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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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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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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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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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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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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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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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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 >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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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 國 大 學 校 第 二 十 八 回 학 술 발 표 第 二 十 九 回 특 별 전 경기도 파주 出 土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형보( 衡 輔 )의 부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 服 飾 학술발표:2010. 11. 5(금) 13:00 ~ 17:30 단국대학교 인문관 소극장(210호) 특 별 전:2010. 11. 5(금) ~ 2010. 11. 30(화)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제4전시실

본 행사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지원금으로 진행되었습니다.

目 次 인 사 말 5 제28회 학술발표 해평윤씨 유물 수습 경위와 성주이씨 이형보의 가계 7 이상룡(성주이씨 도정공파 24세손, 청아출판사 대표) 해평윤씨(1660~1701)묘 출토직물의 조형특성 19 조효숙(경원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조선 현종대 후반~숙종 중반 정국 동향 61 이현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원) 해평윤씨(1660~1701)묘 출토 퇴화직물에 관한 고찰 99 채옥자(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 유효선(서울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경기도 파주 출토 해평윤씨 복식에 관한 연구 127 이명은(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 海 平 尹 氏 (1660~1701) 墓 출토복식 특별전 179 개관기념 행사내역 241 박물관 이용안내 253

石 宙 善 紀 念 博 物 館 開 館 紀 念 제28회 학술세미나 제29회 특별전을 기념하며 올해로 개교 63주년과 개관 43주년을 맞이한 석주선기념박물관 이 기념 행사를 개 최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대학교 박물관은 1967년 11월 3일 중앙박 물관을 개관하였으며 1981년 5월 2일에는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을 개관하였고, 이후 1999년 3월 두 박물관을 통합하여 석주선기념박물관( 石 宙 善 紀 念 民 俗 博 物 館 ) 으로 개 칭,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올해의 특별전은 2001년 6월 경기도 파주에서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도정공파( 都 正 公 派 ) 15세손( 世 孫 ) 이형보( 李 衡 輔, 1659~1719)와 부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 의 묘( 墓 )를 함께 모시는 작업 중에 수습된 복식유물입니다. 이 유물들은 다양한 복식 과 다채로운 문양 등을 통해 당시 사대부가 부녀자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귀중한 자료는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도정공파( 都 正 公 派 ) 24세손 이상룡( 李 相 龍, 청아출판사 대표) 선생께서 기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박물관과 성주이씨 도정공파 문중은 깊은 인연( 因 緣 )이 있습니다. 이형보 公 의 고조부인 대사헌( 大 司 憲 ) 이언충( 李 彦 忠 )의 출토복식이 2002년 제21회 특별전으로 개최된 바 있으며, 같은 해 중요민속자 료 제2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해평 윤씨의 출토품이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귀중한 유물을 후학들을 위해 본 박물관에 기증해주신 문중 어 르신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뜻 깊은 행사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고 더욱 변화발전 할 수 있는 것은 고 - 5 -

석주선박사님께서 일구어 놓으신 큰 업적과 그 뜻을 이어가는 여러분들의 전통복식에 대한 열정과 격려 덕분이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금번에 소개되는 유물과 학술도서가 학계와 전통문화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학술세미나에서 귀중한 논문을 발표해주시는 이상룡선생, 조효숙교수, 이현진선생께 도 감사드립니다. 그밖에 본 유물의 보존과 보수, 그리고 본 특별전을 준비하는데 애 써주신 박물관 관계자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 및 재학생, 그리고 복원품 제작에 참여해 주신 졸업생 여러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2010년 11월 5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장 - 6 -

해평윤씨 유물 수습 경위와 성주이씨 이형보의 가계 이 상 룡 성주이씨 도정공파 24세손, 청아출판사 대표 목 차 Ⅰ. 유물 수습 경위 Ⅱ. 성주이씨 이형보의 가계와 부인 해평윤씨

해평윤씨 유물 수습 경위와 성주이씨 이형보의 가계 Ⅰ. 유물 수습 경위 2001년 6월 4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적성 어유리지 산64번지에 위치한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도정공파( 都 正 公 派 ) 선산( 先 山 )에서 15세손( 世 孫 ) 이형보( 李 衡 輔, 1659~1719)와 첫째부 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의 묘( 墓 )를 함께 모시는 작업을 하던 중 부인의 묘에서 63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이형보 公 은 원래 경기도 양평군 고주내 고읍리에 소재한 선산에 두 번째 부인인 해평윤 씨(1684~1764)와 합장되어 있었다. 같은 날 오전에 이 합장묘를 선산이 있는 파주로 옮기 게 되었다. 첫 번째 부인인 해평윤씨의 묘는 파주시 선산에 있었는데, 부군의 묘를 옮겨 오 면서 원래 있던 곳에서 20미터 아래로 내려온 지점에 이장할 장소를 정하여 이형보 公 과 양위를 합묘하였다. 파주에서의 이장작업은 문중 어른들을 비롯한 10여 명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 작업은 오전 8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여서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작업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부인의 묘를 옮기기 위해 파묘를 해보니, 관 안에는 다시 까만색 내관이 들어 있었다. 내관의 관 뚜껑을 열었더니, 관 안에는 시신 주위로 옷이 가득 차 있었다. 작업을 진행하던 이복상(경기 포천 창수면 주원리 351), 백운근(경기 포천 선산동 동교리 74) 선생 이 관에 차 있던 옷을 밖으로 꺼내어 관리해 두고, 다시 염한 상태로 시신을 위로 끌어올 - 9 -

려 이불을 비롯한 염습의를 해체하였다. 대렴 이불을 펼치고 대렴의를 펼치는 순서로 진행 하였고, 옷을 따로 보관하지 않고 펼친 순서 그대로 두면서 해체하였다. 이미 13대조 할아 버지 대사헌 이언충 公 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된 경험이 있어 염습의의 중요성을 어 느 정도 인식하고 있던 터였다. 시신이 입은 수의도 장소를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 에서 분리하였다. 수의를 모두 해체한 뒤의 시신은 거의 미라 상태였으며, 머리카락도 남 아 있었다. 유물 수습을 마치고, 보공품만 따로 모으고 다른 염습옷 들은 펼쳐 수습한 그대로 싸서 포장하였다. 작업을 총지위한 본인(이상룡, 24 世 孫 )이 유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작업이 끝 남과 동시에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박성실 교수(당시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에 게 연락하였으며 오후 늦게 일산에서 만나 유물을 전달하였다. 성주이씨 도정공파와 석주선기념박물관은 깊은 인연이 있다. 이형보 公 의 고조부 대사 헌( 大 司 憲 ) 이언충( 李 彦 忠, 1524~1582)의 출토복식이 2002년 제21회 특별전으로 개최된 바 있으며 같은 해 중요민속자료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유물 일습이 단국대 학교에 기증되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으로 옮겨 온 유물은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복식 전문가가 참여 하지 않았지만 대렴금과 소렴금으로 염습의를 분류하여 두었기 때문에 염습 단계별로 분류 가 가능하였다. 유물은 습의 13점, 소렴 4점, 대렴 5점, 보공 41점으로 분류되었다. 염습의 분류는 가능하였지만, 대렴이나 소렴의 수습 순서는 보존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습의는 팔 이 끼워져 있거나 깃 고대를 담가둔 형태로 보존되어 수의 입은 차례가 확인 가능하였다. 박물관에서 1년 정도의 보존처리를 거쳐 총 63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 종류는 원삼 1 점, 원삼대 1점, 당의 3점, 장옷 1점, 저고리 33점, 적삼 2점, 치마 10점, 바지 3점, 허리띠 3점, 염습 및 치관 제구 6점이다. 유물 중 일부가 고( 故 ) 난사( 蘭 斯 ) 석주선( 石 宙 善 ) 박사 추모 10주기 행사 <다시 태어난 우리옷, 환생> 展 에 소개된 바 있으며, 금번 제29회 특별전 <조선 후반기 사대부가 여인의 멋차림>에서 유물 일습이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 10 -

Ⅱ. 성주이씨 이형보의 가계와 부인 해평윤씨 해평윤씨는 1660년 11월 21일 출생하였으며, 판서( 判 書 )를 지낸 윤계( 尹 堦, 1622~1692) 1) 가 아버지이다. 15세 되던 해에 한 살 위인 성주이씨 도정공파 15세손인 이형보와 혼인하 였다. 슬하에 자손을 낳지 못한 채 1701년(숙종 27) 8월 1일 초가을 무렵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영평( 永 平 ) 公 이형보는 1659년 5월 29일 생으로 호는 상경( 商 卿 )이다. 15세도 되기 전 부터 사대책문( 詞 對 策 文 )에 능통하여 판서 윤계가 한 번 보고 기특히 여겨 사위로 삼았다 고 한다. 관직도 1702년에 선공감역( 繕 工 監 役, 종9품) 2) 에 의금부사( 義 禁 府 事 )로 옮겼다가 1707년에는 영평 현령( 永 平 縣 令, 종5품)을 지냈다. 1719 12월 2일 61세 되던 때에 사망하 였다. 두 번의 혼례를 치렀는데, 첫 번째 부인은 유물의 주인인 숙인( 淑 人 )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이다. 부부의 금슬이 너무나 좋아 해평윤씨 문중에서 두 번째 부인도 들여보냈다고 한다. 두 번째 부인 숙인 해평윤씨는 아버지가 훤( 暄 )이며, 1684년 12월 7일에 태어나서 1764년 1월 26일에 사망하였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규현( 奎 賢, 57세 사망)을 두 었으며 도정공파 16세손이다. 이형보 公 의 집안은 시대를 풍미한 세도가( 勢 道 家 )이다. 1세 농서군( 隴 西 君 )을 비롯하여 2세 대제학 이조년( 李 兆 年 ), 3세 문하시중 이포( 李 褒 ), 4세 대제학 이인민( 李 仁 敏 ), 5세 영 의정 이직( 李 稷 ), 6세 판윤 사후( 李 師 厚 ) 등의 어른들이 있으며, 이형보 공의 고조부 이언 충( 李 彦 忠 ) 公 은 대사헌( 大 司 憲, 종2품)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이광적( 李 光 迪, 1628~1717) 公 은 공조판서( 工 曹 判 書, 정2품)를 지낸 인물이다. 특히 2000년 4월 22일 성주이씨 도정공파 문중 선산이 소재한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출토된 고조부 이언충 公 의 복식 23점이 2002년 7월 18일에 중요민속자료 제243호로 지정 되어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이 유물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에 기증되어 2002년 5월에 제21회 특별전과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은 바 1) 윤계 [ 尹 堦, 1622~1692] 조선시대 문신. 1678년(숙종 4) 다스리기 어려운 진주목사로 나가 치적을 올리는 등 여러 관직에서 공 적을 쌓았으나, 기사사화 때 송시열의 일당으로 몰려 강진에 귀양 가서 죽었다. 2) 조선 시대 토목 영선( 土 木 營 繕 )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 - 11 -

있다. 3) 부친 이광적( 李 光 迪, 1628~1717)은 숙종조 때 공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호는 은암 ( 隱 庵 ), 시호는 정헌( 靖 憲 )이며, 문렬공( 文 烈 公 ) 이조년( 李 兆 年 )의 12세손이다. 1628년 2월 9일에 태어났으며, 1658년에 문과 등과하였다. 경인년에 한성판윤( 漢 城 判 尹 )이 되며 계사 년에 도화서 제조( 圖 畵 署 提 調 )에 임했으며, 공은 90세까지 장수하였다. 1716년(숙종 42) 과거급제한 지 60년이 되던 해 대과회방( 大 科 回 榜 )을 맞아 숙종이 사화 ( 賜 花 ) 사연( 賜 宴 )을 내리시고, 연수( 宴 需 )와 어제시( 御 製 詩 )도 내리셨다. 이를 기념하여 10 월 22일에 이웃의 70세 이상의 전직 관료들과 그 자손들이 이광적 公 의 정원에 모여 수연 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북원수회도( 北 園 壽 會 圖 )> 4) 기록화가 전한다. 1717년에는 숭정대 부( 崇 政 大 夫 ) 공조판서( 工 曹 判 書 )에 올랐다. 공은 1717년 12월 13일에 90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다. 이상과 같이 이형보 公 의 집안은 시대를 풍미한 세도가( 勢 道 家 )이다. 이형보 公 의 부인 해평윤씨의 유물 출토작업이 복식 전문가가 참여하지 못하여 수습 과정을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수습된 63점의 출토복식은 숙종대를 풍미하였던 사대부가 여인의 의생활 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한국복식 제20호, 2002. 4) 1716년 作, 겸재( 謙 齋 ) 정선( 鄭 敾 )이 41세에 그림, 개인 소장품, 現 국립중앙박물관 위탁관리 - 12 -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도정공파( 都 正 公 派 ) 가계도( 家 繼 圖 ) 純 由 始 祖 公 新 羅 末 京 相 長 庚 ( 隴 西 郡 公, 中 始 祖 ) 1세 師 厚 ( 漢 城 判 尹 ) 6세손 繼 寧 ( 僉 知 ) 丁 寧 ( 諡 章 節 星 原 尉 ) 成 寧 ( 校 理 ) 7세손 詮 ( 都 正 ) 誼 ( 諡 純 貞 號 秋 江 ) 諿 ( 諡 恭 肅 ) 8세손 云 芑 ( 參 議 ) 9세손 掀 ( 都 摁 官 ) 犍 挅 揜 10세손 彦 忠 ( 大 司 憲 ) (1524~1582) 2000년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복식 출토 2002년 7월 중요민속자료 제243호로 지정 11세손 珹 ( 叅 判 ) 12세손 世 美 (1604~1671) 礪 山 宋 氏 (1609~1685) 廷 美 東 美 13세손 光 迪 (1604~1717) 14세손 경기도 파주에서 복식 63점 出 土 衡 輔 (1659~1717) 첫째부인 海 平 尹 氏 (1660~1701년 8월 1일) 둘째부인 海 平 尹 氏 (1684~1764) 15세손 奎 賢 (57세 사망) 16세손 - 13 -

수의 원삼 허리춤에 원삼대가 징궈진 모습 시신의 머리에 착용하였던 여모 안 모습 - 14 -

수의 저고리 3작 깃 고대에서 징궈진 모습 수의 저고리 3작 소매가 끼워져 펼쳐진 모습 - 15 -

이광적 公 신도비와 이세미, 이광적 묘소 전경 이광적 公 신도비 - 16 -

이광적 公 과 진원박씨, 동래정씨 합묘 이형보 公 과 두 부인 해평윤씨 합묘 - 17 -

해평윤씨(1660~1701)묘 출토직물의 조형특성 조 효 숙 경원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목 차 Ⅰ. 서 론 Ⅱ. 복식의 품목별 옷감사용 실태 Ⅲ. 무늬의 유형 및 종류 Ⅳ. 무늬의 조형특성 Ⅴ. 결 론

