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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 원저자 : 鳥 栖 忠 安 편역자 : 김 명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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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①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편역자 해제 김 명 수 (계명대학교 일본학과) 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의 배경과 필자 도스 다다야스(鳥栖忠安)에 대하여 본서는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라는 이름으로 8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총 57회에 걸쳐 조선신문(朝鮮新聞)에 장기 연재 된 것을 모아 편역한 것이다. 조선신문은 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인천에 있던 두 개의 신문, 즉 나카무라 츄키치(中村忠 吉)가 경영하는 조선신보(朝鮮新報)와 구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 등이 경영하는 조선타임즈가 1908년 합병하여 생긴 신문으로(본 서의 인취성쇠기12 참조), 1919년 12월부터는 경성으로 이전하여 발간되었다. 1920년 1월부터는 마키야마 고조(牧山耕藏)가 인수 하여 경영했다. 이후 조선에서 손꼽히는 전국지로서 발전하게 되 는데 인취성쇠기 가 연재된 1931년에는 이미 발행부수에서 경 성일보 및 부산일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1) 태생부터 인천과 각별한 관계에 있던 조선신문이 인천미두취인소(이하 인취 )의 동향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인취성쇠기 의 필자는 도스 다다야스(鳥栖忠安)라는 인물인데 그 행적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2) 도스가 1) 장신, 한말일제초 재인천 일본인의 신문 발행과 조선신문, 인천학연 구 제6권, 2007년, 쪽. 2) 도스의 글로 현재 확인이 가능한 것은 朝鮮時論 1(2), 1926년 7월에 실린 素人の見た朝鮮に於ける兵隊さん 과 朝鮮及滿洲 226호, 1926 년 9월에 남긴 수필 カフヱ 情調, 그리고 저서로 鳥栖忠安, 小運送

4 ②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1926년에 집필한 小運送の硏究 의 서문을 쓴 조선총독부 철도국 이사 도다 다다오(戶田直溫)에 의하면,3) 도스는 일본전보통신사 (日本電報通信社)의 기자였다. 도쿄(東京)에 본사를 둔 일본전보 통신사의 경성지국에 속한 기자였던 것이다. 일본전보통신사 경 성지국은 원래 마키야마 고조(牧山耕藏)가 경영하고 있었는데, 1920년 7월경에 본사 직영으로 조직이 변경되었다.4) 1922년 7월 에는 경성지국의 업무를 확장하면서는 도쿄 본사로부터 요시카와 (吉川) 지국장을 비롯하여 몇 명의 사원을 지원받았다. 확장 당시 경성지국은 내외의 신문기사를 조선 내 각종 신문에 공급하고 일 본의 미곡, 주식, 삼품(三品) 시장의 시세를 신속히 조선의 취인 시장에 공급하는 조선에 있는 완전한 통신사 를 표방하였다.5) 요컨대 도스는 마키야마가 경영하던 일본전보통신사 경성지국 의 기자로서 일본 내 취인소의 미곡 및 주식 시세를 조선 내 취 인소에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취의 사정에 밝았던 것이다. 도스가 인취성쇠기 를 집필하던 1931년 8월부 터 10월까지는 인취와 경취(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의 합병에 관 한 최종 결정을 놓고 회사 측 합병파와 인천부민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기였으나 결국 인취와 の硏究, 朝鮮鐵道協會, 1926년 정도이다. 한편 도스는 1944년 3월 18 일 현재 반도식산주식회사(半島殖産株式會社)의 취체역에 이름을 올리 고 있었다. 官報 호. 3) 鳥栖忠安, 위의 책, 서문 2쪽. 4) 일본전보통신사 경성지국은, 내외전보를 각 방면에 공급하는 동시에 조선 내에 발생한 중요사건을 일본 전국에 전보통신 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였다. 본사 직영이 되면서는 본사로부터 河邑光城이 지국장 으로 파견되었던 것 같다. 東亞日報 <電通支局組織變更>. 참고로 일본전보통신사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1921년 4월 7일에 일본 도쿄의 제국극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原敬 수상, 澁澤 榮一 자작을 비롯하여 각 성의 대신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일본전보통 신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東亞日報 <電通二十週年祝賀>. 5) 東亞日報 <電通支局業務擴張>.

5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3 경취의 경제합병으로 귀결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러한 때 도스 는 인취의 흥망성쇠를 역시 마키야마가 경영하던 조선신문에 연 재하게 된 것이다. 2.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가 그 동안 이용되지 못한 이유 인취성쇠기 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문 스크랩 자료로 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원문검색이 가능하다. 쉽 게 접근이 가능하지만 인취성쇠기 는 자료로 이용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당 자료는 원본이 스 크랩된 채 그대로 스캔되어 있을 뿐이고, 스크랩 자체가 이미 84 년이 지난 상태라 여간한 해상도가 아니면 쉽게 읽을 수 없다. 기사에 따라서는 판독 자체가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한 부분도 발견된다. 원문의 연재순서 또한 다소 혼란스럽게 되어 있어 독 자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예컨대, 12회로 표시된 부분이 2회 연 속 나오지만 날짜와 내용으로 판단할 경우 1931년 9월 2일자는 13회가 되어야 한다. 36회(9월 30일)와 41회(10월 9일)도 2회 연 속 나오지만 역시 날짜와 내용으로 판단할 경우 두 번째는 각각 37회(10월 1일)와 42회(10월 11일)가 된다. 54회(10월 28일)의 경 우도 역시 2회 발견되지만 그 중 하나는 45회(10월 15일)가 잘못 표기된 것이다. 64회로 표기된 것은 46회(10월 16일)이며 74회로 표기된 것은 47회(10월 17일)이다. 또한 56회(10월 30일)도 2회 표기되었는데, 이 경우 앞의 56회는 53회(10월 27일)의 오기이다. 사용되고 있는 일본어도 지금 사용되는 일본어와 많이 달라 일 반 독자뿐만 아니라 일본어에 친숙한 역사 전공자 또한 그 독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한 인취성쇠기 에는 당시 쓰이던 관용구 표현이 많이 등장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일본 속요( 俗 謠 )

6 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나 고사( 故 事 )도 더러 등장한다. 예컨대 인취성쇠기 (3) 말미에 등장하는 노래는 오오이타현( 大 分 縣 ) 하사마마치( 挾 間 町 )에서 불렸 던 자쿄우타( 座 興 唄 ) 十 錢 節 이다. 인취성쇠기 (24)에 등장하는 기노쿠니야 분자에몽( 紀 伊 國 屋 文 左 衛 門 )은 에도시대에 활약했던 상 인으로 귤 전설 로 유명하다. 교토와 에도 사이의 지역 간 가격차 를 이용해 거액의 이익을 보았다는 내용의 귤과 소금에 절인 연어 이야기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인취성쇠기 의 독해가 어 려운 이유는 시종일관 등장하는 취인소(거래소) 관련 용어들이다. 예컨대 인취성쇠기 (35)에 등장하는 50전 앙꼬 의 앙꼬 란, 기 존의 물량에 대해 100% 헷지 물량을 만들어 가격변동의 영향이 없는 료다테( 両 建 て)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팔자와 사자 양쪽 모두 를 동시에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연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역시 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요컨대 인취성쇠기 가 담고 있는 생생하고 풍부한 내용이 자 료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신문 원문을 정확히 판독함으로써 다시 활자화할 필요가 있으며, 원문에 대한 독해를 돕기 위해 각종 관 용구, 용어, 고사에 대한 설명을 역주로 담은 편역서( 編 譯 書 )가 필요하다. 편역자가 인취성쇠기 에 주목하고 기사들을 모아서 번역하게 된 이유이다. 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의 연구사적 의의 인취성쇠기 는, 그 기사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인취( 仁 取 ) 즉, 인천미두취인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영고성쇠를 다루고 있 다. 그에 더하여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역사적 정보들 을 많이 담고 있다. 인취는 1896년에 일본영사의 인가를 받아 설 립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1932년 1월 경취( 京 取 ) 즉, 경성주식현 물취인시장( 京 城 株 式 現 物 取 引 市 場 )과 합병하면서 조선취인소( 朝 鮮

7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5 取 引 所 ) 인천지점이 되었다. 인취는 미두취인소로서 일종의 선물 거래인 청산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인데, 미가의 변동성이 높은 리 스크를 동반하며 막대한 이익을 가능하게 했다. 인취 주변에 중매 인뿐만 아니라 투기를 일삼는 미두꾼들과 그들과 선이 닿아 있는 권력자들이 모여 든 이유였다. 막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 니 그로 인해 인취가 인천부에 납부하는 영업세 또한 으뜸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에서 1932년까지 경취와의 합병 및 경성(서울)으 로의 이전을 인천부민과 재계가 극렬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개항 이후 인천과 인취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인 취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이합집산이 곧 인천재계의 움직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취성쇠기 는 인 취를 중심으로 살펴본 개항 이후 인천의 재계사 라 할 수 있다. 인천이라는 도시 자체가 일본의 경제 침략과 식민지화 과정에서 근대도시로 발전해 왔다는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다 른 어떤 지역보다 조선인/한국인의 애환이 민족적 갈등과 협력이 라는 형태로 두드러져 나타났다. 이른바 식민지의 회색지대가 일 찍부터 형성되었던 것이다. 한국 근대의 형성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동전의 양면처럼 인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감안한다 면 인천재계가 어떤 인적 네트워크로 형성되어 움직이고 있었는 지 역사적 시각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취성쇠기 는 경제사 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사적 측면에서도 학계의 연구 공 백을 채워줄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되는 이유이다. 인취성쇠기 가 평이한 언어로 편역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4.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관련 근대인천경제사 연구 장신은 인천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본인의 신문 발행을 조선신 문( 朝 鮮 新 聞 ) 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조선신문은, 전술했듯이, 1908

8 ⑥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년 조선신보(朝鮮新報) 와 조선타임즈가 합병되어 설립되었는데, 이후 인천을 발판으로 1919년 12월까지는 중앙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그 발행부수와 수입에서 경성일보, 부산일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6) 시기적으로 볼 때 1931년 8월부 터 10월까지 3개월에 걸쳐 연재된 인취성쇠기 는 전국적인 독자 층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 기사의 신뢰도가 높다 하겠다. 한말일제하 인천재계에 관한 연구는 양준호와 문영주에 의해 서 이루어졌다. 양준호는 식민지기 인천상공회의소의 설립과정과 그 역할에 대해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고찰했는데, 이를 통해 인 천상공회의소가 시장 확대 기구에서 종합적 경제 자문통제 기 구로 재편되었음을 밝혔다.7) 또한 양준호는 1926년 전후 인천에 거주했던 재조일본인을 중심으로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가를 정리 하여 자료로서 제공하였다.8) 문영주는 인천상업회의소에 관여했 던 재조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인취 이전 문제 등 다양한 경제현안 에 대해서 인천재계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밝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이 식민지 권력인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재조일 본인 자본가라는 지역 권력과 직면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9) 인취성쇠기 가 주로 그리고 있는 인천미두취인소에 대한 연 구는 아직 일천하다 할 수 있으나 김도형이 갑오개혁 이후 인천 의 미곡유통구조를 분석하면서 인취의 설립과정을 검토했으며,10) 6) 장신, 앞의 글, 쪽. 7) 양준호, 식민지기 인천상공의의 설립과정과 역할에 관한 제도주의적 고찰 시장확대 기구에서 종합적 경제 자문통제 기구로의 재편 -, 인천학연구 제14권, 2011년, 쪽. 8) 양준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인천학연구원, 2009년. 9) 문영주, 20세기 전반기 인천 지역경제와 식민지 근대성, 인천학연구 제10권, 쪽. 10) 김도형, 강보 이후 인천에서의 미곡유통구조; 仁川米豆取引所 의 설 립을 중심으로, 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일조각,

9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⑦ 홍성찬은 경성현물주식취인시장의 경영변동과 관련기관들의 동향 을 다루면서 인취와의 합병 문제를 개괄적으로 검토하였다.11) 한편 이형진은 투기와 수탈의 현장이라는 문학적인 필체로 사회 사적 시각에서 경취 및 인취 주변을 분석하고, 투기로 얼룩진 양 취(인취와 경취)의 거래구조가 결국 일제의 미곡수탈메커니즘에 다름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12) 상기의 인천 및 인천재계와 인취에 관한 선행연구들은 인천상 업회의소(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인천 지역의 기업가 네트워크 를 검토하였으나 구체적인 인물들의 활동을 담고 있지 않아 추 상적인 제도 분석과 자료 정리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취 이전 문제 등의 특정 문제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1920년대와 30년대 초라는 제한된 시기를 대상으로 한 점에서 한말일제하 인천의 성장과정을 통사적으로 제시하는데 한계가 있다13). 인취성쇠기 의 번역과 출판은 이러한 연구사적 한계를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의 시기구분과 내용 인취성쇠기 는 그 내용에 따라 총 네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제1기는 1875년부터 1899년까지로 강화도조약 이 1992년, 쪽. 11) 홍성찬, 1920년대 京取 의 경영변동과 관련기관들의 동향, 연세경 제연구 8(2), 2001년, 쪽. 12) 이형진, 일제하 투기와 수탈의 현장-미두증권시장, 역사비편 18 호, 1992년, 쪽. 13) 인천학연구원에서 정리하고 번역하여 발간한 자료집들은 근대인천경제 사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된다. 인천미두취인소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책 들이 참고가 된다. 정혜중 역, (譯註) 仁川米豆取引所 沿革 (인천역사 문화총서 48),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8년(원문: 1935년 株式會 社仁川米豆取引所沿革 ) ; 仁川府廳編. 仁川府史, 仁川府, 1933년 등.

10 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후 인천의 변화상과 인취의 탄생과 해산명령, 그리고 부흥운동을 통해 영업이 재개될 때까지이다. 제물포라는 작은 어촌이 한일무 역의 무역항 인천으로 약진하게 되는 과정이 일본상인의 활약과 함께 그려지고 있다. 인천에 있던 일본상인들이 1888년 조선의 흉작과 1889년 일본의 흉작으로 인한 미가의 차이를 이용한 미곡 의 반출과 반입을 통해 큰 이득을 얻게 되면서 미곡을 중심으로 한 한일무역이 인천을 무대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인취성 쇠기3). 일본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중국 상인을 인천으로부터 구축( 驅 逐 )해 가는데, 인취의 탄생 또한 중국 상인의 구축과 관련 이 있었다. 미곡반출을 막기 위한 조선정부의 방곡령이 청국 미 곡상의 암약과 관련이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인취성쇠기4). 인취 설립의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던 당시 인천의 대리영사 였던 하기와라 모리이치( 萩 原 守 一 )의 인가만으로 설립이 추진되었 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외무성이 이를 허가하게 된 것 은 경제적 이유라기보다 오히려 지나 상인 세력의 구축이라는 외 교적 의미에서였다. (인취성쇠기5). 인취는, 당시 사에구사상점( 三 枝 商 店 )의 지점장 가쿠 에이타로( 加 來 榮 太 郞 ) 및 모리나가구미( 守 永 組 )의 지배인 나가이 후사키치( 永 井 房 吉 )의 제창과, 당시 인천 상의( 仁 川 商 議 ) 회두로 다이이치은행( 第 一 銀 行 ) 지점장 니시와키 쵸타로( 西 脇 長 太 郞 ) 및 부회두 미즈타 사다시치( 水 田 定 七 )의 찬동 을 얻어 발기인 14명을 중심으로 설립사무를 진행하여 1896년 5 월 5일에 개업했다. 그러나 시장의 분규로 1898년 10월 인취에 해산명령이 내려졌으나(인취성쇠기7), 이사장 가쿠를 중심으로 인 취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인천상의가 지원하면서 1899년 6월 다시 재개인가의 통고를 이끌어 냈다(인취성쇠기11). 제2기는 1899년 6월부터 1919년 5월까지의 시기로 이른바 인 취의 기초가 정비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경인철도가 완공되 었고, 군사적 목적에서 상수도가 인천까지 설치되는 등 인프라의

11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9 정비가 이루어졌다(인취성쇠기13). 1903년에 인천에 거주하던 미 국인 데시우라의 사자 출동이 주목을 끌었다.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의 발발과 함께 2월 10일 인취시장이 일시 폐쇄되었다. 러 일전쟁 중 인취는 자본금을 3만원에서 4만 5천원으로 증자했으 나 러일전쟁 이후 영업은 크게 쇠퇴했다(인취성쇠기12). 이러한 쇠퇴양상은 이후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1908년 7월 휴업에 들어 갔다가 1910년 3월 총회를 통해 영업을 다시 재개했다. 그 사이 1909년 5월 당시의 이사관 시노부 쥰페이( 信 夫 淳 平 )의 양해를 얻 어 영업기간을 연장했다(인취성쇠기13). 이 시기 주목되는 거래 는 1911년에 있었던 임영환( 林 泳 煥 )의 매점 사건인데, 임영환의 전주( 錢 主 )는 왕족 이해승( 李 海 昇 ) 후작이었다(인취성쇠기15). 결 국 임영환의 사자 출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이 거래에 관 여된 네 명의 중매인이 사사로운 장외거래의 혐의로 감옥에 투 옥되는 사건도 있었다(인취성쇠기16). 임영환의 사자 출동 이후 에는 조선의 권신이었던 이봉래( 李 鳳 來 )의 아들 이용문( 李 容 汶 ) 의 사자 출동이 있었는데, 인취 최초의 위약처분이 발생한 원인 이 된 거래였다(인취성쇠기17;18). 1912년에는 오오사카 도지마 취인소( 大 阪 堂 島 取 引 所 )의 이사에서 중매인이 되었다가 뒤에 위 원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 마츠오 츠루오( 松 尾 鶴 男 )가 경영권을 장악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13년 5월에는 일본 취인소에서 조 선미 및 대만미의 대용제( 代 用 制 )가 실시되었고, 이를 위해 조선 미의 이입세가 철폐되었다(인취성쇠기19). 인취는 오오사카( 大 阪 ) 도지마( 堂 島 )에서 행하던 중매인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인취 호황의 한 원인이 되었고 전시호황의 조류를 타고 10할 배당이라는 호성적을 냈다. 이러한 호성적은 가다 긴자부로( 賀 田 金 三 郞 )나 하기와라 쵸기치( 萩 原 長 吉 ) 등 거물들의 관심을 끌었다. 1918년경에 25원을 불입한 주 식이 450원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는 내용은 당시의 인취 의 번영을 말해준다(인취성쇠기20). 그러나 1918년 8월 일본 도

12 1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야마현( 富 山 縣 )에서 시작된 미소동( 米 騷 動 )의 영향으로 조선의 미가도 앙등하자, 이러한 미가앙등의 원인으로 조선총독부는 취 인소에서의 매점 행위를 지목하면서 인천, 부산, 군산의 미곡시 장에 대한 조사를 단행했다(인취성쇠기21). 이 조사를 통해 인취 의 증거금 관련 손실이 총 180만원에 달하는 것이 판명되어 조 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인취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결과 부정 에 관련된 인취 역원들이 물러나고 인취 사장에 부산부윤 와카 마츠 우사부로( 若 松 兎 三 郞 )가 영입되었으며, 다른 역원에도 아라 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이나 덴니치 츠네지로( 天 日 常 次 郞 ) 등 총독부 추천 인사들이 포진하게 되었다(인취성쇠기22). 제3기는 1919년 5월 이후부터 1926년 5월까지이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반동공황으로 경기가 침체하기 시작 하여 1920년대 내내 장기불황을 겪게 되는 시기이다. 이 사이 인 취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인취 관계자들은 그 주요한 원인으 로 조선취인소세령의 실시와 연시장의 영업 침해를 꼽았다. 이를 위한 대책으로 인취 관계자들은 세금 경감을 주장하나 총독부의 강력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또 다른 방편으로 중매인 고바야 시 도우에몽( 小 林 藤 右 衛 門 )은 경취와의 합병 및 경성으로의 이전 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고바야시의 이전합병 제안에 귀 기울이 는 이는 드물었다. 인취의 기세가 아직 대단했기 때문이다. 육덕 풍만한 처녀를 추레해진 노인과 결혼시키는 것과 같다는 비유는 경취와의 합병 제안에 대한 당시 인취 관계자들의 인식을 잘 보 여준다(인취성쇠기38). 한편, 이 사이 1922년 4월에 제령 6호로 조선취인소세령( 朝 鮮 取 引 所 稅 令 )이 발포되어 4월 20일부터 실시되 었고, 그 보다 조금 앞선 2월에 총독의 인가를 받아 300만원으로 증자했다. 취인소세령의 실시에 대해 인취의 역원 및 중매인들은 세령( 稅 令 )을 실시한다면 취인소령을 시행하는 것이 선결문제가 아닐까, 실태법규가 시행되지도 않고 세령만 시행하게 되면 취인

13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11 소 유사 시설에 대해 단속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피력하 며 총독부에 조선취인소령의 제정 및 실시를 요구했다(인취성쇠기 32). 그 사이에 인취 시장을 뒤 흔든 매점이 여러 번 있었다. 다 소 시기가 앞이기는 하지만 가다 긴자부로의 매점 사건이 있었고 (인취성쇠기25), 오오사카 사람 고니시 다츠지로( 小 西 辰 次 郞 )의 매 점 사건(인취성쇠기26), 그리고 불이흥업( 不 二 興 業 )에 의한 대두 매점 사건(인취성쇠기34)과 조선의 수리왕( 水 利 王 ) 으로 유명한 후지이 간타로( 藤 井 寬 太 郞 )의 일본 내지미 수도( 受 渡 ) 사건이 있었 다. 특히 후지이의 일본 내지미 수도 사건은 불이흥업이 내부개혁 을 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인취성쇠기37). 제4기는 1926년 5월부터 1931년 말까지로 인취와 경취의 합병 문제가 전개된 시기이다. 시모오카 츄지( 下 岡 忠 治 )와 유아사 구라 헤이( 湯 淺 倉 平 ) 정무총감과의 교감을 거쳐 경인 재계의 중진인 도 미타 기사쿠( 富 田 儀 作 ), 구기모토 도지로( 釘 本 藤 次 郞 ), 와타나베 사다이치로( 渡 邊 定 一 郞 ) 3명이 인취의 와카마츠( 若 松 ) 사장과 경 취의 덴니치( 天 日 ) 사장에게 합병을 촉구하는 문서를 보냈다. 1926년 5월말의 일로 이로부터 본격적인 인취와 경취의 합병문제 가 대두되었다(인취성쇠기41). 그러나 와카마츠 사장이 아무런 사 전설명 없이 합병안을 발표함으로써 대주주들의 반발을 샀고, 여 기서부터 합병반대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인취성쇠기42). 이에 경인재계의 중진 아라이 하츠타로( 荒 定 初 太 郞 )와 고죠간도( 古 城 管 堂 )가 각 취인소의 그 동안의 성적에 바탕을 둔 중재안을 마련하 여 중재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인천부민들이 경성으로 이전이 전 제가 된 합병안에 반대하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취와 경취의 합병 과정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해산을 앞 둔 권신( 勸 信 ), 즉 조선권업신탁이 소유한 인취 주식을 둘러싼 합 병파와 반대파의 쟁탈전이었다. 결국 합병파인 회사 측이 권신 소유주를 모두 인수하며 쟁탈전을 승리로 이끌었다(인취성쇠기

14 1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43). 합병안을 의결하기 위한 총회가 예정되자 인천부민들 반대 파는 반대표를 던질 주주들의 위임장을 모았고, 실제로 1927년 3 월 31일에 개최된 총회 또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 다(인취성쇠기47). 이후 합병 논의는 영업기간이 만료되는 1929년 까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1929년 초부터 다시 재연된 합병 문제는 야마나시 한조( 山 梨 半 造 ) 총독의 부임과 함께 취인소령의 제정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인천부민의 반대운동 또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인취성쇠기50). 반대파는 조선신탁의 사장이 면서 인취의 주요 주주 중 한 사람인 우즈타카 히로시( 堆 浩 ) 일 파와 손을 잡고 중역 개선을 통한 인취 장악을 노렸고, 우즈타카 는 경영상 자금조달의 문제를 인취 장악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었 다(인취성쇠기51). 1930년 봄에는 합병파와 반대파가 인취의 사망 한 대주주 우츠미 슈쿠로( 內 海 叔 郞 )의 인취 주식을 둘러싼 쟁탈전 이 벌어졌다. 회사 측, 즉 합병파는 이 쟁탈전 또한 도지마의 시 오자키 후지타로( 潮 崎 藤 太 郞 )에게 부탁하여 인수하게 함으로써 승 리로 이끌었다(인취성쇠기53). 이런 상황에서 1930년 12월에 인 취 총회가 개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합병파의 승리로 귀결되었 다(인취성쇠기54). 본격적인 합병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이때부터 양파( 兩 派 )는 1931년 5월에 조선취인소령이 실시될 때까지 법령 에 영향을 미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합병파는 운동의 방향을 조금 틀어 임시총회의 결의가 용인될 수 있는 법령이 되도록 하 는데 맞추어졌다. 즉, 인취의 이전, 기설회사의 합병, 회사조직의 취인소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동일( 同 一 )한 시장에서 미곡과 주 식이 상장될 수 있어야 한다, 미곡취인소는 중앙집중주의가 되어 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반대파는 경제합병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취의 경성 이전만은 양 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조선취인소령에서는 인취의 경성 이전을 금지했다(인취성쇠기56). 이후 인취의 경성 출장소였던 미 구락부( 米 俱 樂 部 )가 폐지되고, 경성 연시장이 부활하면서 인취에

15 인취성쇠기 편역자 해제 13 커다란 타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대구, 군산, 부산, 진남포의 연 시장이 취인소로 승격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인취 또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인취성쇠기57). 이후 인취와 경취는 각각 해산한 후 조선취인소를 신설했으며, 인취는 1932년 1월 12일부터 영업 을 개시한 조선취인소 인천지점이 되었다. 6. 주요 참고 문헌 및 자료 김도형, 갑오 이후 인천에서의 미곡유통구조;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설립을 중심으로, 擇 窩 許 善 道 선생정년기념 한국사 학논총, 일조각, 1992년, 쪽. 문영주, 20세기 전반기 인천 지역경제와 식민지 근대성, 인천 학연구 제10권, 쪽. 양준호, 식민지기 인천상공의의 설립과정과 역할에 관한 제도주의 적 고찰 시장 확대 기구에서 종합적 경제 자문통제 기 구로의 개편-, 인천학연구 제14권, 2011년, 쪽. 양준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인천학연구원, 2009년. 이형진, 일제하 투기와 수탈의 현장-미두증권시장, 역사비 편 18호, 1992년, 쪽. 장 신, 한말일제초 재인천 일본인의 신문 발행과 조선신문, 인천학연구 제6권, 2007년, 쪽. 정혜중 역, ( 譯 註 ) 仁 川 米 豆 取 引 所 沿 革 (인천역사문화총서 48),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8년(원문: 1935년 株 式 會 社 仁 川 米 豆 取 引 所 沿 革 ). 홍성찬, 1920년대 京 取 의 경영변동과 관련기관들의 동향, 연 세경제연구 8(2), 2001년, 쪽. 仁 川 府 廳 編. 仁 川 府 史, 仁 川 府, 1933년. 仁 取 盛 衰 記 ~ 朝 鮮 新 聞 연재기사

16 1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일 러 두 기 1. 본서에서는 편역과 함께 인취성쇠기 의 일본어 기사 원문을 입력하여 독자가 직접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2. 원문을 입력할 때에는 현대 일본어 표기를 위주로 했으나, 판 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으로 처리했다. 는 글씨가 있어 야 할 자리에 글씨가 보이지 않을 경우 표시했다. 3.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기사를 이해하는데 문맥상 크게 지장이 없을 경우 직역을 위주로 했으나 독자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고 판단할 경우 의역했다. 4. 인명은 예외 없이 일본어 읽기에 충실했으나 기타 고유명사 의 경우 편의에 따라 한자음을 한국어로 그대로 읽은 경우도 있다. 5. 널리 알려진 인물이나 사실에 대해서는 역주하지 않았으나, 자료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역주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6. 미곡거래나 투기와 관련된 생소한 용어의 경우 최대한 한국 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했으나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경우 그냥 일본어로 읽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독자의 이해를 돕 기 위해 역주를 통해 해설을 적어두었다. 7. 일본 연호의 경우 서력을 바꾸었다. 예컨대 메이지( 明 治 ) 29 년은 1896년으로 바꾸었다.

17 목 차 목 ⑮ 차 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편역자 해제 14 일러두기 인취성쇠기(1) 제물포가 인천으로 약진, 채색되는 강화도사건 1 인취성쇠기(2) 임오군란에 대한 회상 4 7 인취성쇠기(3) 청일전쟁의 발단 인취성쇠기(4) 청일전쟁 직전 인천의 대두(擡頭) 12 인취성쇠기(5) 지나 상인의 몰락과 인취의 탄생 15 인취성쇠기(6) 창업 당시의 난센스 인취성쇠기(7) 시장의 분쟁으로 해산명령 인취성쇠기(8) 시데하라(幣原)의 부임과 인취 부흥 운동 30 인취성쇠기(9) 부흥 운동의 건의서 제출 34 인취성쇠기(10) 일한무역에 위대한 공적 39 인취성쇠기(11) 보기 드문 미국인의 사자 출동, 일본의 총 45 팔자 연합 인취성쇠기(12) 일러전쟁으로 인취 폐쇄, 전후에는 크게 49 쇠퇴 인취성쇠기(13) 통감정치와 영업기간 연장, 창고 매각 대금으로 부지 매수 54 인취성쇠기(14) 영업 재개 후에도 여전히 한산, 2만석의 58 총거래량 인취성쇠기(15) 일본 아낙네가 경매 손짓, 임영환의 사자 62 출동 인취성쇠기(16) 임영환의 사자 출동과 지역 총 팔자, 하기와라(萩原)의 중재 68 인취성쇠기(17) 구와노(桑野)의 분주로 겨우 해합(解合), 72 중매인 네 명 하옥 사건

18 1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인취성쇠기(18) 인취 최초로 위약처분 발생, 10월한의 대격전 77 인취성쇠기(19) 오오사카 자본의 진출과 마츠오( 松 尾 )의 시대, 일본 의 취인소에서 조선미 대용 인정 81 인취성쇠기(20) 인취 번영책과 중매인 보호, 10할 배당 출현 87 인취성쇠기(21) 조선 내 미곡상도 위축, 미소동( 米 騒 動 )과 조선 91 인취성쇠기(22) 만원의 큰 구멍 발견, 기둥뿌리가 흔들리다 96 인취성쇠기(23) 만원으로 증자 결정, 부흥을 위한 진용 정비 100 인취성쇠기(24) 도지마( 堂 島 )를 상회하여 공전( 空 前 )의 높은 시세, 인취의 열광시대 104 인취성쇠기(25) 가다 긴자부로( 賀 田 金 三 郞 )의 매점, 조전( 早 電 )의 시작 109 인취성쇠기(26) 미소동과 인취, 고니시( 小 西 )와 사이토( 齋 藤 )의 사자 출동( 買 出 動 ) 113 인취성쇠기(27) 밑천 1만원으로 이익 50만원, 전 조선을 상대로 나카토시( 中 利 )와 오하라( 小 原 )의 사자 강행 117 인취성쇠기(28) 모리( 森 )와 우츠미( 內 海 )가 필사적으로 사자 강행, 전 조선을 상대로 121 인취성쇠기(29) 쌀장수의 아이돌보미가 일약 벼락부자로, 호사스러운 결혼 피로 125 인취성쇠기(30) 두 사람의 대성공자, 우츠미( 內 海 )와 히로사와( 廣 澤 ) 129 인취성쇠기(31) 우츠미( 內 海 )히로사와( 廣 澤 )의 연합 사자 출동, 아사노( 淺 野 ) 혼자서 팔자 포지션 133 인취성쇠기(32) 만원을 들여 설비 정비, 세령( 稅 令 ) 실시 137

19 목 차 17 인취성쇠기(33) 스스로 무덤 파는 중매인들, 당국의 공약( 公 約 )은 유녀의 서사( 誓 詞 ) 141 인취성쇠기(34) 불이흥업( 不 二 興 業 )이 대두 매점, 수도( 受 渡 )에 곤란 144 인취성쇠기(35) 진재( 震 災 ) 전후 유타카( 豊 ) 의 투매( 投 賣 ), 중매인들 모두 사자 포지션 148 인취성쇠기(36) 사자 쪽 연합에 개선가, 무네( 宗 ) 중매점 몰락 151 인취성쇠기(37) 후지이 간타로( 藤 井 寛 太 郞 )의 내지미 수도( 受 渡 ), 불이흥업( 不 二 興 業 )의 개혁 154 인취성쇠기(38) 시장 진흥 문제로 합병 대두, 그냥 웃어넘기다 159 인취성쇠기(39) 취인소는 관리의 귀문( 鬼 門 ), 시모오카 츄지( 下 岡 忠 治 )의 망설임 162 인취성쇠기(40) 세 사람이 읽은 시모오카( 下 岡 )의 속마음, 은밀한 상담 165 인취성쇠기(41) 각서 교환으로 마침내 합병 구체화, 제일보에 차질 168 인취성쇠기(42) 부족했던 사전 설명, 와카마츠( 若 松 )의 실수 171 인취성쇠기(43) 아라이( 荒 井 )와 고죠( 古 城 )가 조정안 작성, 인천 측의 반대 174 인취성쇠기(44) 예기( 藝 妓 )의 입을 통해 드러난 음모, 권신( 勸 信 ) 주식 쟁탈전 177 인취성쇠기(45) 권신( 勸 信 ) 소유주 인수 경위, 와카마츠( 若 松 ) 사장의 발표 181 인취성쇠기(46) 위임장에 얽힌 여러 진담( 珍 談 ), 벌벌 떨었던 사람들 184 인취성쇠기(47) 의결하지 못하고 결국 산회, 분규한 총회 187

20 1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인취성쇠기(48) 요네다( 米 田 )의 조정으로 일시 합병 논의 보류, 인천 측 축배 189 인취성쇠기(49) 장어덮밥( 鰻 丼 )으로 꼬리 밟혀 합병문제 재연 192 인취성쇠기(50) 총독 야마나시( 山 梨 )의 양해, 아라이( 荒 井 ) 오마( 尾 間 )를 경계 195 인취성쇠기(51) 야마나시( 山 梨 )의 사임과 사이토( 齋 藤 )의 재임, 덴니치( 天 日 )와 아라이( 荒 井 ) 와병 198 인취성쇠기(52) 우즈타카( 堆 )파와 악수하며 합병 반대열 고조, 중역 개선을 앞두고 201 인취성쇠기(53) 우츠미( 內 海 )의 주식을 시오자키( 潮 崎 )가 인수, 극비리에 진행 205 인취성쇠기(54) 대혼란의 인취 정기총회, 천왕산( 天 王 山 )의 중역 개선 208 인취성쇠기(55) 합병파의 운동도 방향 전환, 법령에 대해 맹운동 211 인취성쇠기(56) 미구락부 폐지와 경성연( 京 城 延 )의 부활, 인취에는 대타격 214 인취성쇠기(57) 합병결의의 성립과 신시대 전개 217 (원문) 223 (자료1) 인천미두취인소의 정관 및 세칙 (1903년 3월) 395 (자료2) 조선취인소세령( 朝 鮮 取 引 所 稅 令, 1921년 4월) 414 (자료3) 조선취인소령( 朝 鮮 取 引 所 令, 1931년 5월) 418 색인 429 편역자 후기 441

2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 仁取盛衰記 1 제물포가 인천으로 약진 채색되는 강화도사건 鳥栖忠安 인취1)가 생겨난 지 만 35년이 되었다. 사내라면 이제부터가 한참 일할 나이이지만, 인취는 이제 겨우 취인소령(取引所令)이 공포되어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의젓한 사내가 되었다. 겉으로는 취인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음에도 근거할만한 법규가 없어,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시장령(市場令)에 의한 연취인(延取 引)에서부터 취인소 유사의 청산취인(淸算取引)으로 업무범위를 함부로 잠식당해도 속울음을 삼길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2) 하지 만 이제부터는 가슴을 펴고 쌀과 관련해서는 조선 내 유일한 주 식조직의 취인소로서 활약하고자 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크 게 축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사실은 수년 동안 현안이었던 경취와의 합병이 윤곽도 잡히지 않아 축하하려고 해도 축하할 수 없는 고뇌의 절정에 있어 곤란했다.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 는 이상 인취 또한 안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 1) 인취(仁取)는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를 일컫는다. 1920년 8월 에 설립되는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은 경취(京 取)라 불렀다. 2) 취인(取引)은 일본어의 とりひき 로 거래라는 뜻이며, 따라서 취인소는 거래소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뒤에 많이 등장하는 각종 거래소 관련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어 혼돈을 막기 위해 여기서는 그 냥 취인으로 쓰고, 각주의 형태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기로 한다.

22 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다 치고, 취인소령이라는 호적법이 생겨 지금까지 사생아인지 무 엇인지 모르던 무적자(無籍者)가 취인소로서 정식대우를 받게 된 오늘, 과거 35년간에 걸친 포말 같은 자취를 돌이켜보는 것도 결코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1896년 5월 5일 개업 당시 자본금 3만원이라는 영세한 자본으로 시작하여 현재 300만원의 대회사가 되기까지 그 여정에는 변천해 가는 시대상을 담은 흥 미진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이름 하여 인취성쇠기(仁取盛衰 記)라 한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인취 개설 전후 인천의 모습을 대 충이라도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인천은 원래 제물포(濟物浦)라 불리는 쓸쓸한 어촌에 불과했 다. 제물포로부터 인천으로 인천의 번영사(繁榮史)는 거의 내지인(內地人)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 (일본: 번역자)가 인천과 인연을 갖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부 터였다.3) 애초에 그 계기가 된 것은 이태왕 15년(1878년)4) 영종 도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일명 강화도사건이라고도 불 3) 이 인취성쇠기는 철저하게 일본인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다. 다소 거 북할 수 있으나 자료적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냥 내지인 을 일본 인 으로 바꾸지 않고 쓰기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리나라 는 일본을 가리킨다. 4) 실제로 강화도사건은 1875년 9월 20일에 발생했다. 조선 해안 지역의 측량을 핑계대고 있지만 사실은 운요호(雲揚號)에 의한 포함외교 시도 로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이라 불리기도 한다.

2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3 리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우라가(浦賀)에서 페리에게 당한 수법 을 따라 조선에 수교를 강요했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파 견된 우리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근해를 측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국 측이 포격을 가해왔다. 다른 나라의 영해를 불 문곡직하고 측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분개하기도 했겠지만, 당시의 조선은 대원군의 집정으로 배외사상이 넘쳐흐 르는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혈기왕성한 일본해군이었다.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 이에 응전하여 결국 영종도를 함락시켰다. 당시 지나(支那)는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강화도사건을 지원해 온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기세가 등등하여 당시의 물불가리지 않던 우리 일본의 외교에 걸려서는 그 대단한 지나도 초장부터 기세가 꺾여 결국 조선은 지나의 속 방이 아니라며 도망갈 궁리를 했다. 이때 일본은 전권대사로 구 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부사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임 명하여 한국 정부에 엄중하게 밀어붙인 결과, 그 다음해(1876년: 역자) 2월 16일에 화친조약이 성립되었다. 이것이 소위 일한수교 조약(日韓修交條約)이다.5) 이 조약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여 일본과 한국은 서로 교역을 하게 되었고, 당시 외무대 승(外務大丞)이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제1대 공사로 부임해 왔다. 당시의 공사관은 성내(城內)에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서대문에 설치되었다. 5) 정확히는 1876년 2월 26일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을 의미한다. 강화도조 약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 정되어 있으나, 이 규정의 목적은 조선에 대한 청(淸)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24 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임오군란에 대한 회상 鳥栖忠安 몇 년 뒤인 1882년, 우연히 대사건이 발발했다. 이른바 임오군 란이다. 이전 민비에게 쫓겨나 실각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6)은 다시 민비를 비롯한 그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어 그 세력을 뒤 엎고 섭정으로 군림했다. 더구나 이 음모는 군정개혁에 의해 발 생한 불평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감행되었다. 호위(扈衛), 훈련(訓 練), 금위(禁衛), 여영(御営), 총융(總戎)의 오영(五営)을 폐하고, 새롭게 무위(武衛), 장위(壯衛)의 이영(二営)이 설치되었다. 의식 (衣食)을 얻지 못하게 된 구식병사는 룸펜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들의 불평은 예기치 않게 고조되어 갔는데, 이 기회를 틈타 대원군이 교묘하게 선동하여 결국 폭동으로 변했고, 우리 거류민에 대한 학살과 일본공사관에 대한 습격이 이루어졌다. 당 시 우리 공사관은 서대문 밖에 있었다. 이 정황에 대해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씨는 여왕민비(女王閔妃) 7)에서 다음과 같이 쓰 고 있다. 지금은 물도 말라버리고 절반쯤은 매워져 물억새가 우거질 6) 원문에는 이응시(李應是)로 되어 있는데, 오기이다. 7) 細井肇, 女王閔妃, 月旦社, 1931년. 이 책은 2000년 6월에 페리칸사 (ぺりかん社)에서 메이지인에 의한 근대조선론 영인 총서(明治人による 近代朝鮮論影印叢書) 제9권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2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5 대로 우거졌으며, 부근에 향상회관(向上會館) 건물이 보인다. 서 대문 밖의 연못(蓮池), 그것은 노론지(老論池) 라고도 고서지(古 西池) 라고도 불렸는데, 고래(古來)로 보통 한발(旱魃)에 기우(祈 雨)하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알려진, 이 나라 역사에 유서 있는 명승 중 하나이다. 연못가에 청수관(淸水館), 그것이 1880년부터 1882년 임오변란까지 일장기를 나부끼며 게양했던 일본공사관이 었다. 그 무렵 관내의 정면을 서상헌(西爽軒)이라고 하였고, 공 사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서상헌 왼편에는 천연정(天然亭)이라 불리던 네 동(棟)짜리 건물이 있었다. 수행원으로서 서기관 곤도 마스키(近藤眞鋤), 어용계(御用係) 아사야마 겐조(淺山顯藏), 오오 바 에이세이(大庭永成), 이시하타 테이(石幡貞), 경부(警部) 오카 헤이이치(岡兵一), 서기생 가와카미 다테이치로(川上立一郞)를 비 롯하여 어학생 3명, 순사 15명 및 관원을 합쳐서 40여 명이 이 네 동에 주재했다. 폭도의 한 무리에 의해 일본 공사가 주재하는 청수관이 화재 에 휩싸였다. 하나부사 공사를 중심으로 공사관원은 위용당당 흰 칼을 앞세우며 똘똘 뭉쳐 결사의 외침과 함께 욱일기(旭日旗)를 휘날리며 폭도를 공격한다. 아이고! 폭도는 기가 꺾여 우왕좌왕 뿔뿔이 흩어졌다. 공사 일행은 때마침 내리는 폭우를 이용해 남 대문으로 향했지만, 성내(城內)가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길을 양화진(楊花津)으로 틀어 한강을 넘어 인천으로 향했다. 일행이 수렁논(泥田)과 같은 진탕에 고생 하면서 인천에 도착한 것은 변란 다음날인 7월 24일, 해가 떨어 지려 할 무렵이었다. 인천에 도착한 일행은 부사(府使)를 찾아가

26 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부사의 후의(厚意)로 술과 밥으로 공복을 채웠지만, 잠시 눈 붙 일 틈도 없이 다시 폭도의 공격을 받았다. 허를 찔려 악전고투 하다가 몇 명의 희생자를 낸 일행은 제물포로부터 작은 배를 이 용해 앞바다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도망갔다. 향한 곳은 수일 전부터 남양만에 계류(繫留)하고 있던 영국의 측량선 플라잉피쉬 (Flying Fish)호였다. 하루 밤낮의 고투 뒤에 구사일생으로 망망대해로 피난한 일행 은 정말 감개무량했다. 월미도에서 출선(出船)한 것은 25일 밤중 이었다. 바다 위를 표류한지 열 몇 시간, 26일 오후 남양만 어귀 에서 마스트가 세 개 달린 플라잉피쉬호를 발견했을 때, 일행은 저도 모르게 모두 일어나 환호했다. 영국 배는 일행을 매우 정성스럽게 대했다. 일체의 사정을 청 취한 선장은 지체 없이 출항하여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이하를 나가사키(長崎)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때 이미 경성의 변 란은 진정되었고, 민비는 그 일족과 함께 쫓겨나 국왕부(國王父) 대원군에게 집정(執政)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나부사 공사는 7월 29일 저녁 나가사키에 상륙하자마자 육로로 출발하여 8월 1일에 는 바칸(馬關)8)으로 가서 명령을 기다렸다. 사건의 상보(詳報)가 도쿄(東京)에 전해졌을 때, 화전(和戰) 즉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조야 상하가 비등했다. 당시의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군함 겐부마루(玄武丸)에 탑승하여 바칸으로 내려가 하나부사 공사에게 대책 안을 전하고, 우선 일본인 보호 8) 바칸(馬關)은 시모노세키(下關)의 옛 이름이다.

2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7 를 위해 군함 공고( 金 剛 ), 닛신( 日 進 ), 후쇼( 扶 桑 ), 기요테루( 淸 輝 ) 의 네 척이 해군소장 니레 가게노리( 仁 禮 景 範 )의 지휘 하에 인천 으로 향했다. 이 군함에는 데라우치( 寺 內 ) 소좌가 이끄는 고쿠라 병( 小 倉 兵 ) 한 개 대대도 육군소장 다카시마 토모노스케( 高 島 鞆 之 助 )를 사령관으로 하여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仁 取 盛 衰 記 (3) 청일전쟁의 발단 鳥 栖 忠 安 공고( 金 剛 ) 이하 4척의 군함이 인천에 들어간 것은 1882년 8 월 12일이었다. 그러자 곧 그 배후에서 청국 수수( 水 師 =해군) 제 독 정급창( 丁 汲 昌 )이 이끄는 위원( 威 遠 ), 양무( 揚 武 ), 초용( 超 勇 ) 등 북양함대 수척이, 원세개( 袁 世 凱 ) 등의 지휘를 받는 육군 병 사 5천을 가득 싣고 인천에 입항했다. 그것은 민비파의 비약( 飛 躍 )에 의한 것이었는데, 일본 및 대원군에 대비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기로 한 결과였다. 이로써 대륙 지나와 섬나라 일본은 이 제 정말로 동양분국( 東 洋 紛 局 )의 무대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뒤 이 대립이 첨단화하여 결국 청일전 쟁에 이르게 되었는데, 실은 그 발단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리하여 하나부사 공사는 인천에 상륙, 우리 육해군의 보호를 받 으며 경성에 들어간 것이 8월 16일, 곧바로 한국 정부와 교섭에

28 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돌입하였다. 대원군은 청국의 계략으로 천진(天津)으로 구송(拘 送)되어 그 뒤 수년간 유폐를 당하게 되는데, 그러한 불우한 처 지가 목전에 다가온 사실도 모르고 왜국(倭國)이 상대할만하다며 특유의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일본 정부를 화나게 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 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래서 (일본의역자) 심기를 해치지 않는 정도로 그 요구의 대부분을 수용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8월 30일에 일단 마무리되었다. 제물포조약은 이렇게 해서 성립했다. 이 조약 성립으로 인천에 우편국이 창설 되었다. 즉 1882년 12월에 우선 급한 대로 영사관 내에 두었다 가, 1896년에 독립하여 나카쵸(仲町)9) 일각으로 이전했다. 그 후 1884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등 친일파 독립당과, 청국의 비호 하에 유안(愉安)을 꿈꾸는 사대당 사이의 갈등으로 마침내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홍장(李鴻章) 사이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는 국면 전개는 근세동양사 9) 현재의 관동(官洞) 일대이다. 관동은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동으로, 인천항이 개항하기 이전에는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에 속하였 고, 각국 거류지(居留地) 설정에 따라 조계(組界) 지구에 편입되었다. 1912년 거류지 구역이 폐지되고 부내면이 새로운 정명(町名)을 만들 때 중정(仲町)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정1 3정목으로 개정되었다.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관동1 3가 동으로 개칭하였다. 1977년 중앙동에 통합되었고, 1998년 중앙동이 신포동에 통합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신포동에서 관할한 다. 관동(官洞)이라는 지명은 일본인들이 개척한 지역으로 관청이 많은 데에서 유래되었다. 일본 거류지의 일부였으며, 일본 영사관, 인천부관 리청, 인천헌병분유소, 인천전기주식회사, 인천부청 등이 있었다. 지금 의 인천광역시청인 인천부청은 1985년 남동구 구월동으로 신축, 이전 하였다. 두산백과 인터넷판 doopidia.

2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9 의 가장 화려한 페이지이다. 더구나 인천은 동양의 형세에 중대 한 변화를 초래한 저기압의 중심지로서 그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다해 왔다. 돌이켜 보건대 1883년 1월 개항 당시(개항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인 듯: 역자)의 인천 정세는 어떠했던가. 인구는 겨우 내지인이 350명, 우편은 매달 12회 나가사키(長崎)에서 오 는 배편(便船)을 통해 전해지는 데 불과했던 빈약한 상태였다. 인천도, 개항을 전기(轉機)로 하여 거주자도 점차 증가했다. 1885년에는 동본원사(東本願寺) 지원(支院) 내, 지금의 은수(銀 水) 부근에 소학교가 창설되었다. 일본인의 상업회의소도 설치되 었다. 거주자가 증가함에 따라 소학교 학생도 늘어났다. 스님의 여가시간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 1890년에는 전임 교장 을 두었다. 이렇게 인천은 반도에 있어서 정책의 중심으로서 (일 본: 역자) 정부도 중시하였고 민간의 의욕도 상당하였다. (인천 은) 완전히 내지인의 알통을 미천 삼아 쑥쑥 팽창해 갔다. 이렇게 써 나가다 보니 취인소와는 꽤나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1896년에 인취가 생겨나기 이전의 미계(米界)는 어 떤 지위에 있었던가, 적어도 조선과 내지 사이의 미곡 관계는 어 떤 상태에 있었던가,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1888년의 조선은 엄 청난 흉작이었다. 그와 달리 일본은 대풍작으로 정기(定期)10)의 10) 여기서 정기(定期)는 정기취인(定期取引)을 의미한다. 정기취인이란,

30 1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최저치가 4원 71전을 시현(示現)하는 상태, 쌀의 홍수는 근년의 현상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었다. 그래서 거류민 사회의 미곡상 중에는 석당 3원 80전의 일본 하등 현미를 가져다 5원에 팔아 치움으로써 상당한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해인 1889년에는 전년의 대풍작과 달리 일본이 대흉작이 었다. 9월 11일에 불어 닥친 폭풍으로 벼농사(稻作)가 완전히 망 해 버린 탓에 5백만 석 감탈미(減脫米)의 홍수로 고심했다. 일본 은, 이번에는 공복을 걱정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890년에 미 가는 폭등에 폭등을 거듭하여 정미(正米)11)가 6월에 들어 최고 11원 85전, 평균 11원 50전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의 최저치 4 원 71전과 비교할 때 일약 2배 이상 뛰어 오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년 일본에서 쌀을 수입했던 인천이 이번에는 반대로 수출하는 주객전도의 형세를 보였다. 즉, 당시 수출된 인천 백미 (白米)는 석당 5원 45전이었는데, 이것이 실제로 조선미가 내지 에 수출된 최초의 일이었다. 이때 내지의 정기(定期)가 최고 9원 60전까지 올랐었지만, 수도(受渡)에 외국미의 대용을 허락함으로 일정한 겐게츠(限月) 또는 기일(期日)에 수도(受渡)하는 것을 약속한 매매거래이다. 경매매(競賣買) 방법으로 매매를 약정하고 수도기일 전 에는 전매(轉賣)나 되사기(買い戻し)를 통해 매매차익을 수수하여 결 제를 종료하는 거래(取引)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선물거래(先物取 引) 또는 청산거래(淸算取引) 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정기취인 (定期取引)에서 형성된 미가(米價)를 의미한다. 겐게츠(限月)이란, 선 물거래에 있어서 매매약정을 최종적으로 결제해야 하는 달을 지칭하 여 기한(期限) 달(月) 의 약칭이다. 또한 기월(期月) 이라고도 한다. weblio 辭書. 11) 정미(正米)는 실제 현물로 거래의 대상이 되는 쌀을 의미한다.

3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1 써 시세는 결국 둔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0년의 내지에 확실 한 풍작이 예상되면서 고가행진은 3, 4, 5월의 3개월로 끝났다. 즉 그해 내지의 정기(定期)가 고가행진을 했던 것은 전년(1899 년)의 흉작으로 현물거래에 소용될 정미(正米)가 결핍되어 있었 기 때문이었다. 1890년 전후 일본의 외미(外米) 수입고를 보면 1889에 2만 1,700만석에 불과했던 것이 1890년(교육칙어 환발의 해)에는 일약 193만 569석을 기록하였고, 그 다음해인 1891년에 는 다시 감소하여 70만 4,763석이 되었다. 1890년의 폭등은 우 리나라 국민생활에 쌀의 위협을 심각하게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널리 알려진 米が十錢すりやヤツコラサのサ唐米や臭いネ働かに や九円と書いてある 12)이라는 속요(俗謡)가 유행한 것도 1890년 그해였다. 12) 오오이타현(大分縣) 하사마마치(挾間町)에서 불렸던 자쿄우타(座興唄) 十錢節 을 옮긴 것 같다. 자쿄우타는 좌중의 흥을 돋우기 위한 노 래이다. 米が十錢すりゃヤッコラヤノヤ 唐米ゃ九錢 ナー千代さん 辛抱せにゃいかれんと書いてある サイナ トッチンチンリン トッチ ンチンリン 일본 민요의 가사를 그대로 옮기기 어렵지만, 대충 옮기 면 쌀이 10전(錢) 하면, 얼씨구, 외국에서 온 쌀은 9전, 치요 씨! 참 지 않으면 안 돼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당미(唐米, とうぐみ)는 메이지(明治)나 다이쇼(大正)기에 아와모리(泡盛)의 원료미로서 널리 이용된 수입 외미(外米)를 말한다. 경질(硬質)의 인도종. 메이지, 다이 쇼기에 아와모리양조조사(泡盛醸造調査)에는 아와모리의 원료미는 당 미(唐米), 지나미(支那米) (1901년), 당산쇄백미(唐産砕白米) (1913 년), 당분미(唐粉米) ( 년)이라고 되어 있어 당시 지나미를 중심으로 한 외미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0년대의 조사에서 조선 혹은 지나미를 도구미, 즉 당미(唐米)라 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당미(唐米)는 수입외미(輸入外米)의 총 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weblio 辭書.

32 1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仁 取 盛 衰 記 (4) 청일전쟁 직전 인천의 대두( 擡 頭 ) 鳥 栖 忠 安 1892년에는 이태왕 친정( 親 政 ) 하에 한국 정부는 폐제개혁( 幣 制 改 革 )을 단행하게 되어 전환국(조폐창)을 용산과 인천에 설치 하였고, 그 회변( 會 辨 =고문: 역자)에 오오미와 쵸베에( 大 三 輪 長 兵 衛 )씨가 취임, 주화기( 鑄 貨 機 ) 6대를 구입하여 화폐주조를 개시했 다. 이 전환국은 1905년 8월 메카다 다네타로( 目 賀 田 種 太 郞 ) 남 작이 재정고문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신화주조를 일본 정부에 위 탁하면서 폐쇄되었다. 인천 전환국의 건물은 그 후 고등여학교 교사로 쓰였는데, 1927년에 헐린 뒤 후시미( 深 見 )의 주조창고가 되었다. 1893년 한국 정부는 갑자기 방곡령을 내어 미곡의 국외수출을 금지해 버렸다. 당시 미가는 현미 기준으로 5원 50전 내지는 6원 이었다. 이 방곡령은 다음해 1894년 3월 당시 일본공사 오오이시 마사미( 大 石 正 己 )가 엄담( 嚴 談 )으로 응한 결과 결국 한국 정부는 (방곡령을)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당시의 청 국공사 원세개( 袁 世 凱 )의 암중비약( 暗 中 飛 躍 )이 있었다. 즉 흉작 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에 방곡령의 공포를 강요하였고, 반면 에 자국 쌀의 무관세수입( 無 關 稅 輸 入 )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3월경부터 청국 미곡상의 대활약에 힘입어 호남미( 湖 南 米 )의

3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3 대수입(大輸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입 총량은 여섯 말(斗) 들이 약 10만 섬(俵)으로 추산되었다. 당시 방곡령은 지방 도처에 서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 관리들은 자신의 사정에 따라 마음대 로 방곡령을 내려서는 상인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반도를 무대로 하는 일본 대 청국의 관계는 시시 각각 험악한 정도를 더해갔고,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결국 1894 년에 전쟁에 돌입하였다. 청일전쟁 이전의 조선은 완전히 지나의 속국과 같은 지위에 있었고, 더구나 국내에서도 고관 사이에 그 에 기대려고 하는 사대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본은 먼저 이토 히로부미로 하여금 근세 지나의 대걸물(大傑物)로 추 앙되는 이홍장(李鴻章)과 천진에서 절충하여 조선은 지나의 속방 이 아니라는 뜻을 인정하게 하였다. 하지만 지나 일류의 속임수 외교는 산초의 열매와 같은13) 일본의 신경을 건드릴 뿐이었다. 청일전쟁도 결국 이 속임수 외교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들어 올린 주먹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의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 에 지나는 조선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그 사이 인천은 반도에 있어서 군사외교는 물론, 일본의 경제적 발전의 토대로서 중요한 지점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지인 거류자도 점차 그 수가 늘 어나 1883년의 개항 당시 인구 350명, 75호에 불과했던 것이, 13) 산초(山椒)의 열매와 같다는 의미는 山椒は小粒でもぴりりとからい 에 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산초는 작은 알맹이라도 꽤 맵다 고 직 역되는데, 우리의 작은 고추가 맵다 라는 속담과 상통하는 뜻을 가지 고 있다. 여기서 일본을 산초의 열매와 같다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 이라고 생각된다.

34 1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1888년에는 134호에 1,171명이 되었고, 청일전쟁이 돌발한 1894 년에는 159호에 1,298명이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상세( 商 勢 )도 점차 활발해져 갔다. 그 당시 유행의 중심은 완전히 인천이었다. 따라서 무역액도 증가하 여 1883년 개항 당시의 58만 5천원에서 1894년에는 502만 4천 원으로 약 10배의 팽창을 보였다. 그런데 인취가 생겨난 1896년의 인천을 1897년 조선신보사( 朝 鮮 新 報 社 )가 발행한 인천사정( 仁 川 事 情 ) 이라는 소책자에서 발 췌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일본거류지 호수 176호, 인구 1,140명 거류지외 호수 595호, 인구 2,764명 즉 거류지 인구의 비율로 보면, 일본은 2할 8푼(28%), 지나가 5 푼 5리(5.5%), 조선 마을이 1할 3푼(13%), 기타 각국 거류지가 5 할 2푼(52%)의 상태였다. 무역 방면에서는 수입이 370만 9천원이 었고 수출이 191만 3천원이었다. 수출 화물 중에서 일본으로 수출 된 것이 154만 5천원, 지나로 23만원, 러시아로 1만 9천원이었다. 수입이 어떤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1893년의 수입이 일본상인 84만 5천원에 대 해 지나 상인이 158만 9천원이었음을 고려할 때, 청일전쟁을 계기

3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5 로 우리나라의 (조선에 있어서: 역자) 상업적 세력도, 이미 당시에 반도에 있어서 외교정치상의 세력이 지위를 전도(顚倒)하고 있었 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지나를 대신하고 있었음은 상상할 수 있다. 사실적 문제로서 일본상인은 청일전쟁 후 지나 상인의 구축 (驅逐)에 전력을 올리고 있었다. 인취의 출현 또한 이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仁取盛衰記 지나 상인 몰락과 인취의 탄생 鳥栖忠安 청일전쟁 후의 일본상인의 활약은 인천에서 지나 상인 세력을 급속도로 구축해 갔다. 한편,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하여 1894, 95, 96년의 내지 미작은 어떤 상태였을까? 1894년은 4,181만 5,714석의 실수(實收)를 보였고, 일본군도 파죽지세로 진군하였으 며, 쌀도 대풍작이었다. 다음해인 1895년에는 3,992만 882석이었 고, 인취가 설립된 1896년에는 3,619만 9,771석으로 감소해 버렸 다. 즉 1896년은 병신(丙申)의 해에 해당했기 때문에14) 예전부터 14) 음양오행에 의하면, 10간(干)의 병(丙)은 陽의 火, 12지(支)의 신(申) 은 陽의 金 으로, 서로를 토멸(討滅)해 가는 음(陰)의 관계이다. 즉, 상극(相剋)의 관계로 불은 금속을 녹일 수 있다(火剋金). 따라서 옛부 터 병신(丙申)의 해가 되면 흉작이 나타난다고 전해진 듯하다.

36 1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작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이 전해져 왔는데, 정말 사실로 나타났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취 설립 계획이 당시 사에구사상점 ( 三 枝 商 店 ) 지점장이었던 가쿠 에이타로( 加 來 榮 太 郞 )와 모리나가 구미( 守 永 組 ) 지배인 나가이 후사키치( 永 井 房 吉 ) 두 사람의 제창 으로, 당시 인천상의( 仁 川 商 議 ) 회두로 다이이치은행( 第 一 銀 行 ) 지점장 니시와키 쵸타로( 西 脇 長 太 郞, 뒤에 본점 지배인으로 옮겨 간다) 및 부회두 미즈타 사다시치( 水 田 定 七 )의 찬동을 얻어 발기 인 14명과 함께 당시 대리영사 하기와라 모리이치( 萩 原 守 一 )의 양해 하에 추진되었다. 외무성이 이를 허가하게 된 것은 경제적 이유라기보다 오히려 지나 상인 세력의 구축이라는 외교적 의미 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창립사무소를 모리나가구미( 守 永 組 )에 두 고 창립위원에 가쿠 에이타로, 나가이 후사키치, 마츠타니 세이 이치( 松 谷 淸 一 ), 다나카 사시치로( 田 中 佐 七 郞 ), 이케다 세이지( 池 田 誠 治 ), 야마시타 신타로( 山 下 新 太 郞 ), 후쿠다 토라타로( 福 田 虎 太 郞 )의 7명을 선출했다. 취인소 설립 출원의 요점을 들면, 취인 의 종류는 쌀( 米 )과 대두( 大 豆 )의 취인, 연취인( 延 取 引 ), 정기취인 ( 定 期 取 引 )의 세 종류, 자본금은 5만원, 1주 25원으로 2천주를 발행하기로 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1896년 인가신청서를 제출하 였다. 이 인가신청서에 첨부한 설립이유서는 다음과 같다.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 설립이유서 제1, 본 취인소의 설립을 요하는 사유는 다음과 같다. 1 인천항은 조선국 평안, 황해, 경기, 충청의 4도 및 전라도 일부에서 산출되는 미두의 집합지로, 당항을 통해 수출하

3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7 는 물품의 종류가 상당히 많지만, 오직 미두 취인 여하만 이 당항의 영고( 榮 枯 )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일한무역의 성쇠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 고 가격이 같지 않아 그 표준을 정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따라서 취인의 방애( 防 碍 )를 초래하는 일이 많다. 이 러한 폐해를 막고자 하는 것, 이것이 본 취인소의 설립을 요하는 첫 번째 사유이다. 2 미두의 품질 및 가격의 표준이 일정할 때는 제국 내지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그 품질 및 가격의 표준을 알게 되 고, 따라서 미두 수출에 지대한 편리를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본 취인소의 설립을 요하는 두 번째 사유이다. 3 몇 해 전, 당항 무역상조합에서 수출미의 개량을 도모하기 위해 검사원을 두었지만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는 데, 지금에 와서 유감스럽다. 가격의 높고 낮음을 정해 일 반 생산자로 하여금 조악미( 粗 惡 米 )의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을 명지( 明 知 )시킴으로써 품질개량을 꾀하고자 한다. 이 것이 본 취인소의 설립을 요하는 세 번째 사유이다. 4 근래 백미( 白 米 )의 품질이 매우 조악한데, 특히 수분을 함 축한 것이 많아 이것이 부판( 腐 販 )을 초래한다. 이외에도 손실을 발생시키는 일이 많다. 만약 이 폐해를 교정하지 않게 되면 그 손실을 입는 자 장래 점점 많아질 것이기 때 문에, 본 취인소를 설립하여 그 폐해를 방지하고자 한다. 본 취인소의 설립을 요하는 네 번째 이유이다. 5 근래 오지( 奧 地 )까지 가서 행상( 行 商 )하며 미두의 매집을 행하는 자 매우 많다. 그런데 가격의 추세를 정확하게 알

38 1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수 없어서 마음대로 구매하여 손실을 초래하는 자가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본 취인소를 설립하여 가격의 추세를 알 게 하면 오지 행상자에게 상당한 편익을 주는 동시에, 이 를 장려하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본 취인 소의 설립을 요하는 다섯 번째 사유이다. 6 당항에서 미두취인소를 설립하고 매매상 편익을 주게 되면, 각도의 미두가 당항에 집합하게 될 것이고, 당항의 상품 또한 각도로 산포( 散 布 )될 것이기 때문에, 당항의 집산( 集 散 )이 증가하게 될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이다. 따 라서 일한 무역상 일층 진보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본 취 인소의 설립을 요하는 여섯 번째 사유이다. 제2, 매매 취인하게 될 미두 집산의 연혁 및 현황 당항에 집산하는 미두의 상권( 商 權 )은 1889년 이래 완전히 우리 나라 상인이 독점하게 되었다. 미두와 같은 것은, 처음에는 산출 액이 정말 근소했지만, 우리 제국에 수출하는 길이 열리게 된 다 음부터는 그 산출이 특히 증가하였다. 매년 풍흉에 따라 증감이 있기는 하나 이전 3년간의 미두 매매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893년 매매고> 단, 한인( 韓 人 ) 상호간의 매매고는 생략한다.(이하 같음) 쌀( 米 ) 6만 3,938석, 그 가격 32만 8,882원 대두( 大 豆 ) 5만 5,624석, 그 가격 19만 4원 <1894년 매매고> 쌀( 米 ) 16만 6,658석, 그 가격 100만 3,199원 대두( 大 豆 ) 6만 161석, 그 가격 27만 91원 <1895년 매매고>

3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9 수출 백미 7만 5,613석, 그 가격 42만 4,900원 수출 현미 3만 4,588석, 그 가격 18만 2,346원 수출 대두 9만 3,114석, 그 가격 37만 5,699원 이외에 일단 당항에 모였다가 다시 부산이나 경성 기타 각지로 흩어지는 쌀( 米 )의 대략적인 양 현백미( 玄 白 米 ) 대략 18만석, 그 가격 대략 100만 6,200원 제3, 본 취인소의 미두 취인 중매인이 될 수 있는 상인의 대략 적 수는 미두상( 米 豆 商 ) 각 80명으로 한다. 仁 取 盛 衰 記 (6) 창업 당시의 난센스 鳥 栖 忠 安 1896년 3월 출원된 인취는 동년 4월에 들어 설립인가의 지령 을 접하고, 중매인 9명의 인가를 얻어 개업 준비에 착수했다. 그 런데 드디어 설립되는구나 하는 시점까지 도달했을 때 한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그 난관이라는 것이 이렇다. 최초의 계획에 의 하면 자본금이 5만원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기인은 이 안을 따라 1주 25원으로 (2000주-역자) 모집을 시작했다. 그런데 응모 주는 약 3배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고, 2원만 지불하면 되는 증거금이 7, 8원이나 하는 엄청난 인기였다. 발기인 측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불입과 함께 마침내 개업하려는 단계에 달했을

40 2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때, 칙령 제74호의 규정에 의해 반액 이상 불입하지 않으면 개 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개업 준비가 일시 중지되었 다. 이에 지금까지 에비스 얼굴을 하고 있던 관계자들은 순식간 에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했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된 상황에서 더 불입할 수도 없고 해서 자본 금을 3만원으로 감액하고 총 주수를 1,200주로 줄임으로써 반액 불입의 형식으로 변경하여 5월 5일에 개업했다. 창립 당시의 가옥은 일본거류지 제53번지(현재의 혼마치[本町] 2정목에 해당, 미즈타씨 소유지로 되어 있다)로 정하고, 회사의 정관이나 영업세칙은 회두인 니시와키 쵸타로(西脇長太郞)15)가 직접 붓을 들어 오오사카(大阪) 및 시모노세키(下關) 취인소를 모방하여 기안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인천미두취인소 초대 이 사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이사장 미즈타 사다시치(水田定七) 이 사 마츠타니 세이이치(松谷淸一), 나가이 후사키치(永井房吉), 미키 유이치(三木雄一), 다나카 사시치로(田中佐七郞) 감 사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 이케다 세이지(池田誠治) 심사역 마츠타니 세이이치, 나가이 후사키치, 미키 유이치, 다 나카 사시치로, 이케다 세이지, 시바타 마고베(柴田孫 兵衛), 구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16), 야마시타 신타로 15) 원문에는 西脇長次郞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다. 西脇長太郞로 바로잡 는다. 16) 원문에는 桑野長太郞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다. 桑野良太郞로 바로잡 는다.

4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21 (山下新太郞), 가와노 고시치로(河野小七郞), 하야시 이 치로지(林市郞治) 이상 모든 역원은 무보수였다. 그 후 개업 직전에 미즈타 사다 시치(水田定七)가 사임했기 때문에, 다나카 사시치로(田中佐七郞)17) 가 이사장이 되었다. 다나카의 이사장 취임은 얼굴마담격으로, 실 질적인 업무는 나가이 후사키치(永井房吉)가 이사장대리의 자격으 로, 구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가 전무이사가 되어 도맡아 처리했 다. 최초의 중매인은 스스키다 시키조(薄田式造), 와타나베 토모타 로(渡邊友太郞), 야스오카 도쿠헤이(安岡德平), 하야시 쵸타로(林 長太郞), 히사마 젠스케(久間善助), 기무라 다케오(木村健夫), 고모 리 토라키치(小森虎吉), 아라이 간지로(新居歡次郞), 나카가와 코 지로(中川好次郞)의 9명이었다. 시장대리인(市場代理人) 신고는 1 명이었지만, 대리인이 아니라도 매매할 수 있는 주먹구구의 방식 이었다. 더구나 이들 중매인들은 아무도 경매수화를 할 줄 몰라, 도대체 어떤 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매인이 되었기에 그 무모함도 상상이 간다. 여러 가 지로 지혜를 강구한 끝에, 그 무렵 인천에 있던 나카츠(中津) 사 람으로 이토조에(糸園) 모(某)라는 자가 (경매수화를: 역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사람을 선생으로 삼아 개업 전에 입회(立 會)연습을 했다고 한다. 엉성한 아저씨들이 열심히 경매수화를 연 17) 원문에는 田中作七郞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다. 田中佐七郞로 바로잡 는다

42 2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습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아내나 아이들에게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치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개업 까지는 불충분하지만 경매수화를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창업 당시의 장부(場帳)는, 지금과 같이 완비된 것이 아니라, 야 마토쵸(大和帳)라는 것으로 위탁미대장(委托米臺帳, 元帳에 해당)과 고객별 테아이쵸(客先手合帳, 仕譯帳=分介帳에 해당)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테아이쵸(手合帳)는 남경부호(南京符丁)라는 일종의 독특 한 부호로 기장하는 것이라 매우 어려웠다. 아주 어려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증거금18)은 100석에 대해 50원으로, 그 중 20원은 취인소로부터 보관증을 건네받았다. 수수료는 석당 3전(=100석에 대해 3원: 역자)이었는데, 히지마이 (日仕舞)는 100석당 1원 50전이므로 절반은 회사가 취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창업 당시의 중매인 신원보증금은 500원이었는데, 이와 는 별도로 증신원보증금(增身元保證金) 규정이 있어 다테마이(建 米)19)를 1천석 늘릴 때마다 300원의 증보증금(增保証金)을 필요로 했다. 이는 1906년 1월의 개정으로 폐지되기까지 10년간 계속된 18) 증거금이란, 계약 성립 및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 한편이 다른 한 편에게 제공하는 담보금을 의미한다. 주식신청증거금, 취인소에 관한 위탁증거금이나 매매증거금 등이 있다. weblio 辭書. 19) 다테마이(建米)는, 에도시대의 경우 장부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거래(帳 合い米の取引)로, 당일 중에 전매(轉賣)나 다시 사들이기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미곡취인에서 사든 팔든 동업자들 사이에 계약이 성 립한 것의 총칭이다. 가격이 하락할 것을 예상하여 매물을 내어 계약 이 성립하게 되면, 우리다테(賣建=賣玉)가 된다. 한편 가격이 상승할 것을 예상하여 취인소에서 사들임으로써 계약이 성립하면 가이다테 (買建=買玉)이라고 부른다.

4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23 제도였다. 그 당시의 다테마이의 단위는 50석이었다.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창업 당시에는 여러 가지 난센스가 속 출했던 것 같다. 그 무렵 기장(記帳, 장부 기입)은, 반지(半紙)20) 를 겹쳐 쌓고, 그 네 귀퉁이에 붓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를 담당 하는 이의 급료가 50원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봉급 이었다. 기장하는 일이 화려했던 직업이었던 만큼, 밤에는 홍등 녹주(紅燈綠酒)의 거리에 틀어박혀 헤어날 줄 몰랐으니, 돈이 아 무리 있어도 부족했다. 더구나 끝이 많이 닳아 뭉툭해진 붓으로 기장(記帳)하고 있었기 때문에 틀리는 일이 많았다. 잘못 적혀 있어도 경매수화를 하는 쪽이 초보자여서 어, 내가 틀렸나 라는 식으로 마치 여우에 홀린 것처럼 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허 점을 이용하여 기장(記帳) 선생이 한창 발호하여 유탕자금(遊蕩 資金)을 벌었던 것이다. 그 무렵 중매인 중에 나카하라 다이치로 (中原太一郞)라는 조금 멍청해 보이기는 해도 사람 좋은 통쾌한 남자가 있었다. 기장 선생 이 사람의 선량함에 주목하여 나쁜 수법을 써 놓고는, 나중에 아무도 몰래 그 사람에게 부탁하여 해 결했다. 나카하라는 특별히 나쁜 얼굴도 하지 않고 그래 그래 라며 모조리 도맡아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요즈음 같이 각박한 세상과 비교하면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몇 대째 이사장 때였던가, 시바타 겐페(柴田源兵衛)라는 남자 20) 주로 붓글씨를 연습하는 일본 종이를 가리킨다.

44 2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가 있었다. 이 남자 형세가 불리해지면 단상에서 뛰어 내려서는 마치 토끼가 도망가듯 민첩하게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려 이 사장이 직접 (경매)수화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사장이 직접 (경매)수화를 한 것에 대해 인취의 경우만을 두고 비웃을 수 없 다. 1893년에 개정될 때까지 내지에서도 자주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仁取盛衰記 시장의 분쟁으로 해산명령 鳥栖忠安 초보자들이 한 데 모여, 밤중에 손을 더듬어 물건을 찾듯, 미 덥지 못한 취인을 계속한 것은 아주 잠시 동안에 불과했다. 조 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중매인들도 요령을 터득해 갔다. 그리고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거래(相場)의 맛을 알게 되면서 야심도 고 개를 들었다. 1, 2년 지나자 이번에는 오기(意地)나 과욕과 같은, 투기꾼(相場師)이면 으레 따르는 기분이 인취에도 스며들었다. 그 영향으로 1898년 인취에서는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해합(解 合)21)이 이루어졌다. 즉, 1898년 햅쌀이 나올 무렵인 단경기(端 21) 거래(取引)에서 시세가 격변했을 때, 사는 쪽과 파는 쪽이 협의하여 일정한 가격을 정해 차금결제(差金決濟)를 함으로써 매매계약를 푸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천재지변이나 큰손들에 의한 매매전의 격화

4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25 境期)를 중심으로 점차 (결제를 동반하지 않는 거래의: 역자) 계 약고(取組高)가 격증한 결과, 사자 쪽(買主)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결국 총해합(總解合)을 하게 되었다. 이때 사자 쪽(買主)의 대장은 이오이 쵸(五百井長)와 요시카와 사타로 (吉川佐太郞) 두 명으로, 10월한(十月限)22)으로 매점(買占)했지만, 결과적으로 보기 좋게 실패했던 것이다. 중심인물인 요시카와 사 타로(吉川佐太郞)는 대담한 투기거래를 벌일 만큼 패기 넘치는 남자로, 월미도(月尾島)를 당시 한국정부로부터 500원에 불하받 아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에 별천지를 만들고 왕처 럼 생활한다는 통쾌한 계획을 세워 활발하게 암중비약했던 일도 있었다. 총해합(總解合)은 사자 쪽(買方)이 모두 무릎을 꿇으면서 불완 전하게나마 수습이 되었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의 결과가 아 주 좋지 않았다. 다시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패(大敗)한 요시 카와 사타로(吉川佐太郞)는 분풀이로 밤에 몰래 영사관의 뒷문을 두드리고는 취인소해독론(取引所解毒論)을 뛰어난 언변을 통해 주 장했다. 당시 영사는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郞)였다.23) 지금이 등으로 인해 시장 수습이 어려워졌을 때, 취인소나 당국에 의해 이루 어지는 비상조치를 의미한다. 포지션(position)의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해 일정한 조건을 정해 강제적으로 결제하게 한다. 거래의 룰을 정 해, 투자가를 평등하게 경쟁시킴으로써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취인소 의 거래인데 도케아이(解合)는 시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초법규적 조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쉽게 발령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번역할 때는 해합(解合) 라 쓰기로 한다. 22) 시월한(十月限)은 :10월에 결제와 현물의 수도(受渡)를 완료하는 거래 를 일컫는다.

46 2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야 명실 공히 우리 외교계의 대선배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당시 취인소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기능을 가진 것인지 외교통인 그 로서는 일체 알지 못했다. 요시카와 사타로(吉川佐太郞)가 투기 거래(相場)에서 진 원한을 세치 혀를 놀리며 (앙갚음 하고자 했 는데, 이시이는 요시카와의: 역자) 유창한 변설에 완전히 말려들 어 취인소는 백해(百害) 있을지언정 일리(一利) 없다 고 결정해 버렸다. 태풍이 지난간 뒤의 해합(解合) 성립으로 한숨 돌린 그 해(1898년) 10월 7일, 인취로서는 청천벽력이라 할 만한 해산명 령이 내렸다.24) (인취) 관계자들로서는 마치 아닌 밤중의 홍두께 격으로 멍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뒤에서 뒤통수를 딱 하고 가격당한 것처럼 놀랐다. 당시 이사장인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 郞)가 (일본 내지로 일시: 역자) 귀국(歸朝) 중이었기 때문에, 시 바타(柴田) 이사가 이사장대리를 맡고 있었는데, 이사들을 비롯 하여 중매인들은 해산명령을 접하고 멍한 상태로 어쩔 줄 몰랐 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직접적인 관계자들에 이어 인천시민의 공황상태가 극에 달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23)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郞, )는 외교관이자 정치가 로, 1912년에 프랑스대사, 1915년 10월 성립된 제2차 오오쿠마(大隈 重信) 내각에서 외무대신에 임명되었다. 1917년에는 특명전권대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중국문제에 관한 미일간의 합의 랜싱-이시이협정 (The Lansing-Ishii Exchange of Notes, 1917) 을 체결하였다. 1920년에는 프랑스대사에 재임되었고, 동시에 국제연맹 설립 당시에 일본대표를 지냈다. 1929년에는 추밀고민관이 되었다. 이시이가 인천 일등영사로 부임한 것은 1896년 10월 8일이었고, 1898년 11월까지 재임했다. ja.wikipedia.org/wiki/石井菊次郞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참조. 24) 韓國近代史資e集成 6권 한일경제관계1, 四. 米豆取引所再設方元株 式會社仁川米豆取引所株主惣代ヨリ出願ノ件 明治三十二年五月, (1) 仁 川米豆取引所解散ノ件, 1898년 10월 20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4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27 인취의 설립에 대해 일본 공사는 당초부터 반대였다.25)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인취의 설립이 인가된 것은 당시의 소장(少壯) 외 교관 하기와라(萩原) 영사대리의 전단(專斷) 때문이었다.26) 이러 한 내부(內部) 경위로 생겨난 인취였기 때문에, 그 후에도 공사 관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폐지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인취 측이 순조롭게 운영해 오다가 도중에 위와 같은 총해합(總解合)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공사관에서는 요 시카와 사타로(吉川佐太郞)의 선동도 있고 해서, 이런 시장의 분 란을 기화로 기다리고 있었다 는 듯이 영사 이시이 기쿠지로 (石井菊次郞)로 하여금 해산명령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맛들인 사람에게 있어서 투기거래는 아편중독과 같은 것 으로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막 재미 붙여 (투 기심이) 분출하고 있던 인취로서는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다. 솥이 끓는 듯한 소란 중에 인취 존속을 위한 운 동이 전개되었고, 먼저 존립애원서(存立哀願書)라는 형태로 그해 25) 원문에는 일본 영사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일본 공사가 맞는 듯하다. 일본 공사(관)은 반대했었고, 당시 인천 영사대리였던 하기와라가 전 단으로 인취 설립의 인가를 내 준 것이다. 따라서 분쟁이 발생하자 공 사관에서 당시 인천 영사인 이시이에게 해산명령을 내리도록 한 것으 로 이해할 수 있겠다. 26) 하기와라 모리이치(萩原守一, )는 1895년에 제국대학 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1895년 11월 13일에 일본 인천영사대 리로 부임했다. 1896년 10월 17일까지 인천에 근무한 하기와라는 1897년에 독일 공사관에 근무했고, 그 후 벨기에, 한국, 미국의 공사 관 서기관을 역임했다. 러일전쟁 후인 1906년에는 봉천(奉天, 현재의 瀋陽) 총영사로 부임했고, 뒤에 외무성 통상국장을 지냈다. 國民的對 韓策 (1896년 12월)을 남겼다. weblio 辭書 참조.

48 2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10월 10일자로 이시이 기쿠지로( 石 井 菊 次 郞 )에게 제출되었다.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 존립애원서 당 미두취인소는 설립이유서에 상세하게 기록한 대로, 메이지 29년(1896년) 4월 중 설립 인가를 얻은 이래, 영업년수( 營 業 年 數 ) 아직 연한( 年 限, 최초 정한 영업기간: 역자)의 3분 1에 달하 지 못했지만, 제반 설비도 점차 경험을 쌓고 업무도 겨우 착수하 여 앞길에 조금씩 호황을 보이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번 달(10월: 역자) 7일자로 갑자기 해산명령을 접하고, 역원과 주주는 말할 것도 없고, 중매인들에 이르기까지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역원회 및 임시주주총회를 열 고, 중매인들도 열석하게 하여 오로지 그 대책마련을 놓고 여러 가지로 협의했습니다. 회의 결과에 의하면, 일반의 희망은 부디 관대한 법적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고 있어 다음과 같이 애원( 哀 願 )하는 사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애당초 취인소는 창업 이래 여러 곤란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일한인( 日 韓 人 )의 취인( 取 引 )도 조금씩 번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날 한인( 韓 人 )의 취인은 일본인의 거의 세 배( 三 倍 )에 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와 직간접적 인 관계를 갖는 자도 적지 않은데, 당 취인소에서도 종래의 관계 상 이번의 해산명령을 접하고서는 주주의 곤란은 물론 십여 명 의 소속 중매인들도 벌써 앞으로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 습니다. 특히 한인 고객과의 관계상 여러 가지 말씀드릴 수 없 는 곤란한 사정도 있습니다.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참상에 이 르게 된 사정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으니, 부디 계속해서 영

4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9 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취인소의 제 규칙 및 영업상 불비한 점이 있을 시에는 명령을 존봉( 遵 奉 )하여 적절치 못한 부분이 없도록 하겠으니, 부디 배려하시어 특별한 법적 조치로 계속 영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 다. 주주 총대 및 중매인 총대가 각자 연서하여 이와 같이 애원 합니다. 이 수소애원( 愁 訴 哀 願 )한 탄원서는 주주 총대 나가토미 이치노 스케( 長 富 一 之 祐 ), 시바타 마고베( 柴 田 孫 兵 衛 ), 가쿠 에이타로( 加 來 榮 太 郞 ), 다나카 사시치로( 田 中 佐 七 郞 ), 히구치 헤이고( 樋 口 平 吾 ), 노비타 가메타로( 延 田 龜 太 郞 ), 고오리 긴자부로( 郡 金 三 郞 ), 이상 7명 이외에 중매인 총대 아오야나기 소이치로( 靑 柳 壯 一 郞 ), 나카하라 다이치로( 中 原 太 一 郞 ), 츠나기 센키치( 綱 木 千 吉 ), 이구 치 사다시치( 井 口 定 七 )의 연명으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시이 기쿠지로( 石 井 菊 次 郞 )는 고집스럽게 응하지 않고, 탄원 내용이 터무니없어 인취 존속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 는 차가운 인사 뿐이었다.

50 3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시데하라(幣原)의 부임과 인취 부흥 운동 鳥栖忠安 광기에 휩싸인 인천 거류민이 사정하기도 했고, 울고불고 애원 하기도 했으며, 방법을 바꾸어 설득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반응 이 없었다. 이시이(石井) 씨는 여전히 냉랭하게 대답할 뿐, 좀처 럼 해산의 이유조차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결국 운동은 지구전 이 되고 말았지만, 취인소로서는 해산명령 직전 잔무정리위원을 선정해야 했기 때문에,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 다나카 사시 치로(田中佐七郞), 이케다 세이지(池田誠治), 히구치 헤이고(樋口 平吾), 시바타 마고베(柴田孫兵衛), 나가토미 이치노스케(長富一 之祐)27) 등 6명을 선정했다. 이 6명은 명의는 정리위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존속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머지않아 이시이 기쿠지로 (石井菊次郞)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의 후임으로 외무대신으 로 현재 유명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가 영사관보로 외교 관의 첫 무대를 밟기 위해 영사대리에 임명되었다.28) 이 시데하 27) 원문에는 永 一之祐라고 되어 있으나 長 一之祐의 오기이다. 28) 시데하라 기쥬로(幣原喜重郞, )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1915년 외무차관이 되어 워싱턴회의에서 전권위임으로 임했다 년 가토 고메이(加藤高明) 내각에서 외무대신에 임명되었고, 이후 4회 에 걸쳐 외무대신을 지냈다. 1920년대 군부의 군확자주노선(軍擴自主 路線)인 다나카외교(田中外交) 아 대립한 국제협조노선 시데하라외교 로 유명하다. 시데하라가 인천 일본영사대리로 부임한 것은 1898년 11월 14일로 1899년 5월 11일까지 재임했다. ja.wikipedia.org/wiki/ 幣原喜重郞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5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31 라는 지금도 의회의 답변으로 체면을 구기거나 국민의 일부에게 는 그 연약외교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젊은 시절의 그도 그렇게 태도가 분명한 사람은 아니었고, 인천에서는 이렇다 할 만큼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 그가 만약 미츠비 시(三菱) 가문의 부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29) 외무대신은 고사하 고 대사도 겨우 될까 말까 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의 인천시대를 잘 알고 있는 노인의 말이다.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가 인천에 부임해 온 이후 인취 부흥 운동은 점점 맹렬해 지고, 관계자는 소위 여론의 환기나 진 정을 통해 외무당국을 움직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계속해 갔 다. 1898년 11월 2일, 나가토미 이치노스케(長富一之祐)30) 이하 17명은 연서로 다음과 같은 건의서를 당시의 상업회의소 회두 니시와키 쵸타로(西脇長太郞)에게 제출했다. 건의(建議)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는 지난 1896년 4월 중에 당항(當港) 재류시민 대부분의 일치 찬성 하에 다수 주주를 얻어 당국으 29) 시데하라의 부인 마사코(雅子)는 미츠비시 재벌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 타로(岩崎彌太郞)의 4녀였다. 야타로의 장녀인 슌지(春路)는 가토 고메 이의 부인이었고, 차녀 이소지(磯路)는 기우치 쥬시로(木內重四郞)의 부인이다. 따라서 이 셋은 동서지간이다. 한편 시데하라의 형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垣, )는 조선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 1900 년 12월에 관립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었고, 1904년 1월 체결된 한일 의정서에 입각한 고문정치의 일환으로 8월 학부참여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ja.wikipedia.org/wiki/幣原喜重郞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30) 원문에는 長 一之裕라고 되어 있으나 長 一之祐의 오기이다.

52 3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창업했다. 창업된 지 또한 얼마 되지 않은 오늘날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돌연 해산명령을 받게 되었 고, 그 때문에 당항 거류민 중 다수의 주주 및 중매인 등의 곤란이 여간 아니며 그 관계 되는 바 무엇보다 넓어 보인다. 또한 앞의 취인소 존속 건은 일한무역상 현재와 장래 모두 좋 지 않은 관계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로 본 문제 와 같은 것은 당항 상업계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며 수 수방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귀소( 貴 所 )에서 신속하게 임시회( 臨 時 會 )를 열어 앞의 이해득실을 심의한 후 의견을 건의하거나 혹은 관계 상민( 商 民 )에게 교시해 주셨으면 하여 이에 건의합니다. 이 건의에 따라 개최된 상업회의소의 임시총회에 영사대리 시 데하라 기주로( 幣 原 喜 重 郞 )도 출석하여 취인소폐해무용론( 取 引 所 弊 害 無 用 論 )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다수가 취인소의 존재 를 인정하여 다음과 같은 건의서를 제출했다. 애초에 취인소를 공설( 公 設 )한 중요한 이유는 물가의 표준을 명확히 함으로써 화물의 집산을 편하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상업이 발달한 장소 치고 이것이 설치되지 않은 곳이 없고, 우리 정부가 취인소법을 발포( 發 布 )하여 매매취인이 번성한 지 구( 地 區 ) 내 상인에게 정부 면허를 주어 일종( 一 種 ) 혹은 수종 ( 數 種 )의 물건( 物 件 )을 다루는 취인소를 설립하게 한 것 역시 이러한 취지에 다름 아니었다고 믿는다. 돌이켜 보면 이 인천 항의 상업은 개항 이래 해마다 번성을 더하고, 특히 1894년의

5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33 전역( 戰 役, 청일전쟁) 이후 갑자기 현저한 발달과 진보를 이루 기에 이르렀다. 당시 재류 본방( 本 邦 ) 상인은 여기에 취인소를 설립할 필요를 느끼고, 1896년 4월 중에 인천미두취인소의 설 립인가를 신청하였다. 당시의 영사는 해당 신청을 받아들여 그 설립이 인가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영업을 해 왔는데 올해 10월 7일에 돌연 해산 엄령( 嚴 令 )을 접했다. 그러나 해산의 이 유에 대해서는 아직 들을 수 없었지만, 본 회의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두취인소의 존재는 당항에 있어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이유를 개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거슬러 올라가 인천미두취인소 설립 당시의 경황을 생각 하면, 그 매매에 종사하는 자는, 일부의 일본인에 그치고 따라 서 그 매매취인고도 매우 근소하여 해당 취인소의 수지가 맞 을 것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뒤에 한국 상인 으로 이 취인에 종사하는 자가 점차 증가하고, 특히 올해 3월 이후 한국 상인의 취인고가 현저하게 증가했다. 경성 상민( 商 民 )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지방에 있는 한상( 韓 商 ) 또한 이 취 인소에서 취인하기에 이르러 결국에는 그 취인고 10 중의 7푼 ( 分 )(70%: 역자)은 한상( 韓 商 )이 점하기에 이른 것도 미두취인 소의 실황( 實 況 )이다. 나아가 이 추세는 점점 진보하여 미두 취인은 한상을 고객으로 하여 수만의 이익 즉 매매수수료를 취하게 됨은 필연이어서 해당 취인소가 본방( 本 邦 )에 있어서 제2신( 第 二 信 )이 전하는 취인소의 번영을 보게 됨은 필지( 必 至 )의 추세라고 인정해 틀림이 없다, 이렇게 예언하는 것도 실

54 3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고 믿는다. 생각하건대 당초 당항에서 최다수를 점하는 본방 상인이 해당 취인소를 설립한 목적은 이것을 통해 한상( 韓 商 ) 취인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함에 있고, 조금도 소수 일본 상인 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초의 목적이 점차 달성되 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해산 명령을 접했다. 이것이 주주인 자의 손실은 도외시하더라도 당항에 있어서 일대( 一 大 ) 이원 ( 利 源 )을 매설하게 되는 결과로 유감을 금하기 어렵다. 이에 간절히 귀하의 세찰( 細 察 )을 청하고자 함이 첫째 이유이다. 仁 取 盛 衰 記 (9) 부흥 운동의 건의서 제출 鳥 栖 忠 安 둘째, 무릇 당항의 상업을 발달시키고자 하면 화물의 집산고 ( 集 散 高 )를 늘리는 궁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미두 집산의 소 장( 消 長 )과 당항의 상업발달과 많은 관계가 있음을 실례를 통 해 증명하면 다음과 같다. 당국( 當 國 )에 있어서 미두 무역은 작년 부작( 不 作 )의 여향( 餘 響 )으로 전년보다 부진한 상황에 빠 졌고, 장소에 따라서는 양식의 부족을 호소하는 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항에 있어서 흡집력( 吸 集 力 )은 용케도 각 지로부터 쌀이 모이는 것( 廻 米 ) 31) 을 촉진했다. 창고의 재고미

5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35 (在米)가 항상 윤택할 수 있었던 것은 미두취인소의 존재에 힘 입은 바 크다. 또한 대저 물가에 고저 있음은 상계(商界)에는 항상 있는 일이고, 때때로 손익이 발생함은 상업가(商業家)를 자처하는 자가 각오해야 하는 바이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 고 저의 추세를 살펴서 능숙하게 손실을 피하는 것이야 말로 상 업가의 비결(秘訣)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가장 투기를 혐기(嫌忌)하는 상실자(商實者)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 즉 다수 의 미곡매매를 약정하게 되는 경우에는 몸소 미곡취인소의 정 기매매법을 이용하게 된다. 이 많은 양의 취인에 수반되는 위 험과 손실을 예방하기 위한다고 하여, 그 실례를 들면, 실로 열과 백을 헤아려도 부족할 것이다. 이제 이런 점에서 간찰(看 察)하면, 당항에 미두취인소가 존재하는 것은 당업자(當業者) 에게 있어 가장 편의(便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당업자가 지방의 생산지로 가서 미두(米豆)를 매입하는 데 종 사하게 될 경우, 부당한 가격 폭락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 실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취인소의 정기(定期)에 팔고, 혹은 가격 고저의 추세를 살펴서 매입할 필요를 느낄 경우에 미리 취인소의 정기(定期)에 사서 이익을 거두게 되는데, 이와 같은 편의는 취인소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편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취인소의 가장 편의한 점은 즉 취인소의 폐 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그렇지만 원래 상업이라는 것은 장래에 수요공급의 관계를 예찰(豫察)하고, 31) 회미(廻米)란, 에도시대, 막부나 여러 번(藩)들이 연공미(年貢米)를 주 로 에도(江戶)나 오오사카(大阪)으로 회조(回漕)하는 것, 즉 선박으로 화물이나 여객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그 대상이 된 연공미 (쌀) 자체를 지칭기도 한다. weblio 辭書.

