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中關係의 관점에서 본 仁祖反正의 역사적 의미 83)한 Ⅰ. Ⅱ. Ⅲ. Ⅳ. Ⅴ. Ⅵ. 명 기* 머리말 仁祖反正 발생에 드리운 明의 그림자 扈聖功臣 후예 들의 정권 장악으로서의 仁祖反正 仁祖反正에 대한 明의 이중적 인식과 대응 仁祖反正 승인을 통해 明이 얻은 것 맺음말 인조반정은 明淸交替가 진행되고 있던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우선 그 발생 배경으로 주목되는 것은 16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對明認識이다. 16세기 性理學이 확 산되고, 명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퍼져 가면서 지식인들은 철저한 中華人 이 되기를 희구하면서 명과 조 선을 一家로 인식했다. 또 명의 으뜸가는 제후국 이라는 자부심 을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이 높아졌다. 바로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군이 참전했던 것을 계 기로 명은 조선의 군주국, 부모국 이자 절대적인 존재 로 자리 * 명지대 사학과 교수 / hemanhan@mju.ac.kr - 239 -
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았다. 이런 배경에서 인조반 정은 扈聖功臣系가 중심이 되어 광해군대 정치를 주도했던 宣武 功臣系를 축출했던 정변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조 정권은 반정 이후 집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명의 권위에 기대야만 했고, 李 适의 亂 등 내부의 위기를 계기로 親明의 방향으로 더욱 기울어 지게 되었다. 기울어 가고 있던 명은 인조반정을 계기로-요동 상 실과 광해군의 거부 때문에-약화되었던 조선에 대한 의제적 지 배력 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을 以夷制夷를 위한 수단으로 다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명에게 행 운 이었다. 인조반정의 발생은 당시 명과 後金(-淸) 대결 구도에 의미 있 는 영향을 미쳤다. 이어 두 차례 호란이 발생하는 데 명과 후금의 대결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1637년 조선이 끝내 청에 굴복 했던 것은 청이 入關하여 중원을 장악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 다. 인조반정을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이라는 거시적 시각에 서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주제어 ------------------------------------------------------ - 240 -
Ⅰ. 머리말 1623년 일어난 仁祖反正은 조선 중후기 정치사의 분수령이었 다. 주지하듯이 이 政變의 성공을 계기로 주도 세력인 西人은 사 실상 조선 후기의 정국을 이끄는 만년 여당 이 되었고 大北과 小 北, 그리고 南人 등 여타 정파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거나 만년 야당 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데 인조반정의 발생과 성공은 17세기 초 조선 내부의 政局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도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정세가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던 이른바 明淸交替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 선은 이미 1619년(광해군 11) 명의 강요에 밀려 援軍을 파견하 여 명이 후금을 공격하는데 동참했던 전력이 있었다(-이른바 深 河 戰鬪 참전). 따라서 심하 전투 가 朝明聯合軍의 패전으로 끝 난 이후에도 명과 후금 양국은 모두 조선의 동향과 향배를 주목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명청교체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이 처한 地政學的 위치와 특수한 위상 때문이었다. 明은 당시 後金의 군사적 도전에 밀려 守勢에 처한 상황에서 조선을 활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고 부심했다. 명은 기본적으로 조선을-누르하치의 後金에 맞서고 있던 北關(-海西女眞의 예허 부 葉赫部 를 지칭)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순종하는 오랑캐 順夷 로서 인식했다. 더욱이 명은 조선이 壬辰倭亂으로 위기 를 맞았을 때 자신들로부터 救援을 받는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고 인식하고 있었다. 명은 이런 배경에서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과 대 결시키려는 以夷制夷 의 유혹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상황이었 다.1) 후금은 후금대로 명과의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 241 -
배후에 있는 조선의 동향과 향배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 다. 후금은 심하전투 이후 기본적으로 조선에 대해 명과 후금의 대결 와중에서 중립 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후금은 1619 년 3월, 조선에 보낸 國書에서 심하전투 에 조선이 참전했던 것 을 왜란 당시 명의 은혜를 갚기 위해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것 이 었다고 일단 양해해 주는 입장을 취했다. 후금은 그러면서도 과거 宋과 金이 대결을 벌일 때 高麗가 어느 쪽도 돕지 않고 中立的인 행보를 취했던 역사적 사실을 조선에 상기시킨 바 있다. 또 자신 들은 조선과 본래 원한이 없다 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향후 자신들 이 명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취할 태도와 向背를 분명히 밝히라고 촉구했다.2) 일본의 德川幕府와 對馬島 또한 인조반정의 발생과 이후의 조 선 정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 인조반정이 일어났던 1623년 德川幕府에서도 도쿠가와 히데타다 德川秀忠 가 물러 나고 도쿠가와 이에미츠 德川家光 가 將軍으로 즉위하는 변화 가 있었다. 자국의 권력 교체기를 맞아 대내외적으로 안정이 필요 했던 幕府는 對馬島를 통해 使節 原之次를 파견하여 仁祖의 즉위 를 축하했고, 조선 또한 예조참의 金德諴 명의로 서신을 보내 일 1) 1618년 順夷 인 조선과 北關을 활용하여 후금을 치자고 했던 明의 戶科給事中 官應震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戶科給事中官應震奏御奴三策 一在 張威勢 奴北隣北關 南隣朝鮮 北關向與奴角 我每季拔火器兵五百佐之 朝鮮當倭 變時 亦受我救援厚恩 宜借北關兵馬向道 搗奴右掖 調朝鮮鳥銃手二三千 同我兵由 鴨綠山後搗奴左掖 此以順夷攻奴之大略也 ( 明神宗實錄 권569 萬曆 46년 윤4 월 乙亥). 2) 張存武 葉泉宏 編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篇 金汗致書朝鮮國王求合作 (2000, 臺北 國史館). 爾兵來助大明 吾料其非本心也 乃因爾國有倭難時 大明曾 救之 故報答前情 不得不然耳 昔先金大定帝時 有朝鮮官趙惟忠 以四十餘城返附 帝曰 吾征徽欽二帝時 爾朝鮮王不助宋 亦不助金 是中立國也 遂不納 由此觀之 吾 二國原無仇隙 今王之意 以爲吾二國原無釁隙 同仇大明耶 抑以爲旣助大明 不 忍背之耶 願聞其詳. - 242 -
본 측에 반정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새 장군의 襲職을 축하한 바 있다. 일본 또한 조선의 정권 교체가 자국에 미칠 영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조선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심하는 자세를 보였 던 것이다.3) 이렇게 조선에 대해 민감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明 後金 日本 등 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에서 인조반정이 일 어나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사태의 전개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일찍이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조선의 정권 교체에 대 한 승인과 인조를 冊封하는 여부를 놓고 명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논란과 對朝鮮 政策을 상세히 고찰한 바 있다. 그것을 통해 명이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을 簒奪 로 여겨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후금과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조선을 끌 어들여 이용하려는 以夷制夷 차원에서 反正 을 받아들이고 仁祖 를 새로운 국왕으로 승인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명 내부 에서는 經常 (-조선의 불법적인 찬탈 을 懲治해야 한다는 원칙) 과 權道 (-후금의 도전으로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조선을 이용 해야만 한다는 현실)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심각한 논란이 빚어졌다는 것 등이 밝혀진 바 있다.4) 필자는 이제 앞의 논저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염두에 두면서 인조반정이 17세기 초반의 朝中關係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를 좀 더 심화시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과정 에 드리워진 명의 그림자 를 살펴본다. 그것과 관련하여 鮮初 이 래 16세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형성된 조선과 명의 특수 관계 3) 田中健夫 田代和生 校訂, 朝鮮通交大紀 (1968, 東京 名著出版) 元和 9년 癸亥; 金奉祖, 鶴湖集 권2 倭情狀啓 ; 한명기,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2009, 서 울 푸른역사), 243 246쪽. 4) 한명기, 1997 17세기 초 仁祖反正과 朝明關係, 東洋學 27; 한명기, 1999 임 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 역사비평사), 305 352쪽. - 243 -