해평윤씨(1660~1701)묘 출토직물의 조형특성 Ⅰ. 서 론 해평윤씨는 종5품 영평현령( 永 平 縣 令 )을 지낸 이형보( 李 衡 輔 :1659~1719)의 부인이다. 2001년 6월 4일 양주 고주내에 있던 남편의 묘를 해평윤씨 묘가 있던 경기도 파주시 적성 어유리지로 옮기면서 합장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단국대 박물관에서는 종친 으로부터 해평윤씨의 유물을 인수받았다. 해평윤씨는 15세 되던 해에 한 살 위인 이형보와 혼인하였으나 자손을 낳지 못하고 41 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고조부는 대사헌 이언충( 李 彦 忠 :1524~1582)이며 시아버님은 공 조판서를 역임한 이광적( 李 光 迪 1628~1717)이다. 남편 형보는 종 5품의 관직인 영평 현령 을 지냈다. 시아버님인 이광적은 숙종때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호는 은암( 隱 庵 ) 시호는 정헌( 靖 憲 )이며 문열공( 文 烈 公 ) 이조년( 李 兆 年 )의 12대 손이고 문경공( 文 景 公 ) 이직( 李 稷 ) 의 9대 손이다. 공은 90세까지 장수하여 병신( 丙 申 1716)년에 대과회방( 大 科 回 榜 )을 맞아 숙종께서 사화( 賜 花 ), 사연( 賜 宴 )을 내리시고 연수( 宴 需 )와 어제시( 御 製 詩 )도 내리셨다. 이처럼 해평윤씨는 명문가의 며느리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의 복식은 17세기 후기 사 대부 부인이 착용하였던 멋과 차림새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다양한 문직물 을 통하여 그 시기의 직물사 단면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유물은 수의, 소렴, 대렴, 보공용으로 구성되었으며, 복식류는 원삼 1점, 당의 3점, 저고 리 35점, 치마 10점, 바지 3점, 허리띠 3등 57점이며 이불류 2점, 멱목 1점, 여모 1점, 베개 - 21 -

1점 관내의 1점 등의 치관제구를 합하여 총 63점이 출토되었다. 직물의 상태는 비교적 양 호한 편으로 제직 특성과 무늬의 조형성에서 17세기 후기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더욱이 다른 분묘에 비하여 무늬가 있는 화문단과 화문능, 화문주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문직물이 많았고 여기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무늬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추사나 항라과 같은 새로운 직물과 자수저고리도 출토되어 17세기 후기에 옷감 사용의 변화와 무늬의 조형성특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본 보고서에서는 해평윤씨 출토 직물들의 제직법과 시문된 무늬의 조형 특성을 분석하 였다. Ⅱ. 복식의 품목별 옷감사용 실태 조사대상 출토 유물은 총 63점으로 해평윤씨가 착용하였던 복식류 57점과 치관제구류 6 점이다. 조사 대상의 옷감은 전체 228점 1) 으로 평직으로 제직한 주( 紬 ), 초( 綃 ), 추사( 皺 紗 ) 를 비롯하여 평직바탕에 무늬를 능직으로 직조한 문주( 紋 紬 ), 능직으로 제직한 능( 紋 綾 / 無 紋 綾 ), 수자직으로 제직한 단( 紋 緞 / 無 紋 緞 ), 익조직과 평직으로 제직한 문사( 紋 紗 )와 항라 ( 亢 羅 ) 등이 출토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16세기의 출토직물 중에 문직물이 출토된 경우는 수자직으로 직조 한 문단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번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는 다른 출토품과는 달리 수자직으로 제직한 문단은 25% 정도이며 그 외에 문주가 9%, 문능이 4%, 문사가 2% 정도로 문능이나 문주가 많이 보인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도 신경유(1581~1633) 등의 17세기에 생존한 분 의 출토복식에서 능이나 문주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1649년 효종실록( 孝 宗 實 錄 ) 효종 즉위년 채단을 능견으로 대신하라 2) 는 국가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1) 직물 종류의 숫자는 복식에서 겉감 및 안감에 사용된 중요한 문직물과 무문직물을 세었으며 동일한 직물의 중복사용은 숫자에서 제외하였다. 2) 孝 宗 實 錄 卽 位 年 7 月 17 日 甲 戌. - 22 -

그밖에 이번 유물에서는 라의 변형으로 17세기 무렵에 새롭게 등장한 항라가 8점이나 출토되었으며, 평직으로 제직되었지만 강한 꼬임을 준 위사로 직조하여 촉감이 마치 요즈 음의 크레이프와 같이 까슬거리는 추사가 2점이 출토되었고, 자수저고리도 한 점 출토되어 이 시기의 옷감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평윤씨의 자수저고리는 최초로 출토된 것이 며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심익창의 부인 성주이씨(1651~1671)의 출토품에서도 수치마( 繡 裳 )와 수낭( 繡 囊 )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17세기에 수놓은 의복이 출토된 사례는 문헌에서 의 자수 금제와 함께 당시에 수 옷이 유행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1631년 인조실록( 仁 祖 實 錄 ) 인조 9년과 1637년 인조실록( 仁 祖 實 錄 ) 인조 15년의 기록에 수의( 繡 衣 ) 수상( 繡 裳 )의 금지령이 내렸으며 3) 연려실기술( 練 藜 室 記 述 ) 효종(1619~1659)조에 淑 徽 公 主 之 不 許 繡 裳 의 기록 4) 에서와 같이 수치마가 당시의 커다란 사치였던 것이다. 이는 수 옷이 많았 던 청나라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그림 1> 해평윤씨 출토직물의 종류(전체) * 주무늬 위주로 구분 3) 仁 祖 實 錄 9 年 7 月 8 日 庚 辰, 仁 祖 實 錄 15 年 5 月 12 日 己 卯. 4) 練 藜 室 記 述 30 券 孝 宗 條. - 23 -

현재 가장 이른 항라의 출현은 충주 박물관 소장의 이응해(1547~1626)의 출토 유물 중 지요이며 그 외에도 17세기의 유물에 항라가 가끔씩 출토되어 이 무렵부터 새로운 소재로 항라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항라라는 명칭이 문헌에 기록된 사례는 1727년 진종효순후 가례도감의궤 에 치마의 안감으로 항주라( 亢 洲 羅 )가 기록되었으며 5), 1776년 영조실록( 英 祖 實 錄 ) 영조 52년 영조의 소렴용 조복에 항라를 사용하였음이 6) 비교적 오 래된 기록이다. 추사도 1690년에 사망한 최원립 유물을 비롯하여 주로 17세기 후반기의 유 물에서 보이기 시작하는데 역어유해( 譯 語 類 解 ) 에는 한자로 縐 紗, 주우사라고 쓰고 즈우 샤 로 언해하였다. 7) 또한 추사는 1787년 정조실록( 正 祖 實 錄 ) 정조 11년에 주우사( 注 雨 紗 ) 항라( 杭 羅 ) 지주( 只 紬 ) 소릉( 小 綾 )의 무늬가 있는 것은 일체 엄금한다 8) 는 내용과 1791년 正 祖 實 錄 정조 15년에 문추사( 紋 縐 紗 ), 문항라( 紋 杭 羅 )를 연경에서 수입하는 것 을 금한다 9) 는 내용에서와 같이 이무렵 항라와 추사가 유행하였으며 무늬 있는 항라와 추 사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 주, 저고리(9605) 안감 <그림 3> 면주, 저고리(9585) 안고름 5) 眞 宗 孝 順 后 嘉 禮 都 監 儀 軌 6) 英 祖 實 錄 52 年 3 月 6 日 丙 申. 7) 譯 語 類 解 下, 織 造 8) 正 祖 實 錄 11 年 10 月 10 日 甲 辰. 9) 正 祖 實 錄 15 年 11 月 3 日 甲 戌. - 24 -

<그림 4> 세주, 대렴금(9587) 동정 <그림 5> 초, 저고리(9614) 길 <그림 6> 추사, 치마(9620) 길 <그림 7> 화문주, 저고리(9596) 안고름 <그림 8> 화문능, 저고리(9600) 길 <그림 9> 화문단, 저고리(9584) 안감 - 25 -

<그림 10> 화문사, 당의(9583) 거들지 <그림 11> 항라, 저고리(9590) 길 63점의 유물 중에 33점의 복식과 이불의 중요부분이 다양한 무늬가 있는 문직물로 만들 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외에 곁마기나 끝동과 같이 작은 부분에 문직물을 사용한 사례까 지 합치면 해평윤씨 복식에서 문직물을 사용한 부분은 모두 89곳이 된다. 그 중에 동일한 무늬의 직물이 중복 사용된 사례가 19건이므로 이를 제외하면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는 모 두 70종류의 문직물이 출토되었다. 복식의 품목별로 문직물과 무문직물의 사용 사례를 정리하면 저고리 35점 중에 21점이 문직물이며 14점이 무문직물로 이루어졌다. 치마는 모두 10점 중에서 5점이 문직물이며 5 점은 무문직물이다. 예복으로는 원삼과 당의가 출토되었는데 원삼 1점이 문직물이며 당의 는 3점이 출토되었는데 2점이 문직물이다. 장옷은 1점이 출토되었는데 무문직물로 되었다. 그 외에 속옷에서 허리띠는 3점이 출토되었는데 2점이 문직물이며 속바지도 3점이 출토되 었는데 2점이 문직물이다. 이불은 2점 모두 문직물이다. <표 1>은 복식 품목 별 문직물 사 용 예를 정리한 것이고 <그림 12>와 같이 그래프로 정리하였다. 이는 다른 시기의 출토복 식과 비교해 볼때 문직물의 사용 빈도가 상당히 높았으며 옷감에 표현된 무늬의 종류도 다 양하게 나타났다. - 26 -

<표 1> 복식 품목별 무늬 사용실태 복식명칭 유문 무문 합계 저 고 리 21 14 35 치 마 5 5 10 당 의 2 1 3 원 삼 1 0 1 장 옷 0 1 1 허 리 띠 2 2 3 속 바 지 2 1 3 이 불 2 0 2 합 계 35 23 58 <그림 12> 복식 품목별 무늬 사용 실태 의복별로 사용된 무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복인 원삼과 당의, 장치마는 모두 연 꽃넝쿨무늬가 사용되었다. 원삼과 장치마는 같은 옷감이 연화문사로 이루어졌고 당의는 각 각 다른 형태의 연꽃넝쿨무늬 화문사와 화문단으로 이루어졌다. 저고리 35점은 <표 2>에서와 같이 21점이 무늬가 있었는데 겉감의 길과 같이 저고리의 중요부분만을 기준으로 볼 때 14종류의 무늬가 문단, 문주, 문능, 문사의 직물형태로 직조 되었다. 저고리에 시문된 무늬의 종류는 포도다람쥐무늬가 4점, 연꽃넝쿨무늬 종류가 각각 4점으로 많은 편이며, 다음으로 완자바탕에 식물무늬가 산점된 것이 3점, 원화문이 2점이 다. 그 외에 각각 다양한 무늬들이 한 점씩 구성되었다. - 27 -

저고리에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요부분에 사용된 14종류의 무늬 이외에 섶, 깃, 곁막이, 고름 등의 작은 부분에도 25종류의 무늬가 시문되어 저고리에서는 모두 39종류의 다양한 무늬가 보여진다. <표 2> 저고리용 옷감 무늬 분석 무늬의 종류 문단 문주 문능 문사 무문단 항라 숙초 주 합계 1 연꽃 넝쿨 2 2 2 연꽃넝쿨+보배 1 1 3 연꽃넝쿨+모란 1 1 4 연꽃넝쿨+나비 1 1 5 모란+국화 1 1 6 매화+곤충 1 1 7 사양화 1 1 8 원화 2 2 9 포도+다람쥐 1 3 4 10 천도+석류 1 1 11 구름 1 1 12 구름+꽃 1 1 13 물결+반용 1 1 14 완자바탕+식물 3 3 15 무늬 없음 2 1 1 10 14 합 계 11 6 3 1 2 1 1 10 35 치마는 <표 3>에서와 같이 10벌 중에 5벌은 무늬가 없는 옷감이며 5점이 무늬가 있는 옷감을 사용하였다. 무늬의 종류는 연꽃넝쿨무늬, 모란+수국, 원화문+보배, 사양화무늬, 완자바탕+식물 등이 각각 1점씩 보인다. 장옷은 1점만 출토되었으며 무문단으로 만들어졌 으며 겨드랑이 삼각무만 물결무늬의 화문릉이다. 1655년에 사망한 여흥민씨의 묘에서 장 옷이 많이 출토되었던 사례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 28 -

<표 3> 치마용 옷감 무늬 분석 무늬의 종류 문단 문주 문사 무문단 추사 항라 주 합계 1 연꽃 넝쿨+보배 1 1 2 모란+수국 1 1 3 사양화 1 1 4 원화+보배 1 1 5 완자바탕+식물 1 1 6 무늬없음 1 1 2 1 5 합 계 3 1 1 1 1 2 1 10 속옷류는 속바지와 허리띠가 각각 3점씩 출토되었는데 속바지는 3점 중 2점에 각각 원 문, 완자바탕에 식물무늬가 시문되었으며 허리띠는 3점 중 1점에 매화무늬가 시문되었다. Ⅲ. 무늬의 유형 및 종류 해평윤씨 묘에서 출토된 직물은 총 228점이며 그 중 89점이 무늬 있는 직물이며 전체의 39%를 차지한다. 89점 중에는 19점이 동일한 무늬가 중복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 면 모두 70 종류의 무늬가 들어있다. 해평윤씨 유물에 보이는 70 종류의 무늬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그림 11>에서와 같이 식 물무늬, 동물무늬, 자연산수무늬, 기하무늬 등으로 구분되며 그 중에 식물무늬가 60%로 가 장 많다. 그 다음으로 기하무늬가 20%, 자연산수무늬가 16% 순이며 동물무늬가 4%정도로 매우 적다. 이번 유물에서는 기물무늬, 문자무늬, 인물무늬 등은 보이지 않았다. 전 시기의 유물들과 비교하면 식물무늬에서는 연꽃넝쿨무늬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꽃과 과일이 사용되었고 꽃이나 동물을 원형으로 도안한 원무늬와 완자무늬를 바탕으로 하 는 기하무늬가 늘어났으며 구름무늬와 같은 자연산수무늬가 줄어든 것이 전반적인 특징으 - 29 -

