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 刊 辭 2013. 2. 退溪學釜山硏究院
차 <기획강좌> 례 동양사상과 이상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 性齋 許傳 散文 硏究 申承勳 3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鄭在權 20 退溪의 林居十五詠 孫五圭 31 南冥 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韓相奎 37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이상사회론 朴文鉉 48 동아시아의 이상세계관 張在辰 62 欲의 現實과 仁의 文藝運動 趙柄悟 78 實學派의 이상사회론 成昊俊 88 동양고전에서 古 와 今 의 문제 金喆凡 95 東洋思想과 우리의 삶 琴鏞斗 98 동아시아의 이상향(理想鄕) 이야기 張源哲 112 漢代 儒家가 꿈꾸었던 理想社會 金奉建 123 폭력 없는 학교를 위한 인성교육의 방향 金秉權 131 茶山 丁若鏞 선생의 삶을 고찰 李泰鍾 142 風俗의 社會的 機能 鄭尙圤 153 환경친화적인 삶 朴淸吉 160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 고찰과 그 치유책 李炳壽 168 中國의 이해 (과거와 현재) 李陽子 174 건강생활과 營養 卞在亨 183 자본주의 4.0시대 한국경제의 도전과 과제 李浩永 198 萬海의 愛國과 詩心 金泰詢 217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 洪普植 233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 李宗峰 241 李舜臣 將軍의 忠國爲民의 정신 崔海晋 254 임진왜란의 기억과 전승 金東哲 258 고려말 禑ㆍ昌王과 廢假立眞 兪英玉 278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현대 趙南旭 293 慶尙左水營에 대하여 李源鈞 308 <일반강좌>
동양사상과 이상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 性齋 許傳 散文 硏究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退溪의 林居十五詠 南冥 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이상사회론 동아시아의 이상세계관 欲의 現實과 仁의 文藝運動 實學派의 이상사회론 동양고전에서 古 와 今 의 문제 東洋思想과 우리의 삶 동아시아의 이상향(理想鄕) 이야기 漢代 儒家가 꿈꾸었던 理想社會 폭력 없는 학교를 위한 인성 교육의 방향 - 1 -
性齋 許傳 散文 硏究 -記를 통해본 理想과 苦惱- 신 승 훈* I. 서론 性齋선생 許傳(1791:정조21년-1886:고종23년)은 조선후기에 큰 문호를 열어 후학들을 聖學의 길로 이끌었던 宗師이다. 분명한 그의 자취 때문에 학계의 연 구적 관심은 주로 학문적 업적에 집중되었다.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를 중심 으로 한 연구진이 그 동안 축적한 성과는 이를 잘 대변한다.1) 그런데 본고는 학문적 업적을 초점에 두지 않고 인간적 면모와 그의 내면세계에 집중해보려 한다. 이는 그간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이 아니다. 성재에 관한 학문 적 연구는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간의 성과는 성재학에 관해 서는 선하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다만 성재의 인간적 면모와 그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앞으로 진행 될 학문적 연구의 밑바탕이 될 것이고, 그것은 성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학문저술에 관련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의 학자 * 경성대 교수 1) 기왕의 연구성과를 일별함은 그 동안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진행해온 성재 허전에 대한 연 구의 진정성과 지속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 연구성과를 정리해 본다. 金喆凡, 性齋 許傳의 生涯와 學問淵源, 문화전통논집 제5집(1997),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60쪽 ; 박준원, 性齋 許傳 文學 硏究, 문화전통논집 제5집(1997),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61~108쪽 ; 강대민, 性齋 許傳 門徒의 愛國運動, 문화전통논집 제5집(1997),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09~130쪽 ; 강대민, 性齋 許傳 門徒의 義兵運動, 문화전통논집 제6집 (1998),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19쪽 ; 김철범, 性齋 許傳의 制度改革論에 관하여, 문 화전통논집 제6집(1998),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1~33쪽 ; 鄭景柱, 性齋 許傳의 詩經講義 에 나타난 說詩 觀點, 문화전통논집 제6집(1998),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5~69쪽 ; 곽 정식, 性齋 許傳의 傳文學에 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7집(1999),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16쪽 ; 정경주, 宗堯錄 에 나타난 性齋 許傳의 經學 관점, 문화전통논집 제7집 (1999),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7~47쪽 ; 김강식, 性齋 許傳의 學風과 歷史的 位相, 문 화전통논집 제7집(1999),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49~63쪽 ; 鄭景柱, 許性齋 禮說의 收養 子 문제에 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8집(2000),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22쪽 ; 金康植, 性齋 許傳의 三政改革策과 성격, 문화전통논집 제8집(2000),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3~38쪽 ; 김철범, 許性齋 著述考略, 문화전통논집 제9집(2001),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 소, 1~19쪽 ; 김철범, 經筵講義를 통해 본 許傳의 政治思想, 문화전통논집 제10집(2003),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14쪽. - 3 -
적 면모가 뚜렷해지겠지만, 자칫 그 면모가 인간적 면모는 소거된 거룩한 초상 이 될 수도 있기에 본고가 인간적인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일정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본고는 성재가 꿈꾸었던 理想과 그가 발을 붙이고 살 았던 당대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苦惱를 찾아보려고 한다. 본고가 주로 다루는 자료는 記이다. 문집과 저술 전반을 검토하여 이상과 고 뇌를 찾는 것이 더 완전한 결과를 도출하겠지만, 역량의 한계와 시간의 제약 등 은 차선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래서 記를 중심으로 논의하려 한다. 記란 문체는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스타일이다. 원천적으로 문체적 속성이 備忘 을 목적으로 하기에 다양한 범주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건물의 조 성과 관련한 각종 造成記, 산수유람과 관련한 遊記, 유람의 풍류를 공감하며 臥遊의 감흥을 담은 山水記, 특정한 목적 때문에 그것을 기록하여 남기는 志事 로서의 錄記 등 다양하고 다채롭다. 또 다양하고 다채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기 에 제약이 적다. 따라서 자유로운 서술이 가능한 문체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 운 記의 서술 속에 성재의 이상과 고뇌가 잘 담겨있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본고는 우선 記를 검토했다. II. 性齋 許傳의 理想과 苦惱 1. 第一等人 과 삶의 현실 성재는 26세가 되던 1822년에 警省文 을 지어 이렇게 포부를 말하였다. 또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니 영장이 되는 所以의 실상을 하지 못한다 면 초목이나 곤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제일등인 으로 스스로 기 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堯舜孔顔도 인간에게는 또한 동류이다.2)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의 실상에 부합해야겠다는 포부 와 이상이다. 그래서 요임금, 순임금, 공자, 안자 같은 제일등인 으로 스스로를 기약하겠다는 것이다. 젊은 날 성재가 꿈꾸었던 理想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다. 그리고 그가 생애를 모두 바쳐 이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미 주 지의 사실이다. 2) 許傳. 性齋集 권10. <警省文>.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213면. 且况旣云物 之0矣, 不能爲所以0之實, 則與草木昆蟲奚異哉! 是固不可不以第一等人自期也. 堯舜孔顔, 於人亦 類也. - 4 -
그런데 성재도 자신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현실이 이 이상의 실현 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아! 이미 晩歲에 태어나 世衰道微하니 비록 仁義道德의 설을 듣고자 하나 누구 를 따라 그것을 구하겠는가? 다만 마땅히 문을 닫고 옛 성현의 글을 읽으며 本性 을 다해야할 따름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어머니의 연세가 높고 가산이 궁핍 하여 궁함을 지키며 가난을 편히 여기면서 끝까지 이 초심을 지킬 수 없음이다. 이것을 두려워하고 이것을 경계하여 전전긍긍하노라.3) 성재가 살았던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은 儒者가 꿈꾸는 이상의 실현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내외의 정치적 상황과 서세동점의 압박, 성리학의 교조화와 민심의 이반 등을 성재 역시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 한 형편은 그가 학문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성재의 오랜 官歷은 家産을 책임져야하는 현실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관직생활이었기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그의 본심은 성현과 같은 제일등인이 되는 것이었지 벼슬살이가 아니었다. 만약 당대가 兼善 天下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시기라면 성재가 벼슬한 것 자체도 유자로서 당연히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었겠으나, 당대는 그러한 가능성이 낮았고 성재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고종조의 대원군집정기에 잠시 그 가능성을 점 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여의치 않았었다. 여하튼 성재 는 이러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하였고, 그 속에서 고 뇌하였다. 성재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2. 普遍的 人性에 대한 희망 성재는 긍정적 세계관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긍정의 근거는 늘 인간에 대한 희망이었다. 무릇 나라의 都邑과 宮室, 집안의 閭里와 屋宅이 그 크고 작음은 다르지만, 그 터를 열고 守成하는 所以는 같다. 터를 열고 지키는 도는 사람에게 달려있 을 뿐이다.4) 3) 4) 許傳. 性齋集 권10. <警省文>.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213면. 噫! 生已晩 矣, 世衰道微, 雖欲聞仁義道德之說, 孰從而求之? 惟當杜門讀古聖贒書, 以盡所性而已矣. 最所念者, 慈 母年高, 而家產空乏, 不能固竆安貧, 終保此初心. 是懼是戒, 戰戰慄慄. 許傳. 性齋集 권14. <揖淸亭重修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1면. 夫國 之都邑宮室, 家之閭里屋宅, 其大小殊, 其所以肇基守成均也. 肇之守之之道, 在乎人而已矣. - 5 -
인간에 대한 신뢰는 성재가 꿈꾸었던 理想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성재는 普遍 한 人性의 발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性齋로 삼으며, 보편 적 인성을 자신만의 호로 獨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獨有가 싫어서 가장 보 편적인 것으로 이름 한다고 이유를 말한다. 가상으로 등장하는 객과의 문답을 본다. 주인이 자신이 머무는 室을 性齋라고 하였다. 객이 힐난한다. 호가 이름과 다 르니 호도 獨有한 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만 獨有한 것을 취해 드러 내어 일컫고, 또 남들로 하여금 드러내어 일컫게 한다. 天命의 性은 무릇 사람이 라면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갖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호를 삼아도 괜찮 을 것이데, 어찌하여 그대가 감히 獨有하는가? 나는 저 獨有라는 것이 싫다. 그래서 이것을 취하였을 뿐이다. 오늘날 천하의 근심거리에 독유보다 심한 것이 없다. 井田制가 폐지되고 阡陌이 이어지자 농부 는 혼자만 부자인 자에게 곤란을 겪고, 학교의 제도가 해이해지자 薦選의 제도가 뒤섞이니 선비는 혼자만 귀한 자들에게 곤란을 겪었으며, 專賣하는 상인이 이익 을 독점하자 상인은 물건을 내놓지 않고, 요망한 사람이 기교를 독점하자 장인은 통하지 못하며, 異端이 독점하자 儒道는 자취나 흔적이 아주 없어졌고, 소인이 독 점하자 군자는 막혔으며, 사사로움이 독점하자 공변됨은 사라지고, 이름이 독점하 자 실상이 망하였으며, 文이 독점하자 質이 어지러워졌으니, 심한 경우는 자식이 어버이를 버리고 혼자만 잘살고, 신하가 군주를 져버리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작 거나 크거나 가볍거나 무거운 일들이 한결같이 독유를 꾸짖기에도 여력이 없는 것들이다. 독유의 근심은 이와 같은 것이다. 이 性이란 사람과 사람이 같고, 생명 과 생명이 갖추었으니, 내가 어질면 남도 어지니 남이 또한 나이고, 남이 의로우 면 나도 의로우니 나 또한 남이다. 예를 행하면 모두가 남이고, 지혜를 갖추면 모두가 내가 되니, 하필 독유한 뒤에야 나의 것이 되겠는가?5) 獨有란 偏在를 말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편재는 문제를 야기한다. 여기서 성 재의 고민과 고뇌는 시작된다. 편재에 대한 혐오와 비판, 이것에 대한 냉철한 대결의식이 성재의 삶을 관통하며 그의 학문세계를 구축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性은 普遍이다. 누구나 갖고 있다. 그 보편성에 성재는 집중한다. 그래서 역설처 럼 들리지만 누구나 가진 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는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에 대 5) 許傳. 性齋集 권14. <性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0면. 主人號其所 居之室曰性齋. 客有難之曰: 號之與名殊, 號亦所獨也. 故人必取己所獨有者而表稱之, 亦使人表稱之. 天命之性, 夫人而有之, 夫人而有之則夫人而爲號可也. 何子之敢獨有也? 曰: 吾惡夫獨有者. 故是之取 爾. 今夫天下之患, 未有甚於獨有者, 井地廢而阡陌連則農困於獨, 學校弛而薦選雜則士困於獨貴, 榷 沽獨利而商不出器, 祅獨巧而工不通, 獨異端而儒道泯, 獨小人而君子沮, 獨私而滅公, 獨名而亡實, 獨文 而亂質, 甚者子遺親而獨, 臣倍君而獨. 小大輕重, 一不餘力而讓獨, 若是乎獨有之患也. 是性也, 人與人 同, 生與生俱, 我仁而人仁, 人亦我也, 人義而我義, 我亦人也. 5焉而均是人也, 智焉而均是我也, 何必 獨然後爲吾有哉! - 6 -
