 들어간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데다 청소만 해 두어 군불이나 제대로 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구나 폐궁에 황제 가 친림하겠다 하니 만일 이것이 알려지면 태후가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엄연히 폐하께서 머무시는 태성전이 있사온데 어찌 사람이 죽어 나간 폐궁에 납신다 하시옵니까? 사람이 죽어 나간 전각이 한둘이더냐? 하오나 휘정궁은 태후마마의 명령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사옵니다. 짐은 천자다! 천자가 들어가지 못할 영토가 어디 있느냐? 너마저 태후의 명이 짐의 위에 있다 보 는 것이냐? 천부당만부당하시옵니다. 소인은 그저 귀신 나오는 궁에 폐하께서 납시었다가 좋지 않은 말이 나 올까 염려된 것뿐이옵니다. 귀신이 나와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니 오늘 같은 날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겠구나. 넌 오늘 그곳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더는 잔소리를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선다. 하개는 대체 종인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후와 무슨 얘기를 했기에 전각을 나올 때부터 심기가 뒤틀렸을까. 늙은 태감은 발만 동동 굴렀다.

238 깊은 어둠이 내렸다. 경수는 한참이나 태성전 앞에서 황제를 기다리다가 그가 휘정궁에 있다는 말에 그곳으로 걸음을 옮 겼다. 생모도 아닌 의귀비의 궁에, 그것도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곳에 종인이 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상관없다. 자신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하는 김종인의 피를 서서히 말려 죽일 생각엔 변함 이 없으니까. 내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내었으니 날 원하는 그에게는 더 큰 흠집을 내리라고, 하여 그 마음을 영원 히 죽여 놓으리라고, 경수는 다짐했다. 그러니 그가 폐궁을 들어가든, 태성전에서 다른 일을 하든 신 경 쓸 일이 아니다. 휘정궁은 이 년 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붉은색 꽃을 찾다가 길을 잃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어 두컴컴한 전각으로 흘러들었고 거기서 자객으로 오인을 받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시렸 다. 태평연. 권신들 앞에서 기녀처럼 용연무를 선보여야 했던 그날이다. 휘정궁은 변함없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궁인들이 청소며 보수를 해 두긴 했으나 오래도록 인기척이 나지 않아 음침하고 궁색했다. 의귀비가 죽은 이후로 한 번도 방에 불이 켜진 적이 없다 하니 불빛이 아른거리는 방은 거의 십수 년 만에 사람을 맞는 것이다. 경수는 편문을 통해 안으로 향하였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한쪽에 소담하게 핀 동백꽃이 보였다. 노 란색 금화( 金 貨 )를 입에 문 탐스러운 붉은 꽃은 담장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너는 무슨 곡절이 있어 주인 없는 집에 홀로 피어 있느냐. 어루만져 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매년 피고 지느라 외롭고 힘들었겠구나. 처연한 꽃에서 시선을 거둔 경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 않다고는 해도 어쩐지 도살 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인지라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주위를 살피니 정전을 비롯해 양쪽으로 늘어선 행각 어디에서도 구름처럼 따라다니는 궁인 들이 보이지 않았다. 경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석계를 밟아 올랐다. 하개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경수는 시립한 사람 한 명 없는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고리를 잡아 여니 휘정궁의 내부 가 드러났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원앙 한 쌍이 연꽃 핀 물에서 노는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깨끗 하게 청소된 방이지만 병풍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갑, 장롱, 하다못해 흔한 책상마저 없었다. 태후가 의귀비가 죽은 후 몽땅 태워 없앴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 병풍은 색이 바래 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 된 듯 보였다. 상석에 급하게 마련한 듯 보이는 보료가 깔렸다. 그 위에 종인이 앉아 있었다. 앞에는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경수는 종인이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놀 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들어갔다. 따라오는 자는 없었느냐? 김 상궁이 잡색꾼은 먼저 예문관으로 돌려보내라 했고 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은 없습니다. 가까이 앉아라. 술상 앞에 마주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종인이 혼자서 연거푸 술을 들이켰고 경수는 일단 잠 자코 있었다. 몰골이 산송장 같구나. 그러면서 경수의 손에 잔을 쥐여 주더니 가득하게 술을 따랐다. 마셔라. 경수는 하라는 대로 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다시 잔이 채워졌다. 경 수는 술잔을 비웠다. 잔에 술이 가득하자 다시 비웠다. 끔찍할 만큼 새파란 침묵만이 감도는 와중, 들 리는 것은 술잔을 넘길 때마다 사부작거리는 옷소매 소리뿐이었다.

239 그러기를 수차례. 급하게 마신 술에 경수가 콜록거리며 힐끗 눈을 치떴다. 종인은 자신을 책망하는 뾰족한 시선에 숨이 콱콱 막혔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몰라주는 경수가 서운하고 또 서운했다. 경수는 찬열을 죽음으로 내몬 종인이 잔인하고 또 잔인했다. 둘의 뒤엉킨 생각이 공중에서 하나의 사념으로 뭉쳤다. 그것은 새카맣고 고약한 악취를 풍겼다. 단 내와 분내, 더러는 취할 것만 같던 달콤한 꿀과 꽃향기가 가득하던 둘의 생각이 어느 순간 오물 덩어 리로 변해 있었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경수는 문득 찬열을 떠올렸다. 경신일 밤에 셋이서 홍류원에 나가 즐겁게 술을 마시고 어울렸던 기 억이 났다. 당시에는 이런 날이 올 줄도 몰랐다. 마냥 행복에 겨워 얼른 적들을 숙청하고 종인의 용양군이 되 어 평생 그를 위해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셋이서 술잔을 기울였지만 오늘은 단둘이다. 그나마도 찬열의 사십구재를 설워하는 날. 그런 데 김종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저 속상한 것만 중요해서 술잔을 권한다. 끔찍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지독한 사람! 분기가 차자 저도 모르게 도르르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경수는 황급히 손바닥으로 눈 가를 문질렀다. 그러나 종인은 이미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낮에도 울더니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심하게 울음을 삼킨다. 그 눈물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종인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는 술잔을 턱 꺾었다. 왜 눈물을 보이느냐. 겨울이라 눈물 나는 병에 걸려 그렇습니다. 청승맞은 병이로군. 종인은 다시 급하게 한잔 꺾었다. 그는 장식용으로 화방에서 급하게 가져다 놓은 홍매화 분재를 가 리키며 말했다. 이태 전, 너와 짐은 저 매화처럼 새빨간 꽃밭에서 처음 만났다. 넌 용연무라는 신기에 가까운 춤을 추고 있었지. 그때로 돌아간다면 두 다리를 잘라서라도 춤을 추지 않을 것이다. 그걸 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짐은 네가 신선인 줄 알았어. 날카로운 검을 쥐고 그처럼 아름답 게 춤을 추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다시 또 한잔. 종인은 분재에 던졌던 시선을 거두고 경수를 바라보았다. 짐은 네가 경계하는 것이 싫어 진왕의 이름을 빌렸다. 우리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지. 홍매화의 꽃말은 고결함과 숭고한 지조. 첫 만남에서는 그 탐스러운 꽃처럼 우리의 인연도 거리낄 것 없이 풍만하게 피리라 예상했다. 지나고 보면 그저 꽃송이째 떨어지는 동백의 처연함에 지나지 않는 것을. 피어있을 땐 아름답지만 지고 나면 사람들에게 짓밟혀 짓무르는 꽃처럼 하릴없이, 덧없이, 초라하게 사라질 정이었다. 경수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비통에 젖지도, 그렇다고 회한에 젖어 있지도 않았다. 이슬을 거둔 홍안은 지독할 만큼 무심했다. 돌이켜 보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앞으로 남은 날이 더 많으니 우린 지나온 길보다 더 많은 추억을 함께할 것이다. 경수는 속으로 냉소를 띤 채 답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묘하게 거슬리는 답변에 종인의 내면에 있던 실 하나가 툭 끊겼다. 그것은 인내심이라는 이름을 달 고 있었다. 종인은 경수를 한참이나 말없이 쳐다봤다. 사람에게 감정이 없으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법. 경수는 종인의 시선이 노골적인 것을 느끼면서도 반쯤 내리깐 눈을 절대 들어 올리지 않았다. 미동조 차 않는 그 고집과 냉기에 종인은 진저리가 쳐졌다.

240 한 번쯤은, 백옥 술병을 기울이며 종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짐을 이해해 줄 수 없겠느냐? 경수는 냉철하게 입을 다물었다. 짐을 믿어줄 순 없는 것이냐? 그러자 침묵하던 경수가 원망 섞인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랑을 속삭이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독 기 품은 눈동자. 머루처럼 달콤한 두 눈에서 사갈의 독이 뿜어져 나왔다. 종인은 처음 보는 눈빛에 움찔하였다. 찬열도 그런 말을 했겠지요.! 끔찍한 국청에서 온갖 고신을 당하는 와중에도 폐하께 자신의 결백을 믿어 달라, 자신의 사정을 헤아려 달라 그리 말했겠지요. 오죽하면 목숨을 끊던 밤에 소신에게 절명시를 보냈겠습니까? 경수는 그동안 밑바닥에 눌렀던 한을 끌어올리듯 독설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폐하께선 국법의 지엄함을 내보이셨습니다. 하나뿐인 벗이라 하셨으면서 그 벗이 피를 토 하는데도 외면하셨죠. 폐하께선,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황제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일희일비하는 존재가 아니니라. 옛정에 얽매여 공사를 그르친다면 사직은 누가 지키며 이 나라의 명운은 어찌 되겠느냐? 종인은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되물었다. 천자는 천자로서 온전해야 한다. 예. 당연합니다. 폐하께서는 대연의 주인이시니까요. 천자는 그럴 수 있습니다. 소신은 감히 천자를 평가할 수 없지요. 허나 한때 정인 이라 여겼던 분은 평가할 수 있습니다. 찬열을 죽인 것은 소신의 정인 입니다. 그 는 야차이자 수라였고 소신은 여전히 냉혹한 그 처결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내면의 실이 하나 더 끊겼다. 만에 하나, 박찬열의 죽음이 짐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그때도 짐을 그런 얼굴로 대할 것이냐.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많죠.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한번 떨어진 꽃은 다시 가지에 붙지 않는 것처럼요. 꽃이 피었을 때 아껴주세요. 지고 나면 다시 보기 어렵답니다. 찬열은 죽었습니다. 잊으셨습니까? 한때 소신의 정인 이었던 분이 그를 죽이라고 명하신 겁니다. 너를 그토록 아꼈건만. 시들지 않게 내내 물을 주고 다사로운 볕을 쬐게 하였건만.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렸다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선 마음 또한 마찬가지겠죠. 거센 바람 한 자락에 이리도 나를 원망하는구나! 종인이 술상을 신경질적으로 밀치더니 순식간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경수의 앞으로 나앉았다. 그리 고는 거칠게 경수의 턱을 잡았다. 그 손에 점점 악력이 가해졌고 경수는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종인은 무자비하게 경수의 턱을 붙든 채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눈을 보고 싶었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없는 머나먼 시공이 느껴져 그 눈을 아꼈다. 그래서 종인은 후회했다. 도경수는 겁에 질리지도, 슬픔에 잠겨 있지도 않았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애 증에 점철된 김종인만이 비칠 뿐이었다. 종인은 문드러져 뭉텅뭉텅 썰려 나가는 마음을 감춘 채 지독한 냉기를 담아 물었다. 네가 무엇이냐. 네가 무엇이냐 물었다. 도경수라 합니다. 틀렸다.

241 답하라. 네가, 무엇이더냐. 앞에 계신 폐하의 백성이자 신하입니다. 피식 사느란 실소를 터트린다. 평소 온화한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지금 이 분위기에는 더할 나 위 없었다. 그래. 맞다. 짐은 이 나라의 지존이고 너는 짐이 주는 녹봉을 받아먹는 신하다. 허니 천자인 짐은 네게 무엇이든 명할 수 있다. 너는 오늘 밤 짐의 시침을 들어야 한다. 그제야 경수의 눈에 두려운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짐의 천안을 똑바로 마주한, 너의 방자함을 꾸짖는 벌이니라. 머나먼 산등성이에서 낮게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43. 효행( 曉 行 ) 겨울의 마지막을 재촉하는 빗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것은 땅을 적시고 지붕을 두드리며 처마 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그토록 싫어하는 빗소리가 사위를 물 샐 틈 없이 채웠음에도 종인은 두렵지 않았다. 굳이 찾는다면 오직 하나. 이대로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이 부서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인은, 자신을 저주할 것처럼 쌀쌀맞게 굴던 청년이 미워서 그답지 않게 패악을 부리고 만다. 꽃잎 위에 아름답게 내려앉으려 했으나 꽃이 몸부림을 쳐서 화가 났다. 그래서 독 바른 날개로 꽃을 꺾어 버리려는 것이다. 불 꺼진 방 안은 온통 울음으로 가득했다. 입 밖으로 낸 것은 그저 밭은 숨소리뿐이었으나 숨결 하 나하나에 섬세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종인은 자신의 그리움이 무너져서 서러웠고, 경수는 자신의 그리움이 아파서 서러웠다. 서러워서 눈 물이 빗물처럼 흘렀다. 그것이 고여 서로의 마음에 얼음 호수가 생겼다. 호수의 얼음은 봄이 되면 자연히 녹을 수도 있었으나 종인과 경수는 서로에게 잔인한 돌을 던져 얼 음을 깨부수려 했다. 얼음이 깨지면 물은 다시 흘러넘칠 것이다. 그러나 돌은 가라앉을 터. 그 돌은 호수 밑바닥에 깊숙이 자리 잡아 영영 빼낼 수 없으리라. 풀어헤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탐하고 더러는 은밀한 어딘가를 헤맸다. 울면서 걸었다. 길 끝 에는 오랜 여정에 지쳐 상처 입은 꽃만이 자리할 터. 종인은 그 꽃이 가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하지만 경수를 어루만지고 그의 입술에 핀 홍화를 짓이기는 행위는 전혀 슬픔에 겹지 않았다. 자신 의 상처가 아파서 주변이 보이지 않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짐승. 지금의 종인은 딱 그런 상태였다. 경수는 어떠한가. 한때는 이 사내의 품에 안겨 세상 누구보다 황홀한 꽃잠에 취하리라고 믿었다. 온유한 성품에 맞게 서로 예를 갖추어 아름다운 밤을 보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면 자신은 처음엔 몇 번 거절 하다가 못 이긴 척 사내의 품에 딸려가 오늘 밤은 꽃과 함께 주무세요 라던 어느 시의 여인처럼 새침 하게 같은 베개를 베겠거니 하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갯속에 갇힌 지금, 경수는 자신을 옭아매는 사내의 손길에 이번 생에서는 두 번 다시 꿈꾸던 꽃잠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무치게 연모하였기에 그 안에 핀 가시마저 끌어안으려 했건만. 이제는 사무치게 원망하기에 가시 에 찔려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자신의 입에서 낯부끄러운 교성이 터져도 아무렇지 않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김종인 이라는 낙인 이 찍히고 발가벗은 몸뚱이에서 쉴 새 없이 붉은 꽃잎이 떨어져 내려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창피

242 함도, 수치스러움도, 그와 공존할 수 없는 달뜸이나 희열 따위. 그저 공허하게 내던져져 먹먹하게 흘 러갈 따름이다. 닫힌 문을 열어 자신의 안으로 종인이 발을 들일 때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땀에 젖어 종인의 손 이 미끄러지면 문득 스미는 한기에 어깨를 떨었다. 어쩌면 나는 당신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모해서 용서할 수 없는지도 몰라. 열뜬 순간이 낙화처럼 하늘하늘 져버렸다. 사모하지 않으면 분노할 일도 없을 텐데. 사모하여 분노하고 연모하여 실망하네. 몇 번이고 열락의 저변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꽃 진 자리에 수흔이 가득하게 번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종인은 몸을 웅크리며 옆으로 물러났고 경수는 그에게서 가녀린 등을 돌렸다. 단정했던 보료와 옷가지가 처참할 정도로 구겨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아프다. 몸과 마음이 너무도 아프다. 이 아픔은 어떻게 해도 치유할 수 없음을 알기에,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처연하게 허공을 바라보았 다. 드물게 쏟아지는 한겨울의 장대비는 어쩌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지도 몰랐다. 짐에게 잘못했다고 빌어라. 한참 만에 종인의 삽삽한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경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조심히 일어나 드러난 전라 위에 한 겹 한 겹 옷자락을 더하기 시작했다. 종인은 입도 벙긋하지 않는 경수에게 나직이 쏘아붙였다. 너는, 정말 지독하구나. 울음 같은 한탄이 묻어 있었다. 경수는 자신의 심장으로 흘러드는 종인의 숨결에 찔리고, 찬열에 대한 생각으로 죽어 버릴 것만 같 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싶었다. 옷을 다 입은 후에는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풀었던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상투 관과 동곳으로 갈무리하였다. 종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쪽에 벗어던졌던 침의를 걸쳤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적당히 섞인 밤의 빛이 경수의 윤곽을 흐리게 했다. 흐려진 윤곽이 더는 보이지 않을 즈음이면 너는 내 곁에 있지 아니하겠지. 박찬열은 죄인이다. 너는 죄인을 두둔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다. 또 사관으로서 정치적 중립도 잃었다. 그 벌로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를 보낼 것이니 나가는 즉시 짐을 꾸리도록 하라. 짐이 부를 때까지 는 도성으로 돌아올 수 없다. 경수는 자신을 놓아주는 종인을 진심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종인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감춘 채 입 을 닫고 있었다. 이윽고 경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일어나 종인을 향해 섰다. 폐하의 지엄하신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정갈하고 예의 바르게 부복하였다. 마지막으로 짐에게 할 말이 있느냐. 보잘것없으나 소신의 마음은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다. 기약할 순 없어도 언젠가 다시 뵙게 되면 그때 돌려주십시오. 그리고 영영 당신에게 주지 않을 것입니다. 경수는 공손히 뒷걸음을 치더니 미련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시간이 멈춘 싸늘한 방 안. 어둠에 동화된 종인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었다. 경수가 남기고 간 향기가 뒤늦게 안개처럼 주변을 에워쌌다.

243 경수가 전각의 정문을 빠져나갔을 즈음, 종인은 설움에 북받쳐 꺽꺽 오열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어 찌나 멈추지 않던지 어미 잃은 아이처럼 밀려오는 슬픔에 투신하고 말았다. 곁방에서 기다리던 하개가 달려왔다. 주인은 빗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억장 이 무너진 하개가 폐하! 하고 다가가자 종인은 그에게 매달렸다. 봇물 터지듯 흘러내린 슬픔과 애증 에 정신이 요연할 지경이었다. 그는 눈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개! 짐이 저 사람에게 몹쓸 짓을 했어. 흐으윽. 보았느냐? 짐이 저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폐하. 흑흑. 추위를 많이 타. 그 아이, 내색하지 않아도 추위에 약한데. 우산도 없이 저렇게 빗속을 뚫고 가면 어떡하느냐? 울음소리 때문에 중간에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지만 의도는 분명하였다. 종인은 미친 사람처럼 문 밖을 가리켰다. 어서 가라.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 당장 짐의 망토를 가져가 도경수에게 하사하라! 하개가 명을 받고 직접 망토를 챙겨 뛰어 나갔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시야는 부옇기만 하고 궁 곳곳에 밝힌 횃불은 아지랑이 같은데, 한참을 뛰다 보니 희조문 근처. 어느새 저기까지 갔는지 경수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고 하개는 그를 뒤쫓느라 늙 은 나이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경수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터벅터벅 걸음을 놓고 있었다. 하개가 멈추시게! 라고 했으나 빗소리 에 파묻혀 듣지 못한 듯했다. 이보게, 도 검열! 잠깐 기다리시게!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를 몇 발자국 옮기더니, 경수는 희조문을 넘자마자 까무룩 자물치고 말았 다. 집에서 사나흘을 기다리자 형부에서 배소단자가 떨어지고 경수의 귀양지가 정해졌다. 종인의 뜻인지 아니면 태후의 입김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역적과 친했던 사관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인지 그의 귀양지는 동주의 경성현이었다. 제법 멀미를 하는 경수는 배를 타고 들어가는 절해고도 가 아닌 게 어디냐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아들이 역모 사건의 여파로 끝끝내 관직을 삭탈당하고 머나먼 땅으로 떠나게 되자 집안은 저주를 받은 것처럼 암연했다. 도명정은 그나마 아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주었다며 황제의 은덕에 감사했다. 윤씨는 그런 은덕은 백 번을 베풀어도 반갑지 않다며, 아들을 붙잡고 울었다. 어린 연수도 형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경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옮겼다. 밖에선 길을 잡는 압송관과 서리들이 말을 끌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종인이 하개에게 명하여 마련했던 무명과 은자 등은 모두 유배지까지 가는 데 수고할 서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수고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유배를 떠나는 죄인에게 횡포가 가해졌다. 경수의 집은 예전보다 넉넉했지만 많은 물목을 댈 만큼은 아닌지라 종인이 나름 신경을 쓴 거였다. 태후와 조정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종인은 경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끝까지 곁에 두었을 것이 다. 그러나 제 욕심으로 찬열을 비명에 보냈으니 이번에도 제 욕심을 차렸다가는 경수마저 잃을 수 있었다. 종인은 조정에서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모든 것을 결정해 버렸다. 물론 경수는 그런 사실을 몰랐다. 다만 종인이 자신의 체면을 살리려고 마지막 적선을 하는구나 싶 었다. 어쨌거나 새하얀 백의를 입은 경수는 정들었던 집을 등지고 말 위에 올랐다. 아이고, 얘야.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보는 것이냐? 응? 몸도 성치 않은데. 아이고, 아이고.

244 뒤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경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려 어머니 품에 안길 것 같았다. 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얻던 신세가 하루아침에 귀양을 가는 죄인으로 변하다니 세상살이 한번 얄궂 고 괴팍했다. 경수는 씁쓸하게 웃음을 흘리며 지난날을 하나씩 길바닥에 버리기 시작했다. 더는, 짧았던 봄날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갔느냐? 새벽빛이 사그라질 무렵, 자릿조반을 앞에 두고 종인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하옵니다. 하개가 숟가락을 쥐여 주며 답했다. 그러나 종인은 손에 힘을 주지 못하고 덩그렁 숟가락을 떨어뜨 렸다. 하개가 눈짓하자 옆에 있던 상궁이 새 숟가락을 바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종인은 수저를 들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폐하. 벌써 사흘째 물 한 모금 제대로 음하지 못하셨나이다. 부디 만백성을 생각하시어 한 숟가락 이라도 젓수시옵소서. 철관의 동북쪽은 길이 아득하기만 한데, 송별하려니 만 리 시름을 어찌 감당하랴. * 떨어지는 한숨 끝에 미처 떨치지 못한 그리움이 배있었다. 힘내지 않으면 이대로 죽으리라. 떠나보냈으니 돌아올 자리도 마련해 줘야지 않는가. 생각한 종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 좀 다오. 그런 후 식사를 하겠다. 돌연 밥을 먹겠다는 소리에 하개와 상궁 등이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그들 중 누구도 종인의 마음 이 까마귀의 먹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았다. 가는 길마저 쉽지 않았으나 마음을 비우고 나니 몸이 힘든 것도 몰랐다. 가벼 운 한기가 스며 잔기침이 터지긴 했으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가 수고비를 두둑하게 챙겨준 덕에 압송관과 서리는 군소리 없이 죄인을 유배지로 데려갔다. 다행히 가는 내내 날씨가 도와주었다. 이따금 잿물을 풀어놓은 듯 극심하게 꾸물거리긴 했으나 눈보 라는 없었다. 하지만 북녘으로 향할수록 햇볕은 따뜻해도 찬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극심한 추위가 느껴졌다. 경수의 귀양지인 경성현은 고산준령이 늘어선 곳으로, 옥토를 개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추위 로 악명이 높았다. 이곳으로 유배를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개는 중죄인들이 귀양을 와서 탱자나무로 담벼락을 두른 위리안치에 처해졌는데 경수는 일정 지역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 외에 운신이 불편하진 않았 다. 고개를 넘고 산속의 오솔길을 넘을수록 경성현에 가까워졌다. 안 좋은 몸으로 말에 올라 머나먼 길 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지라 경수는 얼른 유배지에 도착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막상 경성현 관아 에 인계될 시간이 다가오자 경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죄인의 몸으로 벌을 받으러 온 것이라지만 유배지에서 처소의 집주인인 보수주인을 잘못 만나면 신 세가 더욱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몸이 괴로운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과연 이곳에서 몇 년을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여기가 관아요. 압송관이 말고삐를 느슨하게 잡으며 앞에 있는 큰 대문을 가리켰다. 얼굴을 가리려고 커다란 갓을 쓰고 있던 경수가 모자를 슬쩍 들어 올려 관아의 문루를 올려다보았다. 포졸들이 창을 들고 문 앞을 * 서거정, 송신도사함길지행( 送 辛 都 事 咸 吉 之 行 ) 중

245 지켰다. 드디어 적소( 謫 所 )에 도착하였다. 첫날부터 순탄치 않았다. 죄인은 해당 관아에 인계되면 귀양살이하는 동안 지낼 처소를 배정받아야 했다. 그런데 대개 유배지는 백성들의 살림이 궁핍해서 공짜로 군식구가 느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더구나 조정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사람인데 관아의 수령이나 아전이라면 모를까, 일반 백성들은 본인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어서 죄인 받기를 꺼렸다. 경수는 역모 사건이 있은 직후 조정에서 쫓겨난지라 주민들의 호기심을 샀다. 하지만 그들은 선뜻 낯선 이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온종일 여기저기 떠돌다가 포졸 하나가 억지로 한 집에 떠밀었다. 집주인이 없는데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지요? 지내라면 지낼 것이지, 왜 이리 잔말이 많아? 비록 죄인이긴 하나 여기 있는 동안 의탁할 곳인데 얼굴을 마주하고 허락을 구해야지요. 다른 집들이 모두 거부하니 이러는 것 아니냐? 시끄럽고, 얼른 들어가. 포졸은 우격다짐으로 경수를 밀어 넣은 후 꽁지 빠지게 사라져 버렸다. 경수는 비참한 심정을 감춘 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봇짐을 소중한 보물처럼 꼭 끌어안고 조심 스레 안을 살폈다. 집은 어떻게 봐도 허름하고 초라했다. 쌓인 눈이 녹지 않은 듯 곳곳에는 희끗희끗 한 기색이 있었고 장독은 깨졌으며 그 흔한 시래기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자신도 빈한하게 산 것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경성현의 가가호호를 돌아본 결과 이곳은 교 안에 비할 바 아니었다. 경수는 이곳에 자신의 입을 맡기기가 너무도 면구하여 발만 꼼지락거리며 멀 뚱멀뚱 서 있었다. 그때, 웬 여인 하나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이십 대 중반 남짓해 보였는데 뒤에는 이제 막 돌 잡이가 되었음 직한 아기가 업혀 있었다. 뉘십니까? 여인이 다소곳하게 물었다. 얼어서 새빨갛게 물든 두 볼에서 삶의 고달픔이 느껴졌다. 경수가 공손 히 허리를 숙였다. 여인도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경수라고 합니다. 부끄럽게도, 아. 귀양다리시구먼. 예. 귀양다립니다. 경수가 객쩍게 낯을 붉히자 여인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안 그래도 조정에서 또 사람이 온다기에 마을 사람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답니다. 무슨 죄를 지 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평상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후 경수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러고 는 부엌으로 가 아궁이에 얼마 남지 않은 장작을 툭툭 던져 넣었는데 뒤에서 아이는 빽빽 울음을 터 트리고 있었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쌀독을 열어도 나오는 것은 거미줄뿐인지라 여인은 내색하지는 못하고 슬며시 미간을 좁힐 뿐이다. 경수는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이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는 모두 거절한 자신을 여인은 왜 환대하는지 궁금했다. 그와 동시에 여인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마치 불과 몇 년 전, 낙심 하여 울화에 시달리던 제 어머니를 보는 듯했다. 저기. 경수가 인기척을 내자 황급히 쌀독 뚜껑을 닫으며 여인이 돌아보았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니요. 저어, 앞으로 제가 이 집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의중을 여쭈어야 할 것 같아서. 포졸 나리들이 안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막무가내로 떼놓고 간 모양인데 인제 와 의중을 묻고 말

246 고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적적하던 차에 사람이 들어와 다행입니다. 진심이십니까? 보다시피 이 집엔 나와 이 갓난아기 둘뿐이에요. 바깥 분은? 여인이 머쓱하게 웃었다. 한여름 무산의 꿈이었을 뿐이죠. 그분도 귀양살이하시다가 이태 전에 다른 곳으로 적소가 바뀌었 는데 그 뒤로는 연락이 닿질 않네요. 경수는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유별한데 여인 혼자 사는 집에 덜컥 의탁했다가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나 싶었다. 그런 경수의 생각을 읽은 듯 여인이 말했다. 괜찮아요. 이 마을에선 과부 혼자 사는 집에서 귀양살이하던 분들이 꽤 있었으니까요. 마침 방도 두 개이고 포졸들이 일부러 귀양다리를 버리고 갔으니 말이 나와도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 말에 안심한 경수가 다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줄곧 여기서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르셨습니까? 여인은 민망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괜한 것을 물었다며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추운데 얼른 안으로 들어가세요. 딱히 내놓을 것은 없지만 어떻게든 식사를 마련해 볼게요. 그러자 경수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봇짐을 턱 건넸다. 앞으로 신세 많이 질 텐데 공으로 입고 먹을 순 없지요. 부족하지만 당분간 배를 곯지는 않을 테 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아이고, 저런. 아닙니다. 아니에요. 어쨌거나 내 집에 오신 객인데 잠시 잠깐 맺을 인연이라도 융 숭히 대접하지는 못할망정. 저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경수는 부득불 여인에게 괴나리봇짐을 안겨 주었다. 안에는 그동안 경수가 한두 푼씩 모은 금전과 종인이 심심할 때마다 내려주었던 패물들이 들어 있었다. 더는 종인이 준 선물에 의미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팔든 말든 경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서책 몇 권도 껴 있었는데 대부분 태학관 유생들이 보는 것이라 세책점에 팔면 돈깨나 건질 물건들이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네. 오는 길에 보셨겠지만 이 지역은 추위가 극심해서 먹고살 재료가 많이 나질 않아요. 무엇보다 의 복이 부족해요. 시전에 나가 봐야 거기서 거기인 물건 천지라 대부분 밀무역이나 나라에서 금한 날짜 를 어겨 따로 장을 세우죠. 기후가 이렇다 보니 관아에서도 손 놓고 구경하는 처지랍니다. 아아. 귀한 물건을 받았으니 앞으로 객을 더욱 정성으로 모셔야겠네요. 여인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뒤늦게, 여인은 자신을 종옥이라 소개하였다. 가냘프게 신음하던 박태흥이 문득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명멸하는 빛이 환해졌을 때, 그의 시선에는 가장 먼저 아내 전씨의 얼굴이 보였고 그다음으로 변백 현이 보였다. 두 사람은 최근에 극심한 흉통으로 쓰러졌던 박태흥을 몹시 염려하고 있었다. 올해 예순이 넘은 그는 가벼운 해천 외에 계심통( 悸 心 痛 ) * 을 앓았다. 그런데 추운 지역으로 낙향하 고 나서 오히려 병이 심해져 전씨의 걱정이 심했다. 하나 있는 아들 내외는 다른 지역의 군수로 나가 있는 데다 시집간 두 딸은 시댁에 발이 묶여 올 수 없었다. 그래서 전씨는 부득이하게 백현에게 급히 연통을 넣어 관아로 부른 것이었다. 때마침 제가 옥선산에 있었기 망정이지, 예정대로 아래로 내려갔더라면 길이 엇갈릴 뻔했습니다. * 협심증의 일종

247 다시 잠이 든 박태흥을 방에 두고 나오며 백현은 걱정스레 말했다. 매번 신세를 지는구먼. 아들 내외가 외직에 있다 보니 더욱 집안일을 신경 쓸 사람이 없지. 낙담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이라도 기운을 차리셔야 스승님께서 하루빨리 병을 떨치실 겁니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나. 전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처소는 어디로 하겠나? 지난번에 묵던 방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있게. 삼월이를 시켜 저녁상을 보라고 하지. 자네, 그 아이의 음식 솜씨가 좋다 고 여러 번 칭찬했다지? 입맛에 제법 맞았습니다. 손끝이 야무지더군요. 백현이 배죽이 웃었다. 전씨도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걸었다. 방에서 기다리자 얼마 안 있어 삼월이가 개다리소반에 정성껏 차린 저녁밥을 들고 왔다. 삼월은 일 대에서 제법 얼굴 반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구애하는 사내들도 많아서 콧대가 퍽 높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감생심, 금선공주의 적자인 변백현을 맘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손님상을 담 당하는 그녀는 몰래 생선 하나를 더 얹는다던가, 고봉밥 속에 삶은 달걀을 숨겨 놓는다던가 하는 방 식으로 백현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오늘은 맥적을 구워 그 위에 잣을 뿌려놓았는데 보기만 해도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백현이 상 앞에 앉아 서책을 펼치며 물었다. 삼월이 못내 아쉬워서 몸을 배꼬자 옆에 앉아 있던 백 현의 종자인 경태가 톡 쏘아붙였다. 우리 나리께서 식사하시는데 그리 알짱거릴 셈이냐? 잡수시다가 체하시면 어쩌려고! 원래 이름은 복돌이였는데 백현이 듣기 싫다며 사람을 공경하고( 敬 ) 너그럽게( 泰 ) 살라는 뜻에서 경 태가 되었다. 천것에게 버젓이 한자로 지은 이름이 붙자 경태는 짐짓 제 주인의 품위에 어울리게끔 행동하였는 데, 그중 하나가 제 주인 곁에 얼씬거리는 천박한 계집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술을 좋아하는 백현의 특성 때문에 금선공주가 특별히 지시한 일이기도 했다. 썩 꺼지래도! 경태가 종주먹을 쥐고 을러대자 삼월이 세모지게 눈을 흘기고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갔다. 백현이 혀를 끌끌 찼다.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소원이라면 한 번쯤 들어줄 수 있는데 왜 매번 면박을 주고 내쫓느냐? 그러다 도련님 얼굴이 닳기라도 하면요? 본다고 닳진 않는다. 잘나고 비싼 것도 아니니 누가 본들 무슨 상관이냐? 저 계집애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니 도련님 얼굴은 머지않아 삭고 말 것입니다. 아예 정화수를 떠놓고 저주를 퍼붓지 그러느냐? 도련님께 저딴 것이 어울리기나 합니까? 공주께서 아시면 도련님이 아니라 소인의 종아리가 부러 진다고요! 너만 입 다물면 어머니가 아실 일도 없지. 픽 웃으며 백현은 책장을 넘겼다. 식사하면서 느긋하게 독서하는 것이 그의 취미 중 하나였다. 몇 달간 장안사에 계셨으니 이젠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한참 뒤 경태가 퉁명하게 물었다. 자기야 주인 덕분에 남들은 못하는 유람을 다니니 신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편히 집에 붙어 있고 싶 은 맘도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방랑을 자처하고 칠 년째 전국을 떠도는 이유를 잘 알아서 대놓고 툴 툴거리진 않았다. 조기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며 백현은 답했다. 스승님께서 나으시면 차차 생각해 보련다. 장안사에서 파계승 노릇을 하신 것을 아시면 공주께서 또 소인에게 불벼락을 내리실 텐데.

248 경태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우는소리를 했다. 지난번엔 종아리였으니 이번엔 물볼기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너만 입 다물면 만사형통이다. 그 가벼운 입을 놀려 화를 자초하는 게 누군데? 공주께서 꼬치꼬치 캐물으시는데 어찌 거짓을 고합니까! 나 죽었소, 하고 뻗대라. 날 때부터 우리 집에 있었으면서 여태 어머니 성정을 몰라? 노비가 주인에게 함부로 굴었다가는 경을 치는데 소인더러 매를 벌라고요? 그럼 이번에도 사실대로 고하고 눈총을 받든지. 도련님께서 얌전하게 계시면 만사형통이라니까요? 이놈아. 넌 집에 남아 허드렛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게 감사해야 하는데 어찌 시시때때로 불평불만이냐. 도련님께서 얼른 장가드시고 일가를 이루시길 바라기 때문이죠. 모시는 주인이 역마살을 끼고 사 시는데 달가워할 종이 어디 있습니까? 말이나 못하면. 백현이 뼈 바른 조기 살을 밥 위에 수북하게 얹어 그릇째로 경태에게 내밀었다. 경태가 눈을 반짝 이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익숙하다는 듯 주인이 몇 숟가락 뜨다 만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한다. 삼월이 년이 오기 전에 먹어야 합니다. 숭늉 가지고 오다가 지난번처럼 또 걸리면. 경태는 생각하기도 싫은지 진저리를 쳤다. 의침에 기댄 백현은 픽 웃고는 느긋하게 책장을 넘겼다. 표지에 세의득효방( 世 醫 得 效 方 ) * 이라는 제 목이 적혀 있었다. 44. 종옥( 種 玉 ) 아이의 이름은 무명( 無 名 )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나 일 년이 지나도록 이름을 받지 못하였다. 부친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아이는 그렇게 이름 하나를 얻지 못하고 여린 생명을 이어갔다. 종옥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했다. 어차피 몇 년은 이곳에 발붙이고 살 인연이라 여겨 처음 부터 마음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사람이 그리워서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경수는 자신을 남동생처럼 살뜰하게 챙겨주는 종옥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번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나자 쉽게 믿을 수 없음이라. 경수는 고마우면서도 종옥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첫날은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좁은 곁방에서 보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헛간에서 자야 할 판이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종옥은 그런 방을 내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은 아기 때문 에 안방을 비울 수가 없다면서. 경수는 도리어 자신에게 사과하는 종옥에게 미안해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둘째 날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경수는 이곳이 나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락은 마음이 완전히 허물어진 지옥이다. 물론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으나 종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오히려 오기 가 생겼다. 유배는 뜻밖이었지만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경수는 현실 로 빠르게 돌아왔다. 그는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도성에 남은 가족들이 눈에 밟혔고 찬열에 대한 복수도 해야 했다. 무사히 빠져나가 찬열의 누명을 벗기고 절도에 안치된 박우헌과 관노로 팔린 엄씨 부인의 신분도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것만이 찬열 에게 진 신세를 그나마 갚을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 원나라 위역림이 저술한 의서

249 그래서 약해질 겨를이 없었다. 슬픔에 겨워 몸을 가누지 못했으나 관복을 다시 입던 그 순간부터 경수는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도 꽃은 피었으니, 바람이 제아무리 꽃을 흔들어도 꽃은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다. 셋째 날은 이 지역에 적응하기로 하고 종옥에게 여기 사람들의 생활은 어떤지, 사계절을 어떻게 나 는지, 이웃에는 누가 있는지 등등 상세하게 물어봤다. 이웃에 대한 정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째서요? 관아에서 몇 리는 떨어진 이 마을은 그간 들고나간 외지인이 많아 인심이 각박하지요. 인심이 각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선비는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이곳에 왔지만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사대부의 지위를 내세워 고을에서 수령 노릇을 하려 했지요. 어떤 재상은 나이 오십에 이제 막 열다섯이 된 어린 계집을 탐하 여 첩실로 들였습니다. 어떤 이는 금방 조정에 복귀할 것이라며 하루가 멀다고 수령과 주민들에게 화려한 잔치를 열게 하 였지요. 그러다 보니 곳간에 쌀이 동나 정작 백성들이 먹을 음식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답니다. 점점 경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이 떠난 후에는 마치 가을날 메뚜기 떼가 곡식을 다 휩쓸고 간 것과 같았지요. 먹을 것, 입을 것, 하다못해 자식까지 뺏기니 누가 귀양다리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파렴치한들을 두고도 관아에서는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들은 곧 돌아간다면서 수령들을 꼬드겼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은 이곳에 온 지 반백 일도 아니 되어 다시 조정으로 복직했어요. 그 바람에 수령들은 더욱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지요.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요괴가 어디 있나 했더니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과 유착한 고을 수령들도 역겨워서 경수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경수가 짐짓 떠보듯이 물었다. 작년에 우장군으로 부임했던 분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목책을 쌓아 성벽을 수리해서 백성들을 다독 였다던데. 혹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못 들으셨습니까? 종옥이 바느질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 알지요. 이 촌구석까지 이름을 날린 유명한 분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분과 한서현령 덕분에 경성현은 민심이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직접 볼 기회는 없었지요. 경수는 이런 식으로나마 찬열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슬처럼 사라진 그의 흔적 을 더는 더듬을 길이 없었으니 그가 모르는 일면을 아는 것마저도 소중했다. 헌데 나리는 궁에서 왜 쫓겨나셨습니까? 종옥은 조심스레 물었다. 웬만해서는 그리 젊은 나이에 경성현까지 귀양살이 오는 일은 없는데. 폐하의 눈 밖에 났으니 쫓겨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황제 폐하를 모셨습니까? 경수는 미소로 답하였다. 나리처럼 아름다운 분도 궁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니 황궁에 미인이 많긴 많나 봅니다. 모두 독을 가진 꽃뿐이니 안 피느니만 못하지요. 경수는 다시 실패를 감았다. 바느질로 풀칠하는 종옥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종옥은 그런 경수의 마음 씀씀이를 알고서는 고맙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종옥은 여기 사람이 아니죠? 그리 보이십니까?

250 서울 말씨라서. 예. 어릴 땐 교안에서 자랐고 느지막이 서방님 따라 이곳에 흘러들게 되었지요. 젊을 땐 그리 괴임 을 받았는데 늙고 보니 서방님에게 버려져 이런 신세를 면치 못하네요. 늙었다니요? 저보다 겨우 몇 살 위로 보이는데. 농입니다. 호호. 나리도 제 능청스런 연기에 깜빡 속으시는군요. 종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경수는 그녀의 쾌활한 성격에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종옥은 이름이 참 예뻐요. 양공이 옥을 심어 미인을 아내로 삼았다던데 꼭 그 고사처럼 아름다워 요. 어머. 어찌 제 이름의 내력을 아십니까? 예? 사실 종옥은 서방님이 지어주신 별호랍니다. 저는 옛 이름을 버린 지 오래지요. 이거야말로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이었다. 낭군에게 예쁜 이름을 받다니 참으로 낭만적이군요. 연정에는 나이가 상관없다는 것을, 서방님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답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종옥은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풀어냈다. 아무래도 너무도 고적한 끝에 사람을 만나 얘기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경수는 잠자코 푸실을 실패에 감으며 종옥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처음 만났을 때 전 열아홉이었고 그분은 서른 여섯이셨죠. 귀양살이를 오래 하셨는데도 용모며 옷 자락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셨고 흰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이 나서 한편으로는 관운장 같기도 했답 니다. 관우의 피부는 거의 붉은색에 가까웠지만 경수는 그냥 넘어갔다. 그때 저는 양친을 갓 여의고 막막하게 살았는데 공교롭게 서방님께서 제가 있는 집에 더부살이하 러 오셨지요. 그분도 관청에서 아무렇게나 마당에 던지고 가신지라 부득불 남녀가 살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수령이 노발대발하며 서방님을 다른 집으로 보내 버렸는데 그때 전 이미 서 방님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지요. 어쩌다 마음이 동하게 되었습니까? 일고편운, 사고무친이라. 외롭고 무서운 밤을 나다가 다정하신 서방님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 누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하여 몰래 서방님께 연서를 보내고 서방님 계신 곳 에 밥도 지어 놓고 그랬답니다. 그랬군요. 당시 서른여섯이었다면 처자식이 있었을 텐데? 예. 그래서 서방님께서도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셨으나 나중에는 제 마음을 받아주셨답니다. 오랜 귀양살이로 처가에서 강제 의절을 당하고 난 직후였지요. 하여 저는 더욱 서방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천생연분이라 믿으면서요. 온통 연분홍색이던 시절이 떠오른 듯 종옥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눈빛 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니 조정에서 서방님께 적소를 옮기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서방님을 따라 예 까지 흘러들었답니다. 부군께서는 무슨 죄를 지어서 그리 오래도록 타향살이를 하셨습니까? 서방님께서 따로 말씀해 주신 적은 없습니다. 관아에서도 느슨한 듯 빡빡한 듯 야릇하게 감시할 뿐이었고요. 그래서 저도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외지로 빼돌려야만 하는 존재였거나 조정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대역 죄인이거나. 둘 중 하나였 으리라고 경수는 추측했다. 서방님께선 대체로 의연하셨어요. 하나뿐인 조카를 지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나 도무 지 갈 방법이 없다며 눈물짓기도 하셨습니다.

251 그러다 이태 전 또 다른 곳으로 떠나셨는데 머나먼 절도로 가신단 말에 전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 었습니다. 차마 가시는 분에게 알리진 못했으나 그때 전 무명이를 배태하고 있었거든요. 아. 이런 사연입니다. 얘기를 마친 종옥은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고수머리를 살며시 쓸어 넘겼다. 경수는 처연하고도 기 구한 얘기에 가슴이 찡했다. 비록 떳떳한 부부는 아니나 서로 의지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몹시 애틋했 다. 한때 김종인과 자신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서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마음껏 연모하고 마음껏 기뻐하던 시대가. 이런. 제가 너무 수다스러웠나요? 종옥이 민망해하자 경수는 왼고개를 쳤다. 무명이도 반드시 제 아버지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것은 공허한 위로였지만 종옥에게는 희망이었다. 내일은 장이 서니 같이 나가 봐요. 종옥이 아이처럼 기대에 차서 종용하자 경수는 별수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사실입니까? 백현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찻잔을 괴팍하게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이제 막 기운을 차린 박태흥은 어깨에 이불을 두르고 제자와 느긋하게 독대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백현이 옥선산 장안사에 처박혀 있는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찬열 역모 사건에 대해 들 려주었다. 필시 대인파에서 누명을 씌워 쫓아낸 게지. 아니면 북녘에서 박찬열의 인망이 워낙 두터우니 폐하 께서도 보위를 지키려고 결단하셨는지도 모르고. 까끌까끌한 입안을 훑으며 박태흥은 자못 신랄한 어조로 내뱉었다. 함께 업무를 돌봤던 백현으로서 는 찬열이 찍혀나간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을 잡자 백현의 인상은 심히 험악해 보였다. 표정을 바로 하지 못하겠느냐. 태흥이 꾸짖자 백현은 핏기가 가신 얼굴에 억지로 난장판 같은 미소를 걸었다. 그것이 더욱 괴기스 러웠다. 남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혹은 좋은 일이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이 담담해야 한다고 그리 가르쳤 거늘. 송구합니다, 스승님. 박찬열의 일은 정말 뜻밖이다. 그 부친은 절도에 위리안치 되었다는데 저 사악한 놈들이 보냈음이 틀림없으렷다. 유배지로 낙점된 섬은 물길과 산세가 험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게다가 온갖 뱀과 벌레가 득시글거 려 도무지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다. 박우헌 그자,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던 것으로 아는데 하나뿐인 자식이 누명을 쓰고 자결한 것도 모자라 가문의 대가 끊겼으니 심신이 썩어 문드러지고도 남음이로다. 정녕 폐하께서 박찬열의 무고를 믿어주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박찬열도 처음 몇 날은 버티다가 얼마 안 가 본인의 입으로 죄상을 실토했다는구나. 풍현에 사병 이 있던 것도 사실이고 그 집에서 뇌물과 역모 자금으로 쓰일 어음이 나온 것도 부정할 수 없으니 폐 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실밖에. 백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약 일 년 남짓 박찬열과 지내며 그의 전부를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모를 꾀할 사람이라고 생각 하기는 어려웠다.

252 그는 황제에 대한 충심도 대단했다. 돌아가면 황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수행할 것이라며 결의에 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장문견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던 군사를 오직 황제에게 무릎 꿇게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박찬열이 황제를 시해하고 보위를 노리는 극혈신일 리 없다. 그렇다면 누가, 왜, 하필이면 박찬열을 역적으로 몰았는가. 그리고 황제가 박찬열을 죽이라 한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신분을 뛰어넘은 절친한 사이였는데 하루아침에 갈라진다는 것이 의문스 러웠다. 그 일로 여러 사람이 숙청당했다. 소인파의 거두라 불리던 어사대부가 그리 배신할 줄 누가 알았 겠느냐. 덕분에 그 대쪽 같던 한민생은 형주( 邢 州 )로 유배를 가고 수많은 젊은 인재들마저 기세가 위 축되었지. 통탄할 노릇이다. 늙은이는 혀를 끌끌 차더니 덧붙였다. 참. 태성전에 사관이 드나들던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예. 박태흥이 남우세스럽고 파렴치한 일이라며 하도 욕을 퍼부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 아이가 박찬열과 친형제처럼 자랐는데 이번에 조정의 탄핵을 받고 경성 땅으로 귀양을 갔다는 구나. 그래요? 사람 일 참 알다가도 모르지. 대인파에서 뽑아 태성전에 넣었는데, 알고 보니 박찬열과 형제처럼 자랐다는구나. 박찬열은 비록 죽었지만 그가 원래 폐하의 충신이었다는 것은 삼척동자가 아는 일이 다. 폐하를 감시할 목적으로 사관을 들인 것이 오히려 저들의 패착이 된 셈이다. 박찬열마저 역적으로 죽어 나가자 이참에 모든 싹을 자르겠다는 뜻이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관이 박찬열과 친형제럼 자란 것이 어째서 대인파에게 거 슬리는 일이 되는지요? 잘은 모르겠다만, 폐하께서 태후마마와 처음으로 말다툼을 하셨는데 그것이 그 사관 때문이라 하 더구나. 사관의 용모가 경국지색이라니, 젊은이들끼리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 정이 동하지 않고 배기겠 느냐? 허면 폐하께서 그 사관과 정을 주고받으셨단 말씀이십니까? 호사가들처럼 입방아 찧는 것은 싫다만,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그런 것 같더구나. 헌데 그 사관이 어명으로, 그것도 경성현으로 내쫓길 줄 누가 알았겠느냐? 백현은 자신이 옥선산에서 부친의 흔적을 더듬는 사이 세간에서 별의별 일이 다 터졌구나 싶었다. 그러다 불현듯 지난겨울 부친의 기일에 찬열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내게도 자네와 비슷한 구석을 지닌 벗이 하나 있다네. 그 친구도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네. 자존심은 강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 덕분에 고달픈 유년기를 보냈지만 지금은 관리가 되어 폐하께서 신임하고 계시 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네와 그 친구는 외유내강이라는 점이 닮았네. 겉보기엔 부러질 듯 약하지 만 속은 강한 고집과 신념으로 꽉 차 있지. 박찬열이 백현에게 얘기했던 벗, 그리고 황제와 통정하다 쫓겨난 사관. 둘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폐하 곁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곳곳에 변절자와 폐하를 해하려는 자들만 우글거리지. 네가 그때 과거에 응하였다면 지금 폐하 곁에서 힘이 되어드렸을 것 아니냐?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가정해 봐야 소용없다고 말씀하신 분은 스승님이십니다. 혀만큼은 청산유수로군. 백현은 다시 차를 들이켰다. 시국이 이러하니 너는 방황을 접고 과거 준비에 매진하여라. 중앙으로 진출하는 길은 오직 그뿐.

253 더는 네 방종을 지켜볼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서간을 보내셨습니까? 공주님의 서간이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이니라. 네 방황이 햇수로 팔 년째다. 그렇다고 외국에 나가 오래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은둔 거사를 자청할 필요가 있느냐? 머리 복잡한 게 싫은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태흥이 옆에 있던 장죽을 들어 백현의 머리통을 콩 내리쳤다. 네 입맛대로 살 거면 세상에 왜 나왔느냐! 그게 뭐 제 뜻이었나요? 이놈이! 다시 장죽으로 퍽퍽 쳐대니 백현이 몸을 사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상투 튼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리 때리십니까! 헛상투 튼 주제에! 어른 대접받고 싶거든 네 도리를 다하면 된다! 어쨌거나 장문견이 이번 기회로 힘을 더 얻었을 텐데요. 서두르지 마라. 작은 것부터 천천히 해나가면 되느니라. 머리통을 문지르는 백현을 보며 태흥이 덧붙였다. 하나의 염원이 수십, 수백이 되면 강한 의지가 되는 법. 상황에 굴종하지 마라. 너 같은 젊은이들 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이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백현은 제 스승에게 반쯤 식은 탕약을 바쳤다. 오일장이 열린 저잣거리는 제법 떠들썩했다. 경수는 이곳에 온 지 나흘 만에 바깥으로 나갈 수 있 었다. 낙척 신세치고는 상당한 호사였다. 나리께서 주신 비단 한 필과 패물을 팔아 쌀과 소금, 고기를 사야 해요. 종옥이 보따리를 제대로 여미며 앞장섰다. 오랜만의 나들이라 그런지 그녀는 퍽 들떠 보였다. 아휴, 무명이가 가벼운 고뿔에 걸렸는지 어제오늘 콧물도 심하고. 네. 꼭 의원 댁에 들러서 약을 지어오세요. 아기들은 몸이 약하니 세심히 보살펴야 하잖아요. 뜻밖의 은인을 만나 호사를 누리네요. 은인이라니요. 그저 군식구일 뿐인데요. 이제 이월도 저물어 가는데 동장군의 입김을 그대로 맞는 이곳은 내륙의 십이월이나 일월처럼 느껴 졌다. 여전히 추웠고 산천에 살얼음과 서리가 두꺼웠다. 종옥이 아이를 안고 비단과 패물을 처분하러 간 사이, 경수는 근처 세책방에서 읽을 만한 책들이 있는지 살폈다. 교안에 있을 적에는 곧잘 시첩을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는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고 농번기가 아닌 때는 시간을 죽일 방법을 따로 찾아야 했다. 볼만한 책들이 있는지 이것저것 해찰하는데 확실히 번화가인 도성보다는 모든 것이 뒤처진지라 이 미 유행 지낸 소설과 각종 문집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었다. 찾는 책이라도 있으시오? 그냥 살펴보는 중입니다. 궁에서 나오셨소? 경수는 해찰하던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민망한 미소를 덧붙였지만 주인은 미처 보지 못했다. 경수는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교안에 쭉 들어선 시전 거리에 비하면 규모나 떠들썩함 면에서 비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이곳도 나름대로 번화가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날이 풀리면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겨울의 움츠림을 물리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경수는 비 록 죄인 신분이었지만 사람들의 활기를 느끼고 싶었다. 우울한 잿빛에 잠식당해 허우적거리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구경하던 중, 시간이 지나도 종옥이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자 경수는 불안이 엄

254 습했다. 그런데 그때, 포목점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꽤 시끄럽고 앙칼진 고성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경수는 뜨악한 생각에 얼른 그곳으로 가 보았다. 이 천박한 계집! 네까짓 게 이런 고급 비단과 패물이 어디서 났단 말이야?! 한 소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가운데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기만 했다. 누구도 소녀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경수는 그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기함하였다. 종옥이 앳된 소녀 앞에서 비참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토끼털을 단 운문단 망토에 색깔 고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차림새 는 누가 보더라도 사대부가의 규수였다. 그런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왈패였다. 어디서 났어? 바른대로 고하지 못해? 종옥은 바닥에 널브러진 비단과 패물을 주섬주섬 챙기며 울었다. 훔치지 않았습니다. 훔친 것이 아니어요. 훔치지 않았으면 미천한 네게서 이런 것이 어찌 났단 말이야?! 소녀가 눈짓하자 옆에 있던 그녀의 계집종이 종옥의 뺨을 후려칠 듯 손을 으르며 다가왔다. 그 물건들은 제가 가져온 것인데 대체 무슨 일이죠? 보다 못한 경수가 화가 잔뜩 나서,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앞으로 나섰다.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 자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소녀가 눈을 홉뜨며 경수를 노려보았다. 못 보던 놈인데 너는 또 무엇이냐? 종옥의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옳아! 네놈이 얼마 전에 유배 왔다던 교안에서 쫓겨난 놈이로구나! 소녀가 동조하라는 듯 과장되게 외치자 사람들이 더욱 숙덕거렸다. 네. 그러는 아가씨는 누구시죠? 행색을 보자니 평범한 분으로 보이진 않는데 어찌 백주에 거리 한 복판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계십니까? 소녀의 계집종이 나섰다. 이분은 이곳 경성현의 책임자이신 현령 나리의 고명따님이시오. 예문관에서 내외직의 인사들을 익히던 중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대대로 천석꾼 집안이었다던 경 성현령은 원래 다른 지역 출신이었으나 상피제로 경성현에 온 후 이곳의 지주로 군림한다고 했다. 이곳에 처음 온 날, 그에게 인사를 올리긴 했지만 당시엔 이런 무례한 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다소 귀찮은 기색이 엿보이긴 했어도 태도가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경수는 이래도 네가 나서겠느냐는 듯 턱을 치켜드는 어린 계집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짐작이 갑니다만, 종옥이 내다 판 물건은 모두 제가 교안에 있을 때부터 가 지고 있던 것들이니 아가씨께선 그만 노염을 푸십시오. 이것 봐라. 이 노리개는 우리 어머니께서 나 시집갈 때 쓰라며 주신 것과 똑같은데 때마침 며칠 전에 잃어버려 아주 신경이 쓰이던 차다. 그런데 저 계집이 치레걸이 점포에서 이걸 팔고 있으니 내 가 의심하지 않겠느냐? 집 안에 도둑이 들었다면 가장 먼저 집안사람들부터 단속해야 맞지 않습니까? 뭐야? 보통 그처럼 귀한 패물은 남들은 모르는 깊숙한 곳에 보관하기 마련이죠.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이 있었습니까? 부친께서는 집 안에 그런 도둑이 들었는데도 가만히 계셨나요? 아니, 부친께 노리개를 도둑맞았다고 말씀은 올리셨는지요? 앞뒤가 착착 들어맞는 반박에 소녀는 제 화를 못 이기고 얼굴이 벌게졌다. 경수는 계속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아가씨께서 현령 나리의 고명따님이라면 집안에서 매우 귀하게 여길 테고, 자택 또한 관아인데 이 런 점으로 미루어 외부에서 도둑이 들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씨의 노리개를 훔쳐간

255 사람은 내부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요. 아랫것들 단속은 제대로 하셨습니까? 너, 너! 애초에 있지도 않은 노리개를 도둑맞았다고 하니 궁지에 몰리자 강짜가 날 수밖에. 여인은 붉으락 푸르락하여 경수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귀양다리 주제에 네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 억울한 사람이 있으니 사리에 맞게 판단하자는 것입니다. 종옥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모두 제 물 건이 맞는데 아가씨께선 도리어 아가씨의 물건이라고 주장하시니 저로서도 무척 당황스럽네요. 네 물건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보십시오. 노리개에 쓰인 이 장식은 상의부 공장들만이 새기는 무늬인데 마님께서 궁에서 받은 물 건이 아니라면 이런 표식이 있을까요? 경수가 홍옥을 입에 문 나비 장식의 노리개를 내보이며 물었다. 과연 이 지역에서는 쉽게 나지 않 는, 황실과 교안 세도가들이나 쓰는 고급 투각 장식이었다. 네 이놈! 그리고 아가씨. 경수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소인이 비록 유배 생활을 하는 몸이지만, 본디 황제 폐하의 언행을 기록하는 잠필지신이었습니다. 뜻밖에 이곳으로 쫓겨났어도 언제 사면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데, 계속 이놈 저놈 하시면 듣는 사 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기에 눌린 소녀가 시르죽은 눈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곱게 자란 분이 아버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으시겠죠. 건방진 것! 그 아름다우신 입술에 꽃을 피우는 법부터 배우신다면 아가씨를 더욱 빛낼 것입니다. 너. 두고 보자. 소녀가 치맛자락을 휘감으며 찬바람을 일으키고는 그 자리를 떴다. 계집종이 허둥지둥 제 주인의 꽁무니를 따라갔다. 모였던 사람들도 흩어지자 경수는 담담하게 물건을 수습한 뒤 종옥을 일으켜 세웠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나리까지 봉욕을 당하게 했습니다. 경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엔 가문과 지위를 믿고 설치는 사람들이 많죠. 한두 번 짓밟혀주다 보면 원래 그렇게 태어난 줄 알고 마구잡이로 난도질하기 마련이에요. 종옥은 잘못한 게 없어요. 종옥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경수는 무명이의 모자가 흘러내린 것을 바로 해 주며 종옥을 부축했다. 45. 천애지각( 天 涯 地 角 ) 종인의 일과는 참혹할 정도로 빡빡했다. 하루에 두 시진이나 자면 많이 잔 것일까. 신료들마저 자연 스레 그 움직임에 따라와야 했는데 가장 괴로운 것은 종인 본인이었다. 그는 위태로운 불씨를 살리려고 아등바등했다. 찬열과 경수,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보이지 않 는 적들을 말살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더욱 일에 몰두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까무룩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조차 흉몽이 이어져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의 심신은 점점 지쳐갔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언젠가 저들의 면상에 시원하게 주먹을 꽂 고 싶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오후에 차대를 마치고 침전에서 조금 쉴까 하는데, 장문견이 그를 붙잡았다. 폐하. 신들이 폐하께 간곡히 주청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종인이 피곤한 기색으로 무엇이냐고 물었다. 올해 폐하의 보령이 스물둘이신데 여태 후사는커녕 사직에 안주인마저 없으니 이는 실로 나라의

256 우환입니다. 영회황후의 탈상이 끝났지만 불측하게도 역적이 날뛰는 바람에 황실이 근래 편안하지를 못했지요. 하여 신들이 긴히 논의한 바, 폐하께서는 국혼으로써 사직의 안주인을 다시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하시오. 예, 하오면 그리. 예?! 폐하. 방금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장문견이 놀라 반문했다. 종인은 윤기 없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그리하라 일렀소. 입때껏 국혼의 국 만 꺼내도 진저리를 치고 온갖 핑계를 대며 미꾸라지처럼 굴던 황제가 도대체 무 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다. 모여 앉은 중신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황세용이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앵무새처럼 그 말을 따라 했다. 어질고 정숙한 황후마마를 맞으시어 순후한 음조를 받으신다면 폐하의 전정이 더욱 빛날 것입니 다. 대사농 최진수가 싱글벙글하여 덧붙였다. 그에게도 딸이 있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딸 가진 권신들은 중궁전으로 자신의 아이를 들이밀 심산이었다. 황후는 태후마마와 종친들이 논의하여 간택하는 것이 관례이니 예부에 일러 서둘러 금혼령을 내리 고 처녀 단자를 올리라 하겠습니다. 보여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졌지만 이대로 황제를 홀아비로 늙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황제 를 사로잡을 팔색조 같은 계집을 뽑아 명목상 중궁으로 앉히고 권력을 유지하면 될 일이다. 태후도 이것을 강조했다. 보여와 마찬가지로 현수궁의 주인은 무조건 장씨 문중이나 그 일가친척에 서 나와야 한다고. 모처럼 나라에 경사가 있겠습니다. 황세용이 장문견을 의식하며 말했다. 다들 한시름 놓았다는 듯 서로 축하하고 난리인데, 피곤하게 앉아 있던 종인이 다시 고개를 들며 옥음을 흘렸다. 한 명을 뽑든, 수십 명을 뽑든 모두 경들 뜻대로 하시오. 허나, 단호하게 덧붙이는 한마디. 그 어떤 처자의 가마도 결코 관주성의 정문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 말에 대신들이 대경실색하여 저마다 수박 쪼개듯이 입을 벌렸다. 정문으로 가마를 들이지 않겠다는 것은 간택한 처녀는 무조건 후궁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황제가 정신 나간 것이 아니고서야 현수궁을 비우겠다는 말을 저리도 쉽게 내뱉을 리 없었다. 폐하! 조금 전의 윤음은 거두어 주십시오! 무릇 황실이 번성하려면 훌륭한 안주인을 세우는 것이 근본인데 어이하여 모조리 빈첩으로 삼겠다 하십니까? 무정후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찌 폐하께서는 달을 멀리하시어 음양의 조화를 흠숭하지 않으려 하 십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장왕은 번희의 계명지조로 천하의 주인이 되었고 당 태종은 장손 황후의 지극한 음조로 정관의 치 를 달성하였습니다. 이렇듯 태평성대의 기본은 일월의 화합이요, 사직의 안녕은 가히 내치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곤전을 비운 채 후궁만 들이겠다 하심은 불가하옵니다! 불가하옵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들. 종인은 엎드려서 징징대는 대신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경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만 짐은 친영례를 두 번 행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이미 여러 차례 전쟁하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빠듯하고 간택을 치르는 동안 쓰이는 비용 또한 만 만치 않소.

257 또, 짐은 이미 실덕하여 영회황후를 잃은 전적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 부부지연을 맺든 신중해지고 싶구려. 후궁들을 천천히 알아가다 보면 그중 참된 여인이 있을 터. 후일 그중 한 명을 중궁으로 세워 도 나쁘지 않겠지. 폐하, 하오나! 다들 입 다물라는 듯, 종인이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종인을 쳐다봤다. 짐의 뜻이 이러하니 경들은 더는 왈가왈부 말라. 마른하늘에 내려친 날벼락이 이러할까. 대신들 모두 어안이 막혀 서로 혀를 내둘렀다. 경수는 서서히 그곳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어서 그곳에서의 일과는 무던하게 흘렀다. 종옥에게 신세 지다 보니 괜히 눈치 가 보여 평소보다 더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첫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집에서 한참 떨어진 마을 공용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산짐승의 길을 피해 장작을 패왔으며, 일찍 부엌에 들어가 아침밥을 짓거나 종옥이 밤새 지친 손으로 지분거리던 푸 실을 실패에 감아두기도 했다. 다 어머니를 도와 하던 일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극심한 추위에 손발이 얼고 몸이 굳는다 는 것이 흠이었다. 종옥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경수는 도리질을 쳤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자 의든 타의든 황제에게 내쳐진 몸이고 찬열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다. 마음은 그렇다 쳐도 몸까지 편할 순 없었다. 지치면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첫 닭이 울기 전에 몸이 먼저 일어났다. 일상의 반복 이었다. 마을은 며칠 전부터 꽤 떠들썩했다. 현령의 생일을 맞아 관청에서 큰 잔치를 벌이기 때문이다. 종옥도 몇 번이나 그 집으로 불려가 일하는 것을 돕고 삯을 받아 왔다. 중간에 현령의 고명딸인 춘 영을 만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사흘을 내리 가는 동안 만나진 않았다. 경수는 집에서 무명이 를 돌봤는데 애 보는 것도 만만치 않아서 종옥이 돌아오면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다. 요즘 하는 일마다 잘 풀려 현령 나리의 기분이 하늘을 찌른답니다. 마을에 특별히 골치 아픈 일도 없으니 더 그렇겠죠. 초대 손님도 많은지 까다롭게 자리를 정하는데 돗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랍니다. 종옥은 경수에게 밥상을 내어주며 종알거렸다. 현령 나리의 생신을 축하한다며 산 넘고 개울 건너 고을 수령들이 줄줄이 오시는 모양이에요. 그 많은 손님을 어디서 재우는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일대가 소란스러우니 사람 사는 것 같고 그래요. 내일도 가야 해요? 네. 내일이 생신이니 마지막 뒷정리까지 도와야 해요. 그럼 저도 갈까요? 나리께서요? 네. 원래 잔치 당일이 제일 번잡하고 일도 많잖아요. 게다가 손님들까지 상대하려면 그 댁 식구들 도 여간 피곤하지 않을 텐데 그럴 때일수록 일손이 부족하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유배 중이라지만 나리께서 남의 잔칫집에서 허드렛일 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네요. 잔치가 아니라 종옥을 돕고 싶어요. 요 며칠 불려다니느라 몹시 피곤해 보이거든요. 무명이를 등에 업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은 수월했답니다. 종옥이 농을 던지자 경수를 엷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부엌에만 있으면 되니까 같이 가요, 그럼. 경성현에선 보기 드문 잔칫날이니 나리도 모처럼 흥겨운 가락 한 자락이라도 들으시면 오죽 좋겠어요?

258 이번 도독이, 누구라고요? 백현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박태흥은 장죽의 재를 탁탁 털고는 연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동요하지 마라. 마음을 죽여야 한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 스승님! 이날까지 네가 그자와는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아 방황했다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일은 아니지. 네 나이 스물넷이면 한 가정을 꾸리고도 남음이다. 어린애처럼 뒤로 숨는다고 만사가 해결되더냐?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겁니다. 그자가 제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인데 어찌 폐하께선 그런 자를 동 주의 도독으로 보내셨단 말입니까! 폐하께 직접 의중을 여쭈어 보지 그러느냐. 옛일에 집착한다고 아주 좋아하실 거다. 냉소적인 비꼼에 백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참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자와 마주하라니요?! 백현의 등 뒤로 사뭇 새파란 그림자가 졌다. 여전히 눌러 삼키지 못한 일말의 증오였다. 나라고 이런저런 핑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겠느냐? 지난번에 쓰러진 일로 내자가 시시콜콜 잔소리 를 끓이니 나로서도 별도리가 없구나. 그나마 네가 있어 의지할 데라도 있는 것인데, 네 정녕 아니 가 려느냐? 백현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십 년 가까이 묻어둔 마음은, 다만 원수를 마주하지 않았기에 들끓지 않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미소를 짓고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직 백현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백현은 찬란한 허영과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한 번민이란 이름의 가시 만큼은 여전히 목구멍에 박아두고 있었다. 현령이 한때 내 제자였으니 모른 척하기도 그렇구나. 내가 한서현에 부임했을 때 직접 사람을 보 내 환대해 주기도 했지. 작년 생일에도 못 가서 면목이 없더구나. 백현은 갈등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스승의 애처로우면서도 고압적인 표정을 보자 입장이 난처했 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강요하지는 않으마. 허나 네가 언제까지 그자를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고작 얼굴을 마주할 뿐인데도 조그만 가 능성조차 꺼리니 네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던 마음은 결국 으스대는 건다짐에 지나지 않았구나. 억누르고 있다 하여 아버님의 치욕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그날 이후론 제대로 누워 주무시지도 못하시는데 저라고 그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인지한다 하여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 따끔한 일침에 백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 너를 인정하는 것은 네 스스로 복수가 하찮은 수단임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또 넌 수단이 더러우면 그 아무리 훌륭한 목적이라도 끝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잘 안다고 했지. 그것을 각오하고 진흙에 핀 연꽃이 되겠다 했던가? 해서, 너는 지금 연꽃이 되어 가고 있느냐? 그저 진흙탕의 끈적임과 더러움을 탓하며 싹 피울 생각은 안 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비범한 일도 아닌데 너를 나무라는 나도 기쁘진 않구나. 허나 나는 그 어린 날 네가 했던 말을 빠 짐없이 기억하고 있느니라. 또한, 너는 스스로 널 증명하려 노력했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어린 시절의 변백현. 태흥은 저 매서운 눈매에 담아내던 형형한 독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더욱 백현을 방황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군에서 훈련받은 모든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훌륭하게 활약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칼을 휘두르지 못하면 살육장에서 스러지는 것은 적이 아니라 나다. 칼을 갈았으면 휘둘러 적의 목을 쳐야 하지. 적 들이 매섭게 몰려온다고 마냥 웅크리고 있으면 그들이 저절로 물러나더냐?

259 병서에 통달한 네가 전쟁을 앞둔 병사가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둔치는 아닐 터. 너는 연꽃이 되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주저앉아 우는 병사가 되고 싶으냐? 부친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장안사에서 몇 달을 지내는 동안, 나름대로 초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언젠가는 부딪칠 일이니 절대 피하지 말자, 더는 시간을 죽이는 방랑객이 되지 말자, 아버지와 어머니 의 처절함을 생각하자 그리 다짐했다. 그것은 말라비틀어진 허언 따위가 아니다. 공자를 흠숭하는 유생이나 부처 앞에서 겸허하게 읊조렸 던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다. 가겠습니다. 백현이 무겁게 입을 뗐다. 최대한 그자와 부딪히지 않고 돌아오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혼자 조용히 다녀올 것입니다. 경태도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스승님은 그간 조섭에 신경 쓰고 계십시오. 네가, 다시금 장죽의 담뱃재가 놋으로 만든 재떨이에 탁탁 떨어졌다. 코와 입에서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 는 박태흥은 흡사 안개구름에 휩싸인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의서를 뒤져 내 병에 좋다는 약초와 약방문을 알려줬다 들었다. 의원에게 확인해 보니 써도 좋다 고 해서 며칠 전부터 먹고 있는데 효험이 있는지 심통이 많이 가라앉았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면 사모님뿐만 아니라 저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것이 어찌 스승님의 탓이겠습니까만, 일 좀 줄이시고 타인에게 신경을 덜 쓰신다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잔소리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길을 서둘러야겠구나. 물건은 다 준비해 뒀다.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너는 말 을 타고 다녀오너라.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방을 나오는 백현의 표정은 먹구름처럼 어두웠다. 일대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고관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뒤에 줄줄이 시종들을 달고 달구지나 말에 선물을 잔뜩 싣고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이국의 사절단을 연상케 했다. 훌륭하게 차려입은 그네들은 염염하면서도 풍만한 미소를 입에 걸고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초면에 예를 갖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관청은 대문을 활짝 열고 한껏 흥겨운 잔치를 이어나갔다. 현령은 모처럼 관복을 벗어 던지고 아내 가 지어준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멸시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현령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인 줄 믿고 사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이번 생일잔치를 총괄하였는데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손님들이 직접 관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잔치의 규모였고, 다른 하나는 상차림이었다. 이 때문에 인근에서 내로라하는 수공업 장인들과 아낙들이 며칠 전부터 관청을 수리하거나 천막을 설 치하고, 부엌에서 산해진미를 만드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현령의 아내는 일일이 음식을 맛본 후 그녀만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손님상에 내놓도록 했다. 예컨 대 지위에 따라 음식에 들어간 재료나 술상에 올라가는 안주의 내용물이 은근히 차이 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남편이 앉은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중요 인물을 정하여 음식과 장식

260 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오늘을 위해 삼 년 전에 담근 천일주를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남편을 지극히 흠모하는 현령의 아내에게도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오늘 모이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이 지체 높은 사내들인지라 그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관기들을 남편 앞에 선보여야 한다 는 점이었다. 물론 현령은 여색에 별 관심이 없는,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인사였지만 사실 현령은 매사 심드렁 하고 귀찮아해서 취미 생활도 딱히 없었다 이 좋은 날에 천박한 계집들을 관내로 들이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이 척박한 땅을 버리고 언젠가 중앙 조정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니 오늘 인맥을 돈독히 하려면 해어화는 필수였다. 울긋불긋한 치마와 전모를 뒤집어쓴 한 무리의 기녀들이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보며 경수는 이제 막 먹음직스러운 전 한 장을 뒤집었다. 일손이 워낙 모자라 남녀 구분 없이 일을 보고 있었다. 종옥을 도우러 온 그는 외지인을 경계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없이 자기 할 일에만 몰두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종옥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선 평판이 썩 안 좋아서 두 사람은 가장 구석 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상에. 예전부터 눈여겨봤지만 나리께선 요리도 참 잘하시어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경수는 미리 만들어놓은 전을 데우거나 새로 부치는 일을 맡았는데 집에서 늘 하던 일이라 능숙하 게 예쁜 전을 부쳤다. 녹두를 간 반죽에 돼지고기를 얹고 마지막으로 홍고추를 올려 장식하자 무척 맛있어 보였다. 경수 는 그것을 얼른 들어 옆에 놓인 소쿠리로 옮겼다. 전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종옥은 맞은편에서 채소를 다듬었다. 뭘 그렇게 살피는 거죠? 이 댁 고명따님이라도 마주칠까 봐 그래요. 설마 이곳에 와서 패악을 부릴까요? 알 수 없죠. 그냥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에요. 잔치가 시작된 듯 풍악을 올리는 소리가 터졌다. 시간을 못 맞춘 몇몇 객들이 있었으나 새로 부임 한 도독을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왁자지껄하다 못해 요란한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선율처럼 흘렀다. 경수는 언젠가 궁에서 처음 맞이한 나례 연회를 떠올렸다.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과 귀신 탈 을 쓴 온갖 광대들이 궐의 정적을 깨웠을 때, 경수는 못내 지나가는 순간이 아쉬웠다. 그때 종인은 매해 다시, 그것도 같이 볼 수 있다며 경수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이젠 그런 눈빛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지 오래다. 자, 자! 손님들이 계속 오고 있으니 서두르게! 현령의 아내가 보라색 치마를 홱 추어올리며 반빗들과 도움 주러 온 사람들을 재촉했다. 나리. 안색이 조금 창백한데 괜찮으세요? 아. 찬 공기를 오래 쐬면 종종 이래요. 찬 공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근래 몸도 좀 무겁고 나른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봄이 온다는 증거겠지요. 피로가 쌓이면 그래요. 저는 나리께서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매일 물 긷는 것부터 시작해 서 밥이며 빨래까지 나리 혼자 다하려 드시니. 늘 해오던 일이라 힘들지 않아요. 종옥은 샐쭉하여 다시 채소 다듬기에 열중했다. 어머니! 아버님께서 얼른 오라셔요. 도독께서 어머니를 한번 뵙고 싶다고 했대요. 느닷없이 춘영이 안마당으로 들어오며 나불거렸다. 종옥은 대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녀는 냉큼 머리에 쓴 수건을 푹 내려 얼굴을 가렸다.

261 경수는 종옥과 춘영을 물끄러미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춘영과 눈이 마주치자 공손하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경수를 알아본 춘영이 제 어미가 동헌으로 사라지자 눈을 뾰족이 치켜세우고는 경수 쪽 으로 걸어왔다. 노란색 호박을 단 노리개가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도도하신 귀양다리 아니신가? 춘영이 시비 트는 목소리를 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하였다. 조정의 고결하신 관리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는 어인 일이시죠? 신선처럼 고매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역시 누더기를 입고 있어도 자태가 남다르군요. 황제 폐하의 잠필지신이라고 하셨던가요? 제가 배움이 단천하여 아버님께 여쭈어 봤는데 사관들이 란 청렴하기가 하늘을 향해 뻗은 대나무와 같다더군요. 헌데 나리께선 어떻게 하다 유배형에 처해지 셨죠? 타락한 대가인가요? 춘영은 보란 듯이 약 올렸지만 경수는 대꾸도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에 몰두했다. 반죽을 떠서 돼지 비계를 바른 솥뚜껑 위에 좍 뿌리자 지글지글 전이 부쳐졌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경수를 보자 춘영은 부아가 치밀었다. 얘, 순화야! 여기 향불이나 좀 피우지 않으련? 역겨운 돼지기름 냄새가 나서 못 살겠구나! 명령을 받은 순화란 계집이 안절부절못하자 춘영은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멍청한 것! 주인이 말하면 재깍재깍 들어야 할 것 아니니! 아가씨! 고정하세요! 어린 계집이 울먹이며 빌었다. 춘영은 팩 코웃음을 치고는 옆에 있던 소금 통을 들고 경수에게 확 뿌려버렸다. 에구머니나! 사람들이 놀라서 수군수군 대는 동안에도 경수는 제 몸 위로 후두둑 쏟아진 소금을 떨어내지도 못 한 채 가만히 있었다. 좋은 날 남의 집에 와서 싸움하고 싶지 않았고 춘영 같은 사람은 상대해 봐야 불필요한 소모였다. 또 그녀는 지난번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으니 오늘이 아니더라도 경성에 있는 동안 언젠가는 맞닥뜨 릴 일이기도 했다. 청렴한 관리가 비리를 저지르거나 역심을 품으면 이곳으로 많이들 유람 오신다오. 나리께서도 그 러신지? 사람을 대로변에서 그리 면박을 주더니 꼴좋소. 난 나리가 조정으로 복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소. 다만 이곳에 있는 동안 신세 망치고 싶지 않거든 알아서 처신하시구려. 춘영이 쏘아붙인 후 호쾌하게 웃으며 물러갔다. 뒤늦게 사람들이 몰려와 경수를 살폈지만 이내 춘영이 다시 올까 봐 다들 제자리로 흩어졌다. 종옥 만이 경수 곁에 남아 있었다. 나리. 죄송해요. 그 날 말싸움을 벌인 사람은 전데 왜 종옥이 미안해하죠? 그러지 마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날 제가 오해를 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비단과 패물을 내어준 사람은 저예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죠. 매사 그들을 상대하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경수는 종옥을 안심시켰다. 치솟는 감정 같은 것은 없다. 짧지 않은 이십삼 년 인생에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속할지라도 면전에서 저리 흉악을 부리는 것이 솔직 하게 느껴졌다. 소금이 들어가서 그러는데 어디 잠깐 옷을 털 곳이 없겠습니까? 종옥이 이곳의 총 책임자인 함선댁을 가리켰다. 경수는 함선댁이 일러준 곳으로 갔다.

262 46. 치( 恥 ) 동헌 뒤에 있는 으슥한 곳에서 경수는 윗옷을 벗어 가슴께로 쏟아진 소금을 탈탈 털었다. 아무리 신경을 안 쓰려 해도 몸이 찝찝한 것은 별수 없어서 공연히 심통이 났다. 그래도 바닥을 발로 차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들창 너머의 하늘을 한번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런데 들창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서 경수가 황급히 몸을 가렸다. 누구요? 어떤 몰염치한 사람이 함부로 남을 훔쳐보는 것이오? 경수가 호통쳤지만 밖에선 대답이 없었다.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린 후 서둘러 웃옷을 걸쳐 입고 다시 음식 장만이 한창인 곳으로 향했다. 꽃 피는 춘삼월이 코앞이라지만 고원에 자리한 이 지역은 아랫녘보다 봄이 더디게 왔다. 햇볕은 고 즈넉하고 다사롭지만 가만히 있어도 소매 사이로 찬바람이 스몄다. 물에 손이라도 담그면 얼마 지나 지 않아 빨갛게 얼었다. 경수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전을 부치고 나면 산적과 수육에 쓰일 고기를 다시 삶아야 했는데 그는 고기 누린내 때문인지 솥 앞에 앉아 몇 번이나 헛구역질했다. 비위가 약간 편은 아닌데도 북녘에서 잡은 돼지라 그런지 이상하 게 토악질이 밀려왔다. 냄새조차 맡기 싫었으나 경수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커다란 고깃덩이를 삶고 나니 어느덧 해가 한참 기울어 있었다. 아침나절에 와서 온종일 별의별 음 식과 씨름하다 보니 이제 내 몸이 기름처럼 느껴졌다.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래 보였다. 풍악은 끊이지 않았고 무슨 재미난 얘기들을 하는지 사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안마당까지 들려 왔다. 어린 뭇 계집종들은 고관들에 눈에 들어 어떻게든 자신의 팔자를 펴 보려는 심산도 있는지라 마님이 보지 않을 때면 음식과 술을 나르는 척하면서 그네들 앞에서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현령의 생일잔치는 그렇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무던하게 흘러갔다. 이제는 음식도 넉넉하고 동헌에 잠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시기였다. 품앗이를 온 사람들은 이 집 에서 마련한 늦은 점심상을 받았다. 다들 옹기종기 돗자리 위에 앉아 따끈한 국밥 한술을 뜨려던 찰 나였다. 춘영의 몸종인 순화가 쭈뼛거리며 경수에게 걸어왔다. 경수가 고기 누린내로 속이 뒤틀린 듯하여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순화가 눈치를 보더니 툭 내뱉었다. 우리 아가씨가 동헌에서 잠시 뵙자 하시오. 동헌에서? 되물은 것은 종옥이었다. 무명이에게 밥을 먹이던 그녀는 경수를 홱 돌아보았다. 왠지 꺼림칙한 느 낌이 들어 눈짓으로 가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용건이 있으면 아가씨께서 잠시 이리로 오시면 될 일을. 종옥이 중얼거리자 순화가 대번에 받아쳤다. 우리 아가씨가 천것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 줄 아오? 순진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주인이랍시고 대거리하는 모습이 퍽 앙칼지다.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청하시고 별다른 말씀은 안 하시더냐? 가 보시면 아시겠지요. 동헌으로 오라니 조금 의아해서 그런다. 잔치가 한창인데 왜 하필 거기서 보자고 하시는지 모르겠 구나. 그건 나도 모르오. 아가씨께 직접 여쭈어 보시오. 가지 말라는 종옥의 손을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맞잡아 준 후 경수는 걸음을 옮겼다. 순화를 따라 동헌에 가까워질수록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관기들이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나간 모양이다. 예쁜 옷을 입은 꽃 같은 여인들이 흥을 돋웠으니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으 리라. 아가씨.

263 순화가 춘영을 불렀다. 동헌 아래에서 손님들과 살갑게 대화하던 춘영이 몸을 돌렸다. 오셨소?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날 따라오시오. 춘영은 싱글거리며 어디론가 향했다. 경수는 시비 붙기 싫어서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이윽고 춘영이 도착한 곳은 서헌 안쪽에 있는 작은 마당이었다. 대개 손님의 처소로 쓰는 곳이고 뒤쪽으로는 고갯길을 넘나드는 지름길이 나 한적했다. 춘영은 그곳에서 경수를 잠시 기다리게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나와 경수에게 말하기를, 들어가 보시오. 안에 누가 있는 것입니까? 가면 알 것이오. 불현듯 불쾌한 예감이 들었지만 경수는 별다른 표정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웬 아버지뻘 되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경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김새가 누군가를 떠올리 게 했다. 사내는 경수가 들어오자 음흉하게 눈을 빛냈다. 소인을 청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경수가 정중하게 물었다. 앉아라. 품앗이하러 와서 앉아 담소를 나눌 처지가 못 됩니다. 괜찮다. 앉으래도. 어투는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강압적이었다. 경수는 별수 없이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네가, 일대에 소문난 아이로구나. 일대에 난 소문이 뭔지 몰라도 경수는 사내의 니글거리는 듯한 미소가 영 볼썽사납기만 했다. 게다 가 춘영이 이곳으로 데려왔으니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과연 무비일색이로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경수가 딱 잘랐다. 그러자 사내가 껄껄 웃었다. 네가 조정에서 쫓겨난 사관이라지?! 너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태평연에서 용연무를 추었던 그 아이라는 사 실을 알았을 땐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지. 경수의 평온하던 미간에 희미한 금이 갔다. 당시 술에 취해 네 춤을 제대로 감상하진 못했다만, 폐하께서 친히 초빙하셨을 정도면 보통은 넘 겠다 싶더군. 오늘 너를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용연무에 어울리는 멋진 옷이라도 마련해 올 것을 그 랬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역적과 교우하다가 같은 역적으로 낙인 찍혀 홀로 머나먼 땅에 떨어져 있으니 신세가 참으로 고달 프지 않으냐? 내, 너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일 수 있다. 내 힘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음이야. 이번에 새로 부임하셨다던 도독이시군요. 경수가 차갑게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도독이다. 전쟁만 아니면 동주는 나이 먹은 이들에게는 관직 생활을 편히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중 하나였 다. 자사와 유착만 잘하면 도독으로 부임하는 이 년 동안 놀고먹을 수 있었다. 앞에 앉은 사내는 선정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노는 데만 시간을 허비할 것이 뻔하였다. 지나치게

264 화려한 옷차림이나 번들거리는 면상이 그를 증명했다. 이 추운 촌구석에서 네 용모와 재주를 썩히기 아깝단 생각은 아니 드느냐? 죗값을 치르는데도 재주의 아까움을 탓해야 합니까? 허면 가족이 그립진 않으냐? 귀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낸 네 아비와 어미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순간 목이 콱 메었지만 경수는 동요하지 않은 척했다. 나는 너를 빼낼 수 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조정에 너를 방면해 달라는 뜻을 상달할 수도 있음이야. 원하지 않습니다. 정녕 가족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냐? 갑자기 소인을 불러내 하실 말씀이 이것뿐이십니까? 오늘 밤, 나와 함께한다면 너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경수는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떠냐? 혹 아까 소인을 훔쳐보신 분이 도독이신지요? 변소를 찾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소인은 창기가 아닙니다. 하여 도독에게 몸을 팔아 조정에 복귀하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습니 다. 도독께서는 해웃값을 주고 사근사근한 꽃을 찾으시면 될 일입니다. 경수는 최대한 정중한 어투로 얘기했다. 하지만 도독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아우에게 들어 사관의 고집과 언변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 실제로 못 먹는 감을 앞에 두자 화도 나고 안달도 났다. 너를 이 지긋지긋한 경성 땅에서 빼내 줄 수 있다지 않았느냐? 용양군으로 삼겠다던 황제도 뿌리쳤는데, 고작 방면으로 자신을 유혹하려 들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내 첩실이 되라고 하지는 않으마. 나는 재주 많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단다. 도처에 핀 것이 꽃이고 모두 귀한 재주를 가졌습니다. 이 척박한 땅에선 꽃이 피어도 한때뿐이지. 헌데 오늘 천상의 꽃을 만났으니 그 향기에 질펀하게 취하고 싶구나. 아름다운 꽃은 가시가 많고, 자신을 해할 존재가 다가오면 독을 뿜어내기도 하죠. 꽃을 길들이는 재미도 있는 법이니라. 도독께선 나라의 관리이고 어명으로 지방 백성들을 다독이고자 이곳에 오셨습니다. 헌데 온 지 며 칠이나 지났다고 색을 탐하시며 수청을 들라 하십니까? 네가 지금 나를 꾸짖는 것이냐? 잘못된 일을 행하시려는데 더한 말씀이라고 못 올리겠습니까? 더구나 제가 아무리 궁에서 쫓겨났 다고는 해도 엄연히 예문관의 잠필지신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조용히 폐하의 부름만을 기다리는 몸인 데 어찌하여 도독께서는 소인을 희롱하시는지요? 경수가 딱딱하게 굴자 도독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저 태도가 심히 거슬렸으나 가시를 품은 꽃은 그만큼 취할 가치가 있었다. 나는 한다면 나는 사람이다! 도독이 벌떡 일어나서는 괴팍하게 달려들었다. 이거 놓으! 경수가 대경실색하여 비명을 지르려 하자 도독은 재빨리 경수의 입을 틀어막고 그를 범하려 하였 다. 경수가 이리저리 몸부림칠수록 도독의 악력은 더욱 거세졌다. 거세게 발버둥 치다 보니 몸이 밀려 문갑 쪽으로 붙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도독은 경수의 섬약한 손을 뿌리치고 게걸스러운 눈으로 그의 옷을 확 잡아 뜯었다. 그와 동시에 도독은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경수가 문갑 위에 놓인 화병으로 그의 머리통을 억세게 후려친 것이다.

265 이, 이 빌어먹을 놈이! 도독이 쏟아지는 피를 틀어막으며 삿대질했다. 경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제 옷깃을 움켜쥔 채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앞을 지키던 춘영에게 붙들려 다시 방에 내던져졌다. 도독께 이 무슨 누태요! 고결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내 잘못이 아닙니다! 도독께서 저를. 말을 잇지 못했다. 춘영이 이곳으로 자신을 끌고 왔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경수는 뒷걸음질을 칠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보자니 이것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옭아매려는 술수인 듯했다. 현령 나리를 뵙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설명할 테니 나리를 뵙게, 짝! 쳐올리는 손바닥은 고추에 담근 듯 매섭기 그지없었다. 춘영이 득의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올리 고는 한 대 더 칠 기세로 외쳤다. 너처럼 정조도 없는 더러운 놈은 내 아버님을 뵐 자격이 없어! 도독께서 나를 욕보이려 해서 피하려던 것뿐입니다! 어디서 거짓을 고하느냐! 피를 줄줄 흘리며 도독이 소리쳤다. 경수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을 멋대로 유혹할 때는 언제고 뜻이 성사되지 않자 그 죄를 남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도독, 괜찮으십니까? 순화야! 얼른 의원을 불러라! 얼른! 춘영이 뒤늦게 걱정하는 척하며 도독의 상태를 살폈다. 경수는 버려진 새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네 이놈! 감히 조정의 관리를 유혹하고 뜻대로 안 되니 해를 입혔겠다?! 내 이 죄를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으리라! 도독은 피 흘리는 기괴한 몰골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춘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경수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찌르며 지껄였다. 나는 말이야. 받은 것은 열 배로 돌려줘야 보은한다고 생각해. 이제 알겠니? 날 건드리면 네게 무 슨 일이 벌어지는지. 경수가 매섭게 눈을 치떴으나 춘영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어쩌니? 도독은 네가 퍽 맘에 들었던 모양인데. 난 네게 받은 가르침이 있어 마음씨를 곱게 쓰려고 노력한 거야. 그런데 네 복을 네가 걷어찼으니 별수 있니? 깔깔거리며 나가는 춘영을, 경수는 서슬이 퍼렇게 노려보았다. 잔치가 한창이어야 할 이곳에서 비명이 터지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생일의 주인공인 현령은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착잡한 표정으로 서헌 아래에 섰다. 물을 부어라! 머리에 붕대를 감은 도독.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서헌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복들이 물 통을 들고는 경수의 몸 위로 끼얹었다. 촤악 쏟아진 물은 언젠가 경수가 인보당에서 종인을 찾았을 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경수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 살갗이 비치는 얇은 옷만 입고 밧줄에 꽁꽁 묶인 채였다. 그 꼴을 춘영 이 즐겁다는 듯 지켜보았다. 네놈을 사주한 자가 누구냐! 사주라니요? 저를 욕보이려 한 분은 도독입니다. 경수가 쏘아붙였다. 도독이 혀를 끌끌 찼다. 저런 천박하고 못된 자식을 보았나. 가족이 보고 싶다며 안기게 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감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호통을 치니 패악을 부리는구나! 네 부모가 대체 누구기에 교육을 이리 했 단 말인가? 도독!

266 애꿎은 부모까지 들먹이자 경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곳으로 저를 데려온 사람은 춘영 아가씨고 수청을 들라 하신 분은 도독이십니다! 남의 잔치에서 이 같은 추태를 부린 것만으로도 구설감인데 어찌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십니까?! 저, 저! 내 아우에게 들어 네놈이 잘못이 있어도 절대 인정하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여봐라! 저놈을 사금파리 위에 세우고 잘못을 시인할 때까지 매우 쳐라! 장정들이 경수의 양팔을 붙들고는 날카로운 사금파리 위에 세웠다. 으윽! 비명 대신 신음이 터졌다. 여린 발바닥이 갈가리 찢겼지만 사람들 앞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싶진 않 았다.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뭣들하고 섰느냐? 얼른 저놈을 쳐라! 장정들이 머뭇거리며 현령의 눈치를 살폈다. 현령은 도독보다 품계가 아래인 데다 현 도독은 장문 견과 돈독한 사이라 그를 말릴 방도가 없었다. 현령은 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가혹한 채찍질이 가해졌다. 성긴 밧줄은 물에 젖은 섬약한 청년의 몸을 사정없이 갉아먹었다. 윽! 매질을 피하려 해도 올라선 곳이 깨진 사기 조각 위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발을 뗄 때 마다 칼날 같은 조각이 발을 찌르고 베인 살갗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깨문 입술에서도 이내 피가 터졌고 어깨와 등에서도 금세 핏물이 새어 나왔다. 한창 채찍질을 하던 중 도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겨우 멈춘 매질 에 경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마저도 사금파리 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등과 어깨가 불에 지진 듯 쓰라리고 아파서 무릎과 발의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바른대로 토설하겠느냐? 사실대로 말하면 너른 아량으로 너를 구명할 수 있음이다. 도독이 퍽 너그럽게 지껄였다. 그러나 경수는 울음을 삼키며 매섭게 얼굴을 들었다. 도독 같은 분을 관리랍시고 믿고 계실 폐하가 가엾군요. 뭐라? 비록 쫓겨나긴 했으나 한때 사관이었던 자를 탐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기까 지 하다니, 하늘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네가 조정에서 온갖 해괴한 짓을 벌이고 다닐 때부터 알아보았다. 전에 도 폐하를 유혹한 일로 자신궁에서 석고대죄를 올렸다지? 그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경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경수는 바르르 치를 떨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샐까? 자, 네 죄를 실토하겠느냐? 잘못하지 않은 일을 자백할 순 없습니다. 도독은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쳐라! 다시 심한 매질이 행해지던 중, 그만하십시오! 벼락같은 호통에 군중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관옥의 선비가 서늘한 눈 으로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종옥이 안절부절못하며 무명을 업고 있었다. 사내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경수의 몸을 덮어주었다. 경수가 눈을 들어 사 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네놈은 누구기에 함부로 나서느냐? 이 얼굴,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도독이 실눈을 뜨고 사내를 뜯어보았다. 자세히 보십시오. 나름 눈매 외에는 아버님과 똑같이 생겼다는 평을 듣습니다만. 사내가 허물어지듯 싱그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267 47. 인거단류정( 人 去 但 留 情 ) 도독은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다. 기억에서 지운 누군가를 닮은 듯도 한데 불행하게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독이 고개를 갸웃하자 사내가 말했다. 소생, 변백현이라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도독께 큰 신세를 지신 적이 있지요. 그, 금선공주의 아들?! 공주의 아들이란 말에 군중은 다시 수런거렸다. 자네가 여기 어떻게. 한서현령께서 소생의 스승이십니다. 스승님께서 지병으로 몸이 안 좋으셔서 소생에게 현령의 선물 을 딸려 보내셨는데 오다가 길을 잃어 지체되었습니다. 아, 생신 축하합니다. 백현이 이런 상황에서도 예를 갖추자 경성현령은 얼떨결에 그의 인사를 받았다. 춘영은 일이 잘 되 어가는 마당에 초를 친 백현을 아니꼽다는 듯 쏘아보았다. 그래, 현령은 나의 스승이기도 하시지. 미리 연락은 받았네. 몸은 좀 괜찮으신가? 천천히 낫고 계십니다. 다만 먼 길에 오르실 여력이 아니 되시는지라 부득이하게 소생을 보내셨습 니다. 헌데 이런 처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저놈이 음흉한 맘을 먹고 도독인 나를 욕되게 하였다. 나도 남의 잔치에 와서 이러는 것이 편하지 만은 않다. 대충 자초지종은 들었습니다. 헌데 소생은 과연 도독의 주장이 사실인지 의문이 들더이다. 뭐라? 반빗아치들에게 들으니 순화란 여종이 이자를 데려갔다는데 그 이유가 현령의 따님께서 만남을 청 했기 때문이라더군요. 동헌을 지나느라 이자가 춘영 아가씨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 니던데 이것은 어찌 설명하시겠습니까? 만일 도독의 주장대로 이자가 영감을 유혹하려 했다면 굳이 사람이 많은 동헌을 지나쳤겠습니까? 도독은 말문이 막혔다. 세심하지 못한 춘영이 동헌을 지나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또, 이자는 지난번에 저잣거리에서 이 댁 영애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던데 정황으로 미루어 춘 영 아가씨가 이자를 호의로 데려가진 않은 걸로 보입니다. 일면식밖에 없는 사이인데 갑자기 은밀한 곳으로 불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질 않습니까? 더구나 직전에 욕설을 퍼부으며 소금을 뿌렸다고 하더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셨소, 낭자? 백현이 싸늘한 시선으로 춘영을 쳐다봤다. 종옥에게 사정을 듣긴 했으나 춘영의 생김새는 몰랐는데,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옷감과 노리개로 한껏 치장했기 때문이다. 고작 열너덧 살밖에 안 된 계집애가 영악하고 되바라지기 이를 데 없었다. 현령은 딸아이의 못된 성정에 학을 떼며 경악했다. 두 분이 방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유배 생활을 하는 자가 까닭 없이 도독의 머리 를 그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았겠지요. 그럼 자네는 내가 거짓으로 일을 꾸몄다는 것인가! 진실은 하늘과 두 분만이 알고 계십니다. 대관절 불쑥 나타나 저자의 편을 까닭이 무엇인가? 둘이 대체 무슨 사이기에?! 혹 저자가 자네를 꼬이기라도 했는가? 이런 관옥이 소생을 유혹한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요. 흥! 태평연에서도 자객 누명을 벗겨준 것을 기억하고 있네. 헌데도 모르는 사이라고? 그땐 우연히 마주쳤을 뿐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기에 도움을 주었을 뿐, 결과적으로 자객으로 오해 를 사게 해서 미안하던 차였습니다. 술술 풀어놓는 얘기에 도독, 임제환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했다.

268 보는 눈이 많으니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독. 정녕 오늘 일이 이자의 잘못입 니까? 백현의 얼굴에서 죽은 변석위가 보였다. 괄괄한 성격으로 효경제마저 혀를 내두르게 한 변석위. 그 의 씨가 대를 이어 임제환을 압박했다.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목격자가 이리 많고 정황이 이러한데요. 소생이 알던 분에게 이자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정 녕 이자가 도독에게 음탕하게 굴었습니까? 한참 망설이던 임제환은 자신을 질책하듯 쏘아보는 백현의 눈빛에 압도당하였다. 더구나 서헌 아래 에 선 모든 이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경성현령까지 말이다. 어쩌면, 작은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난 명색에 사관이었던 자가 이곳에서 고생하는 것 이 측은하여 몇 마디 위로를 건네려던 것뿐이었네. 예. 모든 일은 작은 오해에서 비롯하지요. 또 분노는 그 어떤 것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마비시킵니 다. 두 분 다 서로에게 오해가 있어 이 같은 일이 벌어진 듯하니 도독은 이쯤에서 노염을 거두십시오. 오늘은, 좋은 날 아닙니까? 어린놈이 저런 영기와 능글거림이라니. 임제환은 꼭 변석위의 망령이 제 앞에 나와 있는 듯한 착각 이 들었다. 형을 거두어라! 임제환이 소리치자 그제야 종옥이 쏜살같이 달려와 경수를 부축했다. 나리! 정신 차리세요! 경수는 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었다. 현령의 생일에 불미스러운 일을 벌여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오해가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하죠. 더구나 죄인인데요. 도독의 사과에 현령은 행여 제 딸자식의 허물을 들출까 봐 전전긍긍했으나 백현은 당장 그런 것에 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경수의 안색이 심하게 좋지 않았다. 현령 나리. 제가 스승님의 간호를 맡은 처지라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선물은 하인들에게 이미 전달하였으니 따로 하실 말씀이 없다면 서둘러 한서현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리하게. 스승님께 내 안부를 전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이자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적소로 돌려보 내면 수고롭게 사람이 오갈 필요가 없지요. 일리 있군. 그럼 수고해 주겠나? 눈으로 인사한 백현은 임제환을 향해 외쳤다. 도독! 종종 한서현 관아에도 들러주십시오. 스승님과 소생이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백현은 싱긋 웃고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표정이 서늘하기만 한데, 그는 망설임 없이 경수를 안아 들었다. 경수가 놀라 쳐다보자 백 현은 무표정하게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 발에 사금파리가 박혔소. 나리께 두 번이나 신세를 지는군요. 두 번이라니? 태평연 때도 절 구해 주셨지요. 기억하고 있었소? 능소화 전설의 소녀를 미련하다 하셨으니까요. 말하지 마시오. 입김마저 싸늘하구려. 저 때문에 공연한 일에 휘말리신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저는 죄인이니, 짓지도 않은 죄로 봉욕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오. 내, 그대를 총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그 런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요? 그럼 나리께는 감사하다는 말을 올려야겠군요. 고맙습니다.

