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수와 당: 북위-서위-북주 선비 정복왕조의 직계 후예 Motivational Episode 고대 주( 周 : 1046-771-256 BCE) 왕조는 5제( 五 帝 ) 신화의 마지막 황제인 순( 舜 ) 의 자손, 하( 夏 : 2070-1600 BCE) 왕실의 자손, 그리고 상( 商 / 殷 : 1600-1046 BCE) 왕실의 자손 가운데 각각 한 사람씩을 선발하여 정통 후계 왕조가 선대 왕조와 그 후손을 존중 한다는 의미인 각( 恪 )으로 봉해 3공( 公 )을 삼았었다. 구당서를 보면 당의 지배자들은 자 신들의 왕조가 북위-북주-수의 직계 후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제도적으로 천명 했다 ( 以 魏 周 隋 依 舊 爲 三 恪 ). 당 왕조의 삼각은 탁발선비 북위( 後 魏 386-534)의 황족 자손( 韓 公 ), 북주( 北 周 557-581)의 황족 자손( 介 公 ), 그리고 수(581-618)의 황족 자손( 酅 公 )을 말 했다. 북주서를 보면 558년에 북위 황족 후예를 한공으로 삼았다. 수서( 隋 書 )를 보면 양 견이 제위를 찬탈한 직후 북주 정제( 靜 帝 )를 개공으로 삼았다. 자치통감( 資 治 通 鑑 ) 748년 5월 기록을 보면 북위 황족 자손 가운데 한 명을 뽑아 3각의 하나로 삼았다. 송사( 宋 史 卷 四 百 八 十 五 列 傳 第 二 百 四 十 四 夏 國 上 )는 당이 수의 후예이고, 수는 북주-북제의 후예 이고, 이들은 모두 북위의 후예라는 사실을 확인 해 준다( 昔 唐 承 隋 後 隋 承 周 齊 上 遡 元 魏 ). 그런데 자치통감 750년 9월 기록을 보면 재야의( 處 士 ) 최창( 崔 昌 )이라는 사람이 현종( 玄 宗 )에게 상소 하기를: 북위-북주-수가 모두 정통이 아니기( 皆 閏 位 ) 때문에 당 왕 조는 마땅히 은-주-한( 殷 周 漢 )을 승계하여 토착 보호신의 음덕인 토덕( 土 德 )을 이어 받아 토착이 아닌 화덕( 火 德 )를 대신하도록 해야 마땅하다 며 ( 以 土 代 火 ) 화덕인 위-주-수 자 손의 3각을 토덕인 은-주-한 자손의 3각으로 교체 할 것을 상소했다. 집현전 학사 위포 가 하늘의 뜻 이라 맞장구를 치자, 늙은 현종은 은-주-한의 자손을 찾아 3각으로 삼고 ( 上 乃 命 求 殷 周 漢 後 爲 三 恪 ), 최창은 좌찬선대부, 위포는 우부원외랑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753년 5월, [제 정신이 든] 현종은 다시 위-주-수의 후예 를 3각으로 삼았다 ( 復 以 魏 周 隋 後 爲 三 恪 ). 잠시 황제를 현혹한 죄로 최창은 오뢰위로, 사 기를 방조한( 助 邪 ) 위포는 야랑위로 강등되었다. 잠시 미망( 迷 妄 )의 업보인지 현종(b.685 r.712-56)은 70이 넘어 양귀비를 죽게 하고 안사의 난( 安 史 亂 755-63)으로 쫓겨 다니다가 762년 4월에 생을 마감했다. 현종은 중앙아시아 진출에 선봉을 섰던 고선지( 高 仙 芝 )가 낙양 탈환에 실패했다고 755년 12월에 참수하고, 또 다른 고구려 출신 장수 왕사례( 高 麗 人 王 思 禮 )에게 군사를 맡겼었다( 行 在 都 知 兵 馬 使 / 兵 部 尙 書 / 關 內 節 度 使 ). 1
탁발선비 정복왕조의 불교 통치이념과 균전-부병 제도를 답습 Twitchett(1979: 4, 12-3)은 "수-당은 제도적 변혁의 시대가 아니었다. 단지 기존 의 통치 기구를 대폭 확대된 제국의 필요에 맞게 단순화-합리화 시킨 것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수-당 창건자들은 일직이 관중으로 우문태를 따라간 무천진 출신 장군들로, 모두 선비어를 말했다. 그들은, 북위/서위/북주 정복왕조가 개발하고, 자신들이 그 실효성을 직접 체험한 균전제-부병제, 불교적 통치이념, 등을 그대로 답습하여 제국을 운영하였다. 1 수-당 통치 제도는 부족적 성격의 부병제와 선비 세습 귀족의 지휘를 받는 한족 관료 행 정의 2원제를 답습하여, 통일중국 현실에 맞도록 보편성을 고양하는 율령제( 律 令 制 ) 형태 로 개량을 한 것이었다. 550년, 서위(535-56)의 우문태는 북위가 485년에 도입한 균전제를 기초로 부병 ( 府 兵 ) 제도를 개발 했다. 부병은 균전제로 배정 받은 농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고, 농 한기에는 군사 훈련을 받으며, 전시에는 무기, 군복,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 출정했었다. 부병제는 선비 24군의 병력을 관중의 융적( 戎 狄 Turco-Tibetan) 부족과 변방 한족들로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577년, 우문태의 둘째 아들인 북주(556-81) 무제는 관중의 부병 으로 확충된 17 만 명의 24군을 동원해 북제(550-77)를 정복할 수 있었다. 2 수-당 역시 부병 제도를 통해, 민병이라기보다 평생의 (21-59세) 전문직 전투병인 강력한 군사력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었다. 당 태종의 재위 중인 636년 당시 353개의 부병 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261개가 관중(주로 섬서성 渭 水 주변 지역)에 위치 했고, 나머 지 92개는 대부분 인근 산서성 지역에 위치했었다. 즉 부병의 대부분은, 티벳족, 돌궐족, 변방한족 등 다양한 종족이 혼재하는 우문태와 수-당의 본거지에서 동원되었고, 동부 평 원이나 남부의 믿을 수 없는 한족 밀집지역에는 아예 부병본부가 설치되지 안았었다. 부 1 Holcombe (2001: 144), Wright and Twitchett (1973: 1, 25, 29, 31), Wright (1978: 11) 참조. 2 강통( 江 統 )의 299년 사융론( 徙 戎 論 )에 의하면, 후한 시대에 이미 관중 인구의 절반 이상이 융적( 西 戎 北 狄 ) 사람 들이었다. Holcombe (2001: 121-2), Dien (2007: 9), Twitchett and Loewe (1986: 426), Graff (2002: 108-11) 참조. 晉 書 卷 五 十 六 列 傳 第 二 十 六 江 統 羌 戎 狡 猾 關 中 之 人 百 餘 萬 口... 戎 狄 居 半 北 史 卷 六 十 列 傳 第 四 十 八 王 雄 是 爲 十 二 大 將 軍 每 大 將 軍 督 二 開 府 凡 爲 二 十 四 員 分 團 統 領 是 二 十 四 軍 2
병제도는 토지소유의 편중이 심화되어 균전제가 폐기되고 율령제가 와해되는 749년까지 유지되었다. 3 하위직 한족 관료 선발을 위한 과거시험의 본격적인 제도화: 이한치한 서민(plebeian) 왕조라 불리는 전한은 지방의 경제적-군사적 중심 세력인 호족 ( 豪 族 )의 팽창을 억압했었다. 그러나 애당초 대지주-호족 출신이 수립한 후한과 서진 왕 조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관료직을 독점하는 대지주 호족출신의 사족( 士 族 )계급이 형성되 었다. 220년, 조조의 위 조정은 각 지방 유력자 중 중정( 中 正 )을 선정 하여 해당 군의 유 능한 인재를 찾아 9품으로 분류를 하고, 이 순위에 따라 각급 정부 관리를 선발하는 기 준으로 삼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9품 중정제는 개인의 능력 보다는 가문의 위계를 정 하는 제도로 변질 되었다. 