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코리안의 한국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 -1960년대 초창기 국내 투자를 중심으로 한 시론- 金 仁 德 ( 靑 巖 大 學 校 ) 1. 서론 재일동포 1 의 일본 내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해서는 주목되는 기업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재일동포의 기업으로는 롯데, 다이와제관( 大 和 製 罐 ), 소프트뱅크, 헤이와( 平 和 ), 마루한, 사카모토방적( 坂 本 紡 績 ), MK택시 등을 거론하는 것을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경제계의 파친코산업, 야키니쿠산업, 고무신발산업 등에서는 재일동포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후 일본의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재일동포는 소자본을 밑천으로 자영업을 하는 수 밖에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따라서 집단거주지역에서는 고철 매매, 토목, 고무, 플라스틱 등의 분야에서 수많은 영세기업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2 그리고 최근에는 금융업, 부동산업, 레코드 대여, 노래방 사업에도 다수 진출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위 적은 자본을 투하하여 수익이 큰 업종으로 전업하거나 창업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3 특히 1950년대 재일동포 집단거주지역에 쇼긴( 商 銀 )이나 조긴( 朝 銀 ) 등의 민족계 금융기관 이 탄생한 것은 융자의 민족차별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주목된다. 일본 경제 속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재일동포는 국내 투자에 오랫동안 관심과 실제 자본을 투자해 왔다. 재일동포 기업의 투자는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의 휴전협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4 1953년 7월 재일한국인상공회는 모국산업시찰단을 파견하여 산업계를 시찰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와 협력 방안을 모색하면서 1956년까지 3차에 걸쳐 이 사업을 진행했다. 특히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일동포 기업가들의 국내 투자는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5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재일동포 기업가들도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6 1 재일코리안, '재일한국 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교포, 재일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고 있는데, 본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본고의 제목 재일코리안 대신 재일동포 를 채택한다. 아울러 본고는 필자의 다음의 발표문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김인덕, 한국 경제 발전과 재일동포 기업-1960 년대 초창기 국내 투자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국가 발전과 재일코리안의 역할, 동북아역사재단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2015.) 2 <박일( 朴 一 )> 재일코리안의 직업, 정희선 외역, 재일코리안사전, 선인출판사, 2012. 3 <가와 메이세이[ 河 明 生 ]> 재일 기업가( 起 業 家 ), 정희선 외역, 재일코리안사전, 선인출판사, 2012, 4 <양경희( 梁 京 姬 )> 재일코리안 기업의 한국 투자, 정희선 외역, 재일코리안사전, 선인출판사, 2012, 5 김인덕,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과 구로공단-해방 이후 재일동포의 국내 경제 활동과 관련하여-, 숭실사학 (32). 2014. 6. 6 1978 년 한국 정부는 한일 국교 수립 후 재일동포에 의한 본국 투자의 총액이 10 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 시점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외국인 투자 총액은 9 억 3,700 만 달러로 재일동포의 본국 투자가 외국인 투자 총액을 능가하고 있었다.(<고용수( 高 龍 秀 )> 재일코리안 기업의 북한 투자, 정희선 외역, 재일코리안사전, 선인출판사, 2012,)
1960년대 한국에 투자한 재일동포 기업은 민족적, 경제적 이류로 절대 적지 않은 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기업으로 방림방적, 코오롱, 한일합섬, 롯데, 대성전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세에 의해 창립되어 현재는 없어진 경우, 다른 경영진이 운영한 경우 등 그 존재 형태가 다양하다. 재일동포의 국내 진출은 모국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선진 경영기법을 모국기업에 전수함으로써 모국경제의 근대화에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본고는 재일동포의 국내에서의 역할에 대한 문제 제기가 주목적이다. 재일동포 기업의 국내 투자의 초기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 투자의 양상과 그 가운데 대표적인 기업의 사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투자유치를 위한 한국 내 투자제도를 고찰하겠다. 그리고 개별 기업의 사례를 검토하고 그 특징을 비교해 보겠다. 이에 기초하여 투자자로서의 재일동포 기업가의 1960년대 모습을 확인해 보겠다. 2. 선행 연구사와 문제 제기 재일동포의 기업 활동과 관련한 선행 연구는 다른 재일동포 관련 연구 7 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재일동포 기업 활동에 대한 연구는 현재 일천하다고 할 수 있다. 8 본격적인 연구자에 의한 연구는 일본 내의 연구에 치중되어 있다. 