56 3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그에 따라 능숙하게 매매하는 것에 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 서 취인소는 그 기관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일폐(一弊) 가 있다고 하여 완전히 이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게 된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 폐해라는 것을 예방하고, 그것을 교정하는 데 반드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이 또한 회의소가 취인소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까닭으로 역시 귀하의 세찰(細察)을 청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셋째, 미두취인소가 당항에 설립된 이래, 당항 산미(産米)의 질이 현저하게 개량된 사실은 이 또한 특필할 만한 사실이다. 무릇 미질(米質)의 개량은 종래부터 점차 행해져야 했음에도 미두취인소의 창설 이후에야 비로소 현저한 개량32)이 이루어 졌고, 소위 기미(氣米) 등의 조악미가 거의 시장에 나타나지 않게 됨은 이 또한 완전히 미두취인소에서 표준미를 마련하여 엄하게 조악미의 대용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인이 조악미를 인천에 수송하는 것이 불리하고 부득책(不得策)이라 는 사실을 느끼게 했고, 그 결과 미질에 현저한 개량이 이루 어지게 된 것으로 이 또한 미두취인소가 무역시장에 끼친 현 저한 이익인 것이다. 이로써 생각건대 미두취인소가 존재하여 종래의 방침대로 진행하게 되면 미질의 개량은 머지않아 우리 희망대로 이루어지고, 무역상 지대한 이익을 낳게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귀하의 세찰 32) 원문에는 수량(收良) 이라고 되어 있으나 문맥상 개량 의 오기인 듯 하다.

5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37 을 청하는 세 번째이다. 넷째, 가만히 살피건대 취인소의 존재는 재류 본방인의 근검심 ( 勤 儉 心 )을 빼앗고 무모한 투기심을 장려하여 일한무역 전체에 불리유해( 不 利 有 害 )의 영향을 낳게 될 우려가 있다는 설이 없 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취인소의 취인은 원래 투기적 성질 을 갖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의 자력( 資 力 )을 넘어 무모한 투기 적 매매를 행하는 자 왕왕 없지 않지만, 이는 아마도 이런 취 인소의 이( 利 )에 수반되는 폐해로 단지 그 폐해만을 착목하여 취인소의 이해( 利 害 )를 논하면 그 결론은 일언지하에 부정하게 될 것이지만, 이해( 利 害 )가 서로 수반되는 것이 사물의 상태 ( 常 態 )이기 때문에 천하에 절대적인 이( 利 ) 없으면 절대적인 해( 害 ) 또한 없다. 취인소의 이해를 논하는 자는 부디 그 폐라 고 생각되는 바를 세찰심고( 細 察 深 考 )하는 동시에 그 이( 利 )가 있는 바를 숙시심구( 熟 視 審 究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본 회의소가 조사는 바에 따르면, 취인소의 존재에는 전술한 바와 같은 이익이 있고, 그 폐해에 대해서는 스스로 방어의 길이 없지 않다. 즉 취인소의 취인법에 충분한 개량을 가하여 당사 자로 하여금 엄밀하게 무모한 투기적 매매를 방지하게 하는 방침을 찾게 하면 결코 그 폐를 극복하지 못할 리 없다. 그렇 지만, 지금 가령 한 발 양보하여, 상술한 바와 같은 폐해를 쉽 게 방어할 수 없다고 하면, 이때 가장 귀하의 숙려( 熟 廬 )를 청 하고자 하는 것은 공적인 취인소의 취인을 금지하는 것이 과 연 일반의 투기를 절멸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 좀 더 적실( 適 實 )하게 말하면 공적인 취인소 영업을 금지한 결

58 3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과는 공교롭게도 음밀(陰密)한 사이에 일종의 도박을 행하게 하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본 회의 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히려 우려할 만한 경향이 없지 않 은 듯하다. 즉 전보(電報) 편(便)이 있어 앉아서 멀리 오오사 카의 미곡취인소로 승패를 시도하기 위해 순고(純固)한 공미 (空米)33) 매매에 탐닉하게 되는 폐해를 낳게 되고, 이 또한 음 밀(陰密)하게 이루어져 그 폐해는 쉽게 방어할 수 없다.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천미두취인소가 해산하게 되면 1895년 이후 근절되어 없어졌던 통화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투기적 매매도 행해지게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인천미두취인 소의 해산은 일반의 투기심을 부채질하는 음밀(陰密)한 취인으 로 향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다. 그리고 공설(公設)의 장소에서 행하는 바는 이러한 취체를 엄히 할 수 있고, 따라서 그 폐해도 적게 하여 방어할 수 있 지만, 음밀한 장소에서 행해지게 되면 이 취체 방법 때문에 고생할 것이고 아울러 그 폐해를 적게 하여 방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일반의 투기심을 오히려 취체가 편 리한 공설의 장소로 집중시키는 것이 폐해를 적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말할 것도 없이 취인소에는 그밖에도 충분한 이익이 있고, 또한 이 투기라는 말은 착실한 실업가가 꺼려하 는 바이지만, 구극(究極)하면 이 일종의 어폐(語弊)에 기반한 혐기(嫌忌)로 원래 상업이라는 것 자체로 투기적이 아닐 수 없 33) 공미(空米)란 공매매(空取引)의 대상이 되는 쌀, 또는 현물 없이 하는 미곡 거래를 지칭한다. 공매매(空取引)란, 주식의 신용거래나 상품의 청산거래로, 현물의 수도(受渡)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가격 변동에 의한 차익금을 취하기 위해 매매하는 것을 뜻한다.

5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39 다. 따라서 취인소는 이 투기심을 이익이 있는 길로 응용하게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이용하게 되면 상업의 발달 에 기여하는 바 매우 막대할 것이다. 仁 取 盛 衰 記 (10) 일한무역에 위대한 공적 鳥 栖 忠 安 (건의서 계속) 다음으로 또 귀하의 숙려( 熟 慮 )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다. 본방인이 설립한 취 인소를 금지하더라도 당항( 當 港 )에 반드시 취인소가 설립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미 서술했듯이, 인천미두취인소 창립 당시에는 한국 상인이 취인소의 취인을 양지하지 못하거 나, 동소( 同 所 )에 대해 취인을 시도한 자도 없었지만, 그 이후 취인소의 이편( 利 便 )에 대해 한국 상인이 모두 아는 바 되었 고, 결국에는 그 취인고의 10중 7푼( 分 )은 한국 상인에 의한 것이다. 일단 그 이편을 모두 알게 된 그들이 이것을 망각할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인천미두취인소가 해산되자 벌써 그들 손으로 취인소를 신설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릴 지경 이다. 만약 과연 한국 상인의 손에 의해서 취인소가 설립되게 되면 확실히 다음과 같은 불리불편( 不 利 不 便 )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60 4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첫째, 1년 거만( 巨 萬 )의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사업을 허무하게 한국 상인의 손에 맡기고 떠나는 것은 우리의 이원( 利 源 )을 빼 앗아 그들에게 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 둘째, 취인소가 한국 상인의 손에 의해 설립되게 되면 그 사 이 어떠한 폐해를 낳게 되더라도 우리 당국자가 직접 그에 대 한 취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만반의 취체를 하는 데 있어 종래보다 비상( 非 常 )한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오늘날 무엇보다 숙려해야 하는 요점으로, 과연 본 회의소가 판단하듯이, 인천미두취인소가 해산되더라도 다른 취인소가 설립되지 않는다고 반드시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면, 적당한 범위 내에서 취인소의 공설( 公 設 )을 본방인에게 허 가하고, 그것으로 본방인에게 이익을 얻게 하고, 또 취체상의 편의를 얻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귀하의 세찰을 구하 는 네 번째 이유이다. 이상 진술( 陳 述 )한 바를 개괄하면, 당항 상업상의 기관으로서 취인소가 필요하다는 사실, 인천미두취인소를 해산하더라도 그 것으로 취인소의 설립이 없을 것인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이익이 되는 사업을 본방인에게 허가하여 적당한 취체 내에서 그 이익을 진척( 進 陟 )시키는 것 이 유리한 점은 있어도 어려움은 겪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본 회의소가 취인소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까닭 이다. 또한 인천미두취인소 주주의 경우에는 해외 천리의 이 역에서 신산( 辛 酸 )을 맛보며 그렇게 얻은 재산을 많게는 수천 원, 적게는 수백 원을 투입했지만, 갑자기 소유권의 일부를 상

6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41 실하고, 그와 함께 생업을 잃은 중매인 등의 고경( 苦 境 ) 같은 것 또한 절실히 귀하의 통찰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바라건대 귀하가 상술( 上 述 )한 바에 따라 숙려하여 취인소 존 재의 방침으로 이번의 선후책을 끝까지 완수하실 것을 여기 본회의소의 결의를 따라 삼가 건의 드립니다. 재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 회두 니시와키 쵸타로( 西 脇 長 太 郞 ) 영사관사무대리 영사관보 시데하라 기주로( 幣 原 喜 重 郞 ) 전( 殿 ) 이상 건의서의 내용에 포함된 취인소론은 실로 당당한 것으로 (설립: 역자) 당시에 이미 이렇게 투철한 이론을 인취 관계자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그와 동시에 인취의 탄생이 어떻게 일한무역이나, 조선인 상인 내지는 당시의 산업개 발상에 중대한 역할을 했는지, 또한 인취의 해산명령이 당시의 인천 재계에 얼마나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는가를 알 수 있을 것 이다. 이 입론( 立 論 )이 당당한 건의서에 대해 당시 신참인 시데 하라( 幣 原 )는 물론이고 공사관 사람들이 일언반구 변박( 辯 駁, 논 박)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상업회의소나, 곡물무역상조합이 기를 쓰고 벌인 운동이 전혀 주 효하지 않았고, 영사관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 서 인천 측에서는 이런 벽창호 같은 공사( 公 使 )나 영사를 상대하 고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속만 끓이다가, 결국 외무성과 직접 무릎을 맞대고 담판을 짓기로 했

62 4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다. 즉 1899년 2월 당시의 정부는 제2차 야마가타내각(山縣內閣) 으로, 외무대신은 아오키 슈조(靑木周蔵), 차관은 츠즈키 게이로 쿠(都筑馨六), 통상국장(通商局長)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였다. 인 천거류민의 여망(輿望)을 싣고 먼 길 마다않고 현해의 파도를 넘 어 도쿄로 향한 것은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였다. 그는 착경 (着京)하자 우선 동향(同鄕)인 후쿠오카현(福岡県) 선출 대의사 (代議士)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34)에게 사정을 밝히고 중재를 부탁했다. 호탕한 노다(野田)는 두 말 않고 요카타이 35) 가쿠 (加來)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가쿠(加來)를 외무성은 물론이고 당 시 조야의 유력자를 만나게 해, 인천 사정을 설명하는 동시에 양 해(諒解)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쿠(加來)가 도쿄로 가서 최초로 의지한 것은 스에마츠 겐쵸 (末松謙澄)36)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와 스스무 다츠마(進辰 34) 노다 우타로(野田 卯太郞, )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실업가 로 호는 大塊이다. 1898년 3월에 시행된 제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 서 처음 당선된 이래 중의원의원, 체신대신, 상공대신을 지냈다. 후쿠 오카현 평민으로 시작해서 대신에 까지 오른 근대의 상징적인 인물이 었다. ja.wikipedia.org/wiki/野田卯太郞 (2014년 12월 31일 검색). 35) 요카타이(よかたい)는 주로 규슈(九州) 북부, 즉 나가사키(長崎) 일부, 사가(佐賀) 북부, 그리고 후쿠오카(福岡) 일부에서 사용되는 방언이다. 그 뜻은 それでいいでしょう 나 それでもいいですよ 와 같이 한정된 의미가 아니라 어떤 현상을 부드럽게 긍정하는 규슈 북부의 독특한 방언이다. 우리말로는 그럽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Yahoo!知 恵袋 (2014년 12월 31일 검색). 36) 스에마츠 겐쵸(末松謙澄, )는 메이지기와 다이쇼기에 걸치 는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 및 역사가였다. 도쿄사범대학(東京師範学校 는 東京敎育大學과 筑波大學의 전신)을 중퇴하고, 도쿄일일신문사(東 京日日新聞社)의 기자가 되어 사설을 집필했다. 장인인 이토 히로부미

6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43 馬)37)가 스에마츠(末松)의 집에서 서생을 했던 관계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에마츠(末松)가 지원해 준 것은 물론이지만, 주로 몸과 마음으로 분주하게 뛰어 준 것은 노다(野田)였다. 가쿠(加來)가 당시의 묘당(廟堂=정부)을 움직이기 위해 중점적으로 강조한 것 은 취인소의 이론보다도 오히려 해외발전이라는 점이었다. 이 도 쿄에서 전개한 운동으로 야마가타내각(山縣內閣)을 위시하여 중 앙정계의 유력자 간에 있어서 공기(분위기)는 대체로 인취의 재 흥을 허가하는 것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래서 가쿠(加來)는 중앙 정부의 내의(內意)를 확인한 뒤 일단 인천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내각의 의향이 재흥(부흥)으로 결정되기까지 가장 수고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노 우에 가오루(井上馨)이었다. 즉 그는 인천거류민의 충정(衷情)을 듣고 인취를 없애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공사관이 일본인의 해외 발전을 방해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라며 안색까지 바꾸면서 내뱉은 그의 권위 있는 말 한 마디에 아오키 슈조(靑木周蔵) 이하 외무성 사람들은 두 손을 들고 (인취를: 역 (伊藤博文)의 후원을 받아 외교관으로서 런던에 부임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 자작을 수작했으며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회원 이었다. ja.wikipedia.org/wiki/末松謙澄 (2014년 12월 31일 검색). 37) 스스무 다츠마(進辰馬, 1861~?)는 1868년 후쿠오카현 고쿠라시 출신 으로 1889년 도쿄에 와서 스에마츠 박사 및 이토 히로부미의 서생을 지냈다. 1892년 스에마츠 박사의 저서 등을 판매하는 출판업을 시작 했으나 실패하고 1894년 12월 三枝商店 점원으로 인천에 건너왔다. 1896년 경성으로 이전하여 龜屋商店을 양도받아 독립경영을 시작했 다. 1904년에 龜屋商店 安東縣支店을 설치하고, 1906년에는 龜屋商 店 平壤支店을 설치했다. 西洋雜貨 및 食e品商이었다. 이후 여러 차 례에 걸쳐 居留民會 議員 및 商業會議所 議員으로 선출되었다 년까지 조선취인소 감사, 조선상업은행 감사, 조선화재보험회사 취체 역, 경성수산회사 취체역 등을 지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 대인물자료 <進辰馬>.

64 4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자) 부활(復活)시키기로 내정(內定)하기에 이른 것이다. 정부의 내의(內意)를 듣고 부활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망이 충분했기 때 문에 가쿠(加來)는 흔희작약(欣喜雀躍)하여 기선을 타고 돌아왔 지만, 아무리 지나도 정식으로 허가를 내 주지 않았고, 결국 시 데하라(幣原) 재임 시절에는 실현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인취에서는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즉,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협조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힌다: 역자) 공사관 측의 반감 을 피하기 위해 먼저 순서로서 형식이기는 해도 회사를 해산하 는 모양을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가쿠(加來)가 귀인(歸仁) 하여 정부의 내의가 명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산위원을 선임 했다. (인취에서는: 역자) 시데하라(幣原)가 일언반구 말이 없는 것에 대해 안절부절 가만있지 못하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 무런 연락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 줄 것인가 라는 내용의 재촉하는 편지를 비밀리에 스에마츠(末松)와 노다(野田)에게 보 냈다. 그런데 이 편지에 대해 머지않아 영사의 경질이 있을 테 니 허둥대지 말고 기다려라 는 내용의 답장이 보내져 왔다. 그 래서 인천 측은 소리를 죽이고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 중에 시데하라(幣原)는 전출되어 가고 후임으로 이주잉 히코키치 (伊集院彦吉)38)가 영사로 부임해 왔다. 38) 이쥬잉 히코키치(伊集院彦吉, )는 메이지기와 다이쇼기의 외교관이다. 사츠마(鹿兒島縣) 출신으로 1890년에 제국대학을 졸업했 다. 이쥬잉의 아내는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장녀이다 년 9월에 부산영사가 되었다가 1899년 5월 11일에는 다시 인천영사가 되어 1901년 2월까지 근무했다. 이후 天津 총영사 등을 거쳐 1908년 에 중국(淸國) 공사가 되었다. 1916년에 이탈리아공사가 되었고, 1919

6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45 仁取盛衰記 보기 드문 미국인의 사자 출동 일본의 총 팔자 연합 鳥栖忠安 이주잉 히코키치(伊集院彦吉)가 영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음울한 공기(분위기)였던 인천거류민에게 빛이 찾아오고 정식으로 재개인가(再開認可)의 통고가 이루어졌다. 인취는 다시 환희에 난무(亂舞)하면서 1899년 6월 19일부터 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재개의 공로자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는 당시의 인천 거류민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후광이 비쳐 보였던 것 같은데, 마치 이승에 현신한 신이나 구세주와 같은 인기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뚜껑을 연 인취의 역원은 이사장에 살아있는 신 가쿠 에이타로(加 來榮太郞), 이사 고오리 긴자부로(郡金三郞), 히구치 헤이고(樋口 平吾), 감사역 다나카 사시치로(田中佐七郞), 나가토미 이치노스케 (長富一之祐)39), 오카 고오지로(岡幸次郞), 시바타 마고베(柴田孫兵 衛), 심사역 도이 후쿠사부로(土肥福三郞), 오쿠다 사다지로(奥田 貞次郞), 다나카 사시치로(田中佐七郞) 등의 멤버였다. 년 파리강화회의에 전권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22년에는 관동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23년 제2차 야마모토내각(山本內閣)에서 외상을 지냈 다. ja.wikipedia.org/wiki/伊集院彦吉 (2014년 12월 31일 검색) ; 한국 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39) 원문에는 永 一之祐으로 되어 있으나 長 一之祐의 오기이다.

66 4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1899년 하반기 인천에는 인취의 부활을 위시하여 경기(景氣)에 도움될 만한 일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즉 9월에 들어서자 조선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가 완성되어 마침내 기적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경인철도는 미국인 모리스가 한국 정부로부터 권리를 취득한 것인데, 이를 인수하여 1899년 허가를 받은 경부철도주식 회사와 합병한 결과40), 일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사장은 당시 우리나라 재계의 대표로 반도의 국권신장에 활약한 시부사 와 에이이치(澁澤榮一)였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에서: 역자) 대륙 지나(支那)의 세력 을 구축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마수가 반도로 뻗어 왔다. 삼국간 섭, 북청사변(北淸事變)과 같은 세상이 어수선한 중에 한반도의 풍운은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 대원군의 실각, 민비의 독재정 치로부터 이윽고는 민비의 암살로 극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 되었고, 반도 조선은 국제(관계) 상 동양의 발칸으로서 운명에 농락당해 갔다. 이렇게 해서 일러 관계는 흙투성이가 된 채 피 를 악물고 와신상담하는 일본 국민의 분원(憤怨)과, 매우 노골적 인 제정 러시아의 극동에 대한 야심이 사사건건 불꽃을 튀기면 서 대립하여 일러 관계는 시시각각 긴장을 더해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취는 어떻게 되었을까? 1903년의 일인데, 인취시장에 40) 시부사와를 중심으로 조직된 경인철도인수조합은 교섭을 거듭하여 1897 년 5월 8일에 모오스와 경인철도부설권 매수와 관련된 양도계약을 체결 하였고, 1898년 1월에 모오스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정식으로 인수 했다. 1899년 5월 15일에는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1901 년 6월 25일 설립된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재산과 사업 전부를 넘기고 1903년 11월 1일 인수합병되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6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47 처음으로 외국인이 출동하는 신기한 사건이 일어났다. 즉 당시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 데시우라라는 남자가 6, 7월한(限)을 중심으로 매점(買占)에 나섰다. 이에 대해 일본 상인 측이 모두 나서 팔자 가 되어 6월한 4,100석, 7월한 9,800 석과 인취 재개 후 최초의 대수도(大受渡)가 이루어졌다. 이때의 수도(受渡) 가격은 이상의 양기(兩期)가 11원 90전이었는데, 어찌 되었건 데시우라가 마구 사들였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일본 상 인 측도 형세(전황)가 아주 불리해서, 진영(陣營)이 까딱하면 두 손을 들고 항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9월에 들어서서는 완전히 데 시우라 쪽이 난처해져 버려서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따라서 6월말에는 선물(先物) 즉 8월한이 13원 30전의 높은 가격을 보 였던 것이 9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선물(先物, 11월한)이 6원 80 전으로 떨어져 버려, 일본 상인 측에 개가(凱歌)를 드높이 올리 는 상황이 되었다. 이 데시우라라는 남자는 일본 부인을 아내로 삼고 있던 관계상, 그 저택에는 당당한 일본식 방(日本座敷)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의 요정 우로코 는 이 데시우라의 저택이 있던 자리로 이 다다미방(座敷)은 당시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 일전(一戰)에 패한 데시우라는 그 후 얼마간 인천에 살았지만 머지않아 상해(上海)로 돌아가 버렸다. 일가(一家)를 완전히 정리해 떠난 뒤에도 종종 채권 추심 등 다른 용건으로 인천을 방문한 그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영고(榮枯)는 변 하기 마련,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거품 같

68 4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은 것이라, 그런 허무함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는 또 다시 조금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6월 부활한 인취는 그 후 열심히 재흥의 길을 걸어 1900년 8월에는 인취에 부속창고를 건설했다. 당시의 인천은 창고 설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쌀은 거의 야적(野積)했다. 그런데 이 때 창고를 인취 스스로 설비한 것은 쌀의 취인 개선이 부활 이 유의 하나로 강조되고 있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쪽에서 당연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인 취의 그 후는 세상의 경기(景氣)의 풍랑과 미작(米作)의 풍흉에 의해 다소간의 부침은 이었지만 그럭저럭 큰 일 없이 발전해 갔 다. 앞에서 본 데시우라의 사자 출동(買出動)으로 시장을 둘러 싼 공기(분위기)가 갑자기 긴장한 1903년과 같은 경우 거래총량 (出来高)이 758만 6천여 석에 달하는 성황이었다. 이사자(理事 者)가 매우 놀랐을 정도로 기쁘게 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6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49 仁取盛衰記 일러전쟁으로 인취 폐쇄 전후에는 크게 쇠퇴 鳥栖忠安 찔끔찔끔 극명한 회고를 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 무대를 크게 바꾸고 건너 뛰어 일러전쟁으로 옮긴다. 미국인 데시우라의 사자 출동으로 인취가 소란스러울 때 반 도의 풍운은 시시각각 험악해지고 있었다. 동양에 양항(良港)을 구하고자 하는 로마노프 왕조의 야망은 먼저 마산포조차사건(馬 山浦租借事件)으로 마수를 드러냈다.41) 이 문제는 다행히도 러시 아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일 러의 관계는 결국 1904년 2월에 이르러 폭발하고 말았다. 때는 매화가 피는 음력 2월 초 메이지대제(明治大帝)는 선전포 고의 조칙을 내려 황군 분기(皇軍奮起)의 이유를 명확히 밝히시 41)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구하여 1900년에 경상남도 마산포(馬山浦) 를 점거하려고 한 사건이다. 러시아는 여순(旅順)대련항(大連港)과 블 라디보스톡을 연결하고, 츠시마해협(對馬海峽)의 안전운항을 도모하기 위해 해군기지 설영지(設營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 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약을 맺고, 러시아에 마산항 조계 밖 10리 내 적당한 곳에 조차(租借)를 허용하였다.

70 5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고 동원하셨다. 50만의 국군은 동양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칼을 들고 일어난 것이지만, 그 일러전쟁의 서막이 시작된 무대는 인 천이었다. 1904년 2월 8일, 당시 인천에 입항해 있던 러시아 동 양함대 와리야크와 크레크 2함(艦)과 맞서 우류함대(爪生艦隊)의 원호 아래 기고시사단(木越師團)이 적 앞에서 상륙하였고,42) 다 음날 9일에는 인천항 밖 수리(數里) 떨어진 해상에서 2척의 러시 아함을 보기 좋게 제물로 격몰(擊沒)시켜 우리 해군은 출발부터 우위를 점하고 용약(勇躍)했다. 해전이 있던 날 인천은, 지금이야 당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불안과 긴장은 실로 형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일본이 패하게 되면 거류민 은 전부 죽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면서 전쟁 42) 기고시 야스츠나(木越安綱, )가 이끌었던 부대를 지칭한다. 기고시는 육군사관학교(구1기)를 졸업하고 임관하면서 세이난전쟁(西 南戰爭)에 출정했다. 1883년 독일에 유학하였고, 귀국 후에는 프랑스 식이었던 일본 육군을 독일식으로 바꾸었다. 청일전쟁에서는 제3사단 참모로서 제3사단장 가츠라 타로(桂太郞) 하에서 활약하였고, 조선을 지나 압록강을 도하하여 청국 영내로 진격했다. 이때 직속상관인 가츠 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것이 계기가 되어 쵸슈파벌(長州閥)의 총아로서 출세를 거듭했다. 1894년 말에 대좌(大佐)로 승진하였고, 1897년 군무국 군사과장을 거쳐 1898년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잠시 대만에서 근무한 뒤 1900년에 군무국장으로 일본에 돌아와 1901년에 보병 제23여단장에 취임하였다. 러일전쟁에서는 한국임시 파견대 사령관으로 제일 먼저 출정했다. 보병 제23여단을 이끌고 사 세보(佐世保)를 출항하여 인천항에 상륙하여 철도로 경성으로 가 한국 주차대(韓國駐箚隊)를 지휘 하에 두었다. 조선을 확보한 뒤,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 대장이 이끄는 제1군의 첨병으로 압록강도하작전 에 참가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공격함으로써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ja.wikipedia.org/wiki/木越安綱 (2014년 12월 31일 검색)

7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51 의 경과를 응시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백뢰(百雷)가 일시에 떨어지는 듯한 포성, 자욱한 초연(硝煙)이 인천 해상 수 리(里)에 걸쳐 자욱했다. 천지도 부서질 듯한 포전(砲戰)이 전개되다가 몇 시간 동안 포성이 멈췄다. 초연이 걷혀 가는 사이에 처참하게 부서져 파도 사이로 침몰해 가는 러시아함의 모습과, 구해달라는 적병의 그림자가 보였다. 위풍당당 개가를 올리며 인천으로 입항 하는 우리 함대, 일본은 이겼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인천의 거류민은 마치 범인(犯人)43)과 같이 되어 기뻐했다.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던 그 들은 단지 거리에서 거리로 뛰어 다녔다. 노인들도 젊은이들도 남자도 여자도 아우성치며 돌 아다녔다. 있는 힘을 다해서 큰 소리로 떠들었던 말은 일본 이 겼다. 일본 이겼다. 러시아 졌다. 라는 한 마디였다. 지금도 남 아 있는 매년 2월 8일 밤 인천신사의 신 앞에서 행해지는 모닥 불은 이 기고시사단(木越師團)의 적전상륙(敵前上陸) 당시를 기 리는 행사에 다름 아니다. 이 생명이 단축될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인취는 어떻게 되었을 까? 일러 사이의 전운(戰運)이 팽배한 가운데 3기(三期)의 다테 마이(建米)44)는 총해합(總解合)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느 43) 여기서 범인(犯人)이란 속어로 못된 장난을 치는 사람 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44) 다테마이(建米)는 요고시마이(夜越米)라고도 하여 에도시대의 장부상 적혀 있는 쌀의 거래(帳合米)로, 거래 당일에는 전매(轉賣)나 다시 사 들이기를 하지 않는 쌀을 가리킨다. 에도시대 오오사카의 도지마(堂 島) 쌀시장에서, 실제로는 수도하지 않고 장부상에서 매매된 쌀이나 그 매매를 이야기한다. Weblio 辭書.

72 5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긋하게 시세( 相 場 ) 등을 말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9일의 해 전이 끝난 다음날 즉 1904년 2월 10일에 시장을 일시 폐쇄하기 에 이르렀다. 그 후 기고시 중장( 木 越 中 將 )이 이끄는 고쿠라 제 12사단( 小 倉 第 12 師 団 )이 상륙하여 인천의 민심은 점차 안정되었 고, 연전연승의 황군은 전선을 점차 북쪽으로 밀고 가서 압록강 을 건너 만주로 적국을 바짝 추격해 갔다. 따라서 그 해 초여름 즈음에는 이미 조선 내에서는 군수품 수송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있었으나 생명이 단축될 것 같은 위험은 깨끗하게 해소되었다. 그래서 동년 6월 1일이 되어 2월 10일 이래 폐쇄되어 있던 인취 시장은 다시 개시하게 되었다. 재개해서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18일, 인취는 당국의 인가를 받아 4만 5천원으로 증자했다. 즉 인취는 그때까지 발족 당시의 3만원으로 어떻게든 버텨왔으나, 일러전쟁 중에 1만 5천원의 증 자를 실시하여 주당 25원, 1,800주 전액을 불입한 회사가 되었다. 일러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다시 동양 천지에 찾아왔지만, 전 후 재계의 변화는 인취시장을 매우 한산하게 만들었다. 전전( 戰 前 )인 1903년경에는 성황( 盛 況 )이었지만, 그때와는 사정이 전혀 달라져 찾는 이 없이 거미줄을 치는 상황이었다. 전쟁은 위대한 소비이다. 위대한 비생산적 소비가 이루어진 뒤의 반동은 반도 ( 半 島 ) 도처에 그 영향을 미쳤다. 증자는 했지만 인취는 수지가 맞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빈사상태를 드러내고 말았다.

7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53 일러 사이에 강화가 성립하였고, 조선반도를 완전히 일본의 보 호 하에 둔다는 사실을 각국이 인정했기 때문에 1905년 12월 20 일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에 이르렀다. 즉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통감에 임명하고, 외교 군사를 우리 나라의 관리 하에 두고 통감정치를 시작했지만, 이와 동시에 종 래의 공사관 등은 전부 철폐되어 영사는 이사관(理事官)으로 개 칭되었다.45) 이 통감정치로 변경될 당시의 인천 영사는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46)였다. 그는 외무성 촉탁으로 와세다대학의 강 사였고, 엄청난 기세로 네델란드(和蘭) 대리공사까지 오른 뒤 외 교관을 그만두었지만, 현재 신아이치(新愛知)의 주사(主事)로서 문명(文名)을 날리고 있다. 이밖에도 법학박사로서 국제법의 권 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인천영사 시대에도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인천신보(仁川新報)에 명문(名文)을 실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 文)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일러전쟁 후 인천에는 나카무라 츄키치(中村忠吉)가 경영하는 조선신보(朝鮮新報) 외에 구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 등이 경영하는 조선타임즈라는 신문이 있었 45) 이사관(理事官)은 주로 외교영사사무에 직접 종사하는 외무직원을 국 제관행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다. 일등이등삼등 이사관 및 부이사관 의 구별이 있다. Weblio 辭書. 따라서 영사를 이사관으로 개칭했다는 의미는 한국을 외교상 직접 관할 하에 두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46) 시노부 쥰페이(信 淳平, )는 메이지기에서 쇼와시대에 걸쳐 활약한 국제법학자이다. 1897년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 영사관 보로서 경성에 부임하였다. 후에 통감부 하의 인천이사청 이사관과 총영 사 등을 거쳐 1917년 퇴관했다. 중화민국 정부 고문, 신아이치(新愛知) 주필 등을 거쳐 1951년 와세다대학 교수가 되었다. 시노부 죠켄(恕軒)의 장남이자, 간이치로(韓一郞)의 아버지이다. ja.wikipedia.org/wiki/信 淳 平 (2014년 12월 31일 검색)

74 5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는데, 그 후 양사를 합병하여 조선신보(朝鮮新報)가 되었다. 이 조선신보는 후에 마키야마 고조(牧山耕蔵)의 손에 매수되어 경성 으로 발행소를 옮겨 지금의 조선신문(朝鮮新聞)이 되었다. 동도 (東都, 도쿄) 정계의 중진이 된 오노 겐이치로(小野賢一郞) 씨 등 도 한 때 이 조선신보(朝鮮新報)에 있으면서 당시부터 두각을 나 타내고 있었다.47) 仁取盛衰記 통감정치와 영업기간 연장 창고 매각 대금으로 부지 매수 鳥栖忠安 통감정치 하에서 인천의 비약은 또한 눈부실 정도였다. 첫 번 째로 그 당시 풍류인(風流人)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맞이하 여 경성의 화류계가 발달했다고는 해도 아직 인천의 예기(藝妓) 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제일류의 연회가 되려면 인천으로 가져 갈 것인가 아니면 인천 예기(藝妓)를 일부러 경성까지 불러 올 것인가가 문제였다. 화류계에 국한하지 않고 일류 상인은 누 구나 인천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1906년 11월에는 구한국정 부의 사업으로 총 공사비 221만원으로 수도부설공사에 착수했다. 47) 朝鮮新聞 에 대해서는 장신, 한말일제초 재인천 일본인의 신문 발 행과 조선신문, 인천학연구 6,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7년, 쪽 참조.

7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55 준공하여 통수( 通 水 )한 것은 1910년 12월, 멀리 노량진 부근의 한강에 수원( 水 源 )을 두고, 여과한 물을 철관( 鐵 管 )으로 인천까지 끌어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담한 계획이 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가 당시의 군함에 대한 급수를 제일 중요한 목적으로, 다음으로 기선( 汽 船 )에 대한 급수를 중요시 했던 해륙( 海 陸 )의 교통 및 군사상의 원모심려( 遠 謀 深 慮 )로부터 만난( 萬 難 )을 헤치고 단행한 사업이었다. 만약 군 사 목적이 없었다면 인천부민의 수도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 리라고는 꿈에도 바라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1908년 10월 16일 다이쇼천황( 大 正 天 皇 )이 황태자 전하 로 계실 무렵 인천에 입항하셨다. 어함( 御 召 艦 )은 당시의 우수함 ( 優 秀 艦 ) 가토리( 香 取 ), 이어 가시마( 鹿 島 ), 반테( 盤 手 ), 죠반( 常 盤 ), 아사마( 淺 間 ), 츠시마( 対 馬 ) 등의 호위함( 供 奉 艦 )을 따라 당당하게 만두( 灣 頭 )에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용자( 勇 姿 )를 맞이한 인천 거류민은 완전히 감격했다. 다이쇼천황( 大 正 天 皇, 당시 東 宮 殿 下 )는 고( 故 ) 아리수가와노미야 다케히토( 有 栖 川 宮 威 仁 ) 친왕( 親 王 ) 전하의 보좌 하에 도고 헤이하치로( 東 郷 平 八 郞 ), 이와쿠라 도 모미( 岩 倉 具 視 ), 가츠라 다로( 桂 太 郞 ), 하나부사 요시모토( 花 房 義 質 ) 등의 수행원을 데리고 상륙하셨는데, 이때 경성을 잠시 들르셨다. 당시 한국 황제 이하 여러분과의 교제로 일한 관계에 일단의 효과 를 가져 온 것은 물론이다. 왜성대( 倭 城 台 )의 통감관저에는 장두 ( 檣 頭 ) 높이 금색 찬란한 국화 문장도 선명하게 황태자기가 가을하 늘 높이 휘날리어 국위는 계림( 鷄 林 =조선)의 들에 널리 빛났다.

76 5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이 사이 인취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1908년 1월 총회에서 주 주의 한 사람이었던 이노우에 와사부로(井上和三郞) 제의(提議) 로 시장에서 종래 호가(呼値)를 변경하여 외장료(外裝料)를 포함 시키기로 했다. 종래는 소위 裸値段(=裸相場)48)이었기 때문에 수 도거래가격(受渡取引値段) 외에 별도로 석당(石當) 가마니 작업 삯(縄叺荷造賃)을 요했다. 이 가마니 작업 삯은 당시 시세로 다 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40전 내외였다. 이러한 불편은 1908년 1월 총회 이래 제거되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전후 불황은 매매 거래총액(出来高)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 당시 인취의 한산 한 모습은 1908년 상반기의 수수료가 겨우 9백 원 남짓에 불과 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사는 창고료 수입이 괜 찮았기 때문에 겨우 수지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뿐, 시장은 잡초 가 자랄 정도의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시장을 열어 놓고 있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것은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1908년 7월부터 과감하게 휴업했다. 1909년 1월에 시 험 삼아 개업해 보았지만 여전히 상황이 호전되지 않아 10일도 되지 않아 다시 휴업해 버렸다. 인취가 부진했기 때문에 휴업하고 있던 기간에 영업기간이 만 료되어 버렸다. 그래서 1909년 5월 당시의 이사관 시노부 쥰페 48) 하다카소바(裸相場)란 보통 배당증자경과 이자 등의 권리를 포함하지 않은 주식공사채의 시세를 의미하는데, 하다카네당(裸値段)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외장료가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쌀값만을 의미한다.

7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57 이(信夫淳平)에게 역원들이 눈물로 호소하여 다시 10개년간 영업 기간을 연장해 준다는 양해를 얻었다. 시노부(信夫)는 사정을 심 사숙고한 끝에 깨끗하게 이를 인가했다. 이 영업기간 연장에 대 한 인가가 있기 얼마 전의 일이다. 종래 이사장이라 했던 것을 취체역사장이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사관(理事官)으 로부터 통지(お達示)가 와서 취인소 조령(条令)이 시행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감독하기도 어려운 이때 내지(內地) 취인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그대로 모방하면 곤란하다, 상법 중 보통 상사회사의 규정에 따라 정관 및 세칙 내용을 조금 변경시켜 줄 수 있는가 하는 내의(內意)가 전달되었다. 인취 측으로서도 곧 만료하게 될 영업기한을 연장해야 하는 문제도 앞두고 있어 이 사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불리했다. 따라서 명분을 버 리고 실리를 취하면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관 및 세칙의: 역자) 내용을 개혁하는 동시에 이사장이라는 명칭을 폐 하고 취체역사장 및 취체역으로 개칭하기로 했다.49) 또한 특필할 만한 사항으로서는 1900년 8월 건설한 창고를 팔아 치운 일이다. 건설했을 때는 1만 5천원 이내로 가능했지만, 이를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漢城共同倉庫株式會社)에 매각했을 때는 3만 49) 1903년 3월 현재의 인천미두취인소의 정관 및 세칙 제17조에는 취인 소의 역원을 이사장 1명, 이사 2명, 감사역(監査役) 2명, 심사역(審査 役) 5명으로 규정해 놓고 있었다. 또한 취인소의 소원(所員), 즉 직원 으로는 지배인 1명, 서기 약간 명, 감정계(勘定係) 약간 명, 시장계(市 場係) 약간 명, 현미조사계(現米調査係) 약간 명을 두었다. 한국사데이 터베이스 韓國近代史資e集成 6(6) 韓日經濟關係 1, 七. 米豆取引所 設立認可ノ義在釜山1事ヨリ申請之件 明治三十七年十月, (6) 仁川 米 豆取引所의 定款 및 細則.

78 5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6천원이었다. 인취에서는 이 창고를 팔아 챙긴 3만 6천원으로 현 재 취인소 소재지 부지인 가이간쵸(海岸町) 900평을 샀다. 1평에 35원 꼴로 32,500원을 투자했다. 그 후 1911년 4월에 900평 중 184평 1合 42를 오오사카(大阪)의 우콘 곤자에몽(右近権左衛門)50) 에게 팔았다. 그 대가는 1평에 43원 꼴로 총액 7,918원이었다. 仁取盛衰記 영업 재개 후에도 여전히 한산, 20만석의 총거래량51) 鳥栖忠安 1910년 3월 1일 총회에서 재계가 점차 회복의 징후가 있으니, 이쯤에서 시장을 다시 열면 어떨까 하는 논의가 일었다. 이사자 (理事者) 측도 자신은 없었지만 주주의 희망도 있고 해서 열었더 니 의외로 성적이 좋았다. 특히 1910년부터 1911년 초에 걸쳐 1 개월 20만석 내외의 거래(商內)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취의 살 50) 우콘 곤자에몽(右近権左衛門 10代, )는 에치젠(越前, 현재 의 福井縣) 출신으로 메이지기와 다이쇼기의 실업가이다. 1884년 가 업인 회조업(回漕業)을 계승하였다. 청일전쟁 전후부터 발전한 해운업 에 해상보험의 필요성을 느끼고, 1896년 아사노 소이치로(淺野總一 郞) 등과 함께 일본해상보험(현재의 日本火災海上保險)을 설립하고, 1899년에 사장이 되었다.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2015 년 1월 1일 검색). 현재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北前船主の館 右近家 은 제11대 우콘 곤자에몽이 1935년에 완공한 양관이다. 51) 원문은 出来高(できだか)로 되어 있다. 데키다카에는 두 가지 뜻이 있 다. 하나는 수확량이나 생산량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거래소(취인 소)에서 매매가 성립된 주수(株数), 미곡거래소에서는 매매가 성립된 총거래량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Weblio 辭書.

7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59 림(世帶)은 곤란을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세상이 변해갔다.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서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로 바뀌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 얼빈역 앞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 등 사건이 연이어 계속 주마등 처럼 반복되었지만, 인취와는 별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생략한다. 이 렇게 해서 1910년 즉 인취가 3번째 뚜껑을 연 해의 8월 29일, 일한 병합이 이루어져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 케(寺內正毅)는 사람들도 다 아는 무단정치를 진수(眞髓)로 하는, 어 떤 의미에서는 래디컬리스트(급진주의자)이다. 그가 총독에 취임하자 1910년 12월 제령(制令) 제13호로 회사령을 발포하여 취인소 취체에 주도면밀함을 기했다.52) 여기서 종래 영사로부터 이사관(理事官)에 계승되고 있던 인취의 감독권은 총독부로 이관되었다. 이 회사령은 1911년 1월부터 시행되었는데, 그 목적으로 삼은 것은 불건전한 회사의 난설(亂設)을 방지하는 동시에 부정(不正) 한 포말회사(泡沫會社)를 철저하게 취체하여 이를 일소하는 데 있었다. 그 때문에 회사의 설립에 대해서는 모두 허가주의(許可 主義)를 채택했다. 이 데라우치(寺內)의 전제정치에는 일본인은 꽤나 바보취급하고 있다 고 하여 분개했지만, 우는 아이와 마름 에게는 못 당한다고 옛날부터 그랬다, 하물며 콧대가 높아 좀처 52) 회사령은 1910년 10월 29일 공포,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가 1920년 4월에 철폐되었다.

80 6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데라우치( 寺 內 )에게 걸리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어 불만 이 있더라도 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회사령은 그 후 사이토 마코토( 齋 藤 實 )가 총독이 되면서 1920년 4월 1일 보 험업, 무진업, 유가증권 매매 혹은 중개업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 및 회사조직의 취인소에만 적용하기로 하고 폐지되었다. 1910년의 개장과 동시에 수수료의 경감이 실시되었다. 종래 중매인( 仲 買 人 )이 취인소에 내는 수수료는 2전이었는데 이를 1전 ( 錢 ) 5리( 厘 )로 바꾸었고, 또한 중매인이 위탁자에게 받는 수수료 도 2전을 1전 5리( 厘 )로 개정했다. 즉 취인소와 중매인이 각각 자기 몫을 5리( 厘 )씩 양보하여 총액에서 1전이 경감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창업 당시 중매인이 취인소에 냈던 수수료가 1전 5 리였기 때문에, 이 점에서 보자면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이다. 또한 재개( 再 開 ) 당시의 신원보증금은 1,500원이었다. 그것도 꼭 현금으로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즉 역원이 인정하는 부동산에 얼마간의 현금이나 수형( 手 形 )을 더해 내거나, 혹은 완전히 수형 ( 手 形 )만으로 일시 대용( 代 用 )을 허락한 경우( 向 )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현금이나 이를 대신할 만한 유가증권이 아니면 안 된다 고 고지식한 소리만 하던 때에는 (인취는) 뻐꾹새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한산했다. 그 때문에 옥석혼효( 玉 石 混 淆 )라 아무거 나 다 괜찮다는 태도를 취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후에도 이 신원보증금은 1912년 상반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전부 현금납 입으로 바뀌었다.

8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61 재개 후에도 의외로 성적이 좋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시장은 다시 매우 한산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손님이 거의 모이지 않 았고, 이사장은 화롯불을 사타구니에 끼고 앉아, 중매인 몇 명이 모여 네가 사면 내가 팔지 라는 식으로 기합이 빠진 일도 비 일비재했다. 따라서 상대를 잡고 죽일 듯 한 기세로 모두가 다 투는 활발한 손짓 등은 그 무렵의 인취에서 약에 쓸려고 해도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중매인은 전혀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찬밥과 막치짚신(冷飯草履)에 가슴에 손을 품은 채 지금 미결감(未決監)에서 방면된 신세라고 했다. 기운이 없는 모습으 로 시장에 나타나서 오늘도 글렀군 이라며 큰 한숨을 쉬며 돌 아가는 것이 보통. 따라서 이런 상태로는 인취도 틀렸군 하고 인천부민은 숟가락을 던져버리고 그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말았 다. 그 무렵 빈 술병을 수거하러 다니는 술집 심부름꾼에게 인 취가 어딘인가 라고 물어도 글쎄요 인취는 이라며 고개를 갸 우뚱거리며 금방 생각해 내지 못하는 지경까지 영락하고 말았다. 그 후 몇 번이나 변천을 거쳐 세상의 경기가 전환되면서 인취에 황금비 내리는 시대가 찾아왔다. 역시 세상은 칠전팔기(七顚八 起)다.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82 6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일본 아낙네가 경매 손짓 임영환의 사자 출동 鳥栖忠安 1910년 3월 1일 선물(先物) 5월한(月限)부터 장이 섰지만, 그 때부터 계속해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 같이 뻐꾹새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사장인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 郞) 등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기장하는 높은 곳(高場)에서 내려와 누구라도 좋으니까 얼마간이라도 가격을 붙여서 팔던가 사던가 해 보시게, 내가 반드시 상대가 되어 줄 테니 라고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건네도 얼굴만 마주볼 뿐 누구 하나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런데 1911년 4월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사장을 그만두고 오쿠다 사다지로 (奥田貞次郞)가 그 후임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인취에 일대파란이 일었다. 그것은 조선인 임영환(林泳煥)의 매입강행(突 貫買)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임영환의 패배로 끝났을 뿐만 아니 라, 의혹사건까지 일으켰다. 이로 인해 엉뚱하게 날벼락을 맞은 중매인이 생겼다. 찾아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관 계했던 스나가 세이치로(須永勢一郞)군(현재 개성 재주)이 기억 을 더듬어 말해 준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8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63 임영환(林泳煥)의 매점은 인취가 일러전쟁 후의 반동시대에서 벗어나 겨우 재개한 1911년이었던 것 같다. 임영환(林泳煥)은 결 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림자처럼 뒤에 숨어서 지휘봉을 흔들 고, 주문량(注文玉)은 당시 임(林)의 참모 격이라 알려진 다카다 츠네사부로(高田常三郞)에 의해 중매인에게 전달되었다. 다카다 (高田)는 임(林)의 상담역으로 자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보살펴 준 자로 그 후 인취의 중매인이 되었지만, 그 무렵 해안통(海岸 通り)에서 무역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주문을 내는 것은 다카다 (高田)였기 때문에, 물론 본인인 임(林)은 중매점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던 것 같고, 따라서 주문이 나와 있는 중매점 주인은 커녕 당시 취인소 주위에 늘 붙어 있던 다른 사람들 중에도 누 가 임영환(林泳煥)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의 인취는 이제 겨우 자산을 그런대로 유지해 갈 수 있는 서광이 조금 비치는 그런 상황이었다. 최소 계약고(建玉)53)는 50 석으로, 증거금은 보증금 60전(丁敷)54)에 30원 정도, 수수료는 1 53) 교쿠(玉)는 포지션(position)이나 다테교쿠(建て玉 또는 建玉)이라고 한다. 玉を持つ, 玉をつくる, 玉がある(ない) 등과 같이 사용한다. 建て玉=信用取引の玉 라 하여 현물과 구별되기도 하지만, 신용거래 현물에 관계없이 미결제로 가격의 오름과 내림으로 손익이 증감하는 상태 를 총괄하여 교쿠(玉) 또는 다테교쿠(建て玉) 라고 한다. 만약 달러의 가격상승(엔의 가력 하락)을 노리고 달러의 현물을 보유하면 형태는 현금이지만, 중간에 달러 및 엔의 가격 변동으로 손익의 증감 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역시 교쿠(玉) 라 한다. 林知之, 實踐 相 場用語事典, 林投資硏究所의 인터넷판 e/yougo.php. 54) 이 번역 작업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 100丁, 300丁, 100丁高 와 같은 말에 붙는 丁이었다. 이에 대한 쉬운 이해를 위해 좀 길더라

84 6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석당 3전, 하루 정산(精算)이 끝난 것(日仕舞)55)에 대해서는 1전 5리(厘)였다. 시장의 매매는 중매인과 그 대리인은 물론 위탁자 즉 고객들도 자유롭게 시장에 출입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경매 손짓을 하며 매매에 참가했고, 매매가 성립했을 때 어느 점(店) 에 보내 달라고 시장(場台)의 담당자(掛員)에게 한 마디 해 두면 도 다음을 인용한다. 갑작스럽지만, 에도시대에 제니(錢) 100문(文= もん)을 있다고 가정하고, 1그릇에 16문인 소바를 몇 그릇 먹을 수 있을까, 그리고 손에 몇 문이 남을까 알 수 있나요? 보통 생각하면 100을 16으로 나누어 6그릇 먹고 4문이 남는다 는 결론에 이르게 되 겠지만, 실은 정확하게 소바 6그릇의 가격이 되어 손에는 1문도 남지 않습니다. 놀랄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에도시대의 제니계산(錢勘定)입 니다. 원래 에도시대에는 구로쿠센(九六錢) 이라 하여 제니 96매(枚) 의 구멍에 가늘고 길게 꼰 종이를 통과시켜 100문으로 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즉 제니 100문이라 해도 실제로는 1문짜리 제니가 96매 인 것입니다. 왜 이런 관례가 생겼는지 현재로는 확실하지 않지만, 96 이 2나 3, 4, 6, 8 등 많은 수로 나누어떨어지는 수이기 때문에, 계산 의 편리함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따라서 16문의 소바 가 6그릇으로 1문 제니 96매, 즉 100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경 우에 1문 제니 96매로 100문이라 하여 통용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정전(丁錢) 이라는 계산방법도 있었습니다. 정전(丁錢)이라 는 것은 제니 100매를 100문으로서 하여 통용시키는 계산방법으로 정백(丁百) 이라고도 합니다. 예컨대, 돈을 빌리고 작성한 차용증 문 서(金子借用證文) 등 금전대차에 관계된 고문서 등에서 錢 貫 文, 但し丁錢 이라 기록한 것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경우 전화(錢貨) 는 100매로 100문을 세는 계산방법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약 정전(丁錢)이라 기록하고 있지 않다면 97전(錢)으로 계산하게 됩 니다. (이하 생략) 北區の部屋だより 第38號, 2012년 9월, <江戸 時代の錢勘定-九六錢の話->, (2015년 1월 6 일 검색). 따라서 이러한 관습이 인취 등의 취인소에 그대로 남아 있 어 전(錢) 단위까지 표시하기 귀찮을 경우, 예컨대 96전이어도 그냥 100전으로 계산해 100丁이라고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丁을 錢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55) 시마이(仕舞い)는 취인소에서 팔자 약정을 한 후, 그 팔자 약정을 다 시 사들이거나 사자 약정을 한 뒤 그 사자 약정을 전매하여 차금(差 金)을 수수하여 결제를 행함으로써 거래를 종료하는 것을 말한다. 데 지마이(手仕舞) 또는 데즈메(手詰め)라고도 한다. JCFIA/yougo03.

8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65 그대로 해 주었다. 상당히 주먹구구식이었다. 이리야마중매점(イ リヤマ仲買店) 구라시게 데이스케(倉重悌輔)의 아내 같은 사람은 여자답지 않게 장(場)에 나와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를 흐트러 트리며 상거래(商內)를 한 사람으로 당시 만록총중 홍일점(万緑 叢中紅一点)으로 상당히 이채로움을 발휘했다. 장(場)의 상거래 (商內)는 매매쌍방이 손을 마주 잡기 때문에 남자끼리라면 모를 까, 여자의 손을 잡게 되면 이상하게 에로틱한 기분이 될 것이 다, 따라서 여자가 장에 나오는 것(出場)은 풍의상(風儀上) 바람 직하지 않으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촌스러운 이야기가, 이 (부인의) 손에 걸려서 패북(敗北)한 사람들로부터 나온 적도 있 었다. 하지만 이 부인이 상당히 기민하게 움직였고 승부에 능하 기도 했기 때문에, 취인소 측으로서는 이리야마의 사정도 생각해 서 상략상(商略上) 오랫동안 묵인했고 따라서 부인의 활약이 계 속되고 있었다. 임영환(林泳煥)의 사자 출동(買出動)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때의 기관점(機關店)은 구라시게 데이스케(倉重悌輔), 나카무 라 가베에(中村嘉兵衛), 하시모토 야사부로(橋本彌三郞) 등 3개 중매점이었다. 구라시게(倉重)는 전술한 대로 상호는 이리야마, 현재 인천 데라쵸(寺町)에 거주하고 있다. 나카무라(中村)는 마루 나(丸ナ= )라는 상호로 인천 신마치(新町)에서 잡화도매(問屋)을 경영하는데 현존하고 있다. 하시모토(橋本)는, 상호는 가네야(カネ ヤ)로 이 사람은 이미 사망했다. 어찌되었던 이 세 상점(店)에서 사자 주문(買注文)이 나왔다. 매매는 전술한 대로 본인이 장(場)

86 6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에 얼굴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중심인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지 일체 알 수 없고, 단지 이 세 상점에서 매일 상당한 위세(威 勢)로 매입을 계속해 매매 약정이 성립한 총량(總玉高)은 3만여 석에 달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 정도의 계약고 (建玉)는 아니지만 당시의 인취로서는 대담한 사자 출동(買振り) 이었다. 그 시대는 중매인도 적었고 상쇄관계를 일반 위탁자에게 알리는 것도 상략상(商略上)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취인소의 계약(建玉) 관계는 오늘날과 같이 공공연하게 발표하는 일이 없었 다. 따라서 이 계약(建玉)의 내용은 참모격인 다카다(高田)와 본 인인 임(林) 이외에 상세하게 아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인천 시장에는 오오사카(大阪) 시세(相場)의 시초가 (寄り付き)56)와 종가(止め)가, 지급전보(至急電報)57)를 통해 입보 (入報)되고 있었다. 만약 20전의 등락이 있으면 지급전보로 특전 을 보내주도록 오오사카(大阪) 전보사(電報社)와 특약이 맺어져 있었다. 이를 참고로 하여 시세(相場)가 형성되는데, 대체로 (인 천) 지역의 정미시장(正米市場)에 의해 매매가 이루어지는 까닭 에, 때때로 뜻밖의 지역시세(地相場)가 나타나고 있었다. 임영환 (林泳煥)은 합병 이전 이조(李朝)의 황족으로 당시 후작이었던 이 56) 요리츠키(寄付き)는 그날 하루의 거래(取引) 중에서 최초로 성립한 거래 를 의미한다. (주식) 거래가 시작되면, 그날의 사자 주문과 팔자 주문의 조합이 이루어져 매매가 성립한 종목부터 순서대로 거래가 성립해 간 다. 이때 최초로 성립한 거래가 요리츠키 인데, 그때의 주가를 하지메 네(始値), 즉 시초가(始初價) 또는 시가(始價)라 한다. JCFIA/yougo08. 57) 우나덴(ウナ電, ウナ 至急 電)은 지급전보의 약호이다. 1976년 폐지되 었다.

8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67 해승가(李海昇家)58)를 어떤 식으로 설복시켰는지, (이해승가에서: 역자) 일단 3만 원 정도의 현찰을 내 주어 활발하게 사자 주문을 냈기 때문에, 시세는 보통 때와는 다르게 월등하게 앙등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인천 미계(米界)의 유력자인 쇼노지점(庄野支 店)의 만교쿠 이와키치(万玉岩吉)(이미 고인이 되었다), 후지모토 합자회사(藤本合資會社) 지배인 스기모토 이치타로(杉本一太郞) (이 사람도 고인이 되었다), 구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와 그밖의 사람들이 모두 거래 상대방으로 돌아서 (미가를 떨어뜨리려고) 마구 팔아대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한편 임(林) 쪽도 이식 (利食い)59), 즉 매입 계약 이후 가격이 오른 상태에서 이익을 실 현하려고 하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 상대방으로부터 두들겨 맞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생각처럼 이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 이에 얼마간의 양은 다음 달이나 다다음달을 수도기간(受渡期間) 으로 하는 매매로 갈아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견제상(牽制上) 새롭게 매입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당한(當限)으로 돌아 섰다. 당시의 매매 상쇄 후 미결제로 남아 있던 약정 거래량(建 玉)은 1만석 이상은 남아 있었다. 58) 이해승(李海昇)은 1890년생으로 철종의 친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 君) 광(㼅)의 현손(玄孫)이자 궁내부대신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 純)의 손자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59) 이식(利食)이란, 팔기로 계약한 물량의 가격이 하락하여 이익이 붙었 을 때 다시 사들이거나, 사기로 계약한 물량의 가격이 올라 다른 곳 에 전매하여 그 차익을 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88 6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임영환의 사자 출동과 지역 총 팔자 하기와라(萩原)의 중재 鳥栖忠安 팔자 쪽(賣方)의 진영을 보면 공매(空賣)를 하는 사람들은 갈 아타거나, 손절매(損切賣)를 하거나 했는데, 주력이 정미(正米)60) 관계자였기 때문에, 채산상 충분히 수지가 맞는 정기(定期) 시세 (相場)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켠에서 실미(實米)를 준비해 서 빈틈없는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당한(當限) 이 되면, 임(林)은 퇴로를 차단당하게 되어 수미(受米)를 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어졌다. 쌍방이 대치한 채로 드디어 당한(當限)의 납회(納會)가 다가왔을 무렵, 팔자 쪽(賣方) 주력의 한 사람인 구 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는 일면식도 없는 하기와라(萩原)라고 하는 남자의 방문을 받았다. 하기와라(萩原)는 그 당시 경성 남 산정의 파성관(巴城館)(지금의 사토병원佐藤病院)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도쿄(東京) 교바시(京橋)에서 협객으로 상 당히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하기와라(萩原)는 구 와노(桑野)를 몰래 찾아와 임영환(林泳煥)에 대해서 임영환(林泳煥)은 내가 교바시(京橋)에 있을 무렵 일본에 망 명 중으로 (나를) 의지했기 때문에 돌봐 준 일이 있다. 들은 바 60) 정미(正米)란, 실제로 거래되는 쌀을 의미하는데, 실미(實米)라고도 한다.

8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69 에 의하면 최근 인천의 정기시장(定期市場)에서 쌀(米)을 매입했 는데, 그 결과 지금은 빼도 박도 못할 처지에 놓여 곤란에 빠져 있다고 한다. 당신은 남자다운 사람인 것 같으니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을까 상담을 좀 하러 왔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구와노(桑野) 입장에서 보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담에 허둥지둥했지만, 부탁을 받은 이상 모른 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풋내기 아마추어가 자금력만 믿고 무 턱대고 사들인 상황(相場)이었기 때문에, 시세 그 자체에 의지 (意地)가 붙어 있었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간단히 아무 일 없었 다는 듯이 해결하는 것은 곤란했다. 여러 가지로 상담한 결과, 본인의 각오 여하에 따라서는 아무도 모르게 구와노(桑野) 쪽의 큰 손이 선한(先限)을 두 배의 석수(石數) 정도로 매입 계약을 해서 당한(當限)의 해합(解け合い)을 시도하던지, 아니면 다 포기 하고 물러난다. 만약 시세(相場)가 붕괴하여 사자 로 계약한 쪽 (買玉)에서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팔자 로 계약한 쪽(賣玉)에 이 익이 되게끔 하여 조금이나마 회복하게끔 하는 것 이외에 좋은 방도가 없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그 다음날 구와노 (桑野)의 대리로서 스나가 세이치로(須永勢一郞)가 하기와라(萩 原)를 방문, 임영환과 회견하여 선후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하기 와라(萩原)는 물러났다. 드디어 다음날이 되자, 약속대로 스나가(須永)는 구와노(桑野) 의 가게에서 미결제 거래량을 취급하는 도쿠라(戸倉)라는 사람을

90 7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대동하여 경성의 하기와라댁(萩原方)을 방문했다. 곧 임영환(林泳 煥)도 도착하여 전날 협상한 대로 양건식(兩建式)61)으로 팔기 위 해 작전을 설명하고 증거금의 사정을 물었다. 시종 묵묵하게 스 나가(須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임(林)은 천천히 입을 열고 유창 한 일본어로 야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맙소. 사실 수미대금(受米代金)은 확실하게 조선은행으로부터 융통하기로 상담이 성립했기 때문에 반드시 수미(受米)하기로 마음을 굳혔소이다. 부디 안심하시기 바라오. 라고 태연자약하게 공언했다. 이 의외의 말에 스나가(須永)도 하 기와라(萩原)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과연 임(林)이 이야기 하는 대로 자금의 준비가 끝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의문점이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조선은행은 당시 정기(定期) 수미자금(受米資金)에 대해서 쉽 게 대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취인소 규정에 따라 상품의 수도 (受渡)가 이루어지는 달, 즉 한월(限月) 말일에 팔자 쪽(賣方)은 61) 료다테(兩建)란, 동일한 고객이 상품 선물(先物)거래자에 대해 동일상 품, 동일한월(限月)의 팔자 주문과 사자 주문을 동시에 해 놓는 것을 말한다. 이는 주문계약이 일시적으로 손실계산이 되더라도, 포기하거 나 싼 값으로 다시 사들이기를 통해 물러나지 않더라도 괜찮게끔 팔 자 주문과 사자 주문 양쪽을 해 두어, 한쪽의 손실을 막고, 적당하다 고 생각될 때에 한편의 주문을 포기하고 남은 포지션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매매전법이다. 또한 동일상품 선물거래자가 거래소에 대 해 동일상품, 동일한월(限月)의 팔자 주문과 사자 주문을 동시에 해 놓는 것을 말한다. 또한 료다테 포지션의 쌍방 또는 한편을 전매, 다 시 사 들이기를 해서 그날 거래를 정산하는 것을 両建を解く, 両建 を外す 라고 한다. JCFIA/yougo09.

9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71 창고신고서( 倉 所 届 )를 내서 도미( 渡 米 )를 제공하고, 또한 매입하 는 쪽( 買 方 )은 대금을 납입하고 그때부터 그 다음달 1일부터 매 일 현품수도( 現 品 受 渡 )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미 권수도( 米 券 受 渡 )와 같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보통 달에 수도( 受 渡 ) 종료는 중순 정도( 月 央 位 )까지, 석수( 石 數 )가 많을 때 나 기후 사정이 나쁠 때는 월말 근처까지 걸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따라서 사자 쪽( 買 方 )에 수미자금( 受 米 資 金 )을 융통하는 은행은 수미( 受 米 )를 자기 은행 창고에 입고하기까지의 기간은 대인신용( 對 人 信 用 )으로 대출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행이 이 점이 내규에 저촉된다고 하여 쉽게 대출하려 들 지 않았다. 쌀( 米 )만 입고하기만 하면 조선은행이라고 해도 무언 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체로 대출해 주고 있지만, 수미( 受 米 )하는 쪽 입장에서 보면 창고 입고까지 사이에 (자금을) 융통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체로 18은행 지점이 130은행(지금 의 야스다은행= 安 田 銀 行 ) 지점에서 대출을 받고 있었다. 이상의 사정을 알고 있는 스나가( 須 永 ), 도쿠라( 戸 倉 ) 두 사람 으로서는 임( 林 )의 말이 적잖이 의문스러웠다. 본인이 그렇게 말 하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쓸데없는 참견 같았지만, 정말 괜찮겠냐고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에 대해 임( 林 )은 냉정 한 얼굴로 괜찮다고 단호하게 명언( 明 言 )했다. 그렇다면 어떤 특 수한 신용관계로 선은( 鮮 銀 )도 대출하기로 했나 보다 하고 반신 반의하며 물러났다.

92 7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구와노(桑野)의 분주로 겨우 해합 중매인 네 명 하옥 사건 鳥栖忠安 드디어 납회(納會)62)가 되어 팔자 쪽은 도미(渡米)를 제공했지 만 사자 쪽의 임(영환)은 조선은행과의 상담이 성립되지 않은 채 끝나버려 쌀을 넘겨받을 때 내는 수미(受米) 대금의 납입이 불가 능해졌다. 이런 일이 전해지자 시장은 곧 분규하기 시작해 결국 계약 해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취인소의 중역이 사이에 들 어가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그러나 팔자 쪽 의 한 사람도 응하는 사람이 없어 중역들이 너무 곤란해진 끝에 구와노 료타로(桑野良太郞)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구와노는 당시 당한(當限)은 갈아탔고, 중간 선물(中先)도 거래물량(玉)이 적었 기 때문에, 비교적 이해관계가 적은 입장이었다. 따라서 중역이 너무 곤란해 하는 것을 보고 중재역을 맡을 수 있었다. (구와노 는 조정을 위해: 역자) 백방으로 설득에 나섰고, 결국에는 겨우 팔자 쪽도 (해소에) 응했다. 그 결과 임영환의 거래량(建玉) 전 62) 납회(納會)란, 최종일에 입회(立會)하는 것을 말한다. 당월한(當月限)의 마지막 입회를 당한납회(當限納會), 연말 최종영업일의 마지막 입회 를 대납회(大納會) 또는 연말납회 라고 한다. 또한 납회 때의 시세 (相場)가 전반적인 시세보다 높은 경우를 고납회(高納會) 라 하고, 싼 경우를 안납회(安納會) 라 한다. 납회가 가까워지면, 현물 수도희망자 의 다소에 따라 시세가 크게 오르던가, 크게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의 시세를 납회시세(納會相場) 라 한다. JCFIA/yougo05.

9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73 부를 각 중매점에 위탁한 구좌의 잔금 정도의 가격으로 (거래계 약을) 해소하게 된 것이다. 이때 임영환의 손해는 이해승(李海昇) 후작으로부터 인출한 3 만원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팔자 쪽은 형식적으로는 이겼지 만 실제로는 가격이 가격인 만큼 비교적 비싼(割高) 정미(正米) 를 사들인 꼴이었다. 게다가 금리나 창고 보관료가 더 들어가 해합(解合)한 뒤에도 이 불용미(不用米)가 원인이 되어 돈을 벌 수 있던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었다고 모두들 투덜댔다. 이상으로 임영환의 쌀 처분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그로부터 조금 지나서 터무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임(영환)의 주 문량을 취급한 중매인 구라시게 데이스케(倉重悌輔), 나카무라 가베에(中村嘉兵衛), 하시모토 야사부로(橋本彌三郞) 세 명 외에 똑같이 중매점이었던 가사메 에이키치(笠目榮吉)의 사정으로 4명 이 불구속인 채로 경찰 조사를 받은 결과, 기소되어 전부 유죄판 결을 받고 입옥(入獄)한 일이었다.63) 범죄 내용은 취인소를 통하 지 않은 사사로운 매매행위(呑行為)64) 때문인 듯하고, 그 당시의 풍평(風評)은 분분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믿고 있던 63) 다카다 츠네사부로(高田常三郞) 등에 관한 기록은 그리 남아 있지 않 다. 다만 1920년 4월의 동아일보 기사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주목 된다. 仁川米豆取引所 仲買人 高田常三郞, 創重悌輔, 猪飼政太郞 三 人은 取引所定款 第45條 1項 3號 規定에 依하야 今月 22日 後場으로 부터 判決確定期까지 營業停止를 命하였더라. 然이나 現在 建米에 對 하여는 4月末日까지의 賣買處分을 得한다더라(仁川) 東亞日報 <三仲買人賣買停止>. 64) 증권업자가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주를 매매하거나 사설의 마권차권 (車券)을 발행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는 일.

94 7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설은, 임영환 사건으로 조선귀족에게 손해를 입혀 그쪽 사람들에 게 원한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랬는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임영환의 매점 실패 후 머지않아 이용문(李溶文, 李用文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의 사자 출동(買出動)으로 인취는 분규했고, 위약처분까지 일어나는 소동이 있었다. 조선인 방면에 기미(期 米)65)에 대한 이해가 수박 겉핥기식이나마 확산되면서 투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편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책사들이 조선인 부호를 잘 선동하여 기미시장으로 꾀어 내기 위해 책동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출동으로 시세 좋은 장이 형성되는 기운이 조금씩 농후해 졌다. 임영환과 이용문의 사자 출동이 있었던 1911년은 어떠한 상황 이었는가 하면, 1910년은 각 도가 모두 홍수 때문에 흉작이었다. 따라서 쌀에 대한 인기는 다른 때와 달리 특별해서 1911년 들어 서 점점 더 강해졌다. 즉 1910년의 벼 익는 가을에 8원 61전이 었던 미가가 1911년 4월에 들어서는 12원 35전이라는 높은 가격 65) 미가(米價)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물가의 왕 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생활에서 쌀이 높은 지위를 점하고 있었고, 상품으로서 양이 컸기 때문 에 미가가 전 물가의 지표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전 (戰前)의 자유시장 시대에는 쌀의 선물거래도 이루어졌는데, 곡물거래 소(취인소)의 선물을 기미(期米, 期米相場)라 하였고, 이에 대해 현물을 정미(正米, 正米相場)이라고 불렀다. コトバンク (2015년 1월 1일 검색)

9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75 을 시현(示現)했고, 그 후 2개월은 11원대의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기꾼(思惑師)이 갑자기 나타나 완력시 세(腕力相場)66)를 조성하기에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투기가 조금씩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결국 10월 한에 이르러 건곤일축(乾坤一蹴)의 대격전이 되었다. 사자 쪽은 이조(李朝)의 권신으로 그 당시에도 여전히 이왕직 내부(內部)에 세력을 갖고 있던 이봉래(李鳳來)67)의 아들 이용문 (李溶文), 그때 아직 20대 청년이었다. 이에 대해 팔자 쪽은 우 츠미(內海), 쇼노(庄野) 등 중매인 이외의 일반투자가(客筋)를 주 력으로 하여, 북(北)은 평양 진남포로부터 남은 군산과 전 조선 에서 모인 연합군. 이용문의 사자강행(突貫買)에 전 조선 각지 미상(米商)의 연합매(聯合賣)가 형성되어 고집스러운 시세(意地相 場)를 형성했다. 66) 완력시세(腕力相場)란, 자금력에 기대어 시세의 흐름이나 외적인 재료 를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팔거나 사거나 하여 형성된 인위적인 시 세를 말한다. 이렇게 팔거나 사거나 하는 것을 腕力張り 라고 한다. JCFIA/yougo10. 67) 원문에는 李鳳萊라고 되어 있으나 李鳳來가 맞다. 1911년 12월 현재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순부 2권, 4년(1911 신해) 12월 6일(양력) 1번째 기사, <순헌 귀비가 생전에 조선 상업은 행에 예치한 돈을 청구하기 위해 민병석이 은행과 계약서를 교환하 다>. 또한 다음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성미술품제작공장을 설립 하여 운영한 적도 있었다. 이봉래 등 네 명이 조합경영자로 출자하 였다가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해당 공장의 재산 전부를 이왕직에 상납 하고 2만 4천원을 회감(會勘)하여 조합원에게 지급했다. 순부 4권, 6 년(1913 계축) 6월 5일(양력) 2번째 기사, <한성미술품제작공장을 이 왕직으로부터 인수하다>.

96 7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그 무렵 경성 본정 3정목의 다키 긴코도( 多 喜 金 光 堂 )이라는 시 계점의 점원으로 기슈( 紀 州 ) 태생의 미나토( 湊 )라는 남자가 있었 다. 조선어가 뛰어난 28, 9세의 잔재주가 많은 남자였는데, 1910, 11년 경 인취에 나타나 각 상점에 주문을 내며 설레발치 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나토 혼자 와서 주문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도 없었고, 처음에는 손이 잘 맞아 투 기거래로 꽤 돈을 번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점점 문제가 되어 이식( 利 食 ) 후 다시 물량을 사들일 때 처음으로 경성에서 본존인 이용문이 출장을 와서 아사히야여관( 旭 屋 旅 館 )에 진을 치면서 사 정이 판명되었다. 미나토가 왜 이용문에게 빌붙게 되었는지는 명 확하지 않다. 일선에 의하면 이봉래의 첩에게서 난 아들로 이용 문과는 이복형제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로 조선어에는 능숙했지만 태생( 素 性 )을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요컨대 미나토는 그 당시 하이칼라의 자식( 子 息 )인 이용문과 사업 때문 에 친해지면서 투기( 相 場 )의 묘미를 불어 넣었고, (이용문의: 역 자) 자금을 인출하여 인천시장에서 활약한 것이 운 좋게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용문은 미나토를 완전히 신용하게 되었고, 기미( 期 米 )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직접 나서게 되었던 것 같다.

9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77 仁取盛衰記 인취 최초로 위약처분 발생 10월한의 대격전 鳥栖忠安 이용문(李溶文)의 매매는 임영환과 마찬가지로 한 번에 한해 낙착한 것이 아니고 수개월간은 시장에 꽃을 피웠다. 더구나 겉 으로 나서 활약한 것은 미나토여서 이용문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림자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다지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임 영환의 경우와 형태가 닮아 있다. 그 해도 미가는 전기와 같이 앙등 또 앙등을 거듭했지만, 10월한 신보(新甫)68)는 13원 91전으 로 인취 창설 이래 최고치를 기록, 그 달의 증거금 징수만으로도 100석에 대해 250원에 달했기 때문에 사자 선동의 대단함도 대 체로 상상이 간다. 드디어 10월한의 납회(納會)가 가까워 옴에 따라 각지에서 도미 (渡米)가 속속 도착했다. 이에 대해 팔자 쪽의 이용문은 필사적으 로 싸워 물량공세(玉責め)로 해결하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할취(割取)를 주로 하는 곡물거래상(正米師)이어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총 3만 수 천석의 물량(建玉)으로 시작했지만, 그 중 약 1만 석은 25일에 팔자 쪽 주력인 우츠미와 부분 해합(解合)을 68) 니이뽀(新甫)는 상품거래소에서 달이 바뀌어서 발회(發會) 날에 새롭 게 시작되는 한월(限月), 또는 그 시세를 가리킨다.JCFIA/yougo03.

98 7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했기 때문에, 남은 물량(玉은) 2만 2천 석이 되었다. 한편 마침내 납회(納會)가 다가오자 중매점 중에서 1만 4천 석에 대한 수도대 금(受渡代金)의 지불이 불가능한 중매점이 나타났다. 취인소는 허 둥지둥 대소동, 파랗게 질린 중역들은 연일 협의를 위해 분주했 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팔자 쪽 중매상들은 쉽게 해합(解合)에 응할 수 없었고, 원만한 해결은 완전히 곤란해지고 말았다. 난처 해진 역원회는 결국 사자 쪽 중매점을 위약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인취에서 위약처분을 행한 최초의 일이었다. 그때 총독부에 제출한 신고서 및 역원회 결의서는 다음과 같았다. 10월한 사자 쪽 일부 위약처분에 대한 신고 10월한 기미(期米) 현재 물량(建米) 총 석수는 2만 2,100석이 다. 기한(期限)이 되어 팔자 쪽 중매인은 전부 도미창소신고서(渡 米倉所届)를 제출했으나 사자 쪽 중매인 중, 두 명 수취미(受取米) 대금 납입이 없어서 10월 31일 오후 3시 바로 역원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했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1911년 11월 2일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 취체역사장 오쿠다 사다지로(奥田貞次郞) 조선총독부 백작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69) 전(殿) 69) 원문에는 寺田正毅라고 되어 있으나 오기이다.

9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79 역원회결의요령 一, 10월한 사자 쪽 중매인 중, 두 명에 대해 수취미 대금 납입이 없음으로 해서 정관 제122조 및 영업세 칙 제48조에 의하여 처분한다. 一, 위약 석수는 분 8천 550석, 분 5천 450석 으로 한다. 一, 위 위약 석수에 대해서는 영업세칙 제48조에 의해 1석당 2 원 10전씩의 위약금을 징수하고 이를 상대방에게 교부한다. 一, 위약 중매인에 대해서는 각각 5일간의 영업정지를 명한다. 一, 전기 위약 석수는 사자 쪽 총 석수에 대해 안분율( 按 分 率 )에 따라 할당하고 체감하여 결의한다. 1911년 10월 31일 이 위약처분에 의해 사자 쪽의 중매점은 납작해졌지만, 도미 ( 渡 米 )를 준비한 팔자 쪽 중매점도 그 후 4엔(4 百 丁 ) 정도의 폭 락을 당해 상처를 입었다. 그 후 당장 처분해야 할 쌀( 手 當 米 )은 대부분 경성에 있는 곡물거래상의 손을 거쳐 겨우 처분되었다. 무엇보다 이 팔자 쪽 중에서도 이득을 본 자가 없는 것은 아니 었다. 부분 해합( 解 合 )에 응한 우츠미 등은 이문이 남았다. 조합 의 필두( 筆 頭 )로 그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최초의 토대는 이 이용문의 매점( 買 占 )에 편승하여 독차지한 거리( 巨 利 )였다고 말 하는 자도 있다. 기자의 변 이용문의 매점은 1912년 8월한으로 3만석의 수

100 8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미( 受 米 )를 보란 듯이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위약 처분은 이해승 후작 즉 임영환의 매점 사건 때 9월한에서 일어 난 문제로 위약처분에 처한 것은 가사메 에이키치( 笠 目 榮 吉 )였다 는 설이 있습니다. 나는 이 두 개의 사건에 대해 어떤 것이 사 실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만 단지 위약처분이 1911년 10월한이 었다는 것만은 당시의 신고서로 단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또 스나가( 須 永 ) 군의 기억에 의하면 임영환 매점 실패는 총해합( 總 解 合 )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이 두 가지 점을 근거로 하여 이상과 같이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 지 사건에 대해 나는 나의 판단이 어느 정도까지 진실에 가까운 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당시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질 정( 叱 正 )을 구하는 동시에 후일 기회를 보아 만약 틀린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정정하고자 합니다. 위약처분이 일단락되고 나서 인취에서 중매인 증원에 관한 희 망이 있어서 오쿠다 사장이 인천부청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때 인취에서 제시한 비교표에 의하면, 1910년 상반기만으로 사가취 인소( 佐 賀 取 引 所 )는 매매석수 133만 6,200석에 대해 중매인은 32 명이고, 구마모토( 熊 本 )는 100만 9,860석에 대해 23명이지만, 인 취는 1911년 상반기에 126만 6,000석의 거래고에 대해 겨우 13 명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시장의 번영을 위해서도 증원해 달라는 뜻이었는데, 당국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 다.

10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81 이 1911년은 내지에서도 대파란이 있었던 해였다. 같은 해 8 월 정부가 미가 폭등을 좌시하지 못하고 도쿄취인소에 간섭하여 8, 9월 양한의 입회(立會)를 정지했다. 그리고 정부는 선한(先限) 부터 대만미 및 조선미의 수도대용(受渡代用)을 허가하기에 이르 렀다. 즉 단경기(端境期)70)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대만미 또 는 조선미를 이용하여 대용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등급표(格付表) 중에 준비해 두도록 농상무성에서 각 취인소에 통지했다. 또한 인천으로서 특거(特擧)할만 한 것은 같은 해 축항공사에 착수했 다는 사실이다. 仁取盛衰記 오오사카 자본의 진출과 마츠오(松尾)의 시대 일본의 취인소에서 조선미 대용 인정 鳥栖忠安 해가 바뀌어 1912년 5월 정부는 각 취인소로 하여금 단경기 (端境期)에 대만미 및 조선미의 대용을 실시하게 할 요량으로,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수입세를 낮추었다. 7월 초에 23원 70) 단경기란 경계의 끝이 되는 시기라는 뜻으로, 철이 바뀌어 묵은쌀이 떨어지고 햅쌀이 나올 무렵을 이르는 말이다.

102 8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65전이라는 놀랄만한 높은 가격을 보이던 미가는, 이 대용의 시 행과 함께 급전직하 16원까지 떨어졌다. 그 후 기후가 불량하고 추수시기를 놓치면서 또 다시 등귀하였고, 9월 23일의 대폭풍으 로 다시 23원대까지 올랐다. 1910년도의 최저치 11원에 비교하 면 사실 그 차액은 12원이나 되는 오름새였다. 이 해 7월 30일 메이지대제( 明 治 大 帝 )가 붕어하셔서 다이쇼( 大 正 )라고 개정되었는 데, 10월이 되어 인취에 일기( 一 期 )를 획( 劃 )하는 대변화가 이루 어졌다. 즉 종래 인취는 인천인이 경영하는 인취였지만, 오오사 카 자본의 진출로 오오사카인 경영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이야기는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2월에서 3월, 세상도 슬슬 봄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당시 경성에 있던 변호사 시라이 가츠노리( 白 井 勝 悟 )라는 남자가 당시 인천에서 자신의 법 률사무를 취급하고 있던 야마구치 이쿠타로( 山 口 幾 太 郞 )를 대동 하여 구와노 료타로( 桑 野 良 太 郞 )를 방문했다. 당시 구와노는 인 천재계에서 담략( 胆 略 )을 모두 갖춘 신인으로 인격과 식견에서는 제일이라고 주목받고 있었다. 야마구치는 간판은 비록 시라이의 법률사무소취급이지만, 소위 무면허 변호사( 三 百 代 言 ) 같은 사람 으로,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관계상, 구와노나 구와노의 지배인 격( 番 頭 格 )인 스나가 세이치로( 須 永 勢 一 郞 ) 등과는 서로 아는 사 이였다. 이 시라이와 야마구치가 구와노를 방문한 요건은, 오오 사카 도지마취인소( 大 阪 堂 島 取 引 所 )의 이사에서 중매인이 되었다 가 다시 위원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 마츠오 츠루오( 松 尾 鶴 男 ) 71)가, 인취에 주목하여 오오사카의 동지 두세 명과 함께 3분의

10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83 2 이상의 주식을 매수하여 절대우월권을 장악한 뒤 인취를 경영 해 보고자 하니 상담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 그것 이 가능하다면 50만 원 정도로 증자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구 와노는 그 자리에서 이를 승낙하고 동석하고 있던 스나가에게 주식 매집에 힘써 달라고 했다. 그러나 좀처럼 생각대로 주식이 모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주당 65원으로 얼마간을 사 모았지만 예정했던 3분의 2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주당 75원으로 매입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3분의 1에 달하는데 그쳤다. 구와노, 스나 가 두 명은 최후의 수단으로 당시 대주주였던 가쿠 에이타로(加 來榮太郞) 등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하였고, 그 결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주식 전부를 주당 85원에 인수하기로 하여 겨우 3 분의 2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마츠오 츠루오(松尾鶴男)가 맹주 가 되어 함께 시작한 오오사카 그룹의 멤버는 마츠오의 사위 이 이다 모토오(飯田茂登雄), 미야타니 소우에몽(宮谷惣右衛門), 오 오이시 사다지로(大石貞次郞)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마츠오의 인 취 진출은 이케다 쵸지로(池田長次郞)가 마츠오를 만나 종용한 것이 동기가 되어 크게 마음이 동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매수할 때는 시라이의 독무대로 이케다 쵸지로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렇게 준비가 되자 마츠오는 사위 이이다 및 새롭게 채용할 부하 수 명을 대동하여 건너왔다. 결국 10월 총회의 역 원개선 결과, 사장에 마츠오 츠루오, 상무에 이이다 모토오, 오 쿠다 사다지로, 감사역에 미야타니 소우에몽, 모리 츠네키치(森 常吉)가 당선되었다. 마츠오는 1891년 구마모토미곡시장(熊本米 71) 마츠오 츠루오(松尾鶴男)는 1892년 6월에 取引所條例得失論: 明治二 十五年六月二十日第一回報告 (取引所期成同盟會, 총 26쪽, 일본국회 도서관 소장)을 집필할 정도로 취인소 운영에 정통해 있었다.

104 8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穀市場) 취체역을 시작으로 이후 30년간 구마모토(熊本), 오오사 카(大阪), 규소(牛莊) 등의 부두취나 이사장 또는 이사에 취임, 취인소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공을 쌓은 남자였다. 그 후 1913년 4월 개선에서 이이다 모토오(飯田茂登雄)72)가 사장이 되었는데, 그는 전기한 바와 같이 마츠오의 사위로, 교토대학 출신의 법학 사였다. 이이다는 서둘러 내부 쇄신에 착수하여 정관을 변경하고 결산기를 9월과 3월의 2기로 정했다. 이 마츠오, 이이다의 손으 로 인취의 경영이 옮겨지고 나서 얼마동안은 과연 취인소에서 고생한 만큼 상당히 순조롭게 전개되었고, 인취의 주주도 중매인 도 떡집은 떡집이다 라고 만족하고 있었다. 오쿠다가 취체역으 로서 참가한 이면에는 스나가의 건책이 있었다. 1913년 3월 가츠라(桂) 내각이 와해되어 야마모토 곤베에(山本 権兵衛) 내각이 성립하였고, 조선미의 이입세를 철폐하는 동시에 5월한부터 일제히 전국 취인소는 대만미 및 조선미의 대용제(代 用制)를 채용했다.73) 종래에는 단경기에만 국한해서 대용을 허용 하고 있었던 것을 일년 내내 가능하도록 이 제한을 철폐한 것이 다. 이 결과 조선미 이출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미의 대 용으로 내지 시세의 등락폭이 작아졌다. 그 때문에 기미시장(期 米市場)의 묘미가 적어져 결국 대용폐지설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오오사카와 기타 취인소에서 대만미 및 조선미 탄압을 위 한 등급표를 만들어 배척을 시도했지만 결국 불인가로 끝나고 72) 원문에서는 飯田茂登男이라고 되어 있다. 73) 일본에서 조선미에 대한 이입세가 철폐되는 것은 1913년 7월부터였 다. 小早川九郞, 朝鮮農業發達史(資e篇), 友邦協會, 1960년, 48쪽.

10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85 말았다.74) 1914년 정월 사쿠라지마(櫻島) 대폭발에 이어 의회 개회 중에 시멘스 사건이 발생하여 나라 전체가 소란스러웠고 결국 야마모 토 내각은 와해되고 말았다.75) 4월에는 쇼켄 황태후(昭憲皇太 74) 1921년 8월로 좀 뒤의 일이지만 조선미 정기대용제도(定期代用制度) 에 대해 도쿄 측과 오오사카 측이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립한 다음의 기사가 참고 된다. 朝鮮米의 代用撤廢에 對하여 東京側은 全然 朝鮮米의 排斥을 하고자 함과 如한 바 大阪側은 此際 代用制度 를 廢止한다 云함에 對하여 寧히 進하여 正式格付에 入케 함이 至當 하다 主張하여 東京側의 態度에 反對함과 如한 模樣인 大會에서 果然 如何한 結果를 見할지 不明하나 東亞日報 <朝鮮米 代用制 撤廢에 對하야, 水間鮮銀調査課長談>. 75) 시멘스 사건은 다이쇼 초기에 일어난 해군의 수뢰사건이다. 일본 해군 은 독일의 시멘스사로부터 군수품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그때 발주품 대금의 3.5%~15% 정도를 수수료로 수취하고 있었다. 시멘스사의 일본 지사원 칼 리히테르가 자신이 해고된 것에 불만을 품고 회사의 기밀서 류를 훔쳐 회사를 협박했다. 그러나 사건은 곧 발각되었고, 리히테르는 체포되어 베를린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때 일본 해군 고관에 대한 증뢰 (贈賂) 관계 자료가 나왔고, 그 보도가 1914년 1월 22일자 로이터통신 을 통해 발표되었다. 다음날 도쿄의 신문사가 일제히 이 사실을 보도했 기 때문에, 야당 동지회(同志會)의 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郞)은 이를 거 론하며 같은 날 의회에서 추궁했다. 동지회는 야마모토(山本) 내각(山本 權兵衛 수상은 해군)의 붕괴를 목표로 했고,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등은 부패를 추궁했다. 또한 재야의 호헌운동, 영업세 도입에 반대하는 상공회 등이 참가하여 하나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내각과 해 군은 열세에 몰려, 해군 내부에서는 사문위원회(査問委員會)를 발족시 켰다. 문제에 관여된 후지이(藤井光五郞) 소장과 사와자키(沢崎寛猛) 대 좌 등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미츠이물산(三井物産)의 이와하라 겐 조(岩原謙三)나 야마모토 조타로(山本條太郞)도 수감되었다. 2월 10일, 내각탄핵결의안이 상정되었지만, 여당인 정우회(政友會)에 의해 부결되 었다. 그러나 탄핵국민대회 참가자가 의회를 포위하고 경찰과 충돌했 다. 2월 12일, 중의원은 해군예산의 3000만 엔 삭감을 가결했고, 귀족 원은 3월 13일에 해군예산 7000만 엔 삭감을 결정했다. 양원 협의회가 개최되지만 일치를 보지 못하고 예산안은 성립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

106 8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后)76)가 붕어하셔서 그 해 가을에 행해질 예정이던 어대전(御大 典)이 연기되었고, 세상은 불경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1913년 이입세 철폐로 내지의 수용(受容)이 격증한 조선미도 그 후 내지미가 심하게 저락했기 때문에 수요가 격감하여 사기만 하면 곧 가격이 떨어지는 형세, 1900년경과 똑같은 상태여서 미 곡상들은 몹시 난감한 상태였다. 그러나 인천은 취인소 존치(存 置)의 효과가 나타나 다른 각지보다도 타격의 정도가 가벼웠다고 전해진다. (訂正) 이용문의 참모로 활약한 미나토는 이름을 헤이치로(平一 郞)라 칭하고, 그가 있던 시계점은 키타 긴코도(喜多金光堂)77)가 아니고 오리이 시계점(織居時計店)이었다고 S생이라고 하는 사람으 로부터 주의를 환기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에 대한 책임을 지고 3월 24일에 야마모토 내각은 총사직했다. 야마모 토 중장, 후지이 소장, 사와자키 대좌는 징역과료형(科e刑)에 처해졌 고, 야마모토 전 수상, 사이토 전 해상은 예비역 편입처분을 받았다. 미 츠이물산의 중역은 공소심(控訴審)에서 집행유예처분이 되었다. 그 후 정우회를 대신하여 정부계인 동지회가 세력을 확대하였고, 육군이 증강 되었으며, 중국에 대한 강경노선으로 전환되었다. 永井文庫 홈페이지 (2015년 1월 2일 검색). 76) 쇼켄 황태후(昭憲皇太后, )는 메이지천황의 황후이다. 병약 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적처(嫡妻)로서 메이지천황의 측실인 야 나기하라 아이코(柳原愛子)가 낳은 요시히토친왕(嘉仁親王)을 양자로 삼았다. 요시히토가 뒤에 다이쇼천황이 된다. ja.wikipedia.org/wiki/昭 憲皇太后. 77) 위에서는 多喜金光堂라고 되어 있다.