탁발선비 북위의 효문제는 한족 등용 관행을 좀 더 일관성이 있고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정부에서 봉직 가능한 한족 사인( 中 國 士 人 ) 들의 가문( 門 閥 )을, 사해 대성( 四 海 大 姓 ), 주성( 州 姓 ), 군성( 郡 姓 ), 현성( 縣 姓 ) 등, 행정 단위 에 연관시킨 4개 등급으로 분류해 성씨록( 氏 姓 之 書 )을 만들었다. 4 전한-후한 당시의 시험( 察 擧 )은, 효성과 청렴을 중시하는 비정기적 천거-임명 관행을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탁발 북위는, 시험이 없이, 9품중정제를 개량해 한족 대지 주-호족 중에서 지방 정부의 관리들을 임용해 한족을 다스렸다. 수 문제는, 전한-후한의 초기 형태의 시험 관행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해서, 매년 정기적으로 ( 國 子 學 - 太 學 生 徒 나, 지방관의 추천을 받고 예비시험에 통과한 鄕 貢 중에서) 한족 관료를 선발-임용했다. 당 3 Xiong (2006: 4, 53, 61, 115), Graff (2002: 190-1) 참조.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1,133,800명의 전투 병력을 동원했을 당시, 수 나라 부병 군대 총 수는 60여 만이었다. 따라서 50만 명 이상의 훈련 받지 못한 한족 농민을 (부병 본부가 없는) 동부 평원과 남부에서 징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Xiong (2006: 57) 참조. 당 고조 때에는 관중에만 병부( 兵 府 )가 설치되어 있었다. 윤내현 (1991: 258) 참조. 전백찬( 翦 伯 贊, 1990하: 402-3)에 의하면, 8세기 이후 토지 겸병의 급증으로, 755년 현재, 귀족과 대지주 호족이 소유하는 세역( 歲 役 ) 면제 불과호구( 不 課 戶 口 )가 40%에 달했고, 부병제는 이미 720-40년대에 소멸되었었다. 4 隋 書 卷 三 十 二 志 第 二 十 七 經 籍 一 氏 姓 之 書 其 中 國 士 人 則 第 其 門 閥 有 四 海 大 姓 郡 姓 州 姓 縣 姓 3
역시 시부( 詩 賦 )와 유교 이념 중 특히 "효"를 강조하는 과거 시험제도를 유지했다. 5 수-당 진사 시험의 시-부-잡문은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출제되었다. 자유로운 문체로 수사( 修 辭 )와 기교의 문학적 능력을 평가했기 때문에, 고금에 통달한 합격자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기백과 사고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진사 시험 내용은 한족 대지 주-호족들이 "시와 노래"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선비족이 노래와 비파 연주를 특히 즐긴다"는 사실과 연관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6 수와 당은, 중앙정부가 9품 이상의 지방정부 관리들을 직접 임명하는 방법으로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 지방 현지 채용은 말단 서리( 胥 吏 )같은 사무직원에 한정 되었다. 과거 출신 한족이 지방관에서 중앙관리로 진출도 했지만, 조정의 고위직은 거의 모두 북 위 이래 정복왕조의 지배층인 선비 귀족들이 세습하였다. 7 수서( 隋 書 )에 의하면 493년에 북위 효문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길 때, 황족( 帝 族 )이 8개 씨족에 10개 성이 있었고, 세 습적으로 부락의 대인( 大 人 ) 노릇을 하는 36 씨족 92개 성씨가 천도와 함께 이주를 해 본관을 하남 낙양으로 정했다 한다. 우문태는 무천진부터 자신을 따라 서위/북주를 세울 때 공을 세운 장수들을 종장( 宗 長 )으로 하고 그 자손들을 관내( 關 內 / 關 隴 / 甘 肅 - 陝 西 ) 본 관( 本 望 )으로 해서 특별히 씨족지를 편찬해 공식적으로 관롱( 關 隴 ) 귀족집단이 형성되도 록 했다. 이들 선비 개국공신 가문 출신들은 수 조정의 고위직도 거이 모두 독점했다. 8 수 문제 양견과 당 고조 이연 역시 부친과 조부의 공적 덕분으로 모두 관롱 귀족에 속 하게 된 것이다. 당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은 자신들이 속했던 관롱 귀족 출신뿐 아니라, 자 5 Twitchett (1979: 74), Franke (1972: 1-7), Twitchett and Loewe (1986: 153-4, 516, 541, 769), Dien (1990: 10), Elman (2000: 5-8), Wittfogel and Fêng (1949: 457) 참조. 6 Mao (1990: 107), Schreiber (1949-55: 390-1), Elman (2000: 7, 8, 11), Wright and Twitchett (1973: 42) 참조. 7 Wright and Twitchett (1973: 28), Graff (2002: 138), Franke (1972: 4-5), Xiong (2006: 120-1), Wright (1978: 94-6, 202), 참조. 당 사회 상류층은 대 귀족 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 고위직은 세습 귀족들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다. Deuchler (1992: 290-1) 인용. 8 隋 書 卷 三 十 二 志 第 二 十 七 經 籍 一 氏 姓 之 書 後 魏 遷 洛 有 八 氏 十 姓 咸 出 帝 族 叉 有 三 十 六 族 則 諸 國 之 從 魏 者 九 十 二 姓 世 爲 部 落 大 人 者 並 爲 河 南 洛 陽 人 及 周 太 祖 入 關 諸 姓 子 孫 有 功 者 並 令 爲 其 宗 長 仍 撰 譜 錄 紀 其 所 承 叉 以 關 內 諸 州 爲 其 本 望 4
신들이 태원에서 거병을 할 때 적극 협조를 한 태원 지역의 유력 선비 씨족들을 대거 기용 했다. 9 무측천의 부친 무사확은, 그 6대조( 洽 )가 북위의 평북장군으로 산서에 정착 해 태원 부근( 太 原 / 文 水 )에 거주하게 된 선비 씨족 출신이다. 흔히들 태원 출신 무측천이 정권을 장악한 후, 관중의 관롱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통한 중앙정부의 한족 관리 임용을 배 이상 늘였다고 말하지만, 실제 과거로 선발된 관료 비율 자체가, 음서( 蔭 敍,고위 관리 자제의 임용), 천거( 薦 擧,고급 관리 추천) 관행 때문에, 당나라 말기 까지 평 균 10%를 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진사 시험을 보는 사람의 상당수가, 애당초 국자학 과 태학에서 공부를 했거나 지방 학교를 다니며 향공( 鄕 貢 )이 된 하급 선비 귀족들이었 다. 10 한족 사회에서는 만주-몽골 지역의 비 한족 사회에서와 같이 자타가 공인하는 세습 귀족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사학자들은 정복왕조 고유의 세습귀족은 오히려 도외시 하고, 정복왕조에 발탁되어 지방과 중앙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자(collaborator) 역 할을 수행한 관리를 많이 배출한 한족 집안을 귀족(aristocrats) 가문이라고 부른다. 사학자들이 특히 내세우는 한족 귀족 가문이라는 존재는 대대로 정복왕조에 적극 협력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를 대량 배출한 태행산맥( 太 行 山 脈 ) 동쪽 평원의 최 ( 崔 ), 노( 盧 ), 이( 李 ), 정( 鄭 ) 등, 소위 산동( 山 東 ) 4대 성씨이다. 정관정요를 보면 632년에 태종 이세민이 방현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산동지방의 최-노-이-정 네 성씨 들에게 무슨 원한을 가진 적이 없다. 