한 신뢰와 人性에 대한 희망적 전망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성재는 인간이라 면 누구나 하늘이 부여한 性을 구현시키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낙관적 전망이다. 이 낙관이 신뢰와 희망의 근거였다. 이 낙관은 성재가 꿈꾸었던 삶에도 투영된다. 성재가 꿈꾸었던 삶은 儒者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꿈꾸었던 이상이라서 오히려 평범하다. 대저 선비가 성인의 세상에 태어나 밝고 환하게 부합하여 이 군주를 요순같은 군주가 되게 하고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하여 몸은 부귀의 즐거움을 누 리고 이름은 우주의 사이에 드리워 光輝가 멀리 펴져 빛나게 드러남이 군자가 원 하여 하려는 바이다.6) 자신의 군주를 요순이 되게 하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함은 유자의 꿈 이자 이상이다. 이는 孔孟 이후 모든 유자가 꿈꾸었던 이상이었다. 평범하고 일 반적이라서 오히려 공허하게 들리는 이 말을 성재는 신념화하였다. 그가 인간존 재에 보인 강렬한 신뢰와 낙관은 이 평범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90년의 일생 을 학문의 길에 경주하게 하였다. 道在邇 란 말이 이 경우에도 적용되리라 생 각한다. 성재는 이토록 평범해보이고 당연한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다. 그래서 그는 특별하다. 그러나 성재가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한 적은 없었다. 그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고뇌하였다. 특히 理想이 늘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는 문제는 직시하였다. 무릇 孝悌는 지극한 행실이고 忠義는 큰 절개이며 學問은 넓은 사업이다. 이는 모두 性分의 본디 있는 바이며 職分의 마땅히 할 바이지만, 사람마다 모두 이 본 성을 따르고 이 직분을 다할 수는 없다.7) 지극히 당연한 도리지만 실제 현실에서 실현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못한 경 우가 많다. 그것을 개인의 기질의 문제나 편차의 문제로 책임을 돌릴 수도 있으 나 성재는 교화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거기에 士로서의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자를 짓는 일에서조차 선비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매해 네 계절의 가운데 달에 이 정자에서 믿는 바를 익히며 친목을 닦고, 때가 돌아오면 이 정자에서 노닐며 휴식하고 외우고 읊으며 노래를 한다. 가까운 자로 6) 7) 許傳. 性齋集 권14. <晩晦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2면. 夫士生聖 人之世, 明良契合, 使是君爲堯舜之君, 使是民爲堯舜之民, 身享 貴之樂, 名垂宇宙之間, 光輝發越, 赫 赫顯顯, 君子之所願欲也. 許傳. 性齋集 권14. <道川祠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4면. 夫孝弟至 行也, 忠義大節也, 學問廣業也. 是皆性分之所固有, 職分之所當爲, 而有不能人人率此性盡此職. - 7 -
하여금 젖어들고 물들어 보고 느끼게 하며, 먼 자로 하여 소문을 듣고 흥기하게 한다. 이는 대학 에서 이른바 한 집안이 흥하면 한 나라가 흥한다는 것이며, 戴記 에서 이른바 풍속을 옮기고 바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를 지음 이 어찌 심상한 臺榭와 樓觀이 騷人墨客이 왕래하며 음풍농월하는 도구가 될 뿐 인 것과 비교하여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자를 짓는 행위가 향촌의 세력가가 자신과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함이 거나, 풍광을 즐기며 음풍농월의 공간이 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고, 강학의 공간이자 친목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비가 세상에 나가 경륜 을 펴고 포부를 실천하지 못한다해도 자신의 향촌에서 주변을 교화하고 선도하 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됨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성재는 선비의 언행이 곧 교화 의 수단이 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효열이나 충절의 인사에 대한 顯彰 에 있어서 그 인물의 삶이 갖는 가치를 반드시 교화의 관점에서 언급하였다. 낙동강 상류의 곡목리는 侍讀을 지낸 학사 趙景羲 군의 고향마을이다. 대저 나 무의 가지가 굽어서 아래로 드리운 것을 樛 라 한다. 國風의 <樛木>은 군자의 덕 이 아래에 미침을 찬미한 것이다. 학사가 그 뜻을 취하여 거처를 樛園 이라 하였 으니, 좋구나 아래에 미친다는 뜻이여!8) 비록 때를 만나 세상에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향촌에서 자신의 덕성을 아래에 미치며 교화하는 선비를 성재는 바람직한 인간형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遇不遇의 문제는 선비에게 출처의 문제와 관련한 일반적인 고민거리였 다. 성재는 이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지만, 본성을 이루는 길임에는 같다고 보 았다.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를 본성에 따라 닦는다면 단지 본성을 이룰 뿐만 아니 라 또한 그 본성을 다함에 해당한다. 그러나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조정에서 입신하지 못한다면 山林일 뿐인데, 이는 兼善天下와 獨善其身의 나뉨이지만 곧 그 본성을 이룸은 마찬가지이다.9) 遇不遇에 매이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를 다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라는 시각이다.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최 8) 9) 許傳. 性齋集 권15. <樛園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5면. 上洛之曲木 里, 侍讀學士趙君景羲桑梓之鄕也. 夫木之枝, 曲而下垂曰樛. 國風之樛木, 美君子之德逮下也. 學士取其 義名其居曰樛園, 善乎逮下之義也! 許傳. 性齋集 권15. <文山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32면. 天所以賦 予於我者, 率性而修之, 則非惟遂其性, 亦當盡其性. 然士生斯世, 不立身於朝則山林而已, 此兼吾獨善之 分, 卽其遂性均也. - 8 -
선을 다해서 할 뿐 때를 만나지 못했음이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는 연연해하지 않아야 함을 말했다. 오랜 관력에도 요로에 선 적은 없지만, 성 재는 지성으로 군주를 보필했다. 그의 경연강의를 일별하더라도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성재가 우불우의 문제에 이미 그 본성을 이룸은 마찬가지 라 는 답을 가지고 살았음을 의미한다. 성재는 遇不遇를 그 속에서 있으면서 초월 하였던 것이다. 3. 學問的 이상과 방향 성재가 星湖의 학통을 계승하여 順菴과 下廬를 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다. 또 성호가 寒岡과 眉叟를 통해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음도 잘 알려진 사실 이다. 그런데 그 尊信의 정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 그 정도를 알 수 있 는 말이 있다. 아! 한강선생은 가정 22년에 태어나셨으니 퇴계선생보다 연세가 약간 적으셨고, 미수선생은 만력 23년에 태어나셨으니 한강선생보다 연세가 약간 적으셔서 서로 이어서 직접 배우고 도통을 전하여 그 宗을 얻으셨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수백년 뒤에 태어나 항상 선생의 무리가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10) 성재가 한강과 미수를 존신한 것은 자신의 학문이 이분들에게 연원이 닿아 있음을 자부함이며, 또 그 연원이 퇴계에게 있음을 자부하는 것이었다. 앞서 성 재가 제일등인 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는데, 여기 퇴계, 한강, 미수, 성호, 순암, 하려가 성재가 목표로 삼았던 제일등인 일 것이며, 또한 그 문도가 되지 못했음 은 만세에 태어난 후학으로서의 고뇌일 것이다. 성재가 우리나라에서 살만 한 곳으로 영남을 칭송하며, 산천과 풍속과 인물을 기준으로 언급하고 영남의 인물에 중후한 군자가 많음을 그 이유로 들었던 것11)도 사실 퇴계 이후 영남에 뿌리내린 士風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역시 성재의 자부가 형성되게 한 요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부심의 실상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학문을 해야할 것인가? 10) 11) 許傳. 性齋集 권14. <觀海亭重修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2면. 嗚呼! 寒岡先生生於嘉靖二十二年, 少退溪先生若干歲, 眉叟先生生於萬曆二十三年, 少寒岡先生若干歲, 相繼 親炙, 道統之傳, 得其宗矣. 而傳生乎此數百餘年之後, 常恨未得爲先生徒. 許傳. 性齋集 續集 권4. <左水堂記>. 한국문집총간309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60면. 凡言山 川風俗人物可居之地者, 莫不以嶺南爲最何也? 一曰嶽鎭川停土肥泉甘也. 二曰好稼穡尙勤儉, 地重難動 搖也. 三曰文學天性重厚多君子也. 兼此三者, 不惟我八道之最, 求之天下, 似無與較也. 如天嶺之介川, 月城之良佐, 善谷之溫惠, 晉陽之德山, 新安之沙月, 福州之河回, 嶺南之最, 皆大賢所毓0種德也. 遺風 餘俗, 歷累十世不改, 尊祖敬宗孝親悌長忠君信友, 愛人以及物, 是其敎也. - 9 -
성재는 우선 성현의 글을 읽고 체화함을 그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성현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 문학과 덕행은 후세를 가르치기에 충분하 였다.12) 이 글은 晩全堂 洪可臣의 영당을 중수할 때 쓴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성재 의 말이 아니라 미수가 만전당의 문집에 서문으로 써준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성재는 이 말에 한 마디도 군더더기를 붙일 수 없다고 하였다. 전폭적인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이 공감은 성재 자신의 목표나 이상과 부합되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 성재 역시 젊은 시절부터 이런 삶을 꿈꾸었음은 앞서 보았던 바와 같다. 그렇다면 성현의 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 성재는 도 가 멀리 있지 않다고 했다. 학자는 聖人을 배워 장차 聖人에 이르려 한다. 聖人은 나와 동류이니, 그 道는 단지 하늘이 부여한 性을 따름이니, 그 體는 仁義禮智이고 그 用은 부모를 孝로써 섬기고, 효를 옮겨 忠을 하며, 지아비는 뜻이 맞게 하고 지어미는 따르며, 어른은 어른답고 어린 사람은 어린 사람다움이다. 한유가 그 도는 쉽게 밝혀지고, 그 가 르침은 쉽게 행해지니, 그것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면 도리를 따르되 상서롭고, 남 을 다스리면 사랑하되 공변되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면 어느 곳에든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 고 하였는데, 이는 대학 의 나의 밝은 덕을 밝혀 修身齊家治國 平天下한다. 함이다. 聖人이 이미 가고 없으니 道는 聖人의 글에 있다.13) 성재는 학문의 요체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 본성을 體用으로 나누어 말하면 仁義禮智가 그 체이고 孝悌忠信이 그 용이 라고 하였다. 도가 멀리 고원한 곳에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에 있기에 그 도는 쉽게 밝힐 수 있고 그 가르침은 쉽게 행할 수 있다는 한 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유가의 理想인 대학 의 修身齊家治國平 天下도 이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이상의 구체적 실천방안으로써 성재는 下學上達을 말한다. 모든 군자들이여! 먼저 일상의 늘 행하는 일에서 下學함으로부터 점차 天人性 命의 이치에 上達한다면, 물러나 머무름에 몸을 선하게 하여 안자 증자 정자 주자 12) 13) 許傳. 性齋集 권14. <晩全洪公影堂重修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7면. 非聖賢之書不讀, 文學德行, 足以敎後世. 許傳. 性齋集 권14. <芝泉精舍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1면. 學者學 聖人, 將以至於聖人也, 聖人與我同類者. 其道只是率循天賦之性, 而其軆則仁義5智, 其用則事父母孝, 移孝爲忠, 夫和 順, 長長幼幼. 韓子所云, 其道易明, 其敎易行, 以之爲己則順而祥, 爲人則愛而公, 爲 天下國家, 無所處而不當者也. 此大學明明德修身齊家治國平天下者也. 聖人旣沒, 道在聖人書. - 10 -
