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호 <연극보는 남자_남자는 남자다_하동> <나의 실천-철학 실험기_삶을 창조하는 자_상현> <원일의 락락_존 케이지 4'33"> <소설 읽는 수경_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연극 보는 남자 브레히트의 시대는 갔는가, [남자는 남자다] 아침 일찍 깨어나 하얀 병실에서 지빠귀 소리를 들었을 때, 더 또렷이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 몸 하나 사라지는 것일 뿐, 다른 것은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죽은 다음에도 들려올 지빠귀의 온갖 노래 소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하얀 병실에 누워 (1956)>이란 시로, 그가 죽던 해에 쓴 작품이다. 올 가을 동사서독 루쉰 읽기 첫 시간에 루쉰이 남긴 마지막 글인 < 죽음( 死 )>을 읽어 내려가는데 이 시가 문득 떠오르면서 루쉰의 얼굴에 브레히트의 얼굴이 겹쳐지는 묘한 환각 같은 게 있었다. 둘 모두 20세기 초반이라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기를 대단한 싸움꾼으로 살았다는 것, 좀 더 구체적 으로는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적과 싸우는 방식 등에서도 유사한 면이 많다는 것 때문이다. 나찌의 박해를 피해 구두 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꿔가며 망명지를 전전하던 브레히트가 뉴욕을 떠날 때 쓴 호랑이를 피해 달아나니 / 빈대 들에게 뜯기게 되었네 / 평범한 것들이 / 나를 먹어치우고 말았네 같은 글을 보면 루쉰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루쉰을 읽으면서 조만간 그의 작품을 한번 봐야겠다 싶었는데 최근에 기회가 왔다. 그게 바로 <남자는 남자다>였다. 브레히트, 하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는 <서푼짜리 오페라>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사천성의 선인>과 같은 서사극 을 쓴 극작가로 더 기억되리라 싶다. <남자는 남자다> 또한 그가 남긴 서사극 중 하난데, 앞서 말한 작품들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 아는 배우(홍정재)가 출연한다고 해서 학생들 데리고 동국대 내에 있는 이해랑 예술 극장에서 가서 보 게 됐다. 평소에 기회 되는 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연극을 보러 다니는 편인데, 어떤 아이들과 함께할까 고심하다 독서토론반 아이들이 적격 이겠다 싶어 함께 관극을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아주 좋았다. 저녁 찬거리로 삼을 고등어를 사러 나온 갈리가이(그는 하역부로, 아큐와 너무 흡사한 인물) 는 우연히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 병사들과 부딪친다. 그들 중 한 무리인 4인조의 말종 부대가 황인사라는 절에 몰래 들어가 불전함을 훔치고 나오던 중, 사고가 생겨 한 명이 낙오된 다. 불전함 도난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두려움에 떨던 세 병사들은 책임을 전가할 대리 병사를 찾는데, 마침 어리바리한 갈리가이가 그 들의 눈에 띈다. 이들이 그를 꼬드기지만 좀체 넘어오지 않는다. 온갖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꿈쩍 않던 갈리가이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장 사할 수 있다는 말에 자신의 혼과 이름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하면서 그들의 계략에 말려든다. 이제 그는 그들의 계획 하에 하나의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단계별 공정을 통해 이상적인 군인 남자, 아니 살인 병기로 개조, 재탄생되기에 이른다. 역시 서사극 답게, 재미와 감동으로 정서적 몰입을 끌어내거나 극의 흐름에 집중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훼방을 놓는다. 멀쩡하게 배 역을 연기하던 배우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관객을 빤히 쳐다보면서, 작가의 창작 의도와 감독의 연출 의도를 늘어놓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다. 매 장이 끝날 때마다 관객의 게으른 지성을 가격하려는 듯 강렬한 터치의 피아노 사운드가 울려 퍼지고, 후반부에서는 장면이 전환 될 때마다 라운드 걸 이 팻말을 들고 등장해 주인공이 개조되어 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일러주기까지 한다. 당신들은 분명 연극을 보고 있 다는 걸 잊지 말라는 암묵적 주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과도한 친절이 안겨주는 불편함이라니. 아이들은 그 불편함을 기꺼이 즐긴 듯한데, 난 그걸 즐기기가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나의 인간이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을 갖는 존재라 고 하는 개인주의적 마인드를 비웃고 있다는 것과, 군대조직 속의 인물들의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 인간들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는 걸 이해는 했다. 해서, 주인공 갈리가이 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연극의 문제 의식을 현실 속으로 끌고 나아가야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된 건가? 근데, 과연 이 시대에 현실문제에 무감한 관객을 각성시키고 가르치겠다는 의도를 관철시키는 것이 가능한 걸까? 서사극 의 특성상 그러려니 싶으면서도, 확실히 낡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중이나 지식인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 고, 극장이 더 이상 계몽과 교육의 장이 되기 힘든 시대, 극장의 관객들을 끊임없이 소외 시키고 불편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시대의 전위로 거듭나길 바랐던 브레히트의 기획이 제대로 성사되기 위해선 지금, 여기 에 대한 고민이 더해졌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이런 내 느낌과는 별개로 아이들은 이 실험적이고도 현실비판적인 작품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예술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만남이 아이들 속의 어떤 욕구 나 갈망 같은 걸 툭 건들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그동안 난 너무 많은 연극을 봐버렸거나, 쓸데없는 지식으로 매번 의 연극을 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브레히트는 역시 시인이었다. 