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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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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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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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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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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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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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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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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인에서초기황반변성질환과 연관된위험요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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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2009년 12월 Korean J Med Hist 18ː57 72 18ː173-188 Dec. Dec. 2009 2009 C 大 韓 醫 史 學 會 ISSN ISSN 1225 505X 1225-505X 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신 규 환* 1. 머리말 2. 일제의 지방병 관리와 폐흡충증 연구 3.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의 전개과정 4. 맺음말 1. 머리말 1927년 함경남도 경찰부 위생과는 폐흡충증 환자의 치료를 위해 3월 1일부터 19일 동안 영 흥군(현 함경남도 금야군) 지역 청장년 104명에 게 에메틴 주사를 실시하였다. 3월 18일까지 이 미 주사를 맞은 4명의 환자가 사망했으며, 3월 20일에는 추가로 2명이 사망하였다. 3월 24일 위생당국은 일기불순으로 인해 환자들이 감기에 걸렸고, 폐렴이 생겨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다음날 조선총독부는 공식담화를 통해 에메틴 주사를 맞은 6명의 환자가 사망한 이 사건은 갑작스런 한파로 감기가 유행하면서 에메틴 주사를 맞은 환자 중에서 급성폐렴이 병 발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서둘러 해명 하고, 이 사건을 종결짓고자 하였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한성의사회가 개입하여 사망사건은 단순한 폐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 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는데, 역사 상 이 사건은 이른바 영흥 에메틴 중독사건 등으로 불리고 있다. 1) 그런데 이 사건은 질병통제를 구실로 식민지 공권력이 개입하는 과정에서 집단사망이 발생하 고, 이에 대해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였으 며, 진상규명을 위해 전국 각지의 여러 사회단 체가 개입하고 호응하는 등 사회적 반향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학사 차원에서 전면적 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존 연구 중에서 홍순원은 이 사건을 일제가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1) 사료상 에메틴(Emetine)은 에메틴, 에메진, 엠에틴, 에메친, 엠에이딘, 영흥토질 등 표기법이 다양한 데, 편의상 에메틴으로 통일하겠다. - 173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살인무기 개발연구의 일환으로 에메틴 주사를 강제 주입하여 십 수 명이 즉사하고 과반수가 중독 상태에 빠진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2) 한성 의사회를 다룬 여인석 등은 이 사건이 일제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집단치료를 전개하면서 일 본인 공의의 무지에서 초래된 의료사고였다는 점을 지적하였으며, 3) 박윤재는 이 사건을 일제 의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의료정책이 초래한 의 료사고라고 주장하였다. 4) 기존 연구들이 이 사 건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 구하고,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가장 큰 차이는 이 사건이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우발적인 사고인지 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함경남도 영흥지역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시기 전라남도 해남에서 도 동일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이 사건 이 단순히 개인의 실수나 무지에 의해 초래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을 살인무기 개발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평가일 것이다. 적어도 1920년대 에메틴은 폐흡충증을 치료할 수 있는 거의 유일 한 치료제였기 때문이다. 또 한편 일제가 폐흡 충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강제적이었 다거나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에도 의 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일제가 단순한 질병의 예방과 치료 이상으로 제국을 유 지하고 팽창시키기 위한 식민지의 의학지식을 필요로 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식민지배의 폭압성을 드 러내는 사례로 부각되었던 반면,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 왜 이 같은 중독사건이 발생하 였는지 사건 발생의 근본원인에 대한 천착은 거 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건의 핵심에는 제 국의 팽창에 기여하는 위생 의학 지식과 위생 행정의 실천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식민 지 의료권력의 성격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방병 연구와 관리를 통해 일제가 식 민지배를 어떻게 관철해 나갔는지, 또한 식민지 의 의학지식과 의료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 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일제의 지방병 관리와 폐흡충증 연구 지방병(Endemic Disease)은 흔히 토질( 土 疾 ) 혹은 풍토병이라 불리는데, 특정지역의 환경 지 리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질병을 말한다. 고산지 역에서 발생하는 고산병, 하안등지에서 유행하 는 간흡충증(간디스토마) 폐흡충중(폐디스토마), 아열대습지에서 빈발하는 주혈흡충증, 열대지역 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나 황열병 등이 이에 해 당된다. 이들 지방병은 급성전염병이 가진 파괴 력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가진 특성을 이해하고 각 질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제국의 운영과 식민지 경영을 위한 중요한 과제 였다. 예를 들어 두창이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 은 어느 곳에서나 발생하였던 데 반해, 말라리 아나 폐흡충증(paragonimiasis) 등은 특정 국가나 지역의 환경 지리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을 갖 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차별화된 체계적이고 정밀한 의학지식을 요구하였다. 지방병은 대체로 각종 기생충이 원인이 되어 2) 홍순원. 조선보건사. 청년세대; 1989. p.318-320. 3) 여인석 이규창. 