를 고찰한다. 이어 인조반정이 北人에서 西人으로의 정권 교체 라는 차원을 넘어 임진왜란과 명청교체라는 국제정세의 격변에 대한 대응의 방향 차이에서 비롯된 국제적 사건 이라는 측면을 살펴본다. 나아가 반정 이후 인조정권이 정권의 존립을 위해 명의 정치적 권위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었던 상황, 그 같은 상황을 계기로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었던 추세, 그 리고 그 같은 추세가 명청교체의 진전이라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Ⅱ. 仁祖反正 발생에 드리운 明의 그림자 1. 15 16세기 조선과 명의 특수 관계 조선 건국 직후 朝明關係는 삐걱거렸다. 명 태조 朱元璋은 조선 이 遼東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다고 힐문하면서 공격하겠 다고 협박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生釁, 侮慢, 表箋 문제 등 이 불거졌고 조선도 명의 압력에 반발하여 요동 攻伐을 시도하기 도 했다.5) 몽골의 中原 지배를 끝내고 동아시아의 覇者로 등장한 명은 조선으로부터 확실한 복종 을 이끌어내고자 했고, 조선도 명의 무리한 압박에 반발하면서 이런 상황이 빚어졌던 것이다. 갈등과 우여곡절을 겪은 뒤 世宗代 이후에는 양국 관계가 안정 되었다. 세종은 명에 대해 至誠事大論을 내세웠거니와6) 世宗實 錄 의 史評에는 세종이 중국을 공경하고 섬기는데 털끝만큼의 잘못이 없이 법도를 따랐으므로 중국도 그 정성을 칭찬했다 고 했 5) 박원호, 明初 朝鮮의 遼東攻伐計劃과 表箋問題 ; 15세기 東아시아의 정세, 明初朝鮮關係史硏究 所收 (2002, 일조각) 6) 安貞姬, 1997 朝鮮初期의 事大論, 歷史敎育 64, 22~31쪽. - 244 -
다. 세종대는 元明交替 이후 밀려오던 명의 外壓이 종식되고, 조 선이 명의 특별한 藩邦 으로 인정받게 되는 분수령이었다.7) 실 제 명의 嚴從簡은 세종의 공순한 자세를 높이 평가하여 그가 즉 위한 1419년 이후를 양국 관계가 절정에 이른 시기로 보았다. 명 이 北京으로 천도하여 조선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진데다 洪熙, 宣 德 연간에 조선의 事大가 가장 恭謹했고 명 또한 두터운 禮로써 조선을 대하는 것이 다른 蕃國과는 달랐다고 평가했다.8) 15세기 조선의 지식인들 또한 明의 건국을 찬양하고 尊崇의 자 세를 감추지 않았다. 鄭道傳은 오랑캐 元이 100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한 것을 우주간의 커다란 變怪 라고 규정한 뒤 명이 죄인을 몰아내고 天下의 위치를 올바르게 돌려놓고 中原의 수치를 씻었 다고 평가했다.9) 成俔(1439 1504) 또한 교만하고 사나운 元 때문에 中原의 生靈들이 오랑캐의 악취에 오염되고 被髮左袵의 상황으로 전락했다 고 비판하면서 명 덕분에 다시는 오랑캐에 물 들지 않게 되었다고 찬양했다.10) 15세기 지식인들은 이렇게 華 夷觀을 바탕으로 元明交替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明을 正 統 이자 天子國 으로 숭앙하며 명에 대한 事大를 극히 자연스러 7) 한명기, 2004 中國의 王朝交替와 韓半島, 역사를 통해 보는 중국의 대두 (서 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제1차 국제학술대회 발표문) 53~56쪽; 한명기, 2010 원 명교체, 명청교체와 한반도, 동아시아 전통지역 질서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편, 세계정치 12 所收), 71~77쪽. 8) (明) 嚴從簡 殊域周咨錄 권1 朝鮮. 永樂十七年 芳遠老 請以子祹嗣 時 國家遷 都北京 比南京距朝鮮爲益近 以後仁宗昭皇帝洪熙間 宣宗章皇帝宣德間 每歲凡萬 壽聖節正旦皇太子千秋節 皆遣使奉表朝賀 貢方物 其他謝恩等使率無常期 或前者 未還而後者已至 雖國王不世見 然事天朝最恭謹 天朝亦厚禮之 異于他蕃 每朝廷大 事 必遣頒詔于其國 9) 鄭道傳, 三峰集 권3 贈任鎭撫詩序. 10) 成俔, 虛白堂文集 권8 送權同知赴京序. 自世敎衰 干戈搶攘 驕虜桀胡之盜名 字者 竊據而有之 生靈爲炰烋膻腥之所染 辮髮左衽者久矣 皇明汛而掃之 一擧而 無遺種 截然幅員 復歸于正 創神京 壓虜境 長城以雨至于嶺嶠 數萬里不雪之禾 皆入版籍 無有梗化而作蘖者. - 245 -
운 것으로 인식했다.11) 15세기 조선이 명에 지성으로 사대했다는 기록은 많다. 卞季良 (1369 1430)은 명이 천하를 장악한 뒤 조선에 일찍이 없었던 字小之恩을 베풀었고, 조선은 명에 至誠으로 事大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千古에 없었던 아름다운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찬양했 다.12) 南秀文(1408 1442)은 명이 천하를 차지한 뒤 조선이 가 장 먼저 명에 歸附하여 해마다 조공을 다했고, 명 또한 萬國 가운 데 조선을 가장 忠順하다고 평가하여 은혜가 두터워졌다고 평가 했다.13) 徐居正(1420 1488)은 명이 조선을 예우하고 조선이 조공의 예를 다하는 것이 워낙 지극하여 조선은 명에게 內服과 같아 다른 제후국들은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14) 실제 로 당시 명이 조선을 우대했던 것은 사신들이 명에 입국하는 절 차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조선은 명으로부터 信義가 있다고 인 정받아 일본, 暹羅, 占城 등과는 달리 勘合과 같은 증표 없이도 국왕의 表箋만 지참할 경우 입국할 수 있었다.15) 당시 勘合을 지 참하지 않고 조공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 말고 琉球 밖에는 없을 정도였다. 감합은 朝貢貿易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으로 명이 일본을 비롯한 15개국에 지급했다. 그런데 조선과 琉球를 제외한 것은 두 나라는 禮에 근거하여 사절을 왕래시켜 감합 없이도 信 11) 都賢喆, 1999 高麗末 士大夫의 政治思想 硏究 (서울, 일조각), 195~201쪽. 12) 卞季良, 春亭集 권5 送參贊議政府事柳公奉使朝京詩序. 皇明有天下混一之盛 垂五十年 欽惟聖天子御極 接下之恭 字小之仁 曠古無此 而我殿下小心翼翼 畏天 事大 朝聘往來 罔敢或遑 天子嘉之 每稱至誠 易所謂天地交泰 上下志同 此其時 矣 誠千載不可逢之佳會也 13) 南秀文, 敬齋遺稿 권1 太平館重修記. 14) 徐居正, 四佳集 권5 送權花川奉使賀正詩序. 予惟皇明御宇 薄海內外 罔不臣 妾 梯航相接 然世脩職貢 恪勤禮意 我朝鮮爲最 皇朝眷遇亦隆 比之內諸侯 非諸 藩所及 吁榮矣哉 15) 佐久間重男, 1996 明淸 からみた東アジアの華夷秩序, 思想 796 (東京, 岩波 書店), 32~34쪽. - 246 -
義를 맺을 수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16) 이렇게 15세기 지식인들의 명에 대한 존숭의 자세는 각별했다. 申叔舟는 箕子 이후부터 이어져 온 藩國의 의리를 상기시키고, 명 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앞으로도 영원히 명의 울타리로서의 책임 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17) 金宗直(1431 1492)은 선비가 한 귀퉁이의 치우친 나라(조선)에서 태어나 천자국(-명)에 들어가 천자국의 卿士들을 만나보는 것은 男兒로서 한 세상을 뜻있게 사 는 것 이라고 말 한 바 있다.18) 한 마디로 명은 조선 지식인들이 선망하는 나라 였던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5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명을 眞主 로 찬양하 고, 명에 공순하게 사대하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무조건 머리를 숙 이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명에 대해 事大하면서 나름대로 원칙 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權近은 大邦과 小邦 사이의 교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내 생각에 옛날 聖人들이 중국을 다스릴 때 많은 나라를 세우고 諸侯들과 친하며,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돌보고 작 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도록 하여 각기 그 정성을 다하게 한 것은, 먼 나라나 가까운 나라나 모두 화합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삼가 생각컨대 明이 萬邦을 무마하면서 仁이 깊 고 德을 두텁게 하여, 무릇 천지 사이에 있는 동물이나 식물 까지도 모두 그 은덕에 젖었다. 그러므로 해외에 있는 우리 나라도 一視同仁의 德化를 입게 되어, 신임하는 은전과 애 16) 민덕기, 2007 前近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 日관계 (서울, 景仁文化社) 99~102 쪽. 17) 申叔舟, 保閑齋集 권12 雪霽登樓賦. 18) 金宗直, 佔畢齋集 권1 送鄭監察錫堅赴燕京序. 士生偏方 有至白首 而不得踵 王國之門 見王國之卿士焉 今子翩翩然由王國 而入天子之庭 賀天子之儲闈 以近 夫日月之耿光 不可謂虛生一世也 不可謂不償弧矢之志也 - 247 -
도하는 冊命으로 始終을 바르게 하는 것이 갖추어지게 되었 으니, 天命에 따르고 작은 나라를 돌보는 仁이 지극한 일이 다.19)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서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돌보며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게 하는 것을 理想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 목되는 것은 큰 나라를 섬기는 事大 보다 작은 나라를 보듬는 字 小 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나아가 15세기 지식인들은 명을 大國으로 존숭하면서도 조선 의 자부심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卞季良이나 梁誠之 등은 조선을 檀君이 건국한 국가로 인식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고 주 장했고, 조선을 중국의 아류가 아닌 독립적인 세계로 인식했 다.20) 李承召(1422 1484)는 동방의 역사는 엄연히 동방의 역 사로서 실체가 있는데 識者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는 데만 바빠 自 國史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고 탄식하면서 조선에 태어난 이상 반드시 조선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고 강조했다.21) 15세기 지식 인들은 이렇게 명을 존숭하여 공순히 事大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조선의 독자성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명을 존숭하면서도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했던 15세기 지식인 들의 對明認識은 16세기가 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16세기 지식인들의 명에 대한 숭앙은 절대적이었다. 金誠一(1538 1593) 같은 인물은 명을 조선의 부모국 으로 조선과 명은 一家 19) 權近, 陽村集 권16 送行人段公祐使還詩序. 20) 한영우, 1983 조선전기사회사상사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山內弘一, 1979 李朝初期における對明自尊の意識, 朝鮮學報 92. 21) 李承召, 三灘先生集 권11 歷代年表序. 況吾東方 表海爲邦 雖當慕擬中華 然 旣生東國 則不可不知東國之事 而儒者大抵務學上國之書 未嘗兼考我國之誌 非 其心之不欲 亦力有所不逮耳 - 248 -