의 도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벼슬함에 임금을 섬겨 后稷 卨 伊尹 傅說 의 사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쓰지 않을 수 있 겠는가!14) 육영당에 와서 강마할 선비들에게 독려하는 이 말은 성재 자신의 다짐이며, 필생의 노력을 경주한 학문방법이자 학문적 이상이다. 下學으로부터 점차 上達 로 나아감은 구분된 절차나 단계를 의미한다기보다 학문적 방법론으로써 日用 의 常行之事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그 속에 내재한 天人性命의 이치에 도달함이다. 이 방법론은 근기실학의 종장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온 하 나의 公案이었다. 성재 역시 이를 체화하여 후학을 권면한 것이다. 또한 성재는 학문에 있어서 段階的 漸進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15) 즉 고원 한 목표를 향해 獵等을 불사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구획하여 정하지 말고 가까 이에 있는 목표부터 이루어나가는 방식16)을 택하라고 하였다. 인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중니의 문하에서 큰 법도를 받들어 入室한 자가 72인이지만, 일찍이 한 사람도 인으로 허여하지 않고 오직 안자만 석달을 인 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칭찬하시고, 또 인의 조목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시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하시고, 완전히 인으로써 허여하시지는 않으셨으니 인을 어 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인이라는 것은 五常을 포괄하고 萬善을 관통하 는 혼연한 천지의 生物之心이다. 오직 그것을 본성으로 하는 자만이 편안하게 행 하니, 편안하게 행하는 자는 生而知之의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이나 범인이나 모 두 사람이다. 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知之가 비록 나뉨이 있지만 그 앎에 이름은 하나다. 편안하게 행하고, 이롭게 여겨 행하고, 억지로 힘써서 행함은 비록 나뉨이 있지만 그 행함에 이름은 하나다. 진실로 제일등인을 미칠 수 없다고 여겨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자는 포기함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현인을 바 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며, 성인은 하늘을 바란다. 하는 것이며, 下學上達 을 말함은 이것이 높은 데에 오름은 낮은 곳에서부터 하고 멀리 가려고 하면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도를 말함이다. 권생 돈연은 그 대인의 명을 받들어 나에게 학업을 청하려 왔는데, 일찍이 덕을 이루는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내가 그 물음 에 답하였다. 맹자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 하셨는데, 나 는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안자를 배우고, 안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석달을 인에서 14) 15) 16) 許傳. 性齋集 권15. <育英堂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3면. 凡百君子, 先自下學乎日用常行之事, 漸次上達于天人性命之理, 則居可以善身而學顔曾程朱之道, 出可以事君而致 稷卨伊傅之業, 可不勉哉! 可不勉哉! 許傳. 性齋集 권15. <尺木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8면. 物之0而 能變化不測者龍也. 然其始之騰翥也, 必階尺木然后, 潛者見, 見者躍, 躍者飛而雲從之, 其亦異哉! 許傳. 性齋集 續集 권15. <居然亭記>. 한국문집총간309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62면. 君欲 學程朱, 則志葛庵之所志, 學退陶之所學, 庶乎爲行遠自邇之方云爾. - 11 -
벗어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된다, 고 말한다. 석달을 인에서 벗어나지 않음에서 넘어선다면 인을 편안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도달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인 에 의거하는 군자가 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건대 安仁 이 두 글자를 室에 써두고 항상 눈으로 보도록 하라. 17) 성재는 인간이 타고난 자질이 다름을 인정하지만, 그 자질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경지는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 의 한계를 긋고 목표를 향해가지 않는 자는 포기한 자라고 하였다. 무한한 인간 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이라고 하였다. 공자를 배우려면 안자를 배우라는 것 이다. 그러면서 궁극적인 목표와 이상을 잊지 않는다면 그 목표와 이상에 혹 도 달하지 못할지라도 부끄러운 결과가 초래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권면인 것이다. 이는 인간존재에 대한 고뇌를 바탕으로 기존의 학설들에 대한 재해석을 가한 것이다. 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知之는 종래에 그 타고난 천분을 이유로 벗어 날 수 없는 제한조건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성재는 앎이라는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두 같다고 했다. 또 安而行之, 利而行之, 勉強而行之도 그 타고난 자질의 한계에 기인한 제약으로 인식되었었지만, 성재는 행함이라는 궁극적 목 표에 이를 수 있다면 그 역시 같은 것이라 하였다. 天賦의 성을 구현함에 타고 난 기질과 자질의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이루려는 의지 가 있다면 그 궁극의 결과는 같다고 역설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뇌와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의지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人格的 이상과 현실 앞서 성재는 학문의 요체는 인의예지와 효제충신에 있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 표는 그 실천에 있는바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한 인간형이 되는 것이다. 성재는 바로 그 학문의 목표를 삶에서 실천한 인물들을 이상적 인간형으로 기 17) 許傳. 性齋集 권15. <安仁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7면. 仁豈可易 言哉! 仲尼之門, 奉弘規而入室者七十有二人, 未嘗一以仁許之, 獨於顔子稱三月不違仁. 又詔之以爲仁 之目曰非5勿視非5勿聽非5勿言非5勿動, 亦未嘗專以仁許之, 仁豈可易言哉! 夫仁者, 包五常而貫萬 善, 渾然天地生物之心也. 惟性之者安而行之, 安而行之者, 生知之聖也. 然聖凡均是人也, 生而知之, 學 而知之, 困而知之, 雖有分焉, 及其知之一也. 安而行之, 利而行之, 勉強而行之, 雖有分焉, 及其行之一 也. 苟以第一等人, 爲不可幾及而自畫者, 安於暴棄也. 故曰士希賢賢希聖聖希天, 謂下學而上達, 此升高 自卑陟遐自邇之道也. 權生敦淵承其大人之命, 請業於余, 嘗問成德之方, 余應之曰, 孟子曰所願則學孔 子, 余則曰欲學孔子, 先學顔子, 欲學顔子, 當學不違仁之術. 過於不違則可以安仁, 雖不及, 不失爲依仁 之君子矣. 其以安仁二字, 書諸室, 常目在之. - 12 -
리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러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 쪽이 더 많다는 것이다. 성재는 이 문제를 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시한 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인정한다. 삶과 죽음은 사람에게 큰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려는 바에 삶보다 심한 것 은 없고, 싫어하는 바에 죽음보다 심한 것은 없다. 무릇 삶을 구할 수 있고 죽음 을 피할 수 있는 것을 누가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려는 바가 또한 삶보다 심 한 것이 있고, 싫어하는 바가 또한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그 심한 것과 심 함의 경계와 구분을 알아 결단하기를 마치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이 한다. 그러나 삶을 버리고 죽음을 취함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이 있다. 오직 천지의 바른 기운을 품부받아 얻고 인의의 본성을 양성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은 億兆의 사람 중에도 손가락으로 꼽을 사람이 없고, 천리의 땅에도 어 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으며, 백 세대를 보더라도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18) 捨生取死의 어려움을 들어 至高의 가치를 지켜낸 인간을 기리려는 목적의 이 글에서 성재는 오직 천지의 정기를 얻고 인의의 본성을 이룬 사람만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 가문에서 대를 이어 孝孫 과 忠烈과 忠僕이 함께 나온 것은 드물기는 하지만 가정의 훈도와 인격의 함양 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하였다.19) 백행의 근본을 효라 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누구나 할 수 없는 것 또한 효이다. 성재는 누구나 할 수 없는 효행을 기리며 그 일을 기 록한다. 18) 19) 許傳. 性齋集 권14. <趙氏兩世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4면. 死 生之於人, 大矣. 故人之所欲, 莫甚於生, 所惡莫甚於死. 凡可以求生而避死者, 孰不爲也? 而所欲亦有甚 於生者, 所惡亦有甚於死者, 知其甚與甚之界分, 而斷之若斬釘截鐵. 然捨生取死, 有非人人之所可能. 惟 禀得天地之正氣, 養成仁義之本性者爲之. 如斯人者, 兆人而不指屈也, 千里而不肩比也, 百世而不武 踵也. 許傳. 性齋集 권14. <趙氏兩世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4면. 如 咸安趙氏之一門十三忠, 竆天地亘古今而罕有者也. 嗚呼! 有爲端廟全節者, 諱曰旅, 號曰漁溪, 人謂孤竹 之風. 祭之西山院, 其後本支諸孫, 相繼立慬於南蠻北塞之亂. 漁溪五世有諱俊男, 始以孝行拜昭格署參 奉不仕, 丁酉倭再寇, 禍及公曾祖執義公墓, 公冒入賊中, 負土掩柩, 賊脅欲同歸, 公罵曰汝辱我國家, 掘 我墳塋, 不共戴天之讐, 豈從汝苟活耶? 乃北向四拜, 拔刀自刎而死. 賊亦義之, 以衣覆屍而去. 有子曰繼 先, 萬曆癸卯武科, 後値昏朝, 屛居田里, 仁祖改玉, 起爲宣傳官. 時朝廷患毛文龍[明將]之移鎭宣川, 自 椵島移. 以李莞爲義州尹, 莞素知公爲人, 辟爲幕賓, 與議軍事. 丁卯虜兵猝至, 公奮身先登, 射殺賊甚多, 矢竆力竭而死. 肅廟丙戌事聞, 父子俱命綽楔. 故別爲閣以旌之. 哲宗甲寅, 參奉贈司僕寺正, 宣傳贈兵 曹參議. 宣傳公之奴某甲, 自義州還, 未至家五里許, 訃于公族家, 流涕言戰亡事而曰主死之日, 豈欲獨 生, 恐主之名不顯而忌日不傳, 忍而至此. 然不能救夫子於危, 無面目到家, 遂投水而死. 忠奴又生於忠 臣之家. - 13 -
효자는 어린 아이일 때부터 정성으로써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았고, 자라서는 신을 삼아서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母喪에는 죽을 먹으면서 피눈물을 흘리 며 상기를 마쳤고, 아버지가 피가 섞인 설사를 앓아 위태로울 때 매추라기 구이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매추라기 구이를 구하여 드리고, 자라구이를 먹고 싶다고 하면 자라구이를 구하여 드렸는데, 모두 그 시기에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이 나서 여묘살이 3년을 할 때에는 소금으로 간을 한 음식을 먹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으며 부들자리 끝을 자르되 안으로 넣지는 않음을 끊지 않으니 사람들이 하 기 어려운 바였다.20) 남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일을 했기에 그것을 특별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그저 자신의 일로 알고 지극한 정성을 드림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해낸 그 마음을 기린 것이다. 그것은 정성이 있으면 가릴 수 없고 가릴 수 없으면 드 러나기 때문이다.21) 성재는 자신의 손가락을 두 번 찧어 한번은 시어머니를 살 리고 한번은 남편을 살린 홍씨부인의 孝烈을 기린바 있다. 남양 홍씨는 시집오기 전부터 柔順하고 仁孝하였는데, 22세에 辛氏 가문에 시 집와서 婦德과 婦行으로 밖에 알려졌다. 시어머니 이씨를 매우 공손하고 부지런 히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며 어김이 없어서 집안의 법도가 화목하였다. 갑오년에 이씨가 병을 앓아 거의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홍씨는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여러 달을 옷의 띠를 풀지도 않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않으며 몸소 불을 지펴 밥을 해드렸고, 屬纊함에 숨이 끊어지려고 하자 곧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입 에 대어 드리니 마침내 소생하여 지금까지 80여세가 넘도록 여전히 병이 없다. 정 유년에는 그 남편이 염병에 걸렸는데 경서를 전수하다가 갑자기 기절하자 홍씨가 또 그 손가락을 찧어 피를 마시게 하니 남편이 과연 회생하여 지금까지 60여세가 넘도록 해로하고 있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22) 孝烈이 반드시 奇行으로 이루어진다면 누가 孝烈을 행할 수 있겠는가? 성재 가 이런 일을 기록한 이유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있음만을 알고 자신의 몸이 있 음은 알지 못했던23)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다. 이 지극한 정성은 자신의 몸을 20) 21) 22) 23) 許傳. 性齋集 권14. <贈童蒙敎官耐齋李公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5면. 孝子自孩識愛親以誠, 旣長捆屨以供甘旨. 母喪歠粥泣血以終制, 父患血痢危殆, 欲鶉炙則求進 鶉炙, 欲鱉炰則求進鱉炰, 皆非時難得者也. 及丁憂廬墓三年, 食不鹽寢不被, 芐翦不絶[納], 人所難也 許傳. 性齋集 권15. <鶴皐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30면. 余語之曰: 君之所居, 旣以鶴臯爲名, 鶴之聞于天者, 誠也. 君其至誠無息乎? 誠者天道也, 思誠者人道也. 許傳. 性齋集 권14. <洪氏 人孝烈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5면. 南 陽洪氏, 自在室柔順仁孝, 二十二歸于辛門, 德 行, 聞于外. 事姑李氏甚謹勤, 敬夫子無違, 家道雍睦. 甲午李氏疾病殆不起, 洪氏色憂, 屢月不解帶不交睫, 躳執炊爨, 及至纊息幾絶, 乃齧指出血以灌口, 竟得 甦, 至今八十餘尙無恙. 丁酉其夫遘癘, 傳經之際忽氣絶, 洪氏又斫其指, 夫果回生, 至今六十餘偕老, 豈 不異哉! 許傳. 性齋集 권14. <洪氏 人孝烈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6면. 非 - 14 -