10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87 仁 取 盛 衰 記 (20) 인취 번영책과 중매인 보호 10할 배당 출현 鳥 栖 忠 安 1915년 10월 당시의 정부 오오쿠마내각( 大 隈 內 閣 )은 미가조절 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곡의 매상을 시행했다. 이것이 정부가 미곡 문제에 직접 나서 손을 댄 최초의 일이다. 그 해 인취의 거래총 액은 1,121만 8천 석이었다. 이 해 11월 다이쇼천황( 大 正 天 皇 )은 교토에서 즉위 대전( 大 典 )을 거행했다. 1917년 내각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헌정회( 憲 政 會 ) 내각은 중 의원을 해산하고 신임을 국민에게 물었지만, 결국 정우회( 政 友 會 )가 다수당이 되고 말았다. 이 무렵이 되면 구주대전란(=제1차 세계대전)도 절정에 달했고, 그 호경기에 힘입어 우리 재계는 미 증유의 경기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물가는 점점 올랐지만 물자의 배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자칫 잘못하면 국민의 생활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1917년 8월 물가조절령과 선박관리령을 발포하여 완화책 강구를 위한 준비를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 사이 인취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108 8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마츠오, 이이다의 오오사카그룹이 경영하면서 인취의 면목이 점차 새로워졌다고 할 수 있으나 중매인의 실력은 여전히 미미 했다. 이 무렵 시장은 돌발적인 등락이 별로 없는 안정적인 시 세( 地 相 場 )를 보이기도 했고, (투기적) 대량 매매를 하는 큰 손들 의 세력 불균형이 도를 넘어 격렬한 등락을 보이기도 했다. 따 라서 거래에 참여한 쪽은 그만큼 이익도 많지만, 손해를 본 쪽은 증거금이 단번에 날아가 버리는 상황, 또한 이 손해가 너무 커서 중매점은 돈( 足 ) 때문에 흥망무상을 거듭했다. 상쇄 물량은 손해 를 본 쪽으로부터는 돈( 足 )을 받지 못하고, 이익을 본 쪽으로부 터는 척척 청구되는 상황으로 비명을 지르는 참담한 상태였다. 현재의 취인원( 取 引 員 )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조절도 능숙하고 실 력도 갖추어져 있지만, 그 무렵에는 그런 호흡도 알지 못하고 게 다가 무엇보다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정전( 停 電 )해 보거나 탈선해 보거나 하여 자기들 사이에 복잡하고 어수선함이 끊이지 않았다. 주머니사정( 懐 加 減 )이 좋은 상점은 어이없다 불평하면서도 지불 해야 할 것은 지불하고 있었지만, 다소 (상세가) 기울어진 상점 의 경우에는 단골손님에게 구두백편( 叩 頭 百 遍 ), 이마를 다다미에 대고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고객 입장에서 보면, 상쇄 는 중매점이 알아서 할 일,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이 아님에도 모처럼 벌어 놓은 돈을 받을 수 없다니 너무 바보 같아서 말도 안 된다. 없는 것을 취할 수 없는 법이니 울면서 잠자리에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이다와 오쿠다 두 중역은, 외부로부터 스나가 등의 진언도 있고 해서, 오오사카 도지마에서 이소노 고 에몽( 磯 野 小 右 衛 門 ) 78) 이 행했던 방법에 입각하여, 인취의 번영은

10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89 우선 중매인에 대한 보호에서 비롯된다는 방침을 취했다. 한편 취인소의 신축을 계획하여 인취 자신의 신용을 높이는 일에 노 력한 결과, 중매인의 주머니사정(懐具合)도 점차 풍부해지고, 단 골 고객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때부터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중매인은 취인소의 중역이 보 호하기 때문에 고객에 대해서는 절대로 폐를 끼치거나 하는 일 은 없다, 안심할 수 있다는 평판이 전해진다. 그 번영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였다. 이로써 인취의 존재도 마침 내 인정을 받았고, 도쿄의 가다 긴자부로(賀田金三郞)나 하기와 라 쵸기치(萩原長吉, 통칭 하기쵸=萩長) 등의 거물들도 시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취는 전시호황의 조류를 타고 주주 에게는 10할의 배당을 거뜬히 행할 수 있었고, 1918년경이 되면 25만원을 불입한 주식이 450원에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나 이 중매인보호정책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호경기 때, 황 금의 파도에 취해 있던 사이, 인취는 부분적으로 일대위기를 잉 태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1919년 대파탄의 항목에서 상술 하기로 한다. 마츠오가 사장에 취임할 당시 약속한 50만원 증자 계획은, 그 후 여러 차례 총독부에 운동했지만, 그때마다 허가 불가의 결과가 되어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78) 이소노 고에몽(磯野小右衛門, )은 막말과 메이지시대의 실 업가였다. 오오사카(大坂)에서 미곡도매상(米問屋)을 열었다. 1871년 도지마미회소(堂島米會所)를 일으켰다. 1883년 오오사카주식취인소(大 阪株式取引所)의 두취, 1891년 오오사카상업회의소(大阪商業會議所) 회두, 뒤에 제국상업은행(帝國商業銀行)과 호쿠하마은행(北浜銀行)의 설립에 관여했다.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110 9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1918년은 우리 미곡사상은 물론이려니와 사회운동사에도 특필할 만한 미소동(米騷動)이 발생한 해이다. 구주대전의 영향을 받아 연 초 이래 계속 오르고 있던 미가는 결국 7월말이 되어 50전을 돌파 했다. 쌀이 10전이 되면(米が十錢すりゃ) 라고 노래한 것이 어제 같은데, 꿈이야기 같은 50전 쌀에 너무 빨리 만난 것이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이 견디지 못한다. 게다가 이 격등(激騰)의 이면에서는 매점이나 매석이 유감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쌀의 배급은 상당히 원활하지 못했다. 야스나리 지로(安成二郞)79)가 아름다운 일본에 서 태어나 쌀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 같은 이야기(豊葦原瑞 穂の国に生れ来て米が食へぬとは噓のよな話) 라고 노래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국민의 대다수는 생활비의 등귀율에 비해 수입의 증가 가 동반되지 않아 머지않아 한 차례 소동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갑자기 이 험악한 공기는 전국적으로 폭발하여 미소동이 되어 나타났다. 즉 1918년 8월 도야마현(富山縣) 일각에서 뒷골목 안주 인들이 우물가회의(井戸端會議)에서 표출한 격분이 봉화가 되어 도 쿄, 오오사카의 대도시를 비롯해 간토(關東), 간사이(關西), 규슈(九 州)와 전국에 걸친 대소동으로 확대되었다. 스즈키상점(鈴木商店)을 비롯해 각지의 부호들이 닥치는 대로 습격당한 것도 이때였다. 특 히 쌀집들은 빈번하게 약탈되어 파랗게 질렸고, 지금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듯 한 소동, 미친 듯이 날뛰는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 가 출동했는데, 겨우 진정되었다. 나중에 정부는 뒤늦게나마 이렇 게 되면 국민사상의 악화가 우려되니 물자배급의 원활함과 물가의 폭등을 막기 위해 공정한 시가(市價) 표준을 제시하기로 하고, 이 를 위해 각 도시에 염가시장(廉價市場)을 설치했다. 79) 원문에는 康成次郞이라고 되어 있으나 安成二郞이 맞다.

11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91 仁取盛衰記 조선 내 미곡상도 위축 미소동(米騒動)과 조선 鳥栖忠安 내지가 미소동으로 혼란에 빠져 발칵 뒤집혀 있을 때 조선은 어 떤 상태였을까. 내지의 오름세에 따라 조선미의 소매시세가 52전까 지 껑충 뛰었을 정도이니 인천의 정기(시장, 定期市場)나 부산, 군 산의 정미시장(正米市場)도 폭등을 보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의 농상(農相) 나카쇼지 렌(仲小路廉)이 이마에 핏대를 올리며 폭리취체령 등과 같은 큰 칼을 뽑아들고 미곡 매점의 두목격인 마 스누키(增貫)나 오카항(岡半)80)에게 닥치는 대로 경고를 보냈다. 당시 조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농상공부 장관 오하라 신이치(小 原新一)나 상공과장 이쿠타 세이자부로(生田清三郞) 등이 미가조절 에 두통을 앓고 있었다. 오하라는 미가 앙등의 원인이 시세를 끌 어올리기 위한 상인들의 매점에 있다고 보았다. (오하라는 이에 대 한 대책으로: 역자) 첫 번째로 조선에 있는 세 개 시장의 정세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기사(技師) 아야타 유타카(綾田豊, 뒤에 퇴관하여 동척 기사장이 되었다가 작년 퇴사)를 인천으로, 속 관(屬官) 츠키야마(경취 지배인이 되었다가 얼마 전 물고=物故)를 80) 오카 항에몽(岡半右衛門, )은 메이지와 다이쇼기의 실업가 이다. 미곡 거래 중매인으로서 오카항(岡半)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알 려졌다. 츠시미곡거래소(津市米穀取引所) 감사역, 이세철도(伊勢鐵道), 일본인조견사(日本人造絹糸), 대일본궤도(大日本軌道) 등의 역원을 지 냈다. コトバンク (2015년 1월 2일 검색)

112 9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군산으로, 속관 아키야마(秋山, 현 인취 전무)를 부산으로 각각 파 견했다. 당시 부산의 시장은 정미시장이면서도 표준미를 설정하여 연취인(延取引)81) 같은 거래를 관헌 몰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 합장인 오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82)와 부조합장 사카타 분고(坂田 文吾)를 불러 호되게 야단쳤더니, 두 사람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상대매매(相對賣買)라고 우겨댔다. 그 때문에 당국도 오기가 나서, 금고 내에 표준미를 숨겨 놓고 있는 사실이나, 시장에 출입하는 것 은 구매자(買人)와 중매인(仲立ち) 뿐으로 일반 손님(仕手)에게 전 혀 안 보이게 해 놓고 비밀리에 매매하고 있는 사실을 들이대며 이래도 시치미 땔 거냐고 다그쳤다. 더구나 오오이케 츄스케를 필 두로 조합의 유력자 모두가 시세를 끌어올리기 위해 마구 사들이 고 있다고 판명되었기 때문에, 그 대단한 오오이케 츄스케, 변명의 다음 말이 나오지 않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항복하고 말았다. 군산도 인천도 거의 부산과 같은 식으로 시세를 끌어올리기 위해 마구 사들이는 거래가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총독부는 부산과 마찬가지로 비공식적으로 각각 경고했 다. 당시 아직 관리의 증봉(増俸)은 이루어지지 않고, 겨우 임시 81) 연취인(延取引, 노베토리히키)이란, 매매쌍방에서 미리 현물의 수도시 기를 정해 두는 일종의 예약매매계약으로, 동종업자간 거래도 여기에 포함된다. 상품거래소(商品取引所)의 선물거래와 달리, 현물의 수도시 기가 도래하기 전에 전매나 다시 사 들이기를 통해 차금(差金)에 의한 청산이 불가능한 거래이다. JCFIA/yougo05. 82) 오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는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으로 메이지기와 다시쇼기의 실업가이다. 1875년 부산에 건너와 해운제염수 산여관업 등의 사업을 전개했다. コトバンク (2015년 1월 2일 검색)

11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93 수당이 얼마간 붙어 있을 때였기 때문에 소비자의 마음은 무엇 에건 거칠어져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국이 시세 차익을 노린 매 점 행위에 대해 경고를 발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부 산에서는 부윤인 와카마츠 우사부로(若松兎三郞)83)을 통해 오오 이케 이하의 반성을 촉구하고, 또 다시 매점을 하게 되면 그때야 말로 본때를 보여줄 심산이었다. 부산부청에 불려가 주의를 받은 오오이케는 위축되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당국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매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조합원의 매점행위도 금지 시키겠다고 굳게 약속한 뒤, 지금까지 저지른 것에 대한 속죄로 백미 200석을 선뜻 내놓고 염가판매를 하겠다고 했다. 부산부에 서는 그 방법에 대해 협의한 결과 각 소학교에서 한 사람에 대 해 1두(斗)씩 당시의 소매가보다 10전 싸게 내 놓기로 했다. 이 를 보고 부산의 미곡상 중에서 염가판매 미곡의 제공을 신청하 는 자가 속출했기 때문에, 일반 소매시세도 동반해서 10전의 폭 락을 연출했다. 이러한 부산의 염가판매를 따라 조선 내 각지에 서 봉사적인 백미 염가판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매가격이 저 락(低落)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내지와 같은 미소동은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던 것이다. 이 해(1918년) 9월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직하고 하라(原) 내각 83) 若松兎三郞編, 下村先生追悼錄, 1938년 12월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와카마츠 우사부로(若松兎三郞)는 한국 육지면 재배의 원조 라 고 평가되고 있었는데, 다음의 기사를 보면 현재 明治期韓国で活躍 した外交官若松兎三郞の生涯 (仮題)가 집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114 9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이 성립하였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 橋 是 清 )가 대장대신( 大 蔵 大 臣 )이 되어 예의 정우회( 政 友 會 )의 적극정책이 시작되었다. 10월 에는 전 세계를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한 그토록 큰 전란도 종식 을 고하여 독일오스트리아와 연합국 사이에 강화 제의가 있었 고, 11월에는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렇게 전시호황 열에 들 떠서 황해의 거친 파도에 난무하기를 계속했다. 우리 재계도 열 이 식은 열병환자와 같이 점차 안정기미를 찾아 갔다. 그해 10 월에 인천에서는 총 공사비 560만원을 투입한 인천 축항이 완성 되었다. 그런데 우리 재계가 티푸스 환자의 회복기 같은 시대를 향할 때에도 우리 인취에는 경천동지할 대사건이 시작되어 제2 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19년의 조선은 만세소요가 일어난 해로 왠지 어수선한 속에서 해가 바뀌었는데, 3월에 들어 인취는 1일부터 8일까지 겨우 1주일간에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 성립 이 재료가 되어 선물( 先 物 ) 최고 36원 29전부터 최저 30원 50전 으로 시세가 전면적으로 폭락했다. 그 결과 8일을 마지막으로 인취시장의 거래가 정지되고 말았다. 이 입회( 立 會 )가 정지된 이 면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이이다( 飯 田 ) 사장, 오쿠다( 奥 田 ) 취체역 두 명이 아라키 스케타로( 荒 木 助 太 郞 ) 및 기타 일부 중매 인과 결탁하여 (오를 것을 예상하고) 투기적 매입을 했던 것인 데, 시세가 마치 두레박 떨어지듯 급격하게 하락했기 때문에, 상 당한 곤경에 처했던 것이다. 이이다, 오쿠다의 중매인 보호방침 은 처음에는 인취의 갱생에 그 이상 좋을 수 없는 흥분제가 되 었지만, 시일이 경과하면서 중독증상을 보였다. 1919년 봄 쯤 되 면, 내부( 內 部 )에서 결단을 내려 조만간 대절개 수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 3월의 입회 정

11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95 지 때에는 팔자 쪽은 (증거금을: 역자) 현금으로 납부했지만, 사 자 쪽은 증거금을 수형(手形)으로 납부하고 있었다. (訂正) 마츠오 츠루오(松尾鶴男)에게 (인천) 진출을 종용한 원 동력은 이케다 쵸지로(池田長次郞)의 뒤에 있던 오오무라 야스타 (大村保太)84)라는 남자였다는 주의가 독자로부터 있었습니다. 오 오무라 야스타는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 식산은행의 전신)에 여주군 소유면 여수금산(驪水金山)을 담보로 도키(土岐), 구노(久 能), 오카지마(岡島) 등의 무리와 한 패가 되어 수형(手形)을 남 발하였고, 종국에는 위조수형까지 발행하여 한호농공을 교묘하게 속여서 사기를 친 끝에 콩밥을 먹었다는 굉장한 모사꾼(策士)이 었다고 한다. 이 오오무라 야스타가 이케다 쵸지로에게 감언이설 로 속여 마츠오를 유인해 냈다는 것이다. 84) 오오무라 야스타(大村保太)는 1869년 구마모토현(熊本縣) 출신으로 구마모토경제학교(熊本濟濟黌)에서 공부하고 1894년에 게이오기주쿠 (慶應義塾)를 졸업했다. 한때 게이오의 교원이 되기도 했고, 이후 광 산, 산림, 주식 등의 사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1904년 11월 조선에 건너와 먼저 경성에서 경성광고사(京城廣告社)를 설립하여 신문잡지 의 광고를 중개했다. 이후 전당포업으로 바꾸었고, 토목업과 가옥 경 영을 겸업했다. 여주금산(驪州金山)을 매수하여 경영하기도 했다. 1909년에는 경성민단(京城民團)의 의원이 되었다가 1911년에 재선되 었다. 1913년 현재 조선담배주식회사의 감사역을 지냈으며, 호별세 연액이 50원에 달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16 9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만원의 큰 구멍을 발견 기둥뿌리가 흔들리다 鳥栖忠安 중역 자신이 곤경에 빠졌기 때문에 분규를 일으켜 정지된 시 장이니만큼, 바깥에서 보았을 때에도 매우 이상했을 뿐만 아니 라, 언제까지나 꾸물거리며 개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의심스러워 하던 감독관청에서 개장하지 않는 이유를 신문(訊問)했지만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며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당시의 상공과장 이쿠타 세이자부로(生田清三郞)는 부하 인 사무관 모토오카 에이지로(本岡榮次郞)와 속관(屬官) 아키야 마 미츠오(秋山滿夫)85) 두 명을 보내 철저한 조사를 행했다(모토 오카는 뒤에 산림과장이 되었다가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으로 착 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이타현=大分縣의 이사관으로 전임 85) 아키야마 미츠오(秋山滿 )는 1888년 아오모리현(靑森縣) 출신이다. 1908년 8월 대장성(大藏省) 문관보통시험에 합격하여 전매국 서기에 임명되어 전매국 후쿠오카현 미하루(三春)수납소에서 근무했다 년 3월 조선총독부 근무를 명받아 4월 28일부로 임시토지조사국 서 기가 되었다. 1914년 6월 총독부 속관으로 농상공부에 근무하다가 1919년 7월 본인의 청원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바로 인천미두취인소 영업과장에 선발되어 입사했다. 1921년 3월에는 인천미두취인소 지 배인에 발탁되어 영업과장을 겸했다. 1927년에는 취체역으로 승진했 고, 1932년 1월 조선취인소가 창립되면서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경 취와 인취의 합병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 현대인물자료. 원문에는 秋山滿雄으로 되어 있지만, 秋山滿 의 오기 로 판단된다.

11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97 하려다 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이 두 명이 인취에 뛰어 든 것이 3월 10일 전후였다. 검사 결 과 금고 속에서 70 수만 원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도수표가 발 견되었다. 그래서 지배인인 한( 伴 )과 회계주임인 간( 菅 )이라는 남 자를 불러 조사한 결과, 증거금 대신 받아 놓은 것이 부도나 버 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카모토와 아키야마는 안색이 변하 여 그 부적절함을 질책하는 동시에 역원들에게 즉시 모일 것을 요구했다. 당시에 취체역 오쿠다는 여행부재 중이고 사장인 이이 다는 칭병하여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감사역인 다나카 사시치로 ( 田 中 佐 七 郞 )와 다테이시 간( 立 石 幹 )이 나타났지만, 입회하자마자 취인소 경영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호된 질책을 당해 두 사람 모두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멍해졌다. 사실 70수만 원의 부도수형 문제에 대해 두 감사역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부분으 로, 오카모토나 아키야마로부터의 힐문( 詰 問 )은 완전히 처음 듣 는 일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아무리 호통을 쳐도 두 사람 은 실제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 기막혀할 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점점 조사하고 있는 중에 이 부도는 최근의 것이 아니 라 2, 3년 전부터 연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이다나 오쿠다 중역들이 감사 때만 되면 여러 가지 간교한 수단을 써서 계산을 맞추고, 겨우 겨우 속여 온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더 상세하게 조사해 보니 부정( 不 正 )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중매 인이 지불해야 하는데도 미수( 未 收 )되고 있는 것이 그 외에도 막 대한 금액에 달해, 이것들을 전부 철저히 조사하면 인취 자체의

118 9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손실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 180여만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판 명되었다. (인취시장: 역자) 내부( 內 部 )의 일대 부정사건이 백일하에 그대 로 드러나자 아무리 10할 배당으로 으스대고 있던 인취라 해도 기둥뿌리 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는 완전히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이 사건이 적발되자 내지 여행 중이던 오쿠 다에게는 급히 인천으로 돌아오라는 독촉 전보를 보냈다. 한편 꾀병을 이유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사장 이이다에 대해서는 본부( 本 府, 여기서는 인천부)로 출두하라고 성화같은 재촉을 했 지만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울화통이 터진 상공과장 이쿠타 세 이자부로가,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덧문짝에 실려서라도 오라고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에, 이이다도 더 이상 배겨 있을 수 없어 서 어슬렁어슬렁 출두하게 되었다. 실컷 기름을 짠 뒤 이제 대 책을 협의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남김없이 밝혀내자 이 제 일시 모면을 위한 속임수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이다와 오쿠다 두 사람은 스스로의 비리를 전부 인정하고 죄를 사죄한 뒤, 오랫동안 존재한 취인소를 폐멸( 廢 滅 )해 버리는 것은 정말로 죄송한 일이니 자타( 自 他 )의 힘으로 부흥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 다고 주뼛주뼛 말을 이어갔다. 오쿠다 등의 이 말을 들은 이쿠타는, 인취의 부흥은 바라는 바이지만 이렇게 형편없이 얼굴에 똥칠을 한 중역의 손으로는

11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99 결코 잘 될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이다와 오쿠다를 근신케 하 고 다른 유력자의 출동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인재계에서 지금 인기가 높고 인망이 좋은 아라이 하츠타로(荒 井初太郞)86), 덴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 고죠 간도(古城管堂) 87), 히라오(平尾) 아무개 등을 한꺼번에 투입시키기로 이야기가 모아졌고, 결국 이들 유력자들의 손으로 부흥이 추진되었다. 86) 아라이 하츠타로(荒井初太郞)는 1868년 도야마현( 山縣) 출신이다. 그 의 진수는 토목건축의 아라이구미(荒井組)였다. 한때 정치가에 뜻을 두 고 자유당 소속으로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일본 국내의 철도 망 보급에 자극을 받아 토목건축업계로 진출했다. 당시 호쿠리쿠(北陸) 정계의 거물 우에노(上野安太郞) 등과 함께 호쿠리쿠구미(北陸組)를 만 들어 토목건축계에 등장한 것이 성공의 제1보가 되었다. 1904년 경부 선 속성공사가 추진되자, 호쿠리쿠구미의 대표로 조선에 건너가 공사에 참여한 후 독립하여 아라이구미를 창설했다. 당시 동양 제일로 평가되 었던 압록강철교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조선과 만주에서 철도 및 기타 토목공사에 다수 참여했다. 아라이가 임원 및 중역으로 관여한 회사 및 단체로 조선토지경영회사(뒤에 조선토지신탁)를 비롯하여 조선 토목건축협(회장), 조선취인소(이사장), 용산공작회사, 조선정미회사, 조 선화약총포회사, 호쿠리쿠기선회사(北陸汽船會社), 구무힝합명회사, 가 라후토임업회사(樺太林業會社) 등이 있으며, 여의도에 아라이목장(荒井 牧場)도 경영하였다. 또한 조선광업회 이사, 조선축산회 부회장, 조선경 마구락부 회장 등을 지냈는데, 그의 활동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조선재계의 중진이었다. 이러한 명망을 토대로 경취와 인취의 합병 때 수완을 보였고, 조선취인소 발족과 함께 이사장에 취임 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 김명수, 재조일본인 (在朝日本人) 토목청부업자 아라이 하츠타로(荒井初太郞)의 한국진출과 기업활동, 경영사학 59, 한국경영사학회, 2011년, 쪽 참조. 87) 고죠 간도(古城管堂, )는 오오이타현(大分縣) 출신으로 메 이지기에서 쇼와시대 전기까지 활약한 의사이자 실업가였다. 도쿄대 학을 졸업했으며 1887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거류지 병원장이 되 었다. 뒤에 경성의사회장을 지냈다. 1908년 실업계에 투신하여 경성 연예관(京城演藝館) 사장, 조선은행 취체역 등을 역임했다. 경성상업 회의소 부회두를 지냈다. コトバンク (2015년 1월 3일 검색).

120 10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부흥책에 대한 오쿠다의 제안은 취인소의 매매수수료를 증가 시키게 되면 이 정도의 부채는 10년 정도면 정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아라이와 덴니치는 이번 기회에 조선 은행 같은 데서 구제자금의 융통을 받아 정리하고, 대신에 증자 를 시행하여 여기에 프리미엄을 붙여 주식을 모집하고 이 프리 미엄으로 손실의 일부를 보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한 편 중매인 측으로서는 이 대로 인취가 폐멸하면 다년간의 생업 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막대한 손해를 입고 생활은 근본 토대부 터 뒤집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인취의) 정리 및 구제를 당국에 진정했다. 仁 取 盛 衰 記 (23) 만원으로 증자 결정 부흥을 위한 진용 정비 鳥 栖 忠 安 상공과장 이쿠타 세이자부로( 生 田 清 三 郞 )는 여러 가지로 연구 조사를 거듭한 결과 증자안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즉 종래 인취의 자본금이 4만 5천원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50만원의 적 립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18년에는 매매고가 3천 수백만

12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01 석에 달했다는 다른 관측( 違 觀 )을 내 놓았다. 따라서 상당한 적 립을 하면서도 또한 주주에 대해서는 10할의 배당을 했던 것이 다. 이 때문에 1918년에 이미 종종 총독부에 우는 소리로 애원 하며 증자를 간청했지만 허용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이때 증자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쿠타의 결심이 100만원 증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순조롭게 빨리 진척되어 갔다. 즉 동년(1919년: 역자) 4월 400만 원으로 증자하는 동시에 영업기 연한을 1929년까지 연기하게 되 었다. 전 중역 이이다와 오쿠다 소유의 주식은 전 주식의 과반 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징별의 의미에서 모두 내놓게 하고, 이를 팔아 치운 돈으로 큰 구멍의 일부를 보전했다. 증자한 신주( 新 株 )는 구( 舊 ) 주주에게 구주( 舊 株 ) 1주에 대해 3주를 할당하고, 나머지는 40원의 프리미엄을 붙여 공모하기로 했다. 당시 인취의 성황에 군침을 흘리고 있던 부산, 인천 등의 미곡상인은 취인소 를 자신들의 지역에도 설치했으면 싶어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딱 그 시기였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취인소령의 발포 전에는 절대로 허가하지 않을 방침이었고, 이 요망을 냉담하게 뿌리치고 있었다. 이러한 소동도 결국에는 취인소 주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근저에 있었기 때문에 이쿠타는 이러한 욕망을 완화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인취의 증자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 서 일석이조의 방법으로서 부산, 군산의 미곡상들에게 증자한 신 주를 소유하게끔 했다. 또한 이 밖에도 목포, 원산, 진남포 등 개항지의 미곡상인에게도 주식을 할당했다. 이 부흥안이 성립되

122 10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자 동시에 인취의 중역이나 이들과 공모했던 부정 중매인은 사 법권의 발동을 통해 교도소에 갇히고 말았다.88) 총독부는 인취의 추상폭로(醜狀暴露)로 아주 골머리를 썩었다. 부흥안이 성립하면서 (총독부의: 역자) 수뇌부는 취인소의 경영 을 순수한 민간인들에게만 위탁해 두면, 중역들이 투기에 관여하 여 뜻하지 않은 일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취가 모처럼 부흥한다고 해도 다시 이번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되면 통 치 상으로도 재계의 발달을 위해서도 곤란하기 때문에, 경영의 책임자인 사장은 총독부가 추천하는 사람을 앉히게 되었다. 그래 서 상공부장관 오하라(小原)는 사장 후보로 당시의 군산부윤 아 마노 기노스케(天野喜之助)89)를 눈독들이고 있었다. 아마노는 법 88) 다음의 京城日報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인천취인소실 태사건(仁川取引所失態事件)의 검거는 점차 확대하여 14일에 이르러 취체역, 감사역의 잔부(殘部) 및 중매인 다수의 수감을 보기에 이르렀 다. 이에 초미의 급(急)을 요하는 문제는 오는 24일 개최하기로 결정 한 취인소 증자보고 및 역원 선임 등의 주주임시총회를 어떻게 할 것 인가, 그 준비를 몇 명이 해야 할 것인가에 있다. 요컨대 종래 취인소 의 증자사무 및 정리의 실행은 이이다(飯田) 사장, 오쿠다(奧田) 취체 역 두 명 모두 4월 중순 구인되었고, 그 결과 다나카(田中), 다테이시 (立石) 두 감사역이 중심이 되어 이를 집행해 왔다. 그런데 총회를 목 전에 앞두고 역원 교섭 기타 많은 요무(要務)가 퇴적된 지금 갑자기 (다나가와 다테이시: 인용자) 두 명이 수감된 결과, 과연 몇 명이 총 회를 개회할 수 있고, 몇 명이 총회에 참석하여 제안의 설명을 할 수 있을까는 문제이다. 가능한 수단으로서는 (1)다나카와 다테이시 등에 게 일시 보석을 요구할 것인가, (2)당국에서 적당한 인물을 임시로 선 정하여 제안의 작제 및 총회의 설명을 수행토록 할 것인가 이 두 가 지 방도 중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京城日報 <仁川取引所前途, 司法權の活動=重役全滅=前途は悲觀の要なし=內部の 一新>. 89) 아마노 기노스케(天野喜之助,?~1935)는 에도(=東京) 아자부 사쿠라

12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03 학박사 아마노 다메유키(天野爲之)의 동생이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다음으로 마산부윤 미마스 구메키치(三増久米吉)에 게 교섭했지만 이 사람도 거절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오하라는 부산부윤 와카마츠 우사부로(若松兎三郞)를 설득했다. 그러나 와 카마츠가 싫다며 주저주저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사 정을 설명하여 납득시켜 무리하게 받아들이도록 했고, 간신히 사 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사장 이외의 중역도 총독부의 추천으로 전형한 결과, 경성의 아라이(荒井), 덴니치(天日) 외에 고죠 간도(古城管堂), 주성근(朱 性根), 부산의 오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군산의 누노이 가조 (布井嘉造), 진남포의 사이토 규타로(齋藤久太郞), 또한 인천을 대표해서 요시다 슈지로(吉田秀次郞), 고노 다케노스케(河野竹之 助), 시라가미 센이치(白神専一), 정치국(丁致國)90)이 결정되었 다. 거기에 가쿠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상담역으로 한 명 더 다(麻布櫻田) 가라츠번(唐津藩) 번주 오가사하라(小笠原) 저택에서 가 라츠번 번의(藩醫) 아마노 쇼앙(天野松庵)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제 학자인 아마노 다메유키(天野爲之)는 형이다. 메이지유신 전후로 부친 이 병사하여 모친 및 형과 함께 셋이서 가라츠(사가현=佐賀縣)으로 귀향하여 거기서 소년기를 보낸다. 1890년 7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 하고 체신성 우무국(郵務局)에 들어갔다가 1921년 퇴관했다. 한때 도 쿄전문학(東京専門学, 현재 早稲田大学) 정치과에서 교통행정법을 교 수했다가 뒤에 외교관이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공사와 조선 전라 북도 군산부의 부윤을 지냈다. www6.plala.or.jp 歴史が眠る多磨霊園/ 天野喜之助 (2015년 1월 3일 검색). 90) 정치국(丁致國)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으나 러일전쟁 당시 전시 수송 및 통역에 큰 공로가 있다하여 통감이 서훈상주한 것을 보면 일 찍부터 일본과 친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그는 한국 인천항 내동 (內洞)에 거주했으며 대한협동우선회사 총무장(大韓協同郵船會社總務 長)이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 四.日露戰 役關係書類(韓人敍勳), (19)丁致國外四名敍勳上奏ノ件, 機密統發第一七 號, 1909년.

124 10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참가하게 되었고, 1919년 5월이 되어 부흥을 위한 임시총회를 열어 마침내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큰 구멍이었던 180만원은 증자를 통한 프리미엄으 로 65만원을 보전하고, 다시 115만원은 식산은행으로부터 차입하 여 완전히 보전했다. 그런데 취인소가 완전 배상 책임을 이렇게도 멋지게 완수한 실례는 전국에서 유례가 없는 바로, 인취 역사에 찬연하게 빛나는 한 페이지이다. 이렇게 진용을 갖추고 부흥한 인 취는 1919년 6월 2일 입회( 立 會 )를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仁 取 盛 衰 記 (24) 도지마( 堂 島 )를 상회하여 공전( 空 前 )의 높은 시세 인취의 열광시대 鳥 栖 忠 安 이 인취의 개혁과 부흥에 따른 여담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가 지 에피소드가 있다. 첫 번째로 식은( 殖 銀 ) 인천지점은 이 사건 이 동기가 되어 설치되었다. 인취의 기관은행은 그때까지 지금의 야스다은행( 安 田 銀 行 )의 전신 130은행이었다. 이 기관은행의 담 당자가 2년이나 3년에 걸쳐 일어난 인취의 불미스러운 일을 방

12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05 관하며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은 중대한 실수였기 때문 에 기관은행을 보다 건실한 은행으로 바꿀 필요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탁지부장관 스즈키 아츠시(鈴木穆)에게 상공과장 이쿠타 세이자부로가 상담한 결과, 스즈키의 노력으로 당시 막 생긴 식 은의 지점을 인천에 내기로 하고 이를 기관은행으로 삼았다. 식 은 인천지점은 인취의 개혁과 인연이 작지 않은 것으로, 이후 계 속해서 기관은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9년 7월 사장 와카마츠의 밑에서 취인소 경영의 실무를 담 당하게 하기 위해 당시 상공과의 속관(屬官)이었던 아키야마 미 츠오(秋山滿夫, 현 전무)91)를 퇴관시켜서 인취의 영업과장에 앉 혔다. 상황이 바뀌어 계략을 꾸밀 수 없도록 소위 감독자(お目付 役)를 둔 것이다. 또한 이 개혁의 이면에서 활약한 공로를 잊어 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당시 인천부윤 구스노 도시나리(楠野俊 成)92)가 있다. 그의 전직은 현병대위인가 무엇인가였는데 인천부 정(仁川府政)에 임하는 마음은 평범한 일개 무관이 아니었다. 인 취의 폐멸은 인천의 번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91) 원문에는 계속 秋山満雄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로 秋山満 가 맞다. 92) 구스노 도시나리(楠野俊成)는 1867년 고치현(高知縣)에서 태어났으나 원적은 도교(東京)이다. 1885년 3월 오오사카부립중학교(大阪府立中 學校)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하여 1894년 8월 육군 보병 소위에 임 관되었다. 1897년 9월 헌병 소위로 전화한 뒤 누진하여 1905년 2월 대위로 승진하였다. 1907년 1월 통감부 촉탁으로 조선에 건너와 1908년 6월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 사무관을 지냈고, 1901년 10월 이사청 부이사관이 되었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청진부윤이 되 었다가 1916년 겨울 인천부윤에 임명되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 국근현대인물자료.

126 10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고려하여 침식을 잊고 부흥책에 대해 관민 사이에서 알선분주 했다. 인취의 증자에 수반되는 신주의 인수에 대해서도 인천의 곡물상은 물론 일반부민에게도 되도록 인수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해서 권유했다. 큰 소리로는 말할 수 없지만, 그때의 인천부민 중에는 할당된 주식을 겨우 2, 3원의 프리미엄을 받고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 치운 자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합병이다 이전이다 하여 소란스러워진 뒤에 인천 측이 소유한 주식이 적 어서 곤란했던 원인 중 하나는 여기에서 배태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개혁 후의 인취는 구주전쟁의 영향으로 찾아 온 미증유의 대 경기가 뿌린 물보라( 飛 沫 )를 뒤집어쓰면서 굉장한 성황을 보였 다. 시세는 파란중첩( 波 瀾 重 疊 ), 하루 거래량이 105만 석이라는 기록까지 만들었다. 따라서 반기( 半 期 )의 수수료만으로도 80, 90 만원에 달하는 상태로 바로 얼마 전까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고민은 예전의 꿈, 큰 구멍의 일부를 꽤나 과감하게 보전하고, 또 한 주주에게는 6, 7할의 고율 배당을 하다고 하니 대단한 성황이 었다. 정리와 완성에 10년간을 요할 것이라고 보였던 것이 이 호 경기를 만나면서 큰 구멍인 180만원 중 프리미엄으로 벌어 매운 65만원의 나머지 부채 115만원을 겨우 1년 반 만에 깨끗하게 상 각해 버렸다. 그 후에도 호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익의 전부 를 모두 배당으로 돌리라는 등 시끄러운 주주도 있었지만, 이 호 경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잘 모르니 조심하라는 이사자( 理 事 者 ) 의 경계도 있고 해서 건실한 방침을 취하여 이익의 일부는 사내

12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07 에 보류하기로 했다. 이것이 적립금으로 불황이 계속되는 오늘날 에도 계속 호배당을 계속할 수 있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와카마츠가 사장에 취임한 이래 모든 제도를 개혁해 갔기 때 문에 사운(社運)은 여하튼 퇴세만회(頹勢挽回)의 서광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 내지는 예의 농상(農相) 나카쇼 지 렌(仲小路廉)이 미가 폭등은 정기시장 상인의 시세 차익을 노 린 매점에 있다고 생각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구치오토시 (小口落)93)는 안 된다, 증거금은 현금납입으로 제한한다는 등 시 끄럽게 마구 떠들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처넣어 버리겠다 고 검사 출신의 매서운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노쿠 니야 분자에몽(紀国屋文左衛門)94) 같이 배짱 두둑한 투기꾼들도 93) 고구치오토시(小口落)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취인소에 서 계약 물량에 대해 결제할 때 사용하는 간편방법으로서, 신규매매 나 전매다시 사들이기 어떤 것이든 동일점의 동일물건에 대한 매매 는 모두 상쇄하여 사거나 파는 쪽 어느 쪽인가의 초과분만을 현존시 켜 두는 방법이다. 또 다른 뜻으로는 취인소와 중매인 사이에 이루어 지는 결제법의 하나라는 뜻도 있다. Weblio 辭書. 94) 기노쿠니야 분자에몽(紀伊國屋文左衛門, 1669?-1734?)은, 일본의 에 도시대 및 겐로쿠기(元禄期)에 활약한 상인이다. 원래 성은 이가라시 (五十嵐), 이름은 분기치(文吉)로 약하여 기분(紀文)이라 불리거나 기 분다이진(紀文大尽)이라 불렸다.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고, 인물전에 도 불명확한 점이 많아서 절반은 전설상의 인물로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재했다는 설이 주류이다. 분자에몽과 관련하여 귤 전 설 이 있다. 분자에몽이 20대였던 어느 해, 기슈(紀州)는 놀랄 정도로 귤이 대풍작이었다. 수확된 귤을 에도(江戸)로 운반하고자 했으나, 그 해 에도로 가는 항로는 폭풍우로 폐쇄되어 있었다. 에도로 운반할 수 없게 된 귤은 교토상인(上方商人)에게 팔려 가격이 폭락했다. 당시 에 도에서는 매년 대장간(鍛冶屋)의 신을 모시는 후이고마츠리(ふいご祭 り) 가 있었다. 이 마츠리에서는 대장간 지분에서 귤을 뿌려 지역 사 람들에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기슈에서 배가 들어오지 않아

128 10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숨어버려 내지시장의 상거래(商內)도 갑자기 위축되었다. 그렇지 만 이 나카쇼지의 위압도 현해탄을 넘어서까지는 소용이 없었다. 내지가 뜻하지 않은 역신(疫神) 때문에 시달리고 있을 사이에 조 선은 엄청난 우레와 같은 인기, 인취의 거래고는 도지마(堂島) 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기 때문에 그 열광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 상이 간다. 더구나 그 해 조선미 수확이 1,270만 석으로 평년작 보다도 10만 석 정도 적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절호의 조건이 갖 추어져 어찌할 재간이 없다. 노회(老獪)한 투기군은 물론이려니 와 크고 작은 어중이떠중이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아저씨들 이 밀지마 밀지마 하면서 몰려들었다. 귤 가격이 고등하고 있었다. 기슈에서는 싸고, 에도에서는 비싸다. 여 기에 주목한 것이 분자에몽이었다. 분자에몽은 서둘러 대금(大金)을 빌려 귤을 사 모았고, 집에 남아 있던 낡은 배를 고쳐 선원들을 설득 하여 폭풍우 속에서 목숨을 걸고 태평양으로 출항했다. 큰 파도를 넘 고, 폭풍우를 견디며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 분자에몽은 결국 에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모습이 沖の暗いのに白帆が見ゆ る あれは紀ノ国ミカン船 이라는 노래에 남아 있었다. 귤이 부족하던 에도에서 귤은 비싸게 팔리고, 폭풍우를 무릅쓰고 에도 사람들을 위 해 애썼다고, 에도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다. 오오사카에서 대홍수가 나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분자에몽은, 에도에 있는 소금 절인 연어(鹽鮭)를 살 수 있을 만큼 사서 먼저 교토에서 유행병 에는 소금 절인 연어가 제일 좋다 고 소문을 퍼트린 뒤 교토로 돌아 왔다. 소문을 믿은 교토 사람들은 앞 다투어 소금 절인 연어를 구했 고 분자에몽이 운반해 온 연어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기슈와 에도 를 왕복하며 거금을 손에 놓은 분자에몽은, 그 돈을 밑천으로 하여 에도에 재목(材木) 도매상(問屋)을 열고, 에도성을 불태운 메이레키의 대화재(明暦の大火) 당시에 기소계곡(木曾谷)의 재목을 매점하여 한 번에 백만 냥을 벌었다. 이렇게 해서 분자에몽은 소상인에서 호상(豪 商)으로 출세, 부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었다. ja.wikipedia.org/wiki/ 紀伊國屋文左衛門.

12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09 仁 取 盛 衰 記 (25) 가다 긴자부로( 賀 田 金 三 郞 )의 매점 조전( 早 電 )의 시작 鳥 栖 忠 安 오오사카 시세의 조전( 早 電 )이라는 것이 처음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침 1919년 초겨울 쯤 오오사카로부터 아사이 지 사부로( 淺 井 治 三 郞 )라는 남자가 찾아 와서, 보통의 전보보다 훨 씬 빨리 시세를 알 수 있으니 도입하지 않겠는가 하고 제안해 왔다. 인취의 중매인들은 처음에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거래가 시작되자마자 오오사카는 52원에서 46원대까지 급락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조전( 早 電 )을 모두 신용하지 않았다. 보통 의 전보가 1절로 (내용이 전부: 역자) 들어가지 않아 오오사카의 폭락이 전달되지 않았지만, 2절이 되어 겨우 사정이 전해지면서 (아사이의 조전이: 역자) 과연 빠르군 하고 감동하여 꺼냈다. 확 실히는 모르겠으나 아사이가 했던 방법은, 도지마( 堂 島 )에서 곤 란해 하고 있던 사람에게 매달 3, 4천원이나 주어서, 처음에는 1 일 20장 정도 지급전보( 至 急 電 報 )를 치게 했던 것 같은데, 보통 의 전보보다도 약 30분 정도 빨리 도착하고 있었다. 이것이 조 전( 早 電 )의 효시이지만, 그 후 1920년 5월 그 무렵 마루리키( 丸 力 ) 중매점을 경영하고 있던 리키타케( 力 武 )의 형 히라카와 다케 에몽( 平 川 武 右 衛 門 )이 이 조전을 시작했다. 이때의 방법은 경성 에서 받아서 인천에 전화로 알려주는 방법이었지만, 이것이 이치

130 11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카와 하지메(市川肇)95)가 현재 일본상업통신사를 일으키는 단초 가 되었던 것이다. 이즈음에서 한 번 무대를 바꾸어 이번에는 매매전(賣買戰)의 대전 모습을 회고하기로 한다. 이야기는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인취는 새롭게 태어난 이래, 경인 양 지역의 대항 매매전에서부 터 미국인 데시우라의 매점, 임영환, 이용문의 사자 출동과 같은 큰 대전이 메이지시대에 이루어졌지만, 다이쇼시대에 들어서부터 경기가 좋아지면서 대규모로 도전하는 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 고 계속 일어났다. 우선 제일 먼저 손에 꼽히는 것이 가다 긴(賀 田金) 즉 가다 긴자부로(賀田金三郞)의 매점이었다. 가다 긴자부 로는 지금의 가다 나오지(賀田直治)의 아버지로, 당시부터 영등 포 피혁회사의 사장이었다.96) 마침 1917년 봄 무렵부터 츠지카 95) 이치카와 하지메(市川肇)는 아이치현 출신으로 본업이 제사견사(製絲繭 絲) 무역상이었다. 일본 동양잠업주식회사(東洋蠶業株式會社)의 전무이 사로 근무했으며, 1914년 3월 조선으로 건너와 동잠사(東蠶社)를 경영 했다. 1920년 2월 잠사업계에서 물러나 그해 8월 경성전보통신사(京 城電報通信社)를 창설하고, 조선상업통신사(朝鮮商業通信社)를 함께 경 영했다. 1921년 현재 두 회사의 사장이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 근현대인물자료. 1922년 2월 현재 이치가와는 자신이 경영하던 경성 전보통신사, 조선상업통신사, 만주상업통신사의 3사를 합동하여 자본 금 50만원의 주식조직인 일본상업통신사(日本商業通信社)를 계획하고 주식을 모집하고 있었다. 東亞日報 <通信會社近樣>. 96) 가다 긴자부로(賀田金三郞)는 오오쿠라구미(大倉組)의 사원으로 청일 전쟁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이후 모험기업 에키덴샤(驛傳社) 경영을 통해 대만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대만 개발의 원로 로 불 릴 만큼 대만에서 사업에 성공한 가다는 이후 조선으로 사업무대를 옮겨 1911년 조선피혁주식회사를 영등포에 설립하는 등 다양한 분야 에서 활약하였다. 긴자부로의 사업은 대부분 1917년 대만총독부 기사 를 그만두고 조선에 건너온 사위이면서 양자인 나오지가 승계했다.

13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11 와 도미시게(辻川富重)가 가다의 참모가 되어 히로사와 쇼지로 (廣澤正次郞)의 상점을 기관점으로 하여 연속적으로 사자를 계속 하였고(買進み), 어느새 10 수만 석을 사들여 시장을 놀라게 했 다. 결국 막판에 3만 석 정도의 현물을 받기는 했지만, 결과는 가다의 패배로 끝났다. 거물 투기꾼을 고용하여 임했던 가다는 꽁무니를 빼면서도, 6조의 방에서 두 칸 정도의 창을 휘두르는 것 같아서 이런 작은 장소에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며 지고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쓸데없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이긴 사 자 쪽에서는 일부러 허세 부리는 소리로 들렸다나 어쨌다나. 어 찌되었건 세상은 구주전쟁으로 그야말로 황금의 소용돌이가 치 는 재계 공전(空前)의 경기로 가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가다 긴(賀田金)은 백기를 들면서도 오히려 유유하게 퇴각해 갔다. 그렇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하나의 음모가 기획되었다. 당 시 히로사와(廣澤) 상점에 야마시나 기이치(山科喜一)라는 이가 있었다. 뒤에는 경취에서 활약한 인물이지만, 이 사람이 꽤 실력 좋은 책사였다. 이 무렵 경성 도리이 쵸지로(鳥居長次郞)97)의 지 배인 이마이 슈이치(今井修一)가 히로사와 상점에서 사 들여서 3 만 석 정도의 물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야나시나는: 역자) 이 가다가(賀田家)에 대해서는 矢野滄浪, 財界之人百人論, 時事評論社, 1914년, 116쪽 ; 김명수, 한말 일제하 賀田家의 자본축적과 기업경 영, 지역과 역사 25, 부경역사연구소, 2009년 10월, 5-49쪽 참조. 97) 도리이 쵸지로(鳥居長次郞)는 교토(京都) 출신으로, 1913년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에서 용산견사행상(龍山繭絲商行)을 설립하고 견사 중매 업을 경영했다. 1916년에 다시 인천으로 본부를 이전하여 미곡무역업 을 개시하고, 용산에서는 견사업만을 경영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32 11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물량을 노리고 스기모토 미네키치(杉本峰吉)를 공모 파트너로 끌 어들여 히로사와가 없는 틈을 타 한바탕 연극을 꾸몄던 것이다. 즉, 야마시나 등이 50전 정도 값을 후려치면 이마이의 물량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에, 값을 후려쳐서 소위 고 객의 목베기를 하여 이마이의 3만 석을 포기하게 한 것이다. 그 리고 이 3만석을 완전히 자기 쪽으로 끌어 들이고, 거기에다 정 미(正米) 5만 석을 추가로 사들인 뒤, 스기모토 미네키치는 영등 포의 피혁회사로 달려가 가다 긴(賀田金)에게 갖다 바쳤다. 그런데 이 계획에 말도 안 되는 착오가 생기고 말았다. 왜냐 하면 야마시나가 5만 석의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판이 빠르 게도 히로사와의 아내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히로사와는 영등포의 가다 긴의 회사에 있었다. 히로사와의 아내는 큰일이라 고만 생각해서 서둘러 전화로 알렸다. 히로사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야나시나의 계속된 매입에 완전히 당황해서는 그렇 게 되면 큰일이다 빨리 형사에게 부탁해서 야나시나를 붙잡아 라 고 지시했고, 히로사와 아내의 수배로 형사가 쏜살같이 달려 왔다. 이때의 형사는 지금 인천 월미도 극장 지배인으로 있는 사카시타(坂下)였지만, 야마시나는 물량을 사들이는 동시에 몸을 모로 날리며 가다 긴에게 달려가기 위해 인천에서 기차를 탔다 가 주안역(朱安驛)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한편 파트너인 스기모토는 한 발 먼저 빨랐기 때문에 형사의

13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13 손을 벗어나 가다 긴에게 뛰어 들어가는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막상 가서 보니 히로사와가 좀처럼 승인하지 않았다. 온갖 책략 이 끊긴 스기모토는 경성으로 도망갔다. 다음날이 되서 히로사와 는 어제의 장은 부정행위에 의한 매매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터 무니없는 말로 총 해합( 解 合 )해 버리고 말았다. 야마시나 일당은 붙잡혀서 결국 50일 정도 감옥에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거래가 총해합( 總 解 合 )으로 귀결되어 실제로 피해를 입은 이가 한 사람 도 없었기 때문에, 방면되었다. 仁 取 盛 衰 記 (26) 미소동과 인취 고니시( 小 西 )와 사이토( 齋 藤 )의 사자 출동( 買 出 動 ) 鳥 栖 忠 安 이 야마시나의 사건으로 어이없는 꼴을 당한 것은 엉뚱하게 날벼락을 맞은 중매인들이었다. 야마시나 일당이 그런 짓을 한 것은 그밖에도 연계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고 보고 인천경찰 서는 중매인 전부를 염주 꿰듯 잡아왔다. 이 혐의는 물론 곧바 로 벗겨졌지만 일동은 감옥의 만남에는 완전히 질려버려 불평만 만이었다.

134 11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그 후 1918년 여름 무렵, 오오사카의 고니시 다츠지로( 小 西 辰 次 郞 )라는 남자의 매점사건이 일어났다. 내지가 한창 미소동으로 시 끄러울 때, 중매점 모리 츠치로( 森 槌 郞 )의 상점에서 당한( 當 限 ) 2만 석, 선한( 先 限 ) 3만 석을 사들였다. 오오사카 상인 일류의 날카로운 예측능력으로 내지의 미소동을 이용하여 한밑천 잡고자 계획한 일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니시가 쌀의 매점에 적극적이라는 소문 이 자자해 지자 조선의 민중도 용서하지 않았다. 내지 정도의 소동 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산에서 불길이 시작된 조선의 미소동도 지역마다 상당히 독이 올라 있을 때였다. 바로 그때 조선호텔에 머 무르고 있던 고니시가 민중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민중은 갑자기 조선호텔을 포위하여 고니시를 끌어냈는데, 그의 태도 여하에 따라 서는 (민중에게: 역자) 맞아 죽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상황이었다. 고니시는 조선에서 사서 내지로 가지고 가 염가판매할 작정이라고 파랗게 질려 변명했지만 (민중들은: 역자) 좀처럼 귀기울여 듣지 않 았다. 결국 사들인 물량을 풀기로 약속하고 겨우 위기에서 탈출했 지만 이 때문에 고니시는 완전히 겁에 질려 서둘러 진을 풀었다. 고니시가 돌아간 뒤 계속해서 사이토 규타로( 齋 藤 久 太 郞 )가 뛰 어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정이 매우 성가시게 되었다. 고니시 의 물량 정리가 끝나고 머지않아 도쿄로부터 왔다는 가와무라 세 이하치( 川 村 誠 八 )라는 남자가 모리 츠치로의 상점을 방문하여 중 대한 비밀 상담을 제안했다. 가와무라는 사이토 규타로가 파견한 바람잡이 부하였다. 모리를 불러 낸 가와무라는 사이토 규타로의

13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15 뜻을 받아 왔다는 취지를 밝히고 일체의 사정을 밝히면서 얼마든 지 괜찮으니 살 수 있을 만큼 사 달라고 부탁했다. 그 무렵 모리 는 중매인으로서, 욱일승천의 기세였던 고니시가 어이없이 녹초가 되어 버린 것에 화가 치밀어 남몰래 속을 끓이고 있던 때였기 때 문에, 두 가지 답변으로 이 상담에 응해 잠깐 사이에 14만 석을 사들였다. 그때 상대편이 되어 판 쪽은 중매인 아라키 스케타로 ( 荒 木 助 太 郞 ), 모리와 아라키가 서로 상대가 되어 쌍방으로부터 빈틈없이 손을 쓰는 기묘한 작전, 천변만화( 千 變 萬 化 )의 비술을 다하여 싸웠지만, 사자 쪽이 경기 호조라는 조류를 타고 대체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토록 대담한 아라키도 결국 함락당하여 24, 5원대가 되었을 무렵 싸움을 끝내고 가와무라의 군문( 軍 門 )에 항 복하고 7만 석 정도는 해합( 解 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해합( 解 合 ) 이야기를 모리가 가와무라에게 전했을 때 가와무라는 해합하게 되면 지금까지 서로 부채질한 시세는 떨어질 것이 틀림없지만, 그쪽이 잘 해 줄 수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모리는 물론 그 점에는 성산( 成 算 )이 있다고 하여 가 와무라는 해합( 解 合 )을 승낙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해합 ( 解 合 )해 보니 과연 싼 값으로 모리가 말했던 것과 같이는 좀처 럼 되지 않았다. 사자 쪽의 가와무라 즉 사이토는 7, 8만 석의 물량을 더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속을 끓이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기타무라 고로( 北 村 五 郞 )가 남의 이야기에 방해를 놓 았는데, 모리가 아라키와 결탁하여 가와무라에게 막판에 가서 배 신했다고 살살 꼬득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가와무라와 모리는

136 11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거북해져서 결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가와무 라와 손을 떼고 보니 모리는 가와무라에 대해 오기가 생기고 말 았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남자다, 이대로 물러날 성 싶 으냐 라고 투기꾼의 오기로 아라키의 편이 되어 팔자 쪽으로 돌 아서고 말았다. 모리와 손을 끊은 가와무라는 구와노(桑野), 이마무라(今村), 우츠미(內海)를 기관점으로 하여, 이 또한 기세가 올랐다. 그러 나 뭐라 해도 시세는 오름세였다. 팔자 쪽은 날마다 형세가 나 빠졌다. 특히 아라키는 그 무렵 5만 석 이상의 팔 물량을 더 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마지 막 방법으로 쓴 것이 난수(亂手)98)였다. 1919년 3월의 180만원 사건이 발각되기 직전이기 때문에, 그 무렵의 아라키는 취체역인 오쿠다 사다지로(奥田貞次郞)와 짜고 몰래 취인소의 돈을 가지고 나와 군용금에 쓰기도 했고, 부도난 약속수형으로 추증(追證)을 내기도 했다. 따라서 모리와의 사이 에 난수(亂手)를 써서 장을 멈추게 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 다고 상담이 정리되었다. 아라키는 조용히 오쿠다를 방문하여 이 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이면에서 책동시킨다는 계획을 빈틈없이 준비해 갔다. 98) 난수(乱手, らんて)란, 팔자 쪽 또는 사자 쪽이 시장을 혼란시킬 목적 으로 엉뚱한 가격을 제시하거나 대량으로 주문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乱手をふる 라고도 한다. JCFIA/yougo09.

13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17 仁取盛衰記 밑천 1만원으로 이익 50만원 전 조선을 상대로 나카토시(中利)와 오하라(小原)의 사자 강행 鳥栖忠安 난수(亂手)로 시세를 완전히 혼란시키기에는 모리(森)와 아라 키(荒木)만으로는 다소 연기자가 부족하다고 하여 다킨(田金) 즉 다나카 긴페이(田中金平)의 아들 다나카 노리카즈(田中哲一)를 끌어들여 거들도록 했다. 드디어 그 날이 되자 미리 짜 놓은 각 본대로. 전장(前場)이 끝나기 10분전에 (장의 끝남을 알리는) 딱 따기를 치려고 하는 찰나, 전광석화와 같이 나타난 세 명이 한 편이 되어 흔히 히키치가이(引ちがい)99) 라 칭하는 난수(亂手) 를 부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난수도 난수, 줄다리기 흥정에 너무 익숙한 세 명이 눈에 띄는 출중한 기량과 화려한 밀어내기로 시 장을 압도하자, 시장대리인(場立)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고 있는 것을 곁눈질하고, 세 명은 미친 사람처럼 당한(當限), 중한 (中限), 선한(先限) 가리지 않고 보기 좋게 팔아치웠다. 그렇게 되자 시장은 혼란에 빠져 대소동, 결국 사자 쪽이 예상한 대로 전개되어 25원 가량으로 장이 끝나고 말았다. 99) 히키치가이의 원래 뜻은, 두 장 이상의 창문미닫이 따위를 두 줄의 홈을 따라 좌우로 여닫는 것을 의미한다. Weblio 辭書.

138 11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자 마침내 장이 끝나고 보니 유언비어가 횡횡한다. 어떤 이는 내지의 간상(奸商)의 손길이 미쳐 쌀을 매점하고 있다고 하고, 어 떤 이는 조선 내의 미곡상 중 유력한 사람들이 연합해서 매점을 하고 있다 한다. 여러 가지 풍설이 자자해지자, 마침내 명부윤(名 府尹) 구스노 도시나리(楠野俊成)는 방치할 수 없어서 중재에 나서 팔자 쪽과 사자 쪽 쌍방을 부청으로 불러 해합(解合)할 것을 권했 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팔자 쪽으로서는 작전도(作戰圖)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사자 쪽은 좀처럼 응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주장이 재미있다. 우리들은 조선에서 쌀 을 사서 내지로 가지고 가 희생적으로 그것을 염가판매하여 모국 의 어수선한 현상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려는 국가적 견지에서 사 고 있는 것을 난수(亂手)를 써서 장을 무너뜨리고, 우리들의 행동 을 방해하는 것은 정말 괘씸하다, 해합(解合) 같은 것은 당치도 않 다 고 짐짓 허세를 부리며 좀처럼 부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단한 구스노도 힘겨워하는 모양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사자 쪽의 모리가 좀처럼 납득하지 않는다. 잘난 체 하고 있지만 그것 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원래 이 매매전(賣買戰)의 당초 계획에 대 해서는 내가 상담을 받았다. 그때의 출발점은 아라키가 상당한 이 문을 남기고 있어서 시장을 마치 제세상인 양 위세를 부리며 걸어 다녔는데, 그것이 꼴 보기 싫었다. 어떻게 좀 해서 저 돈을 우려내 지 않겠는가 하는 제안이 있어서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싸움이 진 행되어 가자 사건은 미가(米價)라는 국민생활의 안정에 중대한 관 계를 갖는 일. 이래서는 안 되겠다하고 도중에 정신 차려서 나는 번연심(飜然心)을 번복했고, 그 결과 일변하여 팔자 쪽으로 돌아서

13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19 매점 행위에 대항했던 것이다 라고 있는 일 없는 일 섞어가면서 시원시원하게 몰아붙였다. 여기에는 사자 쪽도 완전히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자기 편을: 역자) 배반한 모리는 처 음부터 복잡한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자 쪽은: 역자) 뭐라고 대꾸할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여우와 너구리가 서로 속이는 것 같은 논전(論戰)을 듣고 있던 구스노는, 사자 쪽의 말도 못 붙일 만큼 쌀쌀한 태도에 당 혹했는지 내심 답답해하고 있던 차, 팔자 쪽의 논박에 크게 기뻐 하며 좋아 좋아 하며 말을 걸기도 하고, 해합(解合)에 응하지 않 으면 폭리취체령을 발동시켜 사자 쪽 전부를 잡아들여 버리겠다 고 윽박질렀기 때문에, 일동 움츠려 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팔자 쪽은 계획이 들어맞아 21원대의 조정가격(棒値)100)으로 매 우 유리하게 해합(解合)했고, 사자 쪽은 모두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 해합(解合)에 대해 구와노 한 사람은 맹렬하게 반대했다. 어 찌되었건 미가의 대세는 오름세에 있었다. 그냥 놓아두면 사자 쪽의 승리가 될 상황인데 너무나 형편없는 조정가격(棒値)이라서 반대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팔자 쪽도 아무리 폭리취체 령 직전이라고는 해도 너무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생각 했는지 가격이 쌀 때 사 들였던 쌀을 내 놓아 사자 쪽에 5만 원 정도 이득을 보게 하여 마무리 지었다. 100) 조정가격(棒値, ぼうね)은, 주식이 폭락했을 때 취인소가 중간에 끼 어들어 매매자의 파산을 막기 위해 적당한 가격으로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JCFIA/yougo06.

140 12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중매인들은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진정되었지만, 진정할 수 없 는 것이 사자 쪽의 중심인물 가와무라다. 그는 그런 말도 안 되 는 일이 있는가 하여 이번에는 자신의 물량을 맡긴 중매인을 상 대로 150만원의 손해배상요구의 소송을 제기하고, 도쿄에서 무라 카미( 村 上 ) 외 수 명의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웠지만, 중매인 측은 매매 규약을 방패로 삼아 싸운 결과 중매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이에 어떤 기사가 더 있는지 잘 모르겠다. 스크랩되어 있 는 신문자료에는 그냥 아래의 기사로 곧바로 연결되고 있다. 그 러나 합병과 관련해서 언급한 내용으로 보아서는 한참 뒤의 기 사인 듯하다. 역자 주) 이 되었지만 대체로 경성 연시장으로서는 경인 두 취인소의 합병 등으로 갑자기 취인소 승격은 지난하기 때문에, 우선 그 전 제로서 신령( 新 令 )의 규정에 의한 종목별 청산취인시장( 銘 柄 別 清 算 取 引 市 場 )의 실현을 위해 매진할 모양이다. 그러나 내지의 취 인소 대 종목별 청산취인거래소 등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에 대 해 본부가 어떻게 이를 다룰 것인가는 매우 주목되고 있다.

14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21 仁取盛衰記 모리(森)와 우츠미(內海)가 필사적으로 사자 강행 전 조선을 상대로 鳥栖忠安 1919년의 인취 개혁 후 첫 볼거리는 부산의 나카도시(中利) 즉 나카무라 도시마츠(中村利松)의 사자 출동(買出動)이었다. 명 의는 나카도시였지만, 실제 투기 사업에 돈을 댄 것은 아들인 나 카무라 도쿠타로(中村徳太郞)였다. 이 외에 파트너가 한 사람 더 있었다. 경성 가지하라 스에타로(梶原末太郞)101)의 점원인 오하 라(小原)였다. 두 사람 모두 아직 20대의 애송이였다. 이들의 후 견에 선 것이 가쿠나(角ナ)의 모리 츠치로(森槌郞)와 마루나(丸 ナ)의 히로사와 쇼지로(廣澤正次郞)였다. 모리와 히로사와 두 사 람이 배후에 있으면서 지시했다기보다도 오히려 나카도시와 오 하라를 미끼로 군용금(軍用金)에서 흥정까지 자신들이 직접 전쟁 에 임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리키타케 가지로(力武嘉次郞)102)도 101) 가지하라 스에타로(梶原末太郞)는 1872년 오오이타현(大分縣) 출신 이다. 1887년 10월 조선에 건너온 이래 무역상을 개시했다. 이후 금 건(金巾), 방적, 석유, 해산물의 수입 및 곡물 수출업을 시작했다. 1897년 홋카이도(北海道)로 건너가 다시마 산지를 시찰하던 중 무네 다니(宗谷) 다시마가 조선 내에서 사업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 수입을 기획했다. 또한 석유조합을 만들고, 쥬유합자회사(十友合資會 社)를 창립했다. 1921년 현재 미곡상으로서 가지하라상점(梶原商店) 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외에 오랫동안 경성은행(京城銀行)의 이사와 거류민단 및 상업회의소 의원을 지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 현대인물자료. 102) 리키타케 가지로(力武嘉次郞)는 1865년 사가현(佐賀縣) 출신으로 게

142 12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연합하여 20원대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리키타케(力武)는 히라타 나오타(平田直太) 명의의 중매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런데 리키타케가 도중에 도망가 버렸다. 왜냐하면 나카도시도 본 인이 아니고, 오하라도 주인인 가지하라가 당시 오오사카에 가서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애송이였고 노련한 척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돈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리키타케가 몰래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리와 히로사와 는 불같이 노했다. 그래서 그 앙갚음으로 허를 찔러 놀라게 하 고자 리키타케를 적으로 돌려 사들이기 시작했다. 리키타케가 본 대로 나카도시도 오하라도 실제로는 군용금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리와 히로사와로서는 이미 배에 승선한 탓에 여기까지 왔으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결국 후견에 섰던 관계로 자신의 돈을 입체(立替)하여 사자 강행(突貫買い)으 로 나섰다. 이때의 팔자 쪽 사람들을 보면 진남포의 아라이 신 조(新井新蔵)103), 사이토 규타로(齋藤久太郞)104), 부산의 사코 겐 이오기주쿠(慶應義塾)를 졸업했다. 일찍부터 조선에 건너와 미곡 및 무역업에 종사했고 1904년에 리키타케물산주식회사(力武物産株式會 社)를 창립했다. 이후 인천곡물협회장, 인천정미조합장, 인천부협의원, 인천상공회의소 의원을 역임하는 등 인천 건설의 대은인 으로 평가되 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03) 아라이 신조(新井新藏)는 진남포 미곡계의 권위자 로 1933년 11월 10일에 평안남북도 및 황해도, 즉 서선지방(西鮮地方)을 대상으로 한 마루나곡물협회(丸ナ穀物協會)가 설립되자 그 회장에 취임했다. 平壤 每日新聞 <丸ナ穀物協會設立さる, 同業者一堂に會しき のふ晴の發會式>. 104) 사이토 규타로(齋藤久太郞)은 1874년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으로 1894년 9월에 조선에 건너와 청일전쟁에 시바 고로(柴五郞) 군사령

14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23 타로(迫源太郞), 오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군산의 나카이(中井), 모리 기쿠고로(森菊五郞)105) 등이었고, 거기에 인천에서는 우츠 미 슈쿠로(內海叔郞)에 리키타케 가지로(力武嘉次郞) 등 전 조선 의 유력자들을 동군으로 하여 상대편 진영이 짜여졌다. 대전쟁의 팔자 쪽 진영에는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의 얼굴도 보였다. 관의 통역으로서 종군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도 평양에서 일 본군의 물자구입을 지원했다. 1896년 일본에서 용정기(舂精機, 籾摺 機) 5대를 수입하여 인천에서 용정(籾摺) 및 잡화상을 개업했다. 그 후 평양으로 옮겨 수출입무역과 미곡상을 경영하고 진남포에 지점 및 공장을 설치하여 미국식 엥겔베르크 용정기 및 엥겔식 정미기(精 米機)를 갖추고 개업했다. 1912년 대련(大連)에서 油房豆粉 제조 및 수출입무역상을 경영하는 한편 中華製粉, 滿洲殖産, 滿洲베이큠, 滿 洲倉庫, 日華銀行, 長春銀行, 四平街銀行 등을 창업하고 사장 및 이 사로 경영에 관여했다. 1913년 경성에 지점을 설치하고 곡물 이출 입 무역업을 개시했고, 1917년 경성에 제사견직물공장을 창업하고, 평양 및 인천에 정미소를 개설했다. 1918년 평양에 기계소주 제조 공장을 일으켜 4만 2,000 석의 술을 양조했고, 1919년에는 일본주 양조업을 기획하여 조선쌀을 원료로 일본에 필적할 만한 술을 제조 하여 일본 및 만주에도 이출했다. 1935년 경성에 소맥을 원료로 하 는 제분공장을 설립했다. 1922년 齋藤合名會社를 설립하여 본점을 경성에 두었고, 1935년 현재 滿洲의 특산물과 미곡의 수출입무역을 하고 있었다. 1911년 평안남도와 황해도에서 농사를 경영했으며, 1935년 현재 평안남북도, 황해도, 전라남도, 충청남도 등 각지에 농 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조선곡물협회연합회 간사장, 社團法人鮮米協 會 고문, 工業協會 常任理事 등을 역임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 국근현대인물자료. 105) 모리 기구고로(森菊五郞)은 1876년 효고현(兵庫縣) 출신이다. 병역을 마친 후 가업을 계승하여 오오사카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다가 1902 년 전라북도 군산으로 진출하여 미곡무역을 시작했다. 이후 精米籾 摺工場을 인수 경영했고, 1919년 이후 농장 경영에도 손을 뻗쳐 충 청남도 강경의 相馬農場을 시작으로 전라북도 김제익산옥구, 충청 남도 논산서천부여 등지의 토지를 매수하여 森菊農場을 창설했다. 1926년 현재 군산미곡상조합 조합장, 군산미곡신탁회사 사장으로 활 동 중이었고, 1935년 현재는 群山米穀取引所 이사장, 조선신탁회사, 조선화재보험회사 등의 중역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군산상공회 의소와 학교조합의 의원, 부의회 의원, 도평의회 의원 등에 선출되는 군산의 명망가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44 12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9월한이 되자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의지와 의지가 불꽃을 튀기며 서로 싸우는 처참한 장면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사자 쪽은 얼마간이라도 올려 시세의 대세( 大 勢 )를 탔다. 시세가 오르 는 듯했다. 사고 사고 계속 사들였기 때문에 팔자 쪽 진영의 일 각은 34, 5원대에서 이미 무너졌다. 즉 후지흥업( 不 二 興 業 )의 후 지이 간타로( 藤 井 寛 太 郞 )와 해합( 解 合 )하고, 그를 자기편으로 끌 어들였다. 다음으로 41, 2원대가 되어 사이토 겐타로와 해합( 解 合 )했다. 이 해합( 解 合 )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장면이 있었다. 마침 1919년 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장소는 경성의 하나츠키 ( 花 月 ), 사이토의 물량을 맡아두고 있던 기타지마 고로( 北 島 五 郞 ) 와 사이토 자신, 거기에 상대편인 모리와 히로사와가 남 몰래 만 나 흥정을 끝내고 해합( 解 合 )하기로 합의했다. 나머지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큰 연회였다. 여하튼 이 해합( 解 合 )이 알려지면, 시 세는 폭발할 것이 뻔했다. 따라서 오늘밤은 기차도 끊겨서 인천 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전화도 걸지 않았다. 다음날 장이 설 때까지 일동이 외부와의 접촉을 끊기로 합의하고 만취되어 야단 법석을 떨었다. 그 사이에 틈을 보아 기타지마가 자동차로 도망 쳐 돌아가려다 발각되어 멱살 채 붙잡혀 다시 마시는 등 서로 드잡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다음날 장이 서고 보니 1엔 10전 높은 가격(110 丁 高 )으로 시작, 우츠미상점에서 일찍부터 사 기 시작해 다시 시세가 비등, 결국 49원 90전으로 장이 끝나고 팔자 쪽의 총 함락으로 대세가 정해졌다. 그래서 46, 7원의 선물

14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25 만을 내 놓고 나머지는 총 해합( 解 合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팔자 쪽이 눈물로 호소해 온 것에 대해 사자 쪽은 한 발 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버텼지만, 결국 성의 표시 정도로 10전을 빼주어 49원 80전으로 해합( 解 合 )하게 되었다. 이때의 거래량( 取 組 高 )은 약 20만 석, 나카도시와 오하라는 원래 현금 1만원씩밖 에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돌아갈 때는 현찰로 50만원씩을 품에 지니게 되어 의기양양 개선장군의 기세를 보였다. 仁 取 盛 衰 記 (29) 쌀장수의 아이돌보미가 일약 벼락부자로 호사스러운 결혼 피로 鳥 栖 忠 安 해합( 解 合 )이 이루어질 당시는 당시 와카마츠 씨가 부산부윤에 서 (인취의:역자) 사장이 된 직후였다. (와카마츠는: 역자) 이런 때 중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사정을 몰랐고, 단지 어슬렁 대면서 어떻게 방책을 세워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카도시는 부산부윤이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한 번만 자기 얼굴을 좀 세워 달라고 부탁한 결과, 겨우 이야기를 매듭짓

146 12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의 인취는 고양이도 주걱 도 닥치는 대로 샀기 때문에, 인취에 몰려가 사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인취는 다루기가 어려웠 다. 긴 담배대의 조선인들조차 2천원, 3천원의 돈다발을 신문지 로 말아 중매점 점두에 툭 던져 놓고, 이것으로 쌀을 사 달라는 신규 고객이 4, 5명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고객이라면 미 곡 시세가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할 리가 없다. 그것도 2천원, 3천 원으로 묶여 있으면 중매점에서도 정중하게 취급하겠지만, 2, 3 백 원의 증거금이라면 안 된다 안 된다 라고만 할 뿐 귀찮아서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이런 열광세, 일류 중매점은 1개월의 구 전만으로 순익이 7, 8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정말 문자 그대로 황금의 노도였다. 이 무렵의 세상을 말해주는 실화가 하나 있다. 지금은 옛날 꿈의 흔적이지만, 현재 인천에서 김빠진 맥주 같은 생활을 계속 하고 있는 남자로, 통칭 반지로(潘次郞) 즉 반복창(潘福昌)이라는 자가 있다.106) 그는 원래 아라키 중매점의 아기돌보미였다가 잠 깐 일에 손을 댔던 것이 상당히 싹이 붙어 그때부터 순조롭게 돈을 벌었다. 어제까지 찬밥에 조리를 신고 콧물을 훌쩍거리던 견습생 지로(次郞)였지만, 오늘은 일약 삼십 수만 원의 부르주아 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여학교 출신의 꽤나 모던한 조선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경성 남산정 경성호텔에서 구스노 부윤 106)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전봉관, 럭키경성, 살림, 2007년, 제1부의 두 번째 이야기 <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 유전 - 청년갑부 반 지로, 광인狂人이 되어 미두시장을 떠돌다 죽다> 참조.

14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27 이하 조야의 명사를 초대하여 결혼식 피로연을 열었다. 더구나 그 피로연에는 인천에서 수십 대의 자동차를 한 줄로 세워 타고 하루밤 연회에 7천원을 쓰는 호사를 부렸다. 그 후 그는 외리(外 里)에 토지를 매수하여 웅장한 저택을 마련하고자 했는데, 땅고 르기까지 6만원을 썼다. 이제 막 (저택의: 역자) 담장 일부가 생 겼을 즈음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납작해지고 말았다. 따라서 그의 마음에 그린 궁전 같은 저택은 실현되지 못하고 끝났지만, 땅고르기를 한 토지는 현재 외리(外里) 모 병원의 부지가 되었 다. 그 후 그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지금은 인취의 청소 등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는데, 그 옛날 2만 석의 쌀을 두고 마루 마(丸マ= )에 맞섰던 기세는 약으로 쓰려 해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실로 변화해 가는 인간세상을 느끼게 한다. 또한 1923년에는 히로사와 쇼지로(廣澤正次郞)와 우츠미 슈쿠로 (內海叔郞) 연합 매입에 현지 투기꾼들이 따라서 매매에 나섰다. 이 에 맞추어 아사노(淺野)가 팔자 쪽 상대가 되어107) 대파란을 일으켰 다. 그러나 이때는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재계는 난무(亂舞)의 꿈에 서 깨어나 경기가 하락세로 돌아섰을 때였다. 호쾌한 우츠미와 히로 사와의 완력매입108)으로도 대세를 당할 수 없다. 모든 시세의 묘체 107) 원문의 賣(り)向かう 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손님의 사자 주문을 받 은 증권업자나 상품중매인이 손님의 상대가 되어 대항적으로 파는 것을 말한다. Weblio 辭書. 108) 완력매매(腕力賣買)란, 자력(資力)에 따라 시세의 경향이나 외적인 재료를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팔거나 사거나 해서 형성된 인위적 인 시세를 말한다. 이렇게 팔거나 사는 것을 완력펼치기(완료쿠바 리, 腕力張り)라 한다. JCFIA/yougo10.

148 12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妙諦)는 대세를 파악하여 그 조류를 타는 데 있다. 따라서 인식부 족이 투기꾼에게는 대금물(大禁物)이며, 특히 이 대세에 역행하여 자 신의 힘만 믿고 매매를 강행하게 되면 결과는 반드시 실패이다. 인 취 중매인의 흥망을 살펴보아도 이 이법(理法)은 명확하게 관찰된다. 그렇긴 하나, 일단 시작하면 흥하느냐 망하느냐, 할 수 있는 데까지 하지 않으면 손을 뗄 수가 없는 것이 투기꾼의 기질이다. 따라서 최 초 출발점이 중요하고, 출발점을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재계에 대한 인식을 틀리지 않을 정도로 항상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 기회에 우츠미와 히로사와의 사람됨을 조금 소개해 둘 필 요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인취가 낳은 성공자이지만, 같은 성공 이라 해도 삶의 방식이 다소 다르다. 우츠미는 순수한 시세(相 場)로 돈을 벌어 성공의 제일인자가 되었지만, 히로사와는 중매 인으로 돈을 벌었다. 더구나 같은 중매인으로서 돈을 벌었다고는 해도 (히로사와는: 역자) 아사노 다사부로(淺野太三郞)나 이마무 라 가쿠지로(今村覺次郞)와도 다른 길을 걸었다. 히로사와의 이 익은, 증거금 대용으로 흘러와 어쩔 수 없이 인수한 부동산이나 주식이 1918, 19년경의 호경기 때 값이 올라 이익을 낸 것이었 다. 그의 사망을 전후하여 다시 가격이 하락하여 세상에서 말하 는 정도의 실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공공방면(公共方面)에 도 아낌없이 돈을 낸 사람으로, 지금의 인천남상업학교(仁川南商 業學校)109) 등에는 적잖은 돈을 기부하고 있다. 109) 인천남공립상업학교는 1933년 인천북공립상업학교를 합병하였고, 해 방 이후 인천고등학교가 되었다. 인천고등학교 홈페이지 (2015년 1 월 5일 검색).

14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29 仁取盛衰記 두 사람의 대성공자 우츠미(內海)와 히로사와(廣澤) 鳥栖忠安 우츠미(內海叔郞)와 히로사와(廣澤正次郞) 두 사람 모두 투기 (相場) 배짱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에도 수법은 달랐다. 1923년의 연합 매입 때에도 우츠미는 정면 승부로 한 번 매입으로 나왔지만, 히로사와는 남몰래 빈틈없이 손을 써서 선물을(先物)을 우리코시(賣越)110)하고 있었을 정도였 다. 우츠미는 과연 투기로 돈을 번 만큼 신출내기 때부터 충분 히 성공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투기에 손을 댄 것은 1910년 가을 무렵부터였던 것 같은데, 그때까지는 미곡무역 상으로서 견실하기만 한 남자였다. 그의 수법은 히카레고시111)는 매우 약하지만 일단 리노세112)가 되면 상당히 강한 남자로, 받을 110) 우리코시(, 賣り越し)란, 특정 증권회사나 투자주체가 일정기간 내에 판 수량과 산 수량을 비교했을 때 판 것이 산 것보다 더 많은 때 우리코시 라 한다. 이때 수량은 주수(株数)로 판단할 수도 있고, 금 액으로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어떤 일정 시점에 판 것이 산 것을 상회하는 물량 상태를 말한다. Weblio 辭書. 111) 하카레고시(引かれ腰)란, 매매계약을 정산하여 손해로 판정되었을 때, 더 추증(追證)을 넣어 견뎌낼 수 있는 인내력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추증은, 신용거래청산거래에서 보증금본증거금이 부족했을 때에 집어넣는 보증금증거금을 말한다. Weblio 辭書. 112) 리노세(利乗せ)란, 이익을 보았을 때 그 이익을 더한 자금을 밑천으 로 매매계약을 증가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리노세를 위해 파는 것을 리노세우리 또는 우리노세 라 하고, 리노세를 위해 파는 것을 리노세가이 또는 가이노세 라고 한다. Weblio 辭書.

150 13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것인가 건넬 것인가 바로 직전까지 궁지에 몰아놓지 않고서는 추격의 손을 늦추지 않았다. 그것도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만년 에는 히카레고시도 강해져 갔다. 그의 성공의 뒤에는 부인(지금 의 미망인)의 힘이 또 매우 컸다. 투기 배짱에서는 부인이 오히 려 남편 이상으로 강했다. 형세가 나빠 기가 싹 죽었을 때 (남편 을: 역자) 격려하여 다시 분기( 奮 起 )시킨 것은 완전히 이 부인의 힘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의 우츠미, 히로사와 두 집을 각각 살 펴보면, 히로사와의 미망인은 고베( 神 戶 )에 있다는 소문이지만, 우츠미가의 경우 현명한 미망인에 의해 경제 상태가 조금도 나 빠지지 않았지만, (히로사와가의 경우는: 역자) 우츠미가에 비해 너무 비참했다. 우츠미는 만년 중매인을 그만두고 경인( 京 仁 )의 중역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 았다. 현재 이 집안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도 이런 희망 하에서 선대( 先 代 )가 모았던 것 같다. 히로사와는 염색집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고난시대 에는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함께 요지경( 瑤 池 鏡 )을 가지고 시골 의 신사 앞 노점으로 돌아다닌 시대도 있었다. 인천에 와서도 아내는 극장( 芝 居 小 屋 ) 내 다실의 여급을 하거나 떡장수를 하거 나 하여 가난함의 맛을 빠짐없이 맛보았다. 중매점을 낸 것은 1909, 10년경으로 처음에는 물량으로 50석의 쌀을 만드는 데도 힘들 정도의 미력한 자로 항상 얼굴이 상기되어 시장에 출입하 고 있었다. 따라서 옆에 있는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중매인을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하고 충고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15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31 하다. 그는 누가 뭐라 하든 나도 사내대장부다. 일단 거래를 시 작하면 끝까지 내버텼다. 그의 두둑한 배짱을 높이 사서 최초로 전주(錢主)가 된 것이 이소무라(磯村)라는 남자, 그 다음으로 아 사마츠 다로(淺松太郞)113)가 든든한 백이 되어 상점을 열고 있을 때, 가다 긴(賀田金)의 사자 출동에 그의 상점이 기관점이 된 것 을 계기로 눈에 띄게 뻗어나갔다. 히로사와가 크게 된 것은 투기(相場) 그 자체보다도 중매인으로 서였다. 즉 1만 몇 천 원 정도의 증거금 대신에 흘러들어온 개성 방면의 토지가 호황을 만나 일약 수십만 원이 되거나, 3만 원 정 도 취한 농공은행 주식 5천 주가 식은(殖銀)으로 바뀌면서 약 4만 주가 되었다. 따라서 식은의 신주가 50원, 부모(親)가 100 몇 원 이라는 값을 부른 시대에는 히로사와의 재산(身代)이 200만원이라 고 알려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1925년 경성의 대홍수 때 사망했지만, 그때는 경기도 함께 내림세에 있었기 때문에 자산 평 가도 한 때 여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많은 비용을 들였다. 이야기가 다소 거슬러 올라가지만 1920년 3월경 이 히로사와 113) 아사마츠 다로(淺松太郞)는 1872년 이시카와켄(石川縣) 출신이다. 1904, 5년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왔다가 일시 귀국했다 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육군 용달 및 토목건축청부업을 시작했다. 1921년 현재 주류양조업 및 미곡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사이 朝 鮮燐寸 감사역, 조선화학제약주식회사 사장, 조선토지경영주식회사 취체역, 津田組 취체역 등을 역임했다. 인천미두취인소의 중매인위 원장을 지냈고, 거류민단 의원과 인천상업회의소 의원 등을 역임했 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52 13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가 가짜전보사건을 일으켜 큰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오오사 카의 시세는 정확히 1엔이 싸다(百丁安)고 하는 전보가 들어오고 있는 것을 오히려 1엔이 비싸다(百丁高)고 큰 소리로 장을 흔들 며 돌아다니고, 시세가 비등한 것에 편승하여 마구 사들이고 있 었던 3만 석을 보기 좋게 되팔고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경찰에 붙잡혀 사기죄로 조사를 받았지만, 고의로 한 것 인지 아니면 실제 정상적인 거래에서 발생한 것인지 판단이 서 지 않았다. 힘들게 체포한 경찰도 매우 박약한 증거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무엇인가 달리 적당한 증거가 없을까 하고 가마우지의 눈과 매의 눈이 되어 열심히 찾았다. 이때 운 나쁘게 네아와세킨(根合金)114)이라는 도박자금 문제로 걸리고 말 았다. 지금 월미도 유원지에 있는 사카시타(坂下)가 형사였을 때 의 일이었다. 깨끗하게 수사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내심 난처해 하고 있던 인천서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했다. 114) 원래 네아와세(根合)란,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행해졌던 놀이이다. 단오 때 좌우로 나뉘어 창포(菖蒲) 뿌리의 길이를 서로 비교했던 유 희이다. 여기에 와카(和歌)를 읊으며 승부를 겨루기도 했다 한다. 이 것이 발달하여 뒤에 당상관 이상의 고관들이 가지고 놀던 도박의 일 종이 되었다. Weblio 辭書.

15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33 仁取盛衰記 우츠미(內海)히로사와(廣澤)의 연합 사자 출동 아사노(浅野) 혼자서 팔자 포지션 鳥栖忠安 네아와세킨(根合金)이라는 것은, 팔자든 사자든 고객이 차액을 남겨 이익을 보는 경우 중매인이 이익의 일부를 떼는 것으로, 중 매인이 잘 쓰는 수법이지만, 이것이 완전 사기적 행위라는 이유 로 결국 말려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네아와세킨문제는 히로사 와 혼자로 그쳤으면 좋았을 테데, 그 파문은 전 중매인에게 확대 되어 장부는 전부 압수되고 말았고, 매일 점원이 인천서에 가서 조사를 받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가장 그 금액이 적었던 두세 명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 아사노와 같은 이는, 최초에는 눈감아 주는 듯했지만, 후시아키나이우치115)로 시세가 21원에서 30원대 까지 회복되는 도중, 오오사카가 보합세인데도 변함없이 사들이 기를 계속해서 후시 하나로 2엔(200丁) 정도 실제보다 비싼 값으 로 사들였다. 부자연스러운 시세를 낸 것이 운이 다하여 관리들 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곧바로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 115) 후시란, 과거의 비쌌을 때의 가격이나 쌌을 때의 가격 수준으로, 심 리적인 저항선을 말한다. 가격이 상승해서 과거 비쌌을 때의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손익이 제로이거나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팔아버 리고, 과거 쌌을 때의 가격 수준에 도달하면 여기가 바닥 이라고 생 각해서 사자 주문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역으로 후시메(節目)를 벗 어나면 그때부터 스피드를 높여 크게 상승하거나 하락하게 된다. 林 知之, 實踐 相場用語事典, 林投資硏究所의 인터넷판 w.h-iro.co.jp/article/yougo.php.

154 13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은 시장 대리인들(場立の連中)끼리 한 것으로 점주(店主)는 관련 이 없기 때문에 변명은 섰지만, 원래 이 단속은 버는 대로 중매 인들이 마구 돈을 쓰고 방약무인의 방탕함에 빠진 것에 법관들 의 반감이 고조되어, 결국 검사 지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인천 법원 지청에 있던 판사 오노(小野) 아무개 등은 사기 적 행위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괘씸하다고 이마에 핏대를 올리며 분개했고, 중매인을 부모의 원수처럼 준엄하게 취조했다. 이 사건은 현재 경성법조계에서 넘버원이라 인정받고 있는 변호 사 호리 나오키(堀直喜)가 경성지방법원의 예심판사 시대에, 출 장하여 취조한 결과 대부분 방면되었지만, 한 때는 중매인들이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벌벌 떨었다. 여담은 그만두고 때는 1922년, 10월한에 그 우츠미와 히로사 와 두 거물이 연합한 사자 출동(買出動)에 맞추어 팔자로 나선 것이 유력자 아사노였다. 따라서 이 한판은 볼만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당시는 마침 미계(米界)의 큰 흐름에서 볼 때, 내지에서 는 전년인 1921년 10월 이시이 사다시치(石井定七)116)의 사자 116) 이시이 사다시치(石井定七, )는 13세 때 오오사카의 재목 통야(材木問屋) 이시이상점(石井商店)에 어린 봉공인(小僧奉公)으로 들어갔다. 20세 때 주인인 선대 이시이 사다시치(石井定七) 몰래 재 목을 매점해서 거리를 손에 쥔다. 이를 계기로 사다시치의 상재(商才) 를 높이 산 초대 사다시치의 사위가 되어 곧 2대째 사다시치를 습명 (襲名)했다. 상호는 이마사다상점(今定商店)으로 바꾼다. 도지마(堂 島)에서의 미곡투기계에서 주로 활동했다. 특히 1919년부터 1921년 에 걸쳐 80만 석을 매점, 현금결제가 가능할까 불가능한가를 두고 시 장관계자의 주목을 끌었지만, 결산당일에 필요한 자금 2,300만 엔을 지불했다. 미곡투기 이외에도 러일전쟁에서의 재목투기(材木相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동투기(銅相場)에서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투

15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35 선동(買煽り)으로 도지마(堂島)는 47원 59전까지 가격을 끌어 올 렸고, 또한 11월의 수도(受渡)는 50만 6천 석이라는 엄청난 양의 매매전(賣買戰)이 전개된 끝에 연말에 37원대로 떨어졌기 때문 에, 그 대단한 이시이의 사다항(石井の定はん)도 완전히 꼬리를 감추고 몰락해 버린 뒤였다. 따라서 시장은 아직 파도도 거칠었 고 분위기도 거칠었다. 그 해의 미작은, 내지는 대풍작이었지만, 조선은 흉작으로 비관상태였다. 경기가 하강국면인 데다가 풍작 인기(豊作人氣)였기 때문에, 오오사카는 7월의 입회가 새롭게 시 작될 때(新甫)까지 39원대였다가 13일의 주가하락 때부터 내림세 가 계속되어 9월에 30원대가 무너지면서 28원 9전으로 급전직하 로 대폭락했다. 7월말부터 슬슬 사기 시작한 우츠미히로사와의 연합군은, 오오사카가 일거에 2엔(200丁)을 내려 34원 90전이라 는 새로운 저가(新安値)117)를 내면서 사자 쪽 총 함락이라는 상 황에서도, 7월말의 납회(納會)에서 고집스럽게 사자를 계속하여 인천을 32원 88전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그 후 시세는 8월에 들 어 심하게 오르내리기를 계속했지만, 썰물(干潮) 같은 기세는 인 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이런 와중에 우 츠미와 히로사와는 힘을 합하여 화려하게도 9월에 들어 중한(中 기를 위한 자금조달에 어음(手形)의 신용이 이용되고, 또한 고치상업 은행(高知商業銀行)의 경영권을 쥐고 기관은행으로 삼는 등 부정한 수단에 의한 것이었다. 1925년의 가네보(鐘紡) 신주(新株)를 둘러싼 매매전에서 패배, 오오사카주식취인소(大阪株式取引所) 이사장 시마 도쿠조(島徳蔵)를 끌어들여 만회를 도모했지만 실패, 이시이는 파산 선고를 받았다. 그 뒤 10년에 걸쳐 다액의 부채를 변제했는데, 변제 가 마무리되고 머지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ja.wikipedia.org/wiki/ 石井定七. 117)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저가(新安値)는 그 날의 주식 거래에서 해당 주(株)의 가장 싼 시세를 말한다. Weblio 辭書.

156 13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限 )에 약 10만 석을 사 들였다. 팔자 쪽에 있던 아사노는 고군 분투( 孤 軍 奮 闘 ), 쌍방은 서로 노려보며 끝까지 버텼다. 이 중한 의 시세 변동을 막기 위한 적극 매입이 결국 효과를 발휘하여 선(선한= 先 限 )이 오히려 5원 정도 싼 가격을 형성했고, 사자 쪽 은 전선( 戰 線 )을 11월한까지 더 연장하여 2만 석 정도를 선한에 서 사 들였다. 한편 아사노는 도미( 渡 米 ) 준비를 진행시켜 대구에 있는 미츠 나리( 光 成 )에게 부탁하여 대구의 연시장에서 쌀을 사 들였다. 이 것이 의외의 결과를 불러와 결국 대구의 장을 멈추게 하고 말았 다. 이 대구 연시장이 또한 좀처럼 장을 열지 못하자, 결국 부윤 이 중재에 나섰다고 한다. 이렇게 몹시 혼잡한 상황에서 시세는 하락을 멈출 줄 몰랐고, 9월 중순 경에는 선물 23원 가량이 되 어 버렸다. 그래서 아무리 인내력이 강한 우츠미와 히로사와도 결국 참지 못하고 일부러 추층( 追 證 )을 납부하지 않았다. 선물만 을 대상으로 한 중한은 21원 40전으로 장을 멈추고 말았다. 이 렇게 해서 결국 해합( 解 合 ) 상담이 이루어졌다. 히로사와는 이에 응했지만, 우츠미는 좀처럼 납득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중재에 나선 구와노가 화를 내는 장면이 반복된 결과 결국 중한만 해합 ( 解 合 )하게 되었다.

15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37 仁 取 盛 衰 記 (32) 만원을 들여 설비 정비 세령( 稅 令 ) 실시 鳥 栖 忠 安 히로사와가 쉽게 해합( 解 合 )에 응한 것은 남몰래 선물( 先 物 )에 있어서 순매수에서 순매도로 돌아섰기(우리코시) 때문으로, 우츠 미는 완전히 붕 떠 버렸지만, 히로사와는 순매도로 돌아선 까닭 으로 아직 괜찮았다. 이때는 두 사람 모두 각각 20만 원 정도씩 손해를 봤는데, 이 두 사람을 따라 매매했던 사람들도 깊은 상처 를 많이 입어, 아사노의 득의( 得 意 )와는 반대로, 없는 돈을 몽땅 털은 끝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때 상점을 닫은 중매인 이 29점 중 6, 7점은 있었다. 다나카 긴페이( 田 中 金 平 )와 같이 3 천 석 정도 해합( 解 合 )하고 나머지는 리키타케( 力 武 )로부터 인수 하여 큰 손해를 본 사람도 있었다. 매매전은 이 정도에서 잠시 멈추고 무대를 다시 거꾸로 돌려 회사 자체의 사정에 대해 회고해 보기로 한다. 1919년 개혁과 동시에 시장의 개축에 착수하여 다음해 1920년 1월 첫 거래 입 회에서부터 지금의 시장(건물: 역자)에서 소리도 우렁차게 매매 가 개시되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긴타( 金 太 ) 상점이 된 곳에 시장이 있었다. 이어 1921년에는 사무소를 개축하여 지금의 당

158 13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당한 건물이 생겨났다. 이와 동시에 창고나 사택도 건축되었는 데, 이런 일들에 소요된 총 공사비는 11만 1천원이었다. 외관을 정비하는 동시에 내용에도 착착 개선이 이루어졌다. 1919년 부흥과 동시에 수도고문(受渡顧問)으로 당시 경기도의 곡 물검사소장인 히라오카 우타로(平岡宇太郞)118)를 촉탁하고, 심사 원에 오구라(小倉)와 하시모토(橋本) 두 사람을 위촉했다. 그래도 심사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서, 히라오카를 정식으로 입사시켜 심사장(審査長)으로 삼고, 1920년부터 수도제 도(受渡制度)에 대개혁을 단행했다. 1920년 5월 2일부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는 회사령에 따른 명령사항으로 인취의 역원 및 지배인을 선임 할 때 이력서를 구비하여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명 118) 원문에는 平岡卯太郞라고 되어 있으나 平岡宇太郞가 맞다. 히라오카 우타로(平岡宇太郞)는 1876년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이다. 1905년 5월부터 오카야마현 고지마군농회(兒島郡農會) 기수(技手)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08년 1월 사직하였다. 이후 1917년 4월까지 오카야 마현에서 미곡검사감독 및 산미심사회(産米審査會) 심사장, 산미공진 회(産米共進會) 심사장을 역임했다. 오카야마현청의 명으로 각지의 미곡거래소 및 상황(商況) 시찰을 위해 神戶, 大阪, 京都, 堺, 和歌 山, 新瀉, 山, 高田 등지를 실지 답사했다. 1918년 4월 경기도 권 업기수(勸業技手)로 처음 조선에 건너와 동년 5월 미곡대두검사소 주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12월 서기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부 터 인천미두취인소 조사과장에 발탁되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 국근현대인물자료. 미곡전문가로 조선미에 대한 글을 다수 기고했다. 京城日報 <平岡宇太郞(寄稿), 內地に於ける鮮米の 価値 (一~四)>.