라고 인식했다.22) 조선과 명을 일가로 여기는 인식은 조선 지식 인들이 스스로를 中華人으로 여기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16세기 지식인 가운데는 스스로를 명의 지식인보다 더 철저한 中華人 으로 자부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1574년(선조 7) 북경에 使行했던 許篈과 趙憲은 당시 명에서 陽明學이 유행하고 王守仁 이 文廟에 從祀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들은 명의 지식인 들에게 異端을 받들어서는 안 된다 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天子의 나라, 중화의 본고장 에서 朱子學이 아닌 異端의 학풍이 성행하고 있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朱子性理學에 푹 빠져 있던 16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미 중화인 이상의 중화인 으 로 등장했던 것이다.23) 16세기 지식인들이 명을 절대적으로 존숭하고 심지어는 스스 로를 중국인보다 더 철저한 중화인 으로 자부했던 까닭은 무엇일 까?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기 性理學이 국가의 敎學이자 통 치 이념으로 현실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던 점이다. 性理大典 이 수입되었던 世宗代,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던 成宗代를 지나 16세 기가 되면 조선 지식인들은 성리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들의 기준으로 저술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성리학 이해는 주 로 宋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고, 華夷論의 바탕에서 中華와 夷 狄을 엄밀히 구분했다. 또 老莊과 陽明學을 배격하고 朱子學만을 오로지 존숭하는 것을 통해 조선의 학문이 중국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24) 22) 金誠一, 鶴峯先生集 권5 擬答宣慰使平行長. 我朝之與貴國 事勢之不相接 旣 如前所云云者 而況皇明乃我朝父母之國也 我殿下畏天之敬 事大之誠 終始不貳 故北望神京 天威咫尺 玉帛之使 冠蓋相望 此實天下之所共聞知也 貴國今雖絶和 數十年前 曾有觀周之使 豈不知我邦一家於天朝乎 23) 夫馬進, 1990 萬曆二年朝鮮使節の 中華 國 批判, 山根敎授退休記念明代史 論叢 (東京, 汲古書院), 565~568쪽. - 249 -
또 이 시기 中宗이 反正이라는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즉위한 것도 주목되는 측면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명에 대해 대단히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25) 중종은 이후 反正功臣들의 권세에 휘둘려 治世를 이루지 못하자 趙光祖를 비 롯한 士林들을 重用했다. 조광조 등은 治世를 이루려는 목적에서 道學(-성리학)을 중시하고 무엇보다 君主의 一心을 강조했다. 나아가 性理學을 배타적이고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삼아 이른바 至治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昭格署를 혁파하여 異端를 배척 하고 대외정책이나 군사적 用兵에서도 王道와 仁義 개념을 먼저 강조했다.26)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은 인의와 왕도를 갖춘 이상 적인 나라로 인식될 개연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들어 명에 대해 절대적이고, 어쩌면 맹목적인 尊崇 풍 조가 확산되었던 배경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幼少年들의 修 身書이자 歷史書로서 朴世茂(1487 1554)의 童蒙先習 이 등장 한 점이다. 沈守慶(1511 1599)에 따르면 이 책은 16세기 초반 출간된 뒤부터 學童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교재로 자리 잡았 다.27) 사대부 집안 자제들이 태어나서 최초로 배우는 역사서인 24) 김항수, 1981 16세기 士林의 性理學 이해, 韓國史論 7 25) 계승범, 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서울, 푸른역사) 123~139쪽; 夫馬進, 2007 明淸中國の對朝鮮外交における 禮と 問罪, 中國東アジア外 交交流史の硏究 (京都, 京都大學學術出版會) 所收. 26) 한 예로 趙光祖 등은 1518년(중종 13) 8월, 함경도 甲山에 몰래 들어와 사냥 하고 있던 女眞族 추장 束古乃를 사로잡으려는 계획이 王道政治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여 무산시켰다. 趙光祖 등은 단지 사냥하러 온 束古乃를 盜賊 의 꾀로서 掩襲하여 잡는 것은 왕도에 어긋난다 고 반대했다. 비밀과 전략이 요구되는 군사 작전까지도 王道나 仁義 개념에 맞춰 시행하려 했던 것이다. (김태영, 2006 己卯士林의 至治主義論, 朝鮮 性理學의 歷史像 (서울, 경희 대 출판국) 所收) 27) 沈守慶 遣閑雜錄. 近世有童蒙敎訓之書 名曰童蒙先習者 未知何人所著 或云 斯文朴世茂所著 而問於其姪朴挺立則曰 果是叔父所著 其書先敍五倫 次敍歷代 次敍東國之事實 兼經史之略 童蒙之所宜先習也 敎童蒙者 盍以此爲先乎 - 250 -
이 책은 중국 역대 왕조의 略史를 먼저 언급한 뒤 한국사를 略述 하는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중국사의 맨 마지 막 항목이 明의 건국이고 그 내용이 親明, 慕華의 입장에서 漢族 중심의 華夷觀을 부추기고 있는 점이다. 하늘이 오랑캐 元의 더 러운 德을 혐오하여 大明을 떠오르게 했고, 그 명이 千萬年 동안 이어질 것 이라는 믿음이 확고하다.28) 17세기 이후에도 동몽선 습 이 사대부 집안 자제들에게 必讀書가 되었던 사실을 고려하 면29) 명(-漢族) 중심의 종족적 화이관이 어릴 적부터 조선 지식 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30) 16세기 스스로 중화인 을 자부했던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에 대 해 문화적으로 우월의식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黃廷彧 (1532 1607)은 일본은 중국의 교화 바깥에 위치한 한갓 군더 더기에 불과하므로 중국의 諸侯가 될 수 없다 며 중화의 예의와 문물을 전해주는 조선이 없다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보고들을 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 라고 인식했다.31) 조선이 中華國 明의 충순한 諸侯 라는 자부심이야말로 오랑캐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의 전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尊明意識에 바탕을 두고 일본에 대해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던 16세기 조선 지식인들 에게 명에 거역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28) 朴世茂, 童蒙先習 總論. 胡元滅宋 混一區宇 綿歷百年 夷狄之盛 未有若此者 也 天厭穢德 大明中天 聖繼神承 於千萬年 29) 실제로 李好閔(1553 1634)은 7 8세 무렵부터 동몽선습 을 읽었다고 회고 한 바 있다. 僕纔七八歲 嘗與伴讀周興嗣千字文童蒙先習孝經等書 (李好閔 五 峯先生集 권7 諸賢情詠詩卷序 ). 30) 한명기, 2009 병자호란 직후 대청인식의 변화 조짐, 정묘병자호란과 동아 시아 所收, (서울, 푸른역사), 365~368쪽. 31) 黃廷彧, 芝川集 권3 檄日本國關白書. 乾坤定位 上下判矣 萬國區分 內外別 矣 貴國邈在海中 天地間一疣贅之域 自三代以來 未嘗紀土貢而采國俗 絶不許齒 錄於侯服 幸而弊邦與之爲隣 禮義文物 侔擬中華 貴國舍弊邦 則一步無可往之地 耳無所聞 目無所見 不過井底蛙耳 - 251 -
었다. 따라서 일본이 명에 도전하려 했을 때 조선 지식인들이 느 꼈던 충격은 엄청났다. 임진왜란 발생 직전 조선에 대해 征明嚮 導 를 요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의 국서가 왔을 때, 梁大樸(1544 1592)은 격분했다. 그는 조선과 명의 관계는 의리 로는 君臣, 은혜로는 父子라고 규정하면서 일본 使臣의 목을 치라 고 촉구했다.32) 그리고 실제 일본이 조선에서 길을 빌려 명으로 들어간다 며 전쟁을 일으켰을 때 조선은 명을 대신하여 희생자 의 역할을 자임한다. 倭奴들이 무도하게 명을 침범하려 하므로 조선이 의리에 따라 배척했다가 명 대신 침략을 받았다 는 것 이33) 조선의 인식이었다. 2. 임진왜란과 再造之恩 의 그림자 朝明關係의 관점에서 볼 때 인조반정이 발생하는 배경에는 15 세기 이래 16세기를 거치면서 커져버린 명의 조선에 대한 정치 사상적 영향력, 특히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형성되 고 절대화되었던 再造之恩 과 崇明意識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것은 1623년 정변 성공 직후 仁穆大妃가 반포했던 敎書의 내용 가운데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廢黜을 정당화 하 는 명분으로 재조지은 배신 을 내세웠다. 인목대비는 명과 조선 의 관계는 의리로는 君臣, 은혜로는 父子이고 壬辰年의 再造之惠 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전제했다. 그 때문에 宣祖는 40년 동안 지성으로 事大했고 평생 북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고 강조했다. 그런데 광해군은 배은망덕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 32) 梁大樸, 靑溪集 권3 請斬倭使書上松江鄭相國. 仄聞倭使又來留東平館 而賊 奴書中有今天下歸朕一握 率兵超入大明國 易吾朝風俗 聞不勝心崩肝裂 我之 於皇朝 義則君臣 恩猶父子 非羅麗之於唐宋比也 33) 宣祖實錄 권34 선조 26년 1월 戊午. 上手書答示曰 倭奴不道 要犯上國 小邦 君臣 據義斥之 遂觸其怒 先被兇鋒 今蒙聖天子恤小之仁 特發兵來援 皇恩罔極 - 252 -