로 보인다. 무늬의 구성은 하나의 소재만으로 이루어진 단독무늬 보다는 대부분 두 종류 이상이 복 합구성 되어 있으며 디자인에 따라 각각 역할을 달리하여 배열되었는데 주제가 되는 중심 무늬( 主 紋 ), 부제가 되는 보조무늬( 副 紋 ), 바탕이 되는 바탕무늬( 地 紋 )로 구분된다. 10) <그림 13> 복식 무늬의 유형 * 주무늬 위주로 구분 조선시대 직물 무늬의 변천 과정은 크게 3기로 나누어진다. 임진왜란 시기까지인 16세 기를 1기, 전란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 전기까지를 2기, 18세기 후기부터 조선왕조가 끝 날 때까지를 3기로 분류하였다. 1기에는 무늬의 대상이 되는 소재의 다양함이 부족하며 정형화된 연꽃과 넝쿨무늬, 구름 과 보배무늬가 출토복식에서 대부분을 차지한다. 연꽃이나 모란의 형태도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의 정형화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사이에는 여백이 없이 만초 넝쿨과 보배무늬를 가득 채워 전체적으로 충전된 느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조선중기에 해당하는 2기에는 무늬의 소재도 조선전기의 연꽃이나 구름의 일변 도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각종 꽃과 새무늬, 나비, 벌과 같은 곤충무 늬가 추가되고, 보배무늬도 다양한 형태로 도안되었으며, 기하형 무늬를 바탕에 깔고 꽃을 드문드문 배열하는 금상첨화 구도도 보이는 등 무늬의 다양화 시기이다. 즉 이 시기는 무 늬에 내재되어 있는 상징성보다는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즐겼던 자연 풍경의 소재를 선호 10) 조효숙(2006). 우리나라 전통무늬 1 직물. 국립문화재연구소편. 눌와, p.26. - 30 -

하였고 이러한 취향과 더불어 소재를 여유와 절제의 방법으로 표현하여 자연스러운 아름다 움에 정갈한 인격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무늬의 유행을 이끌었다. 조선 말기 즉 3기가 되면 벽사나 길상에 대한 선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져서 길 상무늬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며 무늬의 조형성도 다시 다양함이 사라지고 정형화 현상이 나 타난다. 이무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길상무늬의 소재는 박쥐, 학, 석류, 천도, 불수 등 이며 이것만으로 부족하여 수( 壽 ), 복( 福 ), 희( 喜 ), 만( 卍 )자 와 같은 길상문자 자체를 무늬 로 사용하여 더욱 직접적인 길상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11) 현존하는 말기 유물 중에는 오복 신앙을 상징하는 오복수무늬( 五 蝠 壽 紋 ), 삼다신앙을 상징하는 도류불수무늬( 桃 榴 佛 手 紋 )가 대부분이다. 해평윤씨가 이 복식을 착용한 시기는 혼인 후 사망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17세기 말기 이며 조선시대 직물무늬의 변천 2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무늬의 종류나 조형성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여성인 사천목씨(1657~1699)의 출토유물과 매우 유사하였다. 17세기의 유 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631년에 사망한 김확부인 동래정씨나 1656년 에 사망한 여흥민씨의 복식에 시문된 직물과는 또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 17세기의 전 기와 후기의 조형성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해평윤씨 묘에서 출토된 직물의 무늬 유형및 종류를 자세히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12) 먼저 옷감무늬 중에서 중심무늬( 主 紋 )를 근거하여 무늬의 유형을 식물무늬, 동물무늬, 자연 산수무늬, 기하무늬의 4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의 유형별로 다시 세분하였으며 중심무늬 외 에 보조무늬( 副 紋 )와 바탕무늬( 地 紋 ) 등 사용된 모든 무늬의 종류를 기록하였다. 또한 각각 의 무늬가 시문된 복식의 품목 및 부분명칭을 기록하고 무늬를 표현하기 위한 제직방법도 조사하여 한 눈에 무늬와 관련된 전체적인 자료를 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식물무늬는 앞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70여점의 문직물 중에 60%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 그 것은 저고리의 곁마기와 같이 작은 부분까지 포함하여 분석한 수치이고, 저고리의 길이 나 치마감 같이 복식의 중요부분에 사용한 무늬만을 조사하면 식물무늬가 82%나 된다. 즉 일반인들이 출토유물을 얼핏 볼 때 느끼는 식물무늬의 체감지수는 60%보다 더 많은 82% 나 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 시기에 식물무늬가 매우 많이 시문되었다고 느낀게 된다. 11) 조효숙(2006). 앞의 책, p.25. 12) 무늬의 유형을 분류할 때는 중심무늬를 기준으로 하였다. 예를 들어 포도다람쥐무늬는 포도의 범위 가 다람쥐 보다 크기 때문에 과실무늬의 유형으로 분류하였음. - 31 -

특히 이 시기에는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대부분이 2종류 혹은 3종류 이상의 소재를 결합하여 도안한 복합무늬로 구성되었다. 식물무늬는 다시 연꽃무늬, 모란무늬, 매화무늬, 사양화무늬, 수국무늬, 원화무늬, 과실무늬의 7가지로 세분되었다. 식물무늬의 소재가 된 꽃의 종류는 연꽃, 모란, 매화, 국화, 동백, 난초, 수국, 천도꽃, 석류꽃, 불수감꽃이 있다. 과실무늬에는 포도 무늬가 비교적 많았으나 포도 이외에 천도, 석류, 불수감도 중요한 소 재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 대나무나 영지도 식물의 보조무늬로 사용되었다. 식물무늬 유형 중에서는 연꽃무늬의 종류가 16점으로 가장 많은 출현빈도를 보이며 유 형은 연꽃넝쿨, 연꽃넝쿨+보배, 연꽃넝쿨+모란, 연꽃넝쿨+국화, 연꽃넝쿨+나비 등 5유 형으로 세분하였다. 전 시기와 유사한 조형성의 연꽃넝쿨무늬는 주로 예복용으로 쓰인 원 삼, 당의, 장치마, 회장저고리 등에서 많이 보인다. 예복에서 연꽃넝쿨무늬가 많이 사용된 이유는 이 무늬가 전 시기인 16세기의 대표적인 무늬이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연꽃넝쿨은 전통적의 이미지를 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시기의 연꽃의 조형성은 연꽃넝쿨 혹은 연 꽃넝쿨에 보배무늬를 보조무늬로 사용했던 전시기의 일률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모란, 국 화, 나비 등의 다양한 보조무늬와 함께 새로운 디자인이 나타난다. 모란무늬는 17세기 직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17세기 전기에 출토된 장기정씨나 여 흥민씨의 직물에 비하여 적게 나타난다. 모란무늬의 종류는 4점으로 모란넝쿨, 모란+국화 로 세분하였으며 모란만 단독으로 사용된 모란 넝쿨무늬는 저고리의 곁마기와 안고름에서 각각 1점씩 보이고 국화와 복합무늬로 시문된 것이 3점 보일뿐이다. 매화무늬도 17세기 유물부터는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데 해평윤씨의 직물에서는 3점으로 각각 절지형의 매화가지만 반복 배열한 것, 매화+곤충, 매화+대나무의 3유형이 보인다. 사양화무늬도 전시기의 이응해(1547~1626), 김확부인 동래정씨(1567~1631), 신경유(1581~ 1633)의 출토직물과는 달리 그다지 많이 시문되지 않아 2건만 보이는데 조형성도 17세기 전반기의 사양화무늬에서 변화되었다. 17세기 초기에서 중기까지 많이 보였던 4종류의 꽃 만을 회화풍구도 혹은 격자형구도로 깔끔하게 배열한 전형적인 사양화 무늬 13) 에서 여백에 보배무늬를 넣어 장식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5~7종의 식물이 결합되기도 하며 4종류의 꽃을 원문으로 디자인한 사례도 보이는 등 전 시기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이번 식물무늬의 특징 중의 하나는 둥근 원형으로 구성된 무늬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3) 조효숙 (2008). 조선시대 직물의 시기감정을 위한 꽃무늬 조형특성 연구. 복식 제58권 5호, p.99. - 32 -

1627년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를 시작으로 17세기의 가례도감의궤에 원문( 圓 紋 )이라는 기 록이 보이는데 14) 연꽃과 매화, 모란 등의 다양한 소재를 둥근형태의 단위무늬를 도안하여 드문드문 배열한 무늬를 일컫는다고 하겠다. 원화무늬의 종류는 6점이 보이는데 원문의 단 위무늬만 배열한것, 원문+보배의 2유형으로 세분된다. 과실무늬의 종류는 모두 8점으로 포도+다람쥐, 천도+천도꽃, 천도+석류, 천도+영지 의 4유형으로 세분하였다. 포도다람쥐 무늬는 주로 저고리의 길에 시문되었는데 기존의 포 도다람쥐무늬와 비교하여 형태도 특이하고 조직도 화문주에 시문된 것이 특이하다. 또한 이 유물에서는 여러 종류의 과실이 산재된 도안 보다는 천도, 석류, 불수 등으로 좁혀지기 시작했는데 조선후기의 도류불수무늬유형의 전조가 이 무렵부터 싹튼 것 같다. 동물무늬는 매우 적게 나타나 3점뿐으로 각각 봉황+꽃, 학+구름, 학+꽃으로 구성되었 다. 봉황이나 학이 중심무늬로 시문된 옷감들이었으나 모두 복식의 주요부분에 사용되기 보다는 당의나 저고리의 끝동, 저고리 안고름 등 극히 작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또한 식물 무늬에서도 원형무늬가 유행하였듯이 봉황과 학도 원문으로 디자인하여 중심무늬와 보조 무늬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복합 구성하였다. 용무늬와 나비, 벌의 곤충무늬도 나타나는 데 이들은 주로 자연산수무늬와 식물무늬의 보조무늬로 사용되었으므로 동물무늬로 구분 하지 않았다. 역시 이번에도 길짐승무늬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산수무늬의 종류는 모두 12점으로 구름, 구름+보배, 구름+꽃, 구름+반용, 물결+ 반용, 물결 등 6유형으로 세분된다. 구름만 단독으로 구성된 경우는 6점이며 보이는데 그 중에 2점이 동일하여 모두 5종류의 각각 다른 형태의 구름무늬가 나타났다. 다른 출토품에 비하여 구름무늬의 출현빈도가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대부분 저고리 끝동과 같은 작은 부 분에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번의 출토품이 여성의 것이므로 구름무늬의 선호가 낮으며 둘째, 시기적으로 17세기가 무늬의 다양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였기 때문에 구름무늬 가 전 시기에서만큼 중요한 소재가 되지 않았다. 구름무늬는 구름만 단독으로 표현한 것 이외에 보배무늬, 꽃, 반용무늬 등과 함께 복합구성된 것이 많고 형태도 사선형의 꼬리로 연결된 사합여의형 구름무늬 이외에 영지형의 구름과 실구름과 같은 변형이 보이는 등 구 름의 구성과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자연산수무늬 중에는 물결무늬 종류가 2점 발견 14) 조효숙 (2003). 동래정씨 흥곡공 일가 묘 출토직물에 관한 연구. 동래정씨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 경기도박물관, p.75-33 -

되었는데 한 점은 물결무늬만 단독으로 표현되었고 한 점은 반용무늬와 복합구성되었다. 기하무늬의 종류는 모두 14점으로 완자, 완자+식물, 완자+학, 완자+용, 마름무늬(능 화)의 5유형으로 세분하였다. 중복사용된 것 10점을 합하면 24건의 복식에 나타나므로 기 하무늬가 많이 나타난 점이 이번 출토유물의 특징이라 하겠다. 17세기 전기의 김확이나 김 여온, 여흥민씨와 같은 17세기의 직물에서 다양한 기하무늬가 많이 출현되었지만 유독 해 평윤씨의 유물에서는 완자무늬 바탕에 꽃이나 과실을 복합구성한 것이 많이 보이며 간혹 원학문이나 팔각형의 용무늬도 복합 구성되었다. <표 4> 무늬의 유형 및 종류 식 물 무늬유형 연 꽃 연꽃 넝쿨 연꽃 넝쿨 + 보배 연꽃 넝쿨 + 모란 연꽃 넝쿨 + 국화 무늬의 종류 복식의 중요부분사용 복식의 작은 부분사용 조직 직물명 연꽃 넝쿨 당의(9571)길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저고리(9570)길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소렴금(9582)깃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삼회장(9589)길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원삼(9572) 색동1,2거들지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삼회장(9589) 깃, 끝동, 곁마기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반회장(9592)끝동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반회장(9593)끝동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반회장(9595)끝동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보배 당의(9583)길 평직/ 2경교 화문사 원삼(9572)길 평직/ 2경교 화문사 치마(9616)길 평직/ 2경교 화문사 연꽃, 넝쿨, 보배 반회장(9600)끝동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넝쿨, 보배 반회장(9585)길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모란, 석류, 매화, 국화, 천도화 삼회장(9588)길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모란 삼회장(9591)끝동 5매수자 화문단 연꽃, 모란, 넝쿨(영지달림) 소렴금(9582)길 5매수자 화문단 연꽃, 국화 원삼대(9573) 5매수자 화문단 - 34 -

