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07 1.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07 10 12 16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9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 2)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대한노총의 활동과 변화 3) 이승만 정부 시기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 2. 한국전쟁과 이후의 노동운동 1) 한국전쟁 시기의 노동운동 2) 한국전쟁 이후의 노동운동 19 19 22 25 26 26 27 제3장 4월혁명과 대한노총의 몰락 그리고 노동운동의 분출 33 1. 4월혁명과 노동환경의 변화 1) 대한노총의 몰락과 한국노총의 출범 2)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개편과 변화 3)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특성 2. 4월혁명 시기 광주ㆍ전남지역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 노동운동 2) 전남지역 노동운동 33 33 36 39 42 42 46 제4장 정부에 의해 개편된 노동조합과 유신체제 하의 노동운동 51 1. 박정희 정부의 노동정책과 한국노총 1) 노동정책과 한국노총의 출범 그리고 노동관계법 개정 2) 노동환경과 노동운동 지원 단체 2. 박정희 정부 시대, 광주ㆍ전남지역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 노동운동 2) 전남지역 노동운동 51 51 55 61 61 68
제5장 노동운동의 재기와 노동자 대투쟁 82 1. 전두환 정부 집권기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의 재기 1) 노동관계법 개악과 노동자 배제 정책 2) 1980년대 전 중반기의 노동환경 3) 노동운동의 재기 4) 노동자 대투쟁의 배경 2.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노동운동 1) 신군부 집권 초기 2) 신군부 집권 후반기 광주지역 노동운동 3) 신군부 집권 후반기 전남지역 노동운동 3. 노동자 대투쟁 1) 광주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2) 전남지역의 노동자 대투쟁 3) 노동자 대투쟁의 주요 쟁점과 특성 82 82 84 86 94 95 95 96 103 104 105 115 123 제6장 민주노조 건설운동과 전국적 연대조직의 결성 128 1. 노태우 정부의 노동정책과 민주노조 건설운동 1) 노동정책: 노동조합 통제와 공권력 투입 2) 노동법 개정 투쟁 3) 민주노조 건설운동과 전국적 연대조직의 확대 4) 노동조합운동의 지원 단체들 5)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 환경과 현실 2. 노태우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1)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2)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3) 1991년 5월정국과 분신 노동자들 128 128 129 130 137 142 143 144 163 175 제7장 노동정치의 시대와 노동법 개정 총파업 176 1.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환경 1) 노동정책: 노사 자율에서 정부 주도로 2) 노사의 임금 합의와 협의 구조: 상급단체 가입 변경 3) 노동조합 연대조직의 확대와 재편 176 176 178 181
4) 김영삼 정부 시대의 노동 환경과 현실 2. 1996년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 1)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 2)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노동법 개정 총파업 3. 김영삼 정부 시대의 노동운동: 임금 단체협약 협상을 중심으로 1) 광주지역의 노동운동 2)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183 186 186 188 191 191 199 제8장 종결 213 참고문헌 223 연표 228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1. 문제제기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맞추어 사회운동의 주요 영역과 내용은 달라졌다. 오늘날 광주 전남지역을 상징하는 사회운동으로 5 18민중항쟁이 거명되고 있으나, 5 18민중항쟁은 광주 전남지역을 배경으로 발생했던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일부일 따름이다. 중장기적 맥락에서 보면, 이 지역에서 5 18민중항쟁의 발발했던 원인을 우발성에서만 찾기에는 한말 이후 이들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의 지난한 항거가 갖는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광주 전남지역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만,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다른 지역들과 비견할 때 상당하다. 사회운동의 측면에서는 이들 지역이 독보적인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사회운동들 가운데 노동운동은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게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고찰할 때, 광주 전남지역에서의 활동이 충실하게 정리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에서 잘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이 한국의 노동운동 더 나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을 무조건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노동운동이 점차 성장하고 있던 초기의 국면과 오늘날을 비교해 보면, 이들 지역의 노동운동의 양상과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에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대기업 사업장들이 광주 전남지역에 수적으로 적음으로 인해, 집단화된 노동자의 수와 규모도 적고, 노동조합 등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노동자의 조직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대규모 공업단지와 대기업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환경이 취약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전국적인 시야에서 잘 포착되지 않으며, 실제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노동운동사 7
있다. 둘째,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노동운동에 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에 관한 자료는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즉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탄압이 강화되었던 시기에는 노동운동이 억압될 수밖에 없었고, 언론도 노동운동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언론에 보도된 노동운동 관련 내용들은 서울과 수도권 또는 대규모 산업체가 위치한 도시와 지역에서 발생한 사례들을 보도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광주 전남지역은 배제되었거나 누락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노동운동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활성화되면서부터는 노동조합 회보를 비롯해 많은 유인물과 자료 등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이 제대로 수집 관리 보존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자료들도 관리 부실이나 의도적인 폐기 등으로 인해 역사적 서술을 위한 근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셋째,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터이지만,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에 관한 조사와 연구 환경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다음 절에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터이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역사에 관한 글, 논문, 서적 등은 매우 적은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사건적으로 많은 부분들이 조사 연구되지 않았거나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시와 군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간한 각종 역사서들의 경우도 다소 편차가 있기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빈약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을 종합적인 구조와 구성을 제2차 문헌 자료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운동의 역사에 관한 시선을 보다 멀리에 두면,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역사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음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들 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은 한말 근대화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발생하고 있었다. 한말의 노동운동의 근대화의 물결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항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이를 대표했던 곳이 목포였다. 당시 항구 도시 목포에는 많은 노동자가 집결해 있었고, 이들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쟁의를 벌었다. 즉 목포에서는 개항한지 5개월 만인 1898년에 2월에 목포항의 부두노동자 600여 명이 참여한 동맹파업을 벌어졌다. 부두노동자들은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의 임금 인하와 임금을 지불시 인신매매식 강제 요구를 반대하면서 7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이 사건은 근대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노동자 파업으로 알려져 있다(목포시, 1990: 53). 이와 같은 쟁점들을 바탕으로 한 파업은 그해 9월에도 재연되었다. 2월의 임금인하 파업의 처리가 미흡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노동자들이 임금문제를 다시 쟁점화 하여 10일 동안 동맹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 전남지역은 한국 노동운동의 서막을 열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러한 유형의 노동쟁의는 항일운동의 성격으로 변화하면서 1903년 12월까지 계속되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20; 이철우, 1983). 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일제 강점기에도 광주 전남지역 여러 곳들에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특성상 항일운동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사회운동의 양상을 지녔다. 노동운동은 근대적 산업시설이 배치되어 있던 장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장소들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부두노동자, 수선노동자, 인쇄노동자, 탄광노동자, 제유노동자, 정미노동자, 목공노동자, 토공노동자 등이 중심을 이루어 다양한 직종과 분야들에서 노동조합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노동회 로 명명되었던 수많은 노동조직 혹은 노동조합들이 지역별로 결성되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에서의 노동운동을 일정한 수준에서 용인했던 조선총독부는 만주사변을 기화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전면 규제와 통제로 방침을 선회했다. 조선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 강도가 극대화되면서 어느 정도 활동이 전개되고 있던 노동자 집결지들에서의 노동운동도 쇄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 광주 전남지역의 경우는 여러 곳에 산업시설이 존재했으나, 노동자가 집결된 지역은 몇 군데로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 전남지역은 산업시설과 노동집단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정근식, 1990: 181~182), 1)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의 당수가 되었던 박헌영이 광주시 백운동 소재 벽돌공장에 은거해 있으면서 화순탄광, 종연방직(전남방직), 목포의 항만노동조합 등의 노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보여주고 있듯이(안종철, 1991: 48),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에서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광주 전남지역은 섬유공업이 가장 큰 산업시설이었고, 이어서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섬유공업은 노동자 수의 측면에서도 다수를 점했다. 당시 섬유공업의 대공장으로는 전남도시( 道 是 )제시공장, 약림( 若 林 )방직 광주공장, 종연( 鐘 淵 )방직 광주공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장에서는 일제 말에 해체되었던 노동조합들이 해방과 더불어 복원 또는 설립되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과정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참여했고, 식민지 유산의 청산 작업에도 한 몫을 담당했다. 미군정시대에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산업체는 화순탄광과 전남방직이었다. 해방 직후의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전국에서 분출되었던 자주관리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들은 중규모의 이상의 공장들에서 거의 대부분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사무직이거나 고참 노동자들은 미군정이 선정한 관리인들과 대립했다. 실질적 의미에서의 노동조합운동 지도자들은 미군정이 회사를 접수하는 것을 계기로 부상했다. 초기에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가 자주 관리나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종연방직이나 화순탄광 약림제사의 경우는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남로당의 주요 인물이었다(정근식, 1990: 256). 미군정은 1946년 2월부터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되었다. 특히 여성 1) 1941년 당시 전남지역에서 5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체는 총 938개였고, 이들 사업체에 약 24,000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 다. 산업별 고용 형태를 보면, 공업이 14,000여 명, 광업이 6,000여 명이었다. 노동운동사 9