랑캐와 화친했고 1619년 深河戰役 당시에는 장수에게 상황을 보 아 向背를 정하라고 사주함으로써 전 병력을 오랑캐에게 투항하 도록 했고, 조선에 오는 명의 사신들을 붙잡아 두는가 하면 황제 의 조칙을 어기고 군대를 보내 명을 원조하지 않음으로써 三韓禮 義之邦을 夷狄禽獸가 되게 했다 고 통렬히 질타했다.34) 인목대비의 말대로라면 인조반정의 발생 배경에는 명의 존재가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특히 주목 되는 것은 인목대비가 명을 의리로는 임금, 은혜로는 아비이자 壬辰年에 再造之惠까지 베푼 존재 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 서 광해군은 임금이자 아비이며 恩人을 배신한 천하의 패륜아, 즉 절대적 존재 인 명을 배신한 不忠不孝背恩 의 원흉 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명은 어떻게 인목대비의 언급처럼 조선에게 절 대적인 존재 가 될 수 있었을까?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조선 건국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양국 관계의 변화에 따라 점점 커져왔다. 李成桂가 威化島에서 回軍했던 이래 조선의 역대 왕들 이 명에 공순히 조공하고 事大해 왔던 이상 명은 조선에게 군주 국 이자 上國 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금=아비 라는 인 식과 맞물려 부모지국 으로 자임했다. 명은 특히 宣祖를 비롯한 조선 국왕들을 책봉해 주는 과정에서 다른 오랑캐 들은 감히 기 대하기 어려운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35) 이 같은 34) 承政院日記 제1책 인조 1년 3월 14일. 我國服事天朝 二百餘載 義卽君臣 恩 猶父子 壬辰再造之惠 萬世不可忘也 先王臨御四十年 至誠事大 平生未嘗背北 而坐 光海 忘恩負德 罔畏天命 陰懷二心 輸款奴夷 己未征虜之役 密敎帥臣 觀 變向背 卒致全師投虜 流醜四海 王人之來本國 拘囚羈縶 不啻牢狴 皇勅屢降 無 意濟師 使我三韓禮義之邦 不免於夷狄禽獸之歸 痛心疾首 胡可勝言 35) (明) 葉向高, 蒼霞正續集 朝鮮考 (皇明經世文編 권461 所收). 隆慶元年 긍 (山亘)卒 從子昖嗣 李氏自成桂以來 事朝廷恭 歲時朝貢外 慶慰報謝無常期 行李 踵于道 王嗣立 則使者往封 有大事 則頒詔其國 他夷不敢望也 - 253 -
입장에 더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명은 조선의 恩人 이 됨으로써 그 영향력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명이 조선의 내정에 간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시기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명과 명군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던 상황, 또 조선이 명의 영향력을 借用하려고 스스로 나서게 되면서부터 조 선에 대한 명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왜란 당 시 조선은 內政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도 명군을 활용하 려고 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오늘날 우리나라는 단지 倭奴 의 再侵만이 아니라 城中의 變亂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 다. 지금 사방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살 수 없으니, 난동 이 일어날 동기는 그 속에 한없이 숨어 있다. 지금은 明軍이 나라를 누르고 있어 비록 간악한 무리가 있어도 감히 움직 이지 못하지만, 명군이 철수한 뒤에는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는 조금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36) 상이 또 이르기를 지금 민심은 극도로 고통을 겪고 있 으니 명군에 대한 접대가 부득이한 일이라는 것을 백성들이 혹 안다고 하더라도 또한 變亂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 다. 명군 장수가 돌아간 뒤 혹시 대중을 불러 모아 거사하는 무리가 있다면 현재의 군사와 기계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백성의 원망이 이미 극에 이르렀으니 어찌 모두가 良民이겠 는가? 나라 밖의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날 화가 염려스럽다 37) 36) 宣祖實錄 권39 선조 26년 6월 丁酉 - 254 -
1593년(선조 26) 1월 이후,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이 본 격화 되고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선조는 명군을 자신의 王 權을 지켜주는 守護者로서 인식했다. 1593년 이후 일본군의 위협 은 한풀 꺾인 대신 민중 반란의 위험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명군 에 대한 선조의 기대와 의존 심리는 대단히 컸다. 그는 명군을 활 용하여 內亂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위에서 보이듯이 내 란에 대한 선조의 우려와 경계 의식은 왜란 초부터 명군이 철수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주목되는 것은 명군 지휘부가 선조의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는 점이다. 1599년 5월, 명군 經理 邢玠는 수백 명의 명군 병 력을 조선에 남겨두어 京鄕의 치안을 담당하는 巡警으로 활용하 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조선 전국에 도 적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명군 600명을 잔류시켜 捕兵으로 활용 하겠다 는 구상이었다.38) 명군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 영역에 속하는 治安 문제까지 신경 을 썼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선조와 조선 지배층 이 명군의 참전과 원조를 재조지은 으로 숭앙하고, 무엇보다 우 선하는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였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명은 임진왜란 참전을 통해 조선의 보호자 이자 절대적 은인 으로서 위상을 확고하게 했다. 그리고 그 같은 위상이 이후 조선을 馴致시키는데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 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훨씬 커진 명의 영향력의 여파는 전쟁 이후 37) 宣祖實錄 권109 선조 32년 2월 壬子 38) 明神宗實錄 권335 萬曆 27년 壬戌. 一 添巡捕 自鴨綠至王京 自王京至釜山 地方寥遠 寇盜充斥 前議留捕兵六百名 卽以把總李開先楊拱二人統之 分地巡 警 - 255 -
조선으로 밀려왔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의 威勢가 추락하고 있었다. 명은 이미 16세기 중반부터 급격 히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英宗이 타타르에게 포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政變이 빈발했다. 독재와 아집에 빠지고 사회 경제적으로 동요하던 시기 그나마 張居正의 개혁을 토대로 왕조 의 수명이 72년이나 연장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39)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 참전은 명의 쇠퇴를 더 가속화시켰고, 곤경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면서 藩國에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 빚 어졌다. 그것은 조선 참전으로 명이 입었던 부담과 손실을 강조하 고 조선의 보답을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이른 바 礦稅之弊 같은 것이 대표적이었다. 1597년 무렵 명에서는 이 미 왜란으로 인한 財政 부담과 함께 礦稅의 폐단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40) 이 같은 상황에서 전쟁 이후 조선에 대해 中江開市를 지속하라고 요구하고, 조선에 왔던 명 使臣들이 막대한 양의 銀 을 뜯어 갔던 것은 광세의 폐단이 변형된 형태로 조선에 전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명은 임진왜란 참전을 계기로 조선 에 대해 절대적 은인 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했다. 당연히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 고 자부하는 명의 생색과 동시에 명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고 여기는 조선의 부채 의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39) 朱東潤, 2009 張居正大傳 (西安, 陝西師範大學出版社), 19쪽 40) 明神宗實錄 권309 萬曆 25년 4월 癸亥. 戶科給事中程紹言 倭變礦變 勢難兼 防 乞停浙江山東沿海開採之役 不報 - 256 -
Ⅲ. 扈聖功臣 후예 들의 정권 장악으로서의 仁祖 反正 당연히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특히 선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을 명군의 참전과 원조 에서 찾았다. 즉 명군 때문에 전란을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의 이 같은 인식은 상당히 미묘한 정치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 음의 기록을 보자. 지금의 회복은 오로지 明軍 때문이다. 그런데 명군이 들 어올 수 있었던 것은 義州로 갔기 때문이다. 의주의 守令과 백성들이 충성과 힘을 다해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 공 은 잊을 수 없다 또한 당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했던 사 람들은 모두 나와 함께 환란을 같이 겪은 사람들이다.41) 위의 발언에서 보이듯이 선조는 명군 덕분에 임진왜란을 극복 할 수 있었다고 전제한다. 이에 더하여 선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호종했던 사람들, 즉 扈聖功臣들과 함께 의주로 갔기 때문 에 나라의 한 귀퉁이라도 보전했고, 의주를 기반으로 명에 원병을 청하여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 군과 직접 맞서 싸웠던 조선 官軍이나 義兵의 공로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한 평가를 내리는 태도와 맞물려 있다. 다음의 기록은 41) 扈聖宣武淸難功臣都監儀軌 (서울대 奎章閣 영인본), 38~39쪽. 今此恢復 專 由於天兵 而天兵之所以至此者 由於往義州故也 義州守臣及其人民 忠勤宣力 以至今日 其功不可忘也 且此時終始扈從者 皆與予同患難之人也 - 257 -
