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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 부 기본방향 I. 총론 1. 연구의 목적과 방법 본 연구는 광주에 설치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 갖는 다양한 기능, 즉 전시와 공연, 교육과 연구, 문화교류, 문화자원의 창조적 활용 및 산업화와 관련해서 이러 한 제반 활동에 기초가 되는 아시아 문화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조사 수집할 것 인가에 대한 기본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전당 내에 하나의 기 관으로 설치될 아시아문화원 산하 문화리소스센터 의 콘텐츠를 채우는 작업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문화리소스센터는 전당 내의 아시아문화창조센터, 아시아문화연구원, 아시아아 트플렉스, 어린이지식박물관 등 다양한 시설에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자료의 통합 데이터뱅크로서 기능한다. 문화리소스센터는 크게 아시아문화도서관 과 아시아문 화아카이브 로 구성되며, 전자는 주로 출판된 도서의 수집과 보관을 중심으로 하 는 반면, 후자는 원천자료의 수집과 보관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 다. 본 연구팀은 도서관의 내용물을 구축하는 작업과 아카이브의 내용물을 구축하 는 작업 사이에는 그 접근방법에 있어서 별개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 - 1 -

2 으며, 후자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집중하였다. 그 이유는 전당이 주체가 되어 아시아 문화자료를 직접 조사하고 수집하는 작업은 아카이브의 내용물 구축과 가 장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자료의 조사와 수집 방향은 궁극적으로 그 자료를 수집하는 기관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아시아문화아카이브 의 성격을 먼저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아시아문화아카이브란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용어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들을 분석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에 바탕을 두어 그 성 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아시아문화아카이브 는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 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의 합성어로, 이들 각각의 개 념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이들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하고 때로 상충되는 의견과 해석이 존재한다. 제 1부 I장 총론 부분에서는 이 보고서에서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 란 개념을 어떤 의 미로 사용하고자 하는가를 논의하였다. 이를 통해서 아시아문화아카이브 가 기존 의 아카이브나 유사 기관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를 밝히고, 아시아 문화자료를 수집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총론에 이어 II장 조사대상의 선정 에서는 아시아의 시간성과 공간성, 문화의 분류체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 무엇을 조사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과 그 이유를 제시하고, III장 향후 자료 조사 및 수집 계획 에서는 문화자료를 체계적으 로 수집하기 위한 전략과 단계적 실행방안을 제시하였다. 제 2부에서는 아시아 문 화자료를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연구자의 관점과 조사기법의 차 원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심도있게 논의하고, 수집된 자료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서 언급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총론에서 제시한 아시아문화아카이브의 기본 성 격에 기초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부분 이 될 것이다. 본 연구는 아시아 지역전문가, 인류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미술, 음악, 건축, 무 용, 영화 등 각 예술영역의 전문가가 함께 참여한 공동연구의 방식으로 진행되었 다. 아시아가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며, 또한 아시아 문화에 매우 많은 하위문화영 역이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본 연구팀의 인적 구성은 분명히 한계를 갖는 - 2 -

3 것이었으나,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최대한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전문가들로 구성 하고자 하였으며, 연구팀에서 다루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자문위원을 통해 부 분적으로 보완하였다. 연구의 과정은 크게 (1) 예술과 인류학 관련 기존 아카이브의 분류체계와 조사 방법에 대한 비판적 검토 (2) 인도에서의 예비 현지조사 (3) 새로운 문화분류체계 와 조사방법의 수립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거쳐 공동연구원간의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고 통합함으로써 아시아 문화자료의 조사와 수집을 위한 밑 그림을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된 내용은 무엇을, 왜, 어떻게 조사하고 수집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을 정립하는 것으로, 개념과 방법론 적 차원의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보다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조사 및 자료수 집 전략과 자료보관의 형태, 특히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을 위한 기술적 논의에 대해서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2. 아카이브 의미의 변화 본 연구팀은 수집된 아시아 문화자료가 보관될 기관을 전당 내 문화리소스센 터 의 아시아문화아카이브로 규정하였다. 이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본구상 연 구 에 나오는 기구 조직표에 기초한 것이다. 문화자료를 수집 보관하는 유사한 기 관, 예를 들어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과 아카이브 간의 차이를 단순화 시켜서 설 명한다면, 박물관과 미술관은 실물 위주의 수집, 보관, 전시를 중심으로 하며, 도 서관은 출판물, 특히 서적의 보관을 중심으로 하는 것에 반해, 아카이브는 출판되 지 않은 원천자료의 수집과 보관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에 있다.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아시아 문화자료의 수집은 이 점에서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의 구축을 위한 문화자료의 수집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가진다. 그런데, 아카이브가 구체적으로 무 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또한 그 의미가 역사적으로 크게 변화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아카이브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할 필요가 있다

4 아카이브(archive)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aekheion, 즉 행정장관의 사무실이란 용 어에서 기원했으며, 공식문서의 보관장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카이브에 보관 된 문서는 통치자의 지배권과 합법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원천이며, 법적 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아카이브에 보관된 문서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고, 외부 인의 접근이 제한되었다. 서구에서 근대국가가 발전하면서 아카이브는 통치를 위한 행정문서의 보관소라 는 제한적 성격과 국가적 기억의 저장소로서 공적(public) 아카이브라는 개방적 성격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아카이브는 국가적 기억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사회적 기억을 담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하며, 아카이브의 개념은 정치적-법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역사적-문화적 패러다임으로 변화하였다. 최근에는 일상적 삶의 기억이란 의미에서 문화의 아카이브(archive of culture) 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 추구하는 아카이브 의 개념은 정부의 공식문서를 주로 보관하는 전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자료들을 보관하는 문화 의 아카이브 라는 새로운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아카이브는 흔히 개인 또는 기관 의 오래된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는 문서자료 뿐 아니라 음성자료, 영상자료(사진, 필름, 비디오 등), 그리고 일부 실물까지도 포함하는 아 카이브를 추구한다. 이는 문자매체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서 일상적 삶의 모습을 보다 충실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영상매체에 익숙 한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아카이브의 자료에 보다 친근하게 접근하게 하기 위해 서도 필요한 전략이다. 전통적 아카이브는 원자료를 오랫동안 보존하는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일반인들 이 아카이브에 소장된 자료에 접근하는 것을 크게 제약하였다. 소수의 학자나 전 문가들이 그들의 연구를 위해 복잡한 절차를 통해 제한적으로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여기서 추구하는 새로운 아카이브는 학자나 전문가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개방적 아카이브를 의미한다. 그 방편으로 문서자료, 음성자료, 영상자료의 디지털화는 자료의 보존과 접근이라는 - 4 -

5 양 측면에서 획기적인 기술발전을 가져왔다. 디지털 자료는 인터넷 등 사이버 공 간에 제공됨으로써 사용자들이 쉽고, 빠르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함으로써 보존 중심의 폐쇄적 아카이브를 벗어나 활용 중심의 개 방적 아카이브라는 목표를 달성한다. 아카이브에 소장되는 자료는 구매, 기증, 기관 사이의 자료 교환 및 대여 등을 통해서도 수집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추구하는 아카이브는 직접적인 조사활 동에 의해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수단으로 간주한다. 물론, 전자의 방식이 활용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고 보완적인 방편일 뿐이 다. 즉, 조사에 기초한 아카이브(research-based archive)를 지향한다. 그 이유는 직 접적인 조사활동에 의해서 자료를 수집했을 때, 조사기관의 독특한 관점과 목적이 반영되는 새로운 자료의 수집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서 독창성 있는 아카이브의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방식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대한 국내 전문연구가를 양성하고, 아시아 지역 내에 인적 네트워크 를 형성한다는 부차적이지만 중요한 효과를 갖는다. 전통적 아카이브와 비교해서 국립아시아 문화전당에서 추구하는 새로운 아카이 브의 두드러진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문화의 아카이브 (archive of culture) * 원천문화자료(문서자료, 음성자료, 영상자료)의 저장고로서의 아카이브 * 디지털 아카이브 (digitalized archive) * 개방적 아카이브 (open archive) * 조사에 기초한 아카이브 (research-based archive) 즉, 정치엘리트와 국가권력의 공식문서를 보존하는 폐쇄적인 신성한 공간 으로 서의 전통적인 아카이브를 벗어나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문화를 표현하는 원천자료(문서자료, 음성자료, 영상자료 등)를 직접적인 조사활동에 의해서 수집하 고, 이를 디지털 자료 형태로 보관하고 활용하는 개방적인 시민공간으로서의 아카 이브를 지향한다

6 3. 아시아란 무엇인가? 아시아 문화자료를 조사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를 구성한 다고 할 때,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의 하나는 아시아이다. 아시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이 모든 계획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자 하는가와 밀접하게 연계되 어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적인 아시아, 본질주의적인 아시아, 동북 아 중심적인 아시아를 넘어서서 새로운 아시아의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의미는 아시아 지역 내의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 하고 이해하면서, 동시에 서로 간에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을 발견 함으로써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아시아이며, 이를 위한 아시아인의 주체적인 노력 을 통해 아시아의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아시아 문화자료의 수집은 이러한 목 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통로가 되어야 한다. 지리적 실체로 상상되는 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유럽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설정하기 위해 필요로 하였던 타자화의 과정에서 배태된 식민주의적 근 대의 제도적 산물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아시아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아 시아를 문화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는 담론으로 표현하 고 표상한다. 그러한 담론 속에서 아시아는 관능적, 수동적, 여성적, 신비적, 이국 적, 정체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며, 그것이 아시아에 대한 정형적인 이미지로 반복 적으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었다. 반면, 유럽인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아시 아에 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내면화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오리엔탈리즘적인 아시아의 극복은 그 속에서 왜곡되 었던 아시아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는 작업이며 또한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지식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7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단순히 아시아와 서구 간의 대립 구도만을 상정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아시아 인의 의식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상당한 정도로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 다. 아시아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방식에 오리엔탈리즘적 담론이 은연중 에 스며들어 있다. 또한, 아시아인 사이에서 상대를 인식하는 태도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발견된다.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태도가 그 예이다. 또한 한국인이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낯선 아시아,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에 대한 태도에서도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의 단초가 발견된다. 따라서, 아시아인의 주 체적 시각에서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내면에 스며들어 있 는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서구에 의해 규정된 아시아가 아니라, 아시아인이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아시아 를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입장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아시아 문화의 본래 적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아시아는 단일한 실체로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이며, 그 근거로 아시아가 공유하는 원형적 문화의 존재를 상정한다. 아시아 문화를 통합하는 본질적인 문화적 가치를 통해서 아시아를 인식한다는 점 에서 본질주의적(essentialist) 아시아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수상이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전 수상에 의해 제기되었던 아시아적 가치 (집 단과 가족지향적인 가치관, 권위에 대한 존경 등)는 본질주의적 아시아관의 정치 적 수사에 해당하는 예이다. 이들이 제시한 아시아적 가치는 실제로는 유교적 가 치를 이념화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본질주의적 아시아관이 갖는 문제점은 아시아적 문화원형을 신비화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시아를 선험적으로 단일한 실체로 상정하는 위험과 아시 아 문화를 영구불변의 어떤 것으로, 즉 탈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위험이다. 아시아 적 문화원형을 전제로 하는 아시아 문화공동체 논의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 나기 힘들다. 오리엔탈리즘이 아시아의 부정적 전통을 선별적으로 채택하여 아시 아의 이미지를 정형화시킨 것에 반해, 본질주의적 아시아관은 아시아의 긍정적 전 통을 선별적으로 채택하여 아시아의 이미지를 정형화시킨다는 차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양자 모두 아시아 문화 내부의 다양성과 차이를 사상시킴으로써 아시아의 실체를 단순화하고, 정형화된 아시아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 7 -