노동자들이 많거나 규모가 작은 공장들이 집중적 공략대상이었다. 남성노동자가 집중해 있는 화순탄광의 노동조합은 1946년 8월 사건을 계기로 11월에 강제적으로 무력화되었다. 미군정의 노동운동 탄압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노동운동 조직을 대표했던 광주평의회와 목포평의회는 1945년 12월에 결성되어 1947년 상반기까지 활동했다. 산별 체계에 기초했던 이들 조직은 일찍이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개별 노동조합에 대한 이들 단체의 구체적 지도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다고 한다. 종연방적이나 화순탄광의 경우, 다른 회사나 공장과 규모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보였는데, 화순탄광은 남로당이 특별 구역으로 설정하여 관리했다(정근식, 1990: 256). 대한노총은 1946년에 현장의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광주지부를 결성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1947년 중반기부터 회사 단위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 임원들은 사무직이거나 중견 간부들로 채워졌다(정근식, 1990: 256~257). 정부는 노동조합을 불온시 했고, 확실하게 통제가 가능하거나 친정부의 성격을 갖는 경우에만 용인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거의 활동하지 못했다. 다소 급진적인 사람들은 생산 현장에서 해고되었거나 축출된 상태였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기반들마저도 완전하게 소거시켰고,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불모지에서 다시 발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7년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인해 산업의 구조 조정과 노동자의 대량 해고 그리고 노동운동의 급속한 위축과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이전시기까지에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을 정치 사회 역사의 측면에서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3절에서 보다 상세하게 언급할 것이지만, 이 책에서 주로 규명하는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이다.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운동의 일부이지만, 역사적으로 지속성을 갖고 전개되었으며,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현장 노동자의 요구와 활동을 상대적으로 잘 보여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2. 기존 연구의 검토 노동운동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양한 주제와 접근들로 분화되면서 꾸준하게 이루어져왔다. 이들 가운데 노동운동의 역사를 일찍이 다루었던 연구로 김윤환 김낙중이 1970년에 발행했던 한국노동운동사 가 있다. 이 책은 장기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당시의 정치 사회적 정세에서 이러한 주제의 책을 발행했다는 것만으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노동운동사의 개요와 같았는데, 서울과 부산 등 산업시설이 밀집되었던 대도시에 관한 내용이 근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1978년에 이와 유사한 성격의 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한국노동조합운동사 가 두 권으로 발행되었는데(조창화, 1987), 서술 시기가 5 16군사정변 직후로 제한되어 있다. 노동문고 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던 이들 책은 국가의 노동 정책, 법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주로 다루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1979년에 발행했던 한국노동 조합운동사 로 파악된다. 이 책은 근대 시기 이후부터 유신체제 출범 이전 시기까지를 조망했는데, 해방 이후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으로 점철되었던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즉 이 책은 출판 시기와 주체를 고려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데, 5 16군사정변 이전 시기에 관한 기록이 특히 주의를 끈다. 위의 책과 같은 시기에 관한 연구들이 새롭게 발견된 자료와 기록에 근거하여 발표되고 있지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선행 연구로서 가치가 여전하다. 그리고 한국노동조합운동사 는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내용들도 적지 않게 적시하고 있어서 당시에 관한 기록과 자료가 빈약함으로 인한 갈증을 다소나마 면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넘어 한국노동운동사를 종합적으로 고찰되었던 것은 2001년에 최영기 등이 집필했던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했던 이 책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외환위기 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전에도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룬 책들은 종종 출간되었으나, 정부의 노동정책과 노동자 및 노동운동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었던 사례는 드물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구분 시점과 쟁점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도 시사점이 크다.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의 주관 하에 2004년에 총 6권으로 발간되었던 한국노동운동사 는 한말부터 1997년까지 약 100년을 망라하여 다루었다. 그래서 한국노동운동사 는 이 연구의 시대적 배경을 구성하고, 체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 책들은 이전에 발간되었던 노동운동사들에 비해 폭넓은 시기를 포괄하고 있으며, 여러 권으로 출간되었지만,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은 역시 제한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기존 연구들을 광주 전남지역으로 범위를 좁혀서 고찰하면, 몇 가지 특성들을 보여준다. 첫째,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가 특정 시기에 편중되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는 주로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그리고 1980년대 이후시기에 한정되어 있다(정근식, 1992; 정근식 나간채, 1992; 김경일, 1992). 근래에 1950년대 전남방직 여성노동자와 그들의 공장 노동 을 소재로 일생생활을 다룬 연구가 발표된 바 있으나(이희영, 2009), 노동운동에 초점을 두고 작성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에 관한 연구는 두 개의 글로 압축된다. 하나는 1986년에 발표되었던 광주지역 공단 실태조사 이고(이광석, 1986), 다른 하나는 1993년에 발표되었던 1980년대 광주지역 노동운동 연구 이다(황효, 1993). 전자는 제목으로 보면 노동운동에 관한 글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문자 자료로 잘 포착되지 않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상황에 관한 노동운동사 11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후자는 오늘날에는 접하기 쉽지 않은 당시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수집한 문자 자료들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 1990년대에 관한 대표적인 노동운동 연구로는 송미성의 논문을 들 수 있다(송미성, 2010). 이 논문은 광노협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당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오늘날 자신들의 생활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따라서 노동운동 그 자체에 관한 내용들은 그다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두루 망라한 연구로는 광주지역 노동운동 전개과정 이 있다(홍성우 강현아, 2003). 이 책의 두 개의 장에서 광주지역 노동운동사가 정리되고 있는데, 제조업과 비제업체로 구분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목차의 배치는 노동운동의 보다 세부적인 구분에 바탕을 둔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의미가 있지만, 노동운동 일반과 다른 세부 운동들과의 관계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인식 구조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제약이 따른다. 그렇지만 1980년대 광주지역 노동운동에서 주요한 사건들이 무엇인가를 개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는 지역별로 큰 편차를 띠고 있다. 즉 기존 연구의 대부분은 광주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므로 전남지역에 관한 연구는 협소한 편이며, 특정 도시에서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조명되었다. 전남 서부권의 경우는 일제하 목포 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을 다룬 김경일의 연구(1992)가 있고, 김자룡의 연구(2008)가 있다. 특히 후자는 1980년대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완성된 논문은 아니지만 관련자들에 대한 면접 자료를 연구에 활용하고 있는 점 등 여러 측면들에서 의미가 있다. 전남 동부권의 경우는 여수 지역 노동운동이 주로 조명되었는데, 주종섭의 연구(2001)가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여수산업단지 건설노동조합의 출범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활동을 다루었다.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1) 연구 대상의 특성 이 연구의 대상은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보다 주목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사 이다. 개념의 위계와 포괄성으로 보면, 노동운동이 상위 개념이고, 노동조합운동은 하위 개념이다. 이 연구는 노동조합운동을 근간으로 하고, 그 밖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위치로 설정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노동조합운동이 약 50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역사 전반을 관류하는 활동을 보여주는 분석 단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를 살펴보면, 노동조합운동 외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고, 각종 노동운동단체와 사회운동이 노동조합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치거나 견인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처럼 노동운동과 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조합운동의 관계는 일관성을 보이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즉 노동운동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은 가장 지속적으로 근간을 형성했다. 반면, 노동조합운동 외부의 노동운동은 존재 양태와 활동의 특성 등에서 상당한 기복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연구가 장기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안목에서 진행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사가 근간이 될 수밖에 없고, 노동조합운동 외부는 노동운동의 일반성과 종합성을 규명하기 위해 언급되는 위치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구는 노동조합운동사의 흐름을 근간으로 하고, 이와 관련된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일반을 함께 조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자 한다. 둘째, 연구에 필요한 자료에 대한 접근과 수집의 제약으로 인한 현실적 한계로 기인한 측면이 있다. 연구 자료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지만,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 연구에서 현실적으로 자료의 수집과 고찰이 어느 정도 가능한 분야는 노동조합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에 관한 자료의 접근이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고, 노동조합 외부의 노동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료화와 고찰이 용이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에 자료의 수집과 정리 상태에 따라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은 다시 집필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노동운동의 다양성을 고려하기 위함이다. 노동운동의 특성과 전개는 시대와 시기에 따라 여러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이 자료와 현실에서 명확히 분리되고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를테면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때, 노동조합과 상급단체의 성격별로 확연하게 차이가 나거나, 이를 자료들에서 규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다양한 특성들을 포괄해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 연구의 대상은 광주와 전남지역이다. 광주와 전남은 본래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이 공포되면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에 의거하여 송정시와 광산군이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이와 같이 광주와 전남이 분리된 것이 25년이 넘었고, 광주에서 전남도청이 이전해갔지만, 일상에서 두 지역은 많은 대부분에서 여전히 하나의 지역처럼 인식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과 일상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공간적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에 관한 통계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산업단지와 시설들이 다수 분포되었던 광산시와 하남공단의 통계가 1988년부터 광주지역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이 연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부터 경기위기로 한국 사회가 전면적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지로 한정한다. 이 연구의 시작점을 한국전쟁으로 한정한 이유는 이 시기에 노동운동 관한 법률들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며, 비록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융위기 시대를 종기로 설정한 것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이 크게 변화했고, 노동에 관한 관계가 크게 달라졌기 노동운동사 13