희생하여 아버지를 화적의 칼날에서 구하기도 하고24), 때로는 호랑이가 감동하 기도 하였다는 전설을 만들기도 한다. 성재는 이러한 전설도 지극한 정성이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묘살이 3년동안 호랑이가 지켜주었으니, 어찌 효성이 이루어낸 일이 아니겠 는가? 참으로 性分의 고유한 바를 다하고 職分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이를 수 있으니, 이는 단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25) 성재는 효가 기행이기에 드러나거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기에 가치 있는 것 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직분을 다하는 것이기에 가치 있다고 기린 것 이다.26) 이것은 성재가 꿈꾸었던 인격적 이상이었다. 부귀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가치 있는 삶이 있다고 믿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믿는 바는 분명 부귀영화로는 이룰 수 없는 별개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 성재는 이러한 인간을 기렸다. 吾黨의 선비 중에 내사생 정군 창익이 있는데 백운산 북쪽에 산다. 군은 藥圃와 牛川을 조상으로 두었으니 참으로 법도 있는 가문의 자손이며, 회재와 퇴계를 종 사로 삼았으니 眞儒의 門人이다. 言動과 擧止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영남사람 이다. 일찍이 太學에서 반년간 유학을 했는데 儒風이 쇠약하고 士氣가 시들해진 것을 보고 개연히 탄식하기를 돌아가 내가 처음 품었던 뜻을 이룸이 좋겠다. 산 은 밭으로 갈 만하고 나무를 할 만하며 물은 마실 만하고 씻을 만하다. 고인의 글 을 읽고 고인의 말을 말하고 고인의 행동을 행한다면 이 사람 또한 고인일 따름 이다. 라고 하고는 그대로 떠났다. 이것을 기로 쓴다.27) 24) 25) 26) 27) 只知有姑有夫, 而不知有其身者, 不能也. 許傳. 性齋集 권15. <永慕堂李公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8면. 嗚呼! 粤在肅宗之時, 有若孝子永慕堂李公, 天性純至, 愛父母多有異行. 年纔十八, 痘疫大熾, 隨其大 人避痘山村, 一夜火賊猝入, 㐫鋒及於大人, 公驚起以身蔽之, 遍軆受創, 手腕已斷, 因以氣絶, 賊去後村 人來救, 僅得回甦. 然病創八年, 遂以不起, 此乃不幸之尤者也, 報生之極者也, 古今能爲此者幾人哉? 許傳. 性齋集 권15. <丁孝子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5면. 廬 墓三年, 有虎守之, 豈不是孝感所致耶? 眞可謂盡其性分之所固有, 而職分之所當爲也, 此非但天質之 美而已. 許傳. 性齋集 권15. <永慕堂李公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8면. 人道莫大於孝, 孝者善事父母之謂也. 子之事親, 天之經地之義, 性分之所固有, 職分之所當爲. 故孝莫 如曾子之養志, 聖人不稱其孝, 但曰事親若曾子者可也. 其或有不幸而遭非常之變, 如舜閔而能盡其道, 然後特以孝稱之. 世降而人或有失其本心之正, 而不顧父母之恩者, 口軆之養, 溫淸之節, 猶不能盡誠, 甚 或有貽羞戮而陷危殆者, 則矧肻服勤竭力報生以死者乎? 許傳. 性齋集 권15. <雲北軒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8면. 吾黨之士, 有內舍生鄭君昌翼, 居白雲之北. 君以藥圃 牛川爲祖, 眞法家子也, 以晦齋 退溪爲宗, 眞儒門人也. 言動 擧止, 不問可知爲嶺南人也. 嘗遊太學半歲, 見儒風衰而士氣委靡, 慨然歎曰: 反而遂吾初服可矣. 山可 耕可樵, 水可飮可濯. 讀古人書, 言古人言, 行古人行, 是亦古人也已. 遂行. 是爲記. - 15 -
성균관에 적을 둔 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정창익은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 을 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홀연히 떠나버린다. 처음 품었던 안빈낙도 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성재는 그를 떠나보내며 이렇게 記를 써주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성재도 이러한 삶을 꿈꾸었기 때문에 부러움 이 있었을 것이다. 시각을 조금 다르게 하면 정창익의 행동과 삶은 유자가 꿈꾸 는 이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성재는 그 꿈과 이상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 정창 익을 이상적 인간형의 하나로 기린 것이다. 안으로는 집안의 가훈을 잇고 밖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며 일생을 사는 사람도 성재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인간형으로 기렸다. 거사 금군 우열이 용마루 몇 개를 얽어 精舍를 산의 시냇물 사이에 짓고, 평소 에 모아둔 우리나라 명현들의 墨帖 수천 본을 보관해두고 그 室의 이름을 尙友라 하였다. 거사는 바로 퇴계의 문인인 매헌공의 후손인데 뜻이 돈독하고 옛 것을 좋 아하는데, 안으로는 가훈을 지키고 밖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며 세상을 마 치려 한다고 한다.28) 성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분명 난세를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었던 듯하다. 출세하여 官祿에 매인 삶을 사느니보다는 욕심없이 家訓과 師敎를 지키고 받들며 사는 삶이 훨씬 현명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런 尙友千古의 삶도 성재의 이상이었다 할 수 있다. 閒雅한 정신세계를 꿈꾸었던 수많은 유자 들처럼 성재도 세속의 名利는 소거된 맑고 깨끗한 세계를 추구하였다.29) 그런 데 그 세계는 혼자만 무욕적 삶을 유유자적 누리는 것이 아니라 敬宗收族의 이 상이 실현되거나30), 공동체의 화합과 공존을 추구하는 儒風이 진작된 사회의 이 상이 함께 추구된 공간이었다.31) 28) 29) 30) 31) 許傳. 性齋集 권15. <紫山精舍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9면. 居士琴 君佑烈, 搆數棟精舍於山溪之間, 以其平日所集我東名賢墨帖數千本藏之, 名其室曰尙友. 居士乃退溪門 人梅軒公後孫也. 篤志好古, 內守家訓, 外承師敎, 以永厥世云爾. 許傳. 性齋集 권15. <朝陽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0면. 以其無事 之時, 藏焉修焉遊焉息焉, 或書一卷, 或琴一張, 或酒一壺, 或山而樵, 或水而魚, 不知山外更有何樂可以 易此者乎? 許傳. 性齋集 권15. <修睦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2면. 人道親親 爲大, 仁率義率, 親親之道也. 厥初生民, 始祖一人, 生子衆多, 則各爲別子, 子之子, 孫之子, 曾孫之子, 至于雲仍, 本本支支, 源源派派, 世愈遠而族愈踈, 分異離析則殆行塗人不若也. 故程夫子曰: 管攝天下 人心, 收宗族厚風俗, 須是立宗子法, 宗法壞則人不知來處, 流轉四方, 不相識. 此周官奠系世辨昭穆之 義也. 許傳. 性齋集 권15. <南厓書室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30면. 我東之 嶺南, 古所稱鄒魯也. 國朝以來, 儒賢輩出, 倡明道學, 流風餘韻, 至屢百年而不衰, 家詩5戶絃誦, 眞天 下之樂國也. 余自十七八歲, 叨陪仁山之庭, 五年之間, 與其文學之士交遊, 習熟聞見, 莫非陶山南冥以來 諸先生之德行言議也. 三十後又一至, 甲子之歲知金海, 學徒日聚, 益覺嶺南之儒風, 可以增士氣而扶 - 16 -
그런데 아무리 성군이 치세하는 세상일지라도 숨어서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 지 않는 현자가 있는 법이고, 세상이 어지럽고 도가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라면 상황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이는 성재가 고민했던 한 가지였다. 옛 唐堯의 성대한 세상에 들에 버려진 현자가 없었다고 일컬어지지만, 箕氵穎 의 사이에는 대개 巢父의 무리가 있었으니 의혹이 아니겠는가? 내게는 대림에 사 는 친구가 있는데 스스로 대림의 한 逸民이라고 하고 자신이 遊息하는 齋를 一林 이라고 하였다.32) 남겨진 현자가 한 명도 없는 세상은 理想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현자가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만들려 고 애쓰는 자세는 儒者의 사명일 것이다. 성재의 고민과 고뇌는 늘 이러한 곳에 있었다. 지고의 가치를 실현한 삶을 살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상황 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남겨지고 묻혀버린 삶을 조명하고 宣揚하였던 것 이다. 그런데 主鎭이 몰래 도망쳐버리고 고립된 성은 포위되어 밖에서는 하루살이나 개미새끼의 구원도 없으니 적은 수로는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없고 약한 병사로는 강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기운을 돋워 한번 크게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겼 다. 하지만 끝내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해짐을 면할 수 없어서 몸이 화살과 돌 아래에 죽게 되었다. 이는 태사공이 이른바 떨쳐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함에 따름이고, 맹자가 이른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함이며, 공자가 이른 바 몸을 죽여 인을 이루는 것이니, 참으로 백세에 人臣을 권면하였다 말할 수 있 겠다. 그러나 忠節을 포상하고 장려하게 하는 恩典이 빠져서 미치지 못함은 단지 자손이 미약하기 때문일 뿐이다.33) 아무리 지고의 가치와 바람직한 이상을 실천하며 살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 는다면 그처럼 허무한 일이 없을 것이다. 성재가 늘 고민했던 것은 이 知遇의 문제였다.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주지 못함을 32) 33) 國脈也. 於是甚欲居之, 時有外夷之亂, 因漂泊東西, 至今恨焉. 許傳. 性齋集 권14. <一林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03면. 昔唐堯盛 時稱野無遺賢, 然箕氵穎之間, 盖有巢父之倫, 豈不惑哉? 余有友人居大林, 自謂大林之一逸民, 而扁其 遊息之齋曰一林. 許傳. 性齋集 권14. <忠順堂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10면. 其奈 主鎭潛逃, 孤城被圍, 外無蚍蜉蟻子之援, 寡不敵衆, 弱不敵強. 然猶厲氣一呼, 士無不視死如歸, 而竟不 免力盡勢竆, 殞身於矢石之下, 此太史公所謂奮不顧身, 以循乎國家之急者也, 孟子所謂捨生取義者也, 孔子所謂殺身以成仁者也, 眞可謂百世人臣之勸, 而褒忠奬節之典, 闕然未及者, 只以子孫微弱耳. - 17 -
근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로 인하여 누군가 드러나고 알려진다면 그 일을 기 록하여 드러낸다는 기록의 정신을 記 에 실현하고 있다. III. 결론 성재가 살았던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은 儒 者 가 꿈꾸는 이상의 실현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내외의 정치적 상황과 서세동점의 압박, 성리학의 교조화와 민심의 이반 등을 성재 역시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 한 형편은 그가 학문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암담한 상황에서도 성재는 普 遍 한 人 性 의 발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人 性 에 대한 희망적 전망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성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늘이 부여한 性 을 구현시키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낙관적 전망이었다. 성재는 학문의 요체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 본성을 體 用 으로 나누어 말하면, 仁 義 禮 智 가 그 體 이고 孝 悌 忠 信 이 그 用 이 라고 하였다. 도가 멀리 고원한 곳에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에 있기에 그 도는 쉽게 밝힐 수 있고 그 가르침은 쉽게 행할 수 있다는 한 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유가의 理 想 인 대학 의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도 이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이상의 구체 적 실천방안으로써 성재는 下 學 上 達 을 말했다. 生 而 知 之, 學 而 知 之, 困 而 知 之 는 종래에 그 타고난 천분을 이유로 벗어날 수 없는 제한조건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성재는 앎이라는 궁극에 도달할 수 있 다면 모두 같다고 했다. 또 安 而 行 之, 利 而 行 之, 勉 強 而 行 之 도 그 타고난 자질의 한계에 기인한 제약으로 인식되었었지만, 성재는 행함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이 를 수 있다면 그 역시 같은 것이라 하였다. 天 賦 의 성을 구현함에 타고난 기질 과 자질의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다 면 그 궁극의 결과는 같다고 역설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뇌와 그 한 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의지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재는 학문의 요체는 인의예지와 효제충신에 있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표란 그것의 실천에 있는바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한 인간형이 되는 것이라 믿 었다. 성재는 바로 그 학문의 목표인 孝 悌 와 仁 義 를 삶에서 실천한 인물들을 이 상적 인간형으로 기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잠시 시대가 古 道 와 거스르는 상황이 있을지라도 그래 - 18 -
서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끝까지 古道를 법도로 삼는다는 尙古의 정신은 성재의 기에 나타난 이상과 고뇌의 변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재의 이 말로 마무리를 삼는다. 비록 古道를 따른다 하여 한 때에 거슬림을 받더라도 끝내 古道로써 百世의 法 으로 삼으니 그 消長盛衰의 이치가 또 어떠한가?34) 참고문헌 <원전> 許傳. 性齋集.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許傳. 性齋集 續集. 한국문집총간309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논문> 강대민, 性齋 許傳 門徒의 愛國運動, 문화전통논집 제5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性齋 許傳 門徒의 義兵運動, 문화전통논집 제6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곽정식, 性齋 許傳의 傳文學에 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7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김강식, 性齋 許傳의 學風과 歷史的 位相, 문화전통논집 제7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性齋 許傳의 三政改革策과 성격, 문화전통논집 제8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0. 金喆凡, 性齋 許傳의 生涯와 學問淵源, 문화전통논집 제5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性齋 許傳의 制度改革論에 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6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許性齋 著述考略, 문화전통논집 제9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1., 經筵講義를 통해 본 許傳의 政治思想, 문화전통논집 제10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3 박준원, 性齋 許傳 文學 硏究, 문화전통논집 제5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鄭景柱, 性齋 許傳의 詩經講義에 나타난 說詩 觀點, 문화전통논집 제6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宗堯錄 에 나타난 性齋 許傳의 經學 관점, 문화전통논집 제7집, 경성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9., 許性齋 禮說의 收養子 문제에 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8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0. 