8 보인다. 본질주의적 아시아관은 오리엔탈리즘적 아시아관이 거울에 비쳐진 또 다 른 모습으로 서로 닮아 있다. 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시아 내부의 문화적 다양성과 이질 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섣불리 아시아 문화공동체를 미리 상 정하는 것보다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자세가 아시아 지역 내의 연 대와 유대를 만들어 가는데 선행될 필요가 있다. 문화적 동질성을 선험적으로 전 제하거나 강요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서로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아시아의 의미를 단지 차이의 인정이라는 다문화적 관점에 국한해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는 서구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서로 고립 된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는 폐쇄적 소우주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 로의 문화를 주고받는 열린 공간이었으며, 그 결과는 동질적인 문화공간은 아닐지 라도 상당한 정도로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종교, 철학, 건축, 음악, 회화, 무용, 언어 등의 분야에서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기원하는 문화요 소들이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양상은 오랜 문화적 교류의 결과이 다. 그러한 역사적 전통은 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하는데 간과해서는 안 될 하나의 자원임에 틀림없다. 또한 아시아가 지난 몇 세기 동안에 겪었던 식민화와 서구적 근대화 과정이 가 져온 문화적 충격은 아시아를 새롭게 인식하는데 동원될 수 있는 아시아인의 공 통의 역사적 경험이다. 그 경험은 서구적 모델의 모방과 종속이라는 측면과 자신 의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고 새롭게 변형시키는 창조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러한 양면성 속에서 아시아가 공유하는 근대적 경험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아 시아인간의 유대를 넓혀가는 것이 아시아를 단순히 관념적 구성물이 아니고 현실 에 바탕을 둔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근대적 경험을 단순히 탈아시아의 경험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재의 아시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사적 경 험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아시아 내부의 문화적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동시에 아시아의 오 - 8 -

9 랜 역사 속에 존재하는 문화교류의 전통과 근대적 경험 속에서 서로간의 유사성 을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서 아시아는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 서의 아시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아시아를 상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하는 과제이다. 한국에서 아시아를 상상할 때 극복해야 할 인식의 또 다른 한계는 동북아 중심 적 세계관이다. 한국인의 아시아에 대한 일상적 인식에 있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적 세계관(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은 매우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러한 세계관은 동북아 이외의 아시아 지역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의식적으로 경멸하 는 태도를 낳는다. 최근 한국 내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동아시아 논쟁도 기본적으 로 동북아 중심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동북아를 아시 아의 중심에 놓는 이러한 인식의 극복 없이는 진정으로 아시아 연대를 성취한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아시아문화아카이브는 국내적으로는 동북아 중심적인 아시아관을 벗어나 아시아를 넓고 새롭게 인식하는 교육의 장소가 되어야 하며, 국내를 넘어 서서는 아시아인 사이의 문화적 연대를 촉진하는 만남과 교류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 광주의 근대적 역사 경험에서 인권, 민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읽어낼 때, 그것은 광주라는 국지적 공간을 넘어서서 보다 넓은 연대를 지향하는 역사적 인식을 의미하며,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아시아에 대해서 보다 강렬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광주가 갖는 문화적, 역사적 자산과 상징성을 아시아인이 주체가 되는 아시아 연대의 구축이라는 미래적 가치와 연결될 수 있 도록 아시아 문화자료의 조사와 수집의 방향이 설정될 필요가 있다. 아시아문화아카이브에서 지향하는 아시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지금 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오리엔탈리즘적 아시아관의 극복 * 본질주의적 아시아관의 극복 * 동북아 중심적 아시아관의 극복 * 아시아 연대를 지향하는 새로운 아시아관의 정립 - 9 -

10 (문화적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인정과 공존,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공통성의 추 구) 4. 표현문화의 아카이브 일상적 삶의 자료를 조사 수집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이 아카이브의 자료 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 려운 일이기 때문에, 무엇을 아카이브에 포함시켜야 할는지, 다른 말로 하면 무엇 을 아카이브에서 제외시켜야 할는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아카이브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서 문화란 개념을 하나의 핵심어로 채택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용성을 유지하면서, 그것이 지나치게 포괄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표현문화의 아카이브 란 개념을 아시아문화아 카이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1) 문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표현문화란 문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특정한 관점을 반영하는 용어이다. 다소 일 반화시켜서 얘기한다면, 문화를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개의 관점으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문화의 도구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의 표 현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충 족하기 수단으로서 문화의 기능에 주목한다. 기술과 경제, 결혼과 가족제도, 육아 방식, 정치, 종교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분석은 이러한 관점에서 행해진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 관점은 문화를 바라보는 매우 강력한 시선의 하나이며 현실적으 로 유용한 지식을 산출하였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지나 치게 쏠리는 현상은 수단과 목적간의 합리적 관계를 중시하는 근대 서구적 인식 론과 실용주의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11 후자는 문화의 의미를 사람들의 사고와 느낌을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찾는다. 문 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식 역시 서구에서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특히 독일 에서 사용되는 교양 으로서의 문화 개념은 인간의 행위 자체보다는 그 안에 담 겨진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였다(엘리아스 1995: 34-35).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20세기 초 미국의 문화인류학은 문명진화론적 보편주의를 비판하고, 개별 민족집 단의 민족혼, 즉 그들의 고유한 가치체계와 정서, 세계관을 파악하는데 주력하 였다. 이러한 입장은 한편으로는 문화상대주의의 인식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에 대한 현대의 상징주의적, 기호론적 해석의 지적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문화의 도구적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수단과 목적간의 합리적 관계에 주목하는 것에 반해, 문화의 표현적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의미론적, 미학적 관계에 주목한다. 여기서 표현문화라는 용 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화를 표현적 측면에서 포착했을 때의 문화의 의미를 지칭 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에 있어서 모든 문화 현상들은 도구적 측면과 표현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도구적 기능만을 갖는 문화현상, 또는 표현적 기능만을 갖는 문화현상은 존 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도구적 기능이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간주되는 문화현상이나 표현적 기능이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간주되는 문화현상을 상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과학 기술이 전자의 예라면, 예술이 후자의 예에 해당한다. 우리 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실용품과 예술품의 구분은 대체로 위의 두 가지 속성 중 어떤 측면을 강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양자간의 경계가 반드시 명확한 것 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음식, 옷, 주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 적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여기서 표현문화라는 용어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과 행위 속에 내재된 속성을 지시하기 위한 개념적 범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타일러(E. B. Tylor)는 문화를 지식, 신앙, 예술, 법률, 도덕, 관습 그리고 사회 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진 다른 모든 능력이나 관습들을 포함하는 복 합총체 라고 정의하였으며, 이는 인류학에서 문화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로 받아들

12 여지고 있다. 문화를 생활양식의 총체로 파악하는 이러한 총체론적 문화개념은 앞 에서 언급한 문화의 도구적 의미와 표현적 의미를 포괄하는 것이다. 전 세계의 다 양한 생활양식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 작된 HRAF(Human Relations Area Files)는 총체론적 문화개념에 기초해서 문화 에 대한 분류체계를 수립하였다(부록 참조). 인류학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에서의 자료 수집과 진열에서도 이러한 총체론적 문화개념에 기초한 분류체계가 활용된 다. 여기서 아시아문화아카이브를 표현문화의 아카이브 로 규정하는 이유는 아시 아 문화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는데 있어서 문화의 도구적 측면과 표현적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생활양식의 총체로서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 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현실적인 측면과 이론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아시아문화아카이브가 아시아라는 광대한 지역을 조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매우 다양한 생활양식의 총체를 자료로 수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따라서, 조사와 수집의 대상으로 삼 는 문화자료의 성격과 범위를 어느 정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 표현문화를 핵심적 인 개념으로 채택함으로써 조사 대상의 범위를 좁혀 들어갈 근거를 마련할 수 있 으며, 이를 통해 보다 특화된 문화아카이브의 구축을 모색할 수 있다. 여기서 표현문화의 수집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하는 이유는 첫째, 아시아 문 화자료의 조사와 수집의 방향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추구하는 지향성과 부합하 도록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예향 으로서의 광주와 호남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이를 발전의 기반으로 잡는다는 점에서 문화예술 의 향 유, 교류, 창조를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 점은 전당 내의 중요한 기관인 아시아문화창조센터, 아시아문화원, 아시아아트플렉스, 어린이 지식박물관 에서 수행하는 전시와 공연, 교육과 연구, 문화콘텐츠개발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 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표현문화라는 용어는 문화예술 이란 용어가 다소 막연 하게 지칭하고 있는 의미를 보다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를 변형시켜 발전시킨 것으로 양자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문화아카이브가

13 표현문화의 수집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 과 부합하고 전당내 각 기관의 기능과 유기적 관계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아시아적 시각에서 아시아문화를 새롭게 이해하고, 아시아인들 사이의 교류와 의사소통을 통해 아시아 연대를 구축하는 것을 미래지 향적 목표로 설정한다고 할 때, 아시아 내의 다양한 표현문화에 주목하는 것은 이 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장 깊은 연관을 갖는다. 타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갖고 있는 느낌과 생각을 그들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때, 표현문화는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이 된다. 표현문화는 문화간 의사소통이 란 관점에서 아시아 내부의 교류를 접근할 때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영역에 해 당한다. (2) 표현문화의 의미 표현문화란 관념과 정서를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공유된 방식에 의해 표현하는 행위와 그 산물을 가리키며, 또한 그렇게 표현된 관념과 정서의 체계를 지칭하기 도 한다. 즉, 표현하는 것과 표현된 것 양자를 포함한다. 여기서 관념은 인간-자연 -초자연에 대해 인간이 지각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상상하는 지적 활동을 의미 한다. 정서는 기쁨, 슬픔, 두려움, 아픔, 웃음, 분노, 사랑, 용맹함과 같이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표현문화는 관념과 정서를 함께 포괄 하며, 그것이 표현행위를 통해 타자와의 의사소통의 장에 표출되는 지점에 주목하 는 개념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언어적 또는 회화적 이미지로 구성하는 재현 (representation)을 표현행위의 하위개념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 표현문화의 구성 요소로 표현의 매체, 표현의 양식(기법), 표현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표현의 매체는 표현행위에 사용되는 재료와 소재를 의미하는데, 이를 인간의 감각 및 지각능력과 연관시켜 나누어 본다면 크게 시각 자료(색과 형태를 갖는 자료), 청각 자료(소리를 갖는 자료), 미각 자료(맛을 갖는 자료), 후각 자료 (냄새를 갖는 자료), 언어적 자료(말과 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표현의 양식은 재