한성의사회에 대하여. 의사학 1992;1(1):33-34. 4) Park Yunjae. The 1927 Emetine Injection Incident in Colonial Korea. International Symposium on Medicine and modernity in East Asia. Seoul: Dept. of Medical History, Yonsei University; August 16-17, 2007. p.113-114; 대한감 염학회. 한국전염병사. 군자출판사; 2009. 제7장. - 174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발병한다. 일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국 내에 서 유행했던 주혈흡충증(Schistosoma japonicum) 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지방병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이를 기반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지방병 연구를 심화시켜 나갔다. 일본 에서 지방병연구는 중간숙주에 대한 연구 필요성 때문에 의학자가 아닌 동물학자들이 주도했는데, 이러한 전통은 식민지 의학연구에서도 마찬가지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식민지 학자가 아닌 일본 인 학자들이 주도하였다. 5) 요컨대, 일본 내에서 지방병연구는 여타 전염병연구의 중요성에 미치 지 못했지만, 대만, 조선, 만주 등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학문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본래 말라리아와 폐흡충증은 남방에서 유래 한 질병으로 열대의학의 한 분야였으며 일제하 조선의 대표적인 지방병이었다. 말라리아는 1925 40년 조선에서 매년 100,000명 내외의 환자가 발생했지만, 퀴닌이라는 치료제가 존재했기 때 문에 치사율은 1 2%에 불과했다. 6) 반면, 1916 년 조선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폐흡 충증 환자는 39,401명에 달했다. 7) 1922-23년 조 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 419,212명 중 16,866명이 폐흡충증 환자로 조사인구의 4.0%에 달하였다. 8) 조선일보 발표에 의하면, 1927년 조사인구의 10%가 폐흡충증 환자이고, 전체 인구대비 230만 명이 환자일 것으로 추산 하기도 했다. 9)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보고에 따르면, 폐흡충증은 조선에서 매년 5-6천명의 환자가 발생하는데 불과했지만, 치사율은 25% 정도에 이르렀다. 10) 조선총독부 방역통계에 따 르면, 1924년까지 매년 수만 명의 환자가 발생 했고, 1,000명 내외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925년 이후로는 2,000-4000명 내외의 환자가 발 생하였고, 평균 12%의 치사율을 보였다. 11) 폐흡 충증의 예방과 치료가 쉽지 않고 치사율이 높았 던 까닭에 식민당국은 폐흡충증의 관리에 주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 보통 폐흡충하면 웨스테르만 폐흡충(Paragonimus westermani)을 가리키는데, 몸길이 7 16mm, 너 비 4 8mm, 두께 3 6mm의 타원형으로 다슬 기, 가재, 민물게 등에 기생한다. 폐흡충은 성충 이 아니라 포낭으로 보호막을 두른 유충의 형태 로 인체에 감염된다. 포낭유충은 소장 장벽을 뚫고 복강으로 나온 후에 복벽, 간, 비 등을 이 행하면서 횡격막을 관통하여 흉강으로 이동하 고, 폐조직 및 뇌까지 침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 서 조직을 파괴하여 출혈과 염증반응을 일으킨 다. 임상적으로는 기침, 각혈, 흉통 등 폐결핵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데, 유충이 뇌를 침범한 경우에는 두통 및 간질발작을 일으키기도 한 다. 13) 일제 식민당국은 예방과 치료 차원에서, 중앙 5) 飯 島 涉. 宮 入 貝 の 物 語 - 日 本 住 血 吸 蟲 病 と 近 代 日 本 の 植 民 地 醫 學. 田 中 耕 司 編. 岩 波 講 座 帝 国 日 本 の 学 知 第 7 卷. 岩 波 書 店 ; 2006. p.140-145. 6)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昭 和 16 年 朝 鮮 防 疫 統 計.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41. p.284-285. 7) 朝 鮮 總 督 府 施 政 年 報. 1916. p.318. 8)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p.4-5. 9) 全 조선 토질환자 勿 驚! 2백30여만. 사망자도 2천명 초과. 朝 鮮 日 報 1927년 4월 28일 2면. 10) 朝 鮮 總 督 府. 朝 鮮 衛 生 事 情 要 覽.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22. p.47. 11)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昭 和 16 年 朝 鮮 防 疫 統 計.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41. p.282-283.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폐흡충증 환자가 1923-24년 10,000-20,000명에서 1925년부터 1940년 사이 2,000-4,000명 수준으로 급감 하고 있는데, 이것은 1923년 이후 전남지역에서 현미경 사용으로 폐흡충증 환자가 12배 이상 급증한 것과는 대조적인 수치이다. 12) 1918년 경무총감부가 펴낸 醫 方 綱 要 에서도 폐흡충증에 대한 특별한 치료책은 없으며, 자양물을 섭취하여 빈혈쇠약을 막아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警 務 總 監 部 衛 生 課. 醫 方 綱 要.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18. p.85-86. 13) 오늘날 폐흡충증의 치료는 프라지퀀텔(Praziquantel)을 복용하여 충체를 사멸시키는 치료법을 쓰고 있다. 프라 - 175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과 지방 차원에서 폐흡충증을 억제하려고 했는 데, 1910년대에는 공인된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 에 주로 예방에 주력해야 했다. 중앙 차원에서 식민당국은 1916년 4월 칙령 제119호에 의거 조 선총독부의원에 과장 1명, 부의관( 副 醫 官 ) 2명, 촉탁 1명으로 구성된 전염병 및 지방병 연구과 ( 傳 染 病 及 地 方 病 硏 究 科 ) 를 설치하고, 14) 1920년 7월에는 조선전염병 및 지방병 조사위원회( 朝 鮮 傳 染 病 及 地 方 病 調 査 委 員 會 ) 를 조직하여 폐흡 충증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본격화하 였다. 15) 이를 위해 파리와 간흡충증 등을 연구 한 고바야시 하루지로( 小 林 晴 治 郞 ; 1884-1969)가 초빙되었다. 그는 1909년 7월 도쿄제국대학 이 과대학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전염병연구소( 傳 染 病 硏 究 所 )와 기타사토연구소( 北 里 硏 究 所 ) 등 을 거쳐 조선총독부의원 전염병 및 지방병 연구 과로 자리를 옮겼다. 1918년 7월 이학박사학위 를 취득하였으며, 1919년 6월부터는 조선총독부 의원 기사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 였다. 1926년 4월 1일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 을 때에, 의학부에 12명의 기초교수가 임명되었 는데, 그 중 한명이었다. 아울러 경성제대의학부 부속병원에 설치된 전염병 및 지방병 연구과의 교수과장을 겸임하였다. 16) 일찍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설립에 간여했 던 사토 고조( 佐 藤 剛 蔵 : 1880-1960)는 조선의육 사( 朝 鮮 醫 育 史 ) 에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특 색으로 약물학과 미생물학에 제2강좌를 설치한 점을 지목한 바 있다. 17) 약물학 제2강좌는 한의 학연구를 위한 것이었고, 18) 미생물학 제2강좌의 주요 연구과제는 당시 조선사회에 많은 피해를 주었던 지방병인 폐흡충증과 말라리아였다. 동 물성 병원( 病 源 )으로 인한 질병은 조선에 특수 한 것이고, 신설 의과대학으로서는 이 방면의 연구를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해 경성제국대학은 의학부에 미생물학 제2강좌를 설치하고, 경성제 대 부속병원에 설치된 전염병 및 지방병 연구과 와 협력하게 한 것이다. 19) 이 때 경성제대 의학 부 미생물학과 제2강좌를 담당한 사람이 바로 고바야시였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30여 년 동안 말라리아, 폐흡충 등 각종 질병을 일으키 는 병원충의 중간숙주인 민물 게, 모기, 벼룩, 파리 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20) 동물학자인 고바야시가 식민지 조선에서 30 여 년 동안 폐흡충증 연구를 주도했다는 점은 사실상 폐흡충증 치료에 특별한 진전이 없는 상 태에서 폐흡충의 일상사를 연구하고 중간숙주에 대한 동물학적 연구와 관리를 통해 예방하는 활 동이 당시의 중요한 방역대책이었음을 시사한 다. 