269 경수의 입에서 나온 사늘한 한숨이 백현의 옷깃을 적셨다. 후궁을 들이란 어명에 예부에서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나갔다. 종인은 내명부의 일이니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해 두었다. 어떤 여인이 후궁을 차지하든 그딴 건 관심 없다. 어차피 뽑힐 여인들도 대인파 영수들의 딸일 터.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빨리 찾아왔다. 화방에서 일찍 핀 매화를 곳곳에 갖다 놓았다. 조만간 날이 더 풀리면 고야정에도 꽃이 만발할 것이다. 삼색도는 다시 필까? 피어난들 같이 볼 사람이 없는데 처량하기만 할 테지. 종인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봄볕이 드는 마당을 바라보았다. 네가 있는 땅에도 봄이 왔느냐? 한 조각의 볕이라도 네게 닿는다면 바랄 게 없겠구나. 얼마 뒤, 하개가 진왕이 들었다고 알렸다. 종인은 눈앞을 부유하던 먼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돌아 보니 종대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게 금족령을 내린 지 수개월만이었다. 폐하께서는 길상을 누리소서. 예는 됐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폐하 덕분에 늘 강건합니다. 용안이 어찌 이리 수척해지셨습니까? 봄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때라 조금 예민해진 모양입니다. 종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종대는 찬열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덧붙여 자신 에게 사사로운 부탁을 할 정도로 연모하던 사관 탓이기도 하리라. 폐하의 옥체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산해진미로 입맛을 돋우시고 기운을 차리소서. 그리하겠습니다. 이제 곧 후궁을 맞으신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종대는 퍽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궁과 조정의 압박이 심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웃으며 농처럼 던졌지만 분위기는 공허했다. 형님이야말로 장가가셔야 하는데 이 아우가 제대로 신경을 못 썼습니다. 소신이야 워낙 몸이 약하니 후사를 본다는 보장도 없고 애꿎은 여인을 청상과부로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천수를 누리실 테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종대는 종인과 전보다 가까워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말은 곱게 해도 눈빛이 싸 늘해 진심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으나 요즘은 아니다. 눈빛이 전에 비해 곱고 따스했다. 얼마 전에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종대가 말을 이었다. 문득 꿈에 시체를 태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분이 영 찜찜해서 해몽을 잘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많은 도움을 받거나 큰 재물을 얻을 꿈이랍니다. 또 반가운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자의 소식을 들을 것이라더군요. 희한한 꿈이군요. 폐하께서 곧 비빈을 맞으시니 그들 중 좋은 인연을 만날 꿈이 아니겠습니까? 허튼소리. 절대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꿈을 사시겠습니까? 종대가 히죽 웃으며 농을 쳤다. 형님을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모처럼 오셨으니 민간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들려주십시오. 오늘은 형님을 오래 붙들어 두고 싶습니다. 그 말에 종대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70 한바탕 난리가 난 후 경수는 지친 몸으로 잠을 청하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극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종옥이 그가 잠든 사이 조심스레 발에 박힌 사금파리를 빼고 물수건으로 흙먼지를 닦아 주었다. 백 현이 집을 지키는 동안에는 급히 장님 의원 댁에 찾아가 의원을 데려왔다. 의원은 꼼꼼하게 경수의 상태를 살폈고 탕약과 연고를 처방해 주었다. 그런데 의원이 방 밖으로 나 오더니 종옥을 나무랐다. 때마침 평상 근처에서 서성이던 백현도 그 소리를 듣고는 다가왔다. 자네를 꼼꼼한 사람이라고 여겼건만. 어찌 환자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두고만 보았나? 왜 그러십니까? 나리께 다른 문제라도 있습니까? 종옥이 놀라서 묻자 의원이 혀를 끌끌 찼다. 저리 몸이 상했는데 찬물을 끼얹고 북풍을 쐬게 했나? 조금만 더 늦었으면 폐질( 肺 疾 ) * 로 이어져 자네와 무명이마저 큰일 날 뻔했네! 폐, 폐질이요?! 그래. 기가 쇠하고 오장육부에 울화가 쌓여 있으니 이를 잘 다스리지 않으면 아주 위험해. 그 말이 사실이오? 백현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내, 바늘을 들고 의원 노릇 한 지 사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맥 하나 못 짚을까 봐? 비록 눈이 멀긴 했으나 의원은 일대에서 의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종옥과 백현은 크게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약방문을 보면 알겠지만 기를 보하고 몸을 튼튼하게 하는 약재로 넣었으니 삼시 빠뜨리지 말게. 원래 궁에 있던 사람이니 자네도 공연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거든 정성을 다하는 게 좋아. 의원은 다른 집에도 가야 한다며 서둘러 길을 잡았다. 어찌 이런 일이. 그런 줄도 모르고 매일 험한 일을 자처하시고 오늘은 극심한 매질까지 당하셨다 니! 그래서 얼마 전부터 몸이 무겁고 나른하다고 하셨구나. 아이고, 세상에나. 종옥은 자신의 무심함 탓이라고 여기며 제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요연했던 백현이 멀어졌던 정신 줄을 붙들었다. 폐질은 전염성이 강하니 이 사실이 밖으로 새지 않게 입조심하게. 아직 확진은 아니나 백성들은 쉬이 동요하기 마련이네.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 자네는 아이가 있으니 당분간 처소 근처엔 얼씬도 말게. 환자는 내가 돌보 도록 하지. 나리께는 안 옮습니까? 어찌 직접 환자를 보신다 하십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제때 끼니와 약만 챙겨주게. 돈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예에. 종옥이 경수가 있는 방을 걱정스레 응시하였다. 저녁 무렵에 경수가 깨어났다. 그는 연고를 바르고 종옥이 달인 탕약을 마셨다. 몹시 쓴내가 났지만 혀에서 느껴지는 맛은 없었다. 나리께서요? 예. 오늘은 한서현으로 돌아가지 않으실 거라며 객잔에다 이미 방을 잡아두셨답니다. 백현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얘기에 경수가 의아하게 여겼다. 스승이 아파서 수발들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리께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던데요? 지금 부를까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에 긴히 할 말이라는 게 뭘까. 경수가 옷깃을 제대로 여민 후 고개를 끄 * 결핵

271 덕였다. 종옥이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백현이 들어왔다. 경수가 일어나려 하자 백현은 손사래를 쳤다. 예는 됐소. 좀 어떠시오? 덕분에 괜찮습니다.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구려. 그대가 괜찮다니 나도 기쁘오. 경수는 백현이 첫인상과는 달리 사근사근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생김새는 쌀쌀맞은 도련님인 데 말투나 부드러운 표정은 색달랐다. 오늘은 객잔에서 주무신다고 들었습니다. 혹 저 때문에 길을 늦추신 것은 아닌지요. 맞소. 하지만 부담 가질 필요 없소. 난 오늘 같은 일을 절대 그냥 넘길 생각이 없거든. 오늘 같은 일 이라면 낮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컬음인가. 백현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는 뭔가 결심한 바가 있는 듯 보였다. 최근 몸을 무리하게 써서 몸 상태가 아주 안 좋다 하오. 폐질 직전이라니 당분간 요양에 힘쓰도록 하시오. 폐질이요? 경수는 심장이 철렁했다. 건강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찬열의 일이 있고 줄곧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더니 제대로 탈을 잡은 모양이었다. 근래 벼랑으로 말을 몰 듯 일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대는 죄인이기에 앞서 부모를 둔 자식이오. 경수는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곳은 마을이 작은 편이라 금세 말이 퍼지지. 그대가 급병에 걸렸다는 것이 알려지면 인심도 흉 흉해지고 사람들이 그대를 쫓아내려 악랄하게 굴 수도 있소. 조심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지 않아도 유배형을 받은 사관이 돌아가신 우장군의 절친한 벗이었단 얘기 를 들어 누군지 궁금하던 차였소. 찬열이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우장군이 경성현에 왔을 때 이런저런 교류가 있었지. 경성현은 동주에 속했으니 백현과 군사적으로 여러 얘기를 나눴음이 틀림없다. 허심탄회하게 술도 마시는 사이였다오. 그래서 그가 대역죄로 죽은 것은 유감이오. 불과 몇 달 전에 벌어진 쓴 기억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 우장군이 본인의 벗 중에 나와 닮은 이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대인 것 같소. 외유내강이 지만 고집이 아주 세다고 했지. 찬열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 얘기를 할 때는 그 침착한 사람도 봄볕처럼 따스해지더군. 둘이 아주 절친했나 보오. 예. 세상에 하나뿐인 벗이었지요. 경수는 쓸쓸하게 웃었다. 이렇게나마 찬열에 관한 조각을 얻을 수 있어 다행이다. 마음에 잠시 볕이 들이친 것 같았다. 난 그대가 우장군뿐만 아니라 폐하와도 깊은 인연이라고 알고 있소. 어디서 무엇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폐하와 저는, 아오. 폐하께서 우장군에게 철퇴를 내리시어 깊이 상심했다는 거. 경수가 떨어뜨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진위가 무엇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오.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 보시오. 그대가 죄인이기에 일개 현 령의 딸에게도 수모를 겪는 것 아니겠소? 이곳에 온 동안 무엇을 결심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소. 몸을 혹사한다고 하여 현실은 바뀌지 않소. 도리어 그대를 노리는 자들에게 웃음을 더해 줄 뿐이 지. 궁에서의 일은 잊고 장차 어찌 살아갈지 치열하게 고민하시오. 그것이 오늘 같은 일을 다시 겪지

272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뭐, 애초에 방랑객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크게 경종을 울리는 충고였다. 제 나름대로 마음을 다잡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갈겠노라고 했지만 결 국은 지칠 때까지 몸을 움직여 현실 너머의 어딘가로 도피하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흠씬 두들겨 맞던 경수는 비로소 눈을 뜬 기분이었다. 48. 영묵도심( 零 墨 到 心 ) 전국적으로 금혼령이 떨어졌다. 황제가 처음으로 맞는 후궁이자 영회황후가 죽은 지 꼬박 삼 년을 채운 다음 행하는 간택이었다. 연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난다 긴다 하는 고관대작들의 여식이 젊은 황제를 치마폭에 감싸려고 은 근히 기대 중이었다. 경성현령의 딸인 춘영은 올해 열여섯이었는데 그녀도 처녀 단자를 올렸다. 황후가 없는 지금 내명 부 수장은 황태후 장씨였다. 그러므로 이번 간택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권한이 있었다. 춘영은 이 사실 을 알고 장씨의 눈에 들려고 온갖 재색 교육에 몰두 중이었다. 태후가 몇 명을 뽑을지는 모르겠으나 관주성 안으로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얻으면 부귀영화가 보장 됐다. 촌구석 현령이라도 짐짓 기대하는 바가 있어 성질머리 악독한 제 딸을 다스리겠답시고 요즘 난 리였다. 덕분에 이 소식은 며칠째 골골거리다가 이제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경수의 귀에도 들어갔다. 봄기운이 산을 휘감았다. 경칩이 지나 계곡의 물이 풍부하게 흘러내리고 일찌감치 기지개를 켠 들 꽃이 듬성듬성 모여 산뜻한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산새는 목청을 높여 아름답게 노래했다. 투명한 햇 볕이 금가루처럼 반짝이며 부서졌다. 북녘에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왔다. 철썩철썩 커다란 돌을 때리며 휘돌아나가는 물줄기를 경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편편한 바위 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턱을 괸 채다. 상당히 오랜 시간 미동조차 않았는데 마른 얼굴 위로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생각이 아주 많아 보였다. 문득 경수는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 울컥했다. 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콱 죽고 싶은 데 도성의 가족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졌다. 버들강아지를 들고 조용히 다가가던 백현은 수심 가득한 경수를 보고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산은 바람이 차거늘. 몸이 개운하다고 완쾌했다 믿는 거요? 경수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잔소리꾼이 버들강아지를 빙글거리며 털레털레 걸어왔다. 스승의 병수발을 들어야 한다던 양반이 며칠째 경성현에서 죽을 치고 있다. 들으니 원래 돌아다니 기를 좋아하여 전국에 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황실에서 지위를 보장해 준다고 해도 저 나이에 한량처럼 굴고 쏘다니는 것이 경수는 썩 이해되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떻소? 어제도 물으셨잖아요. 괜찮습니다. 천만다행이오. 종옥의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예. 종옥을 생각해서라도 무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했소. 몸을 혹사한다고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백현은 불어오는 바람에 강아지풀을 날리고는 경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봄볕에 만물이 녹아내리니 사방에서 달곰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봄이 무르익으면 세상은 온갖 색채로 휩싸여 더욱 아름답게 빛을 낼 것이다. 줄곧 안에만 있어 답답했던 거요? 예. 조금은. 하기야 이제 봄이니 마냥 구들장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겠지. 이곳이 북녘이긴 하나 한창 때면 교안 못지않게 화려한 춘색을 뽐낸다오. 경수는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죽은 미소였다.

273 헛헛해 보이는구려. 그리 보이십니까? 그렇소. 색깔 없는 사람처럼. 허울뿐인 색깔을 지녀 무엇하겠습니까. 하여 이곳에서 흘려보내고 있었소? 무엇을요. 마음. 폐하께서 후궁을 들이신다고 요즘 온 나라가 들썩인다오. 경수는 굳이 되짚어 주는 사실에 잠시 간담이 서늘했다. 잊었다고 여겼다. 만일 무사히 도성으로 돌아간다면 찬열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과 그를 살리겠다고 확언하고도 사지로 내몬 황제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김종인을 벌하고 싶은 욕망뿐. 그래서 그에게 처절하게 짓밟힌 만큼 몇 배로 갚아주겠노라고 간과 쓸개를 씹어댔다. 그런데 그의 침상에 다른 여인을 들인다는 소리에 심장이 철렁하고 뒷덜미가 오싹했다. 경수는 아 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안색이 또 창백하군. 산이라 바람이 차서 그렇습니다.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은 줄 만한 사람에게나 주는 것이오. 돌아서던 경수가 멈칫했다. 백현이 경수의 등 뒤로 쐐기를 던졌다. 함부로 준 마음이라면, 그래서 상처를 받았다면 더더욱 불평해서는 아니 되오. 이상한 소릴 하시는군요. 폐하 때문에 그러는 거 아오. 이 물은 끝없이 흘러 머나먼 바다로 나아가지. 그대의 마음을 이곳에 흘려보냈다면 그 미련은 망 망대해가 삼킬 터. 더는 괜한 일로 우울해하지 마시오. 나리의 충고, 가슴 깊이 새기지요. 그대로 산길을 내려가 버린 경수. 백현이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꽃이 된 소녀의 지고지순함이 청초하지 않습니까? 똑똑하지 못한 방법으로 구질구질한 미련을 끌어안고 죽은 것이지. 죽어서라도 임금님을 기다리겠다면서요. 그것은 미련스러움이 아니라 순정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젊은 나이에 저리도 사연 많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도경 수가 유일할 것이다. 먹물처럼 새카맣게 번지는 고독. 그 두 글자가 경수의 작은 몸을 휘감고 있었다. 백현은 그 먹물이 자신에게도 스며든다고 생각했다. 먹물은 무엇으로 지워야 하나. 난감한 듯 너털웃음을 흘리며 백현도 자리를 털었다. 화선지 위에 깊숙이 스민 먹물은 지울 방도가 없다. 새로운 종이에 새 글자를 채우는 수밖에 없음 을, 백현은 잘 알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한 달이 흘러 버렸다. 사방은 온통 꽃이었다. 벚꽃과 살구꽃이 하얗게 흩날리고 듬 성듬성 영산홍과 철쭉이 산천을 불살랐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에 경수는 땔감을 패던 도끼를 내려놓고 잠시 나무 아래에 몸을 뉘였다. 햇볕 은 다사롭고 바람은 온화했으며 곳곳에서 풍기는 꽃향기는 사람을 유혹하듯 아찔하였다.

274 어느덧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게에는 새벽부터 몸을 움직인 결과가 놓여 있었다. 나무는 이쯤 하면 됐다. 장터에서 팔면 넉넉하게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경수는 드러누운 채 나뭇잎 사이로 아른거리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고 풍성한 구름이 는실난실 푸른 바다를 걷고 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춘절에 경성현령의 고명딸인 춘영이 바로 엊그제 내명부 첩지를 받고 관주성으로 떠났다. 미색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고 지방 수령의 딸을 뽑아 후궁 세력의 균형도 맞추었으니 춘영의 입궁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머리도 나름 돌아가는 여인이니 어떤 식으로든 궁중 암투에서 살아남으리라. 운이 좋으면 모든 후 궁이 바라는 대로 황자를 낳아 내명부 지존이 될 수도 있다. 꽃이 만개한 치열한 황궁에서 어떻게 살 아남을지는 전적으로 그 여인의 몫이다. 문득 춘영을 떠올림은 어린 그녀가 무서운 황궁에서 어떻게 버텨나갈지 걱정되기 때문이 아니다. 사적으로 보자면 그녀는 그 표독스러운 성미와 비상한 잔머리로 경수에게 치욕을 안겼으니 생각할 가 치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가 한때나마 진심을 주었던 종인의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벌어진 상처 를 쑤시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아파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부터 후궁들과의 합방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니 더는 자신과 무관한 일에 가슴 아파할 필요 도, 떨치지 못한 미련에 치여 미간을 찌푸릴 필요도 없다. 오직 복수. 찬열에게 저승으로 들라고 등 떠민 자들을 향한 날카로울 칼날만 갈면 되는 것이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자리를 옮긴 경수는 나무를 몇 짐 더 했다. 느지막한 오후가 돼서야 그는 땀이 나 식힐 겸 잠시 매화나무 아래에 누웠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주위는 온통 새카만 어둠이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산짐승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리 무방비 상태로 자는 거요? 백현이 자그마한 등불을 들고 옆에 앉아 있었다. 경수가 몸을 일으키자 그의 가슴팍에 흐드러지게 쌓였던 매화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을 물끄 러미 바라본 백현이 피식 웃었다. 송나라 수양공주가 어디 있나 했더니 그대가 현신이었군. 보던 책을 탁 덮으며 백현이 덧붙였다. 봄이면 매화나무 아래서 잠드는 것이 취미요, 얼굴 위로 떨어진 꽃잎이 예뻐 매화장이란 화장법을 유행시켰다던 수양공주. 그녀의 이야기라면 경수도 잘 알고 있었다. 경수는 자신을 그런 쪽으로 비유 한 백현을 커다란 눈으로 슬쩍 흘겼다.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 뭐, 그리 오래는 아니오. 나리께 변변찮은 꼴을 보였습니다. 피곤하면 한숨 잘 수도 있는 것이지. 오늘 날씨가 좀 좋았어야지. 그만 가시죠. 경수가 먼저 일어났다. 백현이 등을 들고 따라 일어났다. 경수는 낮에 해 놓은 나무를 등에 짊어지 고 앞서 걸었다. 졸졸 흐르는 샘물을 지나고 몇 개의 언덕과 비탈길을 넘자 저 멀리 아른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부 엉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맑은 바람에 청량한 소나무 냄새가 풍겼다. 경수는 그제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는 백현을 휙 돌아보았다. 한동안 안 보 이더니 오늘은 또 어쩐 일인가 싶었다. 애초에 죄인이 의탁하는 집에 무시로 들락날락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습니다. 무엇이든 답하리다. 어째서 계속 절 찾아오십니까?

275 우장군의 벗이었잖소, 그대는. 함께 일했을 적에 쌓은 추억이 많았지. 또 난 그대 같은 사람들이 흥미로우니 내 발길이 멋대로 이곳으로 이끄는 것을 어쩌란 말이오? 전 나리의 놀이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시각으로 본다고 말한 적은 없소만. 적소를 나리가 자주 드나드는 것은 구설에 오를 일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더는 찾아오지 마 십시오. 냉정하게 선을 긋고 다시 산을 내려가려는데, 나는 그대에게 용무가 있어야만 찾아올 수 있는 거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백현이 등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림자가 이내 경수의 몸을 덮쳤다. 두 번이나 구해 주신 데에 대한 보답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마음에 담지 말라 했소. 허면 어째서 제게 관심을 두십니까? 흥미로운 사람이니까. 계산이라고는 전혀 없는 맑은 눈동자가 경수를 꿰뚫었다. 어떻게 보면 천진난만한 아이의 그것이었 다. 하지만 아이의 눈이기에 솔직했고, 경수는 그것이 묘하게 불쾌했다. 능소화 아래서 그대를 봤을 때부터 그리 생각했소. 어딘가 슬퍼 보이지만 의견을 말하는 데는 굽 힘이 없었지. 자존심은 세지만 절대 오만하지 않소. 무엇보다 그대는, 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어. 단정한 눈동자 안에 무수한 말을 삼키고 있지. 나는 어쩐지 그런 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거든.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시라면 저도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경수는 발길을 돌렸다. 지나치게 똑똑한 거요, 아니면 수다스럽지 않은 거요? 후자로 하지요. 하하! 겸손하기는. 꽤 오랫동안 내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묻지 않소? 백현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더니 경수의 옆에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었다. 경수는 지팡이로 조심스 레 땅을 짚으며 내리막길을 더듬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러자 별수 없다는 듯 백현이 어깨 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말씨는 몹시 공손한데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무시무시하오. 알고는 있소?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빨리 하십시오. 귀하신 몸으로 산까지 오르신 것은 저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는 까닭 아닙니까? 조정에 그대의 적소를 한서현으로 옮겨 달라는 상소를 올렸소. 다소 씩씩거리며 앞서가던 경수가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도경수의 적소를 내 스승님께서 계신 한서현으로 옮겨 달라 청하였다 했소. 어째서입니까? 경수는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대를 이곳에 둘 수 없소. 죄인이 험한 곳에서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대가 죄인인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저의 유배지가 바뀌는 일입니다. 어째서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까? 그대를 배려해서 진행한 일이 아니니까. 경수의 동그란 두 눈에서 원망의 빛이 쏟아졌다. 백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성현령은 좋은 사람이지만 무능한 편에 속하지. 더구나 죄인 관리에 소홀하여 인근에 유배 오는 자들이 다시 도성에 돌아갈 것을 미끼로 패악을 부리는데도 단속하지 않았소. 하여 죄인들이 반성하 기는커녕 백성들을 착복하기만 하니 이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오. 이미 그대는 이곳 사람들에게 적잖

276 은 미움을 받는 데다 일전에 별스런 일까지 있지 않았소? 나는 이러한 진상을 소상히 적어 폐하께 알렸을 뿐이오. 나리께선 제가 폐하와 어떤 관계였는지 아시는 듯하군요. 백현은 정직한 얼굴로 경수를 쳐다봤다. 경수가 이를 악물었다. 그저 이런저런 얘기를 주워들었을 뿐. 난 당사자가 아니니 폐하와 그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깊게 알 필요는 없소. 다만, 그냥 보고 참아 넘기기 어려운 일도 있다오. 산의 어둠이 스산한 바람을 토해냈다. 나뭇잎이 사부작거리며 음산한 노래를 불렀다. 뭐, 사소한 복수심으로 그대를 이용했으니 이것은 용서를 빌어야겠군.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백현은 그 이상의 얘기를 들려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일 내로 연락이 올 것이오. 폐하라면, 그대 일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실 테니까. 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세상살이에 터럭도 관심 없는 한량처럼 굴면서 삼라만상을 구슬 꿰듯이 들여다본다. 찬열은 정말 이런 남자를 가까이하며 그 혹독한 추위를 견뎠단 말인가. 그대가 우장군의 벗이라 하여 사심으로 처리한 것은 아니오. 예. 그러시겠지요. 적소가 옮겨진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소. 나리께서도 뜻이 있어 행하신 일인데 일개 죄인이 무슨 재주로 왈가왈부하겠습니까. 말에 대단한 가시가 돋쳐 있었으나 백현은 맥 풀린 아이처럼 너털웃음만 터트렸다. 경수는 저 속을 알 수가 없어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배 생활이 끝나기 전까지 종인에게 어떠 한 연결고리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는데 백현 때문에 다 어그러졌다. 도경수라는 이름 세 글자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그와 몸을 섞은 새벽, 혼절했던 자신의 어깨 위에 둘러져 있던 값비싼 망토가 생각났다. 그것 은 종인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인제 와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갔 고,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이다. 경수는 착잡하게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별이 총총 뜬 봄밤이었다. 49. 연파만리( 煙 波 萬 里 ) 아침 공기가 산뜻했다. 세 개의 인공 섬을 품은 조하호는 여느 때처럼 투명한 물비늘을 품고 너울 거렸다. 수면 위에 바람이 실어온 꽃잎이 떠다녔다. 휘늘어진 버들잎이 물가에 핀 하얀 수선화와 어우러졌다. 물살이 이리저리 파도를 만들어낼 때마다 늘어뜨린 초록색 실타래와 하얀 신선의 옷자락이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늘에 맺힌 이슬은 미처 사라지지 않고 커다란 파초 이파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나비 한 마리가 이슬을 맞고 젖은 날개로 바르작거리다가 풀밭 위로 쓰러졌다. 반질반질한 조약돌로 겨우 기어 올라 간 그것은 햇볕이 들이치는 곳에 자리 잡고 날개를 말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비를 바라보던 종인의 귀밑머리를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새로 입궁한 후궁들이 태후에게 조현례를 올리고 함께 산책하는 중이었다. 내명부에 젊은 여인들이 없었는데 모처럼 꽃향기가 진동했다. 정작 그 꽃을 마음껏 꺾을 수 있는 황제는 시르죽은 표정이었다. 올해는 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뒤따르는 하개에게 종인은 건조하게 말을 던졌다. 그의 손이 빽빽하게 잎을 피운 녹나무로 향했다. 몸통에 짙푸른 이끼가 낀 녹나무는 효경제가 태어나던 해에 심었던 것으로 정원의 운치를 더해 주었

277 다. 흐르는 시간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나이까. 일리 있는 소리에 종인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발길을 돌려 다른 쪽으로 걸어가기 시 작했다. 하개가 뒤를 따랐다. 최근 종인은 눈에 띄게 마르고 수척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억지로 밥을 먹고 있기는 하나 몸에서 받지 않는 듯 도무지 살이 오르지 않았다. 내의원에서도 이를 두고 제법 고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종인은 자신의 건강하지 않은 몸에 대해 큰 자각이 없었다. 도리어 새로 들인 후궁들과의 합방을 피할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웃어 넘겼다. 폐하. 황공하오나 소인이 감히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듣고 있다. 운을 뗐지만 하개는 감히 물꼬를 트지 못하고 얼마간 침묵했다. 뭔데 그러느냐? 어찌하여 도경수에게 유배형을 내리셨습니까? 그자가 비록 역괴와 막역한 사이였다고는 하나 역모 에 연루된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또 폐하께서 그자를 매우 괴이셨는데 하루아침에 경성현으로 보내실 줄은 몰랐나이다. 조용히 걷던 종인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로서도 하개가 이렇게 여과 없는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 조금 당황했지만 하개 외에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없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미움받아 본 적이 있느냐. 대답 대신 하개는 머리를 조아렸다. 미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타인을 상처 입힌 대가로 받는 미움이라면 어디 다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러다 보면 분명히 내 잘못인데도 괜히 상대방에게 서운한 감정이 쌓인다. 더러운 감정이 계속 쌓이면 그것은 어느새 형태를 갖추어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언젠가는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해치는 마음이 되지. 아무리 괴이셔도 도경수는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런 자를 위하여 어찌 천자께서 고통을 감내하신 단 말씀이십니까? 멀거니 서서 창공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던 종인. 그가 조용히 돌아섰다. 껍데기는 아무 쓸모없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니라. 설령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지라도 알맹이는 알맹이기에 의미를 가진다. 소인은 그저 폐하께서 그자의 일로 줄곧 기운을 못 차리시니 안타까워 올린 말씀입니다. 안다. 드넓은 관주성에서 짐을 걱정하는 사람은 오직 너와 청신뿐이니. 소인이 주제넘게 군 것 같군요. 송구하옵니다. 애써 끌어올린 입매에는 예전과 같은 생기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개는 주군의 처량한 미소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서 이 지독한 시절이 지나갔으면 싶었다. 가볍게 저녁을 먹고 낮에 미처 살피지 못한 상소를 보는데 내수소에서 사람이 나왔다. 후궁들이 새 로 들어왔으니 오늘부터 그녀들과 합방할 수 있다는 전언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인 후궁은 총 아홉 명이었고 다수가 대인파에 속한 고관대작의 딸이었다. 미색도 미 색이거니와 집안이 하나같이 출중하였으므로 후사를 일찍 보는 이가 황후의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 다. 후궁 모두가 자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였다. 안타깝게도 종인은 그녀들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는 최대한 그녀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싶었다. 누구를 품을 생각도 없거니와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개의 걱정대로 요즘은 아무리 밥을 먹어도 살이 붙질 않고, 어떤 약을 먹어도 피로 하기만 했다. 마음의 문제라기에는 몸 어딘가 근본적인 부분이 망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의원에서

278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해 유야무야 시간만 흐르는 중이었다. 짐은 오늘 극도로 몸이 좋지 않다. 모두 물려라. 하개가 내수소에 어명을 그대로 전하였다. 내수소에서 몇 번이고 재청을 올렸지만 종인의 대답은 똑같았다. 나중에 다소 짜증이 난 종인은 집중해서 읽던 상소를 구길 듯이 움켜쥐기도 했다. 하개가 움찔하여 내관을 쫓아 버렸다. 그제야 평온해진 종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군. 얼마 뒤에는 내의원에서 탕약을 올렸다. 예전에 새로 개발했다던 잠에 도움이 되는 약이었다. 여느 때처럼 의관이 약사발을 비울 때까지 그 앞에서 기다리는데, 종인이 상소를 읽느라 약을 챙기 지 않자 하개가 의관에게 먼저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의관이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백 기를 들고 떠났다. 폐하. 지금 탕약을 드셔야 이따 침수에 쉬이 드실 수 있사옵니다. 가져오라. 다음 상소문을 펼치며 손짓하던 종인이 일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른침을 삼켰다. 목판을 들고 오 던 하개가 멈칫하여 종인을 살폈다.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종인이 다시금 상소문을 읽었다. 하개가 호들갑을 떨며 안절부절못하자 종인이 상소문을 흔들어 보 였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하개가 다소 안심했다. 상소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경성현에서 얼마 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며 새로 온 죄인의 적소를 박태흥이 다스리는 한서현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적소에 떨어진 지 석 달이 조금 넘겼을 뿐인지라 죄인의 근거지를 옮기는 것은 선뜻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새로 부임한 도독 임제환과 관련된지라 그냥 넘길 수만은 없었다. 내용인즉, 그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황제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른 데다 현령의 생일 잔치에서 어린 자를 희롱하는 추태를 부렸다는 것이다. 희롱당한 이가 일반 백성인 것도 부끄러운데 그가 한때 황실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었단다. 그 가 수치스러움에 목을 매 죽으려는 것을 겨우 말려놓았다고, 상소는 고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도경수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종인은 임제환에게 치욕을 당한 이가 경성현에서 귀양살 이 중인 경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파르르 떨며 상소문을 구겼다. 임제환의 편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가 새로 부임한 곳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뿐더러 감히 도경수까지 건드리려 하였다니 피가 거 꾸로 솟았다. 임제환을 동주의 도독으로 천거한 사람은 장문견이다. 두 사람은 오랜 지기였다. 비록 임제환이 열 살 넘게 많았지만 장문견을 거의 형님처럼 모셨고 그 덕에 임제환은 무난한 관직생활을 영위했다. 말년이랍시고 이 년 동안 놀고먹을 자리를 내주는 것에 종인도 눈을 감아줬는데 이런 파렴치한 짓 을 저지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종인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탁상을 쾅 내리쳤다. 백학처럼 고결한 성품에 늙은이 앞에서 희롱을 당하였으니 당연히 죽고 싶었을 것이다. 심신이 피 폐해져 쫓기듯이 적소로 떠난 사람인데 오죽 세상이 미웠을까. 강단 있는 아이가 죽음을 결심했을 정 도면 희롱의 정도도 심하였으며 삶의 의지마저 잃었을 만큼 무간지옥에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나. 이 괘씸한! 척박한 곳에서 힘없다는 이유로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황제인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 하늘 아래 오로지 군림하는 자. 연모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했는데 곁에 있지 않다 하여 모른 척 한다면 그야말로 의리도 인정도 없는 사람이리라. 종인은 이내 일필휘지로 교지를 써 내려갔다. 하개가 무슨 일인지 몰라 목판을 든 채 발만 동동 굴 렀다. 교지를 다 쓴 종인이 옥새를 찍고는 자리를 털었다. 그는 단호하게 약은 필요 없다고 한 후 고야정으로 향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 종인은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었다.

279 죄인 도경수의 적소를 한서현으로 옮겨 현령이 직접 관리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별다른 이유 없 이 귀양다리의 배소가 석 달 만에 바뀌는 것은 퍽 드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황제의 뜻을 알지 못했고 누구도 백현이 그런 상소를 올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만 도독 임제환의 직위가 갑자기 해제되어 다른 곳으로 대기 발령이 나자 일전에 현령의 생일날 벌어진 일과 관련하여 어떤 조치가 떨어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임제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지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경수는 뜻밖의 어명에 얼떨떨했다. 그는 곧 군사 두 명을 앞세우고 한서현으로 떠났다. 하루아침에 지낼 곳이 바뀐 것은 종옥도 마찬가지였다. 경수가 그녀를 설득했다. 떠난 지아비가 언 제 돌아올지도 모른 상황에서 추운 경성현에서 홀몸으로 무명을 기르기는 고된 일이었다. 한서현은 환경이나 교육 등 여러 면에서 경성현보다 월등했다. 게다가 백현과의 인연으로 관청이자 현령의 집에서 일할 수 있게 됐으니 그녀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치듯 맺은 인연도 중요하지만 어미가 된 종옥에겐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경수와 종옥은 며칠에 걸쳐 길을 잡은 끝에 한서현에 도착했다. 교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한서 현은 번화가 특유의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멋진 고루거각이 즐비함은 물론이거니와 뱀처럼 늘어선 시전 거리는 교안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옷과 음식이 풍성했고 각종 생필품이 넘쳐났으며 배를 타고 이국에서 들어온 외국인도 심심찮게 보 였다. 해풍이 불어 한낮이면 다소 쌀쌀했지만 경성현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표정 도 유배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군사들을 따라 관아에 도착하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몇 척에 달하는 높은 담벼락 앞에 해자가 놓여 풍부한 물길이 나 있었고 육중한 다리가 육지를 연결했다. 위에서는 무장한 군사들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해도 몇 번의 절차를 걸쳐야 했다. 문루를 지나자 행랑으로 쓰는 숙사 몇 채가 나왔는데, 그곳에선 주로 집안의 노비나 현령을 찾은 외지인이 머물렀다. 여러 개의 편문을 넘자 비로소 거대한 정원과 수십 채에 달하는 전각이 나왔다. 가장 큰 곳은 주로 관리들이 모여 회의하는 장소였다. 그 앞에는 조약돌과 아름답게 꾸며놓은 연못,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수가 가득한 마당이 있었다. 뒤로 들어가면 현령의 식구들이 생활하는 영역이었다. 역시 멋진 정원이 만발한 꽃과 키 큰 나무에 둘러싸인 채 자태를 뽐냈다. 경수는 응접실에서 종옥과 멋쩍게 기다렸다. 허름한 차림이었지만 경수의 피부는 진주알처럼 빛났 고 눈동자는 여전히 하늘의 별을 박은 듯 맑게 반짝거렸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백현이 헛기침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경수와 종옥보다 먼저 출발해 스승의 집에 도착한 지 이틀째였다. 백현을 보고 안심한 경수가 살짝 이맛살을 구겼다가 허리를 숙였다. 나는 평범한 유생이오. 내게 인사할 필요는 없소. 그래도 나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종옥과 그 험악한 경성현을 벗어나진 못했겠지요. 별말씀을. 새로운 배소로 옮겨 온 도경수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미 아는 사이에 구태의연하게 예의를 차리는구려. 백현이 손사래를 치며 상석에 앉았다. 그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죄인의 몸으로 이런 환대 는 호사인지라 경수가 사뭇 망설였다. 그러자 백현이 눈매를 접으며 웃어댔다. 괜찮소. 그대 덕분에 작은 치기를 부렸고 폐하께서 소소한 복수에 동참해 주셨거든. 난 그대를 죄 인으로 대할 생각이 없으니 우리끼리 있을 땐 그리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되오. 원칙은 지키라고 있습니다. 나리께서는 선한 마음으로 한두 번씩 호의를 베푸시다가 그것을 당연 하게 여기는 자들에게 화를 입으실 것입니다. 하오니 제게도 예외를 두지 마시고 미리 경계하십시오. 화를 입든 말든 그것은 내 문제지, 그대의 문제가 아니오.

280 나리께서 화를 입으면 작게는 변씨 문중의 일이요, 넓게는 황실의 일인데 어찌 상관하지 않겠습니 까? 피할 수 있는 일을 경계하지 않아 맞닥뜨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여튼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줄줄 늘어놓는다. 백현은 입술을 오므렸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듣던 대로 성격이 만만치 않구나. 스승님! 암적색 장막 뒤에서 박태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순을 넘긴 것치고는 정정했다. 눈시울이 조금 붉었고 상당히 마른 몸매였다. 그러나 정갈하게 갖 춘 의복과 깨끗하게 빗은 흰 수염에서는 단정하면서도 빡빡한 성격이 드러나는 듯했다. 공사 구분이 철저하고 상벌에 엄하다고 하니 위정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다. 예문관에서도 심심찮게 들었던 이름이다. 한때 소인파의 거두로 활약했고, 황태자 김준면을 지지했 으면서도 살아남았을 만큼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다. 홍만립은 박태흥을 존경한다고까지 했으니 경수 는 그 이름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경수가 박태흥에게 인사를 올렸다. 종옥도 무명을 안은 채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도경수라고 합니다. 앞으로 신세 지게 되었습니다. 태흥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낡고 볼품없는 옷차림에도 타고난 귀티가 흘렀다. 만사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제자가 어쩌자고 죄인을 한서현으로 불러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 녀석이 곧 죽어도 자네를 한서로 데려와야 한다고 했네. 일전에 백현과 함께 일한 우장군의 벗 이라지? 예. 사귀는 사람을 보면 됨됨이를 알 수 있지. 박찬열이 그리된 것은 참으로 안타깝네만. 경수는 역적이라고 몰아세우지 않는 현령의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네가 유배형을 받은 것도 박찬열의 벗이기 때문일 걸세. 폐하께서는 만인지상이시나 조정은 군 주 혼자서 이끌어갈 수 없지. 뼈 있는 말과 많은 의미를 담은 눈빛이 경수에게 닿았다. 경수는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현령 은 그런 경수를 흥미롭다는 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네가 종옥인가? 예.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제법이라고 들었네만. 변변찮은 잔재주입니다. 겸손하군. 마침 내 내자가 여름옷을 지으려던 참인데 눈이 침침해서 그런지 아무리 해도 구름에 싸인 청학을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하더군. 자네는 할 줄 아나? 내세울 재주는 아니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날 따라오게. 내 제자는 저 친구와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태흥은 종옥을 데리고 사라졌다. 객실에 백현과 단둘이 남은 경수는 겸연쩍게 앉아 있었다. 백현이 손뼉을 쳐 노비를 부르자 여종 하나가 달려와 냉큼 향기로운 차와 과자를 놓고 갔다. 오는 길에 시내를 둘러보았을 테지. 어떻소? 경성과 비교해서? 적소로 유명한 경성현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백현은 개운한 괴화차를 들이켰다. 현령 나리께서 인상이 매우 좋으십니다. 말씨는 다정하지만 눈빛은 매섭더군요. 눈썰미가 있구려. 스승님께선 그런 분이라오. 그런 분 밑에서 배운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요. 헌데 나리께선 어째서 방랑객을 자처하십니까. 위정자들의 문제가 뭔지 아오?

281 알려주십시오. 다들 고인 물이 되기 쉽다는 것이오. 자신의 형편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밥그릇 싸움에만 눈이 멀 고 제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해지거든. 그들은 발전이 없소. 도태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계발하는 수 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머리에 지식을 쌓기보다는 곳간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다오. 나는 그 런 것이 싫소.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찻잔의 입술을 쓱 매만지는 손길이 제법 나른했다. 경수는 변백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가벼운 듯하면서도 이렇게 보면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것 같기도 했다. 하여 내 머리에 이것저것 채우고자 전국을 떠돌았지. 헌데 그대 말대로 내 스승님은 좋은 분이니 당분간은 방랑객 놀이를 그만할까 하오. 현령께서도 안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좀 도와줘야겠소. 싱긋 웃는 얼굴에 까닭 모를 짓궂음이 깃들었다. 경수는 떨떠름하게 백현을 쳐다봤다. 죄인이 나리께 무슨 도움이 된다고 하십니까.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관내에 서기관 자리가 비었다는구려. 전임자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봉양 하겠다며 그만뒀다오. 글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서기관이 될 수 있지만 두 달 가량 여러 사람에게 시 켜 보니 영 시원치 않아서 말이오. 저더러 서기관이 되라는 말씀인가요? 척하면 척이군. 전 이곳에 귀양 온 몸입니다. 헌데 어찌 관청의 관리가 되라 하십니까? 죄인이 죗값을 치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소. 그대가 그동안 한 것처럼 노동을 팔 수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적소에 틀어박혀 글을 쓰거나 뜬구름만 잡으며 허송세월하는 것도 한 방편이지. 백현은 히죽 웃으며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허나, 그대는 그리 세월을 보낼 사람이 아니잖소. 궁에 있을 때 속기로 정평 난 예문관의 사관이었 으니 서기관 일도 무리 없이 해내겠지. 그래서 부탁하는 거요. 명령이 아니라 부탁. 경수는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백현이 급히 둘러댔다. 내가 아니라 스승님의 부탁이라니까. 경수는 백현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나쁜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중앙에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박태흥에게 어떤 불이익이 갈지 몰랐다. 이런 사정을 얘기하자 백현은 실소를 터트리고는 경수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대체 변백현 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경계가 어디까지라고 자신하기에 매사 저런 식으로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대는 죄인이니 녹봉은 줄 수 없소. 허나 의식주는 모자람 없이 제공하리다. 원한다면 그대 가 읽을 만한 다양한 서책도 마련해 줄 수 있소. 경수는 자신에게 이토록 호의를 베푸는 까닭이 뭔지 궁금했다. 진지하게 이유를 물었으나 백현은 지난번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대는 흥미로운 사람. 경수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그러니까 다소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백현과는 정상적인 대화가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어쨌든 변백현은 은인이다. 여러 번 신세를 졌고 이제는 죄인 주제에 몸까지 편해지게 생겼으니 백 현에게 절이라도 올려야 마땅했다. 이곳에 온 것도 그의 뜻이 아니었듯, 이번에도 경수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염치 불고하고 나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소. 백현이 활짝 웃었다. 실은 올 칠팔월 중에 대과가 열리거든. 삼 년 전에 열린 대과에 폐하께서 필히 참석하라고 하셨지 만 가기 싫어 멀리했다오. 헌데 올해도 건너뛰었다가는 군사를 보내 날 잡아들이겠다고 하시니 오금

282 이 다 찔끔하지 뭐요? 예전에 대과에서 저지르는 비리를 척결하겠다며 종인이 복시부터 친히 시험지를 살핀 적이 있었다. 그때 종인은 고야정으로 돌아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며 작게 투덜거렸는데 그게 변백현 이라니 의외였다. 난 당분간 과거 공부에 매달릴 생각이오. 하지만 전국에 발자국을 찍고 다니다 보니 모자란 부분 이 많소. 그러니 예문관 출신인 그대가 시간 나는 대로 나 좀 상대해 주시오. 자기 할 말만 내뱉는 이상한 사람. 경수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50. 몽중쌍비( 夢 中 雙 飛 ) 흥미로운 생물을 주웠다더니 그 아이더냐? 박태흥의 걸걸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현은 먼지 날리는 서재에서 좀 먹은 낡은 책을 정리 중이었다. 때마침 관아는 봄볕에 습기 먹은 책을 말리고 있었다. 노비들이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귀한 서적과 문서들을 마당에 늘어놓았다. 흥미로운 생물도 아니거니와 줍지도 않았습니다. 부유하는 먼지 사이를 누비며 백현은 다른 책장으로 옮겨 갔다. 그쪽에는 조금 전 건드렸던 책장보 다 두 배 이상 많은 서책들이 줄을 지어 꽂혀 있었다. 그렇기엔 네 얼굴이 활짝 폈구나.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눈빛이다. 잘못 보셨습니다, 스승님께서. 만사에 흥미를 두는 것은 좋은 일이야. 허나 단순한 흥미로 시작한 일이 네 신변에 어떤 위협을 끼치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책장 뒤로 모습을 감췄던 백현이 스승이 있는 쪽으로 반쯤 몸을 드러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러나저러나 박찬열은 역적의 굴레를 쓰고 죽었다. 그런 자와 가까이한 사람을 네가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이 세간에 어떻게 비춰질지 알고나 있는 것이냐? 세간이 아닌 중앙 귀족들의 눈이겠지요. 태흥은 밀랍을 녹여 두툼한 봉투 위에 떨어뜨렸다. 그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무겁게 말했다. 네가 한 짓을 봐라. 폐하의 눈 밖에 난 자를 곁에 둔 것도 모자라 그자를 이용해 너의 사욕까지 채웠다. 임제환이 외직으로 떠밀린 것은 순전히 네 탓이다. 그 음탕한 자가 네게 앙심을 품지 않고 배 기겠느냐? 그럼 다신 일어설 꿈도 못 꾸게 두 다리를 잘라놨어야 했나요? 백현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고 태흥은 백현의 저런 점이 우려되었다. 본디 도독이란 감찰권을 갖고 청렴하게 각 주의 공사를 처리해야 하지요. 헌데 임제환 그자는 어 땠습니까? 어린 계집의 꼬임에 넘어가 감히 전 사관을 탐하고 도리어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였으니 파 직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 자가 한둘이었느냐? 부패한 도독은 여럿이었고 넌 그때마다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데 유독 임제환에게만 칼날을 들이밀었으니 필시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돌 것이다. 네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임제환을 찍어냈다고 말이야. 틀린 얘기는 아니니까요. 답답한 듯 태흥이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임제환을 그런 식으로 쫓아낸 것은 제 아버님을 그렇게 만든 데에 대한 복수심만은 아니었 습니다. 진짜 복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백현아! 예, 스승님. 네게 마음을 죽이라고 그토록 일렀거늘. 결국 넌 사소한 번뇌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복수는 하찮은

283 수단이라고 네 입으로 얘기했다. 수단이 더러우면 아무리 훌륭한 목적이라도 끝이 아름다울 수 없다 고. 헌데 우연히 한 방 먹였다고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냐? 칼을 갈았으면 그것을 휘둘러 적의 목을 쳐야한다고 하신 분은 스승님이십니다. 태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백현은 스승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부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저는 여전히 칼을 갈고 있을 뿐입니다. 그 칼을 언 제 휘두를지는 오직 저만이 알고 있지요. 흠! 스승님께서 이 제자를 아끼시는 마음 또한 잘 압니다. 스승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승님의 충고대로 주저앉아 우는 병사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단한 씨앗이 껍질을 가르고 땅을 뚫어 싹을 틔웠다. 잎사귀는 아직 한 장밖에 나지 않았지만 오 래도록 가꾼 비옥한 토양과 넉넉한 햇볕, 충분한 물을 머금고 삽시간에 거목이 될 것이다. 거목에 핀 열매가 피를 머금은 혈의 꽃이 아니기를, 태흥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백현은 다시 책장 뒤로 몸을 감추었다. 태흥도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심장이 떨렸다. 도경수를 한서현으로 부른 것은 그가 우장군의 벗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박찬열을 꽤 맘에 들어 했다는 것을. 역적의 지인을 곁에 두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또 있겠느냐. 네가 귀족들의 눈초리를 피하려면 처 신을 더욱 잘해야 할 것이다.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명심하겠습니다. 네 말대로 그 아이를 서기관으로 소용할 것이나 쓸 만한 자인지는 모르겠다. 잠깐 본 것만으로 도 경수의 전부를 판단할 수도 없는 법. 스승님께서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백현이 다시 책장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이처럼 꽤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보셨겠지만 경국지색은 무슨, 그저 남보다 조금 나은 얼굴이잖습니까. 평소에는 말수가 적으나 수 틀리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면박을 준답니다. 아주 학을 떼게 한다니까요. 호오? 말끝마다 자기는 죄인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사람을 살살 약 올리기도 한답니다. 제가 그 래도 자길 두 번, 아니 세 번이나 도움을 준 사람인데 언행에 뼈가 있어서 도리어 제가 그 사람에게 큰 빚이라도 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도 곁에서 지켜보니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더군요. 난다 긴다 하는 자들만 모인 태학관에서 우수생으로 이름을 날릴 만하였습니다. 매사 무신경하던 네가 남의 일에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것은 처음이구나. 그제야 백현이 멈칫하며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언제요. 허허! 네가 얼굴 붉힐 때도 다 있느냐? 노을입니다. 해 질 녘이라는 것도 잊으셨습니까? 오늘 안으로 이 구역까지 정리하고 말리기는 어 렵습니다. 또 책장 뒤로 숨어서는 혼잣말처럼 뭐라고 구시렁거린다. 태흥은 부러 웃음소리를 크게 냈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쫓겨난 아이를 백현이 곁에 앉혀두고 있는 모양새가 아주 이상했다. 그는 복 잡한 생각에 끙 소리를 내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결국 나리 곁에 머물게 하시네요. 늦은 밤, 관아 일각에서 마주친 백현에게 경수는 나지막하게 말을 던졌다. 백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라도 같은 결정이었을 거요. 오직 그대만 싫다고 하지.

284 무엇에 대한 결정입니까? 흥미로운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하는 것. 나리께 저는 그저 놀이대상일 뿐입니까? 고맙다는 말을 참으로 어렵게도 돌려 하는구려. 주변이 정리되니 정신이 번쩍 든 것뿐입니다. 나중에 조정에서 알기라도 한다면. 불법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짓은 한 게 아니오. 그대는 걱정이 지나쳐. 경성현에 있을 때부터 백현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가족 생각에 실행에 옮기지 않았는데 마치 그 속내를 꿰뚫은 듯 틈만 나면 곁을 맴돌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그에게 다정한 위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수에게는 온기를 더해 주었다. 매번 그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지 몰라 경수 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서현으로 옮겨준 것은 고맙지만 이제는 자신을 좀 내버려뒀으면 싶었 다. 그러나 과거를 치르기 전까지는 꿈같은 일일 것이다. 이곳 생활은 적응할 만하오? 덕분입니다. 그럼 앞으로 그대가 웃는 얼굴을 기대해도 되겠소? 경수는 백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발밤발밤 다가오는 그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그대를 재촉해 봐야 소용없겠군. 하늘의 뜻은 필요 없어요. 바라는 것조차 이뤄주지 않는 하늘 따위. 그리 비관적으로 굴지 마시오. 그대는 살아있기에 감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는 것도 있죠. 하지만 그대는 숨을 쉬고 있어. 네. 그래서 괴로워요. 계곡에 있을 때 상념을 다 버린 게 아니었소? 말처럼 쉬웠다면 세상에 번뇌라는 글자는 사라지겠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처연한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나리께선 저를 위해 애써 주셨는데 자꾸 부끄러운 꼴만 보입니다. 그대의 심경이 복잡하다는 것을 아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 백현이 경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여태 그대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난 모르오. 허나 그대에겐 가족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소. 그대를 소중히 하시오. 그대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오. 그래야 그대가 살아. 그래야, 그대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소. 복수든 체념이든, 그 이상의 것이든. 또 냉철한 충고. 한편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위로 같기도 하다. 밤이 깊었구려. 처소까지 바래다주리다. 경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성에서 넘어오느라 여독이 쌓였다. 그래서인지 몹시 피곤했다. 어쩐지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쑤시기도 했다. 그래도 백현에게 사소한 일까지 기대고 싶지 않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돌아서는 경수를, 백현은 붙잡을 수 없었다. 달무리처럼 희부연 윤곽이라 감히 손조차 뻗을 수 없었 다. 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나날이 병약해졌다. 그 때문에 태후도 후궁을 들이고도 단 한 번을 찾지 않은 황제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누가 보더라

285 도 종인은 아픈 사람이었다. 혈색이 없고 입술은 시퍼랬으며 눈동자에 생기도 돌지 않았다. 내의원에서 원인을 밝히려 밤을 새웠지만 시원한 해결책을 알아내지 못했다. 황궁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도 날씨가 좋다는 이유로 강무에 나서겠다고 부득불 우기는 황제 때문에 며칠 동안 조 정이 시끄러웠다.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강무를 통해 무예를 닦고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것 이 황제의 임무라며 종인은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누워 있어봐야 몸은 낫지 않는다는 종인에 말에 어의 고지산이 별수 없이 강무에 다녀오라고 했다. 이에 병부에서 급하게 사냥터를 틀어막고 군사를 움직이느라 진땀을 쏟았다. 황제의 심신을 위해 온 천 근처에 있는 산이 사냥터로 낙점되었다. 강무를 떠나는 당일, 하늘은 여름으로 질주하는 날씨답게 짙푸른 옥색으로 빛났고 곳곳에서 후텁지 근한 바람이 불어와 높이 걸린 깃발을 펄럭이게 했다. 관상감에서 별의 움직임이 나쁘지 않아 아마 사냥하는 사오일 동안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어느덧 산천초목이 초록빛으로 넘실거렸다. 산의 청쾌한 기운이나 마음껏 누리다 와야겠다고, 종인 은 생각했다. 종인은 융복으로 갈아입고 희조전에 모인 대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희조문 앞에는 술 달린 황금색 안장을 쓴 어마가 매여 있었다. 함께 사냥터로 떠나는 중신들은 이미 말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종인은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그는 애써 그것을 숨기며 등걸에 한쪽 발을 걸쳤다. 그런데 일순 강 렬한 현기증이 일었다. 종인은 말에 오르기도 전에 나무토막 쓰러지듯이 혼절하고 말았다. 곁에 있던 하개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의원을 찾아댔다. 일대는 곧 아 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뒤늦게 태후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미간을 찌푸렸다. 의관들은, 침상 위에서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 은 황제와 뿔이 난 태후를 번갈아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지 않나! 과로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고지산이 나섰다. 지난 수개월 동안 제대로 쉬지 않고 정무에 매달리신 데다 날씨가 더워져 기력이 많이 약해진 상 태이지요. 아무리 곁에서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 올려도 이따금 산책하시는 것 외엔 도통 쉬질 않으시니. 내의원에서는 잘못이 없다는 뜻이오? 무능한 소신들을 죽여주소서! 납죽납죽 엎드리는 의관들을 보며 태후는 혀를 찼다. 폐하께선 이제 막 잠이 드셨습니다. 소신들이 곁에서 정성으로 보살필 것이니 태후마마께선 처소 로 돌아가 쉬십시오. 행여 마마의 존체마저 상하실까 저어되나이다. 의관 하나가 권유하자 다들 그러라며 태후의 등을 떠밀었다. 주상의 귀하신 옥체에 흠이 나고 저리 사경을 헤매시는데 어미 된 자로 처소에서 편히 있으란 말 이오? 태후가 날을 세우자 고지산이 아뢰었다. 혼절하신 것은 기력이 쇠하신 까닭이오니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침과 뜸을 놓았고 탕약도 드셨으니 푹 주무신 후에 일어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정녕 주상의 옥체엔 큰 이상이 없다는 뜻이오? 예, 마마. 애초에 강무에 나서는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주상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은 내 죄이기도 하지. 태후가 종인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모인 이들이 지극한 모정에 탄복하였다. 하개만이 떨 떠름한 심정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286 그대로 돌아서기 싫었던지, 태후가 직접 대야에 손을 담가 물수건을 짰다. 물기를 꼭 짠 그것으로 진땀을 줄줄 흘리는 종인의 이마와 얼굴, 목 근처를 닦아주었다. 이번엔 깨끗한 새 수건을 적셔 열이 끓는 종인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그때 종인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열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태후는 눈알을 굴려 힐끗 주변을 살핀 후 조심스레 몸을 숙여 황제가 쏟는 잠꼬대에 귀를 기울였다. 수야. 경수야. 머릿속을 강타하는 생각에 태후는 불쾌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종인의 꼭 감은 눈 끝에서 주르륵 물 구슬이 떨어졌다. 그녀는 이내 잦아드는 헛소리를 무심하게 바라본 후 자리를 털었다. 돌아설 때 태후의 표정은 세상을 잃은 듯 비통에 젖어 있었다. 주상이 말에 오르기 전 떨어진 일로 궁에 해괴한 소문이 나도는 것은 참을 수 없소. 선제의 전례 가 있으니 품위 없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겠지. 나는 그런 꼴을 봐줄 생각이 없으니 다들 입조심 하시오. 태후의 나직한 으름장에 의관과 몇몇 중신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머리를 조아렸다. 또한, 이번 일은 주상의 옥체를 미리 살피지 못한 내의원의 책임이 크오. 만에 하나 주상께서 강건 함을 되찾지 못한다면 주작대로 앞에 너희의 목이 걸릴 것이야! 죽여주시옵소서! 이 틈에 불측한 무리가 날뛰지 않게끔 조정 안팎을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태후가 한쪽에 서 있던 장문견과 황세용에게 일렀다. 그들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 고 태후는 자신궁으로 돌아갔다. 의관들이 꼬리에 불붙은 쥐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종인을 돌보았다. 51. 절양류( 折 楊 柳 ) 깊은 밤에 찬 공기가 내려앉았다. 달은 높게 걸려 있고 멀리서 등꽃과 백정향 꽃의 짙은 향기가 풍겨왔다. 향기를 맡으려 열어놓은 격자창을 넘어 자홍색의 자귀꽃이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핑그르르 맴돌던 자귀꽃은 하릴없이 바닥으 로 떨어졌다. 그때, 한 사내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황제의 침실로 들어섰다. 장검을 찬 채 한 걸음씩 조심스 레 다가오던 그. 돌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청신이었다. 지독한 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종인은 얇은 옷을 걸친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깨어난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어제 낮에 쓰러진 이후 꼬박 하루 만에 눈을 떴는데 황궁을 벌벌 떨게 한 것치고는 한결 개운해 보였다. 하개가 새로 갈아입을 침의를 가지고 들어왔다. 조금 전에 약사발을 들이켜다가 걸쭉하게 피를 토 한 뒤였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한 후 종인은 창백한 상태로 달빛을 쬐고 있었다. 종인이 느리게 돌아섰다. 금방이라도 달빛에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청신. 너는 그만 하개의 불안을 달래주어라. 하개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신을 쳐다봤다. 청신이 품에서 반듯하게 접힌 흰 종이를 꺼냈다. 그것을 자신의 손바닥에 펴 보인 후 하개에게 내밀었다. 하개가 그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경악하며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얀 가루가 바닥 위로 후두둑 흩날렸다. 폐, 폐하!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이것은?! 그래, 맞다. 의귀비가 먹었다고 의심되는 바로 그것이다. 하개가 부들부들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287 짐새, 투구꽃, 지네, 전갈. 총 열두 가지의 맹독을 섞어 만든 독약이다. 음독한 이의 숨통을 꺾 인 버들가지처럼 쉽게 빼앗는다 하여 절양류( 折 楊 柳 )라고도 불린다. 하오나 이것은 궁에선 절대 취급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하물며 내의원에서조차 다루지 않는데 어 찌 절양류가 태성전에 있을 수 있답니까? 종인이 피식 웃었다. 그것은 내의원에서 발견한 것이다. 예?! 짐이 허락하지 않은 독극물이 내의원에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충격에 빠진 하개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절양류는 색깔, 냄새,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고수가 조합하면 은침으로도 독이 검출 되지 않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폐하, 무능한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하개가 엎으려 울었다. 종인이 손짓하자 청신이 하개를 부축해 일으켰다. 네 탓이 아니니라. 하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참을 흐느꼈다. 절양류가 무서운 것은 조합 비율에 따라 상대를 죽일 시기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과 독이 만나 독성은 강해졌지만 몸에 스미는 시간은 더뎌 최고이자 최악의 독극물로 분류되지. 헌데 이것이 짐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에서 발견되었다면 배후는 누구겠느냐? 모두 답을 알고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황제가 허락한 적 없는 약재가 내의원에서 소용되고 있었다 면 필시 이것을 눈감으라고 지시한 거대 세력이 있을 터. 하개는 자신궁을 떠올리며 드물게 이를 으 득 갈았다. 이것을 어찌 발견하셨나이까? 우연이었다. 청신에게 신세 지고 있던 궁녀가 짐의 탕약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따금 기미도 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아이가 몹시 아프더니 급사하였는데 청신이 아는 강호의 의원에게 부검을 의 뢰하니 절양류에 오랜 시간 중독된 탓이라 하더구나. 하오면 폐하께서 근자에 몹시 편찮으셨던 것도?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고 의원을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입 다물고 있던 청신이 날카롭게 내뱉었다. 고 의원이라니요?! 그자는 폐하의 주치의가 아니옵니까? 그자가 내의원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배후의 인물이 절양류를 내락하였고, 내의원 책임자인 고지산 이 직접 약방문을 쓰거나 폐하의 옥체를 진단했기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는지 너무 얼얼해서 하개는 어안이 막혔다. 그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정작 종인은 담담했다. 그는 침착하게 창문을 향해 돌아선 채 다시 달빛을 쬐었다. 천하가 짐의 것인데 의지할 데라고는 너희 둘뿐이로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짐이 서 있을 곳은 두 발을 내딛은 이 작은 공간뿐이지. 절절하게 묻어나는 고독에 하개는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폐하. 망설이시면 아니 됩니다. 순금부에 명하시어 고지산을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그자를 문책한다 하여 쉬이 입을 열 것 같으냐? 절양류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고자 하였을 땐 그 자 역시 배후의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을 터. 걸렸을 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마련 해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순 없습니다. 시시각각 목을 조이는 저들에게 본때를 보이셔야 합니다. 청신이 평소와 다르게 다소 격앙된 투로 주장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구나. 얼른 범인을 잡아들이고 싶은 청신과는 달리 종인은 느긋했다.

288 짐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일 년 남짓. 원인을 찾는다면 내의원에서 불면에 좋다며 새 약을 개발했다고 했을 때부터다. 처음에는 효험 있는 약을 주고 그 뒤로 몰래 절양류를 섞어 짐의 의 심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망설이시는 것입니까? 약방문을 잘못 쓴 것만으로도 고지산을 참수하고도 남음이다. 그런데도 짐이 계속 기다리겠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저들에게 우리가 저들의 술수를 눈치챘음을 들키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까? 청신의 반문에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 를 읽혀 박찬열을 희생시켰다. 도경수를 잃었다. 이제는 어떠한 움직임도 저들이 알 수 없게 모조리 꽁꽁 싸매야 한다. 깊고 깊은 장막 뒤로 숨는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짐은 모든 것을 잃었느니라. 그러니 더한 육체적 고통이 따르더라도 버틸 수밖에 없다. 그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이대로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쉽게 죽지 않아. 하오나 어의는 교체하셔야 할 것입니다. 혐의가 없다 하더라도 고 어의는 환후의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어이 탈을 잡게 하였으니 그 책임이 막중합니다. 청신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드물었다. 그래서 종인과 하개는 청신이 이번 일 로 대단히 화나고 상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인은 그러겠다며 싱긋 웃었다. 서두를 필요 없지. 이보다 더한 고통도 견뎠는데 육신의 굴레 따위가 대수일까. 황제의 옥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를 물어 어의 고지산을 비롯해 다수의 내의원 의관들이 파직 당하거나 벌을 받았다. 황제의 옥체는 곧 국가였기에 조금도 소홀할 수 없었다. 모두 힘을 합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황제의 몸을 돌보는 것, 그를 위해 내의원이 존재했다. 그런데 직분을 망각하고 황제를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뒀으니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만으로 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이와 같은 처결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낌새가 아주 기기묘묘하군. 태후는 손에 낀 은가락지를 지분거리며 생각했다. 고지산은 상당히 조심성 있는 성격이고 믿음직한 자였어. 하여 오랜 시간 공들여 그를 내의원의 수 장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군. 잇새로 끙 앓는 소리가 터졌다. 아무리 황제가 실신한 일로 궁이 뒤숭숭하다고는 하나 평소의 종인이라면 고지산의 의술을 높이 사 정직 처분에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관직을 빼앗아 추방했으니 젊은 황제가 자신에게 벌어진 이상 기 후를 알아버린 것이 틀림없다. 하절로 접어드는 시절에 그녀는 모처럼 연못에 나와 연꽃과 잉어를 구경했다. 근처에는 운향나무와 대나무가 쭉쭉 뻗어 시원한 풍경을 만들었다. 태후의 표정은 부처처럼 온화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북녘의 빙산이 버티고 있어 아랫것들은 감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황세용이 태후의 부름을 받고 연못으로 왔다. 태후는 쨍한 태양을 피해 정자 아래서 배를 곁들인 시원한 오미자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황세용이 인사한 후 태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급한 일이 아니면 조정의 관리를 사사로이 오라 가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아시지요? 태후가 찻잔을 기울이는 황세용에게 다정한 투로 말을 건넸다. 황세용이 미처 음료를 마시지 못하 고 다기를 내려놓았다. 예. 태후마마께서는 손짓 하나도 주의가 깊으시니까요. 번거롭지만 사도께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드시라 청하였소. 제가 해야 할 일이라니요? 태후는 황세용을 오래 붙들 수 없다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며칠 전에 황제가 혼절했을 때 사 관 도경수를 입에 담으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황세용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

289 었으므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수상한 점이 있긴 했다. 태평연에서 황제가 도경수의 편을 들어준 것이나 갑자 기 도경수를 머나먼 경성현으로 보내더니 어느 날은 한서 땅으로 적소를 바꿔버린 일 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가 박찬열을 역적으로 찍어냈으면서 그와 절친이었다는 도경수를 끝까지 싸고도 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더구나 둘은 한때 추문에 휩싸인 적도 있으니 태후의 말은 허투루 들을 게 아니었다. 우린 같은 편이니 에둘러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가문의 일원이자 나라의 동량인 박찬열을 방 패막이로 삼은 이유를 아시오? 미거한 소신이 마마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그리 겸손하실 것 없소.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방법이니. 다만 두려워서 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태후는 머리에 꽂은 장미무늬 비녀를 살짝 어루만지고는 말을 이었다. 박찬열은 도경수의 오랜 벗이었소. 알아보니 서로의 가문이 힘들 때마다 도와줄 정도로 막역한 사 이였다고 하오. 박찬열은 도경수를 좋아했지만 도경수는 황제의 사람이었지. 셋의 우정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오. 박찬열이 도경수를 좋아했다는 대목에서 황세용은 그만 사색이 되었다. 그래서 청혼을 모조리 거절 했던 게로군! 괘씸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여 황세용은 콧방귀만 빵빵 뀌었다. 허나 아무리 공들여 쌓은 탑이라 해도 각각의 치부를 건드리면 하릴없이 무너지는 법. 도경수에게 박찬열은 그런 사람이었소. 도경수로서는 황제를 만난 시간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박찬열과의 추억이 더욱 깊고 풍부했을 거요. 허니 도경수의 역린은, 주상이 아닌 박찬열일 수밖에. 무위장군을 침으로써 금상과 도경수 사이를 갈라놓으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주상이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도경수와 만난 직후였으니까. 황세용은 처음 듣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도경수를 태후의 앞에 끌어 다 놓은 사람은 자신인데 오히려 태후가 더 오래 알고 지낸 듯 많은 것을 꿰고 있자 이제는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주상은 경솔하진 않지만 한 번 결심하면 그것을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 성마르기도 하 고, 한편으로는 복잡하기도 하다오. 폐하께서 용양군에 관심이 있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게 어디 흠이 될 일이어야지. 고관대작이라면 한 집 건너 한 명 꼴로 남첩을 축적하고 있으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하오면 혹 폐하께서 후궁들과 합방을 거부하시는 것도? 다소 비린 미소가 태후의 입가에 걸렸다. 황세용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 도경수에게 빠져 후궁들을 멀리 하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 힐 노릇이었다. 사정은 이만하면 이해하셨지요? 예, 마마. 소신에게 명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도경수가 두 번 다시는 도성에 발길을 들이지 않았으면 하오. 들인다 해도 주상과는 만나선 아니 될 것이오. 그 영특한 아이가 주상의 마음을 다시 얻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소. 이것은 종 사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의 생존과 관련 있기도 하오. 폐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의 원동력이 도경수라는 말씀이시군요. 태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일개 비빈이면 폐서인으로 만들고 두 번 다시 궁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간단하오. 허나 그 자는 조정의 녹을 먹는 자고 주상은 민심이 가라앉으면 얼마든지 교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소. 죽고 못 사는 벗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할 텐데, 그 되바라진 치가 가만히 있진 않을 터. 마마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구려. 무엇입니까?

290 지금 한서현에서 귀양살이 중인 도경수를 함부로 죽인다면 박태흥과 변백현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 오. 금선공주는 호시탐탐 중앙의 동태를 살피며 우리가 실수하기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아들이라 고 다르겠소? 그렇군요. 더구나 유배지를 바꾼 지 얼마 안 된 데다 경성도 아닌 한서에서 죄인이 죽으면 아주 해괴하기 짝 이 없지. 공연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태후는 잠시 차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지난번 일로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구려. 그러니 이번엔 둘 사이를 철저하게 멀어지도록 하는 선에서 끝냅시다. 도경수는 이미 박찬열을 죽인 일로 주상에게 적잖은 앙심을 품고 있을 거요. 주상이 내 입을 막으 며 직접 도경수에게 배소 단자를 내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일이 복잡하겠으나 달리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기도 하오. 마마의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른 연잎 사이로 하얀 백련이 점점이 피어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고결하였다. 새빨간 무당벌레가 연심을 파먹으려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도경수의 모친이 상심하여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다지? 셋째를 낳다가 얻은 몸살로 몹시 쇠약해졌 는데 도경수의 어린 누이가 몇 년 전에 역병으로 죽은 후로 아주 병자가 되었다 하더이다.! 아들의 소식을 들으면 모친이 기뻐할 것이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 후 태후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정자를 빠져나갔다. 황세용이 섬뜩한 지시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청량한 빗줄기가 메마른 땅을 적셨다.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심원을 그렸다. 곧 장마철이었다. 스무 날 넘게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모처럼 큰 비가 쏟아져 한서현의 가 뭄을 해갈해 주었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던 경수는 문득 볼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어깨를 움츠리며 돌아보았다. 백현이 빙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얼음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씩 웃고 있었다. 경수는 난간에 팔을 올린 채 다시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잠시 짬이 나서 쉬던 중이었다. 안 먹을 거요? 경태에게 맛을 보라 했더니 아주 달다며 좋아하던데. 저는 수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육식을 즐기는 거요? 먹는 데 별로 관심 없습니다. 오호라. 그래서 키가. 중얼거리는 백현을 슬며시 노려본 경수. 구슬처럼 맑고 큰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서 백현은 키드득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뒤, 백현이 심드렁하게 수박을 씹으며 물었다. 그대는 다른 일은 잘하면서 왜 본인 몸 돌보는 일엔 소홀하오? 소홀한 적 없습니다. 거짓말도 자꾸 하면 버릇이 된다는 걸 아려나 몰라. 지긋지긋한 잔소리가 이제는 익숙했다.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291 종옥도 함께 거둬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 온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인제 와 공치사하는 거요? 무명이가 한서현으로 오고 비 온 뒤 호박 크듯이 쑥쑥 크더군요. 경성현이 그만큼 고된 곳이었다 는 증거겠지요. 여인 혼자 아이를 기르기란 쉽지 않소. 우리 어머니를 봐서 내 잘 알지. 그렇지 않아도 무명이의 친부가 누군지 물어볼 참이었소. 귀양다리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만약 연 이 닿는다면 아이의 아비에게 무명이가 존재한단 사실은 알려야지 않소? 옳은 말씀입니다. 좋은 일에 나서주셔서 고맙습니다. 경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보일 듯 말 듯 아슷아슷했지만 분명히 처음 보는 미소였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그대가 그리 웃는 건 처음 보거든. 저는 사람이 아닌 줄 아십니까?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동안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오? 늘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나리께서는 정말 여과 없이 말씀하시는군요. 시원시원하기도 하지만 종종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조금 전 한 말이 그대에게 상처였다면 사과하리다. 일일이 그러실 필요는 없고요. 경수는 다시 허물어지듯 미소를 띠었다. 봉긋 올라간 두 볼이 무척이나 앳되고 귀여웠다. 연분홍색 으로 물든 앙증맞은 꽃잎처럼 보였다. 백현은 그가 미소 지을 때마다 제멋대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모란이 아름답게 피었네요. 문득 마당 한쪽에 심어진 홍모란을 보며 경수가 중얼거렸다. 뜰 앞에 작약은 요염하나 격이 낮고 연못의 연꽃은 정결하나 정이 없네. 오직 모란만이 실로 으뜸 이라. *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꽃이라오. 본가에 모란이 많습니까? 이곳처럼 만개했을 거요.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심으셨소. 초록빛 고운 잎사귀 한가롭고 고요한데 꽃송이는 점점 더 붉어져만 가네. 꽃의 마음은 시름에 겨 워 애간장 끊어지건만 저물어 가는 봄빛이 어찌 그 마음을 알까. ** 시름에 겨운 일이라도 있소? 경수는 왼고개를 쳤다. 백현은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해서 수박만 우적우적 씹어 먹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경수는 백현이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저녁 먹기 전에 조금 더 공부할 거요. 내가 작문은 약한 편이라 그대가 봐주었으면 해. 언변이 좋으신데 문장이 약하다고요? 괜한 엄살 아닌가요? 진짜래도. 백현은 눈썹을 홱 치떴다. 은수저 물고 태어난 덕에 평생 펀펀 놀고먹을까 했더니 폐하께서 대과를 치르라고 어지간히 들볶 으셨지. 스승님께서도 잔소릴 하도 해대셔서 올해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참이오. 허니 그대는 열심히 날 도와야 하오. 누리는 것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위정자의 덕목입니다. 안다니까. 그래도 대과는 심하지 않소? 이러다 덜컥 떨어지면 내 체면이 아주 우스워질 거요. 세도가들은 그리 만만하지 않지요. 오래도록 중앙 조정에서 군림했던 자들입니다.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죠. 폐하께서 나리를 아끼시기에 대과를 치러 실력을 증명하라고 하 * 유우석, 모란( 牡 丹 ) 중 ** 왕유, 홍모란( 紅 牡 丹 )

292 신 것 아니겠습니까. 백현이 손뼉을 짝짝 치며 감탄했다. 역시 척하면 척 다 알아듣는군.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을 고스란히 했소.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공연히 치켜세우지 마십시오. 히죽 웃으며 남은 수박을 해치운 백현. 입가에 묻은 붉은색 물기를 옷소매로 닦으려는데 경수가 미 간을 찌푸리며 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수년간 유랑하시느라 거친 습속에 물들어 계신 것은 이해합니다만, 나리께서는 고매한 선비이자 공주의 핏줄이라는 점은 늘 염두에 두십시오. 때로는 체면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젠 그런 말이 잔소리로 들리진 않는구려. 그대에게 내가 길들여진 것은 아닐지. 저는 조련사가 아니니 남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농담 좀 한 것을 가지고 또 진지하게 나오는군. 이마 좀 펴시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경수의 미간을 쭉 늘인다. 경수가 얼른 얼굴을 뒤로 빼며 자신의 이마를 문질 렀다. 새침하게 치뜬 눈동자가 깔깔거리는 백현을 가득 담아냈다. 그거 아시오? 그대는 맑은 물결처럼 잔잔하나 드물게 보여주는 미소는 수면에 비친 햇살 같다오. 빗줄기가 잦아들어 가랑비가 내리는 시점이었다. 백현의 뜬금없는 발언은 오해라고 할 수 없을 만 큼 또렷했다. 경수는 풀었던 표정을 굳혔다. 백현은 픽 웃고는 수박 껍질이 담긴 그릇을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경 후 내 서재로 오시오. 그대의 가르침, 기대하리다. 52. 유사유의( 遊 絲 有 意 )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아 종인은 중요한 일만 처리하며 가능한 휴식을 취했다. 상소 몇 개를 뒤 적인 그는 흐리마리하게 번진 달무리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창문을 열어도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훈풍이 들어와 답답한 실내 공기를 산뜻하게 해 주었다. 일전에 알아보겠다고 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가볍게 담소나 나누자고 들인 청신이다. 하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시간을 꽤 준 듯하다만. 은밀히 움직이느라 시간을 더디 잡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사과는 됐다. 결론부터 말하라. 청신이 공연히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훑었다. 주위에는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만 있을 뿐이었다. 넌 함부로 입을 놀리는 성격이 아니다. 네가 하도 자신 있어 하기에 그 일 을 알아보라고 허락한 것이지. 결론부터 말씀 올리자면 무위장군께서는 자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을 시엔 아무리 너라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소신의 미천한 목숨을 거두신다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종인이 들고 있던 상소를 내려놓으며 청신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 발언에 제대로 책임지라는 의미 였다. 무위장군이 자진했다던 밤, 옥졸 하나가 장군의 부탁으로 지필묵을 가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가 족이나 지인에게 서찰이라도 남기려나 보다 싶어 옥졸은 어차피 죽을 목숨, 마지막 소원 수리라도 해 줘야겠다고 여겨 잠시 자리를 비웠지요. 그런데 그 옥졸이 돌아와 보니 찬열의 옥사를 지키던 동료 둘이 감옥 앞에 쓰러져 있었다. 옥졸이 놀라 황급히 안을 살피니 이미 찬열은 돌로 된 벽에 머리를 받아 자결한 후였다고 한다. 손발에 족쇄 는 채워져 있었으나 목에 두르고 있어야 할 칼은 풀린 채였다. 옥졸은 크게 놀라 곧바로 위에 알렸는데 대역 죄인이 형 집행을 앞두고 자결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어 얼렁뚱땅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옥졸은 그럼 감옥을 지키던 동료들은 왜 죽은 것입니까? 라며

293 조심스레 물었다. 당시 책임자인 순금사령은, 박찬열을 살리려고 파옥을 감행한 누군가가 옥졸들을 죽이고 안을 살 피다 죄인이 자결하여 별수 없이 사라진 것 아니냐? 고 했다. 살아남은 옥졸은 그럴싸한 이야기에 별 생각 없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런데 검시를 담당한 내의 원 의관이 시신의 상태를 살피고는 몹시 놀라기에 내심 뭔가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반역을 꾀한 죄 인이고 사안이 감당도 안 될 정도로 무거워 지레 겁을 먹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검시를 행한 의관이 청신이 강호에 있을 때 의탁했던 스승의 제자였다. 청신은 그에게 의지 하던 기미 궁녀가 죽은 것을 수상하게 여겨 조사 중이었다. 그는 스승에게 궁녀의 검시를 부탁하러 갔을 때 궁중에 그만한 솜씨를 가진 의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의관이 예전에 자신을 찾아와 박찬열의 죽음과 관련해 해괴한 소릴 늘어놓 았다며 사정을 전했다. 의관의 말로는 박찬열의 목 뒤에 아주 희미한 푸른 반점이 있었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점으로 보 이지 않았으며 며칠에 걸쳐 검사한 결과 그것은 독에 당한 흔적이라고 했다. 독? 예. 독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봐. 강호에는 울인( 鬱 刃 )이라 불리는 칼이 있습니다. 만드는 데만 십 년이 넘게 걸리는데 셀 수 없이 많은 독을 칼날에 쉴 새 없이 바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검이 뜨거운 가마와 찬물을 오가며 단단해지 는 것과 달리 울인은 이미 완성된 칼을 독으로 단근질하지요. 하여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상하 고 최악에는 여지없이 죽습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대바늘을 만들어 울인 대신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소신이 확인한 결과 장군 의 청반은 혈액의 흐름이 멈췄을 뿐만 아니라 피부마저 심각하게 괴사하여 목 뒤쪽이 아예 함몰된 것 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검시관들이 그걸 몰랐단 말이더냐? 벽에 이마를 박아 피가 흐른 데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어 쉽게 발견되지 않은 듯합니다. 긴장감에 숨을 참았던 종인이 한꺼번에 날숨을 내뱉으며 격렬하게 콜록거렸다. 청신이 놀라 달려가 려 하자 종인은 벌게진 얼굴로 손을 들었다. 조금 뒤 숨을 가라앉힌 종인은 가벼운 각혈을 숨기려 입 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울인은 짐도 들어본 적이 있다. 선제께서 너를 짐에게 주실 적에 강호 사정에 관하여 이런저런 이 야기를 해 주셨다. 하지만 짐은 허황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 실제로 울인이 쓰일 줄은 몰랐구나. 위험성이 워낙 큰지라 강호에서도 잘 만드는 검은 아닙니다. 요즘은 한두 명이 그 명맥만 잇는다 고 들었습니다. 네 말은 조금의 의혹도 없는 사실이렷다. 소신의 목숨을 걸겠습니다. 찬열의 반짝이는 멋진 모습이 눈앞을 헤집었다. 종인은 괴로운 듯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날까지 찬열의 자결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라 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음모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체 누가 찬열을 이렇게 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끔찍한 추국청에서 온갖 고신을 당하는 와중에도 폐하께 자신의 결백을 믿어 달라, 자신의 사정 을 헤아려 달라 그리 말했겠지요. 오죽하면 목숨을 끊던 밤에 소신에게 절명시를 보냈겠습니까? 종인의 심장이 철렁했다. 경수와 몸을 섞던 밤에는 흘려들었던 말들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도경수에게는 박찬열의 이름으로 절명시 한 수가 갔다. 그는 그것을 보고 더욱 극심한 분노와 슬픔 에 잠겼음이 틀림없다. 도경수는 김종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끝끝내 원망 가득하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종인은 그 것에 괴로워했고 두 번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일의 배후는 도경수를

294 김종인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단 말인가? 수고했다. 끔찍하게 펼쳐진 기나긴 동굴에서 한 마리의 반딧불이 들어와 빛을 비춘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반 짝였으나 섬광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찬열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대외적으로 역적이라는 크나큰 오욕을 짊어진 죄인이다. 청신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과는 달리 당장 결단을 내리라며 종인을 보채지 않았다. 네가 목숨을 걸고 알아낸 진실이건만, 짐은 이번에도 덮어둘 수밖에 없다. 두 발 더 내딛기 위한 일시의 움츠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원하는 뜻을 펴실 수 있도록 소신이 더욱 열심히 뛰어다닐 것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다. 그 옥졸의 신변에 어떠한 위협도 가해지지 않도록 네가 잘 살펴라. 청신은 믿음직한 눈빛으로 종인을 쳐다봤다. 너는 울인을 만드는 자를 은밀히 찾아내 그 행적을 눈여겨보도록 하라. 짐의 명이 있을 때까지 숨 죽이고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봉명하겠나이다. 종인이 다소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사제라는 자의 성품은 어떠하냐. 깊게 알진 못하오나 가볍진 않습니다. 처음에 무위장군의 일을 얘기하려 하지 않아 몸을 사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위장군을 오래도록 흠모하여 고인을 두 번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 다. 진실을 알면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찬열의 명성이 대단하긴 대단했나 보군. 짐이 천자인데 충심을 얻으려면 찬열이 죽은 사정을 밝혀 야 한다니. 소신이 실언하였습니다. 종인은 농담이었던 것처럼 낮게 웃었다. 너도 알다시피 고지산이 파직당한 후 짐의 주치의 자리가 빈 상황이다. 내의원에서 누굴 믿어야 좋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마당에 잘됐군. 청신이 이내 그 뜻을 파악하고는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종인이 두루마리를 펼쳐 교지 한 장을 적 었다. 파격적인 인사 처리에 조정에서 모처럼 한바탕 살풀이를 해대겠구나. 건조하게 웃으며 옥새를 찍은 것은 고신( 告 身 ) * 이었다. 백성들은 분쟁이 생기거나 억울한 일에 휘말리면 관아를 찾아왔다. 바쁠 때는 하루에 열 손가락으 로 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민원을 처리해야 했다. 덕분에 요새 백현은 경수에게 온갖 잔소리를 들어먹느라 곤욕이었다. 한낱 서기관 주제에 문서 내 용이나 잘 받아 적으면 될 것이지, 대체 스승님 곁에 있으면서 이런 거 하나 안 배우고 뭐 했냐는 둥 푸닥거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잔소리라며 귀를 틀어막기도 그런 것이, 경수는 실무 경험이 없는데도 현황이나 사건의 요 점 파악이 빨라서 관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박태흥도 놓치는 세세한 부분을 잡아서 시비가 없게 하니 참으로 효율적이었다. 백현은 요즘처럼 바쁘고 부지런하게 생활한 적이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고 종 종 관청에 불려가 스승과 경수를 도왔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장마철이 지나 무더운 칠월 중순이었다. 과거는 팔월 초하루에 치러질 예정이었 다. 교안까지 가는 데 최소 보름은 걸렸으므로 백현은 슬슬 짐을 싸야 했다. * 벼슬아치 임명장

295 유배 중이라 적소를 벗어날 수 없는 그는, 몸종 경태에게 시험 직전 백현이 필히 봐야 할 요점 공 책을 전달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변백현의 실력이라면 입격하고도 남음이지만 과거는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닌지라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 했다. 내일 교안으로 떠나는 백현은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다. 사실 서책의 행간이나 글자의 모양새마저 기억할 만큼 온갖 책을 지겹도록 탐독해 온 그다. 스승인 박태흥마저 공부 머리로 치면 제갈량에 견 주어도 좋을 것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한 번 본 것은 거의 잊는 법이 없고 그것을 응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재주까지 겸비한 백 현은 비지중물( 非 池 中 物 ), 그야말로 연못 속의 용이었다. 부친에게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는 것만큼 못난 일은 없다고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데다 남의 눈에 띄지 않을수록 일신이 편하다는 스승의 말에 제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경수는 그동안 백현의 공부를 봐주면서 이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백현이 굳이 자신을 뽐내지 않 기에 경수도 모른 척, 그러나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며 백현을 도왔다. 경수는 죄인 신분이라 행랑채에서 생활했다. 그는 백현과 함께 있지 않을 때면 눈치껏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등 잡일을 찾아 했다. 덕분에 아랫것들이 경수를 두고 왈가왈부 하는 일은 없었지만 보이 지 않는 묘한 벽이 있었다. 그런 그가 저녁을 먹고 집무실에서 장부 정리를 하는데 경태가 도련님이 부른다며 서재로 가라고 했다. 경수는 보던 장부를 덮고 군소리 없이 서재로 향했다. 마무리할 공부가 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도착한 서재에 백현은 있지 아니하였다. 그는 앞마당에 파놓은 인공 못에다 술잔을 띄우고 악사처럼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휘영청 높이 뜬 달이 못과 술잔 속에 들어차 찰랑거렸다. 못 주변에는 물풀과 조름나물, 개구리밥이 듬성듬성 떠다녔다. 독특하게 푸르른 벽련이 다보록하게 모인 물꽃밭이다. 못의 네 귀퉁이에 세워둔 석등의 밝은 불빛이 불야성처럼 벽련을 비추었다. 무슨 곡입니까? 다소 서글프면서도 늘어지지 않는 가락이 경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백현은 연주를 멈추지 않고 빙긋 웃으며 지껄였다. 몇 년 전에 만들었는데 이름을 붙이진 않았소. 주 공근( 公 瑾 ) * 같지 않소? 허풍도 심하십니다. 허! 때로는 작은 거짓이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오. 나쁘진 않습니다. 엎드려 절 받는 꼴이로군. 실없이 웃은 그가 뚱땅뚱땅 뜯는 거문고 가락에 맞춰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낙양은 바야흐로 꽃 피는 봄철, 흐드러진 꽃들이 향기를 다투네. 안개는 뜻이 있어 얽혀 드는데 말 도 없이 버들 꺾어 떠날 임에게 주네. 붉디붉은 살구꽃은 푸른 산을 가리고 산 따라 걷던 이는 산 밑 에서 잠시 쉬네. 오늘 밤은 누가 함께 먼 길 가주려나. 고요한 객관의 달빛만 나를 따라오네. ** 경수가 맞은편 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름다운 음률은 끊일 듯, 끊이지 않을 듯 애를 태우며 공간 의 곳곳을 채워 넣었다. 가만히 듣던 경수가 턱을 괴고 멍하게 못물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헤어진 후 그대 있는 곳 알지 못하여 눈에 띄는 것마다 처량하고 괴로웠네. *** 중요한 일을 앞두신 분이 왜 이렇게 구슬픈 곡을 연주하십니까? 예술은 연주자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하오. 그대도 용연무를 추니 심정에 따라 춤이 표현되는 방법 이 가지각색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오. 과거가 큰일은 큰일이군요. 이리 진지하게 나오시니 다른 분 같습니다. 실은 천하제일의 문장가가 와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뻗댈 수 없어서 백현은 버릇처럼 실없는 미소 만 지었다. * 오나라 장수 주유의 자. 음악에 조예가 깊었음 ** 구양수, 옥루춘( 玉 樓 春 ) 2 *** 구양수, 옥루춘( 玉 樓 春 ) 3 중

296 헌데 저를 보자고 하신 연유가? 달빛이 좋지 않소? 뜬금없이 달 타령을 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과연 달빛은 일색이었다. 그동안 그대에게 신세 진 것이 많아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하자고 불렀소. 동학지의( 同 學 之 誼 )란 말은 거창하지만 아무튼 우리가 비스무리하게 노력하지 않았소? 홍패나 받아오고 그런 말씀을 하십시오. 누가 들으면 벌써 장원급제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따 놓은 당상이지. 아무렴, 누구 밑에서 배웠는데? 백현의 당당한 허세에 경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백현이 기다란 작대기로 못에 띄운 술잔 하나를 끌고 오더니 얼른 집어 경수에게 내밀었다. 벌주요. 네? 그대가 오기 전부터 판이 시작되었거든. 먼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내기였 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술자리에선 주최자의 말이 곧 하늘임을 모르는 거요? 허! 여러 약재와 연꽃잎으로 빚은 만전향( 滿 殿 香 )이요. 몸에 좋은 약주라는 것은 그대도 잘 알겠지. 짐짓 놓은 으름장에 경수는 별수 없이 술잔을 꺾었다. 말끔하게 밑을 드러내자 백현이 환하게 웃었 다. 눈매가 야살스러운 부채꼴로 휘어졌다. 자, 한 잔 더. 다른 잔을 끌어와 또 경수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벌주입니까? 권주요. 경수가 다소 마시기를 꺼리자 백현이 다소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주는 술은 받기 싫소?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흥을 깨지 마시구려. 오늘 밤은 달빛 대신 그대가 내 길동무가 돼 주어야 하오. 정 그러시면 권주가라도 하나 읊어주십시오. 아무리 향긋한 술이라도 훌륭한 시가 없으면 그 운치 가 반감되지요. 백현이 잠시 고민하더니 소식의 우미인( 虞 美 人 )을 읊조렸다. 술에 취해 잔 들어 달에게 권하기를, 둥근 달 줄지 않고 그대로였으면. 다시 한 잔 들고서 꽃에게 권하네, 지지 말고 오래오래 있어 주기를. 달 밝은 날, 잔 들고 꽃 앞에서 취해 성쇠가 무상한 일 묻 고 싶지 않다네. 이 같은 즐거움 몇이나 알까. 꽃을 만나 술잔 들고 마시지 않는다면 어떤 때를 기다 려야 한단 말인가. 녹음 속엔 잠든 거문고, 위에는 나는 폭포. 떨어지는 꽃은 말이 없고 사람은 국화처럼 맑네. * 나리 께선 권주가마저도 슬프군요. 심란하십니까? 백현은 뜻 모를 표정으로 거문고를 내려놓았다. 오늘 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구려. 마음이 스산한 것이 그대 말대로 과거 때문에 조금 긴장했 나 보오. 나리께서는 제가 가르치지 않았더라도 능히 입격하고도 남을 실력입니다. 평소처럼만 하시면 폐하 께서 나리를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어머니께 더는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오. 공주께서 철든 아드님을 보고 기뻐하시겠습니다. 농담에 둘 다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 사공도, 전아( 典 雅 ) 중

297 역시, 그대는 미소가 더 어울리는구려. 웃으면 복이 온다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미소를 잃지 않았으 면 하오. 맘처럼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나리께서 심심찮게 던지는 농 덕분에 간간이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거 다행이오! 백현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다른 술잔을 끌어와 입으로 털었다. 참. 무명이의 친부를 수소문하고 있는데 단초가 대충 잡혔소. 참이십니까? 과거에서 돌아오는 대로 확실히 알려주리다. 그전까지는 종옥에게 비밀로 하시오. 공연한 기대감을 심고 싶지 않으신 뜻이겠지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종옥에게 진 신세가 깊은데 나 리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그대가 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리다. 그 말에 경수가 문득 이상한 낌새를 깨닫고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백현도 아차 싶었는지 마른 침을 삼키며 공연히 빈 하늘을 쳐다봤다. 만일 내가 급제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한동안 중앙 조정으로 불려갈 것이오. 폐하께서는 사사로이 사촌 아우이기도 하시니 적당한 때를 봐 그대가 방면될 방법을 찾아보겠소.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그리하시오. 실없는 소리로 그대에게 헛바람을 넣으려는 것은 아니니. 이번만큼은 나리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흘러가도록 모른 척 내버려 두는 것도 현명하오. 경수는 백현이 왜 이다지 자신의 일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백현을 보면 남의 일에 두 팔 걷고 나서는 성격이 아니란 것쯤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달리 도경수가 얽힌 일에는 적극적이었으니 성격이 유난스럽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수는 하루빨리 찬열의 복수를 하고 싶었으므로 백현의 뜻에 완전히 반대하지 않았다. 백 현이 도움이 된다면, 그가 자신을 기꺼이 돕고자 한다면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제 일이라면 폐하께서도 민감하게 받아들이실 겁니다. 공연한 트집으로 도리어 꼬투리를 잡힐 수 도 있습니다. 그럼 폐하께서 먼저 꺼내시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리다. 다시 또 한 잔. 목울대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술이 목마름을 자아냈다. 아. 하나만 물읍시다. 듣고 있습니다. 혹 여전히 폐하가 그립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답해 주오. 조금 전 들뜬 듯 보였던 것과 달리 경수는 서늘하게 되물었다. 나리께 중요한 문제인지요? 그렇소. 떠날 때 모두 황궁에 두고 왔습니다. 저는 천자를 품을 가치도 없는 죄인입니다. 모호한 답변이었다. 겉보기엔 그립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자격이 없다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백현은 미묘하게 밀려오는 실망감에 쓴웃음을 지었다. 정리( 情 理 )란 종이나 비단과는 달라서 가위로 오리듯이 단숨에 끊을 수 없는 법이오. 허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린 자국이 남더라도. 상처투성이로군. 때로는 시간이 흘러 상처도 추억이 되지만 당시엔 그 상처에 마음이 찢어지죠. 해서, 그대의 마음은 아직도 갈가리 찢긴 채요? 약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298 고향 생각이 간절한데 마음이 아프지 않고 어찌 배기겠습니까. 뜬금없는 대답으로 얼버무리지만 공허한 얼굴에 스치는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이 경수를 더욱 작아 보이게 했다. 저 작은 몸뚱이에 꾹꾹 눌러 담은 숱한 가시와 상처는 언젠가 본인도 모른 새 빠져나와 온몸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공연한 것을 물었구려. 미안하오. 아닙니다. 내가 더 노력하겠소. 무엇을요? 그냥. 무엇이든. 나리께서는 알다가도 모를 분이십니다. 가끔 다른 세계에 계신 것 같기도 하고요. 엉뚱하다는 말은 자주 듣소. 거북하게 여기진 마시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잔을 끌어다 나란히 빈손에 쥐고 쨍그랑 맞부딪쳤다. 파삭, 여린 풍랑에 물속의 달이 깨졌다. 53. 단장화( 斷 腸 花 ) 백현이 꽤 떠들썩한 배웅을 받고 교안으로 떠난 지 수일째. 산천초목이 더는 짙푸를 수 없을 만큼 쟁글쟁글한 초록색을 뿜어냈다. 더위가 한층 깊어져 열대야에 몸부림치는 날이 계속되었다. 모두 시원한 부채와 음료를 찾았다. 그 나마 한서는 교안에 비해 여름이 시원한 편이었다. 예년 같았으면 교안의 살인적인 더위에 비루먹은 소처럼 혀를 빼물었을 것이다. 경수는 고향에서 자식 걱정으로 혹독한 여름을 보내고 있을 부모님이 걱정되었다. 월란을 잃은 후 하나 남은 형제인 어린 연수도 아른거렸다. 못 본 새 아우는 얼마나 더 컸을까? 못난 형 때문에 괜히 의기소침해져 있진 않을지 걱정이다. 얌 전한 성격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또래도 몇 명 없는데 죄인의 동생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따 돌림이나 받는 것은 아닐지. 그런 근심으로 또 며칠이 눈 깜작할 새에 지나갔다. 왁자지껄한 중추절이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선 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낮은 타는 듯이 뜨거웠지만 밤에 숨통이라도 트인 것이 다 행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국화가 만발하는 계절이 올 것이다. 경수는 국화의 우아함을 좋아했다. 봄여름에 앞다투어 피어나는 꽃과는 달리 가을 끝 무렵에 홀로 피어서 조용히 지는 국화의 태생이 도도해 보였다. 같이 일하는 관리들 말로는 가을이면 정원에 황국 ( 黃 菊 )이 피어 감상하기에 그만이라던데 얼른 풍성한 꽃을 보고 싶었다. 가을바람과 함께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변백현이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유가를 마친 후 스승인 박태 흥을 만나러 한서현에 들른다는 거였다. 보통 시험이 있고 늦어도 일주일 내로 결과가 발표되는데 이번에는 퍽 채점 기간이 길었다. 황제가 친히 인재를 등탁한다고 모든 권자를 일일이, 수차례에 걸쳐 살핀 탓이었다. 덕분에 이번 대과는 유난 히 어려웠던 주제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자들이 진검승부를 가리는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거기서 장원이 되었으니 이는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금선공주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 심 뿌듯하면서도 체통을 지키느라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훌쩍이 는 소리를 백현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박태흥도 금선공주 못지않게 청승이었다. 백현은 공주의 부탁으로 찔찔 코 흘리던 시절부터 본 아 이다. 그 아이가 방황을 접고 등탁되었다는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태흥은 크게 한 턱 내겠다며 잔치를 벌인다고 공문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자 경수는 더욱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명절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것만으로도 큰 불 효인데 죄인을 자식으로 뒀다는 불명예를 쓰게 하였으니 부모님께 도무지 면이 서질 않았다.

299 경수는 심란해서 손이 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노비들이 질경이 다듬는 일을 도왔다. 온종일 그러고 있다 보니 적어도 고향 생각만은 떨칠 수 있었다. 그러다 늦은 오후에 종옥이 현령이 찾는다며 경수 를 불러냈다. 경수는 손끝에 핏물이 밴 것을 아무렇게나 닦은 후 관내 응접실로 향했다. 박태흥의 마른 손이 청옥을 물린 노란색 찻잔을 들어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태흥은 종옥과 시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경수는 멋쩍게 하단에 앉아 현령을 쳐다봤다. 백현의 소식을 들었겠지만 정말 자네의 공이 컸네.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 칠칠치 못한 녀석은 올해도 그냥 흘려보냈을 걸세. 나리께서 품은 뜻이 있으셨을 겁니다. 저는 우연히 그 시기에 편승했을 뿐입니다. 자네는 정말 겸손하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경수가 살짝 낯빛을 붉혔다. 태흥은 그런 경수를 미쁘게 바라보았다. 백현이 그 아이, 여덟 살에 처음 보았네. 당시 부마도위와 금선공주가 직접 속수를 들고 찾아와 내 게 아이를 부탁하였지. 첨엔 황실과 엮이기 싫어 내키지 않았네만 아이를 본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 귀한 옛 이야기에 경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달랐어. 하지만 하는 짓은 막내둥이라 천방지축에 애교가 철철 넘쳤지. 장난을 좋아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그때부터였나 보다. 경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네만, 팔 년 전 부마가 자결한 후부터 그 밝던 아이가 달라졌네. 공주께서도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고 나도 밖으로만 나도는 그 아이가 못미더웠던 것도 사실이야. 어쨌든 백 현이는 나라에서 크게 쓰일 동량이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아이의 발목을 붙잡아선 안 돼. 어쩐지 무거운 얘기에 경수는 숙연해졌다. 겉보기엔 한없이 가벼워도 속에 품은 웅지는 대단한 아이라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도 알지. 허나 가슴에 담은 불꽃이 뜨거워 자칫 방심하는 순간 불꽃에 제 몸을 태울 수도 있네. 그동안은 내가 옆에서 불쏘시개를 조율했네만, 조정에 발을 들이면 돌봐줄 사람이 없어. 그 아이 스스로 잘 헤쳐나가리라고 생각하네만 사람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 서로 툴툴거려도 박태흥과 변백현은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사제지간이었다. 그러니 태흥이 짐짓 경수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경수도 어렴풋하게나마 백현의 마음을 눈치챘으므로 태흥을 원망하 지 않았다. 언젠가 백현이에게 그런 위기가 닥치거든 자네가 곁에서 잘 지켜보다가 꼭 그 아이를 살려줘야 하 네. 정쟁에 뛰어들라고 새파란 목숨 등 떠민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스승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다네. 내 제자만은 풍랑 속에서 온전하길 바라지.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자네는 웬만한 자들보다 낫군. 과찬이십니다. 백현이는 사흘 후에 돌아올 걸세. 태흥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백현이가 부친 급보네. 자네 앞으로. 경수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내용물을 꺼내 읽었다. 단정하던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무섭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도경수의 모친이 중추절 무렵에 급사하였고 그 집 형편이 몹시 안 좋다 하옵니다.

300 오후 일정이 시작되기 전, 편전에서 잠시 쉬던 중 전해진 소식이었다. 말을 전하는 하개도 듣는 유 도 낯빛이 안 좋았다. 예전에 경수에게서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갑자기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 구나 경수가 사관이 된 후로는 호전되어 집안이 두루두루 편하다고 했다. 그런데 한여름에 초상이 났 다니 기가 막혔다. 종인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씨 가문은 경수의 지난 생일을 축하하겠답시고 수레에 고급 비단 을 실어 보냈을 때 황제와 아들의 관계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라고 일부러 떠들썩하게 어전시위인 청 신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래도 경수의 부모, 특히 어린 동생의 죽음으로 이미 심신이 지쳐 있던 모친은 일련의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종인마저 지난해부터 꼬리를 물고 터진 사건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 는데 병들고 나이든 여인이야 오죽할까. 하지만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해도 아들이 유배지에서 풀려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면 갑자기 숨 이 끊어질 이유도 없어 보였다. 도성에 역병은 돌지 않았다. 모친에게 지독한 지병이 있었는지는 모르 겠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면 필시 경수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온통 부고뿐이구나. 종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도씨 가문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여 상태를 살피고 도울 것이 있으면 돕고 싶었다. 그런 데 급작스러운 초상이 나 참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모친상에 타지에서 고생하는 경수가 얼마나 참담해질지 걱정이었다. 아내가 급살을 맞는 바람에 도명정도 정신이 없더군요. 장사는 잘 치렀지만 큰아들은 외지에서 귀 양 중이고 막내아들은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참이라. 그 가문에 부족함이 없도록 네가 살펴라.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조심하고. 예. 헌데 폐하. 윤씨 부인이 죽기 며칠 전, 한 남자가 찾아와 해괴한 말을 전하고 갔다고 합니다. 해괴한 말이라니? 변 공자는 도경수가 한서현으로 옮긴 후 참회하며 잘 지낸다고 했는데, 도가( 家 )를 찾은 남자는 도 경수가 경성현에서 봄을 못 넘기고 죽었다고 했답니다. 종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던졌다. 파열음을 내며 고급 다기가 돌바닥에서 산산이 조각났다. 그 아이가 죽었다면 짐에게 가장 먼저 소식이 닿았을 터! 대체 누가 그딴 망발을 지껄였단 것이 냐? 고정하십시오, 폐하! 고얀.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이냐? 관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명정도 의심하지 않았고요. 생김새는? 도명정이 설명한 것과 일치하는 자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조정에 드나드는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 다. 그자의 말을 듣자마자 윤씨 부인은 그대로 혼절하였답니다. 그렇게 며칠을 내리 앓다가 무더위까 지 덮쳐 급사한 것으로 파악되옵니다. 종인은 씨근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박찬열을 건드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무 힘도 없는 도경수의 집안까지 끌어들였어. 대체 이렇게 까지 해서 저들이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폐하, 고정하소서! 김종인은 이미 껍데기만 뒤집어쓴 꼭두각시다. 기회를 엿보고 있긴 하나 여태 저들의 입맛대로 다 들어주지 않았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 끝끝내 손발을 자르려고 발악하니 오기가 생겨 더욱 독을 품게 한다. 그가 자신궁 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불현듯 머리를 스친 생각에 종인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태양이 꽃에 햇볕을 내리지 아니하니 특단의 조치라도 내린 것인가. 태양더러 과거의 연을 끊으라, 감히 그리 말하는가.

301 황태후는 도경수와 자신의 관계를 눈치챘다. 경수를 내치라는 그녀의 말에 발끈해서 패악을 부리고 나왔으니 눈치 빠른 그녀가 그냥 넘어갔으리라는 것은 순진한 기대였다. 황실 번창은 황제의 의무 중 하나. 수많은 여인이 후궁에 들어찬 것도 그 때문이다. 누가 되었든 빨 리 황제와 시침하여 황손을 잉태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뜻에 맞게 세뇌하고 양육할 수 있으니까. 태후의 목적은 그것이리라. 태후는 왜 이다지 자신과 도경수 사이를 못 갈라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단순히 조정을 갈아엎으려 던 계획에 도경수가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유언비어를 퍼뜨려 도경수의 모친까지 죽게 하지는 않았을 터. 어쩌면 태후가 꾸민 짓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은 자신궁 외에 의심할 만한 곳이 없었다. 넌 지금 당장 새로 들인 어의를 불러오라. 송 어의 말씀이십니까?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은밀히 데려와야 할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짐의 몸이 안 좋다고 하라. 예? 예, 폐하. 주인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개는 서둘러 내의원으로 향했다. 죄인은 어명이 있기 전에는 유배지를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죽는다 해 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것도 모자라 연로한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상주로 내세워 장을 치 르게 했으니 경수는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갈래갈래 찢어졌다. 월란이 죽었을 때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 자신의 무능함에 치가 떨렸다. 그런데 찬열에 이어 어 머니까지 이리 허무하게 보내자 경수는 금방이라도 생명이 꺼질 것처럼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 다. 이러나저러나 일의 원흉은 따로 있다. 애초에 찬열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자신이 유배지로 끌 려올 일도 없었고, 어머니의 임종조차 못 지키는 천하의 불효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걸 생각하 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던 원망과 복수심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김종인이다. 시작하지 않으려 몸을 사릴 때 그냥 내버려 뒀더라면 종인과 자신은 무던한 관계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찬열이 같은 방법으로 찍혀 나갔다 하더라 도 종인을 연모하진 않았을 테니 원망도 깊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모든 가정은 무의미함을 알기에 경수는 목 놓아 울지도, 하늘을 향해 욕지기를 내뱉지도 않 았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는 어둠을 끌어안은 채 더욱 깊어졌고 마음의 빗장은 더욱 굳세게 걸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무심한 구름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것은 경성현에서부터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지금 이 상태로는 그가 원하는 그 어떠 한 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이슬은 오늘 밤부터 하얗게 내리는데 이 달은 고향에서도 휘영청 밝으리. * 선선한 밤기운에 달은 요요롭게 떴다. 어디에 있든 달은 모양새가 똑같은데 타향에서 발이 묶인 채 보는 달은 하염없는 탄식만을 자아냈다. 저 달을 어머니께서 참으로 좋아하셨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도 어머니와 함께 달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참다못한 긴긴 슬픔이 끝없이 내렸다. 백현은 어사대 감찰어사( 監 察 御 史 ) ** 에 제수되었다. 갓 조정에 발을 들인 신인을 그 자리에 앉히는 * 두보, 달밤에 아우를 떠올리며( 月 夜 憶 舍 弟 ) 중 ** 종육품

302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보통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가 학식과 행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천거하는 자리였다. 종인이 백현을 감찰로 삼은 것은 금선공주와 사촌에 대한 애틋함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신진의 신 선한 눈으로 조정을 제대로 단속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중신들이 난색을 드러냈다. 부마가 팽형으로 죽어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는 것이다. 아무리 태후가 관직 진출을 보장했다고는 하나 내탕고를 사적으로 융통한 부마이니, 그 자 식인 변백현도 출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현은 이것은 자신이 부딪쳐야 할 문제라며 종인을 안심시켰다. 그는 남을 무장 해제하게 하는 재 주가 있었다. 더구나 관리가 되면 허참례, 중일연, 면신례로 선진들을 후하게 대접해야 했으니 이 기 회만 잘 노리면 어사대에서 사랑받는 신래가 될 수 있었다. 첫 삼 개월이 중요하다. 실무를 배움과 동시에 조정의 흐름을 익히는 귀한 시간이었으므로 백현은 절대 한눈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서현에 다녀오기로 했다. 과거에 붙으면 유가라고 하여 삼 일간 휴가를 얻어 친인척을 방문하거나 고향에서 잔치를 벌이는 풍습이 있었다. 백현은 어머 니와 일가친척을 두루 방문하며 급제의 기쁨을 나누었다. 종인은 박태흥에게 인사해야 한다는 백현의 부탁에 며칠 더 말미를 주었다. 합격 발표가 늦어져 이 제야 말고삐를 쥐게 되었으니 한서로 향하는 말발굽이 돌풍처럼 격렬하고 숨 가빴다. 한서 관아에서는 이미 잔치판이 벌어졌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어사화를 들고 나타날 백현을 기다리 느라 백성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상황이었다. 고향 사람도 아닌데 참으로 유별났다. 백현은 그 남우세 스러운 광경이 싫어서 밤이슬을 맞고 돌아왔다. 백현은 스승을 뵙자마자 경수를 찾았다.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도성에 온 김에 찬열의 부모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던 중 우연히 경수의 집을 알게 되었고 그 모친이 중추절 전에 죽었다고 해서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긴 했으나 뒤늦게 귀양살이로 심신이 지쳤을 경수에게 괜한 시름을 얹은 것은 아닌지 후회했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언제고 경수가 알게 될 사실이었다.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와는 달리 경수는 홀로 화단에서 정원수를 다듬는 중이었다. 종옥 말로는 부 고를 접한 사람치고는 담담하게 제 할 일만 한다는데 그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저는 사람이 아닌 줄 아십니까?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소름 끼칠 만큼 희고 단정한 모습으로 일에 열중하는 도경수. 아니야. 그대에게는 분노와 슬픔밖에 남지 않았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백현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렸다. 그는 보폭 넓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경수의 손목을 확 낚아채서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손목을 잡은 자신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많은 힘이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이거 놓으십시오! 나리! 한적한 회랑 아래서 경수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백현이 그제야 잡았던 손목을 놓고 돌아섰다.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소?! 어찌 그리 담담한 표정으로 일만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대는 정녕 마음 이 없는 야차라도 되오?! 버럭 내지르는 고함에 경수가 움찔했다. 나리의 소식으로 모두가 기쁨에 겨운 때입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나드 는 사람이 많으니 자중하십시오. 내 서찰을 못 받은 거요? 받았습니다. 모친상을 당한 사람의 얼굴이요, 그것이? 상중( 喪 中 )인 사람이 따로 지어야 할 표정이라는 것도 있습니까? 백현은 기가 막혔다. 도경수의 심지가 굳었는지 감정이 메말랐는지 헷갈렸다. 나리께선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으시나 봅니다.

303 죄인은 슬퍼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소?! 다 똑같은 사람이요! 그리고 그대가 결백하다는 것은 그 대 자신이 잘 알지 않소? 말끝마다 죄인이라고 스스로 옭아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오! 말 한번 잘 꺼냈다는 듯 경수가 세게 받아쳤다. 그럼 울고불고 난리라도 피워야 합니까?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키고 연로하신 아버지 혼자 상을 치르게 했다며 지독한 자괴감에 빠져 있길 바라시나요? 마음을 죽이지 말라는 뜻이오! 나리의 악의 없는 그 위로가 더욱 상처가 된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뭐요? 가까스로 버티고 있습니다. 헌데 왜 자꾸 들쑤십니까? 상처 난 곳에 소금이라도 뿌리려고요? 나는 다만! 적어도 지금은, 마음이 사치라는 뜻입니다. 수렁에 빠진 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그것이요! 맹수는 사냥할 때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다. 차분하게 기회를 노리고 단번에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 어 숨통을 끊는다. 맹수에게 감정이란 사족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에 기대어 상처를 받았으니 그것이 부질없음을 더욱 현실적으로 깨달은 것뿐이다. 백현은 냉정하던 자신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경수에게 상처준 것에 반성했다. 쥐면 꺼질까, 불 면 날아갈까 소중하게 대해도 모자라다. 그는 착잡하게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애써 외면했던 것이 상기되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현실을 직시하라면서요?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라면서요? 나리의 충고를 뼈에 새기고 실천 중입니다. 헌데 왜 저를 비참하게 하십니까? 어째서 조용한 나무를 흔들려고 하십니까! 회랑 난간에 털썩 앉으며 백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는 내내 괜한 소식을 전한 것은 아닌가 싶어 후회했소. 그대의 부친이 어떤 식으로든 소식을 전 했을 텐데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닌지. 온통 그대 걱정만 했소.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잠겨 있을 줄 알았거든. 그 대는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닌데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소. 항상 남들 머리 꼭대기에서 놀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타인의 호감을 샀고 그들에게서 원하 는 것을 수월하게 얻기도 했다. 그래서 백현은 매사에 자신만만했고 어떤 상황이라도 원하는 분위기 로 몰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도경수와 가까워지고 나서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우울해졌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차 싶을 때 흰 종이로 쏟아진 먹물처럼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되어 버렸다. 온통 얼룩덜룩한 잔흔이다. 미안하오. 한참 만에 진정한 경수가 조용히 대꾸했다. 송구합니다. 좋은 날에 언성을 높였습니다. 내가 세심한 성격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는 데 이렇게나 서툴다오. 가장 괴로운 사람은 그대 인데 내 기분만 생각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소. 악의로 그러신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난 그대가 시름에 젖는 것이 싫소. 경수는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꽃향기처럼 마음을 내비치는 백현이 새삼스러웠다. 교안으로 떠나 기 전에도 그러더니 돌아오자마자 이러니 당황스러웠다. 나리께서는 참으로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따뜻하시니 필시 백성을 위한 좋은 관리가 되실 것입니다. 훗날엔 만고에 이름을 떨칠 충 신이 되시겠지요. 믿음에 대한 대가가 현재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니 빗장을 여는 일은 두 번 다신 없으리라.