때문이다. 이를테면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었던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다수의 업체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10여 년에 걸쳐 구축 및 발전시켰던 노동운동의 기반이 급격하게 붕괴 또는 위축되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2) 광주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 광주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통계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광주직할시와 광주광역시가 발행했던 광주통계연보, 전라남도가 발행했던 전남통계연보, 그리고 노동부가 발행했던 노동통계연감 이다. 그런데 이들 통계 자료들은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표 1> 광주시 전라남도 소재 노동조합의 변화에서 볼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한 자료들에서 광주지역 노동조합에 관해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은 광주직할시로 재출발했던 1986년부터였고, 전남지역의 경우에는 1988년부터 관련 통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표 2> 광주시 전라남도 노동조합 현황은 노동부에서 발간한 노동통계연감 에 따른 것인데, 1986~1990년까지만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노동조합에 관한 통계가 기록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하여 1986~1987년의 전남지역에 관한 통계는 노동부의 자료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밖에 없다. <표 1> 광주시 전라남도 소재 노동조합의 변화 (단위: 년, 개소, 명) 광주시 전라남도 구분 조합원수 조합원수 조합수 조합수 계 남 여 계 남 여 1986 93 21,944 14,690 7,254 1987 137 13,959 9,505 4,454 1988 224 22,989 17,034 5,955 166 20,304 16,757 3,547 1989 278 29,108 21,381 7,727 226 25,953 21,545 4,408 1990 277 29,886 22,468 7,418 224 24,594 20,610 3,984 1991 274 29,774 23,714 6,060 223 25,147 21,153 3,994 1992 280 29,023 23,396 6,627 218 23,458 19,960 3,498 1993 253 28,891 23,654 5,237 348 42,219 36,073 6,146 1994 251 29,447 24,148 5,299 328 39,790 34,278 5,512 1995 243 29,623 24,304 5,319 326 38,962 34,195 4,767 1996 169 27,169 22,383 4,786 332 40,668 36,032 4,636 1997 127 27,315 23,215 4,100 260 32,926 29,042 3,884 1998 116 26,642 24,071 2,571 269 32,481 29,036 3,445 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 자료 : 광주직할시, 광주통계연보, 각 년도. 광주광역시, 광주통계연보, 각 년도. 전라남도, 전남통계연보, 각 년도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표 1>과 <표 2>의 수치가 오차라고 이해하기에는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특히 1986년과 1987년의 통계 수치가 큰 차이를 보여주는데, 노동부가 제시한 자료가 당시 추세와 흐름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1986년에서 1990년까지 광주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노동부의 자료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1991년부터는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발간한 통계 자료를 참조했다. 구분 <표 2> 광주시 전라남도 노동조합 현황 (단위: 년도, 개소, 명) 전국 광주시 전라남도 단위노조 조합원 수 단위노조 조합원 수 단위노조 조합원 수 1986 2,658 1,035,890 113 18,269 93 18,922 1987 4,086 1,267,457 138 21,032 111 19,289 1988 6,142 1,707,456 228 28,600 170 22,855 1989 7,882(17) 1,932,415 278 29,108 226 25,953 1990 7,697 1,886,884 276 29,229 217 25,319 * 주 : ( )안은 한국노총 산업노조 숫자. * 자료: 노동부, 노동통계연감, 각 년도. 위의 표들에서 알 수 있듯이, 광주지역 노동조합 수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증가하다가 1993년 부터 감소세를 나타냈다. 1996년에는 감소세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통계 수치로만 보면 이 때에 많은 노동조합들이 해산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이 있다. 1995년 11 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이 출범한 것이다. 민주노총은 기업별 노동조합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일대 재편을 단행했던 바,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통계 기준과 수치가 크게 달 라졌던 것 아닌가 추정된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1998년까지 노동조합의 수가 계속 감소했던 것은 분 명하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조합원 수의 변화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전반적으 로 등락을 보이며 급변하지는 않았으나, 감소세를 띠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변화는 1997년 말부 터 본격화되었던 외환위기 시대로 인한 영향으로 판단된다. 한편 노동조합원의 성별 구성비를 보면, 남성 조합원이 여성보다는 수적으로 월등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성별 차이는 시대에 따라 일정한 양 상을 보여 주었다. 즉 1986년에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약 2:1이었지만, 1998년에는 약 10:1에 이 를 정도로 노동조합이 남성 중심으로 점점 더 편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사 15
전남지역의 경우는 광주지역에 비해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수가 적었으나, 1993년부터 크게 반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전남지역의 경우에 노동조합의 숫자가 1993년부터 전년에 비해 크게 증가했던 이유 를 자료상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수는 광주지역에 비해 다소 늦게 감소했는데, 1997년에 큰 낙폭을 보여준다. 이것은 광주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외환위기 시대로 인한 영향으로 설 명될 수 있다. 전남지역 노동조합원의 성별 구성비는 1988년에 약 5:1정도였지만, 1997년에 약 8:1 의 대비를 보였다.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노동운동 연구를 위한 자료는 몇 가지로 유형화가 가능하다. 첫째, 노동운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활동 과정에서 생산되었던 제1차 자료들이다.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되었던 제1차 자료는 관련 단체와 기관의 협조 하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현존 여부를 파악하는 것마저 어려운 현황을 나타냈다. 1980년대 이후에 생산되었던 자료의 경우도 여러 이유들로 대다수가 망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 자료들은 기관과 개인 등에 산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노동운동 단체들은 해산하면서 자료를 파기했거나, 보관 관리의 주체가 불분명해지면서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리고 공권력의 탄압에 대비하여 자료를 생산하지 않거나, 압수수색으로 망실한 경우가 많았다고 응답했다. 접촉했던 노동조합들도 자료를 제대로 보관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보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곤란한 형편이었다. 둘째, 노동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나 자료집을 들 수 있다. 노동조합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은 주로 전국적인 차원에서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로는 외기노련, 한국부두노동조합, 항운노동조합, 광산노동조합, 철도노동조합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단체들이 발행했던 노동조합의 역사에 관한 책들은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내용은 매우 드물었고, 협소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사 를 행한 사례도 극히 드물었고, 2) 어떠한 형태이든 노동조합운동사를 정리한 사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노동운동 단체의 활동을 수집한 자료집으로는 1997년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가 생산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가 있다. 총13권으로 구성된 이 백서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활동과 자료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백서에서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에 관한 내용과 기록은 일부에 불과했다. 3) 부노협, 전북노련, 마창노련, 부양노련 등에서는 이 백서를 2) 광주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광주은행노동조합이 1996년에 발간한 광주노조20년사 로 확인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주요 구성은 기수별 노동조합 조합장과 간부들의 명단, 그리고 주요 사업에 관한 내용을 명시한 것 이다. 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는 2003년에 개정되는데, 광주 전남지역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백서발 간에 필요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바탕으로 지역 운동사를 집필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광주 전남지역에서는 여하한 준비와 노력이 없었다. 2001년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를 발간했다. 제목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민주노조 라는 개념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노동조합운동사를 정리했다. 이 책의 시간적 대상은 1970년부터 2000년까지였다. 이 책에 수록된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경우에만 중소규모의 사업장들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되고 있고, 그 외의 시기에는 대기업 사업장이나 전국적으로 크게 관심을 모았던 사례들만 포함되었다. 셋째,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발간했던 지방사의 일부로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경우이다. 하지만 광주 전남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사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의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수록한 경우는 목포시사(사회 산업편) 뿐이었다. 목포시사(사회 산업편) 은 개항부터 1970년대까지의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을 노동조합의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했다(목포시, 1990). 전라남도지 는 제9권에서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기술했는데, 사회운동의 일부로 소개되는 수준이었다(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그 외 광주 전남지역들의 지방사들은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기술한 경우는 있지만,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국한되어 있었다. 넷째, 중앙과 지방에서 발행되었던 신문들에 수록된 기록이 있다. 기록된 내용과 수준에서도 중앙지와 편차가 있었다. 지역 사회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지방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에 보다 빈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항상 그랬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여건상 이들 신문을 모두 일람하기란 불가능했고, 조건과 여건이 허락하는 수준에서 기초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회운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통치 체제의 성격에 따라 노동운동에 관한 신문기사의 내용과 정도는 기복을 이루었다. 이를테면 민주화운동과 민주화가 보다 진전되던 국면에서는 관련 기록들이 빈번하게 수록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잘 기사화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관련자들 주장과 신문 기사의 내용이 상이하거나 누락된 점들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다른 문자 자료나 증언 자료가 적절히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적 여건을 감안할 때,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이 연구에서 노동운동 관련 내용을 중요하게 살펴보았던 신문은 전남일보, 광주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이다.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이 연구의 우선적인 목적임을 감안하여 문자 자료들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주요 문자 자료는 위에서 언급한 신문과 노동운동 관련 단체들에서 발간했던 것 가운데 수집이 가능했던 유인물과 자료집 그리고 책자 등이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사의 초고가 작성되면서 수차례에 걸친 노동운동사 17