즉 당국은 이러한 연구활동에 기초하여 관 련 법령을 포고하고 다슬기 채취 및 구제( 驅 除 ), 게와 가재 채취 금지 등 중간숙주를 제거하거나 하천수의 음용이나 중간숙주의 생식을 금지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지퀀텔을 25mg씩 3회, 3일간 복용하면 충체를 사멸시킬 수 있다. 충체가 사멸하더라도 실제 조직이 정상화 되는데는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충란이 조직 내에 남을 경우 수년간 염증을 유발할 수 있다. 대한감염학 회. 감염학. 군자출판사; 2007. p.1070. 14) 傳 染 病 及 地 方 病 硏 究 科 는 醫 官 科 長 富 永 忠 司, 副 醫 官 田 中 丸 治 平, 副 醫 官 金 杉 榮 藏, 囑 託 小 林 晴 治 郞 등으로 구성되었다. 朝 鮮 總 督 府 醫 院 第 4 回 年 報. 1916. p.2-6. 15) 朝 鮮 總 督 府 官 報 1920년 7월 14일. 16)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편집위원회.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 1885-1978. 서울대출판부; 1978. p.70, 82. 17) 佐 藤 剛 蔵. 朝 鮮 醫 育 史. 茨 木 ; 1956. p.86. 18) 경성제대의 한약연구에 대해서는 신창건. 경성제국대학에 있어서 한약연구의 성립. 사회와 역사 2007;76. 19) 佐 藤 剛 蔵. 朝 鮮 醫 育 史. 茨 木 ; 1956. p.86. 20) 일생동안 5권의 저서와 220편의 연구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종전 이후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부 립의과대학 등지에서 근무했다. 小 林 晴 治 郞 博 士 古 稀 祝 賀 記 念 誌. 衛 生 動 物 1954;4. - 176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특히 함경남도 경무부는 영흥( 永 興 ), 고원( 高 原 ), 문천( 文 川 ) 지역에서 폐흡충증이 빈발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914년 4월 18일 함경남도 경무부는 지 방병예방의 건 을 발표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폐흡충의 의약적 치료제가 없으므로 예방에 주 의를 기울이는 방법이 최선이며, 폐흡충의 중간 숙주인 다슬기 등의 생식을 금지한다는 것이었 다. 21) 1922년 5월 함경남도령 제9호로 폐디스 토마 예방규칙 이 반포되었는데, 의사가 환자의 인적사항과 진료사항을 적어 경찰관서에 제출하 고, 환자는 공의에게 무료진료를 요구할 수 있 으며, 중간숙주의 거래중지와 소독 등 예방활동 에 대하여 규정하였다. 22) 1923년 3월 평안남도 령 제6호로 폐디스토마 예방규칙 이 반포되었 는데, 23) 공의의 무료진료와 더불어 각종 예방활 동을 규정하였다. 실제로 함경남도 경무부는 폐흡충의 중간숙 주를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15 년 여름 한철 동안 연인원 84,000명을 동원하여 700석을 넘는 다슬기를 채취하였고, 1916년 연 초에 연인원 67,000명을 동원하여 350석의 다슬 기를 채취하였다. 다슬기 채취를 위해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 여성과 아동들이었다. 24) 적어도 지방당국의 폐흡충증 관리는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이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 식민당국의 재원뿐만 아니라 식민지인의 노 동력도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식민당국은 폐흡충증의 예방뿐만 아니라 치 료제의 개발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15년 8월 만주에서 활동하던 펑톈의원( 奉 天 醫 院 ) 의사 이 케다 마사카타( 池 田 正 賢 )가 기생충에 대한 살충 효과가 있는 염산 에메틴(Acid emetine) 주사로 임상시험을 실시하였는데, 그 효과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상사례가 4건에 불과해 에 메틴 주사를 상용하기에는 위험요소가 적지 않 았다. 살충효과가 있는 약효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는 에메틴 주사의 지속적인 투약이 필요했는 데, 약물에 과다하게 노출될 경우에는 전신권태, 보행곤란, 소화불량 등과 같은 부작용 이외에, 중독에 의해서 심장쇠약과 심장마비 등이 초래 될 수 있는 치명적 문제점이 있었다. 25) 이런 문제점 때문에 1920년대 초까지도 폐흡 충증 관련 법령에는 발병지역에서 폐흡충 중간 숙주의 채취 및 생식을 금지하고,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는 행위 등을 규제하였을 뿐 에메틴과 관련한 법적인 규제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러나 에메틴 주사는 폐흡충증 환자가 발생한 이 후에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치 료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국은 에메틴 주사의 치명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더욱이 1920년대 에메틴 주사는 폐흡충증뿐만 아니라 주혈흡충증과 같은 기생충 질환의 치료에 광범위하게 시도되었다. 26) 조선에서 에메틴 주사의 임상시험을 주도했 던 곳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위생실이었 다. 임시토지조사국은 수 천 명의 직원을 거느 리고 있고, 그들 중 다수는 지방출장이 많은데 다 유행병을 얻어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임시토지조사국 위생실의 촉탁의사로 있었던 기 쿠치 지로( 菊 池 二 郞 )와 이마무라 도요하치( 今 村 豊 八 ) 등이 폐흡충증 환자들의 임상시험을 담당 21) 朝 鮮 總 督 府 咸 鏡 南 道 警 務 部 告 諭 第 1 號. 朝 鮮 總 督 府 官 報 1914년 4월 18일. 22) 肺 ヂストマ 豫 防 規 則. 朝 鮮 總 督 府 官 報 1922년 5월 15일. 23) 肺 ヂストマ 豫 防 規 則. 朝 鮮 總 督 府 官 報 1923년 4월 5일. 24) 加 加 見 鐵 太 郞 ( 永 興 公 醫 ). 咸 鏡 南 道 に 於 ける 肺 ヂストマ. 朝 鮮 彙 報 1916년 2월. 25) 臨 時 土 地 調 査 局 衛 生 室 調 査. 肺 ヂストマ 蟲 病 に 對 する 鹽 酸 ヱメチンの 治 療 實 驗. 朝 鮮 彙 報 1918년 4월. 26) 1921년 10월 일본인의사가 에메틴 주사로 主 血 吸 蟲 症 (Schistosoma japonicum)을 치료한 사례와 부작용에 대해 서는 F. G. Gawston. Emetine in Japanese Bilharzia Disease. The British Medical Journal 1921;2:1031. - 177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하였다. 27) 1917년 1월부터 임시토지조사국 직원 과 그 가족 중에서 28명의 환자를 확보하고, 2 월부터 임상시험에 착수하였다. 피시험자는 10 대 후반 3명, 20대 22명(여성 1명 포함), 30대 3 명 등 평균 24.3세로 대부분 20대 중반의 건장 한 남성들이었다. 이 점은 왜 에메틴주사의 임 상시험을 경성제국대학이나 조선총독부의원과 같은 식민지의학의 전초기지가 아닌 임시토지조 사국이 주도하였는지를 부연해준다. 임상시험에 따른 식민당국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무엇보다 임시토지조사국을 통해 건강한 시험군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상시험 결과 64%(18명)가 완치되었고, 9명 이 호전되었으며, 1명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략 20일 동안 1회에 0.04cc가 투여되었고, 20 회 정도가 주사되었는데, 최대 29회 동안 최대 1.42cc까지 투여되었다. 에메틴 주사 횟수가 늘 수록 에메틴 부작용에 의해 하지권태 및 전신권 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장에 위협적일 수 있었다. 28) 이 실험으로 에메틴의 효과가 입 증되어, 임시토지조사국 위생실은 에메틴 주사 가 폐흡충증 치료의 특효약 이라고 상찬하기도 했지만, 그 부작용 역시 적지 않다는 사실도 밝 혀진 셈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에메틴이 폐흡충증의 치료제 로 곧바로 상용화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다만 1910년대 후반부터 폐흡충증에 대한 전국적인 실태조사가 진행되었다. 