15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39 령했다. 이 1920년은 인취 대발전의 해로 수수료 수입이 143만 1,900원에 달했고, 전년도의 이익을 합하여 손해금인 180만원을 보전하고도 적립금 80만원을 남겼다. 또한 주주에게는 상반기에 7할 5푼, 하반기에 6할의 배당을 시행했다. 그러나 동년 3월에 세계전쟁이 종말을 고하면서 재계에도 대변동이 일어나 6월 이 래 거래량이 감소했음은 확실히 간취되었다. 이런 와중에 인취는 그해 4월 정관을 변경하고 영업규칙의 개정을 시도하여, 9월말 총독의 허가를 받아 10월 1일부터 실시했다. 1922년 4월에는 제 령 6호로 조선취인소세령(朝鮮取引所稅令)이 발포되어 4월 20일 부터 실시되었다. 또한 4월 25일부터 대두(大豆)의 정기거래를 개시했다. 그리고 1922년 1월 29일의 임시주주총회에서 자본금 을 300만원으로 증자할 것을 결의하였고, 그해 2월 20일 총독의 인가를 받았다. 세령(稅令)이 공포된 이면에도 대수롭지 않은 경위가 있었다. 최초로 인취에만 과세하려고 한다는 내보(內報)가 있었을 때, 와 카마츠(若松) 사장과 아키야마(秋山) 지배인이 본부(조선총독부: 역자)를 방문하여 당시의 세무과장 미즈구치 류조(水口隆三)와 상공과장 다나카 우조(田中卯三)에게 세령(稅令)을 실시한다면 취인소령을 시행하는 것이 선결문제가 아닐까, 실태법규가 시행 되지도 않고 세령만 시행하게 되면 취인소 유사 시설에 대해 단 속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내용의 의견을 진술했다. 이에 대해 다나카는, 과연 그것도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는 듯 한 생각을 비 쳤지만, 미즈구치는 취인소령을 급속하게 낼 수 없다고 한다면

160 14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현재 취인소가 있으니 여기에 세령을 시행하는 것은 반드시 이 상한 것은 아니다 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와카마 츠와 아키야마는, 결국 실시될 수밖에 없다면, 내지와 같은 세율 을 부과하는 것은 좀 심하다, 민력(民力)이 유치한 조선에서는 내지에 비해 되도록 가볍게 해 주었으면 좋겠고, 아울러 과세하 는 이상은 유사 취인의 단속을 엄중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했다. 재무국도 식산국도 이 진정에 대해서는 크게 이유가 있다고 하여 경청했다. 그리고 세령안에는 유사 취인의 단속을 조항에 넣었지만, 법제국에서는 이것을 삭제해 버렸다. 당시 인취는 각 지의 연시장에 의한 잠식으로 처참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1920 년 시장규칙을 개정하여 일도일개소주의(一道一個所主義)로 경성, 부산, 대구, 군산, 목포, 진남포, 원산, 강경, 신의주 9개소에 현 물시장을 허용하고, 60일 이내의 연시장을 인정했다. 이상의 현 물시장은, 이를 기화로 하여 전매(轉買)나 가이모도시(買い戻 し)119)를 공공연하게는 못했지만, 어쨌든 차금결재(差金決濟)가 성행했기 때문에, 인취에는 대타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119) 가이모도시(買 戻 신용거래나 청산거래에서, 공매(空賣)했던 주 식이나 상품을 다시 사들여 현물을 인도하지 않은 채 결제하는 일을 말한다. Weblio 辭書.

16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41 仁取盛衰記 스스로 무덤 파는 중매인들 당국의 공약(公約)은 유녀의 서사(誓詞) 鳥栖忠安 세령(稅令) 시행과 동시에 감독을 엄중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요망에 대해서는, 식산세무 두 방면 모두 크게 공감했다. 생각 건대 세원(稅源)의 함양이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또 담세자의 보 호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이 감독에 대해서는 충분히 시행할 예정이니 안심하라고 했고, 취인소에서 는 언명했던 세율은 내지에서는 만분의 5이지만 조선에서는 만 분의 3 이하로 낮춰 주었으면 좋겠다고 요망했다. 다나카 상공 과장은 (이 요망을) 지당한 의견이라고 하여 재무당국과 절충 중 에 있었는데, 의외의 방면에서 터무니없는 간섭이 들어와 이 요 망은 근저에서부터 뒤집히고 말았다. 이보다 조금 앞서, 취인원조합(取引員組合) 위원장 사카쿠라 이헤이(坂倉伊平)120)가 조합을 대표하여 취인소에 대해 매매수수 료를 감액하여 중매인의 위탁수수료를 늘려주었으면 좋겠다고 120) 사카쿠라 이헤이(坂倉伊平)는 1921년 2월 인천상업회의소 부회두 가 와조에 산지(川添三次)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부회두 선거에서 평의 원 12명 중 11명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1표는 大石秀吉). 東亞 日報 <仁川商議副會頭改選>.

162 14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제안했다. 취인소 측에서는, 1920년의 공황 후 거래고가 점감( 漸 減 ) 경향에 있는 상황에서 매매수수료를 감액하는 것은 고통이 매우 심할 것이라 요구에 응하기 어렵다고 회신했다. 이 때문에 취인소와 취인원 사이에 커다란 갭(gap)이 생겼다. 거기에다가 다시 이 세령( 稅 令 ) 문제가 느닷없이 대두되었다. 취인원 측에서 는 이 문제를 개똥같이 하찮게 생각해서 취인소의 면목을 박살 내고자 했다. 이기고 싶어서 일단의 감정이나 눈앞의 욕심에 사 로잡혀서 큰 흐름을 잘못 파악한 취인원 측은 스스로 무덤을 파 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즉 사카쿠라 이헤이( 坂 倉 伊 平 )는 세무과장 미즈노 류조( 水 口 隆 三 )를 방문하여 우리 중매인은, 내지와 같은 세율을 부담하더라 도 결코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는 취인소 측(의 주장: 인용자)과 는 완전히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취인 세는 당연히 위탁자에게 전가시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세율이 내 지와 같은 이상 이와 마찬가지로 위탁수수료도 내지와 같은 정 도가 되어야 함은 명백하다. 세령 실시를 기회로 매매수수료의 증액이 인정된다면 세율이 조금 높더라도 중매인은 별로 큰 고 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세무당국 은, 한 푼이라도 수입이 많은 편이 좋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직접 담세자인 중매인 측이 내지와 같이 해 주면 좋겠다는 의외의 의 사표시에 미즈노 류조는 크게 한 번 끄덕이며, 지체 없이 결정해 버렸다. 어이없는 꼴을 당한 것은 이사자 측으로 모처럼 고심한 것도 물거품이 되고, 내지와 같은 내용의 세령( 稅 令 )이 나온 것

16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43 을 보고 멍해지고 말았다.121) 세령 실시 후의 상태는, 재무와 식산 두 당국 모두, 그 당시의 공약에 반하여 각지의 연시장에서 멋대로 (인취의: 인용자) 흉내 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속하는 시늉도 하지 않아, 인취는 이 연시장의 영향과 중세(重稅)의 부담으로 녹초가 되어 비명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당국도 당국이지만, 취인원도 취인원이어서 세율을 직접 높이는 등 대체 무슨 무분별한 짓을 한 것인가, 그 어리석은 상황에 질려버려 아무 말도 못하지 않을까. 그후 대구, 군산, 부산 각지의 연시장은 점점 융성해지고 거래 고도 인취와 백중세를 보일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인취는 여러 번 취인소령을 시행하여 보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요망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최근에 이르러 겨우 세령을 제외한 모든 법 령이 공포되었다.122) 이 사이에 인취가 납부한 세금은 370만원 이라는 거액에 달했다. 하지만 당국은 인취를 보호할 만한 아무 121) 1921년 4월 26일부터 시행된 조선취인소세령 의 구체적인 조항은 <부록1> 참조. 122) 조선취인소령은 1931년 5월 20일 공포되었으나, 당시는 경취와 인 취의 합병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시행기일을 결정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1931년 11월 2일자 官報 를 통해 시행기일을 1932년 1월 1일부터라고 규정했 다. 이때 같이 시행된 취인소 관계 법령은 朝鮮取引所令(制令), 同施 行規則(府令), 市場規則改正(府令), 朝鮮正米市場規則(府令), 朝鮮取引 所稅令中改正(制令), 會社令中 廢止에 關한 件(制令)이었다. 東亞日 報 <朝鮮取引所令 一月 一日부터 實施, 十一月 二日附 官報로 公布, 關係法令도 同時>.

164 14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런 시설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인취는 대구, 군산 등의 연시장 에 의해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이렇게 보게 되면 당국 의 태도는 너무 바가지 씌우기 주의이고, 편무적이면서 또한 유 녀의 서사(誓詞)와 같은 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仁取盛衰記 불이흥업(不二興業)이 대두 매점 수도(受渡)에 곤란 鳥栖忠安 1921년 대두(大豆)를 상장하자 곧 대두의 매점이라는 인취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인취는 원래 대두를 상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상 1920년까지 상 장한 적이 없었다. 와카마츠 우사부로(若松兎三郞)123)가 사장에 취임한 이래 대두를 상장하고자 애를 썼다. 당시의 인취 서무과 장 사와쿠마 히로시(澤熊浩)를 대련(大連)에 파견하여 대두 취인 의 실정을 조사하게 했다. 이러한 준비를 거듭한 뒤에 드디어 상장을 결정하였다. 1923년 2월 영업세칙을 개정하여 4월부터 상장했다. 상장하자 곧 대두의 취인은 상당히 활황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불이흥업 상업부가 매점을 획책하여 문제의 큰 소용돌 123) 원문에 若松鬼三郞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인 듯하고 若松兎三郞 가 맞다.

16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45 이를 일으켰다. 이에 대항하여 팔자 쪽을 형성한 것이 인취시장 의 명장 히로사와 쇼지로(廣澤正次郞), 거기에 진남포의 아라이 신조(新井新蔵)가 한 편이 되어 왕성하게 응원했다. 어찌되었건 이 매점(買占)은 대두의 단경기를 예상하여 이루어 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약고(取組高)124)는 7월 15일한으로 3만 석, 8월한 같은 경우는 모방매매도 붙어서 한 때 6, 7만석에 달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의지와 의지가 맞붙은 고집스 러운 거래로 변해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인 결과, 7월한에서 3 만 석, 8월한에서 5만 3천 석이라는 대수도(大受渡)가 이루어지 게 되었다. 팔자 쪽에 선 히로사와는, 북쪽으로는 함경북도에서 만주까지 거의 전 조선 각지에서 대두를 모았다. 그 결과 인천 에서는 대두의 산을 쌓았다. 그러나 막상 수도(受渡)할 때가 되 고 보니, 만주 대두의 품격이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문제가 대 두되었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수도에 지장이 없다는 판단이 나 오는 듯했다. 그런데 수취하는 쪽인 불이흥업에서 수도(受渡)에 지독하게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대두의 수도는 인취로서는 경험 이 부족했고, 또한 이렇게 큰 수도는 전례가 없었다. 이런 허점 을 불이흥업 측에서 이용했다. 불이흥업은 단경기(端境期)의 시 장에 현물이 부족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이 보기 좋게 틀렸다. 불이흥업은 부아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온갖 위협적인 공갈로 사자 쪽 중매점을 포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팔 124) 도리쿠미다카(取組高)란, 주식의 신용거래나 상품의 선물거래에서 매 매계약을 한 채로 결제하고 있지 않은 매매의 양을 의미한다. 따라 서 여기서는 계약고라고 번역했다. Weblio 辭書.

166 14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자 쪽은 수도기일까지 완벽하게 대두를 모았고, 좀처럼 불이흥업 측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쌍방에서 취인소의 이사자( 理 事 者 ) 를 사이에 두고 완력사태로 끝날 수 있는 기세로 대치했다. 이때의 수취하는 쪽의 불평 중 주요한 것을 열거해 보면 대체 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 창고 처마 밑에 대두를 쌓아 놓고 하는 수도( 受 渡 )는 취 인소가 시작한 이래 전례가 없기 때문에 수취하지 않는다. 둘, 콩깍지가 붙은 대두가 섞여 있다. 이것은 되박( 枡 )에 영향 을 주기 때문에 수취하지 않는다. 셋, 검사소에서 검사는 하고 있지만 관할구역 이외의 토지에서 생산된 대두가 있기 때문에 위법이다. 넷, 착색된 대두가 혼합되어 있거나 부패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수취하지 않는다. 다섯, 등급이 다른 것이 한 가마니( 一 俵 )라도 혼입되어 있으면 수취하지 않는다. 여섯, 가마니마다 인부를 시켜 뒤집어 조사하지 않으면 수취하 지 않는다. 이러한 불평이 계속 나와 수도 문제가 상당히 귀찮아 졌다. 그래서 7월 15일한의 수도량이 겨우 3만 석이었음에도 7월 중에 수도가 끝나지 않고, 8월 15일이 되어서도 정리되지 않았다. 수 취하는 쪽은 다음날 아침이 되면 전날 해질 무렵의 모습에서 조

16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47 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수취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때문에 밤에 감시인 몇 명을 세워두어야 했는데, 이런 상태가 매일 반복되었 다. 게다가 사자 쪽의 불이흥업이 큰손이어서 전속 일꾼을 사주 하여 일꾼들에게도 취급상의 불평을 하도록 했다. 수도가 점점 장기화된 이유였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중매점은 한두 점을 제외하고 대부 분 결속하여, 이렇게까지 분규해서는 인취의 번영상 정말로 불이 익이 될 것이기 때문에 급속한 해결을 희망했다. 대두 취급에 익숙해 있는 마츠모토 요고로( 松 本 要 五 郞 )에게 취인소와 중매조 합 쌍방에서 수도( 受 渡 )를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10월 25일에 이르러서 겨우 수도가 완료되었다. 막상 수도가 전 부 끝나 보니 만주에서 가지고 온 대두에는 손은 대지 않아도 되었고 조선 대두만으로 충분했었다. 어찌되었건 한때 이 때문에 인천 부두는 생각지도 않은 대두의 산을 쌓아 일종의 장관을 이 루었다. 이 수도로 녹초가 된 인취는 대두의 상장에 분요( 紛 擾 ) 가 많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그해 12월 15일한 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두를: 역자) 상장하지 않기로 했다.

168 14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진재(震災) 전후 유타카(豊) 의 투매(投賣) 중매인들 모두 사자 포지션 鳥栖忠安 매점사(買占史)의 순서로 말하면 이 불이흥업의 대두 매점 다 음에는 1922년 9월 우츠미히로사와가 연합한 투기 매입의 실 패가 순서이지만, 이것은 이미 전단(前段)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생략한다. 1923년 9월 2일은 관동대지진 때문에 식산국장으로부 터 인심이 안정될 때까지 임시휴업을 하라는 내의(內意)가 전해 졌다. 취인원들은 임시총회를 열어 입회 전에 우선 도쿄 방면의 피해가 판명될 때까지만 입회를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의 상보(詳報)를 통해 피해가 크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면서 결국 총해합(總解合) 가격이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 매각 (賣建て)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유타카(豊) 중매점의 경영자 무네 기헤이(宗喜平)가 끝까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쉽게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합(解合)을 위한 위원회는 결국 그 다음날로 연기되어서야 겨우 당한 30원, 중한 29원 50점, 선 한 28원의 가격(보오네=棒値125))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 후 닷 새 정도 입회를 중지하고 9월 6일에 당한을 제외한 중한과 상한 만으로 거래를 개시했다. 125) 보오네(棒値)란, 주식 폭락 때, 취인소가 중간에 끼어들어 매매자의 파산 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JCFIA/yougo06.

16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49 그 후 시세는 조금씩 하락했다. 선물( 先 物 ) 22원 정도가 되자 유타카( 豊 )의 무네 기헤이가 팔기 시작했다. 진재 후의 재계침쇠 ( 財 界 沈 衰 )를 노린 매각이었기 때문에 일반 투자 중에서 여기에 책응( 策 應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네( 宗 )가 대장이 되어 투매했 던 것이다. 이에 대해 중매인은 전부 팔자로 돌아섰다. 그 때문 에 순식간에 계약고( 取 組 高 )는 4만 석에 달했다. 시세도 내림세 가 대세였던 시기로 20원 80전까지 떨어졌다. 한번이라도 원래 대로 되돌리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이러 한 상황에 중재( 仲 裁 )가 들어가 일부에게 인수할 것을 종용했는 데, 무네( 宗 )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무렵 무네( 宗 )는 명치정( 明 治 町 )에서 유타카( 豊 ) 구락부라 불리는 미구락부( 米 俱 樂 部 )를 설치하고 경인( 京 仁 ) 양쪽에서 활 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전( 京 電 )의 회계 고바야시( 小 林 ) 아무개 를 포섭하여 경전의 돈을 몰래 반출하게 하여 군자금으로 사용 하고 있었다. 그 후 이 고바야시의 회사돈 횡령에 꼬리가 잡혔 다. 조사해 보니 36만원의 큰 구멍을 경전에 내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어 큰 소동이 일었다. 이 한 건이 발각될 무렵부터 무네 ( 宗 )는 투기 쪽도 좀처럼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양쪽이 서로 맞물리면서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무렵의 무네 ( 宗 )는 가령 온전한 돈이 아니라 해도 군용금은 풍부했고, 기세 가 당당했다. 해합( 解 合 )을 위한 교섭이 시작되자 그는 (경성) 사쿠라기( 櫻 木 )에 진을 치고 상당히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에

170 15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대해 사자 쪽의 급선봉(急先鋒)으로서 진두에 선 히로사와는 반 대쪽의 경기(京畿) 히사(久)에 진을 쳤다. 중재의 배후 조정자로 서 이면에서 활약하고 있던 아사노 다사부로(淺野太三郞)126)는 명치정 스에히로(末廣) 안쪽에 모습을 감추면서 취인원조합의 미 츠이(三井) 서기장을 앞세우고 뒤에서 지휘하며 절충을 전개했 다. 사자 쪽에서 파는 것을 삼가라고 요구했지만, 이 요구에 아 무리 해도 무네(宗)은 응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말씨름을 반복하 고 있는 사이에 몇 번인가 장면은 결렬되었지만, 그럼에도 중개 자 측이 간신히 달랜 끝에 50전 앙꼬127) 로 해합(解合)의 상담 이 정리되었다. 126) 아사노 다사부로(淺野太三郞)는 1872년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이 다. 1905년 3월 조선에 건너와 인천 예전 화개동(花開洞)에서 일용 잡화상을 경영했다. 1906년 11월 경성으로 이전하여 본정(本町) 5 정목에서 역시 일용잡화상을 경영, 1911년 4월부터 본정(本町) 4정 목에서 목욕탕업, 1918년 4월부터 인천미두취인소 중매업 등을 경 영했다. 1922년 장소를 옮겨 현주소인 대화정(大和町)에서 주택임대 업에 종사했다. 1928년 7월 財團法人日本家産會를, 동년 12월에는 10만원을 기부하여 財團法人淺野育英會를 창립하여 사회사업에 힘 을 기울였다. 이외에 朝鮮土地經營會社 取締役, 朝日釀造株式會社 監査役, 京城肥e株式會社 取締役社長, 朝鮮貯蓄銀行 監査役, 朝鮮取 引所 理事, 朝鮮證券金融 取締役, 仁川鐵工所 取締役, 白川溫泉 取締 役, 日本家産會 理事長, 京城放送局 理事 등으로서 활동했다 년 11월에 京城府協議會員에 선출되었다. 仁川 武德館 洋館 1동, 仁 川神社 鳥居 및 下燈W, 고향인 山口縣 吉敷郡 小郡町에 도서관 2층 건물 1동, 경성 和光敎園에 2층건물 1동을 건설 기부했다. 京城神社 에 5천원을, 京城高等商業學校에 대강당을 건설 기부하고 또한 乃木 神社에 鳥居, 神馬를 기부하는 등 공공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27) 여기서 말하는 앙꼬(あんこ)의 의미는, 기존의 물량에 대해 100% 헷 지(=츠나기, ツナギ) 물량을 만들어 가격변동의 영향이 없는 료다테 (両建て)의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료다테라는 것은 팔자와 사 자 양쪽 모두를 동시에 취하는 것을 말한다. 林知之, 實踐 相場 用語事典, 林投資硏究所의 인터넷판.

17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51 이 흥정의 마무리는 다음날 월미도에서 하게 되었다. 드디어 당일이 되자 사자 쪽의 중매인들 전원이 모여 월미도로 가서 무 네(宗)가 올 것을 기다렸지만 정각을 넘어도 좀처럼 얼굴을 내밀 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안절부절 하고 있던 중매인들도 드디 어 무네(宗)가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모두 노발대발하며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각오가 있다, 눈에 물건을 보여 달라고 하자 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흥정을 끝내자고 모인 자 리가 일변하여 싸움을 대비하여 사전 협의하는 자리로 바뀌고, 달래는 역할이었던 아사노까지 완전히 화가 나서 그 다음날 첫 거래부터 사고 사고 또 사고 계속 사들이기로 했다. 仁取盛衰記 사자 쪽 연합에 개선가 무네(宗) 중매점 몰락 鳥栖忠安 드디어 그 다음날이 되었다. 중매인은 총동원이다. 전날 월미 도에서 이루어진 합의대로 전장(前場)의 마지막 거래(도메, 止め) 에서 빈틈없이 창을 겨누며 무네(宗)을 포위했다. 마침내 수세에

172 15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몰렸을 때를 노려 목을 죄는 책전(策戰), 침묵 속에 숨을 죽이며 전기(戰機)가 다가올 것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에서 전장(前場)이 끝나는 종 을 치려고 하는 순간, 사자 쪽 동지 중 한 사람인 사카쿠라(坂 倉)가 파랗게 질려 달려 왔다. 이 책전(策戰)이 어디에서 어떻게 새 나갔는지 그 날 아침에 사카쿠라상점에 사자 쪽 물량 3천 석 이 시세차익을 노리고 매각 대상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일거에 무네(宗)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고 벼르고 있던 사자 쪽 연합군의 일격을 간발의 차이로 겨우 막아낸 것이다. 전장(前場)의 마지막 거래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만나 총공격 을 결행할 수 없게 되었다. 연합군은 결국 후장(後場) 첫 주문(寄付 き)때 결행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사자 쪽에 다행이었던 것은 오오사카의 상황이었다. 전장이 끝난 뒤부터 오오사카는 50전 더 올 랐고(=50丁高), 계속해서 후장 첫 주문에 1엔이 더 올라(=100丁高) 견딜 재간이 없었다. 마른 땔감에 기름을 부은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취도 후장 첫 거래에서 일거에 1엔 50전(=150丁) 정도 원 래대로 되돌리고 말았다. 더구나 그 다음날은 다시 값이 올라, 3 기128) 총 매각의 무네(宗)는 중매인 총 연합의 사자 공세에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승기를 잡은 연합군이 통쾌해 하며 점점 더 추격의 고삐를 죄었다. 결국 무네(宗)는 발걸음도 갈팡질창 만신창이 가 되어 지쳐버리고 말았다. 무네(宗)의 결제되지 않은 계약 물량(建 玉)이 그때 약 3만 석, 22원 정도에서 팔기 시작해서 26원까지 질질 128) 여기서 말하는 3기(期)는 선한, 중한, 당한을 말하는 것 같다.

17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53 끌려갔는데, 의기양양한 연합군의 추격이 급하여 까딱하면 당장이라 도 상점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까지 몰렸다. 이 패전은 무네(宗)에게 있어서 정말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더구나 자금공급책이던 고바야 시(小林)가 회사 돈 36만원 소비의 악행이 드러나 감옥에 수감되었기 때문에, 군량미 조달이 끊겨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실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것은 이런 것으로, 그 오만한 무네(宗)도 완전히 기가 질려, 군사(軍事)에 치인 두꺼비처럼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하락세인 재계와 함께 엄청난 투기도 행해졌지만, 1925년 7월 17일 한강 대수해로 경성과 인천 사이의 통신 및 교통기관이 완전히 멈춰버렸을 때, 인취는 18일부터 휴업하여 다른 기관의 회 복을 기다렸다. 그러나 피해 정도가 의외로 커서 쉽게 회복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방임하면 볼온한 투기가 생길 것을 우려, 취인위원총회를 열고 당한과 중한은 41원 70전, 선한은 41원 40전의 중재 가격에 해합(解合)하기로 전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 수해로 대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취의 거물 히로사 와가 사망했다. 거성이 땅에 떨어졌다. 꽤나 엉뚱한 그도 만년에는 1만원의 불상을 만들어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에 기진(寄進)하는 등 공덕 쌓는 일에 항상 마음을 쓰고 있었다. 한 때 200만원이라 고 일컬어지던 자산도 경기(景氣)의 파도에 씻겨가 그의 임종 무렵 에는 그 평가액이 상당히 하락해 있었다. 그럼에도 인천의 히로사 와라 하면 조선 내 유수의 부자로 손꼽혔고, 반도 기미계(期米界) 의 거물로서 사계(斯界)를 비예(睥睨)129)하고 있었다. 129) 비예하다(睥睨하다)는, 정세를 살피며 틈만 생기면 나서려고 노린다

174 15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후지이 간타로(藤井寛太郞)의 내지미 수도(受渡) 불이흥업(不二興業)의 개혁 鳥栖忠安 그 후 오기매매(意地商內)130)와 같은 그야말로 공을 들인 투기 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지만, 1929년 여름 불이흥업의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가 나선 내지미(內地米) 수도(受渡)에는 어딘 가 좀 색다른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 해의 쌀은, 아직 벼가 익지 않은 푸릇푸릇한 논(靑田)이어 서 바다인지 산인지도 확실히 구별할 수 없을 때, 전년(前年)의 수확량 1,350만 석이 최근 보지 못한 감수(減收)로 이를 반영한 시세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진일퇴의 상황은 그 분야의 사람에게는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투기적 애로 미를 한창 방산(放散)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선 것이 조선의 수 리왕(水利王)이라 자임하는 불이흥업 사장 후지이 간타로(藤井寛 太郞)였다.131) 즉 그는 불이흥업 인천지점장 무라카미 마사타카 는 뜻이다. 네이버사전. 130) 오기매매(意地商內)란, 시장의 인기나 시세와는 무관하게 오기로 행 하는 매매를 지칭한다. 오기가 나서 고집불통이 되어 파는 것을 오 기팔기(意地賣り)라고 하고 오기가 나서 사는 것을 (意地買い)라고 한다. Weblio 辭書.

175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55 (村上政高)로 하여금 7월한에 7천 석, 8월한에 9천 석을 팔겠다 고 나섰지만, 이에 대해 사자로 나선 것은 가토(加藤), 오쿠다(奥 田), 아리마(有馬)와 같은 주로 정미업자들이었다. 쌍방 모두 투 기(相場)에 있어서는 베테랑인 만큼 칼끝도 예리하여 수도기일이 다가옴에 따라 격렬한 승부로 변해 갔다. 팔자 쪽 후지이(藤井) 의 참모격인 무라카미(村上)는 내지의 각지를 돌며 내지미를 사 모아 도미(渡米)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사자 쪽은 수미(受 米) 준비를 진행시켜 당당한 진(陣)을 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대증장(大增場)이 되면서 후지이는 (계속 쌀을: 번역자) 사 모았 다. 내지미를 자기 혼자 특별히 전세 낸 배로 인천으로 반입해 온 쌀로 기일에 맞출 수 있을까 어떨까 하고 구경꾼들은 손에 땀을 쥐고 주목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천 앞바다에는 기노쿠 131) 조선의 수리왕(水利王) 이라 불렸던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은 1876 년(또는 1879년) 생으로 오오사카시(大阪市) 출신이다. 1899~1900년 경 그 동안 근무했던 藤本合名會社가 파산하자 새로이 자본금 2만원 으로 藤本合名會社를 재설립해 藤本合資會社로 개칭, 담당사원이 되 어 주로 곡류매매를 담당했다. 1904년 3월 조선으로 건너와 경기도 인천과 전라북도 군산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무역상을 영위했다. 탁 지부의 의뢰로 韓國貨幣整理, 地方廻米事業과 함께 토지매수를 계속 했다.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리에 농장을 설치하고 그 외 群山市街地 를 매수하여 토지경영에도 나섰다. 1907년 水利組合條例 발포에 앞 장서 臨益水利組合을 조직했다. 1909년 藤本合資의 자본금을 30만 원으로 증액하여 1912년 평안북도 압록강 입구에 4천 정보의 토지 를 개간했고, 7천 정보의 大正水利組合을 일으켰다. 1914년 100만 원의 주식회사로 不二興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전무에 취임하였다. 1921년 현재 不二興業의 전무 이외에도 臨益水利組合 組合長, 大正 水利組合 組合長, 益沃水利組合 組合長, 不二商業株式會社 監査役, 群山電氣會社 監査役 등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26년에는 불이흥업 의 사장에 취임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후지 이 간타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李圭洙,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 郞)의 한국진출과 농장경영, 大東文化硏究 49, 성균관대학교 대동 문화연구원, 2005년, 쪽 참조.

176 15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니아 분자에몽( 紀 の 国 屋 文 左 衛 門 )의 밀감 배가 아닌 내지미를 실 은 후지이의 전세배가 쑥 하고 수천일발( 水 天 一 髮 )의 시선에 떠 올라 씩씩하게 인천 부두를 향해 돌진해 왔다. 조선미의 이출항( 移 出 港 ) 인천에 때 아닌 내지미의 역이입이라 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국가 경제상 견지에서 보면,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은 없을 테지만, 그만 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는 투 기의 고집은 그런 말을 할 게재가 아니었다. 밤낮없이 배에서 육지로 짐을 나르는 일꾼들의 요란한 구호에도 살기가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반입한 내지미는 기후미( 岐 阜 米 ) 가 2,465석, 가고시마미( 鹿 兒 島 米 )가 4,096석, 미야자키미( 宮 崎 米 ) 가 1,200석, 아이치미( 愛 知 米 )가 477석, 가나자와미( 金 澤 米 )가 1 만 3,719석, 이것들 중 아이치미 정도가 상등급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하등급이었다. 수도미 검사에는 사자 쪽에서 맹렬한 불평이 나왔다. 아무튼 쌀에 대해서는 구멍의 주름까지 파악하고 있는 베테랑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수도( 受 渡 )인 만큼 좀처럼 조용히 물러나지 않았다. 오기매매( 意 地 商 內 )인 만큼 불평과 투덜대는 소리를 있는 대로 쏟아내고, 시끄럽다고 해서 울컥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인 취의 조사과장으로서 베테랑( 濃 厚 ) 그 자체인 히라오카( 平 岡 )도 역시 화를 냈을 정도였다. 이때의 불이흥업 측의 태도에 대해 전 조선의 미곡상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즉 불이흥업 측에서

17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57 내지의 등급을 표준으로 해야 한다고 열심히 선전했었다. 조선에 서 쌀을 생산하는 불이(不二) 입장에서 스스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다. 즉 내지의 쌀이 (조선의 쌀보다: 역자) 등급이 위라고 주장한 셈이었는데, 이는 결국 조 선미를 차버리고, 스스로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 것에 다름 아니 었다. 거기에 정말로 추한 자본가적 기회주의(資本家的御都合主 義)가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뭐라 하더라도 불 이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후지이 간타로는 평소 조선미계 의 대표적 인물로 자임하면서 큰소리치고 있던 만큼 매우 곤란 한 자승자박의 결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전 조 선의 비난이 떠들썩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상대편이 정미업자들인 만큼 수미(受米)하여 냉정한 얼굴을 하 고 있었던 것에 반해 후지이 간타로는 감쪽같이 실패하여 큰 타 격을 받았다. 불이흥업은 전년(前年)의 감수(減收)에 이어, 군산 의 간척지가 생각처럼 되지 않고, 철원의 중앙수리(中央水利)도 성적불량이었다. 상당히 약해져 있던 상황에서 사장 후지이의 이 번 투기 실패로 큰 구멍이 났고, 결국 감배(減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결손은 식은(殖銀)이 뒤집어쓰고 말았다. 이렇게 되 자 식은에서도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두취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가 후지이 간타로에게 경고하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이어 불이흥업에게는 천하의 간언자(諫言者 ) 오오쿠보 히코자에몽(大久保彦左衛門)132) 격인 동양생명 사장 기무라 유지 132) 원문에는 大久保彦左라고만 되어 있다. 1576년 16세의 초진(初陣)에

178 15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木村雄次)가 조선으로 건너와, 집안의 안태(安泰)를 도모하기 위 해서는 후지이 간타로의 전횡을 억눌러 마음대로 투기자금을 빼 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지이를 뒷방 늙은이 처럼 가미다나(神棚)에 모셔놓고, 총독부 칙임기사였던 미츠이 에이쵸(三井榮長)133)를 전무로 영입하여 일체의 일처리를 일임하 기로 했다. 불이흥업 개혁의 직접 동인은 실로 후지이의 팔자 예측 실패에 있었던 것이다. 인취에 있어서 팔았다 샀다의 커다란 장면은 대강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회부터는 방향을 전환하여 경취와의 합병문제에 대해 소위 이면사(裏面史)로 소개하고, 이것으로 이 성쇠기(盛衰記)를 마치고자 한다. 서 전공(戰功)을 올려 하타모토(旗本)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편에서 공적을 냈다. 다이묘(大名)가 될 수 있었 으나 고사하고, 천하의 간언자(天下の御意見番) 로서 이에야스의 자 문에 응했다고 한다. コトバンク (2015년 1월 6일 검색). 133) 미츠이 에이쵸(三井榮長)은 1879년 출생으로 야마나시현(山梨縣) 출 신이다. 1907년 도교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農商務 省)에 입성하여 기수(技手)가 되었다. 1910년 한국 정부의 초빙으로 조선에 건너와 농상공부(農商工部) 기사가 되었고, 동년 10월에 조 선총독부 기사로 재임되어 이후 줄곧 농무과(農務課) 기사로 근무했 다. 뒤에 不二興業에 영입되어 전무를 거쳐 2대 사장이 되었다. 당 시 朝鮮米의 三井 또는 三井의 朝鮮米 라 불렸을 정도로 조선미의 권위자로 알려졌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7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59 仁 取 盛 衰 記 (38) 시장 진흥 문제로 합병 대두 그냥 웃어넘기다 鳥 栖 忠 安 인취의 이전합병문제가 싹튼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1919년을 절정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우리 재계의 경기( 景 氣 )도 그랬지만, 우리 인취 또한 고율의 과세와 연시장의 침략으 로 대세는 조금씩 쇠퇴를 향해 왔다. 그래서 시장진흥책이 이사 자 및 취인원 수뇌부, 대주주 등 사이에서 언제인지도 모르게 입 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시장의 진흥은 새삼스레 인력( 人 力 )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 이 아니었다. 경기 여하에 따라서는 자연스럽게 다시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자연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숟가락을 던진 이들도 있었고,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기개가 없는 이야기 가 아닌가 하는 적극주의를 취한 이도 적지 않았다. 특히 누구 보다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대주주 우츠미( 內 海 ) 등은 후자 에 속했다. 반면 와카마츠( 若 松 ) 사장, 오오히라( 大 平 ) 감사역 이 하 이사자와 구와노( 桑 野 ), 고바야시( 小 林 ) 같은 취인원 측은 협 의과정에서 세금을 경감하는 것이 시장 진흥 도상에 가로놓여 있는 근본적 장해 배제의 제1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와

180 16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카마츠 사장은 세금의 부담 경감은 총독부 당국이 허용하지 않 을 것이니 도저히 불가능한 상담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 때문 에 우츠미가 얼굴이 빨개져서 덤벼들었다. 경감운동은 해 보지 않고서는 성부(成否)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쪽부터 정하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일이냐, 항상 사장의 태도는 관공서의 출장 소 같아서 무슨 일이든 하지 않는다고 시작 전부터 정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고 정면에서부터 공격하여 와 카마츠를 애먹였던 장면도 있었다. 그때, 이전(移轉) 합병(合倂)은 시장진흥책으로서 고바야시 도 우에몽(小林藤右衛門)134)이 처음 제창한 문제였다. 당시 취인원 중에 경성에 주거를 두고 상점만 인천에 가지고 있던 것은 고바 야시 정도였고, 경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자도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인취의 이사자도 취인원도 합병 이전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인취가 쇠퇴했다고 해도 아직 넉 다운 될 염려도 없이 기세가 엄청 대단했던 시대였고, 오히려 경취의 거세된 듯 한 흉측한 모습에 경취와 합병하는 것은 육덕 134) 고바야시 도우에몽(小林藤右衛門)은 1869년 출생으로 나라현(奈良 縣) 출신이다. 청년시절에 宇智郡 관청에 근무하다가 1902년 사직 하고, 오오사카시로 옮겨 전당포를 운영했다. 1906년 3월 조선에 건너와 경성에서 납품업 및 신탁업 등을 운영했다. 1908년 일본인 상업회의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08년 낙산(樂山) 금광 채굴에 착 수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이후 광업에만 전념하여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1909년 경성거류민단 의원에 당선되었고, 경성의 공익사업 에도 관심을 보였다. 1915년 모든 명예직을 사퇴하고 1921년 현재 까지 오로지 광업 사업에만 전념했다. 한편 1919년 6월부터 인천에 서 중개업을 열어 이 업계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 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8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61 이 풍만한 딸을 늙어 추레해진 노인과 결혼시키는 것과 같아 너 무 아까워서 말할 거리가 안 된다고 도도하게 굴고 있었다. 한 편 와타나베 사다이치로(渡邊定一郞)135) 일파가 당시 이미 합병 과 회사이름(題)을 내밀히 제창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 는 고바야시 도우에몽(小林藤右衛門)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이때 도 역시 인취 이사자나 취인원은 역시 그 옛날 로마에서 행해진 처녀회생법(處女回生法) 같다고 웃어넘길 뿐 돌아보지 않았다. 대주주인 우츠미 등도 이 이전합병설에 대해 처음에는 그렇게 정면에서부터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찬 성은 물론 하지 않았다. 일반의 공기는 어떤 실없는 소리 정도 로 치부하고 있었다. 135) 와타나베 사다이치로(渡邊定一郞)는 1872년생으로 도쿄시(東京市)에 서 태어났다. 1896년 東京鹿島組員으로서 철도공사에 종사했고, 뒤 에 大倉組 土木部에 들어가 宇品港 및 대만철도사업 등에도 종사했 다. 1904년에 조선으로 건너가 경의선 공사에 참여했다. 그 후에 일 단 귀국해 국내에서 제분업을 경영하다가 1913년에 가와카미 사타 로(川上佐太郞)의 의뢰를 받아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간척사업 에 참여했다. 1918년 3월에 마츠야마 츠네지로(松山常次郞)가 黃海 社를 창립해 水利干拓工事設計監督 및 請負業을 시작하자 동사에 입 사해 지배인이 되었다. 1921년 9월에 황해사를 주식회사로 개조하 고 전무취체역에 취임했다. 1926년 1월에는 황해사의 취체역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경성상공회의소 회두로 선임되었고, 개편 후에도 계 속해서 경성상공회의소 회두를 지내다가 1931년 4월에 사임했다. 이외에 조선토목건축협회 이사, 國粹會 조선지부장을 역임했다. 한국 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82 16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취인소는 관리의 귀문(鬼門) 시모오카 츄지(下岡忠治)의 망설임 鳥栖忠安 이 고바야시 도우에몽(小林藤右衛門)의 이전합병설이 처음 나 온 것은 1919년경으로, 그것도 소위 차 마시면서 한 한담(閑談) 정도였는데, 마침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 었다. 조선의 산업은 일대의 명총감 시모오카 츄지(下岡忠治)를 맞이하여 획기적인 비약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가 부산에 일보를 디디는 동시에 내놓은 단어는 산업제일주의(産業第一主義)였다. 이 단어는 반도의 구석구석 퍼져 천하는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었다. 이 시모오카(下岡) 밑에서 식산국장으로서 (산미증식)계획의 중요한 임무를 띤 것은 머지않아 경일(京日)136) 사장으로 취임하 게 되는 이케다 히데오(池田秀雄)이었다. 이케다 밑에서 상공과 정으로서 활약한 것은 지금은 대만전력(臺灣電力)에서 때를 만난 아다치 후사지로(安達房治郞)이었다. 아다치는 당시 반도에서 선 산품충용(鮮産品充用)을 주장하며 내지에 있어서 국산품 애용의 선구가 되었다. 이케다와 아다치 두 인재는 총감 시모오카 밑에 136) 경성일보( 京城日報 )를 의미한다.

18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63 서 산미증식계획의 수립에 따른 생산품의 소화에 대해 생각했다. 쌀을 만드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 소화 방법 을 연구하고, 상품가치 높일 것을 생각해야 한다. 생산의 증가와 상품가치의 증고( 增 高 )를 병행해 가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취인 소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것을 곧바로 임 하기에는) 법령이 불비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인취 외에 각지에 연시장이 있었고, 취인소와 거의 같은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우 선 이것을 개선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이 케다, 아다치의 결론은 일치했다. 이렇게 해서 시모오카에 대한 취인소 정책 확립의 진언( 進 言 )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시모오카는 농상무성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또한 다년간 농무국장( 農 務 局 長 )도 지냈고 상무국장( 商 務 局 長 )을 지내면서 연 공을 쌓은 만큼 취인소의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취인소와 유곽문제는 관리의 귀문( 鬼 門 )이다, 영리한 사람은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은 시모오카가 한 말이다. 부주의로 손을 대면 터무니없는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케다와 아다치가 설득해도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취인소계의 혼란상태를 목도하자 손을 대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 게 되었다. 일세( 一 世 )의 명총감이라 불리는 만큼 그의 결단도 빨 랐다. 즉 결국 시모오카는 마음을 움직여 이케다 식산국장과 아 다치 상공과장 두 사람을 조용히 관저로 불러 3일간 내내 의견을 교환하였고, 그 결과 그럼 해야지 하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184 16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그런데 산미계획과 철도연장이라는 2대사업에 과한 계획을 세 워 예산(안)을 가지고 도쿄로 간 시모오카가 중앙정부와 절충하 던 중에 병을 얻어 쓰러져 버렸다. 그 때문에 이 계획은 실현되 지 못하고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시모오카의 뒤를 이어 정무 총감에 취임한 것이 유아사 구라헤이( 湯 淺 倉 平 )였다. 유아사는 근본이 목석같은 사나이( 根 が 石 部 金 吉 )로 취인소와 유곽문제를 너무 싫어했다. 부임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시모오카는 알고 피했지만, 유아사는 까닭 없이 싫어해서 어떻게 해 볼 도리 가 없다. 이케다와 아다치는 고심참담( 故 心 慘 憺 )하며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한 끝에 겨우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취인소정책 문제에 관련하여 경인양취합병설( 京 仁 兩 取 合 倂 說 )이 대두하게 된 이면에서 활약한 도미타 기사쿠( 富 田 儀 作 )와 시모오카 츄지( 下 岡 忠 治 ) 사이에 얽힌 하나의 미담이 삽입 되어 있다. 시모오카는 효고현( 兵 庫 縣 ) 출신으로 도미타 기사쿠 와 고향이 같았고, 소년이었을 때는 도미타의 형에게서 배웠다. 세간에서는 도미타가 학교 선생을 하고 있을 때 시모오카는 생 도였고, 따라서 사제지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었지만, 도미타 자 신이 스스로 말한 바에 따라 전해지는 것은 시모오카의 선생이 도마타 자신이 아니라 도미타의 형이었다.

18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65 仁 取 盛 衰 記 (40) 세 사람이 읽은 시모오카( 下 岡 )의 속마음 은밀한 상담 鳥 栖 忠 安 시모오카가 정무총감이 되어 부임했을 때 고향의 모( 某 ) 씨로 부터 도미타 기사쿠( 富 田 儀 作 )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 는 이번에 동향 출신인 시모오카가 조선통치의 제일 앞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때 우리들은 동향의 정의( 情 誼 )로 시모오카로 부터 조선의 이권을 넘겨받아 크게 음덕( 蔭 德 )을 입었으면 좋겠 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은 오래전부터 조선 사정에 정통 하고 있으니 우리들과 연락을 취해 이럴 때 서로 돈을 벌어보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의 내용이 열거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과연 도미타 기사쿠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과연 시모오카는 동 향 출신의 성공자이다. 더구나 시모오카는 오늘의 지위에 만족해 서는 안 되고 더욱 더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권운동 같은 쓸데없는 일에 발목 잡혀서 고꾸라져서 는 안 된다. 부디 시모오카를 그르치지 않게 해 주었으면 좋겠 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이 편지를 접하고 상대편이 부끄러웠던지, 아니면 도미타 기사 쿠를 돈에 연연하지 않는 남자라고 냉소했던지, 그 점은 알 수

186 16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없지만 어찌되었건 도미타는 그 후 가끔 시모오카를 만났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시모오카는 누 군가로부터 이 일에 관해 전해 듣고 완전히 감격해 버렸다. 그 때부터 도미타 기사쿠는 (시모오카에 대한: 역자) 이권운동의 격 퇴담당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 후 문제가 진전되어 경인 양취 의 합병이 표면화했을 때, 도미타 기사쿠가 양측 사이의 알선자 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도미타의 행동을 이득을 얻 고자 하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 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의 사정에서 보아 적어도 도미타에게 있 어 그러한 이기적인 불순한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당연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상대편인 경취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창립자의 한 사 람 구기모토 도지로( 釘 本 藤 次 郞 )는 최초 취인소로서 계획했음에 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공과장 이쿠타 세이자부로( 生 田 清 三 郞 )가 근거 법령이 없다, 오늘날 단지 경취만을 취인소로서 허용하게 되면, 각지의 연시장이 모두 취인소가 되고 싶다고 몰려와 어떤 파란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따라서 현물시장으로 허가하기로 했다. 구기모토로서는 경취가 최초의 뜻과는 크게 반하는 모습으 로 태어난 것은 완전히 법령의 불비 때문이니, 이를 원래대로 바 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법령을 빨리 만들어 주는 것 이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한편 와타나베 사다이치로( 渡 邊 定 一 郞 )를 회두( 會 頭 )로 하는 전선상의 연합회( 全 鮮 商 議 聯 合 會 )에서는 취인소령의 발포를 결의하여 당국

18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67 에 요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미타( 富 田 ), 구기모토( 釘 本 ), 와타나베( 渡 邊 ) 이 세 명은 여러 가지로 총감 시모오카에게 접근 할 기회가 많았던 것을 이용하여 취인소에 대한 총감의 속마음 을 슬쩍 떠봤다. 시모오카는 이에 대해 당신들의 요망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로, 나도 산미증식계획과 함께 연구 중이니, 머지 않아 적당한 시기를 보아 해결하고자 한다. 대체로 취인소라는 것을 지방에 남설( 濫 設 )하는 것이 어떨지, 중앙에 모아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의향을 세 사람이 들었다. 시모오카의 방침에 의해 중앙집중책을 취하고, 일대( 一 大 ) 취 인소의 출현을 필요로 할 경우, 만약 인취와 경취를 도외시하고 새로운 취인소가 생긴다고 한다면 경인( 京 仁 ) 재계에 중대한 영 향이 미칠 것은 틀림없었다.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문제를 만약 이상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경인 양취 를 모두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뿐이다. 더구나 시모오카의 속마 음에도 경인 양취를 합병하여 취인소 정책에 합치하는 기관 출 현의 기초로 삼을 의향이 있음을 세 사람은 알아챘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은밀한 사이에 세 사람은 상담을 모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188 16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각서 교환으로 마침내 합병 구체화 제일보에 차질 鳥栖忠安 시모오카가 병으로 쓰러진 뒤를 이어 정무총감으로 임한 유아 사(湯淺)는, 전술한 바와 같이, 취인소에 대해 건드리지 않는 신 (神)에 탈 없다, 즉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는다는 주의(主義)의 남자였다. 하지만 도미타, 구기모토, 와타나베 이 세 명이 전 총 감 시모오카의 뜻을 따라 그 필요성을 적극 설득하는 것에는 본 심이 성실한 남자인 만큼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식산국 내의 의견을 구하게 되고, 이케다(池田)와 아다치 (安達)가 설명하는 것과 잘 종합해서 고려한 결과, 경인 양취의 합병은 괜찮겠지 하게 되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때의 합병은 물론 경제합병일 뿐이었고, 인취의 이전은 구상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유아사의 속마음이 대체로 정해지자, 앞에 나온 세 명은 인취의 와카마츠(若松) 사장과 경취 사장 덴니치 츠네지로(天日 常次郞)137)에게 합병을 종용하는 문서를 보내 (양취 합병에 대 137) 덴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는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北海道로 이 주해 오랜 기간 札幌에서 정미업에 종사했으나 사업이 잘 되지 않았 다. 러일전쟁 후 1906년 8월 약간의 자본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 와 경성의 남대문 외곽에 정미소를 차렸다. 1913년 1월에는 경성거 류민단 의원에 당선되었고, 사업의 발전과 함께 天日精米所를 회사 조직으로 개조하고 사장이 되었다. 인천 및 군산 등에 지점을 설치 하였다. 1921년 현재 朝鮮煙草의 감사역, 인천미두취인소의 감사역, 實業銀行의 감사역, 京城株式取引所의 전무 외에도 2,3개 회사의 중

189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69 한: 역자) 고려를 촉구했다. 이것이 경인 양취 합병 문제에 대해 사실상의 진행을 개시한 발단으로 1926년 5월말의 일이었다. 이 합병을 종용하는 서면(書面)을 계기로 와카마츠와 덴니치 두 사장의 의견이 교환되었다. 연구 결과 합병이 가능하다면 기 초를 좀 더 강고하게 해서 시장의 진흥을 도모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고, 다음과 같은 각서를 교환했다. 합병조건에 관한 각서 인천미두취인소와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의 합병에 관해, 가계 약 체결의 예비행위로서 승낙하여 계약하는 바 다음과 같다. 첫째, 합병은 경취시장을 해산하여 인취에 흡수 합병한다는 종전 의 담합대로 하더라도 양사 주식의 비율 결정상의 사정도 있고 하니 편의상 신설 합병의 방식을 취하고 양사를 해산하는 동시 에 신 회사를 설립하여 양사의 자산업무 및 일체의 권리 의무를 계승할 것 둘째, 합병 후에는 인천에 본점을 경성에 지점을 두고, 본점에 서 미두취인소를 지점에서 주식의 현물시장을 경영할 것 셋째, 신회사의 자본금은 690만원 이내로 하고, 이의 분배는 인취 주주에 대해서는 구주 10주에 대해 신 회사 액면 50원의 불 입을 끝낸 주식 11주, 신주 10주에 대해 신 회사 액면 50원의 12 원 50전 불입 주식 11주를 교부하고, 경취 주주에 대해서는 구주 역으로 활동 중이었다. 상업회의소 평의원에 추천되었다. 한국사데이 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90 17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10주에 대해 신 회사 액면 50원의 전액 불입 주식 7주 반, 신주 10주에 대해 신 회사 액면 50원의 15원 불입 주식 7주 반을 교 부한다. 단, 주주의 희망에 따라서는 이를 대신하여 위와 같은 (액면 50원의: 번역자) 12원 50전 불입 주식 9주를 교부할 수 있 음 넷째, 인취 주주에 대해 전항 주식의 교부 외에 합병의 실행 에 앞서 구주 1주에 대해 4원, 신주 1주에 대해 1원의 특별배당 을 인정하기로 함 다섯째, 신회사의 명칭은 주식회사조선취인소로 할 것 여섯째, 합병 후에는 인취 취인원과 경취 중매인의 업무 겸영 을 인정할 것 이상 이렇게 해서 드디어 양취 합병 문제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게 되었고, 6월 6일 경성구락부에서 양취 연합 중역회를 열어 이 문제를 부의했는데, 역원회의 결과는 만장일치로 토의를 진행시 키기로 결정했다. 이 석상에는 뒤에 반대의 급선봉이 된 요시다 슈지로( 吉 田 秀 次 郞 )와 고노 다케노스케( 河 野 竹 之 助 ) 두 명도 당 시 인취의 중역이었기 때문에 물론 출석하여 크게 쌍수를 들고 찬성했었다. 이 합병이 중역 간에 한 사람의 이의도 없이 가결되자 합병문 제의 발기자인 와타나베( 渡 邊 ), 도미타( 富 田 ), 구기모토( 釘 本 ) 세

19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71 명은 이를 언론기관에 발표했다. 그런데 이 발표의 중요임무를 맡았던 오노 규타로( 小 野 久 太 郞 )가 처리에 만전을 기하지 못했 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각 사의 경제부가 허술해 져 있 을 때였고, 결과적으로 이 발표가 매우 불공평한 것이 되고 말았 다. 그때문에 맹렬한 (합병에 대한: 역자) 이론( 異 論 )이 일었고, 경성일보( 京 城 日 報 )가 먼저 맹렬하게 합병반대열의 선양( 煽 揚 )에 전력을 다해 필진을 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이 문제는 발단의 제일보에서 완전히 이상한 엇갈림이 생겼고, 의외의 반대 자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仁 取 盛 衰 記 (42) 부족했던 사전 설명 와카마츠( 若 松 )의 실수 鳥 栖 忠 安 게다가 또 하나의 실책이라고 하는 것은, 인취 사장 와카마츠 가 사전에 대주주들의 양해를 얻는 일에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 이다. 최초 와카마츠는 일찍이 교토( 京 都 )취인소의 이사장을 지 낸 적이 있는 아마노( 天 野 ) 모라는 사람을 상담상대로 하고 있었 는데, 합병문제에 대해서는 덴니치 츠네지로( 天 日 常 次 郞 )에게 모 든 것을 상담했다. 덴니치는 당시 취인소통이라는 점에서 조선

192 17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제일이라고 자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취인소론은 다소 의심쩍은 면이 있었다. 그런 덴니치가, 최초 와카마츠가 합병 이 야기를 들고 오자 좋아(よし来た) 라고 하며 두 가지 답변으로 응했다. 왜나하면 경취는 이미 그때 쇠퇴 기색이 짙어, 신축의 당당한 건물로 체재만은 갖추었지만, 시장은 (찾는 이가 없어: 역자) 텅 빈 듯했고 문전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것을 허용한 당국까지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취와 같은 증권취인소는 불필 요한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장래에 이런 기관이 필요하 다는 것은 명료한 일이다. 지금은 영락해서 초라한 경취를 없앤 다고 해도, 막상 장래에 다시 만든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 렇게 되면 당국도 이사자도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국 은 내밀히 덴니치를 불러 이러한 고민거리를 흘렸지만, 아무리 지혜자(智慧者)인 덴니치라고 해도 머리를 싸매고 있을 뿐, 경취 가 스스로 부상할 명안(名案)도 없이 고통스러운 처지에 서 있었 다. 이러한 때 와카마츠가 합병이야기를 들고 왔던 것이다. 따라 서 덴니치가 때마침 준비된 나루터의 배를 타듯이 두 말 않고 이 이야기에 응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덴니치는 와카마츠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고 하며 둘이서 몰래 소곤소곤 이야기 를 시작해 합병 각서를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와타나베, 구기모 토, 도미타 세 명이 제창했다고 하는 것은 이면(裏面)을 꾸미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 전에 이미 와카마츠와 덴니치 사이의 호흡 은 절묘하게 잘 들어맞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 이다.

19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73 와카마츠가, 덴니치만을 상담상대로 하고 대주주의 의향을 사전 에 청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실수였다. 인취를 자기 근거지 같이 생각하고 있던 우츠미(內海)가 반대한 원인(遠因)은 사실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 더구나 중매인에게는 전혀 양해를 구하지 않고 각 서를 발표해 버렸기 때문에, 중매인은 내심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바보취급 당했다고 생각하며 분개했다. 하물며 인취의 우츠미라고 자처하고 있던 그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제일보에서부터 실로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대주주회에 앞서 6월 9일에 별도 상담회를 열고, 다시 11일 합병에 관한 대주주 준비회를 조선신탁 2층에서 열 때까지도 우츠미(內海)의 태도는 확실하지 않았다. 같은 달 6월 16일 대주주회가 마침내 야사카(八阪)에서 개최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입을 통해 반대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졌다. 경인 양취 합병 반대의 발단은 사실 이 야사카 회합에 있었던 것이다. 인취 사장 와카마츠는 6일에 발표하면서 그 다음날 7일에는 인천부윤, 조선매일 사장 고토 렌페이(後藤廉平), 기타 두세 명의 유력자와 회견하고, 합병의 동기, 의의, 방법 등을 설명했다. 특 히 시장은 이대로 합병하게 되어 있고, 본점은 인천에 두기 때문 에, 합병은 인천에 있어서 상당히 유리하다는 점을 덧붙이는 것 을 잊지 않았다. 사실 와카마츠는 그때 시장이전은 말도 안 되 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케다 식산국장에게 양해를 구했 을 때에도, 이케다가 경성으로 이전하면 어떨까 하고 말했을 때, 그에 대해 와카마츠는 얼굴이 파랗게 되어 이전(移轉) 같은 것

194 17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을 입 밖에 내기라도 한 다면 큰일 납니다 라며 물러 나온 사실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와카마츠의 존재는 인천부민에게 있어 정말 고마운 존재였던 것 이다. 6월 16일 야사카에서 개최된 100주 이상 대주주회는 서로 이 해관계가 복잡하여 도저히 일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다수 모여 옥신각신했기 때문에, 가부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위원을 선정하여 조사하기로 하고, 우츠미 슈쿠로(內海叔郞), 조 선권농신탁 하라 가츠이치(原勝一), 이마무라 가쿠지로(今村覺次 郞), 고바야시 도우에몽(小林藤右衛門) 등 5명이 위원으로 뽑혔 다. 그 후 이 위원회는 이따금씩 열렸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7 월 21일이 되어 해산해 버렸다. 仁取盛衰記 아라이(荒井)와 고죠(古城)가 조정안 작성 인천 측의 반대 鳥栖忠安 당시의 인취는 아직 기세가 등등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합병에

19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75 대해서도 주주는 꽤나 얌채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합병조건은 경취와 인취가 각각 각별하게 만들기로 했는데, 만들어진 두 개 의 안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경취의 안에 의하면, 양 취 모두 합병에 따른 주( 株 )의 할당 비율은 동등하게 되어 있지 만, 인취의 주주에게는 30만원의 특별배당을 인정했다. 이에 대 해 인취 측의 안은 합계 30만원의 특별배당(구주는 10원, 신주는 2원 50전)을 실시하고, 이 중 신주의 특별배당 2원 50전은 이를 불입에 충당하여 경취의 신주와 마찬가지로 15원 불입으로 해 두어 흡수합병의 형식을 취하며, 인취의 신주 7주 반을 교부한다 는 내용이었다. 이 커다란 격차로 미온적인 평범한 수단으로는 쌍방이 서로 양보하여 의견을 좁히는 것이 곤란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양 취의 중역을 겸임하고 있는 아라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와 고죠 간도( 古 城 管 堂 )에게 조정안의 제작을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만 들어진 조정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합병조건 중재안 一, 경취 15원 불입 10주에 대해 인취 신주 12원 50전 불입 9주를 교부할 것 一, 경취 50원의 불입을 마친 31주에 대해 인취 구주 24주를 교부할 것 一, 부대조건으로서 인취 측 주주에 대해 구주 1주에 대해 10원, 신 주 1주에 대해 2원 50전의 비율로 합계 30만원을 교부할 것

196 17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이유 요지(理由要旨) 합병 비율 산정의 기초 一, 주가의 비율 인취 에 대해 경취 (1926년 6월 29일의 시가는 인취 29원 60전, 경취 29원 20전) 二, 자산의 비율 인취 에 대해 경취 三, 업적의 비율 인취 에 대해 경취 이상을 종합한 합병 비율 경취는 합계 이 되기 때문에 이를 평균하면 78.46이 되 어 인취의 100에 대해 78.46으로 산정의 근거를 삼는다. 이 조정안에 대해서는 양취의 중역진도 이쯤에서 타협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회사 측에서는 대주주회를 열어 합병조건에 대해 찬동을 구하기 로 했다. 하지만 인천의 유지(有志)는 합병은 이전(移轉)의 전제 (前提)라 하여 반대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즉 이 운동은 7월 10일의 공직자대회에 이어 시민대회로 행동을 개시했다. 인천부 민은 합병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중역 중에 경성에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런데 인천부민의 반대가 격화되는 와중에 합병과 반대 양파는 벌써 전초전을 치렀다. 이 전초전은 권신(勸信)138) 소유주를 둘러싼 쟁탈전이었다. 반대파 138) 1922년 4월에 설립된 권업신탁주식회사(勸業信託株式會社)이다. 최 초 자본금은 1000만원이었으며, 대표자는 다케우치 사쿠헤이(武內作 平)였다. 每日申報 <勸信業務開始期>.

19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77 는 감쪽같이 속아 첫 번째 패배(苦敗)를 당하고 말았다. 경인 양취의 합병사를 통해 합병과 반대 양파 사이에 인취주 를 놓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 전후 2번 있었다. 첫 번째는 권신 (勸信)이 소유한 인취주 인수 사건이고, 두 번째는 우츠미(內海) 가 소유한 인취주가 상대편에 인수당한 사건인데, 두 번 모두 합 병파의 승리로 끝났다. 仁取盛衰記 예기(芸妓)의 입을 통해 드러난 음모 권신(勸信) 주식 쟁탈전 鳥栖忠安 권신(勸信)은 현 내각의 법제국 장관으로 지금 한참 잘 나가는 다케우치 사쿠헤이(武內作平)139)나, (일본)세키젠은행(積善銀行)140) 139) 원문에는 竹內作平으로 되어 있으나 武內作平이 맞다. 다케우치 사 쿠헤이(武內作平, )는 아이치현(愛媛縣) 출신이다. 관서법 률학교(현재의 關西大學)와 和佛法律學校(현재의 法政大學)을 졸업했 다. 오오사카변호사회 회장, 大阪土地建物, 日本冷藏, 阪堺電鐵 등의 역원을 역임한 후 1902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그 후 大藏政務次官, 예산위원장을 거쳐 제2차 若槻內閣에서 법제국장관을 지냈다. ja.wikipedia.org/wiki/武內作平. 140) 일본세키젠은행(日本積善銀行)은, 1922년에 경영자의 난맥경영이 원

198 17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으로 유명한 다카쿠라 다메조(高倉爲三)141) 등이 여러 가지 복잡 한 사정에서 창립한 자본금 1천만 원의 대회사였다. 당초 책사들 의 집합체였던 까닭에 (결국) 술책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고, 그 당시에는 이미 해산이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권신이 가지고 있던 인취 주 1만 수천 주가 청산(淸算)에 들어가 오오사카에서 매물로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인취에서는 중역회의 결의를 따라 이를 회사 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오오사카 사람들이 대주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마츠오(松尾)의 예에서 실감했기 때문에, 이때 회사 의 안전을 위해서도 분별없는 사람의 손에 주식이 쥐어져 (시장 이) 교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향도 전달되어 있었다. 이 결 의에는 인천 측의 중역 요시다(吉田), 고노(河野) 두 명도 물론 참 가하고 있었다. 당시 도쿄에 있던 아라이 하츠타로(荒井初太郞)가 오오사카에 우연히 같이 자리한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에게 (권신 주 매입 에 관한: 역자) 교섭에 나서 달라고 의뢰했다. 도미타는 부산의 이마이 겐료(今井源良)의 소개를 받아 현재 도쿄취인소(東京取引 所)의 야마카노(山叶)상점을 경영하고 있던 나가노 마모루(永野 護)를 통해 교섭을 진행했다. 이마이는 원래 조선은행 지점장에서 오오이케(大池)의 지배인이 되었고, 현재는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 인이 되어 파탄한 교토(京都)에 소재해 있던 은행이다. 이것이 계기 가 되어 다수의 은행에서 예금인출소동이 발생했고, 휴업이나 파탄 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세키젠은행사건 이라 불리며 은행 리스크 관리의 교훈이 되고 있다. weblio辭典. 141) 원문에는 小倉為三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인 듯하다.

19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79 업하고 있다. 나가노는 원래 시부사와( 澁 澤 )의 서생으로 출발하여 성공한 인물로, 요코하마취인소의 이사 등을 지낸 적이 있는 민 완가이다. 이 경로로 도미타가 매입 교섭을 추진하자 최초 27, 8 원이면 팔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던 권신이 갑자기 강경한 자 세로 버티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야기는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용이하지 않은 시도가 합병반대파 측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7월 27일 밤, 요시다, 고노, 리키타케( 力 武 ), 기타 인 천 측 유력자가 요정 우로코에서 회합했다. 그 자리에서 리키타 케가 (선불) 계약금으로 5만원을 내고 야스다은행( 安 田 銀 行 )으로 부터 자금을 인출하여, 권신의 주식 전부를 인천 측에서 인수함 으로써 인천에 살고 있는 합병반대파만으로 인취를 경영하자고 하는 밀의( 密 議 )가 이루어졌다. 요시다, 고노는 인취의 현 중역으 로 인취 회사가 스스로 이 주식을 인수하는 것에 찬성하여 중역 회를 배신하는 행동에 나섰다. 이 회합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 았고 완전히 비밀리에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한 준비로 개최되었는데, 장고 끝에 악수( 千 慮 の 一 失 )라고나 할까 그 자리에 예기( 藝 妓 )를 시중들게 한 것이 실수였다. 곧바로 이 밀담이 합병 파에게 새 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 요정 긴스 이( 銀 水 )에서 합병파의 모( 某 ) 씨가 그 자리에 부른 예기가 전날 밤 밀담 자리에 있었던 예기였다. 그 예기는 전날 밤의 밀담 내 용을 완전히 이야기하고 말았다. 회사 측에서는 놀라는 동시에 요시다, 고노의 불신용에 분개했다. 곧바로 도쿄에 있던 아라이에 게 밀전( 密 電 )을 보냈다. 그리고 오오사카에 있으면서 매수 교섭 중이던 도미타 기사쿠를 독려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200 18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인천 측에서는 그렇게 빨리 음모가 적들에게 발각된 것을 알 지 못했다. 매수 교섭은 주로 요시다 슈지로(吉田秀次郞)가 담당 했고, 스기노 에이하치(杉野榮八)142)가 대표로 오오사카로 건너 가기로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27, 8원을 제시했 다. 주가는 쌍방이 다투어 값을 올리는 바람에 인천 측은 31원 까지 어떻게 버텨보았으나 (결국) 회사 측에서는 33원으로 매입 해 버렸다.143)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부터 회사 측에서는 인 천 측에 대해 희망한다면 주식을 나누어 주어도 좋다, 많은 주식 을 오오사카에 두는 것이 위험하니 일단 조선으로 가지고 오면 누가 소유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인천 측에 교섭했다. 그러나 인천 측에서는 6천 5백 주에서 1주만 부족해도 인수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합병 중단의 성명이 없어서 인수할 수 없다고 억지부리기 시작했고,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 다. 그래서 회사 측에서는 이를 중매인 기타에게 나누어 갖게 하기로 하고 마무리 지었다. 142) 원문에는 杉野等八로 되어 있어 杉野榮八의 오기로 생각된다. 143)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가 참조된다. 京仁兩取合倂問題는 渡邊 定一郞氏가 歸京할 때까지 依然保留하여 두기로 되어 一般은 다만 渡邊氏의 歸京時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므로 거의 休息狀態에 있던 바 近者 兩取合倂에 反對하는 仁川委員會에서는 秘密히 反對에 關한 積極的 方法을 講究中이더니 去29日에 委員中 一人인 杉野英八氏가 遽然히 大阪에 渡去하여 勸信 重役과 會見 交涉中이라는데 此에 對 하여 探聞한 바에 依하면 肩代價는 舊株 86圓, 新株 32圓으로 이미 肩代契約金으로 杉野氏에게 5만원을 송금하였고 此 交涉에 對하여 勸信側에서는 舊株 87圓, 新株 33圓을 唱하므로 아즉 決定된 것은 없이 交涉이 繼續한다더라(仁川電話) 東亞日報 <京仁 兩取合倂, 仁川 反對委員 遽然히 渡阪! 勸信仁取株肩代次 爲先契約 金 五萬圓送金>.

20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81 仁 取 盛 衰 記 (45) 권신( 勸 信 ) 소유주 인수 경위 와카마츠( 若 松 ) 사장의 발표 鳥 栖 忠 安 그 당시 인천 측에서는 인취 중역이 가로 챘다고 하여 요란하 게 비난했지만, 실제는 이상과 같은 경과였다. 즉 그간의 사정에 대해 당시 와카마츠 사장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인취 주식은, 권신회사( 勸 信 會 社 )가 다수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 사정이 있 었고, 따라서 지난 번 중역 측에서 어쩔 수 없이 권신과의 사이 에 인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926년: 역자) 7월 7, 8일 경 와카마츠 사장이 오오사카에 있던 중 권신회사와의 사이에 이 실마리를 풀고, 아라이 취체역이 도쿄 체재 중 도미타 기사쿠( 富 田 儀 作 )의 손을 거쳐 교섭을 추진하였는데, 귀선( 歸 鮮 ) 하면서 권신 청산인 대표자와 회견 및 절충을 했다. 동씨가 귀 선( 歸 鮮 )하면서 더욱 교섭을 심화시켜 갔지만, 이 무렵 권신의 태도가 갑자기 강경해 져 당초의 예기( 豫 期 )에 반하여 결국 33원 으로 인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울 만한 사 실이 발각되었다. 다음과 같다. 인취 취체역 중 한 사람인 요시 다 슈지로( 吉 田 秀 次 郞 ) 씨가 부산의 이마이( 今 田 ) 씨의 소개를

202 18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거쳐 도쿄 및 요코하마의 어떤 취인소와 관계 있는 나가노( 永 野 ) 아무개( 某 ) 씨와 밀약하고 권신 소유주의 인수에 나선다, 그 중 6천 주는 도쿄 측에 인수하게 하고 그 대상( 代 償 )으로 도쿄 측에 서 전무취체역을 파견하여 취인소의 실권을 쥐게 한다, 나머지 6 천 주는 요시다 씨 일파의 인천 재주자( 在 住 者 )에게 가지고 온 다. 10월 개선기( 改 選 期 )에 회사를 장악하려는 계책을 실현하고 자 도모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이 사실은 이마이 겐료( 今 井 源 良 ) 씨가 도쿄로부터 조선에 사는 아무개( 某 ) 씨에게 보낸 서한, 동 씨가 오오사카에서 권신과 교섭했다는 사실 및 우리가 문지( 聞 知 )한 기타 사실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것은 지금부 터 십 수 년 전 오오사카의 마츠오( 松 尾 ) 일파가 인취 주의 매점 을 행하여 결국 전횡방자( 專 橫 放 恣 )한 끝에 1919년 봄에 이르러 인취의 대파탄에 이르게 한 경로와 같은 점이 있다. 현재는 6천 주라고 해도 이미 전무( 專 務 )를 냈고, 회사의 실권을 잡은 이상 소유주를 사 늘리는 것( 買 增 )은 용이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인 천취인소는 인천의 취인소가 아니라, 전술한 운명을 걷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취인소 문제에 내지로부터 마수가 뻗치는 것이어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번 인수에 즈음하여 중역 측이 주시한 점은 실로 이 점에 있었다. (인천)부민이 인취 주를 소유하는 것은 평소 환영하는 바이고, 이번에 차라리 권신 소유주 1만 2천 주가 전부 부민 소유가 된 다고 했다면, 중역 측은 기뻐하며 도중에 손을 뺐을 것이다. 그 런데 요시다 씨의 계획이라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띠고 있었 고, 인천부민을 팔려고 했던 것이다. 얼마나 음험( 陰 險 )한 움직 임이었는지는 동씨가 내지에서 귀선( 歸 鮮 )한 이래 회사에는 전화

20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83 조차 걸지 않고, 완전히 그 소식을 비밀에 부치고, 밤낮으로 일 류 야심가를 모아 책동한 사실로도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 중역 측은 부민의 인취 주를 소유하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서는 이번 에 인수한 1만 2천여 주 중 이번에 부민이 매입하기 위해 조인 했다고 전해지는 4천 5백 주에 대해, 이때 신청한 것에 대해서 는 1주에 대해 1원씩은 중역의 부담으로 하여 33원으로 인도하 겠다는 것을 기탄없이 언명( 言 明 )하는 바이다. 주식의 쟁탈에 실패한 인천 측은, 마침내 민중운동에 의한 대 항책을 취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제일보는 합병파의 근원으로 여 겨진 당시 감사역 오오히라 가주로( 大 平 嘉 重 郞 )에 대한 박해로 나타났다. 즉 부민의 이름으로 감사역 사임의 권고장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하여 본정( 本 町 ) 청년단에서 제명하는 일, 리키타케 가지로( 力 武 嘉 次 郞 )의 이름으로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에 설 득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 등 온갖 수단으로 오오히라를 인천에 서 내 쫓으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오오히라도 보통내기가 아니어 서 아무리 눈엣가시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좀처럼 위축되지 않 았다. 그런 와중에 우츠미의 중역문제라는 성가신 문제가 또 하 나 발생하여 점점 더 국면을 분규로 이끌어 갔다. (정정) 전회( 前 回 ) 권신 주 인수의 경위에 대해 아라이( 荒 井 ) 및 도미타( 富 田 )가, 부산의 이마이( 今 井 ) 및 도쿄의 나가노( 永 野 )에게 교섭을 벌였다는 것은 기자가 잘못 들은 것으로 와카마츠 사장의 발표가 사실에 부합하기에 정정한다.

204 18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위임장에 얽힌 여러 진담(珍談) 벌벌 떨었던 사람들 鳥栖忠安 합병문제가 분규함에 따라 인취의 제일인자라 자임하는 우츠미 슈쿠로(內海叔郞)를 중역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설(說)이 내부에 서 대두했다. 우츠미의 친한 사람 중에도 와카마츠(若松)에게 맡 겨두지 말고 우츠미 자신이 직접 나서 해결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하는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해 우츠미도 인취 중역에는 전혀 생각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그 해 10월 20일 인취 정시총회는 다나카 사시치로 (田中佐七郞), 이병학(李柄學) 두 명과 함께 우츠미 슈쿠로(內海叔 郞)를 신 중역에 선출했다. 그러나 당국은 우츠미의 중역 취임에 대해 좀처럼 인가를 내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우츠미는 이미 중매점 간판을 그 후계자인 우츠미 세이조(內海淸藏)144)에게 물 려주고 있었지만, 그 주거(住居)가 중매점의 부엌과 공통하고 있 어서 별거하지 않는 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 144) 우츠미 슈쿠로(內海叔郞)에 관한 정보는 찾기 어려우나 그의 양자인 內海淸藏에 대한 정보가 있어 참고에 제공한다. 1897년 효고현(兵庫 縣) 출신으로 川田喜次郞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仁川米穀商 內海商店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1926년 仁川米豆取引所 取引員 免 許를 취득했다. 인취와 경취가 합병하여 조선취인소가 발족하자 1932년 조선취인소 미두취인원 면허를 다시 취득했다. 1934년 조선 취인소 증권부 취인원 면허도 취득하여 미곡과 주식을 겸영하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20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85 츠미는 이 요구에 대해 평소대로 제멋대로 지껄여대며 좀처럼 주 문대로 별거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결국 중역 취임은 유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우츠미는 내심 적잖이 분개했다. 더구나 그 원인이 와카마츠 사장의 알선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오오 히라 가주로( 大 平 嘉 重 郞 )의 존재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결 정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다음 1927년이 되어서 우츠미는 합병 반대의 기치를 선명하게 하여 봄의 총회 직전에 반대 성명을 내 기에 이르렀다. 총회 직전 인천의 형세를 보면, 전술한 대로 구체 적인 반대운동으로 전개된 오오히라( 大 平 )의 제명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청년단이 인천애( 仁 川 愛 )를 부르짖으며 위임장 모집에 전 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위임장 모집에 만약 응하지 않을 때는 취 인 거절, 절교 등을 내세우며 다그쳤기 때문에, 대부분 그 무섭고 사나운 태도에 두려워하며 청년단이 지휘하는 대로 따라가는 상 황이었다. 단 가토 헤이타로( 加 藤 平 太 郞 ), 츠지카와 도미시게( 辻 川 富 重 ), 나오노 료헤이( 直 野 良 平 ) 등의 유력한 정미업자는 인취 의 이전을 수반하지 않는 경제합병이라면 괜찮지 않겠느냐 하고 의연하게 이에 저항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박해의 손이 다가 오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앞서 말한 사람들은 와카마츠( 若 松 ), 아라이( 荒 井 ), 고죠( 古 城 )의 세 명을 찾아가 총독부에 이전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아 끝까지 열광하는 인천의 민심을 진정시 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 이외에 어떤 효과도 없었다. 부민의 압박이 얼마나 준열( 峻 烈 )했 는가는, 당시 중매점을 경영하고 있던 이마무라 가쿠지로( 今 村 覺 次 郞 )의 예를 보아도 상상할 수 있다. 최초 합병을 하든 하지 않 든 주주의 권리로 제3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치

206 18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불을 질러 버린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반대파에 위임장을 내주고 말았다. 이마무라는 총회가 끝난 후 중매인조합의 총회에서 머리 를 저두평신(低頭平身)하며 사죄했다. 이 총회 전의 위임장 문제에는 여러 가지 진담(珍談)이 포함되 어 있었다. 조선신탁은 지금이야 숨이 곧 끊어질 듯하지만, 당시 는 아직 위세가 좋아 인취 주 1,200주를 소유한 대주주 중 하나 였다. 그런데 이 중역 중에 고토 렌페이(後藤廉平)나 우츠미 슈 쿠로(內海叔郞) 등의 반대파와 구와노(桑野)나 다나카 사시치로 (田中佐七郞) 등의 합병파가 있어, 말하자면 오월동주(吳越同舟) 와 같은 형세였다. 따라서 인취 총회 전에 조선신탁의 중역회를 열어 합병이나 반대 어느 쪽에도 참가하지 않고 엄정중립을 지 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총회 직전이 되자 조선신탁 사장 인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145)와 다나카 사시치로(田中佐 七郞)는 무라타 마코토(村田孚)146) 등으로부터 호통을 듣고 위축 145)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는 1867년생으로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이다. 1887년 조선 인천에 건너와 잡화상을 시작했고, 러일전쟁 당시 군의 어용상(御用商)으로 물자를 공급했다. 1897년 平山米店을 개업하여 미곡상을 시작했다. 이후 인천상업회의소 의원, 인천수산회 사 취체역, 조선신탁회사 취체역과 사장을 지냈다. 탄산수를 제조했 으며 농원도 경영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46) 무라타 마코토(村田孚)는 1879년 오카야마시(岡山市) 출신이다. 러일 전쟁 때 헌병으로 출정했다가 조선에 주둔, 1905년 7월 이래 인천 과 경성 등지의 헌병대에서 근무했다. 1909년 경찰관이 되어 인천서 에 근무했다. 1920년 사직과 동시에 토건업계에 투신하여 寺尾組 인 천출장소장을 지냈다. 이래 인천부에 거주하면서 각 방면의 사업에 종사하며 공직을 겸했다. 1935년 현재 인천물산주식회사 감사, 인천

20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87 되어 결국 반대파에게 위임장을 넘겨주고 말았다. 인취의 감사역 인 다나카 사시치로가 이 위임장을 넘겨주었다고 하니 쉽게 볼 수 없는 진풍경이기는 하다. 이러한 진담(珍談)을 골라내고자 한 다면 끝이 없지만, 어쨌든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합병문제를 부의하기 위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仁取盛衰記 의결하지 못하고 결국 산회 분규한 총회 鳥栖忠安 1927년 3월 31일 오후 3시, 70여 명의 정제복 경관의 호위 하 에 인취 총회가 사무소 2층에서 열렸다. 인취 주위에는 합병 반 대를 외치는 인천부민이 사람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살기(殺 氣)로 가득 했다. 회의장 안은 인천서 경부(警部) 나가오 다케마 (長尾猛馬)가 이끄는 30여 명의 경관들이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 고 있다. 합병파의 출석 주주는 21명, 다카하시 쇼노스케(高橋章 之助)가 구레나룻을 훑으며 선두에 서서 위엄 있게 입장한다. 한 편 반대파는 리키타케 가지로(力武嘉次郞)를 장수로 하여 71명 이들 또한 당당한 진을 펴고 서로 노려본다. 부회 의원, 재향군인 인천분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한국사데이 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208 18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마침내 개회되면서 양파( 兩 派 )는 불꽃을 튀기며 싸웠다. 합병 파에서는 다카하시 쇼노스케, 사이토 고키치( 齋 藤 五 吉 ) 등의 투 사를 진두에 세우고, 반대파는 리키타케를 중심으로 고토 렌페이 ( 後 藤 廉 平 ), 스기노 에이하치( 杉 野 榮 八 ) 등이 필사적으로 싸우며 불꽃 뛰기는 논전( 論 戰 )이 전개되었다. 와카마츠 사장은 주주석 중앙에 테이블을 가지고 나와 연설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탓인지 덜덜 떨기 시작했고, 지금이라도 엎어질 것 같아서 옆에 있던 고 바야시 료조( 小 林 良 蔵 )가 걱정하여 다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혼란이 극심해서 수습할 방도가 보이지 않자 6시 50분이 되어 휴회를 선언하고 와카마츠 사장 이하 안으로 들어가 버렸 다. 옥외( 屋 外 )의 민중은 점점 더 흥분하여 사무소 창문 유리를 노리고 투석하는 자도 나왔다. 결국 여러 명의 검속자( 檢 束 者 )를 내는 소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대로 방임하면 예사롭지 않은 사 태로 발전할 것 같은 형세였기 때문에 경찰의 주의를 따라 결의 ( 決 議 )에 이르지 못하고 그대로 산회했다. 이번 총회는 기가 약 한 와카마츠로 어쩐지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와타나베 사다이치 로( 渡 邊 定 一 郞 ) 등은 와카마츠를 칭병( 稱 病 )하여 안으로 들여보 내고 호기로운 아라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를 의장석에 세워 강 행하고자 이면에서 추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와카마츠가 그대로 의장석에 있었기 때문 에 우려한 대로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20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89 이번 총회에서 위임자에 의의( 疑 義 )가 있다고 하여 반대파가 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위원을 선정하여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날 결말이 나지 않았다. 경관 입회하에 조사내용을 봉인하여 경 찰에 보관하게 하고 4월 1일 정밀하게 조사하기로 했다. 그렇지 만 막상 다음날 4월 1일이 되어 인천서에 관계자가 출두하여 조 사를 위해 서장으로부터 이 서류를 수취할 때 가쿠 츠구오( 加 來 次 夫 )가 나서 인취의 창립자 가쿠 에이타로( 加 來 榮 太 郞 )의 아 들 정중히 이것을 받는다 고 연극 말투로 우스운 몸짓을 해서 일동 어안이 벙벙했던 장면도 있었다 한다. 仁 取 盛 衰 記 (48) 요네다( 米 田 )의 조정으로 일시 합병 논의 보류 인천 측 축배 鳥 栖 忠 安 그 후 4월 24일의 정례총회에 부의한 신주( 新 株 )의 신청에 대 해 회사가 취한 방법에 의의( 疑 義 )가 있다고 하여 소송문제를 야 기하는 등 분규가 계속되었다. 이 분규를 그대로 방임하면 치안 상으로도 우려할만한 사태가 전개될 듯했다. 총독부( 本 府 )의 내 의( 內 意 )를 얻은 경기도지사 요네다 진타로( 米 田 甚 太 郞 )가 양파 를 각별히 불러서 간담했다. 그 결과 무조건으로 일임하기로 했

210 19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고, 7월 17일 계속회( 繼 續 會 )를 열어 이 문제의 해결을 일단 보 류하게 되었다. 이때 중재가 성립하자, 요네다 지사는 와카마츠, 아라이, 아키야마 등의 회사 측과, 반대파인 리키타케, 고토, 스 기노 세 사람을 지사실로 불러 당시 내무부장 쵸이노우에 기요 시( 長 井 上 清 )와 경찰부장 하지 모리사다( 土 師 盛 貞 )의 입회하에 각서를 교환했다. 요네다는 이때 연기( 延 期 )라고 했지만, 인천 측은 중단이라고 해석하여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요네다 가 아라이에게 양해( 諒 解 )한 내용은, 1929년 5월 말일에 영업이 만료되니 그때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어떻겠느냐 하는 의미의 내담( 內 談 )이었던 것 같다. 즉 당시 와카마츠 사장의 이름으로 주주에게 발표한 각서의 내용은 다음 과 같은 것이었다. 각 서 一, 인천미두취인소와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의 합병에 관한 건은 이를 연기하고, 합병에 관한 현재 진행 중인 수속은 일체 이 를 철폐할 것 二, 합병에 관해 계류 중인 소송은 일체 이를 취하할 것 三, 종래 해 왔던 것을 일소하고, 인천미두취인소 당사자를 원조 하여, 일층 그 기능의 발휘를 도모할 것 이 합병문제가 좌절을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에, 와카마츠 사장 은 책임을 지고 사장을 사임했다. 5월 21일의 임시총회에서 재 선되기는 했지만 경영의 자신이 없으면서 그 지위에 머무르는

211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91 것이 깔끔하지 못하다고 생각, 사장 취임을 사퇴하고 아라이 하 츠타로(荒井初太郞)가 대신 사장이 되었다. 이때 지배인인 아키 야마 미츠오(秋山滿夫)도 사임을 신청했다. 이와 동시에 중매인 측에서도 고바야시 도우에몽(小林藤右衛門)이 위원장을 사임하여 부위원장이었던 구와노 겐지(桑野健治)147)가 위원장이 되었고, 닛타 요시타미(新田義民)가 부위원장이 되었다. 또한 그해 10월 총회에서 감사역 오오히라 가주로(大平嘉重郞)도 사임했고, 인천 측의 요구에 의해 그 후임으로 노구치 후미카즈(野口文一)가 감 사역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합병파는 요네다 지사와의 약속을 지켜 갑자기 조용해졌지만, 마침내 영업만기가 가까워 오면서부터 내부적으로 서서히 준비를 진행했다. 1929년 3월, 아라이 사장은 식산국장 이마무라 다케시(今村武志)를 방문해 당국의 의향을 탐문하는 동 시에 경인 양취 중역에 구기모토(釘本), 와타나베(渡邊)를 참가시 켜 은밀한 중에 모의(謀議)를 추진해 갔다. 당시 총독부의 분위 기는 총독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가 부산 상륙 제일보에서 행 한 그 성명서에서 취인소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암시하고 나섰 기 때문에, 상공과장 고지마 다카노부(兒島高信)는 취인소령 입 147) 구와노 겐지(桑野健治)는 1896년생으로 치바현(千葉縣) 출신이다. 1921년 4월 朝鮮取引所稅令이 공포된 뒤 인천미두취인소 취인원이 되었고, 조합의 부위원장으로서 업계를 위해 노력했다. 조선신탁합 명회사 상무이사, 경성방송국 이사와 조선방송협회 평의원, 기타 명 예직 및 조선토지신탁 감사역, 인천무진 취체역, 조선취인소 상의원 (商議員) 및 미두거래위원조합 위원장을 지냈다. 구와노 료타로(桑 野良太郞)의 아들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212 19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안 준비에 착수하여 예산 1만원을 이쪽으로 돌리고 1928년 3월 7일 상공성의 취인과장 후지타 구니노스케( 藤 田 國 之 助 ), 감독관 나가타 히코타로( 長 田 彦 太 郞 ), 시마 츠요시( 島 剛 ) 세 명에게 제도 조사를 의탁했다. 그렇게 해서 나가타, 시마 두 명은 경인 양취 를 위시하여 각지 현물시장을 약1개월에 걸쳐 실지조사( 實 地 調 査 )를 행했다. 仁 取 盛 衰 記 (49) 장어덮밥( 鰻 丼 )으로 꼬리 밟혀 합병문제 재연 鳥 栖 忠 安 나가타, 시마 두 감독관이 인천을 시찰한 결과, 인천에 취인소 를 두어야 할 요소가 매우 적어 졌다는 결론을 얻은 것 같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인취 관계자에게 총독부가 새롭게 취하려는 방침은 분산주의( 分 散 主 義 )가 아니라 집중주의( 集 中 主 義 )였고, 따 라서 인취 이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방침을 정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두 감독관의 의견은, 취인소는 당업자의 기관으로서 당업자가 아닌 자가 이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 는 것이다, 인취의 중매인이 입을 맞추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 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인취를 장래에도 이대로 두는 것에 대 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데 있었던 모양이다. 한 편 곡물협회 측과 두 감독관이 회견했을 때에도, 협회 측은 현재

21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193 의 인취는 거의 이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 연계 매매(かけつな ぎ)148)는 오오사카나 도쿄에서 하고 있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따라서 인취 중매인과 협회 측이 말하는 바가 정확히 일치하여 두 감독관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인취 관계자는 인취의 경성 이전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더 굳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야마나시는 시모오카(下岡)와 마찬가지로 유력한 중앙시장 건설 의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경성과 부산의 한 곳 정도로 했으면 했다. 이 방침에 기회를 틈타 발생한 것이 도쿄 가와사키 도쿠노스케(川崎徳之助)의 부산취인소 사건으로 야마나시(山梨)를 실각시키고, 그 만년에 오점을 남긴 사건이 되었다.149) 경성의 취인소에 대해서는 시마 츠요시(島剛)150)가 조사했는데, 오오무라 모모쿠라(大村百蔵)151) 일파의 조선취인소 운동이 되어 나타나 148) 가케츠나기도리히키(掛けつなぎ取引 掛け繫ぎ取引)라는 것은, 현물 시세 하락에 따른 손해를 방지하기 위한 연계 매매로 현물 없이 공 매매(空賣買)에 의한 헷지 거래를 의미한다. Weblio 辭書. 149) 야마나시는 1927년 12월 조선총독에 부임했다. 부임 직후 立憲民政 党에 의해 미곡상이 경성에 취인소를 개설하기 위해 야마나시의 측 근을 통해 5만 엔을 贈賂했다는 조선총독부의옥사건(朝鮮總督府疑獄 事件)이 폭로되어 사임했다. 미곡상과 측근은 유죄로 집행유예를 받 았지만, 야마나시 본인은 무죄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내 용은 飯沼二郞, 山梨總督疑獄事件と米穀取引所, 朝鮮民族運動史硏 究 3, 朝鮮史叢編集委員會編, 靑丘文庫, 1986년 참조. 150) 원문에는 島德이라 되어 있는데, 제48회의 기록과 비교할 때 오기인 듯하다. 151) 오오무라 모모쿠라(大村百蔵)는 1872년 출생으로 후쿠이현(福井縣) 출신이다. 1904년 大東新聞(京城日報社의 전신) 주필로 초빙된 것을 계기로 영주할 각오로 조선에 건너와 용산에 거처를 마련, 각 신문 과 여러 잡지에 조선경제론을 기고했다. 1906년 경성일본인상공회 의소 이사에 취임했고, 1907년 3월 용산거류민 총대에 선출되었으

214 19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풍운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7월 17일이 되어 총독부는 지 금까지 제출된 원서(願書)를 일단 전부 반려하고 말았다. 야마나시는 당초 아라이(荒井), 덴니치(天日)가 주창하는 조선 먼로주의를 배제하고 내지의 대자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 했다. 중앙에 대자본을 갖고 있는 취인소가 생기고, 이것이 부대 사업으로서 각지에 창고를 경영하며, 이출 조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구상이었다. 이에 대해 덴니치는 창고경영이나 창고건설에 보조금을 준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는 한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 설명했다. 그 사이 야마나시의 머리도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본을 가능한 감소시켜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게끔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양 회사를 합병하여 인취를 경성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 야마나시의 양해를 얻기에 이르렀다. 1929년 3월 30일 경, 당시 경성상의(京城商議) 회두 와타나베 사다이치로(渡邊定一郞)의 자동차가 경취 현관 앞에 의미심장하 며, 1907년 9월 용산거류민단이 조직되자 단장 대리에 당선되었다. 1908년 京元鐵道期成會 조직시 帝國議會에 速成運動을 벌이기도 했 다. 1909년 龍山民團 議員에 당선되었고, 1911년 京城居留民會 議 員에 당선되었다. 이후 경성학교조합회 의원, 경성부협의회 의원, 경 성부회 의원 등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京城中央物産株式會社 사장, 南朝鮮鐵道株式會社 監査役 등을 지냈다. 1924년 東京으로 가서 産 米增殖事業法案의 통과를 의회에 진정하기도 했으며, 1932년 9월 靑南瞑이 경영하는 週刊京城新聞社를 개인 매수하여 경영했다. 한국 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21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95 게 정차해 있었다. 이윽고 안에서 나온 와타나베를 위시하여 구 기모토, 아라이, 아키야마, 고죠 등은 유쾌한 듯이 서로 이야기 하면서 자동차에 올라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사라졌다. 경취 2 층의 중역실에는 와타나베가 가장 좋아하는 마츠킨( 松 金 )의 장어 덮밥이 지저분하게 먹은 잔해를 남기고 있었다. 이 정경( 情 景 )에 서 꼬리가 잡혀, 내부적으로 불타고 있는 경인 양취 합병 문제가 모( 某 ) 신문기자에게 탐지되어, 다시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仁 取 盛 衰 記 (50) 총독 야마나시( 山 梨 )의 양해 아라이( 荒 井 ) 오마( 尾 間 )를 경계 鳥 栖 忠 安 이에 앞서 야마나시는 합병파에 대해 인취의 경성 이전에 대 해 양해하고 아울러 자본금 500만원으로 해라, 그렇게 해서 해 나갈 수 없으면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며 합병파를 애먹였다. 합 병파는 울며 매달린 끝에 90만원을 올려 590만원으로 하기로 양 해를 얻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식산국장 이마무라 다케 시( 今 村 武 志 )가 도쿄에 가 있는 정무총감 이케가미 시로( 池 上 四 郞 )에게 보고하여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이케가미는 음음 거리 며 좀처럼 찬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합병파 뿐만 아니라 이마무

216 19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라도 곤란했다. 이케가미가 응낙하지 않는 것도 도리( 道 理 ), 야 마나시에게는 합병파가 여러 번 찾아가 부탁하며 양해를 구하고 자 노력했으나, 이케가미에게는 마치 제쳐 놓은 듯이 한 마디 인 사도 없었다. (이케가미가 좀처럼 찬성하지 않았던 것은: 번역자) 이에 대해 내심 다소 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라이는 문득 이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금방 달려가 황송해 하며 이케가미 앞에서 문안하며 양해를 구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이케가미도 결국 응낙했다. 이렇게 해서 3월 28일 양취는 연합 중역회를 열고 합병조건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一, 양사는 신설합병하는 방식으로 합병하고, 영업소를 경성에 둔다 (인천에는 그것을 두지 않는다) 二, 신 회사의 자본금을 590만원으로 하고, 인취 주주에 대해서 는 그 10주에 대해 9주의 비율, 경취 주주에 대해서는 동 10주에 대해 8주의 비율로 각기 동종동등불입의 신 회사 주 식을 교부할 것 三, 전항의 주식 교부의 비율에 의해 생기는 불입금 차액 (인취 분 15만원, 경취분 24만 210원)은 각기 그 자산의 감가상각 에 충당할 것 四, 인취의 법정적립금 75만원은 인취 주주에게 특별배당(5할)할 것 회사에서는 곧바로 대주주회를 경성 가게츠( 花 月 ) 본점에서 열

21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97 고 이 합병조건에 대해 그 의향을 타진했지만, 압도적 다수가 찬 성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인천부민이 침묵하고 있을 리가 없다. 부민대회 를 열기도 하고, 공직자들로 구성된 합병저지운동을 목적으로 하 는 단체를 조직하는 등 기세를 부채질해서는 오히려 깃발을 세 우고 본부 및 경기도로 쳐들어갈 형세였다. 때마침 천황의 동생 ( 皇 弟 ) 다가마츠노미야( 高 松 宮 ) 전하께서 연습함대를 타고서 인 천에 오시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부민은 다카마츠노미 야 전하에게 직소( 直 訴 )하겠다는 등 소란을 피웠다. 놀란 당국은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하게 되면 이쪽의 목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하지 않겠는가 하여 당시의 경기도지사 와타나베 시노부( 渡 邊 忍 )가 중재에 나서 잠시 정전( 停 戰 )할 것을 쌍방에 제안했다. 이에 대해 취인소 측은 총회를 중지해야 했다. 만약 이때 총회 가 개최되었다면 이미 야마나시 총독 시대에 문제는 정리되었을 것이다. 와타나베 시노부( 渡 邊 忍 )는 이번 이동으로 경기도지사로 부터 식산국장으로 영전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책임 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에 특히 기억에 남겨 두고 싶은 것은, 당시 야마나시를 둘러싸고 조선통치를 교란시킨 측근 중 간신 오마( 尾 間 ), 히다 ( 肥 田 )로 하여금 손가락 하나도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도록 했다 는 점이다. 152) 오마는 아라이가 내지에 있던 시대부터 알고 있

218 19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경인 양취 합병 문제에 대해, 오마는 가 끔 아라이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아라이는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들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도록 한 것은 아라이 개인 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인취, 경취의 장래를 위해서도 다행스러 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仁取盛衰記 야마나시(山梨)의 사임과 사이토(齋藤)의 재임 덴니치(天日)와 아라이(荒井) 와병 鳥栖忠安 1929년 봄부터 위암 때문에 후쿠오카(福岡)대학병원에 입원했 던 덴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는 병세가 조금씩 악화되고 있었 다. 이와 동시에 담석증으로 고생하던 아라이 하츠타로(荒井初太 152) 다음의 기사를 통해 야마나시 총독과 오마 및 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하여 더구나 야마나시 전 조 선총독 측근인 히다 리키치(肥田理吉) 씨, 오노마 릿켄(尾間立顕) 씨 등이 부산미곡취인소 동래온천 토지불하문제를 위시하여 몇 가지 이권획득운동 에 여념이 없었고, 그 사이 막대한 사기횡령을 기도하여 우리 조선통치사 상에 일대오점을 남긴 각 의옥사건(疑獄事件)에 관해 야마나시 전 총독에 대한 처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중대회의가 27일 오전 10시 반부터 (이하 생략) 大阪毎日新聞 <山梨前朝鮮總督の召喚きょう愈 よ確定, 朝鮮を舞台の疑獄一切は東京地方裁判所に移送す, 檢事總長室の重 大會議>.