허나 그들 집안은 점차 쇠락하여 전혀 관리로 진출 한 사람이 없는데도 옛날의 명성을 믿고 스스로 뽐내기를 좋아하며 사대부라 일컫는다. 그들은 딸을 다른 씨족 사람에게 시집 보낼 때 예물을 많이 바칠 신랑감을 찾으면서 거 액의 재물을 요구 하는데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이라 풍속을 해치고 예의 를 문란케 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들을 중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가 9 Wechsler (1973: 105) 참조. 당 고조는 자신이 태원에서 거병을 할 때 병법에 밝은 무사확( 武 士 彠 )이 기여한 공적을 고맙게 생각해, 수 나라 황족인 고관 양달( 楊 達 )의 딸과 결혼을 시켜주었다. 이 두 번째 부인이 (627년경에 태어난) 무측천의 모친이다. 출세한 산서-태원 출신들은 본관을 수도 장안으로 옮겼다. Twitchett (1973: 81-2) 참조. 10 그래도 측천무후 통치 이후에는 과거출신 한족 중앙관료의 정책결정 영향력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질 수는 있었다. Twitchett (1979: 11, 21, 245-6), Wright and Twitchett (1973: 26, 49, 54-7, 78-9, 89), Elman (2000: 5, 8) 참조. 북송과 달리, 당 때에는 주 시험관이 일부 수험생들의 평소 명망을 개인적으로 조사해 사전에 사적으로 준비한 명단( 通 榜 帖 )을 근거로, 답안지도 보지 않고 합격시킬 수 있는 자유를 주었었다. 金 諍 (2002: 116-7) 참조. 5
없다. 사대부라면 능히 공을 세워 벼슬이 높아지고 임금을 잘 섬겨 그 충성으로 칭송을 받아야 한다. 지금의 최-노-이-정 무리들은 오직 먼 선조의 관직을 자랑할 뿐이데 어찌 우리 조정의 귀한 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개혁이 필요하다. 이에 조서를 내 려 성씨를 바로 잡기 위해 널리 천하의 보첩( 報 牒 )을 구하고, 역사와 경전에 근거하여 뜬 소문을 삭제하고, 불효자나 반역자가 있는 집안을 퇴출시켜 씨족지를 편찬케 했다. 이세 민은 거듭 명했다: 지금 씨족을 정하려는 이유는 우리 조정의 높은 벼슬과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높이고자 함이다. 몇 대 이전을 논할 필요 없이 다만 현재 벼슬의 품계와 등급 을 고려하여 일정한 기준을 두고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11 하지만 이처럼 조정에서 공 식적으로 편찬한 씨족지는 단 한 개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수-당의 지배 씨족들은 거의 모두 대대로 내려오는 정복왕조의 선비 귀족들이 었으며, 그들은 중앙 정부의 고위직을 거의 모두 차지하여 (과거/음서/천거 등으로 발탁 한) 중앙과 지방의 한족 협력자 관료들을 지휘 감독했다. 비록 수 나라 때 과거 시험이 제도화 되었지만, 수-당의 중앙 고위관리 임용에 있어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수-당의 선비 세습귀족에 의한 지배 체제가 실제로 한족 대지주-사족( 士 族 )이나 부유한 상인 중 과거를 통해 발탁된 중앙관료( 士 大 夫 )들에 의한 지배체제로 완전히 바뀐 것은, 한족 왕조 인 송-명 때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 12 송 조정은, 기회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과거를 볼 때 지방 유력자의 추천 요건을 철폐했다. 657년 현재 13,465명의 관료가 5천만의 당 제국 인구를 다스렸다. 그런데, 당 왕조 289년간, 한족의 상급관료 진출 필수요건인 진사시험 급제자 총 수가 6천여 명이었 으니, 년 평균 20명 내외에 불과한 것이었다. 절도사 할거세력을 견제한다고 진사 급제 11 貞 觀 政 要 第 七 卷 第 二 十 九 篇 論 禮 樂 第 二 十 九 五 章 貞 觀 六 年 太 宗 謂... 房 玄 齡 曰 此 有 山 東 崔 盧 李 鄭 四 姓 雖 累 葉 陵 遲 猶 恃 其 舊 地 好 自 矜 大 稱 爲 士 大 夫 每 嫁 女 他 族 必 廣 索 聘 財 以 多 爲 貴 論 數 定 約 同 於 市 賈 甚 損 風 俗... 理 須 改 革 乃... 刊 正 姓 氏 普 責 天 下 譜 諜... 撰 爲 氏 族 志 士 廉 等 及 進 定 氏 族 等 第 遂 以 崔 幹 爲 第 一 等 太 宗 謂 曰 我 與 山 東 崔 盧 李 鄭 舊 旣 無 嫌 爲 其 世 代 衰 微 全 無 官 宦 猶 自 云 士 大 夫 婚 姻 之 際 則 多 索 財 物... 我 不 解 人 間 何 爲 重 之 且 士 大 夫 有 能 立 功 爵 位 崇 重 善 事 君 父 忠 孝 可 稱... 可 謂 天 下 士 大 夫... 今 定 氏 族 者 誠 欲 崇 樹 今 朝 冠 冕... 卿 等 不 貴 我 官 爵 也... 秖 取 今 日 官 品 人 才 作 等 級 宜 一 量 定 用 爲 永 則 Lewis (2009a: 195-206), Bol (1992: 33, 38, 42, 44), Wechsler (1979: 212-3), Twitchett (1973: 50, 54-7, 62-8, 89), Twitchett (1979: 4), Ebrey (1978: 31, 33, 74, 88-9), Graff (2009: 144-5), Johnson (1977: 3) 참 조. 12 Elman (2000: 5, 12), Wright (1959: 94, 202), Xiong (2006: 109, 120-6, 143-71, 224), Eberhard (1965: 170), Wittfogel and Feng (1949: 20), Franke (1972: 4-7), Twitchett (1979: 321-2) 참조. 6
자 수를 대폭 늘렸던 827-35년 간에도 평균 30명을 넘지 못했다. 좀 더 낮은 하급관리 선발을 위해 노자와 유가 경전을 시험하는 명경과( 明 經 科 )도 매년 정원이 100명 내외였 다. 반면, 북송 태종(976-97)은 재위 22년간 1만여 명의 진사를 선발했다. 년 평균 450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13 송-명 한족 왕조에는 정복왕조 고유의 세습귀족이란 존재도 없었 기 때문에, 이들 진사 출신 한족이 중앙정부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Twitchett은 5-6세기부터 내려오는 소수의 막강한 세습 귀족들이 당 사회의 고 위 지배층을 독점 했었지만, 당의 몰락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고 말한다. 북위로부터 수- 당에 이르기까지 중앙의 고위관직을 독점한 선비 귀족과 그 충실한 한족 고위관료 협력 자들은 당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북 중국을 차지한 거란족은 요( 遼 ) 제국을 수립하 는데 공을 세운 자신들 고유의 귀족 집단이 있었고, 한족 협력자 역시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발탁하려 했다. 새로 한족제국을 수립한 송 지배자들은, 도덕적 지탄 대상인 정복왕 조 협력자들(collaborators)을 도외시하고, 새삼 지주-호족 계층으로부터 순수 한족왕조를 섬긴다는 이념적 자부심으로 충만한 새로운 세대의 고위관료를 선발했다. 한족 송-명 왕 조에서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실현되었지만, 요-금-원-청 등 정복 왕조에서는 귀족에 의한 중앙 정부 고위직 세습 현상이 계속되었다. 14 범-세계적 불교 이념을 승계하여 국제화된 제국을 형성 수 문제는 541년에 절간에서 태어나 12살까지 비구니가 키웠다. 