1922-23년 조사는 전국 657개 동( 洞 )에 거주하는 419,212명을 대상으로 180,315명을 검사하였고, 그 중 4%인 16,866명이 폐흡충증 환자임이 밝혀졌다. 검사대상자 중 평 균 환자발견 비율은 9.4%였는데, 경기도(10.4%), 충청남도(14.4%), 전라북도(14.3%), 전라남도(46.0%), 황해도(23.1%), 평안남도(18.7%), 함경남도(12.4%) 등에서는 평균을 상회하였다. 29) 사람수 <그림 1> 1919-27년도 전라남도 지역 폐흡충증 환자수의 변화 연도 (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p.6-8.) 27) 기쿠치( 菊 池 二 郞 )는 1917년 臨 時 土 地 調 査 局 위생실 촉탁의를 거쳐 1918년 조선총독부 철도국 촉탁의로 재직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마무라 도요하치( 今 村 豊 八 )는 1882년생으로 1908년 3월 日 本 醫 學 專 門 學 校 졸업하 였으며, 1911년 4월 東 京 帝 國 大 學 醫 學 部 內 科 와 病 理 科 를 수료하였다. 1911년 5월 조선에 건너왔고, 1913년 7월부터 1918년까지 臨 時 土 地 調 査 局 衛 生 事 務 촉탁 및 의무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18-35년 京 城 府 에서 今 村 病 院 을 개업하였다. 28) 臨 時 土 地 調 査 局 衛 生 室 調 査. 肺 ヂストマ 蟲 病 に 對 する 鹽 酸 ヱメチンの 治 療 實 驗. 朝 鮮 彙 報 1918년 4월. 29)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p.3-4. - 178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전라남도의 경우 1919년부터 폐흡충증 환자 에 대한 실태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 초기 1,000명 내외의 환자가 1923-25년 사이에 12배 이상 급증하여 12,000명을 상회하다가 1926년을 고비로 환자수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폐흡 충증 환자가 급증한 것은 1923년부터 현미경검 사가 본격화되면서 검사의 정확성이 높아졌기 때문이고, 1926년 이후 환자수가 다소 감소한 것은 1925년 이후 에메틴 주사를 비롯한 당국의 지방병 억제책의 본격화와 상관이 있을 것이 다. 30) 바꿔 말하면, 1910년대 이후 소강국면에 있었던 에메틴 치료가 1925년 지방당국에 의해 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표 1. 전라남도 폐흡충증 치료비 재원(1922-27) (단위: 円 ) 국비 지방비 면비 기성회비 기부금 계 1922 700 600 - - - 1,300 1923 900 1,200-1,000-3,100 1924 1,500 1,500-1,781 525 5,306 1925-5,600 370 1,689 1,299 8,958 1926 1,160 5,600-1,481-8,241 1927-5,600 - - - 5,600 계 4,260 20,100 370 5,951 1,824 32,505 (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3. p.24.) <표 1>에 의하면, 1920년대 초부터 폐흡충증 을 치료하기 위한 에메틴 주사가 본격적으로 실 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책 임자는 1922년에 폐흡충증에 대한 전국적인 조 사를 실시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에메틴 치료를 병행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31) 그 중에서도 지방당국이 에메틴 치료를 주도함에 따라 폐흡 충증 치료비 역시 주로 지방비에서 출연되었다. 전라남도는 폐흡충증 치료를 위해 국비지원을 받았으나 지방비의 20% 수준에 불과했다. 폐흡 충증 치료를 사실상 지방당국이 주도하고 있음 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폐흡충증 치료는 중앙에서도 여전히 관심을 받았고, 중앙 의 재정 지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2) 전라남 도는 1926년 1,160원의 국고지원을 받았고, 이 재원을 고흥군과 해남군에 집중 배당했고, 이것 이 1927년 해남군에서 발생한 에메틴 중독사건 의 배경이 되었다. 표 2. 전라남도 폐흡충증 치료비별 치료실적(1923-27) (단위: 명) 국비 지방비 기성회비 기부금 면비 자비 계 치료 전치 치료 전치 치료 전치 치료 전치 치료 전치 치료 전치 치료 전치 1923 141 29 - - 124 81 - - - - - - 265 110 1924 50 21 403 379 87 85 163 142 - - 96 94 799 721 1925 59 56 1,308 1,179 16 16 118 115 110 98 34 30 1,645 1,494 1926 120 103 1,229 1,147 - - - - - - - - 1,349 1,250 1927 - - 378 337 - - - - - - - - 378 337 계 370 209 3,318 3,042 227 182 281 257 110 98 130 124 4,436 3,912 (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3. p.25-29.) 30)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p.6-8. 31) 過 去 成 績 은 良 好 최근의 불행도 중독은 아니오.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2일 2면. 32)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p.24. - 179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1923년에는 해남군에서 치료가 실시되었으며, 1924년에는 고흥군으로 확대되었다. 1925년에는 보성군, 장흥군, 광주군, 순천군, 경진군 등지로 확대되었다. 치료비별 치료실적에서도 지방비에 의한 치료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해남군에 가장 환자가 많았을 뿐만 아 니라 치료환자도 많았다. 33) 한 가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은 에메틴 치료율이다. 1923년에 는 치료환자 265명 중 41.5%(110명)가 완전 치 료되었는데, 1924년 이후로는 평균 90%대의 높 은 치료율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에메틴 중 독사건이 우연히 일회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 라 높은 치료율에 대한 자신감에서 출발했음을 암시해준다. 이와 같은 전라남도의 상황이 전국적으로 동 일하지는 않겠지만, 전라남도의 상황은 지방병 관리의 주체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변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1910년대 중 반 폐흡충증을 비롯한 지방병 관리에 적극적이 었던 식민당국이 1920년대 초 다소 소극적이다 가 1920년대 중반 다시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모 한 것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위생관리 제도의 변화와 관계가 깊다. 그것은 1920년대 위생관리의 주체가 경무총감부 및 조선총독부의 원 등 중앙에서 도지사 및 도 경찰부 위생과가 관리하는 지방으로 이전되었다는 데 있었다. 1919년 3 1운동 이후 무단정치의 한계를 인식 한 일제는 문화정치로 전환하고, 중앙권력을 지 방으로 이양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1919년 지 방제도 개편을 통해 도 경무부장이 가졌던 위생 관련 사무처리 권한을 도지사에게 이관하였다. 이로써 공의에 대한 감독 및 허가 주체가 경무 총감에서 도지사로 변경되었다. 1925년 이후로 는 공의의 임명도 도지사의 권한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방의 권한이 점차 증대되는 것을 의미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의 재정 부담을 축소하고 재정운용의 책임을 지방당국에 떠넘기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양적으로 는 도립의원의 수와 공의의 수가 증가하였지 만, 34) 지방민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목적 으로 설립된 자혜의원의 운영권마저 1925년 도 로 이관되면서, 국고 및 도비 지원을 받지 않는 도립의원은 수익위주의 경영을 본격화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지방의 의료상황이 피폐해지는 가 운데,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공의들이 언론의 주 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업의이 기도 한 공의가 무작정 무료진료만을 계속할 수 는 없었다. 