21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199 郞 )도 마찬가지로 후쿠오카대학병원에 있어서 두 거물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아라이는 곧 전쾌( 全 快 )하여 해운대에서 정양하게 되었지만, 덴니치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해 7월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거성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덴니치의 죽음은 합병파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상이었다. 조선미 곡계( 朝 鮮 米 穀 界 의) 거물로서 합병극의 주역으로서 화려했던 덴 니치의 생애는 그의 유산이 생전에 세상에서 상상하고 있던 것 보다도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듯이 매우 용의주도하고 건실한 방법의 연속이었다. 합병문제에 대해서도 최후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할 때쯤 이 배우 한 사람을 잃게 된 것은 적잖은 손 실이었다. 취인소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깊은 관계에 있 던 총독 야마나시가 퇴관했다. 그 후임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 ( 齋 藤 實 )가 두 번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 야마나시의 은퇴를 전후하여 총독부에는 대이동이 실시되었다. 야마나시의 이면을 적발한 경무국장 아사리 사부로( 淺 利 三 朗 )가 야마나시보다 한 발 앞서 퇴관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내무국장인 이쿠타( 生 田 )가 물러 나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그 후임에는 식산국장인 이마무라 다케시( 今 村 武 志 )가 자리 잡았으며, 토지개량부장이었던 마츠무라 마츠모리( 松 村 松 盛 )가 식산국장의 후임으로 뒤를 이었다. 이때 상공과장도 다시 고지마 다카노부( 兒 島 高 信 )의 후임으로 하지 모 리사다( 土 師 盛 貞 )가 체신국 해사과장( 海 事 課 長 )으로부터 옮겨 왔 다. 이에 합병극도 배우를 교체하여 장면이 확 바뀌지 않을 수

220 20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없게 되었다. 사이토가 재임총독으로서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취인소에 관한 문제는 법령 발포 후가 아니면 일체 처리되지 못한다, 단 기득권은 존중한다는 의미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것만 으로는 합병파로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상당히 막연했다. 아라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 이하 회사 측은 종종 사이토를 방 문하여 그 의견을 떠봤지만 사이토는 좀처럼 속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아라이는, 전 총독 야마나시와 이 문제와의 관계를 상술 하고 만약 야마나시의 방침과 달라져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순 응한다, 만약 합병이 안 된다고 하면 그만두어도 좋으니 방침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에도 사이토는 방침 을 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합병문제를 중지해도 좋다고 했던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 다. 합병파로서는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했음은 무리가 아니 다. 경과를 따라 오면, 이 문제의 분규 원인이 총독부의 분명치 않는 태도에 있었음이 명료하고, 따라서 대부분의 책임은 당국이 져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이 총독부의 태도가 애매했던 이면에는, 야마나시 하에서 식산 국장으로서 당면 책임을 맡은 당시의 내무국장 이마무라 다케시 ( 今 村 武 志 )와 식산국장 마츠무라 마츠모리( 松 村 松 盛 )가 취한 방 침이 완전히 달랐던 사실에도 있었는데,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

22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01 다. 마츠무라는 합병파에 대해 어떤 인계도 받지 않았다고 하여 전임자 시대의 모든 사정은 일축해 버리고 신규로 처음부터 씨 를 다시 뿌리기로 했다. 이는 야마나시 시대의 사정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이마무라로서는 고통스러웠음에 틀림없다. 그와 동시 에 합병파에게 있어서는 사람은 달라도 당국은 당국이다. 그 당 국의 책임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이,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 에 싹 바뀌어 상당히 불리해진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법 치국가의 국민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는 아이와 지토( 地 頭 )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터무니없는 모순 이 현대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仁 取 盛 衰 記 (52) 우즈타카( 堆 )파와 악수하며 합병 반대열 고조 중역 개선을 앞두고 鳥 栖 忠 安 그 뒤 인천은 사이토( 齋 藤 ) 앞으로 여러 번 합병이전 반대 진 정을 시도했다. 이 진정에 대해 사이토 총독은 인천의 조선매일 신문 지상에 인취는 인천의 것이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이라는 의미의 기사를 보도했다. 토목협의 1층에 있으면서 이

222 20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기사를 본 아라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는 불같이 노했다. 당국 의 방침에 지장이 있다면 이 합병은 그만두어도 상관없다고 한 것에 대해, 총독은 그럴 것 까지는 없다고 했으면서도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총독이 언급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총 독에게 큰소리로 따질 것 같은 흥분된 얼굴이었다. 마침 그 자 리에 있던 사람들이 매우 걱정해서 이 사정을 와타나베 사다이 치로( 渡 邊 定 一 郞 )에게 통지했다. 와타나베는 부랴부랴 달려와서 아라이를 달랬다. 반대파 측의 신문에만 보도된 것을 사실이라고 보는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따라서 이것만으로는 불평을 할 이 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라이도 과연 생각했다. 그리고 경 과를 보게 되었다. 인천 측은 이러한 기사가 보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 중운동을 계속해 갔다. 민심은 차제에 첨예화해 갈 뿐이어서 우 려한 인천서장은 반대파의 간부를 불러 요전 날 신문에 의하면 총독부도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제 이 이상으로 열을 올리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고 간담( 懇 談 )했다. 그런데 이때, 죽 은 고노 다케노스케( 河 野 竹 之 助 )가, 사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 지만 총독이 저렇게 말했다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에 방 심은 금물이라는 입장이라고, 본심을 내 뱉었다고 전해진다. 이 반면 총독부의 취인소령 공포를 위한 준비는 상공과장 하지 모리사다( 土 師 盛 貞 )의 손에서 착착 진전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22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203 합병파에게는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때마침 1930년 10월에 인취는 아라이 사장 이하 역원의 임기가 만료되어 개선의 시기가 다가 왔다. 이 시기를 이용하여 역원을 일거에 자 파 측의 손에 넣으려고 하는 운동이 인천 측에 일어났다. 이 역 원개선과 맞물리면서 일어난 2개의 문제가 있다. 그 하나는 조선 신탁을 중심으로 하는 우즈타카 히로시(堆浩)153) 일파의 책동이 고, 하나는 우츠미가(內海家) 소유의 인취주 쟁탈문제였다. 우즈타카는 마루다이 중매점(丸大仲買店)을 경영하고 있었는 데, 조선신탁을 구와노 겐지(桑野健治)로부터 빼앗고, 그 이후 이 를 근거로 하여 인천의 각 사업 회사에 그 날개를 펴고, 인천에 서는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의 세력을 이루었다. 이 기세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무리를 행했기 때문에 조선신탁이 막다른 상황에 직면했고, 또 한편 부민 일부에 반감과 분격(憤激)이 높 아 갔다. 이 분격은 다시 공격으로 바뀌었고, 결국 우즈타카의 세력 하에 있으면서 함남(咸南)의 부동산을 불입자금에 충당한 조선산업회사의 내용 적발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154) 우즈타카 153) 우즈타카 히로시(堆浩)는 1890년 이바라키현(茨城縣) 출신이다. 三井 物産 경성지점에 입사하여 이후 인천출장소장이 되었다. 1921년 仁 川米豆取引所 취인원의 면허를 획득했다. 1923년 月尾島遊園會社 취 체역, 1928년 朝鮮新聞 인천지사장이 되었고, 동년 6월 朝鮮造船鐵 工所를 창립에 참여했다. 조선취인소의 발족과 함께 米豆取引員 면 허를 획득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154) 신문기사를 통해 간단한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또 하나는 문천(文川), 덕원(德源), 정평(定平) 3지방 173명의 지주가 원고가 되 어 토회(堆浩) 등 9명을 상대로 일으킨 소위 조선산업회사(朝鮮産業 會社) 사건은 소화 5년에 소송이 시작된 이래 조선공판계에 신기록 을 지으면서 제1, 2심 모두 원고의 승리로 최후 고등법원에까지 갔

224 20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일파의 조선신탁 곤경 빠져나오기는 필연적으로 인천 측의 인취 탈환 운동과 악수했다. 조선신탁의 자금난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인취의 적립금을 조선신탁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 해서는 현재의 중역들이 열심히 노력해서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를 쫓아내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현 중역이 방해가 되 는 점에서 합병 반대파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렇게 해서 우즈타 카 일파의 가담으로 이 공기는 점점 격화되어 갔다. 1930년 봄의 일이었다. 아라이 하츠타로는 유별나게 빨리 출 근하여 인취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날 취인원조합 위원장 구와노 (桑野)는 경성에서 아라이와 회견할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취에 빨리 나와 용무를 마치고 이제부터 아라이와 회견하기 위해 경성으로 간다고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급사가 (아라이) 사장은 오늘 아침 일찍 출근했다고 고했다. 민감한 구 와노는 이건 좀 이상하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 순간 우츠미의 집 에 왔던 것이라고 직감했다. 아라이를 만난 구와노는 단도직입 이 일을 물었다. 정곡을 찔린 아라이는 반 쓴웃음을 지면서 일 체를 밝혔다. 던 바인데 이제 서류정리도 끝났으므로 동법원민사부에서 이달 안으 로 개정되게 되었다 하며 東亞日報 <上告된 兩 大事件 今日內 公判, 生死 岐路에 선 李洙倬事件 朝鮮産業會社事件>.

22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05 仁 取 盛 衰 記 (53) 우츠미( 內 海 )의 주식을 시오자키( 潮 崎 )가 인수 극비리에 진행 鳥 栖 忠 安 아라이( 荒 井 )의 우츠미가( 內 海 家 ) 방문은, 합병문제를 마침내 진지하게 추진하게 되면 대주주의 의지에 반해 강행할 수는 없 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의향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비인지 바람인지, 우츠미의 주식이 어디로 갈 것인지 그 향배 하나로 합병의 운명 이 결정되는 갈림길이 되었다. 따라서 우츠미가의 소재는 무엇보 다 중대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츠미가의 태도는 좀처 럼 확실하지 않았다. 합병은 불찬성이지 않지만 위임장은 미망인 한 사람이 마음대로 정해서 갖다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 한 태도에 대해서는 과연 아라이도 곤란해졌다. 마지막으로 우츠 미 슈쿠로( 內 海 叔 郞 ) 생전부터의 고객이자 친구( 御 異 見 当 )였던 구와노 료타로( 桑 野 良 太 郞 )가 나서서 설득한 결과, 죽은 슈쿠로 의 형으로 고향 반슈( 播 州 )에 살고 있는 스님이 있는데 이 사람 에게 문의해 놓은 중이다, 그 답장이 10월 7일, 8일 경까지는 올 터이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아라이는 물론 합병파의 중계( 中 繼 )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 때 완전 히 맥이 빠져 모든 것을 내 던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226 20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1930년: 역자) 10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청주에서 전선곡물 상조합연합회가 열렸다. 일체를 던져버린 기분으로 실망해 버린 구 와노(桑野)가 이 모임에 출석하기 위해 인천을 떠날 때, 아사노(淺 野)는 닛타 요시타미(新田義民)와 비밀리에 협의하여, 때마침 대풍 작으로 급락 시세의 대조류에 편승한 승률 좋은 대주(大株) 도지마 (堂島)의 시오자키(潮崎)에게 우츠미의 주식을 인수하도록 획책 중 이었다. 시오자키는 당시 팔자 쪽에 서서 돈을 벌었다. 돈이 대충 헤아려보아도 적어도 300만 원 이상은 될 것이라고 일컬어지고 있 던 때여서 4, 50만원이라는 돈을 던지는 것에 노력과 시간을 아끼 지 않았다. 아사노의 교섭을 좋습니다 라고 하면서 받아들였다. 10월 14일 경성역두에는 투지로 가득한 아사노와 닛타 두 사 람이 남 몰래 경부선 열차의 출발시간을 기다고 있었다. 승객이 붐비는 혼잡한 틈을 타서 몰래 잠입한 두 사람의 모습은 일로 (一路) 멀리 시모노세키로 달려, 우츠미가의 소유 주식 중 9천 주는 구 주 78원, 신 주 28원으로 우리나라 미두계(米豆界)의 거 물 시오자키 후지타로(潮崎藤太郞)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그 렇지만 이 주의 주식을 산 사람이 시오자키라는 것은 오래 알고 지낸 관계자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라이(荒井)도 모르 고 아키야마(秋山)나 구와노(桑野)도 몰랐다. 따라서 세상이 알 방도가 없었다. 그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이루어졌다. 이보다 앞 서 인천의 반대파에서는 요시다(吉田)와 이마이(今井)가 대표로 우츠미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주식을 매각해 달라고 신청했다.

227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 207 우츠미가에서는 매각해 드려도 좋지만 몇 월 며칠까지로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빈둥빈둥 기다리게 하면 이쪽이 곤 란하기 때문에 기일을 정해서 확실히 약속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시원시원한 대답이었다. 요시다, 이마이는 이를 납득하고 돌아갔 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우츠미의 주식이 내지 쪽에 넘어갔다 는 것이 신속하게 전해지자 인천 측은 무라타(村田), 요시키(吉 木), 김윤복(金允福) 3명을 문책위원으로 내세워 우츠미가로 보냈다. 위 세 명은 우츠미가로 뛰어 들어가 인천을 팔아먹는 놈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우츠미가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소유주 식을 처분할 뿐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앞서 약속한 기일까지 인천 측은 어떤 방법도 강구하지 않고 있 다가 이제 와서 항의하는 것은 조금 가소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 에 오히려 되쏘아주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과연 기세등등했던 세 명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우츠미의 소유주식 인수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삽화가 얽혀 있다. 당초 시오자키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유언(流言)이나 억측이 행해졌다. 그 중에서 걸작의 하나로 요시다 슈지로(吉田秀次郞)씨의 천우문제(天佑問題)라는 것이 있 다. 시오자키라는 것은 몰랐지만 시모노세키로 갔다는 것은 알려 져 있었다. 그래서 요시다씨는 인천의 반대파가 다수 모인 석상 에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들 알 수 있도록) 헛기침을 해 대면서 갔는지 모르겠네. 여하튼 재미있네. 매입한 사람 이 시모노세키 통운지점장(通運支店長)과는 정말로 친한 사람이

228 20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니 이 사람을 통해 위임장을 받으면 되겠네. 인천으로서는 정말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다. 이를 전해들은 합병파는 안심시키려 고 한 위안의 말이라 해도 정도가 있다며 웃기는커녕 놀라고 있 었다. 仁取盛衰記 대혼란의 인취 정기총회 천왕산(天王山)의 중역 개선 鳥栖忠安 10월의 정기총회가 다가오자 인천 측은 매일같이 밤에 회합을 열어 결사의 태세로 합병저지를 위한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우 츠미(內海)의 주식을 수중에 넣은 합병파는 승산이 있었기 때문 에 태연한 모습으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중에 우즈타카 (堆) 일파의 책동은, 총회 직전이 되자, 조선신탁(朝鮮信託)과 조 선산업(朝鮮産業)의 내용에 관한 고발자(告發者)가 나타났기 때 문에 검찰(司直)의 손이 뻗쳐 존재감이 희미해 졌다. 인천 측의 반대운동이 맹렬함을 더해가고, 피의 연기라도 내릴 듯 한 기세를 보였기 때문에 당국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총회

22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09 전에 쌍방을 불러 이번에는 합병문제를 부의하지 말고 평온하게 끝냈으면 좋겠다고 간담했다. 합병파는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론이 없었지만, 반대파 입장에서는 인취의 중역 전부가 합병파로 채워지게 되는 것은 간접적으로 반대파의 패북( 敗 北 )을 의미한다. 즉 합병문제의 천왕산은 중역개선에 있 는 것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당국의 의향을 양해한다고 했지 만, 내면적으로는 첨예화해 가는 부민( 府 民 )의 기분을 어떻게 대 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반대파 내부에서는 장로( 長 老 ) 들의 권위가 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로들이 끌려가는 형세였다. 이렇게 26일의 총회가 개최되었지만, 인천의 반대파는 총회를 혼란으로 이끌어 결의를 성립시키지 않는다는 전법으로 나왔기 때문에, 당초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혼란 상태를 보였 다. 이 정기총회는 다시 계속총회를 11월 6일, 7일 양일에 걸쳐 서 인천 공회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병구( 病 軀 )를 이끌고 출석한 아라이( 荒 井 )가 끝까지 의연하게 분투하였고, 어찌 되었든 간에 중역은 전부 앉아서 버티는 것으로 결말을 짓고 총회를 마쳤다. 이 총회 후에 인천 측은 의사록이 위조되었다는 소송을 제기하 여 중역의 당선무효를 주장했지만, 결국 효과 없이 합병파의 승 리로 돌아갔다. 총회 종료 후 머지않아 우즈타카 일파는 결국 사직( 司 直 ) 당국 의 손에 의해 수감되어 예심에 처해졌지만, 합병파는 중역 개선 이 끝남과 동시에 마침내 본격적으로 합병문제를 추진했다. 때는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12월 29일 임시총회를 열어 이 문제를

230 21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부의하게 되었다. 전회( 前 回 )의 예에 비추어 인천에서 총회를 열 때는 완전하게 의사( 議 事 )를 진행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경성 공 회당에서 개최했는데, 인천 측은 여느 때처럼 정기총회와 같은 방법으로 의사방해를 시도했고, 그때문에 2명의 검속자( 檢 束 者 ) 까지 나타났다. 회사의 해산 합병은 주주의 반수 이상 동의를 요한다는 상법상의 규정을 이용하여, 인천 측은 돌연 미리 준비 해 놓은 주주를 다수 파견했고, 그때문에 이 총회는 가결의( 假 決 議 )로 끝났다. 해가 바뀌어 1월 10일 다시 이 가결의의 승인을 요구했기 때문에 임시총회를 경성 공회당에 소집하여 결국 합병 하기로 결정했다. 이 합병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신 회사의 자본금은 619만 1,800원으로 주당 50원의 전액 불 입을 마친 2만 22주와 12원 50전의 불입을 마친 주식 10만 3,974주를 발행한다. 2. 인취의 전액 불입 주 및 12원 50전의 불입을 마친 주 각 10 주에 대해 신 회사의 동액 불입 주 각 10주 3. 경취의 15원 불입 주 10주에 대해 신 회사 주 12원 50전 불 입을 마친 주 8주 4. 인취의 적립금 60만원은 주주특별(배당 구 1주에 대해 20원, 신 1주에 대해 5원) (배당에: 역자) 쓰고, 15만원은 인천부 및 인천상공회의소에 기부하며, 그 잔액은 해산비용에 충당한다. 5. 인취는 경성으로 이전하여 경취와 합병한다.

231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11 仁 取 盛 衰 記 (55) 합병파의 운동도 방향 전환 법령에 대해 맹운동 鳥 栖 忠 安 이 인취의 총회 전후부터 상공과장 하지 모리사다( 土 師 盛 貞 )는 취인소령의 입안을 계속 서둘렀다. 그리고 머지않아 동 법령안은 총독부의 손을 떠나 중앙정부로 회부되었다고 전해지기에 이르 렀다. 합병파의 운동도 다소 방향을 틀어 임시총회의 결의가 용 인될 수 있는 법령이 되도록 하는데 맞추어졌다. 즉, 인취의 이 전, 기설회사의 합병, 회사조직의 취인소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동일( 同 一 )한 시장에서 미곡과 주식이 상장될 수 있었으면 좋겠 고, 또한 미곡취인소는 중앙집중주의가 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척무성을 향해 활발하게 운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아라이 ( 荒 井 ), 고스기( 小 杉 ) 두 사장을 위시하여 취인원조합 위원장 구 와노 겐지( 桑 野 健 治 ) 등은 도쿄로 모두 몰려가 대기하는 상태였 다. 합병파의 맹운동이 도쿄에서 전개되자 인천 측에서도 묵시 ( 默 視 )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인취 이전 반대운동을 위해 없는 돈을 몽땅 털어 위원을 동상( 東 上 )시켰다. 인천 측의 운동자금은 벌써 결핍이 극도에 달했다. 각 정( 町 ) 내에서 모은 돈에는 한계 가 있다. 뒷골목 안주인들 비상금도 이제 끝이 보였다. 대중이 모인 곳에서는 여자들의 옷을 저당잡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는 용감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가 냉정해진 상태에서

232 21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는 사생활을 파기해서까지 (돈을) 내놓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상당한 부자들이 (돈을) 내는 것을 아까워하는 상황이어 서, 불같이 일었던 인천애( 仁 川 愛 )의 절규도 결국은 건성건성 말 뿐인 문제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천 측의 운동도 결 국은 노력봉사라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돈 이야기가 나오면 꽁무 니를 빼는 것이 진상( 眞 相 )이었다. 중역 개선을 위한 인취 총회가 끝나고 머지않아, 취인소령 초 안이 내지에 회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에 아라이, 고스 기 두 취인소 사장은 식산국장 마츠무라 마츠모리( 松 村 松 盛 )를 방문하여 법령을 제정할 때 기설회사의 권익을 보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인취의 평소 희망을 말하고, 시장의 법령위반 행위에 따른 타격과 과중한 부담으로 너무 시달리고 있는 현상 을 어떻게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뜻을 전달했다. 이 희망은 결국 당국의 무관심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기에다 또 새롭 게 나오는 법령에서는 기득권이 존중되지 않게 되어 두들겨 맞 거나 밟히는 비참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 권익 보호를 제일의( 第 一 義 )로 하여 새롭게 제정되려고 하는 법령의 전문( 前 文 )이 불가 능하다면 요점만이라도 좋으니 일단 민간에 자문해 보았으면 좋 겠다, 몰래 기습적으로 법령을 내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의 진정도 했었다. 그 후 도쿄에서 온 전보는 신령( 新 令 )에서는 회원조직으로 할

23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13 뿐 주식회사 조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전해 왔고, 그때문에 합병파의 입장은 매우 부진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항상 합병파의 형세가 유리해 질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가 도쿄로부터 전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고,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합병파도 적잖이 의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탐지한 결과, 일부에서 추정된 바에 의하면, 이전에 경성에 근무한 적이 있는 모지( 某 紙 ) 기자로 기타사키 모( 北 崎 某 )라는 인물이 있었는 데, (당시) 척무성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는 오이타현( 大 分 県 ) 출 신으로 반대파의 거두 고토 렌페이( 後 藤 廉 平 )와 돈독한 사이였 고, 이에 반대파의 부탁으로 그쪽 방면의 정세를 염탐하여 인천 측에 유리한 해석을 담아 보도하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인천 측이 이 인물을 이용하여 관변 일부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정 황도 있었는데, 합병파는 이런 종류의 보도에 대해 인천 측과 도 쿄 사이에 무엇인가 연락을 주고받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234 21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仁 取 盛 衰 記 (56) 미구락부 폐지와 경성연( 京 城 延 )의 부활 인취에는 대타격 鳥 栖 忠 安 (1930년: 역자) 12월 29일 임시총회를 소집한 이면에는 크게 이유가 있었다. 11월 하순경의 일로, 신 법령에서는 회원조직 이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거나, 미곡과 주식의 동시 상장은 인정하 지 않는다와 같은 의미의 도쿄발 전보에 놀란 합병파는, 식산국 장 마츠무라 마츠모리( 松 村 松 盛 )에게 도쿄 전보를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 질의했다. 그때 마츠무라는 도쿄발 전보의 내 용은 믿을 수 없다, 현재 심의중인 법안은 합병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명했다. 합병파는 생각했다. 법령이 발포된 뒤에 이러쿵저러쿵 말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사전에 주주의 의향을 명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총독부에 교섭한 결과, 총독부도 상법에서 허용된 범위에 있는 주주권의 행사에 대해서는 어찌되었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임시총회 결과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상공과는 5월 20일부로 시장규칙을 개정하여 종

235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15 래 실질적으로 인취 중매점의 출장소였던 경성의 미구락부에 대 해 일제히 폐쇄명령을 내리고 8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이 결과 명치정( 明 治 町 )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던 미구락부는 8월과 9월 두 달에 걸쳐 남은 물량( 殘 玉 )을 정리하고 소멸해 버렸다. 이 구락부 폐지의 결의를 굳히는 동시에 하지( 土 師 ) 상공과장은 인취의 아키야마 지배인을 초치하여 조용히 그 의향을 물어 보 았다. 아키야마는 취인소령이 발포되기 전에 착수해서는 곤란하 다, 이때 고식( 姑 息 )적인 수단에 의한 것은 반대라며 머리에서부 터 이에 반대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는 아키야마의 이러한 의향 을 청취했을 뿐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단단히 입단속 을 시켰다. 그래서 아키야마도 하지의 뜻을 이해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한 때 청천벽력 같이 딱하고 이 미구락부의 폐지 명령이 나왔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 아키야마도 폐지에 동 의했을 것이라고 업계로부터 불신임의 소리가 나와, 아키야마는 매우 고통스러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미구락부의 발생에는 오래된 역사가 있다. 무네 기헤이( 宗 喜 平 ) 등이 소금구락부( 鹽 俱 樂 部 )라고 간판을 달고 미구락부를 경 영하고 있었을 무렵은 사실 그 전성기로, 한 때 (경성)부내에 80, 90개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지금의 야마구치현 지 사인 히라이 미츠오( 平 井 三 男 )가 상공과장이었을 시대에는 오히 려 이것을 공인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 후 당국에서도 미구락부 가 번영하는 반면에는 폐해가 적지 않다고 주목하여 조금씩 압 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취의 취인원 측의 희망으로서는 난

236 21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립( 濫 立 )은 폐해를 낳는다고 해도 상당히 수의 제한이 가능하다 면 오히려 존속시켜 주었으면 했다. 이렇게 총독부는 당업자의 의향을 듣게 되었지만, 당시 경성에 출장소( 受 場 )를 갖지 못했던 것은 구와노( 桑 야) 취인점 한 곳이었기 때문에, 구와노를 명치 정의 스에히로( 末 廣 )로 불러 간담( 懇 談 )한 결과는 일점일개소주 의( 一 店 一 ヶ 所 主 義 )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를 제한하면 인취 취인원 측의 희망은 연거래를 엄중히 취급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데 있었다. 이렇게 강경한 의견이 나왔다는 것은 군산, 부산, 대 구의 연시장을 취인소로 승격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추측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취인원으로서는 당국의 태도에 세심 한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진의를 파악 하고자 고심하고 있었다. 이런 강경한 주장도 같은 의미에서 당 국의 속마음을 살피기 위해 계속 두드려 보았다고 보인다. 미구 락부 폐지의 결과 경성과 목표의 연시장이 부활했다. 인취에 타 격을 주어 연시장을 살찌웠다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효과도 없 었다. 신 법령에서는 회사의 합병은 허용하지만 인취의 이전은 허용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 졌다. 이는 합병파에게 있어서 상당 히 심각한 타격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되자 아라이, 고스기, 구와노 세 명은 부랴부랴 서둘러 도쿄로 가서 척무성 방면으로 절충했지만 총독부의 이 방침을 뒤집을 수 없었다. 더구나 새롭 게 탄생하려고 하는 취인소 정책은 지방분산주의이다. 합병파에 게 있어서는 점점 더 쓰라린다, 그래서 무리해서 경성에 출장소

237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17 ( 受 場 )를 둠으로 해서 이 사이에 완화를 도모하고 싶다는 내용의 최후 희망을 탁무성에 제출했고 탁무성도 동정하여 알선했지만, 그조차 용인되지 않고 결국 법령은 공포되어 버리고 말았다. 仁 取 盛 衰 記 (57) 합병결의의 성립과 신시대 전개 鳥 栖 忠 安 아라이, 고스기, 구와노 세 명이 도쿄에 가 있을 때 중요한 취 인소령이 공포되고 말았다. 신령( 新 令 ) 안에는 이전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회사의 합병만은 인정되고 있었다. 허용된 범위에서 이 전( 移 轉 )을 동반하지 않는 합병을 추진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 가 지 설이 분분했지만, 세 명이 돌아와 보니 합병파는 여전히 허용 된 부분만이라도 이때 해 두어야 한다는 방침으로 나왔다. 시행 규칙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먼저 결의한 합병조건의 개정( 改 訂 ) 및 승인을 요구하는 임시총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두 번의 임기를 대충 마치고, 이번이야 말 로 정말로 관계로부터 은퇴 결의를 했다. 이에 따라 총감 고다 마 히데오( 兒 玉 秀 雄 ) 이하 관직에서 물러나 내무국장 이마무라 다케시( 今 村 武 志 ), 식산국장 마츠무라 마츠모리( 松 村 松 盛 )도 조선 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이토의 뒤를 이어 우 가키 가즈나리( 宇 垣 一 成 )가 총독으로 정해지기까지는 내면적으로

238 21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여러 가지 경위가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우가키는 보좌역에 이마 이다 기요노리( 今 井 田 淸 德 )를 발탁하여 정무총감의 의자에 앉혔 다. 이렇게 취인소령을 탄생시킨 관계자들은 퇴관하거나 전임했 고, 마침내 시행규칙이 나올 무렵에는 전부 새로운 인물로 교체 되어 있었다. 정무총감 이마이다는 시행규칙 발포 직전, 아라이, 고스기 이 하 합병파 두세 명을 불러 합법적인 합병이라면 추진해도 상관 없다는 의향을 전했다. 그래서 합병파에서도 드디어 안심하고 최 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추진할 작정이었다. 이 운동에 대해 인천 측이 다시 격분하며 반대 기세를 올린 것 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천 측의 말에 의하면 합병파가 이때 이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언젠가는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그런 시대가 올 것은 명백하다. 즉 상 당한 시기가 경과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법령의 개정운동을 일으 켜 인취를 경성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저의를 가지고 있음이 확 실하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천 측의 이러한 관측이 꼭 맞지는 않다고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다른 문제로 서 인취의 경성이전은 합병파의 충심에서 나온 희망이자 필생의 염원이다. 더구나 대구, 부산, 군산과 각지의 연시장( 延 市 場 )이 취인소로 승격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오늘날, 인취의 장래는 경

239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219 성 이전 이외에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 하는 것은 합병파 누구나 가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합병안의 변경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기 위한 임시총회는 이번 달 6일 경취 2층에서 같은 날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경취와 인 취 모두 열렸다. 이전( 移 轉 )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합병조건은 다음과 같이 변경되어 있었다. 1. 자본금을 659만 9,800원으로 하여, 전액 불입을 마친 주식 2 만 24주, 12원 50전 불입을 마친 주식 11만 1,972주를 발행 한다. 2. 경취의 불입을 마친 10주에 대해 신 회사의 주식 7주 반, 역시 경취의 15원 불입을 마친 주식 10주에 대해 신 회사주 9주 3. 인취의 적립금 중 75만원은 주주특별배당(구주 1주에 대해 25원, 신주 1주에 대해 6원 25전)에 쓰고 그 잔액 및 이월금 은 인취의 해산비용에 충당한다. 4. 신 회사는 본점을 경성 황금정 2정목 99번지에, 지점을 인천 부 해안정 3정목에 두는데, 경취와 인취에 이를 맡긴다. 6일의 총회에서는 인취 측은 상투적인 책전( 策 戰 )을 써서 말할 만큼 말한 후에 지체 없이 철수했다. 작년 2월 말 총회와 마찬 가지로 주주의 머리수를 늘림으로써 가결의로 마치게 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이 결과 다시 인취는 이번 달 25일 정시총회에

240 22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이 가결의의 승인을 요구했는데, 인천 측의 최후 맹투( 猛 鬪 )도 효과 없이 결국 성립해 버리고 말았다. 취인소령의 발포를 하나의 전기로 삼아 인천에서는 좋든 싫든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비상한 흥미를 가지고 장래를 지켜보는 것은 단지 필자만은 아닐 것이 다.(끝) 필자( 鳥 栖 忠 安 )로부터 말씀드립니다. 변변치 못한 글을 오랫동안 읽어 주셨습니다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 기로 했습니다. 회를 거듭하여 57회, 인취의 대강을 썼다고 생각되지만, 빠진 부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방법을 강 구하여 완전에 가까운 형태로 참고하실 수 있도록 제공하고자 합니다.

241 원 문

242

243 원 문 목 223 차 仁取盛衰記(1) 済物浦が仁川への躍進 彩る江華島事件 225 仁取盛衰記(2) 思ひ起こす壬午の乱 227 仁取盛衰記(3) 日支戦乱の導火へ進む 229 仁取盛衰記(4) 戦争直前に仁川躍り出す 233 仁取盛衰記(5) 支那商没落 仁取の誕生 236 仁取盛衰記(6) 創業當時のナンセンス 239 仁取盛衰記(7) 市場紛擾で解散命令 仁取盛衰記(8) 幣原乗込み再興の運動 仁取盛衰記(9) 再興運動の建議書提出 250 仁取盛衰記(10) 日韓貿易に偉大な功績 254 仁取盛衰記(11) 珍らしくも米人の買出動 日本の總売向ひ 259 仁取盛衰記(12) 日露戦争で仁取は閉鎖 戦後は大さびれ 262 仁取盛衰記(13) 統監政治と営業期間延長 倉庫を売った金で敷地買収の事 265 仁取盛衰記(14) 再開後も相變らず閑散 廿萬石の出来高 269 仁取盛衰記(15) 丸まげ姿で妻君が手振り 林泳煥の買出動 272 仁取盛衰記(16) 林の買出動地場總売向ひ 萩原仲裁に飛出す 275 仁取盛衰記(17) 桑野の奔走で漸く解合ふ 仲買四名下獄の事 278 仁取盛衰記(18) 仁取最初の違約字分起る 十月限の大激戦 281 仁取盛衰記(19) 大阪資本の進出で松尾時代来る 285 內地の取引所も鮮米代用を認む 仁取盛衰記(20) 繁栄策と仲買人保護 十割配當出現す 289 仁取盛衰記(21) 鮮內米商も一縮みとなる 米騒動と朝鮮 292 仁取盛衰記(22) 百八十萬圓の大穴を発見 屋台骨がぐらつく 296 仁取盛衰記(23) 百萬圓に増資と決定 復興の陣容成る 299 仁取盛衰記(24) 堂島を上廻つて空前の高値 仁取の熱狂時代 301 仁取盛衰記(25) 賀田金の買いまくり 早電のはじまり 304 仁取盛衰記(26) 米騒動の前行の仁取 小西と斎藤の買出動 307 仁取盛衰記(27) 一萬圓の元手で利益五十萬圓 全鮮を向ふに廻して中利小原の突貫買 310

244 22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仁 取 盛 衰 記 (28) 森 と 內 海 が 必 死 の 買 進 み 全 鮮 を 向 に 廻 して 313 仁 取 盛 衰 記 (29) 米 屋 の 子 守 が 一 躍 成 金 に 豪 勢 な 結 婚 披 露 316 仁 取 盛 衰 記 (30) 二 大 成 功 者 內 海 と 廣 澤 319 仁 取 盛 衰 記 (31) 內 海 廣 澤 の 聯 合 買 ひ 浅 野 一 人 で 売 向 ふ 321 仁 取 盛 衰 記 (32) 十 一 萬 圓 で 設 備 が 整 ふ 税 令 実 施 さる 324 仁 取 盛 衰 記 (33) 自 ら 墓 穴 を 掘 る 仲 買 人 の 態 度 當 局 の 公 約 は 女 郎 の 起 誓 文 327 仁 取 盛 衰 記 (34) 不 二 興 業 が 大 豆 の 買 占 め 受 渡 に 手 を 焼 く 330 仁 取 盛 衰 記 (35) 震 災 前 後 に 豊 の 売 叩 き 仲 買 連 の 總 買 向 333 仁 取 盛 衰 記 (36) 買 方 聯 合 に 凱 歌 あがる 宗 仲 買 店 没 落 す 335 仁 取 盛 衰 記 (37) 藤 井 寛 太 郎 が 內 地 米 を 渡 す 不 二 興 業 の 改 革 337 仁 取 盛 衰 記 (38) 市 場 の 振 興 上 合 併 芽 生 ゆ 一 笑 に 附 さる 341 仁 取 盛 衰 記 (39) 取 引 所 は 役 人 の 鬼 門 下 岡 忠 治 躊 躇 す 343 仁 取 盛 衰 記 (40) 三 人 が 読 んだ 下 岡 のはら 隠 密 の 間 に 相 談 345 仁 取 盛 衰 記 (41) 覚 書 の 交 換 で 漸 く 具 體 化 す 第 一 歩 に 手 違 348 仁 取 盛 衰 記 (42) 事 前 の 説 解 が 欠 げてゐた 若 松 の 失 態 351 仁 取 盛 衰 記 (43) 荒 井 と 古 城 が 調 停 案 作 製 仁 川 側 の 反 対 354 仁 取 盛 衰 記 (44) 芸 妓 の 口 から 一 大 事 露 見 勧 信 の 株 争 奪 356 仁 取 盛 衰 記 (45) 勧 信 持 株 肩 代 りの 經 緯 若 松 社 長 の 発 表 359 仁 取 盛 衰 記 (46) 委 任 状 に 絡 る 珍 談 の 数 々 震 ひ 上 つた 人 達 361 仁 取 盛 衰 記 (47) 決 議 に 至 らずつひに 散 會 紛 糾 した 總 會 364 仁 取 盛 衰 記 (48) 米 田 の 調 停 で 一 時 見 合 せ 仁 川 祝 杯 をあぐ 366 仁 取 盛 衰 記 (49) 鰻 丼 から 足 がつき 問 題 は 再 燃 山 梨 諒 解 を 與 ふ 368 仁 取 盛 衰 記 (50) 總 督 山 梨 の 諒 解 成 る 荒 井 尾 間 を 警 戒 370 仁 取 盛 衰 記 (51) 山 梨 挂 冠 して 斎 藤 再 任 す 天 日 荒 井 やむ 373 仁 取 盛 衰 記 (52) 堆 派 と 握 手 して 反 対 熱 昂 る 重 役 改 選 を 前 に 375 仁 取 盛 衰 記 (53) 內 海 の 株 を 潮 崎 が 肩 代 極 秘 裏 に 纏 る 378 仁 取 盛 衰 記 (54) 大 混 乱 の 仁 取 定 時 總 會 天 王 山 の 重 役 改 選 381 仁 取 盛 衰 記 (55) 合 併 派 の 運 動 も 方 向 を 転 ず 法 令 に 対 し 猛 運 動 383 仁 取 盛 衰 記 (56) 米 倶 楽 部 廃 止 と 京 城 延 の 復 活 仁 取 には 大 打 撃 386 仁 取 盛 衰 記 (57) 合 併 決 議 成 り 新 時 代 展 開 合 併 派 の 勝 利 389

245 원 문 225 仁取盛衰記 1 済物浦が仁川への躍進 彩る江華島事件 鳥栖忠安 仁取が生れてここに満35年となった 男ならこれからが仕事の 仕盛りという年だが 仁取はやっと取引所令が出て一人前の男 になった訳だ 表向は取引所という看板はかかげていても 拠 るべき法規もなく日陰者といった訳ではないにしても市場令に よる延取引から取引所類似の清算取引で散々業務範囲を喰い荒 されても泣き寝入りするよりほかはないという有様だったが これからは大手を振って米にかけては鮮內唯一の株式組織の取 引所として活躍しようというのである だから本来からいえば 大いに祝わずんばあるべからずというべきだ ところが事実は 数年越の懸案たる京取との合併が目鼻がつかず祝うに祝えない 大きな悩みの絶頂にあるから困ったものだ これが片づかない 以上仁取の腰も落着かない訳だ しかしそれはそれとして 取 引所令という戸籍法が出来て今迄私生児だか何だかわからな かった無籍ものが取引所として正式の待遇をうけようという今 日 過去35年間に亘るうたかたのそれを顧みるのもあながち無 意義ではあるまい 明治29年5月5日開業の當時は資本金3萬圓 という細い屋台骨から現在300萬圓の大會社となるに至ったそ の道行きにはうつろい行く時代相を織り込んだ興つきぬ物語り が秘められている 名づけて仁取盛衰記という

246 22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この物語りを始める前に仁取開設前後の仁川の模様をざっと一 通り呑み込んでおく必要がある 仁川はもと済物浦と稱する淋しい一漁村に過ぎなかった 済物 浦から仁川へ 仁川の繁栄史は殆ど內地人によって作られたと いっていい それほど我国が仁川に因縁をもち始めたのは可な り古い時代からであった そもそも事の始めは李太王の15年 明治11年 永宗島事件というのがおッ始まった これは一名 江華島事件とも稱する當時我国は浦賀でペルリからやられた手 口にならって朝鮮に修交をせまった この使命を遂行するため に差向けられた 我軍艦雲揚號とが江華島の近海を測量してい るころを突然韓国側が砲撃した 他国の1海を遠慮會釈もなく 測量するとはもってのほかだというので憤慨もしたが 當時の 朝鮮は大院君の執政で排外思想が漲っていた時代だった とこ ろが対手は血の気の多い日本海軍のことだ 艦長井上良馨は何 を猪小才なとばかりこれに應戦してついに永宗島を陥れてし まった 當時支那は朝鮮を属邦と心得ていたからこの江華島事 件の尻押しをしたことは勿論のことである ところが鼻息の荒 い當時の無鉄砲な我日本の外交にかかってはさすがの支那も出 鼻をくじかれてついに朝鮮は支那の属邦に非ずと逃げを張っ た そこで日本は全権大使に黒田清隆 副使井上馨を任じ韓国 政府に厳重にねじ込んだ結果 その翌年2月16日に和親条約が 成った これがいわゆる日韓修交条約である この条約によっ て 釜山 元山 仁川を開港して日本と韓国とは互いに交易を

247 원 문 227 行うこととなり 當時外務大丞であった花房義質が第1代の公使 として乗り込んで来た 當時の公使館は城內に許されず 西大 門に置かれたのであった 仁取盛衰記 思ひ起こす壬午の乱 鳥栖忠安 越えて明治15年 たまたま大事件が勃発した いわゆる壬午の 乱である 一度閔妃から追われて失脚した大院君李應是は再び 閔妃をはじめ その一族を宮廷より追ってその勢力を覆し再び 摂政として臨んだ しかもこの陰謀は軍政改革によって生じた 不平をとらえて巧に敢行された 扈衛 訓練 禁衛 御営 總 戎の五営を廃して新に武衛 壮衛の二営が置かれた 衣食には ぐれた舊兵はルンペンとなって途方に暮れた これらの不平は 期せずして昂して行ったがこの機微を捕えて大院君がたくみに 扇動したためついに暴動と化し更に我居留民の虐殺となり日本 公使館の襲撃になったのである 當時我公使館は西大門外に あった この情景を細井肇氏は女王閔妃の中に次の如く書いて いる 今は水も涸れ涸れに半ばは埋もれて蘆荻の生い茂るに委せ附近 に向上會館の建物を見る西大門外の蓮池それは 老論池 とも 古 西池 とも呼ばれ古来一般に旱魃に雨を祈れば験應ありとして

248 22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知られたこの国の歴史に由緒ある名勝の一である 池畔の清水 館 それが明治13年から15年の壬午變乱まで日章旗の翻々とし て掲げられた日本公使館であった その頃館內の正面を西爽軒 といい 公使がそこに住まっていた 西爽軒の左方は天然亭と 呼んで四棟の建物があった 随員の書記官近藤眞鋤 御用係浅 山顕蔵 大庭永成 石幡貞 警部岡兵一 書記生川上立一郎を 始め語学生3名 巡査15名並に館員を併せて40餘名がこの四棟 に駐在した 暴徒の一團によって日本公使の駐在する清水館は火災に包まれ た 花房公使を中心に公使館員は威容堂々白刄を林立しながら 一團となって 決死の雄叫びとともに旭日旗を して暴徒をつ いて来る 哀號 暴徒は気を呑まれて右往左往に 算を乱して 散った 公使の一行は折柄の暴雨を衝いて南大門に向ったが城 內堅くとざして入るに由なかったので やむなく 道を楊花津 にとって漢江を越え仁川に向った 一行が泥田のようなぬかる みに難渋しながら仁川についたのは變亂の翌日7月24日 陽も 落ちようとする頃だった 仁川に着た一行は 府使を訪ねてそ の厚意により酒飯に空腹を満たしまどろむ間もなく 再び暴徒 におそわれた 不意を打たれて悪戦苦闘幾人かの犠牲者を出し た一行は済物浦から小舟を艤して沖合はるかに逃れた 目ざす は数日前から南陽湾に繋留していた 英国の測量船フライング フイッシュ號であった 一昼夜の苦闘の後九死に一生を得て 満目漂茫たる大海に浮ん だ一行は真に感慨無量だった 月尾島にともづなをといたのは 25日の夜陰だったが海上に漂うこと10数時間 26日午後南陽湾

249 원 문 229 頭に三本マストのフライングフイッシュ號を見出した時 一行 は思わず總立となって歓呼した 英船は一行を待つにすこぶる懇ろであった 事情の一切を聴 取った船長は時を移さず抜錨して日本公使花房義質以下を長崎 に送った その時すでに京城の變亂はおさまり 閔妃はその一 族とともに追われて国王父大院君に執政を委ねてしまってい た 花房公使は7月29日夜長崎に上陸すると直ちに陸路出発8月 1日には馬関に赴いて命を待った 事件の詳報が東京に傳わった 時 和戦の議が朝野上下を沸騰した 時の外務卿井上良馨は軍 艦玄武號に搭乗して 馬関に下り花房公使に対案を授け取あえ ず日本人保護として軍艦 金剛 日進 扶桑 清輝の4隻が海 軍少将仁5景範の指揮の下に仁川に向った この軍艦には寺內 少佐の率ゆる小倉兵の一大隊を率ゆる陸軍少将高島鞆之助を司 令官として乗込んでいた 仁取盛衰記 日支戦乱の導火へ進む 鳥栖忠安 金剛以下の4隻が仁川に入ったのは8月12日であった と直ぐそ の背後から清国水師提督丁汲の率いる威遠 揚武超勇の北洋 艦隊数隻が袁世凱その他を将とする陸兵5千を満載して仁川に入

250 23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港した それは閔妃派の飛躍によって 日本及大院君に備える ために大軍を派遣することに決した結果であった ここに於て 大陸支那と島国日本は今やまともに東洋紛局の舞台に相見える に至った訳であるが その後 この対立は尖端化しついに日清 戦役とまでなるに至ったのも実にその端はこれに発せられたの である かくて 花房公使は仁川に上陸我陸海の兵に前後を護 られて 京城に入ったのが8月16日 直ちに韓国政府と交渉に 移たが 大院君は清国の術中に陥り天津に拘送され数年間幽閉 の憂目が目前に迫って来ているとも知らず倭国にくみやすしと 得意のほほえみを漏らした だが 鼻息の荒い日本政府をおこ らせることは不得策に相違ない そこで御機嫌をそこねない程 度にその要求の大部分を容れたので この事件は8月30日一先 ず落着した 済物浦条約はかくして成立した この条約成立に よって仁川の郵便局が創設されることとなった 即ち明治15年 12月取りあえず1事館內におかれたがその後明治29年に至って 独立し仲町の一角に移転したのである その後明治17年には金玉均 朴泳孝などいう親日派の独立黨と 清国の翼下にあって愉安を夢みる事大黨との間の葛藤からつい に甲申の乱となり更に伊藤博文と李鴻章との天津条約といった 局面の展開は近世東洋史の最も華やかなページであるがしかも 仁川は東洋の形勢に重大な變化をもたらす低気圧の中心地とし てその都度重要な役割を演じて行った

251 원 문 231 翻って明治16年1月開港當時の仁川の情勢はどんなものであっ たか 人口僅かに內地人は350 郵便は月に12回長崎から便船 でもたらされるに過ぎなかった貧弱な状態であった 仁川も 開港を一転機として居住者も漸次増加した明治18年には東本願 寺支院內今の銀水附近に小学校が創設された 日本人の商業商 議所も設置された 居住者が増加するにつれて小学生も殖えお 坊さんの片手間では間に合わなくなって明治23年には専任の校 長を置くようになった かくて仁川は半島における政策の中心 として政府も重視すれば民間の意気込みも凄まじく全く內地人 の力こぶがもととなってむくりむくりと膨れて行った こう書き並べてみると取引所とは甚だかけ離れたものとなって 来てしまったが さて明治29年仁取が生れる以前の米界は如何 なる地位にあったか 少くとも朝鮮と內地との米の関係は如何 なる状態にあったか 一瞥を與へてみたい 明治21年の朝鮮は 非常な凶作であった それに引かえて日本は大豊作で定期の最 低値は4月71錢を示現するという始末 米の洪水は近ごろの専 有じゃない昔からあった そこで居留者民中の米穀商中には石3 圓80錢の日本の下等玄米を持ち込んで来て5圓に売りとばし ちょっとぼろい金をつかんだという連中もあった 翌明治22年は前年の大豊作に引かえて日本は大凶作 9月11日 に吹きまくった暴風で稲作はすっかりやられてしまって5百萬石 の減脱米の洪水になやんだ 日本は 今度は空腹を心配し始め

252 23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るという始末 俄然この凶作尻を受けた明治23年には米價は暴 騰につぐに暴騰で正米は6月に入って最高11圓85錢 平均11圓 50錢を前年の最低4圓71錢に比べると一躍2倍以上にはね上っ た そこで前年に日本から輸入した仁川は今度は反対に輸出す るという主客転倒の形勢を示した 即ち 當時輸出された仁川 白米は1石5圓45錢のものであったが これが実に朝鮮米內地輸 出の濫觴であったのである かくて 內地の定期は最高値段9圓 60錢まで上ったが 受渡に外国米の代用を許したため相場はつ いに一頓挫を来すに至ったのみならず明治23年の內地は豊作と の見込みが確実となったために高値は3 4 5の3月に出ただけ でやんだ つまりこの年內地の定期が高値を出したのは前年の 凶作で正米が缺乏していたためであったがこの明治23年前後の 日本の外米輸入高を見ると明治22年には2萬1千7百石に過ぎな かったものが 23年 教育勅語煥発の年 には一躍193萬569 石となり その翌年の24年にはまたまた減少して70萬4千763 石となっている この明治23年の暴騰は我国民生活に米の脅威 を深刻にやきつけた年で例の 米が十錢すりゃヤツコラサのサ 唐米や臭いネ働かにや九圓と書いてある という俗謡が流行し たのもこの年であった

253 원 문 233 仁取盛衰記 戦争直前に仁川躍り出す 鳥栖忠安 明治25年には李太王親政の下に韓国政府は幣制の改革を断行す ることとなり典圜局 造幣廠 を龍山及仁川に設け その會辨 に大三輪長兵衛氏が就任 鋳貨機6臺を購入して貨幣の鋳造を開 始した この典圜局は明治38年8月目賀田種太郎男が財政顧問 として来鮮 新貨の鋳造を日本政府に委託することとして閉鎖 するまでつづいたが仁川の典圜局の建物というのはその後高等 女学校の校舎となり昭和2年に至って取こわして深見の酒造倉庫 となり下ってしまった 明治26年韓国政府は突如防穀令を出して米の国外輸出を禁止し てしまった 當時米價は玄米で5圓50錢乃至6圓であった この 防穀令は翌27年3月に至って時の日本公使大石正己が厳談に及 んだ結果韓国政府はついに解除するに至ったがこの裏面には時 の清国公使袁世凱の暗中飛躍があった 即ち彼は名を不作にか りて防穀令の公布を強要し反面自国米の無税輸入を企てた こ の結果3月頃から清国米商の大活躍となり湖南米の大輸入が行な われるに至ったが輸入總量は6斗入約10萬俵と目せられた 當 時防穀令は地方的に随所に行なわれたもので 韓国官場の連中 は自分の御都合次第で勝手気ままに防穀令を出しては商人を苦 しめていたものであった

254 23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かくて半島を舞臺とする日本対清国の関係は刻々に険悪の度を まし東学黨の乱となりついに明治27年には戦端が開かれるにい たったが 日清戦役以前の朝鮮は全く支那の属国の如き地位に ありしかも国內に於ても高官のうちにはそれに甘んずるという 事大主義のものも少なくなかった これがために日本はさきに 伊藤博文をして近世支那の大傑物として謳われる李鴻章と天津 に於て折衝せしめ朝鮮は支那の属邦にあらざる旨を認めさせた が 支那一流のインチキ外交はさんしょうの実のような日本に とっては癇にさわることばかりだった 日清戦役も結局このイ ンチキ外交を肚にすへかねた揚句ふりあげた拳骨であったが この結果日本は朝鮮の地位を確保すると同時に支那は朝鮮から 手を引く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その間仁川は半島における軍 事外交は勿論 日本の經済的発展の足だまりとして重要な地點 となっていた 従って 內地人の居留者も漸次その数を増し明 治16年の開港當時人口350 75戸に過ぎなかったものが 明治 21年には134戸 1,171名となり日清戦役の突発した明治27年 には159戸 1,298名となっていた 人口の増加につれて商勢も漸次盛んとなって行った その頃流 行の中心は全く仁川であった 従って貿易額も増加して明治16 年開港當時の58萬5千圓から27年には502萬4千圓と約10倍の膨 張を示した

255 원 문 235 ところで仁取が生まれた明治29年の仁川を明治30年朝鮮新報社 の発行に係る仁川事情という小冊子から抜粋してみると大體次 のような状況となっている 日本居留地 戸数 176戸 人口 1,140名 居留地外 戸数 595戸 人口 2,764名 即ち居留地人口の割合からいえば 日本は2割8分 支那が5分5 厘 朝鮮町が1割3分 その他各国居留地が5割2分という状態で あった 貿易の方面では輸入が370萬9千圓 輸出が191萬3千 圓で輸出貨物のうちに日本へ輸出されたものが154萬5千圓支那 へ23萬圓露国へ1萬9千圓という数字を示している 輸入がどん な振合を示していたかは遺憾ながら書き洩らしてあるから知る に由ないが明治26年の輸入が日本商人84萬5千圓に対して支那 商人が158萬9千圓という振合を示していたことから見て日清戦 役による我国の商業的勢力もすでに當時に於て半島における外 交政治上の勢力が地位を顚倒していたが如く日本が支那にとっ て代っていたことは想像出来る 事実問題として日本商人は日 清戦役後支那商人の駆逐に全力をあげていた そして仁取の出 現もまたこの努力の現れの一端であったのである

256 23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支那商没落 仁取の誕生 鳥栖忠安 日清戦役後の日本商人の活躍は仁川に於ける支那商人の勢力を 急速度をもって駆逐して行ったが さて日清戦役を中心として 明治27 8 9年の內地の米作はどんな状態であったか 明治27 年は4,181萬5,714石の実収を示し日本軍も破竹の勢を示したが 米も大豊作 翌28年には3,992萬882石となり 更に仁取が設立 された29年には3,619萬9,771石となってしまった 即ち29年 は丙申の年に當り昔から不作との言い傳えを如実に表したので あった こうした環境に仁取設立の計劃は當時三枝商店の支店長であっ た加来栄太郎 守永組支配人永井房吉両名の提唱により 當時 の仁川商議會頭で第一銀行支店長西脇長太郎 後に本店支配人 に転じた 及び副會頭水田定七の賛同で発起人14名を連れ當時 の代理1事萩原守一の諒解の下に進められることとなった 外 務省がこれを許すことになったのは經済的理由というよりも寧 ろ支那商の勢力駆逐という外交的意味に於てであった かくて 創立事務所を守永組の楼上におき創立委員に加来栄太郎 永井 房吉 松谷清一 田中佐七郎 池田誠治 山下新太郎 福田虎 太郎の7名をあげたが 取引所設立出願の要點をあげれば取引の 種類は米及大豆の取引 延取引 定期取引の三種 資本金は5萬 圓 1株25圓で2千株として明治29年認可申請書を提出に及ん

257 원 문 237 だ この認可申請書に添附した設立理由書は左の通りであっ た 株式會社仁川米豆取引所設立理由書 第一 本取引所の設立を要する事由左の如し 一 仁川港は朝鮮国平安 黄海 京畿 忠清の4道及全羅道の 一部より産出する米豆の集合地にして 當港輸出の品物 夥多ありと雖 米豆取引の如何は啻に當港の栄枯に係る のみならず 日韓貿易の盛衰に関せり 然るに其の品質 均しからず 價格同じからず 其の標準を定むること甚 だ難し 従って取引の妨碍を来すこと多くこれが為この 弊を妨がんと欲す是本取引所の設立を要する事由の一な り 二 米豆の品質及價格の標準の一定する時は帝国內地に居住 する人に至るまで其の品質及價格の標準を知り従って米 豆輸出に至大の便利を與えるに至らん是れ本取引所の設 立を要する事由の二なり 三 先年當港貿易商組合に於て輸出米の改良を企て検査員を 設けしも終に其の目的を達すること能はざりしは今に遺 憾とする所なり 故に本取引所を設立し價格の高下を定 め一般の生産者をして粗悪米の價格低廉なるを明知せし め以て品質の改良を計らんと欲す 是れ本取引所の設立 を要する事由の三なり 四 近来白米の米質非常に粗悪にして殊更に水分を含蓄せし 者るもの多くこれが腐販を来し意外の損失を生ずこと多 し 若此弊を矯正せんには其の損失を蒙むる者将来益々

258 23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お多きに至らん故に本取引所を設け其の弊害を妨かんと 欲す 是本取引所の設立を要する事由の四なり 五 近来奥地に行商し米豆の買集を為す者甚だ多し 然るに 價格の趨勢を審にせず猥りに購買し以て損失を来すもの 尠からず故に本取引所を設け價格の趨勢を知らしむると きは奥地行商者に非常の便益を與えると同時にこれが奨 励をなすの好果を得べし これ本取引所の設立を要する 事由の五なり 六 當港において米豆取引所を設立し 売買上便益を與える ときは各道の米豆當港に集合し當港の商品各道に散布し 當港集散の増加するは理の見易きところにして従って日 韓の貿易上一層進歩を見ることを得べし 是本取引所の 設立を要する事由の六なり 第二 売買取引すべき米豆集散の沿革及現況 當港に集散する米豆の商権は明治22年以来全く本邦商人の独 占に属せり 大豆の如きはその始め産出額は実に僅少なりし と雖我帝国に輸出の道開けしより その産出特に増加するに 至れり 其年の豊凶により増減ありと雖も前3年の米豆の売買を挙げれば 左の如し <明治26年売買高> 但韓人相互の売買高はこれを略す 以下同じ 米6萬3,938石 此價格32萬8,882圓 大豆5萬5,624石 此價格19萬 4圓

259 원 문 239 明治27年売買高 米16萬6,658石 此價格100萬3,199圓 大豆6萬161石 此價格27萬691圓 明治28年売買高 輸出白米7萬5,613石 此價格42萬4,900圓 輸出玄米3萬4,588石 此價格18萬2,346圓 輸出大豆9萬3,114石 此價格37萬5,699圓 外に一度當港に集り再び釜山 京城その他各地に散じたる米 の概算 玄白米 太凡18萬石 此價格 凡100萬6200圓 第三 本取引所の米豆取引仲買人たるを得べき商人の概数米豆 商各80名とす 仁取盛衰記 創業當時のナンセンス 鳥栖忠安 明治29年3月出願された仁取は同年4月に入って設立認可の指令

260 24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に接したので仲買人9名の認可を得て開業の準備に着手した と ころがいよいよこというところ迄漕ぎつけて一つの難関に逢着 した その難関というのはこうだ 最初の計劃によれば資本金 は5萬圓となっていたので発起人はこの案に従って1株25圓とし て募集を始めた ところが應募株は約3倍に達するという盛況 證據金2圓払込のものが7 8圓もするというすばらしい人気で あった そこで発起人側は全く悦に入っていたが 愈よ払込ん で開業という段になると勅令第74號の規定により半額以上の払 込をなすに非ざれば開業する事を得ずというので一頓挫を来す に至った ここに於て今迄えびす顔だった関係者はたちまち苦 虫をかみつぶしたような顔に變わった いろいろ考えたが結局 此上払込みをする訳にも行かぬというので資本金を3萬圓に減 額 全株数を1,200株に切下げその半額を払込んだという形式に 引直して5月5日に至って開業した この創立當時の家屋は日本居留地第53號地 現在本町2丁目に あたり水田氏所有地になっている 會社の定款や営業細則は會 頭の西脇長次郎が自ら筆をとって 大阪及び下関の取引所に 倣って起案した かくして出来た仁川米豆取引所初代の理事者 のお歴々は次の顔触れである 理事長水田定七 理事 松谷清一 永井房吉 三木雄一 田中佐七郎 監査 加来栄太郎 池田誠治 審査役松谷清一 永井房吉 三木雄一 田中佐七郎 池田誠 治 柴田孫兵衛 桑野良太郎 山下新太郎

261 원 문 241 河野小七郎 林市郎治 以上何れも役員は無報酬であった その後開業間際になって理 事長水田定七は辞任したので田中佐七郎が理事長となった 田 中の理事長は看板だけで実際の仕事は永井房吉が理事長代理 に 桑野良太郎が専務理事として切って廻すこととなった 最初の仲買人は薄田式造 渡邊友太郎 安岡徳平 林長太郎 久間善助 木村健 小森虎吉 新居歓次郎 中川好次郎の9名 であった 市場代理人の届出は一名で結構代理人でなくとも売 買をするといった頗る大まかなやり方だった しかもこれ等の 仲買連は何れを見ても手振りの出来るものは一人もなく 一體 どんなことをしたらいいのかと途方に暮れたという始末それで いて仲買人となったのだからその無鉄砲さも想像ができる い ろいろと智慧をしぼった末 その頃仁川にいた中津の人で糸園 某というのが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わかってこの男を先生と して開業前に立會の稽古をしたそうだ いい加減の親爺連がま じめくさって手振りの稽古した状況を想像してみるとあまり女 房子供に威張れた格好ではなかったに違いない だがとにか く 開業までにはまがりなりにも手振りが出来るようになって いた 創始當時の場帳は今のように完備した者でなく大和帳と稱する もので委托米臺帳 元帳 と客先手合帳 仕訳帳 の二つがあ り 手合帳は南京符丁と稱する一種独特の符號を以て記帳する

262 24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というのだからものすごい なれないものが見たら何がなんだ かわからないものであった 證拠金は100石につき50圓で こ のうち20圓は取引所から預り證を渡していた 手数eは石3錢 であったが 日仕舞は100石1圓50錢で つまり半分は會社が とっていた訳である 創業當時の仲買人身元保證金は500圓で あったが別に増身元保證金の規定があって 千石の建米毎に 300圓の増保證金を必要とした これは明治39年1月の改正で廃 止されるまで10年間続いた制度だった その頃の建米の単位は 50石であった こうした状態であったから創業當時にはいろいろのナンセンス が続出したらしい その頃場帳づけは半紙をつみ重ねて その 四隅に毛筆で書いたものだったが この給eが50圓 その當時 としては飛び切り高い俸給だった 場帳つけは派手な商売だけ に夜は紅灯緑酒の巷に入りぴたりという生活状態だから金はい くらあっても足りつこはない 然も記帳はちび筆でやっている 位だから間違ひが多い 間違っていても手振りする方が素人だ から はてな俺の方が間違っていたのかなア といった調子で まるで狐につままれたようになることが多い ここのところに つけ込んで場帳つけの先生盛んに跋扈し遊蕩資金を稼いだもの だった その頃仲買に中原太一という少しぼんやりだが人のい い痛快な男がいた 場帳附の先生この男の善良さに目をつけて 悪い手ぶりをつけておくとあとでこっそりこの男にたのみ込ん で始末して貰った 中原は別に悪い顔もせず よしよし と 片っぱしから背負込んでいたという この頃のせち辛さから比

263 원 문 243 べると嘘のような話である 何代目かの理事長に柴田源兵衛という男がいた 此男形勢不利 と見ると高場から脱兎の如く飛び降りて来て 人渦のなかに 割って入り理事長自ら手振りしたという だが理事長の手振り は仁取の場合だけを笑ふ訳にも行かぬ 明治26年の改正までは 內地でも盛んにやったのだから 仁取盛衰記 市場紛擾で解散命令 鳥栖忠安 素人連が寄り合って暗夜に物を手さぐりするような頼りない取 引をつづけたのも束の間 だんだん月日が立つにつれて仲買の をおぼえて来た そして相場の味も占めれば野心も 連中もこつ 起しかけて来て 1 2年たつと今度は意地や張りといつた相場 込んで入った 斯て明治 師につきものの気もちが仁取にもしみ 31年仁取としては生れてはじめての大あふりを喰って最初の解 合が行なわれた 即ち 明治31年端境期を中心に漸次取組高が 激増した結果 買方は二ちも三ちも行かなくなって總解合と なった この時の買方の大将は五百井長に吉川佐太郎の両名 10月限で買占めをやった結果見事失敗に終ったのだった 中心 人物吉川佐太郎は大胆な相場をやっただけ頗る覇気に んだ男

264 24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で月尾島を當時韓国政府から500圓で払下げて貰って離れ小島 に別天地を作り 王様気取りで暮そうというような痛快な計劃 を樹て盛んに暗中飛躍をやったこともあった 總解合は買方總崩れのうちにまがりなりにも始末がついたが さてそのあとが甚だまずい結果になって来た 一敗地に塗れた 吉川佐太郎は負けた肚いせに暮夜ひそかに1事館の裏門をたた き取引所害毒論をその雄辯にまかせてまくし立てた 時の1事 は石井菊次郎 今こそ功なり名とげて我外交界の大先輩として おきまっている彼ではあるが 當時取引所というものは一體ど んな職能をもったものか外交畑の人だけに一こう御存じない の 吉川佐太郎が相場にまけた怨恨を三寸の舌頭にこめたふるな 辯にすっかりまるめられてしまって 取引所は百害あって一利 なし と決めてしまったが 颱風一過解合成立でほっと一息し た同年の10月7日 仁取にはまさに晴天の霹靂ともいうべき解 散命令が突如として降された 関係者にとってはまさに藪から 棒というよりもうっかりしているところを後から脳天めがけて ガン と一つ棍棒でどやされたほどの驚きだった 當時理事 長の加来栄太郎は帰朝中で留守居役の柴田理事が理事長代理を つとめていたが理事者をはじめ仲買はこの命令に接してボーッ としてしまって目を廻さぬだけまだよかったといった有様 直 接関係者につづいて仁川市民の恐慌がその極に達したことはい うまでもない

265 원 문 245 仁取の設立については日本1事は當初から反対だった それに も拘らずこれが認可されたのは時の少壮外交官萩原1事代理の 専断だった こうした內部のいきさつから生まれた仁取だった のでその後も公使館では廃止の機會を鵜の目鷹の目で狙ってい た そんなことは知らぬ仁取側はお調子にのってやっているう ちにこの總解合になった訳であるが 公使館では吉川佐太郎の 焚きつけもきいてこの市場の紛擾を 待ってました とばかり 1事石井菊次郎をして解散命令を出させるに至ったのである だが一度味をしめたものにとってみれば相場は阿片の中毒みた いなものでなかなかやめられるものでない とくに味をしめた ばかりの水の出ばなの仁取にはあきらめやうにもあきらめきれ ぬことだった 鼎の沸くようなさわぎのなかに仁取存続の運動 は先づ存立哀願書として同年10月10日附を以て石井菊次郎の手 もとに差し出された 株式會社仁川米豆取引所存立哀願書 當米豆取引所の義設立理由書に詳記仕候次第にて明治二十九 年四月中設立の御認可を得以来営業の年数未だ年限の三分の 一に達せず候へ共諸般の設備も漸く經験を積み業務も約畧其 緒に就き前途益々好況を呈せんとするに至候処本月七日附を 以て突然解散の御命令に接し役員株主は申す迄もなく仲買人 等に至る迄実に驚愕措く所を知らず依て直ちに役員會並に臨 時株主總會を開き仲買人等も列席せしめ専心善後策に就き 種々協議仕候処一般の希望は是非共此際御寛典を仰き度熱望 罷在候に付左に哀願の次第陳述仕候 抑も取引所は創業以来種々困難を排し以て今日に至り日韓人

266 24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の取引も次第に繁盛に赴き殊に昨今韓人の取引は殆んど日本 人に三倍するの現象を呈するに至り随って之れと直間接の関 係を有するものも少からず 當取引所於ても従来の関係上此 際解散の御命令に接し候ては株主の困難は勿論十餘名の所属 仲買人の如きは早速今後の生計上にも差閊へを来し特に韓人 客方との関係上種々陳す可からざる困難も之れあり 到底拾 収すべからざる惨状を現出するに至り可申候事情前陳の如く に御座候間是非共引続営業御差許相成度尤も取引所の諸規則 及営業上につき不備の點有之候はゞ貴命に遵奉して不都合の 挙措無之様可仕候に付篤に御配量の上特別の御寛典を以て引 続き営業相叶候様御許可被成下度株主總代並に仲買人總代各 以連署此段哀願仕候也 この愁訴哀願した願書は株主總代長 一之祐 柴田孫兵衛 加 来栄太郎 田中佐七郎 樋口平吾 延田亀太郎 郡金三郎 以 上7名のほか仲買人總代青柳壮一郎 中原太一郎 綱木千吉 井 口定七の連名で提出されたが 石井菊次郎頑として應せず 願の筋は以ての外仁取存続断じて罷り成らぬ とばかり剣も ほろろの挨拶であった

267 원 문 247 仁取盛衰記 幣原乗込み再興の運動 鳥栖忠安 狂気のようになった仁川居留民が拝み倒し 泣きつき尻まくり 等手をかえ品をかえて口説き立ててもさっぱり手ごたえがな く 石井の菊さん相變わらず木で鼻を括ったような返事ばかり なかなか解散の理由さえも説明して呉れない 結局運動は持久 戦に入らざるを得ない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が 取引所として は解散命令の手前残務整理の委員をあげなくてはならぬ立場に あるので加来栄太郎 田中佐七郎 池田誠治 樋口平吾 柴田 孫兵衛 永 一之祐の6名をあげた この6名は名義こそ整理委 員であるがその実存続運動の中心人物であったのである 間も なく石井菊次郎は転じてその後任として 外務大臣として今を ときめく幣原喜重郎が1事官補として外交官の初舞台を踏むべ く1事代理に任ぜられた この幣原は今でも議會の答辯で味噌 つけてみたり国民の一部にはその軟弱外交に無能呼ばわりをさ れたりしているが 若き日の彼もあまりきびきびした男でなく 仁川に於ては何等これという目立った仕事を残していない 彼 が若し三菱から女房を貰わなかったとしたら外務大臣はおろか 大使にもやっとことだったろうとは彼の仁川時代を知っている 古老の言葉である 幣原喜重郎が仁川に乗込んで来てから仁取再興の運動はますま す猛烈となり 関係者は所謂輿論の喚起やら陳情によって外務

268 24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當局を動かすべく必死の努力を続けて行った 明治31年11月2 日 長 一之裕以下17名は連署を以て次の様な建議書を時の商 業會議所會頭西脇長太郎に提出した 建 議 株式會社仁川米豆取引所の義は去る明治二十九年四月 中當港在留市民殆んど一致賛成の下に多数株主を得 其筋より設立認可せられ創業日尚浅きの今日如何なる 理由ありてか突然解散を命ぜられ 為めに當港居留民 中多数の株主並に仲買人等の困難に一方ならず其の関 係する所最も広き様相見へ 右取引所存廢一条は日韓 貿易上現在将来共不安関係も可有之哉に被存候実に本 問題の如きは當港商業界に於ける最も重大の事件にし て袖手傍観す可き義に有之間敷と被存候依而貴所に於 て速かに臨時會相開かれ右利害得失御審議の上御意見 の程其筋に建議若くは関係商民御教示相成度候様致度 此段及建議候也 この建議に従って開かれた商業會議所の臨時總會に1事代理の 幣原喜重郎も出席して取引所弊害無用論を主張したが遂に大多 数を以て取引所の存在を認め左の如き建議書を提出した 抑も取引所を公設するの要は物價の標準を明確ならし め以て貨物の集散を便にするに在り 故に商業の発達 せる所之れが設けあらざるはなく我政府が取引所法を 発布して売買取引の繁盛なる地区內の商人に政府の免

269 원 문 249 許を得て一種若くは数種の物件の取引所を設立するを 得せしめたるも亦此旨趣に外ならずと信ずとなり顧れ ば當仁川港の商業は開港以来逐年其繁盛を増し殊に明 治二十七八年の戦役以後は俄然顕著なる発達を進歩を なすに及び當時在留本邦商人は爰に取引所を設立する の必要を感じ明治二十九年四月中仁川米豆取引所設立 の認可を申請し當時の1事は該申請を容れて其設立は 認可せられ再来引続き営業し来りたるに本年十月七日 に至り突然解散の厳令に接せり 而し解散の理由に至 りては未だ與り聞くこと得ずと雖も本會議所が調査す る所をもってすれば米豆取引所の存在は當港にとり寧 ろ其必要なるを認めざるを得ず今其の理由を開陳すれ ば左の如し 第一 遡りて仁川米豆取引所設立當時の景況を査する に其の売買に従事するものは 一部の日本人に止まり 随て其売買取引高も極めて僅少に該取引所の収支果し て相償ふべきや否やすら疑ふべきものありしと雖も後 韓国商にして該取引に従事するもの漸く増加してる殊 に本年三月以後の如きは韓国商の取引高著しく増加し 来り 京城商民は言ふ迄もなく各地方における韓商も 亦該取引所に就て取引をなすに及び遂には其取引高十 中の七分は韓商これを占むるに至りたるもの米豆取引 所の実況にてありき 左すれば此趨勢にして益々進歩 するに至れば米豆取引は韓商を顧客として数萬の利益 即ち売買手数eを収め得るに至るは必然にして該取引 所が本邦に於る第二信の取引所の繁栄を見るに至るべ

270 25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きは必至の趨勢と認めて誤なきを豫言するも其失言な らざるを事実に證し得る日は遠きを待たざるを信じ得 るものありたり 蓋し當初當港を最多数の本邦商人が 該取引所を設立せる目的はこれをもって韓商取引の便 に供せんと欲したるもにあるものにして 必ずしも少 数日本商人を目的とせざりしなり 然るに當初の目的 漸く達し得らるゝの段階に上りたるに際し解散の厳命 に接す これが株主たるものゝ損失は度外に置くも當 港に於ける一大利源を埋設せしむるの遺憾は禁じ難き ものなくんばあらず 是切に貴下の細察を請はんと欲 するの第一なり 仁取盛衰記 再興運動の建議書提出 鳥栖忠安 第二 凡そ當港の商業を発達せしめんと欲せば貨物の 集散高を増す工 をなさゞるべからず 然るに米豆集 散の消長に大関係ありとす実例を以て證すれば當国に 於ける米豆の貿易は昨年不作の餘響として前年より不 振の状況に陥り処によりては糧食の不足を訴ふるもの ありしに拘らず當港に於ける吸集力はなお克く各地よ りの廻米を促したし其在米常に比較的 澤を以て目せ られたるを得たるは米豆取引所の存在興りて大いに力

271 원 문 251 ありしなり れ物價に高低あるは商界の常にして 時々損益あるは商業家たるものの覚悟せざるべからざ る所なりと雖も能く物價高低の趨勢を察して巧に損失 を免るゝは是れ商業家の秘訣と言はざるべからず さ れば平素最も投機を嫌忌する商実者と雖も或る場合即 ち多数の米穀売買を約定するが如き場合に於ては進ん で米穀取引所の定期売買法を利用することあり これ 多数の取引に伴う危険と損失とを豫防するが為めにし て 其の実例を挙ぐれば 実に十百にして足らざるな り 今此點より看察すれば當港に米豆取引所の存在す るは當業者に取り最も便宜なるを念はざるべからず 例えば當業者にして地方に米豆数買出しに従事するに 當り不當の價格暴落等より来る損失を豫防するが為め 豫め取引所の定期に売るが如き若しくは價格高低の趨 勢を察し買入れの必要を感ずる場合に於て豫め取引所 の定期に買って利益を収むるが如き凡そ是れ等の便宜 は取引所ありて初めて得らるべき便宜なりとす 勿論 取引所の最も便宜とする所は是れ取引所の弊害存ずる 所たるは之を認めざるにあらず 然れども元来商業な るものは将来に於ける需要供給の関係を豫察し之に 依って巧に売買する所に妙味存ず 而して取引所は其 の機関として必要なるものに属す 然るに一弊あるが ために全然これが存在を否定す 寧ろ角を矯めて牛を 殺する嫌なしとせざるべし 況んやその弊害なるもの 之を豫防し之を矯正するは必ずしも方法なしとせざる に於てずや是會議所が取引所の存在の必要を認むるゆ

272 25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えんの二にして亦貴下の細察を請はんと欲するの二な り 第三 米豆取引所の當港に設立されて以来 當港産米 質の著しく改良されたるは是れ特筆に値する事実な り 蓋し米質の改良は従来より漸次行はれざりしにあ らずと雖も米豆取引所の創設以来顕著なる収良の実行 され所謂気米等の粗悪米の殆ど市場に現はれざるに至 りたるは是れ全く米豆取引所に於て標準米を備へ厳に 粗悪米の代用を排斥したるが為め韓国人をして粗悪米 を仁川に輸送するの不利不得策を感知せしめ其結果と して米質に顕著なる改良を見るに至りたるものにして 亦もって米豆取引所が貿易市場に與へたる利益の顕著 なるものなり これをもって案ずるに米豆取引所にし て存在し従来の方針をもって進行するに於ては米質の 改良は日ならずして我希望の如く行はれ 貿易上至大 の利益を與ふるに至るべきは疑を容れざる事実なりと 信ず これ貴下の細察を請ふ第三なり 第四 窃かに察するに取引所の存在は在留本邦人の勤 倹心を奪って無謀の投機心を奨励し日韓貿易の全體に 不利有害の影響を與ふるのおそれのありとの説なきに あらざるが如し 然り取引所の取引は素より投機的の 性質を帯ぶるをもって濫りに自己の資力に超越して無 謀の投機的売買を為すもの往々にしてこれなきにあら ずと雖も畢竟斯の如き取引所の利に伴ふ弊害にして単

273 원 문 253 に其の弊害の點にのみ着目して取引所の利害を論ずれ ば其の論結は一言にして否定に属すべしと雖も利害の 相伴ふ事物の常態にして天下絶対的の利なきと共に亦 絶対的の害あらずとせず 取引所の利害を論ずるもの 宜しく其の弊存する所を細察深考すると共に其の利の ある所を熟視審究せざるべからず 而して本會議所が 調査する所をもってすれば 取引所の存在には前述の 如き利益ありて其弊害に至りては自ら防禦の途なしと せず 即ち取引所の取引法に充分の改良を加へ當事者 をして厳密に無謀の投機的売買を防遏せしむるの方針 を探らしむるに於ては決して其弊に勝へざるが如き事 実あらざるべし 然れども今仮りに一歩を譲り上述の 如き弊害は容易に防禦し得ずとするも爰に最も貴下の 熟慮を請はんとするは公の取引所の取引を禁止するも 果して一般の投機を絶滅せしむるを得るや否やの點に あり 一層適実に言へば公の取引所営業を禁止したる の結果は偶々以て陰密の間に一種の賭博を行はしむる の悪結果を来さざるなきや否や 本會議所の調査する ところを以ってすれば寧ろ憂ふべきの傾向なしとせざ るが如し 即ち電報の便あり坐ながら遠く大阪の米穀 取引所に輸贏を試むを得べく此事たるや純固たる空米 の売買に耽ける弊害を生じ来るものにして而かも事陰 密に属するを以てその弊害は容易に防禦し得べから ず 独りこれに止まらず仁川米豆取引所の解散以来は 明治28年以後絶へてなかりし所の通貨に一種の投機的 売買も行はるゝに至りたるが如し 凡そ斯の如くなら

274 25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ば仁川米豆取引所の解散は一般の投機心を駆む陰密の 取引に向はしめたると同一なるを認めざるを得ざるが 如く而して公設の場所に於て行ふ所のものはこれが取 締を厳にするを得べく従ってその弊害も少なきに當て 防禦するを得べしと雖も陰蜜の間に行はるゝものに至 りてはこれが取締の方法に苦しむと共にその弊害の少 なきに防禦するの道なかるべし 果して然らば一般の 投機心をして寧ろ取締の便ある公設の場所に集中せし むるの弊害少なきに若かざるにあらずや 況んや取引 所には他に充分の利益あるに於ておや れ投機な る語は着実なる実業家の忌む所なりと雖も究極すれば 是れ一種の語弊に基く嫌忌にして元来商業なるもの一 として投機的ならざるはなし 而して取引所はこの投 機心をして利益ある道に應用せしむるべき機関なるが 故に 能くこれを利用するに於てはその商業の発達に 資する事蓋し莫大なるものあるべきなり 仁取盛衰記 日韓貿易に偉大な功績 鳥栖忠安 建議書続き 次に尚貴下の熟慮を請はざるを得ざる 一事あり他なし 本邦人の設立せる取引所を禁止する も當港に取引所の設立なきを必すべからざる事是な

275 원 문 255 り 己に叙述るせが如く 仁川米豆取引所創立の當時 韓国商人の取引所の取引を了知せざるや同所に就て取 引を試むるものなかりしと雖も爾来取引所の利便韓国 商人の知悉する所となるや 終には其取引高の十中の 七分は韓国商人之を従むるに至りたるなり なれば一 旦其利便を知悉したる彼等は之を忘却する能はざるは 人情の自然にして仁川米豆取引所の解散せらるゝや早 くも彼等の手に依って取引所の新設を見るに至るべし との説すら聞くに至れり 若し れ果して韓国商人の 手に依て取引所を設立するに至らんか確に左の如き不 利不便を免れざる可しと信ず 第一 一年巨萬の収益あるべき事業を空しく韓国商人の手に 委ね去るは我れの利源を奪ふて彼れに與ふると同一な る可き事 第二 取引所にして韓国商人の手に依て設立さるゝときは其 間如何なる弊害を生ずるも我當局者に於て直接之が取 締りを為す能はざる可きを以て萬般の取締上従来より 非常の不便を来すべき事 斯の二者は今日に於て最も熟慮せざる可からざる要點 にして果して本會議所が見るが如く仁川米豆取引所解 散の一事は他に取引所の設立なきを必す可からずとせ ば適當の範囲內に於て取引所の公設を本邦人に許可 し 之れを以て一は本邦人に利益を得せしめ一は取締 上の便宜を得るの優れるに苦かざるべし 是れ貴下の 細察を請ふ第四なり

276 25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以上陳述する所を概括すれば 當港商業上の機関とし て取引所は必要なる事 仁川米豆取引所を解散するも 之れを以て取引所の設立なきを必すべからざる事 故 に此利益ある事業を本邦人に許可して適當の取締內に 其の利益を進捗せしむるの優れるに若かざる事是れ本 會議所が取引所の存在を必要とする所以にして れ 仁川米豆取引所株主に至りては海外千里の異域に辛酸 を嘗め而して得たる財産を多きは数千圓少きは数百圓 を投入したるものなるに忽然其所有権の一部を亡くし たるものにして之れと共に生業を失ひし仲買人等の苦 境の如き亦切に貴下の洞察を請はざるを得ざるものあ り 仰ぎ願はくば貴下上述の次第に熟慮を垂れ取引所 存在の方針を以て這般善後の計を全ふせしめられん事 を玆に本會議所の決議に依り謹んで建議候也 在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 會頭西脇長太郎 1事館事務代理 1事館補幣原喜重郎殿 以上建議書の內容に盛られた取引所論は実に堂々たるもので あって當時に於てすでにかくの如き透徹した理論を仁取関係者 が持っていたということは驚歎に値する それと同時に仁取の 誕生が如何に日韓貿易や 朝鮮人商人乃至は當時の産業開発上 に重大な役割を演じたか又仁取の解散命令が當時の仁川財界に 如何に大きな波紋を描いたかがうかがわれる この立論の堂々

277 원 문 257 たる建議書に対しては當時かけ出しの幣原は勿論のこと公使館 の連中が一言半句の辨駁が出来なかったであろうことは想像す るに難からぬ 併し 商業會議所や 穀物貿易商組合が躍起と なっての運動も全く奏効せず 1事館は更に動ずる色がなかっ た そこで仁川側ではこんなわからずやの公使や1事を対手に していたところでいつまでたっても埒口は開かないと業を煮や しついに外務省に直接膝詰談判と出かけることにした 即ち明 治32年2月時の政府は第二次山縣內閣で 外務大臣は青木周 蔵 次官は都筑馨六 通商局長は林権助だったが 仁川居留民 の輿望を荷ってはるばる玄海のはを越え東京に向ったのは加来 栄太郎であった 彼は着京すると先ず同郷たる福岡県選出代議 士の野田卯太郎に事情を打あけて橋渡しをたのんだ 放膽な野 田は二言といわず よかたい とばかり加来のたのみを引受け て加来を外務省は勿論當時の朝野の有力者に引きあわせ 仁川 事情の説明すると共に諒解にこれ努めた 加来が東京へ乗出して最初たよったのは末松謙澄であった そ れは彼と進辰馬とは末松のところで書生をしていた関係から だった 従って末松が力ぞえしたのは勿論であるが 主として しん身になって奔走して呉れたのは野田だった 加来が時の廟 堂を動かすのに重心點をおいたのは取引所の理論よりも寧ろ海 外発展という點であったがこの東京における運動で時の山縣內 閣をはじめ中央政界の有力者間における空気は大體において仁 取の再興を許可するというに傾いて来た そこで加来は中央政 府の內意を確めた上で一先ず仁川に引取った あとになって

278 25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判ったがこの內閣の意向が再興に決するまでに一番骨折ったの 表面にこそ何にも言わなかったが井上馨であった 即ち彼は仁 川居留民の衷情を聴いて仁取を取つぶすのは怪しからぬ 公使 館が日本人の海外発展を妨害するとは甚だ以て心得がたいと色 をなして発した鶴の一声で青木周蔵以下外務省の連中は恐縮し て復活と內定するに至ったのであった 政府の內意をきかされ て復活が出来そうな見込みが充分だったので加来は欣喜雀躍し て汽船で引かへして来たがさていつまでたっても正式に許して 呉れず 結局幣原がいる間はとうとう実現せず仕舞たった 仁取では上を恐れぬ致し方との公使館側の反感をさける為に一 先ず順序として形式だけでも會社を解散しそうな模様を見せる 必要があったので加来が帰仁して政府の內意が明かとなったに かかわらず解散委員をあげたが幣原がうんともすんともいはな いのにしびれを切らし いつまでたっても何の音沙汰もないが 一體どうして呉れるか と居催促の手紙をひそかに末松と野田 に出した 然るにこの手紙に対する返事は 近く1事の更迭が あるからあわてずに待て と報じて来た そこで仁川側は鳴り を鎮めて經過をながめているうちに幣原は転じてその後任に伊 集院彦吉が1事として乗込んで来た

279 원 문 259 仁取盛衰記 珍らしくも米人の買出動 日本の總売向ひ 鳥栖忠安 伊集院彦吉が1事となると間もなく久しく陰鬱な空気だった仁 川居留民に光が訪れて正式に再開認可の通告がもたらされた 仁取は再び歓喜に乱舞しながら明治32年の6月19日から営業を 開始する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再開の功労者加来栄太郎は當 時の仁川居留民にとっては全く後光がさして見えたらしくまる で生神さまが救世主のような人気だった かくて再び蓋をあけ た仁取の役員は理事長に生き神様の加来栄太郎 理事郡金三 郎 樋口平吾 監査役田中佐七郎 永 一之祐 岡幸次郎 柴 田孫兵衛 審査役土肥福三郎 奥田貞次郎 田中佐七郎という 顔触れであった 明治32年下期の仁川には仁取の復活をはじめ景気のいい事が相 ついで訪れた 即ち9月に入ると朝鮮最初の鉄道たる京仁鉄道が 完成していよいよ汽笛の声を聞くようになった この京仁鉄道 は米国人モーリスが韓国政府から権利を得たものを引受けて明 治31年許可を受けた京釜鉄道株式會社と合併の結果 日本の手 で出来たもので社長は當時我財界を代表して半島の国権伸長に 活躍した渋沢栄一だった

280 26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日清戦役によって大陸支那の勢力を駆逐するのと同時に露国の 爪牙が半島に延びて来た 三国干渉 北清事變という物情騒然 たるなかに韓半島の風雲は如何に動いて行ったか 大院君の失 脚閔妃の独裁政治からやがては閔妃の暗殺と劇的な出来事が次 から次へと繰返されつつ半島朝鮮は国際上東洋のバルカンとし て運命の翻弄にまかせられて行ったのである かくて日露の関 係は土にまみれた血潮をかんで臥薪嘗胆する日本国民の憤怨 と 露骨を極むる帝政露国の極東への野心とが事毎に火花を散 らして日露の関係は刻々に緊張しつづけたこの環境のなかに あって 仁取は如何に推移したか 明治36年のこと 仁取市場 に始めて外人の出動という珍しい事件が起ったのであった 即ち當時仁川に居住していた米国人デシウラという男が6 7月 限を中心として買占めにかかった これに対して日本商人側總 がかりの売向ひとなり6月限4千100石 7月限9千800石と仁取 再開後始ての大受渡が行われた 此時の受渡値段は以上の両期 が11圓90錢であったが 何しろデシウラがダンダン買扇って来 るので一時は日本商人側も旗色頗る心もとなく 陣営あわやつ いゆるかに見えたが9月に入っては全くデシウラの方が参ってし まって ついに白旗をあぐるに至った 従って6月末には先物即 ち8月限が13圓3錢の高値を唱えたものが9月中旬に至っては先 物 11月限 が6圓80錢におち込んでしまって 凱歌は高らか に日本商人側にあげられた このデシウラという男は日本婦人 を妻君にしていた関係上 そ邸宅には堂々たる日本座敷を造っ

281 원 문 261 たりしていた 今のe亭うろこはこのデシウラの邸宅のあとで ここの座敷は當時のものがそのまま残っている部分も少くな い この一戦に敗れたデシウラはその後しばらく仁川に居たが間も なく上海に引揚げてしまった 一家を引払った後も時折り債権 の取立ての他の用件で仁川を訪れる彼の姿が見受けられたが その後どうなったか 栄枯はうつる 人の世のすべては現れて は消ゆるうたかたのそれの如きはかなさを今更の如く感ずるで はないか 話はまた少し昔に逆もどりする 明治32年6月復活した仁取は その後せっせと再興の途をたどり明治33年8月には仁取に附属 倉庫を建設した 當時の仁川は倉庫の設備がまるでなっていな かったために米は殆ど野積みであった そこでこの際倉庫を仁 取自身で設備することは米の取引改善が復活理由の一として強 調されていた手前當然やらなくてはならぬ問題でもあった そ れはそれとして仁取のその後は世の中の景気の浪と米作の豊凶 によって多少の浮沈はあったとして先ず々々大事なく進んで 行った訳でいるが 前記のデシウラの買出動で市場をめぐる空 気が頓に緊張した明治36年の如き出来高758萬6千餘石に達す る盛況であった 理事者がおったまげるやらよろこぶやらした ことは申すまでもない

282 26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日露戦争で仁取は閉鎖 戦後は大さびれ 鳥栖忠安 小きざみに克明な回顧を與へて行けばきりがないから舞台を大 廻しに廻して一足とびに日露戦争に移る 米人デシウラの買出動で仁取が騒いでいるうちに半島の風雲は 刻々に険悪となって来た 東洋に良港を求めんとするロマノフ 王朝の野望は先ず馬山浦租借事件として爪牙をあらわにして来 た この問題は幸にも露国の思ふつぼにはまらなかったが事毎 に啀み合った日露の関係はついに明治37年の2月に至って爆発 して至った 時は梅咲くきさらぎの初め明治大帝は宣戦の詔を賜いて皇軍奮 起の理由を明かにし給い 動員せられた50萬の国軍は東洋の平 和と正義のためは剣を把って起ったのであるが その日露戦争 の序幕が切って落された舞台は実に仁川であった 明治37年2 月8日 當時仁川に入港していは露国東洋艦隊のワリヤーク コ レークの2艦を前にして爪生艦隊の援護の下木越師團の敵前上陸 となり 明けて9日には仁川港外数里の海上に於て2隻の露艦を 見事血祭りに撃没して我海軍は幸先よしへ勇躍した

