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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김명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유미림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송휘영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이석용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연구논문영토해양연구 Vol. 12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김명기명지대학교명예교수 Ⅰ. 머리말 죽도외 1도 ( 竹島外一島 ) 는일본의영토가아니라고지령한 태정관지령문 ( 太政官指令文 ) 이소개된것은지금부터약 30년전인 1987년호리가즈오 [ 堀和生 ] 교수가발표한 1905년일본의죽도영토편입 이라는논문에서다. 1 동논문을통해최초로발견된 태정관지령문 은한일양국사학자에게독도의영유권에관한새로운연구의전기가되었다. 특히 태정관지령문 의 죽도외 1도 의의미에관해한일학자간의심도 있는연구와격렬한논쟁이전개되어왔다. 2 그러던중지금부터 10년전인 2005년에우르시자키히데유키 [ 漆崎英之 ] 목사가 죽도외 1도 를송도 ( 松島, 독도 ) 로표시한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를발견 발표하여 3 죽도외 1도 의해석에관한한일학자간의논쟁은일단소강상태를맞게되었다고볼수있다. 그결과독도는일본의영토가아니라는것이일본명치정부당국에서공식적으로표명된것이확인되어일 * 논문투고일 : 2016. 9. 30. 심사개시일 : 2016. 11. 8. 게재확정일 : 2016. 11. 30. 1 堀和生, 1987, 一九 五年日本의竹島領土編入, 朝鮮史硏究會論文集 제 24 호. 2 김호동, 2012, 태정관지령죽도외 1도건에관하여본방과관계없다를둘러싼제문제의비판, 독도연구 제12호, 35쪽. 3 漆崎英之, 2013, 태정관지령부속지도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발견경위와그의의, 獨島硏究 제14호, 329쪽. 6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본정부는더이상독도가일본의영토라고주장할수없게되고말았다. 그럼에도 기죽도약도 발견후에도 죽도외 1도 는松島 [ 독도 ] 가아니라는일부일본학자의주장이더러제기되고있다. 4 기죽도약도 에관한국내사학자의심도있는연구에도불구하고이에관한국제법학자의연구는부진상태에있는것이현실이다. 국제법상으로는 기죽도약도 가어떠한법적효력을갖는것인가는독도를연구하는사학자는물론이고국제법학자에게도그리고독도에관한대내외정책을입안 결정하는정부당국자에게도연구를요하는관심과제의하나이다. 이연구는이과제에대한개략적해답을제시하고자시도된것이다. 국제법상이에관한선행연구가전혀없으므로이연구는기초적인것일수밖에없다고본다. 국제법학자가이과제에대해쉽게접근하지못하는이유중의하나는 기죽도약도 의사실의실체에쉽게접근하지못하고또그것을쉽게이해하지못하는데있다고본다. 필자도 기죽도약도 의사실적실체는물론이고그것의역사적의미를이해하지못한채이연구를시작함을자인한다. 국제법학자에게는이연구를기초로심도있고폭넓은후속적연구가이어지기를기대해본다. 이하 (i) 기죽도약도 의개관, (ii) 기죽도약도 의인증지도여부검토, (iii) 기죽도약도 의공식지도여부검토, (iv) 기죽도약도 와역사적권원 4 시마네현다케시마연구소의스기하라다카시 [ 杉原隆 ] 는 1881년송도개간원에관한일련의문서를인용하여 태정관지령문 의 죽도외 1도 는죽도로도송도로도불리운울릉도를의미한다고주장하고있다. 杉原隆, 2012, 第二期 竹島問題에관한조사연구 중간보고서, 島根県竹島問題硏究會, 11쪽. 그러한주장은쓰카모토다카시 [ 塚本孝 ] 에게승계되어있다. 塚本孝, 1994, 죽도영유권문제의경위, 조사와정보 제244호 ; 이성환, 2016, 태정관과태정관지령문은무엇인가, 독도연구 제20호, 97쪽. 의대체순으로기술하고, (v) 결론에서정부당국에정책대안을제의하기로한다. 이연구의법사상적기초는 법실증주의 이며, 연구의방법은 법해석론 적접근이다. 따라서연구의대상은실제로존재하는법 (lex lata) 이다. 7

영토해양연구 Vol. 12 Ⅱ. 기죽도약도 의개관 1. 기죽도약도 의제작 1876년 10월 16일일본내무성은지적조사와지도편찬작업을진행중이던시마네현에서竹島 [ 울릉도 ] 와松島 [ 독도 ] 를시마네현의관할에포함시킬것인가의여부의질의서를받았다. 내무성은동질의서의부속문서와 17세기말조일간의왕복문서를검토하고竹島와松島는조선의영토라는결론을내렸다. 1877년 3월 17일내무성은태정관 ( 太政官 ) 에게죽도의지적편찬에관한질의서를제출했다. 1877년 3월 29일태정관은이에관한지령문을내무성에하달했다. 5 태정관지령문 결재품의서에는태정관우대신이와쿠라도모미 [ 岩倉具視 ] 이외에도성경 ( 省卿 ) 을겸직하는 3명의참의 ( 參議 ) 가날인하였다. 이 3명의참의는대장경 ( 大藏卿 ) 겸직오쿠마시게노부 [ 大隈重信 ], 사법경겸직오키다카토 [ 大木喬任 ] 그리고외무경겸직데라시마무네노리 [ 寺島宗則 ] 이다. 당시 태정관에상신한것은내무성이므로, 태정관지령문 은내무성, 대장성, 사법성, 외무성의 4개성과최고국가기관인태정관이총체적으로참여하여의사결정을한것이다. 6 기죽도약도 는세가지지도의통칭이다. 그중하나는 1876년 10월 16일시마네현참사사카이지로 [ 境二郎 ] 가내무성에제출한품의서 일본해내竹島외일도지적편찬방사 [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에첨부된 기죽도약도 ( 이를이하 시마네현기죽도약도 라한다 ) 이고, 다른하나는일본내무성이 1877년 3월 1일에태정관에제출한일본해내竹島외 1도지적편찬방사에첨부된 기죽도약도 ( 이하이를 내무성기죽도약도 라한다 ) 이다. 그리고또다른하나는 1877년 3월 29일태정관이 5 동북아역사재단독도연구소, 2008, 일본외무성독도홍보팜플렛반박문 제4항 ;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2006, Dokdo, Korean Territory since 6th Century, p. 26; 대한민국외교부, 2012, 대한민국의아름다운영토독도, 21쪽 ; 김병렬, 1998, 독도, 다다미디어, 344~45쪽 ; 신용하, 1996, 독도의민족영토사연구, 지식산업사, 164쪽 ; 정태만, 2014,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및태정관지령과독도, 독도연구 제17 호, 14~15 쪽 ; 김명기, 2007, 독도강의, 독도조사연구학회, 75쪽, 일본국립공문서관디지털아카이브 (http://www.digital.archives.go.jp). 6 太政官編, 1877, 公文錄, 內務省之部, 1877년 3월 17일자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일본국립공문서관디지털아카이브 (http://www.digital.archives. go.jp). 8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竹島외 1도는일본과관계없음을명심할것 이라는지령에부속된 기죽도약도 ( 이를이하 태정관지령문기죽도약도 또는 기죽도약도 라한다 ) 다. 시마네현기죽도약도 는시마네현참사사카이지로가제작한것이고 내무성기죽도약도 와 태정관지령문기죽도약도 는내무성과태정관이각각새로제작한것이아니라시마네현지적편찬방사에첨부된 기죽도약도 를그대로내무성의지적편찬방사에첨부되고태정관지령에첨부한것으로본다. 당시는오늘과같이복사기술이발달되어있지아니했기때문이다. 따라서 시마네현기죽도약도 와 태정관지령문기죽도약도 는동일한것으로본다. 양자가별개의지도라는어떠한논술 주장도접할수없다. 7 정태만, 2014, 앞의글, 18 쪽. 8 정태만, 2014, 위의글, 19 쪽. 2. 기죽도약도 의공시 기죽도약도 는 태정관지령문 의 14개부속문과같이 태정관지령문 에부속되어 태정유전 ( 太政類典 ) 과 공문록 ( 公文錄 ) 에수록되어있다. 다만 태정유전 에는 기죽도약도 가수록되어있지아니하다. 이는아마도당시에는 기죽도약도 를그대로재생복제할과학적기술이부족하여 기죽도약도 를 공문록 에그대로수록하고 태정유전 에는수록하지아니한것으로본다. 7 요컨대 기죽도약도 는 공문록 에등재되어일본국내적으로뿐만아니라국제적으로공시되었다. 따라서 기죽도약도 는일본의대내문서에불과한것이아니다. 공문록 은명치전기의정부공문서원부를수록한것으로일본의관보제도가창설된명치 16년 (1883) 까지관보의기능을했다. 8 관보 (official gazettes) 는공식적인정부정기간행물로국제법연구의기본연원이다 (a primary source for research in international law). 9 그러므로 공문록 에등재되는것은일본국내에한정된고시가아니라국제적공시의의미를갖는다. 공시는국제법상통고 (notification) 의효과가인정되는것으로, 통고는일방적법률행위로통고의내용에따른국제법상효력이발생하는바, 기죽도약도 의공 9 Edmund Jan Osmanczyk, 1900, Encyclopedic Dictionary of the United Nations, 2nd ed.(new York: Taylor), p. 652. 9

영토해양연구 Vol. 12 시는그내용에따라즉, 후술하는 기죽도약도의내용 에따라국제법상효력이인정된다. 공시는특별한형식은없다 (there is no specific form). 10 따라서공시는 public announcement, joint declaration, publication, recognition, exchange of note 등여러가지용어가사용되고있다. 공시는문제의공시의성격에의존하는통고를요한다 (declaration requires notification depend upon the nature of the declaration). 11 따라서공시는요구되는통고의효과가인정되며, 일방적법률행위로법적구속력을갖는다 (declaration has binding force). 12 공문록 은오늘현재일본국립공문서관에소장되어있으며일본국립공문서관디지털아카이브 (http:www.digital.archives.go.jp) 에접속하면누구나열람할수있도록공개되어있다. 3. 기죽도약도 의내용 태정관지령문기죽도약도 는가로 58cm, 세로 38cm의크기로, 다음과같은섬과거리를가리키는문자로구성되어있다. (i) 지도우측상단에종으로 磯竹島略島 라고도명이표기되어있다. (ii) 지도에는두개의섬이그려져있으며, 그중하나는섬의중앙상부에위치하고, 다른하나는그섬의우측하단에위치하고있다. 섬의중앙상부에위치한섬은그섬위에 磯竹島 라고표기하고기죽도서남방에위치한섬은그섬위에 松島 라고표기되어있다. 기죽도는울릉도이고송도는독도인것이다. (iii) 기죽도좌측에종으로 磯竹島에서조선을바라보면서북해안이되며해상으로약 50리정도 라고표기되어있다. (iv) 기죽도와송도사이에사선으로 松島에서磯竹島까지서북쪽 40리정도 라고표기되어있다. (v) 오키도고후쿠우라 [ 隱岐福浦 ] 에서松島 ( 마쓰시 10 Carl-August Fleischauer, 1984, Declaration, EPIL, Vol. 7, p. 67. 11 Fleischauer, ibid., p.67. 12 Fleischauer, ibid, p.67, Mary F. Domineck, 1986, Notification, EPIL, Vol. 9, p. 290; G. Schwarzenberger and E. D. Brown, 1976, A Manual of International Law, p. 141. 10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마 ) 간사선으로 隱岐福浦 [ 오키도고후쿠우라 ] 에서松島 [ 마쓰시마 ] 까지서북쪽 80리정도 라고문자로표기되어있다. 이상이 기죽도약도 에표시된섬과문자의전부다. 기죽도약도 의난내 외를불문하고기죽도또는松島가조선의영토이다또는일본의영토이다라는표현은그림으로나문자로나명시된바없다. 기죽도약도 상에기죽도와松島두섬이있으므로竹島外一島는松島를뜻하는것으로된다. 기죽도에서松島까지는약 40리정도 이고, 오키도에서松島까지 80리정도 라는기술은송도는기죽도에소속되며오키도에소속되는것이아니다라는의미라면 기죽도약도 는松島 [ 독도 ] 가조선의영토라는영토에관한지도라고볼수있을것이나국제법상영토취득의원칙으로근거리원칙은인정되어있지아니하므로이러한추정은인정될수있는지검토를요한다. 물론 기죽도약도 로보아松島가기죽도에가깝고오키도에가까운것이아니므로이를보고시마네현, 내무성그리고태정관이松島를일본과관계가없다고판단했을것으로추정될수있지만 기죽도약도 상으로는그러한근거가없다. 13 이성환, 2016. 앞의글, 108 쪽. 4. 기죽도약도 와태정관지령문의관계 1) 태정관지령문의부속도 ( 附屬圖 ) 관계 태정관지령문 은 1쪽의문서인것이아니라수개의문서의복합체로구성되어있다. 이복합체로구성된 태정관지령문 은크게 (i) 태정관지령문 본문 과 (ii) 태정관지령문 부속문 으로구분해볼수있다. 지령은질의를받은상급기관이하급기관에대한확정적지시를말한다. 13 태정관지령문 본문은 태정관지령문 의핵심인 (i) 지령안 ( 指令按 ) 과지령안을도출한근거인지령안근거 ( 指令按根據 ) 로구성되어있다. 태정관지령문 부속문은 14개문서로구성되어있으며, 이를시마네현이 수집 작성한 6 개의문서와내무성이수집 작성한 6 개 11

영토해양연구 Vol. 12 의문서그리고태정관이작성한 2 개의문서도합 14 개의자료 문서로구 성되어있다. 이 14 개의문서는 공문록 에수록되어있는바, 이를열거해 보면다음과같다. (i) 태정관지령 결재품의서 (ii) 도근현에서내무성에올린질의서 (iii) 내무성지리국에서도근현에내려보낸지리요청서 ( 을제218호 ) (iv) 죽도외 1도 에대한정의 (v) 도해유래및도해허가서 (vi) 도래금지경위및도해금지령 (vii) 도해금지결정의이유 ( 제 1호구정부형의지지의 ) (viii) 일본어민의도해금지를조선에통보한외교문서 (ix) 조선에서받은외교문서 (x) 조선에서받은외교문서를에도막부에전달했다는대마도의회신 ( 제4 호본방회답 ) (xi) 외교교섭창구인대마도실무자가조선에보낸문서 ( 제21호구상지람 ) (xii) 내무성에서태정관에올린질의서 ( 일본해내죽도외일도지적편찬방사 ) (xiii) 기죽도약도 (xiv) 태정광의문서목록 ( 울릉도와독도를편도외로정함과내무성질의및태정관의지 령 ) 14 이와같이 기죽도약도 는 태정관지령문 의 14 개부속문중하나이다. 그 러므로 기죽도약도 는태정관지령의한구성부분이다. 태정관지령문 의 공시와같이 기죽도약도 도 공문록 에등재되어있다. 15 2) 태정관지령문의정의도 ( 定義圖 ) 관계태정관지령문의핵심인지령안은다음과같이지시되어있다. 14 일본국립공문서관디지털아카이브 (http://www.digital.archives.go.jp); 정태만, 2014, 앞의글, 17쪽. 15 일본국립공문서관디지털아카이브 (http://www.digital.archives.go.jp); 정태만, 2014, 위의글, 17쪽. 12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御指令按 伺之趣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 어지령안 품의한취지의죽도외 1 도의건에대하여본방은관계가없다는것을심 득할것. 위의기술중 죽도 는울릉도를지칭하는것이고, 외 1도 는松島 [ 독도 ] 를지징하는것이다. 그리고 본방 은일본을뜻하는것이다. 즉, 독도는일본과관계가없다는뜻이다. 이러한해석은동지령에부속된 기죽도약도 가지령안의해석의근거가된다. 즉 기죽도약도 는지령안의 竹島외 1도 의정의규정이된다고할수있다. 기죽도약도 에는 2개의섬이그려져있으며그중하나는섬위에 磯竹島 라고문자로표기되어있고그섬의서남쪽 40리정도에있는다른도위에는 松島 라고문자로표기되어있기때문이다. 기죽도약도 가태정관지령문의부속문이므로이는태정관지령문의 竹島外一島 의정의규정 ( 定義規定 ), 즉, 정의도 ( 定義圖 ) 라고할수있다. 시마네현에서내무성에제출한질의서, 즉 일본해내竹島외 1도지적편찬방사, 내무성에서태정관에제출한질의서 일본해내竹島외 1도지적편찬방사, 그리고태정관의지령문에는모두각각 기죽도약도 가첨부되어있다. 이는시마네현, 내무성그리고태정관이모두각기 기죽도약도 를보고 죽도외 1도 의의미를 기죽도약도 로정의한것이며 기죽도약도 는 죽도외 1도 를죽도서남방 40리정도에위치한松島 [ 독도 ] 로정의한것이다. 내무성이태정관에제출한일본해내 죽도외 1도의지적편찬방사 에는 죽도외 1도 의정의규정이없으나다만, 원유의대략 ( 原由ノ大略 ) 에 죽도외 1도 에관해기술하고있다. 16 이를좀더시각적으로명료하게표 16 태정관, 공문록, 내무성지부1, 명치 10년 3월 ( 국립공문서관, 서가번호 2A10 公 2032). 시하기위해 기죽도약도 를첨부한것으로본다. 요컨대 기죽도약도 는 태정관지령문 에표시된 竹 13

영토해양연구 Vol. 12 島외 1 도 의의미를松島 [ 독도 ] 로표시한정의규정인것이다. 5. 기죽도약도 에대한대일본공개질의 기죽도약도 의발견 발표는한국의언론계에도큰관심을갖고이를내 외에보도했을뿐만아니라특히, 연합뉴스는 2006 년 9 월에일본외상과 각정당의대표에게 태정관지령문 과 기죽도약도 에관해공개질의를한바있다. 이에관한참신하고창조적인연구가요구된다. 17 Ⅲ. 기죽도약도 의인증지도여부검토 국제법상지도의증명력은극히제한적이다. 국제법상직접적증명력이인정되는지도는인증지도 (authenticated map) 에한하므로 기죽도약도 가인증지도인가부터검토하기로한다. 1. 지도의인증성조약 (treaties) 과재판 (decisions) 과같은법적문서 (legal instruments) 에부속되어그법적문서의불가분의일부를구성하는지도는직접적증명력이인정되고그이외의지도는간접적증명력만이인정되는데불과하다. 이와같이법적문서에부속된지도를 인증지도 라하고, 18 이러한지도의특성을 인증성 (authenticity, authentic character) 이라한다. 19 이 인증지도 에는법적문 17 1) 공개질의의내용 (ⅰ) 시마네현이내무성에제출한질의서 일본해내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지적편찬질의 (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의본문중에기재된 마쓰시마 [ 松島 ] 는오늘날다케시마 [ 竹島 ]/ 독도인가. (ⅱ) 위의시마네현질의서의제목 일본해내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지적편찬질의서 의 다케시마 [ 竹島 ] 는오늘날한국령 울릉도인가? 또한외 1도는 유래의개략 과 이소다케시마약도 에기재되고있는 마쓰시마 [ 松島 ] 인가. (ⅲ) 내무성에서태정관에제출한질의서의제목 일본해내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지적편찬질의서, 그리고태정유전지령서의제목 일본해내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를版圖 ( 판도 = 영토 ) 외라고정한다, 태정관지령결정문 질의한취지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의건本邦 ( 본방 ) 과관계없음을명심할것 에있는 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 라는것은시마네현질의서의제목 일본해내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지적편찬질의서 에있는 다케시마 [ 竹島 ] 외 1도 와같은것인가, 다른것인가? 2) 공개질의에대한일본외무성의답변위공개질문에대해일본외무성은다음과같이답변한바있다. 태정관지령문 과 기죽도약도 의존재를인정하지만 역사적사실등에대하여는현재조사, 분석중으로현시점에서는일본정부의입장에서코멘트할수없다 ( 岡田卓己, 2012, 1877년太政官指令日本海內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解說, 독도연구 제 12호, 200~201쪽 ). 14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서의불가분의일부를구성하는지도뿐만아니라서명된지도와같이지도그자체가법적문서인지도도포함된다. 20 인증지도 는국가기관이발행한지도인 공식지도 (official maps) 와구별된다. 공식지도 는 국가기관 이발행한지도이외에국가의찬조 (auspice) 또는취지 (purporting) 로발행한지도를의미한다. 21 인증 18 Opinion and Award of Guatemala- Honduras Special Boundary Tribunal, January 23, 1933; Hyde Charles Cheney, 1933,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Guenter Weissberg, AJIL, Vol. 27; 1963,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 Reappraisal, AJIL, Vol. 57. 19 Monastery of Sant-Naum Advisory Opinion: PCIJ, 1924, Series B, No. 9, p. 21; A. O. Cukwurah, 1967, The Settlement of Boundary Disputes in International Law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p. 219. 20 PCIJ, 1924, Series B, No. 9, p. 21; Weissberg, 1963, op. cit., 784. 21 Hyde, 1933, op. cit., 315. 22 Weissberg, 1963, op. cit., 803. 23 Hyde, 1933, op. cit., 315. 24 Hans Kelsen, 1996, Principles of International Law, 2nd ed.(new York: Holt), p. 179, n. 1; J. P. Grant and J. C. Barker, Encyclopeadic Dictionary of International law, 2nd ed.(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p. 341; Malcolm N. Shaw, 1997, International law, 4th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46~347. The Island of Palmas Case (1928): UN, 1949, RIAA, Vol 2, p. 839; Minquiers and Ecrehos Case (1953): ICJ, Reports, 1953, p. 56; Western Sahara Case (1975): ICJ, 1975, Reports, p. 39. 지도 는직접적증명력이인정되나 공식지도 는간접적증명력이인정되는데불과하다. 그러나 공식지도 는승인, 묵인, 금반언의효과가인정되는점에특색이있다. 22 공식지도는그를발행한국가가생각하는영역의한계를표시하는것으로인정되기 (represented what that state deemed the limits of its domain) 때문이다. 23 인증지도만이직접적증명력, 즉제1차적증명력이있다는학설과판례를보면다음과같다. 법적사실은그사실과같이이는현재의법의관점에서평가되어야한다. 권리의창조행위가권리가발생되는때에효력이있는법을따라야한다는동일한원칙은권리의존속, 다시말해권리의계속적인현시는법의발전에의해요구되는요건을따라야한다는것을요구한다. 24 그러므로이연구에서는현재의국제법을기준으로하기로한다. 1) 학설 (1) Durward Sandifer Sandifer는지도는대분의경우전문증거로서제2 차적증거라고하여, 그와반대로대부분의경우가아닌특수한경우, 즉법적문서에부속된경우에만제1 차적증거로될수있다고다음과같이암시적기술을 15

영토해양연구 Vol. 12 하고있다. 대부분의경우에서지도는기껏해야제2 차적증거이고, 흔히성격상전문증거다. 25 지도는경계의위치에관해야기될수있는분쟁의결정에서분쟁의결정적증거로거의채택되지아니한다. 26 이와같이 Sandifer는지도는 대부분의경우에제2 차적증거 라고만기술하고있다. 그러나대부분의경우가아닌경우, 즉특수한경우는제1 차적증거로인정된다는의미로반대해석되며, 또대부분의경우가아닌경우가어떤경우인지명시하고있지아니하나지도가결정적증거로인정되는경우는 인증지도 의경우이므로이는인증지도의경우로해석된다. (2) Charles Cheney Hyde Hyde는상설국제재판소의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간국경에관한권고적의견 (Advisory Opinion, Polish-Czechoslovakia Frontier) 을인용하여다음과같이조약과재판문건의일부인인증지도만이제1 차적증거로될수있다고논하고있다. 지도와지도의범례표는조약이나재판의문본과독립하여결정적증거로인정될수없다는것은진실이다. 27 이와같이 Hyde가폴란드와체코슬로바키아간국경에관한상설국제사법재판소의권고적의견을인용한것은그가조약이나재판의문본에부속된지도는인증지도로서이는결정적증거, 즉직접적증거로인정되나, 그이외의지도는간접적증거, 즉제2 차적증거로됨에불과하다고논하는것이다. 25 maps are in most instances, at best, secondary evidence, and frequently hearsay in character. D. V. Sandifer, 1975, Evidence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revised ed., Chicago University Press, p. 157. 26 maps can seldom be taken as conclusive evidence in the determination of disputes which may arise concerning the location of boundary. Sandifer, 1975, ibid., p. 157. 27 it is true that maps and their tables of explanatory signs cannot be regarded as conclusive proof, independently of the text of the tredties and decisions. Hyde, 1933, op. cit., 316. 16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3) Guenter Weisberger Weisberger 는지도는조약과재판의문본에서독립하여증거로될수없 다고하여, 인증지도만이증거로될수있다고다음과같이기술하고있다. 상설국제사법재판소는 지도와지도의범례표는조약과재판의문본으로부터독립하여결정적증명으로인정될수없다 는것을덧붙임으로써재판소의지도의상대적가치의인식을표시한바있다. 28 여러사건과성명은 Sandifer 박사가표시해온바와같이지도는제1차적증거가아니라흔히전문증거의성격을지닌제2차적증거로기술하고있다. 29 이와같이 Weisberger는지도는조약과재판의일부분을구성하는지도, 즉인증지도만이결정적증명력, 즉직접적증명력을갖는다고논하고있다. 28 the Permanent Court expressed of their relative value by adding that maps and their tables of explanatory signs cannot be regarded as conclusive proof, independently of the treaties and decisions. Weissberg, 1963, op. cit., p. 784. 29 case and statements, such as these have led Dr. Durward Sandifer to describe maps not as primary, but as secondary evidence. Weissberg, 1963, ibid., pp. 784~785. (4) A. O. Cukwurah Cukwurah는팔마스도사건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에서지도는법적문서에부속된경우를제외하고권리의승인또는포기의증거로될수없다는판정을인용하여, 인증지도만을제1차적증거로보는의견을다음과같이표시하고있다. 30 with regard to maps as such, the popular approach, arising from their inherent limitations, is not to treat them as conclusive but relative value, Thus, the arbitrator in the Palmas Island case, observed that a map affords only an indication-and that a very indirect one-and, except when annexed to a legal instrument, has not the value of such an instrument, involving recognition or abandonment of rights. Cukwurah, 1967, op. cit., pp. 224~225. 지도의고유한한계로부터야기되는일반적인접근은지도그자체에관해서지도를결정적인가치로서가아니라상대적인가치로서취급된다. 따라서팔마스도사건에서중재관은지도는하나의표시만을제공할뿐이다. 그리고법적문서에부속된경우를제외하고권리의승인또는포기를의미하는문서로서의가치를가지지아니한다. 30 17

영토해양연구 Vol. 12 이와같이 Cukwurah 는법적문서에부속된지도, 즉인증지도만이결 정적증명력, 즉직접적증명력을갖는다고논하고있다. 2) 판례 (1) 1923년의자워르지나사건 1923년자워르지나사건 (Jaworzina Advisory Opinion, Polish-Czechoslovakian Frontier Advosory Opinion) 에서상설국제사법재판소는지도는조약및재판의문본과독립하여직접적증거가될수없다고다음과같은권고적의견을표시했다. 지도및지도상의해설기호는조약및재판의문본과독립하여결정적증 거로인정될수없다. 31 위의권고적의견중 (i) 조약및재판의문본과독립하여 란 조약및재판의문본과별도로 즉 그자체만으로 의의미이므로 조약및재판의문본의일부를이루고있지아니하는경우에는그자체만으로 라는뜻이며, (ii) 결정적증거로인정될수없다 에서 결정적증거 란 제1 차적증거, 즉 직접적증거 를뜻하는것이다. 따라서위의견해는 인증지도 만이 직접적증거 로인정된다는의미인것이다. (2) 1924 년의성나오음수도원사건 1924년의성나오음수도원사건 (Monastery of Saint- Naoum, Advisory Opinion) 에서상설국제사법재판소는그의권고적의견에서동재판소에제출된지도에대해다음과같이 인증성 이없는지도의증명력을부인하는권고적의견을표시했다. 31 maps and their tables of explanatory signs cannot be regarded as conclusive proof, independently of the text of treaties and decisions. Jawerzina, Advisory Opinion: PCIJ, 1923, Series B, No. 8, pp. 32~33. 18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그지도가런던의재판을표시한다고주장된다. 그러나이지도에표시된경계선이 1913년 8월 11일의재판의제1 항말미에관한것이라는것을수락한다할지라도 더나아가문제의지도는서명되지아니하여이의인증성이성립되지아니하였다. 32 위의권고적의견이 공식성 (official character) 이란표현을사용하지아니하고 인증성 이란표현을사용하여문제의지도가인증지도가아니므로직접증거로될수없다는것이다. 특히이의견은지도가조약이나재판에부속되어그일부를구성하는경우만이아니라지도자체에서명이있으면그지도는인증지도로된다는것을인정하고있다는점에특색이있다. (3) 1928년의팔마스島중재사건 1928년의팔마스島중재사건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에서미국은 1,000여매의지도를팔마스島의영유권의증거로제출했으나중재관 (Max Hurber) 은지도는법적문서에부속된경우이외에는영유권의증거로인정될수없다고다음과같이판시한바있다. 32 it is alleged that the map represents the decision of London, Even admitting, however, that the line marked on this map is that refereed to at the end of the first paragraph of the decision of August 11th 1913, Moreover the map in question is unsigned and its authentic character is not established. Monastery of Saint-Naum, Advisory Opinion; PCIJ, 1924, Series B, No. 9, p. 21. 33 a map affords only an indication-and that a very indirect one-and, except when annexed to a legal instrument, has not value of such an instrument, involving recognition or abandonment of rights. Palmas Island Arbitration; UN, 1949, R1AA, Vol. 2, pp. 829~890. 지도는오직하나의방증 즉바로간접적방증 을 제공할뿐이며, 법적문서에부속된경우이외에는권리 의승인또는포기로인정하는문서로서가치를가지지 아니한다. 33 위의판정은지도는법적문서에부속되지아니한지도, 즉인증지도이외의지도는제2 차적증거에불과하며, 인증지도만이권원의제1 차적증거, 즉직접적증거로됨을인정한것이다. 19

영토해양연구 Vol. 12 (4) 1933년의과테말라 온두라스경계중재사건 1933년의과테말라 온두라스경계중재사건 (Guatemala-Hondras Boundary Arbitration) 에서특별경계재판소 (Special Boundary Tribunal) 는다음과같이인증지도의증명력을인정하는판결을했다. 인증지도는고려되어야한다. 그러나그러한기술적인자료일지라도알려 지지도아니하고행정력도실질적으로행사되지아니하는영토에관계되 었을경우에는거의가치가없다. 34 위의판결에는 인증지도는고려되어야한다 라고간결히표시되어있고 고려되어야한다 는의미가무엇을뜻하는지명백하지아니하나 인증지도 라는용어를사용하고있는것으로보아직접증거로인정하여야한다는의미로해석된다. (5) 1986 년의국경분쟁사건 1986년의국경분쟁사건 (Case Concerning the Frontier Dispute-Burkina Faso /Republic of Mali-) 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지도는공적문본에부속되어그일부를구성하는경우이외에는부수적증거 (extrinsic evidence) 로이용될수있음에불과하다고다음과같이판시했다지도는단순한정보일뿐이다. 지도는영토권원일수없다. 지도가공적문본에부속되어그문본의불가분의일부를형성하는경우를제외하고지도는단순한부수적증거일뿐이다. 35 위의판결은공식문본에부속되어그문본의불가분의일부를구성하는지도, 즉인증지도이외의지도 34 authenticated maps are also to be considered, although such descriptive material is of slight value when it relates to territory of which little or nothing was known and in which it does not appear that any administrative control was actually exercised. Guatemala- Hondras Boundary Arbitration, Opinion and Award of Guatemala-Hondras Special Boundary Tribunal, January 23, 1933. 9. 8. 35 maps merely constitute information, they cannot constitute a territorial title, when maps are annexed to an official text of which they form on integral part. Except in this clearly defined case, maps are only extrinsic evidence. Case Concerning the Frontier Dispute-Burkina Faso/Republic Hali-; ICJ, 1986, Reports, para. 54. 20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는간접적증거일뿐이라고표시하여인증지도만이직접적증거로인정된다는점을명시한것이다. (6) 2002년의리기탄島및시피탄島영유권사건 2002년리기탄島및시피탄島영유권사건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itan) 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 1986년국경분쟁사건 (Frontier Dispute-Burkina Faso l Republic of Mali-) 에서국제사법재판소가판시한 지도는공적문본 (official text) 에부속된경우를제외하고는부수적증거 (extrinsic evidence) 로이용될수있음에불과하다 는내용을인용하고 36 다음과같이판시했다 요컨대, 1915 년의협정에부속된지도를제외하고당사자가제출한지도 자료는결정적인것이아니다. 37 위의판결중 협정에부속된지도 란인증지도를의미하는것이며 결정적 이란 직접적, 제1 차적 증거를뜻하는것이므로결국 인증지도 만이직접적증거, 제1차적증거로된다는의미를표시한것이다. (7) 2008년의페드라브랑카영유권사건 2008년의페드라브랑카영유건사건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 에서당사자가근 100매의지도를제출하였다. 말레이시아는지도는권원을창출할수없으며 (maps do not create title), 지도가조약내에구체화되거나국가간교섭에사용된경우 (when incorporated in treaty or used in inter-state negotiation) 를제외하고는인정될수있는것이아니라고주장했다. 38 36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itan: ICJ, 2002, Reports, para. 88. 37 In sum, with the exception of the map annexed to the 1915 Agreement, the cartographic material submitted by the parties is inconclusive. ICJ, 2002, Reports, para. 272. 38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 ICJ, 2008, Reports, para. 270. 이에대해국제사법재판소는이를부정하는어떠한판단도표시한바없고, 말레이시아측량단장 (Surveyer- 21

영토해양연구 Vol. 12 General) 이제작한지도와싱가포르정부 (Government) 가제작한지도는 도서가싱가포르의관할하에있음을확인하는데도움이된다 (tend to confirm) 라고결론지었다. 39 확인하는데도움이된다 라고표현하고 확인된다 라고표현하지아니한것은이들정부기관이제작한지도를 인증지도 로보지아니하고따라서제2 차적증명력을인정한것으로보인다. 이는말레이시아가 지도가조약내에구체화되거나국가간교섭에사용된경우를제외하고는권원을창출할수없다 고주장한데대해재판소가반대의판단을표시한바없는것으로보아명백하다. 요컨대동사건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인증지도이외의지도는제2차적증명력을갖는데불과하다는종래의판례를재확인하는뜻을판시한것이다. 2. 기죽도약도 의인증성 기죽도약도 는조약이나재판과같은법적문서 (legal instrument) 에부속된것이아니므로이는인증지도가아니다. 또한 태정관지령문 도국제법상조약이나재판이아니므로이에부속된 기죽도약도 역시인증지도가아니므로 기죽도약도 는제1차적증명력이있는지도가아니다. Ⅳ. 기죽도약도 의공식지도여부검토 인증지도가아니라도공식지도 (official map) 는묵인, 승인및금반언의효과가인정되므로 기죽도약도 가공식지도인가를검토해보기로한다. 39 ICJ, 2008, 위의책, para. 272. 22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1. 공식지도 1) 공식지도의개념공식지도는국가가발행한지도이외에국가기관의찬조또는취지로발행한지도를말한다. 40 그리고국가기관의찬조또는취지뿐만아니라승인 (approve) 에따라발행한지도도공식지도이다. 41 공식지도에대한개념은사적지도 (private maps) 이다. 42 공식지도와사적지도는동일한법적지위 (same legal status) 에있는것이아니다. 43 2) 공식지도에관한판례 1914년의티모르島중재사건 (Timor Island Arbitration) 에서포르투갈은사적지도를재판부에제출했다. 이에대해중재관은 그러한지도는공식지도와가치에서동일한비중일수없다 (could not be weighed in value with official maps) 라고판시했다. 44 이와동일한취지의판결이 1927년의라브라도르경계사건 (Labrador Boundary Case) 에서도재확인반복되었다. 45 40 Hyde, 1933, op. cit., p. 315. 41 Weissberg,1963, op. cit., p. 781. 42 Cukwurah,1967, op. cit., p. 222. 43 Cukwurah,1967, ibid., p. 222. 44 Timor Island Arbitration: AJIL, Vol. 9, 1915, p. 259. 45 Labrador Boundary Case: Dominion Law Reports, Vol. 2, 1927, p. 425; Cukwurah, 1967, op. cit., p. 222. 46 Hyde, 1933, op. cit., p. 315: Cukwurah, 1967, ibid., p. 223. 47 Hyde, 1933, op. cit., p. 315. 48 Cukwurah, 1967, op. cit., p. 224. 49 UN, 1961, RIAA, Vol. 11, p. 128. 3) 공식지도의효력공식지도는당사국을구속한다. 46 공식지도는그것이발행된때에 국가가생각하는영역의한계를표시하는것으로 (represented what that state deemed the Limits of its domain) 인정되기 47 때문이다. 공식지도는그것을발행한당사자의내심의상태를잘표시하는것 (will indicate the state of mind of party publishing it) 이라할수있다. 48 볼리비아와페루간의국경에관한중재조약 은공식지도에한해증거로인정한다는규정을두고있었다 ( 제3조 ). 49 이런경우공식지도이외의사적지도는증거로인정될수없는것임은물론이다. 공식지도는그지도의발행국의영유의한계를표 23

영토해양연구 Vol. 12 시하는것이므로사적지도와달리다음과같은두가지영토의권원에영향을준다. (1) 묵인 승인의효과공식지도의발행국이그지도상에특정영토를자국의영토로표시할경우그특정영토의이해관계국이이에관해아무런항의를하지아니하면그후그특정영토는그지도의발행국의영토로인정되게된다. 이는공식지도발행국의행위에대한이해관계국의묵인 (acquiescence) 또는승인 (recognition) 의효과이다. 1962년프레아비헤어사원사건 (Temple of Preah Vihear Case) 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동사원을캄보디아의영토로표시한 1907년의지도에대해태국이 1925년및 1937년의프랑스 시암조약협상당시침묵을지켰고, 50 또한 1958년까지이지도에대해문제를제기하지아니하였다고하여 51 동사원은캄보디아의영토에속한다고판시하였다. 52 이는 1907년의지도에 대한태국의묵인또는승인의효과라할수있다. (2) 금반언의효과공식지도의발행국이그지도상에특정영토를자국의영토가아닌것으로표시할경우, 즉특정영토를자국의영토로표시하지아니한경우이특정영토의이해관계국이이를신뢰한때에 53 그공식지도의발행국은차후그특정지역을자국의영토라고주장할수없게된다. 이는공식지도의발행국의행위에대한금반언 (estoppel) 의효과인것이다. 1962년의프리히비하르사원사건에서태국은 1937년에동사원을캄보디아영토내에표시한지도를발행한바있다. 54 이점에착안해보면동사원이캄보디아의영토에속한다는국제사법재판소의판결은 55 50 Temple of Preah Vihear Case: ICJ, 1962, Reports, pp. 27~28. 51 ICJ, 1962, ibid., p. 29. 52 ICJ, 1962, ibid., p. 36. 53 금반언은선의의신뢰성을요구한다. The Grisbardarna Case(1902) : AJIL, Vol. 4, 1940, p. 233; Serbian Bonds Case(1929): PCIJ, 1929, Series A, Nos. 20/21, p. 39; Eastern Greenland Case(1932): PCIJ, 1929, Serises A/B, No. 53, 1933, p. 37. 54 ICJ, 1962, op. cit., p. 28. 55 ICJ, 1962, ibid., p. 36. 56 D. W. Bowett, 1957, Estoppel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and its Relations to Acquiescence, BYIL, Vol. 33, p. 176; I. C. MacGibbon, 1954, The Scope of Acquiescence in International 24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태국의행위에대한금반언의효과라할수있다. 묵인 승인 금반언의원칙은상호연계되어있으며, 이들을엄격히구별하는것은용이하지아니하다. 56 동사건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묵인과금반언의원칙을적용한것이다. 57 2. 기죽도약도 의공식성 기죽도약도 는일본정부의최고국가기관인태정관의지령에첨부된것이므로이는 태정관지령문 의주문과같이일본이라는국가기관이제정하고 공문록 에등재되어국제적으로공시된것이므로 기죽도약도 의공식성은검토의여지가없다. 공식지도는발행국이기발행한지도의내용과저촉 위배되는주장을할수없는것이다. 즉, 일본정부는태정관지령문주문의죽도외 1도는독도를뜻하는것이아니라는주장을할수없는것이다. 따라서일본정부는독도는일본의영토이고한국의영토가아니라는주장을할수없는것이다. Law, BYIL, Vol. 31, p. 148; Jorg Paul Muller and Thomas Cottier, 1984, Estoppel, EPIL, Vol. 7, p. 79; Anne M. Trebilcok, 1984, Waiver, EPIL, vol. 7, pp. 533~536; Malcolm N. Shaw, 1997, International Law, 4th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352; Peter Malanczuk(ed.), 1997,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 ed., Routedge, p. 155. 57 An Rustemeyer, 1981, Temple of Preah Vihear Case, EPIL, Vol. 2, p. 274, 그러나 Shaw는동사건에서 묵인 을적용한것인지 금반언의원칙 을적용한것인지불확실하고 (uncertainity) 또애매하다 (ambiguity) 고논하고있다 (Shaw, 1997, ibid., p. 352). Ⅴ. 기죽도약도 와역사적권원의대체要否검토 일본명치정부의 태정관지령문 과 기죽도약도 에따른조선의송도 ( 독도 ) 영토주권의승인에따라성립된권원에관해 권원의대체 (substitution of title) 를요하는가를검토해보기로한다. 1. 역사적권원의대체의의의 영토주권의권원 (title to territorial sovereignty) 이란타국가에대한영토주권의주장근거 (the validity of claims 25

영토해양연구 Vol. 12 58 Ian Brownlie, 1998. ibid., p. 121. to territorial sovereignty against other states) 를의미한다. 58 영토주권의권원은시간의경과의축에서구분해볼때, 현대국제법상권원 과그이전의 역사적권원 으로구분된다. 그중역사적권원 (historical title) 은고전적권원 (ancient title), 본원적권원 (original title), 봉건적권원 (feudal title) 등현대국제법이전의영토주권의타당근거를말한다. 역사적권원은전법적주권 (pre-legal sovereignty) 의권원즉, 국제법이전의권원을뜻한다. 59 따라서역사적권원은엄격한의미에서법적권원이라할수없다. 물론역사적권원이성립할당시에타당한현대국제법이전의규범도국제규범으로관념하면역사적권원도법적권원이라할수있으나그것은현대국제법상권원이라고는할수없다. 현대국제법은 1648년의웨스트팔리아조약 (Treaty of Westphalia) 이후에성립된것으로보는것이일반적인견해이므로 60 결국역사적권원은 1648년이전근대국가성립이전의권원을의미한다고할수있다. 이는특정국가가국가로서성립한이후에후속적으로증가된 (subsequent increase) 권원과구별된다. 61 시제법 ( 時際法, intertemporal law) 상권리획득시의법과권리존재시의법은다른것이다. 권리의취득에관해서는그취득당시에타당한법이적용되는것이며권리의존재에관해서는오늘평가시에타당한법이적용되는것이다. 권원의대체 란역사적권원을현대국제법에따라타당한다른권원 (another title valid by modern International law) 으로대체 (replacement) 하는것을말한다. 62 즉역사적권원이그후의역사적발전의효과에따라대체 (superseded) 되는것을뜻한다. 63 59 Schwarzenberger and Brown, 1976, op. cit., p. 96. 60 Stephan Verosta, 1984, History of Law of Nations, 1648 to 181, EPIL, Vol. 7; B. S. Chimni, 1993, International Law and World Order, Sage; Westlake John, 1895, International Law (Cambridge University Press); Triggs, D. Triggs Gillan, 2006, International Law, Butterworth, p. 10; D. P. O Connell, 1967, A Cause Celebre in the History of Treaty Making, BYIL, Vol. 42; Cassesse Antonio, 2001, International Law, Oxford University Press; O Brien John, 2001, International Law, Cavendish; Kayaglu Turan, 2010, Legal Imperia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Wheatley Steven, 2010, The Democratic Legitimacy of International Law, Hart; Gross Leo, 1948, The Peace of Westphalia 1648-1948, AIIL, vol. 42; J. R. Strayer, 1979, On the Medieval Origins of Modem State, Princenton University Pres; Mark W. Zocher, 2006, The Territorial Integrity Norm, in B. A. Simmons and R. H. Steinberg(eds.), International Law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Kaczorowska Alind, 2011, Public International Law, 4th ed., Routledge; Joyce Rechard, 2011, Westphalia: Event, Memory, Myth, in F. Johns, R. Joyce and S. Papahuja (eds.), Events: The Force of International Law, Routledge; Diehl Paul F. and Charlatte Ku, 2012, The Dynamic of International Law, Cambridge University Press. 61 Antonio Tores Bernordez, 1987, Territory, Acquisition, EPIL, Vol. 10, p. 498. 62 ICJ, 1953, Reports. 63 David H. Ott, 1987, Public Interna- 26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2. 역사적권원의대체를인정한학설과판례 1) 학설 역사적권원의대체를인정한대표적학설은다음과같다. (1) Hans Kelsen Kelsen은국제법의시간적타당범위 (Temporal Validity) 를논하면서시제법 (intertemporal international Law) 에관해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1928) 에서 Max Huber 중재관의판정을인용하여계속적인주권의현시에는발전된법의조건에따라야한다고기술하여역사적권원은발전된법에따라대체되어야한다고다음과같이논급하고있다. 시제법으로불리는법적규범의시간적타당범위에관한원칙은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에서중재관은그의의견에서다음과같이선언했다. 권리의창조와권리의존재간의차이는구별되어야한다. 계속적인주권의현시는발전되법에의해요구되는조건을따라야한다. 64 계속적인주권의현시는발전된법에의해요구되는조건을따라야한다 는것은역사적권원은당시의법에따라대체되어야한다는뜻이다. tional Law in the Modem World, Pitman, p. 109. 64 The Principles regulating the temporal sphere of validity of legal norm called intertemporal law: Island of Palmas Case the arbitrator declared in his opinion a distrinction must be made between the creation of rights and the existence of the rights its continued manifestation shall follow the conditions required by the evolution of law. Kelsen, 1966, op. cit., p, 179, n. 1. (2) J. P. Grant 와 J. C. Barker Grant와 Barker는시제법 (intertemporal law) 의기술에서 Island of Palmas Case(1928) 의판정중 법적사실은그법적사실과동시에있는법에의해평가되어야한다 (a judicial fact must be appreciated in the light of the law contemporality with it) 를인용하고또한다음의판정 27

영토해양연구 Vol. 12 을인용하여역사적권원의대체라는용어를사용하지아니했으나다음과같이역사적권원의대체를승인하고있다. 권리의창조와권리의존재간의차이는구별되어야한다. 계속적인 주권의현시는발전된법에의해요구되는조건을따라야한다. 65 (3) Malcolm N. Shaw Shaw는특정의권리는그권리의시기에국제법에따라계속적으로존재하는그러한권리는발전적인법제도에의존한다고하여역사적권원의발전적인법제도에따라대체되어야한다고다음과같이기술하여실질적으로역사적권원의대체를승인하고있다. 특정의권리의창조는그시기의국제법에의존하는반면에그러한권리의 계속적존재는발전적인법제도의조건에의존한다. 66 (4) Gillian D. Triggs Triggs는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에서 Max Huber 중재관의판정을인용하여본원적 봉건적권원은그후에발전된실효적선점의법에따라취득되게된다고하여역사적권원의대체를다음과같이기술하고있다. 후속적인국제재판소는시제법에관한후버의접근을채택해왔다.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에서후버판사는발견에기초한스페인선행자의권원은홀랜드에의한실효적인선점의추후행위에우선할수없다는것을발견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Minguiers and Ecrehos Case에서어떠한본원적 봉건적권원은 65 The Principles regulating the temporal sphere of validity of legal norm called intertemporal law: Island of Palmas Case the arbitrator declared in his opinion a distrinction must be made between the creation of rights and the existence of the rights its continued manifestation shall follow the conditions required by the evolution of law. J. P. Grant and J. C. Barker, 2011, Encyclopeadic Dictionary of International law, 2nd ed.(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 311~312. 66 while the creation of particular rights was dependent upon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time, the continued existence of such rights depend upon their according with the envolving conditions of developing legal system. Malcolm N. Shaw, 1997, International law, 4th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46~347. 28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1204 년이후의사건의결과로서소멸되었다. 그리고그권원은실효적선 점의관습법의발전에따라후속적으로취득되었다. 67 개발된관습법에따라취득되었다 (acquired in accordance with the developed in customary law) 는것은역사적권원이대체당시의국제법에따라대체되 었다는의미이므로 Triggers 는역사적권원의대체를승인한것이다. (5) Richard K. Gardiner 67 subsequent international tribunals have adopted the Huber approach to intertemporal law. In Island of Palmas Case, Judge Huber found that the prior Spanish title based on discovery could not prevail over the late acts of effective occupation by the dutch. The ICJ in the Minquiers and Eclehus Case also Found that any original feudal title had lapsed as a consequence of events of after 1204 and that title was subsequently acquiaced in accordance with the developing customary law of effective occupation. Triggs, 2006, op. cit., p. 225. 68 this principle states that acts which have a significant legal effect must be judged in the light of international law at the time that they occurred while the intertemporal law may enable identification of rights at one particular time, it does not resolve the problem where there is a continuous chain of event to be asserted against a background of developing rules of international law. where the original title can be correctly ascribed to the continuous occupant the legal position can be seen as secure. Richard K. Gardiner, 2003, International Law (London: Longman, ), p. 177. Gardiner 는 The Is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에서 Huber 중재관의판정을인용하고권리의 창조와권리의존재간에기본적인차이가있다고하면서국제법규칙의발전을배경으로한사건의연속적고려의문제는시제법의원칙으로해결할수없으며본원적권원을귀속시키는계속적인실효적주장에주목하여야한다고하며다음과같이역사적권원의대체를승인하고있다. 이원칙 ( 시제법의 ) 은의미있는법적효과를갖는행위는 그행위가야기된때의국제법의관점에서판단되어야 한다고한다. 시제법은한특정시간에있어서권리 의식별을가능하게하는반면국제법의발전적규칙의 배경에대해주장되어온계속적사건의연쇄가있는경 우문제를해결하지아니한다. 본원적권원이계속 적인선점자에게정확히귀속될수있을경우에법적지 위는안정적으로보여줄수있다. 68 29

영토해양연구 Vol. 12 (6) David H. Ott Ott는고전적권원은그후의역사적발전에따라대체될경우그대체전의고전적권원은거의의미가없다고하여고전적권원의대체의필요성을다음과같이논하고있다. 고전적권원과그와유사한개념은그들이그후의역사적발전의효과에 따라사실상오랜기간대체되어온영토에대한역사적관련을소홀히한 청구의기초를의미할경우이는거의의미가없다는것이다. 69 이와같이 Ott는고전적권원이그후의역사적발전에의해대체되게된경우이는의미가없는것으로되며, 대체된권원이의미를갖게된다고하여, 고전적권원은역사적발전에따라새로운권원으로대체되어야권원으로인정될수있다고논하고있다. 즉, 고전적권원의대체의필요성을강조하고있다. (7) Santiago Terres Bernardez Bernardez는역사적권원의평가는그권원이발단된때의국제법에따라평가되어왔다고주장한다. 그러나그는다음과같이불소급의원칙은 The Is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1928) 이후제한되게되었다고하여, 즉역사적권원은그 권원의발생당시의법 이아니라그권원의 대체된평가당시의법 에따라평가되게된다고하여역사적권원의변경의필요성을제의하고있다. 역사적권원에대해사례법은시제법의원칙을적절히고려할필요성을강조하고있다. 이에따르면관계권원의평가는권원이주장된발단의시기에효력이있는국 69 Ancient title and similar concept are, however, less significant when they purport to base a claim on some distant historic connection with the territory which has in fact long been superseded by the effects of later historical developments. David H. Ott, 1987, Public International Law in the Modem World (London : Pitman), p. 109. 70 For historic titles, case-law empasizes the heed to take due account of the intertemporal law principle, according to which the evolution or the title concerned should be made on the basis or international law in force. But this principle of non-retro active was gualified by may Huber, in has arbitral award concerning the Island of Palmas as follows. Bernordez, 1987, op. cit., p. 499. 30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제법의기초위에이루어져야한다. 그러나이불소급의원칙은 The Is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에서 Max Huber 의중재판정에의해제한 되게되었다. 70 이와같이 Bernardez 는역사적권원의평가는그권원이발생할당시의 국제법이라는원칙이변경되어, 역사적권원은평가당시의국제법상권원으로변경되어야함을제의하고있다. (8) Peter Malanczuk Malanczuk는영토의권원의타당성을결정하는법은취득의순간에효력이있는법이라고하면서도, 이는 The Is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이후훼손되고말았다고하여, 고전적권원은발전된법의요건을구비하여야한다고다음과같이논하고있다. 71 The rules governity requisition of teritory have changed over the century. This produces a problem of intertemporal law when century s law is to be applied to determine the validity of an acquisition of territory? The generally accepted view is that The validity of an acquisition of territory depended on the law in force at the moment of the alleged acquisition, this solution is really nothing more than an example of general principal that law should not be applied retro activity But the generally accept view has to some exlent been undermined by the Island of Palms case, Malanczuk, 1997, op. cit., p. 155. 72 The historical starting point of titles to territory is pre-legal sovereignty, that is effective control of a teritory by a prince in his own name and with power to defend it. Schwarzenberger and Brown, 1972, op. cit., p. 96. 영토의취득을지배하는규칙은세기를거쳐변화되어왔다. 어느시기의법이영토권원의타당성을결정하는데적용되어야하는가? 그것은주장되는취득의순간에효력이있는법이다. 이는법은소급해서적용될수없다는일반원칙의한예에불과하다. 그러나이러한견해는 The Is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에의해훼손되었다. 71 (9) Georg Schwarzenberger Schwarzenberger는역사적권원은법이전의권원이라고다음과같이논하고있다. 영토권원의역사적출발점은전 ( 前 ) 법적주권이다. 즉제후가그자신의이름으로영토를방위할권한을갖고영토에대한실효적지배를한것이다. 72 31

영토해양연구 Vol. 12 위의기술중 전 ( 前 ) 법적 이란 전 ( 前 ) 국제법적 이라는의미임은물론이다. 위의기술은봉건적권원 (feudal title) 은 국제법이전의권원 이라는것이다. 이는 국제법이전의권원 인봉건적권원은국제법으로평가할수없는권원이라는것을의미하며, 이는봉건적권원은 국제법이후의권원 으로대체되지않으면국제법으로평가될수없다는것을당연히전제로한설명인것이다. 요컨대 Schwarzenberger는봉건적권원은국제법적권원으로대체되어야국제법상효력이있는것으로보고있다. (10) Ian Brownlie Brownlie는역사적권원에적용될법에관해시제법의원칙에따라역사적권원이성립한당시에존재한법이라는원칙은 더이상유지될수없게되었다고다음과같이기술하고있다. 많은경우에있어서이원칙은작용할수없다. 즉, 그의이론적한계는승인, 묵인, 금반언, 시효의효과에따라감소하게되었다. 73 이와같이 Brownlie는역사적권원에적용되어야할법은그권원이성립할당시의법이라는원칙은승인, 묵인, 금반언에따라새로운권원으로변경된다는것을인정한것이다. 즉, 역사적권원은승인, 묵인, 금반언등의권원의근거 (root) 에따라오늘의국제법상다른권원으로대체되어야법적효력이있음을승인하고있다. 이상의주장이외에역사적권원의대체필요성은 P. C. Jessup, 74 F. C. Wade, 75 R. Y. Jennings, 76 M. N. Shaw, 77 D. H. N. Johnson 78 등이주장하고있다. 73 In any case the principle cannot operate in a vacuum : its theoretical extent will in practice be reduced by the effect of recognition, acquiescence, estopper, prescription, the rule that abandonment is not to be presumed, and to general condition of the pleadigs and evidence. Brownlie, 1998, op. cit., p. 129. 74 P. C. Jessup, 1928, The Palmas Island Arbitration. AJIL, Vol. 22, pp. 739~740. 75 E. C. Wade, 1954,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 Grotius Society transactions for year 1954, Vol. 40, pp. 98~99. 76 Robert Y. Jennings, 1963,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in International Law (Dobbs Ferry: Oceana), pp. 28~31. 77 Malcolm N. Shaw, 1997, op. cit., p. 347. 78 D. H. N. Johnson, 1950, Acquisitive Prescription in International Law, BYIL, Vol. 27, p. 332. 32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2) 판례 역사적권원의대체를인정한대표적인판례를보면다음과같다. (1)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 (1928)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Case(1928) 에서 Huber 중재관은권리의창조와권리의존속에적용되는법은각기다르다고전제한다음권리의존재에적용되는법은법의발전에의해요구되는조건에따라야한다고하여역사적권원의대체라는용어는사용하지아니했으나다음과같이간접적으로역사적권원의대체필요성을판시했다. 법적사실은그사실과같이이는현재의법의관점에서평가되어야한다. 권리의창조행위가권리가발생되는때에효력이있는법을따라야한다는동일한원칙은권리의존속, 다시말해권리의계속적인현시는법의발전에의해요구되는요건을따라야한다는것을요구한다. 79 (2) Minquiers and Ecrehos Case (l953) Minquiers and Ecrehos Case(1953) 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봉건적권원은대체당시의법에따라유효한권원으로변경되지않으면효력이없다고다음과같이판시하였다. 재판소의의견으로는본건을재판하기위하여그러한역사적논쟁을해결 79 a judicial fact must be appreciated in the right of the law contemporary with it, the same principle which subjects the act creative of a right to the law in force at the time the right arises, demands that existence of the right, in other words its continued manifestation, shall follow the conditions required by the evolution of law. UN, 1949, RIAA, Vol. 2, p. 839. 할필요가없다 ( not necessary to solve these historical controversies). 프랑스왕이 Channel Islands에도고유의봉건적권원을가졌었다할지라도그러한권원은 1204 년및그이후의사건의결과실효 ( 失效 ) 되었음이분명하다. 그렇게주장된고유의봉건적권원은대체당시의법에따라다른유효한권원으로대체된것이아니면오늘에어떤법적효과도발생하지아니한다. 그대체의입증 33

영토해양연구 Vol. 12 책임은프랑스정부에있다. 80 (3) Western Sahara Case (1975) Western Sahara Case(1975) 의권고적의견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권원의전환 (transforming title) 에서합의서의기능을다음과같이승인했다. 종전까지는 권원의대체 에서 실효적지배 의기능을인정해온것에비해특별한의미를갖는다. 동권고적의견은다음과같다. 그러한영토의사건에서주권의취득은무주지의본원적권원에의한무주지의선점을통해일방적으로영향을받는것으로일반적으로생각되지아니했다. 그러나지방적지배자와체결된합의서를통해 그러한합의서는권원의파생적근거로서인정되었고무주지의선점 에의해취득된본원적권원이아닌것으로인정되었다. 81 (4) Land, Island and Maritime Frontier Dispute Case (1992) Land, Island and Maritime Frontier Dispute Case(1992) 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 Minquiers and Ecrehos Case(1953) 의판결을인용하여동판결은모든고전적권원이단순히무시되는것이아니라대체되지아니한권원이무시되고대체된최근의권원에기초하여재판한것이라고다음과같이판시한바있다. 이사건에서재판소는고전적권원을단순히무시하지아니했고, 더최근의주권의현시에기초하여재판한것이다. 82 80 such an alleged original feudal title could today produce no legal effect, unless it had been replaced by another title valid according to the law of the time of replacement. It is for the French Government to establish that it was so replaced. ICJ, 1953, Reports, p. 56. 81 in the case of such territories the acquisition of sovereignty was not generally considered as effected unilaterally through the occupation of terra nullius by original title but through agreements concluded with local readers such agreements were regarded as derivative roots of title, and not original titles obtained by occupation of terra nullius. ICJ, 1975, Reports, p. 39. 82 the Court in this case did not simply disregard the ancient titles and decide on a basis of more recent display of sovereignty. ICJ, 1992, Reports, paras. 343~344. 34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5) The case concerning Territorial and Maritime Dispute in the Caribbean Sea Case (2007) The case Concerning Territorial and Maritime Dispute in the Caribbean Sea Case (2007) 에서온드라는역사적기초 (historical basis) 에근거한전통적경계선 (traditional boundary line) 의확인을요구했다. 재판소는전통적경계선을용인하지아니했다. 83 전통적경계선은역사적권원에근거한것이다. (6) Pedra Branca Case (2008) Pedra Branca Case(2008) 에서말레이시아는 태고로부터 (from time immemorial) Pedra Branca는조호르왕국의주권하에있었다고주장했고, 84 재판소는역사적권원 (historical title) 은말레이시아에귀속되나실효적지배를해온싱가포르에권원이이전되었다고판시했다. 재판소는판결문에서역사적권원이란용어를사용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다음과같이말레이시아가역사적권원을대체한바없다고판시했다. 말레이시아는동도시들에대한역사적권원을어떻게해서든지제시할수 있다. 그러나아무것도하지아니했다. 말레이시아는그의역사적권 원은분명히하지아니했다. 85 83 ICJ, 2007, Reports, para. 259. 84 ICJ, 2008, Reports, para. 48. 위의판결에서역사적권원을분명히하지아니했다는것은현대국제법상권원으로대체하지아니했다는의미다. 이상이외에역사적권원은 Rann of Kuch Arbitration(1968) 호판결에서인정되었다. 86 85 Malaysia could somehow shaw an historic tittle over the island, whole Malaysia has done nothing Malaysia had not made out its historvic tittle. ICJ, 2008, 앞의책, para. 123. 86 ILR, Vol. 50, p. 494. 이와같이국제사법재판소는역사적권원은대체당시에유효한법에의해대체되지아니하면효력이없고, 대체된이후에는역사적권원은법적으로실효되게된다고판시했다. 35