실제로 공의들은 수익을 위주로 한 진료에 주력했고, 방역활동은 부업으로 전락하 였다. 35) 에메틴 중독사건은 의료권력이 지방화되고, 지방의료가 수익위주 경영으로 전환되는 추세 속에서, 지방당국이 시혜적인 의료서비스를 지 속한다는 명분을 유지하고, 공의를 활용한 식민 지 의료시스템을 강화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발 생하였다. 말하자면 지방당국은 의료의 시혜성 을 명분으로 생체실험을 강행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3.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의 전개과정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1927년 3월 함경남도 영흥지방에서는 에메틴 중독사건이 발생하였는 데,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3월 22일자 동아일 보 는 3월 18일 4명이 사망하였으며, 3월 20일 33) 위의 책. p.25-32. 34) 도립의원의 수는 1910년 13개에서 1943년 46개로 3.5배 증가하였고, 공의는 1914년 130명에서 1941년 628명 으로 4.8배 증가하였다. 朝 鮮 總 督 府 施 政 年 報 (1941). 1943. p.406-407. 35) 박윤재. 조선총독부의 지방 의료정책과 의료소비. 역사문제연구 2009;21. p.165-176. - 180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에는 2명이 더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36) 3월 24일 경찰국은 에메틴 주사 결과가 양호하였으 며, 갑작스런 일기변화로 감기에 의한 폐렴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37) 3월 25일 당국은 조위금을 피해가족에게 나눠주며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이에 격 분한 유가족들로부터 경찰서가 피습을 받기도 했다. 3월 22일 영흥지역 각계를 대표하는 12개 단 체가 경성에 모여 영흥주사 대책강구회(이하 대책강구회) 를 조직하고, 3월 25일에는 한성의 사회에 진상조사를 의뢰했다. 사건을 의뢰받은 한성의사회는 회의 결과 김탁원과 박승목 등 2 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밖에도 황해도 사리원 만수의원장 인정수, 함남 고원단체총회 가 파견한 김인숙, 천일남 등이 자체 진상조사 를 위해 영흥으로 떠났다. 38) 3월 26일 1명이 더 사망하여, 사망자는 총 7명으로 늘었다. 39) 사망자는 진태순(17세), 이현기(23세), 함원순 (37세), 주기준(37세), 김성도(36세), 문승엽(34 세), 진상직(37세) 등으로 주로 20-30대의 청장 년층이 희생되었다. 40) 중독된 환자는 105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실제 입수된 중독 환자 81명의 명단을 분석해보면, 10대가 18명, 20대가 26명, 30대가 26명, 40대가 10명, 60대가 1명이었고, 최연소자는 11세, 최고령은 69세였 다. 41) 중독자와 사망자 중 20대와 30대가 대부 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중독자 중에는 15세 이 하가 5명이고 69세의 노인까지 중독된 것으로 보아, 에메틴 주사를 특정 연령에 한정한 것으 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에메틴 주사가 청장 년 위주의 시험단계를 지나 전 연령층으로 확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월 25일 대책강구회 가 처음 발표한 성명서에 의하면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함경남도 경찰부 위생과에서는 약 3천엔의 국 고예산으로 관할지역 중 가장 폐흡충증이 많은 영흥, 고원, 문천 등 3군에 한하여 에메틴 주사 를 실시하기로 계획하고, 다카하시( 高 橋 ) 위생과 장( 衛 生 課 長 )이 직접 부하 수명을 데리고 영흥에 출장하고 105명의 환자를 모집하여 최초에 3주 일을 계속하되, 만일 도중에 폐하는 자는 이미 실시한 약가를 매일 70전씩 계산하여 받을 터이 라 라는 명령을 내리고, 3월 1일부터 주사에 착 수하였는데, 함경남도 각 군에 산재한 공의들은 명령을 따라서 순서대로 출두하여 연일 실시하 되, 에메틴을 1회에 2그램부터 3그램까지 사용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의들은 에메틴은 1회 사 용량이 1회에 1그램인데, 1회에 2-3그램을 사용 하는 것은 너무 과량이 아니냐고 항의를 하기도 했으나 다카하시 위생과장은 전례에 비추어 자 신이 있으니 염려할 바 없다고 호언장담하여 그 대로 실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19일 동안 계속해 서 반복 주사하였다. 3월 22일까지의 조사에 따 르면, 사망자 6명, 중독자는 60명에 달했다. 소위 36) 卄 日 에 또 二 名 死 亡, 六 名 重 態, 其 他 起 居 不 自 由, 과장은 함흥으로 공의는 불출, 永 興 에서 本 社 特 派 員 金 東 進 發 電 : 永 興 풍토병사건.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2일 2면. 37) 警 務 局 發 表 內 容, 주사한 결과가 량호하다고, 永 興 풍토병 발생에 대하여.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4일; 永 興 土 疾 患 者 中 毒 事 件 ; 特 派 員 金 東 進 發 電 當 局 은 肺 炎 을 主 張, 民 間 醫 師 는 中 毒 을 證 明, 통구공의는 환자의 치료 를 나가지안코 일반환자는 민간의사의 투약을 기다려, 大 會 畢 竟 禁 止, 對 策 決 定.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4 일. 38) 永 興 事 件 의 對 策 을 協 議, 시내 각 단톄대표가 모히여 영흥 風 土 病 사건의 대책을 협의해, 委 員 과 醫 師 를 派 遣.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7일. 2면. 39) 一 名 또 死 亡, 永 興 에서 風 土 病 환자가 '에머틴' 주사맞고.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7일 2면. 40) 問 題 된 永 興 土 疾 患 者 施 療, 治 療 患 者 百 五 名.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2일. p.2; 卄 日 에 또 二 名 死 亡, 六 名 重 態.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2일 2면. 41) 중독된 자와 사망자의 씨명.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25일 2면. - 181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전문기술자요 직접주사자인 다카하시 도 위생과 장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도리어 직접 시험주 사자가 아니면 감히 취하지 못할 태도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초의 계획이야 물론 선 의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에메틴의 사용량으로 말하면 보통 1회 1그램이 의학상 원칙이지만, 전 라북도 위생과장으로 있을 때 시험해 본 전례의 확신으로 그렇게 다량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사망 및 중독의 원인으로 급변한 날씨 관계로 유행한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죽은 것이다. 의학 적 전문가 외에는 그것을 에메틴 중독이라고 말 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고 깨끗하게 변명하다가 질문자의 강경한 태도와 조리있는 질문에 태도를 돌변하여 더 변명할 여 지가 없으니까 에메틴 중독에 원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이 무면피의 다카하 시는 부하경관으로 자기의 신변을 가리우고 급 급히 밤에 영흥을 떠나 원산, 함흥 또 경성으로 떠나 자기 지인의 집에 숨어 가지고 총독부에 양해운동을 한 결과 동료의 괴수회의까지 하였 고, 또한 총독부 경무국의 소위 발표라는 것을 보면 자기의 목적한 바와 같이 그러나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충분한 양해를 얻었던 것이 확실 하다. 42) 에메틴 주사는 이미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 었지만, 사건 발생 초기 영흥지역에서 조직된 대책강구회는 에메틴 주사가 영흥지역에서만 강 행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발표에 따르면, 에메틴 주사가 도 경찰부 위생과의 책임하에 실 시되었으며, 약값을 빌미로 강제성이 부여되었 고, 에메틴 용량도 과다 투여되었음을 알 수 있 다. 또 사건초기에는 식민당국의 실무 책임자인 다카하시 위생과장도 에메틴 중독 가능성을 일 부 시인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위생당국은 공 식발표를 통해 최소 0.8cc 최고 3cc에 이르는 에 메틴의 과다투여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사망 의 직접적인 원인은 날씨로 인한 감기의 유행으 로 폐렴이 발생하여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을 강 조하였다. 43) 한성의사회가 파견한 두 명의 의사는 3월 27 일 9시 영흥에 도착하여 하루 동안 현지조사를 실시한 후, 저녁 9시 30분차로 귀경하였다. 