304 제대로 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방패부터 꺼내드는군. 쌉싸래한 입맛을 다시며 백현은 미간을 구겼다. 그대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지금보다 더 많이 웃고 지금보다 더 행복하길 바라 는 것은 요구가 아니라 그대의 당연한 권리니까. 괴로움은 끌어안고 있어 봐야 자신을 잡아먹는 괴물이 될 뿐이오.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대 자신을 위해 이 슬픔과 난관을 이겨내야 하오. 노력해 주겠소? 이미 밑바닥을 보았는데 여기서 더 나빠질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 쓸쓸하게 얘기하지 마시오. 어쩐지 안아버리고 싶다는 뒷말은 덧붙이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 마음 이라는 것이 사치가 아닌 선물이 되는 날이 올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야차가 아닌 사람임을 늘 염두에 두시구려. 축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급제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또 말 돌리기인가. 백현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힘이었겠소? 절륜한 실력을 가지셨으니 제가 없었더라도 능히 입격하셨겠지요. 지나친 겸손은 도리어 오만으로 보이는 법이라오. 살며시 던지는 농담에도 경수는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긴장이 풀린 탓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라고 말하 는 이가 변백현뿐이라 그런 것인가. 안색이 몹시 안 좋구려. 그동안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라 하였는데. 날이 덥습니다. 그래서요. 경수의 얼굴엔 핏기가 전혀 없었다. 하얀 비단으로 전신을 감은 듯 창백하기만 했다. 부모의 죽음으 로 큰 충격을 받은 탓이리라. 아무리 강인한 척해도 도경수는 감정을 지닌 사람이다. 피붙이가 급살을 맞았는데 임종은커녕 상조 차 치르지 못했으니 심정이 오죽할까 싶다. 기껍지 않다는 것을 아오.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처소에 있으시오. 송구합니다. 그대가 잘못한 일이 아니니 사과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사과는 남에게 지대한 폐를 끼쳤을 때나 하는 거요. 그대는 내게 잘못한 게 없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소. 백현이 자리를 털며 손을 내밀었다. 처소로 데려다주리다. 괜찮습니다. 나리께서 먼저 돌아가 쉬십시오. 날 먼저 보내고 혼자 잡일에 몰두하고 있을 게 뻔해. 아닙니다. 이번엔 얌전히, 안아서 모셔다 드릴까? 고압적으로 지껄인 백현. 황당해서 대답도 못하는 경수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또 제멋대로 끌고 가 버린다. 경수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백현의 연정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잠겨 죽을 것만 같았다. 54. 유광( 流 光 ) 비가 내렸다. 처마 끝에서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법 컸다. 화원에 흐드러지게 폈던 함소꽃과 금앵자가 흰빛을 잃어갈 시기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귀뚜라미 와 풀벌레가 일찌감치 자신들의 목청을 뽐냈다. 그것은 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황궁의 유일한 떠들썩

305 함이었다. 종인은 빗소리에 깊게 잠들지 못했다. 장마철도 아닌데 연이어 내리는 비에 조금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비 내리는 날을 싫어했다. 그걸 알 리 없는 후궁은 지아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옅은 숨을 내쉬며 잠을 청했다. 종인은 이제 막 자신의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기 시작한 후궁을 저만치 밀어내고는 조용히 처소를 나왔다. 세상모르고 잠든 그녀는 종종 황제가 이런 식으로 떠나는 것을 싫어했지만, 둔감해서 끝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침의 위에 두툼한 외투를 걸치며 처소 문을 확 열어젖혔다. 궁녀들이 바닥에 엎드렸고 하개가 언제 나처럼 기다리고 있다. 종인은 정사로 더러워진 몸을 얼른 씻어버리고 싶었다. 그가 미간을 잔뜩 구겼 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하개에게 뭔가를 명한 뒤 서둘러 태성전으로 돌아갔다. 경수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삼 년째다. 세 번의 가을이 찾아온 동안 종인은 그 나름대로 아등바등 하고 있었다. 우선 오래도록 비었던 현수궁의 주인이 정해졌다. 그녀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명문가 출신에 정숙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태후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그래 봐야 오촌 내였던 것 같은데 가문에 대해 뻐기는 것은 없었으나 태후에게 맞서는 인물도 아니었다. 황후는 어느덧 스무 명 가까이 되는 후궁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 크게 휘둘리지 않고 사소한 분쟁이 있으면 그녀만의 지혜로 위기를 잘 넘겼다. 종인에게 아양을 떨거나 곰살궂게 나 오지도 않았다. 자애롭고 엄한, 그야말로 황후 라는 지위를 위해 태어난 여인 같았다. 그녀 아래로 두 명의 비와 네 명의 빈, 세 명의 귀인, 네 명의 미인( 美 人 ) * 등이 후궁을 메우고 있 었다. 내명부 품계 중 최하위인 봉의까지 합쳐 총 열여덟 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모두 입 궁한 지 세 해가 지나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정궁도 마찬가지여서 태후는 후손을 잉태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후는 적손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황후에게 은밀한 방중술과 회임에 좋다는 약, 비방 등을 알려주었다. 효험은 없었다. 그러자 황제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생겨났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씨 를 생산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내의원에서 황제의 옥체는 지극히 건강하다고 못을 박 는 바람에 황궁의 근심은 날로 쌓여만 갔다. 약을 가져다주었느냐. 몸을 씻고 침전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서책을 펴며 종인은 물었다. 예. 매번 빠짐없이 마시게 하고 있사옵니다. 짐이 보는 앞에서 마시면 좀 좋으련만. 명빈마마는 잠이 많으시니까요. 그러다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지. 넌 짐을 말리지 않는 것이냐. 종인이 다음 장으로 넘기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폐하를 해하는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군소리 없이 할 것이옵니다. 사직을 망치는 일인데도? 폐하께서 다 뜻이 있어 행하시는 것을, 일개 내관이 말려서 무엇하겠나이까. 군주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행할 때는 목숨을 걸고 간쟁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니라. 하오면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말리겠사옵니다. 허! 농담 한 번 한 것을. 종인이 피식 웃었다. 빗소리가 무겁구나. * 내명부 품계. 정육품

306 완연한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대 유독 생각나는 이 가을밤에, 홀로 산책하며 삽상한 하늘 노래하네. 텅 빈 산속 솔방울 떨어지 는 소리에, 그대도 아마 잠 못 이루겠지. * 점점 추워질 텐데 그곳은 괜찮을까. 책 모서리를 하도 짓이겨서 둥글게 말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또 손가락으로 지분거린다. 경성현에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한서현이라고 다르겠는가.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조정에 올라오는 상소가 심상치 않더구나. 짐이 그렇게 엎드렸는데도 여전히 미련을 떨치지 못했어. 폐하께선 지난 삼 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적들의 기세가 등등하다고는 하 나 폐하를 믿고 따르는 자들도 많지요. 하늘은 반드시 폐하를 도울 것입니다. 짐은 하늘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인간의 일일 뿐이지. 냉소적으로 내뱉은 후 종인은 피곤하다며 잠자리에 드러누웠다. 하개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조 심스레 촛불을 끄고 뒷걸음질로 침소를 나갔다. 종인은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빗소리에, 끔찍하게 상처를 주고 떠나보낸 경수와의 마지막 밤이 생각났다. 폐하. 요즘 지방 유림들을 중심으로 해괴한 움직임이 있다는 밀고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내막은 대충 파악하고 있소. 추가적인 것이 또 보고되었소? 장문견은 입을 다문 채 거만하게 황세용을 쳐다봤다. 황세용이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전 한서현령 박태흥이 관직에서 물러나 유림들을 가르칠 정사( 亭 舍 )를 차렸는데 그의 사상이 심히 불순하여 불만을 품은 자가 한둘이 아니라 합니다. 사상이라면? 황세용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종인이 얼른 답하라며 재촉했다. 그것이. 황실에 여태 적손이 태어나지 못하는 것은 천견이고 그것은 모두 폐하의 부덕함 탓이라 하였습니 다. 진짜 주인이 아닌 자가 보위를 차지하고 있다고요. 장문견이 재빨리 말을 보탰다. 종인이 팔걸이를 꽉 붙들었다. 진짜 주인이 아닌 자가 보위를 차지하고 있다? 예. 본래 박태흥은 소왕 전하를 지지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당시 소왕이 폐서인으로 쫓겨날 적에 도 한동안 입방아를 찧어 선제의 미움을 받았지요. 새삼스레 그때 일을 들먹임이 아니고서야 무엇이 겠습니까? 무정후가 말하는 그때의 일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오? 종인이 짐짓 불쾌하다는 듯 되물었다. 폐태자인 소왕이 선제의 뒤를 이었어야 했다는 것이겠지요. 박태흥은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자입니다. 하여 십 년도 더 지난 일을 인제 와 제자들을 앞에 두고 거침없이 거론한다는 것이오? 진의야 박태흥만이 알 것이오나 그자가 지방 유생들 사이에서 명망과 혹평을 동시에 얻는 것도 사 실입니다. 더구나 그자 곁에는 전 사관 도경수가 있으니 이들의 만남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자는, 재미있군. 말허리를 자르며 종인이 차갑게 웃었다. 장문견이 낯빛이 어두워져 종인을 올려다봤다. 하나같이 짐의 뒤통수만 노리고 있어. * 위응물, 추야기구이십이원외( 秋 夜 寄 丘 二 十 二 員 外 )

307 폐하. 박태흥은 고견이 높고 선제의 총애를 받은 신하요. 짐도 그자를 오래 쓰고 싶어 관직에서 물러나 겠다는 것을 억지로 붙들어 한서현령으로 제수했소. 헌데 이제는 짐의 등에 칼을 꽂는 발언으로 제자 들을 현혹한다? 또 도경수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로서는 그것이 너무도 불쾌하고 언짢았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냈을지언정 역적과 같은 발언이라 그냥 넘길 순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며, 무턱대고 일을 덮으려 했다가 찬열을 잃지 않았던가. 장문견이 경수의 이름을 입에 담은 이상, 이 전쟁을 피할 순 없었다. 하오나 박태흥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박태흥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한 것 아닙니까? 소인파에서 반박했다. 그러니 더욱 문제지요.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자가 망언을 밥 먹듯이 하는데 어찌 그냥 넘기겠 소? 작은 일도 명암을 깨끗이 가려야 합니다. 하물며 대연의 강산이 달린 일인데 이대로 덮자는 것이 오? 한서현에서 교안까지 오가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체할수록 위험해지니 서둘러 박태흥을 소환 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인파에서 거세게 나왔다. 저들에게 박태흥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텐데 왜 갑자기 그를 물고 늘 어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혹 박태흥은 연막이고 그와 함께 있는 도경수를 노림인가. 종인이 미간을 구겼다. 경들의 뜻은 잘 알았소. 허나 사안이 무거우니 짐은 더 신중해지고 싶소. 누군가 퍼뜨린 유언비어 일 수도 있는 것 아니오? 하오나 역모와 관련한 일이라면 한시도 미룰 수 없사옵니다. 그가 공공연하게 역심을 드러냈다면 모를까, 고작 몇 마디 내뱉은 쓴소리가 와전된 것일 수도 있 으니 조금 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오. 허나 이 일은 사안이 극히 무겁습니다! 그만. 짐의 뜻은 분명히 전하였소. 더는, 경거망동 하지 않을 것이오.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기고 종인은 먼저 편전을 빠져 나갔다. 중신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리. 밤이 깊었으니 그만 쉬시지요. 오, 벌써 시각이 이렇게 되었나? 자네가 내 수발을 드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군. 별말씀을. 나리 덕분에 귀양다리 주제에 호강하고 사는 것을요. 하하하! 처음 봤을 땐 바짝 얼어 있었는데 이젠 별스런 농까지 던지는군. 경수는 쑥스럽게 낯빛을 붉혔다. 그는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진 책과 종이를 수습하여 한쪽에 잘 정리한 후 박태흥에게 공손히 인사 하고 나왔다. 때마침 한서현에도 교안처럼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뜰에는 파초가 가득했다. 새파란 잎을 뽐내던 그것은 파르르 떨며 빗물을 온몸으로 머금었다. 부슬부슬 쏟아지는 가랑비와 석등이 만들어내는 주홍색 불빛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경수는 커다란 들창 앞에 앉아 창틀에 턱을 괴고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이청조의 시 파 초가 생각나니 한밤중 쏟아지는 비에 상심하여 수심만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교안을 떠난 지 벌써 삼 년이 됐다.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하지만 타지에서 맞는 세 번째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하고 고독했다. 경수는 관청 일을 관두고 박태흥을 보수주인으로 삼았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고, 아내와 평온한 여생을 보내길 바랐다.

308 박태흥은 일 년 전부터 사가에 정사를 놓았다. 그런데 수시로 문객을 받는지라 살림이 넉넉하지 않 았다. 가난한 선비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글을 가르치고, 더러는 비싼 문방사우와 끼니까지 대접하니 박태흥의 가세는 날로 곤궁해졌다. 남아 있던 노비들도 푼돈을 얹어 다른 곳으로 보낸 지 두 달이 되어 갔다. 그나마 삼월이만은 곁에 서 노부부의 수발을 도왔는데 그것은 순전히 박태흥을 찾아오는 백현 때문이었다. 드물게 눈길 한 번, 말 한마디를 섞으면 삼월은 혼기를 넘기고도 몸을 배꼬며 수줍어했다. 박태흥의 아내는 늘그막에 고생하는 것이 싫은 눈치였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금선공주가 못난 아들을 잘 가르쳤다며 매달 좋은 옷감과 식량 등을 보내 입에 풀칠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경수는 집안일을 거들었고 낮에는 박태흥을 도와 어린 선비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열 살 을 갓 넘긴 꼬마도 있었는데 그 아이를 보면 헤어진 연수가 생각나곤 했다. 이런저런 걱정에 몸은 한 결 편해도 마음은 여전히 삭풍에 매질을 당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도 희소식이 있었다. 백현이 수소문하여 종옥의 남편을 찾아낸 것이다. 수시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느라 떠돌이 신세나 다름없다던 그는 뜻밖에도 대단한 신분이었다. 바로 의귀비의 친 오라 비이자 소왕의 외숙인 이재관이었다. 이재관은 소왕이 황태자이던 시절에도 이십 대의 앞길 창창한 귀재로 유명했다. 하지만 어린 조카 가 폐위되어 순금사에 갇히자 자연히 대인파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손위누이인 이씨를 대신해 조카인 준면의 결백을 주장하고 다니다가 머나먼 유배 길에 올랐 다. 그 세월이 십여 년에 달하였으니 스물아홉의 청년은 어느새 마흔을 넘긴 장년이 되었다. 그는 오랜 유배로 식솔들에게 버림받았다. 처가에서 강제로 의절당한 후 피폐해진 몸으로 종옥을 만났고 그녀와 정분을 나누었다. 그렇게 종옥은 무명을 배태했지만 이재관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다시 적소를 옮겨 떠났다. 그것이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그래도 만날 사람은 만나는 법. 삼 년 전 유배형이 끝난 이재관은 종옥과 함께 교안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도성에서 조용히 살았다. 한서현을 떠나던 밤, 종옥은 경수와 백현에게 큰절을 올리며 울었다. 호도처럼 퉁퉁 부은 그녀의 눈 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무명이도 새 이름을 얻었고 이제는 곧잘 말도 한다며 백현이 종종 시시콜콜한 소식을 들려주었다. 경수는 종옥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준 백현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백현에게 고마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안에서 생활했지만 몇 달에 한 번씩 시간을 내 한서현에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도성에서 벌어진 재미난 사건을 알려주거나 진기한 물건을 가져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아버지와 어린 아우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윤씨가 죽은 후 도명정은 몹시 지쳐 버렸다. 한동안 경수가 외지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 심장이 썩어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수를 책임지려면 힘을 내야 했다. 그는 요즘 남의 집에서 날품을 팔고 작은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팔아 근근하게 살림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백현이 재물을 베풀고자 했으나 도명정은 마음만 받겠다고 거절했다. 정히 도움을 주고 싶으면 종종 와서 연수의 글공부나 봐 달라며 말이다. 다른 것보다 가족 소식을 들려주었을 때 경수의 눈동자는 반짝 빛을 발했다. 백현에게 수차례 큰 신세를 져서 경수는 그를 볼 낯이 없었다. 왜 매번 남에게 신세만 지고 사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는 그에게 백현은 다정하게 얘기했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오.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하는 철면피가 많은데 그대는 매번 몸 둘 바를 모르니 도리어 내가 민망하오. 정 미안하거든 하루빨리 도성으로 올라와 맛 좋은 술이나 사시오. 털털한 그 성격에 경수도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현실은 바뀐 것이 없고 찬열만 생각하면 화마에 온몸이 지져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미련스럽게도 불쑥 튀어나오는 종인과의 행복했던 한때도 그를 움 츠러들게 했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작은 방에 몸을 뉘였다. 들창 밖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제법 컸 다. 삼 년 전 여름 밤, 백현이 연주했던 이름 모를 거문고 가락과 비슷했다. 경수는 눈을 붙였다. 꿈에서 오랜만에 집을 보았다.

309 영회황후께서는 흰 피부에 화장은 거의 안 하셨고 녹색이나 청색 옷을 즐겨 입으셨다 들었습니다. 황후마마의 연청색 옷을 칭찬하신 것은 영회황후가 그리우신 탓인지요? 그건 하늘하늘하게 흩날리는 치마가 황후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영회황후와 비슷한 옷을 입으셔서 칭찬하신 것이 아니시고요? 보여와 지금의 황후는 다르다. 종인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수의( 修 儀 ) * 강씨가 까르르 웃으며 종인의 입에 달콤한 포도를 가져다 댔다. 종인은 한숨을 삼키며 손으로 그것을 받아 굴렸다. 수의 강씨는 경성현령의 외동딸, 춘영이었다. 경수가 유배 생활을 시작한 곳이 경성이었던지라 종인 은 그 연결고리만으로 춘영에게 잘해 주었다. 경수를 생각하면 애틋함에 심장이 지끈거렸지만 쉴 새 없이 떠드는 춘영 때문에 생각할 겨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춘영은 제법 예쁘장했다. 그러나 생각이 깊지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걸 좋아해 마찰의 중심에 자주 서는 편이었다. 황후가 그녀를 어르고 달래 궁중 비빈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을 것이다. 종인은 다른 후궁들이 춘영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별달리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 려 귀엽다고 감쌌다. 백치든 고약한 성질머리든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 후궁이 시끄러우면 그걸 핑 계로 태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짐이 주는 탕약은 꼬박꼬박 먹고 있느냐. 아차! 폐하와 얘기하는 것이 기뻐서 그만. 얘, 순화야! 얼른 탕약을 내오너라! 몸종이었던 순화는 궁녀가 되어 춘영의 수발을 들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따뜻한 약사발을 들고 왔다. 춘영이 칭찬받고 싶어서 보란 듯이 약을 마셨다. 그리고는 쓰다며 앙탈을 부렸다. 종인은 빛이라고 는 조금도 들지 않은 눈으로 춘영을 바라보았다. 춘영의 구겨진 미간이 더욱 뒤틀렸다. 그는 할 수 없 이 강정 하나를 집어 춘영의 입에 물려주었다. 폐하께서 신첩들의 건강을 위해 항상 살뜰히 약을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자를 낳으려면 어미의 몸이 기름져야 한다. 그러니 거르지 말고 매일 마시도록. 그럼 오늘은 이곳에 머무실 건가요? 아니라면 무엇하러 이 시각에 여기까지 왔겠느냐. 춘영이 얼굴을 붉혔다. 명빈마마처럼 중간에 몰래 나가시면 아니 됩니다. 신첩은 폐하보다 먼저 일어나 조정에 나가시도 록 도울 것입니다. 답하지 않은 채 종인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서책을 펼쳤다. 초장에 서책 읽을 때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고 해 두었다. 그러면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지저귀는 춘영도 한동안 얌전히 있 어 주었다. 그는 자정이 넘도록 서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춘영이 지쳐 잠들자 종인은 비로소 책을 덮고 춘영의 처소를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하개가 직접 등불을 밝혀주며 태성전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문득 하늘에 뜬 가을의 달이 무척 밝아 보였다. 종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경수의 얼굴만큼이나 둥그스름하고 깨끗한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움에 꿈속에서 임에게 가니 회랑에 비스듬한 난간이 있었네. 꿈을 깨니 마당에는 달빛이 환하 고 이별하는 사람 위해 지는 꽃을 비추네. ** 깊은 상념에 젖을 새도 없이 종인은 발길을 돌렸다. 그리움에 잠식당할수록 현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조정이 시끄러웠다. 내일 아침에 결판을 낼 작정들을 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답변을 내 * 내명부 품계. 정칠품 ** 장필, 기인( 寄 人 )

310 놓아야 한다. 체력을 아껴야 했다. 55. 재회( 再 會 ) 대인파에서 박태흥을 잡아들여 국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문견과 황세용이 각각 문무의 권 신들을 움직이니 사태를 진정시킬 방법이 묘연했다. 여기에 옳다구나 싶어 도경수까지 엮어대는 터라 종인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용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삼 년 동안 죽은 듯 엎드려 지내며 물밑으로 은밀히 행한 것들이 많았다. 현수궁을 비롯해 내명부 를 대인파의 여식들로 채워 태후의 눈을 가리고 대인파에게 적절하게 권력을 몰아주면서 소인파와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황제 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종인 이 가장 원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박찬열의 누명을 벗기는 것과 도경수의 복귀. 전자는 사안이 워낙 무거우니 시간이 더 흐르더 라도 상관없다. 문제는 후자다. 역적과 오래 사귀었으며 자신에게 불손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냈으니 불러들이는 것도 종인의 마 음이다. 다만 태후가 먼저 경수에게 손을 대려 했고 그 경계심이 여태 누그러지지 않아 시기와 기회 를 엿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삼 년이나 흘러버릴 줄은 몰랐다. 처음엔 일 년 동안 외지로 빼돌렸다가 도성이 잠잠해지면 다시 부르려고 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겹겹이 쌓인 그리움만 늘인 꼴이 되 고 말았다. 경수의 모친이 수상한 자의 오보를 듣고 급사하였고 도경수도 이 사실을 알았을 터. 대체 도경수의 어느 부분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끝까지 그를 물고 늘어지는지 알 수 없으나 종인도 참을 만큼 참았다. 박태흥과 엮어 제거하려는 것으로 보아 사관으로 천거한 그가 실은 황제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끔찍 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종인은 태후의 끈질긴 집념에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다시금 반역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웃고 넘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박태흥과 도경수를 교안으로 압송하라. 짐이 친국할 것이다.] 전령이 교지를 들고 바람을 가르며 한서현으로 달려갔다. 백현은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그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어사대 동료들이 가만히 좀 있으라며 타박을 놓았다. 백현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뭔가 결심한 듯 황급 히 밖으로 나갔다. 마침 홍만립이 안으로 들어오며 백현을 막았다. 그는 올봄에 예문관을 떠나 어사대의 감찰어사로 제수되어 백현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거 놓으시게! 자네가 간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나? 찬열을 잡아먹은 데 이어 끝끝내 경수마저 죽이려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다. 드러내진 않았어도 여전히 도경수를 그리워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그 사람마저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여야만 속이 시 원하겠느냐고. 하지만 백현은 종인이 그리 경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를 만나고 싶은 것은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자중하시게. 자네가 이래서야 쓰나? 내가 지금 자중하게 생겼나? 당장 비키시게! 보는 눈이 많네.

311 홍만립은 단호했다. 그는 백현이 유배 떠난 경수를 돌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현도 홍만립이 경수의 사관 선진이었으며 그와 가깝게 지냈다고 들었다. 둘은 가치관도 제법 맞는 편이었고 도경수라는 공통분모 가 있어 금세 가까워졌다. 내 스승님께서 간신적자들의 참소로 역적으로 몰리셨네. 헌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란 것인가? 궁엔 엄연히 황제 폐하께서 계시네. 그분은 지존이시니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 허나 자네는 일개 어사대 감찰일 뿐이야. 그럼 이대로 스승님과 지기가 역당으로 몰려 죽는 걸 구경할까? 씩씩대는 백현을 진정시키며 홍만립이 궁벽한 곳으로 그를 끌고 갔다. 날 말릴 생각은 하지 말게. 가서 폐하께 폐하의 귀를 현혹하는 자들을 멀리 하라고 아뢸 것이네. 지금 가장 괴로운 사람이 누구일 것 같나? 날카로운 물음에 백현이 홍만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박태흥 나리는 폐하께서 당색을 떠나 아끼는 사람 중 한 분이시네. 오죽하면 낙향하시겠다는 분을 붙들어 현령으로 만드셨겠나? 또 도경수는 폐하께서 혈육처럼 여긴 박찬열의 벗일세. 그뿐인가? 오래도록 침전에 들락날락하던 사관이었어. 깊은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정이 드셨을지도 모르네. 그런데 그 둘이 반역을 꾀 한단 소문을 들으셨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황당하시겠나? 모두 거짓일세! 그것은 폐하께서 판단하실 일이네. 박찬열이 찍혀 나간 것이 어디 그에게 죄가 있어서였겠나? 의미심장한 발언에 백현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홍만립은 백현처럼 매사 심드렁하고 냉소적이었지 만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직관은 뛰어났다. 자네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사람이야. 또 올가을만 지나면 승차할 텐데 공연한 시비로 스스로 앞길 을 망치지 말게. 백현은 허탈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박찬열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아무것도 못 하고 울부짖었을 도경수의 심정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가 그렇게 세상일에 해탈한 것도, 어떤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 계속 자신을 낮추며 경계하던 것도. 아마 가까운 사람이 해를 당하는데도 자신은 도움 되지 못한다는 박탈감과 무력감을 뼈저리게 맛본 탓이리라. 더 큰 그림을 보시게. 모두 폐하와 폐하께서 아끼시는 자네를 주목하고 있음이야. 백현의 잇새로 낮은 욕지기가 터졌다. 박태흥에게 추포장이 내려왔다. 그가 은퇴한 후 제자를 가르치며 황실을 모독하고 성상을 인정하지 않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반역이라는 말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모두 박태흥이 역 당으로 몰려 잡혀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인 전씨가 오라를 받고 함거에 오른 남편을 붙들고 오열했다. 박태흥은 별다른 저항 없이 함거에 올랐다. 관리들은 지체 없이 수레를 앞뒤에서 보호하며 길을 잡았다. 덜그럭거리며 거칠게 나 아가는 함거는 모두 두 대였다. 뒤에는 경수가 타 있었다. 경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휘몰아치듯이 군사들에게 끌려갔고 정신을 차리 고 보니 초라한 수레 안이었다. 그는 가는 동안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간신들의 황제의 귀밑에다 새살거렸을 말이 무엇인지 짐 작되었다. 왜 자신까지 엮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박태흥 밑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한꺼번에 치려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체 도성과 단절되었던 지난 삼 년간 김종인과 그 주변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백현이 이따금 물어다 주는 소식만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궁금증이 있었다.

312 어쨌든 김종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면 설령 세상에 하나뿐인 벗이 라 해도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친형제도 못 믿어 툭 하면 의심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교지에 나열된 죄목만으로도 노발대발했을 그 얼굴이 훤하였다. 함거의 두꺼운 창살 밖으로 시린 바람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푸른 옷을 벗어던진 산등성이와 한층 더 깊어진 강물을 봐도 전혀 감흥이 일지 않았다. 아마 돌아가는 즉시 저들이 만든 놀이판에 끌 려나갈 것이다. 그런 뒤 찬열처럼 매가리 없이 죽거나 다시 머나먼 땅으로 유배를 당하리라. 경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다시 도성으로 간다면 찬열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단죄의 칼 을 내리겠노라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여기며 삼 년이라는 아까운 세월만 흘려보냈을 뿐이다. 벼랑 끝에 몰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다니 자신은 한참 멀었다고 스 스로 꾸짖는다. 피로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교안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압송관의 무뚝뚝한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상 도성에 도착하니 일순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런 식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일까. 떠나던 날에도 죄인, 돌아오는 날에도 죄인. 잔기침을 쏟았다. 헛헛하게 터지는 냉소에 눈빛은 더욱 얼음장 같았다.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나뭇잎 사이로 예전에 찬열의 집 이 있던 동네가 보였다. 주작대로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어명으로 집이 헐렸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려 이제는 가볼 수도 없을 것이다. 생각하자 경수는 침울하다 못해 설움이 복받치는지라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며 입술만 깨물었 다. 두 대의 함거는 관주성으로 향하였다. 해 질 녘이라 현무문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해가 떨어지자 다시 움직였다. 경수는 조금 의아했다. 교지엔 황제가 직접 문초한다고 했다. 그러면 관주성 옆에 있는 의경궁으로 갔어야 옳다. 그곳은 찬열의 국문이 열린 곳이며 주로 추국청으로 이용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두 대 모두 관주성으로 향하고 있으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경수의 의아함은 금세 풀렸다. 곧 날이 지니 죄인을 이곳에서 하룻밤 묵게 했다가 다시 의경궁으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박태흥과 경수는 서로의 상태를 걱정하며 관주성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끌려가 하룻밤을 보냈다. 마치 불청객이 신성한 곳에 들어와 몸을 사려야 하는 것과 같았다. 불쾌하기 그지없었으나 죄명이 붙 어서 불평을 내뱉을 순 없었다. 이튿날, 꾀죄죄한 모습으로 눈을 뜬 경수는 낯선 내관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는 추레한 몰골을 말끔하게 씻어내라는 내관의 명령에 얌전히 소세와 양치질을 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더러운 옷매무시도 가다듬었다. 손끝이 해지고, 커다란 두 눈에는 피로감이 가득했지만 그 럭저럭 봐줄 만했다. 박태흥은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연로하여 교안으로 오는 동안 여러 번 피로를 호소했다. 또 환절 기나 겨울이면 마른기침과 해천 증상이 심해졌다. 탕약을 제때 먹지 않으면 환갑을 넘긴 나이에 몸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미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 상태가 영 아니었다. 잘못하다가는 국문이 열리기도 전에 사람이 죽어나가게 생겨 경수는 박태흥이 몹시 걱정되었다. 실례지만 박태흥 나리는 어찌 되셨습니까? 내관은 입을 다물었고 군사들이 몰려와 경수의 팔을 붙들고 앞뒤에서 에워싼 채 또 어딘가로 데려 갔다. 온전히 날이 밝고 해가 들이쳤다. 밤에 봤을 땐 몰랐는데 다시 마주한 황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 다. 여전히 웅대하고 위엄이 있었다. 담벼락은 높았고 곳곳에 걸린 연의 깃발은 당당하게 나부꼈다.

313 궁인과 병사들이 한데 엉켜 어지러운 그림을 만들었다. 비로소 관주성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버텼다.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곳인 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한참을 걸어 경수가 끌려온 곳은 유양전이었다. 너무도 눈에 익어 오히려 현판에 걸린 글자를 의심 하며 읽었을 정도다. 유양전은 봄과 가을에 이용하는 편전으로 양옆에는 착검한 군사들이 돌부처처럼 꿈쩍도 안 하고 늘어서 있었다. 경수는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곧 종인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 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들어가시오. 시위가 결박을 풀어주더니 거칠게 등을 떠밀었다. 경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겠다. 그러나 황제가 자신을 이곳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석계를 하나씩 밟아 올랐다. 문득 삼 년 전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휘정궁에서의 밤이 떠올랐다. 그때 종인과 경수는 서로에게 비수를 날렸고 그것에 베여 몹시 아파했다. 궁을 떠난 후로는 그날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는데 환궁하니 새삼 그때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쾌락 속에 던져진 슬픔이 경수의 작은 몸뚱이를 여기저기 할퀴던 밤이다. 종인에게 받은 마지막 물건은 황제가 입는 외투였다. 운문단 망토가 비에 젖은 그의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그것은 종인이 건넨 작별 인사였고 경수는 집에 돌아와 깨어난 후 곧바로 망토를 태웠다. 그 는 무던히도 김종인이란 사람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경성현의 어느 계곡에서처럼. 회랑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간절히 원 한 순간이기도 하다. 결말을 알 수 없지만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유양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넓은 실내는 싸늘했다. 아침 공기가 뒷골을 서늘하게 잡아당겼다. 창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찬란 했지만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미려한 장식과 황실의 존엄을 뽐내는 문양이 천장과 벽, 하다못해 늘어뜨린 휘장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눈길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칙칙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휘감은 것은 암회색의 돌이 깔린 바닥뿐이었다. 그 가운데에 천하의 일인자만이 앉을 수 있는 용상이 놓여 있다. 붉은색 여의주를 문 황룡으로 장 식하고 봉황 자수를 넣은 붉은색 보료가 놓인 그곳. 모두 차지하려고 안달하는 바로 그 자리에 종인 이 앉아 있었다. 면류관에 현색 용포를 입은 그는 검푸른 어둠의 신처럼 보였다. 그의 단정한 발끝이 보이자 경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경직됐다. 삼 년 만에 다시 보는 그. 꿈에서라도 원망하고 한없이 미워했던 그 사람! 하지만 아무리 미워도 그 는 용상의 주인이고 자신은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경수는 지친 걸음을 조금씩 옮겨 적당한 곳에서 멈췄다. 그는 황제에게 사배를 올리고 조용히 무릎 을 꿇었다. 내관이 다녀간 후로는 포박당하지 않아 운신이 자유로웠지만 어쩐지 이곳에서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괴로울 만큼 무거운 적요가 한참을 배회했다. 오랜만이구나. 삼 년 만에 듣는 목소리다. 실내가 넓어 나지막한 그 소리는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네가 고생이 심하였단 말은 들었는데. 잊은 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깊은 회한이 밀려왔다. 왜일까. 나는 당신의 냉정함에 치를 떨었고 당신에게 배신당해 상처를 입었는데 왜 당신의 목소리 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일까. 고생한 보람도 없이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더 큰 죄목으로 잡혀 왔구나. 종인은 냉소적이었고 경수는 입술을 붙인 채 얌전히 있었다.

314 짐은 종종 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홍류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주 어리고 행복했 지. 어떤 때는 몽중의 상황이 그리워 그대로 깨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꿈결처럼 부드러운 어조는 한층 성숙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었다. 경수는 무심결에 종인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까딱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꿈은 강한 열망이 만들어낸 집념의 상징일 뿐이라고. 짐은 아마도 지난 삼 년간 너를 잊지 못한 채 지독하게 앓았는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침묵이 맴돈 후 종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일말의 다정함도 묻어 있지 않은 냉랭한 말투였다. 허나 짐은 지난날처럼 사리분별도 못하고 정에 얽매여 살지 않기로 했다. 황제란 그래서는 아니 되는 자리니라. 해서 네가 박태흥 밑에서 반역을 꾀하고 불측한 발언을 일삼는다는 고변을 듣고 황급 히 도성으로 압송한 것이다.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듯 아프고 갑갑해서 경수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손끝이 떨 렸다. 조금 있으면 조신들이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오기 전 옛정을 봐서 이곳에 자신을 불렀다는 뜻인가.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예민하지. 하오면 폐하께선 소인이 그런 일을 꾸민단 말을 믿으십니까? 경수는 꺼끌꺼끌한 시선으로 상단에 앉은 종인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 다.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가는 휘정궁에서처럼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소인이 역모를 꾀했다고 믿으시는 것입니까? 종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자복하는 것이냐. 삼 년 전에는 소인이 폐하를 믿지 않았었죠. 소인은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이해하고 믿어줄 순 없 겠느냐고 하셨을 때 야멸치게 외면했습니다. 그때의 독기 품은 눈동자는 아직도 도깨비불처럼 형형해서 종인의 어깨를 떨리게 했다. 어떻게 잊 을 수 있을까. 맹독이 뿜어져 나오던, 원한으로 똘똘 뭉친 그 눈빛을. 하지만 그때 한 말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찬열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폐하와 소인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평행선입니다. 교차점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하죠. 소인에 게 어떤 누명을 씌우든 폐하께서 소인을 죽이기로 마음먹으셨다면 소인은 저항할 재간이 없습니다. 딱딱하지만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종인은 심장을 찌르는 사실들에 미간을 구겼다가 표정을 가다듬 었다. 아주 솔직해졌군. 갑자기 이리 순종적으로 변한 이유가 무엇이냐? 소인은 한 번도 폐하의 명령에 저항한 적이 없습니다. 내 명령에 저항한 적이 없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아주 오래전에 폐하께 맹세했습니다. 소인은 폐하의 그림자라고요. 시간이 영원을 허락하는 한 계속. 금원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무색하건만, 너만이 궁중의 해어화에 맞서는구나. 소인은 그때 하신 말씀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56. 여원여모( 如 怨 如 慕 ) 폐하의 그림자가 되고 싶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

315 다.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것이 싫다더니 그림자를 청하느냐? 태양 아래선 모든 것이 떳떳하지 못하죠. 그림자는 태양이 만드니까요. 그 날, 숙비가 주었던 산호로 만든 요패를 경수에게 건넸다. 경수는 귀한 것을 받을 수 없다며 사양 했지만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그것이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우리는 한마음 이라고. 떠날 때는 그리 지독하게 굴더니 갑자기 그때 일을 들추는 까닭이 무엇이냐. 살고자 동정심이라도 얻으려는 것이냐?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을 아예 놔버린 것인가. 쌀쌀한 태도였지만 경수는 동요하지 않았다. 하문하시니 답하겠습니다. 작은 오해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인의 잘못도 있고 폐하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요.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소인은 폐하를 믿지 않았고 당시 찬열의 죽음은, 아니 여전히 그의 죽음은 소인에겐 너무도 큰 슬 픔입니다. 그것은 평생 벗을 수 없는 멍에와도 같습니다. 삶에 대한 미련을 놓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찬열이 찍혀나간 것처럼 소인도 언젠가 그 수순을 밟 으리라고 예견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미련과는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곧 네가 역모를 꾸몄다고 자인하는 것이냐. 종인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마치 그렇다고 답하라는 듯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죄목으로 소인을 옭아매든 저항할 수 없다고요. 폐하께선 천자시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미 정해진 답에 새로운 해법은 통하지 않고 늘어놓는 말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지요. 소인은 그저 폐하의 처결을 기다릴 뿐입니다. 잠시 후 종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 찬 유리 장식 과 구슬들이 차랑차랑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가 경수의 앞에 다다랐다. 큰 그림자가 경수의 몸을 덮쳤다. 종인이 무심한 시선으로 경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엔 서늘함과 슬픔, 알 수 없는 복잡한 것들 이 뒤섞여 있었다. 삼 년 전, 휘정궁에서 네게 조금 더 다정했어야 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애초에 그런 식 으로 널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 허나 짐은 너를 진심으로,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은애하였다. 건조한 고백은 그만큼 담백했고 그만큼 아팠다. 너를 그렇게 아꼈기에 네가 역모를 꾸몄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짐이 받은 고변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런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너와 짐이 이런 순간을 맞는 것 아니더냐.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경수는 참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월이 흐른 만큼 짐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젠 네가 날 믿어주지 않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 는다. 어째서인 줄 아느냐? 답을 기다립니다. 짐은, 네게 더는 감정이 없다.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종인을 올려다봤다. 자신을 지 독하게 사랑해서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착각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종인은 그 오만함을 가혹하게 꾸짖었다. 정은 사람을 말려 죽일 수도 있고 죽어가던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한때였지만 짐이 너와 그런 정을 나누었다는 것에 감사한 적도 있었다. 허나 영원할 것만 같던 연정도 서로의 이해가 다르면 쉽

316 게 정리할 수 있더구나. 종인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나는 당신을 미워했지만 박태흥과 역모를 꾀한 적은 없다고 제대로 해명해야 했다. 그러나 혀가 뻣뻣해서 괴상한 신음만 나왔다. 반역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지긋지긋하구나. 삼 년 동안 제자리였던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던 게 아닐까. 그 한마디에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보면 짐 또한 천자였나 보다. 알겠느냐? 변변찮은 군주지만 짐 은 이 자리를 놓을 수가 없어. 김종인은 이렇게나 변했는데. 연의 강산은 길에 널린 풀 한 포기조차 모두 짐의 것이다. 이를 탐하거나 짐을 끌어내리려 하는 자는 모두 죽어 마땅하지. 하여 짐은 너를 죽일 것이다.! 증거가 어떻게 나오든 짐은 너를 죽여야만 해. 그래야 슬그머니 꼬리를 쳐든 독사들의 소굴을 빠 져나올 수 있거든. 폐하. 허나 옛정을 봐서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종인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의 큰 손이 경수의 바싹 마른 뺨을 어루만졌다. 아기 피부처럼 보드랍던 피부는 삭풍과 고생길에 노출되어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그것이 손끝에서 통렬하게 느껴졌다. 종인의 맑은 두 눈동자에 경직된 경수가 비쳤다. 서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는, 한 순간이라도, 나를 사랑한 적이 있느냐. 나만큼 온몸과 마음을 다 하였느냐? 경수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러나 분명한 음성으로 답했다. 언제나. 언제나요. 사랑했기에 원망할 수 있음을 경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남은 것은 녹아내리지 못한 앙 금뿐이지만 사랑한 적 있느냐는 과거형이라면 응당 그렇다고 답하리라. 아주 명료한 대답에 종인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엔 눈만 바라보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는데도 도무지 상 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흘러버린 세월만큼이나 우리는 이렇게나 멀어진 것일까. 아니면 괜한 자격지심? 그가 몸을 일으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밖에 있느냐! 라고 외치자 하개가 교지가 담긴 목판을 들고 달려왔다. 이대로 꼼짝없이 당하는 것인가! 종인이 눈짓하자 하개가 두루마리를 펼치고 목청껏 내용을 읊었다. 전 예문관 검열 도경수는 학식이 깊고 행실이 올바르며 언행이 단정하여 소임을 다하고 나라에 지 극히 충성하였다. 지난날 오해로 말미암아 유배를 떠났으나 깊이 참회하고 금석과 같은 충심은 더욱 깊어졌도다. 이에 도경수에게 도성 복귀 명령을 내리니, 중추원 정칠품 계의관( 計 議 官 )에 제수한다. 전혀 뜻밖의 처결에 경수는 경악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순금사에 넘길 것처럼 행동하더니 몇 품 계를 초자하여 중추원의 계의관으로 삼겠다고 한다. 파격적인 처사에 경수는 감사하다는 말도, 어째서 이런 결정을 한 것이냐는 물음도 모두 묻어야 했다. 이보게. 폐하께 예를 갖추어야지. 보다 못한 하개가 눈치를 주자 그제야 경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엎드렸다. 교지를 거두어주십시오. 방면해 주시는 것은 감읍하나 중추원 계의관이라는 자리는 감당할 수 없 습니다. 소인의 일로 조정이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어명을 거두어주소서. 그건 짐이 감당할 몫이다. 설마하니 네게 장난으로 관직을 내리겠느냐. 하오나 소인은 품계가 초자될 만큼 학식이 깊거나 공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317 짐이 준다고 할 때 받아라. 성은이 망극하다, 그 한마디 하기가 그리도 싫은 게야? 소인이 교안으로 압송된 것만으로도 조정에서 주목할 일인데 벼슬을 초자하시면 안팎으로 공연한 소문이 나돌 것입니다. 소인은 상관없지만 폐하께 누가 될까 저어되어 그럽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것은 안 좋은 버릇이다. 폐하, 부디. 짐은 네게 민망한 손을 다시 내미는 것이다. 뿌리치지 말라, 그러지 말라, 그리 말하는 것이야. 경수가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종인이 직접 경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길은 조금 전과는 달리 봄바람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표 정과 눈빛도 그리움이란 이름의 파도처럼 넘실넘실 일렁거렸다. 타향에서 고초를 겪으며 얼마나 짐을 원망하였느냐. 고생하였다. 참으로 수고했어. 폐하. 어찌하여.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나중에 설명할 테니 너는 그저 짐이 내리는 관직을 받고 조정에 복 귀하면 된다. 또 이리 피폐해졌으니 건강을 되찾아야 해. 어의는 어디 있느냐? 이미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어서 이 아이를 처소로 안내하고 진맥토록 하라. 박태흥의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적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힘은 찾아놓았느니라. 걱정스러운 경수의 표정을 보며 종인은 빙긋 웃었다. 햇살처럼 부드럽고 한여름의 바람처럼 청량한 미소였다. 삼 년 만에 처음 보는 그것은 소년의 풋사랑처럼 수줍었지만 성년의 농염함도 머금고 있었 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구나. 허나 아직은 네 몸이 성치 않아 보이니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지. 오늘은 이만 본가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라. 오랜만에 집에 가는데 빈손이면 곤란할 테니 섭섭하지 않 을 만큼의 선물을 준비해 두었다. 폐하. 서둘러라. 중신들이 몰려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 그러면서 등을 떠미는 종인의 손길은 다소 급했다. 경수는 그 길로 유양전을 나왔다. 여전히 머리가 멍했고 종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뒤따라 나 오던 하개가 급히 경수를 데리고 유양전 뒤에 있는 처소로 향했다. 좁다란 회랑을 걷는 동안 하개가 말을 건넸다. 새벽녘에 정 내관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입이 무거운 만큼 무뚝뚝하여 괜히 계의관의 마음을 상하 게 하진 않았을지 걱정했네. 듣기에도 어색한 계의관이란 직함에 경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여전히 제게 살갑게 대해 주시는군요. 저보다 지위도 한참 높으신 분이. 계의관은 폐하께서 수족처럼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내 어찌 지위를 믿고 계의관에게 함부 로 대할 수 있겠나? 하개는 푸근하게 웃었다. 그래도 몇 년 만에 뵙는 폐하인데 계의관의 몰골이 참혹하여 그대로 보일 순 없더군. 하여 말끔히 씻기게 하였는데 손길이 거칠진 않았는가? 하 공공께서 보낸 분이셨군요. 워낙 경황이 없어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았습니다. 그럼 됐네. 도 계의관이 돌아왔으니 이제 폐하께서는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승승장구하실 거네. 얼떨결에 교지를 받들긴 했습니다만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그리 신경 쓰이는 것인가? 경수가 선뜻 답하지 못하는 사이 처소엔 다다랐다. 안은 유양전만큼이나 조용했다. 폐하께서 지난 삼 년 동안 어떤 심정으로 지내셨는지 잘 모를 걸세. 내 입으로 떠들 순 없으나 차 차 알게 될 걸세.

318 부디 폐하께 힘이 되어주시게. 내, 이리 부탁함세. 하개의 간절한 표정에 경수는 신산하고 착잡해졌다. 황제는 박태흥과 도경수를 함거에 실어 도성으로 데려왔지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도경수에게는 사면령을 내리고 어명의 출납을 맡은 중추원의 계의관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조정이 몹시 시끄러웠다. 그러나 황제는 중신들의 떠들썩한 반발을 증거가 전혀 없으며 모두 뜬소문에 불과하다 는 말로 묵 살해 버렸다. 박태흥은 도경수를 복직시키기 위한 연극이었음을 알고는 안도했다. 황제가 도경수를 매우 아낀다 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 그는 제자의 연약한 풋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춘들의 마음이란 누구도 매어둘 수 없었고 사람의 정은 지혜 많은 자라 하여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박태흥은 당분간 교안에 있는 백현의 집에 머물며 지친 심신을 추스르기로 했다. 경수는 종인이 바리바리 싸 보낸 선물을 들고 집을 찾았다. 삼 년 만에 돌아온 집은 눈의 띄게 줄 어든 빈자리만큼이나 쓸쓸했다. 아버지는 못 본 새 늙었고 어린 아우는 그만큼 자랐다. 세 부자는 부 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어머니의 임종과 장례조차 지키지 못했으니 소자 같은 불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경수는 크게 자책했다. 도명정은 우울해하는 장남을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일러주 었다. 헤어진 만큼 애틋하고 그리운 가족이었다. 몇 날을 보내더라도 해후를 풀 순 없을 것 같았다. 얼마 후 경수는 찬열과 자주 찾던 그들만의 은거지로 향했다. 삼 년 동안 누구도 그곳을 돌보지 않 아 온통 먼지와 거미줄투성이였다. 그는 그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찬열과 월란의 유품에 지난날의 안부를 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찬열의 집이 있던 곳을 찾아갔다. 일대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던 집은 허물려 새로 운 집이 들어선 상태였다. 그대는 봄 오도록 돌아올 기별 없고, 이 몸은 고향에서 애간장이 끊어지네. * 경수는 먼발치에서 그곳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언덕에서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찬열 의 모친인 엄씨의 눈치로 찬열이 없으면 문턱도 못 넘은 곳이었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눈 추억이 헐린 듯하여 설움이 쏟아졌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나갔다. 지난 삼 년 동안 단련한 마음은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이제 그는 다가온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찬열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하나씩 처단할 작정이 다. 복수는 천천히, 그러나 아주 치밀하고 독하게. 찬열과 자신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던 것처럼. 그 첫 번째는 김종인의 마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그간 짐에게 서운했더라도 돌아온 이상 과거는 묻어주길 바란다. 네게 했던 나쁜 말은 모두 진심 이 아니었다. 종인과 경수의 앞에는 소박하지만 정성이 깃든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향긋한 술 냄새가 호리 병에서 솔솔 올라왔지만 누구도 잔을 기울이진 않았다. 매일은 아니어도 네 소식을 들어왔다. 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더구나. 괜히 그곳으로 보낸 것은 아닌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폐하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소인과의 약조를 어겨 그것에 화가 났을 뿐입니다. 감히 폐하 께 소인이 화를 냈습니다. 이해한다. 너는 찬열과 둘도 없는 사이였으니까. * 이백, 춘사( 春 思 )

319 소인이 그리 못 되게 굴었는데도 여전히 소인을 귀하게 대해 주시는군요. 너는 짐의 그림자다. 당연한 일 아니냐. 경수는 단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있을 땐 너 자신을 낮추지 말라 이르지 않았더냐? 소인이라 하지 마라. 오랜만 이어도 여전히 듣기 거북하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아직도 가지고 있었느냐? 종인이 경수의 허리춤에 매어진 숙비의 산호 요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종인에게 받은 뒤 신주 단 지처럼 모셔놓기만 해서 녹색 술과 유리구슬에는 여전히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 짐을 미워하여 버린 줄 알았다. 아까워서 하지도 않더니. 숙비마마의 유품을 어찌 함부로 버리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밤입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 고 이해하는.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오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밤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잔을 꺾었다. 아른거리는 불빛 사이로 종인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못 본 새 젖 살이 빠지고 하관은 더욱 발달해 훨씬 늠름하면서도 예민해진 인상이다. 경성에서 네 고생이 특히 심하였다고 들었다. 임제환이 널 욕보여 자결하려고 했다며 백현이 상소 를 올렸느니라. 자살 소동은 벌인 적이 없었지만 경수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때 임제환을 죽이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험한 꼴을 당하였느냐?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어 애가 탔다. 말로써 저를 겁박한 것은 사실이나 그리 심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일 은 없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백현이 그리 흥분한 것은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짐도 크게 놀랐었다. 감찰 나리께서 정이 많은 분이라 그렇습니다. 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도독이 파렴치하게 구는 것을 목격하셨으니 더욱 정의감에 휩싸이셨던 것 같습니다. 백현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래, 백현과 박태흥이 널 많이 도와주었다고? 예. 두 분이 아니었다면 이날까지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적소에서 그리 힘들었던 것이냐? 종인은 안타깝게 경수를 바라보았다. 절절한 연민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아니라고 한다면 유배 떠난 자들이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그렇다고 한 다면 폐하께 근심을 심어드릴 뿐이니 차라리 죄를 청하게 해 주십시오. 종인은 사려 깊은 답변에 감동했다. 자신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사소 한 사탕발림이라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아픈 곳은. 폐하. 과거는 묻으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지. 짐이 네게 그런 말을 하고도 꼬치꼬치 캐물었구나. 실은 백현에게 경수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 좋은 쪽으로만 들어와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원을 미리 대기시킨 것도 경수가 몇 년 전에 크게 앓았다는 얘길 들은 탓이다. 해쓱해진 몰골이 그 간의 맘고생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종인 본인도 경수만큼이나 심신이 쇠약해졌다. 절양류에 중독되었다고는 하나 종인의 몸이 그토록 망가졌던 것은 찬열과 경수를 한꺼번에 잃은 극도의 슬픔 때문이었다. 이제는 침전에 사관을 들이진 않으십니까? 네가 떠난 후로 폐지했다. 애초에 네가 아니었다면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경하드립니다. 이런 것으로 경하라니. 건조하게 웃던 종인이 돌연 웃음기를 지웠다.

320 짐은 두 번 다신 널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종인은 자신에게 못을 박듯이 내뱉은 후 술잔을 털었다. 다소 급하고 거칠었다. 짐이 네 곁을 떠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짐은 그전보다 더욱 너를 아껴줄 수 있 다. 그러니 솔직하게 얘기해다오. 너는 진심으로 짐 곁에 남고 싶은 것이냐. 폐하께서는 떠나기 전 제가 두고 가겠다던 그 마음을 버리셨는지요? 경수의 담담한 물음에 종인은 비가 쏟아지던 휘정궁의 밤을 기억해냈다. 보잘것없으나 소신의 마음은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다. 기약할 순 없어도 언젠가 다시 뵙게 되면 그때 돌려주십시오. 그 마음 하나를 되찾으려고 이날까지 이를 악물고 버틴 것이 아니던가. 종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씁 쓸하게 중얼거렸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짐이 어찌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버릴 수 있겠어? 하오면 이제 제게 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종인은 왼고개를 쳤다. 네 마음은 영원히 짐의 것이다. 폐하께서 그러하시다면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 마음을 폐하 곁에 묶어 폐하께서 평안하실 수 있 다면 몇 번이고 드릴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물로 상대를 현혹하기란 이렇게나 간단하다. 벅차서 금방이라도 자신을 끌어 안을 것만 같은 저 표정을 보면 참으로 무상하기 짝이 없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구나. 설령 거짓이라도 괜찮아. 내게 속삭이는 그 한마디면, 경수야, 나는 네게 천하를 줄 수도 있어. 당분간 조정에서 너를 두고 왈가왈부 떠들 것이다. 허나 모두 짐이 감당할 문제이니 너는 묵묵히 네 할 일만 하면 된다. 그리하겠나이다. 아침 일찍 조회가 있어 널 오래 붙들어 둘 수 없구나. 불을 밝혀 줄 테니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 라. 감사합니다. 57. 연촉( 蓮 燭 ) 간밤에 황제가 계의관 도경수에게 연촉( 蓮 燭 )을 내렸다. 그 사실이 퍼지자 궁이 크게 술렁거렸다. 연촉은 연꽃 모양의 황금 등촉이다. 이것은 황제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실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이었다. 당나라의 영호도가 황제와 밤늦게까지 대화하다가 촛불이 꺼져 황제가 내린 금련촉으로 길을 밝혀 돌아갔는데, 그가 지나가자 신하들이 촛불을 보고 황제로 오해했다는 고사는 아주 유명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연촉은 황제가 신하를 매우 아끼고 예우하는 뜻과 일맥상통하였다. 그런데 유배에서 풀리자마자 네 품계를 초자하여 계의관이 된 것도 모자라 보란 듯이 황제의 연촉 까지 밝히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도경수를 향한 황제의 총애가 매우 노골적이고도 지극하였다. 이에 가장 긴장한 사람은 태후 장씨였다. 도경수가 너무도 쉽게 환궁했군. 이제는 주상이 거리낌 없이 대하지 않는가. 뭇 사람들은 조만간 도경수가 황제의 용양군이 되어 밤낮으로 함께할 것이라고 떠들었다. 태후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명부 여인들이 하나같이 황손을 생산하지 못하는 마당인데 세월을 먹어 더욱 농염해진 도경수에게 빠진다면 황제는 정신을 못 차리고 후궁으론 걸음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후사는 뒷전인 채 사내에게 정신을 뺀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참상이

321 다. 이럴 줄 알고 둘 사이를 그토록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다. 박태흥을 앞세워 도경수가 반역을 획책하 고 있다고 하면 황제 인 종인이 당연히 도경수를 벨 줄 알았다. 그러나 경수를 향한 종인의 연정은 태후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김종인은 한낱 풋정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위인이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당장 도경수를 찍어내고 싶어도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도경수를 보호하 겠다는 종인의 의지가 워낙 강하여 접근할 방법조차 요원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전에 사관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나? 이는 대연의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대인파는 늘 우세했고 태후 자신은 힘 이 있었다. 더구나 도경수가 유능하고 예문관에서 지내는 동안 억울한 추문에 휩싸인 것 외에 품행이 올발랐으 니, 그가 다른 관직을 받는다 해도 태후는 나서 반대할 수 없었다. 인제 와 법도를 운운하며 도경수를 찍어내면 그를 직접 데려온 황세용과 대전에 사관을 들이는 것을 묵인한 태후 본인의 꼴이 매우 우스 워진다. 물론 악수를 두어 황제를 압박할 수도 있다. 태성전 앞에 무릎 꿇고 자식에게 석고대죄까지 하며 도경수를 조정에서 내쫓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목이 너무 많다. 김종인이 황권 을 내세워 일을 추진하고자 한다면 태후로서도 달리 방법 이 없다. 도경수 하나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이 오갈 것이며 피곤한 싸움이 지속될 것이 뻔하였다. 허! 완벽한 패착이자 자업자득이로군. 태후가 이런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을 무렵, 종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그동안 미뤘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먼저 관리들을 탄핵할 수 있는 어사대에는 변백현을, 가장 가까이 두고 황명의 출납을 처리하는 중 추원에는 도경수를 심어 디딤돌을 만들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신진 인사들을 꾸려 후퇴했던 작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 하여 박찬열을 미 끼로 내세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적들을 일벌백계하는 것이 종인의 목적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연 나라의 발전이지만 당장의 목표는 황태후와 그 일족을 모조리 몰살하는 것이다. 경수는 계의관으로서 선진들을 따라 자기 할 일에만 몰두했다. 조용하지만 손이 매워 일 처리 싹싹 한 그를 선진들은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가 연촉까지 내릴 정도로 아끼다 보니 하나같이 경수를 어려워했다. 계의관은 예문관의 사관들과 비슷한 역할이었다. 사관이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각각 기록한다 면 중추원의 계의관은 태학관과 조정에서 읽는 조보를 발행하고 황제의 자문에 응하거나 경연 등에 참여해 사초를 작성했다. 그들은 사관보다 조금 더 세밀하고 폭 넓은 영역을 담당했다. 특히 계의관은 사초를 쓴다는 점에서 사관의 역할과 겹쳤는데 역대 황제들이 사관을 피곤하게 여긴 데 반해 계의관은 융통성 있게 움직여 곁에 두는 일이 잦았다. 또 계의관은 사관처럼 청요직이라 줄 을 잘 타면 비룡을 타고 하늘을 오르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종인은 바로 어사대와 중추원의 청요 직에 백현과 경수를 앉혀 자신의 세력을 끈끈히 했다. 경수는 얼마 전 내명부에 황후를 포함하여 총 열아홉의 비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경성현령 의 딸인 강춘영이 그 악독한 성질머리로 운 좋게 내명부의 첩지를 받았다고 들었다. 잊고 지냈는데 비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연스레 그녀가 생각났다. 종인이 후궁을 찾지 않은 지 한 달째다. 정확히는 경수가 환궁한 후의 일이다. 두 사람이 밤에 딱히 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인은 경수가 돌아온 후에는 일절 후궁 쪽으 로는 걸음하지 않았다. 현수궁에 인사차 들른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아비 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함이었다. 후궁에 미묘한 동요가 일었다. 그녀들이 한꺼번에 자신을 공격하면 곤란했으므로 경수는 종인더러 황후와 후궁들을 자주 찾을 것 을 부탁했다. 종인은 대놓고 싫은 기색을 비쳤지만 경수가 고압적으로 나오자 별수 없이 후궁으로 걸

322 음을 놓았다. 사흘 연속으로 황후와 후궁들을 고루 찾자 성질 급한 비빈들이 황제를 자신의 처소로 모시려고 내 관과 궁녀를 매수하기 시작했다. 절박한 그녀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경수는 입맛이 썼다. 그래도 이제는 타인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것은 취하고 필요 없으면 미련 없이 버린다. 황궁의 생리가 그러했다. 새로 일을 배우느라 숙직하거나 늦게 퇴청하는 일이 잦구나. 밤길을 오가는 데 위험할 테니 시위 하나를 붙여주마.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또 궁에서 집이 그리 멀지 않으니 굳이 사람을 붙여주실 필요는 없습 니다. 짐의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다. 다른 관리들은 몸종도 잘만 데리고 다니는데 넌 그 흔한 잡색꾼 도 없지 않느냐? 말이 나온 김에 네 집도 좋은 곳으로 옮겨주고 싶구나. 네 부친도 늙었고 아우는 하 루가 다르게 커 가는데 지금 사는 집은 좁지 않아? 상소와 서책을 정리하던 경수가 갑자기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육부에서 올라온 문서에 비답을 내 리던 종인이 얼른 일어나라고 했다. 폐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일어나서 얘기하라. 경수가 얌전히 일어났다. 무엇인데 무릎까지 꿇느냐? 좋은 집을 갖고 싶어서 그러느냐? 아닙니다. 집은 바라지 않습니다. 허면? 시위를 붙여주겠다고 하시기에 생각난 것이 있어 청을 올리는 것입니다. 기탄없이 말하라. 네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겠다. 경수의 입가에 생글생글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공손하게 얘기했다. 제게 잡색꾼 한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열 명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 예문관에서 일할 때 데리고 있던 자를 말하는 것이냐? 도리질을 친 경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어찌 그래? 달리 원하는 자가 있는 게로구나. 그가 커다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조심스레 답하였다. 파직당한 내관 우장을 저에게 주십시오. 평온하던 종인의 얼굴에 희미한 실금이 갔다. 우장이라면 찬열이 뇌물을 받았다고 지껄여서 종인이 내쫓은 아이였다. 지금은 궁에서 쫓겨나 어디 서 무얼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이 그놈을 원하는 이유라도 있느냐. 예부좌랑( 佐 郞 ) * 우지환의 아우이기 때문입니다. 우지환은 종인이 친정을 시작하고 처음 실시한 대과에서 장원급제했다. 그는 어사대 감찰로서 당시 예문관 검열이던 경수와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장씨 일파를 축출하는 핵심인물 중 하나로 활약했 다. 지금은 승차하여 예부의 낭관이었다. 우지환과 우장이 형제지간이라는 것이 사실이냐? 예. 삼 년 전, 우지환과 살생부를 만들 때 그자가 술에 취해 털어놓았습니다. 일이 있은 후 우지환은 마치 이날만 기다렸다는 듯 장문견 쪽으로 붙었다. 당시 종인은 우지환을 * 정육품

323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대인파가 조정 인사권을 손에 넣고 쥐락펴락해서 신인들의 노선에 관심이 없 기도 했다. 아꼈지만 젊은 나이에 조정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에 붙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으리라고, 그래서 순 리대로 집권한 쪽으로 붙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우장과 둘이 형제라니 뜻밖이었다. 더듬어 보니 우장이 자신에게 과거를 준비 중인 잘난 형 하나가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우지환과 우장이 형제인 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그렇다고 네가 짐이 파직한 놈을 잡색꾼으로 삼게 해 달라고 부탁할 이유는 안 되는 듯한데. 궁에서 찬열의 뇌물 수수를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이 우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또 우지환은 저와 살생부 자료를 모은 사람입니다. 당시 황 사도가 살생부를 언급하며 폐하를 압박했다지요? 살생부는 극비 사항이었는데 어찌 대인파에서 살생부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지환이 변절자라는 말이냐.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끼던 신하였고, 심신이 지치셔 깊게 살피 지 않으려 하셨겠지요. 종인은 속으로 얕은 신음을 삼켰다. 돌아온 후 몸조리에만 신경 쓰라고 했더니 조정 돌아가는 판세 와 과거에 흩어진 조각을 맞춰 홀로 분투했을 경수에게 왠지 미안했다. 허나 네가 하는 말은 심증일 뿐이다. 예. 하여 당장 우지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시라고 말씀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장을 원할 뿐입니다. 왜 하필 찬열의 죽음과 관련된 자를 곁에 두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종인이 선뜻 허락하지 못했 다. 경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우장은 천성이 경박하나 하나뿐인 피붙이인 제 형을 몹시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둘 사이에 우애가 깊으니 우지환이 대인파로 돌아섰다면 우장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제가 알기로 현재 우지환은 고관대작들과 왕래하며 차기 대인파의 수장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한서현에 있는 동안 백현이 알려준 사실들이었다. 도성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짐도 소홀히 했던 부분을 빠르게 잡아냈구나. 저는 폐하의 마음을 읽고 움직일 뿐입니다. 경수의 총기가 더욱 깊어졌다. 수동적으로 어명에 순종하던 아이가 아니다. 황제를 추켜세우면서 자 신의 주장을 제대로 관철하고, 동시에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종인은 떨어져 있던 세월 동안 경수가 몰 라보게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 네 뜻이 그러하니 말리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폐하. 허나 우장을 조심해라. 어수룩한 얼굴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놈이다. 짐이 그를 아예 궁 밖으로 내친 것도 그 때문이니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쫓겨났던 우장은 급작스런 궁의 부름에 얼떨떨했다. 그는 스물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어리바리했다. 우장은 궁에서 나간 후 그간 모은 재산으로 조그맣게 밭을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나 노름 으로 논밭을 잃고, 그나마도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가산을 탕진했다. 지금은 궁여지책으로 객잔에서 막일을 해 주고 있었다. 형인 우지환은 재가하여 신혼 재미에 빠졌다. 자연스레 순위에서 밀린 그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러다 궁에서 다시 부름을 받았으니 몹시 긴장되었다. 그런데 환관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 잡색꾼으로 삼는다는 어명에 우장은 울상이었다. 그렇 다고 다시 객잔에서 막일하며 살기는 싫었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니, 우장에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더라도 어깨 펴고 다닐 수 있는 개똥밭이 궁이었다.

324 그래서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각에서 새 주인을 기다렸다. 얼마 뒤, 중추원 건물에서 나온 도경수를 보고 우장은 경악했다. 유배를 떠난 놈이 어떻게 돌아왔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중추원의 계의관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두 사람은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우장은 내내 엉덩이에 가시가 박힌 듯 안절부절못하였다. 경수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새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경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피차 서로가 누군지 아니 잡다한 얘기는 필요 없겠지. 우장이 머루알 같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네가 예부좌랑 우지환의 아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외에도 너에 대한 것이라면 세간에 놋그릇 개수까지 훤히 꿰고 있으니 내 앞에서 허튼 짓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우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삼 년 전 보았던 단정하고 얌전한 사관이 아니었다. 표정은 동요 없이 깨 끗했으나 말씨와 눈빛에서 묘묘한 위엄이 느껴졌다. 지금 네 뒤를 살펴주는 사람이 있느냐? 그건 어찌. 재가한 지 일 년도 안 된 네 형님이 궁에서 쫓겨난 아우를 돌봐줄 리는 없고. 그 대목에서 우장이 흠칫하였다. 폐하께서는 너의 바둑 두는 재주를 아끼셔서 곁에 두셨지. 헌데 입 한 번 잘못 놀려 지금은 변변 한 집 한 채 없이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 하며 살고 있다지? 점점 불안해진 우장은 입술을 말고 목을 잔뜩 움츠리기까지 했다. 몇 년 전 내가 폐하와 밤을 보냈다는 추문이 나돌았을 때 대체 그 밤에 누가 나를 미행했기에 목 격자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헛소문이 퍼졌는지 의아했지. 태성전에 간자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수시로 하 공공께서 단속하는 태성전에 대체 어떤 간 큰 자가 폐하의 내밀한 사정을 밖으로 빼돌리나 궁금했다. 그, 그것은! 당시 가장 늦게 태성전에 합류한 네놈 외에는 의심할 사람이 없더군. 또 네가 자신궁 궁녀인 사완 과 몇 번 밀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 죽여주십시오! 우장이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경수는 우장이 사완과 만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새가슴인 우장을 몰아세우면 어떤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고, 우장은 제 발이 저려 우는 소리를 쏟았다. 노비가 모시는 주인의 일을 함부로 떠벌리면 멍석말이를 당한다. 하물며 궁인으로서 천자의 일을 발설하였으니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렵다. 최소 혀가 잘려 두 번 다시는 잘난 입을 떠들 수 없게 되 지. 살려주십시오! 나리,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은 다만 웃전에서 시키시기에, 제 혓바닥이 잘리는 모습을 상상하던 우장은 정신없이 떠들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냉큼 제 입을 틀어막았는데 때는 늦었다. 웃전이라면 자신궁이냐. 우장은 도리질을 쳤다. 퉁방울만 한 그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지은 죄가 있다면 앞으로 속죄하는 것만이 답이지. 제발 폐하께는 말씀 올리지 말아 주십시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또 제 형님과는 무 관한 일이니, 너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우장을 일으켜 세웠다. 네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일했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허나 이제부터는 나의 시종으로서 오 로지 내게 충성해야 한다. 그리하면 절대 너를 섭섭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장은 경수의 속내가 뭔지 알 수 없어 진땀만 흘렸다.

325 내게 충성하겠느냐? 머리를 굴렸지만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소인이 비록 우둔하기 짝이 없으나 황궁에 오래 있어 사람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만은 뼈저리 게 알고 있습니다. 누울 자리가 어딘지 판단할 깜냥도 됩니다. 그럼 무너지는 담장 옆에는 서는 게 아니란 것쯤은 잘 알겠구나. 우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심이 선 듯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리께서 소인을 살펴주신다면, 또 소인의 형님을 옭아매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신다면 소인은 죽 어서까지 나리를 모실 것입니다. 나는 배신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앞에서 감언이설을 쏟고 뒤로는 흉계를 꾸미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거든. 우장은 도경수가 모든 걸 알고 자신을 옥죄려고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씨는 둥글둥글했지만 온기 속에서 서슬이 퍼런 칼이 번뜩였다. 허나 충절을 지킨다면 그 대가는 서운하지 않게 받을 것이다. 나리의 고매한 인품은 옛날부터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봤습니다. 경수는 자조적인 냉소를 띠었다. 살고자 이리저리 비빌 언덕을 바꾸는 박쥐의 말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았다. 눈에 보 이나 실체 없는 것. 믿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필요한 박쥐라면 눈 감고 속아주는 척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받아라. 소맷부리에서 염낭을 꺼내 건넸다. 두둑한 금액에 우장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래도 십 년 넘게 궁에 있지 않았느냐? 집은 차차 월봉으로 사들이고 당분간은 그것으로 체면치 레나 해라. 명색에 중추원의 잡색꾼인데 그리 허름한 차림으로 다녀서야 되겠느냐. 어째서 소인 같은 것에게.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 처리는 빠릿빠릿해야 하고 네가 내뱉은 말도 지켜야 한다. 그러면서 입은 무겁고 궁 안팎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식에도 통달해야 해. 그리할 수 있느냐? 박찬열을 찍어낸 이후 황제와 황태후에게 버림받아 투전판을 전전하던 세월. 우지환을 생각하면 도 경수와 손잡아서는 안 되지만 객잔에서 핍박받고 자모전가에게 쫓기는 자신의 청승맞은 신세가 먼저 떠올랐다. 형님에게 피해만 가지 않으면 되겠지. 가까스로 잡은 동아줄이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 자신을 시궁창에서 빼줄 사람은 도경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절대 나리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우장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58. 쟁총( 爭 寵 ) 한층 쌀쌀해진 날씨에 가을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무겁게 떨어졌다. 화단에 심은 국화가 함빡 물을 마시며 바람에 몸을 떨었다. 산중의 암자인 듯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중추원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속기록을 정리 중이던 경수에게 백현이 찾아왔다. 어사대도 금일은 정 리할 것이 많다고 했다. 둘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왔다. 처마를 타고 주룩주룩 쏟아지는 횃대비가 제법 요란했다. 물안개가 살짝 낀 관청 앞마당은 밝힌 등불로 희부옇게 빛을 냈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실은 별 기대 없이 온 거였소. 어째서요?

326 그대가 돌아온 후로 매일 밤 폐하께서 잠깐이라도 그대를 부르신다고 들었거든. 삼 년 동안 묵힌 이야기가 많으실 테니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런가요? 역시 궁중엔 와전된 이야기가 많네요. 매일 부르시지도 않을뿐더러 폐하께선 그리 한가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야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그리 여기기 십상이오. 나리께서도 그걸 믿고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경수가 쏘아붙였다. 백현은 잘못을 인정했다. 미안하오. 보자마자 이상한 소리로 그대의 심기를 상하게 했소. 누구나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리께선 그 누구나 가 되셔서는 아니 됩니다. 품위를 생각하 셔야지요. 날 생각해 주는 거요? 백현이 배죽이 웃었다. 그러면서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폐하께서 그대를 두고 오늘도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놓으셨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구려. 오늘은 영희당에 납시셨다 하오. 어떤 미녀가 사는지 궁금했는데 수의 강씨의 처소라더군. 경성현 령의 딸, 기억하시오? 백현은 경수의 눈치를 살쳤다. 경수는 몇 개의 쪽문을 넘어 조용히 걷기만 했다. 이렇게 비 오는 밤이 되니 나리께서 과거 보러 떠나기 전날이 생각납니다. 한참 걷던 경수가 빗소리에 묻힐 만큼 고요한 음성을 들려주었다. 백현이 제대로 듣지 못하고 턱을 살짝 빼자 경수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제야 백현이 씩 웃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때 들려주셨던 곡조가 꽤 맘에 들었답니다. 오늘은 거문고가 없어서 참으로 아쉽구려. 원한다면 어디서든 연주해 줄 수 있소만. 요즘 일을 배우느라 궁에서 숙직하는 일이 잦습니다. 나리의 초대는 감사하지만 짬이 나지 않는군 요. 혹 나중에라도 진왕 전하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거든 자리를 피하시오. 전하는 악기에 능통하시 니 그대는 반드시 전하와 내 실력을 비교할 테니 말이오. 글쎄요.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경수가 피식 웃었다. 둘은 나란히 발맞추어 느릿느릿 회랑을 걸었다. 몇 번이나 같은 곳을 맴돌았지만 누구도 먼저 각자 의 관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같은 궁에 있어도 부서가 달라 얼굴을 마주할 시 간도 적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수다스럽진 않아도 담담한 정취가 있었다. 일은 할 만하오?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요. 중추원은 그다지 날카로운 곳이 아니라오. 전통이 그렇지. 네. 선진들께서도 제게 잘해 주십니다. 잘해 주기는커녕 다들 경수를 어려워했지만 그런 사정을 굳이 백현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대는 명민하니 일도 금세 손에 익을 것이오. 폐하께서 그대를 각별히 총 애하시니 그 어심에 보답하려고 더욱 노력하겠지. 내가 아는 그대는 그런 사람이니까. 더 노력하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하시네요. 경수가 퍽 토라진 척하자 백현이 낮게 실소를 터트렸다. 잘 지내는 거요? 눈으로 보시고도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내가 보기엔 그다지 잘 지내는 것 같지 않아서 그러오. 말씀드렸잖습니까. 선진들께서 잘해 주신다고. 폐하께서는? 그분께서 제게 연촉을 내리신 일로 황궁이 떠들썩했다는 걸 모르십니까.

327 경수는 다소 건조하게 내뱉은 후 백현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갔다. 백현이 말없이 걸어와 경수의 어 깨를 툭 쳤다. 그건 참으로 부러웠소. 또 그 일로 그대를 얕보던 자들이 단번에 입을 다물었으니까. 원치 않게 남의 이목을 끌었으니 썩 잘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면 그대의 귀환을 탐탁지 않아 하는 자들이 어떤 짓을 했을지 모르오. 유난 스러웠을지라도 이번엔 폐하께서 옳으셨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생각이 많으면 마음만 괴로울 뿐이오. 제게는 마음이 없다고, 그대는 야차가 아니오. 백현이 미간을 구겼다. 경수는 작달막한 머리통을 끄덕였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까지야. 예전과는 달리 조금 고분고분해진 것 같구려. 내 착각이오? 불빛 때문인지 경수의 낯빛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백현은 눈을 깜박이며 경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석등의 불빛이 그대의 두 뺨으로 옮겨 간 듯해서. 그럴 리가요. 젊으신 분이 벌써 야맹증이라도 오셨습니까? 하! 정말 그 입은 거침이 없구려. 제가 말상대 해드릴 때가 가장 즐거우신 거 아니셨습니까? 반박할 수도 없고. 그럼 놀리지 말고 얌전히 계십시오. 놀리면 놀리는 대로 바로 반응이 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으란 거요? 백현이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영락없는 어린애라 경수는 살갑게 웃어 보였다. 백현은 그 소중한 미 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항상 그리 웃으시오. 예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대가 시름에 젖는 것이 싫소. 나리께서 절 괴롭히지 않으시면 됩니다. 뒤끝이 장사진 같군! 모처럼 즐겁게 얘기하며 두 사람은 오래도록 회랑을 빙빙 돌았다. 전각에 하나둘 불이 꺼질 즈음, 영희당에 한 내관이 찾아왔다. 하 공공! 폐하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태성전의 장번내관이었다. 무슨 일인데 오밤중에 호들갑이냐. 이곳이 후궁의 처소임을 모르느냐? 하오나 촌각을 다투는 일인지라. 말해 보아라. 조금 전 대전으로 중추원 소속의 잡색꾼이 다녀갔는데 도 계의관이 혼절했다며 아주 혼비백산이었 습니다. 뭐? 도 계의관이? 화들짝 놀란 하개가 곧장 종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마침 빗소리에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독서 하던 종인은 곧바로 자리를 털었다. 이 늦은 시각에 어딜 가십니까? 종인의 독서를 방해할 수 없어서 억지로 옆에서 수를 놓던 춘영이 재빨리 앞을 막아섰다. 지난번에 도 종인이 그냥 갔다가 한 달 넘게 자신을 찾지 않아 애가 타던 그녀다. 어떻게 다시 찾아온 황제인 데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328 아끼는 신하가 혼절했다는구나. 하오나 폐하! 비까지 내려 길이 아주 미끄럽습니다. 비켜라. 옥체를 생각하시어 오늘은 이만 침수에 드소서. 의관들을 보내 시료하면 될 일입니다. 비키라지 않느냐. 일개 칠품 관리가 신첩보다 중요하단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종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일개 칠품 관리? 그가 춘영을 쏘아보았다. 그러는 넌 일품 명부라도 된다는 말이냐? 너 역시 내명부의 일개 칠품 비빈이 아니더냐?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다. 자신에게 수모를 당하던 도경수가 환궁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걸 안 후로 춘영도 속이 말이 아니 었다. 수많은 꽃을 제치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이젠 사내까지 상대해야 한다 니 기가 찼다. 내명부가 황실의 일원이라 하여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네가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이 조정에서 피땀 흘리는 관리들의 노력과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헌데 일개 칠품 관리라 하였어? 네 주제를 모르고! 신첩이 잘못하였습니다. 고정하소서! 저절로 무릎이 꿇어졌다. 필요 이상으로 화내는 종인이 너무도 무서웠다. 그간 무심하긴 했어도 대 체로 온유했는데 이토록 역정을 내니 오금이 저렸다. 비켜라. 하오나 오늘은 신첩과 함께 있어 주신다고.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너. 나지막한 음성에 춘영이 바르르 떨며 종인을 바라보았다. 짐을 가로막은 사이 그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네 목을 칠 것이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종인은 춘영을 매섭게 쏘아본 후 괴팍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남기고 간 향기는 그 어느 때보 다 독했다. 이것으로 김종인이 도경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분명해진 셈이었다. 춘영은 울부짖으며 도경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복수하는 구나 싶었다. 종인은 거의 비에 홀딱 젖은 채 중추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때마침 일하던 관리들이 놀라 황제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올렸는데 종인의 눈은 오직 도경수만 좇고 있었다. 안에 경수가 없음을 안 종인은 밖으로 나와 숙직실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때마침 경수가 쪽문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종인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보는 눈이 많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하개가 일대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젖으셨습니까? 경수는 아주 순진한 투로 물었다. 폐하. 네가 혼절했다고 들었다. 아픈 것이냐? 대체 어디가 아파? 어의는 네가 기력을 많이 회복했다고

329 했는데 혹 북녘의 삭풍이 네 뼈에 스민 것이냐? 일이 고되고 밤바람이 차서 탈을 잡았느냐? 잠시 어지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우장이 태성전에 찾아와 네가 혼절하였다고 전하였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냐? 잠깐 눈을 감고 쉬었는데 아무래도 그 아이가 놀라서 말을 부풀려 전한 모양입니다. 심려 끼쳐서 송구합니다. 그제야 가슴을 쓸며 종인이 품에서 경수를 떼어놓았다. 밖에 오래 있었던 듯 경수의 몸도 비바람처 럼 차가웠다. 열이 났느냐? 답답해서 산책이라도 하다 온 것이야? 경수는 종인의 추측에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마침 감찰 나리께서 찾아오셔서 잠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랬구나. 짐은 네가 정말 잘못된 줄 알고. 오늘은 영희당에서 머무신다고 들었는데 혹 괜한 소식으로 폐하의 단잠을 방해한 것은 아닙니까? 네가 쓰러졌다는데 단잠이 오겠느냐? 네가 없는 곳에선 무얼 하든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달려오시면 영희당에서 슬퍼할 것입니다. 그분은 내명부의 당당한 후궁이 아닙니까? 짐에게 최우선은 너다. 종인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경수가 맑은 눈으로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종인의 반듯한 이마에서 빗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경 수가 옷소매를 끌어 물기를 닦아주었다. 종인이 그런 경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나른하 게 이어졌다. 이대로 계시면 풍한에 걸리십니다. 얼른 영희당으로 돌아가 옷을 말리시고 강 수의와 못다 한 정 을 나누십시오. 짐을 도발하는 것이냐. 공연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네게 연촉을 내린 일로 짐이 너를 총애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여기서 더 거리 낄 것이 무엇이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야 욕을 먹든 돌팔매질을 당하든 상관없지만 폐하께선 아닙니다. 황후를 비 롯해 수많은 비빈들의 지아비임을 잊지 마십시오. 짐에게 이름 없는 자들은 필요 없다. 황후마마와 비빈들이 서운해 할 것입니다. 그분들도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짐이 아는 이름은 오직 도경수뿐이다. 경수는 종인의 차가운 손을 문질러 마음을 대신하였다. 하 공공께서 걱정하십니다. 보십시오. 어수가 이리 차갑습니다. 종인은 그래도 고집을 부렸다. 정히 영희당이 싫으시거든 침전으로 돌아가십시오. 우선 따뜻한 물에 목욕하시고 인삼차를 드신 후에 화로 곁에서 잠을 청하시면, 함께 가자. 중추원에 밀린 일이 있습니다. 가자. 선진들의 눈치가. 가자, 경수야. 울먹이는 듯한 그 음성에 경수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태성전의 문이 모두 잠겼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달은 깊이 숨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달을 대신 하여 촛불 하나가 침침하게 제 몸을 태웠다.

330 푹신푹신한 이불이 깔린 침상 위에 종인이 누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가만히 눈을 깜박일 뿐이다. 종인이 경수의 뺨을 어루만졌다. 애정을 듬뿍 담은 손길에서 꽃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의경궁에서, 종인의 탁한 음성이 적막을 불살랐다. 넌 찬열을 살려 달라며 바닥에 이마를 찧고 머리카락을 잘랐었지. 처소에서 그 소식을 듣고 미치는 줄 알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저는 폐하께서는 조금 더 복잡하고 많은 사정을 살피셔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모두 미쳐 있었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거나 상대를 이해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네 말이 옳았다. 너도, 짐도 서로에게 잘못한 일이었다.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도 못한 제가 할 말은 아니었지요. 신경 쓰지 마라. 짐은 약조를 지키지 못했고 찬열을 잃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아. 이제라도 잘못된 결과를 바로잡을 수는 있습니다. 종인이 손을 뻗자 경수가 얌전히 머리를 숙였다. 종인의 입술이 경수의 이마에 닿았다. 종인은 그대 로 경수를 끌어당겼다. 경수는 종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를 추억하며 산다. 네가 없는 동안 너와 보낸 시간만이 유일한 추억 거리였지. 해서 지난 삼 년간 뼈저리게 후회하고 깨달았다. 소중한 것은 반드시 내 힘으로 지켜야 함을 말이다. 저도 깨달은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언행에 더욱 신중을 기하고 폐하를 받들며 살 것입니다. 제 주제를 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겠습니다. 세상이 짐을 패악한 군주라 욕해도 상관없다. 너만 짐 곁에 있어 주면 돼. 그리하겠습니다. 황제의 후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수는 지난 삼 년 동안 통렬하게 깨달았다. 유배지를 전전하며 그가 얻은 진리는, 오직 황제의 권력만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저열한 사실뿐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휘정궁에서의 일은 참으로 미안했다. 폐하께서는 천자십니다. 오만한 신하를 꾸짖으셨을 뿐인데 무엇이 미안하십니까? 널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망토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애초에 짐이 널 그리 만들지만 않았어도. 후회하고 또 후회하셨다면서요. 그것으로 그때의 일은 끝난 겁니다. 돌아온 순간 과거는 모두 묻었 습니다. 더는 그런 생각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짐을 이해해 줘서 고맙다. 허나 당당하게 널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조차 여의치 않았어. 폐하의 마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고마워서 종인은 경수를 더 세게 안았다. 경수를 떠나보낸 동안 감히 매일 꿈꾸었던 순간인데 기쁘기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이대로 잠들면 또 꿈속에서 달아나던 것처럼 경수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옆에 있어도 타는 듯 목마르고 멀리 있는 듯 아득했다. 자신을 다독이는 경수의 손길도, 아침에도 폐하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그의 낮은 목소리도, 부드럽 게 만져지는 살결 하나하나까지 종인에게는 취하여 걷는 안개의 어딘가로 느껴졌다.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얼른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즈음, 종인은 스륵 잠이 들었다. 59. 천거( 薦 擧 )

331 우장이 도경수의 잡색꾼이 되었다? 예, 마마. 박 상궁의 말에 태후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형님을 잘 부탁한다며 자신을 찾아올 때는 언제 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가 싶었다. 태후는 예부좌랑 우지환을 불러다 놓고 따끔하게 혼낼까 하다가 관두었다. 우장이 제 형을 아꼈으 므로 두 사람이 끄나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떠벌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우장이 허튼소리라 도 내뱉는다면 우지환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면 된다. 어떤 일은 그녀에게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보다 급한 것은 황후를 비롯해 후궁들이 단 한 명도 회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태후는 어떻게 해서든 이 긴박한 사태를 해결하려고 골몰했다. 그러나 황제의 몸에도 이상이 없다니 너무도 해괴했 다. 이는 황제가 도경수를 총애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경수가 없던 사이에도 비빈들은 아기를 잉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법사를 불러 굿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태후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녀가 우장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우장은 착실하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불미스럽게 쫓겨났던 환관이 중추원의 잡색꾼으로 돌아온 것을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다행히 우장은 남의 시선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한창 황제의 총애를 받는 도경수의 직속이다 보니 괜스레 그까지 우쭐해져 일도 편했다. 형님에 게 따로 불려가 크게 한 소리 들었지만 당장은 명줄이나 다름없는 도경수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 도 없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니 옷을 따뜻하게 여미고 다니십시오. 난 괜찮다. 그보다 네 옷이 얇구나. 내게 안감으로 쓰기 좋은 가죽과 비단이 있어. 가기 전에 우리 집에 잠시 들러 받아가라. 아유, 아닙니다. 폐하께서 나리께 하사하신 것을 어찌 소인에게 주신다고 하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내게 충성하는 한 절대 섭섭하게 대하지 않겠다고. 하오나. 남는 물건을 나누는 것뿐이니 사양할 것 없다. 감사합니다, 나리. 우장이 헤실헤실 웃으며 등불로 경수의 앞을 비추었다. 한참 가다 보니 외전과 내전을 잇는 후원 근처였다. 이 길이 대개 외전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경수 는 자주 이곳을 이용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후궁들이 이 근처까지 나와 있었다. 보통은 넓은 내전 안에서 별로 움 직이지 않는 그녀들인데 희한한 일이었다. 얼핏 보니 커다란 나무에 뭔가를 걸고 있는 듯 보였다. 궁 녀와 상궁들이 그녀들을 에워싸고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우장이 경수가 가리킨 쪽을 힐끗 쳐다봤다. 아! 마마님들끼리 나무에 소원걸기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소원걸기? 예. 보름이면 궁에서 흔히 하는 일이지요. 주로 궁녀들이나 후궁들이 하는데, 소원을 적은 종이를 작은 향낭에 넣어 보름달이 뜬 밤에 나무에 거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소원이야 성총을 얻어 일생의 영욕을 맡기는 것 외엔 별로 없을 것이다. 당장은 궁에 황 손이 없으니 서로 먼저 황자를 낳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수는 미신을 믿지 않아서 흥미로운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이지러지는 달에 소원을 비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음을, 경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낭창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한 귀양다리 아닌가?

332 경수는 단번에 춘영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후궁 언니들을 거느린 채 거드름을 피우며 순화와 함께 걸어왔다. 경수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이오. 조정에 복귀했다는 소식은 들었소만.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도 계의관을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소. 춘영이 경수를 의미심장하게 쏘아보았다. 며칠 전, 도경수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영희당을 빠져나간 종인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렸 다. 그때 처음으로 종인이 화내는 걸 봤다. 도경수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겁박도 함께 였다. 여우 같은 놈! 황제가 영희당에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연극한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에 혼절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 거요? 예.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 작은 몸으로 공사다망하니 어련하실까. 덕분에 잘 견디고 있습니다. 묘하게 거슬리는 어투에 춘영의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네가 폐하의 용양군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내, 너를 이리 다시 만날 줄 알았으면 그 때 그냥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너처럼 천박한 것이 어찌 폐하 곁에 있을 수 있어? 나는 너 같은 가난뱅이가 정말 싫다. 자존심만 높아서는 주제를 모르고 날뛰거든. 폐하께서 너의 무엇에 홀리셨는지 모르겠지만 미몽에서 깨어나시 거든 너처럼 천한 것은 절대 곁에 두시지 않으실 거다. 죽고 사는 일이야 하늘에 달렸으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잠자코 듣던 경수가 엷은 미소로 받아쳤다. 춘영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내 아버지를 욕보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사내의 몸으로 천자를 꾀어 음양의 이치를 흩뜨리느냐? 저는 경성현령을 욕보인 적이 없거니와 폐하를 유혹한 적도 없습니다. 재미있는 말만 쏟는군. 너 때문에 내가 겪은 수모를 생각하면 이가 갈려. 피차일반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경수는 침착하게 입을 다물었다. 한 번만 더 내 처소에서 폐하를 빼앗아갔다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설령 황후라 해도! 일갈한 후 춘영은 도도한 걸음으로 후궁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경수는 무덤덤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물러나서 지켜보던 우장이 후다닥 뛰어와 화를 냈다. 아무리 후궁이라지만 나리는 엄연한 조정의 관리신데 저리 막말을 내뱉어도 되는 것입니까? 말은 뱉을수록 독이 돼. 중독된 것이 나 자신임을 깨달은 후에는 후회해도 늦는단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나리께서 제게 시키신 일 때문에 저 러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 이번엔 내가 먼저 도발했으니 저리 나오는 것도 내 탓이다. 그러니 더욱 화낼 필요 없어. 그렇다고 그리 가만히 계시면 어떡합니까? 우장은 마치 자기가 모욕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 삼 년 전에는 어떻게 황태 후의 끄나풀이 되어 태성전을 오갔는지 모르겠다. 괜찮아. 빼앗아 올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예? 가자. 우리 집까지 들르려면 서둘러야겠다. 시린 바람이 옷섶을 헤집고 들어왔다. 집에 가기 전에 시장에서 따뜻한 만두나 떡이라도 사 가야겠 다고 생각했다. 연수가 좋아할 것이다. 어사대의 총 책임자인 어사대부 자리가 비었다.

333 전 어사대부는 원래 소인파였다. 그러나 대인파의 꼬임에 넘어가 배반한 후 다시 대인파에 버림받 아 얼마 전 낙향했다. 이에 새로운 어사대부가 화두인 가운데 종인은 고야정에서 호기롭게 국화를 감 상했다. 조정이 시끄럽습니다. 조용한 날이 있었더냐? 절 부르셔서 꽃이나 보실 때가 아닙니다. 중추원은 어명을 각 관아에 하달하는 것이 일이다. 넌 계의관이니 짐과 함께 있는 것이 이상하진 않아. 중요한 일이라면 첨원사를 들이셔야 합니다. 짐이 중요한 일로 널 불렀음을 어찌 알았느냐. 폐하께서는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을 때 이곳을 찾으시죠. 종인은 씩 웃었다. 어사대부가 공석이구나. 어사대부는 대대로 소인파에서 장악해서 이번에도 소인파 중 적당한 인물 로 뽑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제가 조정 돌아가는 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추원의 일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요. 네가 어디 낙엽 굴러가는 것조차 허투루 읽을 사람이냐? 어사대를 물갈이한다고 했어도 여전히 대 인파 사람이 넘쳐나서 균형이 맞지 않다. 그래서 반드시 그 수장만큼은 소인파에서 뽑고 싶구나. 곰곰이 생각하던 경수가 제안했다. 박태흥 나리는 어떠십니까? 종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전에 널 데려오려고 꾸민 연극으로 많이 놀란 모양이더구나. 한서현으로 돌아갈 때 불편함이 없 도록 했지만, 간 뒤로 며칠 앓았다고 해서 어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이번에 다시 교안으로 부른다면 아마 그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경수는 짐짓 고심하는 척하더니 예전부터 생각했던 인물을 천거하기로 했다.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오면 이재관 나리는 어떠십니까? 차를 마시던 종인의 손이 멈칫했다. 이재관이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냐. 의귀비의 오라비이자 소왕 전하의 외숙이시죠. 몇 해 전 유배가 풀려 교안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자가 오래도록 유배 생활을 한 이유도 아느냐. 예. 하지만 그것이 폐하의 뜻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리 소왕이 폐태자이고 이재관이 그를 옹호했 다고는 하나 사적으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또 폐하께서는 그리 오래도록 죄인의 굴레를 쓰게 두진 않으시죠. 정확한 지적이었다. 이재관이 여태 적소를 떠돈 것은 태후와 장문견 때문이었다. 그들은 종인이 사 면령을 내릴 만하면 성인이 될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고 하거나 다른 죄목을 붙여 도성으로 올라올 수 없게 했다. 이태 전에는 이재관이 몹시 위독하단 소식이 있었고 소왕비가 둘째를 가져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이재관은 현재 교안 끄트머리에 있는 한적한 동네에서 소왕의 도움을 받으며 종옥과 살고 있었다. 네가 그자를 천거하는 까닭을 묻고 싶구나. 귀양 가기 전에는 젊은 나이에 태학관과 숭문관에서 이름을 날렸고 선제의 총애를 받으셨던 분이 라 들었습니다. 성품은 깐깐하고 한 번 그르다 여긴 것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아 적도 제법 많으셨다 고요. 더구나 십 년 넘게 외지 생활을 하셨으니 조정의 탁류와는 거리가 멀고, 돌아오면 과거의 재주 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실 테니 천거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구나. 오래도록 조정을 떠나 있었으니 돌아온다고 해도 무리해서 세력을 만들려고 하진 않겠지.

334 또 폐하께서 이재관을 등용하시면 종친인 소왕에게도 힘을 실어드리는 것이고, 형제가 돈독하면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의귀비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민가에까지 퍼져 있으니 기세를 몰 아 소왕을 온전히 폐하의 편으로 만든다면 일거양득 아닌지요? 섬세한 관찰에 종인이 무릎을 쳤다. 허나 그자에게 짐은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원수일지도 모르는데? 폐하를 보위에 앉힌 사람은 황태후입니다. 그래도 그자가 끝까지 강짜를 부린다면? 임명하시기 전에 독대하시어 이재관의 속을 떠보십시오. 만에 하나 불손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치십시오. 아주 과격한 발언이구나. 폐하를 위협하는 자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 가치가 없습니다. 분명하지만 미묘하게 경수답지 않았다. 하지만 종인은 경수가 자신을 위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고 해석했다. 귀양살이하는 동안 이재관이 폐하와 관련해 허튼소리를 떠든 적이 있었습니까? 모두 소문뿐이었다. 짐이 그를 사면하려고 할 때마다 장문견이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해괴 한 말을 들어놓으며 이재관이 짐을 저주한다고 했었지. 그럼 의혹을 풀 차례군요. 담담한 경수의 조언에 종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일 이재관을 입궁시키라고 했다. 금상이 외숙을 어사대부로 임명했다고요? 놀라 되묻는 준면에게 이재관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른 턱에 붙은 수염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 자신조차도 조금 전 황궁에서 내려온 교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제는 십여 년 만에 어명으로 관주성을 찾았다. 늠름하게 자란 황제는 이재관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는데, 대개 유배지에서 무얼 하고 지냈는가 하는 거였다. 이재관은 담담하게 현실을 인정했다. 그는 현재 가족과 소박하게 사는 데만 골몰한 상태였다. 그래 서 황제의 질문에 허심탄회하게 대답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조정에서 어사대부에 제수한다는 고신이 떨어져 매우 놀랐다.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안부 몇 마디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양금택목( 良 禽 擇 木 ) 이라는 말을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 둥지를 튼다. 준면이 낮게 웃었다. 외숙의 속내를 떠본 것이로군요. 예. 그래서 몸을 낮추고 최대한 말을 아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저 때문에 강산이 변하도록 고초를 겪으신 걸 생각하면 누운 자리가 가시방석입니 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오래도록 유배생활을 한 것은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금사에 사 년이나 계시도록 했으니 열 번을 죽어 마땅합니다. 이제 돌아오셨으니 지난날은 잠시간 묻어두셔야 합니다. 하오나 전하께서 이리 쇠약해지신 것을 보면 전전반측하여 잠결에도 눈물이 쏟아집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엿하게 가정도 꾸렸고 남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는 것을요. 여기서 더 바라면 욕심이겠지요. 그러면서도 준면의 단정한 이마에 근심 섞인 주름이 잡혔다. 한편으론 걱정입니다. 오래도록 외숙을 죄인으로 대했는데 갑자기 어사대부로 삼다니요? 전 어사대부가 낙향한 후 그 자리가 비었는데, 폐하께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싶어 어사대부는 무

335 조건 소인파 사람으로 뽑겠다고 하셨답니다. 유배 가기 전에 관직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덜컥 당상관이 되었으니 조정 안팎으로 말이 많을 것 입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도리어 청빈한 시선으로 조정을 단속하여 당신께 힘이 되 어 달라고까지 하셨다고요. 금상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데 그런 말을 떠벌렸다고요? 들은 얘기입니다. 누구에게서요? 중추원 계의관 도경수입니다. 준면이 작게 입술을 오므렸다. 일전에 황제가 연촉을 내린 신하가 있다고 해서 제법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경수란 이름을 확실히 기억해 뒀는데, 알아보니 박찬열과 죽마고우였고 얼마 전 삼 년간의 귀양살이를 접고 도성에 복귀했다고 했다. 예전에 종대에게 물으니 김종인이 도경수를 몹시 총애할 뿐만 아니라 종대 본인도 도경수에게 본의 아니게 도움을 준 적이 있단다. 몇 년 전, 자신궁에서 석고대죄를 올리던 도경수를 구하려고 황제가 서찰을 보내 황급히 입궁을 청한 것이다. 당시 타인에게 관심 없는 김종인이 별스런 일을 벌였다고는 여겼지만 대수롭진 않았다. 그러나 지 금 보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재관은 도경수를 알게 된 경로에 대해 설명했다. 아내인 종옥이 경성현에 있을 때 도경수의 보수 주인이었고, 도경수는 종옥이 이재관을 다시 만나는 데 일조한 사람이었다. 도경수에 대해서는 아내의 입을 통해 몇 마디 전해 들었을 뿐 잘 알지 못했는데, 황제를 만나고 온 날 그가 집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사정을 말해 줬다고 한다. 잠자코 얘기를 듣던 준면은 버릇처럼 콧잔등을 찡긋하고는 중얼거렸다. 도경수라. 역모로 처형당한 박찬열의 절친한 벗인데 황제의 곁에서 총애를 받는다니 희한한 사람이다. 더구나 한때 대인파의 사주를 받고 황제의 침전을 들락날락거리던 사관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대인파라면 질 색하는 황제의 곁에 찰싹 붙어 있다니 모양새가 아주 미묘했다.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내자의 말로는 정의롭고 공손하며 학문에도 통달한 사람이라더군요. 어련하겠습니까? 과거도 치르지 않은 채 예문관과 중추원을 뚫고 금상의 연촉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총애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조정이 그 아이 입김에 좌우될 것입니다. 그래 봤자 칠품 관리일 뿐입니다. 그자가 용양군이 되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준면은 희고 고운 두 볼을 살짝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죽은 누이, 의귀비 이씨와 판박이였다. 폐하께서 계의관을 그 정도로 총애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박태흥이 교안으로 압송되었을 때 그자도 함께 왔는데 벌을 받기는커 녕 오히려 관직이 몇 품계나 초자되어 조정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총애의 상징인 연촉 을 받았으니 현재 금상의 눈에 도경수는 천금칠보일 겁니다. 이재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하품 관리인 줄 알았는데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를 눈여겨보십시오. 만약 외숙께서 조정으로 복귀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경수의 입김이 작용했다 면 당분간은 그 아이 옆에 있어야 할 겁니다. 일개 칠품 관리에게 조정이 농락당한다면 그야말로 남우세스러운 일 아닙니까? 너무 가까이하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마세요. 필요하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거리를 두 는 것이 좋습니다. 정치는 외숙께서 더 능수능란하시지 않습니까? 나볏한 손끝이 찻잔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재관은 조카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336 60. 자락( 自 落 ) 밤공기가 몹시 찼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만 불면 낙엽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궁 곳곳에서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유양전에서 일을 보던 종인은 찌뿌드드한 몸을 이완하며 후원을 산책했다. 종인은 요즘 자주 후원 을 거닐었다. 어의 송기석은 중독으로 몸이 상해 운동으로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여름에는 얼른 겨울이 왔으면 하고 바라지만 막상 날이 추워지자 여름날 호수에서 뱃놀이하던 시 절이 그리웠다. 경수와는 한 번도 연꽃 핀 호수 사이를 누빈 적이 없어서 종인은 내년에 꼭 같이 놀 자고 꼬드겼다. 그러자 경수가 물었다. 백창헌이란 곳이 절경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찬열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사이가 아주 안 좋을 때 꺼낸 얘기였다. 청신의 고향인 능주에 하얀 백 매가 피는 백창헌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흰 꽃잎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보는 사람의 넋을 뺀 다고 했다. 짐은 네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줄 알았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새겨듣고 있습니다. 종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경수의 손을 잡았다. 밤바람이 찹니다. 오래 걸으셨으니 이만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조금만 더 걷자. 여긴 후궁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이러다 비빈들이 보기라도 하면. 예나 지금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전 잃을 것이 없지만 폐하께선 아니니까요. 폐하께서 저 때문에 구설에 오르는 것이 싫습니다. 그 마음이면 된 것이다. 종인이 경수의 손을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문득 드리운 수목 사이에서 인기척이 났다. 하개와 배행하는 무리도 멀리 떼놓고 왔는데 무슨 소린 가 싶었다. 게 누구냐? 대답이 없었다. 누가 감히 도둑고양이처럼 풀숲에 숨어 천자의 행적을 좇느냐? 날을 세워 물으니 어둠 속에서 강춘영이 쭈뼛거리며 제 시녀와 모습을 드러냈다. 경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춘영을 빤히 쳐다봤다. 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 종인이 정말 의외라는 듯 묻자 춘영이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산책을 나왔습니다. 산책? 근자에 폐하께서 이곳으로 자주 산보를 놓으신다 하여. 짐이 이 시각에 여기 오는 줄은 어찌 알고? 송구하옵니다. 신첩은 그저 폐하가 너무 그리워서. 감히 짐의 행적을 추궁하기라도 한 것이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춘영은 자신을 매몰차게 밀치고 떠나던 날의 종인을 떠올렸다. 그때 얼굴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식 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경수는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하던 강춘영이 종인 앞에서 초라하게 바들거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전의 호기는 어디 가고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폐하. 밤이 깊었으니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337 기다려라. 짐이 아직 그대와 얘기 중이었다. 하오나 수의께서 폐하를 마중 나오신 듯한데. 경수가 맘에 없는 소리를 늘어놓자 종인은 속이 탔다. 폐하께서 최근 국정으로 무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감히 바라건대, 오늘은 이만 신첩의 처소로 드 셔서 노곤함을 달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네가 지금 짐을 농락하려 함이냐. 예? 무슨 저의로 짐의 행적을 추궁하여 길목에서 버티고 선 것이냐. 너보다 품계가 낮은 후궁들도 이 런 전례가 없거늘, 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짐을 이리 우습게 아는 것이야? 아닙니다, 폐하! 신첩은 정말로 폐하가 그리워서 매일 이곳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뿐입니 다! 우연? 네가 작정하지 않고서야 마주칠 리가 없지 않나! 춘영은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우연입니다. 신첩을 믿어주십시오! 너는 도무지 반성을 모르는군. 황후가 그리 타이르는데도 후궁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않음은 물 론이요, 이젠 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까지 하나? 오해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첩의 말을, 일주일간 금족령을 내릴 것이다! 예?! 이 시간 이후로 수의 강씨는 처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다. 폐하! 신첩에게 어찌 이리 가혹하십니까? 넌 무얼 하고 선 것이냐. 네 주인을 얼른 처소로 데려가지 못할까! 순화를 다그치자 그녀가 찔끔하여 춘영을 일으켜 세웠다. 춘영은 울면서 퇴장했다. 종인은 그녀가 사라진 쪽을 쏘아보며 혀를 찼다. 고얀 것. 오냐오냐했더니 이젠 짐의 뒤를 캐고 다니는구나. 그것이 어디 강 수의의 잘못이겠습니까. 폐하께서 후궁에 자주 납시질 않으니 그리움이 지독하게 쌓인 탓이지요. 그럼 전부 짐이 자초한 일이란 말이냐? 비빈들을 골고루 찾으신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짐에겐 이름 없는 것들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일로 매번 되풀이되는 싸움을 벌였다. 종인은 경수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경수는 후사를 위해 후궁에 자주 들러야 한다고 타일렀다. 매번 종인의 승이지만 싸움은 늘 피곤했다. 정 싫으시거든 현수궁에라도 자주 용안을 비추십시오. 훗날 폐하와 합장되는 분은 황후마마 한 분 뿐입니다. 꺼림칙한 얘기에 종인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짐은 네가 아니면 다 싫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느냐? 어린애 같은 투정에 경수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어찌 웃는 게야?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을 가졌으니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군요.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이라니? 폐하의 마음이요. 그제야 종인도 피식 실소를 뿜었다. 경수의 입 발린 소리 하나에 단번에 맘이 풀어졌다. 우린 서로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있구나. 종인은 경수의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338 춘영은 태후 앞에서 어린애처럼 훌쩍거렸다. 태후는 이재관이 조정으로 복귀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어린 며느리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알리는 것에 피로를 느꼈다. 폐하께서 외간남자 앞에서 신첩을 그리 면박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금족령이 풀리기 무섭게 자신궁으로 쪼르르 달려와 이러는 걸 보면 강 수의는 내명부를 다스릴 재 목은 아니다. 지방 수령들의 여식도 뽑아야 해서 반반하고 총명해 보이기에 뽑았더니, 남의 눈에 들고 싶어 툭하면 소란을 일으키는 사고뭉치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황제가 귀엽다며 두둔하기에 지아비의 마음만은 꽉 붙들어 맨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도 계의관이 신첩에게 앙심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경성현에 있을 때 일을 풀어놓는다. 그나마도 자신이 잘못한 것은 쏙 빼놓고 온전히 경수만 나쁜 사람으로 몰고 가는 내용이었다. 가만히 듣던 태후는 여논어 필사나 마저 하라며 순화에게 먹을 제대로 갈라고 명령했다. 춘영은 다 시 훌쩍이며 글자를 써 내려갔는데, 도무지 입은 쉴 기미가 아니 보였다. 흑. 신첩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영희당에 납시지 않는 것도 다 도경수 그자 때문입니다. 그자가 오기 전까지는 내명부가 참 화목했습니다. 헌데 그자가 오고 나서 부터 폐하께서 현수궁에도 아니 가시니 후궁은 더 싸늘해졌답니다. 너희가 분발하면 될 일이다. 사내의 마음이 강물과 같은데 흐르는 것을 어찌 붙들 수 있느냐? 한마디도 안 하던 태후가 화첩을 넘기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도경수는 만만히 봐서는 안 될 자다. 허나 네가 황자라도 낳으면 달라질지도 모르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게 아닙니까? 도경수 때문에 폐하께서 신첩에게 단단히 맘이 돌아서셨는데 영희당에 오실 생각이나 하시겠습니까? 그렇다고 주저앉아 눈물 바람만 보일 것이냐? 신첩도 하루빨리 용종을 잉태해 사직에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나름대로 책도 읽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폐하께서 어미의 몸이 기름져야 한다고 내리신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지만 도무지 아이가 들어서질 않는걸요. 문득 태후는 꺼림칙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화첩을 덮고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주상께서 네게 약을 내리신다 하였느냐? 공기가 변하자 눈치 빠른 춘영이 냉큼 붓을 내려놓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태후마마. 신첩뿐만 아니라 다른 언니와 동생들에게도 같은 약을 내리시는 것으로 압니다. 더 설명하라는 듯 태후가 춘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여인의 몸에 좋은 약으로 내의원에서 직접 올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신첩만 먹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명부 여인 모두에게 하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 약은 주로 언제 먹느냐? 삼시 빼지 않습니다. 혹 시침을 들고 사흘 안에 다른 탕약을 먹은 적이 있었느냐? 마마께서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춘영이 순진하게 되묻자 태후가 발끈하여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즉 내게 말했어야지! 어, 어찌 그러시옵니까? 됐다. 넌 이만 처소로 돌아가라. 예에. 신첩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춘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궁을 빠져나갔다. 박 상궁! 당장 주상께 내가 뵙잔다고 전하게! 자초지종도 못 듣고 끌려온 종인은 희미하게 남은 분내를 맡고는 밖에 있던 사완에게 은근히 말을 던졌다.