34) 許傳. 性齋集 권15. <忠順堂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2003. 320면. 雖以 古道見忤於一時, 終以古道爲法於百世, 其於消長盛衰之理, 又何如哉! - 19 -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 동학의 이상사회론 - 정 재 권* 제1장 서론 동학의 이상사회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이 때 현실은 어떠한 철 학적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동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언 제나 시간과 공간적 시대의 특수성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동학 이념 역시 스스로의 패러다임에 따라 각각의 시공간적 사회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어떤 현실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그 현실에 대한 이해의 틀 중 하나를 적용한 것이다. 현실적 문제란 인식의 틀끼리 발생하는 불협화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모든 현실 인식의 틀은 각각 지향하는 목표를 가진다. 東學이 西學1)과 佛 學과 儒學과 仙道學과 사상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 패러 다임에 있어서도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는 개인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 국가적 현실과 세계적 현실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러한 것은 객체적 분석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연구들에 있어서 동학의 현실인식 패러다임이 지나치게 객체 사회를 대상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동학의 현실인식 패러다임 의 핵심은 객체적 사회구조 분석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기존의 동학적 현실인식 패러다임들은 객관적 현실을 主로 보고 인식 틀을 從으로 보기 때문이다. 동학의 이상사회란 내면의 하늘님 마음을 고찰하는 心學의 세계이다. 하늘님 마 음을 외부적 사회시스템에 종속시킨다는 것은 외부적 사회시스템이 하늘님이고, 마 음의 하늘님은 사회 시스템 하늘님의 반영물로 볼 수 있다는 공식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동학은 인간은 자연과 우주 및 靈的 세계 속의 한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한 다. 동학의 현실에 대한 개념은 아무리 좁게 설정해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의 靈과 肉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靈에는 만물의 靈이 있고, 肉에는 만물의 肉이 있다. 인간 중심세계에서는 인간이 가치의 중심이며, 인간의 삶이 가치 * 동의대 교수 1) 여기서 말하는 西學이란 水雲이 말한 西學 개념 즉 天主敎를 의미한다. - 20 -
의 중심이며, 인간사회의 가 가치의 중심이 되겠지만 자연과 우주 및 만물의 영혼 적 삶에서는 제도적 물질적 인간중심세계의 가치가 더 이상 동학의 중심사상이 될 수 없다. 제2장 동학적 이상사회의 구성 1. 至氣一元 至氣는 陰陽의 작용으로 인해 인식되나 인식의 방법은 통찰과 믿음이다. 水雲은 陰陽이 서로 고르게 펴짐에 수백 수천가지 만물이 그 가운데에서 화해 나온다 2)고 하였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들리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 영 역을 추론해 내게 하며, 아는 것으로 모르는 영역을 추론하게 하며, 알려지는 것으 로 망각되는 것을 드러내며, 발전함으로서 쇠퇴함을 드러낸다. 좁은 것을 보면서 넓 음을 통찰하게 하는 것이 음양의 작용이다. 氣란 한 마디로 形象하여 表達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상이 아니기에 개념화할 수 없고, 나를 포함하면서도 나란 하나의 요소가 아니기에 玄妙한 것이다. 그것이 대상 화될 수 없는 것이다. 海月은 氣란 것은 天地, 鬼神, 造化, 玄妙를 모두 포괄한 하 나의 氣 3)라고 하였다. 天地와 鬼神과 造化와 玄妙는 보이는 듯 하나 보이지 않고, 들리는 듯하나 듣는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 사물적 관찰과 언어적 한계 를 넘어서는 것이면서도 삶의 모든 요소를 이룬다는 뜻이다. 水雲은 氣의 遍在를 말하기를 氣는 허령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않음이 없고 일 에 명령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양이 있는 듯하나 모양을 말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 나 보기 어려우니 이는 또한 혼원한 一氣이다. 4)이라고 말하였다. 氣는 無所不在하 면서도 모든 일에 主宰者로서 존재한다. 主宰者는 每事에 無往不復之理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무엇으로 되돌아오는지 감지할 수 없지만 그것을 믿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 어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되는가? 또 水雲은 氣를 不然其然5)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다. 나면서부터 알았다 할지 라도 마음은 어두운 가운데 있고, 자연히 화했다 해도 이치는 아득한 사이에 있 다 6)고 하였다. 氣의 遍在性은 인식의 안에도 있고, 인식의 밖에도 있다. 그것은 내 2)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전, 동경대전, 논학문,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사, 포덕142), p.24. 3)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천지이기. 4) 위의 책, 동경대전, 논학문. 5) 위의 책, 동경대전, 불연기연. 6) 위의 책, 동경대전, 불연기연. - 21 -
재한 지극한 하늘님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다. 내재한 지극한 하늘님을 영접하지 못 하면 그러한 이치를 설명할 수 없으며, 과학적 객관자료로는 설명할 수 없다. 동학의 至氣一元主義는 유학의 理氣二元論을 극복함으로써 우주의 존재론적 위계 질서를 현실사회까지 적용하려고 한 송대의 주자적 위계주의적 세계관을 완전히 제 거해 버렸다. 존재론적 위계질서 속에는 人과 物이 다르게 되며, 家와 家가 親親으 로 달라야 하며, 국가끼리도 위계가 있어야 하며, 인간사회 속에도 위계가 있어야 한다. 朱子的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本性을 압도하는 사회질서지상주의로 치 닫게 된다. 동학은 至氣 一元論을 주장하면서 理는 단순히 직능상의 차별로 볼 뿐 근원에서는 하나의 氣라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을 사회관계에 적용시키게 되면 모든 인간의 본원적 차별이 사라지는 평등사회가 구현된다. 직능상의 차이는 직능 일 뿐 직능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가 차별을 받을 수 없다. 지기일원주의는 인간과 만물이 모두 하나의 氣 일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인간 중심주의를 탈피하게 하는 새로운 각성의 일갈이다. 至氣에는 자연과 인간의 모든 생멸활동과 활동의 반복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 인간중심적 공리주의 및 객관주 의의 경계는 사라지고, 초공리 초객관만 남는다. 종교적 믿음의 세계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세계와 인간의 척도에 의한 우주만을 현실로 보는 과학주의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며, 객체지상주의적 현실관에 대한 새 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이다. 인간과 만물 역시 하나의 一氣에서 생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을 제어한다거나 지배하는 위치가 아닌 함께 조화하여 살아가야 하는 에코토피아를 실현하게 된다. 해월은 천지가 곧 부모이고, 부모가 곧 천지이다 7)라고 하였다. 天地가 곧 父母라 는 물활론적 사고는 至氣一元論의 정신세계가 아니면 설명될 길이 없다. 地上天國이란 至氣일원에 따른 세상이다. 인간과 만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사 회를 의미하는 초사회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인간끼리의 합의와 인간끼리의 단계적 발전 단계를 지상천국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존재론적 근거에 기 인한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至氣는 통찰과 믿음의 대상으로 認識의 영역과 超 認識의 영역을 함께 한다. 至氣는 개념화할 수 없는 대상화 불가능한 존재이면서도 無所不在하며, 主宰者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종교성을 가지며, 人格的 絶對者이다. 至氣一元論은 理氣二元論的 사고를 극복함으로써 존재론적 일원론을 형성하고, 모 든 생명의 평등성을 주장하게 된다. 인간끼리의 평등뿐만 아니라 인간과 만물 간의 평등을 전제하기 때문에 참된 현실이란 인간과 만물의 영역, 인간의 인식가능영역 과 인식 불가능 영역이 모두 현실이된다. 地上天國이란 至氣一元의 무한평등의 세 7)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2, 천지부모 - 22 -
계에서 노니는 인간 간의 화해이며, 인간과 자연 간의 화해이며, 인식세계와 초인식 세계와의 화해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2. 侍天主 心學 우주의 모든 존재는 모두 하늘님이며, 사람 역시 하늘님이다. 하늘님이란 요소적 존재가 아니라 至氣의 顯現이다. 至氣는 우주에 가득차서 한 곳도 빈 곳이 없는 존 재이다. 하늘님이란 至氣의 현현이다. 要素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내 몸에 모신다는 것은 내 몸이 한계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 이다. 내 몸을 세포로 구성된 하나의 要素로 본다면 至氣의 無所不在한 존재가 세포 속에 갇힐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몸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며, 몸은 무엇 인가? 나란 것을 다른 타인과 구별시키고, 자연과 구별시키고, 신과 구별시킨 나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서구적 개인 개념으로 떨어질 뿐이다. 天人合一과 物我一體 의 동양적 사고는 철저한 정신세계의 영역이지 요소적 內外觀念이나 主客觀念은 아 니다. 하늘님을 모신 사람이란 기하학적 이성과 감각적 조합으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 이 아니다. 오직 其然과 不然의 양단을 통해서 인지되는 존재이다. 사람이 至氣로 이루어진 존재지만 사람이 식물이나 바위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 다른 동 물과 차이가 나는 원인을 객관적 요소로 분석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수운은 不 然과 其然8)으로 설명하고 있다. 其然을 통한 인식은 언어에 의지해서 인간 간에 소 통될 수 있으나 항상 不然이 있어야 한다. 不然은 믿음에 의지해서 인간과 만물 간 소통될 수 있으나 其然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늘님은 존 재하고, 그렇지 못하면 하늘님은 존재하지 못한다. 하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해도 하늘님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不然其然을 통한 통찰할 때 가지 유보되어 내 면에 존재할 뿐이다. 유보되었다 하더라도 활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맹렬히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 활동을 認知하지 못하고 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줄 알 뿐9)이다. 사람의 하늘님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한 경외하고 받드는 행위를 일러 侍天主라 부른다. 동학의 시천주 신앙은 유학의 도덕적 차별성과 親親主義의 한계를 뛰어넘 는다. 동학의 시천주 신앙에서 나오는 평등성은 외부적 율법으로 경직된 유학의 틀 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시천주 신앙을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전제 아래에서 만 유학의 삼강오륜은 행위의 편리한 규칙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즉 윤리란 유학에 8) 위의 책, 불연기연. 9) 동경대전, 포덕문, 수운은 하늘님의 뜻에 이해 이루어지는 것인 줄 모르고, 저절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無爲而化 라 표현하였고, 그러한 사람을 愚夫愚民이라 하였다. - 23 -
있어서는 理氣의 차별성을 전제로 한 것이나, 동학에서는 至氣 일원론적 전제 아래 에서 요청되는 것이라는 차이이다. 유학에서는 유한한 신체와 세습되는 신분및 직 능을 유일 개인의 본성으로 보고 그 개인을 전제로 요청되는 윤리이나, 동학에서는 至氣的 身體와 초신분과 초직능의 개인을 전제로 요청된 윤리이다. 전자는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윤리이고, 후자는 우주가 내 몸인 至氣身體에 호소하는 윤리이다. 전자는 살아있는 신체에 의탁하는 양심이지만 후자는 生死를 모두 초월하여 至氣에 의탁한 윤리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하늘님인데 하늘님은 요소적 존재가 아니라 지기의 顯現이다. 하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侍天主함을 통해서 가능하다. 시천주 함이란 不然과 其然 인식의 양단을 통해서 認知되고 實踐되는 영역이다. 시 천주 도덕윤리는 儒學의 경직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시천주 행위를 실현 시키는 부분적 과정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侍天主는 心學이기 때문에 心學에 근 거를 두지 않는 여타 동학의 인식론은 종교적 의미의 특성을 상실한다. 3. 同歸一體主義 同歸一體는 存在의 근원이 같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인간의 근원이 하나이며, 班 常의 근원이 하나이며, 君 臣의 근원이 하나이다. 직능상 역할의 차이는 있을 지라 도 그 직능을 벗어나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하늘님을 모시는 사람들이니, 직능상 차이를 가지고 하늘님을 모시는 사람의 格까지 차별로서 지배하거나 조롱할 수는 없다. 同歸一體의 반대말은 各自爲心이다. 各自爲心이란 인간이 품수하고 있는 수많 은 소질과 욕구와 지위들 중에 한 가지를 得하면 그 한 가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을 지배하고, 차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욕구와 지위들을 종횡으로 구별 하고 차별하거나, 지배 또는 복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 동귀일체 이며, 그 반대가 各自爲心이다. 동귀일체는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집단 대 집단 간 발생하는 동학적 신념에 역행되는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소통 뿐 아니라 인간 대 자연, 인간 대 우주의 문제 역시 폭 넓은 소통에서 이루어진다. 소통이란 단순히 정보적 교환과 이성적 합의에 기반한 동귀일체뿐만 아니라 지극한 동학의 시천주 신앙의 동귀일체를 요청한다. 전자는 외형적 일체요, 후자는 내면적 일체이다. 여기서 외면적 동귀일체와 내면적 동귀일체란 무엇인가? 외면적 동귀일체로는 제 도적 문제적의 극복, 즉 남녀차별, 빈부격차, 장애인의 문제, 교육의 문제, 경제의 불균형, 환경의 문제, 실업의 문제 외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열린 소통의 장을 의미한다. 하나의 문제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열린 소통의 장을 의 - 24 -