영토해양연구 Vol. 12 3. 태정관지령문과 기죽도약도 에의한역사적권원의대체 일본명치정부가 태정관지령 과 기죽도약도 에의한조선의송도 ( 독도 ) 영토주권의승인에의한조선의송도영토주권의권원은 1877년행하여진것이며그것은 1648년이후에성립된권원이므로이는역사적권원이아니고따라서 권원의대체 를요하지아니하는것이다. Ⅵ. 맺음말 1. 요약 정리 (i) 시마네현참사사카이지로가내무성에제출한품의서 일본해내竹島외 1도지적편찬방사 (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그리고내무성에서태정관에제출한 일본해내竹島외일도지적편찬방사 (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와태정관지령문에는 기죽도약도 가첨부되어있다. 기죽도약도 에는기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두섬이그려져있으며그두섬위에전자는 磯竹島 로표기되어있으며후자는 松島 로각각표기되어있다. (ii) 기죽도동남방 40리정도에송도 가위치하고있음을그거리를문자로표시하고있다. 이로보아송도가독도임이명백하다. 그러므로 기죽도약도상 기죽도외 1도가송도인것 ( 磯竹島外一島의一島는松島인것 ) 이명백하다. (iii) 기죽도약도 는 1877년에제작된것이다. 그러므로이는현대국제법이성립된이후에성립된것이므로 기죽도약도 에의한권원은역사적권원이아니므로권원의대체문제가제기되지아니한다. (iv) 국제법상인증지도는제1 차적증명력을가지나그이외의지도는제2 차적증명력을갖는데불과하다. 기죽도약도 는인증지도가아니므로제1 차적증명력을가지지아니한다. 36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v) 공식지도는금반언의효과가인정되나비공식지도는금반언의효과가인정되지아니한다. 기죽도약도 는일본메이지시대국가기관인태정관이그의지령인 태정관지령문 에부속된지도이므로이는공식지도이다. 따라서 기죽도약도 는이를제작한일본정부에대해금반언의효과가인정된다. 그러므로일본정부는 태정관지령문 중竹島외一島는松島 [ 독도 ] 가아니라는주장을할수없다. 요컨대 태정관지령문 의 죽도외 1 도 는 태정관지령문 의부속문인 기죽도약도 에의해송도 ( 독도 ) 인것이명백히확인되었으므로 태정관지령문 의 죽도외일도는본방과관계없다 는지령에따라송도 ( 독도 ) 는일본의영토가아닌것으로확인 선언된것이므로일본정부는이에반해송도 ( 독도 ) 가일본의영토라는주장을할수없는것이다. 2. 정책대안의제의정부당국에대해다음과같은정책대안을제의하기로한다. (i) 일본정부의독도영토주권주장에대해, 일본정부가태정관지령문에의해독도가조선의영토임을스스로승인했다는것을정책에적극반영한다. 특히그근거로 기죽도약도 에의해竹島外一島는松島 [ 독도 ] 임이확인되었다는점을강조한다. (ii) 종래에일본정부의독도영토주권주장에대한한국정부의수세적 방어적정책에서독도는 태정관지령문 과 기죽도약도 에의해이미일본이한국의영토로승인한것이라는능동적 공세적정책으로정책의방향을전환한다. (iii) 일본정부스스로가 태정관지령문 과 기죽도약도 에의해한국의독도영토주권을승인하여독도는한국의영토라는것을국민에게널리공시하여국민의영토의식을고양하고애국심을제고하도록하는대국민교육홍보를실시한다. 37

영토해양연구 Vol. 12 국문초록 한국의영토인독도와관련된일본의지도중하나로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라는이름의지도가있다. 이에관해사학자들의많은연구가수행되어왔다. 1877년 3월 29일명치정부의태정관은내무성에 竹島外一島는본방과관계가없음을명심할것 이라는지령을발했다. 동지령에첨부된 기죽도약도 에는기죽도 ( 울릉도 ) 와그서남방 40리정도에松島가그려져있다. 그러므로동지령의 죽도외 1도 는송도 ( 독도 ) 인것이명백하다. 국제법상지도는인증지도에한해 1차적증거능력이인정되고, 인증지도이외의지도는 2차적증거능력이인정되는것에불과하다. 기죽도약도 는조약이나재판에첨부된법적문서가아니므로이는인증지도가아니다. 그러므로동지도는제1차적증명력을가지지아니한다. 그러나다른한편국가기관이발행한공식지도는그것이인증지도가아닌경우에도그것을발행한국가에대해금반언의효력이인정된다. 기죽도약도 는일본의국가기관이제작한공적지도이므로금반언의효과가인정된다. 따라서일본정부는국제법상독도의영토주권이한국에있다는주장에모순, 저촉되는어떠한주장도할수없는것이다. 일본정부의 태정관지령문 과 기죽도약도 에의한조선의송도 ( 독도 ) 영토주권은 1877년에성립된것이므로이는역사적권원이아니므로권원의대체를요하지아니한다. < 주제어 > 태정관지령, 기죽도약도, 기죽도, 송도, 인증지도, 공식지도 38

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ABSTRACT The Legal Effects of the Sketch Map of Isotakeshima in International Law Kim Myungki Professor Emeritas, Myongji University On March 29, 1877 the Daijō-kan, the highest organ of Japan s Meiji government, issued a directive to the Home Ministry. The directive s operative provision stated that Japan has nothing to do with Takeshima (Ulleungdo) and the other island. Which island was the one besides Takeshima referring to? The answer to that question becomes apparent from examining the map attached to the directive titled Isotakeshima Ryakuzu, or Sketch Map of Isotakeshima. The map shows Isotakeshima (Ulleungdo), and lying 40 ri to its southeast, Matsushima (Dokdo). According to international law, only maps that have been authenticated are acknowledged as admissible primary evidence. Unfortunately, the Sketch Map of Isotakeshima is not an authenticated map because it wasn t attached to a legal instrument such as a treaty or a court decision. Therefore, the map does not possess the legal effect as primary evidence. However, the map was officially produced by an organ of the Japanese Government, which allows the doctrine of estoppel to be applied to the map. This makes it inadmissible for the Japanese Government to make any claims that contradict or conflict with its previous claim through the Daijō-kan directive of 1877 that the territorial sovereignty over the island Dokdo belongs to Korea. Keywords Daijō-kan directive, Sketch Map of Isotakeshima, Matsushima, Dokdo, authenticated map, official ma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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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Ⅰ 국제법상 기죽도약도 의법적효력 43

연구논문영토해양연구 Vol. 12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유미림한아문화연구소소장 Ⅰ. 문제의소재 현재일본이우리나라독도를가리키는호칭으로사용하는 다케시마 [ 竹 島 ] 는본래울릉도를가리키던호칭이었다. 그런데에도시대울릉도에대 한호칭으로는 다케시마 뿐만아니라 이소타케시마 도있다. 게다가 이소타케시마 에대한표기는 磯竹島 와 礒竹島 1 두가지형태가있었고, 이소타케 로발음되는단어로는 蟻竹 과 弓嵩 도있다. 일본이동일한대상을다르게표기하는경우가 다케시마 의경우만그랬던것은아니다. 우리나라울릉도가까이에 죽도 ( 竹島 ) 라는섬이있다. 우리말로는 댓섬 인데, 일본은울릉도를지칭하던 다케시마 [ 竹島 ] 와한자표기가같다는사실을알게되자, 竹島 ( 죽도라고읽는다 ) 라는식으로표기하다가 竹嶼 2 로표기를바꾸었다. 3 그러나 댓섬 에대한한자표기가竹島와竹嶼, 두가지인것과 이소타케시마 에대한한자표기가 礒竹 * 논문투고일 : 2016. 9. 30. 심사개시일 : 2016. 11. 8. 게재확정일 : 2016. 11. 30. 1 이글은명칭을다루는것이므로礒竹島, 磯竹島는한자대로표기하고, 음독을달지않은표기도있음을밝힌다. 이글에필요한원문자료및해독과관련하여박병섭선생의도움을받았다. 지면을빌려감사드린다. 2 1883년 水路雜誌 에는 竹嶼 (Boussole Rx), 竹島 ( 朝鮮人 ) 로되어있고, 1920년 日本水路誌 에는 竹島 ( 竹嶼 ) 로되어있다. 3 일본은독도를불법편입하기 1년전에펴낸지리지에 이섬 ( 울릉도-역자 ) 의동쪽에죽서 ( 竹嶼 ) 가있다 고기술하고 竹嶼 에는특별히강조점을찍기에이르렀다 ( 야즈쇼에이 [ 矢津昌永 ], 1904, 韓國地理, 丸善 ). 44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島 와 磯竹島, 두가지인것을동일한차원에서논하기는어렵다. 죽도 가 죽서 가된것은일본이한국명칭과의중복을피하기위해의도적으로바꾼것이지만, 礒竹島 와 磯竹島 는 礒竹島 표기로부터출발해서병존하다가차츰 磯竹島 로변전해갔기때문이다. 그리고 礒竹島 와 磯竹島 모두일본에고유한호칭이라는점에서도다르다. 그렇다면 礒竹島 와 磯竹島 는표기가다른데, 일본은왜 이소타케시마 로음독하며, 다케시마 로기술하지않고 이소타케시마 를함께언급하고있을까? 필자는늘이점이궁금했었다. 선행연구에서이점을명확히설명한것은없었기때문이다. 나카무라히데다카 [ 中村栄孝 ] 4 가일찍이 礒竹島 에관한글을쓴적이있지만, 그의목적은독도영유권에대한역사적배경을고찰하는데있었을뿐, 礒竹島 자체에대한고증에있지않았다. 독도사전 5 의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항목을보면, 17세기이전일본에서울릉도를일컫던말로서 이소 [ 磯 ] 는돌과바위가많은바다나호숫가를말하며, 다케시마 [ 竹島 ] 는대나무가나는섬을의미한다고되어있다. 또한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일본사료에는울릉도를 이소타케시마 라고기록했고, 이시기의문헌에도 이소타케시마 로기록되어있으므로 1616년이전일본은울릉도를가리켜다케시마 [ 竹島 ] 라고한적이없다 6 고기술했다. 그런데같은사전에는 의죽도 ( 礒竹島 ) 항목이따로있다. 여기에는 울릉도의별칭. 이수광의 지봉유설 에보이며, 의죽도 4 나카무라히데다카 [ 中村栄孝 ], 1961, 礒竹島 ( 欝陵島 ) についての覚書, 日本歷史 제158호. 그는 1953년독도를둘러싸고양국이논쟁하게되었을때부터집필을의뢰받고있다가 1961 년에야완성시켰음을밝혔다. 5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11, 독도사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6 독도사전 의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항목, 1616년이전운운은나이토세이추의견해를인용한것이다. 죽도 기죽도의호칭이함께나오는데, 의죽도 기죽등의 죽 ( 竹 ) 자가보이는것에서 죽도 의영향으로설명하기도한다. 7 라고되어있다. 같은사전에서하나는 이소타케시마 로, 다른하나는 의죽도 라고호칭하면, 하나는일본명칭이고다른하나는한국명칭인듯오해할우려가있다. 다시말해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라고만표기하면, 礒竹島 는 이소타케시마 가아닌것처럼여길수있다는것이다. 또한 이소타케시 7 독도사전 의 의죽도 항목. 45

영토해양연구 Vol. 12 마 와 의죽도 가별개의항목으로다뤄져있어전자는방점이 이소 에, 후자는 다케 자에있는듯이보인다. 그런데사전에서 의죽도 를설명하기위해인용한 지봉유설( 芝峯類說 ) 이나이경직의 부상록( 扶桑錄 ) 을보면, 둘다호칭한주체가일본임이드러나있다. 그렇다면 이소타케시마 가아닌 의죽도 8 로호칭하는것은문제가있다. 이글은이런문제인식에서출발하여, 이소타케시마 의유래를고찰하여우리나라 독섬, 돌섬, 석도 ( 石島 ) 호칭과의연관성을모색해보려는것이다. 이글이독도영유권과직접적인연관성을지니는것은아니지만, 우리가무심코사용하는용어하나도정확한유래나자의 ( 字意 ) 를알고접근하는것이영유권연구못지않게중요하다는인식에서감히시도해본다. 우선 磯 礒 에대한사전 ( 辭典 ) 적정의를보자. 중국에서나온 한어대사전 ( 漢語大詞典 ) 에따르면, 磯 자를두가지의미로풀고있다. 첫번째는 물이암석에부딪치는것 [ 水沖擊岩石 ] 을의미하여, 격노하거나저촉된것을가리킬때사용된다. 맹자 9 에나온 磯 자에대해조기 ( 趙岐 ) 는 磯, 激也 로풀었다. 두번째는 물가의돌혹은튀어나온암석 [ 水邊石灘或突出的岩石 ] 을의미한다. 礒 자는 碕礒에보인다 [ 見 碕礒 ] 고되어있어 礒 자자체에대한자의 ( 字意 ) 는나와있지않다. 그런데 碕礒 를보면, 두가지로풀고있다. 첫번째는 산의돌이고르지않은모양 [ 山石不平貌 ] 이고, 두번째는 기이하고일정하지않음 [ 奇特 ; 不平常 ] 으로풀고있다. 두글자 가 돌 과관계있다는것은공통되지만, 磯 자는 물가 와관계있는반면 礒 자는 고르지않음 과관계가있다. 다만지명으로서의 礒竹島 나 磯竹島 는당연하게도 한어대사전 에는보이지않는다. 10 모로하시데쓰지 [ 諸橋轍次 ] 의 대한화사전( 大漢和辭典 ) 의뜻풀이도 한어대사전 과크게다르지않다. 磯 자에대해서는 1. 격 ( 激 ) 하다. 돌이물을막아노하게하다. 2. 강변, 물이고인곳에돌이많은곳, 磯는磧 ( 강가의돌이많은곳 ), かわら [ 川原 河原 磧 ] [ 명사 ] 강가의 8 한국문헌에보인 礒竹島 를 의죽도 로발음하는것은편의상그렇게하는것이지그것이일본의 이소타케시마 에서온것과무관하지않다는사실을밝혀줄필요가있음을말하는것이다. 9 孟子 告子下, 親之過小而怨, 是不可磯也 不可, 亦不孝也. 10 사고전서 를보더라도磯竹島, 礒竹島는보이지않는다. 일본고유의호칭임을의미한다. 韓國漢字語辭典 (1993~1997,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 에도 磯 자를 여울돌기 로풀고있으며단어로는 磯激 만나와있다. 의 ( 礒 ) 자에대한풀이는없다. 46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모래 [ 자갈 ] 밭 ; 바닥이드러난강변. 3. 邦 : 이소, 바다나호수등의波打際 라고되어있다. 대한화사전 은 礒 자에대해서는 2. 돌의모양, 바위 [ 硪 ] 와같다. 2. 邦 : 이소, 磯와통용된다 고되어있다. 11 두사전모두 磯 자를대표자 ( 代表字 ) 로보고있으며 礒 자를이체자 ( 異體字 ) 로보고있음을알수있다. 그런데두사전을비교해볼때다른점이있다. 한어대사전 과는달리 대한화사전 은 礒 와 磯 에대해 邦 이라고하여일본고유의의미를밝히고있는데, 그것은바로 이소 ( いそ ) 다. 두글자가모두일본에서는 이소 의의미를띠되서로통용되는글자로되어있는것이다. 磯竹 과 礒竹 은 이소 에 다케 가합쳐진것이므로 이소타케 로호칭되며, 島 자가붙으면 이소타케시마 로호칭된다. 문헌에따라 이소타케 혹은 이소타케시마 로나온다. 따라서 礒竹島 와 磯竹島 는표기는다르지만의미가다르기때문이아니라 이소 에대한한자를어느것을차용하는가에따라달라진것뿐이다. 그런데문제는 이소 로발음되는글자가두가지만이아니라는데있다. 五十 역시 이소 로발음된다. 다케 도마찬가지다. 다케 로발음되는것에는 竹 이있지만, 武 12 와 猛 도 다케 로발음한다. 시마네현 [ 島根縣 ] 이와미국 [ 石見國 ] 니마군 [ 邇摩郡 ] 관할에 五十猛村, 오키국 [ 隱岐國 ] 스키군 [ 周吉郡 ] 관할에 磯村 이라는지명이있는데, 五十猛村 은 이소타케무라, 磯村 은 이소무라 로음독한다. 13 이외에 蟻竹島 14 를 이소타케시마, 弓嵩 11 礒자나磯자가한자의풀이로볼때는 돌 에방점이있지만, 일본어 이소 의의미로볼때는 물 과관련이있다고할수있다. 12 쓰보이구메조 [ 坪井九馬三 ] 는 다케시마 라는도명이 武島 의왜훈 ( 倭訓 ) 이라고보았다 (1921, 鬱陵島, 歷史地理 제38권제3호, 168쪽 ). 13 帝國行政區劃便覽 (1901, 1929). 14 蟻자는 개미 의뜻이지만그의미와는아무런상관이없다. 蟻 자를 이소 로음독하기때문에차자한것으로보아야한다. 을 이소타케 로도음독한다. 이로써 이소타케시마 나 다케시마 가한자로표기되기전부터고유지명으로서먼저성립해있었으며, 따라서이들에대한표기도지역혹은화자 ( 話者 ) 에따라다르게표기된것임을알수있다. 그렇다면 礒竹 이나 磯竹 등이문헌에는어떻게기술되고있는지를보기로한다. 47

영토해양연구 Vol. 12 Ⅱ. 문헌상의용례와변천 1. 五十猛 과 이소타케 우선 이소타케 ( 시마 ) 에대한훈차표기인 礒竹 ( 島 ) 이나 磯竹 ( 島 ) 등이문헌에기술된용례를조사하여그추이를보자. 이소타케 와관련된표기가가장먼저보이는문헌은 일본서기( 日本書紀 ) 15 다. 그안에 一書曰素戔嗚尊所行無狀故諸神科以千座置戶而遂逐之是時素戔嗚尊帥其子五十猛神降到於新羅國居曾尸茂梨之處 16 라는문장이있다. 素戔嗚尊의아들로서 五十猛神 이거론되어있는데, 이때의 五十猛 을 이소타케루 17 혹은 이타케루 ( イタケル ) 라고하므로 이소타케 와연관지을수있다. 잔태평기( 殘太平記 ) 18 권7 罪人遠嶋流刑評定之事 조 ( 條 ) 에는오다노부나가 [ 織田信長 ] 가죄인을유배보낼원도 ( 遠島 ) 를논의하는가운데 五十猛嶋 에관한언급이보인다. 에이로쿠 [ 永祿 ] 12 년 (1569) 12 월 오키국상인을불러五十猛嶋에대해 물으니, 인슈 [ 隱州 ] 에서 70 리, 동서 9 리로대죽 ( 大竹 ) 이많고사람은살지않 는다. 이대인은아마수사노오미코토 [ 素盞島尊 ] 의아들이소타케루노미코토 [ 五十猛命 ], 이분이이섬에사신다고전해지므로신이있을것으로생각되고있다. 조선국은서쪽으로보이는데이섬도유인 ( 流人 ] 을보낼곳은아니라고답했다. 19 위의글에는 일본서기 에보였던 五十猛 이다시거론되고있지만, 조선의울릉도를가리키는듯이언급되어있다. 오다노부나가당시울릉도가 이소타케 15 日本書紀 번역본에는음독이 이다게루노미고도 로되어있다 ( 성은구역주, 1987, 일본서기, 정음사, 59쪽 ). 16 日本書紀 卷第一神代 ( 上 ). 17 古事記 에등장하는오오야뷰 [ 大屋毘古神 ] 와동일신으로되어있다. 임업의신으로신앙된다 (https://ja.wikipedia.org/wiki 참조 ). 18 中村栄孝는이책은편자가미상이며 1690년의간기 ( 刊記 ) 가있는데, 권12의권말에 元祿 3( 경오 ) 년 9월상순, 書林雁金屋庄兵衛榟라고새겨져있다 고했다. 19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8 쪽. 48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 五十猛 ] 로불리고있었으며거리나대나무등을언급하고있어전설상의섬에머물지않았음을보여준다. 따라서이는일본에서울릉도에관한지견 ( 知見 ) 이 16세기중반경까지거슬러올라간다는것을의미한다. 일본모모야마시대 [ 桃山時代, 1573~1603] 에작성된것으로전해지는 일본도병풍 ( 日本圖屛風 ) 20 및동일계통의병풍에도오키와고려사이에 磯竹 이라는섬이하나그려져있다. 21 이에대하여나카무라히데다카는 礒竹 이라는명칭이이시기전후로알려졌으며 17세기에는양국의외교교섭의대상으로다루어졌다고했다. 22 또한그는지도에서는 竹島 로명기된것이 어주인선항해도( 御朱印船航海圖 ) 외에여러종류가있다고했다. 그는 일본도병풍 에그려진섬의표기를 磯竹 으로보았음에도자신은 礒竹 으로칭했고, 지도상의표기는 竹島 로칭했다. 이런표기의변전은 이소타케시마 를의미하는호칭이 五十猛 에서 磯竹 으로, 다시 竹島 로옮겨 20 中村栄孝, 1961, 위의글, 15쪽. 나카무라 [ 中村 ] 는 일본도병풍 의제작연도에대해서는芦田伊人씨와中村拓박사가 1587년내지 1590년작으로보는福井의淨得寺소장외에도여러소장품이있으므로이설 ( 異說 ) 이있다고밝혔다. 21 시마네현총무과소장자료 5권. 일한어업교섭자료 3, 일본해의다케시마 ( 竹島 ) 에관하여. 22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5 쪽. 23 일본의중세부터근세의이행기인 1478년부터 1618년에이르는약 140년간나라 [ 奈良 ] 고후쿠지 [ 興福寺 ] 다몬인 [ 多聞院 ] 의승려조지쓰보에이슌 [ 長実房英俊 ] 을비롯한삼대 ( 三代 ) 의필자가쓴일기로서 46권으로되어있다 ( 독도사전 참조 ). 24 多聞院日記 38, 간본 4. 25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9쪽에서재인용. 26 内藤正中, 2005, 竹島( 鬱陵島 ) をめぐる日朝關係史, 東京 : 多賀出版, 17쪽. 가고있음을보여준다. 다몬인일기[ 多聞院日記 ] 23 덴쇼 [ 天正 ] 20년 (1592) 5월 19일조 24 에는다음과같은내용이있다. 호키 [ 防 < 伯 > 耆 ] 에서야시치 [ 弥七 ] 가왔다. 10년을오지않았다 ( いそたき人蔘 3냥과못을조금지참하고왔다 ). 단속에걸려갇혀있었다고한다. 25 다몬인의에이슌 [ 英俊, 1518~1596] 에게호키의야시치 [ 弥七 ] 라는자가 いそたき人蔘 을선물한내용에 いそたき 로만쓰여있으므로한자를알수없지만, 나이토세이츄는 이소타키 는 이소타케 이며,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라는이름으로당시불리고있던울릉도의특산인조선인삼이불로장생의묘약으로이미일본에서도알려져있었음을알수있는기사 26 라고보았다. 나이토는가나표기가가리키는한자보다는 이소타 49

영토해양연구 Vol. 12 케시마 가울릉도를가리킨다는사실에초점을맞추고있는것이다. 나카무라도 이기사에 이소타키인삼 3냥을지참했다고하지만, 야시치는호키에서출발했으므로이는 이소타케人蔘 의방언일것이다 고보았다. 그역시호키와울릉도간의관계를의식하고해석한것이다. 27 2. 1614년의 礒竹島 조선에서가장먼저 礒竹島 가보인것은광해군연간 (1614) 이다. 그러나 광해군일기 에는보이지않고 숙종실록 에보인다. 숙종실록 20년 (1694) 에두번보인다. 2월 23일자기사는 1693년여름에남구만이숙종에게 지봉유설 의내용 왜놈들이礒竹島를점거했는데, 礒竹島는바로울릉도라고했습니다 을아뢴내용이다. 8월 14일자기사는남구만이숙종에게 동래부가간직한문서에는 광해갑인년에왜 ( 倭 ) 가사자 ( 使者 ) 를보내礒竹島를탐시 ( 探視 ) 하겠다고말했으나조정에서답하지않고, 동래부로하여금준엄하게배척하도록했다 는기록이있으니, 왜인들이이섬에서어채해온지가또한오래된것입니다 라고한말이다. 이내용으로보건대, 광해군 6년 (1614) 에이일로인해조정이동래부에지시한사항이있었으며, 그문서가동래부에보관되어있음을알수있다. 이수광이펴낸 지봉유설 (1614) 의내용은광해군 6년의일이아니라그이전을가리킨다. 이수광은 울릉도는임진왜란후에사람이가서보니, 왜적의분탕 ( 焚蕩 ) 과노략질을겪어다시인적이없었는데, 근자에들으니왜가礒竹島를점거했다고한다. 혹자는礒竹은바로울릉도라고한다 28 라고했다. 이는임진왜란이후 1614년이전의일로, 이수광 (1563~1628) 의생존시대에있었던일을의미한다. 그러나이수광이 지봉유설 서문을쓴연도가 1614년이므로광해군 6년즉같은해에있었던 일을이수광이기록했다는사실은의심스럽다. 임진왜란당시울릉도가일본에의해점거되었다는사실은 27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9쪽. 28 芝峰類說 권2 지리부. 50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더욱더의심스럽다. 나카무라도 일본군이울릉도를점거한사실을보여주는사료는접해보지못했다. 일본문헌에나오는 竹島 는낙동강입구에가까운, 경상도김해부근으로전혀방향이다르다. 29 고했듯이, 임진왜란관련기록에보이는 죽도 는대부분경상도나충청도지역의 죽도 를가리킨다. 그러므로이때의 礒竹島 는울릉도가아닐가능성이더크다. 한편 1614년에일본이 礒竹島 를탐시하겠다고했을때의섬은그런사실은없었을지라도지칭한 礒竹島 는울릉도를가리킬가능성이크다. 다만이수광이 礒竹은바로울릉도라고한다 고한 礒竹 은이수광의말대로혹자의말에불과하다. 그러므로일본이탐시하겠다는礒竹島와이수광이말한礒竹이같은대상을가리키는것인지도분명하지않다. 다만이로써드러난사실은임진왜란을전후한시기에조선에 礒竹 이라는일본호칭이알려지고있었다는것이다. 이수광이언급한 礒竹島 는이익이 성호사설 울릉도 에서인용했고, 이후 울릉도쟁계 를언급하는조선학자대부분이이를그대로인용했다. 30 일본의 통항일람( 通航一覧 ) ( 권129) 조선국부( 朝鮮國部 ) (105) 무역 을보면, 본주편임략( 本州編稔略 ) 의내용이인용되어있는데, 겐나 [ 元和 ] 6년경신본국 ( 쓰시마국 -역자 ) 상고 ( 商賈 ) 야자에몬 [ 彌左衛門 ], 니에몬 [ 仁右門 ] 31 이라는자가몰래도해하여礒竹島에있었으므로 ( 생각건대磯竹島는바로竹島를말한다 ) 잡아서 라는내용이있다. 1620년의일을가리킨다. 통항일람 ( 권137) 조선국부( 朝鮮國部 ) (113) 의 竹島 부분을보면, 게이초 [ 慶長 ] 17년임자년이즈음磯竹島를일본의경계로 29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5 쪽. 30 남구만은숙종에게, 지봉유설에礒竹島는바로울릉도라고되어있다 는사실을소개했다 ( 숙종실록 20년 2월 23일 ). 춘관지 ( 울릉도쟁계 ), 증정교린지 ( 권4 울릉도의죽도변정전말 ) 에도실려있다. 31 對州編稔略 에는 진에몬 [ 仁右衛門 ] 으로되어있다. 삼았다. 이해 7월에저나라에서동래부윤수겸이공 ( 생각건대宗義智를가리킨다 ) 에게회답서계를보내왔다. 회답서에는 이른바磯竹島는우리나라울릉도다 라고되어있다. 회답서의내용은다음과같다.( 본서에서인용한 조선통교대기 에는경장 19년으로되어있다 ) 라고기술되어있다. 1612년의일이라고기술했지만 1614년의일임을 51

영토해양연구 Vol. 12 알수있다. 통항일람 의두내용으로보건대, 본주편임략 에는 礒竹島 로되어있고, 1612년 ( 원문대로 ) 동래부사윤수겸이보낸편지에는 磯竹島 로되어있다. 이를 통항일람 편자는 磯竹島 로표기했으며, 磯竹島 는바로 竹島 라고단정했다. 위 통항일람 ( 권129) 에나온 彌左衛門 (1620) 에대하여, 나카무라는이경 직의 부상록 (1617. 10. 5) 에언급된 蟻竹彌左衛門 32 에해당시켰다. 나카무라는히데요시 [ 秀吉 ] 시대에 礒竹島 에도항하며특권을지니고있던야자에몬 [ 彌左衛門 ] 은시게오키 [ 調興 ] 33 가말한蟻竹彌左衛門과같은사람일것이라고생각했다. 그러나이경직이언급한일은 1617년의일이며, 시게오키가말한蟻竹島는당진을가리킨다. 이런비정은이경직자신의생각이다. 34 그러므로나카무라가말한礒竹島와이경직이말한蟻竹島는다른지역을가리키고있다. 나카무라는이경직의기행문이만들어진해가요나고의오야진키치 [ 大谷甚吉 ] 등이이섬에표착하고그다음해에막부로부터도항면허를받아어업권을받은시기와같다고보았다. 또한그는이해에마타자이 [ 馬多三伊 ] 등 7명이울릉도에출어하여표류한적이있는데, 이런사실은한국문헌 35 에보인다고했다. 그런일이있었던해는 1617년을가리킨다. 일본문헌에는 통항일람 권135 조선국부 표류 조에인용되어있다는것이다. 나카무라에따르면, 大谷九右衛門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 36 이나 別本村川氏舊記 37 에는 1618년에양가의선조인오야진키치 [ 大谷甚吉 ] 와무라카와이치베 [ 村川市兵衛 ] 가도쿠가와막부로부터 竹島 에도항하는것을면허받았고, 竹島 도항은막부공인하에행해지고있었던것이다 고기술되어있 32 히데요시가蟻竹島에들어가재목을가져온왜인에게 蟻竹彌左衛門 라는이름을지어주었다는사실을쓰시마의調興이이경직에게말한것이다. 그러나蟻竹彌左衛門은히데요시가죽고얼마되지않아죽었다 ( 부상록, 1617. 10. 5). 여기서의蟻竹은 이소타케 의의미로쓴것이므로 礒竹 의오기가아닐까한다. 나카무라도 礒竹彌左衛門 으로보았다 (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8쪽 ). 33 쓰시마번가로야나가와시게오키 [ 柳川調興, 1603~1684] 를말한다. 34 且言昔年秀吉在時有一倭自願入蟻竹島伐取材木及蘆葦而來或有大者如篁秀吉大喜仍名曰蟻竹彌左衛門仍令彌左資爲生活定爲歲入未久秀吉死而彌左繼斃更無往來之人家康得聞此言令先自來現云此必崔義吉到唐津也 ( 扶桑錄 ). 35 마타자이 [ 馬多三伊 ] 의일은광해군 9년 (1617) 의일로 숙종실록 (21년 6월경술조 ) 과 증정교린지 에보인다. 그러나최근에는오야가문이울릉도어업을개시한시기를 1625년이후로보는설이대두하고있다. 36 中村栄孝에따르면, 시마네현립도서관, 明治 44년 10월 19일시마네현사료편찬계복사본, 원래는오키국사이고長田和歌次소장본, 문정원년 9월大谷九右衛門이가전 ( 家傳 ) 하는 竹島由緖記 류에서뽑아써서제출한것의寫 로되어있다. 37 中村栄孝에따르면, 대일본사료 제 12편 29, 元和 4년 5월 16일조에수록되어있다. 52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다. 그러나오야진키치와무라카와이치베가언급한도서명은 竹島 이므로이경직기행문이나 통항일람 에서보인 礒竹島 혹은 蟻竹島 와는표기가다르다. 竹島 와 礒竹島 는같은대상 ( 울릉도 ) 을가리킨다고할수있지만, 蟻竹島 는그렇지못한데나카무라는자국인의울릉도도해연원을멀리끌어올리기위해무리하게한데엮은것이다. 이렇듯일본이나한국문헌에서 1620년까지는 이소타케 혹은 이소타케시마 로불리는섬이있었을지라도그표기는五十猛, 蟻竹, 磯竹島, 礒竹島등으로다양했다. 그리고이들호칭이동일하게 울릉도 를가리키는것이아니었다는사실도알수있다. 증정교린지 (1802) 4권에실린것은 울릉도의죽도변정전말 ( 鬱陵島礒竹島辨正顚末 ) 이다. 여기서 礒竹島 라고한것은 1614년동래부사윤수겸의장계에 礒竹島 를언급한것과관계가있을것이다. 앞에서언급했던것과같은배경이다. 울릉도의죽도변정전말( 鬱陵島礒竹島辨正顚末 ) 에는숙종 19 년 (1693) 쓰시마도주가동래부사에게보낸서계에 조선인이일본의礒竹島를범월 ( 犯越 ) 하였으므로잡아압송한다 고한사실이인용되어있다. 또한 을해년 (1695) 에이르러도추 ( 島酋 ) 가다시동래부에서계를보내礒竹島의일을제기하였는데, 라고한내용, 지봉유설 에이르기를 礒竹은곧울릉도 라하였기때문이다. 라고한내용이인용되어있다. 변증설의제목을 울릉도죽도변정전말( 鬱陵島竹島辨正顚末 ) 로하지않고 울릉도의죽도변정전말 ( 鬱陵島礒竹島辨正顚末 ) 이라고했듯이, 礒竹島가울릉도임을변증하려는데목적이있었지만, 궁극은숙종연간의쟁계가 일도이명 ( 一島二名 ) 에있는것이아님을밝히려는데목적이있었다. 礒竹島 를기술한양국문헌의내용을표로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53

영토해양연구 Vol. 12 < 표 1> 1614 년관련내용기술의비교 ( 밑줄은인용자 ) 문헌명내용 지봉유설부상록숙종실록 (1694. 2. 23) 숙종실록 (1694. 8. 14) 성호사설변례집요만기요람증정교린지조선통교대기 (1614. 7) 壬辰變後人有往見者亦被倭焚掠無復人烟近聞倭奴占據礒竹島或謂礒竹卽蔚陵島也 且言昔年秀吉在時有一倭自願入蟻竹島伐取材木及蘆葦而來或有大者如篁秀吉大喜仍名曰蟻竹彌左衛門仍令彌左資爲生活定爲歲入未久秀吉死而彌左繼斃更無往來之人家康得聞此言令先自來現云此必崔義吉到唐津也 是夏南九萬白上曰東萊府使報倭人又言朝鮮人入於吾竹島宜禁其更入也臣見芝峰類說倭奴占據礒竹島礒竹卽鬱陵島也 東萊府所藏有光海甲寅倭有送使探視礒竹島之言朝廷不答使東萊峻斥之之文倭之漁採此島其亦久矣 芝峯類說云欝陵島壬辰後被倭焚掠無復人烟近聞倭占㨿礒竹島或謂礒竹即欝陵也 甲寅萬曆四十二年六月府使尹宗謙時倭小船一隻持書契規外出來問其緣由則頭倭曰以家康分付探見礒竹島大小形止而恐有漂風路引成給故持此書契出來云云... 光海七年倭差船二隻謂將探礒竹島形止且曰島在慶尙江原之間朝廷惡其猥越不許接待只令東萊府使朴慶業答書曰足下非不知此島之橫占乃欲攙越窺覘是誠何心恐非隣好之道所謂礒竹島實我國之欝陵島也介於慶尙江原海洋載在輿地焉可誣也 光海六年甲寅府使尹守謙狀啓倭小船一隻稱以探見礒竹島形止而出來故問島在何處則答以介於慶尙江原道之間觀其辭意似是鬱陵島云 朝鮮東萊府使尹守謙奉復日本國大馬州太守平公足下尋問鼎來慰豁良多但書中有看審礒竹島之說深竊驚訝不知是計果出於誰某耶 3. 이소타케시마 와 다케시마일건 일본에서竹島 ( 竹嶋 ) 가처음으로관찬문서에보인것으로는 인슈시청합기[ 隱州視聽合紀 ] (1667) 가주로거론된다. 거기에 隱州在北海中故云隱岐島 戌亥間行二日一夜有松嶋又一日程有竹嶋 ( 俗言礒竹島多竹漁海鹿按神書所謂五十猛歟 ) 此二嶋無人之地見高麗如自雲州望隱州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 38 라고기술되어있는데, 竹嶋 가주칭이다. 이어 俗言礒竹島 39 라고하여 礒竹島 를속칭으로했다. 그런데이 礒竹島 에대하여사이토도요노부 [ 齋藤豊宣 ] 는 신서 ( 神書 ) 에서말하는 五十猛 인가 라고했다. 38 隱州視聽合紀 國代記 (1667), 국 립공문서관원문에는礒竹島로, 번각문 ( 續續群書類從第九, 1906) 에는磯竹島로 되어있다. 39 오키쵸립도서관이소장하고있는사사 키본에는 俗言磯竹島 로되어있다 ( 독도자 료집 Ⅲ 隱州視聽合紀, 동북아역사재단 ). 이 책의번역자인오니시는사사키기치자에몬 (1652~1701) 가 ( 家 ) 소장본이국립국회도서관 (1688년본) 소장본보다오래되고전래경위가분명하므로이것을저본으로해서해독했다고밝혔다. 그러나초기의 이소타케시마 표기는대부분礒竹島인데, 사사키본에는磯竹島로되어있다. 사사키본이일본국회도서관소장본보다먼저필사한것이라면후대의필사자들도이를따라 磯竹島 로표기하는것이자연스러운데그렇지않은점이의아하다. 우리나라국립중앙도서관이제공하는원문은조선총독부소장 54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이는 礒竹島 가 五十猛 즉 이소타케 로음독되는것인가짐작된다는견해를밝힌것이다. 이는오키해상서쪽으로이틀거리에있는섬의명칭이 五十猛 礒磯島 竹嶋 로변전 ( 變轉 ) 하고있음을볼수있는데, 그렇다면 礒竹嶋 에서 竹嶋 로변전하는단초는사이토가열었다고할수있다. 이런양상은이른바 다케시마일건 을거치면서더분명해진다. 17세기후반이른바 다케시마일건 을기술한문헌에는 礒竹島 가어떻게표기되어있을까? 1693년 5월 5일쓰시마번의스기무라우네메 [ 杉村采女 ] 는동래왜관에근무중인통사나카야마가베 [ 中山加兵衛 ] 에게竹島와조선에서부르는 부룬세미 가다른것인지를묻는과정에서 일본에서는울릉도를礒竹이라고부릅니다. 울릉도와부룬세미는다른섬입니까 40 라고물었다. 쓰시마번은 1620년에는 礒竹島 로칭했었는데여기서도 礒竹 으로칭하고있는것이다. 1696년 1월의도해금지령이나오기까지쓰시마번 본으로여기에는 寬文七年冬十月藤弗緩采毫於失尾館下 라고기술하여원저자인사이토의서문을그대로필사하고있으며, 이소타케시마 도 礒竹島 로되어있다. 藤弗緩은사이토도요노부의아호 ( 雅號 ) 이기때문이다 ( 오니시도시테루의역주에따름 ). 그런데 1906 년에간행된번각본 續續群書類從第九 는사사키본에의거하고있으며, 따라서서문이 寬文七年冬十月采筆乎八尾館下 로되어있다. 40 竹嶋紀事 1 권, 1693 년 5 월. 41 고타니이헤는 1689년부터 1700년에걸쳐돗토리번의에도유수거 ( 留守居 ) 로서종사했다. 고타니가회도를제출한시기를미타기요토 [ 三田淸人 ] 는 1692~1696년사이로보았다. 1695년에서 1696년사이로보인다. 42 웹다케시마문제연구소는돗토리현립박물관과요나고시립산인역사관소장의지도를탑재하고있다. 두회도는채색에약간의차이가있는것을빼면거의같다. 과돗토리번, 에도막부사이에는많은문서가왕복했지만, 다케시마 ( 울릉도 ) 에대한표기는대부분竹島거나竹嶋다. 에도막부가 다케시마일건 을처리하기위해돗토리번에관련문서와지도를요구했을때, 돗토리번의에도유수거 ( 留守居 ) 고타니이헤 [ 小谷伊兵衛 ] 는관련문서와지도를제출했는데, 41 그가제출한지도는당시오야 무라카와집안이소장한회도를필사 한 ( 고타니이헤가제출한다케시마회도 [ 小谷伊兵衛より差出候竹 嶋之絵圖 ] ) 42 것이었다. 고타니는이회도에서후쿠우라에서마쓰시마까지가 80리정도, 마쓰시마에서이소타케시마까지가 40리정도, 마쓰시마에서조선국까지가 80~90리정도라는주기를넣었다. 그리고회도아래쪽에는 磯竹嶋之圖 라는범례를실어울릉도의여러지명과크기등을써놓았다. 그런데그가제출한회도의표제는 磯竹嶋之絵圖 가아니라 竹嶋之絵 55

영토해양연구 Vol. 12 圖 다. 竹嶋와磯竹嶋가함께보이고있는것이다. 교호연간인 1724년에막부는돗토리번에다시한번지도제출을요구했는데, 돗토리번이제출한회도의이름은 고타니이헤가바친다케시마회도를필사한회도 [ 小谷伊兵衛ニ所持被成候竹嶋之絵圖之写 ] ) 43 였다. 즉고타니가 1696년경필사했던회도를다시필사하여돗토리번이막부에제출한것이다. 회도의표제는 竹嶋之絵圖之写 로되어있되, 회도안에는울릉도가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로, 독도가 마쓰시마 [ 松嶋 ] 로표기되어있다. 이소타케시마 의둘레는 7리 ( 里 ) 반, 마쓰시마의둘레는 30정 ( 丁 ) 으로적고있다. 1724년의회도에도 1696년의회도에있던 磯竹嶋之圖 라는범례가그대로들어가있다. 다만 1724년의회도에는지명앞에주기 ( 朱記 ) 가추가되어있는데, 이를테면 다케시마 [ 竹嶋 ] 에대해세상에서는이소타케 [ 磯竹 ] 라고도하지만, 저희양인 ( 兩人 ) 은다케시마라고합니다. 예전부터에도쇼군께글을올릴때는다케시마라고해왔습니다 44 라는것이다. 여기서말하는세상이어디를지칭하는지알수없지만, 돗토리번지역에서는 다케시마 로부르고있음을밝힌것이다. 그런데이명칭이 1876년에시마네현이내무성에제출할때는 磯竹島 가되어있다. 지도에서는주로礒竹島, 磯竹島로표기되어있음을알수있다. Ⅲ. 다케시마일건 이후의표기 1. 18~19세기문헌의표기 다케시마일건 이후의문헌에서 이소타케시마 호칭의변천을보면, 우선 1736년이토도가이 [ 伊藤東涯 ] 의 유헌소록( 輶軒小錄 ) 에는 礒竹島ノ事 에서 북해안에인슈에서 30리북쪽으로礒竹島라는것이있다. 둘레는 10리쯤이다 45 라고했듯이, 礒竹島 46 로칭하 43 요나고시립산인역사관소장. 44 舩杉力修, 2007, 絵圖 地圖からみる竹島 (II),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最終報告書, 竹島問題研究会, 143쪽. 45 輶軒小錄 ( 일본국회도서관디지털라이브러리원문제공 ). 46 아키오카다케지로 [ 秋岡武次郞 ] 는 松島와竹島 (1950) 에서 磯竹島 로표기했다. 56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고있다. 후에외무성의사카타모로토 [ 坂田諸遠 ] 47 와지도학자아키오카다케지로 [ 秋岡武次郞 ](1950) 가이를인용한바있는데, 모두 磯竹島 로표기했다. 단순한오기인지아니면礒竹島와磯竹島가통용된다고보아서인지는알수없다. 이토는중국의 수서( 隨書 ) 도인용하여 조선에서일본으로건너가는곳에舳羅嶋라는섬에이르는데, 이섬은礒竹을가리키는듯하다 48 라고했다. 그는 유헌소록 에서는礒竹島와礒竹으로, 도가이수필 [ 東涯隨筆 ] 에서는 竹島 로표기하고있다. 오키고기집[ 隱岐古記集 ] (1823) 에는 북서쪽 40여리에마쓰시마 [ 松島 ] 가있다. 둘레 1리정도로나무없는바위섬이라고한다. 거기서서쪽으로 70리에다케시마 [ 竹島 ] 가있는데, 예로부터이섬을磯竹島라고불렀으며대나무가울창한큰섬이라고한다 고했다. 인슈시청합기 를본따편찬한것이므로 磯竹島 도그연장선상에서나온것으로보인다. 다케시마고[ 竹島考 ] (1828) 는 삼국통람 ( 三國通覽 ) 에수록된조선국전도 ( 全圖 ) 를설명하면서 강원도해중에섬이있는데 鬱陵島千山國 49 이라고적었고, 그안에산을모사 ( 模寫 ) 하고 弓嶽 50 이라고했다 고기술했다. 호키지 [ 伯耆志 ] (1858) 에는 磯竹은竹島이다. 3대九右衛門勝信이말하기를, 竹島동쪽에둘레 20 丁정도의섬이있다. 松島라고하는데오키에서 60리쯤된다 라고한내용이있다. 오키고기집 에서 호키지[ 伯耆志 ] 에이르기까지도문헌에서 이소타케 의한자는단일하지않다. 47 坂田諸遠, 松島異見 (1877). 48 輶軒小錄 의기술은도가이의 東涯隨筆 ( 日本儒林叢書 第 1 巻, 1978) 과는약간다르다. 東涯隨筆 에는 隋書 에서말하는탐라도 ( 耽羅島 ) 란아마도이竹島를말하는것일듯하다 ( 隋書ニ所謂耽羅島蓋此竹島ナラン ) 라고되어있다. 49 여기서 千山國 이라고한것은 于山國 의오기다. 50 이를번역한 竹島考 ( 경상북도사료연구회, 2010) 는 이소타케 로음독했다 (83쪽). 2. 이소타케시마각서 이소타케시마 가서명의전면에나오는것은 1875 년의 이소타케시마각서 다. 이문서는겐로쿠연간의 다케시마일건 관련문서를모아편집한것으로, 도해금지령을내기까지막부가쓰시마번, 돗토리번과주고받은서한및쓰시마번과조선과의서간이실려있다. 특히막부가도해금지령을내는데결정적인계 57

영토해양연구 Vol. 12 기를마련해준돗토리번마쓰다이라번주의회답이실려있는데, 거기에는 마쓰시마는두지역 ( 이나바와호키-역주 ) 에부속된것이아니다. 마쓰시마는다케시마로가는해로상의섬이다 51, 마쓰시마에서다케시마까지는 40리정도, 마쓰시마까지는호키국에서해로 120리정도 52 라는내용을담고있어두섬을세트로다루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이 각서 는여러소장본이있다. 첫번째로들수있는것은국립공문서관소장본이다. 제목이 礒竹島覺書 53 로되어있는데, 가운데표지는없으며맨마지막에 明治八 [1875] 年八月八日中邨元起 라고쓰고주인 ( 朱印 ) 元起 가찍혀있다. 내무성지지과소속의나카무라겐키 [ 中邨 ( 村元起 ] 가엮은것인데, 이것을원본으로보기도한다. 54 두번째는내무성지리국소장본인데, 사본이다. 이문서의겉표지는 礒竹島覺書 고발행자는내무성지리국이다. 가운데표지도 礒竹島覺書 로되어있고아래에 全 자가있으며지리료인장이찍혀있다. 55 본문도 礒竹島覺書 로되어있다. 세번째는쓰쿠바대학소장본인데, 청구기호와등록번호가나와있는표지는 磯竹島覺書 로되어있지만, 책으 로묶은것처럼보이는것의표지는 磯竹島事略 으로되어있다. 안의본문으로들어가면, 다시초서체의 礒竹島覺書 로되어있다. 본문에나오는명칭도 礒竹島 다. 세문서를비교해보면표지와본문의명칭은대부분 礒竹島 인데, 쓰쿠바대학소장본의표지의일부만이 磯竹島事略 으로되어있다. 그렇지만이들세문서의주요내용은대부분 다케시마 로언급하고있을뿐 磯竹 礒竹 을주칭으로하여내용을기술한것은아니다. 磯竹 礒竹 이라는호칭은세군데서보인다. 첫번째는 1695년 12월 6일쓰시마번의형부대보가가로 ( 家老 ) 히라타나오에몬 [ 平田直右衛門 ] 을에도에보내보고한구상서 [ 口上之覺 ] 에서인데, 그내용은다음과 51 1695 년 12 월 25 일자회답. 52 1696 년 1 월 23 일자회답. 53 서명아래 完 이라고적혀있다. 礒竹島覺書 에完자나全자가쓰여있는것을포함해서서명으로보는경우가있다. 그러나이는그것이한책으로서완본 ( 完本 ) 임을뜻하는것이지 礒竹島覺書完 이서명임을뜻하는것은아니다. 이를테면 礒竹島事略 은 乾坤 이쓰여있는경우가있는데, 이는건곤 2책으로된것임을의미한다. 54 박병섭, 2016. 6, 池內敏의 竹島-또하나의일 한관계사, 獨島硏究 제20 호, 영남대학교, 260~261쪽. 55 주인 ( 朱印 ) 지리료인 ( 地理寮印 ) 이찍힌것은지리료가지리국으로개칭 (1877. 1. 11) 하기이전에작성되었음을의미한다 ( 박병섭, 위의글참조 ). 58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같다. 56 조선국의 지봉유설 (80년전의책-원주 ) 이라는책에서는울릉도를무릉, 우릉이라고도하고우산국이나礒竹嶋라고도합니다. 임진왜란후에일본인에의해초토화된뒤로는사람이살지않습니다. 요즘은일본인이거주하고있다고도합니다. 그렇다면임진년이래로일본의속도 ( 屬島 ) 가되었다는것을조선전체가잘알고있을것입니다. 두번째는일본이 지봉유설 을인용한부분에서다. 거기에는 壬辰變後人有往見者亦被倭焚掠無復人烟近聞倭奴占據礒竹島或謂礒竹卽蔚陵島也 로되어있어, 礒竹島 와 礒竹 이함께보인다. 세번째는 1696 년에도막부가마쓰에번주마쓰다이라데와노가미 [ 松平出羽守 ] 57 에게서받은구상서 ( 口上書 ) 인데, 그내용은다음과같다. 一. 이즈모와오키사람들이자기네생업을위해礒竹으로간다는것은들어보지못했습니다. 그러나오키가요즘어떤지는알지못합니다. 一. 竹島를이즈모에서는礒竹이라부릅니다. 一. 이즈모와오키에서礒竹으로가는해로는어려운곳인데, 이두지역은요나고사람들이배에타기를딱히바라지는않으나이치베와구에몬의뱃사람들이매년모집해서갑니다. 一. 이상과같으므로자발적으로礒竹에가는일은결코없습니다. 이들인용문으로알수있는것은쓰시마번이 지봉유설 을거론할때의명칭은 礒竹島 이고, 마쓰에번이이즈모와오키를거론할때의명칭은 礒 56 이하에인용한내용에서 礒竹 표기는세소장본이같다. 57 마쓰다이라쓰나치카 ( 綱近, 1659~1709). 마쓰에번제3대번주. 재임기간 1674~ 1704. 竹 이라는사실이다. 磯竹 은보이지않지만 이소타케 인점은공통된다. 그러나앞에서는 磯竹 礒竹 으로칭한지역이주로쓰시마번이었는데여기서는이즈모와오키지역으로되어있다. 59

영토해양연구 Vol. 12 3. 메이지정부와 이소타케시마 메이지정부출범이후 1876년에내무성이지적 ( 地籍 ) 편찬사업에착수했을때시마네현이내무성에제출한문서에는두섬표기가어떻게되어있을까? 내무성은지적편찬사업을추진하면서지리료의관리두사람을시마네현에파견하면서좀더자세한내용을조사하여내무성에문의해줄것을현에요청한바있다 (10월 5일 ). 이런요청이있은지열흘뒤시마네현은 일본해에있는다케시마외일도를지적에편찬하는방법에대한문의 [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를작성하여제출했다 (10월 16일 ). 이때시마네현은소장하고있던고문서와도면 ( 圖面 ) 을첨부했다. 고문서는이른바 원유 ( 原由 ) 의대략 으로, 에도막부의도해허가서부터도해금지령에이르기까지의경위를적은것이었고, 여기에시마네현의후기 ( 後記 ) 를덧붙였다. 도면은 1696년에돗토리번의고타니가막부에제출한, 오야가 ( 家 ) 의회도 ( 繪圖 ) 를축사 ( 縮寫 ) 한 磯竹島略圖 였다. 시마네현이첨부한 원유의대략 은다음과같은문장으로시작하고있다.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다케시마 [ 竹島 ] 라고도한다. 오키국북서쪽 120리정도에있으며둘레약 10리정도에. 내무성은 다케시마 만을문의했는데시마네현은 편찬방사 에 다케시마외일도 라고하여 일도 를추가했고, 첨부문서에서는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를주칭으로해서기술했으므로 다케시마 는별칭이되어있다. 첨부한도면의명칭도 磯竹島略圖 로되어있듯이, 이소타케시마 가주칭이다. 그러나 원유의대략 본문의내용은대부분 竹島 로기술된다. 磯竹島略圖 에보인지명은 이소타케시마 라는지명을제외하면대부분겐로쿠연간오야 무라카와집안이명명한것들이다. 돗토리번은 1724년에막부에보고할때, 다른지역은 이소타케시마 라고하지만자기지역에서는쇼군에게보고할때조차 다케시마 라고한다고밝혔다. 그럼에도 1876년시점에시마네현이왜내무성에보고하는문서에서 이소타케시마 를주칭으로한문서를제출했는지는의문이다. 시마네현은중앙정부가 다케시마 에대한인식만지니고있다고여겨 60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서일까? 이런상황에서묘하게도 이소타케시마 호칭은점차외무성의주도하에竹島 礒竹島 磯竹島로변전하고있다. 외무성의기타자와마사노부 [ 北澤正誠 ] 는 다케시마고증[ 竹島考證 ] (1881) 에서 다케시마고[ 竹島考 ] 를인용하면서, 竹島 < 磯竹島라고도되어있다 > 는본방과조선사이에있는절해의고도 ( 孤島 ) 다. 둘레는 10리정도가되며산은매우험하고계곡은깊고고요하며나무는울창하고대나무가빽빽이들어서있다. 토지는비옥하고물산 ( 物産 ) 이많다 58 고기술했다. 그런데기타자와가인용한 다케시마고 를보면, 竹島는본방과조선사이에있는절해의고도 ( 孤島 ) 다 로되어있을뿐 < 磯竹島라고도되어있다 > 는말은없다. 기타자와가의도적으로삽입한것이다. 이소타케시마각서 에서 다케시마고증 에이르는사이 礒竹島 에서 磯竹島 로변전하고있는양상을목격할수있으며, 磯竹島 를먼저언급한뒤에 竹島 를부연하는식으로기술하고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이런양상이지도나지리지에서도그런것은아니다. 지도와지리지에서는 이소타케 가두가지로표기되고있다. 弓嵩 과 磯竹島 다. 대일본접양삼국지전도 ( 大日本接壤三國之全圖 ) ( 浪花書林, 1786) 에는울릉도에 千山國 이표기되어있고성인봉에해당하는부분에 弓嵩 이라고쓰고 이소타케 라고표기되어있다. 59 증보개정조선국전도 ( 增補改正朝鮮國全圖 ) ( 田嶋象次郞, 1873) 에는울릉도의지명옆에우산국을 천산국 ( 千山國 ) 으로표기했으며, 성인봉에해당하는산에 弓嵩 이라고쓰고 이소타케 라는일본음독을붙였다. 60 따라서이지도는 대일본접양삼국지전도 의영향을받았음을알수있다. 이 弓嵩 에대하여이상태는 弓嵩 은신성한산인 58 竹島考 ( 上 ) 의 竹島松島之地理 에보인다. 59 독도사전 의 대일본접양삼국지전도 ( 大日本接壤三國之全圖 ) 항목 ( 오상학집필 ). 60 독도사전 항목 ( 이상태집필 ). 왕검산 의이두식표기에해당되고이를다시일본음으로훈독한것이 이소타케 인것이다. 이것은이후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로변화되었고이것을줄여 다케시마 [ 竹島 ] 로부르게된것이다. 즉 다케시마 라는지명의유래가우리나라의지명에서비롯됐다는단서 61