식 물 무늬유형 무늬의 종류 복식의 중요부분사용 복식의 작은 부분사용 조직 직물명 연꽃 연 넝쿨 꽃 + 나비 나비 저고리(9568)길 5매수자 화문단 모란 모란넝쿨 반회장(9594)곁마기 평직/경능 화문주 넝쿨 모란넝쿨 저고리(9604)안고름 5매수자 화문단 모 갑사바탕 모란, 국화 적삼(9615)길 평직/2경교 화문사 란 모란 삼회장(9588) + 모란, 국화 곁마기, 고름 국화 5매수자 화문단 모란,국화 치마(9616)말기, 끈 평직/4매경능 화문주 매화 매화 허리띠(9625)겉 평직/변화능 화문주 매 화 사 양 화 매화 + 곤충 매화, 나비, 벌 저고리(9606)길 평직/3매경능 화문주 매화 + 대나무 매죽, 보배, 동백 삼회장(9584) 깃, 곁마기, 끝동 사양화 사양화(국화, 매화, 연꽃, 모란) 보배무늬 포도/다람쥐, 매화/대나무, 석류꽃/새, 동백, 팔보 5매수자 화문단 치마(9617) 길 5매수자 화문단 삼회장(9584)길 5매수자 화문단 수 국 수국 수국 치마(9576)길 저고리(9568)끝동 5매수자 화문단 수국 5매수자 화문단 원화(연꽃) 단속곳(9574)길 평직/4매경능 화문주 원화(연꽃4, 매화3) 적삼(9567)길 평직/4매경능 화문주 원화(모란) 반회장(9594) 길=깃 평직/3매경능 화문주 원화 원화(매화, 난초, 저고리(9606)끝동 평직/4매경능 화문주 원 화 과 실 원화 + 보배 포도 + 다람쥐 모란, 불수감) 원화 (사합여의운, 월계) 반회장(9598)끝동 평직/3매경능 화문주 원화 의례용치마(9616)말기 평직/3매경능 화문주 원화1(연꽃/천도/천 도꽃), 원화2(모란/ 불수감/불수감꽃), 치마(9618)길 평직/3매경능 화문주 보선/석류, 특경, 보산, 영지, 보병 포도, 다람쥐 삼회장(9569)길 5매수자 화문단 포도, 다람쥐 반회장(9601)길 평직/3매경능 화문주 포도, 다람쥐 반회장(9593) 길, 곁마기 평직/3매경능 화문주 - 35 -

식 물 무늬유형 과 실 포도 + 다람쥐 천도 + 천도꽃 천도 + 석류 천도 + 영지 무늬의 종류 복식의 중요부분사용 복식의 작은 부분사용 조직 직물명 포도, 다람쥐 저고리(9605)길 평직/3매경능 화문주 포도, 다람쥐 원삼(9572)색동3, 한삼 5매수자 화문단 포도, 다람쥐 반회장(9596)안고름 5매수자 화문단 천도, 천도꽃 원삼(9572)한삼 5매수자 화문단 천도, 석류 대렴금(9587)길 5매수자 화문단 천도, 석류 저고리(9607)길 4매경능/6매위능 화문능 천도, 천도꽃, 영지 삼회장(9569) 깃, 끝동, 곁마기 5매수자 화문단 천도, 천도꽃, 영지 반회장(9585)곁마기, 깃 5매수자 화문단 천도, 천도꽃, 영지 삼회장(9591)곁마기 5매수자 화문단 봉황 +꽃 원형봉황, 모란, 월계, 난초 저고리(9604)끝동 5매수자 화문단 동물 학 + 구름 학 + 꽃 학2종, 유운 당의(9583)끝동, 동정 평직/2경교 화문사 원형학, 꽃 저고리(9569)안고름 평직/4매경능 화문주 자연 산수 기하 구름(영지운) 반회장(9600)길 3매경능/6매위능 화문능 구름(영지운) 반회장(9596)끝동 3매경능/6매위능 화문능 구름 구름 대렴금(9587)깃 변형능/4매경능 화문능 구름 저고리(9605)끝동 5매수자 화문단 구름(사운) 반회장(9569)고름 5매수자 화문단 구름(사운) 당의(9580)고름 5매수자 화문단 구름 + 구름,보배 저고리(9570)안고름 5매수자 화문단 보배 구름,보배 저고리(9608) 끝동 5매수자 화문단 구름 + 구름, 국화, 모란 반회장(9596)길 3매경능/6매위능 화문능 꽃 구름 + 구름, 반용 저고리(9600)깃 5매수자 화문단 반용 구름, 반용 저고리(9569)겉고름 5매수자 화문단 물결 물결, 반용문 반회장(9592)길 5매수자 화문단 + 반용 물결, 반용문 반회장(9595)안고름 5매수자 화문단 물결 물결 장옷(9581)삼각무 평직/3매경능 화문주 완자 당의(9571)겉고름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완자 반회장(9592)곁마기, 깃 5매수자 화문단 완자 반회장(9595)곁마기, 깃 5매수자 화문단 완자 반회장(9585)겉고름 평직/3매경능 화문주 - 36 -

무늬유형 기하 완자 바탕 + 식물 완자 바탕 + 원학문 완자 바탕 + 팔각용 마름 무늬 (능화) 무늬의 종류 복식의 중요부분사용 복식의 작은 부분사용 조직 직물명 완자, 국화, 난초 단속곳(9575)길, 선단 5매수자 화문단 완자, 국화, 난초 자수저고리(9579) 길, 깃 5매수자 화문단 완자, 국화, 난초 치마(9586)길 5매수자 화문단 완자, 국화, 난초 반회장(9595)길 5매수자 화문단 완자, 국화, 난초 반회장(9592)안고름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엽전, 모란잎 저고리(9604)길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작은국화, 석류 자수저고리(9579)섶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천도, 국화, 영지 당의(9571)거들지 4매경능/4매위능 화문능 완자, 모란, 난초 반회장(9594)끝동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원화문(석류, 국화, 천도, 영지) 저고리(9606)안고름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원형학 반회장(9593)깃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원형학 반회장(9601)깃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원형학 저고리(9605)겉고름 5매수자 화문단 완자, 원형학 단속곳(9575)고름 5매수자 화문단 완자, 팔각용 당의(9583)겉고름 평직/4매경능 화문주 능화 삼회장(9589)겉고름 평직/4매경능 화문주 능화 반회장(9592)겉고름 평직/3매경능 화문주 능화 당의(9571)안고름 평직/4매경능 화문주 능화 반회장(9600)겉고름 평직/4매경능 화문주 Ⅳ. 무늬의 조형특성 해평윤씨 묘의 직물에 사용된 무늬의 유형은 앞 단원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식물무늬, 동물무늬, 자연산수무늬, 기하무늬의 4가지 유형이다. 이 단원에서는 각 유형별로 대표적 이거나 특징적인 무늬를 골라 조형특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 37 -

1. 식물무늬 1) 연꽃무늬 연꽃무늬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삼국시대부터 각종 공예품 무늬로 활용되었으며, 고려시 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가장 사랑을 받았던 직물 무늬이었다. 연꽃은 불교에서는 청아 순수함의 상징물이며, 유교에서는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을 상징 하고, 도가( 道 家 )에서는 팔선( 八 仙 ) 가운데 하나인 하선고( 荷 仙 姑 )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신령스러운 꽃이다. 또한 환생( 還 生 )과 재생( 再 生 )을 상징하기도 하며, 군방보( 群 芳 譜 ) 에 서는 식물은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으나, 연꽃은 꽃과 열매가 함께 나란히 생겨난다 고 하여 연생( 蓮 生 ), 곧 연이어 자손을 얻는다 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 에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연꽃무늬가 옷감 전체에 가득 차게 도 안된 옷감을 매우 선호했다. 16세기 직물무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연꽃무늬 도안은 연꽃의 주위를 만초 넝쿨이 둥 글게 감고 있는 형태인 연꽃넝쿨무늬 [ 蓮 花 蔓 草 紋 ]이며, 여백에 보배무늬를 넣어 충전감을 더한 것도 있다. 그러나 17세기에서 18세기 중기까지는 연꽃무늬의 구성방법과 표현양식 이 다양화되는 시기이며 역시 해평윤씨 유물에서도 다양한 연꽃의 조형성이 보인다. 연꽃 넝쿨 혹은 연꽃넝쿨에 보배무늬를 보조무늬로 사용했던 전시기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벗어 나 점차 다양화 되어 모란, 국화, 나비 등의 다양한 보조무늬와 함께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림 14>는 원삼과 의례용 장치마, 당의에 사용된 연꽃무늬 화문사이다. 바탕은 2올의 경사가 교차된 익조직으로 투명하게 표현하고 무늬는 평직으로 불투명하게 도안하였다. 연 꽃넝쿨+보배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로 측면형으로 도안한 2종류의 연꽃이 좌우 방향을 달 리하여 한줄 씩 엇갈리게 배열되었으며 그 주변에 팔메트형 넝쿨과 사실적인 둥근 연잎, 연밥이 들어있다. 또한 여백에는 만자, 보주, 은정, 서책의 보배 작은 무늬들이 시문되어 충전감을 더하였다. 전 시기의 연꽃넝쿨무늬에 비하여 연꽃이 좀 더 곡선적이고 팔메트형 넝쿨이 장식적으로 도안되었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170mm, 위사방향 105mm 이다. <그림 15>는 저고리(9568)의 겉감에 사용된 연화문단이다. 5매 수자직으로 제직되었으 - 38 -

며 경수자직 바탕에 위수자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두 가지 형태로 도안된 보상화풍의 정면형 연꽃을 한 줄씩 엇갈리게 배열하고, 그 주위를 팔메트형 잎과 만초넝쿨이 감싸고 잇으며 연꽃의 상단과 하단에 날개를 활짝 핀 나비가 정교하게 시문되어있다. 출토복식에 서 처음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의 보상화풍 화문으로 연꽃의 표현이나 나비의 모습에서 전 체적으로 기교있는 장식성을 강하게 풍긴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170mm, 위사 방향 135mm로 매우 큰 무늬이다. <그림 14> 연꽃넝쿨+보배, 당의(9583) 길 <그림 15> 연꽃넝쿨+나비, 저고리(9568) 길 <그림 16>은 저고리(9573)의 고름에 사용된 화문단으로 5매 수자직으로 제직되었으며 경수자직 바탕에 위수자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연꽃과 국화가 동일한 크기로 시문되었 으며 여백에는 서각의 보배무늬가 보인다. 연꽃은 측면형의 사실적으로 표현한 연꽃과 연 밥이 팔메트풍의 잎으로 연결되었고, 국화도 꽃과 잎사귀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고름에 사용된 작은 면적이라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 향 280mm나 되는 매우 큰 단위의 무늬이다. <그림 17>은 소렴금(9582)의 길에 사용된 화문단으로 연꽃과 모란이 시문되었으며 부드 러운 C자형의 넝쿨줄기가 연꽃과 모란을 연결하고 있다. 연꽃의 줄기에는 연밥과 영지, 팔 메트형 잎이 연결되었고 모란의 줄기에는 전형적인 모란 잎사귀가 시문되었다. 연꽃은 구 련화의 모습으로 꽃잎의 외곽은 뽀족하고 안쪽은 둥글게 휘감겨있으며 모란은 측면형이 사 - 39 -

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넝쿨줄기가 가는 곡선으로 부드럽게 꽃들을 연결하고 여백에 다른 보배무늬가 들어있지 않아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단아한 느낌이 난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 는 경사방향 170mm, 위사방향 135mm이다. <그림 16> 연꽃넝쿨+국화, 저고리(9573) 고름 <그림 17> 연꽃넝쿨+모란, 소렴금(9582) 길 2) 모란무늬 모란은 꽃잎이 탐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에 화왕( 花 王 )이라고 하며,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 라 하여 부귀화( 富 貴 花 )로도 불렸다. 모란은 중국산의 식물로 우리나라에서 함박꽃이라고 부르는 작약과 외형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모란은 목본( 木 本 )이고 작약은 초본( 草 本 )인 점이 다르다. 모란은 연꽃과 함께 직물 무늬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였는데 16세기는 연 꽃무늬의 유행에 밀려 주요 소재로 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서 모란무늬 는 장기정씨(1565~1614)를 비롯하여, 여주에서 출토된 동래정씨(1600년대)와 남양홍씨 (1584~1654), 일영에서 출토된 양천허씨(1566~1626) 등 여러 곳의 출토유물에서 갑자기 많 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해평윤씨의 유물은 17세기 말기라 그런지 모란 무늬가 많이 보이지 는 않았다. 모란만 단독으로 사용된 경우는 저고리(9594, 9604)의 곁마기나 고름과 같이 작 은 부분이었고 갑사로 만든 적삼에서 모란과 국화가 넝쿨에 감겨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40 -

<그림 18>은 적삼(9615)에 사용된 화문갑사이다. 평직과 2올의 경사가 교차된 익조직으 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 직물은 일반적인 화문사의 조직과는 달리 위사를 위 아래로 지그 재그로 넣어 짠 갑사바탕에 평조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여 무늬의 외곽선이 선명하지 못하 다. 정면형의 국화와 모란을 한 줄씩 교대로 배열하고 가느다란 C자형의 넝쿨줄기로 연결 하였다. 넝쿨줄기에는 여러 모습으로 도안한 잎사귀만을 더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340mm이상, 위사방향 150mm정도로 매우 큰 무늬이다. 3) 수국무늬 수국은 작은 꽃잎이 가득 붙어있는 화려한 생김새로 인하여 풍요와 부귀를 상징하게 되 었다. 중국에서는 수구화( 繡 球 花 )라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는 수국의 모양이 불상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불두화( 佛 頭 花 )라 부르기도 한다. 전통직물 무늬에서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 지는 않았지만 17~18세기 회화풍의 무늬가 유행할 때 주로 모란과 조화를 이루며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이번 유물에서는 1점만 발견되었다. <그림 18> 모란+국화, 적삼(9615) 길 <그림 19> 수국, 치마(9576) 길 <그림 19>는 치마(9576)에 사용된 화문단이다. 5매 수자직으로 제직되었으며 경수자직 바탕에 위수자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작은 꽃잎이 탐스럽게 붙어있는 정면형과 측면형 - 41 -

두 형태의 수국을 한 줄씩 교대로 배열하고 가느다란 C자형의 넝쿨줄기로 연결하였다. 넝 쿨줄기에는 잎사귀만을 더하고 여백에 다른 무늬를 넣지 않아 수국꽃의 화려함을 강조하였 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205mm, 위사방향 90mm로 비교적 큰 무늬이다. 4) 매화무늬 매화는 겨울을 이기고 봄에 홀로 핀 고고한 자태로 인하여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고난을 견디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로 비유되어 조선후기에 유행하였다. 대나무와 함께 매죽( 梅 竹 ) 의 구성, 까치와 함께 매작( 梅 鵲 )의 구성이 있으며 1690년에 편찬한 역어유해( 譯 語 類 解 ) 에 기록된 蜂 間 梅 로 쓰고 벌이 매화 로 문 15) 이라 설명한 직물명에서와 같이 매화와 함께 도안된 벌, 나비의 모습도 보인다.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는 3건이 매화가 중심무늬로 도안되었는데 매화만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나비와 벌과 같은 곤충이나 대나무, 동백 등 다른 소재와 복합무늬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림 20>은 치마(9625) 허리띠용 화문주이다. 평직바탕에 변화능직으로 매화를 표현하 였다. 매화의 형태는 굵은 가지에 활짝 핀 매화와 봉우리진 매화가 달린 모습을 가지형의 단독 모티브로 도안하여 30mm의 간격을 두고 위사 방향으로 규칙적 배열하였다. 매화무늬 의 1회 반복단위는 위사방향으로 125mm이며 경사방향은 확인학수 없으나 상당한 거리를 두고 드물게 배열되었다. 매화무늬의 크기는 70 90mm이다. <그림 20> 매화, 허리띠(9625) 길 <그림 21> 매화+곤충, 저고리(9606) 길 15) 譯 語 類 解 下, 織 造 - 42 -