14 료와 소재(색과 형태, 소리, 맛, 냄새, 이야기 등)를 도구를 사용하여 어떤 일정한 규칙이나 질서에 따라, 또는 그것을 변형하는 방식에 의해 조합하고 구성하는 기 술과 기법을 의미한다. 서구에서 예술을 art라고 부르는 이유도 표현행위의 이러 한 측면과 연관된다. 여기서는 표현 양식의 기술적 성격을 심미적 기법뿐 아니라 의미론적 기법이란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표현의 내용은 표현행위의 주체가 자신의 활동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과 정서, 그리고 그것이 타자에 의해 해 석되고 수용되는 내용을 가리킨다. 표현문화가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양자를 포괄한다고 할 때, 표현하는 것은 표현의 매체와 양식을 의미하며, 표현되는 것은 표현의 내용을 의미한다. 표현의 매체와 양식은 표현의 내용과 의미론적, 미학적 관계를 가지며, 표현문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표현문화란 용어에서 문화 가 의미하는 바는 표현하는 행위와 표현에 대한 이 해라는 과정 모두가 어느 정도 집단적이고 공적(public)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 다. 표현행위에 있어서 개인의 독창성과 자율적 의지가 거의 개입할 여지가 없다 는 문화결정론적 입장에서 문화의 공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행위를 의사소통이라고 파악할 때 의미의 교환은 소통의 당사자들 간에 공유된 문화적 코드 또는 문화적 문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표현문화의 공적 성격을 말하는 것 이다. 개인의 발화(speech) 행위가 언어적 문법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것은 아니지 만, 그 발화 행위가 타자에게 이해되고 소통되기 위해서는 발화자와 청취자 사이 에 언어적 문법과 의미체계에 대해 서로 공유하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과 유사 한 현상이다. 언어가 다른 집단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어렵듯이, 표현행위도 문화 적 코드를 공유하지 않은 집단 사이에서는 적절한 번역 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의미의 전달이 어렵거나 의미가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현상은 표현행위가 갖는 집단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표현문화란 용어는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 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표현)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성격은 무엇인가? 문화의 집단성을 얘기 할 때 그 집단의 경계는 무엇인가? 문화와 종족 또는 민족집단(ethnic group)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쌍으로 인식했던 독일의 전통은 미국의 문화인류학 에서도 대체로 그대로 수용되었다. 민족이란 정의 자체가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집단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민족문화의 동질성이란 개념의 위치는

15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민족 내부의 성( 性 ), 계급, 연령, 지역적 구분에 따라 문화적 이질성과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 국가 문화의 경우를 생 각한다면, 그 내부에 문화적 이질성의 존재는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문 화의 공유와 집단성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어떤 집단을 상 정하느냐에 따라 문화 공유의 정도와 타집단과의 문화적 차별성의 정도는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 마을공동체, 종족, 국가, 동아시아, 아시아라는 상이한 집 단의 수준에 따라 이들 각각이 공유하는 문화의 내용이나 그 내부에 존재하는 문 화적 이질성의 정도는 달라진다. 표현문화의 집단적, 공적 성격을 인정한다는 것 은 어떤 균질적인 문화적 동질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며, 매우 느슨하게 정의할 때의 문화적 공유를 의미하며, 그것은 집단의 층위에 따라 내포와 외연의 경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아시아의 표현문화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의 집단 적, 공적 성격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문화공동체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느슨한 수준에서의 문화적 공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3) 표현문화와 예술 예술의 의미도 표현행위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때, 예술과 표현문화 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아니면 양자는 서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예술을 표현문화의 일부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는데, 그럼으로써 양자가 중첩되면서 동시에 구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근대 서구에서 예술이라는 용어는 자기 충족적(self-contained)이고 자율적인 분 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즉, 예술 행위는 그 자체의 내적 논리와 방법 과 목적을 가지며 다른 여타의 행위, 예를 들어 경제행위나 종교행위와는 구분되 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구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예술 행위는 미적 감각의 표현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순수 예술은 미적 표현만이 유일한 존재 기반이 되는 분야로 인식되었다. 예술에 대한 다음의 사전적 정의는 서구의 근대적인 예술관을 잘 보여준다: 예술이란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색, 형태, 움직임, 소 리, 기타의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생산하거나 배열하는 것이다

16 이러한 예술 개념의 출현은 근대 서구에서 분업화와 전문화를 수반하는 사회적 분화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획기적으로 진전되는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술 뿐 아니라 경제, 정치, 법, 종교에 대한 개념도 자기 충족적이고 자율 적인 영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즉, 미분화된 유기적 총체로 서의 사회 개념을 대신하여, 기능적으로 분화된 기계적 조합으로서의 사회 개념이 우세하게 되었다. 근대 서구에서의 독특한 예술 개념은 이러한 서구의 독특한 세 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술을 표현문화의 일부로 인식한다는 것은 서구의 근대 예술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미학적 국지성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 예술계 내부에서도 서구의 미학적 기준의 편협함을 넘어서서 예술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소위 미개한 원주민의 그림, 조각, 장식물들을 원시 예술 로 명명하고, 예술의 장르 에 포함시킨 것이 그 예이다. 원시 예술 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 등 모더니스 트 예술가에게 미적 영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작품들은 인류학박물관의 수집품 으로부터 예술전시관의 수집품으로 자리바꿈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미적 감 각이 서구의 독점물이 아니며, 미적 판단의 문화적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서구중심적 예술관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다 른 각도에서 이 현상을 바라보면, 서구적 예술관의 외연적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 로 평가할 수 있다. 비서구의 표현문화를 미학적 기준이라는 서구의 잣대를 통해 서 예술의 영역에 포섭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서구사회의 표현 문화가 갖는 총체적 성격, 예를 들어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특징이 소멸되고, 미학적 판단의 대상으로만 환원되는 것이다. 예술을 표현문화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은 미적 감각을 인간의 표현행위에서 표 출되는 다양한 관념과 정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며,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근대 예술 도 미적 판단의 대상을 넘어서서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적 산물로 취급 되어야 한다. 또한, 미적 판단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예술에 포함되지 않았던 다양 한 표현행위, 일상생활의 잡다한 물건으로부터 정교한 종교적 의례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표현행위가 표현문화의 대상으로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 만약, 예술품의 개념을 표현 또는 재현을 목적으로 의미론적 속성 또는 미학적 속성을 가지거나, 그 양자를 모두 가진 대상 이라고 폭넓게 정의한다면(Morphy 2001: 39), 표현문화와 예술 개념 사이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하지만, 보다 좁은 의 미에서의 서구의 예술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 아카 이브 란 용어를 사용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표현문화의 아카이브 란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표현문화의 의미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표현문화의 아카이브: 문화의 도구적 측면과 표현의 측면 중 후자에 초점 * 표현문화의 정의: 관념과 정서를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공유된 방식에 의해 표 현하는 행위와 그 산물 *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의미론적, 미학적 관계에 주목 * 표현문화의 구성요소: 표현의 매체, 표현의 양식(기법), 표현의 내용 * 예술을 하위개념으로 포함하는 표현문화 5. 해석적 아카이브를 향해서 기존의 아카이브나 박물관에서의 자료 수집과 기록의 방식은 표본 채집의 성격 을 갖는다. 그 자료가 실물이든, 영상자료이든, 음성자료이든, 문서자료이든 원본 또는 그 모형을 수집하고,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자료가 수집된 장소와 시기, 자료의 명칭, 자료에 대한 간단한 설명)를 기술한 텍스트를 첨부하는 방식이다. 하 지만, 이 정도의 정보로 타문화나 다른 시대에 속한 표현문화를 자료의 사용자가 이해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타문화의 표현행위 와 표현물 속에 내재된 문화적 코드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다면 의미소통이 불가 능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즉, 문화간 의미 소통을 위해서는 번역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메타데이타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정보는 매우 불충분한 지시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번역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표현행위와 표

18 현물에 담지된 문화적 코드, 역사적 의미,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는 해석이 자료에 포함되어 제시될 필요가 있다. 그 해석 자체도 결코 완전한 것일 수는 없지만, 적 어도 그것은 자료와 독자(수용자)간의 대화를 유도하는 매개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는 표본 채집의 아카이브를 넘어서서 자료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는 해석적 아카이브를 지향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아카 이브가 아시아 문화 내부에서 의사소통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에 대한 해석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 것 인가? 서구의 근대 예술론에서 발전시킨 미학적, 형식적 분석은 자료에 대한 해석 의 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미학적 분석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미학적 분석에만 그치거나, 서구의 특정한 미학 적 잣대로 미적 감각을 평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해석적 아카이브 에서 담아야 할 해석은 표현행위와 표현물의 다층적이고 총체적인 문화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포함해야 한다. 요루바족의 선( 線 )에 대한 해석을 예로 들어보자. 선의 성질에 대한 요루바 족 의 표현들은 다양한 문화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다. 얼굴에 새겨진 선의 깊이, 방 향, 길이는 그 사람의 친족집단, 개인적 매력, 지위를 표현한다. 얼굴에 새겨지는 선의 성질에 대한 표현은 조상( 彫 像 )이나 도자기에 새겨진 선이나, 새 도로를 내 고 마을의 경계를 긋는 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요루바족에게 있어서 선 은 조형물 뿐 아니라, 신체, 공간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 것은 미적 감각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표현행위에 대한 해석은 이런 점에서 문화체계에 대한 해석을 수반한다(Geertz 1983: 98). 표현문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이론적 관점에서 행해질 수 있다. 몇 가지 대표 적인 예로 도상학적 접근, 구조주의적 접근, 민족과학적(ethnoscience) 접근, 현상 학적 접근, 기호학적 접근을 들 수 있다. 어떠한 이론적 관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내용과 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아시아 문화 아카이 브가 어떤 이론적 관점에 기초한 해석의 방식을 택할 것인지, 그러한 특정한 관점 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여기서 미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단, 문화해석이 너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아시아