미한다. 내면적 동귀일체로는 神0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무차별적 평등정신 을 氣化시키는 에너지를 공동으로 받아들이는 수행과 직관의 일체주의이다. 일체의 사회적 직능에 따른 차별을 뛰어 넘고, 인간과 무생물의 차별을 뛰어넘는 至氣의 일 원적 통찰로서의 일체이다. 동귀일체는 시간과 공간의 화해이기도 하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요소 로 나누어지는데, 과거에 의해서 현재와 미래가 만들어지는 인과법칙을 뛰어넘어야 한다. 미래지상주의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수단화하는데 미래를 위한 수단적 방 법론도 뛰어넘어야 한다. 동양의 사고와 수학적 동일률에 의해 영감을 받은 화이트 헤드의 과정철학 역시 현재를 다양한 언변으로 객관화하려는 신실용주의적 아류로 서 그 아류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동귀일체는 과거결정주의도 아니요, 역사단 계설적 운명론도 아니오, 실용주의적 무원칙론도 아니다. 이들의 의도는 모든 인간 의 행위와 감정과 역사를 언어를 통해 실증하려는 시도가 깃들어 있다. 동귀일체는 현실을 초월하지도 않으면서 현실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다. 외면을 간과한 내면 일변도 역시 문제이지만 내면을 간과한 외면 일변 도의 동귀일체 역시 문제이다. 동학의 종교적 의미는 이 양자를 모두 포괄하면서 내 외를 雙全하는 동귀일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제3장 東學 理想社會의 현실진단 수운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표현하기를 傷害之數10), 淆薄한 世上 人心11), 下元 甲12) 등의 표현을 통하여 各自爲心13)으로 현세적 물질주의에 매몰되고, 하늘님을 지극히 위하는 뜻은 없고, 사람마다 경쟁하고, 신분 마다 지배하고 지배당하며, 국 가 간 兵馬로 침공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相剋時代로 표현하였다. 수운은 이러한 사회를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14)의 시대로 보며, 傷害之數 의 運數로 파악하였다. 傷害之數는 先天運數이기 때문에 東學을 통하여 後天開闢이 되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수운이 본 외부적 현실은 道의 부재이다. 야릇한 風說, 造化를 부림, 武器 15) 등의 이야기는 道와 器의 문제인데 그 중에서 道가 중 심 주제이다. 서양이 싸우면 이긴다는 武器에 대한 공포는 참된 공포가 아니고 그러 한 무기를 사용하여 함부로 남의 문화권을 유린하는 道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10) 11) 12) 13) 14) 15)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책, 책, 책, 책, 책, 책, 동경대전,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경대전, 포덕문. 논학문. 몽중노소문답가. 포덕문. 몽중노소문답가., 동경대전, 포덕문. 논학문. - 25 -
새로운 무기를 개발할 것이 아니라 無窮 無窮한 道를 깨치고 그 도를 펴는 德을 쌓 는 것으로 西學의 침공을 극복해야 된다고 보았다. 東學이 兵馬를 동원한 외세의 침공과 西學의 各自爲心 종교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兵馬를 더 우세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西學을 배우는 것이 아닌 본래부터 있던 우 리의 道를 되살리는 일16)이다. 수운의 이러한 입장은 西學과 서양 문명은 그 자체 各自爲心과 至氣의 결여로 말미암아 東學의 至氣과 同歸一體의 정신에 의해 극복되 는 運數의 것으로 보고 있다. 至氣의 결여란 內外가 둘이 아니며, 존재와 존재자가 둘이 아닌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서학에서는 이 둘을 갈라 要素化시키고 있기 때문에 傷害之數의 相剋運數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이 우주가 모 두 그 자체 神이다. 내가 그 속에 속하는데 나를 또 어디로 분열시켜 나를 볼 수 있 는가. 모두가 우주에 속하는 것 17)으로 정신 영역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늘님 內有 神0과 우주에 一氣로 外有氣化하는 통일적 至氣를 찾아야 된다. 수운이 본 현실은 至氣와 天主의 현실이다. 至氣로 보면 天主가 客이고, 天主로 보면 至氣가 客이나 至氣와 天主는 나 를 통해서 볼 때 둘 다 참 나의 근원이다. 내 가 天主를 모시자 말자 至氣가 함께 내 주위를 감싸 우주에 感通하게 되고, 내가 至 氣를 느끼자마자 천주 하늘님이 바로 살아서 나 를 衛護하여 天地 간 造化에 참여 하게 된다. 一動一靜이란 至氣와 天主의 왕래를 거듭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至氣와 天主를 망각하고 다시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현실은 이렇게 한 생명체의 내면에서 至氣와 天主의 無爲而化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할 뿐 至氣와 天主를 제거한 채 현실의 구조를 배타적으로 방어한다거나 종속되어 지배당하는 관계가 설정된다거나 내부적 제도의 개선 정도를 지칭하는 것 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수운의 현실인식 패러다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운은 그 당대의 현실을 相 剋時代로 표현함으로써 不變의 대상이 아닌 陰陽 動靜의 太極으로 보았다. 태극은 곧 마음의 문제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相剋時代의 본질은 各自爲心인데 각자 위심은 各知不移의 道를 통하여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 또 다른 각자위심의 氣化를 가지고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一氣의 大降接氣를 통하여 天主는 現實이 되고 現實 의 본질이 된다. 참된 현실인식이란 至氣와 天主의 無爲而化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至氣一元的 侍天主 정신에 입각해서 德을 펴는 일은 종교적 및 신앙적 문제이며, 동학의 현실인식의 중심 개념이다. 현실의 위기는 종교적 동학에 있어서 道의 위기이다. 동학의 현실인식 패러다임은 道의 위기를 읽고, 道를 萬世에 전할 16) 노태구, 동학의 지기와 천주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동양정치사상사, 제1권 2호, p.102. 17) Fritjof Capra 저, 이재희 역,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서울 :범양사, 1997), p. 35., 노태구, 동학의 지기와 천주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동양정치사상사 제1권 2호 (서울: 한국동양정치 사상학회, 2002), p.107에서 간접인용. - 26 -
길을 강구하는 방법의 존폐여부를 지칭할 뿐이다. 제4장 수운 동학 이상사회의 계승 - 해월 해월은 세계를 국내와 국외의 관계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 관계 독립국가 모델로 보지도 않는다. 그는 세계동포주의적 입장에서 세계를 본다. 해월 은 우리나라의 영웅호걸은 人種의 種子니, 모두가 萬國 布德師로 나간 뒤에 제일 못난이가 본국에 남아 있으리니, 至劣者가 상재요 도통한 사람이라. 18)라고 하였다. 동학의 이상사회는 하늘님을 마음에 모시는 사람의 마음이며, 그 마음을 가지고 사 회를 구축하는 사람들의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지역과 특정 민족과 특정 역 사의 영역이 아니다. 이를 줄여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니, 동학은 세계동포주의에 기반한 이상사회라는 인식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변화는 동학의 運數에 따른 변화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논리나 노동의 질 과 형식에 따른 변화도 아니며,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운명적 교차점도 아니다. 오직 동학의 운수에 따른 변화이며, 이 변화에 따라서 세계는 바뀔 뿐이다. 해월은 우리 도의 운수는 세상과 같이 돌아가는 것이니 나라의 정치가 변하는 것도 또한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한 것이다 19)라고 하였다. 동학에서 道의 運數란 周易이나 正易的 외부적 卦를 빌려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 설정한 인위적 상징물은 참된 道 의 運數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참된 기준은 동학의 侍天主이념이 실현되 는 시점과 영역일 뿐이다. 외부적 상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我와 非我가 설 정되고 대립되는 갈등의 역사이고, 외부적 상징이 제거된 역사는 我와 非我의 대립 과 갈등이 사라진 조화의 세계이며, 地上天國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어떤 시점을 예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영역 속에서만 이루어지 는 것도 아니다. 현재 속에 同歸一體가 있으며, 현재 속에 各自爲心이 있을 뿐이다. 同歸一體와 各自爲心은 융합할 수 없는 것이지만 同歸一體 속에서도 各自爲心이 나 타날 수 있고, 各自爲心 속에서 同歸一體를 드러낼 수도 있다. 인간의 내면과 그 행 위는 복잡한 수 백가지의 욕구와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부분이 시천주에 맞고, 다른 부분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의 맞지 않은 부분을 가지고 모 든 내면의 잠재된 영역을 무시하거나 폐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시천주라는 것이 단순히 믿음을 밖으로 표시하고 하나의 조직에 가입한다고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와 욕구들을 잘 파악하고, 하나 하나의 사고와 믿음과 행위들이 확률적으로 더 적절한 분포를 보일 때를 의미한다. 따라서 18) 앞의 책,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19)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오도지운, pp.392-393. - 27 -
동학의 역사철학은 역사의 장이 외부가 아니고, 내부 마음이다. 외부 세계는 동귀일 체와 各自爲心이 서로 엉켜 자아의 일부분을 연마하는 장소일 뿐이지 그것이 역사 발전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文化와 道의 역사이지 전쟁과 영토와 행정의 역사가 아니다. 海月은 말하 기를 사상은 동방에 있고, 기계는 서방에 있다. 20)고 하였다. 참된 현실은 侍天主 된 自我에 있다. 외부세계가 나를 지배하고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부 세계를 지배하고 존재하게 하는 데 그 나 가 바로 道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道이지 兵馬가 아니다. 전쟁의 무기는 단순히 기계일 뿐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 지는 못한다. 해월은 무기는 사람 죽이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요, 道德은 사람 살리 는 기틀을 말한다. 21)고 하였다. 사람을 죽여서 문화를 일으키는 일은 어렵고 설혹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잠시일 뿐이요, 사람을 살리는 道를 가지고 세상을 경영하면 영원할 것이다. 道는 內聖外王이니 나를 닦고 밖으로 모범을 보일 뿐 외부적 힘과 강압으로 세상을 지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해월은 수운의 道로써 西學과 서양의 兵馬를 대적해야 한다는 이념에 가장 충실 한 사람이었다. 동학혁명의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동학을 보려는 사람들은 때때로 해월의 동학혁명 초기에 행한 반대의견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 동학의 無爲而 化思想과 天人合一思想 등은 동학을 정치적 사회적 실천과는 거리가 먼 종교로 만 들었다22)고 하지만 이것은 동학의 일부분에 치우친 견해이다. 해월은 道로써 亂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徐璋玉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 우리는 빨리 모여 그것을 공격하자 23)고 하였다. 道는 內聖外王이며, 無 爲而化이다. 亂이란 兵馬로서 자신을 주장을 전달하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기 때문에 동학의 방법이 아닌 것이다. 해월은 교조신원운동을 하기 위해 군중의 동 원을 요청하는 동학도들에게 은인자중할 것을 요청 24)한 기록이 있다. 해월은 현 실이 동학의 교리와 모순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兵馬와 群衆을 이용하여 물리력으로 극복하려는 모든 것들을 傷害之數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철저한 비폭력 적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해월의 현실에 대한 인식패러다임은 현실의 문제가 나의 행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내적 성숙과 수행을 더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비폭력적 방법은 나중에 의암의 3 1운동 때 비폭력운동으로 촉발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20)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吾道之運. 21)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吾道之運. 22) 이러한 관점으로 동학혁명을 논하고 있는 서적으로 이현희, 동학사상과 동학혁명 (서울: 청아출 판사, 1984), p.343. 참고할 것. 23) 吳知泳, 東學史 제2장, (서울: 아세아문화사 影印本, 1979), p.139. 24) 위의 책, p.70. - 28 -