오규상, 박삼석, 한재향, 이수임, 임영언 등을 들 수 있다. 9 오규상은 총련계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활약에 대해 상세히 연구한 저서를 출판하고 있는데 재일동포 기업가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박삼석의 연구에서는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해외동포 힘의 근원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해외동포는 문화, 행동양식, 가치관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뛰어난 적응력, 불굴의 의지, 그리고 독자적인 민족의식과 저력 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해외동포는 문화적으로 민족전통을 고수하려는 의식이 강하고, 특히 교육에서 놀라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수임 등은 공동 연구를 통해 최근 재일동포 기업 활동에 주목했는데, 이주노동자, 기업가의 높은 창업율, 높은 업종 빈도율, 다양한 업종 등을 특징으로 들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 사회의 차별이 재일동포 기업가의 성공에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임영언은 뉴커머에 포인트를 맞추어 인터뷰를 통한 기업 활동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 한재향은 역사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기업 활동의 내용을 역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런 재일동포의 국내 기업 활동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재외동포재단이 출범하고 2003년 제1차 세계한상대회가 열린 이후 재일동포 기업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재일동포 기업가, 재일제주인의 기업가 등 모국과의 연계나 네트워크 활용 등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주요 내용을 보자. 10 河 明 生 은 일본에서의 마이너리티 기업가 활동을 재일1세의 사례분석을 통해 시도하고 있다. 그는 1세의 국내 투자가 가능했던 이유로 한국에 대한 친밀성과 한국 정부의 투자 고양정책이 작용했다고 한다. 실제 재일동포 기업이 투자한 결정적인 요인은 기업가적 마인드 보다 민족적인 관점 등에 치정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1 7 임영언, 김인덕, 재일코리안 연구, 재외한인 연구의 동향과 과제, 북코리아, 2011, 참조. 8 김인덕,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과 구로공단-해방이후 재일동포의 국내 경제 활동과 관련하 여-, 숭실사학 (32). 2014. 6, 139-140 쪽. 9 吳 圭 祥, 在 日 朝 鮮 人 企 業 活 動 形 成 史, 雄 山 閣, 1992, 河 明 生, 韓 人 日 本 移 民 社 會 經 濟 史 - 戰 前 編 -, 明 石 書 店, 1997. 韓 載 香, 在 日 企 業 の 産 業 經 濟 史,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2010, 李 洙 任, 在 日 コリア ンの 經 濟 活 動, 不 二 出 判, 2012, 임영언, 재일코리안 기업가, 한국학술정보, 2006. 10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 모국을 향한 재일동포의 100 년 족적, 재외동포재단, 2008. 11 河 明 生, 韓 人 日 本 移 民 社 會 經 濟 史, 明 石 書 店, 1997, 河 明 生, マイノリテイの 企 業 家 精 神 : 在 日 韓 人 事 例 硏 究, ITA, 2003.
梁 京 姬 는 재일동포 기업이 한국에 투자한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와 금융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12 나가노 신이치로( 永 野 慎 一 郞 )의 연구는 재일동포 기업가 연구의 사례로 주목된다. 13 아울러 이민호는 민단과 함께 국내 투자에 대한 책을 내고 있다. 14 여기에서 이민호는 재일동포의 국내 기여 내용을 정리하면서 경제분야의 역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임영언은 최근 재일동포 기업의 일본 내의 활동을 조사하면서 남북한에 대한 이들의 투자에 대해 언급하고, 남북한 당국의 정책에 따라 그 투자의 액수와 규모가 정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투자가 한국과 북한에 큰 기여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과 북한에 대한 투자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상호 신뢰의 회복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15 일련의 이상과 같은 선행 연구는 재일동포 기업의 일본에서의 활동과 한국과 북한에서의 투자 문제 등이 주된 관심거리이다. 또한 사료에 입각한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이고, 각종 신문과 잡지, 인터뷰 자료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6 3. 1960년대 초 투자제도와 재일동포 기업 1) 1960년대 초 투자제도 재일동포의 재산 유입 명목으로 도입한 외화가 한국의 외자 유치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1960년에 일인당 GNP가 81달러였던 당시 한국 경제를 생각하면 재일동포가 공식적으로 재산 유입의 명목으로 들여오거나 조국 방문 시에 비공식적으로 가지고 들어온 현금은 한국의 경제 개발 초기에 매우 귀중한 자금이었다. 17 실제로 1975년 이전 재일동포 기업은 국내 산업에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를 해 나갔다. 제도적 차원에서 재외동포의 국내로 재산 투자는 1958년 12월 관세법 제125조 2항의 자기소유재산의 반출 반입 또는 재산의 기증 수증에 관하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라는 내용이 신설됨으로 제도화의 길을 갔다. 18 그러나 이 규정에 따른 재외 동포 재산의 국내 투자, 반입은 없었던 것 같다. 1961년 5월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재일동포 기업가 50여명을 초청하여 한국 투자와 지원을 요청했던 일이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 경제지원 요청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부 재일동포 1세들이 군사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지지했고, 지지세력 기반이 동향인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19 1963년 7월 22일 관세법 제125조의 시행에 관한 법령이 개정되어 비귀국자의 재산반입에 생산시설과 그에 부수되는 원자재와 부속품에 한하여 허가하던 제한을 철폐하고, 영주귀국자의 재산반입과 동일하게 함으로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재외동포 재산반입을 12 梁 京 姬, 在 日 韓 國 人 企 業 家 が 韓 國 の 金 融 業 界 に 及 ぼした 影 響 - 新 韓 銀 行 を 中 心 に, 現 代 韓 國 朝 鮮 硏 究 9, 現 代 韓 國 朝 鮮 學 會, 2009. 13 永 野 慎 一 郞 編, 韓 人 の 經 濟 發 展 と 在 日 韓 國 企 業 人 の 役 割, 岩 波 書 店, 2010.(나가노 신이치로 편저,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 말글빛냄, 2010.) 14 이민호, 민단은 대한민국과 하나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2014, 이민호, 자이니치 리더, 통일일보사, 2015. 15 임영언 외, 재일코리안 기업의 경영활동, 북코리아, 2006, 80 쪽. 16 최근의 경향은 다음을 참조.( 일본의 한인 기업 및 기업가와 한인 마켓(오사카시립대학 재일 에스닉 마켓 연구팀과 제주대학교 재일제주인센터 공동 심포지엄) (발표집), 2013.) 17 나가노 신이치로 편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 말글 빛냄, 2010, 55 쪽. 18 교포정책자료 3(해외교포재산반입문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66, 3 쪽. 19 임영언, 재일코리안 기업과 한국 진출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발표문), 2014. 8. 20, 8 쪽.