극 중간에 배우가 부르는 테마송 같은 게 있는데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입가를 맴돌았다. 여기다 그대 로 인용해 보고 싶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 브레히트의 시집을 뒤져 비슷한 내용의 시를 옮겨 적어본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앞서 말 한 그의 대표작들을 만나 보기를 적극 권하면서 글을 맺는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포도주 속에 부은 물을 당신은 다시 퍼낼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포도주 속에 부은 물을 당신은 다시 퍼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화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연극 보는 남자
창조하는 자는 사자 의 정신처럼 누군가가 정해놓은 군중심리나 유행을 파괴할 것이다. 군중심리나 유행이 틀렸다고 이것에 대해 공공연 하게 비판하고 다니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게 무조건 옳고 따라야 한다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렇게 말했다> 중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라는 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너는 네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네 의지를 율법이라도 되는 듯 네 위에 걸어둘 수 있느냐? 너는 네 자신에 대하여 판관이, 그리고 율법의 수호자가 될 수 있느냐? 이 문장처럼 자신의 의지를 율법처럼 중요시하고 이 율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지 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이 말을 힘(=덕)들의 중심이자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즉 힘에의 의지가 아닐까. 자신의 의지를 율법처럼 걸어두는 자는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생성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흔들리게 만드는 다른 의지와 가치를 파괴해야 할 것이다. 창조하는 자의 목적은 오로지 이기는 것이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을 적삼아 싸우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싸 워서 이긴 나 는 전의 나 보다 나아지거나 발전한 나 가 아니다. 그저 새로운 나 일 뿐이다. 애초 생명이란 싸워서 이긴 쪽이 무언가 결정 을 내리는 냉정하다고 할 수도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전의 나 와 지금의 나 도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쁜지 구별할 수 없고, 그저 새로운 나 만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미하엘 엔데라는 작가의 모모 라는 책에는 시간의 꽃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빛의 시계추가 연못을 스쳐 지나간다. 그때마다 꽃이 피 어오르고 지며 또 다시 피어오른다. 이 꽃들은 각자 나름대로 매우 아름답다. 이 꽃이 저 꽃 보다 아름답고 못생기고, 그런 것은 없다. 그 꽃 이 피었을 때는 그 꽃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그 다음 꽃도 그 꽃이 피었을 때는 그 꽃이 제일 아름다웠다. 나 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것만은 꼭 하면서 살아야겠다 하는 걸 찾아서 그걸 위해 노력하고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게 그것은 천문 학, 별을 보는 것이다. 망원경 하나로 평생 가도 갈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그때는 일주일 내내 학교 아니면 집에만 있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별을 보는 것은 어디론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같았던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답기도 했고 그 천체들을 이 해해보고도 싶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래서 천문학자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별을 보는 것보다 수학,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더 많다. 또 천문학자가 되려면 죽어라 공부해서 알아주는 대학에 서 몇 십 명밖에 뽑지 않는 천문학과에 들어가고 또 박사학위까지 따야 한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좀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 말 대안적인 삶이고 창조하는 자의 삶인가. 창조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기에게 대적하는 적을 찾아서 싸우고 이겨서 자기 자신까지도 적으 로 삼아 자신을 창조하고 파괴한다. 대학에 가서 수많은 돈을 들여 천문학자가 되는 것을 이런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어떻 게 해야 할까? 나는 창조하는 자가 되고 싶다. 물론 대학을 가더라도 창조하는 자는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취업이 아닌 정말 공부를 위해서 대학 에 들어가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취업보다는 천문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고. 그것이 나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배우는 것 자체로 나는 변화할 테니까. 나는 데카르트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데카르트는 말했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 다. 가 맞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면서 변할 것이고 끊임없이 극복되고 창조될 테니. 대학을 가든 안 가든 나는 창조하는 자가 되고 싶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적과 싸우면서 나를 창조해 내고 싶다!!!