동학의 정통성은 道로써 세상을 구하는 것이며, 道를 펴는 일이야 말로 가장 강력 한 戰爭이다. 布德이란 말은 가장 힘들고 강력한 수단의 전쟁을 의미한다. 武器를 가지고 대적하는 전쟁은 下手의 전쟁이고, 武器에 의해 승리한 전쟁은 下手의 승리 이다. 道로써 이긴 전쟁은 가장 강력한 勝利이고 道로써 패한 전쟁은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전쟁이다. 따라서 역사는 전쟁에 의해서 승자와 패자의 역사가 아니고 문화 와 道의 역사이다. 전쟁의 승자들이 인류에 남긴 전쟁의 기술 역사보다 道의 승자들 이 남긴 道의 기술 역사는 더 강력한 것이다. 제5장 결론 이상사회란 혈통도 아니요, 국적도 아니요, 언어도 아니요, 역사도 아니다. 유태인 을 보라. 그들의 혈통과 국적과 언어와 역사가 모두 달라도 유태인이 유태인일 수 있는 근거를 생각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수백년 수천년이 지난 뒤 우리에게 우리 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코드 가 있다면 그것은 동학 이다. 동학 속에는 유 불 선 삼학이 애초부터 존재한다. 불학의 정토요, 유학의 완성이며, 선도의 실현처이다. 동 학은 단순히 외세에 저항하는 역사적 사건의 유적만이 아니요, 왕조정치를 마감시 킨 농민군의 혁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길이 보전해 줄 중요한 정신적 유전 자이다. 동시에 동학은 인류의 보배이다. 동학은 단순히 우리의 손을 이미 떠나 있 다는 점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보배를 널리 세상에 알려 후손들에게 선조로 서 부끄럽지 않은 이 순간의 한 삽을 쌓는 작업을 해야 되겠다. [참고도서] <서적> 吳知泳, 東學史, 서울: 아세아문화사 影印本 Fritjof Capra 저, 이재희 역,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서울 :범양사, 1997. 노태구, 동학의 지기와 천주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동양정치사상사 제1권 2호, 서울: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2002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전, 동경대전,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사, 포덕142. <논문> 김정의, 동학의 문명관, 동학학보, 제2호, 서울: 동학학회, 2000. 김한구, 동학의 비교사회 문화론, 한국학논집 제9호,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86. - 29 -
배영기, 동학이념과 21세기 새로운 통일 패러다임 정립, 신종교연구, 제2집, 한국신 종교학회, 2000. 최민자, 동학의 정치철학적 원형과 리더십론, 동학학보, 제9권 1호. 서울: 동학학회, 2005. 한자경, 동학의 이상사회론, 철학사상 제17호,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노태구, 한국인의 정체성과 천도교의 종교교육, 종교교육학연구, 제16권. 서울: 종교 교육학회, 2003. 이현희, 동학과 민족운동, 동학학보, 제9권 1호, 서울: 동학학회, 2005. 조휘각, 동학의 민주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 국민윤리연구, 제51호, 한국윤리학회, 2002. 임형진, 천도교 통일운동과 전위단체, 동학학보, 제8호, 서울: 동학학회, 2004. 오문환, 의암 손병희의 교정쌍전 의 국가건설 사상, 정치사상연구, 제10집 제2호, 한국정치사상학회, 2004. 정경환, 백범의 정치사상과 동학, 동학학보, 제9권 2호. 서울: 동학학회, 2005. 최무석, 동학의 민족교육운동, 교육철학 제4호, 한국교육철학회, 1983. 황묘희, 동학에 나타난 시대개혁론, 동학학보, 제6호. 서울: 동학학회, 2003 황묘희, 동학의 근대성에 대한 고찰, 민족사상, 창간호, 부산: 한국민족사상학회, 2007.12 오문환, 동학사상이 보는 통치의 정당성 문제, 동양정치사상사, 제2권 1호, 한국동 양정치사상사학회, 2003. 고건호, 동학의 세계관에 나타난 전통과 근대의 변증법, 동학학보, 제9권 1호, 서울: 동학학회, 2005. 정영희, 동학의 인간평등사상 연구, 동학학보, 제7호, 서울: 동학학회, 2004. 손인수, 동학사상의 아동관, 교육사교육철학, 제3호, 교육철학회, 1979.9. 진창영, 동학사상의 교육내용과 생태교육, 종교교육학연구, 제24권, 한국종교교육학 회, 2007. 신기현, 동학의 평등인식, 호남정치학회보, 1989. 양병기, 동학의 정치사상으로서의 재조명, 동학학보, 제2집, 동학학회, 2000. 김정희, 동학의 정치사상, 호남정치학회보 vol 5, 호남정치학회, 1993. 김만규, 종교적 사회운동으로서의 동서사상의 교감, 동학학보, 제6호, 서울: 동학학 회, 2003. - 30 -
退溪의 林居十五詠 손 오 규* Ⅰ. 서론 퇴계 이황(1501-1570)의 林居十五詠 은 그 제목 아래에 <次李玉山韻>이라 되 어 있다. 玉山은 晦齋 李彦迪(1491-1553)을 일컫는다. 그래서 <次李玉山韻>이라는 말은, 퇴계가 회재의 林居十五詠 에 사용된 韻字를 빌어다가 자신의 林居十五詠 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퇴계는 회재의 韻字와 題目을 그대로 사용 하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次韻詩는 흔히 있는 일이며 또 조선조 선비들의 멋스러운 문학 활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회재와 퇴계 두 학자가 차지하는 조선조 士林에서의 位相과 학문세계가 너무나 비범하다. 正祖는 1792년 3월 閣臣 李晩秀를 영남으로 내려 보내어, 3월 19일에는 경주에 있는 晦齋 李彦迪의 玉山書院에 致祭하고 24일에는 안동에 있는 退溪 李滉의 陶山 書院에 致祭케 하였다. 그리고 25일에는 도산에서 과거를 실시하였다. 이 때 과거 에 응시한 인원이 무려 七千 二百 二十八이었으며 이 중에서 답안지(試紙)를 제출한 사람이 三千 六百 三十二名이었다1).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선비들이 참 여하였다. 이 때 정조는 敎書에서 말하기를, 바른 학문(正學)을 존숭하려면 마땅히 先賢을 존숭하여야 한다. 2)라고 하였다. 이것은 옥산서원과 도산서원 致祭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지난 번 邪學이 점차 번지려 할 때 오직 영남 사람들이 先正 之學을 삼가 지켜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 이로부터 나의 널리 사모하 는 마음이 더해졌다3) 라고 하였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정조는 회재와 퇴계가 邪學을 물리치고 바른 학문을 수호 * 제주대 교수 1) 嶠南賓興錄, 書啓(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www.aks.ac.kr) 慶尙道慶州 玉山書院 以同月十九日...陶山書院...二十四日...祭畢翌日二十五日設場...御題揭 示使之 應製入門七千二百二十八人 收券三千六百三十二張 2) 조선왕조실록, 정조34권, 16년, 3월2일.(http://silrok.history.go.kr) 敎曰 欲尊正學 宜尊先賢 3) 위의 책, 정조34권, 16년, 3월2일. 向來邪學之漸染也 惟喬南人士 謹守先正之學 不撓不蒦 自是以往 增我曠慕 - 31 -
하여 영남 사림들로부터 尊賢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이만수로 하여금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에 치제케 한 것은, 당시 晦齋 와 退溪의 士林과 學問에 미치는 영향과 位相에 대해 임금이 국가적 행사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회재 詩 次韻은 사 림과 성리학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회재는 林居十五詠 을 45세인 조선조 중종 30년(1537년)에 지었다. 이보다 앞 서 회재는 41세 때인 중종 26년(1531년)에 金安老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성균관 사 예로 좌천되고 곧 벼슬에서 물러나 경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인 중종 27년(1532 년) 42세 때, 경주 紫玉山 아래에 獨樂堂과 溪亭을 지었다. 그리고 45세 때인 중종 30년(1535년)에 林居十五詠 을 지었다. 그러므로 회재의 林居十五詠 에는 자옥 산에 묻혀 살아가는 山林之樂과 학문의 이상과 포부가 형상화되어 있다. 또 회재는 같은 해 10월 11일, 자옥산장에 머물면서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여 記夢 이란 시 2句를 지었다. 이 시의 서문에는, 꿈에 임금의 편전에 들어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아뢰면서 임금에게 靡不有初 鮮克有終이란 구절을 인용하면서 殿下 愼終 如始 則福祚無窮矣4) 라고 아뢰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기몽 이 회재가 자옥산 에 묻혀 살게 된 동기를 말하는 동시에 임금에 대한 충의정신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記夢 과 林居十五詠 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만 한다. 퇴계는 회재와 동시대인이면서도 10년의 차이가 있다. 회재보다는 약간 후배인 셈이다. 퇴계가 회재의 林居十五詠 을 차운한 것은 60세인 명종 15년(1560년)이 다5). 이 해 11월 기고봉에게 사단칠정을 논변하는 답신(答奇高峯書辨四端七情)을 보내었으며, 또 도산서당이 완성되어 학문탐구와 교육이 더욱 깊어졌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퇴계 개인의 생애나 학문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조선조 성리학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때는 회재가 配所에서 病死한(63세, 명종8년, 1553년) 지 7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리고 아직 회재의 復爵에 대한 명이 내려지지 않았다. 회재의 復爵은 명 종21년(1566년)에 비로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회재의 시를 차운하고 제목까지 그대로 사용한 것은 회재에 대한 尊慕之心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훗날 퇴계가 지은 회재의 行狀을 통하여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짐작컨대 혹시 퇴계는 도산서원 隱居의 전형을 회재를 통하여 모색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언적, 晦齋集, 卷2, 律詩 絶句 乙未冬十月十一日 余在山莊 夢入特進俯伏 上前啓曰 臣有病母遠在 不得久留朝 行將辭去... 古人云 靡不有初 鮮克有終 願殿下愼終如始 則福祚無窮矣 5) 권오봉, 退溪詩大全, 포항공과대학, 1992, 636쪽. 4) - 32 -
그렇다면 퇴계는 회재의 어떤 점을 흠모하였을까. 그리고 왜 퇴계는 회재를 흠모 하였을까. 그리고 퇴계가 도산서원에서 추구하고자 한 산림생활의 이상은 어디에 있었는가. 나아가 퇴계는 회재의 영남사림과 성리학계의 위상으로 보아, 學統授受에 의한 도학적 전통과 성리학적 세계관 확립을 목적으로 林居十五詠 을 차운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이 바로 퇴계의 林居十五詠 과 회재의 行狀 에 함 축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Ⅱ. 林泉幽居와 東魯眞隱 회재의 林居十五詠 은 1. 早春 2. 暮春 3. 初夏 4. 秋聲 5. 冬初 6. 悶旱 7. 喜雨 8. 感物 9. 無爲 10. 觀物 11. 溪亭 12. 獨樂 13. 觀心 14. 存養 15. 秋葵 이다. 그런데 퇴계는 이 중에서 6. 悶旱 8. 感物 10. 秋葵 를 뺐다. 또 4. 秋聲 은 早秋 로, 5. 冬初 는 初冬 으로, 14. 存養 은 存心 으로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다. 9. 無爲 는 樂時 로, 12. 獨樂 은 幽居 로 제목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회재의 다른 시 樂天 을 存心 다음에 넣고, 記夢 2수는 맨 마지막에 배치하여 林居十五詠 을 완성하였다. 또 퇴계는 林居十五詠 의 순서를 조금 달리 하였다. 우선 회재의 시 2. 暮春 을 자신의 시에서는 7번째에 배치하였으며, 9. 無爲 는 樂時 로 제목을 바꾸어 5번째 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12. 獨樂 은 幽居 로 제목을 바꾼 다음 6번째에 배치하였 다. 이상을 정리하면, 퇴계의 林居十五詠 1. 早春, 2. 初夏, 3. 早秋, 4. 初冬, 5. 樂時, 6. 幽居, 7. 暮春, 8. 觀物, 9. 喜雨, 10. 溪亭, 11. 存心, 13. 樂 天], 14-15. 記夢 의 순서가 된다. 이런 배치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林居十五詠 은 15수의 연작시로서 하나의 통일된 주제 아래에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林居는 山林隱居를 의미한다. 이것은 회재가 林居十五詠 의 첫머리 5수에서 자옥 산의 春夏秋冬을 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회재의 생각과 의도를 퇴계는 단박 에 간파하였으니, 역시 퇴계의 林居十五詠 첫머리 4수도 도산산수의 4계절을 노 래하였던 것이다. 幽居 벗을 사귀는 마음, 월단에게 묻지 마오 쇄약해지는 얼굴 풍진에 견디기 어렵구려 가난에도 불구하고 요즘 거처를 옮겼더니 앞은 맑은 강이요 뒤에는 푸른 산이네 - 33 -
不用交情問越壇 風塵難與抗衰顔 撥貧近日移三徑 前對淸江後碧山 이 시는 회재의 林居十五詠 중 12. 獨樂 을 차운하여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이 해에는 도산서당이 완성되었다. 따라서 제 3구 삼경을 옮겼다(移三徑) 는 도산서당 이 완성되어 학문대성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제 4구는 背 山臨水의 서당 주변 산수를 노래하였으니, 곧 퇴계와 도산을 말한다. 따라서 퇴계는 이 시에서 주자와 회재의 산수은거를 본받아, 日常 속에서 奇絶處를 발견한 기쁨의 생활, 즉 도산은거를 통한 道의 실천적 삶과 즐거움을 형상화하였다. Ⅲ. 觀物樂時와 欲識前賢 퇴계의 도학적 삶은 학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행되는데, 그 학문적 태도와 성 격을 林居十五詠 5. 樂時 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樂時 만물이 굽고 펴는 조화, 모두가 천지의 이법이며 음양이 옮겨가며 변하는 것도 각기 때가 있구나 나 홀로 태화탕 한잔을 기울이며 안빈락도 백 편을 길게 읊조리리 屈伸變化都因數 爻象推遷各有時 獨飮太和湯一盞 長吟安樂百篇詩 제1구의 都因數 의 數 는 천지자연이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근원이며 원인인 理 法 을 의미한다. 성리학적으로는 理 를 의미한다. 제2구의 爻象 은 그런 이법에 따 라 나타나는 사계절의 현상을 말한다. 제 3구에서 퇴계는 4계절의 현상적 변화를 감상하면서 內的省察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가 술을 마시는 행위는 이 런 내적 성찰의 명상적 자세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 결과 퇴계는 제4구 에서 길이 은거의 삶을 영위할 것이라 다짐하고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한다. 그러니 長吟安樂百篇詩 는 은거의 이상과 즐거움을 유지하며 실천적 삶을 살고 싶다는 이 상을 노래한 것이다. - 34 -