283 원 문 263 海戦の日の仁川は今でこそ當時を知る人達の間に昔語りとなっ ているが その不安と緊張は実に名状しがたいもので 然しこ の一戦に日本が敗れんか居留民は全部命がなくなるものと覚悟 しなくてはならぬ場合にあったから睾丸をあげ下げして戦争の 經過を凝視したのはいうまでもない 百雷の一時に落ちるよう な砲声濛々たる硝煙が仁川の海上数里を圧した 天地も砕ける ような砲戦が展開されて数刻砲声はやんだ 硝煙の晴れ行く相 間から散々やつつけられて波間に沈み行く露艦の姿と救を求む る敵兵の影が見えた 威風堂々凱歌をあげて仁川に入港する我 艦隊 日本は勝った と知った仁川の居留民はまるで犯人の ようになってよろこんだ この気持を何といって表現していい かわわらぬ彼等は只街から街へ走り廻った 老も若きも男も 女もわめき立て 廻った ある限の声でわめいた言葉は 日本 勝った日本勝ったロシヤ負けた という一言だった 今も残る 毎年2月8日の夜の仁川神社の神前に行われる焚火はこの木越師 団の敵前上陸當時をしのぶ行事にほかならないのである この命のちぢまるような緊張のなかにあって仁取はどうなった か 日露の戦雲漲ると共に3期の建米は總解合となったが こう なって来ると相場など悠長なことを言っている場合でないとい うので 9日の海戦が済んだ翌日は即ち明治37年2月10日に至っ て一市場は一時閉鎖されるに至った その後木越中将の率いる 小倉第12師團が上陸して仁川の民心は漸次安定し 連戦連勝の

284 26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皇軍は戦線を漸次此方に進めて行って鴨緑江を渡り満洲に敵軍 を追い詰て行った 従ってその年の初夏の頃となるともう 朝 鮮內に於ては軍需品輸送のあわただしさはあるが命のちぢこま るような危険はけろりと忘れられてしまった そこで同年6月1 日に至って 2月10日以来閉鎖されていた仁取市場は再び開始 される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再開して間もない6月18日 仁取は其の筋の認可を受けて4萬5 千圓に増資した 即ち仁取はそれまで生れた當時の3萬圓で押し 通して来たが 日露戦争の最中に1萬5千圓の増資を行って一株 25圓 1千800株全額払込の會社となったのである 日露戦争が終熄して平和は再び東洋の天地に訪れたが戦後の財 界の變化は仁取市場を頗る閑散なものにした 戦前の明治36年 頃の盛況とは打ってかわって 全く門前雀羅をはるの状態に落 ち込んだ 戦争は偉大なる消費である 偉大なる不生産的消費 の行われたあとの反動は半島の一角にも押しよせずにはいな かった 増資はしたが仁取は収支相償わず 気息奄々たる状態 を呈するになってしまった 日露講和が成立して 朝鮮半島は完全に日本保護の下におくこ とを各国が認めたので明治38年12月20日韓国は日本の保護国と なるに至った 即ち日本政府は伊藤博文を統監に任じ 外交軍

285 원 문 265 事を我国の管理下におき統監政治を始めるに至ったが これと 同時に従来の公使館等は全部撤廃されて1事は理事官に改稱さ れた この統監政治に變更された當時の1事は信 淳平であっ た 彼は外務省嘱託にして早稲田大学の講師たりし借天恕時の 息で後に和蘭代理公使にまでこぎつけて外交官をやめたが 現 在新愛知の主事として文名をはせているほか法学博士として国 際法に於ける一権威を以て許されている 仁川1事時代に於て も當時仁川に於て発行された仁川新報に名文を載せて伊藤博文 をしておどろかしたことがあった 日露戦争前後仁川には中村 忠吉の經營する朝鮮新報のほかに桑野良太郎等の經營にかかわ る朝鮮タイムスという新聞があったが その後両社を合併して 朝鮮新報一社となった この朝鮮新報は後になって牧山耕蔵の 手で買収されて京城に発行所を移し 今の朝鮮新聞となるに 至ったが 東都政界に重きをなしている小野賢一郎氏なども一 時この朝鮮新報に居て當時からその今日至る片鱗を見せてい た 仁取盛衰記 統監政治と営業期間延長 倉庫を売った金で敷地買収の事 鳥栖(とす)忠安(ただやす) 統監政治の下に於ける仁川の飛躍はまた目ざましいものがあっ

286 26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た 第一その當時粋人伊藤博文を迎えて京城の花柳界は 発達 して行ったとはいえまだまだ仁川の藝妓にはかなわなかった 従って第一流の宴會となれば仁川に持って行くか或は仁川藝妓 をわざわざ京城まで呼び寄せるかしたものだった 花柳界に限 らず一流の商人は何れも仁川を根拠地としていた 明治39年11 月には舊韓国政府の事業として總工費221萬圓で水道敷設工事 に着手された 竣工して通水したのは明治43年の12月 遠く鷺 梁津附近の漢江に水源を求め 濾過した水を鉄管で仁川に引く のだから當時としては随分思い切った計劃であった これとい うのも伊藤博文が 戦時の軍艦に対する給水を第一に次に汽船 の給水といったような海陸の交通並に軍事上の遠謀深慮から萬 難を排して断行した事業だった 若し 軍事の目的がなかった としたら仁川府民の水道問題はこう容易く解決するなど夢にも 望めなかったに相違ない 越えて明治41年10月16日大正天皇がまだ皇太子殿下にてましま せし頃仁川に御入港に相成った 御召艦は當時の優秀艦香取 つづいて鹿島 盤手 常盤 浅間 対馬の供奉艦を従えて堂々 湾頭に白波を蹴立つる勇姿を迎えた仁川居留民はすっかり感激 した 大正天皇は 當時東宮殿下 は故有栖川宮威仁親王殿下 の御附添のもとに東郷平八郎 岩倉具視 桂太郎 花房義質等 の随員を従えをて御上陸ついで京城を御二間相成った 當時韓 国皇帝以下の方々との御交際で日韓の関係に一段の効果を齎さ れたのは勿論のことであった 倭城臺の統監官邸には檣頭高く 金色 爛たる菊花の御 章も鮮に皇太子旗が秋空高く飜り国威

287 원 문 267 は鶏林の野に普く輝いた この間にあって仁取は如何に經過したか 明治41年1月の總會 で株主の一人だった井上和三郎の提議により市場に於ける従来 の呼値を變更して外装eを含んだものとすることとなった 従 来は所謂裸値段であったため受渡取引値段のほかに別に一石に つき縄叺荷造賃を要した この荷造賃は時の相場によって多少 の違はあったが大てい40錢內外であった この不便は一石につ き41年1月の總會以来除去される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併し 何といっても戦後不況は出来高に非常な打撃を與えた その頃 の仁取の淋れ方は明治41年上半期の手数e僅々900餘圓に過ぎ なかったのを見ても察せられる 従って會社は倉庫eの収入が あるため辛うじて収支の均衡がとれて行くという状態で全く市 場にはぺんぺん草が生えかけるに至った こんな状態では市場 を開いていても二ちも三ちも行かなくなることは明かだと気づ いて明治41年の7月から思い切って休業することになった そ の後翌42年1月に試み開業してみたが相變らずパッとしないの で旬日ならずして再び休業してしまった 仁取が不振のため休業しているうちに営業期間が満了してし まった そこで明治42年5月當時の理事官信 淳平に役員連が 泣きを入れ 更に十ヶ年間営業期間を延長してもらふことに諒 解を得た 信 は事情を究めた上快くこれを認可した この営 業期間延長の認可あるちょっと前のこと 従来理事長といって

288 26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いたのを取締役社長と改稱することとなった というのは理事 官からのお達示で 取引所条令が施行されていないのみならず 監督の都合もあり かたぐこの際內地の取引所に何から何まで そっくり真似てやられると困るから 商法中の普通商事會社の 規定によって定款及細則の內容に多少變果してもらえまいかと いうような內意が提示された そこで仁取側としては満了する 営業期限の願つぎという問題も間近に控えていることとて理事 官の御機嫌をそこねることの不利なる関係もあり 名を捨てて も実さえ取れば損はないという考えもあって 內容の改革と同 時に理事長の名稱を廃して取締役社長 及取締役ということに した 更に特筆すべき事項としては33年の8月建設した倉庫を叩き 売ったことである 建設した時は1萬5千圓以內で出来たが こ れを漢城共同倉庫株式會社に売却したときは3萬6千圓だった 仁取ではこの倉庫を売り飛ばして得た3萬6千圓で現在取引所々 在地の敷地海岸町の9百坪を買込んだ 1坪35圓の割で3萬2千5 百圓を投じたがその後明治44年4月に至って右9百坪のうち184 坪1合42は大阪の右近権左衛門に売った この代價は1坪43圓の 割で總額7千918圓であった

289 원 문 269 仁取盛衰記 再開後も相變らず閑散 廿萬石の出来高 鳥栖忠安 明治43年3月1日の總會で財界が漸次回復の兆があるから この 邊で市場を開いてみてはどうかという議論が持ち上がった 理 事者側も自信はなかったが株主の希望とあって 開いてみたら 以外にも成績がいい とにかく明治43年から44年はじめにかけ て1ヶ月20萬石內外の商內が出来るようになったので仁取の世 帯は苦しいながらも辛うじて持ちつづけられた そのうちに世の中は變って行った 統監は伊藤博文が曾彌荒助 に更りやがて伊藤博文はハルピン駅頭の露と消ゆるなどの出来 事が次から次へと走馬灯の如く繰返されたが仁取とは別に大し た関係もないから省略する かくて明治43年即ち仁取が3度蓋 をあけた年の8月29日 日韓併合が行われ總督政治が布かれる こととなった 初代總督寺內正毅は人も知る武断政治を真髄と した或る意味のラヂカリストだ 彼が總督に就任するや43年12 月制令第13號をもって會社令を発布して 取引所取締の周到を 期した ここに於て従来1事から理事官に引つがれていた仁取 の監督権は總督府に移されたのである

290 27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この會社令は翌44年の1月から試行されたがその目的としたと ころは不健全な會社の乱設を防止すると共に不正な泡沫會社を 徹底的に取締ってこれを一掃するにあった 故に會社の設立に ついては悉く許可主義を探ったのである この寺內の専制政治 には日本人は 随分馬鹿にしとる というので憤慨したが 泣 く子と地頭には勝たれぬと昔から相場はきまっている まして 鼻息の荒い寺內にかかっては歯が立たぬ御無理御尤もで御座り 奉ると泣き寝入りするよりほかに仕方はなかった この會社令 はその後斎藤実が總督になるに及び大正9年4月1日に至って保 険業 無尽業 有價證券の売買若くは仲介業を目的とする會社 及び會社組織の取引所にのみ適用することとして廃止した 明治43年の蓋明けと同時に手数eの軽減が行われた 従来仲買 人対取引所の手数eは2錢であったがこれを1錢5厘に改められ て更に仲買人と委託者の手数eも2錢を1錢5厘に改定された つまり取引所と仲買人が各々取前を5厘ずつ遠慮して總額に於て 1錢の軽減を見ることとなった 尤も創業當時仲買人対取引所の 手数eは1錢5厘であったから この點から見れば再び昔にか えった訳である 更に再開當時の身元保證金は1千5百圓であっ た それも必ずしも現金を積まなくても結構 役員の認むる不 動産に幾分の現金や手形を添えて差出したり 或は全然手形の みで一時の代用を許した向もあり とにかく 現金かこれに代 るべき有價證券でなくてはなどと堅いことを言っていた日には 仁取は閑古鳥が鳴くというのだから玉石混淆何でも御座れ主義 に出たのも無理はない その後この身元保證金は明治45年の上

291 원 문 271 半期に至ってやっと全部現金納入となった 再開後も雖も案外の好成績と喜んだのも束の間 市場はまたま た頗る閑散に陥ってしまった 第一お客の集りがほとんどな く 理事長は睾玉火鉢を抱え込んで 何人かの仲買人と集まり 君が買うなら俺が売ろうかといった調子で気合のかからぬこと 夥しい 対手をつかみ殺しかねましき勢で皆を決して争う活溌 な手振りなどその頃の仁取には薬にしたくも見られなかった 従って仲買人はまるで商売にならない 冷飯草履に懐手して今 未決監から放免になったといった 不景気な格恰で市場にぶら りとあらわれては 今日もあかん と大きな溜め息ついて引あ げるという始末 従ってこんな風では仁取もとても駄目だと仁 川府民は匙を投げてしまってその存在をすら忘れこれかけて来 た その頃樽拾いの丁稚に 仁取はどこか とたずねても さ ア仁取は と小首かはむけねば一寸考え出せぬまでにおちぶ れた その後幾變遷 世の景気の転換と共に仁取に黄金の雨が 降ろうという時代が訪れたのだから世の中は七転び八起きだ心 配するものじゃない

292 27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丸まげ姿で妻君が手振り 林泳煥の買出動 鳥栖忠安 明治43年の3月1日先物5月限から場がたつことになったが そ れから引続き前述のように閑古鳥が鳴くような閑散振りであ る 社長の加来栄太郎などはたまりかねて高場から飛び降り 誰でもいいからいくらか値をつけて売るとか買うとかいって みて呉れ 俺が必ず相手になってやるから といってみても誰 も顔見合せてうんともすんともいわないといったような情景が 何度か繰返された 然るに明治44年4月加来栄太郎が社長を辞 し奥田貞次郎がその後釜に琚って間もなく 仁取に一大波瀾が 捲き起された それは朝鮮人林泳煥の突貫買で 結果は失敗に 終ったのみか 疑惑事件まで起ってとんだとばっちりを喰った 仲買が出たという珍らしい事件である 當時この事件に一役つ とめた須永勢一郎君 現在開城在住 が記憶を辿って話して呉 れたところによるとこの事件は大體次の様なものである 林泳煥の買占は仁取が日露戦後の反動時代から脱して漸く再開 した明治44年だったらしい 林泳煥はあくまで姿を見せず影に あって采配をふり 注文玉は當時林の参謀格と目せられた高田 常三郎によって仲買人に発せられた 高田は林の相談役であっ てよくその世話を焼いたものでその後仁取の仲買人となったが

293 원 문 273 その頃海岸通りで貿易商を営んでいた 注文を発するのは高田 であったがために勿論本人の林は仲買店に顔を出したことはな かったらしく従って注文が出ている仲買店の主人はとかくその 他のものにてその當時取引所の周囲に詰め切りのやうにしてい た連中にもどれが林泳煥だと知っていたものはなかった 當時の仁取はまだやっと屋台骨を持ちこたえるかという曙光が 認めた位のところであった 建玉は50石建で 證拠金は60丁敷 の30圓位 手数eは1石につき3錢 日仕舞ならば1錢5厘で あった 市場の売買は仲買人及び其代理人は勿論委托者即ちお 客さん同志も市場に自由に入って来て勝手に手を振って売買し た揚句どこの店につけて呉れと場臺の掛員に一言いえばその通 りにしておいてくれるという随分おおまかな遣り方だった イ リヤマ仲買店倉重悌輔の細君などは女だてらに場に出て来て丸 髷あたまをふりみだして商內をしたもので當時萬緑叢中紅一點 として頗る異色を発揮した 場の商內は売買双方が手を握り合 うので男同志ならとにかく 女の手を握ると變なエロ的気分に なるので女の出場は風儀上面白くないから禁止したらどうだな ど野暮くさい話が この手にうまくかかって敗北した連中から 持ち上がったこともあったが この細君なかなか機敏に働くの で 相當勝負にする御得意もあり 取引所側としてはイリヤマ の都合も考えて商略上長い間黙認の形で細君の活躍が続けられ ていた 林泳煥の買出動はこうした時代の雰囲気のなかに生れ て来たのであった

294 27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その時の機関店は倉重悌輔 中村嘉兵衛 橋本彌三郎の3仲買店 であった 倉重は前述の通り商號はイリヤマ 現に仁川寺町に 居住している 中村は丸ナの商號で仁川新町で雑貨問屋を經營 して現存している 橋本は屋號はカネヤでこれはすでに死亡し てしまった とにかくこの3店から買注文が出た 売買は前述の ように本人が場に顔を出さないので 中心人物は一體何もので あるか一切判らず 只この3店から毎日なかなか威勢よく買進ん で来て その總玉高は3萬石餘に達した 今日から見ればさほ ど驚くほどの建玉でもないが當時の仁取としては大胆な買振り であった その時代は仲買人も少く 相殺関係を一般委託者に 知らせるのは商略上面白くないとして 取引所の建玉関係は今 日のように公然と発表するようなことはなかったのであるから この買玉の內容は参謀格の高田と本人の林以外には詳細に知っ ている者は居なかったらしい 其の當時の仁川市場は毎日大阪相場の寄付と止めとが ウナ 至急 電で入報されていた 跡は若し20錢高下があればウナ で特電を寄越して呉れるように大阪の電報社と特約がしてあっ た これを参考として相場が出来て行ったが大體は自地の正米 相場によって売買が行われて行く為めに時々突飛な地相場が現 れていた 林泳煥は合併前李朝の皇族でその當時はすでに侯爵 であった李海昇家をどんな段取りで説付けたか とにかく3萬圓 ばかりの現なまを引出して来て 盛んに買建てたために相場は 桁はずれに昂騰して行った

295 원 문 275 これに対して當時仁川米界の有力筋たる庄野支店の萬玉岩吉 すでに故人となった 藤本合資會社支配人杉本一太郎 こ れも故人となった 桑野良太郎その他が總がかりで対手方に 廻って売叩かうとしてもなかなか崩れない 一方林の方も利喰 いをしようとすればそこをつけ込んで叩かれる心配があるので 思ふように利喰いも出来ず 其の內の幾分は翌月や翌々月に先 の限月に乗替えたりしたが 一方牽制上新に買う必要もあった りしたので愈々當限に廻った 時の建玉は1萬石以上は残ってい た 仁取盛衰記 林の買出動地場總売向ひ 萩原仲裁に飛出す 鳥栖忠安 売方の陣営を見ると空売の連中は乗換えたり 損切りしたりで たが主力は正米筋なので採算上充分引合う定期相場にはビクと もしない片ッ端から実米を揃えて鎗ぶすまを作った こうして いよいよ當限となって来ると 林は逃げ途をたたれて仕舞って 受米をするよりほかはないことになった 双方対持したまま愈 よ當限の納會も切迫したころ 売方主力の一人だる桑野良太郎

296 27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は一面識もないは萩原という男の訪問を受けた 萩原は其の當 時京城南山町の巴城館 今の佐藤病院 の附近に住んでいたが その以前は東京の京橋で侠客として相當顔を売ったこともあっ たと傳えられていた 萩原は桑野をひそかに訪れて林泳煥の事 について 林泳煥は自分が京橋時代に日本に亡命中頼られたので世話し てやったことがあるが聞けば最近仁川の定期市場で米を買っ た結果 今は抜き差しがならなくなって困っているというこ とである あなたを男と見込んで何とかやり抜ける工 はな ものか御相談に参った訳である というような話を持ち込んだ 桑野としてみれば藪から棒の相 談に面喰ったが 頼まれた以上引くわけに行かず さりとて素 人が金力にまかせて無茶苦茶に買まくった相場だから 相場そ のものに意地がついている今日となっておいそれと右から左に 解決することはなかなか困難となっている いろいろと相談し た結果 本人の覚悟次第では誰れも判らぬように桑野の方の手 筋から先限を倍石数ぐらい買建しておいて當限の解合か又は投 げ退きをやり 若し相場が崩れて買玉の方に損をするとしても 売玉に利が乗るようにして幾分でも回復するようにするよりほ かに途はあるまいということに意見が纏った そこでその翌日 桑野の代理として須永勢一郎が萩原方を訪問林泳煥と會見して 善後策を講ずることに話をきめて萩原は引取った

297 원 문 277 いよいよ翌日となると 約束通り須永は桑野の店の売買玉を取 扱う戸倉という男を同道して京城の萩原方を訪問した 間もな く林泳煥も来たので前日の打合せ通り両建式に売るべく策戦を 説明し證據金の都合を問うた 終始黙々として須永の説明を聞 いていた林はおもむろに口を開いて流暢な日本語で いやいろいろとどうも有難う実は受米代金は愈よ朝鮮銀行 から融通して貰うことに相談が纏まったから断然受米するこ とに肚をきめた どうぞ安心して呉れ と泰然自若として言い放った この意外の言に須永も萩原も あっけにとられざるを得なかった 果して林が言う通り資金の 用意が出来たか否かは尚ほ少からず疑問の點があったというの は次の様な事情であったからである 朝鮮銀行は當時定期の受米資金は容易に貸出さなかった 何故 かというと 取引所の規定に従って限月の末日に売方は倉所届 を出して渡米を提供し又買方は代金を納入して れからその翌 月の一日から毎日現品受渡が行われるから 今日のように米券 受渡の様に簡単には参らず普通の月で受渡終了は月央位まで 石数の多い時や天候の都合が悪い時は月末近くまでかかること が珍らしくなかった 従って 買方に受米資金を融通する銀行 は受米を自行の倉庫に蔵入れするまでの期間は対人信用で貸出 すようりほかはなかった 然るに朝鮮銀行はこの點が內規に抵 触するからというので容易に貸出そうといわなかった 米が倉 入れさえすれば朝鮮銀行と雖も何か特別な事情がない限り 大 抵は貸出していたが受米する方にとってみれば倉入れまでの間

298 27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の融通が主眼であるから大抵十八銀行支店が百三十銀行 今の 安田銀行 支店から貸出して貰っていた 以上の事情を知っている須永戸倉両名にとっては林の言葉を少 からず疑問とした 本人がそう言う以上いろいろいうのは餘計 なおせつかいだが大丈 かと念を押したに対して 林は凉しい 顔で大丈 ときっぱり明言するのでそれでは何か特殊な信用関 係で鮮銀も貸出すことにしたものであろうと半信半疑で引取っ た 仁取盛衰記 桑野の奔走で漸く解合ふ 仲買四名下獄の事 鳥栖忠安 いよいよ納會となって売方は渡米を提供したが買方の林は朝鮮 銀行との相談が不調に終り受米代金は納入不可能となった こ のことが傳はると市場は早くも紛糾しはじめついに解合談が持 上り 取引所の重役がなかに入って圓満解決の交渉を始めた しかし売方は一人として應ずるものがなく 重役はほとほと持 てあました揚句 桑野良太郎に調停方を懇請した 桑野は當時 當限は乗換え中先も玉は少かったので比較的利害関係は薄い立 場にあったので重役が困り果てているのを見て仲裁役を引受け 百方説得につとめたすえやっと売方も折れた この結果 林泳

299 원 문 279 煥の建玉全部を各仲買店に委托した口座の残金一杯程度の値段 で解合う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この時の林泳煥の損は李海昇侯から引出した三萬圓の全部で あったと傳えられている 売方は形の上に於てこそ勝ったが実 際は割高の正米を解合の値段が値段だっただけに正米を買付け た上金利倉敷はかかるし解合後この不用米に祟られて儲けるど ころが却って損になったと何れもこぼすこと夥しかった 以上で林泳煥の米の処分問題は片づいたが それから程經てか らのことどんでもない事件が持上った それは林の注文玉を取 扱った仲買人倉重悌輔 中村嘉兵衛 橋本彌三郎の3名のほかに 同じく仲買店であった笠目栄吉の都合4名が不拘束のままで警察 の取調べを受けた結果 起訴せられて全部有罪となり入獄した ことだった 犯罪の內容は呑行為関係からであったらしくその 當時の風評はまちまちであったが 最も一般に信ぜられていた のは林泳煥の事件で朝鮮貴族に損害を與えたから其の筋ににら まれたためというのであったが果してそうかどうかは疑問とさ れている 林泳煥の買占失敗後間もなく李溶文 李用文と書いている人も ある の買出動で仁取は紛糾し違約処分まで起るという騒ぎが 演ぜられた 朝鮮人方面に期米に対する理解が生かぢりながら 行亘って来るにつれて投機を好む民族性に投する至ったのみな らず 方には日本人の策士連が朝鮮人 豪をうまく煽てて期米

300 28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市場に釣り出すべく策動したので朝鮮人の出動によって大相場 が行われるような機運がいよいよ濃厚になって来た 林泳煥と李溶文の買出動を見た明治44年は如何なる状勢にあっ たかというに明治43年は各道とも出水で凶作だった 従って米 に対する人気は非常なもので44年に入ってよりはますます強く なった 即ち43年の出来秋には8圓61錢だった米が翌44年の4 月に入っては12圓35錢という高値を示現し その後2ヶ月とい うものは11圓臺の保合であった こんな状態だから思惑師がと び出して腕力相場を出すにはもって来いの条件が備わっていた 案の如く思惑は徐々に進行して行った がついに10月限りに 至って乾坤一蹴の大激戦となった 買方は李朝の権臣でその當時もなお李王職內部に勢力を有した 李鳳莱の息子の李溶文 その時まだ20代の青年だった これに 対して売方は內海 庄野等仲買人以外の客筋を主力にして 北 は平壌鎮南浦から南は群山と全鮮から集まった聨合軍 李溶文 の突貫買に全鮮各地米商の聨合売となっての意地相場である その頃京城本町3丁目の喜多金光堂という時計屋の店員に紀州生 れの湊という男があった 朝鮮語の巧みな28 9歳の頗る小才 の利いた男だったが 明治43 4年の頃仁取に現れて注文を各 店に発し頗る器用に立廻っていた 最初のうちは湊一人が来て

301 원 문 281 やっているので誰一人不思議に思うものもなく再初めのうちは なかなか手が合うので相場儲けたようであった そのうちに 段々問題となり利喰いの後具び玉を仕込む時に始めて京城から 御本尊の李溶文が出ばって来て旭屋旅館に陣取ったので事情が 判明した 湊がどうして李溶文に取入ったかは明かでない 一 説には李鳳莱の妾腹の子で李用文とは腹違いの兄弟だという人 もあった それほど朝鮮語には巧みであったが素性を知ったも のは一人もなかった 要するに其の當時はハイカラ息子の李用 文と商売のことから懇意になり相場の妙味を吹き込んで資金を 引出し仁川市場で活躍したのが運よく當ったのでこれかもとで 李溶文はすっかり信用したのと同時に期米に興味を感じ大きく 乗出そうということになったものらしい 仁取盛衰記 仁取最初の違約字分起る 十月限の大激戦 鳥栖忠安 李溶文の売買は林泳煥の如く一回限りで落着したのでなく数ヶ 月間は市場に花を咲かした しかも表面に活躍したのは湊で あって李用文そのものはあくまで影の人としてあまり顔を出さ なかったのは林泳煥と型が似ている その年も米價は前記のよ うに昂騰又昂騰で進んで行ったが 十月限新甫は13圓91錢と仁

302 28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取創設以来の高値を示現しその月の證據金の徴収だけでも百石 につき250圓に及んだのだから買煽りの凄さも大てい想像がつ く いよいよ10月限の納會が近づくにつれて各地からの渡米は続々 廻着した これに対して売方の李用文は必死となって戦い玉責 めにして解決せんとしたが何分相手が割取りの正米師とあって 勢は侮りがたい 結局總石数3萬数千石の建玉となったがこのう ち約1萬石は25日になって売方主力の內海と部分解合をしてた のであとに残った玉は2萬2千石となった さていよいよ納會と なると仲買店のうちには1萬4千石の受渡し代金の支払が出来な くなってしまって取引所は上を下への大騒動 青くなった重役 連は連日協議して奔走したがこうなっては売方の仲買連は容易 に解合にも應ぜず圓満解決は全く困難ということとなって切匁 つまった 役員會は遂に買方仲買店を違約処分に決定するに 至った これが仁取における違約処分の最初であった その際總督府に提出した申告書及び役員會の決議書は次の如き ものであった 10月限買方一部違約処分に付申告 10月限期米現在建米の總石数は2萬2,100石に有之期限に至り 売方仲買人は全部渡米倉所届を差出したるも買方仲買人中 の両名受取米代金納入無之に付10月31日午後

303 원 문 283 3時直に役員會を開催し左の通り決定仕候条此段及申告候也 明治44年11月2日 株式會社仁川米豆取引所 取締役社長 奥田貞次郎 朝鮮總督府 伯爵寺內正毅殿 役員會決議要1 一 10月限買方仲買人中 の2名に対し受取 米代金納入なきをもって定款第122条及び営業細則第48 条に依り処分す 一 違約石数は 分8千550石 分5千450石 とす 一 右違約石数に対しては営業細則第48条により1石につき 金2圓10錢宛の違約金を徴収し之を相手方に交付す 一 違約仲買人に対しては各5日間の営業停止を命ず 一 前記違約石数は売方總石数に対し按分率により割當て逓 減して決議をなす 明治44年10月31日 この違約処分によって買方の仲買店はペチャンコになったが渡 米を準備した売方仲買店もその後400丁餘の暴落を喰って傷手 を受けた その後この手當米は大部分京城の正米師の手に廻し てやっと処分した 尤もこの売方のうちにも儲けたものもない ではなかった 部分解合に應じた內海などは儲かった 組の筆 頭で彼が大をなした最初の足場はこの李溶文の買占めに乗じて 博した巨利であったと言っているものもある

304 28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記者申す 李用文の買占めは明治45年の8月限で3萬石の受 米を見事やったと言う人もありますまた違約処分は李海昇侯 つまり林泳煥の買占めの時9月限に於て起った問題で違約処 分に會ったのは笠目栄吉だったという説があります 私はこ の二つの事件について何れがほんとうか判断がつきかねます が只違約処分が明治44年の10月限であったことだけは當時の 申告書によって断ずることが出来ると思いますそれに又 須 永君の記憶によると林泳煥買占失敗は總解合となったという のでありますから 大體この2點を根拠として以上の如く判断 致しました しかしこの2つの事件については私は私の判断が どの程度まで真に近いものであるかという點になると甚だ自 信がありません當時のことを知る人たちに御叱正を乞うと同 時に他日機會を得て若し間違っていた場合は訂正したいと思 います 違約処分が一段落ついてから仁取では仲買人を増員して貰い度 いというので奥田社長から仁川府庁に請願書を提出した その 時仁取から提示した比較表によると 明治43年の上半期だけで 佐賀取引所は売買石数133萬6,200石に対し仲買人は32名であり 熊本は100萬9,860石に対して23名であるが仁取は明治44年の 上半期に於て126萬6,000石の出来高に対して僅に13名に過ぎな いことになっている 従って市場の繁栄のためにも増員してほ しいというのであったが 當局はこの要求を容れなかった

305 원 문 285 この明治44年は內地に於ても大波乱のあった年で同年8月政府 は米價の暴騰にたえかねた結果東京 取引所に干渉して8 9両 限の立會を停止した そして政府は先限から臺鮮米の受渡代用 を許可するに至ったのである 即ち端境期に於て必要ありと認 めた時は臺灣米又は朝鮮米を代用し得る規定を格付表中に準備 して置くように農商務省から各取引所に通知した なお仁川と して特挙すべきは同年築港工事に着手されたことである 仁取盛衰記 大阪資本の進出で松尾時代来る 內地の取引所も鮮米代用を認む 鳥栖忠安 開けて明治45年5月政府は各取引所をして端境期に臺鮮米の代 用を実施させる事として 法律の許す範囲において輸入税を低 減した 但し7月初めに至って23圓65錢という驚くべき高値を 出した米價は この代用が行われるようになって急転直下16圓 まで低落した 更にその後の天候が不良で彼岸丸潰れという結 果に陥り又々騰貴して9月23日の大暴風に再び23圓臺にはね上 がった 43年度の最低値11圓に比べると実にその差は12圓とい う昂騰振りである この年の7月30日明治大帝は崩御あらせら れて 大正と改正されたが10月に至って仁取には一期を画すべ

306 28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き大變化が行われた 即ち従来仁取は仁川人の經營する仁取で あったが 大阪資本の進出によって大阪人經營時代が展開され たのである 話は少し遡る 明治45年の2 3月の交 世の中もそろそろ春め こうという頃當時京城にいた弁護士白井勝悟という男が當時仁 川で同人の法律事務を取扱っていた山口幾太郎を同道して桑野 良太郎を訪問した 當時桑野は仁川財界における新人として 膽略二つながら備え人格識見においてはまさに第一を以って目 せられていた 山口は看板こそ白井の法律事務所取扱である が 所謂無免許の三百代言で 仁川に居住していた関係上 桑 野や桑野の番頭格の須永勢一郎あたりとは知り合であった こ の白井山口が桑野を訪問した要件というのは大阪堂島取引所の 理事から仲買となり更に委員長を勤めたという經歴の持主松尾 鶴男が仁取に着目し大阪の同志2 3と共に3分の2以上の株を買 収し 絶対優越権を掌握した上仁取を經營してみたいから相談 に乗って呉れというのであった そして若しそれが出来れば50 萬圓位に増資するというのである 桑野は即座にこれを承諾し て同席に居合せた須永をして株の買集めに奔走させることとし た 併し なかなか思うようには株が集まらない 最初は65圓 で多少買集めたが 豫定の3分の2には容易に達しないので更に 75圓で買い初めたがそれでも3分の1に達したに過ぎぬ 桑野 須永の両名は最後の切札として當時大株主たる加来栄太郎その 他を極力説いた結果その持株全部を1株85圓で引受けることと して漸く3分の2を獲得した この松尾鶴男が盟主となって一緒

307 원 문 287 に乗出して来た大阪方の顔ぶれは松尾の女婿の飯田茂登雄 宮 谷惣右衛門 大石貞次郎というような連中であった 松尾の仁 取乗出しは池田長次郎が松尾に會って慫慂したのが動機となっ て食指を大いに動かしたとも傳えられる しかし買収の時は白 井の独舞臺で池田長次郎は顔を出さなかった かくて準備が整 うと松尾は女婿の飯田及び新たに採用すべき部下数名を帯同し て乗込んで来た やがて10月の總會では役員改選の結果 社長 に松尾鶴男常務に飯田茂登雄 奥田貞次郎 監査役に宮谷惣右 衛門 森常吉が當選した 松尾は明治24年熊本米穀市場取締役 を振出しに爾来30年間 熊本 大阪 牛荘等の副頭取やら 理 事長やら理事に就任 取引所にかけては大分甲羅を經て来た男 だった その後大正2年の4月の改選で飯田茂登雄が社長となっ たが彼田は前記の通り松尾の女婿で 京大出身の法学士だっ た 飯田は早速內部の刷新に着手して定款を變更し決算期を9月 と3月の2期としたりした この松尾飯田の手に仁取の經營が 移ってから しばらくはさすがに取引所で苦労しただけに頗る 順調に進み 仁取の株主も仲買人も 餅屋は餅屋だ と満足し ていた 奥田が取締役として一枚加った裏面には須永の建策が あった 大正2年3月桂內閣が瓦解して山本権兵衛內閣が成立するに及び 朝鮮米の移入税を撤廃すると同時に5月限より一斉に全国取引所 は臺鮮米の當時代用制を採用した 従来は端境期のみに代用を 許していたが1ヶ年を通じて行うべくこの制限を撤去したのであ る この結果 鮮米移出が増加したのみならず鮮米代用により

308 28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內地相場の動く値幅が小さくなって来たので期米市場は妙味が 少くなり代用廃止説さえ捲き起すに至った しかも大阪その他 の取引所では臺鮮米弾圧の格付表を作って排斥を企てたがつい に不認可となった 否それどころか大正3年4月からは格付表は 監督官庁の指圖通りに作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 大正3年正月櫻島の大爆発につづいて議會開會中にシーメンス事 件が持ちあがり国をあげての騒ぎについに山本內閣は瓦解して 仕舞った 4月には昭憲皇太后が崩御あらせられて その年の秋 行われる豫定の御大典は延期されて世の中は不景気になって 行った 従って大正2年の移入税撤廃で內地の需要が激増した 鮮米もその後內地米が甚だ低落したため需要が激減して買えば 下るという有様 明治33年ごろと同じ状態だというので米屋連 は青息吐息の態であった しかし 仁川は取引所存置の効果が あらわれて 他の各地よりも打撃の程度が軽かったと傳えられ る 訂正 李溶文の参謀として活躍した湊は名を平一郎と稱し彼 が居た時計店は喜多金光堂でなくて織居時計店であったとS生と 稱する人から御注意の御手紙に接しました

309 원 문 289 仁取盛衰記 繁栄策と仲買人保護 十割配當出現す 鳥栖忠安 大正4年の10月時の政府大隈內閣は米價調節委員會を組織し米 の買上げを行った これが政府が米の問題に乗出して直接手を つけた最初である 同年中の仁取の出来高は1,121萬8千石で あった この年11月大正天皇は京都に於て御即位の大典を挙行 せられた 越えて大正6年內閣不信任案の上程で憲政會內閣は衆議院を解散 し信を国民に問うたが結果は政友會が多数党となった この頃 になると欧洲大戦乱も漸く酣となりその好影響を受けて我財界 は未曾有の景気に向って全速力をあげて走りつつあった 従っ て物價はぐんぐん上る一方物資の配給はややもすれば圓滑を缺 き国民は生活をおびやかされんとする有様であった 政府はこ の状態を見て大正6年8月物價調節令 並に船舶管理令を発布し て緩和策を構すべく準備を進めるところがあった この間に仁 取はどんな途を辿ったか 松尾 飯田の大阪方によって經營されるようになって仁取は漸 次面目を改めたとはいえまだ仲買人の実力は微々たるものだっ

310 29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た この頃の市場は依然として突飛な地相場を出したり 売買 仕手勢力の不均衡で行き過ぎのための騰落が激しかったりし た 従って當った方はそれだけ儲も多いが損した方は證拠金は 一ペンにスッ飛んでしまって足を出すという始末 この足がま たなかなか大きく仲買店は足のために浮沈常ならず 相殺の玉 は損した方から足は取れず 儲けた方からはどしどし請求され るという始末で悲鳴をあげるという惨憺たる状態 現在の取引 員は多年の經験で調節も巧みになり実力も備えて来たが 其頃 そんな呼吸もわからずそれに何といっても力がなかったので停 電してみたり脱線してみたりで內輪のごたごたは絶えなかっ た 懐加減の都合のよい店は馬鹿ばかしいこぼしながらも商売 可愛さに払うべきものは払っていたが少し左前の店となれば客 筋に叩頭百遍 額を畳にすりつけて待って貰うよりほかはな かった 客から見ると相殺は仲買店の勝手自分達の知ったこと ではないのに折角儲った金が貰えぬとは馬鹿々々しくてお話に ならない訳であるが ないものは取る訳に行かず泣き寝入りと なるよりほかはなかった そこで飯田奥田の両重役は外部から 須永等の進言もあり堂島における磯野小右衛門のやり口にな らって仁取の繁栄は先ず仲買人の保護からという方針をとるに 至った 一方又取引所の新築を計劃して仁取自身の信用を高め ることに努めた結果 仲買人の懐具合も漸次豊かとなり 客筋 に対して待ったをいわなくなった それからは誰いうとなく仲 買人は取引所の重役が保護するから客先に対しては絶対に迷惑 をかけるようなことはない 安心なものだという取沙汰が傳わ り その繁振りは目ざましいものがあった かくて仁取の存在も

311 원 문 291 漸く認められて 東京の賀田金三郎や萩原長吉 通稱萩長 な どの大手筋も乗出して来るようになった そこで仁取は戦時好 況の潮流に乗じて株主には10割の配當をやすやすと行い 大正 7年頃となると25圓払込の株が450圓で羽が生えて飛ぶように売 れて行った しかしこの仲買人保護政策が胎身となって好景気 時の黄金の波に酔っている間に仁取は內部的に一大危機をはら みつつあったことは大正8年の大破綻の項に至って詳述すること にする 松尾が社長に就任當時約束した50万圓に増資するとい う計劃はその後屡々總督府に運動したがその都度不許可となり ついに実現しなかった 大正7年は我米穀史上は勿論のこと 社會運動史上にも特筆すべ き米騒動の年である 欧州大戦の影響を受けて年初以来上りつ づけた米價はついに7月末に至って50錢を突破した 米が十 錢すりゃ と歌ったのは昨日のようだったが夢物語りとした50 錢の米にあまりも早く出會ったのだから日本国民たるものだま らない それにこの激騰の裏面には買占めと売惜みが遺憾なく 行われたから米の配給は頗る不圓滑とならざるを得ない 康成 次郎が 豊葦原瑞穂の国に生れ来て米が食へぬとは噓のよな 話 と歌ったのもこの頃だった 国民の大多数は生活費の騰貴 率に比して収入の増加が伴わず 何れ一騒動は免れない世相を 示して来た 俄然この険悪な空気は全国的に爆発して米騒動と なって現れた 即ち大正7年の8月 山県の一角で裏長屋のおか みさん連中によってあげられた井戸端會議における憤激が烽火 となって東京大阪の大都市をはじめ関東 関西 九州と全国に

312 29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わたる大騒動となった 鈴木商店をはじめ各地の 豪が片っ端 から襲われたのもこの時だった 特に米屋連はさかんに略奪さ れて青くなり今にも革命が来そうな騒ぎ猛り狂う暴徒を鎮圧す べく軍隊の出動を見たが やっと鎮静に帰した あとで政府は おそまきながらこんなことでは国民思想の悪化がおそろしいと いうので各都市に廉価市場を設けて物資配給の圓滑と物價の無 茶な値上りを防ぐために公正なる市價の標準を示すことにした のである 仁取盛衰記 鮮內米商も一縮みとなる 米騒動と朝鮮 鳥栖忠安 內地が米騒動で上を下への混雑を呈している時朝鮮は如何なる 状態であったか 內地の騰勢につれて朝鮮米の小売相場は52錢 にまではね上ったほどであるから 仁川の定期や釜山 群山の 正米市場も暴騰を演じたことはいふまでもない 時の農相仲小 路廉が額に青筋立て暴利取締令などいう大だんびらを引きぬき 米買占めの親玉増貫や岡半を不都合の至りというので片ッ端か ら戒告を発した 時分に朝鮮でも御多分にもれず農商工部の長 官小原新一や商工課長の生田清三郎あたりが米價調節に頭痛鉢 巻であった 即ち 小原は米價の昂騰が商人の買煽りに原因し

313 원 문 293 ていることは否みがたいと見てとり先ずその第一歩として鮮內3 市場の情勢を調査する必要があることを感じ 技師綾田豊 後 退官して東拓技師長となり昨年退社 を仁川へ属官築山(京取支 配人となり先般物故)を群山に属官秋山 現仁取専務 を釜山に それぞれ派遣した 當時釜山の市場は正米市場でありながら標 準米を設けて延のような取引を官憲に隠れてやっていた そこ で組合長の大池忠助と副組合長の坂田文吾を呼び出し大目玉を 加わしたら両人はあくまで剛情にし相対売買だと言い張るので 當局も意地になり 金庫內にひそかに標準米をしのばせている ことや 市場に出入するのは買人と仲立だけで一般仕手には全 くのぞかせもせず秘密裡に売買している事実をつきつけて こ れでもかもかとせめたてた しかも大池忠助を筆頭として組合 の有力者は何れも盛んに買煽りをやっている事実が判明したの でさすがの大池忠助 辨解の二の句が出ず目を白黒して悉く恐 れ入ってしまった 郡山も仁川もほぼ釜山に同様買煽りが盛んに行われていた事実 があがったので總督府は非公式に釜山と同様それぞれ戒告を発 した 當時まだ官吏の増俸は行われず やっと臨時手當がいく らかついた時のことであったから消費者の心は何なりすさんで いた折柄だったのだ 當局が買煽りに対して戒告を発したのは 無理もなかった そこで釜山では府尹の若松兎三郎を通じて大 池以下の反省を促し なお 買占めをやるならその時こそ目に もみせる肚であったが 釜山府庁に呼び出されて注意を喰った 大池は一縮みになって畏まりこの當局の言に従って自身が買占

314 29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めをやらぬことを誓ったのみならず 組合員にも買煽りをやら せぬことを固く約束した上今までの罪ほろぼしに白米200石を ポンとなげ出し廉売方を申出でた 釜山府ではその方法につい て協議した結果各小学校で一人につき一斗ずつ時の小売値より も10錢安で売出すことにした これを見て釜山米商人中には廉 売米の提供を申出るもの続出したので一般小売相場も引ずられ て十錢方の暴落を演じた この釜山の廉売にならって鮮內各地 で奉仕的の白米廉売が行われたため小売値段の低落を来し內地 のような米騒動は見ないで無事に經過したのであった この年の9月寺內內閣は總辞職して原內閣が成立し高橋是清が大 蔵大臣となって例の政友會の積極政策が始まったが 10月には 全世界をあげて大渦のなかに投じたさしもの大戦乱も終熄をつ げ 独墺と聯合国間に講和の提議となり 11月には休戦条約に 調印を見るに至った かくて戦時好況の熱にうかされて黄海の 怒涛に乱舞しつづけた我財界も熱のさめた熱病患者のように漸 次おちつき気味となって来た この年の10月に仁川に於ては總 工費560萬圓を投じた仁川築港が完成した しかるに我財界が チプス患者の回復期のような時代に向った折も折我仁取にはま さに驚天動の大事件がオッ始まり第2の危機に臨むに至ったので ある 大正8年の朝鮮は萬歳騒ぎが起った年だけに何となく物情 騒然たるなかに開けて行ったが 3月に入って仁取は1日から8 日までの僅か1週間に講和成立が材eとなって先物最高36圓29 錢から最低30圓50錢と瓦落を演じた結果8日を打どめに場は 止って仕舞った この立會停止の裏面には飯田社長 奥田取締

315 원 문 295 役の両名が荒木助太郎その他一部の仲買と結托して買思惑を やったが 相場が釣瓶落しに下ったので非常な苦境に立つに 至ったためであった 飯田 奥田の仲買人保護方針は最初こそ 仁取の更生にこの上もなき興奮剤となっていたけれども時日が 經過するにつれて中毒症状をあらわした 大正8年の春ごろにな ると內部は踏み切って来て早晩大切開手術を施さなくてはおさ まらぬ状態になっていた しかもこの3月の立會停止の際は売方 は現金であったが買方は證拠金を手形で納めていたのであっ た 訂正 松尾鶴男に進出を慫慂した原動力は池田長次郎の裏に 大村保太という男がいたとの御注意が読者からありました 大 村保太は漢湖農工銀行 殖銀の前身 に驪州郡巣由面の麗水金 山を担保として土岐 久能 岡島などいう輩とぐるになって手 形を濫発しはては偽造手形まで出して漢湖農工をペテンにかけ た末臭い飯を喰ったというすごい策士だったそうです この大 村保太が池田長次郎に吹き込んで松尾を誘い出したものだそう です

316 29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百八十萬圓の大穴を発見 屋台骨がぐらつく 鳥栖忠安 重役自身が苦境にたったために事を構えて止めた場だけに 外 目にも頗るおかしかったのみでなく いつまでも愚圖々々して 開こうとしない 不審だというので監督官庁ではその理由を訊 問したが言を左右に托して明かにしない 肚に据えかねて時の 商工課長生田清三郎は部下の事務官本岡栄次郎と属官秋山満雄 の両名を差向け 徹底的の調査を行うこととなった 本岡は後 に山林課長となり斎藤実が總督として着任して間もなく大分県 の理事官に転任せんとしてチプスにかかって死んだ この両名が仁取に乗込んだのが3月の10日前後であったが 検 の知れぬ不渡小切手が 査の結果金庫の中から70数萬圓のえたい 現れた そこで支配人の伴と會計主任の菅という男を呼んで取 調べた結果 證拠金の代りとしてとったものが不渡りとなって いることが判明した 本岡と秋山は色をなしてその不都合を責 めるとともに各役員に速刻参集を求めた 時に取締役の奥田は 旅行不在中で社長の飯田は病気と稱して出て来ない 漸く監査 役の田中佐七郎と立石幹とがでて来たが 立會がしらに取引所 經營の不始末を頭からどやしつけられ二人とも何が何やらさっ ぱり分らずほーッとなってしまった 何しろ70数萬圓の不渡手

317 원 문 297 形など両監査役は全く関知せぬところで 本岡秋山からの詰問 は全く寝耳に水だった いくら怒鳴られても両名は実際知らぬ のだから知らぬといって恐れ入るよりほかはなかった だんだ ん取調べているうちにこの不渡は近ごろのものでなく 2 3年 前から連続して来ているもので 飯田 奥田の重役連が監査の 時だけはいろいろの奸手段で辻褄を合せ やっとごまかして来 たのであることが判明した なお詳細に取調べてみると 不正 はこれだけでなく 仲買人が支払うべきもので未収となってい るものが このほかに莫大な額に達し これらを洗い上げると 仁取自體の損失に帰すべきものが180餘萬圓に達することが判 明した 內部の一大不正事件が 白日の下に曝け出されるといくら10割 配當で威張っていた仁取と雖も屋台骨がぐらつかざるを得な い 會社は全く死ぬか生きるかの岐路に立って至った この事 件が摘発されるとともに內地旅行中の奥田には急遽帰仁を促す 電報が発せられた 一方仮病をつかって引こもり中の社長飯田 に対しては本府に出頭しろと矢の催促を発したが なかなか出 て来ない 疳癪玉を破裂さした商工課長生田清三郎は身動きが 出来ねば戸板に乗って来いと頭から湯気たてておこり出したの で飯田も居たたまらず のそりのそりと出頭に及んだ 散々油 をしぼった上で さて善後策を協議ということになったが こ う根こそぎに洗い上げられるともう一時のがれのごまかしも利 かなくなり 飯田 奥田の両名は自らの非を悉く認め 罪を 陳謝した上で多年存在した取引所を廃滅に帰するは誠に申訳が

318 29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ないから自他の力で復興したいと畏る畏る申出でた 奥田等のこの申出を聞き取った生田は仁取の復興は望むところ ではあるが この散々味噌をつけた重役の手では到底覚束ない と見て取り 飯田 奥田を引こませて 他の有力者の出動を望 むことにした かくて當時京仁財界で今売出しの羽振りのいい 荒井初太郎 天日常次郎 古城菅堂 平尾なにがし等を一束に して乗出させることに話がまとまり これらの有力者によって 復興策を協議することとなった 復興策についての奥田の提案は取引所の売買手数eを増加さし て貰えばこの位の負債は10年もかかれば整理が出来るであろう ということであったが 荒井 天日はこの際朝鮮銀行あたりか ら救済資金の融通を仰いで整理する反面 増資をはかりこれに プレミアムをつけて株式を募集しこのプレミアムによって損失 の一部を補填するがよかろうというのであった 一方仲買人側 としてはこのまま仁取が廃滅すれば多年の生業が一朝にして失 われ 莫大な損害を蒙って生活は根底から覆されることになる というので整理救済を當局に陳情した

319 원 문 299 仁取盛衰記 百萬圓に増資と決定 復興の陣容成る 鳥栖忠安 商工課長生田清三郎はいろいろと硏究調査の結果増資案を採る ことに肚をきめた 即ち従来仁取の資本金は4萬5千圓に過ぎな いのに拘らず50萬圓の積立金を持っていた そして大正7年に は売買高3千数百萬石に達するの違観を呈した 従って相當の積 立をしてもなお株主に対しては10割の配當をしたのである こ の故に大正7年においてすでに屡々總督府に泣きついて増資を懇 請したが許されずにここまで来た そこでこの際増資すること は敢ておかしいことではなかったのである 生田の肚が100萬圓に増資と決ったために話はとんとん拍子に 運んで行った 即ち同年4月100萬圓に増資すると共に営業期年 限を大正18年5月迄延ばすことになった 元の重役の飯田と奥 田の持株は全株数の過半数を占めていたが 懲罰の意味におい て悉く投げ出させ これを売りとばした金で大穴の一部を補填 した 増資の新株は舊株主に対して舊一株についき3株を割當 て 残りは40圓のプレミアムをつけて公募することとした 當 時仁取の盛況に垂涎した釜山 群山等の米商人は取引所を自分 のところにも設置したいというのでわいわい騒いでいる最中 だった これに対して總督府は取引所令の発布前には絶対に許

320 30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可しない方針で この要望をにべなくつッぱなしていた これ 等の騒ぎも要するに取引所の株を持ちたいというのが根底と なっていたのであったから生田はこの煩さい要望を緩和する上 においても仁取の増資は絶好の機會と考えた そこで一石二鳥 の方法として釜山 群山の米屋の連中に増資株を持たせること にした なおこのほか 進んで 木浦 元山 鎮南浦等の開港 地の米商人にも株の割當を行った この復興案が成ると同時に 仁取の重役やこれとぐるになった不正仲買人は司法権の発動を 見 暗いところにほうり込まれてしまった 總督府は仁取の醜状暴露にはすっかり頭を悩ました 復興案が 成るに及んで 主脳部は取引所の經營を純粋な民間人ばかりに 委せておくと 重役連が投機に干與してとんでもないことにな ると考えた 仁取が折角復興するとしてもまた再び今度のよう な轍をふむようなことがあっては統治上にも財界の発達のため にも困るというので 經營の責任者たる社長は總督府が推薦す る人を据えることとなった そこで商工部長官小原は社長候補 の白羽の矢を時の群山府尹天野喜之助に立てた 天野は法学博 士天野為之の弟だったが 見事肱鉄砲を喰わした 次に馬山府 尹の三増久米吉に交渉したが これも断った いよいよ最後に 小原は釜山府尹の若松兎三郎を口説いていやだといって渋るの を因果をふくめて無理往生させ やっとのことで社長に持って 来ることになった 社長以外の重役も總督府のお声がかりで詮衡の結果 京城の荒 井 天日のほか古城菅堂 朱性根 釜山の大池忠助 群山の布

321 원 문 301 井嘉造 鎮南浦の斎藤久太郎 それに仁川を代表して吉田秀次 郎 河野竹之助 白神専一 丁致国が決定 それに加来栄太郎 を相談役として一枚加えることとなり 大正8年の5月に至って 復興の臨時總會を開きいよいよ正式に決定した かくて大穴の180萬圓は増資によるプレミアムで65萬圓を補填 しあと115萬圓は殖産銀行から借り込んで完全に補填したが 取引所が完全賠償の責任をかくも見事に果したという実例は全 国に類例のないところで 仁取の歴史に燃然として輝く一頁で ある かくて陣容を整えて復興した仁取は大正8年6月2日立會 を開始するに至った 仁取盛衰記 堂島を上廻つて空前の高値 仁取の熱狂時代 鳥栖忠安 この仁取改革復興の餘聞ともいふべきいろいろの挿話がある 第一に殖銀の仁川支店はこの事件が動機で設けられることと なった 仁取の機関銀行はそれまで今の安田銀行の前身百三十 銀行であった この機関銀行の當事者が2年も3年もに亘る仁取 の不始末を傍観して凉しい顔をしていたということは重大な失

322 30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態であるというので機関銀行をもっと健実なものに代える必要 が叫ばれた そこで度支部長官の鈴木穆に商工課長生田清三郎 が相談した結果鈴木のさしがねで當時出来たてのほやほやだっ た殖銀の支店を仁川に出させることにしてこれを機関銀行とし た 殖銀の仁川支店は仁取の改革と因縁浅からぬもので以来引 つづき機関銀行となって今日に至っている 大正8年7月社長若松の下にあって取引所經營の実務に當らせる ために當時商工課の属官だった秋山満雄 現専務 を退官せし めて仁取の営業課長の椅子に据た 變てこなからくりが出来な お目付役を置いた訳である なおこの改革の いようにいわゆる 裏面にあって功労没すべからざるものに當時の仁川府尹楠野俊 成がある 彼の前身は憲兵大尉か何かであったが仁川府政に致 す心は尋常一片の武辨ではなかった 仁取の廃滅は仁川の繁栄 に重大な影響を及ぼすべきことを顧慮して寝食を忘れて復興策 につき官民の間に斡旋奔走した 仁取の増資に伴う新株の引受 についても仁川の穀物商は勿論一般府民にもなるべく引受ける ように手をつくして勧めた 大きな声では言えぬが その時の 仁川府民のうちには割當られた株を僅2 3圓のプレミアムを とって右から左に売とばしたものも少なかったらしい 合併だ 移転だとさわぐようになってから仁川側が持株の少ないのに 困った原因の一つはここに胚胎しているといって差支えない 改革後の仁取は欧洲戦争の影響によって訪れた未曽有の大景気

323 원 문 303 の飛沫をあびてすばらしい盛況を呈した 相場は波瀾重畳 1日 の出来高が105萬石という記録をさえ作った 従って半期の手 数eだけでも8 90萬圓に上るという状態 ついこの間まで生 るか死ぬるかの岐路に立った悩みは昔の夢 大穴の一部を可な り思い切って補填してなお株主には6 7割の高率な配當をする というのだからものすごい 整理完成には10年間を要すると見 られていたのがこの好景気にブッつかったため大穴の180萬圓 のうちプレミアムを稼いで埋めた65萬圓の残りの負債115萬內 償却してしまった その後も引つづ を僅1年半できれいさっぱり がつづくので利益の全部をあげて配當に廻せ いてほろいみいり など騒ぎ立てる株主もあったが この好景気はいつまで続くか わからぬからとの理事者の警戒から健実な方針をとり 利益の 一部を社內に保留することにした これが積立金として不況の 今日もなお好配當をつづけることの出来る原因となっているの である 若松が社長に就任して以来諸制度を改革して行ったので社運は ともかくも漸次頽勢挽回の曙光を認めるようになって来た こ の頃內地は例の農相仲小路廉が米價の暴騰は定期市場商人の買 煽にありときめてしまって わかりもしない癖に小口落しはい けないの證拠金は現金納入に限るのとやかましく怒鳴りたて 言ふこと聞かなきアブチ込むだぞ と検事上りの岡ッ引眼で にらみ廻すので紀の国屋文左衛門位の度胸の持合わせはざらに ある 相場師連もすっかりしよけてしまい內地市場の商內は げっそり減って来ただがこの仲小路のにらみも玄海越えてまで

324 30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は利かなかった 內地がとんだ厄病神に祟られている間に朝鮮 は割れるような人気 仁取の取引高は堂島のそれをはるかに凌 駕したというからその熱狂振りも大抵想像がつく 而もその年 の朝鮮米の収穫は1,270萬石と平年作よりも10萬石ほど少いと いう思惑にはもってこいの条件がそなわっているのだからたま らない 甲羅の生えた相場師は勿論のこと大小有象無象の一攫 千金を夢みる おっさん達 が押すな押すなで詰かけた かく て相場は11月限から堂島を上廻って 12月に入ると51圓70錢 という空前の高値相場を示現した 仁取盛衰記 賀田金の買いまくり 早電のはじまり 鳥栖忠安 大阪相場の早電というのが初めて現れたのもこの頃だった 恰 度大正8年の初冬のころ大阪から浅井治三郎という男がやって来 て 普通の電報よりもずっと早く相場を知ることが出来るから 採らぬかといって来た 仁取の仲買連最初は対手にしなかった が 同年12月の新甫早々大阪は52圓から46圓台まで釣瓶落しに 下げたことがある そのときにこの早電を一同信用しなかった が 普通の電報は1節で這入らぬから勿論大阪の暴落はひびかな かった 2節になってやっと這入ってなるほど早いものだと感心

325 원 문 305 してとり出した 何でも浅井がやった方法は堂島で困っていた ものに月3 4千圓もやって 最初は1日20枚位の至急電報を打 たせている模様で 普通の電報よりも約30分位早く届いてい た これが早電の濫觴であるが その後大正9年5月その頃丸力 仲買店を經營していた力武の兄貴の平川武右衛門がこの早電を やり出した この時の方法は京城でとって仁川に電話で入れる という方法であったが これが市川肇が現在の日本商業通信社 をおこす始まりとなったのである この邊で一度舞台を廻して今度は売買戦の大取組を回顧するこ とにする 話は少し遡る 仁取は産声をあげて以来 京仁両地 の対抗売買戦から米人デシウラの買占 林泳煥 李溶文の買出 動というような大取組が明治時代に行われたが 大正時代に 入ってから景気の上ッ調子になるにつれて大仕掛の戦いが次か ら次へと演ぜられて行った 先ず最初に指を屈するのは賀田金 こと賀田金三郎の買占である 賀田金三郎は今の賀田直治の父 で 當時から永登浦の皮革會社の社長だったが 丁度大正6年の 春の頃辻川 重が賀田の参謀となって廣澤正次郎の店を機関店 として連続的に買進み 忽ち10数萬石を買ひまくって市場を あっと言わせた いよいよ大詰で賀田は3萬石ほどの現物を受け たが 結果は敗北に帰した 賀田は尻ッ尾をまきながらも 大 相場師を以て任ずるだけに 六畳の部屋で二間柄の槍をふり廻 すようなものでこんな小場所じゃいくさは出来ない とまけお しみの捨セリフを残して引あげたが 勝ほこった売方には引か れものの小唄と聞えたかどうか とにかく世の中は欧洲戦争の

326 30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ためにまさに黄金の渦をまこうという財界空前の景気えの上り 口だったから白旗をかかげてもなお賀田金悠々たる退却振り だった ところがこの事件に関連して一つの陰謀が企てられた 當時廣 澤の店に山科喜一というのが居た あとでは京取に活躍した人 物だが これがなかなかの策士であった このごろ京城の鳥居 長次郎の支配人今井修一が廣澤の店から買出して3萬石などの玉 を建てていた これを狙って杉本峰吉を相棒に引込み両人がな れ合で廣澤の留守を見はからい一芝居打つこととなったのであ る 即ち 山科等は50錢ほど叩けば今井の玉はきれることが見 お客の首斬りをやって え透いていたので 叩きあげていわゆる 今井の3萬石を投げさせたのをすっかり抱き込んだのみでなくさ らに進んで正味5萬石を買取ってこれを杉本峰吉が永登浦の皮革 會社に走りつけ賀田金のところに持ち込んだ ところがここに一つとんでもない手違が出来てしまった とい うのは山科が5萬石の玉を背負込んだという評判が早くも廣澤の 妻君の耳に入った その時廣澤は永登浦の賀田金のところにい たので妻君は一大事とばかり早速電話で知らした 廣澤は寝耳 に水の山科の買進みにすっかりあわててしまい それは大變早 く刑事にたのんで山科を押えろ ということになり 妻君から の手配で刑事が早速飛んで来た この時の刑事は今仁川月尾島 劇場の支配人でおさまっている坂下であったが 山科は玉を仕

327 원 문 307 入れると同時に横とびに飛んで賀田金のところにかけつけるべ く 仁川から汽車に乗込んだところを朱安駅で押えられてし まった 一方相棒の杉本は山科より一足先だったので刑事の手を逃れて 賀田金のところにかけ込むまではうまく行ったが さて行って みると廣澤が頑張っていて承認しない そこで杉本は萬策つき て 京城に逃げ出したが 翌日となると廣澤は昨日の場は不正 行為による売買だから無効だと無茶なことを言い出しとうとう 總解合にしてしまった この山科の一味徒党はふんづかまって 50日ほど暗いところでむされたが 何分相場は總解合となって 実害を蒙ったものは一人もないので放免されてしまった 仁取盛衰記 米騒動の前行の仁取 小西と斎藤の買出動 鳥栖忠安 この山科の事件で馬鹿を見たのはとばっちり喰った仲買連だっ た 山科一味があんなことをやったのはほかにも連繋があって のことに相違ないとの見込みで仁川警察署は仲買人全部を珠数 つなぎに引っ張り込んだ この嫌疑は勿論直ちにはれたけれど

328 30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も一同は 暗いところのお付合にはすっかりまいってしまって 不平だらだらだった その後大正7年の夏ごろ 大阪の小西辰次郎という男の買占め事 件が起った 內地は米騒動の起っている真ッ最中仲買店森槌郎 の店から當限2萬石 先限3萬石を買建てた 大阪商人一流の目 先きの鋭いところで內地の米騒動を利用し一もうけしようとた くらんだ仕事とだったらしい ところが小西が米の買占にか かっているという噂が高くなって来ると朝鮮の民衆もなかなか 承知しない 內地ほどは騒がなかったとはいえ 鮮內の米騒動 は先ず馬山に火の手をあげ各地とも相當殺気立っていた折 も 折小西は朝鮮ホテルに泊っているところを民衆にかぎつけられ てしまった 民衆はたちまち朝鮮ホテルを包囲して小西を引き 出し 彼の態度一つでは叩き殺しかねまじきものすごさを呈し た 小西は朝鮮で買って內地に持って行って廉売するつもりだ と青くなって辨解したがなかなか聞き入れぬ ついに買建た玉 を解くことを約束してやっと危地を脱したが このために小西 ほ震い上ってしまってサッサと陣を引いた 小西が引さがったあとに引つづいて斎藤久太郎が乗り出した そして今度は事頗る面倒になって来た 小西の玉の整理がつい て間もなく東京から来たと稱する川村誠八という男が森槌郎の 店を訪れて重大な秘密の相談を持ち込んだ 川村は斎藤久太郎 が差向けた手先だった 森を呼び出した川村は斎藤久太郎の意

329 원 문 309 を受けて来た旨を打あけ一切の情を明かして何んぼでもいいか ら買えるだけ買って呉れとたのみ込んだ その頃森は仲買とし て日の出の勢小西がてもなく屁古垂れたのに內々業を煮やして いた矢先だったから二つ返事でこの相談に應じ見る見るうちに 14萬石を買いまくった 其時対手になって売向ったのは仲買の 荒木助太郎 森と荒木ががつきと組んで双方から手を廻す巧妙 な作戦千變萬化の秘術をつくして戦ったが 買方は景気の好調 という潮流に乗って大勢有利の勝戦ださしもの荒木もついに落 城し24 5圓臺となったころ情を打あけて川村の軍門に降り7萬 石だけは解け合いとなった 然るにこの解合話しを森が川村に取ついだとき川村は解合とな れば今迄買煽った相場は下るに相違ないが そこはうまくやっ て呉れるかと念を押した 森は勿論その點には成算があるとい うので川村は解合を承諾したものだった ところがいよいよ解 け合ってみると果して下値で森がいったようにはなかなか参ら ない 買方の川村即ち斎藤はなお7 8萬石の玉を抱えているの ですっかり気を腐らしてしまった そこに持て来て北村五郎が 茶々を入れて森は荒木と結託して川村に背負投げを喰わしたと 吹き込んだものだから川村と森とは気まずくなって別れざるを 得なくなった そしていよいよ川村と手を切ってみると森は川 村に対して意地が出来てしまった よしこうなりゃ俺も男一 匹だ このまま引っ込んでたまるもんかい とばかり相場師に ありがちの意地から荒木の味方となって売に廻ってしまった

330 31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森と手を切った川村は桑野 今村 內海を機関店として これ また意気り立った だが 何んといっても上向いた相場であ る 売方は日に旗色が悪くなる 殊に荒木はそのころなお5萬石 以上の売玉をもっていたのですっかり窮地に陥ってしまった そこで最後の一策としてとったのが乱手だった 大正8年3月の180萬圓事件が発覚する直前だから勿論その頃の 荒木は取締役の奥田貞次郎と通じてひそかに取引所の金を持ち 出して軍用金としたり 不渡りの約手で追證をおさめたりして いた だから森との間に乱手を振って場をとめるよりほかはな いと相談がきまると荒木はこっそり奥田をたずねてその諒解を もとめ裏面から策動させる手はずがちゃんと整った 仁取盛衰記 一萬圓の元手で利益五十萬圓 全鮮を向ふに廻して中利小原の突貫買 鳥栖忠安 乱手で相場をぺちゃんこにするには森と荒木だけではちと役者 が不足するというので田金こと田中金平の息子の田中哲一を引 き込んで片棒かつがせることにした いよいよその日となると

331 원 문 311 豫めしめし合わせた通り 前場の止めがあと10分で木が這ろう という刹那 電光石火の如く現れた3名がぐるになって俗に 引 ちがい と稱する乱手を振り始めた しかも乱手も乱手 場立 としては駈け引きになれ切った3人が水際立った鮮やかな手並と 押し出しの豪勢さに気を呑まれて場立の連中あつ氣にとられて いるのを尻目にかけ 3人は死者狂いで當 中 先と何れも見事 に仰ぎ込んでしまった そうなると市場は上を下への大騒ぎ ついに売方の思うつぼにはまって25圓がらみで場は止ってし まった さあいよいよ場が止まってみると流言飛語が盛んに行われる 或る者は內地の奸商の手が廻って米の買占めが行われるとい い 或る者は朝鮮內の米商の有力筋が聨合して買占めをやって いるという いろいろな風説が高くなって来ると ついに名府 尹の楠野俊成は放っておく訳に行かないというので仲裁に乗り 出して売方買方双方を府庁に呼び解合いをすすめた こう来る のは売方としては作戦圖にあたったのだから北叟笑みしていた が買方はなかなか應じない そしてその言い草が面白い 我々は朝鮮で米を買って內地に持って行き犠牲的に之を廉売 して母国の騒然たる現状を幾分でも緩和しようという国家的見 地から買っているのを乱手を振って場をくずし われわれの行 動を妨害するのは甚だ以って怪しからぬ 解け合いなど以って のほか と大見得を切ってなかなか府尹の言を容れない さす がの楠野ももてあまし気味だったが これを聞いて売方の森が なかなか承知しない 偉そうなことを言うがあれは真赤な嘘

332 31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だ もともとこの売買戦の最初の口大は自分が相談受けたもの だ そのときの出発點は荒木が大分儲け込んでいて市場を我も の顔でのさばり歩くのが小づらにくい 何とかしてあれの金を 巻きあげようじゃないかというので始まったものだ その後戦 いが進んで行くと事は米價という国民生活の安定に重大な関係 を有する仕事 これは悪いと途中で気がついて自分は飜然心を ひるがえした結果 一転して売方にまわり買煽りを押えにか かったものである とある事ないこと こきまぜて啖呵を切っ た これには買方もすっかり参ってしまわざるを得ぬ 何しろ 寝返り打った森は最初からの魂膽をすっかり知り過ぎていたの で 返すことばもなくだまり込んでしまった この狐を貉のだましあいのような論戦を聞いていた楠野は買方 のとりつく島もないような態度に當惑するやら內心むっとする ようにしていた時だから売方の辨駁に大いによろこび得たりや 應とばかり声かけもし解け合いに應じないなら暴利取締令を発 動させて買方全部を縛りあげてしまうぞと威しつけたので 一 同縮上ってしまった かくて売方は計劃圖にあたり21圓臺の棒 値で頗る有利に解け合い買方はすべて落城した この解け合い には桑野一人は猛烈に反対した 何分米價の大勢は上向いてい る 放っておけば買方の勝であるべきところにあまりにひどい 棒値だから反対したのも無理はない そこで売方もいかに暴利 取締令の手前とはいえあまり無理だというので安いころ買い込 んだ米を派して買方に5萬圓ほど儲けさして けりがついた

333 원 문 313 仲買の方はそれでどうにかおさまったが おさまらないの買方 の本尊川村だ 彼はそんな無茶なことがあるかというので今度 は自分の玉をあずけた仲買を対手に150萬圓の損害賠償要求の 訴訟を起こし東京から村上ほか数名の辯護士をさし向けて争っ たが 仲買側は売買の規約を楯にとって争った結果 仲買の勝 となった となったが大體京城延べ市場としては京仁両取合併等により急 に取引所昇格は至難のため まずその前提として新令の規定に よる銘柄別清算取引市場の実現に邁進する模様である 併しこ れに対し本府が內地の取引所対銘柄別清算取引所等の関係から 見て如何にこれを取扱うは頗る注目されている 仁取盛衰記 森と內海が必死の買進み 全鮮を向に廻して 鳥栖忠安 大正8年の仁取改革後最初の見ものは釜山の中利こと中村利松の 買出動だった 名儀は中利だったが その実相場を張ったのは 息子の中村徳太郎である しかもこのほかに相棒が1人いた そ れは京城梶原末太郎の店員の小原という 男2人ともまだ20代

334 31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の小僧ッ子だった この後見に立ったのが角ナの森槌郎と丸マ の廣澤正次郎 2人が背後にあって采配を振ったというよりも寧 ろ中利と小原おとりにして軍用金から駈け引きまで自分だちが 持ち出し実際の戦争に臨んだのだった 最初は力武嘉次郎も聨 合して20圓臺から買い出した 當時力武は平田直太名義の仲買 店を經營していたのであった 然るに力武は途中で逃げてし まった というのは中利も本人でなく 小原も主人の梶原は當 時大阪に行って留守中のことではあり 殊に2人とも小僧だから 山子をはっているだけで 実際は金はあるまいとの見當をつけ たからだった この力武がかごぬけをやったと知ると森と廣澤 はかんかんになった そして返報に一あわふかせようとの鬱憤 から力武を向うに廻して買いだした 力武が見た通り 中利も小原も実際は軍用金はそう大してな かったけれども森と廣澤としてみれば乗かかった船でここまで 来れば抜ぎも差しもならない 結局後見に立った関係から自分 の金を立て替えて突貫買いと出た この時の売方の顔ぶれを見 ると鎮南浦の新井新蔵 斎藤久太郎 釜山の迫源太郎 大池忠 助 群山の中井 森菊五郎 それに仁川の地場では內海叔郎に 力武嘉次郎という全鮮の有力筋を東にして向うにまわした 大 戦争売方の陣営には藤井寛太郎の顔も見えていた いよいよ9月 限となると戦はますますはげしくなり 意地と意地とが花火を 散らして相打つ凄惨な場面が幾日か続いたが 買方は何分上げ 相場の大勢に乗った強味がある 買って買って買いまくるので 売方の陣営の一角は早くも34 5圓臺で崩れた 即ち不二興業

335 원 문 315 の藤井寛太郎と解け合ってこれを味方に引き込んでしまった 次に41 2圓台になって斎藤久太郎と解け合った この解け合 いには面白い場面があった 恰も大正8年の真夏の暑さ盛り 場 所は京城の花月 斎藤の玉を預かっていた北島五郎と斎藤自 身 それに相手方は森と廣澤人知れず會見して手打ちをすま し あとは飲めや唄えの大騒ぎ 何分この解け合いが判明すれ ば相場は爆発にきまっている 従って今夜は汽車もなくなった ことだから仁川にもかえらぬし 電話もかけぬ 翌日場が立つ まで一同缶詰と申合わせて乱痴気騒ぎをつづけた そのうち隙 を見て北島が自動車で逃げ帰ろうとするところを発見され胸ぐ らをひっとらえて又々飲み出すなどの大立廻りを演じた さて 翌日になって場が立てみれば110丁高の寄付 內海の店から早 くも買いはじめ再び相場は沸騰したが 結局49圓90錢で場は止 り売方は總落城と大勢はきまった そこで46 7圓の先物だけ を立ててあとは總解け合いとなったのである この時売方が泣きを入れて来たのに対して買方は一歩も譲らぬ と頑張ったが 結局ほんのしるしばかり色をつけて10錢引きの 49圓80錢で解け合うこととなった この時の取組高は約20萬石 中利と小原はもともと現金1萬圓ずつしかもって来なかったが 引き上げて帰るときは現なま50萬圓ずつを懐ろにして意気揚々 凱旋将軍の概があった

336 31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米屋の子守が一躍成金に 豪勢な結婚披露 鳥栖忠安 解け合いの裏面には當時若松氏が釜山府尹から社長になってき たてのほやほやの時で こんな時の仲裁はどうしていいかさっ ぱり勝手がわからず 只うろうろするばかりで策の施すところ を知らなかった状態だったが 中利は釜山府尹時代から懇意 だったので 一つおれの顔を立てて呉れと頼みこんだ結果 やっと話が折り合うに至ったのである 何分その頃の仁取は 猫も杓子も買った買ったで詰めかけ買いさえすれば儲かるもの ときめていたから始末が悪い 長煙管の朝鮮人でさえ 2千圓 を新聞紙づつみにして仲買の店先にぽんと放り出 3千圓のさつ束 し これで米を買って呉れと言って来る新規客が4 5人はあっ になると米相場たアどんなものか たという 勿論こんなてあい など知ろう筈がない それも2千圓 3千圓とまとまっていると 仲買の店でも鄭重に扱うが 2 3百圓の證拠金なら アあかん あかん とばかり面倒くさがって 頭から対手にしないという 熱狂振り 一流の仲買店は1ヶ月の口錢だけでも純益7 8萬圓 に達したという それこそ実に文字通りの黄金の怒涛だった このごろの世相を語る一つの事実物語がある 今は昔の夢のあ とだが 現在仁取で気抜けのしたビールのような生活をつづて

337 원 문 317 いる男で 通稱潘次郎こと潘福というのがいる 彼はもと荒 木仲買店の子守をしていたが ちょいと手出したら相當に芽が ついてそれからとんとん拍子に儲け昨日冷飯草履をはいて水鼻 汁すすった丁稚の次郎は今日は一躍して30数萬圓のブルとなっ た そこで彼は當時女学校出の頗るモダンな朝鮮美人を女房に もらいうけその結婚披露宴を京城南山町の京城ホテルで楠野府 尹以下朝野の名士を招待して張った しかもその披露宴には仁 川から十数台の自動車をつらねて乗り込み一夜の宴に7千圓を投 ずるという豪勢さだった その後彼は外里に土地を買収し宏壯 なる邸宅を構えんとして地均しまでに6萬圓を投じまさに塀の一 部が出来上りかけたところに一敗地にまみれてぺちゃんこに なった 従って 彼の胸に描いた宮殿の如き邸宅は実現せずし て終わったが 地均した土地は目下外里の某病院の敷地となっ ている その後彼は全く意気揚がらず 今では仁取の掃除など が仕事でその昔2萬石の米を丸マにぶっつけた勢は薬にしたくも 持ち合わしていない 実にうつろい行く人間の世なるかなどの 感が深い 越えて大正11年には廣澤正次郎と 內海叔郎の聨合買に地場筋 が提灯をつけ浅野がこれに売向って大波瀾を捲き起こした し かしこの時は何といっても我財界は乱舞の夢さめて下り坂のと きである 內海 廣澤の豪快をもってしても腕力買じゃ大勢に は叶わない すべて相場の妙諦は大勢を把握してその潮流に乗 るにある だから認識不足が相場師には大禁物 殊にこの大勢 に逆抗して自分の力をたのみすぎた強引売買は結果において必

338 31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ず失敗だ 仁取仲買の興亡をたずねてもそこにこの理法は明ら かに看取せらる さはあれ 一度やり出したら乗るかそるかや るところまでやらなけりゃ引っ込みがつかないのが相場師気質 だ だから最初の出発點が大事であり 出発點を誤らぬために は財界に対する認識を誤らないだけの用意を常にもっているこ とである この機會に內海と廣澤の人となりをちょっと紹介しておく必要 がある 両人とも仁取が生んだ成功者だが 同じ成功でも行き 方が多少違っている 內海は純粋の相場で儲けて成功の第一人 者となったが 廣澤は仲買で儲けた しかも同じ仲買として儲 けたといっても浅野太三郎や今村覚次郎とも異なった道を踏ん だもので彼の儲けは證拠金代用の不動産や株式が流れ込みよん どころなく引受けたものが 大正7 8年頃の好景気に値上りし て利益を得たもので彼が死ぬる前後には再び値下りして世間で いう程の実力はなかった それでも彼は惜し気もなく公共方面 にも金を投げ出したもので 今の仁川南商業学校などには少な からずつぎ込んでいる

339 원 문 319 仁取盛衰記 二大成功者 內海と廣澤 鳥栖忠安 內海 廣澤両人とも相場度胸にかけてはひけを取らぬ男だった が それでもやり口は自ら異なっていた 大正11年の聨合買の ときでも內海は真正直に買一本で進んだが 廣澤はこっそり手 を廻して先物を売越していたほどだった 內海はさずがに相場 で儲けただけに駈出しの時から充分成功の素質を備えていたと 稱せらる はじめて相場に手を出したのは明治43年の秋ごろか らだったらしいが それまでは米穀貿易商として手堅い一方の 男だった 彼の遣り口は引かれ腰は非常に弱いが一度利乗せと なると滅法につよい男で 受けるか渡すかぎりぎりのところま で追詰なくては追撃の手をゆるめなかった それも經験をつむ に従って晩年は引かれ腰も強くなっていた 彼の成功の裏には 人 今の未亡人 の力がまた頗る大なるものがある 相場度 胸においては 人は寧ろ主人以上で形勢が悪くしょげ込んでい るとき激励して再び彼を奮起させたの全くこの 人の力であっ た 大黒柱から逝かれたあとの內海廣澤両家を並べてみると廣 澤の未亡人は神戸にいるとの噂ではあるが 內海家がいしずえ 賢明なる未亡人によって貧乏揺ぎもしないのに比べるとあまり にみじめ過ぎる 內海は晩年仲買を退き京仁の重役になりたい 希望があったらしいがついに実現せずじまいだった 現在同家 の持株も一つはこうした希望で先代が集めたらしい

340 32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廣澤は染物屋から身を起した成功者である 彼の苦難時代には 眼鏡で田舎の縁日を稼ぎ廻った時代もあった 婦してのそき 仁川に来てからも妻君は芝居小屋のお茶子をしたり餅売りをし たりしてつぶさに貧乏の味をなめつくした 仲買店を出したの は明治42 3年頃で最初は50石の米を建てるにも骨が折れると いう微力なもので常に赤い顔して市場に出入していた 従って はたのものがたまりかねて仲買をやめたらどうかと忠告したの も一再ではなかったらしいが 彼は何糞ッ俺も男一匹だ 一度 はあてて見せるとついに頑張り通した 彼の博突度胸に見込ん で最初に金主になったのが磯村という男 その次に浅松太郎が 後楯となって店を開いているうち 賀田金の買出動に彼の店が 機関店となったのをきっかけにめきめき延びて行った 廣澤が大きくなったのは相場そのものよりも仲買としてだっ た 即ち1萬何千圓かの證拠金代りに流れ込んだ開城方面の土地 が好況にあって 一躍十数萬圓になったり 3萬圓かでとった農 工銀行株5千株が殖銀に代わって4萬株ほどになった 従って 殖銀の新株が50圓 親が百何圓という値を吹いた時代には廣澤 の身代は200萬圓と稱されたのも無理はない 彼は大正14年京 城の大洪水の時最後の呼吸を引取ったが その時は景気と共に 値下りしていたので資産の評價も一時ほどにはなかった 彼 ほどつぎ込んでいる

341 원 문 321 話は前後するが大正9年の3月頃この廣澤が偽電事件を捲き起こ して大問題となったことがある 大阪の相場は百丁安という電 報が這入っているのを却って百丁高と大声で場を振れ歩き相場 が沸騰したのに乗じて買い建てていた3萬石を見事手仕舞してう まく逃げてしまった そこで彼は直ちに警察に引っ張られて騙 りだというので取調べを受けたが 故意にやったことか 或は 実際開き誤りか その邊の判別がつきかねるので折角引きあげ た警察も證拠甚だ薄弱で手のつけようがなく地太ん駄踏んでく やしがったがしかたがない そこで警察は何かほかにかっこう な種はないかと今の月尾島遊園地にいる坂下が刑事時代のこ と 鵜の目鷹の目でさがしているうちに運悪く根合金の問題で ひっかかってしまった 引っ込みがつかずに內心弱り切ってい た仁川署は小躍してよろこんだ 仁取盛衰記 內海廣澤の聯合買ひ 浅野一人で売向ふ 鳥栖忠安 根合金というのは売りでも買いでもお客が利喰いする場合仲買 が下駄はいているやつで仲買はよくやる手だが これは全く詐 欺的行為だいう理由のもとにとうとう引っ張り込んでしまっ

342 32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た ところがこの根合金問題は廣澤一人でとまるならよかった が その波紋は全仲買に拡がって帳簿は全部押収されてしまっ た上 毎日店員が仁川署に日参して取調べを受けるということ になってしまった もっともその金額が割合に少かった2 3の ものはのがれることとなった 浅野の如き最初はお目こぼしに 商內で相場が21圓から30圓 あずかることになっていたが ふし 臺まで戻して来る途中大阪か保合であるにかわらず買しめを 行って節一本で200丁ほど買やぶり不自然な相場を出したのが 運のつき 役人連からにらまれて直ちに りこまれてしまっ た しかしそれは場立の連中でやったことで店主はあずかり知 らぬというので言い訳は立ったが もともとこの手入れは儲け るにまかせて仲買連が無茶苦茶に金を使い 傍若無人の遊蕩を やるのに判官連の反感か昂まり ついに検事指揮の下に行われ たものであった 當時仁川法院支庁にいた判事の小野某など詐 欺的行為で栄よう栄華をしているのは怪しからぬと額にあお筋 立てて憤慨し 仲買を親の敵かの如く峻厳に取り調べた この 事件は目下京城法曹界にナンバー ワンと謳われている弁護士 堀直喜が京城地方法院の豫審判事時代に 出張して取調べた結 果 大部分ゆるされたが 一時は仲買連どうなることかとびく びくものだった 餘談はさておき時は大正11年 10月限にその內海と廣澤の両雄 が轡を並べての買出動に提灯がつき売向かったのが有力筋の浅 野だったから その取組は見ものだったに相違ない 時あたか も米界の大勢からいえば內地に於ては前年の大正10年10月例の

343 원 문 323 石井定七の買煽りで堂島は47圓59錢までつりあげ しかも11月 の受渡は50萬6千石という大袈裟な売買戦が行われた揚句 年 末には37圓臺に落ち込んだので さすがの石井の定はんもすっ かり尻ッ尾をまいて没落してしまったというあとを受けている だけに相場界はまだ波も荒けりや気も荒かった その年の米作 は內地は大豊作謳歌だが 朝鮮は凶作で悲観状態 景気の下り 坂にもって来て豊作人気と来たから大阪は7月の新甫までは39 圓臺だったが 13日の株安の気崩れから下げあしがつき9月に は30圓臺割れの28圓メ9錢と急転直下の大暴落 7月末からぼつ ぼつ買いはじめた 內海廣澤の聯合軍は7月末の納會で大阪は一 挙に200丁を下げ34圓90錢と新安値を出し買方總落城という状 態に拘らず仁川を頑強に32圓88錢と買支えていた始末だった その後相場は8月に入って乱高上をつづけていたが 干潮の如き 大勢は人力の如何ともすることが出来ない状態にあった この なかにあって內海廣澤は力をたのんで花々しくも9月に入って中 限に約10萬石を買い付けた 売り向った浅野は孤軍奮闘 双方 はたし合い眼で突つ張った この中限の買支えが利いて先が 却って5圓方の下鞘を打つということになったので買方は更に戦 線を11月限にまで延長して2萬石ほどを先限に買付けた 一方浅野は渡米の手當を進め大邱の光成に頼み込んで大邱の延 べで買付けたのが以外の結果を招き大邱はついに場を止めてし まった この大邱延べがまたなかなか場が開けず ついに府尹 が仲裁に飛び出すというごった返しのうちに相場は遠慮會釈な しに下げて来て 9月のなかば頃には先もの23圓がらみとなっ

344 32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てしまった そこでいかな引かれ腰のつよい內海廣澤もついに たまりかね わざと追證を納めず 先ものだけを商內した中限 は21圓40錢で場をとめてしまった かくていよいよ解合の相談 となり 廣澤は應じたが 內海はなかなか承知しない はては 仲裁に入った桑野がおこり出すといった場面を繰返した結果 やっと中限だけ解合となった 仁取盛衰記 十一萬圓で設備が整ふ 税令実施さる 鳥栖忠安 廣澤が容易に解合に應じたのはこっそり先物に売こしていたか らで 內海はすっかり舞い上がってしまったが 廣澤は売越し ていただけにまだよかった この時は2人とも各々20萬圓近く ずつの損害を蒙ったが 提灯つけた連中にも手ひどい傷手を受 けたもの多く 浅野の得意に引かえて なけなしの金をはたき 出した末すっからかんとなり 店をしめた仲買が29店のうち 6 7店はあった 田中金平の如き3千石だけ解け合ってあとは 力武に肩代りして渡して貰い大損をしたというものもあった 売買戦はこの邊でちょっとストップして舞台をまた逆にもどし

345 원 문 325 會社自體のことについて回顧してみることにする 大正8年改革 と同時に市場の改築に着手し 翌9年の1月新甫の初立會から今 の市場で 析の音も勇ましく売買が開始された それまでは今 の金太の店となっているところに市場があった つづいて大正 10年には事務所を改築して今の堂々たる建物が出来上がった これと同時に倉庫や社宅も建築されたが これ等に要した總工 費は11萬1千圓であった 外観が整って来たのと同時に內容にも着々改善が加えられた 大正8年復興と同時に受渡顧問として當時京畿道の穀物検査所長 であった平岡卯太郎を嘱託し 審査員に小倉 橋本の2人を依嘱 した それでも審査が甚だ杜撰だと兎角の評が絶えなかったの で 平岡を審査長として正式に入社せしめ 大正9年から受渡制 度に大改革を加えた 大正9年5月2日附を以って朝鮮總督長谷川好道は會社令による 命令事項として 仁取の役員および支配人の選任は履歴を具し て朝鮮總督の認可を受くべしと申し渡した この大正9年は仁取 大発展の年で手数e収入が143萬1,900圓に上り 前年の利益を 合わせて損害金の180萬圓を補填した上になお積立金の80萬圓 を残し しかも株主には上半期に7割5分 下半期に6割の配當 を行った しかし 同年の3月に世界戦争が終末をつげると共に 財界にも大變動が起り 6月以降出来高は減少に転じたことが明 らかに看取された この間にあって 仁取は同年4月定款を變更

346 32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し また営業規則の改正を企て 9月末總督の認可を受けて10 月1日より実施した 大正11年4月には制令第6號を以って朝鮮 取引所税令が発布されて同月20日から実施された 更に4月の 25日から大豆の定期取引を開始した そして大正11年1月29日 の臨時株主總會で資本金を300萬圓に増すことを決議し 同年2 月20日總督の認可があった 税令が布かれた裏面にもちょっとしたいきさつがあった 最初 仁取のみに課税しようとの內報があったとき 若松社長と秋山 支配人が本府を訪問して時の税務課長水口隆三と商工課長の田 中卯三に 税令を実施するならば取引所令を施くのが先決問題 ではないか 実態法規が施行されずして税令のみ施行すること になれば取引所類似の施設に対して取締りが出来ないではない か という様な意見をのべた これに対して田中は なるほど それもそうだというように考えたが それでも水口は 取引所 令は急速に出すわけに行かぬとすれば現在取引所があるからこ れに税令を施行するのは必ずしも變體ではない というような 考えをもっていた そこで若松と秋山はどうしても実施すると いうなら內地と同様の税率を賦課することはちと酷い 民力の 幼稚な朝鮮では內地に比べてなるべく軽くしてもらうと同時に 課税する以上類似取引の取締りを厳重にやってもらい度いと希 望した 財務局も殖産局もこの陳情に対しては大いに理由があるという

347 원 문 327 ので傾聴した そこで税令案には類似取引の取締を条項に入れ たが 法制局ではこれを削除して仕舞った 當時仁取は各地の 延べ市場から喰われてさんざんの態たらたらであった という のは大正9年市場規則を改正して一道一ヶ所主義で京城 釜山 大邱 群山 木浦 鎮南浦 元山 江景 新義州の9ヶ所に現 物市場を許し 60日以內の延べ取引を認めた 以上の現物市場 は これを奇貨として転売買戻しを公然とまでは行かないが とにかく差金決済を盛んに行うので 仁取には大打撃が及んだ のであった 仁取盛衰記 自ら墓穴を掘る仲買人の態度 當局の公約は女郎の起誓文 鳥栖忠安 税令施行と同時に取締りを厳重にして貰い度いとの要望に対し ては殖産税務両方面とも大いに共鳴した けだし税源の涵養か ら見ても又擔稅者の保護という點から見ても 當然なことで あったからである 當局はこの取締りについては充分にやるつ もりであるから安心して可なりと言明した 税率は內地では萬 分の5であるが朝鮮においては萬分の3以下にとどめてほしいと 取引所では要望した 田中商工課長は尤もな申し分だというの で財務當局と折衝中に意外の方面からとんでもない横槍が這

348 32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入ってこの要望は根底から覆されてしまった これより少し以前 取引員組合委員長坂倉伊平が組合を代表し て取引所に対し 売買手数eを減額して仲買人の委托手数eを 殖やして貰い度いと申し出でた 取引所側では大正9年の恐慌後 取引高は漸減の傾向にある折柄売買手数eを減額することは苦 痛この上もないから要求に應じかね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 た これがために取引所と取引員との間に大きなギャップが出 来ていた そこにもって来てこの税令問題が降って湧いたよう に持ち上がった 取引員側では犬糞的にこの問題をとらえて取 引所の面目をへしつぶそうとしたが かくて一旦の感情や目先 の慾にとらわれて大勢を見誤った取引員側は自ら墓穴を掘る結 果になってしまった 即ち坂倉伊平は税務課長水口隆三をたずねて我々仲買人は內地 同様の税率を負擔するとも決して苦痛としないという取引所側 とは全然反対の意見を述べた というのは取引税は當然委托者 に転嫁せらるべきものである 税率が內地と同様である以上こ れと同時に委托手数eも內地と同様程度となることは明かであ る 税令実施を機會に売買手数eの増額が認められるならば税 率が少し高かろうと仲買は別に大した苦痛でもないというよう な誤った見解を抱いていた 税務當局は一文でも収入が多い方 がいいに違いないからこの直接擔稅者たる仲買側が內地と同様 で結構という意外な意思表示に水口隆三は大きく一つうなずい

349 원 문 329 て さっさと決めてしまった 馬鹿を見たのは理事者側で折角 の苦心も水の泡 內地同様の税令が出たのを見てぽかんとなっ てしまった 税令実施後の状態は 財務 殖産両當局ともその當時の公約に 背き各地の延市場にはすき勝手のまねをされているに拘らず 取締る風も見えず 仁取はこの延べの影響と重税の負担とでへ とへとになり悲鳴をあげるに至った 當局も當局なら 取引員 も取引員で税率を自ら高めるなど 何という無分別なことをし たものかその愚かな加減にあきれて物がいえないではないか その後大邱 群山 釜山各地の延べはますます隆盛となり取引 高も仁取と伯仲するような勢を示すに至ったため しばしば仁 取は取引所令を施行して 保護してもらいたいと要望したが うなりくなりで推移し 最近に至ってやっと税令を除くすべて の法令が公布された この間に仁取が収めた税金は370萬圓の 巨額に達するが この半面に當局は仁取を保護すべき施設の何 ものをもしなかった結果 仁取は大邱 群山あたりの延べ市場 からかぶられて回復することのできない損失を蒙った 斯く観 じ来れば當局の態度はあまりにふんだくり主義であり 片務的 であり 女郎の起誓文の感があるではないか