영토해양연구 Vol. 12 가된다 61 는견해를밝혔는데, 지금까지의변증으로볼때이는이해하기어려운부분이있다. 사전적의미로도 弓 과 이소, 嵩 과 다케 와의연관성을찾기는어렵다. 이에대해서는좀더고증이필요하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 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 ) ( 長久保赤水, 1779, 1833) 에도두섬이그려져있고그옆에 一云磯竹島, 見高麗猶雲州望隱州 라는글귀가쓰여있다. 이는 인슈시청합기[ 隱州視聽合紀 ] 의글귀를인용한것인데, 세키스이계열의지도가대부분이를원용하고있다. 관허일본여지전도 ( 官許日本輿地全圖 ) ( 中島彭, 1872) 와 대일본부현전도 ( 大日本府縣全圖 ) ( 內田晋齋, 1872) 등이그런계열의지도다. 증보개정조선국전도 (1873) 에는앞에서보였던것과마찬가지로성인봉에해당하는산에 弓嵩 이라표기하고음독을 이소다케 라고붙였다. 한편지리지인 조선지략( 朝鮮誌略 ) ( 東條保편찬, 1875) 에는 자산도 ( 子山島 ) 혹은궁고 ( 弓高 ) 라는이름이있다 라고기술했다. 이때의 弓高 는 弓嵩 의오기인듯하다. 지금까지문헌에보인 이소타케시마 표기를비교해보면 < 표 2> 와같다. 61 증보개정조선국전도 ( 增補改正朝鮮國全圖 ) 에이런기술이보이는데근거자료는밝혀져있지않다. 김규승의 東夷古史硏究의焦點 ( 범한서적, 1974) 의 55. 于山國改鬱陵島別稱弓嵩의古讀法 을보면, 궁숭 에대하여밝히고있는데, 다말 과연관짓고있을뿐 다케시마 와의연관성은보이지않는다. 독도사전 의 대일본접양삼국지전도 ( 大日本接壤三國之全圖 ) (1786) 에도 지금의성인봉에해당하는부분에 궁숭 ( 弓嵩 ) 이란표기와함께일본음으로 이소다케 라고표기된것이주목된다 고했지만, 최초로 궁숭 과 이소타케 를연관시킨학자는이병도다. 이병도는울릉도인에게서직접 弓嵩 이란이름을들은일본인이그뜻을물어방서 ( 傍書 ) 한것이 이소타케 라는것이다. 이병도는 궁숭 과 이소타케 는성인봉을지칭하는것으로 곰 ( 弓 ) 수리 ( 嵩 ) 를차자 ( 借字 ) 한것이라고했다. 이병도에따르면, 일본인이 磯竹島 혹은 竹島 를울릉도의호칭으로하는것은원의 ( 原義 ) 를상실한것이라는것이다. 그이유는 이소타케 의의미가 용맹한높은산 의의미이지대나무와관계없기때문이라는것이다 ( 독도, 1965, 73~74쪽 ). 또한그는일본이 이소타케 를 磯竹 의뜻으로보지않고신성 ( 神聖 ) 과관계있다고본것은참고가된다고했다. 이병도의이런논리는 이소타케 와 磯竹 을분리해서보는것이다. 그럴경우일본에서 이소타케시마 를 磯竹島 = 竹島 로보는논리자체가성립하기어려우므로이문제는좀더고증이필요하다. < 표 2> 이소타케시마 표기비교 연대저자출전명칭비고 日本書紀 五十猛神 1556 년이후 鄭舜功조사후 日本一鑑 竹島 중국문헌 1569 殘太平記 五十猛嶋 桃山時代 日本圖屛風 礒竹 1592 多聞院日記 いそたき人蔘 호키지역 62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연대저자출전명칭비고 1614 朝鮮通交大紀 5 礒竹島 1614 通航一覧 ( 권 137) 磯竹島 1614 邊例集要礒竹島 1614 이수광芝峯類說礒竹島 1617 이경직扶桑錄 蟻竹, 蟻竹島, 蟻竹彌左衛門 1620 通航一覧 ( 권 129) 礒竹島本州編稔略 1667 齋藤豊宣隱州視聽合紀俗言礒竹島 1693. 5. 5 竹嶋紀事礒竹島竹島 1696 고타니회도磯竹嶋 1724 돗토리번회도磯竹嶋 1736 伊藤東涯輶軒小錄礒竹島 按神書所謂五十猛歟, 竹島 1779 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一云磯竹島隱州視聽合紀 1786 大日本接壤三國之全圖弓嵩 ( 이소타케 ) 隱州視聽合紀 1802 增正交隣志礒竹島 1823 大西教保隱岐古記集磯竹島 1828 岡嶋正義竹島考弓嶽 1858 伯耆志磯竹 1865 玄玄堂綠山銅鐫大日本國細圖竹嶋又礒竹嶋 1872 中島彭官許日本輿地全圖一云磯竹島 1873 田嶋象次郞增補改正朝鮮國全圖弓嵩 ( 이소타케 ) 1875 東條保朝鮮誌略子山島혹은弓高 1875 中邨元起礒竹嶋覺書礒竹嶋磯竹島事略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 1876 籍編纂方伺 磯竹島 1877(1696) 磯竹島略圖 磯竹島 1877 坂田諸遠 松島異見 竹島 [ 俗云磯竹島 ) 1881 北澤正誠 竹島考證 竹島 < 磯竹島 > 1914 日鮮通交史 柚谷記曰磯竹島 재인용 4. 1930 년대및그이후의 礒竹島 와 磯竹島 礒 자와 磯 자가통용되기때문인지모르겠지만, < 표 2> 에서보듯이 이소타케시마 에대한표기는문헌마다 礒竹 과 磯竹 이혼재되어있다. 이 63

영토해양연구 Vol. 12 런경향은고문헌에서만그런것이아니다. 다만후대로올수록 礒竹 보다는 磯竹 이더많이보인다. 후대의학자들은고문헌의礒竹 磯竹에대하여그연원을고증하기보다는이섬이 울릉도 임을밝히는데더중점을두었기때문인지원문에는 礒竹 으로되어있더라도번각할때 磯竹 으로바꾼경우가많다. 1930년대조선총독부주관의 조선사 편찬에적극관여했던다보하시기요시 [ 田保橋潔 ] 는울릉도는산인 [ 山陰 ] 지방의어민이도항하면서처음에는이소타케시마 [ 礒竹島 ] 로부르다가 62 다케시마 [ 竹島 ] 혹은마쓰시마 [ 松島 ] 로알려지게되었다고했다. 후에울릉도동남해중에우뚝솟은거암 ( 현행해도상의리앙쿠르島, Liancourt) 이알려지면서 마쓰시마 와 다케시마 라는명칭이울릉도와리앙쿠르島사이에혼동되는경향이생겼다고했다. 63 또한그는울릉도가礒竹島혹은이를생략하여竹島로알려진시대는자세하지않지만, 지봉유설 에비추어생각해보면, 게이초 [ 慶長 ] 64 이전에있었던것은분명하며, 무로마치 [ 室町 ] 시대로거슬러올라갈지도모른다고했다. 65 그러다가에도시대중기에산인도각지에서는단지 다케시마 라는이름으로알려졌는데, 礒竹島 혹은 竹島 라는명칭은울릉도에거대한대나무가나는것과관계있다는것이다. 그런데한편에서는게이초연간의사건에대해 울릉도는다이슈인 [ 對州人 ] 에게는礒竹島라는명칭으로불리고있었지만, 산인도 [ 山陰道 ] 지방에서는竹島라고알려져이섬에도항혹은어렵하거나죽목 ( 竹木 ) 을벌채하는일이드물지않았다고믿고있 다 66 고도기술하여쓰시마와산인도사이에오락가락하고있다. 다보하시가여러문헌에보인礒竹島혹은竹島가울릉도를가리키는것이지부속암초를가리키는것이아니라고 67 명언한이유는이섬이울릉도인가아닌가를밝히려는그의관심과관계가있다. 다만그는磯竹島와竹島명칭의유래에대해서는크게관심이없었다. 그가 울릉도, 그발견과영유 와 울릉도명 62 이견해는앞에서 1724년에돗토리번의보고, 즉요나고지방은다케시마로부르고다른지역에서는이소타케시마로부른다고한사실과는배치된다. 63 다보하시기요시 [ 田保橋潔 ], 1931. 2, 鬱陵島その發見と領有, 靑丘學叢 제3호, 2쪽. 64 1596년부터다. 65 田保橋潔, 1931. 2, 앞의글, 2쪽. 66 田保橋潔, 1931. 2, 위의글, 14쪽. 64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칭에대하여 를쓰는데조선총독부수사관나카무라히데다카 [ 中村榮孝 ] 씨의교시를받은바가적지않다고밝혔듯이, 1931년당시울릉도 礒竹島 竹島유래에대한다보하시의식견은나카무라를따른경향이있다. 아키오카다케지로 [ 秋岡武次郞 ] 의 礒竹島 에대한기술도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 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 ) 에 竹島, 磯竹島라고도한다. 고려에서보는것이운슈 [ 雲州 ] 에서인슈 [ 隱州 ] 를보는것과같다 라고적힌 인슈시청합기 를답습하는정도에머물고있다. 그가 수서( 隨書 ) 와 일본도병풍 에보인 礒竹 을언급한것도울릉도와독도를竹島 松島에비정하는과정에서의혼란을불식시키기위한것이었을뿐 礒竹島 자체에대한고증을위한것은아니었다. 가와카미겐조 [ 川上健三 ] 에게서는 礒竹島 가 지봉유설 에보였던, 울릉도의별칭으로서의인식밖에는보이지않는다. 68 나카무라의 礒竹島 변증은앞에서간헐적으로언급한대로다. 유일하게 이소타케시마각서( 礒竹島覺書 ) (1875) 를검토한그는조선총독부시절 (1926) 조선사편수회가쓰시마이즈하라 [ 嚴原 ] 번주의 종가고문서( 宗家古文書 ) 안에 磯竹島 에관한것이들어있었는데, 게이초와겐나시대것으로 磯竹아무개 라는이름이붙어있던것을본바있음을토로했다. 69 이로써도게이초시대부터 礒竹 과 磯竹 이병기되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최근에는대부분 磯竹島 로표기하고있다. 70 특히 礒竹 과 磯竹 의차이가아닌, 磯竹島 와 竹島 의차이에처음주목한자는나이토세이추 [ 內藤正中 ] 다. 그에따르면, 조선과의왕래는쓰시마를경유하는한가지길밖에없 67 田保橋潔, 1931. 5, 鬱陵島の名稱に就て ( 補 ) - 坪井博士の示敎に答ふ, 靑丘學叢 제4호, 106쪽. 68 川上健三, 1953, 竹島の領有, 外務省. 69 中村栄孝, 1961, 앞의글, 18 쪽. 70 池內敏, 2016, 大君外交と 武威, 名古屋大學出版會 ; 內藤正中 金柄烈, 2007, 史的檢證竹島 獨島, 岩波書店. 으므로울릉도로도해하려는자에게막부는정식허가를해줄수없었고, 따라서지금까지 이소타케시마 로부르고있던울릉도를 다케시마 로개칭한것이아닌가생각된다는것이다. 나이토는요나고사람이어떤명칭으로불렀는지는신청당시사료가현존하지않으므로알수없지만, 다케시마 라는명칭이처음일본문헌에보인것이이른바다케시마도해면허장 65

영토해양연구 Vol. 12 이라고보았다. 그는그근거로도해면허장발급 (1622년이후 ) 71 이전의조일양국문헌에는 이소타케시마 라는명칭으로울릉도를부르고있었다는사실을제시했다. 72 그리하여도해면허이후의공식문서에서 이소타케시마 는더이상보이지않고 다케시마 라는명칭만사용하게되었으며, 그때문에오키기록인 인슈시청합기 (1667) 에서도 이소타케시마 [ 磯竹島 ] 가 다케시마 [ 竹島 ] 의속칭이되어있다는것이다. 73 그런데도해면허이후에도돗토리번에인접한마쓰에번은 이소타케시마 를사용하고있었다. 문헌에따르면, 1696년당시마쓰에번이즈모와오키사람들은礒竹으로, 요나고사람들은竹島로불렀으며 74 1724년에도마찬가지였다고한다. 75 더구나 1696년요나고의두집안 ( 오야 무라카와 ) 은이즈모나오키의엽사 ( 獵師 ) 들을고용하여울릉도로떠나고있던상황이었다. 76 그런데왜이즈모나오키사람들은고용주가부르던 다케시마 호칭을배제하고 이소타케시마 로부르기를고집했을까? 77 마쓰에번사람들에게 이소타케시마 는단지속칭 ( 俗稱 ) 으로만잔존했던것일까? 이점에대해서는여전히의문이남는다. 71 나이토는이케우치의 1625년설을소개하고있다 ( 内藤正中, 2005, 앞의글, 50쪽 ). Ⅳ. 맺음말 고문헌에서 礒竹島 와 磯竹島 는통용되었으므로문헌마다일정한기준없이두가지표기가혼재되어있다. 이소타케시마 는훈차표기가 五十猛嶋 에서 礒竹島 로변전했지만, 문헌에는 礒竹島 와 磯竹島 가혼재되어있고지도에는 磯竹島 외에 竹島 로도표기되어있어세가지표기가혼재되어있다. 더구나고문헌을번각한현대문은대부분고문헌의 礒竹 을 磯竹 으로고쳤기때문에고문헌과번각문의 72 内藤正中, 2005, 앞의글, 51~52쪽. 73 内藤正中, 2005, 위의글, 53쪽. 74 磯竹嶋覺書 에있는마쓰다이라데와노카미의구상서 (1696. 1. 16). 75 1724년회도의주기 ( 朱記 ). 76 磯竹嶋覺書 에있는마쓰다이라호키노카미의비망록 (1696. 1. 23). 77 1696년오키에서안용복일행을심문한기록인이른바 겐로쿠각서 에 磯竹島 는보이지않는다. 당시심문자인나카세단우에몽 [ 中瀨彈右衛門 ] 과야마모토기요에몬 [ 山本淸右衛門 ] 은막부직할령인마쓰에번의대관 ( 代官 ) 이었다. 66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표기가일치하지않는경우도많다. 그럼에도이들은모두 이소타케시마 로음독된다. 그이유는礒竹이든磯竹이든 이소 에대한일본고유어가먼저있었고그훈을따라 礒 와 磯 를빌려조자 ( 造字 ) 한것이기때문이다. 五十猛 ( 島 ) 이라는표기가礒竹 ( 島 ) 磯竹 ( 島 ) 에앞서있었다는사실도같은배경을들어설명할수있다. 그런데일본에서이지명이울릉도와관련성을지니려면, 이소타케시마 에서 이소 에방점이두어져야할것이아니라 다케 78 에두어져야한다. 그렇지않으면 五十猛島 나 弓嵩 과의차이를찾기어려울뿐만아니라 이소타케시마 가항상 다케시마 [ 竹島 ] 에부수적으로병기되어왔던이유도설명하기어렵기때문이다. 한편조선에서는 지봉유설 에 ( 임진왜란으로인해 ) 왜놈들이礒竹島를점거했다 라고기술되어있던사실과 1614년에일본이사자 ( 使者 ) 를보내礒竹島를탐시 ( 探視 ) 하겠다고말한사실에서보듯이모두섬의명칭이 礒竹島 로되어있다. 이런사실은아무런의심없이조선후기의학자들로하여금 礒竹島 를울릉도로단정하게했고, 이런오류는 18~19세기까지도계승되었다. 그러나임진왜란당시등장한 礒竹島 를과연 울릉도 로볼수있는지는의문이다. 이섬을일본이점거했다는사실은나카무라히데다카도부인하고있을정도로개연성이희박하며, 통항일람 ( 通航一覧 ) 의기술은혼란된인식을보여주기때문이다. 다만나카무라는일본인의울릉도도해역사의연원을먼시대로끌어올리기위해서인지는몰라도문헌에 礒竹 과비슷한자형만보이기만해도이를 울릉도 와연관시키고있다. 그가 蟻竹島 = 礒竹島 로보는인식은그런차원에서였다. 일본문헌을보면, 인슈시청합기 와 다케시마기사[ 竹嶋紀事 ] 에는 礒竹島 로, 1696년과 1724년돗토리번지도에서의표제는竹嶋로, 범례에는 磯竹嶋之圖 로표기되어있다가, 1876년시마네현이내무성에제출할때의지도명은 磯竹島略圖 로되어있다. 1696년마쓰에번이막부에제출 78 나카이다케노신은武島를 다케시마 로, 쓰보이구메조는 무시마 로음독했다 ( 유미림, 2013, 우리사료속의독도와울릉도, 지식산업사, 279~281쪽참조 ). 하는구상서에는 이즈모에서는竹島를礒竹이라부른다 라고했고, 1724년돗토리번은 다른지역은 이소타케시마 로, 자신의지역은 다케시마 라고지칭한 67

영토해양연구 Vol. 12 다 라고했다. 이는마쓰에번과돗토리번의인식이달랐음을보여주고있다. 한편 1875년의 이소타케시마각서 에는 礒竹島 로되어있는반면, 1876년시마네현이내무성에제출한 원유( 原由 ) 의대략 에는 磯竹島 를주칭으로하고있다. 두문헌의표기는다르지만산인지방에서는모두 이소타케시마 로불렀다는사실을알수있다. 1876년에시마네현이작성한지도에는 磯竹島略圖 로되어있고, 1881년에외무성관리가작성한 다케시마고증( 竹島考證 ) 에는 竹島 < 磯竹島라고도되어있다 > 라고되어있어, 원래의문헌에는없던 < 磯竹島라고도되어있다 > 라는내용이추가되어있다. 외무성관리인기타자와가조일 ( 朝日 ) 양국이울릉도를두고한창분규를겪고있을때이런기술을추가한이유가 이소타케시마 에대한중앙정부의인지역사를드러내고자해서였는지는알수없다. 다만이때는 이소타케시마 가아닌 다케시마 에관심이모아져있을때인데, 정부문서에 이소타케시마 가먼저언급된뒤에 다케시마 가부연되어있다는사실은주목할만하다. 지금까지살펴보았듯이, 礒竹島 로표기하든 磯竹島 로표기하든모두 이소타케시마 에대한훈차표기이므로어떤표기가옳고그르다고할수는없다. 다만중국과한국사전에는 磯 자를대표자로보고있으며, 일본사전에도 礒 자를 磯 자와통용되는이체자로보고있으므로대표자를써서 磯竹島 로표기하는것이어떨까한다. 고문서에대부분 礒竹島 로되어있는데도번각문에서는 磯竹島 로바꿔표기하고있는것도그런이유에서가아닌가한다. 礒竹島覺書 를소장하고있던쓰쿠바대학이 磯竹島事略 이라고개제 ( 改題 ) 하여소개한것도같은이유에서였을것이다. 다만문헌에 磯竹島 라는표기가집중적으로보인시기는메이지시대를전후해서다. 마지막으로지적할것은 이소타케시마 변증을통해우리는일본의지명방식이우리나라의지명방식과매우흡사하다는사실을시사받을수있다는점이다. 일본이 이소 를 五十, 礒 ( 磯 ) 로, 이소타케시마 를 五十猛島, 礒竹島, 磯竹島 로표기한것은고유어를한자로차자 ( 借字 ) 표기한방식 68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이다. 그런데대한제국칙령제41호에보인 石島 도같은차자표기방식이다. 즉 독섬 이라는고유어가먼저있었고그뜻을따라차자표기한것이 石島 인것이다. 79 일본은 이소타케시마 를 五十猛島, 礒竹島 ( 磯竹島 ) 로표기하는것에유래가있다는그역사성을인정한다면, 우리가 독섬 을 石島 로표기하는것의역사성도인정해야할것이다. 79 최근보도된언론기사 ( 한겨레신문, 8월 28일자기사 ) 에따르면, 1938년조선어사전간행회가간행한우리말사전에 독 : 돌의사투리. 石 이라고풀이된내용을확인했다고했는데, 이미그전에 朝鮮地誌資料 (1906~1914 추정 ) 에 독섬 을 石島 와 獨島 두가지로표기한사실이나와있다. 1940 년에전주사람이조사한사실을보고한 朝鮮말地名 ( 조선어학회, 1940. 7) 에도 독 ( 石 )-돌 임이밝혀져있다. 같은보고서에는셋섬 [ 新島 ], 돗섬 [ 蓆島 ], 곰섬 [ 熊島 ], 돌골 [ 石村 ] 등의방식으로표기한지명이보인다. 1948 년애국노인회가맥아더사령관에게보낸청원문에독도의호칭은 Docksum 으로되어있다 ( 유미림, 2013, 위의책참조 ). 1944 년에 朝鮮語方言の硏究 가간행되었지만, 오구라신페이 [ 小倉進平 ] 가조선방언을현지조사한시기는 1920년대였다. 69

영토해양연구 Vol. 12 국문초록 이글은울릉도의별칭으로지칭되는 이소타케시마 의한자표기가 礒竹島 와 磯竹島 두가지인사실에주목하여그어원과표기의추이를밝히려는것이다. 이소타케 에대한한자는 五十猛, 礒竹, 磯竹, 弓嵩 등표기가다양하다. 그이유는 이소타케 라는고유어가먼저있은뒤이에해당되는한자를빌려표기한것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지역혹은화자 ( 話者 ) 에따라 礒竹, 磯竹 의표기에서차이가있다. 이소타케 에대한최초의한자표기는 五十猛 이지만, 조선의울릉도를알게되면서 礒竹島 로호칭했다가 磯竹島 로정착해갔다. 조선에서는일본의 礒竹島 를가져와사용했는데조선문헌에서 礒竹島 가늘울릉도를가리킨것은아니다. 그럼에도이수광이 礒竹島 를언급한이래대부분의학자가 울릉도쟁계 를언급할때마다 礒竹島 를거론하되이를울릉도로단정했다. 문헌에서는 인슈시청합기[ 隱州視聽合紀 ] (1667) 에서 竹島 가보인후 竹島 를주칭으로, 礒竹島 를속칭으로해서병기하는경향이있다. 이어이른바 다케시마일건 을거치면서돗토리번에서는 다케시마 호칭이정착했지만, 쓰시마번 (Tshushima-han) 이나오키 (Oki Island) 등지에서는 이소타케시마 호칭이여전히남아있었다. 한편돗토리번의문서에서는 다케시마 와 이소타케시마 가섞여있고, 이소타케시마 표기도문헌마다단일하지않다. 문헌에서 磯竹島 라는표기가집중적으로보인시기는메이지시대를전후해서다. 일본의 이소타케시마 = 五十猛, 磯竹島 표기방식이우리에게시사하는바는그표기방식이우리의지명 ( 독섬 = 石島 ) 표기방식과같다는사실이다. < 주제어 > 竹島, 이소타케시마, 五十猛, 礒竹島, 磯竹島 70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ABSTRACT On the Historical Origin of the Name Isotakeshima Yoo, Mirim Director, Korea-Asia Cultural Institute This study aims to clarify the origin of the name Isotakeshima and the transformation the name underwent, mainly by focusing on two of its transcriptions into Chinese, 礒竹島 and 磯竹島. Isotakeshima, which refers to Ulleungdo, and Isotake has so far been expressed in a variety of different combinations of Chinese characters such as 五十猛, 礒竹, 磯竹, and 弓嵩. This is because the native term Isotake existed before various Chinese characters were later adopted to transcribe the name into Chinese. So, the use of 礒竹 or 磯竹 tends to differ depending on the region or the speaker. The earliest transcription of Isotake was 五十猛, but it changed to 礒竹島 after it became known that Joseon referred to the island as Ulleungdo, and then later settled down as 磯竹島. In Joseon, 礒竹島 was sometimes adopted based on its use in Japan, but the transcription did not always refer to Ulleungdo in records produced in Joseon. Nevertheless, ever since Yi Sukwang used 礒竹島, most scholars have mentioned it whenever they discuss the Ulleungdo Dispute and have come to assume that it refers to Ulleungdo. In Japan, after 竹島 appeared in the 1667 Onshu shicho goki ( 隱州視聽合紀 ), or Records of Observations at Oki Province, the trend has been to primarily use 竹島 (Takeshima) and concurrently use 礒竹島 (Isotakeshima) as a colloquial name. Once the Takeshima Ikken, or the Ulleungdo Dispute, occurred, the use of 竹島 became popular and settled down in the Tottori domain, whereas the Tsushima domain and the Oki islands continued to use 礒竹島, implying that the adoption of transcriptions differed depending on the region. Documents from the Tottori domain would interchangeably use 竹島 and 礒竹島, while 礒竹島 would be noted differently in different records. The popular use of 磯竹島 in documents occurred around the times of the Meiji Restoration. Notations of 五十猛 or 磯竹島 to indicate Isotakeshima in Japan shows a pattern of transformation similar to that in Korea where the native name 독섬, pronounced as Dokseom, later came to be transcribed as 石島 in Chinese characters. 71

영토해양연구 Vol. 12 Keywords Takeshima, Isotakeshima, Isotakeshima( 五十猛島 ), Isotakeshima( 礒竹島 ), Isotakeshima( 磯竹島 ) 참고문헌 對州編稔略 大漢和辭典 ( 諸橋轍次 ) 東涯隨筆 ( 日本儒林叢書 第 1 巻, 1978) 水路雜誌 (1883) 輶軒小錄 隱州視聽合紀 (1667) 礒竹島覺書 日本書紀 日本水路誌 (1920) 朝鮮말地名 ( 조선어학회, 1940. 7) 朝鮮地誌資料 (1906~1914 추정 ) 竹島考 (2010,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 竹島考證 竹嶋紀事 (2013,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 竹嶋之書附 增正交隣志 芝峰類說 韓國漢字語辭典 (1993~1997,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 漢語大詞典 한겨레신문, 2016년 8월 28일자기사 위키피디아 (https://ja.wikipedia.org/wiki) 72

연구논문 Ⅰ 이소타케시마 어원에관한일고 ( 一考 ) 김규승, 1974, 東夷古史硏究의焦點, 범한서적. 유미림, 2013, 우리사료속의독도와울릉도, 지식산업사. 한국해양수산개발원편, 2011, 독도사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박병섭, 2016. 6, 池內敏의 竹島 - 또하나의일 한관계사, 獨島硏究 제 20 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内藤正中, 2005, 竹島 ( 鬱陵島 ) をめぐる日朝關係史, 東京 : 多賀出版. 內藤正中 金柄烈, 2007, 史的檢證竹島 獨島, 東京 : 岩波書店. 池內敏, 2016, 大君外交と 武威, 名古屋 : 名古屋大學出版會. 川上健三, 1953, 竹島の領有, 外務省条約局. 帝國行政區劃便覽 (1901, 1929), 東京 : 警眼社. 舩杉力修, 2007, 絵圖 地圖からみる竹島 (II),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最終報告書, 竹島問題研究会. 田保橋潔, 1931. 2, 鬱陵島その發見と領有, 靑丘學叢 第 3 號, 靑丘學界. 中村栄孝, 1961, 礒竹島 ( 欝陵島 ) についての覚書, 日本歷史 제 158 호, 日本歷史學會. 秋岡武次郞, 1950, 松島と竹島, 社會地理 第 27 號, 日本社会地理協会. 坪井九馬三, 1921, 鬱陵島, 歷史地理 第 38 卷第 3 號. 73

연구논문영토해양연구 Vol. 12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송휘영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연구교수 Ⅰ. 머리말 최근일본의독도교육은지난 3월 18일고등학교사회과교과서검정결과발표를통해독도영유권주장을대폭강화하여한국이현재 불법점거 하고있다거나 일본고유의영토 라고명기하여, 초중고학교교육을위한장치는거의완성되어가고있다. 그러나한국의독도연구및일본국내연구등에서이 역사적권원 = 고유영토 에대한논리는더이상주장이무색해질만큼 고유영토론 의근거로내세우는역사적사실이거의반증되고있다. 이러한사실들은일본의근대사료를통해서도확인할수가있는것이다. 본고에서는독도편입조치전후의지리지특히당시일본의지리학계를대표하던 지학잡지( 地學雜誌 ) 에나타난일본의울릉도 독도기록을통해당시일본의울릉도 독도인식을살펴볼것이다. 여기서왜지리지인가하는것은메이지유신이후부국강병이라는일본의근대화과정에서해도 ( 海圖 ) 등지리적정보는국가적으로긴요한것이었다. 이 지학잡지 는 1879년 ( 明治 12) 에창립된도쿄지학협회 [ 東京地學協會 ] 가발행하는지리학, 지구과학 74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에관한학회지로 130여년의세월이지난지금도현존하는학회지다. 1 지리지에나타난일본의독도인식을분석한것으로유미림 최은석 (2010), 유미림 (2011), 윤소영 (2013), 윤소영 (2014), 남영우 (2014) 의연구가있다. 이들연구에서는지지 ( 地誌 ), 향토지, 수로지등을분석하고있으나본고에서다루는지학잡지에대해서는언급되고있지못하다. 2 다만남영우 (2014) 의연구에서는지학잡지에나타난죽도 ( 竹島 ) 에대해언급하고있으나구체적분석에이르지는못하였다. 따라서본고에서는지리학계의중심적학술지를통해울릉도 독도인식의일면을살펴보고자한다. 지리지의기록에서중요한것은 도쿄지학협회 의설립및구성멤버가메이지신정부의수뇌집단이라는것과 지학잡지 의성격이메이지정부의제국주의팽창정책에중요한역할을수행하고있었기때문이다. 따라서이 * 논문투고일 : 2016. 9. 30. 심사개시일 : 2016. 11. 8. 게재확정일 : 2016. 11. 30. 1 현재 800여명의회원을보유하고있는 도쿄지학협회 는 2012년 4월공익사단법인으로이행하여, 회원중지질광물학약 60%, 지리학약 30%, 지구물리학약 10% 로구성되었다. 학술지 地學雜誌 는연6회간행하고있다. 발행초기에는월1회간행. 2 일본의지리지를분석하고있는것으로는유미림 최은석, 2010, 근대일본의지리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한국해양수산개발원 ; 유미림, 2011, 근대조선지리지에보이는일본의울릉도 독도인식, 영토해양연구 2권, 104~131쪽 ; 윤소영, 2013, 근대일본관찬地誌와지리교과서에나타난독도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6호, 363~407쪽 ; 윤소영, 2014, 메이지후기지리지 향토지에나타난독도기술, 독도연구 제17호, 167~197쪽 ; 남영우, 2014, 6, 독도에대한일본의지도제작과측량, 영토해양연구 vol. 7, 26~51쪽을참조. 3 이시기 지학잡지 의 잡보( 雜報 ) 란에는각지의지리적정보와영토취득등의정보를세세하게싣고있다. 지학잡지 는홋카이도개척및편입, 남방제도의편입등일본제국주의의영토확장에서중요한정보전달의장 3 으로활용되고있었던것이다. 소위 독도편입 을전후하여이 지학잡지 에울릉도와독도의기사가등장하는것은다음과같다. 1 日本海中の一島嶼 ( ヤンコ ), 地学雑誌 第 149 号, 東京地学協會, 1901, 301~302쪽. 2 ( 雑報 ) 帝国新領土竹島, 地学雑誌 第 196 号, 東京地学協會, 1905, 282쪽. 3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舊記, 地学雑誌 第 200 号, 東京地学協會, 594~598쪽. 4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舊記( 承前 ), 地学雑誌 第 201 号, 東京地学協會, 660~663쪽. 5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舊記( 完結 ), 地学雑誌 第 202 号, 東京地学協會, 741~743쪽. 6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地理學上 75

영토해양연구 Vol. 12 の智識, 地学雑誌 第 210 号, 東京地学協會, 415~419 424쪽. 7 ( 雑録 ) 竹島の位置新測, 地学雑誌 第 239 号, 東京地学協會, 1908, 821쪽. 여기서 새로운섬의발견 이나 새로운섬의편입 등의정보를 지학잡지 는시의적으로싣고있는데, 1 2 6 7 은독도에관한기사이고, 3 4 5 는울릉도에관한기록이다. 본고에서는우선독도에관련된기사를중심으로당시일본지식인들의울릉도 독도인식을고찰하고자한다. Ⅱ. 태정관지령문 의성안과정 지학잡지의성격을파악하기위해서는우선학회인 도쿄지학협회 [ 東京地学協会 ] 의설립배경과회원의구성면면을살펴볼필요가있다. 1878년오스트리아주재서기관으로근무하고있었던와타나베히로모토 [ 渡辺洪基 ] 4 가빈지리학협회의회원이되어활동하면서국가발전에지학이많은가능성을갖고있음을인식하고일본에도지학 ( 地學 ) 5 을전문으로하는기관이필요하다는것을통감하였다. 귀국한와타나베 [ 渡辺 ] 는전주러공사에노모토다케아키 [ 榎本武揚 ], 조선대리공사하나후사요시모토 [ 花房義質 ], 전영국왕립지리학회회원나베시마나오히로 [ 鍋島直大 ], 영미유학경험자인나가 오카모리요시 [ 長岡護美 ] 등이협력하여협회의동지들을모은다. 그리하여 1879년 4월기타시라가와노미야 [ 北白川宮能久親王 ] 를사장으로에노모토 [ 榎本 ] 와나베시마 [ 鍋島 ] 를부사장, 와타나베 [ 渡辺 ], 가쓰라다로 [ 桂太郎 ], 기타자와마사나리 [ 北沢正誠 ], 나가오카 [ 長岡護美 ] 를간사로하는화려한멤버로도쿄지학협회를창립하였다. 같은해회지 도쿄지학협회보고[ 東京地学協会報告 ] 4 와타나베 [ 渡辺洪基 ] 는후일초대도쿄대학총장으로부했다. 5 여기서지학 ( 地學 ) 이란 1870년대후반지리학 ( 地理學, geography) 을지학 ( 地球科學, earth science) 이라는용어로잘못번역한것에서비롯되는데, 지리학과지구과학 ( 지질학 지구물리학 광물학 암석학 기상학 해양학 고생물학등 ) 을포함한개념으로쓰였다. 즉지질학 ( 地質学 ), 광물학 ( 鉱物学 ), 지리학 ( 地理学 ) 등의총칭으로사용되었다. 76

연구논문 Ⅰ 근대 일본의 지학잡지에 나타난 울릉도 독도 인식 를 간행하였고, 1893년에는 도쿄대학 지질학과 내의 지학회(地學會)와 합병 한 이후는 지학잡지 를 회지로 발행하고 있다. 창설 초기의 회원은 정치 가, 군인, 외교관, 화족(華族)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6 협회는 영국의 왕립지학협회를 본보기로 삼아 해외 조사에도 일찍이 관 심을 가졌다. 1910~1916년에 걸쳐 청국지리조사 라고 하여 중국 중남부 에서 독자적인 조사를 감행하여 지나지학조사보고 3권 등의 성과를 출판 하였다. 그런데 협회의 기관지인 지학잡지 는 크게 논설, 잡록, 부도, 잡보,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팽창하는 메이지 일본의 영토정보를 소상히 전달하 고 있다. 홋카이도의 개척이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진행되고 있고, 그 지역 의 지리적 정보(지형, 거리, 물산, 연혁 등)를 담기도 하며 새로운 섬의 발견 등은 신속하게 잡보(雜報) 란에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적 기관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 지학잡지 200호(1905. 8) 및 201호(1905. 9) 6 保柳陸美, 1979, 東京地学協会100年 の歩み, 東京地学協会創立100周年記 念行事資料集, 東京地学協会를 참조. 창립 초기의 동경지학협회 는 황족(皇族)을 회장 또 는 총재로 두고 임원에는 화족과 명사 등이 주축을 이 루어 학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즉 당시 일본의 상 77

영토해양연구 Vol. 12 류사회의사람들을중심으로하는반학술 반국제친선단체와같은성격의것으로총회 ( 연회 ) 는화족, 고관, 재계인, 외국의공사등호화로운얼굴들이모습을드러내는곳이었다. 협회의운영경비또한이들의기부금으로충당한것도현재의협회나학회와는아주다른점이었다고할수있다. 협회의강연회에는외국을시찰하고온사람, 외국에서여러가지조사를실시한사람, 지리에관한과학적지식이나관측기술을습득한사람의경험담을발표하는자리로, 이는당시의기관지 도쿄지학협회보고 및 지학잡지 의내용에서도파악할수있다. 7 특히청일전쟁을전후한시기에는조선 지나 ( 支那 ) 등의지도를발행하여이들지역에대한세인들의과학적관심을모으기도했다. 이시기에보급된수많은조선지도들중에는이웃나라에대한정보를수집하고자료를제공하던전문적단체들이간행된것들이나타나는데, 도쿄지학협회 의 조선전도 역시그러한지도들중의하나다. 육군참모본부의첩보활동이군사적인것이었다면이러한단체들의활동은보다종합적인목적을가지고전개되었다. 도쿄지학협회는나중에 동양학 ( 東洋學 ) 을발전시키는데에토대를마련한지역연구단체들중가장이른시기에설립된것이었다. 초대도쿄대학총장을지낸와타나베 [ 渡邊洪基 ] 가 조선사정( 朝鮮事情 ) 을번역한에노모토 [ 榎本武揚 ] 와조선공사를지낸바있는하나후사 [ 花房義質 ] 의힘을얻어설립하였다. 이협회는 지학 ( 地學 ) 에서경제 군무 ( 軍務 ), 기타에관한유익한사건의발명이나본회의견문 ( 見聞 ) 에관계되는것이있으면그때그때간편한방법으로이를편찬 출판하여회원의연구 [ 講究 ] 에제공하고아울러일반에보고하는것 을목적으로하였다. 물론여기서말하는지학이란오늘날말하는지지 ( 地誌 ) 또는지리학을의미하는것이다. 또한사할린과중국에관한보고서를내는한편 도쿄지학협회보고 를간행하여많은자료를제공하였다. 이협회는구성원이주로군인 관료 정치가였다는점만보더라도학술적인것보다학문외적으로당시의시대적필요성을추구했던것이다. 이러한활동은당시조선, 지나, 시베리아등지에서 7 保柳陸美, 1979, 앞의글, 72쪽참조. 78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활약했던일본낭인의보고기사를책자로엮어펴내면서도일반지식인들을대상으로한강연회를펼쳤던것과맥락을같이하는것이지만, 도쿄지학협회 의구성원은낭인이아닌제도권의관료, 외교관등을중심으로전개한메이지정부의기관지역할을수행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예를들면이단체와같은시대에조직되어활동한동방협회 ( 東邦協會 ) 식민협회 ( 植民協會 ) 그리고동아동문회 ( 東亞同文會 ) 등은모두가서로경쟁하면서비슷한작업을진행시켰다. 동방협회는 1890년에조직되어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등을조사영역으로포함시키고있었다. 조선에대한관심도커서 1891년가네다 [ 金田栖太郞 ] 로하여금조선내륙을답사하게하였는데, 기관지 동방협회보고( 東邦協會報告 ) 에실린그의보고서와더불어조선관계자료들을엮어 동방총서조선휘보 ( 東邦叢書朝鮮彙報 ) (1893) 를간행하기도하였으며거기에조선지도가실려있었다. 그지도는 1년뒤에간행된도쿄지학협회의지도보다훨씬정확도가떨어지는지도였다. 당시의간기 ( 刊記 ) 에따르면그때까지실측된지도가없어기존의몇가지지도를절충하고이미수행한바있는조사결과를반영하고, 아울러내륙을여행한사람들의이야기를참고하여이규격에맞추어편집한것인만큼아쉬운대로쓸만한지도가되었을것이라하였다. 이러한단체의기관지에는조선관계보고서들이실린바있으며, 이기관지가 1897년 4월에제18권 4호로써종간되자이를흡수한 지학잡지 는일찍이 1884년에부록으로써조선을방문하여조사한바있는고트셰 (C. Gotsche) 니시다 [ 西化田久學 ] 이시이 [ 石井八萬次郞 ] 의 조선지질개도( 朝鮮地質槪圖 ) 를간행하기도했다. 1900년에는문부성에서공익학술법인으로인가되면서임원의구성이크게변화한다. 진보고토라 [ 神保小虎 ], 다나카아카마로 [ 田中阿歌麿 ], 오가와다쿠지 [ 小川琢治 ] 등의학자들이주역을맡으면서학술단체의성격이짙어지고, 화족이나사회적명사들의이름이감소하게된다. 또한회원수도발족당시는 100명정도가되지않았으나 1890년대후반에는 150명정도로증가하였고회원자격에는상당한제약이있었기에 도쿄지학협회 의회원 79

영토해양연구 Vol. 12 이된것을본인의영예로여길정도였다. 8 이와같이볼때 도쿄지학협회 의성격을다음과같이규정할수있을것이다. 첫째, 정부와밀접하게관련되어있어관변단체적성격이짙은학술단체라는점이다. 둘째, 서양의과학적지리정보를습득하고아시아대륙의조사결과를공유하는장으로써 지학잡지 가활용되고있었으며, 셋째, 이는근대일본제국주의의팽창정책의핵심적첨병역할을담당하고있었다는것이다. 넷째, 이들팽창정책관련주요인사들즉외교관, 군인, 고관, 지식인등의정보교류의장으로활용되었다는것이다. Ⅲ. 지학잡지 에나타난울릉도 독도기록과그인식 1. 지학잡지 (1901. 5): 일본해중섬하나 당시대륙의지리적정보를본국에전달하는것은중국과시베리아, 조선등지에건너가활동하고있던대륙낭인 9 들이었다. 이들중러일전쟁, 한일 강제병합등일본의대륙침략과정에서막후에서활동을전개하였던낭인조직으로우치다료헤이 [ 內田良平 ] 를주간으로하는흑룡회 ( 黑龍會 ) 10 가있었다. 1890 년경조선으로건너가 1899년 6월부터약 1년 6개월간조선연해의지형과지리, 주요산물, 어업상황등을조사하였던구즈우슈스케 [ 葛生修亮 ] 가 1901년 2월 3일우치다료헤이와함께조직한것이흑룡회다. 지학잡지 에독도의기록이처음등장하는것이 1901년 5월호인데 일본해중의섬하나 양코 라고기록하고있다. 8 保柳陸美, 1979, 앞의글, 72쪽. 9 메이지정부가들어서면서각번의번사 ( 藩士 ) 들의상당수가직업을잃게되었으며이들은일본국내에서재기를도모하던일본낭인과대륙으로건너가활동하던대륙낭인으로구별되었는데, 이대륙낭인은중국에서활동하던지나낭인, 시베리아의시베리아낭인, 조선에서활동하던조선낭인등으로불리었다. 10 흑룡회 ( 黑龍會 ) 는대아시아주의를주창하는근대일본의국가주의단체로삼국간섭과의화단사건에분개하여현양사의우치다료헤이 [ 內田良平 ] 가 1901년 2월에결성하였는데, 후쿠오카 [ 福岡 ] 를중심으로결성된현양사 ( 玄洋社 ) 에서분파된낭인조직으로 1890년대후반에는많은낭인들이조선에서활동하였다. 80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일본해중의섬하나 ( 양코 ) 지난 4월중순도쿄발행의각신문은일본해중에서섬하나를발견한것을보도하였다. 그에따르면한국울릉도 ( 鬱陵島 ) 동남쪽을지나 30리 ( 里 ), 우리일본국오키 [ 隱岐 ] 를서북으로떨어지기를거의같은거리의해상에아직세인에게알려지지않은섬하나를발견하였다. 이섬은아직본방 ( 일본- 역자 ) 의해도 ( 海圖 ) 에는실려있지않고, 영국의해도에도또한게재되어있지않다. 이섬의존재를확인해보니현재울릉도에사는일본인이맑은날산의높은곳에서동남을바라보면멀리섬의형상이보인다고한다. 지금이섬발견의역사를듣고자 2년전규슈주변의잠수기선이어족을쫓아멀리바다가운데를나가자익숙하지않은곳에섬하나의존재를발견하고기뻐하며이를근거지로정하여그사방의바다에서고기잡이를하였다. 이주변은어족의서식이매우많았고강치 [ 海馬 ] 가수백의무리를이루어잠수기선을방해하여결국목적을이루지못하고돌아왔다고한다. 이배에탔던잠수업자가실제본바를보도한바에따르면이섬은길이 30정 ( 町 ) 11 에가깝고, 구릉이아주높지는않지만도처에덩굴이무성하다. 섬의형태가매우굴곡이심하여어선을정박하여풍랑을피하기에아주편리하다. 다만지상에서수척사이에는땅을뚫어도물을얻을수없어현재로서는수산물제조장으로서의가치는부족하다고할수있다. 그러므로학자, 실업가는오히려탐험을실시할여지가충분하다. 한일어민은이를가리켜양코 ( ヤンコ ) 라고부른다고한다. 이상의기사에따르면그위치는원래부 11 거리의단위로 1정 ( 町 )=60간( 間 ), 109.09m; 30정 ( 町 ) 은약 3,273m. 12 日本海中の一島嶼 ( ヤンコ ) 去る四月中旬東京發行の各新聞紙は日本海中に一島嶼を發見せることを報せり 其いふ所に從へは韓國欝陵島を東南に去ること三十里我日本國隱岐を西北に距ること殆んと同里數の海上に未た世人に知られさる一島嶼を發見せり 該島は未た本邦の海圖には載らすイキリスの海圖にも亦之を記せされとも其島の存在は確實 터확실하지않았고, 생각건대이섬은아직해도에나타나지않았다고하나그기사및칭호에서추측하면이는 Liancourt rocks( 리앙쿠르락스 ) 에부합한다. 혹은이를지칭하는것이없다고의심하지만또한그정확한단정은상세한보고를얻은후에내릴수있을것이다. 참조를위해다음에조선수로지 ( 朝鮮水路誌 ) 제2판 (1899년수로부간행 ) 263쪽에서리앙코르토섬 ( リアンコート ) 에관한기사를옮겨둔다. 12 81

영토해양연구 Vol. 12 여기서보면 1 지난 4월도쿄발행의신문이일본해 ( 동해 ) 에서아직세인에게알려지지않은섬하나를새로발견하였는데 양코 라는섬이며, 2 조선의동남쪽에조선과일본의등거리인 30리 (=120km) 정도에위치한다고한다. 3 이는일본의해도와영국의해도에도실려있지않은새로운섬이라는것이다. 또한 4 이를처음발견한것은 1899년경규슈주변의잠수기선이며, 5 어족자원이아주풍부하고, 6 섬형태가굴곡이심하여어선을 정박하여풍랑을피하기에아주좋다고하고있다. 그리고한일어민은이를 양코 라고부른다는것이다. 그러나 지학잡지 의회원들이해군수로부, 외무성및내무성의관료등으로구성되어있어이미메이지정부에서는 기죽도사략( 磯竹島事略 ) (1875, 내무성 ), 태정관지령 ( 太政官指令 ) (1877, 태정관 ), 죽도고증( 竹島考證 ) (1881, 외무성 ) 등을통해당시송도 ( 松島 ) 혹은리앙쿠르암 ( 리앙코 ) 이라고했던독도의인식을명확히하고있었다. 또한 조선수로지 제2판 (1899) 에서도명확히리앙쿠르암 ( リアンクール岩 ) 이라하여독도의연혁을기록하고있다. 그런데세인에게알려져있지않다거나일본과영국의해도에도기록되어있지않은섬이라는것은이섬의중요성을의도적으로부각시키고있음을알수있다. 또한이 양코 섬은한국과일본의거의중간에위치하고있다고하여소속이불분명하다는것을부각시키고있다. 또한한일어민이모두양코라고부르며규슈의잠수기선이처음이섬을발견하였다고하여 무주지설 을피력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지학잡지 의기사보다앞서구즈우슈스케가흑룡회 회보( 会報 ) 에미발견의섬 양코 를발견하였다고발표하고있다. 이러한양코섬발견의정보는흑룡회를통해서유포 13 되며, 당시신문등의기록을 にして 現に欝陵島にありし日本人は晴天の日山の高所より東南を望みたるに遙に島影を認めたりといへり 今此の島發見の歴史を聞くに一兩年前九州邊の一潜水器船が魚族を追ふて遠く海中に出てたるに 見慣れさる所に一島嶼の存在せることを發見し喜んで之を根據地と定め其四隣の海中を漁り回りたるに 此の邊魚族の棲息せるもの頗る多かりしも海馬數百群を爲して潜水器船を沮みたれば終に目的を終へすして引還したりといふ 此の船中にありし潜水業者の實見したる所なりとて報する所によれは其島は長さ三十町に近く丘陵甚た高からされとも處々に蓁蕪穢 島形又極めて屈曲に富み漁船を泊し風浪を避くるに最も便あり 只地上より數尺の間は之を鑚るも水を得ず從て現今の所にては水産物製造場としての價値は乏しといふべし 故に學者實業家は猶充分なる探検を施すの餘地を留む 日韓漁民之を指してヤンコと呼へりといふ以上の記事に據るに其位置固より確實ならず 想ふに此の島は未だ海圖に示されすといふも其記事及び稱呼より之を察せば恰もLiancourt rocksリアンコートロツクに符合せり 或は之を指すに非ずやと疑はるヽも尚其精確なる斷定は精細なる報告を得たる後に非れは下す能はず 且らく參照の爲めに左に朝鮮水路誌第二版 ( 明治三十二年水路部刊行 ) 二六三頁よりリアンコート島に關する記事を抄録せん. 地学雑誌 13 輯 148 巻 (1901. 5), 301~302쪽. 13 김수희, 2012, 흑룡회의독도침탈기 82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순차적으로보면다음과같다. 흑룡회 會報 (1901. 3. 10) 東京日日新聞 (1901. 4. 13) 地学雑誌 (1901. 5. 15) The Straits Times (1901. 6. 22) The Pacific Commercial Times (1901. 7. 30) 구즈우가흑룡회 회보 에발표한정보는한달뒤에 도쿄일일신문 에게재되었고, 다시한달후 지학잡지 에실리게된다. 그리고이정보는다시해외의영문판일간지에도게재된다. 영문판은싱가포르와하와이의일간지다. 지학잡지 에서는이글의필자를밝히고있지는않으나김수희 (2012) 14 가지적하는바와같이거의동일한내용의정보가실려있어구즈우슈스케가필자일가능성이높다. 위의기사들의내용이거의동일하나 회보 에 서국쪽 [ 西國筋 ] 의한잠수기선 이 지학잡지 에는 규슈주변의한잠수기선 이라고약간수정되었고이정보를 1903년의 한해통어지침( 韓海通漁指針 ) 에서는 야마구치현 [ 山口縣 ] 의잠수기선 으로된것정도만차이가있을뿐이다. 그러나아직해도에나타나지않았다고는하나그기사및호칭에서추측하자면리앙쿠르암 (Liancourt rocks) 에부합한다고하여이어 조선수로지 의기사를함께게재하고있다. 리앙코르트열암 ( リアンコート列岩 ) 이열암은서기 1849년프랑스의선박 리앙코르트 (Liancourt) 가처음으로발견하고호칭은배이름을따서리앙코르트열암이라명명하였다. 그후 1854년러시아 프레가트 형함대인 팔라스 (Pallas) 호는이열암을 메날라이 (Menalai) 및 올리부챠 (Olivutsa) 열암이라불렀으며, 1855년영국함선 호르네트 (Hornet) 호는이열암을탐험하고 도와 양코도발견 기록의재검토, 전북사학 제41집, 215~221쪽. 14 김수희, 2012, 위의글, 229 쪽. 호르네트 열암이라고이름을붙였다. 이배의함장포르 시스 (Forsyth) 의말에따르면이열암은북위 37 도 14 분 동경 131 도 55 분지점에있는 2 개의불모의암초로이 83

영토해양연구 Vol. 12 루어져새똥이항상섬위에퇴적하고이때문에섬의색이하얗다. 그러므로서북서에서동남동으로길이가약 1리 ( 里 ) 고, 두섬사이의거리 1/4 리 ( 里 ) 로써보이는곳마다암초로이어져섬을연결한다. 서도 [ 西嶼 ] 는해면상의높이 410척으로형태는사탕탑과같다. 동도 [ 東嶼 ] 는비교적낮고윗부분이평평하다. 이열암부근의수심은아주깊은것같으나그위치는실로하코다테 [ 函館 ] 를향하여일본해를항해하는선박의직수로 ( 直路 ) 에해당하므로아주위험하다고한다. 15 1899년 조선수로지 제2판의기사를그대로인용하면서도추측건대리앙쿠르암에부합하지만이를지칭하는호칭이없다고의심하고있다. 그리고그에대한단정은뒷날상세한정보를얻은후에야할수있다고의도적으로유보하면서새로운섬일것이라는점을강조하고있는것이다. 그리하여이기사는이후에 한해통어지침 (1903) 에실리면서 제국의새섬 획득을위한정보로작용했다고할수있다. 2. 제국신영토죽도 : 잡보 (1905. 4) 이렇게흑룡회를통해얻어진 양코섬 의정보가각종지지와신문에보도된후잠시 지학잡지 에서보이지않다가다시나타나는것이독도편입이후인 1905년 4월호다. 여기서는잡보란에서 제국의신영토죽도 라는표제로등장한다. 독도편입이 2월 22일인것을생각하면매우신속히그정보를게재하고있는것이다. 제국의신영토竹島 1905년 2월 22일시마네현지사는동현고시제43호에서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노쿠니 [ 隱岐國 ] 에서서북 85리 ( 浬 ) 에있는도서 15 リアンコールト列岩此列岩は洋紀一八四九年佛国船 Liancourt 初て発見し称呼を其船名を取る 其後一八五四年露国 フレガット 形艦 Pallas 号は此列岩を Menalai 及 Olivutsa 列岩と名つけ一八五五年英艦 Hornet 号は此列岩を探検してホルネット列島と名つけり 該艦長 Forsyth の言に據れば此列岩は北緯三七度一四分 東経一三一度五五分の處に位する二坐の不毛嶼にして鳥糞常に嶼上に堆積し 嶼色為めに白し而して北西彳西至南東彳東の長さ凡一里二嶼の間距離約二鏈半にして見たるところ一礁脈ありて之を連結す 西嶼は海面上高さ凡四一〇呎にして形糖塔の如し 東嶼は較低くして平頂なり 此列岩附近水頗る深きか如しと雖 其位置は實に函館に向て日本海を航行する船舶の直道に當れるを以て頗る危險なりとす 84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를죽도 ( 竹島 ) 라고칭하고지금부터시마네현 [ 島根縣 ] 오키도사 [ 隱岐島司 ] 의소관으로정한다는취지의고시를하였다. 이도서는한국의범위에속하는울릉도 ( 송도 ) Dagelet Island와함께일본해 ( 동해 ) 상의고도 ( 孤島 ) 로서아직어느나라에도속하지않는다. 두섬모두암석으로이루어져그하나는둘레 15정 ( 町 ) 16 정도, 두섬을합하여 1리 ( 里 ) 17 정도. 섬위에는새똥이항상퇴적하여흰색을띠고음료수 [ 飮料水 ] 는있지만수목이없고겨우파란풀을볼수있는정도며, 강치 [ 海驢 ] 가아주많이서식하기때문에매년어업으로도항하는자가많다. 열암부근에는해저가깊다고는하나그위치가하코다테 [ 函館 ] 를향해일본해 ( 동해 ) 를항행 16 109.09m 15 町 =1,636.4m. 17 1 리 ( 里 )=3,927.2m. 18 帝國新領土竹島明治三八年二月二二日を以て島根縣知事は同縣告示第四三号に於て北緯三七度九分三〇秒 東経一三一度五五分 隠岐國を去る西北八五浬に在る島嶼を竹島と称し爾今島根縣所属隠岐島司の所管と定めたる旨を告示したり 該島嶼は韓國の範図に属する鬱陵島 ( 松島 )Dagelet Islandと共に 日本海上の孤島にして 未だ何れの國にも属せず 二島共岩石より成り其一は周囲一五町余 二島を合して周囲一里余 島上には鳥糞常に堆積して白色を呈し 飲料水は有れども樹木なく僅かに青草を見るのみにて海驢頗る多く棲息せるが故 年々漁業に渡航するもの多し 列岩附近は海底深しと雖も 其位置函館に向って日本海を航行する船舶の航路に當るを以て極めて危険なりと云ふ 同列岩は西暦一八四九年佛船リアンクールLiancourt の発見にかヽり其称呼を船名に取りたり超えて一八五四年露國フレガート形艦パラスPallas 号は此列岩をメナライMena- lai 及オリヴァツウOlivutsa 列岩と名け 一八五五年英艦ホルネットHornet 号は之れをホルネット列岩と名けたり ( 明治三二年日本水路部刊行朝鮮水路誌に拠る ) 하는선박의항로에해당하므로매우위험하다고한다. 동열암은서기 1849년프랑스선박리앙쿠르 (Liancourt) 가발견하여그호칭을선명에서딴것이다. 그후 1854 년러시아의프레가트형함선팔라스 (Pallas) 호는이열암을메날라이 (Menalai) 및올리부챠 (Olivutsa) 열암이라고명명하였고, 1855년영국함선호르네트 (Hornet) 는이것을호르네트열암이라이름을붙였다 (1899년일본수로부간행 조 선수로지 ( 朝鮮水路誌 에따름 ). 18 1905년 2월 22일시마네현고시 43호로써일본제국의신영토가되었으며, 이는오키섬에서 85해리 ( 浬 ), 약 157.4km 떨어져있다고하여독도의위치를정확히나타내고있다. 竹島 [ 독도 ] 는한국의범위에속하는울릉도와함께동해상의고도로아직어느나라의영역에도속하지않는섬이라는것을강조하며무주지선점론에따른독도편입의당위성을내세우고있다. 그이후의기사는 1899년의 조선수로지 ( 제2판 ) 의정보를이제는그대로답습하여담고있다. 이것은양코섬발견의기사와는사뭇대조적인기술이다. 새똥이 85

영토해양연구 Vol. 12 섬위에많이퇴적하여하얗고, 강치가많이서식하므로강치어렵으로도항하는자가많으며, 1849년프랑스의리앙쿠르호의발견, 1854년러시아함선팔라스의발견, 1855년영국함선호네트의발견으로독도의명칭이변화했다는것을적고있다. 3. 다나카아카마로 (1905. 8): 오키국죽도에관한구기 ( 旧記 ) 1 다음으로독도가등장하는것이 2개월후인 오키국의竹島에관한구기 라는기사에서다. 이것은세차례에걸쳐연속으로게재되는데기본적으로는울릉도에관한기사라할수있다. 그런데여기서 요기국죽도 ( 隱岐國竹島 ) 라고하여예전에죽도라는명칭이었던울릉도가마치오키국에부속되었던것처럼기록하고있다. 그러나에도시대오키섬에서울릉도 독도를 오키국죽도 라고인식한적은거의없었다. 여기서앞부분에서보면죽도 [ 독도 ] 가지난 2월 22일일본제국의영역이되어오키도사의관할로되었으며, 일본해해전 ( 러일전쟁 ) 을알리는관보를통해리앙쿠르암이라는명칭으로세상에알려졌음을기록하고있다. 동섬 ( 竹島 = 독도 ) 은지난 2월 22일시마네현령으로공공연히우리제국의범위에들어와행정상오키도사 [ 隱岐島司 ] 의관할로되었다. 그리고그당시동섬이외국인에의해발견되었던사실및지형에관한일반을소개해둔다 ( 본지제17년 196호참조 ). 이땅은지난 5월 27~28일의일본해해전에서리앙코르트암 Liancourt Rocks이라는명칭아래세상에알려졌다. 지금이섬의연혁을생각하면, 그발견의연대는분명하지않으나프랑스선리앙쿠르호의발견보다훨씬이전에본방인 ( 일본인-역자 ) 이아는곳이다. 도쿠가와씨의시대에이것을조선에내준것같으나, 그이전에이섬은오키 [ 隱岐 ] 에혹은호키 [ 伯耆 ], 이와미 [ 石見 ] 에속하였다. 메이지초년에이르러 ( 태정관제의 ) 정원 ( 正院 ) 지리과 ( 地理課 ) 에서그에대한본방의영유를부인함으로써그후에출판하게된지도는대부분그소재를나타내지않게되었다. 1875년 ( 明 86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治 8) 문부성출판의미야모토산페이 [ 宮本三平 ] 씨의일본제국전도 ( 日本帝國全圖 ) 에는이를실었으나제국의영토밖에두어도색하지않았고, 또한우리해군수로부의조선수로지에는리앙쿠르암이라고적어, 리앙쿠르호의발견그외외국인의측량기사를게재할뿐이었다. 그러므로연합함대사령장관보고에대해관보제119호에도이것을관습적으로리앙쿠르암으로보도하여, 대본영해군막료는그후이것을죽도 ( 竹島 ) 로정정 (6 월 15일관보 6586 호게재일본해해전의상보중竹島라되어있음 ) 하게되었다. 19 그러나여기서는독도의연혁을생각해보면서양의 19 隠岐国竹島に関する舊記同島は去 2 月 22 日 島根県令を以て 公然我が帝国の範囲に入り 行政上隠岐島司の管轄とせられたり 而して其当時吾人は同島の外国人に依り発見せられたる事実及地形に関する一般を紹介し置きたるが ( 本誌第 17 年 196 号参照 ) 此地は去る5 月 27 8 日の日本海の海戦に依り リアンコートLian- courtrocks 岩の名称の下に世上に知られたり 今此島の沿革を考ふるに其発見の年代は不明なれども フランス船リアンクール号の発見より遙に以前に於て 本邦人の知る所なり 徳川氏の時代に於て之れを朝鮮に與へたるが如きも 其の以前に於て 此島は或は隠岐に或は伯書 石見に属したり 明治の初年に到り 正院地埋課に於て其の本邦の領有たることを全然非認したるを以て 其の後の出版にかかる地図は多く其の所在をも示さざるが如し 明治八年文部省出版宮本三平氏の日本帝国全図には之れを載すれども 帝国の領土外に置き塗色せず 又我海軍水路部の朝鮮水路誌には リアンコ一ト岩と題し リアンコート号の発見其他外国人の測量記事を載するのみなり 故に連合艦隊司令長官報告大海報第 119 号に之れを襲用してりアンコート岩として報ぜられ 大本営海軍幕僚は其後是を竹島に訂正 [6 月 15 日官報 6586 号所掲日本海海戦の詳細中竹島とあり ] せられたり 선박이이섬을발견하기훨씬이전에일본인이알고있었던곳이라는것이다. 도쿠가와시기에이섬을조선에내준것같지만오키 [ 隱岐 ] 와호키 [ 伯耆 ], 이와미 [ 石見 ] 에속하였다고주장하고있다. 즉요나고의쵸닌오야 [ 大谷 ] 무라카와 [ 村川 ] 양가가 죽도도해 를하던시절에는오키와호키에부속하였고, 이마즈야하치에몽 [ 今津屋八右衛門 ] 이밀항을하던시절에는하치에몽의출항지인이와미국 [ 石見國 ] 의부속이었다고정당화한다. 그러나에도시대산인지방의울릉도 독도인식에서이러한인식은나타나고있지않다. 태정관제하의내무성지리과에서즉 태정관지령 으로일본의영유를부인했음을기록하고있다. 다시말해 태정관지령 에서말하는 죽도외일도 ( 竹島外一島 ) 는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이고이두섬을조선땅으로인정한것이라는인식을하고있다. 태정관지령 (1877) 이발령되기이전에는간혹일본의지도에기록되는경우도있었지만그이후의지도에서는일본영유를부인한것을바탕으로대부분의일본지도에서일본의영역으로취급하지않았다는것이다. 이는기존 죽도문제연 87