<그림 21>은 저고리(9606)용 화문주로 평직바탕에 3매 경능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가 는 가지에 활짝 핀 매화와 봉우리가 달린 모습을 크고 작은 2 종류의 모티브로 도안하여 한 줄씩 교차되는 격자형으로 배열하였고 여백에 나비와 벌을 넣어 꽃을 따르는 모습을 자연 스럽게 묘사하였다. 그야말로 역어유해( 譯 語 類 解 ) 에 기록된 蜂 間 梅 의 무늬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매화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으로 470mm이며 위사방향으로 800mm이다. 5) 사양화무늬 사양화 무늬는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세화만초무늬( 細 花 蔓 草 紋 ) 와 같이 조선전 기에 많이 출토되었던 4 종류의 작은꽃 무늬( 細 花 )무늬에서 발전한 것으로 17세기의 직물 에서는 4 종류 꽃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사양화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17세 기 이응해(1547~1626), 김확부인 동래정씨(1567~1631)의 유물을 비롯하여 여러 출토직물 에서 4 종류의 꽃을 사실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된 사양화무늬가 많이 발견된다. 네 가지 무 늬가 있다하여 사양화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사계절의 꽃이 모여있다 하여 사계화라고 부 르기도 한다. 그러나 17세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이번 유물을 비롯하여 사천목씨(1657~ 1699)의 유물에서는 사양화 조형성의 새로운 변화가 보인다. 전 시기에는 모두 4종류의 꽃 으로만 단아하게 구성되었던 경향과는 달리 사양화 무늬 사이에 보배무늬가 들어가거나 7 종류의 꽃을 네 그룹으로 엮은 복잡한 조형성으로 변화되었다. 이번 해평윤씨의 유물에서 는 2점의 사양화무늬가 보이는데 모두 좀 더 장식적이고 복잡한 조형성을 보인다. <그림 22>는 치마(9617)에 사용된 화문단이다. 5매 경수자직 바탕에 5매 위수자로 사양 화 무늬를 표현하였다. 가지형의 매화, 모란, 연꽃, 국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도안하여 산재 배열하였고 여백에는 산호, 서각, 보배, 은정, 방승 등의 보배무늬를 넣어 충전감을 강하게 주었다. 매화는 겨울을, 모란은 봄을, 연꽃은 여름을, 국화는 가을을 상징하여 사계절을 표 현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295mm이상, 위사방향 225mm정도로 매우 큰 무 늬이다. <그림 23>은 저고리(9584)의 길에 시문된 사양화무늬로 이제까지 보아온 사양화 무늬와 다른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일반적인 사양화무늬는 매화, 연꽃, 모란, 국화와 같이 꽃만 각 각 한 종류씩으로 하여 4 가지 꽃으로 구성되었으나 여기에서는 7종류의 꽃을 네 그룹 으로 엮은 복잡한 조형성으로 변화되었다. 첫째 그룹은 매화에 대나무을 넣어 매죽으로 표 - 43 -

현하고, 둘째는 석류꽃에 새를 넣어 화조무늬로 표현하고, 세째는 꽃 이외에 포도와 다람 쥐를 넣어 포도다람쥐로 표현하였으며, 네째만 동백단독으로 시문되었다. 이러한 무늬의 표현은 기존의 사양화무늬에서 변화를 꾀한 것으로서 이제까지의 출토유물에서 처음 발견 된 무늬라 하겠다. 여백에는 역시 금정, 은정, 서각, 방승, 산호, 전보, 영지 등의 다양한 보 배무늬를 넣어 충전감을 더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340mm, 위사방향 105 mm정도로 매우 큰 무늬이다. <그림 22> 사양화, 치마(9617) 길 <그림 23> 사양화, 저고리(9584) 길 6) 원화무늬( 圓 花 紋 ) 원화무늬는 여러 종류의 꽃, 보배무늬 등을 둥근 원형이나 타원형의 단위무늬로 도안한 것으로 17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8세기에는 매우 유행하게 된다. 해평윤씨의 유물에서 도 6종류 원화문이 보이는데 원문만 단순하게 배열한 것과 둥근 원문 사이에 보배무늬를 넣은 것도 있다. 대부분 평직바탕에 능직으로 무늬를 표현한 화문주에 많이 나타난다. 해평 윤씨의 유물에서도 7점이 모두 화문주에서 보인다. 1627년에 쓴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昭 顯 世 子 嘉 禮 都 監 儀 軌 ) 를 시작으로 17세기 가례도감 의궤에 노의용 원문남필단( 圓 紋 藍 疋 - 44 -

緞 )과 같은 명칭이 예복용 직물에 나오는데 이러한 궁중의 무늬가 일반직물에서도 원문을 유행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림 24>는 치마(9618)에 사용된 화문주이다. 평직 바탕에 3매 경능직으로 무늬를 표 현하였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조형성으로 일반적인 원문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중심무늬는 2종류의 원문이 교대로 배열되었는데 하나는 연꽃, 천도, 천도꽃의 3종류를 원 형으로 도안하였고 다른 하나는 모란, 불수감, 불수감꽃의 3종류를 원형으로 도안하였다. 원문 사이의 여백에는 보배무늬를 보조무늬로 넣어 충전감을 강하게 표현하였는데 보선( 寶 扇 ), 특경( 特 磬 ), 보산( 寶 傘 ), 영지( 零 芝 ), 보병( 寶 甁 ), 방승( 方 勝 ) 등의 보배무늬들이 석류, 천도, 연꽃, 매화 등과 복합구성을 이루어 매우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295mm, 위사방향 150mm정도로 매우 큰 무늬이다. <그림 25>는 단속곳(9574)과 적삼(9567)에 사용된 화문주이다. 평직 바탕에 4매 경능직 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그림 24>의 원화에 비하여 단아하고 규칙적인 느낌을 준다. 중 심무늬는 2종류의 원화가 교대로 배열되었는데 하나는 연꽃을 둥글게 도한하고 다른 하나 는 매화를 둥글게 도안하여 한 줄씩 교대로 이루어졌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으로는 알 수 없으며 위사방향으로는 110mm정도이다. 단위무늬로 사용된 원문의 크기는 73 80mm이다. <그림 24> 원화+보배, 치마(9618) 길 <그림 25> 원화, 단속곳(9574) 길 - 45 -

7) 과실무늬 직물에서의 과실무늬는 17~18세기에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도 모두 8종류의 과실무늬가 나타났다. 가장 많은 것이 포도와 청솔모로 구성된 포도다람쥐 무늬이며 16) 다음으로 천도무늬인데 천도와 천도꽃, 석류, 영지와 복합 구성되었다. 포도는 열매가 많고 덩굴이 뻗어나가는 형태적 특징 때문에 풍요, 부( 富 ), 다자( 多 子 )를 상징하는 무늬로 사용되었다. 특히 12세기 전반의 고려 상감청자에는 포도덩굴 사이에 동 자가 매달려 노는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16~18세기 조선시대의 옷감에서도 포도무늬가 한동안 유행하였다. 일반적으로 포도넝쿨만 단독으로 구성하기보 다는 주로 동자( 童 子 ) 또는 청솔모와 함께 복합무늬로 표현하였으나 1633년에 사망한 신경 유의 도포에서와 같이 동자나 청솔모의 보조무늬 없이 포도넝쿨무늬만 도안하기도 하였다. 포도와 동자의 결합은 치마나 원삼의 스란단에 시문되었고, 포도와 청솔모의 결합은 17~18 세기 여성용 당의, 저고리, 치마용 화문단 무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해평윤 씨의 것은 특이하게도 화문주에 시문된 것이 3점이 있었으며 포도와 청솔모의 형태도 독 특하다. 천도와 석류, 불수의 삼다무늬는 장수, 다산, 다복을 의미하면서 19세기에 도류불수 무 늬로 정형화되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늬로 자리잡게 되는데 사실은 17세기 후기부터 초기 단계가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세 가지 과실이 함께 사용되지 않고 천도만 단독으로 도안하거나 천도와 석류를 복합구성하였으며 그 외에 천도와 영지의 구성도 가끔 보인다. <그림 26>은 3점의 저고리(9593, 9601, 9605)에 사용된 화문주이다. 평직 바탕에 3매 경 능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번 유물에서는 저고리 4점에 포도다람쥐 무늬가 시문되었 는데 3점은 화문주에 시문되었고 1점은 화문단에 시문되었다. 화문단 저고리(9569)에 시문 된 것은 <그림 27>에서와 같이 이제까지 많이 출토된 일반적인 포도다림쥐 무늬인데 반하 여 화문주에 시문된 포도 다람쥐 무늬는 포도알이 크고 숫자는 적게 달렸으며 그 안에 작 은 꽃무늬와 포도씨와 같은 도안이 들어있고 청솔모의 꼬리도 마치 여지와 같이 동그랗고 표면의 입체감을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135mm이상, 위사 방향 105mm정도이다. 16) 이러한 무늬는 일반적으로 청솔모를 다람쥐와 구분하지 않고 큰 범위에서 포도다람쥐 무늬라고 하였다. - 46 -

<그림 28>은 저고리(9607)에 사용된 화문능이다. 4매 경능직 바탕에 6매 위능직으로 과 실무늬를 표현하였다. 과실무늬는 2 종류의 단위무늬를 만들어 줄을 바꿔가며 교대로 나란 히 규칙배열 하였는데 한 줄에는 천도에 천도꽃 도안을 수평으로 배열하고 다른 줄에는 석 류에 석류꽃 도안을 수평으로 배열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으로 매우 멀리 배열하여 실제 계측이 어렵고, 위사방향으로는 133mm이다. 단위무늬로 사용된 천도, 석류 무늬의 크기는 98 108mm이다. <그림 26> 포도+다람쥐, 저고리(9601) 길 <그림 27> 포도+다람쥐, 저고리(9569) 길 <그림 28> 석류+천도, 저고리(9607) 길 <그림 29>는 원삼(9572)의 한삼에 사용된 화문단이다.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자직 으로 천도무늬를 표현하였다. 천도와 천도꽃이 사선의 가지에 연결되었다. 이와 동일한 무 - 47 -

늬가 1699년에 사망한 사천목씨의 저고리에서도 보이고 이보다 10여년 후의 1712년에 사 망한 남오성의 지요에서도 보인다. 1720년에 사망한 안동권씨의 치마에는 <그림 30>에서 와 같이 석류와 석류꽃을 이와 같은 굵은 가지의 사선 연결구성으로 배열한 유물이 발견되 었다. 이처럼 1700년 전후해서는 한 가지 과일로 구성된 충전형의 과실무늬가 나오기 시작 하여 점차 천도, 석류 불수의 3가지 과실로 구성된 19세기 도류불수무늬로 변화해 간다고 생각된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140mm이상, 위사방향 135mm정도이다. <그림 29> 천도+천도꽃, 원삼(9572) 한삼 <그림 30> 석류+석류꽃, 치마 (안동권씨) <그림 31>은 저고리(9591)의 곁마기에 사용된 화문단이다.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자직으로 과실을 표현하였다. 이 무늬는 주로 곁마기나 깃 에 사용되어 전체적인 구성은 알 수 없으나 천도 와 천도꽃에 영지를 같이 복합구성한 점이 특이하 다. 이와 같은 무늬가 1699년에 사망한 사천목씨 의 저고리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림 31> 천도+영지, 저고리(9591) 곁마기 - 48 -

2. 동물무늬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는 동물무늬가 4%정도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 않았다. 봉황과 꽃, 학과 구름, 학과 꽃의 3종류의 동물무늬가 보이지만 모두 저고리의 끝동이나 안고름 등 작은 부분에 일부 사용되었을 뿐이다. 1) 봉황무늬 우리나라 직물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봉황무늬는 1302년 아미타불에 복장된 능( 綾 ) 직물 의 무늬로, 실같이 가는 구름( 絲 雲 ) 사이로, 단순하게 도안화된 한 쌍의 봉황이 방향을 달 리하여 날고 있는 모습이다. 그 외에 장곡사 철조약사불 복장물에도 구름사이를 날고 있는 봉황이 있으나 이들 모두 조선시대의 봉황과 같이 화려한 형태의 봉황이 아니고 봉황의 특 징을 최소화하여 작고 단순하게 도안하였다. 신분에 따라 복식의 규제가 심화되었던 조선시대에는 봉황무늬는 용무늬와 함께 높은 신분을 상징하여서 조선전기에는 옷감에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꽃과 새 무늬가 유 행하였던 17세기부터는 사양화와 같이 직물에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광해군비 (1576~1623년) 저고리의 단( 緞 ) 직물에도 봉황이 꽃 사이를 날고 있으며 이러한 무늬를 역 어유해 에서는 천화봉문( 穿 花 鳳 紋 ) 이라 쓰고 봉이 곳 ㅣ나드 문 이라 언해하였다. 1627 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昭 顯 世 子 嘉 禮 都 監 儀 軌 ) 등 17세기의 의궤에도 화봉문단( 花 鳳 紋 緞 ) 이 여러차례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무늬의 비단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32>는 저고리(9604) 끝동에 시문된 무늬로 원형봉황을 격자로 배열하고 모란과 난초를 여백에 배열하였다. 2) 학무늬 학은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선비의 청렴한 기상을 뜻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졌으며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하기도 하여 많은 공예품에 사랑받아온 소재이다 직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나타나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17세기 무렵부터 구름과 꽃들과 같이 디자인된 직물유물이 나타나며 - 49 -