339 짐이 오기 전에 손님이 들었던 모양이군. 영희당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종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인사를 하니 냉랭한 기운이 피부로 느껴졌다. 태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태후가 입을 열었다. 긴히 여쭐 말이 있어 오시라 청했소. 무엇입니까. 주상께서 황후와 비빈들에게 따로 내리시는 약이 있다지요? 순간적으로 종인의 명치가 꽉 조였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다. 그 탕약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소? 장차 아이를 배태할 어미의 몸을 만드는 약이오? 종인은 가만히 입을 닫았다. 그러자 태후는 화가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나직이 되물었다. 그 탕약의 정확한 용도가 무엇이오? 시침 후 사흘 안에 다른 탕약을 내리신 것도 사실이오? 주상! 태후마마. 소자가 황후와 비빈들에게 내린 것은 어미의 몸을 기름지게 하는 탕약이 맞습니다. 종인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태후는 자신이 잘못 안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삼 년이 넘도록 내명부 여인들이 단 한 명도 회임하지 못한 것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정녕 아이 밸 몸을 만드는 약이 확실하오? 예. 비빈들의 체질이 모두 달라 담당 의관들에게 정확한 진맥을 받은 후 그에 알맞은 처방전을 쓰 게 하였습니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시거든 내의원 의관들에게 약방문을 따로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리 침착하게 나오는데 더는 추궁할 명분이 없었다. 태후는 잠시 입술을 말더니 다시 물었다. 허면 시침 든 후궁에게만 따로 내리셨다는 탕약은 무엇이오? 혹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소? 황후가 회임하기 전까지는 다른 비빈들에게서 용종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너무도 담담하게 내뱉어서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누구 몸을 빌려 태어나든 다 존귀한 황자요! 설령 궁녀의 몸에서 아이가 잉태된다 하더라도 황후 에게 입적시키면 될 일을 어찌 초장부터 싹을 자르는 것이오? 소스라치게 놀란 태후는 종인을 잡아먹을 것처럼 보였다. 적손이어야만 황후와 아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후는 종인이 서자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이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았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침 든 후궁들에게 그런 탕약을 내리는 것은 아니 되오. 주상이 언제까지 청춘일 순 없 소. 자손을 많이 보는 것도 주상의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지. 황후가 아니면 싫습니다. 종인은 단호했다. 보여에게서 적손을 보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지금 황후에게서도 첫 자손을 보지 못한다면 소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후는 기가 막혔다. 이것은 고집이 아니다. 억지였다. 도경수에게 빠져 있는 것을 모를 줄 아는가. 그래서 현수궁에도 걸음을 잘 하지 않는데, 황후에게서 아들을 보고 싶다고 둘러대는 것이 여간 가소로웠다. 그런데 표정만은 깨끗하고 진지해서 뭐라고 닦 달할 수도 없었다. 마마께서 항상 소자를 위해 주시는 것은 잘 압니다. 하여 매번 소자를 한 번만 더 이해해 줄 수 없겠느냐고 여쭙는 것도 면구합니다. 그럼에도 소자, 이번에도 절절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면 아니 되 겠느냐고 청합니다. 허! 회임할 후궁을 선택하는 것은 황제의 권한이 아닙니까?

340 그렇긴 하오만, 나는 황손이 지극히 적어 걱정이 태산이라오. 주상이 삼년상을 치르느라 새 황후를 맞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 더구나 황실에서 아이가 태어난 지 언제인지 모를 지경이오. 주상. 정녕 종사를 이을 생각은 있는 것이오? 종인은 측은해 보이는 눈빛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마마의 뜻이 정 그러하시니 소자의 욕심을 버리겠습니다. 마마께서 소자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 쓰시는데 늘 소자의 뜻만 내세우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순순히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자 태후는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러 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황제는 식언하지 않는 법이니 본인 입으로 내뱉은 말을 번복할까 싶었다. 영비와 혜빈이 후궁 중에서는 가장 총명하고 얌전하더군. 황후가 아니라면 둘의 처소를 찾아주시 구려. 그만하면 미색도 일품이지 않소? 용모로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영명하시니 당연히 그러시겠지. 후궁을 고루 찾으셔야 좋은 내조를 받을 수 있소. 예. 명심하겠습니다. 내, 주상을 믿겠소. 뺨을 쳐라. 소름 끼치도록 무심한 어명에 순화는 벌벌 떨었다. 죽고 싶으냐. 추상같은 엄명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이내 아래로 빠르게 내렸다. 소 녀의 손바닥에서 주인의 여린 살결이 매섭게 마찰을 일으켰다. 춘영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풀 썩 쓰러졌다. 다시 쳐라. 싸늘한 어조에 순화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 부디 노비의 뺨을 치게 해 주소서! 순화를 가만히 쏘아보던 종인은 나직하게 명했다. 너는 이만 나가보아라. 누구라도 짐을 방해할 시엔 가만두지 않으리라. 안절부절못하던 소녀는 별수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자 춘영은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지아비가 아닌 황제의 위엄에 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 다. 종인은 바닥에 무릎 꿇은 춘영을 노려보았다. 눈빛 하나하나에 가시가 돋쳐 춘영의 가녀린 몸뚱이 를 갈가리 할퀴었다. 짐이 네게 금족령을 내린 것은 네 죄를 깨닫고 반성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헌데 넌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자신궁으로 달려가 전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춘영은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끌어올리며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다. 구슬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얼굴은 점점 볼품없어졌다. 너는 짐과의 금석 같은 맹약을 어겼느니라. 다른 후궁들은 발이 없어 자신궁에 가지 않는 것이며, 입이 없어 짐과 한 약조를 깨지 않는 것이더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춘영은 끅끅 울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동안 네가 황후를 비롯해 다른 비빈들에게 패악을 부리고 못되게 굴어도 귀엽다며 두둔했다. 그 것은 네 솔직하고 명랑한 매력을 높이 산 까닭인데 너는 그런 짐의 사랑에 조금도 보답할 줄 모르는 군. 잘못하였습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시어요. 가까스로 입술을 떼고 울음 섞인 용서를 빌었으나 종인은 빙벽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짐을 볼 때마다 그 소리니 지긋지긋하군. 넌 반성의 기미도 없을뿐더러 매번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짐과의 약조를 어기고 자신궁에 네가 마시는 탕약에 대한 얘기

341 를 흘린 것은 용서할 수 없다. 태후께서 황자를 낳으면 폐하의 대우도 달라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혹해서 순간적 으로 실수한 것입니다. 절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폐하. 흑흑. 이미 물은 쏟아졌고 말은 네 혀를 떠났느니라. 네게 평소에도 입조심 하라고 그리 일렀거늘 너는 짐의 조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 춘영 자신도 종인이 주는 탕약에 불임약이 들어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번 일로 탕약의 정체 를 알게 되었다고는 해도 다른 내명부 여인들과 사실을 나눌 수도 없었다. 너는 군주와의 약조를 어기고 함부로 혀를 놀려 화를 자초했다. 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지 조 없이 입을 놀려 짐과 이 나라 전체를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넣을 성품이로다. 또 몇 번이나 반성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개선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괘씸하고 죄가 크다.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춘영 쪽으로 몇 걸음 가서는 냉랭하게 내뱉었다. 수의 강씨는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군주를 업신여기므로 직첩을 회수하고 어귀상궁으로 강등한 다. 폐하! 또한, 죄를 뉘우치지 않고 황실의 체면을 깎았으니 매일 유시( 酉 時 )에 처소 앞마당에서 소복 차림 으로 꿇어앉아 여훈을 낭독해야 할 것이다. 슬슬 칼바람이 불어 닥칠 동절이었다. 마당에 소복만 입고 여훈을 읽으라는 것은 매우 가혹한 처 사였다. 이는 언젠가 백현에게 경성현에서 경수가 춘영으로 인해 당한 수모를 들은 것이 생각난 탓이기도 했다. 종인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던 소녀가 어린 나이에 그토록 되바라진 짓을 꾸몄다는 데 충 격 받아 더욱 영희당을 멀리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 시엔 쥐도 새도 모르게 네 숨통을 끊을 것이다. 춘영의 턱 끝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61. 구원( 舊 怨 ) 십칠 년 전 초록빛 실타래가 드리워지고 청명한 하늘에 향기로운 꽃잎이 흩날리던 날, 황태자 책봉 식이 거행되었다. 희조전 앞에 효경제가 서 있었고 아래로는 문무백관이 늘어섰다. 붉은 융단이 깔린 길을 따라 예복을 입은 어린 황태자가 의젓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태자의 생모가 사는 휘정궁으로 진귀한 하례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덕비 이씨는 물목을 정리하느라 바쁜 태감과 상궁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찬란한 햇살 아래에 선 채 의식이 끝 나는 대로 이곳을 찾을 지아비와 아들을 기다렸다. 월궁항아처럼 고우십니다. 궁녀의 칭찬에 덕비의 입가에 맑은 초승달이 걸렸다. 오늘을 위해 예복을 새로 지었다. 금실로 채운과 국화 무늬를 새기고, 머리에는 진주 장식을 비롯해 장미무늬 비녀와 커다란 작약을 꽂아 장식했다. 그러자 수더분한 그녀의 용모를 화려하게 빛내 주었 다. 덕비가 손가락에 끼운 매화무늬 백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몹시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뒤, 내수소 태감이 교지를 들고 찾아왔다. 황태자의 생모인 덕비 이씨를 귀비에 봉하고 의( 宜 ) 라는 봉호를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책봉식은 한 달 후 길일에 치러질 것이라고 했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얻은 아들이 황태자가 된 것도 모자라 본인은 후궁 최고 서열에 등극하게 되었 으니 가문의 영광이었다. 덕비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마마. 좋은 날 눈물을 보이시면 하늘이 시기한답니다. 상궁이 미소를 띤 채 덕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눈가를 찍으며 이씨는 물감처럼 선명한 하늘을 올 려다봤다. 인생에 다시없을 행복한 날이었다.

342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이씨는 의귀비가 된 지 이 년 만에 자신의 처소에서 후궁들과 다과를 들던 중 급작스럽게 피를 토하며 죽었다. 때마침 효경제는 지방 시찰을 나가 궁을 비운 상태였다. 이씨는 자신을 비웃는 황후와 숙비 손씨에게 저주를 퍼붓고 숨을 거두었다. 숙비는 한때나마 친자 매처럼 지냈는데 첫 번째 유산이 그녀와 연관된 것을 알고 나서는 원수가 되었다. 그녀의 두 아들을 아껴주었건만, 믿음을 배반으로 보답해 치가 떨렸다. 이씨는 끝내 숙비의 전부인 황자들에게도 저주를 내렸다. 그로부터 밤바다처럼 새카만 적요 속에서 비린내 나는 피바람만 불었다. 동궁 전하께서 실성하셨다면서? 생모가 누구 소행인지도 모른 채 독살됐는데 그 여린 성정에 충격을 아니 받고 배기나? 모르긴 뭘 몰라? 황후마마께서 근자에 폐하께 태자 전하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흘리고 계신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희한해. 누가 황제가 되든 어차피 황후마마는 황태후의 지위를 누리실 텐데 어째서 지금의 태자 전하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일까? 그걸 몰라서 묻나? 돌아가신 의귀비의 아들이니 그렇지.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내의원 의관들은 태자가 심질( 心 疾 ) * 에 걸렸다고 했다. 눈에 띄게 말수가 적어지고 헛것을 보거나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니 그들의 진단은 옳았다.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으나 예 전의 생기는 사라지고 죽은 생선처럼 멍하게 창밖을 볼 뿐이었다. 효경제는 몹시 우려했지만 황후가 제아무리 귀밑머리에서 태자에 대한 악독한 말을 쏟아도 믿지 않 았다. 황태자는, 그의 맏아들인 준면은 사랑하던 의귀비가 남긴 단 하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대연의 동궁은 광인이다. 어느덧 백성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효경제는 꿋꿋하게 아들을 보호했다. 예전 보다는 대화가 줄었지만 어미가 죽은 충격에서 벗어나면 예전의 총명하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고 믿 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사절단을 보내고 환궁하니 대소신료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장문견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효경제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폐하! 태자 전하께서 황후마마를 시해하려 했습니다! 현수궁으로 달려가니 몹시 어수선한 현장이 적나라한데, 흐트러진 옷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황 후가 처소에서 울고 있었다. 바닥에는 뭘 쏟았는지 수흔이 넓게 번져 있었고 잔 같은 것이 깨져 있기 도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황후의 심복인 박 상궁이 답하길, 마마께서 쉬고 계시는데 만취한 태자 전하께서 오시더니 다짜고짜 작문을 검토해 달라시며 마마 께 종이를 던지셨습니다. 마마께서 내용을 읽으시고는 사색이 되어 술이 깨거든 다시 오라고 하셨는 데 갑자기 욕설을 퍼붓고 마마의 멱살을 움켜쥐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탁자 위에 얇은 책자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효경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탁자에 놓인 것을 펼쳐 보았다. [황후가 황태자의 생모를 까닭 없이 죽였다. 부황은 이를 알고도 묵도하였으니 하늘 아래 떳떳한 군주가 아니다. 내가 보위에 오르면 내 생모를 죽인 그들을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내 어머니께서 받 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오장육부에서 피를 쏟게 하리라!] 반박할 수 없는 아들의 필체에 효경제는 사색이 되었다. 어미를 잃은 슬픔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분노로 바꾸어 어버이를 한꺼번에 죽이겠다고 씩씩대는 행 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광인을 동궁에 계속 앉혀서는 안 된다는 조정의 반발도 심해지던 차였다. 효경제는 진노하여 태자를 동궁에서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목격자가 워낙 많아 태자가 도망칠 구멍 은 없었다. * 충격의 의한 정신분열증

343 결국, 황태자 김준면은 부황과 모후를 시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순금사에 갇혔다. 추상같던 황태자 지위는 빼앗겼고 폐서인이 되어 차디찬 순금사에서 어린 목숨을 이어가야 했다. 준면의 나이 열두 살 의 일이었고, 그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는 사 년이 흐른 뒤였다. 차기 지존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역적이나 가는 순금사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며 목숨을 연명 하게 된 준면. 건강했던 몸은 점차 볼품없이 말라갔고 신경도 쇠약해졌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되뇌었다. 이 문을 나서면 날 이 자리로 끌어내린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순금사에서 나온 후 막냇동생이자 새 황제가 된 종인의 배려로 겨우 살아남았다. 칠일 밤낮을 극심하게 앓은 끝에 수월당이라는 작은 집을 하사받고 변두리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자신을 지켜줄 방패막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준면은 서두르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인간은 오직 기다리기만 하면 된 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황후, 아니 태후 장씨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마저 누명을 씌워 순금사에 처박아 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긴 세월을 버텼다. 얼마 전엔 하나뿐인 혈육 이재관이 조정으로 복귀했다. 왠지 자신을 도와줄 것만 같은 귀인도 나타 났다. 지겹게 갈던 칼이 스릉스릉 울어 젖혔다. 태후께 크게 혼나셨다고요? 하개가 그러더냐? 먹을 갈며 경수는 웃기만 했다. 종인은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는 다시 상소에 집중했다. 국모의 자리를 오래 비우신 끝에 맞은 지어미십니다. 현수궁을 자주 찾아주시고 내명부에 잡음이 일지 않게끔 여러 후궁들도 잘 다독여 주십시오. 흥. 하루빨리 후사를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보위가 더욱 굳건해집니다. 이러다 폐하의 대에서 절손할 까 봐 두렵습니다. 벼루를 내밀자 종인은 무심한 손길로 먹물을 찍어 두루마리에 뭔가 적어 내려갔다. 이맘 때 쯤이면 늘 올라오는 호조의 긍휼 상소였다. 아무리 쌓아둔 양곡을 풀어도 겨울이면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귀족들이 틀어쥔 재물의 십 분의 일만 풀어도 도성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 나가는 자들이 반은 줄어들 것이다. 폐하를 꼭 닮은 황자를 얻으신다면 연의 만년대계가 창창할 것입니다. 하다하다 이젠 내명부 일까지 참견하려느냐? 폐하의 보령이 어느덧 스물넷입니다. 여태 후사가 없으니 나라 전체가 근심하고 있습니다. 자신궁 에서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네가 현수궁으로 들어올 게 아니라면 그런 이야기는 싫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여인이었다면 오히려 성격이 강하다고 안 좋아하셨을 거면서. 너처럼 다정하고 사리분별 잘하는 아이라면 누구의 사랑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지. 다정하고 총명한 사람은 넘치는데요. 짐과 말이 통하는 사람은 너뿐이다. 비답을 다 쓴 종인은 시린 손을 호호 불었다. 경수가 붉은색 비단 주머니로 감싼 손난로를 건넸다. 내명부엔 태후가 뽑은 측근들이 넘쳐난다. 현수궁의 주인을 뽑고 싶지 않았지만 태후를 견제하려 면 한 수 접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야. 이만큼 참았으면 됐지, 짐이 언제까지 저들의 비위를 맞 춰야 하느냐? 혹 저 때문에 그러십니까? 종인은 대꾸하지 않고 수로의 자그마한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344 저를 아껴주시는 마음은 감격해 마지않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천자십니다. 폐하께서 책무를 다하지 않으시면 세인들이 제게 손가락질할 겁니다. 너는 짐이 다른 사람과 동침하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보는 것이 좋으냐? 제가 사내로 태어났으니 별수 없는 일 아닙니까. 냉정하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죠. 조금 서운했지만 경수의 말은 조금도 그르지 않았다. 그래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을 어쩌랴. 억지로 동침한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후사를 보고 싶 은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태후가 뽑은 여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노력해 보겠다. 토라져서는 괜히 다 읽은 상소만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다. 경수는 종인이 대답만 넙죽넙죽 하고 계속 내전은 등한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두 번씩 자극을 줘야 한다. 그래야 어렵게 얻은 것을 다시 놓치지 않으려 더욱 자신에게 집중할 것이다. 폐하. 진왕 전하께서 입시하셨습니다. 자신궁에 문안을 오는 날이었다. 요즘 전하와 자주 만나시니 보기 좋습니다. 몇 안 되는 종친이니 잘 다스려야 궁도 편하다. 영명하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밖에 날이 몹시 춥더구나. 곧 눈이 내릴 듯하니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나오자 밖에서 종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수는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종대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하 공공. 혹 폐하께서 찾으시거든 오늘은 당번이 아니라 일찍 집에 갔다고 전해 주십시오. 아우가 가벼운 풍한에 걸려 약을 사 가야 합니다. 알겠네. 하개가 웃으며 경수를 배웅했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경수가 사라진 쪽을 의식한 후 종대가 태성전 안으로 향했다. 궁문 밖에서 기다리니 한참 후에 진왕이 타는 마차가 나왔다. 경수가 급히 마차를 세우고는 마부에 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종대가 마차 안에서 급히 쪽지를 살폈다. [궁 안팎으로 이목이 많습니다. 소인이 인보당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몇 번 눈빛을 주고받은 것뿐인데 이토록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니 도경수의 행동거지가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수가 찾아왔다. 그가 올 것을 알아서 종대는 대문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진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청지기가 경수를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 급히 허리를 숙였다. 몇 년 전, 인보당을 찾아와 진왕에게 약재를 전해 달라고 한 태학관의 유생이었다. 그런데 제 주인이 손바닥까지 맞비비며 초조하게 기다 리는 객으로 다시 나타나자 괜스레 긴장되었다. 경수가 청지기에게 무심하게 눈길을 한 번 주었다. 지위가 다르니 사람을 대우하는 것도 이렇게나 다르다. 입안이 몹시 썼다. 따르는 사람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핀 후 종대는 경수와 인보당으로 들어갔다. 인보당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인데 황궁의 웬만한 전각보다 크고 화려해서 과연 태후의 총애를 받는 황자답다 싶

345 었다. 경수는 객실로 안내되었다. 둘러보니 희귀한 장식물이 많았다. 대개 그림과 화병, 도자기 같은 것이 었는데 치밀할 정도로 적재적소에 자리하고 있어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경수가 눈을 굴리며 안을 구 경하자 종대가 멋쩍게 웃었다. 다과를 내오너라. 시녀들이 먹음직스러운 과자와 따뜻한 생강차를 가져왔다. 고급 생강인 듯 향기가 진하면서도 거북 스럽지 않았다. 다기는 민무늬 백자였는데 소박하고 정취가 있었다. 예전에 소인이 곤경에 처했을 때 친히 자신궁에 가셔서 태후마마를 달래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인 사가 늦었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 일이라면 괘념치 말게. 폐하의 부탁으로 그리한 것이지, 딱히 자네를 도우려고 한 일은 아 니니까. 또 태후께서 아무리 근본을 바로 세우려고 하신다 하셔도 내전에서 예문관 사관에게 석고대 죄를 올리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네. 그래도 덕분에 몸이 덜 힘들었습니다. 빗속에서 초라하게 구겨져 있던 그때가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었네. 이렇게 얘기해 보는 것은 처음이네만. 소인도 진왕 전하의 고매한 인품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대문에 걸린 시청사우만 봐도 전하의 호기 와 멋이 느껴집니다. 종인이 진왕이라고 속였을 때 인보당을 찾아와 대문에 걸린 문구를 보았다. 흔해빠진 춘접 대신 시 가 적힌 것을 보고 참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고하노니 반드시 기억하라. 어디서나 즐김은 평생 득이 되니라. 삶에 달관한 인상을 받았 다면 소인이 옳게 본 것인지요? 종대는 찻잔을 기울이며 미소 지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가 손님을 초대한 것도 굉장히 드문 일 이지만 어쩐지 긴장해서 더욱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황족 이라 분위기에 민감하고 스스로 혀를 단속하는 듯했다. 소인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셨죠? 아까 태성전 앞에서 그리 보이셨습니다만. 망설인 끝에 종대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실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네. 소인을요? 그분께서는 아마 자네도 그분을 만나고 싶어 할 것이라고 하셨지. 누가요? 바로, 날세. 문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희멀건 얼굴에 진왕보다 더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족만이 쓰는 문양의 옷을 입었으나 검소하고 말쑥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낯빛이 밝고 단 정했으며 생김새가 묘하게 종인과 닮았다.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이다. 내가 조용히 들어가겠다고 해서 알리지 않았으니 아랫것들을 나무라진 마라. 종대가 당황한 듯하다가 금세 화색을 띠고는 준면을 자리에 앉혔다. 인사하게. 내 형님이신 소왕 전하시네. 소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도가 경수라고 합니다. 자네가 그 유명한 중추원 계의관이로군. 소왕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경수의 온몸을 훑었다.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폐태자 김준면은 광인이라 왕부에서도 두문불출하여 도깨비와 같다고 했는 데 그런 음침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연분홍 입술 위로 엷은 미소를 띠는데 마치 수면 위에 핀 숭고 한 연꽃을 떠올리게 했다. 소왕은 도성 여인들을 잠 못 이루게 한 찬열과는 다른 의미로 굉장한 미남이었다. 그러면서도 피부

346 는 흠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서 꼭 배꽃이나 빙설로 빚은 사람 같았다. 목소리는 낭창했고 발음은 분명했으며 검은색 눈동자는 청아하고 또렷했다. 종인과는 세 살 차이라 올해 스물일곱인데, 피부가 좋아서인지 동년배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얼핏 시선이 머문 손끝은 겉보기에도 거칠었고, 살집이 없었다. 순금사에 갇힌 동안 독질에 걸려 걸핏하면 자리에 드러눕는다고 하니 젊은 나이에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도리어 병약해서 황 위 계승권에서 밀린 진왕은 나날이 건강해졌으므로 그에게는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예문관 잠필지신으로 발탁되고 삼 년간 유배를 떠났다가 다시 중추원으로 복귀하다니. 젊은 나이 에 전적이 아주 화려하더군. 자네처럼 어린 나이에 조정에 출사하여 급물살에 휩쓸린 사람을 여럿 보았지. 노련한 권신들이 많 으니 그들에게 허점을 보였다가는 눈 뜨고 코 베이기 십상이라네. 날카로운 얘기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염염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조는 단조로웠지만 온화해서 약 간 나른한 느낌이었다. 한 번 자네를 만나고 싶어 내 아우에게 부탁하여 이리 청했네. 아무래도 현재 조정에서 가장 주목 받는 사람이다 보니 다른 이목을 피하고 싶었지. 소인에게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우선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네. 자네가 내 외숙을 어사대부에 천거하였다고 들었네. 오랜 세월 유배지를 전전하느라 나라에 충성 할 길이 요원했는데 자네 덕분에 멸사봉공할 기회를 얻었으니 조카로서 기쁘지 그지없네. 폐하께서 마음에 굳힌 바가 있으셨고 소인은 성심을 읽어 한마디 조언을 올린 것뿐입니다. 자네의 그 조언이 아니었다면 대인파가 득세한 조정에서 내 외숙께서 어찌 다시 관직을 얻을 수 있었겠나? 아첨하는 기색은 없었으나 은근하게 상대를 드높이는 태도였다. 경수는 민망하다며 멋쩍은 선웃음 을 보였다. 서신으로 몇 마디 전할 수도 있으나 무릇 은혜를 입었으면 직접 만나 감사의 말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지. 하여 부득불 자네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였네만, 오히려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 뒤늦게 걱 정되는군. 아닙니다. 이리 소인을 치켜세우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나 보니 자네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 이유를 알겠군. 눈매를 접으며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는데, 마치 꽃을 보고 미소 짓는 달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꼭 사람을 홀리는 듯했다. 나는 한 번 입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네. 비록 힘은 없으나 어려운 일이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얘 기하게. 자네를 도울 방도를 찾아볼 테니. 말씀만으로도 감개무량합니다. 차를 좋아하나? 경수 앞에 놓인 생강차를 가리키며 묻는다. 맛을 들이니 끊기 어려운 것이 차라 하더이다. 내, 변변찮은 재주이나 차 끓이는 데 소질이 있네. 여기 계신 내 아우께서도 칭찬한 솜씨지. 종대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자네를 수월당으로 초대해 맛 좋은 차를 대접하고 싶군. 경수는 소왕이 자신에게 단순히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만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재관의 복귀 를 핑계로 관계에 물꼬를 트고 이젠 자연스레 차 대접을 하겠다며 집으로 불러들이려고 한다. 대체 김준면의 속내가 무엇일까. 폐하께서는 진왕 전하께서 오실 때마다 반드시 최상품의 차를 내놓아야 한다며 신경 쓰시곤 하셨 죠. 그런 전하께서 인정한 솜씨라니 그 맛이 상당히 궁금하군요.

347 은근하게 초대에 응하자 준면이 다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정말이지, 우아하다는 표현 외에는 묘사 할 방법이 없는 근사한 웃음이었다. 62. 봉감우( 逢 甘 雨 ) 찬열을 허무하게 잃은 것은 종인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하여 그는 자신의 진심 을 더욱 감췄고 조정에서 함부로 황제의 생각을 읽을 수 없게 했다. 그러면서도 치밀하게 신진인사들 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정 개편에 나섰는데 그 중심에는 변백현과 도경수가 있었다. 백현은 새로 온 어사대부 이재관과 금세 친해졌다. 종옥이 백현에게 신세를 져 이재관이 백현을 따 로 불러 몇 번이나 술과 음식을 대접한 덕분이었다. 여기에 인맥 넓은 홍만립이 가세하자 어사대가 고삐를 당겨 비리 감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첫눈이 내리고 날이 더욱 추워졌다. 올해는 눈이 조금 늦어 섣달이 되어서야 세상이 순백으로 물들었는데 후궁들은 설중매를 감상한다고 야단이었다. 종인은 짬이 나면 자신들과 함께 매 화를 보자며 꼬드기는 후궁들을 물리고 편전에서 책을 읽었다. 폐하. 계의관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경수가 부름을 받고 왔다. 밖에 칼바람이 불어 유양전으로 오는 동안 청년의 콧잔등과 볼이 불그스 름하게 물들었다. 종인이 얼른 일어나 직접 경수의 손을 잡고 화롯가로 이끌었다. 따뜻한 숯불이 빨갛 게 타올랐고 장작은 탁탁 소리를 내며 불티를 날렸다. 날이 흐린 것이 조만간 큰 눈이 내릴 듯합니다. 폐하께선 늘 건강에 유념하소서. 짐보다 네가 걱정이지. 일이 많아 쉴 틈이나 있겠느냐? 모르시나본데 제가 은근히 엉덩이가 무겁습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죠. 뭐라? 짐의 국록을 먹으면서 농땡이를 피운다는 거냐? 폐하께서도 가끔 국사를 뒤로하시고 고야정으로 숨어드시는데 저는 안 되나요? 새침한 농담에 종인은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게으른 사람은 싫다. 짐이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이리 늦었어? 지난 삼 년간 조정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더군요. 그걸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무리하진 마라. 폐하께서 시키신 일인데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해서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금 나른했다. 장문견과 황세용이 문무를 대표하며 양립하고 있지만 대립각이 날카로웠습니다. 장문견이 대인파 의 실권을 가지면서 문신들이 제법 반발했다더군요. 권력이 넘어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모양입 니다. 자신궁이 아니고서야 대인파에서 황세용을 무릎 꿇릴 사람이 있겠느냐? 대인파는 그런 상태로도 삼십 년 이상 버텨왔습니다. 특히 장씨 일파가 득세하고 극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다 보니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죠. 삐걱거리다가도 이익으로 뭉치면 그 힘을 당 해낼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금 고요한 편전에 팔랑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허나 폐하께서 각고의 노력으로 소인파를 다시 키우셨죠. 또 장씨 일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난번 일로 위축되긴 했으나 지난 삼 년간 신인들이 대거 등용되었고, 폐하께서 적절 하게 관직을 분배하시어 제법 균형이 맞아 보였습니다. 복귀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자료로 제대로 파악했군. 헌데 폐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듣고 있다.

348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고지산이 줄곧 주치의였는데 인사이동을 보니 파직당하였더군요. 내의원 수 장은 신중하게 뽑는 만큼 잘 바뀌지 않는데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보던 책을 탁 덮으며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석에서 내려와 경수의 손을 잡고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걸 알 필요는 없다. 고 어의는 오랜 시간 폐하의 옥체를 살폈습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네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만 실은 과로로 혼절한 적이 있었다. 경수가 놀라 쳐다보자 종인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이럴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다. 또 고지산이 내의원에서 취급하지 않는 약재를 함부로 썼다. 그래 서 파직했느니라. 물이 너무 고여 있었지. 옥체는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니 이렇게 네 앞에 선 것 아니냐. 내의원에서 취급하지 않는 약재는 또 무엇입니까? 짐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다만 약재상에게 뒷돈을 받아 일부러 들인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폐하께서 과로로 혼절할 때까지 옆에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제가 잘못했습니다. 넌 짐의 명령으로 유배지에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네 탓이라는 거냐? 자책하지 마라. 안 좋은 버 릇이야. 경수는 미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종인이 그 작은 얼굴을 들어 올려 짧게 입을 맞추었다. 자책할 때마다 입 맞출 것이다. 폐하. 봐라. 팔팔하잖니. 그리 찡그릴 거 없다. 늘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살펴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죠. 늘어뜨린 눈썹에 또 입을 맞추었다. 네 탓이 아니라는데도. 그래도. 이재관이 일을 잘하더구나. 네가 천거할 만했다. 종인이 화제를 돌렸다. 네가 없는 동안 나름대로 준비한 것들이 있었다. 이번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예. 그러실 겁니다. 너와 변 감찰이 있어 든든하다. 아, 변 감찰과는 자주 연락하느냐? 감찰 나리께 입은 은혜는 뼈에 새겨두고 있습니다만 서로 바빠 자주 뵙지는 못합니다. 때가 되면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때 회포를 풀면 좋겠구나. 우장. 예, 나리. 소왕에 대해 잘 알아? 일찌감치 궁을 나서는 경수는 뒤에 붙는 사람이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무도 없음을 안심한 그는 우장과 헤어지기 전 한쪽에서 조용히 물었다. 우장은 당연하다며 얘기를 풀었다. 소인은 열 살에 입궁했는데 전하께서는 그때도 금부에 하옥되어 계셨습니다. 아마 그해 이 무렵에 방면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꼬박 사 년을 채우고 감옥에서 나왔을 때, 열둘의 어린 김준면은 열여섯의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 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일대가 번잡했을 정도였다. 사 년간 옥살이를 하셨다며? 어쩌다 그렇게 되셨느냐? 선제와 태후마마를 저주해서 폐위됐다고 들 었는데 사실이냐?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당시 중궁이셨던 태후마마의 처소에서 패악을 부렸답니다. 또 부모를 죽이겠 다는 예필을 선제께서 직접 보셨다 합니다. 하여 얼마 안 가 동궁에서 폐하시고 순금사에 가두셨지

349 요. 하지만 소왕은 선제의 총비인 의귀비의 아들이다. 아무리 패악을 부렸기로서니 아비가 그리 쉽게 아들을 사지로 내몬 것도 이해하기 어렵구나. 또 황태자란 지위가 여반장처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 도 아니지 않으냐? 나리 말씀도 옳습니다. 허나 당시 증거가 뚜렷했고, 소왕이 현수궁에서 난동부린 정황을 선제께서 보셨습니다. 경수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살짝 미간을 구겼다. 우장이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전부터 동궁은 광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답니다. 뭐? 민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귀비께서 돌아가신 후 그 미덥던 소왕 전하가 갑자기 정신 줄을 놓기 시작했답니다. 수시로 이명이 들린다고 하질 않나, 헛것이 보인다고 하질 않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심할 때는 뜬눈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으니 제정신인 순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뜻밖이군. 지금은 온전하시던데. 그것은 전하의 처 되시는 왕비마마께서 지극정성으로 내조하신 덕이랍니다.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인으로 불리는 폐태자를 남편으로 섬기기 참으로 어려웠을 터. 왕비의 노고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어린 맘에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갑자기 정신 줄을 놓았겠느냐며 동정하는 무리가 많았 답니다. 동궁이 광인이란 소문이 돌았을 때 폐위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선제께서는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하셨죠. 헌데 감히 천자와 국모를 죽이겠다는데 어찌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여론이 뒤집혔다? 전하에 대한 여론은 의귀비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악화하기 시작했답니다. 이재관 영감이 버티고 있었을 텐데? 당시 숭문관 전한( 典 翰 ) * 이셨던 박태흥 나리가 전하를 보호하려 했지만 이재관 영감은 그때 옥당 의 수찬( 修 撰 ) ** 으로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내시부에서도 주목했던지라 똑똑히 기억합니다. 의귀비의 친정에는 이재관 영감 외에 달리 믿을 만한 자가 없었더냐? 예. 한미한 가문이었지요. 의귀비가 죽은 후 조정에서 김준면을 지지할 세력이 무너진 것이다. 이재관은 효경제의 신임을 받 았지만 그것은 누님이 총애를 얻는 후궁인 덕택이었을 터. 제아무리 대인물이라 해도 영수들이 즐비 한 조정에서 옥당의 수찬이란 정치의 정( 政 ) 도 모르는 햇내기에 불과했으리라. 이재관이 하나뿐인 조카를 지키지 못한 내막이 대충 짐작되는군. 경수는 지그시 허공을 노려보았다. 소왕이 폐서인된 후 조정의 동태는 어떠했더냐?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동궁을 지지하던 세력은 모두 나가떨어진 걸요. 전한 박태흥이 지방 한 직으로 좌천되고 이재관 영감은 오래도록 유배형에 처해졌죠. 썩썩 썰려 나가는 모양새가 바람에 흩 어지는 민들레와도 같았답니다. 효경제에게 김준면은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지만 감히 황권에 도전한 극혈신이자 아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실패작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니 황제이자 아비로서 효경제는 김준면을 폐위하고 순금 사에 가두는 초강수를 둬야 했을 것이다. 현 조정에서 소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없느냐? 누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엄연히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데요. 설령 있다 해도 태후마마께서 가만히 뒀겠습니까? 확인 차 물어보았다. 너는 태후 쪽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가졌을 테니까. 우장이 부끄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 종삼품 ** 정육품

350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조정에서 소왕을 미는 세력이 있으면 곤란해서 꺼낸 말이다. 예. 헌데 갑자기 소왕 전하는 어찌 물으십니까? 이번에 전하의 외숙인 이재관 영감이 어사대부가 되셨다.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인재를 활용하 기 위한 폐하의 결정이시지. 이런 때 종친이신 소왕 전하와 폐하께서 화해한다면 폐하의 전정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우장은 감탄한 듯 두 눈을 빛냈다. 정말 통찰력과 혜안만큼은 누구도 못 따라올 만큼 걸출하시군요. 입에 발린 소리는 듣기 싫구나. 진심입니다. 경수가 피식 웃었다. 날이 춥다. 남은 일이 있다니 얼른 들어가라.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우장과 헤어진 경수는 수월당을 찾았다.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야만 집이 나왔다. 담벼락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봄여름이면 수목이 우거져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보기 어려울 듯했다. 담장 밖으로 솟아 나온 나뭇가지가 겨울인데도 울발한 기세였다. 밖에서 보더라도 집의 규모가 대충 짐작이 되는데 기와와 대문이 낡아 세월을 오래 버텼음을 짐작 케 했다. 인보당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쿵쿵 대문을 두드리니 청지기가 달려 나왔다. 그가 호롱을 든 경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시오? 소왕 전하의 초대로 왔네. 도가 경수라고 하면 아실 것이네. 잠시만 기다리시오. 진왕과 왕비의 부친 외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집에 웬 낯선 자가 나타나자 청지기는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안채로 건너가 소왕비 설초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이들을 유모에게 맡기고 홑이불 겉감을 뜯어 향낭으로 재활용할까 하던 참이었다. 초영은 바늘을 내려놓고 몸소 대문으로 향하였다. 김준면은 서재에서 글을 읽다 초저녁잠이 든 지 채 일각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연 관옥의 사내가 깡깡 언 몸으로 서 있었다. 초영이 대문을 열어젖히자 그가 음전히 인사했다. 연락도 없이 걸음 하여 죄송합니다. 소인은 도가 경수라 하는데, 아! 폐하께 연촉을 받았다는 그?! 말허리를 자르며 초영이 손뼉을 쳤다. 준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서 경수에 관해서라면 초영 도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준면이 경수를 만나고 온 후 조만간 그가 찾아올 것이라며 대비하라고 한 참이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게. 겨울바람이 몹시 매섭네. 초영은 다정하게 웃었다. 경수는 그녀를 따라갔다. 입구에서부터 마당, 건물, 정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인보당에 비해 뛰어난 것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수수했고 나쁘게 말하면 보잘것없었다. 전하께 자네에 대한 얘기를 심심찮게 들었네. 과거나 음서도 아닌데 조정에 뛰어들었다지? 그런데 도 자네 실력이 웬만한 관리들을 아우른다니 참으로 대견해. 과찬이십니다. 예서 잠시 몸 좀 녹이고 있게. 전하께서는 준비하시는 대로 오실 것이네. 경수는 행랑 옆의 객채로 안내되었다. 방은 좁지만 아늑했고 진왕의 취향인 듯한 족자 한 점과 도 자기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급작스러운 방문에도 이리 따뜻하게 대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전하를 찾는 객이어도 반가운 마당에 자네가 이재관 영감의 출사 길을 다시 열어줬으니 고마운 마

351 음 감출 길 없네. 모두 폐하의 결정이셨습니다. 소인은 정말로 한 것이 없습니다. 겸양이 지나치군. 초영은 맑게 눈웃음을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 경수는 방 안을 둘러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명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김준면은 자신을 정치적으 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정치 활동이 일절 금지된 종친이라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끽해야 외숙인 이재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여태 가만히 있던 김준면이 왜 갑자기 정적을 깨고 움직이려는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만에 하나 그의 화살이 김종인을 가리킨다면 경수는 김준면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칠 생각이다. 밉고 싫다 하여도, 황제는 오직 김종인 한 사람뿐이어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자의가 아니었다 한들 김준면은 십수 년 전 동궁에서 쫓겨난 몸.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순 없었다. 준면이 나타났다. 그 뒤를 따라 시종 둘이 찻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경수가 일어나 인사했다. 준면 은 예의는 됐다며 아랫목에 앉았다. 둘 사이에 찻주전자와 다기들이 주르륵 놓였다. 화로에 불을 붙이자 금세 숯이 타올랐다. 얼마 안 가 철병 속의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미리 언질을 주었으면 이리 기다리게 하지 않았을 것을. 귀갓길에 잠시 들르는 편이 요양하시는데 방해되지 않을 듯했습니다. 참으로 세심하군. 어쨌든 와 줘서 고맙네. 날이 추워 운신하기 어려웠을 텐데. 아닙니다. 오히려 전하께서 쉬시는데 불쑥 나타나 방해한 것은 아닌지 뒤늦게 걱정이었죠. 헌데 왕 비께서 살갑게 대해 주시는 것을 보고 그만 마음을 놓았습니다. 부인께도 종종 자네 이야기를 했네. 외가 쪽으로 남은 피붙이는 외숙 한 분뿐인데 그분을 도울 수 있게 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말이야. 거듭 말씀 올리지만 소인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숙의 함자를 거론해 준 것만으로도 자네는 공이 크지. 준면은 미소 지으며 찻물이 끓기 기다렸다. 팔팔 끓인 물은 숙우와 다관에 부어 그릇을 데웠다. 그는 구름처럼 새하얀 백옥 찻잔까지 모두 데우고 나서야 찻숟가락으로 말린 연잎을 조금 퍼 다관 에 넣었다. 또 찻잔을 데운 물은 퇴수기에 버리고 뚜껑을 닫아 맛과 향이 진하게 우러난 차를 각 잔 에 조금씩 따랐다. 정갈한 과정이 끝난 후 준면은 손님인 경수의 앞에 찻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았다. 드시게. 따뜻한 찻잔을 쥐고 준면은 탕수의 색깔부터 살폈다. 은은한 연갈색이 도는 것이 색이 잘 우러났다. 향기도 꼭 알맞았다. 한 모금 들이켜니 혀끝부터 입안 전체를 휘감는 찻물이 은근하고 시원하다. 오늘의 차는 일품이다. 어떤가? 하늘 끝에 유락한 한을 깨끗이 씻어주나니 좋은 차는 가인과 같음을 알아야 할지로다. * 갈수록 푸 른 향기가 나고 시름마저 잊게 하는군요. 극찬에 준면이 빙긋 웃었다. 그의 흰 얼굴은 겨울 하늘에 걸린 달과 같고 살짝 끌어올린 입 끝은 강물의 조각배와 같으며 매끈 하게 접은 눈시울은 풍성하게 말린 파초와 같다. 이런 용모인데 의귀비보다는 숙비의 자색이 뛰어났 다니 사뭇 효경제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경수다. 상지수( 上 池 水 ) ** 로 찻물을 우렸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햇볕이 닿기 전에 채집하였지. 차 맛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는데, 전하께서 우린 정성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진왕 전하께서 반하실 만합니다. * 이숭인, 백렴사혜다( 白 廉 使 惠 茶 ) 중 ** 땅에 떨어지지 않은 이슬

352 맘에 든다니 다행이군. 어느 정도 차를 마신 후 경수가 먼저 물꼬를 텄다. 소인에게 명차를 대접해 주신 것은 감사하나 숨은 뜻이 있는 듯하십니다. 그것이 뭔지 알고 싶어 찾아왔으니 전하께서는 성질이 급하다고 흉보지 마십시오. 내가 초대했는데 그럴 리 있는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듣고 있네. 지난번 진왕 전하 댁에 있을 때, 진왕 전하는 소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다며 저 또한 그분 을 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이 소왕 전하를 원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무척 단도직입적이군.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니까요. 명료하게 금을 긋고 건너편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반투명한 면사 사이로 상대를 바라보지만 일정한 선은 절대 밟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다. 준면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도경수의 당돌한 태도가 미소를 자아냈다. 63. 경도( 傾 倒 ) 자네는 매우 총명해. 사리 분별에 밝고, 어리지만 조정의 이해관계에도 매우 빠삭해 보이는군. 지나친 찬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남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복마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어. 아 니 그런가? 백성들을 위해 일하지 않음을 꼬집는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김준면의 얼굴은 수월처럼 맑고 청렴하기만 했다. 인제 와 과거를 들춘다면 너무 졸렬해 보이는가? 나지막한 물음에는 더듬을 수 없는 암흑의 덩어리가 묻어 있었다. 똘똘 뭉친 그것은 경수의 손을 타고 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 올라왔다. 내가 자네를, 무덤에서 나갈 작은 통로라고 여겨도 되겠는가? 경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차분하게 찻잔을 움켜쥐었다. 전하께서는 줄곧 소인을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허나 소인은 그럴 만한 위치도 아니거니와 담이 작 아 큰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탁 내려놓는 소리가 파열음처럼 꺼림칙하다. 준면은 엷은 미소를 유지하며 경수를 바라봤다. 금 밟기와 넘어가기의 시작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자네가 전하의 총애를 받는 것이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경성현으로 귀양을 떠나고 삼 년 만에 돌아왔어. 박태흥과 불순한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말이야. 예. 그래서요? 허나 폐하께선 자네를 벌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벼슬을 초자하여 등용하셨네. 자네를 향한 믿음으로 만 치부하기엔 현실적으로 생각할 문제들이 많더군. 중추원 계의관, 그 막중한 자리에 자네가 아니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듯 보였지. 마치 그 자리에 자네를 앉힘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건드릴 수 없게 보호하려는 듯했네. 그러니 지 난 삼 년간 자네가 유배 생활을 한 것도 폐하께서 자네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리하셨다고 밖에 해석하기 어렵더군. 대인파에게 보여주려고 말일세. 폐하의 심오하신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망극하게도 소인을 귀하게 여겨주시니 그에 보답하 려 노력할 따름입니다. 폐하께서 자네에게 연촉을 내린 일로 한동안 떠들썩했음을 아네.

353 경수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준면을 당당하게 마주했다. 그가 친왕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 지 않다. 김준면의 속내, 오직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궁중에선 황제의 총애 외에는 무의미하다네. 그건 사실이다. 일인자의 눈에 들지 못하면 관리든 후궁이든 담벼락 안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 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네는 군총이라는 강한 무기를 손에 넣었으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한 마음먹은 일을 행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네. 내게, 그 힘을 빌려줄 순 없겠는가. 경수가 낮게 실소를 흘렸다. 이것이 소인도 전하를 원한다고 여쭌 것에 대한 답인지요? 다짜고짜 이런 말씀을 올리심은 전하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전하께선 지금 소인을 황제의 총애만 믿고 설치는 파렴치한으로 만드시는 것이 고, 인재를 아끼시는 황제 폐하를 한순간에 소인배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시는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고빗사위를 여러 번 넘겼는데 죽음이 두렵겠나? 허나 자네와 폐하의 명성을 훼손하려는 뜻은 절대 아니라네. 종친에게 힘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권력을 손에 넣어 무엇을 이루려 하십니 까? 이미 전하께선 폐위되신 지 오래인 것을요. 주제를 알라는 듯 경계하자 준면은 다소 회한에 젖은 듯 매가리 없이 내뱉었다. 나는 힘을 가지길 원하는 것이 아니네. 힘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지위이기도 하고 이를 잘 아네. 그저 자네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일세. 긴장감이 좁은 방을 꽉 채웠다. 밖에 세찬 바람이 부는지 지창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덜컹덜컹 창문 을 흔들고 가는 바람은 방 안의 공기마저 냉각해 버렸다. 둘은 한참이나 입을 떼지 않았다. 새삼 탐색하듯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용히 덜그럭거 리며 다기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궁과 그를 비호하는 무정후 장문견을 저승길 동무로 삼고 싶네. 한참 만에야 준면이 이실직고했다. 경수는 다소 뜻밖이었다. 순금사에 갇힌 후 십오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문을 꼭꼭 닫고 숨어 지내 기에 원독 같은 것은 묻어버린 줄 알았다. 더구나 그에겐 딸린 식솔이 있으니 하찮은 복수에 매달리 기보다는 안정적인 지금 생활을 영위하는 데 만족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김준면의 눈빛은 성에 낀 유리처럼 차가웠다. 처자식 딸린 몸이 과거에 집착한다고 욕해도 상관없네. 나는 그 날의 치욕을 잊을 수 없어. 그날의 치욕이라시면? 내가 폐위되고 순금사에 갇히던 날 말일세. 준면은 차분하게 자신의 얘기를 풀었는데 이미 우장에게 들어 아는 내용이었다. 경수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짐짓 모른 척하며 물었다. 전하께서 폐서인되어 금부에 갇힌 것은 선제의 의지였습니다. 전하께서 당시 황후이던 태후마마께 패악을 부리고 군주와 중궁을 저주하는 글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장문견이 내게 준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 그 같은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네! 경수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씀을 삼가시지요. 무정후께서 무슨 일을 벌였단 것입니까? 진왕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두 번밖에 만난 적 없는 도경수에게 털어놓는 것은, 준면이 그를 복수의 칼을 뽑아줄 손이라 여기는 탓이다. 준면은 한숨을 삼키며 식어빠진 차로 입술을 축였다.

354 먼저 확답을 주게. 칼자루는 소인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내게 힘을 빌려줄 요량이 아니라면 나는 이후로 어떤 말도 입에 담지 아니할 것이야. 자네는 내 얘기를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나 나는 전부를 걸어야 해. 섣달의 밤을 나는 새가 을씨년스럽게 적막을 장식했다. 스치는 바람에도 번뇌가 묻어나 헐벗은 나 뭇가지를 사시나무처럼 떨게 하였다. 이윽고 경수가 매끈하게 입술을 벌렸다. 좋은 차를 대접받았으니 그에 보답할 차례군요. 며칠 전부터 어딘가 아팠다. 콧물을 찔찔 흘리고 약간 목이 잠겼다. 처음에 고열이 끓을 땐 한겨울 에 마마에 걸린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의원을 부르니 고뿔이라고 해서 한숨 돌렸다. 덕분에 백현은 며칠째 쓴 탕약을 들이켜고 목구멍을 짠 소금물로 헹구는 고역을 치르는 중이다. 오 늘은 일찍 퇴청해서 느긋하게 쉬고 싶었다. 요즘은 육부와 각사가 연말까지 처리해야 할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사대는 탐관오리를 잡아들이느라 엉덩이에 바람 잘 날이 없었는데, 이재관이 온 후로는 더욱 박차를 가해 그야말로 망중 한이 사치였다. 그래도 오늘은 번도 아니고 마침맞게 짬이 나 일찌감치 귀가를 서둘렀다. 집에 가기 전에 잠시 들 를 곳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관청 문을 나서자마자 마침맞게 외전에서 서성이던 종인과 마주쳤다. 퇴청하는 길인가?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날이 찬데 옷깃이 무척 얇군. 내자 없는 티가 좀 나는지요? 뭐라? 농담하는 솜씨가 남다르군. 종인과 백현은 가벼운 웃음을 흩날렸다. 상의원에 일러 자투리 천으로 색공을 만들라 하였네. 색공이요? 자네가 자주 가는 곳에 어린애들이 많다며. 그래도 내 백성들인데 장난감이 있으면 좋지 않겠나. 종인은 빙긋 호선을 그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매번 받기만 해서 참으로 면구하나이다. 요새 공사가 다망하여 발바닥에 땀이 나는 것을 잘 안다. 그대들을 일일이 위로하지 못해서 애석 하구나. 폐하의 우악하신 성심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멸사봉공하여 폐하와 나라를 위해 이바지하고자 하니 힘들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청산유수로다! 종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조만간 연통을 넣을 테니 고모님과 함께 들어오너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고모님을 뵌 지 너무 오래 되었어. 건강하게 잘 계시는지 매번 안부 서찰만 주고받는구나. 무탈하게 잘 계십니다. 기운이 너무 팔팔하셔서 이따금 소신의 등짝도 때리시고요. 백현의 농조에 종인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헌데 자네는 목소리가 변했군. 풍한이라도 든 것인가? 아. 예. 저런. 칼바람이 부는 때이니 평소 섭식을 조심하지 않으면 금세 탈이 나는 법이지. 그리 심각하진 않사오니 폐하께서는 심려치 마소서.

355 그럼 다행이다. 이왕지사 전의감에서 약재를 내어주랴? 깊으신 성은에 감읍합니다만 황실에 소용해야 할 약재를 사사로이 쓸 순 없지요. 교안의 좋은 의 원을 찾아 약을 타고 있으니 빛나는 성심만 받게 해 주십시오. 그리 사양하니 별수 없군. 어쨌든 나중에 내관을 시켜 색공을 전할 테니 변두리에 사는 고아들에 게 가져다주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작 공 하나에 성은이랄 것까지야. 살펴 가게나. 백현이 먼저 사라지는 종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태후 장씨는 사악한 요녀일세. 내 어머니를 독살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봐 숙비 까지 순장해 버렸어. 심지어 숙비는 생전에 장씨 사람이었네. 준면은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케케묵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먼지가 가득 쌓였으나 덮 어두고 지나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당시 나는 장씨의 부름으로 현수궁에 갔다가 장문견과 장씨의 계략으로 어떤 음식을 먹었네. 그런 데 서서히 사지가 마비되더니 의식조차 몽롱해지더군. 그러다 장문견이 내 팔을 붙들고 아바마마와 황후를 죽이겠다는 거짓 자백서를 작성했네. 충격적인 진실에 경수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당시엔 태자가 술에 취해 중궁전으로 뛰어들더니 갑자기 실성하여 황제와 황후를 죽이겠다고 발악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나돌았다. 의귀비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태자가 생모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미쳤다는 데 무게가 실렸다. 깨어났을 때,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토악질이 밀려와 괴로웠지. 하지만 위로는커녕 아바마마께 난생처음 손찌검을 당했다네. 그리고 곧바로 차디찬 순금사 옥사에 갇혀 사 년이란 시간을 죽음과 싸 우며 버텼네. 선제께서 결백을 믿어주지 않으셨습니까? 당시에 모든 증좌가 치밀하게 나를 옭아매고 있었네. 나는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음모에 휘말렸다 고 성토했지만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내 무죄를 밝혀줄 약물도 검출되지 않았네. 전하의 말씀인즉, 태후마마와 무정후의 계략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자의와는 상관없이 저주의 글을 쓰셨단 것입니까? 준면은 결기 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이것이 사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따랐다. 조금 더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소인이 알기로 그 일이 있기 전부터 태자는 광인 이라는 말이 궁중에 떠돌았다고 하던데 이는 어 찌 된 것입니까? 내 생모께서 장씨의 손에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네. 열두 살 어린애가 차게 식은 어미의 시신을 끌 어안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나? 준면은 자신의 손에 그때의 냉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잠시 몸서리쳤다. 피를 쏟은 처참한 시신을 안고 오열하며 나는 두려웠네. 나도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동궁의 생 모가 이리 죽었는데 나라고 이리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라고 말이야.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면 내가 무사히 장성해 보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네. 하오면 살기 위해 부러 미친 척하셨단 말씀입니까? 김준면은 지나치게 똑똑해서 오히려 자신의 신세를 망쳤다. 황제의 장자였고 삼 형제 중 가장 총명 했으며 시류를 잘 읽었다. 그는 왕재였고 의귀비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장씨의 눈 밖에 났고 치밀한 덫에 빠졌다. 경수는 경악했다. 태후의 악행이 상상을 초월하였다. 순금사에서 사 년을 지내셨다 들었습니다.

356 낮에는 온갖 벌레에 뜯기고 밤에는 쥐에게 살점을 내줬네. 곰팡이 슨 벽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 고 바닥에서는 더러운 오물이 내내 마르지 않았지. 여름엔 끔찍한 더위에 숨이 막히고 겨울엔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어. 툭하면 피떡이 된 죄인들이 옥사로 끌려왔네. 가까스로 선잠이라도 들면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소 리에 신경질적으로 깼네. 밤은 길었고 아침은 잔인했지. 여기서 나가는 건 죽은 육신뿐일 거라고 생각 했고 버틴다기보다는 숨통이 끊어지지 않아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갔다고 봐야 했네. 당시의 모진 고초가 되살아나는 듯 준면은 간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바라보는 경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먹구름이 끼어 금방이라도 폭우가 퍼부을 듯했다. 사면령을 받고 사 년 만에 밖에 나왔을 때야 내가 열여섯 살이 되었단 걸 알았다네. 그곳에서 지 내는 동안 난 사람이 아니었지. 김준면은 그때 죽었어. 까라지는 어투에서는 깊은 증오와 회한이 동시에 느껴졌다. 부황과 사냥 다닐 정도로 건강했다던 김준면. 그가 지병까지 얻은 것은 금부에서 지독하게 고생한 탓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태후와 그 일족의 합작품이다. 허면 그때 일을 재조사하게 해 전하의 오욕을 씻고 싶으신 것입니까? 나는 황실 일에 더는 관심 없네. 금부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릴 때도 내가 원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장씨 일문을 척살하는 것뿐이었지. 김준면은 진심으로 장가의 몰락을 바랐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태도가 그간 눌러놓은 증오의 두께 를 가늠하게 했다. 나는 명목상 종친의 자격을 얻었을 뿐 사실상 끈 떨어진 연이라네. 외숙과 진왕 외에 이곳을 찾는 이도 없어. 김준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지. 이런 내가 태후를 직접 처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니 폐하께서 나서주길 바랐다네. 그때 힘을 보탰던 자들이 한둘은 아닐 것입니다. 또 관련자를 찾으려면 태후 쪽 사람을 조사해야 하는데 그들이 쉬이 입을 열겠습니까? 경수가 준면을 바라보았다.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자신도 현실의 한계를 아는 까닭이다. 끈끈하게 뭉쳤으니 쉽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개미 한 마리가 방죽을 무너뜨리기도 하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네에게 털어놓았네. 나머지는 자네 하기 나름일세. 찻값을 상당히 비싸게 받으시는군요. 폐하께 직접 얘기하기 껄끄러운 내 처지를 헤아려주게. 내 입으로 그때 나는 광인이 아니었고 음 모에 휘말려 폐위됐다고 한다면 폐하께서 날 어찌 보시겠나? 소인이 전하기에도 적절한 주제는 아니죠. 누구나 감당해야 할 진실의 무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 까? 나는 그것이 버거워 지난 십오 년간 등 한 번 못 펴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네. 나를 옹색한 사람이 라고 생각해도 별수 없지. 몇 마디 주고받은 것으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진 않습니다. 허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사정이다. 그렇다고 이미 얘기를 들어버렸으니 이대로 묻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수는 참 난처하게 여기면서도 차분히 답했다. 두 가지를 분명하게 약조하신다면 전하를 도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무엇인가. 일을 바로 잡는다 하여도 전하의 위치를 잊지 마십시오. 전하의 지위는 소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357 그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네. 내가 바라는 것은 지난날 내 누명이 벗겨지고 장씨 일문이 마 땅한 벌을 치르는 것뿐일세. 말은 실체가 없으니 금세 잊히기 마련이죠. 당돌하군. 무엇을 원하나? 증서라도 쓸까? 그러라는 듯 경수는 준면을 빤히 쳐다봤다. 준면은 조용히 일어나 필기구를 가져왔다. 그는 경수가 보는 앞에서 조금 전 내뱉은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적었다. 두 장을 적었으니 한 장은 내가 갖고, 한 장은 자네에게 주지. 각자 지장을 찍은 종이를 맞교환한 후에야 경수는 사과의 뜻을 비쳤다. 무례하게 굴어 심기가 상하셨다면 사죄하겠습니다. 괜찮네. 그보다 다른 조건은 무엇인가? 황제 폐하께 힘이 돼 주십시오. 예상하지 못했던 듯 준면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황실이 크게 위축된 상황이 아닙니까? 그동안 왕래가 잦지 않았으나 지금부터라도 서로 노력한다 면 황실 번창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허나 폐하께서 나를 어찌 여기실지 모르는 마당에.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 다리 놓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죠. 그간 들린 소문으로 도경수가 영특하다고는 생각했으나 이리도 총기가 남다를 줄은 몰랐다. 어차피 황제의 전정을 위해서라면 태후와 장문견 일파는 허수아비가 되어야 한다. 김준면도 이를 노리고 도경수에게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경수는 그것에 그치지 않으려 했다. 김준면을 이용해 황실 부흥을 꿈꾸고, 그를 통해 자연스 레 황제에게 권위와 힘을 실어주려 하고 있다. 정말이지 보통내기가 아니다. 준면은 속으로 혀를 내둘 렀다. 그럼 나는 오직 자네만 믿고 기다리겠네. 전하께서는 소인에게 약조하신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남아일언중천금. 사내가 되어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네. 64. 정사우여염지서( 情 似 雨 餘 黏 地 絮 ) 김준면에 관한 진실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추를 달아놓은 듯 무거웠다. 호기롭게 해결할 방 도를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진 않다. 그렇다고 덮어둘 순 없었다. 진실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왔고 경수는 그것을 보았다. 송곳을 제거할지 말지는 그에게 달린 일이나 놔둔다고 능사는 아니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집에 도착하니 때마침 변백현이 나오고 있었다. 연수가 밖으로 나오며 그를 배웅했다. 놀란 눈으로 다가오는 경수를 발견하고 백현이 아는 척했다. 퇴청한 지 꽤 된 것으로 아는데 귀가가 늦었구려. 나리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연수가 초롱에 불을 밝히며 답했다. 잠시 시간이 나셔서 제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보러 오셨답니다. 연수의 실력이 일취월장이더이다. 집에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사학( 四 學 ) * 중 한 곳에서 거학하게 하는 것이 어떻소? 집안일이니 나리께서는, 그대가 교안을 비웠을 때 연수의 글 선생 노릇하던 사람이 나였소. 이 정도 참견은 해도 된다고 보는데. * 사부학당

358 나리는 내가 배웅할 테니 넌 들어가. 연수에게서 초롱을 받아든 경수는 잡아끌 듯이 백현을 데리고 나왔다. 남들 눈에 보기 좋지 않습니다. 긴요한 일이 있더라도 웬만해서는 인편에 전해 주시는 것이 좋겠 습니다. 보기 안 좋을 건 뭐요? 우리가 수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대인파에서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난 남들 시선에 구애받고 사는 사람이 아니오. 늘 바람처럼 떠돌았고 파락호처럼 내키는 대로 살 았지. 공주님을 생각하신다면 그리 사셔서는 아니 되지요. 어머니를 방패 삼는 것은 치사하오! 방패 삼는 것이 아니라,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장돌뱅이처럼 자유롭게 살던 버릇이 어디 가겠소? 어사대 감찰 나리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하군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소? 평소보다 유난히 쌀쌀맞구려. 뒤늦게 자신이 지나치게 반응했음을 깨달은 경수는 죄송하다며 숙였다. 다른 사람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 나는 금방 알 수 있단 말이지. 그대에게 잔소리 들 어가며 수학한 대가인지도 모르겠구려. 몇 개월 배우지도 않으셨으면서. 그래도 그대 덕분에 문장에 부드러움을 더했소. 폐하께서 문장력이 전보다 나아졌다고 칭찬하셨으 니 그대의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검은 겨울을 걷으며 백현은 조잘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샌가 경수에게서 받아든 초롱불이 들려 있 었다. 헌데 목소리가 왜 그러십니까? 풍한이라도 드셨습니까? 티가 나오? 아까 폐하께서도 그러셨는데. 경수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아, 가벼운 고뿔이오. 헌데 그리 옷자락이 얇아도 됩니까? 지금은 열도 많이 내렸고 밥과 약을 꼬박꼬박 먹고 있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경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또 그런 표정이오? 그런 몸을 하시고는 연수의 글공부를 보러 오셨습니까? 정식은 아니지만 글 선생이잖소. 늘 저더러 잔소리하시더니 나리야말로 본인의 몸을 안 챙기시는군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니까. 요즘 무척 바쁠 텐데 잠시 짬이 났을 때 일찍 돌아가 몸을 추스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은 안 하십 니까? 날 걱정하는 거요, 꾸짖는 거요? 나리께선 항상 다른 사람 걱정부터 하는데 저는 안 되는 겁니까? 백현이 놀라서 경수를 쳐다봤다. 경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지만 백현의 설레는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변백현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에게 마음을 줬을지도 모른다. 변백현은 불볕처럼 따뜻하고 바다 처럼 깊은 사람이다. 이런 남자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수가 필사적으로 연모한 사람 은 김종인뿐. 관계는 미묘하게 틀어졌다. 아. 얼마 전 영희당 강씨가 어귀상궁으로 강등되고 매일 벌을 받게 되었다 들었소.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경성에서 그대를 지독하게 괴롭혔는데 인제 죗값을 받는 모양이오. 감히 폐하께서 다니시는 길목

359 을 감시하고 있었다지? 최근 종인이 자주 산책하던 길을 강춘영에게 흘린 사람은 경수였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한 일이지 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지독한 모욕을 줬던 춘영을 찍어냈다. 물론 종인이 그녀에게 과한 처분을 내 렸다고 생각하지만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통쾌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자신마저 유치한 성격이 되어 가는 듯해 약간 자괴감을 느꼈을 뿐 이다. 폐하가 그리워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폐하께서는 헌헌장부시고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 성격에 조바심도 났겠지. 그렇다고 폐하께서 다니시는 길목을 감시하다니 간덩이가 부은 거 아니오? 경수는 말을 아꼈다. 문득 바람이 불어 목을 움츠렸다. 이게 다 폐하께서 후사가 없으신 탓이오. 하다못해 회임한 비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모두 감감무 소식이니 후궁들이 안달할 만하지. 그러면 서로 회임하려고 암투가 더 만연할 겁니다. 여인들이 싸워대는 꼴이 무섭다고 사직을 망칠 순 없지. 저도 폐하께 하루빨리 후사를 봐야 한다고 말씀드리지만 별로 내키지 않은 눈치십니다. 폐하께서 안목이 높으신데 꽃을 흉내 내는 가짜들이 성에 차시겠소? 경수는 불어오는 바람이 거칠다고 느꼈다. 가만히 있고 싶은데 수천 개의 바람이 자신을 옭아매고 흔들었다. 폐하께서 그대를 용양군으로 삼으신다 해도 이상할 건 없소. 다만 시기의 문제일 뿐. 궁에 있는 동안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죠. 여생을 네모난 하늘만 바라보며 살고 싶진 않습 니다. 얼른 황궁을 탈출하고 싶은 모양이군. 허나 폐하의 총애가 대단하니 쉽진 않을 거요. 그것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궁에 머무는 것은 어디까지나 찬열의 누 명을 벗기기 위해서입니다. 경수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얘기했다. 어쩐지 한서현에 있을 때보다 더 냉랭하군. 원래 살가운 성격은 아닙니다. 아니. 그대는 가면 속에 진짜 그대를 감추고 있어. 평생의 은인을 허망하게 잃었습니다. 또 누군지 모를 사람이 제 죽음을 전하는 바람에 어머니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고요. 두 분의 한을 풀려면 스스로 야차가 돼야 하죠. 그대의 입으로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려고 노력 중입니다. 샛길로 빠지면 백현의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나온다. 두 사람은 그 입구 앞에 멈춰 섰다. 그대에겐 조금의 빈틈도 없구려. 달빛이 희붐하게 비치는 골목은 윤곽만 잡힐 뿐 몹시 어두웠다. 틈새로 빠져나간 것이 많아 그러오? 어쩐지 어둠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 백현은 계속 뭉그적거렸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에 말이오. 어느 날 틈이 벌어져 그곳을 메워야 할 날이 온다면 말이오. 나리. 나지막한 부름에 백현은 어떤 울렁거림을 껴안고 경수를 바라보았다. 좋은 혼처가 들어와도 계속 뿌리치신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도 공주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 니실 것이라며 우려하셨습니다. 신하의 사적인 일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폐하께서는 참으로 인정 넘치는 분이시구려. 부디 좋은 배필을 찾아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

360 맥이 탁 풀렸다. 직접 진심을 전한 것도 아닌데 자신으로 하여금 시작조차 못 하게 숨어버리는 경 수가 지독했다. 덧없는 것이 사람의 정이고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이 마음인가 보다. 매어두지 못하는 그것은 하릴없이 물길을 따라 목적지도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파선의 조각처럼 멀리, 아주 멀 리. 그대가 복을 빌어주는데 사양할 수가 있나. 백현은 밝은 표정을 유지했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진심입니다. 나리는 부족함 없는 분이니 필시 현처를 만나 금슬지락을 누리실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좋은 인연을 찾아 화락하는 것은 멋진 일이지. 축복은 고맙소만 내가 여태 장가들지 않은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으니 공연한 생각은 마시오. 혹 제가 실언한 것입니까? 그대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경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밤이 늦었구려. 달빛을 구경하며 걸을 테니 이건 그대가 가져가시오. 백현이 초롱을 경수에게 다시 넘겼다. 불빛이 흐린 달처럼 뿌옇게 번졌다. 샛길로 사라진 백현을 오래 지켜보진 않았다. 그러나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내내 경수는 마음이 무 거웠다. 어사대에 힘이 실리자 하루에 수십 건의 논핵소와 부계( 府 啓 )가 올라왔다. 종인은 이것을 빠짐없이 읽었고 적합한 증좌가 모이면 망설임 없이 일을 진행했다. 이에 조정이 바들바들 떨었고 대인파 쪽 권신들은 어사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연말은 오고 함박눈이 내렸다. 한동안 궁은 나례희 준비로 바빴다. 올 해는 대풍이 들어 연회 분위기가 전보다 떠들썩했다. 해묵은 잡귀와 삿된 존재를 몰아내는 의식은 자정에 불이나 폭죽을 터뜨리며 절정에 이르는데 모두 이 장면을 보려고 목이 빠져라 연말을 기다렸다. 방상시와 창수( 唱 帥 ) 등으로 이루어진 스무 명이 넘는 공인들이 만상전으로 모였다. 방상시는 악귀 를 쫓는 역할인데 황금으로 된 네 개의 눈이 달린 가면을 쓰고 음악에 맞춰 신명나게 처용무를 췄다. 다양한 모양새의 가면을 쓴 자들이 오색으로 꾸민 옷을 입고 악공의 음악에 심취해 벽사를 치르는 광경이 무척 흥미롭고 부산스러웠다. 기녀들까지 섞인 놀이판의 최고조는 하늘 높이 쏴 올리는 화포희였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캄캄한 밤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사람들의 탄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종인은 대신들과 술을 마시다가 화포희가 시작하기 전 고야정으로 숨어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 밤 바람을 오래 쐬면 안 된다는 핑계였는데, 어의 송기석에게 시켜 미리 빠져나갈 방도를 마련한 것이었 다. 그는 고야정에 마련한 따뜻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경수와 마주앉았다. 봐라, 시작하는구나. 종인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펑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요란스러운 불꽃이 터졌다. 세상이 불야성처럼 환해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경수는 두 뺨을 붉게 물들이는 불꽃을 오래도록 올려다 보았다. 네 눈동자에 홍염이 일렁인다. 투영된 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찰나이기에 더욱 귀한 것 아니겠느냐. 경수는 선웃음을 지었다. 찬열까지 함께하던 경신일 밤이 떠올랐다. 신라의 처용은 칠보를 몸에 장식하고 꽃가지 머리에 꽂아 향 이슬 떨어질 제, 긴 소매 천천히 돌 려 태평무를 추는데 발갛게 취한 뺨은 아직 안 깬 듯하고 황견은 방아를 찧고 용은 여의주를 다퉈

361 라. * 너와 마지막으로 나례희를 보낸 것이 사 년 전이더구나. 세월 참 무상하지 않으냐? 인생이 풀 끝의 이슬이라 하였지요. 그래도 저는 연말을 폐하와 함께 보내니 참으로 다복한 팔자 입니다. 다복해? 하하하. 천자의 지위란 허망하기 짝이 없거늘. 폐하께서 황제라서 다복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생략된 말끝에 전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종인은 애틋한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선진들께서 찾으셔서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불꽃놀이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경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한 해의 마지막입니다. 황후마마 곁을 지켜주십시오. 현수궁에 납신다면 마마께서 연말을 따뜻하게 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넌 늘 짐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는구나. 저 때문에 폐하께서 구설에 오르시거나 체면이 깎인다면 그건 제 잘못입니다. 폐하께서 도리를 다 하신다면 누구도 폐하를 함부로 대하려 들지 않을 테니 더욱 권해드림이 맞지 않습니까? 하루 정도 느즈러진다 하여 천지가 붕괴하진 않는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이미 마음이 식으신 것을 압니다. 여흥이 사라지기 전에 황후마마를 위로해 주십시오. 또 내일은 망궐례와 하정례를 행하셔야 하는데 현수궁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나오신다면 내 외에 양전( 兩 殿 )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종인은 경수가 자신을 멀리하려는가 싶어 문득 서운했지만 달리 보면 명분과 사리에 조금도 어긋남 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백기를 들었다. 섭섭하십니까? 짐을 놀리는 것이냐? 경수가 낮게 웃었다. 군주의 정념이 오직 한 곳을 향하니 폐하께서 누구와 함께 계시든 저는 의심하거나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신만만한 태도까지! 종인은 경수의 맹랑함에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도무지 네 말재간에는 당할 수가 없도다. 모두 폐하를 위한 일이니 행여 고깝게 여기지 마소서. 네 마음이 이리 애틋하고 단정한데 옥생각을 품어 스스로 소인배가 되고 싶진 않구나. 경수가 웃으며 종인을 일으켜 세웠다. 면류관과 맨드리를 말쑥하게 가다듬는 그의 손길이 무척 능 숙했다. 옷고름을 다시 여미는 그를 종인이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침이 오기까지 일각이 여삼추와 같으리라. 태양이 다시 뜨려면 반드시 밤이 지나야 합니다. 이별의 정한은 비에 진 길 위의 꽃잎과 같다던데 짐의 신세가 딱 그 짝이로다. 꽃잎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으니 잠시의 이별을 어찌 고통이라 하겠습니까. 잔잔하게 내리는 눈과 떠들썩한 잡희 소리가 가득한 밤. 종인은 경수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오래도 록 움직이지 않았다. 어사대에 계의관 도경수가 찾아왔다. 홍만립과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두 사람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네가 싹이 남다른 줄은 알았다만 중추원의 계의관이 될 줄은 미처 몰랐구나. 나리께서 잘 보살펴주신 덕에 폐하께서 소인의 재주를 높이 사셨습니다. * 이색, 구나행( 驅 儺 行 ) 중

362 그렇지 않아도 옛 동료들과 만날 때마다 심심찮게 네 얘기를 하곤 했다. 넌 성질머리가 대단했지. 예문관에 있을 때 더 겸손하게 지내지 못했던 것을 후회 중입니다. 유은교 나리께선 봉상시 주부( 主 簿 ) * 가 되셨고 임제관은 군기시 직장( 直 長 ) ** 이 되었다. 예. 그렇지 않아도 돌아온 직후 여러분의 근황을 알아보았습니다. 나리께서 송인직 나리를 후계로 점찍으셔서 지금은 예문관 대교가 되셨다고요. 모두 귀하게 지내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군. 가장 파격적인 월등인은 바로 너다. 홍만립이 농지거리처럼 껄껄 웃어대자 경수도 덩달아 미소를 띠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그간 어찌 지냈는지 궁금하다. 소인이 대접하겠습니다. 나리께선 소인이 예문관 문턱을 넘을 수 있게 하신 스승님 아닙니까? 스승이라니 단어가 아주 거창하구나. 사관은 반드시 직필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너는 어디서 무슨 일을 맡든 소임은 반드시 해낼 것이다.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초장에 네가 싫다 며 으르렁거리던 홍만립은 온데간데없고 세월과 추억을 먹은 선진만이 있을 뿐이 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는데 이제는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듯해 경수는 한시름 놓았다. 궁에서는 내 편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홍만립은 가문이 대인파에 속하지만 중도파 인물이고 인맥도 두루두루 넓으니 여러모로 기댈 만한 사람이었다. 아, 변 감찰이 저기 오는군. 경수는 변백현을 찾고 있었다. 요새 어사대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네. 두 분이 의기투합하셔서 폐하께 힘을 보태시니 든든하군요. 나야 저 친구 쫓아가는 뱁새 노릇이나 하는 게지. 두 사람이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렸다. 이윽고 경수는 장서각에서 책을 빌려 돌아온 백현을 데리고 인적 없는 곳으로 향했다. 한 해 만에 다시 만나니 참으로 반갑구려. 백현은 농을 던지고는 혼자 실소를 터트렸다. 간밤에 폐하께서 현수궁에서 머무시고는 아침에 그곳에서 의관을 갖춰 입고 망궐례를 행하러 가셨 다 하오. 폐하께 그리하라고 귀띔한 사람이 그대였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경수는 농담에 장단 맞춰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백현이 표정을 고치며 물었다. 어찌 그러오? 무슨 일이라도 났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추는 통에 백현이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나리께 따로 집에 와 주십사 청할까도 하였으나 제가 성질이 급해 일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차분히 말해 보시오. 듣고 있소. 소왕 전하의 일입니다. 소왕? 예. 나리께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무엇이기에 강심장인 도경수가 이리 납죽 엎드렸는지 모르겠다. 필시 건강한 내용은 아니리라. 65. 체화( 棣 華 ) 上 * 종육품 ** 종칠품

363 편전에서 상소를 보던 중 백현이 찾아왔다. 종인은 인사를 받고는 다시 상소로 시선을 옮겼다. 연초 인데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일이 바쁠 텐데?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독대를 청하였습니다. 무엇인데 목소리가 그리 침울해? 아니면 긴장한 것인가. 너답지 않게? 백현이 답하지 않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종인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차분 하게 아래를 보자 백현이 정말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뭔데 그러느냐? 사뭇 머뭇거리던 백현은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새해이고 폐하의 치국으로 나라가 나날이 안정되니 이는 홍복입니다. 너희 같은 의식 있는 자들이 주야로 몸을 불사르는 덕 아니겠느냐? 모름지기 가화만사성이라. 폐하께 청하옵건대 연초인 만큼 형제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조촐하나마 연회를 베푸심이 어떠신지요? 약간의 정적이 백현의 등골을 시리게 했다. 형제라 하면 내 형님들을 일컫는 것이냐, 아니면 종친부 전체를 말하는 것이냐? 소왕 전하와 진왕 전하입니다. 네가 청하고 싶은 것이 그것인가? 예. 이재관이 너더러 그리 말해 달라고 부탁하더냐? 목소리는 담담한데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이 아니고서야 편전에 들 일이 없 는 변백현이 다짜고짜 찾아와 이런 얘길 해대니 종인으로서는 해연할 수밖에 없었다. 어사대부께서는 소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신 적이 없나이다. 네가 연회를 입에 담으려면 그 대상은 고모님이신 금선공주를 초대하는 일뿐이다. 헌데 갑자기 형 님들을 입궁시켜 연회를 베풀라니 짐은 이해하기 어렵구나. 폐하께는 단둘뿐인 형님이시지 않습니까. 두 분께서 이날까지 종친으로서 몸가짐을 삼가고 경거망 동한 적도 없습니다. 주위의 유혹이 많아 잡음 없이 종친의 본분을 다하기가 어려운데 이 부분은 칭 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허나 당연한 것을 요란스레 얘기한다면 도리어 공치사가 되기 십상이고 의미도 퇴색하지요. 허니 이번 연회로 폐하의 권위와 황실의 안녕을 함께 도모한다면 일거양득인 셈입니다. 짐은 네가 갑자기 이 일에 나서는 까닭이 무엇이냐 물었다. 백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종인은 대체로 온유한데 수틀리면 여지없는 냉혈한이기도 해서 줄다리기 를 잘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총애한다고 해서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실은 어머니께서 가정이 편해야 바깥일도 잘할 수 있다며 소신의 혼사를 재촉하셨습니다. 그 말씀 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어릴 때 소신이 궁에 들어왔을 때 폐하와 친왕 전하들께서 놀아주셨던 소 중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어릴 때 우린 나이가 비슷해 서로 잘 어울렸다. 특히 넌 소왕 형님을 잘 따랐지. 다정한 성 격이라 널 살뜰히 챙기고 아껴주셨다. 예. 문득 옛 생각에 잠기니 폐하께서 공사가 다망하시어 전하들과 따로 어울려 숨을 돌리신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맞게 새해라 폐하께서 망중한 속에서 화합을 다지신다면 좋을 듯하여 올리는 말씀입니다. 종인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백현을 빤히 쳐다봤다. 변백현이 고작 어릴 때 잠시 어울린 것으로 이런 얘기를 꺼낼 위인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안다. 오히 려 귀찮아서 남의 일에 신경 안 쓰는데 나이를 먹었다고 그 성정이 쉽게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 의 성품은 해바라기와 같아 늘 일정한 방향으로 향한다고 하지 않나. 그럼 대체 변백현이 왜 이런 변명까지 해대며 친왕들과 친목을 꾀하라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겉보

364 기엔 삼 형제의 화합이나 뜯어놓고 보면 이 일은 소왕을 위한 것이다. 진왕 김종대와는 점차 화해하 여 전보다 화목하게 지내는데 소왕과는 여태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인은 이재관이 관직에 오른 김에 소왕까지 챙기는가 싶어 고개가 갸웃했다. 김종대와 김준면. 두 사람 모두 종친이지만 힘을 실어주면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 종인은 자신이 강 해져야 경수를 지킬 수 있다 믿었다. 그러므로 김준면의 존재는 묘하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한두 번 얼굴을 내비치는 것으로는 위협이 되진 않는다. 경수도 종친들을 잘 다스려 야 황실 번창에 밑거름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백현마저 이리 나오니 둘이 어떤 사상을 공유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황제로서 종인이 물러날 까닭은 없었다. 도리어 백현의 말대로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다. 듣고 보니 나쁠 것도 없구나. 짐이 무심하여 형님들을 위로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네가 나서 서 이리 말해 주니 참으로 고맙다. 비로소 백현이 안심했다. 벌컥 노기를 보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왕 형님은 출궁하고 한 번도 입궁한 적이 없어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재관 도 복직했고. 아이들도 많이 자란 것으로 아는데 오랜만에 궁에 들어와 회포를 푼다면 좋겠군. 영명하십니다. 폐하께서 이리 성심을 쓰시니 전하들께서 매우 감동하실 것입니다. 한 가지 뜨악한 것이 있다면, 형님께서 과거의 일로 마음의 상처 깊어 짐을 마다하실까 하는 점이 다. 어명이니 감히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설령 상처가 있다고는 해도 폐하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 니까? 선원보첩에서 삭제되어도 모자람이 없는데, 도리어 죄인을 사면하고 다시 종친으로 봉작하기까 지 하셨으니 소왕 전하께서 내심 성은이 망극하다 여기실 겁니다. 혀에 참기름을 바른 듯 술술 얘기하는구나. 너와 말을 섞으면 어떤 주제라도 넘어가고 만다. 종인이 짐짓 웃어 보였으나 분위기는 서늘했다. 허면 하개에게 일러 가능한 빠른 날에 길일을 알아봐 연회를 열도록 해야겠군. 너도 참석하겠느 냐? 초대는 감사합니다만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모처럼 형제가 모여 친목을 다지는 자리에 소신이 낄 순 없지요. 네가 있다 하여 어색할 것 같지는 않구나. 폐하께서 매사 소신을 친형제처럼 아껴주시니 그 우악하신 성심만으로도 감읍하나이다. 종인이 곧장 하개를 불러 일을 진행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종인이 어제 편전에서 백현과 나눴던 얘기를 쭉 읊었다. 경수는 교지를 들으러 들어왔다가 본의 아니게 또 오래 붙잡히게 되었다. 변 감찰이 그리 말하는 데는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 네가 바람을 넣었느냐? 잠시 휘돌아나가는 실바람에 어찌 나무가 흔들리겠습니까. 일전에 넌 종친들에게 힘을 실어야 황실이 산다고 했다. 헌데 변 감찰이 그 말을 똑같이 하더구 나. 우연히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죠. 또 황실이 튼튼해지는 방법 중 하나가 종통과 방계의 화목임은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종인은 말끝을 흐렸다. 여러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찬열이 했던 충고가 떠올랐 다. 소신은 무장이라 잘 모릅니다만, 무릇 정치란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심이 지나치면 그것은 오히려 독입니다. 경계와 의심은 군주가 곁에 두어야 할 무기이나 그것이 군 주의 몸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종대가 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자신에게 찬열은 뼈와 살이 되는 조언을 남겼다. 의귀비의

365 죽음과 김준면이 찍혀나가는 과정을 지켜본 그에게 의심이란 생존법 중 하나였다. 드러내진 않아도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그 마음이 이 살육장 속에서 종인을 이날까지 살아있게 했다. 그러나 의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 공연한 의심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생겼다. 그 간극을 줄이고 중심을 잡는 것이 종인의 과제였다. 소왕의 속을 모르겠다. 종인이 운을 뗐다. 지금껏 와병을 핑계로 종대 형님보다 더 두문불출했고 국가대사에도 참견한 적이 없다. 순금사에 서 나온 후 짐은 나름대로 소왕을 보살피려 했어. 태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소왕이 요양하 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전하께서도 폐하의 노고에 감읍할 것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였다. 어릴 땐 우리 삼 형제가 찹쌀떡처럼 붙어 지냈는데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지. 이깟 보위가 대체 뭐라고. 피 묻지 않은 용상이 어디 있나이까. 하여 제왕가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군주는 하늘이 내린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선 순천( 順 天 )하셨을 뿐이니 이를 어찌 비극이라 하겠습 니까? 경수의 위로에도 종인은 쉬이 미간을 펴지 못했다.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아 의귀비의 죽음을 밝히지 못하고 준면도 순금사에 갇히게 한 듯해 죄책 감이 들었다. 방관자는 범인과 다를 바 없다. 그것만 생각하면 의귀비가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내던진 저주의 말이 생각나 등골이 오싹했다.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 이 타들어 가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 향불을 사르듯 비명횡사할 것이야!!! 김준면은 의귀비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이젠 위협거리도 안 되는 그가 꺼림칙한 까닭은 단지 그뿐이었다. 더 늦기 전에 형제간의 우애를 회복한다면 선제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우리는 내세를 알지 못하지. 그러니 승하하신 아바마마께서 어떤 표정을 짓 고 계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 정 불편하시다면 일을 무르십시오. 감찰 나리께선 그저 집안일이라 생각하여 말씀 올리셨을 텐데 폐하께서 내키지 않으시면 진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마를 짚고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종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오래도록 뵙지 못했다. 또 태후는 소왕을 증오하니 짐이 형님을 초대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군.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상상하기라도 한 듯 종인의 입가에 비린 미소가 걸렸다. 태후마마께서는 소왕 전하를 어째서 싫어하십니까? 아무리 친어미가 죽은 충격으로 정신 줄을 놓았다고는 하나 자신을 죽이겠다는 사람을 달가워할 사람은 없다. 또 태후는 형님의 생모인 의귀비를 가장 싫어했지. 휘정궁을 폐쇄한 것을 보고 의귀비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의귀비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고 경국지색으로 불릴 만한 용모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바마마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아들을 동궁으로 세웠다. 태후마마는 명문세족의 따님이었으니 그런 의귀비가 눈엣가시였겠군요. 장가는 사도를 둘이나 배출하고 그 아비가 태학관 대사성인 데다 친척들이 두루두루 요직을 겸한 명문가였다. 반면에 의귀비는 본래 아바마마의 후궁이던 귀인 정씨의 궁녀였으니 내명부에 오죽 파문 이 일었겠느냐? 궁에는 법도가 많아 양전께서 합방하는 데만 해도 수많은 내규를 따라야 하죠. 궁녀가 승은을 입 고 후궁이 된 경우는 많습니다.

366 네 말이 옳다. 허나 당시 내명부에서 첩지를 받았던 여인들은 모두 간택을 치르고 정식으로 입궁 했다. 오직 의귀비만이 정식 첩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바마마의 은총을 누렸지. 경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소왕이 하도 기품 있고 아름다워 의귀비의 출신이 조금은 특별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의귀비의 용모가 평범했는데 어떻게 후궁이 되었습니까? 정 귀인이 지병으로 요절하자 당시 궁녀인 이씨가 사흘 밤낮으로 빈 전각을 지켰다. 때는 쇠뿔도 녹아내린다는 칠월. 아바마마께서 우연히 처소를 지나시다가 뙤약볕에서 혼절한 이씨를 발견하고 사 정을 물으셨지.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눈치가 빠르고 아는 것이 많았다더군. 경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용모가 빼어나진 않아도 황제와 이야기가 통하니 마음을 사로잡고 홀린 것이다. 효경제는 마음이 통하는 여인을 사랑했을 뿐이다. 비록에 첫눈에 반해 시작한 인연이긴 하나 경수 에게 향하는 연정을 접을 수 없던 종인에게도 내려온 성질이었다. 종인은 그런 면에서 자신이 아버지 를 빼닮았다고 여겼다. 내 어머니께서도 의귀비를 싫어하셨다. 드러내놓고 말씀하신 적은 없으나 후궁의 알력싸움이란 불 을 보듯 뻔하였지. 종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늘 의귀비와 함께하던 부황과 그를 바라보던 착잡한 표정의 어머니가 떠 올랐다. 의귀비는 공공의 적이었다. 그녀를 향한 어머니의 증오도 일구월심이었다. 어느 날은 어머니께서 부황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다. 부황은 의귀비를 함부로 참소하지 말라며 고 함쳤는데 저녁 문안을 올리러 왔던 종인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당시엔 부황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가 크고 나니 자신의 어머니가 의귀비를 무고하다 그것이 발각됐음을 알았다. 의귀비는 늘 빛났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여러 번 유산하긴 했으나 김준면을 낳으면서 후 계가 든든했다. 내명부 여인들의 질시와 맞바꾼 황제의 총애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감로요, 영롱한 보석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후궁을 여럿 두셨지만 의귀비처럼 극도의 총애를 얻은 사람은 없었다. 고야정을 만든 것도 의귀비와 단둘이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었고 휘정궁을 화려하게 꾸민 것도 오직 후궁의 미 소를 보기 위함이었지. 나비는 꽃의 유혹에 빠지면 주위에 거미줄이 쳐진 줄도 모르는 법입니다. 종인은 피식 웃었다. 꼭 자신을 염두에 둔 말 같았다. 좌우지간 조카들이 많이 자랐을 텐데 숙부로서 한 번도 챙겨주지 못했군. 돌이켜보니 짐은 참 못 난 사람이다. 가족 하나 돌보지 못해. 옥체가 열 개라 해도 하루에 쏟아지는 나랏일을 모두 처결할 순 없으십니다. 어찌 만사를 손금처 럼 일일이 살필 수 있겠습니까? 짐이 무심한 것은 사실이지. 철마다 수월당에 옷감과 식재료를 보내고, 생신 때 어주를 내리시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입니다. 그 뿐입니까? 진왕 전하께서 오시면 꼭 진상된 최상품의 약재를 들려 보내시니 폐하께서는 성의를 다하 고 계십니다. 그리 말해 주니 위로가 되는구나. 연회를 여신다면 폐하께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니 세간에 미담이 알려질 것이고, 백성들은 폐하 의 아량에 감복할 것입니다. 또 말씀하신 대로 태후마마께서 소왕 전하를 경계하신다면 폐하께서 전 하와 손잡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될 테니 대인파의 목을 더욱 움켜쥐시는 겁니다. 정치적 승리를 위해 가족까지 이용해야 하는가. 회의감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종인. 경수가 말간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 를 친다. 네가 짐의 장자방이로다. 오랜만에 해후하시니 좋은 선물을 내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367 오래 만나지 않아 형님께서 현재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가 없구나. 현물보다는 다른 걸 내리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곰곰이 생각하던 경수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으레 친왕의 적장자는 세자로서 그 종통을 잇게 하죠. 하오니 소왕 전하의 아들을 군왕( 郡 王 ) * 에 봉작하시어 왕부를 보호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심이 어떻습니까? 후계를 공인하여 명예를 드높이고 충성을 도모하라? 봉작이란 오직 나라의 지존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대내외적으로 소왕이 짐의 신하임을 다시금 공표하는 것이니 감히 다른 생각을 품진 않 을 터. 경수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묘책에 종인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육도삼략과 만권시서를 훑었지만 너의 술책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구나. 지난 삼 년간 문 리가 더욱 깊어지고 생각이 성숙해졌으니 짐은 너를 얻음으로써 날개를 단 호랑이와 같아졌다. 황공하오나 과찬에 속이 다 울렁거립니다. 하하하! 한바탕 신이 나게 웃던 종인이 두 개의 교지를 작성하라 일렀다. 66. 체화( 棣 華 ) 下 시명지보( 施 命 之 寶 ) ** 가 찍힌 두 개의 두루마리가 중추원을 통해 당사자들에게 내려졌다. 하나는 어사대 감찰어사 변백현을 종오품 감찰지평( 監 察 持 平 )에 제수한다는 것이었다. 백현이 관직 을 꿰찬 지 삼 년째인 데다 공좌부에도 흠결이 없었다. 또 황제의 총애로 두 품계나 승차할 수 있었 다. 백현은 교지를 받아들고는 황제가 머무는 정전을 향해 절을 올렸다. 다른 하나는 예부를 담당하는 우승선( 右 承 宣 ) *** 으로 하여금 직접 전달했는데 지엄한 교지가 이제 막 수월당의 대문을 넘고 주인에게 넘어간 참이다. 우승선이 전교하기를, 소친왕 김준면의 적장자 명하를 군왕에 봉하고 봉호를 공( 恭 )으로 삼아 종통을 잇게 하며 삼류주관 ( 三 旒 珠 冠 ) **** 을 내린다. 명하가 미리 받은 예복을 갖춰 입고 삿자리로 나아와 교지를 받들었다. 아이가 황제가 있는 궁궐을 향해 절하였다. 교지는 황제의 명령인지라 명하는 고사리손으로 두루마리를 꼭 붙들었다. 또 행여 실수할까 봐 입 술이 바싹바싹 탔는데 무사히 잘 넘어갔다. 아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당당히 군왕으로 삼아주자 안채에서 몰래 지켜보던 초영은 가슴이 벅찼 다. 지아비의 울분만 생각하면 성에 차지 않았으나 애초에 뭔가 바라고자 준면을 택한 것이 아니었으 므로 이만해도 감지덕지다. 네 오라버니가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군왕으로 봉작되고 가계를 잇게 되었단다. 이제 네 아버지께 서 당당히 기를 펴실 수 있을 거다. 초영은 딸아이의 오동통통한 볼을 꼬집으며 환하게 웃었다. 명혜는 어머니가 웃자 덩달아 신이 나 서 어머니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한편 마당에서 예식을 치르는 준면의 표정은 고요했다. 다리를 놓아주겠다던 도경수의 답변이 이것 인가 싶었다. 김종인이 그를 대단히 괸다고는 생각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조카를 단번에 군왕으로 삼 을 줄은 몰랐다. * 친왕보다 한 단계 아래 ** 어명을 적은 교지 등에 찍는 왕의 금도장 *** 정삼품 **** 세 개의 줄이 달린 면류관. 황제는 열두 줄

368 무려 삼류 면류관이다. 같은 친왕이어도 자신궁의 비호를 받는 종대는 일찌감치 일곱 줄을 달았으 나 준면의 면류관에는 이제 겨우 다섯 개의 줄이 달렸을 뿐이다. 그런데 어린애에게 세 줄을 주었으 므로 이는 굉장한 특혜였다. 물론 공 이라는 작호에는 다분히 준면을 향한 나지막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는 삼가 조심하여 스스로 안녕을 도모하라는 뜻이다. 황제 폐하께서 오래도록 격조하셨다며 신년을 맞아 소왕 전하와 조촐하게 연회를 즐기고자 하십니 다. 사흘 후 승명패를 가지고 입궁하라는 전언입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준면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말쑥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종인이 이리도 빨리 자신을 만나고자 할 줄은 몰랐다. 도경수가 나서니 벼슬도 나오고 황제의 부 름도 떨어졌다. 그는 도깨비방망이라도 된단 말인가. 스스로 허튼 생각에 사로잡히자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어찌 웃으십니까? 폐하의 순후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십오 년 만에 다시 조복을 입고 궁문을 넘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구려. 나도 모르게 옛 생각이 나서 그랬소. 폐하께서는 인정 넘치는 분이시지요. 우승선이 뻗대듯 대거리했고 준면은 말없이 얌전한 미소를 띠었다. 전언은 끝났소? 예, 전하. 날이 추운데 안에서 잠시 차라도 들고 가시오. 처리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참 아쉽구려. 더 할 말이 없으시면, 아.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무엇입니까? 과거도 치르지 않은 도 아무개가 중추원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한다던데. 그렇습니다만. 우승선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준면을 훑었다. 국조에 다시없을 파격적인 인사라 이 심심한 곳까지 소식이 들렸다오. 무거운 용단을 내리셨는데 그이가 국록만 축낸다면 참으로 손해 아니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웬만한 관리 못지않은 지략과 진중함을 가진 자입니다. 허나 원칙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 역사를 기록하는 예문관의 문을 넘은 것만으로도 남우세스러운 데 어명을 전하는 중추원에서 계의관 노릇을 하다니. 상전벽해도 유분수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그 관직은 폐하께서 임명하신 자립니다. 물론 적잖은 반발이 있었으나 태후마마께서도 암묵적으로 윤허하신 일이지요. 태후께서 윤허하셨다? 하긴. 폐하께서 인재를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실 테지. 내, 별스런 걱정을 하 였구려. 우승선은 슬쩍 발을 빼는 김준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폐서인이 되어 동궁에서 쫓겨나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한데 어느덧 두 자녀를 둔 아비가 되었다. 사 년 내내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것 이 무색할 정도였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이보게, 양 서방. 예, 전하! 귀한 손이 나가시니 잘 배웅해드리게. 청지기가 우승선과 별장들을 데리고 마당을 나섰다. 준면이 끝까지 꽁무니를 지켜보다가 긴장이 풀리자 한숨을 몰아쉬었다. 명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

369 와 자신의 아버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괜찮으십니까? 명하야. 예, 아버지. 너는 네 이름의 뜻을 아느냐? 그럼요! 어머니께서 몇 번이나 설명해 주셨는걸요. 소자가 태어난 날에 하늘이 무척 맑아 별과 달 이 세상을 다 비추었다지요? 그래. 그랬다. 하여 나는 네가 밝은 은하수처럼 고요히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네 이름을 명하라 지었다. 너는 그럴 준비가 되었느냐? 소자가 반딧불도 아닌데 어찌 세상을 비추겠습니까? 명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아비의 팔에 매달렸다. 소자가 아는 한, 세상을 비추고 밝히는 존재는 하늘 아래 오직 해님뿐입니다. 달과 별, 하다못해 별의 강인 은하수도 어두운 밤의 길잡이일 뿐이죠. 그런데 소자가 어찌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겠습 니까? 우리 명하는 참으로 총명하구나. 그럼 누가 네 이름의 뜻을 묻거든 꼭 그리 대답해야 한다. 으음. 예, 아버지. 명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머리에 쓴 관모가 커서 몸을 움직이자 금세 비뚜름해졌다. 아버지는 저렇게 멋진데 자신은 아직 어린애라 언제쯤이면 저런 멋진 태가 날지 마음 이 조급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제야 전하께서 광명정대하게 살아가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만한 일로 부인께서 눈물을 보이니 맘이 편치 않구려. 송구합니다. 좋은 날에 주책없게 그만. 부인. 이건 시작이오. 아시겠소?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초영의 뺨을 타고 도르르 흘렀다.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열여섯 소녀가 지독하게 앓았던 상사병, 부친의 극심한 반대, 일 년간 겪었던 남편의 냉대, 모든 것 을 녹이던 첫아이의 탄생, 유명무실한 지위와 꺾인 꽃처럼 무참하게 흘러가는 시간 등등. 다녀오리다. 조심하시어요. 준면은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녀의 손길이 탄 의관을 바로 하고 집을 나섰다. 쇠잔해진 기력 을 걱정한 황제가 튼튼한 가마를 보내서 추위를 느끼지 않고 단숨에 남문을 넘을 수 있었다. 창문을 살짝 열고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니 이전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수더분한 일상이 느껴졌 다. 거리는 떠들썩했고 사람들은 추운 날씨를 피하려 종종걸음으로 바삐 오갔다. 여인들이 뒤에 몸종 을 달고 비단 가게로 향했으며 냇가 아래에선 거지들이 옹송그린 채 겨울을 보냈다. 준면은 다시 문을 닫았다. 옷에서 빳빳하게 풀을 먹인 냄새가 올라왔다. 얼마 안 가 가마가 멈췄다. 짧은 숨을 토한 후 준면은 가마에서 내렸다. 발을 내딛는 순간 까닭 모 를 현기증이 느껴져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늘은 푸른빛 안료를 뽑아 갠 듯 청명했고 부드러운 구름이 물에 띄운 나뭇잎처럼 유유히 흘러갔 다. 햇볕은 강렬하지 않았다. 바람이 몹시 찼으나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내 나이 열두 살. 야차 같은 금부도사에게 붙들려 동궁을 나왔다. 그 후로 꼭 십오 년 만에 궁 문 턱을 넘는구나! 울컥 치솟는 감정은 없다. 남간에서 사 년을 보내는 동안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차가운 벽과 바닥에 모두 새겼다.