350 33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不二興業が大豆の買占め 受渡に手を焼く 鳥栖忠安 大正10年大豆を上場すると間もなく大豆の買占めという仁取な らでは見られぬ珍風景が描き出された 仁取はもともと大豆上 場の権利を持ってはいたが事実上には大正9年までは上場しな かった 若松鬼三郎が社長に就任以来大豆の上場を策し 當時 の仁取庶務課長澤熊浩を大連に派遣して大豆取引の実情を調査 させたりして準備した上いよいよ上場と決し 大正11年2月営 業細則を改正して4月から上場するに至った 上場すると間もな く豆の取引は相當活況を呈したが そのうちに不二興業の商業 部が買占めを策し 問題の大渦をまき起すに至った これに対 抗して売向ったのが仁取市場の飛将軍廣澤正次郎それに鎮南浦 の新井新蔵が味方して旺んに應援した 何しろこの買占めは大豆の端境期を見込んでかかっていたので 取組高は7月15日限で3萬石 8月限の如き提灯もついて一時は 6 7萬石に達していた かくていよいよ意地商內となり最後の 土壇場まで押しつめた結果 7月限で3萬石 8月限で5萬3千石 という大受渡しが行はれることとなった 売向った澤廣は北は 咸鏡北道から満洲にかけて 殆ど全鮮各地から集めた結果 仁 川には大豆の山をきづいたが いよいよ受渡しとなると 満洲

351 원 문 331 大豆が格に入るか否かが先ず問題となり摺った揉んだの末やっ と差支えないということになったかと思うと受方の不二興業の 方で受渡しに散々難癖をつけ始めた 大豆の受渡は仁取として は經験に乏しく こんな大きな受渡は前例がなかったのでここ につけ込んだ不二興業側では端境期の品がすれ見込みが物の見 事に外れた 業腹まぎれに文句のありつたけを並べたて買方仲 買店をして逃げを張らせたが 売方は受渡期日までにすっかり 大豆を集めてしまったので なかなか不二興業側の手に乗らな い 双方から取引所の理事者を仲に挟んで腕力沙汰にも及びか ねまじき勢いで対峙した この時の受方の苦情の主なものを並べて見ると大體次のような ものであった 一 倉庫のひさしに大豆を積んでの受渡は取引所始まって以来 の前例がないから受取らぬ 二 さや付大豆がまじっている これは枡に影響するから受取 らぬ 三 検査所で検査はしているが管轄区域以外の土地の大豆があ るから違法である 四 色付大豆が混合したり腐敗したものが少しでもあったら受 取らぬ 五 等級の違うものが一俵でも混入していたら受取らぬ 六 一俵毎に仲仕を使ってひっくりかえして調べなければ受取 らぬ こうした苦情が次から次に出て来るため受渡は頗る面倒なもの

352 33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となった そこで7月15日限の受渡は僅3萬石であったが それ でも7月中に済まず 8月15日になってもなお済まない 受方は 翌朝になって少しでも前日の日暮に於ける現状が動いていたら 受取らぬなどと言い出すので夜の監視人を何人かつけなければ ならないといった状態を毎日繰返し その上に買方の不二興業 が大手筋であるだけに専属仲仕を使嗾して仲仕連にも取扱上の 苦情をつけさせるので受渡しはますます長引くばかりであっ た 見るに見かねた仲買店は一 二店を除いて大部分が結束しこう まで紛糾しては仁取の繁栄上まことに不利益となるからという ので急速解決を希望し 大豆取扱に慣れている松本要五郎に取 引所と仲買組合が双方から受渡の斡旋方を依頼した かくて10 月25日に至ってやっとのことで濱渡しが済んだ いよいよ受渡 が全部済んでみると満洲から持って来た大豆には手をつけず朝 鮮大豆ばかりで間に合っていた 何しろ一時このために仁川埠 頭は思いもかけぬ 大豆の山をきづき一種の偉観を呈した こ の受渡しでこりこりした仁取は大豆の上場に紛擾が多いことを はっきり知ることが出来たので同年の12月15日限で上場せぬこ とにした

353 원 문 333 仁取盛衰記 震災前後に 豊 の売叩き 仲買連の總買向 鳥栖忠安 買占め史の順序から言えばこの不二興業の大豆買占めの次には 大正11年9月內海廣澤が轡を並べて馬を陣頭に進めた買思惑の 失敗となる順序であるが これはすでに前段に述べたところで あるから省略する 大正12年9月2日は関東大震災のために殖産 局長から人心安定まで臨時休業せよとの內意が傳えられたので 取引員の臨時總會を開き立會前に取敢ず東京方面の被害が判明 するまで立會延刻を申合せたが その後の詳報でますます被害 の大きいことが判ったのでついに總解合の値段が容易に決しな い というのは當時売建てていた豊仲買店を經營していた宗喜 平が突ッ張るので話は容易に纏まらぬ 解合の委員會はついに その翌日に持越されやっとのことで當限30圓 中限29圓50錢 先限28圓の棒値ということになって落ち付いた その後5日間 ほど立會をやめ9月6日に至って 當限を除き中 先だけの取引 を開始した その後相場はじり安を辿っていたが先物22圓見當となると豊の 宗喜平が売って来た 何しろ震災後の財界沈衰を狙った売りで あったために客筋のこれに策應するもの多く 宗が大将となっ て売叩く これに対して仲買は全部売に廻ったので またたく

354 33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うちに取組高は4萬石に達した 相場も大勢は下げにあったとき のこととて20圓80錢まで落ち込み 一度もとに返さねば非常な 混乱に陥るおそれがあった これを見て仲裁が這入り一部に肩 替りを慫慂したが宗はなかなか聞かない その頃宗は明治町で豊倶楽部と稱する米倶楽部を設け京仁を股 にかけて活躍していた そして京電の會計の小林某をだき込ん で京電の金をこっそり持ち出さしては軍資金にしていた その 後この小林の社金横1に足がつき取調べてみると36萬圓の大穴 を京電にあけていたことが判明大騒ぎとなったが この一件が 発覚するころから宗は相場の方も芽が出ず両々相まってついに 没落してしまった しかし この頃の宗はまだたとえまともな 金ではないにしろ軍用金は豊 だし 鼻息はなかなか荒い 解 け合の交渉が始まると彼は桜木に陣取りなかなかの強腰であ る これに対して買方の急先鋒として矢面に立った廣澤は向こ う側の京畿久に陣取り仲裁の影武者として裏面で活躍している 浅野太三郎は明治町の末廣の奥に姿をかくしながら取引員組合 の三井書記長を表に立て影から指揮して折衝が進んで行く 買 方の売を遠慮しろという要求にどうしても宗は應じない 散々 押間答を繰返しているうちに幾度か場面は決裂に頻したが そ れでも仲介者側がやっとのことでなだめた末 50錢あんこ で 解合の相談がまとまった この手打ちは翌日月尾島でやることとなり いよいよその日と

355 원 문 335 なると買方の仲買連打揃って月尾島に出かけて そして宗が来 るのを待ったが定刻を過ぎてもなかなか顔を出さない しびれ を切らしていらいらしていた仲買連もいよいよ宗が来ないとき まると何れも頭から湯気を立てておこり出して よし その 気ならこちらも覚悟がある 目に物見せて呉れようぞ という ことに一致し手打ちの席は一變して喧嘩の打合せと早變り な だめ役だった浅野まですっかりかんかんになっておこり出し その翌日の寄付で買って買って買いまくろうということになっ た 仁取盛衰記 買方聯合に凱歌あがる 宗仲買店没落す 鳥栖忠安 いよいよその翌日となった 仲買は總動員である 前日の月尾 島における打合せの通り前場の止めで槍襖をつくって宗をとり かこみ いよいよ受け太刀となるところを羽賀井じめにしてく たばらそうという策戦 枚をふくんで戦機の到るを今やおそし と待ち受けた ところが今10分で前場の鐘を打とうという瞬 間 買方同志の一人たる坂倉が青くなってとんで来た この策 戦がどこでどう洩れたかその朝になって坂倉の店に買玉の3千石 が利喰の売物となって現れたのである そして一挙に宗の息の

356 33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根をとめようと手具すね引いていた買方聯合軍の手振りを間一 髪の間にからくも喰いとめたのである 前場の止めで思わぬ横槍が現れたため總攻撃の決行が出来な かった 聯合軍はついに後場の寄に決行しようということに なった ところがまことに買方にとっては幸なことには 前場 の止めから大阪は50丁高と来たばかりでなく続いて後場の寄に は100丁高というのだからたまらない 薪に油をそそいだよう な有様だったので 仁取も後場の寄で一挙に150丁ほどはね返 してしまった しかもその翌日はまたまた上値 3期總売の宗は 仲買總聯合の買向いに悲鳴をあげざるを得ない 勝に乗った聯 合軍はいい気味だというのでますます追撃するので 足どりも しどろもどろ満身創痍を受けてへたばってしまった 宗の建玉 はその時約3萬石 22圓位から売はじめて26圓まで引づられて 行ったが 勝誇った聯合軍の追撃急なるためあわや店をしめん とする瀬戸際まで追いつめられた この敗戦は宗にとってはま さに致命的の打撃であった しかも一方金穴の小林は社金36萬 圓消費の悪事露見でぶち込まれたので糧道をたたれ手も足も出 なくなった 実に弱り目に祟り目とはこのことで さすが傲岸 なる宗もすっかり参り 軍事に轢かれた蟇のようになってくだ ばってしまった その後下り坂の財界と共に大した思惑も行われなかったが 大 正14年7月17日の漢江大水害で京城 仁川は通信交通機関が

357 원 문 337 すっかりとまってしまったときに仁取は18日休業してすべての 機関の回復をまつことになった しかし被害の程度は案外大き く容易に回復しそうにないのでここまま放任すれば不穏當な相 場が出ることを憂慮した結果 取引委員總會を開き當中41圓70 錢 先41圓40錢の棒値で解け合うことに全會一致で決定した この水害で大混乱をきわめている最中仁取の大立物だった廣澤 は死んだ 巨星地に隕つ 随分出たらめな彼も晩年は1萬圓の低 金の佛像を作って33間堂に寄進したりして善根をつむのに心が けていたが 一時200萬圓と稱せられていた資産も景気の波に 洗われて彼の臨終の頃にはその評價額はよほど値下りしてい た それでもなお仁川の廣澤といえば朝鮮內における丸持のう ちに数えられ 半島期米界の大立物として斯界をへいげいして いたのであった 仁取盛衰記 藤井寛太郎が內地米を渡す 不二興業の改革 鳥栖忠安 その後意地商內というような御念の入った相場は長らく現れな かったが 昭和4年の夏に至って不二興業の藤井寛太郎が乗り出 して来て內地米の受渡しという毛色の變った一場面が現れた

358 33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この年の米はまだ植付けられた青田の頃で海のものとも山のも のとも見當がつかぬとき前年の1,350萬石という近年には一寸見 當らぬ減収尻を受けて相場は一進一退その道の人にとっては食 指を動かさざるを得ないというような投機的エロ味をさかんに 放散していた 俄然乗出したのが朝鮮の水利王を以て自任する 不二興業社長藤井寛太郎である 即ち彼は不二の仁川支店長村 上政高をして7月限に7千石 8月限に9千石を売建てたが これ に買向ったのは加藤 奥田 有馬等の主として精米筋 双方と も 相場にかけては面摺れのした連中だけに太刀先も鋭く受渡 期日が接迫するにつれて鍔ぜりとなり 売方藤井の参謀格村上 は內地の各地をかけすり廻って 內地米を買集めて渡米の手あ てにかかり 一方買方は受米の用意を進めて堂々の陣を張っ た かくていよいよ大增場となるや藤井は買集めた 內地米を 自分一人で特別にチャーターした船で仁川に持ちかけて来た この米が期日に間に合うかどうかと見物連手に汗を握って眺め ているうち仁川沖には紀の国屋文左衛門の蜜柑船ならぬ 內地 米を積んだ藤井のチャーター船がボカリと水天一髪の視線に浮 かんで勇ましくも仁川埠頭めがけて突進して来た 朝鮮米の移出港仁川には時ならぬ內地米の逆移入という珍風景 が現れた 国家經済上から見たら このくらい馬鹿気たことは ないが やむにやまれぬ相場の意気地はそんなことをいってい られぬ 夜を日についで荷揚げする沖仲仕の掛け声にも殺気な こもるかに見えた かくて持込んだ內地米は 岐阜米が2,465

359 원 문 339 石 鹿児島米が4,096石 宮崎米が1,200石 愛知米が477石 金沢米が1萬3,719石 これ等のうち愛知米だけが格上げとな り その他は全部格下げとなった 受渡米検査には売方から猛烈な苦情が出た 何しろ米にかけて は穴のしわまで読んでいるという通連の間の受渡しだけになか なかだまって見て引き下らない 意地商內だけに苦情小言のあ りったけを並べ立て そのうるさいことと来てはお話にならな い 仁取の調査課長として濃厚そのものの如き平岡もさすがに おこり出したほどだった この時の不二興業側の態度には全鮮 の米穀商から可なり非難があった 即ち不二側では內地の格付 を標準とすべしとてさかんに宣傳を行った これは朝鮮におい て米を生産する不二としては甚だもって不埒な話で內地の米が 格が上であると主張することは勢い朝鮮米を蹴落すことであり 自ら天に向って唾するものである そこにまことに醜き資本家 的御都合主義が露骨にあらわれる この點は何んといっても不 二として辨解の餘地はない 藤井寛太郎は平素朝鮮米界の代表 的人物をもって自ら任じ大きな口を利いているだけに甚だもっ て始末の悪い自縄自縛の結果に陥らざるを得なかった これと 同時に全鮮の非難囂々たるものがあったのはいうまでもない 対手方は精米筋だけに受米してけろり涼しい顔をしていたに反 して藤井寛太郎はまんまと失敗大傷手を受けた 不二興業は前 年の減収につづいて 群山の干拓地は思うように行かず 鉄原

360 34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の中央水利も成績不良というので大分弱り込んでいたところに この社長藤井の思惑失敗で大穴をあけ ついに減配の餘儀なき に至った このけつは殖銀のかぶりとなってしまったが こう なって来ると殖銀でもやきもきせざるを得ないこととなり つ いに頭取有賀光豊の藤井寛太郎に対する戒告となってあらわ れ つづいて不二興業にとっては天下の御意見番大久保彦左格 の東洋生命社長木村雄次の来鮮となり お家の安泰をはかるに は藤井寛太郎の専横をおさえて勝手に相場資金を引出させぬよ うにするにありというので彼れ藤井を社長なりけりで神だなに まつりあげ 一切の切りもりは總督府の勅任技師であった三井 栄長の身柄をもらい受けこれを専務として一任するに至った 不二興業改革の直接動因は実に藤井の売思惑失敗にあったので ある 仁取における売った買ったの大きな場面はまずざっと以上でつ きたと思うから次回よりは方向を転換して京取との合併問題に ついていわゆる裏面史なるものを御紹介し これでこの盛衰記 を終ることにしたい

361 원 문 341 仁取盛衰記 市場の振興上合併芽生ゆ 一笑に附さる 鳥栖忠安 仁取の移転合併問題が芽生えたのは 餘程以前のことであっ た 大正8年を絶頂として下り坂となった我財界の景気もさるこ とながら 我仁取は高率の課税と 延べ市場の侵略とによっ て 大勢は次第に衰退に向って来た そこで市場振興策が理事 者並びに取引員の首腦部大株主等の間には いつとはなしに口 の端に上るようになって来た 當時市場の振興は人力を以て殊更にやるべきものでなく 景気 如何によっては自然に立直るものであるから何事も自然にまか すべきものとして匙を投げた連中もあったが さりとはあまり に意気地のない話というような積極主義のものも少なくなかっ た 特に最も利害関係を有する大株主の內海など後者に属する 方で若松社長 大平監査役以下理事者と桑野 小林等の取引員 側と協議の際税金軽減を以て市場振興途上横わる根本的障害排 除の第一策であると主張した これに対して若松社長は税金の 負擔軽減は總督府當局が許しそうにないからとうてい出来ない 相談だと一蹴したので 內海は真赤になって喰ってかかり 軽 減運動はやってみなくては成否はわからないにかかわらず こ ちらからきめろとは何事だ いつも社長の態度はお役所の出張

362 34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所みたいで何に限らずやらぬ前からきめてしまう癖がある 甚 だもって心得がたいと真向から攻撃し出し若松を手古摺らした という場面もあった その時 移転合併は市場振興策として小林藤右衛門がはじめて 唱え出した問題だった しかし當時取引員と雖も京城に住居を 構えて店だけを仁川に持っていたというのは小林位のもので京 城に対する関心をもっている者は極稀れであったから仁取の理 事者も取引員でも合併移転は頭から問題にしていなかった と いうのは當時仁取は衰えたりと雖もなおまだくだばるような心 配もなく鼻息は頗る荒い時代で却って京取の去勢されたような な格好を見て 京取と合併するのは肉付きの豊かな娘を ぶざま 老さらばえた老人と結婚さすようなもので勿體なさすぎてお話 にならないとお高くとまっていた 一方又渡邊定一郎一派が當 時すでに合併と題を內々唱え出していたが これ間小林藤右衛 門とは出発點を異にしているとはいえ仁取理事者や取引員に とってはやはりその昔羅馬に行われた処女回生法と同様だと一 笑に付して顧みなかった 大株主の內海などもこの移転合併説 には最初はそう正面から反対もしなかったが さりとて積極的 に賛成は勿論せず一般の空気は何のたわごと位に心得ていた

363 원 문 343 仁取盛衰記 取引所は役人の鬼門 下岡忠治躊躇す 鳥栖忠安 この小林藤右衛門の移転合併説が最初出たのは大正8年頃で そ れもいわゆる茶のみばなしの程度だったが いよいよ真剣に考 えられたのはよほどあとであった 朝鮮の産業は一代の名總監 下岡忠治を迎えて劃期的の飛躍を試みることとなった 彼が釜 山に一歩を印すると同時に発した言葉は産業第一主義であっ た この言葉は半島の隅々にこだまして 天下は靡然として一 斉に進行をはじめた かくして出来たのが産米増殖計劃であっ た この下岡の下にあって殖産局長として計劃の衝にあたったのは 近く京日社長として赴任せんとしつつある池田秀雄であった 池田の下に商工課長として活躍したのは今は台湾電力において 時めく安達房治郎であった 安達は當時鮮産品充用の叫びを半 島に上げ內地における国産愛用の先駆をなすに至ったが しか もこの池田と安達の逸材は總監下岡の下にあって 産米増殖計 劃の樹立に伴う生産品の消化について考えた 米を作ることば かり考えるが能でない これが消化の方法を硏究し 商品價値 を高めることを考えねばならぬ 生産の増加と商品價値の増高 とを並行して行くようにするには権威ある取引所の出現を必要

364 34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とする しかし朝鮮においてはこれを直ちにのぞむには法令が 不備である このために仁取のほかに各地に延べ市場があり殆 んど取引所と同様の状態を呈しているが 先ずこれを改善する ことが第一であるということに池田 安達の結論は一致した かくて下岡に対する取引所政策確立の進言となって現れたので ある 下岡は農商務省畑の育ちである しかも多年農務局長もつとむ れば商務局長をつとめて甲羅をへているだけに取引所のことは 百も合點二百も承知なのである 取引所と遊郭問題は役人の鬼 門だ 利巧なものは手をつけぬというのは下岡が言い出した言 葉である うっかり手をつけたらとんでもないこととなること は先刻御承知だから池田と安達が口説いてもなかなか乗らな い しかし朝鮮取引所界の混乱状態を見ると手をつけずには居 られなくなった 一世の名總監と謳われるだけに彼の決断も早 かった 即ち彼はついに心を動かして池田殖産局長と安達商工 課長の2人をこっそり官邸によんで 3日間ぶっ通しで意見の開 陳した結果 そんならやろうということに下岡をして肚をきめ させるに至った 然るに産米計劃と鉄道延長の2大事業も計劃を樹ててこの豫算を 携えて東上した下岡は ついに中央政府と折衝中病を得てたお れたので この計劃が実現するのは見ずしまいだった そのあ とを受けて政務總監に就任した湯浅倉平は 根が石部金吉の堅

365 원 문 345 造で取引所と遊郭問題は大きらいと来ててんで問題にしない 下岡は知っていて逃げるのだが 湯浅は頭から毛嫌しているの で甚だ以て始末におえぬ 池田と安達は苦心惨憺手をかえ品を かえてやっと納得させた ところがこの取引所政策問題に関連して京仁両取合併説が台頭 すに至った裏面に活躍した 田儀作と下岡忠治との間に絡まる 一つの美談が織込まれている 下岡と 田は共に兵庫県の出身 で郷里を同じくしていたのみならず 下岡は少年の時 田儀 作の兄の教え子であった 世間には 田が学校の先生時代下岡 は生徒で師弟の関係があったと専ら傳えられていたが 田自 身の語ったところとして傳えられるのは右のように下岡の先生 は 田自身でなくて 田の兄だった 仁取盛衰記 三人が読んだ下岡のはら 隠密の間に相談 鳥栖忠安 下岡が政務總監となって来たとき郷里の某から 田儀作に書を 寄せて来た それには今度同郷出身下岡が朝鮮統治の雁首にす わることとなったが この際我々は同郷のよしみで下岡から朝

366 34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鮮の利権を寄越してもらって大いに餘沢にあずかるようにした い それには君は朝鮮に古くからいて事情に通じているから 我々と連絡をとってこの際一つお互ひに儲けようじゃないかと いう意味のことが書き連らねられていた これに対してさすが 田儀作は一言のもとに刎ねつけてしまった なるほど下岡は 同郷出身の成功者である しかも下岡は今日の地位で満足すべ きものでなくますます大成せしめねばならぬ それには利権運 動などいうつまらぬことにひっかかってつまづかなる様なこと をしてはならない どうか下岡をあやまらせぬようにして貰い 度いという意味の返事を與えて 拒絶してしまった この書面に接して対手方が恥入ったか 或は 田儀作を金に縁 のない男だと冷笑したか その點はわからないがとにかく 田 はその後度々下岡に會ったけれどもこうしたことは全く秘して いた 然るに下岡は誰からとなく聞いてすっかり感激してし まった それからというものは 田儀作を利権運動の撃退係に あたってもらうようになった その後問題が進展して来て 京 仁両取の合併が表面化するに至ったとき 田儀作がこの間の 斡旋者として重要な役割を演ずるに至ったが この 田の行動 をもって何かうまい汁にありつこうという下心から発したもの と解する向がないではなかった しかしそれは以上の事情から 見て少くとも 田に限って そうした利己的の不順な気持でこ の問題を取扱っていたもの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當然考え 得られるようである

367 원 문 347 當時相手方の京取はどんな状態にあったかというと 創立者の 一人釘本藤次郎は最初取引所として計劃したに拘らず 時の商 工課長生田清三郎は拠るべき法令がない 今日単に京取だけを 取引所として許すことになれば各地の延べが悉く取引所になり たいと詰かけて来ている折柄であるからどんな波瀾を捲き起す かわからないというので現物市場として許可することにした 釘本としては京取が最初の志とは大分反した生れかたをしたの は全く法令の不備にあったのであるからこれを本筋に引直すた めにはどうしても法令を早く出してもらうよりほかに仕方がな いということに肚をきめていた 一方渡邊定一郎を會頭とする 全鮮商議聨合會では取引所令の発布を決議として當局に要望し た こうした事情にあったから 田 釘本 渡邊の3名は何か と總監下岡に接近する機會が多かったのを利用して取引所に対 する總監の肚に探りを入れてみた 下岡はこれに対して君等の 要望はもっとも千萬な話で自分も産米増殖計劃と共に考究中で あるから 何れ適當な時期を見て解決したいと考えている 大 體取引所というものは地方に濫設するのはどうか中央に集めて 機能を発揮せしめるのがいいではないかとも考えているという ような意向を3人が聞いた 下岡の方針によって中央集中策をとり 一大取引所の出現を必 要とする場合若し仁取と京取と度外視して新取引所が出来ると すれば重大な影響が京仁財界に及ぶに相違ない ここは一番大 いに考えなくてはならぬ場合だ この問題を若し理想的に解決

368 34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するとすれば京仁両取を打って一丸とするに限る しかも下岡 の肚にも京仁両取を合併して取引所政策に合致した機関を出現 せしめるための基礎とするという意向があることを3人は見て 取った かくていよいよ隠密の間に3人は相談を集めて行ったの であった 仁取盛衰記 覚書の交換で漸く具體化す 第一歩に手違 鳥栖忠安 下岡が病に斃れたあとを襲って政務總監として臨んだ湯浅は前 述のように取引所に対して触らぬ神に祟なし主義の男だった が 田 釘本 渡邊の3名が前總監下岡の意を體してその必要 を極力口説き立てたのには根が真面目な男だけに深く考えさせ られた ここに於て彼は殖産局內の意見を徴することになり 池田安達の説くところとよく總合して考慮した結果 京仁両取 の合併はよかろうということになった 断っておくが この時 の合併は勿論經済合併であって 仁取の移転は考えのなかに入 れられていなかった 湯浅の肚が大體きまると前記の3名は仁取 の若松社長と京取社長の天日常次郎に対して 合併慫慂の文書 を送って考慮を促した これが京仁両取合併問題を事実上進行 を開始する発端であって大正15年5月末のことであった

369 원 문 349 この合併慫慂の書面をきっかけとして 若松天日両社長の意見 交換となり 硏究の結果合併が出来るならば基礎をますます強 固にして市場の振興をはかることも出来ようというに一致し 次の如き覚書を交換した 合併条件に関する覚書 仁川米豆取引所と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の合併に関し 仮契約 締結の豫備行為として約諾をなすこと左の如し 一 合併は京取市場を解散して仁取に吸収合併をなす従前の談 合なりしも両社株式の比率決定上の都合により便宜新設合 併の方式を取り両社を解散すると同時に新會社を設立し両 社の資産業務及一切の権利義務を継承すること 二 合併後は仁川に本店を京城に支店を設け本店に於て米豆取 引所を支店において株式の現物市場を經營すること 三 新會社の資本金は690萬圓以內としこれが分配は仁取株主 に対しては舊株10株に付き新會社額面金50圓の金額払込済 株式11株 新株10株に付き新會社額面金50圓の払込12圓 50錢の株式11株を交付し 京取株主に対しては舊株10株に 付新會社額面50圓の金額払込済株式7株半新株10株に付き 新會社額面50圓の15圓払込株式7株半を交付す 但し株主 の希望によりてはこれに換て同上12圓50錢払込株式9株を 交付することを得 四 仁取株主に対し前項株式の交付の外合併の実行に先だち舊 株1株につき4圓新株1株につき1圓の特別配當を認むるもの

370 35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とす 五 新會社の名稱は株式會社朝鮮取引所とすること 六 合併後は仁取々引員と京取仲買人の業務の兼営を認むるこ と 以上 かくて いよいよ両取合併問題を具體的に進めることとなり6月 6日京城倶楽部で両取聯合の重役會を開いてこの問題を付議した が 役員會の結果は満場一致で議を進めることに決定した こ の席上には後年反対の急先鋒となった吉田秀次郎 河野竹之助 の両名も當時仁取の重役であったので勿論出席して大いに双手 をあげて賛成したものであった この合併が重役間に一人の異議もなく可決されると合併問題の 音頭取たる渡邊 田 釘本の3名はこれを言論機関に発表し た 然るにこの発表の衝に當った小野久太郎の処置に萬全を缺 き その日が恰も日曜日で各社の經済部が手薄になっていた折 で 結果においてこの発表が頗る不公平なるものとなったので 猛烈な異論がまき起り 京城日報先ず猛烈に合併反対熱の煽揚 に全力をあげて筆陣を張るに至った かくてこの問題は発端の 第一歩において全く變梃なくいちがいを生じ 意外の反対者が 現れる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371 원 문 351 仁取盛衰記 事前の説解が欠げてゐた 若松の失態 鳥栖忠安 更に今一つの失策というのは仁取社長若松が事前に大株主方面 の諒解を得ることに努めなかったことである 最初若松は曾て 京都取引所の理事長をやっていたことのある天野某を相談相手 としていたが合併問題に就ては天日常次郎にすべてを相談し た 天日は當時取引所通という點に於て朝鮮第一を以て自ら任 じていた しかし実のところ彼の取引所論は少々怪しいもの だった その天日が最初若松から合併を持ち込まれて よし来 た とばかり二つ返事で引受けた というのは京取は既にその 時衰退の色濃く新築の堂々たる建物で體裁だけは備えたが 市 場はがらん堂の観を呈し門前雀羅を張るの感があった 従って これを差し許した當局までも眼を疑われざるを得ない状態に あったのである しからば京取の如き證券取引所は不必要かと いうと必ずしもそうでない 将来こうした機関が要することは 明かなことである 今はうらぶれの京取をとりつぶしたとし て さて将来また作るということも變なものである こうなる と當局も理事者も途方に暮れざるを得ない 當局は內々天日を 呼んでこの悩みを洩らしていたが いかに智慧者の天日と雖も 頭を痛めるばかりで京取が自力で浮び上る明案もなく苦しい破 目に立っていた この時にあたって若松が合併話を持ち込んで 来たのだから渡りに舟とばかり二言といわずこの話に乗ったの

372 35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も無理はない 天日は若松に 誰にも言うな というので二人 でこそこそ話をはじめ合併の覚書を作ってしまった 従って渡 邊 釘本 田の3名が提唱したというのは裏面をつくろう手段 にすぎず そのまえにすでに若松と天日との間の呼吸はぴった りと合っていたというのがほんとうらしい 若松が 天日のみを相談対手として大株主の意向を事前に聴取 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一大失態といわざるを得ない 仁取を 我本城の如く心得ていた內海が反対した遠因は実にここに胚胎 するのである しかもこの覚書を仲買には全然諒解なしに発表 してしまったので仲買は內心誰彼れの別なく随分馬鹿にした話 だとして憤慨した まして仁取の內海を以て任じていた彼れの 自負心を傷けずにいようはずはない 第一歩において実ににが り切った気持ちになっていた かくて大株主會に先立ち6月9日 別に相談會を開き 更に11日合併に関する大株主準備會を朝鮮 信託の楼上で開くまでは內海の態度もはっきりはしなかった が 16日大株主會がいよいよ八阪に開かれるに至って反対の口 火が彼の口から切られた 京仁両取合併反対の発端は実にこの 八阪の會合にあったのである 仁取社長若松は6日に発表すると共にその翌7日には仁川府尹 朝鮮毎日社長後藤廉平その他2 3の有力者に會見 合併の動 機 意義 方法等を説明これつとめ 特に市場はこのままにし て合併するものであって本店は仁川におくから合併は頗る仁取

373 원 문 353 にとって有利なものであることをつけ加えることを忘れなかっ た 実然若松はその時市場移転は大それたことと考えていた 池田殖産局長に諒解を求めた際の如き池田が一そのこと京城に 移したらどうかといったのに対し若松は青くなって 移転など とは以てのほか もしそんなことでもいい出そうものなら大變 なことになります といって引下った事実がある この意味に おいて若松の存在は仁川府民にとって実に有難いものだった訳 だ 6月16日の八阪における100株以上の大株主會は各々利害関係が 複雑していて 必ずしも一致することのない者多数の寄合い すったので可否何れとも決しかねたが結局委員をあげて調査し ようということになり 內海叔郎 朝鮮勧業信託原勝一 今村 覚次郎 小林藤右衛門の5名が委員として選ばれた その後この 委員會はしばしば開かれたが何等得るところなく7月21日に 至って解散してしまった

374 35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荒井と古城が調停案作製 仁川側の反対 鳥栖忠安 當時の仁取はまだ鼻息の荒い時代だったので合併についても株 主はなかなか虫のいいことを考えていた 合併条件は京取と仁 取とおのおの各別に作製することとしたが出来上った二つの案 は可なりの隔りがあるものであった 即ち京取の案によれば両 取とも合併に対する株の割當比率は同等とするが仁取の株主に は30萬圓の特別配當を認めるというのである これに対して仁 取側の案は合計30萬の特配 舊株は10圓 新株は2圓50錢 を なし このうち新株の特配2圓50錢はこれを払込に充當して京 取の新株と同様に15圓払込としておいて吸収合併の形式をとり 仁取の新株7株半を交付するというのであった この大きな隔りは微温的な尋常一様の手段では双方からの歩み 寄りが困難と思われたので 両取の重役を兼任している荒井初 太郎と古城菅堂に調停案の作製を託した かくて出来た調停案 というのは次の如きものであった 合併条件仲裁案 一 京取 15圓払込 10株に対し仁取新 12圓50錢払込 9株 を交付すること

375 원 문 355 一 京取 50圓払込済 31株に対し仁取舊24株を交付すること 一 付帯条件として仁取側株主に対し舊株1株に付10圓 新株1 株に付金2圓50錢の割にて合計30萬圓を交付すること 理由要旨 合併比率算定の基礎 一 株價の比率 仁取100.00に対して京取98.65 大正15年5月29日の時價は 仁取29圓60錢 京取29圓20錢 二 資産の比率 仁取100.00に対して京取76.72 三 業績の比率 仁取100.00に対して京取60.00 以上を總合したる合併比率 京取は合計235.37となるからこれを平均すれば78.46となる 故に仁取の100に対して78.46を以て算定の根拠とする この調停案に対しては両取の重役連もここらで折合うより ほ かはなかろうということに一致した そこで會社側ではいよい よ大株主會を開いて合併条件につき賛同を求めることとした が これと同時に仁川の有志は合併は移転の前提だというので 反対の運動を起すこととなった 即ちこの運動は7月10日の公 職者大會につづいて市民大會によって火蓋を切られたのである が 仁川府民は合併問題が起るのは重役中に京城在住の人間が 居るからであると 猛烈な非難を浴びせかけた 然るにこの府 民の反対が激化する裏面に於て合併反対両派は早くも前哨戦が 行われた この前哨戦は勧信の所有株をめぐる争奪戦であった

376 35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が 反対派はまんまと出しぬかれ最初の苦敗をなめさせられる に至ったのである 京仁両合併史を通じて合併 反対両派の間に仁取株の争奪が行 われたことが前後2回ある 第1回はこの勧信所有の仁取株肩代 り事件であり 第2回目は內海の所有株が向先へ肩代りされた事 件であるが2回とも合併派の勝利に帰したのである 仁取盛衰記 芸妓の口から一大事露見 勧信の株争奪 鳥栖忠安 勧信は現內閣の法制局長官として今をときめく竹內作平や 積 善銀行で有名な高倉為三などがいろいろな魂膽から創立した資 本金1千萬圓の大會社だったが 策士連の寄合世帯のこととて策 のために倒れ その頃はすでに解散ときまっていた 従って勧 信のもっていた仁取の株一萬数千株が清算に入って大阪で売物 に出ていた そこで仁取では重役會の決議によってこれを會社 で買取ることとなった 大阪の連中にうっかり大株主となられ ることはすでに松尾の例でこりこりしている だからこの際會 社の安全のためにも纏まった株を滅多な人に握られて攪乱され

377 원 문 357 たくないとの意向も手傳っていたのだった この決議には仁川 側の重役吉田 河野の両名も勿論加わっていた この交渉には當時東京にいた荒井初太郎が大阪に居合わした 田儀作に依頼して當ってもらった 田は釜山の今井源良の紹 介で現在東京取引所の山叶商店を經營している永野護を通じて 交渉を進めた 今井はもと鮮銀の支店長から大池の支配人とな り 現在では釜山で弁護士を開いている 永野はもと渋沢の書 生から身をおこし横濱取引所の理事などをつとめたことのある 辣腕家である この手を通じて 田が買取りの交渉を進めてみ ると最初27 8圓ならば売ってもいいようなことをいっていた 勧信が急に強腰となって来た そこで話はなかなか進まない そのうちに容易ならぬ企みが合併反対派側にひそかに行われる に至った 7月27日の夜 吉田 河野 力武 その他仁川側の 有力者がe亭うろこで會合した その席上において力武が頭金5 萬圓をだして安田銀行から資金を引出し 勧信の株全部を仁川 側で引受け仁川在住の合併反対派のみで仁取を經營しようとい う密議が行われた 吉田 河野は仁取の現重役として仁取會社 自身でこの株を引取ることに賛成し重役會を裏切る行動に出た のである この會合は誰にも知らさず全く秘密の間に事をはこ ぶべく周到な用意をもって開かれたが 千慮の一失というか席 に芸妓をはべらしたことから右から左にこの密談は合併派に洩 れてしまった というのはその翌日e亭銀水で合併派の某氏が 席によんだ藝妓が前夜密談の席に出ていた藝妓であった そし てその藝妓は前夜の密談の內容をすっかりしゃべってしまっ

378 35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た 會社側では驚くと同時に吉田 河野の不信を憤った 直ち に東京にあった荒井に密電がとんだ そして大阪にあって 買 収方を交渉中の 田儀作督励の方法が講ぜられたのであった 仁川側では逸早くも陰謀が敵方に発覚してるようとは知らな い 買収の交渉には主として吉田秀次郎が當り 杉野栄八が代 表として大阪に乗込む段取りがきまっていた そして27 8圓 唱えであった 株價は双方からのせりあげで仁川側は31圓まで つけて出たが會社側では33圓で買取ってしまった 買取ると決 定してから會社側では仁川側に対して希望とあれば株を分けて やってもいい とにかく纏った株を大阪におくことが危険で鮮 內にもって来れば誰がもとうと問うところでないというので仁 川側に交渉したが 仁川側では6千5百株が1株かけても引受け られぬと言い出し最後に合併打切りの声明がないから引受けか ねると駄口をこね出し とうとう有耶無耶に終った そこで會 社側ではこれを仲買その他にも分けて持ってもらうことにして 始末した

379 원 문 359 仁取盛衰記 勧信持株肩代りの經緯 若松社長の発表 鳥栖忠安 その當時仁川側では仁取の重役が横取したというのでやかまし く非難したが 実際は以上の如き經過であった 即ちこの間の 事情につき當時若松社長は次の如く発表している 仁取株は勧信會社が多数の株を所有したために會社全體に及ぼ す影響少からざる事情にあり 従って先般来重役側においてや むを得ず勧信との間の肩代り談を始めることとなり 7月7 8 日ごろ若松社長上阪中勧信會社との間にこれが端緒を開き荒井 取締役東京滞在中 田儀作氏の手を經て交渉を進め帰鮮の逐次 勧信清算人代表者と會見接衝する処あり 同氏の帰鮮するや更 に交渉の歩を進めたるが この頃において勧信の態度俄に強硬 となり當初の豫期に反し遂に33圓以て買受けるの餘儀なきに 至った次第である 然るにここに驚くべき事実の発覚した と いうのは仁取取締役の一人たる吉田秀次郎氏が釜山の今井氏の 紹介を經て東京横浜の或る取引所に関係ある永野某氏と密約を なし 勧信持株の肩代りをなし 內6千株は東京側に持たせその 代償として東京側より専務取締役を出し取引所の実権を握ら せ 残り6千株は吉田氏一派の仁川在住者にて持ち 来る10月 の改選期において會社の乗取策を実現せんと策したる跡歴然た

380 36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ることである この事実は今井源良氏が東京より在鮮某氏に送 りたる書簡および同氏が大阪において勧信と交渉に當りたる事 実および吾人の聞知したるその他の事実により疑うべき餘地が ない かくの如きは今より10数年前大阪の松尾一派が仁取株の 買占を行い遂に専横放恣の末大正8年の春に至り仁取の大破綻に 至らしめたる經路同じきものがある 現在は6千株にしても既に 専務を出し 會社の実権を握りたる以上持株の買増は容易なこ とである かくなれば仁川取引所は仁川の取引所でなく 前述 の運命卜すべきものある これぞ朝鮮の取引所問題に內地より 魔の手が伸びると云うべきであって最も警戒すべき事に非ずし て何であろう 今回の肩代りに際し重役側の注視した點は実に この一點にあるので府民が仁取株を所有することは平素歓迎す る所であって 今回とても勧信の持株1萬2千株が全部府民の所 有に帰するということであったならば重役側は悦んで中途手を 引いたのである 然るに吉田氏の計劃なるものは非常なる危険 性を帯び仁川府民を売らんとしたものである いかに陰険なる 動作であったかは同氏が內地より帰鮮以来會社には電話すら掛 けず全くその消息を秘し日夜一流の野心家を集めて策動した事 実によって證明されて餘りがある 重役側は府民の仁取株を所 有することを歓迎するためには今回買受けたる1萬2千餘株の內 今回府民が買入のため調印したと傳えられる4千5百株に対しこ の際申出であるにおいては1株につき1圓ずつは重役の負擔に帰 せしめ33圓にて引渡しをなすべきことを明言して憚らざる所で ある

381 원 문 361 株の争奪に失敗した仁川側は いよいよ民衆運動による対抗策 をとるに至った しかもこの第一歩は合併派の根源と見られた 當時監査役大平嘉重郎に対する迫害の手となって現れた 即ち 府民の名において監査役辞任の勧告状を送るから本町の青年團 から除名するやら 力武嘉次郎の名をもって或る事件に関連し て警察に説諭願いを出すやらあらゆる手段で大平を仁川から追 出そうと策したが 大平もさるものいくら目のかたきにされ たってなかなかへこまない そのうちに內海の重役問題という 厄介な問題がまた一つ持ち上りますます局面を紛糾に導いて 行った 訂正 前回勧信株肩代りの經緯につき荒井 田が 釜山の今 井東京の永野にわたりをつけたとあったのは記者の聞き誤りで 事実は若松社長の発表の通であったから訂正する 仁取盛衰記 委任状に絡る珍談の数々 震ひ上つた人達 鳥栖忠安 合併問題が紛糾するにつれて仁取の第一人者をもって自ら任ず る內海叔郎を重役にしたらいいだろうというような説が內部に 擡頭した 內海の懇意な者のうちにも若松にまかせておかない

382 36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で內海自身が乗り出して解決つけたらいいじゃないかとすすめ るものもあった これに対して內海も仁取重役には満更色気の ないこともないので気迷いの態にあった模様である こうして この年の10月20日仁取定時總會は田中佐七郎 李柄学の両名と 共に內海叔郎を新重役に選んだ 併し當局は內海の重役就任に なかなか認可を與えそうにない 當時內海はすでに仲買店の看 板をその後継者たる內海清蔵に譲っていたが その住居が仲買 店の臺所と共通しているから別居しない限り許す訳にいかない というのがその理由である 內海はこの要求に対して例の調子 で太平楽をならべなかなか注文通り別居しようとしないのでつ いに重役就任はお流れとなってしまった こうなって来ると內 海は內心少なからず憤慨した しかもこの原因は若松社長の斡 旋が足りないこと及び大平嘉重郎の存在が邪魔をしたものと決 めてしまった かくて翌昭和2年となってから內海は合併反対の 旗幟を鮮明にして来て春の總會直前に反対の声明をなすに至っ た 總會直前における仁川の形勢をみるに前述の通り反対の具 體的運動としては大平の除名運動をきっかけに起った青年團が 仁川愛を絶叫し委任状集めに全力をあげ 若し應ぜないときは 取引拒絶 絶交等をふりかざして迫って来るので大部分その見 幕におそれて青年團の指揮するままになって行く有様であっ た 只加藤平太郎 辻川 重 直野良平等の有力なる精米筋は 仁取の移転を伴わぬ經済合併ならば差支えないではないかと毅 然としてこれに抗した 従って是等の人々はあらゆる迫害の手 が及んで来るのを免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 しかし前記の人達 は 若松 荒井 古城の3人を訪い總督府に移転せぬとの誓約書 をとってあくまでも熱狂する仁川の民心を鎮静せんと努めた

383 원 문 363 しかしそれは只自己の安全を護る以外に何等の効果はなかっ た 府民の圧迫が如何に峻烈であったかは當時仲買店を經營し ていた今村覚次郎の如き最初合併しようとしまいと株主の権利 で第3者の容喙を許さないと豪語していたに拘らず言うことを聞 なきゃ放火するぞと脅されて すっかり参ってしまって反対派 に委任状を渡し總會がすんだ後仲買人組合の總會で低頭平身し て陳謝したという事実に見ても想像せられる この總會前の委任状問題にはいろいろの珍談が織込まれた 朝 鮮信託は今こそ息もたえだえになっているが當時はまだ羽振り がよく仁取所有株1,200株の大株主の一人だった ところでこの 重役中に後藤廉平やら內海叔郎などの反対派と桑野や田中佐七 郎などの合併派がありいわば呉越同舟といった形だったので仁 取總會前に重役會を開き合併反対何れにもくみせず厳正中立を 護ることに決定した しかるにいよいよ總會直前となると社長 の平山松太郎と田中佐七郎は村田孚あたりから怒鳴られて一ち ぢみとなりとうとう反対派に委任状を渡してしまった 仁取の 監査役たる田中佐七郎がこの委任状を渡したというのだから一 寸見られぬ珍風景ではある こうした珍談を拾い上げると限り なくあるが とにかくこうした険悪の空気のなかにいよいよ合 併問題を附議すべき總會は開かれたのである

384 36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決議に至らずつひに散會 紛糾した總會 鳥栖忠安 昭和2年3月31日午後3時 70餘名の正制服警官護衛のもとに仁 取總會は事務所楼上で開かれた 仁取の周囲は合併反対を叫ぶ 府民の人垣をつくって殺気に充たされた 會場內は仁川署警部 長尾猛馬の率いる30餘名の警官を以て萬一を警戒している 合 併派の出席株主は21名 高橋章之助が長髯をしごいて先頭に立 ち物々しくも入場する 一方反対派は力武嘉次郎を将帥として 71名これまた堂々の陣を張ってにらみ合う いよいよ開會されるや両派は火花を散らして戦った 合併派で は高橋章之助 斎藤五吉等の闘士を陣頭に立て 反対派は力武 を中心に後藤廉平 杉野栄八等が必死となって渡り合い火の出 るような論戦が展開された 若松社長は株主席の中央にテーブ ルを持出し演説しはじめたが昂奮のためがたがたぶるいしはじ め 今にもひっくり覆りそうなので側にいた小林良蔵が心配し て足をしっかりと握っていたという 混乱の限りをつくして収 拾の途がつかないので6時50分に至って休會を宣して若松社長 以下引っこんでしまったが 屋外の民衆はますます昂奮しては ては事務所の窓硝子をめがけて投石するものなども出て来てつ いに数名の検束者を出すという騒ぎとなったが このまま放任

385 원 문 365 するときは容易ならぬ事態に立ち至りそうな形勢となったので 其筋の注意により 決議に至らずしてそのまま散會した この 總會は気の弱い若松では甚だ心もとないという心配があったか ら渡邊定一郎などは若松を病気と稱して引き込ませ豪気の荒井 初太郎を議長席に立たせて押し切ろうと裏面にあってすすめた こともあったらしいが この言を入れず若松自身で議長席につ いたために憂慮された通り有耶無耶に終るに至った この總會では委任状に疑義があるというので反対派から調査を 要求したので委員をあげて調べることとなったが その日結末 つかず 警官立會の上これを封印して警察に保管して貰って4月 1日精密に取調べることとした ところがいよいよ翌日の4月1 日になって仁川署に関係者が出頭して取調べるという段になっ て 署長からこの書類を受取るとき加来次 が進み出て 仁 取の創立者加来栄太郎の嗣子うやうやしくこれを受ける と芝 居口上がかかの身振りをやり出し一同あっけにとられたという 場面もあった

386 36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米田の調停で一時見合せ 仁川祝杯をあぐ 鳥栖忠安 その後4月24日の定例總會に付議した新株の申込について會社 がとった方法に疑義があるとて訴訟問題を惹起したりして可な り紛糾したが この紛糾をこのまま放任するときは治安上にも 憂慮すべきものがあるというので本府の內意を受けた京畿道知 事米田甚太郎が両派を各別に呼んで懇談した結果 無条件で一 任することとなり 7月17日継続會を開いてこの問題の解決を 一旦保留することとなった この時仲裁が成立すると 米田知 事は若松 荒井 秋山等の會社側と 反対派の力武 後藤 杉 野の3人を知事室に呼び寄せ 時の內務部長井上清と警察部長の 土師盛貞立會の上で覚書を交換した 米田はこの時延期という ことにしたが 仁川側は打切りと解して祝杯をあげた しかし 実際は荒井に対して米田が與えた諒解というのは昭和4年5月末 日で営業満期となるからその際問題を解決したらいいではない か それまで待ったらどうだという意味の內談であったらし い 即ち當時若松社長の名において株主に発表したる覚書の內 容は次の如きものであった 覚書 一 仁川米豆取引所と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との合併の件はこ れを延期し合併に関する現在進行中の手続は一切これを撤

387 원 문 367 廃すること 二 合併に関する繋争中の訴訟は一切これを取下げること 三 従来の行掛を一掃し仁川米豆取引所當事者を援助し一層そ の機能の発揮を圖ること この合併問題が一頓挫を来すこととなったために 若松社長は 責をおって社長を辞することとなった 5月21日の臨時總會に おいて再選されたが經營の自信なくしてその地位にとどまるを いさぎよしとしないというので社長就任を辞退し 荒井初太郎 が代わって社長となった この時支配人の秋山満 も辞意を申 し出でた 若松は 荒井社長を助けて最初の志をつぎ合併実現 に邁進するように後事をたのみ極力留任をすすめた結果 秋山 はそのままふみとどまることとなった これと同時に仲買人側 でも小林藤右衛門が委員長を辞任して副委員長だった桑野健治 が委員長となり 新田吉民が副委員長となった なおこの年の 10月の總會で監査役の大平嘉重郎も辞任し 仁川側の要求に よってその後任として野口文一が監査役となった それから合併派は米田知事との約を守って鳴りを静めていた が いよいよ営業満期が近づくようになってから內部的に徐々 に準備を進めた 昭和4年3月 荒井社長は 殖産局長今村武志 を訪い 當局の意向をさぐると共に京仁両取の重役に釘本 渡 邊を加えて隠密の間に謀議をすすめて行った 當時總督府の空 気は 總督山梨半造が釜山上陸第一歩においてその声明書のな

388 36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かに取引所問題の政治的解決をほのめかして乗込んで来て以来 商工課長の児島高信は取引所令立案の準備に着手して豫算1萬圓 をこのために振向け 昭和3年7月商工省の取引課長藤田国之 助 監督官長田彦太郎 島剛の3名に制度調査を願託した しか して 長田 島の両名は京仁両取をはじめ各地現物市場を約1ヶ 月に亘って実地に調査した 仁取盛衰記 鰻丼から足がつき問題は再燃 山梨諒解を與ふ 鳥栖忠安 長田 島の両監督官が仁川を視察した結果 仁川には取引所を 置くべき要素は非常に少なくなっているとの結論を得たらし い このことを知った仁取関係者に總督府が新にとらんとする 方針は分散主義でなく集中主義であることを察して仁取の移転 は避くべからざるものと肚をきめてしまった それと同時に両 監督官の意見は 取引所は當業者の機関にして當業者にあらざ るものがこれに対して云々するのは一顧の價値なきものであ り 仁取の仲買が口を揃えてこのままでは立行かないといって いる今日仁取を将来このまましておくことについては大いに考 えねばならぬというにあった模様である しかして一方又穀物 協會側と両監督官が會見した際も協會側は現在の仁取はほとん

389 원 문 369 ど利用していないこと かけつなぎは大阪 東京でやっている などを説明したので 仁取仲買と 協會側のいうことがぴった りと一致し両監督官を首肯せしめたのであった ここに於て仁 取関係者は仁取の京城移転に対する自信をますます固めるに 至ったのでる 山梨は下岡と同様有力なる中央市場建設の意向をもっていた 少なくとも京城と釜山の一ヶ所位にしたいと考えていた この 方針につけ込んで生れたのが東京川崎徳之助の釜山取引所事件 で山梨を失脚せしめ その晩年に汚點を印する事件となったも のであるが 京城の取引所については島徳の調査となり大村百 蔵一派の朝鮮取引所運動となってあらわれ風雲は刻々に迫って 来た 7月17日に至って總督府は今迄提出されていた願書を一 度全部差し戻してしまった 山梨の最初の考えでは荒井 天日が唱へる朝鮮モンロー主義を 排して內地の大資本を入れなくてはいけないというのであっ た 中央において大資本を擁する取引所が出来 これが付帯事 業として各地に倉庫を經營し 移出の調査をしてはどうかとい うのである これに対して天日は倉庫の經營に補助してもらう が建設資金に補助を呉れるなら別問題だが それでない限り到 底珠盤はとれないとて詢々として説いたので山梨の頭もすっか り變わって来た そしてそれならば資本を出来るだけ減じて本 来の使命に進むがほんとうだ そのためには両會社を合併して

390 37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を京城に移したらよかろうというので山梨の諒解を得るに 至った 昭和4年3月の20日頃 當時京城商議會頭渡邊定一郎の自動車が 京取の玄関前に意味ありげに停まっていた やがて內部から出 て来た當の本人渡邊はじめ釘本 荒井 秋山 古城といった連 中は愉快そうに談じ合いながら自動車に乗込みいずくともなく 立ち去った 京取2階の重役室には渡邊の最も好物とする松金の 鰻丼が散々喰い荒された残骸を残していた この情景から足が つき 內部的に燃えつつある京仁両取合併問題を某新聞記者に かぎつかれ また問題は表面化して来た 仁取盛衰記 總督山梨の諒解成る 荒井尾間を警戒 鳥栖忠安 これより先き山梨は合併派に対して仁取の京城移転に諒解を與 えると共に資本金500萬圓としてやれ それでいけなければ解 散したらいいじゃないかと言い出し 合併派を散々手古摺らし た 合併派は泣きついた末90萬圓せりあげて 590萬圓でやろ うということに諒解がついた そこでこのことを東上中の政務

391 원 문 371 總監池上四郎に殖産局長の今村武志から諒解を求めたが 池上 はうなりうなりでなかなか賛成しない これには合併派のみな らず今村も困った 池上がうんといわないのも道理 山梨には 合併派がお百度を踏んで諒解に努めたが 池上はさしおかれた 形で一言の挨拶も受けていなかった これに対して內心いささ か不愉快に思っていたからだった 荒井はハットこの點に気が 付いたので 早速かけつけて鞠躬如として池上の前に伺候し 諒解につとめた結果 池上もやっと うんと言った かくて3月28日両取は聯合重役會を開き合併条件を発表した その內容は次の如きものであった 一 両社は新設合併の方式に依り合併し 営業所を京城に置 く 仁川には之を置かず 二 新會社の資本金を金590萬圓とし 仁取株主に対しては その10株に対し9株の割 京取株主に対しては同10株に 対し8株の割をもってそれぞれ同種同等払込の新會社株 式を交付すること 三 前項の株式交付の割合によりて生ずる払込金の差額 仁 取分金15萬圓 京取分24萬210圓 はそれぞれその資産 の減價償却に充當すること 四 仁取の法定積立金75萬圓は仁取株主に特別配當 5割 すること 會社側では直ちに大株主會を京城花月本店に開きこの合併条件 につきその意向をさぐったが圧倒的多数をもって賛成したので いよいよこれが実現に向かって進むことにした

392 37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こうなって来ると仁川府民が沈黙していようはずはない 府民 大會を開くやら公職者を以て合併阻止の運動を目的とする團體 を組織するやら気勢をあふりはてはむしろ旗を押し立てて 本 府及び京畿道に押しかけかねまじき形勢を示した 時恰も皇弟 高松宮殿下には練習艦隊に御乗組遊ばされて 御来仁に相成る こととなった この事を知った府民は高松宮殿下に直訴するな どと騒ぎ立てた 驚いた當局はそんな無茶なことをされてはこ ちらの首がいくつあったって足りるもんじゃないというので時 の京畿道知事渡邊忍が仲裁に乗出し一時停戦方を双方に申し入 れたことにおいて取引所側は總會を中止せざるを得なくなっ た 若しこの時總會が開かれていたならばすでに山梨總督時代 にこの問題は片付いていた筈であった 渡邊忍は今度の移動で 京畿道知事から殖産局長に転じたがこの點については多少の責 任を感じている模様である ここに特に記憶に留めておき度いは當時山梨をめぐって朝鮮統治 を撹乱した側近の奸尾間 肥田をして一指もこの問題に染させな かったことでいる 尾間は荒井が內地にいた時代から知っていた 人物であった 従って京仁両取合併問題につき 尾間はしばしば 荒井に意味深長の をかけることを怠らなかったが 荒井はそら とぼけて断然これをしりぞけた 彼等をしてこの問題にたずさわ らせなかったことは単に荒井個人のためばかりでなく仁取 京取 の将来のためにも幸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出来る

393 원 문 373 仁取盛衰記 山梨挂冠して斎藤再任す 天日荒井やむ 鳥栖忠安 昭和4年の春ごろから胃癌のために福岡の大学病院に入院した天 日常次郎は病次第に革まり これと同時に膽石病に悩んだ荒井 初太郎も同じく福岡大学病院にあって両巨頭枕を並べて病褥の 人となった 荒井は間もなく全快して海雲臺に静養することと なったが 天日は再び起つ能はず その年の7月に至ってついに 死んでしまった 巨星地に隕つ天日の死は合併派にとっては大 きな傷手だった 朝鮮米穀界の大立物として合併劇の立役者と して華かなりし天日の生涯は彼の遺産が生前世間から想像され ていたよりもはるかに大きなものであったという一事を物語る ごとく頗る周到な用意と健実な方法の連続であった 合併問題 についても最後のゴールに入らんとする時にあたってこの役者 を一枚失うに至ったことは少なからぬ損失であった 取引所問題についてはいろいろの意味において大きなかかわり をもっていた總督山梨は挂冠した その後任總督として斎藤実 が2度の勤めをすることとなった この山梨の引退と相前後して 總督府には大異動が行われた 山梨の裏面を摘発した警務局長 の浅利三朗が山梨より一足先きに退官したのは言わずもがな 內務局長の生田が退いて後進に途を開き その後任には殖産局

394 37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長の今村武志が据わり 土地改良部長だった松村松盛が殖産局 長の後釜にへし上った この時商工課長も更って児島高信のあ とに土師盛貞が逓信局海事課長から転じて来た ここにおいて 合併劇も役者を入れかえて場面はがらりと變らざるを得なく なったのである 斎藤が再任總督として乗り込んで来て間もなく 取引所に関す る問題は法令発布後でなくては一切処理しない 但し既得権は 尊重するという意味の声明をした しかしこれだけではなを合 併派としてはどこに向うべきか甚だ漠としてつかみどころがな いので荒井初太郎以下會社側はしばしば斎藤を訪問してその意 見をたたいたが斎藤はなかなか肚を割らない 荒井は 前總督 山梨とこの問題との関係を詳述して もし山梨の方針と變って いるならばそれに順應する 若し合併がいけないというならば やめてもいいから方針を示してもらいたいと極打割った とこ ろで出て見たが 斎藤はそうでも方針を示さず しかも合併問 題をやめてもいいといったのに対してはそうまでする必要はな いではないかといった 合併派としてはこの言をいろいろに解 釈したのも無理はない 經過をたどって来ると この問題の紛 糾の原因は總督府の煮え切らぬ態度にあったことが明らかで 大部分の責任は當局がおうべき筋合のものであることが明らか となって来る この總督府の態度が煮え切らなかった裏面には 山梨の下に殖

395 원 문 375 産局長としてその當面の責に任じたその當時の內務局長今村武 志と殖産局長松村松盛のとった方針とが全然食い違っていたこ とにあることも見逃せない 松村は合併派に対しては何等の引 継をうけていないとて前任者時代のすべてのいきさつは一蹴し てしまって新規蒔き直しに出た これは山梨時代のいきさつを 知悉している今村としては苦しいことに相違ない それと同時 に合併派にとっては人は變っても當局は當局である その當局 の責任ある人から聞かされたことが人が變ったためにがらりと 變わり非常な不利益な立場につき落されねばならぬということ は法治国の国民としてたえられることではないにきまってい る それでも泣く子と地頭には勝たれぬという馬鹿気切った矛 盾が現代にもいくらもあることを記憶せねばならぬ 仁取盛衰記 堆派と握手して反対熱昂る 重役改選を前に 鳥栖忠安 その後仁川は斎藤にあててしばしば合併移転反対の陳情を試み た この陳情に対して仁川の朝鮮毎日新聞紙上に斎藤總督は仁 取は仁川のものであって絶対に動かさないといったという意味 の記事が報道された 土木協會の一階にあってこの記事を見た 荒井初太郎はかんかんになっておこった 當局の方針に差支え

396 37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があるならこの合併はやめてもいいといったのに対して總督は それには及ばぬといっておき乍ら今更こんなことを總督が言う とは以ての外だと總督のところに怒鳴り込みそうな見幕だ 居 合わせた連中甚だ心配してこの由を渡邊定一郎に通知した 渡 邊は取るものも取あえず駈け付けて来て荒井をなだめた 反対 派側の新聞だけに報道されたものを事実と見るのは早計であ る 従ってこれだけでは苦情を持ち込む理由とはならないとい うのである 荒井もさすがに考えた そして經過を見ることに なった 仁川側はこうした記事が報道されたにかかわらず 相變わらず 民衆運動を続けて行った 民心は次第に尖鋭化して行くのみな ので心配した仁川署長は反対派の幹部を呼んで先日の新聞によ ると總督もああいっているからもうこれ以上に熱をあげなくて もいいではないかと懇談した 然るにこの時 死んだ河野竹之 助が 実は大きな声で言われぬが 總督がああいったというこ とが頗る怪しいので油断は出来ない立場にあるのだと 本音を 吐いたと傳えられる この反面總督府の取引所令公布の準備は商工課長土師盛貞の手 で着々進んで行くかに見えた 合併派はいてもたってもおられ なくなって来た 時恰も昭和5年10月仁取は荒井社長以下役員 の任期が満了して改選の時期となって来た この機會を利用し て役員を一挙に自派側の手に収めんとする運動が仁川側に起

397 원 문 377 こった この役員改選にからんで起った2つの問題がある その 一つは朝鮮信託を中心とする堆浩一派の策動であり 一つは內 海家所有の仁取株の争奪問題である 堆は丸大仲買店を經營していたが 朝鮮信託を桑野健治から 奪って以来これを根拠として 仁川の各事業會社にその羽翼を 延ばし 仁川においては飛ぶ鳥を落とす勢いとなった この勢 いに乗っていろいろの無理をしたために朝鮮信託の行詰りとな り さらに一方府民の一部に反感と憤激が昂まって行った こ の憤激はさらに攻撃と化し 堆の勢力下にあって 咸南の不動 産を払込み資金に引きあてた朝鮮産業會社の內容摘発となって 現れた 堆一派の朝鮮信託苦境切り抜けは必然的に仁川側の仁 取乗取運動と握手した 朝鮮信託の資金難を救う唯一の途は仁 取の積立金を朝鮮信託に移すことである それには現在の重役 連が頑張っていては邪魔になるから これを追っ払うよりほか はない 現重役が邪魔になる點において合併反対派と全く相一 致するのである かくて 堆一派の加擔によってこの空気はま すます激化されて行った 昭和5年の春のことだった 荒井初太郎は 突拍子もなく早出を して仁取に姿を現した その日 取引員組合委員長の桑野は京 城で荒井と會見する約束となっていたので 仁取に早目に出て 用務を片づけこれから荒井と會見のため京城に行くからと周囲 のものにいったら 給仕が社長は今日早朝に来たと告げた 敏

398 37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感な桑野はこれはおかしいぞと考えた次の瞬間に內海のところ に来たのだなアと直感した 荒井に會った桑野は単刀直入この ことをたずねたら 圖星をさされた荒井は半苦笑しながら一切 を打明けた 仁取盛衰記 內海の株を潮崎が肩代 極秘裏に纏る 鳥栖忠安 荒井の內海家訪問は合併問題をいよいよ本腰に進めることにす ることなれば大株主の意志に反して押し切る訳に行かぬからそ の意向を一應たしかめる必要あったためである 右か左か 雨 か風か內海の株の向背一つで合併の運命は決るという瀬戸際だ けに內海家の所在は最も重大視されねばならぬ 然るに內海の 態度はなかなかはっきりせぬ 合併は不賛成ではないが委任状 は未亡人一人で勝手にきめて差上げる訳には行かぬというので ある これにはさすがの荒井も困った 最後に內海叔郎生前か らの顧問格であり御異見當である桑野良太郎が乗出し説いた結 果 死だ叔郎の兄貴にあたる人で郷里播州に住んでいる坊さん がおるが この人に問合せ中でその返事が10月の7 8日頃まで には来るからそれまで待って呉れというのであった これには 荒井は勿論合併派の中継に参與している連中すっかりしょげて

399 원 문 379 仕舞って一時何もがも投げた気になっていた 10月の9 10両日に亘って清州に全鮮穀物商組合聨合會が開か れた 一切をなげた気で失望しちまった桑野がこの會に出席す べく仁川を立つとき 浅野が なげるのはまだ早い何とかなる から持って呉れとしきりにとめた その時すでに浅野は新田義 民とひそかに協議して 折柄の大豊作で棒下げ相場の大潮流に 乗ったあたり屋の大株堂島の潮崎に持込んで內海の株の肩代り を劃策中であった 潮崎は當時売りで儲った 金がザット見 積っても300萬圓を下らぬといわれていた時だけに4 50萬圓の 金を投げ出すに手間ひまはかけなかった 浅野の交渉を よう ござんす とばかり引受けた 10月14日の京城駅頭には勇み立った浅野と新田の2人が人知れ ず京釜線列車の出発時間を待っていた 乗客のこみ合うなかに まぎれ込んだ2人の姿は一路遠く下ノ関に走って 內海家の持株 のうち9千株は舊株78圓新株28圓で我国米相場界の大立物潮崎 藤太郎の金庫のなかにおさまった だがこの株の買手が潮崎で あることは久しい間関係者以外には知られなかった 荒井も知 らねば秋山や桑野も知らぬ 従って世間が知ろう筈がない そ れほど手ぎわよく行われた これより先仁川の反対派では吉田 今井が代表して內海家に持株を売って呉れと申込んだ 內海家 では売ってあげてもいいが何月何日までに決定してほしい い つまでものんべんだらりと待たされてはこちらが困るから期日

400 38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をきめてはっきり約束してもらい度いときっぱりした返答で あった 吉田 今井はこれを諒承して帰ったことは無論のこと である 然るにこの內海の株が內地の方に肩代りされたという ことが逸早くも傳えられるや仁川側は村田 吉木 金允福 の3名を問責委員として內海家に差向けた 右3名は內海家に乗 込んで行って仁川を売るものであるとて怒鳴り立てたが 內海 家としてみれば自分の持株を処分するのに他人の干渉を受ける 筋合のものでない ましてさきに約束した期日までに仁川側は 何等の方法を講ぜず今更の抗議はちと片腹いたいというので 返って逆ねじを喰わしたのでこれにはさすが鼻息の荒い3人もだ アーと参ったらしい この內海の持株肩代り問題についてはいろいろの挿話がから まっている 最初は潮崎だということが知れなかったために各 種の流言や 當推量が行われた そのうちの傑作の一として吉 田秀次郎氏の天佑問題というのがある 潮崎ということは判ら ないが下関に行ったことは知れていた そこで吉田氏は仁川の 反対側が多数集まった席上 咳一咳していったことがふるって いる 買取った人は下関の通運支店長のまことに懇意な人であ るからこの手を通じて委任状をとれる 仁川にとって天佑とは まことにこのこと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 これを傳え聞いた合 併派は気やすめも程があるとて笑うところかおどろいていた

401 원 문 381 仁取盛衰記 大混乱の仁取定時總會 天王山の重役改選 鳥栖忠安 10月の定時總會が近づくと仁川側は毎夜の如く會合を開いて決 死の勢いで合併阻止の運動をつづけて行った 內海の株を手中 におさめた合併派は勝算歴々たるものがあるのでおちつきは らって微動 もしない そのうちに堆一派の策動は 總會直前 になると 朝鮮信託 朝鮮産業の內容に関する告発者が現れた ために司直の手が及び日に影が薄くなって行った こうした空 気のなかに10月の定時總會は開かれた 仁川側の反対運動が猛烈の度を増して血の煙も降らしかねまじ き勢いを示したので當局は警戒し始めた 總會前に双方を呼ん で今回は合併問題を附議しないことにして穏やかに済ますよう にしたらどうかと懇談した 合併派は勿論最初からそのつもり であったから異論はなかったが 反対派にしてみると仁取の重 役全部を合併派で占め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は間接的に反対派 の敗北を意味する つまり合併問題の天王山は重役改選にある のである そこで表面的には當局の意向を諒として引取った が 內面的には尖鋭化して行く府民の気持ちをどうすることも できなかった 実際反対派內部に於ては長老連の威令が行われ ないのみならず 寧ろ長老連は引きづられる形となっていた

402 382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かくて26日の總會は開かれたが 仁川の反対派は總會を混乱に 導き決議を成立せしめないという戦法に出でたため最初名状す べからざる混乱状態を呈した この定時總會は更に継続總會を 11月6 7日の両日に亘って仁川公會堂に開いたが 病躯を押し て出席した荒井があくまでも毅然として奮闘し ともかくも重 役は全部居据りということにけりをつけてこの總會を終わっ た この總會後仁川側は議事録偽造の訴えを提起して重役の當 選無効を主張したが ついに物にならず 合併派の勝利に帰っ た 總會の終了後間もなく堆一派はついに司直の手が動いて収濫さ れ豫審に附せられたが 合併派は重役の改選がすむと共にいよ いよ本腰に合併問題を進め暮も押しつまった 12月の29日臨時 總會を開いてこの問題を付議することとなった 前回の例にか んがみ仁川に於て總會を開くときは完全に議事を進めることが 出来ないというので京城の公會堂で開いたが 仁川側は例に よって定時總會と同様の議事妨害を試み そのために2名の検束 者まで出した 會社の解散合併は株主の半数以上の同意を要す ることとなっている商法上の規定を利用して 仁川側は俄か仕 立の株主を多数さしむけたためこの總會は仮決議に終わり明け て 1月10日再びこの仮決議の承認を求めるために臨時總會を 京城公會堂に招集しいよいよ合併することに決定した この合 併条件は次の如きものであった 一 新會社の資本金は619萬1,800圓で1株の金額を50圓全額 払込済2萬22株12圓50錢払込済み株10萬3,974株を発行

403 원 문 383 する 二 仁取の全額払込済み株及12圓50錢払込済み株各10株につ いて新會社の同額払込済み株各10株 三 京取の15圓払込済み株10株に対し新會社株12圓50錢払 込済み株8株 四 仁取の積立金60萬圓は株主特別 配當舊1株につき20圓 新1株につき5圓 にあて15萬圓は仁川府及仁川商工會議 所に寄付してその残額は解散費用に充當する 五 仁取は京城に移し京取と合併する 仁取盛衰記 合併派の運動も方向を転ず 法令に対し猛運動 鳥栖忠安 この仁取の總會前後から商工課長土師盛貞は取引所令の立案を 急ぎつつあった そして間もなく同法令案は總督府の手をはな れて中央政府に回付されたと傳えられるに至った 合併派の運 動も多少方向を転じて臨時總會の決議が容認せられるような法 令たらんことに向かって注がれた 即ち 仁取の移転既設會社 の合併會社組織の取引所が許されるのみならず 同一市場に於 て米株が上場出きるようなものであり つ米の取引所は中央 集中主義であり度いといった希望を拓務省に向かって盛んに運

404 384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動し始めた このために荒井 小杉の両社長をはじめ取引員組 合委員長の桑野健治などは東京へ詰め切りの状態であった 合 併派の猛運動が東京に行われるようになると仁川側でも黙視が 出来ず これまた仁取移転反対運動のためなけなしの金をはた き出して委員を東上せしめた 仁川側の運動資金はもはや缺乏 の極めにあった 各町內で集める金には限りがある 裏長屋の おかみさんの臍繰金ももうつきていた 大衆集まったところで は女房の着物を質に入れてもいとわぬといったような勇ましい 言葉も出るが 家に帰って冷静となれば私生活を破棄してまで 出そうというものはない そればかりでなく 相當の金持連中 が出しおしみをするといった有様で 火の如き仁川愛の叫びも 結局は口先の問題にかわらざるを得ない 従って仁川側の運動 も結局は労力奉仕ならいとわぬが 金となるとしりごみすると いったのが真相であった 重役改選の仁取總會がすんで間もなく 取引所令の草案が內地 に廻付されたと傳えられる 前に荒井 小杉の両取社長は殖産 局長松村松盛を訪問して法令の制定にあたっては既設會社の権 益を保護して貰いたいとの希望を申出で仁取としての平素の希 望を述べ 市場の法令違反行為による打撃と過重の負擔になや み切っている現状を何とかして貰いたいというにあった この 希望はついに當局から顧みられるところなくて今日まで来てい る そこにもって来て 新に出る法令に於ては既得権が尊重さ れないということになれば打たれたり履まれたりの惨めさであ る そこでこの権益の保護を第一義として新に制定されんとす

405 원 문 385 る法令の全文が不可能ならば要點だけでもいいから一應民間 に 諮問して貰いたい 暗打ち的に法令を出されるというのは ちと酷すぎるといった意味の陳情もあわせてした その後東京電報は新令に於ては會員組織として株式會社組織は 全然認められぬという意味を報じて来たので合併派の旗色は甚 だ振るわ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った いつも合併派形勢が有利 になると東京から電報が来て たたきこわされる感がある こ れには合併派も少なからず不審としていた いろいろと探った 結果 一部に推定されたところによると 以前京城にいたこと のある某紙の記者にして 北崎某という人物があり 拓務省に 出入していたが これが大分県出身で反対派の巨頭後藤廉平と 懇意 反対派に頼まれで同方面の情勢をさぐり仁川側に有利な 解釈を與えて報道していたらしいということになった しかも 仁川側はこの人物を利用して官邊の一部との連絡をはかってい るとさえ見る向もあったが 合併派はこの種の報道について仁 川側と東京と何か連絡が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と見ているよう である

406 386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仁取盛衰記 米倶楽部廃止と京城延の復活 仁取には大打撃 鳥栖忠安 12月29日の臨時總會を召集した裏面には大いに理由があった 11月下旬頃のこと 新法令に於ては會員組織以外は許さぬと か 米株の同時上場は認めぬとか いった様な意味の東京電報 にお された合併派は 殖産局長松村松盛について東電をどの 程度まで信じていいか質した その時 松村は東京電報の內容 は信ずることが出来ぬ 現在審議中の法案は合併を妨げるよう なものでないと言明した 合併派は考へた 法令が発布されたあとで彼れ是れと言ったと ころでそれは何の役にも立たぬから事前に株主の意向を明示す る必要がある そこで總督府に交渉した結果 總督府も商法に 於て許されたる範囲に於ける株主権の行使についてはとかく関 渉すべきではないというので 臨時總會をやむを得ずとして認 めるに至ったものである これより先き商工課は5月20日付をもって市場規則を改正して 従来実質に於て仁取仲買店の出張所であった京城の米倶楽部に 対して一斉に閉鎖を命じて8月1日より施行することとなった

407 원 문 387 この結果明治町を中心として散在した米倶楽部は8月と9月の両 月に至って残玉を整理して消滅してしまった この倶楽部廃止 の決意を固めると共に土師商工課長は仁取の秋山支配人を招致 してこっそりその意向をたずねてみた 秋山は取引所令が発布 される前に手をつけて貰っては困る この際姑息な手段による ことは反対だといって頭からこれに反対の意志を表明した 土 師は秋山のこの意向を聴取したのみで誰にも口外して呉れるな と堅く口どめした そこで秋山も土師の意を諒として誰にも話 さなかった その矢先藪から棒の様にぽかりとこの米倶楽部廃 止の命令が出たのだから たまらない秋山も廃止に同意したも のだろうと業界から不信認を叫ばれ 秋山は頗る苦しい立場に 置かれるに至った 米倶楽部の発生には古い歴史がある 宗喜平などが塩倶楽部と 看板をあげて米倶楽部を經營していた頃などはまさにその全盛 期で一時府內に8 90度に達したとさえある 従って今の山口 県知事たる平井三男が商工課長時代の如き むしろこれを公認 しようかといったほどで その後當局でも米倶楽部繁栄の反面 には弊害が少くないとにらんで徐々に圧迫の手を加えるに至っ たが 仁取の取引員側の希望としては濫立は弊害なりとしても 相當に数の制限が出来るならば寧ろ存続してもらい度いという のであった かくて總督府は當業者の意向をきくこととなった が 當時京城に受場をもたなかった桑野取引店一店であったか ら桑野を明治町の末広に呼んだ懇談の結果は一店一ヶ所主義と することになった かく数を制限すると仁取取引員側の希望は

408 388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延を厳重に取扱って貰い度いというにあった こんなに強硬意 見が出たというのは群山 釜山 大邱の延べを取引所に昇格せ しむ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おぼろげな當りがついていたため取 引員としては當局の態度に細心の注意を払うと共に機會あるご とにその真意をつかみたいと苦心していた この強硬な主張も 同様の意味において當局の肚をさぐるべく打つつけてみたとも 見られる 米倶楽部廃止の結果は京城と木浦の延べ市場が復活 した 仁取に打撃を與えて延べをこやしたという以外に何等の 効果ももたらさなかった 新法令においては會社の合併は許すが仁取の移転は許されぬと いうことが明かとなった これは合併派にとっては非常な痛手 であった かくと知ると荒井 小杉 桑野の3名は取ものも取あ へず東上して拓務省方面に折衝したが總督府のこの方針を覆す ことは出来なかった しかも新に生れんとする取引所政策は地 方分散主義である 合併派にとってはますます痛い そこでせ めて京城に受場を出させることにしてこの間に緩和をはかりた いとの最後の望みを拓務省に持込み拓務省も同情して斡旋した が それすら容認されずしてついに法令は公布されてしまっ た

409 원 문 389 仁取盛衰記 合併決議成り新時代展開 合併派の勝利 鳥栖忠安 荒井 小杉 桑野の3名が東上中に肝腎の取引所令は公布されて しまった 新令のなかには移転は許されぬけれども會社の合併 だけは認められていた 許されたる範囲において移転を伴わぬ 合併を進めるか否か諸説粉々たるものがあったが 3名が帰って 来てみると合併派は依然として許されただけのことをこの際 やっておくという方針に出た 施行規則が出るのを待って さ きに決議した合併条件の改訂承認を求める臨時總會を開くこと となったのである これより先き總督斎藤実は2度のつとめをい い加減に切りあげて 今度こそは本當に官界から引退の決意を した これに伴って總監児玉秀雄以下挂冠して 內務局長今村 武志 殖産局長松村松盛も朝鮮を引きあげるに至った 斎藤の 後を襲って宇垣一成が總督と決るまでには內面的にいろいろの 經緯があったが とにかく宇垣は女房役に今井田清徳を抜擢し て 政務總監の椅子に据えた かくて取引所令を生んだ関係者 は退官したり転任したりして いよいよ施行規則が出る頃には 全部新手に入れかわっていた 政務總監今井田は施行規則発布の直前荒井 小杉以下合併派の 2 3を呼んで合法的の合併であるならば進めても差支えないと

410 390 미곡거래소 仁川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 いう意向を傳えた そこで合併派でもいよいよ安心して最後の 問題を解決すべく具體的に計劃を進めるところであった この 運動に対して仁川側がまたいきり立って反対気勢をあげたこと はいうまでもない 仁川側にいわせると合併派がこの際この程 度で満足しているのは表面だけのこと いずれは隴を得て蜀を 望む時代が来ることは明らかである つまり相當の時期を經過 すれば根本的に法令の改正運動を起こして仁取を京城に持ち去 ろうとする 底意を有することは明らかであるから あくまで 反対すべきだというのである 仁川側のこの観測は必ずしも當っていないと誰が否定出来よ う こうしたことが実現できるか出来ないかは別問題として仁 取の京城移転は合併派の衷心からの希望であり畢生の念願であ る しかも大邱 釜山 群山と各地の延市場が取引所に昇格と 決している今日 仁取の将来は京城移転以外に生きる途がない ということは合併派の誰しもが考えているところである 合併案の變更についての承認を求むべき臨時總會は本月6日京取 楼上で日を同じくして午前と午後に分けて両取とも開かれた 移転を伴わぬだけに合併条件は左の通り變更だれていた 一 資本金を659萬9,800圓として全額払込済株2萬24株 12 圓50錢払込済株11萬1,972株を発行する 二 京取の払込済10株に対して新會社株7株半 同15圓払込 済株式10株に対し新會社株9株

411 원 문 391 三 仁取の積立金の內75萬圓は株主特別配當 舊株1株につ き25圓 新株1株につき6圓25錢 に充てその残額及繰 越金は仁取の解散費用に充當する 四 新會社は本店を京城黄金町2丁目99番地に 支店を仁川 府海岸町3丁目におき京取仁取を以ってこれに充てる 6日の總會においては仁川側は常套的の策戦を以って言うだけ 言った後でさっさと引きあげて行った 昨年12月末の總會と同 様 株主頭数をふやすことによって仮決議におわらせたことは 言うまでもない この結果更に仁取は本月25日の定時總會にこ の仮決議の承認を求めたが 仁川側の最後の猛闘も効かなく ついに成立してしまった 取引所令の発布を一の転機として仁川には善かれ悪かれ新しい 時代が展開した 今後如何なる行き方をなさんとするか 頗る 興味を以って将来をながめるものは単に筆者だけではなるまい 終わり 筆者申す 悪文を永らく御目にかけましたが ここに一應打切ることとしました 回 を重ねること57回仁取の大あらましをうつしたつもりですが洩れたところ も少ないと思います 何れ機會を見て更に何かの方法で完全に近いものと して御参考に供したい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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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자 료 395 (자료1) 인천미두취인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정관 및 세칙 1. 株 式 會 社 仁 川 米 豆 取 引 所 定 款 第 一 章 名 稱 位 置 地 區 及 營 業 期 限 第 一 條 當 取 引 所 ハ 株 式 會 社 仁 川 米 豆 取 引 所 ト 稱 ス 第 二 條 當 取 引 所 ハ 仁 川 港 日 本 居 留 地 第 五 十 三 號 地 ニ 設 置 ス 第 三 條 當 取 引 所 ノ 地 區 ハ 日 本 支 那 各 國 ノ 三 居 留 地 トス 第 四 條 當 取 引 所 ノ 營 業 期 限 ハ 明 治 三 十 二 年 六 月 一 日 ヨリ 滿 十 ケ 年 トス 但 滿 期 ニ 至 リ 株 主 ノ 決 議 ニ 依 リ 更 ニ 繼 續 ヲ 出 願 スルコトアルヘシ 第 二 章 賣 買 取 引 ノ 物 件 第 五 條 當 取 引 所 ニ 於 テハ 米 大 豆 石 油 明 太 紡 績 糸 金 巾 木 綿 ノ 七 品 ヲ 賣 買 スルモノトス 第 三 章 資 本 金 及 株 式 第 六 條 當 取 引 所 ノ 資 本 金 ハ 四 萬 五 千 圓 トシ 之 ヲ 千 八 百 株 ニ 分 チ 壹 株 ヲ 貳 拾 五 圓 トス 但 株 主 ハ 日 本 人 ニ 限 ル 第 七 條 株 金 ハ 當 取 引 所 設 立 後 理 事 長 ノ 通 告 シタル 期 日 ニ 其 半 額 ヲ 拂 込 ミ 其 殘 額 ハ 役 員 會 ニ 於 テ 必 要 ト 認 メタル 時 總 會 ノ 承 諾 ヲ 經 テ 拂 込 マシム 但 後 段 ノ 場 合 ニ 於 テハ 三 十 日 前 總 株 主 ニ 通 告 スヘシ

416 39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八 條 株 式 ハ 一 株 每 ニ 株 券 一 通 ヲ 作 リ 之 ニ 其 金 額 發 行 ノ 年 月 日 番 號 所 名 印 理 事 ノ 氏 名 印 株 主 ノ 氏 名 並 ニ 株 主 ノ 注 意 スヘキ 要 件 ヲ 記 載 ス 第 九 條 當 取 引 所 ハ 株 主 名 簿 ヲ 作 リ 株 式 ニ 關 スル 一 切 ノ 要 件 ヲ 記 載 スヘシ 第 十 條 當 取 引 所 ノ 株 券 ヲ 賣 買 讓 與 シ 又 ハ 姓 名 ヲ 更 改 シタルトキハ 株 券 ト 共 ニ 記 名 ノ 書 換 請 求 書 ヲ 當 取 引 所 ニ 差 出 シ 株 主 名 簿 及 株 券 記 名 ノ 書 換 ヲ 請 フヘシ 但 所 有 者 死 亡 又 ハ 失 踪 シ 其 相 續 人 ヨリ 記 名 ノ 書 換 ヲ 求 ムル 場 合 ニ 於 テハ 親 族 又 ハ 二 名 以 上 ノ 證 人 ヲ 要 ス 第 十 一 條 株 券 汚 染 損 壞 シタルトキハ 新 券 ト 交 換 ヲ 求 ムルコトヲ 得 若 シ 亡 失 シテ 新 ニ 株 券 ノ 交 附 ヲ 求 ムルトキハ 其 事 實 ヲ 明 記 シ 證 人 二 名 以 上 ノ 連 署 ヲ 以 テ 申 出 ツヘシ 此 場 合 ニ 於 テハ 理 事 長 ハ 直 ニ 其 記 名 ノ 書 換 ヲ 停 止 シ 三 日 間 新 聞 紙 ヲ 以 テ 其 事 由 ヲ 公 告 シ 三 十 日 ヲ 經 ルモ 尙 發 見 セサルトキハ 新 株 券 ヲ 交 附 スヘシ 第 十 二 條 株 主 ノ 破 産 家 資 分 産 又 ハ 法 律 ノ 結 果 ニ 因 リ 株 式 ノ 權 利 ヲ 得 タル 者 ハ 取 得 ノ 證 左 ヲ 添 ヘ 記 名 ノ 書 換 ヲ 請 フヘシ 第 十 三 條 株 券 記 名 ノ 書 換 又 ハ 新 株 券 ノ 交 附 ヲ 請 求 スル 者 ハ 規 定 ノ 手 數 料 ( 記 名 書 換 ハ 金 拾 錢 新 株 券 ハ 金 貳 拾 錢 ) ヲ 當 取 引 所 ニ 支 拂 フヘシ 仍 ホ 公 告 其 他 ノ 費 用 ヲ 要 スル 時 ハ 請 求 者 之 ヲ 負 換 スヘシ 第 十 四 條 株 主 實 印 ヲ 改 メ 又 ハ 族 籍 住 所 ヲ 轉 スルトキハ 直 チニ 當 取 引 所 ニ 報 告 スヘシ 第 十 五 條 計 算 閉 鎖 ノ 爲 メ 每 年 通 常 總 會 ニ 際 シ 役 員 會 ノ 決 議 ヲ 以 テ 一 ケ 月 ヲ 踰 ヘサル 期 間 株 券 記 名 書 換 ヲ 停 止 スルコトアルヘシ 第 十 六 條 當 取 引 所 資 本 金 ノ 增 減 ヲ 株 主 總 會 ニ 於 テ 決 議 シタルトキハ 領 事 ノ 認 可 ヲ 經 テ 之 ヲ 施 行 スヘシ

417 자 료 397 第 四 章 役 員 及 所 員 第 十 七 條 當 取 引 所 ハ 左 ノ 役 員 ヲ 置 ク 理 事 長 一 名 理 事 二 名 監 査 役 二 名 審 査 役 五 名 當 取 引 所 ハ 左 ノ 所 員 ヲ 置 ク 支 配 人 一 名 書 記 若 干 名 勘 定 係 同 上 市 場 係 同 上 現 米 調 査 係 同 上 第 十 八 條 役 員 ハ 總 會 ニ 於 テ 投 票 ヲ 以 テ 理 事 長 理 事 ハ 二 十 株 監 査 役 ハ 十 株 以 上 ヲ 所 有 スル 株 主 中 ヨリ 之 レヲ 撰 擧 シ 投 票 多 數 ヲ 以 テ 當 撰 者 トス 投 票 同 數 ナルトキハ 年 長 者 ヲ 擧 ケ 同 年 ナルトキハ 抽 籤 ヲ 以 テ 之 ヲ 定 ム 但 理 事 長 理 事 ノ 內 二 名 ハ 仁 川 港 內 ニ 一 ケ 年 以 上 居 住 シ 貿 易 商 若 クハ 米 豆 賣 買 ノ 商 業 ニ 從 事 シタルモノニ 限 ル 第 十 九 條 理 事 長 ハ 理 事 中 ヨリ 互 撰 ヲ 以 テ 之 ヲ 定 ム 第 二 十 條 役 員 ノ 任 期 ハ 一 ケ 年 トシ 每 年 一 月 ノ 總 會 ニ 於 テ 撰 擧 ス 但 再 撰 スルコトヲ 得 第 二 十 一 條 理 事 長 及 理 事 ノ 在 職 中 其 被 撰 權 利 制 限 株 券 ハ 融 通 ヲ 禁 ス ル 爲 メ 封 印 シテ 之 ヲ 當 取 引 所 ニ 預 リ 置 クヘシ 第 二 十 二 條 理 事 長 理 事 及 監 査 役 ニ 缺 員 ヲ 生 シタルトキハ 臨 時 株 主

418 39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總 會 ヲ 開 キ 補 缺 撰 擧 ヲ 爲 スヘシ 其 補 缺 員 ハ 前 任 者 ノ 殘 期 ヲ 繼 クモ ノトス 但 事 務 ニ 差 支 ナキトキハ 次 回 ノ 改 撰 マテ 延 期 スルコトヲ 得 第 二 十 三 條 理 事 長 理 事 及 監 査 役 ハ 其 任 期 滿 ルト 雖 モ 後 任 ノ 役 員 未 タ 就 任 セサル 間 ハ 前 任 ノ 事 務 ニ 從 フノ 義 務 アルモノトス 又 更 迭 ノ 場 合 ニ 於 テハ 其 事 務 ノ 引 繼 ヲ 爲 スヘシ 第 二 十 四 條 役 員 不 時 ニ 退 職 スルトキハ 其 期 間 ノ 決 算 報 告 ヲ 總 會 ニ 提 出 シ 決 議 ヲ 經 ルニ 非 レハ 其 責 任 ハ 消 滅 セサルモノトス 第 二 十 五 條 理 事 長 理 事 ノ 俸 給 及 監 査 役 ノ 報 酬 ハ 株 主 總 會 ノ 決 議 ヲ 以 テ 之 ヲ 定 ム 第 二 十 六 條 理 事 長 ハ 當 取 引 所 ヲ 代 表 シ 其 事 務 ヲ 總 轄 シ 理 事 ノ 分 掌 ヲ 定 メ 定 款 並 諸 規 則 及 總 會 ノ 決 議 ヲ 施 行 シ 其 責 ニ 任 スヘシ 第 二 十 七 條 理 事 ハ 理 事 長 ノ 指 揮 ヲ 受 ケ 左 ノ 事 務 ヲ 分 掌 シ 理 事 長 事 故 アルトキハ 之 ヲ 代 理 ス 一 市 場 ヲ 整 理 シ 仲 買 人 ノ 行 爲 ヲ 監 督 シ 賣 買 上 ニ 關 スル 諸 般 ノ 事 務 ヲ 掌 ル 事 一 金 錢 出 納 及 倉 庫 ニ 關 スル 事 務 ヲ 掌 ル 事 一 諸 帳 簿 計 算 ノ 整 理 ヲ 掌 ル 事 第 二 十 八 條 監 査 役 ハ 理 事 長 理 事 ノ 業 務 施 行 上 法 律 命 令 定 款 及 總 會 ノ 決 議 ニ 適 合 スルヤ 否 ヤヲ 監 査 シ 計 算 書 財 産 目 錄 貸 借 對 照 表 每 半 季 報 告 書 配 當 金 分 配 案 等 ヲ 撿 査 シ 之 ヲ 株 主 總 會 ニ 報 告 スルコトニ 任 ス 第 二 十 九 條 監 査 役 ハ 必 要 ト 認 ムルトキハ 何 時 ニテモ 諸 般 ノ 業 務 ヲ 尋 問 シ 諸 帳 簿 書 類 及 金 穀 財 産 等 ノ 現 況 ヲ 撿 査 スルコトヲ 得 第 三 十 條 理 事 長 ハ 役 員 會 ノ 評 決 ヲ 以 テ 定 款 ノ 趣 旨 ニ 從 ヒ 營 業 上 ニ 關 スル 諸 規 則 ヲ 定 ムルコトヲ 得 第 三 十 一 條 理 事 長 ハ 役 員 會 ノ 評 決 ヲ 以 テ 仲 買 人 中 行 爲 不 正 ナルモノ

419 자 료 399 又 ハ 不 穩 當 ノ 賣 買 ヲナスモノ 若 クハ 一 般 仲 買 人 ノ 營 業 ニ 妨 害 ヲ 爲 スモノアルトキハ 其 賣 買 ヲ 停 止 スルコトヲ 得 又 除 名 シタルトキハ 領 事 ニ 届 出 テ 領 事 ノ 認 可 ヲ 受 クヘシ 前 項 ニ 該 當 スル 行 爲 アリト 認 ムルトキハ 其 事 跡 判 明 セサルモ 一 時 其 者 ノ 賣 買 ヲ 停 止 シ 取 調 ヲ 爲 スコトヲ 得 第 三 十 二 條 理 事 長 ハ 役 員 會 ノ 評 決 シ 以 テ 仲 買 人 一 同 ノ 間 ニ 設 ケタル 規 約 ヲ 承 認 シ 又 ハ 之 ヲ 改 正 セシムルコトヲ 得 第 三 十 三 條 審 査 役 ハ 受 渡 ノ 際 再 審 ヲ 請 フモノアル 時 ハ 之 ヲ 審 査 決 定 ス 但 其 他 役 員 ノ 事 務 ニ 關 係 セス 第 三 十 四 條 支 配 人 以 下 ノ 所 員 ハ 役 員 會 ノ 決 議 ヲ 以 テ 理 事 長 之 ヲ 任 免 シ 其 給 料 ハ 役 員 會 ニ 於 テ 之 ヲ 定 ム 第 三 十 五 條 支 配 人 以 下 ノ 所 員 ハ 理 事 長 理 事 ノ 指 揮 ヲ 受 ケ 各 其 事 務 ヲ 擔 任 ス 第 五 章 株 主 總 會 及 役 員 會 第 三 十 六 條 株 主 總 會 ヲ 分 ツテ 通 常 總 會 及 臨 時 總 會 ノ 二 種 トス 第 三 十 七 條 通 常 總 會 ハ 每 年 一 月 及 七 月 ノ 兩 度 之 ヲ 開 キ 理 事 長 之 ヲ 招 集 シ 前 期 間 ノ 計 算 書 財 産 目 錄 貸 借 對 照 表 報 告 書 及 配 當 金 分 配 案 等 ヲ 作 リ 株 主 ノ 決 議 ニ 附 ス 其 開 期 ハ 三 日 前 ニ 會 議 ノ 目 的 事 項 日 時 場 所 等 ヲ 通 告 スヘシ 第 三 十 八 條 臨 時 總 會 ハ 役 員 會 ノ 評 決 ニ 依 リ 又 ハ 監 査 役 ニ 於 テ 必 要 ト 思 考 スル 場 合 又 ハ 總 株 金 五 分 ノ 一 以 上 ニ 當 ル 株 主 ニ 於 テ 當 取 引 所 ノ 利 害 ニ 關 シ 會 議 ノ 目 的 ヲ 明 示 シテ 請 求 シタルトキ 之 ヲ 開 キ 少 ク モ 其 開 會 十 日 前 ニ 會 議 ノ 目 的 事 項 日 時 場 所 等 ヲ 通 告 スヘシ