선비 정복왕조 전통에 따라 양견은 자신을 부처의 현신으로 부각 시켰고, 불교를 통일중국 통치이념으 로 확립했다. 수 양제 역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당 고조의 집안도 불교 전통의 선비 지배 씨족 출신이었고, 당 태종 역시 불교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측천무후는 690년에 주 13 Twitchett(1979: 13), 金 諍 (2002: 21, 86, 90, 92, 163) 참조. 당대에는 진사에 합격한 후에도 이부( 吏 部 )의 전시( 殿 試 )를 통과 해야 임관이 되었지만, 북송은 진사 급제자를 모두 즉시 임관했다. 宋 史 卷 二 百 九 十 三 列 傳 第 五 十 二 王 禹 偁 隋 唐 始 有 科 試 太 祖 之 歲 每 歲 進 士 不 過 三 十 人 太 宗... 在 位 將 逾 二 紀 登 第 殆 近 萬 人 14 Wright and Twitchett (1973: 82-3), Twitchett (1979: 13) 참조. Ball(1992: 327)은 북송의 정이( 程 頤 1033-1107)가 송의 과거제도를 통해 형성된 사족 역시 일종의 세습적인 사회 계층을 이루게 되었지만, 당 나라 귀족 사회의 세습 대신 (hereditary ministers) 제도가 오히려 하늘의 도리( 天 理 ) 에 일치하는 것 같다 고 말했다고 기록한 이정집( 二 程 集 )을 인용한다. 7
(690-705)나라를 세운 다음 아예 불교를 국교로 만들었다. 15 여권이 강하고 비유교적인 선비족의 전통은 측천무후가 미륵불이 하생하여 여황제가 된다는 식으로 불교를 앞세워 황제로 등극할 수 있게 했다. 북위 때부터 이따금씩 불교도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이 는 일부 불교도의 지나친 방종과 불교를 빙자해 혹세무민하며 국가 권위에 도전하는 행 위를 응징 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16 탁발선비 북위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며 범-세계적인 불교이념을 적극 수용한 수-당 지배자들은, 유교 전통으로 주변 민족을 야만시하며 폐쇄적인 한족 조정과는 달리, 관대하고 개방적인 국제주의를 추구하여 문화-예술-사상적인 면에서 세계화된 제국을 이 룩했다. 한족이 고위 관직에 오르는 필수 요건인 진사 과거에서 시부( 詩 賦 ) 중심으로 문 학적 능력을 시험했기 때문에, 대지주-호족들의 취향마저 바꾸어 놓았다. Wright 와 Twitchett(1973: 42)은, 당 나라 때 한족들이 역사상 전무 후무 하게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시는 눈으로 보라고만 쓰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불렀고, 이국적인 음률은 시에 낯선 멜로디와 리듬을 도입시켰다. 조정의 엄숙해야 할 예악 조차 이국적 음악으로 점차 대체되어 한족 유학자들의 혐오감을 일으켰다 고 말한다. 실크로드 주변에서 태어난 터 키족 출신 이태백( 李 白 701-63)의 시가 두보( 杜 甫 712-70)를 위시한 당대 한족들을 매혹 한 것은, 당 제국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17 당 태종은 방현령( 房 玄 齡 ), 두여회( 杜 如 晦 )로 대표되는 문학관( 文 學 館 ) 18학사 같은 한족 인재도 수용해 재능을 발휘케 했을 뿐 아니라, 과거제도를 통해 외국인 중 관 리를 선발하기 위해 빈공과( 賓 貢 科 )도 실시 했다. 신라의 최치원도 빈공과에 합격해 벼슬 을 했던 것이다. 반면, 서방 세계로 향한 육로가 거란족 요에 의해 차단된 한족의 송은, 유교 전통을 바탕으로, 내향적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예술 형태를 창조하여 탐미했 다. 명 조정은 정화( 鄭 和 )가 1405-22/1431-33년 기간 중 개척해 놓은 해상 통로 마저 영 락제 (r.1402-24) 사후에 폐쇄( 海 禁 ) 해 버리고, 서방 세계와 단절된 제국이 되는 것이다. 수-당 왕조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7세기 초 이후, 한족( 漢 族 ) 전통의 묘지 수호 신 상들은 점차 불교의 사대천왕( 四 大 天 王 ) 상으로 바뀌면서 극적으로 과장된 (선비족과 15 Wright and Twitchett (1973: 27, 49, 51-2, 54-7, 68, 78-9, 82), Twitchett (1979: 57, 65, 75-7, 180-1, 188, 219, 235, 263, 265), Wright (1959: 66-70, 124) 참조. 16 Wright and Twitchett (1973: 263), Twitchett (1979: 667-9) 참조. 17 Wright and Twitchett (1973: 42, 375) 참조. 8
같은 이민족을 지칭하는) 비-한족 야만인 형상으로 제작 되었다. 전통 유교를 대체해 외 래 종교인 불교가 총체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한족들이 외래 정복자의 막 강한 힘을 빠르게 자각해 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수-당 군대의 주력은 이른바 비- 한족 야만인 들 이었고, 비-한족 장군들이 군의 최고위직을 차지해 지휘를 하고 있었다. 내세의 수호신 형상들이 현세의 수호자들의 형상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던 결과이었 다. 18 당의 위세와 영광은 그 생명이 짧았고, 한족 제국도 아니었다 탁발 북위는 요동을 점거한 범-퉁구스 고구려와 평화 공존을 했었다. 반면, 범- 퉁구스 세력 형성에 위기감을 느낀 수 문제는 고구려 정벌에 집착하다 죽었고, 수 양제 는 613년에 두 번째로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 해 듣고 또다시 철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 [A.5.1.] 우문태 일족을 모두 죽이고 세워 진 수 나라는, 대규모 고구려 침공의 부작용이라 볼 수 있는, 선비 귀족집단의 내부적 반 란으로 37년 만에 망했다. 당 나라는 우문태의 손녀 딸과 결혼한 이연이 반란에 성공해 세운 것이다. 당 제국의 상무적 기개는, 630년에 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천가한( 天 可 汗 )의 칭호를 얻은 이세민이 서거하는 649년까지 31년간 지속 되었으나, 660년부터는 측천무 후의 세상이 되었다. 무후는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했으 나, 당 나라 군대는 6년(670-6년)에 걸친 신라와의 전투에 패해 한반도로부터 쫓겨났다. [A.5.2.-A.5.3.]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r.649-83)은 심신이 병약했다. 황후인 무측천은 처음에는 (660-83) 중병이든 고종을 앞세워 다스리다가, 고종이 죽자 자신의 두 어린 아들들을 내 세워 다스렸고 (684-90), 막판에는 아예 새로 왕조( 周 690-705)를 세워 여황제가 되었다. 705 년, 노쇠한 무후가 셋째 아들 중종을 다시 태자로 만들고 서거할 당시, 선비 정복왕 조의 상무적 흔적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문약한 한족 조정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18 Abramson (2003: 141-2, 145) 참조. 19 북주가 577년에 북제를 병합한 것은 무제(r.560-78)가 급사하기 전에 성취한 것이고, 579년에 진( 陳 )의 양자강 북쪽 땅을 차지한 것은 양현감( 楊 玄 感 )의 부친 양소( 楊 素 )의 공적이었다. Graff (2002: 132-5), Wright (1979: 75) 참조. 9