권장함과 동시에 외환 부족으로 인한 물자 수급상의 부족을 보완하고, 국내물가의 앙등을 억제토록 했다. 문제는 이 재산반입이 소위 정치적 이권의 대상이 되고 정치자금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세간의 발언으로 민정 이양을 전후로 하여 정계에 귀국자의 재산반입 중 소액의 재산반입은 물자수급상의 부족을 보완하여지나 국내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는데 있어 별로 큰 의의가 없었다. 반면에 외환의 부정거래와 기타 부정행위를 조장할 우려가 많으므로 비귀국자의 재산반입에 있어 과세가격 5천만 원 이상에 한하여 허가는 것으로 했다. 이후 1964년 초 국회에서 이 재산반입이 여야 사이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 당시는 이권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중단되었다. 21 당시 한국에서는 재일동포의 물건으로 위조하여 물건이 수입되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2 신문에 이미 보도되어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부산에 청어가 2,000상자가 입하되어 이것이 교포재산 반입이냐 또는 수입허가된 것이냐로 여론이 비등하나 자세히 조사하여보니 교포재산 반입이나 혹은 정식수입 물자로 허가된 사실이 없음. 그럼에도 박정희정부는 외자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964년 의명지시 문서 23 박정희대통령의 외자도입과 관련한 내용은 주목된다. 속의 시행연월일: 1964년 5월 14일 경유 수신 참조 : 국무총리 제목 : 외자도입촉진(차관과 건설) 발신 : 依 命 1. 정부와 국민의 건설 의욕은 당면한 외자 부족 사정으로 침체 상태에 있으며, 이 상태의 계속은 끝내 건설 의욕을 상실케 하고말 우려조차 없지 않습니다. 2. 이러한 사정을 극복하고, 줄기찬 건설의욕의 실현화를 위하여 본인은 지난 1월 6일 AID차관도입의 촉진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한 바 있거니와, 그 후 정부 노력은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정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ADI를 비롯한 모든 외국 차관을 도입하는데 노력을 집중하여, 건설을 서둘러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특히 다음 사항들에 대한 고려, 시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차관 도입의 방식에 대한 고민과 적극적인 정부의 입장 개진을 피력하고 절차의 간소화를 지시하고 있다. <표 1>을 보면, 재일동포의 재산반입 실태 를 나타내고 있다. 1963년 1월부터 1964년 20 재일동포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4 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회전 당구기사건(빠칭고사건)) 가운데 회전당구기사건이 있다.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도박기계인 회전당구기 100 대를 1961 년 12 월 김태준( 金 泰 俊 ) 등이 재산 반입처럼 하여 국내에 수입, 서울 시내 33 곳에 당구장 개설을 승인하려 한 사건이다. 결국 1962 년 10 월 임시국무회의는 관련 시설에 대한 전면폐쇄 조치를 내렸다. 21 교포정책자료 3(해외교포재산반입문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4 쪽. 22 국무회의록(1963 년 제 1 회-9 회, 1964 년 제 1 회-18 회), 국가기록원 (http://conten ts.archives.go.kr), 참조. 23 정부기록보존서홈페이지. 박정희통치원리연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ko s008&logno=150045761036)
8월까지 주로 나이론, 기계부속품, 화공약품이 많고, 특히 섬유류의 투자가 많았다. 개인적인 재산 반입자의 경우 경공업 분야인 섬유류가 당시의 주요투자 산업이었다. 또한 섬유산업에 필요한 화공약품이나 기계류가 투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24 그러나 다양성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표 1> 재일동포 재산반입 실태 25 (단위: 달러)품목 통관(허가) 품목 통관(허가) 품목 통관(허가) 나일론실 5,476(7,806) 기계부속품 1,092(4,186) 화공약품 1,247(3,502) 털실 652(1,151) 철강 261(1,388) 의약품 381(831) 비단실 535(1,271) 비철금속 205(91) 염료 242(280) 무명솜 259(0) 합성수지 264(313) 파라핀왁스 150(607) 무명실 39(0) 자동차량 100(4) 우지 92(0) 기타 섬유 1,219(4,122) 시멘트 32(116) 한약재 54(62) 고무류 8(341) 기타 원자재 114(3) 우유제품 8(10) 기타 종이류 166(119) 기타 608(1,732) 동물성 유지 2(0) 합계 통관합계13,208(허가합계 27,935)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재일동포 기업의 모국 투자가 적극 추진된다. 