19 의 현실적 맥락에 뿌리를 내린 해석이 자료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표현문화에 대한 해석이 갖는 방법론적 의미를 인류학자인 기어츠(Geertz)의 문 화해석과 국지적 지식(local knowledge)에 대한 논의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어츠의 문화 해석의 기본 출발점은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가 총체성과 복합 성을 지닌다고 본 것이다. 현지조사 과정에서 마주치는 개별적인 인식 대상 자체 가 총체적이고 복잡한 성질을 띠고 있는데 이를 올바로 파악하려면 행위자들의 의미의 망(webs of meaning) 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위와 사건(사회적 사실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는 물리적 대상까 지도 포함하는)들을 그 의미가 해독되어야 할 상징 또는 기호 체계로 간주한다 (Geertz 1973). 그는 행위자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또는 표준화된 방식은 존재하 지 않는다고 보았다. 유일한 접근 방법은 관심과 정열을 지니고 행위자들과 지속 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그들의 생활세계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인류학자의 해석은 행위자들의 생활세계 속에 들어갔을 때부터 시작되며 끊임없는 예측과 질문을 통 해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다가가게 된다. 행위자들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은 형식적 방법을 통해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관념체계를 끄집어내는 작업이 아니 다. 행위자들의 의미는 사회적 실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실제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델 역할을 한다. 그는 의미(관념)와 행위의 관계가 훨씬 직접적이고 구 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기어츠의 문화해석은 상징 및 의미체계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종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관습, 예술, 언어, 정치, 경제적 요소 등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들이 총체적 맥락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행위자들의 의미체계는 그 자체로 찾아지거나 기술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회조직과 제도 내에 있는 개인들이 행 동하는 맥락 속에서 발견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의 단위가 아무리 미시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행위나 사건에 담긴 행위자들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내야만 한다. 그는 이러한 시각 에 입각하여 문화해석은 기본적으로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 이라는 성격 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것은 의미구조의 계층화된 위계에서 다양한 수준의 의미들

20 이 형성되고 인식되는 맥락을 기술하는 것이다. 좀 더 깊은 수준의 의미를 구분해 내려면 행위자들이 속한 사회의 제도, 조직, 역사 등을 다양한 수준의 맥락 속에 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두터운 기술 이 이루어질수록 좀 더 깊은 수준의 의미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성되는 사회적 실재의 모습도 더욱 총체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기어츠의 문화해석은 사회적 실재의 직접성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국 지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특유한 의미체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해석의 실제적 단위는 조사자의 경험적 조사가 직접 이루어지 는 범위, 즉 국지적 단위의 지방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의미해석의 과정에서 그려 지는 다양한 맥락들은 사실상 한 지방사회의 사회적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 라서 그의 연구 방식은 국지적 지식(local knowledge)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중요 한 의의를 갖는다. 표현문화를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라고 인식한다 면, 현지인의 관점과 해석은 당연히 주요한 탐구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원주민의 지식(indigenous knowledge), 국지적 지식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을 목표로 하는 에믹(emic)적이고 해석학적 접근방식은 서구의 과학적 잣대에 의 해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 아시아의 고유한 문화를 발견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 용할 수 있는 관점이다. 아시아의 표현문화에 대한 자료수집에서 이 방법을 적극 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접근방식이 문화에 대한 본질주의적, 원형주의적 오류에 빠질 위험 을 갖고 있다는 점도 인식하여야 한다. 원주민의 지식, 또는 국지적 지식을 고유 하고, 잘 변화하지 않으며, 동질적이고, 진정한(authentic) 무엇으로 전제하고 그것 을 추구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입장의 연구는 현지인의 현재의 생활 세계보다는 원형적 문화 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는 현지인의 지식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원형적 문화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현지인의 지식은 무시하거나 간과해버린 것이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이론가의 현대 문화연구는 문화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과는 대척

21 점에 있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지구화 시대의 현대 문화는 끊임없이 부유 하며, 혼성적이고 잡종적이며, 지역적 뿌리를 상실한 문화이다. 현대의 세계는 마 치 1940년대에 유럽의 망명 지식인들이 뉴욕에서 느꼈던 것처럼, 과거와 현대, 이 질적인 공간이 한 장소에 공존하고 있는 문화의 꼴라쥬이며 디아스포라적 세계이 다.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에서 수집하고자 하는 아시아의 표현문화는 이 양 극단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것인가? 이미 사라져 버린, 또는 소멸의 위험에 있는 고귀 한 원형적 문화인가, 아니면 시장의 힘에 이끌리는 천박한 대중문화인가? 아니 면, 전통 또는 지역문화의 현대적 변용이거나, 지구적 문화의 지역적 변용인가? 모든 문화는 끊임없이 변하며, 자신의 문화에 대한 현지인의 인식과 관점도 이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에믹적 접근방식도 문화의 역동성과 역사성을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 아시아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전통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서 로 교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왔으며, 근대에 들어와서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아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서 로 교차하면서 아시아적 근대를 형성해 왔다. 아시아 문화자료의 수집과 해석은 아시아 문화의 이러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 방향성이 설정되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아시아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고찰함으로써 조사 대상을 어떻게 선 정하여야 하는 문제를 다룬다. 이 절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문화자료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해석적 아카이브 지향 * 문화간 의사소통을 위한 번역의 과정으로서의 해석 * 표현문화를 과학적 분석의 대상을 넘어서서 해석의 대상으로 인식 * 현지인의 지식, 국지적(local) 지식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

22 II. 조사대상의 선정 아시아의 문화자료를 모두 아카이브화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I장 에서 아시아 문화아카이브에서 문화가 의미하는 것을 표현문화 로 규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그 범위를 한정하였지만, 여전히 그것이 포괄하는 대상은 매우 넓으며, 또한 그 대상이 갖는 성격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장에 서는 문화자료의 성격을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먼저 검토하고, 표현문화의 분류 체계에 대한 개괄적 시도를 함으로써 아카이브에서 자료화하고자 하는 대상을 개 념적으로 보다 구체화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곧 무엇을 아카이브화 할 것인가 하 는 문제, 다시 말해 문화자료를 선정하는 기준을 규정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1. 아시아의 시간성 모든 문화자료는 그 자체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시대구분은 그러한 역사성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의 범주체계이다. 근대의 시계적 시간이 동질적이고 균 질한 시간의 연속성을 전제하는 것에 반해, 시대범주에 의한 역사 인식은 시간의 연속성을 질적인 단절과 도약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시대구분 을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서 어떤 자료가 갖는 역사적 성격을 해석하거나, 자료의 수집 과정에서 역사적 인식을 반영하는 조사전략을 세우는 지침을 찾을 수 있다 는 점에서이다. 이 절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기존의 다양한 시대구분 방식이 아시아에 적 용 가능한 것인지, 만약 그것에 문제가 있다면 아시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새 로운 시대구분의 제시가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 류 보편과 아시아적 특수성과의 관계, 아시아적 보편성과 개별문화적 특수성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시대범주를 설정하는 방식을 고려하며, 그것이 아시아 문화 아카

23 이브가 지향하는 표현문화의 수집이라는 현실적 목표와 어떤 식으로 부합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시대구분은 역사와 사회를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 에 따라, 또한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적 관심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즉, 시대구분은 특정한 관점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구분의 방식은 특정한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특수한 시대구분을 시도하는 입장과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시대구분을 시도하는 입장 사이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왕국 또는 국가를 유의미한 사회적 단위로 삼는 역사학에서의 전통적인 시대구 분은 왕조 또는 정권의 변화에 따라 시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는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에 주목했던 과거의 역사 연구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시대구분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유럽의 역사학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의 전통적인 역 사학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개별 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과정을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것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엘리트 중심의 역사 인식, 사회 문화적 변화보다는 정치적 변화를 핵심변수로 잡고 있기 때문에 표현문화의 역사 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의 방향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 그리 고 왕국 또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아시아라는 광의의 지역을 거시적으로 인 식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본 아카이브에서 채택할 시대구분의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유럽의 근대 역사학에서는 개별 왕국이나 국가가 아닌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적 과정에 관심을 보이면서,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시대구분으로 고대, 중세, 근현대의 3시기 구분법을 만들어내었다. 이 구분법은 유럽의 역사학자들이 아시아 의 역사를 연구하는 경우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아시아의 현지인 역사학자 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연구할 때 이 구분법을 무비판적으로 도입하는 경향이 나 타났다. 현재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는 선사, 고대-중세, 근세, 근대, 현대의 단계 별 접근을 채택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사학계에서는 여전히 고대, 중세, 근 현대의 3시기 구분법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24 이와 관련하여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중세, 근현대의 3시기 구분법은 유럽의 역사적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로마 문명의 고대, 기독교 문명의 중세, 르네상스 이후의 근현대는 유럽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과정에 대 한 유럽인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유럽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단절과 전환의 계기를 가져왔다고 보는 변화에 기초해서 고대, 중세, 근현대의 3시기 구 분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유럽과는 상이한 역사적 과정을 겪어온 아시아 에 이러한 3시기 구분법을 적용하여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무리이며, 아시아의 역 사적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앙코르 제국이 동남아의 중세에 해당 하고, 고려시대가 한국사의 중세에 해당한다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하다. 이들 국가에서 고대와 근현대와 구별되는 중세적 특징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아주 먼 과거, 다소 먼 과거, 가까운 과거와 현재라 는 의미에서의 고대, 중세, 근현대는 시대구분의 범주로 분석적 가치를 갖지 못한 다. 유럽의 고대, 중세, 근현대에 해당하는 세기를 아시아의 역사를 구분하는데 그 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아시아 각국에서의 역사적 과정은 삼분법으로 나누기에는 보다 복잡한 역사적 단절의 시기를 포함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보다 더 지속적인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아시아에서 서구 의 식민지배가 침투하는 시기 이후를 근현대라고 상정한다고 할지라도, 그 이전의 시기를 고대와 중세라고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는 문제가 남는다. 즉, 3시기 구분법은 유럽의 역사와는 상이한 역사적 리듬과 굴곡을 갖는 아시아의 시대구분 으로 채택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유럽의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사회과학자들은 인류의 보편적인 발전단계에 대 한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발전단계론도 일종의 시대구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 사회진화론자들은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발전단계의 모델로 야만, 미개, 문명의 3분법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는 생산관계라는 사회의 물질적 토대의 변화 에 기초한 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라는 발전단계 모델을 통해 유물론 적 역사인식에 의한 시대구분의 방식을 제시하였다. 사회학자들은 사회구성의 원 리에 주목하여 전통사회와 근대사회를 2분법적으로 구분하였는데, 공동체사회 (Gemeinschaft)와 이익사회(Gesellschaft), 신분사회와 계약사회, 기계적 연대와 유 기적 연대와 같은 이론적 모델들이 이에 해당한다