영토해양연구 Vol. 12 구회 가주장하는 죽도외일도 가 죽도라고도부르고송도라고도부르는하나의섬울릉도 라는주장이거짓임을명확히방증하는근거라할수있다. 즉 죽도외일도 를순리적으로읽으면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이고이두섬을일본의영역이아니라조선의영역으로인정한것으로인식하고있다는것이다. 이같은사실은이케우치사토시 [ 池內敏 ] 가 태정관지령 은울릉도와독도가일본의영역이아니라는것이지조선의영토라는것은아니다 고하는주장이타당하지않음을입증해주는것이기도하다. 20 4. 다나카아카마로 (1906. 6.): 오키국죽도지리학상지식 1905년 8월부터 10월까지세차례에걸쳐 오키국의죽도에관한구기 라는기사가연속하여나온다. 독자는이를보고 죽도 를울릉도와혼동을할수도있다는생각에서이듬해오로지독도에관한사항만을뽑아새롭게정리한것이 오키국죽도지리학상지식 이다. 어떤의미에서 오키국죽도 라고전제하여 죽도도해 의역사를다시말해울릉도도해의경위를자세하게기술함으로써당시의울릉도 [ 竹島 ] 가오키국부속이었음을이미지하도록하는의도도있었을것이다. 그러나앞의 구기( 舊記 ) 의내용은모두울릉도에관한것이다. 이러한사실은부기 ( 附記 ) 에서 이상의기사에따르면본지제200호, 201호및 202호에게재한 오키국죽도에관한구기 의기사는완전히죽도 ( 竹島 ) 의기사가아니라울릉도 ( 鬱陵島 ) 의기사다. 라는것을지적하고있다. 당시일본항해술이서툴렀기때문에이군도 ( 울릉도 ) 를혼동하여사용하였고따라서명칭혼란이있었음을밝히고있다. 작년이맘때, 일본해해전에서일거에적함을섬멸하여죽도 ( 竹島, 독도 ) 는갑 자기세상에그이름이알려졌음에도이에관한지리학상의기사가거의 없다. 다만조선수로지 ( 朝鮮水路誌, 263 쪽 ) 에서리앙코르트열암이란명칭하 에극히간단한기사를볼뿐이었다. 얼마전우리해군 이울릉도에서이섬의실견자로부터듣고서제국군함 20 池內敏, 2012, 竹島問題とは何か, 名古屋大学出版会, 147~149쪽. 88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의아무개가그섬을조사하였다. 이후 1905년 8월에이르러시마네현지사의동섬시찰등이있었다. 우리는이상의여러보고를종합하여竹島에관한지리학상의지식을뽑아정리한다. 竹島는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해당하며해도상에는 3점으로표시되는오키 [ 隱岐 ] 에서 85리 ( 哩 ), 21 하마다 [ 浜田 ] 에서 150리 ( 哩 ), 또울릉도에서는 50리 ( 哩 ) 의해상멀리서이것을볼수가있다. 방인 ( 일본인-역자 ) 은울릉도를송도 ( 松島 ) 라고칭하는데대해이것을죽도 ( 竹島 ) 라고명명하였다. 외국인은 1849년처음으로발견하여프랑스선리앙쿠르호의이름을따서그이름을리앙코르트섬이라고하고, 한인 ( 韓人 ) 은이를독도 ( 獨島 ) 라고쓰고, 본방의어부등은일반적으로 리앙코 섬이라칭하여모두영국명리앙코르트의전와에따른것이다. 죽도의지형은한개의좁은수도 [ 길이 180간 ( 間, 22 폭 50~60간, 깊이 5심 ( 尋 23 ] 로떨어져서로마주하는 2개의주섬과그주위에바둑판처럼흩어진몇개의소서 ( 小嶼 ) 로구성되는바다가운데하나의소군도다. 이들소서는대체로평평하여상부가겨우수면위로드러나주섬의주변은기이한경관을나타내는동굴이많아모두바다표범 [ 海豹 ] 무리의서식지가된다. 주섬은섬전체가대부분불모의독암 [ 禿岩 ] 으로바닷바람이항상전면으로불어온다. 한그루의수목도없고남쪽에만잡초가약간자라는것을볼뿐, 주위가단애절벽으로둘러싸여연성의석층으로이루어져주변어느쪽에서도등반하는것이거의불가능하다. 섬전체에평탄한지면이부족하고, 수도의양측으로는협소하고평탄한몽돌해변이 2~3 개소있지만모두파도의내습을피할수없다. 동도에는지푸라기로만든움막집이있는데이움막집은나카이요자부로 [ 中井養三郞 ] 등竹島어업회사의소유인것이다. ( 중략 ) 출어자는울릉도를근거지로하고, 60~70석선적의일본배 [ 和船 ] 을사용하여이곳에도착해서는배는육상에올려두고섬 21 1리 ( 哩 )=1마일 =1.61km. 22 1간 ( 間 )=1.8182m. 23 두팔을잔뜩폈을때의길이. 1심 ( 尋 )= 약 1.8m. 의움막집에서매회 10여일간채재하며다량의수확을하고, 어렵후또는풍파가심하여정박하기어려울때는바로순풍을타고울릉도로피난하게된다. 출어자의수는 1회에 40~50명을보통으로한다. 이곳에서나는바 89

영토해양연구 Vol. 12 다사자는 1903년이것을잡아오사카로수출하는자도있으나, 완전히실패하면이듬해에다소의수요가생기기도한다. 오늘에와서는제혁업 ( 製革業 ) 의진보와수요의증가로인해군대용배낭에붙이는것도소가죽대용으로쓰기에이르렀다. 기름은정제하여고래기름에떨어지지않는좋은기름을얻을수있고, 고기는식용으로하거나또는비료로제공하는유박 [ 油糟 ] 은아교로사용할수있다. 이를말하자면이섬은일본해의항로에있으며항해자를위해서는아주좋은목표물이된다고하지만피박지가없고또한음료수가없어서아무것도할수가없다. 바다사자가많이남으로써그포획업이조금유망할뿐이다. 24 여기서는오직독도에관한지리적인특징을자세히기술하고있는데, 조선수로지 에리앙쿠르암에관한간단한기사밖에없어서 1904년 9월 25일군함니이타카호 [ 新高丸 ] 의실측과 1905년 8월시마네현지사의독도시찰등에서얻은정보를모아정리하고있다. 독도는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해당하며오키에서의거리가 85마일, 137km이고, 울릉도에서 50마일, 80.5km 떨어져있다고기록하고있다. 그리고울릉도에서는 50마일해상에서독도를바라볼수있다고한다. 울릉도를일본인들이송도라고하므로독도를죽도라고명명한이유라고한다. 여기서중요한것은울릉도에서는 80km 정도의해상에서독도를볼수있다는사실이다. 이것은앞에서 울릉도에있는일본인은맑은날산의높은곳에서동남을바라보면멀리섬의형상이보인다 는기사와일맥상통하는것 24 去年の今日 日本海の海戦にりて一挙敵艦を殲滅し竹島は俄かに世に其名を知られしに関わらず之に関する地理學上の記事の存するもの殆となし されば僅かに朝鮮水路誌 (263 頁 ) によりリヤンコールト列岩の名称の下に極めて簡単なる記事を見しあるのみなりしが 曩きに我海軍が鬱陵島に於て此島の実見者より聞き取り 続で帝国軍艦某の其島を調査し 越えて38 年 8 月に至りては島根県知事の同島視察等あり 吾人は以上の諸報告を総合し以て竹島に関する地理学上の智識を抄録せん 竹島は北緯 37 度 14 分 東経 131 度 55 分に当り海図上には三点を以て示され 隠岐より85 哩 濱田より150 哩 又鬱陵島よりは50 哩 海上遥かに之れを望むを得べし 邦人は鬱陵島を松島と称するに對し之に竹島と命名すと雖も外人は 1849 年始めて発見せしフランス船リアンクール号の名に因みて其名をリアンコールト島と云ひ 韓人は之れを独島と書し 本邦の漁夫等は一般に リアンコ 島と称せり 蓋し英名リアンコールトの転訛に依るなる可し 竹島の地形は一個の狭水道 ( 長さ180 間 幅 5 60 間 深度 5 尋 ) を隔てて相対峙する二個の主島と 其周囲に碁列する数個の小嶼よりなる洋中の一小群島なり 是等の小嶼は概ね扁平にして上部僅かに水上に現出し 主島の周辺は奇観を呈する窟洞に富み共に海豹群の捿窟たり 主島は全島殆んど不毛の禿岩にして海風常に全面を吹き荒し 一抹の樹木なく南面のみ雑草の僅かに生するを見るのみ全周断崖絶壁を以て囲まれ軟性の石層より成り 周辺何れよりするも攀登殆んど不可能なり 全島平坦の地に乏しく 水道の両側に於ては狭少なる平坦の砂礫二 三ケ所あれども皆洋濤の襲来を免れず 東島に於ては菰葦の仮小屋あり 此小舎は中井養三郎の竹島漁業会社の所有にかかるものなり ( 中略 ) 出漁者は鬱陵島を根拠地とし六七十石積の和船を使用して此地に到りそれより舟は陸上に引き揚げ置き島上の小舎に於いて毎回十数日 90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이다. 그리고울릉도를송도라고하기때문에독도를새로운이름으로죽도라고불렀다고하나, 당시해도를제외한일반적인울릉도의명칭은여전히죽도였다. 그리고주목할것은군함니이타카호의정보를함께담고있다는것이다. 외국인은 1849년리앙쿠르호의이름을따서리앙코르트섬이라고하고, 한인은이를독도라고쓰고본방 ( 일본 ) 어부들은일반적으로 리앙코섬 이라칭하는데모두영국명리앙코르트의전와에따른것이다. 여기서 영국명 은 프랑스명 의단순한미스로보인다. 그리고잡보란에서는울릉 間滞在し 多量の収獲をなし猟後 または風波強く繁泊し難きときは直ちに順風を得て鬱陵島に避難するなり 出漁者の数は一回に四五十名を普通とす 此地に産する海豹は明治 36 年之を猟し大阪に輸出したるものありしも全く失敗せしが翌年に至り多少の需用あり 今日に至りては製革業の進歩と需用の増加とに依り軍隊用背の表に附したりしものも牛皮の代用となるに至り 脂肪は精製して鯨油に劣らざる良品を得可く 肉は食用とすべく又肥料に供せらる精油は膠に用ゆ可き見込あり 之を要するに 此島は日本海の航路に当り航海者の為には恰好の目標となりと雖も 避泊地なく又飲料水に亡しきを以て何等の用をなすこと能はず 啻に海豹多く産するを以て其補獲業のやや有望なるのみなり 25 < 雜報 > 鬱陵島本邦状況鬱陵島は日本人の在住者 303 名内男 285 名女 118 名 戸数 96 戸あり 而して韓民は戸数 659 人口 3700 余を算せり 陸産は櫬のトガ等の材木にして大豆之に次ぎ 例年 6 7000 千石の収穫ある 昨年は不作にて35 600 石の収穫に過ぎす 海産は烏賊 海鼠 海苔にして警察官は巡査査部長以下 2 名あり 又郵便受取所ありて毎月一回釜山と交通を為せり 邦人の自治体機関として居留民総代あり 又小学校の設けもあり 在住者の職業は貿易商 木挽 漁業 船乗業等の由なり (39 年 4 月 29 日在釜山朝鮮日々新聞 ). 도에거주하는일본인의현황을담고있다. < 잡보 ( 雜報 )> 울릉도본방인상황울릉도는일본인의거주자 303명, 그중남자 185명, 여자 118명, 호수 96호가있다. 그리고한국인 [ 韓民 ] 은호수 659, 인구 3,700여명에이른다. 육산 ( 陸産 ) 은느티나무등을재목으로하고, 콩이그다음이다. 예년 6,000~7,000석 ( 石 ) 을수확한다. 작년에는흉작으로 3,500~3,600석의수확에불과하였다. 해산 ( 海産 ) 은오징어, 해삼 [ 海鼠 ], 김이있고, 경찰관은순사부장이하 2명이있다. 또한우편수취소가있어서매월 1회부산과교통을하며, 방인 ( 일본인 ) 의자치체기관으로거류민대표 [ 居留民總代 ] 가있다. 또한소학교가설치되어있고, 거주자의직업은무역상, 톱질꾼, 어업, 선원업등이있다. (1906. 4. 29, 재부산조선일일신문 ) 25 1906년 6월현재울릉도거주일본인은모두 96호, 303명으로남자가 185명, 여자가 118명으로상당히많은일본인이정착하고있음을알수있다. 또한한국인은호수 659호, 인구 3,700여명이라고한다. 당시한국인과일본인을합하면약 4,000명정도가거주하고있는것이다. 그리고느티나무를목재로하고콩이 91

영토해양연구 Vol. 12 6~7천 석 정도 수확되며, 해산물로 오징어 해삼 김이 나며 경찰이 2명 주 재하고 있었다. 일본인 자체기관으로 닛쇼조합[日商組合]이라는 거류민기구 가 설치되었고 소학교가 설치되었으며 이들의 주 직업은 무역상, 톱질꾼, 어업, 선원업 등이었다고 한다. 죽도(竹島)의 위치 신측(新測) 오키열도의 서북쪽에 있는 죽도는 이전에 본지 (1906년 6월 제210호, 다나카[田中 씨 논문 참조) 상에 기재하였지만 올해 해군수로 부의 측정에 따르면 동 섬은 오키열도의 북서 약 80리(浬)에 있다. 이 두 섬 중에 동도[女島]는 북위 37도 14분 8초, 동경 131도 52분 22초라고 한다. 관보(제7597호, 41년 10월 21일). 26 1908년에 이르러서는 독도에 대한 위치 측량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탓일 까 죽도[독도]의 위치 신측 에서는 동도의 위치를 신측한 결과를 게재하고 있다. 당초 북위 37도 14분에서 37도 14분 2초로, 동경 131도 55분에서 동 경 131도 55분 22초로 정정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독도 편입 시기 전후의 울릉도 독도 인식을 보면, 우 선 명칭에서 19세기 후반 일본 산인지방의 명칭과는 달리 독도를 양코섬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수로지나 해도에 나타나는 독도 명칭 리앙쿠르암 과는 다른 새로운 섬으로 양코섬 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익낭인 흑룡회의 독도무주지설 유포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899년 6월 27일부터 1900년 5월 20일에 걸친 약 1년 6개월간 구즈우 슈 스케가 조선 연해에서 지형과 지리, 해리와 기후, 주요 수산물, 일본 어민의 어업 상황, 조선 어민의 어업 상황을 상세히 조사하였 고 이는 한해통어지침 (1903)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서 조사된 새로운 섬 양코 의 발견 정보는 보다 앞서 흑 룡회 회보 에 발표되면서 일본 국내외 각 신문에 게 재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똑같은 기사가 도쿄 지학협회의 지학잡지 의 기사로 실리게 된다. 물론 92 26 竹島の位置新測 隠岐列島の北西方 にある竹島は甞て本誌(三九年六月二一〇 号田中氏論文参照)上に記載せしが本年海 軍水路部の測定によれば同島は隠岐列 島の北西訳八十浬にあり 該二嶼中の東 嶼 ( 女島 ) は北緯三七度一四分八秒東経 一三一度五二分二二秒なりと云ふ 官報 (第七五九号 四一年十月廿一日)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이기사의필자는명시되어있지않으나구즈우슈스케다. 여기서중요한것은새로운섬 양코 ( 독도 ) 가일본오키노시마와울릉도에서거의같은거리에있다는것이다. 당시해도와수로지등에기재되고있었음에도일본과영국의해도어디에도적혀있지않은섬이라고하여 리앙코 가아닌 양코 라는새로운섬으로등장하고있는것이다. 또한가지특기할만한것은울릉도에거주하는일본인들이울릉도에서멀리독도를바라볼수있다는것이표현되고있는점이다. 울릉도에서 87.4km의거리에있는독도는자연스레울릉도에서볼수있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지학잡지 에서는새섬을발견하였다면서도이섬이리앙쿠르암과부합하며, 프랑스의포경선리앙쿠르호보다일본인이훨씬먼저이섬을알고있었다고강조함으로써역사적정통성을찾고자하고있다. 즉원래일본이지배하던곳을도쿠가와시대에일본이조선에건네주었다는것을강조하고있으며, 이섬은원래오키노시마에속하였다거나, 호키노쿠니에속하였다거나, 하마다번에속하였다는등의주장을담고있다. 이것은후일 1905년 2월 22일의독도편입사실을정당화또는기정사실화하려는의도가엿보인다는점이다. 이러한점은관변적학술지로서의 지학잡지 의성 < 그림 2> 지학잡지 에그려진독도지도 93

영토해양연구 Vol. 12 격을단적으로보여주는것이기도하다. 오키국죽도에관한구기 ( 旧記 ) 에서다나카 [ 田中阿歌麿 ] 는마치울릉도쟁계 [= 竹島一件 ] 때일어난울릉도에관한기록을 죽도 로내세우면서당시의죽도 [ 울릉도 ] 가마치오키국의부속이었음을부각하고있다. 여기서구기의기사를보면완전히울릉도에만관련되는내용을 3차례의연재로게재하여독도 [ 竹島 ] 의기록인것처럼다루고있다. 그러나뒤에서이를수정하기위해독도에관한기사만를새로게재하여독도의지형과위치, 물산등을세밀하게다루고있다. 여기서 지학잡지 의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정보를보면흑룡회가 회보 나 한해통어지침 등에서유포하고있는정보와밀접하게연결되고있는것이특징적이다. 또한 수로지 의울릉도 독도정보와도연결되어있다. 그리고메이지정부태정관제하의지리과에서일본의독도영유를부인한점, 즉울릉도와독도를조선의영역임을인정하고있다. 이는당시의정부수뇌부를이루고있던이들지식인들에게는 태정관지령 발령의결과울릉도 [ 竹島 ] 와독도 ( 외일도 ) 는조선의영역이라는인식이자연스레자리하고있었기때문이었다. Ⅳ. 맺음말 일본외무성의독도에대한공식견해는 죽도 ( 독도 ) 는역사적으로나국제법상으로나일본고유의영토며현재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것이고, 17세기중반에이미독도에대한영유권이확립되어 1905년 2월 22일각의결정으로시마네현에편입함으로써일본의영토임을재확인했다고주장한다. 2005년이후소위기존의 무주지선점론 에 고유영토론 을보태어논리를강화하고있는것으로보이나, 숱한사료의교묘한자의적해석으로탄생한고유영토론의논리는최근거의부정되어가고있다. 이는시마네현 죽도문제연구회 의연구결과를일본외무성이전혀거르지않고받아들인 94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결과이기도하다. 본고의목적은 1905년독도편입조치전후의지리지특히당시일본의지리학계를대표하던 지학잡지 에나타난울릉도와독도기록을통해당시일본의울릉도 독도인식을검토하고자한것이다. 지학잡지 는메이지초기인 1879년에창립된도쿄지학협회의기관지로, 이협회회원은메이지정부의유력정치가, 군인, 외교관, 화족등으로구성된수뇌집단이며 지학잡지 의성격은메이지정부의대륙팽창정책에중요한역할을수행하고있었다. 이잡지는메이지시기에각지에서발생한새로운섬의발견과편입조치등에관한정보를시의적으로보고하고있으며세계지리상의발견에관한사항및지리적정보도상세하게담고있다. 독도에대해서는 1890년대후반흑룡회의조사정보를바탕으로 양코 라는서양및일본의지도와해도에도없는 새로운섬의발견 사실을보고하고있는데, 이는우익낭인단체인흑룡회가새로운섬 양코 의발견을유포한직후의일이었다. 그러나메이지초기일본내무성과외무성, 태정관에서는죽도 송도개척의청원과지적편찬의문제로죽도와송도의명칭과그존재에대한논의가활발히전개되었고이는이미외무성의 죽도고증 ([ 北澤正誠 ) 과내무성의기록 기죽도사략 으로정리되어있었으므로새삼모르는새로운섬은아니었던것이다. 또한해군수로부의 조선수로지 (1894년제1판, 1899년제1 개판 ) 에서도리앙쿠르암이라하여이섬의존재와유래를명확히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편입조치이후 지학잡지 는프랑스의포경선리앙쿠르호의독도발견보다훨씬이전에일본인이이미독도를인지하고있었다고그기술이바뀌어간다. 이를정당화하기위해 오키국죽도 에관한에도시대의 구기 ( 舊記 ) 로에도시대죽도도해와도해금지령의역사를상세히담고있다. 본연구를통해밝혀진것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첫째, 흑룡회의 회보 와 한해통어지침 의기록처럼동해상의하나의섬 양코섬 을발견했는데이는서양과일본의해도에도없는새로운섬이라고보고하고있다. 이는 지학잡지 가우익낭인집단인흑룡회의활동과궤를같이하고있다는것을보여주는것이다. 둘째, 구정부인에도시대에 95

영토해양연구 Vol. 12 오키노시마와호키노쿠니, 하마다번에부속하였으나도쿠가와막부가조선에건네주었고, 1905년죽도편입으로일본제국의새로운영토가되었다고정당화하고있다. 즉오야 무리카와양가와 1830년대하치에몽의도해사실로관련하는번에부속한것으로인식하고있기는하나에도시대에독도 ( 송도 ) 는조선에건네주어조선에부속한섬으로인식하고있는것이다. 셋째, 1877년메이지정부의태정관지리과에서독도에대한일본의영유를부인했다는것을인정하고있다. 즉 죽도외일도 의 외일도 는자연스레독도 ( 송도 ) 이고태정관의재결에서죽도와송도는조선의영토로되었다고인식하고있다. 다시말해, 에도막부와메이지정부에서조선에넘겨주었지만리앙쿠르호가 양코섬 을발견하기이전에한때죽도도해로인하여오키노쿠니, 호키노쿠니, 이와미노쿠니의부속으로있었다고보고있다. 그섬을새로발견하여제국의신영토가되었다고인식하고있다. 새로운섬을발견하여 죽도편입 으로제국의신영토가된당위성을과거산인지방의부속이었음을주장하여나타내고있다. 그러나이시점에서는무주지선점론에의한영토취득은강조하고있지만 예로부터일본의영토이던것을근대국제법으로편입하여일본영유를재확인하고있다 고까지는피력하고있지않다. 96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국문초록 본고의목적은독도편입조치전후의지리지특히당시일본의지리학계를대표하던 지학잡지 에나타난울릉도 독도기록을통해당시일본의울릉도 독도인식을검토하는것이다. 지학잡지 는 1879년에창립된도쿄지학협회의기관지로, 이협회회원은메이지정부의정치가, 군인, 외교관, 화족등으로구성된수뇌집단이며잡지의성격은메이지정부의팽창정책에중요한역할을수행하고있었다. 본고에서밝혀진것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첫째, 흑룡회의 한해통어지침 의기록처럼동해상의하나의섬 양코섬 을발견했는데이는서양과일본의해도에도없는새로운섬이라는것이다. 둘째, 구정부인에도시대에오키노시마와호키노쿠니, 하마다번에부속하였으나도쿠가와막부가조선에건네주었고, 1905년죽도편입으로일본제국의새로운영토가되었다고정당화하고있다. 셋째, 메이지정부의태정관지리과에서독도에대한일본의영유를부인했다는사실을인정하고있다. 즉에도막부와메이지정부에서조선에넘겨주었지만리앙쿠르호가 양코섬 을발견하기이전에오키노쿠니, 호키노쿠니, 이와미노쿠니의부속으로있었다. 그섬을새로발견하여제국의신영토가되었다고인식하고있었다. 그러나이것은지리학계의의도적오판으로다분히정보유포의성격이강했다고하겠다. 주제어 울릉도 독도인식, 지학잡지, 지리지, 근대일본, 독도영유권 97

영토해양연구 Vol. 12 ABSTRACT Modern Japan s Perception of Ulleungdo and Dokdo in Chigaku Zasshi Song, Hwiyoung Research Professor, Yeungnam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modern Japan s perception of the islands Ulleungdo and Dokdo through mentions of them in Chigaku Zasshi ( 地學雜誌 ), or the Journal of Geography, a journal renowned in Japanese geographical studies around the time Japan allegedly incorporated Dokdo. Chigaku Zasshi was a bulletin published by the Tokyo Geographical Society founded in 1879. The society consisted of the Meiji government s leading members including politicians, military officials, diplomats, and aristocrats, and this society s bulletin played a major role in executing the government s expansionist policies. The following is a summary of the findings uncovered through this study. First, according to Kankai tsugyo shishin ( 韓海通漁指針 ), or the Fishery Guide of Seas around Korea published by Kokuryu ˉkai (The Black Dragon Society), an island named Liancourt Rocks was discovered in the East Sea, which had never before appeared in any Western or Japanese nautical chart. Second, the island has been justified as Japanese territory that was first affiliated to Okinoshima, Hokinokuni or the Hamada Domain under the Edo Bafuku, but was thereafter handed over to Joseon (Korea) by the Tokugawa Bafuku, and then acquired as part of the Japanese Empire through territorial incorporation in 1905. Third, Japan admits that it once denied its sovereignty over Dokdo. Although the Edo Bafuku and the Daijō-kan s Department of Geography under the Meiji government acknowledged Korean sovereignty over Dokdo, the island had been an annex attached to Okinokuni, Hokinokuni, and Iwaminokuni long before the ship Le Liancourt discovered Liancourt Rocks. And since the island was newly discovered, it became eligible to be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y of the Japanese empire. Keywords Perception of Ulleungdo-Dokdo, Chigaku Zasshi, geography journals, modern Japan, Dokdo sovereignty 98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참고문헌 김수희, 2012, 흑룡회의독도침탈기도와 양코도발견 기록의재검토, 전북사학 제 41 집. 남영우, 2014, 독도에대한일본의지도제작과측량, 영토해양연구 vol. 7. 유미림 최은석, 2010, 근대일본의지리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유미림, 2011, 근대조선지리지에보이는일본의울릉도 독도인식, 영토해양연구 2 권. 윤소영, 2013, 근대일본관찬地誌와지리교과서에나타난독도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6 호. 윤소영, 2014, 메이지후기지리지 향토지에나타난독도기술, 독도연구 제 17 호. 葛生修吉, 1903, 韓海通漁指針, 黑龍會出版部. 大田才次郎, 1894, 新撰朝鮮地理誌, 博文館. 島根県教育会編纂, 1923, 島根県誌. 島根県隠岐支庁, 1933, 隠岐島誌. 田淵友彦, 1905, 韓国新地理, 博文館. 恒屋盛服, 1901, 朝鮮開化史, 博文館. 東京地学協会編纂, 1894, 朝鮮全図 1894 年作成. 保柳睦美, 東京地学協会 100 年の歩み, 東京地学協会創立 100 周年記念行事資料集, 東京地学協会. 田中紹祥編, 1894, 新撰朝鮮国全図.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舊記, 地学雑誌 第 200 号, 東京地学協會.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舊記 ( 承前 ), 地学雑誌 第 201 号, 東京地学協會.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舊記 ( 完結 ), 地学雑誌 第 202 号, 東京地学協會. 田中阿歌麿, 1905, 隠岐國竹島に關する地理學上の智識, 地学雑誌 第 210 号, 東京地学協會. 99

영토해양연구 Vol. 12 日本海中の一島嶼 ( ヤンコ ), 地学雑誌 第 149 号, 東京地学協會, 1901. ( 雑報 ) 帝国新領土竹島, 地学雑誌 第 196 号, 東京地学協會, 1905. ( 雑録 ) 竹島の位置新測, 地学雑誌 第 239 号, 東京地学協會, 1908. 100

연구논문 Ⅰ 근대일본의지학잡지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인식 101

연구논문영토해양연구 Vol. 12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이석용한남대학교법과대학교수 Ⅰ. 머리말 오늘날국제사회에서섬문제가중요한국제법적이슈로등장하게된것은연안국들의해양관할권확대와강화움직임을그배경으로하고있다. 그로티우스의해양자유론이래해양질서는 좁은영해, 넓은공해 라는패러다임에기초해있었으나, 20세기이후해양과학기술의발달과연안국들의해양관할권확대와강화로전통적인국제해양질서가흔들리고있는것이다. 특히 1982년유엔해양법협약의효력발생을계기로연안국들의해양관할권확대및강화경쟁은더욱치열하게전개되고있는바, 연안국들은협약상도서제도의모호함을이용하여작고중요하지않은해양지형주변에도 EEZ와대륙붕같은해양수역을설치하고자시도하고있는것이다. 1 3차유엔해양법회의시작을전후하여국제사회는이미배타적경제수역 (EEZ) 군도수역 광역대륙붕도입에대하여합의를이루었기때문에, 자연스럽게섬문제도회의의주요한이슈로등장하였다. 회의는 1958년영해협약의섬의정의를계승하고우여곡절끝에새로이암석 (rock) 에 * 논문투고일 : 2016. 9. 30. 심사개시일 : 2016. 11. 8. 게재확정일 : 2016. 11. 30. 1 이석용, 연안국해양수역확대가국제해양질서에미치는영향, 안암법학 통권제31호, 321~322쪽. 102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관한규정을도입하였다. 그결과유엔해양법협약은제 121 조에관련규정 을두었으나, 협약의섬의정의에대한규정에는여전히모호한부분들이남아있고, 간출지 (low-tide elevation) 와암석의정의와지위에관한논란이그치지않고있다. 더구나국제사법재판소 (ICJ) 를비롯한국제법원과재판소들도완전한섬과암석, 간출지의분류를위한기준을제시하고각해양지형의해양수역에대한권원의문제를다루는데소극적이었다. 이런가운데유엔해양법협약부속서 VII에따라설립된제7 부속서중재재판소 ( 이하중재재판소 ) 는필리핀이중국을상대로제기한남중국해중재사건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본안에대해 2016년 7월 12일판정을내렸다. 2 필리핀의사실상의완승으로끝이난이사건에서필리핀이청구한것은다음의세가지였다. 첫째, 필리핀은남중국해수역과해저, 해양지형에대한연안국들의권리와의무는해양법협약에따라규율되며소위 9단선 (nine-dash line) 에함축된중국의 역사적권리 (historic right) 에근거한주장은해양법협약에어긋나는것이므로무효라고선언해달라고하였다. 둘째, 필리핀은해양법협약에따를때중국또는필리핀이주권또는관할권을주장하는일부해양지형이섬 (islands), 암석, 간출지, 수중암초 (submerged bank) 중어떤것에속하는것인지그지위를결정해달라고하였다. 셋째, 필리핀은중국이자국의해양법협상권리와자유의행사를방해하고해양환경을저해하는건축과어업활동을함으로써협약을위반하였다고선언을해달라고하였다. 이러한필리핀의청구는필리핀의 15개청구 (submission) 에나타나있는데, 해양지형의분류와지위에관한것은그중에 5개다. 청구 3은 Scarborough Shoal은 EEZ와대륙붕에대한권원을창설하지못하고, 청구 4는 Mischief Reef, Second Thomas Shoal, Subi Reef는간출지로서해양수역에대한권원을창설할수없으며, 청구 5는 Mischief Reef와 Second Thomas Shoal은필리핀 EEZ와대륙붕의일부이고, 청구 6은 Gaven Reef와 McKennen Reef(Hughes Reef 포함 ) 는간출지로서해양수역에대한권원을창설하지못하지만그저조선은각각 Namyit와 Sin Cowe의영해기선결정에 2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The Republic of Philippines v.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Award, PCA, 12 July 2016. 103

영토해양연구 Vol. 12 사용될수있고, 청구 7은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는 EEZ와대륙붕에대한권원을창설하지못한다는것을선언해달라는것이었다. 국제법상도서제도와관련하여필리핀과중국간남중국해중재판정이관심을끄는것은, 금번중재재판소가유엔해양법협약제121조의해석에서매우명확하게입장을표명하는등국제법상도세제도와관련하여제기되어온여러가지문제들에대한분명한입장을표명하였기때문이다. 재판소는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완전한권원을가진섬과그런수역을가질수없는암석을구분하는데이제까지의국가들의실행과는달리매우엄격한기준을제시하였다. 해양법협약의채택이후연안국은자국소유의만조시수면위의지형은거의예외없이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섬으로다루어왔으나, 금번중재판정은엄격한잣대로평가하여문제가제기된대부분의해양지형들을간출지나암석으로판정하였다. 원칙론적인입장에서해양법협약을해석하고적용한본중재재판소의판정취지가앞으로의도서제도발전에어떤영향을미치게될지주목하게되는것이다. 이글에서는기존의국제법상도서제도를살펴보고, 필리핀과중국간의남중국해사건에대한중재판정이간출지, 암석, 섬등해양지형의정의와기준에미치게될영향을분석하고자하였다. 특히해양법협약제121조에대한해석과관련하여재판소가제시한완전한권원을가진섬과암석의구분기준을면밀히고찰하여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을살펴보고, 우리나라의독도에대한함의도검토하였다. Ⅱ. 도서제도의역사 섬을국제법적으로정의하기위한시도가처음이루어진것은 1930년헤이그성문화회의 (Hague Codification Conference) 때였다. 당시영국과호주는항상만조점위에존재하는점유와사용이가능한해양지형을섬이라정의하 104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자고주장하였으며, 미국은만조시수면위에존재하는물로둘러싸여있는자연적으로형성된해양지형을섬으로하자고하였다. 결국국제법상의섬이되려면점유와사용이가능해야한다는영국등의주장은수용되지않았고, 헤이그회의제2 위원회제2소위원회는 모든섬은영해를갖는다. 섬이란항상만조점위에존재하는물로둘러싸인육지지역이다 라는정의를채택하게되었다. 3 이는당시전문가위원회소위원회 (Sub-Committee of the Committee of Experts) 가간출지를섬에포함시킬것인가하는데대해치열한논쟁끝에만조시수면위의섬에만영해를인정하고, 영해내의간출지는영해기준선설정시이를활용하도록타협한데따른것이다. 4 20세기중반에접어들면서국가들은해양과학기술의발전을통해서접근이가능해진해양자원확보에관심을가지게되었으며해양관할권확대에나서게되었다. 특히미국은 1945년 9월 28일 대륙붕선언 을통해대륙붕에인접해있는지하와해저의천연자원에대한연 3 Hiran W. Jayewardene, 1990, The Regime of Islands in International Law, Martinus Nijhoff Publishers, pp. 3~4. 4 Derek W. Bowett, 1979, The Legal Regime of Islands in International Law, Oceana Publications Inc., pp. 8~9. 헤이그성문화회의가채택한섬의정의에대해서는다양한평가가있었다. Gidel은섬은조직된인간그룹들의안정적인거주를가능하게하는자연조건을갖추고있어야한다고하여성문화회의의입장에반대하였으며, Johnson은섬의정의중에서 육지지역 (area of land) 이란수면위에존재하는상당한넓이의육지여야하므로조그만암석들을섬으로인정하면안된다고하여비판적이었다. 5 Donald R. Rothwell and Tim Stephens, 2010,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Sea, Hart Publishing, p. 6. 6 Bowett, 1979, op. cit., pp. 8~9; Jayewardene, 1990, op. cit., p. 4 ; ILC Yearbook, 1954, p. 93. 안국관할권행사의정당성을주장하였는바, 대륙붕제도의등장에따른연안국해양관할권확대에따라섬문제가새롭게조명을받게되었다. 1949년시작된국제법위원회 (ILC) 의해양법성문화작업은 1956년 해양법조문과주석(Articles Concerning the Law of the Sea with Commentaries) 의채택으로일단결실을보았다. 5 특별보고자 Francois는 1952년영해체제에관한그의첫번째보고서에헤이그성문화회의제2 위원회가작성한섬의정의를포함시켰다. 1954년국제법위원회회의에서라우터팍트 (Lauterpacht) 는섬은실효적점유와통제가가능하여야한다는조건을첨부하자고하면서, 항상수면위에 (permanently above high-water mark) 라는말앞에 정상적인상황에서 (in normal circumstances) 라는말을삽입하자는수정안을제출하였으나, 6 국제법위원회는 1956년해양법에관 105

영토해양연구 Vol. 12 한초안에서섬이란 정상적인상황에서항상만조점위에있는물로둘러싸여있는육지지역 (an area of land, surrounded by water, which in normal circumstances is above water at high tide) 이라고정의하게되었다. 1958년제 1차유엔해양법회의 (UNCLOSⅠ) 는 영해및접속수역에관한협약 (The Convention on the Territorial Sea and the Contiguous Zone, 이하영해협약 ) 등 4개의협약을채택하였다. 회의에서미국은초안제10조의섬에관한정의를수정하여 섬은만조시수면위에존재하는물로둘러싸인자연적으로형성된육지지역이다 라고하자고하였다. 이제안은 ILC 초안의섬의정의에 자연적으로형성된 이란말을추가하고, 항상 이란형용사와 정상적인상황에서 라는말을삭제한것이었다. 7 결국회의는미국의이러한제안을수용하여영해협약제10조 1항에는 섬은만조시수면위에존재하는물로둘 러싸인자연적으로형성된육지지역이다 라는정의가도입되었다. 1973년시작된제 3차유엔해양법회의 (UNCLOS Ⅲ) 에서는 EEZ와대륙붕, 군도수역을통한연안국의해양관할권확대가예상되었기때문에 1958년영해협약에규정된섬의정의에대한재검토가필요해졌다. EEZ 등을통해조그만섬에지나치게넓은해양공간이부여된다면형평에어긋나는결과가될것이기때문이다. 우선섬들을면적등을기준으로몇가지로나누어적합한 EEZ와대륙붕을부여해야한다는주장은 Hodgson이나 Ely 같은학자들, 도서국가들과그리스, 아프리카국가들이지지하였다. Hodgson과 Ely는섬의면적과인구 본토와의거리를고려하여그에상응하는지위를부여해야한다고하였다. 8 한편제3 차유엔해양법회의에서섬문제에대한실질적인토의는 1974년카라카스회의부터본격적으로이루어졌는데, 당시 14개아프리카국가들은 섬제도에관한 7 미국은 ILC 초안의섬의정의에따르면인공섬이섬에포함되어공해의자유가훼손되므로, 자연적형성에관한조건을첨부해야한다고하였다. 또한초안의 정상적인상황에서 와 항상 이란말은상충되므로삭제하자고하였다. 8 Hodgson은섬의면적을기준으로 0.001 평방마일이하의섬은 rock, 0.001 평방마일이상 1 평방마일이하는 islet, 1 평방마일이상 1천평방마일이하는 isle, 1 천평방마일이상의섬은 island라하여각기그에상응하는지위를부여해야한다고하였다. Ely는섬의면적과인구및본토해안부터의거리를고려하여섬의가치에따라섬이가지는해양수역을적절히제한해야한다고하였다. R. D. Hodgson, 1973, Islands : Normal and Special Circumstances, in J. K. Gamble and G. Pontecorvo(eds), The Law of the Sea: The Emerging Regime of the Oceans, Ballinger Publishing Co., pp. 150~151; N. Ely, 1972, Seabed Boundaries between Coastal States: The Effect to be Given Islets as Special circumstances, in International Law, Vol. 6, pp. 232~235. 106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초안 (Draft Articles on the Regime of Islands) 에서, 만조시수면위에있는물로둘러싸인광대한 (vast) 자연적으로형성된육지지역을섬 (island) 이라하고, 면적이작은것들은소도 (islet), 만조시물로둘러싸여있는자연적으로형성된돌로이루어진융기는암석이라하여작은섬들의해양수역을제한할것을주장하였다. 9 반면에도서국가들을중심으로하는다른국가들은섬도해양에대하여육지영토와동일한권원을가지며, 육지영토주변에설치되는것과동일한방법으로섬의해양수역도설정되어야한다고주장하였다. 10 해양법협약은제121조에섬제도 (Regime of Islands) 에관해간단한규정을두었다. 협약은동조 1항에서자연적으로형성되어만조시수면위에있는, 육지지역을섬이라정의하였으며, 2항에서는이러한섬들은자체의영해와접속수역 경제수역 대륙붕을가질수있다고하였다. 하지만동조 3항에는예외조항을두어인간이거주할수없거나독자적인경제활동을유지할수없는암석은경제수역과대륙붕을가지지못한다고하였다. 해양법협약의채택과발효이후섬제도에서가장커다란논란의대상은 2항규정에따라주변에영해, 접속수역, 경제수역, 대륙붕을가질수있는섬과 3항규정대로인간거주나경제생활의유지가불가능하여경제수역과대륙붕을가질수없는암석을구분하는데관한것이었다. 제3 차유엔해양법회의는본래컨센서스방식에따른협약의채택을시도했었기때문에, 국가들의이해관계와입장이첨예하게대립되는사안에대해서는적당한수준에서타협을이룬경우가있었다. 그로말미암아해양법협약에는일부추상적이고모호한규정들이등장하기도하였는데, 그처럼많은논란이있었던제도와규정가운데에는각국의해양이익에중대한영향을미치는것들이있어서, 각국은협약의발효이후에도관련규정에대 9 U.N. Doc. A/Conf. 62/C. 2/L. 62/Rev. 1. 10 제3차유엔해양법회의에서의섬제도에관한다양한제안과논의에대해서는다음을볼것. 이석용, 2015, 국제법상도서제도와독도, 세창출판사, 19~43쪽. 한국제사회의실행을주시해왔다. 협약의도서제도도그러한사례에속하는데, 국제사법재판소와국제해양법재판소 (ITLOS) 등국제법원과재판소에서는그간암석의정의등도서관련문제를다루는데다소소극적 107

영토해양연구 Vol. 12 으로임해왔다. 그러나금번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상당히적극적으로도서문제를검토하였고그입장을분명하게표시하였다. 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해양지형을 3가지로분류하면서그기준을분명하게제시하였고관련법적문제도검토하였다. 해양법협약은간조시수면위에드러나지만만조시에는물속에가라앉는해양지형을간출지라고하였고, 만조시에도수면위에존재한해양지형을일반적으로 섬 (islands) 이라고하였는데판정에서재판소는이를주로고조지형 (high-tide features) 이라고불렀다. 이어서재판소는인간거주또는독자적경제생활의유지가불가능한고조지형으로협약제121조 3항에따라서 EEZ와대륙붕을창설할수없는것은 암석 이라부르고, 암석이아닌고조지형으로협약제121조 2항에따라해양수역에대해서다른육지영토와동등한권원을가지는해양지형은 완전한권원의섬 (fully entitled islands) 이라고불렀다. 11 Ⅲ. 간출지문제 간출지란썰물일때에는물로둘러싸여물위에노출되나밀물일때에는물에잠기는자연적으로형성된육지지역을말한다. 과거에각종문헌이나조약에서는 drying rock 또는 bank 라부르기도하였다. 12 간출지는엄격히말해서섬이아니다. 그렇지만과거에간출지도섬의범주에포함시켜야한다는주장이있었고, 오늘날에도그지위와관련하여다소모호한점이있다. 오늘날간출지의기선설정에서의지위는 1930년헤이그성문화회의에서 이루어진타협의산물이다. 헤이그회의에서는만조시수면위에드러나는지형만을국제법상의섬으로삼아야한다는주장과간조시드러나는지형도섬으로하자는주장이대립하였다. 결국만조시드러나는지형 11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 280. 12 R. R. Churchill and A. V. Lowe, 1999, The Law of the Sea, Manchester University Press, p. 48. 108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13 Bowett, 1979, 앞의책, p. 10. 14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s. 281~282. 15 Scarborough Shoal은중국에서는황옌다오 (Huangyan Dao, 黃岩島 ) 라부르고필리핀에서는 Panatag Shoal 또는 Bajo de Masinloc 이라부르는북위 15 09 16 동경 117 45 58 에위치한산호초이다. 필리핀루손섬의군도기선에서 116.2 해리, 중국의홍콩부근 29번기점 (Jiapengliedao) 에서 448.2 해리에위치하고있다. Cuarteron Reef는중국에서는화양쟈오 (Huayang Jiao, 華陽礁 ), 필리핀에서는 Calderon Reef 라고하며, 북위 08 51 41 동경 112 50 08 에위치한다. 필리핀팔라완 (Palawan) 섬의군도기선에서 245.3 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85.3 해리에위치해있다. Fiery Cross Reef는중국에서융수쟈오 (Yongshu Jiao, 永暑礁 ), 필리핀에서는 Kagitingan Reef라고부르며, 북위 09 33 00 동경 112 53 25 에위치한다. 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254.2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47.7해리떨어져있다. Johnson Reef, Mckennan Reef, Hughes Reef 는모두산호초로남사군도중심부의환초군인 Union Bank에속한다. Johnson Reef는중국에서는치과쟈오 (Chigua Jiao, 赤瓜礁 ), 필리핀에서는 Mabini Reef 라고부르는데, 북위 09 43 00 동경 114 16 55 에위치하며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184.7해리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70.8해리떨어진곳에있다. McKennan Reef는중국에서는시먼자오 (Ximen Jiao, 西門礁 ) 라고하고필리핀에서는 Hughes Reef 와함께 Chigua Reef 라고하는데, 북위 09 54 13 동경 114 27 53 에위치하며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181.3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66.8해리떨어진곳에있다. Hughes Reef는중국에서는 만을국제법상의섬으로인정하되, 영해내에위치하는간출지는기선설정에활용할수있도록양측간에타협이이루어졌다. 13 하지만간출지의정의와법적지위가분명해진것은 1958년영해협약제11조에의해서이다. 그규정은해양법협약제13조에의해계승되었는데, 간출지가본토나섬으로부터영해의폭을넘는곳에위치하는경우에는자체의영해를가지지못하도록하되, 본토나섬으로부터영해의폭을넘지아니하는거리에위치하는간출지의저조선은영해기선으로사용할수있게한것이다. 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남중국해해양지형의지위와해양권원에관한당사국간분쟁을다루었다. 특히필리핀은청구 4와 6에서일부지형들은간출지로서해양수역에대한권원을가지지못한다고주장하였다. 즉청구 4는 Second Thomas Shoal과 Subi Reef가간출지로서영해, EEZ, 대륙붕을창설하지못하며전유의대상이되지못한다는주장이었으며, 청구 6은 Gaven Reef와 Mckennan Reef(Hughes Reef 포함 ) 역시간출지로서영해, EEZ, 대륙붕을창설하지못하지만그저조선 (low-water line) 은 Namyit와 Sin Cowe의영해기선결정에사용될수있다고하였다. 반면에필리핀은청구 3과 7에서 Scarborough Shoal,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 등은만조시수면위에존재하는고조지형 (hightide features) 이라고하였다. 14 15 필리핀은해양법협약제13조에규정되어있는간출지는육지영토가아니며, 점유나통제등의조치로그곳에영유권을수립할수없다고하였다. 필리핀은간 109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지를위치에따라 3가지로분류하였다. 간출지가섬의 12해리이내에있는경우에는간출지에대한영유권은섬에대해영유권을가지는국가에게속하며, 간출지가 12해리이원연안국의 EEZ나대륙붕에위치한경우에는연안국은해양법협약제56조 3항과제77 조에따른관할권을갖는다. 반면에국가관할권이원에위치하는간출지는심해저의일부가되며, 여하한국가도그간출지에대하여주권이나관할권을가지지못한다고하였다. 필리핀은해양법협약제13조 1항규정대로간출지가전체적으로또는부분적으로섬의영해내에위치하여영해기선의일부로사용될수있는경우가있음을상기시켰다. 16 필리핀은청구 4와 6에언급된 Second Thomas Shoal, Mischief Reef, Subi Reef, Hughes Reef를포함한 Mckennan Reef, Gaven Reef 등 5개의해양지형은간출지라고주장하였다. 그러나필리핀은그중에 Gaven Reefs는 Namyit 섬의영해에그리고 Mckennan Reef는 Sin Cowe 섬의영해내에위치하므로당해도서의영해기준선연장에활용될수있다고하였다. 17 필리핀은증거로두가지위성영상 (satellite imagery) 자료를제시하였다. 하나는 5개간출지에대한 Multi-band Landsat 위성사진인데, 이는 5개의해양지형가운데만조시수면위에존재하는것은없음을보여준다고하였다. 다른하나는 EOMAP 회사가준비하여필리핀이재판소에제공한위성영사분석자료 (satellite imagery analysis) 로 5개해양지형을수심측량방식으로묘사한것이다. 필리핀은 5개해양지형이간출지인것을입증하기위하여기존의해도 (charts) 와 둥먼쟈오 (Dongmen Jiao, 東門礁 ) 필리핀에서는 McKennan Reef와함께 Chigua Reef 라고하는데, 북위 09 54 48 동경 114 29 48 에위치하며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180.3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67.2 해리떨어진곳에있다. Gaven Reef는중국에서는난순자오 (Nanxun Jiao, 南薰礁 ) 필리핀에서는 Burgos라고한다. Itu Aba, Namyit, Sand Cay와같은섬들과함께 Tizard Bank에속한다. 북위 10 12 27 동경 114 13 21 에위치하며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203.0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44.1해리떨어져있다. Subi Reef는중국에서는주비쟈오 (Zhubi Jiao, 渚碧礁 ) 필리핀에서는 Zamora Reef라고부르는산호초로서 Tizard Bank 북쪽에위치해있다. 북위 10 55 22 동경 114 05 04 남사군도북서쪽끝자락에위치하며, 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231.9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02.2해리떨어진곳에있다. 산호초인 Mischief Reef와 Second Thomas Shoal은남사군도중심부에위치하며 Union Bank의동쪽 Tizard Bank의남동쪽에위치한다. Mischief Reef 는중국에서는메이지쟈오 (Meiji Jiao, 美濟礁 ) 필리핀에서는 Panganiban이라고하며, 북위 09 54 17 동경 115 31 59 에위치하고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125.4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598.1해리떨어진곳에있다. Second Thomas Shoal은중국에서는런아이쟈오 (Ren ai Jiao, 仁愛礁 ) 필리핀에서는 Ayungin Shoal이라부르며, 북위 09 54 17 동경 115 51 49 에위치하고필리핀팔라완섬의군도기선에서 104.0 해리, 해남도인근중국의 39번기점 (Dongzhou 2) 에서 616.2 해리떨어진곳에있다. Ibid., paras. 284~290. 16 Ibid., para. 291. 17 Ibid., para. 292. 110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수로지 (sailing directions) 도제공하였다. 18 중국은본사건에서중재절차에참여하지않았으며, 문제가된해양지형들에대해입장을표명하지도않았다. 중국은 2014년 12월 7일자 Position Paper에서도필리핀이중재재판에부탁한일부해양지형이간출지인가하는데대해논평하지않았다. 19 그러나재판소는중국의 황엔다오즉 Scarborough Shoal은모래톱 (sand bank) 이아니라섬 이라는성명과 20 중국은남사군도와인접도서인메이지쟈오즉 Mischief Reef 18 Ibid., paras, 293~295. 19 China s Position Paper, para. 24. 20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Republic of the Philippines, Record of Proceedings: 10th Philippines China Foreign Ministry Consultations (30 July 1998) (Annex 184); Ministry of Foreign Affairs, People s Republic of China, Chinese Foreign Ministry Statement Regarding Huangyandao (22 May 1997) (Annex 106). 284. 21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s. 298~300. 22 Note Verbale from the Permanent Mission of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to the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No. CML/8/2011 (14 April 2011) (Annex 201). See also Note Verbale from the Permanent Mission of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to the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No. CML/12/2009 (13 April 2009). 286; Ibid., para. 301. 23 Ibid., para. 302. 24 간출지는기점으로서직선기선의설정에활용될수없다. 다만등대나이와유사한시설이간조노출지에세워진경우및간출지사이의기선설정이국제적인승인을받은경우에는직선기선설정에활용될수있다고하였다. 해양법협약제7조 4항참조. 와융슈자오즉 Fiery Cross Reef에대해주권을갖는다 고한성명에주목하였다. 재판소는후자의성명은중국이 Mischief Reef와 Fiery Cross Reef를최소한영해를가지는수면위의지형으로보는것으로해석하였다. 21 한편중국은 중국의남사군도는영해, EEZ, 대륙붕에대해완전한권원을갖는다 고하여남사군도해양지형의해양에대한권원에대하여포괄적으로언급한바있다. 22 중국이각해양지형의지위에관하여구체적인입장을표명하지않았지만, 재판소는입수가능한최고의증거에입각하여특히중국이발간한해도와수로지에나타나있는지형에대한설명에주목하면서지형들의지위를평가하였다. 23 해양법협약제121조에따르면국제법상의섬은그것이인간의거주나독자적경제생활이불가능한암석이아닌한, 육지영토와마찬가지로자체의영해, 접속수역, 배타적경제수역, 대륙붕을가진다. 하지만간출지는섬이아니며자체의해양수역을가지지도못한다. 다만, 그것이본토나섬에서영해의폭을넘지아니하는거리에위치하는경우에그저조선이기선에연결될수있을뿐이다. 24 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3 111

영토해양연구 Vol. 12 조를근거로간출지는법적인관점에서육지영토의일부가아니라수중대륙괴의일부이므로, 간출지는전유의대상이되지못한다고하였다. 이는 ICJ가페드라브랑카사건에서간출지사우스레지는페드라브랑카나미들락스와는달리간출지에속하므로별도의고려가필요하다고하면서, 간출지사우스레지는그영해에지형이위치하고있는국가에속한다고한것과같은취지다. 25 중재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21조가섬이되기위한조건으로자연적형성을요구하듯이, 제13조는간출지의경우에도자연적형성을조건으로제시하였다고보았다. 이는해양지형의지위는자연적상태를기초로판단해야한다는것으로, 법적으로인공에의한변형을통해서해저를간출지로그리고간출지를섬으로바꿀수없다는의미다. 간출지는그위에건설된섬이나시설과관계없이해양법협약상간출지라는것이다. 26 남중국해의많은해양지형들은산호초위에시설물과활주로를갖춘거대한섬이건설되면서인공에의한근본적인개조 (substantial human modification) 를겪었다. 중재재판소에따르면, 해양법협약은해양지형의지위는인공개조이전의자연적인상태에기초하여평가하도록요구하고있다고하면서변형이전의상태에관한증거를기초로판단하였다. 27 결국재판소는 Scarborough Shoal,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 Johnson Reef, Mckennan Reef, Gaven Reef는고조지형 (high-tide elevations) 이라고하였으며, Hughes Reef, Gaven Reef, Subi Reef, Mischief Reef, Second Thomas Shoal는간출지라고하 였다. 그리고 Hughes Reef는고조지형인 Mckennan Reef와 Sin Cowe Reef 그리고 Gaven Reef(South) 는고조지형인 Gaven Reef(North) 및 Namyit Island, 그리고 Subi Reef는고조지형인 Sandy Cay로부터 12 해리이내에위치해있다고하였다. 28 25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Pulau Batu Puteh, Middle Rocks and South Ledge (Malaysia/Singapore), Judgment, ICJ Reports, 2008, paras. 298~299. 26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 305. 27 Ibid., para. 306. 28 Ibid., paras. 382~384. 112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Ⅳ. 섬의정의와조건 29 Ibid., para. 385. 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그곳의해양지형중에서만조시수면 위에존재하는해양지형의지위와해양에대한권원문제를검토하였다. 필리핀은청구 3에서 Scarborough Shoal이 EEZ와대륙붕에대한권원을창설하지못한다는것을, 청구 5에서는 Mischief Reef와 Second Thomas Shoal이자국 EEZ와대륙붕의일부임을, 청구 7에서는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는 EEZ와대륙붕에대한권원을창설하지못한다는것을선언해달라고요청하였기때문이다. 29 해양법협약은제121조제3 항에암석에관한규정을둠으로써해양법상의섬을 완전한권원을가진섬 (fully entitled islands) 과해양수역에대한권원이제한되는암석으로구분하였다. 그런데암석에관한규정은일반적인섬관련규정의예외규정이므로일반적인섬에관한정의와조건을먼저검토하는것이옳다. 해양법협약은제121조 1항에서섬을정의하여 섬이라함은바닷물로둘러싸여있으며, 밀물일때에도수면위에있는, 자연적으로형성된육지지역을말한다 고하였다. 따라서어떠한지형이국제법상의섬이되기위해서는그지형은자연적으로형성된것이어야하고, 육지로된지역이어야하며, 만조시수면위에노출되어야하고, 넷째물로둘러싸여있어야한다. 이외에섬의조건과관련해서는섬은상당한면적을가져야한다든가거주가가능하고경제생활이가능해야한다는주장이있었으나, 이러한조건들은해양법협약의섬의정의에는포함되지않았다. 30 해양법협약의섬의정의와관련하여보다구체적인검토가필요한부분은밀물일때에도수면위에있어야한다는조건, 자연적으로형성된것이어야한다는조건, 육지지역이어야한다는조건이다. 30 Clive Ralph Symmons, 1979, The Maritime Zones of Islands in International Law, Martinus Nijhoff, p. 20. 113

영토해양연구 Vol. 12 1. 자연적형성국제법상의섬은 자연적으로형성된 (naturally formed) 것이어야한다. 따라서해저나간출지위에등대와같은인공시설물이건립되어있는경우에도그러한지형들은국제법상섬의지위를가질수없다. 하지만 1930년헤이그성문화회의에서독일과네덜란드는인공시설물들도섬의지위를갖도록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독일은인공섬도그것이해저에고착되어있고그곳에주민들이살고있으면섬으로간주되어야한다고하였으며, 네덜란드는섬을 간조시수면위에존재하는모든자연적또는인위적인해저의융기 로하자고하였다. 31 제2위원회제2소위원회도섬이란 항상만조점위에존재하는물로둘러싸인육지지역 이라고하여인공시설물을간접적으로섬으로인정하였으며, 32 이러한정의는부유하는구조물이아니라면이를제외하지않는다고하여그입장을확인한바있다. 33 그러나이러한제2 소위원회의섬에대한정의는인공시설물을제외한자연적으로형성된지형만을법적인섬에포함시키고자하였던전문가위원회의견해와는다소상충되는것이었다. 헤이그성문화회의에서정리된입장은 1958년제1차유엔해양법회의에영향을미쳤다. 1956년국제법위원회특별보고자는그의두번째보고서에서섬을 항상만조점위에존재하는물로둘러싸여있는육지지역 이라고 정의하였으며, 34 국제법위원회는 영해제도 (Regime of Territorial Sea) 에관한최종안에서이를수용하였는데이는해저에건설된인공시설물을섬으로인정하는것으로해석될여지가있었다. 그러나인공섬에게영해를인정하게되면공해의자유가훼손되리라는우려에서인공시설물에해양수역을인정하기를거부하는입장은 1958년제1차유엔해양법회의에서도확인되어자연적형성을국제법상섬이되기위한조건으로확정하였다. 35 섬의자연적형성에관한조건과관 31 ibid., pp. 29~30. 32 E. D. Brown, 1984, The Areas within National Jurisdiction, Graham and Trotman, I 4 20. 33 S. Broder and J. Van Dyke, 1982, Ocean Boundaries in the South Pacific, University of Hawaii Law Review, Vol. 4, p. 31. 34 ILC Yearbook, 1956, II, p. 270. 35 Bowett, 1979, op. cit., p. 4. 114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련하여제기되는몇가지문제가있었다. 특히 Francois가국제법위원회회의에서섬의정의를작성하면서고려하였다는모래나자갈을인위적으로쌓아놓아형성된섬의지위문제등이거론되었다. 36 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21조와제13 조가섬과간출지에대하여공히자연적형성을조건으로제시한것에주목하였다. 이는해양지형의지위는자연적상태를기초로판단해야하는바, 인공에의한변형을통해서해저를간출지로그리고간출지를섬으로바꿀수없다는의미인것이다. 37 2. 육지지역 국제법상의섬은 육지지역 (area of land) 이어야한다. 국제법이오래전부터일정한지형을법적인섬으로인정하여그주변에해양수역을설치할수있게한것은그섬의육지영토와의유사성때문이었다. 섬은다른육지와마찬가지로최소한해저에고착되어있어야하고, 육지와유사한정도의항구성도가져야한다고보았던것이다. 38 섬이되기위한조건으로서의 육지지역 의의미그리고해저에고착되어항구성이있어야한다는조건의의미에대해서는사례별로검토가필요하 36 국제법위원회제260차회의에서특별보고자 Francois는섬의정의를작성함에있어다음과같은다섯가지사례들을고려하였다고하였다. 모래나자갈을인위적으로쌓아만든섬, 간조시만수면위에나타나는간출지에건설된등대, 항상수면위에존재하는지형에건설된등대, 등대이외의기술적시설, 바다에세워진파일 (pile) 위에건설된주거이다. ILC Yearbook, 1954, vol. I, p. 91. 37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 305. 38 Hodgson, 1973, op. cit., pp. 148~ 149. 다. 첫째는 정박해있는선박 의경우다. 등대선은자연적으로형성된것이아니므로섬의지위를가지지못하지만동시에등대선을비롯한정박해있는선박들은육지지역이아니므로섬의지위를가질수가없다. 둘째는해저시설물 (seabed installations) 의지위다. 해양법협약제60조와제80조는연안국은자국의 EEZ 와대륙붕에인공섬, 시설물, 구조물등을설치하여사용할수있으며주변에안전수역을설치할수있지만, 이들은섬의지위를가지지못한다고하였다. 셋째는다뉴브델타의갈대섬 (reed islands) 이나빙산과같은부 115