중간보고회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토론자들 4) 의 의견과 몇몇 관련자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수정 작업이 후속되었다. <표 3>은 이 연구에 자문을 해주신 주요 관련자들을 제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면접이나 자문을 구해야 하는 분들이 많았으나, 이양현 정향자 등 여러 분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구술 자료들에서 관련 내용을 활용했음을 밝혀둔다. <표 3>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 관련 주요 자문자 성 명 자문 일시 자문 내용 주요 경력 기타 박동환 2014. 8. 31 4월혁명 국면의 노동운동 전남방직 노조위원장 1961. 5. 예비검속 이 황 2014. 8. 30 1980년 이전 노동야학 노동 야학 함성지, 고발지 사건 김상집 2014. 9. 3 1980년대 초 중반기 노동운동 주경미 2014. 12. 4 1980년대 중후반 노동운동, 광노협 전남기독교 노동자총연맹 광주여성노동자회 회장 이수영 2014. 12. 9 1980년대 노동운동, 광노협 광노협 사무차장 5 18민중항쟁 유공자 5 18민중항쟁 유공자 4) 중간발표회의 지정 토론자는 노영기(조선대), 강현아(광주여성재단), 이광일(한신대) 등이었다. 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어 수년이 흘렀으나, 노동과 관련된 법률은 제정되지 않았다. 비단 이 시기는 노동 관련 법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법률과 제도가 미비한 상태였다. 따라서 노동 환경과 노동자 권익을 보호할 법률적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말해도 그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동 관련 정책과 행정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 했던 것은 미군정과 과도정부에 의해 제정 공포되었던 법률들이었으나, 노동자 보호와 정책이 일부에 국한되어 적용되었고, 노동자 전반의 기본생활 보장과 권익 보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송종래, 2004: 194).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동 관련 법률들을 제정할 시기는 더 늦추어졌다. 한반도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거나 전쟁으로 인한 상흔에 고통을 받고 있고, 사회구성원들의 생사가 순식간에 갈리는 상황에서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은 후순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 국면이 지속되면서 노동자 삶과 노동 환경의 열악성을 면하지 못했고, 개선을 위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이 점차 문제시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와 국회는 노동 관련 법률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부와 국회는 1953년 초반에 집단적 노동관계 3법과 근로기준법을 포함한 이른바 노동 4법 을 제정했다. 즉 1953년 1월 27일에 노동조합법 이, 1953년 1월 30일에 노동쟁의법 이 각각 국회를 통과했다. 1953년 4월 15일에는 근로기준법 이 국회를 통과하여 노동 제법의 입법화가 이루어졌다. 노동조합법 은 1953년 3월 8일에 법률 제280호로 공포되었다. 노동쟁의조정법 은 1953년 3월 8일에 법률 제279호로 노동조합법 과 동시에 공포되었다. 또한 노동위원회법 도 당일에 법률 제281호로 공포되었다. 근로기준법 은 1953년 5월 10일에 법률 제286호로 공포되었다. 이러한 법률들에 의거하여 1953년 3월 보사부(사회부) 산하에 중앙노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노동운동사 19
지방노동위원회는 각 시와 도지사 산하에 설치되었다. 이들 법률의 제정 배경과 과정 그리고 성격과 특성은 기존 연구들에서 어느 정도 규명이 이루어졌다(송종래, 2004: 166~192). 그렇지만 이들 법률의 집행과 현실화 여부를 분석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법률의 제정 공포와 확산 정착, 더 나아가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시 공간적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한국전쟁과 전쟁 복구라는 시대상이 노동 현장에서 이들 법률이 의미와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많은 장벽들로 작용했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중요하게 착목할 점은 이들 법률이 당시 노동현장에 실효성을 갖고 있었는가와 노동자가 이들 법률을 인식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에 관한 자료들, 특히 전남지역에 관한 자료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기록들을 통해 이를 우회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아마도 1955년에 순천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에 대한 전남도의회의 활동이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사건은 1955년 8~9월경 순천서전사( 順 天 瑞 電 社 )에서 근무하던 한 노동자가 자살한 것에서 발단했다. 한 노동자가 임금체불 로 인해 경제적 고통이 가중되고 견딜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자 자살했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던 시기로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유로 자살하는 현상을 통해 목도할 수 있듯이, 이 사건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개인의 죽음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남도의회가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면서 개인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 무렵은 차기 선거가 임박했던 국면으로 의원들의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던 국면이었다. 5) 전남도의회 본회의는 이 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실태조사 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전남도의회가 처음 발표했던 계획에 따르면, 조사 기간은 9월 16일부터 약 1주일이었다. 그리고 조사반은 광주와 목포 그리고 여수 순천 등 3개 지방으로 구분하여 각각 5명의 의원들을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루어진 노동실태조사 는 기관과 기간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사 기관으로 전남도의회 산하에 노동대책 특별조사위원회 가 구성되었고, 조사는 9월 21일부터 10일 동안 이루어졌다. 조사는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의 혜택을 받고 있는가와 기업주들의 일방적 의사에 좌우 또는 유린되고 있는가 등을 규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56년 1월 21일 조사 결과는 전남도의회 본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이는 전남지역의 모든 사업장이 아니라, 특정 사업장으로 조사가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지역은 전남제사 6) 와 화순탄광이 조사 대상 사업장이었는데, 이교은( 李 敎 銀 )이 대표로 보고했다. 전남제사는 견사( 繭 糸 )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대다수가 여성노동자였다. 그러므로 전남제사에 대한 조사는 당시 여성노동자의 노동실태와 환경을 대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의원은 전남제사가 출산한지 4일에 불과한 5) 이 도의원들은 1952년 5월 10일에 선출되었다. 다음 선거는 1956년 8월 13일이었다. 6) 1926년에 설립되었던 전남제사는 1935년 종연방직 전남공장이 설립될 때까지 전남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장이었다. 1954년 박인천이 공장을 인수하면서 전남제사로 개칭했다. 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여성노동자를 공장에 출근하게 했음을 밝혔다. 이는 명백하게 근로기준법 을 위반한 것이었고,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도 보장받지 못한 시대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화순탄광에 관한 조사에서는 수개월 동안이나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는 실상이 보고되었다. 화순탄광은 월 평균 5천여 만환의 흑자를 내고 있었으나, 1954년부터 2~4개월의 임금 지급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노동자의 생활은 곤궁에 처해 있었고, 극빈한 상태에서 생계가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이 지적되었다. 목포 지역에 관한 노동실태는 김형기( 金 基 )가 대표로 보고했다. 그는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으며, 심지어는 노동법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고 하면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토로했다. 목포 지역 조사반은 약 3,600명(자유노동자, 염전노동자 제외)의 노동자가 비참한 생활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이들의 하루 수입은 1~7백환 사이였다고 밝혔다. 이를 1일 평균으로 환산하면 275환인데, 5인 가족으로 산출하면 1인당 생활비가 55환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김 의원은 전라남도가 관리하는 노동대책비 2백 만환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악질 기업주에 경종을 울리라고 촉구했다. 끝으로 순천 여수 지역에 대한 조사 보고는 순천서전사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정성순( 鄭 成 淳 ) 은 이 사건에서 회사가 임금을 지급하지 못했던 것은 자금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애로가 조속히 타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환경은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개선되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조사 이후에 진행되었던 노동쟁의의 쟁점과 진행 양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가 1959년 9월에 집계했던 그해의 노동쟁의 양상은 이를 잘 보여주는 실상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그해 9개월 동안 7,577명이 참가한 가운데 총 2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노동쟁의의 쟁점은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불, 이유없는 해고 반대 등이었다. 이후 그해 11월까지 5건의 노동쟁의가 추가로 발생했다. 이들을 모두 합산하여 보면, 1959년에 전남지역에서는 26건 이상의 노동쟁의가 발생했으며, 주요 쟁점들은 1950년대 중반과 별다른 다르지 않았다. 즉 이승만 정부 말기에도 이들 지역들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열약했던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주체는 대한노총이었다.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간부들 가운데 다소 비판적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대한노총 이외의 노동조합이 형성되었던 적이 없었다. 즉 대한노총과 다른 전국적 노동조합으로 1959년에 출범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에 전남지역의 노동조합들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4월혁명이 발발하기까지 전남지역에서 대한노총의 역할은 실로 중요했으나, 활동은 미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4월혁명이 발발하면서 대한노총이 집중적으로 토로되었는데, 전남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5년 10월 21일 전남방직의 일부 공장이 휴업에 들어갔다. 전략사정이 매우 심각해져 전남방직뿐만 아니라 산업체 전반에서 문을 닫는 공장이 속출했던 것이다. 전남방직에서는 4천여 노동운동사 21
명의 노동자 가운데 800여 명을 해직시켰다. 전남방직은 전력사정이 완화되면, 희망자에 한해 복직시킨다고 하면서 임금과 여비 그리고 퇴직금 등을 지급했다. 그렇지만 이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일방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전남방직은 전력사정이 해소되자 500여 명의 노동자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생산품의 가격과 구매력이 낮아지고 있어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전남방직의 운영은 난관이 봉착할 것이라고 했다. 대한노총 산하의 섬유노동조합은 1959년 9월 2일부터 8시간 노동제 실시를 요구했고, 9월 21일부터는 이를 실현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금성, 대한, 삼호, 조선, 대전 등의 6개 회사는 1960년 1월부터 이를 실하기로 약속했고, 태창, 경성, 전남 등의 3개 회사에서도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중소섬유 공장에서는 근로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9년 10월의 대구 합동직물노동조합에서 일요휴무를 요구한 쟁의가 그 일례이다. 하지만 1960년에도 8시간 노동제는 실제로 이행되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기업주가 대부분이었다. 대한노총은 1960년 1월 5일, 방직업자들이 연약한 여공들을 혹사하여 막대한 폭리를 취한다고 비난했다. 대한노총은 1월 12일에 기업주의 불참으로 노사협약이 결렬되자 단위 노조 위원장 회의를 열고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노동시간과 관련한 문제는 섬유노조위원장 김원영( 金 湲 永 )과 부위원장 고일하( 高 一 河 )가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시간 노동제가 실시되지 않은 것과 임금인상 결의가 유효한 성과를 가져오지 못함으로 인해 섬유노조가 분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섬유부분에서의 여공 혹사실태는 아주지역 섬유대회에서 한국의 노동관계 당국에 보내 온 성명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성명서는 한국의 여직공의 12시간 노동을 거론하면서 비인간적 착취행위를 조속히 시정할 것을 요구했으며, 여공을 혹사하는 나라는 한국과 홍콩뿐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2) 광주 전남지역에서 대한노총의 활동과 변화 7) 1953년 3월 8일 노동조합법이 공포되면서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해체되고, 새롭게 조직을 구성했다. 대한노총도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전국대회를 소집했으나, 정대천( 丁 大 天 ) 세력과 이준수( 李 俊 洙 ) 세력이 갈등을 벌였다. 그렇지만 정대천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장악했다. 이후에도 이와 대립하는 세력들이 형성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충돌이 빚어졌다. 이들은 이합집산의 파법 싸움을 계속해서 벌이면서 대한노총을 장악하는데 집중했다.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부와 긴밀하게 결탁됨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그것은 어느 파가 대한노총을 장악해도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와 대한노총의 결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은 무수하게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1956년 3월 13일 경전노동조합이 이승만의 대통령 3선 재출마를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는 사실은 7) 이 절은 한국노총(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 에서 광주 전남지역에 관해 서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압권이라고 할 것이다. 이때 경전노동조합 조합장은 정대천이었다. 대한노총에서의 경력은 선거에서도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한노총 소속으로 총21명이 출마했는데, 당선자는 없었다. 전남에서 목포구 박기봉( 朴 基 奉 ) 국회의원(전 철도연맹 위원장)이, 목포구 김대중( 金 大 中 ) 목포부두노조 공인이 출마했었다. 1958년 5월에 치러진 4대 민의원에는 대한노총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19명이 입후보했고, 7명이 당선되었다. 