그 법률적 계기는 한국과 일본과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협정 등이었다. 26 특히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협정 은 재일동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7 1966년 8월 박정희정부는 외자도입법을 선포했다. 28 이 법은 재일동포 1세에게 한국 투자를 외국인 투자로 우대하는 것을 보장하는 외자도입시행규칙 29 으로 제정되었다. 1966년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는 해외동포 재산 도입과 관련하여 자필의 지시문이 내려졌던 사실이 확인된다. 30 여기에서 박정희대통령은 구체적인 방법을 적기하고 있다. 1. 교포 재산 반입을 적극 촉구한다. 2. 기왕에 있었던 재산반입의 폐단과 부작용을 배제하는 조치를 취한다. 3. 필요한 법, 보안규정, 내법 등을 개정 강구한다. 4. 재외 한국은행에 저금, 입금된 외화의 국내 송금 방안. 5. 반입재산이란 외화물품을 통칭한다. 이미 1961년 박정희 장군은 해외 순방을 계획하고, 9월초 외무부의 소상영 정보과장이 24 교포정책자료 3(해외교포재산반입문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66, 10-11 쪽. 25 교포정책자료 3(해외교포재산반입문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1966, 9 쪽. 26 임영언 외, 재일코리안 기업의 경영활동, 북코리아, 2006, 74 쪽. 27 본 내용은 이성의 다음의 연구에 기초한다.(이성, 한일회담에서의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교섭(1951-1965 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청구논문, 2012.) 28 외자도입촉진법,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에 관한 법률, 장기결재방식에 의한 자본재도입에 관한 특별조치법 을 일원화한 법률이다. 29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참조. 30 국가기록원홈페이지. 박정희통치원리연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kos00 8&logNo=150045761036)
일본에 갔다. 31 그는 재일동포 기업인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갔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재일동포 자본 도입을 희망한다고 피력했다. 32 당시 박정희정부는 재일동포 기업가의 기술력과 미국의 베트남 파병 대가로 받은 달러와 한국의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미국시장에 진출했고, 특히 섬유제품을 가공 수출하는 수출 주도형 분업체제를 확대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33 2) 재일동포 국내 투자 기업 재일동포 기업의 초기 국내 투자 기업의 대표적인 경우로 방림방적( 邦 林 紡 績 ), 한일합섬그룹, 코오롱그룹, 롯데그룹, 기아자동차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기업은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 주도하는데 창업자들은 서갑호, 김한수, 이원만, 신격호, 김철호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서갑호는 일본에서는 사카모토방적( 阪 本 紡 績 )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고, 한국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주일한국대사관 부지와 건물을 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한수는 오사카에서 양복점 경영했는데, 1948년 부산국제시장 직물도매, 1956년 경남모직 설립했다. 이원만은 1965년 한국최초 수출산업공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관여했고, 1972년 구로공단의 가발공장을 제안하여, 이후 가발산업은 1970년대 초 수출 주력상품이 되었다. 신격호는 츄잉껌으로 시작하여 1970년대 제과, 소매, 호텔, 오락을 비롯한 석유화학, 건설 사업에도 진출하여 다각적 경영을 하여 일본과 한국에서 재벌로 성장했다. 김철호는 일본이 패전하기 전에 국내에 진출하여 기업을 시작하여 다른 국내 재일동포 투자 회사와 달리 기계, 자동차 산업에서 큰 역할을 했다. 34 이상과 같은 재일동포 기업가는 국내 투자를 통해 자신의 민족적 문제 해결과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기여를 도모했다. 아울러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35 제주도와 마산 등지의 경우는 유명하다. 제주도의 경우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사람이 김평진이다. 그는 1963년 제주도에 외국인이 투숙할 호텔이 없다고 판단하여 약 3천만 원을 투자하여 제주관광호텔을 지었다. 36 그리고 마산의 경우는 전술한 한일합섬그룹을 들 수 있다. 37 4. 1960년대 재일동포 기업의 국내 투자와 특징 31 이민호, 민단은 대한민국과 하나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2014, 59 쪽. 32 동아일보 1961. 9. 6. 33 이 과정에서 여러 개인적인 인맥이 동원되었던 것도 사실이다.(이구홍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인터뷰(2015. 3. 