25 이러한 발전단계 모델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은 이들 모델들이 암묵적 으로 서구의 발전론적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역사 발전의 방향과 성격을 규 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유럽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현대 유럽 을 인류 문명발전의 정점으로 인식하고, 이와 다른 모습의 비서구사회는 유럽이 이미 지나쳐 온 과거의 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위치 지워지고, 궁극적으로는 동 일한 방향으로 진화의 과정을 겪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들 모델이 인류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 내재된 유럽중심주의적인 요소를 고려할 때 아시아의 시대구분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 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주로 서구에서 제시되어 온 시대구분 방식을 대략적으로 검토하였는 데, 그 어떤 방식도 아시아의 시대구분으로 채택하기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서구적 관점을 벗어난 아시아의 입장에서 아 시아의 역사에 부합하는 시대구분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쾌 한 답을 찾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아시아 전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그 역사적 궤적을 탐구하는 연구가 축적되어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 여기서는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에서 취할 수 있는 시대구분의 방식으로 전근대(또는 전통)와 근대를 잠정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앞서 사회학적 시대구분 방식으로 제시하였던 전통과 근대의 도식을 원용한 것인데, 표현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에 있어서는 차별화한 다는 전제 하에 사용하고자 한다. 서구에서의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에서 근대는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서로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며, 전통으로부터 근대로의 변화를 발전사관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강하게 스며있다. 뒤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여기서는 전통과 근대의 관계를 이항대립적이 거나 발전론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을 지양한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근대(modern)라는 용어는 지금 현재 를 의미하는 라틴어 modo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그것의 문자적 의미에 의하면 모던은 어떤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26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현재의 시간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다. 하지 만, 서구에서 근대는 어떤 특정한 시기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그것 은 서구의 역사에서 발생하였던 거대한 새로운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용어로 사 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변화의 계기로 흔히 지적되는 것은 통합된 시장경제 의 형성, 산업화와 기술혁명, 국민국가의 성립, 과학과 합리적 사고의 발달이다. 이들 요소들의 성립은 시기를 달리 하지만 근대를 형성하는 한 묶음으로 취급하 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와 같이 개념화된 근대는 전통과의 단절 또는 극복 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시아에서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그 의미가 이중적이다. 하나는 서구에 서 근대를 의미하는 사회와 관념체계의 질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와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서구적인 것의 도입이다. 서구에서 근대의 의미가 시간적인 것이라면, 아시아에서 근대의 의미는 시간적이면서 동시에 공간적인 것이다. 근대 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아시아의 역사를 전근대(전통)와 근대로 구분하는 것 은 아시아의 역사를 서구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방식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채택하는 이유는 서구 식민지배와 서구 문물의 도입이 아시아 전체에 미친 충격과 영향이 지대하고, 현대 아시아를 이해 하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적 관점에서 아시아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을 표상하는데 근대라는 표현을 대신할 대 안적 용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락에 따라 근대가 현재의 시점까지 를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근현대란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근대와 현대를 다시 나눌 경우에는 현대의 시점을 어떻게 잡아야하는가 하 는 문제가 제기되며, 이에 대해서는 아시아 지역에 일반적으로 적용시킬 기준을 제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근현대란 표현은 위에서 제시한 근대의 의미에 연장선상에 있으며, 단지 그 시기가 현재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전통과 근대, 또는 전근대와 근(현)대라는 서구의 이분법적 모델이 일반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기에서 사용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밝히 기 위해 전근대의 의미, 근대의 의미, 그리고 전근대와 근대의 관계에 대해 새롭 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서구적 모델에서 아시아의 전근대는 불변의 전통에

27 의해 지배되는 정체된 시기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아시아의 전근대는 매우 다양한 전통들이 서로 교류하고 접합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전통들을 만 들어내는 역동적인 시기로 인식하고자 한다. 서구 세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들어오 기 이전에 아시아의 내부는 서로 고립된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초 원과 사막과 해양의 통로를 통해서 문물, 기술, 종교, 예술을 활발하게 교류하였 다. 군사적 정복, 교역, 종교적 순례는 이러한 교류를 촉진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 다. 즉, 아시아의 전근대를 복수의 전통이 혼재하며 상호작용하는 문화적 혼성성 과 역동성을 지닌 시기로 인식하고자 한다. 이렇게 파악할 때, 전근대라는 표현은 근대 이전의 아시아 역사의 복합성과 변화상을 담아내기에는 매우 불충분한 개념 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단지 단순한 틀로서 전근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며, 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보다 세밀한 시대구분이 만 들어져야 할 것이다. 아시아에서 근대를 서구 식민지배와 서구문물의 도입과 관련하여 규정한다고 할 때, 근대의 역사적 기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멀리는 16세기 이후로, 가깝게는 19세기 이후로 설정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전자는 서구의 무역거점이 인 도의 고아(Goa)와 동남아의 말라카(Malacca)에 성립하는 것을 계기로 서구 상인들 이 아시아 교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근대의 기점으로 잡는 것이다. 아시아의 근 대의 기점을 이 시기까지 올려 잡는 것은 서구의 영향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다 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유럽 상인이 아시아 지역에 처음 출현한 이후 몇 세기 동 안 이들은 유럽에서 수요가 있는 아시아의 특산물에 대한 독점적 교역에 주로 관 심을 가졌으며, 아시아 내부의 교역에 대한 이들 유럽 상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 었다. 또한 이들이 관할하는 영토는 주로 교역의 거점이 되는 일부 무역항에 국한 되었으며, 그 곳을 벗어난 지역에 대해서는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없었 다. 아시아 전체로 보아서 유럽 상인의 출현은 앞으로 다가올 큰 변화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사실 자체만으로 아시아의 역사를 구획 지을만한 사건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보다 본질적인 변화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해서 20세기 초까 지 진행되는 유럽에 의한 아시아 식민지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아 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분할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전 시기에 유럽의 영향이 주로 교역에 머물렀던 것에 반해, 이 시기 이후는 영 토적 지배를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총체

28 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아시아의 근대의 기점을 대체로 19세기 이후로 잡는 것이 보다 역사적 현실에 부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지역에 따라 근대의 시점은 물론 차이가 있으며, 빠르게는 18세기 말, 늦게는 20세기 초로 잡을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의 역사적 기점을 설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시아의 근대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이다. 앞서 서구의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적 모델에서 양자간의 관계는 이항대립적이고 발전론적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지적하 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이해방식을 넘어서서 아시아의 근대성을 새롭게 인식할 필 요가 있음을 제안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전근대를 복수적 전통이 혼재하며 역동적 으로 변화하는 시기로 인식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근현대도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혼재하며 상호 작용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시기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인식할 때, 아시아의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단절의 역사나 극복의 역사가 아니라, 갈등과 대립, 상호침투와 수 용, 재창조와 변형을 수반하는 공존의 역사로 파악할 수 있다. 아시아의 근현대에 있어서 전통과 근대간의 혼성화는 곧 아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과의 혼성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전통문화가 현대적 매체와 스타일을 사용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되고, 서구에서 수입된 문화가 토착적 형식과 내용을 포함 하게 되는 현상은 전통과 근대의 혼성화이면서 동시에 아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혼성화이다. 아시아의 근현대에 있어서 이러한 문화적 혼성화의 양상은 근대화가 서구문화 의 일방적 모방이나 이식의 과정이 아니라 서구의 충격에 대한 아시아의 주체적 대응을 수반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아시아의 주체적 대응은 아시아 내부의 각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전통과 역량,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을 취하 게 된다. 그러한 역사적 과정으로서 아시아의 근현대는 근대화 이론에서 상정하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근대성을 넘어서서 복수적 근대성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다. 복수적 근대성은 전근대와 근대, 아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간의 경직된 경계를 허무는 아시아의 새로운 공간성과 시간성을 암시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아시아의 시간성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일반적인

29 시대구분을 제시한 것이며, 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인식하는 시대구분과 시간성은 여기서 제시한 것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세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근대의 시기는 보다 분화될 필요가 있으며, 근현대의 시기도 마찬가지이다. 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그들 스스로 인식하는 시대구분과 시간성은 이들 지역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축적되는 것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시간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잠정적으로 전근대(또는 전통) 와 근대(또는 근현대) 의 시대구분을 채택하되 양 자를 이항대립적이거나 발전론적으로 인식하지 않음. * 아시아의 전근대: 아시아의 다양한 전통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접합하면서 역동 적으로 변화했던 시기 * 아시아의 근현대: 19세기 이후 아시아에 대한 서구 지배가 전면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아시아인들이 서구 문화를 모방하면서도 전통문화를 새롭게 변용하고, 서구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토착화했던 주체적 대응의 시기 * 아시아 근현대에 있어서 문화적 혼성화의 양상(전통과 근대의 공존, 복수적 근 대화) 2. 아시아의 공간성 아시아가 가리키는 지리적 공간 범위는 매우 방대하며, 그 안에 매우 다양한 생 태적, 인종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차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시아를 하나의 단일한 덩어리로 간주하고 접근하는 일은 자료 수집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과정에 서 뿐만 아니라, 수집된 자료를 보관, 활용하는 과정에서도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 움을 초래한다. 이런 이유로 아시아를 유의미한 공간 단위로 분할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절에서는 아시아를 공간적으로 분할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검 토하고, 앞으로 아시아 문화자료 수집과정에서 채택할 공간분류 방안을 제안한다. 이에 앞서 먼저 지적해두고 싶은 점은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은 조사의 목적에 따