자리를 잡았다. 20 유목민 전사들의 상무적인 전통은, 수-당 통치권 밖에서 서만주 초원의 선비족 본고장을 차지하고 있었던 거란선비 부족이 지켜오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현종 (r.713-55) 치하의 당 나라는, 겉으로 보기에 위세와 번영을 과시했지만, 안으로는 토지 겸병의 급증으로 균전제-부병제 등 율령 체제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었 다. 안사의 난( 安 史 亂 755-63)을 진압해 준 위구르 돌궐족은 부병제가 무너진 당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보호자가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은 840년에 키르기즈 돌궐족에게 멸 망 당했다. 황소( 黃 巢 ) 대란(874-83)이 일어나자 사타( 沙 陀 ) 돌궐 부족의 도움으로 진압을 하고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황소의 잔당으로 항복하여 전공을 세운 한족 하층민 출신 주전충( 朱 溫 / 朱 全 忠 ) 손에 당 제국은 공식적으로 소멸되었고, 당 황실에 충성을 다 했던 진사 출신 한족 고위관료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Fairbank(1992: 86)는 중국 대륙에서 중앙 정권의 실제 공백기간은 755년의 반 란 이후 979년 까지 지속되었다 고 말한다. 현대 역사가들이 정성을 들여 창조한 신화와 는 반대로, 당의 위세와 영광은 그 생명이 매우 짧았었고, 한족 제국도 아니었다. 당이 소멸한 907년 바로 그 해에, 서만주 거란선비 부족은 요(907-1125) 나라를 세워 만주를 통일하고, 당 왕조를 승계하기 위해 북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20 위후( 韋 后 )도 황제가 되려고 남편 중종(d.710)을 독살했고, 713년에는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가 현종(r.712-56)을 폐위하려 했다. 무후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돌궐족의 침입을 회피해 보려고, 공주를 시집 보내고, 공물과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선비-돌궐족의 혼혈인 안록산은, 변방의 10개 절도사 중 (751 년) 요서-하북의 3개 절도사를 겸직하다가,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756년에 대연( 大 燕 ) 황제라 칭하였다. 안록산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난을 겪은 후, 절도사 상당수가 독립 소 왕국을 이루며 할거했다. 10
Appendix 5. 수-당과 고구려의 충돌 A.5.1. 수의 중국 본토 통일과 돌궐 연맹체의 출현 402년, 몽골초원은 서만주에서 이주한 동호 유연( 柔 然 )의 영도 하에 중앙집권적 제국을 수립했으나, 북위는 국경 지대에 대규모의 수비대를 주둔시킨 다음 오히려 몽골초원을 침략하여 양 껏 사람과 가축들을 잡아왔다. 21 유연의 몽골은 결국 552년에 돌궐에 의해 멸망되었다. 돌궐족들은 6세기 말에 이르러 두 개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동 돌궐은 훗날 카라코룸이 위치하게 되는 오르콘 강 상류에 도읍을 정하고, 카간이라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서 돌궐은 그보다 낮은 야브 쿠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제국을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페르시아와 카스피해 주변까지 넓 혔다. 중국 대륙이 수 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어갈 즈음, 북방 초원에는 돌궐 연맹체가 형성되어, 마 치 한 나라가 묵돌의 흉노를 대치했던 상황을 연상하게 되었다. 22 수 문제는, 589년에 중국 전체를 통일하자, 초원 지대에서의 내부적인 반목과 분열을 적 극 조장하였다. 중국 본토는 통일이 되었는데, 돌궐족은 내분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23 수 문제는, 유목 부족들 사이의 내분을 교묘히 조작하는 방법으로 돌궐 세력을 분열시키면서, 말을 안 듣는 칸 들은 제거하고 나머지 칸들은 신속( 臣 屬 )시킬 수 있었다. A.5.2. 고구려와의 충돌 고구려는 436년에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 北 燕 409-36)의 왕과 그 가족들에게 피난처 를 제공해 주었으며, 494년에는 부여 왕 일족을 받아들여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 위서( 魏 書 )는, 491년,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서거 했을 때, 위의 효문제( 孝 文 帝 )가 몸소 흰 두건에 베옷을 입고 수도의 동쪽 교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24 고구려는, 한나라 때 고조선 모양, 요하 동쪽의 만주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도 차지하고, 수도를 평양에 두었다. 고구려는 먼저 수 나라에 적대 행위를 취해, 요하를 건너 공격하였다. 수서 ( 隋 書 )에 의하면,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 에 1만 명의 말갈 기병을 이끌고 영주( 榮 州, 朝 陽 )를 공격 21 유연의 지배자들은, 돌궐 전통으로 볼 수 있는 옛 흉노족 칭호인 선우( 鮮 于 ) 대신에, 몽골식 칭호 인 칸 과 카간 을 사용하였다. Barfield (1989: 120-3) 참조. 22 Ledyard (1983: 320), Janhunen (1996: 172, 183, 186)과 Ostler (2005: 140) 참조. 23 Barfield (1989: 136-38) 24 三 國 史 記 高 句 麗 本 紀 長 壽 王 二 十 三 年 秋 魏 人 數 伐 燕 燕 王 馮 弘 曰 若 事 急 且 東 依 高 句 麗 二 十 四 年 五 月 (436) 燕 王 率 龍 城 見 戶 東 徙 魏 主 令 送 燕 王 以 王 違 詔 議 擊 之 乃 止 七 十 九 年 王 薨 魏 孝 文 聞 之 制 素 委 貌 布 深 衣 擧 哀 於 東 郊 魏 書 高 祖 紀 第 七 下 帝 爲 高 麗 王 璉 擧 哀 於 城 東 行 宮 11