가례도감의궤 에도 운학문, 화학문의 직물명칭이 기록되었다. <그림 33>은 당의 끝동(9583)에 사용된 화문갑사이다. 평직과 2올의 경사가 교차된 익 조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 직물은 위사를 위 아래 지그재그로 넣은 갑사무늬 바탕에 평조직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불로초를 부리에 물고 날아가는 측면형의 학을 한 줄씩 방 향을 바꿔가며 나란히 배열하고 사이의 여백에는 만자모양의 꼬리를 한 사합여의운( 四 合 如 意 雲 )을 배열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경사방향 170mm이상, 위사방향 65mm이다. <그림 32> 봉황+꽃, 저고리(9604) 끝동 <그림 33> 학+구름, 당의(9583) 끝동 3. 자연산수무늬 조선시대 직물에 나타난 자연산수무늬는 대부분이 구름무늬이며 약간의 물결무늬가 있 다.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도 10종류의 구름무늬와 2종류 물결무늬가 보인다. 다른 출토품에 비하여 구름무늬의 출현빈도가 많지 않으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 50 -

1) 구름무늬 구름은 고려시대 직물에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서 옷감의 무늬 중에 매 우 중요한 소재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가례도감의궤 등 17세기의 중요한 문헌에는 대 부분의 무늬 있는 옷감을 통칭하여 유문단( 有 紋 緞 )이나 화문단( 花 紋 緞 )으로 적을 때에도 구름무늬만은 특별히 옷감의 종류별로 운문사, 운문라, 운문단이라고 기록하였던 점은 조 선시대에 구름무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 직물의 구름무늬 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태의 비운( 飛 雲 )이나 불로초 모습의 영지운( 靈 芝 雲 )이 많았으나, 조선시대에는 네 개의 여의가 모인 형태의 사합여의운( 四 合 如 意 雲 )이 대세를 이룬다. 그러 나 이번 해평윤씨 유물에서 보이는 구름무늬는 사합여의형 이외에 영지형의 구름, 실과 같 은 사운 등 다양한 모습이 보이고, 여백에 보배무늬, 용무늬, 꽃무늬와 함께 독특한 복합구 성을 이룬 것도 있다. <그림 34>는 저고리(9600)용 화문능으로 3매 경능직 바탕에 6매 위능직으로 구름무늬를 표현하였다. 구름은 영지형의 구름이 사선방향으로 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보편 적인 조선시대 사합여의형 구름무늬에 비하여 단아하면서도 역동적인 독특한 조형성을 보 인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900 600mm이다. <그림 35>는 저고리(9596)용 화문능으로 3매 경능직 바탕에 6매 위능직으로 구름무늬를 표현하였다. 영지형의 구름에 모란과 국화가 함께 시문된 독특한 조형성을 보인다. <그림 31>의 구름무늬와 조직이 동일하며 무늬의 조형성도 유사하여 같은 작업장에서 생산된 것 으로 생각되며 17세기는 능직이 유행하던 시기라서 구름무늬도 화문능으로 생산한 점이 매우 흥미롭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700 240mm이다. <그림 36>은 대렴금(9587)용 화문단으로 구름무늬는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사합여의 형 운두에 만( 卍 )자형의 꼬리가 사선으로 연결되었다. 여백에 보배무늬가 들어있는 것에 비하여 단순하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265 143mm이다. <그림 37>은 저고리(9607) 끝동에 사용된 화문단으로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자직 으로 구름을 표현하였다. 조선시대에 가장 대표적인 조형으로 사합여의형 운두에 만( 卍 )자 형의 꼬리가 사선으로 연결되었으며 여백에 금정, 서각, 방승, 전보 등 다양한 보배무늬가 들어있어 화려하고도 충전감이 강하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115 110mm이며, 운두의 크 기는 77 55mm이다. - 51 -

<그림 34> 구름, 저고리(9600) <그림 35> 구름+꽃, 저고리(9596) <그림 36> 구름, 대렴금(9587) 길 <그림 37> 구름+보배, 저고리(9608) 끝동 2) 물결무늬 조선시대 직물에 물결무늬는 매우 드물게 보인다.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도 물결무늬 바 탕에 타원형의 반용무늬가 격자로 복합 배열된 무늬 1점과 장옷의 겨드랑이 무에 사용한 물결무늬 1점이 조금 보일뿐이다. <그림 38>은 저고리(9592)용 화문단으로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자직으로 물결을 - 52 -

표현하였다. 물결무늬는 부채꼴모양으로 연속 배열하여 마치 기하무늬와도 같이 바탕에 깔 려있고 타원형 안에 작은 용무늬를 넣은 반용 ( 盤 龍 )무늬 17) 가 격자형으로 드문드문 배열되 었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세로방향으로 55 mm, 가로방향으로 50mm이며, 반용무늬의 크기 는 15 25mm로 매우 작아 용의 특성을 자세히 표현하지 못하였다. 마치 고려시대의 능무늬 바탕에 반용무늬를 시문한 옷감과 조형성이 매우 유사하다. <그림 38> 물결+반용, 저고리(9592) 길 4. 기하무늬 해평윤씨의 유물에서 기하무늬의 종류는 모두 14점이 나왔으며 완자, 완자+식물, 완자 +학, 완자+용, 마름무늬(능화)의 5유형으로 세분하였다. 중복사용된 것 10점을 합하면 24 건이 복식에 시문되었으므로 기하무늬가 다른 유물에 비하여 많이 나타난 것도 하나의 특 징이라 하겠다. 조선 17세기 무렵에 능직물이 많아지면서 기하무늬는 바탕을 이루는 보조 무늬가 아니고 중심무늬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17세기를 대표하는 김확이나 김여온, 여흥 민씨의 직물에서는 전 시기의 출토직물에 비하여 단순한 형태의 기하무늬가 많이 출현되었 다. 그러나 해평윤씨의 직물에서는 기하무늬 중에서도 완자무늬 바탕에 꽃이나 과실과 같 은 식물무늬가 복합된 디자인이 많이 보이며 간혹 원형의 학무늬와 팔각형의 용무늬도 복 합 구성되었다. 이처럼 기하무늬 바탕에 단순한 보조무늬가 드문드문 전개된 구도는 중국 송대에 유행하였던 금무늬 바탕에 연꽃이나 모란무늬를 첨가하는 금상첨화 무늬에서 변화 된 형태라고 생각되며 금상첨화의 어원도 이러한 직물무늬에서 유래되었다. 18) 완자무늬 17) 고려시대부터 마름모 참외의 단면과 같은 원형의 과무늬 속에 용무늬나 새무늬를 도안한 무늬가 많 이 남아 있으며 문헌에 쟁반이나 받침을 뜻하는 반( 盤 )이라는 용어를 써서 반용문이라는 기록이 있 어 이러한 무늬의 명칭을 반용문으로 사용하였다. 중국의 영조법식 에서는 반이라는 용어 대신에 동물의 집, 보금자리라는 뜻의 과( 窠 )라는 용어를 써어 이러한 형태의 무늬를 호칭한다. - 53 -

이외에 마름무늬( 菱 紋 )는 4점이 보이는데 모두 고름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마름무늬 속에 꽃잎을 넣어 능화문이라고 부른다. 1) 완자무늬 완자무늬는 만( 卍 )자를 사선사방으로 연결하여 영원히 이어져 나가는 영속성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만자문 혹은 사격자문 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조선 말기의 궁중 사용 물품을 적은 의 긔 에는 완 라는 기록 이외에 문창살을 의미하는 접문( 楪 紋 ) 혹은 화접문 ( 花 楪 紋 )이라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19) 접문은 완자무늬만 단독으로 시문된 것이고 화접 문은 완자무늬 바탕에 꽃이나 과실과 같은 식물무늬가 복합된 디자인된 무늬로 볼 수 있다. <그림 39>는 저고리(9592) 곁마기용 화문단으로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자로 완자 무늬를 시문하였다. 전체적으로 만( 卍 )자를 사선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도안하였으며 다른 무늬 없이 단독으로 사용되었다. 주로 저고리의 곁마기, 깃, 고름 등의 작은 부분에 사용하 였다. 1633년에 사망한 신경유의 출토복식에는 중치막 겉감을 이 무늬로 하였는데 남성의 절제된 느낌을 주므로 여자 옷에는 중요부분에 쓰기 보다는 남은 옷감을 작은 부분에 이용 했던 것 같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세로방향으로 12mm, 가로방향으로 24mm이다. <그림 40>은 치마(9592) 길과 곁마기에 사용된 화문단으로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 자로 완자무늬를 시문하였다. 그 외에도 단속곳, 자수저고리, 반회장저고리의 등 중요한 복 식에 동일한 옷감이 사용되었다. 바탕에 만( 卍 )자를 사선으로 뻗어나가게 도안하였으며 그 위에 난초와 국화를 교대로 배열하였다. 17~18세기 직물 중에 완자무늬를 바탕무늬로 사 용되고 그 위에 같이 구름, 꽃과 같은 중심무늬를 드문드문 배열한 금상첨화 구도의 무늬 가 많이 보인다. 이러한 유형의 화접문( 花 楪 紋 )은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세로방향으로 90mm, 가로방향으로 55mm이며 단위꽃무늬는 37 43mm정도이다. 이 저고리의 곁마기에는 <그림 41>에서와 같이 매화, 새, 나비, 벌, 쌍서 각, 서책, 전보, 호리병 등이 자수되었다. <그림 42>는 당의(9571) 거들지용 화문능으로 4매 경능 바탕에 4매 위능으로 완자무늬 를 시문하였다. 바탕에 만( 卍 )자가 <그림 40>에 비하여 부드럽게 깔려있으며 그 위에 천 18) 조효숙 (2006), 앞의책, p.162. 19) 의 긔. - 54 -

도, 국화, 영지를 드문드문 배열하였다. 1665년에 사망한 김여온의 유물 중에 소창의용 화 문능이 이와 유사한 조형성을 보이며 직물조직도 같다. 수자직으로 무늬를 표현할 때 보다 능직으로 표현한 완자무늬가 부드럽고 덜 선명하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세로방향으로 90mm, 가로방향으로 55mm이며 단위꽃무늬는 37 43mm정도이다. <그림 43>은 저고리(9604) 길에 사용된 화문단으로 5매 경수자 바탕에 5매 위수자로 완 자무늬를 표현하였다. 바탕에 만( 卍 )자가 부드럽게 깔려있으며 그 위에 엽전과 모란 잎사 귀를 격자로 배열한 매우 독특한 무늬이다. 1690년에 사망한 최원립의 직물에서는 이와 유 사한 완자무늬사이에 태극무늬가 배열된 것도 발견되었는데 이 무렵 완자무늬 바탕에 다양 한 무늬를 복합하여 도안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는 세로방향으로 60 mm, 가로방향으로 44mm이다. 2) 마름무늬 <그림 44>은 저고리(9592) 고름에 사용된 화문주로 평직 바탕에 4매 경능으로 마름무늬 를 표현하였다. 그 외에도 동일한 무늬는 아니지만 유사한 조형성의 마름무늬가 3점이 더 있는데 주로 당의나 저고리의 고름용으로 사용되었다. 능형의 무늬가 좌우상하 방향으로 연속되고 그 속에 2종류의 꽃잎을 시문하여 능화무늬 라고도 부른다. 무늬의 1회 반복단위 는 세로방향으로 23mm정도이며 가로방향은 확인이 어렵다. <그림 39> 완자, 저고리(9592) 곁마기 <그림 40> 완자+식물, 치마(9586) - 55 -

<그림 41> 자수, 저고리(9579) <그림 42> 완자, 당의(9571) 거들지 <그림 43> 완자+꽃, 저고리(9604) 길 <그림 44> 능화, 저고리(9592) 고름 Ⅴ. 결 론 조사대상 출토 유물은 총 63점으로 해평윤씨가 착용하였던 복식류 57점과 치관제구류 6 점이다. 출토된 옷감은 평직으로 제직한 주( 紬 ), 초( 綃 ), 추사( 皺 紗 )를 비롯하여 평직바탕에 무늬를 능직으로 직조한 문주( 紋 紬 ), 능직바탕에 무늬를 능직으로 제직한 능( 紋 綾 / 無 紋 綾 ), - 56 -

수자직으로 제직한 단( 紋 緞 / 無 紋 緞 ), 익조직과 평직으로 제직한 문사( 紋 紗 )와 항라( 亢 羅 ) 등이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16세기의 출토직물 중에 문직물이 출토된 경우는 대부분 수자직으로 직조한 문단이었으나 이번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는 다른 출토품과는 달 리 수자직으로 제직한 문단은 25% 정도이며 그 외에 문주가 9%, 문능이 4%, 문사가 2% 정도로 문능이나 문주가 많이 보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라의 변형으로 17세기 무렵에 새 롭게 등장한 항라가 8점이나 출토되었으며, 평직으로 제직되었지만 강한 꼬임을 준 위사로 직조하여 촉감이 마치 요즈음의 크레이프와 같이 까슬거리는 추사가 2점이 발견되어 이 시 기의 제직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해평윤씨 유물에서는 70 종류의 무늬가 발굴되었는데 이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식물무늬 가 60%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기하무늬가 20%, 자연산수무늬가 16% 순이며 동물무늬가 4%정도로 매우 적다. 이번 유물에서는 기물무늬, 문자무늬, 인물무늬 등은 보이지 않았다. 식물무늬는 전시기에 비하여 시문된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대부분이 2종류 혹은 3종류 이상의 소재를 결합하여 도안한 복합무늬로 구성되었다. 식물무늬는 연꽃무늬, 모란무늬, 매화무늬, 사양화무늬, 원무늬, 과실무늬의 6가지로 세분되었는데 연꽃의 종류가 16점으로 가장 많은 출현빈도를 보인다. 식물무늬의 소재가 된 꽃의 종류는 연꽃, 모란, 매화, 국화, 동백, 난초, 수국, 천도꽃, 석류꽃, 불수감꽃이 있으며 과실무늬에는 포도 무늬가 비교적 많 았으나 포도 이외에 천도, 석류, 불수감도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 대 나무나 영지도 식물의 보조무늬로 사용되었다. 이번 식물무늬의 특징 중의 하나는 둥근 원 형으로 구성된 무늬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동물무늬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 않았다. 봉황과 꽃, 학과 구름, 학과 꽃의 3종류의 동물무늬가 보이지만 모두 저고리의 끝동이나 안고름 등 작은 부분에 일부 사용되었을 뿐 이다. 자연산수무늬의 종류는 모두 12점으로 구름, 구름+보배, 구름+꽃, 구름+반용, 물결+ 반용, 물결 등 6 유형으로 세분된다. 구름만 단독으로 구성된 경우는 6점 보이는데 그중에 2점이 동일하여 모두 5종류의 각각 다른 형태의 구름무늬가 나타났다. 다른 출토품에 비하 여 구름무늬의 출현빈도가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대부분 저고리 끝동과 같은 작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기하무늬의 종류는 모두 14점으로 완자, 완자+식물, 완자+학, 완자+용, 마름무늬(능 - 57 -