Ⅳ. 靜中持敬과 聞道樂天 퇴계의 학문은 心性論 에서 독창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심성론은 인간의 마음을 깊이 성찰하고 탐구하여 善한 상태를 유지하는 수양론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 다. 이런 생각을 선비의 벼슬살이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것은 곧바로 進退辭受之義 를 말하는 것이다. 의리라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근원하니, 마땅히 선비는 마음에 근원하는 의리의 올바름으로 進退辭受의 근본을 삼아야만 한다. 觀心 고요 속에 경을 지키려 옷깃마저 단정히 하노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하면 이것은 두 마음이리 연평에게 이 뜻 궁구한 것을 물으려 하였으나 얼음항아리 가을달처럼 아득하여 찾을 수 없음이여 靜中指敬只端襟 若道觀心是兩心 欲向延平窮此旨 氷壺秋月杳無心 마음이 利慾을 떠나 순수한 상태 즉 타고난 그대로의 性을 지킨다면 만사와 만물 이 그대로 비치니, 참된 모습을 잃을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이기 심과 욕망이 넘치니 마음이 흐려지기 쉽다. 퇴계는 <天命圖說>에서 마음을 설명하 되 心體와 心用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Ⅴ. 결론 退溪 李滉의 林居十五詠 은 晦齋 李彦迪의 임거십오영 을 次韻하여 제목도 그 대로 사용하였다. 단지 회재의 임거십오영 중에서 悶旱 과 秋葵 그리고 感物 을 빼고 회재의 다른 시 樂天 과 記夢 2수를 보태어 15수를 완성하였다. 회재는 42세 때(1532년) 벼슬에서 물러나 경주 紫玉山 아래에 獨樂堂을 지어 은 거하였다. 그리고 45세(1535년) 때에 林居十五詠 을 지어 隱居之志와 학문적 깨달 음 그리고 道의 실천을 통한 正學의 수호와 進退辭受之義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성 리학을 탐구하여 大學章句補遺, 續或問, 求仁錄 등의 저술을 남겨 性理學史에 빛난다. 또 忘齋 孫叔暾과 忘機堂 曺漢輔에게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라는 글 을 통해 성리학에 대한 정밀하고도 뛰어난 식견과 학문적 함축을 보였다. 그리하여 嶺南學派의 창시로 일컫기도 한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여 결론으로 삼는다. - 35 -
첫째, 퇴계가 회재의 林居十五詠 을 次韻한 것은 60세(1560년) 때이다. 이 해 11월 퇴계는 奇高峯에게 四端七情을 논변하는 답신을 보내었으며, 또 도산서당이 완성되었다. 퇴계는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회재의 임거십오영 을 次韻하여 도산은 거의 전형을 탐색함과 동시에 회재의 정신과 학문을 찬양하며 景慕의 情을 기탁하 였다. 둘째, 퇴계는 회재의 삶과 학문을 통하여 도산은거의 전형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 라 짐작된다. 나아가 學統授受에 의한 도학적 전통과 성리학적 세계관 확립을 목적 으로 임거십오영 을 次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퇴계는 도산은거를 통하여 자연의 조화로움을 깨치는 희열과 함께 사색을 통한 靜觀의 靜謐함을 內的凝視를 통해 自覺하고 있다. 그리고 대자연의 哲理와 인 생의 順理에 대해 사색하며 그것을 궁리하는 도산은거의 즐거움을 山水樂으로 형상 화하였다. 넷째, 林居十五詠 은 퇴계가 그리는 이상적 삶이요 陶山隱居의 自樂을 노래하였 다. 퇴계는 도산은거를 통해 도학적 삶에 대한 淵源과 모범을 실천하고자 하였으니, 林居十五詠 은 林泉幽居를 통한 東魯眞隱의 意境을 노래하였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林居十五詠 은 퇴계의 학문정신과 尊賢정신이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퇴계는 도산에 은거하여 敬을 실천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대자연의 조화와 順理에 동참하는 道의 경지를 노래하였으니, 林居十五詠 은 觀物樂時와 欲識前賢의 意境을 형상화 하였다. 여섯째, 林居十五詠 은 도산은거를 통해 利慾으로부터 벗어난 지혜의 삶과 승화 된 의식의 경계를 형상화하였으니, 內直外方의 敬을 실천하는 自省之心을 노래하였 다. 곧 靜中之敬과 聞道樂天의 意境이 그것이니, 修養論에 입각한 조선조 士大夫詩 歌의 典範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 36 -
南冥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한 상 규* 1. 참선비의 길을 안내한 교육자 400 여년전 조선사회를 개혁 하고자 했던 處士. 南冥 曺植(1501 ~ 1572)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그리워지고 날이 갈수록 절실한 까닭이 무엇일까. 남명이 이룩한 많은 업적이 당대는 물론 지금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추앙받고 있기에 지금도 우리는 지적인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선비의 모습으로 남고 싶어한다. 한 시대를 살았던 지성인의 삶 은 앎 을 통하여 영원히 계승되고, 교육을 통하 여 그와 같은 됨 을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잠시 동안의 고난과 모순된 삶속 에서도 잊혀 지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다. 오늘 여기 모이신 많은 유림의 지도자 들은 바로 이러한 삶에 동참하면서 나의 모습을 先賢과 같이 그리워하고 되고 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남명이 살다간 400여년 전 士 林의 정신이 국가의 元氣가 되어 우리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다. 南冥集 編年 67세 조에 당시 선비의 성격과 관련하여 언급하였으니, 일반적 으로 사림은 ①성리학자나 사장학자의 구분없이 士類로 보는 경우 ② 성리학자 와 詞章學者를 통칭하는 경우 ③ 사림파라 하여 선비들의 집단개념으로 보았 다. 이렇게 볼때 선비의 인생로는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과거를 거쳐 벼슬길을 나선 선비가 退官落鄕하여 敎學의 場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지방문풍을 교화하는 지도자가 될 때 士林派라 부를 수 있다. 조선중기 金宗直의 문도가 일시 중앙정제에 진출하기 이전까지는 출사한 성 리학자 鄭道傳, 權近 등을 훈구파라 하여 앞서 말한 선비에 속하지만 순수한 사 림파와는 구별된다. 한번 출사한 선비도 그들의 在地的 기반이 鄕里이기 때문에 향촌의 교화에 힘썼다. 즉, 이들은 향촌에서 글을 가르치고 예법을 일으키는 禮敎主義者다. 이같은 현상은 유교문화의 공통성으로 본다. 당시의 향촌교화는 경전을 기초 로한 제분야의 지식을 가르치는 역할이 공자의 교학이나 程朱子의 교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선비 역할은 정치함의 명분을 正命으로 내세워 각자의 역할기대에 충실하는 경우도 있다. 남명은 言路를 통하여 郡王 * 동주대학 교수 - 37 -
之學을 헌책하였는데 이것은 선비의 正命論 이며 향촌의 교화와 民風의 순 화로 사림파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남명에게서 이러한 기절을 엿볼 수 있다. 儒者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나 권력, 실리와 같은 욕망에 무관심하 거나, 무력한 사람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 이상적 사회를 꿈꾸는 지성 인이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이해하는 유학은 현실참여를 전제하고서 자신의 학을 체득하였다. 여기서 사림의 현실 참여의식은 修己의 측면에서 學 이 되고 治人의 입장에서 敎 를 성취하려 한다. 이로써 사림파의 역할은 충족 된다. 조선중기 이후에 거듭되는 士禍를 계기로 남명같은 사림의 선비가 주목 을 받으면서 숭앙받는 인물이 되므로 자연히 교학에만 전념하는 선비의 기절 을 순유로 보게 되었다. 남명은 스스로 성찰하기를, 내 일찍이 才와 德이 없으니 어찌 일마다 할 수 있겠는가마는 만일 옛날 의 덕을 높이고, 후학을 권장하여 얼마간의 賢才를 설발하여 각기 그 재능을 높이고 앉아서 성공함을 보는 일이 좋다. 고 하였으니 이는 그가 꿈꾸는 조선사회의 중심이 선비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조선시대의 사림파의 선비는 관직보다는 향리와 산림에 은거함으로써 출사의 선비보다는 높은 기절로 숭앙받고 있었다. 동시에 교학과 국정에 대한 헌책으로 순수한 선비의 기절을 保持할 수 있었다. 남명의 이와 같은 사림정 신은 出處大節에서 나타난다. 조선시대 유학의 興起와 교학의 요람은 사회발전의 기본 바탕이라고 보고 나아가 유학은 학문적 성장과정서 교학의 역할이 至大하여 전통논리를 흡수 하는 가운데 민본정치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이 政敎이념과는 별도로 인간본연의 본성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훈구학자와는 대조되는 사림학 파에 의하여 새로운 私學의 발달을 가져왔다. 사림의 공적은 백성을 순화하고 군왕을 교화하면서 인재양성에 뜻을 두면서 차츰 특정의 학자를 중심으로 門徒를 이루어 학통을 형성하게 이르렀다. 이러 한 학통은 주로 영남지역의 선비들에 의해서 조선의 鄒魯之鄕 이라는 유 학의 고장이 형성되었다. 그 학파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까지 이어져서 남인 의 영수 許穆은 남명의 사상을 계승한 鄭逑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남명이 성 장한 다음 1519년 己卯士禍는 도학정치의 맥을 끊어 놓았으나 학문과 사색의 도장은 날로 흥기 하였다. 이로써 영남사림의 학풍은 조선 초 관학에 대칭되 는 사학의 태동으로 한국유학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즉 吉再이후 형성된 학통 은 이황 조식대에 와서 사림의 선비정신은 교학활동을 함으로써 두 학파의 - 38 -
사상은 더욱 생명력을 얻게된다. 영남우도의 조식은 金宏弼, 鄭汝昌의 학풍을 계승하여 南冥學派를 형성하여 退溪學派와 더불어 양 학파는 공자 이래 중국의 原始儒學과 주자의 성리학을 받아 들여서 각기 다른 학문사상과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유하연구의 대가 朴鍾鴻은 한국사상사논고 에서 유학이 한반도 문화형성에 정신적 일익을 담당함과 동시에 중앙집권적 체제형성에 있어서 지도이념의 구실을 하였다고 하였다. 중앙집권체제형성에서 지도이면의 역할은 정신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후일 파당으로 사사를 앞세우는 일면도 있었기에 학파의 순수성이 훼상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학파의 형성에 긍정적인 요인이 된 배경은 成宗代 부터 新進士類를 우대하여 지방 문풍 진흥에 이바지를 하였다. 대개 학통의 연원은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는 경우와, 科擧場에서 選擧取才한 知貢吏를 사 부로 존경하고 그 사상과 학문을 따르고 숭모하는 데서 비롯된다. 학통의 연원은 私淑한 문인의 계통과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나타났다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문화속이 잉태한 사림의 정신이 강직한 先行性과 각고의 탐구심이 강직한 把持力으로 나타나서 타 학파의 追隨를 불허하였다. 이러한 풍토가 조선중기의 교학을 난숙하게 하였다. 또한 교학이념의 多端한 방법으 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로 인하여 학교의 제도와 學規가 속 출하였고, 사학기관이 발달하여 신진사류가 다수 배출되었다. 일단 배출된 신 진사류는 향리에 생활근거를 두면서 농촌의 애환을 직접 체험하였으나 때로 는 上京從事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남명의 문도는 대개 侍從하였을 뿐 관직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하여 교학과 行身에 유념하였다. 이들이 주로 교학 하는 장소는 서원을 중심으로 存養省察 과 修身治己 를 宗旨로 삼았다. 이들은 일신의 안녕을 안목에 두지 않고 오직 存天理竭人欲 하려는 삶의 태도가 있었으므로 당시 서원을 중심으로 한 교학활동은 인륜을 목표로하고 있었다. 남명학파도 퇴계학파와 같이 정치적인 패퇴를 그들의 명분론으로 보 상받고자 정교이념과 맞설 수 있는 사상으로 윤리적 예교주의를 정도로 받아 들였다. 그런 까닭으로 節義만이 이러한 사상을 보존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교학규범으로 義 를 내세웠던 남명은 의리를 내면적 근거와 우주적 근원 에서 해명하려는 철학적 삶을 성리학의 과제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 예학의 실천적 行道다. 그 행도가 不就와 順自然의 道家的 삶의 자세와 가깝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성리학적 원리에만 구속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으므로 퇴계학파 로부터 배척을 받은 적도 있다. 퇴계학파에서는 陸九淵과 王守仁의 학문은 - 39 -
중국에서 성하지 않고 간혹 숭상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고 말하였다. 이황의 문도인 柳成龍이 이같은 견해를 표명한 바 있는데 明의 왕안석이 陽明을 종사하는 것은 覇道하는 유자 라고 하여 다소 선적인 태도를 비난하 였다. 이황은 양명은 학술이 매우 어긋나고 그 마음은 굳세고 사납다고 하면 서 왕양의 모든 변설은 장황하며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면서 배척하였다. 남명의 학문경향은 퇴계학파와는 달리 양명학을 부정한 적이 없 고 오히려 폭넓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문도들의 학문성향도 성리학에만 얽매 이지 않았다. 2. 제자교육에 성공하여 후일 남명학파를 형성하다. 남명에게서 배운 수많은 문인들은 대개가 경상우도에 밀집해 있다. 남명의 사우, 문인, 사숙인에 관한 기록은 덕천원생록 7권, 산해사우연원록, 덕천사우연원록 등이 있다. 이중 산해연원록 에는 문인과 종유인의 구 분없이 111명이고, 덕천산우연원록 에는 135명 종유인이 52명 사숙인이 162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남명이 30세부터 과업을 포기하고 독서와 교학에 만 전념하던 산해정(김해)시절에 정복현, 이제신, 권문임, 노흠, 권문현 등이 와서 배웠고, 48세부터 60세까지 약 12년간은 합천 雷龍亭 (三嘉)에서는 정인홍, 이광우, 이광곤, 문익성, 오건, 강익, 전치원, 하응도, 박제현, 진극원, 박제인, 하항, 하각, 박찬, 오운, 이정, 조종도, 이천경 등이 보인다. 남명 61 세부터 별세할 때까지 산천재(산청원리)에는 이조, 이창, 정탁, 조원, 김우옹, 이대기, 이노, 유종지, 최영중, 김효원, 정구, 최항, 유대수, 곽재우 등이 있으 며 강학장소가 밝혀지지 않는 문인으로 배신, 하청주, 이요, 이유인, 오간, 김 면, 도희령, 박제현, 이욱, 박순, 최원, 박인량, 하혼, 강숙, 최녁, 송당수, 노순, 이현우, 정인기 등이 있다. 이처럼 영남 우도에서 최대의 문도를 이루어 이후 남명학파 혹은 南冥別派(安鼎福의 말)를 형성한 것은 한국유학사에서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남명의 교육적 역량이 지대함을 말해 준만큼 문인 들의 처신과 행적도 조선조 선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에 남명의 교육적 업적은 퇴계를 壓頭하고도 남음이 있다.(이만규, 조선교육사 1950)는 후세의 평가가 나온 것은 영남우도의 학이 남명의 출현에 이르러 一高峰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남명의 폭넓은 인간성과 高節한 志操는 남방의 大終山 같아서 智異 山下의 기상을 그대로 표출했다. 이는 영남좌도의 소백산하의 이황의 문도와 뜻을 같이 하면서도 학문의 次序 와 방법을 달리하여 남명학파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식의 사상은 도학 자적 삶의 자세를 중시하였다. 그는 老子의 우주본체에 따르는 理法을 당연시 -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