영토해양연구 Vol. 12 유하는자연적형성물 (floating natural formations) 의지위에관한것이다. 이미 1954년국제법위원회회의에서 Lauterpacht는섬을정의하는데논란의여지가있는문제들을제시하면서스피츠베르겐 (Spitzbergen) 섬과남극대륙주변의 단단한얼음 (solid ice) 의문제를제기한바있다. 39 이처럼빙산과같은자연적형성물의지위문제가제기되는것은이들의형성이자연적이고, 특히부유하는빙산에는흙이나바위와같은빙하의파편들이섞여있어서육지 (terra firma) 와유사한성분을지니고있는경우가종종있기때문이다. 그렇지만이러한부유하는형성물들은해저로부터분리되어있을뿐아니라바람과조류의영향에따라부유하는것이므로섬의자격을가지지못한다고보아야한다. 40 3. 만조시노출 국제법상의섬은 만조시노출 (emergence at high-tide) 되어있어야한다. 어떤일정한지형이국제법상의섬이되려면항상수면위에노출되어있어야하므로, 썰물때에는수면위에노출되었다가밀물때에는물속에잠기는간출지는국제법상섬의지위를가지지못한다. 국제조약과각국의실행그리고국제법원과재판소의입장을분석해보면, 오늘날법적인의미에서의섬이되기위한조건으로만조시노출이필요조건이라는데대해서는별다른이견이없다. 그렇지만섬제도의발달과정을살펴보면, 만조시노출을섬이되기위한조건으로하는데대해서반대가없지않았음을알수있다. 1930년헤이그성문화회의에서는 섬 에대한개념조차정립되지못하였던데다가간출지와의혼동으로만조시노출 을섬의조건으로삼는데어려움이있었다. 41 회의이전인 1929년설문지에대한답신을통하여밝혀진각국의입장을보면간출지도섬으로인정해야한다는주장과만조시수면에노출되는육지지역만을섬으로해야한다는주장이균형을이루고있었다. 42 결국 39 1920년파리강화조약은 Spitzbergen 섬주변에항상존재하는얼음에서영해를측정하는것을허용하지않았다. 40 Symmons, 1979, op. cit., p. 22. 41 Symmons, 1979, ibid., p. 42; Bowett, 1979, op. cit., p. 6. 116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1930년회의에서는이들양측주장간의타협을통하여만조시노출되는육지만을법적인섬으로하고, 간출지는그것이영해내에위치하는경우에는영해의한계를측정하는데사용할수있게하였다. 43 만조시노출에관한원칙은 1930년헤이그성문화회의와 1958년제1 차유엔해양법회의를거치면서확립되었으며, 1982년해양법협약에서도그대로유지되었다. 물론 만조시노출 이란조건의정확한의미도보다세밀한검토가필요하다. 섬이되려면그야말로항상수면위에존재해야하는것인지, 아니면하루 24시간중일정한시간이상만노출되어있으면되는지결정해야한다. 그러나각국의해양수역확대노력은만조시노출의정확한의미를파악하는데혼란을초래하고있으며, 국제법원과재판소들도이문제에대해 42 설문에대한답신에서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뉴질랜드등은간출지는섬에서제외해야한다고하였다. 반면에미국, 루마니아, 덴마크, 핀란드, 독일, 일본, 노르웨이등은간출지도섬의지위를가져야한다는입장이었다. 특히미국은간조시수면위에노출되는모든자연적으로형성된육지표면이섬으로간주되어야한다고하였다. Symmons, 1979, ibid., p. 230, note 281. 43 Bowett, 1979, op. cit., p. 6. 44 영국은 1858년자국이조사한바에따르면옛날에등대가있었던 House Rock 의표고는 19피트였으며, 1960년조사한바로는당시등대가위치하고있는보다낮은암석의표고는 17피트라고하였다. 그러나그후조사한바에따르면옛날등대가있었던 House Rock는통상적인대조 (mean highwater spring tide) 시에는단지수면위 0.2피트에불과하였다. Channel Pilot 1971 ed., p.108; Symmons, 1979, op. cit., p. 44. 명확한입장표명을유보하였다. 영불대륙붕사건에서영국은 Eddystone Rock의암석들중일부는통상적인대조 (mean highwater springs) 시에도항상수면위에존재하므로이들은섬의지위를갖는다고하였다. 44 반면에프랑스는국제관습법은섬과간출지를구분하는기준으로여러형태의조수사이에구분을하지않는다고하면서, 1년동안한번도바닷물속에잠기지않는지형만이섬의지위를갖기때문에 Eddystone Rock은간출지라고하였다. 45 당시중재재판소는 Eddystone Rock과서부채널지역의기점설정문제는직접적인관련이없다고하면서, Eddystone Rock이섬의지위를갖는가하는데대해서는명확한입장을밝히지아니한가운데 만조시노출 의기준에관해서는영국의입장이타당하다고하였다. 46 45 Anglo French Continental Shelf Case, Award, 1977, paras. 125, 138. 46 Symmons, 1979, op. cit., pp. 44~45. 117

영토해양연구 Vol. 12 Ⅴ. 암석관련규정의해석과적용 1. 배경과당사국의주장 해양법협약은제121조에서자연적으로형성되어만조시수면위에있는지형들을섬으로인정함으로써전통적인섬의정의를그대로승계하였으며, 대부분의섬은영해와접속수역 경제수역 대륙붕을가질수있게하였다. 하지만동조 3항에는일종의예외규정을두어인간의거주또는독자적인경제생활을유지할수없는암석은경제수역과대륙붕을가지지못한다고하였다. 문제는해양법협약제121조에서말하는암석이무엇인가하는것이다. 하지슨 (Hodgson) 같은일부학자들과국제수로국 (International Hydrographic Bureau) 에서는면적을기준으로암석을정의한바있으나, 면적만을기준으로섬의해양수역에대한권원을결정하는것을합리적이라고할수는없었다. 해양법협약은해양지형의면적이아니라 인간의거주가능성 과 독자적경제생활 을암석의판단기준으로제시하였으나그의미가명확하지않았다. 더구나인간의거주라는조건을현실적인거주가아닌거주가능성을의미하는것으로해석한다든가, 경제생활에등대를비롯한여러가지시설로인한경제적이익이나주변수역의해양자원까지포함시킨 다면경제수역과대륙붕을가질수있는섬의범위는크게확대될것이기때문이다. 해양법협약의암석에대한정의와조건이이처럼모호한것을이용하여일부국가들은자국의해양수역을확대하고자하였다. 이들은무인도와같은작은섬에대해영유권을주장하고그주변에광대한경제수역과대륙붕을설치함으로써국제사회로부터비난을받았으며주변국가와의분쟁을야기하였다. 일본은 2008년 11월 12일대륙붕한계위원회 (CLCS) 에자국의 Submission을제출하였는데, 제출문서를보면일본 47 Barry Hart Dubner and Jason Parent, 2007, When is a Rock an Island? Another Unilateral Declaration defies Norms of International Law, Mich. St. J. Int l L., vol. 15, pp. 519~521, 530. 오키노도리시마는수십년전까지는대략 6 개정도의암석을볼수있었지만, 1989년부터는 2개만이눈으로식별할수있게되었다. 이에일본정부는대략 2억 8천만달러를들여 82피트두께의외벽공사를하였으며, 나중에는작은암석주변에 5천만달러를들여티타늄그물을설치하였다. Norimitsu Onishi, 2005, Japan and China Dispute a Pacific Islet, N. Y. Times, July 10. 118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은오키노도리시마나미나미도리시마처럼대륙붕과 EEZ 를가질수없는 암석임이분명한해양지형주변에도대륙붕을설치하려시도하고있음을알게된다. 47 물론해양법협약의섬제도규정의취지를중시하여과거에경제수역과대륙붕을설치할수있는섬이라고주장해온조그만섬에대한주장을스스로철회한국가도있다. 영국은한때스코틀랜드서북쪽에위치한외딴섬로칼 (Rockall) 에대해그주변에경제수역과대륙붕을설치할수있다는입장이었으나, 1997년노동당정부가수립되면서정책을바꾸었다. 1997년 7월 31일외무장관쿡 (Robin Cook) 은의회에서영국의해양법협약가입방침을전하면서 영국의어업한계선은 St. Kilda를기점으로재정립되어야하는바, 로칼은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에비추어그러한한계선을위한유효한 (valid) 기점이될수없다 고하였다. 48 오늘날도서문제가국제법에서관심대상으로떠오른이유중의하나는섬이경제수역과대륙붕을통해연안국의해양수역을확대해가는유효한수단으로활용되고있기때문이다. 해양법협약제121조규정에비추어경제수역과대륙붕을가질수있는섬의경우에는큰문제가없지만, 동조 3 항에규정된암석에해당하는해양지형을활용하여무리하게해양수역을확대하고자하는경우에는주변국가와분쟁이발생할수있다. 더구나암석에불과한해양지형주변에경제수역이나대륙붕이설치되는경우에는그만큼인류의공동유산이축소되는결과를초래할수도있다. 남중국해사건에서중재재판소는필리핀의청구를반영하여해양법협약제121조를두가지측면에서검토하였다. 첫째, 필리핀의청구 3은 Scarborough Shoal은 EEZ와대륙붕을창설할수없다는선언을원하였는바, 재판소는이해양지형이해양법협약제121조에비추어볼때완전한권원의섬인지아니면암석인지검토해야하였다. 재판소는필리핀이청구한것이주권에관한결정이아니라는이유에서이사건은영유권에관한분쟁이아니라고보았으며, 해양수역에대한권원에관한분쟁과관할권중첩수역에서의경계획정에관한분쟁은다르다는이유에서이사건은 48 Clive R. Symmons, 1998, Ireland and the Rockall Dispute: An Analysis of Recent Developments, IBRU, Boundary and security Bulletin, Vol. 6, No. 1, pp. 78~84. 119

영토해양연구 Vol. 12 해양경계선획정에관한분쟁이아니라고하였다. 따라서재판소는청구 3 을심리할수있는관할권을가지고있다고판시하였다. 재판소는동일한근거에서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의 EEZ와대륙붕에대한권원을부인해줄것을요청하였던청구 7에대해서도동일한결론을내렸다. 49 둘째, 필리핀은청구 5, 8, 9에서자국의 EEZ에대한선언을청구하였는데, 이는남사군도의모든섬즉수면위지형들이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목적상암석에해당한다는일반적인결정을얻고자한것이다. 필리핀의청구 5는 Mischief Reef와 Second Thomas Shoal이자국 EEZ와대륙붕의일부임을선언해달라는청구였는데, 이는사실상필리핀이이들지형에서 200해리이내에위치한해양지형으로중국이관할권을주장하는모든해양지형의지위에관한분쟁을제기한것이었다. 재판소는이분쟁역시도서영유권이나해양경계획정에관한것이아니라고하였으나, Mischief Reef와 Second Thomas Shoal이완전한권원을가진섬으로결정되는경우에는경계획정문제가제기되어재판소의관할권이방해받을수도있었다. 따라서재판소는필리핀의청구 5에대한관할권결정을유보하였다. 50 중재재판소는필리핀이청구에서그법적인지위에대하여청구한해양지형이외에남사군도에서크고중요한다른섬들의지리와역사에대해서도검토하였다. 특히대만이점유하고있는면적이 0.43km 2 에달하는 Itu Aba( 太平島 ), 필리핀이점유하고있는면적이 0.41km 2 인 Thitu( 中業島 ) 는물론 West York, Spratly Island, North-East Cay, South-West Cay 등을검토하였다. 재판소는이러한 6개의큰섬들이모두해양법협약제121조 3 항이목적상암석이라면남사군도의다른섬들도완전한권원의섬이될수없다는입장에서이를검토한것이라고할수있다. 51 필리핀은제121조에암석에관한 3항이등장한것은보잘것없는섬에지나치게넓은해양관할권을부여하는것을피하기위한것이라고주장하였다. 특히 49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 392. 50 Ibid., para. 393. 51 Ibid., paras. 400~407. 120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제121조 3항의해석과관련하여, 암석의의미를지질학적 지형학적특성에비추어해석하는데반대하고, 암석의면적기준을인간거주와경제생활이가능한최소면적인 1km 2 이하로제시하였으며, 인간의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에대하여엄격한조건을제시하였다. 필리핀은각국의 3항에대한해석에는차이가있지만, 사람이살지않고, 작고, 황량한작은섬에완전한해양수역을부여하면아니된다는데대해서는합의가이루어진상태라고하였다. 아울러영국의 Rockall 주변어업수역포기등의국가실행과일본이오키노도리시마주변광대한대륙붕에대해대륙붕한계위원회 (CLCS) 에 Submission을제출한데대한중국정부의항의를상기시켰다. 52 필리핀은필리핀의청구 3과 7에등장하는 4개의해양지형들은당연히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암석이라고하였다. 필리핀은각국이촬영한항공사진과위성사진, 수로지등을참조하여이들은인간거주를지원할수없는암석이라고하였다. 아울러필리핀은 Itu Aba, Thitu, West York 등남중국해의비교적커다란해양지형도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을유지할수없다고하였다. 53 중국은, 필리핀의청구 3, 5, 7과관련하여, 포지션페이퍼에서필리핀은중재재판소에영유권문제이전에중국의해양관할권주장의해양법협약과의합치문제를다루어주도록요청함으로써말앞에마차를갖다놓았다고비판하였다. 54 중국은해양에대한권원을향유하는것은해양지형을소유하고있는국가이지해양지형자체가아니라고도 52 Ibid., paras. 410~419. 53 Ibid., paras. 423~426. 54 China s Position Paper, para. 18. 55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China, Briefing on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Xu Hong Director General of Department of Treaty and Law, 19 May 2016. 56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paras. 446~448. 하였다. 55 중국은필리핀이중국이현재주재하고있는 9개해양지형의지위에대한결정만을요구한것도불만이었다. 남사군도에대한중국의해양권원에대하여결정하려면모든남사군도의해양지형을함께다루어야한다고하면서, 현재대만이지배하고있는이투아바 ( 태평도 ) 와필리핀이점령하고있는해양지형이빠져있는것을비판하였다. 56 중국은해양법협약제121조를필리핀의청구에포 121

영토해양연구 Vol. 12 함된해양지형에적용하는문제에대해서는명확한입장을표명하지않았다. 중재재판소는일부해양지형의지위와협약제121조에대한중국의입장은그국내법과외교교환공문, 공적인성명등에서파악할수있다고하였다. 57 중국은일본의오키노도리시마주변확장대륙붕주장과관련하여해양법협약제121조 3항규정의운용에관하여심각한우려를표시하고자신의입장을개진하였었다. 중국은 2009년 2월 6일자로유엔사무총장에게보낸 Note Verbale에서, 국가들은 200해리이원대륙붕의외측한계를설정할권리와함께인류의공동유산인국제심해저의범위를준수하여국제공동체전체의이익을침해하지아니할의무도가진다고하였었다. 중국은 2011년 8월 3일 Note Verbale에서는, 자국은오키노도리는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을유지할수없다고주장해왔다고하면서, 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암석인오키노도리는 EEZ와대륙붕을가질수없다고주장하였었다. 58 2. 해양법협약제 121 조 3 항의문언해석 (1) 암석의구성성분중재재판소는제121조 3항에암석이란용어를사용한것이어떤지질학적이나지형학적기준을염두에둔것은아니라고하였다. 이러한입장은 ICJ의니카라과대콜럼비아사건에대한판결에서도표명된바있다. ICJ 는산호초인콜럼비아의 Quitasueno는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암석이라고하였는데, 국제법상섬의정의에서그지질학적성분은고려대상이아니라고하면서, 그지형이산호로구성되어있다는사실은관련이없다고하였다. 59 아울러어떤해양지형의명칭역시암석여부에영향을미치지아니한다고하였다. 항상물속에있는해양지형에도 섬 이나 암석 과같은명칭이사용되는경우가많지만, 그러한명칭이해양지형의지위를결정해주지는않는다는것이다. 60 57 Ibid., paras. 449~450. 58 Ibid., paras. 451~457. 59 Nicaragua v. Colombia, Judgment, ICJ Reports, 2012, para. 37; Ibid., paras. 479~480. 60 Ibid., para. 482. 122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2) 유지능력중재재판소는 유지 (sustain) 란식량이나물등을공급하여생명을지탱하게하는것이므로, 인간의유지는먹고사는데필요한식량과물등을공급하는것이라고하였다. 61 유지 는지속적인시간동안사람들을생기가있고건강하게지켜주는것이며, 경제생활과관련해서는어떤활동을일정한기간동안계속하게하는것이다. 제121조 3항의규정은인간거주와경제생활의유지능력에관한것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다. 중요한것은그지형이실제로인간거주와경제생활을유지하고있는가하는것이아니라객관적으로그지형이인간거주나경제생활에적합하고 (apt), 그럴능력이있으며 (able to), 도움이되는가 (lend itself to) 하는것이다. 따라서재판소는어떤해양지형에현재사람이거주하지않는것이사람이거주할수없다는증거는아니며, 현재경제생활이없는것이경제생활을유지할수없다는증거가아니라고하였다. 아울러중재재판소는과거의인간거주와경제생활에관한역사적증거는지형의능력을확정하는데관련이있다고하였다. 62 61 Ibid., paras. 485~486. 중재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 유지 의일반적인의미는다음세가지요소를가진다고보았다. 첫째는지원 (support) 과필수품의공급이다. 둘째는시간적요소인데, 지원과공급은일정한기간동안이루어져야하며단발성이거나단기간의것이어서는아니된다. 셋째는질적인요소로 적절한기준 을충족하는것이다. Ibid., para. 487. 62 Ibid., para. 483. 사람이많이사는육지에가까운섬이라도사람이거주하지아니하였거나경제생활이유지되지아니하였다면, 그지형은사람의거주가불가능한섬이라고할수있다. 반면에, 사람들이역사적으로어떤섬에거주하였거나그섬이경제활동의근거지였다는증거는당해지형의능력을보여주는증거가될수있다. 63 Ibid., para. 489. (3) 인간거주중재재판소는협약제121조 3항에사용된인간의 거주 (habitation) 는질적인요소 (qualitative element) 를포함하는바, 그용어에는 settlement( 정주 ) 와거주지 (residence) 개념이반영되어있다고하였다. 어떤해양지형에소수의사람들이그냥주재 (presence) 하는것은항구적 (permanent) 이거나습관적인 (habitual) 거주지 (residence) 가아니며여기에서말하는 거주 에해당되지않는다는것이다. 따라서 인간의거주 는사람들이어떤해양지형에서살아가는데필요한모든요소를요구할뿐아니라, 단순한생존이아닌사람들의인간생활과생계에충분한조건을요구하는것이라고한다. 63 123

영토해양연구 Vol. 12 물론인간거주와생계수단의형태는매우다양하며, 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목적상특정한문화나거주형태를상정한것은아니다. 그러나어떠한거주이건필요한요소는있는바, 인간거주를위하여당해해양지형은최소한사람들이장시간 (for extended period of time) 항구적 습관적으로머물게할수있는식량, 물, 주거를 지원, 지탱, 공급 (support, maintain, provide) 할수있어야한다. 64 재판소는협약제121조 3항에서말하는 거주 는일반적으로사람들로이루어진그룹이나공동체 (community) 의해양지형거주를의미한다고하였다. 관련조문에사람들의숫자가명시되는않았지만, 인간거주가한사람의거주를상정한것은아니라는것이다. 65 (4) 독자적경제생활독자적경제생활이란조건과관련하여, 중재재판소는 경제적 (economic) 의일반적인의미는물질적인자원의개발및규제와관련이있으며상품과서비스의생산 판매 구매 교환에관한절차및제도와관련되어있다고하였다. 그리고여기에서 생활 (life) 은자원의단순한존재로는불충분하며자원을개발 분배하기위한 그곳사람들의일정한수준의활동 (some level of local human activity) 을요구한다고보았다. 특히재판소는 경제생활 은 유지 의시간적요소에유념하여이해되어야한다고하면서, 단한번의거래 (one-off transaction) 나단기사업은지속적인경제생활에해당되지아니한다고하였다. 66 재판소는조문의 독자적 (of their own) 은해양지형자체 ( 또는관련해양지형그룹 ) 가주로외부자원의유입에의존하지아니하고, 주민의관여함이없이이루어지는채굴활동 (extractive activities) 만을위한것이아닌, 독립적인경제생활을지원할수있는능력을가져야한다는의미라고하였다. 경제활동이어떤지형의경제생활이되려면경제활동이이루어지는곳주변의자원은외부에서수입된것이아닌그곳의자 64 Ibid., para. 490. 65 Ibid., para. 491. 하지만중재재판소는협약제121조 3항이 인간의정주 (settled human habitation) 와 인간의단순한체류 (mere presence of humans) 를구분하는기준을제시한것은아니며, 인간정주형태 (more settled mode of human habitation) 유지에필요한지형의물리적특성을밝힌것도아니라고하였다. Ibid., para. 492. 66 Ibid., para. 499. 124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원이어야하며, 오직외부자원의지속적인투입을통해이루어지는경제활동은 독자적경제생활 에해당하지아니한다는것이다. 그러한활동은어떤지형의 독자적인 경제생활이아니며궁극적으로외부로부터의지원에의존하는경제생활이기때문이다. 같은맥락에서, 어떤해양지형이나그주민에게아무런이익도돌리지아니하는 순전히채굴적인경제활동 (purely extractive economic activities) 도그지형의독자적인경제생활에이르지못한다고하였다. 67 해양지형주변의해양수역즉영해, EEZ, 대륙붕에서이루어지는경제활동은협약이말하는 경제생활 에해당될까? 재판소는 EEZ나대륙붕에서이루어지는경제활동은제외된다고보았다. 협약제121조 3항은해양지형이 EEZ나대륙붕을갖기위한조건을규정한것인데, EEZ나대륙붕에서의경제활동의존재만으로모든수역을가질수있다면그것은순환론이고어색한일이라는것이다. 하지만영해의경우에는다르다. 여기에서는순환론은적용되지아니하며모든섬들은제121조 3항에관계없이영해를창설할수있기때문이다. 영해에서의경제활동은그것이주민을통해서든아니면다른방법에의해서든해양지형에연계될수만있으면당해지형의경제생활의일부를구성할수있는것이다. 68 (5) 인간거주또는경제생활어떤해양지형이 EEZ와대륙붕을가지려면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모두유지할수있는능력이있어야하는지아니면한가지만충족해도되는지도의문이었다. 필리핀은논리상부정적인 or 에따른결합은누적 67 Ibid., para. 500. 68 Ibid., para. 503. 조그만암석주변영해에서조업하지만암석을사용하지아니하는원양어민은당해지형의독자적경제생활이란조건을충족시킬수없다. 당해지형에인접한해저에서광물자원을추출하지만그지형을이용하지아니하는기업도마찬가지다. 적인요건을형성하는바그것은본질적으로 2중부정이므로, 어떤지형이 EEZ와대륙붕을가지려면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이모두가능해야한다고하였다. 재판소도이규정의해석에서논리의중요성과관련하여필리핀과같은입장이었으나, 필리핀의결론에는동의하지않았다. 필리핀이주장하듯이, 그문장 125

영토해양연구 Vol. 12 은누적적인조건을만들어내지만, 그문장의부정적인전체적구조는누적적인기준으로인해당해지형이그러한해양수역들을부정당하는환경을서술한다는것이다. 따라서재판소는그논리적결과는어떤해양지형이인간거주또는독자적경제생활이가능하면 완전한권원의섬 (fully entitled island) 이된다는것이라고하였다. 69 그런데재판소도인정하였듯이, 경제활동은사람들이수행하고경제활동이나생계유지가불가능한지역에는사람들은거의거주하지않는다. 이는협약제121조 3항의문법적구조에관계없이인간거주와경제생활이란두가지개념이실제로깊이연결되어있음을보여준다. 그렇지만인간의거주는유지할수있지만경제생활지원을위한자원을제공하지못하는지형이있는가하면, 경제생활을유지할수있게하지만인간의거주를유지하는데필요한조건을결여하고있는지형이존재할수는있다. 70 3. 해양법협약의문맥, 목적, 준비문서검토 중재재판소는암석과 완전한권원을가진섬 은문맥상해양지형을 완전한권원을가진섬, 암석, 간출지, 수중지형으로나누는분류체계가운데있다고하였다. 따라서제121조 3항은동조다른규정및제13조간출지에관한규정과의관련하에해석되어야하며, 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은어떤해양지형이 EEZ와대륙붕을거부당하는조건에관한것이므로, 해양수 역과 EEZ 제도도입의목적도고려하여해석되어야한다고하였다. 재판소는해양지형의지위는그자연적조건을기초로평가되어야하므로간출지나해저가법적인섬으로바뀔수없듯이암석도간척등을통해서 완전한섬 이될수는없다고도하였다. 만일국가들이기술과물질을활용하여인간거주나경제생활의유지가불가능한암석을 완전한권원을가진섬 으로바꿀수있다면, 제한규정 (provision of limitation) 으로 69 Ibid., paras. 493~494. 70 Ibid., para. 497. 본문에서후자의경우로, 제3차유엔해양법회의당시 Micronesia 대표가말하였듯이, 여러개의섬들이합력하여전통적인생활방식을유지해가고있는경우를들수있다. 하지만필리핀은그러한가능성을인정하는해석은 EEZ 제도의목적즉당해수역을창설해내는지역의주민들에게권리와의무를부여하는 EEZ 제도의목적에서어긋나는것이라고하였다. 126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서의제121조 3항의목적은좌절되리라는것이다. 71 재판소는협약내에서의맥락과제121조규정과 EEZ 개념간의관련성을고려하였다. 특히 1958년제네바협약에서연안국의권리와관할권은영해와대륙붕에머물렀고해양법협약제121조 3항같은조문이없었던것을감안할때, 암석관련규정의등장은 EEZ에의한연안국관할권확대와밀접한관련이있다고보았다. 그리고 EEZ 제도의목적은연안국의관할권을확대하고당해수역의자원을연안국주민들의이익을위해서보존하는데있다고하였다. 72 또한해양법협약의 EEZ에관한규정들은타협을통해마련된것이며, 개발도상연안국 (coastal developing states) 국민들의이익과연안국관할권의확대에반대해온전통적인해양국가와원양어업국가의이익간의균형을모색한결과라는것이다. 73 재판소는협약제121조 3항은 EEZ가지나치게확대되는것을방지하는데기여하였다고하였다. 이조문은작은 (tiny) 해양지형들이불공정하게그리고형평에어긋나게해양공간에대한권원을만들어낼수없게한것이다. 74 중재재판소는협약제121조 3항의채택에이르게한상황에대하여검토하였다. 재판소는 1971년부터섬의정의와해양수역권원문제가당시새로이떠오르고있었던 광역해양권원체제 (regime of expanded maritime entitlements) 의맥락에서새로운관련성을갖게되었다고하였다. 특히 1971년심 71 Ibid., paras. 508~509. 72 Ibid., paras. 512~513. 73 재판소는개발도상국의수요를강조한것은해양법협약서문에도나타나있다고하였다. 협약은서문에서 이러한목적의달성이인류전체의이익과필요, 특히연안국이거나내륙국이거나관계없이개발도상국의특별한이익과필요를고려한공정하고도공평한국제경제질서의실현에기여할것이라는점을유념하고 라고하였다. Ibid., para. 515. 74 Ibid., para. 516. 75 Ibid., para. 526. 해저위원회회의에서몰타의 Pardo 대사는그러한권원을모든섬에게부여할가능성에대하여우려하였는바, 200해리관할권한계가사람도없는외딴작은섬에대해서도인정된다면, 국가관할권너머해양공간에대한국제적관리의효율성은심각하게훼손되리라는것이었다. 75 1974년카라카스에서개최된제3 차유엔해양법회의제2회기에서는후일제121조 3항이된규정에대하여포괄적인협상이진행되었다. 당시섬들사이에구분을위한방식에합의는것이실제로불가능하다 127

영토해양연구 Vol. 12 고하여구분에반대하는국가들이있었다. 그럼에도 1975년제네바에서개최된제3 회기에서, 이문제는비공식교섭그룹 (informal consultative group) 에넘겨졌으며, 여기에서준비한비공식단일교섭문 (Informal Single Negotiating Text) 은 rocks which cannot sustain human habitation or economic life of their own 라는예외규정을도입하였다. 76 하지만, 재판소는협약제 121조의준비문서 (Travaux Preparatoires) 는동조 3항의해석에서불완전한지침이라고하였다. 특히최종적인조문을만들어낸중요한타협 (compromise) 은 1975년의비공식협의를통해서이루어졌는데, 거기에관한기록은존재하지아니한다고하였다. 그럼에도재판소는교섭의역사로부터몇가지일반적결론을이끌어낼수있다고하였다. 특히 121조 3항은제한규정으로섬이지나치게넓은해양공간을창설하지못하게하는조건을부과하며, 그러한조건이란인류공동유산인심해저에대한침해를방지하고해양공간의형평에어긋나는분배를회피하기위한것이라고하였다. 77 4. 해양법협약제 121 조 3 항해석의결론 중재재판소는해양법협약의문언과문맥, 목적은물론협약제121조 3항이등장하게된배경등을고려하여당해조문의해석과관련하여다음과같이결론지었다. 78 첫째, 암석이란단어를사용하였다고하여서당해규정이단단한바위로이루어진해양지형에만적용되는것은아니다. 둘째, 해양지형의지위는, 인간의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능력의향상을위한외부로부터의부가 (additions) 나변경 (modification) 없이, 그자연적능력 (natural capacity) 에기초하여평가되어야한다. 셋째, 인간거주 (human habitation) 와관련하여가장중요한요소는거주가단기적인것이어서는아니된다는것이다. 인간거주는그곳에집을가지고있는 안정 76 Ibid., paras. 530~531. 당시영국대표는해양지형의면적, 인구, 거리에근거하여권원에차등을두는데의문제점을지적하였고, 멕시코대표는섬관련상황의엄청난다양성을커버할수있는특별규칙을작성하는것은너무어려운일이라고하였다. 77 Ibid., para. 535. 78 Ibid., para. 539. 128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79 Ibid., para. 542. 80 Ibid., para. 543. 81 Ibid., para. 544. 적인인간공동체 (stable community of people) 에의한거주를포함하는것으로보아야한다. 하지만그러한공동체는꼭커야하는것은아니며, 멀리떨어진환초에서는적은사람들과가족그룹으로도충분하다. 특히유목민의어떤지형에의주기적이고 (periodic) 또는습관적인거주는여기에서말하는거주가되며, 원주민의존재는그것으로충분하다. 79 넷째, 독자적경제생활 (economic life of their own) 은인간거주와연결되어있으며, 대부분의경우이두가지조건은병존한다. 그런데제121조 3항은현재경제적가치를가지고있는것보다경제생활의유지에대하여언급하였다. 재판소는문제의 경제생활 (economic life) 이란일반적으로어떤지형에거주하고있거나그곳에집을가지고있는주민들 (human population) 의생활과생계를의미한다고하였다. 특히제121조 3항은 독자적인 경제생활을요구하므로, 경제생활은해양지형자체를지향하는것이어야하며영해주변의수역이나해저에만초점이맞추어져있으면아니된다. 80 다섯째, 제121조 3항의문맥을보면인간거주또는독자적경제생활을유지할수있는능력은섬에게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권원을부여하는데충분하다. 하지만해양지형은그것이 안정적인인간공동체 에의해거주되고있는경우에독자적경제생활을가지고있는것으로보았다. 여기에는한가지예외가있는데, 주민들이관련해양지형의네트워크를통해서자신들의경제생활을유지해가는경우다. 복수의해양지형을사용해서만어떤지역에거주할수있는주민들은그거주가 단일의해양지형에의하여 유지되지않는다고해서그해양지형에거주하는데실패한것으로보지않는다. 마찬가지로, 그생계와경제생활이여러해양지형에걸쳐있는주민들은, 그러한지형들에직접거주가이루어지지않았다고해서그해양지형들이독자적경제생활을유지하고있음을부인당하지아니한다고하였다. 81 여섯째, 제121조 3항은당해지형에서현재또는이제까지사람의거주나경제생활이행해지고있는가하는데관한것이아니며, 인간거주나독자적경제생 129

영토해양연구 Vol. 12 활을유지할수있는해양지형의능력에관한것이다. 해양지형의능력은객관적기준에따라판단되며, 이는주권문제와는관련이없다고하였다. 82 일곱째, 해양지형의인간거주또는독자적경제생활능력은사례별로 (case-by-case) 평가되어야한다. 재판소는지형의자연적능력에기여하는주요요소들을평가하였는데, 그런요소에는오랜기간일단의사람들이 (a group of persons) 살아가는데충분한양의물과식량, 주거가포함된다. 또한어떤지형에거주하고그곳에서경제생활을영위하는데관한조건에영향을미치는요소인기후, 지형의다른지역이나주민에의근접성, 지형에서의생계에대한잠재적영향등도그러한요소에포함된다. 83 여덟째, 어떤해양지형의능력은 작은도서군 (a group of small island features) 의집단적인간거주와경제생활유지능력의잠재력을감안하여평가되어야한다. 재판소는원격도서주민들은자주많은섬들특히때로는아주멀리떨어져있는섬들을생계유지에사용하고있음에유념하였다. 그러한도서들이전통적인생활형태를유지해가면서인간거주를유지하는네트워크를형성하고있는경우에는복수의섬들의역할을외부공급으로보지않는다고하였다. 84 아홉째, 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해석에관한재판소의결론에비추어보면어떤해양지형의객관적 물리적조건에관한증거는그임무를수행하는데는유효하였다. 물리적조건의증거들은분명히어떤범주에속하는지형들을분류하는데는충분하였지만, 그경계선에위치한지형을분류하는데는충분하다고할수는없었다. 85 중재재판소는보다신뢰할수있는해양지형의능력에관한증거는역사적사용에관한것이라고하였다. 사람들은매우어려운상황인오지에서도 공동체를형성해왔는바, 어떤해양지형에관한역사적기록들이그곳에안정적인공동체가발달된적이없었다는것을보여준다면그합리적인결론은그자연환경이공동체형성에부적합한것이고따라서그 82 Ibid., para. 545. 83 Ibid., para. 546. 84 Ibid., para, 547. 85 Ibid., para. 548. 130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지형은인간거주를유지할수있는능력이없다는것이다. 재판소는그러한상황에서도인간거주가전쟁, 오염, 환경피해등으로인하여방해받은것은아닌지에대한검토는필요하다고하였다. 그러한상황이아니라면역사적으로인간공동체를유지한적이없는지형은인간거주를유지할수있는능력을가지지못한것으로보아야한다고재판소는결론지었다. 86 이어서중재재판소는어떤해양지형에현재사람이거주하고있거나역사적으로거주한적이있었다면, 그러한거주가외부의지원 (outside support) 을통하여가능해진것은아닌지검토가필요하다고하였다. 외부의지원이매우중요한것이어서거주를위한필수적인조건인경우에는그지형은인간거주를유지할수있는것이아니기때문이다. 이러한맥락에서, 재판소는외부로부터공급되는순수한공무원이나군대는어떤지형이인간거주를유지할수있다는증거가되지못한다고하였다. 해양법협약제121조 3항규정이국가들의과도하고불공정한주장을제한하기위한것임을감안하면, 본래인간거주를유지할수없는지형에영토와그해양수역에대한주장을제기하기위하여사람들이배치되었다면그것은인정할수없다는것이다. 87 86 Ibid., para. 549. 87 Ibid., para. 550. 5. Scarborough Shoal,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 Gaven Reef, Mckennan Reef 와남사군도기타해양지형에의적용중재재판소는 Scarborough Shoal은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목적상 암석 이라고하였다. Scarborough Shoal은만조시노출되는 5~7개의암석으로구성되어있다. Scarborough Shoal의수면위돌출부는매우작으며, 이는과거의사진에서도확인된다. 그들이 자연적으로형성된상태에서 인간거주를유지할수없음은분명하다. 거기에는식수, 식물, 거주공간 이없으며다른해양지형에서멀리떨어져있다. Scarborough Shoal이전통적으로여러국가어부들의어 131

영토해양연구 Vol. 12 장으로사용되어왔지만, 재판소는주변수역에서의경제활동은그것이당해지형의경제생활을형성하는것이되려면그해양지형과명확한연계를가지고있어야한다고하였다. 그환초에서작업하던어부들이그환초의 high-tide rock 들을사용하였다는증거는없으며, 어업이외에다른경제활동을하였다는증거도없다. 따라서 Scarborough Shoal이독립해서독자적인경제생활을유지할수있다는증거는없다고하였다. 88 중재재판소는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 Gaven Reef, Mckennan Reef도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목적상 암석 이라고하였다. 이들은모두수면위의지형이기는하지만대부분식수, 식물, 거주공간이없거나부족하여, 자연상태에서는인간거주나경제생활의유지가불가능한작고척박한지형들이기때문이다. 중국은 Johnson Reef, Cuarteron Reef, Fiery Cross Reef, Gaven Reef(North) 에서매립작업을진행하고시설물을건설하였지만, 그것은오직준설과만조시에는물속에가라앉는환초에건설한것으로외부로부터의공급에의존하는것이다. 이처럼중국은일부해양지형에시설물을건설하고대대적인간척사업을진행하였으나, 재판소는이러한중국의건설작업은그것이비록대규모였다고하여도해양지형의지위를암석에서 완전한권원을가진섬 (fully entitled island) 으로변모시킬수없다고하였다. 89 중재재판소는중국이 중국은전체로서의남사군도에기초하여영해, EEZ, 대륙붕을가진다 고성명을발표한것과그포지션페이퍼에서필리핀이남사군도에서몇개의지형만을선택해서그해양권원에대해결정해주도록청구한것을비판한사실을상기하였다. 재판소는중국이인간거주와경제생활이란기준의검토시주민들이 밀접하게관련된해양지형네트워크 (network of closely related maritime features) 를통하여유지할수있음을고려한것은아닌가하는것과남사군도가군도기선또는직선기선제도에 포함되는것으로본것은아닌가하는점을고려하였으나, 이에대한재판소의입장은부정적이었다. 90 중재재판소는 Itu Aba, Thitu, West York, Sprat- 88 Ibid., paras. 554~556. 89 Ibid., paras. 557~570. 90 Ibid., paras. 571~576. 132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91 Ibid., para. 578. 92 Ibid., para. 580~581. ly Island, South-West Cay, North-East Cay 등남사군도에서보다중 요한지형들의지위도검토하였다. 현재남사군도의모든섬들은어떤국가에의해서든통제되고있고시설물과인원이배치되어있다. 그러나이러한거주는성격상압도적으로군사적또는정부적인것으로외부의지원에의존하는것이다. 더구나상당수섬들은크게개조되었는바, 재판소는 EEZ의등장이나인공에의한변형이전의해양지형상황에대한역사적증거 (historical evidence) 들이당해지형의인간거주와경제생활능력에대한보다신뢰할만한지침이된다고하였다. 91 남사군도여러섬의우물의존재는일련의보고서들이이를확인하였다. 즉 1868년 China Sea Directory는 Itu Aba, Thitu, North-East Cay의작은우물들의존재를언급하였다. 수질에대해서는양호 (Itu Aba), 음용가능하나염분이있음 (Thitu), 약간오염 (South-West Cay) 등다양한보고들이있었다. 92 특히상업적목적에서 1939년작성된일본의이투아바조사보고서에따르면그곳에는상당한양의식수가있다고하였다. 재판소는남사군도의섬에는작은우물들이존재하였으며, 수질은오늘날의음용수기준에미치지는못하지만시간과강우등의조건에따라달랐으며, 이러한민물은우수와함께과거에소수의사람들의생활을지원한것으로보았다. 93 역사적인기록들은남사군도의비교적큰섬들은역사적으로경작된적이있음을보여준다. 1868년 China Sea Directory는이투아바는작은나무와관목으로뒤덮여있으며, Thitu도관목으로덮여있었다고하였다. 시간이가면서 20세기초그곳섬들의식물수준도높아지는데, 일본은상업적목적에서이투아바에바나나, 파파야, 파인애플, 야자등과실수들을식재하였다. 94 재판소에제출된기록들은소수하이난출신어민들의일관된주재 (presence) 를시사해주었다. 1868년 China Sea Directory에서 Tizard Bank 관련기술에대한주석에따르면, 해삼과거북을채집하며생계를이어온하이난어부들이이들섬에서발견되는데, 그들중의일 93 H. Hiratsuka, 1939, The Extended Base for the Expansion of the Fishery Business to Southern Area: NewSouthern Archipelago On-Site Survey Report, Taiwan Times, May; Ibid., para. 584. 94 Ibid., paras. 585~586. 133

영토해양연구 Vol. 12 부는그곳에여러해체류하였으며, 하이난에서출발한정크선들이쌀과기타생필품들을싣고그곳을방문하여어민들의해삼및기타물건들과교환하였다고한다. 또한 1868년 China Sea Directory에따르면하이난출신중국어부들이 North Danger Reef의암초에자주나타나서해삼과거북을포획하고북동쪽암초의중앙에있는우물에서식수를조달하였다고하였다. 95 상기한증거에도불구하고재판소는남사군도에서인간공동체 (human community) 와같은것을발견할수없었으며, 그곳의섬들은임시대피소나어민들의조업기지또는광부와어부들의임시주거였을뿐이었다고하였다. 재판소는 EEZ의도입목적은작은해양지형에지나치게넓은해양수역을도입하는데있지아니하다고도하였다. 결국재판소는 Itu Aba, Thitu, West York, Spratly Island, South-West Cay, North-East Cay 등은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의유지가불가능하다고보았으며, 남사군도의섬중에는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해양지형은존재하지않는다고하였다. 96 Ⅵ. 맺음말 제3 차유엔해양법회의에서채택된해양법협약제121조는섬제도에관한규정인데, 섬의정의에대해서는 1958년영해협약의관련규정을계승하였다. 그러나새로이암석에관한규정을도입함으로써섬에대한차별화를시도하였는바, 섬의정의에내재해있는문제점은물론암석과간출지의정의와지위를둘러싸고논란이그치지않았다. 더구나해양법협약이 EEZ 와광역대륙붕을도입함으로써국가들의해양수역에대한욕구가분출하는가운데, 국제사법재판소를비롯한국제법원과재판소들은완전한섬과암석, 간출지의조건을제시하고해양지형의해양수역에대한권 95 Admiralty Hydrographic Office, 1868, China Sea Directory, Vol. II, p. 71; Ibid., paras. 597~598. 96 Ibid., paras. 625~626. 134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원문제를다루는데소극적이었기때문에, 섬제도는국제해양법의최대의약점으로남아있었다. 이런상황에서유엔해양법협약부속서 VII에따라설립된제7 부속서중재재판소가남중국해중재사건본안에대한 2016년 7월 12일판정에서섬등해양지형문제를깊이가있고과감하게다룬것은의미가있는일이다. 남중국해분쟁에서문제가된해양지형들은일반적인섬과간출지그리고 EEZ와대륙붕에대하여완전한권원을가지는섬과그렇지못한암석의경계선에위치한것이었다. 그리하여본고에서는먼저섬제도의발달과정과섬의정의를고찰하였다. 남중국해분쟁에서중재재판소는간출지문제를깊이있게다루었다. 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3조를근거로간출지는수중대륙괴의일부이므로전유의대상이되지못한다는사실을확인하였다. 또한해양법협약제121조가섬이되기위한조건으로자연적형성을요구하듯이, 제13조는간출지도자연적형성을조건으로제시한것으로보았다. 이는해양지형의지위는자연적상태를기초로판단해야한다는것으로, 법적으로인공에의한변형을통해서해저를간출지로그리고간출지를섬으로바꿀수없다는의미다. 국제법상도서제도와관련하여남중국해중재판정이많은주목을끌게된이유중의하나는중재재판소가섬과암석의문제를정면으로다루었기때문이다. 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규정을세밀하게해석하고다양한고려사항들을검토하였는데, 특히인간의거주또는독자적경제생활에관한조건을매우엄격하게분석하고해석하였다. 그렇지만남중국해사건에대한판정에서중재재판소가취한입장특히완전한권원을가진섬과암석을구분하는기준과관련하여재판소가제시한입장이국제사회에서보편적인규범으로받아들여질수있는지는시간을갖고살펴보아야한다. 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은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을유지할수없는섬을암석이라규정하고 EEZ와대륙붕에대한권원을부인하였는데, 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이라는조건에대하여재판소는매우엄격한기준을적용하였기때문이다. 인간거주는단기적인것이어서는아니되며 135

영토해양연구 Vol. 12 안정적인인간공동체 (stable community of people) 에의한거주여야한다고하고, 독자적경제생활은해양지형자체를지향하는것이어야하며주변의수역이나해저에초점이맞추어져있으면아니된다고하였는데, 이러한기준은기존의국가들의실행에비추어보면지나치게엄격한것일수있다. 이는재판소가동규정이어떤해양지형에서현재또는이제까지사람의거주나경제생활이행해지고있는가하는데관한것이아니라인간거주나독자적경제생활을유지할수있는해양지형의능력에관한것이라고해석함으로써작게나마탈출구를제시하였지만, 재판소의기본적인입장변화여부는해양법협약체결당시의원론적인입장을충실하게따른것이라고할수있다. 문제는세계많은국가들이이미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완전한권원을가진섬과가질수없는암석간의구분을회피하고있고, 실제로영국의 Rockall 섬등을제외하고는자국소유의법적인섬의 EEZ와대륙붕을포기한사례를거의찾아볼수없는상황에서, 남중국해중재판정으로국가들의해양정책이급반전을이루어낼수있을지그귀추가주목되는것이다. 특히이번사건의당사자인중국은물론이고오키노도리에대하여과도한주장을하고있는일본그리고미국역시만조시수면위의지형들의해양수역중의일부를암석이라고하여그해양수역을제한하고있지아니한상황도고려해야한다. 이번중재재판소판정의취지를그대로적용하면우리나라의독도를비롯해국제적인관심사인대부분의해양지형은 EEZ와대륙붕을가질수없는암석으로격하될것이다. 재판소가제시한인간거주와독자적경제생활에관한기준은매우엄격한것이기때문이다. 어떤기준에따르든암석이분명한해양지형은물론완전한권원을가진섬과암석의경계선에위치하는해양지형에대한각국의입장변화여부는조금더지켜보아야한다. 현재한일양국은모두독도를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완전한섬으로인정하고있는데, 기본적으로섬나라인일본이당장오키노도리를포함한암석이나독도주변에도 EEZ와대륙붕을설치하는정책을변경할가능성은별로없어보인다. 따라서당장한국과일본간에독도의법적지위와해 136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양수역을둘러싼갈등이발생하지는않을것이다. 다만본남중국해판정을계기로국제법상도서제도에커다란변화가올가능성은얼마든지있으므로국제법원과재판소의동향과각국의입장을예의주시하면서대책을마련해나아가야할것이다. 137

영토해양연구 Vol. 12 국문초록 유엔해양법협약제121조는섬제도에관한규정에서전통적인섬의정의를계승하였으나, 암석에관한규정을두어 EEZ와대륙붕을가질수없게하였다. 이규정에도불구하고국제법학계와국제사회에서는섬의정의에내재해있는문제점과암석과간출지의정의와지위를둘러싸고논란이그치지않았다. 이런가운데유엔해양법협약제7 부속서에의하여설립된제7 부속서중재재판소는남중국해중재사건본안에대한 2016년 7월 12일판정에서섬등해양지형문제를깊이가있고과감하게다루었다. 남중국해분쟁에서중재재판소는간출지는수중대륙괴의일부이므로전유의대상이되지못한다는사실을확인하였다. 또한간출지에도자연적형성이란조건이적용되는것으로보았다. 이는해양지형의지위는자연적상태를기초로판단해야한다는것으로, 법적으로인공에의한변형을통해서해저를간출지로그리고간출지를섬으로바꿀수없다는의미다. 국제법상도서제도와관련하여남중국해중재판정이많은주목을끌게된것은중재재판소가암석의문제를정면으로다루었기때문이다. 재판소는해양법협약제121조 3항의조건들을상세하게검토하였는데, 특히인간의거주또는독자적경제생활에관한조건을매우엄격하게해석하였다. Rockall에대한영국의입장이외에는자국소유의수면위의섬들을 EEZ 와대륙붕을가질수없는암석으로분류한국가를거의찾아볼수없는상황에서, 금번중재재판소의판정이국제법상도서제도에얼마나큰영향을미치게될것인지는조금더지켜보아야할것이다. 이번중재재판소판정의취지를그대로적용하면우리나라의독도를비롯해국제적관심사인대부분의섬들은 EEZ와대륙붕을가질수없는암석으로격하될것이다. 현재한일양국은모두독도를 EEZ와대륙붕을가질수있는완전한섬으로인정하고있으므로, 당장독도의지위를둘러싸고갈등이발생할일은없을것이다. 다만본남중국해판정을계기로국제법상도서제도에커다란변화가올가능성이있으므로국가들의관련동향 138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과국제법원과재판소의입장도예의주시해야한다. < 주제어 > 남중국해, 중재재판소, 도서제도, 간출지, 암석, 인간거주, 경제생활 ABSTRACT South China Sea Arbitration and Its Implications on International Regime of Islands Lee, Seokyong Professor of Law, Hannam University Although Article 121 of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UNCLOS) followed the a traditional definition of islands, the same article s third paragraph stipulates that rocks which cannot sustain human habitation or economic life of their own shall have no exclusive economic zone or continental shelf. However, due to the issues inherent in the definition of an island as well as the vague definition and legal status of rocks and low-tide elevations, the article has remained as a source of controversy. And recently, an in-depth, critical review on the status of various maritime features was carried out at a trial on the South China Sea dispute between the Philippines and China. The award issued by the tribunal confirmed that because low-tide elevations are part of submarine topography, they cannot become objects of appropriation for any state. The tribunal considers natural formation as a precondition for low-tide elevations, which means artificially modified lowtide elevations cannot be legally recognized as islands.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squarely faced the matter of the status of rocks. The tribunal especially scrutinized Article 121 (3) of UNCLOS and performed a strict interpretation on the conditions for human habitation and independent economic life. However, given existing practices with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degree of impact the award will have on the regime of islands defined by UNCLOS remains unpredictable. 139

영토해양연구 Vol. 12 If the award ruling is to be applied to insular formations, most of the maritime features bordering between island and rock are likely to be classified into rocks. Although Dokdo is not a large insular formation, Korea and Japan have considered the maritime feature as an island. Nevertheless, it will be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new developments in state practices and international judicial organs. Keywords South China Sea, Arbitral Tribunal, Regime of Islands, low-tide elevation, rock, human habitation, independent economic life 참고문헌 -도서와논문- 이석용, 2015, 국제법상도서제도와독도, 세창출판사. 이석용, 2010, 연안국해양수역확대가국제해양질서에미치는영향, 안암법학, 통권제31호. Bowett, Derek W., 1979, The Legal Regime of Islands in International Law, Oceana Publications Inc. Brown, E. D., 1994,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Sea, Vol. 1, Dartmouth Publishing Co. Churchill, R. R. and Lowe, A.V., 1999, The Law of the Sea, Manchester University Press. Clingan, Thomas A., 1994, The Law of the Sea : Ocean Law and Policy, Austin & Winfield. Jayewardene, Hiran W., 1990, The Regime of Islands in International Law, Martinus Nijhoff Publishers. Rothwell, Donald R., and Stephens, Tim, 2010, The International Law of the Sea, Hart Publishing. Sohn, Louis B., and Noyes, John E., 2004, Cases and Materials in the Law of the Sea, Transnational Publishers. 140

연구논문 Ⅰ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Symmons, Clive Ralph, 1979, The Maritime Zones of Islands in International Law, Martinus Nijhoff. Broder, S. and Van Dyke, J., 1982, Ocean Boundaries in the South Pacific, University of Hawaii Law Review, Vol. 4. Charney, Jonathan, 1999, Rocks that cannot Sustain Human Habitation,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93. Dubner, Barry Hart and Parent, Jason, 2007, When is a Rock an Island? Another Unilateral Declaration defies Norms of International Law, Mich. St. J. Int l L., Vol. 15. Hodgson, R. D., 1973, Islands : Normal and Special Circumstances, in J. K. Gamble and G. Pontecorvo(eds), The Law of the Sea: The Emerging Regime of the Oceans, Ballinger Publishing Co. - 판례-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The Republic of Philippines v.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Award, PCA, 12 July 2016. Dispute Concerning Delimitation of the Maritime Boundary between Bangladesh and Myanmar in the Bay of Bengal(Bay of Bengal), Judgment, ITLOS, 2012. Maritime Delimitation in the Black Sea (Romania v. Ukraine), Judgment, ICJ Reports, 2009.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Pulau Batu Puteh, Middle Rocks and South Ledge (Malaysia/Singapore), Judgment, ICJ Reports, 2008. Territorial and Maritime Dispute between Nicaragua and Honduras in the Caribbean Sea (Nicaragua v. Honduras), Judgment, ICJ Reports, 2007.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adan (Indonesia/Malaysia), Judgement, ICJ Reports, 2002. Maritime Delimitation and Territorial Questions between Qatar and Bahrain(Qatar v. Bahrain), Judgement, ICJ Reports, 2001. 141

연구노트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장원석제주신성여자고등학교교사손명철제주대학교지리교육전공교수 명명백백한자국의영토도주장하지않는자에게는돌아오지않는다. 이한기, 1969 I. 머리말 교통 통신수단이발달하고지역간, 국가간사람과물자의이동이활발해지면서인접국가들사이의영유권분쟁도빈번하게발생하고있다. 우리나라도최근독도를둘러싼일본과의외교문제뿐만아니라이어도에관한중국과의신경전이점차고조되고있는실정이다. 우리나라처럼좁은공간에오랜세월동안많은인구가서로어울려생업을지속해올때, 영토혹은국토가가지는의미는단순한물리적인지표면의일부에머물지않는다. 국토는국가의지리적조건이며국민이그들의삶을펼치는터전인것이다 ( 류우익, 1988). 국민은국토가부여하는여러가지조건에창의적으로적응하여독특한삶의양식을다채롭게전개하며, 시간의흐름과더불어그결과를다시국토의구석구석에채워남긴다. 따라서국토는국민의온갖영광과고난이층층이쌓이고아로새겨진역사의현장 142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인동시에, 미래의후손에게넘겨줘야할영원한삶의유산이라할수있다. 이와같이우리국토의중요성에대한인식이높아지고널리확산됨에따라초 중등학교사회과, 특히지리교육에서국토또는영토에대한내용과비중이강화되고있다. 현행 2009개정사회과교육과정에따르면, 중학교의경우지리영역에 우리나라의영토 라는독자적인대단원이설정되어이단원에서영토, 영해, 영공에대한개념뿐만아니라독도의중요성을집중적으로학습하도록하고있다. 고등학교에서는한국지리과목에서첫번째대단원으로 국토인식과국토통일 을설정하여통일문제와함께주변국가와관련된영역갈등의원인과과정, 그리고대응방안을모색하는학습기회를제공하고있다 ( 교육과학기술부, 2011). 그런데영토분쟁에관한논의와연구는비교적활발하게이루어지고있으나, 영토혹은국토교육과관련된선행연구는많지않은편이다 ( 서태열, 2009; 남호엽, 2011; 김민정, 2013; 허은실, 2013). 그것도독도교육과관련된연구가대부분을차지할뿐이어도교육에관한연구는거의찾아보기어렵다 ( 송호열, 2013; 유수현, 2013). 본연구의목적은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활용할수있는바람직한이어도교수-학습방안을모색하여제시하는것이다. 이를위해우선 2009개정사회과교육과정한국지리과목에서이어도관련내용이얼마나, 어떻게다루어지고있는가를검토하고, 현재사용되고있는 5종의한국지리교과서에서는이어도가어떻게기술되어있는가를비교 분석하고자한다. 이러한검토와분석결과를토대로설명식개념학습, 논쟁식토론학습, 그리고스토리텔링학습등 3차시에걸친이어도교수 -학습과정안을개발하여제시하기로한다. 본연구자가개발한교수-학습과정안은동료조언법 (peer debriefing method) 을통해신뢰성 (credibility) 과타당성 (validity) 을검증하였다. 교육경력 15~20년된제주도내고등학교지리교사 3명이조언자로연구에참여하여, 3개의교수-학습과정초안에대해교육적의미와잘된점, 문제점이나아쉬운점, 개선할점이나대안등에대해조언하였다. 연구자는모두 3차례에걸쳐조언자들의조언내용을반영하여연구를진행하였다. 143

영토해양연구 Vol. 12 II. 현행고등학교한국지리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 1. 2009개정사회과교육과정을통해본이어도 2009개정사회과교육과정에따르면고등학교사회교과는한국지리, 세계지리,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 경제, 법과정치, 사회 문화등모두 8개의일반선택과목으로편성되었다. 이중영토문제를가장직접적으로다루는과목은바로한국지리다. 한국지리과목에서는 영토 라는일반적용어보다국민국가적맥락을가지는 국토 라는용어를주로사용하고있는데, 총괄적인과목목표서술부분에서아래와같이과목의성격과목적을규정하고있다. 궁극적으로한국지리는우리국토에대한올바른인식과이해를바탕으로세계화, 지역화에필요한안목을기르고국민과국토공간의유기적인연관성을이해하여국토의의미를인식하고소중함을느낄수있는기회를제공하는과목이다. 나아가한국지리는학습자들이자신의삶을풍요롭고의미있게만들어갈수있는인간으로성장하도록돕는것을목적으로한다. 또한인지적 기능적 정의적목표영역별로각각 2개씩모두 6개의목표를서술하고있으며, 특히정의적영역의목표에서아래와같이독도와이어도등을다룰수있는여지를제공하고있다. 바. 국토분단, 주변국과의영역갈등과같은우리국토가당면하고있는국 토공간의정체성문제를올바른시각에서이해하고, 바람직한국토관과 국토애를함양할수있는태도를기른다. 구체적으로내용체계를살펴보면, 모두 8개대단원중첫번째대단원으로 국토인식과국토통일 단원을설정하여우리영토를다룰수있도록 144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하고있다. 이대단원은다시 4개의중단원으로구성되는데, 국토에대한인식변화, 우리나라의위치특성, 국토통일의당위성, 국토의정체성과영토문제 가그것이다. 이들중네번째중단원에서영토분쟁에관한내용을보다직접적으로다루게되며, 이러한사실은네번째중단원과연계된아래와같은성취기준을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4 주변국가와관련된영역갈등의원인과과정및그중요성을인식하고, 우리나라영토문제에대한대응방안을제시할수있다. 이처럼현행고등학교사회과교육과정에따르면, 사회과 8개선택과목중한국지리과목에서만영토문제를직접적으로다루고있으며, 그것도단하나의중단원에서만내용을서술하고있음을알수있다. 2. 현행한국지리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현재한국의초 중등학교교과서는내용과체제면에서거의전적으로국가교육과정의규정을받는구조다. 고등학교한국지리교과서도 5개출판사 ( 금성출판사, 미래엔, 비상교육, 지학사, 천재교육 ) 에서각각 1종씩모두 5종의교과서를발행하여학교현장에공급하고있으나, 전체적으로보면실제내용과체계면에서큰차이가나타나지않을수있다. 그러나이어도와같이특정의구체적인내용을중심으로면밀히살펴보면교과서간에의미있는차이가발견되기도한다. 여기서는 5개출판사별 ( 가나다순 ) 로이어도에대한내용을얼마나, 어떻게다루고있는지비교 분석하고자한다. 먼저이어도에관한내용이어디에, 어떤형태로배치되어있는가를살펴보면 < 표 1> 과같다. 이는동일한내용이나용어라도교과서의어느부분에, 어떻게배치하는가에따라그것의중요도와위상이달라질수있다는점에서주목된다. 다시말하면자료나학습활동, 단원마무리부분에배치하는것보다는제목이나학습목표, 본문내용에배치하는것이상대적으로그중 145