한 것이다. 25 598년, 수 문제( 文 帝 r.581-604) 양견( 楊 堅 )은 30만 명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막내 아들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에 공격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이 원정에서 살아 남아 고 국으로 돌아간 수 나라 군대는 20%도 되지 않았다. 605년, 수 양제( 煬 帝 r.604-18) 양광( 楊 廣 )은 돌 궐족 2만 명을 보내 거란족을 쳐부순 다음, 고구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복종하지 않으면 돌궐 족을 동원하여 공격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607년에 돌궐족의 지휘 캠프를 방문했을 때, 양제 는 카간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26 양광은 서둘러 항주로부터 북 경 근처까지 대 운하를 연장시켰다. 611년, 수 양제는 (백만 명이 넘었다 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 대와 막대한 보급 물자를 집결시킨 다음, 자신의 불운을 탓하게 된 요동 공격을 개시했다. 요하 동쪽 주변을 따라 설치된 고구려 요새들은 늦여름의 장마가 시작되어 수 나라의 군 사 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버텨냈다. 수 나라 군대가 요동성(지금의 요양)을 함락시 키지 못하자, 양제는 원정군의 1/3인 30만 명을 떼어 내,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수 나라 군대는 을지문덕 장군의 계략에 말려들어 살수(청천강)에서 몰살을 당했다. 압록강을 건너왔던 30만 명의 수 나라 군대 중에서 살아 돌아간 숫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양제 는 요동성의 포위를 풀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27 613년에 수 나라 군대는 다시 요하를 건넜으나,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중국 대륙 통 일에 큰 공을 세웠던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양제는 또다시 철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14년에 양제의 군대가 세 번째로 요하를 건넜으나, 이번에도 고구려 요새들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는 네 번째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 군에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미 전 국이 반란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매번 거듭 패할 때 마다, 고구려 정복에 대한 양제의 집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모든 출정이 너무나도 참담하게 끝났기 때문에, 전쟁으로 피폐한 제국 자체가 멸망하게 되었다. 28 강력했 지만 단명으로 끝난 수 왕조 (581-618)는 당 왕조(618-906)로 대체되었다. 당 태종(r.627-49) 이세민( 李 世 民 )은 유목 부족의 정치 게임에 정통하였으며, 초원지대 문 화와 전통에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목민들의 전법에도 숙달하였다. 이세민은 전략 적인 후퇴에 능하여, 공격하기 전에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우선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몸소 군대 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고, 타고 있던 말이 네 마리나 죽었다. 그는 말들의 죽음을 애통이 여겨 석 25 隋 書 卷 八 十 一 列 傳 第 四 十 六 東 夷 高 麗 開 皇 十 八 年 元 率 靺 鞨 之 衆 萬 餘 騎 寇 遼 西 榮 州 總 管 韋 沖 擊 走 之 高 祖 聞 而 大 怒 영주는 만리장성 밖에 위치해 있으며, 570-83 년 동안 고보녕( 高 寶 寧 )이 점거하고 있었다. 26 三 國 史 記 高 句 麗 本 紀 第 八 嬰 陽 王 九 年 王 率 靺 鞨 之 衆 萬 餘 侵 遼 西 隋 文 帝 聞 而 大 怒 命. 將 水 陸 三 十 萬 來 伐 軍 中 乏 食 復 遇 疾 疫 師 還 死 者 十 八 九 十 八 年 初 煬 帝 之 幸 啓 民 帳 也 我 使 者 在 啓 民 所... 與 之 見 帝.. 帝 宣 旨 曰 苟 或 不 朝 往 巡 彼 土 啓 民 突 厥 可 汗 也 27 Lee (1984: 47) 28 Twitchett (1979: 143-9) 12
상( 石 像 )을 만든 다음, 화살을 몇 개나 맞았고 부상이 어떠했는가 뿐만 아니라, 그 말들 하나하나의 신체적 특징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말과 전쟁에 대해 이렇게 세세한 관심을 갖는 것은 유목민 지도 자들의 특징이다. 29 선비 귀족들은 상무정신을 강조했고, 직접 전투와 사냥에 참가하는 것을 높게 평가했었다. 30 630년 이후, 돌궐족들은 당나라 통치 아래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 세민은 중국 땅의 황제 인 동시에 유목민의 카간이 되었고, 648년에는 파미르 고원도 당나라가 직 접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이족과는 전혀 얘기가 달랐다.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 문제- 양제 마찬가지로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645년, 당 태종과 이세적( 李 世 勣 )이 이끄는 군대가 요동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태종은 요동성 아래의 해자를 메우기 위해 손수 가장 무거운 흙 자루를 날랐으며, 장수 한 명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하자 몸소 상처의 피를 빨아주었다 한다. 그러나 공격군은 안시성에 이 르러 진군을 멈추게 되었다. 태종은 장수들을 직접 지휘하며 공격을 독려했다. 당나라 군대는 하루 에 6-7번이나 공격을 반복 할 정도로 전력을 투입 했다. 하지만 두 달에 걸친 공격도 허사로 끝이 나고, 겨울이 닥쳐오자 이세민은 철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31 647-8년, 다시 한번 고구려를 공격 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태종은 다음해에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완전히 격파하 겠다고 선언을 했다. 하지만 자신 생애 단 하나의 참패에 대한 통분의 한을 품고 태종은 649년에 죽었다. 태종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수 양제 꼴이 났었을 수도 있었다. 구당서를 편찬한 사관( 史 官 )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수 양제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요동에 군사를 일으켜 드디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도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이 많았다. 태종 자신도 출사( 出 師 )를 후회하였다. 자갈밭인 야만족 땅은 정 복하더라도 쓸모가 없으며, 버려두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허영심 때문에 쓸데없이 헛고생만을 했구 나! 통역을 보내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 이다. 32 A.5.3.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5세기가 시작될 무렵, 고구려의 광개토왕( 廣 開 土 王 r.391-412)은 백제 수도 한성을 (396년 29 Barfield (1989: 141) 인용. 30 Barfield (1989: 140) 31 Lee (1984: 48) 참조. 629년, 태종은 이세적( 李 世 勣 )을 고비사막으로 보내 동돌궐을 정복하였다, 이세적의 본래 성씨는 서씨( 徐 氏 )였으나 고조( 高 祖 ) 이연( 李 淵 )이 이씨 성을 하사 해 주었다. 이름도 본래 세적( 世 勣 )인데, 태종의 이름 세민( 世 民 )의 세 자를 피하여 그냥 적 이라 부르게 되었다. 32 舊 唐 書 列 傳 第 一 百 四 十 九 渤 海 靺 鞨 史 臣 曰 隋 煬 帝 縱 欲 無 厭 興 兵 遼 左 遂 亡 其 國 我 太 宗 文 皇 帝 親 馭 戎 輅 東 征 高 麗 雖 有 成 功 所 損 亦 甚 悔 於 出 師 夷 狄 之 國 猶 石 田 也 得 之 無 益 失 之 何 傷 必 務 求 虛 名 以 勞 有 用 但 當 修 文 德 以 來 之 被 聲 敎 以 服 之 擇 信 以 撫 之 謹 邊 備 以 防 之 使 重 譯 來 庭 航 海 入 貢 玆 庶 得 其 道 也 13