樂 樂 원일의 락락 존 케이지 (John Cage1912~1992) 1912년 9월 5일 로스엔젤레스 출생. 할아버지는 청교도적 감리교단의 순회 목사였고 아버지는 발명가. 어머니는 세 번째 결혼을 통해 존 케이지를 낳음. 작곡가, 저술가, 음악 시( 詩 )인, 뉴욕 균류학회를 설립한 버섯 전문가, 내 생각에 가장 훌륭한 내 작품, 최소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침묵<4분33초>이다. 작곡가이자 시인인 존 케이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침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침묵이란 무 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여러 다양한 행위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그것을 침묵 (silence) 이라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질서나 감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서와 표현으로 이끌어 가지만 그때 우리의 소리를 침묵시킨다. 1961년 이태리 밀라노의 잡지 메트로 에 수록된 글 <로버트 라우셴버그,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관해>라는 글 첫머리에 케이지는 이런 문장을 적어 놓았다. -관계자 여러분께- 백색 회화는(White painting)가 먼저입니다. 내 침묵의 음악은 나중에 나왔습니다. 헌데 내 추측으로는 케이지의 4 33 작품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벽암록> 중 세존의 침묵 설법이라 생각한다. 擧. 世 尊 一 日 陞 座. 文 殊 白 槌 云, 諦 觀 法 王 法, 法 王 法 如 是. 世 尊 便 下 座.(종용록.벽암록) 세존께서 어느 날 법좌에 오르셔서 말없이 앉아계셨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나무 방망이를 쳐서 설법이 끝났음을 알리며 말하였다. 법왕께서 설하신 진리를 보라. 법왕의 진리는 이와 같다. 이에 세존께서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이상 설법 끝! 침묵의 설법, 존재하되 말하지 않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절대적 침묵. 마하가섭존자의 염화시중의 알아차림. 부처님의 열반 이후 수많은 동물들이 모여 들어 슬퍼하였다는 이야기는 아마 다 사실일 것이다. 동물들은 침묵과 늘 함께하기에 참으로 깨어 존재하며 침묵의 시공에서 부처와 교감을 주고받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따금 새들과 함께 지저귐을 주고받으며 놀다보면 어느새 소리를 내지 않는 상태에서 더 그들과 깊은 교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가 있다. 나는 그런 때 침묵의 가치를 느낀다. 그것은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이다. 입을 다물고 대신 귀 기울여 당신 그리고 당신과 함께 존재하는 것들과의 사이에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소리를 들어보길 권한다. 그러면 지금 이 좀 더 현실적 감각으로 선명히 다가올 것이다. 그 소리들을 제대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도 참 나 로서 존재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절대적 침묵이란 없다. 침묵적 상태만 있을 뿐이다. 그 상태에서 침묵은 드넓은 세상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말하자면 침묵은 어떤 죽음과 생성을 잉태한 상태의 공간적 소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침묵을 깨고 나타날 소리들이 머무는 잠재성의 터널과도 같다. 나는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에서 내 작품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음악은 작곡가의 느낌과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텅 빈 시간이나 텅 빈 공간 따위는 없다. 각각의 순간 이 시간이며 공간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보고 또 듣는다. 침묵 같은 것은 없다. 항상 무언가 일어나며 소리를 내고 있다. 실 제로 침묵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공학적 목적으로 조용히 만든 방을 무향실( 無 響 室 ) 이라 하는데, 여섯 개의 벽면이 특수 소 재로 만들어진 이 방에서는 소리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 에 들어간 나는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은 소리,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담당 엔지 니어에게 설명하자 그는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내 혈액이 순 환하는 소리라고 알려 주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각각의 순간이 시간이며, 공간이다. (존 케이지, <Silence> 중) 케이지가 확실히 선불교에 깊이 영향을 받았음을 우리는 그의 사상과 작품 전반에 걸쳐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작곡가란 소리를 조직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동감한다. 서양 전통 화성의 질서 있는 음 관계성만을 음악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 작곡가들 에게 적절하지 못한 이유는, 이제 그들이 소리의 전 영역을 인식하고 상대하게 된 까닭이다. 즉 현대의 작곡가는 아카데미에서 금지한 소리 의 모든 비음악적 영역을 탐구한다. 존 케이지는 그것이 가능함을 평생에 걸쳐 행동을 통해 실천한 작곡가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 도 했다. 나는 예술과 삶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음의 문장들은 존 케이지의 주요 어록들 가운데 그의 작곡 성향을 드러내며 특히 침묵과 깊이 관련된 것들이다. 고요한 마음은 좋고 싫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다. 좋고 싫음을 넘어섬으로써 마음을 글자 그대로 열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닫으려고 노력하는 대상은 내게 너무 친숙한 것들이다. 굉음, 바람소리, 심장 고동 소리, 산사태 소리로 사중주를 작곡하고 연주할 수 있다. ( )대중이 좋아하리라 생각한 소리만을 들려주면 ( ) 우리는 새로운 소리의 경험으로부터 차단된다. 리처드 코스텔라네츠가 쓴 케이지와의 대화 마지막에 재클린 소사르가 케이지에게 프루스트식의 질문을 던지고 이에 케이지가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중 몇 가지 인상적인 질문과 대답을 꼽아보면 이렇다. -어디에 살고 싶은가? 내가 있는 곳이다.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부처님이다. -마음에 드는 그림은? 마음에 든다든지, 좋아한다는 것에 되도록 집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새로운 일에 호기심을 가 지고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이 주는 선물중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은? 나는 내게 있는 것을 갖는다 -어떻게 죽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내 관심을 많이 끄는 해답의 비밀이다.