전남지역으로 보면, 나주 을구 이진수( 李 鎭 洙 ) 무소속 전 노총 최고위원이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나주 갑구에 출마한 이사동( 李 社 烔 ) 무소속 잠사노조 위원장은 당선되었다. 대한노총의 활동을 전남지역으로 좁혀 살펴보면, 1957년부터 잘 드러난다. 10월 26일 [대한노동 조합총협의회 결성 준비위원회] 명의의 성명서 가 발표되었는데, 여기에 여수지구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 이재식( 李 載 植 ), 목포지구노동조합연합회 대표 정순기( 丁 淳 基 ), 광주지구노동조합회 위원장 최유식( 崔 有 植 )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정대천과 김기옥 세력이 연대한 것이었다. 1959년 7월 30일 개최된 대한노총 전라남도연맹 임원 선거도 당시 전남지역에서 누가 노동조합을 주도하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선과 결과 위원장에는 최유식이 22표로 당선되었고, 부위원장에는 목포부두노조위원장 배석천, 화탄노동조합 위원장 박석기, 여수부두노조위원장 김판석, 순천철도노조위원장 곽수송이 당선되었다. 선거 후 임원 임기를 2년으로 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시기 전남의 노동운동은 조합원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대한노총 소속의 지역별 또는 산업별 조합장 일부의 활동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특성을 이해하고, 4월혁명 시기 전남지역의 노동운동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활동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사람은 오랜 기간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최유식이다. 그는 1946년 6월 중순에 대한노총 광주지부(지부장 전영배)가 결성될 때부터 청년부의 간부로 활동했다(정근식, 1992: 132). 최유식은 1947년 10월 26일 이청천의 참석 하에 개최되었던 대동청년단 전남단부(단장 서민호)의 산업국장을 맡 았 고(임 선 화, 2009: 122), 1948년 11월 4일 에 는 여 순 사 건 에 대 응 하 기 위 해 결 성 되 었 던 긴급사태대책위원회 상임위원 겸 정보부에 편성되어 활동했다. 그는 1949년에는 국민회 전남본부와 광주지부에서 중임을 맡았으며, 여러 행사들에서 사회를 보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8) 그리고 1952년 4월 15일 실시된 지방의원 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다방면으로 전남지역에서 영향력을 갖는 인물로 성장했다. 1954년에 이르면, 최유식은 대한노총에서 8명으로 구성된 회계감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8) 그는 1949년 6월 11일 국민회 광주지부 주최로 개최된 38선 철폐 광주국민대회 에서 미 국무성에 보내는 대회 결의문 을 낭독했다( 대한국민회, 38선 철폐 광주국민대회를 개최, 동광신문, 1949. 6. 12.). 노동운동사 23
1958년 10월에 김기옥( 金 琪 玉 )이 대한노총의 위원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회계감사위원들이 대체로 지역별 또는 산업별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것으로 보면, 관행적으로 배분되었던 직책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대한노총 내에는 여러 세력들이 경쟁과 야합을 벌였는데, 9) 최유식은 정대천( 丁 大 天 ) 계열이었다. 정대천과 최유식의 행보는 거의 일치했다. 최유식이 1957년 10월에 등장했던 대한노총과 별개로 전국적 노동조합을 지향했던 대한노동조합총협의회(이하 대한노련) 이 발족하는데 깊숙이 개입했다는 점은 이를 확신하게 한다. 대한노련은 그 해에 대한노총의 권력 장악에 실패한 정대천과 김기옥 세력이 연대하여 결성을 시도했던 단체였다. 정대천은 경전노동조합 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던 인물로 자유당 내 제2인자였던 이기붕의 최 측근이었다. 그는 이러한 배경을 활용하여 한동안 대한노총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로 군림했다. 한편 최유식은 김기옥 계보라고 파악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1958년 10월에 대한노총 위원장에 김기옥이 당선되어 집행부를 구성했는데, 최유식이 배제되었던 것이다. 김기옥이 대한노총을 장악하면서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반 김기옥 세력들이 확대되면서 대한노총과 별개의 전국적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협) 의 결성이 시도되었다.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지도위원은 5명이었는데, 정대천과 최유식의 이름이 확인된다. 또한 선전위원에서 화순탄광노조위원장 박석기의 이름이 확인된다. 정대천과 최유식은 그해 10월 26일 전국노협 결성 이전에 대한노총으로 복귀하고, 비판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최유식은 4월혁명 직전에 상당히 영향력을 갖춘 노동조합의 전국적 지도자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보건사회부가 개입하여 화합을 종용했다. 정대천, 김기옥, 김주홍 3인은 대한노총 깃발 아래 대동단결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화합이 성사된 것은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가 계속된 상태로 1959년 10월 7-8일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노협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10월 26일 서울 태화관에서 결성식을 했다. 그리고 임원을 선출했는데, 최유식과 박석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전국노협 결성에 정대천 일파는 물론, 대한노총 내 반 김기옥 세력 그리고 광산노동조합 등이 모두 탈퇴했던 것이다. 정대천 일파는 김기옥 일파와 자유당의 화합전략에 포섭되고 있었고, 광산노동조합 등도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은 대한노총의 파쟁이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정부 및 고용주와는 주종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노동자의 권익보호에는 진정성을 갖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대한노총 산하의 각 노동조합도 이러한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한노총의 최고 지위를 획득하려는 일부 노조 간부들은 장기간에 걸쳐 대한노총 본부는 물론 그 산하의 각 노조에 세력을 강화하고 지배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노총 본부에서 9) 대한노총 내 세력들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연합, 정부와 자유당의 개입과 관계 등에 대해서는 임선자(2007)를 앞의 책을 참조. 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일어나는 사건은 항상 그 산하 노조에 영향을 미쳤고, 산하단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도 대한노총에 영향을 미쳤다. 3) 이승만 정부 시기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 전남지역의 산업시설들은 인구가 집중된 몇몇 도시들과 자원의 채취와 활용이 용이했던 장소들에 분포되어 있었다. 전남지역을 대표했던 산업시설은 일제강점기 광주에 건립되었던 전남방직공사 10) 와 전남제사 등으로 주로 여성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었다. 항구가 발전한 목포와 여수에는 부두와 관련된 업종과 해운업이 발달하고, 화순과 광양 등에는 광업이 발전하여 남성노동자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전남지역은 일제강점기에도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사회운동이 빈발했고, 해방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안종철 외, 1995). 195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산업의 물적 시설들이 크게 변하지 않고 존속했기 때문에, 11)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이 갖는 위상은 오늘날에 비해 높았다. 광주 전남지역의 산업시설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북한군이 전남지역을 점령했던 기간은 2달여 정도였지만, 좌우 갈등과 전투 등으로 산업시설들 다수가 파괴되었다. 항구나 광산 등에 관한 피해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각종 기계 설비들로 작동하는 공장들은 피해도 심각했고, 원상 복구까지 시일이 소요되었다. 전남지역의 전쟁 피해와 양상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자료들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다른 지역의 상황도 유추할 수 있다. 광주의 경우는 전남방직 광주공장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는 북한군이 공장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군의 폭격으로 기인했다(대한방직협회, 1987). 손실 규모는 공장건물 10,431평을 비롯하여 방직기 38,368추, 직기 1,510대였는데, 전국 방직회사들 가운데 세 번째로 피해가 컸다(대한방직협회, 1968: 459~460). 파괴된 시설은 1954년경에 보다 발전된 신규 설비들로 대체 복구되었으나(전방주식회사, 1984: 430), 노동자의 수도 복원되었는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광주시사 에 의하면, 전남방직의 노동자가 1949년에는 4,002명이었으나, 1955년에는 2,689명으로 대폭 감소했던 것으로 확인된다(광주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1995: 526). 그 이유는 또 다른 원인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전력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력이 부족하여 공장이 가동될 수 없었고, 회사는 1955년 10월경에 대거 휴직처분을 했던 것이다. 이후 전력사정이 호전되면서 노동자 수가 증가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최대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의 경우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상황이 상대적으로 잘 파악되어 있다(목포시, 1990: 696 697). 10) 1934년 9월에 일본종연방직공업주식회사 광주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공장은 1948년 6월에 전남방직공사로 명명되었고, 1951년 11월에 민간에 불하되어 1952년 11월에 전남방직주식회사로 새롭게 발족했다. 1961년 4월에 전남방직주식회사 와 일신방직주식회사로 분할되었다. 11) 전남지역은 1960년대에 건설의 시대 라고 불릴 만큼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전라남도 지 9권, 217). 이것은 그 이전의 시대에는 산업시설이 해방 당시와 크게 변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노동운동사 25
목포시사 에 의하면, 섬유, 화학, 제빙, 요업 등 다양한 산업시설들이 파손되었던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부두나 항운 시설에 관한 내용은 집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실상을 알 수가 없는데, 피해가 미비했거나, 근거 자료가 없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목포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산업시설은 대동유지화학공장으로 865,998,710원의 피해를 입었고, 이어서 대한면업공사가 682,782,335원의 피해를 당했다. 대한면업공사는 조면기 100대와 직기 150대 등 기계 일절이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들은 목포의 산업노동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환경의 악화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2. 한국전쟁과 이후의 노동운동 12) 1) 한국전쟁 시기의 노동운동 한국전쟁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운동을 박멸시켰다. 노동운동 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국가 수립을 둘러싼 갈등 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맥은 거의 소멸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나마 노동운동의 형식을 취했던 것은 1946년 이승만의 발언이 계기가 되어 창립되었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제압 및 박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자유당의 일원이었던 대한노총뿐이었다. 대한노총 중심의 노동운동과 별개로 노동운동이 진행되었던 사례는 극히 드물었고,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이 계속 중이던 1952년 2월 대한노총 광산연맹은 중앙본부 위원장 및 노동조건추진위원장 이름으로 대한석탄공사와 상공부장관 등 요로에 초과 작업시간에 대한 임금계산 기준의 개정과 미불 임금 및 미가 보상금 지불요구 등 9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날로 폭등하는 쌀값과 광산노동자의 심각한 생활난을 시급히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진정 활동에는 영월, 도계, 장성, 은성, 화순 등 국내 주요 탄광노조들이 동참했다. 이들은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당시 대한노총 광산연맹에서 제시한 9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초과 작업시간에 대한 임금계산 기준의 개정, 2 식량배급에 대한 부양가족 수 제한 폐지, 3 미가 보상금 시가( 時 価 ) 환산, 4 정부 기준배급미 인상 차액의 지불, 5 공상부조의 규정제도의 실시, 6 위험작업 수당 지불(외선전공 운탄작업 노동자), 7 야근근무 수당 지불, 8 자동차 운전 킬로 당 수당, 9 미불 임금 및 미가 보상금 지불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사회부 노동국은 광산 노조의 진정을 받고 즉시 상공부, 석탄공사, 농림부 등 관계당국과 연석회의를 열고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미지불 임금 8억 원 문제는 심각하므로, 2월 21일까지 석탄공사가 우선 반액을 지불 청산토록 했다. 12) 이 장은 한국노총(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 에서 광주 전남지역에 관해 서술한 내용과 전남일보 등에 의거하여 구 성했다. 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그러나 기일이 넘어도 석탄공사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광산연맹은 3월 4일 다음 5개조의 요구 조건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즉 1 미불된 제 임금 및 보상미를 즉시 지불할 것, 2 정부기준 배급미가 인상으로 인한 인상 전과의 차액을 지불할 것, 3 정부기준 배급미에 대한 부양가족 제한을 폐지하고 부양가족 전원에 급여할 것, 4 야간근무 수당은 직원에 한할 것이 아니라, 일용 종업원에게도 해당 지급할 것, 5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인상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성명서에는 3월 10일 정오까지 이러한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파업을 단행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탄공사는 광산연맹의 태도가 강경하자, 3월 14일 이에 대응하여 광산연맹과 합의하고 조인했다.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체불노임 등은 3월 20일까지는 지불한다. 2 미가 인상 차액은 노동자 측의 요구대로 응한다. 3 부양가족 배급제한 폐지한다. 4 야간근무 수당은 일용부에게도 해당시킨다. 5 임금인상은 4월부터 대책을 세운다. 그러나 임금 인상 요구가 보류됨으로써, 단지 부분적인 승리밖에는 못 거둔 노동쟁의가 되었다. 2) 한국전쟁 이후의 노동운동 한국전쟁 이후 전남지역에서 노동조합운동은 몇몇 사업장들에서만 발생했다. 산업화 수준이 미진했고, 한국전쟁에 의해 파괴된 생산시설의 복구 등으로 인해 도시 중심의 일부 사업장들에만 노동자가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남지역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이 1955년 보관되고 있어 이전에 전개되었던 노동운동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책과 자료에서도 이 시기에 관한 부분이 크게 취약한데,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대한노총이 자유당의 기간단체로 포함되어 있어서 정부의 지침을 이행하는 역할이 주요했다는 점이다. 둘째,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셋째, 기반과 환경이 취약하여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이 시기 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주요 산업체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며, 내용의 파악이 명확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감안하여 이 시기 전라남도에서 전개되었던 주요 노동쟁의들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한석탄광산노동연맹 화순광업소의 노동쟁의 대한석탄공사(이하 석공)는 국영기업체로 산하에 영월, 도계, 장성, 화순, 고성 등의 광업소를 두었다. 사회부는 1954년 3월에 석공 산하 광업소들에 대해 임금 지불 실태와 재해보상 지불 실태, 위법 행위 사실 등을 조사했다. 그렇지만 조사를 마친 사회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953년 6월 14일 근로기준법에 제정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영기업체도 이를 지키지 않았고, 정부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화순광업소를 비롯하여 영월, 동계, 은성광업소의 노동자 7,000여 명은 생계를 영위하는 것이 더욱 노동운동사 27