27, 해외교포문제연구소)) 34 韓 国 ロッテ 会 長 に 創 業 者 次 男 日 本 と 別 路 線 強 まる(ニュースの 理 由 ) 日 本 経 済 新 聞 (2011 年 3 月 3 日 ) 夕 刊 2 面 関 西 興 銀 日 韓 金 融 複 合 体 の 野 望 普 銀 転 換 へ 布 石 営 業 圏 拡 大 ( 月 曜 ワ イド) 日 経 金 融 新 聞 (1993 年 7 月 5 日 ) 1 面 < 本 国 投 資 協 30 周 年 > 漢 江 の 奇 跡 をサ ポート 民 団 新 聞 (2005 年 4 月 6 日 ) http://www.mindan.org/shinbun/news_view.php?catego ry=1&page=69 < 寄 稿 > 韓 国 の 経 済 発 展 に 寄 与 した 在 日 韓 国 人 在 日 本 大 韓 民 国 民 団 HP(2010 年 1 月 1 日 ) http://www.mindan.org/front/newsdetail.php?category=1&newsid=12222 의해 임영언 작성 35 임영언, 재일코리안 기업과 한국진출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발표문), 2014. 8. 20, 9 쪽. 36 이하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김인덕,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과 구로공단-해방이후 재일동포의 국내 경제 활동과 관련하여-, 숭실사학 (32). 2014. 6.) 37 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1) 주요 국내 투자 기업 (1) 방림방적 서갑호는 1915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에서 태어났다. 일본명은 사카모토 에이치( 阪 本 榮 一 )이다. 39 1928년 도일, 오사카( 大 阪 )의 상가에 들어가 직물 기술을 배웠다. 그 후 사탕 판매, 폐품 회수, 타월 공장에서 기름치는 일을 하는 등 수많은 직업을 경험했다. 전후( 戰 後 ) 군수물자의 매매로 모은 자금으로 40 방적기를 사 모아 1948년에 사카모토방적을 설립했다. 1950년에는 가와사키중공업( 川 崎 重 工 業 )의 공장을 매입하고, 오사카방적을 설립했다. 한국전쟁의 특수 경기를 타고, 두 방적회사는 급성장했다. 더욱이 1955년에는 경영 부진에 빠져 있었던 히타치방적( 常 陸 紡 績 )을 매입했는데, 1,500명의 종업원과 18만 추( 錘 )의 설비를 보유한 사카모토그룹은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을 떠받친 10대 방적으로 손꼽혔다. 사주인 사카모토 에이치는 당시 일본의 고액 소득자 랭킹 의 상위에 오른 자산가로도 유명해졌다. 오사카 소득세 납부 1위, 일본 전체 백만장자 랭킹 톱 3위에 들었다. 41 또한 그는 도쿄( 東 京 ) 아자부( 麻 布 )의 광대한 토지를 몇 억 엔으로 매입하여 전술했듯이 주일대사관 용지로 한국 정부에 기부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한국 진출을 결심, 태창방적을 매수하고 115억 엔을 투자하여 서울에 방림방적을 설립했다. 또한 1964년에는 17l억 엔을 투자하여 구미공업단지 내에 윤성방적( 潤 成 紡 績 )을 설립했다. 42 서갑호의 경우 다른 어떤 재일동포 보다 국내 투자의 선두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확인하게 한다. 38 공식 투자금보다 휠씬 큰 규모의 비공식루트로 들여온 포켓머니 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방림방적 서갑호 사장의 모국 투자 신고액은 257만 2천 달러였는데 그보다 투자금을 높게 신고한 재일동포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당시 재일동포 가운데 모국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사람으로 서 사장을 꼽는데 대해,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43 (2) 롯데 신격호( 辛 格 浩 )는 1922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44 일본명은 시게미쓰 다케오( 重 光 武 雄 )이다. 1940년 도일하여 와세다( 早 稻 田 )고등공학교(현 38 나가노 신이치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 말글 빛냄, 2010, 64 쪽, 39 정희선 외 3 인 역, 재일코리안 사전 선인출판사, 2012, 8, 201 쪽. 40 水 野 直 樹, 文 京 洙, 在 日 朝 鮮 人 - 歷 史 と 現 在 -, 岩 波 書 店, 2015,91 쪽. 41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 편, 모국을 향한 재일 동포의 100 년 족적, 재일동포재단, 2008, 82 쪽. 42 1974 년 조업 직전 윤성방적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방적기가 소실. 자금 융통에 실패, 서갑호는 조업 재개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 화재로 말미암아 일본에서의 실적에도 영향을 미쳐, 같은 해 사카모토그룹은 관련 회사를 포함해 640 억 엔의 부채를 내고 도산했다. 1975 년에 회사정리법이 적용된 것을 기회로 한국으로 귀국. 2 개의 방적회사 경영에 전념했지만, 1976 년 11 월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타계했다(<박일( 朴 一 )> 서갑호, 사카모토방적, 정희선 외 3 인 역, 재일코리안 사전 선인출판사, 2012, 8.) 43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 편, 모국을 향한 재일 동포의 100 년 족적, 재일동포재단, 2008, 88-89 쪽. 44 정희선 외 3 인 역, 재일코리안 사전 선인출판사, 2012, 8, 226 쪽.