그들 은 3월 31일 조사결과를 한성의사회에 정식 보 고하였다. 44) 한성의사회의 보고에 따르면, 에메 틴 주사를 맞은 8명을 조사한 결과, 중독증상 이 현저하다 고 결론 내리고, 대책강구회에도 조사결과를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45) 이를 계기 로 영흥청년회는 책임자를 탄핵하기로 결정했으 며, 46) 대책강구회에서도 사건 책임자들의 처벌 을 당국에 요구했다. 47) 42) 永 興 注 射 對 策 講 究 會 聲 明 書 를 發 表. 朝 鮮 日 報 1927년 3월 25일 2면. 43) 영흥 주사사건과 위생당국의 발표. 朝 鮮 日 報 1927년 3월 23일 2면. 44) 檢 診 갓든 兩 醫 師 中 毒 으로 斷 定 報 告.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2일 2면; 중독이 확실, 영흥 풍토병환자에 에메 틴 주사사건, 한성의사회 정식발표.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4일 2면. 45) 臨 床 診 査 한 결과 중독증상이 현저. 朝 鮮 日 報 1927년 4월 4일 2면. 46) 영흥토질 주사사건 탄핵.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9일 2면. 47) 책임자의 처벌을 총독부당국에 요구.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25일 2면. - 182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그림1> 폐흡충증의 치료를 위한 에메틴 주사 장면(1927년) (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3.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건의 의혹은 깊어져갔 는데, 식민당국은 에메틴 주사의 잘못을 시인하 지 않고 당국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당국은 공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과 관련된 각종 강연회를 금지시켰으며, 48) 기자들의 취재활동까지도 금지 시켰다. 49) 아울러 당국은 조선통치에 해가 된다 는 이유로 에메틴 사건에 대한 비판연설도 금지 시켰으며, 50) 심지어 추도회도 금지시켰다. 51) 1927년 3월말 이 사건에 대해 함흥지방법원의 후쿠다( 福 田 ) 검사와 원산지청의 와타나베( 渡 邊 ) 검사 일행은 공의와 사망자 가족 등에 대한 취 조를 실시하였다. 52) 1927년 3월 30일 검찰측의 주도로 사망자 7명 중 5명의 부검이 실시되었 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교수인 이나모토 ( 稻 本 龜 五 郞 : 1877-?)와 조수인 신성우( 申 聖 雨 ) 등은 검사 입회 하에 남산 공동묘지 인근에서 함원순, 김성도, 진상직 등의 사체를 부검하였 다. 이후 장흥지역에 보관 중인 이현기와 진태 순의 사체도 부검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체 부검결과는 비밀에 부쳐져 공표되지 않았다. 53) 검찰측은 매우 공정하고 신중한 태도로 사건을 48) 함흥강연회 금지, 공안을 방해할 염려가 잇다고. 東 亞 日 報 1927년 3월 31일 2면. 49) 기자의 왕래금지 전말.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2일 2면. 50) 에메틴 사건의 비판연설 금지, 조선통치에 해가 잇다는 리유.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7일 2면. 51) 추도회 또 금지. 東 亞 日 報 1927년 10월 7일 2면. 52) 공의와 환자가족을 검사 출장 취조. 朝 鮮 日 報 1927년 3월 30일 2면. 53) 死 亡 者 七 人 中 五 人 을 解 剖. 총독부의원의사가 출장해부, 解 剖 結 果 는 絶 對 秘 密. 朝 鮮 日 報 1927년 4월 3일 2면. - 183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조사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진상을 규명하기보 다 당국의 눈치를 살피며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 급했다. 1928년 3월 중독사망자 중의 한사람인 진상직 ( 陳 相 稷 )의 미망인 장정일( 張 正 一 )은 나카노( 中 野 ) 지사( 知 事 )와 다카하시( 高 橋 ) 위생과장과, 김 준호( 金 俊 鎬 ), 윤명걸( 尹 明 傑 ), 함병승( 咸 秉 昇 ), 이재영( 李 材 榮 ), 히구치( 通 口 ) 의사 등 5명의 공 의를 상대로 위자료 이만 원 청구소송을 함흥지 방법원에 제출하였다. 54) 그러나 처음부터 이 소 송은 중과부적이었다. 사건의 심각성에 비추어 법원은 공판을 연기하는 등 신중한 모습을 보였 으나 결국 사건을 무혐의 처리하였다. 또 법원 은 공판비용까지 원고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더 이상 분란의 소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발생한 에메틴 중독사건 은 1927년 4월 1일 처음 보도되었는데, 당국에 서는 해남군 화산면 사건 이라고 불렀다. 전라 남도 위생과는 4명의 공의가 3월 5일부터 20일 까지 해남군 화산면에서 환자 48명에게 에메틴 주사를 계속하였는데, 3월 21일부터 3월 26일까 지 6명이 사망하였다. 사망자는 10대 중반 1명, 30대 3명, 40대 1명, 50대 1명 등이었다. 55) 해남 역시 영흥과 마찬가지로, 10년 전 임시토지조사 국의 임상시험 대상이 20대 중반의 남성이었던 것에 비해, 에메틴 주사 대상이 전 연령대로 확 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망자 중에는 형제도 있었고, 애지중지 자란 외아들도 있는지라 이들의 사망에 격분한 피해 자 가족들이 화산면 주재소로 달려가 습격하였 다. 당국은 소요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목포, 장흥, 영암 등지 경찰서에서 지원대 100여 명을 급파하는 한편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장 이마나가( 今 永 )로 하여금 사태 수습을 명하였다. 이에 경찰당국은 목포 등 주요 도시에서 신문기 자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6) 사건 초기 당국은 에메틴 주사분량은 2그램을 사용하였다 고 언급하였는데, 57) 사건이 악화되자 구체적인 주사분량을 밝히기 어려우며 기존에 쓰던 분량 만을 사용하였다고 기존 주장을 번복하였다. 58) 아울러 공의들은 감기에 걸린 후 폐렴으로 사망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사태 수습을 위해 도 위생당국에서는 3월 25 일 광주도립의원 안과 아베( 阿 部 德 次 郞 ) 의사와 도 위생과의 오바타( 小 畠 太 郞 ) 등 두 사람을 현 장에 출동시켜 환자를 호별 방문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 가운데 또 다른 문제가 불 거졌다. 화산면에 있는 화산청년회는 사망원인 을 질문하기 위해 박종언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 을 선출하였다. 대표단은 아베 의사를 방문하여 에메틴 중독이 확실하다는 증명서를 요구하였는 데, 아베 의사는 증명서를 써 주고 곧바로 해남 읍 경찰서에 가서 협박을 당하여 증명서를 써 주었다 고 고발하였다. 해남경찰서는 100여 명 의 경찰을 파견하여 화산면 일대를 포위하고, 대표단 8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해남경찰서는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주동자들을 일시 감금하였다. 1927년 4월 2일 조선총독부 위생과는 각도에 통첩을 내려 에메틴 주사를 중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59) 아울러 조선총독부 위생과는 지난 11 년 동안 에메틴 주사를 상용하여 왔으며, 이번 54) 道 知 事 相 對 로 一 萬 圓 慰 藉 料. 도지사 이하 여섯 사람걸어 피해자 미망인이 소송제기, 永 興 에메진 事 件 의 뒤. 朝 鮮 日 報 1928년 3월 8일 5면; 일만원 위자료 청구, 피고는 함경남도 중야지사, 기타 위생과장과 공의까 지 걸어, 함흥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에메틴 주사로 상부( 喪 夫 )한 여자. 중외일보 1928년 3월 22일. 55) 에메틴 注 射 患 者 海 南 서도 중독.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일 2면. 56) 問 題 中 問 題 생긴 三 個 事 件 의 顚 末.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2일 2면. 57) 注 射 分 量 은 二 瓦. 친족은 주재소를 공격, 原 因 은 疑 訝 千 萬.