어려워지기에 이르자 1954년 12월 2일 파업을 들어갔다. 당시는 한파로 연료난이 극심해서 48시간 파업이 사회에 미친 파급이 컸다. 노동조합은 지난 10월 26일 석공을 상대로 정식 쟁의보고서를 제출하고, 당국의 조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국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을 월 23,175환 평균율로 인상할 것, 미지불임금(4개월분)을 즉시 청산할 것, 석공은 왜잔( 倭 殘 )의 관료정책을 버리고 노임정책을 시정할 것,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여 1953년 8월 8일부터 소급 실시 할 것이었다. 대한노총은 파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요구조건 관철을 위한 방편이므로 48시간 파업 기간이 만료되는 12월 4일에 작업을 재개할 것이라고 했다. 양측 사이에 가장 쟁점이 되었던 미불임금은 약 3억 환 정도였다. 상공부와 석공은 이 문제는 탄값을 인상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했다. 이에 석탄광산 노련에서는 1954년 12월 7일 임금인상 및 미불노임의 해결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 목적을 관철할 것이며, 12월 14일 2차 파업을 실행하기로 결의했다. 사태가 악화되어가자 보건사회부는 석탄공사 사장을 근로기준법과 노동쟁의 조정법 위반을 이유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하는 행정조치를 취했다. 정부는 석탄 산업에 위기감이 조성되자 군대를 파견하여 노사관계 개선을 기도했다. 그러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상공부로 하여금 6억 환을 석탄공사에 융자함으로써 노임을 지불하게 했다. 노동쟁의와 종결과 더불어 석탄공사는 1955년 1월부터 54%의 임금인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석탄공사의 임금지불과 임금인상 약속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55년 9월 11일에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는 쟁의가 다시 발생했던 것이다. 1956년 6월 대한노총 석탄광노동조합연합회가 성명서 를 발표했다. 참가단체들 가운데 화순탄광노동조합 위원장 박석기( 朴 石 基 )가 있었다. 그리고 1956년 6월 11일 양측의 협정서 가 체결되었는데, 여기에도 박석기가 참여했다. 그렇지만 이런 양상은 매년 반복되었다. 1957년에 노동조합은 파업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하여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다시 상황이 고조되자 석탄공사는 1957년 4월 8일에 노동조합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고, 임금인상 쟁의가 종결되었다. (2) 금융조합연합회에 대한 자유노련의 파업 전국의 각 항만과 주요 철도역에는 자유노련 산하의 노동자 17,00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 금융조합연합회는 1953년 11월부터 자유노련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소급 인상하여 지급해야 했지만, 지연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한 투쟁으로 자유노련은 1954년 9월 30일부터 48시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자유노련에서는 9월 22일에 인천, 장항, 군산, 목포, 여수, 마산, 부산, 포항 등지의 자유노조 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금융조합연합회로부터 하역을 청부하고 있는 사업체가 9월 30일까지 임금을 인상하여 소급 지급해야 된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파업할 것임을 결의했다. 자유노련 노동자들은 당일이 되어서도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결국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국 8개 주요 항만에서 48시간 예정으로 단행하기로 했던 파업은 4개 장소에서만 7시간가량 이루어졌다. 총파업은 자유노조 자체의 조직적 취약성만을 드러내고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분규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결이 이행되지 않음으로 인한 노동쟁의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조직적 취약성을 발견한 자유노련은 1954년 12월에 금융조합연합회와의 투쟁을 조직 강화의 계기로 만들었다. 즉 자유노조는 성과를 도출하진 못했으나, 12월 20일에 다음과 같은 3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호소문에서 쟁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1 지난 8월 30일 체결된 중앙노동위원회와 금용조합연합회와의 노임 150% 인상만을 즉시 실시하라. 2 전기 협정에서 확약한 바에 의하여 1953년 11월 1일부터 소급 실시키로 된 인상 노임 전액을 1955년 1월 20일까지 지불하라. 3 재정업의 절차에 의하여 노임지불이 지연되면 사회부 당국은 이에 대한 선후책을 강구할 것이고 반드시 1955년 1월 20일까지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3) 조선운수주식회사의 노임 부정 착취 금액 반환 쟁의 대한노총 자유연맹 산하의 여수와 마산 부두 하역업에 종사하는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단체협약에 규정된 정당한 노임 전액을 지급받지 못했다. 검찰과 보사부가 기업주인 조선운수주식회사(이하 조운)를 조사한 결과, 일부를 부정 착취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일은 노동자의 권익투쟁을 회피한 자유노련의 어용성을 확실히 보여주는 실례였다. 외자청으로부터 정부물자 하역작업을 청부받은 조운은 여수와 장항 부두 하역작업과 관련하여 노사의 임금배분율을 기본임금은 3:7제로, 기타의 과분한 관리비와 우천시, 위험품 등의 작업은 할증금을 지급해야 된다는 특별조항을 내용으로 하는 노사 간의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운이 이를 무시하고 기본임금을 삭감하여 할당하고 나머지는 할증금의 명목으로 부정 취득했다. 이에 자유노련은 1954년 12월에 조운을 상대로 쟁의를 벌었으며, 1955년 3월 13일 자유노련위원장 김기동( 金 起 東 )의 명의로 조운 사장 임봉순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사건이 확산되자 국회 본회의와 보사부는 미지급된 각종 할증금을 즉시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도록 시달했으나, 조운은 노임지불을 계속 거부했다. 이 사건은 여수, 장항, 군산, 목포 등 항만부도 모두에 해당되었다. 조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표방했던 자유노련은 1955년 9월 13일 개최되었던 통합대회를 기점으로 태도를 선회했다. 통합대회에서 선출된 간부들이 노동쟁의보다는 정치적 타결책을 모색한다는 내용의 성명서 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간부들은 서울지방검찰청에 계류 중인 공문서 위조 및 노임 횡령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이들은 노동권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노동자들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이것은 김기옥 체제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 일로써 12월 5일에는 조운과 노임인상 노동운동사 29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쟁의종결보고서를 보사부에 제출하여 종전까지 받지 못한 각종의 할증금까지 스스로 묵살시켰다. 이로써 결국 노동자들의 노임을 불법적으로 착취한 내막은 은폐되었다. 1958년 목포 세관 구내 하역 작업권 쟁탈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특히 현지 하역작업 업주(강성복)와 노동자(6분회, 25명) 사이에 대립이 심각하여 전라남도 노동쟁의조정위원회에 판정을 요구했다. 쟁점은 하역 업주가 수차례에 걸쳐 돈을 거출했는데, 강성복은 세관당국에 교선비조로 사용했다고 하고, 6분회는 이의 구체적 집행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강성복은 1957년 9월 7일에 오천영 외 25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강성복을 1958년 4월 21일 경찰에 고발했다. 1958년 6월 17일 전라남도 노동쟁의조정위원회가 소집되어 강성복이 노동쟁의 조정법 제11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정하고 해고자들의 복직을 판정했다(중앙노동위원회, 1980: 112~114). 7월 17일 강성복을 기소한 검찰은 오천영 외 25명을 해고하고 노동쟁의 기간 중에 황치관 외 43명을 채용함으로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한양운수에서는 1957년 7월 17일 임금 70% 인상을 결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선주에게만 일방적으로 50% 이상을 지급하고, 노동자 28명에게는 임금을 인상하지 않았다. 이에 목포지구해상노동조합은 1959년 3월 한양운수를 상대로 노동쟁의를 시작했다. 사건이 격화되자 전라남도 사회과에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4) 부두노동조합의 야합과 파업 국회 본회의는 인천 부두노동조합의 십장제 폐지 등 대한노총의 노동쟁의 관계에 관한 현지조사를 1959년 6월 8일 벌이기로 했다. 국회는 인천, 부산, 여수, 목포, 군산, 마산에도 조사반 파견을 결정하고, 십장의 임금중간착취의 실태를 규명하려 했다. 십장제를 비롯한 부당한 임금 구조가 부두노동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국회조사단은 현지조사를 통해 노조 간부의 노동자 착취를 조절하는 입법조치를 마련할 것임을 공언했다. 하지만 거액의 노임횡령 사건은 규명하지 못했고, 십장제의 모순과 폐해도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지 못했다. 집권당과 노동조합의 긴밀한 이해관계가 이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들이 전남지역에서도 확인된다. 목포부두노동조합에서 발생한 부정사건이 대표적인데,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통제하기 유리한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다. 목포부두노동조합 간부가 1954년 4월부터 1957년 4월 사이의 비료포대 중량 노임인 367만환을 포기하는 대신에 한국운수로부터 250만환을 개인부채 반제 형식으로 수령했다. 이후에도 노동조합 간부는 같은 방법으로 200만환을 지불받아 900만환의 조출료( 早 出 料 ) 흥정을 1년 동안 지연시켰다. 이런 사실이 공론화되자 경찰은 1958년 7월 대한노총 중앙쟁의부장이며, 목포노조위원장인 배철( 裴 哲 )에게 금족령을 내렸으나, 20일경 서울로 도피했다. 부두노동조합 부차장 회의에서는 배철의 사표 제출을 권고했으며, 분회장들은 그가 불법을 저지른 것이라고 시위를 벌였다.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그런데 이 사건에는 경찰이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었다. 경찰은 2개월 전부터 목포부두노동조합 개편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배철의 부정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했던 것이다. 7월 31일 경찰은 사찰 형사들을 동원해 부두노동자들을 유달초등학교 강당에 집결시켰다. 경찰은 출입을 금지시키고, 5회에 걸친 거수투표 끝에 김진해( 金 鎭 海 )를 위원장에 당선시켰다. 그러나 부위원장 2명을 비롯해 다른 간부진들의 기존 노동조합 세력은 그대로 존속했다. 자유당은 경찰의 개입과 조정에 대해 불법이라고 지적하고, 집회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자유당은 경찰의 행위를 규탄했고, 목포부두노동조합은 목포경찰서장 외 1명의 경찰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또한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를 비롯하여 정부 부처에 청원서를 보냈다.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경찰 개입설에 대해 유감이라고 하면서 부정사건 관련자인 배철을 구속한 것이라고 했다. 1958년 8월 19일 소집된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는 노동조합법 제33조 1항에 의거하여 목포부두자유노동조합은 해산하고 32조 2항에 의거하여 부두노조의 임원을 개편할 것 등을 의결 했다. 이에 목포부두자유노동조합은 부당성을 주장하며, 기존 부두노동조합과 하등 관련이 없이 새로 성립된 것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김진해는 전라남도지사를 상대로 광주고등법원에 부두노조 해산명령 취소 에 관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9월 8일 광주고등법원 위의 취소 신청을 각하했다. 그리하여 9월 17일 대한노총 부두노조의 개편을 위한 총회가 개최되어 1,083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선거를 했는데, 배철이 위원장에, 배석천( 裴 錫 天 )과 정순기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59년 6월 한국운수 목포지점과 목포부두노동조합 사이에 1년 동안 전개되었던 조출료 9백만 환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한국운수는 노동조합의 무성의로 조출작업 가동률이 낮아 9백만 환의 비용이 소비되었으며, 특별한 단체협약 조항이 없는 한 조출료는 노동자에게 지불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반면 노동조합은 조출료를 정당한 임금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전액 지급을 요구했다. 이는 한 회사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임금협상에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얼마 후 한국운수 목포지점과 목포부두노동조합 간부들 사이에 비밀 회담이 2~3년 전부터 있었고, 노동자들 모르게 임금 가운데 4,500천환이 개인 부채인 것처럼 지불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이 돈을 수령하고, 조출료 지연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배철이었다. 경찰은 이 사건에 관해 수사를 개시했고, 배철은 사표를 제출했다. 6월 28일 대한노총 목포부두노동조합은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위원장 선거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배석천( 裴 錫 天 )이 위원장에, 추성엽( 秋 成 葉 )이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배철( 裴 哲 )은 임금 횡령으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돈의 용처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여수부두에서는 1959년 11월 23일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여수부두노동조합이 여수어업조합을 상대로 노임 인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선에서 위탁 판매장까지의 운반비를 한 상자 당 노동운동사 31