30 라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으며, 모든 목적에 부합하는 유일한 공간분류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하는 공간분류 체계도 특정한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이해하야여 한다. (1) 국가에 의한 공간분류 현대에 들어서서 국가의 영토적 경계는 지리적 공간을 분할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아시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오늘날의 세계지도는 지구적 공간을 국가 경계에 의해 분할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을 시 각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상상된 정치공동체 로서의 근대국가는 그 이전 의 정치체제와는 달리 명확한 영토 개념에 기초한 정치지리적 공간을 의미한다. 근대국가들은 각각의 영토 내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측면에서 통합을 강 력하게 추진하는 반면, 자신의 영토 외부와는 차이와 단절을 명확하게 규정한다 (국가간의 교류는 이러한 내부적 통합과 외부와의 차이와 단절을 전제로 해서 이 루어진다). 따라서 근대국가는 오늘날 다른 어떤 기준보다도 공간적 분할을 강력 하게 작동시키는 제도적, 관념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국가에 의한 공간분할이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지만, 아시아 문화 자료 조사와 수집을 위한 공간분류 체계로서 그것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에는 여 러 가지 근본적인 제약점이 존재한다. 먼저 아시아에서 근대국가 성립의 역사적 과정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현대 아시아 국가들의 영토적 경계는 상당 부분 서구 식민지배의 산물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화 과정에서 영토적 측면에서만 큼은 식민지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서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는 근대국가의 영토가 과거 왕국의 영토와 대체로 일치하는 경우가 있지 만, 이들 사례는 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서구 식민지배의 결과 과거에 하나의 단일한 정치공동체 에 소속되지 않았던 많은 종족(ethnic) 집단이 특정 식민권력의 지배 하에 포섭되 거나, 단일한 종족집단이 서로 다른 식민권력의 지배 영역 속으로 분리되는 현상 이 발생하였으며, 그것이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에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즉, 근대국 가의 영토적 경계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새롭게 그어진 공간분할이며, 종족 집단의 경계나 문화적 경계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31 둘째, 국가에 의한 공간분할은 아시아 전체를 문화적 공간으로 인식하는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근대국가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 관념이 공간분할의 의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국가관은 국가를 정치공동체일 뿐 아니라, 민족공동체 또는 문화공동체라고 인식함으로써, 한 국가 내에 동질적이고 통합된 국가문화가 존재하며, 그것이 타국의 문화와 근 본적으로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즉, 국가문화를 일종의 문화적 소우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방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데, 하나는 국가 내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존재한다는 점 을 간과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문화적 공 유의 측면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를 문화적 공간으로 인식하기 위 해서는 국가적 공간분할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간분류 개념의 도입이 필요하다. 국가중심적 공간분할에 대한 대안적 인식방법으로 지역연구(area studies)에서의 지역에 대한 개념, 인류학적인 문화지역(culture area)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 지역연구에서의 세계지역 개념에 의한 분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연구는 세 계를 몇 개의 주요한 지정학적 공간으로 분할하는 세계지역(world region) 이란 개념을 발전시켰다. 세계지역의 분류방식은 지역연구를 관장하는 기관에 따라 차 이가 있고,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지만, 예를 들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서유럽, 동유럽, 라틴아메리카 등의 용어가 세계지역의 범주 에 해당한다. 이러한 세계지역의 분류는 미국의 국제정치적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자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치경제적으로 미국과 이해관계가 큰 지역은 보다 세밀하게 구분되고, 그렇지 못한 지역은 미분화된 방 식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경우만 본다면 미국의 지역연구에 서 채택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의 분류체계는 그 이전에 유 럽의 아시아 연구가 아시아 또는 오리엔트라는 큰 덩어리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32 유럽의 각국이 자신의 식민지 영역을 단위로 연구하던 경향과 비교해서 보다 진 일보한 것이다. 미국의 지역연구가들은 아시아 내에 존재하는 중요한 지역적 차이 를 인식하였으며, 그러한 차이를 보다 객관적인 용어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예 를 들어 과거에 흔히 사용되던 근동, 중동, 극동과 같은 표현은 유럽중심적인 공 간 인식을 반영한 것인데 반해서, 미국의 지역연구에서는 이들 지역을 서아시아, 동아시아와 같은 용어로 표현함으로써 보다 중립적인 공간 인식을 반영시켰다. 현 재 동남아시아의 경우에 유럽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이 지역을 인도 너머 (Further India)' 또는 인도차이나로 명명함으로써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도 또는 중국의 부속물처럼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에 반해, 미국의 지역연구에서 채택한 동남아시아라는 명칭은 이 지역의 독자적인 성격을 인정한 것이다. 세계지역의 개념이 기본적으로는 지정학적 공간 인식에 기초한 것이지만, 각각 의 세계지역 공간에 포함된 국가와 사회들이 어느 정도 유사한 문화적 공통성과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지역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아 시아는 유교문화, 남아시아는 힌두문화, 서아시아는 이슬람문화의 영향이 두드러 지게 나타나는 지역이며, 동남아는 힌두와 불교문화,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면서 동남아의 고유한 전통적 생활양식이 기층문화에 존재함으로써 남아시아나 동아시 아와는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진 지역이다. 중앙아시아 역시 이슬람과 불교 등이 혼재하지만, 실크로드와 관련된 역사적 전통을 공유하는 지역이다. 아시아에 서 문화의 통합적 기제로서 종교가 갖는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아시아에 대 한 세계지역의 분류 방식이 대체로 종교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의 공간분류 체제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방식이 갖는 현실적 이점은 이러한 아시아 지역 분류 방식이 이미 상당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 분류 방식을 쓸 때 예상되는 혼란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교문 화권, 힌두문화권, 불교문화권, 이슬람문화권과 같이 종교만을 기준으로 해서 공간 을 분류할 경우에는 그 지리적 경계를 명확하게 긋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공간 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같은 문화권 내에 포함시켜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문화권이라고 할 때 아랍 지역 뿐 아니라 인도의 북부, 중앙아시 아의 일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중국의 일부를 포함시켜야 하는데, 그 개념 은 문화의 교류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아시아에 대한 공간 분류의 지 침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33 세계지역의 범주를 사용할 때 아시아를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 시아, 중앙아시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동아시아란 명칭은 동북아만을 지칭하기 도 하고, 최근에는 동북아와 동남아를 합친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동아 시아란 명칭 대신 동북아시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각 지역범주에 속하는 국가 또는 지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지역범주 국 가 동북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대만, 극동러시아 동남아시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동티모르 남아시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서아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오만,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몽골, 티베트, 신장자치구 < 표 1-1 > 지역범주표 이 분류는 아시아의 공간을 분할하기 위한 발견적 모델로서 의미가 있으며, 각 각의 지역범주가 명확하게 독자적인 지역 실체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지역과 지 역사이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며, 상당히 자의적인 분할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예 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이 서아시아에 포함되어야 할지, 남아시아에 포함되어야 할 지, 아니면 중앙아시아에 포함되어야 할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서아시아의 서쪽 경계를 사우디아라비아로 잡은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북아프 리카 지역은 언어, 종교적으로는 서아시아에 가깝기 때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북

34 아프리카와 서아시아를 하나의 지역범주에 묶는 것도 가능하다. 앞에서 이들 지역이 지배적인 종교의 차이에 의해 구별될 수 있는 문화지역으 로서의 성격을 가졌다고 하였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지역 내에 문화적 다양성과 이질성이 상당한 정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남아 시아에는 이슬람, 힌두교, 불교가 혼재하며, 언어와 종족적으로 매우 복잡한 구성 을 갖는 지역이다.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이 지배적인 종교이지만, 이 곳은 기독 교와 유태교의 발생지이기도 하며, 아랍계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과 비아랍계 언어 를 사용하는 지역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존재한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유교와 한 자 사용이 공통의 문화적 유산이지만, 한국, 중국, 일본 3국 사이에 일상적인 문화 의 측면에서는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지역경계의 애매모호성, 개별 지역 내에 존재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이질성을 고 려할 때, 위에서 제시한 아시아 지역범주에 지나치게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피할 필요가 있다. 지역은 국가와 같이 닫힌 공간이 아니라 외부로 연결되며 열려 있는 공간이다. 세계지역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국가 경계를 넘어서서 문화적 동질성과 차 이를 인식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는다. 예를 들어 불교 문화를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와 같은 개별국가의 수준에서 조사하는 경 우에 비해 동남아라는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탐구할 때 테라바다(Theravada) 불 교로서 동남아의 불교문화가 갖는 독특한 지역적 성격과 역사적 관계를 보다 폭 넓게 파악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문화의 연구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국가의 수준을 넘어서서 접근할 때 아랍의 이슬람과는 다른 동남아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기존의 일국사적인 접근 방법을 넘어서서 동아시아적 전망에서 바라볼 때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였던 역 사적 공통점과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역사학자들의 제안도 이러한 세계지역적 접근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시아를 몇 개의 중요한 지역공간으로 분할하여 접근하는 것은 아시아라는 방 대한 공간에 대한 조사를 수행할 때 전략적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35 다. 이러한 조사상의 현실적 편의성 외에도 지역으로 접근할 때 개별 국가 수준에 서의 연구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지역 공간의 성 격이 닫힌 공간이 아니고, 외부에 연결되고 열려 있는 공간이란 점을 인식할 때, 개별 지역에 대한 연구는 아시아 전체를 조망하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3) 문화지역에 의한 공간분류 문화와 지리적 공간을 연계시키기 위해 인류학에서 발전된 문화지역(culture area)이란 개념을 아시아의 공간성을 이해하는데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인류학에서 문화지역의 개념은 어떤 특정한 문화적 특질을 공유 하는 집단을 공간적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문화적 단위는 내부적으로는 문화적 유 사성 내지 동질성을 보이며, 외부와는 변별적인 차이를 보이는 수준에 의해서 결 정된다. 사회진화론에서는 문화적 유사성과 차이를 보편적인 문명발전 단계에 의 해서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에 반해서, 문화지역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인류학자들 은 그러한 유사성과 차이를 특정한 문화요소 내지 그러한 요소들의 집합체인 문 화복합이 공간적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의해서 설명하였다. 즉, 문화의 공간적 분 포는 역사적 관계의 산물로 인식되었다. 이런 점에서 인류학의 문화지역 개념은 19세기 유럽 전파주의자들의 문화권(Kulturkreis) 개념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양자간의 차이를 든다면, 유럽의 전파주의자들은 전세계적인 차원에 적용될 수 있 는 문화권을 설정하려고 시도한 것에 반해, 20세기 초 미국 인류학자들은 보다 제 한된 공간에서의 문화전파 과정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미시적인 문화지역 을 설정하려고 하였다. 문화지역을 설정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과연 어느 정도 문화적인 속성을 공 유해야 하나의 독자적인 지역단위로 인정될 수 있으며, 어떠한 문화요소가 문화지 역의 경계를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가를 선택하는데 있다. 인류학 자들은 문화지역을 나누는 기준으로 종족(예: 쿠르드족), 종교(예: 이슬람 세계), 언 어(예: 반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인종(예: 멜라네시아) 등 다양한 개념을 동원 하여 왔는데, 어느 기준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문화지역의 성격과 범위는 크게 달 라진다. 이들 상이한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단일한 문화지역은 현실적으로 거의