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일 2면. 58) 分 量 은 言 明 不 明, 분량은 예년대로 했습니다.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2일 2면. - 184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사태로 인해 조선인들이 주사를 꺼려하는 추세 가 더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를 표명했다. 60) 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장흥지청의 무라이 ( 村 井 ) 검사는 의혹을 풀겠다는 의지로 목포 민 간의사 김계수와 장흥 민간의사 김건식 등 두 사람에게 의뢰하여 4월 7일부터 사체해부에 착 수하였다. 첫 해부에 참여한 김계수는 첫 사체 에 대해 중독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 그 러나 무라이 검사는 해부결과에 대해서 함구했 다. 다만 그는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국자의 호의의 실책 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했 다. 61) 그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자발적으로 사건에 뛰어들긴 하였으나 결국 사 건의 진실은 공표되지 않았다. 1928년 1월 무라 이 검사는 이 사건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림으 로 사건을 종결시키고 말았다. 62) 더욱이 당국이 에메틴 중독과 관련된 언론보도를 통제함에 따 라 사건의 진상은 물론 추가적인 피해사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4. 맺음말 에메틴 중독 사건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위생 당국에 맞서 각지 시민단체 및 사회단체가 진실 을 규명하는데 앞장서고, 의사사회가 직간접적 으로 개입하여 위생당국의 강제적이고 부당한 조처에 당당하게 맞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조직 화된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편 당국은 중독이 아닌 감기에 의한 폐렴이라고 주장하였 고, 검찰이나 법원 역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 기보다 사회안정을 빌미로 사건을 조기에 진화 시키는데 골몰했다.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각종 사회단체와 한성의사회 등이 조직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 사건이 중독에 의해 발생했다 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식민당국은 중독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였다. 심지어 에메틴 주사는 에메틴 중독 사건 발생 이후 잠시 중단 되었을 뿐 1930-40년대에 오히려 보편화되는 추 세였다. 63) 식민지사회에서 에메틴이 상용된 것 은 에메틴 이외에 각종 흡충류를 살충 치료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점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일본 내에서 에메틴 사용을 극 도로 제한하고, 1940년대까지도 일본정부가 지 방병 억제를 위해 주로 중간숙주의 박멸에 집중 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64) 식민지 대만에서 지방병연구는 대북제국대학 의학부에 집중되었으며, 연구진들은 치료제 개 발을 위해 1920-30년대에 각종 조사와 수많은 실험을 실시하였다. 65) 이에 비하면 식민지 조선 에서 지방병연구는 조선총독부의원이나 경성제 국대학 의학부 등 식민지 의학연구의 총본산에 집중되지 않고, 임시토지조사국이나 도 위생과 와 같은 실무조직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 이유 는 조선의 지방병이 지방적으로 편재해 있는데 다가 동물학자인 고바야시가 30여 년 동안 지방 병 연구를 주도한 탓에 생체실험과 관련된 연구 59) 전국 각도에 통첩, 엠에이딘 주사 정지. 朝 鮮 日 報 1927년 4월 2일 2면. 60) 효과가 의문. 朝 鮮 日 報 1927년 4월 2일 2면. 61) 첫 解 剖 는 中 毒, 아직 확언은 어려워, 의사 金 桂 洙 氏 談.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2일 2면; 失 責 은 失 責 이나 好 意 의 失 責, 원인이야 무엇이나간에. 東 亞 日 報 1927년 4월 12일 2면. 62)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p.34. 63) 원로의사의 인터뷰에 의하면, 1940년대 에메틴 주사는 폐흡충증 등 흡충류의 치료뿐만 아니라 이질 등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상계동 슈바이쩌, 김경희. 연세의사학 2009;12(1):95. 64) 飯 島 涉. 宮 入 貝 の 物 語 - 日 本 住 血 吸 蟲 病 と 近 代 日 本 の 植 民 地 醫 學. 田 中 耕 司 編, 岩 波 講 座 帝 国 日 本 の 学 知 第 7 卷. 岩 波 書 店 ; 2006. p.148-149. 65) 范 燕 秋. 제국정치와 의학: 일본 전시동원하의 대북제국대학 의학부. 사회와역사 2007;76. - 185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를 본격적으로 진행 지휘할 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66) 고바야시의 연구방향과 대책은 폐흡충의 일상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 간숙주를 구제하거나 매매를 금지하는 등의 사 전 예방책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폐흡충증 환자가 발생할 경우에는 예 방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식민당국은 치 료제로서 에메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다. 이미 에메틴 주사의 위험성은 1915년 이 케다의 임상시험이나 1917년 임시토지조사국의 임상시험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시험결과를 통해 대다수의 의사들은 1cc 이상의 에메틴을 사용할 경우 전신권태, 심장마비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식민당국은 1920년대 이후 폐흡 충증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더불어 에메틴 치 료를 병행하였다. 임시토지조사국이 20대 중반 의 건장한 남성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데 비 해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10대 초반에서 60대 후반까지 전 연령층으로 확대되어 갔다. 더욱이 2-3cc에 이르는 과다한 용량을 사용하기 시작하 였다. 에메틴 중독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지방병을 억제하기 위한 식민당국의 관리와 통제의 실패, 지방당국의 성급한 실험과 강제성, 그리고 식민 지 주민의 인권에 대한 경시풍조에서 비롯된 것 이다. 에메틴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에메틴주사를 강행한 것은 단순한 질병의 예방과 치료 목적이 아닌 제국의 팽창에 필요한 식민지 의학지식을 축적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 이후 위생행정의 중심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고, 지방당국의 위생행정을 도 지사와 도 경찰부 위생과가 장악하였다. 폐흡충 증의 통제와 관리 역시 기본적으로 지방당국이 주도하였는데, 도 위생과장과 공의들이 지방비 의 지원을 받아 무료진료를 확대해 나갔다. 지 방의료의 자율성이 확대됨에 따라 지방당국은 위생경찰 등을 활용하여 에메틴치료를 강제할 수 있었던 기반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에메틴 중독 사건은 식민지 조선에서 의료권력의 지방 화 추세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 다. 그러나 폐흡충증 치료의 주요 재원은 지방비 외에도 국비, 면비, 기부금 등에서 출연되었다. 지방병관리가 기본적으로 지방당국이 주도하였 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지도와 관리가 유지되 었음은 국비지원이 지속되었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에메틴 중독사건이 한 지역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 에서 같은 시기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점은 중앙과의 연계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 보완된 연구를 통해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색인어: 지방병, 폐흡충증, 에메틴 중독사건, 영 흥, 해남, 식민통치, 고바야시 하루지로, 의료권력의 지방화 투고일 2009. 9. 7. 심사일 2009. 9. 8. 게재확정일 2009. 11. 2 66) 고바야시도 폐흡충증을 연구하는 가운데, 1927년 에메틴의 효과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킨 바 있다. 小 林 晴 治 郞. 肺 ヂストマ 硏 究 補 遺 一. 朝 鮮 博 物 學 會 雜 誌 ; 1927. - 186 -