이공학부)에서 수학했다. 20대에 그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을 읽고 감명받고, 주인공 샤를로테의 이름에서 이후에 LOTTE라는 상호로 회사명을 쓰게 된다. 45 1946년 대학 졸업 후 도쿄에서 비누와 포마드 등을 제조하는 히카리( 光 ) 특수화학연구소 를 설립했다. 46 암시장에서 화장품을 팔아 모은 자금을 밑천으로 47 26세 때 자본금 100만 엔으로 껌 등을 제조하는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롯데는 천연 치클 을 캐치프레이즈로 매출을 늘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 껌 시장의 70%를 점유했다. 그 후 부동산, 전자, 프로야구 등의 분야에도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신격호는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와 친밀한 관계였다. 48 신격호는 기시 노부스케와 한일 관계의 막후 조정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일회담의 과정에서는 신격호가 협조와 자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축하의 뜻으로 그는 청와대에 냉난방 시설을 선물했다. 49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여러 일에 종사했고, 1967년에는 국내에 본격 진출했다. 이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 회장에는 전 국무총리의 유창순( 劉 彰 順 )를 영입했다. 이후 기업 경영의 다변화를 추진하여 여러 분야로 계열기업을 확대했다. 50 (3) 코오롱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원만은 경북 영일 부농집에서 태어났다. 1932년 그의 일본행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세계를 품에 안고자 해서 단행되었다. 51 일본에 건너 간 이원만은 신문팔이, 알루미늄공장 일을 하다가 1935년 2월 아사히공예라고 하는 광고용 모자가게를 차렸다. 52 이때 이원만은 아들 이동찬을 일본으로 불러 동생 이원천과 함께 일했다. 전쟁 중에는 피복공장으로 발전했다. 해방이 되자 이들 3명은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이원만은 귀국하여 경북기업을 창설, 뉴똥이라는 직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제헌국회에 출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 동생 이원천과 합류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던 이원만 형제는 6.25특수경기에 힘입어 큰돈을 벌었다. 이씨 일가는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서 나일론사를 사다가 한국에서 팔기로 하고, 일본에서는 삼경물산을 한국에는 개명상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을 시작했다. 1954년 12월 17일 이원만과 이동찬은 대구의 경북기업을 정리하고 상경해서, 개명상사를 설립했고, 53 이 45 서진모, 청년 신격호, 이지출판, 2010, 89 쪽. 46 서진모, 청년 신격호, 이지출판, 2010, 41 쪽. 47 水 野 直 樹, 文 京 洙, 在 日 朝 鮮 人 - 歷 史 と 現 在 -, 岩 波 書 店, 2015,91 쪽. 48 서진모, 청년 신격호, 이지출판, 2010, 151 쪽. 49 서진모, 청년 신격호, 이지출판, 2010, 156 쪽. 막후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의 회고가 증명한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한일회담의 양쪽 대표들을 알게 된 뒤로 쌍방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합석시키는 일도 주선했습니다. 그런 모임의 기회가 잦아지자 양국에서 어렵고 미묘한 일에 부닥치면 나를 통해 의견을 접근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일들을 할 때마다 나는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그 동안 벌여놓은 사업 때문에 잊고 지냈던 조국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보답을 했다고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서진모, 청년 신격호, 이지출판, 2010, 157.쪽.) 50 <나가노 신이치로 박일( 朴 一 )> 신격호, 정희선 외 3 인 역, 재일코리안 사전 선인출판사, 2012, 8. 51 나가노 신이치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 말글 빛냄, 2010, 40 쪽. 52 박시온, 이원만처럼-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FKI 미디어, 2013, 52 쪽. 53 박시온, 이원만처럼-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FKI 미디어, 2013, 118 쪽.
회사가 이후 1957년 4월 한국나이롱주식회사, 코오롱상사, 코오롱 그룹의 시발점이었다. 1963년 한국 기업 최초로 나일론을 수출한 한국나이롱이 벌어들인 돈은 3만 9천 달러로 한국 총수출의 6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원만은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의장에게 수출을 위해 공업단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구로동 수출산업공단으로 그것이 결실을 맺어 나타났다. 54 이후 그는 일본에서 국내 투자를 적극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 55 고향이 따뜻하게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조국은 여러분이 돌아와 공장을 세워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일본 사람인 척하지 맙시다. 얼마나 고국이 그리웠습니까? 지금 성공했을 때 돌아갑시다. 내 나라에서 떳떳하게 일을 합시다.! 56 1963년 10월 12일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발족되었다. 이후 1965년 첫 삽을 뜨고 1967년 4월에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국나이롱주식회사는 첫 입주사가 되었다. (4) 한일합섬 한일합섬의 창업자 김한수는 1935년 일본에 건너가 고노하나상업학교( 此 花 商 業 學 校 ) 야간부에서 공부했다. 57 이후 그는 오사카에서 양복점 경영했다. 1944년 귀국하고 이후 부산에서 직물도매상을 했다. 그리고 1953년 대경산업을 설립했고, 1956년 경남모직을 설립했다. 한일합섬을 1964년 설립했다. 1960년대 당시 신비의 섬유 라 불리는 아크릴 섬유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 해외 수출의 길을 열었다. 1973년 단일 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58 한일합섬 창립 당시인 1964년 6월, 1500만원으로 한일합섬 섬유공업(주)를 창립했는데,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기공식에 참석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 20년사 에 의하면,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했다. 1967년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수는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사원수가 이 정도였으니 지역 사회와 지역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했다. 59 한일합섬은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한일여고 (한일전산여 54 박시온, 이원만처럼-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FKI 미디어, 2013, 174 쪽. 55 이원만에 대한 개인평으로는 조직적인 역량이 뛰어 나고, 언변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기도 한다.