영토해양연구 Vol. 12 요성을강조하는것으로해석할수있다. < 표 1> 한국지리교과서별이어도내용배치현황 구분제목학습목표본문내용자료학습활동단원마무리금성출판사 미래엔 비상교육 지학사 천재교육 < 표 1> 에서보는바와같이우선모든한국지리교과서는이어도에관한내용을자료의형태로제시하고있다. 배치형태뿐만아니라내용의분량비중면에서도출판사별로큰차이를보이고있는데, 천재교육출판사의경우제목과학습목표, 본문내용, 자료, 단원마무리에걸쳐상대적으로다양한형태와많은분량으로이어도를다루고있음을알수있다. 교과서별이어도에대한상세한관련내용은아래에서살펴보기로한다. 1) 이어도의위치적특성과종합해양과학기지에초점을둔금성출판사교과서금성교과서는첫번째대단원 1. 국토인식과국토통일 아래네번째중단원 04. 소중한우리국토 를설정하고, 다시두번째소단원 2. 소중한우리의영토 부분에서이어도관련내용을다루고있다. 본문내용에서이어도의위치와경제적가치를설명하고, 중국과갈등이발생하고있음을강조하고있다. 동일한면에자료두개를상하로배치하여소개하고있는데 1. 독도의중요성 과 2. 이어도의중요성 이그것이다 (< 그림 1>). 여기에서는이어도의위치적특성과함께종합해양과학기지를소개하고중국과의영유권분쟁도간략하게다루고있다. 학습활동에서도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건설에따른유리한점을설명하도록제시하고있다. 전반적으로금성교과서는이어도의위치적특성과경제적가치, 그리고중국과의영유권분 146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 그림 1> 금성출판사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 ( 출처 : 서태열외, 2014, 31 쪽 ) 쟁을중심으로이어도를다루고있다. 따라서제주사람들의이어도에대한인식과오랜세월구전되어오는이상향으로서의이어도에대한언급이전혀없는점이아쉬움으로남는다. 2) 배타적경제수역및어업수역도와함께간략하게이어도를다루는미래엔교과서미래엔교과서는첫번째대단원 I. 국토인식과국토통일 아래네번째중단원 4. 국토의정체성과영토문제 를설정하고, 다시첫번째소단원 1. 우리나라의영역 부분에서이어도관련내용을다루고있다. 영역의중요성을살펴보기위해 3개의자료를제시하고있는데그중하나가이어도에관한것이다 (< 그림 2>). 이어도자료에서는이어도의위치, 종합해양과학기지, EEZ를둘러싼중국과의분쟁을소개하고있다. 탐구활동에서는이어도에세운종합해양과학기지의타당성을설명하도록제시하고있다. 전반적으로다른교과서에비해이어도에대한분량과실제내용이적은편인데, 그대신간도에대해서는비교적상세하게소개하고있다. 147

영토해양연구 Vol. 12 < 그림 2> 미래엔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 ( 출처 : 박희두외, 2014, 31 쪽 ) 3)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사진과우리나라영해및주변수역의지도속에서만이어도를다루는비상교육교과서비상교육교과서는첫번째대단원 I. 국토인식과국토통일 아래네번째중단원 4. 국토의정체성과영역문제 를설정하고, 다시첫번째소단원 1. 우리나라의영역과영역문제 부분에서이어도관련내용을다루고있다. 동일한면의우측상단에아무런설명도없이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사진을배치하고있으며, 아래쪽에 더알아보기 자료로제시한지도속에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의위치를표기해서소개할뿐이다 ( 그림 3). 전반적으로볼때다른교과서에비해이어도에관련된내용분량이가장적을뿐만아니라설명도매우미흡한편이다. 148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 그림 3> 비상교육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 ( 출처 : 최규학외, 2014, 33 쪽 ) 4) 자료 중하나로비교적상세하게이어도를다루는지학사교과서지학사교과서는첫번째대단원 I. 국토인식과국토통일 아래네번째중단원 4. 우리나라의영역과영토문제 를설정하고, 다시첫번째소단원 1. 우리나라의영역과영역갈등 부분에서주로이어도관련내용을다루고있다. 앞의소단원에서는자료와탐구활동형태로, 그리고대단원마무리부분에서는 되짚어보기 형태로소개된다. 자료에서는이어도의위치적특성과경제적가치, 중국과의영역분쟁관련내용과함께, 이어도가오랫동안 제주도민에게는바다에나가돌아오지않는남편이나아들이살고있다고믿었던이상향으로구전되어왔다 는사실을부기하고있다 ( 그림 4). 탐구활동에서는이어도의경제적 학술적가치를조사해보도록하고있으며, 대단원마무리에서는이어도에관한설명중잘못된곳을바르게고치도록함으로써인지적활동을되짚어강화하고있다. 전반적으로지학사교과서는이어도와관련된내용이분량면에서많은편은아니지만, 제주사람들의이어도에대한인식등다양한내용을풍부 149

영토해양연구 Vol. 12 < 그림 4> 지학사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 ( 출처 : 윤옥경외, 2014, 29 쪽 ) 하게다루고있는편이라할수있다. 5) 형식과내용면에서이어도의비중을크게다룬천재교육교과서천재교육교과서는첫번째대단원 I. 국토인식과국토통일 아래네번째중단원 04. 독도와이어도 를설정하고, 다시두번째소단원 2.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 부분에서이어도관련내용을집중적으로다루고있다. 우선중단원수준에서이어도를제목에포함하고있다는점 ( 사진 5), 그리고소단원제목중하나를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 로선정한점이특기할만하다. 소단원 2.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 에서는 이어도의위치와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의역할에대해파악한다 는학습목표를제시하고, 이 150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 그림 5> 천재교육교과서에기술된이어도 ( 출처 : 박병익외, 2014, 28 쪽 ) 어도의위치와종합해양과학기지에대해상세하게설명하고있다. 이와함께제주도민요 이어도사나 를소개하고, 예로부터이어도가 전복과미역을따며해녀로서힘든삶을살았던제주도여인들의이상향으로간주되어 왔다는사실을기술하고있다. 대단원매듭짓기 에서는이어도가중국보다우리나라에가까워우리에게관할권이있음을다시한번강조하고있다. 전반적으로천재교육교과서는이어도의중요성을독도와거의대등하게다루고있으며, 내용과형식면에서다른교과서에비해가장높은비중으로이어도를소개하고있다. III.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방안 앞장에서간략하게살펴본바와같이, 현재고등학교에서사용되고있는 5종의한국지리교과서는이어도와관련하여내용분량과제시형태, 내용요소등여러면에서뚜렷한차이를보이고있다. 아무런설명도없이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사진과주변수역지도에그위치만표기한교과서가있는가하면, 중단원과소단원의제목에이어도를표기하고학습목표와본문내용에서이어도관련내용을상세하게다룰뿐만아니라, 제주도민요 이어도사나 와제주도여인들의이상향으로서의이어도를소개하는교 151

영토해양연구 Vol. 12 과서도있다. 이장에서는이러한교과서들의특징을종합적으로비교 분석하여그장점들을취하고, 필요시다른관련자료들을보충하여보다바람직한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을개발하였다. 1. 이어도수업의학습목표와주요학습내용우선교수-학습과정안개발에앞서이어도수업의학습목표를설정하고주요학습내용을추출하였다 (< 표 2>). 학습목표는지식, 기능, 가치 태도등 3개영역에걸쳐가능한한영역간균형을이룰수있도록설정하였다. 한국의사회교과교과서들은대부분지식영역의목표에치중되어있어실제교과서내용도개념과지식중심으로편중되어있는경우가많기때문이다. 또한지리과목은각종지도와사진, 항공사진, 인공위성영상등다양한시각적자료를통해필요한정보를읽고해석하는능력과자신이수집한정보를표와그래프같은시각적자료로표현할수있는능력, 곧지리도해력 (geographicacy) 함양이중시되는과목이기때문에이를반영하여기능적영역의목표를다소강화하였다. 내용요소에서는현행한국지리교과서들이강조하고있는이어도의지리적환경과경제적가치, 중국과의영유권분쟁이외에도제주에전래되고있는이어도관련신화와전설, 민요등을포함함으로써내용요소에다양성과풍요성을제고하였다. 152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 표 2> 이어도수업의학습목표와주요학습내용 구분영역성취기준 목표 내용 지식기능태도문화 역사지리적환경중요성해양과학기지 이어도의수리적, 관계적위치를파악한다. 이어도의지리적환경을이해한다. 이어도의지정학적중요성을파악한다. 이어도와관련된최근쟁점들을비교 분석한다. 이어도의위치를지도상에표시할수있다. 이어도와관련된자료를수집하고체계적으로정리할수있다. 이어도와관련된한국, 중국, 일본자료를분석하고종합하여이어도가한국의수역에포함됨을논리적으로말할수있다. 이어도주변부존자원의활용방안을모색할수있다. 이어도문제를통해우리나라의영역갈등에대한대응방안을제시할수있다. 이어도에대한이해를통해국토를사랑하고수호하려는마음과태도를가진다. 이어도해양과학기지의중요성을통해우리나라과학기술에대한자부심을가진다. 이어도를둘러싼영유권분쟁을살펴보면서영토문제를대화로해결하려는자세를가진다. 이어도관련설화, 민요, 신화등역사적자료 위치, 거리, 지형특징, 기후특징, 형성과정 수산 해저자원등경제적가치, 지리적가치, 정치 군사적가치 이어도해양과학기지설립을위한노력과과정 2. 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은모두 3차시수업에맞추어개발하였다. 이는기본적으로 3차시정도는할애해야가장이상적인수업이전개될수있다는점을전제로한것이다. 그러나학교현장의수업시수여건에비추어볼때, 모든학교에서 3차시수업을진행하기는어려울것으로보인다. 따라서학교별수업여건에따라이중 1차시나 2차시만활용할수도있으며, 교과활동뿐만아니라비교과활동을통해서도활용할수있도록고려하였다. 우선 1차시는영토와이어도에관한기본적인개념과지식을교사중심의설명식수업으로진행한다. 그리고 2차시는학습자가주도하는탐구식수업으로진행한다. 이때는논쟁식대립토론이도입된다. 마지막 3차시는스토리텔링을통해이전차시수업에서획득한개념과지식을내면화하는과정이다. 연구자가개발하여동료교사들의조언을통해수정 보완한각 153

영토해양연구 Vol. 12 차시별이어도교수 - 학습과정안은아래에서상세하게제시한다. 1) 개념중심의강의식학습 : 1차시교수-학습과정안 1차시는교사의강의식, 설명식수업이진행된다. 학습자들이영토와이어도에관한사전지식이충분하지못하고, 특히이어도에관한이해와관심이부족한상태에서는학습자중심의다양한수업활동을전개하기가쉽지않기때문이다. 따라서 1차시에는영토란무엇이고, 지금그것이왜중요한지를알려줄필요가있다. 우리나라의영역과이어도의지리적환경, 이어도를둘러싸고벌어지고있는중국과의영유권분쟁등에대해기본적인지식과쟁점을학습한다 (< 표 3>). < 표 3> 강의식, 설명식개념학습과정안 단원 Ⅰ. 국토통일과국토인식 4. 국토의정체성과영토문제 차시 1/3 대상전학년 학습목표 이어도의지리적환경과지정학적중요성을파악할수있다. 이어도와관련하여발생하는주요분쟁들을비교 분석할수있다. 이어도에대한이해를통해국토를사랑하고지키려는마음과태도를가진다.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전시학습내용확인 [ 동기유발 ] 우리수역내에서이루어지는중국의불법어업활동에대한사진을제시하고그이유에대해이야기해본다. 도입 (5 분 ) 문답학습 호기심유발문제인지 [ 학습목표제시 ] 학습목표확인하기 전개 (40 분 ) 강의학습 [ 주요내용학습활동하기 ] 우리나라의영역이어떻게설정되는지설명한다. - 우리나라영토는헌법에규정되어있다는점을알려준다. - 헌법제 3 조 : 대한민국의영토는한반도와그부속도서로한다. - 영해는해안선의형태나섬의분포에따라기준선이다른점을이해시킨다. - 영공은영토, 영해와마찬가지로주권이미치는곳으로영토와영해처럼명확한한계를그을수는없지만대기권정도로한정된다는것을설명한다. - 배타적경제수역 (EEZ) 의필요성과주권적권리를알아본다. 교과서지도를화면에띄우고설명한다. 영해와배타적경제수역, 공해의차이점을비교설명한다. 154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전개 (40 분 ) 탐구학습 강의학습탐구학습 탐구활동을통해영역의중요성을알아보자. - 한 중 일간어업수역도를보면서해양경계획정의어려움을알고, 배타적어업수역과중간수역이나잠정조치수역의설정배경을찾아본다. 이어도의지리적환경과지정학적중요성을알아보자. 동아시아의주요영토분쟁에대해알아본다. - 일본과의관계에서독도와관련된분쟁을살펴본다. - 중 일간의센카쿠열도분쟁과남중국해주변국가의난사군도분쟁을살펴본다. 중국과의관계에서이어도와관련된분쟁의개요를알려준다. - 중국과우리나라의주장을살펴본다. 탐구활동을통해이어도가우리가지켜야할땅인것을확인해본다. - 이어도가분쟁지역인원인을알아본다. - 이어도에관한자료등을이용하여이어도를우리땅으로지킬수있는방법을탐색한다. 확산적사고 정리및평가 (5 분 ) 형성평가학습정리과제제시차시예고 형성평가를통해단원의핵심내용에대한학생들의이해를간략히확인한다. - 영해의기선에서부터 200 해리까지의수역중영해를제외한수역으로연안국의경제적권리가인정되는수역은? ( 배타적경제수역 (EEZ)) 이번차시의학습내용을정리한다. 이어도와관련된영토분쟁에대하여우리나라와중국의주장을조사하고, 우리의대응방안을정리한다. 중국과의이어도갈등문제에대한토론이진행됨을고지한다. - 미리진행및준비자, 토론자, 심판자를자체적으로선발하게한다. - 토론에필요한토론진행계획표및준비양식을미리배부하여토론준비를철하게할수있도록한다. 과제제시는유인물을통하여조사하도록준비한다. 2) 논쟁식토론학습 : 2차시교수-학습과정안 2차시는 1차시학습을토대로학습자주도형의탐구식수업으로진행한다 (< 표 4>). 탐구식수업중에서도논쟁식대립토론을도입한다. 먼저논쟁식토론의개요를설명한후, 학습자들에게자료를탐색하고정리할수있는시간을부여한다. 이때탐구의범위는넓은의미로보아탐색-정리-발표단계까지확대시켜내용을구성한다. 2차시에서강조하는것은논쟁식토론의결과보다학습과정이다. 이러한학습과정을통해학습자들은스스로 155

영토해양연구 Vol. 12 주제를탐구하면서자기주도적으로학습을진행해나갈수있는기회와경험을가진다. 대립토론의구체적인형식과절차는 < 표 5> 에제시하였다. < 표 4> 논쟁식토론학습과정안 단원 Ⅰ. 국토통일과국토인식 4. 국토의정체성과영토문제 차시 2/3 대상전학년 학습목표 이어도와관련된최근쟁점들을이해한다. 이어도에대해실질적근거를바탕으로토론할수있다. 이어도와관련된한국, 중국, 일본자료를분석하고종합하여이어도가한국의수역에해당됨을말할수있다.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도입 (5 분 ) 문답학습 전시학습내용확인 - 지난시간에학습한우리영토에관한내용을상기하면서, 배타적경제수역의주권적권리를알아보고, 해양영역의중요성, 이어도의중요성등을간단히정리해준다. [ 동기유발 ] EBS 지식채널 e 그들의논리 를통해영토를둘러싼양국의주장과각논리의모순점을이야기한다. 전개 (42 분 ) 토론학습 [ 학습목표확인 ] 이어도를둘러싼중국측과한국측의주장을실질적근거를바탕으로토론할수있다. [ 사전활동하기 ] 토론의규칙및유의점에대하여알려준후토론을시작한다. (5 분 ) - 진행을담당한학생들이자리를배치 정리하게한다. - 토론주제제시 : 이어도는한국측과도수역에포함되어야하는가? - 양측학생들에게 2 분정도발제 ( 입론 ) 내용에대해작은소리로전략을짜도록한다. - 동시에심판자들에게심판의역할과판정내용을파악하도록심판용지를활용하여설명한다. [ 토론활동하기 ] 찬성발제 ( 입론 ): 찬성팀제 1 토론자 (3 분 ) - 대정읍마라도로부터남서쪽으로 149km(80 해리 ), 중국의여산도 ( 余山島, 서산다오 ) 로부터동쪽으로 287km(155 해리 ), 일본의조도 ( 鳥島, 도리시마 ) 에서 276km(149 해리 ) 에위치하고있어어디보다도가깝고, 수면밑 4.6m 아래에있으면서파도가높을때는그모습이수면위로드러나실제로존재하고있다. - 우리해저광구제 4 광구에있는우리나라대륙붕의일부분으로현재이어도해양과학기지가설치되어운영되고있다. - 1653 년하멜표류기의표류해상도, 1750 년 ( 영조 26 년 ) 해동지도중제주삼현도등에서이미이어도가우리것임을나타내고있다. 미리조사해온다. 진행준비자, 토론자, 심판자를선정한다. 3 :3 대립토론 (debate) 방식으로진행한다. 학습준비물 : 토론사전준비물, 교실배치 발제과정에서나온상대의주장내용들을잘정리하게한다. 156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반대발제 ( 입론 ): 반대팀제 1 토론자 (3 분 ) - 이어도는중국발원의 silt 지역안에있으므로중국관할지역내에있다. - 이어도가중국본토의자연적연장인대륙붕선상에있으므로지질학적관점에서중국관할권에속한다. - 중국문헌산해경에 쑤옌자오 [ 소암초, 蘇岩礁, 이어도의중국명칭 ] 를기록하고있다. 쑤옌자오는당 송 명 청의문헌에기록돼있으며고대역사서적에도중국땅으로명시돼있다. 중국영해와 200 해리경제수역내에있기때문에현재도중국의영토다.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시간엄수하게한다. 작전회의 (2 분 ) - 작전회의에서는상대방의입론에대한심문전략을짤수있도록시간을준다. 반대심문 : 반대팀제 2 토론자 (3 분 ) - 실제로존재한다고했지만, 해양법상간출지는만조시에는수중에잠몰하지만간조시마다수면에출현해야하는것이기때문에이어도는간출지가아니라수중암초다. 설령이어도가해수면아래가아닌해수면위의암초라가정할지라도먼바다에고립되어있는무인암석에대하여영해와배타적경제수역 (EEZ) 이나대륙붕을주장하는것은억지다. - 아직배타적경제수역경계가설정되지않은상태에서이어도에인공구조물을세운것은문제다. - 쑤옌자오는중국과한국의배타적경제수역에위치해있다. 중국과한국은쑤옌자오를영토로여기지않으므로영토분쟁이존재하지않는다. 쑤옌자오문제는쌍방이담판으로해결해야한다. 심문과정에는상대방이절대반박을하지못하도록한다. 찬성심문 : 찬성팀제 2 토론자 (3 분 ) - Silt line 의개념은황해가대부분의중국기원퇴적물로뒤덮였다는생각을검증하기위해도입한일종의가설이다. 황하가많은퇴적물을배출하기때문에황해가대부분이것으로구성되었을것이라는가설인것이다. 하지만국제저명학술지에게재된중국과학자의연구결과에따르더라도과거황해퇴적물기원지연구결과는서로일치하지않거나때로는상반된주장을하고있으며, 심지어는믿기어려운데이터도많다고한다. 이연구논문발표후한국과학자들이연구를진행한결과황해퇴적물기원은중국과한국기원퇴적물의혼합체로나타나는데, 더연구가진행되어야한다는것이결론이다. 이후중국정부는이주장을두번다시못하고있다. - 국제판례의경향은 마주보는국가간거리가 400 해리이내이면배타적경제수역과대륙붕을포괄하는단일해양경계선을설정해야한다. 실제로국제해양법재판소는 2012 년 3 월 14 일방글라데시와미얀마간벵골만해역에서의해양경계선을유엔해양법협약제 15 조를인용하여중간선 ( 마주하는두국가의연안가운데를연결한선 ) 으로결정했다. 이판결을적용할경우이어도는우리나라해역에속하게된다. - 산해경이라는문헌은 사기 에서사마천조차감히말할수없는기서로믿을수없다고할정도로, 본래비과학적이고신비한신화를수록한책이므로여기에서언급하고있는 소암초 ( 蘇岩礁, Su Rock) 가이어도를지칭한다는것을검증할수있는자료는그어떤것도없다. 157

영토해양연구 Vol. 12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작전회의 (2 분 ) - 새로운주장을하지않도록하고, 반박내용을문장으로정리 기록한다. 찬성반박 : 찬성팀제 3 토론자 (3 분 ) - 한국의마라도에서서남쪽으로 149 km (80 해리 ) 떨어진반면중국에서가장가까운유인도인서산다오 [ 余山島 ] 로부터의거리는동쪽으로 287 km (155 해리 ) 에이른다. 배타적경제수역이겹치는해역은협상을통해경계선을획정할필요가있지만이어도해역은한국에훨씬가깝다. - 특히한국은지난 2003 년부터 8 년에걸친공사끝에이어도에해양과학기지를가동하며실효적지배권을확보하고있는상태다. 이어도해양기지설립은영해또는해양경계획정의기점으로삼기위한것이아니라해양관측및조난구조를위해설립한것이다. - 고서 ( 古書 ) 에서도이어도가우리의영역임을잘알려주고있지만, 이어도가위치한해역은앞서 1952 년인접해양에대한주권을선언한평화선선포수역내에있어우리나라의해양관할권에속했다. 반대반박 : 반대팀제 3 토론자 (3 분 ) - 한국은황해와동중국해에서의경계획정과관련하여중국에대하여무조건적인중간선원칙을주장하고있지만, 대륙붕퇴적물과해저지형을최대한고려하는형평의원칙이적용되어야한다. - 중국의긴해안선, 바다에접해살고있는조업인구등을감안해이어도가중국수역에들어올수있도록배타적경제수역경계를이어도동쪽에그어야한다. 작전회의 (2 분 ) - 여기서작전회의가필요한경우전체학생들을대상으로찬성측과반대측이각각함께모여전략을짤수도있다. 자유토론 : 각 1 분이내부여 (3 분 ) - 전체토론으로이루어지도록한다. - 자유토론은한사람의발언이 1 분초과해서는안되고, 한번발언후에는다른사람이발언한후에야발언가능하다. - 자유토론후양측이잠깐의논하고최종적인자신의주장을하도록한다. 찬성정리 (2 분 ) - 중국이주장하는해양경계원칙, 즉형평의원칙은설득력이없다. 황해와동중국해대륙붕은동질적인연속체로된하나의대륙붕으로간주하여야한다. 먼저잠정적으로등거리선을채택하고, 그다음이등거리선을수정해야되는 특별한사정 이있는가를적용하여야한다. 한중양국의중간수역은대부분 400 해리가안되기때문에거리를중시하는중간선원칙을적용하는것이국제법적타당성을갖는다. 최근의국제판례도이러한경향을반영하고있다. 리비아 - 몰타사건에서보듯이대안국간의거리가 400 해리를초과하지아니하는경우해저지형은고려하지아니하며, 경제수역과대륙붕에단일경계선을긋는것이오늘날국제사회의일반적인경향이므로, 중국의종래의주장은설득력이없다. 반대정리 (2 분 ) - 서해와동중국해의대륙붕경계획정과관련하여한국이서해와동중국해에서중국과의해양경계를정함에있어서소위지질학적및지형학적기준을무시하고중간선원칙만을적용하고자하는것은지나치게자국의입장만을고려하고있다. 해양경계가명확히획정되기전까지는이어도주변수역을한국측과도수역으로인정할수없고잠정조치수역으로유지하여야한다.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상대방심문에대하여반박할내용을논의할수있도록작전타임을갖도록한다. 반박은찬성측부터하고, 상대방에반응하거나답변해서는안된다. 반박을학습지에기록한다. 158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심사결과정리 (3 분 ) - 심판자는결과점수를합산, 발표하고양측의잘한점과못한점을이야기한다. 결과발표 (3 분 )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필요한경우교사는토론내용과심판판정을확인할수있다. 정리평가 (5 분 ) 정리 차시예고 총평을통해토론의핵심내용에대한학생들의이해정도를간략히확인한다. 스토리텔링 : 이어도와관련된스토리만들기 - 민요 이어도사나, 최부의 표해록, 이청준의 이어도 의내용을발췌하여나눠주고, 당시의상황이나그들의삶을상상하고정리하도록한다. 유인물제작 < 표 5> 실제교실에서의대립토론 Format 순서내용및토론자시간비고 1 사전설명토론규칙및유의점 5 분 2 찬성입론찬성팀제 1 토론자 3 분 반대입론반대팀제 1 토론자 3 분 토론 3 작전회의 2 분 4 반대입론반대팀제 2 토론자 3 분 찬성심문찬성팀제 2 토론자 3 분 5 작전회의 2 분 6 7 8 찬성반박찬성팀제 3 토론자 3 분 반대반박반대팀제 3 토론자 3 분 작전회의 9 토론결과심사발표 2 분 시간엄수 ( 타이머작동 ) 평가표에제시된항목을유념하여토론에참여할수있도록함 자유토론 전체토론 ( 각 1분 ) 3분 자유토론은한사람의발언이 찬성정리 찬성팀 2분 1분을초과하면안되며, 한번발언하면다른사람이발언을 반대정리 반대팀 2분 한후발언가능 심사결과정리 3 분 복도대기 총평및결과발표 3 분 토론실입실후총평및판정 총소요시간 42 분 159

영토해양연구 Vol. 12 3) 스토리텔링학습 : 3차시교수-학습과정안 3차시는이전차시에서획득한영토및이어도에관한개념과지식을내면화하는과정이다. 여기서는먼저우리선조들의삶의모습및생활속에서당면하는온갖고난을극복하고자하는의지와정서를담은이야기들을발굴하여제시함으로써학습자들의흥미를유발할필요가있다. 조상들의삶의모습을유추하는데는학습자들의지리학적상상력 (geographical imagination) 이발휘되어야하며, 관련자료로는전래민요나설화, 이를바탕으로창작된문학 예술작품, 그리고당시사람들의기록물등이있다. 물론이중에는허구적인내용을담고있는것도있을수있지만, 그러한허구를통해학습자들은당시의시대상황과삶의모습을상상하고간접체험할수도있다. 이수업에서는구체적으로제주민요 이어도사나 와최부의 표해록, 그리고이청준의소설 이어도 를수업자료로도입하였다 (< 표 6>). < 표 6> 스토리텔링학습과정안 단원 Ⅰ. 국토통일과국토인식 4. 국토의정체성과영토문제 차시 3/3 대상전학년 학습목표 제주사람에게이어도는어떤존재였는지를이해할수있다. 이어도와연관된제주인의가치관을이해하고설명할수있다.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문답학습 전시학습내용확인 도입 (5 분 ) [ 동기유발 ] 이어도사나 민요를들려주고어떤느낌이나생각이들었는지이야기한다. [ 학습목표확인 ] 전시간에나눠준유인물속의내용들을읽고어떤생각이들었는지소감을간단히발표하도록한다. 이어도민요자료 전개 (40 분 ) 발표학습 자료로제시한 < 자료 1> 의이어도와관련된내용을낭송해주면서지리학적상상력을동원하여상황을떠올릴수있도록한다. < 자료1> 이어도허라이어도허라 ( 이어도이어라이어도이어라 ) 이어이어이어도허라 ( 이어이어이어도이어라 ) 이어허맨나눈물난다 ( 이어하면나눈물난다 ) 이어말은마랑근가라 ( 이어란말은하지말고가라 ) 강남을가난해남을보라 ( 강남을가면해남을보라 ) 이어도가반이엥해라 ( 이어도가반半이라고하더라 ) - 맷돌노래, 제주민요- 확산적사고 학습준비물 : 컴퓨터, 빔프로젝트, 이어도관련자료 160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 내가만일당시사람이라면왜이노래를불렀을까? 부르면서무슨생각을했을까? - 작자미상의구전민요인 이어도사나 가만들어질당시사람들은어떤일을하면서살았을까? - 여기에등장하는지명인 해남 이나 강남 은구체적으로어디를가리키고있을까? < 자료 2> 를차분히읽게하면서, 산꼭대기에서멀리하얗게부서지는바다를바라보는상상을하게한다. 확산적사고 전개 (40 분 ) < 자료 2> 물결은용솟음치고바다빛은희다. 예전에정의현감채윤혜 ( 蔡允惠 ) 가내게했던말이생각난다. 제주늙은이들이말하기를, 맑게갠날한라산꼭대기에오르면멀리서남쪽으로아득히떨어진바다밖에백사장같은것이보인답니다. 지금보니한라산에서보인다던그것인가싶은데이는백사장이아니고백해 ( 白海 ) 다. - 최부, 표해록 제 1 권무신년, 윤정월 7 일 - 내가표류하여서백해 ( 白海 ) 로들어가서북풍을만나남하하였을때산모양같은것이보이기도하고보이지않는것같기도하였다. - 최부, 표해록 제 3 권무신년, 3 월 29 일 - - 왜넓은바다한가운데서바다가하얗게변하는현상이나타날까? - 만일내가망망대해한가운데서하얗게파도가부서지는 백해 를만난다면어떤생각을하게될까? < 자료 3> 을정독하도록한다. < 자료 3> 긴긴세월섬은늘거기있어왔다. 그러나섬을본사람은아무도없었다. 섬을본사람은모두가섬으로가버렸기때문이었다. 아무도다시섬을떠나돌아온사람이없었기때문이었다. 이어도는오랜세월동안이제주도사람들의입에서입으로이야기가전해내려온전설의섬이었다. 천리남쪽바다밖에파도를뚫고꿈처럼하얗게솟아있다는제주도사람들의피안의섬이었다. 아무도본사람은없었지만, 제주도사람들의상상의눈에서는언제나선명한모습을드러내고있는수수께끼의섬이었다. 그리고제주도사람들의구원의섬이었다. 더러는그섬을보았다는사람들도있었지만, 이상하게도한번그섬을본사람은이내그섬으로가서영영다시이승으로돌아오지않았기때문에그모습을분명하게말할수있는사람은아무도없는섬이었다. - 이청준, 이어도 - - 소설이청준의 이어도 에서이어도는제주사람들에게어떤존재인가? - 소설이청준의 이어도 에서이어도는고된삶의터전으로묘사된민요와달리, 아무도알수없는꿈의낙원, 유토피아로표현하고있다. 소설과민요속에투영된이어도와당시사람들의실제생활모습을떠올리며이야기해보자. 확산적사고 161

영토해양연구 Vol. 12 단계방법교수 학습활동 창의 인성지도상유의점 학습정리 위치정보를학생들스스로주변장소와의관계, 상황을파악하면서지도에표시하고서술하게한다. - 위치, 거리, 방향, 주변지역의공간개념을통해이어도의지정학적위치의중요성을생각해보고, 지도상에위치를표시한다. 또한자신의말또는글로간략히정리한다. 정리평가 (5 분 ) 다음시간에전개될내용을소개한다. 4) 한국지리이어도수업수행평가양식이와같이 3차시에걸쳐이어도수업을진행하면서동시에수행평가도실시한다. 물론 1차시개념수업같은경우에는지필식평가도가능하겠지만, 연구자가개발한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은기본적으로수업이진행되면서평가도동시에진행하는수행평가를염두에두고개발하였다. 이때도입될수있는가능한수행평가유형은일화기록법 (anecdotal records), 체크리스트 (checklist), 평정척도법 (rating scales) 등을이용할수도있고, 경우에따라서는비디오법을이용하여수업장면을비디오로녹화한후분석할수도있다. 또한 < 표 7> 과같이 NIE를기반으로하는수행평가방법도고려해볼수있을것이다. 162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 표 7> 한국지리이어도수업수행평가양식 (NIE 기반 ) 한국지리수행평가 ( ) 회 제학년반번이름 : 채점 이어도관련기사스크랩이공간은기사를붙이는공간입니다. 채점이끝날때까지떨어지지않게잘붙여주기바랍니다. 수행평가안내사항 1. 제출마감 : 년 월 일 요일 시 분 2. 제출방법 : 개인별로제출 3. 내용 : 주제관련기사를 2개붙이고, 기사내용요약, 용어정리, 자신의생각을반드시볼펜으로써서제출. 4. 스크랩기사기준 : 이어도관련모든기사 ( 국가, 날짜, 온오프라인에대한기준없음 ). 단, 출처를확실히표시해주기바랍니다. 유의사항 : 제출시간을반드시지켜주기바랍니다. 출처 - 언론사 :, 년월일요일기사 기사내용요약 ( 기사의내용을 2~3 문장으로요약하세요 ) 용어정리 ( 모르는용어를찾아서사전적인용어정리하세요.) 기사에대한자신의생각쓰기 163

영토해양연구 Vol. 12 IV. 맺음말 이연구는 2009개정사회과교육과정과고등학교한국지리교과서 5종에기술된이어도관련내용을비교 분석하고, 바람직한이어도교수-학습방안을모색하려는것이다. 연구결과는아래와같이요약할수있다. 첫째, 현행사회과교육과정에따르면, 고등학교사회교과에편성된 8개의일반선택과목중독도와이어도를포함하여영토문제를가장직접적으로다루는과목은한국지리과목이다. 한국지리는모두 8개대단원중첫번째대단원으로 국토인식과국토통일 단원을설정하여우리영토를다룰수있도록하고있다. 둘째, 현재고등학교에서사용하고있는 5종의한국지리교과서를비교 분석한결과, 이어도관련내용은모든교과서가자료의형태로소개하고있다. 교과서별로이어도관련내용의분량뿐만아니라배치형태면에서도큰차이를보이고있는데, 아무런설명없이자료속에종합해양과학기지사진과지도상에그위치만표기한교과서가있는가하면, 중단원과소단원의제목과학습목표, 본문내용, 자료, 그리고단원마무리에걸쳐다양한형태와많은분량을할애해이어도를다루는교과서도있다. 셋째, 5종의한국지리교과서의장점을취합하여이어도수업을위한학습목표와주요학습내용을선정하였다. 학습목표는지식, 기능, 가치 태도영역별균형을고려하였으며, 학습내용도이어도관련설화와민요, 신화등문화 역사적자료를발굴하여교과서내용을보완하였다. 넷째,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활용할수있는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을 3차시로개발하여제시하였다. 1차시는개념중심의강의식학습이며, 2차시는논쟁식토론학습, 3차시는이전차시에서획득한개념과지식을내면화하기위해스토리텔링학습으로구성하였다. 이들수업과관련하여 NIE를기반으로하는수행평가양식도개발하여제시하였다. 연구를마치며한가지제언을하고자한다. 현행고등학교사회과교육 164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과정에따르면독도와간도, 이어도를포함한영토문제를직접적으로다루고있는과목은한국지리가거의유일하다. 문제는한국지리과목이 8개일반선택과목중하나로편성되어있어고등학교학생중일부만이이과목을통해영토에관한기본적인개념과지식, 그리고영유권문제를학습할수있다는점이다. 이문제에대한개선이요구된다. 165

영토해양연구 Vol. 12 국문초록 최근각국가마다자국의이익을극대화하기위한행동이빈번하게나타나고있으며, 이로인해인접국가들사이에분쟁이끊이지않고있다. 특히영토와관련된분쟁이지속적으로발생한다. 각국가마다자국의안전과경제적자원을확보하기위해관리가능한공간을확대하려하기때문이다. 우리나라주변도예외가아니다. 이연구의목적은영유권분쟁의한지점인이어도가우리에게주는의미를확인하고,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활용할수있는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을개발하여제시하는것이다. 이를위해현행사회과교육과정과한국지리교과서에서의이어도기술방식을비교 분석하고, 이를토대로바람직한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을 3차시에걸쳐개발하였다. 현행한국지리교과서분석결과, 교과서별로이어도에대한내용분량과제시형태가큰차이를보이고있었다. 이어도교수-학습과정안은강의식개념학습, 논쟁식토론학습, 그리고스토리텔링학습의 3가지유형으로제시하였다. < 주제어 > 영토, 영유권분쟁, 이어도, 국토, 한국지리 166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ABSTRACT Teaching-Learning Plan on Ieodo for Korean High School Students Jang, Wonseok Teacher, Shinseong Girl s High School Son, Myongcheol Professor, Geography Education Major, Jeju National University As of late, many countries have frequently been taking actions to maximize their national interests, causing ceaseless disputes with their neighboring countries. Territorial disputes have especially been arising frequently as each country aims to expand their territory to ensure national security and secure profitable resources and the countries surrounding Korea are no except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verify what Ieodo, an island also under territorial dispute, means to Korea and to analyze descriptions about the island in Korean geography textbooks to devise strategies for teaching and learning about Ieodo. Analysis of the current textbooks confirmed that approaches toward the Ieodo issue differ very much between textbook publishers and the amount of contents tends to be insufficient. Based on the analysis, this study suggests teaching-learning plans for high school geography curriculums in Korea using the three different methods of lecturing concepts, holding discussions, and performing storytelling to better impart Ieodo s identity to students. Keywords territory, territorial dispute, Ieodo, national territory, Korean Geography 167

영토해양연구 Vol. 12 참고문헌 고충석 강병철, 2013, 이어도해양분쟁과중국민족주의, 한국학술정보. 교육과학기술부, 2011, 사회과교육과정, 교육과학기술부고시제 2011-361 호 별책 7. 김민정, 2013, 영토교육에관한지리교과서의비교연구 : 한국과일본의지리교과서를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김부찬, 2015, 국제해양법과이어도문제, 온누리디앤피. 박병익외, 2014, 고등학교한국지리, 천재교육. 박희두외, 2014, 고등학교한국지리, 미래엔. 서태열외, 2014, 고등학교한국지리, 금성출판사. 송성대, 2015, 두개의얼굴이어도, ( 사 ) 이어도연구회. 유수현, 2013, 지리교과서의독도관련영토교육내용분석 : 고등학교한국지리를중심으로,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윤옥경외, 2014, 고등학교한국지리, 지학사. 이상균, 2016, 19 세기일본지도에독도는없다, BookStar. 이한기, 1969, 한국의영토, 서울대학교출판부. 최규학외, 2014, 고등학교한국지리, 비상교육. 허은실, 2013, 한 일초등사회과의영토교육관련내용비교 : 교과서와교육과정분석을기초로, 한국교원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강근형, 2011, 이어도주변해역의해양분쟁요인과대책, 이어도연구 창간호, 도서출판각. 김동전, 2014, 이어도와이어도과학기지에대한역사학적인식 동아시아해역갈등의해법모색을위해, 한국학연구 32. 김부찬, 2013, 동아시아해양갈등과이어도문제, 이어도저널 5, 온누리디앤피. 김은석, 2013, 에우토피아, 이어도의존재론적의미, 이어도연구 4, 온누리디앤피. 남호엽, 2011, 글로벌시대지정학비전과영토교육의재개념화,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지 19(3). 168

고등학교한국지리수업에서이어도교수 - 학습에대한연구 류우익, 1988, 국토의재인식 : 문제와미래상, 한국사회의발전과국토구조의재편성, 서울대학교지리학과. 박상흠, 1998, 사회과수행평가의이론적배경과적용방안, 사회과교육 31. 서태열, 2009, 영토교육의개념화와영토교육모형에대한접근,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지 17(3). 손명철, 2013, 학습자주도적인탐구형세계지리교과서모형탐색 영국의고등학교 <World Geography: Case Studies> 를사례로,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지 21(3). 송성대, 2010, 한 중간이어도해영유권분쟁에관한지리학적고찰, 대한지리학회지. 송성대, 2013, 이어도지명의유래와그의의, 이어도연구 4, 온누리디앤피. 송호열, 2013, 중학교사회 2 교과서의독도중단원비교분석 질적분석을중심으로, 한국사진지리학회지 23(4). 이상균 최희, 2015, 북한의영토교육과한민족의독도영유권, 영토해양연구 9. 조성윤, 2012, 이어도에관한제주도주민들의이미지, 이어도연구 3, 온누리디앤피. 169

사료해제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정영미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Ⅰ. 머리말 독도관련매년한두건의사료가언론을통해소개되고있다. 새로운자료발굴 이라는형용어가붙은것이대부분이다. 이를언론에소개된대로정리하여목록으로만들어본것이 < 붙임 1> 이다. 이표를통해지난이십여년간주로독도를일본영토에서제외하거나한국영토로표기한지도들이발굴되어왔음을알수있다. 이와함께질문을받는경우가많다. 과연이러한자료들이정말 새로운 자료들인가? 독도영유권에서 중요한 자료들인가? 등의질문이다. 물론사료각각의차원에서는그렇다. 지금까지그존재가언급되지않았던 새로운 자료들도있고, 적건많건독도와관련하여이야기할수있는부분을포함하고있는자료들이기때문에대부분 중요한 자료들이라고할수있다. 그런데한일독도 ( 영유권 ) 논쟁의차원에서는이야기가달라진다. 한국이그동안많은자료와역사적사건을근거로제시하며독도영유권을입증해 170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왔으나일본은이에수긍하지않고있다. 한국과는다르거나어긋난관점에서한국이제시한근거를해석해왔기때문이다. 따라서한일독도논쟁차원에서의 새로운, 중요한 자료라는것은이와같은일본측의다르거나어긋난관점에서의해석을아우르면서도그것을극복할수있는근거를제시하는자료라고할수있다. 이에다음에서는 1950~1960년대의한일독도영유권논쟁에대하여살펴보고자한다. 지금접하고있는완성된형태의한일독도영유권논리를순차적자료제시및해석, 해석에대한반론과재반론을통해체계화되는과정으로서파악할수있기때문이다. 이과정을통해각각의자료가어떤관점에서해석되었고반론되었는지확인하고향후어떤자료의발굴이요청되는지가늠해보고자한다. Ⅱ. 본론 1. 1950~1960 년대한일독도영유권논쟁의배경과경과 1952년 1월 18일이승만대통령이 대한민국인접해양의주권에대한대통령선언 ( 이하 평화선 이라고함 ) 을공표한다. 1952년 4월로예정되어있던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발효에앞서맥아더라인을계승한한일간의해양경계선을정한것이다. 1950~1960년대한일독도영유권논쟁은이승만대통령의평화선공표에대해일본이항의각서를보내오면서시작된다. 항의각서를통해일본은 대통령선언은일본해의 다케시마 (Liancourt rocks로도알려짐 ) 에대한영유권을상정하고있는듯하나일본은명백히일본영토인그섬들에대한한국측의그와같은어떠한상정또는주장도인정하지않는다 1 는취지의문항 1 1952. 1. 28 일측각서. 이하제시하는문서들의출처에대해서는 < 붙임 2> 참조. 이포함되어있었다. 이에대해한국측은 1952년 2월 12일자각서로서 171

영토해양연구 Vol. 12 독도는일본영토가아니라는반론을한다. 그근거가된것이연합국총사령관각서 ( 이하 SCAPIN이라고한다 ) 677호 (1946. 1. 29) 및맥아더라인이었다. SCAPIN 677이명백히독도를일본영토에서제외시키고있고독도는맥아더라인밖에위치한다는것이그근거였다. 주지하다시피 SCAPIN은 SCAPIN Index의약자로서, 1945년 9월부터 1952년 4월까지의 6년 8개월간일본을점령통치한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 (GHQ/SCAP: General Headquarter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가각서 (memorandum) 형태로일본정부에하달한 GHQ/SCAP의기본적정책또는지령을말한다. GHQ/SCAP은일본정부에명령을내려일본정부가 GHQ/SCAP의대일본정책을수행하게하는이른바 간접통치 의형식으로일본을점령통치하였는데 SCAPIN은그통치의주요형식이었다. SCAPIN은제1 호 (1945. 9. 2) 에서제2204호 (1952. 4. 26) 까지발행되었다. 이외지령, 명령, 섹션메모 (section memo), 구두명령, 시사 (suggestion) 등을통해정책수행을지시하기도하였다. 한편 SCAPIN 677은다음과같이총 6항으로구성되어있는데한국측주장은그 3항에근거한것이다. 먼저 약간의주변지역을정치상행정상일본으로부터분리하는것에관한각서 라는제목하에, 제1항은 일본제국정부는일본이외의어떠한지역또는그지역의어떠한정부관리와피용자또는어떠한사람에대해서도정치적행정적통치를행사하거나행사를기도함을종결할것을지령한다. 고되어있다. 제2 항에서는 GHQ/SCAP이인정하는경우를제외하고일본제국정부는기 ( 旣 ) 인가되어있는해운, 통신전기예보에관한일상적업무외일본이외의정부관리, 피용자와접촉해서는안된다고규정한다. 제3 항에서는 이지령의목적을위해 일본 을정의하고있는데정의된지역을알기쉽게정리해보면 < 표 1> 과같다. 172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 표 1> SCAPIN-677 제 3 항정리 일본 더작은인접섬들중포함되는섬 4 개의본도 ( 本島 ), 홋카이도 [ 北海島 ], 혼슈 [ 本州 ], 규슈 [ 九州 ], 시코쿠 [ 四國 ]) 와약 1 천개의더작은인접섬들 쓰시마 [ 對馬 ], 북위 30 도이북의류큐 [ 琉球 ] ( 난세이 [ 南西 ]) 제도 a. 울릉도, 리앙쿠르암 ( 독도 ), 제주도 더작은인접섬들중제외되는섬 b. c 북위 30 도이남의류큐 [ 琉球 ] ( 난세이 [ 南西 ]) 제도 ( 구치노시마 [ 口之島 ] 포함 ), 이즈 [ 伊豆 ], 난포 [ 南方 ], 오가사와라 [ 小笠原 ], 이오 [ 硫黃 ] 제도다이토제도 [ 大東諸島 ], 오키노토리시마 [ 沖の鳥島 ], 미나미토리시마 [ 南鳥島 ], 나카노토리시마 [ 中の鳥島 ] 쿠릴 ( 지시마 [ 千島 ]) 열도, 하보마이 [ 齒舞 ] 군도 ( 수이쇼 [ 水晶 ], 유리 [ 勇留 ], 아키유리 [ 秋勇留 ], 시보쓰 [ 志發 ], 다라쿠토 [ 多樂島 ] 포함 ), 시코탄토 [ 色丹島 ] 한편맥아더라인이라는것은구체적으로는 SCAPIN 1033(1946. 6. 22) 을가리킨다. 1945년 9월 2일 GHQ/SCAP의지시가없는한어선을포함한선박일체의이동을금지한다는명령을내렸고, 9월 14일에는목조선에한해일본연안 12해리이내에서의조업을허락하였다. 그리고 1945년 9월 27일맥아더라인이라는일본의포경및어업수역을정하는선을발표하였다. 이선은점점확장되어갔는데 SCAPIN 1033은제2 차어구확장을정한지령이다. 이확장과정을정리하면 < 표 2> 와같다. < 표 2> 맥아더라인의확장날짜 내용 SCAP 1945. 8. 25 모든어업활동제한 1945. 9. 14 연안 12마일이내목조범선조업허가 1945. 9. 27 1945. 11. 30 제 1 차어구확장 ( 와카나이 [ 稚內 ]), 네무로 [ 根室 ] 해협제외 ) (FLOTLOSCAP Serial No. 80 of 27 Sept. 1945) 오가사와라 [ 小笠原 ] 근해포경허가 (SCAPIN 371, 30 Nov. 1945) 1945. 10. 13 규슈남쪽해역까지확장 (SCAJAP No. 42, 13 Oct. 1945) 1945. 11. 3 조정, 홋카이도연안 3 마일이내모든해역 (SCAJAP No. 587, 3 Nov. 1945) 173

영토해양연구 Vol. 12 1946. 6. 22 1949. 9. 19 1950. 5. 11 제 2 차어구확장 (SCAPIN 1033) 제3차어구확장 (SCAPIN 2046) 모선식 ( 母船式 ) 2참치어업허가 (SCAPIN 2097) 출처 : 日本占領 GHQ 正史 History of the Non-military Activities of the Occupation of Japan, 1945-1951 42 卷水産業, 日本図書センター, 1990, 2 쪽. SCAPIN 1033 은총 5 항으로구성되어있다. 이중제 2 항에서일본포경 및어업수역을정하고, 제 3 항에서 (a) (b) 항목을두어수역의한계를정하 고있는데 (b) 일본선박이나선원들은 다케시마 [ 독도 ] ( 북위 37 도 15 분, 동경 131 도 53 분 ) 의 12 마일이내로접근하거나이섬에어떠한접촉도해서는안된다 고명기하고있는것이다. SCAPIN 677 및 1033 에의거하여독도가일본영토가아니라고반론한 한국측각서에대해일본은 1952 년 4 월 25 일자각서로서반론해왔다. 다케시마 ( 독도 ) 는시마네현오치군고카무라에속하는섬이며 일본정부 조사에따르면 다케시마 가 Dokdo 로서한국에속해있었다는근거가없 다 는취지의것이었다. 이때 SCAPIN 677 및 1033 에대해한국과는다른 관점에서의해석을하였는데다음과같다. SCAPIN 677 에대해서는제 1 항과제 6 항을근거로제 3 항에서의독도제 외가영유권과는관련없다는주장을하였다. 정부차원또는행정차원의권한실행이나실행시도의중단일뿐이라는것이제1항에나타나있으며제6 항에서연합국의최종결정이아니라는것이규정되어있기때문이라는것이다. SCAPIN 1033에대해서는제3 차어구확장을지령한 SCAPIN 2046(1949. 9. 19) 제6 항을근거로판단한다. 이에의거하면맥아더라인에부여된권한이관련지역및그외지역에서의국가관할권, 국제적영역또는어업권에대한연합국정책의궁극적결정을나타내는것이아니며또현재맥아더라인이폐지되었다는 2 모선식어업 ( 母船式漁業 ): 1 척의모선 ( 母船 ) 과다수의소형어선으로이루어진선단 ( 船團 ) 이행하는어업. 174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것이다. SCAPIN 1033에서는제5 항에서같은내용이기술되어있는데 본승인은국민적관할권, 국제적경계또는관계구역이나기타어떤구역내의어업권에대한최종적결정과관련된연합국정책의하나의표현은아니다 는내용이다. 이에대한지적은 일본정부견해 1 에서나온다. 그리고이어서일본은 다케시마 [ 독도 ] 가역사적국제법적으로일본영토에속한다고주장한 일본정부견해 1 을보내온다. 여기에대해한국은역사적으로지리적국제법적으로독도가한국영토임을논증한 한국정부견해 1 로서반론한다. 이후새로운자료와역사적사건을제시하며자국의견해를보완 강화하고상대국견해에반론하는패턴의논증이한일회담종료시까지지속되었다. 3 2. 한일정부견해와논점의종류 각각 3 차및 4 차에걸친한일정부견해를총체적견해, 이를뒷받침하는 3 1953. 9. 9 한국정부견해 1/1954. 9. 25 한국정부견해 2/1959. 1. 7 한국정부견해 3/1953. 7. 13 일본정부견해 1/1954. 2. 10 일본정부견해 2/1956. 9. 20 일본정부견해 3/1962. 7. 13 일본정부견해 4 4 이 < 붙임 2> 에서의 견해 는각정부견해에서의독도영유권과관련한총체적견해를적은것이다. 근거사실 또는 자료 는이견해를뒷받침하는근거로제시된역사적사실이나자료의내용을간략하게적은것이다. 텍스트에서명확히제시되어있지않은자료의제목이나사건명, 출전등은이후의연구성과등을참조하여필자가확정하여명기해놓았다. 해석 은각자료에대한것을서술되어있는대로나누어적어넣은것이다. 각각의자료에대한해석을하나로묶어종합적인해석을하는경우도있다. 자료또는역사적사실과이에대한해석으로분류하여표로정리한것이 < 붙임 2> 1950~1960년대한일독도논쟁분석표 4 다. 이표를통해한국은 1~ 31, 일본은 A~Z, Aa~Zz, a~f의역사사료나사건을제시하며독도가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한국영토라는것또는 다케시마 [ 독도 ] 가역사적 국제법적관점에서일본영토라는것을논증하고있는것을볼수있다. 이논쟁을쟁점별로세분화해보면다음과같다. 먼저역사적인측면에서는울릉도와독도의명칭을소재로독도가역사적으로어느나라땅이었느냐를다투었다. 일본은울릉도와독도가일본에서다케 175

영토해양연구 Vol. 12 시마와마쓰시마라는이름으로불려진것과마쓰시마의경우한국과의사이에분쟁의대상이된사실이없다는지적을한다. 한편시볼트지도 (1840) 가원인이되어마쓰시마를 다케시마 라는이름으로편입했다는설명을하고 다케시마 [ 독도 ] 는시마네현오치군고카촌에속하는일본땅이며수세기동안한국에속해있었다는근거가없음 을주장한것이다. ( 일 본정부견해 1 ) 이에대해한국은울릉도와독도가예전에우릉등의이름과우산이라는이름으로불린것및근대에들어독도라는명칭으로불린점을들어독도가한국영토임을논증하였다. 숙종실록 의안용복기사, 독도를 본국소속 이라고한 1906년의울도군수심흥택의보고가그근거가되었다. 더불어독도라는명칭이나오게된배경을 경상도방언 을근거로설명하고 일본이독도가일본고유영토라는근거로제시한것은다케시마 마쓰시마라는명칭에관한것뿐이며한국측사료에따르면독도는한국영토임 을논증한다. ( 한국정부견해 1 ) 이후쟁점은양국이제시한역사적사료, 사건등에대한해석과재해석이라는과정을통해더욱세분화되어갔다. 일본은제2차견해에서우산도는울릉도가아니며, 안용복이한말은허위가많고, 심흥택이울릉도를방문한일본관리에게선물을받고치하한것으로보아독도를한국땅으로생각하지않았다고반론한다. 동시에 은주시청합기 등의일본고문서와고문헌및조선의울릉도쇄환정책을들어일본은에도시대부터 다케시마 [ 독도 ] 를실효지배했으나한국의실효지배근거는확인되지않는다고하였다. 176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여기에대해한국은제2차견해에서우산도는울릉도이고 숙종실록 등에서의안용복기사는사실임을재확인한다. 또한안용복기사와관련하여, 17세기일본어부의울릉도도해면허, 안용복사건을경과하면서이들의면허가에도막부에의해중단된사실, 그리고안용복사건이후정기적으로수토사를보내어울릉도를관리한것등을들어울릉도와주변해역이조선의주권하에있음을논증하였다. 이와함께심흥택이일본관리를영접한사실이없다고지적하나근거자료는제시되지않았다. 이와같이양국의제2 차견해에서는독도의역사적명칭에대한논점이대략 ( 가 ) 우산도는울릉도인가, ( 나 ) 안용복의증언은진실한가, ( 다 ) 17세기일본어부들이에도막부로부터받은면허및도해금지령은어떻게해석될수있는가, ( 라 ) 1906년심흥택의행위의진실은무엇인가라는논점으로세분화되어쟁론되었다. 이후양국의제3차견해에서는세분화된쟁점각각에대해근거자료와해석을보완하고논리를체계화시키고있는경향을볼수있다. 역사적인측면에서의또하나의쟁점은고문헌과고지도등에서의일본인의독도인지및실효지배관련사항이다. 이는일본의제1차견해에서제시되었는데이를받아한국의제1 차견해에서는울릉도와독도의지리적접근성을지적한다. 즉 울릉도와독도의지리적접근성은국제법이요구하는역사적권원확립요건을만족시킬제사실 ( 史實 ) 이존재했을것이라는추정을가능케함 이라는것이다. 이쟁점은한일협정이후울릉도에서독도가육안으로보인다, 안보인다라는논쟁으로발전하였다. 그리고제2차견해에서는일본이제1차견해에서제시한 은주시청합기, 오야규에몬가쓰노부수기, 일본여지로정전도 등에대한반론이이루어졌다. 즉일본어민의울릉도도해와독도경영과는관계가없다, 고문헌에서의독도에대한기록은울릉도침략에부수된것이므로무효이다, 고지도에서보이는당시사람들의독도에대한인식과영유권과는관계가없다는것등이다. 이역시한일협정이후자료각각의해석그자체로논점이 177

영토해양연구 Vol. 12 나뉘어쟁론되었다. 다음으로국제법적인측면에서는 1905년일본의독도편입이쟁점이되었다. 일본은제1차견해에서시마네현고시, 나카이요자부로의강치어업경영등은독도에대한 국제법상의영유권확립요건을충족시키는것 으로서국제법적관점에서도독도는일본영토에속한다고논증하였다. 이에대한한국의제2차견해는 일본은한국이항의할수없는상황을만들고무주지인적이없는독도를편입하였으므로불법 임을강조하였다. 한일의정서 (1904. 2. 23), 제1차한일협약 (1904. 8. 22) 등의한일조약이그근거로제시되었다. 그리고동시에독도편입을전후한시기의문헌, 해군보고서, 수로지등을들어일본인이독도를조선영토로인식했음을입증한다. 이와같이양국의제1차견해에서는 1905년일본의독도편입이일본은실효지배 각의결정 고시등의국제법차원에서, 한국은한일의정서 한일협약등의한일관계와편입전후의일본인의독도인식이라는차원에서쟁점화되었다. 이에이은제2차이후의견해에서는, 각각의견해에대해그것을입증하는추가적인사료, 역사적사건이제시되며보완되어간다. 제2차견해에서일본은, 1906년일본관리의독도조사, 토지대장게재, 강치어업면허부가등독도편입과실효지배에관련한국내적조치등의근거사실을추가하였다. 한편, 대한지지 등독도가기재되어있지않은한국문헌등을들어한국의제1차견해에서의 일본이독도편입전후독도를자국령으로인식하지않았다 는견해에대응하였다. 한국은, 일본이제2차견해에서제시한각각의사료, 역사적사건등을재해석하는한편, 1906년의통감부설치등의당시의한일관계를지적하며일본의독도편입을불법으로규정하였다. 이어제3차견해에서일본은한국이제2차견해에서시마네현고시의불법성을지적한것에대해팔마스섬사건 (1928) 등의관련국제판례를들어반론하고한국은그국제판례관련일본의해석을재해석함으로써일본의독도편입을불법으로재강조하고있는것을볼수있다. 178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이와같이국제법적차원에서는 1905년의일본의독도편입이정당한가아니면불법인가가따져졌는데, 독도편입을국제법적인측면에서보는일본의관점과한일관계사적인측면에서보는한국의관점이라는특징을엿볼수있는쟁점이다. 그리고각론적으로제시된견해들에대한해석역시대립되어해석그자체가세부쟁점화되어가는것을볼수있다. 이때쟁점화된각각의사료나역사적사건에대한해석에대해서는 < 붙임 2> 를참고하기바란다. 한편 1905년의일본의독도편입이정당한가아니면불법인가라는쟁점에부수하여그전후의일본인또는한국인의독도인식이문제시되고있는것을볼수있다. 이를주쟁점에부수한세부쟁점으로서하나의카테고리로묶을수있다. 따라서국제법적차원에서의독도영유권논쟁의쟁점은 1905년의일본의독도편입이라는것과, 1905년전후의한국과일본인의독도인식이라는것의두가지로나눌수있다고본다. 3. 독도영유권논쟁과사료적특징위에서 1950~1960년대에한일간에오고간양국의독도관련정부견해와쟁점을정리하여보았다. 한국정부견해는 독도는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한국영토 라는것이고일본정부견해는 독도는역사적 국제법적관점에서일본영토 라는것이다. 그리고각각의견해를논증하기위한자료, 역사적사건등이제시되었는데이에대한상대국의재해석, 반대되는사실이기술된자료의제시등의반복을통해쟁점이세분화되어간경향이있다. 역사적측면에서는 우산도는독도인가, 안용복의증언은진실한가, 17 세기일본어부들이에도막부로부터받은면허및도해금지령은어떻게해석될수있는가, 1906년심흥택의행위의진실은무엇인가, 일본고문헌이나고지도에서보이는일본인의독도인지및실효지배를어떻게볼것인가라는쟁점으로세분화되어간것을볼수있다. 179