36 존재하지 않는다. HRAF(Human Relations Area Files)는 인류학의 문화지역 개념에 기초해서 세 계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시도를 하였다. 먼저 세계를 아프리카, 지중해 를 둘러싼 지역(유럽, 북아프리카, 근동 포함), 동아시아, 도서 태평양, 북미, 중남 미로 크게 분류하고, 각 지역을 중범주의 집단과 하위범주의 집단으로 세분화하였 다. 대범주가 지리적 공간인 것에 반해, 중범주와 하위범주는 문화적 요소를 기준 으로 한 집단으로 되어 있다. 중범주를 구성하는 집단은 언어군(linguistic family) 또는 하위 언어군이며, 각각의 중범주는 종족집단(ethnic group)을 단위로 하는 하 위범주에 의해 세분화된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는 25개의 언어군 또는 하위 언어 군으로 구성된 중범주로 나누어지고, 종족집단으로서의 한국인은 만주족과 더불어 퉁구스 언어군이라는 중범주의 하위범주로 설정되어 있다. 종족집단을 구분하는 기준 역시 언어가 핵심이 된다고 할 때, HRAF의 분류체계는 언어적 유사성과 차 이의 수준에 따라 세계 문화를 나눈 것이다. 이러한 HRAF의 세계문화 분류체계와 관련해서 언어적 차이가 문화지역 구분의 결정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HRAF에서 종족으로 인정하고 있는 집단들이 실제로 타집단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종족 정체성을 가진 집단인지 아니면 외부인에 의해 발명된 집단인지에 대해서 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러한 이론적 의문을 논외로 하더라도, 아시아 지역을 종족집단으로 세분해서 이들 각 집단의 문화를 수집한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극 복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인도네시아에서 현재 알려진 종족집단이 100여개에 이르는데, 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를 종족집단별로 체계적으로 세분해서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인류학의 문화지역 개념은 아시아의 공간분류를 위한 주도적 틀로 삼기는 어렵 지만, 세계지역 개념에 대한 보완적인 수단으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라는 분류체계는 아시아 의 공간을 큰 획으로 구분짓는데는 유효하지만, 보다 미세한 수준에서의 문화요소 들의 공간적 분포를 보여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인류학의 문화지역 개념은 그

37 러한 공백을 매우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자 인형극의 공간적 분포, 이깟(ikat) 직물의 공간적 분포는 특정한 문화요소들이 동남아 지역 내에서, 나아 가서는 인도와 중국과 어떤 역사적 연계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특정 문화요소들의 집합체로서 문화복합은 세계지역 개념으로는 쉽게 포착하기 힘든 문화의 공간적 분포의 양상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바와 발리에 서 인도의 서사시(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와 힌두교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과 상징들이 음악(가믈란), 그림자극(와양), 바틱 직물, 무용, 벽화, 사원의 부 조에 공통적으로 동원되는 문화복합 현상에 주목함으로써 국지적 문화의 독특성 을 밝힐 수 있다. 아시아의 공간분류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국가중심적 공간분할에 대한 대안적 공간 인식의 필요성 * 아시아를 크게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5개 의 권역으로 분류 * 미세한 수준에서의 문화요소들의 공간적 분포를 밝히기 위해서 문화지역 이란 개념을 보완적으로 활용. 3. 표현문화의 분류체계 총론에서 아시아문화아카이브에서 수집할 문화자료의 성격을 표현문화라고 규 정하였다. 표현문화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공유된 방식에 의해 관념과 정서를 표현하는 행위와 그 산물을 가리킨다. 이 절에서는 이렇게 정의된 표현문화를 아 시아 문화자료 수집이라는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분류체계는 실제 자료 수집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하는데 지 침이 될 뿐 아니라, 표현문화가 의미하는 바를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개 념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도구적 측면에서 규정하느냐 또는 표현적 측면에서 규정하느냐에 따라

38 문화에 대한 분류체계의 방식은 크게 달라진다. HRAF의 문화분류체계에서 경제, 기술 및 물질문화, 혼인과 가족, 사회관계, 생애주기, 정치조직, 법, 종교, 의료, 교 육, 예술, 여가, 언어 등이 핵심적인 문화영역으로 설정된 것은 문화의 도구적 측 면을 중심으로 분류를 시도한 결과이다. 문화자료의 성격을 표현문화로 규정할 때 는 그것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분류의 방식이 요청된다. 표현문화의 분류체계를 구성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고려할 점은 그것이 통문 화적( 通 文 化 的 )인 유효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표현문화의 특수성에 기초한 분류체계를 선험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작업일 뿐 아니라 왜곡의 위 험을 갖기 때문에 그보다는 통문화적 유효성을 갖는 분류체계를 구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아시아적 독특함이 포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보다 현실적 인 방안이다. 표현문화를 회화, 건축, 조각, 사진, 음악, 무용, 영화, 연극, 문학 등 의 하위 범주로 나누는 분류체계는 서구에서 예술이 특화된 영역으로 독립하고 전문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세분화되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표현문화 의 통문화적 분류체계로는 부적합하다. 표현문화를 서구적 예술개념의 좁은 의미 를 넘어서서 보다 광의의 의미로 규정할 때, 표현문화가 갖는 기본 성격으로부터 출발해서 통문화적 분류체계를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현문화는 표현하는 것(표현의 매체와 행위)과 표현된 것(관념과 정서)의 결합 인데, 분류체계를 구성함에 있어서 표현된 것보다는 표현하는 것에 기초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유효한 방안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로 몇 가지 점을 들 수 있 다. 첫째, 관념과 정서는 구체적인 대상이나 행위를 통해 표현되며, 우리는 표현물 과 행위에 대한 체험과 해석을 통해 그 속에 표현된 관념과 정서를 파악할 수 있 다. 즉, 표현하는 것과 표현된 것의 결합관계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표현하는 것이 인식의 출발점이 된다. 둘째, 표현된 관념과 정서에 기초한 분류는 표현문화의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하 는 표현이라는 실천적 측면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도서관의 십진분류법에서 이러 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십진분류법에서 대범주를 구성하는 철학, 종교, 사회

39 과학, 순수과학, 기술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는 크게 학문의 성격에 따른 분 류방식이며, 지식을 범주화하는 하나의 독특한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류방식 을 통해서는 표현하는 것과 표현된 것의 결합으로서의 표현문화의 특성을 파악하 기 어렵다. 셋째, 표현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 분류체계는 기존의 예술 분류체계가 표현매체 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과의 연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넷째, 표현하는 것에 기초해서 표현문화를 접근함으로써 관념과 정서에 대한 보 다 폭넓고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기존의 도서관적 접근에서는 관념 (지식)이 글의 형태로 표현된 것에 집중함으로써 다양한 표현의 방식을 간과하는 한계가 있었으며, 예술학적 접근에서는 표현의 의미를 미학적 측면에서 주로 포착 하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는 관념과 정서가 다양한 표현의 형태, 즉 사물과 이 미지, 소리, 맛과 냄새, 말과 글, 몸짓 등을 통해 표출되는 양상에 주목함으로써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과의 관계를 보다 풍부하게 포착할 수 있다. 이는 인간 의 이성과 문자매체를 중심으로 지식체계를 구성하는 기존의 입장과는 달리 인간 의 오감과 비문자적 매체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뜻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표현문화의 분류체계로 크게 시각문화, 청각문화, 미각 및 후각문화, 언어문화, 몸의 문화, 공간문화, 복합문화의 7가지 대범주를 제안한 다. 이 분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은 표현물과 표현행위를 인지하는 인간 의 감각 능력이다. 이러한 분류체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 만, 불교의 인식론과 상당한 정도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불교의 12처( 處 )에서 처 ( 處 )는 ayatnya를 번역한 것인데, ayat은 들어오는 의 뜻이고, nya는 것 과 곳 이 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ayatnya는 들어오는 곳( 處 ) 또는 들어 오는 것( 入 ) 이라는 뜻이다. 12처란 6근( 根 ), 즉 6개의 감각기관인 눈( 眼 根 ), 귀( 耳 根 ), 코( 鼻 根 ), 혀( 舌 根 ), 몸( 身 根 ), 마음( 意 根 )과, 이에 상응하는 대상인 6경( 境 ), 즉 색깔과 형태( 色 境 ), 소리( 聲 境 ), 냄새( 香 境 ), 맛( 味 境 ), 닿을 수 있는 것( 觸 境 ), 생각 ( 法 境 )을 합친 것이다. 마음( 意 根 )을 감각기관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감각과 사유 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서구의 근대적 인식론과 차이를 보이지만, 그 밖의 분류방 식에서는 보편성을 인정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40 위에서 제시한 7가지 대범주 중 시각문화, 청각문화, 미각 및 후각문화는 불교 의 12처의 내용 일부와 정확히 일치한다. 언어문화라는 범주는 언어가 단순히 소 리나 형태(문자)가 아니고, 의미의 기호라는 독특한 매체적 특성을 고려해서 청각 문화와 시각문화로부터 구별하여 독자적인 범주로 설정하였는데, 불교에서의 마음 ( 意 根 )과 생각( 法 境 )과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몸의 문화라는 범주는 몸(몸짓과 몸의 치장)을 통한 표현행위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독자적인 범주로 설정하였다. 불교에서 감각기관으로서의 몸 ( 身 根 )과 촉경( 觸 境 )이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몸짓과 몸의 치장이 눈을 통해 시각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각문화의 일부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문화는 공간을 통한 표현행위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독자적인 범주로 설정하였다. 공간을 형성하는 인공물(건축, 도로, 마을과 도시 등) 역시 눈을 통해 시각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각문화의 일부가 된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문화, 몸의 문화, 공간문화라는 범주는 인간의 감각 능력에 따른 표현문화의 분류 원칙과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인간의 표현 행위와 관련해서 이들 영역이 갖는 독특성과 중요성을 고려해서 독자적인 범주로 설정되었다. 시각, 청각, 언어, 몸짓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동원되며, 그 중 어느 것이 주도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표현문화를 지칭하 기 위해서 복합문화라는 범주를 설정하였다. 위의 분류체계는 표현하는 것(표현의 매체와 행위)을 중심으로 만든 것이지만, 표현문화는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관념과 정서)의 결합이라는 정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각문화는 색과 형태라는 재료와 소재를 어떤 일정한 규칙이나 질서에 따라 조합하고 구성함으로써 관념과 정서를 표현하는 총체를 의 미한다. 시각자료에 의해 표현되는 관념과 정서는 매우 다양할 것이지만, 색과 형 태에 대한 관념 자체(예를 들어 원근법)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다른 영역에서 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청각문화에서는 음에 대한 관념, 미각과 후각문화에서 는 맛과 냄새에 대한 관념, 언어문화에서는 언어에 대한 관념, 몸의 문화에서는 몸에 대한 관념, 공간문화에서는 공간에 대한 관념이 포함된다. 7개의 대범주에 어떤 표현물과 표현행위가 포함되는 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