(이구홍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인터뷰(2015. 3. 27, 해외교포문제연구소)) 56 박시온, 이원만처럼-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FKI 미디어, 2013, 176 쪽. 57 나가노 신이치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 말글 빛냄, 2010, 50 쪽.(이하 한일합섬에 대한 내용은 별도의 주가 없으면 나가노 신이치로의 책을 참조한다.) 58 1979 년에는 4 억불 수출탑을 수상, 아크릴 섬유의 방적, 염색에서 시작해 이후 스판 본드 및 특수사의 개발 생산 등 섬유산업을 선도했다. 또한 의류 수출과 패션분야의 진출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의류 및 합섬 전문기업으로 성장했다. 59 1967 년 68 만 불이던 수출액이 71 년에 2,286 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 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출 1 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 6 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당시 최고 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 대 도시 마산 도 이 한일합섬이 일조하여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를 설립했다. 기업으로서는 내실 있는 훌륭한 투자였다고 할 수 있다. 60 (5) 기아자동차 창업자 김철호는 1905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61 그는 1922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1930년 삼화제작소를 설립하여 자동차, 자전거 부품 생산으로 수익을 얻었고, 동시에 일본 기계 산업의 기술을 습득했다. 이후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자 한국으로 귀국했다. 1944년 12월 김철호는 영등포에 경성정공(주)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것이 기아산업과 삼천리자전거의 모체이다. 1952년 기아산업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삼천리자전거를 개업하여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삼륜 트럭을 생산했으며, 1970년 11월 10일에 경기도 시흥에 20만 평 규모의 소하리(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공장을 착공하여 1973년 6월에 완공했다. 62 2) 투자의 특징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재일동포의 모국투자 총액은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아울러 재일동포 기업은 구로공단을 비롯한 각종 공단에 설비를 비롯해 자금을 투자했는데, 주요 사업 분야는 섬유, 기계, 전자, 전기, 금속 제조업분야 등을 비롯하여 호텔,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성공한 대기업과는 달리 소규모 영세자영업이 대부분인 재일동포 기업은 경제 불황과 일본 대기업의 진출 여파로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재일동포 1세들은 피땀 흘려 성공을 이루었다. 재일동포 2세들도 틈새산업에서 일하던 시대에는 누구나 열심히 만하면 어느 업종이든 성공이 보장되었다. 63 실제로 재일동포의 한국투자도 초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재일동포 기업의 국내 진출은 차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한일합섬의 경우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주목되고 기술력에 기초하여 국내에 자본을 갖고 진출하여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선도했다. 박정희 정부 이후에 국내에 진출했던 것이다. 64 기아의 경우는 박정희 정부 이전에 국내에 진출한 기업으로 기술력과 자본에 기초하여 국내에 진출했다. 롯데의 경우는 1967년 롯데제과를 통해 국내에 진출했는데, 일본정계와 깊은 유대 속에서 국내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오롱은 나일론 생산의 기술과 참의원을 지낸 이원만의 능력, 초기 구로공단의 설립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역사가 있다. 기술력과 정계인맥 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60 1974 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 학급 1,680 명 규모였으나, 1980 년에는 120 학급 7,200 명까지 늘었다. 학급 수가 120, 한 학년 40 반 정도의 큰 규모였으니,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큰 규모였다. 이 학교 학생들은 한일합섬에 취업해서 돈을 벌어 대부분을 고향의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자신들의 공부도 하려했던 갸륵한 마음씨를 가진 나이 어린 여공들이었다. 61 나가노 신이치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 말글 빛냄, 2010, 45 쪽. 62 이곳은 한국의 첫 종합 자동차 공장으로, 연간 25,000 대의 생산 능력을 갖추었다. 1990 년에 기아산업에서 기아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0 년대 말 자금난으로 기아그룹은 1997 년 7 월 15 일에 부도 유예 협약이 적용된 이후, 1997 년 10 월 22 일에 법정관리를 받았다. 2001 년 4 월 1 일 대규모 30 대 기업 집단인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편입되었다.(위키피디아, 참조.) 63 그러나 1970 년대 이후 출생한 재일동포 3, 4 세의 경우 일본에서 새로운 창업을 시도하기조차 힘든 형편이다. 더구나 일본기업에 취업하거나 재일동포 1 세의 기업을 승계하는 경우 그나마 다행인데, 이것도 특정 업종을 제외하고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존 3 대 민족산업의 쇠퇴에 따라 폐쇄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소수에 불과하여 이 때문에 재일동포의 앞날은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한때 일본에서 번성했던 IT 산업도 이미 포화상태에 접어든지 오래였다.(임영언, 광주세계한상대회와 재일동포기업, 무등일보 2012. 9. 11.) 64 한일합성섬유공업주식회사, 한일합섬 20 년사, 1986, 참조.