영토해양연구 Vol. 12 국제법적측면에서는일본의독도편입이정당한가불법인가를주쟁점으로하여, 각론적으로제시된견해를입증하는역사적사건, 사료해석각각이쟁점화되었다. 그리고부수하여편입당시의일본인의또는한국인의독도인식이쟁점화되었다고볼수있다. 그런데본고의취지에따라포커스를사료에맞추어보면, 이러한과정은대부분근거자료의단락적발췌 인용에따른해석또는역사적사건 ( 사실 ) 에대한서로다른맥락에서의파악에서비롯되는것을알수있다. 처음한국이독도가일본영토가아니라는근거로제시한 SCAPIN 677 을예로들어보자. SCAPIN 677을둘러싼논쟁은한일제2차견해에서제4차견해까지지속되는데한국은 SCAPIN 677의제3항에의거, 일본은제1 항과제6항에의거하여같은견해를반복제시하고있다. SCAPIN 1033, 즉맥아더라인역시마찬가지다. 즉같은자료에서서로다른부분을보고있거나같은사건에서서로다른측면을이야기하는것인데논쟁과정에서정반합의전개없이반론에직면하면또다른서로다른부분이나측면을늘려가는것으로대응해온것이다. 예를들면 SCAPIN 677 해석에대해일본은제2차 ~ 제4차견해를통해 SCAPIN/1 및 1953년덜레스성명등을추가로제시하며제 1차견해에서의해석을견지하였다. 한국역시제1차견해에서의해석을제3 ~4차견해에서도견지한다. 같은자료나사건 ( 사실 ) 에대한다른맥락에서의해석은이외의쟁점관련자료나사건 ( 사실 ) 에서도동일하다. 예를들어 세종실록 지리지나 ( 신증 ) 동국여지승람 의기사는한국에서는우산도 = 독도기사, 일본에서는우산도 = 울릉도기사로서해석되고있다. 17세기안용복증언과일본인의울릉도도해관련사실에대해서는, 한국에서는그가독도가일본의마쓰시마로서우산도라고한것이중시되는한편일본에서는일본인의울릉도도해과정에서독도에대해알게된것이중시되고있다. 나카이요자부로의독도편입청원서와관련하여, 한국에서는그가독도 180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를조선영토로생각했다는것에포커스를맞추고일본에서는그가독도에서강치어업을경영, 실효지배한것에포커스를맞춘다. 일본의독도편입에대해서는, 일본은국제법적절차를따랐으므로정당하다고하고한국은당시한국이일본의식민지화되는과정에서일어난일이므로불법이라고한다. 이견해와관련되어있는근거자료각각에대한해석도쟁점화되어있다. 1905년전후의일본인또는한국인의독도인식에대해서는서로에게유리한자료또는사건 ( 사실 ) 을양적으로늘려간경향이있는데역시같은자료의다른부분에서는또는다른역사적맥락에서는상대국의견해를뒷받침하는것과같은매우중의적인자료들이대부분인것이다. 결론적으로한일독도영유권논쟁에서의근거자료 ( 사료또는사건 ( 사실 )) 대부분이한국측근거자료인동시에일본측근거자료라는특징이있음을지적할수있다. 동일한자료에서서로다른부분이발췌 인용된결과나타나는특징이다. 발췌 인용을통해전체텍스트또는어떤통사적 공시적으로기승전결을이루고있는사건 ( 사실 ) 이갖는의미로부터자유로워지고그만큼자의적의미규정이가능하기때문이다. 또하나, 지엽적으로세분화된쟁점에매몰됨으로써쟁점의줄기또는본질이자칫망각되는현상이자주일어난다는특징이있다. 예를들어일본은제2차견해에서 은주시청합기 등의고문헌, 오야규에몬가쓰노부수기 등의고문서, ( 개정 ) 일본여지로정전도 등의고지도를근거로 도쿠가와 3대장군이에미쓰시대에막부가요나고주민오야무라카와의 다케시마 [ 독도 ] 지배를허가했고, 울릉도도항시 다케시마 [ 독도 ] 가중계지로사용되었으며어로도행해졌다 는것을주장하였다. 이에대해한국은제2차견해에서 은주시청합기 등의고문헌에대해서는 일본의울릉도방면침략시대에저작된것으로증거로서무효, 1696 년일본국민의울릉도방면출어가금지됨 이라는견해를제시하고, ( 개정 ) 일본여지로정전도 등의에도시대중기이후의고지도에대해서는 고지도에서보이는당시의일본인민들의독도에대한정확한지리적지식과 181

영토해양연구 Vol. 12 독도영유문제와는관계없음 이라는지적을한다. 이러한한국측답변은문제의본질이정확히지적된것이었다. 일본측주장은옛날에일본인이울릉도도해중에독도를인지했다, 독도에서강치를잡기도했다는것이다. 그런데그근거가되고있는 은주시청합기 등의고문헌은 다케시마 [ 독도 ] 가아닌다케시마 [ 울릉도 ] 에대한기록물들이다. 다시말해에도시대에다케시마라고불렀던울릉도에대한일본인의인식과도해의역사를기록한기록물들인것이다. 여기에당시마쓰시마라고불렀던독도도언급되고있음을볼수있다. 그러나단지울릉도와함께한섬또는울릉도에부속된섬으로서의명칭, 오키섬또는울릉도와의거리정도의정보만언급되어있을뿐이다. 즉일본은옛날일본인의울릉도인식과도해의문제를현재적관심에따라독도인식과도해의문제로치환시켜논하고있는것이다. 따라서 은주시청합기 등이 일본의울릉도방면침략시대에저작된것으로무효 라는한국측답변이나왔다고본다. ( 개정 ) 일본여지로정전도 등의고지도역시마찬가지다. 에도시대일본서해안지역에서제작된지도중일본서북쪽먼바다에다케시마 [ 울릉도 ] 와마쓰시마 [ 독도 ] 라는이름으로두개의섬을그려놓은지도들이있다. 일본측은이런지도들로서일본인의독도인식에근거한 다케시마 [ 독도 ] 영유권을논한것이다. 그런데이논리는전혀성립되지않는다. 마쓰시마 [ 독도 ] 만있다면모를까다케시마즉울릉도도같이그려져있는지도를근거로영유권과결부된일본인의독도인식을논할수는없는것이다. 울릉도를일본영토로인식했다면가능하다. 그러나국가적영유차원에서울릉도가일본영토인적이없었다. 즉지도상의인식의문제와영유권문제는별개인것이다. 한국측답변에서 일본고지도에대해서는고지도에서보이는인식과영유권과는하등관련없음 이라고한이유일것이다. 한편두섬을조선의영토로인식한지도들이있다. 역시마찬가지의지 182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적이가능하다. 일본인이조선영토로인식했기때문에두섬이조선영토가되는것이아니다. 이논리대로라면일본인이두섬을일본영토로인식하는것으로두섬모두일본영토가되어버린다. 고지도상의인식의문제와영유권문제는별도로생각할필요가있다. 그럼에도최근까지 은주시청합기, ( 개정 ) 일본여지로정전도 등의해석을둘러싼논쟁은지속되어왔다. 일본인의울릉도 독도소속에대한인식이라는문제가영유권문제로치환되는것은아니라는사실은이지엽적이고세부적인논쟁에의매몰과함께묻혀버린듯하다. Ⅲ. 맺음말 1950~1960년대의독도논쟁은,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영토라는일본측주장에대한한국측반론으로시작되었다. 그리고 3, 4차에걸쳐주고받은한일정부견해를통해한국은독도가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관점에서한국영토임을, 일본은 다케시마 [ 독도 ] 가역사적 국제법적관점에서일본영토임을논증하였다. 그리고양국이각각자료와해석을제시하고상대국이재해석하는과정을통해 우산도는독도인가, 1905년의일본의독도편입은정당한가 등의쟁점이다시몇개의쟁점으로세분화되어간다. 한일독도논쟁에서의쟁점의세분화는근거자료에포함된독도관련의미의중의성에서비롯된다. 그중의성은동일한자료에서서로다른부분이발췌 인용된결과나타나는특징이다. 발췌 인용을통해전체텍스트또는어떤통사적 공시적으로기승전결을이루고있는사건 ( 사실 ) 이갖는의미로부터자유로워지고그만큼자의적의미규정이가능하기때문이다. 또한논쟁기이후의논쟁형태까지염두에두고본다면세분화된쟁점에매몰됨으로써쟁점의줄기또는본질이망각된경향이있다. 일본인의울릉도 독도소속에대한인식이라는문제가영유권문제로치환되는경 183

영토해양연구 Vol. 12 우가왕왕있는것이다. 그리고논쟁기에제시된논점의종류, 논리의형태, 자료및해석의종류와범주가이후약간수정보완되어지금에이르렀다는점을지적할필요가있다. 다시말해논쟁기를되돌아봄으로써앞으로나아갈방향을강구해볼수있다는의미다. 결론적으로지난논쟁의명확한파악위해자료가발굴될필요가있다고본다. 독도가한국영토임을시사하는많은자료가이미제시되어왔으나동시에독도가일본영토라는의미로도해석되어왔다는점을명심해야한다. 이경우유사한자료의양적확충은별의미가없는것이다. 물론독도영유권은독도논쟁에어떤영향을받는것이아니다. 다시말해일본측이어떤문제를제기하였든또는한국측의해석에어떤문제가있든그것과는관계없는것이다. 한일논쟁을통해또는이논쟁에서의우위선점등에힘입어독도영유권이성립된것이아니기때문이다. 그러나한편으로일본이독도영유권을주장하고있는것도사실이므로그것이어떤것인지분명히파악해야할필요는있는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그동안해온바와같이왜독도가한국영토이고일본영토가아닌지를살펴보는것이아니라왜일본이독도를일본영토라고하고한국영토가아니라고하는지에대해더세심히살펴볼필요가있는것이다. 새로운 중요한 자료발굴도이와관련하여진행되어야할필요가있다고본다. 184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 붙임 1> 독도관련 새로발굴된자료 목록 보도 방송일자 1996. 10. 4 1998. 3. 24 2005. 2. 27 2005. 3. 22 매체제목발굴 ( 소개 ) 자료해석 ( 기사내용요약 ) 연합뉴스 연합뉴스 연합뉴스 YTN 독도한국영토입증하는일본古地圖발견 러시아해군이그린최초의독도그림등공개 독도는한국땅 일본고지도발견 일본고지도, 독도 영토에서제외 하야시시헤이 [ 林子平,1738~1793] 의 삼국여지통람로정도 ( 三國輿地通覽路程圖 ) 1854 년러시아푸차친제독함대팔라스함소속시르게프대령이독도를관측하면서 3.5 마일 (6.5km), 5 마일 (9.2km), 14 마일 (26km) 거리에서그린것. 1857 년에해군보고서를통해발표, 1861 년해군성 항해지침, 1882 년 한국동해안도 등에수록 1856 년프랑스해군성 수로지 수록독도 1886 년모리킨세키 대일본해륙전도부조선류큐전도 ( 大日本海陸全圖附朝鮮琉球全圖 ) 1785 년하야시시헤이 조선팔도지도 1300 년경 대일본국도, 일본변계도 독도를일본이름인竹島로표기하고그위에 조선의땅 이라고못박음 이지도에서독도의동쪽섬은 올리부차, 서쪽섬은 메넬라이 로명기되어있으나 ( 이지도가 ) 조선동해안도라는점에서러시아가이들섬을명백히한국영토로보고있음을입증 1855 년 11 월 17 일프랑스함정콩스탕틴호가동해통과시승무원이그린지도. 독도에서 28km 떨어진곳에서독도를그림 竹島로표시된울릉도와松島로명시된독도가조선의영토에편입 한반도전체를노란색으로채색한이지도에는북위 39 도에울릉도와독도 ( 우산국 ) 가하나의큰섬으로그려져있고, 울릉도우측바다가 일본해 가아닌 동해 로표기되어있음 제 3 자인주일영국대사가만든고지도집에나온일본지도에독도가표시되어있지않음. 독도가일본땅이아니라는사실을증명 2005. 8. 10 2005. 2. 27 2005. 2. 27 한국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경향신문 여기봐, 한국땅이라돼있지! 독도는한국땅입증지도발견 독도명백히日영토밖에위치 독도는한국땅 지도잇달아발견 1910 년경 대일본분현지도 ( 大日本分縣地圖 ) 중 조선전도 1910 년경 대일본분현지도 ( 大日本分縣地圖 ) 중 시마네현전도 1785 년하야시시헤이 조선팔도지도 1951 년 3 월영국정부가작성한지도 독도를 다케시마 라는이름으로명확하게조선영토에포함 권위있는이지도의제작자가독도를일본영토로인식하지않았음 북위 39 도에울릉도와독도 ( 우산국 ) 가하나의큰섬으로그려짐 북위 39 도와 40 도사이에울릉도와독도 ( 우산국 ) 를하나의큰섬으로묶었고 궁숭 ( 弓崇 ) 이라는글과 동 ( 東 ) 이란글기입 일본영토에서독도가제외되어있음 ( 매일신문 ). 1951 년 2 월에마련된 1 차초안에는독도, 울릉도. 제주도까지일본령으로포함시켰다가확인을거쳐정정 185

영토해양연구 Vol. 12 보도 방송일자 매체제목발굴 ( 소개 ) 자료해석 ( 기사내용요약 ) 1876 년 대일본전도 ( 大日本全圖 ) 일본의각지역명칭이상세히적혀있지만 다케시마 는없음 2005. 4. 4 2006. 6. 18 2006. 10. 25 한국일보 연합뉴스 연합뉴스 日사료아무리뒤져도독도는한국땅 315 년전日고지도 독도는한국땅 독도는조선땅 日지도공개 1870 년이노다다타카 [ 伊能忠敬 ] 의 관판실측일본지도 ( 官版實測日本全圖 ) 1926 년작성, 1930 년수정 육지측량부출판지도구역일람도 1691 년이시카와유센 [ 石川流宣 ] 해산조륙도 ( 海山潮陸圖 ) 1892 년스즈키게이사쿠 [ 鈴木敬作 ] 조선국전도 ( 朝鮮國全圖 ) 1893 년오스가류타쿠 [ 大須賀龍澤 ] 대일본전도 ( 大日本全圖 ) 이노다다타카의지도에서시마네현에독도는없음 독도없음. 1905 년시마네현에강제편입시킨이후에도일본정부가관리하지않았음 일본시마네현북쪽에위치한오키섬의오른쪽에울릉도와독도를합친섬이그려져있고이섬에는 한당 ( 韓唐 ) 표시 일본메이지정부가독도를시마네현에강제편입시키기전에독도를한국땅으로보고있었음 2007. 7. 5 연합뉴스 독도는신라땅 표기日고지도발견 7 세기교키 [ 行基 ] 의 행기도 ( 行基圖 ) 현재의울릉도와독도를기러기들이쉬었다가가는곳이라는의미로 안도 ( 鴈島 ) 로표기. 안도 는사람이살지않는곳으로신라땅이라는해설도기록됨 2007. 12. 4 조선닷컴 우산도 는역시독도였다 박세당 (1629~1703) 서계잡록 박세당이배를타고울릉도에갔다온승려로부터전해들은이야기. 대게두섬 ( 울릉도와우산도 ) 이그다지멀지않아한번큰바람이불면닿을수있는정도다. 우산도는지세가낮아, 날씨가매우맑지않거나최고정상에오르지않으면 ( 울릉도 ) 에서보이지않는다. 고기록 2008. 2. 22 경향신문 독도는한국땅 입증할日고지도발견 1894 년 신찬조선국전도 마쓰시마와다케시마라고표시한섬들이한국본토와똑같이옅은황색으로칠해져있고일본과중국땅은무색. 독도를 마쓰시마 로표기한것은당시일본에서울릉도와독도의명칭이혼란스러웠기때문임 2009. 1. 3 연합뉴스 독도영토제외 日법령첫발견 조선총독부교통국공제조합이소유한일본재산정리에관한정령시행에관한총리부령 [ 총리부령 24 호 (1951. 6. 6)] 구령에의해공제조합등에서연금을받는자를위한특별조치법제 4 조제 3 항규정에기초한부속도서를정하는명령 [ 대장성령 4 호 (1951. 2. 13)] 일본의부속도서에서독도제외 2009. 1. 12 연합뉴스 日, 현행법령서도 독도 영토서제외 1960 년 대장성령 43 호 및 1968 년 대장성령 37 호 일본이전후연금수급자선정및일본점령지역회사의재산정리등을목적으로 1951 년제정한총리부령 24 호와대장성령 4 호를개정한것. 일본의부속도에서울릉도와독도, 제주도를제외한다 고명시하고있으며현재까지유효 186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보도 방송일자 매체제목발굴 ( 소개 ) 자료해석 ( 기사내용요약 ) 2009. 6. 5 연합뉴스 독도특위, 독도한국령표기 고지도발견 1832 년네덜란드왕립도서관소장지도 한국영토는노란색, 일본은초록색, 중국은붉은색으로표시, 울릉도와독도는한국령표기 2010. 4. 14 파이낸셜뉴스 日고지도 독도는조선땅 1894 년 일본조선지나삼국지도 ( 日本朝鮮支那三國地圖 ) 일본본토는분홍색으로, 독도와울릉도는조선과마찬가지로연한녹색으로각각표시, 당시일본인들이독도와울릉도를조선땅으로인식하고있었던것을나타냄. 특히일본은그동안독도를 다케시마 [ 竹島 ] 로표기하면서 다케시마 가독도라고, 주장해왔으나이지도에서는독도는 마쓰시마 [ 松島 ] 로, 울릉도가 다케시마 로표기되어있어눈길을끎 2010. 4. 8 주간동아정치 19 세기클라프트지도 독도는한국땅 율리우스클라프트, 1832 년하야시시헤이의 삼국총람도설 ( 三國總攬圖說 ) 번역출간본, 271 쪽 울릉도, 죽도, 우산도있음. 우산국이 3 개의섬을포괄는이름이며우산도가바로독도임을알수있음 2011. 5. 3 2012. 3. 28 연합뉴스 문화일보 동해 조선해표기 1800 년대日고지도발굴 독도는한국땅 입증日고지도첫공개 1835 년미노사쿠소고 [ 箕作省吾 ] 제작지도 1892 년오노에이노스케 [ 小野英之助 ] 보통학전서 제 16 편 만국신지도 ( 萬國新地圖 ) 수록 대일본국지도 ( 大日本國地圖 ) 1895 년고토쓰네타로 [ 後藤常太郞 ] 대일본분현지도 ( 大日本分縣地圖 ) 1904 년하마모토이사부로 [ 賓本伊三郞 ] 극동일로청한사국대지도 ( 極東日露淸韓四國大地圖 ) 동해를조선해로, 태평양쪽일본동쪽바다를대일본해로표기 일본본토는황색으로채색했지만, 울릉도와독도는채색을하지않아독도가일본땅이아님을보여주는지도로국내첫공개 시마네현관내의위치와거리등을매우정확하게나타내고있는데독도는포함되어있지않음 우측하단에 조선신지도 를부록으로제시해조선을더자세하게나타냈는데울릉도와독도를강원도와동일하게연한보라색으로채색 2012. 7. 27 SBS 독도, 일본땅아니다 日학자고지도공개 1880 년일본내무성지리국 대일본전도 ( 大日本全圖 ) 1895 년 일본전도 ( 日本全圖 ) 정부공식지도로서당시러시아와분쟁중인쿠릴열도의조그만섬까지꼼꼼히표시어있지만, 독도는흔적도없음 청일전쟁당시승리의대가로받은타이완을일본땅으로새로표기했지만독도는없음 187

영토해양연구 Vol. 12 보도 방송일자 매체제목발굴 ( 소개 ) 자료해석 ( 기사내용요약 ) 2012. 8. 28 국민일보 독도는조선영토 표기 日근대교과서첫공개 1887 년오카무라마쓰타로 신찬지지 ( 新撰地誌 ) 2 권수록 일본총도 ( 日本總圖 ) 1905 년 소학지리용신지도 ( 小學地理用新地圖 ) 수록 대일본제국전도 ( 大日本帝國全圖 ) 일본주변섬을가로줄로표기해일본영토임을밝히면서울릉도와독도는같은표시로조선땅임을분명히확인 류큐의부속섬은물론, 1894 년부터식민화한대만, 일본북부의지시마 [ 千島 ] 열도까지꼼꼼히일본의영토로표시. 독도는포함되지않음 1886 년 일본사요 ( 日本史要 ) 대마도등주변군도를모두자국영토로주장, 독도에대한표기는나타나있지않음 2013. 5. 22 KBS 오사카 일본고지도도발견 독도조선땅 1785 년하야시시헤이 삼국접양소도 ( 三國接壤小圖 ) 동해에위치한 2 개의섬에는울릉도와독도의일본식이름인 죽도 라는명칭이한자로쓰여있음. 죽도 는 조선이가지고있다 며정확히표기 2013. 4. 28 제주신보 독도가한국땅임을알리는고지도일본에서발견 1717 년겟신 [ 月心 ] 성자여항 조선통신사와나눈대화를정리한책지도를보면울릉도옆에독도의옛이름 우산도 ( 于山島 ) 가선명함 2013. 5. 21 2013. 8. 14 뉴스천지 경북매일 日지식인단체 독도는한국땅 18 세기일본고지도공개 日독도편입은허구 일본고지도나와 1775 년, 1778 년 일본흥지로정전도 ( 日本興支路程全圖 ) 1905 년동경시수문관 일로교전극동전국대지도 ( 日露交戰極東戰局大地圖 ) 1775 년지도에는독도가일본영토로표시되어있지만일본막부정부가다시조사한후펴낸 1778 년지도에서는독도가제외 한국전도 에독도와울릉도가표시되어한국영토임을알수있음. 독도는강원도쪽으로붙어있어당시일본이독도의위치조차자세히파악하지못하고있었다는것을알수있음 2013. 10. 24 아시아경제 일본독도동영상에정부 고지도 복원공개 맞불 1844 년미쓰쿠리쇼고 [ 箕作省吾 ] 신제여지전도 ( 新製輿地全圖 ) 세계를동반구와서반구로구분하여표시. 조선과일본사이해역을 조선해 로표기. 프랑스인이만든세계지도를바탕으로제작 2013. 10. 24 2013. 10. 24 연합뉴스 충청일보 독립기념관 패전일본정부독도를영토로인식안해 독도는우리땅 희귀자료 2 점공개 1948. 7. 3 일본건설성지리조사소발간 주코쿠및시코쿠지방도 (1/500,000) 1942 년아유사와신타로 [ 鮎澤信太 ] 대일본해 ( 大日本海 ) ( 경성사출판부 ) 독도를일본의영토에서제외할것을명령한 1946 년연합국각서 677 호를계승한지도 태평양을일본해로명시, 동해를한국의바다로표시 2014. 8. 12 Korea Daily 독도는한국땅 일본고지도또발견 1785 년 삼국통람여지로정전도 ( 목판본 ) 독도 ( 죽도 ) 를 조선의것 이라고명시했으며색상도조선과같은색으로표시 1844 년 신제여지전도 동해가조선해로표기됨 188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보도 방송일자 매체제목발굴 ( 소개 ) 자료해석 ( 기사내용요약 ) 2014. 8. 24 연합뉴스 독도는한국땅 인정한일본정부지도첫공개 1951 년 8 월 일본영역참고도 1951 년. 8 월해상보안청수로부작성지도. 1951 년 10 월일본국회가대일평화조약을비준할때제출한부속지도로서독도주변에반원을그려일본영토에서명확히제외 2014. 11. 27 2015. 2. 25 경북매일신문 강원도민일보 독도는한국땅 日문서또나왔다 독도한국령입증고지도공개 1951 년일본마이니치신문간행 대일평화조약 및부속도 일본영역도 1895 년 일청한군용정도 ( 日淸韓軍用精圖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후일본마이니치신문이평화조약에조인된내용을일본국민에게알리기위해발간한백서. 독도가일본영토가아닌한국영역으로표시됨 각국가와국가사이의국경선이명확하게그려져있으며조선과일본사이에는동해바다상에국경선을분명하게표시하고있어당연히독도는조선의국경선안에표시. 조선의영토임을분명히함 2015. 4. 14 KBS 독도는조선땅 일본정부공식지도첫발견 1897 년 대일본제국전도 ( 大日本帝國全圖 ) 1897 년에일본농상무성이제작한지도로서울릉도와함께독도가하얀색조선영토로표시 2015. 7. 17 2015. 7. 20 국민일보 경북매일 독도는조선의것 1802 년판일본지도발굴 독도 = 한국땅 19 세기日지도발견 1785 년및 1802 년하야시시헤이 [ 林子平 ] 대삼국지도 ( 大三國地圖 ) 울릉도와독도가조선의땅임을상징하는노란색깔로함께칠해져있고지금까지발견된고지도중유일하게독도이름과함께 조선의것 ( 朝鮮ノ持之 ) 으로표기하고있음 1887 년일본문부성허가 신찬지지 ( 新撰地誌 ) 부속 일본총도 울릉도와독도가함께나란히한국의영토임을알수있게하는가로줄속에포함됨. 일본의영토는또다른가로줄로표기함으로써독도와구분 2016. 2. 21 중앙일보 일본고지도가보여주는독도는한국땅 1897 년일본문부성검인일본지리교과서 일본지지 부속지도 1785 년 삼국접양지도 ( 三國接壤地圖 ) 일본영토는붉은색, 조선영토는흰색으로표시됨. 독도도흰색으로표시되어일본영토가아님을보여주고있음 동해가운데두섬중큰섬을 죽도 라고적은뒤조선의것이라고표기 1895 년일본군제작군사용정밀지도 일청한군용정도 ( 日淸韓軍用精圖 ) 국가사이의국경선이범례에따라그려졌고독도와울릉도가우리나라국경선안에그려져있음 189

영토해양연구 Vol. 12 보도 방송일자 매체제목발굴 ( 소개 ) 자료해석 ( 기사내용요약 ) 2016. 8. 29 연합뉴스 1938 년발행조선어사전초판본찾았다 문세영 조선어사전 (1938, 초판본 ) 379 쪽 독 을돌의사투리와홀로독 ( 獨 ) 등두가지로설명, 당시사람들이독도와석도를같은말로사용했음을보여주는자료 2016. 10. 24 2016. 10. 25 세계일보 세계일보 11 면 YTN KBS 독도는조선땅인정일지도 교과서발견 독도영토주권입증자료 2 점공개 일제강점기시마네현지도에 독도 는없었다 日 독도는일본땅아냐 신자료공개 일본농상무성지질조사소편 일본제국전도 (1888, 1892) 야마카미만지로 [ 山上萬次郞 ] 중등교과용지도외국부 (1902) 및 여자교과용지도외국지부상 (1903) 1912 년일본문부성간행중학교과용지리부도 최근일본지도 1946. 1. 5 아사히그래프 45 권 1 호 일본측독도보다작은일본섬에산표기가되어있지만성인봉이있는울릉도나산봉우리로이뤄진독도에는산을나타내는표시가없음. 일본영토로인식하지않아측량대상에서제외독도가일본국경선밖에있음 국가전도에울릉도와독도를표기하였으나시마네현이속해있는주고쿠지역지도에독도표기없음 아사히신문이 1923 년부터 2000 년까지발간한뉴스화보로제 2 차세계대전후바뀐세계의영토지도수록. 일본영역을사선으로그려넣은지도에울릉도와독도지역은누락 190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 붙임 2> 1950~1960 년대한일독도논쟁분석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한국 1952. 2. 12 각서 독도는일본땅이아님 1 SCAPIN 677(1949. 1. 29) 연합국이일본영토에서독도를제외시켰음 2 SCAPIN 1033(1949. 6. 22) 독도는맥아더라인밖에위치함 일본 1952. 4. 25 각서 다케시마 ( 독도 ) 는시마네현오치군고카촌에속하는일본땅이며수세기동안한국에속해있었다는근거없음 A SCAPIN 677 (1949. 1. 29) 제 1 항 B SCAPIN 677 (1949. 1. 29) 제 6 항 C SCAPIN 2046 (1949. 9. 19) 제 6 항 독도에대한정부차원또는행정차원의권한실행또는실행의도의중단을의미할뿐임 포츠담선언제 8 조에서의일본의 제소도 에대한궁극적결정과관련된연합군의정책이아님 맥아더라인은관련지역및그외지역에서의국가관할권, 국제적영역또는어업권에대한연합국정책의궁극적결정이아니며지금은폐쇄되었음 1953. 7. 13 일본정부견해 1 - D 이수광, 지봉유설 권 2 지리부 ( 地理部 ) 섬 ( 島 )(1633) E 1694 년 9 월조선예조참판이여 ( 李畬 ) 가쓰시마번주에게보낸서신 F 시볼트 (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일본도 ( 日本圖 ) (1840) - - 예전에다케시마또는이소타케시마라고했던섬은지금은울릉도라고하는섬이며다케시마는마쓰시마로알려져있었음 필립프란츠본시볼트가 1840 년에제작한지도의실수로유럽지도에서는울릉도가마쓰시마로표기되게되었고, 그결과앞의명칭과뒤의명칭이뒤바뀌게되었음. 이부정확한명칭이일본에서도사용되어울릉도가마쓰시마로표현되고명백히마쓰시마라고불리던작은섬에 다케시마 라는이름을붙이게되었음 1693 년 ( 일본元祿 6) 에일어난한일간의분쟁이후막부지시에따라일본인이어로를위해다케시마 ( 울릉도 ) 근처로가는것이금지되었으나그때의다케시마는지금의 ' 다케시마 ( 독도 )' 와는관계없음. 1881 년 ( 일본明治 14) 일본정부가일본인이어로및벌목을위해가는것을금지한섬은 다케시마 ( 독도 ) 가아닌울릉도였음 에도시대문헌과고지도에따르면 다케시마 ( 독도 ) 는예전에마쓰시마라는이름으로알려져있었음조선문헌에서도보이듯이다케시마는예전에는울릉도를가리키는명칭이었으나시볼트의지도로인해마쓰시마가울릉도를가리키게되었으므로마쓰시마에는다케시마라는명칭이부여되게되었음마쓰시마인다케시마는지금까지한번도한일간분쟁대상이된적이없음 - 울릉도와관련된한일간어떤분쟁에서도 다케시마 ( 독도 ) 가이슈가된적은없음 191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국제법적관점에서도독도는일본영토에속함 G 시마네현고시 40 호 (1905. 2. 22) H 나카이요자부로의 량코도영토편입및대하원 ( りゃんこ島領土編入並に貸下願 ) (1904. 9. 29) I SCAPIN 1033 제 5 항 J Memorandum from GHQ/SCAP to the Japanese Government AG 800.217(25 Apr 52) DS (SCAPIN 1033 폐지건 ) K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제 2 장제 2 조 (a) 항 L SCAPIN 2160(1951. 7. 6) ( 독도를미국폭격훈련구역으로지정 ) 고문헌과고지도등은지금의 다케시마 ( 독도 ) 가일본에서예전에마쓰시마라는이름으로알려졌었고일본영토로간주되었다는것을보여줌 일본정부는한국병합이전인 1905 년 ( 일본明治 38) 2 월 22 일시마네현고시 40 호로 다케시마 ( 독도 ) 를시마네현오키도사관할하에둠. 이는국제법상의영유권확립요건인영토편입의지조건을충족시키는것임. 일본인나카이요자부로가일본정부의공식허가를받아 다케시마 ( 독도 ) 에漁舍를짓고바다사자를잡은이후 다케시마 ( 독도 ) 는제 2 차세계대전이전까지일본인에의해효과적으로개발되었음. 이역시국제법상의영유권확립요건인실효지배조건을충족시키는것임 제 5 항에서국가주권과어업권에대한최종결정관련연합군의정책을나타내는것이아님을말하고있으므로, SCAPIN 1033 이결코 다케시마 에대한일본의주권을부정하는것은아님 1952 년평화조약체결에앞서맥아더라인은 1952. 4. 25 자각서에따라폐지되었음 독립한국에포함되는섬으로울릉도, 거문도, 제주도만언급하고있음 평화조약대표조인국인미국이일본과협정하여 (1952. 2. 28 자 ) 다케시마 ( 독도 ) 를미군연습장으로지정한것은 다케시마 ( 독도 ) 가일본의영토라는전제임 1905 년시마네현고시 40 호및나카이요자부로의독도강치어업경영은국제법상의영유권확립요건을충족시키는것임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따라독도는일본영토로규정되었으며일본의어업권을제한한맥아더라인은이미폐지되었음또독도가미공군연습장으로지정된것은독도가일본영토라는것을의미함 192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953. 9. 9 한국정부견해 1 일본이독도가일본고유영토라는근거로제시한것은 다케시마, 마쓰시마 라는명칭에관한것뿐이며한국측사료에따르면독도는한국영토임 울릉도와독도의지리적접근성은국제법이요구하는역사적권원확립요건을만족시킬제史實이존재했을것이라는추정을가능케함 3 세종실록 권 153 지리지 / 강원도 / 삼척도호부 / 울진현 (1454) 4 ( 신증 ) 동국여지승람 권 45, 울진현 / 우산도울릉도조 (1531) 5 숙종실록 권 30 숙종 22 년 9 월무인조 6 1906 년울도군수심흥택보고서 ( 각관찰도안 보고서호외 1906. 4. 29 / 이명래보고서 ) - 우산과울릉이현의동쪽바다가운데있는데이두섬의거리가멀지않아날씨가좋으면서로바라다보인다 고함 김자주의보고에따르면독도는삼봉도라고불렸음 1696 년안용복이울릉도와독도에가서두섬이한국영토이니일본배가울릉도독도접근해서는안된다고경고함 울도군소속독도 라는구절이있음. 1910 년이전에독도가울도군수에의해관리되었다는사실에논란의여지없음 울릉도와독도명칭관련, 한국에서울릉도는우릉 무릉 울릉등으로, 독도는삼봉도의우산으로불렸음현재의독도라는명칭은경상도지방 ( 원문대로임 ) 의사투리임. 독 은 돌 을의미하며독도는 돌섬 이라는뜻인데 isolated island 라는의미의독도라는명칭과발음이같으므로적당히, 상징적으로독도라고불리게되었음 지리적으로독도는오키보다울릉도에서가까움. 날씨가좋으면울릉도에서독도가보임. 울릉도와독도의지리적접근성은국제법이요구하는역사적권원확립요건을만족시킬제史實이존재했을것이라는추정을가능케함 일본은한국이항의할수없는상황을만들고무주지인적이없는독도를편입하였으므로일본의독도편입은불법임편입이후에도독도가한국땅이라는것은제史料가증명하는바임평화조약은 SCAPIN No. 677 을재확인한것이며, 동조약에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들어간것은한국섬들에대한대표성때문임 7 한일의정서 (1904. 2. 23) 8 제 1 차한일협약 (1904. 8. 22) 9 시마네현교육회편, 시마네현사 ( 島根縣史 ) (1923) 제 5 장 10 1904 쓰시마함보고서 ( 쓰시마함함장해군중좌仙頭武英이수로부장에게보낸 1905. 1. 5 자보고서 67 호 ) 독도는무주지인적이없으며한국이곤란한상황에처했을때독도가편입되었으므로항의할수없었음 나카이요자부로는독도를한국영토라고믿고있었음 울릉도주민수십명이매년이섬에어사를세우고섬근처에서어로에종사한다고보고하였음 11 한일신협약 / 정미 7 조약 (1907. 7. 24) 1907 년신한일조약에따라일본이공개적으로한국의내정간섭, 통감부에서추천한일본관리들이한국의수산을조사하였는데그보고서에독도는한국에속한섬으로참조되었음 12 한국수산지 (1908. 5) 193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3 히바타셋코, 일본해에있는 다케시마 의일조관계에관하여, 역사지리 제 55 권제 6 호 (1930) 한국강원도에속하는 다케시마 ( 독도 ) 와울릉도는한국영토의최동단으로서일본해에있다고함 1954. 2. 10 일본정부견해 2 우산도는지금의독도가아닌울릉도며안용복증언에는허위가많고한국측이제시한제역사적사실및 SCAPIN 관련해석은달리해석됨 1 SCAPIN 677(1949.1.29) - 제 3 항 14 일본해군성, 조선연안수로지 제 3 편 조선동안 (1933) K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제 2 장제 2 조 (a) 항 15 일미행정협정에의한합동위원회가독도를폭격훈력구역에서삭제 (1953. 3) 3 세종실록 권 153 지리지 / 강원도 / 삼척도호부 / 울진현 (1454) 4 ( 신증 ) 동국여지승람 권 45, 울진현 / 우산도울릉도조 (1531) M 정원용, 문헌촬록 (1850) 5 숙종실록 권 30 숙종 22 년 9 월무인조 6 1906 년울도군수심흥택보고서 ( 각관찰도안 보고서호외 1906. 4. 29/ 이명래보고서 ) 9 시마네현교육회편, 시마네현사 ( 島根縣史 ) (1923) 제 5 장 일본정부의해석관련, 일본영토에관한한평화조약에는이 SCAPIN 조항과모순되는조항이없으므로 SCAP 의처리를그대로재확인하여준것임 일본이독도를편입이후에도독도는울릉도에속했으며울릉도어민에의해경영됨 여기에서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열거된것은그대표성때문이며그밖의한국해안의수많은섬들을한국영토로부터분리함을의미하지않음 미공군은한국정부항의에따라 1953. 2. 27 독도를미공군연습지에서제외하였다고공식적으로통고해왔음 우산도와삼봉도는지금의 다케시마 ( 독도 ) 가아닌울릉도임. 또김자주의보고는 동국여지승람 이아닌 숙종실록 기사임. 한국고문헌과고지도에서 독도 라는명칭은찾아볼수없음 숙종실록 기사는안용복이귀국후비변사취조를받았을때거짓공술을한것이므로내용에허위가많음. 안용복이울릉도에서일본어선의울릉도 독도접근경고시는일본어민은울릉도에도항하지않았음. 당시조선국정부는안용복을불법출국죄로체포하여유형에처함 심흥택은조사단으로부터독도에서포획한강치 1 마리를받고치하함. 만일군수가당시 다케시마 ( 독도 ) 를울릉도에속한섬으로취급하였으면당연히그러한응대는안했을것임 나카이가오키도청에제출한 다케시마 ( 독도 ) 에관한설명은편자의오해에근거한것이라고할수있음 한국측은문헌이나사실인용에서부정확하며해석오류가많음 194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3 히바타셋코, 일본해에있는 다케시마 의일조관계에관하여, 역사지리 제 55 권제 6 호 (1930) 이논문이발표된 1930 년에는 다케시마 ( 독도 ) 는시마네현에소속되어있었고조선강원도관할하에있지않았기때문에명백히필자의오류임, 필자는예전에다케시마라고불렸던것이울릉도며지금의 ' 다케시마 ' 가아니라는것에대한인식이없었음 14 일본해군성, 조선연안수로지 제 3 편 조선동안 (1933) N 본주연안수로지 제 2 권제 2 편 본주북서안남서부 항 수로지는사용자의편의를위해편찬되는것으로섬의귀속과는관계없음. 우연히 다케시마 ( 독도 ) 가울릉도부근을항행할때에관계있는섬이므로울릉도항에병기했을뿐임. 동시에 다케시마 ( 독도 ) 는오키열도부근을항행하는경우에도관계가있으므로 ' 본주연안수로지제 2 권 ' 2 편 본주북서안남서부 항에 다케시마 ( 독도 ) 가오키열도및 다케시마 ( 독도 ) 로되어있음 10 1904 년쓰시마함보고서 조선연안수로지 에따르면 다케시마 의東方島에어부용고위소옥이있으나풍랑때문에심히파괴되어있다고함 이라는한구절뿐임. 한국측이인용한구절은편자가들은이야기를기록한후년의 다케시마 ( 독도 ) 의사정이며군함쓰시마의보고는아님. 또보고에는울릉도에서오는사람으로되어있고울릉도주민은아님. 이사람들은울릉도를근거로전복 미역채취를위해 다케시마 에온일본인및이들에게고용된조선인을가리킴 7 한일의정서 (1904. 2. 23) 8 제 1 차한일협약 (1904. 8. 22) 한일협약제 2 항의외교고문은미국인이었고, 한일의정서는인용이부정확함. 한일의정서는원래러일전쟁시한국의영토보전목적달성을위해필요에따라군략상필요한지점을일시적으로사용하는것을정한규정에불과하고 다케시마 ( 독도 ) 영토편입조치와는관련없음 195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O SCAPIN/1 (1951. 12. 5) P 1953 년 8 월 8 일자덜레스의아마미군도권리포기성명 SCAPIN677 에의거하여일본정부의행정권이정지된남서제도중북위 30 도와 29 도간의섬들이 SCAPIN/1 에의해일본정부의행정관할하로복귀. 1953 년 12 월아마미군도행정권도일본측에반환됨. 또남은남서제도및이우후암남쪽남방제도, 오키노토리시마, 미나미토리시마에대해서도일본에 잔존주권 이있음이명백해짐. 행정권이정지된하보마이군도에관해서도일본이평화조약에의거권리, 권한및청구권을포기해야할열도중에포함되어있지않음을덜레스미전권에의해명백히되어있음. 이상의사실상의조치에서보아, 총사령부각서와평화조약사이에는관계가없는것이명백함 일본측은에도시대부터 다케시마 ( 독도 ) 를실효지배했다는근거를가지고있으나한국의실효지배근거는확인안됨 Q 은주시청합기 (1667) R 오야규에몬가쓰노부수기 [ 大谷九右衛門勝信手記 ] S 오야규에몬가쓰후사가나가사키봉행서로제출한구상서 (1741) T 죽도도설 (1750~1763) U 장생죽도기 (1801) V 죽도도 ( 竹島圖 ) (1724) W 일본여지로정전도 및에도시대중기이후의고지도 도쿠가와 3 대장군이에미쓰시대막부가요나고주민오야무라카와 [ 大谷村川 ] 의 다케시마 ( 독도 ) 지배허가, 울릉도도항시 다케시마 ( 독도 ) 가중계지로사용되었으며어로도행해짐 개국이전의일본에는국제법의적용이없었으므로당시실제로일본에서일본영토라고생각하고일본영토로취급, 외국과의분쟁이없는것으로영유조건을충족시킴. 다케시마 ( 독도 ) 는예전에마쓰시마라는명칭으로일본인에게알려졌었고일본영토의일부로생각되어졌으며또일본인에의해항해상 어업상이용됨. 한국이 다케시마 를옛날부터인지하고이것을이용하고있던것을확인할수없음조선은초기부터장기간공도정책 ( 空島政策 ) 을취하였으므로울릉도에서더욱먼바다의고도인다케시마에까지경영의손을뻗었을리없음 196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X 조선의공도정책 한국이 다케시마 를옛날부터인지하고이것을이용하고있던것을확인할수없음 Y 다케시마 영토편입에관한각의결정 (1905. 1. 28) 국가적영유의사확인충족 Z 시마네현고시 (1905. 2. 22) 국가적영유의사공시충족 Aa 시마네현지사마쓰나가부키치 [ 松永武吉 ] 의 다케시마 조사 (1905. 8) 일본은국제법에서요구하는영토취득요건을충족하였으나한국은옛날부터 다케시마 를영유하고유효하게경영하지않았음. Bb 시마네현제 3 부장진자이요시타로일행 40 명의 다케시마 조사 (1906) Cc 다케시마 를관유지로서토지대장에게재 Dd 시마네현령제 18 호 어업취재규칙 (1905. 4. 4) 개정및나카이등 4 명에게 다케시마 강치어업정식면허부여 (1905. 6. 5) 근지속적실효지배확립 근대국제법상필요한영토취득요건충족됨 E e 다케시마 가마이즈루진수부에해군재산으로이양됨. 야와타조지로가강치어업권획득. 마이즈루진수부사령관이 다케시마사용심득명령서 교부 F f 현채, 대한지지 (1910) 한국영토의동쪽한계를동경, 130 도 35 분으로함. 여기에 다케시마 ( 독도 ) 는포함되지않음. 현채는학 G g 박은식, 한국통사 (1915) 부편집국장으로서당시의권위자였음 1905 년전후한국측은 다케시마 ( 독도 ) 를자국영토로생각하지않았음 197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954. 9. 25 한국정부견해 2 우산도는현재의독도이며안용복진술은허위가아님. 그결과에도막부는 2 차에걸친울릉도도해금지조치를취했고 1837 년에도금지조치가취해졌음. 일본측이제시한근거자료에대한재해석및반박 3 세종실록 권 153 지리지 / 강원도 / 삼척도호부 / 울진현 (1454) 4 ( 신증 ) 동국여지승람 권 45, 울진현 / 우산도울릉도조 (1531) M 정원용, 문헌촬록 (1850) 5 숙종실록 권 30 숙종 22 년 9 월무인조 15 증보문헌비고 권 31 (1908) 16 안용복의 1 차출어 (1693) 17 에도막부의울릉도도해금지령 (1696) 18 하마다의하치에몬 [ 八右衛門 ] 사건 (1837) 우산과물릉의두섬이울진현정동쪽해중에위치되고이두섬의거리가그리원격이아니기때문에일기가청명한때에는이두섬이서로가망견할수있다. 고함 우산도와울릉도이두섬은울진현의정동쪽해중에위치 하였다고함 일설우산울릉본일도 라는구절은막연한일설에지나지않음 조선말기의단순한개인隨錄, 세종실록 과같이역사적 지리적사실과그변천을밝히는데도움이되는문헌적가치는전혀없음 마쓰시마는우산도이고우리나라땅이라고함 울릉도 ( 다케시마 ) 와울릉도로부터단지 49 해리의거리에있고또시마네현오키도로부터약 86 해리의해중에있는그부속도 ( 독도 ) 가한국의영유라는것을재확인하고이후일본인들의이지역으로의출어를금지케함 1696 년안용복 2 차출어후에도일본인의불법범경이있었고조선은이후 3 년에한번씩수토사를파견함 헌종 3 년 ( 일본天保 8, 1837) 다케시마 ( 울릉도 ) 에서밀무역한이와미국하마다번하치에몬을사형에처함. 조선정부의안용복추방은연양수역출입금지라는국법위반행위에대한조치며결코국토의주권문제와는관계가없음조선의주권을일본국정부에재인식시키는데혁혁한공적이있었다는데비추어사형에서감형되어유배된것에불과함 우산도는현재의독도이며우산도삼봉도울릉도가동일한섬의이칭에불과하다는일본의견해에는근거없음 안용복관련 숙종실록 의기사는안용복사건의전말을제시하여주는역사적사실임 19 에도막부의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면허 ( 朱印 ) (1618) 1618 년호키의어민에게 朱印 을하사한것은울릉도가당시조선의주권하에있었다는증거임 198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6 1906 년울도군수심흥택보고서 7 한일의정서 (1904. 2. 23) 20 1906. 2 통감부설치 9 시마네현교육회편, 시마네현사 ( 島根縣史 ) (1923) 제 5 장 - 나카이요자부로이력서 13 히바타셋코, 일본해에있는 다케시마 의일조관계에관하여, 역사지리 제 55 권제 6 호 (1930) 14 일본해군성, 조선연안수로지 제 3 편 조선동안 (1933) N 본주연안수로지 제 2 권제 2 편 본주북서안남서부 항 1906 년심흥택이간다 [ 진자이 / 神西 ] 일행영접한사실없음 제국주의일본이한국에강요하였기때문에한국정부가이를무효로인정하고있는소위모든관계조약과협정등을구실로불법적으로한국영토에상륙하여조사등을자행할수있었음 나카이가일본의독도시마네현편입 1 년전에독도를한국영토라고믿었던것은사실임 저자는자기의지식대로 다케시마와울릉도는일본해최동단에있는한국영토이다 라고명기 다케시마 ( 울릉도 ) 의위치, 지세, 산물과기타사항을자세히기술 다케시마의이름만기재 만일다케시마가본래부터일본의속도였다면일본본주연안수로지에서그위치, 지세, 산물등을상세히기술하였을것임 10 1904 년쓰시마함보고서 울릉도로부터독도에온사람은일본인과그들에고용된한국인이다 라고하는일본정부의단언은전연근거가없는말임 어느부분은전함의보고에근거를두고또어느부분은수로지의편찬자가전문에의하여후에첨가하였다고주장하고있음. 일본해군성이수로지를공간지로서편일화한것인고로수로지편찬자가임의로허구한사실을기재한것은결코아님 8 제 1 차한일협약 (1904. 8. 22) - 제 2 항 일제는한국외교권을탈취하기위해스씨를앞잡이로고용, 책임은일제에있음. 일본정부가 잠시 라는용어를사용하고있으나실상은당시일제정부는영구적으로근본적인침략계획하에모든것을수행함 1 SCAPIN 677(1949. 1. 29) O SCAPIN/1 (1951. 12. 5) 1946 년 1 월 29 일자스캐핀 677 은 1951. 12. 5 스캐핀각서또는미국정부에의하여일본정부의행정관리권을회복하었다고하나일본정부가주장하는이들섬은미국을유일한관리권자로지정한국제연합의신탁통치하에있었던섬에지나지않음 199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K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제 2 장제 2 조 (a) 항 요나고오야 무라카와양가의울릉도출어 Q 은주시청합기 (1667) R 오야규에몬가쓰노부수기 ( 大谷九右衛門勝信手記 ) W ( 개정 ) 일본여지로정전도 등에도시대중기이후의고지도 3 개의주요도서의열기는결코독도를한국영유에서제외하려하는것은아님, 울릉도의하나의속도로서독도가이평화조약에의하여울릉도와같이한국영역으로서승인되어있다고하는의미로도해석 요나고의오야무라카와양가는울릉도방면에원양출어하는허가를얻은것뿐이지일본정부가주장하는바와같이 다케시마 ( 독도 ) 를지배하도록 하게한것이아님 일본의울릉도방면침략시대 (1614~1697) 에저작된것으로증거로서무효, 1696 년일본국민의울릉도방면출어금지라는일본측결정을조선정부에통고함 고지도에서보이는당시의일본인민들의독도에대한정확한지리적지식을지적하고있으나이는독도영유문제와하등관계가없는것임. 지도의가치에대하여서는원도가없으므로한국정부의견해를제시할방법없음 조선의울릉도수토관파견 3 년에한번씩울릉도와독도에수토관이파견되었음 X 조선의공도정책 울릉도와그속도인독도에대한영유권의포기를의미하는것은아님 일본의국제법에의한 다케시마 ( 독도 ) 영유요건은충족되지않음 일본의독도에대해말하고있는소위역사적사실근거가독도가한국의영토라는사실에아무런영향을끼치지못함 Y 다케시마 영토편입에관한각의결정 (1905. 1. 28) Z 시마네현고시 (1905. 2. 22) 14 일본해군성, 조선연안수로지 제 3 편 조선동안 (1933) N 본주연안수로지 제 2 권제 2 편 본주북서안남서부 항 Ff 현채, 대한지지 (1910) 일본문부성인가학교용현대지도 일본전국교육도서주식회사간행 표준세계지도 제 6 판도 (1952. 6. 10) 다부치도모히코 한국신지리 ( 제국백과사전 134 권, 1906 년제판 ) 308 항및 조선전도 한국연안수로지 개정제 2 판 (1907) 일본역사사전 제 1 권 (662 항 c 항 16~17 행 ) 독도는한국영토로결코국제법상선점의대상이될수없음 암암리에시행된것으로외국에는물론일본의일반국민에게도알려있지않음 1904 년이래일본제국은한국의강제점령을목적으로측량기타의명목하에공공연히한국침략 한국을개설하기위한서책이므로무인고도의이름을굳이기입할필요가없었음. 즉저술목적이다른데있었음 일본문부성이인가한학교용현대지도는독도를일본영토의일부로서취급하고있지않음 한자 다케시마 의음표를 다케시마 대신로마자로 CHUKDO, 일본가나 CHYUKUDO 로표기 다케시마 ( 독도 ) 를한국영토로기술 한국인은 송도 라고書하고일본어민은 리앙고도 라고호칭하고있다 고함. 한국인은 독도 ( 돌섬 ) 라고하는매우적당한이름을사용하고일본인은 리앙꿀럭스 라는외래의이름만을사용하였다는것을일본정부 ( 해군성 ) 가인정하였다는것을표시 현재의 다케시마 라는이름이울릉도의일 ( 一 ) 속도의호칭으로서사용되게되고그외국명이 리앙쿠 - 르 운운이라고주기 200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956. 9. 20 일본정부견해 3 우산도는울릉도이고우산울릉이도이명 ( 二島二名 ) 설은명확한것이아니며우산도에관한설명은울릉도를가리키는경우도있음 일본은예전부터독도를인식하고실질적으로경영하고있었으나한국은공도정책등울릉도를포기하고있었으며근대에들어겨우사람을살게했음. 독도는울릉도보다더멀기때문에한국이경영했을가능성은거의없음 Hh 삼국사기 Ii 고려사 지리지 3 세종실록 권 153 지리지 / 강원도 / 삼척도호부 / 울진현 (1454) 4 ( 신증 ) 동국여지승람 권 45, 울진현 / 우산도울릉도조 (1531) D 이수광, 지봉유설 권 2 지리부 ( 地理部 ) 섬 ( 島 ) (1633) Jj 태종실록 권 33 태종 17 년 2 월임술조 Kk 세종실록 권 33 태종 17 년 (1417) 2 월임술조 Ll 권기 ( 権記 ) (1004) Mm 고려사 권 134 열전, 47, 신우 5 년 7 월조 19 에도막부의 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면허 ( 朱印 ) (1618) Nn 오야규에몬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 (1656) 우산국은울릉도를가리킴 삼국사기 의입장답습. 기술말미에于山 武陵양도설 ( 両島説 ) 을의심하고있음 于山 武陵이도설을말하고있으나, 주기 ( 注記 ) 에서는이두섬이울릉도이며신라시대의우산 ( 于山 ) 이라고말하고있음 이도설을채택하고있으면서도이도일명 ( 二島一名 ) 일지모른다는의심을하고있음 일도이명 ( 一島二名 ) 설을고집 우산도에서大竹, 水牛皮기타산물 ( 産物 ) 이나고 86 명이거주하였다고함 울릉도를 우르마섬 이라고함 일본인의울릉도도해에대해기록 우산 울릉이도설 ( 二島說 ) 을취하고있는문헌도전문이시종울릉도에관한설명이고우산도에관해서는구체적설명이되어있지않음. 이는이제문헌의편자에게문제의섬에관한실지의견문을기초로한명확한지식이결여되었기때문이고우산도에관한지식은후대에이르기까지새로운발전은없었음 조선시대의울릉도공동화 ( 空洞化 ) 에따라일본인의왕래증가, 임진왜란후 (1593) 약 100 년에걸쳐완전히일본인의어채지가되었음 마쓰시마 ( 독도 ) 도해면허의근거. 울릉도를오고갈때마다배를대는곳으로서또는강치및전복채취지로서이용된것은당시마쓰시마라고불렸던지금의 다케시마 ( 독도 ) 임 Q 은주시청합기 (1667) Oo 오야규에몬청서 ( 大谷九右衛門請書 ) (1681) V 죽도도 ( 竹島圖 ) (1724) 다케시마 ( 독도 ) 의위치 지형등을기록 막부명령에따라호키의이케다번이제작. 다케시마를정확히표현한것으로서당시의일본인이다케시마를잘알고있었다는증거 5 숙종실록 권 30 숙종 22 년 9 월무인조 안용복의일방적진술이며허위가많고자기행동을과장시키기위해없는일을만들었음. 사인 ( 一私人 ) 의행동으로서 다케시마 ( 독도 ) 영유를주장하는근거가되지않음 Q 은주시청합기 (1667) 마쓰시마 ( 松島 / 지금의다케시마 ) 및다케시마 ( 울릉도 ) 로서일본의북서부의한계로봄 201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Pp 죽도에관한 7 개조반답서 ( 竹島に関する七箇條返答書 ) Oo 오야규에몬청서 ( 大谷九右衛門請書 ) (1681) 19 에도막부의 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면허 ( 朱印 ) (1618) 이섬은원래일본의땅으로 라는문구가있음 대유원시대인 50 년이전에아베시로고로의주선으로울릉도를배령하고 라는구절이있음 오야 무라카와양가의울릉도도해면허는 朱印狀 이아님. 다케시마 ( 울릉도 ) 에관한도해면허로서이섬의독점적경영에대한면허임. Nn 오야규에몬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 (1656) 1656 년또는그이전에역시마쓰시마 ( 독도 ) 도해면허됨 17 에도막부의울릉도도해금지령 (1696) T 죽도도설 (1750~1763) U 장생죽도기 (1801) 마쓰시마 = 독도와는관계없음 오키국마쓰시마 ( 隠岐国松島 ) 라고함 마쓰시마 ( 독도 ) 를 본조서해의끝땅 ( 本朝西海のはて地 ) 이라고함. X 조선의공도정책 - 숙종실록 권 25, 숙종 19 년 11 월정사조 Q q 조선의울릉도개척 (1884) Rr 숙종실록 태종실록 의수토관보고 Oo 오야규에몬청서 ( 大谷九右衛門請書 ) (1681) Ss 이케다의로주아베분고노카미에의반답서 ( 池田ー老中阿部豊後守への返答書 (1695. 12. 26) Tt 마쓰다이라호키노카미각서 ( 松平伯耆守覚 ) (1696. 1. 23) U 장생죽도기 (1801) 三百年空棄之地 라고함 1618 년에서 1692 년까지오야 무라카와양가는한번도울릉도에서조선본토사람을만난적이없음 1884 년의일임 울릉도에관한보고임 마쓰시마 ( 독도 ) 에서약간의일을본다 고함 마쓰시마 ( 독도 ) 에서전복을조금잡는다 고함 한국의수토관파견은막부의도해금지조치이후의일로서울릉도는거의 300 년에걸쳐버려져있었음울릉도경영에관해그렇다고한다면, 하물며이섬보다아주멀리떨어진바다에있고사람이살수없는소암도인지금의다케시마 ( 당시의마쓰시마 ) 에까지한국측의경영손길이뻗쳤다고는도저히생각할수없음 다케시마 ( 울릉도 ) 에가는길에마쓰시마 ( 독도 ) 가있기때문에 라고함 다케시마 ( 울릉도 ) 에갈때반드시마쓰시마 ( 독도 ) 에들러 라고함 202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지금의 다케시마 ( 독도 ) 는마쓰시마라는이름으로예전부터일본인에게알려졌고일본영토의일부로생각되었으며일본인에의해이용되어왔음. 메이지 38 년 (1905) 에이르러동년 1 월 28 일의각의결정및동년 2 월 22 일의시마네현고시를거쳐이섬을정식으로시마네현에편입시킴 17 에도막부의울릉도도해금지령 (1696) 18 하마다의하치에몬 ( 팔우위문 ) 사건 (1837) Uu 메이지시대에들어서의일본어민들의 다케시마 ( 독도 ) 개척 자료불특정 Z 시마네현고시 (1905. 2. 22) Vv 1928 년팔마스섬사건 Ww 1931 년크립퍼튼섬중재재판 Xx 미국의괌선점 막부가도해금지조치를취한것을다케시마 = 울릉도에대해서임 하마다번 ( 浜田藩 ) 家老오카다다노모 ( 岡田頼母 ) 의부하하시모토산베 ( 橋本三兵衛 ) 가하치에몬에대해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의명목을마쓰시마 ( 독도 ) 도해로하는방법도있다고일러줌 1887 년오키도민의독도에서의강치및전복채집및 1903 년독도에서본격적으로어업시작 당시의일본이영토취득시의관행적고시방식, 외국통고는영토취득의절대적요건이아님 당시의일본이영토취득시의관행적고시방식, 외국통고는영토취득의절대적요건이아님 1 SCAPIN 677(1949. 1. 29) 연합국최고사령관의권한은점령관리목적을달성하기위한행동범위에제약되었고기간도점령관리기간중으로한정됨. 점령목적달성을위해비점령국의영토권의행사에어떤제한을가하는취지의지령을발하는경우는있어도, 그것은일본점령관리가행해진기간의일로서각서제 6 항에있는대로일본영토의최종적결정과는관계없음 일본은근대에들어국제법상적법한절차를통해다케시마를편입했으며다케시마 ( 독도 ) 가한국의영토였다는법적근거가제시되지않는이상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제 2 조관련한국측의해석은성립하지않음 O SCAPIN/1 (1951. 12. 5) K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P 1953 년 8 월 8 일자덜레스의아마미군도권리포기성명 일본정부의정치상또는행정상의권력의행사가정지되어있던제소도중북위 30 도에서 29 도까지사이의남서제도는평화조약이발효되기전에일본정부에반환됨 제 3 조에규정된북위 29 도이남남서제도, 이후암남쪽남방제도및오키노도리시마및미나미도리시마에는잔존주권 ( 残存主権 ) 이형성되어있었음 하보마이군도는일본이평화조약에의거하여권리, 권한및청구권을포기해야하는지시마열도중에포함되지않는다는것이평화회의시덜레스미전권에의해명백해짐. 남서제도중아마미군도에관해서는그후일본정부에행정관할건이반환됨 일본정부의행정권관할로반환된제도가국제연합의신탁통치하에있었다는견해는북위 29 도와 30 도간의남서제도 ( 南西諸島, 연합국최고사령관이관리 ) 도아마미군도 ( 奄美群島, 미국이행정 입법 사법상의권력을행사 ) 도한번도국제연합신탁통치하에놓인적은없음 203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959. 1. 7 한국정부견해 3 독도는역사상 지리상으로또한부인할수없는법이론에의하여대한민국의엄연한영토의일부 Hh 삼국사기 3 세종실록 권 153 지리지 / 강원도 / 삼척도호부 / 울진현 (1454) D 이수광, 지봉유설 권 2 지리부 ( 地理部 ) 섬 ( 島 ) (1633) M 정원용, 문헌촬록 (1850) 15 증보문헌비고 권 31(1908) 우산국을울릉도라하고또는울릉도를우산국이라고하였다고해도그어느것도울릉도부근의무인소도가우산국에포함되어있지아니하였다는사실을말하는것이아닌것임 주기에 우산무릉양도를울릉도라고하였다 고되어있으나본문에서는명백히서로다른이름의두섬으로서인지하고있음 일개사인 ( 私人 ) 의기록임 일개사인 ( 私人 ) 의기록임 우산과울릉은이도 ( 二島 ) 이며 여지지 에따르면 우산은즉왜의마쓰시마이다 라고함 지리적지식이발달되지않았던시대는일도 ( 一島 ) 에이명 ( 二名 ) 이혼용되다가정확한지식의획득과더불어이도이명 ( 二島二名 ) 으로분리지칭되어짐. 일본메이지초기에울릉도를마쓰시마와다케시마라는이명으로혼칭하다가이후분리된것과같음 Yy 죽도고증 (1881) 의 다케시마 ( 울릉도 ) 개척론 및 마쓰시마 ( 울릉도 ) 개척론 외무성공신국장이 마쓰시마 ( 독도 ) 라는이름은일본인이명명한것이나실은 조선울릉도에속한우산이다 라고함 Q 은주시청합기 (1667) 일본측해석은오독 ( 誤讀 ) 임 17 세기일본어민의울릉도 독도도해 (19, Oo, Ss, Tt, U 등자료 ) 안용복사건관련 (5, 16 등자료 ) 다케시마 마쓰시마명칭혼란관련 (F 등자료 ) 한국의우산도관련 (3, 4, 5 등자료 ) 일본의독도편입관련 (Y, Z 등자료 ) Z 시마네현고시 (1905. 2. 22) 일본인은삼국시대부터특히고려왕조말기에이르러서는한국의연안각지와내륙에까지깊이출몰입구하여한국의인민과재산을구략함. 당시일본인들의노략을위한도해가비단울릉도일대에만그쳤던것이아니었음. 당시에일본인들이한국연해각지를구략함으로써그구략지구에관한지리를숙지하였던것임 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금지령이후의마쓰시마 ( 독도 ) 도해는일종의침구행위임 이러한명칭의혼란은무엇보다도울릉도와독도에대한당시일본인의지리적지식이명확치못하였다는것을증명하는것이며또이러한지리적지식의결함은결국이것이일본의관할권외에속하였던것을증명하는것임 신라지증돵당시에우산국이신라에귀속하였다는사실과그우산국은조선초기에이르러서는분명히울릉 우산양도를포함한것으로인지되어관찬지리지를비롯한기타공사기록에수록되었고따라서울릉도의속도인우산도즉독도도영역의일부로분명히간주하고있었음이확실함 이러한일본의국내조치는적어도 1905 년당시까지일본국이독도를그영토의일부분으로생각하고있었지않았다는하나의유력한반증을제시함. 왜냐하면일본측이진실로독도의영유권을확립하였다면그당시에새삼스러이이를일본국의영토로편입할필요가없기때문임 비밀리에고시한것이맞음 204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일본문부성인가학교용현대지도 독도를일본영토로표시하지않음 일본전국교육도서주식회사간행 표준세계지도 제 6 판도 (1952. 6. 10) Ww 1931 년크립퍼튼섬중재재판 한자竹島를한국어로표음 하와이정부에대한통고가있었음. 하와이에서발행되는 폴리네시아 지상에영문으로 크립퍼튼섬에대한프랑스주권의수립을공고 한것 Vv 1928 년팔마스섬사건 Xx 미국의괌선점 1888 년의국제법회의 통고가필요없다 고는하지않음. 다만팔마스도와같은주민이살고있는지역에서는은밀한주권의행사란불가능하다는전제하에아프리카대륙의토지의선점에서보는바와같은통고의의무가발생하지않는다고판정한것임 1890 년의미국대법원판결. 문제의섬이명백히무주의지역이라는확증이선연후에비로소그섬의미국으로의편입을결정하기로된것. 그렇기때문에외국에통고를하지않았던것이고이사건은순전히국내적사건으로서외국과의분쟁이야기된일이없음 선점에관한요건으로서은밀한고시가아니라외국에대한통고를요구하고있음 K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청일전쟁 (1895) 러일전쟁 (1904) 8 제 1 차한일협약 (1904. 8. 22) 독도가원래일본의영토가아니므로조약 2 조에의거하여원래의한국영토일체를대한민국에반환해야함 독도편입에서외교상의문제가있었음 독도의처리는포츠담선언부터일본항복후의기본정책에이르는일련의문서에의하여통일적으로이해되어야하며그러한용의없이스캐핀제 677 의 6 항만으로전체를왜곡하려는일본의태도는부당함 31카이로선언 (1943. 11. 27) K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1 SCAPIN 677(1949. 1. 29) 일본영토를청일전쟁이전의상태로환원한다고하였음 일본에편입한다는적극적인규정이없는한일본에서분리가확정된지위에는아무런변동없음 독도는차인접도서로서인접제소도와는명백히구별됨. 1947 년 6 월 19 일일본에대한항복후의기본정책에따라서일본의영토는인접도서에만국한되었음. 독도는연합국최고사령관이관리하는주변소도도아니고또한국독립후합중국의입법및사법권의행사에유보된지역도아님. 독도에일본의소위잔존주권이설립된일도없음 한국은대일평화조약에앞서이미 1948 년 8 월에독립을달성한이래독도의관리통치를회복하였으며그러한상태하에서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당사국에서정식승인을받고있었음 205