이 점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우리나라 將士들이 일본군을 막아낸 것은 바로 羊을 몰 아다가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았다. 李舜臣과 元均의 바다에서의 승리가 首功이고 그밖에 權慄의 幸州의 승리와 權應銖의 永川 공략이 사람들에게 약간 강한 인상을 줄 뿐 그 나머지는 들어본 바가 없다.42) 羊을 몰아다가 호랑이를 공격하는 격 이라는 비유 속에 임진왜 란 시기 조선의 관군이나 의병을 바라보는 선조의 속내가 드러난 다. 비록 이순신과 원균을 首功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마지못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순신과 원균의 활약을 동급으로 평가하 고 있는 것 또한 몹시 미심쩍다. 임진왜란이 완전히 끝난 이후 벌어진 功臣 錄勳 과정에서 선조 는 일본군과 직접 싸웠던 宣武功臣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扈聖功臣들을 더 높이 평가했다. 李恒 福과 鄭崑壽를 전란 극복의 元勳으로 인정하여 扈聖一等功臣에 錄功했다. 두 사람은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하고, 명에 가서 조선 사정을 호소하고 원군을 불러오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선조 는 또한 공신 녹훈 과정에서 호성공신들을 일방적으로 편애했다. 우선 호성공신은 86명이나 되었지만 선무공신은 16명밖에 녹공 하지 않았다. 특히 호성공신 86명 가운데는 內侍 24명을 포함해 34명을 中人 이하 신분의 인물로 채웠다. 선조는 內侍, 馬夫 등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을 수행한 신료들은 거의 대부분 공신으로 42) 扈聖宣武淸難功臣都監儀軌, 105~108쪽. 答曰 我國將士之禦倭 正如驅羊而 攻虎 李舜臣元均海上之捷爲首 此外權慄之戰行州 權應銖之攻永川 差强人意 其餘無聞焉 - 258 -
책봉하는 편향된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결국 명군 역할 절대화 扈聖功臣 찬양 (=義州 播遷의 의미 부각) 宣武功臣 평가 절하 실추된 宣祖 자신의 권위 만회 라는 구도와 맞물려 있었 다.43) 동시에 그것은 西人과 南人이 중심이 되었던 호성공신들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광해군 정권은 광해군 자신을 포함하여 그 핵심인 鄭仁弘과 李爾瞻 등 왜란 당시 일선에서 義兵 등으로 활 약했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광해군은 分朝를 이끌며 일선에서 전쟁을 지휘했고, 정인홍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격파한 主戰派였다. 이이첨 또한 주전파였는데, 정통성이 약했던 광해군이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했다.44)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왜란 당시 의병 으로서 주전파적 속성이 강한 宣武功臣 에 근접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 다. 실제 광해군대에는 왜란 당시 조선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을 宣祖나 扈聖功臣들의 명에 대한 請兵 때문 이 아니라 광해군이 활약하면서 義兵들을 奮起시켰기 때문 이라는 인식이 강조되고 있었다. 또 광해군 스스로가 왜란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하기도 했다.45) 이렇게 볼 때 인조반정의 발생과 성공은 단순히 국내정치적 차 원이 아니라 명군, 혹은 명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 의의를 다 시 정의, 평가할 수도 있다. 실제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인 물들은 대부분 李恒福과 일정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이항복은 광 43) 한명기, 앞의 책(1999), 67~82쪽; 한명기, 2007 再造之恩과 조선후기 정치사, 大東文化硏究 59 44) 한명기, 1988 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의 動向, 韓國史論 20 (서울대 국사학과). 45) 노영구, 2004 공신 선정과 전쟁평가를 통한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 역사비 평 51; 한명기, 앞의 논문(2007). - 259 -
해군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北人들이 득세했던 당시 정국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서인 신료들의 대부 노릇을 했던 인물이었다. 나아가 인조반정을 일으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 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반정을 도모했다거나, 金瑬나 李貴 등이 그의 명망을 가탁하여 반정을 일으켰다는 등의 이야기 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었다.46) 나아가 김류, 이귀 뿐 아니라 李時白, 申景禛, 崔鳴吉, 張維 등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 들 대부분이 이항복의 門下였다.47) 그런데 李恒福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元勳이자 扈聖一等功臣으 로 녹공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인조반정은 결국 扈聖功臣 계의 인물들(-西人)이 宣武功臣 계의 인물들(-北人)을 제거하고 집 권했던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조정권이 광해군대에 비해 親明의 기치를 보다 선명하게 내 세운 것은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보다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 이다. 어쩌면 威化島回軍 이래 國是처럼 굳어진 親明의 趨向이 임 진왜란을 계기로 절정에 이르고, 宣武功臣 정권 의 속성이 강했 던 광해군대에 이르러 다소 약화되었던 것을 되돌려놓은 사건이 인조반정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고 하겠다.48) 46) 安鼎福, 順菴先生文集 권13 橡軒隨筆 下. 盖君者天也 君雖無道 豈可簒廢 伊霍之事 非人人所可擬也 晉唐四人識見畧同 君臣大分 不可以干犯故也 我朝光 海君之廢也 白沙設謀遺戒金瑬等而爲之 故許滄海格高士也 嘗斥呼白沙名 人以 爲尤 則答曰 彼不知君臣之分 安可尊之乎 此義定是 然而白沙之賢而豈爲是哉 或曰 金瑬李貴等欲爲藉重而爲此言 實無是事 其說似然 47) 朴亮漢, 梅翁閑錄 宣祖末年, 谿谷張公 (徐大錫 編, 朝鮮後期 文獻說話 分 類整理 (Ⅱ) (1991,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280~281쪽, 286쪽. 48) 다음에 보이듯이 正祖가 柳夢寅을 伸寃해 주면서 내린 글에서 改玉(-仁祖反 正)을 언급하면서 大明中天 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 新刊 於于堂遺集, 御製伸雪判付. 夢寅者豈不是難之難者 栢舟之唱 莫云下俚鄙 辭 見者掩卷 聽者墮淚 此又夢寅爲人爲鬼之節拍 其在昬朝也 守正而屛跡 甘心 淪廢 逮夫改玉之辰 日月光華 大明中天 乃能矢心不渝 亦未嘗於常分上絲毫有虧 - 260 -
Ⅳ. 仁祖反正에 대한 明의 이중적 인식과 대응 명이 인조반정을 불법적인 찬탈 로 인식하면서도 권도 차원에 서 인조를 책봉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으므로 본 장에 서는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한다.49) 1624년(인조 2) 4월, 조선은 權啓를 聖節兼冬至使로 삼아 명에 파견하기로 결정 했다. 당시 書狀官으로 동행했던 洪翼漢의 기록을 보면 당시 명 이 인조반정에 대해 보였던 인식과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당시까지도 명 조정에서는 인조반정의 성격에 대한 규정 문제, 인조를 책봉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歸一되지 않은 상 황이었다. 조선 국왕 李琿이 조카 李倧에게 찬탈당했다. 官撰의 熹宗實 錄 과 私撰의 兩朝從信錄 에 실린 이 기사야말로 사실상 당시 명 조정이 인식하고 있는 인조반정의 실체였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이 후 찬탈 이란 표현을 변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소모 해야 했다. 하지만 두 사서에 실린 내용은 결국 고쳐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훗날 洪大容은 청나라 知己였던 사람에게 보낸 글에 서 明記輯略 이란 史書에도 인조반정과 관련하여 李貴 등이 불 을 끈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入宮하여 광해군을 묶어 불 속으로 던졌다 거나 조선국왕(-인조)이 임금을 弑害하고 스스 로 즉위한 뒤 (명에서) 변방 신료들이 토벌하기를 청하자 魏忠賢 에게 붙어 封典을 청했다 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거론한 바 있다.50) 缺處) 49) 본장을 서술하는 데는 그 동안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洪翼漢의 花浦先生朝天 航海錄 의 내용을 주요 자료로 활용했다. 홍익한은 1624년과 25년에 걸쳐 冬 至使 書狀官으로 명에 다녀와서 위의 기록을 남긴 바 있다. - 261 -