주중의 어느 하루, 종일토록 집에 있으면서 되는 대로 손에 잡히는 소설을 꺼내 읽는 호사를 누렸다. 공교롭게도 그 중 두 편의 소설이 모두 서간체 형식으로 쓰였는데, 두 작품이 사뭇 다른 느낌이라 재미있었다. 먼저 읽은 작품 속 화자는 자신의 선택이 전적으로 과거 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 해석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으로서 편지 쓰기를 이어간 데 반해, 나중에 읽은 작품에서 편지 쓰기란 도저히 풀 길 없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구하는 과정이고 하여 묘하게도 그 행위 자체가 꾸역꾸역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되어주는 거다. 후자가 일본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자신과 태어난 지 3개월 된 아기를 남겨두고 자살해버린 남편을 향 해 줄곧 왜 죽었느냐고 묻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한 대목, 한 문장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야말로 꽉 짜인 이야기 구조가 일단 놀랍다. 라면 장사를 하다 어느 날 한꺼번 에 목을 매 죽어버린 옆집 일가, 동네 파칭코장에서 맞은 초경, 죽은 남편이 종종 보여준 사팔눈이 자아낸 낯섦 등은 하나하나가 말할 수 없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거기서 주제에 부합한다. 생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죽어야 했나요? 이렇다 할 말도 남기지 않고 당신은 선로 위를 끝까지 걸어갔나요? 어째서 우리는 살아야 하나요? 그때 감쪽같이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당신이 죽고 나서의 그 며칠간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합니다. 여우한테 홀 린 것 같은, 여럿이서 누군가에게 속은 듯한, 그런 멍한 마음속에 흐느끼지도 울부짖지도 못한 채 오직 컴컴한 땅속에 가라앉아 있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유이치를 내버려둔 채 멍하니 다다미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관리인 부부가 하루 종일 저를 지켜봐주었습니다. 남편의 뒤를 따라 가스관이라도 물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저는 마치 남의 일처럼 생 각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유이치를 데리고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에, 비 그친 선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제 또렷이 비쳤 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 위로 회색 블레이저코트를 입고 약간 등을 구부린 특유의 모습으로 혼자 묵묵히 이슥한 밤의 선로 위를 걷 고 있는 당신의 뒤를 좇으면서 저는 열심히 그 마음속을 알려고 기를 썼습니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을까요. 그러다가 제 앞을 걷고 있는 당신이 앞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가끔씩 멈춰 서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저를 보고 있는 당신은 자전거를 훔쳐 돌아온 날 밤의 그 사팔눈이 된 다른 얼굴이었습 니다. 저는 그 얼굴을 보면 그냥 무턱대로 슬퍼지고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작아지며 멀어져가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스물다섯인가, 젊은 과부네. 어머니도 동생 겐지도 올 때마다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여자는 알 수 없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이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롭고, 그래서 재혼을 하고서 새로 생긴 딸아이와 시아버지를 보살피면서도 문득 또 묻고 만다. 당신은 왜 죽었나요? 무려 7년 동안이나 같은 질문이다. 그 기록이 바로 이 편지인 셈인데, 그 안에는 사소해 보일 법한 에피소드들이 굉장한 비밀을 품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모여 있어 독자를 숨죽이게 한다. 왜 죽었을까? 왜 누군 가는 조금 전까지 찻집에서 커피를 시켜 마시다 갑자기 죽기로 결심하게 되는 걸까? 어린 부인과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남겨두고 유 서 한 장 남기지 않고, 기차가 바로 등 뒤에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로 위를 끝까지 걸어가는, 그런 건 어떤 마음에 따른 것일까? 그런 남자의 생은 그 전부터 뭔가 수상한 기미를 보이는 걸까? 만나는 모든 사람과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다 죽을 이유가 되었을까, 그 남자에게는? 아마 화자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죽은 이를 향해 이 말 저 말을 해본 것일 테다. 그런데 흥미롭고 또 자연스럽게도, 화자의 편지에는 남편이 죽은 뒤 그녀가 보낸 일상들이 하나둘 섞여 들어가 색채를 발하기 시작 한다. 수줍은 듯 그녀에게 인사하는 의붓딸과 시아버지, 마을 전체를 진동시키는 해명( 海 鳴 ), 그곳에서 차차 얼굴을 익히고 말을 섞게 된 이웃들, 사는 집을 개조해 새로 시작한 숙박업 등등. 이런 이야기가, 그녀가 전남편에게 묻고 또 묻는 말, 또 전남편에 얽힌 이런저