370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던 것은 그때 두고 온 마음이 여태 돌아오지 않은 탓 이리라. 그러니 문득 불어오는 칼바람에 옷자락이 흩날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마주할 수 있는 것 이다. 하지만 추억은 버려지지 않았다. 안으로 발을 들일수록 깊은 곳에 묻었던 유년기가 떠올랐다. 대연의 보위를 이을 차기 군주, 황태자로 책봉되던 때는 이 희조전에 문무백관이 모여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한 달 후 어머니는 내명부 정일품 의귀비에 봉해졌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과 어머니는 큰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모두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천자의 총 애, 그것이 휘정궁과 동궁에 흘러넘쳤다. 부질없군.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서야 되겠는가. 그 후의 일은 다시 떠올리기 싫어 준면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행각을 따라 내관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 와 준면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헉헉! 소왕 전하이십니까? 그러네만. 소인은 대전의 봉 내관이라 하옵니다. 폐하께서 전하를 모셔오라고 하셔서 급히 나왔는데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말씀에 마음이 기뻐 길을 서둘렀네. 그러셨습니까? 자, 어서 가시지요. 동장군의 강샘이 대단합니다. 준면은 봉 내관을 따라갔다. 굳이 그가 안내하지 않아도 궁의 지리는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연회장은 상려정 인근의 명협전( 蓂 莢 殿 )이었다. 안은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고 꾸며져 있었다. 병장( 屛 障 )을 모두 거둬 실내가 탁 트였고, 금향로에서는 희멀건 향연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몸을 사르는 향은 신비로우면서도 다소 매콤한 향기를 뿜었는데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벽에는 산수화가 걸렸다. 상석에는 채색한 사계도가 있어 상당한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금침 보료가 깔린 자리는 대를 세워 바닥보다 한 뼘 정도 높았는데, 용틀임 무늬를 새겨 황제의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종대가 먼저 와 기다렸다. 그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줄곧 흥분 상태였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 다. 일찍이 태후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종인이 준면까지 불러 연회를 베풀자 일각이 여삼추 같 았다. 얼마 안 가 준면이 들어왔다. 종대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면을 맞았다. 감성이 풍부한 종대는 왠지 벅차서 눈물이 핑 돌았다. 종인의 부드러운 변화가 좋았고, 준면이 다시 궁으로 발을 들일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형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날씨가 몹시 찬데 오는 동안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괜찮다. 어찌 눈시울을 붉히느냐? 십오 년 만입니다. 천지가 뒤바뀌지 않는 한 이런 날이 오기란 요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사람 마음이야 오죽할까. 그러나 종대는 준면이 여태 종인에게 냉소적이었던 점을 기억했다. 가슴에 맺힌 한이 점점이 뿌린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리는 삶이었다. 김준면의 망가진 인생을 동정 했다. 그러나 김준면이 군주인 김종인에게까지 억세게 구는 것은 접어두고 넘기기 어려웠다. 그간 김 준면이 가여워 입 다물고 있었으나 내심 그의 사상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인의 부름에 준면이 흔쾌히 입궁한다고 했고 실제로 연회장에 와 있으니 놀랄 노자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기회에 서로 오해를 풀고 의기투합한다면 조정을 농락하는 세력을 몰아낼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종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371 실은 형님께서 초대에 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께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셨는데 어찌 거절하겠느냐. 치기 어릴 때는 내 자존심이 우선이었 지만 딸린 처자식이 있다 보니 굽히면 그만인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실적인 판단부터 하게 되더군. 그럼 폐하에 대한 마음은? 내가 폐하 라고 칭하는 것을 못 들었느냐? 그제야 종대가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환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내관의 외침에 종대와 준면이 좌우로 흩어져 머리를 조아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종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느닷없이 준면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십오 년 만의 입궁인데도 전혀 긴장하지 않던 그다. 그런데 종인이 등장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모골이 송연하고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내리깐 시선 끝에 김종인의 발이 보였다. 아름답게 올라간 버선코가 나볏하게 바닥을 스치고 지나 갔다. 궁에서 나고 자라 한 번도 궁 밖을 벗어난 적 없는 몸짓이다. 제법 보폭이 넓은데도 소리가 없 고 점잖으면서도 묵직했다. 시도 때도 없이 쿵쾅거리며 휘정궁이나 동궁으로 뛰어들던 어린애가 아니다. 고작 발걸음 하나에 지나간 세월의 틈이 사무쳤다. 준면은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예는 됐습니다. 편히 앉으십시오. 준면은 하마터면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카랑카랑하던 어린애의 그것은 사라지고, 나른하면서도 분명한 어른의 옷을 입은 음성이 준면의 귓 가에 꽂혔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인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그림자처럼 성큼 다가와 코앞에서 존재감 을 뿜어내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언제나 자신보다 어린 아우였다. 어쩌면 영영 자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의 김종 인은 그랬다. 김종인은 늘 자신의 뒤에 있었다. 세 살이라는 나이 차도 그렇거니와 유난히 까맣고 말라서 성장이 그를 비껴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김종인이, 상상도 못 한 모습으로 자라 자신을 바라본다. 둥그스름한 이마와 선하지만 단호한 눈매, 명산의 봉우리와 바위를 옮겨놓은 듯한 코와 입술, 깎은 듯한 강인한 턱, 건강해 보이는 그을린 피부. 자신에게 물려주지 않은, 아버지 효경제의 모든 것이 김 종인에게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준면은 앞에 앉은 자가 아우인지, 아니면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동궁에서 내쫓은 부황인지 헷갈렸 다. 단지 목소리를 듣고 용안을 마주했을 뿐인데 옛날 일이 떠올라 심장이 벌렁거리고 오금이 저렸다. 금방이라도 우레와 같은 소리로 도사와 나장들이 밀려와 자신의 두 팔을 결박할 것 같았다. 황태자가 실덕하여 망령되게 스스로 저위( 儲 位 ) * 를 훼손하고 잘못을 거듭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도다. 하늘의 뜻을 저버렸으니 이에 폐하여 서인으로 강등한다. 첨원사가 쩌렁쩌렁 외치던 폐위 교지가 다시 울려 퍼졌다. 온몸에 날아와 박히던 윤음에 준면은 여 전히 어찔하고 아득하여 몽중을 헤매는 듯 현실을 분간할 수 없었다. 착란에 준면은 종인이 몇 번이고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종대가 형 님! 하고 크게 불러서야 퍼뜩 정신을 붙들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십니까? 종대가 걱정스레 물었다. 준면은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아. 천자의 위엄에 눌려 나도 모르게. 저도 성인이 되고 형님을 처음 뵙는데 서로 달라진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요. 종인이 낮게 웃으며 부드럽게 준면을 쳐다봤다. 황공하옵니다. 소신이 그만 누태를 부렸습니다. * 태자의 지위

372 누태라니요? 형제 사이에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탓인가. 오늘을 벼른 것은 자신인데 여유는 김종인이 부리고 있다. 오래도록 격조했습니다. 마침 신년이라 형님들 생각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공주들은 하가하여 운신 이 어렵고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기억도 없는지라. 하여 사내들끼리 의리도 다질 겸 연회를 마련하 였는데 너무 초라하여 흉을 보실까 저어됩니다. 당치 않으십니다. 사사로운 연회로 국고를 낭비할 순 없지요. 향긋한 술과 맛있는 안주, 그리고 소 신들이 나눌 만한 이야기가 있으니 이보다 더 화려한 잔치가 어디 있습니까? 나불거리는 종대에게서 오늘을 고대한 들뜸이 드러났다. 이런 종대를 태후전에서 기생하는 소인배 로 여겼으니 도리어 그를 오해한 지난날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수월당은 어떻습니까? 종대 형님은 종종 궁에 들러 저와 담소를 나누셨지만 형님은 한 번도 입궁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이었던 몸이 폐하의 우로지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은신하여 자중하는 것이 도리고 폐하께 보은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심했습니다. 물질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이고 정성인데 세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무시로 약재와 옷감을 보내주신 덕에 부족함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도 친히 축사와 비단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명하가 올해 여덟 살인가요? 아홉입니다, 폐하. 벌써요? 세월이 쏜살같이 흐르는군요. 첫 조카가 생긴단 소식을 접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명하를 공왕에 봉하시고 왕부의 종통을 잇게 해 주신 점, 이 자리를 빌려 감읍하나이다. 종인이 웃으며 손사래 쳤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종친부에 입학하여 종실로서 교우관계를 넓히고 학문을 익히면 좋을 것입 니다. 명하는 글공부를 좋아합니까? 이제 겨우 동몽선습을 떼고 소학에 흥미를 보일 뿐입니다. 형님을 닮았다면 명민하기가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워낙 천방지축이라 글보다는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나이는 누구나 그렇지요. 저도 그때는 형님들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고치는 것이 일 상이지 않았습니까? 잔잔한 웃음들이 터졌다. 이런, 두 분을 모셔놓고 여태 술잔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습니다. 늘 어딘가에 정신 머리 한두 줄기를 빼놓고 다닙니다. 종인의 농담에 종대와 준면이 싱긋 웃었다. 이윽고 종인이 친히 일어나 두 형들의 술잔을 꽉 채워 주었다.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리는 술이 그 윽한 향기를 뿜어냈다. 종인이 자리로 돌아가 잔을 들었다.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 * 올봄에는 궁에 체 화( 棣 華 ) ** 가 만개했으면 좋겠군요. 세 사람이 공중을 향해 소리 없이 잔을 맞부딪쳤다. 67. 폐릉( 弊 綾 ) 다. 신경질적인 햇볕이다. 아니, 태후 자신의 신경이 날카로워 모처럼 내리비치는 따스한 빛도 거슬렸 * 시경, 소아 상체 편 중 ** 산앵두나무 꽃. 형제의 우애를 뜻함

373 그녀는 자신궁 앞마당을 산책하다가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울 하늘은 어릴 적 보았던 바다 처럼 짙푸르고 멀리 날아가는 새들은 흩뿌린 곡식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을 보더라도 눈에 거슬리 고 즐겁지 않다. 우장이 도경수의 잡색꾼으로 전락했음을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김종인이 월초에 진왕과 소왕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고는 심병이라도 난 듯 울화가 치솟 았다. 진왕이야 그렇다 쳐도 소왕을 궁으로 불어들이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말로는 오래 격조하여 종친들을 달래는 연회였다고 하는데 여간 꺼림칙한 일이 아니다. 다른 누구 도 아닌, 한때 동궁전의 주인이었던 김준면을 자신의 곁으로 부른 것은 불행의 씨가 될 터였다. 게다가 그때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벌써 여러 번 그의 입궁을 허락해 소왕이 외숙인 이재관에 이 어 본인도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는 얘기가 퍼졌다. 이미 그 아들을 공왕에 봉하였으므로 둘 사이는 어느 때보다 말랑말랑했다. 태후마마. 사완이옵니다. 태후가 주위를 물리고 자신을 부축하는 박 상궁과 사완만을 데리고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알아보았느냐? 예. 이재관 영감을 어사대로 들이라 한 사람은 도경수고 소왕을 궁으로 부르라고 건의한 사람은 감찰지평 변백현이라고 합니다. 뭐라? 금선공주의 아들이? 사완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는 기가 찼지만 표정엔 일절 변화가 없었다. 폐하께서 중추원과 어사대에 각각 수족을 심어두고 조정을 단속하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박 상궁이 나직이 말을 보탰다. 벌써 각종 비리로 찍혀나간 대인파 권신들이 수두룩합니다. 무정후와 대책을 세우셔야 할 때가 아 닌지요? 황세용이 여러 번 나를 찾아왔네. 그때마다 내가 거절한 것은 바로 조정의 눈과 귀가 우리에게 집 중하는 탓이야. 이런 상황에서 무정후든 사도든,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네. 죽은 듯 이 가만히 있어야 해. 죽은 듯이! 하오나 웃전이시지 않습니까? 또 무정후와는 남매지간인데 잠시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꼬투리 가 잡히겠습니까? 어사대가 예전 같지 않아. 태후가 딱 잘랐다. 박 상궁이 초조하게 입술을 말았다. 주상이 지난 삼 년 동안 와병을 핑계로 정사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네. 헌데 인제 보니 모두 연극 이었던 것 같구나. 나도 인지하지 못한 새 삼사가 주상의 손아귀에 들어갔어. 허면 어찌해야 합니까? 소왕 전하마저 궁으로 불러들였으니. 언젠가는 그게 패착이었음을 깨닫겠지. 태후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나 같으면 소왕을 영영 수월당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거네. 마마께서는 화근이 될 만한 불씨는 반드시 끄셨죠. 그래. 그것은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방책이었으니까. 주상도 이를 모르진 않을 텐데 참으로 어리석군. 당장은 소왕과 과거를 곱씹으며 회포를 푼다고 해도 보위라는 것이 어디 그리 꿈결 같은 이야기여야 말이지. 조정의 동요가 심상치 않습니다. 황 사도께서 저리 들썩이는 것을 보면 무정후께서 말씀은 아니 하셔도 내심 불안하실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결단. 결단이라. 태후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는 발길을 돌렸다. 사완이 얼른 전폐로 올라가 섬돌을 깨끗이 정리한 후 태후를 기다렸다. 암적색 치마를 입은 태후가 우아하게 계단을 올라 섬돌 앞에 섰다. 사완이 엎드려서 태후의 신을

374 벗겨주고는 가지런히 정리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가 사완에게 일렀다. 무정후에게 급전을 넣어라. 윤대를 마치고 낮것 수라를 들기 전 잠시 짬이 났다. 겨우내 방에만 옹송그리는 것이 싫어 산보를 놓으니 날씨도 제법 풀려 주위가 청량했다. 아직 봄이 오려면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지만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나 산들바람에 몸을 떠는 나뭇가지나 입 춘이 머지않았음을 아는 듯했다. 오늘 윤대는 중추원과 삼사, 육부를 중심으로 행했다. 참여했던 신료들을 거의 다 돌려보내고 이재 관을 비롯해 변백현, 도경수 등을 데리고 부러 내전 깊숙이 향했다. 여름이었다면 숭화루에서 용주( 龍 舟 ) * 를 띄우고 한가함을 즐겼을 것이다. 날이 더 풀리면 잉어들이 떼를 지어 모이겠구나. 오월 중순부터 연잎이 차례로 수면을 떠돌고 육칠월에 화려하게 만개하니 부용정은 오직 뜨거운 하절만 기다릴 것입니다. 이재관이 대거리하자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 못을 뒤덮는 수천 송이의 연꽃은 가히 장관 이었다. 두 사람은 무슨 얘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는가? 경수와 백현이 마주 보며 웃고 있자 문득 신경 쓰인 종인이 능청스레 물었다. 백현이 답했다. 소신이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사온데 어느 날 소신 집의 어린 노비가 개집으로 들어가 개를 꼭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하여 연유를 물으니 개가 아파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려고 했답니다. 그 어린 마음이 기특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여 웃음이 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말 못하는 짐승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구나. 장차 크게 되리라. 종인이 짐짓 나무라는 투로 백현에게 말했다. 너도 얼른 궁에 그처럼 귀여운 아들을 데려와야지. 지난번에 고모님이 혼담을 꺼내셨다면서 여전 히 진척이 없는 것이냐? 짐이라도 나서서 좋은 규수를 찾아주랴? 다분히 농조였지만 백현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경수가 나섰다. 폐하께서 만기친람으로 바쁘신데 사사로운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또 변 지평이 아무리 폐하의 인척이라고는 하나 친분으로 그의 혼사를 추진하시면 대인파의 촉각이 예민한 이때 이 래저래 눈길을 끌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구나. 짐의 생각이 짧았어. 폐하께서 변 지평을 아끼시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재관이 보탰다. 백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쪽에서 황후와 배행하는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황후가 황제를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종인이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며 황후와 경수를 번갈아 보았다. 폐하께서는 길상을 누리소서. 황후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이시오? 볕이 좋더군요. 현수궁 뒤에 있는 인공산도 보기 좋지만 탁 트인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습니다. 황후는 아양을 떨거나 총애를 얻으려 술수를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에 만족했 고 자신궁과 태성전 사이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종인은 지금의 황후를 지어미로 여기진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적 조력자 정도일 것이다. 노를 함께 젓는 동료의식 외에 황후에게 느낄 만한 감정은 없었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 바람이 찬데 하 공공은 어찌 폐하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드리지 않았는 가? * 놀잇배

375 황후가 뒤에 선 하개를 나무랐다. 소인이 어리석었나이다. 윤대를 마치고 신료들과 바람이나 쐴까 하여 급히 걸음을 옮겼소. 하개의 탓이 아니니 노여워 마 시오. 폐하의 옥체는 대연의 대들보나 다름없는데 어찌 소홀함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시는 황후야말로 옷깃이 퍽 얇으니 지밀상궁을 혼내야겠구려. 신첩은 민망하게도 따뜻한 온돌 위에 앉아 있다가 나왔으니 괜찮습니다. 황제만큼이나 국모의 존체도 사직의 대들보라는 것을 모르시진 않겠지. 그제야 황후가 졌다는 듯 엷게 웃었다. 함께 걷겠소? 종인이 먼저 제안했다. 황후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지난 삼 년간 독수공방 신세였는데 가을 무렵 부터 사람이 달라지더니 어느 후궁보다 중궁을 위해 줘서 내심 기뻤다. 물론 종인은 경수가 황후에게 잘해 주라고 신신당부해서 그 말을 따른 것뿐이다. 경수가 보는 앞에 서 이러는 것은 싫었지만 이목이 많을 때 황후에게 잘한다면 태후전에도 말이 흐를 것이 뻔했다. 그 러면 자신도 태후와의 약조를 이행하는 셈이었다. 종인과 황후가 나란히 걷는 것을 경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강춘영에게서 종인을 빼앗을 때는 몰랐다. 종인을 안달하게 하려고 일부러 내명부 일을 들먹이며 그의 등을 떠밀 때만 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음이 좋지 않다. 눈앞에서 종인이 다른 여인과 발걸음을 나란히 하며 걷자 심사가 몹시 언짢았다. 아니, 슬펐다. 그에게 남은 감정은 오직 증오뿐인 줄 알았는데 마주 보며 그의 진심을 조금씩 알아가 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먼저 가라는 황제의 분부는 없었으나 대전과 내전의 주인들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버티고 있을 순 없었다. 이재관이 앞장서서 걸었다. 누군가 내게 정리( 情 理 )란 시간이 지나면 오린 자국이 남더라도 반드시 끊긴다고 하였소. 백현이 슥 다가왔다. 경수도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그대가 폐하의 뒷모습을 바라볼 줄은 몰랐구려. 해진 비단이라도 비단이라 값어치 있는 것 아니겠소? 이미 생채기가 난 것인데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을 수 있는 것을 어째서 자르려 하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요. 이을 마음이 아주 없진 않군. 백현은 씁쓸했다. 원독만이 남아 복수하겠다던 도경수다. 그런 그가 몇 달 사이에 변하더니 다시 예 전처럼 종인을 사랑하려 한다. 박탈감이 느껴졌다. 애초에 그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한 적은 없다. 진심을 보여주려고 할 때마다 벽 뒤에 숨 어서 자신을 넘보지 말라고 하던 그다. 그래서 체념하고 살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 라 못내 섭섭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도경수는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으니. 황제의 사람을 마음으로 탐한 죄, 손에 넣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형벌이라면 무척이나 달콤한 일이 아닌가. 폐하께서 그대를 지극히 연모하시는 것이 그대의 복이오. 이미 죽은 사람의 일로 굴러들어온 호박 을 넝쿨째 차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오. 폐하의 총애를 그런 저속한 감정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저속하다? 백현은 냉소를 터트렸다. 천자의 총애가 아니라면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소?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대가

376 먹고 입고 행하는 모든 것이 폐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무엇이 중요 하겠소? 총애는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다오. 표현의 문제죠. 나리께서 누군가를 은애하는데 그 감정을 가리켜 굴러들어온 호박이라고 칭한다면 그것이 미문이겠습니까, 황문이겠습니까? 나직하게 되받아치는 경수는 무척이나 우아했다. 미안하오. 제게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내 말은 폐하를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궁이 조용하다고는 하나 대인파에서 삼사와 그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소. 또 폐하의 순정 이 한결같다고는 해도 사람의 마음은 장담할 수 없는 법이지. 바람도 물도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물진 않으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경수다. 한창 불타오를 때는 목숨 바쳐 사랑할 줄 알았는데 찬열이 그리된 후로는 배반감에 열정이 식어버린 것을 그 스스로 체험했다. 김종인이 자신을 맹목적으로 아끼고 있음은 첫정에 대한 애틋함과 찬열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깬 것에 대한 미안함일 것이다. 그의 진심이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은 그의 마음이 온전히 도경수 한 사람에게만 향해 있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백현의 말대로 바람이나 물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이 그랬듯 김종인의 마음 도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 이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며 늘 조심하는데 변백현은 볼 때마다 잔소리였다. 아까 도와줘서 고맙소. 무엇을요. 폐하께서 내게 혼처를 구해 주시겠다고 한 것 말이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폐하나 저나 나리께서 좋은 배필을 만나 백년해로하기를 진심으로 기원 하고 있습니다. 인연은 원하고 강요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오. 폐하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사방에서 나더러 장가들라고 성화로군. 백현은 다소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속을 뒤집는 경수도 야속 했다. 그래도 동그란 뒤통수를 보니 또 귀엽기도 해서 혼자 마음이 풀어졌다. 다른 얘기지만 그대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찬열과 어머니의 복수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걸 다 이루고 나면? 경수는 대꾸 없이 무작정 걷기만 했다. 한창 걷다 보니 어느새 관청 인근이었다. 그대의 뜻을 다 이루고 나면 그다음은 무엇을 할 생각이오? 예문관에 있을 때, 경수가 입을 열었다. 폐하를 따라 행궁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강무를 하시던 중 폐하께서 낙마하시어 부상이 심했는데 그때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 마음을 다하고 있었지만, 신분이 불분명해 실질적으로 제 가 그분 곁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었죠. 그때 결심했습니다. 폐하께서 무사히 깨어나시면 원하시는 것을 해드려야겠다고.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 용양군이요. 백현이 등에 찬물을 끼얹은 듯 경악한 표정으로 경수를 쳐다봤다. 경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찌 그리 놀라십니까? 그대 입으로 그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서.

377 설마 제가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이미 지난 일이고 속절없는 바람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폐하와 저는 서로에게 비수를 꽂은 존재입니다. 관계를 회복한다고 해 도 과거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경수의 냉정함에 백현은 안타까움이 앞서면서도 한편으로 안도하는 자신이 싫었다. 현재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눈앞의 태산도 넘지 못했는데 어찌 벌써 하산을 서두르겠습니까? 그거 아시오? 무엇을요? 그대에게선 미래의 희망이나 기대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미래는 현재의 축적물일 뿐이죠. 매 순간을 절실하게 살다 보면 미래의 구복 따위에 매달려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이전보다 많이 누그러지긴 했어도 여전히 도경수의 마음은 황폐한 상태다. 그런 데도 비집고 들어갈 구멍조차 없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면서까지 김종인과 쌓아온 모든 것에 투신하 고 있었다. 백현은 무너져 내려 울고 싶었다. 도경수가 안타까웠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신을 연민했다.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박찬열의 복수가 끝나면 김종인과 도경수는,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먼지처럼 엉켜 머릿속을 배회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하시오. 경수가 공손하게 물러났다. 백현은 착잡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어사대 편액이 걸린 관청에 도착했다. 다소 부산스러운 움직임들이 포착되는 가운데, 변 지평! 변 지평! 홍만립이 답지 않게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68. 불공대천( 不 共 戴 天 ) 경주자사( 瓊 州 刺 史 ) * 임제환은 본시 색정광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하온데 나이를 먹을수록 추태가 심해 작금에 이르러서는 관할 지역에서 축첩 문제로 종친과 시비가 붙으니 일벌백계하여 풍속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홍만립의 주장에 이재관이 부연설명을 했다. 임제환은 그동안 비슷한 일로 여러 번 탄핵받았으나 무정후의 비호로 유야무야 넘어간 적이 많았 습니다. 게다가 그는 사 년 전 동주의 도독으로 나갔다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폐하께서 친히 다른 곳으로 좌천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예. 한동안 잠잠하다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니 지극한 폐단입니다. 어사대부의 말씀대로 같은 잘못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그간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쓴소리한 사 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내가 색을 탐하는 것은 음양과 자연의 이치겠으나 그것은 하늘 아래 서 떳떳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홍만립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경주자사 임제환이 만석꾼 김 진사의 애첩을 희롱한 것도 모자라 관아의 기생이란 기생은 죄다 하 룻밤 노리개로 여기고, 종국에는 정왕( 靜 王 )의 며느리까지 탐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정왕부의 세자빈입니다. 평소보다 흥분한 홍만립을 대신해 이재관이 뒤를 이었다. * 종이품. 지방 우두머리

378 임제환은 지위를 믿고 설치므로 더욱 괘씸합니다. 그간 부민들이 폭정에도 신음만 흘렸는데, 만일 정왕부 세자빈의 일이 아니었다면 영영 그 죄가 묻힐 뻔했습니다. 정왕이 뒤늦게 자손을 보아 며느리 를 맞은 지 이제 석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니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잠자코 듣던 종인이 반응했다. 정왕은 신녕제( 信 寧 帝 ) * 의 넷째 아드님이시자 짐의 숙부님 중 한 분이시지. 늘그막에 산천 좋은 곳에서 쉬고 싶으시다기에 짐이 윤허하여 경주 땅으로 내려간 지 오륙년 쯤 됐을 터. 임제환이 이를 모르진 않을 텐데 어찌 그런 패악한 짓을 했단 말이오? 정왕 전하의 며느리인 줄 모르고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유죄를 어찌 무지로 덮겠습니까? 평소 행실이 바르지 않았고, 혼인한 아녀자를 억지로 취하려다가 사람을 해쳤으니 어떤 변명을 대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재관이 그물을 치자 홍만립이 얼른 고기를 몰았다. 두 사람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오히려 이날 까지 임제환의 몰락을 바랐던 변백현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종인은 그 속내를 꿰뚫었다. 이미 몇 년 전에 그가 경성현에서 있었던 일로 분개하여 상소를 올린 덕에 조정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 금선공주와 백현은 임제환이나 대인파에 대해 별다른 적개심을 내비치지 않아 다수가 두 사람이 부마도위의 일을 그대로 묻고 지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 상소를 계기로 임제환이 좌천되자 사람들은 변석위의 아들이 임제환을 향해 박박 칼을 갈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런 마당에 이 자리에서 백현이 말을 보태면 입지가 더 난처해질 수 있었다. 어쨌든 백현은 이날까지 끈질기게 임제환을 예의주시했고, 납죽 엎드려 그가 덫에 걸릴 날만 손꼽 아 기다렸다. 이런 차에 홍만립이 먼저 소식을 접하고 분기탱천하였다. 백현이 경성에서 임제환이 경수에게 행했 던 일을 모조리 얘기한 덕분이었다. 정왕이 직접 상소를 올렸고 죽은 세자빈이 공교롭게도 형부상서 채규성의 처조카인지라 조정에서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폐하. 부디 임제환의 관직을 삭탈하고 졸경을 내리시어 정왕부의 한을 푸셔야 합니다. 무정후가 임제환을 무척이나 아낀다오. 조정에서 그 세력이 여전히 발호 중이니 이 일을 어떻게 처결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망설이시면 아니 됩니다. 조정에서 논의하는 동안 임제환은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 증거 인멸에 나 설 것입니다. 나아가 조정 영수들의 힘을 빌리려 할 테니 속히 순금사를 움직여 오라를 내리십시오. 홍만립의 채근에 종인이 지그시 백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느낀 백현이 살짝 몸을 숙이며 높낮이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로지 국법대로 행하소서. 그 한마디에 오래전 임제환과 장문견 등이 올렸던 상소가 떠올랐다. 부마도위 변석위가 지엄한 황실의 내탕고를 사사로이 융통하고 금선공주의 이름을 팔아 교만하게 굴었습니다. 이를 묵과하면 황실의 체면과 천자의 권위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정황이 명명백백하니 폐하께서는 오로지 국법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종인이 다시금 상소문을 읽었다. 점잖은 양반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평소 반듯하던 서체가 갈필이 었다. 어사대에서는 더는 나서지 마시오. 너무 많은 이목이 쏠리면 곤란해. 하오나 순금사에서 일을 맡는다고 해도 무정후가 나서면 흐지부지될 것입니다. 짐이 일의 처음을 알았으니 그 과정과 끝을 보고야 말겠소. 한두 번이 아닌 데다 숙부님과 채규성 의 체면도 걸려 무정후도 쉽사리 나서긴 어려울 것이오. 밖에 있는가? 하개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찾아 계시옵니까? 당장 순금사령을 들라 하라. * 효경제의 아버지. 즉, 종인의 할아버지

379 해 질 녘, 모처럼 비번이 아니라 경수와 백현은 우연히 마주쳐 나란히 집으로 향하게 됐다. 어제오늘 있었던 일로 조정이 떠들썩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장문견의 오른팔인 임제환이 심지를 당긴 폭탄처럼 터지고 말았으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귀추가 모였다. 종인은 순금사령에게 임제환을 압송하여 일말의 의혹도 없게끔 깨끗하게 진상을 밝히라고 하였다. 처결이 어찌 날지는 아직 모르지만 황제가 국구였던 장문견에게 간접적으로 칼을 뺀 것이나 다름없어 조정은 첨예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기쁘십니까. 무엇이? 임제환 말입니다. 그자가 그리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거요? 한서현에 있을 때, 박태흥 나리께서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백현은 속으로 쓸데없는 소릴 했다며 스승을 향해 빽 고함을 질렀다. 세상 사람 다 아는 얘기를 저만 모르고 있더군요. 세상 사람 다 알아도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지난 세월을 견뎠는지는 스승님밖에 모르셨소. 오래도록 방황하셨다지요? 잠시 말이 없던 백현은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깨끗했고 달은 밝았다. 공기의 흐름도 멈춰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 나이 열여섯이었소. 알 만한 나이이기도 하고, 모를 나이이기도 하 지. 불행하게도 나는 남보다 귀가 커서 더 많은 얘기를 들었고 울분이 쌓여갔다오. 그것을 삭이려 전국을 도셨습니까? 스승님께서 사람이 되라고 하셨소. 해서 사람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오, 물으니 많이 보고 듣고 배 우라고 하시기에 유랑하며 견문을 익히는 것이 능사라고 여겼지. 몇 년 전 제가 봉욕을 당할 때 몹시 화내셨죠. 도독이 임제환이었기 때문입니까? 스승님께 된통 혼났소. 나, 그대의 일을 핑계로 폐하께 상소를 올려 치기 어린 복수를 했거든. 사소한 번뇌에 사로잡혀 조정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박태흥의 노염을 샀었다. 그리고 백현은 자신 이 한 짓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칼을 갈고 있음을 밝혔다. 주저앉아 우는 병사는 되지 않으 리라고, 오니 속에서 오래 참고 기다린 연꽃처럼 화려하게 필 것이라고. 지금껏 숱한 벌레와 끈적끈적한 진흙탕을 견뎠다. 지옥에 가지 않는 한 괴로움도 영원하진 않을 터. 이제는 연잎 위로 흐드러진 부처의 미소만 피우면 된다. 허나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소. 복수는 하찮은 수단이고 수단이 더러우면 어떤 훌륭한 일이라도 그 끝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하여 직접 덫을 놓지도 않았고 그를 참소하거나 헐뜯은 적도 없소. 폐하께서도 벼르고 계셨을 겁니다. 곧바로 순금사령을 부르신 것을 보면요. 아무렴. 폐하의 입장에서는 대인파의 거두 중 하나를 쳐내는 일이니. 공주께서는 또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머니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소. 임제환은 여전히 경주 땅에 있고 이제 막 순금사에서 추포장 이 떨어졌을 뿐이지. 일리 있는 소리에 경수가 고개를 주억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것이 나리께서 원하시던 복수의 시작이자 끝입니까? 고작 임제환 한 명을 찍어내는 것으로 아버님과 어머니, 그리고 어린 변백현의 울분이 풀릴까? 뭔가 더 거대한 뜻이 있는 듯하지만 표정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스승님께 자초지종을 들었다면 내 아버님께서 임제환에게 쓴소리 몇 마디 던지신 것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셨음을 알겠구려.

380 부모를 해한 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지. 허나 조금 전 복수는 하찮은 수단일 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먼바다에서는 큰 물고기를 잡을 땐 어부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오. 작은 미끼를 던져 서로 잡아먹 게 한 후 굶주림에 지친 물고기가 스스로 그물에 걸리길 바라지. 세상에는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도 대어를 낚을 방법이 아주 많다오. 나리께서 숨 쉬는 세상도 달콤하지만은 않군요. 세상살이가 벌과 나비가 환장하는 꿀처럼 달콤하기만 하다면 무릉도원이니 극락이니 하는 말은 생 기지도 않았을 거요. 백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그것은 어쩐지 홀가분하면서도 작위적이었다. 나리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나 같은 파락호한테 배울 게 있다고? 예전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나리께선 고매한 선비이자 공주의 아드님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라 고. 체면을 생각하신다면 스스로 파락호라고 일컫진 않으실 겁니다. 날 생각해 주는 거요? 자신을 깎아내려 봐야 좋을 건 없죠. 나리께서 늘 제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요. 내 스승은 오히려 그대라오. 글속은 알았어도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 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대가 내게 배울 것은 없소. 백현이 선을 그었다. 명심하시오. 그대는 그대로서 온전해. 그대 자신에게서 배우고 그대 스스로 깨우쳐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소. 진지한 충고에 경수는 백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역시, 배울 것이 많은 분입니다. 허! 그러지 말라니까! 집에 와 보니 싸리문 앞에서 웬 인영 하나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경수가 사뭇 경계하며 누구냐 고 묻자 사내가 불쑥 돌아서서는 얼굴을 보였다. 나리께서 소인의 집을 어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경수가 은근히 떨떠름하게 나오자 사내가 사색이 되어 총총 다가왔다. 군기시 직장이 된 임제관이 었다. 경수는 예문관에 있던 내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임제관이 불쑥 찾아와 이러는 것이 영 불편 했다. 형인 임제환의 일일 게 뻔하였다. 그래도 당장 내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고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서 향나무가 심어진 궁벽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계의관 나리께서 일찍이 교안으로 돌아오셨음은 알고 있었으나 군기시 일이 바빠 제대로 찾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어찌 소인에게 존대를 하십니까? 아무리 소인의 품계가 높다고는 하나 한 단계일 뿐이고, 나리께 서는 당당하게 과거를 치르고 입격하신 관리시니 소인을 그리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 그런가? 임제관은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덧붙여 사사로이 담소를 나눌 만한 사이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자네를 괴롭혔던 것은 못난 치태였을 뿐이니 제발 그것으로 옛정까지 저버리진 마시게.

381 소인의 집은 어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알음알음하는 자들에게 물어보았네. 무슨 일이신지요? 염치없네만 자네 혹 나를 도와줄 수 있는가? 임제관이 망설이다가 실토했다. 자네가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잘 아네. 예문관에 있을 때부터 폐하를 지근에서 접하며 성격도 두루두루 파악했을 테고 자네는 원래 예의를 중시하니 폐하께 밉보일 까닭이 없었겠지. 황제와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여 대놓고 조롱할 때는 언제고 궁지에 몰리니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맘에 없는 소릴 해댄다. 자존심 강한 임제관이 이 지경이니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방증이라 경수는 더욱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실은 경주자사 임제환이 내 형님이시라네. 형님께서 여색을 즐기시는 것은 인정하네만 봉접수향은 당연지사 아닌가? 네. 그렇죠. 자네도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오해 가 있었는지 내 형님께서 문초를 당할 위기에 놓이 셨네. 순금사에서 나섰으니 꼼짝없이 교안으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으실 텐데 형님의 연세가 올해 예 순하고도 다섯이라네. 그 몸으로 어찌 형문을 감당하시겠나? 나리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임제환 영감은 어떤 오해 로 고초를 겪으시겠군요. 그렇지, 바로 그 오해! 허나 정왕은 폐하의 숙부십니다. 그분께서 늦게 얻은 아들이 첫 부인을 맞자마자 잃었으니 이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필시 오해가 있었을 것이야. 임제관은 단언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제 형에 대한 믿음이 매우 굳건해 보였다. 폐하께서 조정과 논의하여 처결하실 일인데 소인이 나리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네가 폐하 곁에서 내 형님께서 오해를 씻을 수 있게 잘 좀 구슬려 주시게. 아니 되겠는가? 요즘 소인더러 천 갈래의 바람이 되라는 분이 많으시군요. 경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임제관은 뜨악하여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나리의 딱한 처지는 알겠으나 폐하께서는 소인이 몇 마디 보탠다고 흔들리실 분이 아닙니다. 지금 껏 그러셨듯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시죠. 당연히 알고 있네. 알고 있네만, 요즘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아신다면 나리께서 소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러 오진 않으셨을 겁니 다. 어허, 도 계의관! 내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형님의 오해를 풀고자 자네를 찾았건만! 찾아오시라고 청한 적 없습니다. 또 사정이 급박한 것은 나리이지, 소인은 아니지요. 임제관의 낯빛이 싹 바뀌었다. 경수는 그자가 성미가 고약해 해코지할 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대꾸했다. 허나 나리께서 형님을 생각하시는 그 우애가 아름답군요.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사정을 잘 살펴 주십사 말씀은 올려보겠습니다. 정말인가?! 고맙네! 정말 고맙네! 형님의 무죄가 밝혀지기만 한다면 내 자네에게 금은보화가 쏟아 지는 꾸러미를 내밀지! 마음만 받겠습니다. 허면 보는 눈이 있을까 저어되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하시게. 그리하시게, 도 계의관! 쾌재를 부르는 임제관과는 달리 돌아선 경수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어젯밤, 군기시 직장 임제환이 저를 찾아와 형을 구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너를 그토록 괴롭히더니 간밤에 함부로 찾아가? 미쳤구나, 그자가.

382 종인이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하여 넌 뭐라 하였느냐? 그를 달래서 보내야겠기에 말씀은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짐에게 솔직하게 털어놔서 고맙구나. 폐하. 이 일을 어찌 처결하실 생각이신지요? 아직은 조정에서 장문견의 위세를 무시할 수 없고 임 제환이 그간 권신들과 깊이 교류하여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일이 쉽다. 경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임제환이 그간 쌓아온 악행이 얼마더냐. 또 그가 외직으로 떠돈 지 한참이고 이 일을 이대로 덮었 다가는 오히려 장문견과 대인파의 입지만 더욱 좁아진다. 삼사의 입지를 가장 먼저 다져놓으신 것은 이러한 소치였군요. 장문견이 나선다면 가장 먼저 어사대가 들고 일어날 것이고, 경연에 나가면 숭문관의 혈기왕성한 낭관들이 이 일을 의제로 삼아 물어뜯을 것이다. 조정 영수들이 얼마나 버티겠느냐? 허면 서까래로 당하기 전에 저들끼리 꼬리 자르기를 하겠군요. 소인배들의 이익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또 대인파가 지난 삼십 년간 조정을 집어삼킨 비법이기도 하지. 그들은 이익이 같으면 빠르게 뭉치고 취한 후에는 절대 흩어지지 않는다. 위기가 찾아와도 누군 가를 표적 삼아 꼬리를 자를 뿐이다. 부마의 죽음이 임제환의 참소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금선공주께서 부마를 잃으신 후 황실에 일절 왕래하지 않는 것이 그 탓이라던데요. 종인이 자세를 고치며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에는 짐도 어렸다. 보위를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태후가 수렴 청정할 때였지. 짐은 눈 뜬 앵 무새였고 태후가 입을 놀리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결정은 짐이 한 것이니 온전히 자유로 울 순 없지.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순 없습니다. 당시 폐하께서 의지하실 곳은 태후마마뿐이었고 모든 결정은 오 직 전후 사정의 인과에서 나오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종인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아니었다면 고모님께서는 절대 짐을 용서하지 않으셨을 거다. 허면 폐하께서는 그때 일이 과장된 음모였음을 알고 계신단 뜻인지요? 대인파가 이날까지 저지른 일 대개가 그렇다. 머리가 클수록 하늘이 가까우니 나무보다는 숲을 보 게 되는 셈이지. 경수는 그것을 숨기고 혼자 깊이 고민했을 종인의 숱한 밤이 걱정되었다. 영회황후가 죽은 후 부쩍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것도 안쓰러운 마당이다. 황제로서 그가 감당해야 할 무게는 두 어깨를 짓누르 고 전신을 쥐어짜는 고통일 터. 어째서 자신은 이날까지 그의 고민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았던가. 경수는 문득 자신의 냉정함과 종 인을 향한 연민에 모골이 송연했다. 임제환은 차라리 자복하여 자손이라도 보존케 해 달라고 빌어야 마땅하다. 정왕을 건드린 것만으 로도 장과 도( 徒 ) * 를 면할 수 없거늘. 괘씸하게 그 아우가 나서서 입을 놀리다니? 어떤 오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애원하더군요. 상소에 빼곡하게 적힌 그자의 악행이 모두 오해란 것이냐? 종인이 혀를 끌끌 찼다. 오해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옛날 일이 떠오릅니다. 뜻 모를 소리에 종인이 경수를 쳐다봤다. 경성현에 있을 때 현령의 생신 잔치가 열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엌일을 도우러 보수주인을 따 라 관아에 갔는데, 그 딸이 누군가 저를 찾는다며 방으로 안내했지요. * 노역

383 그 일이라면 백현에게 대충 들었다. 그래서 강춘영을 벌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녀는 스스로 몰락했 다. 또 경수는 돌아온 직후 그때 심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 경수가 새삼 그때 일을 입에 담는 것 은 다른 까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에는 웬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저더러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냐며 수청을 들면 유배지에서 벗어 나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싫다고 하자 악력으로 이기려 드는데 노인이라도 힘이 항우장 사와 같더군요. 종인의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능욕당하는 것이 싫어 사력으로 발버둥 쳤지요. 마침맞게 문갑에 놓인 화병으로 노인의 머리를 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저를 몰아세우며 동헌 마당으로 끌고 나가 사금파리 위 에 세워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뭐라? 사금파리 위에서 채찍질을?! 예. 나중에 겨우 풀려나긴 했지만 작은 오해가 있었다며 끝까지 저를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오해라 는 말이 상황에 따라 별별 뜻으로 쓰이니 참으로 망측합니다. 종인은 잔뜩 화가 나 목덜미가 붉어질 지경이었다. 백현에게 그때 일을 듣기는 했어도 이처럼 자세 한 사정은 전해 듣지 못했다. 더구나 경수가 담담하게 풀어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원래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성품이니 당시 상황이 무척이나 긴박하고 위태로웠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조정에 임제환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사건의 전후는 대강 알고 있었다만 네가 그런 고초까지 겪었을 줄은 몰랐다. 예전엔 폐하께서 제 일을 걱정하시는 것이 싫어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임제환의 민낯이 드러나니 씁쓸합니다. 어금니를 앙다문 채 뭔가 생각하던 종인이 나직이 명하였다. 너는 당장 교지를 받아 적어 순금사에 전하도록 하라. 경수가 지필묵이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어 올렸다. 종인이 잔뜩 노기 띤 음성으로 내뱉었다. 임제환을 순금사로 압송하는 대로 문초를 행하라. 죄가 명명백백하거든 상궐단자를 올릴 필요 없 이 장 오십 대, 도 칠 년을 내리고 받은 고신은 모조리 추탈하여 절도에 위리안치하라. 장 오십 대를 속바치려고 * 하거든 장 스무 대를 추가하라! 69. 계학( 谿 壑 ) 수월당에 내수소 사람들이 찾아왔다. 월초나 월말이면 궁에서 꼬박꼬박 사람이 나와 일용할 양식과 옷 등을 내주었다. 곳간 열쇠는 초영이 담당했으므로 그녀는 내관들이 가져온 물목을 꼼꼼히 점검하 고는 노비들을 시켜 모두 안으로 들였다. 황제가 내렸다는 탕약이 있어 초영이 아랫것들을 물리고 자신이 직접 약탕기 앞에 앉았다. 정성으 로 약을 달인 후 준면이 좋아하는 달곰한 깨강정을 곁들여 사랑으로 향했다. 준면은 두 아이들을 앉혀놓고 종대가 선물한 신인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 중이었다. 족자에 걸린 것 은 민화였다. 닭과 개, 다양한 식물, 호랑이들이 익살스럽게 생동했다. 그림에 흥미가 없는 모양으로 딸아이인 명혜는 한참 전부터 목이 뒤로 넘어갈 듯 말 듯했다. 명하 가 쿡쿡 웃으며 아우가 상모를 돌립니다! 라고 말하자 준면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초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명하가 화색을 띠었다. 초영이 그릇을 내려놓고는 꾸벅꾸벅 조는 명혜 를 안았다. 명혜가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림을 보고 계셨습니까? * 보석금을 내는 일

384 오전 내내 공부하였으니 머리도 쉬어야지요. 전하께서도 쉬셔야 합니다. 아이들을 봐주신다고 무리하시면 안 돼요. 어머니는 어째서 매번 저희보다 아버님이 우선입니까? 명하가 질투하듯 투덜거리자 초영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버님께서는 집안의 가장이시고 너희에게 뼈와 살을 주셨다. 또 이 어미에겐 하나뿐인 낭군이시니 당연히 아버님부터 챙겨야지. 가끔은 소자와 명혜는 안중에 없으신 듯합니다. 어허. 오냐오냐했더니. 아버님! 명하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제 아비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초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준면이 무릎 위에 명하를 앉히고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너와 명혜는 이 아비와 어미의 기쁨이자 자랑이다. 가족은 하나인데 어찌 차등이 있을 수 있겠니?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지 마라. 네 어머니께서 너를 낳으실 적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아니? 그건 준면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해서 명하는 시무룩해졌다. 너는 은근히 시샘이 많다. 사내는 올바른 대의 외에는 어떠한 욕심도 없어야 하지.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그럼 어머니께 사죄하여라. 명하가 일어나 초영 앞에 서서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소자, 생각이 단천하여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였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밖에 유모 있는가? 유모가 종종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별채로 건너가게. 약밥과 얼음엿을 내주고 체하지 않게 감주도 곁들이게.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마련했다는 말에 명하가 헤벌쭉했다. 유모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초영이 목판의 탕약을 내밀었다. 그릇을 만져 보니 아직 뜨끈뜨끈 했다. 조금 전 내수소에서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폐하께서 특별히 내리신 약이랍니다. 내의원에서 최상품 으로 고른 약재라더군요. 손발이 차거나 기력을 보할 때 좋다 하더이다. 폐하께서는 닷새 전에 따로 약재를 보내셨는데? 진상된 것을 살피신 김에 전하 생각이 나셨겠지요. 초영이 약을 후후 불었다. 폐하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시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뭔가 의아해서 준면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주기적으로 약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보통 달이나 보름 단위로 주는데 닷새 만에 또 새 약재를 보냈다는 것이 미심쩍었다. 더구나 진귀한 약은 잘 내주지 않고, 준다 하더라도 종대를 통해 쓰임새를 듣게 하였는데 오늘은 그런 것이 일절 없었다. 부인의 정성은 고맙지만 지금은 어쩐지 속이 불편해 물조차 넘기기 싫구려. 체기가 있으십니까? 신첩이 얼른 산사육( 山 査 肉 )을 가져오겠습니다. 부탁하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을에 말려둔 것이 아직 남았답니다. 초영이 나간 후 준면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탕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수소. 내수소라. 생각하던 그가 반닫이 위에 놓인 화분에 탕약을 반쯤 쏟고는 나머지는 바닥에 흘린 것처럼 엎어버 렸다. 얼마 안 가 초영이 들어와 쏟아진 그릇과 약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손이 미끄러워 약을 쏟고 말았소.

385 속이 불편하여 아니 드시겠다면서요? 다시 생각하니 부인께서 부러 달인 것인데 아니 먹기 민망하여 마시려 했지.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약이 뜨거웠을 텐데. 괜찮소. 여종을 불러 청소하게 한 후 초영이 백비탕과 산사육을 내밀었다. 탕약을 다시 달이겠습니다. 전하께서 동상에 걸리신 후 손발이 저리고 통증이 심하신 것을 잘 압 니다. 겨울이면 그 증세가 심해지는데, 폐하께서 내리신 이 탕약이 특효라 하니 꼭 드셔야 합니다. 대답 없이 물만 후룩후룩 마시는데 준면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자꾸만 창문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심기가 매우 불편한 듯했다.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아무 일도 아니오. 잠시 쉬고 싶구려. 까닭 없이 이럴 양반이 아닌데 거 참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캐묻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 나면 준면이 스스럼없이 얘기해 주기 때문이다. 방바닥이 찹니다. 군불을 데울 테니 오수라도 드시어요. 그리하리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초영이 물러간 뒤, 준면은 화분에 시선을 고정했다. 순금사에서 임제환의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정왕이 황급히 교안으로 사람을 보내 임제환이 단 죄받는 꼴을 빠짐없이 보고 오라 했다. 종인은 일을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임제환은 교지대로 관직이 삭탈되고 장형과 도형을 모두 받게 되었다. 다만 그간 조정에 봉 사한 것과 장문견의 상소 몇 마디가 힘을 발휘해 장형은 서른 대가 깎여 스무 대만 맞게 되었다. 그러나 임제환은 나이가 많아 장형 열 대만으로도 엉덩이가 터지고 온몸에 큰 무리가 왔다. 스무 대는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사람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음을 종인은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임제환의 형을 감해야 한다는 대인파의 상소에 이렇게 답했다. 짐은 이미 그의 참혹한 악행을 알게 모르게 묵인했다. 또 그가 치적한 공을 생각해 장형 서른 대 를 감하였으니 이로써 정왕의 원망을 사지 않을 수 없다. 계속 설왕설래하는 것은 오히려 짐의 얼굴 에 먹칠하는 꼴이니 더는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말라. 임제환은 꼼짝없이 장 스무 대를 맞았고 피고름이 나 병석에 드러누웠다. 그런다고 도형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종인은 한 발 더 나아가 죄인을 교안에 두지 말라며 먼 형주 땅으로 보내라고 했다. 명목은 목책을 쌓고 산성 수리에 노동을 보태라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유배였다. 지난날 중추원일기와 내수소 기록을 샅샅이 뒤져 대조한 결과 저들이 네 부친을 참소한 정황이 드 러났다. 어사대의 부계를 살피던 중 종인이 백현에게 말을 건넸다. 백현은 묵묵히 올려야 할 계만 정리할 뿐이었다. 당시 부마를 죽이라고 한 자들이 임제환을 비롯해 장문견과 그 일파 대부분이더구나. 네 아비는 억울하게 팽형에 처해지고 옥중 자결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허나 지금 당장 그들을 일망타진하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들은 국가 대신이야. 소신은 임제환이 벌을 받고, 폐하께서 가친의 억울함을 알아주신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돌아오지도 않지. 당장 저들을 도륙한다고 해도 말이다. 백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부마의 누명을 벗기고 그의 명예와 지위가 신원되는 것일 터. 하지만 수습이 쉽지는 않으니 조금 더 인내해야 할 것이다.

386 소신의 집안일로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좁게 보면 변씨 문중의 일이나 넓게 보면 황실의 일이다. 저들은 감히 나라의 부마도위를 욕보이 고 죽음으로 몰았다. 짐은 네 부친의 사사로운 복수가 아닌 나랏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과연 폐하께서는 천하를 평정하실 성군이십니다. 만상전을 나오니 때마침 푸른 하늘 위로 까치가 날아오르며 힘차게 울었다. 햇볕이 넉넉하여 점점 봄을 앞당기는데 문득 현기증이 일어 백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늘이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임제환을 압박해서 그의 사지육신을 찢고 일가 를 패망하게 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백현의 머릿속에는 큰 종이가 있었고 그는 조금씩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중이었다. 이제 팔부 능선을 넘었다. 완성된 화폭은 백현이 지금껏 심심파적으로 그린 것 중 최고의 걸작이 되리라. 가문의 한을 너희의 피로 씻으리라! 화원( 花 園 ) * 에서 산 푸릇푸릇한 몽당솔이 죽었다. 의송산의 양분을 잔뜩 머금은 것으로 겨우내 방 안에 솔향기를 뿜더니 별일이었다. 마치 햇볕에 탄 것처럼 바짝 말랐다. 이파리는 갈잎으로 변해 우수수 떨어졌고 단단하던 나뭇가지 는 푸석푸석해 수분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솔보굿이 비늘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물을 안 준 것도 아닌데 정말 괴이했다. 상록송이라 하여 샀더니 어찌 이리 타 죽었을까. 생각하던 초영이 불길하다며 남편 방의 분재를 얼른 치우게 했다. 서재에 들어온 준면이 창가에 두었던 분재가 사라진 것을 보고는 어디다 두었느냐고 물었다. 초영 이 직접 서안을 정리해 주며 답했다. 조금 전에 보니 새카맣게 말라 죽었더이다. 송엽액이 좋다 하여 달여 마실까 하였더니. 농담하지 마시어요. 불길한 것을 어찌 드신다 합니까? 준면이 후후 웃었다. 내가 죽였소. 예? 며칠 전 내수소에서 준 약재로 내 탕약을 달이지 않았소? 체기가 있다고 하였으나 실은 맘속으로 꺼림칙한 것이 있어 일부러 마시지 않은 거요. 초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준면은 그런 아내가 안심하게끔 온기를 가득 담아 손등을 어루만졌다. 부인이 주신 탕약을 반쯤 분재에 쏟았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니 그리 죽어 있었소. 하, 하오면? 약재랍시고 내게 독약을 건넨 것이지. 초영이 경악하여 숨을 꾹 참았다. 그녀는 하마터면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했다. 궁중에서 지낼 때도 종종 이상한 낌새가 들어 약이나 밥을 거부하면 여지없이 방에 둔 화분이 죽 었지. 이번에도 그런 연장일 뿐이라오. 초영이 두려운 기색으로 물었다. 하오면 탕약은 폐하께서 내린 건가요? 아니. 이번 일은 폐하와는 무관할 것이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인면수심한 짓을. 주절주절 내뱉던 초영이 불현듯 내리친 벼락에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 혹 태후전에서? * 꽃 가게

387 준면은 초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초영은 불안해 죽겠는데 남편이 너무도 천하태평인 듯하여 속으 로 부글부글 끓었다. 태후마마께서는 어째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것입니까? 내가, 폐태자이자 의귀비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모두 끝난 일입니다. 어떤 원한은 가슴에 오래 남아 세월이 흐를수록 똬리를 틀고 뿌리내린다오. 전하께서는 지금껏 쥐 죽은 듯 엎드려 사셨습니다. 명하가 공왕에 봉해지긴 했지만 그것 말고 달 라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십 년 넘게 송장처럼 살았는데 갑자기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입궁까지 했으니 적들의 눈에 불이 타 는 것은 당연하오. 참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께 말씀드려 폐하께 은밀히 상황을 알리겠어요. 내가 당장 죽길 바라는 것이오? 초영이 끔찍한 소리에 놀라 얼른 남편에게서 떨어졌다. 장인어른께서 나 때문에 은인자중하고 계시오. 헌데 부인께서 장인어른을 부추긴다면 일은 삼천포 로 빠져 저들의 덫에 온전히 걸리고 말 것이오. 저들은 내가 죽든, 나를 비호하는 장인어른께서 돌아 가시든 반드시 한 가지 이익을 취할 터. 부인께서는 정녕 그것을 바라시오? 신첩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너무도 황망하고 무서워서 실수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자중해야 하오. 하오면 어쩌시렵니까? 태후마마께서 전하를 끝까지 죽이려 할 텐데 꼼짝없이 당해야 합니까? 전하 께서 잘못되시면 우리 모자는 어찌합니까? 부인은 나를 구원했소. 준면은 다시 초영의 손을 따스하게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에 나락 끝에서 든든한 울타리를 만났으니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오. 부인이 아니 었다면 꼼짝없이 인생을 비관하다 죽었을 테지. 허니 이런 부인이 고마워서라도 나는 부인이 슬퍼하 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오. 미력하나마 사력을 다해서. 힘을 주어 내뱉는 모든 문장에는 진심이 꽉꽉 채워졌다. 혼인하고도 일 년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 부인이 홀로 독수공방한 것을 생각하면 나는 스스로 용서가 안 돼. 전하. 부인이 극심한 산고 끝에 명하를 낳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오. 명하는 당신과 나를 잇는 생명의 줄이었고, 나태하게 현실에 누워 징징거리던 나를 일깨운 회초리였소. 이런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내가 어찌 세상을 등지겠소? 초영의 두 눈에서 이슬처럼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늘 미안하다고만 할 뿐, 이렇게 진솔하게 흉금을 털어놓은 적이 없던 준면이다. 열여섯 그 날. 교안에 계신 막내 이모의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김준면과 설초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잣거리를 구경한다고 멋대로 나섰다가 길을 잃어 왈패에게 희롱당하지 않았다면, 마침맞게 김준 면이 책을 빌리러 세책점에 나오지 않았다면, 김준면이 설초영을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부인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소. 그러니 부인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오. 전하야말로 천방지축인 신첩을 아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멋대로 혼사를 추진해 달라며 아 버님을 부추겼고, 전하의 처지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떼를 썼어요. 그 덕에 장인어른께서 며칠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셨지. 준면은 낮게 웃었으나 초영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아픈 기억이었다. 초영의 부친인 설혁은 대대로 명주의 부호였다. 중앙에 진출하기보다는 외직에 머물며 지방을 다스 렸는데 그는 재물이 많아 조정에도 꽤 힘을 미치고 있었다.

388 그런 설혁의 인생에 최대 시련이 닥쳤다. 금이야 옥이야 기르던 막내딸이 교안 이모 집에 갔다가 낭패를 당했는데, 그만 자신을 구해 준 사내에게 홀딱 빠져 시집가겠다며 생떼를 부렸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았으나 혼기가 찰 시기이기도 했다. 설혁은 왈짜패에게서 어린 계집을 빼낼 정도 면 정의감이나 무술이 보통이 아닌 듯해 아랫것들에게 남자의 신상을 캐게 했다. 그리고 정체를 알고 서는 기겁했다. 다름 아닌 폐서인됐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소왕 김준면이었던 것이다. 비록 소왕이 황자의 지위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양친을 잃고 뒤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천애고아나 다름없었다. 황실과 왕래도 안 했고 태후의 감시를 받았으니 소왕은 혼기가 지나도 혼인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소왕과 혼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난리인 막내딸을 설혁은 곤란하게 여겼다. 광에 가두기도 하 고, 어르고 달래도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혼서를 보냈는데 여러 번 거절당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설혁은 화가 나 혼담은 없던 것으 로 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다 속이 상한 초영이 상사병으로 앓아누웠다. 열여섯밖에 안 된 딸이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이 에 설혁이 부랴부랴 짐을 챙겨 직접 교안의 수월당으로 찾아가 빌었다. 사정을 알게 된 준면이 착잡 하게 답했다. 나는 권력과 재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요. 종친이라는 허울을 보고 내게 덤비는 것이라면 나는 당신의 딸이 죽든 말든 관여치 않을 것이오. 제 딸은 그런 것을 바라고 전하와 혼인코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 오직 진심뿐입니다! 피차 괴로운 혼인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기쁜 것이 낫겠지. 당시 궁에서는 김준면의 나이가 스물이 되기 전에 혼사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김종 대의 혼사를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준면은 이런 내막을 알고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자신을 초영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녀에게 초반에는 전혀 정이 붙질 않았다. 의무감에 몇 번 잠자리를 가졌으나 그뿐이었다. 그러다 덜컥 초영이 회임했고 꼬박 하루를 채운 사투 끝에 명하를 얻었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준면은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초영에게 무릎 꿇었다. 명하를 낳은 후 전하께서는 신첩이 조금이라도 서운할까 봐 매사 저와 일을 의논하시고 저를 최우 선으로 하셨죠. 장인어른께서도 손자를 안아보시고는 비로소 우릴 인정하셨소.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와 아이들만 있다면 하늘을 지붕 삼고 풀밭을 이불 삼는다 한들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신첩에게는 지금의 행복이 더욱 소중합니다. 이해하오. 부인의 마음을 나는 다 이해하오. 전하. 신첩은 너무 두렵습니다. 하마터면 폐하를 의심할 뻔했어요. 잔뜩 독이 오른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자충수가 된다는 것을 저들도 언젠가는 깨달을 것 이오. 폐하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짬이 나시면 다시 승명패를 내리시겠지. 준면은 발발 떠는 초영을 다독였다. 그의 깨끗한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번졌다. 70. 다정각사총무정( 多 情 却 似 總 無 情 ) 환절기라 서명정의 몸이 좋지 않았다. 고기를 먹은 지 꽤 된 듯하여 돌아가는 길에 어리전에 들러 꿩고기를 샀다. 생치저냐를 만들어 뜨끈한 쌀밥과 함께 드리면 아버지의 입맛이 돌아올 것 같았다. 군칠에서는 초저녁부터 거나하게 취한 상인들이 요란법석을 떨었다. 경수는 정겨운 살냄새 가득한 육전과 저잣거리를 돌아보며 모처럼 한가함을 느꼈다. 달도 뜨지 않은 저녁, 해가 빠르게 저물어 집으로 가는 길은 벌써 으슥하고 어두웠다. 경수는 발길

389 을 서둘렀다. 요 며칠 새 누군가 그의 뒤를 밟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과거도 치르지 않은 채 관직을 받고 황제의 고야정까지 들락날락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미움을 잔 뜩 산 상황이다. 더구나 어사대와 더불어 조정에서 권신들을 찍어내는 도구로 비쳐 그도 모르는 새 정적을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그들이 은밀히 일을 도모하려고 사람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 기에 경수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감나무 근처에서 세 명의 왈패들이 나타났다. 경수가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뒤에도 사람이 있었다. 총 다섯이다. 무, 무슨 일이시오? 네가 도경수이냐? 그렇소만 무슨 일로? 왈패들은 허리춤에서 검을 한 자루씩 뽑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대단한 놈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별것 아니군.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일대에 집은 서너 채뿐이고 모두 노인들이 살아서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때맞춰 순라군이라도 지나가지 않는 한,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폐하를 홀렸다기에 천하일색일 줄 알았는데 참 볼품없군. 하하하! 태후마마께서 시키셨소? 아니면 사도요? 구천에서 굽어 살피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 죽을 땐 죽더라도 배후가 누구인지는 명백히 알고 싶소. 그래야 귀신이 되더라도 당신들 꿈에는 아니 나타날 테니! 네놈의 방자함이 하늘을 찔러 나라에 먹칠을 하니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하시는구나! 사내들이 칼을 빼 들고 일제히 경수를 향해 겨눴다. 경수가 파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꼭 감 았다. 이대로 죽는가 싶어 심장이 쿵쾅거리고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윽! 아악! 단말마의 비명에 경수가 놀라 실눈을 뜨니 한 사내가 어둠 속에서 왈짜패를 쓱싹쓱싹 썰고 있었다. 경수는 정신이 요원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순식간에 왈짜들을 제압하고 두목인 듯한 놈의 뒤채를 휘어잡아 경수 앞에 꿇어앉게 했다. 역광이 걷히고 서서히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신 나리! 주변엔 왈패 넷의 시체가 널브러졌고 혈흔이 비쳤다. 경수는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 다. 다친 데는 없는가?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리께서 이곳에는 어떻게? 그보다 이자의 배후를 살펴야 할 것이야. 말해라. 일을 사주한 자가 누구냐? 청신이 다그치자 왈패의 수장은 낮게 욕지기를 뱉었다. 버텨도 소용없다. 너를 폐하 앞으로 끌고 가 감히 중추원의 계의관을 해하려 한 까닭을 낱낱이 들 을 것이다. 에잇! 청신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왈짜가 억세게 혀를 깨물었다. 경수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청신은 그런 왈짜를 비릿하게 노려보고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서 네 명의 시위들이 나타났다. 청신이 그자들에게 왈짜를 수습하게 하였다. 혀를 깨물어도 소용없지. 목숨이 붙어있다면 얼마든지 자백을 받아낼 수 있으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청신은 경수에게 다가와 살폈다. 경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 다. 몹시 놀란 듯 안색이 파리했다.

390 노린전에 혹하여 사람 목숨 해하기를 업으로 삼은 자들이네. 폐하께 곧 보고될 테니 안심하게. 폐하께 보고된다니요?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하오면 근자에 제 뒤를 좇던 분이 나리십니까? 어명으로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네만 아까 그자들은 전부터 자네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어. 무슨 까닭으로 그랬느냐는 듯한 눈빛에 청신이 대꾸했다. 일전에 임제환 때문에 그 아우인 임제관이 멋대로 자네의 집을 찾은 일로 폐하께서는 분개하셨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까 노심초사하셨는데, 임제관처럼 멋대로 자네의 뒤를 밟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여기시어 내게 하명하셨네. 저를 지키라고요? 조정에서 어사대를 비롯한 삼사의 젊은 관리들이 심심찮게 표적이 되는데 자네는 폐하의 총애를 얻지 않나? 또 스스로 몸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지. 자신을 지키려고 황제의 호위를 맡은 어전시위를 붙이다니, 종인의 진심에 온몸이 녹을 것만 같았 다. 찬열의 일로 자신에게 보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김종인은 변함없이 도경수를 아끼고 사랑한다. 연인이 전과 같이 자신을 대하지 않는데도 사내는 하늘과 바다처럼 연인을 품고 또 품었다. 그렇다고 폐하의 안위를 책임지시는 나리께서 곁을 비우시다니요? 어명이 완고하여 어쩔 수 없었네. 허나 덕분에 살았으니 천만다행이지. 경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네. 안 그래도 어명을 받은 후부터 줄곧 자네와 독대할 시간이 마련되길 바랐다 네. 청신과는 별로 말 섞을 일이 없어서 그가 독대를 원한 까닭이 무엇일지 몹시 궁금했다. 집에 도착해 안방에 간단하게 저녁상을 마련해 주고 다시 나온 경수. 청신은 근처의 객잔에서 기다 리고 있었다. 단둘이 얘기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닐세. 나도 막 저녁을 물린 참이야.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청신이 말간 두 눈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청신이 쉽게 입을 놀리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 아서 괜스레 긴장감이 몰려왔다. 청신은 강호에서 온 사람으로 늘 언행에 신중을 기했고, 종인은 그런 청신을 수족처럼 아꼈다. 하개 와 청신이 아니었다면 종인은 살얼음판인 궁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경수는 자신이 없는 동안 종인에게 두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청신이 무슨 얘기를 꺼낼지, 다른 사람을 물리고 단둘이서 봐야 하는 그 중차대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공연히 두려웠다. 폐하께서도 몇 번이나 고민하셨지만 차마 당신 입으로 말씀하시기가 민망한 듯하여 내가 중간에서 다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네.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성격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폐하께서 홀로 괴로워하시는 걸 볼 순 없었 어. 허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폐하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내 의지로만 떠드는 것이라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나리께서는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성에처럼 차갑게 내려앉은 한숨 끝에 청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박찬열 장군에 관한 얘기일세. 경수가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일전에 무위장군께서 옥중에서 자결하신 일로 역모 사건이 종결되었네. 허나 이는 모두 조작된 사 건이었어. 폐하께서는 오래전부터 진상 파악에 나서셨고 단초가 모일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셨지.

391 찬열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일을 김종인이 오래전부터 벼 르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나는 어명을 받자와 따로 무위장군의 죽음에 대해 조사 중이었네. 무위장군께서는 옥중에서 자결하신 게 아니야. 그분께서는 누군가 쏜 울인이라는 독침에 당하여 숨을 거두셨네. 경수가 경악했다. 강호에서는 울인이라는 맹독으로 만든 검으로 적을 죽이기도 하는데 워낙 치명적이라 지금은 명맥 만 이을 뿐 감히 서로에게 울인을 겨누려 하지 않는다네. 헌데 누군가 이것을 써서 무위장군을 죽음 으로 몰았고, 진상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마무리하려 했네. 그 후 청신이 울인을 만드는 과정과 찬열이 타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위를 모조리 털어놓았다. 얘기를 모두 들은 경수는 기가 막혀서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황망한 일을 당하면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다던데 지금의 그가 딱 그러했다. 마치 찬열의 죽음과 절명시를 받아보았을 때처 럼 말이다. 청신은 사시나무처럼 떠는 경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도 계의관. 괜찮은 것인가? 경수가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붙들었다. 그가 숨을 토한 후 되물었다. 정녕, 정녕 찬열이가 자결한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청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일순 이들이 입을 맞추고 자신을 속이려는가 싶었다. 그러나 정황이 딱딱 들어맞고 송기석 이 실제로 종인의 주치의가 된 점을 미루어 조금 전 들은 얘기가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찬열이는 죽기 전 제게 절명시를 남겼습니다. 서체가 분명. 빠르게 말을 잇던 경수는 아차 싶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했다면 익숙하게 봤던 찬열의 필체와는 확연히 달랐 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을 텐데! 어찌 그러는가? 옥졸 하나가 인편에 찬열의 유언을 보냈습니다. 성삼문의 절명시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평소 찬 열의 서체와는 달랐습니다. 필적이 달랐다? 예. 찬열은 무장이고 서예에는 관심이 없어 제가 늘 악필이라고 놀리곤 했습니다. 헌데 그때 받은 유언의 필체는 비록 흘림체이긴 했으나 제법 격식 있고 정갈한 편이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인 수체( 仁 壽 體 ) * 에 가까웠습니다. 그 서찰을 아직 가지고 있는가? 예. 다음에 입궁할 때 폐하께 보여드릴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그 날 무위장군께서 옥졸에게서 지필묵을 빌려 간 것은 사실이네. 아마 누군가에게 유언을 남기려 했던 모양인데 중간에서 누군가 글을 가로챈 것이 틀림없네. 경수는 모골이 송연했다. 똑똑한 척, 고결한 척은 혼자 다했으면서 정작 분노에 눈에 멀어 이처럼 사소한 단초를 놓치고 있었다니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한 번쯤은 짐을 이해해 줄 수 없겠느냐? 만에 하나, 박찬열의 죽음이 짐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그때도 짐을 그런 얼굴로 대할 것이 냐. 유배를 떠나기 전, 휘정궁에서 종인은 금세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그리 물었다. 그리고 경수는 * 중종 때 문신 김구의 서체

392 차갑게 답했다.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많죠.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한번 떨어진 꽃은 다시 가지 에 붙지 않는 것처럼요.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렸다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선 마음 또한 마찬가지겠 죠. 김종인은 이 엄청난 일을 혼자 뒤집어쓸 생각이었던 것인가? 생각하자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을 종인이 대단했고, 그에게 미안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쏜살같이 흐른 시간은 어느새 동장군을 물리고 봄을 데려왔다. 이제 막 맺힌 개나리와 목련 봉오리 가 가지 끝에서 실바람에 바르르 떨었다. 앙증맞은 자태는 어린아이의 풍성한 눈웃음 같기도 했다. 겨우내 얼었던 산천의 물이 녹아 계곡에서 철철 흘러넘쳤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샘물은 수로를 따 라 궁 곳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수면 위에서 빙그르르 춤추다가 종인의 손에 닿았다. 종인이 물방울 이 맺힌 초록빛 잎사귀를 들고는 햇볕이 비춰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작은 무지개를 그릴 듯한 데, 문득 콜록콜록 잔기침이 터졌다. 한동안 괜찮더니 환절기가 되자 몸이 안 좋았다. 몇 번 혈흔이 비치기도 했지만 기침이 심해 목구 멍에서 피가 쏟아진 것이라 그리 심각하진 않았다. 어의 송기석이 물심양면으로 힘썼다. 폐하, 찾으셨나이까. 경수가 들었다. 간밤에 청신이 돌아와 어젯밤 경수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그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다고 밝 혔다. 종인은 일순 화가 치밀었으나 청신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속으로 울음만 삼켰다. 언젠가는 밝힐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난 후에 할 예정이었다. 그 러나 뜻밖에 계획이 틀어졌으니 전화위복인지 설상가상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봄볕이 제법 좋구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손에 쥐고 있던 싱싱한 나뭇잎을 경수에게 내밀었다. 네게 주는 봄이니라. 여전히 소년 같으십니다. 너도 여전히 소년 같구나. 종인이 경수를 데리고 정자 앞에 앉았다. 어젯밤에 네게 괴한이 붙었다던데 다친 데는 없더냐? 중랑장께서 도와주셔서 목숨을 부지했나이다. 무엄하게 네게 손을 대려 하다니. 청신이 아니었다면 너는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폐하의 혜안에 깊이 탄복하였습니다만, 나리께서 폐하의 곁을 떠나는 일은 없게 하소서. 불측한 무 리가 언제 폐하께 위협을 가할지 모릅니다. 적들이 네 목숨까지 노린 상황에서 오가는 길에 널 홀로 둘 순 없다. 붙잡은 이를 문초하여 배후 를 알아낼 것이다. 저 때문에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폐하께서 처리하실 일이 산더미인데요. 네가 최우선이니라. 그리고 둘은 한참이나 서로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들고나는 이름 모를 새만이 나뭇가지에 앉았다 가 담벼락에 총총 걸음을 놓으며 이내 날아갔다.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꽤 경쾌했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이런 고요함은 오랜만이다.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사막의 샘물인 듯 귀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갈증을 달래려는 듯 종인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며칠 혼자서 많이 고민하다가 네게 먼저 털어놓는 것이 좋을 듯하여 오라 하였다. 오늘이 아니면 당분간 태후의 탄신연 준비로 바쁠 테고. 그렇게 또 미루다 보면 영영 시기를 놓칠 것 같구나. 경수가 곧장 무릎을 꿇었다.

393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결같이 믿어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속이 좁아 폐하를 믿지 못 하였습니다. 경수의 흰 두 뺨은 낯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다시 요동쳤다. 종인에게 미안해서 전전반측했다. 어떻게 다시 종인의 얼굴을 마주할까 싶어 오는 내내 마음이 편 치 않았다. 다시 본다 해도 그에게 무슨 자격으로 말을 건넬 것이며 무슨 낯으로 그를 대할까 싶었다. 그런데 종인이 미리 사정을 안 듯 다정하게 나오니 방죽 무너지듯 마음의 앙금과 벽이 모조리 부서 졌다. 종인이 경수를 일으켜 세웠다. 네 탓이 아니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폐하를 믿지 못한 것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찬열인 저와 가문의 은인이고 가족 처럼 의지했죠. 가족을 잃은 슬픔에 이성을 잃고 폐하께 상처를 드렸습니다. 박찬열은 죽는 순간까지 너와 짐을 걱정했다. 스스로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었어. 그래서 우리는 불길로 뛰어든 그를 막지 못해 충격 받은 것일 뿐이다. 결국, 경수의 입에서 울음이 터졌다. 종인이 그를 안아 달랬다. 말없이 등을 토닥였고 머리를 쓰다 듬었다. 종인도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꾹 참았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경수는 의경궁에서 이마를 찧던 날처럼 슬프게 되뇌었다. 그 소리를 듣는 종인의 가슴도 찢어졌다. 네게 진즉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찬열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미쳐 있었다. 모두가 미쳐서 서로에게 상처만 주려 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아니다. 네게 일찍이 털어놓지 않는 짐의 탓이다. 붉어진 눈시울을 뒤로하고 종인은 계속 말했다. 당시 너와 짐은 무척 어렸다. 성숙하기보다는 각자의 감정이 더욱 중요하고 이성보다는 냉소가 가슴에 와 닿던 시절이었다. 짐은 나를 냉대하던 네가 미웠다. 세상 끝에 홀로 남겨지더라도 너만 나를 이해해 준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여겼다. 헌데 네가 나를 차갑게 대하니 혼자 실망해서 너를 밉게 본 것이다. 네 마음이 황폐 함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 아닙니다.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네가 돌아온 직후 말했어야 했으나 중추원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듯해서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둥글게 아롱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종인은 경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수야. 짐은 한편으로는 네가 사실을 털어놓아도 믿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뒷말은 잇지 않았으나 생략된 종인의 사념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후 겉으로는 김종인에게 충성하고 굴복한 척했으나 내심 그에 대한 원독으로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줬을 것이다. 툭하면 밀어내고 안달하게 하였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종인을 온전히 자신의 손에 넣고 흔들 수 있 으리라고 여겼다. 오로지 황제의 힘이 있어야 찬열의 누명을 벗기고 어머니에게 오보를 알린 세력을 발본색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삼 년을 타향살이와 유배로 보내면서 순수하던 청년은 사라지고 궁중의 악귀만이 남아 남들처럼 모 질고 독하게 변하였다. 그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것을 김종인이 몰랐을까? 변해버린 마음을 김종인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였을까? 폐하께서는 모두 아시고도 나를 곁에 두신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것을 아시면서 끝끝내 나 를 놓지 못하신 것이다. 이렇게 몇 마디 말로써 금세 풀어질 마음을 어째서 몇 년 동안 끙끙 앓으며 서로 미워하고 탓하였 을까. 서로에 대한 배려가 지나쳤던가, 아니면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기에 더욱 실망이 컸던가.

394 정이 지나치면 도리어 무정하다던데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했던 것은 아닐까. 폐하를 뵐 낯이 없습니다. 저는 폐하를 뵐 자격도 없습니다. 자책하면 화낼 것이다. 매번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미루고 감췄던 짐의 탓이다. 지난 세월 홀로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괴롭고 슬프셨습니까? 혼자서 얼마나. 얼마 나. 다시 눈물이 팍 터지니 슬픔에 휩쓸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해와 달도 헤어졌다가 만나는 것을. 71. 경죽서난( 罄 竹 書 難 ) 경수가 청신의 부탁대로 찬열의 절명시를 가져왔다. 필적을 대조하니 과연 찬열의 것과 달랐다. 제 법 흉내 낸 기색이 엿보였으나 서체는 버릇이라 온전히 자신의 기척을 지우진 못했다. 자세히 보니 네 말대로 인수체에 가깝구나. 종인은 다시금 서찰을 살폈다. 이런 것으로 경수의 마음을 뒤흔들다니 적들의 수가 간교하고도 기 가 막혔다. 짚이는 데라도 있으십니까? 한 군데 외에 달리 있겠느냐. 헌데 이것을 보니 예전에 황세용이 짐에게 보였던 것이 떠오르는구나. 경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종인이 따로 모아둔 편지함에서 다른 서찰을 꺼냈다. [수중에 금상의 밀명으로 작성한 살생부가 있으니 사도께서는 반드시 몸을 보중하고 언행을 삼가야 합니다.] 일전에 황세용에게 몸을 사리라고 했다던 찬열의 서찰이었다. 절명시와 대조하니 필체가 거의 같았 다. 경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떠하냐? 찬열의 서체를 따라 한 흔적이 엿보이나 세심하지 못해 자신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누군가에게 대 필하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짐도 그리 생각한다. 사도도 깊이 연루됐다는 뜻이군요. 봉호와 독사는 거리낌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법이지. 경수는 마음이 무거웠다. 박찬열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김종인이 자신과의 약조를 어기고 찬열을 죽였다 고 생각해 여태 그를 원망하고 증오했다. 혼자 진실을 끌어안고 끙끙 앓았을 종인을 생각하니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경수는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명이 밝자마자 입궁할 채비를 하면서도 개 운하지 않았다. 종인은 연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사정일 뿐이다. 경수는 진심으로 종인을 볼 낯 이 없었다. 표정이 어찌 그래? 풀죽은 것이 너답지 않구나. 황송하옵니다. 어떤 생각은 눈빛만으로도 전해지지. 그러지 마라, 경수야.

395 억지로 입시울을 끌어올려 화답하지만 그것은 쓴웃음에 지나지 않았다. 짐은 여전히 의문이다. 종인이 탁자에 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말했다. 왜 하필 찬열이어야 했는지 말이다. 짐을 압박할 목적이었다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것이다. 당시 찬열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긴 했다만 그를 반역으로 찍어낼 만큼 위협적이진 않았어. 실질적인 위협 이라면 오늘날의 삼사가 그러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경수가 조심스레 의견을 보태었다. 혹 폐하의 의지를 완전히 꺾으려던 것이 아닐까요? 짐의 의지를? 폐하의 말씀대로 굳이 찬열이 아니면 안 되는 까닭이라도 있는 듯 보입니다.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 짐의 결론도 그러했다. 마치 찬열을 본보기로 삼으려는 듯했지. 당시 폐하께서는 친정을 시작하시고 얼마 안 되어 개혁 의지를 불태우셨습니다. 저들이 나중에 들 이밀었다던 살생부 같은 것도 그렇고요. 다방면에서 비리를 추적하던 것이 태후와 무정후의 귀에 들 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종인은 진지하게 경수의 말에 집중했다. 상황만 놓자면 그때와 지금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를 빼면요. 단 한 가지? 폐하와 저 사이에 찬열이 있다는 것이죠.! 찬열이 우장군이 된 후 실질적으로 장문견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죠. 또 폐하께서는 공교롭 게도 제가 예문관 검열이 된 직후 더욱 개혁에 박차를 가하셨고요. 저들 눈에 저와 찬열의 존재는 마 치 폐하의 양 날개와 같아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건 지금의 백현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서 변 지평 나리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종인의 표정에 실금이 갔다. 백현마저 잃는다면 금선공주를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당시 폐하께서는 저에 대한 감정을 감추셨지만, 찬열이 제가 석고대죄를 올릴 때 자신궁 앞마당에 뛰어든 일이 있죠. 태후마마께서는 그때부터 저희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날 일이라면 찬열에게도 쏟아냈다. 그래서 더욱 찬열을 북방으로 보내야 했다. 또 폐하께서 나날이 전정에 빛을 더하시니 저들은 위협적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폐하의 의 지를 꺾으려고 계책을 세웠을 테고, 그 과정에서 찬열이 억울하게 죽은 거죠. 안다. 그러나 여전히 왜 하필 찬열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단순히 그가 짐의 오랜 벗이었 기 때문일까? 저는 유배에 가 있을 적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누군가 제가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거짓을 전하는 바람에 병약하신 어머니께서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숨을 놓으셨어요. 종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외람되오나 그때 저는 모든 것이 폐하의 잘못이라고 확신해 감히 폐하를 의심하고 원망했습니다. 경수의 목소리와 어투는 담담했지만 꺼낼수록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뿐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 스러웠다. 하지만 오해가 풀리니 안개에 가려졌던 길이 보이더군요. 누군가 제가 폐하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두 번 다시는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길 바란 것 이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찬열이 죽은 것만으로 폐하와 삼 년이나 헤어지지 않았습니까? 저들의 진짜 목적은 찬열이 아닌 저와 폐하였을 겁니다. 뒤통수를 맞은 듯 종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396 결국, 저들이 원한 것은 짐의 피폐함이었단 것이냐? 찬열은 저의 은인이니 그를 해하면 제가 불망나니처럼 분간을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을 겁니다. 또 그런 제가 폐하께도 영향을 미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실제로 그랬고요. 씁쓸함과 회한이 묻어나는 태도에 종인은 허탈함을 느꼈다.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지냈건만, 지난 시 간 동안 태후의 손아귀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놀아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씨의 계략대로 찬열 때문에 경수와 관계가 틀어지고 개혁은 물거품이 됐으며 심신이 좀먹어 죽지 못해 사는 삶이 됐다. 경수를 잊으려 국정에 매달렸고, 쉴 새 없는 나랏일과 절양류로 몸은 망가질 대 로 망가졌다. 우환질고가 지난 삼 년간 종인을 무자비하게 괴롭혔다.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리 잔인하단 말인가! 종인이 벌컥 화냈다. 꽉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고정하소서. 옥체에 해롭습니다. 모든 것이 짐 때문에 벌어졌군. 짐이 아니었다면 찬열이 그리 억울하게 죽지도 않았을 거다. 빽빽한 그물에 걸린 고기가 무슨 재주로 달아나겠습니까? 짐은 천자다! 허수아비 취급에도 분수가 있는 법. 짐을 희롱하고자 너와 찬열을 고통스럽게 했으니 짐이야말로 너희를 볼 낯이 없다. 저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서로 오해하고 자책하다가 의지를 잃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 려는 것이죠. 경죽서난( 罄 竹 書 難 ) * 이라. 저들의 수가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옭아매고 있을지 모르겠다. 권불십년이라 했습니다. 저지른 죄목이 너무 많아 이젠 저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울화가 치밀어 용암처럼 들끓는데 반대로 경수가 차분하게 굴어 다행이다. 그를 보자 종인도 심기 를 다잡고 더욱 흔들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저들은 짐을 주저앉히려고 너를 표적 삼아 온갖 더러운 짓을 할 거다. 알고 있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짐이 부서지더라도 너만은, 폐하께서 부서지는 것은 싫습니다! 경수야. 싫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어찌 스스로 추락하겠다고 하십니까? 종인은 오랜만에 보는 경수의 진심어린 태도에 감격했다. 청신이 아니었다면 오해를 풀지 못해 고 통은 고통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약조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늘 그 자리에 당당하게 계시겠다고요. 제가 어디에서든 폐하를 우러러볼 수 있게, 세상에서 가장 밝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시겠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경수가 무척 애틋하고 예뻤다. 정인을 걱정하는 이의 눈빛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래서 종인은 그대로 경수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경수는 종인이 이끄는 봄빛의 꽃밭으로 걸어갔다. 만개한 수천 송이의 오색 꽃이 그의 가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화사한 꽃잎이 모든 것을 덮었다. 약조하마. 이번엔 반드시 네 마음에 보답하겠다고. 붉어진 경수의 뺨을 살짝 어루만지는데 문득 그의 어깨 너머로 삼색도 나무가 보였다. 희한하게도 네가 떠난 후 고야정에 삼색도가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았다. 허나 올해는 삼색도뿐 만 아니라 곳곳에 꽃이 펴 화원이 화사하게 빛나리라. * 악행이 과해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움

397 굳이 붙들려고 하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마음. 똑같이 생채기 내어 갈가리 찢어주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 다소곳하게 구르는 연잎 위의 이슬방울처럼 소중하게 아롱져 내리는 진심에 지난날의 원망 이 모두 증발하고 만다. 또 눈물이 쏟아지려 함은 무덤덤한 야차의 머릿속에 은근한 방초 향기가 끼어든 탓이리라. 그 향기 가 달아나기 전에 경수는 입술을 꼭 깨물어 눈물을 삼켰다. 빛나는 진심에 청승맞은 눈물은 보이기 싫었다. 얼마 전 수월당에 짐의 이름으로 약재가 전해졌는데 소왕 형님께서 뭔가 미심쩍어 기르던 분재에 탕약을 쏟아버리셨다. 수일 후 분재의 소나무가 새카맣게 타 죽었다는구나. 종인이 덤덤하게 전했다. 짐은 따로 약재를 내린 적이 없다. 허니 소왕의 존재가 심히 거슬리는 누군가가 짐을 빙자하여 일 을 꾸미려 했을 것이다. 경수가 미간에 굵다란 주름을 잡았다. 오늘 아침에 형님께서 다녀가셨는데, 말씀해 주지 않았다면 공연히 오해만 살 뻔했다. 태후전에서 행한 일이든 장문견이 따로 저지른 일이든, 수법이 갈수록 담대해지고 있습니다. 어사 대에서 탐관오리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저들을 쉴 새 없이 탄핵하는 데다 얼마 전 임제환의 일도 있어 매우 입지가 좁아진 탓일 겁니다. 초조하겠지. 자초한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동요하지 마소서. 이를 말인가. 하개가 주강에 들 시각이 다 되었음을 알려 왔다. 종인이 경수를 붙들고 일렀다. 경수야. 내, 진심으로 네가 걱정된다. 당분간 청신을 붙여줄 테니 오가는 길이 불편하더라도 참아 다오. 아니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짐이 그리하라면 그리하라. 하오나. 검지로 입술을 막는 바람에 경수는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가 눈썹을 팔자를 늘어뜨렸다. 강호에서 온 자다. 암행에 능하니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짐이 준다고 할 때 받아. 청신이든, 무엇이든.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래. 네가 몸 둘 곳이 짐 곁 말고 또 어디가 있겠느냐? 호쾌하게 웃으며 나서는 종인을 경수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따라 나갔다. 풍부한 봄 냄새가 천지사방을 뒤덮었다. 어젯밤에는 큰비가 내렸다. 봄을 앞당긴 봄비였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예년에 비하면 따뜻 한 편이었다. 장원서( 掌 苑 署 )에서 동절기에 묵은 나무를 솎고 꽃을 관리하려고 화원 곳곳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이 일렬로 쭉 늘어선 끝에는 숭화루가 있었다. 종인이 지나갈 때마다 장원서 소속 관리들과 궁인 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올렸다. 호수가 찬연한 햇살을 받아 물비늘을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큰비로 불어난 호수에서는 벌써 잉어 떼가 무리를 지어 헤엄쳤다. 부평초가 떠다니는 호수는 엷은 옥색을 띠었고 흰 구름을 삼켜 유영하게 했다. 아른거리는 물안개가 무릉의 심처인 듯한데, 서늘한 바람에 기분이 사뭇 산뜻하다. 공기가 아주 상쾌하구나.

398 아침 수라를 거르시고 산책하시니 소인은 그저 두렵습니다. 왜? 짐이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하개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짐은 그리 허약하지 않아. 지난번에도 각혈하신 것을 모를 줄 아시나이까? 목에 어혈이 뭉쳐 있었는데 그게 쏟아진 거다. 송 어의가 그러는데 근자에 폐하께서 국정에 시달리시느라 옥체에 열기가 많이 쌓이셨답니다. 내 의원과 수라간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십니까? 꼬박꼬박 탕약을 먹고 섭생에도 조심하고 있다. 하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옹원에 알아보니 금일 아침에 서해에서 잡은 꽃게가 나루를 통해 들어왔다 하옵니다. 꽃게는 열 기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하니 탕으로 끓여 올리오리까? 짐이 해산물이라면 질색하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옵니다. 종인은 자신에 관한 한 벽창호가 되는 하개의 성질을 잘 알았다. 그래서 뜻대로 하라며 백기를 들 어줬다. 폐하, 저기 무정후께서 오시나이다. 하개가 은근히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에서 장문견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여전히 안하무인이라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이다. 그래도 종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장문견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무정후. 조회를 파하자마자 따로 불러 곤하진 않소? 아닙니다, 폐하. 오래도록 격조했구려. 경이 한동안 허리 통증으로 병석에 누워 걱정이 많았는데 편전에서 다시 보 니 마음이 놓였다오. 폐하께서 살펴주신 덕입니다. 어의와 약재를 신의 집으로 따로 보내주셔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대는 짐의 장인이자 태후마마의 아우님이기도 하지.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가내는 두루두루 평안하신가? 매사 신의 안위와 집안 사정을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짐이 무심한데도 경은 탓하지 않고 치켜세워주는구려. 장문견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내심 김종인이 자신을 따로 부른 까닭이 뭔지 궁금해 죽을 맛이 었다. 올해 태후마마의 탄신연은 경이 맡아주었으면 하오. 예부에서 처리할 일을 신에게 맡기셔도 되겠습니까?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사뭇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리하면 안팎으로 말이 나돌 것입니다. 하하하! 경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는 거요? 외척이 날뛴다며 공연한 오해를 살까 저어됩니다. 종인이 부드럽게 눈시울을 접었다. 짐이 부덕하여 태후마마께서 도통 즐겁게 지내질 못하시는군. 진왕 형님께도 부탁할 것이나 아우 인 경의 노력이 보태진다면 마마께서 좀 기뻐하시겠소? 신이 무능하여 태후마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어려울 겁니다. 짐보다 마마의 성정을 더 알지 않소? 또 올해는 새 황후가 세워지고 처음 맞는 탄신일이니 더욱 정성을 쏟고 싶구려. 그 말에 장문견이 머리를 굴렸다.

399 삼사, 특히 어사대의 활약으로 태후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대인파의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아진 마 당이다. 이럴 때 황실 웃어른의 탄신연을 화려하게 가진다면 흩어진 군중을 모으는 데 효과적일 것이 다.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호화로운 연회를 마련해야겠다. 폐하께서 간곡히 청하시니 뜻대로 행하겠나이다. 그럼 짐은 경만 믿으리다. 예부에도 일러둘 테니 긴밀하게 상의하여 태후마마를 기쁘게 해드릴 멋 진 잔치를 만들어 보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청미한 공기가 바람을 만들어 종인의 살결을 간질이고 황룡을 수놓은 용포를 흩날리게 했다. 발걸 음을 놓을수록 호수와 가까워져 물기를 머금고 넘어오는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다. 훅 끼치는 사늘함 에 종인이 슬쩍 목을 움츠렸다. 한기가 드십니까? 바람이 아직 차구려. 연침이나 편전으로 드시지요. 종인이 미소를 머금고는 호숫가로 몸을 돌렸다. 오뉴월이면 숭화루와 부용정에 연꽃이 만발할 것이오. 오뉴월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벌써 연꽃 타령인가 싶다. 약야( 若 耶 ) 개울가에 연밥 따는 저 아가씨, 연꽃 너머 웃으며 얘기하네. * 서시가 약야계에 연꽃을 따러 가면 온 동네 청년들이 몰려나와 그녀를 구경했다는군. 장문견이 대거리했다. 말씀하시니 올해 필 꽃이 기대되는군요. 특히 부용정의 연꽃은 꽃잎이 크고 아름다운 데다 연잎 또한 욱욱청청하여 못을 뒤덮는 장관을 이루지요. 맞소. 하여 짐은 그 무렵이면 숭화루보다는 부용정의 운치를 더 좋아한다오. 주돈이가 연꽃을 가리켜 화중군자라 했는데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경도 그리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신이 비록 무관이기는 하나 자연과 사물의 이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 짬짬이 시문을 배워 일품 관리로서의 명예가 무색하지 않게 노력 중입니다. 군자가 문무를 겸하는 것은 좋지. 경은 탁월한 무장이면서도 학문을 멀리하지 않으니 과연 대연의 큰 복이군. 장문견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연꽃을 말하니 문득 영회황후가 떠오르는구려. 단번에 장문견의 얼굴에서 미소가 거두어졌다. 딸아이가 비명횡사한 지 어느덧 육 년이 넘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요절이다. 그녀의 죽음은 김 종인의 냉대 때문인데, 당사자가 보여를 입에 담으니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보여 는 연꽃보다는 해당화를, 해당화보다는 모란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황후 의 일인데 짐이 어찌 모르겠소? 종인은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장문견은 축축한 꺼림칙함에 뜨악했다. 마치 수년 전 자신궁을 침범한 자객을 잡아두고 자신에게 조세 혁파를 빌미로 거래를 제안했던 날과 비슷한 미소였다. 종인이 사뭇 쓸쓸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호숫가를 천천히 거닐자 장문견도 별수 없 이 그 뒤를 따랐다. 물비늘이 반짝이는 날이었지. 햇볕이 쟁글쟁글하여 꼼짝없는 여름이기도 했어. 종인이 회한에 젖은 듯 말을 이었다. 당시 짐은 만상전에서 윤대를 행했는데 급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히 현수궁으로 향하니 황후는 이미 숨을 거두었소. * 이백, 채련곡( 採 蓮 曲 ) 중

400 어찌하여 그때 일을, 영회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오. 숭화루에서 용주를 타고 궁녀들과 뱃놀이 중이었는데 갑자기 배 에 물이 차더니 전복되기 직전이었지. 놀란 황후와 궁녀들이 허둥지둥 연못으로 뛰어들었지만 연꽃 줄기가 발목에 감기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소. 장보여는 자결했다. 자존심이 강해 지아비의 박대를 견디지 못하고 보란 듯이 물속으로 뛰어든 것 이다. 장문견이 이런 뜻을 담아 종인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종인이 돌아서며 냉정한 시선으로 장문 견을 응수했다. 경은 아직도 짐을 원망하는구려. 신이 어찌 감히 황제 폐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러한가. 하오나 말이 나온 김에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듣고 있소. 폐하께서 어떤 소이가 있어 그때 일을 구중에 담으시는지 모르겠으나 보여를 두 번 죽이는 말씀은 삼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발칙한 발언이었지만 종인은 나무라지 않았다. 장문견의 오만방자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영회는 짐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그런 말은 의미 없지 않느냐는 질책 섞인 시선이 따랐다. 그 날 보여가 물놀이를 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은 경도 알 것이오. 여러 무리에 태후도 함께였다. 태후는 멀미가 난다는 이유로 용주에 오르진 않았지만 인근에서 잉 어에게 밥을 주며 한가롭게 있었다. 헌데 이상하지 않소? 주위에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 어째서 일국의 국모가 그리 허무하게 가라앉았 는지. 보여는 신의 장중보옥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어찌 신에게 비수 를 꽂으려 하십니까? 영회는 자결하지 않았소. 72. 영회( 英 懷 ) 영회는 자결하지 않았소. 폐하! 장문견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옴짝달싹하지 못하자 종인이 나직하고도 분명하게 내뱉었다. 짐의 첫 정비는 경이 생각하듯 그리 나약한 여인이 아니란 말이오. 신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지하에 계신 황후마마를 욕보이려 하십 니까?! 짐이 그리도 원망스럽소? 장문견의 군턱이 파르르 떨렸고 종인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날까지 진실을 함구하고 지낸 짐과 영회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구려. 폐하께서 그럴싸하게 지어내시는 몇 마디가 진실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소원해도 부부지간의 일을 경이 일일이 알 수는 없을 거요. 허나 짐은 경의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죽은 황후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고 확신하오. 아주 기고만장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니 다시금 박찬열처럼 소중한 이를 잃어야 김종인이 정신을 차릴지 싶었다. 하지만 아궁이에 던진 장작더미 하나가 요절한 딸아이에 대한 애틋함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401 먼저 얘기를 꺼내셨으니 매듭을 지어주십시오. 보여가, 돌아가신 황후마마께서 자결하신 게 아니라 는 것이 참입니까? 짐이 그이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영회는 단 한 번도 짐의 무심함을 탓한 적이 없소. 오히려 짐의 무정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신세를 받아들였지. 그것만 생각하면 짐은 저승에서도 영회의 얼굴을 볼 낯이 없소. 김종인은 머리가 커진 만큼 군주의 위용과 명민함을 갖추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들먹이는 파렴치 한은 아니다. 그가 장보여의 삼년상을 꽉 채우고 대외적으로 그녀를 매우 추존한 것만 봐도 그녀에 대한 마음이 느껴졌다. 미안함 혹은 자책. 정녕 마마께서 스스로 세상을 등지신 것이 아니란 말인가? 장문견의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중궁이다. 내명부의 지존이자 백성의 어머니. 일월에 견주는 황후가 지아비가 박대한다고 하여 자결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황후마마께서 사고로 돌아가셨다면 어째서 그때 주모자들을 추국하지 않으셨습니까? 경비에 소홀한 시위들과 관련자를 모조리 문초해 죽이거나 유배 보낸 걸 잊었소? 그건 황후마마를 지키지 못한 자들에 대한 엄벌이 아닙니까? 신은 어째서 당시 의문점을 곧바로 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종인이 장문견 쪽으로 반쯤 돌아서서는 비뚜름하게 쳐다봤다. 그가 야릇하면서도 악의 없는 투로 말하였다. 개를 때리려면 그 주인이 누구인지부터 살펴야 하지.! 벌집을 쑤실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꿀을 포기해야 하오. 만사가 그런 이치 아니겠소? 장문견은 자신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폐하. 슬슬 경연에 드실 시각이옵니다. 마침맞은 하개의 알림에 종인이 손을 들어 알았다는 표시를 보였다. 장문견은 버석버석한 입술을 훑었다. 문득 수년 전, 강무를 나갔다가 다쳐서 오랜만에 조회에 나온 종인에게 대신들이 황후를 맞으라고 주청한 일이 있었다. 그때 종인은 처음으로 영회를 들먹이며 대 신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사직의 내외가 굳건하길 바란다면 영회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의문부터 풀어야 할 것이오. 그때 장문견은 김종인이 헛소리를 늘어놓아서 이를 박박 갈았는데 오늘 태도를 보니 그가 한 말이 면책을 위한 변명은 아닌 듯했다. 도대체 보여는 어떻게 죽은 것일까. 정말로 지아비의 냉대가 싫어서 자결했을까, 아니면 김종인이 지껄인 대로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일까. 예상치 못한 전개와 단서들에 장문견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참. 경연청으로 향하려던 종인이 발길을 돌리더니 덧붙였다. 당시 영회의 시중을 들던 아이가 현재 자신궁 궁녀 사완이라는 것은 아시오? 헉! 경이 잘 모르는 듯하여. 물결처럼 잔잔한 미소를 흘리고는 무리를 이끌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장문견의 퉁방울 같은 두 눈 이 쏟아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경연을 마치고 오자 태성전 앞에서 종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종인은 반갑게 제 형을 맞으며 안으로 들였다. 언제나처럼 맛있는 차와 과자를 내왔다. 밖에서 새하얀 살구꽃이 쏟아졌다.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종대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뭔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402 오늘따라 말이 없으십니다. 태후마마께 꾸중이라도 들으셨습니까? 아닙니다. 헌데요. 그것이. 짐짓 망설이기에 종인이 주위를 모두 물렸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입니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는데 혹 소신이 정사에 관여한다고 곡해하실까 봐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대전에 앉아 구들장을 지키는 사이 형님께서 도성 곳곳에서 벌어지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 려주곤 하셨죠. 그 덕에 여러 민원을 처리하고 더러는 호환을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형님이 아니라 면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허나 이번 사안은 기존과는 다릅니다. 무게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두려워 마시고 편안하게 말씀하십시오. 종인이 몇 번이나 안심시킨 후에야 종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신이 거느린 노비의 일입니다. 그자는 소신이 왕부에서 생활할 때부터 줄곧 함께였는데 평소 효 심이 깊고 충성스러운 자이죠. 이름은 장지라고 하는데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얼마 전 가정을 꾸려 모두 왕부에서 거두었습니다. 종인은 찻잔을 기울이며 진지하게 종대의 얘기에 집중했다. 헌데 장지가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은 흔적이 있어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았습니 다. 몇 번이고 추궁한 끝에 경위를 알아보니 그자가 고액의 고리대에 휘말린 것이었습니다. 고리대요? 엄연히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아직도 교안에서 고리대를 놓는 자들이 있단 말씀입니 까? 소신도 기가 막혀 사연을 물으니 장지의 동생이 수년 전 몰래 지주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이를 갚 지 못해 장지가 대신 왈패한테 몰매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종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소신은 그간 장지의 충심을 높이 사 그가 갚아야 할 채무를 없애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여 고리대 를 놓은 지주가 누구인지, 또 장지에게 사과하게 하려고 왈패를 수소문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 니다. 교안 변두리에 있는 상령 땅의 지주가 고리대를 놓고 있었는데, 이름은 남사종입니다. 남사종은 홍 인철의 사돈이고, 홍인철은 불과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사도 황세용의 청지기였습니다. 남사종과 홍인 철은 평소 왕래가 잦았는데 남사종의 고리대 사업을 홍인철이 돕는 듯했습니다. 종인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이것이 수상하여 은밀히 뒤를 알아보니 상령 땅의 실제 지주는 사도 황세용이고, 홍인철은 여전히 사도의 집에서 청지기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면 황세용이 불법으로 고리대 사업을 벌이고 노비의 이름을 팔아 문서를 조작했다는 뜻입니 까?! 종인이 놀라 버럭 외치자 종대는 놀라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의 낯빛이 몹시 어두워졌다. 종대는 괜한 얘기를 꺼냈나 싶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데 종인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이는 수조권 없는 관리가 명의를 빌려 고액의 고리대를 놓고 교묘하게 직접 세금을 거둬들인 사건 입니다. 토지 세금은 무조건 나라에서 지정한 관청에서 거두게 되어 있는데, 상령 땅은 그렇지 않았습 니다. 종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욱하는 성질머리를 가까스로 누르며 나직하게 물었다. 그 평야에서 거두는 세금이 어느 정도입니까? 매년 삼백 석에 가깝습니다. 비록 토지는 작지만 땅이 비옥하여 해마다 수확량이 일정하기 때문입 니다.

403 삼백. 삼백 석이라!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나는 세금을 모조리 직접 거두고 토지대장을 조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리대로 백성들을 착복하니 일대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도탄에 빠졌을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형님은 이 사실을 언제 아셨습니까? 장지가 그리된 지 꼬박 한 달째이고 사도가 이 같은 짓을 벌이고 있음을 안 것은 불과 닷새 전입 니다. 성마른 종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처소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돌연 종대의 앞으로 가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정말로 사도가 그 같은 짓을 벌였다면 사도가 착복하는 국가 세금이 과연 상령 땅 하나일까요? 나 아가 일품 관리가 이런 짓을 할 정도니 전국적으로 조사하면 얼마나 될지 가늠도 안 되는군요. 순금사를 시켜 조사하게 하심이 어떠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어사대의 탄핵이 있어야 합니다. 하오면 백현이를 움직이십시오. 아니면 어사대부도 있지 않습니까? 임제환의 일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대인파에서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 면 꿈틀하는데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죠. 당분간 몸을 사리는 것이 좋습니다. 맴맴 도는 말에 종대가 뒤늦게 의중을 알아차렸다. 장지를 설득하겠습니다. 그러면 백현이와 어사대부를 통하지 않더라도 어사대뿐만 아니라 폐하께 서 직접 이 일을 아실 뿐만 아니라 공론화할 수도 있습니다. 허면 형님만 믿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모든 증좌는 빠짐없이 모아두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마음이 통하자 종대는 안도했고 종인은 황태후의 왼팔인 사도를 찍어낼 좋은 기회를 얻어 다소 흥 분했다. 실은, 종대가 앞에 앉은 종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소신이 괜히 정사에 끼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여 편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님이 아니라면 도성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순 없다고요. 또 이처럼 엄청난 일을 말씀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형님께 실망했을 겁니다. 그러십니까? 국법으로 종친의 정치 참여는 금지돼 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모른 척하고 있으라는 말 은 아니죠. 형님께서는 왕부에서 부리는 노비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이를 해결하려 나서신 것이 아닙 니까? 그렇게 입을 맞추어야 한다는 듯한 고압적인 눈빛이었다. 종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스스로도 태후의 팔을 자르는 날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자신 의 아우를 믿기로 했다. 결기에 찬 저 표정을 보니 종인에게 큰 확신과 계획이 있는 듯했다. 여느 때처럼 화분을 정성껏 가꾸던 태후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도 황세용이 토지 비리 사건에 휘말려 어사대를 비롯해 각사에서 탄핵이 빗발친다는 거였다. 자세히 말하라. 인보당의 노비인 장지란 자가 주작대로 앞의 신문고를 울렸는데 때마침 입궁하던 형부와 호부의 두 상서들이 자초지종을 듣고 직접 폐하를 모시고 문루까지 갔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장지의 사연을 들으시고는 격노하시어 순금사로 하여금 곧장 사도를 추포하고 상령 땅을 결박하라 하셨습니다. 사완의 말에 태후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시울이 가늘게 떨렸다. 경주자사 임제환이 탄핵받아 떨어져 나간 지 보름도 안 됐다. 어사대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 궁과 대인파를 주목하는 마당에 이 같은 일이 벌어져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어찌 그리 경망스럽단 말인가?

404 불퉁하게 내뱉은 태후는 침착하게 눈을 뜨며 더 자초지종을 설명하라고 했다. 사완이 보고 들은 것 을 얘기하자 곱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일 처리가 이토록 허술하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사도를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 상궁이 물었다. 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죄가 발각되었으니 반드시 여죄가 있는지 파헤칠 것이다.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해. 헌데 이상합니다. 장지는 인보당의 노비인데 어째서 주인인 진왕 전하께 먼저 알리지 않았을까 요? 사완이 조심스레 지적하자 태후가 입술을 팩 깨물었다.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생각난 부분이었는데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근래에 진왕과 황제의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수상한 부분이었다. 더구나 종친의 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목 으로 소왕까지 황궁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나. 태후는 곰곰이 되짚었다. 도경수를 끌어들인 이후부터 김종인의 권세는 갈수록 강해지는데 자신은 오히려 위축되고 있었다. 조카인 박찬열을 앞세워 어린 황제의 발목을 묶긴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을 뿐이다. 원하는 대로 현수궁의 주인도 장씨 일문에서 뽑았다. 그러나 황손이 태어나지 않았고, 도경수가 돌아온 후로는 공공연히 그를 총애하여 내명부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됐다. 비록 박찬열을 잃었지만 김종인은 여전히 황제이고 삼사를 비롯해 신인들을 중심으로 조정 실권을 점점 장악해 나가고 있다. 반면에 태후 본인은 수년이 지난 지금 목숨만 붙들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손에 넣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겉보기엔 화려하나 속이 빈 상자와 같았다. 더구나 이번엔 자신의 공고한 권력 기반 중 하나인 사도가 비리 사건에 휘말렸다. 사건에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현재 상황에서는 치명타다. 만에 하나 진왕 전하께서 마음을 달리 잡수셨다면. 박 상궁의 지적에 태후가 그녀를 찌릿하게 노려보았다. 입 다물게! 진왕은, 종대만큼은 항상 나를 친어미처럼 대하고 따랐어! 소인이 실언하였습니다. 예, 진왕 전하는 마마께 언제나 진심입니다. 박 상궁 마마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전하께서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내심 종대의 변심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를 불러다 놓고 왜 노비가 신문고를 두드리게 내버려 뒀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태후는 답답한 마음에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어쨌든, 사도가 벌인 일은 우리와는 관계없으니 무정후에게도 당분간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이르게. 주상의 움직임이 영 심상치 않아. 그리하겠습니다. 사완이 명을 전하러 밖으로 나갔다. 태후의 생각과는 달리 상령 땅에서 수확한 조세 일부가 자신궁으로 들어갔다는 치부책이 나왔다. 종대가 미리 확보한 증좌였는데 일찌감치 종인에게 넘겨서 누구도 치부책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는 추적하지 못했다. 이에 황세용은 순금사에 갇혀 날마다 조사를 받았고, 종인은 상궐단자를 꼼꼼히 살피며 여죄를 밝 히려고 노력했다. 이번 사건은 어사대에서 움직인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어사대는 대인파의 경계에서 잠시나마 멀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늘 대인파를 눈여겨봤으므로 조정은 사도의 일이 어떻게 결론 날 것인 가 주목했다. 국가 최고 관직이자 문신들의 수장인 사도. 그에 대한 처분이 어찌 내려지느냐에 따라 향후 대인파 의 권력 행방과 생존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405 자신궁이 연루됐다는 증좌가 잡히자 태후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종인은 변함없이 살가운 척 문 안을 올렸고, 얼마 남지 않은 태후의 탄신 진연에 만전을 기하라고까지 했다. 겉보기에는 태후를 지극히 위하는 행동이었지만 태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김 종인의 모든 것이 가증스러웠다. 황세용을 잃는 것은 아깝지 않다. 다만 그의 비리에 자신궁까지 얽혔으므로 이 의혹을 풀든, 황세용 의 혐의를 벗기든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무정후는 아직도 와병 중이라더냐? 벌써 며칠 전부터 장문견더러 오라고 했는데 번번이 아프다는 핑계로 등청을 거부하여 태후는 심기 가 몹시 불편했다. 여러 번 연통을 넣었사온데 정말로 병이 깊으신지 거동조차 불편하시다며. 박 상궁이 말끝을 흐리자 태후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자신이 불리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살려달라고 징징거리더니 정작 자신궁이 위기에 처하자 핑계를 대며 만남을 피한다. 이것이 우애인가 싶어 쓴웃음이 터지는데, 박 상궁이 넌지시 말을 전하였 다. 헌데 마마. 알아보니 사도의 일이 터지기 전에 폐하께서 무정후를 따로 부르시어 말씀을 나누셨다 고 합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한 나라의 군주가 신하를 불러 독대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모르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무정후를 경계하시어 독대한 적이 손에 꼽습니다. 또 두 분이 만나신 후에는 반드시 어떤 처결이 내려왔지요. 태후는 몇 년 전, 조세 개혁안을 두고 황제와 씨름하던 자신의 아우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궁에 자객을 끌어들여 황제를 압박하려다가 오히려 자객의 품에서 장가의 표창이 나오는 바람에 모두 물거품이 된 적이 있었다. 장문견은 김종인과 독대했고, 바로 다음 날 조정은 황제가 추 진하는 조세 개혁에 찬성하였다. 태후는 등골이 서늘했다. 무정후가 주상의 회유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냐? 소인이 무얼 알겠습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무정후께서 일부러 마마를 피하시는 것이라면 그 연유 부터 알아보시는 것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내전에 앉아 있는 내가 무슨 수로 밖으로 나가겠나? 아랫것들을 부리시면 됩니다. 내가 불러도 들어오지 않는데 아랫것들을 부린다고 쉽게 입을 열겠나? 사완이라면 다르지 않습니까? 영회황후를 모시던 아이입니다. 그 점을 파고들면 무정후께서도 달리 말씀이 있지 않겠나이까? 하지만 그 아이는. 골똘히 생각하던 태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완을 움직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하지 만 그만큼 믿음직한 아이기도 해서 지금 상황에서는 박 상궁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럼 사완에게 좋은 약재와 음식을 딸려 보내고 무정후가 와병한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보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도를 저리 둬서는 안 될 것 같구나. 착취한 세금 일부가 내 궁으로 흘러든 증좌가 있다 하니, 나 로서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군. 박 상궁이 주인의 생각을 살피려는 듯 태후를 빤히 쳐다봤다. 장원서에 일러 도끼질 잘하는 아이 몇을 달라고 하게. 화원에 손볼 데가 있으시나이까? 그래. 나무가 너무 자라 볼썽사나우니 그만 잘라야겠네.

406 73. 오월동주( 吳 越 同 舟 ) 사도 황세용의 토지 비리 사건으로 조정이 떠들썩한 와중에 수월당은 따로 떼놓은 세계인 듯 무던 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수소를 거치지 않고 자신궁에서 사람이 나와 준면은 해연하고 오싹했 다.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됐던 태후다. 생모인 의귀비를 증오하여 그녀를 죽이고 아들을 폐서인으로 만들었으며 효경제가 내렸던 처소까지 폐쇄한 장본인. 더구나 얼마 전에는 종인의 이름을 빌리면서까 지 독약을 건네 준면을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조정에서 들리는 이야기도 있어 준면은 예감이 안 좋았다. 그래도 태후의 사람을 마다할 수는 없었 다. 준면은 미소로 사완을 맞았다. 그녀는 이제 막 장문견의 집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태후마마께서 세자께서 군왕으로 진봉되신 것을 축하하시며 다양한 서책과 문방사우를 보내셨습니 다. 또 진주 열 줄과 홍옥 두 알, 황금 백 개, 비단 스무 필, 오색 산호 한 점과 비취 한 쌍을 왕비께 내리셨습니다. 명혜군주를 위한 꽃신과 장난감도 새로 주셨습니다. 마마께서 큰 은혜를 베푸시는군. 자네가 마마께 감사의 인사를 잘 전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태후마마께서 따로 전하시는 서신입니다. 사완은 짐짓 은밀한 눈빛이었다. 아. 다과라도 들고 가겠나? 마침 차를 우리려던 참이었네만. 소인은 마마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 이만 가야 합니다. 양 서방. 귀빈이 나가시니 문 앞까지 잘 배웅해 드리게. 사완이 나간 후 준면은 주위를 모두 물리고 조용히 서찰을 열어보았다. 종이에는 단 네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 伊 霍 之 事 ] 고개를 갸우뚱하던 준면. 일순 머리를 강타하는 생각에 그가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접 실에는 봄날의 따스한 햇볕만 내리비칠 뿐,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태후가 갑자기 자신에게 손을 내민 까닭이 무엇인가. 고작 네 글자에 식은땀이 나려는 것을 보니 아직 심장 단련이 덜 된 것 같기도 했다. 준면은 쓴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확인하듯이 몇 번이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글자는 바뀌지 않았 다. 먹물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그가 황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어놓은 창밖에서 하염없이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급전을 부쳐서 오늘은 오지 못할 줄 알았네.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급한 일이 있더라도 짬을 내야지요. 응접실에는 이미 향기로운 차와 다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준면은 경수를 화로 근처로 안내했다. 아 직 밤바람이 차서 추위에 약한 준면은 오월까지 작은 화로를 곁에 두고 살았다. 오는 동안 몸이 얼었을 테니 우선 차부터 들게. 준면은 언제나처럼 단정한 손길로 차를 우렸고 경수는 예의 입술을 축이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찻잔 안에 창가의 달이 비쳤다. 여기서 차를 마시니 잔 속에 달이 들어오는군요. 풍광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담장을 따라 수목이 빽빽하던데 여름이면 수월당 전체가 짙푸른 바다처럼 보일 겁니다. 내외가 화초를 좋아하여 정원 가꾸는 데 꽤 심혈을 기울였네. 머지않아 등나무와 장미가 만발할 걸세. 향기 그만이니 한 번 놀러 오게나.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조팝나무에 은근히 시선을 던지는데 준면이 입을 열었다. 실은 자네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네. 급하게 부르시기에 예상은 했습니다만.