1624년 9월 10일, 홍익한 일행을 만난 登州의 同知 翟棟 등은 질책하기를 이제 朝鮮이 임금 廢立하기를 내기바둑 두듯이 하여 방자하기 짝이 없으니 紀綱이 어디 있는가 운운하여 일행을 긴장 시켰다. 특히 東林黨 계열의 신료였던 吏科給事中 魏大中은 세상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君臣의 名分인데 조선이 함부로 簒逆의 변을 일으켰음에도 명으로부터 토벌의 군사를 회피하려고 시도하 고 있다 고 극렬하게 성토한 바 있었다.51) 10월 28일, 사신 일행은 인조반정의 승인과 책봉 여부를 둘러 싸고 명 禮部에서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직접 목도했다. 당시 禮科左給事中 劉懋는 조정에서 朝鮮이 힘을 다하여 오랑캐 를 평정해야만 冊封을 준허하기로 결정했으니 쉽사리 인조의 冊 封을 승인할 수는 없다 고 운운했다. 반면 右給事中 顧其仁은 조 선이 상국을 섬긴 지 200년 동안 列聖의 誥命이 일정한 법칙이 있었는데 이제 지체하면 그에 어긋나는 것이고, 陪臣이 바다를 건 너와 두 번이나 청하는데도 준허하지 않는다면 문제일 뿐 아니라 遼東을 평정하는데도 방해가 된다 고 했다. 인조가 명으로부터 책 봉을 받으려면 먼저 조선이 후금과 대결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는 주장과, 명이 먼저 인조를 책봉해 주어야 조선의 성의를 이끌 어낼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눠지고 있었던 것이다.52) 그런데 당 50) 洪大容, 湛軒書 外集 권1 杭傳尺牘-明記輯略辨說. 李貴等救火爲名 領兵 入宮 縛琿投烈焰中死 盡殺其世子宮眷親信之人云云 丙寅 姜曰廣册封條 朝鮮 王諱弑君自立 邊臣請討 因魏忠賢請封云云 51) 洪翼漢, 花浦先生朝天航海錄 권1 天啓 4년 11월 20일. 聞得吏科給事中魏大 中 於上年奏聞使辭朝後 參擧我國事陳疏云 其略曰 禮莫大于名 名莫大于分 分 于莫大于君臣 而姓某諱某 乘東鄙不靖之日 廢君自立 名分安在 惟彼越在海外 原 不必興聞罪之師 以彼鱗介 易我冠裳 但欲以一紙蠻書 便取九重冊詔 恐賞奸誨叛 莫此爲甚 52) 洪翼漢, 花浦先生朝天航海錄 권1, 天啓 4년 10월 28일. 初 禮科左給事中劉 懋力言于朝曰 朝鮮冊禮 不爲准許於上年 諸公未曉其意耶 責效滅虜 乃許准封 朝 議已定 豈可容易許之 右給事中顧其仁曰 不可 朝鮮事大二百餘年 列聖誥命 自有 - 262 -
시 명은 언제까지나 조선에 대해 명분을 내세우면서 반정에 대한 승인과 책봉을 회피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요동의 급박한 정세 때문이었다. 그 급박한 정세를 넘어서려면 조선의 협조가 절 실히 필요했다. 즉 조선을 以夷制夷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야만 했다. 실제 당시 명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은 1619년 조선과 海西 女眞 하다부 哈達部 의 병력까지 동원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 지만 실패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의 참패가 그것이었다.53) 사 르후 전투 패전 이후에도 조선을 끌어들이려는 명의 이이제이 시 도는 멈추지 않았다. 군사적으로 누르하치에게 계속 밀리고 있었 기 때문이다. 1621년에는 滿洲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인 遼陽과 瀋陽마저 함락되었다. 당황한 명은 1621년 6월, 熊廷弼을 다시 기용했다. 웅정필은 요동의 대부분을 빼앗긴 것을 염두에 두고 三 方布置策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기획했다. 그것은 廣寧 등지의 방 어 태세를 강력하게 유지하고, 天津과 登萊 지역의 水軍을 이용하 여 후금을 견제하는 전략이었다. 특히 登萊 지역의 수군으로써 조 선과 연결하고, 조선을 시켜 압록강 부근에서 명을 聲援하는 것을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54) 웅정필이 삼방포치책을 구상하면서 조 선에 대한 軍援 요청은 더 증가했다. 명이 후금 때문에 守勢에 처 하면 처할수록 조선을 이용하려는 심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하지만 조선의 光海君은 명의 군원 요청에 순응하지 않았 다. 그는 사르후 전투에 병력을 보낸 이후로는 명의 거듭된 징병 定章 而反爲稽滯 則非特有乖規例 陪臣萬里跨海 再使來請 今若不許 必令復至 天朝待小邦之道 固爲顏甲 而其妨害於遼事者 安保其必無也 反覆言之 多官皆以 顧言是 卽日抄送 53) 사르후戰에 대한 종합적 고찰은 陸戰史硏究普及會, 1972 明と淸の決戰 (東 京, 原書房) 참조. 54) 陳生璽, 2006 明淸易代史獨見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14~215쪽. - 263 -
요청을 거부했다. 명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같은 시점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니 以夷制夷를 시 도하는 자들은 그것을 조선을 이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 식하게 되었다. 9월 24일 洪翼漢 일행이 靑陽店이란 곳에 도착했 을 때 生員 李如杜 등은 조선이 예의바른 나라라고 찬양했다. 그 러면서 遼東이 적에게 점령된 이후에도 조공을 계속하니 정성이 지극하다 며 毛文龍이 椵島에 외로이 있는데 朝鮮이 적의 후방 을 노리고 있으므로 오랑캐가 오금을 못 펴고 중국이 편한 것 이 라고 했다. 또 조선의 새 왕이 仁哲하여 禮儀를 돈독히 하고 폐 단을 제거하여 정사를 일신했으니 명이 遼東을 회복하려 할 때 믿을 것은 오직 귀국 뿐 이라고 운운하여 인조반정의 발생을 긍 정적으로 평가했다.55) 12월 18일 禮科給事中 顧其仁은 조선의 요청을 들어줄 것을 다시 강조하면서 遼東의 정세에 대해 언급했 다. 그는 조선을 책봉하는 것은 列聖朝의 전례였고 적들이 山海 關을 엿보는 판에 조정에서 掎角之勢로 여기는 것은 오직 毛文龍 과 朝鮮 뿐이라며 封典을 준허하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며 인조를 빨리 책봉하라고 요구했다. 바로 이 같은 인식과 정세 판단 아래서 명은 인조를 책봉하게 된다. 그리고 승인 배경에는 당시 명 조정을 魏忠賢의 奄黨이 장 악하고 있는 현실이 작용했다. 北京에 갔던 홍익한 일행도 그 같 은 현실을 직접 목도했다. 10월 19일, 홍익한 일행이 만났던 한 중국인은 천하의 권세자는 魏忠賢이고 둘째는 客氏이고, 세째는 황제 라고 운운했다.56) 북경의 市井에서는 위충현의 권력이 사실 상 황제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인조가 책봉 승인을 받아내는 과정에는 모문룡의 역할도 중요했다. 그는 사실상 奄黨 55) 洪翼漢, 花浦先生朝天航海錄 권1 天啓 4년 9월 24일 56) 洪翼漢, 花浦先生朝天航海錄 권1 天啓 4년 10월 19일 - 264 -
의 일원이었다. 조선에게 책봉이라는 선물을 안겨 줌으로써 조선 을 순치시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서 모문룡은 인조반정의 발생을 두둔하고 조선의 새 정권을 비호했다.57) 결국 황제는 1625년 1월, 인조를 책봉한다는 칙유를 모문룡에게 내리고, 그 사실을 조선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또 조선과 힘을 합쳐 후금을 토벌하라는 지시도 곁들였다. 그것은 사실상 조건부 책봉 이었다.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현 실을 고려한 조처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冊封使로서 조선에 파견하기로 선택된 자들이 전부 魏忠賢의 휘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환관 王敏政과 胡良輔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자들이자 위충현 에게 賄賂하고 왔던 자들이었다.58) 인조를 승인했던 데에는 명의 어지러운 政局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Ⅴ. 仁祖反正 승인을 통해 明이 얻은 것 명은 고민 끝에 인조를 승인, 책봉함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 의제적 지배력 을 다시 회 복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사실상 1621년 요동이 후금에게 넘어가 조선과의 육로가 단절되고, 명이 추구하는 以夷制夷 정책에 조선 의 광해군이 고분고분하지 않음으로써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1. 새로운 은혜 의 탄생과 의제적 지배력 의 회복 57) 한명기, 2010 이여송과 모문룡, 역사비평 90 58) 洪翼漢 花浦先生朝天航海錄 권2 天啓 5년 1월 2일. - 265 -
위에서 살핀 대로 명은 인조반정 직후 고민에 빠졌다. 조선에서 일어난 政變을 정상적인 왕위 계승(-反正)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불법적인 쿠데타(-簒奪)로 부정하거나 응징할 것인가? 과거의 사례를 돌아보면 명은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대체로 조선 의 선택을 묵인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太宗이 왕세자를 讓寧大 君에서 忠寧大君(-世宗)으로 교체하고 승인을 요청했을 때 명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中宗反正이 일어났을 때에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조선의 承襲 요청을 수락했다.59) 하지만 인조반정의 경우는 달랐다. 우선 당시 명 안팎의 정세가 중종반정이 일어날 16세기 초반 무렵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 다. 명 조정에서는 당쟁이 치열했다. 奄黨과 東林黨은 遼事 문제 를 놓고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엄당은 현실 을 고려하여 山海關 을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는 守勢的인 입장이었는데, 동림당은 후 금에게 빼앗긴 遼東을 수복해야 한다고 攻勢的인 요동정책으로 맞섰다.60) 특히 동림당 신료들은 인조를 승인하는데 부정적이었 다.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새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시 급했던 인조는 명에 충성을 다짐했다. 그것은 후금과 적극적으로 대결하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새 정권에 대한 冊封, 즉 承認權을 쥐고 있던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급격히 커졌 다. 조선의 새 정권을 책봉하기로 최종 결정할 때까지 명은 시간 을 끌었다. 綱常으로 보면 명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해야 할 簒 59) 중종반정 직후 조선의 새 정권은 燕山君을 시켜 중종으로 국왕을 교체해 달라 고 요청했고 명은 그를 수용했었다. 60) Frederic Wakeman, Jr.,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volume 1,(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pp.69-72; 閻崇年, 2006 明亡淸興六 十年 (北京, 中華書局), 97쪽. - 266 -