화)의 5유형으로 세분하였다. 중복사용된 것 10점을 합하면 24건의 복식에 나타나므로 기 하무늬가 많이 나타난 점이 이번 출토유물의 특징이라 하겠다. 김확이나 김여온, 여흥민씨 와 같은 17세기의 직물에서 다양한 기하무늬가 많이 출현되었지만 해평윤씨의 유물에서는 완자무늬 바탕에 꽃이나 과실과 같은 식물무늬가 복합된 디자인이 많이 보이며 간혹 원형 의 학무늬와 팔각형의 용무늬도 복합 구성되었다. 해평윤씨가 이 복식을 착용한 시기는 혼인 후 사망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17세기 말기 이며 조선시대 직물무늬의 변천 2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전 시기의 유물들과 비교하면 식물무늬에서는 연꽃넝쿨무늬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꽃과 과일이 사용되었고 꽃이나 동물을 원형으로 도안한 원무늬와 완자무늬를 바탕으로 하는 기하무늬가 늘어났으며 구름 무늬와 같은 자연산수무늬가 줄어든 것이 전반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무늬의 종류나 조형 성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여성인 사천목씨(1657~1699)의 출토유물과 매우 유사하였다. 17 세기의 유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631년에 사망한 김확부인 동래정씨 나 1656년에 사망한 여흥민씨의 복식에 시문된 직물과는 또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 17 세기의 전기와 후기의 조형성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古 書 > 閨 閤 叢 書 飜 譯 老 乞 大 譯 語 類 解 仁 祖 實 錄 肅 宗 實 錄 昭 顯 世 子 嘉 禮 都 監 儀 軌 仁 祖 莊 烈 后 嘉 禮 都 監 儀 軌 - 58 -

顯 宗 明 聖 后 嘉 禮 都 監 儀 軌 肅 宗 仁 敬 后 嘉 禮 都 監 儀 軌 肅 宗 仁 顯 后 嘉 禮 都 監 儀 軌 景 宗 端 懿 后 嘉 禮 都 監 儀 軌 憲 宗 孝 顯 后 嘉 禮 都 監 儀 軌 懿 仁 王 后 殯 殿 都 監 儀 軌 仁 穆 王 后 殯 殿 都 監 儀 軌 < 韓 國 書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2001), 朝 鮮 時 代 피륙의 무늬. 심연옥(2004), 이응해 출토직물 연구, 이응해 장군 묘 출토복식, 충주박물관, pp.169-201. 심연옥(2004), 남오성묘 출토복식 직물연구, 남오성묘 출토복식, 국립민속박물관. 이은주, 조효숙, 하명은(2005), 길짐승흉배와 함께하는 17세기의 무관 옷 이야기, 민속원. 조효숙(2000), 장기정씨 묘 출토 직물의 분석, 포항 내단리 장기정씨 묘 출토복식 조사보고 서, 안동대 박물관. 조효숙(2001), 의원군 일가 출토직물에 관한 연구, 전주이씨 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 경기 도박물관. 조효숙(2003), 동래정씨 흥곡공 일가 묘 출토직물에 관한 연구, 동래정씨 묘 출토복식 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조효숙(2005), 연안김씨 묘 출 출토직물에 관한 연구, 연안김씨 묘 출토복식 양평 출토 홍 몽남 배위, 경기도박물관. 조효숙, 이은진(2006), 진주류씨 합장묘 출토직물에 관한 연구, 진주류씨 합장묘 출토복식, 경기도박물관. 조효숙(2006), 우리나라 전통무늬 1 직물, 국립문화재연구소. 조효숙(2008), 조선시대 직물의 시기감정을 위한 꽃무늬 조형특성 연구, 服 飾 (58-5), 한국 복식학회, pp.87-101. - 59 -

조선 현종대 후반~숙종 중반 정국 동향 이 현 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원 목 차 Ⅰ. 머리말 Ⅱ. 현종말 숙종초 정치 세력의 변화 Ⅲ. 남인의 분열과 정치 세력의 교체 Ⅳ. 己 巳 甲 戌 換 局 과 정치 세력의 교체 Ⅴ. 맺음말

조선 현종대 후반~숙종 중반 정국 동향 Ⅰ. 머리말 조선 전시기 동안 현종대 후반부터 숙종대 중반까지는 정치적으로 격변기라고 일컬을 만 한 시기였다. 현종대 발생한 두 차례의 예송( 禮 訟 ) 논쟁 중 두 번째 갑인예송( 甲 寅 禮 訟, 현 종 15, 1674)이 포함되며, 숙종대 중반까지는 세 번에 걸친 환국이 모두 일어났기 때문이다. 현종대는 주된 연구 경향이 복제 예송이었고, 연구 또한 상당히 진척되었다. 1) 현종 15년 (1674)에 발생한 갑인예송은 효종비 인선왕후( 仁 宣 王 后, 1618~1674)가 승하한 뒤, 며느리 인선왕후를 위해 시어머니 인조의 계비( 繼 妃 ) 장열왕후( 莊 烈 王 后, 1624~1688)가 상복( 喪 服 )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갑인예송은 현종말에 발생했지만 숙종 조까지 그 영향이 미쳐 정국을 뜨겁게 달군 정쟁이었다. 숙종대는 붕당( 朋 黨 )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깨고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 1) 예송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조. 池 斗 煥, 1987 朝 鮮 後 期 禮 訟 硏 究 釜 大 史 學 11; 정옥자, 1989 17세기 思 想 界 의 再 編 과 禮 論 韓 國 文 化 10; 李 成 茂, 1992 17 世 紀 의 禮 論 과 黨 爭 朝 鮮 後 期 黨 爭 의 綜 合 的 檢 討 한국정신문화연구 원; 李 迎 春, 1998 앞의 책, pp.213-273; 李 俸 珪, 1998 조선후기 禮 訟 의 철학적 함의:17세기 喪 服 論 爭 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9(인하대); 朴 丙 鍊, 1998 朝 鮮 時 代 禮 訟 의 政 治 行 政 的 含 意 정 신문화연구 71; 李 元 澤, 2000 현종대의 服 制 論 爭 과 公 私 義 理 에 관한 연구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 학위논문; 李 元 澤, 2000 숙종초 乙 卯 服 制 논쟁의 사상사적 함의 韓 國 思 想 史 學 14; 이원택, 2001 己 亥 服 制 논쟁과 그 이념적 지향 韓 國 政 治 學 會 報 (한국정치학회) 34; 김문준, 2005 17세 기 典 禮 問 題 에 대한 權 諰 의 예론과 그 의의 韓 國 思 想 과 文 化 28; 김현수, 2005 17세기 己 亥 年 典 禮 論 爭 의 禮 學 的 性 格 韓 國 思 想 史 學 25. - 63 -

변하는 사태 를 가리키는 환국 이 세 차례나 전개된 시기였다. 경신환국( 庚 申 換 局, 1680), 기사환국( 己 巳 換 局, 1689), 갑술환국( 甲 戌 換 局, 1694)이 그것이다. 숙종은 이러한 환국을 통해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통해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숙종의 환국을 통한 정치 세력의 교체는 국정 체제의 변화로 이어졌다. 곧, 숙종대에 이 르러 16~17세기간에 이루어진 붕당정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격심한 대립을 노정하자 숙 종은 환국 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붕당정치기 유지되어 온 붕당 공존의 원칙이 깨어지면서 각 붕당은 자신들의 권력 장악을 추진하는 한편, 국왕은 세 번의 환국을 주도하면서 국왕권을 강화, 탕평정치기로의 변화를 꾀했다. 국왕 숙종에 의해 붕당정치기에서 탕평정치기로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본고는 성주이씨 이형보( 李 衡 輔 )의 묘를 경기도 파주에 있는 부인 해평윤씨의 무덤과 합 장하는 과정에서 해평윤씨의 복식이 출토되어 복식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자 해평윤씨가 살 다 간 시기의 정치 사회상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해평윤씨는 1660년(현종 1)에 태어나 그녀의 나이 15세 때 결혼, 1701(숙종 27)에 졸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활동 시기를 주요 시기로 설정, 현종 후반에서 숙종 중반까지 정국 동향을 살피고자 한다. 2)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국의 동향을 살폈다. 먼저 제2장에서 는 현종 10년(1669)에서 숙종 1년(1675)까지, 제2장에서는 숙종 1년부터 14년(1688)까지, 제3장에서는 숙종 15년(1689)부터 숙종 27년(1701)까지로 설정하여 각각의 정치적 사건과 정치 세력의 변화에 주목했다. Ⅱ. 현종말 숙종초 정치 세력의 변화 1. 현종말 서인 배제와 남인 등용 효종이 승하하자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기해 복제 예송은 삼년을 주장하는 남인이 아닌 2) 본고는 이현진, 2008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3 4장에서 정치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내 용을 토대로 재정리하되, 기존 연구 및 실록과 문집, 의궤 등 여러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이다. - 64 -

기년( 期 年 )을 주장하는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허목( 許 穆, 1595~1682)의 상소로 인 해 복제 논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윤선도( 尹 善 道, 1587~1671)까지 뒤를 이어 가세하지만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밖에 남인 권시( 權 諰, 1604~1672), 윤휴( 尹 鑴, 1617~1680), 조경( 趙 絅, 1586~1669), 홍우원( 洪 宇 遠, 1605~1687) 등이 계속해서 삼년복을 주장했지만 오랫동안 유배를 가거나 심한 탄핵을 받아 서인 주도의 정국은 굳건했다. 현종 10년(1669)에 이르기까지 유세철( 柳 世 哲, 1627~1681)이나 황연( 黃 壖 ), 이석복( 李 碩 馥 ) 등이 남인을 지지하는 상소를 간간이 올리긴 했으나 역효과만 났다. 현종은 다시는 예론을 거론하지 말도록 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현종 10년은 송시열( 宋 時 烈, 1607~1689)이 태조의 계비( 繼 妃 ) 신덕왕후( 神 德 王 后,?~ 1396)를 태묘( 太 廟 )에 부묘하자는 안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쟁점화되었던 시기였다. 3) 현 종이 망설이고 허적( 許 積, 1610~1680)이 곤란하게 여겨 좀 지연되긴 했지만 서인 주도로 그 일은 해를 넘기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현종 11, 12년은 경신대기근 이라 불릴 정도로 심각한 재난이 닥쳐 전국적으로 기근에 허덕여 진휼이 최대 현안이었던 기간이었다. 4) 그 런 가운데 현종 11년(1670)부터 현종의 서인에 대한 태도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남인들도 이전에 비해 좀 더 서인들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남인이 서인을 공격한 것은 현종 11년에 발생한 전라감사 김징( 金 澄, 1623~1676)의 사 건에서부터 조짐이 표면화되었다. 김징이 그의 모친을 위해 회갑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단 석( 李 端 錫 )과 김석주( 金 錫 冑, 1634~1684)가 김징이 지위를 빙자하여 탐욕을 부렸다고 논죄 하면서부터 이 사건이 비롯되었다. 척신 청풍 김씨가와 남인들은 탐장죄( 貪 贓 罪 )에 해당한 처벌을 주장했고, 송준길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김징을 구원했고 특히 송준길이 가장 적극 적이었다. 이 일로 서인의 이단하( 李 端 夏, 1625~1689)와 이경억( 李 慶 億, 1620~1673), 오상 ( 吳 尙, 생몰년 미상) 등에게 처벌과 체직이라는 형벌이 가해졌고, 당사자 김징은 도배( 徒 配 )에 처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동왕 12년(1671)에는 윤경교( 尹 敬 敎, 1632~1691)가 송시열을 두둔하고 허적을 공박, 5) 3) 신덕왕후의 부묘 논의는 이현진, 2005 조선시대 신덕왕후( 神 德 王 后 ) 부묘론( 祔 廟 論 )의 의의 人 文 論 叢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54; 2008 앞의 책, 2장 2절 참조. 4) 경신대기근 의 양상에 대해서는 김성우, 1997 17세기의 위기와 숙종대 사회상 역사와 현실 25, 1 장 2절 참조. 5) 長 湖 封 事 ( 乾 )( 奎 5063), 封 事 上 陳 時 弊 仍 論 相 積 疏 ( 十 一 月, 獻 納 時 ); ( 坤 ), 附 錄 中 年 譜 ( 四 十 四 年 - 65 -