420 40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三 十 九 條 當 取 引 所 總 株 金 五 分 ノ 一 以 上 ノ 株 主 ヨリ 臨 時 總 會 ヲ 請 求 シタル 時 ハ 理 事 長 ハ 其 請 求 書 ヲ 受 領 シタル 日 ヨリ 二 十 日 以 內 ニ 開 會 ノ 手 續 ヲナスヘシ 第 四 十 條 株 主 ハ 其 所 有 ノ 株 數 十 株 マテハ 一 株 每 ニ 一 個 ノ 議 決 權 ヲ 有 シ 十 一 株 以 上 ハ 五 株 每 ニ 一 個 ヲ 增 ス 第 四 十 一 條 總 會 ハ 總 株 金 ノ 三 分 ノ 一 ( 委 任 狀 ヲ 付 シタルモノモ 加 算 ス 以 下 之 ニ 準 ス) 以 上 ニ 當 ル 株 主 ノ 出 席 ヲ 以 テ 成 立 ス 定 款 ノ 變 更 資 本 金 ノ 增 減 及 任 意 ノ 解 散 ニ 係 ル 總 會 ハ 總 株 金 ノ 半 數 以 上 ニシテ 總 株 主 ノ 二 分 ノ 一 以 上 ニ 當 ル 株 主 出 席 スルニアラサハレハ 開 會 スルコ トヲ 得 ス 第 四 十 二 條 總 會 ノ 議 事 ハ 出 席 株 主 議 決 權 ノ 過 半 數 ヲ 以 テ 決 シ 可 否 同 數 ナルトキハ 議 長 之 ヲ 決 ス 第 四 十 三 條 第 四 十 一 條 ニ 定 ムル 定 數 ノ 株 主 出 席 セサルトキハ 假 決 議 ヲナシ 更 ニ 五 日 以 內 ニ 第 二 ノ 總 會 ヲ 招 集 スヘシ 第 二 總 會 ニ 於 テ 仍 ホ 議 決 權 ノ 定 數 ニ 滿 タサルモ 出 席 株 主 ノ 多 數 ヲ 以 テ 第 一 回 ノ 假 決 議 ヲ 認 可 シタルトキハ 之 ヲ 有 効 トス 但 其 招 集 ノ 通 知 書 ニハ 其 旨 ヲ 明 告 スヘシ 第 四 十 四 條 株 主 事 故 アリテ 總 會 ニ 出 席 スル 能 ハサル 時 ハ 委 任 狀 ヲ 以 テ 株 主 中 又 ハ 業 務 代 理 人 親 族 ( 親 族 又 ハ 業 務 代 理 ハ 役 員 ニ 於 テ 正 當 ト 認 ムルモノニ 限 ル) ヘ 代 理 セシムルコトヲ 得 但 當 取 引 所 役 員 中 ニ 代 理 ヲ 委 任 スルコトヲ 得 ス 第 四 十 五 條 通 常 總 會 ノ 議 長 ハ 理 事 長 之 ニ 任 シ 理 事 長 事 故 アルトキハ 理 事 之 ヲ 代 理 ス 但 臨 時 總 會 ノ 議 長 ハ 株 主 中 ヨリ 臨 時 之 ヲ 撰 任 スルコトヲ 得 第 四 十 六 條 役 員 會 ハ 理 事 長 理 事 ヲ 以 テ 之 ヲ 組 織 シ 隨 時 之 ヲ 開 ク

421 자 료 401 第 四 十 七 條 役 員 會 ハ 理 事 長 之 カ 議 長 トナリテ 其 會 議 ヲ 統 理 ス 可 否 相 半 ハスルトキハ 議 長 ノ 決 スル 所 ニ 依 ル 第 四 十 八 條 監 査 役 ハ 役 員 會 ニ 列 シ 意 見 ヲ 陳 ルコトヲ 得 但 決 議 ノ 數 ニ 算 セス 第 四 十 九 條 總 テ 會 議 ニ 於 テ 決 議 シタル 事 項 ハ 其 要 ヲ 決 議 錄 ニ 登 載 シ 議 長 及 筆 記 者 之 ニ 署 名 捺 印 シテ 保 存 スヘシ 第 六 章 仲 買 人 第 五 十 條 仲 買 人 タラント 欲 スル 者 ハ 其 願 書 ニ 履 歷 書 ヲ 添 ヘ 理 事 長 ニ 差 出 スヘシ 理 事 長 ハ 履 歷 書 ノ 正 否 及 資 格 ノ 有 無 ヲ 詳 査 シ 意 見 ヲ 具 シテ 居 留 民 役 所 ヲ 經 テ 領 事 ノ 許 可 ヲ 受 クヘシ 仲 買 人 タラント 欲 スル 者 ハ 二 名 ノ 紹 介 人 ヲ 要 ス 內 一 名 ハ 當 取 引 所 ノ 仲 買 人 タルヘシ 第 五 十 一 條 仲 買 人 ノ 免 許 ヲ 受 ケタルトキハ 身 元 保 證 金 千 圓 以 上 二 千 圓 以 下 及 當 取 引 所 ノ 定 款 規 則 揭 示 等 ヲ 遵 守 スヘキ 誓 約 書 ヲ 當 取 引 所 ニ 差 入 レ 營 業 ヲ 開 始 スヘシ 仲 買 人 身 元 保 證 金 ヲ 差 入 レタル トキハ 當 取 引 所 ハ 其 預 リ 證 書 ヲ 交 付 スヘシ 此 預 リ 證 書 ハ 他 ニ 使 用 スルコトヲ 得 ス 仲 買 人 ハ 營 業 中 當 取 引 所 ヨリ 交 付 シタル 一 定 ノ 看 板 ヲ 其 店 頭 ニ 揭 クヘシ 第 五 十 二 條 仲 買 人 身 元 保 證 金 ハ 公 債 若 クハ 銀 行 預 リ 券 ヲ 以 テ 代 用 ス ルコトヲ 得 第 五 十 三 條 仲 買 人 ハ 當 取 引 所 ノ 定 ムル 區 域 內 ニ 其 店 舖 ヲ 設 クヘシ 仲 買 人 ハ 支 店 出 張 所 取 次 人 ノ 類 ヲ 設 ケ 其 營 業 ヲ 行 フコトヲ 得 ス

422 40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五 十 四 條 仲 買 人 ハ 自 己 ノ 計 算 ヲ 以 テスルト 他 人 ノ 計 算 ヲ 以 テスル トヲ 問 ハス 當 取 引 所 ニ 對 シ 其 賣 買 取 引 上 一 切 ノ 責 任 ヲ 負 フヘシ 第 五 十 五 條 仲 買 人 廢 業 死 亡 若 クハ 資 格 ヲ 失 ヒタルトキハ 本 人 又 ハ 相 續 人 若 クハ 親 戚 ヨリ 免 許 狀 ヲ 添 ヘ 届 書 ヲ 理 事 長 ニ 差 出 スヘシ 理 事 長 前 項 ノ 届 書 ヲ 受 ケタルトキハ 三 日 以 內 此 旨 ヲ 市 場 ニ 揭 示 シ 計 算 ヲ 整 理 シタル 上 領 事 ノ 認 可 ヲ 受 クヘシ 第 五 十 六 條 仲 買 人 營 業 ヲ 停 止 セラレタルトキハ 其 姓 名 ヲ 市 場 ニ 揭 示 スヘシ 若 シ 除 名 セラレタルトキハ 免 許 狀 及 看 板 ヲ 取 引 所 ニ 返 還 ス ヘシ 此 場 合 ニ 於 テハ 理 事 長 ハ 免 許 狀 ヲ 領 事 ニ 返 還 スヘシ 第 五 十 七 條 仲 買 人 賣 買 上 違 約 處 分 ノ 爲 メ 身 元 保 證 金 ヲ 以 テ 賠 償 ニ 充 テラレタル 時 ハ 其 預 リ 證 書 ヲ 當 取 引 所 ニ 返 還 スヘシ 若 シ 之 ヲ 返 還 セサルモ 其 證 書 ハ 廢 紙 ニ 屬 ス 第 五 十 八 條 仲 買 人 身 元 保 證 金 ノ 預 リ 證 書 ヲ 汚 染 損 壞 シタルトキハ 更 ニ 新 券 ヲ 請 求 スヘシ 若 シ 亡 失 シタルトキハ 其 事 實 ヲ 明 記 シ 保 證 人 連 署 ヲ 以 テ 申 出 ヘシ 當 取 引 所 ハ 新 聞 紙 ニ 公 告 シ 二 十 日 ヲ 經 タル 後 新 ニ 預 リ 證 書 ヲ 交 付 スヘシ 前 項 ノ 場 合 ニ 於 テ 手 數 料 ハ 金 五 十 錢 其 他 新 聞 公 告 料 ハ 本 人 ノ 負 擔 タルヘシ 第 五 十 九 條 仲 買 人 ハ 抽 籤 ニ 依 リ 甲 部 乙 部 ノ 組 合 ヲ 構 成 シ 各 部 ニ 一 名 ノ 組 長 ヲ 撰 擧 シ 之 ヲ 理 事 長 ニ 届 ケ 置 ヘシ 第 六 十 條 組 長 ノ 任 期 ハ 一 ケ 年 トシ 每 年 一 月 之 ヲ 改 撰 ス 但 滿 期 ニ 至 リ 再 撰 スルコトヲ 得 第 六 十 一 條 組 長 ハ 其 組 合 ヲ 代 表 シ 其 組 合 員 ニ 關 スル 一 切 ノ 取 締 ヲナ シ 又 役 員 會 ニ 參 シテ 意 見 ヲ 述 フルコトヲ 得 但 決 議 ノ 數 ニ 加 ハルコトヲ 得 ス

423 자 료 403 第 六 十 二 條 組 合 員 ハ 其 組 合 中 死 亡 逃 走 隱 匿 除 名 違 約 者 等 ア ルトキハ 本 人 ニ 代 ハリ 取 引 上 ニ 關 スル 業 務 ヲ 整 理 スヘシ 但 財 産 上 ノ 義 務 ハ 之 ヲ 負 擔 セス 第 六 十 三 條 仲 買 人 相 互 ノ 間 ニ 於 テ 營 業 上 ノ 規 約 ヲ 設 ケタルトキハ 理 事 長 ニ 届 出 テ 其 承 諾 ヲ 受 クヘシ 第 六 十 四 條 仲 買 人 ハ 理 事 長 ノ 承 諾 ヲ 經 テ 代 理 人 ヲ 用 ユルコトヲ 得 此 場 合 ニ 於 テハ 其 者 ノ 住 所 氏 名 年 齡 及 委 任 權 限 等 ヲ 記 載 シ 理 事 長 ニ 申 出 ツヘシ 但 仲 買 人 トシテ 營 業 禁 止 ヲ 命 セラレ 又 ハ 除 名 ノ 處 分 ヲ 受 ケ 二 ケ 年 ヲ 經 サルモノハ 代 理 人 トナスコトヲ 得 ス 第 六 十 五 條 代 理 人 ニ 於 テ 不 正 ノ 行 爲 ヲ 爲 シ 又 ハ 役 員 ノ 命 令 ニ 違 背 シ タルトキハ 爾 後 賣 買 及 入 場 ヲ 拒 絶 スヘシ 第 六 十 六 條 代 理 人 ノ 氏 名 ハ 其 受 任 及 解 任 每 ニ 本 人 ノ 氏 名 ト 共 ニ 市 場 ニ 揭 示 スヘシ 第 六 十 七 條 仲 買 人 ハ 他 ノ 仲 買 人 ノ 代 理 人 ヲ 用 ユルコトヲ 得 ス 第 六 十 八 條 仲 買 人 ハ 委 托 者 ノ 請 求 アル 時 ハ 其 委 托 ニ 關 スル 一 切 ノ 事 項 ヲ 隱 秘 スヘシ 第 六 十 九 條 仲 買 人 他 人 ノ 委 托 ニ 依 リ 賣 買 ノ 約 定 ヲ 爲 シタルトキハ 其 事 項 ヲ 記 載 シタル 報 告 書 ヲ 製 シ 委 托 者 ニ 交 付 スヘシ 又 タ 仲 買 人 ノ 請 求 ニ 依 リ 當 取 引 所 ハ 其 賣 買 ヲ 證 明 スヘシ 第 七 十 條 仲 買 人 ニ 於 テ 債 權 者 ノ 爲 ニ 身 元 保 證 金 ヲ 差 押 ヘラレタルト キハ 其 金 額 ヲ 補 充 スルニ 非 レハ 新 規 賣 買 ヲ 爲 スコトヲ 得 ス

424 40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七 章 倉 庫 第 七 十 一 條 當 取 引 所 ハ 倉 庫 ヲ 設 置 シ 當 取 引 所 ニ 於 テ 取 引 スル 物 品 ニ 限 リ 之 ヲ 保 管 シ 荷 主 ノ 請 求 ニ 從 ヒ 倉 荷 證 書 又 ハ 指 圖 式 倉 荷 證 書 ヲ 發 行 スルコトアルヘシ 第 七 十 二 條 當 取 引 所 ハ 役 員 會 ノ 評 決 ヲ 以 テ 豫 メ 確 實 ナル 藏 主 ト 特 別 ノ 契 約 ヲ 結 ヒ 賣 買 貨 物 受 渡 ノ 便 宜 ト 爲 スコトアルヘシ 第 七 十 三 條 當 取 引 所 倉 庫 ノ 保 管 貨 物 ニシテ 天 災 地 變 其 他 避 ク 可 ラサ ル 災 厄 ニ 罹 ルカ 又 ハ 鼠 喰 虫 喰 或 ハ 物 品 ヨリ 生 スル 變 質 減 量 等 ノ 損 害 ハ 當 取 引 所 其 責 ニ 任 セス 第 八 章 手 數 料 及 口 錢 第 七 十 四 條 當 取 引 所 ニ 於 テ 仲 買 人 ヨリ 徵 收 スル 手 數 料 額 ハ 賣 買 取 引 ノ 種 類 ニ 依 リ 役 員 會 ニ 於 テ 之 レヲ 定 メ 領 事 ノ 認 可 ヲ 得 テ 施 行 ス 第 七 十 五 條 仲 買 人 ニ 於 テ 委 托 者 ヨリ 收 入 スル 口 錢 額 ハ 仲 買 人 ニ 於 テ 協 議 決 定 シ 理 事 長 ノ 承 認 ヲ 受 クヘシ 第 七 十 六 條 手 數 料 又 ハ 口 錢 額 ヲ 變 更 セントスル 時 ハ 第 七 十 四 條 及 第 七 十 五 條 ノ 手 續 ヲ 經 テ 七 日 以 上 市 場 ニ 揭 示 シタル 後 之 ヲ 施 行 ス 第 七 十 七 條 當 取 引 所 ノ 手 數 料 ハ 直 取 引 及 延 取 引 ハ 當 日 營 業 時 間 內 ニ 定 期 取 引 ハ 本 證 據 金 差 入 ノ 定 刻 ニ 於 テ 之 ヲ 徵 收 スヘシ 若 シ 之 ヲ 差 入 サル 者 アルトキハ 其 諸 證 據 金 及 身 元 保 證 金 ヨリ 取 立 タル 上 違 約 處 分 ノ 手 續 ヲ 爲 スヘシ 第 七 十 八 條 轉 賣 買 戾 ハ 手 數 料 及 口 錢 ヲ 徵 收 セス 第 七 十 九 條 賣 買 約 定 ヲ 終 ヘタル 後 解 約 スルコトアルモ 手 數 料 及 口 錢 ハ 返 還 セサルモノトス

425 자 료 405 第 八 十 條 仲 買 人 ハ 委 託 ヲ 受 ケタル 事 件 ニ 付 口 錢 ノ 外 必 要 ナル 荷 造 運 搬 費 藏 敷 料 保 管 料 現 金 遞 送 費 若 クハ 爲 替 手 數 料 物 品 撿 査 費 等 委 託 者 ノ 爲 メニ 立 換 タル 實 費 ハ 之 ヲ 其 委 託 者 ニ 請 求 スルコトヲ 得 第 九 章 市 場 ノ 開 閉 及 休 業 第 八 十 一 條 當 取 引 所 ノ 市 場 ハ 第 八 十 二 條 ニ 規 定 シタル 休 業 日 ヲ 除 ク 外 每 日 直 取 引 及 延 取 引 ハ 一 回 定 期 取 引 ハ 二 回 一 定 ノ 時 間 ニ 於 テ 開 閉 ス 其 時 限 ハ 之 ヲ 市 場 ニ 揭 示 スヘシ 定 期 取 引 ハ 前 項 ノ 外 夏 季 ニ 於 テ 夕 場 立 會 又 ハ 日 曜 日 午 後 一 場 限 リ 立 會 ヲナスコトアルヘシ 此 場 合 ニ 於 テハ 豫 メ 其 立 會 時 間 ヲ 領 事 ニ 申 告 シ 市 場 ニ 揭 示 スヘシ 第 八 十 二 條 當 取 引 所 ノ 休 業 日 ハ 大 祭 日 祝 日 日 曜 日 及 每 年 年 首 三 日 間 年 末 六 日 間 トス 其 他 已 ムヲ 得 サル 事 情 ニ 依 リ 臨 時 休 業 スル 時 ハ 豫 メ 其 理 由 ヲ 揭 示 スヘシ 第 八 十 三 條 定 期 取 引 其 月 限 リノ 賣 買 取 引 ハ 其 期 日 ノ 前 日 本 場 限 リ 閉 會 スルモノトス 第 八 十 四 條 當 取 引 所 燒 失 等 ノ 事 變 ニ 罹 ルトキハ 七 日 以 內 ニ 假 市 場 ヲ 建 設 シ 引 續 キ 開 場 スヘシ 但 已 ムヲ 得 サル 事 故 ニ 依 リ 其 期 間 ニ 開 場 スルコト 能 ハサルトキハ 其 理 由 ヲ 領 事 ニ 申 告 シ 之 ヲ 公 告 スヘシ 第 十 章 直 取 引 及 延 取 引 第 八 十 五 條 直 取 引 ハ 特 ニ 期 日 ヲ 指 定 セサルトキハ 其 受 渡 期 日 ハ 約 契 當 日 ヨリ 五 日 間 トス

426 40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八 十 六 條 直 取 引 及 延 取 引 ハ 見 本 銘 抦 又 ハ 現 物 ニ 就 キ 賣 買 スヘシ 但 見 本 品 ニハ 要 用 ノ 事 項 ヲ 付 記 シ 受 渡 ノ 結 了 マテ 當 取 引 所 之 ヲ 保 管 ス 第 八 十 七 條 直 取 引 及 延 取 引 ノ 米 豆 ハ 一 ト 口 十 石 石 油 ハ 五 十 函 明 太 ハ 十 駄 紡 績 糸 ハ 五 個 金 巾 ハ 五 十 反 木 綿 ハ 百 疋 ヲ 下 ルコト ヲ 得 ス 第 八 十 八 條 直 取 引 及 延 取 引 ハ 相 對 賣 買 糶 賣 買 及 入 札 賣 買 ヲ 用 ユ 第 八 十 九 條 直 取 引 ヲ 爲 シタルトキハ 賣 買 者 雙 方 合 意 アル 場 合 ハ 一 方 若 クハ 雙 方 ヨリ 當 取 引 所 ニ 證 據 金 ヲ 差 入 ルヘシ 又 理 事 長 ノ 見 込 ヲ 以 テ 徵 收 ヲ 命 スルコトアルヘシ 延 取 引 ヲ 爲 シタル 時 ハ 當 取 引 所 ハ 證 據 金 ヲ 徵 收 スヘシ 第 九 十 條 直 取 引 及 延 取 引 ヲナシタルトキハ 賣 買 者 雙 方 ヨリ 當 取 引 所 ノ 帳 簿 ニ 其 登 記 ヲ 請 フヘシ 但 延 取 引 ヲ 爲 シタル 時 ハ 賣 主 ヨリ 買 主 ニ 交 付 スヘキ 賣 渡 證 書 ニ 當 取 引 所 ノ 證 印 ヲ 受 クヘシ 第 九 十 一 條 契 約 期 限 前 ト 雖 モ 賣 買 者 雙 方 ノ 合 意 ニ 依 リ 取 引 所 ニ 届 出 テ 受 渡 又 ハ 解 約 ヲナスコトヲ 得 第 十 一 章 定 期 取 引 第 九 十 二 條 定 期 取 引 ノ 期 限 ハ 三 ケ 月 ト 定 メ 每 限 月 ニ 分 チ 賣 買 ス 第 九 十 三 條 定 期 取 引 ハ 競 賣 買 ヲ 用 ヒ 米 ハ 忠 淸 道 中 玄 米 大 豆 ハ 長 湍 大 粒 ヲ 以 テ 標 準 トス 但 シ 凶 作 ノ 爲 メ 旣 定 ノ 標 準 品 ヲ 得 サルトキハ 役 員 會 ヲ 開 キ 更 改 ス ルコトヲ 得

427 자 료 407 第 九 十 四 條 定 期 取 引 ノ 一 口 建 方 及 約 定 直 段 ノ 呼 直 ハ 左 ノ 如 シ 建 方 米 豆 五 十 石 石 油 五 十 函 明 太 十 駄 金 巾 五 十 反 紡 績 小 五 個 木 綿 百 疋 呼 直 一 石 一 函 一 駄 一 反 一 個 一 疋 第 九 十 五 條 標 準 米 豆 ハ 每 年 十 一 月 ニ 該 年 産 穀 ニ 依 リ 當 取 引 所 役 員 及 仲 買 人 組 長 立 會 ノ 上 之 ヲ 定 メ 壜 詰 トシ 封 緘 ヲ 爲 シ 當 取 引 所 ニ 保 管 シ 每 年 十 二 月 一 日 ヨリ 發 會 スル 翌 年 二 月 限 ノ 賣 買 ヨリ 該 新 穀 標 準 ヲ 以 テ 賣 買 ヲ 開 始 ス 若 シ 標 準 ノ 變 更 ヲ 必 要 トスルトキハ 現 ニ 賣 買 取 組 中 ノ 期 月 間 ハ 已 定 ノ 標 準 ニ 依 リ 更 ニ 開 始 スル 期 月 ヨリ 更 正 標 準 ニ 依 ルモノトス 第 九 十 六 條 定 期 取 引 ノ 契 約 ヲ 爲 シタルトキハ 左 ノ 區 別 ニ 依 リ 賣 買 者 雙 方 ヨリ 證 據 金 ヲ 徵 收 ス 第 一 本 證 據 金 本 證 據 金 ハ 賣 買 成 立 ノ 當 初 之 ヲ 徵 收 ス 第 二 追 證 據 金 追 證 據 金 ハ 相 場 ノ 高 低 ニ 依 リ 之 ヲ 徵 收 ス 第 三 定 時 增 證 據 金 定 時 增 證 據 金 ハ 受 渡 約 定 期 月 之 ヲ 徵 收 ス 但 要 用 ト 認 メサル 場 合 ハ 之 ヲ 徵 收 セス 第 四 臨 時 增 證 據 金 臨 時 增 證 據 金 ハ 非 常 ノ 事 變 アルカ 又 ハ 數 日 間 休 業 スル 等 ノ 場 合 若 クハ 相 場 ニ 甚 シキ 高 低 アリト 思 料 スルトキ 之 ヲ 徵 收 ス

428 40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九 十 七 條 證 據 金 ハ 現 金 タルヘシ 第 九 十 八 條 非 常 ノ 事 變 アルカ 或 ハ 甚 シキ 相 場 ノ 高 低 アルカ 若 クハ 不 穩 當 ノ 賣 買 ト 認 ムルカ 又 ハ 其 當 日 ノ 景 況 ニ 依 リ 諸 證 據 金 ノ 徵 收 ニ 差 支 アリト 思 料 スルトキ 又 ハ 多 數 ノ 賣 買 アリテ 帳 簿 整 理 ニ 差 支 ア ルトキハ 役 員 ノ 評 決 ヲ 以 テ 幾 人 ヲ 限 リ 賣 買 高 ヲ 制 限 シ 又 ハ 一 時 賣 買 ヲ 差 止 メ 或 ハ 全 體 ノ 立 會 ヲ 延 引 シ 又 ハ 停 止 スルコトアルヘシ 此 場 合 ニ 於 テハ 卽 時 其 旨 ヲ 領 事 ニ 申 告 シ 市 場 ニ 揭 示 スヘシ 第 九 十 九 條 立 會 停 止 中 ト 雖 モ 特 ニ 理 事 長 ノ 承 認 ヲ 得 テ 轉 賣 買 戾 又 ハ 解 約 ヲ 爲 スコトヲ 得 第 十 二 章 受 渡 第 百 條 受 渡 ハ 其 期 日 ニ 至 リ 直 取 引 延 取 引 定 期 取 引 ヲ 問 ハス 受 渡 期 日 ノ 前 日 午 後 三 時 限 リ { 但 シ 定 期 取 引 ニ 限 リ 十 二 月 ハ 二 十 日 限 リ} 賣 主 ハ 渡 品 銘 柄 藏 所 等 ヲ 届 出 テ 買 主 ハ 其 取 引 總 金 高 ヨリ 證 據 金 等 ヲ 引 去 リタル 殘 額 ヲ 差 出 スヘシ 當 取 引 所 ハ 賣 買 者 雙 方 立 會 ノ 上 當 取 引 所 調 査 係 ヲシテ 現 品 ノ 撿 査 及 受 渡 ヲ 爲 サシメタル 上 其 代 金 ヲ 賣 主 ニ 交 付 ス 尤 モ 定 期 取 引 ノ 受 渡 ニ 限 リ 當 取 引 所 調 査 係 二 名 以 上 立 會 ノ 上 品 位 價 格 ヲ 定 ム 第 百 一 條 第 百 條 ノ 審 査 ニ 對 シテハ 審 査 役 ノ 再 審 査 ヲ 請 フコトヲ 得 此 再 審 査 ニ 對 シテハ 異 議 ヲ 唱 フルコトヲ 得 ス 但 此 場 合 ニ 於 テハ 審 査 役 三 名 以 上 理 事 長 之 ヲ 指 名 囑 托 ス 第 十 三 章 公 定 相 場 第 百 二 條 直 取 引 延 取 引 ノ 公 定 相 場 ハ 其 取 引 實 際 直 段 ヲ 以 テ 每 日 一

429 자 료 409 回 市 場 ニ 揭 示 ス 又 定 期 取 引 ノ 公 定 相 場 ハ 每 日 午 前 午 後 各 限 月 每 ニ 區 別 シ 左 ノ 項 目 ニ 隨 ヒ 市 場 ニ 揭 示 スヘシ 最 初 ノ 立 會 ニ 於 テ 賣 買 取 引 シタル 一 石 ノ 直 段 ヲ 云 フ 留 方 最 終 ノ 立 會 ニ 於 テ 賣 買 取 引 シタル 一 石 ノ 直 段 ヲ 云 フ 最 昻 相 場 賣 買 立 會 中 最 モ 高 キ 一 石 ノ 直 段 ヲ 云 フ 最 低 相 場 賣 買 立 會 中 最 モ 低 キ 一 石 ノ 直 段 ヲ 云 フ 平 均 相 場 賣 買 シタル 總 代 金 ヲ 其 總 數 量 ニテ 除 シタル 一 石 ノ 直 段 ヲ 云 フ 第 十 四 章 帳 簿 第 百 三 條 當 取 引 所 ニ 於 テ 使 用 スヘキ 諸 帳 簿 ハ 役 員 會 ニテ 定 メタル 名 目 用 法 ニ 依 リ 之 ヲ 整 頓 スヘシ 第 百 四 條 仲 買 人 其 業 務 上 使 用 スヘキ 諸 帳 簿 ハ 仲 買 人 組 長 ニ 於 テ 其 名 目 用 法 ヲ 議 定 シ 理 事 長 ニ 届 出 テ 其 承 認 ヲ 受 ケ 之 ヲ 整 頓 スヘシ 第 百 五 條 仲 買 人 其 業 務 上 使 用 スヘキ 諸 帳 簿 ハ 其 紙 數 ヲ 附 記 シ 當 取 引 所 ノ 撿 印 ヲ 受 クヘシ 第 百 六 條 仲 買 人 ハ 理 事 長 ニ 於 テ 帳 簿 ノ 撿 閱 ヲ 要 求 スルトキハ 何 時 ニ テモ 之 ヲ 差 出 シ 其 尋 問 ニ 答 フヘシ 但 此 場 合 ニ 於 テハ 組 長 ノ 立 會 ヲ 命 スルコトアルヘシ 第 百 七 條 當 取 引 所 ノ 諸 記 錄 ハ 目 次 編 纂 シ 役 員 會 ニ 於 テ 定 メタル 方 法 ニ 依 リ 之 ヲ 保 存 ス

430 41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十 五 章 出 納 決 算 第 百 八 條 當 取 引 所 ノ 事 業 年 度 ハ 六 ケ 月 トシ 每 年 一 月 ヨリ 六 月 マテヲ 上 半 季 トシ 七 月 ヨリ 十 二 月 マテヲ 下 半 季 トシ 一 月 七 月 ノ 總 會 ニ 於 テ 前 期 ノ 決 算 ヲ 決 議 ス 第 百 九 條 總 會 ニ 於 テ 決 議 シタル 當 取 引 所 ノ 財 産 目 錄 及 貸 借 對 照 表 ハ 新 聞 紙 ヲ 以 テ 公 告 スヘシ 第 百 十 條 當 取 引 所 每 期 ノ 決 算 ハ 其 期 間 ニ 於 テ 收 入 シタル 總 金 額 ヨリ 稅 金 諸 經 費 損 失 金 等 ヲ 引 去 リタル 金 額 ヲ 純 益 金 トシ 其 內 ヨリ 準 備 積 立 金 ( 純 益 金 百 分 ノ 五 ヨリ 二 十 マテ) 役 員 賞 與 金 ( 純 益 金 百 分 ノ 十 ) ヲ 扣 除 シタル 金 額 ヲ 以 テ 株 主 ニ 配 當 ス 第 百 十 一 條 準 備 積 立 金 ハ 非 常 ノ 災 害 其 他 格 段 ノ 事 故 アル 時 ハ 總 會 ノ 決 議 ヲ 經 領 事 ノ 認 可 ヲ 得 テ 支 出 スコトヲ 得 第 百 十 二 條 當 取 引 所 ニ 於 テ 損 失 ヲ 來 シ 資 本 金 ノ 缺 額 ヲ 生 シタルトキ ハ 直 ニ 臨 時 總 會 ヲ 開 キ 其 事 實 ヲ 報 告 シテ 處 分 ノ 方 法 ヲ 決 議 スヘシ 第 百 十 三 條 當 取 引 所 ノ 所 有 金 及 預 リ 金 保 管 方 法 ハ 總 會 ニ 於 テ 決 議 ス 第 十 六 章 仲 裁 第 百 十 四 條 仲 裁 委 員 ハ 當 取 引 所 ニ 於 テ 爲 シタル 賣 買 取 引 ニ 關 シ 仲 買 人 相 互 間 又 ハ 仲 買 人 及 委 託 者 間 ニ 起 リタル 紛 議 ニ 付 雙 方 合 意 ヲ 以 テ 請 求 アルトキ 之 ニ 對 シテ 判 斷 ヲ 與 フルモノトス 第 百 十 五 條 仲 裁 委 員 ハ 其 定 員 ヲ 五 名 トシ 內 二 名 ハ 當 取 引 所 役 員 互 撰 ヲ 以 テ 之 ニ 任 シ 三 名 ハ 仲 買 人 中 ヨリ 投 票 ヲ 以 テ 撰 出 シ 委 員 等 ヨリ 委 員 長 一 名 及 代 理 者 一 名 ヲ 互 撰 ス 第 百 十 六 條 仲 裁 委 員 ノ 任 期 ハ 其 事 件 一 回 限 リトス

431 자 료 411 第 百 十 七 條 仲 裁 ヲ 請 フ 者 アル 時 ハ 理 事 長 之 ヲ 受 ケ 第 百 十 五 條 ノ 手 續 ヲ 以 テ 掛 員 ヲ 撰 任 シ 其 事 件 ヲ 取 扱 ハシム 第 百 十 八 條 仲 裁 判 斷 ハ 掛 員 ノ 多 數 ヲ 以 テ 之 ヲ 決 ス 若 シ 同 數 ナルトキ ハ 委 員 長 ノ 決 スル 所 ニ 依 ル 第 百 十 九 條 仲 裁 ヲ 請 フ 者 ハ 其 事 柄 ヲ 口 頭 ヲ 以 テ 申 出 ツヘシ 但 理 事 長 ニ 於 テ 必 要 ト 認 ムルトキハ 書 面 ヲ 差 出 サシムヘシ 第 百 二 十 條 仲 裁 ヲ 請 フ 者 ハ 其 取 調 ヲ 受 クルニ 當 リ 自 身 出 頭 スヘシ 已 ムヲ 得 サル 事 故 アルトキニ 限 リ 掛 員 ノ 承 認 ヲ 經 テ 代 人 ヲ 出 スコト ヲ 得 但 辨 護 士 ヲ 代 人 ト 爲 スコトヲ 得 ス 第 百 二 十 一 條 仲 裁 上 掛 員 ニ 於 テ 必 要 ト 認 ムルトキハ 證 人 ノ 出 頭 ヲ 求 ムルコトアルヘシ 第 百 二 十 二 條 仲 裁 ノ 判 斷 ハ 書 面 ヲ 以 テスヘシ 其 書 面 ニハ 委 員 長 及 掛 員 一 同 署 名 捺 印 スヘシ 仲 裁 委 員 ノ 署 名 捺 印 シタル 判 斷 ノ 正 本 ハ 之 ヲ 當 事 者 ニ 送 達 シ 其 原 本 ハ 送 達 ノ 證 書 ヲ 添 ヘテ 當 取 引 所 ニ 保 存 スヘシ 第 百 二 十 三 條 仲 裁 ニ 關 スル 費 用 ハ 掛 員 ノ 指 示 シタル 者 ヨリ 差 出 スヘ キモノトス 第 百 二 十 四 條 仲 裁 掛 員 ハ 其 仲 裁 事 件 ニ 關 シ 顧 問 員 ヲ 置 キ 又 ハ 之 ヲ 仲 裁 ノ 席 ニ 參 セシムルコトアルヘシ 第 百 二 十 五 條 前 數 條 ノ 外 仲 裁 判 斷 ニ 關 スル 必 要 ノ 事 項 ハ 民 事 訴 訟 法 仲 裁 判 斷 ノ 規 定 ニ 依 ル

432 41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十 七 章 違 約 處 分 第 百 二 十 六 條 賣 買 手 數 料 諸 證 據 金 及 受 渡 等 ノ 規 定 ニ 違 背 シタルモ ノ 又 ハ 取 引 損 益 ノ 決 濟 ヲ 怠 リタルモノハ 違 約 ヲ 以 テ 處 分 スヘシ 第 百 二 十 七 條 仲 買 人 ニ 於 テ 其 營 業 上 法 令 並 定 款 諸 規 則 等 ニ 違 背 シ 又 ハ 不 正 不 實 ノ 所 爲 アリト 認 ムルトキハ 役 員 會 ノ 評 決 ヲ 以 テ 五 百 圓 以 下 ノ 過 怠 金 ヲ 徵 收 ス 此 場 合 ニ 於 テハ 其 事 由 ヲ 詳 記 シ 領 事 ノ 認 可 ヲ 受 クヘシ 第 百 二 十 八 條 第 百 二 十 六 條 又 ハ 第 百 二 十 七 條 ニ 該 當 スルモノアルト キハ 役 員 會 ノ 評 決 ヲ 以 テ 其 者 ヲ 除 名 スルコトアルヘシ 此 場 合 ニ 於 テハ 領 事 ニ 届 出 テ 認 可 ヲ 受 クヘシ 第 十 八 章 營 業 細 則 第 百 二 十 九 條 此 定 款 ニ 規 定 スルモノヲ 除 クノ 外 市 場 開 閉 賣 買 證 據 金 及 受 渡 違 約 處 分 倉 庫 其 他 必 要 ノ 事 項 ハ 營 業 細 則 ヲ 以 テ 之 ヲ 定 ム 營 業 細 則 ハ 役 員 會 ニ 於 テ 之 ヲ 定 メ 領 事 ノ 認 可 ヲ 經 テ 施 行 ス 第 十 九 章 解 散 第 百 三 十 條 株 主 總 會 ニ 於 テ 當 取 引 所 ノ 解 散 ヲ 決 議 シタルトキハ 株 主 ノ 撰 擧 ヲ 以 テ 二 名 以 上 ノ 淸 算 人 ヲ 撰 擧 シ 一 切 ノ 事 務 ヲ 處 辨 セシム ヘシ

433 자 료 413 第 二 十 章 定 款 變 更 第 百 三 十 一 條 此 定 款 ヲ 變 更 スルトキハ 株 主 總 會 ノ 決 議 ヲ 以 テ 之 ヲ 定 メ 領 事 ノ 認 可 ヲ 經 テ 之 ヲ 施 行 ス 附 則 第 百 三 十 二 條 當 取 引 所 ノ 初 期 ノ 撰 擧 ニ 於 テ 當 撰 シタル 役 員 ハ 明 治 三 十 二 年 六 月 就 職 ノ 者 ニ 限 リ 明 治 三 十 三 年 一 月 ニ 於 テ 之 ヲ 改 撰 スル モノトス 第 百 三 十 三 條 株 金 拂 込 期 限 ニ 拂 込 ヲ 怠 リタル 株 主 ハ 其 拂 込 ムヘキ 金 額 ニ 對 シ 期 日 ノ 翌 日 ヨリ 金 百 圓 ニ 付 一 日 金 五 錢 ノ 延 滯 利 息 及 其 爲 メ 生 シタル 費 用 ヲ 支 拂 ハシム 第 百 三 十 四 條 株 金 拂 込 ヲ 怠 リタル 株 主 ニ 對 シテハ 更 ニ 五 十 日 間 ノ 猶 豫 ヲ 與 ヘ 其 期 間 ニ 拂 込 ムヘキ 事 ヲ 催 告 シ 尙 ホ 此 期 間 ニ 拂 込 サルト キハ 其 株 主 ニ 通 知 ノ 上 其 株 券 ヲ 公 賣 ニ 附 ス 此 場 合 ニ 於 テハ 異 議 ヲ 申 立 ル 事 ヲ 得 ス 第 百 三 十 五 條 公 賣 ニ 附 シタル 株 式 代 金 ニテ 拂 込 金 及 第 百 三 十 三 條 ノ 利 息 其 他 公 賣 ノ 爲 メ 生 シタル 一 切 ノ 費 用 ヲ 償 フ 能 ハサル 時 ハ 前 株 主 ( 公 賣 ニ 處 セラレタルモノ) ヨリ 追 徵 ス 但 剩 餘 金 アル 時 ハ 本 人 ニ 還 附 ス 第 百 三 十 六 條 當 取 引 所 創 立 ノ 際 仲 買 人 タラント 欲 スル 者 第 五 十 條 第 二 項 ノ 紹 介 人 ハ 當 取 引 所 ノ 株 主 二 名 トス 第 百 三 十 七 條 定 期 取 引 受 渡 米 豆 ノ 再 審 査 ニ 際 シ 審 査 役 事 故 アルトキ ハ 役 員 會 ノ 議 決 ヲ 以 テ 其 審 査 ヲ 他 ニ 臨 時 囑 托 スルコトヲ 得

434 41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자료2) 조선취인소세령( 朝 鮮 取 引 所 稅 令 ) 朝 鮮 取 引 所 稅 令 ( 制 令 第 6 號 )을 다음과 같이 制 定 公 布 하다.( 日 本 文 分 省 略 ) 第 1 條 取 引 所 에는 賣 買 手 數 料 收 入 金 額 100 分 之 10의 比 率 에 依 하여 取 引 所 稅 를 課 함. 第 2 條 取 引 所 는 每 月 의 賣 買 手 數 料 收 入 金 額 을 翌 月 10 日 까지 政 府 에 申 告 함이 可 함. 但 廢 業 한 時 는 直 히 此 를 申 告 함이 可 함. 前 項 의 申 告 를 不 爲 하며 又 는 政 府 에서 申 告 를 不 相 當 으로 認 하는 時 는 政 府 其 課 稅 標 準 額 을 決 定 함. 第 3 條 取 引 所 稅 는 每 月 分 을 翌 月 末 日 까지 納 付 함이 可 함. 但 廢 業 한 時 는 直 히 此 를 納 付 함이 可 함. 第 4 條 取 引 所 에 在 한 定 期 取 引 에는 其 賣 買 各 約 定 金 高 에 對 하 여 1 萬 分 之 5의 比 率 로써 取 引 稅 를 課 함. 但 轉 賣 及 買 戾 에 對 하여는 此 限 에 不 在 함. 賣 買 를 解 約 하여도 取 引 稅 는 此 를 免 除 치 아니함. 第 5 條 取 引 所 의 仲 買 人 은 每 月 分 의 定 期 取 引 의 賣 買 各 約 定 金 高 를 記 載 한 申 告 書 를 取 引 所 를 經 하여 翌 月 10 日 까지 政 府 에 提 出 함이 可 함. 取 引 所 는 前 項 의 申 告 書 를 調 査 하고 其 當 否 에 對 하여 意 見 을 附 하고 前 項 의 期 限 까지 此 를 政 府 에 提 出 함이 可 함. 前 項 의 規 定 에 依 하여 取 引 所 로 하여금 申 告 書 를 調 査 케 하기

435 자 료 415 爲 하여 仲 買 人 은 第 1 項 의 期 限 前 相 當 의 期 間 內 에 申 告 書 를 取 引 所 에 送 付 함이 可 함. 申 告 書 의 提 出 이 無 한 時 又 는 政 府 에서 申 告 高 를 不 相 當 으로 認 하는 時 는 政 府 其 課 稅 標 準 額 을 決 定 함. 第 6 條 仲 買 人 은 每 月 分 의 稅 金 을 取 引 所 를 經 하여 翌 月 末 日 까 지 政 府 에 納 付 함이 可 함. 第 7 條 取 引 稅 의 納 稅 告 知 書 는 取 引 所 를 經 하여 此 를 其 仲 買 人 에게 送 達 함. 此 境 遇 에 在 하여는 取 引 所 에 交 付 한 時 로써 仲 買 人 에게 送 達 한 것으로 看 做 함. 取 引 所 는 仲 買 人 의 納 付 할 稅 金 을 收 集 하여 前 條 의 期 限 까지 此 를 政 府 에 送 付 함이 可 함. 取 引 所 前 項 의 規 定 에 依 하여 收 集 한 稅 金 을 送 付 치 아니한 時 는 國 稅 徵 收 令 에 依 하여 取 引 所 로부터 此 를 徵 收 함. 第 8 條 仲 買 人 이 廢 業 除 名 其 他 의 事 由 로 因 하여 其 資 格 을 失 한 時 는 課 稅 標 準 額 의 申 告 及 取 引 稅 의 納 付 는 前 3 條 의 期 限 에 不 拘 하고 直 히 此 를 行 함이 可 함. 仲 買 人 이 死 亡 한 時 는 其 相 續 人 은 前 項 의 規 定 에 準 하여 課 稅 標 準 額 의 申 告 及 取 引 稅 를 納 付 함이 可 함. 第 1 項 의 規 定 은 取 引 所 가 廢 業 한 境 遇 에 取 引 稅 에 對 하여 此 를 準 用 함. 第 9 條 取 引 所 는 仲 買 人 의 取 引 稅 納 付 에 對 하여 保 證 의 責 에 任 함. 仲 買 人 納 期 內 에 取 引 稅 를 納 付 치 아니한 時 는 政 府 는 取 引 所 로부터 此 를 徵 收 함을 得 함. 第 10 條 取 引 所 는 賣 買 手 數 料 및 賣 買 取 引 에 關 한 事 項 을 帳 簿 에

436 41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記 載 함이 可 함. 仲 買 人 은 賣 買 取 引 에 關 한 事 項 을 帳 簿 에 記 載 함이 可 함. 第 11 條 稅 務 官 吏 는 取 引 所 又 는 仲 買 人 에 就 하여 賣 買 手 數 料 又 는 賣 買 取 引 에 關 한 帳 簿 書 類 를 檢 査 하며 又 는 徵 稅 上 必 要 한 處 分 을 함을 得 함. 第 12 條 取 引 所 第 2 條 의 申 告 를 怠 하며 또는 詐 한 時 는 100 圓 以 下 의 罰 金 又 는 科 料 에 處 함. 因 하여 脫 稅 한 時 는 脫 稅 高 3 倍 에 相 當 한 罰 金 又 는 科 料 에 處 하고 直 히 其 稅 金 을 徵 收 함. 第 13 條 取 引 所 의 仲 買 人 第 5 條 或 은 第 8 條 의 申 告 를 怠 하며 또는 詐 한 時 는 100 圓 以 下 의 罰 金 又 는 10 圓 以 上 의 科 料 에 處 함. 因 하여 脫 稅 한 時 는 脫 稅 高 5 倍 에 相 當 한 罰 金 에 處 하고 直 히 其 稅 金 을 徵 收 함. 但 稅 金 20 圓 未 滿 인 時 는 罰 金 額 은 100 圓 으로 함. 第 14 條 取 引 所 의 仲 買 人 委 託 을 受 한 定 期 取 引 에 對 하여 取 引 所 에서 其 賣 付, 買 付 又 는 受 渡 를 하지 않고 此 를 行 하며 同 一 又 는 類 似 의 計 算 으로써 委 託 者 에 對 하여 其 決 濟 를 行 한 時 는 取 引 稅 에 關 하여는 取 引 所 에서 定 期 取 引 을 하여 脫 稅 한 것 으로 看 做 하여 其 稅 金 5 倍 에 相 當 한 罰 金 에 處 하고 直 히 其 稅 金 을 徵 收 함. 但 稅 金 20 圓 未 滿 인 時 는 罰 金 額 은 100 圓 으로 함. 前 項 의 境 遇 에 在 하여는 委 託 者 에 對 하여 約 定 金 高 로 하여 計 算 한 金 額 으로써 賣 買 各 約 定 金 高 로 함. 第 1 項 의 稅 金 에 關 하여는 第 5 條 乃 至 第 7 條 及 第 9 條 의 規 定 을 適 用 치 아니함.

437 자 료 417 第 15 條 取 引 所 의 仲 買 人 이 한 第 5 條 又 는 第 8 條 의 申 告 가 不 當 한 境 遇 에 在 하여 取 引 所 此 를 正 當 한 申 告 로 하여 政 府 에 提 出 한 時 는 100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因 하여 脫 稅 함에 至 케 한 時 는 脫 稅 高 5 倍 에 相 當 한 罰 金 에 處 함. 但 稅 金 20 圓 未 滿 인 時 는 罰 金 額 은 100 圓 으로 함. 第 16 條 取 引 所 又 는 其 仲 買 人 左 의 各 號 의 1에 該 當 하는 時 는 100 圓 以 下 의 罰 金 又 는 10 圓 以 上 의 科 料 에 處 함. 1. 取 引 所 第 5 條 又 는 第 8 條 의 境 遇 에 在 하여 申 告 書 에 意 見 을 附 치 아니하며 又 는 申 告 書 의 提 出 을 怠 한 時 2. 賣 買 手 數 料 或 은 賣 買 取 引 에 關 한 帳 簿 를 調 製 치 않고 其 記 載 를 怠 하며 或 은 詐 한 時 又 는 帳 簿 書 類 를 隱 匿 한 時 3. 稅 務 官 吏 의 質 問 에 對 하여 答 辯 을 不 爲 하며 或 은 虛 僞 의 陳 述 을 하고 又 는 其 職 務 의 執 行 을 妨 害 한 時 附 則 本 令 은 1921 年 4 月 21 日 부터 此 를 施 行 함. 本 令 施 行 前 에 行 한 賣 買 取 引 에 係 한 賣 買 手 數 料 로서 本 令 施 行 後 에 收 入 하는 것은 取 引 所 稅 의 課 稅 標 準 額 에 此 를 算 入 치 아니함. 출전 : 朝 鮮 總 督 府 官 報 , 朝 鮮 總 督 府 施 政 二 十 五 年 史,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38 41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자료3) 조선취인소령( 朝 鮮 取 引 所 令 ) 朝 鮮 取 引 所 令 은 (1931년 5월) 8일 오후 4시 발표하였는데 그 전문은 좌와 같다 第 一 章 取 引 所 組 織 及 設 立 第 1 條 取 引 所 는 法 人 으로 하여 會 員 으로써 組 織 함 第 2 條 取 引 所 는 營 利 의 目 的 으로써 業 務 를 行 함을 不 得 함 第 3 條 取 引 所 名 稱 中 에는 取 引 所 라는 文 字 를 用 할 事 第 4 條 取 引 所 에 對 하여는 本 令 에 規 定 한 者 를 除 한 外 는 朝 鮮 民 事 令 에 依 할 것을 定 한 民 法 中 社 團 法 人 에 關 한 規 定 을 準 用 함 第 5 條 取 引 所 의 設 立 은 朝 鮮 總 督 의 免 許 를 受 할 事 第 6 條 同 種 의 物 件 을 賣 買 取 引 하는 取 引 所 는 一 地 區 一 個 所 에 限 하여 設 立 함을 得 함 第 7 條 取 引 所 免 許 年 限 은 10 年 으로 함 但 朝 鮮 總 督 은 出 願 에 依 하여 此 를 更 新 함을 得 함 第 8 條 有 價 證 券 을 賣 買 取 引 하는 市 場 은 取 引 所 로 看 做 하고 本 令 에 依 치 아니하면 此 를 設 立 함을 不 得 함 第 9 條 同 一 取 引 所 에서 有 價 證 券 의 賣 買 取 引 과 米 其 他 商 品 의 賣 買 取 引 을 倂 行 함을 不 得 함 第 10 條 取 引 所 는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하여 取 引 所 의 賣 買 取 引 에 附 帶 한 倉 庫 業 其 他 業 務 를 行 함을 得 함. 取 引 所 가 倉 庫 業 을 行 할 境 遇 寄 託 者 의 請 求 가 있을 때는 寄 託 物 의 倉 荷 證 券 을 交 付 함을 要 함. 朝 鮮 民 事 令 에 依 하기로 定 한 商 法 第 383 條

439 자 료 419 2, 第 2 項 及 第 383 條 3의 規 定 은 前 項 의 倉 荷 證 券 에 此 를 準 用 함 第 二 章 取 引 所 의 會 員 第 11 條 取 引 所 에서는 其 會 員 에 限 하여 賣 買 取 引 을 爲 함을 得 함 第 12 條 左 記 各 項 의 一 에 該 當 한 者 는 取 引 所 의 會 員 됨을 不 得 함 一, 帝 國 臣 民 又 는 帝 國 法 令 에 依 하여 設 立 한 會 社 가 아닌 者 二, 無 能 力 者 三, 破 産 者 로 復 權 치 못한 者 四, 1 年 懲 役 又 는 禁 錮 以 上 의 刑 에 處 하여 其 執 行 을 終 하 고 又 는 執 行 을 受 함이 없게 된 日 로부터 5 年 을 經 過 치 아니한 者 五, 第 46 條 乃 至 第 51 條 의 規 定 에 依 하여 1 年 未 滿 의 懲 役 又 는 罰 金 刑 에 處 하여 其 執 行 을 終 하고 又 는 執 行 을 受 하 지 아니하게 된 日 로부터 3년을 經 過 치 아니한 者 六, 第 13 條 第 2 項 第 22 條 又 는 第 41 條 規 定 에 依 하여 除 名 되 고 除 名 日 로부터 3년을 經 過 치 아니한 者 七, 合 名 會 社 合 資 會 社 又 는 株 式 合 資 會 社 는 其 無 限 責 任 社 員 中 株 式 會 社 는 其 取 締 役 其 他 業 務 를 執 行 하는 社 員 中 帝 國 臣 民 이 아닌 者 又 는 第 2 號 乃 至 前 號 一 에 該 當 한 者 八, 株 式 會 社 로 其 資 本 의 半 額 以 上 及 議 決 權 의 過 半 數 가 帝 國 臣 民 又 는 帝 國 法 令 에 依 하여 設 立 한 法 人 에 屬 치 아 니한 者 第 13 條 會 員 前 條 第 1 號 乃 至 第 3 號 及 第 6 號 乃 至 第 8 號 一 에

440 42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該 當 한 時 는 取 引 所 로부터 脫 退 함. 朝 鮮 總 督 은 不 正 한 手 段 에 依 하여 會 員 이 된 것을 발견할 時 는 此 를 除 名 함을 得 함. 朝 鮮 總 督 은 前 條 各 號 一 에 該 當 한 者 로 會 員 이 된 것을 發 見 할 時 는 此 를 取 引 所 에서 脫 退 케 함을 得 함 第 14 條 取 引 所 는 定 款 으로써 會 員 됨을 必 要 한 條 件 을 定 함을 得 함. 取 引 所 는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會 員 이 前 項 의 條 件 을 缺 함에 至 한 境 遇 又 는 此 가 缺 如 된 者 로 會 員 된 것을 發 見 할 時 는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하여 此 를 取 引 所 로부터 脫 退 케 함 을 得 함. 朝 鮮 總 督 은 會 員 이 前 項 의 境 遇 에 該 當 할 時 는 此 를 取 引 所 로 脫 退 케 함을 得 함 第 15 條 取 引 所 會 員 을 加 入 케 하고자 할 時 는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할 事 第 16 條 會 員 인 會 社 는 其 代 表 者 를 定 할 事 前 項 代 表 者 는 會 社 의 業 務 를 執 行 하는 社 員 或 은 役 員 又 는 登 記 한 支 配 人 으로 帝 國 臣 民 인 것을 要 함. 1 人 으로 2 이상의 會 社 代 表 者 가 됨을 不 得 함 會 員 은 會 員 인 會 社 의 代 表 者 됨을 不 得 함 第 17 條 會 員 은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出 資 의 業 務 를 有 함 會 員 은 其 出 資 額 의 限 度 에서 取 引 所 의 責 任 을 分 擔 함 第 18 條 會 員 은 朝 鮮 總 督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身 元 保 證 金 을 取 引 所 에 納 付 할 事 第 19 條 取 引 所 는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會 員 으로 會 費 를 徵 收 함을 得 함 第 20 條 會 員 은 支 店 出 張 所 其 他 何 等 의 名 義 임을 不 問 하고 2 以 上 의 場 所 로써 同 一 取 引 所 의 賣 買 取 引 의 取 扱 을 하는 場 所

441 자 료 421 로 함을 不 得 함 何 人 이라도 取 引 所 의 賣 買 取 引 의 依 託 代 理 媒 介 又 는 取 次 의 營 業 을 行 함을 不 得 함 第 21 條 會 員 은 自 己 의 計 算 又 는 他 人 의 計 算 을 不 問 하고 取 引 所 에 在 한 其 賣 買 取 引 에 對 하여 一 切 의 責 任 을 負 할 事 第 22 條 取 引 所 는 其 秩 序 를 保 持 하기 爲 하여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會 員 이 其 營 業 을 停 止 하고 千 圓 以 下 의 過 怠 金 을 科 하며 又 는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하여 此 를 除 名 함을 得 함 第 23 條 會 員 은 死 亡 解 散 脫 退 除 名 其 他 事 由 에 依 하여 會 員 되 지 못하게 된 後 라도 其 取 引 所 에 在 한 賣 買 取 引 의 結 了 目 的 範 圍 內 에서는 其 結 了 에 至 하기까지 會 員 으로 看 做 함 前 項 의 境 遇 會 員 의 行 爲 가 없는 時 는 取 引 所 는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他 人 으로 하여금 其 行 爲 를 行 케 함을 得 함 第 三 章 取 引 所 役 員 及 商 議 會 員 第 24 條 取 引 所 에 左 의 役 員 을 置 함 理 事 長 1 人 理 事 若 干 人 監 事 若 干 人 役 員 은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2 年 以 內 任 期 로써 會 員 中 으로 會 員 總 會 에서 此 를 選 任 함 但 理 事 長 及 理 事 가 아닌 者 로 選 任 하여도 無 妨 함 1 人 으로 2 以 上 의 取 引 所 理 事 長 又 는 理 事 됨을 不 得 함 役 員 의 選 任 은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할 事

442 42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25 條 第 12 條 各 號 一 에 該 當 한 者 는 取 引 所 의 役 員 됨을 不 得 함 役 員 第 12 條 各 號 一 에 該 當 함에 至 할 時 는 其 職 을 失 함 會 員 中 으로 選 任 된 役 員 이 會 員 이 아니 되게 하는 時 亦 同 一 함 朝 鮮 總 督 은 不 正 의 手 段 에 依 하고 又 는 第 1 項 規 定 에 違 反 하 여 役 員 으로 된 者 를 發 見 할 時 는 此 를 解 散 함을 得 함 第 26 條 會 員 인 會 社 役 員 에 選 任 된 後 第 16 條 第 1 項 規 定 에 依 한 其 代 表 者 에 異 動 이 生 할 時 는 其 會 社 는 役 員 의 職 을 失 함 第 27 條 朝 鮮 總 督 은 役 員 의 職 務 를 行 하는 者 無 할 境 遇 必 要 하 다 認 할 時 는 假 役 員 을 選 任 함을 得 함 第 28 條 取 引 所 는 朝 鮮 總 督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取 引 所 에 關 한 重 要 한 事 項 을 附 議 하기 爲 하여 商 議 員 會 를 設 置 함을 得 함 第 四 章 取 引 所 賣 買 取 引 第 29 條 取 引 所 는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會 員 으로 하여금 賣 買 取 引 에 對 하여 證 據 金 을 納 케 함을 得 함 取 引 所 는 賣 買 取 引 高 에 應 하여 會 員 으로 賣 買 手 數 料 를 徵 收 함 을 得 함. 其 率 은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할 事 第 30 條 取 引 所 는 賣 買 取 引 에 關 한 責 任 을 履 行 치 아니한 會 員 이 있을 時 는 其 證 據 金 及 身 元 保 證 金 으로써 損 害 賠 償 의 用 에 供 함을 得 함 第 31 條 取 引 所 는 證 據 金 及 身 元 保 證 金 에 對 하여 優 先 權 을 有 함 第 32 條 取 引 所 賣 買 取 引 의 依 託 者 는 依 託 契 約 에 基 하여 生 하는 債 權 에 關 하여 當 該 會 員 의 身 元 保 證 金 을 他 債 權 者 에 對 하여

443 자 료 423 優 先 權 을 有 함. 前 條 의 優 先 權 은 前 項 의 優 先 權 에 對 하여 優 先 의 效 力 이 有 함 第 33 條 取 引 所 는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賣 買 取 引 의 違 約 으로 生 하는 損 害 에 對 하여 賠 償 의 責 에 任 함을 得 함 前 項 의 境 遇 取 引 所 는 其 賠 償 한 金 額 及 此 에 關 한 諸 費 의 追 證 을 違 約 者 에게 要 求 함을 得 함 第 34 條 取 引 所 는 業 務 規 定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立 會 의 停 止 又 는 會 員 의 取 引 所 에 在 한 賣 買 取 引 을 停 止 케 함을 得 함 第 35 條 受 渡 其 他 決 濟 及 其 繰 延 은 業 務 規 定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取 引 所 를 經 하여 此 를 行 할 事 受 渡 其 他 決 濟 及 其 繰 延 에 關 한 事 務 는 取 引 所 自 身 이 此 를 行 할 事 第 36 條 取 引 所 는 業 務 規 定 을 設 하여 賣 買 取 引 에 關 한 細 則 을 定 할 事 事 務 規 定 은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할 事 第 37 條 會 員 은 依 託 을 受 한 取 引 所 의 賣 買 取 引 에 對 하여 取 引 所 에서 其 賣 付 買 付 又 는 受 渡 를 行 치 아니하고 行 한 것과 同 一 又 는 類 似 의 計 算 으로써 依 託 者 에 對 하여 其 決 濟 를 爲 함을 不 得 함 取 引 所 는 前 項 規 定 에 違 反 한 會 員 에 對 하여 其 營 業 을 停 止 又 는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하여 此 를 除 名 함을 得 함 第 38 條 取 引 所 는 朝 鮮 總 督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公 定 市 勢 及 會 員 의 賣 買 高 를 公 示 할 事 第 39 條 本 令 에 定 한 者 外 取 引 所 의 賣 買 取 引 에 關 하여 必 要 한 事 項 은 朝 鮮 總 督 이 此 를 定 함

444 42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第 40 條 差 金 取 引 을 하는 取 引 所 類 似 의 施 設 을 하고 又 는 其 施 設 에 依 하여 取 引 을 行 함을 不 得 함 第 五 章 取 引 所 監 督 第 41 條 朝 鮮 總 督 은 取 引 所 又 는 其 役 員 或 은 會 員 의 行 爲 가 法 令 又 는 定 款 에 違 反 한 時 本 令 或 은 本 令 에 基 하여 發 한 命 令 에 依 하여 行 한 處 分 에 違 反 할 時 公 益 을 害 한다 認 할 時 又 는 公 衆 의 安 寧 에 妨 害 가 있다 認 할 時 는 取 引 所 又 는 其 役 員 或 은 會 員 에 對 하여 左 의 處 分 을 行 함을 得 함 一, 取 引 所 의 解 散 二, 取 引 所 의 業 務 停 止 三, 取 引 所 의 業 務 一 部 停 止 又 는 禁 止 四, 役 員 의 停 職 又 는 解 散 五, 會 員 의 營 業 停 止 又 는 除 名 第 42 條 朝 鮮 總 督 은 取 引 所 會 員 이 著 이 減 少 할 時, 1 年 以 上 取 引 所 의 業 務 를 休 止 할 時 其 他 取 引 所 를 存 續 할 必 要 가 없다 認 할 時 는 此 의 解 散 을 命 함을 得 함 第 43 條 朝 鮮 總 督 이 必 要 하다 認 할 時 는 官 吏 로 하여금 取 引 所 又 는 其 會 員 의 業 務 又 는 帳 簿 書 類 財 産 其 他 一 切 의 物 件 檢 査 又 는 監 督 上 必 要 한 處 分 을 行 케 함을 得 함. 이러한 境 遇 는 取 引 所 의 役 員 又 는 會 員 은 物 件 을 提 供 하여 質 問 에 應 答 할 事 第 44 條 朝 鮮 總 督 이 必 要 하다 認 할 時 는 取 引 所 에 對 하여 其 定 款 又 는 業 務 規 定 의 變 更 을 命 하고 其 決 議 를 取 消 를 行 하고

445 자 료 425 其 他 監 督 上 必 要 한 命 令 을 發 하며 又 는 處 分 함을 得 함 第 45 條 取 引 所 의 解 散 은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할 事 解 散 한 取 引 所 의 財 産 處 分 에 對 하여 必 要 한 事 項 은 朝 鮮 總 督 이 此 를 定 함 第 六 章 罰 則 第 46 條 第 20 條 의 規 定 에 違 反 한 者 는 30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第 47 條 第 40 條 規 定 에 違 反 한 者 는 1 年 以 下 의 懲 役 又 는 3 千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第 48 條 取 引 所 의 役 員 又 는 職 員 其 取 引 所 의 賣 買 取 引 에 關 한 職 務 에 關 하여 賄 賂 를 收 受 하고 又 는 此 를 要 求 約 束 할 時 는 1 年 以 下 懲 役 又 는 3 千 圓 以 下 罰 金 에 處 하고 不 正 의 行 爲 又 는 相 當 한 行 爲 를 하지 아니한 時 는 3 年 以 下 의 懲 役 又 는 5 千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前 項 境 遇 收 受 한 賄 賂 는 此 를 沒 收 함. 萬 若 又 는 一 部 를 沒 收 하기 不 能 할 時 는 그 價 格 을 追 徵 함 第 49 條 左 의 各 號 一 에 該 當 한 者 는 1년 以 下 懲 役 又 는 3 千 圓 以 下 罰 金 에 處 함 一, 取 引 所 의 役 員 又 는 職 員 에 賄 賂 를 交 付 提 供 又 는 約 束 한 者 二, 取 引 所 에 對 한 市 勢 를 虛 僞 公 示 한 者 三, 公 示 又 는 頒 布 의 目 的 으로써 虛 僞 의 市 勢 를 記 載 한 文 書 를 作 成 한 者 又 는 此 를 頒 布 한 者 四, 免 許 를 受 치 아니하고 取 引 所 를 設 立 한 者

446 42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前 項 第 1 號 의 罪 를 犯 한 者 自 首 할 時 는 其 刑 을 減 刑 又 는 免 除 함을 得 함 第 50 條 取 引 所 에 在 한 市 勢 의 變 動 을 圖 할 目 的 으로써 虛 僞 의 風 說 을 流 布 하고 僞 計 又 는 暴 行 或 脅 迫 한 者 는 2 年 以 下 의 懲 役 又 는 5 千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第 51 條 取 引 所 에 依 치 아니하고 取 引 所 의 市 勢 에 依 하여 差 金 의 授 受 를 目 的 한 行 爲 를 한 者 는 1 年 以 下 의 懲 役 又 는 2 千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但 朝 鮮 刑 事 令 에 依 할 것을 定 한 刑 法 第 186 條 規 定 의 適 用 은 無 妨 함 第 52 條 取 引 所 가 아닌 者 로서 그 名 稱 中 에 取 引 所 임을 表 示 할 文 字 를 用 한 者 는 5 百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第 53 條 會 員 은 其 代 理 人 戶 主, 家 族, 同 居 者, 雇 人 其 他 從 業 者 가 其 業 務 에 關 하여 第 20 條 의 規 定 에 違 反 할 時 는 自 己 의 指 揮 가 아니라는 理 由 로 其 處 罰 을 免 함을 不 得 함 第 54 條 本 令 의 罰 則 은 法 人 은 其 行 爲 를 爲 한 理 事 取 締 役 其 他 業 務 를 執 行 한 社 員 或 役 員 又 는 登 記 한 支 配 人 에 此 를 適 用 함 附 則 第 55 條 本 令 施 行 의 期 日 은 朝 鮮 總 督 이 此 를 定 함 第 56 條 從 前 의 規 定 에 依 하여 設 立 한 會 社 組 織 의 取 引 所 로 本 令 公 布 의 際 現 存 한 것은 現 認 可 된 營 業 繼 續 期 間 滿 了 日 까지 有 價 證 券 賣 買 取 引 하는 取 引 所 의 營 業 을 繼 續 함을 得 함 第 57 條 從 前 規 定 에 依 하여 設 立 하고 本 令 公 布 의 際 現 存 한 會 社 로 有 價 證 券 을 賣 買 取 引 하는 市 場 을 經 營 하는 者 는 現 認 可

447 자 료 427 된 營 業 繼 續 期 間 滿 了 日 까지 有 價 證 券 賣 買 取 引 하는 取 引 所 의 營 業 을 繼 續 함을 得 함 第 58 條 前 2 條 規 定 에 依 한 取 引 所 는 朝 鮮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하여 合 倂 함을 得 함 前 項 規 定 에 依 하여 合 倂 한 取 引 所 는 前 2 條 規 定 에 依 한 各 取 引 所 營 業 에 對 하여 本 令 施 行 의 際 現 存 한 營 業 所 의 所 在 地 에서 各 其 營 業 繼 續 期 間 滿 了 日 까지 其 營 業 을 繼 續 함을 得 함 第 59 條 前 3 條 에 規 定 한 取 引 所 의 營 業 繼 續 期 間 滿 了 의 際 朝 鮮 總 督 이 特 히 必 要 하다 認 할 時 는 前 3 條 規 定 에 依 한 營 業 繼 續 期 間 滿 了 日 부터 10 年 以 內 의 期 間 을 限 하여 更 히 其 營 業 의 繼 續 을 許 可 함을 得 함 第 60 條 第 51 條 乃 至 第 58 條 規 定 에 依 한 取 引 所 ( 以 下 株 式 會 社 組 織 의 取 引 所 라 稱 함) 의 定 款 의 變 更 은 總 督 의 認 可 를 受 할 事 第 61 條 株 式 會 社 組 織 의 取 引 所 에서는 其 取 引 員 에 限 하여 賣 買 取 引 을 行 함을 得 함 取 引 員 이 되고자 하는 者 는 朝 鮮 總 督 의 免 許 를 受 할 事 第 62 條 取 引 員 取 引 所 의 役 員 이 認 可 를 受 할 時 는 其 免 許 는 效 力 을 失 함 第 63 條 株 式 會 社 組 織 의 取 引 所 의 役 員 은 定 款 의 定 한 바에 依 하여 2 年 以 內 의 任 期 로써 株 主 中 으로 此 를 選 任 함. 第 24 條 第 1 項 第 3 項 又 第 4 項 及 第 25 條 規 定 은 前 項 役 員 에 對 하여 此 를 準 用 함 第 64 條 取 引 所 의 役 員 取 引 員 免 許 를 受 할 時 는 其 職 을 失 함 第 65 條 取 引 員 間 에 子 芩 의 供 與 損 益 의 分 配 其 他 取 引 員 의 營 業 에 對 하여 特 別 한 利 害 關 係 를 有 한 者 는 其 取 引 所 의 役 員

448 42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됨을 不 得 함 第 66 條 株 式 會 社 組 織 取 引 所 의 役 員 又 는 使 用 人 은 何 人 의 名 義 임을 不 問 하고 其 取 引 所 의 取 引 物 件 에 對 하여 取 引 所 에 在 한 賣 買 取 引 을 行 하고 又 는 其 依 託 을 受 함을 不 得 함 株 式 會 社 組 織 의 取 引 所 役 員 又 는 其 使 用 人 은 其 取 引 所 取 引 員 間 에 資 金 의 供 與 損 益 의 分 配 其 他 取 引 員 의 營 業 에 對 하여 特 別 한 利 害 關 係 를 有 함을 不 得 함 第 67 條 朝 鮮 總 督 은 第 65 條 規 定 에 違 反 하고 役 員 으로 된 者 를 發 見 又 는 役 員 으로 前 條 第 2 項 規 定 에 違 反 하였다 認 할 時 는 此 를 解 職 함을 得 함 第 68 條 第 66 條 第 1 項 規 定 에 違 反 又 는 同 條 第 2 項 特 別 利 害 關 係 를 生 할 目 的 으로 한 行 爲 가 있는 者 는 5 千 圓 以 下 의 罰 金 에 處 함 第 69 條 株 式 會 社 組 織 取 引 所 及 其 取 引 員 에 對 하여는 第 3 條 第 10 條 第 1 項 第 12 條 乃 至 第 14 條 第 16 條 第 18 條 第 20 條 乃 至 제23 條 제27 條 乃 至 第 39 條 第 41 條 乃 至 第 45 條 第 1 項 第 46 條 第 48 條 第 49 條 第 53 條 及 第 54 條 의 規 定 을 準 用 함 第 70 條 本 令 에 規 定 한 者 外 本 令 施 行 의 第 株 式 會 社 組 織 取 引 所 及 取 引 員 에 關 하여 必 要 한 事 項 은 朝 鮮 總 督 이 此 를 定 함 每 日 申 報 < 多 年 縣 案 의 朝 鮮 取 引 所 令 自 十 二 日 公 布 實 施 全 文 七 十 條 >

449 자 료 429 색 인 (1) 130은행 71, 은행 71 (ᄀ) 가네야(カネヤ) 65 가다 긴자부로( 賀 田 金 三 郞 ) 89, 109, 110 가다 나오지( 賀 田 直 治 ) 110 가사메 에이키치( 笠 目 榮 吉 ) 73, 80 가츠라 다로( 桂 太 郞 ) 54 가와노 고시치로( 小 七 郞 ) 21 가와무라 세이하치( 川 村 誠 八 ) 114 가와사키 도쿠노스케( 川 崎 徳 之 助 ) 193 가와카미 다테이치로( 川 上 立 一 郞 ) 5 가지하라 스에타로( 梶 原 末 太 郎 ) 121 가쿠 에이타로( 加 來 榮 太 郞 ) 16, 20, 26, 29, 30, 42, 45, 62, 83, 103, 189 가쿠 츠구오( 加 來 次 夫 ) 189 가토 헤이타로( 加 藤 平 太 郎 ) 185 강화도사건 1, 2, 3 경인양취합병설( 京 仁 兩 取 合 倂 說 ) 164 고노 다케노스케( 河 野 竹 之 助 ) 103, 170, 202 고니시 다츠지로( 小 西 辰 次 郎 ) 114 고다마 히데오( 兒 玉 秀 雄 ) 217 고모리 토라키치( 小 森 虎 吉 ) 21 고바야시 도우에몽( 小 林 藤 右 衛 門 ) 160, 161, 162, 174, 191 고바야시 료조( 小 林 良 蔵 ) 188 고스기( 小 杉 ) 217, 218 고오리 긴자부로( 郡 金 三 郞 ) 29, 45

450 43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고죠 간도( 古 城 管 堂 ) 99, 103, 175 고지마 다카노부( 兒 島 高 信 ) 191, 199 고토 렌페이( 後 藤 廉 平 ) 186, 188, 213 구기모토 도지로( 釘 本 藤 次 郞 ) 166 구라시게 데이스케( 倉 重 悌 輔 ) 65, 73 구로다 기요타카( 黑 田 淸 隆 ) 3 구마모토미곡시장( 熊 本 米 穀 市 場 ) 83 구마모토취인소( 熊 本 取 引 所 ) 78 구스노 도시나리( 楠 野 俊 成 ) 105, 118 구와노 겐지( 桑 野 健 治 ) 191, 203, 211 구와노 료타로( 桑 野 良 太 郞 ) 20, 21, 53, 67, 72, 82, 205 권신( 勸 信 ) 176, 177 기고시사단( 木 越 師 団 ) 50, 51 기노쿠니아 분자에몽( 紀 の 国 屋 文 左 衛 門 ) 107, 156 기무라 다케오( 木 村 健 夫 ) 21 기무라 유지( 木 村 雄 次 ) 157 기미시장( 期 米 市 場 ) 74, 84 기타무라 고로( 北 村 五 郞 ) 115 기타지마 고로( 北 島 五 郞 ) 124 김옥균 8 김윤복( 金 允 福 ) 207 (ᄂ) 나가노 마모루( 永 野 護 ) 178 나가오 다케마( 長 尾 猛 馬 ) 187 나가이 후사키치( 永 井 房 吉 ) 16, 20, 21 나가타 히코타로( 長 田 彦 太 郞 ) 192 나가토미 이치노스케( 長 富 一 之 祐 ) 30, 31, 45 나오노 료헤이( 直 野 良 平 ) 185 나카가와 코지로( 中 川 好 次 郞 ) 21

451 자 료 431 나카무라 가베에( 中 村 嘉 兵 衛 ) 65, 73 나카무라 도시마츠( 中 村 利 松 ) 121 나카무라 도쿠타로( 中 村 徳 太 郞 ) 121 나카무라 츄키치( 中 村 忠 吉 ) 53 나카쇼지 렌( 仲 小 路 廉 ) 91, 107 나카이( 中 井 ) 123 나카하라 다이치로( 中 原 太 一 郞 ) 23, 29 난수( 亂 手 ) 116, 117, 118 네아와세킨( 根 合 金 ) 132, 133 노구치 후미카즈( 野 口 文 一 ) 191 노다 우타로( 野 田 卯 太 郎 ) 42 노비타 가메타로( 延 田 龜 太 郞 ) 29 누노이 가조( 布 井 嘉 造 ) 103 니레 가게노리( 仁 禮 景 範 ) 7 니시와키 쵸타로( 西 脇 長 太 郞 ) 16, 20, 31, 41 닛타 요시타미( 新 田 義 民 ) 191, 206 (ᄃ) 다가마츠노미야( 高 松 宮 ) 197 다나카 긴페이( 田 中 金 平 ) 117, 137 다나카 노리카즈( 田 中 哲 一 ) 117 다나카 사시치로( 田 中 佐 七 郞 ) 16, 20, 21, 29, 45, 97, 184, 186, 187 다나카 우조( 田 中 卯 三 ) 139 다이쇼천황( 大 正 天 皇 ) 55, 87 다이이치은행( 第 一 銀 行 ) 16 다카다 츠네사부로( 高 田 常 三 郞 ) 63 다카시마 토모노스케( 高 島 鞆 之 助 ) 7 다카쿠라 다메조( 高 倉 爲 三 ) 178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 橋 是 清 ) 94 다카하시 쇼노스케( 高 橋 章 之 助 ) 187, 188

452 43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다케우치 사쿠헤이( 武 內 作 平 ) 177 다키 긴코도( 多 喜 金 光 堂 ) 76 다테이시 간( 立 石 幹 ) 97 대만미 81, 84 대용제( 代 用 制 ) 84 대용폐지설 84 대원군 3, 4, 6, 7, 8, 46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內 正 毅 ) 59, 78 데시우라 47, 48, 49, 110 덴니치 츠네지로( 天 日 常 次 郞 ) 99, 168, 171, 198 도고 헤이하치로( 東 郷 平 八 郞 ) 55 도리이 쵸지로( 鳥 居 長 次 郞 ) 111 도미타 기사쿠( 富 田 儀 作 ) 164, 165, 178, 181 도이 후쿠사부로( 土 肥 福 三 郞 ) 45 도지마취인소( 大 阪 堂 島 取 引 所 ) 82 도쿄취인소 178 도쿠라( 戸 倉 ) 69, 71 (ᄅ) 리키타케 가지로( 力 武 嘉 次 郞 ) 121, 123, 183, 187 (ᄆ) 마루다이 중매점( 丸 大 仲 買 店 ) 203 마스누키( 增 貫 ) 91 마츠모토 요고로( 松 本 要 五 郎 ) 147 마츠오 츠루오( 松 尾 鶴 男 ) 82, 83, 95 마츠무라 마츠모리( 松 村 松 盛 ) 199, 200, 212, 214, 217 마츠타니 세이이치( 松 谷 淸 一 ) 16, 20 마코토( 齋 藤 實 ) 60 마키야마 고조( 牧 山 耕 蔵 ) 54

453 자 료 433 만교쿠 이와키치( 万 玉 岩 吉 ) 67 메이지대제( 明 治 大 帝 ) 49, 82 메카다 다네타로( 目 賀 田 種 太 郞 ) 12 모리 기쿠고로( 森 菊 五 郞 ) 123 모리 츠네키치( 森 常 吉 ) 83 모리 츠치로( 森 槌 郞 ) 114, 121 모리나가구미( 守 永 組 ) 16 모리스 46 모토오카 에이지로( 本 岡 榮 次 郞 ) 96 무네 기헤이( 宗 喜 平 ) 148, 215 무라카미 마사타카( 村 上 政 高 ) 154 무라타 마코토( 村 田 孚 ) 186 물가조절령 87 미가조절위원회 87 미구락부( 米 俱 樂 部 ) 149 미나토( 湊 ) 76 미마스 구메키치( 三 増 久 米 吉 ) 103 미소동( 米 騷 動 ) 90 미츠나리( 光 成 ) 136 미츠이 에이쵸( 三 井 榮 長 ) 158 미야타니 소우에몽( 宮 谷 惣 右 衛 門 ) 83 미즈구치 류조( 水 口 隆 三 ) 139 미즈노 류조( 水 口 隆 三 ) 142 미즈타 사다시치( 水 田 定 七 ) 16, 20 미키 유이치( 三 木 雄 一 ) 20 민비 4, 6, 46 (ᄇ) 박영효 8 반복창( 潘 福 昌 ) 126

454 434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반지로( 潘 次 郎 ) 126 부산취인소 193 (ᄉ) 사가취인소( 佐 賀 取 引 所 ) 80 사에구사상점( 三 枝 商 店 ) 16 사와쿠마 히로시( 澤 熊 浩 ) 144 사이토 고키치( 齋 藤 五 吉 ) 188 사이토 규타로( 齋 藤 久 太 郞 ) 103, 114, 122 사이토 마코토( 齋 藤 實 ) 60, 199 사장 고토 렌페이( 後 藤 廉 平 ) 173 사카쿠라 이헤이( 坂 倉 伊 平 ) 141, 142 사카타 분고( 坂 田 文 吾 ) 92 사코 겐타로( 迫 源 太 郎 ) 124 산미증식계획( 産 米 增 殖 計 劃 ) 162 산업제일주의( 産 業 第 一 主 義 ) 162 서기관 곤도 마스키( 近 藤 眞 鋤 ) 5 선박관리령 87 세키젠은행( 積 善 銀 行 ) 177 소금구락부( 鹽 俱 樂 部 ) 215 소네 아라스케( 曾 彌 荒 助 ) 59 쇼노지점( 庄 野 支 店 ) 67 수도대용( 受 渡 代 用 ) 81 스기노 에이하치( 杉 野 榮 八 ) 180, 188 스기모토 미네키치( 杉 本 峰 吉 ) 112 스기모토 이치타로( 杉 本 一 太 郞 ) 67 스나가 세이치로( 須 永 勢 一 郞 ) 62, 69, 82 스스무 다츠마( 進 辰 馬 ) 42 스스키다 시키조( 薄 田 式 造 ) 21 스에마츠 겐쵸( 末 松 謙 澄 ) 42

455 자 료 435 스즈키 아츠시( 鈴 木 穆 ) 105 스즈키상점( 鈴 木 商 店 ) 90 시노부 쥰페이( 信 夫 淳 平 ) 53, 56 시데하라 기주로( 幣 原 喜 重 郞 ) 30, 31, 32, 41 시라가미 센이치( 白 神 専 一 ) 103 시라이 가츠노리( 白 井 勝 悟 ) 82 시마 츠요시( 島 剛 ) 192, 193 시모오카 츄지( 下 岡 忠 治 ) 162, 164 시바타 겐페( 柴 田 源 兵 衛 ) 23 시바타 마고베( 柴 田 孫 兵 衛 ) 20, 29, 30, 30, 45 시부사와 에이이치( 澁 澤 榮 一 ) 46 시오자키 후지타로( 潮 崎 藤 太 郞 ) 206 츠나기 센키치( 綱 木 千 吉 ) 29 츠키야마 91 (ᄋ) 아다치 후사지로( 安 達 房 治 郞 ) 162 아라이 간지로( 新 居 歡 次 郞 ) 21 아라이 신조( 新 井 新 蔵 ) 122, 145 아라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 99, 175, 178, 188, 191, 198, 200, 202, 204 아라키 스케타로( 荒 木 助 太 郞 ) 94, 115 아루가 미츠토요( 有 賀 光 豊 ) 157 아리수가와노미야 다케히토( 有 栖 川 宮 威 仁 ) 55 아마노 기노스케( 天 野 喜 之 助 ) 102 아마노 다메유키( 天 野 爲 之 ) 103 아사노 다사부로( 淺 野 太 三 郞 ) 128, 150 아사리 사부로( 淺 利 三 朗 ) 199 아사마츠 다로( 淺 松 太 郞 ) 131 아사야마 겐조( 淺 山 顯 藏 ) 5 아사이 지사부로( 淺 井 治 三 郞 ) 109

456 436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아야타 유타카( 綾 田 豊 ) 91 아오야나기 소이치로( 靑 柳 壯 一 郞 ) 29 아오키 슈조( 靑 木 周 蔵 ) 42, 43 아키야마 미츠오( 秋 山 滿 夫 ) 96, 191, 105 야마구치 이쿠타로( 山 口 幾 太 郎 ) 82 야마나시 한조( 山 梨 半 造 ) 191 야마모토 곤베에( 山 本 権 兵 衛 ) 84 야마시나 기이치( 山 科 喜 一 ) 111 야마시타 신타로( 山 下 新 太 郞 ) 16, 120 야마카노( 山 叶 )상점 178 야스나리 지로( 安 成 二 郞 ) 90 야스다은행( 安 田 銀 行 ) 71, 104, 179 야스오카 도쿠헤이( 安 岡 德 平 ) 21 영종도사건 2 오노 겐이치로( 小 野 賢 一 郞 ) 54 오노 규타로( 小 野 久 太 郞 ) 171 오마( 尾 間 ) 197 오오무라 모모쿠라( 大 村 百 蔵 ) 193 오오무라 야스타( 大 村 保 太 ) 95 오오미와 쵸베에( 大 三 輪 長 兵 衛 ) 12 오오바 에이세이( 大 庭 永 成 ) 5 오오이시 사다지로( 大 石 貞 次 郞 ) 83 오오이케 츄스케( 大 池 忠 助 ) 92, 103, 123 오오쿠보 히코자에몽( 大 久 保 彦 左 衛 門 ) 157 오오히라 가주로( 大 平 嘉 重 郞 ) 183, 185, 191 오카 고오지로( 岡 幸 次 郞 ) 45 오카 헤이이치( 岡 兵 一 ) 5 오카항( 岡 半 ) 91 오쿠다 사다지로( 奥 田 貞 次 郞 ) 45, 62, 78, 116 오하라 신이치( 小 原 新 一 ) 91

457 자 료 437 와카마츠 우사부로( 若 松 兎 三 郞 ) 93, 103, 144 와타나베 사다이치로( 渡 邊 定 一 郞 ) 161, 166, 188, 194, 202 와타나베 시노부( 渡 邊 忍 ) 197 와타나베 토모타로( 渡 邊 友 太 郞 ) 21 왜성대( 倭 城 台 ) 55 요네다 진타로( 米 田 甚 太 郞 ) 189 요시다 슈지로( 吉 田 秀 次 郞 ) 103, 170, 180, 181, 207 요시카와 사타로( 吉 川 佐 太 郞 ) 25, 27, 27 요시키( 吉 木 ) 207 우가키 가즈나리( 宇 垣 一 成 ) 217 우츠미 세이조( 內 海 淸 藏 ) 184 우즈타카 히로시( 堆 浩 ) 203 우츠미 슈쿠로( 內 海 叔 郞 ) 123, 127, 129, 174, 184, 186, 205 우츠미가( 內 海 家 ) 203, 205 우츠미상점 124 우콘 곤자에몽( 右 近 権 左 衛 門 ) 58 운요호( 雲 揚 號 ) 3 원세개( 袁 世 凱 ) 7, 12 유아사 구라헤이( 湯 淺 倉 平 ) 164 이구치 사다시치( 井 口 定 七 ) 29 이노우에 가오루( 井 上 馨 ) 6 이노우에 와사부로( 井 上 和 三 郞 ) 56 이노우에 요시카( 井 上 良 馨 ) 3 이노우에 카오루( 井 上 馨 ) 3, 43 이리야마중매점(イリヤマ 仲 買 店 ) 65 이마무라 가쿠지로( 今 村 覺 次 郞 ) 128, 174, 185 이마무라 다케시( 今 村 武 志 ) 191, 195, 199, 200, 217 이마이 겐료( 今 井 源 良 ) 178, 182 이마이 슈이치( 今 井 修 一 ) 111 이마이다 기요노리( 今 井 田 淸 德 ) 218

458 438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이병학( 李 柄 學 ) 184 이봉래( 李 鳳 來 ) 75 이소노 고에몽( 磯 野 小 右 衛 門 ) 88 이시이 기쿠지로( 石 井 菊 次 郞 ) 25, 27, 28, 29, 30 이시하타 테이( 石 幡 貞 ) 5 이오이 쵸( 五 百 井 長 ) 25 이와쿠라 도모미( 岩 倉 具 視 ) 55 이용문( 李 溶 文 ) 74, 75, 77 이이다 모토오( 飯 田 茂 登 雄 ) 83, 84 이입세 84, 86 이주잉 히코키치( 伊 集 院 彦 吉 ) 44, 45 이치카와 하지메( 市 川 肇 ) 110 이케가미 시로( 池 上 四 郞 ) 195 이케다 세이지( 池 田 誠 治 ) 16, 20, 30 이케다 쵸지로( 池 田 長 次 郞 ) 83, 95 이케다 히데오( 池 田 秀 雄 ) 162 이쿠타 세이자부로( 生 田 清 三 郞 ) 91, 96, 100, 166 이태왕 2, 12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8, 13, 53, 54, 55, 59 이토조에( 糸 園 ) 21 이하응( 李 昰 應 ) 4 이해승( 李 海 昇 ) 73, 80 이홍장( 李 鴻 章 ) 8, 13 인천남상업학교( 仁 川 南 商 業 學 校 ) 128 임영환( 林 泳 煥 ) 62, 63, 65, 66, 68, 70 (ᄌ) 정급창( 丁 汲 昌 ) 7 정치국( 丁 致 國 ) 103 제물포( 濟 物 浦 ) 2

459 자 료 439 조선미 10, 81, 84, 86, 91, 108, 156 조선산업회사 203 조선신문( 朝 鮮 新 聞 ) 54 조선신보( 朝 鮮 新 報 ) 53, 54 조선신탁 208 조선은행 70, 71 조선취인소 170, 193 조선취인소세령( 朝 鮮 取 引 所 稅 令 ) 139 조선타임즈 53 조전( 早 電 ) 109 주성근( 朱 性 根 ) 103 (ᄎ) 총해합( 總 解 合 ) 25, 27 51, 80, 113 쵸이노우에 기요시( 長 井 上 清 ) 190 취인소해독론( 取 引 所 解 毒 論 ) 25 츠즈키 게이로쿠( 都 筑 馨 六 ) 42 츠지카와 도미시게( 辻 川 富 重 ) 111, 185 (ᄑ) 페리 3 폭리취체령 91, 119 (ᄒ) 하기와라 모리이치( 萩 原 守 一 ) 16 하기와라 쵸기치( 萩 原 長 吉 ) 89 하나부사 요시모토( 花 房 義 質 ) 3, 6, 55 하라 가츠이치( 原 勝 一 ) 174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 谷 川 好 道 ) 138 하시모토 야사부로( 橋 本 彌 三 郎 ) 65, 73

460 440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하야시 곤스케( 林 権 助 ) 42 하야시 이치로지( 林 市 郞 治 ) 21 하야시 쵸타로( 林 長 太 郞 ) 21 하지 모리사다( 土 師 盛 貞 ) 190, 199, 202, 211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漢 城 共 同 倉 庫 株 式 會 社 ) 57 한호농공은행( 漢 湖 農 工 銀 行 ) 95 호리 나오키( 堀 直 喜 ) 134 호소이 하지메( 細 井 肇 ) 4 회사령 60, 138 후지모토합자회사( 藤 本 合 資 會 社 ) 67 후지이 간타로( 藤 井 寬 太 郞 ) 123, 124, 154, 157, 158 후지타 구니노스케( 藤 田 國 之 助 ) 197 후쿠다 토라타로( 福 田 虎 太 郞 ) 16 히구치 헤이고( 樋 口 平 吾 ) 29, 30, 45 히다( 肥 田 ) 197 히라야마 마츠타로( 平 山 松 太 郞 ) 186 히라오카 우타로( 平 岡 宇 太 郞 ) 138 히라이 미츠오( 平 井 三 男 ) 215 히라카와 다케에몽( 平 川 武 右 衛 門 ) 109 히라타 나오타( 平 田 直 太 ) 122 히로사와 쇼지로( 廣 澤 正 次 郞 ) 111, 129, 127, 129, 145 히사마 젠스케( 久 間 善 助 ) 21 히지마이( 日 仕 舞 ) 22

461 자 료 441 편 역 자 후 기 사실 편역자가 인취성쇠기 를 접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평소 일제하 조선신탁업 및 재조 일본인의 신탁회사 경영에 관 심을 갖고 있었고, 그 주요한 인물들을 조사해 가는 와중에 인 취성쇠기 (52)에도 등장하는 우즈타카 히로시( 堆 浩 )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즈타카는 인천의 조선신탁회사를 경영했던 인물이었고, 그에 대한 자료조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역사정보 통합시스템을 통해 인취성쇠기 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취성쇠기 를 읽어보니 그 안에는 개항 이후 1931년까지의 인천재계사가 인취를 중심으로 다이나믹하게 전개 되고 있었다. 인천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성은 물론 도쿄와 오오 사카 등에 있던 거물급 상인들도 등장했고, 데시우라라는 미국인 부터 이해승과 이봉래이용문 등 권력자까지 인취에 관여하고 있었다. 특히 인취성쇠기 에는 인취의 설립배경과 준비과정, 이 후의 전개과정과 경영변동, 경취와의 합병과정이 취인소에 밝은 도스라는 기자의 손으로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과 인물들을 배후로 하여 중매인들이 각종 매매전( 賣 買 戰 )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매매전은 취인소와 관련된 그간 알 려지지 않은 많은 정보와 이미지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 풍부한 내용과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자료로서의 인 취성쇠기 는 판독이 어렵기도 했거니와 일본어 자체가 어려워 다른 연구자나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다 행히 인천학연구원에서 공모한 2014년 번역과제가 받아들여져

462 442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신문스크랩에 불과했던 인취성쇠기 가 자료집의 형태로 일반에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인천경제사 나아가서는 한국경제사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인천학연구원 관계자와 익명의 심사위원들에게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특히 그간 역자의 무리한 요구에 도 현명한 대응으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인천학연구원의 신미혜 씨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응급실로 이송되어 급하게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신 장모님(함길자 권사님)과 연로하셔서 직장만으로도 힘에 부치실 텐데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직 접 병간호에 애쓰시는 장인어른(최우용 권사님)께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지면을 빌어 기도드린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아내 최혜영과 아들 김동혁은 그 존재만으로 커다 른 힘과 위로가 된다. 사랑을 전해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2015년 1월 27일 요코하마 히요시에서 김 명 수

463 인취성쇠기( 仁 取 盛 衰 記 ) - 미곡거래소 仁 川 米 豆 取 引 所 의 흥망성쇠 - 초판인쇄 2015년 2월 13일 초판발행 2015년 2월 13일 편 역 자 김 명 수 발 행 인 박 진 한 발 행 처 인천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구 석정로 165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성지관 102호 전화 : 032) ~4 / 전송 : 032) 편집.인쇄 주)스톰씨앤씨 032)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CIP제어번호: CI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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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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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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