407 준면은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냈다. 경수는 준면에게서 그것을 받아 열어보았다. 이곽지사? 며칠 전에 자신궁에서 사람을 보내 온갖 패물을 전하며 그걸 주고 갔다네. 자신궁이라고요? 허면 이것은 태후마마의 서신이라는 말씀입니까? 준면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곽지사라. 참으로 태후마마다운 솔직함입니다. 덧붙이는 말에는 냉소가 깃들어 있었다. 역시 자네는 단번에 알아보는군. 은나라의 이윤과 한나라의 곽광은 각각 모시던 주인을 내쫓아 새로운 왕을 옹립했죠. 맞네. 이곽지사는 이윤과 곽광이 대의를 위해 왕을 내쫓은 일을 가리키는 말이지. 헌데 태후가 이것을 전하께 보냈단 겁니까? 호시탐탐 나를 죽이려고 안달하더니 갑자기 이러는 까닭을 모르겠네. 전하께서는 현재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아십니까? 황세용이 비리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다지. 옥사에 갇혀 매일 조사받는다고는 들었네만. 또 무정후 장문견이 태후마마를 피하고 계시죠. 뜻밖의 말에 준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남매의 우애가 남다를 텐데? 경수는 종인을 통해 장문견이 영회황후의 죽음을 단단히 의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같은 사 실을 들려주자 준면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몹시 놀라워했다. 당시 황후가 서거했을 때 궁중에서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지. 황후가 폐하의 박대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호수에 뛰어드셨다고 말이야. 그땐 장씨 일문에 힘이 집중되어 누구도 그 소문을 의심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단 것인가? 이러나저러나 대연의 국모십니다. 비록 연치가 어리시고 폐하의 총애를 받은 것은 아니나 영회황 후의 품성이라면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린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강하고 제법 현명하다 들었네. 나도 황후의 죽음이 조금 수상하다고는 생각했네. 그리 자존심 센 분이 대우가 박하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지는 않았거든. 폐하게 들으니 당시 장문견이 전장에서 의장검을 함부로 휘두른 일로 조정과 자신궁 사이에 마찰 이 있었다더군요. 조정은 장문견을 탄핵하려 했고, 자신궁은 전공을 세운 장수이니 그럴 수 없다고요. 폐하께서도 드물게 화를 내셨으니 자신궁의 입장이 퍽 난처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태후가 황후를 불러 왜 아비를 위해서 빌지 않느냐며 몇 마디 하셨답니다. 황후께선 조정 일에 끼고 싶지 않다며 발을 뺐는데 태후는 끝까지 황후를 몰아세웠지요. 결국 황후께서 편전에서 아 비의 죄를 청하였고 때마침 전장에서 돌아온 장문견이 태후의 설득으로 직접 사죄하여 겨우 용서를 받았답니다. 준면은 경수가 구중심처의 일까지 꿰고 있자 속으로 몹시 놀랐다. 그전부터 황후께서는 이미 태후와 수차례 갈등을 일으키셨답니다. 폐하께서는 장씨 가문의 여식이 라 싫어하셨지만 황후마마는 폐하를 진심으로 은애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더욱 영회황 후의 삼년상을 고집하셨고요. 자네는 어찌 그런 내밀한 사정까지 알았는가? 정말 정보력이 대단하군.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내전에서 벌어진 일은 그전에 황후 밑에서 일하던 궁녀에게서 들으셨고요. 허면 정녕 영회황후는 태후가? 경수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준면은 아연실색했다. 태후가 재종인 박찬열을 죽인 것만도 끔찍한데, 그녀는 자신의 조카이자 일국 의 국모를 그리 제거하고 황제에게 누명을 씌웠다. 태후의 엄청난 악행은 이미 겪을 대로 겪었지만 드러난 사실은 다시금 준면을 진저리치게 했다.

408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폐하께서는 여태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군. 참고 기다리는 것 외에 그분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준면은 더욱 태후가 용서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장문견이 자신궁의 부름을 피하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도의 치부책에서 자신 궁으로 돈이 흐른 증좌가 잡혀 자신궁은 입장이 몹시 난처한 상황이죠. 그럼 궁여지책으로 내게 이런 서찰을 보낸 것인가. 오월동주 * 라는 말이 있지요. 준면의 입가가 뒤틀렸다. 사도의 일이 밝혀진 것은 인보당의 노비인 장지라는 자가 신문고를 울렸기 때문입니다. 노비가 억 울한 일을 당하고도 주인인 진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북을 두드린 것입니다. 태후가 의심하지 않고 배 기겠습니까? 또 진왕 전하는 워낙 정치를 싫어하니 태후로서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을 겁니다. 사실만을 짚는데도 입안이 삽삽하여 준면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상하군. 태후가 아무리 벼랑에 몰렸기로서니 당장 폐하를 폐위하려 들다니. 당장은 아니지요. 그동안 쌓인 분노가 태후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는 겁니다. 이미 조정에서는 다수의 대인파가 탄핵당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사도와 무정후가 있어 버틸 수 있 었는데, 한 명은 정치 생명이 끝나기 직전이고 다른 한 명은 피붙이인데도 외면 중입니다. 태후는 하 책이라도 택할 수밖에 없죠. 모든 걸 폐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인가. 동궁을 폐서인으로 만들고 제 손으로 황제를 세운 여인입니다.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면 주인은 그 개를 죽이려 들지 않겠습니까? 여과 없는 소리에 준면의 미간이 구겨졌다. 전하께서는 소인과의 약조를 지키셔야 합니다. 내 지위는 소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말인가? 전하와 소인이 나눠 가진 증서가 있지요. 경수가 고압적으로 쳐다봤다. 내가 다른 맘을 먹었다면 자네를 불러 이 일을 솔직히 털어놓고 혜안을 구하려 했겠나? 궁에 있다 보니 의심하고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자네도 자네만의 사정과 고충이 있으니. 일단 폐하께 말씀드리고 상의하겠습니다. 그리하게. 헌데 그전에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군. 아마 전하와 소인, 그리고 폐하의 생각은 모두 같을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를 것입니다. 자네가 내 생각을 읽어주니 참으로 편하군. 준면이 싱긋 웃으며 경수의 찻잔에 찻물을 더 따라주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준면과 나눈 얘기를 모두 전한 후 경수는 담담하게 상소를 정리했다. 편전에 어지러이 흩어진 상소 문의 열에 아홉은 하루빨리 사도 황세용에 대한 처결을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잠자코 듣던 종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무르익는 봄날에 살구꽃과 배꽃이 하얗게 흩날렸다. 귀여운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꽃잎 몇 장이 내려앉았다. 종인이 반응 없이 바깥만 응시하자 경수는 종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책상에 흩어진 꽃잎을 * 吳 越 同 舟. 오나라와 월나라가 한 배를 타고 움직임. 한 가지 목표를 이루려고 원수끼리 손을 잡음

409 손으로 쓸어 담았다. 종인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경수를 쳐다봤다. 너는 형님과 언제부터 알고 지냈느냐? 예? 어째서 형님이 사사로이 너를 왕부로 불러 그와 같은 얘기를 하셨느냐? 날카로운 질문에 경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간 두 사람의 만남은 비밀이었고, 종인이 두 형제를 초대 하게 된 것도 사실상 종친인 백현의 역할이 컸으므로 준면과 경수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런 데 갑자기 준면이 경수를 불러다 태후의 밀서를 얘기했으니 종인으로서는 당연히 의심스러웠다. 당황한 경수의 표정을 보고 종인은 눈을 치떴다. 어째서 대답하지 못하는가. 송구합니다. 폐하께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을. 나직한 물음에 경수는 뭔가 결심이 선 듯, 아래로 내려가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지금부터 제가 올리는 말씀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으니 폐하께서는 영명하신 판단력으로 헤아려주 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지난번에 준면이 경수를 초대하여 태후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한 내막을 얘기했다. 전하께서 처지가 곤란해 직접 고할 수 없으시다며 진왕 전하와 말을 맞추고 제가 인보당에 있을 때 납시어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차를 대접하신다며 수월당으로 초대하셨고, 그때 당 신께서 폐서인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종인은 어렸다. 고작 열 살이었고 천방지축으로 뛰놀기 바빴다. 본인이 황제가 된 후에도 한참 이 지나서야 의귀비와 준면의 폐위에 수상한 부분이 있다고 여겼을 뿐, 깊게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 았다. 그런데 진실을 알고 나니 그 수법이 악랄하고 지독해서 종인은 구역질이 밀려왔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수사해 주길 원하신다더냐.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다만 장씨 일문을 끝장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건이 워낙 오래됐고 당시 동궁에 배치됐던 사람 중 상당수가 죽거나 유배를 갔지. 이재관도 돌 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겠느냐. 태후와 장문견이 죽이려 들 때마다 소 리 없이 스러져갔을 거다. 역겹구나. 대체 이까짓 보위가 뭐라고. 폐하께선 하늘이 택한 군주십니다. 형님께서 숨을 죽이셨던 까닭이 비로소 이해되는구나. 준면 형님은 짐처럼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짐에게 힘이 생길 때까지. 형님의 사정을 제대로 전할 기회가 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 종인. 상당히 착잡해 보였다. 그 같은 일이 있었으면 진즉 알렸어야지. 짐짓 나무라듯 경수를 쳐다본다. 경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고개만 숙였다. 진상을 밝히려 해도 증인과 증좌가 부족해. 형님의 기억만으로 장씨 일문을 단죄하기란 여간 어려 운 일이 아니다. 황송하오나 폐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듣고 있다. 폐하께서 소왕 전하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일의 우선순위만큼은 명확히 하 셔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말씀하신 대로 당시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태후와 장문견, 그리고 소왕 전하 단 셋 뿐입니다. 그 외에 전하의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요. 그때 일을 조정에서 거론한 다면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것은 전하와 폐하십니다. 어째서냐. 지금 태후의 입지가 좁아졌다고는 하나 그분은 일국의 국모십니다. 대인파에서 태후를 두둔하려

410 순금사를 휘두를 테고, 폐하와 전하께는 명확한 증좌를 내놓으라며 압박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수중 에는 오직 소왕 전하의 일방적인 증언뿐이니 이것만으로 심리하면 세상이 비웃습니다. 종인은 경수의 조언을 곰곰이 새겨들었다.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논리적인 얘기였다. 그럼 짐은 형님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없을 텐데? 폐하께서는 천자십니다. 백성들을 품으려는 성심은 아름답습니다만 소왕 전하의 지위를 생각하셔 야지요. 형님께서 황태자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는 뜻이냐?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혜안을 구하노라. 장씨 일문이 감히 일국의 동궁을 모해하여 폐서인으로 만들고, 순금사에 가둬 죽어가는 꼴을 방조 했다는 죄목을 씌운다면 세상은 크게 동요할 겁니다. 허나 사건이 마무리되면 그 후의 일은 어찌 되 겠습니까? 소왕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려다가 도리어 폐하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뭇 사람들이 억울하게 보위를 빼앗긴 소왕을 동정하다가 소왕을 대신해 황제가 된 종인을 원망할 수도 있다. 경수는 이것을 경계했다. 네 뜻은 알겠으나 해묵은 일이다. 짐이 보위에 오른 지 십 년도 지났거늘. 세월은 사물을 부식시키지만 세월을 좌우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가엾고 딱 한 것에 측은지심을 가집니다. 그 마음이 여럿이 되면 무서운 힘이 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짐은 그저 태후를 찍어낼 방도로 활용하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신궁과 무정후에 대한 폐하의 원독은 소왕 못지않으십니다. 능라금수에 비단 금침을 쓴다 하여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요. 종인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경수가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준면과 경수의 사이를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난날의 오해를 풀었음에도 행여 경수가 자신을 버리고 소왕과 만나 음모를 꾸미진 않을까 했는데, 자신의 못되고 망측한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미안하다. 어째서 사과하십니까? 널 의심했다. 짐은 네가, 폐하의 마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 올리지 않은 제가 나쁜 겁니다. 하지만 경수야. 그런 표정은 싫습니다. 맥이 풀렸다. 경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사랑해서 조금의 수상함조차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이 못난 탓이다. 짐의 짧은 생각을 바로잡아줘서 고맙구나. 차마 드러내지는 않을 뿐. 하지만 이미 형님의 사정을 알아버렸으니 외면할 수도 없다. 너도 형님에게 도와준다고 약조했다 면서? 전하께서는 분명히 장씨 일문의 몰락을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단죄하려는 데 비단 죄목이 전하의 일만 있겠습니까? 네 뜻은. 의귀비의 일을 엮으십시오. 중궁이 후궁을 훈육하는 것은 예사이다. 또 당시 증좌가 없다며 발뺌할 것이다. 의귀비의 일을 엮 는 것은 너무도 약해. 허나 민가에까지 퍼진 이야깁니다. 이것은 장씨 일문이 몰락하는 데 결정타가 되진 않을 것이나 유효한 일격은 될 수 있습니다. 경수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의귀비의 일을 문제 삼으면 반드시 태자가 폐위된 사건까지 수면 위로 떠오를 겁니다. 그때 폐하 께서 나서서 일을 처리하신다면 소왕이 순금사로 끌려간 내막이 폭로될 것이고 민심이 크게 요동칠

411 겁니다. 그리되면 도리어 짐의 지위가 흔들릴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의귀비의 억울함을 풀다가 태자 폐위에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핵 심은 오직 폐하께서 먼저 나서서 이 모든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누 군가에게 폭로된다면 폐하께서는 자칫 진실을 알고도 보위 때문에 은폐하려 했다는 오명을 쓰실 수도 있습니다. 그제야 종인이 무릎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네 책략은 따라잡을 수가 없구나. 폐하께서 저였어도 그리하셨을 겁니다. 치켜세울 일은 아니지요. 종인은 뒤늦게 경수가 지나치게 오래 꿇어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다닥 뛰어가 일으켜 세웠 다. 정신이 없다 보니 너를 그냥 뒀구나. 괜찮습니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쏟아지는 봄볕만큼이나 다사롭고 풍부했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했는데 네가 해답을 줘서 속이 시원하다. 경수는 빙그레 웃었고 종인은 그런 경수를 애정을 담뿍 담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와 형님이 왕래하는 것은 여전히 짐이 모르는 것으로 해 두어라. 공연한 오해를 사면 네게 좋지 않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께서 짐의 생각을 알고 싶어 애가 타시겠군. 픽 실소를 터트린 종인이 도로 책상 앞에 앉으며 말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시라고 전하여라. 형님께서 미지근하게 나오면 저들은 필시 진왕이 나 다른 종친을 물색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명분이 없어 섣불리 일을 진행하긴 어려울 터. 짐이 죽든지 저들이 죽든지, 사생결단 끝에 결말이 나겠지. 저들이 가진 계책이 뭔지 드러나기 전 까지 형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른 척 그저 가만히 계시라고 하여라.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봄이로다. 형님께서 차를 좋아하시니 명주에서 진상한 설련향( 雪 蓮 香 )을 들고 찾아가면 되겠군. 짐 이 보냈다고 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74. 염화지신( 炎 火 之 神 ) 황세용이 은밀히 사람을 부려 자신을 살려달라는 전언을 넣었다. 태후는 어찌할까 몹시 고민하다가 황세용이 이대로 주저앉으면 다음 목표는 장문견과 자신이 되리라 판단했다. 어차피 소왕에게 이곽지사라는 서찰을 건넸으므로 이젠 이판사판이다. 그런데 사완이 왕부에 다녀 오고 수일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준면은 입을 꾹 다물었고 태후는 속이 탔다. 그런 와중에 나날이 자기 생일이 다가오는지라. 올해는 예부를 대신하여 태후의 탄신연을 준비하기 로 한 장문견이 진왕과 함께 움직였다. 태후는 오랜만에 나타난 아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장문견은 목숨보다 아끼던 보여를 비명횡사 하게 한 사람이 자신의 누님이라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김종인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라 태후에게 바락바락 대들며 따지지 않은 것이 장문견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간 소원했군. 사저로 약재를 보냈는데 도무지 낫지 않으시던가? 태후는 나지막하게 물었고 장문견은 입술에 꿀을 바른 듯 벙긋하지 않았다. 몸이 여전히 안 좋은 듯한데 예부를 대신하여 내 생일 진연을 준비 중이라지? 진왕이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황실에 바람 잘 날이 없으니 마마의 심기도 불편하실 것 아닙니

412 까? 나보다는 오히려 자네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군. 마마의 말씀대로 몸이 완전히 낫지 않은 탓입니다. 태후는 아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두문불출할 때는 뒷덜미를 끌고 와 자신궁 앞마당에 꿇리고 싶 었는데 막상 며칠 새에 살이 빠진 몰골을 보니 꾀병은 아닌 듯했다. 황 사도의 일이 있기 전, 주상이 자네를 부용정으로 불러냈다더군.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한 데. 별말 아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부용정에 연꽃이 만발한다고 하기에 신도 주돈이의 애련설을 좋 아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 예. 거기서 마마의 탄신연을 신더러 준비해 보라고 했고요. 헌데 그것은 어찌 물으십니까? 자네가 주상과 독대한 지 얼마 안 돼 황 사도의 일이 터지고, 공교롭게도 자네는 와병했네. 나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여겨지지 않더군. 예전에도 자네는 주상과 단둘이 만나 얘기를 나누고는 전국의 조세 개혁 반발을 거둬들이지 않았는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정말로 그때 나눈 대화라고는 말씀 올린 것이 다입니다. 태후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으나 장문견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알겠네. 내 생일은 대충 지나가도 상관없으니 무리하지 마시게. 자네는 이 나라의 제후이자 태위 야. 몸을 망쳐서 자리에 드러누우면 나라의 손실일세. 마마의 뜻을 새기겠습니다. 준비한 약재가 있으니 박 상궁에게 받아가게. 예.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견이 나간 곳을 태후는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마음이 전혀 개운치 않았다. 태후는 답답한 마음에 상려정 인근을 거닐며 협죽도와 대나무를 감상했다. 여느 봄처럼 푸른 기운 이 상쾌하고 청아하게 뿜어져 나오는데, 조금도 즐겁지 않아서 태후는 내내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새하얀 용각석 탁자 위로 태후가 좋아하는 해당화를 꺾어 죽 늘어놓았는데 그걸 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태후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쪽에서 도경수가 뒤에 우장을 달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화원을 가로질러 태성전으로 향 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보자 속이 뒤집힌 태후는 곁에 있던 사완을 시켜 두 사람을 데려오게 했 다. 나, 나리! 태후마마십니다! 우장이 사완의 뒤를 따라가며 잇새로 빠르게 말했다. 경수는 긴장하지 말라는 듯 눈짓했고 우장은 태후가 자신을 죽이려 들 것만 같아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였다. 마마, 도 계의관을 데려왔습니다. 태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만안하시고 천추를 누리소서. 경수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우장은 가능한 태후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뒤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복귀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서로 활동하는 공간이 달라 얼굴을 볼 여유도 없었어. 소인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내전에 있어도 조정의 유명인사 정도는 알 수 있지. 유명인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봄볕이 따스하여 산책 중이었는데 마침 해당화가 곱게 피어 늘어놓고 구경 중이었네. 너는 자 연이 가진 그대로의 매력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황세용에게 속아 태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대뜸 그림을 좋아하느냐며 물었다. 그때 경수는 실 제 풍경이 주는 정취는 무엇도 따라올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걸 여태 기억하다니 태후의 기억력이

413 놀라웠다. 파초와 목련도 피어서 나는 화원의 수많은 정자 중에서 이 상려정을 가장 좋아하네. 마마. 소인은 폐하의 부름으로 태성전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다고 우회적으로 돌리자 태후는 풍만한 눈웃음을 지었다. 얘기할 사람이 없어 주책없이 일국의 관리를 붙들었군. 헌데 괴상하단 말이야. 뒤에 있는 자는 내가 알기로 주상에게 미운털이 박혀 궁에서 완전히 쫓겨났을 텐데, 어째서 네 잡 색꾼이 된 것인가? 소인이 폐하께 청하여 내락을 받았습니다. 파직된 내관을 관리의 심부름꾼으로 쓰다니 해괴하군. 예부좌랑 우지환의 아우니까요. 당당한 대답에 태후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우지환의 아우라니? 두 사람이 형제지간임을 모르셨습니까? 태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경수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도경수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도 모른다. 저 아이가 예부좌랑의 아우인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느냐? 우지환은 대인파에서 촉망받는 인재죠. 허나 원래 소인파로 활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위장군 박찬 열이 역적으로 찍혀 나가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정치 노선을 바꾸는 것이야 개인의 신념에 따른 일이니 신경 쓰고 싶진 않습니다만, 시선을 내리깔았던 경수가 눈을 들어 태후를 똑바로 바라봤다. 소인에게도 칼자루 하나쯤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태후는 인자하게 머금었던 미소가 무너지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가까스로 선웃음을 유지했다. 박찬열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아주 당당하군. 군총을 얻는다고는 해도 역적을 거론하기가 쉬운 일 은 아닐 텐데. 마마께서는 소인의 이런 점을 싫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지. 너의 총명함은 일찍이 알고 있었으니. 서로에게 나긋나긋 날리는 독설과 비수에 우장은 오금이 찔끔하여 등골이 오싹했다. 도 계의관은 당시 무위장군이 그리 죽은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는가?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둘의 우정이 남다르다고 들었네만. 하문하시니 답하겠습니다. 소인은 벗 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뿐, 역적 의 죽음은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국법에 따라 폐하께서 어렵게 내리신 용단을 소인이 무슨 자격으로 논하겠습니까? 태후는 자신이 경수에게 말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몇 마디로 발발 떨며 태성전의 사관이 되겠다던 도경수는 온데간데없었다. 앞에 선 자는 일렁이는 눈동자 안에 복수의 불꽃을 심은 화신이었다. 그 투명하던 청년이 이렇게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변한 것에 태후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세 월 동안 궁에서 타락한 사람을 셀 수 없이 봤기 때문이다. 다만 도경수가 이 정도로 커버렸다는 사실 에 경계심이 들었다. 내가 공연한 것을 물었군. 조정이 시끄러워 마마께서 편히 쉬질 못하시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시나 봅니다. 은근히 자신의 처지를 조롱하는 통에 태후의 목덜미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조정이 시끄러운 것은 오직 폐하의 전정을 망치려는 탐관오리들이 설치기 때문입니다. 폐 하께서 불철주야 힘쓰고 계시니 태후마마께서는 더는 심려치 마십시오.

414 태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한 패배다. 불러서 몇 마디로 화풀이 좀 해 보려던 것이 아주 우습게 돼 버렸다. 걱정해 주니 고맙구나. 마마께서는 혹 황 사도의 일을 염려하시는지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태후는 대답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조금 뒤 진정한 그녀가 답했다. 대연의 사도이고 문신들의 수장이 토지 비리에 연루됐으니 걱정이 아니 되겠느냐? 나라를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옥사에 있는 황 사도를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무어라? 네놈이 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태후가 탁자를 퍽 내리치며 호통하자 경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고정하십시오. 네가 주상의 총애를 입기로서니 관주성의 웃전인 나를 능멸하려 함이더냐? 오해십니다. 소인은 다만 마마께서 걱정하는 분이 불분명하여 여쭙고자 한 것입니다. 당연히 주상과 이 나라지! 예.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소인이 의심이 많아 그렇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저의가 있어 내게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소인이 실언하였습니다. 하지만 뭇 사람들이 폐하께서 황 사도를 이대로 안고 가시려는 것이 아니 냐며 걱정한답니다. 주상께서 현명하게 처리하시겠지. 물론입니다. 하오니 마마께서 폐하를 뵙고 한 말씀 올려주십시오. 더 큰 그림을 보셔야 한다고요. 더 큰 그림? 엄연히 왕법이 위에 있습니다. 헌데 버리면 그만인 것에 집착하여 조정을 혼잡하게 하면 사직이 문란해지지 않습니까? 하여 삼사와 태학관에서 계속 상소가 올라오는데도 폐하께서는 황 사도에 대한 처결을 미루시어 모두 염려하고 있습니다. 태후는 조용히 경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듣고 보니 설득력이 있었다. 마치 태후가 살아날 방법이 라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전에 있어 조정 일을 알지 못하네. 그런 일이 있다니 참으로 걱정이군. 그러니 마마께서 은근히 나서주신다면 폐하께서도 황 사도의 일을 다시 생각하실 겁니다. 마마께 서는 황실의 웃전이고 천자의 모후이시며 엄연한 국모가 아니십니까? 황 사도의 수완과 능력은 훌륭합니다만 대연의 조정엔 사도보다 청렴하며 유능한 관리들이 넘치지 요. 인재가 이리 많으니 과연 폐하께서는 큰 복을 누리시는 분입니다. 이미 결심한 바가 있었는데 도경수의 의견까지 들으니 귀가 솔깃했다. 그의 말이 옳다. 버리면 그만인 것에 집착하면 시간만 잡아먹고 오히려 의심을 살 것이다. 황세용을 버리고 적임자를 찾아 사도로 앉히면 될 일인데 뭐가 아쉬워서 여태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계의관의 말을 잘 알았네. 바쁜 사람을 불러다 놓고 애꿎게 시간만 잡아먹었군. 아닙니다. 마마께 폐하를 설득해 달라며 근심을 얹었으니 소인은 면목없습니다. 그만 가보게. 태성전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아니 되지.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태후는 결심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도경수를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사도 황세용이 남의 이름을 빌려 토지와 세금을 횡령하고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를 착취한 정황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비자금 중 일부가 자신궁으로 흐른 치부책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 자금을 추적하다가 그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사람을 부려 도명정 내외에게 도경수가 경성현에 서 죽었다는 거짓 부고를 알린 것도 밝혀졌다. 끝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일인지상 만인지하인 사도에게 엄정한 법의

415 심판을 받게 했다. 그의 몰수된 가산은 나라에 귀속되었고 일부는 상령의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숨 가 빴던 나날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종인은 대인파의 거두인 임제환과 황세용을 일사천리로 쳐낸 어사대에 직접 어주 창고를 열어 사온 을 내렸다. 또 황세용이라는 거목을 베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 종대를 대접하고자 궁으로 불 러들였는데, 종대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모든 증좌를 감찰지평 변백현이 내놓았단 말씀입니까? 예, 폐하. 오래전부터 대인파 인물 중 몇몇을 조사 중이었는데 황세용 사건이 워낙 심각하여 조만 간 폐하께 탄핵 상소를 올릴 예정이었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 경주자사 임제환의 일이 터졌고, 그 동안 잡아들인 탐관오리 때문에 어사대에 지나친 이목이 쏠려 있었답니다. 해서 형님을 찾아가 황세용의 일을 알린 것입니까? 결과적으론 그렇습니다만, 소신의 노비인 장지가 왈패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마 침맞게 시기가 맞물렸습니다.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종대가 노비의 억울함을 풀겠다는 핑계로 황세용이라는 대어를 낚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 썩 수긍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문제없었지만 김종대가 그간 문하생조차 받지 않을 만큼 외부인과의 접촉을 꺼렸던 것을 보면 황세용을 낚기엔 무리가 따랐다. 백현은 몇 년 전부터 오늘을 준비한 듯 보였습니다. 임제환을 찍어낸 것도 그 아이가 지독하게 파 고든 결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황세용까지 엮다니, 부패한 관리를 잡아들이겠다는 사명감이 아주 남다릅니다.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가 썩은 관리들을 모조리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정의감으로 번졌 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백현이 어사대에서 일하며 썩은 고깃덩이를 썩썩 잘라냈으므로 종인으로서는 매우 시원한 일이었다. 스스로도 지나치게 남의 이목을 사는 것을 꺼렸으므로 백현에게 일을 맡기는 한 염려할 필 요는 없을 것이다. 고모님께서 변 지평을 잘 훈육한 덕분이겠지요. 그나저나 저는 형님께서 이번 일에 나서주셔서 정 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소신은 말을 전한 것뿐입니다. 헌데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진땀이 나고 배 속이 알싸한 것이, 역시 소신은 정치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가슴을 후루루 쓸어내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웃음이 터진 종인이 비단보자기가 깔린 목 판을 직접 들고 내려왔다. 어쨌든 형님께서 용기를 내주셨습니다. 소신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어려운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두셨다가 여름에 시원하게 부치십시오. 선초( 扇 貂 ) * 에 진주를 매달고 손잡이는 시원한 백옥으로 꾸민 청선( 靑 扇 ) ** 한 자루였다. 종대는 그 것을 받으며 감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다. 소신은 정말로 한 일이 없는데. 아휴, 귀한 사송선( 賜 送 扇 ) *** 을 소신이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습니 드릴 것이 마땅치 않아 급히 생각했더니 이것뿐이더군요. 때때로 소신에게 하사하시는 물건만으로도 하해와 같은 성은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형님이십니다. 세상에 한 분뿐인, 같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난 형제요. 폐하. 언제 한 번 짬을 내어 인보당에 가겠습니다. 그래도 형님께서 지내시는 곳인데 아우가 무심하여 그동안 걸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타시던 칠현금도 있으니 모처럼 형님께서 금도 타고 노 * 부채고리에 다는 장식 ** 푸른 빛깔의 부채 *** 임금이 하사한 부채

416 래도 하시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 말에 지난날의 마음고생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인 듯 사라졌다. 종대의 만면에 환한 빛이 감돌 았다. 종대는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가는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아우를 지키려고 어미의 원수인 자신궁에 들락날락했고, 그 때문에 아우에게 끄나풀이라는 오해까지 받아 오래도록 화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력을 알아주는 듯 종인은 변했다. 그는 지금껏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지독했던 세월을 보 상받는 기분이었다.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 혹 제가 가는 것이 부담스러우신지요?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 오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헌데요? 감격해서 그렇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무척 감동했습니다. 종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가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읊조렸다. 그대를 생각하며 뭔가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어 한 조각 대나무 드리오니, 대나무 사이에 맑은 바람 불거든 바람 따라 서로를 생각합시다. * 섬세한 청선을 보니 문득 목은( 牧 隱 ) ** 의 시가 떠오르는 군요. 부채 한 자루로 바람을 일으키고 그 바람 속에서 정인을 떠올리는 아름다움이라. 참으로 감성적입 니다. 형님께서 드디어 장가들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폐하! 소신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한량처럼 자유롭고 방탕하게 사는 현재가 아주 만족스 럽습니다! 적극적으로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종대를 보며 종인은 한바탕 박장대소를 늘어놓았다. 75. 침주( 沈 舟 ) 조용히 책을 읽던 종인이 별안간 기침을 쏟았다. 잔기침에는 지난번처럼 가벼운 토혈이 섞였는데 때마침 율무차를 가져온 하개가 그것을 보고 기겁했다. 어찌 또 각혈을 하시나이까?! 종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서랍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구나. 세답방에 입단속을 시키고 깨끗한 옷을 내오너라.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몸이 좀 고단해서 그런다. 많은 일이 있었고 며칠 새 비가 와서 날이 춥지 않았느냐? 송 어의는 폐하의 옥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청신의 말을 믿었는데 실력을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닌지요? 어의는 짐의 옥체를 필사적으로 돌보고 있다. 너만 부산스럽게 굴지, 그리 심각하지 않아. 하오나 폐하! 어서 옷을 가져오라는데도. 마지못해 새 옷을 꺼내와 주인이 갈아입게 도왔으나 하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벌써 그가 본 것 만 해도 서너 번은 될 것이다. 그런데도 번번이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리니 하개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폐하, 도 계의관 입시이옵니다. 김 상궁의 전언에 종인은 얼른 하개를 내쫓아 버렸다. 하 공공의 표정이 어찌 저리 어두우십니까? 짐이 기침 몇 번 했기로서니 어의를 부르지 않는다며 역정이다. * 이색, 그대를 생각하네( 君 相 憶 ) ** 이색의 호

417 풍한에 걸리셨습니까? 어째서 춘색이 짙은 이때 기침을 토하십니까? 풍한은 무슨. 숨을 잘못 들이켜서 잔기침 좀 했다. 경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종인은 얼른 앉으라며 아래쪽 방석을 가리켰다. 네 아우가 사학에 들어갔다며? 훗날 형제가 나란히 조정에 봉사하면 좋겠구나. 아직 어린애일 뿐입니다. 가르칠 것도 많고요. 얌전하질 못하죠. 널 닮았다면 총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한 번도 안 보시고 어찌 예단하십니까? 네가 옆에 끼고 좀 가르쳤겠느냐?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고 경수는 피식 웃었다. 조정에서 처리할 각종 문서에 일일이 비답을 내리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해 질 녘이라 사위가 차츰 어두워지려고 했다. 오랫동안 집중해서 몸이 굳은 종인이 기지개를 켰다. 옆에서 종인을 거들며 그가 각사에 전할 어명을 적던 경수도 함께 긴장을 풀었다. 자신궁이 납죽 엎드린 꼴을 보니 사도의 영향이 크긴 컸나 보더구나. 오랫동안 유착한 관계가 아닙니까. 사도는 시전 상인들과 가까워 사실상 자신궁의 자금줄 노릇을 해왔지요. 헌데 다른 것도 아니고 공문서 조작으로 나라의 세금을 탈루했으니 백성들은 배반감을 느 끼고 황세용을 지탄 중입니다. 조정의 실세이면서도 청백리라는 점을 내세워 민심을 얻었는데 그 믿음에 배신의 칼을 꽂았으니 자업자득이다. 태후마마께서 지금은 무조건 죽은 듯이 있어야 함을 모를 분도 아니지요. 짐이 황세용은 쳐냈지만 자신궁에는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아 태후가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을 거다. 곧 본인의 생일이고 장문견도 다시 자신궁에 들락날락하니 경계가 흐트러져야 마땅하지. 폐하의 예상이 옳았습니다. 장문견은 영회황후를 목숨보다 아껴서 여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 지만 딸린 식솔 때문에 다시 태후의 손을 잡았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혈육이 태후의 손에 죽었으니 말은 못해도 장문견의 속은 문드러지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 또한 권력과 부귀영화라. 아편처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약물이니 취한 뒤에는 벗어나려 해도 심신만 피폐해질 뿐이다. 장씨 남매는 다시 조정을 장악하려 들 것입니다. 허나 그 충심이 예전과 같을 수 있을까? 냉소적으로 반문한 종인에게 경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겼다. 태후는 장문견의 충심을 의심하고 장문견은 태후에 대한 원망을 거두지 않을 테니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일을 도모하려면 신뢰가 반석이 돼 야 하는데 이젠 그 기반마저 무너진 셈이지. 영회황후의 서거는 매우 안타깝습니다만 폐하께서 때맞춰 진실을 밝히신 덕에 더 좋은 기회를 잡 을 수 있었습니다. 기회라. 짐은 죽어서도 영회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너그러우신 황후께서는 폐하의 고충을 이해하실 겁니다. 종인은 위로해 줘서 고맙다는 듯 경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폐하께선 저를 치켜세우시지만 저는 폐하를 따라잡으려면 멀었습니다.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 시며 인내하시는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짐의 기분을 띄우려고 하는 소리임을 모를 줄 아느냐? 짐짓 핀잔을 주면서도 쑥스럽고 기분이 좋은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종인의 입가에 나긋나긋한 초 승달이 걸렸다. 이것이 바로 울인으로 만든 대침입니다.

418 청신이 보자기를 펼치자 침통에 꽂힌 커다란 바늘 한 자루가 나왔다. 겉보기에는 두껍긴 해도 평범 했는데 스치기만 해도 사람의 피부를 상하게 하고 죽음까지 몰고 오는 무시무시한 독이 묻어 있었다. 종인은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렸을 찬열을 떠올리니 저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현재 강호에서 울인을 다루는 자는 셋입니다. 이중 한 명은 문파를 이끄는 수장이고, 다른 한 명은 대장장이인데 단순히 울인의 명맥을 이으려 제작할 뿐 절대 사고팔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울인이란 검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인데 제조과정에서 눈이 멀어 손에서 뗀 지 오래랍니다. 허면 그 셋 중 이 대침을 만든 자가 있는 것이냐? 네 말만 들었을 때는 모두 혐의점이 없어 보이 는데. 세상에 울인검이 풀린 지 수십 년이 지났으니 존재를 아는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지요. 다만 그 수가 워낙 많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찬열을 죽인 자만 찾으면 된다. 소신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는데 아무래도 일찍이 만들어 놓은 대침을 누군가 구입해서 사용한 것 으로 파악됩니다. 하여 대침을 가진 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였고 금린방이라는 상단에서 수상한 점을 찾았습니다. 금린방? 해주( 海 州 )에서 가장 큰 상단인데 전국의 모든 상권과 활발하게 유통하여 몸집이 큽니다. 또 동주 처럼 해로 운용이 쉬워 물자 운송이 빠른 편입니다. 수많은 물건이 쌓이는 곳이지요. 예전에 들어본 것도 같았다. 해주는 교안과는 불과 닷새 남짓한 거리라 마음만 먹는다면 움직이기 쉬운 지역이었다. 수하들이 금린방의 행수가 울인 대침을 가진 고수들을 부린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하여 은밀 히 뒤를 캤더니 과연 고수들을 빌려준 대가로 은 칠십 냥을 받았더군요. 찬열은 기린아다. 헌데 대연 최고의 장수를 죽인 대가가 고작 은자 칠십 냥? 기가 차서 종인의 낯빛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자들을 모두 추포해 두었습니다. 큰 상단의 고수라면 상대하기 어려웠을 텐데? 장군께선 인덕과 중망이 높으셨습니다. 강호에까지 명성이 자자했지요. 더구나 현재 강호 맹주가 장군을 흠모하여 심심찮게 자신의 문파로 들이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강호 맹주? 박우헌의 옛 친구라는 고영 말이냐? 예. 구륜도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박우헌은 소싯적에 전국을 떠돌았다. 그가 쓴 기행문에 구륜도가 언급되어 짐도 기억한다. 그럼 고 영이 찬열을 어릴 때부터 지켜봤을 수도 있겠군. 그건 모르겠지만 고영이 장군을 자주 언급했던 모양입니다. 헌데 금린방이 감히 나서서 찬열을 살해하였으니 사실상 모든 강호의 영웅을 적으로 돌린 셈이 군. 예.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상단을 멸문시키겠다고 하자 금린방의 행수가 나서서 술술 불었습니다. 경수와 오해를 풀었지만 찬열은 지울 수 없는 문신과도 같았다. 떠올릴 때마다 자상을 입은 듯 쓰 라리고 아파서 경수는 고통스럽고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수들의 자백을 받았고 돈이 오간 장부를 확보했습니다. 바로 그 대침이 장군의 몸을 상하게 한 그것입니다. 종인은 차마 바늘을 더 바라보지 못하고 보자기를 덮어버렸다. 작은 바늘 하나로 일국의 젊은 장수 를 죽음으로 몰고 억울한 누명까지 씌워 멸문의 화를 입게 하였다. 계략이라면 지긋지긋한데 이곳에 서는 계략과 음모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것이 종인을 비참하게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폐하. 잠시만. 잠시면 된다.

419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듯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종인. 한참 만에야 그가 다시 고요를 깨뜨렸다. 관련자들을 모두 추포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라. 아직은 때가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찬열에게 지필묵을 가져다줬다는 옥졸은 어찌 됐느냐? 안전한 곳에서 가족과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경수를 죽이려 했던 왈짜는? 혀를 깨물어 말하기가 여전히 불편합니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감시하며 끈질기게 회유 중입니다. 조만간 배후를 실토할 것입니다. 고문은 절대 아니 된다. 반드시 감정에 호소하는 회유책을 써야 해. 그리하고 있습니다. 그럼 안심이다. 네가 안팎으로 수고가 많다.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청신은 우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장문견과 태후의 사이가 틀어졌다.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테니 바짝 긴장하고 황궁 수비를 강화하 도록. 큰일이요? 보위가 바뀔 수도 있다. 충격적인 발언에 청신은 대경실색했다. 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엄연히 폐하께서 계신데 누가 감히 보위를 노립니까? 그것은 역심입니다! 그리 흥분할 것 없다. 이 자리가 언제는 온전히 짐의 것이었더냐? 폐하! 특히, 저들은 삼사와 중추원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경수의 안전을 부탁한다. 소신은 폐하의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화급한 상황에서 도경수의 안위부터 신경 쓰십니까? 청신이 이해할 수 없다며 벌컥 노기를 비치자 종인은 낮게 웃었다. 평소엔 조용하고 심드렁한 위인 인데 주군의 일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악을 쓰는 것이 여간 재미있었다. 짐에겐 봉군도위와 네가 훈련시킨 수많은 장수가 있다. 허나 경수에겐 아무도 없어. 지난번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느냐? 실력 좋은 다른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네가 아니면 안심할 수가 없구나. 하오나, 경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짐은 삶의 의지를 잃을 것이다. 경수에 대한 종인의 지극한 마음을 알아서 청신은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잠시면 된다.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풍랑이 잦아들 것이다. 뭐라? 주상이 이씨 계집의 죽음을 재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단 말이냐?! 예. 폐하께서 난감해 하셨는데 대전에서 오래도록 소왕의 하소연을 들으시고는 정식절차를 밟으라 고 윤허하셨답니다. 하여 소왕이 당시 일을 재조사해 달라며 직접 형부에 소장을 제출했고요.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더냐? 폐하께서는 백성들까지 그 일을 알고 있는 데다 곧 마마의 탄신일이라 이참에 마마의 누명을 벗겨 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민간에서 떠도는 소문이 태후마마의 명예를 심히 훼손한다면서요. 형부에서 소장을 받아들였단 말이더냐! 친왕이 직접 소장을 냈고 폐하께서 마마의 명예를 운운하시는데 형부에서 무슨 재주로 기각하겠습 니까? 이런 발칙한! 사완의 보고에 밖에서 자목련을 감상하던 태후는 평정심을 잃었다. 그녀의 단정한 입시울이 흐트러

420 졌고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예상조차 못 했던 일이기에 심장이 다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황세용을 찍어낸 지 얼마나 됐다고. 혼잣말처럼 울분을 터트린 태후는 치맛자락을 움켜잡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씨 계집의 죽음을 재조사하겠다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의귀비는 태후의 역린이기 때문이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황궁 생활을 버티던 그녀에게 변변찮은 가문의 궁녀 하나가 낭군의 승은을 입 고 승승장구하는 꼬락서니는 여간 볼썽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씨의 낭군은 황제 였다. 황제는 궁의 모든 여인을 취할 수 있고, 여인은 투기해서는 안 되는 칠거지악의 예법이 있었다. 당시 장씨는 겉으로는 모두와 화목하게 지내는 척했다. 성격이 드세어 낭군의 총애를 받은 것은 아 니나 상벌에 엄격하고 내명부를 균형 있게 다스려 존중은 받았다. 내명부의 지존이란 자리는 장씨가 버텨내는 힘의 근원이었다. 궁의 밤은 너무 길었고 처소는 냉골 이었다. 그곳에서 일국의 국모라는 지위마저 없었다면 자존심 강한 그녀는 스스로 벽에 머리를 들이 받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진 마음으로 다스린 후궁이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붙든 낭군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씨 계 집이 나타나고 부터는 후궁의 질서가 무너지고 황후의 지위는 가을날 부채처럼 아주 우스워지고 말았 다. 황제는 이씨를 총애했고 하루가 멀다고 그녀의 처소만 찾았다. 이씨가 말을 잘하고 황제와 대화가 통하는 점은 인정하나 총명하기로는 장씨도 밀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씨를 향한 황제의 총애는 마치 당 현종이 양귀비를 대하는 듯했다. 휘정궁이라는 새로운 궁을 하사하고, 태성전 안뜰에는 소비원을 만들어 둘만의 비밀공간으로 삼아 버렸다. 그녀의 생일이면 조하호의 세 섬에서 화려한 잔치를 열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이를 지극히 총 애하여 황태자로 삼기까지 했다. 이씨와 있었던 수많은 사건을 술회할 순 없지만 장씨에게 이씨는 여인으로서 지독한 패배감을 안긴 유일한 사람이다. 일생의 연적이자 숙적. 그래서 태후는 의귀비라면 여전히 치를 떨었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현기증이 나는 듯 잠시 비틀거린 태후를 사완이 냉큼 부축하였다. 태후는 처소 한쪽에 마련된 쉼터 에 앉았다. 폐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의귀비에 대한 마마의 마음을 아시면서 어째서 그 같은 어명을 내리셨답니까? 박 상궁이 속이 상해 투덜거렸다. 주인의 안색이 심히 좋지 않아 그녀는 사완더러 주변을 물리라고 했다. 소왕 전하께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형부에 제 어미의 일을 재조사해 달라고 소장을 낸 것이 답이다! 마마, 고정하소서!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사리분별이 어두워진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구나. 그 아이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니. 태후는 자조적으로 쓴웃음을 터트렸다. 하오나 마마의 제안은 소왕의 입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것 아닙니까? 원래 보위는 소왕이 이 었어야 하니까요. 십오 년이다. 한이 쌓일 대로 쌓였을 텐데 그 아이 눈에 보위가 대수겠느냐? 제 어미의 한을 풀어 달라고 주상의 귀밑머리에서 속닥거렸을 꼴이 선하구나. 하오면 어찌합니까? 이대로 계시다가는 소왕이 동궁에서 쫓겨난 일까지, 싸늘하게 쏘아보자 박 상궁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마음이 급하여 실언하였나이다.

421 모든 상황이 순탄치 않다. 근래에 이처럼 강한 압박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입궁한 후 사십 년 가까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위기가 있었고 죽고 싶었던 순간도 샐 수 없다. 그때마다 침착하고 슬기롭게 대처했기에 이날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 아니겠나.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뿐이니라. 바람이 잦아들기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수밖에. 짐에게는 의귀비 독살 사건의 진상을 밝힐 만한 증좌가 없다. 그걸 태후라고 모르겠느냐? 당시 관련자들은 태후께서 조용히 처리하셨고 선제의 후궁들은 태후를 두려워하니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엔 관심도 없을 테고요. 그래. 유일한 목격자인 짐의 생모마저 황실 종묘에 들어가 있으니 사실상 태후의 죄를 입증할 만 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인은 고야정에서 한가로운 봄바람을 맞으며 화원을 감상했다. 주강이 막 끝난 참이라 머리를 식 히고 싶었다. 경수는 날이 따스한데도 자주 한기를 느끼는 종인을 위해 외투를 들고 있었다. 언제든지 종인의 어깨에 걸쳐줄 생각이다. 실질적인 소득이 없어도 상관없다. 시늉만으로 소문을 흘리고 그것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길 기다 리면 되니까. 자신궁에는 부는 바람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있느니라. 허나 소왕의 폐위 사건은 조사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물꼬를 트셨고, 의귀비 독살과 소왕의 폐위 사건은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요. 알고 있다. 우린 그저 몇 마디 말을 흘리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자신궁은 몸을 사리느라 아무것 도 하지 않을 것이나 가만히 있을수록 숨통만 조인다는 사실을 깨닫겠지. 낚싯대는 그때 거두어도 늦 지 않는다. 태후의 탄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군요. 무정후가 귀빈들을 많이 초대해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 하고 과시하는 장으로 삼을 겁니다. 태후는 관주성의 웃전이니 그럴 수 있다. 또 매년 그래 왔고. 수월당에 이곽지사의 뜻을 전한 태후입니다. 저들의 세력이 결집한다면 폐하의 신변에 무슨 위험 이 닥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경수가 뾰족하게 노려보자 종인은 객쩍게 웃었다. 농이다. 가뜩이나 눈이 큰데 그리 치뜨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아느냐? 그런 말씀을 안 하시면 됩니다. 불퉁한 경수의 손을 잡고 은근하게 끌어당기는 종인. 요즘 너를 볼 짬도 안 나는구나. 국정으로 바쁘시니 별수 없지 않습니까. 어째 서운한 기색이라고는 없구나? 서로 믿음이 있으면 몸이 떨어져 있다 한들 아쉬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또 아예 못 보는 것도 아 니고 시시때때로 교지도 받아 적으면서 폐하를 뵐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건 업무이지 않으냐? 이렇게 고야정에서도 뵙는걸요. 일각도 채 아니 되는 것을. 폐하께서 이루실 것들을 생각하면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너는 정말 냉정하다. 알고는 있는 게야? 그런 말 많이 듣는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는 경수다. 종인은 전의를 상실해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 다. 그만 가셔야 합니다. 차대에 늦으시면 신료들이 의심합니다. 등 떠밀지 마라. 안 그래도 갈 참이었다.

422 폐하께선 나랏일을, 저는 중추원의 일을 맡았으니 성심을 다해야 합니다. 천자께서 모략과 협잡에 만 열을 올려서야 되겠습니까? 뭐? 모략과 협잡?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단어를 바꿔드릴까요? 됐다! 토라진 듯 경수의 팔에 들린 외투를 낚아채 혼자서 어깨에 걸쳐 버렸다. 성큼성큼 고야정을 나서던 종인은, 저녁에 침전으로 들어라. 옆에서 상소라도 정리해. 라는 말만 남기고 휙 사라져 버렸다. 떨어지는 삼색도의 꽃잎을 바라보며 경수는 나른한 봄볕을 만끽했다. 달곰한 미소가 걸렸다. 76. 적혈적주( 赤 血 的 呪 ) 태후의 탄신연이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요, 사방에서 청량한 솔바람이 불어 꽃 비를 흩뿌렸다. 구화장과 알록달록한 휘장이 높다랗게 걸리고 온갖 꽃과 장식물이 연회장을 꾸몄으며 예인과 광대들이 한데 어우러져 재미있는 공연을 선보였다. 장문견은 한동안 소원했던 누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연회에 총력을 기울였다. 예부와 종대까지 들볶은 덕에 많은 귀빈이 초대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볼거리 많은 탄신연을 자랑할 수 있 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과 축하 인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대인파가 많이 위축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지라 태후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긴장 을 늦추지 않았다. 형부에서는 계속 의귀비의 죽음을 조사 중이었는데 당시 동궁이던 김준면을 폐위한 사건까지 수면 으로 끌려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녀의 인생에서 다시금 큰 결단을 내리는 날이다. 오후에는 연무장에서 격구 대회를 열어 무장과 종친들이 한데 어우러졌는데, 큰 사고 없이 흥겹게 끝나 모두의 기분은 흥그럽기 그지없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입궁하지 않은 준면을 제외하고는 종친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도 처음이었다. 저녁에는 황족만이 모인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황제와 태후를 비롯해 황후, 후궁, 종친, 그들을 시 중드는 상궁과 궁녀 등이 모여 연회장은 상당히 북적거렸다. 태후마마의 탄신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종인은 태후에게 잔을 권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태후는 잔을 받아들었다. 낮에도 여러 번 잔을 기울여 술기운이 조금 남은 상태라 둘 다 마시는 시늉만 했다. 주상에게는 고맙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구려. 양전이 화합하여 어미의 생일을 이리도 화려하게 챙겨주니 참으로 감격스럽소. 마마의 생신인데 어찌 소홀함이 있겠습니까? 또 오늘은 진왕 형님과 무정후가 힘을 합쳤습니다. 소자는 구경만 해서 조금 민망합니다. 두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꼼꼼히 진행 상황을 보고받으셨을 거 아니오? 그 정성을 어찌 무시하겠 소? 헤아려 주시니 감읍하나이다. 그간 황실과 조정에 이런저런 말이 나돌아 마마께서 심기가 상하셨 을까 봐 걱정이 많았습니다. 황세용과 의귀비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태후는 특유의 풍만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종인의 말에 집중했다. 허나 오늘 이 자리는 오직 마마를 위해 준비했으니 그간의 심려를 모두 떨치시길 바랍니다. 소자 는 마마의 만수무강을 비나이다. 주상의 효심이 이리도 지극하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구려. 마마의 가르침으로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마마께서는 대연의 황태후이

423 시니 어찌 효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만백성이 주상의 이런 점을 본받아 저마다 본분을 지킨다면 연의 만년대계가 창창할 것이오. 소자, 아직 부족합니다만 그러길 바라야지요. 어마마마. 신첩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좋소. 며느리가 주는 잔도 받아봅시다. 잠자코 있던 황후가 예쁘게 웃으며 태후와 잔을 기울였다. 늙은이의 주책일 수도 있으나 이런 자리가 아니면 또 언제 말하겠소? 주상과 중궁이 합심하여 얼 른 황손을 안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니 두 분은 이 어미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마시구려. 황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고 종인은 선웃음으로 응수했다. 형님. 아, 폐하. 한 잔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종인이 한창 다른 친왕들과 떠들썩하게 노는 종대에게 찾아가 술을 따라주었다. 말끔하게 잔을 비 운 종대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황실 연회는 조금 촌스럽고 딱딱해서 싫어하는데 오늘은 술이 일품이라 맘에 든다고까지 했다. 형님께서 이번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무정후의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지위를 내려놓 고 그에게 맞춰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거나 태후마마를 위한 일이 아닙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신분을 내세울 필요는 없지요. 주변을 의식하여 아름답게 대화하고 있었으나 속마음에는 둘 다 장씨 일가를 향한 가시로 가득했 다. 창인후( 昶 仁 侯 )의 여식이 올해 열아홉이랍니다. 혼처가 마땅치 않은 모양인지 직접 저에게 혼처를 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답니다. 창인후라면 공부에서 이름을 날린 국가대신이 아닙니까? 헌데 그 여식이 여태 시집을 못 가다니 의외로군요. 막내딸인데 황족이 아니면 싫다고 아비를 압박하는 모양입니다. 황족이 아니라 황궁에 들어오고 싶은 거겠지요. 미혼인 황족이라고 해 봐야 손에 꼽는데 창인후 정도면 못 해도 친왕 급의 혼처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종대가 속내를 꿰뚫자 종인은 멋쩍게 웃었다. 예. 실은 여식을 제 후궁으로 만들고 싶은 눈치인데 저는 곧 죽어도 싫더군요. 후궁이라면 아주 진 절머리가 납니다. 농처럼 내뱉는 종인을 보며 종대도 킥킥거렸다. 혹 폐하께서 도경수의 눈치를 보시는지요? 엇, 무덤까지 비밀인데 어찌 아셨습니까? 진심이십니까? 그 쥐방울만 한 것이 폐하를 쥐락펴락하는지요? 쥐방울이요? 하하하! 둘이 큰 소리로 왁자하게 웃어대자 주변에서 황제의 기분이 아주 좋음을 알고 덩달아 기뻐했다. 오 직 태후만이 안 그런 척하면서 두 사람을 예의주시했다. 이제는 강건하시기도 하니 창인후의 여식을 형님과 맺어드리고 싶습니다. 소신은 혼자인 것이 편합니다만. 알아보니 시문에 일가견이 있다더군요. 창인후는 형님과 통하는 면이 있으니 아비에게서 가르침을 잘 받았을 겁니다. 자색도 갖추었다니 금상첨화 아닙니까? 폐하께서 소신을 놀리십니다. 왕부를 번창시키셔야 합니다. 단호한 종인의 눈빛에 압도당하였다. 종인이 황실 번창을 위해 종친들에게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 려 함을 잘 아는지라 종대도 더는 저항할 수 없었다.

424 소신의 심미안이 매우 높음은 잘 아시지요? 제아무리 창인후의 여식이라도 수틀리면 도망칠 겁니 다. 오가는 대화 속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불가했던 애정이 담겼다. 종대는 종인이 자신에 게 다시 맘을 열어서 늘 감사하게 여겼다. 조금만 진심을 보여줘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 피붙이. 앞으 로도 오늘처럼 함께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종대는 진심으로 바랐다. 평소보다 빨리 마셨더니 취기가 금세 오릅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벌게진 종대는 종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근에서 술을 좀 깨고 오면 다시 긴 이 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흥이 깨지기 전에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종대가 연회장 밖으로 나갔 다. 온종일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는군. 궁 일각에서 만난 백현은 새벽까지 달리지 못해 아쉽다며 계속 투덜거렸다. 태후의 탄신을 기념하 여 각사에서 숙직을 서는 신하들에게도 술과 음식이 내려왔는데 정작 재미난 구경거리는 연회장에서 만 볼 수 있었으니 참 통탄할 노릇이었다. 자네도 종친이니 한 번 얼굴을 들이밀어 보지 그러나? 함께 나온 홍만립이 백현의 어깨를 툭 치며 찔렀다. 백현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주고( 酒 庫 )에서 막 꺼낸 향기 좋은 술만 있으면 되는데, 그 팍팍하고 따분한 자리에 내가 왜 끼 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다 거기에 있다지 않았나? 가무를 못 봐서 섭섭한 게 아닌가? 거문고 타는 솜씨는 내가 훨씬 낫네. 또 시작이군. 농담 아니라니까? 자네는 못 들어봤겠지만 내가 또 노래도 기가 막힌다네. 물론 진왕 전하에 비하 면 쪼금, 아주 쪼~금 모자라지만 겨우 한 끗 차이라고. 그 한 끗이 명인과 범인( 凡 人 )을 가르는 거 아닌가? 툭탁툭탁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경수는 떼어놓은 풍경인 듯 혼자서 홀짝홀짝 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경수는 어째서 중추원에서 마시지 않고 예까지 온 건가? 내가 불렀네. 자네가? 중추원의 고리타분한 선진들 사이에서 홀로 노니는 학처럼 굴 것이 뻔하여 논의할 게 있다며 구슬 렸지. 눈치가 빨라서 금세 따라 나오더군. 홍 나리가 기다리신다는데 어떻게 안 나옵니까? 나는 기다린다고 한 적이, 홍만립의 입을 잽싸게 틀어막으며 백현은 경수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유리 술잔의 호박처럼 노란 술은 독하고, 조그만 술통의 술은 진주처럼 붉구나.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니 옥 같은 기름이 지글지글, 비단 병풍 수놓인 장막은 향기로운 바람에 싸여 있구나. * 폐하께서 하사하신 술과 고기가 으뜸이로군. 모처럼 쉬어가는 길목이니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말고 향기에 취 하는 거요. 알겠소? 얼씨구? 아주 신이 났군그래. 술이라면 간이며 쓸개며 다 내어주실 분입니다. 잠자코 있던 경수가 한마디 거들자 홍만립이 박수까지 쳐가며 수긍했다. 아주 둘이서 나를 놀리려고 작정했구려. 불퉁하게 나온 입을 삐죽거리는 백현은 꼭 젖먹이를 벗어난 어린애 같았다. 끈기 있게 기다리다가 임제환의 비행을 추적하고 진왕을 부추겨 사도 황세용까지 찍어낸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과 * 이하, 장진주( 將 進 酒 ) 중

425 능력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자자. 그만들 하고 저기 가지 끝에 걸린 은월 좀 보게. 하얗고 깨끗한 것이 어찌 저리 미인의 얼굴 같은지. 홍만립이 가리킨 곳에는 연분홍 벚나무 위에 새침하게 뜬 둥근 달이 있었다. 달무리를 살짝 끼고 오롯하게 뜬 달은 술 향기가 가득한 이 봄밤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담장을 따라 쭉 늘어선 꽃나무 와 측백나무의 푸른 잎도 정취를 더하였다. 이곳은 관청과는 멀고 연회장과 비교적 가까워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 등을 여러 개 걸어 그리 어둡진 않으나 담벼락 너머 사람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어 유사시에는 금세 관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자리를 찾고 백현이 자신 좀 칭찬해 달라며 경수에게 치대는 것을 홍만립은 꼴사납다 며 혀를 찼다. 자리가 아주 그만이군. 하얀 달과 어여쁜 꽃, 향기로운 술, 즐거운 노랫소리, 그리고 함께해서 즐 거운 지인들. 오늘 밤은 참으로 멋져. 홍만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은 잔을 들어 맞부딪쳤다. 쨍그랑하는 경쾌한 소리가 밤하늘까지 뻗어 나갔다. 한창 바람을 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사이에도 다른 종친들이 종대에게 들러붙어 그간 안부를 물으며 혼처를 주선해 주겠다고 난리였다. 태후의 비호가 있는 데다 최근 몇 년간 황제와의 관계도 아주 좋아서 진왕의 인기는 전보다 더 치 솟은 상태였다. 진왕과 혼인하겠다는 사대부 규수들이 많다며 다들 싱글벙글했다. 종대는 적당히 대거리한 후 틈바구니를 빠져나왔다. 연회장으로 돌아오니 이제 막 무희들의 공연이 끝난 듯 치렁치렁한 장신구와 옷자락을 늘어뜨린 여인들이 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종대는 그들에 게 심드렁한 눈빛을 보낸 후 본인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태후마마. 헌왕( 獻 王 ) * 께서 보리와 배꽃, 창포, 당밀 등을 넣어 빚은 벽향주( 碧 香 酒 )를 보내셨습니 다. 칠 년을 묵힌 포양주( 抱 釀 酒 ) ** 라 하옵니다. 헌왕이? 그 정성이 아주 대견하군. 가져오너라. 박 상궁이 노란색 비단이 깔린 목판에 쌍봉소준( 雙 鳳 小 樽 ) *** 을 들고 왔다. 술병이 어찌나 화려한지 금색으로 칠한 몸통 양옆에 작은 손잡이 두 개가 달렸고, 붉은색 봉황이 각기 푸른색 옥을 물고 날아 오르는 듯한 형상을 취하였다. 헌왕부에서 신경을 많이 썼군. 이처럼 화려한 술병은 처음이라 눈이 다 휘둥그레지는군. 헌왕 숙부는 애주가라 술에 있어서는 으뜸이시지요. 지난번에 소자에게도 홍류석과 산호로 장식한 유리 술병을 보내셨는데, 무엇으로 빚었는지 그 병에 술을 담으면 맛이 더 깊어지고 향도 진해졌습니 다. 그 쌍봉소준도 아마 벽향주의 맛을 최대한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주상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욱 기대되는구려. 웃으며 자기 앞에 한 잔 따르게 하고는, 자. 헌왕의 귀한 정성을 함께 맛봅시다. 제안하며 종인의 빈 잔에도 한가득 술을 따르는데, 태후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종인은 잔을 탁 내려놓고는 하개를 시켜 종대를 데려오게 하였다. 무정후는 먼저 돌아갔으니 별수 없지만 오늘 연회를 준비하느라 종대 형님께서 수고가 많으셨답니 다. 태후마마께서 내리는 술 한 잔으로 노고를 위로하신다면 형님께서도 무척 감격하실 겁니다. 일순 태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제 앞의 잔을 먼저 들었다. 진왕은 따로 치하할 터이니 우선 주상과 내가 한 잔씩 주고받읍시다. 어쨌든 내게 들어온 선물이 니 주상과 내가 먼저 마시는 것이 보기에도 좋지 않소? * 효경제의 막냇동생 ** 술독을 안고 그 사람의 체온으로 익힌 술 *** 한 쌍의 봉황을 양쪽 귀에 그린 술병

426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웃으며 태후와 잔을 주고받았다. 흠. 과연 향과 맛이 일품입니다. 은은하게 보리 향이 나는데 다른 재료로는 무엇이 들어갔는지 궁 금하군요. 배꽃 향기도 나는 듯한데? 주상이 안목이 매우 높구려. 태후가 겨우 안심하는 사이 종대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헌왕부에서 태후마마께 좋은 술을 바쳤답니다. 형님도 맛을 보셨으면 해서요. 종인이 자신의 잔을 건네 종대에게 내밀었다. 종대가 활짝 웃으며 기다리자 태후가 사뭇 낯빛이 어 두워졌다. 눈치 빠른 종대가 그것을 알아보고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 아니외다. 온종일 시끌벅적하게 있었더니 힘에 부치는구려. 나이를 먹었나 보오. 하오면 그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박 상궁은 옆에서 마마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뭘 하였는가? 송구합니다, 전하. 나무라지 마시구려. 흥을 깰 수 없었을 뿐이니. 둘이 대화하는 사이 술잔에 벽향주가 가득 채워졌다. 정성을 어찌나 쏟았는지 물방울이 드러났을 뿐인데도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오늘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신이 무얼 한 게 있다고요. 받으십시오. 술을 쭉 들이켜니 코와 입안 가득히 향이 번져 더욱 술을 당기게 하였다. 종대가 맛이 좋다며 눈을 반짝이자 종인이 웃었다. 헌왕 숙부께서 태후마마의 탄일을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모양입니다. 맛을 보니 보리, 배꽃, 창포, 당밀뿐만 아니라 송진과 연꽃 향도 납니다. 역시 형님의 미각은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두 분께서도 한 번 더 맛을 보십시오. 동백 위에 있던 눈을 거둔 것인지 술이 유난히 맑고 깨끗한 데 은은하게 감도는. 커헉! 형님! 꺅! 일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술에 대해 품평하던 종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종대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 몰려들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종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자 모두 동작을 멈추고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어의! 어의는 어디 있느냐! 하개가 외치자 시위들이 재빨리 내의원으로 달려갔다. 종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종대 쪽으로 왔다. 종대는 탁자를 붙잡고 벌컥 올라오는 토혈을 쏟았 는데 모양새가 영락없이 의귀비가 죽던 때와 똑같아서 종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 이 타들어 가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 향불을 사르듯 비명횡사할 것이야!!! 숙비를 저주하던 의귀비의 새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 숨바꼭질하다가 휘정궁으로 숨어들어 어린 종인이 목격했던 그것은 악몽으로 나타나 종인을 지독하 게 괴롭혔다. 의귀비의 저주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것 이라는 무력감과 패배감. 종인에게 발작과 불면증을 안겨다 준 의귀비의 저주가 종대에게 발현되자 종인은 제정신이 아니었 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427 폐, 폐하. 폐하! 자리를 피하소서! 자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형님을 처소로 모셔라. 어서! 시위들이 종대를 업고 사라지기 무섭게 종인이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 외쳤다. 이곳에 감히 황족을 시해하려 한 패역무도한 자가 있다! 연회장을 비롯해 황궁의 사문을 봉쇄하고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라! 또 오늘 하루 드나들었던 이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수상한 움직임이 있거든 바로 추포하여 짐 앞으로 끌고 오라! 봉명하겠나이다! 청신! 예! 당장 순금사를 동원하여 헌왕부를 봉쇄하고 일족을 연금하라! 청신이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하개는 헌왕부에서 진상한 벽향주를 챙겨두도록. 감히, 어떤 놈이 짐의 황궁에서 이 같은 짓을 벌 이려 하였는지 발본색원해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부들거리는 종인을 보며 황후는 경악했고, 태후는 어째서 종대가 피를 토하였는지 어안이 막히고 황망하여 멍하니 있었다. 다들 이 상황이 무섭고 이해되지 않아 겁을 먹은 표정들이었다. 폐하, 의원들을 데려왔습니다. 밖에서 문을 열어주자 송기석을 비롯해 내의원에서 내로라하는 실력 있는 의원들이 몰려왔다. 그들 이 예를 갖추는 것을 잘라먹으며 종인이 싸늘하게 명령하였다. 반드시 형님을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살과 뼈를 발라 궁문 밖 까마귀들의 먹잇감으 로 던지리라. 어찌 이런 일이! 일단 연회장 안의 다른 처소로 옮겨진 태후는 사색이 되었다. 종대의 안위가 걱정됨과 동시에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동태를 살피러 갔던 사완이 나타나자마자 좌불안석이던 태후가 그녀를 몰아세웠다. 내 분명히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거늘! 죽여주시옵소서! 허나 소인은 분명히 마마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헌왕부에서 매년 술을 진 상하는 것을 알고 의심 사지 않게끔 술병과 술을 준비했습니다. 헌데 일이 왜 이렇게 됐느냐 이 말이다! 모르겠습니다. 소인도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완은 울음을 터트렸고 태후는 그것조차 꼴 보기 싫어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사완이 울면서 밖으로 나가자 박 상궁이 벌벌 떨며 태후를 진정시켰다. 진왕 전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마마, 어깨를 떨고 계십니다. 진왕, 종대 그 아이가 죽으면 나는 살 수가 없을 것이다. 냉혹한 철의 여인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말도 못하던 그 아이가 꾸물꾸물 기면서 내 품에 안겼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게 어 마마마 라고 하던 순간은 또 어땠고? 다들 나를 황후라 어려워하고 무서워만 했는데 종대만은 구김살 없이 살갑게 굴었다. 그 아이만은 내가 진정으로 어미라는 느낌이 들게 했어! 태후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죽인다면 나는 죽어서까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마지막이 아니어야 한다. 내 실책으로 앞길 창창한 그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아니 돼! 주인의 이런 약한 모습은 처음이라 박 상궁은 당황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졌다. 그녀는 태후가 김종 대를 제 피와 살처럼 아끼는 것을 지켜봤던지라 주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마. 안수를 거두소서. 무탈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428 흑흑. 자신을 속이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서 태후는 서럽게 울었다. 77. 광명갱생( 光 明 更 生 ) 술병과 잔을 만든 이, 술을 만든 이, 옮긴 사람, 시중을 든 궁녀 등등 연회장에서 벌어진 일과 관련 해 모든 이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모두가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긴장하며 처분을 기다리던 그때. 처소 옆의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종인은 십수 년 전 휘정궁의 병풍 뒤로 몸을 숨겼다가 두 여인이 의귀비를 죽음으로 몰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감기는 기억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종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안색도 새파랬다. 안에 들어가서 전하를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황후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종인은 못 들은 듯 미간을 구기고 바닥을 응시했다. 어의들을 방해하기 싫으셔서 그러십니다. 하개가 종인의 마음을 읽고 아뢰자 황후는 아차 싶었다. 얼마 뒤, 정신을 차린 종인이 하개에게 물 었다. 태후마마는 어디 계시느냐? 서진각에 계십니다. 곁에서 시중드는 이 외에 다른 사람은 없느냐? 그런 것으로 아옵니다. 황후가 태후마마를 보살펴 주시구려. 마마께서 몹시 놀라셨을 텐데 곁에서 위로라도 해드려야지 않겠소? 신첩의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도 놀라셔서 진땀을 흘리시는데. 짐은 괜찮소. 하개와 어의들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마마께 가보시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황후는 억지로 떼어야 했다. 그녀가 사라진 후 종인은 입술을 재차 잘근잘근 씹었다. 일각이 여삼추, 시간이 너무도 더디게 흘렀 다. 폐하. 용안이 몹시 어두우십니다.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주군의 머릿속에는 여러 상념이 뭉쳐 있을 것이다. 하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고뇌에 사뭇 숙연해졌다. 이럴 때 도경수라도 옆에서 위로해 준다면 좋겠는데, 황족들만 연회 에 참석할 수 있어서 아쉬웠다. 폐하, 어의들이 나옵니다. 방 안에서 송기석을 필두로 네 명의 어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종인이 벌떡 일어나 송기석에 게 다가갔다. 어찌 되었느냐? 형님께서는? 소신들의 무능을 죽여주시옵소서. 송기석과 어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전부 무릎을 꿇었다. 이 같은 장면을 아주 오래전에도 본 듯 하여 종인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요연하였다. 송 어의. 자네의 의술 실력이 고명함을 알고 있다. 자네는 짐과의 약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야. 허니 어설픈 농담은 집어치우고 진실을 말하게. 형님께서는 어찌 된 것이냐? 짐독입니다.! 헌왕부에서 바쳤다던 술을 조사해 보니 병 안에 조그만 주머니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손잡이를 밀면 그 주머니를 건드려 내용물이 술에 떨어지는 구조입니다. 바로 그 속에 짐독이 들어 있었습니 다.

429 말이 되질 않는군. 그 술은 형님께서 마시기 전에 태후마마와 짐이 먼저 마셨다. 그런데 어째서 형 님만 저리되셨느냐? 술을 분리한 후 병을 깨서 조사하였는데 안쪽을 보니 철사가 헐거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번 시험하다가 중간에 오작동한 듯합니다. 하늘이 태후마마와 폐하를 살리셨습니다. 허튼소리! 네 말대로라면 손잡이를 밀어서 독이 든 주머니를 터트려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허나 첫 잔은 태후께서 직접 주셨고 둘째 잔은 짐이 따랐는데, 허면 짐이 형님을 저 리 만들었다는 것이냐?! 종인이 격노하자 어의들을 모두 무릎을 꿇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폐하, 고정하소서. 화를 내시면 옥체에 지극히 해롭습니다. 하개가 말렸지만 종인의 분노를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정하시옵소서. 안에 작은 바늘이 있어 주머니를 터트리는 구조인데 바늘이 뒤늦게 터져 진왕 전 하께 피해가 갔다는 뜻이옵니다. 종인이 바르르 떨면서 어의들을 쏘아보았다. 그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그대들은 진왕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였는가? 죽여주시옵소서. 짐이 주는 녹을 받아먹으면서 할 말이라고는 그것뿐인가? 모두 관복을 벗고 기다리라. 원하는 대로 모조리 죽여주지. 경악하는 어의들을 뒤로 한 채 종인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에는 종대가 누워 있었고 그의 몸은 싸늘했다. 핏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아우 를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는데, 종인은 제 형을 보자마자 울컥하여 가슴이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형 옆에 앉았다. 형님! 폐하. 어찌 이리. 손을 어루만지니 얼음장처럼 차갑고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 그것을 잡자마자 둑이 무너진 듯 눈물 이 쏟아졌다. 형의 손이 이렇게나 작고 부드러운데 어째서 한 번도 맞잡아주지 않았단 말인가.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형님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우가 어리석어 형님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폐하. 살릴 것입니다. 형님을 살릴 것입니다. 어의는 밖에 있느냐! 어의들이 몇 번이고 상의하고 노력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짐독에 중독된 것을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독이 전신으로 퍼져서 어의들은 손쓸 만한 시기는 지났다. 종대는 자신이 점점 죽어가는 것이 느껴 졌다.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도 동반되었다. 몰골이 처참할 것이다. 거울을 보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모습이 추레한 것을 눈에 담기는 싫으니 말이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저는 아직 형님의 사저에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형님께서 화촉을 밝히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형님의 노랫소리를 다시 들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칠현금을 연주하시며 예전처럼 노래하시는 모습을 다 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종인을 종대는 다정하게 다독였다. 지난 세월, 자신 때문에 속을 끓였을 김종대. 뒤늦게 깨달은 우애는 몹시 애틋했지만 형제의 시간은

430 넉넉하지 않았다. 종인은 그동안 종대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만 생각나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 형님을 자신을 위해 원수 같은 자신궁 앞에서 꼬리를 흔들었는데, 그 속도 몰라주고 밉다고만 하였으니 그 세월을 보내며 종대가 받았을 상처를 무엇으로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제야 겨우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됐는데, 음모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종대를 보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소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짐은 천자예요. 하늘이 부여한 권능을 가졌는데 형님을 못 살리 겠습니까?! 그 진심에 소신은 죽어서도 여한이 없습니다. 형님. 부탁입니다. 제발 마지막인 것처럼 얘기하지 마십시오. 종대의 작은 손을 잡으며 종인은 애원했다. 종대는 그런 종인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부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셨지요. 비 오는 날을 싫어하셨습니다. 이제는 괜찮으십니까? 혼자 계셔도 무섭지 않으십니까? 형님. 흐흑. 그럼 됐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종인아. 예. 예, 형님! 눈물범벅이 된 종인을 보자 어린 날의 울보와 겹쳐 보였다. 나지막하게 웃음이 터졌다. 두 번 다시는 네 이름을 부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종대가 붙들린 손을 빼내어 제 아우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통통하던 볼살이 모두 사라지고 단 단한 어른의 것이 자리한 윤곽에서는 사뭇 부황의 면모까지 느껴졌다. 종대는 종인이 완전히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심이다. 이제는 정말로 안심할 수 있다. 제발 저를 혼자 두지 마십시오. 제 곁에 남아주십시오. 곁에 있는 것을 소중히 해라. 그러면 무섭지 않을 거다.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형님께서 그리하라면. 네가 준 청선, 아직 부치지 못하였는데.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는 종대를 보며 종인은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종대 형님.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형님이 떠나리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어 망치 로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형님께서 조용히 쉬고 싶으신 모양이다. 종인은 주위를 물린 후 종대 혼자서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게 하였다. 밖으로 나오자 어의들이 여전히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게 보였다. 종인은 그들을 지나쳤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청춘이 스러지자 세상이 온통 암흑이었다. 조등( 弔 燈 )이 걸리고 인보당의 문이 닫히기까지는 단 보름이면 충분했다. 장례는 황태자의 예에 맞 추어 최고로 치러졌으며 풍류객으로 이름을 날린 진왕답게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몰려든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황제는 진왕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인보당에 친림하여 관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슬픔 을 가누지 못해 여러 번 주저앉기도 했다. 종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은 온전히 태후에게 있었다. 종인은 그렇게 믿었고, 실제로 이재관과

431 백현에게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히라고 명하자 수많은 증좌가 엮인 굴비처럼 줄줄이 딸려 나왔다. 친 왕 살인사건이라 조정과 황족들의 귀추가 결과에 주목되었다. 특히, 자다가 순금사로 끌려간 헌왕은 노발대발하여 진범을 밝혀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결국엔 자 신궁에서 헌왕의 이름을 팔아 독주를 만들고 그것을 황제에게 먹이려 했음이 들통이 났다. 나아가 이 사건을 도경수에게 누명 씌워 함께 제거할 계획이었음도 밝혀졌다. 헌왕은 자신을 모함하고 명예를 땅에 떨어뜨렸다며 자신궁을 단죄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겉치레 로 자신궁에 매년 술을 보내긴 했으나 사실 왕래가 없는데 자신을 끌어들여 황제를 시해하려 한 점에 서 헌왕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의귀비의 일을 조사하면서 동궁 폐위 사건과 관련한 증좌가 쏟아져 자신궁은 제정신 이 아니었다. 이런 틈에 종대의 일까지 터지자 자신궁은 한 걸음만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영영 추락할 꼴이었다. 그러나 태후는 종대를 잃은 슬픔이 너무 큰 탓인지 희한하게도 어떠한 의욕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 다. 이상하구나. 내 배를 빌려 낳은 아이도 아닌데 어찌 이리도 친자식이 죽은 듯 가슴이 미어지고 그 리움에 사무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가로젓는 일이 늘어났다. 진왕을 향한 모정만큼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번 일로 태후와 황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종인은 득득 이를 갈았다. 그는 고문이라면 끔찍이 싫어했지만 자신궁의 모든 상궁과 궁녀들을 의 경궁에서 추국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백을 받아내라고 했다. 얼마 안 가 무정후 장문견도 순금사에 하옥되었다. 태후가 궁지에 몰리자 소인파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려는 대인파가 합심하여 그를 탄핵한 것이다. 적기라고 생각한 그들은 진신소( 搢 紳 疏 ) * 와 유소( 儒 疏 ) ** 를 받아내 태성전에 올렸고, 종인은 지칠 줄 모르고 그것들을 읽었다. 여기에 두문불출하던 준면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의경궁에 나타나 폐위되던 과정을 증언하 였다. 여론이 완전히 뒤집힌 상황이라 일사천리로 사건이 진행되었다. 폐하. 순금사에서 올라온 상궐단자입니다. 편전에는 종인을 비롯해 교지를 전할 경수, 사건을 맡은 백현과 이재관이 들어 있었다. 밖에는 추적 추적 봄비가 내렸는데 하늘은 온통 먹색이고 빗방울은 몹시 굵었다. 소왕에게 마비약을 먹이고 필사꾼을 매수하여 가짜 비방서를 꾸민 것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헌데 조사하다 보니 이 필사꾼이 도 계의관에게 전했다던 박찬열의 유서를 쓴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황 세용에게 전해졌다던 장군의 일행서가 있다던데 그것도 그자의 짓이었습니다. 수중에 살생부가 있으니 당분간 몸을 사리라던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종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필사꾼은 인수체의 달인이고, 이를 근거로 다그쳐 물으니 자신의 죄목을 실토하였습니다. 허나 누 구에게, 왜 전달되는 글인지는 모르고 그저 쓰라고 하여 썼다며 발뺌입니다. 찬열의 유서는 성삼문의 절명시를 필사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준면 형님의 사건조차 몰랐다는 것 은 거짓이다. 분명히 황실의 직첩명이 기재되었을 텐데 그걸 몰랐다니 누굴 바보로 아는가? 종인이 낮게 코웃음 쳤다. 하교한다. 필사꾼은 죄를 뉘우치지 않고 그릇된 재주로 동궁을 폐위하는 데 일조하고, 대연의 기린아를 죽음 으로 몰아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으므로 참수하라. 경수가 그 내용을 받아 적는 사이, 백현이 다시 아뢰었다. * 모든 벼슬아치가 연명하여 올리는 상소 ** 유생들의 연명 상소

432 그 외에 무정후는 매관매직으로 등용문을 어지럽히고 이부를 농락했으며 풍현 등에 사병을 몰래 길러 조정의 군량과 무기를 빼돌렸습니다. 이를 무위장군 박찬열이 역모를 꾸민다는 증좌로 바꿔 결 국엔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종인은 피가 끓는 듯 화를 삭이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경수도 그 대목에서는 멈칫하였다. 우선 자신궁의 죄목부터 듣고 싶군. 황태후는 아우인 무정후를 움직여 동궁을 폐위하였습니다. 또 소왕이 금부에 있을 땐 사람을 매수 하여 여러 차례 죽이려 시도했고 최근에는 어명을 사칭하여 수월당에 독이 든 약을 보냈습니다. 전 사도 황세용과 결탁하여 불법으로 착취한 자금을 받고 있었으며 입지가 좁아지자 폐하를 시해하려 소 왕에게 서신을 보내 모반을 부추겼습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종인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이재관이 걱정스레 물었다. 종인은 계속하라며 손을 들어 보였 다. 자신궁 궁녀 사완을 문초하니 과거 태후의 사주로 영회황후께서 뱃놀이하실 때 바닥에 구멍을 뚫 어 침몰하게 했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궁녀로 하여금 물에 빠졌을 때 잠수하여 황후의 발목을 연꽃 줄기로 감아 익사시켰는데 그 궁녀는 일이 끝난 즉시 살해해 우물에 던졌습니다. 경악스러운 진실에 이재관은 충격 받은 표정이었고 경수는 종인을 살폈다. 역시 안색이 심히 좋지 않았다. 자신에게 대들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일국의 국모를 그리 죽이다니. 그것도 자신의 조카 를. 황후를 제 아랫것보다 못한 개처럼 다루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할까. 계속할까요? 아직도 죄가 더 남았단 말이냐? 진왕 전하에 대한 것입니다. 말하라. 폐하께서 이미 아시는 대로 원래 벽향주는 폐하께 올릴 것이었답니다. 자신궁의 입지가 좁아지자 압박감을 느낀 태후가 소왕에게 이곽지사라는 서신을 보낸 후 결단을 내렸답니다. 평소 헌왕이 생일 마다 술이나 술병을 보내온 것을 알고 헌왕을 사칭해 그 같은 일을 꾸몄는데, 천만다행으로 주머니가 터지지 않아 폐하께서는 무사하셨고 진왕 전하가 희생되셨습니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굳어버린 종인. 만감이 교차하고 여전히 제 형을 잃은 슬픔에서 허우적대는 듯 몹시 괴로워 보였다. 또 의귀비는 절양류라는 맹독에 차츰 중독되어 돌아가셨는데 이것은 박 상궁이 아는 사람을 통해 궁으로 반입했다고 합니다. 듣자니 전 어의 고지산이 절양류를 내의원에 들였고 한때 폐하께서, 그 부분은 됐다. 약재상의 뒷돈을 받아 밀반입한 약재가 한둘이 아님은 짐도 알고 있다. 종인이 황급하게 백현의 말을 가로막았다. 경수는 아직 종인이 절양류에 중독됐었단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제발 비밀을 지켜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종인의 의도를 파악한 백현이 말을 이었다. 그 일과 관련한 인과관계가 명백합니다. 관련자들은 모두 잡아두었고 자백도 받았습니다. 종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요하게 말하였다. 박 상궁은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궁에 사특한 물건을 반입했으니 가산을 몰 수하고 참형에 처한다. 궁녀 사완은 원래 주인인 영회황후를 배반하고 태후의 명에 따라 국모를 죽이는 모반을 행하였으 므로 역시 가산을 몰수하고 참형에 처한다. 사완은 죄질이 무거우니 연좌제에 따라 일가족을 함께 주 륙하라. 창백한 얼굴을 다시 들어 올리며 종인이 물었다. 박찬열에 대한 것은 없었느냐? 황세용을 불러 함께 조사하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워낙 인망 이 높고 의심하던 자가 많았으므로 사건 심리를 따로 떼놓아야 할 듯합니다.

433 어사대부의 말씀이 옳습니다. 황세용은 현재 귀양 중이니 그자를 교안까지 데려와서 심문하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짐에 게는 시간이 없다. 하오면? 이재관과 백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종인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청신이 너희를 도울 것이다. 모든 증좌가 그에게 있다. 뜻밖의 말에 모두 놀라 종인을 쳐다봤다. 특히 경수는 찬열의 일은 한참 후에 재조사할 것으로 여겼는데 물밑에서 모든 작업을 마쳐놓았다고 하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아픔과 고뇌를 알아주지 않고 지독하게 종인을 미워했던 시간과 그 속에서 이를 갈던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보고는 끝났느냐? 폐하의 현명하신 처분을 기다립니다. 우선 무정후 장문견에 대한 처결이다. 종인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장문견은 드러난 죄질이 심히 악독하고 추잡하며 참혹하다. 일국의 태자를 능욕하여 폐서인으로 만들고 외척으로서 삼가 겸손하지는 못할망정 지위를 믿고 발호하여 정사를 농단하며 백성들의 고혈 을 빨았다. 또 국법으로 금한 사병을 기르면서도 이를 면피하려 억울한 사람을 역적으로 만들었고, 황 태후를 부추겨 소왕을 죽이려 하고, 헌왕의 이름을 빌려 천자를 시해하려 했으니 고신을 빼앗고 거열 형에 처한다.! 일족의 십오 세 이상의 사내들은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변방으로 보내 위리안치하며 식솔들은 관 청과 공신들의 노비로 삼게 하라. 장문견의 찢어진 시신은 다시 여덟 조각으로 나눠 전국에 뿌리고 그 자리마다 말뚝을 박아야 할 것이며 머리는 교안에 묻어 일 년마다 굴묘편시( 掘 墓 鞭 屍 ) * 하여 일벌 백계하라. 평소 부드럽던 종인의 성정과는 달리 너무도 지독한 처결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가운데 백 현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폐하. 소왕을 죽이려 한 것은 태후이고 헌왕을 사칭해 폐하를 시해하려 한 것도 태후입니다. 아직 명백히 드러나진 않았으나 무위장군을 죽음으로 몬 것도 그분인데 어째서 모두 장문견의 짓이라고 하 십니까? 그제야 이재관이 동조하며 이유를 알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종인이 경수를 쳐다보자 그가 붓을 내려놓고는 대신 답하였다. 어쨌든 지금의 폐하를 있게 한 분입니다. 비록 피가 섞인 모자지간은 아니나 어떻게 아들이 어미 에게 죄를 묻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겠습니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이 나라는 유교를 섬기니 조 정에서 선처를 구할 것입니다.! 허나 폐하께서 태후를 용서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시면 그들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자들도 폐하께 용서를 구하려 들 것이고 조정의 유능한 인사들이 빠져나가 생기는 혼란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같은 소식이 백성들의 귀에 들어갈 테니 민심도 확보할 수 있지요. 이의 있나? 종인의 난처함을 이해했는지 이재관과 백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뒤 백현이 다시 물었다. 하오면 자신궁에 대한 처결은 어찌 내리시렵니까? 태후는 무정후에게 농락당했다고 포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등을 돌리고 친정이 멸문의 화 를 입었으니 재기하기도 어려울 터. *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매질함

434 자신궁에 계속 머물게 할 것이다. 천자를 그리 핍박했는데 너무 영화로운 처사 아닌지요? 짐의 명령 없이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야겠지. 귀신조차도. 영명하십니다. 사실상 처소에 유폐한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박 상궁과 사완을 비롯해 자신궁에 기거하던 수많은 종자들이 모두 떠나게 된 마당에 혼자서 그 큰 전각을 지키기란 여간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종인은 태후가 그곳에서 지독하고 우울한 외로움에 시달리길 바랐다. 자신의 생모가 순장돼 죽은 지아비 곁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듯이. 짐이 하교한 대로 각사에 전달하라. 예, 폐하. 광명이 되살아났다. 78. 애이불비( 哀 而 不 悲 ) 태후가 저지른 모든 악행은 장문견이 뒤집어썼다. 종인도 사직을 위하여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었 고 준면은 장씨 일문이 몰락한 것에 일단 만족했다. 아끼던 아우 종대를 대가로 치러야 했지만 숙원 이 풀리자 체증이 가신 듯 속이 시원하였다. 태후는 종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실각하여 처소에 유폐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분노로 일그러졌고 시시때때로 패악을 부렸다. 그러나 자신궁에는 궁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시위 들만 버티고 있을 뿐, 그녀를 시중들던 사람은 모두 떠난 상태였다. 태후가 눈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종인을 저주할 무렵, 경수는 태성전으로 향하는 걸음을 서 둘렀다. 한동안 종인이 혼자 있기를 청하여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에 급작스레 박찬열에 대한 처 결이 나와 조정이 발칵 뒤집힌 참이었다. 황제가 하교하기를, 모든 증좌가 장문견과 황세용을 위시한 역적들의 모략이었음이 밝혀졌다는 것 이다. 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박찬열과 박우헌을 비롯해 가문을 신원시키며, 대의를 위해 희 생한 박찬열은 그간의 군공과 충심을 높이 사 좌장군( 左 將 軍 ) * 에 추증한다는 내용이었다. 청신이 숨겼던 모든 증인과 증좌를 풀었다. 또 경수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사람도 태후의 짓임이 밝혀졌는데 황실의 명예가 더는 추락하게 둘 수 없어 종인은 자신만 아는 사실로 했다. 한편 경수는 지금 슬픔과 놀라움으로 점철된 마음으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꼬박 사 년 만에 찬열의 누명이 벗겨지고 박씨 문중이 원래 지위를 되찾게 되었으므로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나 왠지 맘이 편 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하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했을 종인이 걱정된 탓이다. 폐하께서 반역으로 처리한 사건을 재조사하신 것은 천자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으셨다는 뜻이 오. 아무리 허허실실이라 하셔도 그분은 일국의 지존이시오. 그대와 박찬열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천자의 자존심을 쉽게 버리셨겠소? 백현의 말은 경수의 가슴을 짓눌렀다. 무겁게 내려앉은 종인의 고통이 비로소 경수에게 절절히 와 닿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에게 무수 히 던졌던 칼날과 날카로운 냉소는 영영 나을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았으리라.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 고 초라해서 경수는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폐하께서는 오수에 드셨네. 태성전에 가니 하개가 가로막았다. 며칠째 제대로 안숙하지 못하셨네. 심중에 크나큰 고통이 자리하신 탓이겠지요. 진왕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내색은 안 하셔도 감정을 추스르시지 못하시네. * 정삼품

435 애이불비( 哀 而 不 悲 ). 극도의 슬픔에 잠겼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다. 몇 날 며칠을 전전반측하 면서도 황제이기에 슬픔 자체에 먹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소인이 다녀갔다고 전해 주십시오. 반듯하게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흠흠! 때맞춰 일어났다는 표시를 해 보이는 종인이다. 천만다행이군. 폐하께서 기침하신 듯하네. 문을 열어젖히자 정면으로 침상이 보였다. 종인이 이불을 걷고 앉아 있다가 경수를 발견하고는 화 색을 띠었다. 어서 오너라. 경수가 들어가자 하개가 웃으며 다시 장지문을 닫았다. 네가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짐이 오래 기다리게 하였느냐? 아닙니다. 저도 조금 전 왔습니다. 그랬구나. 헌데 어쩐 일이냐? 짐이 부르기 전에는 잘 오지도 않으면서. 오후에 등청하여 이제 막 조정의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난 또 뭐라고.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속으로 긴장했다. 찬열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었을 뿐이다. 그래도 결심이 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종인이 피식 웃었다. 그 아이는 짐의 종자기다. 억울하게 죽었을 때 제문 한 글자조차 지어주지 못했는데 누명을 벗기 고 신원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인제 와 폐하께 죄를 청하기도 면구합니다. 죄를 청해? 무엇 때문에? 오래전, 폐하께서는 찬열의 죽음이 폐하와 관련이 없음이 밝혀진다면 그땐 어떤 얼굴로 폐하를 대 할 것이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휘정궁에서 경수와 몸을 섞었던 날이었을 것이다. 종인은 그 날을 기억 속에서 빨리 지우고 싶었고, 굵직한 몇 마디 외에는 경수와 나눴던 대화는 맘에 담지 않았다. 종인이 딱히 떠올리지 못하는 듯하자 경수가 차분히 얘기했다. 폐하께서는 제게 그리 물으셨습니다. 그때 가서도 그리 차가운 얼굴로 폐하를 대할 것이냐고요. 별스런 것을 맘에 담고 있었구나. 잘못했습니다. 폐하의 어지러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 고집만 부려 폐하를 더욱 괴롭고 아프 게 했습니다. 과거는 묻어두기로 하지 않았더냐. 어떤 일은 빠져나온 못처럼 감춰도 감출 수 없는 법입니다. 짐은 그 일을 모두 잊었다. 화가 나서 서로에게 내뱉은 말은 비수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비수에 찔린 상처를 다시 드러내고 싶은 것이냐? 상처는 아물지만 흉터는 남죠. 저는 폐하께 그런 상처와 흉터를 남겼습니다. 해서 줄곧 짐의 눈을 마주하지 않고 그리 고개를 숙이는 것이냐?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종인은 착잡했다. 경수에게서 사과를 바라거나 이런 얘기를 듣고자 한 적은 없다. 그저 영원히 자신 의 숨이 되기를 바랐을 뿐. 네 마음이 편해지고자 짐에게 사과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자 짐에게 이러는 것이냐. 아닙니다.

436 헌데 왜. 폐하를 뵐 낯이 없어서요. 어떻게 해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오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현재를 치열 하게 살아야 한다. 짐은 그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폐하께서 그 모진 세월을 홀로 괴로워하셨을 걸 생각하면 저는! 저는 몰랐다는 것만으로도 저 스스로 용납이 되질 않습니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만큼 쉽고도 어려운 일은 없지. 허나 너를 옭아매면 짐이 더욱 괴로워진다. 똑 똑한 네가 이 간단한 사실은 어째서 모르는 거냐? 용서하십시오, 폐하. 흐득거리는 경수를 더는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종인은 경수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단단 한 어깨가 비를 맞은 새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찬열에 대한 여애와 종인에 대한 연민, 그를 믿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 한 회고일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경수의 복잡한 심경에 종인도 우울했다. 혼자 아파한 적은 없다. 짐은 언제나 너와 함께이길 바랐어. 으흑흑. 눈물이 마른 줄 알았는데. 너는 정말 솔직한 사람이구나. 어째서 매번 자신을 위로하느냐고 되물어야 하는데 슬픔에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경수는 종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서럽게 울었다. 무엇을 향한 눈물인지는 명확하다. 그 마음을 종인 이라면 알고 있으리라. 제게 기회를 주셨더라면.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함이냐? 당신과 고통을 분담할 기회라고 답하려 했지만 경수는 입을 다물었다. 유배를 떠나기 전 종인은 몇 번이나 경수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것을 외면했던 것은 경수 본인이다. 매 순간 벗의 죽음과 관련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것이 네게는 기회이더냐? 찬열의 일입니다. 또 폐하께 고통을 안긴 저이고요. 그만한 대가는, 짐이 원하지 않는다. 눈물범벅인 경수의 얼굴을 닦아주는 종인의 손길은 무척 다정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단호했다. 그 가시밭길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듯. 어쨌거나 찬열을 죽인 것은 짐이다. 그를 죽여 영원히 무간지옥에서 사는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속죄하려면 자신의 손으로 찬열의 명예 를 회복해 주어야 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반드시. 짐이 황제라서 벗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 아니겠느냐?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모든 업은 짐이 지고 갈 것이다. 이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돼. 종인은 경수의 손을 꽉 붙들면서 스스로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신성시하는 태도에 경수는 종인의 깊은 정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찬열의 일이 억울하여 울화만 가슴에 쌓았을 뿐, 유배지로 떠날 때 나 돌아올 때나, 또 돌아와서의 행보도 어느 하나 찬열에게는 도움이 되질 않았습니다. 네가 한 게 없다니? 돌아온 직후 조정의 분란을 잠재우며 불철주야 짐을 곁에서 도운 자는 누구더 냐? 찬열의 죽음을 당장 해결하고 싶었음에도 조용히 인내했고 우리 형제들이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게 다리가 되어 주었다. 네가 고생해서 쌓인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 짐 곁에서 큰 힘이 되고 있지 않으냐? 짐은 마음 놓고 네 이름을 부르고, 너와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이 소중하다. 그 시간에서 힘을 얻는데 네가 한 일이 없다니?

437 참아 눌렀던 감정이 폭발할 듯이 들끓었다. 경수는 종인의 목을 끌어안고 강하게 입을 맞추었고, 잠 시 당황했던 종인은 금세 얽혀드는 정에 모든 것을 맡겨버렸다. 정염이 타올랐다. 그 불꽃에 타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 고 해도 더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대로만 있을 수 있다면. 처마를 타고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물은 시원하다 못해 싸늘했다. 빗방울은 대나무와 파초 이파리를 거세게 내리찍었다. 장마가 지려면 두 달은 남았다. 최근 가물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세찬 빗줄기는 의 외였다. 준면은 찻잔을 기울였다. 종대가 선물한 다기인데 찻물은 온도가 알맞아 자색의 찻잎을 은근히 우 려냈다. 오늘 같은 날이면 인보당에 놀러 가 하릴없이 오후를 보내다가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종대가 새로 알아낸 예술가들에 대한 소개를 들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져서 준면은 의식적으로 다른 쪽으로 화살을 돌리려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 다. 내실에 가도 안 계시기에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별채에서 바라보는 향나무가 꽤 인상 깊다오. 변함없이 저 자리를 지키지. 전하께서 손수 심고 가꾸셨지요. 아이들을 낮잠 재운 초영이 준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준면이 추위를 느낄까 봐 담요를 가져 와 어깨에 걸쳐주었다. 오는 동안 옷깃이 젖었구려. 비 오는 날의 묘미 아니겠어요? 생긋 웃으며 주전자를 올려둔 화로를 끌어다 준면의 옆에 둔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 보이오? 마침내 전하와 의귀비 마마의 원한이 풀렸어요. 그런데 며칠 지켜보니 전하께선 도리어 우울해 보 이시는군요. 준면은 맑은 눈동자로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물을 머금은 하늘은 우중충한 면상을 들 이밀었다. 준면의 머리 위로 하늘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은 젊은이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었다. 진왕 때문에 그러십니까? 애석하다는 말로도 진왕의 죽음은 표현할 수 없죠. 두 분의 우애도 깊었고 진왕에게 신세 진 적도 많았잖아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진왕처럼 다정하신 분을. 전하. 태후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장씨가 여전히 자신궁에 있소. 어명이니까요. 그 여자가 관주성에 남아 호의호식할 것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구려. 장문견은 이미 사지가 절단 났고 장가는 뿔뿔이 흩어졌어요. 어쨌든 태후는 나라의 어머니인데 폐 하께서 쉽게 죽이긴 어렵죠. 황제가 모후를 폐위한 전례도 없고요.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응어리진 마음은 눈 녹듯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도 모르다가 한순간에 능욕당하셨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였소. 난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었고, 동궁에서 쫓겨나 순금사에서 뼈와 살을 바르는 고통을 받았소. 여전히 그때 느꼈던 모든 감정과 감각이 시시각각 되살아나 나를 괴롭힌다오. 그런데 장씨는!

438 전하의 심정을 이해해요. 모진 세월을 홀로 견디셨고 얻은 거라고는 병뿐이죠. 준면은 울컥하여 말아 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초영이 낭군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폐하께서 모든 죄를 장문견에게 뒤집어씌운 까닭은 전하께서도 아시잖아요. 그분께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예요. 종대가 죽었소. 종대는 아우가 자신을 의심할 때도 원수의 앞에서 희희낙락하며 굴욕을 참았소. 착해빠진 그 녀석 이 지하에 누워 있는데 장씨는 대체 뭐란 말이오! 손에 쥐었던 천하를 내려놨을 뿐 여전히 목숨은 부 지하고 있소. 그뿐이오? 편안히 자신의 처소에서 먹고 자며 안락하게 지내지 않소?! 전하. 나는 십오 년을 기다렸소. 오직 장씨가 처참히 죽는 것을 보려고 극열과 냉기가 뻗치는 지옥 속에 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단 말이오! 초영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준면의 어깨를 감쌌다. 김준면은 황태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내색하지 않는다 하여 얼룩덜룩한 앙금마저 지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눌러왔기에 더욱 폭렬하는 원한이다. 그래서 초영은 자신의 낭군이 너무도 아팠 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하늘이 도왔어요. 하늘이 있다면 장씨를 저리 내버려두진 않을 거요. 허면 도 계의관에게 도움을 청해 보십시오. 준면의 미간이 꿈틀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그자가 있고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잖아요. 전하와도 왕래하니 외면하진 않 을 거예요. 명분이 없소. 폐하께서 나와 어머니에 대한 일을 재조사하셨고 관련자는 모두 처벌을 받았소. 더구 나 박찬열까지 신원되어 박우헌이 현재 교안으로 돌아오는 중이라니 그자는 더는 날 도울 까닭이 없 소.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쉽게 인연을 끊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정치판에 뛰어든 자들은 오십보백보요. 도경수라고 다를 것 같소? 그래도 전하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자입니다. 준면은 매가리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아니라 금상을 도운 거요. 도경수에게 나는 장기판의 말일 뿐이지. 준면은 경수와 나눠 가진 각서를 떠올렸다. 일이 끝나더라도 종친으로서 자신의 주제를 잊지 말라 는 내용. 그런 것까지 문서로 남길 만큼 경수는 치밀했다. 약조한 것이 있어 준면을 종인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도왔으나 따지고 보면 그것 역시 김종인을 위 한 일이다. 위축된 황실의 화합과 부흥을 도모하여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었다. 장문견이 죽고 태후가 실각하면서 대인파는 힘을 잃었소. 남은 자들은 웃전에 굴복했을 뿐이라며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다 하오. 금상은 그들을 포용했고, 조정은 점차 안정될 것이오. 도경수는 바빠질 테니 설령 얘기를 꺼낸다 해도 지금 태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어찌 단언하십니까? 모르겠소? 이제 도경수에게 나는 이용 가치가 떨어졌단 말이오. 명하를 군왕으로 만들어 우리 가 문을 보호해 준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황제와 친왕의 처지를 각인시키는 도구였을 뿐이오. 도경수는 나를 믿지 않아. 전하께서는 도경수를 믿으시고요? 준면을 초영을 빤히 쳐다봤다. 전하께서도 그자를 믿지 않는다면 억울할 것도 없어요. 함께할 목표가 사라졌으니 도경수에게 소왕은 황제를 위협할 종친 중 하나란 말이오.