41 히기 위해 중간 범주를 포함한 분류체계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각 범주에 해당 하는 세부항목은 아시아의 표현문화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그 독특성을 반 영하는 유의미한 방식으로 새롭게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대범주 중간범주 세부항목 시각문화 청각문화 미각 및 후각문화 언어문화 몸의 문화 공간문화 2차원적 공간 (평면) 3차원적 공간 (입체) 공간과 시간의 결합 음악 소리 맛 냄새 입말 글말 비구어적 언어 몸짓 몸의 치장 자연공간 인공물 공간 서체, 회화, 디자인, 판화, 사진 등 오브제(공예, 조각), 건축, 기념물 등 미디어아트 등 선율, 리듬, 구조, 짜임새가 있는 소리 소리 음식, 음료 향 구술 언어 문자 신체언어, 신호 등 춤, 수행, 무예 등 옷, 장신구, 화장, 문신, 탈 등 자연공간 건축물 공간, 도로, 마을과 도시 등 복합문화 의례, 축제, 영화, 연극, 인형극, 놀이 등 < 표 1-2 표현문화의 분류체계 >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기초로 해서 표현문화의 분류체계를 그림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42 < 그림 1-1 > 표현문화의 분류체계 다이어그램 위 그림은 표현문화의 7개 범주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여기에 설정된 7개의 범주는 각각 닫힌 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간에 칸 막이가 숭숭 뚫려 있는 방을 의미한다. 7개의 범주는 표현행위와 그 산물이 지각 되고 표출되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이 주도적인 성격을 갖느냐에 따라 설정된 것 이고, 실제 표현문화의 많은 부분은 몇 개의 범주에 동시에 속하는 것이 일반적이 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무용은 몸짓이 그 표현행위에 있어서 주도적 이란 측면에서 몸의 문화라는 범주에 속하지만, 음악, 의복, 무대장치, 이야기 줄 거리를 갖는 복합적 표현문화의 성격을 갖는다. 힌두사원은 사원 건축물 뿐 아니

43 라 그림, 음악, 춤, 설교, 향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복합적 문화의 공간이다. 아랍문 화의 시낭송은 음악적 표현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에 언어문화와 청각문화에 동시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시아의 전통적 표현문화는 다양한 표현매체 가 동원되는 양상을 띤다는 점에 주목할 때 그 특징적인 측면을 잘 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문화를 7개의 범주로 나누어 제시한 것은, 분류체계가 현상에 대한 인간 인식의 출발점이며 조사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종의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하는 표현문화의 분류체계는 실체 적 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조사의 편의를 위한 하나의 발견적 모 델이란 점을 먼저 밝혀둔다. 표현문화의 분류체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표현문화에 대한 통문화적 분류체계의 모색 * 표현물과 표현행위를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능력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표현문화를 시각문화, 청각문화, 미각 및 후각문화, 언어문화, 몸의 문화, 공간문 화, 복합문화의 7가지 범주로 분류 * 위의 7가지 범주는 표현문화를 인식하기 위한 발견적 모델임. 표현문화의 각 범주에 대한 정의 및 범위, 그리고 각 범주가 갖는 독특한 성격 에 기초한 조사방법에 대해서는 제 2부 조사방법과 분석틀 의 II장 문화영역별 조사방법과 분석틀 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44 III. 향후 자료 조사 및 수집 계획 아시아 문화 아카이브에 소장되는 자료는 크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수집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에 이미 수집된 자료들을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새 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는 것이다. 아시아 문화자료의 범위가 매우 방대하다 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모든 자료를 직접 수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 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미 수집된 자료를 구입하거나, 기증을 받거나, 아 니면 기존에 존재하는 아시아 문화자료 소장기관과의 교류 협정을 통해 자료를 교환하고 공동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활용해야 한다. 아날로그 자료의 디지털화와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킹과 같은 최근의 기술혁신은 기관 사이의 자료 교환의 방 식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으며, 과거에 비해 이 부분이 갖는 중요성이 증대하 고 있다. 원거리에 위치하는 기관들의 컴퓨터와 터미널을 서로 연결하는 광역 네 트워크(wide area network) 나 세계적인 인터넷 표준 규약을 사용하는 일련의 기 관들 사이의 새로운 컴퓨터 네트워크인 인트라네트(intranet) 는 새로운 자료 교환 과 자료 공유의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Ali Ibrahim 2004). 하지만 지적소유권의 문제는 실물 자료의 교환 뿐 아니라 디지털 자료의 교환에서도 기관 사이의 교류 협정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기관 사이의 자료 교환과 공유를 위해서는 세부적으로 기술적, 법적 절차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 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별개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현지조사를 통한 자료의 수집 방안을 중심으로 향후 국립아시아문 화전당이 시행할 중장기 계획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현지조사에 의한 자료 수집은 시간과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비효율적인 자료 수집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 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현지조사에 의한 자료 수집은 다른 방식에 의해서 는 성취하기 어려운 매우 중요한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본 연구팀은 아시아문 화아카이브의 자료 수집 방안에서 현지조사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 다

45 현지조사를 통한 자료의 수집이 갖는 효과로는 첫째, 아시아문화전당의 독특한 관점과 목적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서 독창성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할 수 있다. 다른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이용 할 경우에는 그 자료를 수집한 사람이나 기관의 목적이나 관점이 이미 자료 수집 과정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전당의 목표와 부합하게 활용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현대의 정보기술의 혁신에 의해 자료의 교환과 공유가 활성화되고 있고 그것이 소장 자료에 대한 종전의 배타적 소유의 한계를 극복하 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 기관이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반영하여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는 노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타기관과의 자료 교환이나 자료 공유도 아시아문화전당이 독자적인 자료를 보유하고 있을 때 에만 그러한 협력관계의 구축이 가능할 것이다. 둘째, 현지조사는 기존의 정보에서 누락되었거나 예측하지 못하였던 자료를 발 견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또한 이미 주목받았던 자료라 할지라도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내용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시아문화아카이브 가 기존에 이미 알려져 있는 자료를 단순히 답습하여 수집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수집을 목표로 설정할 때 현지조사는 이를 위한 핵심적인 방법이 된다. 셋째, 현지조사는 아시아 문화의 현재적 모습을 포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두 는데 탁월한 효과를 갖는다.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현재는 과거로부터 진 행되어온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며 또한 미래의 변화를 그 안에 내포한 국면이 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일상적 문화는 항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 어 조사자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현지조사를 통한 현재의 기록은 지금은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미래적 가치를 갖는 자료이다. 또한 아시아인의 현재적 삶의 모습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현 실적으로 보다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현지조사는 현지인의 삶의 맥락에서 문화자료가 갖는 생생한 의미를 파악 하고, 현지인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시아인의

46 관점에서 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데 현지조사는 다른 연구방법으로는 대체하기 힘든 매우 유력한 수단이 된다. 다섯째, 현지조사는 국내에서 아시아 전문가 인력을 양성하는데 직접적으로 기 여한다. 현재 국내에는 아시아 전문가 인력의 풀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형편이지 만, 아시아 지역에 대한 현지조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전문가적 역량을 키 울 수 있다. 또한 대학원생을 현지조사의 연구보조원으로 참여시켜 아시아 연구에 대한 동기와 경험을 쌓게 함으로써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여섯째, 현지조사의 과정에서 현지의 학자나 전문가, 현지 대학이나 연구기관과 의 협력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수 효과가 기대 된다. 현지조사 과정에서 맺어진 인적 네트워크는 전당이 주축이 되어 아시아 문 화교류를 추진하는데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이하에서는 현지조사를 통한 아시아 문화자료 수집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단계 별 조사계획, 조사형태, 연구팀의 구성과 조사협력 체계, 현지조사의 예시와 예산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아시아 문화자료 조사와 수집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전 망에 기초한 계획 아래 실제 조사와 수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수정과 보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 아시아의 공간 범주에 따른 단계별 조사계획 광대한 아시아 지역에 대한 현지조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시아를 유의미한 공간들로 분류해서 이들 공간에 대한 단계별 조사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편으로 2장 1절에서 제시한 아시아의 지역 대분류(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기초로 해서 아시아의 공간을 나누고 이에 대

47 한 단계별 조사계획을 수립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국가나 민족을 단위로 하여 단계별 조사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시아 내에 수많은 국가와 민족집단이 존 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인 방안이 되지 못한다. 아시아 문화자료의 조사와 수집은 장기적 플랜에 의해 체계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크게 세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조사계획을 제시 하겠다. 첫 번째는 준비단계로 아시아 문화전당이 설립되는 2010년까지의 기간이 해당하고, 두 번째는 기반구축단계로 전당의 사업이 정부의 예산 지원에 크게 의 존하는 2023년까지의 기간이 해당하며, 세 번째는 심화와 전문화의 단계로 전당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것으로 기대되는 2024년 이후 의 기간이 해당된다. (1) 준비단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본구상안>에 의하면 광주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2010 년에 아시아문화전당을 개관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준비단계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의 5개년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부터 아시아 문화자료의 수집이 착수 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 문화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수집은 한국에서 처음 실시되는 것으로 실행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불가피하리라고 예상 된다. 2010년까지의 조사 단계는 그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앞으로의 장기적인 조사계획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확정하는데 필요한 과정이다. 전당을 개관한 이후 에야 조사에 착수하여 그러한 과정을 겪는 것은 예산과 시간의 낭비를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둘째, 전당 내의 여러 기관들은 수집된 문화자료를 활용하는 것에 의해 기능하 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전당의 개관과 더불어 각 기관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 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개관 이전에 어느 정도 문화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져 있어 야 한다. 준비단계에서의 조사와 수집활동은 그러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반드

48 시 필요하다. 셋째, 전당의 개관은 단지 건물의 완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당 안에 설 치될 내용물에 대한 윤곽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준비단계에서 수집된 자료를 기초로 해서 전당의 개관 시에 전시나 공연을 기획함으로써 전당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과 성격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준비단계에서의 문화자료의 조사와 수집은 아시아의 5개 권역 전체를 대상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그 이유는 권역별로 자료의 조사와 수집 과정에서 부딪칠 상황 에 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개관 이후의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치밀한 점검이 필요하며, 또한 5개 권역의 조사가 분절적인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정도의 통합성과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각 권역 에 대한 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조사의 내용과 형태에 대한 전체적인 조율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권역별 조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조사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 연구에 이어서 최소한 2번 정도 아시아 문화자료 조사 및 수집 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 번째 계획안은 2006년 에서 2010년까지의 현지조사를 위한 것이다. 본 보고서는 자료조사와 수집을 위한 기본적인 관점과 방향을 설정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권역별 조사를 위한 구 체적인 조사대상이나 조사항목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아시아 5개 권역의 지역전 문가와 문화영역별 전문가를 포함하는 공동연구팀에 의해서 준비단계에서의 현지 조사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조사대상과 조사내용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계획안은 준비단계에서의 현지조사가 완료된 시점에서 그동안의 조사 경험을 바 탕으로 2011년 이후의 장기적인 조사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계획의 수립을 통해서 아시아 문화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수집이 가능하다. 또한, 준비단계에서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을 위한 시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수집된 자료가 디지털 형태로 보관된다고 할 때, 조사 과정에서부터 이를 고려한 방식으로 문서자료, 영상자료, 음성자료 등을 기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시 아문화아카이브의 디지털 형태가 미리 확정되어야 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료

177

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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