수 있다. 특히 방림방적은 1964년 방적회사를 인수하여 출범한 경우로 서갑호는 국내 많은 자본을 투자했으나, 결국 기업의 경영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기술력, 자본력, 기타 요소를 통해 회사의 존립과 발전이 결정되었는데, 기업의 운영 방식은 대부분 일본식이었다. 직접 재일동포가 운영하거나, 대리로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우가 초기에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5. 결론 국회에서의 비판과 반대에도 재일동포 재산은 국내 투자의 길을 갔다. 이것은 결국 한국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정치와 별도의 문제이다. 재일동포의 국내 진출 기업은 존재 유무와 관련해서는 첫째, 지금도 존재하는 경우, 둘째, 이름이 바뀐 경우, 셋째, 없어진 경우로 대분할 수 있다. 기업의 특성에 따라 구분해 보면, 첫째, 민족적 관점에서 투자한 경우, 둘째, 국내 정치와 깊은 관련을 갖고 운영된 경우, 셋째, 순수 이윤 창출을 위해 투자한 경우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재일한인 기업가의 국내 투자는 1960년대의 경우 서갑호와 신격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의 국내 투자는 성공과 실패라는 측면에서 대비된다고 생각한다. 65 일반적으로 기술력, 자본력, 기타 요소를 통해 회사의 존립과 발전이 결정된다. 재일동포 기업의 운영 방식은 대부분 일본식이었다. 직접 재일동포가 운영하거나, 대리로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우가 초기에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공한 대기업과는 달리 오늘날 소규모 영세자영업이 대부분인 재일동포 기업은 경제 불황과 일본 대기업의 진출 여파로 경쟁에서 밀려났었다. 그럼에도 1960년대 이후 재일동포 1세들은 피땀 흘려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 2세들도 틈새산업에서 일하던 시대에는 누구나 열심히 만하면 어느 업종이든 성공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인 것이다. 다수의 재일동포 기업은 한국 내 투자를 통해 영주 귀국을 하거나 본국에서의 또 다른 생활기반을 갖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 내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지역 경제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준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이들의 다수는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국내 투자에 재고하고, 국내와 관련된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는 국내와 일본의 상황 차이와 인맥으로 하는 투자의 문제 등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요약문> 재일동포의 일본 내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해서는 주목되는 기업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재일동포의 기업으로는 롯데, 다이와제관( 大 和 製 罐 ), 소프트뱅크, 헤이와( 平 和 ), 마루한, 사카모토방적( 坂 本 紡 績 ), MK택시 등을 거론하는 것을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경제계의 파친코산업, 야키니쿠산업, 고무신발산업 등에서는 재일동포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후 일본의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재일동포는 소자본을 밑천으로 자영업을 하는 수밖에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따라서 집단 거주지역에서는 고철 매매, 토목, 고무, 플라스틱 등의 분야에서 수많은 영세기업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금융업, 부동산업, 레코드 대여, 노래방 사업에도 다수 진출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위 적은 자본을 투하하여 수익이 큰 업종으로 전업하거나 창업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50년대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역에 쇼긴( 商 銀 )이나 조긴( 朝 銀 ) 등의 민족계 65 고광명, 재일 제주인의 삶과 기업가 활동, 보고사, 2013, 224 쪽.
금융기관 이 탄생한 것은 융자의 민족차별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주목된다. 실제로 재일동포 경제인의 주요 투자는 업종으로는 서비스업, 제조업, 도매 소매업, 건축업, 오락 유기장( 遊 技 場 ) 등의 분야가 절대적이다. 일본 경제 속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재일동포는 국내 투자에 오랫동안 관심과 실제 자본을 투자해 왔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재일동포 기업의 모국 투자가 적극 추진되었다. 그 법률적 계기는 한국과 일본과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협정 등이었다. 특히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협정 은 재일동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박정희정부는 1966년 8월 외자도입법을 선포했고, 이 법은 재일동포 1세에게 한국 투자 외국인 투자로 우대하는 것을 보장하는 외자도입시행규칙 으로 제정되었다. 1960년대 한국내에서의 비판과 반대에도 재일동포는 한국 내 투자의 길을 갔다. 이것은 한국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얘기할 수 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재일동포의 모국투자 총액은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아울러 재일동포 기업은 구로공단을 비롯한 각종 공단에 설비를 비롯해 자금을 투자했는데, 주요 사업 분야는 섬유, 기계, 전자, 전기, 금속 제조업분야 등을 비롯하여 호텔,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재일동포의 국내 진출 기업은 존재 유무와 관련해서는 첫째, 지금도 존재하는 경우, 둘째, 이름이 바뀐 경우, 셋째, 없어진 경우로 대분할 수 있다. 기업의 특성에 따라 구분해 보면, 첫째, 민족적 관점에서 투자한 경우, 둘째, 국내 정치와 깊은 관련을 갖고 운영된 경우, 셋째, 순수 이윤 창출을 위해 투자한 경우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재일동포의 한국투자도 초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재일동포 기업의 국내 진출은 차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는데, 한일합섬의 경우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주목되고 기술력에 기초하여 국내에 자본을 갖고 진출하여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선도했다. 박정희 정부 수립 이후에 국내에 진출했던 것이다. 기아의 경우는 박정희 정부 이전에 국내에 진출한 기업으로 기술력과 자본에 기초하여 국내에 진출했다. 롯데의 경우는 1967년 롯데제과를 통해 국내에 진출했는데, 일본정계와 깊은 유대 속에서 국내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오롱은 나일론 생산의 기술과 참의원을 지낸 이원만의 능력, 초기 구로공단의 설립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역사가 있다. 기술력과 정계인맥 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방림방적은 1964년 방적회사를 인수하여 출범한 경우로, 서갑호는 국내 많은 자본을 투자했으나, 결국 기업의 경영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기술력, 자본력, 기타 요소를 통해 회사의 존립과 발전이 결정되었는데, 기업의 운영 방식은 대부분 일본식이었다. 직접 재일동포가 운영하거나, 대리로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우가 초기에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공한 대기업과는 달리 소규모 영세자영업이 대부분인 재일동포 기업은 경제 불황과 일본 대기업의 진출 여파로 경쟁에서 밀려났었다. 그럼에도 1960년대 이후 재일동포 1세들은 피땀 흘려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 2세들도 틈새산업에서 일하던 시대에는 누구나 열심히 만하면 어느 업종이든 성공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인 것이다. 다수의 재일동포 기업은 한국 내 투자를 통해 영주 귀국을 하거나 본국에서의 또 다른 생활기반을 갖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 내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지역 경제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준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이들의 다수는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국내 투자에 재고하고, 국내와 관련된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는 국내와 일본의 상황 차이와 인맥으로 하는 투자의 문제 등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