奪 임에도 불구하고, 모문룡과 합세하여 후금을 토벌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의 새 정권을 특별히 승인해 주자는 것이 당시 예부상 서 林堯兪를 비롯한 명 조정 신료들의 주장이었다. 찬탈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封典을 승인한다 는 言說이 조명관계에서 새로 운 명분으로 추가되었다. 再造之恩 에 이어 封典之恩 이 탄생하 는 순간이었다.61)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쫓아내면서 인조는 宣祖의 후계자가 되었다. 선조는 명으로부터 재조지은 을 입었고 인조는 봉전지 은 을 입었다. 은혜 에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요구가 따르게 마련 이다. 이제 인조는 두 가지 은혜 를 모두 갚아야만 했다.62) 자연 히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운신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조선이 명에 대해 아쉬운 소리 를 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조선은 명의 요구에 대해 더욱 저자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모문룡에 대한 軍糧 接濟를 비롯하여 사회경제적 부담을 감수해 야만 했다. 다음으로는 불법적인 찬탈임에도 불구하고 封典을 허 락해 준 명 의 天朝 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거역하기가 더욱 곤란 해졌다. 한 예로 1625년(인조 3) 명에서 황태자가 태어나자 명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통고하기로 결정한다. 조선에 왔던 61) 明熹宗實錄 권42 天啓 3년 12월 癸巳 禮部尙書林堯兪等言 朝鮮廢立之事 以綱常名義論 討之絶之 此一定之正體也 以翼戴天朝論 二心通奴者是爲我梗也 同心滅奴者是爲我用也 此時急在邊疆 似未可以經常禮論矣 如蒙皇上俯從所請 伏乞先頒勅諭一道 登萊撫臣 差官同陪臣至彼 錫以朝鮮國王名號 統領國事 仍著 令發兵索賦 同毛文龍設伏出奇 俟恢復漸有次第 始遣勳戚重臣 賫捧節冊 完此封 典 庶幾字小之中不失固圉之道 其于疆事國體 所裨非細矣. 62) 인조가 선조의 손자이자 후계자임을 강조하는 다음의 발언에서 이 같은 분위 기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是故 宣祖大王於平日 無或一者背燕京而坐 其臨群 臣 爲天朝感激之語發於至誠 至於咨文方物 皆盡誠敬 至今不泯於婦孺之耳 恭惟 殿下 宣祖之孫也 所當以宣祖之心爲心 以宣祖之事爲法 (趙絅, 龍洲遺稿 권6 辭司諫疏 ). - 267 -
詔使 姜曰廣은 1626년 6월, 서울에 도착하여 인조를 만난다. 당 시 인조는 황제의 조칙을 맞이하는 迎詔禮를 행했는데 素服을 입 고 있었다. 인목대비의 國喪 때문이었다. 인조가 소복을 입은 것 을 본 강왈광은 인조에게 절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조선의 국상 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私事에 불과한 것이므로 以私廢公할 수 없 다 며 힐문한다. 인조가 이에 忠과 孝는 같다는 논리로 대꾸하자 강왈광은 소복을 입는 것을 오랑캐의 풍속 夷俗 이라 계속 몰 아 부치면서 服을 바꾸지 않으면 詔禮를 행하지 않겠다고 위협하 여 결국 인조를 굴복시켰다.63) 요컨대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은 기우는 제국 명의 軌道 속으로 더욱 철저하게 재진입했다고 할 수도 있다. 2. 毛兵, 조선 駐屯 明軍의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 인조반정 이후 명이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명군의 존재다. 1622년부터 1637년까지 조선의 鐵山 부근에는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毛文龍의 東江鎭에 소속된 장졸들이 그들이다. 조선에서 는 그들을 보통 毛兵이라고 불렀다. 본부는 비록 철산에서 약간 떨어진 椵島에 있었지만, 명군은 수시로 철산, 龍川 등 청천강 이 북 지역에 출몰했다. 뿐만 아니라 청천강 이북 지역에는 명군이 설치한 屯田들이 광범하게 널려 있었다. 모문룡이 요동 수복 의 슬로건을 내걸고 가도로 들어간 것은 1622년이었다. 그가 지닌 군사적 역량은 미약했지만, 후금은 그 63) (明) 姜曰廣, 輶軒紀事 丙寅 6월. 夫朝鮮亦猶我中華之敎也 慶而嘉服 王豈不 聞 使者以華禮厚國王 而國王反以夷俗自處 其謂之何 王復詞曰 不穀亦獲聞禮敎 是固一道也 予曰 夫禮者 臣者所自盡也 使人爭其失 已非矣 國王服不易 詔必 不開 王其三思無忽 王卒復詞曰 敢不如命 易服 禮畢 - 268 -
와 동강진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후금과 가까이 있는데다 水 軍으로써 압록강을 통해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요충이었기 때문 이다. 이후 후금은 모문룡과 가도를 목에 걸린 가시 처럼 여겼고 1637년 가도를 함락시킬 때까지 가도는 후금과 조선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는 시한폭탄 이었다. 조선에게도 동강진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요동의 육로가 단 절된 상황에서 가도는 명과 연결되는 海路의 요충이었다. 명은 인 조반정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조선을 모문룡에 대한 경제적 후원 자로 묶어두려 했다. 조선 또한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하는 과정 에서 모문룡이 도와주었던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른바 封典之 恩에 대해 감사하고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해야 만 했다.64) 명은 또한 가도의 동강진을 후금 뿐 아니라 조선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명과 후금의 대결 와중에서 조선이 명 을 배반하고 후금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적 거 점으로 여겼다. 실제 그들은 조선이 배반하지 않고 여전히 명의 편에 서 있는 것을 명군이 철산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 기고 있었다.65) 동강진에 주둔하는 명군이 갖는 정치적 무게는 1623년의 인조 반정과 그와 연결된 사건이었던 1624년 李适의 亂을 계기로 확 실히 부각되었다. 이괄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모문룡에게 원 병을 청하는 임무를 맡았던 金德諴(1562 1636)은 명군의 존재 를 이용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김덕함은 모문룡의 부하 2 3명 64) 李元翼, 梧里先生續集 권1 毛游撃文龍接待所啓辭. 今日臣等 往見毛游擊 設 茶酒稱說 提督文龍爺爲下邦 凡所顧護之事 無所不用其極 至於今此封典 提督爺 曲盡費心 奏知朝廷 得以完了 下邦君臣 無不感激稱頌 65) (明) 周文郁, 邊事小記 권4 條陳移陣揭帖. 朝鮮雖弱 亦我一藩籬也 協我未 足以制奴 叛我遂足以資敵 鮮之不可棄也明甚 邇年遼道阻絶 而不失包茅之貢者 以鐵山有兵 旣彌其外叛之心 - 269 -
을 이괄 반란군의 진영으로 보내 그들을 시험해 보자고 했다. 만 일 반란군이 그들을 죽일 경우 그것은 天兵을 죽이는 것 殺天 兵 이므로 그들은 天下의 賊 이 된다고 했다. 그럴 경우, 모문 룡은 이괄의 반란군을 분명히 적으로 인식하여 그들이 어떤 왕자 를 임금으로 추대하더라도 明은 그를 역적의 괴수 逆魁 로 여 길 것이라고 주장했다.66) 인조정권은 실제로 이괄과 명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 신경을 곤 두세웠다. 이괄이 擧兵했던 지역의 인근에 바로 모문룡의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동향과 관련하여 세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기도 했다. 이괄이 모문룡과 결탁하는 경우, 누르하치와 결탁하는 경우, 직접 서울을 향해 돌격해 오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인조정권은 이괄이 서울로 진격해 오는 것을 下策으로 여기고, 모문룡에게 환심을 사서 결탁한 뒤 청천강 이북 을 장악하는 것을 上策이라고 여겨 가장 두려워했다.67) 이괄이 모문룡과 결탁할 경우, 명 조정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가능성이 있 었기 때문이다.68) 인조정권은 이괄과 모문룡의 결탁을 막고 반란 을 진압하기 위해 명의 군사력과 그들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노 66) 金德諴, 醒翁先生遺稿 권2 辭工曺參議疏. 故臣以爲 在島使臣齊告于都督 持 督府討适牌文 送家丁二三名于賊中 試其情形 适若以殺王人之刃 移於督府家丁 則雖殺一名 乃是殺天兵也 當爲天下之賊 而都督亦明其爲賊 賊雖或有推戴之變 而爲賊适所戴者 乃逆魁也 僞尊之初 已得罪於天朝 則終無赴愬之處矣 賊若忌憚 天朝 厚待家丁而送 則其不敢犯天兵之形 從可知矣 因此而請兵於都督 則名正言 順 可行天討 67) 金起宗, 西征錄. 此賊(-李适)有上中下三策 以銀蔘厚結毛將 據有淸川以北 部署諸城 號令一道 上策也 陰結奴酋 倚仗聲勢 中策也 間道疾趨 直向京城 下策 也 68) 이괄의 난이 일어났던 당시까지 명은 仁祖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은 상 태였다. 명의 冊封使 王敏貞 일행이 서울로 들어온 것은 1625년 6월의 일이었 다. 인조 책봉을 둘러싼 과정과 논란에 대해서는 한명기, 앞의 책(1999), 326~352쪽. - 270 -
심초사했다. 명군이 가도와 철산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에서 인조 반정에 이어 이괄의 난까지 발생했던 것은 명에게는 행운 이었 다. 과거 조선에서 왕위 교체가 이루어질 때, 명은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새로운 국왕을 冊封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달랐다. 왕위 교체의 사유가 반정 과 반란 이었다. 그와 함께 명과 조선을 둘러싼 안팎의 정세가 매우 가변적이고 유동적 이었다. 명은 쇠퇴해 가는 와중에 後金의 도전 때문에 위기를 맞 고 있었다. 조선은 반정이라는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어렵게 잡은 정권을 반란 때문에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이 인조를 책봉할 것인지? 아니면 이괄이 추대한 자를 책봉할 것인지?의 여부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상황 에서 명의 책봉은 과거처럼 당연한 관행 이 아니라 커다란 은혜 로 치부되고 동시에 엄청난 반대급부까지 챙길 수 있는 사안이었 다. 요컨대 명은 반정 과 반란 을 계기로 조선을 길들일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 를 움켜쥐었던 셈이다. 이렇게 인조대에는 조선에 주둔하는 명군의 존재 자체가 커다 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다 이괄의 반란 같은-그 처리 과 정에서 명의 의제적 지배력 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는-內憂가 일 어났다. 그것은 모문룡의 몸값 과 명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 이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明은 인조정권에게 정통성을 부 여해 주는 원천이자 존재 근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인조정권은 명을 절대시하게 되고, 명을 위하는 일이라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서라도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별다른 고민 없이 제기될 수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한참 뒤까지도 명의 은혜 再造之恩 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주 장이 나오는 점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항복했던 직후, - 271 -