이듬해(1672)에는 이상( 李 翔, 1620~1690)이 송준길( 宋 浚 吉, 1606~1672)을 찬미하고 허적을 극도로 비방하는 6) 사건들이 있었다. 이 사건들을 겪으면서 남인의 서인 공격이 본격화되 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롯한 서인들은 김징이나 윤경교, 이상을 옹호한 반면, 허적과 오시수( 吳 始 壽, 1632~1681) 등 남인들과 척신( 戚 臣 ) 김석주는 그들을 강경하게 비난했다. 7) 현종은 옹호하는 서인들에게 처벌을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 송준길에 대해 냉담한 태도 까지 보였다. 8) 그 대신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에게는 이전에 양송( 兩 宋 송시열 송 준길)을 대우했던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9)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한 현종의 신임이 점차 허적 쪽으로 기울어졌다. 현종 12년(1671) 허적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부터는 10) 노골적으로 당색( 黨 色 )을 거론하며 서인들을 배제 시켜 나갔다. 아울러 점차 남인들에게 관대하거나 호의적인 경향으로 바뀌어 갔다. 11) 이런 과정에는 척신 청풍 김씨가의 역할이 만만찮게 작용했다. 현종이 점차 남인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데 이들의 역할은 지대했다. 당시 남인들과 청풍 김씨 집안의 제휴는 서인들의 견제 세력으로 충분했다. 청풍 김씨 辛 亥 十 一 月 五 日 ); 顯 宗 實 錄 卷 20, 顯 宗 12 年 12 月 壬 午 (5);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5, 顯 宗 12 年 12 月 壬 午 (5). 6) 打 愚 遺 稿 卷 2, 疏 論 許 積 疏 ; 顯 宗 實 錄 卷 20, 顯 宗 13 年 5 月 丙 辰 (11);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5, 顯 宗 13 年 5 月 丙 辰 (11). 7) 특히 김석주는 김징과 김징을 찾아간 인물들을 일일이 제시하며 매우 적극적으로 처벌하도록 청했다 [ 息 庵 遺 稿 卷 17, 啓 辭 請 罷 職 靈 光 郡 守 洪 錫 箕 啓 請 罷 職 錦 山 郡 守 鄭 載 厚 啓 請 罷 職 全 羅 右 水 使 李 旰 啓 請 罷 職 統 制 使 柳 斐 然 啓 請 拿 問 全 羅 兵 使 朴 而 ( 日 名 ) 啓 請 拿 問 統 制 使 柳 斐 然 啓 請 拿 問 全 羅 監 司 金 澄 啓 (2)]. 8)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5, 顯 宗 13 年 4 月 癸 巳 (18); 顯 宗 實 錄 卷 20, 顯 宗 13 年 7 月 乙 巳 (2);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6, 顯 宗 13 年 7 月 乙 巳 (2). 9) 허적이 서인들의 비난을 받고 下 鄕 하면 현종이 사람을 보내 극진한 모습을 보이는 기록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런 와중에 현종이 벼슬을 제수하거나 벌을 내릴 때 허적을 거친다는 기사[ 顯 宗 實 錄 卷 19, 顯 宗 12 年 6 月 戊 戌 (19);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4, 顯 宗 12 年 6 月 戊 戌 (19)], 軍 國 의 대소사를 허적에 게 전임하고 있다는 기사[ 顯 宗 實 錄 卷 20, 顯 宗 12 年 12 月 壬 午 (5);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5, 顯 宗 12 年 12 月 壬 午 (5)], 허적에게 푹 빠져 있다는 기사[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5, 顯 宗 13 年 5 月 丙 辰 (11)] 등은 비 록 서인들의 발언이지만 허적에 대한 현종의 신임을 잘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10) 顯 宗 實 錄 卷 19, 顯 宗 12 年 5 月 癸 亥 (13);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4, 顯 宗 12 年 5 月 癸 亥 (13). 11) 趙 嗣 基 가 기해년 禮 論 과 國 喪 에서의 문제점들을 거론하자 처벌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서용 했고(13년 3월에 처벌하고 6월에 서용), 조경의 아들 趙 威 鳳 이 상소하여 효종의 능인 寧 陵 의 손상과 관련하여 관련자들(대개 서인들)을 비난하자 그를 칭찬했으며[ 顯 宗 實 錄 卷 21, 顯 宗 14 年 4 月 庚 戌 (11);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6, 顯 宗 14 年 4 月 庚 戌 (11)], 조위봉을 이어 張 應 一 이 천릉의 결정과 영릉을 감독한 자들의 죄를 논한 사실에 공감하여 비통해 하고, 장응일의 처벌을 바라는 계청을 끝내 윤허하 지 않은 사실[ 顯 宗 實 錄 卷 21, 14 年 6 月 壬 子 (14) 7 月 辛 未 (4);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7, 顯 宗 14년 6 月 壬 子 (14) 7 月 辛 未 (4)] 등에서 엿볼 수 있다. - 66 -

집안이 기본적으로 견지하는 당색은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 金 集, 1574~1656) 과 김육( 金 堉, 1580~1658)이 대동법을 둘러싸고 충돌했던 사건, 12) 김육의 묘( 墓 )에 수도( 隧 道 )를 쓴 일로 민유중( 閔 維 重, 1630~1687)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뒤로 13) 청풍 김씨 계열들 은 송시열을 배후 인물로 여겨 송시열 중심의 서인과 입장을 달리했다. 청풍 김씨가는 뿐만 아니라 기해 복제 논쟁 때 삼년복을 주장했다. 14) 또 효종의 능에 표 석( 表 石 )을 세우는 일과 민신( 閔 愼 )의 대복( 代 服 ) 문제로 김우명( 金 佑 明, 1619~1675)이 송 시열과 부딪치기도 했다. 15) 갑인예송 때에도 김석주는 기본적으로 청풍 김씨가에서 보인 예론을 견지한 채 활약하는 등 16) 기존 서인들과는 상당히 대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17) 그 러나 정국은 여전히 서인이 집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효종의 능인 영릉( 寧 陵 )을 옮기는 일과 민신( 閔 愼 ) 집안의 복제 문제로 서인들은 심한 타격을 입었다. 먼저 영릉의 천릉( 遷 陵 )은 영림부령( 靈 林 副 令 ) 이익수( 李 翼 秀 )가 현종 14년(1673) 3월 영 릉의 파손과 수리에 대해 상소한 것이 발단이 되어, 18) 여러 논의를 거쳐 마침내 옮기기로 결정했다. 19) 현종초 효종의 능자리를 정할 때 수원으로 정하고 싶은 현종의 생각과 달리 양송( 兩 宋 )을 비롯한 서인들이 주축이 되어 건좌산( 乾 坐 山, 건원릉 왼편 산등성이)으로 정 했었다. 20) 능의 역사를 감독하고 능을 봉심한 이들 역시 서인들이었으므로 천릉이 결정되 12) 金 潤 坤, 1971 大 同 法 의 施 行 을 둘러싼 贊 反 兩 論 과 그 背 景 大 東 文 化 硏 究 8, pp.152-153; 2001 한국 중세의 역사상 영남대 출판부 재수록. 13) 文 貞 公 遺 稿 卷 7, 啓 辭 請 前 參 判 金 佐 明 考 律 勘 罪 仍 命 改 葬 其 親 啓 ; 孝 宗 實 錄 卷 21, 孝 宗 10 年 4 月 戊 戌 (8). 14) 顯 宗 實 錄 卷 19, 顯 宗 12 年 3 月 己 未 (8);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3, 顯 宗 12 年 3 月 己 未 (8); 肅 宗 實 錄 卷 3, 肅 宗 1 年 4 月 戊 戌 (10)). 15) 宋 子 大 全 卷 15, 疏 箚 因 國 舅 論 斥 待 罪 疏 ( 癸 丑 九 月 十 三 日 ) 二 疏 ( 癸 丑 九 月 二 十 六 日 ); 顯 宗 實 錄 卷 21, 顯 宗 14 年 9 月 乙 亥 (9);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7, 顯 宗 14 年 9 月 乙 亥 (9). 16) 당시 승지였던 김석주는 현종에게 송시열의 收 議 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 고 했기 때문에 허목이 소를 올려 쟁론하게 되었다 고 아뢰거나[ 顯 宗 實 錄 卷 22, 顯 宗 15 年 7 月 乙 亥 (13);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8, 顯 宗 15 年 7 月 乙 亥 (13)], 현종에게 儀 禮 經 傳 斬 衰 章 의 註 疏 를 해석 해 올리면서 주소 가운데 앞뒤 庶 字 를 각각 하나의 뜻으로 풀이했다[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8, 顯 宗 15 年 7 月 丙 子 (14)]. 17) 척신인 청풍 김씨 세력을 서인내의 漢 黨 으로 규정하여 산당인 송시열계와 대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고 한 연구가 주목된다( 鄭 萬 祚, 1999 17세기 중반 漢 黨 의 정치활동과 國 政 運 營 論 韓 國 文 化 23 참조). 18) 顯 宗 實 錄 卷 21, 顯 宗 14 年 3 月 甲 午 (24);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6, 顯 宗 14 年 3 月 甲 午 (24). 19) 顯 宗 實 錄 卷 21, 顯 宗 14 年 5 月 甲 戌 (5);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7, 顯 宗 14 年 5 月 甲 戌 (5). 20) 筵 說 講 義 通 編 (규장각 소장 古 4254-11, 이하 같음) 卷 2; 宋 子 大 全 卷 9, 疏 箚 辭 判 義 禁 兼 陳 山 陵 事 箚 ( 己 亥 七 月 二 日 )~ 五 疏. - 67 -

자 이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천릉을 위해 대왕대비의 복제( 服 制 )가 거론 되면서 기해 복제의 여파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21) 다음으로 민신가의 복제 문제를 살펴보면, 민업( 閔 嶪 )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민세익( 閔 世 益 )이 정신병에 걸려 상주 노릇을 못하게 되자 민세익의 아들 민신( 閔 愼 )이 할아버지를 위해 참최복( 斬 衰 服 )을 입고 집상( 執 喪 )한 일이 있었다. 김우명은 살아 있는 아비의 존재를 무시한, 곧 부자간의 윤리를 교란시킨 인륜상의 큰 변고로 보아 처벌을 요구했다. 사실 민 신의 복제 결정에는 박세채( 朴 世 采, 1631~1695) 민정중 송시열 등의 뒷받침이 있었다. 22) 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현종대 내내 송시열에게 자문을 구하여 왔던 터였다. 그러나 송 시열에 대한 신임이 소원해져 가는 중, 23) 민신가의 복제 문제는 송시열의 복제에 관한 지 식조차 의심을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송시열을 존신하던 이들, 송준 길 이유태( 李 惟 泰, 1607~1684) 윤증( 尹 拯, 1629~1714)조차 이 복제의 결정에 난색을 표 명할 정도여서 24) 현종의 송시열에 대한 불신은 더해만 갔다. 이는 곧 현종의 서인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되었다. 현종 14년(1673) 7월 허적이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고, 그에 대한 현종의 신임이 거의 절 대적인 상황하에 김만중( 金 萬 重, 1637~1692)이 허적을 비난하고 탄핵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종은 이를 기화로 김만중을 포함해서 평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서인 대신들, 이숙 ( 李 䎘, 1626~1688) 이선( 李 選, 1632~1692) 민정중( 閔 鼎 重, 1628~1692) 성호징( 成 虎 徵, 1625~1694) 등을 처벌했다. 양사에서 한 해가 지나도록 이들을 신구하는 문제로 간쟁했지 만 25)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현종은 서인들이 남인들을 비난할 때면 대개 색목( 色 目 )으로 21) 천릉할 때의 服 制 는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緦 麻 服 을 입어야 하는데, 대왕대비가 기해년 국상 때 이미 기년복을 입어 당장 成 服 할 예가 없어 문제가 되었다. 여러 번 논의를 거친 뒤 결국은 大 明 集 禮 의 周 親 은 素 服 을 입는다 는 조항에 의거해 白 衣 를 입고 3개월을 마치는 것으로 결정났다. 22) 朴 世 采, 南 溪 集 卷 第 五, 疏 因 閔 愼 査 事 首 罪 疏 ( 癸 丑 九 月 二 十 四 日 ); 閔 鼎 重, 老 峯 集 卷 4, 疏 箚 請 與 朴 世 采 同 被 罪 罰 疏 ( 甲 寅 ); 宋 時 烈, 宋 子 大 全 卷 15, 疏 箚 因 國 舅 論 斥 待 罪 疏 ( 癸 丑 九 月 十 三 日 ) 二 疏 ( 癸 丑 九 月 二 十 六 日 ). 23) 현종이 허적을 신임하는 가운데 송시열은 그 흐름에 역행하는 행동을 했다. 김징 윤경교를 구원하 면서 송준길과 함께 허적을 배척한 사실도 있었고, 후술하겠지만 허적이 삼학사를 비난한 점을 비판 하고 또한 수상으로서 대기근의 책임을 물어 허적을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더욱이 寧 陵 을 옮기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현종과 송시열의 관계는 갈수록 소원해져 갔다. 24) 草 廬 集 卷 25, 別 集 書 與 尤 菴 書 ( 別 紙 丙 辰 四 月 在 謫 所 時 ); 顯 宗 實 錄 卷 21, 顯 宗 14 年 9 月 乙 亥 (9);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7, 顯 宗 14 年 9 月 乙 亥 (9). 이유태는 민신가의 변례에 관해 전반적인 설명을 곁들임과 아울러 송준길 윤증 이외에 동일한 입장을 취한 이들을 수록했다. 25) 汾 厓 遺 稿 卷 8, 疏 箚 辭 大 司 諫 兼 救 四 臣 疏. - 68 -

몰아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급기야 서인 대신들까지 처벌하기에 이르렀던 것 이다. 남인들과 척신 청풍 김씨 세력들이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견제하여 많은 성과를 올 리자 작금의 사태를 우려한 송시열은 대처 방안이 필요했다. 허적을 제어할 자는 척신인 김좌명( 金 佐 明 )뿐이라고 송시열은 생각했다. 26) 김좌명의 졸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27) 김좌명이 척신이라는 인지도도 있었지만 세간에서의 그의 인망에 대해 송시열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나마 제휴하려던 김좌명이 죽고 김우명이 민신 집안의 변례( 變 禮 )로 인하여 오 히려 송시열을 공격하면서 송시열의 당초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서인 실각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갑인예송이 발발하면서 정치 세력의 판도는 남인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남인 주도 정국으로의 전환에는 공교롭게도 서인들 사이에 명 망을 받았던 이들이 이즈음 많이 사망한 것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28) 갑인예송으로 영의정 김수흥( 金 壽 興, 1626~1690)을 비롯하여 당시 대공복( 大 功 服 )으로 정해 올린 예관들 및 이들을 두둔한 이들까지 처벌을 받았고, 허적을 영의정으로 제수했 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승하하여 갑인예송 문제는 숙종대로 넘겨졌다. 2. 숙종초 남인 주도와 戚 臣 견제 남인이 본격적으로 서인을 공격한 도화선은 숙종 즉위년(1674) 진주의 유학 곽세건( 郭 世 楗, 1618~1686)이 소를 올리면서부터였다. 현종이 승하한 뒤 숙종은 현종의 지문( 誌 文 )을 송시열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했다. 곽세건은 상소하여 기해 갑인 복제의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 현종의 지문을 지어 올린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29) 곽세건의 이 일이 주된 논란으로 떠오르자 숙종은 송시열을 두둔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 26) 宋 子 大 全 ( 附 錄 ) 卷 14, 語 錄 李 選 錄 ;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7, 顯 宗 14 年 9 月 壬 辰 (26). 27) 顯 宗 實 錄 卷 19, 顯 宗 12 年 3 月 己 未 (8); 顯 宗 改 修 實 錄 卷 23, 顯 宗 12 年 3 月 己 未 (8). 28) 현종 말경 사망한 서인 명망가로 당장 趙 復 陽, 洪 重 普, 李 景 奭, 李 慶 億, 李 敏 迪, 宋 浚 吉, 鄭 太 和 등을 꼽을 수 있다. 29) 无 爲 齋 集 ( 奎 중 2475), 論 斥 宋 時 烈 製 進 誌 文 疏 ; 肅 宗 實 錄 卷 1, 肅 宗 卽 位 年 9 月 丙 戌 (25). - 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