런 기억들과 섞이기 시작할 때, 작품에는 서서히 온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은 (실체 없는)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가족소설 이나 청소년 소설의 온도와 달리, 살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러 가지를 놓아버린 자, 가까스로 다시 뭍으로 올라와 아무 기대도 품 지 않은 채 이 삶을 살아가겠노라 마음먹은 자가 삶에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온기 같다. 그것은 보는 이를 몹시 울적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그건 이쪽 입장에서는 아직 삶에 대해 일말의 기대와 미련을 버리지 못했 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죽어버렸을 때의 심정을, 내가 그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바로 그 순간 다른 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때 그게 어떤 느낌일지, 사체조차 보지 못하고 태 워버린 시신을 생각할 때 마음이 어떤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지.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여전히 이쪽 편에서 삶을 이어가면서 또 다시 희 로애락을 겪고 지금의 남편을 질투하고 지금 아이를 찰싹찰싹 때리다가도 문득 선로 위의 남편을 떠올릴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그런데 묘하게도, 그 정경이 점차 따뜻해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따뜻해지는 만큼 또 쓸쓸해지는 건, 나 자신 여전히 기대와 미련이 많아서라는 생각이. 삶을 정면으로 보는 건 문학 안에서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이나마 이토록 심장을 흔들어대는 일인가, 나는 이런 말들을 혼자 주워섬기며 마지막장을 덮었더랬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이야기는 작품 제일 마지막에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드디어 남편의 죽음을 납득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이해시키는 데 성공하는데, 그때 그녀가 내린 답은 바로 환상의 빛 이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 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리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 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시아버지의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배가 고프면 저렇게, 이층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저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뭘 떠올리고 있는 건지, 툇마루에 앉아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유이치도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요. 죽은 남편은 바다 표면에서 반짝거리는 저 빛과 같은 것을 그날 선로에서 보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건 손에 잡히지는 않으면서 자꾸만 사람을 유혹하곤 하니까. 당신은 그 빛을 향해 걸어갔을 거예요. 나도 여기 앉아 지금 그 빛을 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빛에 가 까이 가려다 죽은 사람들을 몇 압니다. 이곳 어부들은 나보다 훨씬 더, 저 반짝이는 바다 아래 얼마나 위험한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지 잘 알지요. 누군가는 그 빛을 따라가다 죽지만, 여기 우리들은 그 빛을 보며 하루하루 물고기를 낚고 그것을 굽거나 찌고 말 안 듣는 아 이들을 때리고 밤에는 서로를 안습니다. 있는 빛을 없는 것인 양 하지 않거니와 그 빛에 끌려 들어가 삶 너머로 가버리지도 않으면서 여기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는 삶에 대한 이야기 기사도 정신도 전쟁 영웅도 다 사라진 현대문학 안에서 소설이 가장 진솔하고 또 진지하게 임해야 할 문제 중 하 나가 이것 아닐까 싶다. 나도 당신도 환상의 빛에 기대어 살면서 일희일비하고 때로는 죽고 싶다가도 그래도 살아야지 하며 몸을 일으 키는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현대소설은 우리네들 같이 평범하고 가련한 사람들이 어떻게 조금이나마 존귀해질 수 있는가를 열심히 묻 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