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상황에서도 명이 베푼 재조지은을 갚 기 위해 명과 교통할 수 있도록 청 황제에게 호소해야 한다 고69) 주장하는 신료가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임진왜란을 통해 형 성된 재조지은 이 인조반정을 계기로 사실상 조선 지식인들에게 내면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Ⅵ. 맺음말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인조반정은 국내적으로 뿐 아니라 明淸 交替가 진행되고 있던 당시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도 상당한 영향 을 미친 사건이었다. 우선 인조반정을 통해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한 것을 조 선 건국 이래 16세기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밀접해진 조선과 명 의 특수 관계 속에서 다시 해석할 수 있었다. 명에게 충순하게 事 大하면서도 조선의 자존심을 강조했던 15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對明認識은 16세기 들어 상당히 경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宋學에 바탕을 둔 性理學의 확산, 명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하 는 童蒙先習 과 같은 서적의 등장과 함께 일부 조선 지식인들은 中華人보다도 더 철저한 中華人 이 되기를 희구하면서 명과 조선 을 一家로 인식했다. 명의 으뜸가는 제후국 이라는 자부심이 일 본에 대한 우월의식의 근거로 내세워지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것 69) 趙絅, 龍洲遺稿 권6 辭司諫疏 其三曰 毋忘大明再造之恩 以通朝聘 嗚呼 皇朝 再造之恩 其可忘乎 恭惟殿下 宣祖之孫也 所當以宣祖之心爲心 以宣祖之事爲 法 今雖不幸制命於豺狼之牙 而事勢之急 稍異於出城之時 則殿下何不直陳於汗 曰 汗之活我恩固大矣 明朝活我先祖之恩 亦不可忘 我忘明朝 則我之子孫亦必忘 汗 於汗亦非利也 我欲修聘於明朝 不敢諱焉云爾 則彼或一分義我而動心 - 272 -
을 계기로 명은 조선의 군주국, 부모국 에서 은인 으로까지 추 앙되면서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실제 왜란 당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內亂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 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의 王權 유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명 군은 구세주 이자 임진왜란 극복의 절대적 공로자 였다. 이런 인 식을 바탕으로 선조는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그 와중 에 명에 대한 숭앙과 충성은 절대적인 가치가 되었다. 이런 측면 을 고려하면 인조반정은 대외관계사적 측면에서 扈聖功臣系가 중 심이 되어 광해군대 정치를 주도했던 宣武功臣系를 축출했던 정 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반정 성공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 는 과정에서 명의 권위에 기대야만 했고, 그 와중에 모문룡에게 코가 꿰이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또 이괄의 난 등 내부의 위기 를 계기로, 당시 기울어가고 있던 명의 영향력 속으로 더 깊이 들 어가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 귀결은 후금(-청)과의 갈등으로, 끝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명은 상대적으로 인조반정을 계기로-요동 상실과 광해군의 거 부 때문에-약화되었던 조선에 대한 의제적 지배력 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명은 조선을 以夷制夷를 위한 수단으로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명에게는 행운 이었다. 요컨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1644년 명청교체가 실 현 될 때까지 조선 내부의 정치사는 나라 밖의 변수에 의해 커다 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國外 변수에 의해 촉발된 조선 내부의 정치적 격변이 다시 역으로 명청교체의 전개 흐름에 일정한 영향 을 미치기도 했다. 우선 인조반정이라는 정변이 배태되고 발생했 던 것 자체가 임진왜란 이래 점차 현실화되고 있던 명청교체의 - 273 -
흐름과 밀접히 맞물려 있었다. 역으로 인조반정의 발생은, 당시 遼東을 놓고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명과 後金(-淸) 양국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이어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이 배태되고 발생 하는 데 명과 후금의 대결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1637년 조 선이 끝내 청에 굴복했던 것은 역으로 청이 入關하여 중원을 장 악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인조반정을 단순히 조선 내부의 政變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轉變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까닭이다. - 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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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istorical meaning of 'Injo Banjeong' in the perspective of Sino-Korean relations in early seventeenth century 70)Han, Myung-gi* 'Injo Banjeong', the Chosun's military coup d etat in 1623 had an important effect upon the shift from Ming to Qing. If we want to know the origin of coup d etat in 1623,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Imjin War, the Japanese invasion of Chosun Korea in 1592. There was an indissoluble connection between 'Injo Banjeong' and the Imjin War. During the war, king Sunjo(宣祖) was subjected to various humiliations caused by his incompetence and an evacuation of the capital. In contrast to the King Sunjo, some high commanding officers like Yi Sun Sin and some righteous army's leader like Gwag Jae-Woo commanded general popularity caused by their victories and devotions. To get out of his difficulties, King Sunjo regarded the Ming army as the only savior of Chosun Korea on the brink of ruin. He set high value on "Hoseonggongsin(扈聖功臣)", many subjects who were in attendance on King Sunjo from Seoul to Euiju, and set low value on "Seonmugongsin(宣武功臣)", some commanding officers and righteous army's leader. King Sunjo * Professor, History Department, Myongji university - 278 -
said that his evacuation from Seoul to far north western city of Euiju was crucial and strategic action to lead Ming army into Chosun Korea. After Imjin War, faced with Manchu's military threat, Ming forced Chosun Korea to send troops and contend with Manchu. King Gwanghaegun tried to refuse Ming's request, and which abused as cause for his political opponents as Injo to usurp his throne in 1623. It is very interesting that the majority of usurpation leaders were the successors of the "Hoseonggongsin" Lee Hang-Bok. At first, Ming did not accept the legitimacy of Injo, and some hard-liners demanded that Ming should punish the leading power of the coup. As time went on, however, some proposed the need to appease Chosun, considering Manchu's military threat. After all Ming made up her mind to approve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and utilize Chosun Korea. In conclusion, 'Injo Banjeong' must be restudied in relation to the shift from Ming to Qing in broader East Asian perspectives. Key words 'Injo Banjeong', the shift from Ming to Qing, the Imjin War, "Hoseonggongsin(扈聖功臣)", "Seonmugongsin(宣武功臣)" - 2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