신규환ː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 참고문헌 東 亞 日 報. 朝 鮮 總 督 府 官 報. 朝 鮮 日 報. 中 外 日 報. 加 加 見 鐵 太 郞. 咸 鏡 南 道 に 於 ける 肺 ヂストマ. 朝 鮮 彙 報 1916년 2월. 朝 鮮 總 督 府. 警 務 總 監 部 衛 生 課. 醫 方 綱 要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18. 臨 時 土 地 調 査 局 衛 生 室 調 査. 肺 ヂストマ 蟲 病 に 對 する 鹽 酸 ヱメチンの 治 療 實 驗. 朝 鮮 彙 報 1918년 4월. 朝 鮮 總 督 府. 小 林 晴 治 郞. 肺 ヂストマ 硏 究 補 遺 一. 朝 鮮 博 物 學 會 雜 誌. 1927. 全 羅 南 道 警 察 部 編. 全 羅 南 道 ニ 於 ケル 肺 ヂストマ ノ 槪 況. 全 羅 南 道 警 察 部 ; 1928. 朝 鮮 總 督 府. 朝 鮮 衛 生 事 情 要 覽.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22.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昭 和 16 年 朝 鮮 防 疫 統 計. 京 城 : 朝 鮮 總 督 府 ; 1941. 朝 鮮 總 督 府 施 政 年 報. 1916. 朝 鮮 總 督 府 施 政 年 報 (1941). 1943. 朝 鮮 總 督 府 醫 院 第 4 回 年 報. 1916. 대한감염학회. 감염학. 군자출판사; 2007. 대한감염학회. 한국전염병사. 군자출판사; 2009. 박윤재. 조선총독부의 지방 의료정책과 의료소비. 역사문제연구 2009;21. 范 燕 秋. 제국정치와 의학: 일본 전시동원하의 대북제국대학 의학부. 사회와역사 2007;76.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편집위원회.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 1885-1978. 서울대출판부; 1978. 신창건. 경성제국대학에 있어서 한약연구의 성립. 사회와 역사 2007;76. 여인석 이규창. 한성의사회에 대하여. 의사학 1992;1(1). 홍순원. 조선보건사. 청년세대; 1989. Park Yunjae. The 1927 Emetine Injection Incident in Colonial Korea. International Symposium on Medicine and modernity in East Asia. Seoul: Dept. of Medical History, Yonsei University; August 16-17, 2007. 佐 藤 剛 蔵. 朝 鮮 醫 育 史. 茨 木 ; 1956. 小 林 晴 治 郞 博 士 古 稀 祝 賀 記 念 誌. 衛 生 動 物 1954;4( 特 別 號 ). 飯 島 涉. 宮 入 貝 の 物 語 - 日 本 住 血 吸 蟲 病 と 近 代 日 本 の 植 民 地 醫 學. 田 中 耕 司 編. 岩 波 講 座 帝 国 日 本 の 学 知 第 7 卷. 岩 波 書 店 ; 2006. - 187 -

醫 史 學 제18권 제2호(통권 제35호) 173-188, 2009년 12월 = ABSTRACT = Research on Endemic Diseases and Japanese Colonial Rule : Focusing on the Emetine Poisoning Accident in Yeongheung and Haenam Counties in 1927 Sihn Kyu-hwan*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spread of paragonimiasis and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response to it. To consolidate colonial rule,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needed medications to cure paragonimiasis. When Dr. Ikeda Masakata invented acid emetine to cure paragonimiasis in Manchuria in 1915, emetine treatment carried the risk of emetine poisoning such as fatigue, inappetence, heart failure, and death. Nonetheless, Japanese authorities forced clinical trials on human patients in colonial Korea during the 1910s and 1920s. The emetine poisoning accident in Yeongheung and Haenam counties in 1927 occurred in this context. The Japanese government concentrated on terminating an intermediary host instead of injecting emetine to repress endemic disease in Japan. Howeve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pushed ahead with emetine injections for healthy men through the Preliminary Bureau of Land Research in colonial Korea in 1917. This clinical trial simultaneously presented the effects and the side effects of emetine injection. Because of the danger emetine injections posed, the colonial government investigated only the actual condition of paragonimiasis, delaying the use of emetine injection. Kobayashi Harujiro(1884 1969), a leading zoologist and researcher of endemic disease for three decades in the Government General Hospital and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colonial Korea, had used emetine while researching paragonimiasis, but he did not play a leading role in clinical trials with emetine injections, perhaps because he mainly researched the intermediary host. Government General Hospital and Keijo Imperial University therefore faced limitations that kept them from leading the research on endemic disease. As the health administration shifted the central colonial government to local colonial government, the local colonial government pressed ahead with emetine injections for Korean patients. Emetine poisoning had something to do with medical power's localization. Nevertheless, the central colonial government still supported emetine injections with funds from the national treasury. The emetine poisoning accident that occurred simultaneously in two different regions result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support. This accident represented the Japanese colonial rule's atrocity, its suppression of hygiene policies, and its disdain for colonial inhabitants. The colonial government sought to accumulate medical knowledge not to cure endemic disease, but to expand the Japanese Empire. Key Words : endemic disease, paragonimiasis, emetine poisoning accident, Yeongheung, Haenam, Japanese colonial rule, Kobayashi Harujiro, medical power's localization, Japanese Empire * Dept. of Medical History, Yonsei University - 1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