439 전하께서 지나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계의관한테 진심을 물어보신 것도 아니잖아요. 설 령 전하의 말씀이 계의관의 진심이라도 그게 무슨 위협이 되겠어요? 준면은 자리에서 일어나 추녀를 타고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물을 손바닥 안에 담았다. 빗방울은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이 빗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공명이라오. 그것을 필사적으로 붙들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황제든, 신하든. 지난번에 어사대부 댁에 다녀왔는데 외숙모께서 말씀을 재미있게 잘하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갖 얘기를 했답니다. 외숙모께서 계의관의 보수주인이었고 그 인연으로 어사대부와 인연이 닿은 것 은 아시지요? 뜬금없는 얘기에 준면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착잡하게 대나무 이파리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외숙모께서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더군요. 도 계의관이 적소를 한서현으로 옮기면서 외숙모께서도 따라가셨는데 중추절이 지나서 계의관의 모친이 급사했다는 부고가 날아왔답니다. 계의관이 그해 봄을 못 넘기고 죽었다는 오보가 전해지면서 모친의 병환이 악화하여 죽었다고요. 그런데 여기에 의문점이 많았다는군요. 준면이 반쯤 몸을 돌려 아내를 쳐다봤다. 초영은 준면처럼 깨끗한 얼굴로 후원의 풍경을 바라보면 서 말을 이었다. 도씨 가문에 계의관의 부고를 알린 자가 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사도 황세용이 매수한 사람이었 다지요? 형벌을 줄이려던 황세용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순순히 자백했고, 그때 계의관의 집에 거짓 죽음을 알리라고 한 사람이 황태후였다고 합니다.! 황세용이 비리 사건으로 쫓겨나기 전에도 끝끝내 그 일을 사주한 자와 배후는 토설하지 않았는데 장문견과 태후가 체포되자 모든 걸 털어놓았죠. 하지만 근래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고, 사람을 사주해 말을 흘리는 것은 너무도 작은 일이니 누구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도 계의관은 어명을 전하느라 어느 곳이든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당연히 자신궁에 접근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준면은 초영을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명랑하고 쾌활한 여인이라고만 여겼는데 뜻밖이었다. 외숙께서 바깥일은 잘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태후의 일은 워낙 지독해서 넋두리처럼 몇 마디 건네 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사실관계는 확실한 셈이죠. 미소 짓는 초영의 뒤로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쏴아 퍼붓는 소리가 제법 사나웠다. 79. 장재유무간( 長 在 有 無 間 ) 무슨 고민이라도 있소? 정무 보고를 위해 대전으로 향하던 중 백현은 경수를 만났다. 그런데 경수의 안색이 별로였다. 눈빛 은 침울하고 굳게 다문 입술은 사뭇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탑전에서도 그런 얼굴이라면 폐하의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요. 어떤 고민이라도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면 위로도 소용없음을 아오. 그래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으 면 좋겠소. 혼자서 끙끙 앓는 일이라면 주위에 도움을 청하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현명하지. 백현의 조언은 그의 인생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늘 진심으로 와 닿았다.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기 도 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거짓 부고를 전하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440 자신궁이겠지. 총명한 그대가 그 정도도 짐작하지 못했을까. 확인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그건 자기기만일 뿐이오. 태후가 부처 같은 얼굴로 악랄한 짓만 골라서 해왔음을 그대가 모르는 바도 아니잖소. 하지만 제 어머니는 평범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대의 어머니이기에 표적이 된 거요. 그대가 폐하의 사람이니까. 신랄한 지적에 경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표정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지만 귀 끝이 붉어져 단단히 분기가 차오름을 알렸다. 황궁의 인심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소. 한 번 눈 밖에 나면 상대가 피를 볼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각다귀라오. 해서, 그대 손으로 태후를 어쩌기라도 할 거란 뜻이오? 대답 없는 경수를 보며 백현은 짧게 코웃음 쳤다. 엄연히 이 나라의 황태후요. 황제 폐하의 법적인 모후이며 선제의 정궁이었소. 태후가 악인이라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나 그녀가 대연의 황태후라는 것 또한 천하가 아는 바요. 찬열이 죽은 후부터 제 원망의 화살은 줄곧 폐하를 가리켰습니다. 유배를 떠났을 때도, 그곳에서 고생하다가 어머니의 임종조차 못 지켰을 때도요. 하지만 그 모든 게 저를 이용해 폐하를 압박하려는 태후의 계략이었죠. 그런데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나는 그대의 분노가 온당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거기까지요. 그 이상 그대가 무얼 할 수 있겠소? 폐하의 윤허를 얻어 태후를 죽이기라도 할 거요? 못할 것도 없죠. 복수가 그리 우스운 줄 아시오? 끝없이 계략을 짜야 하고 상대의 반응도 살펴야 하오. 경우의 수 를 따져 수많은 대책도 세워놔야 해. 헌데도 안심하지 못해서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지. 이건 한 나 라의 태후를 죽이는 일이오. 그대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소? 원수를 죽여도, 용서해도 마음속의 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나리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러니까 그만두라는 거요! 누구의 손을 빌리든 한 번 손에 피를 묻히면 돌이킬 수 없음을 정녕 모르는 거요? 찬열의 복수를 지지하실 때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셨잖습니까. 원수를 무너뜨리는 것과 황태후를 시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요. 방법의 차이일 뿐, 원한을 갚는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죠. 나리께서 그리 말씀하시다니요? 내가 해 봤으니까. 회한에 젖은 백현의 말투에 경수의 걸음이 멈췄다. 일순 두 사람 사이에 돌개바람이 불어 닥쳤다. 초록색 나뭇잎이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해 봐서 알아. 그러니까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마. 나리께서는 저를 이해해 주실 것으로 여겼습니다. 발을 들이지 말라는 거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얘기를 꺼낸 제 실수로군요. 그대답지 않으니까 농담 그만하는 게 좋을 거요. 어떤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장문견은 죽었고, 임제환도 유배지에서 의문사했죠. 부마도위의 누명도 벗겨져 변씨 가문이 신원 됐으니 나리의 매듭은 제대로 풀린 것 아닙니까? 차갑게 이글거리는 불꽃은 경수를 잘근잘근 씹었다. 백현은 불꽃의 맹렬함에 놀랐고, 거기서 빠져나 올 생각도 없어 보이는 경수의 태도에 진저리를 쳤다. 폐하께서 그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잖소? 지금 당장 태후를 해한다면 가 장 먼저 대전이 의심받을 텐데 그러면 폐하의 뜻에 반하는 일 아니오? 그대는 누구보다 폐하를 존중

441 하잖소? 그래서 오래도록 고민했습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멍할 정도로 반복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고 요. 만약 일이 성공한다고 해도 폐하께서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거요. 폐하께서 아무리 태후를 증오한 다고 해도 그분은 인의와 도리를 아시는 분이니까. 정도를 넘으면 폐하께서는 그대를 용서치 않으실 거요. 이미 결심이 섰습니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한순간에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도경수! 저를 막고 싶다면 폐하를 뵙는 즉시 말씀 올리는 게 좋을 겁니다. 경수는 냉랭하게 앞장섰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백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얼른 그 뒤 를 쫓아 돌려세웠다. 경수가 머루알 같은 눈동자를 들며 백현을 쳐다봤다. 백현은 다소 짜증스러운 기 색을 보였으나 이내 표정을 풀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대를 어찌 이기겠소? 계획이 있다면 내게도 알려주시오. 없다면 찾아보리다. 더는 말리지 않겠소. 나리의 은혜는 결초보은하겠습니다. 그대는 내게 보답하는 방법을 모르잖아. 허망하게 흩어지는 재와 같은 맹세에 백현은 한숨을 내뱉 었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자신궁은 한 달 새에 끔찍할 만큼 황폐한 허허벌판으로 바뀌었다. 아침저녁 으로 쏟아지던 수많은 선물은 둘째 치고 아끼던 수족들이 모두 잘려 시중들만한 아이도 변변찮았다. 그나마 식사와 청소를 담당하는 환관과 궁녀 몇이 있긴 하나 낯설어서 맘에 들지 않았다. 태후는 정전 회랑에 앉아 변화무쌍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세월을 죽이는 신세가 어처구니없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그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끔찍한 악몽. 깨어나면 거울처럼 산산이 부서질 악몽 말이다. 그러나 악몽은 현실이었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그녀는 적막강산으로 변한 처소에 유폐돼 발자국 하 나 맘대로 낼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고 해도 절대 지난날을 후회하지는 않을 테지만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단언컨대 진왕의 죽음뿐이리라. 유일하게 어미로서 대해 준 아이다. 그런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인 걸 생각하면 밥 한 숟갈 제대로 넘기기 어려웠다. 찻물이 식었구나. 새로 바꿔 오너라. 탁자 위에 놓인 촌스런 백색 자기를 가리키며 태후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시중을 드는 궁녀들은 이 곳에 있기 싫어서 빈둥거리기만 할 뿐, 이젠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태후를 경외하지 않았다. 내 말이 아니 들리느냐? 박 상궁이었다면 찻잔만 흔들었어도 재깍 알아듣고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온 계집들은 하 나같이 게으르고 굼떠서 태후의 속을 열두 번은 더 뒤집었다. 그래도 화낼 기운이 없어 꾹 참았는데 보자 보자 하니 기고만장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나는 자신궁의 주인이다! 노비가 주인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어찌 되는지 모르느냐! 그제야 한쪽에서 깔깔거리던 궁녀 둘이 쪼르르 달려와서는 예를 갖추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숯을 거의 다 써서 찻물을 끓일 여력이 되질 않습니다. 내수소에서 받아오면 될 것 아니냐? 내수소 태감들이 바쁜 모양입니다.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후궁 마마님들의 처소에서 쓰는 숯과 장 작이 만만치 않다 하더이다. 태후는 그것이 거짓임을 파악했다. 설령 사실이라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영화로울 때는 문턱이 닳도록 자신궁을 들락날락하며 아첨하더니 실각했다고 안부는커녕 코빼기도 안 비치는 며느리들이 우

442 스울 뿐이다. 고작 찻물 한 번 끓이는데 무슨 숯이 그리 많이 든다는 거냐? 당장 바꿔오지 못할까! 궁녀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폐하께서 태후마마를 제대로 모시라고 하셨거늘, 무슨 짓들인가? 소리가 난 쪽을 보고 태후는 이를 갈았다. 도경수. 태후마마를 뵈옵니다. 만안하시고 수복강녕하소서. 네가 어찌 이곳에? 경수는 부들거리는 태후를 무시하고 그녀가 마시던 찻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묵은내가 나는군. 찻잎이 오래됐는데 어찌 이런 하품 중의 하품을 태후마마께 올리는가? 당장 내 수소에 가 새 찻잎과 숯을 받아오게. 하, 하오나 나리!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네만. 궁녀들이 사색이 되어 쪼르르 사라졌다. 주상이 이곳을 봉쇄했는데 어찌 들어왔느냐? 어명을 받드는 중추원의 관리가 황궁에서 들어가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주상이 보냈느냐? 하늘이 참으로 쾌청하군요. 자신궁의 자목련이 천하일색이라던데 볼 기회가 없어서 아쉽습니 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느냐? 내 신세를 조롱하고자 함이더냐? 경수는 빙긋 웃으며 왼고개를 쳤다. 일개 칠품 관리가 어찌 감히 태후마마를 조롱하겠습니까? 내 앞에서 그리 가식적으로 굴 필요 없느니라. 어사대와 순금사에서 내 죄를 낱낱이 밝혔다던데 네가 앞장섰음을 모를 것 같으냐? 소인은 누구와는 달리 신분으로 사람을 대하진 않습니다. 언제나 진심을 다할 뿐이지요. 빙글빙글 빠져나가는 답변에 태후는 더욱 이가 갈렸다. 나를 이리 만들어서 네놈이 두 발을 뻗고 잘 줄 알았는데 안색을 보니 그도 아닌 듯하군. 조정에 몸담은 자라면 누구나 나랏일에 치이고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지요. 제법 초췌한 것을 보니 뭔가 맘에 걸리는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왜, 주상이 전과 같지 않은 게냐? 폐하께서는 만백성의 어버이시고 누구나 공평하게 대하시며 아끼십니다. 소인은 전과 다르지 않은 데 마마께서는 계속 초췌하다고 하시니 혹 소인이 그리 지내길 바라시는지요? 가증스러운 것. 끝까지 뻔뻔하게 구는군. 삑삑 우짖는 새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궁의 적막을 찢는 소리였다. 오월인데도 해 질 녘이 되니 바람이 싸늘합니다. 마마의 존체가 상하실까 저어되니 안으로 들어가 시겠습니까? 태후는 경수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자들이 있을 테니 자신에게 해코지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내실로 들어가 상석에 자리했다. 늘 꽃향기가 넘치던 자신궁의 내실은 화초를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꽃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천 막도 모두 내려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촛불 몇 개만이 음침한 실내를 밝혔다. 이제야 마음 놓고 얘기할 수 있겠군요. 소인이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는 실바람도 들어올 수 없으 니까요. 남의 이목 신경 쓰는 건 여전하구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마마께서 주신 관직인데 명예에 누를 끼치면 안 되잖습니까? 삼가 조심하는 것이 좋지요. 주상이 보내서 온 게 아니로군. 폐하께서는 소인이 이곳에 있는지 모르십니다. 주상이 알면 참으로 좋아하겠구나.

443 마마께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태후는 의침에 몸을 기대었다. 사뭇 여유가 넘치는 태도에 의식적으로 부용꽃 같은 미소를 입에 걸 었다. 말해 보게. 제 어머니에게 거짓 부고를 전한 까닭이 뭡니까?! 내가 미웠던 겁니까, 아니면 폐하가 미웠던 겁니까? 차분한 질문이었지만 증오를 가득 담은 눈빛에 태후는 조금 긴장했다. 마마의 악행은 손에 꼽기도 어렵지만 가장 최악은 나를 임종도 못 지킨 천하의 불효자식으로 만든 데에 있습니다. 폐하와 나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됐고요. 그리 말하는 걸 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도 알 것 아니냐? 뭘 그렇게 손에 넣고 싶으셨습니까? 당신의 일족은 이미 외척으로 수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데 요. 대체 뭐가 모자라서 대연의 기린아와 힘없는 백성까지 죽여 가며 발악했습니까? 태후가 나지막하게 냉소를 뿜었다. 발악? 발악이라 했느냐? 황궁에서 악다구니질을 하지 않고서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느냐? 기를 쓰지 않으면 순식간에 암투 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는데 발악하지 않고서 어찌 버텨? 네가 하는 짓은 발악이 아니더냐? 저를 이렇게 만든 분은 마마십니다. 나라고 처음부터 독하게 군 줄 아느냐? 태후는 몸을 일으키고는 회한에 찬 얼굴로 얘기했다. 사십 년 전 입궁한 후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명문가 출신의 황후였기에 선제와 황족들은 내 게 거는 기대가 컸지. 나도 하루빨리 황손을 낳아 사직에 공을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도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폐하의 총애는 멀어져 갔어. 지창으로 들이비치는 햇볕은 사십 년 전의 그것과 같은데 바라보는 이의 마음과 용모만큼은 전과 달랐다. 수많은 계집들 지아비의 품에 안겼고, 수많은 아이가 그녀들의 배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해 할 수 있었느니라. 나는 곤전의 주인이고 그들은 후궁에 불과하니까. 어느 집안이든 첩실은 아이가 없 으면 훗날 기댈 곳조차 없는 가련한 인생들이었으니까. 남색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따스한 햇볕 아래 서니 낭군은 짐의 중궁은 언제 봐도 모란처 럼 너그럽고 작약처럼 화사하구려. 라며 미소를 보였다.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 줄 아느냐? 그런 지아비에게 소주방에서 갓 데운 맛있는 간식을 대접하며 정무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 다. 그러면 낭군은 중궁의 솜씨는 일품이구려. 사가에 있을 때부터 부엌일을 도맡아 했다더니 과연 대연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있소. 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일평생 자신을 아껴주고 보호해 줄 사내를 만나 은애하며 삼종지도를 따르는 것이니라. 화목한 가 정을 이루어 한날한시에 남편과 묻힌다면 그보다 더 귀한 부귀영화가 없는 법. 그러나 총애는 오래가지 않았다. 황후가 오래도록 회임하지 못하자 대신과 황태후가 앞다투어 후궁 을 간택했고 내전에 홀로 피었던 모란은 어느새 무더기로 핀 싱싱한 화초 사이에서 매력을 잃었다. 남편과는 점점 멀어지고 후궁에서는 웃음꽃이 끊이질 않는데 그녀에게 황궁의 밤은 너무 길고 추웠 다. 새벽이 오면 날이 밝는다는 증거.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 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 마음이 헛헛해 견딜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권력이라도 손에 넣으려고 했습니까?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었다. 헌데 이상하지. 온화한 얼굴을 버리고 내명부의 기강을 세울수록 총 애는 잃어 가는데, 사람들은 나더러 현모양처라며 칭찬하고 경외하더구나.

444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도 마마께서 저지른 일은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변명? 나는 장씨 가문의 장녀로 집안을 책임져야 했어. 해서 궁의 생리가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 나를 잃는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지. 그래서 그리 행동했을 뿐이다. 황궁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허나 모두가 마마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네가 뭘 알아? 대뜸 사느랗게 묻는 통에 경수는 목울대를 넘기며 마른 침을 삼켰다. 네가 사십 년간 관주성의 네모난 하늘만 보고 지냈느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의 고통을 느껴 보기나 했느냐? 사십 년의 역사에 대해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판단하려 들어?! 폐하께서는 마마를 용서하실지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용서? 나는 네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용서? 가장 소중한 벗과 어머니를 비명에 가게 했으며 일국의 지존을 능멸했잖습니까. 네가 뭘 할 수 있어? 네가 제아무리 주상의 군총을 받기로서니 나를 함부로 대하면 주상이 널 가 만둘 것 같으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수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는 태후에게 다가가 그녀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작은 보자기와 병 하 나를 꺼내놓았다. 태후가 불안하게 경수를 올려다봤다. 빛이 역광으로 비쳐서인지 도경수의 모습은 거 대한 사귀처럼 보였다. 해주에 가면 전국을 상대로 움직이는 금린방이라는 거상이 있답니다. 교안과도 자주 왕래하는데 고수들을 많이 거느렸다는군요. 또 강호에는 울인이라는 검이 있습니다. 십 년을 맹독으로 단근질해서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상하고 제대로 맞으면 여지없이 죽는다지요? 경수는 보자기를 펼쳐 대침 한 자루를 꺼냈다. 이것이 바로 울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든 바늘입니다. 수년 전, 목숨보다 귀한 벗이 옥중에서 이 작은 물건 하나에 절명하고 말았죠. 고수들은 고작 은 몇 냥에 대연의 장수를 죽였는데 그 은자는 누 가 줬을까요? 그제야 태후의 낯빛이 흙색으로 변하며 눈빛이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절양류라는 독입니다. 열두 가지가 넘는 독을 섞어 효과가 그만이라더군요. 사람의 목 숨을 꺾인 버들가지처럼 쉽게 빼앗는다 하여 절양류라 불린다니 그 효능이 어떨지 감히 짐작됩니다. 마마께서도 절양류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군요.! 박 상궁을 통해 내의원에 들여 의귀비를 서서히 말라죽게 했으니까요. 경수는 탁자 앞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었다. 태후는 사색이 되어 도경수가 만지작거리는 바늘과 병 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 두고 격세지감이라고 하나요? 네 이놈. 그 옛날, 마마께서는 대전의 사관이 되기 싫다던 저를 겁박하셨지요. 또 무수한 사람들이 마마의 눈앞에서 스러져갔을 테고요. 주상을 부르라. 주상을 데려오라! 마마께서 계시는 한, 이 나라는 영원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여봐라! 폐하께서도, 지하에 있을 찬열도, 또 내 어머니도 편히 눈감을 수 없을 테고요. 부들거리는 태후 앞에 태연히 병뚜껑을 열어 보이는 경수.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하고 무표정해서 태 후는 도경수가 자신을 잡으러 온 저승차사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진왕 전하께서 마마를 용서치 않을 겁니다. 뭐? 생모인 숙비를 토사구팽 했는데 전하께서 마마를 진심으로 섬겼을 것 같습니까? 사도의 일이 터진 직후 잠시 종대를 의심한 적이 있으나 그 외에는 한 번도 그의 효심에 의문을 품

445 지 않았다. 모두 자신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할 때 종대만큼은 애교까지 부려가며 태후의 곁에 남아 있었다. 사실상 모든 희로애락을 그와 함께했고, 병약한 그를 위해서 자신의 먹는 것과 입는 것까지 내주기도 했다. 황태후에게 김종대는 기른 정이 만든 깊은 유대감이 있었다. 그래서 종대의 죽음은 여전히 비현실 적이고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솟구쳤다. 그런데 도경수는 그 아이가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자신을 흔들려는 뻔한 수작에 넘어갈 순 없다. 태후는 경수를 비웃었다. 네 수가 너무도 촌스럽구나. 그래도 너를 고매한 선비라고 생각했는데 아깝게 죽은 황족까지 들먹 이며 나를 겁박하느냐? 진왕 전하께서는 마마를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어미라고 여긴 적도 없고요. 그분은 항상 폐하를 위해 움직였고, 숙비의 유언을 지키고자 당신께 엎드리며 오욕을 뒤집어썼을 뿐입니다. 종대는 나를 친어미라고 여겼어! 그랬다면 찬열이 역도로 몰리기 전 갑자기 와병을 핑계로 몇 달씩 자신궁을 안 찾았을 리가 없겠 죠. 또 황세용의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노비인 장지를 부추겨 일부러 남문의 신문고를 두드리게 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소왕 전하께서 그러시더군요. 진왕이 품은 태후를 향한 증오는 자신 못지않지 않아서 사뭇 두려울 지경이라고요. 도경수 네 이놈! 자신궁에 다녀온 후에는 항상 속을 게우셨답니다. 그런 분을 친아들처럼 여기고 제 손으로 죽이기 까지 했으니. 네가 감히, 감히! 격노한 태후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쏟았다. 그런 태후에게 경수는 무심하게 울인 대침과 절양류 를 내밀었다. 전하께서 마마께서 살아계신 걸 알면 구천에서 얼마나 원통해 하시겠습니까? 진왕이, 마마의 꿈에 나타나 피눈물을 쏟진 않으시던가요? 태후는 손에 집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대부분은 바닥에 곤두박질쳤지만 책 한 권이 날아가 경수의 이마를 강타했다. 그래도 경수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무서울 만큼 침착한 태도라서 태 후는 기가 질렸다. 네놈을 궁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김종인을 알고 있었으면서 대담하게도 날 속였구나!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저는 자신궁의 끄나풀 노릇을 하기 싫다고. 그런데 마마께서 억지로 시키 셨으니 힘없는 저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마께선 저더러 폐하의 언행을 기록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대로 했을 뿐인데 왜 화를 내시죠? 천박한 것! 주상의 총애가 얼마나 갈 것 같으냐? 사내의 마음이란 변화무쌍한 계절과 같아서 영원할 수 없다. 절세가인이라 해도 총애를 잃기 십상인데 하물며 네놈은 사내가 아니더냐? 세상에 절대적이란 것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천하가 마마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지금은 안중에도 없던 천박한 것 과 마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천의( 天 意 )가 영원히 네놈 곁에 머물진 않을 것이다. 지금은 황제의 총애가 지극해 만사가 아 름답고 쉽게 보이겠지. 천하가 네 발아래 있는 것 같겠지! 허나 모든 걸 잃은 후에야 깨달을 것이다. 네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경수는 살짝 흐트러진 옷자락을 심드렁하게 매만졌다. 저는 천하를 주무르고 싶은 생각도, 폐하의 총애가 영원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도 없습니다. 제

446 가 원한 것은 평안이지, 부귀영화가 아니랍니다. 그럼 어째서 주상 곁에 있는 거냐! 태양은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태양을 떠나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태양? 그림자? 비로소 태후가 실성한 듯 낮게 웃어댔다. 그 웃음은 한참 이어졌다. 절양류가 조금 덜 고통스러울 듯한데. 적어도 외형은 깨끗하지 않습니까? 너는, 정말 지독하구나. 언젠가 종인에게 들었던 것과 같은 말. 그러나 경수는 그때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황궁에서 피는 꽃은 독초뿐이지요. 오냐. 네 뜻대로 해 주마. 허나 넌 나를 죽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두고 보아라. 네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갈 테니. 애석하게도 저는 미신을 믿지 않아서요. 태후는 절양류가 담긴 병을 택했다. 이것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흔적 없이 처리했다. 의귀비 와 조카인 박찬열까지도. 하지만 자신이 똑같은 수법에 당하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환멸감이 극해 달했을 때, 태후는 눈물을 멈췄고 망설임 없이 병을 꺾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경수 를 쏘아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마치 너의 마지막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고 저주하듯이. 동시에 희로애락으로 버무려진 사십 년간의 궁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고 황후의 예법에 따라 관주성으로 들어서던 순간부터 종대가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마지막 생일 연회까 지. 천하를 호령했던 여중호걸의 인생이 허무하게 빛을 잃었다. 80. 화락시( 華 落 時 ) 태후가 자결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종인은 혼비백산하였다. 유폐하긴 했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하리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주변을 통제하기만 했을 뿐 태후 본 인에 대한 감시가 심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결이라니 매우 뜻밖이었다. 어찌 죽었다는 것이냐? 어의들이 꼼꼼히 살폈는데 아무래도 음독 같다고 하옵니다. 음독? 자신궁에서 불순한 물건은 모두 회수하라고 하였는데?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물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일국의 황태후가 음독 자결이라. 다소 혼란스러운 듯 한동안 이마만 짚던 종인은 다시 하개에게 물었다. 궁녀들은 조사해 봤느냐? 분명히 부족함 없이 대하라고 하였거늘 태후가 자결하는 동안 아무도 몰 랐더란 말이냐? 그 시각에 궁녀들은 내수소에 찻잎과 숯을 받으러 갔었다 합니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실각하고 멸문당했기로서니 태후가 그리 쉽게 목숨을 끊을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녀가 죽던 시각에 사람이 없어서 더욱 수상했다. 하필이면. 공교로운 일일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종인의 구겨진 얼굴에 다시 실금이 갔다. 하온데 그 시각에 도 계의관이 자신궁으로 향하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다. 순식간에 종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장원서 사람인데 후원에서 잡초를 뽑던 중 도 계의관을 봤다고 합니다. 허나 그때 폐하께서 계의

447 관을 찾으셨지만 잠시 다른 일로 출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보기엔 이 일에 경수가 개입된 것 같으냐? 소신이 우둔하여 판단하기 어렵사옵니다. 조금 전 공교로운 일이라고 한 것은 너다. 실언하였나이다. 아니. 정황이 그러하다면 그 아이가 태후를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개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우선 도경수를 들라 하라. 고야정으로 은밀히 불러야 할 것이다. 예, 폐하. 또 경수를 목격했다던 아이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한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도 계의관이 자신궁으로 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이가 들고나는 것을 본 시위 와 궁녀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옵니다. 모두 도경수 손에 있으니 하룻밤이 지나서야 짐에게 소식이 당도한 것이다! 종인이 언성을 높이자 하개는 움찔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국상을 논해야 하니 반 시진 후에 삼공( 三 公 ) * 을 비롯해 육부상서들을 들라 하라. 봉명하겠나이다. 고야정에 도착한 경수는 미묘하게 냉랭한 기운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 린 후 조금 떨어져서 기다렸다. 침묵이 꽤 길어져 다리 아래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데, 문득 바람이 불어 어딘가에서 피어난 등꽃의 향기를 전해 주었다. 그 향기에 정신이라도 번쩍 든 듯 종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태후가 서거했다는구나. 어의에게 들으니 사망 시각은 어제저녁 무렵이라는데 짐에게는 오늘 아 침에서야 그 소식이 닿았다. 천하가 짐더러 불효자라고 손가락질하겠지. 짐이 태후의 죽음을 방조했을 것이란 낭설이 떠돌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어. 너. 어제 자신궁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높낮이 없는 어투에는 강한 추궁과 질책의 기색이 역력했다. 경수는 종인에게 거짓을 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제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얘기를 늘어놓을수록 종인의 표정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갔다. 하여 절양류를 건넸습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알고? 청신 나리께서 형부에 제출하신 대침과 절양류가 있기에. 역시 너 혼자 벌인 짓이 아니군. 널 도운 자는 누구냐. 경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종인은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속이 시원하더냐? 그것으로 찬열과 네 어미의 복수를 하니 잠자리도 편하더냐?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아는 게야! 온유하던 종인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함치자 경수는 정말로 놀라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너는 왜 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너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그런 추악한 짓을 시키지 않으려고 짐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 최고 관직을 받은 세 명의 대신

448 알기나 해?! 폐하! 고정하소서! 준면 형님의 말만 듣고 태후가 네 어미를 죽인 진범이라고 생각하다니 기가 차는구나! 그토록 총 명한 네가 어째서 의심 한 번 안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형님이 너를 부추겨 개인적 인 복수를 행하려 함은 파악하지 못했느냐?!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김준면은 장씨 일문의 몰락을 바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경수를 끌어들이고 설득하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김준면의 원한과 자신의 원한은 똑같아서 경수는 고심 끝에 태후에게 비참한 마지막을 선물 하고자 했다. 복수의 온점은 태후도 그녀가 죽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지독하게 죽어감으로써 찍고 싶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태후에 대한 너의 원한 역시 나 못지않게 깊고 지독할 테니까. 모든 걸 잃은 태후가 자신궁에서 발 뻗고 자는 것이 불만이었을 수도 있어. 마주 보이는 시선 끝에 용포 자락이 보였다. 어찌나 사시나무처럼 떠는지 옷자락이 파르르 전율하 고 있었다. 허나 네가 태후를 죽일 권리는 없어.! 어째서 이리도 짐을 비참하게 하느냐!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찬열을 잃었고 내 어머니는 산 채로 순장되셨어! 심지어 동모형제인 종대 형님까지 허무하게 보냈다! 용서? 네 원한이 짐이 받아온 고통에 비할 수 있더냐!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신경 써 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돌아온 이상, 예전처럼 물정 모르던 태학관 유생이 될 수 없음을요. 차라리 짐이 우유부단해서 태후를 그대로 둘까 봐 겁이 났다고 하여라.! 변 지평이 태후를 주살해야 한다고 했을 때 짐을 거들었던 것은 무엇이냐? 나는 그때도 우리가 한마음이라 내심 네가 기특하고 더욱 어여뻐 보였다. 헌데 지금 네가 저지른 짓을 봐라. 짐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짐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어!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끝까지 너만 생각하는구나. 책망 섞인 시선에 경수는 할 말을 잃었다. 종인이 화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건 황족을 죽인 것에 대한 괘씸함일 줄 알았다. 하지만 분노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종인은 자신의 마지막 성역이자 보루인 도경수가 직접 피를 묻히는 더러운 짓을 해서 격분했고, 경수는 그런 종인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전신이 짓 눌렸다. 너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다. 네가 짐을 증오해도 그것마저 짐의 업이라 여기며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 허나 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안 돼. 폐하. 돌아가라! 폐하! 중추원에는 병가를 내고 이목을 피하라. 일주일간 입궁을 불허한다. 근신 처분에 경수는 맥이 빠졌다. 하지만 종인의 믿음을 배반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대가치고는 너무도 약소한 편이다. 일주일이란 종인이 경수를 보지 못하는 한계점을 뜻하는 것이리라. 경수는 왈칵 치솟는 감정에 이를 악물었다. 그는 정중하게 절을 올린 후 물러갔다.

449 시대를 풍미하던 여걸 황태후 장씨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종인은 그녀의 죽음을 병사로 위장했고, 백성들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며 욕했다. 누구도 그녀의 죽음과 장씨 일가의 몰락을 애통해 하지 않 았다. 조정 대신들과 논의하여 태후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일각에서 태후는 사직의 죄인이니 격을 낮춰 후궁의 예로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종인은 거절했다. 사십 년간 대연의 국모로 계셨던 분이니 반드시 규례에 맞춰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심을 고려하 지 않을 수 없으므로 선제의 능에 합장하지 않는다. 또한 태후는 직계 자손이 없으므로 짐이 신주를 모셔야 하는데 이 예법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짐은 효경제와 숙비의 아들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최고로 예우해 주는 황제의 포용력에 백성들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여기에 순혜 ( 順 惠 )라는 시호를 올렸으므로 황제를 생불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평소 행적과는 정반대인 시호를 내림으로써 황태후를 자자손손 비웃음거 리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에 킥킥거렸다. 한 달 사이에 황실에서 두 명이나 죽어 나갔고, 조정은 다시 애도의 의미로 모든 업무를 멈추었다. 경수도 일주일 넘게 집에 있어야 했는데 오후에 연수의 글을 봐준다는 핑계로 백현이 얼굴을 비쳤다. 오늘은 학당도 쉬는 날이라 백현은 연수에게 몇 가지 과제를 내주고는 경수의 방을 찾아다. 생각보다 작고 검소한 살림에 백현은 눈알을 굴렸다. 경수가 마침맞게 직접 다과상을 내왔다. 폐하께서 이런저런 하사품을 많이 내리셨을 텐데 어째서 여태 단출하게 세 식구만 사는 거요? 아버님께서 검소한 생활을 좋아하십니다. 또 폐하의 은총을 받는다고 갑자기 세간을 늘이거나 많 은 노비를 거느리면 사람들이 비웃을 테고요. 그래도 한두 명 정도 옆에서 시중들 사람을 구하는 게 좋을 거요. 춘부장께서 혼자 살림을 책임지 시기엔 연세가 연세이지 않소?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아버님을 설득해 쓸 만한 사람을 물색 중입니다. 내가 알아봐 줄까? 어머니께서 사람 보는 눈이 높으셔서 일 잘하고 충성심 좋은 사람으로 골라주 실 텐데. 그런 것까지 나리의 힘을 빌릴 순 없죠. 기운 없는 미소에 백현은 목을 축이면서도 경수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종인이 경수를 부른 후 그가 갑자기 병가를 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둘 사이에 꽤 많은 얘기 가 오갔으리라고 짐작은 한다. 하지만 그건 경수도 각오한 점이었다. 평소라면 침울해 할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줄곧 우울해 보이는구려. 폐하의 역린을 건드렸나 봅니다. 역린? 농입니다. 그렇게 대로하시는 것은 처음 봐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대체 폐하께 어떻게 꾸중을 들은 거요?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마음이 좋지 않아요. 아마 폐하께서는 제가 이렇게 될 것을 아셔서 그렇게 말리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뜻 모를 소리였다. 경수는 선웃음을 지으며 차나 마저 들라고 권하였다. 태후를 처리했는데도 통쾌하거나 후련하지 않아서 마음이 더 무겁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백현이 미리 경고한 부분이기도 한 탓이다. 백현과 종인은 분명히 경수를 말렸다.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은 것은 본인이라서 경수는 가슴이 답 답해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아물어가는 상처를 내 버려둘 뿐이다. 홍 감찰께서 요즘 나리의 혼처를 구하시느라 바쁘시더이다. 차를 들이켜던 백현은 사레라도 들었는지 컥컥 기침을 뿜었다.

450 아. 그게. 홍 감찰이 내 집에 술을 마시러 왔다가 어머니를 뵙는 바람에. 공주님께서 여태 나리를 미혼으로 남겨두신 것이 의외입니다. 모르는 소리 마시오. 아버님의 누명이 벗겨지자마자 하루가 멀다고 나를 볶으신다오. 홍 감찰께 좋은 술을 사드리십시오. 감찰 나리의 내자께서 성품이 후덕하여 고관대작들의 훌륭한 규수들을 두루두루 알고 계신다 합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리다. 백현은 웃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무슨 뜻으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지만 꼭 단둘이 있을 때 마다 바늘로 찌르듯이 심장에 고통을 줘서 이제는 경수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경수는 백현이 갖은 핑계로 자신의 집을 찾을 때마다 쫓아낼 수도 없고, 거리를 둘 수도 없 어 본의 아니게 속을 긁어댔다. 이런 사정을 백현이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금방 간다더니 뻔 뻔하게 방까지 들어와 다과상까지 받고 있으니 백현의 능글맞음에 백기를 들었다. 참. 폐하께서 내가 그대를 도운 것도 아시오? 그건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서 그것까지 말했다가는 백현까지 불똥을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 을 전할 순 없었다.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따로 여쭙지도 않으셨고요. 그래서 이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을 둘러대는 자신이 놀랍지도 않았다. 아아. 그랬구려. 난 그대가 너무 침울해 하기에 폐하께서 낱낱이 하문하신 줄 알았소. 날이 꽤 저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에 박우헌 어르신 댁에 초대받아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습니 다. 잘 됐구려. 그렇지 않아도 공께서 며칠 전 도성으로 돌아와 새집을 하사받고 부인과 함께 사신다 고 들었소. 모두 폐하의 은덕이지요. 그럼 함께 나갑시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머리가 깨질 듯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니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종인은 어두컴컴한 방 안을 둘러보다가 곁방에서 대기하던 어의를 불렀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해 그의 상태를 살피려 어의들이 번갈아가며 대기했는데 오늘은 주치의인 송기석이 번이었 다. 종인의 상태를 꼼꼼히 진맥하던 송기석은 멀리 뒀던 화병을 침상 가까이 옮겼다. 화병에는 불면에 좋은 백합이 가득 꽂혔으며 종인이 베고 자는 베개에는 지난해 가을에 따서 말린 산국( 山 菊 )이 수북하 게 들어 있었다. 한 시진밖에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신경 쓰시면 안 된다고 그리 말씀드렸건만. 저기 쌓인 상소를 보게나. 저걸 다 처리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있 나? 하여 업무를 줄이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짐 때문에 덩달아 어의까지 잠들지 못하는군. 폐하의 옥체를 살피는 것이 소신의 일입니다. 그래도 족욕을 꾸준히 해서 그런지 비교적 잠이 잘 오는 편이다. 맥을 짚느라 살짝 걷어 올렸던 침의 자락을 내려주며 송기석은 아래로 내려가 앉았다. 춤추는 촛불 이 짙은 불그림자를 만들었고, 비바람에 문풍지 흔들리는 소리가 퍽 요란했다. 몇 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체력이 달릴 때로 달리는군. 부디 업무를 줄이시고 보양에 힘쓰소서. 만기친람하시는 것은 성군의 덕목이나 몸의 뿌리를 돌봄 에도 소홀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451 요즘은 석강과 야대만큼은 건너고 있지 않으냐? 그 외에도 일정이 빡빡하신데 고작 석강과 야대를 빼는 것으로 소신더러 안심하라 하시나이까? 종인은 멋쩍은 듯 뒷목을 매만졌다. 조정이 많이 안정된 것으로 아옵니다. 청하오니 부디 행궁으로 이어하시고 여름을 나소서. 올여름 은 재작년처럼 무소뿔이 녹는 무더위가 예상돼 관상감의 우려가 깊사옵니다. 여러 번 간청했는데 짐이 번번이 거절해서 이골이 나진 않았느냐? 상쾌한 원풍과 맑은 공기를 쐬시며 청산녹수를 감상하시면 환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완쾌는 정녕 아니 되는가. 낮은 목소리에 송기석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짐은 매번 자네를 곤란하게 하는군. 용안육( 龍 眼 肉 )을 생으로 드시질 못하신다기에 수라간에 일러 다식으로 만들어 올리라 하였습니다. 꿀이나 조청을 넣으면 달곰하니 입맛에 맞으실 것입니다. 빙글빙글 답을 회피하는 어의 때문에 종인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송기석은 움찔하다가 버릇처 럼 머리를 조아리며 고하였다. 온담탕( 溫 膽 湯 )을 다시 올리겠나이다. 어떻게든 짐을 재우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네만.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무슨 자격으로 폐하께서 내리신 높은 관직을 감당할 수 있겠나이까? 자네는 강호에서 와서 그런지 민간의 처방까지 모두 알고 있지. 실력이 아주 좋아. 게다가 입도 무 거워서 믿음직해. 과찬이시옵니다. 송 어의. 윤음을 주시옵소서. 정녕, 완쾌는 아니 되는가? 송기석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까지 바닥에 박아버렸다. 둔탁하게 울리는 충돌 소리에 종인은 고개 를 내저었다. 화타와 편작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소신의 의술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니 죽여주시옵소서. 교안에서 자네만 한 의원을 찾기는 어렵지. 허나 요즘 들어 출혈이 잦아 하개가 몹시 걱정하고 있 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몸이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사옵니다. 허니 내의원에서 수라간에 올리는 처 방대로 수라를 모두 드셔야 하나이다. 거름도 기름진 땅에 뿌려야 더욱 효과를 내는 법입니다.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는데 어째서 청신은 자네만큼 말재주가 안 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스스로 내뱉은 농담에 잔웃음이 터졌다. 적막한 공간에 빗소리와 더불어 울려 퍼진 공허였다. 어서 침수에 드소서. 종인은 빗줄기가 비치는 하얀 지창을 바라보았다. 오래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빗소리가 쉴 새 없이 새살거려서 잠들 수 없는 밤. 지창 사이로 나뭇잎 그림자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부슬비 차가우니 꽃잎이 떨어지는 때로구나. * 만병의 근원은 마음에서 기인합니다. 당분간만이라도 복잡한 정무를 쉬시며 옥체를 회복하시는 데 주력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어의 말인데 어찌 거역할쏘냐. 웃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돌아누운 그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송기석이 그 기색을 눈치 채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관두고는 침전을 나갔다. 탕약을 달여 올려야 했다. * 한악, 요랑( 繞 廊 ) 중

452 81. 의란( 漪 瀾 ) 종인의 화가 풀리지 않아서 경수는 줄곧 집에서 근신했다. 종인의 명령대로 중추원에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 크게 의심을 사진 않았지만 사지육신 멀쩡한 청년이 득병해서 오래 누워있는 것도 예사 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명이 있지 않은 한 함부로 궁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박우헌이 교안으로 돌아와 집을 사고 부인 엄씨와 다시 만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연 수와 서책을 사러 책방에 갔던 도명정이 우연히 밖에 나온 박우헌을 만난 덕분이었다. 경수는 곧장 박우헌의 집으로 찾아갔다. 적몰되었던 재산을 모두 돌려받아서 박우헌은 다시 예전처 럼 살 수 있었는데 아직 노비들이 돌아오지 않아 집 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세간도 다 정리 하지 못한 듯 곳곳에 물건이 쌓여 어수선했다. 경수를 본 박우헌은 몹시 반가워했고, 엄씨도 못내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도경수가 예전의 빈한 한 집의 유생이 아닌 데다 남편과 아들의 누명을 벗기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간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아들을 잃은 슬픔이 고작 육체적 고통에 비하겠느냐? 죄송합니다. 제가 찬열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째서 네 탓이냐? 태후와 장문견의 짓이었음이 밝혀졌으니 이젠 여한이 없다. 못 본 새 고생이 어찌나 심했는지 박우헌과 엄씨는 상당히 늙었다. 그래도 따뜻한 미소는 여전했다. 그는 경수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다, 경수야. 네가 아니었으면 내 아들의 억울함을 풀 수 없었을 거다.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찬열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교안으로 오는 동안 네 소식을 많이 들었다. 폐하의 총애가 깊다던데, 네가 아니었다면 찬열은 여 전히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길바닥에 뿌려져 있었을 거다. 찬열의 유해는 오래전에 청신이 수습했지만 대역죄를 저질러 봉분도 없는 허름한 산속에 묻혀 있었 다. 그것을 박씨 문중으로 옮겨온 사람은 경수였다. 경수는 이제 막 정리된 사당으로 들어갔다. 역대 박씨 조상과 자손들의 위패가 모셔진 그곳은 피어 오르는 향불 냄새가 가득했고 연기가 희미하게 번졌다. 그곳에는 추증되어 예부에서 직접 만들어 보 낸 위패가 놓여 있었다. 故 左 將 軍 朴 氏 諱 燦 烈 之 靈 位 * 위패에 적힌 글자는 몇 번을 봐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다. 경수는 박우헌과 엄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생의 은인이자 벗에게 향을 올렸다. 하얀 연기가 스멀 스멀 솟구치고, 경수는 바닥에 두 번의 절을 하며 망자에게 예를 다하였다. 이날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찬열이라면 너그럽게 이해할 것이다. 그래 서 경수는 울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에게 미안한 만큼 이를 악물었고, 찬열 앞에서 더는 울고 싶지 않기도 했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그러느냐? 찬열에게 인사하고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가려는데 박우헌이 붙들었다. 경 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분 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어르신을 다시 뵌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간 네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정말 고맙구나. 찬열이 제게 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가 우리 가문을 살렸다. 비록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지만 적어도 조상들에게 고개 숙일 필요는 없게 되었어. 찬열도 그리 생각할 겁니다. 어쨌거나 그 친구가 택한 일이니까요. * 고 좌장군 박찬열의 영위

453 그래. 내 아들은 그런 아이이지. 다시 차오르는 슬픔을 참으려는 듯 박우헌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그래. 고맙구나. 정말 고맙다, 경수야. 마음이 홀가분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더 무거웠다. 그만 도 계의관을 용서하심이 어떠십니까? 상복을 벗기 무섭게 조잘거리는 하개를 종인은 찌릿하게 쏘아보았다. 벌써 달포가 훌쩍 지났사옵니다. 그간 중추원의 일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계의관은 찾지도 않 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폐하께서는 그 날 이후로 수라도 제대로 못 들고 계시지요. 소인은 계의관이 아니라 폐하의 옥체가 걱정되어 올리는 말씀입니다. 갈수록 말재주만 느는군. 냉소를 띠었지만 하개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수를 아낀 만큼 그의 행동이 너무도 괘씸해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만큼 그리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덕분에 바로 오늘 아침에도 송 기석에게 엄청나게 잔소리를 들은 참이다. 지금쯤이면 도 계의관도 많이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만은 절대 그런 일에 뛰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피를 묻힌다 해도 짐이 시켜서 어 쩔 수 없이 해야만 해. 자의지로 그러는 것은 스스로 타락을 부르는 지름길인데 어리석게도 그 늪에 발을 들여서 화가 났다. 폐하께서 그이를 끔찍하게 괴이셔서 그러시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짐이 더 화나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 답을 기다리나이다. 경수가 준면 형님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는 것이다. 모친의 원수이니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겠지요. 그 아이가 가족을 유달리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형님이 그 부분을 노렸을 줄은 몰랐다. 태후에 대한 소왕의 원한은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을 것입니다. 태후가 자신궁에 앉아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게지요. 너무 성급했다. 짐이 절양류를 괜히 남겨뒀겠느냐? 예. 그들이 아니었어도 태후는 언젠가 폐하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됐다. 이미 지난 일이니 들먹여 봐야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지. 종인은 손사래를 치며 돌아섰다. 문득 고개를 드니 담장 너머로 내리비추는 볕살이 유난히 하얗고 밝았다. 그 사이로 어느덧 무성하게 자란 수목과 화초가 싱그러운 총천연색을 뽐냈다. 벌써 유월이군. 재작년에는 이맘때부터 더워서 정무 보기가 힘들었는데 올해는 그리 덥지도 않구 나. 아직도 아침저녁이면 찬 기운이 돌아. 하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많은 궁인들이 올해도 혹서가 몰려올 것 같다며 이른 더위를 걱정 중이었 다. 뭐 하고 섰느냐? 경수를 용서하라며? 예? 아아, 예에. 당장 연통을 넣겠습니다. 짐이 변덕이 심한 사람 같으냐? 아무리 정이 깊어도 오해와 실망이 쌓이면 헤어지기도 하고 서로 원망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나이 까? 종인이 킥킥거리자 하개는 민망한 듯 얼른 중추원으로 향했다. 종인은 그제야 파안대소하기 시작했 다. 가정도 이루지 않은 하개가 그런 말을 늘어놓은 것이 여간 우습지 않았다.

454 잘못했습니다. 사과를 들으려고 부른 게 아니다. 다시는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만하라니까. 경주에 수해가 들었다는구나. 지휘할 사람을 파견해야 하는데 누가 좋을지 모르겠다. 왜 꿀 먹은 벙어리야? 상소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자 경수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종인은 쭈뼛거리는 경 수를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겁내지 마라. 지나간 일을 책잡는 것은 용군이나 하는 짓이지.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네가 여기에 있을 수나 있느냐? 폐하께 실망만 안겨드렸는데요. 해서 그동안 네가 쌓아온 공적까지 모조리 없애주길 바라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잔소리 말고 옆에서 먹이나 갈아다오. 잔뜩 긴장하고 왔는데 종인이 부드럽게 나와서 경수는 안심했다. 그는 얼른 상단으로 올라가 종인 의 옆에 놓인 방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단정한 손길로 쓱쓱 먹을 갈기 시작했다. 못 본 새에 너무 마르셨습니다. 요즘도 밤잠을 못 이루십니까? 누구 덕에 속을 끓이느라 이렇게 됐다. 면목없습니다. 누가 보면 짐이 너를 잡아먹는 줄 알겠구나. 농담도 못 하느냐? 혼자 껄껄 웃더니 짐짓 엄하게 이른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은 없다. 두 번 다신 짐의 허락 없이 손에 피를 묻히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종인은 두루마리 하나를 경수에게 건넸다. 경수가 그것을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호부에서 올린 장계인데 임제환이 얼마나 비리를 저질렀는지 그간 재해 지역으로 보낸 곡식과 은 자를 모두 빼돌려 경주 지역의 구휼 사정이 몹시 안 좋다. 지난달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강물이 범람했고, 인근에 초가집만 백여 채가 부서져 수재민이 수백에 달한다는구나. 유능한 관리를 파견해 임제환이 저지른 짓도 수습하고 민심도 다독이며 일대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마땅한 자가 생각나지 않는다. 조정도 안정되는 과정이라 관리를 뽑기 애매하고, 그렇다고 종친을 보 내자니 경험자가 없으니. 정말 걱정스러운 듯 종인은 잘생긴 얼굴에 실금까지 그어가며 한탄했다. 짐의 말을 듣고는 있느냐? 인사권은 이부상서에게 있습니다만. 조정 곳곳에 빈자리가 많아 그것을 메우는 데만 해도 이부상서의 머리가 쪼개질 거다. 짐은 너의 의견을 묻는 것이니라. 폐하의 현명하신 결단으로 역적들을 몰아내 조정엔 서운이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유배지에 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죠. 종인은 다음 상소를 집어 들었다. 계속하라는 듯 경수를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민생이 아직 형주에 있습니다. 형주는 교안에서 멀지만 경주에서 불과 사흘 남짓한 거리에 있지 요. 네가 짐을 살리는구나. 종인은 곧장 교지를 작성했다.

455 그래, 한민생이라면 믿을 만하지. 지나치게 직설적이라 짜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일을 맡기면 뒷말 이 나오지 않게 잘 처리했다. 조정에서 원리원칙주의자를 찾기란 드물다. 제대로 교류한 적은 없지만 한민생 나리의 명성은 태학관에서도 유명했습니다. 다들 존경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지요. 벽창호라서 정치 생명이 길지 않을 거라고요. 어사대에 있기엔 제격이지 않으냐. 경수가 비로소 미소를 띠었다. 이참에 수해 지역을 수습하는 즉시 조정으로 다시 불러야겠다. 유능하니 어디에 맡겨도 잘할 테 지. 폐하께서 근심을 더시니 기쁩니다. 이부상서도 너처럼 모든 관리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데 참으로 섬세하구나. 폐하의 전정을 빛내 종묘와 사직을 떠받들 인재들입니다. 이름과 특징 정도는 기억해두는 것이 여 러모로 편리하죠. 노력해 주니 고맙구나. 마땅히 할 일입니다. 아직도 경수가 제멋대로 태후를 제거한 것만 생각하면 가슴에 불씨가 타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마 주하고 턱없이 웃고 있으니 순간의 분노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어떻게 너를 폐하. 소왕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태성전에서 기다리시면 될 것을. 잠시 기다리라! 종인이 보던 상소를 내려놓고 얼른 자리를 털었다. 경수도 덩달아 일어났다. 갑자기 소왕이 왜 찾아 왔는지 모르겠는데 그 마음을 읽은 듯 종인이 답했다. 적적하여 담소나 나눌까 하여 짐이 불렀다. 오늘 숙직하는 날이냐? 예. 오늘은 제가 당번입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다시 부르마. 하오면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문 앞에서 마주친 준면에게 사무적으로 인사를 올린 후 경수는 걸음을 서둘렀다. 몸도 안 좋으신데 계속 오라 가라 해서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준면은 편전 옆에 딸린 조용한 응접실을 둘러보다가 왼고개를 쳤다. 폐하의 부름인데 어찌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소신은 폐하의 은덕으로 보기보다 강건하답니 다. 순금사에 있는 동안 골육에 사무친 한기가 형님을 괴롭힌다고 들었습니다. 꾸준히 시료를 받았고 폐하께서 매번 보내주시는 훌륭한 약을 먹어 그리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 다. 겨울이면 가끔 통증이 일긴 하지만 심각하지도 않지요. 준면은 여느 때처럼 달처럼 환하고 고운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걸었다. 태후가 죽은 후 부쩍 궁으 로 불러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괜히 마음이 불안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암암리에 도경수가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얘길 들어서 자신까지 책망하려는 건 아닌가 했지만, 종 인은 한 번도 준면을 나무라지 않았다. 더구나 조금 전 도경수가 편전을 나갔으므로 두 사람은 화해 했다고 봐야 좋을 것이다. 명하와 명혜를 데리고 한 번 입궁하십시오. 아, 형수님도요. 말씀만으로도 감읍합니다만 괜히 폐하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그리 말씀하시면 오히려 제가 섭섭합니다. 종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선제의 아들 중 형님과 저 단둘만 남았습니다. 전 종대 형님조차 지키지 못했죠. 그것이 어찌 폐하의 탓입니까?

456 어쨌든, 형님께서 자주 입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명하는 성격이 어떻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한 번도 못 본 조카에 대한 궁금증이겠구나 싶어서 준면은 성실하게 대답했 다. 놀기만 좋아하는 개구쟁이입니다. 그 나이엔 누구나 그렇지요. 그래도 명색에 종친인데 글월도 모르는 문맹으로 만들 순 없어서 옆에 끼고 가르치긴 합니다만 여 간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아, 왕비가 명혜를 가졌을 땐 어찌나 투기가 심했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하지만 사내라면 몸이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하니 놀기도 좋아하는 것 아니겠 습니까? 또 적당히 독점욕이나 성취욕도 있어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왕부를 이어받아 폐하께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천명을 다하는 것일 겁니다. 제게도 그만한 아들이 있다면 좋겠는데 불운하게도 내명부에서는 여태 소식이 없답니다. 폐하께서는 대연의 지존이시고 천자이십니다. 누구보다 복이 많으시고, 또 황후마마를 비롯해 후궁 모두 덕 있는 재녀들이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종인은 짐짓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래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모든 것이 제가 부덕해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조금 의기소침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폐하께서는 명군이십니다. 수십 년은 퇴보한 이 나라의 사직을 올바르게 돌려놓으셨는데 어찌 스 스로 부덕하다 하십니까? 허투루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가끔은 형님께서 보위를 이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 군요. 그 소리에 준면은 깜짝 놀라 냉큼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폐하! 소신은 보위에 일말의 관심도 없고 감당할 깜냥도 안 됩니다. 농으로라도 그런 무서운 말씀 은 거두어주소서! 형님. 순금사에서 죽을 뻔한 소신을 방면하여 살려주신 분은 폐하십니다. 소신이 동궁에서 쫓겨난 것은 태후의 음모였지만 그것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차가운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손가락들이 파들파들 떨렸다. 종인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제가 지나쳤습니다. 준면은 몸을 일으키고도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은근슬쩍 차기 정국에 관 해서 언급하는 종인이 너무도 해연하고 수상쩍었다. 속내를 떠보는 것 같아 더욱 말을 삼가고 행동을 신중히 하고 있지만 입궁할 때마다 진이 빠졌다. 도대체 김종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궁의 내밀한 사정을 알 수도 없고, 안다 해도 뭘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어서 준면은 불안했다. 도경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둘이 화해한 듯하니 필시 어떤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참. 내의원에서 올여름은 꼭 행궁에서 나야 한다며 난리랍니다. 관상감에서 혹서를 예고해 긴장되 는 모양이더군요. 옥체가 불예하십니까? 요즘 별의별 일을 겪었더니 심신이 좀 지친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몇 마디 했는데 아주 호들갑을 떨더군요. 폐하의 옥체는 종묘와 사직과 직결되니 어의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여 인근의 행궁 중 한 곳으로 이어하여 여름을 날까 합니다. 괜찮다면 형님께서도 함께 가셔서 며칠 요양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457 제가요? 온천으로 가려 합니다. 형님 몸속의 한기를 따뜻한 온천물이 녹여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해후한 뒤로 종인이 준면을 많이 챙기긴 했지만 행궁까지 함께 가자고 하니 도리어 더 불안했다. 준면은 굳어가는 표정을 깨닫고는 얼른 미소를 띠었다. 폐하께서 휴식하시는데 소신이 어찌 감히 방해하겠습니까? 왕부 식구들과 함께 가셨으면 좋겠는데, 정녕 아니 가시렵니까? 성심만으로도 감읍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별수 없군요. 아쉽습니다. 폐하를 귀찮게 해드릴 수야 없지요. 흠. 허면 모레 식구들을 데리고 입궁하십시오. 황궁 곳곳을 구경하시고 오후에는 연극을 보고 저녁 을 함께 들면 좋을 듯합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준면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전혀 기쁘지 않다. 그 는 당장 도경수를 만나고 싶었다. 82. 암운저미( 暗 雲 低 迷 ) 준면은 집으로 가기 전에 궁 일각으로 경수를 불러냈다. 그는 조용한 음색으로 최근 이상하게 변한 종인의 상태를 들려줬다. 폐하께서 후사가 없으신데 지난번부터 은근히 차기 정국을 논하시는 듯하여 두렵다네.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일 수도 있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종대가 죽은 후 유독 적적해지신 모양이야. 나더러 가족들을 데리고 자주 입궁하라고 하셨네. 진왕과 폐하의 우애가 깊긴 했죠. 심지어 이번에 행궁으로 이어하시는데 나도 함께 가자고 하시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와의 약조가 있기도 하지만 폐하께서 갑자기 저러시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불안하네. 별일 아닐 겁니다. 전하의 추측대로 진왕이 그리우신 거겠죠. 그래도 소인이 한 번 알아볼 테니 너 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창백한 준면을 잘 달래서 돌려보낸 후 경수는 심란해졌다. 밤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종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진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탓이라면 좋겠는 데 차기 정국을 입에 담았다면 예사로 흘릴 순 없었다. 오늘은 숙직을 서는 날이라 밤새 중추원의 등불을 밝혀야 했다. 삼경이 가까운 때에 경수는 촛대의 심지를 자르며 한숨을 삼켰다. 정리할 문서가 제법 많았는데 한참 전부터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다. 밤중에 부른다던 종인은 깜빡 잠들었는지 내내 소식이 없었다. 이튿날에는 오후 출근이라 머리 위로 해가 쨍쨍하게 떴을 때 입궁했다. 조보를 확인하고 나니 선진 하나가 와서 보름 뒤 행궁으로 이어한다고 했다. 내의원에서 수차례 간청했고 관상감에서도 올 여름 혹서가 예고되니 황제의 옥체를 생각해 서늘한 지역으로 미리 피서를 가야 한단다. 행궁으로 이어하면 조정의 주요 기관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각 관청으로 준비하라는 통보가 떨어 졌다. 중추원도 갑작스러운 결정에 필요한 자료와 인원을 추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밤이나 돼서야 이부에서 올린 인사 재배치로 고신 몇 개를 전해야 해서 겨우 태성전에 들 수 있었 다. 종인은 내일 경연에서 쓸 자료 때문에 장서각에 있다가 조금 전 태성전에 돌아왔다. 훈풍을 쐬었 는데도 얼굴에 혈색이 없었는데, 경수는 자신의 기분 탓이길 바랐다. 아침에 형주로 교지를 보냈는데 한민생이 잘해 주면 좋겠구나. 종인은 수라간에서 올린 감주를 들이켜며 미소 지었다. 경수의 앞에도 미리 마련한 감주와 차산병 이 놓여 있었다. 물론 경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458 왜 또 표정이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는데 무거운 낌새를 눈치챈 종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저야말로 폐하께 여쭙고 싶습니다. 잠자코 있던 경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다만. 정녕 그러십니까? 아아. 승건궁( 承 乾 宮 )으로 이어한다는 소식 때문에 그러느냐? 걱정하지 마라. 관상감이랑 내의원에 서 요란스럽게 굴어서 그러느니라. 재작년에도 옮겨야 한다는 것을 계속 미뤘거든. 경수는 종인이 일부러 대답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며칠 묵는 것이라면 옥명합이 제격인데 여름을 아예 관주성에서 나지 말라니 별수 없이 승건궁으 로 가야 하지. 어쨌든 승건궁도 썩 나쁘지 않아 이참에 온천욕이나 실컷 즐길 작정이다. 물에 유황 성 분이 가득해 피부에 특히 좋다. 그간 쌓인 일이 많아서 너도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같이 달이나 보면서 목욕하면 좋겠구나. 근처에 대나무와 배롱나무가 있어서 운치가 상당하단다. 재잘거리는 종인에게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 밤, 종인에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경수는 이튿날 등청하기도 전에 내의원으로 찾아갔다. 아무래도 종인의 신변에 급격한 변화가 있는 듯한데 하개나 청신은 입도 벙긋 안 할 위인들이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송기석은 정삼품의 고관이고 자신은 칠품의 하급 관리라 다짜고짜 불러내 용태가 어떠냐고 묻는 게 예의는 아니었다. 그래서 궁 소식에 빠삭한 우장을 시켜 내의원의 동태를 살피게 했는데 어찌나 단속해놨는지 어떤 소득도 건지지 못했다. 경수는 좌절했다. 종인은 신중한 성격이라 준면에게 농담으로 보위를 운운했을 리 없다. 자신이 모 르는 뭔가가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집에 오자마자 안채로 오라는 어머니의 부름이 있었다. 백현은 옷깃을 가지런히 하고 경태에게 먼 지는 묻지 않았는지 여러 차례 물은 후 어머니의 처소로 향하였다. 금선공주의 처소에는 모란이 한창 무르익어 온통 붉은색이었다. 부마인 변석위가 아내를 위해 손수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린 꽃이라 공주는 화단을 애지중지했다. 흐드러지게 핀 홍모란 밭 맞은편에는 아 담하지만 고즈넉한 건물이 자리했다. 백현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넘고 시원한 밤바람이 불었다. 금선, 그녀는 제 아들과 똑같이 생긴 눈을 하고 아른거리는 불빛 아래서 수를 놓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에 꽂은 구슬 달린 가란화잠이 찰랑찰랑 흔들렸 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어서 오너라. 날이 제법 더워졌는데 일하는 데 힘들진 않더냐?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보름 뒤에 승건궁으로 이어할 예정인데 팔월 말까지는 그곳에 있을 모양입 니다. 그래? 폐하의 옥체에 큰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내의원과 관상감에서 이번 여름에 지독한 더위가 예상된다며 꼭 시원한 행궁에서 여름을 나야 한 다고 했답니다. 그렇군. 폐하의 옥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니 이어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한동안 어머니 혼자 교안에 계셔야겠습니다. 금선은 낮게 웃으며 수틀을 옆으로 치웠다. 지난 삼 년간 교안에 좀 붙어 있었기로서니 아주 대단한 효자가 됐구나. 그간 전국을 떠돌며 어미

459 의 속을 썩인 것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냐? 백현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자는 스승님의 조언으로 전국의 현자들을 찾고 고결한 사상과 문물을 배우려 했을 뿐입니다. 저 라고 떠돌이 생활이 좋았겠습니까? 됐다. 여기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다녀와라.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폐하를 모시며 나랏일을 돌보 러 가는 것인데 집안일에 얽매여서야. 싱긋 웃는 백현에게 금선은 문갑에서 붉은색 비단 주머니 세 개를 꺼내 보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읽어보면 안다. 백현은 뜨악했으나 순순히 주머니를 열어 차례로 펼쳐보았다. 모두 명문가 규수들의 사주단자였다. 사흘 전에 요녕공주( 曜 寧 公 主 ) * 가 또 외손을 보았다. 그 딸아이가 올해 스물이니 너보다 몇 살 어 릴 뿐인데도 벌써 시집가서 아이를 낳았다더구나. 어릴 때 집안끼리 꽤 어울리지 않았니?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마라. 홍 감찰에게 여러 처자를 소개받았는데 그도 마뜩잖다고 퇴짜를 놓았 다며? 백현은 나가는 즉시 경태를 단단히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게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날까지 입을 다물기도 했고. 좋은 가문의 여식과 혼인하여 일평생 서로 의지하면서 산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집안에 남 자라고는 너 하나뿐인데 네가 대를 잇지 않으면 변씨 가문은 절손한다. 내가 낳은 아들로 인해 변씨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은 참을 수 없구나. 백현은 말없이 웃었다. 어머니의 자존심 강한 성격도 알고 어떻게든 혼기 넘긴 아들을 장가보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금선은 아들 녀석의 미소가 또 능글능글하게 넘어가려는 수 작이라고 여겼다. 어미의 말을 허투루 듣는 게냐? 아닙니다. 마음에 차는 처자가 없는 것이냐, 아니면 일부러 혼인을 피하는 것이냐? 둘 다이지만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또 은근한 미소만 흘리는데 금선이 짐짓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도경수라는 자와 자주 어울린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자가 폐하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 느냐? 소자도 폐하의 사람입니다, 어머니. 폐하께서 네게도 용양군이 되라고 하시더냐? 그제야 백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간 도연수의 공부를 봐주러 그 집에 수차례 들락거리긴 했지 만 경수와의 관계는 일절 내색한 적이 없었다. 필시 경태 놈이 어머니에게 모조리 불어버렸을 것이다. 네 꼴을 보니 내 짐작이 맞구나. 어머니. 너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백현은 두 입술을 꼭 붙이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정녕 그 아이를 맘에 둬서 혼사를 피하는 거냐? 너, 도경수를 좋아하니? 대답해. 줄줄이 늘어선 예쁜 꽃 돌아보지 않음은, 반은 수양 때문이고 반은 그대 때문이네. ** * 효경제의 누이. 금선의 언니

460 시로 대답하는 아들의 태도가 기가 차면서도 한때 연가를 들려주던 남편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금선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핏기가 가시는 것만 느꼈다. 너희가 아무리 결백해도 사람의 혀는 목을 자르는 칼이다. 뭇 사람도 아니고 수백이 모인 궁, 그것 도 황제의 사람을 네가 어찌? 소자가 마음에 담았을 적에는 천자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당에 앉아 바깥일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사람들이 도경수가 받는 총애에 대해 하도 떠들어서 감은 잡고 있다. 너는 변씨 가문의 핏줄이고 대를 이을 의무가 있어. 헛된 마음으로 가문을 도륙하게 할 셈이냐? 금선은 모골이 송연했고 백현은 창백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리 앞서 나가십니까? 네가 지금 무시무시한 말을 쏟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아? 소자는 그자와 뭘 해 보려는 생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소자 혼자 품은 외사랑일 뿐입 니다. 그런 마음을 품는 것조차 네게 화가 미칠 수 있다. 도경수는 폐하에 대한 마음이 지극합니다. 소자는 안중에도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너는 정의 무서움을 모른다. 소자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일만 권의 책을 읽었고, 일천 명의 현인을 만났는데요. 또 웃어넘기려고 하기에 금선은 가자미눈으로 아들을 흘겨보았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도경수에 대한 마음이 오래되어 정리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소자도 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매달리는 것은 싫습니다. 또 어머니 못지않게 현모양처를 만나 토끼 같은 자식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하도 거짓말을 해대서 아들의 말이라면 메주로 콩을 쑨대도 못 믿을 판이다. 금선은 그런 의심을 잔뜩 내비쳤다. 그럼 약조해드리지요. 이번에 행궁에서 돌아오는 즉시 어머니께서 정해 주시는 여인과 혼인하겠습 니다. 네가 억지로 혼인하는 것은 싫다.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와 혼인하실 땐 억지로 하셨다면서요. 황족의 혼사가 어디 그냥 혼사더냐? 황실의 이익을 위한 정략혼인에 지나지 않지. 그래도 어머니께선 아버님을 의지하시면서 행복하셨다고 하셨죠. 그래. 네 아버지 같은 분은 만나기 어렵다. 고집이 무척 세고 직설적이라 선제를 알현할 때는 등줄 기에 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뚝심 있고 재치 넘치는 사내였지. 어머니를 누구보다 아껴주셨고요. 허니 너도 네 내자가 될 사람에게 그리해야 한다. 절대 힘들게 해서는 안 돼. 어릴 때부터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진심으로 가을에 내가 정해 주는 사람을 배필로 맞을 거니? 각서라도 써 드릴까요? 이왕지사 일을 앞당기면 좋으련만. 그래 봤자 삼 개월입니다. 혼사를 치르기엔 촉박하나 상대를 찾기엔 넉넉한 시간이죠. 아들이 순순히 나온다고 해서 안심할 순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더 압박하기도 싫어서 금선은 그러 라고 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백현은 사뭇 무정해 보였다. 마음 정리는 진즉에 해야 했다. 그러나 한 번 에 끊을 수도 없는 것이 연정이라. 자연스레 정리되어 가는 이 과정마저도 고통스러워서 백현은 얼른 꿈에서 깨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다. 그렇다. 이건 꿈이다. 깨고 나면 별일 아닐 꿈. 악몽이라기엔 아름답고, 행복한 꿈이라기엔 지나치 ** 원진, 헤어진 뒤에( 離 思 ) 4 중

461 게 무심하고 아픈 그것이었다. 종인의 신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채 승건궁으로 이어하는 날이 왔다. 관 주성의 주요부서와 병력이 황제를 보필하려고 여러 날에 걸쳐 행궁으로 떠났다. 마지막 날에는 황제 의 어가와 조정 대신, 황후를 비롯한 몇몇 후궁들이 길을 잡았다. 경수는 종인과 같은 날에 움직였다. 유월 중순이라 날씨는 후텁지근했고 산천초목은 늘 그렇듯 시 원한 녹색 비단을 두르고 다시없을 계절을 만끽하였다. 승건궁은 커다란 정원을 여러 개 가졌다. 뒤로는 구불구불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숲이 있고 앞 에는 힘차게 휘돌아나가는 강이 자리했다. 성문에는 해자가 놓여 적의 침입을 차단했는데, 주위에는 처음 보는 남녘의 꽃이 피어 화사함을 더하였다. 구조는 관주성과 비슷했으나 애초에 휴식을 위한 곳이었으므로 온천만 해도 네 개에 달하였다. 지 하에서 펄펄 끓어오른 물은 땅속에 난 수로를 따라 지상으로 솟구치는 과정에서 식어 적절한 온도였 다. 중추원 건물에 짐을 풀고 선진들에게 궁 곳곳을 안내받은 경수. 어깨에 근심이라는 두 글자를 짊어 진 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등꽃이 핀 일각에서 하늘만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좁은 등에 끈적 거리는 그림자만 드리워서 산의 청량한 기운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머리가 아파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던졌다. 아. 봉 내관. 대전 소속으로 여기저기 심부름을 해 주는 사람이다. 주로 종인이 찾을 때마다 경수에게 어명을 전 하는 자였다. 중추원에도 아니 계시기에 한참을 찾았습니다. 날이 더워 잠시 등나무 아래서 햇볕을 피하고 있었소. 폐하께서 내일 저녁에 조촐하게 연회를 여신다 합니다. 아끼는 신하 몇 명만 부르니 계의관은 부 담 없이 참석하라는 어명입니다. 알려줘서 고맙소. 허면 소인은 이만. 저기, 봉 내관. 예. 혹 폐하께서 최근 이상한 소리를 하시거나 편찮으시다고 호소하신 적이 있소? 봉 내관은 왼고개를 쳤다. 실면증이 있으시긴 하나 용태가 불예하시진 않습니다. 참이오? 예. 어찌 그러십니까? 아, 아니오. 승건궁으로 이어하는 바람에 계의관 나리도 걱정되셨나 봅니다. 폐하의 옥체라면 내의원에서 성심 성의껏 돌보니 심려치 마십시오. 교안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의원들이 모였잖습니까. 봉 내관이 말이 옳구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두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발설하기를 꺼리는 통에 경수는 본인이 지나치게 예민한 탓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꺼림칙한 느낌은 얼룩덜룩한 먼지처럼 따라붙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83. 종아서( 從 我 捿 )

462 저녁 일정을 모두 파해야 한다는 내의원의 주청에 따라 종인은 모든 정무를 뒤로하고 탕에 뛰어들 었다. 멋들어진 수석이 탕 주변을 에워싸고, 단단하고 길쭉한 대나무가 새파란 잎을 뽐내며 하늘 위로 솟구쳐 있는데 도처에 꽃창포와 장미, 패랭이꽃이 앞다투어 피어 여름밤을 숨 쉬게 했다. 산 밑이라 밤바람이 제법 시원했고, 노천이라 머리 위로 바로 보이는 새하얀 달은 월궁항아를 품에 안고 노래하는 듯했다. 가슴께에서 찰랑거리는 온천물은 따뜻해 이마에 송골송골 알땀이 맺혔다. 이런 여유는 실로 오랜만이라 노곤함에 저절로 눈꺼풀이 감기는데, 폐하. 진중함을 담은 낮은 목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어째서 시중드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목욕하십니까? 귀찮아서 다 내보냈다. 하 공공도요?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경수는 걱정스러운 듯 도톰한 입술을 콱 깨물었다. 둘러보니 네모난 목판 위에 수건과 속적삼, 침의 등이 정갈하게 개켜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풍한이라도 들면 어쩌시려고요.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하물며 천자인 짐이 걸리겠느냐? 농담에도 전혀 웃어주질 않아서 종인은 괜히 머쓱했다. 오늘은 번이 아니라기에 불렀다. 관주성에서 가깝다고는 해도 이틀이나 걸린 길인데 피곤하진 않 더냐?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내일 연회에 참석하라는 통보는 받았고? 낮에 봉 내관이 다녀갔습니다. 장씨 일문을 숙청하는 데 너와 여러 신하들의 공이 컸다. 그래서 몇몇만 초대해 위로해 주려고 하 는데 하개는 연회도 일정에 속한다며 그냥 방에서 푹 쉬라고 하더구나. 요즘은 그 잔소리 때문에 돌 아버릴 것만 같다. 폐하의 옥체가 우선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청풍명월무인관( 淸 風 明 月 無 人 管 ) * 이라. 모처럼 산수 좋은 데서 지인들과 정다운 시간을 갖는 것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 송 어의는 짐의 마음이 편해야 한다고 하는데 다들 짐이 과음할까 봐 걱정만 하 니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투덜거리며 괜스레 참방참방 물장구를 쳤다. 그러다가 문득 눈가에 짓궂은 기운이 서리더니, 한 움큼 물을 떠 경수 쪽으로 촥 뿌렸다. 경수가 놀 라 뒤로 물러나서는 뱁새눈으로 쏘아보니 우습다고 깔깔거렸다. 군소리 없이 소매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는데, 종인이 경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가 반쯤 몸을 기울였다. 촛불을 밝힌 석등의 불빛과 희부옇게 올라오는 물안개 때문에 분위기가 야릇했다. 너도 들어오라. 어찌 감히. 우리 둘뿐이니 괜찮다. 은밀하게 끌어들이는 손길에 경수는 등골이 다 저릿하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불쑥 들어오면 곤란했으므로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경수의 팔목을 꽉 붙들고 확 끌어당기는 종 인의 악력은 제법 거셌다. 종인은 물에 젖은 시선으로 경수를 올려다봤고, 경수는 자신을 채근하는 종인을 내려다봤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간다면 입술이 맞닿을 듯했다. 관자놀이에 맺힌 물방울이 종인의 턱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 지는 게 보였다. 주변을 모두 물렸다. 오는 동안 한 사람도 아니 보였을 텐데. *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사람의 관할이 아님. 속세를 벗어남

463 조금 더 끌어당기더니 관복의 띠를 벗겨낸다. 손길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경수는 미동도 못 했고, 저 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휘정궁에서 널 안은 이후로 어쩐지 두려워서 두 번 다신 네게 손대지 못했다. 흐트러진 옷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종인은 경수의 머리 위에 얹은 관모까지 벗겼다. 싫다면 거부해도 좋아. 갑자기 왜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경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지배한다 고 생각했다. 들어오겠느냐? 여름이라 더 얇아진 내의 사이로 흰 살결이 아슷아슷 비쳤다. 종인은 물 묻은 손으로 경수의 허리 를 꽉 움켜쥐었고 그 자리에는 수흔이 남으면서 옷깃이 살에 들러붙었다. 들어오겠느냐? 다시금 물었을 때 경수는 달에 홀린 것처럼 탕 속으로 발을 들이고 말았다. 정신없이 몸을 섞고 나니 탕천이 온통 물바다였다. 옷섶 사이로 종인이 깨물고 빨았던 유두도 제법 부풀었고 그가 움켜쥐고 파정할 때까지 드나들었던 엉덩이 쪽도 둔탁하게 아팠다. 물속에서 어찌나 격렬했던지 개운하기보다는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경수는 그대로 잠들었다. 종인은 한참이나 경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물이 치솟아 시야가 희부옇게 변 했다. 그는 온천물로 세수하고 언제 울었냐는 듯 멀쩡한 목소리로 하개를 불렀다. 오늘 일이 이리될 것을 알고 있던 하개는 미리 준비했던 담요를 가져왔다. 그는 주군의 정사를 아 예 못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가 한쪽에 기대 잠든 경수를 담요로 둘둘 말자 그새 침의로 갈아입은 종인이 그대로 경수를 안아 들었다. 달빛이 아주 맑구나. 하개는 환하게 웃는 주군을 보니 덩달아 기뻐했다. 생강차를 내오너라. 그렇지 않아도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처소로 가시면 바로 드실 수 있사옵니다. 이부자리도 모두 갈았느냐? 물론입니다. 오시느라 무리하셨을 테니 오늘은 일찌감치 침수에 드소서. 말갛게 웃은 후 종인은 좁은 복도를 지나 처소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푹신푹신한 이불 위에 경수 를 뉘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경수는 사뭇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발갛게 익은 볼이 아직도 상기되 어 있었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눈썹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는 것이 내색은 안 했어도 오는 동안 몹시 노곤했던 모양이다. 문득 피로감을 느낀 종인은 마저 봐야 할 상소가 있어 책상이 놓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또 코피가 터졌는데 후두둑 핏물이 쏟아져도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경 수가 깼는지 안 깼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경수는 쌔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밖에 있느냐? 예, 폐하. 옷이 더러워졌으니 새 침의를 가져오라. 그 말에 하개가 안으로 들어와 종인의 상태를 살폈다. 이로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토혈. 조금 전만 해도 즐겁던 그의 얼굴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일찍 침수에 드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어찌 또 서안 앞에서 상소를 보려 하십니까? 쉿. 검지를 입술에 대며 경수 쪽을 힐끗거리는 종인. 바닥을 닦고 침의를 새로 내와라.

464 어의도 함께 들이겠나이다. 폐하께서 소인에게조차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으시니 반드시 어의의 진맥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 흘겨볼 것 없다. 폐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소인은 정말 두렵사옵니다. 물기 젖은 목소리에 종인은 착잡해졌다. 소인은 폐하께서 홍류원으로 나가시던 시절부터 줄곧 모셨습니다. 오직 폐하 한 분을 보필코자 눈 빛만으로도 성심을 읽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요. 이런 소인이 폐하의 용태를 모르겠나이까? 연의 만백성이 폐하의 강건함을 바라고 있습니다. 간청하오니 폐하께서는 부디 전력을 다하시어 옥체를 보중하소서. 울먹이는 그에게 해 줄 말은 없었다. 종인은 담담하게 하개를 바라보았고 하개는 심기를 거슬렸다 간 종인의 알 수 없는 병이 더 악화할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종인은 하개에게 던졌던 시선을 잠든 경수 쪽으로 옮겼다. 촛불이 저리 춤추는데도 깊이 잠든 경수. 언제까지 저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두려움이 종인을 절망스럽게 했지만 그는 끝끝내 티를 내지 않았다. 나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태양이 되려면 그리해야 하니까. 그러니 경수야. 오늘처럼만 늘 나 와 함께 있어다오. 경수는 동이 틀 무렵에 잠에서 깼다. 그는 제 옆에서 웅크린 채 잠든 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줄기 실오라기 같은 빛이 종인의 윤곽을 그려냈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단단한 남성의 이목구비. 경 수의 모든 것을 어루만졌던 두툼한 손과 말랐지만 실팍한 몸뚱이까지.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종인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된 것일까, 아니면 평생의 숙적을 쓸어버린 후 갑자기 찾아온 변화일까. 알 수 없다. 모두 입을 다문 지금, 경수로서는 종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누르며 경수는 종인의 뭉툭한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하개가 정리해둔 옷을 챙겨 입었다. 그는 이대로 나갈까 하다가 뭔가 아쉬웠다. 그래서 서안 앞으로 가 문진으로 종이를 고정하고 조용 히 먹을 갈아 붓끝에 살짝 묻혔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붓을 놀렸다. 잘 보이는 곳에 종이를 펼쳐놓은 후 경수는 그대로 처소를 나왔다. 아직 이슬도 채 마르지 않은 푸 르스름한 여명이었다. [어찌하면 그대와 한 쌍의 원앙 되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황이여, 황이여, 나를 따 라 둥지를 틀어다오. 꼬리를 비비며 영원한 짝이 되리. 정 나누고 몸이 통하고 마음이 하나 되니 깊은 밤 서로 좋게 지낸들 뉘 아리오. 두 날개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올라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시오.] * 경수가 써 놓고 간 시에 종인은 웃음이 터졌다. 필체는 굵직하지만 글자마다 부끄러움이 뚝뚝 떨어 졌다. 누구더러 황( 凰 ) ** 이라 하는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데 문득 만나고 얼마 안 돼 서로 시나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주고받던 때가 * 사마상여, 봉구황( 鳳 求 凰 ) 중 ** 봉황의 암컷

465 생각났다. 굴곡이 깊은 세월이었지만 그때처럼 서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마지막까지 이 마음이 변치 않길 바란다면 너무 이기적일까. 까라지는 눈빛에 공연히 우울함이 밀 려왔다. 그런 기분을 안 느끼려 온종일 업무에 집중했다. 요양도 즐길 겸 왔다지만 공식적으로는 칠팔월의 무더위를 피하려고 온 것이라 국정에 소홀할 순 없었다. 이젠 완전히 옷깃이 얇아져 너도나도 손에 부채 하나씩을 들고 시원한 음료나 과일을 찾는 때다. 수라간에서도 배를 띄운 오미자차를 올려 유독 열이 많은 황제의 옥체를 신경 썼다. 물론 그에 앞서 내의원에서 들인 탕약을 마셔야 했다. 종인은 약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먹어서 이젠 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러 나 옆에서 시어머니처럼 감시하는 하개와 송기석 때문에 투덜대지도 못하고 꿀꺽꿀꺽 탕약을 삼켰다. 경주에서 올라온 한민생의 수재민 복구 장계를 검토하고 병부에서 헤아려 달라며 올린 일부 국경지 대 군사 개편 문제에 대해 살피고 나니 땅거미가 졌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회에 늦을 수 없어서 곧 바로 연회장으로 향하였다. 난여에서 내린 곳은 승건궁에서 연회장으로 쓰는 장교원( 長 交 院 )이었다. 장교원에는 너른 앞마당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인공 호수가 있었는데 온천수가 끓다 보니 이른 연꽃이 만발하여 절경이었다. 공 중에 걸어놓은 형형색색의 등불과 십이지를 조각한 석등이 불야성처럼 연회장을 밝혔다. 도경수, 변백현, 이재관, 홍만립 등을 비롯해 장씨 일문을 축출하는 데 애쓴 주요인물 열다섯 정도 가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다. 그러나 마련한 음식과 술만은 일품이었다. 종인이 특별히 신경 쓰라고 지 시한 까닭이었다. 그가 등장하자 모인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손짓 하나에 다들 제자리에 앉았고, 종인 은 서론이 긴 것을 싫어했으므로 유쾌하게 외쳤다. 그간 수고 많았소! 앞으로도 나라를 위해 더 애써주길 바라오! 떠들썩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쳐진 것도 아닌 적당한 술자리였다. 그간 누구보다 맘고생이 심했을 황제가 가장 기쁜 낯으로 모두에게 술을 권하고 농담도 던지니 다들 기분이 좋았다. 친형이 죽어서 한동안 우울해 보였는데 단장의 아픔은 극복한 듯했다. 한참 시 짓기 대결이 끝나고 나니 희미한 달안개가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그 아래 짙푸른 수목과 향긋한 화초가 하다분하게 이파리를 늘어뜨렸는데, 악공들이 연주하는 생황과 거문고 소리에 춤을 추 는 것만 같았다. 느른한 곡조를 따라 바람도 불고, 바람결에 호수에 핀 연못은 그 어느 때보다 난만한 자태를 뽐냈 다. 홍옥을 문 듯 흰 꽃잎 사이로 붉은색이 언뜻언뜻 비치는데, 봄여름에 연밥을 따러 물가를 누비는 여인들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러한 생각에 흠뻑 취한 듯 다소 느즈러진 태도로 호숫가로 걸어온 백현은 술잔을 움켜쥔 채 혼잣 말처럼 읊었다. 맑은 연꽃 향기 드넓은 연못에 가득한데, 어린 아가씨 노는 데 정신 팔려 연꽃 따는 일은 더디기 만 하네. 날이 저물도록 물장난하느라 뱃전까지 흠뻑 젖었으니 붉은 치마 갈아입고 오리 잡으러 가겠 구나. * 혼자서 뭘 그리 중얼대는가? 뒤에서 들린 소리에 멈칫하니 황제가 서 있었다. 얼핏 살피니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리를 오가며 서로 술을 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서 여태 붙 잡혀 있던 황제는 겨우 탈출해서 밤바람에 술을 깨려는 듯 보였다. 연꽃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잎이 이리도 크고 풍성한 것은 명주에서만 봤는데 뜻밖입니다. 명주의 연꽃이 천하제일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네만 그 정도로 아름다운가? 극락정토에 피는 꽃을 이승으로 옮긴다면 단언컨대 명주의 연꽃일 겁니다. 화중군자를 자네 혼자만 만났다니 정말 괘씸하군. * 황보송, 채련자( 采 蓮 子 )

466 각설이처럼 여기저기 쏘다닌 보람이지요. 견문만큼 값진 경험은 없지. 짐은 교안 밖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기행문이나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 외에는 세상을 접한 기회가 적다. 역대 선조들께서는 미복을 하고 전국으로 순행하러 다니셨습니다. 국정이 조금 더 안정되면 폐하 께서도 직접 순행을 다니시며 백성들을 가까이 접하심이 어떠십니까? 민생을 피부로 느낄 뿐만 아니 라 재야에 숨은 인재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 백현은 빙긋 웃는 종인에게 옆구리에 찼던 술병을 풀어 잔을 채워주었다. 조정에 회오리바람에 몰아칠 때마다 혼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찬열을 잃었어. 음악이 바뀌었을 때, 종인은 맘속에 담았던 얘기를 꺼냈다. 백현은 대꾸하지 않고 진지하게 주군의 넋두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때부터 우린 함께 공부하고 함께 연무장에 서며 함께 땀을 흘렸지. 세상의 관심이 황태자와 병약한 내 형님에게 쏠려 있을 때 그 아이만은 늘 내 편이 되어 위로했다. 그래서 짐은 짐의 어리석 음으로 찬열을 보내야 했을 때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누누이 그 친구에게 짐은 백아요, 너는 종자기라고 하였는데 정작 그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짐이 라니 스스로도 끔찍해서 구역질이 나더구나. 하지만 찬열은 끝끝내 짐을 탓하지 않았다. 짐도 찬열의 죽음을 무색하게 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고. 그런데도 어찌 이리 불안해하십니까? 그래 보이느냐? 다른 사람들은 진왕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기운을 못 차린다고 하지만, 소신이 감히 헤아리건대 폐 하께서는 다른 근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좌장군과 관련 있는지요? 종인은 백현의 눈썰미에 재차 감탄했다. 아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이렇게 혼을 불살라 조정을 원래대로 돌려놨는데도 어쩐지 찬열이 용서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드는구나. 아무리 명예를 드높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죠. 허망한 마음이 폐하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 찬열은 영영 짐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뜻 모를 소리에 백현은 이상한 낌새를 받고도 연유를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종인은 다들 그런 반응이라는 듯 백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뿐이었다. 도 계의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다. 어째서인지요? 도 계의관은 좌장군의 오랜 지기이고, 또 폐하의 정인이 아닙니까? 이야기한들 내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지 않고 경수의 마음도 무거워질 뿐이지. 우리에게 찬열은 어떤 금기와도 같은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 듯해서 백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홍만립과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 누는 경수가 보였다. 기분이 꽤 좋은지 달아오른 복숭아 뺨 위로 헤실헤실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죽은 사람에게 얽매여 있을 순 없진 않습니까? 그냥 이따금 생각나고, 그러면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잘못한 것만 떠올라서 괴로워지는 것이지. 두 분의 우정은 민가에서도 자자합니다. 하지만 황도( 皇 道 )를 걷는데 어찌 희생이 따르지 않겠습니 까? 좌장군은 목숨으로서 폐하를 지켰으니 그분의 죽음이 애석하시거든 선정으로 백성들을 이롭게 하 시면 됩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장군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습니다. 백현이 다시 잔을 채웠고, 맑은 술에 달과 등불이 아른거렸다. 한 잔 드니 온갖 걱정 사라지고, 두 잔 술에 홀연 하늘도 잊었노라. * 심중에 스미는 삿된 것들은 * 도연명, 연우독음( 連 雨 獨 飮 ) 중

467 모두 쫓으시고 오늘 밤만이라도 편하게 즐기시기를. 백현의 능청에 종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기 좀 봐라. 둘이 무슨 얘기를 저리 즐겁게 하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구나. 잔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조금 전 백현이 슬긋 훔쳐봤던 경수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홍만립과 대 작 중이었는데, 홍만립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라도 풀었는지 만면에 흥그러움이 가득했다. 폐하께서는 도 계의관을 보시기만 해도 미소가 번지시는군요. 자각하지 않아서 짐은 잘 모른다. 거울이라도 드릴까요? 놀려도 휘어진 입시울은 내려올 줄 몰랐다. 큰 산도 넘었고, 폐하께서 도 계의관을 지극히 총애하시니 저 친구가 용양군이 되는 것은 시간문 제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계의관에게는 크나큰 영광으로, 하지 않는다. 넌지시 찌른 거였는데 단칼에 잘라서 되레 놀란 백현이다. 도경수가 황제의 용양군이 되는 것은 정 해진 길이었다. 백현도 조만간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경수는 총명하고 유능한 아이다. 용양군이 관직을 그대로 이은 채 천자와 공식적으로 동침할 수 있는 자리이긴 하나 후세에서 그것을 어찌 평가할지 모르는 일 아니냐? 한때 경수를 꼭 용양군으로 만들어 밤낮으로 함께하고 싶긴 했다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오히려 무르는 것이 현명한 자리다. 그리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의 유일한 연인이며, 숨이고, 생명. 그러니 어떤 오점도 남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종인은 그보다 더 심오한 원인에 직면해 있었다. 소신이 한서현에서 도 계의관을 만났을 땐 몹시 피폐해서 금방이라도 숨을 놓을 것처럼 보였습니 다. 지금처럼 저렇게 반짝이지 않았답니다. 짐이 준 상처에 온몸이 찢긴 직후가 아니더냐. 아마 짐에 대한 원망이 깊었을 거다. 도경수는 자신을 능소화라고 여겼을 겁니다. 종인이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봤다. 한 소녀가 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는데 암투에 밀려 죽을 때까지 왕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소 녀는 죽기 전, 담가에 묻히더라도 내일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다고 했지요. 소신은 능소화 전설 속의 소녀를 미련스럽다고 하였는데 도경수는 지고지순한 순정이라 하였습니다. 문득 수년 전에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경수가 울부짖듯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소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신다고요? 무엇을 주려 하십니까? 내명부 첩지입니까? 소 인더러 답답한 궁궐에 갇혀 폐하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능소화라도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때 비유한 능소화의 의미를 여태 몰랐는데 백현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당시 도경수 는 왕의 눈에 들었다가 하릴없이 버려질 자신의 처지가 두려웠을 것이다. 설령 폐하를 원망했다 하더라도 잠시뿐이었겠지요. 그러니 저리 빛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 눈에는 경수가 빛나 보이는가? 무심코 나불거린 말에 무슨 낌새라도 알아챘나 싶어 백현은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는 냉큼 둘러댔 다. 누구보다 폐하의 성총을 받는데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저 빛이 꺼진다면, 역시 짐이 문제겠지?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잘 마셨네. 말없이 미소로 대응하나 싶더니 술잔을 내려놓으며 종인은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 종 인을 시선으로 좇는 백현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468 84. 만행루( 萬 行 淚 ) 날이 더 더워졌다. 빙고에서 얼음을 꺼내 근처에 두고 시원함을 느껴보지만 이른 더위에 다들 괴로 워했다. 이제 막 경연을 마친 종인은 각 처소로 흩어지는 신하들에게 오미자차를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자 신도 돌아가 시원하게 두어 사발 들이켜려 했다. 그런데 회랑을 지나치던 중 그가 나무토막처럼 픽 쓰러져서 모두 혼비백산하였다. 승건궁으로 이어한 지 스무날 만에 황제가 혼절했다. 황후가 대전으로 찾아와 직접 황제의 병시중을 들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런데 내의원에서는 과로라고만 할 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는 의구 심을 감출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승건궁으로 오신 뒤 업무를 줄이셨고 매일 온천욕으로 심신을 다스리셨소. 헌데도 과 로라고 한다면 내의원의 실력이 바닥이라는 증거 아니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이른 더위에 다소 해쓱해지신 것은 사실이나 그 외에 다른 문제로 고통을 호소하신 적이 있으셨는지요? 그건 아니오만. 황후마마께서는 국모이시니 폐하의 용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몇 달 사이에 너무 많 은 일이 있었습니다. 과거 문제까지 얽혀 폐하의 심신이 어느 때보다 쇠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 죠. 또 폐하께서는 체질적으로 열이 많고 조금만 신경 써도 몸에 무리가 가는데 이는 사냥이나 바깥활 동으로 열을 발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올봄에 강무를 나가 신선한 공기와 활동적인 사냥으로 옥체 를 환기하셨어야 했지만 아시다시피 황궁이 어지러워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간 쌓인 여러 문제가 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했다는 뜻이로군. 예. 그러니 조금만 무리해도 피로가 쌓여 이렇게 힘들어하실 수밖에요. 하오니 폐하께서 깨어나시 면 마마께서라도 지금보다 업무량을 더 줄여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의욕적으로 만기친 람하고 계시나 과로가 거듭되면 훗날엔 정말 두려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의학 지식이 전혀 없는 황후로서는 그 말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찬물에 수건을 적셔 황제의 이마 에 얹어주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얼른 쾌차하셔요. 신첩을 혼자 두시면 안 됩니다. 중추원에서 일을 보던 경수는 짬이 나자마자 곧바로 대전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중간에 백현에게 낚여 인적 드문 곳으로 빠졌다. 백현도 소식을 듣고 놀란 모양이었다. 그대는 알고 있었소? 백현이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경수는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 저리되시도록 그대도 몰랐단 말이오? 용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내의원에도 물어봤지만 다들 허로증이라고만 할 뿐 대수 롭지 않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옥체가 온전해도 모자랄 판에 내의원에서 그리 허술하게 나왔단 말이오?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사람은 경수였다. 경계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종인이 정신을 놓을 때까지 알지 못했고, 여전히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른다. 답답함에 어디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은 폐하께서 이곳으로 오시기 전, 소왕을 불러 차기 정국에 대해 논하셨다고 합니다. 뭐요?! 저도 그 얘기를 듣고 나름대로 폐하께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본 거였는데 입단속을 하셨는지 모두 입에 걸쇠를 걸었습니다.

469 마른 침을 넘기던 백현은 장교원에서 종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빛이 꺼진다면, 역시 짐이 문제겠지? 꺼림칙한 말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무리 없이 국사를 살폈고 내의원에서 말리지 않으면 미뤘던 석강 과 야대도 한두 번씩 진행했었다. 그런데 단 스무날 만에 자리에 드러눕다니 너무도 해연했다. 폐하께서 뭔가 숨기고 계신 것이 확실하오. 만약 소왕을 떠본 말씀이 농이 아니라면. 만약 같은 건 없습니다. 폐하께선 누구보다 강건하시니까. 하지만 그 만약을 대비하지 않아 늘 손해 보는 것도 인간이지. 생각하기도 싫은 듯 경수의 눈빛이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지금 대전엔 황후마마께서 드셨다 하오. 마마께는 뭔가 말씀하셨을지도 모르지. 일단 가봅시다. 그러나 도착한 대전에서도 황제의 병명은 단순한 과로라고만 했다. 황후가 정성껏 병시중을 들고 있다고 해서 두 사람은 터덜터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습니다. 폐하께서 쉬쉬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소. 그러니 더욱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만분지일이라도 폐하의 용태가 정상이 아니란 사실이 알 려지면 후사가 없음을 빌미 삼아 계략을 꾸미려는 자들이 나타날 겁니다. 소왕이라고 다르지 않죠. 아예 못을 박는 경수를 보니 소왕과의 사이에서 뭔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소. 허나 이는 감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보위가 달렸으니 종친들을 불러 상의하는 것이 맞소. 경수는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그의 그림자조차 너덜거리는 심정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진정하시오. 폐하께서는 반드시 쾌차하실 거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누구보다 그대가 강해야 하오. 헌데 이렇게 떨어서야. 백현이 손을 뻗어 경수의 마른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경수는 금세 손을 빼내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 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 봐. 그대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걸 주지 못하잖아. 보은하는 법을 모르잖아. 폐하께서 깨시면 반드시 그대를 찾으실 거요. 알아서 잘하겠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차근차근 폐하의 용태를 물어보시오. 일이 심각하거든 삼공들을 불러야 할 테니 그건 내가 어사대부께 말해놓 겠소. 여기서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마오. 돌아가 그대 자리를 지켜. 먼저 가려는 백현의 옷깃을 황급히 붙잡는 경수.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괜찮으실 거요. 폐하께서는 아무 일 없으실 거요. 그제야 안심할 수 있다는 듯 억지로 웃어 보이는데 그것이 더 백현을 가슴 아프게 했다. 자신을 속 이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동시에 자리한 불안이 황궁을 흔들었다. 고모님이 보고 싶소. 금선 고모님을 불러주시오. 비몽사몽간에 떨어진 황제의 말에 황후는 곧장 교안의 금선공주에게 연통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황 제가 깨어나자 내의원은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고 조정은 황제의 환후에 차도가 있는지 궁금해했다. 폐하의 용태는 좀 어떠신가?

470 다행히 고비는 넘겼습니다. 고비를 넘겨? 단순 과로라고 하지 않았나? 따지는 백현에게 뭐라고 둘러댈 말이 없어 어의가 고전하는 중 송기석이 밖으로 나왔다. 그가 어의 에게 눈총을 주자 그자가 다른 곳으로 총총 사라졌다. 조금 전 황후마마께서 내 어머니를 이곳으로 불러들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폐 하께서 부르셨습니까? 어째서 폐하의 환후를 정확하게 아는 자가 없는 것입니까? 마지막 문장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며 송기석은 나지막하게 답하였다. 금선공주님은 폐하께서 부르셨네. 폐하의 용태는요? 괜찮으시네. 업무가 과하고 날이 더워 잠시 혼절하셨을 뿐이야. 고명한 어의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다들 과로라고만 합니까?! 모든 어의가 그렇게 말한다면 당연히 같은 진단을 내렸다고는 생각이 안 되나? 송기석의 반문에 백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종인이 준면에게 보위를 언급했다고 해서 호들갑 떠 는 쪽은 자신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경수의 말에 따르면 종인이 주변 단속을 철저히 해서 모두 발 설을 꺼렸으므로 누구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조정 대신들의 걱정이 심합니다. 부디 폐하의 환후를 정성껏 살펴주십시오. 이를 말인가. 조용히 휴식하셔야 하니 그만 돌아가게. 닷새 후 황제가 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새 수척해져서 신하들이 몹시 우려했다. 종인은 해사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벌써 여러 번 혼절한 전적이 있어서 누구도 쉬이 걱정을 놓지 못했다. 절대적 안정을 취해야 했지만 나랏일이 워낙 많아 그를 모두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래서 오후까지 틈틈이 쉬어가며 중요한 안건부터 차례로 처리하였는데 그마저도 힘에 부쳐서 저녁 무렵에는 거의 파 김치가 되었다. 예전에는 삼경 무렵까지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책까지 읽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 는 업무량을 해냈을 뿐인데도 피로감이 심하였다. 황후가 소주방에서 직접 끓인 인삼탕을 들이켜며 마지막 상소문을 읽은 후에야 종인은 제대로 휴식 할 수 있었다. 해가 무척 길어져 이제야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저녁노을이 단풍잎 처럼 붉고 아름다웠다. 점점이 떠다니는 구름도 앙증맞았다. 하개. 예, 폐하. 짐이 아픈 동안 다른 일은 없었느냐? 아침에도 여쭈셨나이다. 별일 없었습니다. 고모님은 오시는 중이라더냐? 내일이면 도착하실 듯합니다. 비가 오는데도 길을 서두르셨다 합니다. 장마철이군.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먹구름을 살피듯 종인의 시선은 머나먼 창공으로 향하였다. 경수는 다녀갔느냐? 온다면 모양새가 더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폐하 곁은 줄곧 황후마마께서 지키셨습니다. 일리 있는 소리에 종인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 외에는 변 지평이 어사대를 대표해 잠시 다녀갔사옵니다. 그는 창 아래 다보록하게 핀 봉선화를 바라보았다. 푸른색 줄기와 이파리 위로 소담하게 핀 붉은 꽃잎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옆에 핀 보라색 꽃잔디는 이곳의 화원 관리가 다소 엉망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청신은 어디 있느냐?

471 밖에 대기 중입니다. 송 어의와 경수를 불러오라. 봉명하겠나이다. 잠시 후 송기석과 경수가 대전으로 들었다. 종인은 청신과 하개도 함께 들어오라고 했다. 봉 내관이 밖을 통제하였다. 침침하게 불을 밝힌 넓은 실내는 다소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주홍색 불빛이 흔들흔들 춤을 추었고 향로에서는 달콤한 향료를 섞은 안식향이 희멀건 연기를 뿜어냈다. 어쩐지 안개에 휩싸 인 듯한 공간이다. 경수는 뜨거웠던 밤을 보내고 이런 식으로 종인을 마주하게 되어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모두 과로 라고 둘러대지만 종인의 상태가 그보다 심각하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눈빛만 봐도 그 생각을 알 수 있는 깊은 사이. 그는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얼굴이 어찌 그 모양이냐? 경수에게 던진 질문이다. 경수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 단둘이 있을 때완 달리 읍을 하고 답하였다. 폐하께서 혼절하신 후 온 나라가 근심에 빠졌습니다. 소신 또한 폐하의 백성인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 밑도 거뭇거뭇하구나. 밤잠이라도 설친 게냐? 그렇다 한다면 폐하께서 소신의 상태를 걱정하실 테고, 아니라 한다면 폐하에 대한 소신의 충심이 자칫 가볍게 비칠까 우려되니 난처함을 헤아려주소서. 종인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너희를 부른 것은 현재 짐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뿐만 아니라 모두가 짐의 상 태가 어떤지 궁금해하겠지. 허나 조정이 안정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다시 격변과 혼란을 주기 싫 더구나. 청신과 하개, 경수는 불안한 듯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송 어의. 짐의 용태가 어떤지 솔직하게 말해 주어라. 송기석이 한 걸음 나와서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도 계의관은 모르겠지만 폐하께서는 사 년 전, 절양류 중독으로 혼절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 으로 전 주치의 고지산이 파직되고 내의원 의원들도 서서히 물갈이되었지요. 처음 듣는 소리에 경수는 아연실색했다. 소신이 내의원의 수장이 된 후 폐하의 옥체를 면밀히 살폈는데 절양류뿐만 아니라 폐하와는 상극 인 약재까지 써서 아무리 수라와 약을 드셔도 나날이 몸이 마르고 실면증에 시달리실 수밖에 없었습 니다. 교안으로 돌아온 후 고지산이 파면된 이유를 물었을 때 단순히 썩은 물이라던 종인의 변명이 떠올 랐다. 그때는 의심할 생각조차 못 했는데 절양류라는 맹독에 중독돼서 그랬다니 청천벽력 같았다. 그 것은 순혜태후가 의귀비를 죽이려고 수년에 걸쳐 음식과 찻물에 탔던 극약이 아니던가. 경수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질 때, 송기석은 더욱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고지산은 일시적으로 약효를 완화하여 폐하의 용태를 쥐락펴락하여 교묘하게 의심을 피했을 겁니 다. 하지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폐하께서는. 송기석은 너무도 민망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절양류는 산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최악이자 궁극의 독으 로 불립니다. 한 번 중독되면 해독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리죠. 겉보기에는 중독 전과 다름없고 일상생 활도 가능합니다. 다만 몸 안이 몹시 쇠약해져 무리할수록 큰 타격을 받습니다. 청신과 하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두 사람은 종인이 절양류에 중독되었지만 고지산을 파직함으로 써 완전히 해독한 줄로만 알았다. 더구나 늘 붙어 있어서 종인의 상태를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그런 상태가 될 수도 있음을 미리 간파하지 못한 자신들에게 화가 났다. 서론은 필요 없소. 폐하께서는 어떠시오? 하개가 안달하며 물었다. 송기석은 정말 얘기해도 되냐는 듯 종인을 쳐다봤고, 종인은 그러라며 손

472 짓했다. 폐하께서는 어림잡아 최소 삼사 년은 그 독에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친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마수를 뻗었다고 봐야 했다. 그 대목에서 청신은 격분하여 저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더구나 체질과는 상극인 음식과 약을 잡수셨고 친정을 시작하신 후로는 오직 일에만 매달리셔서 용태가 심히 좋지 않사옵니다. 결론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소! 폐하께서는 계속 하혈하시거나 토혈을 쏟으시는데 이는 오장육부가 완전히 녹은 탓입니다. 독기가 뼛속까지 침투하여 더는, 더는 손 쓸 방도가 없습니다. 폐하! 하개가 울부짖으며 주저앉았고 청신은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경수는 온몸이 떨리기 시 작했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고 입술마저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태후가 유폐된 후 종인은 부쩍 소왕을 궁으로 불렀다. 진왕이 죽는 바람에 하나 남은 형제와 우애 라도 다지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종인은 준면에게 차기 보위를 논의하려 했고 준면은 겁을 먹었다. 준면에게 그 얘기를 전해 들은 후부터 경수의 불안은 불씨를 댕긴 장작처럼 타올랐다. 불길이 거세 졌다. 뜨거운 그것은 어느새 화마가 되었다. 어찌하여 소인에게조차 숨기셨나이까! 옥체에 화급이 미쳤는데 어찌 소인에게 일언반구조차 아니 하셨나이까! 흑흑흑! 엎드려 통곡하는 하개를 보며 종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그리 나올 줄 알았기에 숨긴 것이다. 애초에 비밀은 공유하는 것이 아니지. 하오나 종묘사직이 달린 일이옵니다. 아직 젊으신 폐하께서 그 같은 고통을 어찌 홀로 감내하셨사 옵니까? 소인은 믿을 수가 없나이다! 짐인들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받아들였겠느냐? 울지 마라. 미리 경계하지 않은 짐의 탓이니 행여나 네 잘못으로 돌릴 생각도 하지 마. 하지만 하개는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늙은 그에게 자식처럼 아끼고 어버이처럼 따랐던 주군의 안타까운 소식은 참담하다 못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안겼다. 짐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 이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마음이 조급해. 하지만 이런 상황을 밖에 알릴 수는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경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져야 한다는 백현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주저앉아 하개처럼 대성통곡이나 하고 싶었지만 그런다면 종인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질 것이 다. 이미 그에게 너무도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얼굴은 창백할지언정 평소처럼 담담하게 굴었는데 종인도 경수의 마음을 아는지 은은한 미 소를 보내주었다. 모두 짐의 진짜 병명이 무엇인지, 상태는 어떤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허나 명심하여라. 어명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아니 된다. 설령 말이 새어나가더라도 그것은 짐이 차기 보위 를 정한 후여야 해. 구체적으로 말하는 종인이 이제는 잔인하기까지 했다. 청신은 더는 참지 못한 듯 무릎을 꿇으며 외 쳤다. 그런 참담한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전국을 뒤져 명의들을 데려오겠습니다!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자들이 있으니 구륜도의 수장인 고영에게 말한다면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청신은 억장이 무너져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이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부디 심기를 굳건히 하소서! 청신 네가 하개와 함께 짐의 잠저에 들어왔을 때가 스물둘이었던가? 벌써 서른이 훌쩍 넘었으니 오직 흐르는 것은 세월뿐이로다. 그것을 무슨 수로 막겠느냐? 억지로 붙들어 봐야 고통스러울 뿐이 다.