에) 포위 공격하고, 요동을 정복한 후, 만주 동북쪽의 숙신( 肅 愼 ) 마저 굴복시켰다. 33 광개토왕 생전 에 이룩한 군사적 위업을 계기로, 고구려는 그 후 250여 년간 흑수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 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 正 史 )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전쟁에 동원된 기록이 여섯 번 나타난다. 장 수왕( 長 壽 王 r.413-91)이 만 명의 말갈 병사들을 몸소 거느리고 468년에 신라의 주( 州 ) 하나를 공격 해 빼앗았고; 문자명왕( 文 咨 明 王 r.491-519)이 507년에 고노( 高 老 ) 장군과 말갈 병사들을 보내 백제 를 공격했고; 영양왕( 嬰 陽 王 r.590-618)이 598년에 직접 만 명의 말갈 병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 고; 보장왕( 寶 藏 王 r.642-68)은 645년에 안시성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고구려 군과 함께 말갈 병사 15만 명을 파견했다. 고구려 군은 말갈군, 백제군과 함께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보장왕은 661년에 어느 장군에게 말갈 병사를 인솔하고 신라의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34 금사( 金 史 )에는 15만 명의 흑수말갈 병사들이 645년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위해 당 태종의 군대와 싸웠다고 적혀있다. 구당서( 舊 唐 書 ) 역시 15만의 말갈 군이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고 분명하 게 말하면서, 당 태종이 사로잡은 말갈 병사 3,300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35 660년, 측천무후는 소정방( 蘇 定 方 )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하 고 유인궤( 劉 仁 軌 )를 웅진( 熊 津 )도독으로 삼았다. 668년에는 이세적( 李 世 勣 )에게 대군을 주어 김인문 ( 金 仁 問 )이 지휘하는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 安 東 都 護 府 )를 설치하고 설인귀( 薛 仁 貴 )를 안동도호로 삼았다. 663년, 백제유민의 부흥운동을 진압한 측천무후는 계림( 鷄 林 )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당과 한편이 되어 싸운 신라 문무왕(r.661-82)을 대도독으로 임명했 다. 664년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 扶 餘 隆 )을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670년 3월 고구려 유장 고연무( 高 延 武 )와 신라 장군 설오유 ( 薛 烏 儒 )는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고, 4월에는 말갈군을 물리쳤으나, 당병이 계속 33 광개토왕은 392 년에 거란을 공격했었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398 년 이후 어느 때인가 흑수말갈 이 굴복된 것으로 되어있다. 동부여는 410 년에 정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 國 史 記 高 句 麗 本 紀 廣 開 土 王 ( 二 年 ) 北 伐 契 丹 虜 男 女 五 百 口 又 招 諭 本 國 陷 沒 民 口 一 萬 而 歸 廣 開 土 大 王 碑 文 八 年 戊 戌 敎 遣 偏 師 觀 息 愼 土 俗 自 此 以 來 朝 貢 論 事 금사( 金 史 )는 분명하게 흑수말갈 족이 발해에 복속했다고 말한다 金 史 卷 一 世 紀 金 之 先 出 靺 鞨 氏 靺 鞨 本 號 勿 吉 古 肅 愼 地 也 元 魏 時 勿 吉 有 七 部 曰 粟 末 部 曰 黑 水 部 唐 初 有 黑 水 靺 鞨 粟 末 靺 鞨 其 五 部 無 聞 粟 末 靺 鞨 始 附 高 麗 姓 大 氏 李 勣 破 高 麗 粟 末 靺 鞨 保 東 牟 山 後 爲 渤 海 黑 水 靺 鞨 居 肅 愼 地 亦 附 于 高 麗 嘗 以 兵 十 五 萬 衆 助 高 麗 拒 唐 太 宗 敗 于 安 市 開 元 中 來 朝 置 黑 水 府 以 部 長 爲 都 督 其 後 渤 海 盛 强 黑 水 役 屬 之 朝 貢 遂 絶 五 代 時 契 丹 盡 取 渤 海 地 而 黑 水 靺 鞨 附 屬 于 契 丹 34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말갈군과 32 번이나 싸운 기록이 있으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말갈군과 23 번 싸운 기록이 있다. 三 國 史 記 高 句 麗 本 紀 長 壽 王 五 十 六 年 (468) 王 以 靺 鞨 兵 一 萬 攻 取 新 羅 悉 直 州 35 舊 唐 書 列 傳 第 一 百 四 十 九 上 高 麗 靺 鞨 之 衆 十 五 萬 來 援 安 市 城 太 宗 收 靺 鞨 三 千 三 百 盡 坑 之 14
밀려들자 백성( 白 城 )으로 퇴각을 하였다. 7월, 신라는 고구려 왕족 안승( 安 勝 )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백제 고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671년 6월, 신라 군대는 당병과 백제 고지의 석성( 石 城 )에서 싸워 5,300여명의 수급을 베고 당나라 군 장교 6명을 사로 잡았다. 10월에는 신라 수군이 당 선박 70여 척을 격파했다. 672년 8월, 대동강 하류 지역에서 당군을 무찔렀다. 675년 2월, 측천무후는 설인귀에 게 수군으로 공격하게 하는 동시에 이근행( 李 謹 行 )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신라와 전면전을 벌리게 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 유민을 포함하는 9군( 軍 )을 총동원했다. 675년 9월 29일, 이근행의 대군을 임진강 지역에서 격파하여 30,380필의 말을 노획했다. 676년 11월, 설인귀의 수군을 격퇴시켰다. 당 나라 군대는 신라와 벌린 6년 전쟁(671-6)에 패해 한반도로부터 쫓겨났다. 676년에 요동군으로 옮 겨진 안동도호부( 安 東 都 護 府 )는 677년에 다시 신성( 新 城 )으로 철수 했다. 