영토해양연구 Vol. 12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1962. 7. 13/ 일본정부견해 4 일본의독도실효지배의역사와오래된지식 에도시대고문서와고지도 (M m, Mm, 19, Nn, Q, Pp, Nn, Oo, Ss 등자료 ) 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금지령과그이후의자료 (17, T, T, U 등자료 ) 일본은오래전부터독도에대해알고실효지배해왔음 조선이다케시마를인지했었다는증거는없음 안용복증언은국법을어기고해외에나간범인이귀국후취조당할때한공술로서허위및신뢰성결여 메이지시대마쓰시마가울릉도를가리키는명칭으로쓰였음 Zz 곤도모리시게, 변요분해도고 ( 辺要分解図考 ) 18 하마다의하치에몬 ( 팔우위문 ) 사건 (1837) 조선의고문헌 (Hh, Ii, 3, 4 등자료 ) 15 증보문헌비고 권 31 (1908) Jj 태종실록 권 33 태종 17 년 2 월임술조 a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5 숙종실록 권 30 숙종 22 년 9 월무인조 15 증보문헌비고 권 31 (1908) F 시볼트 (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일본도 ( 日本圖 ) (1840) Yy 죽도고증 (1881) 의 다케시마 ( 울릉도 ) 개척론 및 마쓰시마 ( 울릉도 ) 개척론 1696 년 1 월에울릉도경영을포기하였으나지금의 다케시마 ( 독도 ) 도항은금지되지않았으며여전히일본영토라고생각하고있었음 조선고문헌에는이명일도 ( 二名一島 ) 또는이명이도 ( 二名二島 ) 의양설이있음. 이명일도설도일도이명일지모른다는의심을품고있음. 이도설을지지하는편자가우산도명칭거론시시종울릉도관련설명을함 일본측이마쓰시마라고명명하여경영했던섬 ( 지금의다케시마 ) 이있었던것을알고고문헌에나온우산도를그마쓰시마에적용한것에불과함 대죽 ( 大竹 ), 생저 ( 生苧 ) 등산물이있으며 15 호 86 명의인민이사는섬으로보고함 우산도가울릉도와조선본토중간에크게그려져있음. 이우산도는실재하지않는섬임 안용복은조선에없는 鬱陵子山両島監税将 또는 鬱陵監税官 이라는관직을사칭함 1693 년울릉 우산등의섬을조선경계로삼는다고쓴서계를에도막부가주었으나쓰시마번주가그서계를빼앗았기때문에그불법행위를소원하기위해 1696 년에안용복이두번째로일본에도래하였다고하였으나조일간외교문제는쓰시마번주가담당하고있으며에도막부가그러한서계를준다는것은있을수없는일임. 또한 1696 년 6 월의안용복의 2 차도래에당혹한일본측이울릉도에도해한오야가어부들 15 명을처벌했다고증언했으나그이전인 1 월 28 일에오야가어부들에대해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금지령이내려져있어오야가어부들이울릉도에도해할수없었음 유럽의측정오류에기인한다케시마, 마쓰시마명칭의혼란을피하기위해 1905 년마쓰시마 ( 독도 ) 를편입할때 다케시마 로명명한것임 외무성공신국장이 마쓰시마 ( 독도 ) 라는이름은일본인이명명한것이나실은조선울릉도에속한우산이다 라고한것관련, 공신국장의말이아니며여기에서의마쓰시마는독도가아님. 1880 년 9 월군함아마기의조사로이마쓰시마는울릉도로밝혀지고다케시마는울릉도부근의죽서 ( 댓섬 ) 으로밝혀짐 206

사료로본독도논쟁사 - 새로운자료발굴의방향성모색을위한전사 ( 前史 ) 로서 출전견해근거사실또는자료해석 국제법상일반적으로조약상특별한의무가있는경우를제외하고영토취득을다른나라에통고하는것이의무적이지않음 전후의일본영토는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따라처음으로처리되었음 Z 시마네현고시 (1905. 2. 22) b 1905. 2. 22 시마네현보( 島根県報 ) c 1905. 2. 24 산음신문 ( 山陰新聞 ) d International Law Ⅰ, 8 판 559 항 e Traite de Droit International Public Tome Ⅰ, 441 항 Vv 1928 년팔마스섬사건 Ww 1931 년크립퍼튼섬중재재판 f 1888년국제법학회선언 청일전쟁이후의일본제국의일련의침량행위및 1904 년한일의정서가일본의 다케시마 ( 독도 ) 편입과의관계 (7, 8, 29, 30, 31등의자료 ) 일본이근대국가로서 다케시마 ( 독도 ) 영유의사를재확인한것 1885 년베를린의정서에규정된것과같은통보의의무는팔마스섬사건또는크립퍼튼섬중재재판과같은경우에는적용되지않음. 어떤방법으로도영토취득이라는공시성 ( 公示性 ) 이부여되면이것으로충분함 한국이시마네현고시보다앞서 다케시마 ( 독도 ) 를유효하게경영하고있었다는것이입증되지않으면, 이와같은논의는무용함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의고유영토. 한국에서약취 ( 略取 ) 한31카이로선언 (1943. 11. 27) 것이아님 B SCAPIN 677 (1949. 1. 29) 연합국에의한일본의 제소도 에대한최종적결정이아님제6항 f 1947. 6. 19 일본에대한항 다케시마 ( 독도 ) 의귀속을구체적으로확정한것이아님복후의기본정책 K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제 2 장제 2 조 (a) 항 SCAPIN 677 에따라행정분리된울릉도, 제주도, 독도세섬중울릉도및제주도두섬에관해일본의포기를규정하고, 독도에대해서는어떤규정도하고있지않음 출처 : 외교통상부문서, 독도문제, 1952-53, 분류번호 743.11JA, 등록번호 4565 외교통상부문서, 독도문제, 1954, 분류번호 743.11JA, 등록번호 4566 외교통상부문서, 독도문제 1955-59, 분류번호 743.11JA 등록번호 4567 외교통상부문서, 독도문제, 1960-64, 분류번호 743.11JA 등록번호 4568 외교통상부문서, 독도문제, 1965-71, 분류번호 743.11JA 위내용은, 외무부정무국편, 1955, 독도문제개론, 외무부 ; 외교통상부국제법률국 ( 편 ), 2012, 전면개정판독도문제개론, 외교통상부에정리되어있다. 동문서중한일간왕복구술서는, 신용하, 2000, 독도연구총서 7 독도영유권자료의탐구제 3 권, 독도연구보전협회 ; 신용하, 2001, 독도연구총서 8 독도영유권자료의탐구제 4 권, 독도연구보전협회에해제와함께정리되어있다. 또한한일독도영유권논쟁기에대한경과및왕복각서목록, 참고문헌등자세한것은정영미, 2015, 일본은어떻게독도를인식해왔는가, 한국학술정보참조. 207

서평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류큐신보 산인쥬오신보공저,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 이와나미서점, 2015) 琉球新報 山陰中央新報, 環りの海- 竹島と尖閣国境地域からの問い ( 岩波書店, 2015) 양기호성공회대학교교수 전후 70주년이지났음에도동북아지역은북한의핵실험과미사일도발, 영토와역사문제, 혐한과반일이중층적으로겹쳐지면서갈등과대립에서벗어나지못하고있다. 역사반성과화해협력, 평화체제와신뢰구축, 동아시아공동체의모색은찾아보기어렵다. 반목의기저에는영토문제를둘러싼내셔널리즘과국가이익이짙은그림자를드리우고있다. 동아시아국경분쟁의상당수가해양경계선이나도서영유권을둘러싼분쟁이다. 러일간쿠릴열도, 중일간센카쿠열도 ( 중국명댜오위다오 [ 釣魚島 ], 일본명센카쿠열도 [ 尖閣諸島 ]), 그리고한일간독도문제가그렇다. 지금까지발생하였거나진행중인도서영유권분쟁사례는약 30개지역에달한다. 이가운데 1/3 이상이해양경계선이나도서영유권을둘러싼분쟁이다. 최근들어주목할점은영토문제의쟁점과해법이바뀌고있다는점이다. 가히영토문제, 쟁점, 해법이변용을거듭하는영토 영해레짐 (regime) 의변화를목도하고있다. 2016년 7월중국과필리핀간남중국해도서분쟁은유엔해양법협약중재재판소 (PCA) 판결에따라필리핀의영유권이인정되 208

서평 Ⅰ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었다. 중국의역사적영유권주장은수용되지않았고, 암초를가공한인공섬은도서로인정받지못했다. 러일전쟁이래영토분쟁의대명사였던쿠릴열도문제는일본의아베신조 [ 安倍晋三 ] 내각이검토중인 2개섬반환과러일공동통치라는 새로운접근법 (New Approach) 으로해결의실마리를찾을지모른다. 영토문제못지않게중대한쟁점으로등장한것이한중일간어업권갈등이다. 중국어선의불법조업은국내수산업에큰피해를끼치고있고양국관계에균열을만들어내고있다. 어족자원고갈과어획량감소는서해안어민들의시름을깊게하고있다. 세계생선소비량의 1/3 을차지하는중국은무분별한남획으로주변국과마찰을빚고있다. 2016년 6월한일간어업협상이결렬되어어업문제도점차심각해지고있다. 이로인해한국어민들의일본내배타적경제수역 (EEZ) 조업이불가능해지면서피해액은무려 100억원을넘어섰다. 생활권차원에서어민의이익보호를적극적으로추구해야한다는목소리가높다. 영토와영해, 영공은더이상국가주권과외교협상에한정되지않고, 주민들생계에영향을미치는지극히사회경제적인문제가되고있다. 영토문제는영토주권, 내셔널리즘, 포퓰리즘뿐만아니라, 해양자원, 조업권과개발이익등에영향을받고있다. 국가주권이미치는영유권개념만으로다양하게얽힌복합한문제를분석하기어렵다. 영토문제는국가간외교라는중앙정부의독점영역이지만, 지방정부와시민단체의요구나운동에영향받아종종종속변수가되기도한다. 2012년 4월일본의극우정치가이시하라신타로 [ 石原慎太郎 ] 도쿄도지사는민간모금을통한센카쿠열도매입을추진하였다. 이에일본민주당정권은센카쿠를국유화하였고중일관계는최악으로치달았다. 일본의지자체가기억 기념의상징을설정하고, 이를국가수준으로상향시켜서영토분쟁을유발하는정치적인과정은새삼기억에새롭다. 일본시마네현 [ 島根県 ] 에서다케시마의날을제정한것이나, 이시가키시 [ 石垣市 ] 에서센카쿠의날을제정한것이대표사례다. 2005년 2월시마네현이일방적으로다케시마의날을제정한것은한국정부와국민의분노를불러일으켰고, 그해 3월노무현정부가대 209

영토해양연구 Vol. 12 일신독트린이라는강경책을발표한직접적인원인이되기도하였다. 일본내영토 영해에관한출판물은방대한분량에달하고있다. 일본전자서적판매망인요도바시닷컴 (www.yodobashi.com.) 에서검색한결과, 영토에관한출판물은 1,377건, 영해에관한책은 135건이다 ( 검색일 : 2016년 10월 20일현재 ). 이가운데독도는 463건, 센카쿠는 711건, 북방영토는 323건으로집계되어출판물숫자로만본다면센카쿠, 독도, 쿠릴열도순으로관심이높았다. 그런데여기서다루는류큐신보 산인쥬오신보공저 만남의바다-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 이와나미서점, 2015) 는지금까지영토 영해관련서적과약간차이가있다. 굳이말하자면, 영토 영해문제가중앙정부간영유권분쟁에초점이맞추어졌던기존연구흐름에서약간비껴서있다. 이책은한국과일본, 중국과일본, 일본과타이완간영토문제를국경지역에거주하는생활자의시각에서바라보고자시도하고있다. 오히려지역주민과생활영역의관점에서영토문제와도서분쟁에초점을맞추었다는점에서신선하고자극적이다. 지역의관점에서, 생활자의관점에서영토문제를안고있는지역신문들의공동작업으로만들어진작품이다. 센카쿠열도에가까운오키나와현 [ 沖縄県 ] 의대표언론인 류큐신보[ 琉球新報 ], 시마네현의대표신문인 산인쥬오신보[ 山陰中央新報 ] 가공동으로연재한시리즈물을책자로펴냈다. 류큐신보 는오키나와현에서가장오래된대표적인신문매체다. 판매부수는약 15만부로현내전체신문부수의약 50% 를차지하고있다. 보수적인논조를지니고있지만, 미군기지에대한비판적인입장은다른지역신문과마찬가지다. 시마네현의지방신문인 산인쥬오신보 는시마네현, 돗토리현 ( 鳥取県 ) 을서비스지역으로하며, 판매부수는약 18만부다. 독도관련기사와사설을다수게재하며, 극단적인영토내셔널리즘에반대하고있다. 위의신문들은영토문제를중앙정부가독점적으로보도하는시각과방식에의문을느끼고있었다. 양신문이공감한부분은역시접경지에서생활하는지역주민의시점이필요하다는것이다. 영토문제는국가간의쟁점으로만다루어지고있으나, 국경지역과해역은변경주민에게생활권과교류 210

서평 Ⅰ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권이기도하다. 영토문제를둘러싸고내셔널리즘이고양되면서국민감정은악화되고, 정부정책은강경한대책으로기울기일쑤다. 그러나일단분쟁이발생하면가장먼저큰피해를입는사람들은국경지역주민들이다. 독도와센카쿠를, 오키나와와타이완을그리고동북아시아를두번다시분쟁지로해서는안된다는생각을공유하고있었다. 북아사히닷컴의서평에서요시오카게이코 [ 吉岡桂子 ]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이표현한것처럼, 영토와영해는스스로서있는위치에따라시점이바뀐다. 살고있는장소에따라풍경도바뀐다. 국경의바다는지도상에국경선이그어져있지만, 지역주민의눈에비치는것은생활을지탱해주고, 파도가밀려오는바다다. 1 이책은주변국과분쟁이나갈등이발생하면가장먼저피해를입는당사자로서지역주민에눈높이를맞추고있다. 이책은직접현장에서얻은생생한목소리를전하는르포라이터방식을취하고있다. 시마네현과오키나와현어민들을직접취재하고, 상대방의입장을듣고자한국, 중국, 타이완을찾아갔다. 치열한영토분쟁을평화롭게해결한유럽과아시아의사례를취재하기도하였다. 이책은오키노시마초 [ 隠岐の島町 ] 섬에서이시가키섬까지, 타이완에서중국까지, 한국의경상북도와시마네현지역주민의목소리에귀기울이고있다. 그리고도서분쟁을해결한말레이시아와싱가포르정부, 전쟁으로인해수차례나강제적으로국적이바뀐프랑스와독일경계인알자스 로렌주민들, 국제연맹의개입으로자치권을획득한발트해올란드군도 (Landskapet Åland) 까지방문하여생생한지역민의인터뷰를전하고있다. 이책은국가내셔널리즘을어떻게극복할것인가를주제로실감나는어민들의생활모습과결부시켜영토문제에접근했다는점에서긍정적으로평가할수있다. 취재기간은 2013년 3월부터 6월까지 62회에걸쳐서현장르포중심으로시리즈물을연재하였다. 이책은 2013년일본신문협회에서수여하는저작상을수상하였다. 공통주제를화두로지방언론사가상호간교류와연계를시도한점도공동수상배경이되었다. 이책은경계지역주민, 특히도서지어민들의조업 1 북아사히닷컴사이트는 http://book. asahi.com/reviews/reviewer/ 2015042000008.html(2015. 04. 19) 을참고할것. 211

영토해양연구 Vol. 12 권과생활상에초점을맞추고있다. 한중간어업문제를비롯하여각국간에갈등이높아지고, 불법조업과어자원남획의문제가더이상새삼스럽지않다. 이에따라영토 영해의쟁점이변화하면서이를바라보는다양한시각이필요해지고있다. 중일간, 한중간, 한일간, 일본과타이완간조업권과어획량을둘러싼갈등이심각해지면서, 도서영유권문제의분화와변용이두드러지고있다. 1994년유엔국제해양법이 200해리배타적경제수역을허용한이래, 한중일 3국은상호간 1997년 11월중일어업협정, 1998년 11월신한일어업협정, 2000년 8월한중어업협정, 2013년 4월일본과타이완간어업협정을각각체결하였다. 최근들어중국어선의불법조업이한국어민들의생계에악영향을미치고있는데, 이것은중일간에도예외가아니다. 이책은먼저일본측의어려운사정을구체적으로전하고있다. 이시가키섬의일본어민들이센카쿠근처에중국어선이대량출몰하면서불안을느끼고있다는것이다. 2012년 9월일본정부가센카쿠섬을국유화하면서중국관용어선의출몰이두드러지게잦아졌다. 주변해역의긴장이높아진것도두말할나위가없다. 조업중빈번히해상보안청과연락을하면서중국어선과충돌을피해야하는부담이늘었다. 연료비급등에따른부담, 어업자원감소등으로센카쿠열도조업량은매년줄어들고있다. 2013년일본과타이완간어업협정은센카쿠분쟁에서중국과타이완간연대를우려한일본정부가타이완에상당부분양보한것이었다. 이책은북위 27도이남지역이잠정수역으로설정되어센카쿠열도어장에타이완어선의조업이허가되면서일본어민들이큰피해를입었다고주장한다. 참치어획량이많은해역을타이완에게상당부분양보하였고, 이에대한오키나와어민의불만이높았다. 오키나와현어업협동조합회가도쿄로상경하여외무성, 농림수산성을방문하여재협상을강하게요구하였다. 일본지자체도대책을세우기시작하였다. 해양보전과개발을추진하고자 2011년오키나와현다케토미초 [ 竹富町 ] 가, 2013년이시가키시 [ 石垣市 ] 가해양기본계획을책정하였다. 212

서평 Ⅰ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이책의장점은일본어민의주장과불만못지않게한국, 중국, 타이완어민들의호소를그대로싣고있다는점이다. 의란현 ( 宜蘭縣 ) 소오진 ( 蘇澳鎭 ) 은타이완에서오래된전통적인어촌으로, 총인구 43,300명중어민이약 4할에달한다. 크고작은 800척의어선이있고연간수산업매출은 1,100억원이넘는다. 어업을생계로이어가는타이완어민들은영유권보다어업권을요구하고있다. 원래타이완에서댜오위다오는영유권문제이상으로어업권의성격이강하다. 어업문제의최전선에있는타이완의란현소오진어민들은황금어장을둘러싸고일본오키나와현이시가키시의어민들과계속해서대립해왔다. 댜오위다오근해어장은지난 100년동안이들에게는생활의터전이었다. 매년 4~7 월에는수백척의어선이출어해서참치를잡아왔다. 타이완어민은잠정수역내조업은당연하다고생각하고있다. 반면, 일본측 EEZ와겹쳐진이시가키어민들은불만을토로하고있다. 2012년 9월센카쿠열도국유화에대한중국의반발도전하고있다. 중국내 125개도시에서반일시위가연일발생하였으며, 전국적으로확산되면서해안도시뿐만아니라내륙지방에서도더욱격렬해졌다. 근대이후서양의침략에시달린중국은영토문제에민감하다. 그러나중국이대국답게영토문제에자제심을발휘하고있다는현지주장도전하고있다. 중국은홍콩을 155년만에, 마카오를 440년만에돌려받았지만그과정에서무력행사가전혀없었다는것이다. 중국인의영토의식, 치욕의역사, 냉정한대응등복잡한감정을엿볼수있다고적고있다. 이책은어업협상으로인하여변경지역어민이불이익을받은사례는한일어업협정도마찬가지라고강변하고있다. 1996년시작된한일어업협정에서 EEZ가겹치면서중간수역범위가예상외로확대되었고, 한국측에오징어와털게어장을잠식당했다는것이다. 그러나독도주변이중간수역에포함되면서사실은한국이야말로억울한입장이다. 2016년 6월한일어업협정이결렬되면서일본은수개월째양보하지않고있다. 일본 EEZ 내어획량을대폭줄여서한국측에불리한조건을강요하고있다. 1999년체결 213

영토해양연구 Vol. 12 한한일어업협정은한일중간수역에서조업이가능하나, 일본 EEZ에서는일본정부의허가가필요하다. 일본의고집스런자세는한국정부가 2013년결정한후쿠시마주변 8개현수산물수입금지조치에대한반발로해석되고있다. 더구나일본정부는 2015년 10월부터독도인근수역에서일본권익을강화하려는 EEZ 관련신규법안을추진하고있어서양국관계에장애물이될전망이다. 이책은어족자원에대한관심도, 수산업계의활동량, 어선숫자와어획량등을종합적으로산정한각국어업세력의강약정도가자원획득경쟁에크게반영되고있다고주장한다. 어업세력이강한나라가자원관리를늘려나가고남획을서슴지않고있다는것이다. 동중국해를중심으로한중일각국의어업세력의분포도를살펴보면중국, 한국, 일본순으로강하다. 1980 년대수산업전성기를자랑하던일본이가장약해지고, 증가에서감소세로돌아선한국이두번째로크고, 그리고최근들어생선중심의식문화가확산되고있는중국의어업세력이폭발적으로커져가장강하다는것이다. 우리에게가장심각한것은중국어선들의한국영해내불법조업과한국해경의단속에대한폭력적인대응이다. 백령도와연평도등서해 5도해역에서불법조업하는중국어선은하루평균 131척에이른다. 단속중인인천해경고속단정이중국어선에부딪쳐침몰하면서, 해경이불법조업과폭력저항을엄단하기위해함포사격도불사하겠다고항의했을정도다. 2 중국인들의소득증가와식생활변화, 사양산업인한국수산업에비해활발한중국내수산업투자, 서해안의풍부한어족자원, 중국정부의관리통제가미치지못하는불법조업등은한국측의적극적인대책과아울러새로운어업질서로의재편을요구하고있다. 이책은도서분쟁의평화로운해결을모색하면서흥미롭게도영토문제를해결한몇가지사례를들고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간페드라브랑카 (Pedra Branca) 섬분쟁은국제사법재판소판결을수용하면서마무리되었다. 하얀섬으로불리는페드라브랑카는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에둘러싸인군도로, 어선들이휴식하는기지섬이기 2 연합뉴스, 2016. 10. 13 보도. 214

서평 Ⅰ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도하다. 말레이시아반도에서약 14km, 싱가포르에서약 44km, 인도네시아빈탄섬은이보다더가깝다. 1989년싱가포르의리콴유 [ 李光耀 ] 수상은영유권소송을제소하였다. 2008년 5월양국간영토분쟁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싱가포르에영유권을, 말레이시아에남쪽암초의소유권과어선들의조업권을허용하는판결을내렸고, 양국은중재안을수용하면서영토분쟁은마무리되었다. 가장중요한근거로삼은것은 1953년말레이시아가영국령싱가포르에도서영유권을주장한적이없다는문서를보낸것이었다. 양국간우호관계, 그리고경제적상호의존, 중재수용에대한정치적관용이평화적해결을일구었다는지적이있었다. 그러나싱가포르와말레이시아는모두영국지배하에있었고, 독도편입시한국은일본의식민지로서, 성격이크게다르다는현지언론인의발언도전하고있다. 또하나시사점이풍부한사례는러시아, 스웨덴, 핀란드 3국간올란드군도를둘러싼분쟁이다. 올란드군도는발트해의군사적요충지로약 2만 8천명의주민들이 6,500개섬에걸쳐서거주하고있다. 올란드군도는스웨덴귀속에서러시아가진출하면서영유권이넘어갔다. 1917년러시아혁명이후핀란드가독립하면서양국간영유권분쟁이발생하자, 국제연맹이개입하였다. 결국 1921년핀란드주권하에올란드주민의자치권을보장하면서비무장, 중립화되었다. 매년약 3천억원의재정지원을핀란드정부에서받고있지만, 올란드주민들은자치권과비무장중립에자부심을느끼고있다. 해운, 관광등에서해양산업이성황을누리면서경제적으로도성장하고있다. 알자스-로렌 (Alsace-Lorraine) 은인구약 186만명의알자스지방, 약 235만명인로렌지방을포함하는지역으로프랑스동북부에소재하고있다. 국제분쟁을전쟁으로해결하는시대에살았던국경지대주민은전쟁의희생물이되었다. 1870~1945년까지독불간전쟁이세차례나벌어지면서알자스-로렌주민들은네번이나국적이바뀌었다. 독일어를배우다가금지당하고, 프랑스어를익혔다가다시독일문화권으로바꾸도록강요받았다. 군사력에직결되는석탄과철광은항상전쟁에서자원쟁탈의대상이었다. 전후프랑스의드골대통령과서독아데나워수상의협력으로 1952년 215

영토해양연구 Vol. 12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가설립되었다. 분쟁과증오를넘어서서평화와화해를추구해온독불간대화는 1963년엘리제조약으로결실을맺었다. 여기에는매년 2회이상양국정상회담, 각료급회담, 청소년교류를포함하고있다. 독불협력은 1993년유럽연합이탄생한강력한추진력이되었음은물론이다. 2006년독일과프랑스는양국공동의역사교과서를만들어교재로사용하고있을정도다. 독불간청소년교류사업은 2012년까지양국에서약 750만명이참가하였다. 2011년현재, 양국간교환유학생은 6만 1천명, 자매도시는 2,200개에달하고있다. 이책은주민들의눈높이에서국경분쟁을바라보고자한다. 변경지주민에게특히지역경제활성화는매우중요하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오키나와현내어업종사자는 5,822명에서 3,929명으로줄어들었다. 시마네현도약 7천명에서 3,689명으로절반정도로감소하였다. 일본인 1인당어패류섭취량도매년줄어서 2000년 92그램에서 2010년 72.5 그램으로크게낮아졌다. 어획량감소로고민하는오키나와어민들은센카쿠열도근처에서잡히는참치를브랜드화하여상품가치를높였다. 이시가키섬의야에야마 [ 八重山 ] 어협은센카쿠참치를상표등록하였고, 나하시 [ 那覇 ] 는참치를시어 ( 市魚 ) 로결정하였다. 국경을넘은어민들의대화는양국간갈등을줄일수있는대안이다. 2013년 5월타이완에서센카쿠열도주변해역내조업방식을논의하는어업위원회가열렸다. 한일간중간수역의조업협의도민간어업단체가참가하고있다. 대게조업은한일양국간민간협의와별도로연 1회어로장회의가열린다. 이책은센카쿠문제의평화적해결수단으로서오키나와현, 중국, 타이완의삼각무역구상을제창한다. 가장가까운타이완과무역을활발하게하면서물가를안정시키고소득을늘릴수있다. 상호호혜관계를발전시키면서긴장완화를기대할수있는효과적인외교방식이라고강조한다. 타이완에가까운요나구니초 ( 与那国町 ) 는독자적으로책정한자립비전에근거하여, 주재원파견이나중학생홈스테이등교류사업을지속해가면서타이완과관계를강화하였다. 2011년에는국경지역지자체공무원과연구 216

서평 Ⅰ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자들이모여서 경계지역연구자네트워크 JAPAN 을발족시켰다. 분쟁으로치닫기쉬운영토내셔널리즘에빠져사고를정지하지말고, 갈등과대립을넘어서서다양한방법을찾아가는것이필요하다. 앞으로경계지역한중일그리고타이완의지방정부가주체가된해양거버넌스 (Ocean Governance) 를구축하여의사소통과신뢰구축을모색해나갈필요가있다. 해양거버넌스는해양이용과관련된규범, 제도적장치그리고실제적인정책들을포괄하는개념으로간주할수있다. 경계지역의주민들이주체가되어갈등해소를도모할수있다. 자발적참여와자율성을바탕으로수평적네트워크를구축하여새로운형태의상호작용과협력을시도하는것이다. 3 이책은동남아, 유럽에서분쟁해결사례를교훈삼아영토내셔널리즘을넘어서서스스로가가능한첫발걸음을내딛고자하였다. 국경이아닌생활터전을둘러싸고주변국어민들과대화하는자세는모든일본인들에게국경이란과연무엇인가를묻고있다. 그동안중앙정부의영유권주장에편승하여그저단편적인지식과편협한영토론에집착하여보도한지역신문의무책임한자세에대한반성이기도하다. 무엇보다도중앙정부가획정하고주장하는영토문제에서국경접점의현장에서살아가는지역주민의시각이배제되어있다고느꼈기때문일것이다. 지방신문이오히려주변국과갈등을조장하고있는것은아닌가, 지역언론의책임은없는것인가하는반성이연재의출발점이었다. 그리고가장중요한문제의식은평화적인해결이중요하며, 내고장이분쟁지가되어서는절대안된다는생각이었다. 영토문제는금방해결할수있는것이결코아니다. 그러니일본인들은경직된사고에빠지지말고, 역사적경위를살펴보면서상대국의입장을이해하고자노력하고, 그목소리에열심히귀를기울여야한다고말한다. 국경을맞댄변경지역주민들은대부분고령화되었고마을은쇠퇴하고있다. 인적 물적교류를확대하고상호의존을높이면서공동으로활성화시키는것도영토문제를극복하는보완적인대안이다. 접경지 3 우양호, 2010. 08, 지방정부해양행정의문제점과발전방향-해양거버넌스구축을중심으로 17(2) 을참고할것. 역주민들에게영토분쟁은결코일어나지말아야할국가폭력에다름아니다. 217

영토해양연구 Vol. 12 이책이영토내셔널리즘에구속되지않고, 평화를희구하는경계인들의모습을부각시킨점은높이평가할만하다. 국경을넘어서변경지주민끼리상호이해와교류확대를추진하는것은바람직하다. 생활자의시점, 분쟁지역화하지않는두가지모두중요하다. 그러나이책은어민의생활을중시하자는의도와달리일본측피해상을나열하고있어서거부감이느껴지는것도사실이다. 상대국의부당성을지나치게강조한것도부적절하고매우유감스럽다. 영토 영해문제도기존일본정부의논리와입장을그대로답습하고있다. 예를들면, 센카쿠열도는류큐왕국의조공사신이중국행항로표지로서인식하고있었고, 독도의경우돗토리나시마네의어부들이어업거점으로먼저발견했다는것이다. 둘다일본이오래전부터존재를인식하고, 주변해역을이용해왔다고강변하고있다. 독도와센카쿠에대한왜곡된억지주장은그대로며, 기존주장을발췌, 편집한수준에머물러있다. 그럼에도변경지주민의생활자시각에서중앙정부의영토내셔널리즘을극복하고자노력한점은인정해야할것이다. 비교적균형잡힌시각을추구하고자노력한점도긍정적으로평가하고싶다. 마지막으로, 이책제목을직역하면 돌고도는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역에서묻는다 가가깝다. 메구루 ( 環る : めぐる ) 의의미는주변을돌다, 에워싸다, 돌아오다등다양한뜻을가지고있다. 그야말로바다에는물결이나파도가여기저기돌아다닌다. 한국, 중국, 일본의국경을의식하지않는물결과파도가서로만나서따라흐르거나부딪치는것이다. 그런의미에서일부러 만남의바다 로번역하였다. 이책이영토와영해가국경을가르는분리대라고인식하기보다도, 바다라는생활권에서사람들의만남을강조하고있기때문이다. 한중일중앙정부도영토내셔널리즘을넘어서서교류와협력의미래상을실천해나가는모습이더욱늘어나기를기대하고싶다. 218

서평 Ⅰ 만남의바다 - 독도와센카쿠, 국경지대에서바라본다 219

영토 해양일지 영토 해양일지 도시환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2016 년국내국외 6 월 8~9 일 : 군 ( 軍 ), 동해서독도방어훈련실시 8 일 : 일외무성, 한국정부에독도방어훈련항의. 다케시마 ( 竹島 독도 ) 영유권에관한우리나라 ( 일본 ) 의입장에비추어수용할수없다 며반발. 매우유감 이라는입장도덧붙임 9 일 : 중 러군함센카쿠접속수역동시항행, 중국군함은첫사례 15 일 : 일본방위성, 중국정보수집함이가고시마 [ 鹿兒島 ] 현인근영해침범문제제기, 중국은 항행의자유 주장 7 월 8 월 16~18 일 : 군 ( 軍 ), 서해중부해상서해상기동훈련실시 8 일 : 군 ( 軍 ),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 배치결정 1 일 : 경북울릉군, 독도박물관재개관 2 일 : 외교부, 일방위백서 독도영유권주장 강력항의및주한무관초치 10 일 : 독도한국령첫표시 1947 년표목사진원본공개 12 일 : PCA, 중국 - 필리핀간남중국해영유권분쟁중재결정. 중국의남중국해구단선을인정하지않고, 타이핑다오 [ 太平島 ] 등암석으로규정. 중국은판결수용거부, 반발 2 일 : 일, 방위백서에 12 년연속 독도는미해결일본고유의영토 로표기 3 일 : 북, 탄도미사일일본측배타적경제수역 (EEZ) 내착탄 6 일 : 센카쿠열도에중국정부선박, 어선이함께접근. 일본항의 9 일 : 일외상, 중국대사를초치해동중국해사건에대해엄중경고 220

영토 해양일지 2016 년국내국외 12 일 : 국회, 국회독도방문단 광복절에독도방문계획발표 11 일 : 중, 고해상도지구관측위성가오펀 [ 高分 ] 3 호발사성공. 관계자가 중국의해상주권과이익을수호하는데매우유용하게활용될것 이라밝힘 11 일 : 중국어선, 일접속수역서모두퇴거 13 일 : 일외무성, 국회독도방문단 방문계획항의 8 월 9 월 10 월 15 일 : 국회, 여야국회의원독도방문단독도시설점검 22 일 : 군 ( 軍 ), 을지프리덤가디언 (UFG) 연습개시. 한미해상기동훈련실시 8 일 : 해경고속단정, 불법조업중국어선의충돌로침몰 11 일 : 정부, 불법중국어선단속강화대책발표 17 일 : 중해경선, 일접속수역에진입 24 일 : 한중일외교장관회담개최. 중 일간센카쿠문제격화 25 일 : 북, 잠수함탄도미사일시험발사, 일방공구역내낙하 28 일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북한의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SLBM) 시험발사규탄언론성명채택 5 일 : 중 일정상회담 ( 항저우 ), 중국의해양진출등현안에대해접점을모색하였으나이견을확인하는데그침 12 일 : 러 중, 남중국해에서첫대규모연합훈련개시 13 일 : 중시진핑, 남중국해우군 캄보디아취임후첫방문 20 일 : 일, 해저화산분화로여의도 24 배면적영해확대추진발표 22 일 : 미, 남중국해서 항행의자유 작전재개 221

영토해양연구 Vol. 12 2016 년국내국외 11 월 1 일 : 해경, 불법조업중국어선에최초로공용화기발포 13 일 : 일, 센카쿠등무인도서무장충돌대비첫훈련 17 일 : 일, 동남아국가연합 ( 아세안 ) 과군사훈련등방위협력강화추진계획 비엔티안비전 제시 2 일 : 일, 주인없는 외딴섬 277 곳국유화방침발표 12 월 222

규정및규칙 연구윤리위원회구성 운영규칙 편집위원회규정 간행및논문심사규정 논문심사내규 투고요령

규정및규칙 연구윤리위원회구성 운영규칙 제정 2007. 9. 21. 규칙제 19 호개정 2010. 5. 28. 규칙제 43 호개정 2015. 12. 23. 규칙제 105 호 제 1 조 ( 목적 ) 이규정은동북아역사재단연구윤리위원회 ( 이하 위원회 라한다 ) 의 구성및운영에관한기본적인사항을규정함을목적으로한다. 제2조 ( 용어의정의 ) 이규정에서사용하는용어의정의는다음각호와같다. 1. 연구부정행위 ( 이하 부정행위 라한다 ) 라함은연구를제안, 수행하거나연구결과를발표하는과정에서행하여진위조, 변조, 표절등연구의진실성을침해하는다음의행위를말한다. 가. 위조 라함은자료나연구결과를허위로만들고이를기록하거나보고하는행위를말한다. 나. 변조 라함은연구와관련된자료, 과정및연구결과를사실과다르게변경하거나누락시켜진실에부합하지않도록하는행위를말한다. 다. 표절 이라함은타인의아이디어, 연구과정및연구결과등을적절한인용표시없이연구에사용하거나자신이이미발표한연구결과를적절한인용표시없이부당하게발표하는행위를말한다. 2. 연구부적절행위 ( 이하 부적절행위 라한다 ) 라함은연구내용또는결과에대하여학술적공헌또는기여를한사람에게정당한이유없이저자자격을부여하지않거나, 학술적공헌또는기여를하지않은자에게감사의표시또는예우기타이유로저자자격을부여하는행위를말한다. 224

3. 제보자 라함은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를인지한사실또는관련증거를위원회에알린자를말한다. 다만, 고의또는중대한과실로당해주장이나증언에반하는사실을간과한자는제보자로간주하지않는다. 4. 피조사자 라함은제보또는위원회의인지에의하여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의조사대상이된자또는조사수행과정에서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에가담한것으로추정되어조사의대상이된자를말한다. 5. 예비조사 라함은본조사실시여부를결정하기위하여제보된사실에대한관련정보를수집하고예비적인사실확인절차를수행하는것을말한다. 6. 본조사 라함은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의혐의에대한사실여부를입증하기위한절차를말한다. 제3조 ( 기능 ) 위원회는재단소속의연구자와재단을통하여연구비를지원받은자및재단학술지에원고를게재한자등의연구윤리와관련된다음각호의사항을심의 의결한다. 1. 연구윤리관련제도의수립및운영에관한사항 2. 부정행위및부적절행위의예방조치에관한사항 3. 예비 본조사의착수및조사결과의승인에관한사항 4. 예비조사위원회, 조사위원회의구성에관한사항 5. 제보자보호및피조사자명예회복조치에관한사항 6. 조사결과의처리, 후속조치및재심의의처리에관한사항 7. 기타위원장이부의하는사항 225

영토해양연구 Vol. 12 제4조 ( 구성 ) 1. 위원회는사무총장, 한중관계연구소장, 한일관계연구소장, 독도연구소장 ( 이하 당연직위원 이라한다 ) 을포함하여 7인의위원으로구성하며, 위원장은사무총장이되고부위원장은논총편집위원장이수행한다. < 개정 2015. 12. 23> 2. 위원장이부득이한사유로직무를수행할수없을때에는부위원장이그직무를대행한다. 3. 당연직이외의위원은재단부연구위원이상의연구직중에서이사장이임명하며, 그임기는 2년으로한다. 4. 위원회의원활한업무수행을위하여연구직직원중에서이사장이임명한자를간사로한다. 5. 위원장은위원회의의견을들어전문위원을위촉할수있다. 제5조 ( 회의 ) 1. 위원회의회의는필요한경우에위원장이소집하고주재한다. 2. 회의는재적위원과반수출석으로성립하며출석위원 3분의 2의찬성으로의결한다. 3. 위원회는필요한경우위원이아닌자를회의에참석시켜의견을들을수있다. 4. 회의는비공개를원칙으로한다. 제6조 ( 제보및증거보전 ) 1. 제보자는위원장에게구술 서면 전화 전자우편등가능한모든방법으로제보할수있으며실명으로제보함을원칙으로한다. 2. 위원회는제보에대한증거보전을위하여연구기록이나증거의상실, 파손, 은닉또는변조등을방지하기위한상당한조치를취할수있다. 226

제7조 ( 검증시효 ) 1. 제보의접수일로부터만 5년이전의부정행위및부적절행위에대해서는이를접수하였더라도처리하지않음을원칙으로한다. 2. 5년이전의부정행위및부적절행위라하더라도재단의운영상의장애를초래하거나, 재단의위상을심각하게훼손할우려가있는경우에는위원회의의결에따라이를조사할수있다. 제8조 ( 예비조사위원회 ) 1. 위원회는제6조제1항에의한제보를접수한경우예비조사가필요하다고인정되면 3인이내의위원으로예비조사위원회를구성한다. 2. 예비조사는접수일로부터 15일이내에착수하고, 조사착수일로부터 30일이내에완료하여위원회의승인을받도록한다. 3. 예비조사에서는다음각호의사항에대한검토를실시한다. 1) 제보내용이부정행위와부적절행위에해당하는지여부 2) 제보내용이구체성과명확성을갖추어본조사를실시할필요성과실익이있는지여부 3) 제보일이시효기산일로부터 5년을경과하였는지여부 4. 예비조사결과보고서에는다음각호의내용이포함되어야한다. 1) 제보의구체적인내용및제보자신원정보 2) 조사의대상이된부정행위혐의및관련연구과제 3) 본조사실시여부및판단의근거 4) 기타관련증거자료 제 9 조 ( 본조사착수및기간 ) 1. 본조사는위원회의예비조사결과승인후 30일이내에착수되어야하며, 이기간동안본조사수행을위한위원회 ( 이하 조사위원회 라고한 227

영토해양연구 Vol. 12 다 ) 를구성하여야한다. 2. 본조사는판정을포함하여조사착수일로부터 90일이내에완료하여야한다. 3. 조사위원회가제2 항의기간내에조사를완료할수없다고판단될경우위원회에그사유를설명하고기간연장요청을하여야한다. 제10조 ( 조사위원회의구성 ) 1. 조사위원회는 5인내지 7인의조사위원으로구성하며당해연구분야에전문적인지식및경험이풍부한자를 3인이상포함시켜야한다. 2. 조사위원으로전문성과객관성을가진외부인사를 2인이상위촉함을원칙으로한다. 3. 당해조사사안과이해관계가있는자는조사위원으로위촉할수없다. 제11조 ( 기피 제척 회피 ) 1. 피조사자또는제보자는위원또는조사위원에게공정성을기대하기어려운사정이있는때에는그이유를밝혀위원회에기피를신청할수있다. 2. 당해안건과직접적인이해관계가있는자는안건의심의 의결및조사에관여할수없다. 3. 제 1항또는제2항의사유가있다고판단하는위원및조사위원은위원회에회피를신청할수있다. 4. 기피또는회피신청에대한결정에기피신청된위원이나회피신청한위원은참여할수없다. 228

제12조 ( 조사위원회의권한과책무 ) 1. 조사위원회는조사과정에서제보자 피조사자및참고인에대하여출석과자료제출을요구할수있다. 2. 조사위원회는연구기록이나증거의상실, 파손, 은닉또는변조등을방지하기위하여상당한조치를취할수있다. 3. 조사위원회는조사업무를수행함에있어조사대상연구와연구자에게부당한피해가가지않도록최선을다해야한다. 제 13 조 ( 진술기회의보장 ) 조사위원회는혐의사실에대해피조사자에게의견을 제출하거나해명할기회를부여하여야한다. 제14 조 ( 결과보고서의제출 ) 1. 조사위원회는조사완료후 10일이내에조사결과보고서를위원회에제출하여야한다. 2. 조사결과보고서에는다음각호의사항이포함되어야한다. 1) 제보의구체적인내용및제보자신원정보 2) 조사의대상이된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혐의및관련연구과제 3) 해당연구과제에서의피조사자의역할과혐의의사실여부 4) 관련증거및증인 5) 조사결과에대한제보자와피조사자의주장내용과그에대한판단및처리결과 6) 조사위원명단 제 15 조 ( 조사결과에따른조치 ) 1. 위원회는재단소속연구자의행위가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에 229

영토해양연구 Vol. 12 해당한다는조사위원회의조사결과를승인한때에는이사장에게징계및상당한제재조치를건의하여야한다. 2. 위원회는재단을통하여연구비를지원받은자의행위가부정행위또는부적절행위에해당한다는조사위원회의조사결과를승인한때에는이사장에게상당한제재조치를건의하고소속기관장에게조사결과를통보하여야한다. 3. 위원회는고의또는중대한과실로, 진실과다른제보를하거나연구윤리관련허위사실을유포한자에대해이사장에게징계또는상당한제재조치를건의할수있다. 제16조 ( 결과의통지 ) 위원장은조사결과에대한위원회의결정을서면으로작성하여지체없이피조사자및제보자에게통지한다. 제17조 ( 재심의 ) 피조사자또는제보자는위원회의결정에불복할경우전조의통지를받은날로부터 20일이내에이유를기재한서면으로위원회에재심의를요청할수있다. 제18조 ( 비밀유지의의무등 ) 1. 위원회와조사위원회는제보자를보호하고피조사자의명예를부당하게침해하지않도록노력하여야한다. 2. 제보 조사 심의 의결및건의등과관련된일체의사항은비밀로하되상당한공개의필요성이있는경우위원회의의결을거쳐공개할수있다. 3. 위원, 조사위원, 조사에직 간접적으로참여한자, 이사장및관계임직원은심의 의결 조사기타직무수행과정에서취득한정보를누설하여서는아니된다. 그직을그만둔후에도같다. 230

제 19 조 ( 경비 ) 위원회의운영에필요한경비를예산의범위내에서지급할수 있다. 제 20 조 ( 운영지침 ) 기타위원회운영에필요한세부사항은위원회의심의를거 쳐별도로정한다. 부칙 < 제 19 호, 2007. 09. 21> 이규칙은이사장의승인을받은날부터시행한다. 부칙 < 제 43 호, 2010. 05. 28> 이규칙은이사장의승인을받은날부터시행한다. 부칙 < 제 105 호, 2015. 12. 23> 제 1 조 ( 시행일 ) 이규칙은 2016 년 1 월 1 일부터시행한다. 제 2조 ( 다른내규와의관계 ) 이규칙은직제규정부칙 ( 제68호 ) 제2 조에따라개정된 것으로본다. 231

영토해양연구 Vol. 12 편집위원회규정 1. 편집위원회는영토 해양및동해표기관련연구분야의전문연구자로 구성하고, 편집위원의임기는 2 년이다. 2. 편집위원회는위원장, 편집위원으로구성한다. 위원장은동북아역사재단 ( 이하재단 ) 의 영토해양연구 발간사업담당부서장이수행함을원칙으로하나, 부득이한경우이사장이지명할수있다. 편집위원장은재단소속편집위원중에서실무를총괄할편집이사를임명한다. 3. 편집위원의유고시편집위원회는차기호논문심사가있기전에새로운편집위원을선정한다. 4. 편집위원회는다음과같은사항을심의결정한다. 1) 영토해양연구 의편찬에관한전반적인사항 2) 영토해양연구 에게재하기위한일체의논문류에대한심사 3) 영토해양연구 게재특집및일반논문, 연구노트, 자료해제, 서평, 일지등에대한기획과심사 4) 기타 영토해양연구 관련사업에대한기획과심의 5. 편집위원장은편집위원회의회의를주재하고 영토해양연구 의편집과간행을총괄한다. 6. 재단소속편집위원은 영토해양연구 의편집과간행에따른실무를담당한다. 232

7. 편집위원회는 영토해양연구 발간전에개최하고, 편집위원회의진행절차는편집및토의사항을중심으로하여기타필요한사항에대해논의한다. 편집이사는편집위원회의원활한진행을위해참고자료및보고사항을사전에준비하고회의록을작성한다. 233

영토해양연구 Vol. 12 간행및논문심사규정 1. 영토해양연구 에는다음과관련된특집, 논문, 연구노트 ( 단보등 ), 자료소개, 서평등의글을게재한다. 1) 독도와관련된주제 2) 영토및해양과관련된주제 3) 본재단의목적에부합하는논문 2. 영토해양연구 는 6 월 30 일, 12 월 31 일매년 2 회간행하는것을원칙으 로한다. 3. 편집위원회는투고된원고를다음과같은과정과내용으로심사한다. 1) 편집위원회는투고된모든원고를논문제목, 형식요건, 원고분량의적절성, 재단목적에대한부합성등을기준으로 1차심사하고, 참석편집위원과반수통과판정을얻어 2차심사에회부한다. 2) 편집위원회는투고원고중논문류의경우편당관련전공자 3인의심사자를선정하여 2차심사가이루어지도록한다. 2차심사때에는공정성을위해필자명을반드시지운뒤심사한다. 3) 심사위원은심사의뢰된논문을편집위원회의정해진양식에따라 수정없이게재 (A), 수정후게재 (B), 수정후재심사 (C), 게재불가 (D) 의네등급으로판정한후편집위원회에제출하여야한다. 이중 B C 등급의경우수정사항이, D등급의경우에는게재불가이유가반드시명시되어야한다. 4) 편집위원회는심사통과논문편수가 영토해양연구 의일반적인분량을초과할경우편집위원회의기획과심사성적을종합적으로고려하여우선게재순위를정한다. 234

4. 편집위원회는심사위원과심사과정에관한구체적인사항일체를대외 비로한다. 이외투고자는게재가결정된논문이라할지라도심사위원회의보완요구가있을경우이를최대한존중하여야한다. 5. 편집위원회는심사결과를투고자에게서면등의방법으로통보한다. 논문은아래와같은항목에의하여심사한다. 1) 논문제목의적절성 2) 형식요건및체제의정연성 3) 논리성및독창성 4) 학술적가치 5) 인용자료의적절성 6) 분량의적절성 7) 요약문의적절성 6. 편집위원회는 영토해양연구 에투고된일체의원고에대해심사종료후돌려주지않는다. 235

영토해양연구 Vol. 12 논문심사내규 1. 편집위원회는심사결과를다음의네가지로처리한다. 1) 게재가 : 3인모두 A로판정한경우예 : (A, A, A) 2) 수정후게재 : 3인모두 B 이상으로판정한경우 / 2인이 A로, 나머지 1인이 C로판정한경우예 : (A, A, B) (A, B, B) (B, B, B) (A, A, C) 3) 수정후재심사 : 2인이 A와 B 이하로판정하고나머지 1인이 C로판정한경우 / 2인이 B 이상으로판정하고나머지 1인이 D로판정한경우 / 1인이 A나 B로판정하고 2인이 C로판정한경우예 : (A, B, C) (A, B, D) (B, B, C) (B, C, C) (A, C, C) 4) 게재불가 : 2인이상이 C나 D로판정한경우 (A, C, C와 B, C, C는제외 ) / 1 인이 D로판정하였는데 A가포함되지않은경우예 : (A, C, D) (A, D, D) (C, C, C) (B, B, D) (B, C, D) (C, C, D) (D, D, D) 5) 재심사 : 2인이 B 이상으로정하였는데 1인이 D로판정한경우, D 판정 1건에대해서만심사위원을교체하여재심사함. 2. 편집위원회는논문편수가 영토해양연구 의수록분량을초과하거나또는편집위원회의기획상의우선순위등의사정에따라심사통과원고가운데일부를필자의양해하에차기호또는차차기호에실을수있다. 이가운데단순히 영토해양연구 수록분량초과만이원인일때에는투고및심사성적순위로해당호게재를결정한다. 3. 심사결과통보는심사위원이나과정을대외비로한상태에서심사결과와수정제의및게재불가사유를통보한다. 236

투고요령 1. 영토해양연구 는전문적인학술지로서논문, 서평, 연구노트 ( 단보등 ), 회고와전망, 영토 해양관련일지, 자료소개등이게재된다. 투고하고자하는원고는 3월 31일또는 9월 30일까지투고신청서와함께 영토해양연구 편집위원회앞으로제출하여야한다. 2. 원고는반드시컴퓨터파일로작성하여 영토해양연구 편집위원회메일 (tas@nahf.or.kr) 로보내야한다. 또한최종원고제출시사진 ( 해상도 300dpi 이상 ) 및기타자료는별도제출한다. 3. 원고분량은 200자원고지 100장내외를기준으로하되충분한논지전개를위해부득이한경우 50장이내로초과할수있다. 그림과사진의수량은원고분량에포함하지않으나논지전개를위해필요한최소한으로제한한다. 4. 원고는제목, 필자 ( 소속기관, 직위 ), 머리말, 본문, 맺음말, 국문및영문초록, 국문및영문주제어, 참고문헌 ( 필요시 ) 의순서로구성한다. 5. 논문의목차와소제목은머리말부터순서에따라 Ⅰ > 1 >1) > (1) 로번호매김을한다. 6. 인용문헌은가급적각주로표기하되부득이한경우에는참고문헌의방식을활용할수있다. 237

영토해양연구 Vol. 12 7. 각주에서현대문을인용할때에는 필자, 연도, 논문, 서책 ( 출판사 ), 쪽수 의순서로한다. 앞서인용한문헌을재인용할때에는바로위의문헌을인용할경우에는 필자, 연도, 위의글 ( 책 ), 쪽수 의순서로, 바로위이전의문헌을인용할경우에는 필자, 연도, 앞의글 ( 책 ), 쪽수 의순서로인용한다. 예 ) 김홍도, 2010a, 위의글, 78쪽. 홍길동, 2002, 앞의글, 29쪽. 8. 각주에서고중세문헌을인용할때에는 작자 ( 필요시 ), 서책, 편목, 인용문 의순서로한다. 이중고중세문헌은필요할경우판본명이나영인본명을밝힐수있고, 인용문중전략, 중략, 후략등은 로표기한다. 이외본문중의인용문은문장가운데에삽입되는경우 표시로묶고, 인용문이길어문단을나눌경우에는 표기없이서술한다. 예 ) 東北人, 東北集 ( 東北文化社影印本 ). 東北有高士, 東北公賢裔鵠擁, 是人世 9. 서양문헌을인용할때에는책명은이탤릭체, 논문은큰따옴표로표기하고다음과같은순서와방식으로인용한다. 예 ) V. G. Childe, 1932, Chronology of prehistoric Europe : a review, Antiquity 6, pp. 206~212. 10. 참고문헌을활용하는경우에는본문의인용처를밝히고자하는곳에괄호를치고그안에필자와인용문헌의간행연도및필요시인용쪽수를표기한다. 예 ) ( 동북인, 2006 : 24) 238

영토해양연구 Vol. 12 초판 1 쇄인쇄 초판 1 쇄발행 2016년 12월 20일 2016년 12월 30일 펴낸이 펴낸곳 김호섭동북아역사재단 등록 제312-2004-050호 (2004년 10월 18일 ) 주소 서울시서대문구통일로 81 임광빌딩 전화 02-2012-6065 팩스 02-2012-6189 ISSN 2234-3296 비매품 이책의출판권및저작권은동북아역사재단에있습니다. 저작권법으로보호를받는저작물이므로어떤형태나어떤방법으로도무단전재와무단복제를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