473 잠자코 있던 경수가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 남은 시간은 얼마입니까? 송기석이 또 종인의 눈치를 보려 하자, 의술 하는 사람으로서의 양심조차 없으십니까? 시기를 알아야 조정에서 어떻게 대비할지 확실히 준비할 것 아닙니까? 너무도 냉정한 태도에 하개와 청신은 경수를 다소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설마 그조차 진단하지 못하시는 건 아니시죠? 삼 개월.! 종인이 나섰다. 짐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뿐이다. 송 어의는 최선을 다하였어. 그를 몰아세우지 마라. 삼 개월이라니요? 고작 석 달이라니요! 참다못한 경수가 소리쳤다. 상태가 매우 위독함은 알겠으나 일이 년의 시간은 남은 줄 알았다. 그런 데 겨우 백 일 남짓한 시간만 쓸 수 있다니 하늘도 무심했다. 그 어떤 신의가 살아 돌아와도 짐을 살릴 순 없다. 삼 개월이 짧은 시간인 듯해도 달리 보면 넉넉 하기도 하다. 너희의 마음이 어떤지는 잘 안다. 허나 인명은 하늘에 달렸으니 누구를 탓하겠느냐. 혼자만 마음 정리하면 다인가. 기가 차서 경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폐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심신의 안정입니다. 여러분께서 도와주셔야 폐하께서 그나마 주어진 시 간을 아낌없이 쓰실 수 있습니다. 또 내의원에서도 다른 방도를 찾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경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기분이 었다. 종인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 싶었다. 눈에서 흐르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처참하게 흘러내렸다. 85. 비음( 悲 吟 ) 주위를 물리고 단둘이 남았다. 한참 전부터 멍하게 앉아 있기만 한 경수. 종인은 그의 눈치를 보느 라 어쩔 줄 몰랐다. 화났느냐? 서운한 것이냐? 경수야. 그러지 마라. 제가 돌아왔을 때라도 말씀해 주셨어야 합니다. 고지산의 일을 여쭈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으셨 어야 합니다. 네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다. 폐하께 저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야 당연히, 필요하면 찾고 필요치 않으면 팽개쳐도 좋은 그런 사람입니까? 말이 지나치구나. 짐의 진심을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헌데 어째서 모든 고통을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십니까! 다소 격앙된 투로 일갈하자 종인은 움찔했다. 제가 그렇게나 약해빠진 사람으로 보이셨습니까? 걱정하는 게 싫으셨다니요? 언제든 알려질 사실 인데 나중에 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진다던가요? 그건 아니다만 짐은 네가, 제가 걱정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그러셨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그저 폐하의 마음이 편

474 하고자 그러신 것 아닙니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는데 폐하께서는 어째서.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하자 종인이 일어나 경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경수를 품에 안았다. 짐이 어떤지 알면 넌 무슨 일이든 몸 사리지 않고 뛰어들었을 테니까. 미워하지 마라, 경수야. 짐을 미워하지 말아다오. 정녕 방법이 없습니까? 송 어의가 못한다면 청신 나리의 말씀대로 재야에 숨은 고수를 데려오면 안 되겠습니까? 짐의 상태는 짐이 가장 잘 안다. 제 부탁입니다. 폐하, 그래도 아니 되는 것입니까? 울먹이는 목소리에 종인은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송기석이 사력을 다하고 있음은 종인이 가장 잘 알았다. 괜한 희망을 품었다가 꺾이기를 수차례. 경수에게 그 같은 고통을 안길 순 없었다. 남은 시간을 아끼자. 그리하면 된다. 이기적이십니다. 폐하께서는 정말 무정하고 이기적이십니다. 터트리는 울음에 종인도 기어이 슬픔을 흘렸다. 눈물이 이슬처럼 맺히더니 빗물처럼 무겁게 떨어졌 다. 저더러 어떡하라고. 흐윽. 흐느끼는 경수를 한참이나 안아줬다. 겨우 진정된 그에게 종인은 그 옛날 산막에서처럼 밀화를 풀 어놓았다. 어릴 적에 우리 삼 형제는 비빈들이 낳은 황자들 중 유일하게 봉호와 봉작을 받았다. 아바마마께 서는 준면 형님을 가장 예뻐하셨지만 생모와는 상관없이 종대 형님과 짐도 아껴주셨다. 다른 공주들 은 누리지 못하는 총애를 우리에게는 제법 골고루 나눠주셨지. 밤 부엉이가 울었다. 우린 술래잡기를 즐겨 했는데 마지막으로 했던 것이 벌써 십수 년도 넘었구나. 비가 오려는 듯 바람은 스산하게 나뭇잎을 흔들었다. 준면 형님이 술래였을 거다. 아바마마께서 궁을 비우셔서 우린 더욱 궁 여기저기를 누빌 수 있었 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휘정궁으로 숨어들었는데 병풍 뒤에 서 있자니 갑자기 비빈들이 차를 마시러 들어오더구나. 밖에서는 복도를 밝힌 초 심지를 자르는 듯 가위질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의귀비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 의원들은 고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고 순혜 태후와 내 어머니는 의귀비의 상태를 살피며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았지. 멀어서 자세히 들리진 않 았지만 차기 보위에 대한 얘기였을 거다. 내가 병풍 뒤에서 듣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의귀비는 죽기 전에 순혜태후와 내 어머니께 저주를 퍼부었다. 장씨에게는 자신보다 더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며 자자손손 손가락질받으리라고 했다. 손씨에게는 일찍이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악다구니를 부렸다. 그리고는 두 아들, 종대와 종인의 미래 까지 저주했다.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이 타들어 가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으리라.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과 달리 너무도 끔찍하고 지독한 주문( 呪 文 )이었다. 경수는 놀라기보다는 경멸 의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당한 것이 억울할지라도 어린아이들까지 악담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느껴지 진 않았다. 돌이켜 보니 모두 의귀비의 저주대로 됐더구나. 종대 형님은 독주를 마시고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 다. 짐 또한 내상이 심하여 걸핏하면 위아래서 피를 쏟으니 말이다. 어린 나이에 그런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셔서 마음속에 깊은 상흔이 남으신 겁니다. 진왕과 폐하의

475 일은 의귀비의 저주와는 상관없습니다. 설마 진심으로 그런 미신을 믿는 건 아니시죠? 종인은 무릎을 모으며 선웃음만 흘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신을 싫어하는 그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의귀비가 죽던 모습은 오래도록 종인을 괴롭힌 악몽이기도 했다. 이제는 악몽 때문에 몸이 약해졌는지, 몸이 약해져 악몽을 더 꾸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됐다. 모든 게 모호했다. 짐이 이렇게 된 것은 상관없는데 너와 지낼 시간이 얼마 없음은 두고두고 한이 될 것 같다. 경수 야.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후회하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구나.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너는 늘 짐을 이해해 줬다. 그러니 이번에도 짐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쩜 그렇게 자기만 생각하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빙그레 웃는 종인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 졌다. 아이처럼 웃는 저 얼굴에 무어라고 하겠는가. 지금부터 교지를 쓸 것이다. 다음 보위에 관한 것이다.! 후사가 없어 삼공들을 불러 의논함이 맞지만 그랬다가는 가까스로 안정된 조정에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또 짐은 보위를 논할 때만큼은 원로대신은 믿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막상 일이 닥치면 가문의 이익을 생각해 어떤 정치색을 띨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인은 아주 단호했다. 오래전부터 생각을 굳힌 듯했다. 짐이 직접 적을 것이니 너는 은밀히 가지고 있다가 짐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조정에서 공표하도 록 해라. 알겠느냐? 끝까지 잔인하게 구는 김종인. 그래서 너무 미운데 그는 연의 황제다. 경수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으며 종인에게 지필묵과 옥새를 대령하였다. 먹을 갈아다오. 새카만 먹물처럼 어두운 밤이 깊어만 갔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만안하시고 길상을 누리소서. 예는 됐습니다. 하개, 고모님을 일으켜 드려라. 하개가 금선공주를 부축했다. 그간 편지로만 안부를 주고받다가 거의 십 년 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린 종인은 늠름 한 사내대장부가 되어 있었고, 젊고 어여쁘던 고모님은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중년 여인이 되었다. 맛있는 차와 간식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둘은 입에 대지도 않고 그간 어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폐하께서 정신을 잃으시고 저를 찾으셨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좀 어떠십니까? 안색 이 여전히 좋지 않으십니다. 이른 무더위에 몸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모두 힘써 준 덕분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몇 달 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요. 홀로 감당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금선은 종인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백현만큼이나 훌쩍 큰 조카는 사내의 골격을 갖추었을 뿐 장난기 심하던 어릴 때 모습도 가지고 있 었다. 또 오라비인 효경제와 몹시 닮았다. 금선은 숙비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유일하게 잘한 일 이 있다면 오라비의 분신을 남긴 점일 것이다. 너무 늦게 찾아뵈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시집간 공주는 출가외인이라 황궁 출입이 자유롭지 않죠. 고모님께 기회를 드리지 않은 제 잘못입 니다. 어느새 이리 장성하셔서 헌헌장부가 되셨습니까? 아직도 천둥 치는 밤을 무서워하십니까? 숙비마

476 마가 준 산호 요패를 손에 꼭 쥐고 주무십니까? 고모님도 참. 제 나이가 벌써 스물여섯입니다. 선제께서 보셨다면 참으로 대견하다 하셨을 겁니다. 또 제가 아바마마를 쏙 빼닮았다는 말씀을 하시렵니까? 금선은 미소 지었다. 놀라서 달려오긴 했습니다만 이리 장성하신 폐하를 뵈니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허나 건강이 더 악화하기 전에 잠시나마 정사에서 물러나 쉬는 것이 어떠십니까? 유능한 관리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왕지사 행궁에서 여름을 나게 되셨으니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쉬십시오. 폐하의 안위가 곧 대연 의 안위 아닙니까? 예, 예. 고모님이 그리 걱정하시는데 당연히 따라야지요. 웃음기 가득한 종인을 보니 금선도 안심했다. 오기 전에 백현을 만났을 때는 상태가 너무 심각한 것처럼 얘기해서 가슴을 졸인 참이었다. 고모님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제가 유일하게 기댔던 분입니다. 이리 다시 만나게 되어 진심으 로 반갑고 좋습니다. 저야말로. 너무 늦었지만, 부마도위의 누명을 벗기고 신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씨 가문에 맺힌 천추의 한 을 폐하께서 씻어주셨습니다. 무거운 얘기는 그쯤 하시지요. 황후가 고모님을 위해 점심상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요기부터 해결 하고 저녁에 다시 뵙지요. 고모님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입니다. 예, 폐하. 황후마마께서 어찌나 잘해 주시던지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음식도 맛있고 처소에서 들라며 간 식도 챙겨주셨는데 하나같이 모양이 예쁘고 정성이 가득했답니다. 황후의 음식 솜씨는 궁중 제일입니다. 만족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기품도 남다르시던데요. 옷차림과 장신구가 검소하시던데 그런데도 국모의 위엄이 느껴졌답니다. 과연 명문가 규수답더군요. 온화한 생김새에 주변도 섬세하게 챙기셔서 감탄했습니다. 영회황후와는 달리 상냥하시던데 폐하께서 중궁을 자주 찾으신다면 일월의 복이 가득할 겁니다. 종인은 황후가 금선공주에게 몇 마디 떠들어댔음을 직감했다. 겉으로는 총애에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황후도 여인이다. 지아비가 현수궁을 찾을 때마다 드러내놓 고 좋아하진 않아도 화려하게 내오는 음식이며 시중드는 정성만 봐도 그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황후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비록 정은 없지만, 종인은 스스로도 아내 복이 많다고 여겼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이리 일가를 이루신 걸 보니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변 지평도 혼기를 넘겨 고모님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금선은 안 그래도 골치 아프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간 그 아이가 방황이 심해 혼인하지 않아도 말리지 않았답니다. 조정에 발을 들인 후에는 여러 일이 겹쳐 짬이 나지 않았고요. 저라도 신경 쓸 걸 그랬습니다. 어명이라도 들어먹을 아이가 아닙니다. 하하하. 변 지평이 이퉁이 세긴 하죠. 그래도 올가을에 교안으로 돌아오면 제 뜻에 따라 혼인하겠다고 약조해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래요? 고모님께서 혼처를 구하느라 바쁘시겠군요.

477 시간이 넉넉한 것도 같고, 부족한 듯도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아무래도 한 집안의 안주 인을 들이는 일이고, 차후 곳간 열쇠를 맡겨야 하는데 가문으로만 뽑기엔 무리가 있답니다.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부마도위와 공주의 며느리입니다. 또 변 지평의 지위도 남다르니 가문은 반 드시 살펴야 합니다. 금선은 그러겠노라며 웃음으로 답하였다. 어떤 며느리가 좋으십니까? 변 지평의 고집과 성격을 받아줄 사람이라면 보통내기는 아니어야 할 텐데요. 변 지평은 함께 학문을 논하는 걸 좋아하니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다면 좋겠군요. 글을 많이 아는 며느리는 싫습니다. 여사서나 춘추좌씨전 정도를 읽을 줄 알면 됐지요. 여자는 모 름지기 집안일에 능하고 남편을 위할 줄 알면 됩니다. 백현이도 그런 여인을 좋아할 테고요. 금선은 짐짓 도경수를 의식하며 못을 박았다. 만에 하나 백현이 무의식적으로 실수하여 황제가 자신의 사람을 흠모하는 걸 알아챘다면 지금까지 꺼낸 얘기는 허투루 흘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금선은 황궁에서 나고 자랐으며 남편을 잃으면서 산전 수전을 겪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하고 의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러나 종인은 금선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변백현이 도경수를 좋아한다고 의식한 적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백현이 좋은 사람과 혼인하여 다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종인에게 백현은 신하이기 이전에 금선공주의 아들이요, 사촌 형님이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괜한 것을 물었군요. 폐하께서는 문식 있는 사람을 좋아하시니 당연합니다. 고모님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찻잔을 내려놓으며 종인은 말을 이었다. 제가 한 사람을 좋아해서 그자를 곁에 두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날개가 꺾여 괴로워할 것이 뻔해 서 차마 못 했습니다. 곁에 두신다 하면 내명부 여인이나 용양군을 말씀하시는지요? 빙그레 웃는 종인. 그는 나름대로 조정 소식에 능통한 금선공주가 자신과 도경수의 관계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 연모한 사람인데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평생을 바쳐 연모한 사람이라니 복을 타고났군요. 서로를 지나치게 생각해서 때로는 상처를 주고, 한발 다가가면 때로는 멀어지고. 함께 걷는다 싶으 면 뜻하지 않은 바람이 불어 풍진에 앞길을 더듬기조차 어려웠답니다. 연정을 나누는 모든 연인이 그렇습니다. 한이불을 덮는 부부도 갈등이 생기는데 혈기왕성한 젊은 이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부딪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것이지요. 어떤 일도 배 려와 인내의 고통 없이는 훌륭해질 수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진심을 다해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지만 실은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 다. 폐하 스스로 여쭈어 보십시오. 그 사람을 대하는 데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지요.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않은데 그 사람은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심심상인이라고 하지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두 분이 한마음 한뜻이라면 그런 일로 고민하 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정히 자책감이 드신다면 상대가 가장 행복한 상태로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켜주시면 됩니다. 진심은 반드시 전해지니까요. 종인은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의심만 가득하던 자신의 선택지에 명확한 해답이 보인 기분이 었다. 누구도 도경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넉넉할지는 모르겠다. 고모님께서는 진중하시며 통찰력과 혜안이 뛰어나시죠. 고모님의 조언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폐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밖을 좀 보십시오. 며칠 무덥더니 또 비가 내리는군요.

478 예. 장마철이니까요. 법궁이 아니라 승건궁의 서각에는 볼만한 책이 많지 않았다. 특히 의서는 드물어서 경수는 좌절했 다. 내의원을 못 믿는 건 아니나 그들이 바빠서 혹여 놓친 기록이 있다면 자신이 찾아서 종인의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책을 뒤져도 병을 극복할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요즘 서각에서 자주 보는구려.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온 백현과 마주쳤다. 헌데 어째서 의서만 보는 거요? 혹 그대도 내의원을 믿지 못하는 거요? 나리야말로 내의원의 실력을 의심하시는 모양입니다. 적어도 폐하의 환후가 과로가 아닌 것은 아오. 폐하께선 업무량을 절반으로 줄이셨소. 헌데 내의원 에서 짠 듯이 과로라고만 하니 어느 바보가 곧이곧대로 믿겠소? 저도 의심이 들어 그냥 그들이 놓친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나가시죠. 다소 서늘한 밤이었다. 석등과 처마에 걸어둔 상등만이 미묘한 불빛을 밝혔다. 부슬부슬 가느다란 비가 내렸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경수를 위해 백현이 우산을 들었다. 경수의 어깨가 젖지 않게 우산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서각은 후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현과 경수는 얼마 안 가 때마침 산책을 나온 금선공주와 만났다. 어머니! 신선한 꽃을 들여다보던 금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단번에 아들 옆에 붙은 사람이 그 유명한 도경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옷 젖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들이 우산을 상대 쪽으로 기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조금 전까지 폐하와 담소를 나누었는데 안에 너무 오래 있어서 좀 답답했다. 처소로 가기 전에 산 책이나 하려고 왔는데 뜻밖에 너를 만나는구나. 그러셨군요. 헌데 이쪽은? 짐짓 모른 척하며 경수를 바라보자 경수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공주께 인사 올립니다. 중추원 계의관 도가 경수라 합니다. 백현이 바깥일을 얘기하는 편이 아니라 사귀는 친구나 관리를 잘 모르는데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 네. 성품이 강직하고 총기가 남다르다더군. 과찬이십니다. 내 아들이 워낙 제멋대로라 벗을 사귀기 어려운데 자네가 옆에서 잘 받아준다며 칭찬했다네. 못난 아들을 둬서 여러모로 걱정이 많네만 자네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안심할 만하지. 그리 말씀하시니 낯부끄럽습니다. 지평 나리야말로 소인이 어려울 때마다 물심양면 도와줘서 입은 은혜만 해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사람이 돕고 살아야지 않겠나? 우리 같은 사람이 베풀지 않으면 민심이 흉악해져 살기가 어렵지. 나리께서 공주님의 가르침으로 이리 훌륭한 분이 되셨나 봅니다. 금선은 손사래까지 치며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아들의 칭찬에 춤을 추는 입시울마저 감추진 못했다. 금선공주는 자식 교육과 상벌에 엄격해서 강직하고 쌀쌀맞은 인물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데, 막상 마주하니 소문보다는 부드러워 보였다. 눈매는 영락없이 아들과 똑같았다. 그간 폐하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두 사람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너희 같은 젊은 인재들이 동량이 되어 폐하를 떠받든다면 대연의 미래가 창창할 거다. 아녀자라 조정 일에는 관심 없으시다면서 늘 저리 말씀하신다오.

479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문득 찬 기운이 몰아쳐 금선이 어깨를 움츠렸다. 백현이 얼른 어머니에 게 다가갔다. 바람이 찹니다. 이만 처소로 가시지요. 오늘은 번이 아닌 게야? 서각에 빌린 책을 돌려주고 처소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소자가 모시겠습니다. 도 계의관, 만나서 반가웠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배웅하는데 한참 걸어가던 백현이 돌연 돌아오더니 경수에게 우산을 쥐여 주었다. 가랑비에 옷깃이 젖으면 큰일이지. 쓰고 가시오. 나리는요? 어머니의 우산이 있으니 괜찮소. 그러고는 돌려줄 새도 없이 씩 웃으며 사라져 버렸다. 기름을 먹인 노란색 우산을 보니 홍류원에서 종인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산막에 그대로 두 고 왔는데 오래도록 가지 못했다. 월란과 찬열의 유품에도 먼지가 가득할 텐데 언제쯤이면 그곳에 다 시 갈 수 있을까. 헛헛한 마음은 가눌 길이 없는데 가랑비는 애절한 선율처럼 느릿느릿 쏟아졌다. 경수는 손을 뻗어 빗방울을 느꼈다. 뚝뚝 떨어지는 빗물에 가느다란 울음이 섞어 버렸다. 종인이 보고 싶었다. 86. 차( 嗟 ) 눈 깜짝할 새에 장마철이 물러가자 모래마저 끓어오르는 칠월이었다. 더위를 참지 못하는 종인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땐 옷깃을 걷어 올리고 정무를 봤다. 금선공주가 곁에서 수시로 종인의 상태를 살폈는데 어머니처럼 잘해 줘서인지 근래엔 혈색도 좋아 지고 활기도 넘쳤다. 황제의 병이 낫자 조정은 물 흐르듯이 굴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호숫가에 달빛이 비쳤다. 아른거리는 물안개 사이로 연꽃이 흐드러지게 마지막을 불태웠다. 종인은 정자에 앉아 만개한 물꽃밭을 감상했다. 며칠 후면 칠석이라 예부에서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조금 전에 각 처소와 대신들에게 보낼 선물을 검토해 달라며 예부상서가 찾아와 막 결재를 끝난 후였다. 올해는 어사대와 형부, 순금사가 가 장 수고해서 그들에게 많은 선물이 돌아갈 예정이었다. 요즘 청신 나리께서 자리를 자주 비우신다지요? 흐트러진 종인의 옷깃을 다시 정리해 주며 경수가 물었다. 종인이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했다. 그것 때문에 아주 미치겠다. 짐이 하지 말라는데도 강호의 고명한 의원을 데려오겠다며 구륜도의 수장한테 연락하더니 수시로 궁을 비운다. 시위지신이 주군의 곁을 자주 비우면 도리어 남의 이목을 살 텐데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청신이 은근히 벽창호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그래도 저는 청신 나리가 부럽습니다. 어째서? 폐하를 위해서 발 벗고 나설 무대가 있으니까요. 저는 기껏해야 알지도 못하는 의서를 뒤적이는 것뿐인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을 때까지 숨길 걸 그랬지. 티 내지 말라고 그리 당부했건만 어째서 하나같이 호들갑들이냐. 종인이 볼멘소리를 내뱉자 경수가 낮게 웃었다. 어떤 일은 머리가 시켜서 하고, 어떤 일은 마음이 시켜서 합니다. 청신 나리나 저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조정에서 숙덕거리는 건 어찌 감당하려고?

480 조정은 폐하께서 감당하셔야죠. 전 폐하만 신경 쓰고 싶습니다. 종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턱 내쉬었다. 하루하루 날이 지나갈수록 저는 불안합니다. 그건 청신 나리와 하 공공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폐하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것은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노력이기도 하죠. 하 공공께 들으니 낮에 또 토혈을 하셨다지요? 오냐오냐했더니 하개의 입이 무척 가벼워졌구나. 내 이것을. 폐하께서 이해해 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폐하께서도 나름의 고충이 있으시겠지만 상황 을 아는 저희도 저희만의 고충이 있습니다. 짊어진 무게는 다를지라도 서로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 내 색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말 네게는 이길 수가 없구나. 피로에 젖은 종인은 경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낀 연꽃의 호수는 꿈결처럼 아득한 분위기 를 자아냈고, 풍경에 녹아든 연인은 한 폭의 그림으로 흐르는 시간을 박제하였다. 안심했다. 무엇을요. 네가 생각보다 의연해서. 내색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맙다. 제가 울면 폐하께서 상심하십니다. 알고는 있었느냐? 툭 던지는 핀잔에 경수가 잔잔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까지 너를 괴롭게 할 거다.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십니다. 짐을 원망할 테냐? 사랑에 빠지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가끔 네가 정말 냉정하다고 느낀다. 뭐, 그런 점이 좋긴 하다만. 이럴 때일수록 저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요. 네 말이 백 번 천 번 옳다. 청신이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짐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동네방네 떠벌 리는 꼴이라서 어찌나 조마조마한지 모른다. 황후마마께는 언제 말씀드리실 겁니까. 황후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일국의 국모이자 폐하의 아내십니다. 날벼락은 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황후의 가문은 조정과 깊게 연루되어 말하는 순간 천하가 알게 될 거다. 또 황후에겐 자식이 없으 니 짐의 상태가 이런 것을 알면 곧바로 종친 중에 후계를 물색하려고 나설 테고. 그리되면 짐의 계획 이 틀어지느니라. 폐하의 뜻을 알겠습니다. 종인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경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둘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 다. 그러다 종인이 추은 듯 어깨를 떨었다. 한기가 드십니까? 바람도 아니 부는데 뼈가 시리다. 안아주겠느냐? 그 소리에 경수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종인을 꽉 끌어 안았다. 따뜻하십니까? 화로를 끼고 있는 것보다 좋구나. 사람의 체온만큼 따스한 것은 없죠. 그럼 오늘은 네 체온으로 짐을 따뜻하게 해다오.

481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파악하고 거절하려는데, 가자, 경수야. 짐은 네가 필요해. 도무지 저항할 수 없게 한다. 소왕 전하를 부르셨다고요? 종인은 물수건으로 경수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나 소왕 전하는. 네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나흘 뒤가 칠석이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나 쁜 건 아니지 않으냐? 파정한 흔적과 끈적이는 땀방울을 깨끗하게 닦아준 후에는 직접 속곳과 속적삼을 입혀 주었다. 종 인의 손길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햇볕처럼 다사로웠다. 짐더러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라더니 정작 네가 형님을 의심하는구나. 과거의 얼룩이 모두 지워진 분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당당한 친왕이죠. 더구나 후계자까지 있습니 다. 경계하셔야 합니다. 이 자리는 원래 형님의 것이었으니 넘긴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 떠보려고 하시는 말씀이라도 듣기 싫습니다. 종인의 농지거리에 놀아나고 싶지 않은 듯 경수는 다소 쌀쌀맞게 굴었다. 조금 전까지 교성도 내뱉 기 싫다며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던 자와 동일인물인가 싶을 지경이다. 네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칠석만 나고 바로 돌아갈 텐데 뭐가 그리 걱정이냐?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것 같아서 더 싫습니다. 뭐? 소왕도 가족이 있습니다. 명절에 처자식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건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 니까? 그런데도 부르셨어요. 그건 이번 칠석이 가족과 함께할 마지막 명절이라고 생각하시는 탓 아닙 니까? 중추철도 남았는데 어째서 지금입니까? 어째서 지금 금선공주와 소왕을 폐하 곁으로 부르신 겁니 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실은 삼 개월도 안 남은 거 아닌가요? 경수가 심하게 떨었다. 바들거리는 그의 마른 어깨를 감싸며 종인은 나지막하게 일렀다. 너를 힘들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요! 얼마든지 힘들어도 돼요. 다만 저는 진실이 알고 싶은 겁니다. 폐하께서 제 곁에 얼마나 더 머무실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고요. 머루알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습윤하게 젖어들었다. 종인은 경수의 옷고름을 매듭지으며 담담하게 얘기했다. 삼 개월이든, 육 개월이든, 아니면 그 이상이든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짐더러 이기적이라고 하였 지? 잘 보았다. 짐은 끝까지 너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짐은 짐의 마음이 중요해. 짐만 편하 다면 다른 건 관심 없다. 폐하! 이런 일로 만날 때마다 서로 속만 상하니 네게 말한 게 득인지 실인지 헷갈리는구나. 폐하께서 근심하신다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제 탓이 되겠죠. 그만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은 아셔야 합니다.

482 정말로 저를 두고 가시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경수는 종일 진지하고 심각한데 용서치 않겠다는 말이 귀여운 반항쯤이나 된다는 듯 종인은 푸르르 웃어 버렸다. 네가 화내면 기분이 묘하다. 그 이유가 짐일 때는 더욱. 도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져주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전부 자기 맘대로 할 뿐인 이 남자를. 떠들썩한 칠석 연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수는 중추원 관리들과 칠석 음식을 먹고 여느 때처럼 잔 업을 마친 후 처소로 돌아갔다. 잠시 쉴 틈도 없이 그는 저잣거리의 책방에서 산 의서들을 탐독했는데 역시 종인의 병에 도움이 될 만한 단초는 없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절망적이라 경수는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칠석 연회가 이리 성대한데 자네는 또 서책 삼매경인가? 문밖에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했더니 나리셨습니까? 뭐? 어슬렁? 허허. 이 친구 좀 보게. 뭡니까, 그건? 책을 덮으며 경수가 홍만립의 왼손을 가리켰다. 홍만립은 보따리를 풀며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폐하께서 우리 어사대에만 특별히 하사하신 술과 음식이다. 이건 천리향이라는 거다. 천 일을 묵힌 보리와 꽃잎으로 빚어 향기가 천 리까지 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뚜껑을 여니 과연 처음 맡아보는 신비로운 향기가 풍성하게 번졌다. 고기와 채소로 만든 음식은 보 기만 해도 군침을 돌게 했는데, 한쪽에는 새알을 띄운 흑미죽과 시원한 복숭아화채가 있었다. 흑미를 곱게 갈아서 소화를 돕는 데 아주 좋다는군. 폐하께서 어사대에 술고래들만 있는 것을 아 시고 빈속에 마시지 말라며 식전 음식으로 주셨다. 종인의 섬세함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홍만립은 쉬는 날만큼은 휴식을 취하라며 경수에게 잔 을 권하였다. 일할 땐 반드시 집중해야 하지만 쉴 수 있을 때 쉬지 않으면 오히려 다음 날 업무에 지장을 준다. 또 오늘은 명절이니 가까운 사람과 느즈러지게 마셔도 상관없지. 나리께서는 지독한 애주가시죠. 예문관에 있을 때는 이렇게 마시지 않았어. 너도 어사대에 반년만 있어 봐라. 궁중에서 어사대의 업무량이 제일 많다는 것은 소인도 잘 압니다. 둘은 나란히 잔을 기울였다. 코끝에서 은은하게 맴도는 향이 일품이라 다음 잔을 바로 마시고 싶다 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즐기기 위한 술임이 확실했다. 헌데 이 늦은 시각까지 혼자서 무슨 책을 그리 보았느냐? 흥미로운 책이라면 내게도 추천해다오. 아, 별거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서각에서 서책을 뒤적이는 걸 봤다.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좋다만 좋은 책이 있다면 함께 나눌 줄도 알아야지. 그냥 의서 몇 권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의서? 예. 그런데 의학적 지식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네가 왜 의서를 보느냐? 어디 불편한 데가 있는 게야? 교안에 계신 아버님께 서찰을 받았는데 몸이 조금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증상만 있는 데다 의원 들도 정확한 병명을 몰라 고통을 호소하셨죠. 저런. 네 효심이 지극하구나. 둘러댄 말이 너무도 그럴싸해서 홍만립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날도 더운데 춘부장께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군.

483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부쩍 몸이 약해지셔서 걱정입니다. 집에 사람을 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곁 에서 챙겨주는 아내만은 못하니까요. 재혼이라도 주선해드리려고? 권했는데 아버님께서 싫어하시더라고요. 연로하신 부친을 그리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네 마음이 갸륵하다. 또 한 번 잔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살짝 데친 채소를 곁들어 먹었는데 톡 쏘는 맛이 있어 천리향과 안성맞춤이었다. 폐하께서 술에 어울리는 안주만 보내주셨군요. 입에 머금으니 술은 꽃처럼 흩날리고 안주는 무겁 거나 가볍지 않아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응하여 향과 맛을 돋우니 어사대가 무척 복이 많군요. 폐하의 세심하신 성격 덕분 아니겠느냐. 그러게요. 이번 칠석에 맞춰 금선공주와 소왕 전하를 승건궁으로 불러들이셨으니 두 분께는 또 얼마나 잘하 실지. 폐하께서 정말 많이 변하셨다. 옛일을 회상하는 홍만립은 마치 종인을 옆구리 끼고 키운 아비 같은 표정이었다. 예전에는 마지못해 용상에 앉아 계시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 늘 시르죽은 모습으로 하루하루 국 정을 버티는 모습이셨다. 당신이 그렇다 보니 종친들은 살피지 못하셨고 황실은 점점 각박하게 변해 갔다. 하지만 지금은 저리 늠름하게 국정을 주도하시는 데다 역적을 처단하고 사직을 바로 세우셨지. 뿐 만 아니라 황족까지 챙겨 국가 번성을 꾀하시니 참으로 명군이시다. 홍만립은 종인을 깊이 신뢰했다. 순혜태후의 조정 장악부터 지금까지 지켜보았으니 남다른 존경심 이 생겼다. 헌데 자손이 없어 정말 안타깝군. 폐하께서 너를 아끼신다는 것은 알지만 너도 본분을 지켜야 한 다. 기회가 닿는 대로 말씀 올리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몇 번 혼절하신 일로 조정엔 내심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자칫 폐하께서 후사 없이 붕어하신다면 혼란이 초래됨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그럼 다행이군. 네게 푹 빠져 안중에도 없으신 줄 알았다. 소인을 민망하게 하시네요. 사실 이번에 소왕을 승건궁까지 부르신 것은 의아하다. 중추절을 앞두고 굳이 칠석 연회에 소왕을 부르시다니? 진왕 전하를 그리 보내시고 형제간의 우애에 대해 더욱 깨달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기엔 가족과 함께 보내 마땅한 날에 전하 한 분만 궁으로 오라 하신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 렵구나. 더는 술의 맛도, 향기도 나지 않았다. 경수는 무미건조하게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밤하늘이 어찌나 새카만지 계수나무 위에는 흑공단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조정에 몸담은 지 이제 십 년이 넘었는데 너무 많 은 일을 겪은 탓인 듯해. 생각이 많으면 판단에도 혼란이 오죠. 넌 폐하께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으니 꺼낸 얘기였다. 혹시라도 뭔가 아는 게 있나 했어. 군주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리 총애를 받는 신하라도 진실은 알 수 없는 법이죠. 너도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하겠군. 날카로운 한마디에 경수는 일순 심장이 철렁했다. 말해 주지 않겠다면 굳이 묻지는 않으마. 허나 천자가 곧 대연의 종묘와 사직임을 잊어서는 안

484 돼. 명심하겠습니다. 쨍그랑 부딪친 술잔 소리가 진실을 감춘 고독과 적요를 찢었다. 나를 무척이나 껄끄러워하는군. 직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사람임을 아네. 폐하께서 혼절하셨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진 마당에 전하의 입궁이 달가울 사람은 없을 겁니 다. 폐하께서는 몹시 반겨주시던데. 전하께서 야심가이신 줄은 아직 모르시니까요. 어째서 나에 대한 평가가 그리 박해졌나? 한 번도 전하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한 적은 없습니다. 자네가 날 신뢰하는 척하며 이용했다는 것은 아네. 하지만 그건 내가 부탁한 일이니 나도 할 말은 없지. 또 우리는 나눠 가진 맹약이 있는데 자네는 어째서 그리 불안해하는가? 불안해하기를 바라시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군요. 준면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으니 한 번 더 확인시켜드리죠. 전하의 신분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과연 군총이 하늘을 찌르는 자라 그런지 일국의 친왕에게도 거침없이 말하는군. 사내끼리 한 약속이 아닙니까. 그런 나를 자네가 계속 자극한다는 생각은 아니 하는가? 경수의 미간이 꿈틀했다. 나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데 자네는 지나치게 경계하고 내가 마치 모반이라도 꾀할 것처럼 몰 아세우는군. 이대로 가다가는 없던 역심이라도 만들어야 덜 억울할 판이야. 그리 느끼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나도 여기 오기 싫었네. 칠월칠석에 내 부인과 아이들을 왕부에 두고 혼자 행궁에 나와 있는 게 나라고 달갑겠나? 허나 일개 친왕이 어찌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역하겠는가? 해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을 뿐 이니 그리 책망하듯이 바라볼 필요 없네. 어젯밤 연회의 여파가 조금 남은 모양으로 준면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창백했 는데 이른 아침인데도 옷차림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묻는다면 실례가 되는지요? 폐하께 직접 여쭈어 보면 될 일을. 제왕들의 대화를 한낱 계의관이 어찌 묻겠습니까. 그럼 친왕인 내게 묻는 것은 실례가 아닌가? 무례를 범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째서 답해야 하는가? 소인에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눈치 빠른 준면은 도경수가 뭔가 심하게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네는 꼼꼼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군.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다가는 언젠가 정적들에게 꼬투리가 잡혀 꼼짝없이 당할 걸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소인이 원하는 답은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께 얻지 못하는 답을 내가 함부로 떠들 것이라고 생각했나? 전하의 원한을 벗겨드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만.

485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면 준면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말이 없다. 어쨌거나 경수에게 접근한 것도 자 신이요, 무덤 밖으로 빼내 달라고 애걸복걸한 것도 자신이니 말이다. 가족 연회에서 별다른 얘기가 오갔겠는가. 지난번에 차기 정국 얘기를 꺼내셔서 내심 긴장했네만 다행히 어젯밤에는 그런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네. 이른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직 취기가 깨지 않으신 듯한데 매실을 드시면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볼일이 끝났다고 칼로 무 자르듯 돌아서는 경수를 보며 준면은 낮게 웃었다. 총명한 머리에 비해 어딘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나를 도구로밖에 안 보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방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시중드는 궁녀에게 말린 매실을 가져오게 하였 다. 87. 내여춘몽( 來 如 春 夢 ) 칠석이 지나자 금선공주와 소왕은 곧바로 교안으로 돌아갔다. 소왕이 왔다기에 다른 마찰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던 경수는 그가 조용히 돌아가자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불꽃은 예상치 못한 데서 튀어 올랐다. 칠석 연회가 끝나고 일주일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날, 경연 도중 황제 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벌써 나흘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요양했는데도 정무를 손에서 놓지 않더니 무더위와 겹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탓이었다. 황궁이 크게 술렁거렸다. 황후는 의연하게 견뎠지만 눈물을 막지는 못했고, 조정 대신들은 이대로 황제가 죽을 시 차기 보위를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다. 내의원에서 사력을 다하 여 황제를 돌보고 있었으나 황제가 송장처럼 누워 있기만 하자 불신의 골만 깊어졌다. 삼공들이 차례로 병문안을 다녀간 후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겨우 눈을 떴다는 소식이 들 렸다. 그는 곧바로 경수를 찾았고 황후는 그런 상황에서도 도경수만 찾는 지아비에게 충격을 받은 눈 치였다. 어쨌든 경수는 대전으로 왔다. 서늘한 방 안에 들어서니 황후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듯 이 자리를 떠버렸는데 경수는 그 애타면서도 굴욕적인 심정을 알 듯도 하여 더욱 정중하게 인사를 올 렸다. 안에는 황제의 몸을 돌보려고 가져다 놓은 각종 약재와 의료 도구가 놓여 있었다. 향로에서는 심신 을 안정시키는 향이 연기를 뿜어냈고 열어놓은 창밖으로는 끄물거리는 오후의 하늘이 펼쳐졌다. 하개가 종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굳이 힘들게 몸을 일으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다. 종인은 아주 수척했고 간간이 잔기침을 쏟을 때마다 검붉은 토혈이 쏟아져 상황이 매우 안 좋아 보 였다. 그런데도 흐트러진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며 허리를 펴니 그 자존심을 알만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기력을 아끼십시오. 옥음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담담하게 울리는 경수의 낮은 목소리는 사뭇 매몰차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너무 급작스러워서 그럴 겁니다. 폐하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하개가 묘하게 흐르는 어색함을 타파하려고 급히 둘러댔다. 하개.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느냐? 자리에 누우시면 그리하겠습니다. 고집불통 같으니. 투덜거리면서도 종인은 하개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골 이 녹은 듯 어지러워 죽을 맛이었는데 누우니 한결 나았다. 하개가 나간 후 방 안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촛불만이 움직이

486 는 전부였다. 종인이 다시 잔기침을 쏟았다. 이번엔 피를 쏟진 않았으나 폐가 찢어질 듯 아파 그의 미간은 좀처 럼 펴지지 않았다. 경수는 걱정스럽게 바라볼 뿐, 종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자신이 무능하 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변 지평이 널 많이 좋아하더구나.! 칠석 연회 때 얘기하던 중에 알아차렸다. 변 지평이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있다더군. 고모님이 취중에 실수하셨지. 그럴 분이 아닌데 당신 아들이 장가도 아니 들고 사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경수는 착잡하게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진즉 백현에게 거절 의사를 비치지 않은 자신의 잘못 이기도 했다. 짐은 못 들은 척해서 두 사람은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날 밤에 짐은 잠을 이루지 못했어. 짐은 네가 변 지평을 어찌 생각하는지, 또 경성현과 한서현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관계를 맺 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어쨌거나 넌 지금 짐 곁에 있고 짐은 너를 믿으니 말이다. 하지만 짐도 사 람이라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더구나.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폐하. 수년간 간직한 변 지평의 순정도 대단하더구나. 짐이 오해하여 너마저 의심할까 봐 홀로 줄곧 속 앓이를 했지. 어쩐지 불편한 대화였지만 경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경수야. 듣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변 지평에게 너를 내주라고 하는데 가슴이 시키질 않는구나. 또 너를 물건 다루듯이 누 군가에게 맡기거나 주는 것도 어불성설이지. 영명하십니다. 설령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해도 거절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종인이 피식 흘린 웃음에 꽃물이 밴 듯했다. 언제 또 혼수상태가 될지 몰라 정신이 맑을 때 너를 들라 하였다. 짐이 너를 놓지 않는다고 원망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저 혼자 두고 가시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겉치레가 아닙니다. 경수야. 예. 머리가 조금 아픈데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종인은 눈을 감았고 경수는 부채질해 주며 숨이 꺼져가는 자신의 반쪽이 편히 잠들 수 있게 배려했 다. 숨소리가 지극히 잦아들었을 때, 경수는 무너지려는 것을 억지로 버티며 밖으로 나왔다. 어딘가로 숨어들어 실컷 울고 싶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합니다. 장씨가 끝까지 폐하를 물고 늘어지는군요. 송기석의 말에 청신이 이를 갈며 덧붙였다. 절양류만 아니었다면 한창나이인 황제가 사경을 헤맬

487 일도 없었을 텐데 어두컴컴한 방 안에 누워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어 쩌면 분노일 수도 있다. 죽은 자에 대한 분노, 산 자에 대한 연민. 내의원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다 써 보았습니다만 며칠을 더 늦출 뿐입니다. 서두르십시오. 대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칠석 연회가 끝난 지 며칠 만에 이런 변고라니. 하개가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경수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다음 보위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었는가?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만 만일을 대비하여 친필로 교지를 작성하셨습니다. 오, 불행 중 다행이군. 허나 국법대로라면 비상시에 내리는 보위에 대한 교지는 삼공과 함께 봐야 합니다. 국가대사가 걸 린 일인데 제가 간직하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자네에게 맡겼다면 자격이 있지. 종친 중에 보위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소왕뿐입니다. 청신이 냉정하게 거들었고, 경수가 반박했다. 과거의 오욕을 씻었다지만 어쨌거나 한 번 폐서인되었던 몸입니다. 이 상태로 황위에 오른다면 정 통성 시비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자네는 폐하의 교지를 읽어보지 않았는가? 아직 최악의 상황이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교지를 열겠습니까? 만약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마땅히 삼공과 종친들을 모아두고 공표해야 합니다. 옳은 말일세. 허나 대의를 생각해야 하는 이때 폐하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군. 폐하께서는 필시 여러 요소를 고려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소왕의 태생적 한계를 염두에 두셨다면 아마도. 경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러자 다들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폐하의 뜻과 제 추측이 온전히 맞아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죠. 그래도 폐하께서 자네 말대로 교지를 쓰셨다면 정통성에 휘말리지도 않으면서 폐하께서 할 수 있 는 한 최선을 다하신 셈이지. 도무지 그분의 아량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하개와 청신이 차례로 내뱉었고 모두 동의했다. 지금 당장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없네. 송 어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네. 하개와 송기석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두 사람에게 쉬라고 권하고 싶어도 시시각각 악화하는 황제 때문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수는 다만 소주방에 부탁하여 두 사람이 허기지지 않게 가벼운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 처소에서 머리를 식히는데 백현이 찾아왔다. 그는 상당히 불안해하면서도 열이 뻗친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폐하께서 자리보전하고 계신 지 수일이 지나도록 내의원에서 환후를 잡지 못해 조정에서도 우려가 심하오. 헌데 하개며 청신이며 내의원이며 다들 평소와 다름없이 굴어서 뭐 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소. 그대는 진실을 알 것으로 보는데. 안 그래도 골이 꽝꽝 울리는데 백현마저 화를 쏟자 경수는 너무도 피곤했다. 지난번에 혼절하셨을 때부터 줄곧 이상했소. 헌데 짠 듯이 입을 다물어서 따로 알아낼 방법이 없 었지. 폐하야 조정이 걱정되어 당신의 환후를 숨기신다 해도 어찌 그대마저! 폐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부글부글 열이 끓었지만 백현이 입을 다물자 처소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더는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려드리지요. 폐하의 용태는 나리께서 생각하 시는 것 이상입니다.

488 그,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백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폐하께서 그리 위독하신 거요? 대체 언제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궁의 계략에 당하셨습니다. 중독이라는 두 글자가 백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격분하여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턱 끝이 바르르 떨릴 정도였다. 나리라서 말씀드리는 것이니 그만 진정하십시오. 진정? 진정이라고? 정황을 추측하는 것만으로도 태후에 대한 증오가 끓는데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 요? 화내면 나리의 심기만 상하실 뿐,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대는 폐하의 정인이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찌 침착한 얼굴을 할 수 있소? 이전에도 비슷한 일로 말다툼한 적이 있었다. 윤씨 부인의 부고가 전해지고 경수가 괴로워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백현은 막상 한서현으로 돌아왔을 때 평소와 다름없이 일만 하던 경수에게 화를 냈었 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수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인데 이처럼 평온한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 여태 폐하를 용서하지 못한 거요? 허나 그분께서는 대연의 천자이시자 만백성의 어버이시오! 저더러 강해지라고 하신 분은 나리십니다. 그런데 이젠 속상해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십니까? 제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시는지요?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할까요? 조정 대신들에게 폐하의 환후를 떠들어 대며 미래의 불안감에 대해 함께 공유해야 하나요? 그런 뜻이 아니라, 직언 한마디 올리죠. 나리께선 다 좋은데 감정에 휩쓸리는 점이 유일한 흠입니다. 더 최악은 뭔지 아십니까? 한 걸음 다가오며 경수는 싸늘하게 덧붙였다. 제가 관련한 일이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신다는 점입니다.! 이날까지는 나리께 입은 은혜가 커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십시오. 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섭니다. 나리의 은혜는 늘 뼛속 깊이 새기고 있지만 실은 도경수란 사람은 의리가 뭔지 모릅니다. 왜 또 얘기가 그렇게 흐르는 거요? 부담스럽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무능해서 나리께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순 없지만 만에 하 나 그걸 빌미로 저를 곤란하게 하신다면 저는 나리께 해를 입힐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만. 듣기 싫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소인배가 아니시잖습니까. 제 말을 장난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종인이 백현의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는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 지금은 몸이 안 좋아 그 냥 넘어가지만 예전의 종인이었다면 경수에게서 백현을 떼어놓고자 어떤 조치를 취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렇게 모질어야 더는 자신에게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이다. 아픔은 잠깐이지만 훗날에는 차라리 그때 인연을 끊길 잘했다며 칭찬하는 날이 올 테니. 오늘은 중추원에서 숙직하는 날입니다. 더 볼 일이 없으시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냉정하게 떠나는 도경수가 너무도 미운데 그만큼 사무쳐서 백현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종인은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다. 그러나 며칠째 누워만 있었더니 도리어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더위에 살까지 짓물러 그게 더 고통스러웠다. 욕창이라도 생기면 곤란했으므로 그는 하개의 도움으로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489 지 않아 거동은 불편했지만 앉아서 창밖의 초록색 물결을 바라보는 것은 흡족했다. 어릴 때만 해도 승건궁에 오면 땀범벅인 채로 목욕하느라 궁녀들이 장난 좀 그만 치라고 나무랐었 지. 두 분 형님은 얌전하신데 어째서 나만 천방지축으로 날뛰느냐면서. 그때 짐이 뭐라 한 줄 아느 냐? 글쎄요. 형님들 몫까지 움직이느라 내가 두 배는 더 수고로운 걸 모르느냐고 호통쳤다. 동시에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폐하께서는 유난히 장난이 심하셨죠. 한 번은 당시 동궁이던 소왕의 옷자락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사흘이나 골방에 갇히지 않으셨습니까? 연말에 폭죽 좀 터트렸기로서니 짐도 그 불꽃이 형님의 옷에 붙을 줄 알았겠느냐? 의귀비 마마께서 박장대소하셨던 걸 기억합니다. 도리어 숙비마마께서는 식은땀을 흘리셨는데 말 이죠. 황태자의 용포를 훼손하는 불경을 저질러 어머니께선 아바마마께 꾸중을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셨 지. 골방에서 사흘간 반성하는 걸로 끝난 건 의귀비의 아량 덕분이었다. 예. 암투와는 별개로 의귀비께선 황자들을 골고루 사랑해 주셨지요. 철없지만 순진무구하게 반짝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듯 종인은 한참이나 과거 회상에 잠겼다. 오래도록 이 자리에 있었는데 여전히 정치가 뭔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쓰러져서 정무에서 손을 뗀 요즘이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하다. 그간 너무 많은 일에 시달리셨지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건 누구나 갖는 포부다만 제왕가에서는 천자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지. 그래서 짐은 이제 이 지긋지긋한 자리를 내려오게 되어 무척 기쁘다. 참지 못하고 하개가 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울었다. 짐이 죽었느냐? 어째서 눈물 바람이야? 폐하, 으흑흑. 몸뚱이가 이리된 것은 뜻밖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상황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십 년 넘게 이 자리를 지킨 보람이 없을 거다. 흑흑. 하개, 새 황제를 잘 보필하여라. 그게 싫거든 낙향하여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게 해 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소인은 폐하의 잠저 시절부터 함께하였습니다. 늘 뒤에서 폐하를 모셨지요. 궁에 들어와 반백 년 가까이 지냈지만 폐하만큼 가슴 따뜻하신 분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인의 단 한 분뿐인 주군이십니다. 멋대로 굴어서 널 서운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짐이 헛살진 않 았구나. 좋다. 너도 연로하니 여생은 편안하게 보내야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청신은 네 먼 친척이지. 아바마마께서 홍류원의 시위대 수장을 구하라는 말에 넌 망설임 없이 강 호에 의탁하던 청신을 교안으로 불렀다. 그리고 줄곧 너희 둘이 내 곁을 지켰어. 그러니 청신에게도 뜻을 물어야겠구나. 소인과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걱정이다. 하개가 눈물을 닦은 후 고개를 갸웃했다. 청신은 짐의 시위지신인 동시에 오만 병력의 중앙군 통솔자다. 그런데 갑자기 청신이 사라진다면 중앙군에는 큰 혼란이 일 것이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490 차기 국정이 안정되고 군부가 온전히 그 사람에게 장악될 때까지 청신이 수고해 줘야겠다. 청신에게 폐하의 뜻을 전하지요. 그럼 안심이다. 또 황제의 주치의는 대대로 황제가 붕어하는 시점에 불경죄를 물어 파직당해 유배 를 간다. 허나 송기석은 믿음직하고 해박한 데다 실력도 우수하지. 이런 자를 단 며칠이라도 궁에서 떠나보낸다면 안정되지 않은 조정에서 또 절양류 같은 독극물이 사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어. 송 어의는 충직한 사람이지요. 뜻이 그러하시면 황명으로 송 어의를 보호하십시오. 그러는 게 좋겠다며 종인은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는 일필휘지로 교지 한 장을 써 하개에 게 넘겼다. 조정에 인재들이 많으니 새 황제가 잘 다스리리라 믿는다. 짐이 할 일은 끝난 것 같군. 도 계의관에게 내리시는 윤음은 없으신지요? 그 아이에게 무어라 전할까. 무슨 말을 해도 상처일 텐데. 의연하게 잘 견디고 있습니다. 소인도 궁 생활이 오래라 노련하다면 노련하다 할 수 있는데 어떤 때는 소인보다 더 노회한 현인 같더군요. 그런 아이지. 짐의 안목이 꽤 좋지 않으냐? 소소한 농담에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 피곤하구나. 그동안 제대로 못 쉬었으니 이참에 게으름 좀 피워야겠다. 이쪽으로 누우십시오.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듯이 잠이 들었다. 88. 거사조운( 去 似 朝 雲 ) 두고 보아라. 나는 네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갈 테니. 절양류를 마시기 전 순혜태후는 보란 듯이 경수를 자극했다. 마지막까지 악담을 쏟는 그녀에게 기 가 질렸지만 죽는 마당에 무슨 소리인들 못 할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녀의 마지막 발악이 먹혀드는 듯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이가 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일 것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떻게든 원망의 대상을 찾고자 하는 발악일 수 도 있다. 물론 태후의 음모로 종인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제 와 여죄가 있다며 순 혜태후의 묘를 파헤칠 수도 없어서 경수는 모든 원망과 번뇌를 버리기로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과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경수는 대전으로 향하는 이 걸음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거짓말처럼 무거운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마치 하늘이 자신을 대신해 청승을 떠는 듯하여 오히려 마음은 더 차분했다. 몇 개의 전각과 회랑을 지나 대전에 도착하니 하개의 눈두덩은 퉁퉁 부어 있고, 청신은 칼을 찬 채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변은 여느 때와 다른 구석이 없는데 검은색 지붕에는 짙은 죽음의 그 림자가 내려와 숙연했다. 들어가 보게. 하개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 하나와 응접실, 별실 두 개를 지나니 비로소 대 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침소가 나타났다. 넓은 방에 덩그러니 누운 종인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향료 를 피워서 창문을 열어 환기 중이었는데 행여 체온을 떨어뜨릴까 봐 경수는 곧바로 창문을 닫았다. 덜커덕거리는 소리에 조용히 누워 있던 종인이 눈을 떴다. 향낭의 꽃을 바꿨느냐. 발음이 조금 부정확했다. 목소리도 작았다. 독이 퍼질 대로 퍼져 건강하던 피부색은 밀랍처럼 창백 하였다. 수국이 피었기에 다른 것과 섞어 보았습니다. 음, 향기가 진하지 않고 신선하구나. 맘에 드십니까?

491 안정 효과만 있는 향냄새만 맡았더니 청량감이 든다. 다음에 올 때 폐하 것도 가져오겠습니다. 모양새를 보니 짐이 준 향집노리개인 듯한데. 예. 폐하께서 주신 겁니다. 아직도 가지고 있었느냐? 새것처럼 흠집 하나 없구나. 폐하께서 주셨는데 함부로 대할 수야 없죠. 산호 요패도 그대로입니다. 네가 돌아온 직후 한두 번 찬 것은 봤다만 왜 또 안 하고 다니느냐? 귀한 자리에서 몇 번 찼는데요. 제게 관심이 없어지셨나 봅니다. 괜히 토라진 척하자 종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네게 쏟는 관심의 만분의 일이라도 내명부에 쏟았다면 짐은 주렁주렁 아이들을 달고 있을 거다. 상상조차 안 되는군요. 종인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못 했다. 종인은 건강한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흠잡을 데 없이 윤기 넘치고 생기가 도는 사람이었다. 그런 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사경을 헤매며 죽음 앞두다니 하늘이 무심해도 이렇게 무심할 수 없었다. 꿈을 꿨다.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었는데 흰 배꽃과 매화가 눈보라처럼 휘날리더구나. 햇살은 따스하고 누가 부는지 생황 소리도 들렸지. 무릉도원이 있다면 그곳인가 싶을 정도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니 폐하의 꿈속에 들어가 보고 싶군요. 경수는 여느 때처럼 땀이 많은 그를 위해 부채질해 주었다. 깨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곳은 예전에 청신이 말했던 백창헌이라는 곳 같더구나. 삼사월이 절경이 라는데 너와 함께 가기로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쾌차하시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 쾌차하면. 붉은색 구슬이 달린 주렴 너머로 며칠 전까지 종인이 들여다보던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필시 짬이 나는 대로 또 몸을 혹사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건만. 경수는 속상해서 시선을 거두고는 부채질에만 집중했다. 서늘한 바람 에 종인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다. 많은 말을 해 줄 수 없다. 말이 길어질수록 너는 짐을 잊지 못하겠지. 그래 줬으면 하시는 건 아니고요? 종인이 낮게 웃었다. 다소 공허한 느낌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백창헌에 데려가 주십시오. 지금 상황에선 네가 짐을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부채질하던 경수의 손을 잡아 내리며, 경수야. 나지막하게 부르고는, 짐의 인생은 온통 얼룩뿐인데 유일하게 잘한 게 있다면 너를 만난 것이다. 짐은 네 덕에 김종인으 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렸어.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털어놓는 진심에 경수는 회한에 젖었다. 자신을 늘 치켜세우지만 정작 종인에게 잘해 준 적이 없는 듯해서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동시에 찬열이 죽고 나서 종인에게 던졌던 날카로운 비수들이 생생 하게 떠올랐다. 조금 더 현명하고 세심하게 대응했더라면 후회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또 다른 일로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넌 탁월한 인재이니 조정에 쓸모가 많다. 새로 등극할 황제를 짐처럼 따르며 받들어다오. 어명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만 저를 시기하는 자들도 적지 않으니 조정에는 오래 있지 못할 듯합

492 니다. 누가 감히 너를 시기하느냐? 폐하께서 연촉도 내리시고 시시때때로 고야정으로 불러 밤늦게까지 함께했는데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소인배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재주가 남다름은 천하가 아는 것을. 대단한 재주도 아닌데 매번 칭찬해 주시는 분은 폐하뿐이십니다. 과장은 아니지 않으냐. 부끄럽습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니 버틸 수 있는 한 버텨보겠습니다. 그럼 됐다. 다른 이들이 네가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직을 꿰찼다고 탄핵하려거든 그에 대비하여 교지를 쓰마. 어떠냐? 휴식하셔야 할 때도 늘 장래를 걱정하고 계셨습니까?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시는 것도 병입니 다. 네가 걱정돼서 그런다. 폐하께서 주신 것이니 폐하께서 아니 계시면 제게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 건 나중의 일이니 지 금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소 나무라는 투에 종인은 머쓱하게 웃었다. 또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폐하. 정녕 제게 하실 말씀은 그뿐입니까? 내세가 있다면 그때는 필부로 태어나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구나. 제왕가라 면 지긋지긋해. 골육상쟁도 끔찍하다. 그러니 경수야. 마지막 힘을 짜내듯이 경수의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때 짐이 가진 게 없더라도 다시 만나주겠느냐? 당연한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예의지요. 말만이라도 감동해서 종인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 끝으로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날이 더워 너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그간 날이 궂더니 지금은 비가 옵니다. 그래도 피곤하지 않으냐? 그만 물러가라. 조금만 더 있겠습니다. 황후가 올 거다. 조금만 더요. 고집을 부리는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억지로 내쫓진 않았다. 종인은 눈물범벅이 된 채로 다시 잠을 청하였다. 꽉 붙든 경수의 손도 놓지 않았다. 경수는 그런 종 인의 손에 뺨을 비비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백창헌에 가요. 그런 뒤 명주의 연꽃 정원을 보러 가는 것은 어떠십니까? 가을 겨울에는 만년설이 내린 운악산으로 모실게요. 찬열이 다녀온 적이 있는데 오월까지 눈이 녹지 않아 향나무에 핀 눈꽃과 새하얀 자작나무가 절경이라 합니다. 시시각각 잦아드는 숨결에, 저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데려가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경수는 하염없이 종인을 바라보았고, 다정한 손끝으로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정리해 주었다. 저를 데려가 주셔야 해요.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잘생긴 얼굴 위로 분명하게 떠올랐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웠다. 그러나 이렇게 똑바로 얼 굴을 들여다본 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493 볼수록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나의 태양. 좋은 꿈 꾸십시오. 마치 내일이라도 다시 만날 것처럼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고,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경수는 허무하고 먹먹한 마음을 잠재우 지 못했다. 그는 처소로 돌아와 오래도록 어둠 속에 자신을 맡겼다. 종인이 건넸던 무수한 다정함이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모르겠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무미건조하고 눅눅한 빗속의 밤. 삼경이 훌쩍 지나 새벽으로 넘어가는데 끔찍한 적요를 깨며, 상위복( 上 位 復 ) *! 상위복! 상위복! 황제의 붕어를 뜻하는 스물일곱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병부와 중앙군, 황궁 시위대는 도성과 행궁의 경계를 삼엄하게 강화하였다. 예부에서는 급작스러운 황제의 붕어에 당황하면서도 전례대로 침착하게 국장 준비를 해 나갔다. 그리고 급하게 연락을 받은 종친과 대신들이 속속 승건궁으로 모였다. 문무백관이 빈전에 절을 한 후 곡소리를 냈다. 활기차던 행궁에는 하얀 휘장과 상복을 입은 궁인들 로 즐비했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오가 막 지났을 때, 경수는 종인이 남긴 두루마리를 중추원 수장인 첨원사에게 넘겼다. 첨원사는 조정 대신과 종척들이 모인 정전에서 차기 보위에 대한 성지를 공표하였다. 소친왕의 아들 공군왕 김명하는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에 뜻이 깊으며 효를 중요시하고 웅지가 남 다르니 하늘과 백성의 뜻에 따라 대연의 종묘와 사직을 받들라. 아울러 황후 정씨의 정치 참여를 엄 금할 것이나 공왕의 생부인 소왕을 섭정왕으로 봉하며 사도 민기평, 태위 지융경, 사공( 司 空 ) ** 유철을 고명지신( 顧 命 之 臣 ) *** 으로 삼아 국정 운영을 원활하게 하라!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김준면은 유일한 성인 황자로서 보위를 이을 유력한 후보였지만 내막과는 상관없이 과거에 구설수 에 휘말린 데다 종법에 따르면 같은 항렬에서는 후계자를 뽑을 수 없었다. 이에 다음 세대인 공왕을 황제로 임명하면서 종법의 모순을 해결하고, 원래 준면에게 돌아갔어야 할 자리를 어린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돌보게 함으로써 상쇄하였다. 그러면서 준면이 혹시라도 권력 을 탐하여 아들을 압박할까 봐 삼공을 내세워 서로 견제하게 했다. 실로 신권은 분산되면서 어린 황제가 황제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성지가 발표되자마자 예부에서 수월당으로 용포와 면류관 등을 준비해 전령을 띄웠다. 마침맞게 풍 한에 걸려 며칠을 앓아누웠던 준면은 황제가 붕어했단 소식을 듣기 무섭게 아들을 황위에 세운다는 얘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섭정왕으로 삼아 명하가 친정하기 전까지 나랏일을 맡길 줄은 몰랐다. 그 자리를 한 순간이라도 탐내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으나 이런 식으로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이 부분에서 준면은 종인에게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김종인. 문득 시선을 드니 칠석 때 종인이 하사한 병풍이 보였다. 신선들이나 살 법한 절묘하고 신비한 무 릉도원이었다. 종인은 저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살고 싶었던 것일까. 준면은 착잡하게 금색 두루마리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상자에서 경수와 나눠 가졌던 각서를 꺼내 불에 태웠다. 재가 날리며 종이는 활활 타올랐다. 모든 것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 왕의 영혼더러 다시 돌아오라는 말 ** 정일품. 삼공 중 하나로 토지와 민생 담당 *** 왕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대신

494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고, 공제( 公 除 ) * 기간이 끝난 후 마침내 윤정 황제의 능이 세워졌다. 갑작스러 운 죽음이었기에 능을 조성하는 시간이 촉박했지만 수개월이 걸리진 않았다. 이름은 헌릉( 獻 陵 )이었 다. 이부에서 삼 년간 황릉을 지킬 수릉관( 守 陵 官 ) ** 으로 누구를 뽑을지 의논했다. 이에 도경수가 자청 하고 나서자 반은 이해한다는 반응이었고 반은 의외라고 여겼다. 연수도 어느덧 열다섯이었다. 경수는 연수를 앉혀놓고 아버지를 잘 보살펴야 한다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연수는 머리가 큰 만큼 제 형을 이해했고 그러겠노라고 답하였다. 가족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오니 백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안의 가을 햇살은 수더분하 게 차려입은 백현을 황금색으로 감싸 안았는데 꼭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소.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수릉관으로 떠난다니 믿기지 않소. 마지막까지 도리를 다해야죠. 많이 수척해졌구려. 교안으로 돌아온 이후 줄곧 보지 못했는데 무척 해쓱하오. 마음이 헛헛합니다. 뭘 삼켜도 쓰기만 하니 먹는 보람이 없죠. 나리께서도 살이 많이 내리신 것을 보니 맘고생이 심하신 것 같은데요. 폐하께서 그리 갑작스레 가시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소. 조국이 백 년 대들보를 잃었으니 연의 백 성으로서 상심할 수밖에. 따라붙는 한숨에 종인을 존경하며 따랐던 지난 시간이 가득하였다. 참. 갑자기 능주의 백창헌이라는 곳이 황실의 이름으로 금지 구역이 되었던데 사람들이 그대 때문 이라고 하더군. 그대가 그걸 금지로 만들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걸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오. 소문과 사실의 경계가 모호하니 늘 조심해야 하죠. 선제께서 살아생전 당신께서 죽으면 바로 그곳을 금지로 만들고 허락한 사람 외에는 누구도 들이 지 말라고 하셨다 하오. 황실에서는 고인의 유언이니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고. 복잡한 절차나 사정 같은 건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뜻이 있으셨으니 그리하셨겠지요. 능주의 백창헌. 춘색이 사방으로 뻗치면 백매화가 천지를 뒤덮어 돌부처도 감상적으로 만든다는 별 세계 같은 곳이다. 또 종인과 가기로 약속한 곳이기도 하다. 경수는 백현이 더는 그 일에 관심을 두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공주께서 아쉬워하진 않습니까? 무엇을 말이오? 선제의 국상으로 삼 년 뒤에나 혼례를 치르셔야 할 거 아닙니까. 명문가 규수를 물색하셨다고 들 었습니다만.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또 오늘 혼인하든 십 년 뒤에 하든, 서로 진심이라면 시기는 중요치 않은 것 아니겠소? 정화수 한 사발을 떠놓고 해도 진심만 있다면 말이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거리가 가깝다면 다른 건 헤아릴 필요가 없죠. 경수는 투레질을 해대는 말에 봇짐을 실었다. 떨어지지 않게 단단하게 매어두었다. 어쩐지 이번에 가면 두 번 다시는 그대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소. 나리께서 저를 만나러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을 것 같구려. 어리신 폐하께서 어찌나 나를 좋아하시는지. 농담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폐하께서 붕어하시기 전에 그대에게 보위에 대한 교지를 넘겼다 들었소. 다들 그대가 생각한 사람 과 금상이 동일인물인지 궁금해하더군. 그대와 폐하는 눈빛만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이였으니 * 왕이 죽은 후 일정 기간 업무를 중지하는 일 ** 왕과 왕실의 무덤을 지키던 벼슬

495 까. 같은 사람입니다. 역시. 조정에서는 소왕을 유력한 후보자로 봤는데 과연 그대와 폐하께서는 통찰력이 남다르오. 나리께서도 같은 선택을 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나? 정쟁이라면 지긋지긋하니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군.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어대는 것이 꼭 털이 수북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서른인데도 백현은 여전히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종종 연수를 보러 가도 되겠소? 그래 주시면 오히려 제가 고맙죠. 글 선생이신데 그런 것까지 제 허락을 얻으십니까? 묻는 것이 예의니까. 언제든지요. 다만 학당에서 기숙하니 오시려거든 늘 연통을 보내고 집에 있는지부터 확인하십시 오. 그리하리다. 이제 가야 합니다. 돌아올 거요? 경수는 미소만 머금을 뿐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거요? 돌아오시오. 하개도 떠나고 청신만 남은 궁은 재미가 없단 말이오. 어차피 친하지도 않으셨으면서. 추억거리 하나 나눌 사람이 없다는 뜻이오. 홍만립 나리가 계시지 않습니까? 에이, 아무리 친하다 해도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는 한계가 있지. 업무의 연장선 같거든. 종인이 떠난 이후 이렇게 연달아 웃어본 기억이 없었다. 몇 달 동안 잃어버렸던 웃음을 백현이 되 찾아 주었다. 정말로 가야 합니다. 알겠소. 더는 붙잡지 않으리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왜 마지막인 것처럼 인사하는 거요? 삼 년 후에 다시 돌아오라니까. 성문까지 배웅해 주고 싶은데 병부에서 비리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요즘 폐하도, 어사대도 신경이 곤두섰다오. 그만 들어가 봐야겠소. 네. 더 늦기 전에 서두르십시오. 말갈기를 쓸어주는 경수에게 백현이 조용히 말하였다. 몸조심하시오. 낯선 땅에서 혼자 능을 지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 제 몸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그대는 변함없이 쌀쌀맞고, 변함없이 이성적이며, 또 변함없이 다정하오. 그런 그대를 오래도록 연모했소.! 알고 있었을 거라고 보는데. 갑작스러운 고백에 경수가 눈만 깜박거리자 백현이 킥킥 웃었다. 당황했구려. 그런 표정 때문에 늘 그대를 놀리고 싶었다오. 다음에 볼 땐 내 옆에 처음 보는 꼬마가 있을지도 모르오. 그대를 숙부라고 소개할 테니 내 아이 에게 잘해 줘야 하오.

496 나리를 닮으면 장난이 심하겠군요. 또 무척 총명할 테고요. 에이, 끔찍한 소리 마시오. 백현이 질색하며 덧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날 닮지 않았으면 좋겠소. 늘그막에 어머니께서 손자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은 보 기 싫소. 나 같은 애가 변씨 가문에 둘이나 있다? 저승에 계신 아버지께서 뒷목 잡고 쓰러지실 일이 지. 끝까지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 전형적인 변백현이었다. 또 이렇게 마지막을 유쾌하게 헤어질 수 있 게 하는 것도 변백현뿐일 것이다. 그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조금도 갚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러 나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둘은 서로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경수는 말에 올라탔고, 백현은 반대쪽으로 걸어갔 다. 둘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점과 점이 될 때까지 둘은 끝까지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울긋불긋한 단풍 일색인 교안의 가을이 저물어 갔다. 나오는 글 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노승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비범한 청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리 굴곡진 인생을 살았을 줄 은 몰랐다. 그것도 현군이라 일컫는 윤정제의 사람이었다니. 원치 않았지만 조정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점점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방패가 되어준 사람이 그분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영영 인간의 마음을 잃고 절망 속에서 살았겠죠. 이젠 잊을 과거에 불과하겠구려.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잊고 싶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일이라면 과거의 인연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없었겠지. 청년은 낮게 웃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가 다소 요란하게 들렸다. 다시금 바람이 문풍지를 뒤흔들었는데 전형적인 한겨울의 풍경이었다. 극락에 가고 싶습니다. 앞길 창창한 젊은이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니군. 극락이어야 해요. 그분께서는 필시 그곳에 계실 테니까. 아무도 모르지. 사후 세계가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으니 말이오. 참선하여 열반에 오르라는 말씀입니까? 불법을 오래 닦았다오. 머리카락이 나고부터 배운 거라고는 줄곧 그것뿐인데 달리 무슨 말을 하겠 소? 청년의 나른한 입매가 다시금 휘어졌다. 속내를 털어놓고 나니 이전보다 한결 편해진 인상이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는구려. 이런데도 굳이 가야겠소? 눈이라도 그치면 길을 잡는 게 좋을 텐데. 가야 합니다. 지금도 너무 늦었습니다. 노승은 말없이 일어나 털신 하나를 가져왔다. 살려준 대가는 해야지. 초라하다고 흉이나 보지 마시구려. 귀한 물건입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보은할 기회를 앗아가는 것도 도리는 아니오. 차 맛이 좋습니다. 계수나무 향이 나는군요. 안목이 있구려. 한 잔만 더 주십시오. 대가는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부드럽게 생긴 것과는 달리 고집스러운 청년이다. 하기야 그렇기에 그리 험악한 일을 겪으면서 버

497 텨낸 것 아니겠나. 노승은 정성을 다하여 차를 우렸다. 새빨간 숯 위로 불티가 날렸고 금세 바글바글 끓은 찻물이 청 년의 찻잔 속으로 부어졌다. 청아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했다.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삼 년 동안 황릉을 지켰더니 몸은 쇠약해졌고 행색도 볼품없었다. 그래도 때 가 되면 집과 황실에서 돈과 옷을 보내줘서 큰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다만 무얼 걸쳐도 거추장 스럽고 무얼 먹어도 입에 맞지 않아 스스로 몸을 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눈보라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런 산속을 헤매는 것은 위험하다며, 마지막으 로 들렀던 암자의 주지는 몇 번이고 경수를 말렸다. 이곳에서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난 겁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경수는 빙그레 웃으며 암자를 벗어났는데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홍매화가 눈앞에 아른거렸 다. 마치 홍류원의 그것과 같아서 경수는 이것이 재회로 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했다. 발목까지 잠기는 눈밭을 헤치고 몇 시간에 걸쳐 산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돌아가며 삼엄 하게 지키는 초소를 찾았다. 드디어 백창헌에 도착했다. 경수는 얼어버린 몸을 억지로 이끌어 문지기들에게 다가갔다. 문지기들 이 앞을 가로막았다. 도경수라 하오. 그가 산호 요패도 함께 보여주자 문지기들이 창을 거두었다. 선제가 발을 들여도 좋다고 허락한 유 일한 사람이 마침내 나타나자 문지기들도 보람을 느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찾을 수도 없는 금지를 지키는 게 너무 지겹던 참이었다.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지만 눈이 쌓인 백창헌은 백매는커녕 풀 한 포기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러나 관리를 잘해서 정원은 깨끗했고 봄이면 확실히 백색 절경을 이룰 듯했다. 경수는 온몸이 얼어 뼈 마디마디가 쑤셨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장 큰 나무 아래로 향하 였다. 가지에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희미한 실바람에도 눈가루가 햇볕에 반짝이며 아름답게 부서 졌다. 서두르길 잘했다. 이렇게 청미한 풍경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는 오래도록 매화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난 세월을 되새김질했다. 노승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세세한 기억 하나하나가 전부 되살아났다.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종인의 손과 뜨거웠던 체온도 떠올랐다. 비로소 눈물이 솟구쳤다. 종인이 죽던 순간에도, 헌릉을 지켰던 삼 년 동안에도 단 한 번 흘리지 않 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는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매정할 정도로 괜찮아 보였던 그가 실은 몇 번이고 마음속의 자신을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 다. 연수가 열여덟 살이 됐어요. 저희 형제가 조정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올해 소과에 입격해 내년이면 태학관에 들어간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경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끄물거리던 하늘이 새파란 능라금수를 뽐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동을 끝내지 못한 철새 떼가 날아갔다. 말하지 못했는데, 폐하께서는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십니다. 그는 담담하게 품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조정에 더 있으라고 하셨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폐하께서 주신 것이니 폐 하께서 안 계시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어찌나 날이 벼리게 갈았는지 칼날로 나비의 날개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찍 왔다고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저도 피곤해요. 너무 지쳤죠. 그리고는 거리낌 없이 가슴에 찔러 넣는데 해괴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새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일 뿐, 어떠한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498 종인이 죽던 순간부터 자신의 마지막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경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기고도 마지막 그림이 이렇다면 차라리 영광 아니겠나. 왜 하필 소인입니까? 같은 질문에 너는 제대로 답할 수 있느냐? 소인에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폐하의 그림자가 되고 싶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 다.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것이 싫다더니 그림자를 청하느냐? 태양 아래선 모든 것이 떳떳하지 못하죠. 그림자는 태양이 만드니까요. 뜨거운 피가 작약처럼 화사하게 피었다. 점점이 흩어진 핏방울은 흡사 흩날리는 홍매화의 꽃잎 같 기도 하였다. 금원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무색하건만, 너만이 궁중의 해어화에 맞서는구나. 새빨간 눈밭 위로 쓰러지며 경수는 손에 쥔 산호 요패를 어루만졌다. 이것이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우린 한마음이라고 하셨지요. 그림자는 태양을 따릅니다. 이제 영원 히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는 깨끗하게 미소 지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멀리서 삭풍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루가 흩어지는 새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백창헌의 눈밭 정원. 그 한가운데 핀 붉은 꽃 잎 위에서 청년은 기나긴 잠을 청하였다. 몽중의 연인을 찾으려는 듯 벅찬 표정이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통합 우리나라 ⑵ 조상님들이 살던 집에 대 해 아는 어린이 있나요? 저요. 온돌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했어요! 네, 맞아요. 그리고 조상님들은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았어요. 주무르거나 말아서 만들 수 있는 전통 그릇도 우리의 전통문화예요. 그리고 우리 옷인 한복은 참 아름 답죠?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바지와 조끼를 입어요. 명절에 한복을 입고 절을

More information

상품 전단지

상품 전단지 2013 2013 추석맞이 추석맞이 지역우수상품 안내 안내 지역우수상품 지역 우수상품을 안내하여 드리오니 명절 및 행사용 선물로 많이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경기동부상공회의소 임직원 일동 -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More information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시 민 문서번호 어르신복지과-1198 주무관 재가복지팀장 어르신복지과장 복지정책관 복지건강실장 결재일자 2013.1.18. 공개여부 방침번호 대시민공개 협 조 2013년 재가노인지원센터 운영 지원 계획 2013. 01. 복지건강실 (어르신복지과)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More information

2

2 1 2 3 4 5 6 또한 같은 탈북자가 소유하고 있던 이라고 할수 있는 또 한장의 사진도 테루꼬양이라고 보고있다. 二宮喜一 (니노미야 요시가즈). 1938 년 1 월 15 일생. 신장 156~7 센치. 체중 52 키로. 몸은 여윈형이고 얼굴은 긴형. 1962 년 9 월경 도꾜도 시나가와구에서 실종. 당시 24 세. 직업 회사원. 밤에는 전문학교에

More information

ÆòÈ�´©¸® 94È£ ³»Áö_ÃÖÁ¾

ÆòÈ�´©¸® 94È£ ³»Áö_ÃÖÁ¾ 사람 안간힘을 다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 허세욱을 그리다 - 허세욱 평전 작가 송기역 -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원 허세욱.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 해 미국은 사죄하라는 투쟁의 현장에 서 그 분을 처음 만났다. 평택 대추리 의 넓은 들판을 두 소녀의 목숨을 앗 아간 미군들에게 또 빼앗길 순 없다며 만들어 온 현수막을 대추초교에 같이 걸었다. 2007년

More information

歯1##01.PDF

歯1##01.PDF 1.? 1.?,..,.,. 19 1.,,..,. 20 1.?.,.,,...,.,..,. 21 1,.,.,. ( ),. 10 1? 2.5%. 1 40. 22 1.? 40 1 (40 2.5% 1 ). 10 40 4., 4..,... 1997 ( ) 12. 4.6% (26.6%), (19.8%), (11.8%) 23 1. (?).. < >..,..!!! 24 2.

More information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제3편 정 치 제3편 정치 제1장 의회 제1절 의회 기구 제2절 의회기구 및 직원 현황 자치행정전문위원회 자치행정전문위원 산업건설위원회 산업건설전문위원 제1장 의회 321 제3절 의회 현황 1. 제1대 고창군의회 제1대 고창군의회 의원 현황 직 위 성 명 생년월일 주 소 비 고 322 제3편 정치 2. 제2대 고창군의회 제2대 고창군의회 의원 현황 직 위

More information

120229(00)(1~3).indd

120229(00)(1~3).indd 법 률 국회에서 의결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을 이에 공포한다. 대 통 령 이 명 박 2012년 2월 29일 국 무 총 리 김 황 식 국 무 위 원 행정안전부 맹 형 규 장 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관) 법률 제11374호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 공직선거법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21조제1항에 단서를 다음과 같이 신설한다. 다만,세종특별자치시의 지역구국회의원

More information

01Report_210-4.hwp

01Report_210-4.hwp 연구보고서 210-4 해방 후 한국여성의 정치참여 현황과 향후 과제 한국여성개발원 목 차 Ⅰ 서 론 Ⅱ 국회 및 지방의회에서의 여성참여 Ⅲ 정당조직내 여성참여 및 정당의 여성정책 Ⅳ 여성유권자의 투표율 및 투표행태 Ⅴ 여성단체의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운동 Ⅵ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향후 과제 참고문헌 부 록 표 목 차 Ⅰ 서 론 . 서론 1.

More information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총선 이후 우리 교육의 방향 당 체제에서 우리 교육의 전망과 교육행정가들의 역할 박 호 근 서울시의회 의원 교육위원회 위원 서론 년 월 일 제 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는 바로 민의 의 반영이기 때문에 총선결과를 살펴보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가를 분석해 본 후 년 월 일을 기점으로 제 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시 작되는 상황에서 우리 교육이 어떻게

More information

목 차 營 下 面 5 前 所 面 71 後 所 面 153 三 木 面 263 龍 流 面 285 都 已 上 條 367 同 治 六 年 (1867) 正 月 日 永 宗 防 營 今 丁 卯 式 帳 籍 범례 1. 훼손 등의 이유로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기함. 단, 비정 이 가능한 경우는 ( ) 안에 표기함. 2. 원본에서 누락된 글자는 [ ] 안에 표기함. 단, 누락된

More information

639..-1

639..-1 제639호 [주간] 2014년 12월 15일(월요일) http://gurotoday.com http://cafe.daum.net/gorotoday 문의 02-830-0905 대입 준비에 지친 수험생 여러분 힘내세요 신도림테크노마트서 수험생과 학부모 600명 대상 대입설명회 구로아트밸리서는 수험생 1,000명 초대 해피 콘서트 열려 구로구가 대입 준비로 지친

More information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1 361호 [별책 3] 중학교 교육과정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2 와 같습니다. 3.

More information

시험지 출제 양식

시험지 출제 양식 2013학년도 제2학기 제1차 세계사 지필평가 계 부장 교감 교장 2013년 8월 30일 2, 3교시 제 3학년 인문 (2, 3, 4, 5)반 출제교사 : 백종원 이 시험 문제의 저작권은 풍암고등학교에 있습니다. 저 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전재와 복제는 금지 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3. 전근대 시기 (가)~(라)

More information

177

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More information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여는말 풀꽃, 제주어 제주어는 제주인의 향기입니다. 제주인의 삶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삶의 향기이고, 꿈의 내음입니다. 그분들이 어루만졌던 삶이 거칠었던 까닭에 더욱 향기롭고, 그 꿈이 애틋했기에 더욱 은은합니다. 제주어는 제주가 피워낸 풀잎입니다. 제주의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비바람 맞고 자랐기에 더욱 질박합니다. 사철 싱그러운 들풀과 들꽃향기가

More information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정보나눔 섭이와 함께하는 여행 임강섭 복지과 과장 여름이다. 휴가철이다. 다 들 어디론가 떠날 준비에 마음 이 들떠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여행 매니아까지는 아니 지만, 나름 여행을 즐기는 사 람으로서 가족들과 신나는 휴 가를 보낼 계획에 살짝 들떠 있는 나에게 혼자만 신나지 말 고 같이 좀 신났으면 좋겠다며 가족들과 같이 가면 좋은 여행 눈이 시리도록

More information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우리 시의 향기 사랑하는 일과 닭고기를 씹는 일 최승자, 유 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문학평론가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More information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80 < 관용 표현 인지도> 남 여 70 60 50 40 30 20 10 0 1 2 3 4 5 6 70 < 관용 표현 사용 정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4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5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6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70 < 속담 인지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1 2

More information

6±Ç¸ñÂ÷

6±Ç¸ñÂ÷ 6 6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과천심상소학교 졸업증서(문헌번호 03-004) 일제강점기 과천초등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장이었던 맹준섭임을 알 수 있다.

More information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More information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07 1.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07 10 12 16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9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More information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해제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이 자료는 한말의 개화파 관료, 김윤식 金 允 植 (1835~1922)이 충청도 면천 沔 川 에 유배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문 傳 聞 한 것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책 이다. 수록한 부분은 속음청사 續 陰 晴 史 의 권 7로 내제 內 題 가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로 되어 있는 부분 가운데 계사년 癸 巳 年

More information

조선왕조 능 원 묘 기본 사료집 -부록 : 능 원 묘의 현대적 명칭표기 기준안 차 례 서 장 : 조선왕실의 능 원 묘 제도 11 제 1부 능 원 묘 기본 사료 Ⅰ. 능호( 陵 號 ) 및 묘호( 廟 號 )를 결정한 유래 1. 건원릉( 健 元 陵 ) 21 2. 정릉( 貞 陵 ) 22 3. 헌릉( 獻 陵 )

More information

E1-정답및풀이(1~24)ok

E1-정답및풀이(1~24)ok 초등 2 학년 1주 2 2주 7 3주 12 4주 17 부록` 국어 능력 인증 시험 22 1주 1. 느낌을 말해요 1 ⑴ ᄂ ⑵ ᄀ 1 8~13쪽 듣기 말하기/쓰기 1 ` 2 ` 3 참고 ` 4 5 5 5 ` 6 4 ` 7 참고 ` 8 일기 ` 9 5 10 1 11, 3 [1~3] 들려줄 내용 옛날 옛날, 깊은 산골짜기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 이

More information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조 례 익산시 조례 제1220호 익산시 주민감사 청구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 1 익산시 조례 제1221호 익산시 제안제도 운영조례 일부개정조례 3 익산시 조례 제1222호 익산시 시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 12 익산시 조례 제1223호 익산시 시세 감면 조례 전부개정조례 13 익산시 조례 제1224호 익산시 행정기구설치조례 19 익산시 조례 제1225호 익산시

More information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권2 동경잡기 東京雜記 동경잡기 173 권2 불우 佛宇 영묘사(靈妙寺)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632) 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인데 체제가 특이하다. 속설에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메 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지금은

More information

38--18--최우석.hwp

38--18--최우석.hwp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 崔 宇 錫 1) 1. 序 文 2.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3. 結 語 1. 序 文 沈 德 潛 (1673-1769)의 字 는 確 士 이고 號 는 歸 愚 이다. 江 南 長 洲 (현재의 江 蘇 省 蘇 州 ) 사람으로 淸 代 聖 祖, 世 宗, 高 宗 삼대를 모두 거쳤다. 특히 시를 몹 시 좋아한

More information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1. 재미있는 글자 단원의 구성 의도 이 단원은 도비와 깨비가 길을 잃고 헤매다 글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글자 공부를 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칫 지겨울 수 있는 쓰기 공부를 다양한 놀이 위주의 활동으로 구성하였고, 학습자 주변의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흥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각 단계의 학습을 마칠 때마다 도깨비 연필을

More information

cls46-06(심우영).hwp

cls46-06(심우영).hwp 蘇 州 원림의 景 名 연구 * 用 典 한 경명을 중심으로 1)심우영 ** 목 차 Ⅰ. 서론 Ⅱ. 기존의 경명 命 名 法 Ⅲ. 귀납적 결과에 따른 경명 분류 1. 신화전설 역사고사 2. 文 辭, 詩 句 Ⅳ. 결론 Ⅰ. 서론 景 名 이란 景 觀 題 名 (경관에 붙인 이름) 의 준말로, 볼만한 경치 지구와 경치 지 점 그리고 경치 지구 내 세워진 인공물에 붙여진

More information

0429bodo.hwp

0429bodo.hwp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이 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의 후손 또는 연고자로부터 이의신청을 받기 위해 작성 되었습니다. 이 인물정보를 무단 복사하여 유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전 파하는일체의행위는법에저촉될수있습니다. 주요 훈포상 약어 1. 병합기념장 2. 대정대례기념장 3. 소화대례기념장

More information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진한기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 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 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More information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과 임제 신해진(전남대) 1. 머리말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사육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남효온( 南 孝 溫 )의 (1492년 직전?), 임제( 林 悌 )의 (1576?), 김수민( 金 壽 民 )의 (1757) 등이 있다. 1) 첫 작품은 집전( 集

More information

<3230313320B5BFBEC6BDC3BEC6BBE74542532E687770>

<3230313320B5BFBEC6BDC3BEC6BBE74542532E687770> 58 59 북로남왜 16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흔든 계기는 북로남 왜였다. 북로는 북쪽 몽골의 타타르와 오이라트, 남왜는 남쪽의 왜구를 말한다. 나가시노 전투 1.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임진전쟁 전) (1) 명 1 북로남왜( 北 虜 南 倭 ) : 16세기 북방 몽골족(만리장성 구축)과 남쪽 왜구의 침입 2 장거정의 개혁 : 토지 장량(토지 조사)와

More information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檀 國 大 學 校 第 二 十 八 回 학 술 발 표 第 二 十 九 回 특 별 전 경기도 파주 出 土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형보( 衡 輔 )의 부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 服 飾 학술발표:2010. 11. 5(금) 13:00 ~ 17:30 단국대학교 인문관 소극장(210호) 특 별 전:2010. 11. 5(금) ~ 2010. 11.

More information

11민락초신문4호

11민락초신문4호 꿈을 키우는 민락 어린이 제2011-2호 민락초등학교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1 펴낸곳 : 민락초등학교 펴낸이 : 교 장 심상학 교 감 강옥성 교 감 김두환 교 사 김혜영 성실 근면 정직 4 8 0-8 6 1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로 159번길 26 Tel. 031) 851-3813 Fax. 031) 851-3815 http://www.minrak.es.kr

More information

이용자를 위하여 1. 본 보고서의 각종 지표는 강원도, 정부 각부처, 기타 국내 주요 기관에서 생산 한 통계를 이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각 통계표마다 그 출처를 주기하였음. 2. 일부 자료수치는 세목과 합계가 각각 반올림되었으므로 세목의 합이 합계와 일 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3. 통계표 및 도표의 내용 중에서 전년도판 수치와 일치되지 않는 것은 최근판에서

More information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제2장 사천교육의 발자취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1. 근대 이전의 교육 가. 고대의 교육 인류( 人 類 )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부터 역사와 함께 교육( 敎 育 )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삶을 꾸려왔는지는 여 러 가지 유적과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 우리조상들의 생활을 미루어

More information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More information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지역의 합리적인 행정구역 결정방안 이 양 재 원광대학교 교수 Ⅰ. 시작하면서 행정경계의 획정 원칙은 국민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결정 되어야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의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모 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신생매립지의 관할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간 분쟁(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당진군, 전라남도 순천시와 전라남도 광양시

More information

??

?? 한국공항공사와 어린이재단이 함께하는 제2회 다문화가정 생활수기 공모전 수기집 대한민국 다문화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함께 만들어 갑니다. Contents 02 04 06 07 08 10 14 16 20 22 25 28 29 30 31 4 5 6 7 8 9 10 11 12 13 15 14 17 16 19 18 21 20 23 22 24 25 26 27 29 28

More information

652

652 축 사 2003년 11월 5일 수요일 제 652 호 대구대신문 창간 39주년을 축하합니다! 알차고 당찬 대구대신문으로 지로자(指걟者)의 역할 우리 대학교의 대표적 언론매체인 대구대 신문이 오늘로 창간 서른 아홉 돌을 맞았습 니다. 정론직필을 사시로 삼고 꾸준히 언로 의 개척을 위해 땀흘려온 그 동안의 노고에 전 비호가족을 대표하여 축하의 뜻을 전하 는 바입니다.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6. 29 () 11:00 ( ) 20 0 1. 6. 29 11( ).(397-1941) 1. 2. 3. 4. 5. 1. 28, 60() (,, ) 30 619(, 6. 29) () 6 (,,,,, ),,, - 1 - < > (, ), () < > - 2 - 2.,,, 620,, - 3 - 3. ( ) 1,614,, 864 ( ) 1,6 14 864 () 734

More information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31313135292E687770>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31313135292E687770> 제 1 부 제1소위원회 (2) 충남지역(1)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당진군ㆍ홍성군ㆍ서산군(2)ㆍ예산군- 결정사안 1950. 9ㆍ28수복 후~1951. 1ㆍ4후퇴경 충청남도 당진 홍성 서산(2) 예산군에서 군 경에 의해 발생한 불법적인 민간인 희생으로 진실규명대상자 33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자 151명이 희생된 사실을 또는 추정하여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More information

<C1DFB1DE2842C7FC292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무 단 전 재 금 함 2011년 3월 5일 시행 형별 제한 시간 다음 문제를 읽고 알맞은 답을 골라 답안카드의 답란 (1, 2, 3, 4)에 표기하시오. 수험번호 성 명 17. 信 : 1 面 ❷ 武 3 革 4 授 18. 下 : ❶ 三 2 羊 3 東 4 婦 19. 米 : 1 改 2 林 ❸ 貝 4 結 20. 料 : 1 銀 2 火 3 上 ❹ 見 [1 5] 다음 한자(

More information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96 1 96 3 4 1 5 2 ( ),, TV,,,,, 96 5,,,, 3, ), ( :,1991) ), ), 13 1 3 96 23, 41, 4 68 (1) 11, 1223, (3/18 ) ( ) 6, 1 (4/2 ) 16, ( ), 1 (5/3 ), ( ) ( ) 1 (2) 96 8 33 41 (4/25 ), (9/24 ), ( ) 961 (5/27 )

More information

???? 1

???? 1 제 124 호 9 3 와 신시가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면 제일 먼저 이 도시에서 언제나 활기가 넘 쳐나는 신시가지로 가게 된다. 그 중심에 는 티무르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을 중심으 로 티무르 박물관과 쇼핑 거리가 밀집돼 있다. 공원 중심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영 웅, 티무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우즈베 키스탄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서나 티무르의 동상이나

More information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일부개정 3 5.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일부개정 4

More information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More information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S I N S A G O 정답과 해설 채움 1. 마음을 나누는 삶 02 2. 효과적인 자료, 적절한 단어 11 3. 문학을 보는 눈 19 4. 보다 쉽게, 보다 분명하게 29 5. 생각 모으기, 단어 만들기 38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More information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30323138292D28BCF6C1A4292E687770>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30323138292D28BCF6C1A4292E687770> 이 조사보고서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32조제1항 규정에 따라 2008년 7월 9일부터 2009년 1월 5일까지의 진실 화해를위 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을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되었습 니다. 차례 제 3 부 인권침해규명위원회 사건 김세태 등에 대한 보안대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사건 11 오주석 간첩조작 의혹 사건 25 보안대의 가혹행위로

More information

160215

160215 [ 진경준, 대한민국 검사의 민낯! ] 진경준 검사 정봉주 : 진경준 검사장 사건이 충격적인가 봐요.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얘기도 나오는 걸 보니까. 왜 그래요, 느닷 없이? 김태규 : 공수처는 여러 검찰개혁안 중의 하나였죠. 검찰의 기 소독점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공수처를 도입해야 한다 는 얘기가 오래 전부터 나왔고. 그런데 지금 정권이 레임 덕에 막 빠지려고

More information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Ⅰ 가이드라인 개요 >>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지주회사법

More information

000000038348.hwp

000000038348.hwp 규범 폐쇄성 신뢰 호혜 < 그림1> 사회자본의 구조 D E B C B C A A 비폐쇄성 네트워크(a)와 폐쇄성 네트워크(b) 출처: Coleman, 1988. p. 106. 信 用 人 情 關 係 面 子 報 答 꽌시의 구조 지방정부 동향 공장장 공장장 청부책임제 향진기업 연변 백운(

More information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제11편 성씨 인물 579 제3장 인 물 1. 고려ㆍ조선시대 인물 강순 강열황 구계우 구상은 김감 김경상 김계백 김계환 김규 김광오 김광원 김극성 김극신 김근행 김낙항 김남호 김노기 김노영 김맹권 김명현 김문서 김백간 김상현 김생려 김선지 김성국 김성우 김수정 김수현 김숙 김시걸 김신행 김억 김여남 김영석 김영수 김영제 김용제 김우식 김위 김응순 김응의 김응정

More information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공인중개사의 업무 및 부동산 거래신고에 관한 법령 제1장 공인중개사제도 제2장 총칙 제3장 중개사무소의 개설등록 제4장 중개업무 제5장 중개계약 및 부동산거래정보망 제6장 중개업자 등의 의무 제7장 중개보수 제8장 교육 및 업무위탁, 포상금 제9장 공인중개사협회 제10장 지도ㆍ감독 및 벌칙 제23회 완벽대비 제1장 공인중개사제도 1. 시험시행기관 (1) 원칙

More information

ad-200100008.hwp

ad-200100008.hwp 성매매방지대책 연구 성매매방지대책 연구 성매매방지대책 연구 여 성 부 한국여성개발원 목 차 Ⅰ. 서론 Ⅱ. 성매매에 대한 시각과 성매매 유형 분류 Ⅲ. 성매매 관련 법 정책 및 사건처리 Ⅳ. 성매매 관련 법의 주요내용과 문제점 Ⅴ. 성매매 관련 법의 적용현황과 문제점 Ⅵ. 성매매 관련 의식조사 결과 Ⅶ. 외국의 입법례 Ⅷ. 개정법(안) 제안 Ⅸ. 정책제언 참고문헌

More information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4탄 지학 정복하기 1. 빅뱅 우주론 빅뱅과 동시에 시공간 및 물질 생성 물질 : 쿼크와 경입자 양성자와 중성자 헬륨원자핵 원자 생성[38 만년 이후] 자연계의 존재하는 힘 : 중력, 강한핵력, 전자기력, 약한핵력 빅뱅우주론의 증거 1 수소와 헬륨의 질량비가 3:1 2 우주 배경 복사 발견 2. 별의 탄생과 진화 1 별의 탄생과정 성간운 형성 원시별과 원반

More information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문화재위원회(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 문 화 재 위 원 회 - 2 - - 3 - 안건번호 근대2012-04-001-4 - - 5 - - 6 - - 7 - - 8 - 안건번호 근대2012-04-002-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More information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인 천 광 역 시 의 회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More information

교육실습 소감문

교육실습 소감문 컴퓨터교육과 2008312140 김경근 Ⅰ. 처음... 이번에 교육실습을 다녀온 곳은 서울에 위치한 노원고등학교, 나의 모교이다. 실 습 학교로 굳이 이 학교를 선택 지원한 이유는, 모교이기 때문 이 아니라 집에서 가까워서 라는 이유가 컸다. 물론 내가 졸업한 모교가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하기 도 했다. 실습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오로지

More information

1

1 정의당 당규 2012.11.09. 제1차 전국위원회 제정 2013.02.28. 제4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06.16. 당대회 개정 2013.08.31. 2기 제1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10.20. 2기 제2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12.14. 2기 제3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12.31. 2기 제4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4.02.22. 2기

More information

¼þ·Ê¹®-5Àå¼öÁ¤

¼þ·Ê¹®-5Àå¼öÁ¤ Ⅴ. 육축 1. 개설 2. 1961년 수리 전의 육축 3. 육축의 구조 4. 지하유구 조사 5. 실측조사 6. 석축부재의 현황 127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 崇禮門 精密實測調査報告書 사진 5-3. 태조 때의 축성형식 사진 5-4. 세종 때의 축성형식 사진 5-7. 성벽 철거 전(1880년대) 사진 5-5. 개축된 축성형식

More information

109

109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128 김한용 구술 녹취문 129 III. 광고사진가로서의 활동 김: 아아 최: 그리고 신진자동차 퍼브리카도 선생님이 찍으셨대요? 김: 예? 최: 신진자동차에서 나왔던 퍼브리카 김: 퍼브리카. 예, 맞습니다. 최: 요렇게,

More information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500 0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500 0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2013년도 본예산 일반회계 환경위생과 ~ 환경위생과 세 출 예 산 사 업 명 세 서 부서: 환경위생과 단위: 환경정책 환경위생과 8,231,353 3,622,660 4,608,693 국 2,472,543 기 144,000 도 976,102 시 4,638,708 자연환경보호(환경보호/환경보호일반) 5,910,247 1,462,545 4,447,702 국 1,817,800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6. 29 ( ) 11:00 20 0 1. 6. 29 2 3 ( ).( 397-0781) 1. 2. 3. 4. 5. 1. ( : 2 ) 2 8607, 306 19, 7 6 28, 95 3 - (5 ) (,,,,,, ) - 1 - 2. -, - -, - 2 - 3.,, 1,700, 827 ( ) 1,700 8 27 803 469 560 227 289 117 48

More information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4.13 총선, 캐머런과 오스본, 영국 보수당을 생각하다 정 영 동 중앙대 경제학과 자유경제원 인턴 우물 안 개구리인 한국 정치권의 4.13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정당 간 정책 선거는 실종되고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이전투구식 경쟁이 심 화되고 있다. 정말 한심한 상황이다. 정당들은 각 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강 정책, 목표를 명확히 하고,

More information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중국 명문가의 가정교육 * - 先 秦 에서 淸 末 까지- ** 1) 李 庚 子 1. 머리말 2. 孝 悌 를 통한 질서의 확립 3. 德 을 통한 품성 수양 4. 立 志 를 통한 자아 확립 5. 맺음말 1. 머리말 교육의 일차기관은 가정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가정의 문화를 배우고 사 물의 바른 질서를 배우며 그 사회와 시대의 문화 양식을 먼저 익힌다.

More information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2011 어르신 생활문화전승프로그램 柯 亭 里 義 兵 마을 백년터울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걷는다 주관 춘천문화원 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차 례-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1. 역사적 측면 2. 문화적 측면 3. 미래 삶의 터전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제3장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2. 고흥 류

More information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금산 은 상위의 중부방언에 속한다. 충청남도의 핵방언권 중 (A)지역, 즉 충청 남도의 남부이며 전라북도와 주로 접경을 이루는 방언권이다. 그중 충청남도의 최 남단에서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 금산 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 다. 금산 지역이 전라북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문화 등 제반 교류의 가능성 을 엿볼 수 있고, 이는 곧 금산과 전북방언과의

More information

DBPIA-NURIMEDIA

DBPIA-NURIMEDIA 정신문화연구 2001 겨울호 제24권 제4호(통권 85호) pp. 75 96 企劃論文 退溪學派의 經濟的 基 : 財産 形成과 所有 規模를 중심으로 1) Ⅰ. 머리말 Ⅱ. 財産 形成 문 숙 자* Ⅲ. 財産 所有 規模 Ⅳ. 맺음말 Ⅰ. 머리말 退溪學派 는 지역, 당색, 학문상의 이론적 배경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용어이 며, 시기에 따라서 지칭하는 의미에 차이가

More information

내지4월최종

내지4월최종 내 가 만 난 7 0 년 대 죽은 언론의 사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정동익은 오래 전 자신이몸담았던 동아일 보사 앞에 서 있었다. 촛불을든시민들은 동아일보는 쓰레기다! 라며 야유 를 보냈다. 한때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신문 동아일보는 젊은 시절 그와동 료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자유 언론 이 아니었다. 그는 차마더바라

More information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불교학과반(1년 과정) 기초교리반(6개월 과정)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저녁 7시 5월 5일 5월 12일 5월 19일 5월 26일 어린이날 휴강 인도불교사 2 / 이거룡 교수님 인도불교사 3 / 이거룡 교수님 중국불교사 1 / 이덕진 교수님 5월 7일 5월 14일 5월 21일 5월 28일 백련암 예불의식 및 기도법 / 총무스님 성철

More information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14강 역사영웅소설 15강 판소리계 소설 판소리계 소설 : , 등 일반적으로 판소리 사설의 영향을 받아 소설로 정착된 작품을 가리킨 판소리 : , , , , 등이 사설과 창이 전해지고 있 하층민의 예술로 시작하여 전계층을 아우르는 예술이 되었 상류층, 지배층이 향유층이 되면서 점차 작품의 주제가

More information

2 국어 영역(A 형). 다음 대화에서 석기 에게 해 줄 말로 적절한 것은? 세워 역도 꿈나무들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일을 할 예정 입니다. 주석 : 석기야,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석기 : 응, 드디어 내일 어머니께서 스마트폰 사라고 돈

2 국어 영역(A 형). 다음 대화에서 석기 에게 해 줄 말로 적절한 것은? 세워 역도 꿈나무들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일을 할 예정 입니다. 주석 : 석기야,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석기 : 응, 드디어 내일 어머니께서 스마트폰 사라고 돈 20학년도 6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 제 교시 국어 영역 형 (A ) [ ~ 2] 다음은 교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진행된 학생의 발 표이다. 물음에 답하시오. 안녕하십니까? 입니다. 오랜 시간 학교에서 교복을 입 고 생활하자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 복이 좀 더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현재 착용하고 있는

More information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농촌진흥운동기의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과 관련하여- 아오노 마사아키( 青 野 正 明 ) 모모야마가쿠인대학( 桃 山 学 院 大 学 ) 번역:이화진 들어가는 말 본고에서는 주로 1930 년대 전반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농촌진흥운동 1 에 있어서, 신사정책( 神 社 政 策 )과 관계가 있다고 예상되는 농본주의(

More information

<B3EBB5BFB0FCB0E8B9FD20B1B9C8B820B0E8B7F920C0C7BEC828C3D6C1BE29A4BB2E687770>

<B3EBB5BFB0FCB0E8B9FD20B1B9C8B820B0E8B7F920C0C7BEC828C3D6C1BE29A4BB2E687770> 국회 계류 노동관계법(안) (2012.05.30 ~ 2013.10.14) - 1 - 가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1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2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법 5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징수 등에 관한 법률 7 고용보험법 10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18 고용상 학력차별금지 및 기회 균등 보장에

More information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313232332E687770>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313232332E687770> 2013 소외계층 독서 인문학 프로그램 결과보고서 - 2 - 2013 소외계층 독서 인문학 프로그램 결과보고서 c o n t e n t s 5 22 44 58 84 108 126 146 168 186 206 220 231 268 296 316 꽃바위 작은 도서관 꿈이 자라는 책 마을 기적의 도서관 남부 도서관 농소 1동 도서관 농소 3동 도서관 동부 도서관

More information

부벽루 이색 핵심정리+핵심문제.hwp

부벽루 이색 핵심정리+핵심문제.hwp 부벽루 - 이색 알맹이 정리 시 대 : 고려말 갈 래 : 5언 율시 성 격 : 회고적 표 현 : 어 조 : 지난날의 찬연한 역사를 회고하며 그와 대비되는 현재의 모습에서 무상감에 젖어 있 운 율 : 압운(루, 추, 유, 류) 특 징 : 장엄한 표현.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 이미 지로 표현(4연) 주 제 : 지난 역사의 회고와 고려 국운 회복의 소 망 작가소개

More information

입장

입장 [입장] 20대 총선 여성 비정규직 청년정책 평가 여성 정책 평가: 다시 봐도 변함없다 (p.2-p.4) 비정규직 정책 평가: 사이비에 속지 말자 (p.5-p.7) 청년 일자리 정책 평가: 취업준비생과 노동자의 분열로 미래를 논할 순 없다 (p.8-p.11) 2016년 4월 8일 [여성 정책 평가] 다시 봐도 변함없다 이번 20대 총선 만큼 정책 없고, 담론

More information

PSAT¿¹Á¦Áý ȨÆäÀÌÁö °Ô½Ã (¼öÁ¤_200210) .hwp

PSAT¿¹Á¦Áý ȨÆäÀÌÁö °Ô½Ã (¼öÁ¤_200210) .hwp 변화 < : 19851999> 연도 고령취업자수 고령취업자 비율 계 남 여 농 가 비농가 1985 1,688 11.3 10.8 12.0 24.3 6.8 1990 2,455 13.6 13.1 14.3 35.9 8.3 1995 3,069 15.0 14.4 16.0 46.5 10.1 1996 3,229 15.5 15.0 16.2 48.2 10.7

More information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발 간 사 먼저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이 발간되기까지 집필에 수고하신 경기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경기도의 각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신 김문수 경기도지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More information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소재 기획의도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More information

2힉년미술

2힉년미술 제 회 Final Test 문항 수 배점 시간 개 00 점 분 다음 밑줄 친 부분의 금속 공예 가공 기법이 바르게 연결된 것은? 금, 은, 동, 알루미늄 등의 금속을 ᄀ불에 녹여 틀에 붓거나 금속판을 ᄂ구부리거나 망치로 ᄃ두들겨서 여러 가지 형태의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ᄀ ᄂ ᄃ ᄀ ᄂ ᄃ 조금 단금 주금 주금 판금 단금 단금 판금 주금 판금 단금

More information

<B0ADC8ADC7D0C6C428C3D6C1BE292E687770>

<B0ADC8ADC7D0C6C428C3D6C1BE292E687770> 인천학연구총서 강화학파 연구 문헌 해제 김수중조남호천병돈 공편 머리말 진리 를 우리말로 참 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반대를 거짓 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을 찾아보아도 아직까지 거짓 에 대한 어원만 밝혀져 있다. 거짓 의 어원은 거죽 이며 이는 지 금 우리가 사용하는 가죽 과 뿌리가 같다고 한다. 즉 그것은 겉에 드 러난 부분, 곧

More information

320110.PDF

320110.PDF *.. 1. 2. < > 3. 4...,.,.?. * - 150 - (, ),,,.,,.,,. 2-4.. 50. ( ),,.. - 151 - ., : : :,,,......, - 152 - .. 1.,,,,.... ( ) ( ) ( ) ( ),,,,.,,, - 153 - ,,. (BC 1 ),,. (BC 37 ),,,,,, (BC 18 ),,,,.. (, ),.,,,,.,,.,,.

More information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2006.11. 20,2009.6.15>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2006.11. 20,2009.6.15>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실 내 수 영 장 운 영 내 규 1999.6.1. 내규 제50호 개정 2001. 3.19 내규 제 82호 개정 2005.12.29 내규 제135호 2002. 3.25 내규 제 92호 2006.11.20 내규 제155호 2002. 8.28 내규 제 94호 2009. 6.15 내규 제194호 2005. 5.20 내규 제129호 2011.11.10 내규 제236호

More information

Ⅰ- 1 Ⅰ- 2 Ⅰ- 3 Ⅰ- 4 Ⅰ- 5 Ⅰ- 6 Ⅰ- 7 Ⅰ- 8 Ⅰ- 9 Ⅰ- 10 Ⅰ- 11 Ⅰ- 12 Ⅰ- 13 Ⅰ- 14 Ⅰ- 15 Ⅰ- 16 Ⅰ- 17 Ⅰ- 18 Ⅰ- 19 Ⅰ- 20 Ⅰ- 21 Ⅰ- 22 Ⅰ- 23 Ⅰ- 24 Ⅰ- 25 Ⅰ- 26 Ⅰ- 27 Ⅰ- 28 Ⅰ- 29 Ⅰ- 30 Ⅰ- 31 Ⅰ- 32 Ⅰ- 33 Ⅰ- 34 Ⅰ- 35

More information

인 사 청 문 요 청 사 유 서

인 사 청 문 요 청 사 유 서 국무위원후보자(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유일호) 인사청문요청안 의안 번호 제출연월일 : 2015. 12. 제 출 자 : 대 통 령 요청이유 국가공무원법 제31조의2에 따라 다음 사람을 국무위원(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으로 임명하고자 국회의 인사청문을 요청하는 것임. 인사청문 요청대상자 성 명 : 유 일 호 ( 柳 一 鎬 ) 생년월일 : 1955년 3월 30일

More information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 시행 2015.9.9] [ 산림청훈령 제1262 호, 2015.9.9, 일부개정] 산림청( 산림병해충과), 042-481-4038 제1장 총칙 제1 조( 목적) 이 규정은 산림보호법 제3 장 " 산림병해충의 예찰 방제 에서 위임된 사항과 산림병해충( 이하 " 병 해충 이라 한다) 의 예방 구제를 위하여 병해충의 발생조사와

More information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와 그 위헌 여부에 관한 소론 - 서울고등법원 2011.2.1.자 2010아189 위헌법률심판제청결정을 중심으로 한국정보법학회 2011년 5월 사례연구회 2011. 5. 17.발표 변호사 김기중 미완성 원고임 1. 서론 헌법재판소는 2002. 6. 27. 99헌마480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등 위헌확인사건에 서 불온통신 의 단속에

More information

넓은 들을 배경으로,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은 예로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운 상주의 원동력이다. 강은 단순 히 물은 담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강은 크고 작은 여러 하천들이 모여 큰 물줄기를 이룬다. 낙동강 역시 상

넓은 들을 배경으로,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은 예로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운 상주의 원동력이다. 강은 단순 히 물은 담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강은 크고 작은 여러 하천들이 모여 큰 물줄기를 이룬다. 낙동강 역시 상 김 진 형 상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낙동강으로 흐르는 으뜸천 병성천 의 역사와 문화 ([email protected]) 강은 문화를 이룬다. 인류문화의 발상지는 모두 강을 끼 꽃피웠다. 고 형성되었다. 강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 조선시대 이름난 책인 세종실록지리지, 연려실기술 요한 조건이자 새로운 문화를 전달하는 전파자의 역할을 한 등에는 낙동강의 어원을

More information

기사스크랩 (160504).hwp

기사스크랩 (160504).hwp 경향신문 / 2016.05.03(화) "갈등없는 성과연봉제 도입" 홍보하던 동서발전, 부당노동행위 정황 성과연봉제 노사합의안 찬반투표 당시 동서발전 울산화력본부 기표소 모습 공기업 발전회사 중 처음으로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에 대한 노사합의가 이뤄진 한국동서발전이 직원 들의 찬성 투표를 유도하기 위해 부당노동행위를 벌인 복수의 정황이 나왔다. 직원들에게 동의서를

More information

(095-99)미디어포럼4(법을 알고).indd

(095-99)미디어포럼4(법을 알고).indd 법을 알고 기사 쓰기 62 논쟁적 주제 다룰 땐 단정적으로 보도하지 말아야 과학적 사실에 대한 보도 시 주의할 점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정책연구팀장 변호사 기자도 전문가 시대다. 의학전문기자, 경제전문기자 라는 말은 이미 익숙하고 이 외에도 책전문기자, 등 산전문기자, IT전문기자, 스포츠전문기자, 자동차 전문기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기자들이 있다. 과학

More information

소공동체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희가 모였사오니 여기 모인 이들과 이 가정에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희는 오늘 소공동체 모임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공부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합니다. 주님께 청

소공동체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희가 모였사오니 여기 모인 이들과 이 가정에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희는 오늘 소공동체 모임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공부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합니다. 주님께 청 교우들의 모임 길잡이 12 2014 통권164호 소공동체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희가 모였사오니 여기 모인 이들과 이 가정에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희는 오늘 소공동체 모임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공부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합니다. 주님께 청하오니 저희와 함께 하시어 엠마오 제자들에게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