요동 지역은 668년에 당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가 안동도호부가 관할하게 되었으나, 당 조정은 옛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677년 2월,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봉해 요동주도 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자 681년에 귀양을 보냈다. 36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부족을 거느리고 만주 땅에 발해를 세웠다. 기 록을 보면 대( 大 )씨 일족과 대조영은 고구려 왕족 중 핵심 부족인 계루( 桂 樓 )부에 속했거나, 아니면 고구려에 귀화한 속말-말갈족이었던 것 같다. 37 발해가 처음으로 일본열도의 야마도 왕국에 사절단 을 보냈던 것은 727년이었는데, 자신들이 옛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여 부여의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며, 발해가 바로 옛 고구려임을 천명했다. 38 732년에 발해의 무왕( 大 武 藝 719-37)이 산동반도의 등주( 登 州, 오늘날의 봉래)를 공격하자, 733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아래위로 동시에 공격 했다. 발해 왕은 798년에 야마도 왕에게 국서를 보내, 발해가 고구려(또는 고씨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39 발해는 황상( 皇 上 )-황후( 皇 后 )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록을 남기면서 907년에 당이 망할 때까지 공존을 하고, 거란 시조 야율아보기( 耶 律 阿 保 機 )에게 멸망 당하는 926년 36 舊 唐 書 卷 一 百 九 十 九 上 列 傳 東 夷 高 麗. Lee (1984: 71-73) 참조. 37 舊 唐 書 卷 一 百 九 十 九 下 列 傳 北 狄 渤 海 靺 鞨 風 俗 與 高 麗 及 契 丹 同 開 元 七 年 祚 榮 死 乃 冊 立 其 嫡 子 桂 婁 郡 王 大 武 藝 襲 父 爲 新 五 代 史 四 夷 附 錄 第 三 渤 海 唐 高 宗 滅 高 麗 徙 其 人 散 處 中 國 高 麗 別 種 大 乞 乞 仲 象 子 祚 榮 立 中 宗 時 置 忽 汗 州 封 渤 海 郡 王 其 國 土 産 物 與 高 麗 同 欽 定 滿 洲 源 流 考 卷 八 疆 域 一 渤 海 遼 史 言 渤 海 大 氏 始 東 牟 山 舊 唐 書 作 桂 婁 之 東 牟 山 桂 婁 爲 高 麗 部 名 高 麗 五 部 西 漢 以 還 桂 婁 部 爲 王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高 句 麗 傳 本 涓 奴 部 爲 王 稍 微 弱 今 桂 婁 部 代 之 38 聖 武 神 龜 四 年 九 月 渤 海 郡 王 使 首 領 來 着 十 二 月 渤 海 郡 者 舊 高 麗 國 也 五 年 正 月 上 其 王 書 曰 復 高 麗 之 舊 居 有 扶 餘 之 遺 俗 ( 續 日 本 紀 二 : 182, 186, 188) 39 渤 海 康 王 與 日 本 國 桓 武 書 [796] 可 尋 踨 於 高 氏 日 本 逸 史 卷 七 類 聚 國 史 卷 一 百 九 十 三 ( 柳 得 恭, 渤 海 考 國 書 考 三, 1779-84 편찬, 참조.) 15
까지 19년을 더 생존했다. 40 오대사, 요사, 금사는 모두 발해와 말갈-여진 족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기록을 했다. 당시 발해가 말갈 보다는 고구려의 후계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41 낙양에서 사망한 고구려 보장 왕( 高 寶 藏 r.642-68)의 손자 고진( 高 震 700-73)의 묘비를 보면, 고진이 발해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42 8세기 말경에 이미 고구려와 발해를 동의어로 사용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r.391-412) 이후, 고구려는 668년까지 250여 년간 흑수말갈족을 포함하여 동 부 만주의 말갈족 대부분을 지배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중부만주의 예맥-퉁구스는 오래 전에 한반도로 내려와 쌀 재배를 하며 살아 온 예맥 친족들과 합쳐야 할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 그 러나 발해(698-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해 만주 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200년 이상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와는 달리, 속말말갈족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발해 왕국의 말갈-여진 지배층 이라는 존재도 대 부분 한때에는 고구려의 구성원이었었다. 43 이러한 의미에서 Henthorn(1971: 54)이 발해는 고구려 가 용접을 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갈-여진의 금과 청 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 게 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 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예 맥-퉁구스의 역사는 바이킹 왕국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덴마크 사람들이 지배하던 바이킹 제국 (1397-1523)은 스웨디쉬 바이킹의 반란으로 해체되었고, 대니쉬 바이킹은 1658년에 스웨덴 남부의 룬트(Lund) 지역 마저 상실했다. 1814년에는 스웨디쉬 바이킹이 주도 하는 스캔디나비아가 등장 하 여, 스웨덴 왕이 군림하는 스웨도-노르웨이 연합 왕국의 형태로 1905년까지 존속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대니쉬 바이킹의 존재는 유틀란트 반도와 2개의 섬에 한정되게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왜곡( 歪 曲 )의 시정( 是 正 ) 2012 홍원탁( 洪 元 卓 ) 서울대 명예교수 (http://www. HongWontack.com) 40 황상( 皇 上 )이라는 표현은 발해 3대 문왕 태흠무의 둘째 딸( 貞 惠 公 主 737-77)과 넷째 딸( 貞 孝 公 主 757-92) 묘비에서, 황후( 皇 后 )라는 표현은 발해 9대왕의 왕비( 順 穆 皇 后 ) 묘비에서 나타난다. 41 遼 史 卷 二 十 八 本 紀 第 二 十 八 天 祚 皇 帝 二 天 慶 六 年 渤 海 二 千 餘 戶 叛 七 年 女 直 軍 攻 春 州 渤 海 人 皆 降 金 史 卷 一 本 紀 第 一 世 紀 渤 海 盛 强 黑 水 役 屬 之 五 代 時 契 丹 盡 取 渤 海 地 而 黑 水 靺 鞨 附 屬 于 契 丹 其 在 南 者 籍 契 丹 號 熟 女 直 其 在 北 者 不 在 契 丹 籍 號 生 女 直 生 女 直 地 有 長 白 山 黑 龍 江 新 五 代 史 卷 七 十 二 四 夷 附 錄 第 一 契 丹 有 窺 中 國 之 志 患 女 眞 渤 海 等 在 其 後 欲 擊 渤 海 舊 五 代 史 卷 三 十 四 唐 書 十 莊 宗 紀 第 八 同 光 四 年 [926] 契 丹 寇 女 眞 渤 海 遼 史 卷 一 百 三 列 傳 第 三 十 三 文 學 上 重 熙 四 年 況 渤 海 女 直 高 麗 合 從 連 衡 不 時 征 討 42 高 震 墓 誌 銘 渤 海 人 祖 [ 高 寶 ] 藏 43 唐 書 卷 二 百 一 十 九 列 傳 第 一 百 四 十 四 渤 海 本 粟 末 靺 鞨 附 高 麗 者 姓 大 氏 其 子 祚 榮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