15환에서 25환으로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 쟁의는 어업조합과 노조 사이의 조정을 통해 1상자 당 18환으로 3환 인상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5) 기타 노동쟁의 1959년 7월 3일부터 6일까지 나로도어업조합 소유의 제빙공장 노동자 20여 명이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4년 여 걸쳐 약 500만환의 노임이 체불되었다고 주장했다. 나로도어업조한 이준형 이사는 회사를 매각한 뒤에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음 이사에게 업무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행방을 감추었던 것이다. 1959년 8월 4일에는 여수 신항부두 확장공사를 하던 노동자 약 400명이 시행사인 계림토건을 상대로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2월부터 7월까지 임금 1,200여 만환 가운데 700여 만환이 전표로 지급되어 큰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현금이 필요했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20% 할인 금액으로 전표를 넘겼던 것이다. 계림토건은 여수시로부터 600여 만환의 자금만 지급받아 임금 500만환을 지불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상당한 자금이 영달되었으나, 계림토건이 다른 곳에 사용하려고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은 계림토건을 경찰에 고발할 것임을 예고했다. 1959년 11월 4일에는 광주송정 간 도로 포장용 돌을 송정공원 뒷산에서 채석하던 노동자 100명이 미불 임금 3백 만환의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11월 5일 회사가 2백 만환을 우선 지급하자 파업은 중단되었다. 이 회사는 과거에는 임금 지불을 지연하여 노동자들이 전표를 20% 공제 매도하여 불이익을 당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1959년 11월 여순토건노동조합(위원장 김윤문)이 협성토건회사(대표 최익주)를 상대로 노동쟁의를 제기했다. 이 회사는 1957년 2월부터 8월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876명에 대한 임금 130여 만환을 체불했는데, 이때까지도 지급하지 않았다. 전라남도 지방노동위원회는 12월 1일 최익주에게 출두를 통보했다. 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제3장 4월혁명과 대한노총의 몰락 그리고 노동운동의 분출 1. 4월혁명과 노동환경의 변화 1) 대한노총의 몰락과 한국노총의 출범 4월혁명 당시 대한노총 지도부는 정대천, 이기주, 김기옥 등으로 이루어진 연합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1957년 제10차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김주홍 일파를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대한노총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들은 집권당이었던 자유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4월혁명이 발발한 이후, 노동계에서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은 김기옥 위원장과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집행부들을 규탄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김기옥은 제11차 대한노총 전국대회에서 5인 지도제를 구성하고, 이를 매개로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다. 4월혁명 기간에 자유당과 대한노총은 동일체로 인식되고 있어서 노동자들은 김기옥 집행부에 대해 거세게 사퇴를 요구했다. 위기를 직감한 김기옥은 4월 24일 자유당 산하에서 떠나 본연의 노동운동으로 돌아가겠다 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 발표에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중견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에 소재한 김기옥을 파괴하기도 했고, 노동조합 개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로 인해 대한노총 지방조직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1948년 4월 10일 근로자의 복지향상과 기업주와의 투쟁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설되었던 대한노총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노총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아래와 같이 매우 좋지 않았다. 대한노총 비판자들을 규합하여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1959년 10월에 새로 발족한 노동조합 전국조직이었던 대한노동조합협의회 였다. 사용주와 대결하는 노자투쟁에서 단 한번 승리한 사실 없고, 경제적 불안정에서 오는 불완전 고용 과 실업자의 격증 그리고 직업 연령의 연장으로 취업의 불균형 등 헤아릴 수 없는 위협과 함정이 생 산 근로자를 뒤따르고 있었으나, 대한노총은 헤게모니 쟁탈 자기 일파의 이권을 위한 집권당과 사용 노동운동사 33
주와의 야합 등 가지가지의 비행만을 연속해온 것이다. 13) 대한노총 위원장과 집행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사태의 전개를 예의주시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자유당이 붕괴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5월 2일에 정대천과 김주홍이, 그리고 5월 3일에 김기옥이 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집행부의 일괄사퇴가 아니었다. 대한노총의 기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지만, 기존 간부들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기존 간부들은 기득권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다져놓은 인적 유대 관계를 모두 가동했다. 대한노총은 위원장을 비롯해 지도부 몇 명만 바뀌었고, 얼마간은 유지되었다. 그래서 전국 철도노조연맹, 전국 전업노조연맹, 전국 광산노조연맹, 전국전매노조연맹, 전국체신노조연맹 등의 단체에서는 조직체가 개편되지 않고 잔존했다. 오랜 시일을 두고 형성된 조직과 인적유대는 계속하여 뿌리 깊게 노동조합의 개편과 민주적 발전의 저해했다.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60년 5월 9일 대한노총의 모든 간부진이 사퇴를 했다. 대한노총은 사실상 해산된 상태였고, 10여 명의 수습위원들이 활로를 모색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5월 한 달 동안에 170여 개의 단위노조를 개편 포섭하여 16만 명의 조합원을 흡수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합법적인 노동쟁의는 주로 노동조건의 개선 및 임금인상의 요구를 내걸고 점차 증대되었다. 그 추세는 단위 노조에서 산별 노조에로, 지역적인 범위에서 전국적인 범위로, 평화적인 방법에서부터 파업 등 실력행사로, 일회의 쟁의에서부터 반복적인 쟁의로 발전해간다. 보사부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1960년 한 해 동안의 노동쟁의는 발생건수가 227건에 참가인원이 64,335명이었다. 1959년의 95건에 참가인원 49,813명과 비교하면,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쟁의 발생 건수로 보면, 이 수치는 1953년 이후부터 자유당 말기까지에 발생한 쟁의건수에 육박했다. 이 수치는 보사부의 통계로, 행정적 절차에 의해 신고된 것만을 집계한 것임을 감안하면, 실제의 노동운동은 이 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이승만 정부에서는 대한노총과 전국노동협의회라는 두 개의 전국적 노동자 단체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 두 단체는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대립과 반목으로 일관해왔다. 노동조합 조직률이나 조합원 수 그리고 설립 역사 등으로 보면, 대한노총이 압도적인 위상과 힘을 갖고 있었으나, 4월혁명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되어 갔다. 노동자들은 대한노총을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일부로 보았고,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전국노동협의회는 대한노총의 이러한 점들을 부각시키면서 세력을 확대했으나, 이들 역시 대한노총에서 분리되었던 세력의 일부였고, 근본적으로 차별적인 조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1960년 9월 15일 두 13) 폭악스런 사용주, 전남일보, 1960. 5. 4. 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단체는 전국 산업별 대표 17명과 지역별 대표 18명이 모여 회합한 결과 무조건 통합을 추진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국노동단체통합대의원대회 소집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지도위원으로 진진한과 양일동 등 7명을 선출하고, 10월 1 2일에 통합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때 최유식은 통합대회 실행위원의 심사분야에, 목포의 배철은 연락분야에 참여했다. 1960년 9월 15일 통합발기조합이 이루어졌는데, 전남도연맹 대표 최유식( 崔 有 植 )과 목포지구연합회 위원장 김판술( 金 判 述 )이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1일 개최된 통합대의원대회에는 노조연맹을 비롯하여 자동차노련, 조양사노련, 전업노련 등 24개 노조연맹을 대표한 324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임시의장단으로는 성주갑(대한노총 대표), 김말룡(전국노동협의회 대표), 송밀성이 선출되었다. 양대 세력들은 통합연합체의 대한노총과 한국노총 두 가지 명칭 결정을 놓고 격돌했다. 이들은 서로 비방하는 발언 등이 폭발하면서 통합대의원대회는 결론을 맺지 못하고 해산했다. 1960년 11월 25~27일 전국노동단체통합결성대회가 재개되었다. 통합노동단체의 명칭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으로 합의되었다. 11월 27일 중앙운영위원들이 선출되었는데, 최유식의 이름이 확인된다. 4월혁명을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전남지역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었다. 그는 한때 전국노동조합 최고위원이나 위원장을 역임했던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11월 30일 한국노련 임시 정 부의장 및 사무총장이 결정되었는데, 의장에 경북지역노동조합위원장이었던 김말룡이 선출되었고, 사무총장에 최유식이 선임되었다. 전국노협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던 김말용이 한국노련 의장에 선출되었던 것은 전국노협이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최유식 등은 비록 전국노협 결성에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않았으나, 대한노총 내에서 비판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이것이 그가 4월혁명 국면에서도 무사히 지위를 보전했고, 더 나아가 새롭게 출범했던 전국노동자단체에서 요직에 선임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전국노동단체 통합대회 실행위원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던 전진한은 한국노련의 중앙위원회 임시부서를 불법이라고 성명을 내고,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새로운 임원진을 발족시켰다. 12월 6일 김말룡 세력과 전진한 세력들은 노련회관(구 노총회관) 점유 문제 등으로 충돌했다. 이날 전진한 일파의 사무총장 이종성이 최유식을 구타했다. 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최유식은 김말룡 일파로 명시하고 있다. 이종성은 3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두 세력 사이의 대립이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통합 논의가 확산되었으나, 두 사람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지연되었다. 양측은 1961년 5월 말경 통합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5 16군사정변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한편 대한노련은 민주당 정부가 입법 추진했던 반공특별법 및 데모규제법이 노동운동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제약한다고 보고,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부의 비민주적 지향을 규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세력들 내에 대한노련이 참여했다는 것에서 당시 이들이 어떤 지향과 위상을 지녔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노동운동사 35
2) 광주 전남지역의 노동조합 개편과 변화 4월혁명의 여파로 대한노총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영향력과 지지 세력은 여전히 상당했다. 노동조합을 둘러싼 세력들은 한동안 교착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기구와 운영을 새롭게 준비할 여유 없었다. 즉 노동조합의 조직과 기구 등 외적인 틀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들의 변화는 위원장과 지도부의 변화를 중심으로 확인해야 된다. 그렇게 보면,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는 지속형, 교체형, 신설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지속형 :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지속형은 기존의 노동조합 위원장과 진도부가 개편되지 않고 존속한 경우를 의미한다. 4월혁명의 격랑 속에서도 전남지역의 주요 노동조합 위원장과 간부진은 건재했다. 이러한 특성을 보여준 사례들은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 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이었다. 이들 노동조합이 시류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위원장들의 활동 및 지향과 관련이 깊다. 4월혁명이 발생하자, 최유식은 새로운 전국적 노동조합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의 활동은 9월 15일 전국노동단체통합대의원대회 소집위원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11월 25 27일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의 결성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 30일 한국노련 의장에는 최말룡이, 사무총장에는 최유식이 선출되었다. 명실상부한 전국적 노동조합의 핵심 인사가 된 것이다. 최말룡은 자유노련 위원장 겸 대구지구노동조합 위원장이었는데, 이 둘은 전국노협 결성을 준비하던 무렵 이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은 공공연하게 최유식을 최말룡 계보로 분류했다. 이와 같이 최유식은 대한노총 및 자유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나, 1959년부터 일탈하기 시작했다. 그는 4월혁명을 거치면서 구세력을 대신할 노동조합을 창설하는 인물로 변신했고, 한국노련이라는 새로운 노동조합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최유식은 6 25전쟁 이후 전남지역에서 경쟁자 없이 10여 년 이상 전남도노동조합연합회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의 입장과 위원장의 견해가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장악력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최유식이 노동조합운동에서 비판 세력으로 표상되었던 만큼,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위원장과 지도부가 바뀔 개연성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 곳은 화순광업소 노동조합이었다. 산업별 노동조합이었던 광산노동조합은 전국적 노동조합의 여러 입장들 가운데 비판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14) 무엇보다 광산노동조합이 대한노총에 비판적 입장을 갖는 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주요했다.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위원장은 박석기( 朴 石 基 ) 15) 로, 여러 해에 걸쳐 위원장을 연임하고 있었다. 1959년 8월에 전 14) 김말룡은 4월혁명 직후 잡지에 수록한 글에서 지역으로는 대구, 부산, 마산, 인천이, 산업별로는 광산과 전기 계통이 대한 노총 내에서 혁신 세력이었다 고 했다(김말룡, 1960, 노동조합운동의 전망, 새벽 7권 7호, 새벽사, 150쪽). 15) 박석기는 이승만 정부에서는 자유당 화순군당 사회부장이었다( 경향신문, 1963년 1월 1일자, 구 정치인 171명을 해 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전국광산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이주기( 李 周 基 )가 대한노총 사무총장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국노협 결성에 동참했고, 당시 전국광산노동조합 위원장 김정원( 金 正 元 )도 참여했던 만큼, 박석기도 선전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최유식과 같이 박석기도 전국노협 결성까지 함께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활동과 관계는 4월혁명 이후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거의 그대로 존속되었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4월혁명 직후인 5월 14일 화순광업소 노동조합 조합원 약 800명은 광장에 집결하여 제13차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정기총회 안건은 위원장과 집행부 선출이었다. 박석기는 압도적인 표차로 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1명은 기존의 부위원장이었고, 1명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이 선거는 노동조합에서 박석기의 기반이 매우 공고했으며, 흔들림이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박석기는 1961년 8월 31일에 한국노총 산하에 새롭게 설립되었던 노동조합에서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전국광산노동조합, 1969: 79). (2) 교체형 : 목포부두노동조합과 철도연맹 순천지부 교체형은 노동조합의 위원장과 지도부가 교체되었던 경우이다. 교체형은 진행과정 양상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갈등이 없이 자연스럽게 교체가 이루어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갈등의 과정을 거쳐 교체된 경우이다. 목포부두노동조합의 사례가 전자라면, 철도연맹 순천지부의 사례는 후자에 해당한다. 목포에서의 4월혁명은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그 정점은 4월 19일과 26일이었는데, 특히 26일은 서울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김부련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대규모 군중집회와 시위가 벌여졌다(4 19부상자회 광주 전남지부 외, 1995: 184-188). 이 러 한 정 세 는 목 포 부 두 노 동 조 합 에 영 향 을 주 었 다. 4월 혁 명 당 시 목포부두노동조합은 1959년 6월 28일에 선출되었던 배석천을 위원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그간의 노동조합 운영과 지향 등을 쟁점으로 위원장과 지도부를 탄핵하고 책임을 추궁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비판과 항의를 견딜 수 없음을 인식하고, 5월 2일에 일괄 사퇴를 했다. 며칠 후 새 위원장과 집행부를 선출하는 선거가 개최되었는데, 배철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배철은 배석천보다 오랜 기간 목포부두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목포부두노동조합의 주도권을 두고 임일남( 林 一 南 )과 김진해( 金 鎭 海 ) 세력들이 대립했다. 전반적으로는 임일남 세력이 우세했다. 1954년 7월 대한노총목포지구연맹이 결성되었을 때, 위원장은 임일남이었고, 배철은 부위원장이었다(목포시, 1990: 48). 임일남에 이어 위원장이 된 제 ). 그는 38세였던 1960년 11월 전남 화순 1구 도의원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경향신문, 1960년 12 월 13자, 도의원당선자 ). 박석기는 5 16 이후 정치정화법 해당자로 분류되어 규제를 받다가 1963년 12월 31일자로 해제되었다. 이 과정에 재건국민운동본부 화순군 상무위원으로 활동한 것이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 경향신문, 1962년 4월 30일자, 정정법해당자 70명, 재건운동본 지부 간부에 ). 이후에도 박석기의 노동조합 활동은 계속되어 1965년부터 1974년경까지 전국광산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연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전국광산노동조합, 1974: 213). 노동운동사 37
배철은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연임했다. 그렇지만 1959년 6월에 더 이상 위원장직을 계속할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배철이 조출료( 早 出 料 ) 지급 지연 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배철 사건에는 밝히기 어려운 흑막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배철은 1958년 경찰에 쫓기던 무렵 대한노총 중앙쟁의부장을 역임하는 등 전국적 노동조합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57년경부터 대한노총에 반발하는 흐름에도 합류했다. 앞서 언급했던 1957년 10월에 결성을 준비했던 대한노협의 기획위원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된다. 대한노협 결성준비위원회에는 최유식과 배철을 비롯하여 여수지구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 이재식( 李 載 植 )의 이름도 있다. 그 밖에도 배철과 최유식은 활동에서 이름이 종종 함께 등장한다. 1960년 10월 1 2일에 개최되었던 전국노동단체 통합대의원대회에서 최유식은 심사분야의 실행위원이었고, 배철은 연락분야의 실행위원이었다. 이러한 점들로 보면, 배철은 목포지역의 노동운동에서 대한노총 비판 세력으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바탕으로 4월혁명 직후에 위원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목할 사실은 배철과 배석천이 완만한 관계였다는 점이다. 1958년 9월 배철 세력이 노동조합 주도권 획득에서 위기에 처했던 무렵에 개최되었던 총회에서 배철은 위원장에, 배석천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목포부두노동조합의 위원장과 지도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시켜준다. 목포부두노동조합 개편을 갈등하던 계파들이 연합집행부를 구성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송종래, 2004: 472). 그렇지만 한국노총의 출범 과정과 이후에는 배석천이 다시 주도권을 장악했다. 순천에서의 4월혁명은 4월 27일에 학생들이 주도하여 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4 19부상자회 광주 전남지부 외, 1995: 188). 그런데 발생 시기와 규모 그리고 빈도 등에서 광주나 목포에 비해 저조했다. 따라서 4월혁명의 파장이 크지 않았고, 이는 순천지역 노동조합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한노총 철도연맹 순천지부는 위원장과 지도부 장악을 두고 두 세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순천지부 의장단은 4월혁명 직후에 사퇴를 표방했으나,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후속 문제를 결정짓기로 했다. 5월 17일 순천에서 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식전부터 두 집단은 충돌했다. 한 집단은 기존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광주와 목포 등에서 온 대의원들이었고, 다른 집단은 순천지구 소속 몇몇 병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정화위원회였다. 정화위원회는 대의원대회가 불법이고, 기존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대의원이 선별되었다고 주장했다. 갈등이 계속되자, 총 대의원 33명 가운데 19명이 참석하여 기존 의장단 사퇴를 선언했고, 2명의 수습대책위원을 선출하여 27일에 대의원대회를 다시 개최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산회했다. 그런데 대의원대회가 재개되었던 날은 6월 1일이었고, 33명의 대의원 가운데 24명이 참석했다. 두 세력은 회의 진행 과정에서 계속 충돌했으나, 의장단 선거는 강행되었다. 선거에서 당선된 임원들은 대의원의 다수를 점한 기존 세력들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위원장이 바뀌었으므로, 세력 교체로 보일 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수 있지만, 새 위원장은 기존 체제에서 간부였고, 수습대책위원이었던 강성순( 姜 成 順 )이었다. 즉 철도연맹 순천지부는 단절이 아니라, 계승의 성격을 갖는 교체였다. (3) 신설형 4월혁명 이후, 노동조합들이 활발하게 신설되었다. 대규모 사업장을 비롯해 중소 규모의 사업장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지만, 아직 결성되지 않은 사업장들이 더 많았다. 다음 <표 3-1>은 1960년에 전남지역의 노동조합과 조합원 신고 설립 취소 및 변경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그해 말 전남지역의 노동조합은 83개로, 17,425명의 노동조합원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29개의 노동조합이 4월혁명 이후에 신설되었고, 새로 가입한 노동자는 2,850명이었다. <표 3-1> 1960년 전라남도 노동조합 및 조합원 신고 설립 취소 및 변경 상황 노동조합 (개) 노동조합원 (명) 신고 설립 년 말 노동조합 수 신고 설립 총수 년 말 조합원 수 사무원 노무원 남 녀 남 녀 29 83 2,850 17,425 343 17 15,080 1,985 * 주 : 보건사회부, 1960, 통계연보, 479쪽.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앞의 책, 495쪽. 노동조합이 신설된 시기는 대부분 4월혁명 직후였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이 신설된 사업장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모두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60년 5월 13일에 대한노총 산하 순천마차노동조합이, 5월 14일에 광주비료와 나주의 호남비료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에 나주노동조합연맹이 결성되었다(한국노동조합초연맹, 1979: 527). 그 밖에 목포 소재 농기구제조업체였던 선일기공사와 남양수산 등에서 노동조합이 신설되었다. 이를 지역별로 감안하여 보면, 광주, 나주, 목포, 순천 등 전남 전역에서 노동조합이 신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4월혁명 시기 광주 전남지역 노동운동의 특성 4월혁명 직후부터 전국에서 노동쟁의가 급증했다. 1960년에 전국에서 227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64,355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469). 노동쟁의 발생 건수로 보면, 정부 수립 후 4월혁명 이전까지 발생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이를 조정하고 중재할 중앙노동위원회와 지방노동위원회는 마비상태였다.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면서 6월 초순까지 노동운동사 39
중앙노동위원은 1명도 선임되지 못했다. 전남지역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7월 5일에 이르러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 9명이 선임되었다. <표 3-2> 1960년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노동쟁의 현황 발생월일 사업장 주요 쟁점 참여자 수 기타 4. 25. 호남비료 체불임금 지급 500여명 공장 건설노동자 5. 5. 한국운수 광주지점 체불임금 지급 7 80명 5. 6. 순천 철도국 화차의 객차 사용 시정 국장 약속, 소강 5. 10. 한국운수 목포출장소 체불임금 지급 50여명 5. 20. 한국운수 여수출장소 체불임금 지급 2,000여명 5. 전남방직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6. 1. 광주여객 관리직원 교체, 임금인상 200여명 지방노동위 중재 7. 23. 중앙여객 단체협약 체결, 임금인상 124명 지방노동위 상정 9. 8. 전남운수 임금인상, 노동환경 개선 버스 332대 운행 중단 10. 3. 전남방직 미지불 임금 지급 133명 10. 15. 전남방직 단체협약 체결(수당 증액과 노동조건 등) 10.초순 목포염전 단체협약 체결 지방노동위 상정 10.초순 천생건설사 (목포) 연장근로 및 휴일근로 수당 지급 10명 지방노동위 상정 10.중순 여수 4개 인쇄소 단체협약 체결, 해고반대, 체불임금 1960년 전남지역 노동쟁의들 가운데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는 <표 2>와 같이 14건으로, 16) 4월 1건, 5월 5건, 6월 1건, 7월과 9월 각각 1건, 그리고 10월 5건이 발생했다. 노동쟁의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호남비료 공장이 건설되고 있던 나주였다. 이 노동쟁의는 공장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운수부문에서 노동쟁의들이 발생했는데, 화물이나 물건을 운반하는 육체노동자들이 주체였다. 이들 노동쟁의는 한국운수의 지점과 출장소에서 16) <표 2>보다 훨씬 많은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신문자료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4건이었다. 비 록 일부 노동쟁의들이 누락되었지만, 당시 쟁의의 양상과 특성을 도출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